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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3-01)


 어린양을 위한 목자의 헌신

시편 23편 1-6절


부족함과 넉넉함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도가 함께 지녀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부족한 모습을 인정할 때, 목자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순종하는 자세를 견지할 때, 넉넉함과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내 삶의 목자이신 주님을 얼마나 잘 따르며 살고 있습니까?

  

  • 23편은 양 떼를 돌보는 목자의 이미지로 주님을 향한 신뢰를 노래한 시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다고 다짐하는 언약 공동체를 대표하는 다윗에게 여호와는 목자뿐만 아니라 위험에서 건져주는 용서와 같습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누이시고, 소생시키시고, 의로운 길로 이끄실 ‘나의 목자’ 여호와를 향한 감사로 충만합니다.

 

내 목자이신 여호와(1-4)

양들은 제 길만 고집하고 근시안적이고 혼자 자신을 방어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겁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과 같은 우리를 위해 밤낮들에서 지내며 한데서 자야 하는 고된 목자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물질문명의 기준에 따라서 생각하니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1-4)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왕이 뙤기까지 많은 고통을 겪었고, 와이 되어서도 밧세바 사건, 아들 압살롬과의 달등 등, 그의 삶은 사실 부족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1) 부족함 없으신 여호와(1-2)

 

다윗은 하나님께 ‘여호와는 나의 목자’(la)라고 고백합니다. 이곳 말고도 구약에서 주님을 목자의 이미지로 표현하는데(시편 28:9; 77:20; 78:52; 100:3; 이사야 40:11; 49:9-10; 에스겔 34:11-16), 이는 히브리 전통에서 아주 오래된 칭호 중 하나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할 때, ‘목자이신 하나님’(창세기 48:15)이 출생부터 지금까지 함께하심을 고백했습니다. 고대근동 세계에서도 신들과 왕들을 묘사하면서 목자 이미지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이는 고대인들의 권위와 통치의 상징으로서 목자 이미지를 활용한 셈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윗이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부를 때, 자신을 그의 돌봄을 받는 양으로 고백한 것이며, 동시에 그분의 통치 아래 있는 존재인 자기 정체성을 표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시고 목자이며 왕이십니다(참조. 미가 5:5). 목자는 일차적으로 양을 먹이고 보호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목자 이미지는 구원 역사라는 더 큰 맥락에서 출애굽과 광야 생활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시편 80:1; 95:7).

다윗의 고백은 자기 조상들에게 행하신 구원 행위에 근거합니다. 다윗의 고백적인 선언은 둘째 소절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다윗은 목자이신 여호와 덕분에 ‘나는 부족함이 없다’(1b)고 노래합니다. 본래 미완료형태인데, 히브리어 구문에서 미완료형은 지속되는 현재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다윗의 조상들에게 여호와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셨던 기억을 반영합니다. 이스라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직전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회고하면서 들었던 절절한 당부, 곧 모세의 고별 설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신명기 2:7).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선물로 받을 가나안 땅을 먹을 것에 모자람 없고, 아무 부족함 없는 땅이라고(신명기 8:9) 했습니다.

다윗은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셔서 현재뿐 아니라 알지 못하는 미래까지 책임져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다윗은 전형적인 히브리 시형의 문체로 노래합니다. 두 개의 소절로 구성된 시행이 매우 음악적이고 아름답습니다. ‘푸른 초장으로 그가 나를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그가 나를 인도하신다’(2). 겨울철의 건기가 끝나고 봄비를 머금은 상쾌한 계절의 연둣빛을 연상시킵니다. 새싹이 돋는 봄날의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양들은 편히 누워 쉬는 목가적인 그림입니다. 옛적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거룩한 ‘처소’(출애굽기 15:13), 곧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목장’(시편 83:12)에서 평화롭게 쉴 수 있음을 노래합니다.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안식이었던 것처럼(신명기 12:9), 여호와의 목장은 다윗의 안식처가 됩니다.

 

(2)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3-4)

 

여호와의 푸른 목장과 쉴 만한 물가에서 누가 안식하지 못하겠는가? 때문에 다윗은 고백합니다. ‘그가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해 의의 길로 인도하셨다’(3). 다윗의 ‘생명’(네페쉬)을 회복시킨 목적이 마치 ‘의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인 것처럼 들립니다. ‘의의 길’은 ‘바른 길’입니다. ‘의’는 바름과 ‘곧음’이며, 마땅히 행할 ‘표준’입니다. 또한 ‘길’(마갈)은 밟아서 다져진 길을 뜻하니 오랜 세월 합의된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하나님이시니 그의 양도 마땅히 가야 할 그 길, 즉 ‘곧은 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는 여호와가 자기 이름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 당신의 평판 때문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여호와 그의 이름에 어울리게, 합당하게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는 오래전 자기 언약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시면서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으나, 악행에 대한 보응도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출애굽기 34:5-7). 여호와께서 당신 이름에 합당한 존재로서 그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셨던 것처럼, 그의 백성도 그분의 존재 목적에 걸맞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그분’(3인칭)으로 불렀지만, 이제 ‘당신’(2인칭 남성 단수)으로 호명합니다. 좀 더 친밀한 관계를 표시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당신이 나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십니다’(4). 다윗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골짜기에서도 ‘악’이 두렵지 않습니다. ‘해로움’이나 불운이 닥쳐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다윗에게 여호와는 언제 덮칠지 모를 위험과 외로움에도 함께할 나의 친구이자 나와 함께 걷는 일행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함께 계시면서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보호해줍니다. ‘지팡이’로 번역된 말은, 목자들이 양을 인도하는 도구입니다(미가 7:14).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목자는 들짐승으로부터 양을 보호하는 막대기와 양들을 돌보는 손잡이가 구부러진 지팡이를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팡이는 고대 사회에서 왕이나 재판장 또는 지도자들의 법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통치의 막대기’였습니다(창세기 49:10; 민수기 24:17; 시편 45:7; 에스겔 19:11, ‘규’). 여호와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다윗에게 위로의 도구입니다. 나의 안위가 된다는 말은 나의 위로와 안락함이 된다는 뜻입니다. ‘위로하다’라는 말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거나(이사야 66:13) 여호와가 나의 위로라는 다윗들의 언어에서(시편 71:21; 119:82),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표현할 때 쓰입니다(이사야 12:13; 40:1).

 

내 잔치의 주인이신 여호와(5-6)

하나님께서는 슬픔과 시름과 두려움으로 죽은 듯 쳐져 있던 양들에게 새 힘을 주는 목자입니다. 그 이름에 어울리도록 내가 의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밟고 간 땅을 좇아 주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걷는 길이 의의 길입니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5-6)

 

여호와의 보호를 묘사하는 배경이 푸른 초장에서, 죽음의 골짜기로, 즐거움이 넘치는 잔칫집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고백합니다. ‘당신이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나의 대적들 앞에서 당신이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고 나의 잔이 넘칩니다’(5). 갑작스럽게 다윗의 원수가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목가적인 분위기와 사뭇 다릅니다. 이는 아마도 다윗의 역사적인 정황이나 실존적인 상황 같아 보이지만, 원수가 누구인지 규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다윗을 비방하고 미워하며 적대시했던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건 간에 여호와가 그들 앞에서 잔칫상을 차려주십니다. 이 ‘상’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진설병을 두는 ‘상’(출애굽기 25:23)이나 희생제사를 위한 상을(에스겔 40:39) 언급할 때 사용되었지만, 왕을 위한 화려하고 풍요로운 상차림(열왕기상 4:27)에도 쓰였습니다. 이러한 문맥들을 고려하면, 이것은 필요한 식사와 잔치를 여호와가 직접 준비해주심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더군다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생기를 회복시키는 은유입니다(잠언 15:30). 또한 고대사회에서 잔칫집 주인은 손님을 맞이하며 올리브기름을 머리와 얼굴에 바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귀한 손님으로 영접하는 의식으로서 전통적으로 잔치에서는 기름이 빠지지 않았습니다(아모스 6:6; 시편 45:7; 92:10; 104:15).

이러한 의식의 상징적 의미는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보호에 대한 찬미입니다. ‘나의 잔이 넘칩니다’라는 고백으로 풍요롭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마지막 시행의 고백은 감격과 확신에 차 있습니다. 다윗은 두 가지를 확신합니다. 첫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뒤따를 것인데, 살아있는 내 온 생애 동안(6ab) 이라고 합니다. ‘선하심’은 ‘좋다’라는 의미를 넘어 사람의 삶을 기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과 관련된 말입니다.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의무와 사랑을 표현한 핵심적인 말로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낸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오래오래 살 것을 다짐합니다(6). 이는 잔치를 베푸신 여호와, 그분의 집에서 그분과 함께 지속적인 교제를 나누는 그림입니다. 23편은 마치 ‘나는 선한 목자라’(요한복음 10:11)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된 숲의 메아리처럼 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으로 이끄시는 목자이십니다. 돌보시고 인도하시며, 보로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신실한 자를 선대하시고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 그에게만 의와 생명, 쉼과 평안이 있습니다. 위로하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거짓 목자의 음성에 현혹되지 말고 참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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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2-02)


 미리 보는 십자가의 고난(2)

시편 22편 22-31절


복음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지만, 우리는 점점 복음이 위축되는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스스로 복음을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생명력을 경험하지 않으면 복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나 자신부터 복음을 깊이 이해하며 능력을 맛보고, 그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하겠습니까?

  

  • 22편 후반부는 탄식과 애통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홀로 맞이하는 외로운 죽음과 어둠은 사라지고, 다윗은 신앙 공동체의 모든 회중과 함께 찬양하며 구원을 선포합니다. 땅의 모든 끝과 열방의 모든 족속이 온 세상 주인이신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와 예배하는 주님의 우주적 왕권의 성취를 예고합니다.

 

회중 가운데서 드리는 감사의 찬양(22-26)

하나님께서는 내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참 좋은 분입니다. 그러니 두려움보다 기대를 품고 내일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그분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으며, 여전히 그는 백성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서원한 대로 자신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서 담대하게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합니다.

 

22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2-26)

 

십자가 고난에 초점이 맞추어진 전반부와는 달리, 고난을 넘어선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승리를 맛본 사람들은 먼저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서 찬양할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1) 회중 앞에서의 감사와 찬양(22-24)

 

더 이상 다윗의 절망과 좌절의 탄식 소리는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했기에 여호와께 당신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속에서 찬양하겠다고 다짐합니다(22). 다윗은 혈연적인 관계를 넘어 함께 예배하는 언약 공동체인 ‘회중’ 가운데서 여호와 이름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러고서 다윗은 언약 백성인 회중을 다양한 방식으로 부르며 동참할 것을 권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 야곱의 후손들,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에게 그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고, 두려워하라’(23). 독특한 점은 회중을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23a)라고 호명하면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라’(23c)고 권고합니다. 이미 언약 백성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로서 정체성이 전제되었음에도 주님을 두려워하라는 조언은 그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을 좀 더 강조한 셈입니다.

이어서 다윗이 회중에게 주님께 찬양하고 영광 돌리고, 그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분은 곤고한 자의 고통을 멸시하거나 경멸하는 분이 아니며, 그의 얼굴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도움을 청하는 부르짖음에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24). 다윗은 처음에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했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신다고 외쳤지만(1-2), 완전히 뒤바뀐 상황을 선포하며 노래합니다.

 

(2) 서원과 다짐(25-26)

 

이제 다윗은 ‘큰 회중’ 가운데서(25a) 여호와께 다짐합니다. ‘나의 찬송의 주제는 당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들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겠습니다’(25). ‘큰 회중’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축제의 날임을 알 수 있지만, 다윗이 무엇을 서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고통에서 풀려나면 성전에 예물을 바치겠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레위기 7:15-21). 서원과 갚음은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닙니다. 다만 서원 갚는 자는 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은총을 경험한 것을 공동체 앞에서 공적으로 알리고, 공동체는 서원 지킨 자의 구원에 동참합니다.

‘가난한 자들’(‘겸손한 자들’)이 배불리 먹으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양하고, 언약공동체인 회중의 생명이 항상 지속되기를 기원합니다(26). 두 시행의 이미지는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 일부를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식사 자리를 연상시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집니다. 또한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라고 했는데, ‘마음’을 뜻하는 ‘레바브’는 ‘심장’을 뜻하는 말입니다. 굶주림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는 생명의 양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영원히’라는 말은 늘, 항상, 언제나 지속되는 현재성을 표현한 것이지 내세적 가치를 표현한 말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배불리 먹고 찬양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마치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것이고, 주린 자는 배불리 먹게 된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일부를 미리 맛보는 듯합니다(참조, 누가복음 6:20-21).

 

모든 열방과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찬양(27-31)

주님의 공의로우심은 산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와 상차 태어날 자에게까지,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까지 찬양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고난을 듣고도 멀리하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와 맺은 언약대로 언제까지든지 신실하실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불안해하지 말고 주님의 공의가 우리를 지키실 것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27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9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27-31)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해야할 사람들은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과 모든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의 주재이시기에 십자가의 복음은 이 모든 사람에게 승리를 경험하게 합니다.

 

(1) 땅 끝 모든 족속이 여호와를 예배(27-29)

 

개인적인 감사는 회중 속에서 찬양으로 커지고, 예배자인 다윗의 서원 갚음은 공동체의 축제에서 나누는 공동체의 식사로 확장되어 생명의 활기로 충만해졌습니다(24-26). 다윗은 이제 자신의 구원 경험을 더 폭넓게 확장시켜 땅 끝은 민족이 주 앞에서 예배하기를 열망합니다. 개인의 구원 경험은 공동체로 확장되고 좀 더 보편적인 관점으로 전환됩니다. 이를 표현한 시인의 언어는 장엄합니다. 당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모든 나라의 민족이 돌아와 경배할 것입니다(27). 모든 민족이 ‘기억하고 돌아온다’는 것은 1차적으로 모든 열방이 여호와가 자기 백성에게 행한 일을 깊이 생각하고 돌아오는 것이지만, 결국 온 세계의 창조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민족들이 귀환하는 우주적인 사건과 우주적인 왕권의 묘사입니다. 창조를 받은 자들이 창조자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마땅한 귀결로 묘사합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온 세계에 깃든 하나님의 왕권을 노래합니다. ‘그 왕권은 여호와께 속하였고, 모든 나라들 가운데 계신 통치자시라’(28). 창조자는 온 세상의 통치자이며 왕이요, 그분이 여호와임을 명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여호와 왕권을 찬송하며 경배하는 것은 풍요를 누리며 사는 자들만의 일이 아니라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임을 선포합니다(29). 이는 매우 독특합니다. 생명 없는 죽은 자들, 곧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자기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가 어떻게 찬송할 수 있습니까? 이는 구약 다른 본문의 입장과 다릅니다(참조. 시편 30:9;이사야 38:18).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하늘과 땅 그리고 삶과 죽음이 모두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포함되기에 찬송과 경배가 오로지 살아 있는 자들의 것만이 아님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해석자들 중에는 온 열방이 경배하기 위해 돌아오는 것을 예루살렘(또는 시온)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보고 종말론적인 사상과 연결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다윗은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장벽의 구분이 의미 없을 정도로 여호와의 통치권이 죽음의 영역까지 미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다윗은 살아 있는 사람은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영역까지 포함시켜 여호와의 우주적 왕권을 노래합니다.

 

(2) 구원받은 후손들이 여호와 공의를 전파(30-31)

 

이 땅에서 고난당한 자들의 삶은 죽음으로 귀결되지 않고 구원받았으며, 온 열방의 증거가 되었습니다(24-29).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한 세대로 끝나지 않고 죽음을 초월하여 아직 출생하지 않은 세대에까지 미칠 것입니다(30-31). 죽음은 모든 인류가 공평하게 맞이할 순간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경험한 다윗은 하나님의 역사가 한 세대에서 멈추지 않음을 확신하며 노래합니다. 다윗은 후손이 여호와를 섬길 것이고, 세대를 거듭하며 나의 주가 회자되면서 전해질 것이라고(30) 예고합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주’라고 호명하여 자기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셔서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신 주님에 대해 개인적이고 친밀한 경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친밀한 경험은 다윗만의 특별한 개별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며, 세대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재현될 것입니다.

 

후손들은 와서 그분의 ‘공의’를 장차 출생할 백성에게 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행하신 것 때문입니다(31). 다윗은 아직 출생하지 않은 미래의 세대들에게까지 주님의 공의, 곧 정의롭고 공평한 행위로 규명되는 ‘구원’이 미칠 것을 예고합니다. 주님의 ‘공의’는 ‘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 ‘구원’(salvation), ‘해방’ (deliverance)의 모든 과정과 관계된 하나님의 핵심적인 품성이며 사역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22편은 고난 받은 한 개인만의 구원 사건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로서 메시아적인 관점으로 해석됩니다.

22편의 전반부(1-21절)에서 한 사람의 지독한 외로움과 고난이 메시아 예수의 사역과 연결되어 해석된 것처럼, 후반부(22-31절) 역시 세대를 거듭하여 메시아를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의’를 노래합니다(참조. 시편 78:6; 로마서 3:22).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 순간에 신뢰와 죽음의 순종으로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살려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시려는 선하신 뜻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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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1-03)

 


영적 무지한 사사 입다와 그 딸

사사기 11장 29-40절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영향력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는 참 지혜와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본문은 인간이 말씀에서 떠나 세상의 영향을 받으면 얼마나 어리석게 행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방적 종교성이라는 영적 어둠이 초래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 입다가 전쟁에 임할 때, 하나님의 영이 입다와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입다를 사사로 인정하시고 그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암몬의 손에서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이 과정속에 입다는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인신 제사를 소원합니다. 그로 인해 결국 자신의 무남 동녀를 번제로 죽게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승리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됩니다.

 

입다의 출정과 서원(29-31)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은 비참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모든 전쟁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면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입다처럼 인간의 성급함과 하나님을 향한 무지함이 무모할 때,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9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29-33)

 

본문은 암몬과의 전투와입다의 서원을 기술합니다.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입다에게 임하게 하십니다. 이전에 웃니엘과 기드온도 영이 임하자 전쟁에 나가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이제 입다에게 임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1) 입다의 출정(29)

 

길르앗 지역 때문에 암몬과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전형적인 전쟁 장면처럼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고 용감하게 암몬에게로 나가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라는 표현은 3장 10절에서 웃니엘에게 임할 때와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입다를 사사로 인정해 주신다는 증표이며,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며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는 증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입다에게 그의 영을 보내신 것 자체가 놀랍고 감격스럽습니다. 이만큼 오기까지 방해가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배역과 회개를 반복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지 않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10:13).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고초에 안타까워하셨습니다(10:16). 그러다 암몬이 길르앗을 치려 하자 백성들은 하나님 의견은 아예 무시하고 스스로 나서서 구원자를 찾았고(10:18), 입다와 협의하여 그를 머리로 세웠습니다(11:5-11). 이 과정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입다에게 그의 영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얼마나 크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입다는 기드온처럼(6:34-35) 영을 힘입어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그는 길르앗 진영이 있는 미스바(미스베)로부터 길르앗 전역, 북부의 므낫세와 요단강 건너 므낫세(29), 에브라임까지 갔습니다(12:1-3). 그 후에 다시 미스바로 돌아와 암몬을 먼저 공격하기 위해 나갔습니다. 입다가 영을 힘입어 이들 지역을 종횡무진하는 장면을 역동적으로 그려냅니다.

 

(2) 입다의 서원(30-31)

 

여기까지만 보면, 이전의 전쟁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완벽한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함께 출정하는 입다의 모습에서 전쟁의 승리가 기대되는 때, 예상치 않게 입다의 서원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나가기 직전에 입다는 여호와께 서원합니다. 자신의 손에 암몬을 넘겨주시고(30), 자신이 평안히 집으로 돌아오면, 집에서 맨 처음으로 마중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겠다고 합니다(31).

원래 이 대목은 일반적으로 여호와께서 승리를 확신을 주시는 위치인데, 입다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나선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려는 모습입니다.

 

이 입다의 서원을 볼 때, 비록 암몬에게는 하나님께서 입다를 이스라엘에게 주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판단을 맡긴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이 전쟁은 자신의 모든 것이 걸린 전쟁으로 길르앗의 머리가 될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길르앗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사람을 번제로 들이는 이교적 제의를 하나님께 서원한 것입니다.

입다가 하나님의 법을 잘 몰라서 그랬거나, 가나안 문화에 너무 져져서 이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 체험적으론 잘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고 서원을 통해 마치 보험이라도 드는 듯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런 입다의 모습은 기드온보다 더 영적으로 타락한 모습입니다. 기드온은 일단 모든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워하였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쟁할 때는 온전히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입다는 인신 제사라는 서원을 통해 여호와의 전쟁조차 그 의미를 퇴색시켰고 하나님을 조건에 좌지우지되는 분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원래 여호와께서 주인공이고 인간은 보조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서원을 통해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보조자로 만든 것입니다.

 

(3) 승리를 주신 하나님(32-33)

 

입다가 전쟁을 하는 장면은 매우 간략하게 표현됩니다. 입다 이야기에서 전쟁 장면이 중심 이야기가 아니라 다음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에 그치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 이스라엘 자손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승패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여기서는 너무나 당연한 듯 여호와께서 그들을 입다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말과 함께 입다가 차지한 성읍의 명단이 나오면서 전쟁 이야기가 정리됩니다.

입다는 모압과 이스라엘 경계 부분인 아로엘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암몬과 길르앗 경계가 되는 아벨 그라민과 도시들을 전부 정복하여 암몬 자손을 길르앗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매우 큰 승리를 한 것입니다(33). 여기서 암몬과의 전쟁 문제가 해결되어 이야기가 정리되는 듯하지만, 이 땅의 서원과 전쟁의 승리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됩니다.

 

서원 제물로 드려진 입다 딸(34-40)

하나님께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과 협상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터무니없는 소원을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끌어내려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상숭배의 본질인 것입니다.

 

34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37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38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40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34-40)

 

입다가 대승을 거두고 미스바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돌아올 때, 경솔한 사원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의 집에서 입다의 딸이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습니다.

본문에 입다가 소원할 때 했던 말인 ‘나와서 영접하다’라는 말을 반복하여, 딸이 입다의 서원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입다의 딸이 무남독녀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34). 입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딸이 영문도 모른 채 즐겁게 소고 치고 춤추며 아버지를 마중 나온 것입니다. 이 장면은 너무나 비극적인 장면으로 입다의 서원이 끔찍한 비극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입다는 자신의 딸이 마중 나온 것을 보고 옷을 찢으며 한탄합니다(35). ‘왜 하필 내가 나왔냐?’라고 원망합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딸을 책임으로 돌립니다.

 

결국, 그가 이 전쟁을 온전히 하나님의 전쟁으로 들이지 않았기에, 그의 승리도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자신의 딸을 죽이는 상처뿐인 승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입다의 말을 들은 딸은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받아 아버지가 말한 대로 행하라고 말합니다(36). 여기서 ‘아버지’와 ‘당신’이 다섯 번이나 나와 그녀는 이 상황의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주셨으니 아버지도 자신의 선원을 갚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36). 그녀는 약속을 지키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우리 인간도 자신의 말을 지키는 진실성을 보여야 한다고 신앙 고백한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고 신실하셨기에 인간도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입다의 딸의 신앙 고백은 전혀 신실하지 않은 입다나 길르앗 사람이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명백히 다른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 고백, 또한,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무지함에서 비롯된 순진함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난 잘못된 서원은 이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보이는 신실함은 아닙니다. 그녀와 입다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입다의 서원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입다의 서원과는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여호와의 전쟁이었습니다.

 

딸은 두 달만 말미를 달라고 부탁합니다(37). 자신이 처녀로 죽는 것을 애곡하기 위해 친구들과 산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처녀라는 것은 ‘젊다’라는 뜻이며 ‘인생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다’라는 것을 강조한 편입니다. 그녀에게 후손이 없으며 입다에게도 후손이 전혀 없다는 의미도 됩니다. 입다는 이를 허락하였고 그녀는 정말 두 달 뒤에 돌아와 아버지의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하였습니다. 입다의 딸의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쓰는 것이 너무나 끔찍한지, 본문은 ‘그는 자신의 소원대로 딸에게 행하였다’라는 간접적인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39).

 

이런 입다의 딸을 기리기 위해 이스라엘 딸들이 1년에 한 번씩 나흘씩 애곡하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레위기 27장 2-8절에 따르면, 잘못된 소원은 돌이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으며, 서원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죄가 되면 서원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입다와 그의 딸은 이것을 몰랐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딸의 희생에 눈을 감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입다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킴으로 자신이 원하는 길르앗의 머리 자리를 얻었습니다.

입다에 딸은 사사기 내에서 최초로 희생된 여성입니다. 이전까지 여성들은 축복받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용감한 여성들로 긍정적으로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입다에 딸은 본인은 신실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기에 어이없이 실행된 여성입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점점 타락할수록 여성들의 처지도 점점 열악해집니다. 1장에서 갈렙은 자신의 딸을 보호하고 풍성하게 해줄 샘을 주는 보호자로서의 아버지였지만, 입다는 자신의 딸을 죽이는 어리석은 아버지로 둘은 대조됩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가족 관계도 깨지며 보호자인 아버지가 자식을 희생시키게 됩니다.


입다의 딸은 죽음으로 신실함을 보이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입다의 딸을 대신할 숫양을 보내시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불신실함을 드러내고, 미신적이며 우상적인 행태에 철퇴를 가하시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신앙이 말씀에서 이탈할 때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들은 반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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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1-02)

 

 

 


암몬과의 외교전을 피는 입다

사사기 11장 12-28절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 담대해야 합니다. 강한 자들의 부당한 주장과 요구 앞에 위축되지 않고 합리적으로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적으로, 영적으로 준비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하지만 정당한 논리라고 해서 악을 설득하거나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호소하며 신실하심을 의지해야 할 이유입니다.

 

  • 입다는 암몬 왕과 길르앗 소유권을 두고 분쟁을 벌립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를 근거로 암몬 왕의 주장이 터무니없음을 밝힙니다. 그 땅을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셨으므로, 암몬은 그 뜻을 거스르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합의가 실패로 돌아갔고, 이제 전쟁이 임박했습니다.

 

입다와 암몬의 왕의 분쟁(12-13)

역사를 바르게 기억하지 못한 민족은 불행은 계속 반복되어 집니다.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깨어 있지 않을 때, 악한 세력들은 역사를 왜곡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고, 선한 사람들을 향해 부당한 요구가 반복되어 집니다. 입다는 무리한 암몬 왕의 주장에 대해 바른 역사관으로 대항합니다.

 

12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하니 13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사자들에게 대답하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제 그것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 하니라(12-13)

 

입다는 길르앗 장로들에 의해 그들의 머리로 임명됩니다. 먼저 첫 임무로 암몬의 도발에 대해 투입됩니다. 입다와 길르앗 간의 권력 절충이 끝나고, 입다와 암몬 왕 사이의 길르앗 땅 소유권에 대한 논쟁이 기술됩니다. 이들의 대화에 대부분은 입다의 장황한 연설 내용입니다.

 

고대에는 전쟁하기 전에 서로 사자들을 보내어 말싸움을 먼저 합니다. 이는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상대방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입니다. 입다는 전쟁하기 전에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고 자극합니다(12).

이제 막 길르앗의 머리가 된 입다는 암몬 왕에게 사신을 보내는 모습은 왕처럼 행동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길르앗 땅을 ‘우리 땅’이나 ‘우리 민족의 땅’이라고 하지 않고 ‘내 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내 땅’이라는 표현은 왕이 자신의 왕국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는 먼저 사자를 보내어 암몬 왕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전쟁의 원인이 암몬에게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이에 암몬 왕은 길르앗, 즉,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는 원래 암몬 땅이었는데,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후에 점령하였기 때문에 이제 평화롭게 돌려달라고 으름장을 놓습니다(13). 이곳이 원래 자기 땅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순순히 항복하고 길르앗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거절 시에는 전쟁을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암몬 왕이 길르앗 땅을 차지하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어떤 명분이나 순리에 의한 것이 아닌, 그저 힘의 논리로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해져 약해져 있을 때, 자신의 영토를 넓히고자 하는 야망뿐입니다.

 

역사 회고를 통한 입다의 변론(14-22)

우리가 어떤 상황 가운데 처하던 그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여 이성적 논리로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과 역사에 대한 준비된 지식만이 잘못된 주장을 막을 수 있습니다. 바르게 세울 수 있습니다.

 

14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다시 사자들을 보내 15그에게 이르되 입다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점령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6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광야로 행하여 홍해에 이르고 가데스에 이르러서는 17이스라엘이 사자들을 에돔 왕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청하건대 나를 네 땅 가운데로 지나게 하라 하였으나 에돔 왕이 이를 듣지 아니하였고 또 그와 같이 사람을 모압 왕에게도 보냈으나 그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가데스에 머물렀더니 18그 후에 광야를 지나 에돔 땅과 모압 땅을 돌아서 모압 땅의 해 뜨는 쪽으로 들어가 아르논 저쪽에 진 쳤고 아르논은 모압의 경계이므로 모압 지역 안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며 19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당신의 땅으로 지나 우리의 곳에 이르게 하라 하였으나 20시혼이 이스라엘을 믿지 아니하여 그의 지역으로 지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을 모아 야하스에 진 치고 이스라엘을 치므로 21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의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매 이스라엘이 그들을 쳐서 그 땅 주민 아모리 족속의 온 땅을 점령하되 22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와 광야에서부터 요단까지 아모리 족속의 온 지역을 점령하였느니라(14-22)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하는 암몬 왕의 주장에 대해 왜곡된 부분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전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암몬 왕에게 입다는 가급적이면 전쟁보다 평화를 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자를 보내,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두 가지 이유로 길르앗 지역이 이스라엘의 소유이며, 그 요구가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가 증거로 제시한 내용들은 출애굽부터 광야 여정 동안 이스라엘과 에돔, 모압, 아무로 족속 사이에 있었던 사건들입니다(민 20-24방; 신 2장).

 

첫 번째 이유로 14절에서 18절에서 입다는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은 암몬과 모압 땅을 점령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출애굽 여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자신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홍해까지 왔고, 거기서 다시 가데스까지 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에돔과 모압 땅으로 지나가려고 사자를 보냈지만, 그들이 허락하지 않아 가데스 광야에 머물다가 모압 동편 경계인 아르논 진을 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정중하게 요청하지만 거절당한 것입니다.

여기서 입다는 아르론의 모압의 경계라는 것을 강조하며, 자신들은 모압 땅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실 광야에서 길르앗으로 오는 가장 좋은 길은 애굽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남북으로 놓인 왕의 대로를 지나는 루트입니다. 그래서 에돔과 모압에게 사자를 보내어 길을 통과할 수 있게 허락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나 민수기에 암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이 길은 에돔과 모압을 통과하지만, 암몬은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단 동편의 사건을 다루는 신명기 2장 37절에 따르면, 암몬 땅은 가까이 가지 않았다라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이 암몬뿐 아니라 에돔과 모압과도 싸운 일이 없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입다는 이어 두 번째 이유를 이스라엘이 차지한 길르앗은, 원래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다고 말합니다. 입다는 아모리 땅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이나 에돔처럼 아모리에서도 사자를 보내 땅을 지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압과 에돔과 달리 지나가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군사를 모아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이렇게 아모리가 이스라엘과 전쟁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왕 시혼과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넘겨주셨고, 이스라엘이 그들을 이겨 아모리 사람들의 땅을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입다는 이 같은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 자손은 아르논에서 얍복까지와 광야에서 요단까지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아르논은 모압과의 경계에 흐르는 강으로 최남단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얍복강은 최북단 경계를 말합니다. 광야에서는 요단까지는 동편 경계와 서편 경계를 말합니다.

 

변론의 종결과 암몬의 거절(23-28)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면,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해박한 지식이나 경험 그리고 달변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항상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입다는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며 암몬의 불법적 요구를 거절합니다. 용기 있는 선택을 합니다.

 

23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아모리 족속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옳으냐 24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한 것을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 25이제 네가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느냐 그가 이스라엘과 더불어 다툰 일이 있었느냐 싸운 일이 있었느냐 26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마을들과 아르논 강 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주한 지 삼백 년이거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 27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였으나 28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가 사람을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23-28)

 

입다는 길르앗이 암몬 자손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구구절절하게 논증한 후, 이스라엘이 아모리 땅을 계속해서 점령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1)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신 땅

 

첫째,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신이 땅을 준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입각하여 자신들이 이 땅을 차지한 것은 이스라엘의 신은 여호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입다는 당시의 세계관과 신관을 가지고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2) 모압 왕 발락보다 더 잘났느냐고 질문함

 

둘째 논리는, 당신이 모압 왕 발락보다 더 잘 났냐고 묻고 있습니다. 입다가 말하는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땅을 차지하자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저주하기 위해, 당시에 매우 유명한 선지자로 알려진 위대한 사람 발람을 부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저주 대신 축복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과 전쟁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이렇게 현재 암몬 왕보다 훌륭한 발락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전쟁도 못하였는데, 내가 감히 할 수 있겠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3) 이미 이 성읍에 거주한 지 300년이 지남

 

셋째, 이미 이 성읍에 거주한 지 300년이 지났다고 말합니다. 입다 시대를 대략적으로 주전 1100년경으로 보는데 가나안 정복 시기는 대략 주전 1400년 경이 됩니다.

26절에 언급된 ‘헤스본’는 아모리 왕 시혼이 살던 수도로 아르곤 강가 북쪽에 위치합니다. 아노엘은 아르론 강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합니다. 이렇게 이 땅들은 원래 아무리 땅이었음을 다시 암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한 걸음 양보에서 암몬 왕의 주장대로 이곳이 안 온 사람들의 땅이었다면, 왜 300년 동안 그 땅을 도로 차지하지 않았는지 묻습니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옛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길르앗 땅의 소유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한 입다는 마지막으로 이런 암몬 자손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판결해 달라고 기원합니다. 이때는 여호와를 사사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호와만이 이스라엘과 세상의 사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다의 말해 보면, 그가 역사와 구원과 하나님께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지식만인지 아니면 신앙인지 의문이 듭니다. 뒤에 나오는 이때의 행동을 보면, 지식과 신앙이 분리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분명 바른 지식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바른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올바른 신앙인은 아닙니다.

 

이런 입다의 말을 들은 암몬 왕은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을 시작합니다. 아마도 처음부터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싸움에서 일단 입다가 승리하였습니다. 암몬 왕은 대구할 말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8절의 암몬 왕은 막무가내로 입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있다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어떤 단어들을 사용하고 말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화술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제 자기가 입을 다물어야 될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기에 다음 단락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지도자로 세워진 입다는 암몬의 부당한 소유권 주장 앞에 합리적 논리로 반박합니다.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논리로 부당성을 논박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는 변방에서 잡류와 어울려 살았지만, 역사적 신앙적 의식만을 또렷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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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1-01)


입다를 사사로 선택한 이스라엘

사사기 11장 1-11절


세상에서는 외적인 조건을 보고 지도자를 선택합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사람의 배경을 그 사람의 능력보다 중요시하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기준이 다릅니다.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워지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신 이유를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 입다는 길르앗의 아내가 낳은 아들들에게 쫓겨나 돕 땅에 거주했는데, 잡류가 그와 함께합니다. 암몬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암몬과 싸워 달라고 청합니다. 입다는 자신이 그들의 머리가 된다는 확답을 받고 그들과 동행합니다.

 

입다의 출생 배경(1-3)

세상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지 않고, 그 사람의 출신, 가문, 스펙이나 능력을 따라서 평가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한 인식보다는 그 사람의 환경이 얼마나 더 소중한가를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오늘날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이러한 차별을 당해본 적 있습니까? 차별은 큰 아픔으로 상처로 남을 가망성이 있습니다.

 

1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2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3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1-3)

 

영적인 지도자가 없는 암흑한 시기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본문은 느닷없이 입다 이야기가 나옵니다. 길리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로 소개되지만, 이는 기드온과 동일한 호칭으로 군사적으로 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사적으로 이스라엘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입다는 기생이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보다 더 출신이 좋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생은 몸을 파는 여인을 의미하므로 창세기의 율법에서 여호와께서 가증한 직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기생과 길르앗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자입니다. 그렇지만 그를 길르앗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기생에게서 태어났어도 길르앗의 아들로 인정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길르앗의 부인의 아들들은 입다에게 기억을 주지 않겠다면서 입다를 내쫓아버립니다.

그래서 길르앗 사람들, 특히 이복형제들은 입다가 출신이 미천하다고 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든 자녀에게 유산을 나눠주는 이스라엘의 상속법을 깨뜨린 것이므로 유산을 나눠주기 싫어 형제를 쫓아 내버린 행동은 이스라엘 백성이 점점 악해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급기야는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 방황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타의에 의해 고향 길르앗을 등지게 된 입다는 길르앗에서 동북방으로 20여km 떨어진 돕으로 도망해서 살았습니다. 그는 고향을 떠나서 살았는데, 그에게 지도자 자질이 있었던지 여러 잡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점차 많은 떠돌이가 입다에게로 몰려들어 그를 추종했습니다. 만약 입다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은 채 살았다면, 자신의 추종 세력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되돌아와 형제 부모에게 보복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난동을 부리는 불량배로 전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배경이나 스펙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그 사람의 신실함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을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차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이유로 차별하고 있는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입다(4-11)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은 바른 신앙입니다. 자신이 먼저 결정해 놓고 도움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이 아닌 도우미나 종으로 전락시키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암울한 사사 같은 시대를 살지 않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4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5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6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7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 8그러므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매 9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10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11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4-11)

 

이 본문은 10장 18절과 연결됩니다. 정치적 약자를 이용하다 쓸모없으면 폐기 처분하려던 무정한 이들의 의도는 사사 시대에 어두운 단면이자 비정한 이 세상의 민낯입니다. 인격이 아니라 효용성에 따라 속보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값을 매기는 세상을 성도인 우리는 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1) 입다는 찾은 장로들(4-6)

 

암몬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은 전쟁이 임박했습니다(4). 암몬과의 전쟁을 앞두고 길르앗 장로들은 형제들에게서 쫓겨난 입다를 데리러 돕 땅까지 갔습니다(5).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에게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6). 이 단어는 주로 군사적 지휘관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장로들보다 낮은 지위로 그들의 명령 아래 길라 군대 장관이 되어 달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서 싸워줄 용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2) 장로들의 제안을 수락한 입다(7-9)

 

입다는 길르앗 장로들의 부탁에 대해 먼저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는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라는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 입다가 그들에게 감정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을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라고 따집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이제 힘들다고 자신을 부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화를 내는 것이며 그 말 속에는 조롱도 포함돼 있습니다. 사실 형제들이 입다에게 유산을 주지 않고 쫓아내기 위해서는 길르앗 장로들의 법적 승인이 있어야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장로들도 입다의 형제들과 한통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입다는 이들에게 당당하게 따지며 조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입다는 장로들의 잘못된 행동을 간접적으로 지적하면서 협상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합니다. 입다에 강한 저항과 조롱의 길라 장로들은 결국 한발 물러서며 입다에게 머리를 숙입니다. 그들은 입다가 가서 암몬과 전쟁을 해준다면 길라 주민의 머리로 삼겠다고 제안합니다(9). 여기서 ‘머리’는 군사적 정치적 우두머리를 의미하며,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의 마음을 얻기 위해 1개 군대 장관이 아닌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전쟁만 하면 머리로 삼겠다는 장로들의 제안에 입다는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입다가 장로들의 파격적인 제안, 즉, 전쟁만 해도 머리로 삼겠다는 제안에서 한 발 물러선 것으로 전쟁에서 이기면 머리가 되겠다라는 뜻입니다. 입다는 이 사람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져 어떤 조건이라도 들어주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전쟁에 지면 책임을 물어 자신을 다시 쫓아낼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는 자신이 확고부동하게 길르앗의 머리가 될 조건을 내세운 것입니다. 만약 전쟁에 이기면 아무도 입다가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그를 내게 넘겨주시면’이라는 표현은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라고 말한 것인데 보통은 매우 신앙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과연 입다가 정말로 전쟁의 주인은 여호와이시며 여호와께서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는 조금 더 확실하게 전쟁의 승리를 얻고 싶은 욕망으로 어리석은 소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는 말로는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다’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사실을 온전히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전쟁에서 승리했을 경우 입다의 입지를 매우 강력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면, 이것은 여호와께서 입다에게 주신 승리가 되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경우에 입다는 여호와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되기에 아무도 그의 지도자 자격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게 됩니다. 입다의 발언은 순수한 신앙의 발로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자신의 입지를 공고하기 위한 방책일 뿐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모여서 지도자를 세우는 모습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며, 다시 한 번 암시적으로 왕의 모티브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여호와 앞에 나간 입다(10-11)

 

입다의 제안에 길르앗 장로들은 여호와를 증인으로 삼아 자신들이 입다의 말대로 전부 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10). 장로들 생각에 일단 입다가 전쟁에 나오면 전혀 손해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입다와 길르앗 장로들은 모두 여호와를 입에 올리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진위는 모두 의심스럽습니다.

이런 거래를 통해 길르앗 사람들은 전쟁을 하기도 전에 입다를 자신들의 머리와 장관으로 삼았고, 입다는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자신의 말을 다 아뢰는 절차를 밟아 이스라엘의 사사가 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길르앗 장로들과 입다가 언약을 세우시는 모습입니다.

 

당시, 여호와께 대한 제사와 예배와 신탁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재구성하기 어렵습니다. 추측건대, 여호와께 제사 지내는 제단 앞에서 길르앗 장로들과 입다는 언약 의식을 했을 것입니다. ‘사사가 되었다’는 말은 없지만 12장 7절에 비추어 보면, 사사로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사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셨지만, 입다는 사람들에 의해 선택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절차를 거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줄지 고민하고 계신 사이에 사람들이 먼저 사사를 선택하여 하나님 앞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큰 자비하심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입다를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입다에게 소중한 기회를 주셨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풍성한 삶을 누릴 기회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사람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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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0-02)

 


책망을 듣고 회개하는 이스라엘

사사기 10장 10-18절


어떤 사람이 길을 걷다가 웅덩이에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 그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또 나중에 그 길을 가다가 다시 웅덩이를 지나다가, 다시 빠져서 죽을 고생 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향해 ‘바보’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이런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위기만 모면하다가 환경이 좋아지면 범죄하는 행동이 반복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 아비멜렉 후에 일어난 사사 돌라와 야일이 통치하던 시대는 45년 동안 사회가 안전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평화의 시기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보다는 점점 타락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평화가 타락을 부르는 기회가 됩니다.

 

구원의 요구를 거절하신 하나님(10-14)

많은 크리스천 중에 신앙이 성장하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무안 반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환경이 좋아지면 하나님을 떠났다가 나빠지면 다시 돌아오는 삶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무한 반복적으로 배반하고 형식적인 회개하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을 베풀지 않습니다.

 

10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11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12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13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14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10-14)

 

이스라엘은 특별한 사람들이었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특별한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고, 특별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다른 민족들과 같이 악을 행하였습니다. 블레셋과 암몬에 의해 18년 동안 압제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긴 죄를 범했다고 고백하며, 전에 없던 회개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자신 하나님을 버리고 발을 섬기며 범죄하였다라고 고백합니다 ‘범죄하였다’라는 이 원어의 의미는 길을 잘못 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여행하며 장거리 운전을 할 때 목적지로 가는 올바른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하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길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이탈하면 영원한 생명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늦게라도 회개했으니 다행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그리 쉽게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반응은 이스라엘에 대해 냉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건져 주시기 전에, 지금까지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동안 어떻게 구원하셔 주셨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모두 일곱 민족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을 언급합니다. 애굽에서부터 시작해 근래의 마온(미디안)까지 하나님께서는 일곱 민족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11-12). 숫자 ‘7’는 완벽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일곱 민족으로 구원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벽하게 구원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완벽하게 구원하여 주셨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그때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13)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이 섬겼던 신들에게 구원을 요청하라고 하셨습니다(14). 하나님의 이런 반응은 당연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매일 돌아보아야 합니다. 매일 삶의 길을 점검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삶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말씀에 비추어 봐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회개의 길을 막으시기 전에 그 길에서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회개에 약하신 하나님(15-16)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귀를 막고, 마음을 닫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때려서라도 막힌 귀와 마음을 열게 하십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있음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해보면,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던 평안이 얼마나 큰 축복 가운데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5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16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15-16)

 

하나님의 단호한 말씀 앞에서 이스라엘은 다시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처분을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간구를 거절하셨지만, 이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구해 주실 분이 오직 여호와 한 분이심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서 이번에는 진심 어린 회개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회개가 말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자신의 죄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까지 보입니다(15). 이스라엘은 징벌은 달게 받을 것이니 제발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구합니다. 스스로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하나님만 섬기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때문에 마음 아파하십니다(16).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이스라엘의 곤고함(고통)’(16)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매 맞는 자식을 보며 아파하는 아버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이스라엘을 보시고 마음을 돌이켜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움직이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말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회개는 삶의 온전한 변화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행동으로 옮깁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반드시 죄의 뿌리가 뽑힐 것입니다. 오늘 죄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기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근심(17-18)

하나님의 사랑을 쉽게 여기는 것은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은혜를 받은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다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그렇게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외칠 때는 마음과 귀를 닫고 교만하게 굴던 자들이 이제야 겸비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17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을 치고 18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17-1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곤고로 인해 근심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위해 사사 입다를 세우심으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을 압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했습니다(고후 7:10). 세상 근심은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며 말씀이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합니다(마 13:22). 그래서 모든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리시는 평강으로 극복해야합니다(빌 4:6-7).

 

반면에 자신의 죄로 인한 성도의 거룩한 근심은 회개의 열매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근심은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회개보다 앞서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눅 15:11-32).


삶에도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자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고자 악한 영적 세력의 우리를 가두고자 싸움을 걸어옵니다. 전쟁은 생명이 걸린 싸움터입니다. 말씀과 기도 믿음으로 영적 싸움을 진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영적 무기는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면,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우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회개로 죄의 뿌리를 뽑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누리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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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0-01)

 

 

 


이스라엘을 위한 소 사사 둘라와 야일

사사기 10장 1-9절


미국에서 대학 농구를 10회나 우승한 ‘죤 우든’이라는 전설적인 감독이 있습니다. 한 기자가 우승의 비결을 물어보면서 선수들에게 무엇을 강조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특별한 훈련 방법이나 기술에 대해서 말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 감독이 지극히 평범한 것들을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수들에게 평범한 것을 소홀히 여기면, 중요한 순간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처럼 평범한 일상이 매우 중요합니다.

 

  • 아비멜렉 뒤를 이어서 둘라와 야일이 사사가 됩니다. 그 후 이스라엘은 또 악을 행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깁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며 이스라엘을 블레셋과 암몬의 손에 파십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고 암몬이 요단을 건너와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사사 둘라(1-2)

대부분 사람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이름을 남기는 삶에 집중하다가 욕심에 이끌리는 죄의 삶을 살기도 하고, 평범한 삶을 하찮은 삶으로 취급하는 잘못된 태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삶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삶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한 영웅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1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 2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이십삼 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1-2)

 

사사기 10장에서 대 사사 기드온과 삼손 사이에 두 사사가 소개됩니다. 이 소 사사들은 이전 사사들의 성격을 이어받습니다. 사사는 기본적으로 군사적으로 구원자의 역할을 담당하지만, 기드온부터는 왕처럼 백성을 다스리는 다스리는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10장에 등장한 소 사사 역시, 구원자 역할을 하는 사사와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 사사로 나뉘게 됩니다.

 

아비멜렉의 잘못된 통치와 그의 종말이 있고 난 후, 잇사갈 지파의 도도의 아들, 부아의 아들인 돌라가 새로운 사사로 등장합니다. 그에 대한 성경에서 소개는 매우 짧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였고, 사사로 23년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표현은 웃니엘과 소 사사인 삼갈에게 사용된 표현입니다. 이것은 돌라가 군사적 사사로 이스라엘을 적의 손에서 구원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전 사사들을 통치기간이 40년 혹은 80년인 것에 비해, 통치 기간이 23년밖에 안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타락으로 평화의 점점 짧아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거의 50년 가까이 평화를 누립니다. 하지만 평범한 삶 속에 조용히 비극의 씨앗들은 뿌려지고 있었고, 결정적 전환이 이뤄지자마자 이스라엘은 악을 향해 질주했습니다. 겉으로는 별 문제 없었던 상황에서 엄청난 일들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아비멜렉 바로 뒤에 사사 돌라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삶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했고, 23년 동안 사사로 있다가 죽었습니다(1-2). 돌라의 삶에는 아비멜렉과 같은 극적 드라마(혹은 코미디)가 없습니다. 돌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했고, 아무 문제 없이 이스라엘에 23년이라는 긴 평화의 시기를 가져왔다는 내용만 전해집니다. 어찌보면 그는 특별한 문제 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사로 볼 수 있습니다.

 

사사 야일(3-5)

우리의 겉모습은 변함없이 괜찮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물질과 이기심에 타협한다면 아마도 다른 문제의 싹이 우리 안에서 계속 자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는 계속되었지만, 그 과정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이 조금씩 더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4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5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3-5)

 

돌라의 뒤를 이어 소 사사 야일이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길르앗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에 22년간 평화가 이어집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을 통칭해서 부르는 명칭으로 지파에 이름은 아닙니다. 요단 동편은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입다도 길르앗 사람으로 나옵니다.

 

야일도 돌라와 비슷하게 22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습니다. 야일의 특이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구원하였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야일이 군사적 구원하지 않고 다만 다스리는 역할을 한 사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그는 아들 30명이 있고, 어린 나귀 30마리를 타고, 성읍도 30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30명이나 되는 것은, 아들이 70명이나 되는 기드온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 나귀는 값비싼 이동수단이었던 것을 볼 때, 이들이 부와 지위를 누리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성읍이 30개라는 것은 이들이 각각 성주로서 다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볼 때, 야일은 왕처럼 살았을 뿐 아니라 자식들에게까지 부와 지위를 물려준 왕정국가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삶을 산 것을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기드온 이후 왕과 같은 사사의 모습이 이스라엘에서 점점 많아졌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악행하는 이스라엘(6-9)

종종 죄와 욕망을 쫓아가다가 그것에 잡아먹힌 사람들을 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죄를 선택하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죄악은 마약처럼 결국 사람을 지배하게 됩니다. 마음과 영혼을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우리가 소유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욕망과 탐욕은 우리보다 우월한 힘을 가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6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7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8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9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6-9)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것을 사사기에서는 이방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섬기지 아니했다’라는 세 가지 동사로 묘사했습니다. 동사의 종류로는 ‘섬기다’와 ‘버리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의 이야기와 비교할 때 매우 특이한 점은 이들이 일곱이나 되는 신들(바알들, 아스다롯,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 자손의 신들,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각 민족이 섬기던 하나님의 ‘신’이 아니라 여러 ‘신들’을 섬겼다고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섬긴 신은 일곱 종류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야말로 가나안 만신전에 있는 모든 신을 섬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배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이스라엘의 악에 진노하셔서 이방 민족의 손에 그들을 넘기셨습니다. 그들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 또한 가중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이방 민족의 압제 아래 놓이게 하셨지만,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들과 암몬 자손, 두 이방 민족에게 이스라엘을 넘기셨습니다. 이후에 입다는 암몬 자손,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과 관련된 문제를 다르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암몬과 블레셋에게 넘기신 그해에 그들이 요단 동편 길르앗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치고 억압합니다. 단순한 정서적 압박이 아니라 누르는 힘에 의해 파괴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은 암몬과 블레셋에 의해 부서지고, 눌리고, 깨어졌습니다. 길르앗은 입다 이야기의 지리적 배경이 됩니다.

 

이방 민족들에 의해 이스라엘은 심각한 고통을 받았습니다(9절). 그 고통은 블레셋과 암몬과 아모리 족속 때문이라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진노하사'라고 알려 줍니다. 우리가 범하는 가장 치명적 실수는 하나님과 세상을 분리하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시간, 장소, 행동 혹은 감정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한다면, 하나님은 곧 우리에게 진노하실 것입니다.

 

결국, 야일이 죽은 후에 문제가 터집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온갖 이방의 신들을 섬겼습니다(6). 어찌 보면 순식간에 천지개벽이 이뤄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사의 존재 때문에 대놓고 나타나지 않았지, 조금씩 이방의 문화와 가치관이 이스라엘을 잠식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볼수 없는,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조금씩 하나님 아닌 것에 자리를 내어 준다면, 우리에게 세속적 즐거움을 주던 것들이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우리를 지배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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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9-04)

 

 


아비멜렉의 최후

사사기 9장 42-57절


올림픽은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의 축제입니다. 운동선수들은 올림픽을 기다리며 그 동안 땀과 노력의 씨앗을 뿌립니다. 운동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고 메달을 획득한 후 인터뷰한 것을 보면, 모두 동일하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올림픽을 준비하며 흘린 땀방울이 헛되지 않는 것 같아 기쁘다’라는 인터뷰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선한 것을 심으면 선한 열매가 열립니다. 마찬가지로 악을 심으면 저주와 심판이 찾아옵니다.

 

  • 본문은 죄의 씨앗을 심었던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심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보루에 불을 놓아 세겜 망대 안 사람들을 다 죽입니다. 그가 데베스의 망대를 공격할 때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그의 머리 위로 내려던집니다. 아비멜렉은 여자에게 죽임당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무기든 청년에게 죽여 달라고 합니다. 이는 그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갚으신 것입니다.

 

파괴를 일삼은 삶(42-49)

지금 시대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포기하고 방해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가 삶의 가장 우선순위를 둡니다. 항상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마음 가짐을 새롭게 하며 살아갑니다.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의 삶이 아니라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42이튿날 백성이 밭으로 나오매 사람들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알리니라 43아비멜렉이 자기 백성을 세 무리로 나누어 밭에 매복시켰더니 백성이 성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그들을 치되 44아비멜렉과 그 떼는 돌격하여 성문 입구에 서고 두 무리는 밭에 있는 자들에게 돌격하여 그들을 죽이니 45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는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46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갔더니 47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지매 48아비멜렉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살몬 산에 오르고 아비멜렉이 손에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를 찍어 그것을 들어올려 자기 어깨에 메고 그와 함께 있는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가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하니 49모든 백성들도 각각 나뭇가지를 찍어서 아비멜렉을 따라 보루 위에 놓고 그것들이 얹혀 있는 보루에 불을 놓으매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으니 남녀가 약 천 명이었더라(42-49)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과 서로 연합하여 아비멜렉의 왕국을 만드는 일에 협력하였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지원했고, 그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연합한 사이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 배신하며 이제는 가장 미워하고 보복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에 대한 아비멜렉의 보복은 가알과 합세하여 자신을 배반한 세겜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이 일에 연루되지 않은 무고한 세셈 사람들까지 죽였고 성을 헐었습니다(42-45). 그의 보복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겜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세겜 망대에 살던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서 엘브릿 신전의 보루(堡壘)로 들어갔습니다(46). 보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튼튼하게 쌓은 성의 시설물로, 주로 소규모 성곽을 일컫습니다.

이 ‘엘브릿 신전’은 9장 4절에 나왔던 ‘바알브릿 신전’과 같은 곳으로 추정됩니다. 바알 우상을 섬기는 곳입니다. 결국 세겜 망대 사람들이 위기를 피하고자 들어간 곳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신전으로 피난처를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이 사실을 알고는 부하들을 이끌고 살몬 산으로 올라가서 나무를 찍어와서, 그 보루 아래에 나무를 놓고 불을 질러서 그곳에 있던 세겜 사람들 약 천명을 모두 죽였습니다(49). 자신을 왕으로 섬긴 백성들을 너무 잔인하게 죽인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은 보호를 받으러 들어간 신전 안에서 자신들이 세웠던 왕에게 불타 죽는 비극을 맞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섬긴 신과 왕은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가짜 신과 왕으로 들어났습니다. 정말 요담의 저주에 등장한 ‘가시나무’처럼 아비멜렉은 백성들을 불로 태워버렸습니다.

 

이렇게 아비멜렉을 협력해서 여룹바알(기드온)의 아들들 70명을 죽인 세겜 사람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요담의 관점에서 보면 인과응보이고,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9장 24절에서 분명히 그들을 향해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에게 저지른 포학한 일을 갚되 그들을 죽여 피 흘린 죄를 그들의 형제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9:24)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피난처에 숨은 사람들을 죽이는 모습은 아비멜렉을 매우 비겁한 전사로 보게 합니다. 아비멜렉은 나무를 찍어 어깨에 매면서 곁에 있던 부하들에게 자신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행하라고 명령합니다(48). 이것은 7장 17절에서 기드온이 그의 부하들에게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라고 했던 말과 같습니다. 아비멜렉이 세겜의 망대를 허무는 것은, 기드온이 브니엘 망대를 허무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이렇게 아비멜렉과 기드온의 말과 행동에 유사성을 통해서 아비멜렉의 사건이, 기드온의 폭력적인 유산이란 것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죽음과 평가(50-59)

미움의 감정으로 일어난 분노가 멈추지 않을 때 큰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 피해는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큰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미움으로 일어난 분노를 키우지 않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크게 키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에 대해서만 바라봐야 합니다. 자기 통제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선하고 올바른 말과 행동으로 대응하는 것을 노력해야 합니다.

 

50아비멜렉이 데베스에 가서 데베스에 맞서 진 치고 그것을 점령하였더니 51성읍 중에 견고한 망대가 있으므로 그 성읍 백성의 남녀가 모두 그리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간지라 52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53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54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55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각각 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 56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57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50-59)

 

아비멜렉은 언제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가져다주었던 방식이기에 그는 학살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던 살육의 현장에서 자신이 살육당하는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악은 결국 돌고 돌아 그의 머리 위에 떨어졌습니다.

 

(1) 아비멜렉의 죽음(50-55)

 

아비멜렉의 보복은 그가 죽기 전에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뚜렷한 이유 없이 전쟁을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관차처럼 아비멜렉의 분노가 계속 폭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겜 성읍을 초토화 시키고,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까지 찾아가서 불을 질러 1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아비멜렉은 세겜에서 끝나지 않고, 데베스라는 지역까지 진격합니다. 이 지역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세겜에서 북동쪽 약 18km에 떨어져 있는 위성도시으로 추측합니다. 아비멜렉은 세겜만이 아니라 위성도시인 데베스까지 점령하여 세력을 넓히려고 시도합니다. 만약, 데베스 사람들이 세겜 사람들과 함께 아비멜렉에게 맞셨다 하더라도, 아비멜렉의 이렇게 베데스를 공격한 행동은 지나치게 잔인하고 폭력적입니다. 그는 이미 성을 점령했고, 그 성 사람들이 견고한 망대로 도망한 상황에서(51) 무차별 살육을 자행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은 이전처럼 평화적인 방법이 아니라 폭력적인 방법으로 데베스를 점령하였고, 데베스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피하려고 성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가 숨었습니다(51-52). 이에 아비멜렉은 망대로 도망한 사람들과 담판을 지으려 하지도 않고, 세겜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망대를 불태워 모두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아비멜렉이 데베스 망대를 불사르기 위해 망대에 다가가는 순간, 데베스의 한 여인이 맷돌 한 위짝을 아비멜렉에게 던져 그의 머리를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사용하던 맷돌은 보통 현무함으로 된 두 개의 돌로 되어 있습니다. 맷돌 아래짝은 무겁고 납작하거나 약간 굽은 돌로 그 위에 곡식을 넣고 조금 더 가벼운 돌로 위짝을 만들어 곡식을 갈아서 가루를 만들었습니다. 맷돌 위짝의 무게는 약 2-3kg 되었기 때문에, 여인이 집어 던지기에 크게 무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깨뜨리다’라고 번역한 단어는 다른 곳에서 쓰임은 잔인한 압제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것으로, 압제자 아비멜렉에 부족한 사람의 죽음에 매우 어울리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한 여인의 용감한 행동이 아비멜렉을 저지하였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한 바위에 자신의 형제 70명을 죽인 아비멜렉은 결국 한 여인이 던져 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름도 남편의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아비멜렉의 죽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이름도 없는 한 여인에게 왕이라고 자처하는 자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죽어가는 아비멜렉의 말 속에 여인의 손에 죽는 것이 얼마나 치욕적으로 여겼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그는 한 청년에게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54)라고 고백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죽음을 비참하고 치욕적인 고백한 것입니다. 한 청년이 아비멜렉이 죽기 직전에 그를 찔러서 죽게 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무리 이 사실을 감추려고 했어도 결국 그는 여인이 던져 맷돌에 맞아 죽은 왕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이 여인은 드보라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야일과 마찬가지로 여인의 가재도구를 이용하여 적장을 죽인 영웅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일과 달리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사시대는 뒤로 갈수록 여성의 인권이 유린되는데, 영웅적인 여성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것은이런 분위기에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아비멜렉에 대한 평가(56-59)

 

아비멜렉에 대한 결론적인 평가입니다. 아비멜렉의 죽음에 대한 논평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아비멜렉은 시스라처럼 여호와의 적으로서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후 각기 자신의 처서로 돌아갔습니다. 아비멜렉의 죽음 이후는 사사의 죽음 이후에 나오는 평안 도구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비멜렉이 사사가 아니란 것과 올바른 지도자가 없는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70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 기드온에게 행한 악행을 이같이 갚으셨고(56),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도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여룹바알의 이들 요담의 저주가 성취되었습니다(57). 다른 한편으로는 요담의 저주에 나타난 두 가지 요소가 차례로 성취된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보이시진 않는 하나님께서 배후에 계시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사건의 전환을 주도하시는 장본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악행과 세겜 사람들의 악행에 대해 심판하셨습니다. 특히 자신의 욕망을 위해 형제들을 가차 없이 죽인 아비멜렉의 악행을 갚아주셨습니다. 요담이 우화를 말하며 선포했던 저주를 성취하심으로 심판을 이루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심판입니다. 데베스의 한 여인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요담의 저주를 성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비멜렉과 공모한 세겜 사람들에게도 요담의 저주가 모두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세겜와 아비멜렉은 자신들의 죄의 인과응보적 결과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요담은 당시 세계관인 인과응보적인 관점에서 아비멜렉을 저주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은 그 인과응보조차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인과응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 원리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선한 자에게 상을, 악한 자에게 벌을 주겠다고 결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인과응보는 기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상과 벌을 주시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시행됩니다. 본문 그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아비멜렉 이야기에는 하나님께서 악한 영을 보내시는 것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 거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지, 해설을 통해 아비멜렉에 대한 사건에 하나님께서 밀접하게 관계하시며, 그를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다만, 등장 인물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의 마음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살지 않을 때, 하나님의 하신 일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된 행위를 묵인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인간의 가식(8:22-32)이나 인간의 잔인함(9:1-55)도 왕 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의 자기중심적 야망은 하나님의 왕권에 양보해야만 합니다. 이것으로 기드온의 이야기가 완결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와 큰 영향력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선하고 가치 있는 일에 쓰임 받지 못한다면 결국 헛된 인생일 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말고 오직 주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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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9-03)

 


이기적인 욕망이 낳은 결과

사사기 9장 22-45절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심어 놓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농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삶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악을 심으면 악의 열매를 맺지만, 선을 심으면 선의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장차 좋은 열매를 거두길 원하신다면 지금 선한 열매를 심으시길 바랍니다.

 

  • 본문은 아비멜렉이 세겜에서 왕이 된 지 3년 만에,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세겜과 아비멜렉은 전쟁을 하게 되었고, 이 와중에 가알은 도망가고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게 철저히 패배하게 됩니다. 이 단락은 아베멜렉의 왕권이 어떻게 몰락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아비멜렉을 배신한 세겜 사람들(22-24)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의 소식을 들으면서 그것을 조롱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 속에 점점 멸망당해 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의 예언을 전해 그들이 심판을 면하고 영생을 얻도록 힘써야 합니다.

 

22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에 23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24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에게 저지른 포학한 일을 갚되 그들을 죽여 피 흘린 죄를 그들의 형제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 25세겜 사람들이 산들의 꼭대기에 사람을 매복시켜 아비멜렉을 엿보게 하고 그 길로 지나는 모든 자를 다 강탈하게 하니 어떤 사람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알리니라(22-2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강하게 하시는 방법은 주변 나라들을 약하게 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나라들이 스스로 자중지란에 빠져 망하게 하셨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방법은 이스라엘을 약하게 하시기보다 주변 나라들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중지란에 빠지게 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의 악행은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에게 치를 떨게 만듭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이, 약육강식에 힘의 논리, 간교한 외교술, 보복, 전쟁 등만 가득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3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스리다’라는 의미는 일반적인 단어인 ‘마샬’ 대신 ‘싸르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왕자(王子)로서 행동하다’ 혹은 ‘왕자로서 다스린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표현을 통해서 아비멜렉을 왕이 아닌 왕자 정도로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세겜 주민이 아베멜렉을 배반한 것에 대해,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을 죽인 것에 대한 피흘림의 복수를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에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악한 영을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23). 이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사사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보낸 것과 대조를 보입니다. 심판하실 때는 악한 영을 보내십니다. 이런 설명을 통해 세겜의 반란은 단순한 인과응보가 아닌 무제한 피를 흘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구체적 배반 행위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엿보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도질을 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의 눈치를 보면서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것은 아비멜렉의 지도에 도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있다는 사실이 아비멜렉에게도 알려집니다.

 

가알의 선동과 스불의 전략(26-33)

불의한 성공을 부러워하지도 의로운 패배에 절망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진실한 의로움이 없는 악인들의 불의한 연합과 연대가 무너질 것은 예언의 성취이자 하나님의 보응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악인들에게 오늘의 번영은 위장된 심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성공을 부러워하지도 의로운 패에 절망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26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의 형제와 더불어 세겜에 이르니 세겜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니라 27그들이 밭에 가서 포도를 거두어다가 밟아 짜서 연회를 베풀고 그들의 신당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니 28에벳의 아들 가알이 이르되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신복은 스불이 아니냐 차라리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우리가 어찌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29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더라면 내가 아비멜렉을 제거하였으리라 하고 아비멜렉에게 이르되 네 군대를 증원해서 나오라 하니라 30그 성읍의 방백 스불이 에벳의 아들 가알의 말을 듣고 노하여 31사자들을 아비멜렉에게 가만히 보내어 이르되 보소서 에벳의 아들 가알과 그의 형제들이 세겜에 이르러 그 성읍이 당신을 대적하게 하니 32당신은 당신과 함께 있는 백성과 더불어 밤에 일어나 밭에 매복하였다가 33아침 해 뜰 때에 당신이 일찍 일어나 이 성읍을 엄습하면 가알 및 그와 함께 있는 백성이 나와서 당신을 대적하리니 당신은 기회를 보아 그에게 행하소서 하니(26-33)

 

서로 미워하기를 그치고 사랑해야 합니다. 한때는 골육지친이라며 의기투합했던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이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미움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했습니다(요일 3:15).

 

(1) 가알의 등장으로 구체화된 반란(26-29)

 

26절에서 29절은 가알을 신뢰하는 세겜 사람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때까지는 세겜 사람 일부가 아비멜렉을 괴롭히는 정도였지만 가알의 등장으로 반란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가알은 에벳의 아들로만 소개되며, 어느 지파인지 어느 민족인지 전혀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에벳’은 ‘종’이란 뜻이며 직역함은 ‘종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가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첩의 아들에 이어 이제는 종의 아들이 왕이 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등장하자마자 세겜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였고, 그를 위해 새 포도주를 짜서 신당에서 먹고 마시는 연회를 열었습니다(27). ‘신당’이라는 말을 통해 바알과, 또한, 이방신을 섬기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세겜 사람들은 가알이 나타나자마자 그를 매우 좋아하고 신뢰합니다. 이런 행동은 아비멜렉의 몇 마디 말에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금방 가알의 편에 붙어 아비멜렉을 욕하였고 가알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이간질 합니다. 즉, 아비멜렉은 여룹바알의 아들이므로 세겜과는 관계가 없다라는 강조했습니다. 이전에 아비멜렉은 자신을 여룹바알의 아들 70명과 구별하여 자신의 어머니가 세겜 사람임을 근거로 친척과 곤욕이라는 끈끈한 유대감을 표시하며 왕으로 세움을 받았는데, 가알은 아비멜렉의 아버지가 여룹바알을 들어 세겜과 아비멜렉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합니다(28). 아비멜렉이 감추려고 애쓴 사실을 가알이 드러냈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필요에 따라 자신의 친척으로 여기기도 하고, 불리할 때는 남으로도 여기기도 한 것입니다.

간접적으로 이간질했던 가알은 이제 직접적으로 반역을 이야기합니다. 이 백성이 자신의 손에 있으면 자신이 아비멜렉을 제거하겠다고 하면서 아비벨렉에게 군대를 더 많이 만들어 자신에게 덤비라고 야유합니다(29). 이렇게 아비멜렉에 대한 도전과 비난을 통해 가알은 점차 세겜에서 자신의 세력을 얻어갔는데, 이것은 아비멜렉이 세겜에서 세력을 얻은 방법과 유사합니다.

 

(2) 아비멜렉에게 가알의 공격을 알림(30-33)

 

30절에서 33절은 아비멜렉에게 가알의 공격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이런 세겜과 가알의 동향을 스불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줍니다(30). 스불은 30절에서 세겜의 방백이라고 소개되었는데, 가알은 28절에서 그를 ‘아비멜렉의 신복’이라 부르면서도, 그와 아비멜렉 사이를 이간질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연회에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 달리 스불은 아비멜렉에게 가알과 세겜의 동향뿐 아니라 어떻게 전쟁을 해야 할지 작전까지도 알려주면서 아비멜렉에게 가알의 전쟁을 준비하라고 조언합니다. 아비멜렉은 세겜의 전폭적인 지지로 왕이 되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세겜이 아비멜렉을 대적하여 전쟁을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진압과 세겜성의 멸망(34-45)

누군가를 이용하는 관계의 끝은 비극적인 피해 보복과 파멸만이 남을 뿐입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서로 야합하고 악의 연대를 행했던 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오늘도 악의 연대가 아닌 선한 일을 위해 힘을 모으고 연대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34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밤에 일어나 네 떼로 나누어 세겜에 맞서 매복하였더니 35에벳의 아들 가알이 나와서 성읍 문 입구에 설 때에 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이 매복하였던 곳에서 일어난지라 36가알이 그 백성을 보고 스불에게 이르되 보라 백성이 산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도다 하니 스불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보았느니라 하는지라 37가알이 다시 말하여 이르되 보라 백성이 밭 가운데를 따라 내려오고 또 한 떼는 므오느님 상수리나무 길을 따라 오는도다 하니 38스불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전에 말하기를 아비멜렉이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리요 하던 그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이들이 네가 업신여기던 그 백성이 아니냐 청하노니 이제 나가서 그들과 싸우라 하니 39가알이 세겜 사람들보다 앞에 서서 나가 아비멜렉과 싸우다가 40아비멜렉이 그를 추격하니 그 앞에서 도망하였고 부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많아 성문 입구까지 이르렀더라 41아비멜렉은 아루마에 거주하고 스불은 가알과 그의 형제들을 쫓아내어 세겜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더니 42이튿날 백성이 밭으로 나오매 사람들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알리니라 43아비멜렉이 자기 백성을 세 무리로 나누어 밭에 매복시켰더니 백성이 성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그들을 치되 44아비멜렉과 그 떼는 돌격하여 성문 입구에 서고 두 무리는 밭에 있는 자들에게 돌격하여 그들을 죽이니 45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는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34-45)

 

세겜 사람들의 배신으로 반역은 시작되고 가알의 등장으로 구체화되었다가 결국 전쟁 상황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신복인 스불의 조언에 따라 밤의 세계에 매복하였습니다. 아베멜렉이 세겜을 치기 위해 매복하는 모습은 25절에서 세겜 사람들이 아베멜렉을 엿보기 위해 매복하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이것은 둘의 상황이 역전되어 엿보고 공격을 하던 세겜 사람들이 오히려 매복과 공격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둘 사이의 갈등이 점점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마침내 가알이 전쟁을 위해 성문 앞에 나와 섰고, 아비멜렉은 군사를 움직였습니다. 가알이 이 사실을 알아채고 스불에게 산꼭대기에서 사람이 내려온다고 하였지만, 스불은 잘못 본 것으로 일축하였습니다. 그는 아비멜렉 편에 서서 아비멜렉이 최대한 가까이 와서 전쟁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알이 알아볼 정도로 아비멜렉의 군대가 가까이 오자 스불은 가알을 충동하여 전쟁하게 합니다. 스불은 가알이 아비멜렉을 우습게 여기며 한 말을 인용하며, “네가 전에 말하기를 아비멜렉이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리요 하던 그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이들이 네가 업신여기던 그 백성이 아니냐 청하노니 이제 나가서 그들과 싸우라”(38)라고 조롱합니다.

스불의 말을 통해 가알이 도저히 물러설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가알이 물러서면 거짓말쟁이요 비겁자가 되는 상황이었다가 가알은 스불의 충동에 어쩔 수 없이 앞장서 나아가 아비멜렉과 싸웠지만, 결국 아비멜렉에게 패하여 도망하였고 스불은 이들을 세겜에서 쫓아내 버립니다.

 

40절에 나오는 “부상하여 엎드린 자가 많아 성문 입구까지 이른다”라는 표현은 아비멜렉이 세겜의 군대를 철저히 추격하여 그들을 모두 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동했던 가알을 쫓아낸 후, 아비멜렉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배신한 세겜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그 백성을 죽이고 그 성을 헐고 소금까지 뿌립니다.

 

44절에서 아비멜렉은 밭에 있는 자들을 공격하여 죽이는데, 이들은 무장하지 않는 민간인들을 의미하며, 이들을 죽이는 것을 통해 아비멜렉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무자비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왕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죽이고 있습니다.

 

45절에서 나오는 점령 순서는 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순서이지만 마지막 소금을 뿌리는 행위는 구약의 다른 본문에는 나오지 않아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대 근동의 문헌에 따르면 더 이상 사람이 번성하지 못하게 하는 저주 행위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아비멜렉은 자신을 배신한 세겜에게 철저하게 복수하였습니다. 이렇게 폭력으로 일어선 지도자는 결국 자기 백성도 폭력으로 대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불의하게 일어선 지도자와 그를 지지하고 세운 사람들에게 그 죄를 물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악인들을 짓밟으실 그 날이 이제 곧 올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지도자를 세우며, 서로 보복하지 말고, 말씀대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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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9-02)

 

 

 


세겜 사람들을 향한 요담의 항변

사사기 9장 7-21절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히틀러가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악한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 악한 계획을 실행해 가면서 다른 민족을 멸시하고 또 멸망시키려는 시도도 하였습니다. ㄱ러나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의 마지막은 비극적으로 끝났습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히틀러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악인의 악한 계획은 처음에는 그들의 의도대로 성공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죄의 시작은 언제나 멸망과 비극으로 끝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 있기 떄문입니다.

 

 

  • 요담은 그리심 산에 올라가 세겜 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이 옳으냐며 책망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 불사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3년 후 하나님께서 악한 영을 보내시니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합니다.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들에게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내리시려는 것입니다.

 

요담의 우화(7-15)

지금 있는 자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리입니다. 자격이 없는 이들은 자리만 탐하지만, 자격을 갖춘 이들은 주어진 자리에서 제 소임을 다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부르신 자리와 주신 은사를 서로 견주어 자랑하지도 위축되지도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일이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에 자신의 소명과 역할도 소중히 여기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7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8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9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0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1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2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3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4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5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7-15)

 

아비멜렉에서 가까스로 요담은 아비멜렉이 형제 70명을 한 바위에 죽었고,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세겜 사람들에게 항변합니다. 그는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으로 올라가 세겜을 향해 외칩니다. ‘나볼로스’라는 도시를 가리는 두 개의 산중 좀 더 남쪽에 있는 산으로 신명기 27장 12절과 여호수아 8장 30-35절에 축복의 산으로 나타납니다. 세겜이 그리심 산(남쪽)과 에발 산(북쪽) 사이의 골짜기란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요담은 축복의 산에서 세겜을 향해 저주하고 있습니다. 산꼭대기는 위급할 때 도망치기 유리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쉽고, 목소리가 아래까지 잘 전달됩니다.

 

요담은 소리 높여 세겜을 향해, ‘내 말을 들어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7)라고 외칩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령처럼 전합니다. 이 외침은 아비멜렉의 말(2)에 넘어간 세겜인들을 넌지시 비난하면서, 이제 자신의 말에 주목하여 하나님의 호의적인 응답을 기대하라는 권유입니다. 세겜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지만, 그가 의미하는 하나님의 응답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하고 완전한 판결입니다.

 

요담은 이와 같이 형제들의 죽음이나 그들을 죽인 장본인을 왕으로 세운 행동에 대해 개인적으로 보복하거나 물리적으로 충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을 미루어 볼 때, 이복형제들에 대한 아비멜렉의 말(2)은 왜곡된 주장이며 억측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말만 듣고 그들에게 해 끼칠 맘도 없었던 무고한 자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호의적인 응답은 받을 수 없습니다.

 

8-15절은 요담이 우화를 통해, 여기서 세 종류의 유익한 나무와 가시나무가 나옵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이 크나큰 실수임을 깨우치려 합니다. 우화에서 나무들은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울 나무를 찾아다니느라 분주합니다. 실제로는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분주합니다. 나무들은 감람(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순으로 찾아가 왕이 되기를 요청합니다. 왕 후보가 된 세 나무는 모두 자기에게 주어진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로 각각 기름과 포도주와 단 과일을 제공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만족합니다(9,13).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왕이 되기 위해 이런 귀한 가치를 버릴 수 없다며 거절합니다.

이때 ‘왕이 되는 것’은 ‘나무들 위에 흔들대는 것’(‘우쭐대는 것’, 9,11,13)으로 나와 왕의 직책과 아비멜렉이 왕 된 것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거절하자, 모든 나무는 가시나무를 찾아가 왕이 되라고 합니다.

위 세 나무와 달리 가시나무는 열매도 없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가치도 없으며, 가시로 고통만 줍니다. 이런 나무를 왕으로 삼으려 한 자체가 그들을 고통과 멸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주제를 모르고 반갑게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그는 나무들이 기름을 부어 자기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면, 자신의 그늘에 피하라고 호령까지 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불을 내어 레바논의 백향목이라도 살라버릴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실상 가시나무는 그늘도 거의 없으며, 나무들이 그 덤불 아래에 들어갈 수도 없고, 가까이 갔다가는 가시에 찔리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 가시나무가 불을 뿜어 최상의 목재인 백향목까지 태워버린 다니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우화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현실에서는 세겜인들이 가시나무 같이 가치도 없고 해악만 불러올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이미 무고한 자기 형제들을 죽임으로써 그의 가시와 불의 위협이 실제임을 증명했습니다. 요담은 세겜인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으므로 그들에게 가시와 불만 남았음을 예고합니다.

 

악인들에 대한 심판 예언(16-18)

성도는 악한 세력이 권세를 얻고 의인을 박해하는 상황에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 길로 행해야 합니다. 악한 자들이 잠시 동안 의인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므로 반드시 때가 되면 보응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16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의 손이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17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냈거늘 18너희가 오늘 일어나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의 아들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그의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들 위에 왕으로 삼았도다(16-18)

 

요담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세겜 사람들을 저주함으로써 우화에서 말한 가시나무가 아비멜렉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세겜 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우화를 통해 비유했습니다. 요담이 그리심 산에서 나무들의 비유를 하고 나서, 그 비유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이제 세겜 사람들의 잘못을 본격적으로 추궁합니다.

 

16절에서 3개의 질문을 통해 세겜 사람들의 잘못을 강하게 비난합니다. 첫째 질문에서 언급한 진실함과 의로운 문제를, 두 번째 질문에서는 그 대상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즉, 여룹바알과 그의 집에 대한 진실함과 의로움을 묻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에서 여룹바알의 행동에 대한 올바른 보담이냐고 묻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형식의 반복을 통해 내용을 점점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요담은 16절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을 통해 17-18절에서 설명해 가고 있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을 다 죽이고,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은 결코 의로운 행동이 아니란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서 자신들을 위해 미디안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해 여룹바알에 대한 보훈이 아니라 배신이라고 비난합니다.

여기서 요담이 아비멜렉을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닌 ‘여종의 아들’이라고 부름으로서, 아비멜렉이 진정한 상속자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부당한 일입니다. 기드온 가문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러면서 요담은 세겜 사람들에게 선택을 촉구합니다. 그들이 만약 계속해서 아비멜렉을 지지한다면, 아비멜렉으로 인해서 오히려 그들이 피해를 당할 것이고, 결국 아비멜렉도 죽임을 당할 것을 예고합니다. 그는 아비멜렉을 두려워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담대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예언의 성취(19-21)

의로운 왕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높이고 성공의 열매를 그들과 나눕니다. 하지만 악한 왕은 자기가 왕이 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부터 숙청하는, 소위 ‘토사구팽’(兎死狗烹)의 행태를 보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탐욕과 악이 가득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고 해를 입히게 됩니다. 성도는 거룩하고 선한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19만일 너희가 오늘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하고 의로운 일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려니와 20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21요담이 그의 형제 아비멜렉 앞에서 도망하여 피해서 브엘로 가서 거기에 거주하니라(19-21)

 

요담은 2개의 조건문을 통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저주합니다. 만일 세겜 사람들의 행동이 진실하고 의로우면, 아비멜렉으로 인해 기뻐할 것입니다(19). 만일 그렇지 않으면 아비멜렉에서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세겜과 밀로 사람들을 태울 것이며, 그들도 아비멜렉을 태울 것이라고 말합니다(20).

그러나 이미 앞에서 이들의 행동이 여룹바알에게 진실하지 못하고 의롭지 않았다 라고 비난했기 때문에 첫째 조건이 이미 어겨졌습니다. 그러므로, 둘째 조건이 서로 불이 나와서 서로를 태우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언약 관계를 어겼고 범죄하였기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언약 관계를 맺은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여룹바알로 바꾸고 있습니다. 즉, 세겜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여룹바알의 목숨을 건 헌신 때문이라고 해석하였고, 그래서 세겜 사람들은 여룹바알을 진심함과 온전함으로 대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이제 세겜과 여룹바알의 언약을 파괴한 거로 세겜 사람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여호와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지 않는 영향이 아비멜렉뿐 아니라 요담에게도 미쳤습니다.

 

세겜 사람들을 엄중한 경고하고 저주한 요담은 아비멜렉에 대한 복수를 위해 어떤 공격적인 행동이나 노력을 도모하지도 않고, 그저 모압의 경계에 있는 광야 브엘로 도망해 그곳에서 여생을 보냅니다(21). 즉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나안을 떠나 세겜이나 아비멜렉으로부터 먼 지역에 은신처를 찾고 그곳에서 평생 지내게 됩니다. 이렇게 여룹바알의 잘못으로 인해 자식 때 엄청난 비극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집을 파괴한 죗값은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의 유산을 잘 지키고, 함께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되기 위해 힘쓰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악인들이 흥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운 길을 가다 보면서 충성하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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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9-01)


야망과 이기심으로 왕이 된 아비멜렉

사사기 9장 1-6절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을 만큼 인간의 지배 욕망은 강렬합니다. 권력에서 나오는 전능감이 스스로 신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부패는 배교를 낳습니다. 기드온 시대에 종교적 부패가 자녀 시대에 배교를 낳은 것입니다.

 

 

  • 여룹바알(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자기 외가가 있는 세겜의 왕이 될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혈연에 호소하여, 주민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후원금으로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는 데 쓰고, 세겜의 왕이 됩니다. 아비멜렉의 죄와 이를 지지한 세겜 사람들이 죄가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아비멜렉(1-3)

부정적인 지도자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거짓된 정보와 과장된 말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 사람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어리석은 국민들은 자신들의 살을 갉아먹는지도 모르고, 이러한 악한 선동에 설득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한 지도자 설 수 없도록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1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2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3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1-3)

 

에룹바알(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첩에 아들입니다(8:31). 아비멜렉의 이야기가 기드온 이야기 뒤에 이어지는 후속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첩에게서 나은 아들이며, 아들들 중 첫째를 제외하고(8:20) 유일하게 이름이 언급되었습니다(8:30-31). 특히, 이름이 ‘내 아버지는 왕이라’라는 뜻입니다. 그는 첩의 아들, 그것도 이방 여인의 아들이었기에 이복형제나 다른 가족에게 한 식구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 고향인 세겜에 등장합니다. 세겜은 기드온의 고향인 오브라에서 남서쪽으로 10km,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65km로 ᄄᅠᆯ어진 곳에 위치했습니다. 세겜은 에브라임 지파의 도시로 이스라엘 중심부에 위치하며, 상업적 종교적으로 매우 유명하며 중요한 도시입니다. 남쪽에는 그리심 산이 있고, 북쪽에는 에발 산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한 다음에, 그곳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한 곳이며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했던 곳입니다.

그곳에 사는 지파는 북쪽 이스라엘에서 가장 강력한 에브라임 지파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기드온이 에브라임 출신의 세겜 여자를 아내가 아닌 첩으로 들린 이유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지만, 이유가 무엇이든지 세겜 여자를 첩으로 맞아 들렸다는 자체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어머니가 첩이며 이방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오브라에 있는 기드온의 집에서는, 정식 부인들의 아들들에 의해 신분상 낮은 위치에 있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는 기드온의 지위나 재산을 물려받는데, 매우 불리했습니다. 어쩌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처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은 ‘내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 자신의 아버지 기드온이 왕처럼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왕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습니다. 그는 오브라에서 정통적으로 자신이 기드온의 후계자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신을 지지해줄 사람들을 찾아 어머니의 고향 세겜으로 온 것입니다. 그는 세겜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자신 계획을 실행하여, 제일 먼저 외할아버지에게 가문 사람들을 모아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도록, 세겜 사람들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9장의 아비멜렉 서사는 그를 “여룹바알의 아들”로 소개하며 시작합니다. 이 서사에는 ‘기드온’이란 이름이 아예 나오지 않고 ‘여룹바알’로만 언급됩니다(2, 5[2], 16, 19, 24, 28, 57). 저자가 ‘바알이 그와 싸우라’는 뜻의 ‘여룹바알’만 고집한 것은 의도적인 전략인데, 바알 대적자인 기드온과 바알 숭배자들(세겜인들과 이들의 지지를 받는 아비멜렉)을 대조시키려는 목적입니다. 기드온은 바알 제단을 찍고 하나님의 제단을 세움으로써 바알과 다퉜습니다(6:27-31). 이제 아비멜렉은 바알 숭배자들과 손잡고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과 다투려 합니다.

아비멜렉이 모친의 고향(8:31)인 세겜에 온 목적은 이곳의 왕이 되기 위함입니다. 그는 왕이 될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장래에 거침돌이 될 수 있는 이복형제 70명을 제거할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아비멜렉의 ‘스스로 왕 만들기’ 작전은 혈연에 호소하여 세겜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겜의 사람들’(바알레 쉐켐)이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로 번역된 단어가 ‘바알’의 복수형(베알림)입니다. ‘바알’은 ‘주인’의 뜻도 있으나, 사사기에서는 줄곧 우상 신을 가리켰습니다(2:13; 3:7; 8:33). 여기서는 ‘세겜의 주인들’의 의미로서 세겜 성읍 주민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바알 숭배자임을 알려줍니다. 이 호칭은 9장에서 15회나 나와 ‘바알’을 계속 상기시키며 세겜에 바알 숭배가 편만했음을 부각합니다(2,3,6,7,18,20,23[×2],24,25,26,39,46,47, 51).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아비멜렉은 먼저 그곳의 외가 친척들의 지지를 얻어 그들을 조력자로 이용합니다. 그는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도록 세겜 사람들에게 자기를 선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는 세겜인들이 자기를 왕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자기 한 사람이 세겜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이 다스리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을 포함하여 기드온의 아들들이 왕 될 자격이 있음을 전제로 말합니다. 실상 기드온은 왕처럼 살았지만, 왕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서 왕이 되라는 요청을 받고 거절했지만(8:23), 그는 ‘내가 다스리는 게 어떻겠느냐?’며 스스로 왕의 자리를 구합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을 대적에게서 구한 업적을 세우고도 왕의 자리를 거절했지만, 공적도 없는 아비멜렉은 적극적으로 그 자리를 탐합니다. 기드온의 70명 아들들도 유명한 사사의 아들이란 명목으로 지역에서 실세 노릇을 했겠지만, 왕으로 다스리지는 않았습니다. 아비멜렉은 사실을 부풀려 70명의 형제들이 다 왕좌를 노리는 것처럼 설명합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여룹바알”로 부름으로써 바알 숭배자인 세겜인들로 하여금 기드온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일으키게 유도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의 자식들의 다스림에도 거부감을 느끼고, 그들 대신 아비멜렉을 지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아비멜렉이 ‘그들의 뼈와 그들의 살’이기 때문입니다. ‘뼈와 살’(골육)이라는 표현은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고 자신의 형질과 똑같음에 감탄하며 표현한 말입니다(창 2:23;참조. 창 29:14; 삼하 5:1). 골육을 내세우는 것은 자신을 왕으로 세워 서로 덕을 보자는 의미입니다.

아비멜렉은 외가 친척들의 연합과 열성으로 세겜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비멜렉의 회유에 말려들어 그의 충성스러운 대변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아비멜렉의 말은 세겜 모든 사람의 귀에 전달되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우리의 형제’라며 그에게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혈연에 하소연하여 세겜의 왕이 되려 했던 아비멜렉의 작전이 제대로 맞아떨어졌습니다.

 

자기 형제들을 죽인 아비멜렉(4-5)

이방신, 즉 우상은 옳고 그름에 문제보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성취해 주는 역할에 그칩니다. 욕망은 탐욕을 만들고, 탐욕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성도들은 탐욕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욕망을 채워 줄 지도자를 따르는 것은 공멸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4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5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4-5)

 

아비멜렉을 지지하기로 결심한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70개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줍니다. 이것은 바알브릿 신전이 아비멜렉의 왕권을 지지한다는 표시인데, 바알브릿은 8장 33절에서 언급된 신으로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대신 따르던 배교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알브릿 신전의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비멜렉의 왕권은 처음부터 이방신의 지지를 받고 성립된 배교적인 정권임을 보여줍니다.

 

아비멜렉은 왕이 되는데 세겜에서 용병을 사서 물욕을 키웁니다. 그들을 데리고 오브라의 아버지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자신의 이복형제 70명을 한 바위 위에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세겜 주민들은 ‘바알브릿’(‘언약의 바알’, 8:33) 신전에서 은 70세겔(798g)을 아비멜렉에게 후원금으로 줌으로써 말만(3)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를 왕으로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4). 이는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데 바알의 동의와 지지를 얻었음을 함축합니다. 세겜인들의 물질 지원은 기드온의 무고한 아들들을 없애는 데 동의하고 공조하는 행동입니다. 기드온이 바알을 부수고 여호와의 제단에 수소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헌신을 보였을 때(6:25-27), 오브라의 바알 숭배자들은 그에게 보복하지 못했습니다(6:28-31). 이제 세겜의 바알 숭배자들이 그의 아들들을 죽여 보복함으로써 바알에게 헌신을 표현합니다.

 

아비멜렉은 은 70개 후원금으로 무모한 무법자들을 조력자로 구했습니다. 본문에서는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4)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고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기에 그는 용병을 사서 세력을 키운 것입니다.

그는 오브라로 가서 한 바위 위에서 자기 형제를 다 죽입니다. 여기서 아비멜렉의 잔인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비멜렉의 형제 사실을 강조합니다. 자기 왕권을 위해 형제들을, 그것도 한 바위에서 한꺼번에 몰살시킨 무자비하고 패륜적인 인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 왕정 국가에서는 왕이 되기 위해, 혹은 왕이 된 후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형제를 죽이는 일이 흔했습니다. 하지만 사사시대에는 권력을 위해 형제들을 죽이는 일들은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아비멜렉이 보여주는 고대 사회의 왕권 탈취에 모습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지도자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을 다스리다가 죽은 후, 그 왕권을 세습하지 않고, 새로운 지도자가 선택되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보다 얼마나 잔인하고 인륜을 저버린 채 욕망에 충실한 모습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왕들을 죽여 자기 형제의 죽음에 보복했으나(8:18-21), 그 아들 아비멜렉은 왕이 될 욕망을 위해 자기 형제를 죽입니다. 우상 하나의 제작비가 은 200세겔(2.28kg 인데(17:4), 이들을 처치하는 데는 은 70세젤(798g)이 들었으므로, 한 사람의 소중한 목숨이 은 1세겔(11.4g)의 헐값에 사라진 것입니다.

그가 죽인 자들은 ‘여룹바알의 아들’이자 ‘그의 형제’로 설명됩니다(5). 이는 그들이 바알 대적자 기드온의 자식들임과, 아비멜렉의 골육지친임을 강조합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자신이 ‘골육’임을 강조하여 세겜인의 환심을 샀으나(2), 정작 70인 형제의 목숨을 앗아갈 때는 그들이 세겜 주민들보다 훨씬 더 가까운 자신의 ‘골육’임을 무시했습니다.

이로써 기드온의 권세와 영화를 상징하던 아들들은 그의 한 아들로 인해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형제 모두가 살육당해 핏물을 이루었을 현장은 아비멜렉의 대담함과 폭력성과 잔인성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기드온의 장자인 여델이 두려워하며 적장을 감히 죽이지 못했던 것(8:20)과는 아주 대조적인 장면입니다. 바위 위에서 형제들을 처단한 아비멜렉은 후에 맷돌 짝에 머리가 부서져 죽게 됨으로써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54).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제들이 당한 폭력과 흘린 피를 기억하고 계십니다(24).

한편, 이 순간에도 70명의 아들 중 막내 요담은 살아남았습니다. 자기 형제들이 살해당할 때 가까스로 숨어,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요담은 아비메렉의 정권이 붕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아비멜렉이 형제들을 잡는 중에 몸을 숨겼고, 5절에서 아비멜렉의 형제 70명이 죽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요담 대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종이나 다른 자가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세겜의 왕이 된 아비멜렉(6)

욕망의 노예가 된 자에게 사람은 존중에 대상이 아니라 자기 이해에 따라 얼마든지 이용하거나 제거될 수 있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통제되지 않는 지도자의 야망과 자기 욕망을 채워 줄 지도자를 거절하지 않고 따르는 맹목적인 추정은 위태로운 공생이고 공멸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의 멸망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6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6)

 

마침내 아비멜렉은 세겜의 왕이 됩니다. 그를 왕으로 추대한 자들은 세겜의 모든 사람들과 “밀로 모든 족속”입니다. ‘밀로 족속’은 직역하면 ‘밀로의 집’이므로 밀로 가문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세겜인들에 버금가는 권세가일 것입니다. 아니면 대부분의 번역본처럼 ‘벧밀로’라는 지명일 수 있습니다. 이들을 ‘세겜 망대 사람들’(46)과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편, 왕을 세운 장소로 세겜의 상수리나무 기둥이 소개됩니다. 기둥은 ‘세워진 것’이란 뜻으로서 기념비나 기념물을 뜻합니다. 이곳은 세겜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같은 곳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세겜의 상수리나무는 아브라함(12:6-7)과 야곱(창 35:4)과 연관되어 등장했습니다. 특히, 오늘 왕을 세운 장소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할 때 상수리나무 아래에 큰 돌을 세운 것을 상기시켜(수 24:25-26), 큰 대조를 이룹니다.

이렇게 아비멜렉은 이방 신전에 후원을 받아 자신의 형제 70명을 죽이고, 이방신을 섬기는 곳에서 이방 신 보호를 받으며 이스라엘의 최초 왕이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과정은 하나님이 철저히 무시되었고 오직 자기 욕망과 이방신만을 충실하게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아비멜렉의 모습은 아버지 기드온이 품고 있던 욕망을 실현한 것으로, 아버지의 부정적인 모습이 자식에게 얼마나 악영향을 미칠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은 잘 사용되면 백성을 압제에서 구원하고 평화로 이끕니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은 권력은 폭력성을 드러내어 공동체를 위기로 몰아갑니다. 결국, 분별력과 올바른 시민 정신이 짐승을 통제하고 길들여 보호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지혜와 통찰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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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8-03)

 

 

 


포장된 욕망, 노골적인 욕망

사사기 8장 22-35절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감추어진 마음을 볼 방법이 있습니다. 행동이나 말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입니다. 마음에 독이 있는 사람은 그의 말에 독이 가득합니다. 마음에 감사가 가득한 사람은 그 말에 감사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매일 가득 채운 사람은 입술을 통해 말씀의 능력이 흘러갑니다.

 

  • 본문에는 미디안과 전쟁 후, 기드온이 왕처럼 권력을 누리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신 분,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왕, 그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망각하고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기드온은 요구를 거절했지만, 어리석게도 그들에게 받은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이스라엘을 배역의 길로 이끕니다.

 

왕의 권력을 누리는 기드온(22-27)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 외에 왕으로 삼을 만한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만이 유일한 왕이 되지 않고서는 어디에도 참된 희망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다른 그 누구, 그 무엇에도 하나님의 왕좌를 내주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왕이신 하나님만이 다스리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또 누구를 통해 다스리실지 결정하실 것입니다.

 

22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23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24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25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에 던지니 26기드온이 요청한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 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초승달 장식들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또 그 외에 그들의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27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22-27)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구원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쟁을 하면서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기드온을 미디안을 물리친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에게 왕의 자리를 제안합니다. 사사기에서 왕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하지만, 왕이 되어달라는 백성의 요구에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라고 거절합니다.

기드온에게 요구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전체 백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기드온과 함께했던 300 용사이거나 므낫세 지파 사람들, 혹은 미디안 전쟁에 동참한 지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기드온과 후손들까지 왕으로 삼을 뜻을 내비칩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했으니 왕이 될 자격을 갖췄다고 여겼고, 그에게 기꺼이 충성을 바치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에게서 구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계시는 왕이 아닙니까! 백성들의 요구에 기드온은 자기나 후손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가 다스릴 것이라고 단호히 말합니다(23).

그렇지만, 기드온의 이 대답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한 장본인임을 언급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또한, 여호와는 앞으로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자신들을 다스리고 계시는 분임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기드온과 백성 모두는 왕을 구하는 행동이 왕이신 하나님을 버린 행동(삼상 8:7-8) 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간 왕을 원하는 경우에라도, 전쟁에 능한 용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 그를 경외하고 순종할 자가 왕의 자격이 있음을 간과했습니다(신 17:15-20).

왕의 자리를 거절한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그 대신 전리품으로 얻은 금귀고리를 요구합니다(24). 자신도 전리품을 많이 얻었을 터인데 남의 전리품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기드온은 미디안을 무찌른 공로가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왕의 자리까지 제안받았으니, 이 정도는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기드온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으니, 금품 요구를 못 들어줄 리 없습니다. 그들은 무려 17 00세겔(약 19kg)을 줍니다. 미디안인들이 교역하는 유목민들이라 매매를 위해 값진 물건을 소유했고, 금귀고리를 착용하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이 일이 가능했습니다(24). 그는 왕이라는 ‘명예’ 대신 ‘부’라는 실제적인 이득을 취한 것입니다. 이 외에도 부적인 초승달 장식, 패물, 미디안 왕이 입었던 값진 자색 옷, 낙타 목에 둘렀던 장식줄까지 기드온에게 건넸습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물품들은 주로 왕들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왕의 의복이나 패물들을 기드온에게 줌으로써 계속 왕처럼 대접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말로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왕이 되고 싶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에 보면, 그는 실제로 왕처럼 살다가 죽습니다.

기드온은 백성에게 얻어낸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그와 그의 집안과 공동체에게 신앙의 덫이 됩니다. 에봇은 금실과 은실로 만든 대제사장의 겉옷으로 레위인이 다룰 의복입니다(출 28장). 값지고 화려한 재료로 만든 에봇은 종종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사용되었습니다(출 28:30). 기드온이 사사로이 에봇을 만들고, 자기 거주지인 오브라에 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성막은 실로에 있었으므로 실로가 예배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브라에 에봇이 있으므로 사람들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제사하는 일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드온을 포함한 온 이스라엘이 에봇을 따라 음행했습니다(27). 이는 에봇을 우상에게 입혀 섬겼는지 그 자체로 우상화하여 숭배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에봇은 종종 드라빔이나 우상과 함께 동급으로 언급되며, 이 에봇의 우상화는 사사기에서 미가와 단 지파에게서도 포착됩니다(17:5; 18:14,18).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오브라에 있던 자신의 아버지집에 바알의 제단을 부수고 시작한 사역은,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었는데(6:25-27), 이제는 자신의 집에 우상을 세우고 언약 공동체를 헐고 우상 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눈에 옳다고 여겨 행하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 죄임을 알려줍니다. 또한, 지도자의 안일한 태도와 언행이 공동체의 신앙을 무너뜨릴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는 자신과 타인의 사상과 언행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이 기준이 되어야 함을 일깨웁니다.

 

기드온 가문의 번성과 그의 죽음(28-32)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많습니다. 전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을 떠나 엉뚱한 것을 왕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작은 일이 그러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매일의 일상적인 삶에서 일관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역경의 시험을 잘 통과한 사람이라도 순탄함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28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 29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이 돌아가서 자기 집에 거주하였는데 30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31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 32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가 많아 죽으매 아비에셀 사람의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되었더라(28-32)

 

이제부터 진행된 이야기는 기드온의 에필로그(맺음이야기)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그의 죽음과 장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사와 다르게 기드온은 그의 아들 이야기, 특히 아비멜렉에 대한 소개와 기드온이 죽은 후, 백성들의 배교를 언급함으로서 아비멜렉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자 평온이 찾아옵니다. 미디안은 7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했으나(6:1), 이제 이스라엘에게 복종하는 속국의 신세가 되었습니다(28). 그들은 다시 세력을 회복하고 더 이상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살아 있는 40년 동안 평화로운 세월을 누렸습니다. 기드온이 이룬 업적에 다른 나라들까지 이스라엘을 침공할 염두를 못했던 것입니다.

한편, 기드온은 전쟁 이후,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사기 저자는 29절에서 기드온 대신 ‘여룹바알’이란 이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9장에 아비멜렉의 이야기를 준비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 이름은 기드온이 그의 고향 오브라에서 바알의 제단을 파괴한 사건에서 나왔습니다. 그때 고향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분개했고,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며 기드온이 어떻게 될 것인지 두고 보자고 했습니다(6:32).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이후로 기드온의 신상에는 아무 일도 없었으며,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심으로써 기드온은 바알과 다투어서 이긴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또한 이 사건들을 통해 그가 참 신이심이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부르는 사람이라고 함으로서 그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우상이 있었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것은 기드온의 상태가 사사로 부름받기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에게는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많은 아내를 두었고, 그들로부터 아들 70명을 얻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30)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이는 왕의 규방(harem) 규모입니다. 고대에 여러 아내를 둘 만한 신분이 왕과 고위계층임을 생각하면 기드온은 유사한 권세와 영화를 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은 여러 아내를 둘 여지가 없으며(창 2:24), 왕에게도 일부다처를 경고하셨습니다(신 17:17). 실제, 많은 아내와 자녀는 가족 간의 분란을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기드온은 이 두 가지 말들을 어기면서 실제적으로는 왕처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70명의 아들을 얻으려면 부인이 20-30명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을 제외한 이스라엘의 어느 왕보다 많은 부인과 자녀의 수입니다. 자신은 왕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기드온의 말과 행동이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많은 아내 외에 첩도 두었습니다. 그 첩은 세겜 출신의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이 세겜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경계에 있는 도시입니다. 이로 보건데 기드온은 아마도 결혼을 통해 세겜과 동맹을 맺었던 것입니다. 이 또한 이방인과의 결혼 또한 율법으로 금한 규례이지만(신 7:3-4), 기드온은 이를 어겼습니다. 기드온은 첩이 낳은 아들 이름을 ‘아비멜렉’(내 아버지는 왕이라)이라 지었습니다. 비록 서자이지만 기드온이 왕임으로 자부심을 가지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실제로 왕처럼 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앞서 나온 맏아들 여델(8:20) 외에 나머지 아들에 대해서는 아무 소개도 없으나, 왕자 같은 이름을 얻은 첩의 아들은 특별한 주목을 받습니다. 앞으로 이 아들의 행보가 궁금해집니다.

 

기드온이 이런 부귀영화를 누린 것은 믿음의 전쟁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을 자신이 왕이 되는 전쟁으로 만들어버린 배신의 결과입니다. 32절에서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가 많아 죽으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면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평안하고 오래 살다가 죽었고, 그는 이스라엘의 전통대로 평안이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배역(33-35)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온전히 들어내는 자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들어낼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자신의 공적을 들어내면 하나님 백성이 아닌 자신의 추정세력으로 만드는 것에서 그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이 죽자 너무 쉽게 하나님을 배교합니다.

 

33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서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으며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34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35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아니하였더라(33-35)

 

기드온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 너무 쉽게 하나님을 배교합니다. 기드온이 죽은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로 여호와에게서 돌아섭니다. 이전과 같이 바알들을 음행하게 섬겼습니다. 이 모습은 기드온 집에 있던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것과 같은데, 이것은 기드온이 죽은 후, 이스라엘의 배교가 바로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기드온이 살아있는 동안 여호와 대신에 에봇을 음란하게 섬기는 본을 보였기 때문에, 기드온이 죽은 후, 바알의 음란하게 섬기는 길로 돌아가기가 매우 쉬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알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은 바알과 싸우는 자인 여룹바알(기드온)의 사역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습니다. 9장 4절에서 세겜에 ‘바알브릿’ 신전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신전을 만들고 이 신을 섬기는 제단과 형상을 만들었음을 보여줍니다.

‘바알브릿’은 ‘언약이 바알’ 또는 ‘언약의 주인’이란 뜻의 우상으로서 세겜 사람들이 숭배하던 신입니다. 우상을 ‘언약의 바알’이라 불렀다는 것은 그 우상과 언약을 맺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그 우상을 그들의 신으로 삼은 행동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음을 함축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알브릿’을 ‘엘브릿’(‘언약의 엘’, ‘언약의 하나님’)으로 부른 것(9:46)도 이 점을 시사합니다.

 

사사기 저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고 덧붙임으로써(34) 그들의 의지적인 거부와 무관심을 질책합니다. 주변의 모든 대적에게서 이스라엘을 건지신 분은 여호와이셨건만, 백성들은 참 하나님을 잊고 가짜 신을 하나님으로 삼는 배은망덕함과 어리석음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불성실함은 하나님께서 택한 지도자 기드온에 대한 불성실함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그들에게 베푼 선(은혜), 즉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선봉에 서서 사사의 역할을 감당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35절에서 기드온을 다시 ‘여룹바알’이라 부르는 것은 바알의 단을 헐고 여호와의 단을 쌓은 그의 행적을 상기시킴으로써(6:25-32) 현재 바알과 언약을 맺고 여호와를 잊은 이스라엘의 행실을 대비하고 꾸짖으려는 의도입니다. 백성들은 기드온과 그 후손을 왕으로 삼으려 할 정도로 충성과 헌신을 보였으나(22), 이제는 그와 그 집을 후대하지 않았습니다. 후대(‘헤세드’)는 언약의 기본적인 의무를 내포한 단어이므로 이스라엘이 기드온에게 마땅한 본분을 다하지 않고 배신했음을 암시합니다. 이들은 기드온을 배반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렸던 자들입니다(6:8-10). 이들에게서 부적절한 대접을 받는 기드온 또한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함으로써(8:24-27, 30-31)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기드온의 죽음 이후 백성들은 공공연한 바알 숭배로 들어섭니다. 바알과의 싸움에서 지고 맙니다. 그만큼 탐심의 뿌리는 깊고 집요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완전한 승리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날에 이르기까지 앞서가신 주님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주신 십자가를 지고 가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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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8-02)

 


숙곳 사람들을 징벌한 기드온

사사기 8장 10-21절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도와주고 났더니, 오히려 어렵게 했다고 한 말을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실제로 그런 경우를 당한다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미디안에서 구해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은 얼마나 황당하셨겠습니까?

 

  •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아 오다가 숙곳에 이르러 성읍의 장로들을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하고, 브누엘 망대를 헐고 사람들을 죽입니다. 한편 기드온의 맏아들 여델이 아직 어려서 세바와 살문나를 향해 칼을 빼지 못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을 죽이고 닉타 목에 장식을 떼어서 가져갑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의 두 왕을 사로잡음(10-12)

‘미래의 성공에 대한 가장 큰 장애물은 과거의 성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을 경험한 사람들이 과거의 성공에 붙잡혀 초심을 잃고 교만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공로로 돌리려는 태도는 사람을 이처럼 심각하게 타락시킵니다. 안타깝게도 기드온에게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가 어떤 유혹에 이끌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0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따라와서 거기에 있더라 11적군이 안심하고 있는 중에 기드온이 노바와 욕브하 동쪽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길로 올라가서 그 적진을 치니 12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진영을 격파하니라(10-12)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는 갈골에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1만 5천 명가량의 동방 사람의 군사도 그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죽은 동방의 군사들은 12만 명이었습니다(10). 그들은 그곳에서 안심한 채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기드온은 노바와 욕브하 동쪽 장막에 거주하는 자들의 길로 올라갔고, 쉬고 있던 그들의 진을 공격했습니다(11). 갑작스러운 공격에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자 기드온과 그의 용사들은 그들의 뒤를 추격했습니다.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는 곧 사로잡혔고, 그들을 따라온 군사들 역시 격파되었습니다(12).

 

숙곳 사람들을 징벌한 기드온(13-21)

세상에서는 기회주자가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자기 꾀에 죽게 됩니다. 영적인 부분에 기회주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과 하나님과의 중간에 있을 순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사역을 마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외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5)

 

13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오다가 14숙곳 사람 중 한 소년을 잡아 그를 심문하매 그가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들 칠십칠 명을 그에게 적어 준지라 15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 살문나를 보라 하고 16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17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 18이에 그가 세바와 살문나에게 말하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 19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20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 하였으나 그 소년이 그의 칼을 빼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 21세바와 살문나가 이르되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하니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들을 떼어서 가지니라(13-21)

 

기드온과 함께 미디안을 추격한 인원은 여전히 300명이었습니다. 미디안의 왕 세바와 살문나는 비록 전쟁에 대패하여 12만 명을 잃었지만, 갈골이라는 곳에 주둔한 그의 군대는 여전히 1만 5천 명 가령으로, 기드온의 군사보다 월등히 많았습니다. 하지만 미디안 미디안은 다시 한 번 대패하여 진영은 대파되고 두 왕은 사로잡힙니다.

 

(1) 숙곳 사람들의 징벌함(13-16)

 

요하스의 아들 기드온이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숙곳 사람 중에 한 소년을 잡아 그에게 숙곳에 관한 정보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기드온에게 숙곳의 방백과 장로 77명을 적어 주었습니다(14).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에게 그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습니다.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살문나를 보라”(15).

그리고 기드온은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고, 들가시와 찔레를 취해 그것들로 숙 사람들을 징벌했습니다(16). 숙곳 사람들은 앞서 군사들에게 식량을 나눠 달라고 했던 기드온의 요청을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욕적인 말로 그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세바와 살문나의 목숨이 지금 너희 손에 있다는 것이냐’라며 기드온 군대의 기량을 얕보았습니다. 기드온은 이 일을 마음 깊이 새기고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동방 사람의 군대를 격파하자마자 숙곳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경고했던 대로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의 지도자들을 처단했습니다.

 

(2) 브누엘 사람들을 징벌(17)

 

기드온은 숙곳에 이어 브누엘까지 징벌했습니다. 그는 브누엘의 망대를 헐었고 그 성읍 사람들을 죽였습니다(17). 브누엘은 숙곳보다 더 심하게 징벌을 받았던 것같습니다. 기드온이 방어를 목적으로 세워진 망대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성읍의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학살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드온의 행동은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브누엘 성읍은 가나안의 성읍, 즉 이방인들의 거주지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요단 동편 성읍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의 성격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는 민족과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말할 것도 없고 더 이상 예의 바른 언행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지도자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3) 기드온이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를 죽임(18-21)

 

기드온이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18). 기드온이 국가적 위기를 다룬 후 이제 세바와 살문나 및 자신의 일을 결산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왕들이 다볼에서 죽였던 사람들에 대해 묻자, 그들은 자신들이 죽인 자들이 기드온처럼 왕자들 같았다고 답했습니다. 이들의 대답은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 왕권 모티브를 소개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세바와 살문나는 기드온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기드온과 자신들이 죽인 사람들에 대한 인상을 묘사함으로써 기드온에게 아첨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답을 들은 기드온 세바와 살문나가 죽인 이들이 자신의 형제들, 자기 어머니의 아들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19). 이것은 기드온의 형제들이 격렬한 전투 중에 죽은 것도 아니고, 익명으로 죽은 것도 아니며, 분명히 미디안 왕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에게 기드온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어 기드온은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며 자신의 복수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19b). 여기서 기드온의 형제에 대한 언급은 이야기에 새로운 주제를 도입합니다. 그의 가족의 불행이 여호와께서 기드온을 구원자로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지만, 그가 초기에 보여 주었던 망설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기드온이 미디안 왕을 추격했던 동기가 여기서 새롭게 등장하여 그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과거 기드온이 신학적이고 민족적 동기로 행했다면, 이제는 단순히 개인의 복수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칼을 빼지 못했습니다. 아직 어려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20). 기드온이 자신의 맏아들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는 전쟁 중에 잡힌 중요한 미디안 왕들을 죽임으로 영광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소년이 전쟁에서 대적의 우두머리인 왕을 죽인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행하기에는 그 소년이 아직 어리고 그들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기드온이 이 일을 맡았습니다. 한편 미디안 왕들의 입장에서는, 기드온 같은 용사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부끄럽지 않지만, 소년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미디안 왕들은 기드온에게 죽임 당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을 취했습니다(21). 일종의 왕의 상징처럼 보이는 초승달 장식품을 기드온이 취함으로써 이스라엘과 미디안의 전쟁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원수에 대한 복수를 자체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원조는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도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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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8-01)

 


에브라임의 불만과 계속 추격하는 기드온

사사기 8장 1-12절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었을지라도 종종 복음을 잊거나 오해하며 살아갑니다. 복음에서 멀어질 때 나타나는 증상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었겠습니까? 육적이고 정욕적인 행동으로 모든 것을 결론짓습니다. 목적하고 있는 결과를 얻는 데는 반드시 참고 기다려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 기드온이 승리한 후, 에브라임 사람들이 왜 자신들을 처음부터 부르지 않았느냐고 따지자, 기드온은 그들이 미디안의 방백 오랩과 스엡을 죽였으니, 더 낫다며 화를 물어줍니다. 한편, 미디안의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할 때,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이 협조하지 않자 기드온은 보복을 선언합니다.

 

에브라임의 불만(1-3)

우리 성도들은 모든 부분에서 철저하게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울은 평생 온갖 수고를 다 하며 복음을 전하고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에서 멀어질 때 어떤 모습이 나타나겠습니까? 사람들이 복음으로 멀어질 때, 영적인 부분은 사라지고 육신의 욕심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1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2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3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1-3)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고 도망가는 무리를 뒤쫓는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내부에서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미디안과 전투 막바지에 참여해 도망치던 미디안을 요단강 나루에서 저지하고,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죽인 에브라임 지파가 기드온과 크게 다툽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자기들을 미디안과의 전쟁에 부르지 않았다며 시비를 건 것입니다(1).

 

이 장면은 사사기 내에서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갈등이 일어난 첫 장면입니다. 12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와 함께 가장 강력한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그들은 북쪽 지파들 중에 힘과 영향력이 가장 강한 지파입니다. 그런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해 강하게 항의한 것입니다.

기드온이 처음에는 에셀, 스블론, 납달리 지파만 불러서 전쟁을 하다가 병력이 부족하여지자, 나중에 에브라임 지파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왜 이렇게 강하게 항의하게 된 것입니까? 전쟁에서 승리한 후, 승전의 전과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리려는 이기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미디안에게 압제 당할 때는 잠잠히 있다가 이제야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매우 비겁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얻는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욕심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기여도에 따라 전리품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늦게 참여하여 기여를 적게 한 에브라임은 전리품을 적게 가져가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부르지 않는 것에 대해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자신의 몫을 더 얻어내려는 속셈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런 에브라임 지파의 모습은 희생하지 아니라고 하면서도 성과에 대해서는 집착하고 욕심을 내는 얌체 신앙입니다.

 

기드온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합니까? 기드온은 흥분하지 않고 이렇게 대처합니다. 그는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3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2-3)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분노를 풀어줍니다. 이것은 에브라임 지파가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죽인 영광을 취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통해 기드온은 에브라임이 자신보다 아주 위대한 일을 했다고 치켜세우면서, 전리품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뜻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기드온에게는 힘센 상대와 갈등을 말로 잘 조율하고 해결하는 탁월한 수완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 참여를 거부한 브누엘과 숙곳(4-6)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이 완전함을 보여 줍니다.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않으셨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을 잊을 때, 우리는 자기 안전과 유익을 스스로 보장하기 위해 급급하게 됩니다.

 

4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5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6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4-6)

 

4절에 보면,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장소가 요단강 동편으로 옮겨집니다. 거기서 직면한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의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넙니다. 군사들은 매우 피곤한 상태였지만, 추격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멀지 않는 숙곳에 이르렀을 때, 기드온은 이곳 사람들에게 피곤하고 지친 자신들의 상황을 알리고 먹을 것을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그리고 좀 더 호의를 얻기 위해 자신의 지금 미디안의 왕인 ‘세바’와 ‘살무나’을 추격하는 중이라고 설득합니다. 적들을 치기 위해 수고하고 있다고 말을 하면, 호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숙곳의 방백들의 반응은 기드온의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기를 거절했습니다. 그 방백들은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6)라고 거절합니다.

‘숙곳’은 요단강 동편 갓 지파의 영역임으로 그 지역명의 뜻이 ‘쉼터’입니다. 그런데 쉼터에서 양식과 휴식을 구했지만, 거절당한 것입니다. 이들이 거절했다는 것은 기드온이 자신들이 ‘세바’와 ‘살무나’의 수중에서 건져 줄 진정한 지도자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단 서편에서 일어선 기드온의 지도력을 요단 동편의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 5장의 드보라 노래에서도 요단 동편 지파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요단 동편과 서편 사이에 갈등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갈등은 후에, 입다의 이야기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복수를 맹세하는 기드온(7-9)

복음은 하나님을 대적해 죄를 범한 우리를 그분의 오래 참으시고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도무지 이러한 사랑을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기독교만이 지닌 엄청난 요구의 근거가 됩니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오직 먼저 이 사랑을 받은 자만이 시도가 가능한 명령입니다.

 

7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8거기서 브누엘로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9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7-9)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의 반응을 듣고서 다음과 같이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7)라고 복수를 맹세합니다. 즉 세바와 살무나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박대한 자들을 잔인하게 징벌하겠다는 뜻입니다.

기드온은 지금 자신이 이스라엘의 원수와 싸워 다시는 이스라엘의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피곤과 고생을 무릅쓰고 있는데, 정작 동족들이 불신앙으로 인해 자신의 돕지 않는 것에 대해 불같이 화가 나서 개인적으로 복수를 맹세한 것입니다.

 

그리고서 이곳을 떠나 좀 더 동쪽에 있는 ‘브누엘’로 갑니다. ‘브누엘’은 옛 ‘브니엘’이라고 부르는데,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실험한 곳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숙곳에 했던 요청과 동일한 요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 또한 속곳에서와 같이 불신앙적인 대답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또다시 자신이 평안이 돌아오게 되면, 브누엘 망대를 헐겠다고 복수를 맹세합니다.

 

이렇게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이 기드온을 돕는 것을 거절한 자신들이 지역적으로 미디안 군데가 진을 치고 있는 ‘갈골’과 멀리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만약 기드온이 전쟁에 지면, 기드온을 도운 자신들이 미디안 군대에게 큰 보복을 당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기드온은 물론이고 기드온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눈에는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보다 미디안 군대가 더 커 보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온전히 기드온과 하나님을 신뢰했다면, 자신들이 미디안에게 보복당할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고, 기드온과 갈등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기드온도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돕지 않은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맹세하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보라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지파에 대해 비난하며, 하나님 사자의 저주를 전달하였지만, 자신이 직접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나발이 자신을 돕지 않고 무시하자 그를 죽이겠다고 군사를 이끌고 왔다가, 그의 손으로 원수를 갚지 말라는 아비가엘의 지혜로운 조언을 듣고 돌아간 일이 있습니다.

 

이처럼 원수갚는 일은 여호와의 손에 달린 것인데, 기드온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박대한 동족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이 맹세로 인해 여호와의 전쟁은 요단강을 건너면서, 기드온 개인의 원수 갚는 전쟁으로 변질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분명한 명령이 주어진 것을 기억합니까?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주목할 때 대적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떻게 달라져야 합니까? 자신을 대적하고 손해를 끼친 원수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는 절대로 개인의 너그러움, 아량, 인품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치르신 대가, 주님을 대적하는 자가 받게 될 분명한 심판을 온전히 알 때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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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7-02)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대승한 기드온

사사기 7장 15-25절


독일 축구선수이며 감독이었던 프란츠 베켄바워는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하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성경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는 사람만이 이기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승리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된 기드온은 300명과 함께 미디안을 공격합니다. 그들은 항아리와 나팔과 횃불로 적진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적군을 교란시켜 도망하게 하셨습니다. 다른 지파들도 소환되어 적군을 추격했습니다. 기드온과 함께하실 것을 약속한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미디안 적진에서의 전면전(15-22)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서 영적 전쟁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는 전쟁과 하나님의 백성이 감당하는 영적 전쟁은 여러 가지로 차이점이 많습니다. 영적 전투에는 이미 승리했기에 눈에 보이는 세상의 규모나 힘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본문은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15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16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17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18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19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백 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20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21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22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15-22)

 

적군의 꿈과 해몽(13-14)을 들은 기드온은 승리의 확신을 갖고 전쟁에 임합니다(15-18). 그는 이 사건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헌신을 다짐합니다. 감격으로 이스라엘 진영으로 되돌아온 기드온은 용사들에게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다’고 외칩니다. 이 선언은 기드온이 적진에 가기 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며(9), 적군을 통해 반복되었고(14), 이제 기드온의 입으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을 세 대로 나누어 출격 준비를 합니다. 그는 모든 백성의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려 줬습니다. 항아리 안에는 횃불이 들어 있습니다. 앞서 언급된(8) 양식을 넣었을 항아리와 나팔은 병기 용도였던 것입니다. 전투를 앞둔 군인이 칼과 창이 아니라 나팔과 항아리를 가졌다니 어떤 전투가 벌어질지 궁금증과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기드온은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그대로 하라’고 지시합니다(17). 특히 ‘내가 하는 대로 그대로 하라’는 말을 반복하여 작전 성공을 위해서는 완전한 신뢰와 복종이 절대적임을 암시합니다. 기드온과 그의 소대가 나팔을 불면, 나머지 소대도 모든 적진 주위에서 나팔을 불고,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라고 합니다(18). 외침에서도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수장으로, 기드온은 사령관으로 나타납니다. 이 전략이 하나님의 명령인지는 언급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바락이나(4:6-7) 여호수아에게 주신 전략(수6:2-5)처럼 기드온의 전략 또한 인간의 눈에는 터무니없는 전략이지만, 이전처럼 이번에도 기적과 구원을 이루실 것을 기대하게 합니다. 전투가 시작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기드온과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십니다(19-22a). 기드온의 300명 군사는 그가 지시한 작전을 바탕으로 출동합니다.

19절부터 미디안과 요단 서편에서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8:3에서 마무리됩니다. 기드온은 군사 중 100명을 데리고 밤 10-11시쯤(이경 초) 미디안 초소 근방에 이릅니다. 밤에 빈 항아리와 횃불에다 나팔까지 들었으므로 조심스럽게 접근했을 것입니다. 그 시각 미디안 군대 파수꾼들은 교대를 막 마쳤습니다(참조. 대하 23:4-11). 이때 기드온과 군사들이 나팔을 불자 나머지 두 군데 군사들도 따라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 다음 손에 있는 항아리를 부수자 안에 들어 있던 횃불이 모습을 보이며 환하게 타올랐습니다. 이제 횃불을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으로는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쳤습니다(20). 이들 구호에 언급된 ‘칼’은 적군의 꿈 해석에서 언급된 ‘기드온의 칼’(14)을 연상시켜 하나님의 승리를 예고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손에는 정작 칼이 없었습니다. 300명이 동시에 부는 나팔소리,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 횃불이 뿜어내는 화염의 요란한 움직임, 군사의 함성과 구호 속에 들리는 여호와와 기드온의 이름은 오밤중에 적막을 깨고 골짜기 사방에서 울려 퍼졌고 이 소리는 잠자던 적군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기드온의 군대는 각기 자기 자리에서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진영을 에워싼 채로 있었습니다. 대조적으로 온 미디안 진영에서는 적군들이 뛰고 소리 지르며 도망했습니다. 모래처럼 많던 낙타와 짐승(12; 6:5)도 놀라 울면서 날뛰었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적진에서 적들은 서로를 적으로 오인하여 칼부림을 했습니다. 이 칼부림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의 결과였습니다(22).

하나님의 개입은 그가 바락 군대의 선봉에서 시스라 군대를 혼란에 빠지게 하신 일(4:15)과 폭우를 내려 대적을 휩쓸어버린 일(5:19–22)을 상기시킵니다. 바락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심과 승리의 약속을 신실히 지키셨듯이, 이번에도 약속하신 대로 동행과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22-25절의 전투와 함께 요단 서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135,000명 중 12만 명을 무찌르는 쾌거를 이룹니다(8:10).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6:16)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미디안 적진 밖에서의 추격전(23-2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승리를 받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약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강하시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기준으로 강함과 약함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며, 그분이 우리를 높이십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승리를 믿으며, 세상과는 전혀 다른 영광으로 우뚝 서야 합니다.

 

23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 24○기드온이 사자들을 보내서 에브라임 온 산지로 두루 다니게 하여 이르기를 내려와서 미디안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라 하매 이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다 모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고 25또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미디안을 추격하였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강 건너편에서 기드온에게 가져왔더라(23-25)

 

다른 지파들도 합세하여 미디안 군대를 추격합니다. 하나님께서 300명을 뽑기 전에 전쟁에 참여하러 온 납달리, 아셀, 므낫세 지파(3-5; 6:35)가 다시 합류합니다(22b-23). 그 시각 미디안 진영을 간신히 탈출한 적군들은 요단을 건너 도망가기 위해 요단강 기슭에 위치한 스레라(사르단)의 벧 싯다와 벧산 남부로 추정되는 아벨므홀라의 경계까지 퇴각gkqsl다. 기드온 부대에 합류한 지파 사람들은 이들 뒤를 추격했습니다. 바락이 시스라 군대를 쫓을 때와 유사한(4:16) 이 장면은 이스라엘의 완승을 내다보게 합니다. 여기서, 기드온이 지파들을 부른 행동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함을 나타내기 위해 300명으로 축소한 인원을 다시 늘린 점만 보면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바락 때는 지파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했지만(5:14-15,18), 이번에는 기드온이 지파들을 직접 소환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드온이 300명과 함께 미디안 적진을 감당하고 있는 동안 그곳을 빠져나간 적군들이 있었기 때문에, 당장 쫓아갈 형편이 되지 않아, 퇴각로 근처의 지파들에게 급히 협력을 요청했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참작하면, 적진 내에서는 300명을 통한 전면전으로 대부분의 군사를 무찔렀고, 적진 밖에서는 지파들의 협력과 추격전을 통해 도망자들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에브라임 지파도 소환되어, 공을 세웁니다(24-25). 북부 지파를 소집했던 기드온은 에브라임 온산지에도 전령들을 보내, 미디안과 싸우러 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기드온은 그들에게 도망자들을 앞질러 가서 벧 바라와 요단강으로 통하는 수로들을 점령하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벧 바라는 갈릴리 호수 남쪽 20킬로미터, 요단 서편에 있는 나루터로 유추됩니다. 위 지파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요단강을 건너려는 적군들을 나루터에서 막는 작전입니다. 에훗 때 모압 족속도 요단을 건너 도망하려 했고, 이때 에훗이 요단 서편 나루를 장악하여 도망하지 못하게 한 것과 같습니다(3:28-29). 에브라임 각 사람 모두가 소집되었고, 주어진 임무대로 요단의 나루터를 점령했습니다(24). 에브라임 지파는 기드온의 전략을 따름으로써 신의를 보였고,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힘을 증명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미디안의 두 방백인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들은 미디안의 지도자나 군대 우두머리로 추정됩니다. 당시 미디안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가 출정했으나, 싸움에 대패하자 남은 병사 약 15,000명을 이끌고 이미 요단을 건넌 상태였습니다(8:10). 시편 저자는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목장인 이스라엘을 자기들 소유로 취하려 한 자들이었다고 비난합니다(시 83:12). 방백의 이름인 ‘오렙’은 ‘까마귀’란 뜻이며, ‘스엡’은 ‘늑대’란 뜻으로, 옷니엘 시대에 적군의 왕을 ‘두 배나 사악한 구산’(구산 리사다임)이라고 부른 것처럼, 멸시하여 붙인 별칭으로 보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오렙을 바위에서, 스엡은 포도주 틀에서 죽였습니다. 이 장소는 그들의 이름을 따서 오렙 바위와 스텝 포도주 틀로 불렸습니다. 포도주 틀과 바위는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로부터 표징을 얻었던 장소를 상기시킵니다(6:11,20). 같은 장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디안의 방백들이 이 특정 장소에서 죽임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실 때 약속한 이스라엘의 승리(6:16)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훗날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실 것을 증명하는 일환으로 이 방백 사건을 회고하면서, 그들을 처치한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알려줍니다(사 10:26). 시편 저자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언급합니다(시 83:11). 방백들을 처단한 후 에브라임은 계속 미디안을 추격했습니다. 그리고 요단을 건너 기드온(8:4)에게로 가서,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전달합니다. 지파들이 시간을 벌어준 사이에, 기드온은 적진을 소탕하고 요단을 건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을 찾아간 에브라임 사람들에게는 다른 꿍꿍이도 있었습니다.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조건은 믿음인데, 이 믿음 또한 사람의 의지로 가질 수거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은혜의 선물로 주셔야만 합니다. 성도는 승리의 조건인 믿음도 주시고 사탄과 직접 싸워 승리를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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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7-01)

 


300용사로 구원한 기드온

사사기 7장 1-14절


힘과 숫자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시대입니다. 교회도 성도수와 재정으로 성공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힘의 논리로 변질될 때 믿음의 본질로부터 이탈할 수 있습니다. 참된 승리의 요건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의 싸움을 통해 궁극적으로 드러내야 할 바는 무엇입니까?

 

  • 기드온의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연합군에 맞설 이스라엘 군사로 300명만 뽑으십니다. 이들로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두려워하는 기드온에게는 적군의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확인시키십니다.

 

전쟁을 위해 인원을 줄이시는 하나님(1-8)

망각과 자만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삶을 살게 합니다. 사람들은 풍요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듯이, 전쟁에서 승리 때문에 자만하여 하나님을 잊을까 걱정하십니다. 실패보다는 성공 이후에 더 큰 시험이 찾아옵니다. 망각과 자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필수 단계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순간, 자신을 지키고 지탱해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1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2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3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4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5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6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7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8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1-8)

 

이스라엘이 출정하려는 순간(6:33-35) 불현듯 기드온의 표징 사건(6:36-40)이 등장했고, 본문 7:1-14에도 예상치 못한 두 사건이 이어져 출정과 승리가 미뤄집니다.

본문 1-8절은 하나님께서 미디안과 싸울 300명을 선택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6:33-35의 내용과 직접 연결됩니다. 현재 미디안과 동맹군인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은 요단 동편에서 강을 건너와 모레 산(이스르엘 골짜기의 북동쪽) 앞 골짜기에 진을 친 상태입니다(1; 6:33). 미디안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까지 왔다는 것은 남쪽 지역인 가사 지역부터 점점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마침내 북쪽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드온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적진의 남쪽 ‘하롯 샘’(‘떨림의 샘’) 곁에 진을 쳤습니다. 하롯 샘은 이스르엘 골짜기의 남동쪽에 위치한 길보아산 기슭에 위치했습니다.

이때 ‘기드온’을 ‘여룹바알’로 소개하는데, 이 이름은 바알에 대항한 승리를 상징하며 이는 곧 벌어질 전쟁의 승리를 암시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순종하면서도 두려움과 불확신 가운데 있는 그의 내면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전쟁 준비를 한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적을 너희 손에 주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2). 그 이유는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2)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6장 36절에서 기드온이 하나님께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이라는 말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그의 백성이 자신의 힘으로 승리했더라고 여기고,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에게 돌릴까 봐 이렇게 시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드온과 함께한 백성은 그의 소속 므낫세 지파와 므낫세 북부에 거주하는 아셀, 스불론, 납달리 지파 사람들로(6:35), 총 32,000명에 이르렀습니다(3). 드보라 때는 약간 더 많은 지파에서 40,000명이 운집했습니다(5:8). 그러나 미디안 연합군의 135,000명(8:10)에 비하면 1/4에도 못 미칩니다. 현재 상태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같이 같이 싸워 주시지 않으면 힘든 전쟁인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군사가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백성이 많아 그들로 미디안을 이기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지 않고 그를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 인원으로 미디안을 무찌르면, 이스라엘이 교만해져서 구원의 공로를 자신들에게 돌릴 위험이 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숫자를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 전쟁만 아니라 사사들의 모든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신 분이 하나님이며, 그가 모든 영광을 받아야 함을 분명히 일깨웁니다.

 

하나님께서는 군사를 주리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사용하십니다.

첫째로, 군사를 축소하는 방법은 지금 두려워 떠는 사람은 길르앗 산에서 떠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합니다(3).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러준 가나안 전쟁의 수칙이었습니다(신 20:8). 즉,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신앙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겁쟁이들이 남으면 사상자만 늘고, 다른 백성까지 겁먹게 하여 싸움에 방해가 됩니다. 이에 32,000명 중 무려 22,000명이 돌아가 10000명만이 남았습니다. 이처럼 많은 숫자가 돌아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기드온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는가를 보여줍니다. 많은 백성이 두렵고 떨면서 돌아갔기에, 이곳 샘의 이름이 ‘하롯’(하로드: ‘떨림’)이 됐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때 기드온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표징을 구한 끝에(6:36-40) 간신히 마음을 추슬러 전투를 하려는데, 병력이 1/3로 줄었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여전히 10000명의 군사를 보고 이들도 많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기드온의 눈에는 이만큼 남은 것도 적다고 생각하고 더욱 두려워졌을 것인데, 하나님의 눈에는 이들도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수가 많고 적음이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전쟁은 어차피 이스라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군사들을 또 시험하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믿지 못해 시험을 시작되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시험하고, 또한 이스라엘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10000명을 물가로 데리고 내려가라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사람을 지목할지 미리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곳에서 같이 가라고 지명한 사람들만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모호하게 말씀하십니다(4). 이것은 물가에서 상황을 보고 결정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물 마시는 모습에 따라 한 무리를 선택하려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물가로 가서 물을 마시게 합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1) 무릎을 세우거나 선 채로, 손에 한 움큼 뜬 물을 핥는 자와 (2) 무릎을 꿇고 얼굴을 물에 가까이 데고 마시는 자를 따로 세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결과로는 수를 세어보니 (1)번 무리는 300명이었고, 나머지 9,700명은 (2)번에 해당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신 300명만을 선택하셨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시험하신 것은 물 마실 때의 경계와 방어 태세였을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마시면 적을 경계하거나 공격에 재빨리 방어할 수 없지만, 무릎을 세우거나 서서 마시면 그럴 가능성이 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차적 목적은 인원 감축이므로 어떤 자세였든 소수를 택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300명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기드온을 통해 미디안을 무찌르게 하실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이 적은 수로 미디안을 이긴 후에 이스라엘은 이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적군이나 이 소식을 듣는 자들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백성에게 각자 처소로 돌아가라고 명하십니다. 이에 ‘백성’은 양식과 나팔을 챙겼습니다. 이 내용은 흐름상 느닷없지만, ‘백성’은 선택된 300명을 가리킵니다. 돌아갈 백성들은 양식과 나팔이 필요 없으므로 이들에게 줬을 것입니다. 양식은 자루나 항아리에 담으므로 양식과 나팔에 대한 언급은 항아리와 나팔이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전략적인 병기(16-20)가 될 것을 예고합니다.

 

기드온은 군말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9,700명을 각 장막으로 돌려보냈고,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순종하여 돌아갔습니다. 기드온은 나머지 300명을 붙들어 두었습니다. 이제 미디안 군대의 수는 이스라엘의 450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골짜기에서 대치 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이렇게 하신 뜻은, 전쟁은 사람의 수에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승리의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9-14)

우리의 신앙에서 항상 하나님의 크심과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움의 사람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작은 용사에서 큰 용사로 되길 바라십니다. 힘겨운 시련 중에 우리가 바랄 것은 상황의 반전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크심과 자신의 작음을 알아갈 때, 자신의 믿음도 그만큼 자랄 것입니다.

 

9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10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11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12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13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14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9-14)

 

여기서는 300명을 이끌고 대군에 맞서야 하는 기드온에게 놀라운 방법으로 승리의 확신을 주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두려워 떨던 백성은 다 떠났지만(3),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 기드온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군사의 수를 줄인 이유는 바로 기드온이 하나님보다 사람의 숫자를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일어나라! 미디안 진영에 대항하여 내려가라!’고 전쟁을 명령하십니다(9),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진영을 기드온의 손에 넘겨주었다고 하십니다. ‘넘겨주었다’(9)는 완료형으로 예(1:2;4:14)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를 주셨음을 부각합니다.

군사가 100배로 줄어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았을 것인데, 갑작스런 출정 명령이 떨어지자 기드온은 더 겁이 났을 것입니다. 이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적군을 통한 표징을 준비하여 선수를 치십니다. “네가 두렵거든 부하 부라와 함께 적진으로 내려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11)라고 하십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두려워하던 기드온이 적들의 말을 들으면, 기드온이 용기가 생길 것이고 그러면 미디안을 공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기드온은 부하를 데리고 적진의 전초 기지 경계로 내려갑니다. 9-11절까지는 ‘내려가다’가 네 번 반복되어 미디안을 향한 공격이 다가옴을 알립니다. ‘내려가다’의 문자적 의미는 적진이 골짜기(평원)에 있어 지형학적으로 내려간다는 뜻이며, 실제 미디안 진영은 이스라엘 진영의 북쪽에 있었습니다(1).

적군의 진영에는 미디안, 아말렉, 동방 사람들의 장막이 쭉 펼쳐져 있었고, 그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은 미디안을 주축으로 이스라엘을 약탈하던 유목민 무리들입니다(6:3-5). 이들에 대한 묘사(12)는 6:5과 유사합니다. 메뚜기 떼로 비유된 적군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보냈음을 상기시켜(욜 1:4; 2:25), 적군의 침략이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죄 때문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께서 이제 이 메뚜기 떼를 다 쓸어버리실 것입니다. 적군이 끌고 온 낙타도 해변의 모래처럼 많았습니다. 전쟁에서 낙타의 존재는 그 크기와 생김새로 이스라엘에게 위압감을 주고, 말과 철병거처럼 전쟁의 기동력을 대신하며, 노획물을 많이 실어갈 것을 암시합니다.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적진은 기드온을 더 두렵게 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예고하신 대로(11) 기드온이 적들이 하는 말을 듣게 하시고, 이를 통해 두려움을 없애주십니다(13-14). 적들의 말은 꿈 얘기와 그 해몽이었습니다.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왔고’, 그것이 한 장막까지 ‘와서’, 그것을 ‘치고’, ‘무너뜨리고’, ‘뒤집어버렸으며’, ‘그 결과로 장막이 쓰러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보리떡이 장막을 쓰러뜨리는 장면이 자세하고 느리게 전개되는데, 이는 대적 시스라가 야엘의 기습 공격으로 죽는 장면과 유사하며(5:27), 장막의 파괴를 부각합니다.

꿈 풀이는 적군의 친구를 통해 들려옵니다. 보리떡 한 덩이는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을 뜻합니다. 장막이 부서진 것은 ‘하나님이 미디안 모든 군대를 기드온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 마지막 문장은 하나님이 기드온을 이곳에 보내면서 상기시키신 ‘완료형’의 승리의 약속과 같습니다(9). 하나님의 약속과 더불어 적군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의 승리를 듣게 된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사용하심과 그가 이스라엘에게 승리 주심을 확신 합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지만, 이는 기드온의 연약한 믿음을 드러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차례 표징을 주셨고, 승리를 확인시키셨으나, 기드온은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무척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적군의 꿈과 해몽은 단숨에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적 전쟁의 승리는 숫자와 힘에 있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묘수를 짜내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하는 것이고, 기뻐하실 만한 큰 용사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승리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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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6-03)


기드온을 사사로 준비시키신 하나님

사사기 6장 25-40절


요즘 주위에 성도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행동으로 품격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모습을 벗어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변화는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환경이나 여건에 큰 변화가 있어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유익인 것입니다.

 

  • 두려워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징표를 보여주시며, 기드온이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인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확증을 받은 기드온은 드디어 하나님께 첫 번째 임무를 받고 이를 수행하게 됩니다.

 

바알 제단을 없애는 기드온(25-32)

세상은 강력하고 흉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순종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기드온의 소심하게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분께 받은 사명을 용기 내어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25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27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28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29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30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31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32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25-32)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제일 먼저 주신 명령은 기드온의 아버지 집에 있는 우상을 없애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우상숭배가 만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의 시작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임을 보여준다.

 

(1) 바알의 제단을 없애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실행(25-27)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아버지의 7년 된 둘째 수소를 가져다가,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신상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 제단과 아세라 상을 찍고”라는 명령을 통해서 이스라엘 안에 우상숭배가 만연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를 안 섬긴 것이 아니라 혼합주의적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드온의 아버지 집은 이방 신의 제단을 차려놓을 만큼 부유하고 권세 있는 집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세라 상으로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은 아세라 신상은 신이 아니며 장작밖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 44:15의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7년된 둘째 수소는 가장 좋은 소를 말한다. 집에서 가장 좋은 소로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산성 꼭대기는 아마도 기드온이 살고 있는 오브라 성읍의 높은 곳을 뜻하며, 여기서 제사하게 한 것은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사실을 모든 성읍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건을 시작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에 만연한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기드온은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였기에 밤에 몰래 실행합니다. 여기서 또다시 두려움의 모티프가 등장합니다. 밤은 은밀함을 상징하는 시간으로 사람들의 는 을 피해 몰래 일을 하기에 적당한 시간입니다. 그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만 아직 사람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2) 이스라엘 자손들의 반응(28-32)

 

성읍 사람들은 아침에 기드온이 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자는 성읍 사람들의 눈을 통해 기드온이 한 일들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지 알기 위해 열심히 추적하였고 마침내 기드온을 찾아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상을 없앤 기드온을 죽이려고 하는데, 이런 모습은 암시적으로 백성들이 이방 신들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6:10에서 아모리 사람의 신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과 반대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을 없앤 기드온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명령으로 우상을 없앤 기드온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 그들은 요아스에게 네 아들을 끌어내 죽이겠다고 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요구에 31절에서 요아스는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할 것이냐 그가 다투는 것을 돕는 자는 아침까지 죽을 것이다라고 항변합니다. 바알이 참 신이라면 신 스스로가 심판할 것이니 공연히 신의 싸움에 끼어들면 오히려 해를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과 바알에 대한 조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신인 바알을 위해 싸우려고 하는 것도 웃기고 인간이 신을 위해 싸우는 것도 웃깁니다. 지금 요아스는 통렬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비웃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바알이 신인지 아닌지에 대해 시험하는 것입니다. 요아스의 말은 매우 논리적이지만 신앙적이진 않은데, 요아스가 참 신앙인라면 우상을 집에 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신들을 섬기는 기회주의자일 뿐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통해서 바알과 싸우는 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사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후에 전쟁을 위해 나팔을 불었을 때 백성들이 그에게 나아온 것입니다.

 

미디안과의 전쟁 준비(33-40)

영적인 권위와 영적인 리더십은 사람들은 실력이나 도덕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영향력과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게 됩니다(행 1:8).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받으려면 마음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33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34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35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36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33-40)

 

소심하게 사사의 사명을 시작한 기드온에게 적들이 몰려옵니다. 하나님의 영은 바로 기드온을 통해 일을 시작하셨지만, 기드온은 그 역할이 두렵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미디안과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위협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전쟁을 준비하게 하시며 승리의 약속을 주십니다.

 

(1) 전쟁을 위해 백성들을 모음(33-35)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평야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내렸습니다. 사사기에서 ‘여호와의 영’은 어떤 특별한 직무를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사사들에게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 영적 권위를 부어주십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영적 권위를 가집니다. 그는 마음의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중심에 모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전쟁을 알리는 나팔로 사람들을 불렀고, 이에 아비에셀, 므낫세, 아셀, 스불론, 납달리 5지파 사람들이 그를 영적인 지도자 사사로 인정하고 그에게 모였습니다. 그가 영적으로 지도자 역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기드온의 양털 시험(36-40)

 

이 단락에서 기드온은 양털로 하나님의 확증을 요청합니다. 여기서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면’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기드온은 이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이란 사실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나서야 전쟁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구원자, 즉 사사로 사용하시려면 좀 더 확증을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전쟁에 나서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런 두려움과 확증에 대한 요구는 드보라 이야기에서 드보라의 동행을 요구한 바락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기드온은 두 번의 양털 시험을 하는데, 먼저 양털을 타작마당에 놓으면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기드온의 요청대로 양털에만 이슬이 가득하게 해주셨는데, 그 양도 그릇을 가득 채워서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많은 이슬을 품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기드온은 이것만으로는 믿지 못했습니다. 원래 양털은 습기를 잘 흡수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양털이 물을 많이 품은 것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다시 하나님께 매우 조심스럽게 요청합니다. 그의 화법을 보면 ‘이번만’이란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요청이 무례하거나 하나님을 화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을 계속해서 시험한 것을 보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보다 적에 대한 두려움이 더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기드온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은 무한히 참으시고 기드온의 무례한 요청을 다 들어주십니다. 이에 대한 기드온의 반응이 본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기드온이 이제는 확실하게 믿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연약한 자신의 일꾼들에 대해 참아주시며 그가 믿음으로서 나갈 수 있을 때까지 인도하시는 인자가 많으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기드온은 연약하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 들어 당신의 일꾼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갖도록 도우셔서 결국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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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6-02)

 

 


연약한 기드온을 부르심

사사기 6장 11-24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면서 그 특색에 따라 이름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샤파, 엘샤다이 등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본문에는 샬롬이라는 단어는 평화라는 뜻으로서 ‘여호와 샬롬’은 평화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 본문에는 이스라엘은 여사사인 드보라를 통해 구원 받은 후 40년 동안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안정 속에서 또다시 악을 행하였습니다. 미디안을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를 받고, 힘들어할 때, 한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기드온의 모습은 연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연약한 기드온을 통해 이끌어 가십니까?

 

부르심을 받은 기드온(11-14)

오늘날 교회나 나라가 어려움을 당할 때, 이런저런 불평하며 비판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가 어두울 때 사람들은 두 가지 점에서 절망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고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다는 절망감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자격과 능력이 없어서 시대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는 무능력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그 문제를 기드온처럼 ‘네가 그 문제를 해결하라. 그래서 내가 너를 거기 보낸 것이 아니냐?’라고 하실 것입니다.

 

11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13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14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11-14)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질책하셨지만(8-10), 그들의 부르짖음(6-7)을 지나치지 않고, 미디안의 수탈에 이스라엘 자손은 또 다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11-24).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고향 오브라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머뭅니다. 11절은 오브라를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로 길게 설명하는데, 본 사건의 마지막에 이곳에 여호와의 제단이 세워집니다(24절). 그 시각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3-5) 포도즙 짜는 곳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바람이 날리는 넓은 장소에서 타작을 하지만 포도즙 짜는 돌 구덩이에서 하면 발각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을 ‘힘의 용사’(“큰 용사”)라 부르며 여호와가 그와 함께하심을 전합니다(12). 숨어서 타작하는 자를 ‘큰 용사’로 부르는 것은 어울리지 않지만, 하나님의 함께하시면 가능할 것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불러 사명을 주거나 힘을 북돋을 때 언급됩니다(창28:15; 출 3:12; 수 1:5). 이는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셨고 그에게 미디안을 무찌를 힘과 능력 주실 것을 뜻합니다(16). 기드온은 갑자기 낯선 사람이 나타나 타작하는 것을 들킨 것에 놀랐고 그의 말에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신다는 말에 안심했겠지만 그의 정체를 알아채지는 못했습니다. 사자를 “나의 주”(아도니)라고 부르는데 상대를 높여 부르는 표현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 메시지가 특별히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미디안의 압제 속에 있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니요?”라며 냉소적으로 응수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지배 아래에 있고 출애굽 때 베푼 구원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부재의 증거로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고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다며 탓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고 이방의 손에 넘기신 것은 우상숭배 때문임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고 사사들을 일으켜 이방의 압제에서 구하셨는데, 기드온은 이 모든 기적을 묵과한 것입니다. 기드온의 말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를 엿보게 합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상호 신의를 다해야 하는 언약 관계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영적, 도덕적 상태를 점검하지 않고, 눈앞의 현실과 이기적인 사고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나 선지자를 보내 지적한 것도 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8-10; 2:11-13). 기드온의 이런 냉소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즉각 “가서 이 네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임무를 주십니다(14). 기드온이 입다(11:1)처럼 실제로 큰 용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이란 단어의 반복(12,14)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14)란 수사적 질문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기드온에게 임할 것을 확신시킵니다. 좀전까지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원계획을 세워 두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기적(13)은 믿음이 적고 의심은 많은 기드온을 통해 나타날 것입니다.

 

기드온의 거절과 표징의 요구(15-18)

성경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물들은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해 때로 의심하고 실수하고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 구언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오늘 기드온 역시 그렇습니다.

 

15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16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17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18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 하니라(15-18)

 

기드온은 예기치 못한 부르심과 임무를 거절합니다. 그는 ‘어떻게 제가 이스라엘을 구하겠습니까?’라며 자신에게는 힘도 없고 자격도 없다고 합니다. 자신의 가문이 므낫세 지파 중 가장 약하고, 자신은 집안에서 가장 작다고 말합니다. 가문의 약함(달)은 가난하고 낮은 신분을, 작음(짜이르)은 어리고 보잘 것 없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실상 그의 아버지의 집에는 열 명 이상의 종들과 수소나 염소 등 가축이 있었고, 많은 돈을 들여 제작해야 할 우상들과 제단도 있었습니다(25, 27;17:4). 기드온과 형제들은 미디안 왕들의 눈에 다 왕의 아들들처럼 보였습니다(8:18). 즉 그의 집안이 상당한 부와 권세를 가졌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사회적 신분과 개인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분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14).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기드온이 이렇게 주저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반드시 함께하실 것을 재확증 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16).

12절과 마찬가지로 기드온에게 그분의 임재와 능력이 임할 것을 약속합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을 마치 한 사람 치듯 쉽게 무찌를 것이고 이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기드온은 아직 확신이 없어 자기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는 분이 정말로 하나님이신지 표징을 보여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아직 여호와의 사자의 정체를 인지하지 못했기에, 낯선 자가 하나님을 운운하며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추긴다고 여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며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의 모습은 모세(출 4:1-8)나 예레미야(렘 1:4-9)에게서도 나타났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데는 그분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반드시 필요함을 보여줍니다(사 6:8).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표징을 보이기 전까지 그곳에 머물러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사이에 그는 가서 예물을 갖고 와서 여호와의 사자 앞에 차려놓겠다고 설명합니다. “예물”(민하)은 ‘소제’의 의미도 있으나 여기서는 ‘선물’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방문한 천사들을 접대한 것(창 18:3-8)처럼 기드온도 사자에게 음식을 대접하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수락합니다.

 

기드온에게 표징을 보여주신 하나님(19-24)

지극히 평범하고 약한 자를 들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감당케 하십니다. 스스로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불가능한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사하면서 영광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셨을 때, 지체하지 않고 순종해야 합니다.

 

19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20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21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22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19-24)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표징을 보여주시자 기드온은 부르심에 응합니다.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대접할 음식으로 염소 새끼 한 마리와 무교병을 준비합니다. 염소는 희생제 사용이 아니므로 굽거나 삶아 고기를 준비했고, 남은 것으로 국을 끓였습니다. 가루 한 에바(22리터)로는 무교병을 준비했습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누룩을 넣지 않은 전병을 만든 것입니다. 기드온이 준비한 새끼 염소와 엄청난 양의 가루는 당시 이스라엘의 궁핍한 상황을 고려할 때(3-6) 상대에 대한 아낌없는 호의와 헌신이었습니다. 그는 준비한 것을 상수리나무 아래 있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대신 기드온에게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올리고 국을 그 위에 부으라고 명했습니다. 기드온이 순종하자 여호와의 사자는 지팡이를 뻗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었습니다. 그랬더니 바위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태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표징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여호와의 사자는 사라졌습니다. 기드온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당황했지만, 그제야 그동안 자기의 대화 상대가 여호와의 사자였음을 깨닫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의 요청대로(17) 하나님께서 표징을 보여주셨는데도 감격할 겨를도 없이 자신이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했으니 죽을까 겁에 질립니다. 여전히 그가 믿음이 적고 두려움이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기드온에게 여호와는 ‘안심하라(샬롬), 두려워 말라, 네가 죽지 않을 것이라’며 거듭 진정시키고 안심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안심시키는 말씀에 기드온은 마음의 평안을 되찾습니다. 그는 자신이 요구한 표징을 하나님이 친히 보여주셨음을 깨닫고 이에 하나님의 부름에 응합니다. 그는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고 ‘여호와 샬롬(평안)’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제단을 쌓는 일은 그 일을 기념하며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의미입니다(창 12:7; 13:18). 저자는 이 제단이 아비에셀 가문의 오브라 성읍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덧붙임으로써 본 사건의 진정성과 역사성을 부각합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해도, 때로 무지하고 의심을 품고 있어도 우리를 큰 용사가 되도록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안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명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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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6-01)

 


미디안을 통한 징계

사사기 6장 1-10절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두 번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처음 몇 번은 다음에는 조심해야지 라고 되새깁니다. 실수를 통해 치명적인 손해를 보면 자신의 삶을 고치게 됩니다. 그러나 실수에 대한 아무런 대가가 지불되지 않거나 생각보단 미약하게 지불되면 실수에 대한 회개 없게 되어집니다. 똑같은 실수를 또 하게 되어집니다. 하지만 몇 번의 실수를 하다보면 조심성이 없어집니다. 실수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일상생활이 됩니다. 자신의 영혼을 망치는 지름길이 되어지고 맙니다.

 

 

  • 하나님을 다시 배역한 이스라엘은 이번에는 미디안의 압제를 받게 됩니다. 압제에 시달린 백성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난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임을 지적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깨닫고 회하기를 원하는 이유에서입니다.

 

이스라엘의 배역과 하나님의 심판(1-5)

사람의 눈에 보이는 좋은 것과 높은 지위와 뛰어난 실력 등이 우리를 지켜 주고 성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그것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세운 우상들은 삶을 풍요롭게 하기는커녕 평안함을 빼앗아 갈 뿐입니다.

 

1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2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3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4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5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1-5)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배역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사사기 6-9장은 대사사 사이클 네 번째로 사사 기드온(6-8장)과 그의 아들 아비멜렉(9장)에 대한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드보라와 바락의 활약으로 야빈의 압제에게 벗어난 40년간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평안 중에 하나님을 잘 섬기기보다는 점점 하나님께 다시 반복해서 범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사기 6:1-9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신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눈에 죄를 짓는 이스라엘의 행태는 옷니엘부터 시작하여 에훗과 드보라 시대에 이어 이번에도 반복됩니다(3:7,12; 4:1).

한 사사의 서사가 끝나고 이스라엘의 배역이 매번 재등장하는 것은 영적 타락이 심화 됨을 암시합니다(2:19). 하나님을 배역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경고하신 대로 숭배하던 우상들이 그들의 삶에 올무가 된 것입니다(2:3). 이는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행하는 분이며 심판자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스라엘은 7년 동안 미디안의 속박을 당합니다. 미디안의 핍박은 앞에 기록된 사사 이야기(3-5장)에 나온 다른 이방의 압제보다 훨씬 상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디안족속’은 아브라함과 후처 그두라 사이의 아들 미디안(창 25:1-2)의 자손들입니다. 이들은 요단 동편의 남부에 거주했으며, 시내 반도부터 요단 동편의 북부까지 오가며 생활한 반유목민이자 대상입니다. 모세가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와 우호적인 관계를 이뤘으나, 광야 여정에서 이스라엘과 미디안은 적대 관계에 놓였습니다. 미디안은 모압과 결탁하여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했고(민 22:4), 싯딤에서 이스라엘을 음행과 우상숭배에 끌어들였습니다(민 25장).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디안 왕들과 백성을 죽이고 마을을 노략하고 불태우게 하셨습니다(민 31장).

그런 상황이 역전되어 지금은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이겼습니다. ‘이겼다’란 동사는 사사기에서 두 번 나왔는데, 옷니엘이 대적 구산 리사다임을 이겼다는 내용(3:10)에 한 번 더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배역과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을 대조한 것입니다.

미디안은 다른 유목민들인 아말렉 족속과 동방 사람들을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약탈하곤 했습니다. 아말렉족속은 요단 남서쪽의 네게브, 요단 동편, 시내 반도을 순회하며 살았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 간의 적관계는 출애굽 때부터 포로기 이후까지 줄곧 등장합니다. 사사시대에는 아말렉이 에훗 당시 모압 왕과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3:13). “동방 사람들”은 어떤 민족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미디안과 아말렉에 합류한 것을 보면, 두 민족 근처에 있는 대상 유목민들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들이 약탈하자 산에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만들어 대비하였습니다. “웅덩이”는 ‘바위틈이나 산골짜기’인 듯하며, 곡식을 저장하거나 몸을 숨기는 용도였을 것입니다. 미디안 연합군은 이스라엘의 파종 후부터 추수기 사이에 침입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건기 후 이른 비가 내리는 10,11월에 파종을 하고, 우기를 지나 3,4월부터 겨울 보리를 시작으로 한 해의 첫 수확을 시작합니다. 약탈자들이 싹이 나고 곡식이 자랄 때 침입했다면, 짐승들로 밭을 휩쓸어 먹게 하고, 자신들은 이스라엘 가정의 저장고를 털었을 것입니다. 침입자들은 유목민이자 대상들이므로 짐승들과 장막들을 소유했는데, 이것들을 다 끌고 올라왔습니다. 이 점은 그들이 이스라엘 영토에 오래 머물면서 약탈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또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메뚜기 떼와 같았습니다. 대적의 군대를 메뚜기 떼로 비유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매개임을 상기시킵니다(골 2:25). 그들의 가축 때 속에는 낙타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짐과 사람을 나르던 낙타는 이번에 말과 철 병거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노획물을 싣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

한편 이들은 요단 동편에 운집하여 요단강을 건너왔을 것입니다(33). 그들은 진을 치고 노략질을 시작하여 지중해 연안 남단의 가사 지역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토지 소산을 휩쓸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양식은 남기지 않았고, 생계유지에 필요한 양과 소나귀까지 다 끌고 갔습니다. 메뚜기 떼처럼 몰려와 산물과 재산을 싹 쓸어가는 모습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임했음을 암시합니다(골 1:47; 신 28:31,33). 이스라엘은 지배자인 미디안 왕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기에(3:14-15), 살림이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한 해의 수확까지 빼앗기고 땅이 황폐해졌으니 끼니 걱정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나마 약탈자들이 몰려올 때 굴이나 산성에 숨어 위험한 순간을 모면한 채 비밀 저장소에 둔 곡식으로 연명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응답(6-10)

오늘날 성도들이 물질을 위해 노력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닌 방법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줄 알면서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지속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수고하지만, 결산을 해보면 항상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만 시키고 자신은 빈손으로 돌아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쉽게 결단을 못하고 ‘이번 한번만’ 하면서 그러한 일이 지속되고 있다면, 빨리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육신도 만신창이가 되어 병들고, 영혼도 망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6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7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8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6-10)

 

이스라엘은 마침내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미디안의 지배와 약탈이 7년 동안 계속되었으므로 그들은 궁핍함이 심했습니다. 여기서 ‘궁핍하다’(달랄)는 ‘낮아지다’, ‘보잘것없게 되다’의 뜻도 있어, 단순히 곡식이 없어 육체적으로 굶주리고 경제적으로 시달린 것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피폐하게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되자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들이 미디안으로 인해 여호와께 부르짖었음은 6-7절에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 그만큼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어 절박한 상황임을 드러냅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사사 이야기에서처럼 이들의 부르짖음에는 회개했다는지 악행에서 돌이켰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제 이스라엘이 부르짖었으므로, 앞의 사사들 시대처럼 하나님께서 곧 사사를 부르실 것이 기대됩니다(3:9,15;4:4).

 

그런데 이번에는 이 예상을 깨고, 다른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사(기드온)를 부르기에 앞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선지자의 메시지는 이전에 여호와의 사자가 전달한 내용(2:12)과 유사하며, 하나님의 책망을 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먼저, 그가 전하는 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임을 확실히 합니다(8).

메시지는 두 부분이며, 첫 부분(8-9)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지난 일들을 다섯 문장으로 진술합니다. 그 내용은 첫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종들의 집이었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나오게 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만 아니라 광야와 가나안 땅에서도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이방 민족들에게서 그들을 건지셨습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광야와 가나안 땅에서 이방 족속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습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쫓아낸 자들의 땅을 그가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셨고 그가 은혜를 베푸셨음을 증명합니다.

둘째 부분(10)은 이 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도 불구하고, 그와 맺은 언약에 충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임을 언급하십니다. 이 어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다시금 일깨우는 말입니다. 하나님꼐서는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모리 사람”은 가나안의 특정한 족속이 아닌 ‘가나안 족속’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아모리사람의 땅”은 ‘가나안 땅’을 뜻합니다. ‘두려워하다’는 ‘경외하다’의 뜻도 있으며, 이 명령에 그 의미도 내포되었습니다. 우상들은 참 신이 아니므로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며, 그것들을 경외하고 섬겨서도 안 됩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만이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임을 일깨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나온 그들의 조상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어떻게 섬기나 관심 두지 말고, 그들의 우상숭배를 따라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신 12:30). 또 이를 지키지 않으면 대적의 침략 등 숱한 재앙이 있을 것과 최후에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레 26:14-39; 신 28:15-68). 동시에,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선과 의를 행하면 그들과 후손에게 복을 영원히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신 12:28; 28:114). 이 경고와 약속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세대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눈에 합당한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사람과 그들의 우상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방 우상들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방의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며 고통 당해야 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셔서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회복으로 이끄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때 속히 깨닫고 그분의 은혜를 향해 나아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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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5-02)

 


드보라의 승전가(2)

사사기 5장 19-31절


 

 

회사나 직장에서 쓰임을 받기 때문에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커다란 공적으로 많은 수익을 낼 수 있겠지만, 때로는 실수로 인해 큰 손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도움을 준 것과 잘못을 범한 것에는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공과 과를 언급하며 적절한 대가도 기원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기손 강 전투에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왕들의 군대를 크게 물찌르셨습니다.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돕지 않은 메로스 주민들은 저주를, 도운 야엘은 축복의 전갈을 받습니다. 죽은 아들의 금의환향을 기다리는 적장 시스라의 어머니는 애처롭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을 누립니다.

 

 

드보라의 찬양(19-30)

 

믿음은 인생에서 분명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참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평안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자는 죄의 횡포에 눌려 고통과 신음 속에 결국 패망할 것입니다. 드보라의 노래는 이렇게 엇갈린 인생의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9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20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21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22그 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리도다 23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24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25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곧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26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일꾼들의 방망이를 들고 시스라를 쳐서 그의 머리를 뚫되 곧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도다 27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28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29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30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19-31)

 

드보라는 승리의 노래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백성에게는 축복이, 대적들에게는 저주가 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개입과 적군의 패배(19-22)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계속됩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기존 강에서 적군을 물리치신 사건(4:15)을 시적으로 묘사합니다. 19절과 22절은 적군의 패배를 기록하고, 중간인 20-21절에 하나님의 개입을 기술함으로써 중간 부분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19절에는 적군으로서 시스라가 아닌 “왕들”과 “가나안 왕들”이 먼저 등장합니다. 하솔왕 야빈의 이름은 5장에서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4장에서는 바락과 시스라 간의 전투에 집중하고, 시스라와 군대가 전멸됨을 보여줌으로써 압제자 야빈 왕의 패배를 부각했다면, 5장에서는 이 전쟁을 이스라엘 전체와 가나안 사이의 전쟁으로 확대하여 참여한 모든 이방 왕의 패배를 부각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여기서 가나안 왕들은 시스라 군대의 동맹군입니다. 여호수아 때 하솔 왕도 이스라엘을 칠 때가나안 북부의 여러 왕들을 소집했습니다(수 11:1-5). 군사가 해변의 모래와 같았고 말과 병거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번 전쟁도 유사했을 것입니다. 가나안 왕들은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싸움을 벌였습니다. 므깃도와 다아낙은 기존 강 남부의 성읍이며, 므깃도 물가는 결국 기손강을 뜻합니다. 바락이 오른 다볼 산(4:12)은 기손강의 동북부에 있으므로 두 군대는 중간 지점인 기손강 골짜기에서 교전합니다. 가나안 왕들은 적은 병력으로 모여든 이스라엘을 보고, 쉽게 이겨 많은 전리품을 취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날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별들을 동원하여 땅의 군대와 싸우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별들은 비를 몰고 오는 원천을 뜻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라, 얕은 시내와 같던 기손 강은 급격히 쏟아진 폭우로 금세 물이 불어났고, 주변은 진창이 되었습니다. 급류로 시스라 군대와 병거는 뒤집혔고, 물에 쓸려갔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교란 작전이 있었으므로(4:15), 폭우 외에도 천둥과 번개 등이 동반되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은 하나님의 강림(4-5)을 암시합니다. 유사한 현상을 동반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나 다윗의 싸움에서도 목격됩니다(출 14장; 삼하 22장).

21절 끝에 나온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는 적군을 무찌르는 장면의 시적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의 강림과 기습 공격으로 적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패전 군의 줄행랑치는 장면은 적군의 말들이 말발굽을 박차며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 이 구원 사건은 후대에도 그분을 찬양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시 83:5).

 

(2) 메로스를 향한 저주와 야엘을 향한 축복(23-27)

 

다음은 메로스의 주민들(23)과 야엘(24-27)이 각각 저주와 축복의 선언을 받는 장면입니다. 대조적인 두 내용은 전투에 참여한 지파와 불참한 지파가 각각 칭찬과 책망을 받은 것(14-18)과 같은 맥락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먼저 메로스의 주민들에게 저주가 선포됩니다. 메로스는 이곳 주민들이 이스라엘의 전투를 돕지 않아 저주의 대상이 된 것을 보면, 전쟁이 일어난 기존 강 주변 마을로 추정됩니다. 이들을 향한 저주의 선언은 그 강도가 셉니다. ‘거듭거듭 저주하라’(23)는 ‘사정없이/철저히 저주하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불참한 지파들은 꾸지람만 받았고 저주의 선언은 받지 않았습니다(15c-17). 이런 점에서 봤을 때, 메로스 주민들이 심한 저주를 선고받은 것은 그들의 죄가 중하고, 이 저주가 번복될 수 없는 판결임을 암시합니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을 돕지 않았던 이들의 죄를 여호와에 대한 반역으로 여깁니다. ‘대적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도우러 오는 행동’은 ‘여호와를 도우러 오는 행동’과 동일한 까닭입니다(23). 이들의 죄목인 여호와를 돕지 않았음이 두 번 반복되어 그들 죄의 무거움과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에게 합당함을 부각합니다. 반면, 헤벨의 아내 야엘은 여느 유목민 여인보다 더 축복받는 여인이 됩니다. 그녀가 시스라를 처단한 것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꾀한 것이므로 영광과 축복을 받을 일(4:9; 5:24)로 평가되었습니다. 더구나 이방인에다 여인으로서 이런 공을 세웠으므로, 동족의 전투를 방관한 자들을 더 부끄럽게 만듭니다. 야엘의 영웅담은 25절에서 ‘시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물을 그가 구했다’로 시작합니다. 이 문장에서 ‘물’이 강조되었는데, 이 물은 바로 직전에 시스라 군대를 멸한 근원이지 않았습니까! 야엘은 물 대신 엉긴 우유(요구르트, 크림)를 귀한 그릇에 담아 줍니다(비교. 4:19). 음료와 그릇 정보는 물을 요구한 자가 귀한 신분이며, 이에 야엘이 정중하게 대접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렇기에 야엘이 이 남자를 죽이는 모습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야엘이 그를 죽이는 장면(26)은 상세히 묘사되어 그녀의 영웅적인 행동과 적장을 죽인 쾌거를 극대화합니다. 야엘의 왼손은 장막 말뚝으로, 오른손은 일꾼들의 나무망치로 뻗쳤습니다. 야엘은 ‘시스라’를 망치질했습니다(이제야 이 남자의 정체가 밝혀진다). 특히, 그의 머리를 부쉈습니다. 정확히는 그의 관자놀이를 찔러 꿰뚫었습니다. 연이어 시스라가 죽는 장면(27)도 상세히 묘사되어 청중에게 통쾌함을 선사합니다. 4장에서는 그가 기절해 죽었다고만 나왔으나(4:21), 여기서는 그가 죽어가는 순간을 한 컷 한 컷 보여주고, 또 반복합니다. 시스라의 몸은 야엘의 기습 공격으로 그녀의 발 사이에 구부러졌습니다. 그는 그곳에 쓰러졌고 누웠습니다. 시스라가 구부러지고 쓰러지는 동작은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마치 TV에서 같은 장면을 되풀이하여 재미와 극적 효과를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시스라는 그의 몸이 구부러진 곳, 바로 야엘의 발 사이에서 죽어 엎어졌습니다. 이때 “죽었도다”는 ‘큰 타격을 받다’, ‘멸망하다’의 뜻으로, 시스라의 확실한 죽음을 알리고, 그의 지위와 명성이 다 무너졌음을 함축합니다.

 

(3) 시스라의 어머니의 헛된 기대(28-30)

 

시스라는 이미 여인의 손에 죽었건만, 이를 알 리 없는 어머니는 개선장군이 되어 올 아들을 헛되이 기다립니다. 야엘의 장막에 집중되었던 이야기는 이제 이방나라로 옮겨져,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한 여인에게서 멈춥니다(28). 이 여인은 시스라의 어머니로서, 창살 틈으로 ‘아들의 병거가 왜 이리 늦어지느냐?’며 노심초사합니다. 아들의 귀환이 늦어지므로 창가를 떠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이에 지혜로운 시녀들은 ‘노획물을 왜 나누지 못했겠어요? 다들 한두 처녀쯤 얻었겠죠. 시스라 장군님은 수놓은 채색 옷을 휘감고 오실 거예요’라고 응수합니다(30). 이들의 말은 시스라 군대가 대승을 거둬 노획물을 나누느라고 귀환이 늦춰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두 처녀”는 포로로 잡은 여자를 노예나 첩으로 삼는 일로서 승전한 군대의 흔한 모습입니다. 시스라의 노획물 중에서 “채색 옷”이 세 번 반복되었고, 특히 수놓은 물건임이 강조되었습니다. 금의환향에 걸맞게 화려한 옷을 두르고 돌아올 시스라를 모두 기대하고 있습니다. 시녀들의 말은 그동안 시스라가 많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용사였음을 알려줍니다. 어머니도 시녀들의 말을 스스로 되뇌며 위안을 받고, 들뜬 마음으로 아들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채색 옷을 휘감은 시스라가 아니라, 피범벅이 된 처참한 시신이 그들을 기다립니다. 여인을 전리품으로 얻기는커녕 시스라는 한 여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수치스러운 결말을 맞았습니다(9:54). 어머니의 기대나 시녀들의 지혜로움은 실제로는 허망함과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찬양의 마무리와 땅의 평안(31)

 

많은 봉사의 자리가 충성스러운 일꾼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무 바빠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사역과 봉사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용기를 내었던 야엘이 받은 승리와 복을 헌신의 자리에서 날마다 경험하기를 축복합니다.

 

31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31)

 

찬양의 끝은 하나님의 원수들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저주와 축복의 기원입니다. 마침내 이방인의 압제가 끝나고, 땅에 평온함이 찾아듭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하나님의 평안을 누립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함께 부르는 승전의 노래에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승리와 그 승리에 동참한 이스라엘의 영광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승리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세상 길에 있지 않고 십자가의 길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해가 힘 있게 돋는 것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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