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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1-0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장 1-11절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고합니다. 그리고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들에게 가장 좋은 소식을 석방일 것입니다. 왜 복음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했겠습니까?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기 위해 마가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복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을 통해 당신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셨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요한은 세상에 오실 메시아를 위해 그의 사역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세상을 위한 공생애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1)

하나님의 역사는 즉흥적이거나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사역들이 태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완벽하게 성취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까지 계속적으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 일들을 이루어 가신 역사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에게 복음입니다. 마가는 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복음’을 다음처럼 정리합니다.

 

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

 

마가는 예수님에 대한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고 선언합니다. ‘복음(ευαγγελον)’이란 ‘좋은 소식’입니다. 병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은 자신의 병을 치료할 의사를 만나는 것이며, 재정이 궁핍한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자금을 조달할 부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적인 복음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복음이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 복음은 새로운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죄 아래서 태어났지만, 죽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류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런 인류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을 공급해 구원할 구세주(救世主)를 보내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진짜 ‘복음(福音)’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재물로 돌아가심입니다. 당시에 ‘신의 아들’로 섬김과 칭송 받던 로마 황제는 화려한 궁궐 안에 생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낮고 천한 마구간에 오시고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5:39).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사백 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계속적으로 정신이 들지 않는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정복을 당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이 점점 잊혀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마가는,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정리하고 기록했습니다, 이 정리한 것을 당시 황제를 숭배하던 로마제국에 전해졌는데, 바로 이 ‘마가복음’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황제를 신의 아들로 숭배했는데, 가짜 신의 아들이 아닌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보고서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오늘날 너무나 익숙한 상투어이지만, 마가가 이 책을 기록할 당시에는 죽음을 각오해야만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마가는 서두에서 복음에 대한 정의로, 짤막하게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정의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복음은 로마 제국의 인간인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시며, 이 세상을 구원하신 분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란 것입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에서 소개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역은 백성 위에 군림한 왕이 아니라 백성을 섬기는 종처럼 오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과 사역(2-8) ⁂【 마태복음 3:1-12, 누가복음 3:19,15-17 】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빛내기 위해 주인공보다 먼저 준비한 엑스트라들이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에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보다, 먼저 그 사역을 준비한 엑스트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비록 엑스트라이지만 자신의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였습니다. 무슨 사역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까?

 

2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족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되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2-8)

 

예수 그리스도 앞에 먼저 보낸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예수님과 제자들이 살아갈 삶을 미리 사는 존재였습니다. 죄인들이 세례를 통해 죄 용서를 받게 함으로써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합니다. 제사장 집안의 사람이면서도 타락한 성전 체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요단강 세례를 통하여 백성들이 죄 사람을 받게 해줍니다.

 

(1) 세례 요한의 등장(2-3)

 

당시 로마 제국의 군대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먼저 전령(傳令)을 통해 승전보를 알렸습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승전보를 알리는 전령사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인 성경 교육을 통해서 대부분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전령사로 와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언급된 내용을 두 곳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이사야 40:3)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라기 4:5)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외치는 자’나, 말라기 선지자가 말한 ‘엘리야’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전하는 전령사(傳令使)를 의미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사람들을 죽음의 광야에서 생명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준비시킵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면 나갔습니다. 하지만 불순종을 통한 광야 40년이란 기간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보다 현실에 급급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평탄지 못한 환경에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대로 가나안 땅으로 입성시켰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엘리야의 역할도 모세와 같은 역할일 것입니다. 왜곡된 이스라엘을 바른 상태로 회복시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처럼 메시아의 길을 예비합니다(누가복음 1:7).

 

세례 요한의 등장은 엘리야의 삶처럼 등장합니다. 엘리야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명을 위해 부름 받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초라한 선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화려한 제사장의 옷이 아니라, 광야에서 낙타털과 가죽 띠를 띤 낮은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던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출애굽을 준비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3:2)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가 준비하는 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죄악에 빠진 사람들을 영적 출애굽 사건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그리스도 앞서 세례 요한을 보내셨고 그리고 준비케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엘리야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협력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것 외에,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2) 세례 요한의 사역(4-8)

 

세례 요한의 등장은 구약에서 약속하셨던 엘리야 모습처럼 등장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둘 다 사명은 위대했지만, 삶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열악한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회개 세례를 통한 구원(4-5)

첫째는 회개의 세례를 통해 구원받도록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쳤습니다. ‘회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걸음입니다. 과거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새로운 거룩한 삶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초청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이키는 역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주어진 새로운 삶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나온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하나님 백성으로 되도록 준비시켰습니다. 세례를 베푸니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죽음의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요단강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의 세례식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던 일을 재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몸은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만, 영적으로 여전히 노예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례는 새로운 출애굽의 상징이요 여호와께 돌아가는 의식이었습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를 높임(6-8)

두 번째 그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사역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언약의 메시아로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 뒤에 오실 메시아를 위해 준비하는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평판이나 인정이 아니라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역할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정도로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강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들을 마음을 여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 사역은 마치 정글에서 새로운 길을 닦는 작업과 같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행차 앞에서 외치는 소리로서 길을 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비록 그는 사역을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해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바르게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자신을 따랐지만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많은 지도자들이 자신을 조롱했지만, 의기소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세의 근원은 사역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쳐주는 엑스트라 역할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어진 사명이 비록 작아 보일지라도 쉽게 생각하지 말고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맡겨주신 사명을 완성될 때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서 세례 요한과 같은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9-11) ⁂【 마태복음 3:13-17, 누가복음 3:21-22 】

세례 요한이 메시아의 길을 예비했던 사역을 살폈습니다. 그 분이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 또한 화려한 만왕의 왕으로서 등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시작하셨습니다.

 

9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9-11)

 

마가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사적인 탄생과 같은 내용은 생략하고, 곧장 공식적인 예수님의 사역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죄인 아닌데도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통해 두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대속적인 세례(9)

 

첫째는 예수님께서는 죄인도 아니신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을 세례 요한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태복음 3:14)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말씀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의를 이루기 위함입니다(신명기 6:25).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이사야 53:4-6).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예고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능력이 더 크신 분으로 기대되던 예수님께서 오히려 더 적은 능력을 가진 자에게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점은 매우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가장 낮아지심인 십자가에 죽으심을 내다보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죄인을 대신하기 위한 ‘대속적인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5:21)고, 죄에 대한 회개와 세례가 필요 없었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타락한 인간과 자신을 일치시켰고, 죄인을 대신하는 속죄 사역의 시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인과 함께 죽음으로써 죄인을 살리고 하나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하는 사명에 충성하신 것입니다.

결국 고난 받는 종으로서 죽음까지 받아들려야 할 사명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세상 나라’를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길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임을 알고 순종하셨습니다.

 

(2) 왕의 대관식(10-11)

 

두 번째는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그리스도의 대관식(戴冠式)’이었습니다(요한복음 1:31-34). 마가는 예수님의 세례 받으신 장면에서 세 가지 현상에 집중합니다. 먼저, 하늘이 갈라지고, 다음으로 성령이 임했고, 마지막으로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확증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대관식(戴冠式)’이란 왕이 처음으로 왕위에 올라가는 예식입니다. 그 예식은 매우 화려하고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드는 예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관식은 아주 평범한 소박한 예식이었습니다. 대관식의 핵심은 하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옴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 음성은 시편 2편 7절에서 미리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편 2:7)

 

시편 2편의 배경은 왕의 대관식이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취임하는 대관식을 진행하는 장면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님이 예수님에게 강림하셨습니다. 이 일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들어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나타난 현상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백성들을 회개라는 것을 통해 십자가로 초청하였습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서 자신의 나라를 통치하신 분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겸손하게 출발하신 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한 헌신과 함께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는 자로서 겸손하게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받은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해주셨습니다. 모든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제 진심으로 옛 사람의 길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처럼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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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서론

 

》 마가복음 서론 《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

 

모든 사실을 기록한 일은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진행해야 합니다. 어떤 사실을 기록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후대 사람들에게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떤 역사적인 사실을 문자로 기록한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신약성경 중 복음서인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들도 그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특히,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로 일하면서, 사도 베드로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교훈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기록한 복음서가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그 분량은 적지만 그 내용은 힘이 넘치고 신선합니다. 이 ‘마가복음’은 다른 세 마태, 누가, 요한복음서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복음서의 ‘원조’로 인정해 왔습니다.

 

마가복음의 제목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본들은 이 복음에 대하여 단순히 ‘마가에 의하여’라는 표제를 붙이고 있습니다. 후에 ‘복음’이란 용어가 예수의 생애와 봉사에 관한 이야기에 적용되었으므로, 이 책의 표제에 덧붙여졌습니다. 「제임스왕역(KJV)」에 나타난 ‘성(聖) 마가에 의한 복음’이란 표제는 단지 후기의 사본에서만 발견됩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마가복음’은 한문성경에서 ‘马可福音’이라 부른 것을 번역하여 ‘마가복음’이라 부른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은 이 책의 이름 그대로 이 복음서의 저자가 마가 요한임을 만장일치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가’라는 이름은 마르쿠스(Marcus)란 라틴어에서 왔으며, 그것은 이 기록자의 성(姓)입니다(사도행전 12:12,25). 그의 히브리식 이름은 요한(사도행전 13:5,13)이었으며, 그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사도행전 12:12). 마가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 살았으며, 초대교회의 탄생지인 마가 다락방의 집의 유복한 청년이었습니다. 이 요한 마가가 본 서의 저자임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1) 내적인 증거 : 마가는 마가복음 안에 저자로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수제자로 ‘베드로의 아들’로 불렀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5:13). 그는 예수님의 직계 제자는 아니므로, 예수님과 활동한 내용을 기록한 곳에는 당연히 등장하지 않습니다.

 

(2) 외적인 증거 : 사도 바나바의 생질인 ‘요한 마가’라는 사실은 초대교회 때부터 의심 없이 인정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소아시아 교회 감독이었던 파피아스(Papias A.D. 140년)는 사도 요한으로부터 마가복음이 마가가 베드로의 교훈을 토대로 그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 기록은 아주 정확한 것이라는 언급을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주후 150년경의 순교자 저스틴(Justine), 185년경의 이레나이우스(Irenaeus)도 마가가 베드로 사도의 통역자였으며, 그의 교훈과 증언을 토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 연대

마가복음의 저작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언급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13장에 나온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초토화되리라는 말이 있는데(1,2,14-23), 이 말이 장차 닥칠 비극을 예고하는 예언이냐, 아니면 이미 닥친 비극을 서술하는 기록이냐에 따라서 기록 연대가 달랍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 본 서는 4복음서 중 가장 일찍 기록된 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따라서 그 시점도 주후 63-70년경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주후 7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그 복음서들이 마가복음을 근거로 기록되었다는 것이 복음서 기록 연대의 배경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록 연대가 주후 70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 장소

본 마가복음이 기록된 장소는 대체로 ‘로마’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기록될 당시 마가는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에 의해 로마로 가게 되었으며(디모데후서 4:11),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서 활동했습니다(베드로전서 5:13). 초대교부들도 본 서를 마가가 로마에서 기록했다고 증언했는데, 이레나이우스와 클레멘트가 대표적입니다. 그리므로 마가는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방인 신자를 위해 로마 제국의 심장인 로마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첫 독자

마가복음이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복음이라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합니다. 마가가 습관적으로 유대적인 용어와 관습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 독자들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5:41;7:2-4,11,34).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말하기를, 베드로의 설교를 직접 들었던 로마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자기들에게 문자로 기록된 복음을 전해준 사람은 바로 마가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이 복음서의 서론 부분에서 확실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본서의 서론 부분을 보면, 본서의 독자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당연히 알고 있는 것들은 설명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세례 요한이 소개될 때 그의 신분 확인을 위한 어떤 절차도 없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의 투옥도 이미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언급되어 있고, ‘세례’(1:4)라든가 ‘성령’(1:8) 등의 용어도 이미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 것처럼 아무런 설명 없이 바로 쓰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배경과 동기

본 마가복음을 기록한 배경을 살펴보면, 기록 동기와 목적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본토는 거의 약탈에 가까운 로마 제국의 세금 정책으로 인해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으며, 이방인 교회들도 네로 황제의 박해로 인해 환난과 순교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점차 사라져 갔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과 교훈을 실제로 체험한 성도들도 희귀해져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외적으로 역경에 처한 교회에 신앙적 격려를 해줘야 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교훈을 기록하여 남겨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본 서는 하나님 아들이신 메시아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의 종’으로 오셔서 고난 받는 삶을 사셨습니다. 끝내는 하나님의 의와 권능으로 승리하사 부활 승천하게 외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할 목적으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특징

처음으로 기록된 마가복음의 내용은 다음으로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기록하는데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섬기려 오신 예수님이므로 말씀보다 행동을 강조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이방인(로마) 성도를 위한 복음서

 

본 서가 유대 본토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 특히 로마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록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본서 자체가 그 사실을 입증합니다. 본 서에는 유독 라틴어에서 출처된 언어가 많습니다. 본 서만이 로마 교회 성도인 루포를 언급합니다(마가복음 15:21). 핍박과 순교에 특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당시 로마 교회가 당면하고 있던 고난적 정황과 부합됩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대교의 풍습과 지리를 따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마가복음 1:5; 7:3,4,11).

 

(2) 사역과 행동 중심의 복음서

 

본서에는 ‘즉시, 그리고’라는 단어가 50회 이상 나타나며 그리스도 예수의 행동과 사역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본서에 예수의 비유가 4회만 언급된 것을 보더라도 본 서가 예수의 행동과 사역 중심의 복음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색보다는 행동을 중시하는 라틴 계열 성도들의 취향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3) 사실적인 묘사의 복음서

 

본 서에는 약 150여 회나 역사적 현재 용법이 나타납니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 일어나고 있는 듯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본 서의 특징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본 복음서를 ‘정열의 삶의 복음서’라고 칭합니다. 예수와 그 전도단이 음식 먹을 틈도 없이 사역했다는 사실을 두 번씩이나 언급한 것은 본 복음서밖에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마가복음의 구조

Ⅰ. 봉사를 위한 준비, 가을, AD 27년, 1:1~13

 

Ⅱ. 갈릴리 봉사, 유월절에서 유월절까지, AD 29~30년, 1:14~7:23

A. 초기 갈릴리 봉사, 1:14~34

B. 첫 번째 선교 여행, 1:35~45

C. 가버나움과 그 주변에서의 봉사, 2:1~3:19

D. 두 번째 선교 여행, 3:20~5:43

E. 세 번째 선교 여행, 6:1~7:23

 

Ⅲ. 공적 봉사에서 물러나심, 봄에서 가을까지, AD 30년, 7:24~9:50

A. 갈릴리 변경 지방에서의 봉사, 7:24~8:10

B. 십자가를 내다보심, 8:11~9:50

 

Ⅳ. 페래아 봉사, 가을에서 봄까지, AD 30~31년, 10:1~52

 

Ⅴ.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봉사, 유월절, AD 31년, 11:1~15:47

A. 서기관 및 바리새인과의 갈등, 11:1~12:44

B.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의 재림에 대한 예언, 13:1~37

C. 예수의 체포와 심문, 14:1~15:20

D. 예수의 못박힘과 장사, 15:21~47

 

Ⅵ. 부활과 부활 후의 출현, 16: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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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1-02)

 


스스로를 변호하는 욥(2)

욥기 31장 24-40절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주변의 다른 사람이 없어도 온전함을 지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염두해 두고 살기 때문에 진정 양심이 깨끗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해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마 10:28)고 명하셨습니다. 욥은 스스로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 욥은 ‘만일 내가 ~했다면’이라는 맹세의 형식을 사용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온전한 삶을 추구하고 살아 왔다는 데에 조금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는 어떤 면에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면 저주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단언할 정도로 자신의 무고함에 대해 확고합니다.

 

죄 짓지 않는 경건한 삶(24-40)

모든 범죄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적인 마음의 결과입니다. 욥은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의인의 길을 걸었음을 증언합니다. 욥의 고백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신실한 성도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24○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25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 26만일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뜬 것을 보고 27내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맞추었다면 28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 29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하였던가 30실상은 나는 그가 죽기를 구하는 말로 그의 생명을 저주하여 내 입이 범죄하게 하지 아니하였노라 31내 장막 사람들은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는가 32실상은 나그네가 거리에서 자지 아니하도록 나는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노라 33내가 언제 다른 사람처럼 내 악행을 숨긴 일이 있거나 나의 죄악을 나의 품에 감추었으며 34내가 언제 큰 무리와 여러 종족의 수모가 두려워서 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잠잠하였던가 35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36내가 그것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리라 37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알리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38만일 내 밭이 나를 향하여 부르짖고 밭이랑이 함께 울었다면 39만일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출을 먹고 그 소유주가 생명을 잃게 하였다면 40밀 대신에 가시나무가 나고 보리 대신에 독보리가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24-40)

 

욥은 자기를 미워하는 자가 겪는 불행을 보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먼저 괴롭히고 상처를 준 것은 상대방의 범죄일지라도, 그에게 미움과 보복의 마음을 품는 것은 나의 또 다른 범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7) 욥이 짓지 않은 죄(9): 재물 신뢰(24-25)

 

29장부터 시작된 욥의 자신을 위한 마지막 변론은 이제 31장에서 종지부를 찍습니다. 31장에서 욥은 ‘나는 이런 죄를 짓지 않았다. 만일 그런 죄를 지었다면 나에게 저주가 내리길 바란다’는 내용으로 자신의 결백을 거듭거듭 증명합니다. 1-23절에서 욥은 마음과 육체의 정욕을 좇지 않고 순결을 지켰으며, 종이나 약자를 불의하게 대하지 않고 존중하였다는 내용으로 짓지 않은 죄 여덟 가지를 진술하였습니다. 이제 아홉 번째로 그는 재물을 의지하지 않았고 재물이 많다는 이유로 기뻐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귀한 보석을 가졌을 때 든든하게 느끼고 재물이 늘어나는 것에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욥은 표면에 나타난 재물의 증식에 초점을 두지 않고 재물이 늘어나게 한 근원인 하나님께 집중하였습니다. 욥이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이나 지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지도 그리고 축복의 결과였음을 확신하였습니다(29:3-6).

 

(8) 욥이 짓지 않은 죄(10) 일월성신 숭배(26-28)

 

재물이 욥의 의지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하늘의 해나 달도 욥의 경배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욥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매 순간에 그의 임재를 인정하였으므로 일월성신이나 우상을 향한 동경이나 관심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욥에게 있어서 세상을 밝혀주는 눈부신 태양이나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변신해가며 화려한 자태로 밤하늘을 밝히는 달에 현혹되어 그것들을 향하여 손으로 슬쩍 입맞춤을 보내는 행동은 재판에 붙여 판결을 받을 죄악이었습니다. 해와 달에 대해 마음속에 미묘한 동요가 일어나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며 속임수라고 여겼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태도와 변화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욥의 신앙 원칙은 예전과 동일합니다(1:5; 31:1).

 

(9) 욥이 짓지 않은 죄(11): 원수의 재난을 기뻐함(29-30)

 

욥은 이제 29-32절에 걸쳐 자신의 주변에 있는 원수와 종과 나그네를 언급하며 그들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행동의 태도를 진술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람들에게 정의와 자비를 베풀어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29:7-17, 21-25), 그를 미워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욥은 그런 자들이 재앙을 만났다 해서 기뻐하거나 우쭐거리지 않았으며 그들이 죽기를 바라는 저주의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원수에 대한 욥의 태도는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부합합니다(마 5:44).

 

(10) 욥이 짓지 않은 죄(12) 손님 접대 거부(31-32)

 

욥의 집에서 함께 거주하는 종들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고기로 배를 채울 수 있었으며, 지나가는 나그네들은 욥의 호의로 그의 집에서 편안히 묵고 갈 수 있었습니다. 13-23절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욥은 사회에서 지위가 낮거나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지음받은 창조물임을 기억하여 그들이 받을 권리와 보호를 제공하였습니다. 나그네나 손님을 대접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며 종을 무시하지 않는 행동은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며 그를 경외한다는 표현입니다(레 25:43: 엡 6:9).

 

(11) 욥이 짓지 않은 죄(13): 죄를 숨김(33-34)

 

짓지 않은 죄 열세 번째로서 욥은 악행이나 죄를 숨긴 일이 없다고 하며 자신의 정직성을 주장합니다. 그는 앞서 5-6절에서 이미 자신이 거짓말로 남을 속이지 않았음을 하나님께서 직접 테스트해보시라고 할 정도로 자신의 온전함을 주장했습니다. 이제 여기에 덧붙여 욥은 자기가 죄를 지었을 때, 다른 사람처럼 죄를 덮어 감추려 하지 않고 다 드러내었다고 말합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나 죄를 바로 인정하기보다는 죄를 은폐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려 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은 대부분 체면, 자존심, 양심의 불량함으로 인해 또는 남으로부터의 비난이 두려워 죄를 감추려 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체면이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온전함을 지키려는 간절한 열망이 있어 양심도 깨끗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죄를 지었을 때 자기 마음에 숨기지 않고 회개하였습니다. 이런 욥의 태도는 비단 자신의 죄과뿐 아니라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일(예. 재산과 자식을 다 잃은 것을 당했을 때에도 바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한 예에서 잘 드러납니다(1:20-22). 또한 욥은 많은 무리와 여러 종족으로부터 모멸을 당할까 두려워 집에 숨어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죄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자가 되기를 소원하므로 자신의 죄가 남에게 밝혀지는 것과 그에 따른 결과를 감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12) 욥의 결백 호소(35-37)

 

욥은 자신의 결백을 변호하기 위해 구구절절 자신이 짓지 않은 죄를 나열하다가 이제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에서 욥의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로하고자 찾아온 세 친구는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욥을 정죄하며 그의 변론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무슨 까닭인지 욥에게 침묵하고 계십니다. 욥은 우상이나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의 길로 행하고자 했습니다. 의의 삶을 살다가 죄를 짓는 경우에도 속히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고 다시 의로운 삶을 이어 나갔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피조물임을 마음에 새기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였습니다. 이처럼 욥은 하나님이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고 실천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결백을 확신하며 자신이 진술한 무죄를 뒷받침하는 변론에 서명을 하고 법정에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침묵하시는 재판장 하나님께 사정하며 자기의 사건을 살피고 판결을 내려주시기를 촉구합니다. 그에게 죄가 있다고 고발하려는 자들이 있다면 고소장을 써오기를 명령합니다. 욥은 그 고소장을 하나님 앞에 가져와 재판을 받으면 자신의 결백이 드러날 것을 확신하므로 그 고소장을 어깨에 메거나 왕관처럼 머리에 쓰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행동과 생각이 결백하므로 하나님께 다 알려지는 것에 떳떳했으며 왕족처럼 당당히 그 앞에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13) 욥이 짓지 않은 죄(14):땅에 대한 악용(38-40)

 

짓지 않은 죄의 마지막으로 욥은 땅을 악용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욥은 하나님이 한 가정의 생계를 지탱해주기 위해 땅을 주셨다는 것과 땅에 대한 법을 지켜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땅을 마구잡이로 이용하여 환경을 파괴하지 않았고, 남의 땅을 가로채지 않았으며, 다른 이의 땅에서 소출을 얻은 경우 정당한 값을 지불했고, 땅의 소유주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욥은 땅과 관련한 법을 어겼다면 밀과 보리가 나야 할 땅에서 가시나무와 독보리가 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욥은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땅과 관련해서 결백합니다. 이것으로써 스스로의 무죄를 변론하는 욥의 말이 끝났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는 것이 손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잠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장기적으로 보면 훨씬 더 안정되고 풍요로운 길입니다. 성도는 모든 것을 경제 논리로만 설명하려 어리석은 자의 길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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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1-01)

 


스스로를 변호하는 욥

욥기 31장 1-23절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만민 평등을 위하여 싸운 그런 놀라운 혁명입니다. 대혁명의 3대 정신은 ‘자유 평등 박애’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국기가 삼색기라고, 파랑은 자유, 흰색은 평등, 빨간색은 박애를 상징합니다. 대 혁명에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는 정신은 성경에서부터 나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욥은 수천 년 전에 기록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놀라운 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욥은 온전한 삶을 지향하고 그런 삶을 실천해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로운 통치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변론하는 욥은 온전하고 떳떳하기에 너무 억울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짓지 않은 죄를 나열하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변론을 들어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1-23)

세상 사람들은 서로 좋아서 하는 행위는 문제 될 것 없다며, 음행은 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욥은 음행을 정죄 받을 행위로 알고 철저히 경계했습니다. 욥의 생을 통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삶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1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2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 3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 4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5○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 6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7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8내가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출이 뿌리째 뽑히기를 바라노라 9○만일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문에서 숨어 기다렸다면 10내 아내가 타인의 맷돌을 돌리며 타인과 더불어 동침하기를 바라노라 11그것은 참으로 음란한 일이니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요 12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니 나의 모든 소출을 뿌리째 뽑기를 바라노라 13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 14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15나를 태 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 16○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17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18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 19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본 체 했다면 20만일 나의 양털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입혀서 그의 허리가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다면 21만일 나를 도와 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주먹을 들어 고아를 향해 휘둘렀다면 22내 팔이 어깨 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그 자리에서 부스러지기를 바라노라 23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1-23)

 

욥의 친구들은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이 손상을 입지 않도록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변호하는 믿음 좋은 신학자요 목회자처럼 보였으나, 그들의 논증에는 ‘사랑의 하나님’이 부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세상과 다름없습니다. 욥은 자신을 고발하는 세상 속에 홀로 내팽개쳐져 있습니다.

 

(1) 욥이 짓지 않은 죄(1) 성적 정욕(1-4)

 

고통과 상처로 만신창이가 되어 두려움을 느끼는 욥이지만 자신의 결백에 대해서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욥의 무죄를 변호해줄 자가 주위에 없으므로 욥은 스스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해왔습니다. 그가 친구들과의 논쟁을 끝내려 하기 때문에 이번이 그의 마지막 변론이 됩니다. 그러므로 욥은 필사적이고 단호합니다. 법정에서 피고가 죄를 졌는지 안졌는지에 대해 증거를 바탕으로 판결을 내리듯, 욥은 자기가 짓지 않은 죄 14가지를 하나하나 나열함으로써 자신이 결백하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욥이 언급한 죄의 목록은 죄를 총망라하거나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순서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이는 욥의 최종 목표가 자신의 무죄 증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완전한 수를 의미하는 7을 두 번 사용하여 14가지의 죄를 나열함으로써 자신이 언급하지 않은 죄목이 있다해도 자신은 그 죄에 대해 결백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드러냅니다.

 

욥은 자기가 짓지 않은 죄로서 먼저 성적인 정욕을 들었습니다. 그는 그의 눈과 언약을 맺어 처녀에게 정욕의 눈을 돌리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행동에 앞서 미리 그 생각을 차단하여 범죄에 빠지지 않으려고 눈과 언약을 맺은 행위는 욥의 결단력과 지혜를 보여줍니다. 또한 욥이 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도 알려줍니다. 누군가 범죄의 현장에서 걸리지 않았거나 죄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과 생각으로 죄가 되는 생각을 할 때 그는 이미 죄를 지었다고 욥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여자에게 음흉한 눈길을 보내는 것이 이미 죄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마음까지 살피는 욥의 태도는 1장의 욥에 대한 소개에서도 동일하게 기술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영적 상태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영적 상태까지 살폈습니다(1:5). 자녀들이 혹시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죄를 지었을까 하여 노심초사하였던 점을 미루어 보아 욥 자신은 얼마나 더 철저하게 죄에서 떠나려고 애썼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행위와 더불어 마음의 생각을 중요하게 여긴 욥의 태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동일하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외적으로만 죄목에 걸리지 않고 율법을 피해 가려는 것을 따끔하게 지적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각 계명의 근본적인 목적을 파악하고 마음의 동기와 생각을 먼저 살펴 죄의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주셨습니다(마 5:21 이하).

 

욥이 마음으로 작정하고 정욕의 죄에 빠지지 않으려고 할 수 있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정의로운 통치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 계심을 욥이 알면서도 구름에 가려져 계시므로 악을 행해도 모르실 것이라 믿고 악을 행했다며 욥을 비난하였습니다(22:12-15). 욥은 이 말을 염두에 둔 것처럼 하나님을 높은 곳에 계신 전능자로 언급하며, 그가 욥의 모든 행위를 낱낱이 살피신다는 점을 욥 자신도 확실히 안다고 밝힘으로써 엘리바스의 비난에 반박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멸망과 재앙을 유산으로주실 것임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죄를 짓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욥은 세 친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서 자신이 받고 있는 현재의 고통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증거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2) 욥이 짓지 않은 죄(2):속임수(5-6)

 

둘째로, 욥은 남을 속이거나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했다면’이라는 공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무죄함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욥이 거짓말하고 다니며 남을 속이는 데 재빨랐다고 의심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흠이 없음을 아시게 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정직한 삶을 살았으므로 본인이 흠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하나님의 욥에 대한 평가(온전하고 정직하며, 1:8; 2:3)를 고려했을 때 거짓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욥과 같이 시편 기자도 하나님의 율례를 버리지 않고 온전하게 행하여 죄로부터 자신을 지켰다고 선포하며(시 18:20-24)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살펴 시험하시라고 요구하였습니다(시 26:1-2). 이들은 당당히 자신을 시험해보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3) 욥이 짓지 않은 죄(3): 죄의 길을 따름(7-8)

 

셋째로, 욥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죄악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계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31:4). 또한 그의 마음과 행동으로 따라야 할 길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선택하였습니다(23:11-12), 그러므로 그의 행동을 주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에서 치우치거나 떠나지 않았고(31:7),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먹는 음식보다 더 귀중하게 여겼습니다(28:12). 또한 자신의 눈과 귀와 입이 원하는 대로 따라 행하거나 죄로 자기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그가 이러한 죄를 지었다면 그가 일한 대가를 다른 사람이 얻기를 바라고 그의 밭의 작물이 뿌리째 뽑혀 더 이상 자신에게 소출을 줄 수 없기를 바란다고까지 진술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죄가 없음을 아신다고 확신하였고(10:7,15) 본인도 자신의 죄 없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4) 욥이 짓지 않은 죄(4):간음(9-12)

 

넷째로, 욥은 타인의 아내에게 탐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욥은 이미 결혼을 했으므로 처녀(1)든 이웃의 아내(10)든 마음으로 유혹되어 의도적으로 간음을 계획하거나 실행하지 않았다고 진술합니다. 만일 이런 죄를 지었다면 자신의 아내가 다른 이의 종이 되고 다른 남자와 동침하기를 바란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욥은 간음이 파렴치하고 음란한 행위이며,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곳 즉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삼켜버리는 불과 같은 중죄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간음죄를 지었다면 재판장으로부터 벌을 선고 받고 자기의 소출이 완전히 끊어지는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선포합니다.

 

(5) 욥이 짓지 않는 죄(5):종을 학대(13-15)

 

욥이 짓지 않은 죄의 다섯 번째는 종의 권리를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욥이 남종이나 여종을 업신여기거나 그들의 불만을 무시하지 않았던 것은 욥이나 종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평등하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어머니의 태속에 지음받아 세상에 나온 자들이므로 욥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무시한다면,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호소하거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 뭐라고 대답할 면목이 없다고 진술합니다. 욥은 이 진술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사려 깊게 창조하셨으므로 누군가 이 세상에 태어나 주인이 되든 종이 되든 그를 마땅히 존중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6) 욥이 짓지 않은 죄(6-8): 약자를 소홀히 여김(16-23)

 

욥이 짓지 않은 죄의 여섯 번째에서 여덟 번째까지의 항목은 사회에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힘없는 자들을 못 본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욥은 끊임없이 가난한 자, 과부, 고아에게 관심을 두고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종들을 인간으로서 평등하게 창조된 피조물로 여겼듯이 사회의 약자들 또한 자신의 가족처럼 돌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기쁨과 위로가 되어주고 그들에게서 축복의 말을 들었습니다(29:12-17). 욥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알고 있고 그를 경외하므로 하나님이 돌보라고 명령한 사회의 약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윤리기준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절대적 판단 자체를 거부합니다. 상대적 기준을 주장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본을 보여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물론이고 내면까지 정결하게 함으로 세상에 거룩함을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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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01-01)


심판자로 임하실 여호와

미가 1장 1-7절


모든 성경들은 목적이 있겠지만, 특히 예언서에는 분명한 기록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복해서 행하는 죄악의 사이클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경고하시고, 끝까지 듣지 않는 백성들을 향하여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들을 용서하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또 다시 백성들은 범죄하는 일에 빠진 패턴이 계속되어 반복되어진 것을 봅니다.

 

  • 미가서의 내용은 아름다운 사마리아 도시와 아주 훌륭한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 성을 볼 때, 겉으로 보기에는 풍요롭고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보내시며 ‘너희가 타락하였다’, ‘너희에게 죄가 무성하다.’, ‘내가 너희를 심판하겠다.’라고 경고하는 메시지로 1장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강림하실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될 것이며 성들과 우상들은 모두 파괴될 것입니다.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1)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어두운 시대를 변혁시키십니다. 주의 종들을 통해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의 종들에게 전달됨을 믿고

 

1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1)

 

미가가 활동하던 일들을 ‘미가서 개론’에서 살펴보았지만,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서술한 ‘미가 개론’을 한 번 더 살펴보신다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원어 성경에는 ‘여호와의 말씀’로 시작하지만, 우리나라 성도들을 위해서 우리 성경에 변역된 순서대로 설명해 가겠습니다.

 

(1) 미가의 활동 시대

 

하나님께서는 미가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남왕국 유대 왕들인 요답,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약 54년 동안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것임을 밝힙니다. 그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정확한 대상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2) 미가의 활동 내용

 

‘미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첫 단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통해 미가서는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명시합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전해주신 말씀에 권위를 부여하는 형식에 예언서는 ‘호세아’, ‘요엘’, ‘스바냐’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가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묵시(word)’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당사자들에게 전합니다. ‘묵시’는 ‘예언’, ‘말씀’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 전에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3) 미가의 활동 대상

 

하나님께서 부르신 미가는 유대 작은 마을인 모레셋(Morasthite)에 살고 있었습니다. 선지자인 미가를 통해서 당시 유명한 두 도시를 향해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와 남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범죄하여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갑자기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선지자를 보내셔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지를 전하시면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길 기다리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언되는 과정의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누구를 선택해 말씀을 받게 하실 것인지, 어떤 말씀을 주실 것인지, 얼마나 오랫동안 사역하게 하실 것인지, 누구에게 전하게 하실 것인지 등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게 엎드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전파해야 합니다.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선포(2-4)

서로 언약을 맺을 때는 일련의 절차와 규칙이 있습니다. 언약 당사자를 확인하고, 그 내용을 확인하고 그리고 직접 대면하면서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맺은 그 언약을 실천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라는 점입니다.

 

2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3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4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2-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히 12:6).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에 대해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2)라고 모든 피조물들은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어그러진 상태에 있는 피조물들이 본 모습(identity)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자신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선지자는 묵시에 압도되어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3)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산과 골짜기가 녹고 갈라지면서 힘을 잃고 맺을 못 추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엄청난 위엄으로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 묵시를 통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죄악을 더는 견딜 수 없어 일어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마음으로 온 백성,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향해 외칩니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될 때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 회복의 길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 특히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모든 만물과 사람들을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새롭게 듣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심판하실 이유(5) - 죄와 허물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배가 무너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예배를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수축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5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5)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지 이유를 밝히십니다. 이곳에서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조상의 이름입니다. 그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임하시게 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그 중심에서부터 죄가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허물 자체였으며,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 타락과 변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 예배하는 곳으로 중심적인 도시이지만,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산당과 다름없었습니다. 이곳에 죄와 허물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은 백성들의 예배가 무너졌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라는 종사가 아니라 우상과 죄가 가득한 곳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 죄가 우상숭배입니다. 성전이 있고 예배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대해 죄가 들어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참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많은 왕들이 나옵니다. 왕들 중에서 예배하는 왕들은 왕과 백성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왕이 산당을 짓고 우상숭배를 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할 때에 어김없이 그 나라를 심판하시고 백성들을 멸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찾으시는 자는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특히 성도들은 예배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잘못하면 이 시대에도 교회를 산당으로 만들 수 있는 어리석임이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결과(6-7)

문화가 중요한 것은 악이 만연하면 처음에는 괴롭지만, 나중에는 내성이 생겨서 견딜만해집니다. 점점 자신도 생존하기 위해서 자신도 악을 범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래서 악한 문화에 별 불편 없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심판이 닥치면, 그 심판을 온전히 맞게 되어 있습니다.

 

6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를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내리고 그 기초를 드러내며 7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6-7)

 

사마리아는 주위 골짜기보다 90m정도 높은 곳에 세워졌습니다(사 28:1). 하지만 그곳이 분주하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아무 쓸모없는 땅으로 사람들이 살지 않고 돌무더기와 포도를 심을 동산 같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마리아는 BC 722-721년 앗수르 의해 침략으로 멸망당하고 그런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무너진 성의 돌들이 골짜기로 쏟아져 내림으로 성의 기초가 드러났습니다.

우상의 신전 기생들에게 준 재물로 우상을 만들고, 성전을 치장하였습니다. 이 악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앗수르에게 빼앗겼고, 앗수르 사람들은 그 재물을 자기 신들의 신전의 기생들에게 주었습니다. 죄로 인한 결과는 이렇듯 비참합니다. 그리므로 죄를 멀리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에도 우리 안에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기생의 값으로 모은 돈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돈으로 거래하면서 교회를 세워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중세시대에 면죄부를 팔아서 교회를 건축했던 것처럼 우리 안에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로 교회와 자신의 삶 가운데 기생의 값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 왕들을 형통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를 했던 왕들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현재 당신의 실패와 어려움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 관계에 단호하게 끊어버리라고 계속 촉구하시는 죄는 무엇입니까?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는 쉽지 않는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듣기에 거북한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기 원하십니다. 말씀을 겸손히 받아 들려야 합니다. 그 말씀으로 죄의 유혹에서 이기게 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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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01) - 미가 서론  (1) 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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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0-02)

 


고난 중에 부르짖는 욥

욥기 30장 16-31절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려고 애썼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 환난을 주시는 ㄱ섯인지 이해할 수 없을 때 정말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욥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응답을 구합니다. 욥의 경험 속에서 환난 날을 맞이하는 성도의 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 육체적으로나 내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욥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욥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했으나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욥을 대하는 하나님의 행동이 자비와 인애가 풍성하신 그의 성품과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에 위배되므로 욥은 혼란스러워하며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욥을 대적하시는 하나님(16-23)

하나님께서 느껴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도 않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고통만 있다고 생각될 때, 욥은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부르짖는 것, 이것이 진짜 지혜자의 태도일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욥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6이제는 내 생명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 날이 나를 사로잡음이라 17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18그가 큰 능력으로 나의 옷을 떨쳐 버리시며 나의 옷깃처럼 나를 휘어잡으시는구나 19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20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21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22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 23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16-23)

 

욥기 30장 상반부의 말씀이 욥을 끔찍하게 공격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면, 30장 하반부의 말씀은 그로 인해 다가온 욥의 처절한 고통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먼저 16-19절의 말씀은 욥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 고통 속의 욥(16-17)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지나간 행복한 시절을 회상할 때, 도성의 지도자로서 젊은이나 나이든 자에게 지혜로 조언을 주며 그들과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등 그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살았고 그들로부터 축복과 존경의 소리를 들으며 지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29장). 그러나 지금 욥은 비열하고 보잘것없는 젊은 부랑아들에게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모욕과 위협을 당하여 품위도 잃은 채 공포에 떠는 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30:1-15).

1절과 9절에 이어 욥의 입에서 다시 언급된 ‘(그리고) 이제는’(30:16)이라는 말은 그가 여전히 재난 당하기 전 평안과 축복이 가득한 삶을 살았던 시절을 비참한 현재와 비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친구들로 인해 정죄를 받고 있고 마을의 부랑아들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있음과 동시에 개인적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바라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매일 밤마다 겪는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의 영혼이 속에서 다 쏟아져버린 것처럼 느꼈습니다. 밤과 아픔을 사람처럼 묘사하여, 밤이 그의 뼈들을 창으로 찌르고, 뼈를 갉아내는 아픔은 잠자리에 들 시간인데도 자지도 않고 여전히 깨어 자신을 괴롭힌다고 표현합니다. 이와 같이 낮에는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위협을 당하고 밤에는 육신의 고통으로 아파 어찌할 바 모르는 욥의 삶은 더 이상 ‘원기왕성한 날들’(29:4)이 아니라 ‘환난/고통의 날들’(30:16)로 채워져 있습니다.

 

(2) 욥을 대적하시는 하나님(18-23)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이 모든 고통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과 핍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8-23절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18-19절에서는 하나님을 ‘그’나 ‘큰 능력’으로 간접적으로 부르고, 20-23절에서는 ‘당신’으로 부릅니다. 욥이 하나님을 ‘그’로 부르는 것은 욥의 말을 듣고 있는 친구들에게 또는 혼잣말처럼 자신을 무자비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을 제3자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당신’으로 부르는 것은 욥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잔인하게 다루고 계심을 항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큰 능력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지만 지금은 그 큰 권능으로 자기를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계신다고 진술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옷을 힘껏 움켜쥐어 옷이 구겨져 변형될 만큼 그의 몸을 쭈그러뜨리시므로 그의 오장육부와 뼈들이 으스러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옷깃을 여미듯이 욥의 목을 조이시니 그의 숨통이 막힙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진흙 가운데 던져버리시고 티끌과 재와 같이 취급하셨다고 한탄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낮은 땅 아래 그의 궁핍한 백성을 굽어살피시며 그들이 티끌과 거름 무더기 같은 고통에 있을 때 거기서 건지시고 일으키시는 분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시 113:6). 그러나 욥은 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된 자기를 오히려 진창에 내던지시고 먼지와 재와 같이 보잘것없는 신세로 내동댕이치셨다고 증언합니다. 사람들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고 자신에게도 한량없는 축복으로 함께하셨던 하나님으로부터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먼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욥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욥은 이제 답답하고도 비참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절규합니다. 환난과 고통에 놀라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부르짖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대꾸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이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지만 하나님은 욥의 존재를 알아보셨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도움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주시기는커녕 도리어 도를 바꾸어 욥을 무자비하게 대하시며 핍박하셨습니다. 그의 능력의 손으로 욥을 무자비하게 내리치시고 태풍에 날려버리셨습니다.

욥을 향한 하나님의 공격으로 인해 욥은 이제 죽을 때가 가까웠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있던 가축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빼앗아 가셨고 재물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귀한 아들과 딸 열 명 모두를 하루아침에 대풍에 죽게 하셨습니다. 게다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욥에게 육체의 질병을 내리시고, 옆에 머물던 아내에게서 비난과 욕을 듣게 하시고, 자기를 위로해준다고 찾아온 친구들로부터는 심한 정죄와 모욕의 말을 듣게 하셨습니다. 또한 나이만 젊고 마을에서 쫓겨나고 굶주려 힘도 없는 건달들로부터 멸시와 위협을 당하여 공포에 질리게 하셨습니다. 이것도 서러운데 밤이면 밤마다 뼈가 쑤시는 아픔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욥을 핍박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강해지고 끊임없자, 욥은 “하나님, 마침내 저를 죽음으로 인도하시는군요”라고 말합니다.

 

욥의 항변과 탄식(24-3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십니다. 욥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느꼈던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욥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를 바라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응답과 거절도 응답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제 불평과 원망을 거두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믿음으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24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25고생의 날을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26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27내 마음이 들끓어 고요함이 없구나 환난 날이 내게 임하였구나 28나는 햇볕에 쬐지 않고도 검어진 피부를 가지고 걸으며 회중 가운데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 29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30나를 덮고 있는 피부는 검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말미암아 탔구나 31내 수금은 통곡이 되었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구나(24-31)

 

욥이 기대한 복 대신 재앙이 찾아왔습니다. 빛 대신 흑암이 덮쳤습니다. 뼈가 쑤셔서 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고 눈을 뜨고 보내는 낮에는 하나님께 대한 서운함으로 마음이 들끓어 고요함이 없었습니다.

 

(1) 욥의 항변(24-25)

 

욥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삶을 살았음에도 자기를 이토록 외면하고 공격하여 죽을 지경에 몰아넣으신 것에 대해 항변합니다. 사람이 재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고 부르짖으면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께서 내민 손을 잡아 건져주시는 분임을 알므로 자신도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의 도움을 간절히 기대했습니다. 더구나 욥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괴로운 자와 함께 울며 그를 위로하는 등 이웃을 사랑하며 어려운 자들을 돕고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뜻(레 19:18; 시 41:1; 롬 12:15)대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욥29:12-17)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도움이나 구원의 응답을 주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의 고통을 가중시키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행동은 그의 속성인 사랑이나 정의 그리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과 의의 삶을 사는 자에게 주신 약속에 위배되는 것이 아닙니까? 욥은 신뢰해왔던 하나님의 행동에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이러한 욥의 태도는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게 취급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데에서 나옵니다.

 

(2) 욥의 고통과 탄식(26-31)

 

욥을 외면하고 고통을 안겨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욥은 좌절과 혼란을 맛보며 한탄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왔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축복과 평안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그에게 복을 주시고 빛과 같은 형통을 주실 것이라 기대하였습니다(29:18–20). 그러나 한순간에 복 대신 재앙이 왔으며 빛대신 흑암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여파로 마음의 기쁨과 평안은 사라지고 그의 창자가 속에서 끓어 쉼이 없습니다. 그의 앞에 고통의 날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들끓어 오르는 내면의 괴로움과 함께 피부병으로 인한 뼛속부터의 아픔과 열기로 욥의 피부는 검게 타고 벗겨졌습니다. 욥은 까맣게 탄 얼굴로 사람들 가운데 서서 도움을 요청하지만 누구도 그를 위로하거나 돌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욥은 이전에 자유롭게 성안과 성문을 출입하고 성중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고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으나(29:7,21-25) 지금은 그의 질병으로 인해 맘대로 다닐 수도 없으며 사람들과의 접촉이 금지되고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외롭고 서글퍼 공허하게 울어대는 광야의 이리나 타조와 같은 신세가 되어 통곡하며 탄식합니다. 수금과 피리와 함께 노래와 즐거움이 가득했던 때는 다 지나가고 욥은 이제 통곡과 애곡의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욥의 눈앞에 보이는 새카맣게 타버린 피부만큼 그의 마음도 타들어 갑니다.


환난을 원하거나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환난에 대해 성도는 믿음을 무기로 살아 이겨 내야 합니다. 환난 날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줄기차게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시험을 이겨 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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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30-01)

 


헤아릴 수 없는 기쁨

시편 30편 1-12절


 

고통의 문제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고통을 제거해주시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실까?’ 이러한 질문의 반대편에는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과 함께하신다’라는 대답이 늘 있었습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신음하던 시인이 고통을 벗어났을 때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 다윗의 시로서, 다윗은 고통과 병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감사의 시는 감사제를 드릴 때 불리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 감사의 시에 ‘성전 봉헌가’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가 성전 의식과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시의 내용에 성전이나 봉헌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확실하지 않습니다.

 

주께 감사 찬양하는 이유(1-3)

우리가 찬양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삶의 근거를 마련하셨기에 그 은혜를 찬송해야 하고, 또한 우리를 구언하셔서 인생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면서 살 수 있게 하셨기에 그 은혜를 찬송해야 마땅합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2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1-3)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림으로 시를 시작하고 또한 시를 맺습니다(1,12). 그의 감사의 내용에는 자신이 경험한 고난의 때와 그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 때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병에 걸렸고 죽음의 위기에 있었으나 지금은 회복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세 가지 이유를 밝힙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죽음에서 끌어내심으로써 다윗의 원수들에게 기뻐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1). 둘째,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병을 치료하심으로써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2). 셋째,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문턱에서 다윗을 살리셨습니다(3). 이 세 가지 이유 속에는 다윗과 원수와의 관계 그리고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타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가 아파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런 다윗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치료와 생명을 공급하심으로써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끌어내신 사건(1)은 그를 죽음에서 끌어올려(lift up) 살리심으로써 무덤으로 내려가지(go down) 않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3)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는 그분이 죽음의 병을 치유하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능력자임을 밝히 드러냅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고, 구원을 얻었고, 이제 그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다윗과 원수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마음의 태도와 행동에서 잘 나타납니다. 원수들은 다윗이 죽고 멸망할 때는 기뻐하지만, 다윗의 병이 치유되어 생명을 얻을 때는 그들에게 낙이 없게 됩니다. 다윗의 고난과 죽음을 기뻐하며 고대하는 원수들은 악인들입니다(시 35:15-16). 그러나 의인은 그런 악인들이 병들었을 때 그를 위해 슬퍼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자입니다(시 35:13-14; 109:4).

 

성도들을 주 찬양에 초대(4-5)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치유 사역입니다.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심은 물론, 환난에서 건져주시며 궁핍한 자들을 부요케 하여 주시는 것들도 하나님의 치유의 한 영역입니다. 영적으로 곤고한 자들을 소생시켜 주시는 것도 중요한 치유입니다. 그 치유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4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5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4-5)

 

다윗은 본인만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함께한 공동체를 기억하고 그들을 찬양에 초대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 공동체이므로, 한 사람의 감사의 이유는 그가 속한 공동체 모두에게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공동체에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의 거룩함을 기억하기 위해 감사하라고 청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다윗을 구원한 사건을 표현하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거룩함은 죄가 없고 공의로우며 은혜로운 성품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다윗을 병과 고통에서 구원하시며, 원수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모든 행위에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하신 일을 되새기며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화답해야 하는 반응입니다.

이제 5절에서 다윗은 그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성품에서 하나님 찬양의 이유를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대조적인 성품인 노여움과 은총을 예로 들어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알립니다.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노여움은 잠깐이나 그의 은총이 평생에 임할 것임을 표명합니다. 하나님의 노여움과 은총은 성도의 울음과 기쁨과 직결됩니다. 하지만 노여움으로 인한 성도의 눈물은 저녁에 머물다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아침에는 기쁨을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지만, 노하시는 때에라도 긍휼히 여겨 노여움을 오래 지속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출 34:6). 여기서 하나님의 노여움과 은총은 단순히 하나님의 성품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의 6-12절에 좀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다윗의 형통의 때와 고통의 때(6-7)

기다림의 법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서두름은 하나님의 뜻을 빨리 알아야 하겠다는 성급함보다 사단의 덫에 걸린 결과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는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깊은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회의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자여야 할 것입니다.

 

6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6-7)

 

다윗이 앞 5절에서 하나님께 감사 찬양해야 하는 이유로 언급한 내용은 그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었습니다. 다윗은 형통한 때와 고통의 때를 경험했습니다. 형통한 때라는 것은 그의 삶이 평화롭고 고요한 시기라는 뜻입니다. 그런 때에 그는 자신 만만하게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거야”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표현은 불행이나 악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서(시 46:5;10:6), 자신의 형통한 때가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은 시편 46:5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므로 예루살렘 성이 ‘흔들리지 (개역개정에서는 ‘요동하지’로 번역) 않을 것이다’와 같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고백(시 16:8; 62:2,6) 또는 하나님 덕분에 의인이 ‘흔들리지 않음’을 확증하는 표현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시 15:5;112:6; 잠 10:30;12:3). 그러나 여기서는 시편 10:4-6의 악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는 다윗의 교만한 발언입니다. 다윗의 흔들림이 ‘영원히’ 없을 것이라는 표현은 ‘대대로’ 해악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악인(10:6)의 말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만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다윗이 형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7). 다윗은 자신이 산같이 흔들림 없이 굳게 설 수 있었던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간과하거나 잊고서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두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에게 노하셨습니다(5). 그에게 근심과 고통을 주셨습니다. 삶이 안락하고 편했을 때에 다윗은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잊은 듯 자기 자신과 형통한 현재를 보았고 앞으로의 형통한 미래를 자신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근심과 고통으로 삶이 흔들리자 다윗은 자기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자신이 형통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현재의 고통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고통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으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가린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간섭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깨달은 평생의 은총(5)인 것입니다.

 

다윗의 간구(8-10)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때에 따라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의 때를 기억하고 은혜의 기도를 잊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8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8-10)

 

교만과 죄로 인해 고통과 죽음에 다다른 다윗은 하나님께 용서와 회복을 간구합니다. 다윗은 “제가 살아야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죽는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외치며 용서와 생명의 회복을 간청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그의 도움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고 구원할 능력과 긍휼을 가지신 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의 응답과 다윗의 화답(11-12)

다윗은 찬송할만한 이유와 조건을 갖추었을 때에 찬송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건을 갖추지 못해도, 마땅한 이유가 없어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의 찬송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무엇 때문에 찬송하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으로 찬송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11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11-12)

 

다윗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으므로 다윗은 감사와 찬양으로 화답합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베옷을 춤으로 바꾸신 분이 하나님께서 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와 고통으로 통곡하는 눈물을 바꾸어 그가 기쁨을 참지 못하고 춤을 추게 하셨습니다. 그가 참회하며 고통 속에서 입었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과 응답을 경험한 다윗은 잠잠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주께 노래하며 영원히 주께 감사합니다. 주께 영원히 감사드리겠다는 다윗의 고백에는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사의 기회를 주실 것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은 찬송할만한 이유와 조건을 갖추었을 때에 찬송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건을 갖추지 못해도, 마땅한 이유가 없어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의 찬송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무엇 때문에 찬송하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으로 찬송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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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9-01)

 


여호와의 권능의 소리

시편 29편 1-11절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이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우리는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온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선포하며 경배해야 합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어떻게 선포하고 경배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그의 목소리로 천지에 나타나 천지와 이방신의 세력을 굴복시키십니다. 세상의 무질서를 정복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창조주와 통치자임이 밝히 드러납니다. 이 하나님께 하늘에서는 그의 천사들이 그리고 땅에서는 그의 백성들이 왕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배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1-2)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역사, 인간 등 모든 것을 다르시십니다. 여호와의 소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요구합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할 유일한 분입니다. 하나님께 최고로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하기에 당신의 모든 것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1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1-2)

 

시인은 하늘에 있는 권능 있는 존재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이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상에 있어 그분의 모임에 등장하는 자들입니다(욥 1:6, 2:1; 왕상 22:19; 시 89:6 등). 시인은 이들에게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라고 세 번이나 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찬양을 받기에 마땅하신 분이라는 점이 시인의 찬양 명령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가장 잘 인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천사들에게 그들이 인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리라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그의 이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시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창조주와 통치자로서의 놀라운 능력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돌리는 찬양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땅의 성도는 하늘의 천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적절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거룩하고 구별된 옷을 입고 예배하는 모습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은 세마포를 입고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거룩한 옷이 내포하는 의미는 예배자의 성결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예배자가 흠 없는 예물을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듯이(레 1:2-3),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성결한 마음과 행실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자신을 헌신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소리(3-9)

하나님께서는 혼돈을 다스리시는 영광의 왕이시며, 여호와의 소리로 영광을 선포하십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이 만천하에 알려지는 것입니다. 영광은 인간이 조작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드러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6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3-9)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세계가 증명합니다. 온 피조물을 뒤흔들고 압도하는 하나님의 소리가 그 영광의 증거입니다. 뇌성은 가나안 바알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아무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1) 물 위에 계신 하나님의 소리(3-4)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온 세상에 강한 폭풍우 속 천둥소리로 임하십니다. 여호와의 소리는 하나님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이며, 그의 능력과 위엄이 드러나게 되는 소리입니다. 먼저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쟁쟁하게 울립니다.

가나안 인들에게 바다는 바다와 혼돈의 신인 얌과 폭풍의 신인 바알이 싸움을 일으키는 전쟁터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천둥소리를 들을 때 바알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폭풍우 속에서 크고 강하게 울리는 이 천둥소리는 바알의 소리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소리의 주인공인 하나님께서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시인이 힘과 위엄이 있는 소리를 내며 많은 물을 정복하신 하나님을 묘사함으로써 능력과 영광의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자가 아무도 없으며, 바다나 혼돈의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힘을 쓸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알립니다(시 89:9).

 

(2) 백향목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소리(5-6)

 

천둥소리로 묘사된 하나님의 영광이 바다로부터 이동하여 이제 레바논의 산들에 임합니다. 시인은 여러 지역에서 특별히 가나안의 북쪽 지역에 있는 레바논 산과 시론(헤르몬 산) 그리고 그 산들의 명물인 백향목을 지목하였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성경에서도 ‘레바논의 영광’(사 6:13)으로 불릴 만큼 이스라엘과 같이 견고한 집을 짓기 위한 목재가 귀한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좋은 나무로 알려졌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도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들여와서 사용했습니다(왕상 5:6; 6:9-10), 시론은 시돈(페니키아)인들이 헤르몬 산을 가리켜 부른 이름으로서(신 3:9) 해발 2800미터가 넘는 높이로 지중해 동해안 쪽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신에게 바쳐진 곳이란 뜻을 갖고 있는 이 산은 이방신들의 거주지로 알려졌습니다.

이와 같은 장엄한 산들과 그 산들의 가장 빼어난 나무들이 하나님의 청천벽력과 같은 천둥 번개 소리 앞에 맥을 못 추고, 흔들리고 뒤틀리고 꺾이며 부서집니다. 시인은 이 산들과 나무가 파괴되며 아수라장이 되는 모습을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들송아지가 몸을 뒤틀며 걷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뛰는 것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이 산과 나무를 정복하신 것입니다.

시인은 폭풍의 바다를 지나 산들에 임하여 그것을 뒤흔들며 제압하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힘을 보여줌으로써 바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산에 깃들어 있는 어떠한 혼돈과 신들의 세력도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 앞에서는 일어설 수 없음을 표명합니다. 바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제압한 이 헤르몬 산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세상의 어떤 신의 이름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즐거이 외치게 될 주체입니다(시 89:12).

 

(3) 광야를 진동하는 하나님의 소리(7-9)

 

천지를 진동하는 하나님의 뇌성이 바다와 산맥을 지나 광야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천둥 번개 소리가 광야를 뒤흔들고 화염이 치솟아 삼림을 불태웁니다. 화염을 가르신다는 표현은 불을 내신다는 표현으로 번개와 더불어 일어나는 화염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불과도 연결 지어 묘사하는 것입니다.

한편, 시인이 지목한 가데스 광야는 바란 광야 가데스(민 13:26)인지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지명보다는 일반적인 사막 지역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광활한 지역 어디든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알리는 굉음이 들리지 않는 곳은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고 불과 지진이 나는 모습을 통하여 시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권이 세상에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산의 나무들에게 영향을 미치듯 광야의 짐승들에게도 임하여 새끼를 밴 암사슴이 예정된 시간보다 앞당겨 새끼를 낳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진동에 삼림이 눈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이와 같이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이미지들 모두가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와 그의 통치 능력을 드높이는 구실을 합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통해 표현되는 초월적인 힘은 영광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피조물들이 영광을 외친다고 합니다. 여기서 성전이 하늘의 하나님 계신 곳인지 땅의 성전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늘이라면 시인은 우리를 다시 1-2절의 천사들이 외치는 ‘영광’의 소리로 향하게 합니다. 땅의 성전이라면 이제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외치는 ‘영광의 소리’가 천사들이 외치는 영광의 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에서 울리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느 쪽이든, 여기서 시인이 의도하는 점은 하나님의 영광이 천지에 충만하므로 그의 피조물 모두가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10-11)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통치자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홍수는 인간이 어찌하지 못하는 거대한 힘이고 크나큰 위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정복하고 통제하셔서 백성들에게 힘과 평화를 주십니다. 자연과 인간에게 평화를 주는 하나님과 달리인간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습니까?

 

10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11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0-11)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왕권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이 요동하는 바다와 산과 광야를 통제하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왕권이 견고하게 세상에 안착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홍수 때에도 홍수를 정복하시고 세상의 왕으로서 견고히 세상을 통치하셨다. 위에서 본 우주의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는 영원히 유지될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힘과 평강을 복으로 주시고 보호하십니다. 1-2절에서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과 힘을 찬양하고, 3-9절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통하여 영광과 힘이 증명되며, 이제 영광과 힘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힘과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본 시에서 시인은 인간 세계에서뿐 아니라 우주만물 속에서 일어나는 혼돈과 무질서와 도전을 단번에 압도하고 질서를 잡는 하나님의 힘을 찬양합니다. 또한 우주의 질서자이며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힘과 복을 주신다는 점을 다시 확증하고 있습니다.


찬양을 하나님께 도리는 행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는 일일 뿐 아니라,.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지키고 기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평화로운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께 어떤 마음과 행실로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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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8-01)


나의 힘과 목자이신 여호와

시편 28편 1-9절


찬양은 감사의 표현이요, 믿음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찬양은 이미 얻은 승리로 드리기도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나옵니다. 그것은 승리할 것에 대한 믿음으로 미리 드리는 고백입니다. 오늘 시인은 믿음의 고백으로 찬양을 드립니다.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기 때문입니까?

 

  •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시인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응답을 촉구합니다. 시인에게 괴로움을 주는 악인들의 불의와 부정에 그의 기도 소리를 높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간구 소리를 들으셨고, 시인은 이에 기뻐하며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인(1-2)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흔들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처럼 느껴질 때 참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외적인 시련 못지 않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하는 듯 보여 더 가슴 아픕니다. 시인은 정신이 하도 없어 보입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1-2)

 

시인은 ‘당신께’라고 외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시인의 간구를 들어줄 이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알아주고 간구에 귀 기울이시길 원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산지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산에 있는 반석은 요새나 산성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피난처가 되며 견고한 힘과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반석은 구원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구원’이란 단어와 함께 사용됩니다(시 18:2,46; 62:2,6). 여기서 하나님을 반석으로 부른 것도 사무엘하 22:47처럼 ‘구원의 반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지성소는 성소의 내부에 있는 방으로 언약궤와 그룹이 놓여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성소가 있는 시온이나 예루살렘, 성소 자체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지만, 지성소는 그 중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충만하고 밀집된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성소를 향한 시인의 자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하나님께로 향하려는 의지를 상징합니다. 현재 하나님은 시인에게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의 간구에 반응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결코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귀를 막지 마소서. 내가 지금 부르짖고 있나이다’라고 외치며 하나님의 침묵을 깨뜨리고자 합니다. 손을 들고 지성소를 향하여 자기가 의지하는 분이 하나님뿐임을 상기시키고 하나님의 주위를 돌려 하나님의 응답을 촉구합니다. 덧붙여 하나님이 묵묵부답으로 대하시면 시인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재촉합니다. 이사야 14:15에 의하면 구덩이의 맨 밑바닥이 스올(죽은 자가 거하는 곳)인데, 이때 구덩이에 해당하는 단어가 바로 무덤으로 번역된 단어와 같습니다. 무덤이 죽음의 문턱을 의미하므로, 시인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면 지금 자기가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간구는 은혜를 구하는 간구이며 구원을 구하는 간구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외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통하여 응답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도의 몫은 우리 자신이지만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 덕분입니다.

 

악인의 심판을 촉구(3-5)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악인은 겉과 속이 판이해서 남도 파멸시키고 자신도 망하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고 손으로 정의를 세우심으로 모두를 살리십니다. 악인은 심지 않은 것에서 거두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심은 대로 수확하게 합니다.

 

3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4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5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3-5)

 

시인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원인은 악인들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기를 악인들과 함께 멸망으로 끌어가지 마시기를 요청합니다. 시인은 그들처럼 거짓말을 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가 아니므로 악인의 운명에 휘말려갈 수 없습니다. 이 악인들은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악을 품는 위선자들입니다. 이처럼 악인들은 인간관계에 있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탐욕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이 악인들의 잘못을 따져서 공의로 갚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그에 응당한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이 하나님께 악

안을 심판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사적인 앙갚음 때문이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정의와 공용에 어긋나서 하나님이원하시는 세상의 질서가 어지럽혀지기 때문이다.

5절에서 나타나듯이 악인들의 죄악은 인간관계에서만나타나지 않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지 드러난다. 우선 그들의 악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하신 창조 사역이나 출애급과 같은 구원 사역,하나님의 통치 등을 망각하고 주의를 가울이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으며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간과하고 자기 이익과 자기 자산을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자들이다. 이처럼 악인들이 하나님이세우신 정의와 질서를 개고 하나님의 관계나 다른 아웃과의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허물어뜨리고 다시 세우지 않으실 것이다. 시인은 이 점을 확실히 믿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내려 하나님의 정의와 질서가 재정비되는 것을 보고자 기대한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를 찬양(6-7)

하나님께서는 구한 대로 들으십니다. 힘들다고, 아프다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고, 건성으로 듣고, 두어 번 들으면 지겹다고 귀찮다고 멀리 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잘 들으시고, 들으신 대로 응답하십니다. 시인은 그 하나님 때문에 기ㅃ 어쩔 줄 모릅니다.

 

6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7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6-7)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한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절의 ‘나의 간구하는 소라를 들으소서’가 이제 6절에서 ‘내 간구하는 소라를 들으심이로다’로 변했고 ‘도움을 얻었도다’(절는 말이 추가된 점을 보면 1~2절에서 기도하던 간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침묵을 끼고 응답합니다.

 

시인은 찬양의 첫마디로 ‘여호와를 찬송함이여’라고 외치는데, 이는 ‘여호와를 송축함이여’란 뜻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6-7절에서 ‘송축하라’로 시작한 찬양은 ‘찬양할 것이다’로 고조됩니다. 전체적으로 찬양(6)-찬양의 이유(6)-찬양의 이유(A-TD절의 순서로 전개되어 시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납니다.

 

시인에게 있어 하나님께서는 ‘힘’이고 ‘방패’입니다. 특히 힘과 방패는 용사에게 있어서 자신을 보호하고 적을 물리치는데 필수적입니다. 용사에게 힘과 방패가 있다면, 그는 전에서 든든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 힘과 방패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전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인은 하나님만 의지한 결과 하나님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시인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자(1)가 아니라 기쁨과 생명으로 충만한 자입니다(7).

그는 기쁨과 감사에 겨워 자신만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 노래’라고 지칭하며 다른 사람의 노래와 차별을 두는 것은 자신의 노래에 담긴 내용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구원을 두드러지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힘과 방패로 삼은 자는 이러한 개인적인 노래가 그의 삶 동안 계속해서 나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찬양(8-9)

지도자들은 요새 같은 든든한 힘을 얻기를 바라고, 백성들은 배불리 먹고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기를 구합니다. 참된 기도는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지 않고, 이웃과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로 확장됩니다. 시인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던 위치에서 이제 왕과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8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9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8-9)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힘’과 ‘방패’만이 아니라 그가 선택하신 왕과 그의 모든 백성에게 ‘힘’과 ‘구원의 요새’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을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라고 표현한 데에는 하나님께서 손수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운 자를 통해 그의 백성을 돌보신다는 뜻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윗과 그의 자손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메시아가 그의 백성을 통치하시며 친히 구원의 요새가 되어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업(산업)입니다(신 4:20; 사 19:25; 렘 12:7-9),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왕이며 목자입니다(시 23:1). 시인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고난과 어려움에서 구원하시고 복 주시기를, 그리고 그들의 목자가 되어 영원히 인도하시기를 간구하며 기도를 마칩니다.


흔들리는 세상과 흐느끼는 신인에게 가장 든든한 존재는 반석이신 하나님입니다. 우리 눈에도 보이는 악인의 행실이 하나님의 눈에 괜찮을 리 없습니다. 때가 되면 의인과 악인 사이에서 응답과 심판으로 억울함으로 풀어주시고 힘이 되어주실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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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03-01)


하나님의 심판

하박국 3장 1-19절


고난 당하는 자는 기도하고, 즐거원하는 자는 찬송하나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이 있습니다(약 5:13).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고난 중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고 찬송합니다. 그난 중에도 즐거움으로 찬송하는 영적인 능력을 배우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 하박국의 결론부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하박국의 기도입니다. 그동안 하박국은 하나님과의 두 번의 대화를 가졌고, 그 대화 가운데 하나님께 두 번 질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하박국은 이제 질문 대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에 대한 신뢰의 노래를 부릅니다. 전체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시는 용사로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기도의 시작(1-2)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거나 무능하신 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건이 연결되어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박국은 모든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1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2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1-2)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람, 곧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 일이 수년 내에 부흥하고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곧 유다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이 속히 이뤄지기를 원하다고 기도합니다.

 

(1) 표제(1)

 

3장을 하박국의 기도라고 합니다. 하박국은 1-2장에서는 하나님께 질문을 했었으나, 이제는 기도로 그의 자세가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2장에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반드시 심판하셔서 공의를 세우실 것임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기다리는 것이 의인의 성실함과 믿음인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2) 기도의 시작(2)

 

하박국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식을 들었고 그의 행하심으로 인해 놀랐다고 고백합니다. 바벨론을 불러 유다를 치시려는 계획으로 인해 놀랐다는 뜻입니다. 그러나이제 그는 그 일을 ‘부흥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부흥케 하다’의 원어는 ‘하야’로서 ‘살다’라는 동사의 피엘 명령형입니다. 그 일에 생명을 부여해 달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치시는 일을 행해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게 된 하박국의 믿음을 잘 표현하는 문구입니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기억하소서’라는 2절 끝부분의 표현은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할 것을 이제 받아들이지만, 그 과정 중에 유다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하박국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게 되어 2:40이 말하는 ‘의인’다운 모습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의인 가운데는 현재의 일을 향한 떨림이 있지만 그 떨림을 넘어서는 믿음이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전쟁의 용사이신 하나님(3-12)

하나님의 통치와 권능은 막연한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충분히 눈으로 보고 안 것이고, 지금 우리 삶에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이 오히려 안전을 보장해 주는 큰 힘이 됩니다.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3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셀라)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4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5역병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의 발 밑에서 나오는도다 6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여러 나라가 전율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의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7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는도다 8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 9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화살을 바로 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강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10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11날아가는 주의 화살의 빛과 번쩍이는 주의 창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12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을 두르셨으며 분을 내사 여러 나라를 밟으셨나이다(3-12)

 

3절부터는 열방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시고 그 전쟁을 수행하시는 용사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데만과 바란 산에서부터 오신다고 묘사합니다. 데만은 요단 동편의 에돔 지역이고, 바란 산은 시내산과 에돔 사이에 있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임하시는 분입니다. 3절 하반절부터 5절까지는 하나님의 전쟁하시는 모습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인데,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세상에 가득하고, 하나님의 빛은 마치 날카로운 뿔처럼 빛나며, 그가 가시는 길에는 전염병이 앞뒤에 가득합니다. 전염병은 하나님의 전쟁의 결과 많은 원수들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문구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크시며 원수들을 물리치시는 강한 용사이심을 나타냅니다. 6절은 용사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땅과 열방과 산이 무너지고 엎드러질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7절은 하나님께서 열방을 무너뜨리실 것을 구산과 미디안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열방 중에 하나님을 대적할 이가 없는 것입니다.

8-11절은 하나님의 전쟁하시는 모습을 피조 세계의 여러 요소들을 비유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특별히 이 구절들에서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향해 전쟁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물 이미지는 고대 근동에서 죽음과 무질서를 상징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물을 상대로 승리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물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들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며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입니다. 하나씩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8절은 하나님께서 말을 타시고 병거를 타신다고 말함으로써 전쟁의 이미지를 더 구체화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전쟁은 강들과 바다를 향해서 노여워하심이라고 표현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물들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물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9절은 하나님께서 화살을 꺼내시고 저주의 말씀으로 땅을 쪼개셔서 그 땅의 쪼개진 부분들이 물로 채워져 강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10절은 산들이 주님 앞에서 흔들리고 바다가 주님께 손을 들고 항복했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물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피조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묘사한 것입니다. 11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해와 달과 별들과 같이 빛을 내는 광명체들조차 하나님의 빛 앞에서 멈추었다고 말합니다. 8-11절은 창세기 1장에서 물들을 다스리시고 땅을 드러내시고 광명체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세를 용사의 하나님 이미지로 새롭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2절은 이 문단의 마지막 구절로서, 8-11절에서 하나님께서 창조의 권세로 피조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용사 이미지를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로 연결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짓밟으시고, 열방을 밟으시고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피조세계와의 전쟁 이미지는 결국 바벨론과 같은 열방에게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한 시적 기법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용사이신 하나님(13-15)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 죄에 대해 징계의 채찍을 드십니다. 때로는 욥의 경우처럼 우리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시기 위해 환난을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두 경우 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필요한 구원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도가 믿음 안에서 당하는 환난은 인내와 연단을 통해 구원의 소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13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 14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15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13-15)

 

13-15절은 앞서 묘사된 전쟁의 용사로서의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서술해나갑니다. 13절은 하나님의 전쟁이 바로 주의 백성과 언약백성의 지도자인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집 머리를 치시고, 목부터 발끝까지 모두 발가벗기실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사실상 다윗 왕조의 후계자인 유다왕국의 왕들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13절은 다윗 언약의 회복에 대한 약속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언약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14절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음 받은 자와 언약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의 머리를 창으로 찌르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창’으로 번역된 ‘마태’는 ‘막대기’,‘지파’를 뜻하는 말인데, 9절에서도 사용되었고 ‘화살’로 번역되었습니다. 14절은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무찔러 승리하신 것처럼 다윗 왕국의 대적들을 무찔러 승리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5절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말을 타심으로 바다를 밟고 승리하셨다고 선언하면서, 다시금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는 이미지를 재활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승리하시는 최고의 용사이시기에, 유다 왕국의 대적들에게 패배하시지 않는 영원한 승리의 주인공이십니다. 지금 눈앞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심지어 바벨론이 유다를 이기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끌어가시는 궁극적인 승리의 일부분인 것이라고 하박국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고백(16-19)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은 곳에 이르게 하시고, 두려워하지 않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16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16-19)

 

이렇게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게 된 하박국은 16-19절에서 자신의 현실로 되돌아와서, 그 승리에 대한 확신을 현재의 삶에 적용합니다. 16절에는 유다를 향해 전쟁하러 올라올 바벨론에 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넘어서게 만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함께 어우러져 표현되어 있습니다.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썩이는 것이 뼈에 들어온다는 것은 바벨론에게 패배하게 될 전쟁의 처참함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기다린다’는 것은 그 전쟁에서 결국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유다를 회복시킬 것에 대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신뢰의 이중주는 17절과 18절에서 각각 더 자세히 나타납니다. 17절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이미지를 활용하는데, 이 나무들은 시내산 언약의 축복과 저주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입니다(참조. 신 28:28-32). 이 나무들에 열매가 없다는 것은 단순한 기근 이상의 것들, 즉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여 전쟁에서 패배하게 됨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18절에서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전쟁의 용사되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를 궁극적으로 회복시켜주실 것을 신뢰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 구절이 하박국 3장의 마지막에 나타난다는 것은 장차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 왕국이 다시 회복되어 열방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될 것임을 하박국이 믿음으로 선포한다는 뜻이 됩니다. 하박국은 눈 앞에 펼쳐지는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심하였으나, 하나님과의 두 번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에 복종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신실함으로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고통 속에서 오히려 왕 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겠다는 결단을 노래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믿음의 사람이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 죄에 대한 징계의 채찍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어떤 일이 있든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으리라는 결단을 다시 한 번 확고하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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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02-02)


하나님의 응답(3)

하박국 2장 12—20절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주를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럿이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갑니까? 아니면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갑니까?

 

  • 이어진 하나님의 두 번째 응답의 하반부입니다. 앞선 두 개의 화(6b-8,9-11)와는 달리 여기에 기록된 세 가지의 화는 모든 여호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바벨론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며, 마침내 그는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13-14,16,20).

 

세 번째 화(12-14)

인간들은 작은 업적이라도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인간의 이름을 남기고 영광을 드러내려고 세우는 모든 바벨론 성과 같은 것들은 반드시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그 인간의 영광이 잿더미로 변해갈 때, 하나님의 영광은 온 세상에 편만해질 것입니다.

 

12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3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14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12-14)

 

세 번째 화는 ‘피로 성읍을 건설하고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노예들의 피와 땀, 가혹한 매질과 눈물로 세워진 것들은 그 야망과 더불어 모든 것이 헛것이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피(ימד다임)’는 ‘땅에 흘려진 피’를 의미합니다. 바벨론이 다른 민족들의 피를 흘리고서는 그 피를 가지고 자신의 성읍을 세웠음을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즉, 세 번째 화는 이웃을 멸망시켜 자신을 부요하게 하는 자에 대한 화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화가 오게 됩니다. 민족들은 피곤하고 지칠 정도로 많이 수고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불에 타버리게 될 것이고, 힘들게 노력할지라도 결국은 수포로 돌아갈 뿐인데 이런 일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정녕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14)라고 선포합니다. 바벨론에 임하게 될 저주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곳에서 ‘알다(עדי야다)’는 경험으로부터 근거한 통전적인 지식을 가졌다는 뜻을 지녔으므로, 우리는 ‘모든 열방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민족들은 자신들의 수고가 모두 불쏘시개가 되어버리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이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신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화는 단순히 바벨론을 향한 분노의 심판에 머물지 않고, 모든 열방의 민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는 궁극적인 회복의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참된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은 것처럼 온전히 모두 다 덮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물이 바다를 덮지 않은 곳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지식이 열방 가운데 임하게 되는데, 어느 한 민족 빠짐없이 모든 열방에서 임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큰 성 바벨론이라 할지라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잠시 있다가 불탈 것을 위해 수고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한 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모든 삶을 드립시다.

 

네 번째 화(15-17)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인의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으시고, 죄에 대해 확실하게 보응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재앙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경건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악행을 행한 자들에게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웃과 평화를 누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15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6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17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15-17)

 

네 번째 화입니다. ‘다른 민족에게 수치를 주는 자’에게 내려지는 화입니다. 15절은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는 자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이웃이란 바벨론의 침공을 받은 열방을 뜻하는데 이웃이라고 표현된 것은 바벨론이 그들을 침략에서는 안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15-16절의 문맥은 ‘술 취함’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바벨론이 행한 그대로 그들에게 되갚으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에게 술취하게 하여 그들을 수치스럽게 만든 바벨론이므로 하나님은 그 손의 잔을 바벨론에게 부어 취하게 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벌거벗음’의 이미지 역시 바벨론에게 다시 적용됩니다. 15절에서는 바벨론은 다른 민족의 하체를 드러내어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려 했는데 16절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어 수치스럽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오른 속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도 여호와의 심판을 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잔을 진노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민족에게 부으실 것인데 그러면 그들은 그 포도주에 취하여 비틀거리며 걷게 되고 잘못된 결정과 삶의 행위들을 통해 결국 고난과 수치에 이르게 됩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이 바벨론에게 수치를 더하는 이유는 그들이 강포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강포에 대한 책임을 바벨론에게 물으신다는 하나님의 선언은 하나님께서 1장에 나타난 하박국의 요청 즉 공의를 행해달라는 요청을 행하실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다섯 번째 화(18-20)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 등의 제극들을 통해 모든 우상숭배자들을 멸하시고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참 성전을 세우게 하시고, 그 몸 된 교회가 온 세상에 퍼져나가 결국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악의 세력들은 날뛰고 있지만, 하나님의 권능 앞에 결국은 모두 잠잠해질 것입니다.

 

18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19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20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18-20)

 

다섯 번째 화입니다. 대상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입니다. 18절은 새겨 만든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이라는 두 종류의 우상을 언급합니다. 우상을 만든 자들에게조차 그 우상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우상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들의 형상이 아니고 인간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며 따라서 그것을 만들어낸 장인들에게조차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조차 하지 못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 허무함은 ‘거짓스승’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납니다. 19절은 금과 은을 말하는 못하는 돌과 나무에 입힌 것일 뿐이어서 그 안에는 영혼이 없는 무생물일 뿐이고 따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교훈을 베풀지 못한다. 20절은 다섯 번째 화의 결론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이 그 앞에 잠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벨론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민족들은 하나님 앞에 잠잠해야 한다. 잠잠하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섬기던 거짓 스승 우상들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어서나 들을 수 없는 목석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고 말씀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뜻을 성취해 가십니다. 그 앞에 모든 의문을 잠재우고, 불평을 그치고, 그리고 침묵합시다. 잠잠히 믿음으로 맡기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기다림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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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02-01)


하나님의 응답(2)

하박국 2장 2-11절


 

힘들고 깜깜할수록 하나님께 많은 말을 쏟아냅니다. 정작 하나님의 대답을 오래 기다리지 않습니다. 기도하여 답답한 것을 시원하게 풀어내는 것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느낌으로 기도를 생각한다면, 상담사를 찾아가서 넋두리를 늘어놓으시고, 넋두리이나 하소연을 들으시고 정작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을 만든다면, 이런 태도는 정말로 기도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하박국은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바빌론을 향한 심판을 정당성을 주장하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의 심판이 끝이 아니며, 최종적인 심판의 때가 곧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묵시에 대해서 설명하시고(2-3), 의인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으로 살게 됨을 알려주십니다(4). 또한 악인의 특징을 묘사하신 후(5-6a), 다섯 가지 재앙(6b-20)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2-5)

환경과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묵시를 마음 판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달려가도 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복잡한 환경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말씀에 집중할 때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의인으로서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방자해집니다.

 

2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5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2-5)

 

하나님께서 심판의 때를 정하시고, 그때가 되면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심판을 시행하실 것입니다. 거짓되거나 실망시키는 일 없이 계시하신 대로 성취하실 것입니다. 약속이 얼마나 신실하고 확실한지 보이시기 위해 계시를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선명하게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르기에 더디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 확실한 실현만은 굳게 믿고 인내를 가지고 말끔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⑴ 묵시에 대한 소개(2-3)

 

먼저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묵시’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묵시(ןוזח하쫀)’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내려주시는 ‘환상’을 뜻합니다. 말씀을 통해 현실을 보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현실을 이기는 방법은 말씀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바벨론의 공격이라는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현실을 이기는 길은 오직 말씀뿐이었습니다. 성경은 말씀을 통해 현실을 보는 것을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3). 바로 심판이 임하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묵시를 판에 선명하게 기록해서 달려가면서 읽어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환상의 내용은 악한 자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내용인데, 바벨론을 향한 선포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바벨론에 대한 심판은 ‘정한 때가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바로 심판이 응답이 되지 않게 보일지라도 언젠간 반드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환상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에 거짓된 것이 결코 아닌데, 다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바벨론을 데려와 유다를 심판하시는 일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라야 바벨론을 심판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2) 악인과 의인의 비교(4)

 

악인과 의인을 대비합니다. 즉 악인은 교만하며 정직하지 못합니다. 즉 교만하며 속과 겉이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1장에서 말하고 있는 공의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에 비하여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입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신실함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신실함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벨론을 심판하는 그 방법과 그 시기를 선택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신실함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의인입니다.

 

다섯 가지 ‘화 있을진저’: 첫째와 둘째(6-11)

성도는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자가 들끓어도 믿음으로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는 항상 눈에 보이는 악한 권력자가 아니라 눈에 뵈지 않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악인에게 집중하면 불만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만, 믿음은 우리를 견고하게 서게 합니다.

 

6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7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8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9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0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6-11)

 

2:6-20에는 ‘화 있을진저’가 다섯 차례 나와 단락을 형성하며, 단락마다 바벨론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이 단락은 하나님의 둘째 대답(2:2-5)에 대한 부가적인 계시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고발된 바벨론의 죄악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1) 첫째 ‘화 있을진저’(6-8)

 

교만하고 거짓된 바벨론을 향한 첫째 ‘화’는 그가 여러 나라를 노략했음을 지적하면서 똑같이 앙갚음당할 것을 예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모습을 ‘자신을 넓혀가며 족한 줄 모르고 열방들을 모으는 자’(5)로 표현합니다. 바벨론은 욕심과 교만으로 인해 스스로는 넓어지고 성장하는 줄 알지만 결국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앙갚음은 열방이 바벨론의 패망을 속담과 수수께끼로 만들어 조롱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열방과 민족들을 쓸어 모으던 자(5,6)는 그 열방을 비웃었지만, 때가 이르면 패망하여 열방의 웃음거리(오바댜 12-13; 나훔 3:18-19; 예레미야애가 1:7)가 될 것입니다.

6절의 ‘언제까지 이르겠느냐?’는 ‘이제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열방이 장차 바벨론을 충자하며 조롱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6절 하반절부터 첫 번째 화를 선포합니다.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모으는 자를 향한 저주입니다. 다른 나라를 멸망시켜서 자기 것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사실상 빚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벨론은 자기 소유가 아닌 열방의 땅과 백성과 재산을 모아 늘려가는 자이며, 담보(‘볼모’로 번역됨)를 늘려 빚을 많이 진 자와 같습니다(6). 채무자들이 갑자기 일어날 것이고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바벨론을 괴롭힐 것이며 결국 바벨론이 노략을 당하게 될 것임을 선언합니다(7). 그리하여 그동안 바벨론에게 침략 당했던 민족들로부터 남은 자가 나와서 바벨론을 침략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벨론이 그들의 피를 흘리면서 강포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즉 첫 번째 화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공의를 행하셔서 그들의 행한 대로 갚으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8).

이런 사람에게 갑자기 채무자들(‘억누를 자들’)과 압제자들이 들이닥치듯, 바벨론은 약탈당할 것입니다. 바벨론이 위세를 높여가며 열방을 공격할 때, 백성을 죽이고 땅, 성읍, 주민에게 강포(폭력)를 행했으므로, 이제 반대로 열방의 남은 백성이 바벨론을 노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메대와 바사 연합국을 일으켜 바벨론을 약탈할 계획을 이미 갖고 계셨습니다(예레미야 25:12,14; 50:10).

 

(2) 둘째 ‘화 있을진저’(9-11)

 

둘째 ‘화’는 ‘자기 집을 위해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바벨론 특히, 왕의 이기심과 탐심을 책망합니다. 하지만 악인은 자신의 악으로 인해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재앙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바벨론은 제 나라와 왕조만 귀하게 생각해, 재앙이 닥칠 때 피할 있도록 높은 데 둥지를 틉니다. 마치 에돔이 높은 산 바위틈에 자리 잡고 적군이 쳐들어올 수 없다고 자만한 것처럼(오바냐 3), 바벨론 왕 또한 적군이 틈탈 수 없는 곳을 마련하고 부당한 이득을 취해 재산을 증식합니다. 그러나 이기심과 탐욕의 결과는 수치와 범죄일 뿐입니다. 그가 백성들을 가지 치듯 잘라낸 것이 도리어 그의 왕조에 수치를 가져오고, 자신에게 죄를 짓게 만듭니다. 즉, 바벨론에게 심판으로 돌아온다는 의미입니다. 바벨론이 많은 열방을 멸망시킨 것이 사실은 자신에게 수치를 불러오게 만드는 충고였음을 조롱하는 뉘앙스로 알려줍니다. 열방을 취한 것이 잘한 행동인 줄 알았기에 충고가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결국은 자신을 멸망시키는 수치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10).

11절에서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나무('집’으로 번역됨)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라는 문장은 담의 돌과 나무로 만든 집의 들보가 빠져 무너지는 모습으로, 바벨론 왕조의 몰락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바벨론의 집이 무너지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담에서 돌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성벽의 돌들이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목재 구조물에서 들보가 응답한다는 것은 목재로 지은 집들로부터 들보가 무너져 내린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화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악한 이득을 취하는 자들 곧 바벨론에게 있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부당한 일들의 연속입니다. 부정적하고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정직한 자들은 손해를 보는 일이 흔합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믿음이 요청되는 상황입니다.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악의 최후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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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01-02)


하박국의 질문(2)

하박국 1장 12절-2장 1절


 

우리는 부모님에게서 안정감을 누립니다. 그것은 우리의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 직위가 어떤 위치든지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부모님에게서 안정감을 찾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부모님에게서 안정감을 누리는 것은 부모님께서 힘이 강하거나 재물이나 능력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다만 부모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믿음과 신뢰가 안정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안정감을 누리는 것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토록 변함없으실 사랑으로 안정감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 하나님과 하박국의 두 번째 대화로 하박국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자신의 생각을 요청하면서 유다 왕국을 돌보아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성과 정결하심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공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보겠다고 선언합니다.

 

하박국의 질문(2)(1:12-2:1)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범죄한 사실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를 징계하시려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방 민족을 세우신 것은 더 이해되지 않습니다. 단순한 징계의 도구를 넘어 바벨론은 다른 여러 나라들까지 정복하며 승승장구합니다. 하박국은 화가 날 정도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입니다. 악을 싫어하시고 패역을 참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이런 상황에서도 잠잠 하시는지, 마치 보지 못하는 것처럼 가만히 계시는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 모든 것의 대답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12○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13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14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15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17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2:1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1:12-2:1)

 

하박국은 하나님의 결정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신뢰하였습니다. 바벨론은 자기 힘을 신으로 삼았지만, 오직 한 분 여호와만이 만세 전부터 역사의 주인으로 계셨으며,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거룩한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1) 하나님의 영원성에 기초한 질문(12)

 

하박국은 첫 번째로 하나님의 영원성에 기초하여 질문합니다. “주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라는 하박국의 질문은 수사학적 질문을 사용하는데, 수사학적 질문이란 긍정과 부정을 뒤바꾸고, 의문문과 평서문을 뒤바꾸어, 문장의 의미를 강조하는 기법입니다. 즉 “주는 만세 전부터 계시나이다”의 의미를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박국은 왜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까? 12절 중반부에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라는 구절을 함께 생각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서기관의 정정”으로 불리는 본문으로, 원래는 “주여 당신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십니다”라는 본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죽음에 이르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한 표현이 아닙니다. 문장 그대로 하나님은 죽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며, 그분의 존재하심은 끝나지 않습니다. 즉 시간이라는 개념이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를 내리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2절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심판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고,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여기서 ‘그들’은 5-11절에서 언급된 ‘바벨론 제국’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을 세우신 이유를 ‘심판’과 ‘경계’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판’으로 번역된 원어가 바로 ‘미쉬파트’인 것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이 ‘미쉬파트’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 구현된 상태 혹은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한 도구 및 기준을 뜻합니다. 4절에서 ‘정의’로 번역되었고 7절에서 ‘당당함’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미쉬파트’가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잘못된 ‘미쉬파트’의 기준을 가진 바벨론이 유다 땅에 오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12절에서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사용하시는 기준은 바로 이 ‘미쉬파트’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에 합당하다고 판단되는 범주 안에서만 바벨론을 사용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 하반절에 나오는 ‘경계하다’의 원어인 ‘야카흐’는 ‘꾸짖다’, ‘책망하다’라는 의미인데, ‘미쉬파트’와 비슷하게, 바벨론을 사용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의 범주를 제한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하박국은 바벨론을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을 꾸짖고 책망하시는 범주, 즉 하나님께서 바른 기준으로 세상을 지도하시는 그러한 범주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기에, 그래서 변치 않으시는 분이기에, 하나님의 ‘미쉬파트’는 올바르게 실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7절에 의하면, 그들의 마쉬파트는 자신 스스로가 기준이 되는 미쉬파트이기에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데려와 이스라엘에 ‘미쉬파트’를 세우신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정결하심에 기초한 질문(13)

 

하박국은 이어서 하나님의 ‘정결하심’에 기초하여 하나님께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눈이 ‘정결하시기 때문에’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셔서는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먼저 하박국은 하나님의 ‘눈’에 대해서 말합니다. 상반절을 직역해보면, ‘하나님의 눈은 악을 바라보기에는 너무나도 정결하시다’가 됩니다. 하나님의 눈은 악과는 접촉하실 수도, 악을 바라보실 수도 없다는 개념입니다.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라고 번역된 부분에서 ‘차마 못하신다’라는 부분의 원어는 ‘야칼’의부정어법인데 ‘~할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패역함을 볼 능력이 없으시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패역과 함께하실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시적 표현인비다. 하박국은 이런 두 가지 표현들을 통해 하나님과 악/패역은 공존할 수조차 없음을 강력하게 부각시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연이어, 하나님께서 그러한 약하고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고 계신다고 선언합니다. 특별히 악인이 의인을 집어삼켜도 하나님께서 ‘잠잠하시다’라고 말합니다. 아무런 일도 행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신다는 것으로, 정결하신 눈을 가지신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없는 일이라는 주장입니다.

 

(3) 낚시에 비유한 질문(14-17)

 

이제 하박국은 14-17절을 통해서 바벨론의 행위가 얼마나 악한지를 묘사합니다. 기본적인 이미지는 바벨론을 낚시하는 악한 어부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14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바다의 고기처럼,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처럼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논법입니다. 사람이 ‘바다의 물고기’, 그리고 ‘다스리는 자 없는 기어 다니는 것’이 되었다는 것은 창세기 1장의 문화명령을 뒤집어놓는 개념입니다. 창세기 1:26-28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땅의 기는 것을 다스리게 하셨는데, 하박국은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을 바다의 물고기와 땅의 기는 것처럼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고기나 기는 것과 같은 인생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15-17절은 바벨론 제국이 그런 물고기와 기는 것들을 낚시한다고 설명합니다. 15절은 여러 종류의 낚시 도구를 언급합니다. 낚시, 그물, 투망으로 모으면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16절은 바벨론이 이러한 자기의 소득을 기뻐하면서 그물과 투망에게 제사를 드린다고 말합니다. 이런 결과를 주신 분은 분명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데, 바벨론은 투망과 그물이 자신들에게 물고기를 주었다고 여겨 그것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물과 투망으로 인해 살찌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5-16절은 하나님께 대한 하박국의 통렬한 비판입니다. 바벨론에 유다 왕국을 넘겨주면, 바벨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에게 모든 영광을 돌릴 것이기에,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은 송두리째 빼앗겨버리는 비통한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는 것입니다. 17절은 바벨론이 그렇게 한 나라를 살육한 후에 다른 나라를 계속 살육해나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권세는 없어지고, 온 땅들이 모두 바벨론의 손에 넘어갈 수 있으니, 그런 일은 결코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14-17절은바벨론을 악한 낚시꾼으로 묘사하면서, 자신에게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지식 없는 나라임을 드러낸다. 이런 바벨론에게 유다를 넘겨준다면, 그것은 온 땅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열방을 회복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구속의 뜻을 위반하는 행위가 될 것임을 주장합니다. 하박국의 주장은 매우 논리적이며, 듣기에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4)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선언(2:1)

 

하박국은 이런 주장들을 모두 펼친 후,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파수하는 곳과 성루에 서서, 과연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불러오실지 지켜보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대답하실지를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 자신 역시 다시금 대답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계속해서 논쟁하겠다는 하박국의 의지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하박국의 불평과 분노가 가득 담긴 표현입니다. 하박국 자신의 판단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불러오겠다 하신 1:5-11의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인 '미쉬파트'에 결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을 바꾸시기 전까지, 하박국은 자신의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언젠가 우리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고, 우리는 주를 찬미함으로 구의 구원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애통하며 기다리고, 기도하며 기다리고, 힘써 일하며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탄식의 기도에 응답하실 날이 곧 도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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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13-01)

 

 


교회를 위한 희생

고린도후서 13장 1-13절


 

사역자의 존재 목적은 성도의 온전함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것이고, 그의 삶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사역자는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지를 사도 사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 고린도후서 12:12-21에 이어 세 번째 방문에 대해 다루고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내용은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1-10절은 바울의 세 번째 방문과 관련해 거짓 사도들과 그 영향에 흔들리는 교회에 대해 단호히 경고합니다. 10장부터 시작한 거짓 사도들 문제를 일단락 짓습니다. 둘째, 11-13절은 편지 끝부분입니다. 마지막 당부와 문안 인사와 교회를 위한 축복의 기도로 편지 전체를 종결합니다.

 

바울의 세 번째 방문 계획과 경고(1-10)

교회의 거룩함을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권징이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권징 뒤에는 영혼과 교회에 대한 사람이 전재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도를 비난하고 교회에서 개인의 유익을 구했던 자들을 정식으로 벌하겠다고 경고하면서도 교회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1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2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3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4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5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6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7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8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9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10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10)

 

바울은 고린도 방문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경고와 권면의 말을 합니다. 만약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의 방문 계획과 반대자들을 향한 경고(1-4)

 

세 번째 방문과 관련해 마지막 권고를 이어갑니다. 12:14에서 시작한 내용이 점점 무거워져 이 부분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바울은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위에 세우라는 신명기 19:15을 인용함으로 시작합니다. 세 번째 방문을 재판 상황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러고는 엄중히 경고합니다. 앞서 두 번째 방문 때 경고했었고 아직 교회에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말하는데, 전에 죄 지은 자들과 남은 모든 자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2:5-11에서는 바울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용납하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바울 자신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일관성 없어 보이지만, 이 둘의 상황이 다른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앞부분은 세 번째 편지로 교회 대부분이 바울에게 돌아온 상황(참조, 7:11-12)인 반면, 이 부분은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배경으로 합니다. 진리로 돌아온 교회는 소수의 반대자들을 너무 심하게 책망하지 말아야 하지만, 만일 그들이 끝까지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거짓 사도들과 함께 교회를 흔든다면 바울 자신이 그들을 징계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그들에게 부화뇌동한 교인들도 포함됩니다. 바울이 상황을 이토록 엄중하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바울에게서 메시아가 말씀하시는 증거를 찾기 때문입니다(3).

짧은 표현이지만, 교회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요소를 응축하고 있습니다. 첫째, 거짓 사도들과 추종자들이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흔들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 의해 세워졌고 이미 대부분 성도들이 바울과의 갈등을 접고 그를 따르고 있는 상황임에도 바울의 권위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둘째, 권위 문제의 핵심은 바울에게 메시아의 말씀이 있는가 입니다. 단순히 사역자로서의 호불호 문제가 아닌, 진리 문제입니다. 만일 바울에게 메시아의 말씀이 없다면, 그가 전한 모든 것과 그 결과는 무위로 돌아갑니다. 이는 그가 세운 교회의 정체성 문제로 비화하여 심각해집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 모임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들은 사랑으로 겸손히 섬기는 바울의 모습을 업신여깁니다. 메시아에 대한 추가 설명(3b)과 바울이 용서하지 않겠다는 근거를 말한 부분(4)에서 반복된 ‘약함’ 표현은 반대자들의 이런 목소리를 반영한 듯합니다. 아마도 바울의 삶과 태도가 긍정적 승리와 성공만을 추구 하는 그들과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편지 내내 약함과 환난을 참 사역자의 모습으로 소개한 것도 이런 배경과 관계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들에 대해 메시아는 그들의 악에 대해 약한 자가 아닌 능력으로 존재하신다고 말합니다(3b). 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4a).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메시아 안에서 약하기에 그분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으로 독자들을 위해서 다시 살 것입니다. 바울의 겸손한 섬김은 무능함의 증거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진리로 주님의 부활을 가능케 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며(5:11), 그분의 능력은 약함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12:9-10).

바울의 이런 표현은 그가 사도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 권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 곧 모든 거짓을 깨는 그분의 능력(10:3-6)으로 반대자들을 용서치 않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 독자를 향한 권면들(5-6)

 

반대자에게서 모든 독자들로 대화 상대를 확장해 두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는 독자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5). 자신이 믿음에 있는지 시험하고 스스로 검증하라고 합니다. 검증 내용은 메시아가 그들 속에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고전 1:2) 성령의 은사를 풍성히 경험하고 있는 신령한 자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고전 1:5-6; 3:1). 하지만 바울의 진단과 처방은 적절합니다. 만일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십자가의 진리를 세상에서의 번영과 안정을 추구하는 것과 섞으면 메시아는 자연적으로 뒷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약 관계를 깨는 우상숭배입니다. 메시아의 사람임을 검증하는 것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거짓 사도들 영향의 본질을 분명히 알고 조심하며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참조. 6:157:1). 둘째 권면은 바울과 동역자들에 대한 것입니다(6), ‘우리’는 그 시험과 검증을 통과한 사람임을 알고 인정하라고 합니다. 명령 대신 다소 부드러운 소망 표현으로 전달하지만, 독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거짓 사도들이 아닌 참 사도인 바울에게 돌아와 진리 안에 서는 것입니다.

 

(3) 독자를 향한 소망과 기도(7-9)

 

독자를 위한 중보기도를 소개합니다. 그들이 어떤 악도 행하지 않게 도와주시기를 간구합니다(7).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떠나 바울이 전한 진리 안에서 온전하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9).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간구하는 것이기에 굳이 그 내용을 알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내용을 소개한 것은 간구 내용이 중요한 것임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종의 가르침입니다. 그렇기에 독자들 역시 그 요소를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 동일하게 주의 도우심을 구하며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중보기도에는 또 다른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독자를 향한 바울의 마음입니다. 두 가지를 통해 나타납니다. 첫째, 기도의 목적을 부연합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것은 자신이 신앙 안에서 검증된 자(참조. 6)임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말 그대로 독자들이 선을 행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바울이 주님께 합당하지 않은 자라고 독자들이 오해하더라도 말입니다. 기도의 모든 초점이 독자의 유익임을 말합니다. 둘째, 왜 기도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부연합니다. ‘우리’는 진리에 반하는 것들을 할 수 없고 진리를 위해서만 행하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약할 때 독자들이 강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역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전달합니다. 반대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바울은 진리 안에 있고, 무능한 것 같은 그의 섬김은 하나님의 능력이 독자들에게 머물러 그들도 진리 안에서 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독자들은 이런 바울의 마음에 어떤 모습으로든 응답해야 합니다.

 

(4) 거짓 사도 문제에 대해 편지 쓰는 이유(10)

 

마지막으로 편지를 쓴 이유, 특별히 거짓 사도들과 관련한 내용을 언급한 이유를 말합니다. 세 번째 방문 때 회개하지 않는 독자들을 주의 권세를 따라 징계하지 않기 위해 아직 떨어져 있을 때 회개하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만일 듣지 않으면 엄중한 주의 징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전제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거짓 사도들의 비난, 곧 바울은 떨어져 있을 때 강하고 함께 있을 때는 무력하다는 말이 틀린 것임을 확인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문안 인사 전 편지 끝까지 진지함과 엄중함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편지의 마무리 마지막(11-13)

다른 사람을 향한 무지가 이해로, 무관심이 관심으로, 무시가 배려로, 무례함이 존중으로 변화됩니다. ‘그대가 곧 또 다른 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나에게도 일어나는 일이 됩니다.

 

11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11-13)

 

권면들과 문안 인사로 전체 편지를 정리합니다. 마지막 권면은 일련의 명령으로 전달합니다.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라, 위로를 받으라, 같은 생각을 하라, 평안하라. 일반적 권면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거짓 사도들 문제로 어수선한 교회에게 온전함으로 인한 기쁨과 평안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후 바울은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의 임재를 빌고 독자들에게 서로 문안하라고 하고 모든 성도의 문안을 전달합니다. 마무리는 삼위 하나님을 통한 축복으로 끝맺는다. 구약에 제사장의 축복이 있다면(민 6:24-26), 신약에서는 삼위 하나님을 통해 복을 빕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축도의 기원입니다.


사도는 고린도 성도들의 기쁨과 온전함, 위로와 평안을 구합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할 때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진정한 사역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그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온 삶으로 대리하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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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12-02)


재물이 아니라 사랑을 원한 바울

고린도후서 12장 14-21절


 

억울해도 참아야 할 때가 있고, 끝까지 변호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내 명예가 달린 일이 있고, 가족과 공동체의 명예를 위한 일도 있습니다. 바울은 왜 그토록 길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자신을 변호하였습니까? 그가 진정으로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그게 그리고 중요합니까?

 

  • 12:13까지 거짓 사도들과 관련한 어리석은 자랑을 마친 바울은 이 부분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세 번째 방문 계획을 언급합니다. 13:10까지 이어집니다. 내용이 상당히 엄하고 진지합니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4-18절에서 바울의 방문이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님을 설명함으로 거짓 소문에 대해 반박합니다. 둘째, 19-21절에서 바울의 자랑이 독자를 위한 것임을 부연하고, 자신의 방문이 심각한 것이 되지 않게 하라고 경고합니다.

 

세 번째 방문에 대한 오해 반박(14-18)

자식은 부모로부터 얻을 유익을 생각하는 때가 많지만,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만을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사랑할수록 더 많이 내어줍니다.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재물을 소비하고, 자신까지 내준다고 말합니다.

 

14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5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16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17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18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14-18)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에 한 말이나 행위에 대해서 들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안하였던 이유를 설명한 후에 고린도 교회 방문을 앞두고 그가 가진 염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사람들에게 돈은 아주 민감합니다.

 

(1) 세 번째 방문이 경제적 이익 추구와 관련 없음을 설명(14-15)

 

거짓 사도들과 관련해 자신의 어리석은 자랑을 다룬 바울은 이 부분부터 교회 방문에 대한 주제로 옮겨갑니다. 그것은 세 번째 방문입니다.

첫 방문은 선교여행을 통해 처음 고린도에 간 것입니다. 두 번째 방문은 의도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원래는 연보와 관련해 방문할 계획이었습니다(고전 16:5-7). 그런데 교회가 바울의 두 번째 편지에 순종하지 않아 예정에 없던 방문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 방문은 바울과 교회 모두에게 고통스러웠습니다. 교회가 여전히 바울에게 순종하지 않았고, 둘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채 에베소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방문 때 바울은 마게도냐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들렀다가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계획을 말했던 것 같습니다(1:16). 역시 연보와 관련한 방문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마저 수정되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 다시 방문하면 덧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2:1). 대신 디도 편으로 눈물의 편지 또는 혹독한 편지라고 불리는 세 번째 편지를 보냈고, 바울은 에베소에서 드로아를 거쳐 마게도냐로 갔습니다(2:12-13). 거기서 고린도에서 온 디도를 만났고 교회의 회개와 바울에 대한 좋은 마음이 다시 생긴 것에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7:6-7). 연보를 위한 세 번째 방문은 기쁨으로 할 수 있을 듯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변수가 생겼습니다. 여전히 바울을 거절하는 소수가 있었고 거짓 사도들의 영향력으로 교회가 흔들리는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세 번째 방문은 기대와 우려가 함께 있는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디도 편에 보낸 세 번째 편지를 통해 교회 대부분이 바울에게로 돌아섰기 때문에 연보 문제가 잘 진행될 것 같은 기대가 있지만(9-10), 거짓 사도들 문제는 우려스럽습니다. 바울은 이 우려의 마음을 갖고 세 번째 방문 계획을 다룹니다. 세 번째 방문을 준비하면서 바울이 언급한 첫 내용은 독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14).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조심스러운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은 그의 고린도 사역 특징 때문입니다. 모든 교회 사역에 적용한 것은 아니지만, 고린도 교회에서는 사역비를 받지 않고 섬겼습니다. 두 가지를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기근으로 인한 교회의 어려운 사정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 안에 있는 경쟁 분위기입니다. 만일 바울이 어느 가정 교회에서 사역비를 받으면 그것으로 경쟁의 빌미를 줄 수 있음을 알았던 듯합니다. 그런데 독자는 바울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무보수로 섬긴 것을 무능함과 사도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참조. 고전 9장). 여기에 바울이 교회 돈을 갈취했다는 거짓 사도들의 악한 비난이 첨가되었습니다(16). 당연히 바울로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세 번째 방문이 연보를 위한 것이기에 오해 받지 않게 해야 합니다. 독자들에게 어떤 보수나 경제적 유익을 받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계속 부연합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독자들의 재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14). 독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잘 서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도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마치 고린도 성도의 작은 재물이 아니라 큰 재물을 원한다고 말한 것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해 돈을 모을 의무가 있지 아이가 부모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첨가합니다(14).

고린도 성도와의 관계를 영적 부모-자식 관계로 설명해서(6:13: 참조. 고전 4:15) 고린도 성도를 사랑하고 돌보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전달합니다. 더 나아가 고린도 성도의 영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쁘게 허비할 것이라고 반복해서 표현하고, 바울 자신이 고린도 성도를 사랑했기에 자신은 얼마나 더 사랑 받겠는가라는 수사적 질문을 첨가합니다(15). 고린도 성도의 재물에 전혀 관심 없음을 계속 강조합니다. 하지만 강조가 깊어질수록 역으로 그만큼 이 영역에 대해 독자들이 많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 바울 방문과 관련한 악의적 소문에 대한 반박(16-18)

 

이번에는 바울에 대한 악의적 소문에 대해 반박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경제적 짐은 지우지 않았음에도, 어떤 이, 아마도 거짓 사도들 중 하나가 바울이 교묘한 자가 되어 독자들을 속이고 돈을 갈취했을 것이라고 말한 듯합니다(16). 사역비를 받지 않았음에도 생활에 필요한 돈이 바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빌립보 교회의 헌금이지만, 앞에서는 무보수로 일한다고 말하고 뒤에서는 고린도 교회 돈을 속여 빼앗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 번째 방문 계획을 말하면서 왜 교회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설명을 먼저 했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18절까지 강한 어조가 담긴 일련의 질문으로 반박합니다. 모두 긍정이든 부정이든 독자 스스로 대답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14-15절에서 독자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첫째 질문은 바울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자신이 보낸 사람들을 이용해 독자를 착취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부정 대답을 요구하는 ‘메’로 시작하는 질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일이 없음을 확신하며 독자들에게도 동일한 대답을 하게 합니다. 둘째와 셋째 질문은 바울이 보낸 디도와 또 다른 형제에 대한 것입니다. 디도가 독자를 착취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역시 부정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그런 일이 없다고 답해야 합니다. ‘우리’(바울과 동역자)는 같은 성령과 같은 발자국으로 걷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긍정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같은 성령으로 동일한 태도로 살고 사역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디도와 한 형제의 이야기를 한 것은 그들이 연보의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교회에서 돈을 갈취하지 않았다면, 그들을 보낸 바울 역시 그런 의도가 전혀 없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거짓 사도들이 비난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울의 자기자랑 변호와 경고(19-21)

우리는 항상 자기정당화에 익숙하고 또 능숙합니다. 자신의 입장만을 강변하거나 진실을 가리고 악을 은폐하는 자기합리화로 공동체를 어렵게 하는 일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때, 기쁨의 교제가 아닌 엄한 책망만 가득한 시간이 될 것을 우려합니다.

 

19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20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21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19-21)

 

바울은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이 있음을 깊이 자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에 관한 책임입니까? 그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대한 책임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을 면하기 위해서 교회 앞에서 자신을 변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 바울의 자기 자랑에 대한 변호(19)

 

자기 자랑에 대한 바울의 변호와 독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먼저 바울의 자랑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을 교정합니다. 바울은 독자들이 오랫동안 ‘우리’가 자기 방어를 하고 있다고 여겨왔음을 지적합니다. 바울의 자랑에 대한 독자들의 부정적 인식을 전제합니다.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바울의 입장을 변호하고 방어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짓 사도의 경우와 두 가지가 다릅니다. 첫째, 바울의 자랑은 메시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한 것입니다. 자기만을 내세우는 그들과 다릅니다. 어리석은 것이지만, 신적 존재들이 인정한 것입니다. 둘째, 그의 자랑은 독자들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고린도 성도를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과 다릅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자들아’를 첨가함으로 독자들을 향한 마음을 전달합니다.

 

(2) 바울의 방문이 심각한 것이 되지 않게 하라는 경고(20-21)

 

이제 바울은 어조를 바꾸어 고린도 성도들에게 경고합니다. 직접 명령 대신 ‘내가 갈 때에 … 두려워한다’는 표현을 반복함으로 전달합니다. 두 번째 방문과 비교해 세 번째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두 번째 방문은 서로에게 고통스러웠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진리를 거절하고 여전히 세상을 따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거만함과 혼란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두 번째 편지(고린도전서)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 역시 그런 독자들 모습이 힘들었습니다. 그는 그 상황을 하나님이 자신을 낮춘 것으로 묘사합니다. 수치스럽고 아픈 경험이란 말입니다. 세 번째 방문은 달라야 한다. 비록 두려워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렇게 만들지 말라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세 번째 편지를 통해 회복된 관계가 거짓 사도들 때문에 다시 깨지는 일이 없도록 독자 편에서 다시 회개하고 거짓 사도들의 영향에서 돌아와야 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영혼만 생각했습니다. 공동체만 생각했고, 그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 안에서 기쁨으로 교제하는 것만 원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복음을 전한 이유요,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요, 자신을 변호한 이유였습니다. 그 교제 속에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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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12-01)

 


경험이 아니라 약함을 자랑한 바울

고린도후서 12장 1-13절


 

무엇이 진정한 은혜입니까? 어쩌면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 이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안목을 갖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하여 그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형통할 때도 하나님께 찬미할 수 있는 심령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은 어떻게 그 은혜를 경험하였습니까?

 

  • 11:22에서 시작된 구체적인 자랑 내용을 이어가고 마무리합니다. 내용은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10절에서는 셋째 하늘을 경험한 이야기와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의 놀라움 때문에 교만하지 말라고 주신 육체의 가시를 언급합니다. 둘째, 11-13절에서는 11:1에서 시작한 바울의 자랑을 마무리한다. 어리석은 일임을 알면서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변론하고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육체의 가시(1-10)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겨서도 안 됩니다. 누군가의 경험을 부러워하고 경험한 누군가를 우러러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지도자를 참다운 지도자가 되게 하는 것은 신비 체험이 아닙니다.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14년 전에 아무나 하기 어려운 환상과 계시를 목격하고 경험합니다.

 

1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10)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신비한 체험을 말하면서 초점이 자신에게 맞취질까 봐 자신을 ‘그’라고 표현합니다. 셋째 하늘에까지 갔던 신비한 체험을 말하는 것은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라고 말합니다.

 

(1) 14년 전의 경험(1-4)

 

자랑다운 자랑을 한다. 의무나 당위성을 표현하는 동사(데이 Mei)를 사용해 꼭 자랑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1절). 14년 전, 곧 주후 42년경 시리아-길리기아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경험한 주의 환상과 계시에 대한 이야기다. 하늘 성소 가장 안쪽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낙원이라고 불리는 셋째 하늘까지 붙잡혀갔었다. 육체로 갔는지 아니면 유체이탈처럼 영으로 갔는지 모르는, 오직 하나님만 그 정황을 아는 신비한 경험이었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들었는데, 모두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바울의 이 자랑에는 두 가지 포석이 있는 듯하다. 첫째, 거짓 사도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것이다. 이 경험은 인간적 자랑을 중시하는 독자나 거짓 사도들 모두에게 부러운 이야기다. 둘째, 참 자랑이 무엇인지 가르치려는 것이다. 바울은 이 경험을 소개할 때 자랑에 대한 그의 관점을 유지하며 전달한다. 인간적 자랑은 어리석은 것이고 약한 것을 자랑함으로 하나님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세 가지 방법으로 전달한다. 1) 셋째 하늘 자랑도 무익한 것이라고 평한다(1절). 놀라운 내용임에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익하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2) 1인칭 대신 3인칭으로 표현한다. 자기 이야기지만, '나'가 직접 경험한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자랑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 3) 더 자세한 이야기를 자제하고 이후 경험한 또 다른 수치스러운 사건을 첨가한다(5-10절), 앞내용의 반전이고 바울이 전하려는 핵심 의도를 담고 있다.

 

(2) 계시 절제: 약한 것을 자랑한다(5-6)

 

바울의 놀라운 경험 자랑을 절제하겠다고 한다.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성공담이 아닌 실패나 약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다. 바울은 앞서 언급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랑할 것이지만, 자기에 대해서는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한다(5절). 바울과 그 사람이 서로 다른 듯 생각하게 한다. 맞다. 바울은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분리한다. 과거의 놀라운 경험을 지금 자기를 높이는 데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자랑은 어리석은 것이고 거짓 사도들과 달리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려는 의도를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둘째, 자기의 경험에 과도한 집중이 몰리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바울의 경험은 사실이다. 놀라운 것이기에 충분히 자랑할 만하다. 하지만 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6절). 거짓 사도들이 이런 경험을 했으면, 자랑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독자의 환심을 얻을 좋은 무기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달랐다. 신비한 경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고 있다. 삶과 사역의 초점과 방향을 어디에 둘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7절부터 또 다른 경험을 소개함으로 이 원리를 설명한다.

 

(3) 육체의 가시(7-10)

 

11:32-33과 12:1-4에 이어 세 번째 경험담입니다. 첫 번째 같은 실패담이고, 두 번째 이야기의 반전입니다. 바울의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습니다. 몸 상태와 관련해 바울을 상당히 힘들게 했던 것 같습니다. 주먹으로 치듯 아주 거칠게 바울을 대한 것입니다(7). 심지어 그것을 위해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간구했을 정도였습니다(8).

14년 전 셋째 하늘 계시와 연결 지어 말한 것을 보면 육체의 가시는 주후 42년에서 머지않은 시간에 경험한 듯합니다. 아직 시리아 길리기아사역 중이거나 혹은 안디옥 교회 사역 초기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지역 1차 선교여행(주전 46-48/49년)이전 사건이며, 하나님께서 고쳐주지 않으셨다고 했기에 그 몸 상태로 선교여행 했을 듯합니다. 어쩌면 갈라디아서 4:13-15에서 말한 육체의 병, 특히 눈과 관련된 몸 상태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바울의 초점은 육체의 가시 자체가 아닙니다. 그와 관련한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먼저 깨달음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의 가시에 대한 해석입니다(7).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교만을 방지하는 하나님의 배려로 묘사합니다. 차음부터 이렇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에 대한 많은 생각 뒤에 알게 되었을 수도 있고 혹은 세 번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그렇게 해석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놀라운 계시가 교만한 자랑이 되어 자신을 망칠 수 있다는 것과 육체의 가시를 교만을 방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안배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해 성공의 자랑과 교만의 연결을 경계합니다(7). 깨달음과 관련한 두 번째는 약함과 관련한 하나님의 뜻입니다(8-9). 육체의 가시로 인한 고통이 커서 그것을 위해 세 번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에게 충분하며 약함 안에서 능력이 온전해지기 때문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표면적으로 육체의 가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실패한 기도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이나 기대했던 기도 응답 모습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원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강함과 성공보다 하나님의 함께함이 중요하고, 성도의 약하고 수치스러운 것 안에서 그분의 참 능력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울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강해야만 하고 극복하고 성공해야만 하는 세상 방식 대신 메시아 안에서 약하고 실패한 것 같은 모습을 자랑하고 기뻐합니다(9). 성공의 개념이 세상과 확연히 다릅니다. 산상수훈의 팔복 내용처럼(마 5:1-12) 사역이나 일상 삶의 모습에서 메시아를 위해 욕을 당하고 박해와 곤고함을 경험하는 것을 성공과 복과 승리로 여기는 것입니다(10). 바울이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11:30;12:5)은 이런 이유에서다. 거짓 사도들과 독자에게는 이상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참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바울에게는 자부심의 비밀입니다.

 

바울의 자랑 마무리(11-13)

자식이 고통당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식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아비의 마음 때문입니다. 섬기는 것은 겸손과 인내의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사랑으로 오래 참았던 바울과 달리 거짓 사도들은 성도들에 대한 사랑 없이 자신을 드러내기에 급급했기에 오래 참음의 덕목이 없었을 것입니다.

 

11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12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13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11-13)

 

사도의 표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것뿐 아니라 오래 참는 것도 포함합니다. 사랑으로 오래 참았던 바울과 달리 거짓 사도들은 성도들에 대한 사랑 없이 자신을 드러내기에 급급했기에 오래 참음의 덕목이 없었을 것입니다.

 

(1) 거짓 사도들과 관련한 바울의 자기 변론(11)

 

자랑을 마무리하고 독자의 바른 판단을 촉구합니다. 먼저 자랑 이야기에 대해 정리합니다(11). 거짓 사도들처럼 자신의 장점과 사역의 성공을 떠벌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어리석은 자가 되어 그런 자랑을 늘어놓았다고 합니다. 원치 않았지만 ‘너희’의 상황, 곧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들의 자랑에 흔들리는 독자들의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바른 분별을 도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르)가 있습니다(11). 자화자찬하는 거짓 사도들(10:12)과 달리 독자들의 칭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고, 지극히 큰 사도라 칭하는 자들에 비해 부족함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11). 바울은 여기에 ‘비록 아무 것도 아닌 자이지만’을 첨가해 거짓 사도들은 아무것도 아닌 자기보다 더 형편없는 자들임을 전달합니다. 훨씬 부족한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흔들리는 것을 방치할 수 없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2) 바울이 참 사도인 표지(12-13)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참 사도라는 것을 강하게 전달하고 질문 형식으로 독자의 바른 판단을 촉구합니다(12-13). 그가 참 사도인 증거는 기사와 능력을 독자 가운데서 행한 것입니다. 인간적 지혜와 말의 화려함이 아닌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입니다(참조. 고전 1:2; 4-5).

그런데 그 일을 ‘모든 참음’으로 했습니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주님과 교회를 위해 견디며 수고했다는 의미입니다(4:7-15; 6:4-10). 바울은 계속해서 수사적 질문과 확증으로 독자를 위한 자신의 헌신을 강하게 호소합니다(13). 자신이 부담 주지 않으려 한 것을 제외하고, 독자가 다른 교회보다 부당하게 대우받은 것이 있습니까? 그런 불의한 처사를 용서하라는 것은 교회에 해를 끼친 것이 없다는 반어적 표현입니다. 교회는 바울이 행한 것을 똑바로 이해하고 바르게 판단해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축복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능력과 지혜를 구하고 사모할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환경을 주셔서 우리가 잘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 당신을 주셔서 동행하고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참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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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11-02)

 


고난을 자랑스럽게 자랑한 바울

고린도후서 11장 16-33절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의 자랑을 하는 바보가 되어보려니 이해해 달라고 합니다. 거짓 사도들처럼 자랑의 시늉을 내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합니다. 곧장 자랑거리도 아닌 것을 자랑합니다. 이제 세상 보기에도 어리석은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우리의 자랑거리는 왜 진정한 자랑이 됩니까?

 

  • 거짓 사도들과 대조되는 바울의 자랑거리를 소개하며 12:13까지 이어집니다. 본문 내용은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6-21절에서는 비록 어리석은 것이지만 자기자랑을 하겠다고 합니다. 거짓 사도들의 자랑을 독자가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2-33절에서는 바울의 자랑거리를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거짓 사도들에 비해 더 많이 수고한 것을 말하지만, 복음과 교회를 위해 받은 고난과 염려가 핵심입니다. 수치스럽게 박해를 피한 내용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랑(16-21)

우리의 자랑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어리석인 일인 줄 알면서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자랑은 주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성도들을 향해 노심초사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마음이며 목자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16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7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18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9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21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16-21)

 

은혜 받은 사람은 자랑할 수 없다고 강조했던(고전 1:26-31) 바울이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일인 줄 알면서도 자랑하는 것은 자신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복음을 들은 고린도 성도들이 흔들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1) 육체에 따라 하는 자랑(16-18)

 

자랑에 대한 11:1-4 내용 중 바울 편에서의 이유를 제외한 두 가지를 재차 언급합니다. 그중 하나는 어리석은 자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를 어리석은 자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고는 혹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자신을 어리석은 자로 여기라고 합니다(16). 이상한 표현입니다. 몇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 사역자의 자기 자랑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울이든 거짓 사도들이든, 그 내용이 인간적으로 놀랍고 화려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늘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자랑은 주님이 아닌(17) 육신을 따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8). 둘째, 어리석은 자랑을 하겠다고 합니다. 자랑한다고 해서 마치 이 일이 어리석은 줄 모르고 하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16a). 그런 줄 알면서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리석은 것이기에 하려는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어 그들 방식으로 누가 진짜 사역자인지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음껏 자랑할 수 있도록 자기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라고 말합니다(16b).

 

(2) 어리석은 자랑의 이유(18-20)

 

11:1-4 내용과 관련해 재차 설명하는 두 번째는 거짓 사도들을 잘 용납하고 있는 독자의 상태입니다. 바울이 다른 이들처럼 육신을 따라 자랑하려는 핵심 이유입니다(18). 이 부분은 11:4과 초점이 다릅니다.

앞부분이 예수와 복음과 성령이라는 진리 차원에 대해서라면, 이 부분은 독자에 대한 기짓 사도들의 태도에 집중합니다. 다섯 개 조건절로 묘사합니다. 거짓 사도들이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속임수로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독자 얼굴을 때려도 용납합니다(20).

바울의 태도와 많이 다릅니다. 바울은 독자 위에 군림하거나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지 않았고(1:26), 오히려 종처럼 섬겼습니다(4:5). 복음을 이익을 위한 통로로 사용하지 않았고(2:17), 빼앗는 대신 무보수로 사역했습니다(11:7-9). 고린도 성도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두 번째 방문 이후 여행 계획을 변경해서라도 상처주지 않으려 했습니다(1:23). 또한 세 번째 편지를 쓸 때도 혹시 독자의 마음이 아플까 봐 많은 걱정과 눈물로 썼습니다(2:4). 모두 그들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독자들은 누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지혜 있고 신령한 사람이라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참 사역자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19).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관점 대신 인간적 조건을 앞세운 경쟁과 성취를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거짓 사도들처럼 독자를 대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부끄럽게도 그들이 비웃은 것처럼 자신은 너무 연약해서 독자들을 착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21). 자신에 대한 그들의 조롱으로 그들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대신 바울은 어리석은 자랑에 대해서는 담대히 하겠다고 합니다.

 

바울의 자랑거리(22-33)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수많은 위험과 억울한 오해와 온갖 역경 속에서도 바울의 생명을 지켜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약한 성도들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교회를 든든히 세우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처한 상황과 형편, 자신이 가진 자원과 능력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를 지키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22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30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31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32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22-33)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주의 나라를 위해 일함 헌신적인 열심과 그 과정에서 있었던 고난을 열거합니다. 좋은 소식은 전하는 것이 악의 세력들에게는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때리며 위협하기 하고, 심지어는 죽여서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1) 바울의 자랑거리 1: 유대교 유산에 대해(22)

 

자랑의 구체적 내용이 시작됩니다. 질문 형식으로 거짓 사도들의 자랑을 하나씩 반박하며 자기자랑을 소개합니다. 첫 영역은 유대교 유산에 대해서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자랑을 비유대인 독자들에게 늘어놓은 듯합니다. 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 사람이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그들의 자랑에 대해 바울도 그렇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3:4-6에서 말한 교회를 어지럽힐 수 있는 유대교 대적자들과의 비교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둘은 두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 빌립보서와 달리 유대교에 있을 때의 더 나은 모습, 곧 베냐민 지파이고 탁월한 바리새인이었음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둘째, 빌립보서에서는 유대교 유산에 대해 바울이 훨씬 낫다는 말을 하지만, 여기서는 단지 ‘나도 그렇다’고 말할 뿐입니다. 이 차이는 거짓 사도들의 강조점을 추론하게 합니다. 그들은 유대인임을 자랑했지만, 빌립보서의 경우와 달리 유대교 유산 자체에 집중하지 않은 듯합니다. 핵심은 유대인으로서 메시아의 일꾼, 곧 사도 사역에 대한 자랑입니다. 바울이 더 긴 지면을 할애해 비판한 것(23-30)과 그들과의 비교우위를 표현한 것(23)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바울의 자랑거리 2: 메시아 일꾼으로서의 사역(23-29)

 

거짓 사도들의 자랑의 두 번째 영역에 대한 반박입니다. 메시아의 일꾼에 대해서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스스로를 메시아의 사역자라고 칭하는 것에 황당해 합니다. 심지어 자기가 그들의 표현을 인용한 것을 정신 나간 말을 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23). 그들은 절대로 그런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반박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은 그들에 비해 훨씬 뛰어난 사역자이며 더 열심히 일했다고 말하고 자기 자랑을 길게 나열합니다. 그들보다 감옥에 더 많이 갇혔고 매도 더 많이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더 많았습니다(23). 구체적으로 유대인에게 서른아홉 대의 매를 다섯 번 맞고, 태장을 세 번 맞고, 한 번 돌로 맞아죽을 뻔했고, 세 번 파선했고, 하루 밤낮을 바다 위에서 떠다녔습니다(24-25). 사역 과정에서 많은 위험들이 있었고(26), 수고하고 애쓰면서 많이 자지 못했고 목마름과 추위와 굶주림을 겼었던 적이 많았습니다(27).

그런데 자랑하는 내용이 이상합니다. 무용담처럼 고생한 것뿐입니다. 거짓 사도들의 자랑이 이런 식이었을지 모릅니다. 나름 겪었던 어려움을 부풀려 자기들이 얼마나 수고했는지 자랑했을지 모릅니다. 바울은 그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자랑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주의 도우심에 대한 내용과 사역의 성공담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이런 것들에 집중해 자기자랑을 끌고 갔을 것입니다. 주의 도우심을 통해 은혜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고, 성공담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주의 도우심을 언급하지 않았고, 설사 그것을 말해도 하나님께 초점 두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1:9; 12;1-5). 자기가 사역한 교회가 문제없이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28-29). 약함과 어려움이 있고 실족함도 있다고 합니다. 사역을 잘못해서 교회에 문제가 많은 듯 들릴 수 있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교회를 위해 많이 염려하고 있음을 자랑합니다. 바울은 긍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방식의 질문들로 교회를 향한 자기 마음을 증거합니다(30). 이미 독자들도 바울의 마음을 알고 있음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익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20)과 완전히 다릅니다.

 

(3) 바울의 자랑거리 3: 수치스러운 탈출(30-33)

 

어리석고 이상한 자랑이 계속됩니다. 거짓 사도들과 같은 장점과 성공 사례 대신 수치스러운 실패담이 이어집니다. 첫 사례는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사람을 피해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가 도망친 사건입니다. 주후 37/38(혹은 33/34)년의 일입니다. 이 사건도 뒤집어 보면 바울의 사역에 대한 긍정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레다 왕이 다스리던 아라비아(나바티안 왕국)에서의 3년 사역이 성공적이어서 왕이 직접 다메섹까지 사람을 보내 바울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내용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막힌 도우심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실패자처럼 수치스럽게 도망친 것만 이야기합니다. 오직 약한 것을 자랑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초점 맞추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자랑은 마치 취업문을 계속 두드렸지만 여전히 원서를 내야 하는 취업준비생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과정은 하나님 앞에서 성실했지만 결과가 없기에 간증의 자격조차 없는 자로 취급받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그랬는데, 요즘 교회는 실패를 말하는 바울을 좋아할까 아니면 믿음의 성공을 말하는 거짓 사도를 좋아하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수고의 목록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것은 아주 아름다운 일이고 모두가 동참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랑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수고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꼐서는 신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아니라 그 충성된 수고를 가능케 하신 하나님만이, 그분의 능력과 자비와 오래 참으심만이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 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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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11-01)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랑한 바울

고린도후서 11장 1-15절


 

선악을 결정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미 그 기준을 알려주시고 따르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믿은 것을 당신 맘대로 당신 열정을 다 동원하여 믿어도 지혜가 없으면 스스로 망하는 길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왜 지혜 없음은 불신앙이 되었습니까?

 

  • 10장에 이어 거짓 사도들 문제를 계속 다룹니다. 이 부분부터 그들이 헛된 자랑으로 교회를 속이는 것과 관련해 바울 자신의 자랑거리를 소개하며 12:13까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자랑을 말하는 이유에 대해 다루며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4절은 자신을 자랑하는 첫째 이유를 설명합니다. 교회를 아끼기 때문입니다. 5-15절은 바울 자랑의 둘째 이유입니다. 거짓 사도들이 헛된 자랑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으려는 시도를 무력화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의 어리석은 자랑의 이유(1) (1-4)

예수님께서는 성도와 교회의 남편이십니다. 정결한 신부를 바라는 것이 남편의 마음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정결하기를 바라십니다. 정결하다는 것은 신랑만을 생각하며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린도 교회 중의 어떤 사람들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마음을 쉽게 빼앗겼습니다.

 

1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2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1-4)

 

바울은 자기변호와 자랑이 어리석게 보이는 일인 줄 알면서도 진리를 벗어나 어리석은 길로 가는 성도들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권한을 거듭 강조하기로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정결한 신부의 모습으로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뵈올 수 있게 하려는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1) 바울의 호소: 나의 어리석은 자랑을 용납하라(1)

 

거짓 사도들의 자랑에 맞서 바울의 자랑을 서술해갑니다. 자신의 자랑을 약간 어리석은 것으로 묘사하고 독자가 용납해주기 원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la). 두 가지 안타까운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독자의 상태입니다. 사역자가 인간적 조건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일입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독자에겐 다릅니다. 오히려 그런 자랑을 사역자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독자의 ‘어리석은’ 관점을 비판합니다. 둘째, 바울의 상태입니다. 교회를 세운 사도이기에 추천서 쓰듯 자신을 소개하거나 자랑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자랑으로 거짓 사도들과 진흙탕싸움을 해야 합니다. 독자들의 낮은 눈높이에 맞춰 그들이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12). 독자를 향한 바울의 사랑과 간절함입니다(11). 이어 바울은 ‘나를 용납하라’는 명령을 덧붙임으로 그 싸움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보입니다(16).

 

(2) 권면의 이유 1: 교회를 위하는 바울의 마음(2-3)

 

자랑할 내용을 소개하기 앞서 왜 그 일을 하는지를 부연합니다. 하나님과 독자의 언약 관계를 유지시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마치 순결한 처녀를 메시아에게 드리듯 독자를 한 남편 메시아에게 약혼시킨 것으로 묘사합니다(2).

결혼은 언약 관계의 대표적 상징이며(렘 31:32), 특히 성도와 메시아를 신부와 신랑으로 묘사한 것은 새 언약 관계의 전형적 표현입니다(마 22:2; 롬 7:1-4). 복음을 통해 독자들이 구원 과정을 경험하도록 이끌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거짓 사도들의 영향력 때문에 독자와 메시아의 관계가 위태로워졌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가면 뱀에게 미혹된 하와가 하나님을 거절하고 선악과를 먹었듯(창 3:1-6) 독자의 사고가 메시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 수 있습니다(3). 마치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린 것과 같습니다. 방치하면 언약 관계에 충실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과정을 막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그런 결과까지 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사랑을 거절한 언약 백성에게 맹렬한 질투로 경고하고 징계해서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자에게도 동일한 질투의 사랑을 표현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따라 어리석은 자랑을 함으로 독자들이 돌아오도록 돕고 있습니다(2). 바울의 초점은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추구하는 거짓 사도와 다릅니다.

 

(3) 권면의 이유 2: 교회의 상황(4)

 

바울이 자랑할 수밖에 없는 실제 이유는 교회가 전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짓 사도들이 와서 바울이 선포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전해도 용납하고, 그들이 받지 않은 영을 받게 해도 용납하고, 그들이 듣지 못한 복음을 전해도 용납했습니다. 그것은 새 언약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있게 하는 것, 곧 구원 과정과 전혀 상관없는 것인데도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과 비교하며 거짓 사도들의 영향력을 선호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이 바울이 하나님의 질투로 독자를 대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전개할 거짓 사도들의 자랑에 맞서는 바울의 자랑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어리석은 자랑한 이유2(5-15)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 그리고 성도들을 온전히 세우는 것, 이것이 바울에게는 우선순위였습니다. 그래서 가치 있는 것을 전하면서 값없이 전하고, 때로는 부족할 때에도 그 부담을 성도들에게 지우지 않았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마게도냐 성도들을 통해서 바울의 부족한 것을 채워 주었습니다.

 

5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6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7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8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9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10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11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12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 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13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5-15)

 

사도 바울에게 내세울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도 잘 못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은 외양이 아니라 내용입니다. 바울은 외양이 아니라 내용을 전합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교회를 고상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1) 바울의 변호: 약한 웅변술에 대해 거짓(5-6)

 

사도들이 비난하는 바울의 약점에 대해 변호합니다.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에 비해 조금도 부족함 없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지극힌 큰 사도’란 거짓 사도들이 바울과 비교해 스스로를 평가한 말일 것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영역을 변호합니다. 첫째는 바울의 말재주입니다(5-6). 그들은 바울의 화술을 지적하고 사역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합니다. 실제로 바울의 말은 유창한 웅변술과 수사학을 사용해 사람들을 설득하는 형식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편지에서도 그 문제가 지적되었습니다(고전 2:1-2). 바울은 구차한 변명 대신 자신은 유창한 화법에 문외한이라고 자인합니다. 하지만 진리의 지식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거짓 사도들과 비교할 수 없는 지식을 가졌고 독자들에게 여러 방법으로 그 지식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복음 증거와 관련해 두 번째 편지에서 이미 변호했던 것입니다(고전 2장). 그럼에도 똑같은 내용으로 다시 변호해야 할 만큼 독자들은 여전히 세상의 평가 방식을 못 버리고 있습니다.

 

(2) 바울의 변호: 섬김과 사랑의 태도에 대해(7-12)

 

거짓 사도들의 비난에 대해 바울이 변호하는 두 번째 영역은 그가 교회를 섬기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겸손함, 특히 사역비를 받지 않고 섬기는 것에 대해 무능하다고 여기거나 혹은 교인들의 돈을 착취하면서도 받지 않은 척한다고 말한 듯합니다(12:16). 전자에 대해서는 이미 두 번째 편지(고전 9장)에서 언급했던 것인데, 여전히 거짓 사도들의 말에 속고 있습니다. 후자는 확인하면 바로 알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은 반문합니다. 복음을 값없이 전함으로 자신을 낮추고 독자를 높인 것이 죄입니까(7)? 예수의 주 되심과 예수를 위해 독자의 종이 된 것을 선포하며(4:5), 그에 부합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 잘못입니까? 독자가 대답해야 합니다. 이 모습은 거짓 사도들과 대조되는 것입니다(20). 그러나 먼저 독자나 거짓 사도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을 해명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사역비를 받지 않았는데도 돈이 있습니다. 천막 짓는 일을 했지만(행 18:3), 그것으로 모든 경비를 충당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디선가 돈을 받아야 했습니다. 기근으로 어려움 겪는 독자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사역비를 받지 않았다는 말에 대해 거짓 사도들은 거짓말이라고 비난한 것 같습니다.

이에 바울은 독자를 섬기기 위해 쓴 경비는 마게도냐 교회(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헌금이라고 설명합니다(9; 참조. 행 18:5; 빌 4:14-15). 심지어 그 돈은 독자를 위해 다른 교회에서 탈취한 것이라고 묘사합니다(8). 설사 그들의 비난처럼 바울이 교회 돈을 탈취했다 해도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조심했고 계속 조심할 것이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메시아로 인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기에 더욱 선포에 부합하는 태도, 곧 고린도 교회(아가야 지방)에서 무보수로 사역하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고 합니다(10,12). 하나님 앞에서의 자랑이며, 독자를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워 자신의 태도의 진실성을 확증합니다. 이런 해명은 거짓 사도들의 비난을 막고 그들의 영향력 확산을 차단하기 위함입니다(12).

 

(3) 거짓 사도들에 대한 비판(13-15)

 

12절과 연결해 거짓 사도들을 비판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며 메시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평가합니다. 스스로 메시아의 사도로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를 전하기는 한 것 같습니다. 메시아를 전하는 거짓 사도가 존재합니까? 가능합니다. 사탄 자체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에, 사탄의 사역자가 의의 사역자로 가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의 이런 비판은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 사역자와 관련해 예수와 복음 전파 자체보다 어떤 예수와 어떤 복음을 무슨 목적으로 전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거짓은 교회 밖뿐 아니라 소위 정통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기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도와 관련해 교회는 계속 분별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바울은 지금 자랑이라는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진심은 안 믿어주고 의심하면서 거짓 사도들에게는 잘도 속았습니다. 광명의 천사인 사탄의 하수인들에게 속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국은 심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속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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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10-01)


거짓 사도들에게 대한 경고

고린도후서 10장 1-18절


 

그리스도인은 늘 웃고 양보하고 이해하고 화낼 줄도 모르고 그래서 늘 손해 보는 사람의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속지 말라. 그 반대 이미지도 천지입니다.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분노하고 대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 연보에 대한 설명 이후 10장부터 주제와 분위기가 바뀝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사도들과 그들 영향에 흔들리는 교회 문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시작 부분입니다. 내용은 크게 둘로 구분됩니다. 첫째, 1-11절은 바울을 폄하하는 거짓 사도들에게 경고하고 그들을 따르지 말라고 독자들에게 권합니다. 둘째, 12-18절은 거짓 사도들과 바울을 비교하여 누가 참된 사도인지를 설명합니다.

 

연보 참여를 독려(1-11)

좋은 리더는 굳은 확신을 가지면서도 온유함으로 성도를 권면합니다. 고린도 교회 일부 거짓 사도들은 바울을 평가하기를,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온갖 뒷말을 하면서도 직접 대면하여서는 어떤 말도 못하는 비겁한 사람이라고 치부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을 헐뜯는 사람들은 매섭게 대할 것이지만, 사랑하는 성도들에게까지 그렇게 하지 않도록 돌이키라고 경고합니다.

 

1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3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7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8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9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10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11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1-11)

 

고린도 교회를 설립한 후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동안,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당파로 갈려져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 배후에는 거짓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남아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서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독자를 향한 바울의 엄중한 권면(1-2)

 

바울은 주제와 논조를 바꾸어 말을 이어갑니다. 사역 변호와 연보는 부드럽게 기술했지만, 이 부분부터는 다소 거친 논조로 비판과 책망을 사용합니다. 교회가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절은 시작 부분입니다. 상황의 심각성과 바울의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상황에 대해서는 바울과 고린도 성도와 거짓 사도들 세 그룹이 언급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과 떨어져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성도와 함께 있고 바울 일행을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고 폄하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의 경고는 독자와 대면하면 무력하지만 떨어져 있을 때는 담대하다는 평가를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조롱하는 표현인 듯합니다(10). 바울은 ‘대면 무력함/떨어져 있음 담대함’이라는 그들 표현을 역으로 사용합니다. 떨어져 있는 지금은 담대함 대신 메시아의 온유와 관용으로 권하지만(1), 장차 교회를 방문해 대면할 때는 무력함 대신 거짓 사도들에게 담대히 대하듯 독자를 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권면하다’와 ‘간구하다’ 동사를 사용하지만, 그 내용은 명령 이상의 경고입니다. 계속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따르면 바울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몸소 알려주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이 싸우는 방법(3-6)

 

어떤 관점으로 상황을 보고 어떻게 대할지를 설명합니다. 거짓 사도들 문제는 단순히 사람과의 다툼이 아닙니다. 이 세상 신(4:4)이 통치하는 어둠의 영역과의 전쟁입니다(3-4a; 참조. 6:14-7:1). 그렇기에 육신의 몸을 갖고 있지만 세상 방법으로 싸우지 않습니다(3). 인간적 논리나 힘 같은 것으로는 승산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서 그분의 능력을 무기 삼아 전투에 임해야 합니다. 어둠의 영역에 속한 견고한 진들을 파괴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4b-6절은 그 능력이 실제로 어떻게 일하는지를 설명하고 고린도 성도의 상황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의 지식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고, 마치 전쟁 포로를 사로잡아 왕이나 총사령관에게 무릎 꿇리듯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메시아에게 복종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은 거짓 사도들의 모든 헛된 생각과 이론을 완전히 깨고 승리할 것이며 그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독자들이 거짓 사도들의 영향력에서 돌아오면 거짓 사도들만 심판 받고, 그러지 않으면 그들과 함께 심판 받을 것입니다. 상당히 심각한 경고입니다. 바울의 이런 말은 교회의 현 상황에 대해 세 가지를 전달합니다. 첫째, 자신의 경고는 개인적 감정이나 다툼의 문제가 아니라 어둠의 영역과의 전쟁 수행임을 알립니다. 둘째, 그 전쟁의 핵심은 사고와 생각과 관련한 진리 차원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기에 독자의 순종은 단순히 거짓 사도들 혹은 바울이란 사람을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 비진리 가운데 어느 쪽에 설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셋째, 그들에게 붙어 함께 멸망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3) 거짓 사도들 문제에 대한 독자들의 바른 판단 촉구(7-11)

 

본격적으로 사도권을 자랑(변호)하기에 앞서 독자들의 바른 판단을 주문합니다. 눈에 보이는 분명한 증거들로 판단하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자기가 메시아에게 속한 줄로 확신한다면, ‘우리’도 그렇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기를 바랍니다(7). 거짓 사도들의 자랑에 대한 응답으로 12절부터 제시할 바울의 자랑과 관련 있습니다. 그들은 추천서를 포함한 여러 인간적 조건을 자랑하여 참 사도라고 주장하고 바울의 권위를 폄하합니다. 문제는 독자들이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독자들에게 바르게 판단하라고 명령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판단을 돕기 위해 자기에게 주신 권세, 곧 교회를 세우는 사도의 권세를 과하게 자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8). 그리고 자신의 자랑을 그저 편지로 위협하는 정도의 것으로 치부하지 말라고 덧붙입니다. 편지는 강하지만 막상 만나면 약하고 말도 형편없다는 거짓 사도들의 비방 때문입니다(10). 바울은 경고합니다. 떨어져 편지 쓰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하는 사람은 동일인입니다! 똑같이 강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거짓 사도들과 독자 모두가 들어야 합니다. 바울의 자랑은 상황을 심각한 것으로 보는 바울의 1차적 처방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해결이 안 되면 대면해서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자랑과 관련한 바울과 거짓 사도들과의 대조(12-18)

사람의 평가를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오직 그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인가?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잘못된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해서 오해를 낳고 있지는 않습니까! 일부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신비적인 체험, 혈통적 우월, 세상 학문을 자랑하며 바울을 비하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바울은 자기 자랑만 일삼는 사람들과 대조하여 권고합니다.

 

12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13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5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16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17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8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12-18)

 

바울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옳다 하는 자들과 같은 부류에 들거나 견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자신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과 판단하시는 분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1) 거짓 사도들의 자랑(12)

 

거짓 사도들의 자랑에 대한 바울의 응답이 시작됩니다. 거짓 사도들은 바울을 업신여기면서 자신들은 바울보다 더 위대한 자라고 스스로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칭찬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자기 자랑에 불과할 뿐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감히 그들과 비교할 수 없다’고, 그들과 동급으로 놓거나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얼핏 보면 자신을 수준 낮은 자로 묘사한 듯하지만, 이는 그들의 오만함과 뻔뻔함을 극적으로 들어내는 반어적 표현입니다. 그들과 격이 다르다는 것을 비웃듯 강조합니다. 그들은 자기 기준으로 자기를 재고 자기와 비교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12).

 

(2) 바울의 자랑(13-16)

 

바울은 자신의 한도 이상으로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영역의 범위를 따라 자랑한다고 합니다(13).

바울이 거짓 사도들과 대조하는 것 같은데, 대조점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몇 가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첫째, ‘카논’의 이해입니다. 원문은 바울이 ‘카논’의 범위를 따라 자랑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규범이나 기준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최근에 발견된 문헌 용법에 의하면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본문은 후자의 의미입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영향력 범위에 따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개역개정이 15절과 16절에서 카논을 ‘규범’이라고 번역한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처럼 활동 범위 또는 지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재거나 측량하는 것과 관련한 용어 사용입니다. 시편 16:6에서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 준 구역을 기업으로 말한 것처럼, 이런 측량의 모습은 영향력의 범위와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전달합니다. 거짓 사도들은 스스로를 기준 삼아 헤아리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범위로 합니다. 기준점과 적용이 다릅니다. 이 두 요소를 종합하면 거짓 사도들의 문제는 단순히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이나 걸게 없는 자랑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랑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분량 안에서만 자랑하지만, 거짓 사도들의 자기 자랑은 한계를 모르는 과도한 자기 자랑이라고 비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영향력 범위에 자기 기준으로 들어와 영향력을 미치고, 그것으로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범위 중 하나가 독자들, 즉 고린도 교회입니다(13). 그렇기에 그들은 바울이 세우고 수고한 교회에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복음과 상관없는 다른 영향력을 끼치고, 마치 훌륭한 일을 한 양 스스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15-16). 숟가락 얹기를 넘어 도둑질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함부로 범위를 넘어 독자에게 간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 사역자로서 복음을 가지고 갔습니다. 또한 당시 고린도 성도들은 다른 사역자의 영향권 안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자랑은 다른 교인을 빼앗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세운 고린도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계속 성장하고 거짓 사도들 대신 바울의 영향력이 그들 안에서 더 커지게 하려는 소망의 표현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다른 이들이 사역한 곳에 가서 자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으로 가서 복음 사역이 확장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이런 대조는 참 사역자 바울의 몇 가지 사역 원리를 보여줍니다.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을 따라 사역합니다. 둘째, 복음과 바른 진리를 증거하고 사람들을 이익의 통로로 여기지 않습니다. 셋째, 교인 뺏기는 없습니다.

 

(3) 하나님 앞에서의 참 자랑(17-18)

 

바울은 마지막으로 앞 내용을 짧게 부연 설명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해야 하고, 그분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진짜입니다. ‘주 안에서’는 ‘주께서 정해주신 한계 안에서’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자신의 업적이나 위대함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사역을 잘 감당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께서 우리를 칭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거짓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통성도 없고 그분이 인정하는 결과도 없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잘 분별해야 합니다. 거짓 사도들 같은 엉터리 사역자도 문제지만, 분별력 없는 무지한 성도들도 문제입니다.


바울은 본질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달리 행동하면서도 일관성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상대가 눈에 보이는 대적자들이나 반대하는 성도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근본적으로 영적인 싸움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상대할 수 있는 싸움이며, 주 안에서 이긴 싸움임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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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9-01)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연보 조언

고린도후서 9장 1-15절


 

헌금은 우리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우리가 기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기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것을 빼앗으시는 분이 아니시라 더 좋은 것으로 풍성히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 연보(헌금)에 대한 설명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5절은 8:16-24과 연결해 고린도에 사람을 보내는 이유와 독자의 연보 참여를 재차 요청합니다. 둘째, 6-15절은 연보에 대한 제반 요소를 부연합니다. 자원함 넉넉함으로 할 것(6-7절 참조. 8:12)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공급(8-11)과 비유대인 독자들의 연보를 통한 예루렘 유대인 신자들과의 연합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결과(13-15)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보 참여를 독려(1-5)

하나님께서는 즐겨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거나 부족하여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며 모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기에 헌금의 액수가 아닌 헌금의 마음을 보십니다. 혹시 당신은 그런 하나님께 너무 인색하지 않습니까?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 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연보를 권하고 있습니다.

 

1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2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3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4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5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1-5)

 

공동체의 견고한 연대를 위해서 가자가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마무리 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1년 전에 예루살렘을 위해 헌금을 작정했지만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선동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만일 고린도 교회가 헌금을 중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마게도냐 성도들도 낙심하여 헌금을 포기할지 모릅니다.

 

(1) 연보에 대한 1년 전 결심을 상기시킴(1-2)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는 것은 쉽지만 한 번 시작한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작정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고린도 교회를 중심으로 아가야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서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거짓 선생들 때문에 잠시 멈추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8:24의 두 내용과 연결해 독자의 연보 참여를 권합니다.

그 내용은 1) ‘우리’가 독자들에 대해 여러 교회에 자랑한 것과 2) 바울의 자랑이 사실인 것을 연보사역 수행자들에게 보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것은 3-5절에서 다루고, 이 부분은 첫 번째 내용을 부연합니다. ‘연보’라는 말 대신 ‘성도 섬기는 일에 대해’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처럼(8:4) 이 일이 다른 이들을 향한 독자의 사랑의 발로임을 확인시키는 것입니다(8:8, 24).

이어 바울은 그 일에 대해 독자들에게 다시 쓰는 것은 사족이라고 말합니다. 1년 전에 독자들이 간절함을 갖고 그 일을 시작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편지(고전 16:1-4)에서 특별한 언급 없이 연보 준비를 언급한 것을 보면, 이미 그 전에 바울이 연보에 대해 교회에게 말한 듯합니다. 독자들은 기꺼이 동의했고, 두 번째 편지에서 구체적 방법과 그 일을 맡을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기꺼이 참여한 것에 대해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자랑했고, 고린도 교회의 열심이 선한 자극제가 되어 여러 교회들이 참여한 듯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독자들이 바울의 다른 가르침을 거절하여 갈등이 생겼고 연보도 중단되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고린도 교회에게서 자극을 받아 연보에 열심인데, 정작 고린도 교회는 주춤한 것입니다. 이제 그 갈등이 회복되었습니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과거의 열심을 상기시켜서 그 일을 다시 진행시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 형제들을 보낸 이유(3-5)

 

바울은 연보 사역을 위해 디모데와 다른 두 형제를 포함한 세 명의 형제들을 파송한 이유를 부연 설명합니다. 그는 ‘그런데’라고 반의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절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아가야 지역의 성도들에게 실망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열심을 내었지만, 그들이 계획했던 헌금을 기대한 만큼 실행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가 방문하기에 앞서 이 형제들을 먼저 보내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연보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열심을 다른 교회들에게 자랑한 것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8:24의 두 번째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체면을 살리려고 연보 참여를 권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독자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형제를 보낸다고 말하고(3), 마게도냐인들과 함께 고린도에 갔을 때 준비되지 않아 ‘우리’가 확신하고 있던 것, 곧 독자들이 준비했을 거라고 믿은 것을 부끄럽게 만들지 말라고 하기 때문입니다(4). 하지만 바울은 그런 사역자가 아닙니다. 그런 행동은 복음 장사를 하는 거짓 사도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평가만을 기대하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5:9-10). 고난과 수치를 당하더라도 예수님의 주 되심이 드러나고 예수님을 위해 고린도 성도들 섬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4:5, 12-15). 고린도 성도들이 증인입니다. 더 나아가 8-15절에서 연보의 목적을 설명할 때 바울의 유익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다른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들어야 합니다. 바울이 아닌 고린도 성도들의 체면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비록 연보에 대한 첫 권유는 바울이 했지만, 실제로 그것에 응답해 적극적으로 시작했던 쪽은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그들의 동참을 귀히 여겨 마게도냐 교회들에게도 소개했는데, 막상 준비가 안 된 것을 다른 교회들이 안다면 고린도 교회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게도냐 교회들은 열심히 연보를 준비하고 있기에 그 부끄러움은 배가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수치 당하지 않도록 돕고 싶은 것입니다(참조. 8:8). 고린도 성도를 향한 바울의 자랑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들의 선물(율로기아)인 연보가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것과 그들에 대한 바울의 신뢰를 함께 전달합니다. 또한 실제로 그들이 준비가 안돼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돕는 형제들을 보냅니다. 그들을 향한 바울의 세심한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연보에 대한 제반 요소 부인(6-15)

헌금은 재정으로 교회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체의 영혼을 되살려 그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며, 전하는 자의 진실한 믿음과 복종과 섬김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에 당신의 물질을 쓰고 있습니까?

 

6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0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1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2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13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5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6-15)

 

헌금은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헌금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보시며, 그들에게 더 큰 은혜로 채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소년의 손에 들린 오병이어를 사용하듯이 작은 것을 취하셔서 공동체를 풍성하게 하십니다.

 

(1) 연보의 방법(6-7)

 

바울은 연보에 대해 ‘자원함과 넉넉한 마음으로 하라’ 3절과 5절에서 말한 연보 준비와 관련해 설명합니다. 구체적 방법은 고린도전서 16:2에서 매주 첫날에 수입에 따라 모아두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연보의 기본 원리를 상기시킵니다. 자원함과 넉넉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인색하게 심는 자는 인색하게 거두고 풍성히 심는 자는 풍성하게 거둔다는 원리로 설명합니다(6).

아마도 5절에서 사용한 ‘선물’(율로기아)과 연결해 6절 내용을 소개한 듯합니다. 이 원리의 초점은 인색함/넉넉함의 대조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이어 바울은 7절에서 이 원리를 연보에 적용합니다. 각각 마음에 정한 대로 하고 아까워서 슬퍼하며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드리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개인의 자발적 결정입니다. 둘째, 넉넉한 마음입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실 물질적 보상을 기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다른 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며, 하나님께서 그런 자를 귀히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2) 연보의 자원: 하나님의 은혜로운 공급(8-11)

 

바울은 이제 고린도 성도들이 연보할 수 있는 자원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공급입니다(8). 그분은 당신의 자녀가 이 땅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일반적 은혜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의 초점은 다른 성도를 섬기는 착한 일을 수행할 있도록 물질적 도움을 주신다는 데 있습니다. 성도는 단순히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복을 구하거나 누리고 사는 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주님이 오실 때 경험됨을 믿고 이 땅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와 은혜를 흘려보내는 통로로 살아야 합니다(벧전 2:9). 복을 비는 것은 그런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은혜 베푸시는 것도 그런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바울은 시편 112:9을 인용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실제로 그분이 은혜 베푸심으로 언약 관계의 의무인 사랑의 의무를 충실히 행하신다고 말합니다(9).

그렇기에 마치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형제 사랑의 의무를 이행하는 독자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셔서 그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10). 하나님의 이런 도우심은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넉넉한 은혜를 경험하여 섬김의 일을 계속할 수 있고, 예루살렘 성도들은 부족함을 채움 받게 되고, 궁극적으로 그 일로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백성이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11).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선(善)순환입니다.

 

(3) 연보의 목적과 결과(12-14)

 

11절과 연결해 연보 사역의 목적과 결과를 부연합니다. 두 가지 차원에서 넘치는 결과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첫째는 사람에 대한 것으로 성도들의 부족한 것들이 채워질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것으로 그분에 대해 많은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12).

이어 바울은 그 요소들을 하나씩 설명합니다. 13절은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연보 사역은 메시아의 복음에 대한 고백에 합당하게 사는 순종의 모습이고, 예루살렘 성도들과 모든 교인을 위한 교제의 풍성함을 보이는 일입니다. 그 섬김의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14절은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흘려보내면 예루살렘 성도들은 독자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4) 마지막 감사(15)

 

바울은 마지막으로 다시 하나님께로 관심을 옮겨갑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선물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정리하면, 사랑의 섬김인 연보는 유대인 성도(예루살렘 성도)와 비유대인 신자(고린도와 마게도냐와 아시아의 교회들)를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게 하며,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자발성과 성실함이 없는 연보는 시험거리가 됩니다. 관대함과 형편대로 하지 않는 연보는 걸림돌이 됩니다. 진정한 연보는 주는 자와 받는 자를 연결하여 둘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주는 자의 영광이 드러나는 연보나 받는 자에게 수치와 부담을 주는 연보를 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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