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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7-01)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신앙

욥기 27장 1-23절


성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는 사람이나 별 생각 없이 교회에만 출석하는 사람이나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차이가 나타나는 시간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시간은 바로, 고난의 시간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성도가 평소에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았는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 욥의 발언이 계속됩니다. 27장의 대부분을 소발에게 할당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소발의 말이 7절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8절이나 혹은 13절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견해들도 있습니다. 이런 재구성들은 27장의 내용에 대한 학자들 각자의 개인적 견해에 따라 다릅니다. 최종 형태를 고수한다면, 27장이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와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관건입니다.

 

욥의 무죄 주장(1-10)

27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앞부분과 악인이 당하는 운명을 논하는 뒷부분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전반부를 1-6절까지로 볼 수도 있고, 1-7절까지로, 혹은 1-12절까지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1-10절을 하나의 단위로 볼 것입니다. 그 이유는 11절부터 상대를 지칭할 때 단수(‘너’)에서 복수(‘너희’)로 바뀌며, “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운행 법칙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7-10절 혹은 8-10절은 악인에 대한 일반론이 아니라, 욥 자신의 무죄 주장의 연속으로서, 욥 자신은 “악인”이나 “불의한 자”, “불경건한 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1욥이 또 풍자하여 이르되 2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3(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4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5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6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7나의 원수는 악인 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8불경건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는 무슨 희망이 있으랴 9환난이 그에게 닥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10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겠느냐(1-10)

 

27장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새로운 도입구로 시작합니다. ‘마샬’을 개역개정처럼 “풍자”로 이해하면 친구들의 말에 대한 반박과 역공이라는 해석 틀로 27장을 이해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 단어가 ‘잠언’으로 번역되는 점에 주목한다면, 마샬이라는 표현은 27장이 왜 규범적 지혜의 언어를 구사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특히 8-10절과 13-23절은 친구들의 말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규범적 지혜에 속한 어휘와 신학적 주제가 표현됩니다. 이 구절들을 욥에게 할당하는 정경의 전승을 존중할 때, 이 구절이 친구들의 말을 빌려서 친구들을 공격하는 “풍자”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동일한 어휘나 유사한 주제라 할지라도 어떤 문맥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변함없이 고수합니다. 무죄를 주장하는 표현들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불의한 거짓을 말한 적이 없으며 사실이 아닌 것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습니다(4). 4절의 개역개정이 “말하지 아니하리라”라는 번역으로 미래의 의지라는 뉘앙스로 번역했으나, 반드시 미래에 한정해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날들과 지금 현재, 앞으로의 날들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봐야 하는 이유는 첫째, 문법적으로 설명하면, 히브리어 동사에는 시제(tense) 개념이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완료와 미완료로 양분되는 히브리어의 동사 시스템은 완료동사와 미완료동사 모두 과거, 현재, 미래에 다 사용됩니다. 참고로,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의 사고 속에 시제 개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동사를 통해 시제를 표현하지 않을 뿐, 부사나 전치사구, 접속사 등을 비롯한 다른 품사나 표현들로 시제 개념을 나타냅니다. 둘째, ‘맹세와 서약 구문’(2)이 꼭 미래의 약속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이’로 시작하는 ‘맹세와 서약 구문’은 그 이름 때문에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됩니다. 그러나 이 구문은 다음에 이어질 것이 확실한 사실임을 서약하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왔다는 것도 또한 확실한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욥은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의 주장을 죽을 때까지 인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따라 살아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마음이 없고, 지금과 같은 깊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온전함”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5).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부정하고 정죄하는 친구들이 오히려 “악인”이며 “불의한 자”이고(7),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불경건한 자”)라고 “풍자”합니다. 친구들이 즐겨 사용하는 규범적 지혜의 언어로 친구들을 공격하는 수사법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친구들이 말한 ‘악인의 결말’을 그대로 친구들에게 되돌려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들은 욥처럼 죽을 만큼의 고통이 찾아와도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8). 왜냐하면 그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9). 이 구절은 엘리바스(욥15:34), 빌닷(8:13), 소발(20:5)의 말과 궤를 같이 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기뻐하겠느냐”)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10). 이러한 악인에 대한 규범적 지혜의 정의는 욥 자신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욥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외치며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소망하는데(13:3,22; 14:15; 16:20,21; 23:3-6), 악인이라면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호소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께 호소하는 욥 자신은 악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친구들의 말과 유사한 규범적 지혜의 언어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함과 동시에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친구들의 말은 한 번도 하나님을 향한 적이 없습니다.

 

악인의 결말(11-23)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고난과 심판의 시간에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려고 애쓰고, 주님 안에서 교제하는 이들과 함께 그분의 영광을 사모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안다는 것은 단지 지식의 차이가 아닌 삶과 죽음의 차이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11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에게 있는 것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12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 13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포악자가 전능자에게서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14그의 자손은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의 후손은 음식물로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15그 남은 자들은 죽음의 병이 돌 때에 묻히리니 그들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며 16그가 비록 은을 티끌 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 같이 준비할지라도 17그가 준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의 은은 죄 없는 자가 차지할 것이며 18그가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파수꾼의 초막 같을 것이며 19부자로 누우려니와 다시는 그렇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아무것도 없으리라 20두려움이 물 같이 그에게 닥칠 것이요 폭풍이 밤에 그를 앗아갈 것이며 21동풍이 그를 들어올리리니 그는 사라질 것이며 그의 처소에서 그를 몰아내리라 22하나님은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던져 버릴 것이니 그의 손에서 도망치려고 힘쓰리라 23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며 손뼉치고 그의 처소에서 그를 비웃으리라(11-23)

 

이제 욥은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운행 법칙(“하나님의 솜씨”)을 숨김없이 가르치고자 합니다(11). 앞으로 펼쳐질 내용은 친구들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다 알고 경험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경험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이해하지 못합니다(12).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에는 안개나 입김, 수증기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들을 의미하는 ‘헤벨’이 동사와 동족목적어로 나타납니다. 직역하면 ‘너희들은 왜 이것을 안개/수증기로 여기는가?’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욥이 정의하는 악인의 운명은 이것입니다: 우선 “악인”의 평행어는 ‘아리찜’, 즉 ‘폭력을 행사하는 자’입니다(13). 이 단어는 마음(내면)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 간에 실제 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일컫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언어 폭력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폭력적인 인간들과 그들의 후손이 하나님께 받을 것은 죽음과 배고픔입니다(14). 그들 중 일부가 죽음(“칼”)에서 용케 살아남았다 해도 병들어 죽게 될 것이며, 장례식에서 그들의 아내는 죽은 남편을 위해 울지 않을 것입니다(15). 악인이 비록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입을 옷들을 겹겹이 늘어놓아도(16), 그의 의복은 의로운 자들이 입게 될 것이고 죄 없는 자가 그의 재물을 나눠 가질 것입니다(17). 악인이 지은 집은 마치 새집이나 거미줄로 된 집처럼 임시로 지은 막사나 움막에 불과합니다(18). 부유한 채로 잠자리에 들지만 자고 일어나면 그는 더 이상 부자가 아닙니다. 그의 재물은 하룻밤 사이에도 없어질 수 있습니다(19).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재물을 잃을 두려움이 매일 밤 악인을 홍수처럼 덮칠 것이며(20), 한줄기 바람에도 그의 집과 그 자신마저 날아가 사라질 것입니다(21). 22절과 23절의 3인칭 남성 단수 주어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21절의 동풍일 수도 있고, 비인칭주어로서 불특정한 다수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22절의 주어는 “하나님”으로 보고, 23절의 (동일한 3인칭 단수) 주어는 “사람들”로 해석했습니다. 그보다는 22절과 23절의 주어를 둘 다 ‘하나님’으로 일치시키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아낌없이 “동풍” 혹은 “화살을 쏘아 보내시면 악인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도망쳐야 합니다(22). 그래 봤자 하나님 손바닥 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처소인 하늘에서 도망치려는 악인을 보고 박장대소하십니다(23). 이러한 악인의 결말은 친구들의 설명과 유사합니다(15:28-35; 20:4-29 등). 그러나 세밀한 차이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손의 많음(14)은 규범적 지혜에서 의인/지혜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욥은 악인에게도 자손이 많을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둘째, ‘칼에서 살아남는 것’도 의인/지혜자의 ‘분깃’입니다. 그러나 욥은 악인이 칼에서 살아남을 가능성도 염두에 둡니다. 셋째, 재물 역시 의인에게 할당된 복입니다. 그러나 욥은 악인이 재물이 많을 수 있다고 합니다. 돈이 산더미처럼 많고 입을 옷이 즐비한 부자를 악인과 연결시키는 것은 반성적 지혜에 속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믿음의 선진들은 큰 어려움이나 가난, 고통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며 당당한 모습을 유지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라는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신앙 훈련을 이어 나간다면 당당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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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5-01)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욥기 25장 1절-26장 14절


 

하나님께서 창조 이후에는 세상에 간섭하지 않으시고, 세상은 자연의 이치대로 움직인다는 이신론 사상이 있습니다. 이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관념에 갇혀 있는 추상적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만물의 주권자임을 말합니다.

 

  • 25장과 26장을 비교해서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얼핏 보기에 하나의 이야기 (26:1-5을 제외하고)로 묶는 것도 가능할 만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25장을 빌닷의 말로, 26장을 욥의 말로 구분합니다.

 

빌닷의 지혜: 하나님의 크심과 인간의 작음(1-6)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의 수고와 공로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 주셨기에, 우리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한량없는 은혜에 응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3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4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5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6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25:1-6)

 

빌닷의 마지막 발언은 짧고 주제도 단순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개념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곳”에 계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분께는 ‘공포’와 ‘평화’가 공존합니다(2). “위엄”으로 번역된 ‘파하드’는 주로 두려움과 무서움, 놀람이나 공포를 뜻합니다(욥 3:25;4:14;13:11;15:21;21:9;22:10;23:15;25:2;31:23; 39:16,22). 개역개정이 (긍정적 의미의) “위엄”으로 번역한 경우는 이 구절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로서 공포로 다스리기도 하시고 평화로 다스리기도 하십니다. 그의 다스림(“광명”)을 받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3b). 위대한 창조주 앞에서 모든 피조물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3)라는 표현은 수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욥의 “누가 능히 헤아리라”(26:14)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달”과 “별”은 일종의 천상적 존재로 여겨지는데, 이런 피조물 중 최고의 것들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감히 자신의 빛을 뽐내지 못합니다(5). 하물며 하찮은 벌레 같은 인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4,6). 참고로, 인간 전체를 표현하는 말로서 빌닷은 ‘여자에게서 난 자’(4)와 ‘사람의 아들’(인자, 6)을 사용합니다. 인간은 제아무리 의롭고 깨끗하다 해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합니다(4).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진술과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표현하는 주제는 욥과 친구들의 입을 통해 반복되었습니다(4:17;9:2;15,20;10:15;15:14;22:3).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의롭고 깨끗할 수 없는데 빌닷은 왜 욥에게 의롭고 깨끗하기를 요구합니까?(8:6) 만약 욥의 고난이 의롭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것에 대한 대가로 지불하는 ‘까닭 있는’ 고난이라면, 세 친구를 비롯한 모든 인류도 욥과 동일한 정도의 ‘징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왜 인과응보의 원리가 선별적으로 작용합니까?

 

빌닷의 지혜에 대한 반박(26:1-5)

하나님 앞에서 어느 인생도 깨끗할 수 없습니다. 이는 분명히 옳은 말이지만 상대방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없다면 상대를 공격하고 죽이는 칼이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대로 행하지 않으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빌닷은 하나님 앞에 비천한 존재이므로 욥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3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4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5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26:1-5)

 

빌닷의 ‘모두가 죄인’이라는 일반론은 사실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신학적 개념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욥을 정죄하기 위한 논리입니다. 그 일반론 안에서 빌닷 자신은 비켜서 있다는 사실을 욥의 반론은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빌닷의 짧은 발언에 대한 욥의 반박은 ‘의로움’에 대한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일반론에 맞서 ‘너는 의로운가’라는 질문은 사실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욥의 반론은 빌닷의 주장대로 모두가 죄인이라면 빌닷 역시 마찬가지고 욥을 향한 손가락질은 마찬가지로 빌닷 자신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의로움에 대한 욥의 정의입니다. 힘없는 자를 도와주는 것(2)과 지혜 없는 자에게 조언을 해주고 깨달음을 주는 것(3)은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면서 사용하던 표현이었습니다(“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4:3-4). 욥은 자신이 이런 의를 행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이라는 빌닷의 논리 (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를 빌닷에게 되돌려줍니다: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4a). 그 말이 돌아가야 할 곳은 빌닷 자신이다. 또한 욥은 빌닷의 지혜의 출처를 묻습니다. 4b절을 직역하면 ‘누구의 호흡(“정신”)이네게서 나왔느냐’입니다. 빌닷은 자신의 지혜가 조상들의 축적된 지혜임을 강조했습니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8:8). 욥은 이 지혜가 ‘죽은 지혜’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옛 시대 사람”과 “조상들”은 “죽은 자의 영들”(5)이며 그들은 물 밑 저 아래에서 두려워 떨며 머물고 있다고 말합니다(5). 죽은 자의 눈으로 현실을 보지 말고 직접 자신의 눈으로 이 창조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은 전형적인 반성적 지혜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한계(26:6-14)

우리는 피조물의 연약함에 사로잡혀 죄인의 태도를 고수할 것이 아닙니다. 더욱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신뢰함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여겨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6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7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8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9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10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11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 12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 13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14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6-14)

 

5절은 일종의 회전축(pivot)입니다. 4절 하반절과 연결하여 빌닷의 지혜가 죽은 자들의 지혜임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논의의 시야를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공간으로 옮겨갑니다. 그 첫째가 죽음의 공간(스올과 아바돈)입니다. 죽음의 공간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며, 그곳조차 하나님께는 감출 것이 없이 모두 선명히 드러납니다. 둘째는 하늘이라는 공간입니다. 욥은 구름이 물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왜 항상 비가 내리지 않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자기처럼 구름으로 물을 잘 싸매서 구름 안의 물이 지상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창을 중간에 두어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로 나누고(창 1:6-7), 그 사이에 창문들이 있어서 때때로 비가 내린다(창 7:11; 8:2)는 창세기의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과 뭍 사이에 경계를 만드신 분도 빛과 어둠의 경계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10). 하나님께서 천둥과 번개로 소리치시면 온 땅과 하늘이 두려워 떱니다(11).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면(즉, 바람이 불면) 구름이 사라져서 하늘이 맑아지고, 그분의 손(번개?)으로 도망가는 뱀을 꿰뚫으실 수도 있습니다(13).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 번째 공간은 바다입니다. 바다가 흉흉할 때(라합이 격동할 때) 그 바다를 잠잠케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12).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설명하면서 욥은 죽음의 세계와 하늘과 바다를 그 예로 듭니다. 이 공간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인간이 갈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활공간과 활동 영역을 벗어나는 곳마저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은 실제로 그 공간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를 설명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모르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 함입니다. 욥은 14절에서 이린 예를 든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극히 작은 부분(“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음성으로 알려주시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나, 그 음성이 그분의 모든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그분께서 어떤 일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하시지는 우리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25장과 26장의 비교

25장과 26장(5-14절)이 모두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에 많은 학자들이 둘 모두 빌닷의 말로 이해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주제는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 양측 모두에서 주장합니다. 어느 지혜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규범적 지혜는 인간의 활동 영역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집중하기 때문에, 각 인간이 그분의 뜻에 맞게 사느냐 그렇지 않느나 라는 ‘의’와 규범의 문제를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반성적 지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세계조차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세계는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언설(38-41장)의 핵심 내용입니다.


빌닷의 마지막 답변은 그들의 지식으로는 욥의 고난에 대해 명케하게 답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저 체념하고 고난을 받아들이라는 결론밖에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종교이든지 그저 고난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죄와 사망 권세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정한 해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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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4-01)


악인 심판을 갈망하는 욥

욥기 24장 1-25절


 

미국 시카고에서는 휘튼칼리지라고 하는 명문 대학이 있습니다. 그 대학에는 플랭카드 홀이라는 건물 2층에는 그 학교가 배출한 선교사들의 명단과 사진이 붙어있습니다. 몇 사람의 사진에는 십자가가 붙어있는데, 그 의미는 선교사의 삶을 살다가 순교하였다는 표시라고 합니다. 그 학교 출신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짐 엘리엇’이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 24장은 엘리바스의 규범적 지혜에 반박하는 점에서는 23장과 연속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반성적 지혜이 독특한 대안적인 선악 개념이 표현되는 점에서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장입니다. 이 장에서는 규범적 지혜의 어휘와 개념들(부자와 가난한 자, 빛과 어둠 등)을 욥이 어떤 방식으로 뒤틀어서 반성적 지혜를 설명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규범적 지혜자들에 대한 반론(1)

당연하게 믿고 있는 진리가 현실 속에서 실현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 진리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갖게 됩니다. 특별히 악에 대한 심판이 지연되는 현실을 발견하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욥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세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불평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1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1)

 

1절 상반절의 원문은 이해하기 까다롭습니다. ‘니쯔페누’는 ‘감추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왜 시간들이 전능자로부터/에게서 감추어지지 않는가?’입니다. 동사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대입했을 때 의미가 명확해지지 않기에 많은 번역들은 다양한 의미로 이해합니다: 정해지다, 알려지다 등. 의문사와 부정어가 혼합된 문장이라 수사의문문으로서 본래의 전체의미가 긍정문(시기가 감추어졌다)인지 부정문(시기가 감추어지지 않았다)인지도 혼동됩니다. 따라서 상반절의 의미는 하반절을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반절은 ‘왜 그분을 아는 자들이 그의 날들을 보지 못하는가?’입니다. ‘그분을 아는 자들’이란 엘리바스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안다고 믿는) 규범적 지혜자들을 일컫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패턴을 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예를 들어 자신이 언제 죽을 지 왜 그들은 알지 못하는지를 반문하는 표현입니다. 만약 상반절이 ‘시기들이 감추어졌다’라는 의미라면, 1절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이 정하신 시기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규범을 안다고 하는 자들마저 그 시기를 알지 못한다'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반면, ‘시기들이 감추어지지 않았다’라는 의미라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하신 시기(규범/패턴)를 알려 주신다는데, 왜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날도 미리 예측하지 못하는가’ 정도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상반절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이든 간에, 욥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패턴을 안다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패턴을 알려주신다고 믿는 규범적 지혜자들조차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항상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불의한 현실(2-17)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악한 일들에 사람들의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생활 방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라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을 사는 올바른 처세술이며 성공으로 이끄는 삶의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악인이 큰소리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합니까?

 

2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3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4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5그들은 거친 광야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빈 들이 그들의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음식을 내는구나 6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악인이 남겨 둔 포도를 따며 7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워도 덮을 것이 없으며 8산중에서 만난 소나기에 젖으며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9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10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 11그 사람들의 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 12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13○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그 도리를 알지 못하며 그 길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14사람을 죽이는 자는 밝을 때에 일어나서 학대 받는 자나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 15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가리며 16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잠그고 있으므로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17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기니 죽음의 그늘의 두려움을 앎이니라(2-17)

 

2절부터 24절까지 욥은 악인들과 그들의 결말,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것은 친구들의 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제들이었습니다. 욥이 이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악인들과 그들의 부당한 행위들을 고발하면서도 ‘악’이나 ‘무지(지혜없음)’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서술 방식을 채택합니다.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사람들인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악한 행위들을 하게 만들었는지, 그런 악인들의 결말은 어떠한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욥의 친구들만큼의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욥이 목도한 불의한 현실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땅의 경계선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서 남의 땅을 빼앗기도 하고, 경계를 변경하여 그 땅 안에 있던 양떼를 자기 소유로 착복하기도 합니다(2). “고아”와 “과부”로 상징되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소유조차 빼앗는 사람들이 있습니다(3). 가난한 자들은 학대를 당해서 길거리에서 쫓겨납니다(4).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라는 개역개정의 번역은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홉베우’는 푸알형으로 수동의 의미가 강합니다. 스스로 숨는 것이 아니라 빼앗고 학대하는 자들에 의해서 ‘거리에서 사라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거리에서 쫓겨난 이들은 “거친 광야”와 “빈 들”, 즉,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워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에서 먹거리를 구해야만 하는 처지에 이릅니다(5). 이 가난한 자들은 ‘남의 것’ 혹은 동물이나 먹는 사료를 훔쳐먹거나, 땅에 떨어져 상태가 나쁜 포도를 주워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6). 이들은 추운 밤에도 입을 옷 하나없이 벌거벗은 채로 잠을 자야 합니다(7). 비가 오면 겨우 바위틈에서나 비를 피하려 하지만 그들의 몸은 흠뻑 젖고 맙니다(8). 사람들은 아이를 어머니 품에서 빼앗아 고아로 만들거나 혹은 고아를 비롯한 가난한 자의 것마저 폭력으로 착취합니다(9). 이렇게 하나 남은 것마저 빼앗긴 사람들은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닙니다(10절 상반절). 그들은 밭과 포도원을 소유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됩니다. 그들이 운반할 곡식은 풍성 하나 그들이 그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10절 하반절). 그들이 짜내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11). 먹거리가 없어서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고통에 허덕이는 자들이 아무리 도와 달라고 외쳐도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시지 않습니다, 혹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다(12). 빛을 싫어하고 밝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13). 욥은 이 말을 할 때 ‘빛’은 좋은 것이고 ‘어둠’은 나쁜 것이라는 가치판단을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빛이 있는 낮에도 악을 저지르고 빛이 없는 밤에도 악을 저지릅니다. 살인자들은 ‘빛에(“밝을 때에”)’ 사람을 죽입니다. 그것도 가난하고 학대받는 불쌍한 사람들을 말입니다(14절 상반절). 어두워지면 도둑질을 하거나(14절 하반절) 간음을 저지릅니다(15). 도둑질을 하느라 밤에 활동하는 자들은 낮에는 집에 틀어박혀 잠을 잡니다. 그들에게는 ‘낮’이 곧 ‘밤’이고, 빛이 곧 어둠입니다(16-17).

 

악인의 결말(18-24)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부조리 연속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도 성공을 얻지 못합니다. 불법과 부정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좌시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때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참고 견뎌야 합니다.

 

18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 19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빼앗나니 스올이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20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21그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박대하며 과부를 선대하지 아니하는도다 22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23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24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18-24)

 

18절부터 24절은 악인들이 처하게 될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 악인의 결말을 설명하는 욥의 언어는 친구들의 것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그들의 삶은 “빠르게 지나가고” 그들의 소유도 “저주를” 받습니다(18).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며(19) ‘잊혀짐’이 그들의 운명입니다(20). 저주와 죽음과 잊혀짐은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가 규정하는 악인의 결말과 동일합니다. 또한 그들이 높아져 잠시 잘 나가는 때가 있으나 곧 낮아지고 추수 때의 이삭처럼 잘려 나갈 것이라는 말(24)은 앞선 소발의 주장과 유사합니다(“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20:5). 그런데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이런 “강포한 자들”을 인도하시는 분도(22), 그들에게 평안을 주시며 그들에게 의지가 되시는 분도(23)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23절의 개역개정은 상반절과 하반절을 반의적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이 번역은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를 ‘악에 대한 심판’이라고 보는 번역자의 해석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의 시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는 것인데, 18-24절의 전반적인 표현이 규범적 지혜의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이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해석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평안을 주시고 그들의 삶을 지탱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신다’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떤 해석이든, 이 구절이 모든 것을 관할하시고 모든 일이 그분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패턴의 불확실성(25)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악한 방식으로 이웃을 이용하거나 억압해 부와 명성을 쌓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가르칩니다(롬 12:1). 성도들은 세상에서 말하는 세속적 성공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영원한 상급에 삶의 목적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25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25)

 

악인의 결말을 규범적 지혜와 거의 유사하게 표현하고 있는 욥의 주장의 결말은, 그러나 친구들의 것과 다릅니다. 규범적 지혜는 반드시 그 규범대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욥은 악인의 운명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가 욥의 주장의 핵심입니다. 악인들의 결말이 이럴 수 있지만, 혹은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꼭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규범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하는 기계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패턴에 따라 현실이 흘러가지 않아도 그 현실이 잘못되었다거나(“거짓”) 현실이 허상이라고(“헛되게”) 말할 수 없습니다(25절 하반절). 현실은 현실입니다. 자연세계와 인간의 삶에 규범이나 패턴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규범과 패턴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공의로운 분이라는 사실이 변함없는 진리인 이상 악인의 형통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로 인해 이 세상에서 평안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우리는 장차 이루어질 악인들의 멸망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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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3-01)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욥기 23장 1-17절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고 침묵하시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음성을 생생하게 들려주시며 각종 은사를 주시던 친절하고 따뜻한 주님이 느껴지지 않게 되게 철저하게 홀로 남겨진 것과 같은 소외감과 불안 속에서 고독을 맛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심한 고난까지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욥도, 엘리야도, 모세도 그랬습니다.

 

  • 욥은 이제 하나님을 발견하여 그가 계신 곳에서 정의로운 심판을 받고 싶습니다. 따라서 변론할 말을 준비하여 하나님을 찾아 사방을 헤매었지만,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고 만날 수 없어 탄식합니다. 그럼에도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살았음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결정하고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를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원하는 욥(1-7)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확인할 수 있어야 탄식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랑을 도무지 확인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되인 되었을 때 자기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확인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 안에 원망과 탄식이 끝납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6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1-7)

 

욥은 엘리바스의 권면에 대해 다비합니다. 먼저 자신의 혹독한 고통에 대해 한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가 당하고 있는 재앙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1) 엘리바스의 발언에 대답하는 욥(1)

 

엘리바스의 혹독한 정죄와 회개에 대한 권면을 들은 욥은 엘리바스와 친구들에게 대답하기보다는 마치 독백을 하듯이 말을 이어갑니다. 욥기 23-24장까지 계속되는 욥의 발언에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과 찾을 수 없는 하나님(23:2-9), 하나님에 대한 신뢰(23:11-17), 하나님의 때를 알고자 하는 갈망(24:1), 악행자의 심판의 때(24:2-25) 등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23장은 하나님의 장소(하나님이 어디 계실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24장은 하나님의 때(하나님이 언제 심판을 하실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원하는 욥(2-7)

 

욥은 너무 답답하고 억울하여 하나님을 만나 뵙기를 갈망합니다.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재판을 받기 원합니다. 그의 친구들은 첫 대화 때부터 줄곧 선입견과 치우친 논리와 억측으로 자신들의 발언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제 엘리바스는 단도직입적으로 욥이 큰 죄인이라고 친구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하였고, 욥에게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복을 받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21장).

엘리바스의 발언에 오늘도 욥의 마음에는 반항과 불평이 저절로 끓어오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린 재앙보다 친구들이 주는 상처로 인해 욥의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탄식이 더 견디기 버거울 지경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엘리바스의 주장과 권고를 완전히 무시합니다. 욥이 짓지도 않은 죄를 추론하여 늘어놓는 것을 들으며 억울한 마음이 불끈 솟구치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힘써 지켜왔음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지는 않습니다(10-12). 또한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종용하는 엘리바스의 조언을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정직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이라는 의지를 불태웁니다(7).

“어디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욥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변론할 말을 잘 준비하여 그분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나서 왜 자기가 이와 같은 무고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공정한 재판을 열어 알려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공정한 재판정에서 욥은 하나님께 억울한 사정을 아뢸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다 들으시고 무죄를 선포하실 것임을 고대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재판장으로서 그의 큰 능력을 행사하셔서 욥을 거세게 논박하지는 않으실까 두려운 생각이 들어 잠깐 주춤합니다(6). 또한 앞서 9장에서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받는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하였습니다(9:14-16).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변론을 들으실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결백을 선언 받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욥이 자신의 정직함(7.10)에 대해 확고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작정하신 일을 이루실 것(13-14)에 대해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욥을 위선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욥에 대한 평가 기준은 명백한 증거가 아니라 자기들의 주관적인 해석과 치우친 논리였습니다. 욥은 자신이 결백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처벌을 완전히 그리고 확실하게 면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부재와 욥의 신앙(8-12)

 

감당하기 힘든 삶의 시련과 재난을 만날 때 우리는 그 해결책이 수학 공싲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은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깊은 고통 가운데 빠져들어 갑니다. 욥의 상황이이와 같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갈망과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긴 탄식을 쏟아 냅니다.

 

8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8-12)

 

욥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현실에 또다시 탄식합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a=뵐 수 없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멀리 떠나신 것이 아니라 그를 지켜보시며 그의 기도와 탄식을 다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느껴지지 않는다고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1) 하나님의 부재(8-9)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받아 억울함을 풀고자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욥이 전후좌우와 동서남북 어디를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탄식이 깊어진다. 무소부재한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이 계셨던 흔적은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욥에게는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길로 행한 욥(10-12)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욥은 “그가 나의 가는 길을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과 무능에 좌절을 느끼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삶을 다 알고 계심을 확신하며 선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정직한 자이며 하나님 말씀을 토대로 살아온 것을 아실 것이라는 데에 추호도 의심이 없습니다(10). 또한 이러한 욥의 확신 있는 진술은 앞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행하라고 경고한 것(22:22)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욥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그가 택했다는 길은 대체 어떤 길입니까?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즉, 그가 택했고 그가 살아온 길은 바로 ‘하나님의 길’이었습니다. 그가 따라갔던 발걸음이 바로 ‘하나님의 발걸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에 머물러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그의 길만을 똑바로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발걸음은 하나님의 입술에서 직접 나오는 명령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와 뜻이 다 담겨있습니다. 욥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먹어야 하는 음식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하루에 정한 음식이 몸을 건강하게 지켜 생명을 연장시키듯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건강과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욥은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자신의 영적 생명에 영양을 보충해주고 영적으로 더 풍성한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살아왔기 때문에, 욥은 현재의 고난을 하나님으로부터의 형벌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용광로에서 불순물을 다 녹이는 연단을 받고 정금이 되어 나오는 과정이라고 여깁니다. 욥은 이 시련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이 더 굳건해질 것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함(13-17)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만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며 그분을 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오히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를 멀리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13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13-17)

 

욥은 믿음을 갖게 된 근거로 과거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귀히 여기며 지켰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죄를 아시면서도 자신을 고난 가운데 몰아넣기로 작정하셨고, 그러한 하나님의 작정을 막을 수 없다는 두려움입니다.

 

(1) 작정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13-14)

 

욥은 하나님께서 유일한 절대 주권자이시므로 본인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신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결정하는 일에 자유로우시며 성취하시는 일이 많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에 자신에 대해 작정하신 일이 있다고 믿습니다. 욥에게 주신 재앙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며 앞으로의 계획도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욥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욥의 미래에 어떤 것을 작정하셨는지 알 수도 없으나, 계획하신 것을 분명히 이루실 것임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욥이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생각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자기의 계획과 뜻과는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을 욥이 인정한 데서 나옵니다.

 

(2)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함(15-17)

 

욥이 떳떳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경외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무엇이든 원하시는 대로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반면, 욥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힘도 지혜도 없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두려워 떱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욥은 그에 대한 경외감에 사로잡힙니다. 엘리바스는 재앙과 고난으로 인해 두려움이 욥에게 임했다고 주장했습니다(22:10–11). 그러나 욥은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에게 닥친 흑암과 같은 재앙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로 인해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욥은 매사에 말로나 행동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우매한 자와 같이 행동하기를 거부했습니다(1:5,22;2:1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조차도 욥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1:8;2:3) 라고 평가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 경외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세상도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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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2-01)

 


엘리바스의 불가능한 축복

욥기 22장 1-30절


 

욥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음에도 엘리바스는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을 죄인으로 규정하면서 그 죄가 끝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맹렬히 공격합니다. 엘리바스가 아무리 옳은 말을 했다고 해도 이런 태도로는 상대방에게 결코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 욥과 친구들 사이의 세 번째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번에도 엘리바스가 포문을 엽니다. 이것이 엘리바스의 마지막 발언입니다. 이번 발언의 특징은 규범적 지혜의 일반적인 진술에 그치지 않고 욥의 죄를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물론 엘리바스가 언급하는 욥의 죄는 직접 목격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추론해낸 것입니다.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불만(1-11)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께 아무 이득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겸손과 자기 비하는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큰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 무엇보다 우리 인간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십니다.

 

1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3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4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5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6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7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8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9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10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11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1-11)

 

엘리바스는 욥의 경건과 지혜를 조롱합니다. 심지어 인강 자체가 하나님께 별 의미 없는 존재인 것처럼 함부로 말합니다.

 

(1) 징벌은 죄의 증거(1-5)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엘리바스의 발언은 신앙의 ‘유익’에 대한 것으로 시작합니다. 15:3에서 욥의 반성적 지혜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했던 엘리바스의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유익’이라는 단어 ‘사칸’은 엘리바스와 그리고 후에 엘리후의 발언에서만 등장합니다(15:3; 22:2; 22:21; 34:9; 35:3). 욥과 욥기의 반성적 지혜는 신앙을 ‘유익’과 ‘이익’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악인들의 생각이고(21:15) 사탄의 생각입니다(1:9-11;2:4-5).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올바르게 살아가는 의(=지혜)가 인간에게 유익을 준다고 믿습니다. 이 규범적인 지혜의 패턴을 아는 것을 통해 재앙(넘어짐과 끊어짐, 패함)을 피할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신학은 한발 더 나아갑니다. 의와 지혜는 인간에게 유익이 되지만 그것이 곧 높으신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꼐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인간에게 지혜를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며, 오직 인간에게 도움이 되게 하려고 알려주십니다. 엘리바스는 이 진술을 욥의 무죄 주장을 타파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욥이 아무리 의로움과 온전함을 주장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3). 그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는 겨우 욥 하나를 바로 잡기 위해 욥을 꾸짖고 심판하실 필요가 없습니다(4).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드는 것, 욥을 가르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3). 하나님마저도 ‘이익’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시므로(뿌린 대로 거두시는 분이므로), 욥에게 재앙이 임한 것은 욥을 교육하고 지혜롭게 만드시기 위함이 아니라, 단순히 욥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5). 기계적인 법칙인 인과응보의 규범이 작동한 것뿐입니다.

 

(2) 욥이 지은 죄와 그로 인한 결과(6-11)

 

엘리바스는 욥이 지은, 정확히는 욥이 지었음에 분명한 죄악을 나열합니다. 첫째, 그는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았습니다(6a). “볼모로 잡으며”로 번역된 동사는 ‘하발’인데, 이것은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욥기의 핵심 단어 중 하나인 “까닭 없이(힌남)”가 사용되는데, 이 문맥에서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란 뜻입니다. 즉, 욥은 사람들을 부당하게 갈취한 것입니다. 상반절만으로는 어떤 것을 갈취했는지 목적어가 나와 있지 않지만, 하반절의 평행구가 그 빈 자리를 채워줍니다. 소위 ‘계단식 평행법(staircase parallelism)’으로 불리는 것인데, 평행하는 구와 절이 의미를 보충해 주거나 선명하게 좁혀 주는 역할을 합니다. 상반절의 “형제”는 “헐벗은 자”와 평행어로서, 둘이 합해 ‘헐벗은 형제’라는 표현이 완성되고, “볼모로 잡으며”와 “의복을 벗기며”가 합해져 ‘의복을 담보로 잡다’라는 상황이 선명해집니다. 가난한 자의 옷을 담보로 잡는 것은 율법 규정에 어긋납니다(신 24:17). 또한 담보를 맡기고 잡는 일에 속임이나 도둑질과 같은 착취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레 6:2). 둘째, 욥은 부유하면서도 가난한 자를 돕지 않았습니다(7-9). 목마른 자와 주린 자에게 물과 음식을 주지 않았습니다(7).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의 율법에 이와 완전히 동일한 표현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약자를 보호하는 규정은 많이 있습니다(출 22:25; 23:11; 19:10; 23:22; 15:4-5,7,11 등). 잠언은 더 나아가, 원수에게까지 물과 음식을 제공하라고 가르칩니다(잠 25:21). 욥은 ‘얼굴이 들린 자’로서 땅을 소유하고 있는 힘 있는 자였습니다. ‘얼굴을 들다’라는 숙어는 ‘편애’를 의미합니다(창 19:21; 32:21;민 6:26; 신 28:50; 삼상 25:35 등등). ‘얼굴이 들린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사회적으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많은 존경을 받는 자를 뜻합니다(왕하 5:1; 사 3:3; 9:14).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당연히 해야 할 규범을 지키지 못하고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 것은 악이며 죄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성경에서 사회적 약자(통칭 “가난한 자”)를 대표하는 상징어입니다. 이들을 보호하라는 명령과 이들을 도와주지 않거나 억압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는 경우는 매우 많습니다(출 22:22; 10:18; 14:29; 24:17, 19-21; 26:12-13;27:19; 1:17,23; 10:2;7:6; 22:3; 22:7,25; 슥 7:10, 말 3:5 등). 엘리바스에 의하면 욥이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위에서 열거한 욥의 죄악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악을 저지른 죄에게 “올무”와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10). 악인은 자신이 파놓은 함정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라는 주제가 여기서도 반복됩니다. 고난은 “어둠”과 “홍수”라는 단어로 비유됩니다(11). 하나님께서 주신 재앙을 어둠으로 표현하는 것은 엘리바스의 말에서 자주 등장합니다(5:14; 15:22,23,30). 욥이 처한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엘리바스의 진단은 한 마디로, ‘까닭 없는 고난은 없다’입니다. 사탄의 ‘까닭 없는 신앙은 없다’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잘못된 생각(12-20)

우리는 다른사람에게 조언해야할 필요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바로잡아주려는 마음은 좋은 것이지만 그에합당한 태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조언이 사실과 진리에 근거해야합니다. 또한상대방의 반응과상관없이 온유함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태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도록 신중히 처신해야 합니다.

 

12○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우두머리 별이 얼마나 높은가 13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14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15네가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16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터는 강물로 말미암아 함몰되었느니라 17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18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의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머니라 19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죄 없는 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20우리의 원수가 망하였고 그들의 남은 것을 불이 삼켰느니라 하리라(12-20)

 

악인이자 죄인인 욥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잘못되었습니다. 옛적부터 악인들이 걸어온 전형적인 길을 욥도 걷고 있습니다(15). 저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12) 악인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구름 뒤에 계셔서 보이지 않으며 단지 하늘의 궁도를 걸어 다니실 뿐이라고 생각합니다(14). 그런 하나님께서 구름 건너 이 땅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일들을 알 리가 없고 따라서 하찮은 일들을 일일이 심판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 악인의 생각입니다(13). 악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기를 바라고(17a), 하나님이 인간 삶에 개입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합니다(17b). 엘리바스는 이 말을 욥이 했다고 말합니다(13).

물론 욥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은 없습니다. 욥은 오히려 그와 반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7:19-20; 10:4-6; 13:27;14:3,6; 16:9). 욥을 비롯한 악인들은 이러한 잘못과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생각 때문에 자신의 수명을 다살지 못하고 죽고(“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집은 없어져 버리는 운명을 맞이합니다(16). 엘리바스 자신은 이러한 악인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18b). 이 표현은 욥의 표현을 그대로 모방한 것입니다(21:6). 욥은 이 표현을 재앙이 임하지 않는 악인들의 경우를 묘사하며 사용했는데, 엘리바스는 전혀 다른 문맥에서 같은 표현을 적용합니다. 죄로 인해 징벌을 받는 악인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합니다.

 

회개로의 요청과 의인에게 임하는 복(21-30)

사람들은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힘없는 사람이 자기 앞에서 겸손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소위 ‘갑질’이라는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자세는 자신을 하나님처럼 이기는 교만함의 극치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욥이 자신들 앞에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21○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22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23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24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25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26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27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28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29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30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21-30)

 

엘리바스의 마지막 조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하라는 것입니다(21). 흥미로운 것은 개역개정이 “화목하고”로 번역한 단어는 ‘유익이 되다’라는 뜻의 ‘사칸’입니다. 히필형으로는 ‘익숙해지다’(민 22:30)나 ‘친해지다’(시 139:3)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하나님과 유익한 사귐의 관계로 들어가라는 조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는 ‘유익’이 있고 유익한 결과가 주어집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직접 귀한 “보화”와 “고귀한 은”이 되시며(25); 기도하고 말하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7-28). 여기에는 조건(까닭/이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속에 새기고(22), 악을 멀리하고(23), 자신의 소중한 것을 버리고(25),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고(26), 겸손해야 하며(29), 손을 깨끗이 하고 죄 없는 상태가 됩니다(30). 이로써 엘리바스는 모든 말을 마칩니다. 엘리바스의 정죄는 곧 욥에게 반박을 당하고(23:10-12; 29:12-17; 31:7-40),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도 ‘우매’라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42:7-8).


모든 성도에게 회개라는 단어는 너무나 익숙합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감정을 넘어 진정한 삶의 변화를 이끕니다.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시는 죄에 머물면서 회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덧입어 참된 변화를 이루고 선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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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1-02)


모순된 주장을 비판하는 욥

욥기 21장 17-34절


 

우리는 믿음대로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복 받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을 근본부터 흔드는 때가 찾아옵니다. 그때가 이유 모르는 고난의 시기입니다. 고난 중에는 신학적 물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 부재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 아직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했으므로 현실에서는 다양한 삶의 양상이 나타납니다. 악인들이라도 기력이 넘쳐 기세등등하고 건강하며 안전과 번영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들이 죽을 때조차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도 합니다. 친구들의 말은 한결같이 ‘의인은 흥하고 악인은 망한다’는 법칙을 강조하지만, 이 법칙이 세상에서 그대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심판받는 악인이 드문 현실(17-22)

지금도 악인은 좀처럼 심판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악인의 형통함을 좇아 악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누리는 형통함은 하나님 백성이 영원히 누릴 영과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17○악인의 등불이 꺼짐과 재앙이 그들에게 닥침과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하게 하심이 몇 번인가 18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 같이, 폭풍에 날려가는 겨 같이 되었도다 19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그의 자손들을 위하여 쌓아 두시며 그에게 갚으실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0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할 것이니라 21그의 달 수가 다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17-21)

 

욥은 악인이 형통을 누리는 엄연한 현실과 악인의 교만한 내면을 지적함으로 친구들이 주장하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얼마나 모순되는지 앞서 지적했습니다. 욥은 나아가 그들의 주장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강조합니다.

 

(1) 심판 받는 악인이 드문 현실(17-18)

 

욥은 7절부터 계속해서 현실에서 풍요를 누리는 악인의 삶에 대해 언급하며 세 친구의 ‘악인은 멸망한다’는 논증에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악인의 빛과 등불이 꺼지고 자신의 꾀에 빠져 재앙을 당한다”(18:5-12)는 빌닷의 주장에 “얼마나 자주 악인들의 등불이 꺼지고(갑자기 죽고), 그들에게 재앙이 닥치며,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재앙을 할당받느냐?”고 반문합니다. 또 “얼마나 자주 악인이 바람과 폭풍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을 받아 이리저리 날려가는 지푸라기나 겨(시 1:4)와 같은 처지에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친구들의 주장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재앙에 처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욥의 반론입니다.

 

(2) 악인의 징벌과 후손(19-21)

 

덧붙여, 욥은 “악인의 징벌이 후손에게 미친다”는 친구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18-19절에서 언급된 것처럼 그의 생애에 일어나지 않고 연기된다면 욥의 친구들은 십중팔구 “하나님이 악인에 대한 처벌을 자손에게 내리시려고 쌓아 두신다”(5:4에서 엘리바스의 주장; 20:10에서 소발의 주장)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자녀가 아니라 죄를 지은 바로 그 장본인에게 갚으셔서 그가 직접 깨닫도록 하셔야 할 것이라고 욥은 주장합니다. 악인이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한 자신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여 전능자의 진노를 마셔야 하지, 만약 악인이 수명이 다해 죽거나 중간에 죽으면 죽고 난 후에 자기 자손이나 자기 집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말하며 친구들의 주장을 일축합니다.

이와 같은 욥의 주장은 선지자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말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납니다. 선지자들은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이 이가 시리다”라는 속담을 예로 들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에 대한 심판이 자기들이 아닌 후손에게 임할 것이므로 자기들은 상관없다며 죄를 계속 저지르는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그런 속담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신포도를 먹는 그 자가 이가 시림같이 각기 죄악으로 죽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선포하였습니다(렘 31:29-30; 겔 18:2-4).

 

두 사람의 죽음(22-26)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겸손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뜻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삶의 지식과 경험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가르치고 전하는 일은 욥의 친구들이 전한 헛된 위로이며 거짓된 가르침과 같을 뿐입니다.

 

 22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23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24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25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26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23-26)

 

욥은 악인의 멸망을 주장하는 친구들의 변론이 결국 자신을 정죄하기 위한 속셈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집과 장막을 무너뜨리신다는 거들의 주장을 반박하여, 여전히 악인의 장막이 세상에 존재하며 악인의 운명이 항상 파멸로 끝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1) 지혜로운 심판자 하나님(22)

 

욥은 친구들의 자만과 주제 넘은 행동을 빗대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높은 자들을 심판하는 심판주이신데 누가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려 드느냐고 책망합니다. 이와 같은 욥의 물음은 이사야 선지자가 장래에 실현될 여호와의 통치를 예언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조언자도 스승도 없지만 그의 지혜와 비교할 자가 없는 창조주이며 전능자라고 언급한 것(사 40:13-14)을 상기시킵니다. 친구들은 전통과 유전을 통해 배운 제한적인 지식과 경험을 너무 의존한 나머지 욥이나 이사야가 지적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헤아릴 수 없는 권능을 미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교훈하시는 스승이심(욥35:11; 36:22)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해 치우치게 주장하였습니다. 욥은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2) 서로 다른 두 삶의 같은 운명(23-26)

 

친구들이 주장하는 ‘의인은 번성하고 악인은 멸망한다’는 공식이 현실에서는 잘 들어맞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욥은 이제 “서로 다른 두 삶을 사는 사람에게 같은 운명이 임한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이는 기력이 넘치고 신체도 튼튼하여 안전하고 평안히 죽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슬픔과 고통을 품고 행복을 맛보지 못한 채 죽습니다. 여기서 전자를 악인으로 후자를 의인으로 볼 수도 있고 악인이나 의인으로 나누지 않고 이해해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욥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마다 어떠한 다른 삶을 살든 죽으면 결국 흙에 눕고 썩는 것은 누구에게나 매한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인생은 결코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으며 삶이 어떤 정해진 형식에 따라 흘러가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친구들의 헛된 위로를 거부(27-34)

우리는 이 진리를 기억하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사로 위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의 자리에서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주님을 의지하도록 서로 도와야 합니다. 구주 예수님이 친히 고난 당하셨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우리를 넉넉히 도와주십니다. 이 진리로 서로를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27○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속셈도 아노라 28너희의 말이 귀인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이 살던 장막이 어디 있느냐 하는구나 29너희가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30악인은 재난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고 진노의 날을 향하여 끌려가느니라 31누가 능히 그의 면전에서 그의 길을 알려 주며 누가 그의 소행을 보응하랴 32그를 무덤으로 메어 가고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33그는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기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앞서 갔으며 모든 사람이 그의 뒤에 줄지었느니라 34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려느냐 너희 대답은 거짓일 뿐이니라(27-34)

 

욥은 악인들도 번영을 누리며 살다가 영광스럽게 죽어 간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의인들이 불행한 일을 겪는 현실의 모순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세의 삶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1) 친구들의 헛된 위로를 책망함(27-28)

 

욥은 친구들이 욥을 도와주려는 의도는 없이 오히려 해하려는 속셈이 있음을 다 안다며 친구들에 대한 원망을 표현합니다. 친구들이 그러한 의도가 있지 않다면 어찌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욥에게 계속해서 ‘인과응보’의 공식만을 주장하겠습니까?

 

(2) 악인을 둘러싼 현실(29-33)

 

욥은 이제 악인의 추악한 삶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천하에 명백히 드러날 것이라는 친구들의 말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빌닷은 악인이 망하여 그의 후손이나 그가 거하던 곳이 다 없어질 것이며 동서남북 사방에서 오는 여행자조차도 악인의 최후 소식을 듣고 경악할 것(18:17-21)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악인이 어디를 가든 재앙과 사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18:7-13). 이와 유사하게 엘리바스도 악인에게 평생 고통이 있고 형통할 때에도 재앙이 찾아온다고 주장하였습니다(15:20-25). 소발도 악인이 재물을 착취하여 삼킨다 해도 형통함과 즐거움이 그에게 없고 하나님의 진노가 비처럼 다고 하였습니다(20:12-29).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마땅한 진노를 내리시면 차라리 낫겠는데, 악인들은 유유히 재난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악인에게 그의 가는 길이 재난의 길이라 책망하며 누가 그의 사악한 소행을 갚아주겠느냐?”고 욥은 묻습니다.

 

욥은 마지막으로 악인의 죽음이 임박하고 죽은 후에다 잊힐 것이라는 친구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악인이 누리는 영화가 그가 죽어 매장될 때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악인의 발자취가 완전히 끊어지고 사람들에게 잊힐 것이라고 빌닷은 주장했지만(18:17-21), 현실에서는 악인이 죽으면 그를 추종하고 옹호하던 많은 자들이 무리를 지어 무덤에까지 그와 동행해주며 그의 덤을 지켜주기까지 한다고 욥은 반발합니다. 악인이 죽어서까지 이런 대접을 받으므로 그가 묻힐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길 정도라고 말합니다.

 

(3) 친구들의 헛된 위로를 거절함(34)

 

욥에게 있어 친구들의 위로는 ‘조롱’을 넘어서서(21:3) ‘헛된 위로’이며 친구들의 말은 거짓입니다! 앞서 2절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처지를 이해해주는 것이 욥이 친구들로부터 원하는 ‘진정한 위로’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욥의 처지에서 이해하려 들기보다 욥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욥을 조롱하며 회개를 강요하여 욥에게 ‘헛된’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헛된’으로 번역된 ‘헤벨’은 전도서 저자가 인생의 ‘허무함’을 토로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또한 ‘우상’의 뜻도 있어 여기서는 친구들의 말이 욥에게 허무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틀에 박힌 사고만을 주장한다면 거짓된 것이나 우상을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한 가지 방법으로 악인과 의인을 대하지 않으심이 명백한데 친구들이 계속해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욥에게 그 사상을 주입하려 하는 것은 분명 욥을 위로하거나 도우려는 의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친구들의 매정하고 혹독한 말과 태도에 욥의 속은 더 타들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그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날이 더디게 온다고 잠들어서는 안 됩니다. 깨어 사시기 바랍니다. 바른 진리로 서로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심판을 향해 내달리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주님이 이 땅에 임하셔서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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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5-04)


부활한 후에 몸의 상태

고린도전서 15장 35-49절


부활이 주님을 믿고 산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의 욕심에 사로잡혀 살고 있지 않습니까? 땅의 것을 집중하느라 주님의 뜻을 잊고 살지 않습니까? 한계가 있는 인간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려고 하면 믿음의 상상력을 잃어버리고 신앙생활이 지루하게 됩니다. 바울은 창조주의 무관한 가능성 안에서 자연의 이치와 이미지들을 동원하여 몸의 부활에 대해 생생하게 설명합니다.

 

  •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씨가 곡식이 되듯이 우리의 존잰 전체가 완전히 새로워지고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 전과 후에 대해서 몸은 씨와 열매가 다른 만큼 다르다고 말합니다. 부활의 몸은 썩고 연약하고 욕된 첫 아담의 몸과 달리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몸처럼 될 것이라고 합니다.

 

부활에 대한 두 가지 질문:부활 과정과 부활의 몸(35)

부활의 과정과 부활의 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중 부활의 몸에 대해 설명합니다. 심는 것과 다시 사는 것의 차이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몸을 주신다는 원리를 따라 설명합니다. 신자는 첫째 아담과 그에 속한 몸으로 시작했지만, 빛의 영역 속에서 그 영역을 시작한 예수의 몸처럼 하늘에 속한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35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35)

 

부활과 관련해 또 다른 주제들로 넘어갑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활 과정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의 몸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이의 질문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서술합니다. 아마도 바울 자신이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형식인 듯합니다. 독자를 대화 속에 끌어들여 집중하게 하는 형태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 부활의 몸은 36-49절에서, 부활 과정은 50-56절에서 다룹니다.

 

부활의 몸에 대한 바울의 대답(36-49)

우리 육체는 썩을 것이지만, 다시 살아난 몸은 썩지 않을 것입니다. 욕되고 천한 육의 몸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생의 육체는 상처나 병에 약한 몸이지만, 부활 후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한 몸이 될 것입니다. 육의 몸은 현세의 삶을 위한 몸이기에 부활 이후의 삶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36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36-49)

 

거짓 가르침이나 이단 사설을 경계해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영혼의 부활은 받아들였지만, 몸의 부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1) 몸에 대한 두 가지 원리(36-41)

 

‘어리석은 자여’로 주의를 환기하고 설명을 시작합니다. 몸이 만들어지는 두 원리를 말합니다. 첫째, 모체가 죽어야 합니다(36). 바울은 고린도 성도(‘너’)의 경험에 호소해 강한 참여를 유도합니다. ‘네’가 심은 것이 죽지 않으면 생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얼핏 보기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씨를 심으면 그것이 살아 있어야 싹을 틔우고 자라서 열매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씨가 자라 열매 맺는 연속성이 초점이 아닙니다. 심은 씨와 이후 과정에 나타난 것과의 불연속적 형태의 차이입니다. 37절은 이 초점을 구체화합니다. ‘네’가 심은 것은 장차 될 몸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으로 덮이지 않은 밀 같은 단순한 씨일 뿐입니다. 씨를 심었기에 그 씨의 형태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싹이 나고 줄기가 되고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변화를 위해 원래 것이 없어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주목할 것은 ‘몸’이라는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짐승 등에게 쓰는 말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몸과 연결시키기 위해 일부러 사용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몸을 주시며 또한 각 씨들에게 그들만의 몸을 주셨습니다(38).

이 원리는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몸의 다양성입니다. ‘각각’과 ‘자신만의’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요소는 다양한 몸의 개별성은 다음 세대에도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개의 몸은 다음 세대에도 물고기 몸이 아니라 개의 몸이 된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요소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런 요소들을 담고 있는 둘째 원리를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 한 예는 생명체의 몸에 대한 것입니다(39).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 등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다양한 육체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다음 세대에도 동일한 형태를 갖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는 비생명체에 대한 것입니다(40-41). 하늘에 속한 ‘몸’과 땅에 속한 ‘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도 서로 다릅니다. 이상의 설명을 정리하면 부활의 몸에 대한 원리는 (1) 원래 몸의 모습은 죽고 새로운 것이 나와야 합니다. (2) 그 몸은 다양합니다. (3) 시작자에 따라 다음 세대 몸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4) 하나님께서는 모든 과정의 주인입니다.

 

(2) 몸에 대한 원리를 부활의 몸에 적용한 설명(42-44a)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다'는 표현으로 36-41절의 원리를 부활의 몸에 적용한다. 네 가지 대조로 설명합니다. 모두 심긴 것과 부활과의 대조입니다. 썩어질 것으로 심기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부활합니다(42). 부활의 몸은 현재 몸과 달리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욕된 것으로 심기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부활합니다. 연약함으로 심기고 능력으로 부활하며(43), 자연적인 몸이 심기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44a). 부활의 몸에 대한 이런 설명은 어둠과 빛이라는 두 영역을 배경으로, 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대조한 것입니다. 첫 세 가지 대조는 전치사 ‘엔’을 사용하여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 단어는 방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장소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문은 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긴 것은 한 사람이 어둠의 영역에 있을 때의 모습입니다. 썩고 욕되고 연약한 상태 속에 있습니다. 반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빛의 영역으로 옮김 받는 자의 결과 상태입니다.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능력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설명의 또 다른 특징은 심는 과정과 다시 일어나는 과정 모두 수동형이란 점입니다.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결과임을 말하는 것으로 앞부분 원리의 적용입니다. 마지막 특징은 어떤 순서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긴 과정이 먼저 있고 그것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과정이 있습니다. 역시 원리에 대한 적용입니다.

 

(3) 자연적 몸과 신령한 몸에 대한 부연(44b-49)

 

앞서 언급한 자연적 몸과 신령한 몸에 대한 부연입니다. 37-41절의 원리 요소들을 담고 있고, 21-22절에서 말한 아담과 메시아를 시작점으로 한 두 영역을 전제로 합니다. 역시 대조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설명의 시작은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 메시아와의 대조입니다. 창세기 2:7을 인용하여 첫 아담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코에 숨을 불어넣어 그 결과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입니다. 44b절에 나온 ‘자연적인’(프쉬키코스)과 ‘신령한’(프뉴마티코스)의 동족어 프쉬케와 프뉴마를 써서 대조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습니다. 44b절은 현재 몸과 부활의 몸을 대조합니다. 동일한 사람에 대해 심긴 모습과 부활의 모습이 다름을 말합니다. 45절은 두 영역과 관련해 각 영역의 시작자 대조입니다. 그 안에는 각 영역에 속한 이후 사람들의 모습 차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아담은 ‘프쉬케’를 갖고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씨에게 자연적인 몸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시작자에 따라 그 후손의 몸이 결정되는 하나님의 원리 때문입니다(38). 하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그의 씨인 성도는 생명의 영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46-49절에서 ‘먼저’와 ‘그 후’는 순서를 통해 두 아담과 관련한 차이를 설명합니다. 부활은 순서가 있습니다(46). 영을 통한 신령한 몸이 먼저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몸이 먼저이고 신령한 몸은 그 다음입니다. 부활은 메시아를 통한 새 창조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옛 창조에 속한 것이 죽어야 새 창조의 부활이 가능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첫 사람(아담)과 둘째 사람(아담)은 기원이 다르기에 각각에 속한 씨들도 다릅니다(47-49). 첫 아담의 기원은 땅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씨들 역시 땅의 기원을 가진 자들로서 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둘째 아담의 기원은 하늘입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속한 신자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몸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의 영광의 ‘몸’처럼 될 것입니다(빌 3:21; 요일 3:2), 바울은 이런 부활의 몸에 대한 설명을 ‘우리’를 통해 독자와 공유하는 것으로 결론짓습니다(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처럼 장차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형상이란 본질을 잘 드러내는 외적 표현을 의미합니다. 현재 성도는 땅에 속한 자의 본질을 입고 있지만, 예수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 통치 영역으로 옮겨져 하늘에 속한 자의 신분을 갖고 있기에(빌 3:20), 장차 그 신분에 걸맞은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부활의 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몸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몸이며 부활의 주님 같은 영광스러운 몸이라는 점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볼 수 있고 그분과 영원히 온전한 사랑의 교제를 할 수 있는 몸입니다(13:12).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실제로 경험하면 됩니다!


우리가 장차 입을 부활의 몸은 이 세상에서의 몸과 전혀 다릅니다. 살려 주는 영이신 예수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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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1-01)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순들

욥기 21장 1-16절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누립니다. 그들이 실제로 세속적인 부를 얻고 때로 의인들보다 더 많은 복을 누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이와는 반대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욥은 그들의 말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답답함을 호소합니다.

 

  • 소발의 마지막 발언이 끝나고 욥이 대답합니다. 소발 한 사람이 아니라 세 친구 모두를 겨냥하지만, 발언의 요지는 앞선 소발의 ‘악인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라는 주제를 반박하는 것입니다. 소발은 자신의 주장을 인류가 생긴 이래 변함없는 진리라고 말했지만, 욥은 악인이 잠깐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대대로 잘 먹고 잘사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반박합니다. 신앙의 렌즈로 현실을 왜곡하지 말라는 반성적 지혜의 가르침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친구들을 향한 요청: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1-6)

이 세상에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통과 억울함 속에서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잠히 고통을 감내하신 이유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우리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3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너희가 조롱할지니라 4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 마음이 어찌 조급하지 아니하겠느냐 5너희가 나를 보면 놀라리라 손으로 입을 가리리라 6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1-6)

 

욥과 친구들은 서로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요청하며 평행선을 달립니다. 이번에 욥은 특별히 더 힘을 주어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심우 사모아’는 ‘부정사 절대형의 강조용법’이라는 문법이 적용되는 형태로, 개역개정은 “자세히”라는 부사를 첨가함으로써 강조의 의미를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는 여러 해석이 가능한 문장입니다. 문맥적으로 가장 가능성 있는 해석을 두 개만 제안하자면, (1) ‘(너희의 어쭙잖은 조언이 아니라) 내 말을 자세히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너희가 줄 수 있는 진정한 위로다’라는 해석과, (2)‘나의 말이 너희의 생각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해석이 그것입니다. (1)의 의미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지만, (2)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의 하소연을 진지하게 경청해준다면, 자신이 당한 곤경이 하나님의 악인 심판 현장이 아님을 알고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니다. 친구들이 욥 자신을 조롱하려면 자기 말을 다 듣고 조롱하라고 합니다(3).

욥은 이어지는 7-13절에서 인과응보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현실을 근거로 규범적 지혜에 고착된 친구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말이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야말로 마음이 조급한 상황이라고 합니다(4). ‘시아흐’는 “원망”보다는 중립적인 의미의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욥 자신의 고난은, 악인이 자기가 놓은 덫에 스스로 걸리듯 인간의 행위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일입니다. 만약 욥 자신을 비롯한 사람이 문제의 원인이었다면 욥은 지금처럼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4절의 “조급”은 호흡이 가빠지고 숨을 못 쉴 정도가 아니라 더 깊은 괴로움과 마음의 번민을 나타냅니다(유사한 표현이 등장하는 민 21:4와 삿 16:16 참조). 욥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까닭 없는”, 즉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가중됩니다.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이나 이유를 알면 그에 대한 해결책도 생기는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하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욥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욥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봐달라고 부탁합니다(5).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달라는 부탁입니다. “너희가 나를 보면”으로 번역된 구절을 직역하면 ‘너희는 나에게 몸을 돌려라/향해라’가 됩니다. 욥이 처한 상황과는 관계없는 규범적 지혜의 일반론만 얘기하지 말고, 친구인 욥이 어떠한 상태인지 어떠한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친구들의 몸을 자신을 향해 돌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자신의 말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이후에 나오는 ‘현실을 직시하라’라는 요청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5절과 6절은 놀람과 두려움이 언급되는데, 좁게는 욥 자신이 처한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토로하는 말이면서, 좀더 넓게는 규범적 지혜의 인과응보 원리가 무너진 현실(7-13)에 대한 놀람과 공포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욥이 부당하게 폭행당하여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면 친구들도 경악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반성적 지혜의 근거로서의 현실(7-16)

악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침묵은 그들을 하나님의 최후 심판 아래 두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우리의 잘못이 드러나고 교만이 꺾이며 거룩한 삶을 향한 교정이 일어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녀로 삼아 주셨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평안은 주님이 오시는 날에 산산이 때어지고 부서질 것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7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8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9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10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11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12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13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14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15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16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7-16)

 

친구들이 말하는 규범적 지혜의 작동 원리에 대한 욥의 반문은 이것입니다. 7절의 의문문은 다음의 세 질문으로 나뉩니다: (1) 다 죽고 없어져 눈앞에서 사라져야할 악인들이 지금도 저렇게 많이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악인들이 잠시 강성할 수는 있지만 그들은 제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그들은 가까스로 생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천수를 누리며 살고 있는가? (3) 그냥 오래 사는 것 정도가 아니라 왜 악인들은 힘이 세고 또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힘이 강해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대로라면 악인들은 후손이 없거나(18:19) 있어도 가난한 자에게까지 구걸하며 빌어먹는 비참한 신세로 살아감이 마땅한데(20:10),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들 옆에는 후손들이 튼튼히 버티고 서 있고, 그들은 장수해서 자손들을 직접 눈으로 봅니다(8).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가 악인들에게 임하는 것이 당연한 ‘원리’인데, 그들의 처소는 아무 걱정 없이 평안합니다. 왜 그들의 집은 ‘피우지도 않은 불이 그것을 삼킬 것이고 그의 거처에 남은 것들 모두 타버릴 것이다’(20:26)라는 소발의 말대로 되지 않습니까? 욥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매’(9:34)가 오히려 저들에게는 임하지 않습니다. 욥의 재물과 자식들이 끔찍한 재앙을 맞이한 것과는 정반대로 악인들은 그의 소유물과 자손들까지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수소는 씨를 퍼뜨리는 데 실패가 없고 암소들은 새끼를 낳는 데 실패가 없습니다(10). 개역개정의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라는 번역은 수컷마저 잉태한다는 의미로 오해될 소지가 있는 번역입니다. 악인의 후손들은 춤추며 뛰놀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행복해합니다(12).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고(수명을 다 살고)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13). 악인들은 곧 지혜가 없는 무지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감히 하나님께 ‘당신의 법도를 아는 것에 우리는 관심이 없소’라고 할 정도로 교만한 무지자입니다(14). 인간이 마땅히 섬겨야 할 전능자가 과연 있기나 하느냐고 묻고, 그분을 만나는(“기도한들”) 일이 대체 자신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묻습니다(15). 여기서 “유익”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의 효용성을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까닭 없는 신앙이 가능한가’라는 사탄의 질문과 연결됩니다. 욥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자 지혜자로 살아가는 이유는 그만한 대가를 하나님으로부터 지불받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좋은 것을 얻기 위한 투자로서 ‘유익’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의 대가를 빼앗으면, 즉 투자의 효용가치가 사라지면, 욥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릴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지금 욥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악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은 동시에 욥의 반성적 지혜가 “무익한 말”, 즉 아무 효용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엘리바스의 말을 겨냥하기도 합니다(15:3). 선과 악의 구분이 분명하고, 의인과 지혜자에게는 복이 임하고 악인과 무지자에게는 벌이 임하는 선명한 이분법이 소위 ‘종교 장사’에는 훨씬 유리합니다.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에 풍성한 열매가 맺히고 외양간이 소떼와 양떼로 넘쳐난다고 가르쳐야 장사가 됩니다. 하박국과 욥의 신앙은 ‘무익’합니다. 이렇듯 욥이 서술하는 악인들의 ‘현실’은 친구들의 ‘이론’과 전혀 다릅니다. 현실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자손손 이어지는 악인들의 행복과 번영은 그들의 손으로 직접 일군 것이 아닙니다(“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16). 16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그들의 번영(복)은 그들의 손에 있지 않다. 악인들의 도모가 나로부터 멀어지기를!” 뿌린 대로 거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욥 자신은 이러한 악인들의 패거리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아짜트 레샤임’은 “악인의 계획”일 수도 있고 ‘악인들의 무리’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라면, 악인들의 도모에 자신이 혹하지 않기를 스스로에게 타이르는 문맥입니다. 악인들의 견실하게 보이는 행복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도모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 후자라면, 욥이 ‘악인들의 무리’에 속해 있지 않다는 의미는 중의적입니다. 첫째, 악한 자들에게 벌어지는 일이 욥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악인에게조차 행복과 번영이 주어지는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온 자신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탄식일 수 있습니다. 둘째, 신앙을 효용가치로 평가하는 무리 속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2장에서 고백한 욥의 신앙은 이미 대가를 초월한 신앙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악한 자들이 번성하며 의로운 자들이 고난에 처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 부조리한 일들을 보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이 땅을 감찰하시며 고난 중에서도 의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상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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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0-01)


하나님을 잘 아는 적하는 사람들

욥기 20장 1-29절


 

전쟁터에서 지휘관이 적군의 동향을 잘못 판단하게 되면 자기 군사를 모조리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한순간의 판단은 전쟁의 승패를 떠나 수많은 군사의 생명을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하는 것입니다. 비단 그런 중대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상 생활에서의 크고 작은 판단 하나는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반드시 가져다 주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판단이 흥망의 기로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삶과 죽음의 기로가 되기도 합니다.

 

  • 소발의 두 번째 발언이자 마지막 발언입니다. 4절부터 길게 이어지는 소발의 규범적 지혜는 ‘악인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로 요약될 수 있는데, 욥이 처한 상황과는 무관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앞선 욥의 탄식에 전혀 무감각한 반응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랑도 잠시오”, “즐거움도 잠깐이니라”라는 지혜’의 말을 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입니까?

 

창조 때부터 이어온 오래된 지혜(1-3)

우리 자신이 악에 대해 경각심을 갖되 다른 사람의 고난을 이러한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악에서 지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악인들이 맞이한 비참한 결말을 마음에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깨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의로운 삶을 선택하도록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1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3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1-3)

 

소발의 마지막 발언의 시작은 세 친구의 전형적인 도입부의 형식을 따릅니다. 욥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발언을 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합니다(4:2; 8:2; 11:3; 15:2-6; 18:2-4). 왜냐하면 욥의 말은 지혜의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욥의 주장이 세 친구의 말이 지혜의 말이 아니라고 반박하기 때문입니다.

15장의 엘리바스처럼 소발 역시도 욥과의 대화를 ‘지혜의 대결’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빌닷이 욥의 말을 자신들을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18:3)라고 이해한 것처럼, 소발 역시도 욥의 말을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책망”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욥은 단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을 뿐이고,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지 말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탁했을 뿐입니다. 소발은 자신의 지혜가 오래된 지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4). 전통적인 규범적 지혜가 천지 창조 때부터 정해진 규범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바스와 빌닷이 조상들로부터 지혜를 물려받았음을 강조하며(8:8; 15:18-19), 욥에게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고 질책하는 것(15:7)과 일맥상통합니다. 욥은 자신의 지혜가 오래된 지혜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38:4)라는 질책은 욥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인과응보의 원리가 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친구들이 하나님의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소발의 지혜(1): 악인의 승리는 잠깐이다(4-11)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악행을 기억하시고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준비하십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잠시 평안하고 강성해 보인다할지라도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영원한 가치에 헌신자들에게 영원한 상급이 있습니다.

 

4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5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6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7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8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지리라 9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 10그의 아들들은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11그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4-11)

 

소발이 말하는 지혜의 첫 번째 핵심은 ‘악인의 승리는 잠깐이다’라는 규범적 지혜의 익숙한 표현입니다. 시편의 탄원시에 주로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고(시 37, 73편), 엘리바스와 빌닷도 동일한 주제를 말했습니다(8:11-13; 15:29-33). 악인, 즉 하나님을 모르는 자(“경건하지 못한 자”)의 승리와 기쁨의 함성은 그 소리가 공간적으로 멀리 가지 못하며(미까로브), 그의 행복은 시간적으로도 잠깐일 뿐입니다(5). 잠시나마 그의 ‘키’(개역개정의 “존귀함”)가 하늘에 닿아서 구름을 만질 수 있다 해도 그는 “똥”이나 “꿈”, “환상”처럼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7-8). 기세등등하던 악인들이 사라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는 소발의 말(7,9)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한탄하는 욥의 말(19:7, 13-15)과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악인은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욥의 주위에 사람이 없는 이유는 그가 악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욥을 떠나거나 멀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눈에서 욥이 안 보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악인의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개역개정의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9)는 ‘메꼬모’를 주어로 해석한 것인데, ‘마꼼’은 남성명사로서 이 문장의 여성 단수 동사 ‘테슈렌누’와 성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어는 여성명사인 상반절의 ‘아인’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메꼬모’는 부사적으로 덧붙여진 말로 보입니다. 이렇게 9b절을 다시 해석하면, ‘(그를 쳐다보던 눈은) 그가 원래 있던 곳에서 더 이상 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가 됩니다. 악인이 당하는 재앙은 악인 한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그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악인의 자녀들은 가난한 자의 비위를 맞춰가며 그들에게 구걸을 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로 번역된 ‘달림’은 구체적으로는 ‘얇고 가느다란’ 비쩍 마른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여기서 파생된 의미로 ‘낮은’, ‘가난한’, ‘힘없는’, ‘하찮은’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먹을 것이 없어 비쩍 마른 사람에게까지 음식을 구걸해야 하는 처참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1절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는 악인이 한때 잘나가던 시절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5절의 승리의 함성과 6절의 키(머리)가 하늘에 닿을 정도라는 구절, 그리고 10절의 “얻은 재물”과 동일한 의미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11절의 “기세”는 번역자의 첨가입니다. 주어는 상반절의 ‘그의 뼈들’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젊음이 가득했던 악인의 뼈들도 머지않아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

 

 

소발의 지혜(2): 악인은 독을 스스로 삼킨다(12-22)

 

사람의 분노는 결코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인과응보의 법칙을 진리라고 믿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순종해 나가야 합니다.

 

12○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13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 14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15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18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 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 19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20○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21남기는 것이 없이 모두 먹으니 그런즉 그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22풍족할 때에도 괴로움이 이르리니 모든 재난을 주는 자의 손이 그에게 임하리라(12-22)

 

18장에서 빌닷은 악인이 자신의 꾀에 스스로 넘어가는 것을 “그물”과 “올가미”(8), “덫”과 “올무”(9), “덫”과 “합정”(10)의 비유로 표현했습니다. 동일한 내용을 소발은 음식과 먹는 것에 비유한다. 악인은 악을 달게 여깁니다. 악을 달게 여긴다는 표현은 잠언 9:17(“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에도 나옵니다. 그 악이 너무 달콤해서 악인은 입 속에 넣고 천천히 아껴 먹습니다(13). 그러나 식도를 타고 넘어간 악은 뱃속에서 뱀의 독이 됩니다(14). 악을 입 속에 넣고 천천히 먹는 것은 악인이 부유해서 재물을 가진 것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뱃속에서 그가 삼킨 재물을 토해내게 만드십니다(15). 15절 마지막의 ‘요리쉔누’는 개역개정처럼 “도로 나오게 하심”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반절의 ‘토하다’라는 말과 동의적 평행어가 됩니다. 그러나 동사 야라쉬)는 ‘상속받다’라는 뜻으로, 히필형(사역형)은 ‘(다른 이에게 넘겨주다’, ‘(다른 이에게 주기 위해) 빼앗다’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참조. 삿 1:19;11:24). 만약 이 경우라면, 악인이 입에 넣었던 재물을 토해내면 하나님께서 그 재물을 다른 이에게 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5:5의 엘리바스의 말(“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과 유사한 진술입니다.

18-19절의 빌닷이 악을 설명하는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는 일견 인과응보의 원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수고한 열매를 자신이 누려야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수고하여 얻은 것”을 빼앗기는 것은 악인 스스로 남의 것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19).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집을 빼앗은 사람의 재물을 악인이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인과응보의 원리가 정확히 적용되는 것입니다. 20-22절에서 계속해서 악인이 잠시 풍족할 수 있고 잠시 재물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하고 곧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주제를 반복합니다.

 

 

소발의 지혜(3):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23-29)

 

많은 성도들이 소발과 같은 잘못을 범합니다. 자기주장을 인정받으려고 하나님의 권위에 기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잘 모를 때 나타나는 교만과 어리석음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여 남에게 쉽게 충고하기를 주의하고, 조용히 혼자 기도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3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음식을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 같이 쏟으시리라 24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화살을 쏘아 꿰뚫을 것이요 25몸에서 그의 화살을 빼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의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닥치느니라 26큰 어둠이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치리라 27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28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29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23-29)

 

소발의 음식 비유의 결말은 이렇습니다: 악인이 자신의 음식을 먹으려 해도 하나님의 재앙이 그에게 임하는데 마치 그의 밥그릇에 비가 쏟아지는 것과 같습니다(23). 그가 혹시나 하나님의 재앙을 한 번 피할 수 있을지라도 또 다른 재앙이 그를 맞이할 것입니다(24). 철제 무기와 구리 화살 중 어느 것이 더 치명적인지 우열을 가릴 수 없습니다. 레위기 26:19과 신명기 28:23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악인들에게 철과 놋의 재앙이 임합니다. 악인이 혹시 자신의 몸을 꿰뚫은 놋화살을 빼내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 독으로 인한 끔찍한 고통이 그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25). 하나님의 화살을 맞아 고통스럽다고 탄식한 욥의 외침(욥 6:4; 16:13)에 대한 ‘친구’ 소발의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인에게 지정되고 악인이 받아야 할 몫과 유산(29)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꽁꽁 숨겨둔 것(쩨푸나브)에까지 온통 어둠이 임할 것이며, 아무도 피우지 않은 불, 즉 하나님의 불이 그가 감추어둔 것과 그의 거처를 모두 불태워(26) 그가 가진 것은 모두 휩쓸려 떠내려갈 것입니다(28). 누군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하늘과 땅이 그의 악을 세상에 폭로할 것입니다(28). 악인은 결국 자신이 뿌린 악을 스스로 삼키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복잡다단하여 한 가지 이론이나 주장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삶은 신비입니다. 평소에는 은혜롭게 들리던 설교나 말들이 갑자기 이해 불가 또는 언어도단이 됩니다. 따라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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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5-03)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앙적 은택

고린도전서 15장 20-34절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의 한 역사적 사건만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 적용해야 할 일만도 압니다. 그 사건의 영향력이 오늘까지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해 시대를 열었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촉구하였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중요성을 변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고 인간의 삶이 현세로 마감된다면, 사람들은 종교적 책무든 사역의 각오든 성화의 삶이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논지입니다.

 

 

  • 앞 12-19절이 부활이 없는 부정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긍정 상황을 설명함으로써 성도들을 훈계합니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20-28절로,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결과들을 설명합니다. 둘째는 29-34절로, 부활로 인한 결과와 그것을 소망하고 사역하는 자신의 예를 들어 독자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칩니다.

 

예수의 부활로 인한 결과(20-28)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이 끊어졌습니다. 아담 이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었는데, 이제 그 죽음의 행렬이 끝났습니다.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는 첫 열매입니다. 이제 그에게 붙은 자도 그 부활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분처럼 순종할 때 우리도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20-28)

 

예수님의 부활을 시작으로 장차 진행될 구원 과정 완성의 큰 그림 속에서 신자의 부활을 소개합니다. 또 이런 영광스런 미래를 기대하고 부활에 근거한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1) 전제 : 예수가 부활하셨다(20-22)

 

부활을 부인하는 일부 신자의 주장에 대해 그 논리적 결과가 어떤지를 보인(12-19) 바울은 이제 예수의 부활이 가져올 긍정적 결과를 설명합니다.

20절은 그 전제이자 시작입니다. 예수가 부활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기에 예수님의 부활도 없다는 13,16절 내용과 반대입니다. 그러나 13,16절은 가설에 근거한 논리적 추론이지만, 20절은 실제 사건에 대한 선포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두 가지를 추가해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첫째, 강한 반전 표현인 ‘그러나 이제’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주장과 그에 따른 부정적 상태에 대한 강한 반전으로 예수 부활의 사실성을 강조합니다. 둘째,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는 표현입니다. ‘잠자는 자들’이란 죽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 곧 첫 수확입니다. 수확이 시작되었기에 이후에 계속 수확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신자들도 부활할 것임을 말합니다. ‘왜냐하면’이란 접속사를 통해 죽은 자들의 첫 열매에 대해 부연합니다(21-22). 아담과 메시아로 인한 결과 대조를 통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를 설명합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해 존재한 것처럼 죽은 자들의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해 존재합니다(21). 많은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게 된 것처럼 많은 사람이 메시아 안에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22). 얼핏 같은 이야기의 반복 같지만, 초점이 다릅니다. 21절은 한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아담이든 메시아든 한 사람을 통해 죽음과 생명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반면, 22절은 아담과 메시아로 인한 결과에 초점 맞춥니다. 많은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고 메시아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설명은 몇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아담과 메시아는 모두 첫 열매들입니다. 아담은 옛 창조의 시작이고 메시아는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20절에 대한 설명이자 21절의 초점입니다. 아담을 통해 죽음이 존재했기에 그 이후로 죽음이 지속됩니다. 하지만 메시아를 통해 생명이 시작되었기에 아담과 다르게 메시아 이후로는 생명이 지속될 것입니다. 둘째, 아담과 메시아는 통치 영역의 시작자들입니다. 단순히 조상이나 시작자가 아닙니다. 죄로 인한 죽음의 통치 영역과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 영역의 문을 연 자들입니다. 22절의 ‘안에’라는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전치사는 도구나 방법의 뜻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장소의 의미로 ‘아담 안에’ 혹은 ‘메시아 안에’라는 말입니다. 각각 아담의 반역으로 시작된 죄와 죽음의 통치 영역과 메시아를 통해 회복된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런 면에서 22절은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 시작된 어둠의 영역, 곧 하나님께 반역하는 통치 영역 속에서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모든 사람(많은 신자)이 메시아가 통치하는 영역 속에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2) 결과: 부활과 구원 과정의 완성(23-28)

 

22b절과 연결해 예수 메시아의 통치 영역 속에 있는 신자들이 어떻게 구원의 완성을 경험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첫 번째는 구원의 완성 과정을 시간 순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시간 진행 표현(‘다음에는’[23절], ‘그 후에’[24절])과 접속사(‘때’[24,27,28절])를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과 관련한 구원의 완성 과정이 차례대로 된다고 말하고 예수의 부활을 첫 열매, 곧 시작점으로 소개합니다(23). 그 다음은 주의 재림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일으킴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후는 마지막입니다(24).

비록 시간 표현을 썼지만, 물리적 시간이라기보다 논리적 시간, 곧 주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과정일 것입니다. 역사의 완성이고 모든 것을 심판할 때입니다. 이때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 곧 하나님을 대적한 모든 인간적 세력과 영적 세력을 멸하고 메시아 통치를 아버지 하나님께 넘깁니다. 그런데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사이 중간 시점도 있습니다. 원수들을 발아래 두는 완성의 때까지 예수가 통치하고 있는 시점입니다(25).

십자가와 부활로 어둠의 영역을 깨고 하늘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연결시켰지만(마태복음 28:18), 아직 완성은 아닌 ‘이미’와 ‘아직’의 시점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 통치 영역의 주권자로서 어둠의 영역에 대한 회복과 완성을 이루어가는 통로입니다. 정리하면 신자의 부활은 예수의 부활 ‘이미’와 ‘아직’ 사이의 예수 통치-재림과 완성이라는 시간 틀 속에 있다.

 

두 번째 설명 방식은 어둠과 빛이라는 종말적 두 영역 관점입니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독립된 존재가 아닙니다. ‘아담 안’이라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통치 영역에 속하거나, ‘예수 안’이라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 존재입니다. 둘 중 하나이고 중간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자의 부활은 단순히 개인이 변화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과 사탄이 통치하는 어둠의 영역에 대한 완전한 심판과 함께 얻어집니다. 바울은 어둠의 영역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를 예수의 발아래 두는 것, 곧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 심판으로 마지막 원수인 죽음도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신자는 빛의 영역에서 생명의 부활을 얻습니다. 이 과정이 끝나면 아들 하나님인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통치 권위를 다시 그분께 드리고,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것 속에 계시며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27-28).

이런 설명에 의하면 신자의 부활은 어둠의 통치 영역을 멸하고 구원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 속에 위치한 것으로, 개인 구원의 마지막 과정일 뿐 아니라 만물을 회복하는 마지막 과정에 속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의 부활, 곧 죽은 자의 부활로 이루어질 결과입니다.

 

부활에 근거한 실제적 권면과 경고(29-34)

부활은 무엇이 참된 삶이고 생명다운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들, 제한된 것들, 소수만 누리는 것들을 위하여 사는 삶을 헛되게 만들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오늘이 전부인 듯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가장 지혜로웠을 것입니다.

 

29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29-34)

 

부활은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게 했습니다. 사망의 통치자 사탄을 이기고 그 예수님께서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셔서 사탄과 함께 대적하는 세력들을 멸하시고, 이양 받은 왕권을 성부 하나님께 드릴 것입니다.

 

(1) 실제적 권면 1: 부활과 세례(29)

 

구체적 상황을 예로 들어 실제적 권면과 경고를 한의 부활이 없다면 왜 죽은 자들 때문에 세례를 받습니까? 아마도 독자 중 일부가 부활을 부인하면서도 ‘죽은 자’의 부활, 곧 영광스런 미래를 얻고 싶어 세례를 받는 것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인지부조화입니다. 차라리 부활을 인정하는 것이 더 일관성 있지 않겠느냐는 지적입니다.

 

(2) 실제적 권면 2: 부활과 고난을 견딤(30-32)

 

두 번째 예는 고난 상황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바울은 날마다 죽는 상황 같은 고난을 당하고 에베소에서 맹수로 상징될 수 있는 어려운 상황과 싸웠다고 합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의미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그런 삶은 유익합니다. 심지어 그런 고난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영광스런 미래 때문입니다.

 

(3) 실제적 권면 3: 부활과 바른 삶(32b-34)

 

마지막 권면은 부활에 근거한 바른 삶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오늘 이 생이 끝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즐기며 사는 것이 최고의 선일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살고, 교인 중 어떤 이들은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그들을 책망합니다. 속지 말고 의를 행하며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부활이 있고 또 하나님의 미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도의 삶은 과거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발판으로 미래를 기대하고 오늘을 사는 것이다. 속으면 안 됩니다.


부활은 우리가 죽음이 다스리는 이 세상을 따라 살지 않아도 되고, 살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주었습니다. 옛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오게 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으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였습니다. 달리 살아야 진정한 삶이 되는 이유와 근거를 만들어준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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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5-02)

 


확신에서 논리로 발전한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12-19절


논리학에서 추리를 할 때, 결론의 기초가 되는 판단을 일컬어 ‘전제(前提)’라고 합니다. 전제를 통해 이론이 진행되고, 그 곳으로부터 유추해서 결과를 유추한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전제가 잘못되면 그 전체 위에서 세운 모든 논리도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 계속해서 부활에 대한 주제를 다룹니다. 조건문을 통해 예수 부활의 필요성을 논증합니다. 내용은 크게 교회 상황을 말하는 12절과 부활의 필요성을 논증하는 13-19절은 더 구체적으로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3-15절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는 것과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과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다룹니다. 16-19절은 앞부분을 부연하는데, 죽은 자의 부활이 없는 것과 신자의 구원과의 관련성을 다룹니다.

 

교회의 문제 상황 : 죽은 자드르이 부활이 없다고 말함(12)

성도 중 일부가 부활이 없다고 한 것에 대해 부활의 필요성을 논증합니다. 조건문을 통해 부활이 없는 상항에 대한 추론의 꼬리 물기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바울이나 독자 모두 비참해집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부활은 있습니다.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

 

1-11절에서 부활이 복음의 핵심 내용임을 설명한 바울은 12절부터 교회의 문제 상황으로 들어갑니다. 조건문을 사용한 논리적 추론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지체를 중시한 고린도 성도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도록 이끕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일부 신자가 믿지 않는 것을 지적하며 시작합니다. 만일 메시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되었다면 왜 ‘너희’ 중 어떤 이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였습니까? 조건절은 앞부분 내용을 근거로 합니다. 메시아의 부활은 바울을 포함한 여러 증인들이 목격했고(3-8), 그에 대한 선포는 바울과 모든 사도들이 행했습니다(11). 고린도 성도들은 그 선포를 믿음으로 받아 구원 안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교인 중 어떤 이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합니다. 주절의 내용입니다. 자기가 전한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말라고 바울이 경고한 이유입니다(2). 아마도 죽은 자의 부활을 황당한 이야기로 여겼고, 특별히 몸의 부활은 더욱 못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 철학에 의하면 몸은 영에 비해 열등하고 속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비록 교회 안에 있었지만 여전히 복음의 증거보다 자기 생각과 세상의 사고를 더 우선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첫 번째 논증 :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13-15)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지금도 무덤에 계셔야 하고, 목숨을 걸고 부활과 그 중요성을 전한 사도들은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또 죽고 실패한 구세주를 믿을 필요도 없으니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맙니다. 2000년 동안 부활의 복음을 듣고 변한 사람들의 믿음 역시 다 거짓이 되고 맙니다.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13-15)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부활과 관련하여 품은 의문과 궁금한 부분을 다르기 전에, 복음 진리인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언급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받아들인 복음 진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골자로 합니다.

 

(1) 죽은 자의 부활 없는 것에 대한 첫 번째 논증 1(13)

 

일부 교인들 생각이 적절치 않다는 사실을 조건문 형식으로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는 12절 내용을 ‘만일’이란 조건절로 재진술하고, 주절을 통해 그들 생각의 논리적 결론을 보여줍니다. 만일 그렇다면 메시아의 부활은 없게 됩니다. 예수님도 사람 몸으로 존재했고 십자가에서 죽었기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의 부활 역시 없을 것입니다.

 

(2) 죽은 자의 부활이 없는 것에 대한 첫 번째 논증 2(14-15)

 

13절과 연결한 꼬리 물기입니다. 메시아의 부활이 없는 상황을 전제로 그에 대한 논리적 결론을 보여줍니다. 세 가지 결과적 상황을 언급합니다. 모두 부정적입니다.

첫째, 바울을 포함한 전도자(우리)의 선포는 헛것이 됩니다(14). 메시아가 부활하지 않았는데 부활했다고 전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바울은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둘째, 독자들의 믿음도 헛것이 됩니다(14). 부활이 없는데 있다고 전한 거짓말을 믿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메시아의 부활도 없다는 말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참 메시아인지 확인할 길이 없게 됩니다. 당시 예수님의 좌우에서 함께 십자가에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 똑같이 죽었기에 부활이 아니면 예수님의 죽음이 특별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부활이 없는 예수님의 죽음은 그 자체가 실패를 의미할 수 있기에 그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진짜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마치 세상의 다른 종교들처럼 그 창시자 혹은 계시자가 죽었기에 그들을 통한 영생의 계시가 사실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는 이런 상황에서 그를 믿는 것이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구원을 보증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그런 믿음은 착각이거나 자기 확신일 수 있습니다.

셋째, 바울을 포함한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해 거짓말한 것이 됩니다(15).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어 메시아의 부활도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전한 것입니다. 단순한 거짓말을 넘어 하나님을 기만하고 이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죄입니다. 이렇듯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이나 신념 차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과 관련해 바울과 독자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부정적 영향이 미칩니다. 모든 것이 거짓말이 됩니다.

 

두 번째 논증 :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16-19)

그리스도의 부활을 헛것이나 오류라고 주장하는 사상이나 이론, 주장에 휩쓸리지 말고, 부활의 진리를 증거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 영향을 미치던 그리스도 철학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영혼에 비해 열등라고 저속하며 멸절하기 때문에 부활의 생명을 덧입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한 성경적 근거와 경험적 근거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16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16-19)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기대를 걸 곳은 이생뿐이고, 그러면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추방을 당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리스도인이 가장 불쌍하고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1) 죽은 자의 부활이 없는 것에 대한 두 번째 논증 1(16)

 

‘왜냐하면’이란 표현을 통해 13-15절 내용을 부연합니다. 역시 조건절을 통한 꼬리 물기로 진행하며 시작점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전제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메시아의 부활도 없습니다. 13절 내용과 동일합니다.

 

(2) 죽은 자의 부활이 없는 것에 대한 두 번째 논증 2(17-19)

 

16절과 연결해 논리적 추론을 계속 진행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어 메시아의 부활도 없다면’(17a). 16-17a절까지는 13-14a절의 내용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후 논리 연결은 그 방향이 다릅니다. 14b-15절과 달리 철저히 독자 상태에만 집중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그들의 믿음은 쓸모없게 됩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부활과 죄 사함과의 관계성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대신 받은 것입니다. 심판 결과인 죽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그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끝났고 더는 심판 받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그것을 경험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회개와 믿음을 통해 얻게 되지만, 부활은 하나님의 심판이 끝났고 예수님으로 인한 죄 사함의 길이 열렸음을 확충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4:25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만일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죄의 대속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고, 예수 믿는 독자들의 죄가 처리되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부활이 없으면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예수님 안에서 자는 사람, 곧 죽은 사람들은 구원을 알 수 없는 채로 죽은 것입니다(18). 바울은 그 상태를 멸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이 땅의 삶이 전부라는 말인데, 모든 신자는 이 땅에서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예수 믿지 않고 죽기 전에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 안에 있으면서도 부활의 소망 없이 이 땅만을 소망한다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합니다(19).

 

지금까지 설명에 의하면 죽은 자의 부활은 몇 가지 면에서 꼭 필요합니다. 첫째, 바울의 증거가 거짓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합니다. 부활이 있다고 이미 말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증거가 거짓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분 역시 부활을 말씀하셨고 이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의 메시아 됨을 위해 필요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의 죽음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신자들의 죄를 용서하는 통로인지 알 수 없고, 죄사함이 이루어졌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가 메시아인지도 확실치 않을 수 있습니다. 설사 메시아가 맞다 해도 부활 없는 그의 사역은 실패입니다. 넷째, 독자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합니다. 부활 없는 복음은 죄 사함을 보증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의 삶을 넘어 영원한 생명도 확증할 수 없습니다. 그것 믿고 이 땅에서 다르게 사는 것은 인생 낭비입니다. 부활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논리적인 귀결이지만, 반대로 부활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감사하게도 부활은 사실입니다. 증인들이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지난 모든 구원의 역사와 예수님의 삶이 완성됩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으면 그간 모든 역사를 설명할 수 없고, 우리가 선 자리를 알 수 없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생명도, 소망도, 삶의 의미도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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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5-01)

 

 


복음과 그리스도의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생각할 수도 없는 끔찍한 가정(假定)들이 있습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하지만 복음에 있어서 가장 끔찍한 가정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일 것입니다. 왜 그런 가정은 성립될 수 없습니까? 있어서는 안 됩니까?

 

  • 예배 상황에 대한 것을 끝내고 새로운 주제로 넘어갑니다. 부활에 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1-2절로, 바울이 듣고 독자에게 전한 복음에 대해 소개합니다. 둘째는, 3-8절로, 부활과 관련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셋째는 9-11절로, 바울과 관련한 추가 정보를 제공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1-2)

 

이 부활신앙은 지금도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입을 통해 고백되어지고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부활에 대한 구체적 문제를 상술하기 전에, 과거에 바울이 전하고 고린도 성도들이 들었던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바울이 독자적으로 고안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과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과 모든 사도들이 공유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 내용임을 말합니다.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1-2)

 

바울이 말한 ‘알게 하노니’는 표현과 복음이란 말로 이전 부분과 주제적 단절을 보입니다. 11-14장이 교회 모임에 대한 것이라면, 15장은 부활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알게 하노니’라는 말로 운을 떼고 추가 설명으로 그 복음의 성격을 말합니다. 그 복음은 바울이 독자인 ‘너희’에게 전한 것입니다. ‘너희’가 받아들여 이미 그 안에 서 있고, 바울이 전한 것을 잘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그것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몇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부활은 복음의 진리와 연결된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없으면 바울의 증거는 복음이 아닙니다. 또한 성도 몸의 부활이 없으면 역시 복음이 아닙니다.

둘째, 부활의 복음은 새로운 내용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예수 메시아로 교회의 터를 잘 닦을 때(3:10) 가르쳤던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 진리를 통해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셋째, 부활과 관련해 고린도 성도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복음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비상식적인 것이고, 영에 비해 몸을 중시하지 않는 당시 생각 속에서 몸의 부활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넷째, 고린도 성도들은 진리에 계속 서야 합니다. 그는 복음의 내용을 상기시켜 굳게 붙잡으라고 하고, 그들이 가진 믿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계속 부활 내용을 뺀 채로 복음을 믿으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결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진리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활 진리는 세상 사고를 따를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일하심의 진리를 따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다섯째, 구원은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미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계속 진리 안에 서 있음으로 완성을 경험해야 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완성을 향해 가는 ‘구원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부활과 관련한 복음의 내용(3-8)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새롭게 함으로써 신비한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성경대로 사는 것을 열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3-8)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은 바울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1) 복음의 내용: 메시아의 죽음(3-4)

 

바울은 부활과 관련한 복음 내용을 다시 설명합니다. 바울이 받은 것을 독자들에게 전했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접속사로 시작하는 네 가지 일련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사건은 메시아의 죽음입니다. 메시아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었습니다. 구약 약속의 성취로서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더 구체적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적은 십자가에 대한 설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린도 성도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했을 때 이미 가르쳤기에 더 설명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열쇠는 ‘성경대로’입니다. 메시아 고난에 대한 구약 본문들이 여럿 있지만, 특별히 죄 용서와 관련해 신명기 21:22-23과 이사야 53장이 대표적입니다. 신명기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그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사람들 죄를 대신 지고 고난당한 자의 이야기입니다. 신명기 내용과 연결시키면 메시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서 죽은 것은 사람들 죄와 그로 인한 심판을 대신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죄를 위한 죽음’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둘째 사건은 메시아의 장례입니다. 성경 예언(이사야 53:9)의 성취이지만, 바울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셋째 사건은 부활입니다. 성경대로 제 3일에 다시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죽음과 부활의 모든 과정은 구약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오랜 계획의 성취이며 요소들 모두가 구원사건의 핵심입니다.

 

(2) 복음의 내용: 메시아의 부활과 증인들(5-8)

 

바울이 독자들에게 전한 네 번째 사건은 예수 부활을 목격한 것입니다. 바울은 상대적으로 이 부분을 길게 언급합니다. 전하고 싶은 주된 초점이라는 말입니다. ‘그후에’를 통해 시간 순서로 목격자들을 소개합니다. 처음은 게바, 곧 베드로이고 그 후는 열두 사도입니다. 그 후는 오백 명 넘는 형제들이고 그 후는 야고보이며 그 후는 많은 사도들이고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입니다.

이런 설명에는 몇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부활과 관련한 주도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목격자들은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본 것이 아닙니다. ‘보다’동사의 수동형과 대상을 의미하는 여격(~에게)을 통해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이 보게 되었음을 묘사합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따라 목격자들을 네 그룹으로 구분합니다. 베드로와 열두 사도, 오백 명 넘는 형제들, 야고보와 많은 사도들, 그리고 바울입니다.

둘째,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여러 목격자를 열거한 것은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부활의 예수를 만난 오백 명 넘는 형제 중 죽은 사람도 있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첨가한 것(6)도 그 때문입니다. 셋째, 바울 역시 부활한 예수님을 목격한 자입니다. 비록 만삭되지 못하여 난 사람 같은 자이지만, 그에게도 주님이 나타나셔서 부활하심을 알게 했습니다.

 

바울 자신에 대한 추가 정보와 결론(9-11)

온전한 복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온전히 깨닫고 믿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을 나타내고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바울은 결코 ‘더 많이 수고하면서’ 부활을 전하는 종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9-11)

 

바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는 표현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나’라는 1인칭 강조 지시어를 통해 사도 중 가장 작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설명은 바울의 구원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의 대조로 진행됩니다. 먼저 구원 이전 상태입니다(9). 그는 감히 사도라고 불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1-2 내용을 반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도행전에서는 주의 제자들을 핍박했다고 표현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참조, 갈라디아서 1:13, 23; 빌립보서 3:6)라고 말합니다. 몇 가지 생각거리가 있습니다.

첫째, 바울의 교회관입니다. 그는 교회를 건물이 아닌 사람들, 곧 하나님 백성의 모임으로 이해합니다(1:2). 더 나아가 교회를 메시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반영한 듯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했는데,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왜 자기를 핍박하느냐’고 질문합니다. 제자들을 예수님과 동일시한 표현입니다. 이 경험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서로 뗄 수 없는 한 몸으로 인식하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바울이 편지를 쓰는 의도입니다. 이전에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자였습니다. 지금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입니다. 오히려 바울이 그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과거 교회를 핍박하던 자가 사도가 되어 교회를 세웠고, 지금 어지러운 교회를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10절은 ‘그러나’를 통해 구원 이후의 반전 상태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모든 사도들보다 더 수고한다고 말합니다. 그들과 비교하거나 경쟁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것에 응답해 충성스럽게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은혜입니다. 구원과 은사와 지식을 도구 삼아 비교와 경쟁으로 교회를 어지럽힌 고린도 성도들과 다릅니다.

 

11절에서 바울은 그간 언급한 복음의 내용과 부활에 대해 결론짓습니다. 바울과 사도들의 복음 전파 내용이 다르지 않다는 것과 그 내용을 독자들이 믿어 구원을 경험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활의 내용이 담긴 복음은 바울이 만든 것도 아니고 그만 전한 것도 아닙니다. 목격자가 있는 역사적 사실로, 초대 교회 모든 사도와 전도자들이 공유하고 있고 또 전하고 있습니다. 독자들 역시 경험으로 확증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지난 모든 구원의 역사와 예수님의 삶이 완성됩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으면 그간 모든 역사를 설명할 수 없고, 우리가 선 가리를 알 수 없고,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생명도, 소망도, 삶의 의미도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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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4-02)

 


성숙하게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

고린도전서 14장 20-40절


로마인들은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들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 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투리아인들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은 세계의 승자가 되어 천년 로마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로마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나라를 유지했으며,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했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인 이야기’를 쓴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가장 먼저는 법과 제도를 지키는 원칙에 충실했던 로마 시민들의 질서 의식, 준법이라고 합니다.

 

  • 교회 모임에서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해 가르칩니다.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20-25절로, 믿지 않는 자와 관련해 방언과 예언을 대조합니다. 둘째는 26-35절로, 교회 예배 상황에 대한 실제적 지침을 제공합니다. 여기에는 방언과 통역과 예언과 아내들이 일으키는 무질서한 상황이 포함됩니다. 셋째는 36-40절로, 은사에 대한 설명의 결론입니다. 자신의 은사 때문에 교만해지지 말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질서 있게 행하라고 권합니다.

 

구도자/불신자와 관련한 방언과 예언의 대조(20-25)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주신 표적이지만(사 28:11-12), 또한 그들을 위해 절제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초신자들이 예배를 드릴 때, 자신들이 알아듣지 못한 말들을 함으로 자칫하면 청신 나간 행동처럼 보여 그들에게 겁과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때문에 자기 숨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전파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20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20-25)

 

방언과 예언을 불신자에 대한 기능 차원에서 비교하고, 은사에 대한 권면을 마무리합니다. 은사 사용을 금하지 않지만, 사랑으로 행하고 교회에서는 질서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1) 방언과 예언과 관련한 명령(20)

 

방언과 예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공적 예배에 참여한 구도자나 불신자와 관련해 두 은사를 비교합니다. 먼저 세 가지 명령으로 바른 생각을 요청합니다. ‘생각에 대해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 ‘악에 대해 어린 아이가 되라.’ ‘생각에 대해 온전한 자가 되라.’ 생각에 대한 것을 양 끝에 두고 악을 가운데 둔 A-B-A 형태입니다. 주목할 것은 신령한 것들에 대해 잘 생각할 것과 합리적 판단을 요청한 점입니다. 흔히 신령한 것들은 이성적인 것과 상관없는 듯 여깁니다. 아마 고린도 교인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성적 판단을 계속 요구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합당한 판단과 분별하는 것을 영적이고 성숙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2) 방언과 예언의 대조(21-25)

 

방언과 예언을 대조합니다. 구약의 예를 들고(21) 그에 근거해 방언과 예언을 대조한(22) 후 방언(23)과 예언(24-25)을 하나씩 설명하는 구조입니다. 먼저 구약 성경을 예로 듭니다. 하나님이 다른 방언과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 것이지만 듣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방언으로 전한 것과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는 것을 연결점으로 삼기 위해 인용한 듯합니다. 구약도 방언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를 통해 구약 인용을 방언과 예언에 대해 적용합니다(22). 방언은 하나님의 표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지만 예언은 믿는 자를 향합니다. 구약 인용과 23-25절과의 연결에 의하면 방언과 예언이 가져올 결과 차원을 말하는 듯합니다. 다시 말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불신자들이 하나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게 함으로 멸망의 결과를 낳게 하지만, 예언은 그분의 계시를 드러내 궁극적으로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입니다. 방언이 신령하기에 신자에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뒤집습니다. 방언은 신자가 진리를 증거할 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바울은 ‘만일’이라는 조건절을 통해 이 내용을 부연합니다(23-25).

만일 구도자와 불신자가 교회 모임에 참여했을 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전하면, 그들은 그 모임을 미쳤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언을 통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성적인 말로 계시를 전하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주님을 인정할 것입니다. 1-19절 설명이 동료 신자를 향한 사랑의 관점에서 방언과 예언을 대조했다면, 이 부분은 불신자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관점에서 대조합니다. 구도자와 불신자에게 진리를 전하는 차원, 곧 사랑으로 전도하는 것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참 신으로 인정하게 하는 차원, 즉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차원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방언의 문제는 단순히 그것이 신령한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어떤 것이 최고의 비교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그 은사가 사랑의 모습으로 사용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분 이름을 드러내는 수직적 차원과 동료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수평적 차원이 다 포함됩니다.

 

교회 예배 상황에 대한 실체적 지침들(26-35)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말하는 것이기에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영적 유익이 있지만, 공동체적 차원에서 는 그 방언을 통역해 주는 않으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배 중 방언은 누군가가 그 방언을 통역해 줄 수 있는 경우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26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34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26-35)

 

앞서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용하라는 말을 이제 질서를 따라서 은사를 사용하라는 권면으로 달리 표현합니다. 질서를 따라 찬송시, 가르침, 계시, 방언, 방언 통역, 예언 등 각자가 가진 은사를 발휘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성도의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1) 교회 예배 상황에 대한 실제적 지침들: 원리(26)

 

그간의 논의를 근거로 실제 지침을 제공합니다. 먼저 ‘그러면 어찌할까?’라고 스스로 질문하고 명령으로 답하는 형식으로 원리를 정리합니다. 교회 모임 때 찬송, 가르침, 계시, 방언, 통역 등 여러 은사를 사용해도 됩니다. 하지만 은사를 통한 비교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원리, 곧 모든 것을 서로 세워주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사랑에 근거한 은사 사용입니다.

 

(2) 방언에 대한 실제적 지침(27-28)

 

방언을 사용할 때 반드시 둘 혹은 많아야 셋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례대로 질서 있게 하되 통역이 반드시 수반돼야 합니다. 만일 통역자가 없으면 교회 모임에서는 잠잠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나 찬양할 때 사용해야 합니다.

 

(3) 예언에 대한 실제적 지침(29-33a)

 

예언할 때도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해야 합니다. 만일 예언할 때 다른 이에게 성령의 계시가 임하면 말하는 사람은 잠잠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예언하면 교회 모임이 무질서해집니다. 성도들이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권면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스스로도 그렇게 예언을 주지 않으십니다. 질서의 하나님이기에 교회 모임에 유익이 되도록 질서 있게 예언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언하는 자들은 다른 예언하는 자들 밑에 있어야 합니다. 자기 외에 또 다른 사람에게 계시를 주실 수 있음을 인정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언을 할 때도 이성적 사고를 사용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4) 문제 일으키는 아내들에 대한 실제적 지침(33b-35)

 

여기서는 질서 없는 상황의 예를 듭니다. 아내들이 교회 모임에서 무질서하게 질문하거나 은사를 사용한 상황인 듯합니다. 그 모습은 예배를 방해할 뿐 아니라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문제가 되는 아내들에게 잠잠하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모든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지 못하게 금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아내들의 은사 사용을 막은 것도 아닙니다. ‘잠잠하라’는 명령은 이미 모든 성도들에게 방언과 예언과 관련해 무질서함을 막는 방법으로 제시했습니다(28,30). 그렇기에 아내들에 대한 명령도 무질서함을 막기 위한 임시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은사 문제에 대한 결론적 권면(36-40)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이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더 신령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하고 영적인 것처럼 들리는 말씀이라도 성경에 어긋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36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36-40)

 

고린도 교회에 자신이 신령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라고 주장하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1) 결론적 권면: 교만한 자들에 대한 경고(36-38)

 

은사 사용에 대한 결론적 권면입니다. 질문(36)과 조건절(37-38)을 통해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서 나온 것이냐? 그것이 ‘너희’에게만 임했느냐? 상당히 비관적인 질문들입니다. 공통점은 ‘너희’라는 표현입니다. 신령한 것들이 ‘자기’에게만 있는 특별한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 그 기원도 자기 것인 양 착각한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이런 교만은 자연스레 비교 의식으로 이어지고, 교회 모임의 질서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이어지는 조건문 표현은 이들의 교만을 구체화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한다면’ 그들의 자기 인식을 반영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엄히 경고합니다. 만일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해 교만해져 있다면 자기가 편지에 쓴 것들을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조심하라고 합니다. 단순히 사도로서의 권면이 아닌 주님의 명령입니다.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바울 가르침의 성격을 알지 못하면 그들은 스스로의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나 신령한 자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교만을 버리고 바울 가르침을 듣고 겸손해야 합니다.

 

(2) 마지막 명령들(39-40)

 

은사에 대한 마지막이자 실제적 명령입니다. 예언도 하고 방언도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적절하고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구체적 추가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사랑으로 실제로 그렇게 하면 됩니다.


성숙한 생각과 행동으로 교회 공동체와 믿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은사라도 교회를 세우고 다른 사람들 섬기는 일에 취선을 다해야 합니다. 방언하는 사람은 통역의 은사도 구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감사하고 자기 덕을 세우는 테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방언 경험에 대해서 문외한이거나 신앙의 초신자들은 방언으로 하는 기도나 찬양에 ‘아멘’으로 응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회중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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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4-01)

 


 

덕을 세우는 은사

고린도전서 14장 1-19절 


 

모든 은사는 선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새 창조의 목표를 따라, 성도들이 서로의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은사를 사모할 때 가급적이면 어떤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 최고의 은사가 되게 하는 방법인 사랑을 따라 행하라고 일한 후 예언과 방언에 대해 비교합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1-5절입니다. 사랑을 따라 신령한 것을 추구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말하고 예언과 방언을 대조합니다. 둘째 부분은 6-12절입니다. 왜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방언과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셋째 부분은 13-19절입니다. 공적 예배 때 방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설명하고 결국 예언이 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언과 방언(1-5)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첫째가 사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큰 은사의 기준은 신령함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사랑은 은사를 은사 되게 하는 필수 요소며, 사랑을 추구하는 은사라야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모든 성도들이 봉사를 행할 때, 사랑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은사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은사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모든 은사를 통한 봉사에 있어서 항상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1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1-5)

 

고린도 성도들은 다른 영적 은사들보다 방언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영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은사가 방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함으로 영적 은사를 자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용하라고 권하고 특별히 공적 모임에서는 방언보다 예언을 더 추구하라고 합니다. 방언을 하려면 반드시 통역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과 소통해서 인격적 관계성을 증진하고 교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예언을 추구(1)

 

더 큰 은사들을 만드는 길(12:31)인 사람을 설명한 후(13장), 교회 상황에 대해 권면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면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바울은 예언하기를 권합니다.

 

(2) 예언과 방언(2-5)

 

바울은 방언의 무익성과 예언의 유익성을 대조적으로 설명하면서,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 방언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소개합니다.

예언을 더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방언과 예언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방언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소통 방식이지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2).

성령으로 자신의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방언은 성령으로 혀가 움직여 말하는 것이기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고, 심지어 방언하는 자도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방언은 사람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한 사랑의 요소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은 다릅니다(3).

사람들을 세워주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잘 표현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방언이 필요 없고 예언만 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서로의 기능과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4). 방언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웁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성에서 잘 서기 위해 방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도울 수 있습니다. 사실 예언과 방언은 서로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단지 그 기능과 목적이 다르기에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할 지를 분별하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5절에서 방언과 예언의 상황을 구분해 권면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독자들이 다 방언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성령으로 인한 교제와 비밀을 나눌 수 있는 통로이기에 개인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독자들이 예언을 더 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보다 교회를 세워가는 데는 예언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인이냐 교회냐 사이의 상황 인식과 어떤 것이 함께하는 사람에 대한 인격적 배려이고 성도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분별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6-12)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은사를 추구할 때, 그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된 세우지만, 사사로운 욕심으로 구한 은사는 시기와 경쟁으로 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떠나 은사는 언젠가는 변질됩니다. 은사에 대한 열정이 항상 교회를 건강하게 섬기는 열정과 조화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6-9)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것이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에자기 덕을 세우는 데만 유익하지만, 예언은 사람들에게 알아듣게 말하는 것입니다.

 

(1)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 2(6-9)

 

예언이 왜 필요한지를 계속 설명합니다. 일련의 조건절로 ‘나(바울)’의 예를 ‘너희(독자들)’에게 적용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두 가지가 언급됩니다.

6-9절은 그중 하나로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전하는 경우입니다. 먼저 ‘나’의 경우입니다(6-8). 만일 ‘나’가 너희에게 가서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이 아닌 방언으로 말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6) 방언이 다른 은사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기에 소통이 되지 않아서 독자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7-8절에서 악기의 예를 통해 설명을 이어갑니다. 만일 피리나 거문고 등의 생명 없는 악기들이 음의 구분을 전달하지 못하면 어떻게 그 악기들을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전쟁 때 신호를 전달하기 위한 나팔이 구분된 소리를 내지 못하면 어찌 전쟁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들어도 상식선에서 동의할 수 있는 예들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런 설명을 ‘이와 같이’라는 표현을 통해 ‘너희’ 경우로 적용합니다(9). 만일 너희가 방언을 통해 분명치 않은 말을 전한다면, 그 말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방언으로는 의사소통 할 수 없기에 마치 허공을 향한 소음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공적 모임에는 적절치 않습니다.

 

(2)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 2(10-12)

 

‘나의 상황을’ 너희에게 적용한 두 번째 내용입니다. 언어 소통 과정을 예로 듭니다. 먼저 언어를 표현하는 소리에 대한 일반 원리를 제시합니다(10). 아마도 세상에 많은 종류의 언어가 있지만, 소리 없는(뜻 없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렇기에 ‘나’가 그 소리의 능력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 말하는 자에 대해 야만인이 되고, 말한 자 또한 ‘나’에게 야만인이 됩니다(11).

서로 소통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신령한 것을 추구하기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예언하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12). 교회 안 공적 모임에서 방언을 말하면 서로 소통이 안 되고, 결과적으로 교회를 세울 수 없기에 소통할 수 있는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공적 예배 때 방언 사용에 대해(13-19)

은사를 추구하는 열망보다 은사 추구의 동기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입니까? 그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타인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고 사랑을 구연하는 은사가 더 큰 은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 타인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3-19)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의 무익성에 대해 설명한 후, 교회 것을 세우기 위한 영적인 은사가 더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세우기 위해 방언보다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1) 방언 사용자는 통역을 위해 기도하라(13)

 

앞부분 설명을 근거로 방언 사용자에게 권면합니다. 방언을 하는 자들은 통역하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모든 방언 말하는 자가 반드시 통역의 은사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통역의 은사가 있으면 공동체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2) 바울 경험을 통한 설명(14-15)

 

바울은 1인칭 표현으로 통역의 은사를 구하라는 13절 내용을 부연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생각해 볼 때, 방언 기도를 알아듣지 못한 것은 자신에게도 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통역의 은사는 공동체적으로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건 생활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이성적 이해에는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14)

따라서 기도나 찬송할 때 영으로 하는 방언과 이성으로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 함께 가야 합니다(15). 하지만 상황 분별이 필요합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나 찬송은 14절처럼 개인 상황이지만, 이성으로 기도하고 말하는 것은 교회 모임이란 공적 상황입니다. 방언을 공적 모임에서 사용하려면 통역이 필요합니다.

 

(3) 독자들 상황을 통한 설명(16-17)

 

이제 바울은 왜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기도나 찬양을 하면 안 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4-15절이 ‘나’를 통해 바울 차원에서 설명했다면, 이번에는 ‘너희’를 통해 독자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한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기에 어떤 이가 다른 이를 축복하거나 감사의 말을 해도 그것에 공감해 함께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적 예배 유지가 불가능하고 메시아의 한 몸이자 하나님의 한 식구로서의 정체성과 유대감, 인격적 사랑 나눔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교회를 망칠 수 있습니다.

 

(4) 바울의 권면(18-19)

 

바울은 다시 1인칭 ‘나’를 사용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마무리합니다. 자신이 많은 방언을 하는 것에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방언 자체가 필요 없다는 인식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방언은 분명 성령의 선물입니다. 애써 금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공적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을 때는 통역이 없는 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고, 기본적으로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이성적인 말로 교제하고 함께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최고의 은사가 되게 하는 사랑 차원에서의 권면입니다.


신령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사모하도록 권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자신을 위한 은사이기 때문에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는 다른 사람을 섬기고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세우는 예언의 유익한 은사를 구하길 바랍니다. 당신에게도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주시되,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유익한 예언의 은사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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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3-01)

 


아가페 사랑의 탁월성

고린도전서 13장 1-13절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연약한 여자를 강한 어머니로 만드는 것은 사랑입니다. 위대한 인물들 위에는 하나같이 위대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을 만드는 비결은 바로 사랑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사를 소유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준신 의도 또한 분명합니다. 그 의도를 따라 사용되어야 합니다.

 

  • 최고의 은사들을 만드는 방법(12:31)과 연결한 사랑에 대한 설명입니다. 내용은 설명 방법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1-3절입니다. ‘만일’과 ‘나’라는 1인칭을 사용한 세 개의 조건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은사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으면 의미 없음을 말합니다. 둘째는 4-7절입니다. 직설법 표현으로 사랑의 특성을 설명합니다. 셋째는 8-13절입니다. 현재와 미래의 시간 대조를 통해 사랑의 영원성과 온전성을 설명합니다.

 

사랑의 필요성(1-3)

 

하나님의 구원 계획(비밀)에 대한 지식과 산을 옮길만한 대단한 이적을 베풀 수 있는 믿음(마가복음 11:23)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자신의 재산을 구제나 종교적 열정으로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낭비이고 헛수고일 뿐입니다.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행동을, 예언과 지식과 믿음의 선물(은사),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능력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도,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1-3)

 

고린도 성도들은 많은 은사(恩賜)들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은사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은사들 중에서 방언(方言)을 천사의 언어로 여기면서 최고의 은사로 떠받들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앞 12장에서 은사들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본 13장은 ‘사랑’장입니다.

더 큰 은사들을 만드는 최선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어떤 은사, 어떤 섬김이든 사랑으로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들을 제시합니다.

먼저 사랑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면서 시작합니다. ‘만일’과 1인칭 지시어 ‘나’로 구성된 세 개의 조건절로 진행합니다. 첫째는 말과 관련된 영역입니다(1). ‘만일 내가 사람들의 방언들이나 천사들의 방언들로 말할지라도’. 방언을 먼저 언급한 것은 교회에서 우월감과 열등감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독자들에게 방언은 최고 은사 후보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관점에 일침을 가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방언들은 소리 나는 징이나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소통의 통로가 아닌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합니다. 그 귀한 은사를 이렇게 표현한 것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마치 방언을 통역하듯 사랑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알아듣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어떤 방언도 함께 살아가는 관계성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2절입니다. ‘만일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소유했다 해도.’ 12:8-10에서 언급한 은사들을 예로 듭니다. 예언은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고(14장) 지식은 독자들이 좋아합니다(1:5; 6:1). 믿음은 단순한 고백 이상의 것으로 특별한 일을 행하실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이 역시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12:10). 주목할 것은 ‘모든’이란 표현으로 이 요소들을 묘사한 점입니다. 과장을 통한 강조입니다. 사랑 없는 상태와 비교하기 위함입니다. 설사 그 모든 것을 다 갖고 있고 알고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은사들을 통해 자신을 신령한 자로 여기고 우월감을 가진 자들에게 그들 자랑이 헛것임을 말합니다. 1절이 은사 자체에 대한 내용이라면 2절은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셋째는 3절입니다. ‘만일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자랑하기 위해 내 몸을 내어줄지라도.’ 일과 헌신과 관련된 영역입니다. 다소 과장의 표현으로 ‘모든’ 소유와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는 가상의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럴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이런 세 가지 조건절 표현은 은사나 헌신이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에 사랑이라는 요소가 없으면 무의미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꼭 있어야 하는 필수 요건입니다.

 

사랑의 특성(4-7)

천사의 언어로 여기면서 최고의 은사라고 추앙하지만 갈등과 혼란만 일으키고 있는 방언도, 사랑의 마음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이방 종교의 예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시끄럽기만 하고 아무 의미 없는 소음에 그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지식과 대단한 이적을 베풀 수 있는 믿음(마가복음 11:23)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4-7)

 

사랑을 주어로 해서 그 특징에 대해 서술합니다. 바울의 서술은 형태적으로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은 ~하다’는 긍정 표현입니다. 오래 참음과 친절함의 두 항목이 있습니다(4). 다른 하나는 ‘사랑은~하지 않는다’는 부정 표현입니다. 일곱 개 항목(시기, 자랑, 교만, 무례함, 자기 유익을 구함, 성냄, 불의)이 제시되고, 진리를 불의와 연결해 제시합니다(4-6). 세 번째는 ‘모든 것’을 목적어로 하는 네 동사(참다, 믿다, 바라다, 견디다) 표현입니다(7). 이렇게 열거된 사랑의 모습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은 철저히 인격적 관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을 정의하기 어렵지만, 인격과 인격이 서로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면 사랑에는 지정의(知情意)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지(知)는 인지 정보에 대한 것으로 상대방에 대한 앎과 관련 있습니다. 정(情)은 정서적으로 느끼는 차원입니다. 의(意)는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고 과정입니다. 상대방에게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를 판단하여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사랑의 특징들은 생각(지)의 요소와 함께 상대방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情)의 요소, 곧 상대방을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기뻐함이 이 요소와 가깝지만, 사람이 아니라 불의와 진리에 대한 반응이기에 다른 영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사랑을 단순히 감정 차원으로만 묘사하고 싶지 않은 듯합니다. 합당한 사고 과정과 판단을 통해 관계를 긍정적으로 잘 세워가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듯합니다.

둘째는 사랑은 진리와 함께 갑니다.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나 무조건적 호의가 아닙니다. 철저히 진리 영역과 관련 있습니다. 바울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고 불의가 아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반드시 바른 앎과 바른 분별과 함께합니다. 우상숭배나 어쭙잖은 진리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바라는 것은 현재 상태가 긍정적이지 않음을 전제합니다. 일회적 느낌이나 상태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인격적 관계로 드러내야 하는 과정입니다.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기에 애써 해야 하는 차원이 있습니다.

넷째는 고린도 교회 문제 상황과 정반대 모습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기와 자랑과 교만과 무례히 행하는 것과 자기유익을 구하는 것 등은 교회 분열과 성적 문제들의 원인입니다. 또한 진리로 분별하는 것은 우상숭배 문제와 관련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문제들이 ‘사랑’의 요소, 특별히 바른 인격적 관계성을 세워가는 차원이 없기에 나타남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사랑의 영원성과 온전성(8-13)

은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때까지 유효합니다. 믿음과 소망도 실제가 오면 의미 없어집니다. 하지만 사랑은 날로 커질 것입니다.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고 삼위 하나님만 도드라질 때까지, 내 것은 하나도 주장하지 않고 이웃만 위할 때까지, 사랑은 한없이 컥질 것입니다.

 

8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8-13)

 

사랑에 대한 세 번째 설명으로 영원성과 온전성을 다룹니다. 은사는 현재에만 필요하고 주님이 다시 오시면 쓸모없게 되지만,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먼저 바울은 예언은 폐해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해지겠지만,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8). 9절부터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현재와 미래의 대조로 제시하는데, 특별히 지식과 예언과 관련해 서술합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知識)’이란 하나님/예수에 대한 것입니다. 뜻과 계획을 포함한 그분의 어떠하심에 대한 정보를 말합니다. 핵심은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입니다. ‘예언(豫言)’이란 신자나 외인들에게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따라 현 상황을 해석하고 격려하거나 책망하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 신자와 교회가 갖고 있는 지식과 예언의 은사는 모두 부분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분의 뜻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완성하실 때는 다릅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생각과 지식이 당시에는 최고로 보여도 장성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듯이(11), 또는 거울로 보는 것은 희미하지만 실제 얼굴을 보면 더 분명히 알게 되듯이 미래는 다를 것입니다. 그때에는 부활의 몸으로(빌립보서 3:21)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보며 온전한 앎과 사랑의 인격적 교제를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13).

13절을 직역하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지금) 있다’입니다. 현재에는 세 가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믿음과 소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끝나는 것들입니다. 사랑은 다릅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필요합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보이지 않기에 믿음이 필요하고 온전함이 없기에 그때를 기다리는 소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지금이나 그때나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신자가 지금부터 영원토록 존재하기 때문에 그 관계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사랑 역시 지금부터 영원토록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이 최고입니다. 성도는 이 요소를 가지고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성도들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서로에게 인격적으로 긍정적인 표현을 함으로써 서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나 섬김이든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은사요 섬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사랑의 성품을 닮길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충만해져서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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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2-02)

 

 


한 몸을 이룬 공동체

고린도전서 12장 12-31절


 

우리의 몸은 많은 기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두 서로 다 연결이 되어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온 몸이 약해지거나 아픕니다. 그래서 몸의 지체는 여러 가지이지만, 몸은 여러 지체를 통해 하나를 이룬 것입니다.

 

  • 바울은 앞에서 은사의 다양성과 일치성에 대해 몸을 통해 비유로 말합니다. 이제 비유를 들어서 고린도 성도들의 의무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지체만을 위대하게 사용하기 원치 않으시며, 지체들에게 각각의 능력과 성품을 주셔서 적절히 연합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온전하게 이루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한 몸과 많은 지체들(12-14)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인종과 국가, 사회적 신분, 남녀 차별 등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차이를 그대로 가지고서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인 교회를 완전하게 이룰 수 없습니다. 지상의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 성령에게서 세례를 받아 한 몸, 즉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12-14)

 

한 몸과 많은 지체들에 대해 설명합니다. ‘마치 ~처럼 ~ 하다’라는 비교 표현을 통해 사람의 몸과 메시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연결합니다. 핵심은 다양성과 통일성입니다.

이 요소들은 ‘마치’로 시작하는 종속절 구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과 관련해 12절은 두 개의 절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한 몸을 주어로 많은 지체가 있음을 말하고, 또 다른 하나는 많은 지체를 주어로 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한 몸(주어) - 많은 지체- 많은 지체(주어) - 한 몸의 구조입니다. 마찬가지로 메시아의 몸, 곧 교회도 하나이지만,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후 바울은 ‘왜냐하면’이란 두 개의 이유절로 12절을 부연합니다. 하나는 13절입니다. 어떻게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한 몸이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한 몸 안으로 세례를 받고, 한 피를 마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와 주의 만찬을 통한 주님과의 연합입니다.

또 다른 이유 절은 14절입니다. 한 몸에는 하나의 지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두 이유 절 모두 다양성과 통일성 요소를 갖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13절은 통일성에 초점을 맞추고 14절은 다양성에 더 집중합니다.

 

비유와 설명1: 비교로 인한 열등감에 대해(15-20)

우리 몸에는 다양한 기능한 기관들이 많습니다. 가장 비천한 지체도 몸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기관도 몸 전체를 이룬데 기관으로 역할을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비천해 보인 사람이라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성도라면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위치나 특별한 은사를 받지 못했다고 해도 교회의 한 몸입니다.

 

15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15-20)

 

본 단락에서는 당신은 그리스도의 봉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교회 안에서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은사라도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역설적으로 덜 귀해 보이고 덜 아름답게 보이는 지체일수록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 못할 만큼 존귀하고 요긴하게 사용하십니다.

 

(1) 비유(15-16)

 

다양성과 통일성을 근거로 비교 상황으로 인한 교회 문제를 다룹니다. 첫째는 열등감입니다. 바울은 사람 몸에 있는 여러 지체들을 의인화해 그 문제를 소개합니다(15-16). 발은 자기가 손이 아니니까 몸에 필요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귀 역시 눈과 비교해 그렇게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은사와 섬김을 통한 비교 의식으로 중요한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를 구별하거나 차별하는 상황을 전제합니다. 특별히 비교로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들의 예를 듭니다.

 

(2) 설명(17-20)

 

몸의 지체들을 의인화한 15-16절 내용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른 지체와의 차이는 비교와 열등감을 느낄 사항이 아닙니다. 만일 모든 몸이 하나의 지체만 있다면 몸은 제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눈만 있으면 몸은 보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이 없습니다. 코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한 지체만으로 구성된 것은 몸이 아닙니다. 한 몸에는 반드시 다양한 지체들이 서로 다른 기능으로 존재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 다양한 기능의 지체를 한 몸에 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입니다. 그렇기에 비교를 통한 열등감은 합당치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쓸모없는 자녀와 선물(은사)은 없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성도와 은사가 있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다른 지체의 부족함을 채워 온전한 몸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와 설명2: 비교로 인한 우월감에 대해(21-26)

남다른 지식과 은사로 자신을 우월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목받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자들이고, 주목받지 못하는 자들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유능하고 요긴해도 더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더 많은 이들과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는 무익한 존재일 뿐입니다(13:1-3).

 

21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21-26)

 

교회는 한 몸 의식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특히 셀을 통해서 한 몸 의식을 돈독히 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몸에 지체처럼 붙어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끼리는 육신의 형제보다 더 반갑습니다. 성령의 교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영적인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1) 비유(21)

 

비교로 인한 둘째 문제를 다룹니다. 우월감입니다. 역시 사람 몸의 지체들을 의인화해 상황을 제시합니다. 눈이 손에게 보는 기능이 없으니 쓸데없습니다. 하거나 머리가 발에게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15-16절과 반대 상황입니다. 아마도 교회 안에서 은사와 섬김을 통해 우거리는 부류의 태도를 지적한 듯합니다.

 

(2) 비유 설명(22-26)

 

우월감 문제에 대해 설명합니다. 사람 몸의 예와 교회 안의 예를 섞어가며 제시합니다. 우월감을 설명하기 위해 의인화한 몸의 지체들의 경우와 달리 실제 사람은 몸에서 더 약해 보이는 부분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덜 귀하게 여겨지는 것을 더 귀한 것으로 입혀줍니다. 더 약해 보이는 지체는 아마도 내부 장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손이나 발보다는 약하지만 아주 중요한 기관이기에 여러 모습으로 보호합니다. 또한 덜 귀히 여기는 지체는 성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은 그 부분을 더 귀한 것으로 입히고 가려서 수치가 드러나지 않게 합니다. 하지만 얼굴 같은 이미 아름다운 지체는 다릅니다. 꾸미고 더 아름답게 하지만 가리지는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교회 구성원들은 하나님이 귀중함을 더하게 하십니다. 분쟁 없이 서로 돌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비교하여 우월감으로 차별과 배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사가 많은 사람은 자신이 더 약한 존재이고 덜 귀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섬겨야 합니다. 더 나아가 몸의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프듯, 교회에서 한 지체가 차별 받아 상처받고 아파한다면 온 몸과 모든 지체가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또한 한 지체가 영광 얻으면 모든 지체가 즐거워하듯, 교회에서도 서로에게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한 몸이며 한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를 이렇게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개인적 모임일 뿐 아니라 세상의 관점이 통용될 수 있는 단순한 정치 혹은 사교 모임 정도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때만 이런 관점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은 모습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오늘 우리도 바울의 가르침을 들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로의 적용(27-31)

한 지체가 아플 때 공동체 전체가 자기 아픔으로 느끼고, 한 지체의 영광에 모든 공동체가 시기나 질투 없이 같이 기뻐할 때 살아있는 건강한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주셨습니다. 모든 은사가 다 요긴하지만, 초자연적인 은사보다는 복음을 선포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은사가 교회를 세우는 데 더 필요합니다.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27-31)

 

한 지체의 고통을 모든 지체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한 지체의 영광을 모든 지체의 영광을 받아 드려 함께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하지 못하다면 그 상태는 지체의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고통과 즐거움, 아픔과 기쁨을 한 몸으로 함께 느끼는 것이 몸이란 유기체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 성도들이 겪는 고통이나 누리는 영광에 대하여 다른 사람 이야기 하듯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성도의 연합이 된 영적 상태라고 할 수 없습니다.

 

(1) 메시아의 몸과 지체(27-28)

 

‘너희’라는 2인칭 표현으로 고린도 교회 상황으로 연결합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몸이며 지체의 부분입니다. 앞서 비유로 설명한 내용의 정리입니다. 그들은 메시아 예수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과 언약 관계 맺은 자들로서 한 몸으로서의 통일성과 많은 지체로서의 다양성을 함께 갖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은사와 그것을 통한 섬김과 사역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습니다. 은사 차원도 있지만, 1차적으로 부르심에 따른 섬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두 진리와 관련된 것이지만, 그 모습은 다릅니다. 한편, 은사에 따른 섬김의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병 고치는 것과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 말하는 것들입니다. 모두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부르심과 은사로 메시아의 몸, 즉 교회를 구성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의 요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허락하고 세우신 분이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성의 요소를 어떻게 묶어서 교회의 통일성을 세워야 합니까? 13장은 그 중요한 방법을 소개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독자들로 하여금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함으로 관심을 유발합니다.

 

(2) 다양한 섬김과 은사(29-31)

 

모든 사람이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 병 고치는 은사나 방언을 말하거나 통역하는 은사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다양한 섬김의 모습과 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최고의 것입니까? 바울은 독자에게 더 나은 은사들을 추구하라고 명하고(‘너희는 더욱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 최고의 길을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최고의 은사가 아니라 주어진 은사들을 최고가 되게 하는 방법입니다.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한 후 바울은 13장 내용으로 갑니다.


다름이 다툼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지체가 다양하기에 몸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입니다. 저마다 하나님이 두신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비교해선 안 됩니다. 지체를 빛나게, 은사를 은사되게,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것을 주는 ‘평등’이 아닙니다. 다름을 포용하는 ‘사랑’ (13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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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2-01)

 


성령의 은사 사용 지침서

고린도전서 12장 1-11절


졸업이나 입학을 하면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다양한 선물을 받게 됩니다. 그 다양한 선물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것들로 선물을 받습니다. 만약 받은 선물이 필요 없는 물건으로 생각한다면,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첫째는, 선물한 사람이 선물 받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이 선물에 대한 사용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본문은 교회 모임에 대한 세 번째 주제입니다. 성령의 선물인 은사에 대한 것으로, 특별히 방언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이 부분은 그 시작으로 신령한 것과 은사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3절로 신령한 것들에 대한 의미를 재정리해서 독자들의 생각을 교정합니다. 다른 하나는 4-11절로 은사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제공합니다.

  

신령한 것들에 대해(1-3)

신령하다는 것은 은사의 기원이 사람이 아닌 성령께 있다는 뜻입니다. 은사 있는 사람만 신령하다거나 은사가 성령의 선물입니다.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도 아니고, 보상이나 상급도 아닙니다. 그러니 자기 자랑과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삼아선 안 됩니다.

 

1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1-3)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후에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부족함 없이 받은 교회였습니다(1:7). 하지만 이렇게 받은 은사를 예배 중에 무질서하게 사용함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1) 신령한 것들에 대한 도입(1)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로 집중을 유도하고 ‘~ 대하여’라는 표현으로 편지로 질문한 것에 답합니다. 이번에는 예배 상황 속 신령한 것들, 소위 성령의 선물(은사) 사용에 대해서입니다.

바울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표현으로 원리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참조 10:1). 신령한 것들에 대한 성도의 이해를 교정하며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2) 성령과 구원과 신령함(2-3)

 

지식과 정보와 관련한 동사를 사용해 원리와 설명을 제시합니다. 먼저 ‘너희들이 알고 있다’라는 말을 통해 성도가 알고 있는 지식을 상기 시킵니다. 그들이 이방인으로 있을 때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그대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한다’라고 하여 성도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식으로 진행합니다(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할 때 아무도 예수의 이름으로 저주하지 않으며,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이 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몇 가지 의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독자의 사고와 생각 차원의 교정입니다. 신령한 것에 대해 바울은 그들의 지식과 이해 영역을 먼저 다룹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식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정리하고 그 의미를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렇듯 바울은 독자의 행동을 교정하기 전에 그들의 사고와 생각을 바꾸어 바른 삶이 나오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권면의 전형적 특징입니다.

둘째, 성령과 구원 과정과의 연관성입니다. 바울의 설명은 ‘그때’와 ‘이때’라는 구원 이전과 이후의 시간 대조로 진행됩니다. 성령의 존재 여부는 구원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핵심입니다. 성도들은 구원 이전에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단순히 비유 대인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밖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성령이 없었습니다. 오직 우상 숭배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원 이후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신자 안에 있고 그 영이 신자의 고백을 돕습니다. 그렇기에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은사의 유무와 종류와 상관없이 성령을 모신 신령한 자들입니다.

셋째, 성령과 관련한 신령한 것은 철저히 주님과의 바른 관계성과 관련 있습니다. 바울은 신령한 것들을 기적이나 신기한 것들로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 영으로 말하는 자는 경쟁 관계나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 이름으로 저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사람 사랑의 차원이이지만, 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예수 사랑의 차원이기도 합니다. 또한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역시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핵심입니다. 이렇듯 성령으로 말하는 자, 곧 신령한 자는 철저히 하나님/예수와의 바른 관계성과 사람과의 좋은 관계성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런 관찰에 의하면 바울은 독자들에게 1) 특정 은사를 가진 자만 신령한 자가 아니라 예수를 주로 믿는 모든 신자가 신령한 것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2) 진짜 신령한 것은 바른 관계성,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은사(4-11)

‘건전한’ 은사 사용이 ‘건강한’ 교회를 세웁니다. 은사는 다양하지만 은사를 주신 뜻을 분명합니다. 과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은사의 우위를 견주지 말고 은상의 목적에 충실하게 사용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4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4-11)

 

다양한 은사가 소개됩니다. 가르침과 관련한 은사에서부터 방언과 통역까지 아홉 개의 은사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소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은사 특히 방언을 맨 나중에 언급함으로써 자신들을 좀 더 신령하고 특별한 사람으로 자랑했던 방언하는 자들을 비판한 듯 보입니다. 은사의 우열은 없습니다.

 

(1) 은사와 섬김과 사역(4-6)

 

은사에 대한 구체적 설명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교회 모임과 관련한 요소들, 곧 은사와 섬김과 사역과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4-6).

특별히 다양성과 일치성을 중심으로 보여줍니다. 첫째, 은사와 관련해 다양한 은사들이 있지만, 한 성령만 있습니다. 은사란 은혜로 주신 공짜 선물입니다. 바울은 은사와 관련해 두 가지 내용을 말합니다. 하나는 은사의 다양성입니다. 교회 안에 한 은사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은사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은사의 주인은 성령입니다. 다양한 은사는 한 성령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치 자기 것인 양 자랑하거나 비교하면 안 됩니다.

둘째, 섬김과 관련해 섬김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주님은 한 분뿐입니다. 교회 안의 섬김은 두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도들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이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보이는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섬김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한 종류의 섬김만을 최고로 여기는 것 역시 합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섬김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주님이신 예수 메시아이기에 섬김이 많을수록 예수가 주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사역에 대해 다양한 모습이 있지만, 일이 되게 하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농사와 관련해 아볼로와 바울의 사역을 설명한 3장 이야기와 맥을 같이합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자신의 일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사역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이 세 가지 설명은 이후 진행될 은사와 그것을 통한 섬김과 사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양성이 있기에 자신의 것만을 최고라고 여기는 교만을 버리고, 한 분이지만 동시에 셋인 삼위 하나님의 주 되심을 따라 그분의 의도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2) 은사에 대해: 목적과 다양성과 통일성(7-11)

 

교회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에 대해 서술합니다. 아홉 개의 은사가 예로 소개됩니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을 분별함, 방언 말함과 방언 통역입니다. 성령의 모든 은사를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없는 것이 28절과 로마서 12:6-8에 있기 때문입니다(예: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 베풂 등).

또한 이것들만 중요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은사와 관련해 바울이 전달하려는 의도는 따로 있습니다. 전달 방식과 표현에서 몇 가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은사는 개인적입니다. 각 사람이라는 표현이 시작(7)과 끝(11)에 나오며, 그 안의 모든 설명에는 은사를 받는 대상이 단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은사의 개인적 특징을 말해줍니다.

둘째, 은사는 성령이 주십니다. 분명히 은사는 성령의 일하심의 증거이고(7,11) 개인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은사를 가진 자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다’라는 동사의 수동형을 사용해 은사의 주인이 성령이고 신자는 그분의 선물을 받은 것일 뿐임을 분명히 합니다.

셋째, 둘째 의도와 관련해 은사는 한 성령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은사 문제로 나뉠 수 없습니다. 같은 성령이 다양한 은사로 교회를 분열시킬 리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 방언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당시 교회는 방언을 중요시했습니다(14장). 하지만 바울은 방언과 관련된 것을 맨 나중에 언급합니다. 방언을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것 없는, 단지 은사의 하나로 소개하고픈 의도입니다. 이것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다섯째, 은사의 목적은 교회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에 관해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 내용입니다. 한 성령이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준 것이 은사라면(11), 그 뜻은 은사를 통해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유익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7). 이렇듯 바울은 계속해서 은사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교정합니다.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를 중심으로 삼위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인정하고 겸손해야 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성도를 섬기는 방향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기본 방향은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방향, 곧 그분 뜻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 속 은사가 지금도 지속되는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그 논란을 이렇게 풀고 싶습니다. 은사주의를 경계해야 하지만 지나친 경계로 성령의 은사를 경시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지’(디모데전서 4:4)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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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1-02)


한 몸으로 세워갈 성만찬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


성만찬은 단순히 떡과 포도주만 먹고 마시는 식사가 아닙니다.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성찬의 떡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몸을, 성찬의 잔은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기념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성찬의 정신을 따라 공동체의 유익이 되도록 참여해야 합니다.

 

  • 고린도교회에 예배에 대한 두 번째 문제점은 성만찬이었습니다. 내용을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17-22절은 도입과 문제 진술입니다. 둘째, 23-26절은 주의 만찬에 대한 가르침을 상기시킵니다. 셋째, 27-32절은 주의 만찬 가르침에 근거한 첫 번째 권면입니다. 넷째, 33-34절은 두 번째 권면입니다. 바울의 초점은 주의 만찬 자체가 아니라 그 정신에 따라 공동체 지체들을 어떻게 배려하고 함께 참여할 것인지에 있습니다.

 

성만찬의 오용을 책망(17-22)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진 형제적 교제 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됨을 체험하고 천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동체의 하나 됨을 기념하고 확인해야할 성만찬 자리가 오히려 상처와 분열을 주장하는 자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17-22)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칭찬 받지 못할 문제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이는 성찬과 관련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쟁 문제로 인해 그들의 모임이 유익하지 않고 도리어 해롭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분쟁 속에서 옳다고 인정받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분쟁이 가진 얼마 안 되는 순기능 중 하나입니다.

 

(1) 주의 만찬 문제 도입(17-19)

 

‘칭찬하다’(에파이네오)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2절에서도 언급된 것이지만 분위기가 다릅니다. 17-34절은 앞부분보다 심각해서 전혀 칭찬할 상황이 아닙니다. 바울 진단에 의하면 교회 모임 중에 좋은 것보다 나쁜 것들이 더 양산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교회에 모였을 때 분열이 있음을 들었습니다. 이 분열은 1-4장과 다르게 경쟁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부자 교인과 가난한 교인 간의 차별로 인한 분열입니다. 아마 바울은 가난한 자들 편을 통해 교회 상황을 들은 듯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그런 상황이 있음을 믿고 있다는 말을 추가합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독자들 중에 파당이 있어야 옳게 인정함 받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환히 드러나려면, 여러분 가운데 파당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19). 분열을 통해 자신을 괜찮다고 여기며 함부로 행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비꼽니다.

 

(2) 문제 진술(20-22)

 

여기서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가톨릭, 20절). ‘왜냐하면’이란 접속사를 통해 그 상황을 설명합니다. 먹을 때 각자가 자기 만찬을 먹어 치우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이는 배고프고 어떤 이는 배부르고 술 취하는 일이 생겼습니다(21). 이상한 상황입니다. 이것을의 언약 백성 모임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관찰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각자’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각자’ ‘자기’ 만찬을 먹는다고 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만찬 음식을 가져와 자기만 먹고 마심으로 주의 만찬을 마치 개인 만찬 성격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마도 부자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먹어버리다’라는 표현입니다. 시간적인 요소가 있지만 개인이 만찬 음식을 먹어 치워버렸음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주의 만찬을 사유화하고 자기만 먹고 마시는 상황에서는 음식을 가져올 수 없는 가난한 자는 만찬에 참여할 기회마저 박탈당합니다. 더욱이 당시는 심한 흉년으로 식량이 부족했기에 가난한 자들이 만찬 음식을 가져오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부자의 이런 행동은 자연스레 주의 만찬을 부자와 가난한 자의 분열의 장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바울은 일련의 질문 형식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합니다(22). 첫 질문은 그들이 먹고 마실집이 없어서 교회에서 그렇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니다’라고 대답하여 부끄럽게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그러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분의 언약 백성 모임입니다(1:2). 그런 행동은 하나님뿐 아니라 그분의 가난한 백성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입니다. 당연히 바울은 그들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까?’, ‘칭찬할까?’, ‘내가 칭찬하지 않는다’라는 일련의 대화 형식으로 그들을 책망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어찌 이해했는지 몰라도 바울 진단에 의하면 그들 행동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모임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의 만찬 전승(23-26)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교회, 가까운 사람만을 위하는 교회만큼 교회의 본질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치르신 고통, 수치, 생명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땅히 다른 사람을 위해 고통, 수치, 생명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합니다. 교회의 중심에 놓여 있는 기반은 주님의 십자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3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23-26)

 

문제 상황에 대한 구체적 권면 전에 주의 만찬의 의미를 상기시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전한 가르침이 주님의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비록 주님께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 전승을 전해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이 주님께 들은 것이기에 그 기원은 예수님입니다. 주의 만찬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 위함입니다. 주의 만찬은 주님이 잡히시기 전날 유월절 만찬 때 무교병과 포도주에 대해 각각 자신의 몸과 피라고 말하고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에 몇 가지 의미가 있음을 말합니다. 첫째, 주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 몸과 ‘내’피라는 예수의 말을 직접 인용함으로 강조합니다. 둘째,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너희’라는 표현을 통해 주의 만찬에 참여한 자들은 한 몸, 한 공동체임을 말합니다(10:16-17). 셋째,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임과 그의 희생으로 구원, 곧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선포하는 것입니다. 만찬 안에는 주의 몸과 피로 상징되는 구원 과정과 그 결과 요소가 들어 있기에 그것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사역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주의 만찬 전승에 근거한 첫 번째 권면(27-32)

성찬식에 임할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할 때 게으름이나 음란 같은 개인적인 죄를 돌아보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핍한 사람을 향한 자신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상고해야 합니다. 과연 자신은 소외되고 가난한 지체를 돕고 있는지, 혹은 말로만 그들을 돕는 것은 아닌지 철저히 살펴야 합니다.

 

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27-32)

 

바울은 성찬식을 비롯해 고린도 교회의 모든 예배에서 합당치 않은 것은 무엇이든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성찬식 참여라는 고귀한 특권과 소명은 엄격한 자기 성찰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의 마음 자세와 행동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1) 첫 번째 권면과 이유(27-29)

 

주의 만찬 전승 의미에 근거해 독자들에게 첫 번째 권면을 합니다. 원리와 명령과 이유로 구성됩니다. 먼저 원리입니다. 누구든 주의 빵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27).

두 가지 초점이 있습니다. 첫째, ‘주’에게로의 참여입니다. ‘주’란 말의 반복에서 확인됩니다. 주님께 참여하는 것이기에 개인 만찬처럼 취급하면 안 됩니다. 둘째, 주의 만찬에 합당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단순히 빵과 잔을 어떻게 먹을 것인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의 만찬 의미에 부합하게 참여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주님의 사역 의미를 놓친다면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주님의 몸과 피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 됩니다. 주님에 대해 범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원리에 근거해 사람이 자기를 살핀 후에 먹고 마시라고 명령합니다. 원리의 초점을 기억하고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의 몸을 분별치 않고 참여하면 자기에게 임할 심판을 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증(30-32)

 

분별하지 않고 참여해서 받은 심판의 예를 듭니다. 성도들 중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죽은 자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이 주의 만찬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런 현상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않아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형제들을 부끄럽게 한 죄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일환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심판의 결과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시기까지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성도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일들에 대해 두 가지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첫째, 죄의 실존과 그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실재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살피고 조심해야 합니다(31). 둘째, 이런 현상이 하나님의 최종 심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훈련일 수 있는데, 최후 심판 때 세상과 함께 정죄 받고 멸망하지 않도록 조심시키는 경고입니다(32).

 

주의 만찬 전승에 근거한 두 번째 권면(33-34)

날마다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 성도는 흔히 주님을 위해 산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남을 위해 산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고 주님만 보입니다. 그 주님이 이웃 사랑을 명하시기에 우리는 주변 사람에게 고개를 돌려야 합니다.

 

33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33-34)

 

두 번째 권면을 합니다. 첫 번째(27-29절)보다 간단하지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주의 만찬 때 서로 함께 먹으라고 명하고, 만일 배고프면 집에서 먹고 오라고 합니다. 주의 만찬을 개인 만찬처럼 여겨 자기들만 먹지 말고 음식을 가져올 수 없는 가난한 교인들과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임이 하나님의 심판의장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런 행동은 주님을 바르게 기억하는 방법이자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머지 일들에 대해서는 교회에 가서 교정하겠다고 하고 이 문제를 마칩니다.


존 스타트 목사님은 ‘성찬’은 은혜의 방편이고, 연합의 상징이고, 살아 있는 교회의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체현인 성찬이 온전히 체화되어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성찬은 주를 기억하고 자신을 살피고 지체들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까? 성찬을 통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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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1-01)


거룩한 예배를 위한 자세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종종 선교사님들이 선교지 풍습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실패한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대로 전파하려기 때문입니다. 이는 선교지에게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고려를 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복음 전하는 방법은 시대장소에 따라 다르게 전파되었습니다. 복음 자체는 변함없지만, 시대와 장소를 따라서 전달되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게 전파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각 국마다 다른 모습입니다. 중국에서는 마약을 금했고, 우리나라에서 술과 담배를 금했습니다. 당시에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악한 것을 금했던 것입니다.

 

  • 본문에서부터 14장까지는 예배 중에 있을 이슈들을 권면합니다. 본문은 그 첫 주제로 교회 모일 때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입니다.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2-6절 도입 부분으로 문제 상황에 대한 기본 정보와 권면을 제공합니다. 둘째는 7-12절로 앞부분 권면에 대한 첫 번째 근거입니다. 창조에 근거함여 남편과 아내의 관계성을 설명합니다. 셋째는 13-16절로 2-6절 권면에 대한 두 번째 근거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 스스로의 판단과 당시 관습에 의지해 논증합니다.

 

머리에 쓴 문제에 대한 도입(2-6)

교회는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각 사람이 어떤 권위 아래에 있는지, 어떤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다가 문제가 발생됩니다.

 

2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2-6)

 

바울은 자신이 전한 전통을 지키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 원리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여자의 머리는 남자,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때 자신이 그 권위 아래 있음을 합당한 방식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1)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에 대한 도입(2)

 

사도 바울은 예배 상황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갑니다. 첫 주제는 모임 때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독자를 칭찬하면서 시작합니다. 모든 일에 그를 기억하고 그가 전한 전승을 잘 지켰기 때문입니다. 칭찬한다는 말은 처음 사용됩니다. 고린도전서 안에서는 독자에게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는 말(1:4) 이후 처음 언급된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아마도 이후 제시될 권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칭찬으로 표현한 수사적 의도일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과의 관계성과 그에 근거해 바울이 전한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것입니다.

 

(2)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에 대한 기본 정보와 권면(3-6)

 

‘그러나’로 칭찬과 반대 상황을 다룹니다. ‘알기 원한다’는 형식으로 상황에 대한 기본 정보와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 토대는 하나님과 메시아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성이고, 권위나 탁월한 위치를 의미하는 머리의 상징으로 표현합니다. 제일 위가 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메시아의 머리가 되신다. 메시아는 남편의 머리이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됩니다(3).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메시아 → 하나님의 관계다. 메시아는 하나님 나라와 새 언약 관계의 시작이기에 남편 → 메시아의 관계이고, 남편과 아내는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기(9)에 아내 → 남편의 구조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여기서 제공하지 않습니다. 구체적 설명 대신 그 원리에 근거해 예배 상황의 문제를 진단합니다. 먼저 남편에 대해서입니다(4). 남자가 머리(물리적)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면 그 머리(상징)를 욕되게 합니다. 당시 황제나 이방 제사장들이 우상에게 제사할 때 토가 같은 겉옷을 머리에 끌어 쓰고 집행했습니다. 아마도 어떤 이들이 이런 세상 방식을 교회 예배 상황에서 연출했던 모양입니다. 세상 지위를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는 남편의 머리(상징)인 메시아를 욕되게 하기에 문제입니다. 메시아를 향한 예배를 우상 제사의 모습처럼 만들었기에 합당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내에 대한 것도 다룹니다(5-6). 당시 아내들은 공적 자리에서 머리에 천을 써서 결혼한 신분을 나타냈는데, 예배 상황에서 그것을 벗는다면 머리(상징)인 남편을 욕되게 합니다. 마치 결혼 관계를 거절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당시 상당히 수치스럽게 여겼던, 공적 자리에 민머리 여자가 나타난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또한 아내뿐 아니라 그런 아내를 둔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공적 예배 때 아내가 천으로 머리를 덮지 않으려면 머리를 밀어 수치스러운 상태가 되거나, 그것이 싫다면 천을 씀으로써 결혼한 자로서의 증표를 유지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남편이나 아내가 공적 예배에서 기도나 예언 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자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바울의 관심은 예배와 행위의 적절한 연결입니다. 우상 제사 형식을 도입함으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거나 세상 풍조를 따라 교회에서 결혼 관계를 가벼이 여기는 모습으로 참여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권면의 근거 1: 창조에 근거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성 설명(7-12)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질서와 상식을 지켜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혼란스러운 것을 질서 있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질서의 사람이지 공동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판단기준을 제시합니다.

 

7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7-12)

 

창조와 새 창조(주 안에서)를 전제로 2-6절 권면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먼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기에 머리(물리적)를 가려서는 안 됩니다.

형상이란 본질을 잘 드러낸 외적 표현을 의미합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잘 드러내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창조 과정을 배경으로 합니다(창세기 1:26-27). 바울은 여기에 영광이라는 표현을 추가합니다. 창세기에는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은 종종 합께 등장합니다(참조. 시편 8:5). 남자는 하나님/메시아의 어떠함과 영광을 반영하는 존재이기에 예배 상황에서 이방인들이 우상에게 제사하듯 머리에 무엇을 쓰면 안 됩니다.

한편, 여자에 대해서는 여자가 남자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이기에 머리에 천을 쓰라고 합니다. 바울은 창조 순서와 특징을 통해 여자에 대한 주제를 좀 더 자세히 다룹니다. 아담과 하와는 창조 과정에서 기원과 목적이 다릅니다. 아담은 하나님 형상을 따라 흙으로 직접 지어진 존재이지만, 하와는 아담을 통해 나중에 지어졌습니다. 또한 하와는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로 지음 받았습니다(창세기 2:18-23). 이 때문에 여자(아내)는 예배 상황에서 머리에 천을 쓰지 않음으로 자기가 남편과 관련한 모든 관계에서 자유로운 듯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천을 씀으로써 그 머리(물리적)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그 권리를 남편과의 관계를 충실히 표현하는 쪽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돕는 배필로서 남편의 영광을 드러낼 아내가 오히려 남편을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생각하는 부부관계는 아내만 일방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수직 관계가 아닙니다. ‘주 안에는’ 남편과 아내의 개념이 세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11). 하와가 아담을 통해 지어졌지만,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를 통해 태어났습니다. 서로 자기의 높임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오직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자리 매김해야 합니다.

 

권면의 근거 2: 독자의 판단과 당시 관습에 호소(13-16) 

교회의 전통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해 세워진 전통입니다. 그러므로 공적인 예배나 기도나 예언을 할 때,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지나친 자유에 대한 주장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와 질서를 부정하고 공동체를 혼란을 주는 그릇된 자유의 남용을 경계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중에 영적인 질서를 깨뜨리고 혼란스럽게 만든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13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13-16)

 

바울은 이 문제를 논쟁거리로 삼지 말라고 본연의 본성과 통념에 따라 판단해보라고 설득합니다. 자유와 개성, 권한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주장하다가 건전한 상식과 문화를 거스리고 공동체에 혼란을 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함과 불쾌함을 주지는 말아야 합니다.

 

(1) 권면의 근거 : 독자 판단에 호소한 논증(13-15)

 

2-6절 권면에 대한 두 번째 근거 제시다. 7-12절이그야이 창조를 통한 논증이었다면, 이 부분은 고린도교회의 성도의 생각과 판단에 호소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는 명령과 함께 두 가지 요건으로 분별하라고 합니다. 모두 질문 형식으로 제시합니다. 한 요소는 적절성입니다. ‘적절하다’는 의미의 동사를 통해 예배 상황에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묻습니다(13). 앞부분에서 제공한 신학적 논증을 근거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요소는 본성 그 자체입니다(14-15). 모든 시대에 통용되는 창조의 본성이라기보다는 당시 사회에서 용인하는 직관 혹은 보편적 생각을 의미합니다. 남자(남편)와 여자(아내) 모두에게 질문합니다. 먼저 남자에 대해서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라고 질문합니다. 우리 시대에는 문제되지 않지만, 로마 사회에서 긴 머리는 남성성을 거절하고 동성애와 관련해 여성 역할을 하는 자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남자의 긴 머리는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한편 여자에 대해는 긴 머리가 스스로에게 영광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고 질문합니다. 미(美)를 추구하는 여자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이유를 긴 머리는 가리는 것 대신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긴 머리 때문에 천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마도 긴 머리를 마치 머리를 가리기 위해 추가로 써야 하는 천과 연결시킨 유비 표현인 듯합니다. 여자는 예배 환경에서 머리에 천을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2) 권면의 근거: 당시 관습에 호소한 논증(16)

 

비록 다른 생각을 가진 자가 있다 해도 당시 교회에 그런 관습이 없기에 ‘우리’라는 사도들이 가르친 전승이나 바울의 권면을 따르라고 합니다. 권면과 명령이긴 하지만 강요는 아닙니다. 또한 절대적으로 목숨 걸고 따라야 할 규범으로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당시 사람들에게 복음 증거가 방해되지 않도록, 그리고 공적 예배 가운데 세상 방식이 아닌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모습으로 하기를 바랍니다.


차이와 질서와 상식을 부정할 때 혼란은 불가피합니다. 자유와 권한의 사용보다 서로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원리에 타당하다면 관습을 무시하거나 본성을 거슬러서도 안 됩니다. 경직된 예배에도 변화가 필요하지만 질서 없이 자유분방함에 경도된 예배 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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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0-02)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고린도전서 10장 14절-11장 1절


어떤 공동체 내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영광과 유익만을 위해 행동한다면, 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이곳에는 동물의 법칙인 ‘양육강식의 법칙’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서로를 세우기보다는 서로를 이용하려고 서로를 믿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속하고 싶은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길 원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국 공동체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자신이 희생되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 8장에서 시작한 우상 제물 문제를 마무리합니다. 14-22절에서는 우상 제물과 관련한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그 일에서 도망가라고 합니다.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0:23-11:1은 고기 먹는 것에 대한 권면입니다. 시장에서 파는 것이나 불신자가 제공하는 것은 묻지 않고 먹지만, 어떤 성도가 우상과의 연관성을 물으면 그 사람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고 합니다. 타인을 배려하는 원리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상과의 교제를 멈추라(14-22)

오늘날은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야 성공합니다.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모임을 만듭니다. 성도들은 설 자리와 날 자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편 1:1)라고 말씀했습니다. 시험의 장소를 들어가면서도 시험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14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18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19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22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14-22)

 

아무리 하나님만이 참 신이고 우상은 실체 신이 아님을 잘 알고 있더라도, 자신의 지식을 신앙이라고 착각하지 말고 우상숭배 하는 예식에 참여하지 말라고 합니다. 

 

(1) 우상 제물에 대한 명령(14)

 

‘그러므로’와 ‘내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으로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해 결론적 권면을 합니다. 먼저 우상 신전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해 명령합니다. ‘우상숭배 하는 일에서 도망가라!’ 시험과 관련해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신다는 13절 내용과 연결되며, 음행에 대한 결론적 권면과 동일합니다(6:18). 즉, 주님이 도우시니 음행의 환경에서 도망하듯 우상에 대한 것에서도 자기 합리화하며 참여하지 말고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2) 설명과 경고(15-22)

 

명령에 대한 설명과 경고를 이어갑니다. 바울은 지혜있는 자들에게 말함 같이 할 테니 자기 말을 스스로 판단해보라고 합니다(15). 독자를 지혜 있는 자라고 말한 점은 의외입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지혜를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16절 이후 내용에 집중하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16-18절은 주의 만찬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두 가지 요소에 집중합니다. 첫째, 메시아와의 교제입니다. 만찬 때 나누는 축복의 잔은 메시아의 피와 교제하는 것이고, 빵은 그의 몸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상 신전에서 벌어지는 만찬에도 먹고 마시는 요소가 있기에 그것에 우상과의 교제 요소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둘째, 만찬에는 같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공동체가 하나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빵이 하나이기에 같은 빵을 먹는 많은 자는 예수님의 같은 몸에 참여하는 형제들, 곧 한 식구(食口)입니다. 바울은 구약의 예를 들어 부연합니다. 구약 백성이 같은 제단에 참여해 같은 제물을 먹었기에 한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상 제물에 함께 참여하면 우상과 한 식구가 될 수 있습니다. 모두 19절 이하 설명을 위한 전제입니다. 주목할 것은 듣는 자가 긍정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찬 때의 잔과 빵이 메시아와의 교제라고 말하고, 구약의 예를 통해 같은 음식에 참여하면 한 식구임을 인정하게 하는 방법을 씁니다. 15절에서 독자를 지혜 있는 자로 부르며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9절부터 주의 만찬 설명에 근거해 우상 제물의 만찬 행위를 질타합니다. 먼저 우상에 대한 것입니다. 성도 중 일부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만 참신이라고 여기며(8:4-6) 함부로 살지만, 바울은 그들의 짧은 지식을 교정합니다. 이방인의 제사는 분명 귀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의식에 함께하면 귀신 섬기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신전에서의 만찬은 그 신에게 참여하는 것이기에 주의 만찬으로 예수님과 교제하는 자에게는 합당치 않습니다. 더 나아가 우상의 만찬에 참여하면 그들과 한 식구가 되는 것이기에 이 또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합당치 않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런 일을 그만두기를 강력히 권합니다. 20절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바울 입장에서 말하지만, 22절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분의 맹렬한 질투를 불러일으키지 말고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내용을 수사적 표현으로 전달합니다. 그렇게 하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처럼 망한다는 경고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23-11:1)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가장 큰 자유를 누리게 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것들이 다 유익하거나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공동체와 이웃에 대한 배려 없는 자유는 결코 자신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유익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남의 유익을 먼저 고려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사용해야 합니다.

 

23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11:1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0:23-11:1)

 

몸이 가장 약한 곳이 중심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공동체에서 가장 약한 지체들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향평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기준입니다. 그들을 배려하고 기다려주는 것, 이를 위해서 자신의 속도를 조절하고 자기 욕망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1) 고기와 관련한 독자들의 주장과 바울의 반박(23-24)

 

우상 신전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권면을 마친 바울은 이제 나머지 사람들에게 고기에 대한 권면을 합니다. 구체적 권면에 앞서 그와 관련한 원리를 다룹니다. 고린도 성도들 주장과 그에 대한 반박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성도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가하다’고 말합니다. 세상 만찬 때의 방종에 대한 자기 합리화 주장과 동일하며(6:12), 지식으로 우상 제물을 합리화하고 다른 성도를 배려하지 않는 자들의 주장과도 같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모든 것이 유익하지도 않고 덕을 세우지도 않으니, 오직 자기 유익이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며 살라고 합니다. 8:9-12에서 말한 원리를 반복합니다. 우상 신전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리와 관련 있다면, 그 제사의 결과인 고기에 대한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원리와 관련 있습니다.

 

(2) 고기와 관련한 세 가지 상황에 대한 명령들(25-30)

 

고기에 대한 세 가지 상황을 제시하며 구체적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 시장에서 파는 고기의 경우입니다. 당시 시장 고기는 대부분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기에 얼핏 보면 우상을 섬기는 행위의 연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경우 우상과의 연관성을 묻지 말고 먹으라 합니다. 음식의 성격은 그 자체보다 상황 요소가 결정하는데, 이 경우 우상 제사에 참여한 것이 아니므로 우상과 연결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불신자가 초대한 자리에서 먹는 고기 음식의 경우입니다. 바울은 이 경우에도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 합니다. 이 상황도 우상에게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초대한 사람을 배려해 먹으라는 것입니다. 셋째, 어떤 신자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고기라고 말한 경우입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약한 신자가 앞의 두 경우를 포함한 일반 상황에서 고기의 성격을 우상과 연결시킨 경우입니다. 만일 그런 자들과 함께 있으면 그 사람 양심을 배려해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사실, 우상에게 제사하는 경우가 아니면 고기 먹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신앙과 상관없습니다. 평가 받을 사항도 아닙니다(29). 또한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감사히 먹으면 됩니다(26,30). 하지만 그것이 믿음 약한 형제를 힘들게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형제 사랑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메시아가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따라서 자기 행동을 조심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24절에서 말한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라는 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3) 결론적 권면(10:31-11:1)

 

우상 제물 주제에 대한 결론적 권면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합니다(31).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에 적용되는 원리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성도들은 우상 제사와 만찬에 참여하면 안 됩니다. 한편, 하나님 사랑의 원리는 또 다른 원리와도 연결됩니다. 그분이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다른 신자를 위해 자기 권리와 지식을 주장하는 행위에 절제와 조심과 배려를 더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모습을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게 책망 받을 것 없는 자들이 되라는 명령으로 제시합니다(“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2).

끝으로 바울은 이런 권면에 자신의 모습을 예로 언급하고 마무리합니다. 자기처럼 모든 일에 모든 사람들을 배려하고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라고 합니다.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배려와 섬김을 통해 다른 이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구원 과정에서 넘어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의 삶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려는 원리가 지배하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명령합니다. “내가 메시아를 본받는 것처럼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1:1).”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고 복음과 사람을 위해 절제하고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고자 했던 바울. 그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 몫이고, 그가 제시하는 원리에 반응하는 것 또한 독자들 몫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잘 들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는 잘 듣고 있습니까? 진지한 질문과 성찰이 요구됩니다.


바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은 어떤 일을 하든지 명심해야 할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 두 원칙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에 합당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주신 자유를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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