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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5-01)

 


승리 후 찬양을 드리는 드보라

사사기 5장 1-18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승리하게 하실 때, 그 은혜와 승리를 찬양하고, 또 예배를 드리는 것은 너무 귀중한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심을 기억하고, 베풀어주신 은혜를 찬송할 수 있다면, 비록 우리의 현실과 상황에서 낙심되는 많은 일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용기와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 속에 길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감사하고 찬송할 때, 우리가 쉼을 회복할 수 있고,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 본문은 드보라와 바락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가나안 시스라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드보라는 찬양을 통해 전쟁의 진정한 영웅이신 여호와를 찬양하고, 여호와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한 자들에 대한 축복과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저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찬양에 초대(1-3)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떠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지나 온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찬양과 감사는 여호와 하나님께 행하신 일을 기억할 때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1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2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3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1-4)

 

사사기 4장과 5장 모두 같은 사건인 시스라와의 전투를 배경으로 다루지만, 4장은 서사로, 5장은 시로 기술하여, 각각의 문학적 특징을 살립니다. 특히, 5장의 시는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바치는 찬양이며 4장에서 수수께끼 같았던 하나님의 강림과 초자연적인 개입(4:15)을 시적으로 묘사합니다. 언급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헌신을 부각하는 등 4장을 보완해줍니다.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드보라가 찬양을 이끌며, 바락과 백성을 불러 찬양에 동참하도록 권합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계기는 이번 전투에 이스라엘 백성의 깊은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보라와 바락(4:6-9)을 중심으로 스불론, 납달리 등 여러 지파가 참여했고(14-15), 이들의 헌신이 승전의 한몫을 감당했습니다. 이들의 ‘즐겁게 헌신함’(2,9)은 ‘자원제’처럼 자발적 참여를 함축합니다. 하나님 찬양에 동참해야 할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만 아니라 열방 왕들, 특히 전투에 패한 가나안 왕들도 포함됩니다. 이 모두의 찬양의 대상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십니다(3).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전쟁 전의 이스라엘(4-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처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친히 개입하셔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역사를 경험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책임을 주습니다.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의 선행과 이웃을 향한 섬김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전해져야 합니다.

 

5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6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7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8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5-8)

 

4-5절은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당시 하나님의 강림 사건들을 회고하며, 이번 전투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출현은 에돔과 시내산 두 장소와 관련하여 회상됩니다(신 33:2; 시 68:7-8). 여호와가 에돔(‘세일과 에돔 들’, 4)에서 출정하신 장면은 하나님께서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이스라엘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시며, 열방으로부터 보호하셨음을 함축합니다(민 10:33-36; 20장). 시내산에서의 강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상기시킵니다(출 19장).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면 온 천지가 그들의 창조주를 알아보고 반응합니다. 땅에서는 지진이 나고, 하늘에서는 비, 우박, 천둥, 번개가 쏟아지며, 화산이 터지고 산이 진동합니다(시 18:12-13).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그의 언약 백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으니, 백성과 열방이 하나님께 찬송으로 화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6-8절은 이스라엘의 암울했던 시기를 묘사하여 하나님의 강림과 개입이 절실했음을 보여줍니다. 드보라는 이 시기를 블레셋과 하솔의 지배기로 부르지 않고 각각 삼갈과 야엘의 날로 칭하여 이들의 헌신을 높입니다. 이 둘은 하찮은 도구를 이용해 적을 무찌른 용맹한 자이며 이방인입니다(3:31; 4:17-22). 이 시기에는 적군이 대로를 장악하고 행인들을 괴롭혀 무역상이나 행인들이 그 길 대신 좁고, 험하고, 인적이 드문 길로 우회해야 했습니다. 시골 마을들은 이방인의 공격에 사람이 줄고,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드보라는 이런 날이 자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고 애통해합니다. 드보라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칭하며, 자신의 소명이 어머니가 자식을 보호하고 양육하듯 이스라엘을 위하는 역할임을 밝힙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야빈 왕의 혹독한 지배를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을 배역하고 우상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4:1).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자(4:3), 하나님께서는 바락으로 시스라 군대에 맞서게 하셨습니다. 지파들의 참여(14-15)로 4만 명 이상이 이 전투에 가담했습니다(8). 그런데 그들에게는 방패나 창 등 싸움에 나갈 무기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바락이 하나님의 부름에 주저했던 이유들이었을 것입니다(4:8). 그렇지만 이런 상황이기에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이 더 놀랍고 감격스럽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찬양(9-13)

승리의 찬양 속에 함께 헌신한 이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또한 함께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책망 섞인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함께 기뻐하며 슬퍼하는 공동체가 되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함께 누리며 찬양해야 합니다.

 

9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10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전파할지어다 11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12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13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9-13)

 

드보라는 전쟁에 헌신한 자들을 칭찬하며 하나님 찬양에 적극 초대합니다. 드보라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이끌었고, 그들이 전쟁에서 헌신한 점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또한 그들의 헌신이 자화자찬으로 끝나지 않게, 하나님에 대해 감사하고 그분의 놀라운 일을 전파하도록 명합니다. 앞서 열방이 하나님 찬양 명령을 받았고(3), 이제는 이스라엘에서 흰 나귀를 타고, 값진 양탄자에 앉은 자들, 즉 높은 지위와 부를 가진 지도자나 방백 또는 무역상들, 그리고 일반 행인들도 하나님의 공의를 전파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드보라의 ‘전파하라’는 명령(9-11)에는 하나님의 구원에 담긴 ‘공의’가 강조되었습니다. 덧붙여, ‘전파하다’(씨아흐)는 ‘곰곰이 생각하다’의 뜻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제대로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백성 모두 이방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대로를 활보할 수 있으니(비교. 6), 하나님의 공의를 전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의 활 쏘는 자들도 모여 찬양하며, 고통 속에 있던 마을 사람들(6)도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공의를 전해야 합니다.

11b-13절은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난 전쟁에 대한 회고입니다. 그때 백성들은 적군과 싸우러 성문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으로 불려 하나님께 헌신한 언약 백성임이 부각됩니다. 드보라와 바락은 백성의 대표로서 각자의 역할을 다짐받습니다. 12절의 외침은 드보라가 자신과 바락의 역할을 일깨우려는 시적 표현이거나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해됩니다. ‘행동을 개시하라’는 의미의 ‘깰지어다’(12)란 명령이 네 번 반복되면서 드보라에게 찬양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찬양의 임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선지자와 사사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역할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락에게는 용사로서 일어나 적군을 사로잡아 끌고 오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남은 백성도 전쟁에 동참합니다. 이에 여호와가 강림하여 선두에 나서십니다. 세일과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여호와(4-5)가 이제 이스라엘을 구하러 강림하셨습니다. 이때 “여호와”는 ‘여호와의 백성’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13).

 

전쟁에 참여한 지파와 참여하지 않은 지파(14-18)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구원 역사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 일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이 부르심에 응답해 사역에 최선을 다해 애쓰고 수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 그들의 수고에 대해 하나님께 칭찬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맡기신 사명에 한마음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14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 15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6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7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18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14-18)

 

이 단락은 전쟁에 참여한 지파를 칭찬하고(14-15b,18), 불참한 지파를 꾸짖는(15-17)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불론과 납달리에서 만 명을 소집하셨으나(4:6), 실제 전쟁에서는 에브라임, 베냐민, 잇사갈, 므낫세 반 지파도 동참해, 약 4만 명의 군대를 조성했습니다(8). 이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에 합당합니다. 드보라의 출신지인 에브라임에서는 아말렉이 거주했던 지역(12:15)의 사람들이 동참했습니다. 그들에 이어 베냐민 지파가 싸움터로 내려왔습니다. 에브라임의 북쪽 므낫세 반 지파(“마길”)의 용감한 장수들도 출정했습니다. 므낫세의 북쪽 경계인 스불론, 잇사갈 지파도 대장군과 방백들을 보냈습니다. 잇사갈 지파와 바락이 드보라와 합류했으며, 잇사갈은 특히 바락의 뒤를 바짝 쫓아 골짜기로 돌진했습니다. 반면, 단, 아셀 지파 및 요단 동편 지파(므낫세, 갓, 르우벤)는 주저했고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므로 질책을 받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가나안 입성 전에 기업을 분배받는 조건으로 요단 서편 지파들의 전투에 참여할 것을 약속했습니다(민 32장).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을 어겼습니다. 물과 목초지가 풍부한 땅을 얻은 르우벤 지파는 시냇가(또는 친족들)에 모여 전쟁에 참가할 지 고심했으나 출정하지 않았습니다. 길르앗, 단, 아셀지파는 고민하는 수고조차 없이 그저 일상생활에 충실했습니다.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길르앗)는 거주지에 머물렀고, 단은 배 타고 무역을 했으며, 아셀은 거주지인 지중해 연안에서 생업에 종사했습니다.

18절은 다시 참여 지파로 돌아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를 크게 칭찬합니다. 하나님과 지도자의 명에 순종하여 출정한 그들(4:9,14)은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헌신과 희생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죄에 빠져 죽음의 덫에 놓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시고 영생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막에 꽃이 핀 것과 같이 황폐한 인생을 새롭게 바꾸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의로운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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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4-02)

 


이방인 여인을 통한 사역

사사기 4장 11-24절


격투기 경기인 ‘K1’나 ‘권투’는 상대방을 어떻게 넘어뜨리느냐에 따라 승패를 가릅니다. 시합 중에 선수가 결정적인 한방을 날림으로 경기가 끝나는 경우에 ‘결정타를 날렸다’고 합니다. 결정타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선수는, 자신을 서서히 몸을 풀듯이 하면서, 상대방 선수에게 운동량이 많도록 유도해서 지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지치고 나면 결정타 한 방을 날려 KO승으로 이끕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왕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결정타는 무엇입니까?

 

 

  • 본문에는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바락은 가나안 군대장관 시스라와 전투하기 위해 다볼 산에 진을 치고, 가나안 시스라도 기손 강가에 진을 칩니다. 이 전쟁을 승리케 해주시는데, 남성 지도자들(바락과 시스라)을 통한 것이 아니라 드보라와 야엘와 같은 여인들을 통해 이루어가십니다. 그녀들의 용기 있는 믿음과 지혜로운 행동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담대한 승리를 거둡니다.

 

시스라가 기손 강으로 군사를 모음(11-13)

세상에서는 능력이 강해 보여야 합니다. 언제나 눈에 보이는, 즉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을 의지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믿는 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섬리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11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12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다볼 산에 오른 것을 사람들이 시스라에게 알리매 13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 병거 구백 대와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을 하로셋학고임에서부터 기손 강으로 모은지라(11-13)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군사들 진영인 하데롯에서 기손 강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이 전투를 ‘므깃도 전투’라고 합니다. 그가 군사를 기손 강으로 옮긴 것은 그곳이 제 지리적으로 철병거를 움직이는 데 용이했기도 했지만 결국 “내가 … 기손 강으로 이같이… 네 손에 붙이리라”(7)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스라의 군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내시기 위해 준비시킨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겐 사람 혜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것더라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다볼 산에 오른 것을 혹이 시스라에게 고하매”(11-12). 시스라에게 바락의 군사들이 다볼 산에 진쳤다고 알려준 것은 헤벨의 집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은 겐 족으로 유목생활을 했는데, 모세의 권유로 가나안에 들어와서 아랏 남쪽에 있는 유다 광야에 거했었습니다(1:16). 그런데 이들이 자기 만족의 거처를 떠나 북쪽으로 이동해 게데스에서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 나무 곁에 장막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습니다. 즉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시기 위해 오래 전에 유목생활을 하는 그 가족을 이주시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행하심으로써 그분의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혜벨의 가족이 시스라에게 다볼 산에 바락의 군대가 진쳤다고 알려준 사실에 살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야빈의 학대를 당하는 상황에서 겐 족속이었던 헤벨의 가족은 사업상의 거래를 위해 가나안 족속과는 친분을 쌓으면서 안전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이해관계 속에서 헤벨의 가족은 당시의 전황을 시스라에게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롬 8:28).

바락이 다볼 산에 진쳤다는 소식을 들은 시스라는 즉시 하데롯에서 기손 강으로 병력을 이동합니다. “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병거 구백 승과 자기와 함께 있는 온 군사를 이방 하로셋에서부터 기존 강으로 모은지라”(13). 철병거를 이끌고 있는 시스라가 기존 강으로 군사를 모은 것은 아마도 이 때가 건기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만약 우기(雨期)철이라면 기존 강이 범람하여 이스르엘 평원에 진을 칠 수 없었기에 그곳으로 이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건기에 다볼 산을 앞에 두고 펼쳐진 기존 강가의 넓은 평원은 철병거를 앞세워 전투를 치르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다볼 산에 진친 바락의 군사들을 산 아래로 유인하면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스라의 군대를 멸하심(14-1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자연까지도 사용해서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목숨처럼 의지했던 것들도 한순간에 무너지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건기에 갑작스런 폭우가 내려 기손 강이 범람하게 되었을 때에 시스라의 군대가 얼마나 당황했을지를 상상이 갑니다.

 

14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15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16바락이 그의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하로셋학고임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더라(14-16)

 

기손 강에 시스라의 군대가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이들을 바락의 손에 붙이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스라의 군대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내어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6). 기손 강에 모인 시스라의 군대를 보자 드보라는 주저하지 않고 바락에게 공격하도록 명합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이에 바락이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14). “일어나라”는 드보라의 말은 군사를 일으켜 싸움에 임하라는 명령으로서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신다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승리의 확신이 없다면 철병거 구백 승이 진치고 있는 넓은 평원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내려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는 군사 전략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한 여성의 무모함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의지해서 명령한 것입니다.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앞서 행하심으로써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시지 아니하시느냐?” 시스라의 군대가 기손강에 진친 사실만으로도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 싸움의 주체는 드보라도 바라도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대장이 되셔서 이스라엘 군대에 앞서 행하셨던 것입니다.

드보라의 확신에 찬 명령에 따라 바락은 일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철병거가 버티고 있는 이스르엘 평원으로 내려갑니다. 바락의 군사들 역시 드보라와 동일한 믿음으로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통해 약한 자를 들어 세상의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고전 1:27-29).

이제 바락의 군대에 앞서 행하신 여호와께서 시스라의 군대를 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바락의 앞에서 시스라와 그 모든 병거와 그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도보로 도망한지라”(15). “쳐서 패하게 하셨다"라는 말은 '멸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스라의 군대를 바락의 칼 아래 멸하시는 역사는 5장의 드보라의 승전가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바락의 군대가 다볼 산에서 내려옴과 동시에 기손 강에 폭우가 쏟아져 이스르엘 평원은 온통 진흙탕이 되었고 철병거는 진흙탕 속에 오히려 적군의 표적만 될 뿐이었습니다. 갑작스런 폭우로 당황하여 혼란에 빠진 시스라의 군대를 바락의 군사들은 쉽게 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가 얼마나 일방적이었는지 군대장관 시스라조차 병거에서 급히 내려 도망쳤습니다.

바락과 알만 명의 이스라엘 군사들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바락이 그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이방 하로셋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남은 자가 없었더라”(16). 이날의 완전한 승리가 두 가지로 나타나 있는데, 첫째는 시스라의 군대는 공격 한번 못해 보고 주둔지까지 쫓겨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시스라의 군대에는 살아 남은 자가 한 명도 없이 오직 군대장관 시스라만 도망쳤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시스라가 여인의 손에 죽임당함(17-24)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들어 쓸만한 사람이 없다고 스스로 자괴감에 빠질 어려운 시대입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숨어있는 일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을 세상의 법칙으로, 가령 강력한 군사력이나 많은 경제력과 같은 것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무능력해 보인 장애인이나 여성같이 미약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17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18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가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으니라 19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게 하라 내가 목이 마르다 하매 우유 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게 하고 그를 덮으니 20그가 또 이르되 장막 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하고 21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22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할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그에게 이르되 오라 네가 찾는 그 사람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엎드러져 죽었고 말뚝이 그의 관자놀이에 박혔더라 23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24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17-24)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어려운 때에도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사람들을 준비하시고, 그들의 순종을 통하여 자기 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어떻게 해서, 그들을 구원하시는지를 보여주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많은 경우에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1) 도망쳐 겐 족속 헤벨의 집에 도착(17)

 

가나안의 하솔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바락이 바볼 산에 오른 것을 알고, 시손 강으로 달려들어 갔습니다(13). 시손 강은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 말라서 일반 도로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손 강에 자랑스럽게 철병기 900승을 몰고 전투에 참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럽게 장대비를 내려서 시손 강에 홍수가 나게 하심으로 강력했던 철병거가 아무런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시스라는 모든 것을 잃고 걸어서 혼란함과 피곤함 가운데 도망쳐서, 평소에 평화조약을 맺고 있던 겐 사람 헤벨의 집으로 도착하였습니다(17). ‘겐 족속’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 또는 호밥의 자손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 당시에 유다 지파와 함께 종려나무 성읍 여리고에 거주하다가, 유다의 남쪽 끝 황무지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 족속은 목축업을 하고 있어서 한곳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겐 족속 중에 ‘헤벨’이란 사람은 무리를 떠나서 납달리 지파의 땅에 있는 도피성 게데스 근방에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가나안 왕 하솔의 보호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11).

 

이처럼 두 종족은 서로 왕래하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겐 족속 중 작은 가족이지만, 헤벨이 어디에 장막을 치고 살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시스라는 이스라엘의 장군 바락에게 쫓기는 급박한 상황에서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장막을 치고 있는 헤벨의 집으로 걸어서 도망한 것입니다(17).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계획이나 우연조차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지식과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어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시스라가 도망하여 도착한 곳이 우연인지 운명인지, 바로 겐 사람 헤벨의 장막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2) 시스라를 맞이하는 헤벨의 아내 야엘(18-19)

 

겐 족속의 헤벨에 장막에 도착한 시스라를 맞이한 사람은 헤벨의 아내 야엘이었습니다(18). 시스라는 가나안 왕 하솔과 겐 족속 헤벨의 사이에는 화평의 조약이 있었습니다. 야엘의 극진한 환대는 시스라가 최적의 안전지대라고 생각하며 만족했습니다.

시스라는 안심하고, 당시 관습으로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가 감히 들어갈 수 없는 ‘여인의 장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야엘은 시스라를 이불로 덮어줍니다. 시스라를 자신의 장막으로 들인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고, 그만큼 시스라에게는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스라를 맞는 야엘의 극진한 영접으로 완전히 안도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야엘의 환대로 그녀를 믿게 된 시스라는 물을 달라고 합니다(19). 그러자 야엘을 시스라에게 물보다 영양가가 있고 더 좋은 우유를 대접합니다. 우유를 대접하는 것은 더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시스라에 대한 호의입니다. 피곤하고 배고픈 시스라에게 좀 더 영양가 있는 제공하여, 야엘이 자신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호의를 품고 있음을 알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 암시에는 당시 우유에는 마음을 평안케 하는 성품이 있어서 시스라를 깊이 잠들게 하는 여할을 한 것입니다.

 

우유를 마시고 이불을 덮은 시스라는 잠들기 전에 자신의 안전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부탁합니다. 바락이 이곳까지 추적할 것을 예상한 시스라는 야엘이 자신을 숨겨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막 문 앞에 서 있다가 누가 도망자를 찾게든 “너는 없다 하라”라고 부탁합니다(20), 그러나 이 순간부터 시스라의 생명은 한 여인의 손에 달려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3) 시스라를 죽인 야엘(21-22)

 

시스라는 생명을 여인의 손에 맡긴 채 극도의 피로감으로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21). 시스라가 깊이 잠이 들었을 때, 헤벨의 아내 야엘은 시스라의 살쩍에 장막 말뚝을 박아 죽였습니다. 여기서 “살쩍”은 머리의 관자놀이를 가리킵니다. 그 당시 유목민에게 있어서 장막을 세우고 거두는 것은 여인들의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야엘이 말뚝으로 시스라를 박아 죽이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스라는 전쟁에서 홀로 도망치다가 결국 여인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야엘은 속임수로 시스라를 죽였습니다. 야엘이 애초부터 시스라를 죽이려고 했는지, 아니면 시스라를 죽이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이 되어서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스라가 쫓기고 있음을 눈치채고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지혜롭게 처신한 것을 보면, 그녀의 행동이 상당히 의도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야엘은 자신을 믿고 잠이 든 시스라를 죽였습니다.

이러한 야엘의 행위에 대해 성경은 5장에 나타난 드보라의 승전가를 통해 다음과 같이 축복하고 있습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야엘의 행동은 라합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수 2:1-21).

 

시스라를 쫓아온 바락은 그곳에 도착하자, 야엘은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이미 말뚝에 관자놀이가 밝혀 죽어 있는 시스라를 보여줍니다(22). 수많은 군대를 호령하던 장군이, 힘없는 여인의 장막에서 장막 말뚝에 처절하게 죽어갔던 것입니다. 여인의 손에 죽은 시스라를 봄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한 성취됨을 확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신 대로 가나안 왕 시스라를 연약한 여인의 손에 죽게 하셨습니다. 바락은 단지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확인하는 증인에 불과했습니다.

 

(4) 이스라엘의 구원(23-24)

 

하나님께서 야엘이라는 여인을 통해, 당대 강력한 가나안 왕의 야일 군대장관 시스라를 제거시켰습니다. 사사기 저자는 이것을 23-24절에서 이렇게 기록하여 역사에 남깁니다.

시스라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은 마침내 야빈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야빈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죽게 하심으로써 아무도 그분의 영광을 빼앗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로 인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는 ‘가나안 왕 야빈’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이후로 성경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100여 년 전 여호수아가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했을 때, 이들을 가나안 땅에서 완벽히 제거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가나안 왕 야빈으로 인한 불행의 역사가 되풀이되었던 것입니다.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시고 또한 여인을 통해 시스라를 죽게 하신 사실은 연약한 사람을 사용하여 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연약한 자를 통해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연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고 고백했듯이 믿는 자는 자신의 연약한 실체를 깊이 인식함으로써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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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8-01)

 


빌닷의 두 번째 발언

욥기 18장 1-21절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이해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해 탄식할 수 있지만, 그 고난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로 찬양으로 예배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문제 해결에 참된 경험을 하게 됩니다.

 

  • 빌닷은 두 번째로 엘리바스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원색적으로 욥을 공격합니다. 빌닷의 두 번째 발언의 특징 중 하나는 앞선 발언의 “내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와 같은 미래의 소망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빌닷의 두 번째 발언의 핵심은 고통을 겪는 것이 곧 죄가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으로, 악인이 맞이하게 될 운명 혹은 귀결에만 집중합니다. 규범적 지혜의 일반론을 통해서 욥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욥에 대한 공격(1-4)

악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소망 없이 멸망을 당합니다. 죄인들은 죽음에 에워싸일 때 의지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속자도, 중재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닷은 욥이 이런 결말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1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3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4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1-4)

 

빌닷의 두 번째 변론입니다. 엘리바스와 빌닷의 논변에 물러서지 않고 더 많은 말로 두 친구를 반박하고 저항하는 욥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을 포함한 다른 논객들(“우리가")이 지혜를 말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시작합니다. 빌닷은 짜증스럽게 반응합니다. 왜 욥이 자신을 포함한 친구들의 논변을 부정한 짐승처럼 대하느냐고 힐문합니다. 그런데 개역개정의 3절은 주어가 욥인 듯이 번역했는데, 원문은 “우리”로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왜 우리가 짐승처럼 간주되느냐? 너희 눈에는 우리가 더러워 보이느냐?”입니다. 그는 욥을 “울분을 터트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고 묻습니다. 피조세계의 변화를 초래할 만큼 욥 네가 대단한 사람이 나는 힐문입니다. 빌닷이 욥의 문제점으로 여기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깨달으라”(2)

 

먼저 지혜를 갖춰야 규범적 지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지혜자가 되어야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는 어불성설로, 빌닷 자신의 설득이 실패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셈입니다.

 

(2)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3)

 

‘너희는 왜 우리를 동물로 취급하느냐’라고 하는데, 규범적 지혜는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지혜가 허락되었고 동물은 지혜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여기 부정한 짐승 취급한다는 말은 지혜가 없는 아둔한 자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욥의 지혜는 규범적 지혜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이분법을 제기하는 것에 반론을 제기합니다(전 3:18-21).

 

(3) “부정하게 보느냐”(3)

 

정결과 부정의 이분법(정결한 것은 선한 것이고 부정한 것은 나쁜 것이다)도 규범적 지혜에 속합니다.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은 짐승으로 취급한다는 말과 동일하게 무지한 자와 악한 자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빌닷의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언설(38-41장)과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언급하시는 수많은 동물들(사자, 까마귀, 들나귀, 타조, 말, 매, 독수리, 그리고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부정한 짐승’에 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반성적 지혜는 이러한 짐승들을 정결/부정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 구절을 “부정하게”가 아니라 '어리석게'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4)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4)

 

빌닷은 욥을 분노(화) 때문에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규범적 지혜는 화내는 사람을 지혜자로 여기지 않습니다(“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잠 22:24). 빌닷의 말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1) 욥은 지혜자가 아닙니다; (2) 욥의 고난은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도 욥이 분노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시겠습니까? (5)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4): 땅이 저절로 없어지거나 바위가 스스로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런 현상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정해진 규범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른 악인의 운명(5-21)

악인이 번성하기도, 의인이 고난 당하기도 합니다. 의인이 세상에서 형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온전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견지하는 것이 참된 성공임을, 빌밧은 알지 못했습니다.

 

5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6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7그의 활기찬 걸음이 피곤하여지고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8이는 그의 발이 그물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들며 9그의 발 뒤꿈치는 덫에 치이고 그의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10그를 잡을 덫이 땅에 숨겨져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목에 있으며 11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라게 하고 그 뒤를 쫓아갈 것이며 12그의 힘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13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 14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며 그는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15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의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의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16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들 것이며 17그를 기념함이 땅에서 사라지고 거리에서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18그는 광명으로부터 흑암으로 쫓겨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19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 20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21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5-21)

 

빌닷은 욥의 무지를 비난한 다음에 이제 자신의 지혜를 밝힙니다. 그 지혜는 15:17-35의 엘리바스의 지혜와 다르지 않습니다. 빌닷의 지혜는 잠언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1) 빛과 어둠의 이분법(5-6)

 

“빛”, “불꽃”, “등불”은 선한 것이고 어둠은 나쁜 것입니다. 밝은 것은 의인과 지혜자에게 속해 있고 어둠은 악인과 무지자의 영역입니다. 설사 악인에게 빛이 있고 그가 사는 곳이 잠시나마 밝을지라도 그 빛은 어두워지고 등불은 꺼지고 맙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악인에게는 어둠이 찾아온다는 주제는 잠언에 흔하게 나타납니다(잠 4:18-19; 13:9; 20:20; 24:20).

 

(2) 재앙은 ‘덫’과 같은 것입니다(7-10)

 

7절의 “활기”와 “피곤”의 이분법도 익숙한 비유입니다(사 40:30-31). 악인이 스스로의 꾀에 빠진다는 표현도 잘 알려진 표현입니다(시 5:10; 10:2; 64:8; 잠 1:31;14:17;26:27;28:10). “그물”과 “올가미,” “덫”과 “함정”은 평행어로서 야생동물을 잡기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위험을 깨닫는 지혜가 없어서 동물들은 스스로 미끼를 뭅니다. 자신의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재앙을 선택한다’는 주제는 규범적 지혜에서 흔히 사용됩니다(욥 5:5;22:10; 시 9:16;10:9;11:6;69:22; 잠 1:17;7:23;22:5;29:5). 7절의 “꾀”는 선(의인, 지혜자)의 영역에도 속하고 악(악인, 무지자)의 영역에도 속하는 어휘입니다. 의인과 지혜자에게는 “교훈”(잠 1:25, 30; 8:14)이나 “권고”(잠 12:15;19:20; 27:9)가 되지만, 악인의 ‘지혜’는 곧 자기가 빠질 함정이 됩니다.

 

(3) 공포와 재앙과 질병은 악인/무지자의 운명입니다(11-13)

 

무서움과 놀람(11)은 악인/무지자의 특질입니다(삼상 16:14-15; 욥 18:14; 시 73:19). “기근”과 “재앙”(12), “질병”과 “사망”(13)도 그의 몫입니다. 공포가 악인을 둘러싸고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며, 그의 주위에는 재앙이 도사리고 있습니다(11-12). 아픈 것은, 특별히 죽을 정도로 아픈 것(“사망의 장자”)은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악인이기 때문입니다(13). 질병을 죄 때문이라는 여기는 생각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에피소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요 9:1-12).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은 이 규범적 지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4) 악인이 거하는 곳은 없어지거나 타인에게 빼앗깁니다(14-15)

 

“장막”과 “처소”는 생존의 필수 요소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이분법은 잠언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홍하리라”(잠 14:11),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잠 24:15). 악인은 기본적인 생존권을 위협받습니다. “유황”(14절의 “공포의 왕”)이 그가 거하는 집에 뿌려집니다(시 11:6 참조). 이 구절은 욥의 자녀들이 큰 바람으로 집이 무너져 죽게 된 것을 연상시킵니다(욥 2:19) 빌닷이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8:4)라고 판단한 근거가 됩니다.

 

(5) 악인은 기억되지 않고 잊힙니다(16-20)

 

악인이 죽으면(‘메마르고 시들면’ 혹은 ‘잘려지면’, 16) 그에 대한 기억은 사라질 것입니다. 과거와 조상을 “기억”하는 것은 지혜를 배우는 중요한 학습법입니다. 반면에 잊음과 잊힘은 악인의 운명입니다: ‘의인을 기억하는 것은 복이고 악인의 이름은 썩는다’(잠 10:7). 흥미로운 점은 “이름”과 “기억”이 평행어로 쓰이는 점인데, 히브리어에서 “이름”은 자손 번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창 12:2), “그(압살롬)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삼하 18:18),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사 48:19). 그래서 빌닷의 말은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로 이어집니다(19). 악인의 패망은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는 오는 자”가 놀라게 하는데, 이 표현은 천지사방에 있는 많은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후손과 선조를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20). 이렇게 악인의 운명을 정리한 빌닷은 자신의 말이 확실하다는 점을 강조하며(“참으로”) 말을 마칩니다(21).


많은 사람이 인과응보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인이 고난 당하고 의인이 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우리의 생각과 어긋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결코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날까지 인내와 믿음으로 그분이 인정하시는 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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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4-01)


하나님의 응답하는 여선지자 드보라

사사기 4장 1-11절


신앙이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온몸이 말씀으로 움직일 때, 아니, 몸에 말씀이 한줄한줄 새겨질 때, 그만큼이 진실한 신앙입니다. 신앙을 몸에 새길 줄 아는 사람은 좀처럼 상황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 이스라엘이 다시 타락하자, 이번에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이스라엘을 파십니다. 가나안 지도자 야빈이 사는 하솔은 전략상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여호수아에서는 하솔을 ‘그 모든 나라의 머리’라고 가나안의 중심지임을 소개합니다. 또한 이 지역에는 철병거가 있어서 사사시대 초기까지 가장 강력한 가나안 지역입니다.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에게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철병거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도로 억압하였고,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자 사사 드보라를 보내시고 그녀를 통해 발락을 불러 가나안 전쟁을 준비하십니다.

 

야빈의 손에 팔린 이스라엘(1-3)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계획에 따라 사람을 미리 준비시키시고 또 환경을 조성시키십니다. 만약 믿는 자가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하고 어떤 일을 행했는데 그 앞에 여러 가지 장애물이 놓여 있다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서도 많은 역경을 만날 수 있지만, 미리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믿는 자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환경을 통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민감해야 합니다.

 

1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3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1-3)

 

에훗이 모압의 학대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후, 이스라엘은 80년 동안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에훗이 죽고, 또 다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가기 시작하고 악을 행함으로써 끝이 납니다. 다시 죄악에 빠지게 된 이스라엘은 가나안 왕 야빈의 지배 아래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1)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악행(1)

 

사사 에훗이 죽은 뒤에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1) 에훗의 죽음 이후에 이스라엘이 다시 죄악된 삶에 빠졌다는 사실은 80년의 평화로운 세월 동안 그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그들에게 종교적 형식은 있었을지 모르나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삶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에훗이 죽고 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타락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또”라는 말로써 그들의 악행이 “반복”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상 숭배를 금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했던 에훗의 영향력이 그의 죽음과 함께 더 이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그들은 다시 이전의 상태, 즉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는” 상태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이방의 신들을 좇는 삶을 살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헐값으로 팔아넘기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대로 대우하십니다.

 

(2)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한 징계의 도구인 야빈(2-3)

 

다시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깨우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왕 야빈을 징계의 도구로 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2). 하솔은 가나안 북쪽의 주요 성읍으로 군사적으로도 요새였습니다. 특히 하솔은 여호수아에 의해 약 100여 년 전에 정복된 곳입니다. 당시 여호수아는 메롬 물가에서 야빈을 중심으로 연합한 가나안 족속의 엄청난 군대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진멸했습니다(수 11:1-15). 그런데 100여 년이 지난 시점인 본문에서 다시 가나안 왕 야빈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야빈’은 개인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왕의 호칭으로 여겨집니다.

여호수아는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가나안 왕 야빈의 무리들을 멸하였는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야빈’이라는 호칭으로 가나안 왕이 일어난 것은 어떻게 된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여호수아가 완전한 승리를 주었음에도 이 승리를 누리지 못하고 악의 세력이 이처럼 강성할 만큼 이스라엘이 타락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팔레스타인 북쪽에 남아 있던 가나안 족속이 세력을 확장하여 ‘야빈’이라는 호칭을 다시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지배하려 한 것입니다. 이처럼 악의 세력은 완전히 사라진 것같이 보여도 영적으로 해이한 틈을 놀리지 않고 다시 그 세력을 키웁니다.

강력한 세력으로 팔레스타인 북쪽에 자리잡은 가나안 왕 야빈에게는 “철병거 구백 승”으로 대표될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야빈 왕은 철병거 구백 승이 있어서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3). 이러한 막강한 군사력으로 가나안 왕 야빈은 이스라엘을 심히 학대하였습니다. “학대했다”(라하츠)는 것은 무력으로 쥐어 짜내듯 그들을 착취했음을 의미합니다. 그 압제가 극심하여 고통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비극적이게도 이스라엘은 죄로 인한 고통이 극에 달해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여선지자 드보라(4-10)

목회자만 의지하는 신앙생활로는 영적 어린아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영적 지도자를 통하여 개인적으로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는 사람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영적 지도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믿는 자 개개인을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데까지 이르러 온전히 설 수 있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타인에 의지하는 신앙이었습니다.

 

4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6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8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9.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10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4-10)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가나안 왕 야빈의 학대에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여선지자 드보라를 통해 구인을 베푸십니다.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 세움 받았다는 것은 남성 중심의 당시 사회에서 영적 지도력을 발휘할 만한 남성이 없었음을 말해 주는 사실로서,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암시해 줍니다.

 

(1) 드보라를 통해 계시를 주심(4-7)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 아래서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세우신 구원자는 여선지 드보라였습니다.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4-5). 남성 위주의 당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한 여성을 예비하셨습니다. 드보라는 랍비돗의 아내로 소개되어 있는데, 랍비돗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랍비돗의 아내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한 사람의 아내인 여성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상의 삶에서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자를 그분의 필요에 따라 일꾼으로 세우심을 보여줍니다.

사사로서 드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재판을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재판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사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출 18:13; 왕상 3:28).

“드보라의 종려나무”로 불리는 곳에 거하면서 사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는데, 이같은 사실로 보아 드보라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사사로서 확실하게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드보라가 거한 곳이 ‘에브라임 산지의 라마’와 벧엘 사이로 언급되어 있는데 에브라임 산지의 라마로 표기한 것은 납달리 지파에 위치한 라마와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수 19:30).

이스라엘 남쪽 지방에서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드보라는 어느날 북쪽 지역에 거하는 바락을 불러 하나님의 계시를 전합니다. “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였느냐 이르 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다.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6-7)

본문에는 사사로서 드보라의 지도력이 두 가지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렀다는 것입니다. 납달리 게데스는 팔레스타인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드보라가 거하고 있는 남쪽의 에브라임 산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드보라가 바락을 오도록 전했을 때 그가 순종한 사실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바락에게 이르는 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드보라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전하는 자임을 나타냅니다. 또한 드보라가 바락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명령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가 백성들이 드보라를 사사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전해준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서 늘 나타나는 한 가지 원칙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 원칙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면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즉, 명하신 그대로 순종해야 할 사람의 영역이 있는 반면 그 순종을 사용하셔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드보라를 통해 바락에게 주신 명령에도 바락이 순종해야 할 영역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영역이 나타납니다.

먼저 바락은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10,000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야 했습니다. 다볼 산은 갈릴리 호수 남서쪽 방향으로 잇사갈과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경계가 접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가라”는 말은 싸움터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드보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다볼 산에 접해 있는 두 지파에서 군사를 모아 싸움에 임하라는 전투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열두 지파가 가운데서 이 두 지파에서만 일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라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에 관해서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이들 지파가 거한 곳이 가나안 왕 야빈이 거하고 있는 하솔과 가까워 야빈으로부터 가장 심한 학대를 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는 바락이 납달리 지파에 속했고 더구나 그 지파의 지도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만 명의 군사를 모아 다볼 산으로 가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명령과 함께 바락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사람의 순종을 사용하여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역을 말합니다. “내가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기손 강’은 다볼 산을 근원으로 이스르엘 평원을 지나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로서 우기에는 이스르엘 평야로 물이 흘러 넘치나 건기에는 강바닥이 말라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빈에게 속한 군대를 이곳으로 이끌어내어 승리를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애초부터 승리가 보장된 것이었습니다.

 

(2) 바락이 드보라의 동행을 요구함(8-10)

 

그러나 드보라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바락은 조건을 제시합니다.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8). 드보라와 함께라면 그대로 순종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갈 수 없다는 바락의 대답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태도라고 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드보라가 바락의 요구를 받아들여 함께 가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락의 요구가 불신에서 나온 것이라면, 드보라는 분명히 바락의 믿음 없음을 책망했을 것입니다. 바락의 이러한 연약한 태도는 이성인 드보라가 왜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워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동행을 요구하는 바락의 말에 드보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9). 바락의 연약함과는 대조적으로 드보라의 지도력이 돋보이는데, 이러한 드보라의 강력한 지도력 때문에 바락은 드보라의 동행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드보라가 함께함으로써 바락은 확실한 승리가 보장된 싸움에서 영광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전쟁에서의 영광은 그 전쟁을 지휘한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침으로써 사울 왕보다 더 큰 영광을 얻었습니다(삼상 18:8-9).

드보라의 응답을 들은 바락은 이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군사를 모집합니다. “바락이 스불른과 남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일만 인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10). 바락의 소집 명령에 100,000명의 군사가 그를 따랐다는 사실에서 하나님께서 이 싸움에 바락을 부른 것은 그가 이 두 지파의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가졌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빈의 학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드보라와 함께 바락을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바락은 소집 명령에 10,000명의 군사가 따라나선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믿는 자가 취해야 할 태도는 순종밖에 없습니다. 창조주이시며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행하기만 하면 그분이 친히 그 일을 이루십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약속이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에 그분이 명하신 일을 이루는 데 결코 실패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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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3-02)

 


왼손잡이 사사 에훗와 삼갈

사사기 3장 12-31절


사람들은 위대한 일들을 하는 사람이라면 능력 있는 용장들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아닌 연약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큰 일들을 이루시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인물로 사용하셨습니다. 유관순, 잔 다르크 등등…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사용하여 이 시대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까?

 

  • 본문은 사사 웃니엘의 죽음은 40년 평안을 종식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또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고 동쪽 모압과 서쪽 블레셋을 통해 하나님의 징계가 임했습니다. 징계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왼손잡이 에훗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으시고, 삼갈의 무예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모압의 압제(12-14)

영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주 쉽습니다. 교회를 출석하지 않은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삶의 주관자였던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그 자리에는 반드시 악한 것이 자리를 잡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공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삶을 주관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도덕적인 타락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12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13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14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12-1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타락할 때, 징벌의 도구로 이방 민족들을 강하게 하셔서 그들에게 붙였습니다.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북쪽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 동쪽은 암몬과 아말렉과 동맹한 롯의 자손인 모압 왕 이글론, 그리고 남쪽에는 함의 자손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종으로 삼고 주인 노릇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자, 습관적으로 반복적인 범죄합니다. 웃니엘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타락 후에 점점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락을 해나갑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에게 파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합니다(12). 여기서 ‘또’라는 말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반복적으로 악을 행하고 있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등장한 왕은 모압 왕 에글론으로, 에글론의 이름은 ‘송아지’입니다.

12절의 주어는 하나님으로서 모압 왕 에글론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 에글론을 강성하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를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려나무 성읍인 여리고 성을 의미하는데 여리고는 동편에서 서편으로 넘어가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베델 등.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에 매우 가깝기 때문에 가나안을 정복하는 데 교두보가 되는 요지입니다. 이스라엘도 가나안을 점령할 때, 이곳을 가장 먼저 점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모압과 암몬과 아말렉 동맹군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가나안 전체를 다시 잃을 수도 있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은 이렇게 강성해진 모압에게 18년 동안이나 조공을 바치며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악을 행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에굴론 왕을 섬기며 고난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징벌의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나 왕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에훗 사사의 이야기(15-30)

종종 자신을 너무 무기력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자신이 보기에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가진 달란트를 통해 최선을 다해 섬기면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주의 주신 권능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담대히 나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15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16에훗이 길이가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17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매우 비둔한 자였더라 18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19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려 하나이다 하니 왕이 명령하여 조용히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20에훗이 그에게로 들어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이르되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의 좌석에서 일어나니 21에훗이 왼손을 뻗쳐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22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의 몸에서 빼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겼더라 23에훗이 현관에 나와서 다락문들을 뒤에서 닫아 잠그니라 24에훗이 나간 후에 왕의 신하들이 들어와서 다락문들이 잠겼음을 보고 이르되 왕이 분명히 서늘한 방에서 그의 발을 가리우신다 하고 25그들이 오래 기다려도 왕이 다락문들을 열지 아니하는지라 열쇠를 가지고 열어 본즉 그들의 군주가 이미 땅에 엎드러져 죽었더라 26그들이 기다리는 동안에 에훗이 피하여 돌 뜨는 곳을 지나 스이라로 도망하니라 27그가 이르러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 28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수들인 모압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 모압 맞은편 요단 강 나루를 장악하여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29그 때에 모압 사람 약 만 명을 죽였으니 모두 장사요 모두 용사라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였더라 30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15-30)

 

에훗이 두 번째로 소개됩니다. 사사 에훗은 옷니엘과 구조가 유사하지만, 훨씬 길게 기술하고 그가 적대자를 제거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사들 이야기는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고 사사의 지파에 따라 지리적인 이동(남부의 유다에서 북부의 단으로)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용상 후반으로 갈수록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1) 이스라엘의 배역과 부르짖음(12-15a)

 

이스라엘은 다시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했고, 이에 모압 왕 에글론(‘황소, 송아지’)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는 말을 두 번 반복하면서도(12), 그 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죄는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섬긴 것이며, 그로부터 파생되는 불순종임을 알 수 있습니다(6,7; 2:2,11-13,17,19).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가나안 족속을 다 몰아내지 못하고 함께 거주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벌하기 위해 하나님은 모압을 강성하게 하십니다. 모압은 요단강 동편, 사해의 남동쪽 고원 지대에 거주했습니다. 모압 왕 에글론은 이스라엘을 공략하기 위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동맹군으로 모집했다. 암몬은 모압과 혈연적으로 연결되었고(창 19:38), 지리적으로도 모압의 북쪽 아르논 강부터 얍복 강에 위치했습니다. 아말렉은 네게브에서 시내 반도, 요단 동편 등에 거주했습니다. 동맹군과 합세한 에글론은 이스라엘을 쳤고, 종려나무 성읍으로 불리는 여리고를 점령했습니다. 여리고는 요단 서쪽 8km에 위치해 요단의 동서쪽을 넘나드는 길목이라 지리상 적군의 공격 대상이 되기 쉬웠습니다. 가나안에 입성할 때 이스라엘도 여리고를 맨 처음 점령한 바 있습니다(수 6장). 그 여리고가 이제 모압의 손에 넘어갔고, 18년 동안 구속당합니다.

 

(2) 사사 에훗과 하나님의 구원(15b-30)

 

억압받는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에훗을 구원자로 세워 이스라엘을 구하십니다. 베냐민 지파 게라의 아들인 그는 특히 왼손잡이인데, 그의 왼손 활약을 부각하려는 복선입니다.

베냐민 자손 중 왼손잡이 용사가 유명한 것으로 보아(20:16), 왼손잡이는 왼손이 특별히 훈련된 용사를 뜻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모압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었고, 에훗은 공물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공물 전달이 표면상의 임무일 뿐이고 진짜 임무는 따로 있었습니다. 비밀 임무를 위해 에훗은 한 규빗(50cm) 되는 양날 비수를 만들어 오른쪽 허벅지 옷 안에 차고, 다른 신하들과 함께 가서 에글론 왕에게 공물을 바쳤습니다.

왕은 매우 살진 자로 나오는데 이런 에글론의 비둔함과 비대함도 복선 역할을 합니다. 공물 전달 임무를 마친 에훗은(그러나 아직 전달할 공물이 남아 있다!) 돌아가다가 공물 나른 자들을 미리 보냅니다. 자신은 길갈 근처 돌 뜨는 곳(경계표, 19)에서 다시 왕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는 왕에게 전달할 “은밀한 일”이 있다며, 왕과 사적인 알현을 요청합니다. 이때 ‘일’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다바르’는 ‘말씀’, ‘것’, ‘사안’ 등을 모두 의미합니다. 왕에게 은밀한 말이 있다고 접근하지만, 그 은밀한 것의 정체는 숨겨온 칼이었습니다.

왕은 신하들을 다 방에서 물러가게 하고, 에훗을 안으로 들입니다. 이때 왕은 서늘한 옥상 방(다락방)에 앉아 있었습니다. 에훗은 그가 전할 ‘은밀한 일을 하나님/신의 일’로 바꿔 말하여 전달할 사안의 엄중함과 가치를 주장합니다. 신의 특별한 전갈이란 말에 왕은 비둔한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에훗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에게 쏜살같이 달려들어 죽이는 데 성공합니다. 저자는 왕의 암살 장면을 21-22절에 상세히 기술하여 긴장감 속에 이스라엘의 승리를 고조시킵니다.

에훗은 외손을 뻗어 오른쪽 허벅지 아래에 감췄던 비수를 빼 들었습니다. 그가 준비한 칼과 왼손의 재주가 용이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그는 힘을 다해 왕의 배(“봄”, 21절)를 찔렀습니다. 왕이 서 있었기에(20절), 에훗은 몸을 굽힐 필요 없이 선채로 쉽사리 왕을 찌를 수 있었습니다. 왕은 비둔했기에 에훗의 재빠른 공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에훗의 칼은 날선 양날에다 길었으므로(16), 찌르는 힘이 가중되자 왕의 몸에 깊게 박혔습니다. 칼날만 아니라 칼자루까지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왕의 몸에 박힌 칼날에는 기름이 바로 엉겼습니다. ‘칼끝이 등 뒤까지 나왔다’(22)란 번역은 칼이 빗나감 없이 깊이 박혀 비대한 몸을 뚫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왕이 치명상을 입었음을 표현합니다. 이 문장은 ‘배설물이 나왔다’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이 경우 그가 죽었음을 나타냅니다. 신하들이 나중에 왕이 발을 가리고 계신다고 생각한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24), ‘발을 가리다’라는 표현은 ‘용변을 보다’라는 뜻이며, 시종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방에서 냄새가 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밀한 물건으로 숨겨진 임무를 완수한 에훗은 현관으로 나왔습니다. 영리하게도 나오면서 옥상 방의 문들을 닫고 잠금으로써 그는 도망할 시간을 법니다. 에훗이 나가자, 신하들은 왕의 시중을 들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문들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들은 잠긴 방에서 냄새가 나자 왕이 볼일을 본다고 생각하여 밖에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당황스러울 정도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왕은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신하들은 열쇠를 가져와 문을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군주’가 죽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에훗은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경계표(돌 뜨는 곳)를 지나 스이라로 도망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이른 그는 나팔을 불어 기다리던 이스라엘 자손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에훗을 선두로 함께 산지에서 내려왔다. 에훗은 용감하게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수들인 모압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28)라고 외칩니다. 에훗의 외침에는 에글론을 죽였다거나 그 왕이 죽었다는 직접적인 내용은 없습니다.

물론 모압 왕의 죽음 소식을 전했을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외침에서 강조된 것은 오직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다는 점입니다. 이 선포는 1:2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선포와 마찬가지로 ‘미래형’이 아닌 ‘완료형’으로 나왔습니다. 에훗의 선언에는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 그의 전지전능하심, 하나님에 대한 에훗의 믿음이 담기 있습니다. 그의 외침을 들은 이스라엘은 사기가 충전했습니다. 에훗이 성공적으로 왕을 암살했듯이, 이제 그와 이스라엘이 합리하여 모압군을 성공적으로 무찌릅니다. 이스라엘은 에후을 선두로 함께 내려가 모압 맞은 편의 요단강 나루를 점령했습니다. 이들의 전통 같은 경비로, 적군은 한 명도 요단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가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약 만 명을 죽였습니다. 더구나 죽임을 당한 이들은 모두 장수였고 용사였습니다. 힘세고 수도 많았던 적군이었으나, 그중 어느 누구도 도망할 수 없었습니다(29). 이스라엘이 용맹한 적군을 다 죽였다는 내용과 28,29절에 반복된 ‘(적군 중) 한 사람도 ~하지 못했다’는 표현은 실제이거나 과장이 섞였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각된 것은 이스라엘의 대승이며, 여기에 하나님의 기적 같은 도움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손에 굴복했습니다. 에훗이 선포한 대로(2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압에게서 건지셨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은 80년 동안 평온했습니다. ‘평온하다’(샤카트)는 ‘평화롭다’, ‘고요하다’, ‘평안하다’의 뜻으로서, 전쟁이 없었음을 함축합니다. 사사 이야기 중 가장 긴 평화의 기간입니다.

 

사사 삼갈(31)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데서 나타납니다. 세상의 강력한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믿음이었습니다. 삼갈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막대기로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당신의 능력은 근원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강력한 능력을 발휘될 것입니다.

 

31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31)

 

대사사들의 이야기 사이에 나오는 여섯 소사사(삼갈, 돌라, 야일, 입산, 엘론, 압돈) 중 삼갈이 첫째로 소개됩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은 이방인이며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그의 행적은 드보라의 찬양에도 암시됩니다(5:6).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600명을 처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데 다양한 사람과 방법을 통해 당신의 능력과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동쪽 모압 사람들뿐만 아니라 서쪽 블레셋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끈질기고 사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 시대까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에훗의 뒤를 이어서 사사를 아주 평범한 삼갈을 선택하셨습니다. 삼갈이 활동하기전, 당시 강력한 블레셋 사람들은 얼마나 약탈을 강행했던지, 나중에 여자 사사로 등장한 드보라의 노래에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삿 5:6)라고 고백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무섭고, 사회가 불안해서 작은 길로 피해 다녔다는 것입니다.

 

삼갈의 활동은 약 2m정도 되는 소를 몰던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어떻게 죽였는지는 모르지만, 대적과 싸울 여건이 않았습니다. 하지만, 삼갈의 활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에훗과 삼갈은 연약하고 평범했지만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왼손잡이 에훗을 통해 모압으로부터, 삼갈로부터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의 지도력 아래 80년 동안이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고통의 기간보다 안식의 기간이 더 길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함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또 다시 악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압와 에글론의 손에 그들을 넘기십니다. 모압왕 에글론은 암몬과 아말렉 연합으로 처들어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은 모압의 통치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는 에훗을 사사로 세우십니다. 에훗은 전략적으로 모압 왕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음을 선포합니다. 이 선포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 에훗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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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3-01)

 


평온을 회복한 사사 옷니엘

사사기 3장 1-11절


초보운전자가 운전할 때는 단거리를 운전합니다. 운전 실력이 붙으면 어디나 가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장거리 운전은 단거리 운전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초보자들에게는 힘든 노동입니다. 초보자가 장거리 운전하면 본인만 힘든 것이 아니라 동석자들도 힘들긴 마찬가지입니다. 장거리 운전은 능숙한 운전자에게 맡겨야 편안하게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도 인생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운전대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평안한 인생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6절은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이자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 사이클의 마지막 설명 부분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 남겨두신 이방 민족의 명단과 이스라엘의 명단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인 7절에서 11절은 사사기 중심 미학의 첫 번째 사사 웃니엘의 업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과 이스라엘의 타락(1-6)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함으로 점점 타락의 길로 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도 더욱 믿음의 길로 나아갈 것이냐, 아니면 잠시 믿음에서 떠날 것이냐 시험의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따라 실천함으로 능력을 발휘하기 원합니다. 시험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가 중요합니다. 시험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3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4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5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6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1-6)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가나안 전쟁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가 점차 많아졌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자 그들은 남아 있는 적들을 전멸시켜야 했음을 알았습니다. 유다 지파를 선발로 가나안 족속들에게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토벌 작전을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서히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쫓아낸 것보다 종으로 사역을 시킨다면...’이란 인간의 생각이 앞서서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어떤 지파는 이들에게 사역을 시켰고, 또 어떤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속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 섞여 살기도 했습니다.

 

(1) 이방민족을 남겨두신 이유(1-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려고 그들 가운데 가나안 이방 사람들을 남겨 두셨습니다(1). 그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1)로 정의됩니다. 이는 그들이 여호수아 죽음 이후의 세대이며, 여호수아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목격한 자들의 후손 세대임을 알립니다(2:7). 그들은 하나님과 긴밀한 유대 관계도 없었고, 그가 하신 일을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2: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시험을 통해 언약 관계를 지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의 도구로 이방 족속을 사용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이방 족속을 남겨두어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세대로 전쟁을 알고 배우게 하셨습니다(2). 이는 전쟁을 통해 싸우는 법과 전술을 익히고,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믿음과 순종을 실행하도록 의도하셨다는 뜻입니다(4; 2:22). 전쟁은 시련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믿음과 순종으로 이방을 쫓아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을 유업으로 얻고 그가 베푸시는 물리적 축복을 받습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그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는 영적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실패하면, 이방 족속은 이스라엘에게 가시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2:3).

 

(2) 남겨진 이방 민족들(3-4)

 

시험을 위해 하나님이 남겨두신 민족으로는 블레셋, 가나안, 시돈, 히위 족속이 소개됩니다(3). 이들 지역은 여호수아 13:2-6의 남겨진 땅 목록의 요약이며 가나안 전역을 가리킵니다. 블레셋(남서쪽)의 다섯 군주는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 족속의 통치자를 가리킵니다(수 13:3). 유다 지파가 한때 이들 지역을 점령했으나(1:18), 도로 뺏긴 것입니다. “모든 가나안 족속”(남동쪽)은 특정 민족이라기보다는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여러 민족을 대표합니다. 시돈 족속(북서쪽)은 가나안의 북서쪽 지중해 연안의 베니게 (페니키아) 주민들입니다. 히

 

(3) 이방 민족을 통한 결과(5-6)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살지 못하도록 쫓아내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남겨놓으신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세에게 주셨던 명령을 제대로 순종하지 여부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알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믿음이 견고한지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타락을 하나님께서는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한 풍성한 복된 삶입니다. 스스로 하려는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마치 초보운전자가 장거리 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편안한 마음이 살아집니다.

 

사사의 모범, 첫 사사 웃니엘(7-11)

우리가 승리하는 방법은 세상의 방법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약육강식의 방법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손을 붙드는 자에게 최후에 승리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7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8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9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10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11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7-11)

 

7-11절은 웃니엘 사사 이야기입니다. 웃니엘 사사의 이야기는 사사의 중심 이야기의 첫 번째 이야기로, 그에 관한 인물 묘사는 사사의 전향을 보여줍니다. 그의 성격 인품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그가 수행한 전쟁에도 구체적으로 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웃니엘 이야기는 ‘이스라엘 졌으니 여호와께 악을 행함’, ‘여호와께서 적의 손에 파심’, ‘이스라엘이 적을 섬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음 사사를 세우심’, ‘구원 – 이스라엘 – 평안’이라는 사사기의 기본적인 틀을 보여주는 기능만 하고 있습니다. 이후 사사들의 이야기는 이 기본적인 틀에 개별적으로 다른 요소들로 구성됩니다.

 

웃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이며 아버지 그나스는 갈렙의 동생입니다. 그를 갈렙과 연결시켜 소개한 것은 갈렙과 웃니엘의 세대가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웃니엘은 갈렙의 후계자로 여호수아 세대와 가나안 세대를 연결하는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니지만 갈렙처럼 유다 지파에 속했으며, 1장 가나안 전쟁에서 유다가 맨 먼저 올라간 것처럼, 유다 지파 소속인 웃니엘 첫 사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1) 사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7-8)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완전히 잊고 가나안의 풍요의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가나안 땅 자체에 빠져서 그 땅에 더욱 잘 살기 위해서 바울과 아세라를 섬긴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유월절이나 무교절, 만나, 성막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을 기억할 수 있도록 장치들을 말해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기억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경험하고 말씀을 들어야 기억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기억이 하나님을 섬기는 전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 모든 장치와 말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었고 그 결과 눈에 보이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입니다. 바알은 신상의 형태로 되어 있고, 아세라 여신은 나무 기둥의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바알들과 아세라들이라는 복수 표현은 신상과 재단이 이스라엘 여러 곳에 퍼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사 리사다임 손에 파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를 8년 동안이나 섬겼습니다.

 

(2)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하나님(9-10)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억압의 상태로 들어간 것입니다. 애굽의 학정을 못 이기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처럼,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라는 것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단어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웃니엘이라는 사사를 구원자로 보내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10)라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을 어떻게 행사하시는지를 나타내주는 주된 어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사가 전쟁을 치를 때 여호와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사사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영은 영적 혹은 인격적 변화를 나타내기보다는 탁월한 군사적 힘과 능력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즉, 전쟁을 할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일 뿐 사상의 본문에서는 인간의 인격적인 변화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입다와 삼손도 여호와의 영을 받았지만, 인격적으로는 상당히 문제가 많은 인물들이었습니다.

 

(3) 손에 넘겨주시는 하나님(11)

 

전체적으로 웃니엘의 이야기에서는 ‘손’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8절에서 하나님께서 구사 리사다임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고, 10절에서는 웃니엘의 손에 구사 리사다임을 넘겨주셨으며, 결국, 웃니엘의 손이 그를 받았습니다. 이런 손 바뀜을 통해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오직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너무 쉽게 생각하면, 영적인 타락이 점점 임하는 것입니다. 환경과 여건이 좋지 않을지라도, 세속적인 방법과 타협하지 말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웃니엘과 같이 나라와 사람들을 세우는 능력이 임합니다. 순간순간마다 주신 하나님 나라 사명을 잘 감당하면 승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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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2-02)


돌고 도는 악순환의 역사

사사기 2장 11-23절


나쁜 현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을 ‘악순환(惡循環)’이라고 합니다. 잘못된 일들이 악순환되지 않도록 자녀들에게 자신이 체험한 일들을 가르치는 일은 참 어렸습니다. 자신처럼 시행착오를 대물림하지 않고 자녀만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배울 수 있었으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사람이란 이토록 옳은 일을 배우고 익히고 살아내는 것을 힘들어하는 존재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사사 시대에 반복되어 일어난 일들이 요약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겨 하나님을 진노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 넘겨 심판하십니다. 박해 속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을 배역함으로써 악순환을 반복합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의 배역 역사(11-19)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롭고 신실한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드십니다.

 

11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15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16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17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18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19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11-19)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역했고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배역과 징벌과 회복의 과정이 계속 순환하였습니다. 11-19절은 그 순환 과정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특히 11-15절은 이스라엘의 배교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방인에게 넘기시는 내용입니다.

 

(1) 이스라엘의 배역(11-13)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11)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저버린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그는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부르신 분이고, 그들이 섬기던 신입니다(12). 그분은 애굽에서 수백 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고, 조상들과 세운 언약대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는 조상들의 하나님일 뿐, 자신들이 섬겨야 할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10절에서 언급된 것처럼, 그들은 여호와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누린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모르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것을 생각하여 주변 이방인의 신들을 좇았고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도 조상의 신을 섬기고, 가나안의 신들도 같이 섬겼습니다. 이러한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숭배한 신은 바알과 아스다롯입니다. 이들은 비와 풍요, 사랑의 신이며 가나안의 대표적인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분명히 하나님을 향한 배교입니다.

 

(2) 하나님의 진노(14-15)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가나안의 신들은 여호와께 완전히 패배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과 비교해서 가나안의 신들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무능한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이런 행동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쉬지 않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서 가나안의 신들도 함께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났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면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언약은 상호배타적인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배반하는 일입니다.

십계명의 제 1계명인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언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삶의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값싼 풍요를 더 누려보겠다고 가나안의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배역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렀습니다. 12절의 ‘하나님의 진노’가 14절에 반복되면서 진노가 심판으로 구체화됐음을 알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을 ‘노략하는 자들의 손에 넘기고’ 그들의 손에 파는 행동으로 표현됩니다(14). ‘~의 손에 넘기다(주다).’는 주도권과 승리를 주셨다는 뜻이며, ‘~의 손에 팔다.’는 그의 종이 되어 압제를 받게 한다는 뜻입니다.

노략자들은 한두 민족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방 족속이었습니다. 주변 모두가 이스라엘의 대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의 죄가 무겁고 반복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의 침략과 핍박을 당해 낼 수 없었습니다. 대적의 손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가능했습니다(16-28). 그 전에는 이스라엘이 누구와 전쟁하든지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15). 여기서 “재앙”(라아)은 11절의 ‘죄’(라)와 같은 단어이며, 이는 이 재앙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임을 보여줍니다.

14절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힌 손은 대적들의 손이었지만, 15절에는 ‘하나님의 손’으로 언급되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심판하는 일을 주관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운 처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삼으신 후 그들에게 율법을 주고 죄짓지 말라고 경고하셨으며, 죄에 대한 징벌이 있음을 맹세로 알리셨습니다(출 23:32-33; 신 4:15-31; 28:15-68). 하나님께 순종할 때 받을 축복도 함께 약속하셨지만(신 28:1-14), 죄를 선택한 이스라엘은 경고대로 이방인에게 극심한 박해와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3) 하나님의 긍휼과 이스라엘의 반응(16-19)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극심한 괴로움에 빠졌을 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를 보내셨습니다.

“사사들”(소페팀)이란 호칭은 사사기에서 16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재판관’을 뜻하지만, 이들의 주 역할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사’는 당시 지파를 다스리는 지도자로 지파가 적들에게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원할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사들은 재판관이라고 하기보다 영적,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도자인 사사들을 세워 주셨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다른 신들을 따랐습니다.

특별히 사사기에서 사사들을 구분할 때 표1처럼 ‘대사사’와 ‘소사사’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사사 특징 전쟁을 통하여 외부와의 갈등을 해소한 군사적인 지도자
특수한 상황에 일시적 지도력
인물 웃니엘, 에훗, 삼갈, 드로바, 기드온, 입다, 삼손
소사사 특징 법을 통하여 내부의 갈등을 해소한 행정적이고 사법적인 지도자
종신적에 가까운/4가지 기록(이름, 고향,통치기간,매장지)
인물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자기들의 죄로 징벌을 받는 이스라엘의 모습(14-15), 직후에 사사를 통한 구원(16)이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부각해줍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자극한 것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었지만(18), 여기에 바로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회개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더 앞선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세워 주신 사사들에게도 불순종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행악 중 가장 큰 문제는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17) 우상들에게 절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이 영적으로 음란할 뿐 아니라, 이방 신을 섬기는 여인들과 관계를 가지며 풍요를 비는 행위 역시, 음란했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악행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섬겼던 조상들의 길을 따르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조상들이 걸었던 순종의 길에서 속히 벗어났습니다(17).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사사들을 세우셨고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18).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여호와의 영을 보내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3:10; 11:29).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18).

16절에 이어 반복된 18절의 이런 내용에는 “여호와”가 대부분 주어로 나옵니다. 이는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사사와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또한, 저자는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신 것은 대적의 압제로 신음하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듣고 긍휼히 여기시고 마음을 바꾸셨기 때문임을 밝힙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기계적으로 상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녀가 잘못된 길로 치우치면, 돌아오게 하려고 징계하십니다. 하지만 징계를 받은 자녀들이 너무 힘들어하면, 그것마저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배은망덕하게도 조금만 살만하고, 자신들을 인도하던 사사가 죽으면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행동은 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배교하고, 그전 세대보다 더 타락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1:1)라는 표현처럼, 하나님의 영적 지도자가 부재했을 때 백성의 신앙이 악화되고 죄는 더 심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사사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 말고도 그들에게 영적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의 타락은 다른 신들을 좇고 섬기고 절하는 데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이는 십계명의 가장 기본 계명들(출 20:3-6)을 어긴 것입니다. 이런 타락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실생활에서의 도덕적, 윤리적, 사회적 타락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이스라엘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패역한 길”은 강퍅하고 완고한 생활이며 하나님의 뜻에 위배 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치다’는 ‘떨어지게 하다’, ‘포기하다’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이 악행을 그만두려는 의지와 실천이 미진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20-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일꾼들을 통해 구원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구원받은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스럽기보다는 이상스럽게 다시 우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주변에 연단의 도구를 허락해 둡니다. 그리고 괴로움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말입니다.

 

20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20-23)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악행에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12, 14절에 이어 20절에서도 세 번째로 반복됨으로써 진노의 강도가 높아졌음을 나타냅니다.

이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20-22)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심판이며, 그 내용은 여호와의 사자가 전달한 말씀(1-3)과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1)는 생각되었고, 대신 그들의 순종과 그로 인한 심판이 두드러지게 기술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배역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한 언약을 어긴 행위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과 맺은 언약을 “영원히 깨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고”(1), 이를 신실히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께 신실한으로 응대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부르지 않고, 21, 23절에서 ‘이방 민족’으로 변역된 단어로 부름으로써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처럼 취급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그의 언약을 지킬 때만 가능함(출 19:5)을 상기시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가나안 족속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신 결과였으며, 여기에 이스라엘의 순종이 뒤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현 세대는 하나님의 언약에 신경 쓰지 않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의 생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불순종한다면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지 않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3; 수 23:13).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이방인들이 남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는 쫓아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21).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방 족속을 남기신 것은 이스라엘이 조상들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22; 3:4). 특히, 23절은 이스라엘을 시험하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확고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때에 이방 민족들을 남겨 두셨고,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이스라엘 주변에는 하나님께서 남기신 민족들이 있습니다. 1장을 보면, 이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각 세대는 믿음과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업의 축복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회복의 기쁨을 되찾을 의무가 있습니다.


자녀 양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의 전수, 신앙의 전수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해내야 할 일입니다. 부모가 먼저 그 가치를 실현해 보일 때 더 쉬울 것입니다. 가치의 천수, 신앙의 전수가 없이는 모든 교육이 헛것이고 모든 유산이 무의미하며 인생 자체가 실패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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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2-01)

 


뒤늦게 후회하는 이스라엘

사사기 2장 1-10절


사업하다가 실패하신 분을 심방 했습니다. 과거 많은 재산을 돌아보면서 그 때에 하나님께 봉사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혼잣말처럼 ‘지금까지 날려버린 물질 중에 10분의 1만이라도 교회에 봉사했다면 교회가 아름답게 건축되었을 텐데…….’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래서 ‘달아난 재물은 돌아오지 않으니깐 이제부터라고 충성하면 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을 망치고 난 후에는 아무리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현재에 어떤 태도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지만, 이스라엘은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의 실패와 우상숭배에 대해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이전에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생존했을 때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겼으나 그들이 죽은 후 하나님을 저렸습니다.

 

보김 사건(1-5)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한 번 약속하신 것은 손해날지라도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함을 닮아서, 신실하게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점점 영적으로 타락되어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신실함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 점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실함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1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3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1-5)

 

여호수아가 죽은 후 지파별로 자신의 기업을 차지하는 전쟁을 치르게 된 이스라엘은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가나안 사람들의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과 더불어 살며 결혼과 같은 언약을 맺고 그들의 풍습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온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갑자기 등장합니다. 사사기에서는 ‘여호와의 사자’는 신적인 존재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전달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사사 시대에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직접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질책하고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서 그들이 이방 민족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리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선지자를 가리킬 수 있으나(대하 36:15-16; 학 1:13), 사사기에서 천사인 여호와의 사자(6:22; 13:16, 21)와 인간 선지자(6:8; 13:6)를 달리 칭하고 있기에, 여기 사사기에서는 하늘에서 보내신 전령, 천사로 보입니다. 사사기에서는 ‘하나님의 사자’가 종종 등장하여, 하나님의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것은 사사시대에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직접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의 정복 기록(1장) 직후, 여호와 사자의 등장은 느닷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이 가나안 정복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이 범한 불순종을 책망하는 내용이라서 1장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1:1-2:5 단락의 첫 부분에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1:2)이 있었고, 마지막 부분(2:1-3)에 유사한 상황이 등장하여 형식상으로도 짜임새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왔습니다. 길갈은 여리고의 동쪽 경계(수 4:19)이며,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 여러 중요한 일-장막을 치고 할례를 했던 일, 예배를 드리고 제비뽑기를 해서 땅을 분배하던 거룩하고 중요한 장소-들이 일어난 곳입니다. 길강에서 보김으로 올라오는데, 그 장소가 벧엘과 실로 사이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눈물’이라는 뜻의 이 지명은 4절의 이스라엘의 통곡을 예고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음을 상기시키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응답이며, 그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창 15:13-14; 46:4)을 실행하신 증거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또한 그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루신 것입니다(창 15:16, 18-21; 26:3; 28:15). 셋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영원히 깨뜨리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근본적으로는 시내산 언약(출 19:6)을 가리키지만, 구체적으로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쫓아내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가리킵니다(신 7:2; 수 1:2-4).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도 신실히 지키셨습니다(6).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반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이 값을 치르고 있음을 알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한 명령은 가나안 주민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것입니다(출 34:12; 신 7: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을 살려둔다는 뜻이므로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신 1:2)는 명령을 어기게 됩니다. 사사기 1장이 정복 보고에도 가나안 족속과 언약을 맞은 일과 그들을 살려 노예로 삼은 일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일로 기술된 바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금한 언약에는 이방인과의 결혼도 포함되었습니다(신 7:3), 이를 통해 이방인의 우상숭배가 이스라엘 가정에 스며들고 하나님을 배반하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출 34:16; 신 1:2-4).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결혼했고 자녀들을 이방 자녀와 결혼시키는 죄를 범했습니다(3:6; 12:9). 둘째 명령은 우상숭배의 유혹이 될 수 있는 제단들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출 34:13; 신 7:5). 제단을 하는 행위에는 그 주변의 주상, 목상, 조각상 등의 우상을 깨드리고 불사르는 일도 포함되었습니다(신 7:5). 제단이 남아 있으면, 이스라엘이 유혹을 받아 우상을 숭배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명령 또한 지키지 않았습니다(11-12,19). 두 가지 중요한 명령들을 상기시키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질책하십니다(2). 이 수사적 질문은 이스라엘의 죄를 재차 확증할 뿐 아니라 순종에 대한 분노, 상심, 안타까움과 그들을 심판해야 하는 고통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불순종하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신 바 있습니다(수 23:13).

결국, 사사기 1장에 기록된 각 지파의 정복 실패는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겨진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 옆구리에 가시가 되며,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신앙에 올무가 된 것도, 미리 알리셨습니다(민 33:55; 신 7:16; 수 23:13). 슬프게도, 이 예고가 이루어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족속과 우상은 사사 시대만 아니라 왕정 시대를 거쳐 나라가 멸망하기까지 이스라엘에게 거침돌과 고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가나안 족속과 언약 맺은 것과 우상 제단을 헐지 않은 것에 대한 질책합니다(2-3). 이러한 ‘명령을 어겼다’라는 것은 1장에서 거민들을 남겨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을 남겨두고 일을 시킨 것이 바로 그들과 언약을 맺은 행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력을 다해 가나안을 진멸할 때까지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정복의 성패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을 몰아냄으로써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안정과 발전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신 것은 완전한 정복을 통해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그의 거룩한 백성의 길을 지속하는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소리 높여 웁니다. 그래서 지명이 ‘울음’, ‘우는 자들’이라는 뜻의 ‘보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제사를 드립니다(5). 백성의 눈물과 제사는 불순종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곧바로 여호와를 잊고 맙니다(10).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한 회상(6-10)

너무 과거에 받았던 은혜를 집착하지 말고, 새롭게 주실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물질도 날아가 버린 물질을 가지고 후회하기보다는 장차 내려주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열심히 봉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은혜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것은 타락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6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9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6-10)

 

사사기를 다시 시작하듯 여호수아의 죽음과 그 이후 이스라엘의 영적 변화를 설명합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이 순하여 가나안 백성을 진멸하고 그 땅을 점령합니다(수 1-12장). 그 후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정복한 땅과 정복할 땅을 분배했습니다(수 13-19장). 백성들은 각각 분배받은 그들의 땅으로 가시 정착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의 지도에 따라 하나님을 섬김 있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함께 가나안에 정착한 장로들이 생존한 동안에는 이 장로들의 신앙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7; 수 24:31). 여호수아 및 그와 함께한 장로들은 광야에서 살아남아서 가나안 땅에 입성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광야를 지나며 여호와가 베푼 기적과 구원을 경험했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와 여리고 등의 성읍을 정복하면서 여호와가 행하신 모든 큰일을 목격하고 경험했습니다. 7절에서 여호수아 및 장로들의 생존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원동력처럼 기술한 것은 영적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공동체에 미치는 이상적인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이는 이후에 있을 큰 영서 쇠퇴(10)를 예상케 합니다.

여호수아는 처음에는 모세의 ‘수종자’로 소개되었는데(수 1:1), 110세에 죽을 때에는 모세처럼 “여호와의 종”이란 호칭으로 불립니다(8; 수 24:29). 이런 변화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모세를 따라 자신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했음을 증명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지도자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딤낫 세라)에 장사됩니다. 이곳은 여호수아가 원한 성읍이며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분배받은 땅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성읍을 재건하고 정착했습니다(수 19:50). 여호수아에 대한 기록은 그가 분배받은 기업을 잘 누렸다는 축복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었을 때 갈렙과 함께 여호수아가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110세까지 장수하고 가나안에서 기업을 얻고 평생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며 그분을 섬기다가 여호와의 종으로 삶을 마감한 것은 큰 축복이자 은혜입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그를 아는 장로들과 그 세대도 다 죽었습니다. 이제 그 뒤를 이은 새로운 이스라엘 세대에게는 그들을 영적으로 이끌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도 몰랐고, 여호와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도 몰랐습니다. 물론 이들이 하나님께서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 전혀 몰랐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알다’라는 동사가 정보의 입수만 아니라 ‘관계성’을 함축한 동사임을 고려하면, 이들 세대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으니 당연히 그가 하신 일을 직접 경험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그들이 전해 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그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갔으며, 그들의 현재 삶에 어떤 의미나 영향력으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암울한 변화는 가나안 정복 시대에서 사사 시대로의 전환을 나타냅니다.


여호수아의 시대를 마감합니다. 그리고 점점 영적인 암흑기로 접어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경험했던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들은 그래도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죽은 후에 자란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였습니다. 신앙교육의 실패와 이스라엘 불신앙의 의미합니다. 사사기 시대는 영적인 지도자가 없었고, 신실한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중심사상인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는 결과를 맺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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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1-03)


모든 가나안을 정복하지 못한 이유

사사기 1장 22-36절


오래전에 강원도 강릉 지방에 산불이 나서 큰 피해를 낸 적이 있습니다. 초기에 산불을 진화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음 날이면 또 산불이 나고, 또 산불이 났습니다. 그 이유는 불씨를 정확히 끄지 않아서 불씨가 바람을 타고 살아난 결과였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실수는 죽음입니다.

 

  • 본문은 북쪽 지역에 위치한 지파들의 점령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므로 요셉 지파는 베델을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 외 지파들은 북쪽 지역을 점령하는 데 실패하면서 가나안 족속들을 살려두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있어 자손들이 가나안 족속들에게 밀려서 단 지파는 오히려 아모리 족속에게 밀려나는 모습 또한 보여줍니다.

 

요셉 자손의 벧엘 범령(22-26)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죄악에 대해 너무 관대합니다. 하지만, 죄악이 성도들에게 들어오면 영성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단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좋아합니다.

 

22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23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24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25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22-26)

 

요셉 가문은 정확하게 에브라임과 므나셋 지파를 말하는데, 그들은 북쪽에 위치한 지파들 가운데 가장 강한 지파였기 때문에, 이들이 북쪽 지파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벧엘’은 여호수아 18장 13절, 22절에 따르면, 원래 베냐민 지파에 주어진 성읍으로 에브라임과 베냐민 지파의 경계를 이룹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는 자신의 기업 아래에 있는 중요한 도시인 예루살렘과 벧엘을 점령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벧엘을 점령하게 됩니다.

요셉 지파가 벧엘을 성공적으로 점령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성공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무리 강력하고 힘든 성읍도 점령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특별한 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할 때 정탐꾼을 보낸 것처럼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리고 정탐꾼이 루스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만나서 성읍 입구를 알려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합니다(22). 부탁을 들어주면 은혜를 베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알려주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도 들어있습니다. 이런 위협에 그 사람은 성읍 입구를 알려줍니다. 그 정보를 이용하여 에브라임 사람들이 쳐들어가 성읍을 칼날로 쳐서 벧엘을 성공적으로 점령합니다(25).

이 장면은 여호수아서에서 여리고성을 점령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정탐꾼 읍 사람들의 도움, 성읍 사람들의 구원, 성읍 정복 등에 동일한 모티브가 등장합니다. 기생 라합의 도움으로 여리고 성읍을 수월하게 얻은 것처럼, 벧엘도 이름 없는 사람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물론 다른 점도 있습니다. 전에는 도와준 사람의 이름이 기생 라합이라고 밝혀지고, 그녀의 영웅적인 행동이 강조되었고, 그녀와 가족은 이스라엘 자손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이름 없는 성읍의 사람은 그가 아닌 정탐꾼이 먼저 그들과 약속하게 되고, 결국, 이스라엘 자손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헷 사람의 지역에 가서 새로운 ‘루스’라는 성읍을 짓고 살았습니다(26). 그런데 이후에 그가 짓 루스 성읍은 가난한 문화를 보존하고 부흥시켜 이스라엘 안에 퍼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요셉 가문은 여호와를 믿는 신앙으로 벧엘을 점령하였지만, 가나안 사람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먼저, 승리를 위해 그들과 언약하므로 결국 가나안 문화를 남겨두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 이름없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나안 문화가 다시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전에 죄악된 문화와 풍습을 여전히 이어지며, 요셉 자손이 가나안 땅 정복에 있어 완전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적은 숫자지만, 죄악의 씨앗은 무섭습니다.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씨앗의 영향력은 무섭게 펴지는 것입니다.

 

다른 자손들의 실수(27-36)

‘순종(順從)’이란 의미는 100%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99% 순종하고 1% 불순종이라할지라도 불순종입니다. 예를 들어, 음식에 99.99% 자연 유기농 식품으로 식품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 0.01%의 치명적인 맹독성 독약이 들어갔습니다. 이 음식을 ‘유기농 음식’이라고 하지 않고 ‘맹독성 음식물’이라고 합니다. 그럼으로 완전한 순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간까지가 아닌, 정말 끝까지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27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28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9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30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31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34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35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36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27-36)

 

본문은 북쪽 지파들의 가나안 점령 실패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단락은 점령에 실패한 지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언급된 지파의 순서는 므낫세를 제외하고는, 남쪽에서 북쪽 위치 순으로 언급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지파들이 자신의 기업을 점령하는 것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탈락은 아주 작은 타협에서 시작됩니다.

 

(1) 므낫세의 점령 실패(27-28)

 

므낫세는 요단 동편과 서편에 모두 기업이 있는데, 여기서는 요단 서편의 정복 이야기만 다루고 있습니다. 므낫세는 ‘벧스안’과 ‘다아낙’과 ‘돌’과 ‘이블르암’과 ‘므깃도’의 주민을 다 쫓아내지 못했습니다(27). 여기서 ‘벧스안’과 ‘다아낙’과 ‘므깃도’는 매우 유명한 도시들입니다. ‘벧스안’는 애굽 시대부터 가나안을 다스리는 중요한 거점이며 무역의 중심지였고, 다아낙과 므깃도는 중요 전투지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매우 강성한 성읍이었고 가나안 사람들도 매우 완강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에 므낫세의 힘으로는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28절에 보면 이스라엘 전체가 강성해진 후에도 다 쫓아내지 않고 그들에게 일을 시켰더라고 보고합니다. 여기서 므낫세라고 표현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국가적 힘을 가진 왕정 시대에 비로소 완전히 정복했다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고 자기들의 힘으로만 정복하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2) 에브라임과 스볼론의 점령 실패(29-30)

 

계속해서 에브라임과 스블론의 실패를 기록합니다. 그들은 대체로 점령을 하였지만, 완전히 진멸하지 않고 가나안 사람들이 이들 가운데 살게 하였다고 보고합니다. 

이들은 군사 수가 많고 전쟁을 열심히 수행한 지파이며, 후에 드보라의 전쟁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끝까지 싸우진 않았으며, 가나안 족속과 동맹을 맺고 자기 기업 안에서 가나안 사람들이 살도록 허락하고 맙니다. 이것 역시 진멸을 명령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스블론의 경우는 가나안 사람들이 스블론의 노예로 노역을 담당하였다고 보고하는데, 아마도 사사 시대의 일이 아니라, 28절처럼 후대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3) 아셀과 납달리 지역의 점령 실패(32-33)

 

아셀과 납달리는 스블론 북쪽 지역에 위치한 지파들입니다. 아셀은 해변가에 매우 비옥한 곳에 위치하였고, 납달리는 아셀 동편 지파에 위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기업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 가운데 소수로서 끼어 사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소수로 끼어 사는 에브라임과 스블론과 반대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지역을 얻은 후 그것에 만족하고 더는 가나안과 싸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완전히 주시겠다는 말씀과 전쟁할 때 함께 하셨다는 말씀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고 결국 그들은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얻어 가나안 족속 사이에 끼어서 그들의 문화에 동화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점령 보고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4) 단 지파의 점령 실패(34-37)

 

마지막으로 단 지파의 점령 실패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단락은 단 지파의 형편을 보여줍니다. 단 지파는 아직 북쪽으로 이주하지 않는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후에 단 지파가 북쪽 끝 라이스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그 모든 역사를 알고 있는 사사기 저자는 단을 맨 마지막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 지파는 원래 유다 지파와 인접한 해양 지역의 비옥한 평지를 분배 받았지만, 이 지역을 지키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33절에 보면 주어가 아예 아모리 족속으로 나옵니다. 아모리 족속은 단 지파를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로 내려오지도 못하게 만드는 등 매우 강한 의지로 자신들의 지역을 지킬 뿐 아니라 오히려 단 지파를 핍박하였습니다. 결국, 단 지파는 이런 아모리 족속을 이기지 못하고 북쪽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후에 요셉 지파가 이들을 정복하고 이들에게 일을 시키게 됩니다. 요셉 지파가 여기서 다시 등장하여 북쪽 점령 이야기를 감싸며 결론을 이끕니다. 요셉 지파가 이들에게 노역을 시켰다라는 것은 힘이 생겨 완전히 정복할 수 있는데도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고 이들을 살려둠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실수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전쟁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은 느슨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죄를 대충 남겨두므로 후에는 큰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삶에 은밀히 들어와 자리 잡으려는 죄악과 세속의 요소들을 분별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불순종이 당신과 가정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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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1-02)


철저한 전투로 연전연승

사사기 1장 11-21절


한국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 중 한 분은 이순신입니다. 그는 왜구들과 전투에서 23전 23승을 이루었던 장군입니다. 그가 승리한 원인은 부하들을 통솔한 리더십과 지형지물을 이용한 뛰어난 전술 등이었습니다.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는 것을 백전백승(百戰百勝) 또는 연전연승(連戰連勝)이라고 합니다.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만물과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본문에 유다 지파가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하나님께 있다고 합니다.

 

  • 유다 지파의 승전보로 시작된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사역이 계속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냅니다. 갈렙은 드빌을 점령하는 자에게 그의 딸 악사를 내주겠다고 합니다. 웃니엘이 그 땅을 점령하고 역사를 아내를 맞이합니다.

 

솔선수범하는 웃니엘(11-15)

오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용기를 내어 힘써 싸워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사역이 보이면, 뒤로 미루지 않고 담대하게 감당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사역할 때는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담대하게 사역함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려움으로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11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주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12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3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하였으므로 갈렙이 그의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4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15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11-15)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유다 지파의 승리가 이어집니다. 출애굽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중에서 제일 연장자 갈렙입니다. 기럇 세벨이라 불린 ‘드빌’ 성을 공격할 시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여호수아 15장 15-19절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합니다.

이 성을 정복하면서, 갈렙은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자기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에 공을 세운 사람을 자신의 사위로 삼아서 신분 상승을 시켜주는 것이 관습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사무엘상 17장 25절에서도 사올이 골리앗을 이긴 사람을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겠다고 공언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것은 백성들에게 큰 용기를 준 행동이었습니다.

 

갈렙의 신분은 유다 지파에 속했으나(민 13:6; 대상 4:15), 원래 그나스/그니스 족속(민 32:12)입니다. 이들 조상은 아브라함 당시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 몰아낼 족속 중 하나였습니다(창 15:19). 이들은 후에 에돔 족속돠 연결되었습니다(창 36:11). 갈렙은 애굽에 거주하다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을 따라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출 12:38). 당시 불평하며 문제를 일으킨 이방인들(민 11:4)과 달리, 그는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40세에 가나안 땅을 정탐했고(수 14:7),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셨음을 확신했습니다(민 13:30). 광야 생활을 마치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밟은 출애굽 1세대중 유일한 사람입니다. 갈렙은 85세 때에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심을 확신하여 헤브론을 기업으로 분배받고 그곳을 정복합니다(10; 수 14:10-13; 15:13-14).

 

이번에는 그의 동생 그나스의 아들인 웃니엘은 선발대로 나가서 드빌(기럇세벨)을 점령하였습니다. 성읍의 점령은 가나안 주민 진멸과 기업 획득을 의미하고, 하나님 약속의 성취와 축복을 함축합니다.

갈렙은 약속대로 그에게 악사를 아내로 줍니다. 갈렙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올과 다르게, 자신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신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믿음과 순종과 함께(수 14:8,9,14) 성도의 삶에 본보기가 됩니다.

 

추가적으로 주목할 것은 기업에 대한 악사의 열망과 적극성도 부각 됩니다. 곁으로는 가부장 제도 안에 아버지에 의해 남편이 정해진 듯하지만,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갈렙에게서 결혼 지참금으로 땅을 얻으려 합니다. 그녀의 행동은 주도적이며 진취적입니다.

악사는 집을 떠나는 날, 남편 웃니엘을 부추겨 아버지에게 밭을 요구하자고 합니다. 갈렙은 요청에 따라 네게브 땅을 줍니다. 그런데 그 땅은 사막 지대라 물이 필요했는데, 농사를 짓거나 목축하기가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악사는 살기 힘든 곳으로 가면서, 식구들이 살아갈 방법을 간구합니다. 갈렙은 악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샘을 달라고 합리적이고 적극적인 요청합니다(14). 그녀는 매우 적극적이고 지혜로운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그 결과, 갈렙은 윗 샘과 아랫 샘을 선물로 줍니다. 나귀를 탈 만큼 부를 소유한 여인이 땅을 더 가지려는 것이 욕심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눈으로 보고 발로 밟은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3:15; 수 1:3).

악사는 땅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땅을 얻을 권리가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갈렙이 약속을 믿고 85세에 산지를 정복하겠다며 그곳을 기업으로 구하여 칭찬받았듯이(수 14:11-12) 그녀의 땅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성경이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땅이 적다고 불평하는 에브라임 지파는 개척 정신과 믿음을 가지라고 꾸짖음을 듣지 않았습니까(수 17:14-18)!

 

적극적인 딸 악사의 요청과 풍성하게 응답해 주는 아버지 갈렙을 통해 악사의 결혼이 매우 축복받은 아름다운 결혼임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모습은 사사기에서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 모범적인 이스라엘 남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사기 21장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타락한 부부의 모습도 보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여성들은 항상 적극적으로 자기 인생을 개척한 자들이었습니다. 자기 처지나 한탄하며 눈물만 흘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혜로운 모습은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참다운 지혜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웃니엘에게는 두 가지 축복이 임합니다.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맞아드린 것과 남방의 샘물을 두 개까지 선물로 받았습니다.

 

겐 자손의 참전(16)

영적 싸움에서 이기려면 인간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믿음에는 어느 특정 민족으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승리의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길 바랍니다. 말씀 묵상, 기도 생활 그리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의 교제 등 같은 은혜의 통로를 잘 유지해야 합니다.

 

16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주하니라(16)

 

유다 지파의 승리에 힘입어 모세의 장인 부족인 겐 사람들도 큰 유익을 얻습니다. 그들은 유다 지파와 함께 종려나무 성읍인 여리고로 올라갔고, 이들이 드빌 남부에 위치한 아랏 네게브(남방)인 유다 황무지를 소개됩니다.

광야 여정 당시 아랏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했고(민 21:1; 33:40), 후에 여호수아가 그곳을 정복했습니다(수 12:14). 아랏 네게브와 관련하여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자손들이 등장합니다. 놀랍게도 이들 또한 갈렙, 웃니엘, 악사처럼 이방인 출신입니다. 유다의 정복 보고에서도 이처럼 이방인의 믿음과 축복이 가득합니다.

이드로는 겐 족속으로(4:11) 미디안의 제사장이었습니다(출 3:1). 그는 광야 여정 제2년 초에 미디안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모세는 동행을 청했고, 이스라엘의 선대와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합니다(민 10:29-32).

모세는 죽었지만, 이들은 유다 자손과 함께 요단을 건너 종려나무 성읍(여리고), 즉 가나안에 이스라엘과 함께 입성합니다. 그들과 함께 가나안을 정복하며 아랏의 네게브까지 와 청착합니다.

겐 자손의 정착기사는 뜬금없이 보이지만, 모세의 장인이 광야에서 모세를 돕고 호의를 베푼 결과 그 자손이 가나안에서 기업을 얻어 살게 됐다는 후속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겐 자손에게 한 모세의 약속과 하나님의 축복이 성취되었음을 증명합니다. 또한, 이 내용은 나중에 사사기 4장에서 겐 사람 헤벨의 아내는 하솔의 군대 장관을 죽입니다(4:17-22). 이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수고한 결과는 결국에는 자신의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감정으로 실패(17-21)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변명과 이유는 없습니다. 작은 타협이 가져올 심대한 영적 오염에 대해서 심각하게 여겨야 합니다. 사소한 영적 태만이 영적 타락으로 이어졌고, 머잖아 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거하는 곳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종하기 위해 찾고 구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정복할 수 없고, 정복하지 않아도 되는 변명과 이유들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17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그 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의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18유다가 또 가사 및 그 지역과 아스글론 및 그 지역과 에그론 및 그 지역을 점령하였고 19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0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21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17-21)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유다 지파는 승승장구에도 불구하고, 철병거로 무장한 평지에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들도 예루살렘에서 여부스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지 못하고 함께 살았습니다. 이곳들은 가나안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점령하기 어려운 땅이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곳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여호수아가 철기를 지닌 하솔을 쳤고, 또 철병거를 지닌 가나안 족속을 이길 수 있다는 약속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찌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수 17:18) 실제는 드보라 시대에는 바락이 철병거 900승을 이끄는 시스라의 대군을 이겼습니다(삿 4:15). 인간적인 생각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못하면 범죄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도록 유혹할 만한 요소들도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당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멀리는 요소들이 무엇입니까? 인터넷이나 TV 시청을 적당히 하고, 경견하지 않은 책들은 분별하며, 덕스럽지 않는 인간관계도 정리해야 합니다.


갈렙을 제외한 유다 군사들은 땅을 완전히 점령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철 병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실력과 능력으로 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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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2-01)

 

  


미리 보는 십자가의 고난

시편 22편 1-21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분입니다.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선조들의 역사와 구원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계획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명료히 보여 주셨습니다. 신구약에 보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역사를 찬찬히 생각하며 감사 찬양을 드립시다.

 

  • 21편은 왕을 위한 감사 시입니다. 다윗은 주의 힘과 능력으로 얻은 구원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또한 기름 부음 받은 왕을 통해 얻은 승리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왕 주변을 돌러싼 적들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오직 언약 관계 안에서 존속되며 과거의 승리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신뢰를 낳고 미래의 성공을 확신하는 근거임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의인의 탄식(1-2)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하늘을 보면서 탄식입니다. 몸이 아픈 것도, 힘들고 홀로 남겨진 것도 더 견딜 수 있지만, 어려운 상황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환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시고, 멀리하여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1-2)

 

다윗의 첫마디는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을 향한 호소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1a) ‘내 하나님’을 반복해서 부르는 ‘엘리 엘리’라는 말은 구약에서 유일한 표현입니다(참조, 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그는 하나님께서 아니라 ‘내 하나님’을 부릅니다. 깊은 유대감과 간절함이 배어 있습니다. 항의처럼 들리는 질문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는 친밀한 유대감 없이 불가능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신명기 31:6, 8) 말씀하신 것을 마음에 두었습니까? 적극적으로 어찌 나를 멀리하고 돕지 않으시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않으시는지(1bc)따져 묻습니다. ‘신음 소리’는 괴로움과 번민으로 소리치고 신음하는 말들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응답을 촉구하는 반어적인 외침입니다.

다윗은 다시 ‘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자신이 밤낮으로 부르짖고 잠잠히 있지 않는데 왜 응답하지 않으시는지(2) 묻습니다. 지금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입니다. 밤낮없이 소리쳐도 소용없습니다. 다윗은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묻고 또 물으며 절실함을 피력합니다.

 

조상들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을 신뢰(3-5)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두렵기 시작합니다. 진퇴양난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는 상황에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답답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뜻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거에 선조들에게 응답하셨던 하나님께 이제도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찬양합니다.

 

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3-5)

 

고통 중에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항변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갑자기 ‘그러나 당신은 거룩하시며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좌정하신 분입니다’(3)라고 말합니다. ‘내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지만, 자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고백합니다. 마치 그룹 위에 앉으신 하나님(사무엘하 6:2; 시편 80:1; 99:1)을 떠올려 이스라엘의 찬송(또는 영광) 중에 앉으신 하나님으로 대체한 것처럼 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찬송을 보좌삼아 앉으신 것을 상상하면서 하나님을 언약백성의 찬양의 대상과 본질로 고백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당신을 신뢰하고 신뢰해서 당신이 그들을 건지셨습니다’(4), 다윗은 ‘우리 조상들’과 ‘당신이 그들을 건지셨다’는 말로 출애굽과 광야의 삶을 현재로 소환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은혜를 언급하며, 묵상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그때처럼 응답하시기를 촉구합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당신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당신을 신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5) 각성시켜 자신이 더 이상 유기되거나 수치 당하는 일이 없기를 열망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내려는 다윗의 절실한 내적 투쟁은 ‘신뢰했다’(의뢰했다)라는 말을 세 차례나 반복한 데서 드러납니다. 다윗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과거 사건으로 묻어두지 않고 다시 현재의 경험으로 되살리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공개적인 멸시(6-8)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조롱합니다. 환경도 힘든데, 사람들까지 더 힘들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끝까지 신뢰로 가난을 이겨낸다면, 주님 따라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6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6-8)

 

또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신’(3)이 ‘그러나 나는’으로 바뀌었습니다. 구원받은 자기 선조들과 다름을 강조하고 싶었습니까? 다윗은 ‘그러나 나는 벌레이고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비방거리이며 백성의 조롱거리입니다’(6)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이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받지 못한 처지인지 묘사합니다. 신체적 질병에서 오는 고통 못지않게 타인의 비방은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더군다나 자기를 보는 사람마다 비웃고 입술을 비죽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합니다(7). 그 말은 더없이 다윗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다윗은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8).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을 빈정대는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에 따른 보상 체계를 앞세워 맹렬하게 공격해옵니다. 사람들이 다윗의 고통을 보응의 체계로 보면 고통은 죄 때문입니다. 이것은 숨통을 조여 오는 고통입니다. 반대로 죄 없이 당하는 고통이라면 하나님께서 위협받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조롱입니다.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신뢰(9-11)

참 신앙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지식적인 신앙은 결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있어야 하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고백을 통하여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9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11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9-11)

 

다윗은 또 ‘그러나’로 말문을 엽니다. 그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모태에서 끌어내셨고, 당신은 내가 당신을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을 때조차’(9). 다윗은 숨막혀오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성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 출생의 순간에도 죽지 않고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어머니 품에서 보호받는 유아기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은 자기 의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더 크게 작용했음을 강조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지금 너무 멀리 계신다고 느낍니다. 다윗은 몹시 걱정스럽고 속이 끓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부터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 되셨으니(10) 멀리하지 마시기를 간구합니다. 환난 날이 가까이 왔지만 도울 자가 없기 때문에(11) 더 간절합니다. 매우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짐승처럼 달려드는 원수들의 위협(12-18)

들판에서 피폐해 죽어가는 짐승처럼 쓰러져 가고 있을 때 주변인들을 보면,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처럼 사방에 에워싸고 있습니다. 대답이 없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신앙을 조롱하기도 합니다. 자녀들의 곡진한 신뢰의 고백이 때로 영광이 아니라 쓰디쓴 조롱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끝까지 우리가 이 음란한 세대에서 당신을 인정하기를 기대하십니다.

 

12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12-18)

 

절망의 상황은 짐승처럼 달려드는 자들 때문에 더 험악해집니다. 다윗이 자신이 겪는 고통을 축소해 말하거나 삭제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많은 황소와 바산의 힘센 소들이 입을 벌리고 사자처럼 달려든다고 말합니다(12-13). 공격적이고 잔인하고 위협적인 짐승들은 많고 강합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는 물처럼 쏟아지고, 내 모든 뼈는 어그러지고, 내 마음은 밀랍(초)처럼 녹았고,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는 입천장에 붙었다’(14-15ab)고 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슬픔과 고통을 마음껏 표현합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고통이 시인을 짓누릅니다. 다윗은 고통과 두려움 때문에 견디기 힘겨워하며 하나님께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죽음의 흙먼지 속에 두셨나이다’(15c). 그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죽음에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궁지에 처한 사람이 되어 공포와 고통을 호소합니다.

다윗이 죽은 사람처럼 보였습니까? 개들이 에워싸고 악한 무리는 수족을 찌르고(16), 뼈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앙상한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주목해서 쳐다보고, 그들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 앞에서 겉옷과 속옷을 나누고 제비 뽑습니다(17-18). 겉옷도 모자라 속옷까지 빼앗기는 치욕스러운 상황에 던져졌습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데 옷 벗김을 당하는 수모와 굴욕을 당하는 비참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며 호소(19-21)

어려움이 닥치면 탈질하고 마음이 녹아 사라지듯이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목이 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었으며 뼈들은 그 숫자를 헤아릴 만큼 앙상하게 튀어나왔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주여 내게서 말리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기댈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19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19-21)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시인이 멀리서 돕지 않으셨던(1) 하나님을 향해 호소합니다. ‘여호와 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의 도움이 되소서’(19). 처음에 다윗은 ‘내 하나님’이라고(1) 불렀지만, 지금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고, ‘나의 도움’(‘나의 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미 다윗은 나를 멀리하지 마시기를 요청했지만(11), 여전히 응답 없는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듯 ‘나의 도움’이 되시기를 청합니다.

다윗은 더 필사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자기 ‘생명’과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을 칼과 개의 세력으로부터 낚아채 주시고(20), 사자의 입에서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나를 구원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말입니다. 이후 ‘들소의 뿔로부터 당신이 내게 응답하셨습니다’(21b)라는 완료형태 문장으로 급전환합니다. 이와 같은 구문법적인 변화는 들소의 뿔처럼 위협적인 세력에 받히려는 순간 하나님의 신속한 개입과 응답이 실현되는 극적인 장면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 순간에 신뢰와 죽음의 순종으로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살려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시려는 선하신 뜻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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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1-01)

 


계속되는 거룩한 가나안 전쟁

사사기 1장 1-10절


전국적으로 벌이는 전쟁을 전면전(全面戰)이라 하며, 한정된 지역에서는 국지전(局地戰)이라고 합니다. 전면전에서 이겼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 남아있는 잔당들을 전멸하는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국지전은 전면전만큼 어려움이 따릅니다. 사사기는 가나안 정복에서 남아 있는 잔당들을 완전히 정복하게 못함으로 그들로 인한 아픔이 되는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역사적인 배열로 보면, 여호수아서 다음으로 오는 성경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전반적으로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 안에는 아직 가나안에 살던 잔당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잔당을 진멸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국지전입니다.

 

  • 본문은 여호수아의 정복 시대를 이어서 전투는 계속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생활에 점점 정착되어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이스라엘을 누가 이끌 지도자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대두됩니다. 여호수아가 후계자를 세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그 사후에 이스라엘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유다 지파의 출정과 베섹 정복(1-7)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세상을 적당히 눈치 보면서 분위기에 편승하여 살아가는 사람과 모든 어려운 상황을 정면 돌파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두 종류의 사람 중에 누가 지도자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솔선수범하는 사람을 선택해서 지도자로 사용하십니다.

 

1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3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1-3)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민족과 전쟁에서 승리해 가나안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안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수 18:3)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각 지파별로 땅을 나누어 주고, 각 지파에게 직접 자기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동안 가나안 정벌의 지도자였던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지도자가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1)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파 중 유자 지파가 가장 먼저 전쟁을 시작합니다.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합니다.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의 도움을 받아서 베섹 성과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여 승리합니다.

 

유다 지파는 야곱의 아들로써 4번째 아들이지만 영적으로 장자 지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이 있을 때, 가장 먼저 나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임지는 일들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전투에 함께 하신 하나님(4-7)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패한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세상보다 강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는 강하지 않지만, 도저히 패할 수 없었고, 패해서는 안 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께서 군대 장관이 되어서 그 전쟁을 주도하시는 거룩한 전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패한 이유는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믿음이 약한 이유입니다.

 

4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5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6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7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4-7)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싸우러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증거입니다. 순종은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창세기 15장 16-2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하신 땅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땅의 죄악을 심판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유다 지파와 동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2,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명을 죽이고”(4) 하나님은 틀림없으신 분입니다. 약속을 믿고 나가면 승리하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잠시 아주 흉악한 아도니 베섹의 고백을 들어봐야 하겠습니다.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7) 이전에 아도니 베섹은 다른 왕들을 잔인하게 대했습니다. 그렇게 잔악하던 그가 유다 지파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당합니다. 그의 고백은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후, 고백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매우 공정하시고 자신들이 심는 데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합니다.

 

전쟁에 승리하는 유다 지파(8-10)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승리를 안겨주십니다. 함께하시는 자에게 교만한 자들의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자신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신실함이 약속 성취의 가장 큰 요인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힘차게 확장되며 건설할 것입니다.

 

8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 9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고 10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8-10)

 

먼저 예루살렘 정복을 기록합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진멸하는 것은 하나님 명령(신 7:1-2)에 대한 순종이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의 축복이 예상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방 족속을 몰아낸 것은 다윗 때에 이르러서입니다(삼하 5:6-9).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유다는 예루살렘 남부의 유다 산지 네게브, 쉬펠라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유다 지파는 먼저 헤브론을 쳤습니다. 당시 헤브론은 갈렙이 기업으로 받은 땅이었으나(수 14:12-14), 아직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헤브론은 ‘기럇 아르바’로 불렸는데, 아르바는 아낙인들(민 13:33) 중에 가장 유명한 용사이며(수 14:15), 아낙의 아버지(또는 조상)였습니다(수 15:13,21:11).

이 지역의 성읍들은 크고 견고했고 거대한 이 아낙인들이 살고 있어 정복하는 게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와 후손에게 주실 것이란 약속(민 14:24; 신 1:36)과 하나님의 함께하심(수 14:12)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 또한 약속대로 갈렙으로 헤브론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수 15:14). 이처럼 하나님 약속의 성취는 갈렙과 같은 순전한 믿음과 실행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유다 지파는 당시 아낙의 아들(또는 자손)인 세새, 아히만, 달매(민 13:22)를 죽였습니다.

20절에는 이들을 쫓아낸 자가 갈렙이었음을 밝힙니다(수 15:13-14). 이처럼 믿음과 실천이 뛰어났던 갈렙은 놀랍게도 이방인 출신이었습니다.


지금도 영적인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의지하고 나가시길 바랍니다. 승리하신 예수님을 보라보며, 당신에게 주신 남아 있는 영적 전쟁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맡겨주신 사명을 믿음으로 감당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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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서론

 


사사기 서론


 

사사기는 사시들과 그들 시대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은 여호수아가 죽고 난 이후부터 사무엘이 등장하기 직전까지의 역사를 기록합니다. 이 시기는 가나안 정착과 왕정 확립 사이 기간으로 대략 주전 1200-1012년경이며, 이스라엘 역사에서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정치적 위기는 주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사들의 활약으로 극복됩니다. 그러나 사시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영웅적인 사사들도 변질하고 타락하며, 이스라엘은 점점 더 추락합니다(참고 : 시니어 매일성경). 본 서론의 목적은 사사들의 활동과 당시의 역사적 배경 등을 살펴봄으로써 사사기의 더 명확한 이해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사사기의 이름

히브리어 맛소라 성경은 본서의 명칭을 “쇼페팀”이라 했는데, 이는 ‘재판관들’ 혹은 ‘심판관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은 사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임명받아 백성들이 죄악에 대한 형벌로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받아 고통과 압제에 부르짖을 때는 구원하는 일을 했고, 평화 시에는 백성들을 다스리고 분쟁을 재판해 주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자 및 기록 연대

(1) 저자

사사기의 저자는 분명치 않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사무엘이 본서와 사무엘상·하와 룻기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또한, 초대 교회의 전승도 사무엘을 사사기의 저자로 봅니다. 그러나 이는 유대인의 전승에 의한 것이며 정확한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무엘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2) 기록 연대

기록 연대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사울과 다윗이 다스리던 B.C. 1050-100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의 비교

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이 순종하여 개척하고 전진하고 승리하는 역사입니다. 그러나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부패하여 정복당하고 실패하는 역사입니다.

 

사사기의 내용의 특징

사사기서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죽은 후부터 사무엘 선지자까지 약 400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용의 특징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는 것이 반복됩니다(2:2,11,20, 3:7,12, 4:1, 6:1, 10:10). 여호와께서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때마다 대적의 손에 붙이셨습니다(2:14, 3:8, 4:2, 6:1, 10:7, 13:1).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사사를 일으키셔서 구원하셨습니다(2:16, 3:9,15, 4:4, 6:12, 11:11, 13:5). 곧 사사기의 특징은 이스라엘의 배반과, 이런 이스라엘을 치시는 하나님의 징계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 회복시키는 역사가 오랜 세월동안 계속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사사기의 주된 사상

사사기의 주된 사상은 인간의 나약성과 하나님의 신실성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능력의 역사를 많이 체험하였고, 끊임없이 주의 경고의 말씀을 들었지만, 불신과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습니다. 따라서 패배와 비참한 압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기억했고 부르짖으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때마다 구원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평안해지기만 하며 또다시 되를 짓는 나약하고 간사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마다 징계하시고 계속 은혜를 베푸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사사기서 말씀이 주는 교훈

첫째, 인간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할 때 혼란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17:6, 18:1, 19:1,21,25). 이렇게 사람마다 자기 판단과 생각대로 행했을 때 질서와 조화를 잃었습니다. 동족끼리 싸우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중심으로 하나나 되고 순종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영적 질서가 생기고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에 빠질 때는 진노하시고 단호하게 징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는 또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사사기서에는 이렇게 죄를 범하면 징계하시고, 돌이켜 부르짖으면 은혜 베푸시는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연약하고 허물진 자들과도 함께 하시고 사사들로 쓰셨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아비 집에서 가장 작은 자로서 연약하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에훗은 왼손잡이였고 드보라는 자매이었으며, 입다는 기생의 아들(11:1)이었습니다. 특히 삼손은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머리털이 깎이고, 도덕적 허물로 나실인으로서의 규례를 어긴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소심하고 연약하고 허물진 자들과 함께 하사 이스라엘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불완전한 자들을 쓰셔서 강대한 대적을 물리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더욱 크게 드러내셨습니다.

 

사사기의 구조

1. 사사를 세우신 하나님(1:1-3:6)

(1)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하니한 이스라엘(1:1-2:10)

(2)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하나님(2:11-3:6)

 

2. 사사들의 역사(3:7-16:31)

(1) 메소보다미아의 압제와 옷니엘의 구원(3:7-11)

(2) 모압의 압제와 에훗의 구원(3:12-30)

(3) 블레셋을 이긴 삼갈(3:31)

(4) 드보라와 바락의 행적(4:1-5:31)

(5) 미디안의 압제와 기드온의 구원(6:1-8:35)

(6) 폭군 아비멜렉(9:1-57)

(7) 돌라와 야일의 행적(10:1-5)

(8) 암몬의 압제와 입다의 구원(10:6-12:7)

(9) 입산과 엘론과 압돈의 행적(12:8-15)

(10) 블레셋의 압제와 삼손의 행적(13:1-16:31)

 

3. 사사시대의 혼란상

(1) 미가의 단지파의 우상숭배(17,18장)

(2) 동족간의 전쟁(19-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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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8-02)


갈릴리에서 다시 만난 예수님

마태복음 28장 11-20절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 받으셨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이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한 제안(4:8-9)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자, 더 온전한 권세와 영광을 주신 것입니다.

 

  •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을 속이는 사람들(11-15)

부활을 두고 전개되는 논쟁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것인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믿어도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영적으로, 혹은 믿어도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부활은 영적으로, 혹은 의미로만 취급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1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11-15)

 

여자들은 기쁨으로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러 갔지만, 부활을 믿지 못하는 군인들은 부활 사건을 보고하기 위해 대제사장들을 찾아간다. 그들은 일어난 모든 것을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합니다.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리고 그 위에 앉은 것(2)과 무덤이 비고 시체가 사라진 것(3)을 전했을 것입니다. 경비병들이 무덤을 지킨 이유는 시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예상 때문이었다. 이 말은 당시에 유대인들이 생각한 부활은 '몸의 부활'임을 증언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 사건과 함께 벌어진 일을 생생하게 목격한 경비병들의 보고를 묵살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숨기려는 이들의 행동에서 역설적으로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절망과 슬픔 가운데 있는 제자들이 경비병들의 수비를 뚫고 큰 돌을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런 싸움도 일어나지 않은 채 정예 군인들이 시체를 소수의 민간인들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보고서도 한쪽은 신앙을 갖고 기뻐하며, 다른 쪽은 믿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독자들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 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이 믿지 않는 현상에 대해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갈릴리에서의 재회(16-20)

주님께서는 치유의 하나님으로서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를 안고 오십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사랑에 감격하여 남은 생을 주님을 위하여 드렸습니다. 갈릴리에서 열두 명의 소그룹을 데리고 시작한 사역이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전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세계선교의 사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16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6-20)

 

마태복음의 마지막 단락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 당부하시는 장면입니다.

 

(1) 주께서 부활한 사실을 의심하는 제자들(16-17)

 

16절부터 무대가 바뀝니다. 갈릴리 시골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있는 바닷가 한 언덕입니다. 성전이란 주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입니다. 건물로 된 성전이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 속죄와 진리가 있지 않으면 그저 벽돌을 쌓아놓은 돌무덤일 뿐입니다. 하지만 갈릴리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계셨습니다. ‘열한 제자’(16)는 너무도 상징적입니다.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26:14-16), 그리고 그들의 선동에 놀아난 대중들까지 포함한(27:20), ‘믿지 않은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상징합니다. 이제 그 ‘유다’로 대표되는 ‘불신앙의 이스라엘’은 모두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제 종말의 새로운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스가랴 13:7에서 예언한 대로, 버림받고 죽이심을 당해, 그의 양 무리는 흩어졌지만(26:31),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약속대로 갈릴리에 먼저 가 계셨습니다(26:32). 하지만 아직도 이 ‘열한 제자들’ 곧 종말의 새로운 양 무리 속에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장차 불어날 이 양 무리 안에도, 결국 떨어져 나갈 자들이 또 생길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모두가 그물에 들어오지만, 전부 고기는 아닙니다(13:44-50). 최종적인 심판은 주께서 다시 오실 그때 이루어질 것입니다(24:29-31).

 

(2) 부활하신 주께서 열한 제자들에게 명하심(18-20)

 

이제 부활하신 주께서는 다시 한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는 선포를 하십니다. 공식적으로 자신이 만유의 왕 되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참 목자 되신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리 통치자, 곧 메시아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런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11:27):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하지만 이제 만유를 상속받을 합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는(4:1-11) 일에 승리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실로 만유의 대리 통치자인 그리스도 곧 메시아시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참된 왕이요 목자로 지명되고 임명되었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18-20절에 기록된 이 장면은 그래서 참으로 놀랍고 기쁘고 황홀하며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18-20절에 기록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과 종말의 새로운 양 무리의 모습, 그리고 주님의 권세,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뜻, 말씀을 가르침과 주님의 임재의 요소들을 다 갖춘 구약의 배경은 에스겔 34:23-24(37:24-28)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실패하고 흩어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9-10장)에게 돌아오신 종말의 목자 곧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권세와 긍휼로 오십니다(겔 34:1-16). 그리고 ‘구약의 종말의 다윗 목자’(겔 34-37장: 미 2-5장; 슥 9-14장) 전통에 따라, 특히 스가랴 9-14장에 따라 버림받고 수난당하는 목자로서 죽으시고, 종말에 양과 염소를 심판하시는 심판주-목자로 오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새 언약 백성인 회복된 양 무리에게로 돌아와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세우신 ‘다윗 같은 한 목자’가 되십니다(겔 34:23-24). 이분이 교회의 ‘목자장’이십니다(참조, 벧전 2:25; 5:4).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부활의 주님, 교회의 머리 되신 목자장이신 주님은 가장 중요한 명령을 하십니다. 원문에는 ‘제자 삼으라’가 유일한 주동사입니다. ‘가서’와 ‘세례를 주며’ 그리고 ‘지키게 할 목적으로 가르치고’는 모두 분사형태입니다. 그러므로 19-20절은 선교 대명령이 아닙니다. 제자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가장 최종적인 목적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그 내용, 그 분부하신 ‘모든 것들’을 행하여 지키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분부한 모든 것들’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주님의 순종과 사역을 통해 성취되고, 새롭게 해석되고, 다시 명령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의 새로운 계명을 순종하고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도 주십니다. 그래서 지킬 수 있다. 이것이 19-20절에 기록된 지상대명령의 핵심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참조, 마 7:26).

‘가서’는 분사로 표현된 부대 상황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세례를 주고’ 역시 부대 상황이고 수단입니다. 세례를 주어 교인 숫자를 늘린 것으로 선교가 다 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가르쳐서’도 역시 수단입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많이 가르치면서도, ‘지키게 하지’ 못하면 그것은 선교 대명령의 실패입니다.

 

주님이 교회와 함께하시는 이유, 종말에 하나님의 임재를 보장하시는 ‘임마누엘’로서 교회 중에 함께하시는 이유는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죄 사함을 선포하여 교인들을 만드는 것만이 아닙니다. 저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열방으로 ‘보내는’ 것이 궁극적 목적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지 많이 가르치는 것이 목적도 아닙니다.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 되게 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 생명으로 거듭나서, 열방 가운데로, 이방인들 가운데로 나아갈 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행하여 그 말씀을 지켜 의의 열매를 맺는 사람, 주님을 닮은 성품을 가진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곧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지상 대명령입니다.


기독교는 화해와 용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숨 바쳐 우리 인간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다시 오십니다. 실패한 자, 소외된 자, 소망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으로 지금도 찾아오십니다. 어긋난 우리의 인생을 바로 잡아 주시고 새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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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복음(28-01)

 


부활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8장 1-10절


‘부활(復活)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의 생애 전체에 대한 긍정이자 세상을 향한 공지(公知)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가르침과 삶의 증인으로 교회가 세상을 행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증언하고 시ᅟᅵᆯ행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사건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통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 안식 후 첫날 빈 무덤에서 천사를 만나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이를 알리려고 제자들에게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전제하고서, 그로 인한 두 가지 결과를 빈 무덤(1-8,11-15)과 부활하신 예수님(9-10, 16-20)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1-7)

부활 사건은 하늘과 땅이 움직여야 가능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하여 일하셨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구경하고 감탄할 일이 아니라 나누고 전할 소식입니다. 부활 신앙은 두려움과 큰 기쁨을 갖고 담대하게 증인의 삶을 살도록 촉진합니다.

 

1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1-7)

 

안식일이 지난 새벽 동틀 두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 여인들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그 두 마리아는 역사상 처음 있는 위대한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끝나고 밤(토요일 밤)이 니난 다음, 한 주간의 첫날인 지금의 주일 중 새벽 무렵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자들은 주의 첫날 새벽 무렵에 무덤을 향했습니다. 충격적이게도 모습이 번개 같고 눈같이 흰 옷을 입은 천사가 무덤을 막았던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여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합니다

 

(1) 천사는 수동태 동사를 사용해서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졌다.’고 말합니다(6), 부활을 일으켜진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원하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고, 특히 아들은 십자가에서 버림받는 순간에 처해도 아버지를 신뢰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 두지 않고 살려내심으로써 아들의 순종이 옳았음을 입증하십니다. 부활은 신뢰의 입증입니다.

(2)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 특히 육체의 부활을 알립니다. 9절에서 여자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데, 발을 잡은 것은 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부활이란 영혼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육체는 썩고 영혼이 하늘에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한 번 살아났다가 때가 되면 다시 죽는 소생과도 다릅니다. 신자들의 소망인 부활은 땅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육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장), 신자들은 예수께서 다시 와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그들을 초대할 때 부활해서 새로운 몸으로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반복해서 예고하신 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바라보면서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신자들은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그가 살아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나 무덤이 아니라 부활에 시선이 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언제나 부활과 함께 해석되어야 합니다.

(4) 부활의 의미는 예수님과 신자들의 만남이다. 예수님은 부활해서 홀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만나러 가신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날 곳으로 먼저 가시기 때문에 환영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을 만나려고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와의 만남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를 만나듯이 부활하신 그를 만나 힘과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8-10)

부활의 주님은 약속대로 부활하셨고, 약속대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도망한 자들을 ‘형제’로 불어주시고(12:49-50),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난하고 온유하고 애통한 자들의 도시인 변방의 갈릴리에서 제자들이 자신의 일을 이어받게 하시려고 기다리셨습니다.

 

8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8-10)

 

두 여인은 5-7절에서 부활하신 예수에 대해서 들었으나 8-10절에서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여자들은 천사의 지시대로 제자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 경배합니다(9). 예수님은 천사가 지시한 내용을 다시 확인해주십니다(10).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주체는 천사에서 여자들로 바뀝니다. 여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다음과 갇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교회는 기쁨으로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여자들의 반응은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을 만나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교회가 즉시 전해야 할 부활의 메시지가 교회의 진정한 기쁨입니다. 부활의 소식, 즉 예수께서 부활해서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고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한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실 것이라는 사실은 교회의 참된 기쁨입니다.

(2) 부활의 첫 증인은 여자들이다. 만일 초기 교회가 부활의 이야기를 창작했다면, 당시에 증인으로서 신빙성이 떨어졌던 여자들이 아니라 남자들을 첫 번째 증인들로 묘사했을 것입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주시는 메시지는 이미 천사를 통해 여자들이 받았습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않더라도 두려움과 기쁨으로 제자들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에 천사의 메시지를 전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여자들을 찾아오신 것은 그들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은 명령 자체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만나 격려하고 위로하는 데 있습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경배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꼐서는 신자들이 기쁨과 감격으로 교제하는 분이며 경배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교회가 경배하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은 제국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이야기가 숨 쉬고 꿈틀거리는 곳입니다. 피상적으로 돈과 권력이 승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저번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노래가 흐릅니다. 부활 신앙은 욕심과 허영은 가짜임을 폭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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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7-05)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내신 예수님

마태복음 27장 57-66절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두 진리는 개인과 교회 신앙의 근본이자 발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며 좁은 길의 신비를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제자도는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깊이 생각하며 영원히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내면화하는 일입니다.

 

  • 본문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매장하고(57-60) 여자들이 무덤을 향해 앉아 있는 장면(61)과 유대 지도자들이 빌라도의 도움으로 무덤을 차단하는 사건(62-66)으로 구성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예수님(57-61)

증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직접 보고 만졌다는 것은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의 근거입니다. 기절도 아니고 영혼만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몸이 없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몸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몸으로 행하는 사랑이고, 몸을 위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57-61)

 

예수님께서 예언의 말씀대로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죽음을 취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십자가에 처형된 시신들을 방치되어 독수리나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말합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장사 되지 않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반역에 동참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없이도 못살 것 같던 사람들도 이 순간만은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는 아리마데 요셉(57-58)

 

저녁이 되었을 때,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등장합니다. 본문에서는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57)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라는 제자가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유대 문화에서 저녁이 되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 이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에 죽으셨고(마가복음 15:42; 23:54; 요한복음 19:31,41) 날이 저물었습니다.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고 안식일은 62절의 ‘이튿날’, ‘준비일 다음 날’이므로, 아직은 안식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뒤 셋째 날(주일)에,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28:1). 안식일이 되기 전에 빨리 시체를 수습해서 매장해야 합니다.

요셉은 아리마대 출신의 부자였습니다. 마가는 요셉을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마가복음 15:43)고 설명했지만, 마태는 그를 부자로 묘사합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고 새 무덤을 제공할 정도의 재력이 있었습니다. 당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잘 갖춰진 무덤을 제공하는 호의를 보이기도 했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처형을 당한 십자가형 범죄자였기에 그의 시체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이미 열한 제자들이 도망할 정도로(참조. 26:56; 27:55-56) 예수님과 엮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님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요셉은 참 제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마태는 ‘또한 예수의 제자였다’라며 요셉을 예수님의 제자로 소개합니다.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58). 요셉은 부자였고 명성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빌라도에게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기 전에 미리 빌라도를 찾아가서 허락을 받았을 것입니다. 빌라도 역시 예수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다루는 것을 원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범죄자로 취급받은 사람의 사체마저 외면하지 않는 의인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낸 요셉(59-60)

 

요셉의 요구에 빌라도는 응답하였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끌어 내렸을 것이고 요셉은 곧바로 시체를 수습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깨끗한 세마포로 쌌습니다. 이것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요셉이 새 무덤과 새 세마포를 사용했음을 의미합니다. 세마포가 어떤 종류의 옷감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나체 상태의 시체를 급히 덮을 용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시체에 세마포로 만든 옷을 입혔는데, 본문에서 시체를 쌌다고 표현한 것은 그런 방식의 옷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은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매장해야 하는 급한 상황에서 비참한 대우를 받고 걸레처럼 찢긴 몸을 존귀하게 다루기 위해 최소한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바위를 뚫어 만든 자신의 새 무덤에 예수님을 두었고 무덤 입구에 큰 돌을 굴려 놓고 갔습니다(60). 마태는 ‘새’ 무덤인 것을 강조합니다. 누가에 따르면 새 무덤은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이었습니다(누가복음 23:53). 십자가에서 처형된 자는 영예로운 곳에 묻히지 못했으나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위해 새 무덤을 제공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자들은 영에로운 곳에 장사하지 못했지만, 요셉은 당시의 범죄자들이 장사된 것과 다르게 예수님을 영예롭게 매장했습니다.

 

(3) 예수님의 장사에 대한 또 다른 증인들(61)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하는 과정에는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 맞은편에 앉아 보고 있었습니다(61). 그녀들은 십자가 현장에도 있었습니다(55-56). 61절의 ‘그곳에 … 있었다’는 표현은 55절에서 여인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는 내용과 유사합니다.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자들은 십자가 현장에 있었고, 시체가 묻힌 장소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요셉과 여자들은 죽은 예수님에게 끝까지 지켰습니다. 마태는 시체와 무덤을 목격한 증인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아리마대 요셉이 목격자들의 이름입니다.

요셉은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따른 제자들이나 무리와 달리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다만 예수님을 위해 또는 예수님 때문에 희생합니다. 그는 재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19장의 부자 청년과 대조됩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으나(19:16-24), 요셉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낮은 자로 죽은 자의 시신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셉은 제자도의 좋은 모본입니다.

여자들 역시 참 제자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죽은 메시아의 길을 이들은 끝까지 따릅니다. 여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목격자들 가운데서 더 이상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중심을 차지합니다.

본문의 여성들은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강한 사람들입니다. 여성들이 하늘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서 소외되거나 주변부로 몰리는 일은 수난 이야기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믿음 혹은 예수님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더 이상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믿음이나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최우선 되는 일로 여깁니다. 제자는 얻게 되는 부산물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돌로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62-66)

종교 권력은 예수님을 우습게 여겼지만,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였습니다. 기득권 유지에 자신의 방해되는 요인들을 제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이야기가 회자 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특별 경계령을 내려 원천봉쇄하였습니다. 진짜여서 두려워한 것입니다.

 

62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62-66)

 

예수님의 죽음 뒤에 예수님의 죽음을 염려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시신을 탈취한 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인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1) 무덤을 지키도록 요구한 종교지도자들(62-64)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한 장면을 잇는 본 단락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무덤을 굳게 지키려는 음모를 꾸미는 내용을 다룹니다. 이튿날, 즉 준비일 다음 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모였습니다(62).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정보에 따라 속임수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회의를 열었습니다(63).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 총독에게는 ‘주’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진정한 주이신 예수님께는 거짓말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셋째 날까지 무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도록 명령해달라고 부탁합니다(64). 그래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치고는 예수가 살아난 것으로 사람들에게 거짓말하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를 세웁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여전히 백성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또한, 그들은 만일 백성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된다면, 순교자가 부활한 것으로 생각해서 메시아 운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순교자가 부활했다는 소문이 도는 것은 순교자가 죽기 이전보다 더 위험한 일이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지킬 병력을 빌라도에게 요청합니다.

 

(2) 종교지도자들의 요구를 수용한 빌라도(65-66)

 

총독 빌라도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합니다(65). 그는 아리마대 요셉에게 예수님을 장사하도록 허락했고 반대쪽의 입장도 들어줍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만인의 요청을 들어주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경비병은 로마 군인들이며(참조, 28:14)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도록 허락합니다. 또는 ‘너희가 갖고 있다’를 명령형으로 이해하면 빌라도의 경비병을 사용하라는 뜻이 더 명확해집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큰 돌로 무덤을 막았으나 경비병들도 시체를 지킬 목적으로 이 돌을 전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막아버립니다(66). 경비병들은 돌과 무덤 사이를 봉인 함으로써 무덤을 안전하게 지켰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따른 여인들은 이 무덤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무덤을 열 이유는 없으므로, 봉인한 것은 부활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서 인간의 안전장치인 돌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막는 돌은 일시적으로는 성공으로 보일 수 있을지라도 반드시 제거됩니다.


 

세상이 버린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죽음은 생명이요 부활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묶어둘 수 없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인생길이 어떠하며, 세상의 진리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 주신 예수님에 대한 확증이자 그 생명으로의 대담한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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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7-04)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장사 되신 예수님

마태복음 27장 45-56절


복음은 최상의 정치이자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적인 힘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개인적 영혼 구원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넘어 인간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재창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메시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는 의도하신 세상을 회복하기 위한 버려짐이었습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45-53)과 백부장과 여인들이 십자가의 증인들로 등장합니다. 마태는 당시의 저술 문화에 따라서 십자가 형벌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그 의미를 구약의 성취와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서술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45-53)

 

십자가의 비밀은 죽음에 넘겨져 타인을 살리고 만물을 재창조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불의에 의한 부당한 죽음이자 아담의 문제에 대한 종결 선언입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무력화하는 하나님의 모략입니다. 죽어가는 예수님을 보며 인류의 총체적 무능과 부패의 실마리를 봅니다.

 

45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45-53)

 

예수님께서는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으신 것은 6시간 정도입니다. 그중에 정오( 제6시)에 시작된 어둠은 제9시까지 3시간 동안 온 땅에 임했습니다(46). 대낮인 해가 떠 있는데, 어두움이 임했다는 것은 초자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고(아모스 8:9-10; 신명기 28:29; 예레미야 15:9),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십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22편을 인용하여 기도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편 22:2) ‘엘리’는 ‘나의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레마 사막다니’는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하는 아람어입니다.

버림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46절이 의인의 고통을 담고 있는 시편 22편을 인용한 데서 증명됩니다(27:35,39,43). 아들의 고통은 세상의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경험한 적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고통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슬픔으로 기도하면서 호소하신 고통입니다(26:36-46).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해 버림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이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엘리야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47). 하나님께 호소했지만 응답이 없자 차선책으로 엘리야에게 희망을 걸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서 막대기에 꿰어 예수님으로 하여금 마시게 했습니다(48). 신 포도주는 당시 농부들이 마셨던 값싸고 낮은 질의 포도주로서 하층민들이 사용한 포도주 종류입니다.

49절과 연결해 보면, 사람들은 동정심이나 연민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좀 더 연장해서 정말로 엘리야가 오는지 알아보려고, 호기심과 조롱으로 신 포도주를 제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34절에서는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지만, 목마를 때 식초를 마시게 했다는 내용인 시편 69:21b인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를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받으셨습니다(누가복음 23:34).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고 숨을 거두셨습니다(50). 그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고 땅이 흔들렸고 바위들이 갈라졌습니다(51). 그때 무덤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이 일으켜졌습니다(53).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마태는 부활 이후에 일어나는 이 사건들을 부활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난의 이야기 속에 배치해서 십자가의 죽임이 부활과 직결된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여러 의미를 전달합니다. 첫째, 마태는 성전 휘장이 찌어진 것(27:51a)과 묵시 사건(51b-53)을 연결하여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마태는 구약 본문을 사용하여 묵시적 사건들이 지닌 의미를 암시해주고 있습니다(에스겔 37:12-13; 스가랴 14:4-5; 다니엘 12:2). 마태가 사용한 구약 본문들을 보면, 무덤이 열려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나며(에스겔 37:12-13),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성도들과 함께 계시며(스가랴 14:5), 땅의 티끌 가운데 자던 자들이 부활한 것입니다(다니엘 12:2).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성도들의 몸이 살아나는 것은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된 사실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감수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도들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예수님의 죽음은 그런 부활의 길을 열었으며, 마태는 선지자적 시간으로 부활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강조합니다.

둘째, 성전의 휘장이 찌어진 사건은 하늘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이 게시되었음을 알립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성전의 휘장을 하늘의 궁창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늘이 열려 보이지 않는 하늘의 뜻이 이 땅에 계시 됩니다. 성전은 우주의 축소판으로 보이지 않는 하늘, 보이는 하늘, 땅과 바다를 상징적으로 담아내는 구조물입니다. 성전은 수직의 우주를 수평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성전의 휘장이 찌어진 것은 하늘의 문이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을 회복하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이 하늘의 진리를 깨닫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을 회복하실 일, 즉 임마누엘의 기적이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의 희생에 대한 성부의 반응으로, 즉 전적인 은혜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임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은혜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으심이 복음입니다.

 

예수님 증인들(54-56)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첫 사람은 놀랍게도 제자들이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이방’ 백부장과 병사들이었습니다(8:11-12; 21:43).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증인들 역시 죽기까지 따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제자들이 아니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인들’이었습니다.

 

54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54-56)

 

사형을 집행한 로마 백부장과 군인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진신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진시로’는 신앙고백적인 성격을 나타냅니다(예레미야 14:33). 로마 군인들이 고백하는 장면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하늘의 비밀이 계시되고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을 보여 줍니다.

하늘에 감추어진 진리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이요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한 자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하늘이 열려서 하늘의 계시가 알려진 사실을 예수님의 세례(3:13-17)와 변화산 사건(17:1-7)에서 이미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장면들과 달리 이번에는 하나님의 계시(‘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가 하늘이 아니라 사형을 집행한 로마 백부장과 군인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하늘의 진리가 이방인들에게 전해집니다. 그가 예수님의 신분을 알게 된 것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하늘의 반응으로 이뤄진 결과입니다! 이로써 마태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성취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마태복음 12:18,21; 28:19-20). 로마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은 카이사르를 가리킵니다. 백부장과 군인들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군인들은 이제까지 하나님의 아들인 황제에게 순종했으나 이제 순종의 대상이 바뀝니다.

 

십자가 현장에는 예수님을 위해 많은 여자들이 함께했습니다(55). 여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고 십자가 현장까지 와서 그의 처형을 지켜보았습니다. 마태는 여자들이 ‘멀리서’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여자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위험했기 때문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실패한 베드로가 멀리서 예수님의 신문하는 것을 본 것처럼 여자들도 실패한 것입니까? 마태가 ‘그곳’ 또는 ‘거기에’를 넣은 것은 여자들이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많은 여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모든 제자들’과 대조됩니다(26:56). 베드로가 ‘멀리서’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심문의 결과를 알기 원했으나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에 없었던 것(26:58)과 대조적으로 여자들은 그의 마지막 순간에 참여합니다. 따르고 섬기는 것은 제자도의 언어이므로 여자들이 십자가의 모본 입니다. 특히 갈릴리에서부터 십자가의 현장에까지 따르고 섬겼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변함없이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는 제자도의 모본입니다. 결국, 여자들은 무덤까지 예수님을 따르고 부활의 첫 번째 증인들이 됩니다.

마태는 십자가 현장에 있었던 많은 여자들 중에서 세 명을 언급합니다(56). 이들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사건을 보증할 수 있는 십자가 현장의 생생한 목격자들입니다. 증인으로서의 신뢰도가 훨씬 높았던 남성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여성들의 이름은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과 함께했던 유다와 베드로가 예수님을 팔고 부인한 모습과 대조됩니다.


고난받는 메시아는 고통 가운데 있는 개인과 사회를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비극과 고통을 헤아려본 사람만이 우는 이들과 함께 울 수 있습니다. 경청과 공감이 결핍된 사회에서 새로운 길, 생명을 주는 여정을 동행할 하나님의 사람들이 출현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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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7-03)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지내신 예수님

마태복음 27장 27-43절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그 마지막 순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성육신하셔서 오신 순간부터 그분의 모든 공생애 삶과 십자가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최고봉은 바로 십자가로 점점 다가가신 이 고난의 길입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형판결을 받은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끌려가서(27-31), 십자가에 처형당하고(27-31) 십자가에 처형당하고(32-38) 세 부류의 동족에게 수치를 겪는(39-44) 모습을 묘사합니다. 고통과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의 형벌과 십자가 아래 인간들의 조롱 속에서도 아들은 끝까지 아버지를 신뢰하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십니다.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다로(27-31)

고난은 순종을 훈련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결정 때문에 무력에 의해 수모를 겪는 길입니다. 제자의 길은 스승보다 배제의 정도가 적을 수 있어도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 전체로 증언한 복음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하는 신앙을 회피해서는 안 된비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중에 인내하심으로 온전한 순종의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27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27-31)

 

총독 빌라도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의 관저로 데려갔고 온 부대가 예수님 주변에 집결했습니다(27). 로마인들은 할 수 있는 한 공개적으로 형벌을 가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자주색 웃을 입혔습니다(28). 왕을 상징하는 표시는 옷, 왕관, 홀입니다. 자주색 옷이 왕을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로마 군인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주홍색 망토를 입힙니다. 군인들은 황금빛이 나는 왕관 대신 가시덤불을 잘라 머리에 씌웁니다(29). 왕이 잡는 홑을 오른손에 둡니다. 군인들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만세, 유대인의 왕이여!’라고 조롱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는 자주색 옷을 입고(31) 홀을 들고 앉은 채 만세 ‘왕이여!’라는 백성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조롱하다’는 31, 41절에서 반복됩니다. 조롱과 수치는 예수께서 세 번째 수난 예고에서 이미 예상하신 것입니다(20:19). 군인들은 예수께 침을 뱉었고 홀을 빼앗아 가시를 쓴 그의 머리를 때립니다(30). 유대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손에 조롱당하십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그들이 입힌 옷을 벗기고 예수님의 옷을 입힙니다(31). 그리고 십자가 처형 장소로 끌고 갑니다. 당시에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곳을 통과해서 처형 장소로 향했는데, 이는 대중을 공포감으로 몰아넣음으로써 그런 범죄를 행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시범 효과를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은 유대인의 왕이 이방 군인들에게 조롱당하고 매를 맞는 모습에 초점을 맞춥니다. 성육신하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는 경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수치를 당하십니다. 유대인들과 로마 군대에 의해 버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의 길을 가십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힘을 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치를 감내하며 한 걸음씩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이사야 50:6).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53장에 묘사된 고난의 종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함(32-38)

신체적인 핍박은 정신을 파괴하고 비정상으로 만듭니다. 왜 정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고통을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복음은 자유와 해방의 복음입니다. 학대받는 자를 외면한 채 복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십자가에 세워진 장면을 소개합니다.

 

32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거기 앉아 지키더라 37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32-38)

 

본문에서 ‘그들이 나갔을 때’는 예루살렘 도성을 나간 장면을 뜻합니다(32). 십자가 처형은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시행됐기 때문에 군인들은 예수님을 끌고 관저를 벗어나 십자가 처형장으로 향합니다. 사형수는 십자가의 가로대를 직접 운반해야 했습니다. 수직 부분은 이미 처형장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이은 심문, 대중 앞에 노출된 재판, 조롱과 매질 등으로 처형장으로 이동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그대로 두면 가는 도중에 사망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레네 출신 시몬에게 강제로 지고 가도록 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에 이르렀습니다(33). 당시에 군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허락했습니다(34). ‘콜레’는 간, 쓸개, 쓴 쑥과 같이 쓴맛을 내는 물질을 가리킬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 몰약의 맛과 쓸개 맛은 같은 것으로, 마태는 군인들이 쓴맛을 내는 풀을 포도주에 넣은 것을 설명합니다. 군인들이 마취 효과를 위해 쓸개를 탄 포도주를 준 것이 아닙니다. 시편 69:21-22에서 시편 기자는 원수들이 자신을 모욕하려고 쓸개를 음식물로 주는 것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마태는 쓴 물질을 시편 69편의 ‘쓸개’로 명명해서 예수님을 시편에 나온 고통당하는 의인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쓴 잔(26:39-42)을 선택하시고 인간이 준 쓴 약을 마시지 않으십니다. 이제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달았습니다(35).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었으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입니다. 수치스럽게 만들려고 죄수를 십자가에서 벌거벗긴 것은 로마의 십자가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시편 22:18이 배경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도 사람들이 속옷을 제비 뽑는 것은 나체 상태의 처형을 의미합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편 22:18) 군인들은 처형당하게 된 이유를 제시할 목적으로 예수님의 머리 위쪽에 명패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강도와 같이 십자가 처형을 받은 장면은 예수님께서 강도와 같은 수준으로 취급받았음을 암시합니다(이사야 53:12).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왕은 예루살렘 밖에서 벌거벗겨진 채 수치와 모욕 가운데 처형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를 치듯이 아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장면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합니다. 본문이 묘사하는 십자가 형벌의 과정은 대중적인 수치를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군인들이 십자가에 힘없이 달려 찢어지고 늘어진 몸의 예수님 위에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명패를 붙인 것은 그를 대중에게 경고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체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아 두는 것으로 공개적인 수치를 준다. 하나님의 아들이 벌거벗겨져 저주를 상징하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는 죄인들의 수치를 가려주고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수치가 이 땅의 죄인들에게는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세 부류(39-44)

사람들의 죄악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누가 누가 더 많이 흉악하게 범죄할 수 있는지 경연대회를 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인간의 악한 죄성은 꺾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무죄한 예수님의 보혈 능력을 알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39-44)

 

앞 단락에서는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했다면 본문에서는 동족을 대표하는 군중, 유대 지도자들, 심지어 십자가의 강도들에게서 조롱당하십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욕하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비웃습니다(4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놀립니다(41-42).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라고 조롱합니다(43). 특히 백성들은 예수께서 구원하는 역할을 할 줄로 기대하고 호산나를 외쳤으나(21:9,15) 구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마저 구원할 수 없는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남을 구원하지만,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유대인들이 놀리면서 예수님에게 던진 말의 내용 자체는 옳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지 않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셨다(1:21; 8:25; 9:27, 14:30). 고난의 종으로서 아픈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8:17; 이사야 53:4).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지불하러 오셨습니다(20:28), 주의 만찬을 통해 서도 많은 사람을 위해 피와 살을 주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버림받고 조롱당해 죽는 순간에도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신뢰하십니다. 우리는 세 부류가 조롱하면서 예수님의 신뢰 심을 자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온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는데도 어떤 도움도 얻지 못한 채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특히 신뢰심을 자극하는 소리는 사탄의 광야 시험을 떠올립니다. 사탄은 광야 시험 기사에서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을 떡으로 만들고(43)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46). 하나님 부재의 상징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수치에서도 아들은 끝까지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아들에게 아버지의 함께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죽기까지 순종해서 하나님의 계획, 곧 구원사의 목표를 성취하실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역사에 강력히 개입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인생에 닥치는 시련이나 당혹스런 일들마저도 하나님의 임재와 간섭을 의미합니다. 성자의 특징이 성부에 대한 신뢰였듯이 신자의 특징도 하늘 아버지에 대한 신뢰여야 합니다. 사탄은 언제나 택하신 자들의 신뢰심을 건드립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어느 순간까지 신뢰해야 하는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교훈입니다.


참담한 고난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실한 묵언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심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의 면류관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사이비입니다. 번영복음과 성공신학은 자아부인 없는 십자가로 진리를 왜곡하는 괴설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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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7-02)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예수님

마태복음 27장 11-26절


 

공평과 정의에 대한 예언자적 외침은 교회가 갖고 있어야 할 영적 자산입니다. 예언자적 영성은 해로운 상상력을 갖고 현실 안주와 타협을 거부합니다. 당시의 정치 권력은 사형 선고를 할 만한 협의를 예수님께서 발견하지 못했으나, 제국의 안정을 택했습니다.

 

  • 빌라도의 손에 넘겨진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빌라도의 첫 질문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입니다. 고소자들의 고발 내용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바라바와 예수님께서 유월절 특별 사면 대상의 후보에 오릅니다.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선동된 무리가 바라바를 선택했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 강력히 외칩니다. 무리의 거센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던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줍니다.

 

빌라도와 예수님(11-19)

비폭력 침묵이야말로 세상이 어두운 밤으로 덮였을 때 진실 규명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진실한 침묵은 빌라도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권력, 섬기는 리더십으로 제국의 이야기에 도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함과 모살로 가는 길에서 구차하게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11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11-19)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이 그 빛을 거부하는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요 1:9-11). 비록 초라하게 법정에 서 계시지만,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신 메시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고발 내용에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1) 빌라도에게 심문받는 예수님(11-14)

 

예수님께서 총독 빌라도 앞에 서 있습니다(11). ‘∼ 앞에 서다.’는 구약과 유대교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의 위치와 모습을 그려주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세상의 재판장으로 와서 재판하는 자리에 앉을 자가 재판을 받을 자 앞에 서 있습니다.

총독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말이 옳다’고 유대인의 왕인 것을 인정하십니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내용을 추가합니다(12).

산헤드린 공회, 곧 유 법정은 심문의 결과를 들고 로마 법정에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이는 빌라도를 압박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와 유대의 질서를 위협하는 인물로 재빨리 처리해야 할 것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고소를 듣고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참조 26:62). 묵묵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은 고난의 종을 연상하게 합니다(사 53:7). 로마법에서는 고소한 부분에 대해 침묵하는 자는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13-14). 예수님께서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의 잔을 마실 것을 다짐했으므로 자신의 생명을 위해 투쟁하거나 변호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가야 할 운명의 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2)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풀어준 빌라도(15-19)

 

총독 빌라도는 식민지 백성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정치적 행위로 죄수를 풀어주려 합니다(15). 빌라도는 예수님 옆에 바라바라는 이름의 유명한 죄수를 데리고 옵니다. 바라바는 폭력으로 로마에 대항해서 싸운 혁명가로 보입니다(막 15:7; 눅 23:19). 바라바의 이름은 ‘예수 바라바’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두 예수, 진짜 메시아와 가짜 메시아를 평행으로 배치합니다.

빌라도는 군중을 향해 직접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질문은 편향적입니다. 그는 백성을 위해 혁명을 시도한 사람을 예수 바라바, 곧 ‘예수, 바라바’로 부르지만.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를 불리는 예수’로 칭합니다. 왜 빌라도는 이런 판단을 한 것입니까?

이는 빌라도가 유대 지도자들이 시기심 때문에, 즉 예수님을 정치적 이슈로 자신에게 넘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8). ‘시기’는 타인의 성공에 대한 분개를 의미합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역을 통치하는 권세를 가졌고 특히 명절에는 예루살렘 성전 옆에 있는 안토니오 성채에 거주하면서 유대 명절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예수님에 대한 군중의 기대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인기 때문에 빼앗길 수 있는 통치 권위와 존경 받는 자리를 침해받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이며, 그를 제거하면 빌라도는 정치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빌라도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정치적 안정입니다. 로마의 정의는 식민지의 백성 한 명에게, 그것도 큰 절기에 엄청나게 많은 무리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의 왕으로 기소된 자를 그냥 석방해 주는 것 역시 빌라도에게는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는 처음부터 진리를 따르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빌라도가 판결하려던 순간에 빌라도의 아내는 꿈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의인이라고 말합니다(19).

 

본 단락은 정치적 안정만 생각하며 진리의 판결을 외면하는 총독과 중간 중간에 군중을 설득하는 유대 지도자들과, 설득 당해 바라바의 석방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요구하는 군중 사이에 고독하게 서 있는 메시아를 주목하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지만, 빌라도의 말과 빌라도 부인의 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의인인 사실이 드러납니다.

무지와 탐욕의 소리로 시끄러운 중에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가십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으며, 재판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빌라도의 정치적 실리주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진리는 고난을 수반하고 정치는 타협과 실리를 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신원하시고 실리를 추구한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고난의 종의 침묵(이사야 53:7)은 실리주의를 추구하는 신자들의 길을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20-26)

모든 결정에는 자신의 책임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결정인 죄에 대해서도 대가를 반드시 받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데 앞장선 유대인들은 몰랐기 때문에 용서가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피에 대한 대가를 철저히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결정에도 말없이 순종하심으로 하나님 뜻을 온전히 이루십니다.

 

20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20-26)

 

빌라도가 아내의 말을 듣고 고민하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틈을 주지 않고, 바라바를 요구하도록 군중을 자극합니다(20). 총독은 두 사람 중에서 누구를 석방하기 원하는지 묻습니다. 군중의 선택은 바라바입니다.

빌라도는 다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17)라고 하면서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묻습니다(22).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거짓 메시아로 판명된 자들의 운명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었기에 구원자를 기다렸던 군중은 구원자를 죽이라고 요구합니다.

빌라도가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악을 행했는지 묻습니다(23). 왜냐하면, 십자가 처형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지 빌라도는 잘 알고 있고, 예수님께서 그런 처형을 받을 만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게 만든 주도적 역할을 하며, 빌라도는 재판의 주권을 갖고 있는 총독이면서도 수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처음부터 진리대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약했기에, 설득당한 군중의 외침(23)과 폭동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24) 겁을 먹고 진리를 외면하고 맙니다. 이제 군중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빨리 판결하지 않는 것 때문에 폭동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빌라도는 손을 씻음으로써(24) 자신은 재판 결과에 책임이 없다는 표시를 보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당하라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말하는데, 이는 대제사장들이 유다에게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한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27:4). 빌라도의 말은 같은 말을 들은 유다가 나가서 자살한 것처럼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한 유대인들의 운명,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사건을 암시합니다.

20절의 ‘군중’은 25절에서 ‘모든 백성’으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 중에서 병들고 약한 자들을 치유하셨으나(4:23) 이 백성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요구합니다. 모든 백성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자신들과 자녀들이 지겠다는 의미로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녀에게’ 돌리라고 외칩니다.

결국,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도록 명령합니다(26). 세상을 심판할 재판장이 지금은 죄인들의 채찍에 맞고 사형장으로 보내집니다. 채찍질은 십자가 처형 전에 실행한 형벌이었습니다. 채찍은 여러 가닥의 가죽 끈으로 되어 있고, 끈에는 못이나 유리 조각이나 돌과 같이 날카로운 물질이 붙어 있어서 채찍질로도 뼈가 드러나고 죽기도 했습니다(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6.304).

 

예수님의 무죄가 드러날수록 그를 둘러싼 인간의 죄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거짓으로 백성을 선동합니다. 백성은 사랑과 회복의 나라를 가지고 온 예수님을 버립니다. 의인의 피를 흘린 것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눈 먼 유대 지도자들의 길을 선택한 백성의 운명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반란을 로마가 제압하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구원자를 외면하고 심판의 길을 택한 예루살렘의 군중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든 존재합니다. 군중의 다수결이 진리는 아닙니다. 광장에 모인 군중의 욕망이 강할수록 그들은 쉽게 선동 당합니다. 선동당하는 자들은 선동하는 자들의 운명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은 성경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에 익숙해져야 선동당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진실의 편에 서야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무죄라는 것을 알고 놓아주려 했으나 끝까지 예수님의 편에 저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종교지도자와 군중의 손을 들어줍니다. 우리는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중에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회피한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사람들이 아닌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 편에 서서 진실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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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7-01)

 


예수님을 판 은 삼십을 돌려주고 자살한 가룟 유다

마태복음 27장 1-10절


종교인이라면 죽을 만한 사람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영혼의 의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잘 가르쳐 주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인 용서와 긍휼도 잘 알게 해주어야 하는 직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을 돌아볼 만큼 겸손하지도 않았고, 교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예수님의 심문이 끝나고 확정되자 새벽 미명인데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을 결박한 되 총독 과저로 이송해 넘겨줍니다. 예수님께서 넘겨진 후 사형 선고를 받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습니다. 자신으 ㅣ잘못을 뉘우치며, 받은 은 삼십을 돌려줍니다. 그들이 받지 않자 성전을 향해 던지고 나가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밭을 구입해 나그네의 묘지로 삼으며, 예레미야(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부패한 권력(1~2)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롬 13:1).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권세를 악한 일에 사용하는 지도자에게는 심판이 따릅니다(눅 1:52 참조). 부패하고 탐욕에 물든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력으로 하나님 아들을 심판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데 빠르게 움직입니다.

 

1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1-2)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밤새도록 심문했고, 날이 밝자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게 됩니다. 소집 목적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미 짜놓은 각본에 따라 밤새도록 심문해서, 불과 하룻밤 사이에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결정하고는, 로마 법정에 기소할 죄목을 찾아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2). 그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던 것은 로마 제국이 유대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사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 18:31).

권력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권력과 힘은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세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도자는 자기 위에 있는 권세자를 항상 기억하며, 모두를 선하고 의롭게 이끌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3-10)

회개는 신앙의 첫 걸음이자 의인으로 칭함을 받는 최선책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생은 회복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회개와 후회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시선을 두는 것이고, 후회는 자신을 향해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가룟 유다는 잘못된 결단으로 그릇된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3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3-5)

 

본문의 핵심 용어는 유다가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받았다가 들려준 ‘은 삼십’(27:3,6,9), 곧 ‘핏값’입니다. ‘무죄한 피’ → ‘피의 값’ → ‘피의 밭’의 순서는 죄 없는 예수님의 목숨은 하찮은 값에 매겨졌지만, 비극적인 운명을 상징하는 피가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미래적 가치를 지니는지를 보여 줍니다.

무죄한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책임 부분에 줍니다. 무죄한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책임 부분에서는 인간의 악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차원에서는 구원 역사를 담은 성경의 성취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 예수님을 판 은 삼십을 돌려줌(3)

 

예수님께서 유죄 판결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지자, 가룟 유다는 이러한 과정을 보면서 후회합니다.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3). 은 삽십은 직접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조건으로 거래를 해서 받은 액수입니다(26:14-16). 은 삼십과 관련 표현은 본 단락에 다섯 번 등장하는 어휘로서(3,5,6,7[이것으로],9; 스가랴 11:12-13),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마태가 사용하는 단순 과거형인 ‘돌려주었다’는 원래 돈이 나온 출처로 되돌려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돈은 원래의 출처로 돌아가게 되었으므로, 대제사장들이 일하던 당시의 성전은 무고한 자를 죽이는 데 필요한 돈을 저장한 곳이 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는 공간이 돼야 하지만, 대제사장들은 성소의 보고에서 무죄한 피의 값을 위해 은 삼십을 지불했고 그 돈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돈을 지급한 대제사장들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무죄한 피의 값으로 얼룩진 성소에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23:35). 또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미 책망하신 대로 성전은 더러운 이득을 챙기려고 모의하는 자들이 득실거리는 강도의 소굴이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21:13).

 

(2) 가룟 유다의 자살(4-5)

 

가룟 유다는 무죄한 자의 피를 넘김으로써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4).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유다의 책임이니 자신들이 더 이상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합니다. 유다는 돈을 던지고 나가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습니다(행 1:16-20). 사도행전의 묘사와 조화를 시킨다면 유다는 목을 매었다가 땅에 떨어져 창자가 터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유다의 죽음을 최후 심판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택한 길이나 명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합니다. 유다의 행위(‘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는 앞에 나온 베드로의 행위(‘…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26:75)와 대조됩니다. 부활 이후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장면과도 대조됩니다. 이 장면 앞에 베드로의 배신 사건(26:69-75)이 나오는데, 베드로도 후회했으나,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 부활의 목격자와 증인이 됩니다.

 

뉘우침 혹은 후회는 회개를 위한 첫 단계입니다. 뉘우침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돌이키는 것을 뜻하는 회개는 죄를 짓기 이전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무죄한 피의 값(6-10)

죄의 대가든 생명의 값이든 궁극적으로 무언가를 남기게 됩니다. 당신은 무엇을 남기는 인생이 될 것입니까?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실수에 괴로워하는 가룟 유다에게 조금도 동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외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었습니다.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 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6-10)

 

대제사장들은 가룟 유다가 던진 은 삼십을 받고는 ‘피의 값’이라고 부릅니다. 은 삼십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대가였습니다.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판 것은 스가랴 11:13의 암시로 26:15에서 이미 언급되었고, 9절에 다시 나옵니다.

대제사장들은 이 돈을 성전의 보고에 두는 것은 율법의 규정에 맞지 않다고 보았습니다(12.2:14:4; 참조. 신명기 23:18: 역대상 22:8-9). 그런데 스가랴 11:13에는 ‘토기장이’이지만, 마태는 ‘보고’를 사용합니다. 토기장이는 토기를 만드는 사람 또는 성전에서 귀금속 헌물을 처리한 기술자를 뜻했기 때문에, 마태는 스가랴서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진 것을 성전의 보고에 던진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이 나그네들을 위해 산 땅은 ‘피의 밭’으로 불립니다(행 1:19). 이곳은 마태복음이 기록되기 전, 가룟 유다가 자살하기 이전에 이미 피의 밭으로 불렸습니다. 9-10절에서 마태는 대제사장들이 무죄한 피의 값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구입한(27:6-8) 사건을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9절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열 개의 성취 공식 중 마지막입니다(1:22; 2:15,17,23; 4:14; 8:17; 12:17; 13:35; 21:4).

마태는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의 값과 이 피의 값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스가랴 11:13을 예레미야 18, 32장과 함께 사용합니다. 유다의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은 스가랴 11:13과 가깝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 11:13). 그런데 마태는 스가랴 11:13을 인용하지만, 구원 역사의 의미를 예레미야서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예레미야를 통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선물의 상자는 스가랴서인데 그 내용은 예레미야서인 것과 같습니다.

스가랴 11:13과 연결되는 예레미야 본문은 18-19, 32장입니다. 토기장이의 옹기와 밭을 구입하는 이야기는 각각 예레미야 18장과 32장에 나옵니다. 18장을 보면,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하는데,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만든 토기를 깨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듭니다(렘 18:4). 이는 하나님께서 한때 보살폈으나 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백성과 도성을 파멸시킬 자유를 갖고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어서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서 그것을 깨뜨립니다(렘 19:1,10). 이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예고하기 위함입니다. 이 예언을 전하도록 예레미야가 보냄을 받은 장소는 힌놈의 골짜기입니다(렘 19:2). 한편, 32:6-15은 밭을 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2:6-15에서 선지자가 밭을 구입한 시기는 바벨론 군대에게 예루살렘이 포위된 때였습니다. 바벨론의 땅이 되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갈 것인데도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근처의 밭을 산 행위(예레미야 32:8-14)는 언젠가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될 희망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게헨나)에서 아들들과 딸들을 우상 몰렉에게 제물로 바칠 정도로(예레미야 32:35) 가증하게 행동해서 심판을 받았으나,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회복해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합니다(렘 32:37-44).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가 말한 이스라엘의 목자-왕으로 오셨지만, 백성은 은 삼십이라는 하찮은 가치로 예수님의 값을 매겼습니다. 값싸게 치러진 예수님의 값은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무죄한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악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차원에서는 구원 역사를 담은 성경의 성취를 뜻합니다. 마태복음 27:9-10에서 예레미야 32장을 사용한 것은 무죄한 자의 피로 구입한 피의 밭은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회복될 것이라는 미래의 희망을 암시합니다(참조, 23:39, 27:52-53). 이 밭은 나그네들을 위한 용도였으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민족을 위한 것임을 암시합니다(28:19-20). 핏값으로 무덤을 산 사건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직후에 성전의 휘장이 열리고 무덤이 열려 잠자던 성도들의 몸이 일어나는 기적과도 관련됩니다. 인자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 즉 몸값으로 지불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20:28) 죄인들이 그 대가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핏값을 값싸고 하찮게 매깁니다. 그러나 그의 피는 어떤 사람이라도 회복시키는 값어치를 지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핏값을 싸게 여기거나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을 회복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세상의 소망, 가정의 소망, 나의 소망은 예수님의 보혈뿐입니다.


 

참된 회개는 후회를 포함하지만, 후회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했고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께 큰 잘못을 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며 회개함으로써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회복되었지만, 유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목매어 죽음으로써 영원한 저주의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후회할 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일단 돌이킬 수 없다면, 그로 인해 더 이상 후회할 만한 일들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를 가장 괴롭게 수치스럽게 만든 일은 무엇입니까? 더 큰 후회를 만들지 말고 큰 회복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돌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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