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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02)


하나님의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1장 12-22절


생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기’와 ‘물’입니다. ‘공기’는 5분만 숨 쉬지 않고, ‘물’은 5일만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물’과 ‘공기’가 중요한 요소이지만,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햇볕’입니다. 근본적인 생명의 본질이 이 햇볕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양의 햇볕을 받아야만, 몸이 건강한 생체로 조절이 됩니다. 햇볕에 노출됨으로 건강을 찾듯이, 성도는 기도의 빛 앞에 노출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빛으로 나갈 때, 특별히 하나님께서 영혼의 건강을 주실 것입니다.

 

  • 본문은 성전의 현재와 미래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면서 현재의 성전이 심판받고 만민이 기도하는 공동체가 세워질 것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의 등장에 맹인들과 다리 저는 자들이 치유 받고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로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 성전의 운명과 새 공동체의 본질을 강조합니다.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12-17)

인간의 탐욕은 가장 성스러워야 할 공간조차 짓밟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신앙의 이름으로 승인되는 순간, 교회는 사적 탐욕이 시낭의 이름으로 승인되는 순간, 교회는 사적 탐욕의 장으로 변질됩니다. 예수님 안에 세워진 새 성전 공동체는 장사하고 정죄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고 구원하며 치유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드린 믿음의 기도가 성전에서의 기도를 대신에 할 것입니다.

 

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12-13)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 안에서 파는 자들과 사는 자들 모두를 쫓아내셨고, 돈 바꾸는 자들의 탁자와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자리를 엎으셨습니다(12). 돈 바꾸는 사람들은 탁자에서 헬라나 로마의 돈을 성전 세겔로 바꿔주었습니다(출 30:11-16). 주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맡았던 일입니다. 이 기간에 유대인이 개별적으로 성전에 세금을 냈을 뿐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모은 큰돈을 가져와서 성전세로 바꿨습니다. 가버나움에서는 성전 세금인 반 세겔을 내는 것에 동의하셨지만,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는 세금 거두는 행위 자체를 반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돈 바꾸는 사람들의 탁자를 엎으신 것은 성전세의 기능이 중지될 것을 예고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비둘기 파는 자들의 자리를 엎으십니다. 새를 제물로 바칠 때는 요구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성전 관계자가 꼼꼼히 검사했습니다. 비둘기는 가난한 자들이 바치는 제물이었습니다. 검사하는 업무에 대한 독점적인 지위를 가진 성전 관계자들은 까다롭게 비둘기를 검사했습니다. 미쉬나에 따르면 비둘기 가격이 올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됐다는 내용이 나옵니다(m, Keritot 1:7).

하나님께서는 성전 세금이나 제사 비용으로 백성에게 짐을 지우는 분이 아닌데, 성전의 권력자들은 세금과 제물에 대한 엄격한 잣대로 이윤을 취했고 가난한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이사야 56:7과 예레미야 7:11을 인용하십니다. 이사야 56:7은 더 나은 것이 오고 있음을 알리며, 예레미야 7:11은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 만민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성전이라도 심판하시지만, 성전을 세우실 때의 원래 목적은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성전, 교회를 통해 실현됩니다.

 

이 사건은 몇 가지 의미를 전달한다. 첫째, 교회는 만민이 하나님께 기도로 예배하는 공동체이므로, 예수님 당시의 권력자들처럼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고 탐심을 섬기는 행위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행위는 성전의 상업화를 꾸짖은 것일 뿐 아니라 파괴되고 대체될 성전의 운명을 예고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참조. 24:1-2). 이는 예레미야 7장과 말라기 1:10에서 예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과 열방의 구원을 위해 오셨으므로, 성전 제의가 아니라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만민을 구원하는 길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들의 상을 엎으신 것은 성전의 속죄 기능이 중지되고 예수님의 대속물(20:28)이 만민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셋째, 스가랴 14:21의 예언대로 매매하는 자들이 성전에서 사라지는 ‘그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열방의 회복이 실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정화 사건 직후에 맹인들과 다리 저는 자들을 치유함으로써 성전 제사 제도가 아니라 자신의 사역으로 시작된 하늘나라에 반응하고 있음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할 수 있도록 세워진 곳이며,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 역시 반민이 기도하는 것을 특징으로 삼기 때문에 특정인들의 전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만민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곧 대화를 뜻하는 기도를 교회의 본질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두 가지 반응(14-17)

‘경청’은 귀를 기울여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귀는 태양이고 뇌는 태양의 주위를 도는 위성’이라고 할 정도로 귀는 우리 신체 기관 중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경청은 단지 ‘듣는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 특히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말하기보다 듣기를 우선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경청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14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14-17)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21:14-17은 성전 정화 사건 이후에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하며, 맹인들과 다리를 저는 자들이 치유 받고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로 부르는 장면과 종교지도자들의 비판이 대조됩니다. 성전 정화 사건에 이어서 이 내용이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받으신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함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아들에게’라고 외치는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분노합니다(15).

맹인들과 다리 저는 자들의 외침은 메시아를 통한 회복의 시대가 왔고 이런 회복이 성전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알립니다. 특히 21:9의 호산나 찬송처럼, 15절에서 어린이들이 부른 찬송 내용인 시편 118:26을 보면, 호산나로 찬송하는 장소는 여호와의 집, 곧 성전입니다. 찬송을 하게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16) 어린아이들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승인하셨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성전은 하나님의 계시가 선포되는 장소이며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의 외침을 성경이 예고한 것이라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십니다(16). 사회-종교적으로 소외된 자들이 치유 받는 사건은 하늘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복된 소식의 증거입니다(11:5; 누가복음 7:22; 이사야 56장; 61장). 성전은 긍휼의 공간입니다. 교회는 긍휼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종교적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함으로써 주의 이름을 높이는 모임입니다. 치유와 회복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메시아와 무화과나무의 심판(18-22)

명분을 앞세우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방해하는 걸림돌을 만들었다면 예수님과 같은 의분과 열정으로 그것을 내몰아야 합니다. 성도가 거룩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회복될 때 주님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18-22)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에 다시 들어오셨고 시장하셨습니다(18).

예수님께서는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고 가까이 가셨지만, 잎사귀 외에는 아무 열매도 찾지 못하셨습니다(19).

열매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행위를 의미합니다(3:8,10;7:16-20;12:35;13:8;21:33-43). 열매는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아들의 사역에 대해 사람들이 반응해야 할 행위를 뜻하며, 21:33-46의 비유에서도 열매 맺는 백성이라는 주제로 다시 등장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심판하신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고는 어떻게 나무가 즉시 마를 수 있는지 묻습니다(20).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언급하지 않고 기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21). 제자들이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무화과나무에게 벌어진 일을 행할 뿐 아니라, 산에게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기도로 구하는 것마다 모두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22). 기도에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기도자의 신뢰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언약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러 가는 곳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기도가 성전의 제사를 대체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셨던 것처럼 그를 따르는 자들도 하늘의 아버지를 신뢰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신뢰해야 합니까? 산도 던질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심판으로 무화과나무가 마른 사건은 심판과 믿음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고 기도하는 공동체로 대체될 것입니다. 만민이 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성전의 열매입니다. 화려한 잎사귀만 드러낼 뿐 만민을 위한 긍휼이 열매로 맺히지 않고 제사 행위처럼 형식화된 신앙의 방식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한 성전 제사에는 응답하지 않으셨지만, 만민의 기도에는 반응하십니다. 교회는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을 향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참 성전으로서 외면당하는 자들을 고치시고 용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금지한 맹인과 저는 자들도 용납하고 고쳐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오는 자를 막지 않으시고 용납하고 치유하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전이 원래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구원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살펴보고 그들에게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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