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27-01)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신앙
욥기 27장 1-23절
성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는 사람이나 별 생각 없이 교회에만 출석하는 사람이나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차이가 나타나는 시간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시간은 바로, 고난의 시간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성도가 평소에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았는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 욥의 발언이 계속됩니다. 27장의 대부분을 소발에게 할당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소발의 말이 7절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8절이나 혹은 13절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견해들도 있습니다. 이런 재구성들은 27장의 내용에 대한 학자들 각자의 개인적 견해에 따라 다릅니다. 최종 형태를 고수한다면, 27장이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와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관건입니다.
욥의 무죄 주장(1-10)
27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앞부분과 악인이 당하는 운명을 논하는 뒷부분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전반부를 1-6절까지로 볼 수도 있고, 1-7절까지로, 혹은 1-12절까지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1-10절을 하나의 단위로 볼 것입니다. 그 이유는 11절부터 상대를 지칭할 때 단수(‘너’)에서 복수(‘너희’)로 바뀌며, “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운행 법칙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7-10절 혹은 8-10절은 악인에 대한 일반론이 아니라, 욥 자신의 무죄 주장의 연속으로서, 욥 자신은 “악인”이나 “불의한 자”, “불경건한 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1욥이 또 풍자하여 이르되 2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3(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4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5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6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7나의 원수는 악인 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8불경건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는 무슨 희망이 있으랴 9환난이 그에게 닥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10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겠느냐(1-10)
27장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새로운 도입구로 시작합니다. ‘마샬’을 개역개정처럼 “풍자”로 이해하면 친구들의 말에 대한 반박과 역공이라는 해석 틀로 27장을 이해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 단어가 ‘잠언’으로 번역되는 점에 주목한다면, 마샬이라는 표현은 27장이 왜 규범적 지혜의 언어를 구사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특히 8-10절과 13-23절은 친구들의 말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규범적 지혜에 속한 어휘와 신학적 주제가 표현됩니다. 이 구절들을 욥에게 할당하는 정경의 전승을 존중할 때, 이 구절이 친구들의 말을 빌려서 친구들을 공격하는 “풍자”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동일한 어휘나 유사한 주제라 할지라도 어떤 문맥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변함없이 고수합니다. 무죄를 주장하는 표현들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불의한 거짓을 말한 적이 없으며 사실이 아닌 것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습니다(4). 4절의 개역개정이 “말하지 아니하리라”라는 번역으로 미래의 의지라는 뉘앙스로 번역했으나, 반드시 미래에 한정해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날들과 지금 현재, 앞으로의 날들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봐야 하는 이유는 첫째, 문법적으로 설명하면, 히브리어 동사에는 시제(tense) 개념이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완료와 미완료로 양분되는 히브리어의 동사 시스템은 완료동사와 미완료동사 모두 과거, 현재, 미래에 다 사용됩니다. 참고로,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의 사고 속에 시제 개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동사를 통해 시제를 표현하지 않을 뿐, 부사나 전치사구, 접속사 등을 비롯한 다른 품사나 표현들로 시제 개념을 나타냅니다. 둘째, ‘맹세와 서약 구문’(2)이 꼭 미래의 약속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이’로 시작하는 ‘맹세와 서약 구문’은 그 이름 때문에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됩니다. 그러나 이 구문은 다음에 이어질 것이 확실한 사실임을 서약하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왔다는 것도 또한 확실한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욥은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의 주장을 죽을 때까지 인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따라 살아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마음이 없고, 지금과 같은 깊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온전함”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5).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부정하고 정죄하는 친구들이 오히려 “악인”이며 “불의한 자”이고(7),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불경건한 자”)라고 “풍자”합니다. 친구들이 즐겨 사용하는 규범적 지혜의 언어로 친구들을 공격하는 수사법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친구들이 말한 ‘악인의 결말’을 그대로 친구들에게 되돌려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들은 욥처럼 죽을 만큼의 고통이 찾아와도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8). 왜냐하면 그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9). 이 구절은 엘리바스(욥15:34), 빌닷(8:13), 소발(20:5)의 말과 궤를 같이 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기뻐하겠느냐”)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10). 이러한 악인에 대한 규범적 지혜의 정의는 욥 자신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욥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외치며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소망하는데(13:3,22; 14:15; 16:20,21; 23:3-6), 악인이라면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호소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께 호소하는 욥 자신은 악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친구들의 말과 유사한 규범적 지혜의 언어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함과 동시에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친구들의 말은 한 번도 하나님을 향한 적이 없습니다.
악인의 결말(11-23)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고난과 심판의 시간에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려고 애쓰고, 주님 안에서 교제하는 이들과 함께 그분의 영광을 사모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안다는 것은 단지 지식의 차이가 아닌 삶과 죽음의 차이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11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에게 있는 것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12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 13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포악자가 전능자에게서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14그의 자손은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의 후손은 음식물로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15그 남은 자들은 죽음의 병이 돌 때에 묻히리니 그들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며 16그가 비록 은을 티끌 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 같이 준비할지라도 17그가 준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의 은은 죄 없는 자가 차지할 것이며 18그가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파수꾼의 초막 같을 것이며 19부자로 누우려니와 다시는 그렇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아무것도 없으리라 20두려움이 물 같이 그에게 닥칠 것이요 폭풍이 밤에 그를 앗아갈 것이며 21동풍이 그를 들어올리리니 그는 사라질 것이며 그의 처소에서 그를 몰아내리라 22하나님은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던져 버릴 것이니 그의 손에서 도망치려고 힘쓰리라 23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며 손뼉치고 그의 처소에서 그를 비웃으리라(11-23)
이제 욥은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운행 법칙(“하나님의 솜씨”)을 숨김없이 가르치고자 합니다(11). 앞으로 펼쳐질 내용은 친구들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다 알고 경험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경험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이해하지 못합니다(12).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에는 안개나 입김, 수증기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들을 의미하는 ‘헤벨’이 동사와 동족목적어로 나타납니다. 직역하면 ‘너희들은 왜 이것을 안개/수증기로 여기는가?’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욥이 정의하는 악인의 운명은 이것입니다: 우선 “악인”의 평행어는 ‘아리찜’, 즉 ‘폭력을 행사하는 자’입니다(13). 이 단어는 마음(내면)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 간에 실제 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일컫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언어 폭력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폭력적인 인간들과 그들의 후손이 하나님께 받을 것은 죽음과 배고픔입니다(14). 그들 중 일부가 죽음(“칼”)에서 용케 살아남았다 해도 병들어 죽게 될 것이며, 장례식에서 그들의 아내는 죽은 남편을 위해 울지 않을 것입니다(15). 악인이 비록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입을 옷들을 겹겹이 늘어놓아도(16), 그의 의복은 의로운 자들이 입게 될 것이고 죄 없는 자가 그의 재물을 나눠 가질 것입니다(17). 악인이 지은 집은 마치 새집이나 거미줄로 된 집처럼 임시로 지은 막사나 움막에 불과합니다(18). 부유한 채로 잠자리에 들지만 자고 일어나면 그는 더 이상 부자가 아닙니다. 그의 재물은 하룻밤 사이에도 없어질 수 있습니다(19).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재물을 잃을 두려움이 매일 밤 악인을 홍수처럼 덮칠 것이며(20), 한줄기 바람에도 그의 집과 그 자신마저 날아가 사라질 것입니다(21). 22절과 23절의 3인칭 남성 단수 주어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21절의 동풍일 수도 있고, 비인칭주어로서 불특정한 다수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22절의 주어는 “하나님”으로 보고, 23절의 (동일한 3인칭 단수) 주어는 “사람들”로 해석했습니다. 그보다는 22절과 23절의 주어를 둘 다 ‘하나님’으로 일치시키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아낌없이 “동풍” 혹은 “화살을 쏘아 보내시면 악인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도망쳐야 합니다(22). 그래 봤자 하나님 손바닥 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처소인 하늘에서 도망치려는 악인을 보고 박장대소하십니다(23). 이러한 악인의 결말은 친구들의 설명과 유사합니다(15:28-35; 20:4-29 등). 그러나 세밀한 차이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손의 많음(14)은 규범적 지혜에서 의인/지혜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욥은 악인에게도 자손이 많을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둘째, ‘칼에서 살아남는 것’도 의인/지혜자의 ‘분깃’입니다. 그러나 욥은 악인이 칼에서 살아남을 가능성도 염두에 둡니다. 셋째, 재물 역시 의인에게 할당된 복입니다. 그러나 욥은 악인이 재물이 많을 수 있다고 합니다. 돈이 산더미처럼 많고 입을 옷이 즐비한 부자를 악인과 연결시키는 것은 반성적 지혜에 속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믿음의 선진들은 큰 어려움이나 가난, 고통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며 당당한 모습을 유지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라는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신앙 훈련을 이어 나간다면 당당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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