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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01)


 

 

마태복음 21장 1-11절


대형 영화제나 연예 시상식들을 보면 화려합니다. 그 시상식장에 들어서는 주인공이나 연예인들은 대중에 눈에 띄기 위해 화려한 옷과 비싼 장신구를 치장하고 포토라인에 섭니다. 많은 대중은 그들에게 환호하며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퍼붓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왜 그러셨겠습니까?

 

  •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예언을 성취하려 나귀를 타고 무리의 환호 속에 겸손과 섬김의 왕으로 입성합니다. 이 주제가 예루살렘에서 펼쳐질 한 주간의 사역에 빛을 제공해줍니다. 성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며 다윗적 왕의 입성을 환호하는 무리와 성안 거민들의 반응이 대조를 이룹니다. 이는 향후 펼쳐질 팽팽한 갈등의 전조가 됩니다.

 

나귀를 타는 겸손의 왕(1-5)

천국의 백성인 성도들은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겉으로 힘과 권력을 추구하거나 가시적인 결과만 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내면적인 성품을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만왕의 왕인 예수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1-5)

 

본문에 드디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반응을 보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두 제자를 보내 나귀 새끼를 준비하심(1-3)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운 감람(올리브)산 벳바게에 이르렀습니다(1). 벳바게는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감람산 근거 있었고, 기드온 골짜기 동쪽에 있고 예루살렘과 경계를 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종말을 묘사할 때, 종종 이 감람산을 묘사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5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14:4-5)라고 예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벳바게에 이르자 제자들에게 기이한 요구를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2)고 하십니다. 나귀를 끌고 올 때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께서 필요로 하신다고 하면 보내줄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직역하면 ‘주께서 그것들을 필요로 하신다’입니다. 나귀의 진정한 주인은 예수님이므로 주께서 원하시는 시간에 정당하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창 1:26-31, 사 1:3).

 

(2) 이사야의 예언 성취(4-5)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는 것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기 위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4). 4절은 마태복음에 나타난 열 개의 구약성경 인용 공식 중 아홉 번째입니다. 5절은 스가랴 9:9과 이사야 62:11을 결합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인물은 열왕기상 1장의 솔로몬 왕과 스가랴 9:9에 나오는 시온의 왕뿐입니다. 두 인물은 왕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입성하는 장면이고, 왕이 입성할 때 즐거운 축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가랴서를 살펴보면

 

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특별히 스가랴 9:9의 새로운 왕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고 백성을 정의롭게 통치하기 때문에, 공의로 다스리는 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참조. 삼하 23:1-7). 이 공의로운 왕의 통치는 평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시 72:1-7). 이 평화는 로마 황제가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주제 측면에서 본문은 스가랴 9:9뿐 아니라 이사야 62:11과도 비슷합니다.

 

11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이사야 62:11)

 

5절의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 백성을 가리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군사적 힘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탄 모습은 왕의 겸손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과 세상 나라의 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의 특징인 겸손을 보여줍니다.

 

스가랴 9장에서 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제압한 후에 왕의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에 근거하는데,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50명을 앞세웠던 압살롬(삼하 15:1)과 대조적으로 다윗은 나귀를 탄 겸손의 왕이었습니다(삼하 19-20장). 스가랴 9:10은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끓어버리실 것을 예언하면서(참조, 사 2:7; 31:1; 미 5:10; 학 2:22), 이스라엘의 왕은 나귀를 타고 평화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예고합니다.

예수님의 특징인 ‘온유한’이나 ‘유순한’ 성품을 가리키기보다는 낮아진 삶, 겸손한 삶을 의미합니다(11:29).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왕으로서 군마가 아니라 겸손과 평화의 통치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는 겸손한 왕이기에 낮아져서 모든 사람을 섬기므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아들(6-11)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으로서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떤 분으로 오셨습니까? 어떤 분으로 환호하고 높이고 계십니까? 겸손하고 온유한 왕인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부름을 받았으니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온유하고 섬기는 성도들로 따라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때 무리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6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6-11)

 

입성하신 예수님을 향해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무리는 예수님 앞과 뒤에 서서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 성에 다윗의 자손이 오셨는데 알아보지 못하고 소동하다 결국엔 참 임금을 죽인 예루살렘 사람들과 무척 다른 반응입니다.

 

(1) 나귀를 타신 예수님(6-7)

 

예수님의 지시대로 두 제자는 새끼 나귀를 끌고 와서 나귀들 위에 그들의 겉옷을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마리의 나귀 중에서 사람이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참조. 막 11:2; 눅 19:29).

어미 나귀는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가 새끼였고, 사람들 타본 적이 없으므로 새끼 옆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왕을 위해서 아무도 타지 못하도록 관리해 둔 나귀를 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무리의 반응(8-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귀를 탄 예수를 위해서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펼쳤고,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펼쳤습니다(8).

군중이 자신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펼치는 것은 왕이 행진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참조. 왕하 9:13). 이렇게 옷을 길바닥에 펼치는 것은 왕이나 높은 지위의 인물을 추앙하고 존중하는 행동입니다(왕하 9:13). 이는 군중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앙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군중은 군사력으로 승리를 가져다줄 왕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라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행하신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기대했던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아들’과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 내용은 시편 118:25-26에서 온 것으로, 이 시편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순례자들을 환영하는 부분에 해당합니다. 특히 순례자들이 모이는 큰 절기인 장막절, 유월절, 오순절, 수전절에 사용된 것입니다.

‘호산나’는 시편 118:25에서 ‘구원해 주소서!’ 혹은 ‘도우소서!’를 의미하는 아람어 ‘호샤나’의 헬라어 음역입니다. 히브리어는 ‘호쉬아 나’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아들에게’는 ‘이제 구해주소서’(시편 118:25; ‘이제 구원하소서!’)를 다윗의 아들에게 붙여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시편 118편에서 왕을 암시하므로 군중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합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로 부른 것은 왕적 메시아에 대한 군중의 기대를 반영합니다. 역설적으로, 마태복음에서 ‘다윗의 아들’은 치유하는 종으로 묘사됩니다(9:27;15:22;20:30-31).

군중은 예수님을 향해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가장 높은 곳은 가장 높은 하늘, 즉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계시는 하늘을 가리킵니다(참조, 눅 2:14). 땅에서는 군중이 호산나를,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호산나를 외칩니다. 하지만, 군중의 환호는 예수님을 곤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3) 예루살렘 성의 반응(10-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온 도시가 진동하며 ‘그는 누구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유대 지역은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므로 왕의 등장은 로마와의 충돌을 의미했기에 정치적인 혼란을 예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에 대해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권위로 기름 부름 받은 메신저이므로,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등장했다는 소식은 당연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북쪽의 갈릴리 지역에 온 선지자의 등장은 로마 당군뿐 아니라 성정을 중심으로 권위를 행사했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과 같은 지도부에는 위협이 되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이지만 왕의 도성 예루살렘에 지극히 겸손한 모습으로 들어가십니다. 군마나 백마가 아니라 짐짝을 싣고 다니는 나귀의 등에 앉아 가십니다. 이는 스가랴 9:9의 예언처럼 예수님의 겸손, 즉 낮아짐을 강조하는 모습입니다.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또한, 예수님의 낮아진 모습은 고난 받는 종을 떠올립니다(사 53:4). 낮아져 오는 메시아의 모습은 백성이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은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왕을 기다렸습니다. 이 점에서 유대교의 메시아 기대 사상과 기독교의 메시아사상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가 믿는 주께서 이렇게 겸손하시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그로 인해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복음인 이유는 그가 믿는 자들을 세상에서 번영하게 해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번영을 위한 기대는 당시 군중에게 있었던 메시아 기대 사상입니다. 교회가 믿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은 종으로 죽기까지 낮아져 죄인들이 구원받을 길을 여셨습니다.

현재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낮은 곳에 오신 예수님의 헌신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존귀한 자로 대접받습니다. 또한 낮아지신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는 겸손한 사람들로 구성된 나라이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낮아져 고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나라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련되고 화려한 준마가 아니라 초라하고 볼품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로마를 뒤엎고 이스라엘을 회복할 강력한 왕이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쟁과 정복이 아닌 사랑과 희생을 통해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십니다. 우리의 왕이 겸손하고 온유하시다면 그분의 백성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가 오늘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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