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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01) - 아모스 개론


아모스 개론


 

1. 표제


 소선지서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제목은 저자인 아모스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이다. 아모스라는 이름은(히, Amos) “짐을 지다”, “(짐을) 운반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아마스(히,‘amas)에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그 이름의 뜻은 “짐을 진 자”인데, 이것은 아모스가 부름을 받고 전달하였던 엄숙하고도 무게가 있는 기별들과 잘 어울린다. 이 이름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2. 저자


 암 7:14, 15에서 소개되는 아모스의 자서전으로부터 우리는 그가 목자요, 경시받던 뽕나무 배양자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가 가난하였지만 독립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사실은 그가 잠시 그의 양떼를 떠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교육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선지자 학교에서 선교를 위하여 훈련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아모스의 경우에서처럼, 비교적 배우지 못하고 유리한 점들도 별반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사업을 위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고후 4:7)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을 봉사하는 일에 사람을 적합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아모스는 유다를 떠나 이스라엘로 가서 아마도 왕의 여름 궁전이 있고 제일의 송아지 신전이 위치해 있는 벧엘에서 그의 주된 일을 하였을 것이다. 그가 송아지 숭배에 대하여 고발을 하였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아모스는 우상을 숭배하는 대제사장 아마시야의 반대에 직면하였는데, 이 사람은 아모스를 위험한 음모자라고 왕앞에 고소하였다(암 7:10-13 참조). 우리는 아모스의 말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아모스는 그의 단순하면서도 꾸밈없는 변론과 그의 사상의 생동감과 고귀함 때문에 가장 중요한 선지자들의 대열에 들어야 한다. 물질 세계와 도덕 세계의 바탕을 파악하기 위하여 더욱 깊이 꿰뚫어 보거나 하나님의 거룩성, 지혜, 능력에 대하여 더 큰 통찰력을 나타낸 선지자들이 많지 않다.

 

 3. 역사적 배경
 

아모스는 유다와 이스라엘 양국이 번영하던 때에 부르심을 받아 그의 사명을 성취하였다. 여로보암 Ⅱ세 아래의 이스라엘은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호 2:8 참조). 여로보암은 시리아를 정복하여 통일 왕국 시대의 북방 변경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 영토는 북단의 하맛에서부터 사해까지 이르렀다(왕하 14:25, 28). 유다에서는 웃시야 왕이 에돔과 블레셋을 정복하고, 암몬을 굴복시키고 농업과 평화의 목적을 위한 가내(家內)기술을 장려하였고, 크고 힘있는 군대를 양성하여 예루살렘을 철통같이 방비하였다(대하 26:1-15 참조).
 외관상으로는 외적으로부터 안전하고 내면적으로 튼튼하였기에, 이스라엘은 위험이나 멸망을 조금도 예기치 않고 있었다. 사실, 앗시리아가 그 상승 세력으로 주의를 끌고 있었지만, 그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는 것은 있을성 싶지 않았다. 번영으로 인한 공통된 열매들­자부심, 사치, 이기심, 압박­이 유다와 이스라엘 양국에 마음껏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은 초대 왕이던 여로보암 Ⅰ세가 도입한 송아지 숭배(왕상 12:25-33)때문에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아모스와 호세아가 부름을 받고 그들의 예언들을 특별히 북방 왕국을 향하여 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송아지 숭배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웃시야는 B.C. 767-750년까지의 유다의 유일한 왕이었고, 여로보암 Ⅱ세는 B.C. 782-753년까지의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이었으므로, 아모스의 봉사는 B.C. 767-753년 사이의 어떤 때인 것같다. 아모스의 실제적 예언 봉사가 얼마동안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 책 속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지진 전 이년”(암 1:1)이라는 진술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언제 이 지진이 일어났는지를 확증할 만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아모스는 호세아 선지자와 동시대의 사람이면서 더 나이를 먹었던 것같다.


 4. 주제

 

아모스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의 죄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가능하다면 그들로 회개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덴의 도시가 우상 숭배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의 마음이 격동되었던 것처럼, 아모스도 그가 상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죄들과 사치를 보고 격동되었을 것이다. 그는 물질적 번영으로부터 생겨난 죄악들, 부자들의 사치, 주연, 방탕등을 탄핵했는데, 그들은 가난한 자를 압박하고 뇌물과 강요를 통하여 재판을 굽게 함으로써 이러한 일들을 자행할 수 있었다. 아모스는 호세아보다 죄악들이 저질러진 환경과 그 죄상들에 대하여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는 백성들의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죄악들을 곳곳에 생생하게 파헤치고 있다. 죄된 어떤 행위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고하고, 주변 국가들에게 만일 그들이 계속 죄짓는 일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틀림없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일이 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의가 죄를 이기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영광스러운 묘사로써 그의 책을 마무리 짓고 있다.

 

5. 개요

Ⅰ. 표제 1:1

Ⅱ. 주변 국가들 유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들 1:2-2:16
     1. 다메섹 1:2-5
     2. 가사 1:6-8
     3. 두로 1:9, 10
     4. 에돔 1:11, 12
     5. 암몬 1:13-15
     6. 모압 2:1-3
     7. 유다 2:4, 5
     8. 이스라엘 2:6-16

Ⅲ.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적 기별 3:1-6:14
     1. 예언적 기별들의 확실성 3:1-8
     2.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심판을 피할 수 없음 3:9-4:13
     3.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슬픔 5:1-27
     4. 여호와의 날을 뒤로 미루는 자들에게 임할 화 6:1-14

Ⅳ.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이상 7:1-9:10
     1. 황충에 대한 이상 7:1-3
     2. 불에 대한 이상 7:4-6
     3. 다림줄에 대한 이상 7:7-9
     4. 아모스에 대한 아마샤의 반대 7:10-17
     5.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과 익은 열매에 대한 이상 8:1-14
     6. 죄인들의 심판에 대한 이상 9:1-10

Ⅴ. 회복과 축복에 대한 약속들 9: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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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1-02)

 


심판을 예고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1장 20-33절


 

열매가 풍성한 나무를 보면 얼마나 기쁩니까? 목회자들도 처음에는 구도자적 태도를 유지하다가 점점 현실과 타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자의 각오는 희미해지고 현상 유지에 만족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좋은 열매를 기대하고 심은 나무인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어떤 열매를 기대하십니까?

 

  • 다음 날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게 됩니다. 무화과나무가 상징하는 옛 이스라엘이 종결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무효화 사건을 기도와 용서에 대한 교훈으로 연결시키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전과 관련하여 행하신 일에 대해서 불안함을 느낍니다.

 

말라버린 무화과나무(20-2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세상을 향하여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메시지를 가장 짤막하게 요약하면,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받은 너희도 사랑으로 살아야 사람답고 행복하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과 일행은 길가에 가면서 저주 받은 무화과 나무를 보았습니다.

 

20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1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20-21)

 

제자들은 전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말라비틀어진 것을 목격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마가복음에서 나타납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로부터 더는 열매를 구할 수 없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에 반응합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이 문장에서 흥미로운 것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주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마가의 문맥 속에서 분명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예레미야 8:13; 호세아 9:10; 미가 7:1). 이스라엘로부터 더는 열매를 구할 수 없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심판을 고한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 당혹스러워 보일 수 있는(열매를 맺을 때가 아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기에) 예수님의 행위를 상징적 행위로 보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행위를 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22-23)

‘믿음’이란 기도하는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참다운 기도는 기도를 드리는 자와 기도를 받는 대상과의 신뢰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런 신뢰 관계가 있을 때 신자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어도 새 시대의 공동체는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고, 그 기도는 그 관계에 근거하여 응답될 것임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22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22-23)

 

베드로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에 주목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루 만에 현실이 된 사실에 집중합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믿음과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22)라는, 이 문맥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언급된 것은 흥미롭습니다. 직전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성전 무효화를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제자들의 관점에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성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과 성전을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심판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와 성전 청소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어떻게 그 심판을 피할 수 있을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기도 주제와 연결되지만, 예수님의 성전 무효화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성전이 있었던 성전 산’이 바다에 통째로 던져지는 것은 성전에 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것이 마치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은 분명히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 그 시온 산 위에 있는 성전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바다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 없는 예배와 기도에 장소가 되었던 성전이 있던 시온 산이 바다에 던져질 수 있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더해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있더라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하신 약속들을 파기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새로운 구원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징적인 비유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새로운 일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기도와 용서(24-25)

우리가 누군가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은 채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은 우리는 마땅히 형제자매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열매 맺는 신앙인의 바른 모습임을 기억합시다. 뿌리가 죽은 외식적 형식주의자가 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24-25)

 

구약의 언약적 기대를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 즉 예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시대를 ‘기도’라는 주제를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기도에 대한 확신을 말씀하신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성전의 무효화를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대해 기존 유대인의 생각과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성전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기도의 장소로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믿음의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어떤 곳에서 기도 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도 하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핵심은 이루어질 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즉, 기도의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었습니다(17). 그러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 성전의 무효화를 선언하신 후에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리적 성전이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기도가 유의미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성전이 없더라도 하나님께 믿고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기도 응답의 확신이라는 주제를 용서라는 주제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도 매우 시의적절한데,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하고 언약 백성 상호간의 용서를 경험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용서해야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용서하신 것이 전제되어 있고, 이 용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우리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뜻임을 기억해야 합니다(마태복음 18:23-27).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 자신이 받은 용서의 깊이를 모르는 철부지입니다. 물리적 성전이 사라져도 새로운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은 하나님께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있고, 서로 용서하며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립니다.

 

권위에 대하여(27-33)

우리는 하늘로부터 온 구원의 은혜를 받고 누리고 있음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몇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신 분임도 믿습니까?

 

27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31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33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7-33)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본문에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논쟁 장소인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위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고, 도대체 무슨 권위로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여기서 ‘이런 일’은 성전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보인 급진적인 행위와 선포를 말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권위에 의지하여 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면, 종교지도자들은 신성모독으로 즉시 그를 고소하였을 것입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은 그 자체로 매우 정교하게 구성된 함정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라고 말하면 신성모독이 되고,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정당성이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 뒤에 도사리는 함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즉답을 피하십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반응은 당대 랍비들이 즐겨 쓰던 토론 방식으로 상대방의 논리적 모순을 역질문을 통해서 드러냅니다. 이 ‘노련한’ 질문으로 이슈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요한의 권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던진 질문은 요한의 세례의 기원에 관한 것입니다. 질문을 받은 종교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사적으로 의논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워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기원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그 세례가 하늘로부터 기원했다는 대답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오실 자’로 언급한 요한의 사역에 대해 공개적으로 인정하신 바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 역시 요한의 메시지와 궤를 같이합니다(‘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군중의 예측할 수 없는 태도로 곤경에 빠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함정을 놓으려고 질문한 종교지도자들은 도리어 함정에 빠져버립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일치하는 요한의 사역에 대해 공식적인 판단을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지혜로 권위에 대한 지도자들의 질문을 효과적으로 물리치셨고, 자신의 권위의 근원이 하늘로부터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증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도 없이 종교적 형식주의와 외식주의에 접은 유대 교권 사회에 사망 선교를 내리셨습니다. 잎만 무성한 그들의 종교 형태를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 앞에 진실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진짜 신앙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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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4)


예수님의 제자도를 배우는 길

누가복음 10장 32-52절


 

성도들 가운데 세상과 하나님 나라 질서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해 여전히 세상의 질서와 상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가 제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제자들의 감추어져 있던 노골적이고 불순한 동기가 전면에 부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과는 다른 참된 제자도에 대해서 인내하면서 가르치십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이야기의 마지막은 맹인 바디매오를 치유하는 이야기로 끝맺습니다. 세인에게 주목받지 못한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고 길에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죽음과 부활을 예고(32-34)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자신이 바라는 것만을 구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약 4:3).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32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32-34)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가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장면은 이전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수난과 죽임을 당할 장소로 예루살렘이 명시적으로 언급됩니다(33). 둘째로, 수난 당하시는 절차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제자 가룟 유다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지고, 후에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셋째로, 이방인들이 그를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는 언급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은 예수님의 수난 장면에서 그대로 실행됩니다. 그런데 수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부활은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나타나게 될 신원의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종말론을 잘 알고 있었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죽는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아는 유대종말론 안에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신적 통치의 대리자로서 악과 악에 동조한 자들을 심판하고 의와 의로운 자들을 신원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분인데, 그러한 분이 죽임을 당한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이었습니다.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이 세워진다는 계시는 부활의 아래서만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35-40)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당신의 생명을 주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십자가의 도를 따라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섬기듯이 이웃을 섬기는 제자의 도를 행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35-40)

 

예수님의 1, 2차 수난 예고가 등장하고 난 후에 제자들의 어리석은 모습들이 등장했었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제자들의 영적인 어두움과 무지의 모습들이 부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모습이 훨씬 더 노골적이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제자들 속에 감춰진 불순한 동기가 전면에 부각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예고가 주어지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놀라운 청탁을 합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제자도에 대한 예수님의 거듭되는 인내의 가르침을 생각한다면, 세 차례의 수난예고 후에 이러한 청탁을 예수님께 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의 깊이를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의 의미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어두움에 빛을 비춰주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은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표현합니다. 실제로 야고보와 요한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왕의 즉위식 장면은 그들의 기대와 다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해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역설적으로 그의 왕위 즉위식이 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합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예언적인 말씀이 이어집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이 예수님께서 마신 잔과 그가 받는 세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세베대의 아들들은 순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그들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청탁을 알게 된 나머지 제자들은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분개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지속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 두 명이 어리석은 요청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도 차지하고 싶던 자리를 그들이 선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이 분개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도 세베대의 아들들과 같은 야망에 붙들려 있었음을 보여주는 강한 증거입니다. 만일 야망이 없었다면 그들이 분개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의 반응(41-45)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큰 자가 되고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으로 오셨고, 겸손히 그 길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와 요한의 행동에 열 제자들이 화를 냈습니다. 그들 역시 같은 욕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1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1-45)

 

이렇게 한심한데도 예수님은 이전처럼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 인내하며 가르치십니다. 통치자들은 자기 야망을 위해서 자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가치 체계를 정면으로 반대하시고 전복시키는 가르침을 제시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에서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궁극적인 섬김의 본보기로 자신을 제시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갖는 성격을 대속물로 규정하십니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대속적 성격까지 따를 수는 없겠지만, 그의 삶이 보여주는 본보기는 따라야 합니다.

 

소경에서 치료 받은 바디매오(46-52)

 

사람들은 육신의 질병을 치유 받는 성령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면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구원의 가치를 기억하고 구원을 베푸신 주님께 끊임없는 찬송과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6○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46-52)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에 이르렀습니다. 마가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예수님의 여정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로 맹인 바디매오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맹인이었고 걸인이었습니다. 길가에 앉아 있었다고 하는 표현은 그가 나중에 그 길을 따라 나서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마가의 의도적인 표현으로 보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이 예견했던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가져올 다윗 왕가의 아들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꾸짖음 속에서도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예수께 호소합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난 후, 여정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자 맹인은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옵니다. 이 모습은 흡사 1장에서 시몬과 그의 형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고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과 세베대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실제로 거지의 겉옷은 그에게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 겉옷을 내버리고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맹인은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십니다. 이 선언의 결과로 바디매오는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이 치유의 원인이 그의 믿음이었음을 밝힙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보도할 때마다 그 기적이 믿음에 근거했음을 줄곧 강조해왔습니다. 이 이야기를 종결하면서 마가는 바디매오가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다’고 보도합니다. 제자들은 이 여정을 갈릴리로부터 시작해서 죽곧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시작할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를 좇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실제로 이 여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다 도망가는데(14:50),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맹인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고 그에게 합당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믿음에 근거해서 치유를 경험한 후에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십자가와 죽음의 길에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이러한 미묘한 대조는 마가복음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진정한 제자도의 길이 무엇이며, 진정한 제자란 과연 누구입니까? 물론 마가의 원래 독자들은 이 제자들이 변화되어서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사도들로 쓰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도들의 부족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제자도란 이름과 명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계속 따라가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헛된 것을 구하는 잘못된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힘쓰는 참된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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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2)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

마가복음 10장 17-31절


 

창세기 타락 사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그 형상을 잃어버린 것, 또는 그것이 비틀려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치유되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공적 예배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 또 개인적인 말씀 묵상을 훈련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아주 중요한 축복의 시간입니다.

 

  • 한 부자가 예수님께 영생에 관해 질문합니다. 계명들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대답에 그는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근본적인 도전 앞에서 부자는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섬기며 살았는지 드러내고 맙니다. 재물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급진적인 제자도를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부자 청년의 질문(17-20)

우리는 재산이 없어서, 지위가 낮아서 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 소유가 많아서, 지위가 높아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일, 영생의길을 가는 일은 정반대입니다. 율법적인 종교 생활만으로 영의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17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17-20)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라는 표현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시는 중입니다. 이 상황에서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지속적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고 영생에 관해 질문합니다. 이 부자도 예수님을 따르는 데 진지한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참조. 10:21).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 질문을 던진 부자에게 전제된 생각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백성의 최종적인 신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백성의 신실한 반응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으로부터 줄기차게 강조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해서 자동적인 구원을 부여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실하게 반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상실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여기서 부자는 단순히 행위 구원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도 그의 생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라고 확고하게 말씀하시면서, 선함을 하나님 한 분에게만 귀속시키십니다. 뒤따르는 예수님의 대답은 십계명의 다섯째에서 아홉째 계명으로 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다룹니다. 이 계명들의 정신은 레위기 19:18(‘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의 질문이 행위 구원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만일 부자의 질문이 행위 구원의 가르침이었다면, 누구보다 예수님이 먼저 그것을 지적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부자는 이러한 계명들을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지켰다고 주장합니다. 이 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이 말씀하셨던 십계명의 명령들은 주로 식별 가능한 행동들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계명들을 지켰는지 어겼는지 점검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용이합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부자는 자신이 모든 계명들을 지켰다고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그의 교만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적어도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다 지켰다는 부자의 주장에 다른 특별한 악의는 없다 할지라도, 이것은 계명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근거한 주장임이 곧 드러납니다.

 

진짜 문제(21-22)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재물이기 때문에 재물이 우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여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21-22)

 

부자의 계명 이해가 피상적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예수님께서는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율법 조항을 가지고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계명 이해에서 빠진 요소를 지적하십니다. 그에게는 영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있었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다 팔고 예수님을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는 바로 ‘그 재물’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초청입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동기가 사랑이었다는 점을 부각 시킵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셨기에, ‘그 우상’을 제거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라고 초청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좋으라는 예수님의 사랑의 초청 앞에서 이 부자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가 버립니다. 이 부자가 진정으로 무엇을 섬기고 있었는지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참조. 마 6:24).

 

재물과 제자도(23-27)

구원은 하나님께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내 손을 비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 삶, 곧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삶은 버림을써 가능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것을 버려야 할 때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제자입니다. 진정한 제자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23○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3-27)

 

재물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께서는제자들에 대한 교훈으로 전환하십니다. 제자들을 둘러보시고는 제자들을 향하여 가르침을 전개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가 가진 함의를 비유적 이미지를 통해서 전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 충격적인 말씀을 나름대로 해결해보려는 주석적 논의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낙타(카멜로스) 대신에 후기 사본 중에는 밧줄(카밀로스)이 종종 등장하는데,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됩니다. 단어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바늘의 귀’라는 뒷문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성문이 닫혔을 때 이 조그만 간이 문을 통해서 낙타가 힘겹게라도 통과할 수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의 의도를 약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26-27).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유대주의 환경에 살고 있던 제자들에게는 놀라운 가르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부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상급의 약속(28-31)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자연스럽게 재물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우상 숭배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김으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복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28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28-31)

 

10:28에 등장하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는 베드로의 대답은 마가의 문맥 속에서 두 가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제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1:16-20). 또한 과거 이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는 것은 같은 문맥 속에서 많은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부자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비록 마가의 본문에 베드로의 보상에 대한 질문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30절의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베드로의 대답 속에 그런 함의가 들어 있음이 드러납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의 잘못된 동기는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분명히 드러납니다. 제자들의 감추어진 동기를 이미 아셨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정한 포기의 동기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포기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서 제자의 길을 걸어간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진정한 보상이 뒤따릅니다. 그 보상은 현세적인 것과 아울러 내세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상과 함께 핍박도 겸하여 받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단락을 종결하시며 충격적인 말씀을 전하십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은 세상적 가치를 뒤바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먼저 된 자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나중 되고, 세상의 관점에서 나중 된 자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먼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언급이 문맥 속에서 베드로가 한 말에 대한 결론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베드로를 위시한 많은 제자들에게 주는 경고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제자도의 삶은 필연적으로 영생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도의 삶이란 세상적 가치를 가지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희생(28)이 자신들에게 영광스러운 자리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망상을 하면 안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면서 분명해질 것입니다.


아직도 세상 가치관에 젖어 있다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시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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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1)

 

 


이혼에 대한 논쟁을 벌린 바리새인

누가복음 10장 1-16절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너무 쉽게 결혼하고 헤어지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진짜 결혼 생활은 쉽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성경적인 결혼관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성경적인 관점으로 결혼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한 가정을 만들어 주셨고, 그 가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당시 큰 사회적 항의를 가지고 있던 이혼에 관해서 가르치십니다.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이혼은 쉽게 행해지던 일이었고, 유대 사회에서는 이혼이 행해져야 하는지 합법적 근거에 관해서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 질서의 원리로 돌아가서 이혼이 합법적이지 않음을 선포하십니다. 그의 가르침은 혁명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혁명적 가치관을 다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바리새인들(1-4)

그리스도인들에게 배우는 일은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을 지으시고 통치하신 분을 알아가는 일입니다. 자신이 믿는 분을 잘 모른다면 자신의 믿음은 자신의 신념이고 자신의 바램일 뿐입니다. 주님을 잘 알고 잘 믿어야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 삶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우려하지 않고 시험만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배울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1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1-4)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 가면을 벗고 대놓고 예수님을 대적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셨습니다. 실제 하나님과 백성이 맺은 언약은 결혼식 때 신랑과 신부가 맺은 혼인서약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은 바람난 신부와 같았습니다. 음란한 신부로서 신랑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일삼는 나라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신부인 이스라엘을 그들이 떠받들던 앗수르와 바벨론에 넘겨 버리셨습니다. 하지만 영영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셨듯이 신랑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제 회개한 신부들과 새로운 언약, 새로운 결혼 과계를 맺게 하셨습니다. 혈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은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이 신랑을 잘 영접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에 배경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갈릴리 지역을 떠나서 헤롯 안디바의 관할하는 유다 지역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건너편 길로 내려오십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울수록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발언도 강해집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더 노골적입니다.

이곳, 유다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두 종류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함없이 무리를 가르치셨다고 소개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무리를 치유하셨다고 소개하고 있고(마태복음 19:2), 마가는 예수님께서 무리를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치유와 가르침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분리될 수 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교묘하게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르치시고 계신 예수님께 시험하기 위해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이혼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을 직역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적법한 것입니까?’입니다. 이 표현에는 두 가지 숨은 뜻이 들어 있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2(1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의 관점에서 이혼이 합법적인지를 질문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죄를 덮어씌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은 당대 정치적인 상황과 연관해서 특별히 헤롯 안티바스는 자기 형제의 아내를 취했고, 이 일(이혼 문제) 때문에 세례 요한의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결국 마가는 요한이 이 일과 연관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기술합니다(6:14-29). 그러므로 이 이혼의 이슈는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모세가 무엇을 명했는지 되묻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4에 근거해서 이혼 증서를 주고 내버리기를 허락했다고 답합니다. 사실 신명기 말슴은 이혼에 대한 명백한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담긴 사악한 의도를 드러내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은 특정한 조건이 만족되었을 때 이혼을 실제 가능한 것으로 보기는 하지만, 실제 삶을 영위해가기 위한 허용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신명기 율법은 불법적인 이혼과 재혼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들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혼을 명령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악한 인간들의 행위 때문에 허락하섰을 뿐입니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 바리새인들은 이혼이 하나님의 명령인 듯 다루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논리적 모순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혼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5-9)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사랑’이 주제입니다. 남녀 간이나 부모 자녀 간에 사랑이든 등등 사랑이 주제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소설이나 연극들의 구성을 사랑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반대로 보면, 가장 슬픈 이야기들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른 것에 욕심을 부리다가 정작 제일 중요한 한 가지, 이것을 놓쳐버리는 것을 듣습니다.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5-9)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혼을 허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사람들에게 이혼을 허용하셨는지를 밝히십니다. 그 이유는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몰이해와 사악함을 함께 연결시키십니다.

신명기 말씀에 근거해서 아내를 버릴 구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악함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율법 남용 사례에 해당합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법을 제정하시고 수여하신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망각한 채 개별 규정에 집착해서 법을 남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에 대항해서 예수님께서는 결혼의 원리를 설명하심으로써 이혼 문제를 다루십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최초의 모범으로 돌아가서 그 원리와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반영하는 윤리는 허용되는 원리가 아니라 근본적인 창조의 원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 원리는 창세기 1:27과 2:24로부터 출발하는데, 이 본문들은 부부의 성적 결합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요, 유일하면서도 깨어지지 않는 원리임을 나타냅니다. ‘한 몸’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결혼이 인간의 편리나 사회적 관습 이상의 훨씬 깊은 뜻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십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관해서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어떠한 근거 위에서 이혼을 허락해야 하는지를 논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해치는 것으로 이해하십니다. 이것은 그레코만 관점과 유대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급진적인 관점입니다.

이러한 원리들에 대한 예수님의 호소는 필연적으로 성경의 어느 한 본문을 다른 본문과 대치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한쪽을 더 선호해서 다른 한쪽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각의 본문에는 고유한 기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을 말하는 본문도 있고,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서 허용된 본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는 매우 급진적입니다. 이것은 당대의 이혼 풍조를 뛰어넘는 혁명적인 가치관입니다.

 

가르침에 대한 결론(10-12)

어떤 상황을 보면서 사람들은 해석이 다릅니다. 한 사건이지만 긍정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번대로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 해석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적인 상황을 중심에 놓고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10-12)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제정된 결혼의 기본 원리를 제시하심으로써 이혼의 부당함을 확고히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급진적 가르침의 결론으로 이혼과 재혼을 간음으로 규정하십니다. 이혼과 재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원한 연합을 새로운 성적 연합으로 대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혼 동기가 완악한 마음이었다면 재혼은 그 완악한 마음이 열매를 맺은 것에 해당합니다.

이런 맥락 하에서 예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같은 원리를 적용하십니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것도 간음이요,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 시집가는 것도 간음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당시 남성 주도 사회에서 매우 충격적인 가르침이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정신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가르침입니다. 복음의 가치는 사회적 약자인 여자의 인권을 반영하면서도 공평한 윤리적 적용을 시도합니다. 인간의 패역함이 있는 곳에 불평등이 그 결과로 드러나지만, 복음은 그 패역함을 회복시켜 평등한 인간됨을 여과 없이 드러내 줍니다.

 

제자도를 가르치신 예수님(13-16)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어떤 상황 대체를 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에 대해 민감한지 살펴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무시당하면 발끈한 사람은 자존감이 부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기뻐하시고 화내셨겠습니까?

 

13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3-16)

 

본문은 당시의 관습을 반영한 것 같습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대속죄일 저녁에 아이들을 장로들에게 데려와서 기도와 축복을 받게 하곤 했습니다(미쉬나 소페림 18:5). 하지만 사람들이 데려온 아이들을 제자들이 또 막아섭니다. 그 이유를 마가는 분명히 제시하는 않고 있습니다. 다만 9:33-37의 문맥에서 제자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누가 더 큰지에 대해 다툰 이력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세워서 하나님 나라의 섬기는 가치관을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가르침을 받은 후에도 어린아이를 데려온 사람들을 막은 것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음을 사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에서, 심지어 제자들로부터도 무시당하던 아이들을 소중하게 받아들이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사람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시당하고 거절당한 사람들(병든 자, 소외된 자, 이방인, 여자, 어린이)이 인정받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 전통적이고 남성 주심적인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샬롬의 나라’이고, 그 ‘샬롬’은 사람들 사이에서 평등이라는 가치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악된 세상적인 가치관에 길들여진 자들이 이런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배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시며 어린이 한 명, 한 명을 안수해 주셨습니다(16).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결혼마저 거래의 대상이 되는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여, 하나님 정하신 질서대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아무도 결혼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가 어니면 불가능한 것이 신실한 결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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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5-01)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욥기 34장 31절-35장 16절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잘못의 대가로 겪게 되는 고난입니다. 다음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겪는 고난입니다. 마지막으로 자발적으로 당한 고난인데, 정의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당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당하신 희생은 순전히 자발적인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지 고난에는 의미가 있고 거기에는 반드시 유익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이 본문에서는 엘리후가 두 가지로 욥을 공격하는데, 첫째는 욥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욥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엘리후는 이 두 부분에 대해 공격하면서 결론적으로 욥은 죄인이며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 마지막 부분(34:31-37)

하나님께서는 심판주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잠자는 자들처럼 죄에 빠져 세월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속에 물들어 살아간다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1○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2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 33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 34슬기로운 자와 내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내게 말하기를 35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 36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37그가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31-37)

 

이 부분은 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 마지막 부분으로 엘리후는 욥이 범죄하지 않았다는 말에 반박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욥이 지혜가 없는 무식한 자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1) 욥의 말과 엘리후의 대답(34:31-33)

 

엘리후 욥이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고백을 해야 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했는지를 묻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욥이 이렇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입니다. 32절에서 “깨닫지 못한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라는 구절은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 지혜로워져야 한다는 의미이며, 엘리후는 욥의 현재 상태가 지혜가 없는 상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3절(“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은 죄를 심판하고 그에 맞는 처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욥이 자신은 죄가 없고 자신에게 내려진 재앙은 부당하다고 말한 들 욥의 마음대로 그 재앙이 처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할지, 아니면 계속해서 자신은 무죄하다고 주장할지 욥이 결정할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욥이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결과로 지금 고난을 받고 있으며, 전적으로 욥에게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는 말입니다.

 

(2) 다른 사람들의 질문(34:34-35)

 

엘리후는 자신의 말의 객관성을 더하기 위해 슬기로운 자들과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합니다.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을 지혜로운 자라고 표현함으로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또한 이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말하기를 욥이 무식하며 지혜롭지 못하다고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엘리후는 이들의 입을 통해서 무죄를 주장하는 욥이 무식하며 지혜가 없다고 대놓고 비판을 한 것입니다.

 

(3) 엘리후의 대답(34:36-37)

 

두 번째 연설 결론으로 엘리후 욥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식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시험을 받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현재 받은 벌로 충분하지 않으며, 이것은 욥이 아직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7절에서 욥이 죄에다 반역을 더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는 지금 욥이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반역으로까지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째 연설은 욥이 무식해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가 재앙을 받게 되기를 기원하는 말로 끝을 내고 있다. 참 잔인한 결론입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에 욥이 어리석고 고집스러워 지혜자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심각한 재앙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욥에게 고통이 계속되기를 원한다는 기원을 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자의 행동인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35:1-16)

고난 당하고 있는 지체를 위로해주고 싶다면 어떤 말을 해 줄지 고민해 보는 것도 좋지만, 어떤 말을 피할지 심사숙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사려 깊고 지혜로운 친구가 되어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생을 아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사려 깊은 말로 힘을 북돋워 주는 친구들이 있다면, 사람이 어떤 고난에 빠지든지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1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2그대는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그대는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3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범죄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지마는 4내가 그대와 및 그대와 함께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대답하리라 5그대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6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7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 9○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치나 10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11땅의 짐승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가르치시고 하늘의 새들보다도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시는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이도 없구나 12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13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14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 15그러나 지금은 그가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16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1-16)

 

이 부분은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로 욥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욥의 말의 인용과엘리후의 반박이라는 형식으로 연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1) 욥의 말을 인용(35:1-3)

 

엘리후는 욥의 주장에 대해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나는 욥이 정말 정의롭냐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의로운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첫째 문제는 욥이 죄가 없는 상태에서 재앙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정의인 인과응보대로 행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며, 그럼 하나님이 불의하고 욥이 더 정의롭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둘째 문제는 9:22에서 욥이 제기한 무죄한 자나 악인이 동일하게 멸망 당한다는 문제로, 21:15에서 인용한 악인들의 무례한 말을 근거로 하여 욥이 의로운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주장한 것을 문제 삼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욥의 말에 대한 명백한 과장이며, 엘리후가 욥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일부러 곡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엘리후의 반박(35:4-8)

 

4절에서 엘리후는 욥뿐만 아니라 욥과 지금까지 함께하며 토론하였던 세 친구들까지 자신의 연설 대상에 포함시킵니다.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의 말이 자신보다 덜 지혜로워서 욥을 설득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도 한 수 가르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하늘의 구름을 예로 들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간 세상에서 멀리 계신지를 표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거나 의로운 행위를 해도 결코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해를 당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의를 행한다고 해서 하나님에서 상을 받거나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엘리후가 말하고 싶은 것은 8절로 인간의 행동은 오직 인간에게만 영향을 미치며, 의로운 행동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하여 자신의 억울함과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3) 죄인의 부르짖음의 헛됨(35:9-13)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왜 욥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지 않는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학대가 많고 권력자들의 힘에 눌려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상태에 있는데도 구원을 못 받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10-11절에서 보면, 그들은 시편 기자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고 탄원하던 기도를 전혀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12-13절에서 교만한 악인들이 부르짖으면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데, 악인들의 부르짖음은 헛된 것이며, 이런 헛된 것에 하나님은 듣지도 관심을 가지시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돌아보다’라는 단어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 엘리후의 결론(35:14-16)

 

엘리후는 욥에게 이 두 가지 문제가 모두 있다고 언급합니다. 첫째는 죄를 자복하며 부르짖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릴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아직도 욥은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엘리후 생각에는 욥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으며, 지금 받고 있는 고난만으로도 벌을 다 받은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이렇게 죄인으로 하나님의 관심도 받기 어려운 욥이 계속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지식이 없는 태도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엘리후는 세 번째 연설에서 욥이 스스로 주장한 의로움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을 하고, 그가 죄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아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사려 깊은 말로 힘을 북돋워 주는 친구들이 있다면, 사람이 어떤 고난에 빠지든지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어 갈 때, 우리는 함께 고난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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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32-01)


죄를 용서 받은 자의 복

시편 32편 1-11절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복되게 살도록 지으셨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불행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죄를 해결하지 않고 아무리 많은 기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못 본 척하시겠다고 하십니다.

 

 

  • 시인은 한때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아 영육간에 극심한 고통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사하셨고 시인은 놀라운 은혜와 자유함을 경험하였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덕분에 죄 사함 받은 자의 행복은 말할 나위 없이 큽니다.

 

용서받음의 행복(1-2)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시며 주관자이십니다. 복의 전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며 죄를 용서받는 것이 복의 출발입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기에, 죄가 가득할 때는 어떤 복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 용서의 큰 복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1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2)

 

‘얼마나 행복한가?’를 두 번씩(1,2) 연발하며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은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 지은 자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께서 들어 올리고 덮으시고 정죄하지 않으시니 기쁘지 아니하겠습니까? 죄 사함을 받아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계속해서 그분의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다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시금 이것을 깨닫게 되었고 죄 사함의 축복을 선포합니다.

 

시인의 회개 전과 후(3-5)

회개는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침묵은 죄를 고백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죄인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니까 차라리 시치미를 떼고 입을 다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않으면 죄가 나를 괴롭히고 들들 볶아댑니다.

 

3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3-5)

 

회개는 공개적으로 해야 합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다윗은 주님께 고백합니다. 죄를 죄로,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고 실토합니다. 하나님께 낱낱이 털어놓는 것은 모든 죄가 하나님께 지은 죄이기 때문이고 잘못을 범한 당사자에게 고백하는 연습을 미리하는 것입니다.

 

(1) 시인의 회개 전(3-4)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회고하며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은 자의 행복에 대한 근거로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고백합니다. 그는 죄를 지었고 죄 지은 사실을 인지했으나, 이를 개의치 않고 침묵했습니다. 여기서 시인의 ‘침묵’은 회개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그가 죄를 인정하지 않고 고백하기를 거부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는 시인에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죄에 대해 침묵하여 다문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종일 새어나왔고, 뼈가 녹는 듯 몸이 날로 약해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손이 밤낮으로 그를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까지 그에게 고통을 주시므로 그의 기력이 여름가뭄에 말라 없어지듯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몸과 마음의 고통의 근원이 그가 지은 죄와 죄를 고백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의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깨닫도록 채찍질하고 계신다는 점도 절대 모르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버티는 시인의 마음과 태도는 교만하고 완악합니다.

 

(2) 시인의 회개 후(5)

 

고통을 견디다 못한 시인은 마침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 자신이 죄 지은 것을 인정하고 죄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침묵을 깨고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백 해야겠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여기서 ‘허물’과 ‘죄’와 ‘죄악’을 인정하고 회개한다고 언급하는데 이 세 단어가 1-2절에서 이미 ‘허물’, ‘죄’, ‘정죄’로 번역되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시인의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1-2절에서 죄를 용서받아 행복한 자는 누구보다 먼저 시인 자신이었다는 점을 드러내었습니다. 시인은 그가 죄를 덮지(‘숨기지’로 번역됨) 않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덮어(‘가려진’으로 번역됨) 용서하심을 체험한 후, 죄 사함 받은 자로서의 행복을 선포하고 이것을 다른 성도에게도 알리고자 했습니다.

 

시인이 죄를 시인하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악을 용서하셨습니다. ‘(바로) 당신이 나의 죄악을 사하셨나이다’라는 시인의 진술에서 시인을 용서하는 주체가 하나님이심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에게서 긍휼하심과 자비하심과 사랑이 저절로 드러난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라고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어 백성으로 삼을 때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요구하셨습니다(출 19:6). 하나님이요 구하시는 거룩한 또는 성결한 삶을 위한 지침으로 십계명을 주시며 그것을 지켜 거룩한 삶을 이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의 약함과 악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게 되면 성막에 와 제물을 드려 회개함으로써 죄를 씻고 다시 거룩한 백성의 삶을 회복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죄에서 속히 떨어져 나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시인의 조언(6-7)

회개는 공개적으로 해야 합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시인은 주님께 고백합니다. 죄를 죄로,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고 실토합니다. 하나님께 낱낱이 털어놓는 것은 모든 죄가 하나님께 지은 죄이기 때문이고 잘못을 범한 당사자에게 고백하는 연습을 미리 하는 것입니다.

 

6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셀라)(6-7)

 

회개하여 죄 용서를 받은 후 시인에게서 신음 소리와 고통이 사라졌고 하나님의 징계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시인은 다른 경건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얻어 기도하라고 조언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시인의 권고는 그들이 소원하는 바를 구하라는 의미보다는 그들이 죄를 지었을 때 곧바로 그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께 고백하여 죄 용서함을 받으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를 고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홍수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용서의 은혜가 임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시인은 용서의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을 동일시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그분이 용서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어떤 환란에서도 자기를 보호하고 구원하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인의 고통과 신음의 소리는 구원의 노랫소리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훈(8-10)

회개한 자는 다른 죄인을 회개로 이끕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당사자 앞에서 솔직하게 잘못을 고백하는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자극이 됩니다. 목을 죄던 죄에서 자유하고 보니 얼마나 시원한지 모릅니다. 깊은 슬픔이 사라지고 자기도 모르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8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10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8-10)

 

죄를 숨기고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악인들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겠고, 그들은 뻐가 쇠하는 고통으로 신음하겠지만,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여 용서받은 죄인들, 즉 의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또 그 기쁨을 크게 외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가르침(8)

 

시인이 하나님께 보호자와 구원자 되심을 고백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의 말씀으로 교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르치고 훈계하는 교사와 멘토(mentor)가 되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시인을 가르치고 그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훈계하며 눈을 떼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하나님의 세밀하고 친밀한 인도와 보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지혜의 약속이 죄인이었던 시인, 용서받은 시인에게 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1-2절의 죄 사함 받은 자의 행복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따르는 축복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줍니다.

시인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모든 자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포함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도와 가르침을 받을 때 겸손과 신뢰가 요구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겸손과 신뢰를 설명하고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말과 노새의 예를 들면서 그것들과 같이 되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말이나 노새의 주인은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 길로 몰고 가려고 할 때 이 동물들이 무지하고 완고하여 말을 안 들으므로 재갈과 굴레를 꿰어 강제로 끌고 갑니다.

 

(2) 하나님의 훈계(10)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려고 하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고집만 피우며 자기 생각대로 가려 한다면 어떻게 인도를 받겠느냐?’는 말입니다. 이 교훈에는 시인이 한 때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저항하여 어리석게 행한 것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인과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신뢰하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겸손하게 따라야 할 것입니다.

 

(3) 악인과 의인의 결과(10)

 

이 경고를 듣고도 자기의 고집과 생각을 따라가는 자는 악인이며, 그들에게는 슬픔이 따를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를 신뢰하며 따라가는 자는 의인이며, 하나님의 인자가 그를 따를 것입니다.

 

용서의 하나님을 찬양(11)

속마음을 드러내지 말고 뻔뻔하게, 당당하게 살라는 이 시대에 이 다윗의 고백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고리타분하며 진부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만이 회복과 평안을 경험할 수 있게 합니다.

 

1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11)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지혜의 권면도 받은 행복한 시인은 함께한 무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하라고 외칩니다. 시인은 성도들이 자기와 같이 하나님께 죄 사함 받는 행복을 누리고 더불어 약속하신 보호와 인도를 축복으로 받기를 기대합니다. 시인의 간증과 하나님의 권면을 듣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성도들은 시인과 함께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언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까? 당신이 바라는 것을 받을 때입니까? 아니면 주께서 바라는 대로 살지 못한 자신이 용서받고 받아들여질 때입니까? 후자입니다. 죄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인지를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용서해주신 것을 알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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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31-01)


고통 중에도 주를 의지하는 다윗

시편 31편 1-24절


 

사랑이란 말이 드물게 많이 나오는 시편입니다. 고난 중에 그것도 목전에 둔 극심한 고난 중에 있는 다윗의 입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고난이 주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우리의 사랑의 반응을 요구하신다는 뜻입니다.

 

  • 다윗은 원수로 인하여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자와 공의로 자신을 어려움과 고통에서 보호하시고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고,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구원을 간구(1-4)

하나님께서는 의지하는 자들의 구원이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만이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위기가 닥치면 그 위기를 묵상하다가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위기가 아닌 위기 너머에 계신 구원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2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3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4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1-4)

 

다윗은 ‘당신께’라고 외치며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직접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고난과 고통에 처했을 때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를 보호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으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피난처, 바위, 산성, 반석에 비유압니다. 대부분 산지에 주거하던 이스라엘인에게는 견고한 바위나 높은 산성은 종종 자연 재해나 강도나 적의 공격에서 그들을 보호해주는 보호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보호처와 같이 다윗을 위험에서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바위와 산성은 때로 다윗에게 충분한 보호막이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다윗이 피난처 삼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다윗을 보호하고 구해낼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피할 때 자기가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할 때 그분이 귀 기울여 들으시고 구원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슨 근거로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를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1,4).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므로 다윗에게 닥친 상황을 의롭게 살피시고 마땅히 그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삼아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시고 언약을 맺으셨으므로, 그분 이름의 명예를 걸고 하나님의 백성인 다윗을 돌보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한편, 다윗이 처한 상황은 ‘비밀히 친 그물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사냥꾼이 새나 짐승을 사냥할 때처럼 원수들은 다윗을 잡으려고 몰래 그물을 쳐 다윗을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그에 반해 다윗은 무고한 자임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5-8)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거니와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반면 우상은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생명도 알맹이도 없습니다. 우상은 돕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반석이요 상성이시기에 삶을 믿고 맡길 만합니다. 당신은 영혼과 인생을 누구에게 맡기고 있습니까?

 

5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6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7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8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5-8)

 

다윗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대적의 위협이 주는 두려움과 근심은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고 슬픔과 한숨으로 남은 인생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립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목숨마저도 앗아가려는 대적들의 모략에 혼절할 지경입니다.

 

(1)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윗(5-6)

 

5절의 첫마디인 ‘당신의 손에’라는 말은 1절의 ‘당신께’와 같은 맥락으로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다윗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그토록 신뢰하는 하나님의 손에 자기 자신을 맡깁니다. 그의 생명까지 하나님께 내맡길 정도로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다윗의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과 동일하며, 이는 구원을 이루는 모든 일을 마치고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절정을 보여줍니다(눅 23:46).

 

(2)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유(7-8)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으므로 변치 않는 약속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구원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속량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다윗이 구원을 받은 후에 이 사건을 회고하며 진술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앞으로 일어날 구원을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음으로 선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5절 이후의 내용(5-18)이 다윗의 여전한 고난을 묘사하고 있으므로, 후자로 이해하는 편이 1-18절의 문맥에서 더 적절합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허탄한 거짓 또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지만, 다윗은 진리의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지금 고난 중에 있어도 언약의 하나님이 그가 처한 상황을 아시고 원수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안전하고 자유롭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다’고 믿음으로 선언할 수 있습니다(8). 다윗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확신하고 기대하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 (9-13)

사실 고난이 예상치 못한 가운데 찾아오는 불청객이라고 말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처음부터 고난 중에 태어났고 고난과 함께 살아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다른 얼굴로 찾아왔을 뿐이지 그 실체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까?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9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10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11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12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13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9-13)

 

다윗은 고통 중에도 기도합니다. 육체(9-10)와 관계(11-13)의 어려움에 시달리면서도 일생을 마냥 슬퍼하며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럴지라도 내 하나님, 내 구원의 반석이요, 산성이신 주님을 목 놓아 부릅니다.

 

(1)하나님의 은혜를 간구(9a)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확신하는 다윗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절박하고 힘든 상황을 하나님께 낱낱이 아뢰며 앞으로 임할 하나님의 구원을 재촉합니다.

 

(2) 영육간의 고통(9b-10)

 

다윗의 고통은 몸과 마음에 가득합니다. 이 근심과 고통은 하루나 이틀의 일이 아니라 그의 평생에 있어온 것처럼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운이 빠지고 약해집니다.

 

(3) 원수로 인한 고통(11-13)

 

다윗의 고통의 원인은 그를 욕하고 몰래 자신을 위기에 빠뜨린 원수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웃과 친구와 알지 못하는 행인조차도 그를 피하고 비방하였고, 더 나아가 그를 죽이려고도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이미 죽은 사람과 깨진 그릇처럼 버려져 존재감을 상실하였습니다. 다윗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두려움과 고통이 엄습하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합니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구원을 간구(14-18)

믿음이 중요한 이유는 많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대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피하기만 하면 자신의 음밀한 장막에 우리를 숨겨 주시고, 온갖 구설의 다툼을 막아주십니다. 다윗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만 신뢰하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4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15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6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17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 18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이 말 못하는 자 되게 하소서(14-18)

 

다윗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대적의 위협이 주는 두려움과 근심은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습니다. 슬픔과 한숨으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변하자 모든 관계들이 돌변하여 떠나고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1)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14)

 

죽을 고통에 놓인 다윗은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기에게는 하나님밖에 없음을 확언하며 ‘그러나 나는 주를 의지합니다!’ 라고 외칩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15-18)

 

그는 자기의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인지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하여 자기를 원수에게서 건져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다윗은 기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공의, 인자, 은혜 등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여 자신의 구원을 간청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포함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으며 그의 말씀과 행동이 이 성품에서 온다는 것을 다윗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구원을 간청하면서 원수들에 대한 심판도 함께 간구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는 자는 무고히 고통받고 있는 자기 자신이므로 하나님이 그를 원수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되 그의 원수들에게는 수치와 멸망이 임하기를 구합니다. 이 원수들은 비겁하고 사악할 뿐 아니라 교만하고 죄 없는 자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므로 이들의 입을 막아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찬양(19-24)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견고한 성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붙든다면, 고난 때문에 눈이 흐려지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바라볼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이 진실함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이 진실함입니다.

 

19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20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21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22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23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24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19-24)

 

이제 다윗의 간구가 끝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시작됩니다(19-24) 내용으로 보아 이 단락은 다윗이 기도의 응답을 받은 후인 듯합니다.

 

(1) 의인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19-20)

 

먼저, 다윗은 의인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찬양합니다(19-20).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며 피난처 삼는 자를 위해 최고의 것을 마련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사람의 꾀와 다툼을 일으키는 말에서 구하시고, 그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비밀 장소에 감추시는 분입니다. 다윗이 음모를 꾸미고 거짓을 말하는 자들을 지목하는 이유는 그의 원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며 피난처 삼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은 자신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은총과 동일시되어 있습니다.

 

(2) 다윗의 찬양(21-22)

 

둘째로, 다윗은 자신이 기도한 대로 인자하심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21-22).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시고(7), 구원하시기를(16) 구하고 기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를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인자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금 확증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한 위기에 놀라 자기가 하나님의 눈 밖에 났다고 생각하고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받기에 마땅한 찬송을 드립니다.

 

(3) 성도에게 권면(23-24)

 

끝으로 다윗은 성도들을 향해 권면합니다(23-24). ‘여호와를 사랑하라! 힘내라! 담대하라!’ 이 세 가지 명령으로 다윗은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다윗을 포함한 하나님의 성도는 진실하고 겸손하며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호하고 사랑하시므로 그분의 성도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존중하는 교만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엄한 심판이 있다는 점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다윗의 경험을 함께 들은 성도들은 다윗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억울한 시기를 믿음으로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가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합니다.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한 자를 엄중히 갚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바로 그분의 사랑의 다른 속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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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4-01)


엘리후의 가혹한 충고

욥기 34장 1-30절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기에 하나님께서 선하다는 결론을 고민 없이 도출한다면 수없이 많은 반론이 제기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 수 있으며,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으로 죽어 마땅한 우리에게 베푸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할 때 주저함 없이 하나님으 ㅣ성하심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 엘리후에 따르면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강력히 주장한 나머지 하나님의 정의로움에 의구심을 품어 하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그는 세상 모든 이들을 감찰하시며 그들을 행위를 따라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 앞에서 제외될 자는 없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1-4)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며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동시에 언제든지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아뢰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누군가에 대해 평가하려면 그의 말뿐 아니라 그의 삶도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선악의 기준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1엘리후가 말하여 이르되 2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3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4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1-4)

 

엘리후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나머지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의로운 위치에 두는 불경한 죄를 지었다고 지적했습니다(33:9-12). 또한 하나님께서 꿈이나 고통을 통해서 그의 백성에게 경고하며 그들을 단련하신다고 말하며 욥이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33:13-30). 이제 34장에서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모든 이를 감찰하시고 악한 자를 심판하심으로써 세상을 의롭게 통치하심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는 욥이 이를 듣고 하나님께 품은 야속한 마음과 재판을 열어 하나님과 변론하려는 생각을 철회하고 속히 하나님께 순복하여 종국의 심판을 면하기를 기대합니다.

엘리후는 먼저 지혜와 지식 있는 자들을 불러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라 요구하는데(2-15). 여기서 지혜 있는 자들이란 욥과 친구들이나 그들을 포함한 청중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2,10,34). 엘리후는 12:11에서 욥이 한말을 따라 “입이 맛을 분별하듯이 귀가 말을 분별하므로 자기 말을 귀담아 듣고 정의가 무엇인지 함께 알아보자”고 설득합니다. 즉, 자신의 주장이 옳고 선한지, 욥의 주장이 옳고 선한지 판단해보자는 것입니다.

 

엘리후의 논쟁(5-3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엘리후의 가르침대로 언제나 정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해야 하빈다. 우리의 시련을 통해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의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5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6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7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8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9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10○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11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 12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13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상을 그에게 맡겼느냐 14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과 목숨을 거두실진대 15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16○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17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18그는 왕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 하시며 지도자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19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 20그들은 한밤중에 순식간에 죽나니 백성은 떨며 사라지고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거함을 당하느니라 21○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22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23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24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25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 사이에 뒤집어엎어 흩으시는도다 26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눈 앞에서 치심은 27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깨달아 알지 못함이라 28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하게 하며 빈궁한 사람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29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30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5-30)

 

엘리후는 욥의 발언들을 듣고 그가 악하다고 판단합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욥의 말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실 수 없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그분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 욥의 부당한 주장(5-9)

 

엘리후 욥이 스스로의 의로움을 부각시킨 점이 부당하다고 밝히며(5-9), 이에 대한 증거로서 하나님께서 정의로운 통치자라는 점을 설명합니다(10-15). 그는 욥의 불경함을 증명하기 위해 욥이 이전에 한 말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은 잘못을 지적합니다(5-6). 욥이 스스로 의롭다는 점, 하나님께서 자신의 정당함(‘의’로 번역됨)을 빼앗아갔다는 점,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몰았다는 점, 허물이 없는 자신에게 치료할 수 없는 고통을 주셨다는 점. 엘리후는 욥의 입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엘리후 욥이 목마른 자가 물을 마시듯 남들이 자기에게 쏟아 붓는 비방과 조롱을 다 받으면서, 악인들과 떼 지어 함께 다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봐야 유익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정죄했다고 비난합니다(7-9). 엘리후의 이 주장은 욥의 말을 정확히 인용한 것은 아니며 욥이 한 말을 자기 나름대로 요약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친구들과의 논쟁 속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악인으로 하여금 의인이 누려야 할 장수와 권세를 누리게 하시면서도 죄 없는 자신은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셨다며 불평하였습니다(21:7-26). 또한 악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거나 그에게 기도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 들지도 않음을 욥이 지적하였습니다(21:14-15). 이에 엘리바스는 욥의 죄가 크므로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이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고난을 받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응수하였습니다(22:3-11). 엘리바스와 마찬가지로 현재 엘리후 욥이 악하고 어리석은 자의 길로 갔음을 증명하려 합니다.

 

(2)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10-15)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죄 없는 자를 박해한다는 욥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악행과 불의를 결코 행하지 않으시며, 사람의 행위에 따라 갚으시는 공의와 선의 통치자이심을 주장합니다. 그가 하시는 일에는 실수도 죄악도 없습니다. 이러한 엘리후의 주장은 욥이 지금 받고 있는 고난이 마땅하기에 허락되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엘리후는 또한 하나님께서 누구의 명령을 받아 세상을 통치하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가 창조주이며 세계의 통치자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하시는 일을 일일이 누구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마음만 먹으면 한순간에 사람으로부터 그의 영과 목숨을 빼앗아 혹으로 돌아가도록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호흡이 끊어지지 않게 보호하시고 삶을 영위케 하시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입니다. 엘리후는 현재 욥에게 생명이 붙어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3) 정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16-20)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욥에게 직접 향하여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라고 요구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미친다는 점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16-33).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재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의 왕이나 지도자들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거나 ‘악하다’고 판단하고 선언하실 수 있는 권세자이십니다. 그들의 생명을 한순간에 빼앗을 수 있는 전능한 심판자이십니다. 엘리후가 특별히 왕이나 지도자와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악인들을 예로 들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예외일 수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욥의 위치가 마을의 지도자와 왕과 같았기(29:25) 때문이며 욥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정의를 싫어하신다는 욥의 주장이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재차 강조합니다.

 

(4) 감찰하며 심판하시는 하나님(21-28)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행위를 살피십니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각과 동기와 언행을 이미 다 파악하시므로 그가 악을 저질렀음을 즉각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를 심판하기 전에 사건의 전말을 따로 면밀히 조사하기나 재검토하는 등 시간을 지체할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행악자는 하룻밤 사이에 멸망하게 되고 그가 가진 것은 모두 남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또한 그에게 닥친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알려져 공공의 이야깃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악자는 어쩌다 죄를 짓게 되었습니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세상을 공의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이나 명령에 제대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지 못하기 십상이고, 설령 알았다 해도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의 자리에서 몰아냈으므로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학대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등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핍박을 당한 자들은 하나님께 이에 대해 눈물로 부르짖으며 행악자의 심판을 간청하게 됩니다.

엘리후는 감찰하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진술하면서, 욥도 자신이 알든 모르든 악행을 저질렀으며 그가 당한 고난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감찰하심과 심판의 결과라는 것을 넌지시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엘리후도 욥의 세 친구처럼 인과응보에 기초한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5) 모두에게 동일한 하나님의 통치(29-30)

 

엘리후 욥이 줄곧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불평하고 정죄했음을 지적합니다(29: 33:13).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감히 따져 물을 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통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공평함과 정의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세 있는 악인이 그의 백성을 해치지 못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당신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숨김없이 내놓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언제나 선함과 정의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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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9-04)

 


사역 태도를 가르치신 예수님

마가복음 9장 38-50


 

다른 사람들과 일을 하다 보면자신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그래서 종종 사역에 있어 의견이 다른 것을 사역을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결코 그렇지만 않습니다우리 주변에는 서로 다른 것이 조화를 이룬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합창단이 합창할 때각 파트 다르게 있어 4부로 부릅니다음은 다르지만 그 다른 음들이 함께 모여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세상에는 다름을 통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 경우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누가 크냐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논쟁은 제자들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은 제자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과 벌어진 다툼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만의 높은 장벽을 쌓음으로서 타인을 배제시키는 전형적인 세상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져야할 자세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져야할 자세(38-41)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보면 자신과 비슷한 사역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때로는 경쟁상대로 생각할 수가 있었습니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달란트를 따라서 서로 합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시길 원하십니다그러나 제자들처럼 경쟁심리가 일어나서 문제를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38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38-41)

 

요한은 어떤 이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아니었지만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사람을 보았습니다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그래서 요한은 그들에 대해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보고합니다.

 

지금까지 귀신 축출 기적은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독특한 활동이었기에제자들은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자신들만 이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제자들은 자신들이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자신들이 쳐 놓은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만족한 사람들입니다자신과 다른 것을 무조건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형태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첫째는 약자들은 고립주의(孤立主義)로 나타납니다교회사에서도 나타나고 지금도 나타난 수많은 분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반면에 강자들은 팽창주의(膨脹主義)로 나타납니다자신들의 교리와 신조들을 동의해야만 울타리를 열어줍니다그러나 둘 다 배타주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태도가 아닙니다.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귀신 축사 능력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자신들의 전매특허라고 생각했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는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다만 자신들의 권한이 침애 당하고 있다는 사실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만의 은사가 아니라는 사실에 몹시 당황 했을 것입니다제자들은 얼마 전에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서 사람들 앞에서 무안당한 경험이 있었습니다자신들은 실패했는데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위신도 실추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그래서 위기감을 느껴서 금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그러한 기적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시행할 수 있다고 밝히셨습니다그리고 그들을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폐쇄된 특권 공동체가 아니며 수용적인 열린 공동체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진심으로 주의 능력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을 통해서든지 일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자신들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제자들의 폐쇄적인 공동체 의식과 특권 의식을 교정하십니다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모든 이들에게 상이 있음을 약속하시면서 제자들의 편협한 생각을 고쳐 주셨습니다.

 

사역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제자들은 단지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혹시 특권의식 속에서 당신도 다르다는 이유로 시기하며 그 사람의 사역을 반대하지 않습니까모든 사역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 들려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일군이 되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이 멀리해야할 죄(42-4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나가는 분입니다그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십니다하지만 사람들은 사람들을 경계할 대가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진심으로 경계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42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없음45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없음47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42-48)

 

예수님의 제자들이 경계해야할 대상은 사역을 동참하는 사람이 아니라 범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지체가 제자의 길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그들을 실족한다면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을 받을 것인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그래서 사역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강력한 적군은 범죄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모든 죄를 저지르게 하는 유혹들과 당당히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를 기억할 것입니다사도 바울이 3년 반 동안이나 사역했던 곳입니다그 교회가 이단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그래서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습니다하지만 그들은 진리는 잘 지킬 수 있었지만첫 사랑은 잊어버렸습니다무고한 피해자가 많이 나온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첫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는 경고하셨습니다(계 2:1-7).

우리 시대에도 성도들이 힘을 합쳐 싸워야할 대상은 사탄입니다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교회들끼리 교회 지도자들끼리 집안 다툼을 하는 일은 없어야하겠습니다하나님께는 그들이 누구라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예수님의 경고는 계속됩니다지체를 넘어지게 하는 자도 큰 형벌을 받지만스스로 죄에 걸려 넘어지는 자도 형벌을 받는다고 경고하십니다그렇게 신앙을 잃어버리면 그 결과가 너무 참혹하기 때문에 죄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우리 몸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인 손과 발과 눈까지도 제거하라고 경고하십니다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과장법입니다.

 

죄악으로 오는 위험의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십니다먼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위험입니다그래서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가 받을 형벌의 중대성을 인상적으로 강조합니다다음으로 스스로 넘어지는 문제 역시 중요한 문제입니다자기 자신 안에서 오는 위험이었습니다그래서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그 결과가 너무나도 중대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피하려면 몸의 지극히 소중한 부분들까지도 제거해 버려야 할 것임을 촉구합니다차라리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뽑아서라도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결단 이하에 따라 생명에 들어가느냐아니면 지옥에 던져지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지옥의 불 속으로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죄악으로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져서 끊임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 끔찍하고 무서운 지옥입니다예수님은 지옥에 가는 것보다 죄를 짓게 하는 손이나 발이나 눈을 없애고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요구하십니다만약 우리의 손과 발과 눈이 죄를 짓게 한다면그것을 없앨 즉각적이고 완벽하게 죄를 끊을 것을 요구하십니다잘못인 줄 알면서도 계속 죄는 잘못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혹시 당신은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당신의 삶에서 잘라내야 할 죄는 무엇입니까?

 

제자들에게 필요한 덕목(49-50)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져야할 덕목에 대해 간략한 권면으로 마무리하십니다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그것이 무엇입니까?

 

49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49-50)

 

제자들이 서로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가르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불로서 소금에 절여서 성전에 드려지는 번제물처럼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희생제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고난의 불로 정결한 제물이 되지 않으면 지옥불에 고통을 당하는 죄악의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불로 정결함을 입지 않으면 남을 실족하는 자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금에 절여진 제자들만이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소금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에 꼭 있어야할 소금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제자들의 역할은 화목하게 하는 일입니다화목케 하는 사람들이 지체를 실족하게 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악을 저질러서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세상은 서로 경쟁하지만 제자는 벽을 허물고 장벽을 부스고 차별을 철폐해야 합니다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심어야 합니다무엇보다도 화목하기를 힘쓰며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폐쇄적인 사역이 아닙니다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갑니다자신의 이권 때문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실족케 한다면 무서운 죄악입니다당신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가 관계가 파괴되어 집니까회복되고 있습니까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공동체가 화목하게 되길 바랍니다화목하게 화평하게 하는 제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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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9-03)
 


두 번째 십자가를 예언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9장 30-37


 
하루하루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큰 축복이며 선물입니다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면서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오늘 하루 당신의 삶 가운데 주님과의 친밀한 깊은 교제가 있을 축복합니다.
 

  • 본문은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버나움에 들릴 예정이었습니다. 얼마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에 계시던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가시면서도 가급적이면 무리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여행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제자들을 양육할 시간이 더 많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을 가시면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언을 하셨습니다.

 

죽음과 부활을 두 번째 예언(30-32)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도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없다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예수님께서 변화산에 놀라운 하나님의 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이것을 본 제자들에게는 더욱 인간적인 영광스런 모습을 신뢰하게 됩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욱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30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30-32)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여정은 이제 갈릴리 지역에 이르렀습니다제자들은 갈릴리에 도착했을 때예수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던 갈릴리에서 군중집회를 통해 영향력을 힘껏 발휘하길 원했을 것입니다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조용한 길로 찾아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그 동안에서는 많은 무리들을 만나셨습니다하지만 지금 이 시간만큼은 무리에게 방해받지 않고제자들에게만 가르치시길 원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대중에게 노출을 삼가고자신이 이 땅에 찾아오신 목적과 그들을 부르신 이유 그리고 그들에게 따라가야 할 제자의 모습에 대해서 가르치시며 제자들에게만 조용히 시간을 보내시길 원하셨습니다.
 
이방 지역이었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간 지점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무리들에게 휩싸여서 가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지난번처럼 이어 두 번째로 반복해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고를 반복하십니다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남은 사역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확실히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에 대해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제자들이 알기를 원하셨습니다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을 친구라고 칭하시며 그분의 비밀을 전부 알려 주시고자 했습니다(요 15:15).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런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을 뿐 아니라 그 의미를 어느 누구도 함부로 질문하기까지도 두려워했습니다왜냐하면 또 어떤 책망이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실수는 자신들이 선입견으로 모든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셔도 상대방의 의도한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지도 않았습니다자신들의 생각으로 가득한 것입니다이것이 얼마나 큰 실수를 가져옵니까우리들도 말씀을 읽을 때나 들을 때나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 귀 기우리는 경우를 봅니다진정한 제자가 되길 원하신다면말씀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을 깨닫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누가 클까 다투는 제자들(33-34)

예수님께서는 외면할 수 없는 감당해야할 진실 앞에서 감당해 가셨고제자들에게 가르치길 원하셨습니다하지만 제자들의 모습은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가급적이면 피하고 싶고 회면하고 싶은 그러한 모습들을 보여줍니다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들을 제자들은 그것을 충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3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33-3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집중해서 가르치시고 같이 시간을 보내시길 원하셨습니다하지만 제자들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그들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집중하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합니다예수님의 질문에 당황했을 것입니다그들은 아무도 대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각하게 전하는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엉뚱하게 누가 큰지에 대해 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이야기하지만그들의 관심은 오직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통치자 되셔서 새로운 세상을 여실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그래서 계속적으로 제자들 중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 곧 성공과 승리를 통한 명예나 지위 등에 관심이 있었습니다그래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지를 놓고 자기들끼리 길거리에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삼년 동안 예수님께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아직까지도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훈련은 지식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입니다제자들의 삶이 완전하게 변화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교회를 통해 훈련하십니다훈련은 진심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훈련입니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으면 곁과 속이 다를 이중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겉으론 섬긴다고 하지만 제자들처럼 자신의 이권에게 대단히 큰소리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자로서 가는 길에 대한 훈련에 들어가지 전에 제자로서 기본적인 정신이 필요합니다군인에게는 군인정신이 기초적으로 필요하듯이 제자에게는 제자의 정신이 바르게 필요합니다그것이 없으면 바른 제자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이것은 구호나 외침이 아닙니다제자로서의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른 제자 길을 설명하신 예수님(35-37)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큰사람은 모든 사람을 겸손히 섬기는 사람입니다그래서 사람의 눈에 크게 보이는 것은 누가 더 많이 쌓고 높아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하지만 하나님의 눈에 크게 보이는 것은 누가 더 많이 내주고 낮아져 섬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35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5-37)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정말 한숨스러웠을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앉으셨습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고 말씀하셨습니다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첫째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주님은 첫째가 되는 것이 나쁘다고 하시지 않습니다다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첫째가 되는 방법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주님의 방법대로 따라가는 것이 제자들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 아이를 안으시고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이 첫째가 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나아가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어린 아이의 같다는 것은 종과 같은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종의 자세는 무엇입니까아침 일찍 일어나서 주인의 밭에 나가서 농사를 짓고 수고합니다그리고 저녁까지 수고한 후에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와서저녁에는 주인이 주무실 때까지 계속 섬겨야 합니다단 하루도 쉬지 않고 주님의 집에서 365일 동안 수고해야 합니다그러고도 자신의 주장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그곳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그래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도 경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제자들이 꿈꾸는 세상과 예수님이 세우려는 하나님 나라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장 잘 보여주어야 할 곳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교회는 서로 섬기려 하는 곳이고 서로 바닥으로 내려가려는 곳입니다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섬김을 받고 서로를 가장 존귀하게 대접하는 곳입니다그런 곳에 예수님께서 임재하시고 자신의 몸으로 삼으실 것입니다예수님은 교회에서 서로 높아지려고 갈등하고 다투고 대접받으려 하는 곳을 자신의 몸으로 삼으실 리 없습니다.
당신이 영접해야할 어린 아이는 누구입니까이 땅에서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수고하기보다 더 낮은 자리에 가는 사람입니까인정해 주지 않고 대접해 주지 않아서 섭섭한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주님의 마음이 편히 임재하실 사랑과 섬김과 겸손의 공동체를 가꾸어나가길 바랍니다교회에서는 섬긴다는 것은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성도들의 섬김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연약한 성도들이 세워진다면 섬기는 사람으로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겸손하게 주를 섬기는 제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이기심을 뛰어넘어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성령의 불로 이기심을 태워 버려야 합니다이제는 섬김을 받으려는 자리보다 심김의 자리로 나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작은 일부터 섬김에 실천이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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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3-02)


엘리후의 가혹한 충고

욥기 33장 13-33절


 

성공한 사람들의 비참한 말로들을 보며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성공이 별거 아니네.”라고 반응합니다. 성공이 별거 아니라는 깨달음은 꼭 필요합니다. 많은 재벌 회장들의 비참한 말로를 보면 성공이 별거 아님을 깨닫습니다. 또한 지상 최대로 성공했던 솔로몬의 전도서 고백도 성공이 별거 아님을 생생하게 교훈합니다. 그러나 성공이 별거 아님을 깨닫는 것은 좋지만 성공 자체를 혐오하면 안 됩니다

 

  • 엘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신의 뜻을 알리신다고 인간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그를 꿈이나 환상으로 경고하시며, 그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 고통으로 징계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징계 받아 고통 받고 있는 인간에게 중보자 천사를 준비해주시며, 그가 회개할 때 그를 용서하고 회복하시며, 죽음의 구덩이에서 생명의 빛으로 이끄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경고와 징계의 하나님(13-2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일반계시를 보는 사람은 어렴뜻이 그 뜻을 분별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읽지 않으면서 꿈이나 환상 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해야 합니다.

 

13○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14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15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16그가 사람의 귀를 여시고 경고로써 두렵게 하시니 17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18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 19○혹은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20그의 생명은 음식을 싫어하고 그의 마음은 별미를 싫어하며 21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22그의 마음은 구덩이에, 그의 생명은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13-22)

 

엘리후는 이제 자신이 아무리 호소하며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는 욥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분인데, 사람이 그 말씀에 관심이 없어서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 계시로 경고하시는 하나님(13-16)

 

욥은 세 친구와의 논쟁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할 길이 없고 하나님의 대답도 없자 하나님께 재판을 열어 왜죄 없는 자신에게 고난을 주셨는지에 대한 답을 주고 자신의 무죄를 확증해주시기를 재촉하였습니다(10:2;13:2,22;23:3–7; 32:35-37). 이에 엘리후는 욥에게 다른 관점에서 그 문제를 보라고 제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하시는 알이나 말에 대하여 또는 사람이 하나님께 묻는 질문에 대하여 일일이 답변해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주관자로서 사람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지혜와 계획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는다 하여 사람이 하나님과 논쟁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이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때로는 꿈이나환상을 통해서 경고의 말을 전하고(7:14) 한 번이 아니라 거듭거듭 말하여도 사람은 이것 또한 잘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엘리후는 이런 설명을 통해서 욥이 세밀한 하나님의 계시에 눈을 돌리기를 넌지시 조언합니다.

 

(2) 하나님이 인간에게 경고하시는 이유(17-18)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경고의 계시를 주시는 이유로 엘리후는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 사람이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며 교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렵게 여긴다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악한 행실과 악한 말을 그치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죄악의 길로 가려 할 때 또는 죄악의 길에 속한 줄도 모르고 교만할 때 하나님께서는 지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그를 경고하여 그가 주의하고 의의 길로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둘째, 사람을 구덩이에서 건져 그 생명을 건지시기 위함입니다. 이 점은 13-33절의 단락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강조되었습니다. 이 단락에서는 ‘구덩이’(18,22,24,28,30와 ‘생명’(18,20,22,28,30)이란 단어가 각각 5번씩 등장하였습니다. 이때 18, 29, 30절에서는 두 단어가 한 절에 함께 나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음의 구덩이에서 건져 생명으로 인도하심을 표현합니다. 24절에는 구덩이만 나오지만 역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반복과 강조를 통해 엘리후는 구원과 생명의 하나님을 부각시킵니다.

엘리바스는 5:17-26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며 욥에게 그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엘리후는 이런 충고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욥에게 닥친 현재의 고난은 하나님이 그를 교만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구실을 한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종용합니다.

 

(3) 징계를 통하여 계시하시는 하나님(19-22)

 

욥의 세 친구는 세월을 통해 내려온 전통과 경험을 통하여 고난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만 이해하였고 욥에게 이를 적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죄를 지어 회개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세 친구의 의견에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엘리후는 고난이 죄의 결과라는 세 친구의 입장과는 다른 관점을 소개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때로 인간에게 고통을 주어 그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또 그를 단련하기도 하시므로 고난을 항상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결과로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고난과 고통을 사용하여 욥이 교만하지 않도록 하시고 그를 단련시켜 결국은 생명을 주시려고 합니다. 또한 욥에게 침묵하신 것이 아니고 꿈이나 고통 등을 통해 말씀하셨으나 욥이 이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음성에 더 민감해져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정작 엘리후 욥이 어떤 죄목으로 징계를 받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점에 민감하지 못했습니다.

 

회복과 용서의 하나님(23-30)

고난과 재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천사가 그의 중보자가 되어 그이 정당함을 보이고,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서야 한다는 생각은 부분적으로 옳은 이해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아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사가 중보자가 된다 해도 한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죄인은 자신의 정당함을 하나님 앞에 보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고난 앞에서 인간은 죄의 값을 대신 치러 줄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23○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24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25그런즉 그의 살이 청년보다 부드러워지며 젊음을 회복하리라 26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27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범죄하여 옳은 것을 그르쳤으나 내게 무익하였구나 28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29○실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30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23-30)

 

엘리후는 징계로 인한 질병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벗어난 사람의 반응을 언급합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목적도 이렇게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1) 중보자 천사와 하나님의 용서(23-24)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단련시킬 때 고통을 주는 것만으로 그의 역할을 끝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일천 천사(또는 ‘사자’(messengers]) 가운데 한 명을 보내어 고통 받는 자의 중보자가 되게 하여 그가 다시 의롭다 칭함을 받도록 도우십니다. 욥은 높은 하늘에 자기의 증인과 중보자가 계심을 바라고 믿으며 그 중보자가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해주기를 원했습니다(16:19,21) 욥이 언급한 그 중보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 지은 백성을 위하여 그를 대변할 자를 준비하시고, 그 대변자의 중보의 기도를 통해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 죄인의 죗값을 치를 희생제물을 얻은 것으로 간주하여, 그의 생명을 죽음에서 건지시려고 합니다.

 

(2) 인간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25-28)

 

하나님께서 천사의 중보를 통해 고난 받은 자를 다시 의롭다 여기셨으므로 그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당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말끔히 없애주시고 전보다 더 낫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고난 받은 자의 깨어졌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그의 입술에 찬송과 기쁨을 주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며 그가 다시 의로워졌음을 알리실 것이다. 용서받은 이 죄인은 이제 고통과 두려움에서 나와 당당히 사람 앞에서 자신의 죄와 무익함을 시인하고, 자신을 무덤에서 건져 생명의 빛을 보게 하신 하나님만을 노래하며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엘리후는 이런 설명을 통하여 욥이 현재의 고난에 초점을 두지 말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눈을 돌려 소망을 품고 다시 의롭다 칭함을 받아 육체적 질병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고 조언합니다.

 

(3) 하나님이 인간을 회복시키시는 이유(29-30)

 

죄 지은 인간을 용서하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은 위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17-18절의 설명을 보라) 생명과 구원의 제공자이십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을 멸망의 구덩이에서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꿈이나 환상으로 경고하고, 육체의 고통 을 주어 징계하며, 천사를 보내어 중보하게 하고, 죄 지은 인간을 용서하고 회복케 하십니다. 더구나, 인간을 구원하며 생명을 주려는 하나님의 시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그의 고통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깊은 뜻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으라고 촉구합니다.

 

내 말을 듣고 대답하라(31-33)

우리가 누군가에게 하는 권면이나 위로나 교훈이 그에게 적절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 사람을 더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사과’지만(잠 25:11) 그렇지 않은 말은 독 사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해서 말씀하시니 잘 분별하고 깨달아 유익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31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32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기쁜 마음으로 그대를 의롭다 하리니 그대는 말하라 33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그대를 가르치리라(31-33)

 

욥은 전에 친구들에게 “내 허물이 무엇인지 알게 하면 내가 잠잠하겠다”(6:24)고 말했고, 엘리후는 이 말에 대꾸하듯이 이제 자기가 깨달은 지혜로 욥을 가르칠 테니 새겨들으라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과 논쟁을 벌였으나 욥을 정죄할 뿐 깨달음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욥을 잠잠케 하기는커녕 말을 더 많이 하게 만들었다. 엘리후는 이제 친구들과는 다른 견지에서 욥에게 의견을 내놓으며 깨달음이 있거든 잠잠히 자기 말을 경청하라고 지시합니다. 혹시라도 욥이 자신의 의견에 반박할 것이 있다면 말하라고 종용하면서 자신 또한 욥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후 욥이 자기의 말에 대답하지 못할 것을 확신하므로 다시 한 번 욥에게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지 말고 잠잠하여(13:2,19) 자신의 지혜의 가르침에 계속 귀 기울이기를 청합니다(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때로는 초자연적 방법으로, 때로는 말씀과 상황을 통해 우리가 당신의 뜻 안에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를 갈망한다면 그분의 뜻에 기꺼이 순종할 것을 마음으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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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9-02)


믿음의 능력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가복음 9장 14-29


 

성악가들은 날마다 발성 연습을 합니다운동선수들 또한 날마다 연습과 스트레칭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그래야만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영적인 능력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항상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당신은 영적인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 본문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마지막으로 병을 고치신 이적 기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세 제자와 함께 변화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아 있던 아홉 제자들이 난처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모인 무리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이유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하고 계십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14-18)

하나님의 능력은 믿는 자들을 통해 나타납니다믿음이 없다면 어떤 기적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 망신을 당하고 있었습니다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14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5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14-18)

 

예수님께서는 수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그곳에서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놀랐고 두려워했습니다그래서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산 아래에는 내려와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그곳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의 제자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도착하자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모여 들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건의 발단을 한 아버지가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제자들에게 부탁했지만귀신을 내쫓지 못하고 실패하였습니다그들은 한때는 성공적으로 많은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6:13). 과거에는 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능력도 보여주지 못하고 실패했던 것입니다더욱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상황이 논쟁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홉 명의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모습과는 극단적으로 대조되고 있었습니다모세가 시내산을 내려왔을 때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아론을 지도자 삼아서 황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제자들은 큰 무리에 둘러싸여서 서기관들과 변론하고 있었습니다그들에게 논쟁과 조소거리가 되어서 망신당하고 있었습니다더욱 불신의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서기관들은 이미 앞에서부터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해 적대적이었고예수님의 귀신 쫓는 기적과 관련하여서도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3:22).

 

믿음의 생활은 한 때 누렸던 영광을 경험으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경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제자들은 이미 권세를 받았고(막 6:7), 경험이 있었음에도(막 6:13) 불구하고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그들은 영적 전투를 자신의 경험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날마다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성령 충만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19-27)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만 업신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까지 업신여깁니다하나님을 믿으라는 우리들의 말에 귀담아듣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19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19-2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귀신과 세상 사람들에게 쩔쩔매고 있는 상황을 보시며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한탄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의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아직도 더디게 깨닫고 믿음이 없어서 그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한 없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예수님의 대답은 달랐습니다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혹시 제자들처럼 인생의 능력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착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핵심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능력을 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21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21-24)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린 아들을 데려오게 하십니다그의 아버지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자초지정을 묻으십니다사실 아이를 죽게 하려고 어려서부터 자주 불과 물속에 던졌습니다예수님 앞에서 아이는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넘어졌습니다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을 꺾으려는 사탄의 전략입니다그는 자포자기 한 심정으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대답합니다그 동안 아이의 고질병은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고 갔습니다아홉 제자들에게도 귀신을 치유할 수 없는 의심을 더욱 부추겼던 것입니다의심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믿음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계십니다예수님은 단호하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답변하셨습니다예수님의 명령은 의심에게 책망이며 악한 세력에 대한 도전입니다예수님은 믿음을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이 생각하는 지혜와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정직한 고백합니다언뜻 이율배반적인 답변입니다믿음과 믿음 없음의 공존은 말이 안 됩니다말은 안 되지만 현실에서는 일어나고 있습니다곧 한편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달라고 소리쳤습니다예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가는 죄인들의 마음 태도입니다누군들 100% 믿음 가지고 주 앞에 나간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주님은 그런 줄 아시면서도 우리를 대해 주셨던 것입니다그러기 때문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마음에 태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보고 계셨습니다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많은 믿음이 아니라 진짜 믿음을 원하신 것입니다.

 

25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25-27)

 

이에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명령하시자 그 귀신을 소리를 지르며 아이에게서 떠나갔습니다아이는 죽은 사람같이 쓰러졌습니다일어나지 못했습니다사람들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보기만 해도 그 권위에 굴복했던 귀신들은권위 있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그리고 이 사건을 논쟁거리로 삼았던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증명하셨습니다.

 

이곳에는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아이가 죽은 것같이 쓰러졌다는 표현과 그가 일으킴을 받았다는 표현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고 사흘만에 다시 일어나는 사건을 미리 내다보는 표현입니다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와야할 이유가 이곳에 있습니다바로 이 아이처럼 죄와 사망에 매어 사탄에 매어 종노릇하던 자들을 살리시기 위해 갈보리 산에서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책망하셨습니다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이 도와주신다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믿음의 기도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하나님보다 커 보인다면문제에 너무 가까이 가 있습니다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서 하나님 앞에 문제를 내려놓을 때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하나님께 해결할 것을 믿고 내려놓은 것이 믿음입니다지금 해결 받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면믿는 사람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을 믿고 예수님 앞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문제점을 가르쳐주신 예수님(28-29)

믿음과 기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기도합니다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제자들은 자신의 문제점을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 조용히 나갑니다.

 

28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28-29)

 

제자들은 자신들이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물었습니다과거에는 귀신을 쫓아내었지만 지금은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다제자들은 자신의 실패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그래서 그 이유를 조용히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지 않아서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오직 기도로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예수님께서도 기도하지 않고 귀신을 축사하셨습니다주님께서 의미하신 기도는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에서 나오는 능력성령 충만함을 의미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날마다 기도하는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매일매일 기도하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기도의 능력이 온전히 들어나게 됩니다제자들에게 부족한 것이 기도하는 삶이었습니다하나님의 능력은 기도로 요청하고 의지해야 믿음에서 시작합니다능력의 근원은 예수님이며 우리는 그 능력의 통로입니다따라서 치유를 원하는 사람들처럼하나님이 고쳐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올바른 능력의 통로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공적인 과거의 행적이 자동으로 오늘도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음을 대체할 성공 전략이나 테크닉은 없습니다오직 믿음밖엔 없습니다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날마다 변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능력을 이 세상에게 나타나길 원하십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신 데도 실패한 이유가 있습니다그것은 과거의 경험으로 의지해 나갈 때 실패합니다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신뢰하는 것입니다자신의 경험을 의지하지 않고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믿음에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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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9-01)


천상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9장 2-13절


 

세계 7000m이상 높은 산은 14봉우리입니다. 산악인들은 14봉우리를 전부 등반하는 것이 꿈입니다. 산악인들이 그렇게 등반하고 싶은 산일지라도, 막상 정상에 머무는 시간은 약 한 시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산소가 희박하고 기압이 높아서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시간 이상이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아무리 절경이 황홀하고, 그곳에 오르기 위해 많은 준비했어도, 반드시 내려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 산에 오른 예수님과 제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자신이 장차 다스릴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무리를 피해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셨을 당시에 있었던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있는 헐몬 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이유가 있습니다.

 

변화산으로 올라가심(2-4)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푼 성도들에게 새로운 신앙 경주에 다시 나가도록 재촉하고, 영적인 허구에서 벗어나서 현실의 두 발을 딛고 살도록 촉구합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을 외치는 선동적인 구호에 속지 말라고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2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2-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죽기전에 볼 자들도 있을 것이다’라는 희망적인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등극한다는 뜻이었습니다. 1차적으로 부활 사건을 염두해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은 부활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서 십자가의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 엿새 후에 수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시고 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이 ‘변화산 사건’은 자세히 살펴보면, 첫 이스라엘과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첫 언약을 맺을 때, 경험했던 모습과 여러모로 비슷합니다. 저자 마가는 예수님을 새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으시는 새로운 모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참고. 출애굽기 24:16). 예수님께서는 모세처럼 높은 산에 올라 영광 가운데 서셨습니다.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는데, ‘세상의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다’라는 묘사는 그것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영광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 옆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 선지자들의 대표자인비다. 이들이 나타난 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증명해 줍니다(4). 이 놀라운 사건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장차 어떤 영광을 받게 될 지를 미리 보여 주시려고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장차 예수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왕이십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쁨으로 자신의 뒤를 따르게 하려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받을 영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실 영광을 소망하여 영광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의 반응(5-8)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 다 중요한 복음이 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일 것입니다. 부활만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희로애락의 생활 속에서 희망과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5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5-8)

 

변화산에서 영화롭게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본 베드로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자리에 초막을 짓자고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장막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 아래에서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 초막절을 떠올린 것입니다(5-6).  이에 하나님께서는 구름 소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7)라고 명령하시는데, 이는 시편 2:7과 신명기 18:15의 인용입니다. 시편 2편은 왕의 대관식 때 불렀던 노래고, 신명기 18:15은 하나님께서 ‘나(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실 것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은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영광스런 모습이었습니다. 아직도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 본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합니다. 그 때에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분의 선언과 요구가 아무리 충격적이더라도 베드로처럼 그분을 막아서거나 산 위에 머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 종착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에 내려오심(9-13)

사람들은 자신이 온전히 믿지 못한 것들을 말하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그것을 온전히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믿을 때 말씀을 통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 그분이 그리스도심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고난을 먼저 거쳐야 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산에서 본 것을 발설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십니다.

 

9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9-13)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선지자는 어리석은 백성에 의해 멸시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변화산 사건을 부활 이전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1) 예수님의 당부(9)

 

예수님께서는 산 아래로 내려오시면서 돌아 가시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2) 엘리야에 대한 질문(10-11)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서로 의논하다가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왜 엘리야는 아직 오지 않았는냐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2) 엘리야에 대한 대답(12-13)

 

예수님은 엘리야가 먼저 오는 것은 회복을 위함이고 이미 엘리야가 왔지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제자들은 감격해서 그냥 그렇게 머물러 있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제자들처럼 고난 없는 영광만 누리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광을 위해 고난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의 가장 좋은 모델은 교회와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가정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믿음의 공동체 성도 모두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 땅에서 모두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드러내면서 천국 리허설을 잘 마치고 나서 그 나라에 함께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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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8-03)


제자도를 가르치신 예수님

마가복음 8장 27-9장 1


 

사람들이 뭔가 부족할 때 2%로 부족하다고 말을 자주 합니다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하게 설명합니다하지만 그들의 대답을 들어보면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사실 그것은 2%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2%도 표현하지 못한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먼저 고난과 죽음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을 예고를 하시자 그는 가로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그 길만이 영생의 길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고백(27-30)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그렇다면 믿고 있는 예수님을 어떠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기다리고 사모하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니까그것은 신앙의 모습을 이끌어가는 신앙관이기 때문입니다당신도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바른 대답을 하시길 바랍니다.

 

27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27-30)

 

예수님께서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십니다제자들과 함께 가이샤라 빌립보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마지막 여정인 빌립보에서 예루살렘까지 약 200km를 걸어가면서 제자 훈령을 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제자의 삶인지 알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지식입니다제자는 스승을 따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스승의 정체가 곧 제자의 정체인 것입니다제자는 스승의 분신입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먼저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여론으로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질문하셨습니다제자들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따라 예수님께 엘리야나 세례 요한과 같이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무리들의 이해는 이것까지였습니다많은 말씀을 듣고 많은 기적을 보았지만 바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대답들을 들으신 후에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습니다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이 대답은 예수님이 기대하셨던 대답이었습니다이 뒤에 예수님의 칭찬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그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명하셨습니다이런 명령을 하셨는지 알 순 없지만 뒤에 가르친 내용을 보면 어느 정도 가늠케 해줍니다.

그것은 베드로는 아직 그리스도이신 중 알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이신 줄 몰랐던 것입니다이대로 제자들이 메시아로 전하면 무리들 역시 자신들이 바라던 정치적인 메시아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제자들도 더 배워야 했고무리들도 더 알아 야 했습니다그래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그러지 않으면 자신들이 만든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직접 그 사실을 공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때까지는 그리스도의 신분은 비밀에 붙여야 합니다.

 

베드로를 꾸중하신 예수님(31-3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 어떤 메시아인지 가르치기 시작합니다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세 번에 걸쳐서 자신의 사명을 소개하십니다이번이 그 첫 번째입니다.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31-33)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에이제 예수님께서 장차 자신이 이루어가야 할 일들을 예언하셨습니다처음으로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실 것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희망적인 말씀보다 절망을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를 포함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을 꾸짖었습니다그들이 이렇게 강력하게 대한 이유가 있습니다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하지만 이제 자신의 선생이 망하기 때문에 자신들도 망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게 된 제자들은 모든 것을 깨달은 것처럼 보입니다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다른 메시아였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조국을 정치적 속박에서 해방시켜 다윗 시대의 영화를 회복하는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라고 생각해서 따라왔던 것입니다그러면 자신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모든 것을 버린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따라왔던 것입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을 예언하신 것은 하늘이 무너진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이 서로 앞 다투어서 예수님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꾸짖었습니다그리고 적극적으로 말렸던 것 같습니다그중에 다혈질인 베드로는 더욱 열심히 항변하며 말렸습니다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 칭찬 들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이키시면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그 중에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바리새인들과 헤롯당처럼 자기 자신의 이권만 생각하고 있습니다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사탄이 하는 일은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는 일입니다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간질하는 것이 사탄의 일입니다지금 베드로가 하는 일이 그 일입니다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크게 책망을 받았습니다앞에서 살펴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지금 베드로의 공통점이 있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오히려 사탄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그들은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뒤를 따라가지 않고 예수님 앞에서 인도하려 들었습니다예수님을 가르쳐 들고자신들이 바라던 예수님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하나님의 뜻을 앞세우지 않고 자기 명예와 자랑과 자기만족을 앞세웠던 것입니다사람들에게는 칭찬을 받을 진 모르겠지만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일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을 열심히 따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예수님을 바로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예수님인 줄 알고 따르고 있던 분이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으로 만들어 놓은 허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왕노릇하는 나라입니다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세상 나라의 왕으로서 로마를 물아내고 이스라엘을 근동의 강대국으로 만드실 분이 아닙니다그분은 사탄의 나라를 이기고 온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분입니다검과 창의 무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세우실 것입니다그리고 그 나라는 남을 희생시켜 세울 나라가 아니라 자신이 희생하여 세우실 나라입니다.

 

제자들은 성공적인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와 다른 말씀하신 예수님을 책망한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그리고 있습니까그분을 통하여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제자도를 가르치신 예수님(34-9:1)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백성의 자세를 가르치십니다진정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제자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설명합니다진정으로 예수님을 쫓는 제자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34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1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34-9:1)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그 방법을 사람들과 제자들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예수님을 따르는 비결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그것은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자신의 욕망을 품고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십자가를 가로 막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잃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것은 목숨과 바꿀 만큼 복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따라오라는 것입니다십자가의 고난을 받겠지만영원한 생명과 영광이라는 엄청난 복도 받을 것입니다그러한 제자들만이 진정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십니다그 사실을 믿을 때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다음으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38)고 결단을 촉구하십니다예수님을 자신의 목숨보다 하찮게 여기면 주님도 그렇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그것을 세상을 사랑하고 신랑이신 예수님을 버린 것이기 때문에 죄라고 하시고 음란한 짓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감당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항상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그것은 자기 주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것입니다예수님처럼 목숨까지 버려서라도 순종해야 합니다그러나 그것은 희생이나 손실이나 그리고 헌신도 아닙니다버린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그리고 당신의 헌신을 통해 귀한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입니까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생각대로 앞장섰습니다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웠습니다먼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야만 예수님을 바르게 따를 수 있습니다그렇지 않으면 십자가를 지고 따를 수 없습니다이제 진정한 제자라면 자신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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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8-02)


영적인 소경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가복음 8장 14-26


 

자세하게 말했는데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그러면 다시 또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만그래도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그리고 듣는 사람이 말을 전하는 사람의 의도와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이러한 상황은 말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나처할 때가 있습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통해 두 번이나 무리를 먹이시는 기적을 보았지만, 바리새인들은 하늘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주님은 불신앙으로 가득한 그들을 떠나십니다. 본문은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 대해 제자들이 부정적인 반응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에서 소경을 치유하신 것을 통해 제자들의 영적 치유의 필요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누룩을 설명하신 예수님(14-15)

마음이 둔하면 깨닫지 못합니다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귀로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행동이 둔하면 제때에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생각이 둔하면 계획과 추진력이 없습니다손발이 둔하면 게을러 굶게 됩니다그러므로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결국 주님께 책망을 받게 됩니다.

 

14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14-15)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떠나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헤롯왕의 나쁜 행동을 닮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하셨습니다적은 누룩이 음식 전체에 펴지듯이 이들의 악한 가르침과 행동이 제자들에게 악한 영향을 줄 것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이것에서 말씀하신 누룩은 제자들에게 끼칠 수 악한 영향력을 의미합니다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종교 지도자들은 흠모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이란 것입니다그들은 많은 기적을 보고도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습니다그들은 자기 입맛에 맞을 때까지 어떤 진리도 믿지 않고 왜곡한 사람들입니다헤롯의 경우도 권력을 위해 경건을 가장하고 진리를 억압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모두 경계의 대상일 뿐입니다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리새인처럼 종교적인 위선자나 헤롯과 같이 정치적인 야망을 가진 사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는 요구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바리세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권하셨습니다오늘날 우리들도 조심해야할 세상의 누룩들이 있습니다세상의 권력과 명예에 영향을 받으면예수님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그러기 때문에 반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누룩을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빵을 걱정하는 제자들(16-21)

예수님과 많은 시간을 지내면서 많은 것을 듣고 보고 배웠습니다하지만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답답함을 볼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 누룩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을 때제자들은 무엇이라고 응답합니까?

 

16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16-2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함을 이해하고 계셨습니다그래서 누룩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제자들은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자신들이 떡을 가져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누룩을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누룩을 떡으로 이해하는 제자들은 한심스러운 것입니다그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싶은 대로만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과 관계에 잘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들은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자기 확신이 지나치게 강해서 모든 것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누룩을 말씀하실 때자신들의 해석대로 떡을 걱정하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칠병어이를 통해 남은 떡을 미처 챙기지 못하고 배에 오른 것에 대해 예수님의 책망하신 줄 알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예수님을 자신의 종교나 정치적으로 경쟁자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제자들도 예수님을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로 만들고 있었습니다그런 점에서 언젠가 제자들도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처럼 자기 이해관계가 다르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책망하십니다그들을 향해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그들의 문제를 마음이 굳어진 데서 찾으십니다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상태로 규정하십니다왜 이렇게 책망을 받아야 합니까그들은 망각했던 것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홍해의 기적만나의 기적 그리고 많은 기적들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망각했습니다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그래서 그들은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았습니다망각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망각과 무지가 낳은 자신은 불신입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그들에게 말씀이 어렵게 들린 것은 그것이 자신과 상관없이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말씀과의 상관성을 찾지 못한 것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이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시던 기적을 다시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이러한 기적들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먹을 것에 대해 걱정하고 염려했기 때문입니다제자들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 6:33-34)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를 만큼 영적인 눈이 열렸지만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만큼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습니다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마음이 굳어져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습니다더디게 깨닫는 제자들의 문제를 지적하시되그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지적해 주시는 분입니다.

 

성도들이 말씀에 영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되면다른 무엇인가에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그래서 신앙은 항상 선택의 문제입니다어떤 것에 영향을 받을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이러한 것들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그래서 바른 누룩을 전파해야 합니다오늘도 주의해야할 누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그런 누룩을 퍼트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22-26)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넘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마무리되어 가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마가는 여기서 매우 의미심장한 기적을 소개합니다그 기적은 벳새다에서 소경을 치료하는 기적입니다.

 

22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22-26)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계실 때사람들이 앞을 보지 못한 소경을 데리고 왔습니다예수님께서는 소경을 마을 밖으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직접 그 사람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여 주셨습니다그러자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눈을 열려서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하지만 희미하게 보였습니다아직까지는 불안전한 치유였습니다예수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예수님께서 다시 소경을 안수해주시니깐 이제 완전하게 회복이 되었습니다두 단계로 고치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말고 돌아서 집으로 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두 단계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아직 제자들이 영적인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첫 번째 소경이 희미하게 보이듯이 예수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희미하게 이해했던 것이었습니다이러한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깨우쳐 주고 싶었습니다단계적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그래서 이 사건은 벳새다 소경을 두 단계로 치유하신 것은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점점 뜨여가는 과정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적인 시력은 어떻습니까하나님과 말씀을 희미하게 보인 상태보다 밝히 보아야 합니다만약 희미한 상태라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만져주시길 바랍니다당신의 어두워진 영혼이 더욱 밝아지고 넓은 시야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사람들의 형편을 보고 불쌍히 여기십니다하나님의 말씀을 편식하며 자신이 이해한 것만 최고라고 고집하지 않습니까그것은 믿음 없는 행위입니다믿음이 없고 마음이 강퍅해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엉뚱한 생각을 하는 우리들은 불쌍히 여겨 주시길 구하길 바랍니다그리고 영안을 뜨게 하시길 원합니다그리고 온전한 예수님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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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3-01)


하나님의 변호인을 자처하는 엘리후

욥기 33장 1-12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시는 것을 모두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논쟁하려 하지 말고, 잠잠히 참고 믿고 순응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며 사람으로 교만치 않게 하시고 멸망에서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로 병상에 던져질지도, 그의 긍휼과 대속의 은혜로 회복될 것입니다.

 

  • 자신이 말해야 하는 정당성을 설명한 후 엘리후는 이제 직접 욥을 향하여 자기의 의견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지혜와 정직함으로 욥에게 대답할 것임을 밝히고,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꿋꿋하게 선포한 것은 하나님께 불경한 태도이며, 사람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다고 반박합니다.

 

진실한 내 말을 들어라(1-4)

우리는 본질적으로 은혜가 필요한 존재하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누구도 자신의 위치와 권위를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과 지위와 재물을 내세워 다른 사람 앞에서 권위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자신이 흙으로 지음 받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거짓 신자일지 모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권위입니다.

 

1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2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말하는구나 3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 4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1-4)

 

엘리후가 드디어 욥을 향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내 말을 듣고,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대답함을 넘어 자만에 빠진 훈계자의 모습입니다.

 

(1) 욥이여 내 말을 들어라(1)

 

32장에서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의 대화를 들으며 그들의 말에 동조할 수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그가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정직과 지혜를 얻었고 할 말이 속에 가득하므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거듭거듭 주장하였습니다.

이제 엘리후는 33장에서부터 직접적으로 욥을 향하여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합니다. 세 친구와는 달리 “욥이여”라고 이름을 부르고(1,31;37:14), 자기의 말에 귀 기울여 들으라고 요구하며 말을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욥의 이름에 다른 명칭을 덧붙이거나 대화를 시작할 때의 형식적인 말을 하는 것도 다 생략한 채 연장자인 욥의 이름만을 부르는 엘리후의 태도에서 결코 사람의 낯을 보거나 아첨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단호함(32:21-22)과 동시에 뻔뻔함이 나타납니다.

이뿐 아니라 1-12절까지 엘리후는 “보시오!”라는 말을 재차 반복하면서(원문에서 2, 6, 7, 12, 19절의 초두에 나옴) 욥이 자신의 말에만 완전히 집중하라고 재촉합니다. 자기가 욥에게 할 말은 아주 중요하므로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욥은 친구들과 대화 중에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13:22)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에 대답해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엘리후는 이제 욥에게 지금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므로 대신 자기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엘리후 자신의 입에서 지금 쏟아질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자신이 그 대답을 제공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절과 마지막 부분(31,33)에서 반복적으로 “욥이여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며 자기의 말에 집중하라고 촉구합니다.

 

(2) 내 말은 진실하다(2-4)

 

엘리후는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할 말을 가득히 채워주어 곧 터질 것 같다고 진술했는데(32:18-20), 그 말을 증명하듯 그가 입을 열자마자 말이 줄줄 흘러나옵니다. 엘리후는 자신이 그 정도로 할 말이 많고, 말하는 시간을 그만큼 오래 기다렸으며, 또한 거침없이 논리정연하게 말을 쏟아낼 수 있을 만큼 지혜롭다는 점을 피력합니다.

이에 덧붙여, 엘리후는 그의 말하는 바는 다 진실이며 거짓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욥도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면서 자기가 하는 말이 다 진실이며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음을 진술하였습니다(27:4). 욥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숨결(영)이 붙어 있는 한 진실을 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이 말을 되풀이하듯 자신이 진실한 이유가 그 자신이 하나님의 숨결(전능자의 기운과 동일함)로 창조되었으며 지금도 그 숨결로 말미암아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에는 욥과 세 친구와 마찬가지로 엘리후 자신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므로 이 자신의 말에 경청해야 함이 은근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동안의 엘리후의 말을 종합해보면, 그는 자신에게 지혜로운 깨달음이 있는 것과 누구의 체면을 세우거나 아첨하지 않고 그 깨달음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근원적인 이유를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정직성에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32:7-8,18-22;33:3-4).

 

할 수 있거든 내게 대답하라(5-7)

우리는 본질적으로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누구도 자신의 위치와 권위를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권위가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과 섬김의 권위입니다. 마땅히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권위가 됩니다.

 

5그대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6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7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5-7)

 

어떤 말이든 들을 의향이 있으니 반론을 제기해도 된다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는 상대의 말에 대해 열린 태도라기보다는 어떤 반론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만한 태도로 보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조언자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공감해 줄 사람입니다.

 

(1) 내게 대답하라(5)

 

엘리후 욥에게 “만일 할 수 있다면 내게 진술하라”고 요구합니다. 실상 이 요구는 욥의 대답을 기대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후는 33장의 끝에서도 유사하게 “만일 할 말이 있다면 대답하라”고 말합니다. 반복적으로 ‘만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엘리후가 욥에게는 반박할 말이 없을 것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음을 나타내줍니다. 32장에서도 보았듯이 엘리후 욥이나 세 친구보다 자신이 나이가 어리지만 지혜에 있어서는 그들보다 뛰어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후가 하는 대부분의 말에는 그가 그들보다 훨씬 지혜롭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그의 태도가 엿보입니다.

 

(2) 동등한 그대와 나(6-7)

 

엘리후는 하나님 앞에서 욥이나 자신이나 똑같이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임을 강조하며 자기와 욥의 동등함을 일깨웁니다. 엘리후는 욥이 누차 하나님의 두려움이 자신에게 엄습한다고 말한 것(6:4; 7:14; 9:34; 13:21; 23:16)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이나 압박감을 주실 수 있겠으나, 욥과 동일한 인간인 엘리후 자신은 그런 두려움이나 압박감을 주지 않으므로 걱정할 필요 없다고 욥을 안심시키려 합니다. 엘리후가 이렇게 동등성을 강조하며 욥에게 대답하라고 종용하는 데에는 하나님과 변론하려 들지(13:2,19) 말라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일일이 대답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13) 욥이 하나님을 자꾸 채근하기보다는 여기 하나님의 영이 주신 지혜를 힘입어 진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므로, 욥이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혹시라도 할말이 있으면 자유롭게 말해보라고 설득합니다.

 

내가 그대의 말을 들었느니라(8-11)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길고 지루한 침묵으로 응답하실 때가 종종 있지만, 그 시간은 우리의 믿음이 더욱 요구되는 시간임을 기억하시고 믿음으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계명을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8○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9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10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11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8-11)

 

엘리후는 드디어 본론을 시작합니다. 자신이 순전하고 의로운데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셨다는 욥의 말을 언급하고 나서, 욥이 의롭지 못하다고 단정 짓습니다. 엘리후가 드디어 욥에게 하려는 말을 시작했지만, 그 역시 욥의 친구들처럼 욥의 고통을 더하는 훈계자였습니다.

 

(1) 내가 들었느니라(8)

 

엘리후는 욥의 말을 9-11절에서 인용한 후, 이제 그 말에서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지적은 30절까지 계속됩니다. 엘리후가 지적한 욥의 가장 큰 잘못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느라 결과적으로 자신의 의를 하나님의 의보다 더 크게 여겼다는 점입니다. 엘리후 욥이 “하나님이 죄도 없는 자를 못살게 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그의 불경함과 의롭지 않음을 증명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신 분이므로 욥이 아무리 의로워도 하나님보다 더 의로울 수도 없고,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을 제대로 평가할 지혜도 권한도 없기 때문입니다.

1-7절까지 욥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도록 다양한 설명을 한 후, 엘리후는 그 자신이 욥과 세 친구가 논쟁하는 동안 내내 그들과 함께 있었기에 욥이 한 말을 똑똑히 다 들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욥이 이전에 친구들에게 한 말을 9-11절까지 인용합니다. 이와 같이 엘리후는 욥과 논쟁할 때 세 친구와는 달리 욥의 말을 인용하고(예. 34:5-6,9;35:2-3) 그의 말에서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는 11절에서처럼 욥이 이미 한 말(13:27)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욥이 주장하는 바의 핵심적인 요소를 되풀이하여 말합니다.

 

(2) 욥의 말 인용(9-11)

 

엘리후 욥이 자신에게 무고하고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원수로 여기셨으며 자기 발을 차꼬에 채우고 모든 행위를 감시하신다고 주장했음을(13:23-27) 상기시켜줍니다. 이처럼 엘리후는 ‘욥이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실상 욥은 오히려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을 인정하였습니다(7:21;13:26). 지금 욥이 주장하는 ‘무고함’이란 그가 죄를 안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적이 있으나 다 회개하여 현재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지금 자신에게 임한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만한 중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에서의 무고함입니다. 엘리후는 이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내가 대답하리라(12)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난은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는 반드시 계획이 있고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12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12)

 

엘리후가 이 점을 지적하기 전에 엘리바스도 이미 꿈에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들은 말을 인용하여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보다 더 의로울 수가 있겠느냐“고 욥에게 반문했습니다(4:17). 다만 엘리바스나 친구들은 대부분 근거도 없이 자신들의 생각으로 욥을 정죄하였고 이제 엘리후는 보다 정당하게 욥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의 말을 토대로 잘못을 지적하며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보다 크시다는 엘리후의 주장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로움과 옳으심을 우리에게 일일이 말씀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크고 위대하신 분임에도 우리를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교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큰 사랑으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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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8-01)


광야에서 이방인을 먹이신 예수님

마가복음 8장 1-13


 

주님을 찾아갈 수 없는 상황에 있을 때주님은 당신을 찾아오십니다주님의 찾아오심을 인간의 조건을 따라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을 찾아오십니다당신의 인생 가운데 주님께서 찾아와 말씀하신 것을 들으시길 바랍니다그리고 주님께서 주시기 원하시는 모든 것들을 얻는 그런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먹이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계속적으로 이방 사람들을 향한 사역을 살피고 있습니다. 이방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축사하시고,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치고 그리고 이방인들을 먹이시는 사건입니다. 과거에 갈릴리 지역에서 유대인 남자 오천 명을 먹이신 적인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방 지역에서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이방인(1-4)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드신 기적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합니다하나님은 사람들의 필요를 아시고 그것을 채우시기 위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오늘도 주님은 우리들의 필요를 아시고 그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그러나 그렇게 이루어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1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4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1-4)

 

오병이어와 비슷한 사건이 이번에는 이방인들이 사는 동네에서 일어납니다예수님께 나아온 무리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습니다그들은 주린 배를 참아가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대단한 열심이고 열정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먹을 것이 떨어졌는데도 광야에서 삼 일 동안이나 함께하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그런 무리가 돌아가는 길에 기진할까 예수님은 염려하셨습니다이처럼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으셨으며영적인 필요와 육적인 필요를 나누지 않으셨습니다굶주린 유대인을 불쌍히 여겨서 먹이신 예수님께서 굶주린 이방인들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난 곳도 광야지만이 기적도 광야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마가복음의 큰 무대는 광야입니다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는 장소입니다광야는 믿음이라는 눈으로 보면광야에는 또 다른 실체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하지만 자신의 기준대로 보면삭막하고 살아남기 힘든 곳입니다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제자들도 광야는 소명을 기억하고 사명을 부여받고 사명을 환기하는 자리였습니다광야는 자신의 주장은 사라지고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때도 무리를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이번에도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있고 계십니다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예수님께서는 당신보다 더 잘 아시고 피할 길을 준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의 반응을 요구하셨습니다그러나 제자들의 태도는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합니다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기는커녕 훈계하고 책망하듯 한 행동입니다이 모습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한 탄식 소리가 다시 들려온 듯합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적인 소리를 들어보겠습니다.

 

18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19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20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시편 78:18-20)

 

제자들은 첫 번째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얼마 전까지 첫 번째 기적을 맞보고도 이번에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제자들은 의외의 반응입니다마땅히 깨달아야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실패는 예수님의 신랄한 책망을 듣기에 충분합니다(8:17-21).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직접 보고 직접 그 기적에 참여했으면서도제자들은 예수님을 의지하는 대신 현실의 벽 앞에서 체념하는 편을 택합니다자기가 할 수 없고 상식적으로 가망이 없으면 예수님도 무능한 분으로 만드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속사정까지 먼저 아시고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걱정하지 말고 예수님을 가까이 나가서 사정을 아뢰시길 바랍니다그러면 당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더 풍성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칠병이어를 통해 역사하신 예수님(5-10)

예수님은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돌보시는 분입니다예수님께서는 누가 말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배고픔을 아시고 그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랑의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제자들을 향해 소유한 것이 몇 개인지 물어보고 계십니다.

 

5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7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8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10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5-10)

 

이렇게 불신앙적인 제자들의 태도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제자들은 떡 일곱 개를 내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땅에 앉게 하십니다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떡을 가지고 축사하십니다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 주게 하십니다떡을 나누어 주면서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오병이어의 기적을 망각한 채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믿음 대신에 체념을 선택한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그들은 또 잊었구나!’라는 생각에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이러한 제자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예수님보다 먼저 나서서 속단하고 체념하고 있는 기도의 제목이 없습니까그것까지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위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하나님께 맡기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이 가져온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셨습니다그러고도 일곱 광주리의 떡이 남았습니다이방인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보다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던 것입니다약 사천 명의 사람들이 이 기적을 경험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오병이어 기적은 갈릴리 서쪽 해안에서 유대인을 위한 잔치였으면본 기적은 갈릴리 동쪽 이방 땅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잔치입니다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쌍히 여기시고 만족케 하셨던 것처럼이방 백성도 동일하게 긍휼히 미하고 있음을 상징한 것입니다이 사건은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얼마나 풍요로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다시 흩으시고 이방 지역 사역을 마무리하시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십니다.

 

이방인인 우리들은 지금 이미 이 잔치를 맛보는 중에 있습니다오늘도 예수 공동체의 나눔을 통해 적어도 우리 주변에서부터라도 이 천국의 부요함을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11-13)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대한 믿음을 가진 것은 기적이 아니라 믿음입니다믿음을 가져야할 유대인들더 나가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그들의 태도는 이방인들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예수님을 믿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시험하려든 것을 봅니다.

 

11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11-13)

 

이방인들은 삼 일 동안이나 굶주리면서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청종했습니다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그들은 그 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들었을 텐데도 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눈으로 하늘에서 만나가 내린 것을 보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그들에게 더 이상 어떤 표적을 보여준들 그들은 믿지 않고 트집을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그들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기 위해 새로운 표적을 구한 것입니다말도 안 되는 다양한 핑계를 대며 다른 증거를 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면서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깊은 탄식을 하십니다종교 지도자들이 먼저 신뢰하고 믿어야한데도 불신으로 가득 찬 모습을 탄식하신 것입니다그 유대들에게 보여주어도 안 믿음을 것이기 때문에 보여주지 낳는 것입니다짐승처럼 여기는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말씀을 삼 일 동안이나 청종하는데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말씀보다는 기적에만 관심가진 시대입니다포스던모던니즘은 진리가 없다고 생각한 시대입니다이 시대에 영합하여 말씀에 대한 문맹자들이 많이 나옵니다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며 불신을 작정한 시대의 주장에 마음이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도리어 겸손한 자세로 확신하게 신실하게 진리를 말하고 성실하게 진리를 나타내며 살아갑니다기적을 구하는 것보다 믿음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이 때에 예수님께 믿음의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철병이어의 기적 때처럼 우리의 형편을 살펴보고 계십니다그리고 당신의 부족함을 아시고 풍성하게 채우실 것입니다한 가지 주의할 것은 너무 기적에만 의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적절하게 이루어 가시는 분임을 잊지 않으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그리고 당신도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의 시선으로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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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7-03)

 

 


이방인의 장벽을 무너트린 예수님

마가복음 7장 24-37절


 

몸이 아프면 정상적이기 않기 때문에 몸이 움츠려듭니다. 특히 감기가 들어서 코만 막혀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만일 혈관이 막히면 동맥경화로 마비가 됩니다. 터지면 큰 질병을 가져 옵니다. 뇌에 산소 공급이 되질 않으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도 막힌 것이 있다면 반드시 뚫어야만 해결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가는 데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결법’으로 이방인들에게 장벽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예수님을 뚫어주셨습니다.

 

  • 본문에서 8장 10절까지 예수님의 이방 사역이 전개됩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이방인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눈총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이방 지역에서 이방 여인의 딸과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과 유대인의 장벽을 무너뜨리셨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자격은 유대인의 생각처럼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꾸셨습니다. 것을 의미하십니다.

 

이방인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24-30)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들은 절대로 구원의 반열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만이 구원의 혈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방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모든 장벽을 초월하여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4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24-30)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으로 넘어가시기 전에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한 장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결 교리였습니다. 본문은 먼저 예수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고치십니다. 이 사람들은 ‘씨 뿌린 비유’에서 좋은 밭에 뿌려진 사람들입니다.

 

(1) 두로 지방을 찾으신 예수님(24)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게네사렛에게 갈릴리 중부에 위치한 두로 지역을 방문하셨습니다. 먼저 넘어가시기 전에 이방인들과 유대인의 장벽을 먼저 무너뜨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두로는 구약에서 주로 시돈과 함께 연결되어 언급되는데(이사야 23:1-12; 예레미야 47:4 등), 이방인 거주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역의 한 집에 들어가셨다는 언급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정결 규례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새 시대에 토라의 규정들, 특별히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성과 속을 나누는 음식법이 의미 없어졌음을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7:19).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의 방문은 구약에서 예언된 두로와 다른 이방 민족에 대한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읽힐 수 있습니다(시편 87:4). 본문 문맥도 이 같은 해석을 지지합니다. 바로 이전에서 정결 규례에 대한 언급 이후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을 찾아가시는 이야기는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방인들의 지역에서도 임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휴식을 위해 잠시 사적인 시간을 갖기 원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예수님의 시도는 이번에도 실패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 사람들에게도 익히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25-26)

 

아무도 모르게 쉬시려고 두로 지역에 들어가셨지만, 그곳에서도 쉴 수 없었습니다. 이방 지역이었지만 예수님의 명성은 이미 두로 지역까지도 널리 펴져있었습니다. 그 두로 지역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더러운 귀신’이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더러운’이란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정결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앞서는 정결 규례와 관련된 주제와 잘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인이 가나안 여인이라고 소개 됩니다. 이미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 예수님께 나아온 무리 가운데 두로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3:8) 예수님께서는 이 지역을 방문하셨을 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헬라인이었고, 정결의 관점에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딸을 두었습니다. 헬라인이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종종 유대인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이방인을 언급하는 용어입니다(로마서 1:16; 고린도전서 1:24; 갈라디아 3:28). 정결 규례의 관점에서 이러한 이방 여인과 유대인들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 발아래 엎드려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유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둘 사이에는 너무나도 멀었지만,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기준으로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이 하나님께 더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3) 예수님의 대답과 여인의 반응(27-28)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정결 규례나 이방인들에 대해서 취하신 태도로 생각해볼 때, 이방 여인의 간청에 대한 그의 반응은 얼핏 보면 당혹스럽습니다.

 

① 황당한 예수님의 대답(27)

이방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에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으로 그녀의 요청을 매우 쌀쌀하게 거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곳에 사용된 ‘개들’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지칭하던 경멸적인 표현입니다.

앞에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신 답변과는 모순처럼 드리는 답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진심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시험하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이방인 지역 거라사 지역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이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하는 지역인 이방 지역으로 들어오셨고, 이방인 집에 머물고 계시고 있습니다. 더 나가서 이방인 여인과 대화까지 하고 계십니다. 이미 이러한 행동들만으로도 정통 유대인의 생각을 깨드리는 행동이었습니다.

 

② 믿음을 가진 여인의 반응(28)

이방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사의 순서에서 이스라엘에 우선권이 주어져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차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다소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개’의 은유를 그대로 사용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적절히 답합니다.

차가워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라고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이곳에서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그녀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예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도 보여줍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옳소이다’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보다 유대인들을 먼저 구원하려 오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속사의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창조적인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 개가 자녀들의 상아래 있다면, 자녀들과 동시에 해택을 입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물론 온전한 떡은 아니더라도 부스러기만이라도 먹을 권리가 개에게도 있다고 합니다.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여인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 메시아의 풍성한 식탁에 참여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 잔치는 이미 오병이어에서 보았듯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나 남을 만큼 풍성한 잔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발 아래 조아리고 있으면, 유대인에게 구원을 베풀 때, 이방인인 자신도 그 남은 떡을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이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바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의 빛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이사야 42:6;49:6). 이 여인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이 같은 정확한 인식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매우 놀랍습니다. 더욱이 항상 예수님과 같이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놀라움은 더해집니다.

 

(3) 놀라운 반전(29-30)

 

예수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29)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딸을 보지도 않고 말씀만으로 귀신을 쫓아내주십니다. 집으로 돌아간 여인은 귀신이 떠나고 딸이 온전해진 채, 침상에 누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귀신이 쫓겨나간 사건 보도를 통해서 마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유대 지역뿐만 아니라, 이방 지역에서도 선포되고 성취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귀먹은 자를 치유하신 예수님(31-37)

하나님 앞에서는 가난한 마음과 순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마음으로 연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는 관심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변 사람들 가운데 당신의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하나님 나라는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임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해방과 자유의 역사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31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31-37)

 

이제 예수님께서는 두로를 나와서 북쪽 시돈을 통과해서 갈릴리 남동쪽에 위치한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바다로 가셨다고 소개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갈릴 서편의 유대 지역과 대조되는, 아마도 동편의 이방 지역을 의미합니다.

 

(1) 데가볼리에서 사역하신 예수님(31-35)

 

그런데 그 데가볼리 사람들이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들이 이사야 35:5-6에서 메시아가 행하실 일들을 언급하면서 등장합니다.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고 말 못 하는 자의 혀가 노래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35장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따로 데리고 사서 치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특이하게 고쳐주십니다. 따로 데리고 가섰습니다. 따로 데려가신 이유는 아마도 이 치유 사역을 공개적으로 함으로써 불러올 수 있는 불필요한 주목을 피하려고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에 손가락을 넣고 손바닥에 침을 뱉어서 그의 혀를 만지시며 ‘에바다’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귀와 눈이 뚫리면서 병이 나았습니다. ‘에바다’는 아람어로 ‘열리라’라는 뜻인데, 그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어떠한 신체 부위가 열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귀먹은 자가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지막 날에 메시아가 오실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이사야서 35:5-6)

 

이렇게 소경과 귀머거리를 고치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충분히 메시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예수님을 충분히 보고 배우지 않는 상태에서 기적만 보고 오해할 수 있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사역이 방해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과는 달리 이 소식은 더욱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들에게 귀가 열리니깐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구약의 성취(36-37)

 

예수님께서는 치유 이적을 베푸신 후, 다시 침묵을 명령하십니다. 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영적인 귀를 통해 들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 말씀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복음도 전파할 수 없었습니다. 전하더라도 어눌하게 전파했던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의 상태를 ‘에바다’로 귀를 여시고 입을 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서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라고 반응하였습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아더라’(창세기 1:33)라는 것과 표현과 같은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아주 새롭게 보시기 좋은 상태로 되돌립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재창조 사역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치유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가서 치유 받아야할 눈멀고 귀먹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영적인 귀먹거리와 말 더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바다의 은총을 간절히 기다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하나님 자녀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막힌 담을 허신 분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들 사이의 막혀 있는 것들을 뚫어주셨습니다. 이제는 모든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통이 아니라 믿음을 보고 계십니다.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모든 문제들을 깨끗하게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능력 있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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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7-02)


영혼을 더럽게 하는 가르침

마가복음 7장 14-23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더러운 것들을 피하려고 합니다흙탕길을 걸어갈 때는 흙탕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걸어갑니다집안에 부패된 음식은 다른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분리시켜 놓습니다좋지 못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 참석하지 않지 않습니다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마음속에 있는 더러움임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심령의 더러움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종종 무관심할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심령의 더러움이 얼마나 심각하게 자신을 더럽게 만드는지 알아야 합니다더러운 생각은 마음속에 깊은 곳에 존재하면서 자신을 망쳐가지만깨끗하기 위해서는 우선 더러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보다 장로들의 유전을 더 고수하려는 자들과 논박하십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의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정결과 부정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신앙의 본질을 오도하는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비유로 참된 정결을 설명(14-16)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허물고 계심을 봅니다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그들은 예수님께 항의합니다제자들의 문제는 스승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4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14-16)

 

호시탐탐 예수님을 노리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문제를 삼았습니다장로들의 전통에 의하면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은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그 대신 함께 따라오던 무리를 향해 깨닫길 기대하시면서 비유를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손 씻는 것만 강조하는 바리새인들의 정결법에 대해서무리에게 사람을 더럽히는 것을 말씀하십니다사람들을 더럽게 하는 것은 에서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음식물이 아니라사람 에서 나오는 것들이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사람을 더럽게 하기 때문에 마음을 정결케 하기를 원하십니다악한 행위는 악한 생각에서 비롯됩니다예수님은 유대교의 정결 예법들과 관련해서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들어 정결법이 잘못된 것에 반박하십니다첫째는 항의하는 너희들이 위선자들이란 것입니다겉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같지만실질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진 사람들입니다하나님께 진실로 예배하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란 것입니다둘째로 자신들이 만든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의 참 뜻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고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그들은 다만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자신을 차별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이것입니다율법의 완성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보면서 율법의 전문가를 자처하고 있었습니다얼마나 위선자입니까그들이 마음이 더러워진 이유가 무엇입니까더러운 것들을 마음에 집어넣기 때문입니다그러기 때문에 더러운 것들이 나왔던 것입니다더러운 것들을 보고더러운 것들을 만지고 그리고 더러운 것들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그들은 탐욕스러운 것을 보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입니다(고전 3:16). 성소가 더럽혀진다면 아무리 손을 씻는 외형적인 정결예식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그래서 날마다 마음을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로 덮고 씻어야 합니다우리들이 매일 보고 묵상하는 것이 거룩한 것들이어야 합니다마음의 묵상이 마음의 내용을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식물이 깨끗하다.’고 선언하십니다이것은 구약의 정결규례와 음식법 전체의 유효 기간이 끝났고 말하는 것과 같은 혁명적인 해석입니다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4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로마서 4:14)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영혼 구원을 성취하시고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음식을 통한 정결의 구분을 폐하시고 내면으로부터 거룩함과 온전함이 흘러나오도록 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십니다어떤 말을 하지 않더라도어떤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있는 악한 생각을 하나님께 솔직히 고백하며 그 생각들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비유에 대한 설명(17-20)

칼빈은 인간의 마음은 악의 제조공장과 같다.’고 했습니다사람들은 죄성으로 인해 죄악 된 행위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때로는 우리들이 이러한 것들을 부인하거나 숨기려고 노력합니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고 숨김없이 나오길 원하십니다.

 

17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20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7-20)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내용을 듣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물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물음에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깨달음이 없느냐?”고 반응하십니다예수님의 비유는 유대교가 오랜 역사 동안 아주 중요하게 여긴 정결법이 이제는 폐지되었다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기준이 사라졌다고 하는 혁명적인 선언이기 때문입니다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정결법이 완성된 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18b-19)라고 추가로 설명하십니다사람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곧 모든 음식은 배설물로 나오기에 진정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이제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사이에 구별은 사라지고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니 다 깨끗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임의로 나누신 이유가 있습니다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들과 구별되어 정결하고 거룩한 나라임을 일깨우시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그것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거룩하게 하실 대속의 사역을 미리 보여 주는 모형이고 그림자였습니다그런데 이제 원형과 실체가 왔기 때문에 모형과 그림자는 사라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사람의 실체(21-2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은 외모에 있지 않습니다다만 하나님의 성전인 마음에 모습을 봅니다하지만 자연적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거룩함이 아니라 죄악으로 가득한 것입니다쓰레기 같은 것들은 마음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쓰레기 같은 생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1-2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 있는 죄성들을 열거하고 계십니다이제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새로운 기준을 말씀하십니다이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들곧 악한 생각음란간음악의속임수방탕질투욕지거리교만어리석음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한마디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열거된 더러운 것들은 죄의 행위와 죄성에서 비롯해서 그릇된 태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인간은 죄성으로 인해 죄 된 행위를 쏟아 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모든 음식은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주고필요 없는 것은 배변을 통해 몸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따라서 음식은 우리의 몸을 더럽게 하지 않습니다다만 우리 속에서 나오는 죄의 성향과 그 행동들이 우리를 더럽게 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시는 마음이 우리를 부정하게 만듭니다아무리 교회를 다니고예배를 드리고기도를 많이 하고헌금을 많이 하고성경도 많이 읽고교회에서 중직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것이 가득하면 그는 더러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외적인 활동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죄를 감추는 위선자(僞善者)들이라는 것입니다. ‘위선자란 연극배우들이 가면을 썼다.’ ‘분장을 했다.’는 말입니다연극배우들이 분장을 하듯이 경건의 모양만 꾸미고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 바로 부정한 사람들입니다모든 인류를 거룩하게 하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예수님을 구주와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이야 말로 가장 부정한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은 참으로 더럽습니다미움과 음란과 폭력 그리고 타락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습니다세상이 이처럼 더러운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더럽기 때문입니다세상은 사람들 속에 있는 생각들이 흘러나와서 문화를 만들기 때문입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개혁하기 전에 먼저 우리 영혼의 내면세계를 변화되길 원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속을 들려다 보시고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그래서 생각이 매우 중요합니다악한 생각에서 악한 말이 나오고악한 행동이 나옵니다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말도행동도 바뀌지 않습니다우리가 버려야 하는 악하고 더러운 생각들은 무엇입니까생각 없이 행동하지 말고생각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인지 살피고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속에 옛 사람의 잔재들이 꿈틀거립니다우리의 결심과 노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덧입으면 깨끗하게 씻어질 것입니다죄로부터 승리할 것입니다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변화가 될 때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이나 규칙보다도 중요합니다하지만 모든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의 생각보다 앞세워야 합니다외면을 중시함으로 형식에 치우신 경우가 있다면 주님 앞에 부끄러운 삶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정직한 영을 계속해서 부어 깨끗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어긋나는 생각이 앞장서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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