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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8-02)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랑한 바울

고린도후서 8장 16-24절


 

‘돈’은 이 시대에 하나님을 필적할 만한 유일한 신입니다. 맘몬을 잘 다루는 자들이 성숙한 성도이고, 맘몬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지 않는 사역자가 하나님의 복음의 신실한 수종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구제헌금을 모금하고 운반하는 사역자들을 고심하여 선택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연보 사역을 수행할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등장인물과 관련해 다섯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6-17절은 디도를 소개합니다. 둘째, 15-19절은 다른 교회에서 파송한 형제를 함께 보낸다고 합니다. 셋째, 20-21절은 여러 사람을 참여시키는 이유를 말합니다. 넷째, 22절은 디도와 함께 한 형제를 더 보낸다고 합니다. 다섯째, 23-24절은 사역을 수행할 형제들을 다시 추천하고 교회의 동참을 요청합니다.

 

연보 사역을 수행할 자 (1)(16-19)

하나님의 일은 세상의 일과 달라서 다른 관점이나 안목으로 사안을 판단해야 합니다. 선악의 기준이 다르고, 불의와 정의의 기준이 다릅니다. 우리 기준은 하나님이고, 우리 목표는 하나님 나라이고, 우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일의 효율성이나 눈에 보이는 교회의 세력 확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일 역시 사람의 일이기도 합니다.

 

16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17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18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19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16-19)

 

연보 사역을 독려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디도가 나섭니다. 그 들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심이 없기 때문에 오해를 돌파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연보 사역을 수행할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1) 디도를 소개함(16-17)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모금하고 수금하는 일을 디도에게 맡겼습니다. 이 일을 담당할 사람은 먼저 바울 자신이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신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디도는 이미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책망하는 편지를 전달한 적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를 대할 때 마치 바울을 대하듯이 두려워하고 떫으로 영접하였고 그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린도 교회에 대한 디도의 애정은 더욱 깊어졌으며 바울도 그것을 기뻐했습니다(고후 7:15-16).

그러므로 디도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 양쪽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는 사람으로서 헌금 수금을 담당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보내면서 한번 더 고린도 교회에 디도에 대한 칭찬과 추천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디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디도가 단순히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셨다고 말함으로써 그를 의심 없이 영접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디도는 단순히 바울의 요구에 순종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더 큰 애정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로 나아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원하여(아우싸이레토스)’라는 단어는 8:3에서 마게도냐 교회가 자원하여 헌금했다고 말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디도는 고린도 교회의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그 일을 위한 사명감에도 투철한 사람입니다.

 

(2) 무명의 다른 형제를 소개함(18-19)

 

바울은 디도와 함께 다른 두 형제를 함께 보냅니다. 그 첫 번째 형제를 소개하는데 그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을 소개하면서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소 의아하지만 바울은 그가 모든 교회에 잘 알려진 칭찬받는 자라고 말합니다.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라는 표현은 다소 애매합니다. 그가 복음 선포의 일을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교회를 위한 봉사의 일을 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러한 구별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들을 보더라도 그들이 원래는 봉사의 일을 위해서 선택받았지만, 스데반과 빌립은 사도들 못지않게 복음 선포의 일에도 참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 6-8장).

바울은 19절에서 이 형제에 대해서 한 가지를 더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울 일행과 동행하면서 헌금 수금의 일을 감당하도록 특별히 교회에서 선택된 사람입니다.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란 표현은 교회가 이 형제를 선택한 목적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영광과 바울의 소원은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헌금을 통하여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하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제 사업은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형제가 바울을 동행하여 이 일을 돕는 것은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바울의 소원을 돕는 것이 됩니다. 이 형제가 전적으로 이 일을 위해서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돈을 다루는 일에 대한 그의 능력과 신실함이 인정받았다는 뜻이며, 고린도 교회는 안심하고 그에게 헌금을 맡길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염려(20-21)

헌금은 신실한 일꾼을 통해 신중하고 투명하게 관리되어야 합니다. 세상보다 더 투명하고 진실하게 그러나 교회를 사랑하고 지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게 해야 합니다. 재정을 투명하고 지혜롭게 관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시험거리를 제공하지 않고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20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21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20-21)

 

고린도 교회의 헌금을 모금하는 사업에 있어서 바울이 한 가지 염려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 헌금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 사사로이 사용한다는 비난을 받을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개의 분파가 있었으며(고전 1:12), 그 중에서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고 그의 사역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헌금 모금을 위해서 디도 일행을 보낼 때에는 이런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이 직접 그 헌금을 모금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일을 맡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에게 그 일을 맡기는 것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에게 모두 안심이 되고 불필요한 의심을 불식시킬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일을 맡길 사람을 선택하는 데 매우 신중했으며, 이제 자신의 그러한 염려를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대신해서 헌금 모금의 일을 담당할 이 사람들을 선택할 때 이러한 그의 염려가 반영되었다고 밝힌 것입니다.

21절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배려하는 바울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일이 단지 하나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인정받는 일이 될 수 있도록 매우 신중하고 진지하게 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평가가 아니라 사람들의 평가였다. 바울은 자신의 일이 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정작 조심했던 것은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일이 의심 많은 사람들의 비판에 의해서 비난 거리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연보 사역을 수행할 자 (2)(22-24)

교회는 물질 때문에 흥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합니다. 성령이 오신 후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덕목 운데 하나는 물질 나눔이었는데, 바로 그 대목을 마귀는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교회를 상하게도 하고 넘어뜨리기도 했습니다. 대표를 선임할 때도 회계 전문가만이 아니라 영적이고 믿음의 눈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이어야 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자를 세워야 합니다.

 

22또 그들과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는 그가 여러 가지 일에 간절한 것을 여러 번 확인하였거니와 이제 그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 23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24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22-24)

 

디도와 동행할 일꾼들은 교회가 칭찬했고, 사도가 시험을 통해 인정하였습니다. 복음 증거 사역으로 검증을 받았고, 성도들을 향한 신뢰가 있었고, 무엇보다 선한 일에 남다른 간절함과 사모함이 있었습니다. 인맥을 통해서, 학맥을 통해서, 지연을 통해서 일꾼을 선출한 것이 아니라, 이렇듯 투명한 검증 절차를 거처야 합니다. 화려한 이력이나 비범한 실력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신실한 태도가 진정한 일꾼의 자격입니다.

 

(1) 세 번째 형제를 소개함(22)

 

바울은 그의 사절단의 세 번째 멤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형제에 대해서도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바울이 그를 선택한 이유를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여러 가지 일에 매우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이 여러 번에 걸쳐서 확인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를 여러 번 확인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열심과 그들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믿고 신뢰하는 열린 마음이 이 일을 감당하는 데 중요한 자질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의 헌금 모금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이들을 환영하라(23-24)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보내는 사절단에 대한 칭찬과 그들을 사랑으로 맞이하라는 권면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디도에 대해서 소개하기를 그는 나의 동료이며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동료(코이노노스)라는 단어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인데, 함께 운명을 나누는 관계를 가리키며 때로는 배우자를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디도 역시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바울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라고 소개하면서, 디도가 바울과 더불어 고린도 교회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다른 두 형제들에 대해서도 매우 존귀한 표현으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사자들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들의 사자들이라는 표현에서 이 형제들은 여러 교회들에서 인정받은 자들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특히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존귀한 표현으로 칭찬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들의 사역의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신실한 자들이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이들을 따뜻하게 영접함으로 이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보이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고린도 교회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바울의 생각이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돈은 인간을 망가뜨릴 수도 있고,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그 돈을 부릴 수 없습니다. 돈을 관리하는 사역자 역시 성령의 사람, 성경의 사람, 공동체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돈이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려면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이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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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8-01)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된 연보

고린도후서 8장 1-15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큰 특징은 나눔입니다. 지체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그 나눔에 의해 살고 있다고 믿기에 가능합니다. 바울은 오늘 고린도 교회에 모범이 되는 교회와 또 친히 모범이 되어주신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 바울의 사역 변호 주제를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에 대해 다룹니다. 9:15까지 이어지며, 이 부분은 첫 부분입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1-6절에서 연보와 관련해 마게도냐 교회들의 상황을 소개하고 고린도교회에 디도를 보낸다고 말합니다. 둘째, 7-15절은 연보에 대해 고린도 교회의 참여를 독려합니다. 메시아의 은혜에 근거해 섬기는 일에 동참하기를 권하며, 섬김의 방법과 함께 섬김의 의미도 설명합니다.

 

예루살렘을 위한 연보와 디도 파송(1-6)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헌금)는 전적으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즉 그들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과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마게도냐의 모범적인 연보는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귀한 교훈을 줍니다.

 

1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6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1-6)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 야기된 오해를 풀기 위해, 자신의 사도로서의 직분과 사역 자세에 대해 변호하며 그에 근거해 관용과 화해를 호소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바울은 8-9장에서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기근과 핍박으로 말미암아 시달린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제에 동참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1) 마게도냐 교회들의 섬김(1-5)

 

바울은 이제 연보의 주제로 전환합니다. 연보와 관련한 마게도냐 교회의 상황으로 운을 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를 독자에게 알려준다고 합니다. 많은 환난을 통한 검증 과정 속에서도 그들은 기쁨이 풍성하였고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관대함을 더 풍성하게 했습니다(2).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은혜의 본질은 축적이 아닌 나눔입니다. 자기에게 긍정적 상황과 결과가 임하는 것만을 은혜로 생각하는 일반 통념과 반대입니다. 둘째, 교회들의 상황이 녹록치 않습니다. 많은 환난과 극심한 가난이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를 신경 쓸 마음과 물질적 여유가 없을 수 있는 환경입니다. 셋째, 교회들의 태도가 귀합니다. 많은 환난에도 넘치는 기쁨이 있고 극심한 가난이 성도를 향한 관대함을 더 넓게 했습니다.

3-6절을 통해 마게도냐 교회의 모습을 부연합니다. ‘내가 증언한다’ 표현을 통해 그들 모습의 참됨을 강조하며 몇 가지 특징을 더 소개합니다. 첫째, 기쁨에 근거한 자발적 참여입니다. 강요나 억지가 아닙니다. 그들이 먼저 자원함으로(아우타이레토이) 동참하게 해달라고 많이 요청했습니다(3-4). 물론 바울도 원하기는 했지만, 바울은 그들이먼저 했다고 말합니다(5). 둘째, 동참의 의미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돈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를 위한 섬김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4). 바울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입니다(5). 셋째, 정성스럽게 참여합니다. 가난한 상황이었지만 능력에 따라, 아니 능력 이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3). 이런 특징을 가진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신은 연보와 관련해 좋은 자극제가 된 듯합니다.

 

(2) 연보를 위해 다도를 보냄(6)

 

바울이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연보의 일 시작한 것을 완성하도록 권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성도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연보 참여 독려(7-15)

우리의 나눔은 자신의 것으로 나눈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나눈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구제 연보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제하고도 생색내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누라는 마음을 주셨을 때는 우리 쓸 것은 공급하시겠다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일용한 양식으로 공급해 주셨듯이, 오늘도 나눔을 실천하는 성도들의 삶에도 분명히 채우실 것입니다.

 

7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10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13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14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15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7-15)

 

바울은 환난과 극한 가난 중에도 풍성한 구제 연보를 한 마게도냐 지방 교회들의 모범을 제시함으로 고린도 교회로 하여금 동참하도록 권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구제 연보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1) 교회의 동참 권면(7)

 

마게도냐 교회들 상황과 연결해 고린도 교회에게 동참을 권면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물질적으로 동참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마게도냐 교회들과 고린도 교회와의 연결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받는 것만 아니라,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은혜가 고린도교회에도 넘치기를 바랍니다. 사실 독자들은 여러 면에서 풍성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믿음의 말과 지식과 간절한 열망과 바울로 인한 독자들의 사랑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이미 두 번째 편지에서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한 내용이었고(고전 1:4-7), 세 번째 편지를 통해 바울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전제로 합니다. 환난과 가난 속에 있는 마게도냐 교회들과 상황이 다릅니다. 그들에 비해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요건이 더 많고 준비도 되어 있기에 이제는 적극적으로 그 은혜에 참여하라는 말입니다.

 

(2) 부연설명1: 연보의 모본은 예수다(8-9)

 

왜 동참해야 하는지를 부연합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권면이 강압적 명령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사도로서 믿음을 주관하는 대신, 독자들의 자발성과 책임 있는 결정을 위해 제안한다는 말입니다(참조. 1:24).

바울이 권면하는 첫째 이유는 연보가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통해 고린도 성도들이 사랑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8). ‘다른 이들의 간절함’이란 마게도냐 교회들의 열망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상황을 언급한 것은 고린도 교회와 경쟁시켜 동참을 이끌어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어려운 환경에 있는 마게도냐 교회의 헌신이 고린도 교회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어 멈추어 있는 연보 사역, 곧 성도 사랑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10)을 이제 다시 진행하라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신은 1년 전 고린도 교회의 열심에 기인하였습니다(9:2).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고린도 교회가 마게도냐 교회들에게서 자극 받아야 했습니다. 한편, 독자들이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 근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9). 그분은 온 땅의 주인이요 부요한 자이지만, 독자인 ‘너희’를 위해 이 땅에 가난한 자로 오셨습니다. 능력과 정체성 대신 부와 가난을 대조하여 예수의 사역을 표현합니다. 여러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1)처럼 예수님의 은혜도 움켜쥠이 아닌 나눔임을 드러내고, 그 수혜자가 독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마게도냐 교회들은 그 예수를 따르고 있으며 독자 역시 예수의 은혜에 반응해야 한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그들도 예수처럼 가난하게 되라는 것입니다.

 

(3) 부연설명2: 계획대로 이행하라(10-12)

 

동참을 권면하는 또 다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미 고린도 교회가 계획한 것이니 이행하라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도 명령이란 단어 대신 의견을 뜻하는 ‘그노메’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8절처럼 독자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이 독자에게 유익하다’는 말을 첨가하여 그들의 연보가 손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것임을 부연합니다(10). 바울에 의하면 독자들은 이 편지 쓰기 1년 전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행하기를 원했었습니다(참조. 9:2). 하지만 바울과의 갈등으로 진척되지 못했는데, 이제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그들이 원하고 행하던 것을 끝까지 수행하라고 권한 것입니다(11). 하지만 참여 과정에 원칙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에 따라, 즉 형편에 따라 능력껏 해야 합니다(12).

 

(4) 부연설명3 : 연보의 목적은 균등하게 함이다(13-16)

 

바울은 계속적으로 연보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을 평안하게 하고 고린도 성도에게는 환난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나눔을 통해 균등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3). 독자들의 여유분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부족함을 채우고, 또 상황이 바뀌어서 독자들이 어렵고 다른 교회들 형편이 괜찮아지면 독자들이 도움 받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14).

바울은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던 만나에 대한 출애굽기 16:18을 인용해 그 원리를 부연합니다(15). 몇 가지 생각 거리가 있습니다. 첫째, 소유의 불균형은 불가피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다는 말씀(요 12:8)처럼 죄로 망가진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만나의 의미입니다. 세상 문제의 궁극적 해결은 주의 재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전의 모든 방법은 한시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회복을 맛보는 방법은 여럿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만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부와 가난의 문제를 경험했지만, 광야에서는 달랐습니다. 세상 관점에서 부유하지는 않았어도 부와 가난의 문제로 고통을 겪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필요한 만큼 만나를 먹었습니다. 축적을 통한 빈부 차이도 없었고 소유를 통한 높낮이도 없었습니다. 한시적이기는 했지만, 소유의 불균형 문제를 완전히 잊게 하였습니다. 셋째, 성도의 나눔은 망가진 세상 구조에 대한 훌륭한 대안입니다. 자기에만 집중하는 죄의 삶과 구별되며, 독식과 움켜쥠의 세상 문화에 대한 저항입니다. 망가진 세상을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지만, 만나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처럼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는 귀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넷째, 교회가 헌신하는 모습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여유가 있어 나눈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을 표현했기에 더 귀합니다. 고린도 교회도 쉬운 상황은 아닙니다. 심한 기근의 여파에서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연보에 참여하는 것은 더욱 귀한 것이고 은혜를 나누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나눔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나눔에 근거합니다. 나눌 마음과 함께 나눌 것을 함께 주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 때문에 가능합니다. 아무도 그 나눔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고, 자기 영광의 근거로 삼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통로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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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0-01)

 


하찮는 자들에게 공격 받은 욥

욥기 30장 1-15절


 

세상에서는 의인이 악인에게 박해를 받아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욥의 고난이 그랬고, 예수님의 고난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욥과 예수님의 고난의 결과를 보듯, 의인의 고난은 하나님의 구원과 복이 임하는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현재의 고통을 탄식하는 내용입니다. 과거의 축복과 존경의 세월을 회상한 욥은 현실의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욥의 대적이 되셨고, 사람들은 욥을 멸시하며 그에게 온갖 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에 욥의 탄식과 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욥을 조롱하는 부랑아들(1-10)

우리는 사회적으로 동경의 대상이었던 사람이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아니면 다른 이의 재앙을 기뻐하는 생각이 듭니까? 사실 인간들의 마음에는 이처럼 다른 이의 재앙을 기버하는 악한 심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우는 자와 함께 우어 주고 웃는 자와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1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 2그들의 기력이 쇠잔하였으니 그들의 손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3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인하여 파리하며 캄캄하고 메마른 땅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 4떨기나무 가운데에서 짠 나물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먹을 거리를 삼느니라 5무리가 그들에게 소리를 지름으로 도둑 같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쫓겨나서 6침침한 골짜기와 흙 구덩이와 바위 굴에서 살며 7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에 모여 있느니라 8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이름 없는 자들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이니라 9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10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 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는도다(1-10)

 

29장에서 욥은 재앙이 임하기 전의 행복했던 때를 회고하며 그 상태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30장에서는 그가 현재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해 탄식하고 있습니다.

 

(1) 욥을 조롱하는 부랑아들(1)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누릴 수 있었던 축복의 삶을 회고한 욥은 이제 그 모든 것을 잃고 난 현재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한탄합니다. 29장의 욥의 ‘한창이던 때’(29:4)와 대조되어 욥의 입에서 나오는 첫마디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어구가 애처롭게 9절과 16절에서도 반복되어 나옵니다. 재앙이 임하기 전에 욥은 젊은이들에게나 노인들에게서 경의와 존중을 받았습니다. 욥이 지나갈 때면 마을 사람들은 젊은이든 노인이든 소리를 죽이고 말을 삼가며 일어나 예를 갖추었습니다(29:8-10). 그들은 욥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애타게 기다리며 그의 조언을 귀 기울여 경청했습니다(29:21-24). 욥은 무리들에게 있어 왕과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자 같았습니다(29:15). 그러나 ‘이제’ 욥은 자기보다도 나이 어린 자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30:1-15에서 욥은 먼저 자신을 모욕하는 이 젊은이들이 어떠한 자들인지에 대해 언급하고(1-10), 그들의 악행과 자신이 받고 있는 수욕에 대해 묘사합니다(11-15).

 

(2) 부랑아들의 실체(1b-8)

 

욥을 조롱하는 이 젊은이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이들은 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들이며,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아주 수준이 낮은 부랑아들입니다. 당시 젊은이들은 나이든 자들에게 마땅히 공경을 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던 욥을 공경하기는커녕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이 부랑아들의 불경과 불손함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습니까? 욥은 이들의 출생을 언급함으로써 불량한 태도의 출처를 찾습니다. 이 건달들의 아버지들은 욥이 판단하기에 양 떼를 지키는 개와 함께 둘 수도 없을 만큼 쓸모도 없고 신분이 낮은 자들입니다. 당시에 개는 현대사회에서처럼 사람들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쓰레기를 뒤지며 길거리의 오물을 먹는 동물로 간주되었으므로 사람들의 무시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개를 부리는 사람들 또한 사회의 천한 부류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욥은 이 부랑아들의 아비들이 동물보다도 못한 사람들이며, 그 아비들의 자식답게 부랑아들 또한 모든 면에서 사람의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면서, 자신이 그런 자들에게 모욕당하고 있는 것에 기막혀합니다.

2절의 ‘그들’은 언뜻 보기에는 이 부랑아들의 아버지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랑아들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들은 나이만 젊을 뿐 가난과 굶주림으로 인해 제대로 먹지 못하여 그들의 젊음의 때에 가질 수 있는 원기 왕성함이 다 소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손은 도울 힘이 없으므로 욥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이들의 주거지는 메마르고, 떨기나무나 가시나무가 자라고, 마을에서 떨어져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광야입니다. 이 부랑자들은 그곳에서 자라는 덤불 속에서 짠 나물을 찾아 캐어 먹고 나무뿌리를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삽니다. 이 젊은이들은 처음부터 광야에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도성에서 미련한 자들의 자식으로, 사생아로 태어나 사회에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컸습니다. 이들은 태생이 천하고, 미련하고, 행실마저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도둑을 내쫓듯이 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마을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러므로 이 건달들은 어두운 골짜기나 구덩이나 바위굴을 떠돌며 쉴 곳을 마련하고, 광야의 나무 아래 모여 떼를 이루어 지넵니다. 이들은 살아있고 아직 젊으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사람의 구실도 못하고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3) 욥을 조롱하는 부랑아들(9-10)

 

욥은 부랑아들의 실체에 대해서 그들의 태생(1b, 8)이나 그들의 현재 모습(2-4)이나 다른 무리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5-7)를 고려해 보았을 때, 그들이 사회의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는 자들이며 그런 조롱을 받기에 적합한 자들이라는 점을 밝혔습니다. 이 부랑자들의 실체는 욥의 실체와는 비교될 수도 없을 정도로 비루하고 비천했습니다.

그렇다면 욥은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욥의 인격과 삶은 부랑아들과는 극명하게 대조적이며, 사람들의 욥에 대한 평판도 부랑아들이 받은 것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욥은 온전하며, 정직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인정받았습니다(1:1,8;2:3). 그는 신앙으로 가족을 이끌어 자녀들이 행위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죄에 빠지지 않도록 살피는 자였습니다(1:4-7). 그는 정의로 무장하여 궁핍하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당하는 자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서 그들을 돕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며, 사회의 부정과 불의를 못 본 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몰아내었습니다(29:15-17). 이런 행실을 눈과 귀로 보고 들은 마을 사람들은 욥을 축복하고 칭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29:11-13). 도성에서 지도자로서 사람들의 송사와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며 인자한 아버지나 왕과 같이 사람들을 지도하고 돌봐주었습니다(29:21-25). 욥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또한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모범적이었으며 신앙의 본을 보이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판도가 바뀌었습니다(참조, 12:4; 19:13-19). 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들이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욥의 면전에서 그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불러가며 모욕하고 놀려댑니다. 불의와 악행을 저지르는 무리들은 정의를 실천하고 어려운 자를 도와주었던 욥을 향해 불경과 불의를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부랑아들의 악행(11-15)

이전까지만 해도 도움을 받던 사람들이 힘이 빠지자 달려드는 모습을 쉽게 봅니다. 이러한 현실은 마치 정글과도 같은 인간 세상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우리는 악인들의 자리에 서지 않고 그들을 막아서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11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12그들이 내 오른쪽에서 일어나 내 발에 덫을 놓으며 나를 대적하여 길을 에워싸며 13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데도 도울 자가 없구나 14그들은 성을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드는 것 같이 내게로 달려드니 15순식간에 공포가 나를 에워싸고 그들이 내 품위를 바람 같이 날려 버리니 나의 구원은 구름 같이 지나가 버렸구나(11-15)

 

욥은 자기가 이런 일을 당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늙어서 힘이 빠졌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1) 하나님의 외면(11)

 

불량배들이 이토록 욥을 조롱하고 괴롭힐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욥은 그 배후에 하나님의 욥에 대한 외면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29:11;16:7-14). 욥은 29장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하나님 덕분에 욥이 가진 축복과 영향력이 늘 새로워지고 그의 기력이 지속되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29:20). 그러나 그 하나님은 이제 욥의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셨고 그를 곤고하게 하셨습니다. 욥은 자신이 늘어진 활시위처럼 기력도 없고 가치도 없어 다 죽게 된 것처럼 느꼈습니다. 반면 젊은 부랑아들은 고삐를 벗어버려 자유로운 몸이 된 소처럼 이리 뛰고 저리뛰며 제멋대로 욥에게 난동을 부립니다.

 

(2) 부랑자들의 악행과 이 당하는 수욕(12-15)

 

부랑아들은 욥을 대적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른쪽은 보통 도움의 손길이 예상되는 쪽이지만 부랑아들은 욥의 오른쪽에서 오히려 그를 대적하기 위해서 들고 일어섰습니다. 이들은 욥이 제 길로 갈 수 없도록 길에 덫을 놓고 길에서 그를 에워싸고 길을 헐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성읍을 점령하여 그 성 가운데로 몰려드는 군사들처럼 욥에게 인정사정없이 덤볐습니다.

부랑자들이 겁 없이 달려드는 포악한 행위는 욥을 순식간에 공포로 휘감았습니다. 그 공포심이 욥에게 있는 품위와 위신을 바람처럼 쫓아버렸으므로, 욥이 구원을 받거나 형통하게 될 가능성은 구름이 지나가듯 사라져버렸습니다. 욥은 27장에서 악인에게 공포가 예고 없이 임할 것이며 하나님은 그를 외면하여 구조하지 않고 대신 재앙을 주실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27:20-23). 그러나 현실에서는 악인에게 닥칠 두려움과 재앙이 욥에게 닥쳤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외면하셨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십니다. 욥은 겉보기에 영락없이 악인의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인간은 감사하고 축복하기보다 시기하는 존재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죽하면 ‘사촌이 땅을 가면 배가 아ㅍ다.’는 속담이 생겼겠습니까?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항상 다른 사람을 축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야말로 세상에서 축복의 통로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전하는 촉복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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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9-01)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욥기 29장 1-25절


 

부자들 중에 가나안하고 약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욥은 부자이면서도 겸손하게 약자를 돌보고 적극적으로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 29-31장은 한 묶음으로서 전체가 욥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9장은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묘사합니다. 그 시절을 욥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던 시절’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29장은 “그러나 이제는”으로 시작하는 30장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욥에게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 자신의 기도를 그분께서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고난 이전의 시절에 대한 묘사는 현재의 고통을 더욱 극대화합니다.

 

좋았던 시절(1): 하나님이 함께하신 시절(1-6)

욥은 고난을 겪으며 주위 사람들을 모두 잃는 아픔을 겪습니다. 자식들을 잃었으며 형제들과 친척, 지인들이 그를 멀리했습니다. 그나마 옆에 와준 친구들은 욥을 정죄하고 가르치려고 할 뿐 욥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며 그의 아픔에 공감하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욥은 혼잣말을 합니다. 이 독백은 욥의 속마음을 관객(욥기를 읽는 독자)에게 털어놓는 것입니다. 욥의 마지막 이야기는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극명하게 대비시킵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와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가 아무런 문제없이 화목(샬롬)하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사람들과의 관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1욥이 풍자하여 이르되 2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3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 4내가 원기 왕성하던 날과 같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 5그 때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젊은이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 6젖으로 내 발자취를 씻으며 바위가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쏟아냈으며(1-6)

 

과거를 회상하며 욥은 불가능한 것을 소망하는 전형적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다시 예전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시던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2).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2b) 그의 빛이 머리를 향해 비추어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표현은 민수기 6장의 ‘제사장의 축복’(아론의 축복)과 시편 23편을 연상시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민 6:24)의 동사 ‘샤마르’가 2절에서 똑같이 사용되었고,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민 6:25)에서처럼 하나님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와 앞길을 비춰주던 시절을 욥은 그리워합니다. 그 좋았던 시절(“원기 왕성하던 날”)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내 장막 위에 머물던 시절이었다(“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민 6:26)라는 축복이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그 때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셨으며”(5a)라는 표현은 다윗의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라는 고백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중요한 것은 욥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신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욥이 잘해서 그 대가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인과응보가 아니라 “까닭 없는” 것입니다. 욥기의 지혜가 증언하는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행동에 사후적으로만 반응하는 인과응보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욥의 신앙 여정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시작되고 촉발됩니다. 욥이 가는 길에 저절로 우유와 기름이 흐르는 것처럼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된 것도(6)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은혜의 수직적인 관계가 수평적인 관계로 옮겨갑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욥의 주위에는 사람들도 함께 있게 됩니다(5).

 

좋았던 시절(2): 사람들이 함께한 시절(7-10)

하나님 앞에서 단 한 점의 흠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자기 능력으로 얻은 것으로 여기는 교만한 마음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나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그 때에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마련하기도 하였느니라 8나를 보고 젊은이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9유지들은 말을 삼가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10지도자들은 말소리를 낮추었으니 그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느니라(7-10)

 

욥은 이제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가 어떠했었는지 회상합니다. 성문 가에 자리를 깔아놓는다는 표현은(7) 그 지역 사람들의 사회적, 정치적, 사법적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하는 재판이 열리는 장소가 성문이고, 재판장의 역할을 담당하는 자는 왕이나 장로들이었습니다(신 22:15; 25;7; 룻 4:11; 삼하 15:2; 19:8). 욥은 공동체 사회 안에서 존경을 받습니다. 욥이 마을의 중심지인 성문에 나타나면, 젊은 사람들이 겸양의 표현으로 자리를 비켜줄 뿐 아니라(“숨으며”), ‘백발이 성성한 자들’(“노인들”)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서 있었습니다. ‘서 있다’라는 동사 ‘아마드’는 어떤 지시가 내려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시신을 만져 부정하게 되어 유월절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모세는 ‘서 있어라’라고 명령하는데, 이를 “기다리라”는 뜻입니다(민 9:8). 마을의 높은 어르신들과 지역 유지들마저 욥의 존재와 사회적 위치를 존중하여 ‘손바닥을 자신의 입에 갖다 댄다’(9). 이와 동일한 표현이 40:4에도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위엄 앞에 겸손히 입을 다무는 것을 뜻합니다. 지위나 신분이 높은 사람들(“지도자들”)도 욥 앞에서는 말을 아꼈습니다(10). 사람들은 욥 앞에서 자신의 말을 자제하면서, 그 대신 욥을 주의 깊게 쳐다보며 욥의 이야기를 경청하였는데(11), 그 이유는 욥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의인이자 지혜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좋았던 시절 (3):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의로운 삶(11-19)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모두 채워 주시고, 세상에서 번영하고 안정적인 삶을 허락해 주실 때, 우리는 자만하지 말고 그것으로 연약한 자들을 도우며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시는 복이요, 번영입니다.

 

11귀가 들은즉 나를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증언하였나니 12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13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14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15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16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17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 18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숨을 거두며 나의 날은 모래알 같이 많으리라 하였느니라 19내 뿌리는 물로 뻗어나가고 이슬이 내 가지에서 밤을 지내고 갈 것이며(11-19)

 

욥이 의로 옷 입고 “나의 정의”로 “겉옷과 모자”를 삼았다고 하는데(14), 이 표현은 요즘 신앙인들이 흔히 말하듯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를 내세웠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뜻과 판단에 맞게 산다는 뜻입니다(시 132:9; 사 11:5;59:17). 도움을 요청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어려운 사람들을 고통에서 건져주는 것(12-13)은 규범적 지혜가 요청하는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끔찍한 고통을 당해서 ‘죽어가는 사람’(“망하게 된 자”)에게 욥은 복이 되었고 기쁨이 되었습니다(13).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의로운 삶을 욥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앞 못 보는 이들에게 눈이 되어주고 걷기 불편한 이들에게 발이 되어주는 것(15), 극도의 가난을 겪는 이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주고, 심지어 잘 모르는 낯선 사람들의 일조차 돌봐주는 것(16), 맹수와 같은 악인들을 물리치고 피해자들(“노획한 물건”일 수도 있고 악인들의 먹이가 된 피해자를 의미할 수도 있다)을 악인의 이빨에서부터 빼내주는 것(17). 욥이 의와 의인을 묘사하는 이러한 표현들은 욥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성경 전반에서 흔히 나타나는 표현들이며, 엘리바스가 욥을 정죄하면서 사용한 표현이기도 합니다(22:5-9). 하나님의 규범에 맞게 살아가는 삶은 ‘예측 가능한 삶’이기도 합니다. 과거로부터 패턴을 익히는 잠언적 지혜의 힘은 바로 앞으로 다가올 삶의 불확실성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바꿔주는 데 있습니다. 욥은 이렇게 규범대로 살면 규범적 지혜가 약속하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믿었습니다: ‘나는 모래처럼 많은 날들을 산 뒤에 내 보금자리에서 숨을 거둘 것이다’(18). 이것이 규범적 지혜가 말하는 의인의 운명입니다(신 5:33; 잠 10:27 등), 시편 1편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는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와 같이, 뿌리가 물에 맞닿아 있는 나무는 어려움 없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형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19).

 

좋았던 시절(4):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시절(20-25)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깨닫고 그 복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바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내 영광은 내게 새로워지고 내 손에서 내 화살이 끊이지 않았노라 21무리는 내 말을 듣고 희망을 걸었으며 내가 가르칠 때에 잠잠하였노라 22내가 말한 후에는 그들이 말을 거듭하지 못하였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스며들었음이라 23그들은 비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렸으며 봄비를 맞이하듯 입을 벌렸느니라 24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미소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 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느니라 25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여 주고 으뜸되는 자리에 앉았나니 왕이 군대 중에 있는 것과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과도 같았느니라(20-25)

 

욥은 다시 한 번,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가 어떻게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로 이어지는지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욥이 말하기를 기다리며 그의 조언을 경청하였고, 그의 말은 마치 이슬이 떨어져 땅에 스며들 듯 사람들의 가슴에 녹아들었습니다(21-22). 그들은 농사에 반드시 필요한 ‘늦은 비’(“봄비”)를 기다리듯 욥의 말을 기다렸습니다(23). 24절은 ‘사하끄’가 부정적인 의미의 ‘조소’나 ‘비웃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내 말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에게 나는 조소를 날렸으며 내 얼굴의 광채는 그들에게는 비추이지 않았다.’ 욥은 사람들의 존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마치 왕이 군대의 상석에 앉듯이 어디에서나 가장 높은 자리는 욥을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이러한 왕과 같은 위엄과 권위는 어떤 군사적 힘이나 폭력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상을 당해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애곡하는 자”)을 욥이 위로했기 때문입니다(25).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꼐서 그 모든 것을 주신 것은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그렇게 gd하는 자가 참으로 복된 성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그분을 믿고 하나님의 의를 적극적으로 행함으로 진정 복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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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7-01)


자기 변호를 하는 사도 바울

고린도후서 7장 2-16절


 

잔뿌리만으로 버티기에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뿌리를 깊이 내린다는 건 척박한 땅에서는 힘겨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들, 지도자와 성도들 간의 신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열지 않고는(2), 마음을 드리지 않고는(7) 회복할 수 없는 것이 신뢰의 관계입니다.

 

  • 앞부분에 이어 새 언약 사역자로서의 권면을 이어갑니다(2-4). 바울은 자신을 마음으로 영접하라고 합니다. 이후 5절에서 마게도냐 상황을 언급하여 주제를 전환하며, 그것이 16절까지 이어집니다. 이는 2:12-13에서 제시한 바울의 여행 상황과 관련한 설명입니다. 디도를 통해 교회의 회개 소식을 듣고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그간의 소회를 밝힙니다. 특별히 두 번째 고린도 방문 이후 쓴 눈물의 편지(세 번째 편지)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과 좋은 결과에 감사합니다.

 

권면 5: 마음으로 바울을 영접하라(2-4)

우리 모두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고난과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들, 물론 위로가 필요합니다. 일상의 사소한 문제로 지쳐있는 사람들, 그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남들을 위로하고 돌보고 섬기는 이들, 그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서로 위로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2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2-4)

 

바울과 동역자들(‘우리’)을 마음으로 영접하라고 합니다.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벗고 바울에게 마음을 주라는 말입니다. 네 번째 권면(6:14-17)이 독자와 거짓 사도들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면, 이 부분은 바울과 독자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세 번째 권면(6:11-13) 내용을 반복하고 있으며, 그간 제시했던 사역 변호의 최종 목적을 보여줍니다. 이 명령의 근거는 독자를 향한 바울의 태도와 행함입니다.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았고 해롭게 하거나 속여 빼앗은 일이 없기에 바울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2). 거짓 사도들이 교회에서 행한 모습(11:20)과 바울에 대한 비방(12:16)을 염두에 둔 내용인 듯합니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교회를 이용했지만,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2:17).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이 말이 독자들에게 오해를 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게 아무 해를 가하지 않았음에도 독자들이 영접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는 것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독자를 정죄하려고 한 말은 아니라고 첨언합니다(3). 오히려 너무 사랑해서 함께하고 픈 의도로 말했다고 합니다. 이어서 네 가지 확신을 소개함으로 2:14부터 제기한 모든 사역 변호와 권면을 마무리 짓습니다(4). 첫 두 가지는 독자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담대함이 많고 자랑도 많습니다. 담대함(파레시아 tappnoia)은 용기나 확신을 뜻합니다. 6:11처럼 독자에 대한 확신 때문에 바울의 입과 마음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자랑은 독자에 대한 신뢰와 칭찬을 의미합니다. 이런 확신 때문에 교회의 문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전히 독자를 사랑하며, 거짓 사도 문제에 대해 독자들이 바르게 처신할 것을 믿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가지는 바울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위로가 충만하고 모든 환난에도 기쁨이 넘칩니다. 이는 참사역자의 자세를 놓치지 않겠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짓 사도 문제와 관련해 독자들이 어찌 해야 하는지를 넌지시 전달하고 있고 동시에 바울 편에서 새 언약 사역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의 회개 소식에 대한 감사와 소회(5-16)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은 성경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사랑의 바탕 위에서 성경을 통해 서로를 돌아보고 서로 회개하고 서로 위로하는 것이 진정한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심각하게 근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5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6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8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14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5-16)

 

그런 바울에게 고통과 근심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디도 편에 편지를 보낸 일을 통해, 그리고 디도가 가지고 돌아온 소식을 통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바울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통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1) 디도를 만나기 전 근심과 만난 후의 기쁨(5-7)

 

바울이 마게도냐에 도착한 이후의 상황으로 주제가 전환됩니다. 시점도 현재 독자의 상황에서 과거 세 번째 편지 결과를 알기 이전으로 거슬러 갑니다. 2:12-13 내용과 연결됩니다. 얼핏 보기에 상당히 뜬금없는 전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원문의 ‘왜냐하면’(가르)이란 접속사는 이 부분 설명의 의도를 짐작케 합니다. 4절에서 언급한 독자에 대한 확신의 이유와 근거를 소개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 번째 편지를 통해 바울과의 갈등을 끝내고 회개하고 돌아왔기에, 거짓 사도 문제에서도 바울 편에 설 것을 기대할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과거 독자들이 보여준 회개의 모습은 이후 8-9장에서 언급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에 대해서도 바울의 말에 순종할 것을 기대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이런 면에서 5-16절은 바울의 사역 변호와 연보에 대한 주제를 함께 붙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를 거쳐 마게도냐에 왔을 때 바울 일행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내적으로 육체가 편치 않았고, 외적으로 환난을 당했습니다. 1:3-11에서 언급한 어려움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로의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디도가 고린도에서 좋은 소식을 갖고 돌아온 것입니다. 교회가 회개하고 바울에게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상황은 교회 문제를 염려하며 갔던 디도에게 위로를 주었고, 그 이야기를 듣는 바울에게도 가뭄에 단비였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가 자신의 잘못을 애통하고 바울을 사랑할 뿐 아니라 그를 위한 열심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2) 바울 기쁨의 이유(8-12)

 

바울의 기쁨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의 기쁨은 디도 편에 보낸 눈물의 편지 또는 혹독한 편지라고 부르는 세 번째 편지에 대한 교회의 반응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 자신도 이 편지를 어려운 마음 가운데 썼습니다. 2:4에 의하면 많은 눌림과 걱정으로 눈물과 기도로 썼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도 너무 심한 책망에 그들이 근심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같이 있습니다. 괜히 쓴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도 있었습니다(8). 다행히 상황이 해결되었고 바울의 걱정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호된 질책을 받고 그들이 근심했지만, 오히려 그 근심이 그들을 하나님께 대한 회개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근심을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으로 여겼습니다(9).

10-11절에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부연합니다. 세상이 주는 근심은 하나님과 상관없기에 사망의 결과를 낳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을 위한, 후회 없는 회개를 낳습니다(10). 근심에 대한 원리입니다.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한 근심인지에 따라 이해가 달라질 수 있고, 결과가 근심의 성격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고린도 성도의 경우는 결과가 긍정적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의한 근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볼수 있다. 근심으로 인한 변화가 11절에 언급된다. 그들은 주님에 대해 더 간절해졌습니다. 그 간절함은 자신을 더 깨끗하게 하려는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바울과의 관계 회복을 향한 열망으로 묘사됩니다. 모두 하나님과 바울을 이전과 다르게 대하려는 모습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근심 속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감과 바울에 대한 미안함, 어리석게 행한 것에 대한 자책감 등이 어우러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보면서 바울이 염려한 것이 있었던 듯합니다. 문제를 일으킨 자에 대한 독자들의 태도입니다. 독자들은 그에 대해 분 내기도 하고 벌주기도 했습니다(11; 참조. 2:6). 그러나 그것을 너무 심하게 하면 교회가 분열되는 또 다른 계기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변화를 기뻐한다는 말이 문제를 일으킨 자에 대한 또 다른 책망으로 비칠까 조심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쓴 것은 오직 자기에 대한 독자들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바뀐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라고 첨언합니다(12). 교회를 사랑하고 또 다른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고 고심하는 참 사역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참조, 2:5-11).

 

(3) 디도의 기쁨과 교회를 향한 바울의 신뢰(13-16)

 

고린도 성도의 회개를 기뻐하는 바울의 표현이 이어집니다. 8-12절은 주로 고린도 성도의 변화와 그에 대한 바울의 기쁨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부분은 디도와 관련해 설명합니다. 고린도 성도의 변화는 어려운 상황 속에 있는 바울에게 하나님이 주신 위로였습니다.

그런데 이 위로는 디도의 기쁨으로 배가 되었습니다. 그가 독자 모두에게서 마음의 쉼을 얻었기 때문입니다(13). 비록 두 번째 편지(고린도전서)와 관련해 디모데가 겪은 일과 두 번째 방문에서 받은 상처가 있었지만, 바울은 여전히 독자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디도를 보낼 때 그에게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했다는 말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14). 그러면서도 마음에 불안과 염려도 있었던 듯합니다. 디도의 방문이 긍정적이었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쉰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독자들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디도를 잘 영접했고 바울의 말에 순종하여 돌아섰습니다. 디도는 그 일로 독자들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바울에게 이중의 안도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디도를 통해 문제가 회복되었으며 디도에게 자랑한 독자들에 대한 신뢰가 틀리지 않았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것에 독자를 신뢰하게 된 것 때문에 더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16). 이 신뢰에는 과거의 갈등 상황뿐 아니라 교회의 현 문제 상황, 곧 바울을 거절하는 소수와 거짓 사도들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옳은 선택을 기대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8장부터 시작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기대하게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문제 많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신뢰를 보시기 바립니다. 그들의 현재보다는 하나님께서는 빚어가실 내일을 보았기에,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보았기에 가능한 신뢰였을 것입니다. 모든 관심이 온통 ‘나’인 세상에서, 이런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성도입니까? 신뢰와 사랑과 격려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교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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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6-01)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신 하나님

고린도후서 6장 1절- 7장 1절


은혜는 성도의 존재 기반이며, 이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은혜가 헛되지 않게, 은혜의 직책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전합니다. 대가를 치러야 할 일이지만, 대가를 치를 만한 일이었다고...

 

  • 5:20-21과 연결해 화목 사역자로서 독자를 권면합니다. 이전 설명의 요약과 적용입니다. 네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1-2절은 독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둘째, 3-10절은 바울의 사역 변호를 다시 언급합니다. 앞부분 내용의 재진술입니다. 셋째, 11-13절에서 사역 변호에 근거해 자신을 영접하라고 독자에게 요청합니다. 넷째 14-7:1에서 믿지 않는 자와 함께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구체적 적용의 하나다.

 

권면 2: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지 말라(1-2)

우리가 주의 일꾼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목사 안수증이나 어떤 학위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신의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살전 2:19). 이처럼 우리가 전한 복음을 듣고 거듭난 영혼들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친필로 만들어 주신 자격증이요 추천서입니다.

 

1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1-2)

 

앞부분인 고린도후서 5:20-21에 이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화목 사역자로서 두 번째 권면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의 복음 증거로 현재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무위로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역시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곧이어 이사야 49:8 인용과 그에 대한 설명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부연합니다(2). 진지하게 권면하고 ‘지금’이라는 때를 강조한 것을 보면, ‘그 때’ 있을 주의 엄위한 심판을 구체적으로 언급해서 독자에게 경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참조. 5:10).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를 부각하며 반응을 요구합니다. 일부 불순종하는 자들과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경고하고 있지만, 바울에게 돌아온 교회에 대해 감사하고 그들을 향한 온유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사역 변호(3-10)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믿을만한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을 말합입니다. 사람은 믿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이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고 성장시켰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은 불신한 것입니다.

 

3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3-10)

 

새 언약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의 화해를 거부하고,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는 것은 은혜를 ‘헛되게’ 하는 일입니다. 은혜로 자녀 삼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하찮게 여기는 일입니다.

 

(1) 바울의 사역 변호(3-4a)

 

바울의 사역 변호가 다시 이어집니다.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으로 독자의 반응을 유도합니다. 자신의 사역이 비난받지 않게 하기 위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아무에게도 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3). 여기에는 장사꾼처럼 복음을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은 진리의 차원(1:17)과 무보수로 고린도 교회를 섬긴 사역자로서의 삶의 차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11:8-9). 바울은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의 사역자들처럼 자신을 추천한다고 합니다(4a).

앞에서 자신의 사역 변호를 자천이 아니라고 말한 것(5:12)과 비교하면 일관성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사역 변호는 철저히 거짓 사도들 영향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들처럼 인간적 조건들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겠다는 말이며, 참 사역자의 특징이 무엇인지 고린도 성도들에게 바르게 인식시키려는 의도로 이해해야 합니다.

 

(2) 구체적 예들(4b-10)

 

4a절에서 말한 ‘모든 일’의 구체적 내용을 소개합니다. 먼저 언급하는 것은 사역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입니다(4b-5).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입니다. 편지 첫 부분(1:3-11)과 4:7-9에서 말한 내용과 잇닿아 있습니다(참조. 고전 4:9-13). 이 상황 속에서 바울이 취한 태도는 정결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좌우에 의의 무기를 통해서 사역했고 영광과 욕됨이나 악한 폄훼와 선한 칭찬을 함께 받으며 사역했습니다(6-8a).

그럼에도 세상에서는 속이는 자와 이름 없는 자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또한 죽은 자들, 징계 받는 자들, 근심하는 자들,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참된 자고 그분이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분 앞에서 살아있는 자고, 죽임 당하지 않으며,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진리로 부요케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관점을 대조함으로 누구에게 충성하는지를 핵심으로 한 표현입니다.

이런 바울의 삶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가능합니다. 첫째, 하나님/예수의 사랑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의 소명과 독자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셋째, 미래 부활의 소망과 하나님께 받을 칭찬과 인정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에게만 집중하는 거짓 사도들과 대조됩니다(참조. 10-13장).

 

권면 3 : 바울에게 마음을 열라(11-13)

복음은 우리 죄를 사하고 의롭게 하며,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그렇기에 새 언약의 복은 옛 언약인 율법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신 것이고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약속을 전하는 직분은 세상에 있는 어떤 직분보다 소중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11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11-13)

 

사역 변호의 목적을 소개합니다. 독자들이 바울을 더 받아들이기를 바라서입니다. 몇 가지 특징을 통해 전달합니다. 첫째, ‘고린도인들이여’라는 호격입니다. 여기서만 사용합니다. 독자의 집중을 유도합니다. 둘째, ‘우리’에서 ‘너희’로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우리’의 입과 마음이 독자인 ‘너희’를 향해 열려 있기에 고린도 성도도 바울에게 마음을 더 넓게 하라고 합니다. 사실, 교회의 문제는 바울 때문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를 통한 갈등이나 지금 교회에 존재하는 문제도 독자들이 바울에게 마음을 활짝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2). 셋째, 독자를 복음으로 낳은 ‘자녀’ (참조. 고전 4:15)로 부릅니다. 그들과의 관계를 상기시켜 마음을 더 열어줄 것을 호소하는 표현입니다.

 

권면 4: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하지 말라(14-7:1)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현재 정죄와 심판의 일을 하는 옛 언약(율법)의 사역을 감당하던 모세도 그 얼굴에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주며 성령께서 직접 효과를 창출해 내시는 새 언약의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에게는 그 영광이 얼마나 찬란하겠습니까? 세상의 직업이나 업적이 진정한 영광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사역을 하는 것이 최고의 자부심입니다.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7:1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14-7:1)

 

질그릇 속 보배처럼 성도의 삶은 세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의 신비를 품고 살아갑니다. ‘존경과 비방, 영광과 욕됨’, 이런 역설적인 삶은 은혜가 머무는 조건이자, 은혜가 머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5:14)이 바꾼 것은 삶의 목적만이 아닙니다.

 

(1)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14a)

 

주제가 사역 변호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전환됩니다.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메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내용 이해에 몇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째, 본문의 문맥적 연결입니다. 이 부분 주제는 믿지 않는 자와의 관계성인데, 앞뒤 문맥은 바울의 사역 변호입니다. 주제적 불연속성이 있어 보이기에 바울의 다른 편지를 삽입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이 현 문맥을 떠나 다른 곳에 기록된 사본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의 정체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예수를 믿지 않는 자를 의미합니다. 세상에 있는 불신자를 의미할 수 있지만, 문맥을 고려하면 거짓 사도들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다른’ 영과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묘사하고(11:4), 사탄의 일꾼이라고까지 말합니다(11:15). 진리와 상관없고, 세상 방식으로 일하는 자들이기에 믿지 않는 자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셋째, 다른 멍에를 멘다는 말입니다. 멍에를 메는 것은 교제나 함께함을 상징합니다. 많은 경우 함께 일한다는 뜻으로 보고 불신자와 동업하지 말라는 식으로 적용합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두 요소를 고려하면 굳이 일과 연결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교제와 영향력의 차원에서 거짓 사도들과의 관계성을 끊으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부연 설명(14b-18)

 

불신자 같은 거짓 사도들과 왜 관계를 끊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다섯 가지 수사적 질문으로 시작합니다(14b-16). (1) 의와 불법, (2) 빛과 어둠, (3) 메시아와 벨리알, (4)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5)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일치하고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하나님 나라와 반역의 통치 영역 간의 대조입니다. 이 둘이 양립할 수 없는 핵심 이유는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6b; 고전 3:16). 새 언약 약속(겔 36:27-28)의 성취, 곧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로 옮겨와 그분과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구약을 인용하여 독자의 상태와 명령의 근거에 대해 부연 설명합니다. 독자 상태에 대한 것은 모두 새 언약을 담고 있는 본문들입니다(16, 17b-18). 하나님께서 백성 중에 함께하시고 ‘하나님 백성’ 관계(32:38; 겔 37:27)를 만들고, 그들을 영접해(20:34, 41) 아버지-자녀 관계(호 1:10)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그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의무에 대해서는 이사야 52:11을 통해 언약 백성이 부정한 것에서 떠날 것을 말합니다(17a). 새 언약이 성취되었기에 의무와 관련한 말씀도 따라야 함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3) 결론적 권면(7:1)

 

그 의무는 7:1에서 결론 내용으로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합니다. 신자의 거룩한 삶이라는 넓은 범위의적용이 가능하지만, 본문의 초점은 참 사역자와 거짓사역자를 분별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편지들입니다. 주변사람들에게 편지로서 그리스도를 소개시켜주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의 변화된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당신을 살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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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5-02)

 


하나님과 화목을 위한 메시아처럼

고린도후서 5장 11-21절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때문에 이 바뀐 사람입니다. 바울의 생애를 바꾼 것도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다시 살아났고 이제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 사역에 수반된 고난과 부활 소망 설명(4:7-5:10)을 마치고, 사역 자체에 대한 변호를 이어갑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직분에 대한 변호입니다.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15절에서는 바울의 사역 동기가 메시아의 사랑에 근거해 독자들을 사랑하는 것임을 역설합니다. 16-21절은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화목 사역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그것에 근거해 독자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할 것을 권한다.

 

고린도 성도를 향한 바울의 사역 동기 변호(11-15)

하나님께서는 완벽하시고 모든 사람의 모든 행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의 모든 행실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 때문에 매사를 바르게 행할 때는 그로 인해 염려하거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당부하기를 자기를 스스로 자기자랑을 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11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11-15)

 

바울은 자신이 심판대 앞에 설 사람임을 기억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성도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간적인 자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이 즌 기회입니다. 하지만 이 자랑 또한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미쳤다는 비난이 사실일지라도 그것 또한 성도들을 위한 미침입니다.

 

(1) 독자를 향한 바울 사역의 진정성 변호(11-13)

 

다시 바울의 사역 변호가 진행됩니다. ‘주의 두려우심을 알기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11). 10절에 언급한 마지막 심판을 전제한 것입니다. 이 표현으로 시작한 것은 바울의 사역을 독자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입니다.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평가자 하나님 앞에서 알려지고 인정받은 사역자이기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 양심에도 알려져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11). 복음으로 교회를 세웠으니 독자들에게 인정받거나 자천할 필요가 없었습니다(3:1).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거짓 사도들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사역 내용의 진정성이나 방법의 적절성은 중요치 않습니다. 인간적 조건들로 환심을 사면 그만입니다(12). 그들이 교회를 흔들고 자신을 폄하하기에(13: 미쳤다) 바울은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2절에서 사역 변호가 계속됩니다. 자기를 비롯한 동역자들의 진정성을 변호하면서도 거짓 사도들처럼 자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대신 독자들에게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거짓 사도들에게 응답할 거리를 갖게 한다고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거짓 사도들에 대해 바울을 인정할 거리를 주는 것도 사실이고, 독자 스스로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사실입니다. 바울이 자천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이미 새 언약 사역 내용(3장)과 사역 과정의 어려움에 대한 응답(4장)을 통해 자신이 참 사역자임을 증명해왔기 때문입니다. 자천입니다(4:2).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거짓 사도들과의 차별성을 만들기 위함인 듯합니다. 바울과 거짓 사도들 모두 사역을 하고 자천하지만, 바울의 목적은 다릅니다. 바울은 그들이 폄하하듯 미쳤든지 그렇지 않든지 오직 두 가지 목적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독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13). 참 사역자와 거짓 사역자를 가르는 중요한 구분점 중 하나입니다.

 

(2) 바울 사역의 근간인 메시아의 사랑(14-15)

 

왜 하나님과 독자들을 위해 사역하는지를 추가로 설명합니다. 메시아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바울을 강권하였습니다. ‘강권하다’(쉰에코)는 통제력을 행사한다는 말입니다. 그 만큼 메시아의 사랑이 강렬하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생각과 판단을 배제한 채 감정에만 치우치거나 비인격적 굴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한 논리적 사고가 수반된 결과입니다. 판단과 결정을 의미하는 ‘크리노’ 동사의 분사 형태를 사용해 추가 설명하기 때문입니다(14).

바울의 생각과 판단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메시아 사역의 의미입니다(14).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기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사야 53장처럼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방법으로 대신 죽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으로 그와 연합한 자는 예수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심판으로 함께 죽었고(롬 6:3), 어둠의 영역에 대해 죽었습니다(롬 5:6). 메시아와 연합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고 세상의 통치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새 생명 얻은 자가 됩니다. 여기에는 바울과 독자도 포함됩니다. 둘째, 메시아 사역의 결과와 신자 삶과의 연결입니다(15).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었기에 그와 연합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들은 자기 대신 죽고 부활한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죄의 모습을 포기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바꿉니다. 죄의 핵심은 창조주 대신 자신을 왕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을 우선시하는 것은 죄와 반대로 사는 것이고, 피조물로서 자기를 사랑하신 분에 대한 합당한 반응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이 독자들에게 하는 모든 사역과 행동은 메시아의 사랑으로 인한 구원과 그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여러 가치들을 분별하고 중요한 것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화목 사역과 바울의 사역(16-21)

예수를 믿지 아니한 사람은 다시 살아날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인생을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우리의 죗값으로 자신 대신 주님께서 죽으셨음으로 이제부터는 나는 없는 것으로 하고 내 대신 죽으신 분을 위해 나머지 생애를 살아야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느냐는 말인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우리가 사나 죽으나, 먹으나 굶으나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는 길임을 분명하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16-21)

 

하나님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목의 사역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사건입니다. 우리를 화목의 사신으로 부르신 시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먼저 다른 지체들과 화목하게 하고,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부르신 사건합니다. 평화를 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처럼 평화를 심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1)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화목 사역과 바울의 소명(16-19)

 

메시아의 사랑이 강권하는 것에 따라 주를 위해 살아가는 순종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 한 모습은 이제부터 사람들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 것입니다(16). 세상 대신 하나님 나라에 속한 관점으로 사람들을 대하겠다는 말입니다. 어둠의 영역에 대해 주와 함께 죽고 빛의 영역에서 다시 살게 되어 관점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도 이전에는 세상 관점으로 알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 새로운 관점은 누구든지 메시아 안, 곧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와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실제로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이전과 다른 소속과 정체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는 것입니다(17).

이 관점으로 사역하고 독자를 대하겠다는 말입니다. 한편, 메시아의 사랑의 강권에 순종하는 또 다른 모습은 바울에게 주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에 순종하는 모습은 20절에서 설명합니다. 그 전에 바울은 그 직분이 무엇인지 먼저 소개합니다(18-19).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 사역과 관련한 모든 것의 기원은 하나님입니다(18). ‘모든 것들’과 기원을 의미하는 전치사(에크)와 하나님과의 연결을 통해 보여줍니다. 사역과 관련해 14-15절은 메시아 중심의 설명인 반면, 이 부분은 하나님 중심의 설명입니다. 둘째, 바울의 사역은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화목 사역의 일부입니다. 화목 사역은 18절에서 소개되고 19절에서 부연됩니다. 두 설명을 정리하면 일련의 과정이 보입니다. (1) 시작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해 세상과 화목한 것입니다(19). 이 과정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21절 표현처럼 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는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 저주와 심판을 받아 죽게 하셨습니다. 죄 용서의 문을 열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 모든 사람들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구원의 문과 길이 확실하다는 증거입니다. (2) 사람들에게 화목의 길을 전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구원의 길이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고 심판하지 않는 방법입니다(19). 사람들을 살리려는 하나님 마음의 표현입니다. (3)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화목의 과정을 경험케 하신 것입니다(18). 21절 표현처럼 죄인인 ‘우리’가 메시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4) 화목의 말씀을 ‘우리’ 안에 두어 사역하게 하셨습니다(18).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을 소개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연결되는 방법을 죄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에 의하면 바울의 사역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자부심을 주고 독자들에게는 권위의 진정성을 주는 내용입니다.

 

(2) 권면 1: 하나님과 화목하라(20-21)

 

18-19절의 화목 사역과 연결해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편지의 첫 명령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 명령은 이미 하나님 백성이 된 독자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상당히 적절한 말입니다.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관계 연결 과정, 곧 칭의는 일회성 차원이 있지만, 그 관계를 실제로 누리는 화목은 지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은 가볍지 않습니다. 명령 앞뒤로 진지한 내용이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명령은 (1) 메시아를 대신해 화목의 사신이 되어 (2) 마치 하나님이 권면하시는 것처럼 (3) 메시아를 대신해 간청한다고 말합니다(20).

하나님/예수의 직접 명령 같은 엄숙한 무게감을 전달합니다. 이뿐 아니라 명령 뒤에 ‘우리’가 예수로 인해 얻은 구원을 첨가합니다(21). 화목 사역을 설명한 18-19절과 연결된 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통해 화목 과정을 경험하고 그에 대한 사역자로 부름 받은 자임을 부연합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거짓 사도에 휘둘리지 말고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며 그 명령을 따라 하나님 앞에 충실히 살기를 결정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피조물’(5:17)이지만 이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주인도 바뀌고, 삶의 방향도 이유도 동력도 목적도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져온 놀라운 역사요, 창조다. 주님을 만난 이후 내게서 변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랑을, 그 화해를, 그 변화를 전하고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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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5-01)

 

 


영생과 최후 심판을 준비하는 삶

고린도후서 5장 1-10절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다. 바람, 하중, 진종,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것보다 세게 내력을 설계하는 거다.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인생도 신앙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에게 그 내력은 무엇이겠습니까?

 

  • 앞에 4:16-18과 연결해 현재와 미래 소망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 설명과 맥을 같이합니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5절은 현재 몸과 부활의 몸의 대조를 기반으로 현재의 탄식 상황 속에서 미래 부활을 간절히 기대한다고 합니다. 6-10절은 부활에 근거한 현재 소망과 그 소망을 품은 삶의 모습을 언급합니다. 사역 차원뿐 아니라, 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개인적 소망과 그에 근거한 삶의 실제를 소개합니다.

 

현재의 탄식과 미래 부활에 대한 소망(1-5)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창조의 원형인 하늘나라의 모형입니다.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호화 주택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1-5)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다가 육체가 무너지면 하늘에 영원한 육체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육신의 옷을 벗어버리면 영원히 썩지 않을 하늘나라에 육신의 옷을 입게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난을 겪으면서 낙심하지 않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살 수 있는 이유는 부활의 소망 때문입니다.

 

(1) 현재 몸과 부활의 몸의 대조(1)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6-18절과 연결해서, 계속해서 부활 소망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이어갑니다. 새 언약 사역 과정의 고난에 대한 태도를 설명하는 문맥, 그리고 바울과 동역자를 의미하는 ‘우리’를 사용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생명과 관련한 두 차원 중 예수님과 연합해 미래 부활을 경험하는 것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고난에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부활의 소망 때문입니다. 그는 현재의 육체와 미래의 부활의 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시간적 지속성과 가치 경중에 집중한 16-18절에 비해 이 설명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몸을 집으로 묘사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도 없는 표현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서처럼 부활 이후에도 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재와 미래의 몸은 다릅니다. 현재의 몸이 임시로 거주하고 무너질 운명을 갖고 있는 장막이라면, 미래의 몸은 영원한 건물 집입니다. 지속성과 안정성이 다릅니다.

둘째, 바울은 땅과 하늘의 대조합니다. 현재 몸을 땅의 것으로 말하고 부활의 몸은 하늘의 것으로 표현합니다. 소속과 정체성을 담은 표현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땅에 속한 자였기에 후손들도 땅에 속합니다. 하지만 둘째 아담 메시아가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그에게 속한 자들은 하늘의 생명과 몸을 유업으로 받을 것입니다(고전 15:47-50).

셋째, ‘손으로 짓지 않은’이란 표현입니다. 몸의 기원에 대한 것입니다. 이 표현과 반대되는 ‘손으로 지은’이란 것은 일반적으로 신적 기원이 아닌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상과 관련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육신의 부모에게 받은 몸과 하나님께 직접 받는 몸의 차이를 의미합니다. 부활의 몸은 주님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2) 현재의 탄식 상황과 미래 부활에 대한 소망(2-4)

 

계속해서 바울은 1절의 내용을 부연합니다. ‘탄식하다’를 주동사로 한 주절과 그에 딸린 종속절 구조가 두 번(2-3과 4)반복됩니다. 주절 내용은 육체의 장막에 있는 현재 상태를 전제로 탄식한다는 것이고, 종속절은 미래 부활 상황에 대한 것입니다. 앞부분처럼 사람이 거하는 처소로 현재와 미래 몸을 묘사하고 있고 하늘과 땅의 대조를 갖고 있지만, 미래를 소망하는 현재 상태에 더 집중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의 설명은 공간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반역의 나라의 충돌과 시간적으로 ‘이미’와 ‘아직’의 갈등을 배경으로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통해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반역의 통치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 옮겨와 새 언약 관계 안에 거합니다. 하지만 반역의 통치가 아직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연결이 시작되었지만, 지금 여기서 그 완전함을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 과정에서 성도는 무거운 짐 진 것같이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의 요소가 있지만, 여전히 망가진 세상에서 질그릇 같이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4:1,7).

바울과 동역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박해와 답답한 일과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그렇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미래의 온전함을 더 소망합니다. 그 소망은 단순히 육체의 몸을 벗어 버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마치 죽을 육체가 생명에 의해 삼켜지듯 혹은 육의 몸이 신령한 몸을 덧입듯 주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할 것입니다(고후 3:18; 빌 3:21). 예수님의 재림 때 경험할 것이며, 고린도전서 15:53-54에서 독자들에게 가르쳤던 내용입니다.

 

(3) 부활과 관련한 하나님과 성령의 역할(5)

 

미래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신자의 부활을 포함한 구원의 모든 과정을 계획하고 실행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메시아를 다시 살려 새 언약 약속을 이루셨고(4:14), 성도들에게 정체성과 미래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십니다(1:21-22; 엡 1:14). 성령은 예수 부활의 능력이며 새 언약의 영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신자들을 동일한 능력으로 부활하게 하실 분입니다(3:18; 롬 8:11). 마치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은 사람에게 생기를 부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신 것처럼(창 2:7), 성령을 통해 부활의 몸을 온전히 덧입는 새 창조의 완성을 이루실 것입니다. 지금은 온전함을 경험할 수 없지만, 신자는 그 과정을 이루실 하나님과 새 언약 관계 안에 있고, 그 완전함의 보증인 성령을 경험하고 있는 자입니다. 바울도 그중 하나입니다.

 

부활에 근거한 현재 소망과 그에 근거한 삶(6-10)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서 오는 차이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땅이 삶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은 영원의 관점 안에서 이 땅의 삶을 설계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과 눈에 보이는 일에 목숨을 거는 삶은 차원이 다릅니다.

 

6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6-10)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몸으로 있는지 아니면 죽어서 부활의 몸을 입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바울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께 부끄럽지 않고 기쁘게 영접 받을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1) 부활에 근거한 바울의 소망(6-8)

 

지금까지의 설명을 근거로 오늘을 살아가는 바울의 두 가지(6-8, 9-10절) 태도를 언급합니다. 첫째, 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소망으로 산다고 합니다. 미래 소망을 주목하고(4:18), 육신의 몸을 벗고 영원하고 신령한 몸 덧입기를 사모한다(2)는 이전 설명의 연장입니다. 그 내용은 ‘담대하다’(타레오) 동사와 함께 지식과 사고의 동사를 통해 두 번 표현됩니다.

6-7절에서는 ‘항상 담대하다’고 말합니다. 부활의 소망 때문에 탄식과 어려움에도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다는 말입니다. ‘안다’ 동사의 분사형(에이도테스)으로 현재 상태에 대한 지식을 소개합니다. 현재 몸, 곧 장막 집에 거할 때는 주님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육신의 몸으로는 주님을 볼 수 없고 친밀한 교제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지식을 언급한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신자 삶의 한 특징입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기대하고 담대하게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 미래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예수를 통해 하신 일 때문입니다. 그 과거 사건을 믿음으로 구원의 현재 실제에 참여하고, 하나님이 미래에 하실 일을 믿음으로 소망하고 오늘을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담대하다’를 주동사로 사용하고 이어 ‘유도케오’ 단어를 써서 더 좋은 것을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선택 내용은 육신의 몸을 떠나 주와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으로 주님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고 싶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몸으로 세상을 사는 것보다 그분과의 영원한 교제가 더 중요하다고 가치판단을 한 것입니다. 이 선택은 또한 바울이 부활을 기대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그것을 통해 '아버지-자녀 관계‘ 또는 ’사랑을 주고받는 이로서의 관계(새 언약)‘를 온전히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연결이 구원의 본질임을 알기에 새 언약의 바울은 오늘을 담대하게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부활 소망에 근거한 바울의 현재 삶과 그 근거(9-10)

 

둘째, 부활 소망 때문에 바울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씁니다. 바울의 이런 삶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육신의 몸으로 주님과 떠나 있든지 아니면 죽어 부활의 몸으로 그분과 함께 있든지 바울의 유일한 초점은 자신을 사랑하신 그분을 사랑하며 사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랑의 표현 방법으로 지금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에게 맡겨진 새 언약 사역을 정성스럽게 수행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 주님의 마지막 심판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행위대로 평가하시는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기에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힘쓴다고 합니다. 선한 행위로 최후 구원을 얻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 과정에 참여했다고 해서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때 있을 칭찬과 인정을 기대하며 그분과의 관계를 조심히, 귀히 여기며 살겠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경험하고 미래를 소망하며 오늘을 담대히 사는 것, 그것이 바울 사도의 삶의 원리입니다.


육신을 벗고 싶을 만큼 삶이 고단합니까? 사명이 힘겹습니까? 부활의 약속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합니다. 잠깐 자신을 만족시켜주는 것을 위해 영원한 가치를 버리지 않고 주님을 만나기에 합당한 영혼으로 준비하며 살아온 당신의 삶을 주님을 다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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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4-01)


그리스도의 진실한 추천서

고린도후서 4장 1-18절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반응으로 ‘자기 연민’이나 ‘패배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스스로 자신은 불쌍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인생은 실패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에게는 실패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 앞부분과 연결해 바울의 사역 변호가 계속됩니다. 영광스러운 새 언약 시역이지만, 항상 긍정적 모습만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6절에서 새 언약 복음을 방해는 세력과 이에 반하는 바울의 사역 내용과 확신이 설명됩니다. 둘째, 7-15절은 사역에 수반된 고난과 그것을 견디는 목적을 언급하고 그 경험으로 독자와 연결합니다. 셋째, 16-18절은 고난을 견디게 하는 미래 소망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의 사역 변호와 복음의 방해 세력(1-6)

생명을 살리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은 사람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답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망치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그분의 뜻입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1-6)

 

바울의 사역 변호가 이어집니다. 새 언약 사역의 영광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역 과정에서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새 언약의 직분에는 영광과 함께 고난도 따릅니다. 바울은 갖은 반대에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반은 긍휼이 크고, 맡은 사명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의 사역 변호와 복음의 방해 세력(1-4)

 

‘낙심’(1,16)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낯설지 않습니다. 이미 1:3-11과 2:14-16에서 비슷한 상황을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부터는 그런 상황에 굴하지 않는 확신과 당당함을 소개합니다.

핵심 이유는 영광스러운 새 언약 사역을 맡았기 때문입니다(1a). 쉽지 않다고 낙심하고 내려놓기에는 그 사역이 너무 귀합니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진리를 드러내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1b-2). 숨은 부끄러움을 버리는 것입니다. 교묘함과 약빠름으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것과 섞어 전하지 않고, 사람의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드러냄으로 자신을 추천하는 것에 더 힘쓴다고 합니다. 자신을 추천한다는 말은 거짓 사도들을 배경으로 한 표현입니다. 그들과 달리 어려울수록 인간적 방법으로 호감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정공법으로 진리를 더 진리대로 바르게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역 과정의 어려움 중 하나는 복음을 전해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3-4).

바울은 이 상황을 복음이 가려진 것으로 묘사합니다. 몇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 편에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가 전하는 것은 복음의 광채, 곧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영광스런 예수 메시아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문제는 어둠의 영역에 속한 자들과 그 영역의 통치 세력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각각 망하는 자들과 이 세상의 신이라고 묘사합니다. 둘 중 누가 더 문제일까를 묻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망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을 거절하고 믿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의 핵심으로 말합니다(롬 1:28). 사탄은 그 믿지 않는 마음을 더 혼미케 합니다. 에베소서 2:1-3은 이 둘의 관계를 말합니다.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은 어둠의 영역 속에 있는 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따라 하나님을 거절하고 사탄을 따르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런 면에서 세상 어둠의 영역에서 복음의 진리가 막히고 가려지고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으로 회개한다는 것이 더 신기합니다.

 

(2) 바울의 사역 내용과 확신(5-6)

 

3-4절 상황과 연결해 바울의 사역 내용을 소개합니다. 복음이 막힌 것이 자신의 무능함이나 전파 내용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님을 부연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증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기를 높여 섬김 받거나 세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 메시아가 주님인 것과 바울이 독자들의 종이 된 것만을 증거합니다. 바울의 주인이 둘인 셈입니다. 하나는 독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더 높은 주인 예수입니다. 예수가 주인 것은 이해되지만, 두 번째 표현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독자들을 예수와 동급으로 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신 예수의 섬김을 따라 그들을 섬김다는 말입니다(참조. 요 13:14-15). 예수님을 주로 모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라면, 예수를 따라 그분 백성을 섬기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독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일하면서 사역한 것이나, 그들을 배려함으로 방문 계획을 수정한 것도 섬김의 표현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의 증거는 말뿐 아니라 주를 따르는 삶도 같이 있습니다. 그가 그런 증거의 삶은 산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때문입니다(6). 마치 어둠 속에서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시듯(창 1:3), 어둠의 영역에 있던 바울에게 예수 메시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비추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버지-자녀’의 친밀한 관계, 곧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가 바른 증거와 삶을 살게 하는 이유이자 동력입니다.

 

바울의 고난 사역과 성도들(7-15)

세상에는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탄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과의 싸움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마음을 혼미하게 하고 눈을 가려 영적 장님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사람들의 영적 눈을 여시고 하나님이 비추시는 영광의 빛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복음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7-15)

 

바울은 영광스러운 직분자임에도 언제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종 된 태도를 견지합니다. 전해져야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실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상전이 아닌 종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바울의 고난과 하나님의 위로(7-11)

 

3-4절과 연결해 새 언약 사역 과정에서 경험하는 또 다른 고난 상황들과 그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 소개됩니다. 앞 경우는 복음 전파가 막히고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라면, 이 경우는 바울 자신에게 직접 가해지는 상황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질그릇 속에 보배를 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연약한 육체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은 메시아 예수님의 복음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육체가 연약하기에 스스로 보호할 힘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뿐입니다(7). 그렇기에 사방으로 욱여쌈과 답답한 일과 박해와 거꾸러뜨림을 당하지만, 완전히 절망하거나 사역을 포기하지 않습니다(8-9). 오히려 그 고난을 예수를 위해 그분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으로 여깁니다(10-11). 그분을 따르고 증거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지만, 예수의 죽음이 생명으로 연결되었기에 바울 역시 그 생명의 능력을 기대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생명은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그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과정이었습니다. 둘째, 예수의 실제 부활입니다.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 사역이 완성되었고, 그것을 통해 믿는 자가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역시 자신의 고난이 또 다른 이에게 예수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는 새 생명의 완성이 있기에 지금의 고난이 끝이 아님을 믿었습니다. 죽음과 생명의 이런 역설적 모습을 사역에 담고 있는 자가 참 사도입니다. 인간적 성공의 모습만을 강조한 거짓 사도와 대조됩니다.

 

(2) 바울의 상황과 독자와의 연결(12-15)

 

‘우리’와 ‘너희’ 표현을 통해 바울의 고난 사역을 독자와 연결시킵니다. 사망이 ‘우리’안에 일하고 생명이 ‘너희’ 안에 일한다고 합니다 (12). 예수님의 죽음을 깊어지는 고난 사역을 통해 그의 생명이 건달되는 실재가 독자와의 관계성에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독자들은 바울의 그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환난과 독자의 구원을 연결시킨 1:6과 같은 개념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바울의 고난 사역을 독자와 연결시킨 것은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첫째,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입니다. 장차부활의 날에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이 바울과 독자 모두를 예수의 부활과 연합해 다시 살리시고 그분 앞에 서게 하실 것입니다(14). 바울은 독자들에게 이 소망을 증거했고 언젠가 그 증거대로 부활의 실제를 경험하게 될 것을 믿었기에 자신의 고난 사역을 독자와 공유한다고 말한 것입니다(13). 둘째, 독자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바울의 고난이 독자의 유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환난과 주의 위로를 배경으로 독자들에게 기도로 바울 사역에 동참하라고 말한 1:11 내용과의 유사성을 고려하면 좋겠습니다. 즉, 바울의 고난 사역에 기도 등으로 함께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사역의 긍정적 결과로 감사할 것이 많아지고,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고난은 인간적으로 실패한 듯 보여서 거짓 사도들의 자랑에 비해 별 볼일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사역 같은 것이 바로 독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디게 하는 미래 소망(16-18)

성도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초대교회 선배들은 목숨까지도 포기했습니다. 성도라는 이름보다 귀한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명함(名銜)에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 속사람 보다는 겉사람으로 여전히 행사한다면, 그는 성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날이 갈수록 속 사람이 새로워진다면 그가 참 성도입니다. 그의 영적인 실존이 나날이 강해진다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16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6-18)

 

바울은 고난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더 집중하게 하고, 그 사역이 예수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부활의 소망입니다. 질그릇 같은 겉 사람, 곧 사람의 육체는 사라질 것이지만, 주님을 믿는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바울은 보이는 것에만 주목하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영광의 미래를 믿음으로 보고 산다고 합니다.


바울의 행적과 열망을 보시기 바랍니다. 온통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만 전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종임을 한 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예수만 드러난다면 어떤 고난도 감수했습니다. 성도들도 그 예수를 알기를, 닮기를 바랐습니다.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광체를 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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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3-01)


그리스도의 진실한 추천서

고린도후서 3장 1-11절


 

일반적으로 비밀에 부치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편지를 ‘공개편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낸 ‘공개편지’입니다. 정성이 가득한 편지는 겉포장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내용이 거짓되거나 과장되어 있으면 언젠간 진짜 모습이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신실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기록된 성도이길 바랍니다.

 

  • 사도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음해하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사도로서 추천서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야말로 참 사도임을 증명하는 추천서이었습니다. 참된 섬김의 표지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추천서(1-3)

살아가다보면 누군가의 추천장을 써주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추천장(推薦狀)’이란 지명도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 직장이나 학교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추천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에게 추천서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1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1-3)

 

2:14-17에 이어 바울의 사역 변호가 계속됩니다. 앞부분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내용이었다면, 여기부터는 고린도 교회 성도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이제 추천서 문제로 시작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유랑 사역자들이 많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처음에는 아무 사역자나 받아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잘못된 거짓 사역자들이 들어와서 점점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문제가 발생하자 거짓 교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파송하는 교회에서 파송하는 사람에게 추천장을 주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이 추천장을 보고서 그 사역자를 인정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교회의 추천서로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경쟁과 인간적 조건을 중시했던 고린도 분위기와 잘 맞았고 교회에도 통했던 모양입니다(10:7).

 

반면, 바울은 그런 추천서가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비록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이기 때문에, 신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은 추천서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바울은 대응해야 했습니다. 수사적 질문들로 시작합니다. 그는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이들처럼 독자에게 추천서를 보내거나 받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1)? 수년 전에 교회를 개척한 장본인에게 추천서 요구는 어불성설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형태의 추천서가 있습니다. 바로 독자들입니다. 바울은 독자들을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로 묘사합니다(2; 참조. 고전 9:2). 성도는 바울과 동역자들 마음에 각인된 존재들이며 사랑으로 표현된 사역의 결과입니다. 그들의 사역자가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이뿐 아니라, 독자들은 메시아를 드러내는 편지입니다(3). 가장 확실한 추천서는 고린도 교회 안에 있던 성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 동안 바울이 전하는 복음으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의 진실한 사도됨을 증명하는 ‘추천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으로 메시아로 인한 구원 과정에 참여하고 있고, 구원의 보증인 하나님의영(1:20-21)을 경험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먹과 돌판으로 상징되는 옛 언약이 아니라 성령으로 상징되는 새 언약 백성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산 증인입니다.

 

새로운 언약 사역자(4-18)

선물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그러나 화려하게 포장된 것보다 진실적인 내용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하려면 자신을 잘 포장하고 멋있게 나타내는 기술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잠시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내적으로 실력이 없으면 결국 실체가 들어나고 결국에는 무너집니다.

 

4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7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4-18)

 

사도 바울은 복음을 새 언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섬기는 새 언약의 사역자입니다. 사람의 추천장이나 거짓 교사들처럼 율법이나 문자에 의존한 사역과는 다릅니다. 성령은 살지지만, 문자(율법)는 사람을 정죄함으로 죽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로서 자격은 율법을 통해 사람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1) 새 언약 사역의 자격(4-6)

 

추천서가 왜 필요 없는지를 부연합니다. 사역 자체에 대한 확실성과 자신감 때문입니다(4). 자신감의 시작은 사역의 신적 기원 때문입니다(5). 바울 스스로 시작한 사역이 아니기에 인간적 조건이나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에게 사역을 맡기고 이루어 가실 하나님 앞에서 충실하면 됩니다. 진정한 평가와 만족은 그분에게서만 나옵니다. 사역의 기원과 평가에 대한 이 확신 때문에 그는 거짓 사도들의 비난에도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교회에게는 사역 변호를 안 할 수 없었습니다. 사역에 대한 바울의 확신과 자신감의 또 다른 근거는 그가 예수님께서 가져온 새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6). 바울은 성령을 새 언약의 대표적 특징으로 묘사합니다. 옛 언약에서는 문자로 쓰인 조문이 언약 관계를 규정하고 유지하는 통로였다면, 새 언약에서는 신자 안에 거하는 성령이 관계를 증거하고 규정하며 미래 온전함을 보증합니다. 새 언약과 성령과의 연결은 구약에서 약속된 것이며, 예수를 통해 실현되어 독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실제입니다.

 

(2) 새 언약 사역의 영광스러움(7-11)

 

문자와 성령으로 대표되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조를 사역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역시 거짓 사도들과의 대조를 반영하는 듯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새 언약 사역과의 관련성이 적은, 유대교에 충실한 기독교인들인 듯합니다. 옛 언약 사역은 돌판에 새긴 문자(예, 십계명)에 근거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관계 유지 방법과 그분의 뜻을 어길 때 받을 심판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사역에도 영광스러움이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보고 내려와 백성에게 말씀을 전할 때 그의 얼굴에 영광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출 34:29-35).

그러나 새 언약 사역은 더 영광스럽습니다. ‘만일 옛 언약 사역이 라면, 새 언약 사역은 훨씬 더~’라는 세 개의 비교 조건문을 통해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새 언약 사역은 성령의 사역입니다(7-8). 옛 언약 사역은 돌판 문자를 통한 것입니다. 기원이 하나님이란 면에서는 같지만, 일의 진행 과정에 하나님의 영이 직접 참여한다는 점에서 새언약 사역이 훨씬 더 영광스럽습니다. 둘째, 새 언약 사역은 생명의 사역입니다(9-10). 옛 언약 사역은 문자조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게 하지 못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옛 언약 사역은 죽음의 사역입니다. 새 언약 사역은 다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죄 용서와 그로 인해 하나님과 새롭게 맺어진 화목의 관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영광스러웠다면, 생명의 사역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셋째, 영광의 지속성이 다릅니다(11). ‘없어짐’과 ‘거함’의 대조로 설명합니다. 모세 얼굴에 있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없어집니다. 옛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반응 조건을 핵심으로 하기에 인간의 죄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지 않는 한 그 관계 유지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를 맺고도 하나님을 거절한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새 언약은 다릅니다. 비록 관계 유지를 위해 인간이 애써야 하는 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새언약 관계는 예수로 인한 죄 사함 이후 얻은 것이고, 그 관계 유지와 보증을 위해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거절하지 않는 한 새 언약 관계는 유지됩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새 언약 사역은 옛 언약 사역보다 훨씬 귀하고 영광스럽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역을 위해 부름 받고 섬기고 있습니다.

 

(3) 새 언약 사역의 내용과 그 결과(12-18)

 

앞서 언급한 옛 언약 사역과의 대조를 바탕으로 더 강한 확신으로 자신의 사역을 변호합니다. 바울의 확신과 담대함은 모세의 사역과 비교하는 13절에 나타납니다. 모세는 자기 얼굴에 있는 하나님 영광의 반영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너울로 가렸습니다(출 34:22-35).어차피 사라질 것이지만, 그 끝을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사역은 사람들의 눈을 가린 너울을 걷어내는 길을 전해줍니다. 모세의 사역과 반대일 뿐 아니라 더 뛰어난 사역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임을 감안한다면 모세와의 비교는 놀랍도록 담대한 표현입니다. 개인적 탁월함에 근거한 자만심 표현이 아닙니다. 새 언약과 관련한 비교할 수 없는 요소들에 근거한 확신입니다. 첫째 요소는 예수와 모세의 차입니다(14). 모세는 옛 언약 중재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자이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영광의 본체이십니다(4:6). 감히 둘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 예수를 전하는 자입니다. 둘째 요소는 예수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새 언약의 성취입니다(15-16).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얼굴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마치 모세가 얼굴에 너울을 쓴 것처럼 마음에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하는 가림막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구약성경을 읽고 가르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그 가림막이 없어지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연결이 가능합니다. 셋째 요소는 성령입니다(17-18). 가림막을 제거하고 새 언약 관계를 맺는 과정에 성령이 일하십니다. 죄로 인한 심판에서의 자유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의 회복을 경험케 합니다. 넷째 요소는 새 언약 안에 있는 영광스런 미래입니다(18). 신자들은 부활을 통해 영광스런 주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모세가 가린 것을 완전히 걷어내고, 그분과 얼굴과 얼굴로 교제하며 영원히 사랑을 나눌 것입니다. 성령은 그 보증이며, 실제로 그 변화를 행하실 분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요소들을 가진 새 언약 구원을 전하는 사역자입니다. 충분히 담대할 만하고 추천서가 필요 없을 만큼 확신과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부심이 바울에게만 해당하는 않습니다. 새 언약 관계 안에 있는 모든 자가 가질 감사와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편지들입니다. 복음으로 당신을 살려주셨고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변화된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볼 때마다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행하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들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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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1-03)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인 성도들

고린도후서 1장 23절 – 2장 17절


타락(추락)은 자기 자리를 떠나고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경계해야 할 것은 ‘자기 확장’입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고 옛 자아들이 활보할 때 교회는 세상에 향기가 아닌 악취만 풍기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 여러 내용을 짧게 전달합니다. 첫째, 1:12-22과 연결해 방문 계획 변경과 눈물의 편지를 쓴 이유를 설명합니다(1:23-2:4). 둘째, 여전히 바울에 대해 의구심 품은 자들을 용서하라고 요청합니다(5-11). 셋째, 디도를 통해 교회의 회기 소식을 듣기 전에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갔을 때 상황을 다룹니다(12-13). 넷째, 사역에 대해 변호하기 사적합니다(14-17). 앞부분 주제와 구분됩니다. 일차적으로 4:6까지 이어지지만, 길게는 7:4을 거쳐 7:16까지 진행됩니다.

 

방문 계획을 변경한 이유(23-24)

복음 사역자는 사역 철학이 필요합니다. 평신도 사역자에게도 사역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 철학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용서의 원리입니다. 바울의 사역 원리가 용해되어 잘 나타나는 본문에서 우리는 건강한 사역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3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2:1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1:23-2:4)

 

사도가 방문 계획을 변경하고 대신 눈물의 편지를 써서 호소한 것은 독자를 아끼는 마음의 발로였습니다. 억지로 그들을 바꾸지 않고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고 싶었으며, 격한 마음으로 방문하였다가 영적인 자녀들인 그들에게 상처만 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과하다 싶을 만큼 혹독하게 편지를 썼지만 그 안에는 그들을 향한 사랑과 눈물을 담았다고 합니다.

 

(1) 방문 계획을 변경한 이유(23-24)

 

12-22절과 연결해 방문 계획 변경에 대한 구체적 이유를 제시합니다. 2:4까지 이어집니다. 핵심 이유는 하나입니다. 독자들을 아꼈기 때문입니다(23b). 24절부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계획 변경의 이유를 설명할 때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고, 심지어 자기 목숨을 걸고 말한다는 표현입니다(23a). 자기 말이 진실임을 강조하는 아주 엄숙하고 진지한 표현입니다. 동시에 매우 슬픈 표현입니다. 그렇게까지 자신이 세운 교회에게 자신이 거짓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니 말입니다. 바울이 인식하는 교회 상황, 즉 여전히 그를 거절하고 있는 일단의 사람들과 특히 거짓 사도로 인한 상황이 아주 심각함을 짐작케 합니다.

독자를 아껴 방문하지 않은 이유가 24절부터 설명됩니다. 첫 이유는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이 기쁨을 만들어 가는 데 함께하는 자가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불순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번째 방문을 했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계속 바울을 거절하자 바울은 맘이 상해서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가서 호되게 책망할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린도에 먼저 갈 것을 언급한 16절 계획은 그런 마음과 관련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가지 않기로 합니다. 교회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일방적으로 끌고 가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바울에게 불순종하고 있지만, 여전히 믿음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여 기쁨을 회복하게 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 것입니다.

 

(2) 방문 대신 눈물의 편지를 쓴 이유(2:1-4)

 

독자를 아껴 방문하지 않은 것에 대한 또 다른 설명입니다. 24절처럼 바울의 고심과 독자를 향한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고심은 ‘스스로 결심했다’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1절). 많은 갈등과 기도와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또 다시 고통과 슬픔으로 고린도를 방문하지 않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해서가 아닙니다. 바울에게 상처를 주고 불순종하고 있지만,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 백성이 된 영적 자녀들입니다. 다시 방문해서 그들과 언쟁하고 서로 상처 받아 기쁨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문제는 처리해야 했습니다. 이런 갈등 상황에서 바울이 선택한 것은 방문 대신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4). 세 번째 편지는 많은 눈물로 썼습니다. 진리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과하다 싶을 만큼 책망했습니다(7:8). 바울도 편지를 쓰면서 교회가 힘들어 하지 않을까 걱정하였고 혹시 계속 거절하면 어쩌나 염려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많은 생각과 기도로 썼습니다. 바울은 그 선택을 독자를 향한 넘치는 사랑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이 방문 계획을 바꾼 이유입니다.

 

의구심 품은 자들을 용서하라(2:5-11)

회개한 성도는 용서하고 위로해야 합니다(마 6:12,14-15). 또한 자신이 잘못했을 경우에는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회개는 사람 앞에서 하는 회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하는 회개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 중에 자신에게 대해 의심을 품는 자들을 해야 논하고 있습니다.

 

5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2:5-11)

 

시점과 상황이 전환됩니다. 4절까지 방문 계획과 세 번째 편지를 보낸 배경을 다루었다면, 이 부분은 그 이후 교회의 회개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감사하게도 교회 대부분은 디도 편에 보낸 ‘눈물의 편지’를 통해 바울에게로 돌아왔지만, 소수가 여전히 불순종을 고집했습니다. 이들에 대한 처리도 중요했습니다. 기존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교회 분열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반대자와 관련한 정황 기술로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 아마도 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이 계속 불순종해서 바울을 지속적으로 근심하게 한 듯합니다. 바울은 이 상황을 어느 정도 교회를 근심하게 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반대자 문제가 바울만의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상황 해결도 바울과 교회 모두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교회가 회개하여 그 사람의 영향력이 작아졌습니다. 그의 태도는 벌을 받듯 교회에 의해 비난과 제지를 당한 듯합니다(6).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반대자와 교회의 처신 여부에 따라 이후 양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바울의 권면은 단순합니다. 용서하고 위로해서 사랑을 나타내라고 합니다(7-10).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반대자를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그가 너무 근심할까 염려합니다. 그래서 이전 문제에 대해 교회가 회개하고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반대자를 사랑하라는 권면에도 순종하라고 합니다. 교회가 용서하면 바울도 용서하고, 그 용서를 메시아 앞에서 한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합니다. 둘째, 사탄의 계획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교회 분열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진리로 거짓을 솎아내는 것은 분명한 진영 구분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끝나 거짓을 제거하면, 분별 과정에서 나뉘었던 아픔을 사랑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방치하면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사탄의 놀음에 교회가 분열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반대자에게 교회가 사랑을 보이라고 권한 것입니다.

 

드로아를 거쳐 마게도냐에 갔을 때의 상황(2:12-13)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그런 사실을 교정할 때,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교정하도록 경고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동기로 하신 것입니다. 계획을 세우고 변경하는 일에 매우 신중한 것은 넘치는 사랑 때문이었고 어떻게 하여야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였습니다.

 

12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12-13)

 

다시 시점 변화가 일어납니다. 5-11절보다 앞선 시점으로 디도 편으로 ‘눈물의 편지’를 보낸 4절 이후 상황입니다. 폭동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로 갔습니다. 복음 증거의 좋은 기회가 있었지만, 고린도 교회 문제 때문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울은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이후 상황은 7:5-16에서 다시 진행됩니다.

 

바울의 사역 변호: 고난이 수반된 순전한 말씀 증거 사역(2:14-17)

하나님 일군의 인식과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하여서 하나님을 명확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분명히 의식하며 철저히 종으로서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고 명확히 드러내고 전한 말씀대로 삶을 통해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14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4-17)

 

바울이 보낸 ‘눈물의 편지’를 받고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고 돌이켰지만, 여전히 바울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을 나타내라고 당부합니다. 그들이 공동체에서 받은 벌로 충분하며, 사탄에게 이용당하여 공동체의 분열로 이어지거나 아예 그들이 공동체에서 떠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도 지혜롭지 못한 방식 때문에 악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 고난이 수반된 사역(2:14-16)

 

자신의 사역 변호로 주제를 전환합니다. 여전히 불순종하는 자들을 설득하고, 이후 언급할 거짓 사도 문제와 관련해 자기변호의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역과 관련해 하나님이 행하신 두 가지에 대해 감사하면서 시작합니다(14). 첫째, ‘우리’를 사로잡아 사역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사역의 기원과 특징을 말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듯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거절하던 죄인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사역자로 부르셨습니다. 또한 포로가 전리품으로 끌려가듯 그 사역에는 세상에서의 수치와 환난도 있습니다(고전 4:9). 둘째, 각처에서 메시아를 아는 향기를 나타내게 하셨습니다. 메시아를 전하고(1:19; 4:5) 예수를 따르는 삶의 방식으로 살기에 그분의 향기가 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메시아를 아는 향기에 대해 부연합니다(15-16).

 

(2) 순전한 말씀 증거 사역(2:17)

 

바울은 자신의 증거와 삶을 하나님 앞에서 나는 향기로 표현합니다. 메시아를 담고 있고 그분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그 사역이 귀한 향기로 인식됩니다. 모든 사람이 메시아에 대한 증거를 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삶 역시 세상이 환호할 만큼 화려한 것도 아닙니다(6:4-10). 이런 면에서 메시아를 아는 향기는 세상 관점에서는 코를 막고 기피해야 하는 사망의 썩은 냄새일 수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냄새와 연결해 자기 사역의 특징을 대조의 방법으로 제시합니다(17). 어떤 이들, 곧 거짓 사도들은 마치 장사치처럼 자신의 인간적 조건들을 떠벌이고, 이를 바탕으로 사역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고 말합니다. 첫째, 말씀을 하나님께 받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자기 것인 양 자랑하거나 이익의 도구로 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예수 앞에서 전하는 것처럼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사람에게 전했지만, 환심이나 인기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분 앞에서 하듯 조심히 정성스럽게 전했습니다. 이것은 참 사역자를 분별하는 중요한 조건이며, 사역자도 교회도 들어야 하는 원리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것을 중요시 여겼다면 세상에서 지탄받는 것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생은 가져야 할 것보다 ‘지켜야’ 할 것이 더 많습니다. 자기 ‘자리’, ‘사명’, ‘형제’를 지켜야 합니다. 자신을 살게 한 ‘복음’ 또한 지켜야 합니다. 지켜내기 위해서는 복음에, 믿음에 다른 것을 섞지 않는 ‘순전함’(2:17)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향기로, 향기 나는 교회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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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1-02)

 


자신과 사역을 변호하는 바울

고린도후서 1장 12-22절


 

퍼즐은 서로 모양이 다른 100조각이나 100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퍼즐이 서로 다른 모양이 있지만, 그것들이 서로 하나하나 맞추어서 완성된 그림이 되어질 때, 참 즐거움이 있습니다. 다양한 성도들이 하나하나 맞춰져서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기쁨이 클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신실하게 퍼즐을 맞추어가는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환난과 위로가 담긴 송영으로 독자와의 연결을 꾀한 바울은 이제 교회에게 자신과 사역에 대해 변호합니다. 7:16까지 이어지는 본문의 첫 시작인데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12-14절은 독자를 향한 바울의 태도를 변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행했다고 합니다. 둘째, 15-22절은 이전 방문 계획을 변경한 것에 대해 변호합니다. 경솔한 계획이나 개인적 변덕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전한 복음 역시 일관성과 신뢰성이 있음을 변호합니다.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 변호(12-14)

사람들을 대할 때는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신실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했다는 고백입니다. 남들과 비교하지도 않고 없는 것을 과정하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양심껏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참 사역자일 것입니다.

 

12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12-14)

 

앞 단락에서 환난 때마다 위로를 주심으로 능히 고난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는 고린도 성도들 사이에 있었던 그에 대한 부당한 비난을 일축시키고 그의 사도로서의 직분과 사역 자세에 대한 정당성을 증거하기 위해 자기의 건실성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1) 교회를 향한 바울의 태도 변호(12)

 

‘우리’의 자랑을 소개하여 본격적으로 편지 몸말의 문을 엽니다. ‘자랑’은 거짓 교사들이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교회에 떠벌인 것을 배경으로 바울이 그들의 자랑을 부끄럽게 하고 자신이 참 사도임을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편지 전체에서 바울의 자랑은 주로 사역과 독자들을 향한 태도를 내용으로 합니다.

1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조와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조와 관련해, 바울은 ‘우리의 자랑은 이것이다. 즉…’ 형태로 전달합니다. 자랑을 먼저 언급하고 내용을 나중에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자랑’을 힘주어 소개하려는 의도을 나타냅니다. 이런 의도는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라는 추가 표현에서도 확인됩니다. 사도의 양심을 걸고 독자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참 자랑이라는 말입니다. 자랑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초점이 있습니다. 첫째, 세상 방식으로 살거나 사역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했다는 표현에 하나님의 은혜와 육체의 지혜의 대조를 첨가한 것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독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입니다. ‘특별히 너희에 대해서’라는 표현을 추가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인간적 자랑 또는 자신에 대한 그들의 비난에 대해 참 자랑을 소개함으로써 자기의 사역을 변호합니다. 화려한 인간적 조건으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실함과 거룩함으로 독자들을 향해 사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그가 제시한 참 사역자를 분별하는 기준입니다.

 

(2) 이전 편지 내용에 대한 변호(13-14)

 

자랑을 통한 자기변호를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첫 내용은 고린도 방문 계획을 변경한 것에 대해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 방문에 대해 썼지만(고전 16:5-9)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에 대해 마음을 열지 않은 일부 교인들과 거짓 사도들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방문 계획을 이행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이전 편지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입니다. 계획 언급이 경솔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바울 인격에 대한 회의입니다. 계획에 문제가 없다 해도 이행하지 않은 것은 신실하지 않다는 방증일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바울의 사도권과 사역의 진정성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도권에 대한 도전은 그의 사역 결과인 교회의 정체성과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즉, 신실하지 않은 자가 사도일 수 있으며, 자격 없는 자가 세운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는가의 문제로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오해소지들에 대해 바울은 이전 편지 내용의 진실성을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독자들이 이전 편지를 읽고 이해한 내용 외에 다른 것을 쓴 적이 없다고 합니다(13). 또한 그들이 온전히 알게 되기를 바라는 내용도 첨언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는 그날에 독자는 바울의 자랑이 되고 바울은 독자의 자랑이 되기를 원합니다(14). 지금은 부분적으로만 알기에 오해도 있지만, 교회를 향한 바울의 의도와 사랑이 온전히 드러나서 그들이 바울을 자랑하게 되고, 바울 역시 그들을 자랑하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말입니다.

 

방문 계획 변경과 복음 전파의 신뢰성 변호(15-22)

모든 성도들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약속한 바를 지켜야 합니다.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능한 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의 인격에 따라 그 복음에 대한 신빙성이 듣는 사람들에게 좌우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든지 능력이 있거나 부족할지라도 사용하십니다.

 

15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7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8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15-22)

 

자신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에 근거한 것임을 변호한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부터 2:13까지에서는 고린도 성도들이 그를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불성실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게 된 이유로 작용한 고린도 교회에 대한 수차의 방문 계획변경과 관련하여 해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방문 계획을 변경시킨 것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1) 바울의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 변경에 대한 변호(15-17)

 

이전 편지 속 방문 계획의 진실성에 대해 계속 변호합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기대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얻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는 교회가 바울의 권면을 거절하기 이전에 쓴 것이기에, 바울은 교회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방문 계획을 소개했을 것입니다. 그의 계획은 에베소 → 고린도 → 마게도냐 → 고린도 → 유대로 가는 것이었습니다(15-16)

16절). 예루살렘을 위한 연보와 관련한 여행입니다(고전 16:1-4). 하지만 이 계획은 이행되지 못했습니다. 여기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이 계획이 고린도전서 16:59에서 밝힌 내용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거기서는 에베소에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 → 고린도 →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주후 53년 여름이나 가을에 에베소를 출발해 고린도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방문 계획과 관련해 두 번의 변경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첫째는 이전 편지와 다르게 마게도냐를 거치지 않고 고린도에 직행하는 것으로 바꾼 것이고, 둘째는 그마저 이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계획 변경 자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방문과 관련한 전체 과정의 방향을 바꾼 계기가 된 것은 교회가 고린도전서의 권면을 거절한 사건입니다. 고린도에 갔던 디모데가 아픈 마음으로 바울에게로 돌아와 교회 상황을 전했고, 이에 바울은 예상에 없던 방문, 곧 고통스러운 두 번째 방문을 합니다. 그 방문은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때 바울은 15-16절 계획처럼 다시 고린도에 방문해 상황을 종결짓겠다고 말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 계획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아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황 설명은 1:23-2:4에서 제시됩니다. 이 부분에서는 자신의 방문 계획 수립 과정에 문제가 없었음을 먼저 설명합니다(17). 특별히 계획 과정의 무책임성에 대해 변호합니다. 두 가지 수사적 질문으로 진행합니다. 계획을 세울 때 경솔하게 혹은 무책임하게 했겠습니까? 또 육체를 따라 계획해서 ‘예’와 ‘아니오’를 동시에 하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했겠습니까? 모두 독자 스스로 ‘아니다’라고 대답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계획 과정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2) 바울이 전한 복음의 일관성과 신뢰성에 대한 변호(18-22)

 

방문 계획을 왜 이행하지 않았는가를(23f) 설명해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복음 증거 내용의 일관성을 변호합니다(18-22). 앞서 언급한 대로 바울의 계획 변경은 신실성이 없다는 증거라고 폄하하고, 그것을 통해 그의 사도권과 복음 증거 사역의 신뢰성까지 공격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입니다.

바울은 삼위 하나님께 근거하여 자신의 증거사역의 신뢰성을 설명합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18,20-22). 그분은 증거 과정과 관련한 구원의 모든 과정을 계획하고 이루시는 분입니다. 오래전에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그 약속을 성취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또한 그 메시아를 증거하는 자들(‘우리’)을 부르시고 사역을 맡길 뿐 아니라, 그 증거 사역을 통해 구원의 실제를 경험케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을 보내 구원 과정에 참여하고 있음을 확증시키고, 결과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 영광 돌리게 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신실함입니다(19-2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입니다. 그에게는 ‘예’와 ‘아니오’가 공존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만 있는 신실한 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전파로 그를 믿으면 구원 과정에 참여하게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21-22). ‘우리’의 증거 사역 결과로 구원 과정에 참여하면, 그 증거이자 미래 과정의 보증인 성령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이미 독자들은 누구보다도 성령의 경험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이런 설명에 의하면 바울의 사역은 삼위 하나님이 행하시는 커다란 구원 과정 속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분들에 의해 시작하고 그분들을 통해 수행하고 그 결과를 그분들이 보증합니다. 사역의 신뢰성에 대해 이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바울의 이런 변호는 교회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고린도 교회와 관련해 누가 참 사도인지를 분별하는 시금석입니다. 구원 과정의 전체 그림을 갖고 삼위 하나님으로 인한 구원의 실제를 경험케 하는 통로가 진짜 사도입니다. 이후 바울의 새 언약 사역 설명과 거짓 사도 비판을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입니다. 둘째, 후대 교회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과정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 진리를 전하는 자가 참 사역자입니다. 단순히 사람을 위로하거나 교회를 경영하는 능력은 본질이 아닙니다. 진리 전달이 중요합니다.


진실에 응답하는 것, 진실을 말하는 것도 때로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일관되게 실천하고 실현하는 것은 더 큰 결단과 지속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입술의 고백을 삶으로 풀어내는 과정입니다. 복음의 진리에 마음 다해 아멘으로 화답하고, 아멘을 살고, 아멘의 사람이 되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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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1-01)

 


역경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린도후서 1장 1-11절


‘제 코가 석자’란 속담은 ‘자기도 어려워 주변을 돌아볼 여우가 없다.’는 뜻입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이 자기 힘든데 다른 사람을 위로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자기도 어려운데 다른 사람을 위로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극심한 고난으로 살 소망까지

 

  •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네 번째 편지입니다. 1:1-11은 시작 부분입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1-2에는 발신자와 수신자와 문안 인사가 있고, 둘째, 3-11절은 하나님을 향한 송영입니다. 메시아 예수로 인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경험한 것에 감사하고(3-5), 그 과정을 독자 상황과 연결시킵니다(6-7). 특별히 아시아에서의 환난과 구원 경험을 부연함으로써 독자들의 참여를 유도합니다(8-11).

 

서신의 서언(1-2)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모든 고난을 제거해 주시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기에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사명을 감당하는 사명자들은 더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야 한다면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2)

 

바울은 사도로서 권위와 고린도교회 설립한 사람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발생된 여러 문제들에 대해 책망과 고린도 교회에서 질문한 답변을 담은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발송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그의 처방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악화 되었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눈물의 편지’를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후에 감사하게도 그 편지를 통해 교회가 회개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어지럽히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울은 이전 문제 상화 해결에 대한 감사와 함께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부분과 거짓 사도라는 새로운 문제에 관해 편지를 씁니다. 본문은 그 편지의 시작입니다.

 

(1) 발신자와 수신자(1)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도전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다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됨과 고린도 교회를 위해 사역했던 일 그리고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는 당시의 편지 양식을 따라 발신자와 수신자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➀ 발신자(1a)

 

발신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함께 편지 보내는 사람으로 디모데를 소개합니다. 평범한 표현이지만, 독자와의 관계를 고려하면 두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예수의 사도’라는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비롯한 여러 편지에서도 언급된 것이지만, 고린도후서와 관계된 상황에서는 특별히 강조하는 듯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며 갈등이 일단락되었지만,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구심을 풀지 않았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하므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인정한 사도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이후 전개될 사도권 변호의 발판으로 삼기 위한 인사로 시작합니다.

 

둘째, 바울과 함께 이 서신의 공동 발신인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소스데네(고전 1:1) 대신 디모데를 언급합니다. 이렇게 디모데를 언급한 이유는 디모데의 상황이 특별합니다. 고린도 교회와 바울 간의 갈등과 회복의 전 과정을 경험하고 목격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기쁨으로 바뀐 디모데는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을 전하는 증인입니다.

 

➁ 수신자(1b)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입니다. 바울은 수신자들을 ‘하나님의 교회’라고 묘사합니다(고전 1:2).

이전 고린도전서의 수신자에 대해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라고 장황하게 나열했습니다. 하지만 본 고린도후서에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단백하게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서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갈등이 해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안에 거짓 사도들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도성의 정체성은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언급한 것은 이 편지에만 있습니다. 아마도 이후에 제시할 연보(9:2)와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경고하는 내용과 관련 있는 듯합니다(11:10). 또한 그의 편지가 점진적으로 모든 교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회람(回覽)해 가면서 읽기를 원했습니다.

 

(2) 문안 인사(2)

 

바울은 당시 기독교인들의 통상적인 인사말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이라고 인사를 전합니다. 이러한 ‘은혜와 평강’의 인사는 바울의 초기 서신들로부터 후기 서신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딤전 1:2과 딤후 1:2에는 ‘긍휼’이 첨가되기도 함). 바울이 인사로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동등하게 공급됩니다. 그 ‘은혜와 평강’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은혜’는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는 총애,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구원이며, ‘평강’은 유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인사말로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는 평화와 안녕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은혜와 평강은 진정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향한 찬송(3-7)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와 평강도 주십니다. 고난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 겪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당할 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해결책을 마련해 주십니다. 따라서 문제는 환난 자체가 아니라 환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3-7)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본론을 시작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며 겪었던 일들이 고린도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비록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했지만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렸습니다.

 

(1) 메시아로 인한 고난을 위로하신 하나님을 찬양(3-5)

 

바울의 서신에서 이곳과 에베소서에만 찬양이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과정을 신령한 복으로 소개하고, 영에서 언급한 구원 과정의 각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합니다. 고린도후서도 마찬가지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이후 내용은 송영에서 언급한 구원 과정의 각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합니다. 고린도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송영 내용인 바울의 환난과 주의 위로가 이후 내용에서 계속 언급되기 때문입니다(2:14-17; 4:1-5:10; 7:4-16; 거짓 사도와 관련한 10-13장). 송영을 이후 전하려는 내용의 밑그림으로 제공하는 전략적 구성입니다. 송영의 구조 역시 의도적입니다. 환난과 위로의 과정을 하나님 – 바울(‘우리’) - 독자(‘너희’)로 두 번 연결합니다. 첫 연결은 3-7절이고, 두 번째 연결은 8-11절입니다. 3-5절은 하나님과 바울의 연결입니다.

 

송영은 하나님의 속성 묘사로 시작합니다(3). 그분은 우리 주 예수 메시아의 아버지이고 위로와 자비의 아버지이자 하나님입니다.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예수와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아버지, 곧 예수를 통해 구원 과정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둘째, 새 언약 관계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 신자들과 새 언약 관계를 맺은 분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이자 아버지입니다. 또한 새 언약 관계 안에서 신실함과 사랑의 의무를 행하시는 의로운 분입니다. 그 사랑의 의무는 위로와 자비로 표현됩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4-5절에서 바울(‘우리’)의 실제 삶과 연결됩니다. 먼저 위로와 관련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4). 그분은 ‘우리’의 모든 환난에서 위로하신 분입니다. 그 위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통해 환난 받는 또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새 언약과 관련한 바울 사역의 핵심 형태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과의 관계안으로 들어간 언약 백성에게는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통로, 곧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제사장 역할입니다(출 19:5-6; 벧전 2:9).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른 이에게 흘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중에 자신과 관련한 이 의무를 새 언약 사역(3:6)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5:18)으로 표현합니다. 한편, 예수와의 연결은 바울이 당하는 환난과 위로가 어떤 의미인지를 서술하는 5절에 있습니다. 바울의 고난은 메시아의 고난, 즉 그분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고난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위로는 메시아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것입니다(4:11). 제사장 역할을 하는 새 언약 백성의 특권입니다. 이런 면에서 송영은 바울의 사도권과 사역 변호와 관련 있는 듯합니다.

 

(2) 환난과 위로를 통해 바울과 독자를 연결(6-7)

 

바울은 자신이 환난과 위로를 경험한 것은 독자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라고 한다. 얼핏 보기에 그 연결이 생뚱맞다. 독자 때문에 환난 받은 것도 아니고, 바울의 위로 자체가 독자들에게 구원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표현을 이해하는 열쇠는 앞서 언급한 새 언약 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예수와 바울의 사역이다. 바울의 고난은 단순한 삶의 어려움이 아니라 복음 사역과 관련 있다. 이런 고난은 교회도 겪을 수 있다. 특별히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과 벗하는 삶을 거절하고 복음의 통로로 살기로 결정했기에 가능성이 더욱 높다. 이 과정에서 교회도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예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고, 그 경험은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를 더 굳건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소망이다(7절). 바울의 경험은 교회를 향한 모범이다.

 

환난을 주시는 목적(8-10)

‘고난을 당할 때 기뻐하라’라는 명령은 고난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열매를 바라보며 기뻐하라는 것입니다(롬 5:3-4). 고난에는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고난을 당한 이웃에게 가장 큰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그와 유사한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믿음으로 잘 이겨 냄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8-10)

 

8-10절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과 하나님의 구원 ‘형제들아…모르기를 원치 않는다' 표현으로 바울의 상황을 독자와 공유한다(8절). 4절을 부연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다. 아주 심해서 사형선고를 받은 듯 바울 스스로도 살 소망을 접을 정도였다. 상황 자체가 초점이 아니기에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바울의 의도는 두 가지다.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소개하고, 그 상황을 독자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얻은 교훈을 언급합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것입니다(9b-10). 이전에도 복음을 전하면서 어려움을 당했고(11:23; 참조. 고전 4:9-13),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상황은 상당히 심각합니다. 죽음에 가까운 경험과 주의 도우심은 마치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듯한 경험으로 인식되었고, 믿음과 진리의 관점을 더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된 듯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삶뿐 아니라 사역의 모든 초점이 주께 있음을 재확인하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언급은 이후 내용을 위한 복선 설정으로 보입니다. 자기사역에 부정적인 일부 교인들과 특별히 인간적 자랑거리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 문제에 대해 바울이 사도권을 변호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인간적 조건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과 그분의 도우심만을 구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사역한 자가 참 사도임을 보여주고픈 것입니다.

 

기도 부탁(11)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상대방과 같은 처지에 놓여 보지 않는 한,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자신이 당한 고난을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연장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도우실 것을 확신합니까?

 

11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11)

 

독자들에게 기도로 도울 것을 요청하며 자신의 환난 경험을 독자와 연결합니다. 성도의 중보기도는 사역자가 흔히 요청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요청에는 두 가지 의도가 담긴 듯합니다. 첫째, 독자들의 유익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많이 경험해서 그로 인한 감사가 많아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독자의 신앙이 더 견고해지는 방법이다. 둘째, 바울과의 관계입니다. 기도로 바울 사역에 동참하라는 말입니다. 거짓 사도들과 관련한 문제 상황에서 참 사도인 바울의 사역에 함께하라는 권면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3-11절은 복음 증거 과정에서 경험한 환난과 주의 위로를 바탕으로 두 가지를 전달합니다. 1) 하나님/예수를 중심으로 한 새 언약 사역자로서 바울의 사역 변호, 2) 독자와의 연결입니다. 누가 참 사도인지를 분별하고 진리 편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아픔이 없으니 창조도 없다’는 말이 이렇게 풀어봅니다. 고난이 있으니 위로도 있습니다. ‘무통분만의 시대’는 참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통증이 있어야 통감도 가능하기에, 성도에게 고난은 필연입니다. 하지만 그 고난은 ‘위로의 샘’입니다. 그 샘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공동체를 새롭게 만나고, 믿음을 새롭게 만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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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7-01)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시편 27편 1-14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라는 말이 믿음에 관한 얼마나 적실한 정의 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100% 확률의 모험이기 때문에, 이미 현실이 된 것이나 다름없이 받아들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1%의 희망도 없는 상황마저 뒤엎을 수 있고, 전혀 가망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근거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시인은 눈앞에 닥친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신뢰하여 평안한 마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을 사랑하며 항상 그분의 임재를 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원수에게서 구원하시고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하며 찬양을 서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여 두려움이 없는 시인(1-3)

하나님만이 구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의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요, 내 갈 길을 밝히는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합쳐도 더 크시고 강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자이시므로 겁나지 않다고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시인은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1-3)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빛’, ‘나의 구원’, ‘내 생명의 능력’으로 부릅니다. 하나님을 ‘나의’로 부르는 시인의 모습 속에 하나님과 그의 친밀한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빛이라 불렀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빛’과 ‘불’로(사 10:17; 미 7:8; 요 1:4), ‘영원한 빛’이 되십니다(사 60:19). 시인은 이 빛되신 하나님을 구원과 연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둠 같은 대적들을 몰아내고 시인에게 승리를 주고 구원하시는 분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빛’과 ‘구원’이신 하나님을 생명과 연결한다. 특히 생명의 능력은 요새나 피난처를 가리키므로, 하나님이 시인의 피난처가 되셔서 그가 하나님께 피하면 생명을 보존하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개인적인 보호자가 되어주시므로 시인은 두려워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 주변에는 시인을 노리는 원수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시인을 물어뜯어 해를 입히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구원자 하나님이 계시므로 그의 원수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족하여 넘어졌습니다. 또한 시인에게는 개인적인 원수 외에도 국가적인 원수가 있습니다. 적들이 군대를 결성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시인을 공격하려고 에워싸도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여 마음이 든든합니다(시 46편).

 

시인의 기도(4-6)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것입니다. 원수들 앞에서 승리하는 것은 당장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소원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시인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원을 기도합니다. 그것은 주의 집에 살겠다는 오직 하나의 소원만 있을 뿐입니다.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4-6)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과 긍휼을 구합니다. 묵상 중에 주의 얼굴을 찾으라는 내적인 음성을 듣고 즉각 반응 합니다. 일생 내내 시인의 도움이 되신 주께서 이번에도 버리지 말고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1) 하나님의 임재(4)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마음이 담대한 시인은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평생토록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구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단호하고 강렬한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단호하고 강렬합니다. 시인이 바라보기 원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나, 하나님을 사모하거나 구한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원문으로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모두 시인으로 하여금 은혜와 기쁨이 되는 표현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2) 하나님의 보호(5)

 

시인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전은 시인이 환난당할 때에 피난처가 됩니다. 시인은 어려움에 처할 때에 하나님이 그를 처소에 숨기시거나 높은 바위 위에 두셔서 어느 누구도 시인을 찾거나 공격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숨겨주는 모습은 시편 91편에 하나님의 날개깃으로 시인을 숨겨 보호하시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높은 바위는 성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므로 실제로 성전이 있는 시온을 지칭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참조. 시 46편)

 

(3) 하나님께 찬양(6)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숨겨 보호하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원수들 앞에서 시인에게 승리를 안겨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해주신 그 성전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고 감사와 찬양을 드리겠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 간구(7-12)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 자녀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있습니다. 쳐다보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마저 자신이 정한 척도를 따라 판단에 따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분, 하나님만이 바라보시며 웃어주시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부모에게 버림받을 정도로 극도의 고독과 고립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7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8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10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11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2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7-12)

 

시인의 소원은 오직 하나, 여호와의 임재 앞에 나아가 그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수세에 몰려 있으면서도 이미 승리를 누리는 사람마냥 하나님께 제사와 찬송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는 신뢰하며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믿음임을 설명합니다.

 

(1) 응답을 촉구(7-10)

 

1-6절까지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신뢰는 담대한 고백,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끝없는 사랑, 환난에서 승리하여 감사 제사를 드리게 될 확신에서 나타났습니다. 이제 7-14절에는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신뢰가 그의 간구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청합니다.

7절과 9절에 다양하게 표현되는 ‘들어주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응답하소서’,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떠나지 마소서’는 모두 ‘들어주소서’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이렇게 단어와 형식(‘…하소서’, ‘…하지 마소서’)을 바꿔가며 같은 내용의 기도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은 그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절실하게 기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원합니다. 시인은 아직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이 마치 얼굴을 돌려 그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인에게 얼굴을 향하시고 기도 소리를 들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립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명령하실 때, 시인은 마음으로 주의 얼굴을 찾을 것이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이제 환난이 찾아오자 시인은 결심한 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점을 하나님께 상기시키며 자신을 긍휼히 보시고 얼굴을 보여주시기를 구합니다. 덧붙여 자기를 긍휼히 여겨 떠나지 마시길 간청합니다.

시인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말한 것은 설령 이 땅에 있는 육신의 부모가 그를 버린다 할지라도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접하실 것을 확신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현재 시인의 친구나 형제, 그의 부모조차도 다 그를 외면하여서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이 홀로 남았으나, 하나님은 자신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며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을 기대하는 자임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시인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입니다.

 

(2) 하나님께 간구(11-12)

 

하나님의 긍휼과 얼굴을 구하는 시인은 환난 중에라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을 배우고 하나님의 인도로 원수들의 모든 장애를 벗어나 평탄한 곳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자신은 선과 정의가 있는 하나님의 길을 따르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폭력과 거짓을 일삼는 원수들과 같이 취급하지 마시고 자신을 그들에게 넘겨주지 마시길 간청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마땅한 심판을 내려주시고 자신에게는 평안과 안전을 공급해달라고 간청 드립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림(13-14)

원수들이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터무니없는 말로 몰아세우는데 우습게도 주변 사람들은 그 말을 믿어줍니다. 이러한 숨이 넘어갈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선하심을 의지하고 우리를 삼키려는 죽음의 땅을 산 자의 땅으로 부꾸며 살아가야 합니다.

 

13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3-14)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그리고 선과 정의를 확신하므로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응답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구체적으로 시인의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시인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시인은 이러한 확고한 믿음을 마음에만 품지 않고 공동체에 선포합니다. 시인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강하고 담대하게 그를 기다리라고 조언하며 시를 마칩니다. 현재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이 이르지는 않았지만 시인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인내하며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구원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을 택한다는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다림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이라는 사실은 기다림이 가능한 이유요 두렵지 않은 이유입니다. 지금은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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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6-01)

 


나를 실피시고 시험하소서

시편 26편 1-12절


거친 텃밭에서도 보들보들한 새잎이 나듯, 연일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새잎을 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인의 불안을 넘어 사회적 불안이 우리를 자극하고 공격할 때, 어떻게 담당하게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상자가 있습니다.

 

  • 이 시는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온전함과 진리 중에 행한 것과 주님 의지하는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시인 자신은 모함하는 행악자들과 같지 않고, 하나님께서 계신 집을 사랑하는 자로서 무죄함과 결백을 호소합니다. 무엇보다 시인은 악인들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을 염려하며 구속의 은총을 구하면서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결백을 호소하는 기도(1-3)

 

하나님께서는 재판관이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호소할 사람도 호소할 길도 없다면,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밝혀줄 것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공평하게 재판하시고 또한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샅샅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공평하게 재판하실 하나님께 간청하면 선하고 의로운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1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3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1-3)

 

시인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그분이 자기 사정을 공정하게 처리해주실 것을 믿고 호소합니다. 시인의 첫마디가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la)라고 의미심장하게 시작합니다. ‘판단하다’(샤파트)라는 말은 재판관으로서 판결을 내려달라는 뜻입니다. 왜 여호와의 판단이 필요한지 이유를 밝힙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신의 온전함을 따라 걸었기 때문입니다(1b). 이는 진실한 마음과 온전한 행실로 살아왔음을 천명하는 호소입니다(참조, 시 101:2; 잠 2:7; 10:9; 19:1; 20:7; 28:6). 또한 시인이 흔들리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1c).

 

시인의 거침없는 호소는 계속됩니다. ‘여호와여 나를 조사해보시고, 내 뜻과 내 양심을 감찰하소서’(2). ‘내 뜻’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몸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콩팥’(킬야)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콩팥은 사람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양심’은 ‘심장’ 또는 ‘마음’을 뜻하는 ‘레브’입니다. 심장은 고대인들에게 한 사람의 의사 결정 기관이며, 지혜와 의지의 자리입니다. 시인은 남이 들추지 못할 내면 깊숙한 곳과 양심까지 샅샅이 조사해달라고 말할 만큼 깨끗합니다. 시인은 마음의 법정인 양심과 가장 깊은 내면의 깨끗함을 호소합니다. 시인의 뜻과 양심을 포함한 전부를 뜨거운 용광로에 넣어서 불순물이 나오는지 살펴보시길 원합니다.

 

이처럼 시인의 요청은 뒤로 물러섬 없이 당당하고 자신만만합니다. 시인의 절박함에 당당함이 끼어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인의 주장과 담대한 태도는 자칫 교만하거나 적절하지 않은 태도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이유를 밝힙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인자하심이 내 앞에 있고, 나는 당신의 진리를 따라 걸었기 때문입니다’(3). ‘인자하심’은 언약적인 사랑이며 실패하지 않는 사랑, ‘헤세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인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강렬했으니 여호와의 ‘진리’, 곧 진실함과 신실하심을 따라 걷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인의 온전한 삶의 실천은 여호와의 엄한 명령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당신의 진리(진실하심) 안에서’ 자신의 투철한 의지로 살아왔노라고 고백할 뿐입니다. 이것이 곧 구원의 절박함 속에서도 당당한 이유입니다.

 

악인들과 다름을 호소(4-5)

악한 무리와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윤리와 도덕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무리들과 단절하면 많은 이익관계까지도 단절되는 위험을 수반합니다. 설사 그럴지라도 기꺼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하면 그들의 운명에 휩쓸리기 때문입니다.

 

4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5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4-5)

 

하나님께 헌신된 시인의 온전하고 무죄한 삶은 악인들과의 관계나 그들에 대한 시인의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진리에 부합하게 살았음을 호소했습니다(3). 그런 그가 ‘허망한 사람’, ‘간사한 자’와 동행할 리 없습니다(4). 시인은 헛것을 따르는 자들, 곧 우상숭배자들과 함께 앉지 않을 것입니다(4a). 따라서 마음속에 음흉하게 무언가를 숨기거나 사건을 덮어 은폐하는 ‘간사한 자’, 곧 ‘감추는 자들’과 동행하지 않을 것이라고(4b) 다짐합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부류는 ‘내 뜻’과 ‘내 양심’을 샅샅이 조사해주시기를 구했던(2) 시인과 정반대의 사람들입니다. 평행관계가 보여주듯 시인은 헛것을 추구하거나 숭배하는 자들과 비밀스럽게 뭔가를 감추는 자들을 동급으로 여깁니다. 그들과 교제하며 친분을 나누는 일이 없을 것이라 다짐합니다. 또한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반역하는 악한 자들과 함께 앉지 않을 것입니다(5). 선행을 위한 ‘집회’(카할)가 아니라 행악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패거리 문화나 대중 집회를 시인은 ‘미워했고’, 악한 자들과는 동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백 호소와 여호와를 향한 사랑 고백(6-8)

성도들은 거룩한 성도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에서는 손에 뇌물이나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고, 불평 대신 감사의 노래를 높이 부르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적을 더불어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악한 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삶을 꾸려나가는 것과 정확하게 대조되는 삶을 노래합니다.

 

6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7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8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6-8)

 

시인은 다시 여호와를 부르며 결백을 호소합니다. ‘내가 무죄하여 내 손을 씻고, 여호와여 당신의 제단에 두루 다닙니다’(6). 깨끗한 손은 깨끗한 마음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손을 씻는 행동은 다양한 정황에서 발견되지만, 무죄와 정결의 필요성을 상징합니다. 예배자의 선행 조건으로서 깨끗한 손(시 24:4)은 성전 입장을 위한 정규적인 의식이기도 했습니다(시 73:13). 또한 제단은 하나님과의 친교와 임재를 알려주는 식탁을 상징합니다. 시인은 그 주변을 돌면서 ‘감사의 소리를 듣게 하고, 당신의 기이한 모든 일들을 말할 것입니다’(7)라고 다짐합니다. 여호와를 향한 시인의 사랑 고백이 독특합니다. ‘여호와여, 나는 당신이 거주하시는 집을 사랑하고 당신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했습니다’(8), 시인은 마치 회상하듯이 완료형 동사로 말합니다. ‘당신이 거주하시는 집’과 ‘당신의 영광이 머무는 곳’은 지성소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를 ‘내가 사랑했다’(아하브티)는 말은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했다(5)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물론 시인이 사랑하는 것은 건물 자체의 영광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 처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그 영광을 사랑합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드물지만(31:23; 97:10; 116:1; 145:20),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이름(5:11; 69:36), 여호와의 법과 구원을 사랑합니다(119:47, 48, 97, 113, 119, 127, 159, 163)는 표현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악인들과 구별되기를 간구(9-10)

성도들은 악한 사람들과 함께하면 그들의 운명에 따라서 자신도 휩쓸려 갑니다. 그들은 우상숭배하고 뇌물로 사람의 마음을 훔치고 심지어 살인까지 일삼는 자들과 함께 부당한 이권에 기웃거리지 않아야 합니다. 소수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과 사귀는 일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서 있기 때문입니다.

 

9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10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9-10)

 

시인은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면서 악인들과 함께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들과 한패가 되지 않을 것을 다짐했습니다(4-5). 이제 시인은 자신의 다짐 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나의 영혼을 죄인들과 함께 제거하지 마소서/내 생명을 살인자들과 함께 제거하지 마소서’(9). 시인이 악인들과 함께 휩쓸려 제거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구는 여호와가 악인들을 박멸하실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시인이 죄인들(9)과 동격 관계로 설정한 살인자들(9b)은 주로 피에 굶주려 폭력적인 행위나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그런 자들과 한통속으로 묶여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그들의 속성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의 손에는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는 뇌물로 가득합니다’(10). 시인은 악인들의 사악함을 뇌물을 밝히는 손으로 특정합니다. 시인은 앞서 자신의 무죄한 손을 언급했지만(6), 사악한 죄인들의 손은 부정하고 불법한 뇌물로 가득합니다. 뇌물과 관련된 자들은 대체로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고, 이들은 자기보다 취약한 계층의 사람으로부터 부당하고 불법적인 이득을 챙깁니다. 시인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요청합니다.

 

결백 확신과 구속의 은총을 호소(11-12)

완전할 수 없다고 해서 완전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완전함이 아니라 세상과 달리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들리고 떠나는 무리 가운데서도 그들과 달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시인도 많이 흔들렸고, 항상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1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2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11-12)

 

시인이 맨 처음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니’(1a)라고 고백하고 호소한 것처럼 다시 반복합니다. 시작과 끝이 서로 호응하는 구성입니다. 시인은 ‘내가 흠 없는 삶을 살겠습니다’(11a)라고 다짐하고 간청합니다.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11b).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무죄함을 맹세했지만(6), 여전히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총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구속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무엇보다 ‘속량하다’ 또는 ‘구속하다’라는 의미의 ‘파다’는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처럼, 죽을 운명에 처해졌다가 구원받는 것처럼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자기백성 삼으신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삼하 7:23). 그러니까 시인은 자기 조상들이 맛본 구속의 은총이 여전히 자신에게도 유효한 은총이 되기를 열망합니다.

시인의 언어를 통해 예배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여호와가 보이신 은총 속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서고 싶습니다. 시인은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으니 내가 회중 가운데서 여호와 당신을 송축할 것이라’(12) 다짐합니다.

시인은 앞서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한다고 고백했지만(5), 이제 ‘회중’(막헬림)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더군다나 시인이 발을 딛고 있는 평탄한 데는 견고한 장소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공평함, 정직함, 의로움을 표현한 은유입니다(참조. 사 11:4). 따라서 시인은 신앙과 윤리적인 삶의 일치를 다짐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나의 완전함으로’(1,12) 살았다고 고백한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의 올바른 삶의 방식은 변함없을 것이라 다짐합니다.


하나님께 변호를 의뢰한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더 책임 있는 자세로 완전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늘을 판단하실 하나님이 그날에도 재판장이 되어 모든 걸 판단하실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힘을 얻고 곧게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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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8-01)

 


지혜와 명철의 길

욥기 28장 1-28절


과학의 발전으로 새로운 지식이 쌓여 갈수록 사람들은 지식의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이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욥은 인간의 기슬과 지식의 한계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성도는 인간 지식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믿음의 길로 행해야 합니다.

 

  • 욥기 28장은 지혜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 편의 아름다운 시입니다. 모든 것을 팔아도 아깝지 않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보다 지혜가 더 가치 있다고 설파하는 이 시는 지혜의 궁극적인 출처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합니다. 이 설명은 잠언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는 것이 28장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다른 것과 가른 지혜(1-14)

클린스의 주석에서 28장을 엘리후의 말로 취급하며 이 장의 위치를 37장 이후에 배치합니다. 엘리후의 말로 보는 이유를 첫째, 친구나 청중에게 하는 말이 없고, 둘째, 고통에 대한 호소나 괴로움의 감정이 표출되지 않았다는 점을 듭니다. 하지만 그의 접근법은 28장에서 결여된 것, 즉 ‘무엇이 아닌가’에 초점을 맞춘 방식입니다.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28장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그리고 28장을 욥의 말로 이해했을 때 어떤 의미가 도출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칠십인역(LXX)과 사해문서에서 발견된 아람어역 욥기(11QtgJob)도 마소라 본문(MT)과 동일한 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즉, 28장을 엘리후의 말로 볼 수 있는 외적 증거는 없습니다. 따라서 28장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28장이 누구의 말이냐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의 틀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는가입니다.

 

1은이 나는 곳이 있고 금을 제련하는 곳이 있으며 2철은 흙에서 캐내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3사람은 어둠을 뚫고 모든 것을 끝까지 탐지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광석도 탐지하되 4그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갱도를 깊이 뚫고 발길이 닿지 않는 곳 사람이 없는 곳에 매달려 흔들리느니라 5음식은 땅으로부터 나오나 그 밑은 불처럼 변하였도다 6그 돌에는 청옥이 있고 사금도 있으며 7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8용맹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느니라 9사람이 굳은 바위에 손을 대고 산을 뿌리까지 뒤엎으며 10반석에 수로를 터서 각종 보물을 눈으로 발견하고 11누수를 막아 스며 나가지 않게 하고 감추어져 있던 것을 밝은 데로 끌어내느니라 12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13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14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1-14)

 

본문은 동물들과는 다른 인간의 탁월함에 대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주제는 규범적 지혜에 속합니다. 규범적 지혜는 피조물 중 인간의 특별함과 위대함에 주목합니다. 지혜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구문의 단위를 1-11절이 아니라 1-14절로 보면 완전히 다른 관점과 해석이 나타납니다. 특히 12절은 20절에서도 반복되며 그 뒤 이어지는 두 절(13-14절과 21-22절)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집니다. 이것을 일종의 후렴구로 본다면, 1-11절을 마무리하며 지금까지 언급된 주제들을 반대로 뒤집는 수사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1-2절은 은과 금, 철과 구리 등 귀한 광석들은 모두 저마다의 출처와 기원이 있다는 주제를 다룹니다. 이것은 5-6절에서 음식과 불, 그리고 청옥과 사금의 기원과 출처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서 반복됩니다. 3-4절은 사람의 탁월한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캄캄한 굴을 헤매거나 아주 위험한 골짜기의 벼랑에 매달려서라도 그 귀한 광석을 찾아내고야 맙니다. 3-4절의 인간은 7-8절의 동물들과 대비됩니다. 독수리와 매는 하늘을 높이 날고 멀리 보는 대단한 눈을 가졌지만 그 능력으로도 광석을 찾지는 못합니다. 사자처럼 매우 용맹한 동물들도 보석이 있는 험한 길로 다니지 않고 다닐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광석이 얼마나 귀한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압니다. 그래서 바위를 부수고 돌을 깨고, 물의 흐름을 막고 어둔 곳에 빛을 비추고, 심지어 산을 거꾸로 뒤집어서라도 그 귀한 보물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야 맙니다(9-11).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찾고야 마는 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규범적 지혜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 12절의 말을 덧붙입니다. 이렇게 보석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찾아다니는 인간이 왜 지혜가 어디 있는지 모르며 보석보다 귀한 지혜를 찾아다니지 않습니까? 지혜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인간과 동물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은 반성적 지혜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대단하고 탁월한 피조물이라 해도 지혜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13절의 ‘에레크’를 개역개정은 “길”로 번역했는데, 이 히브리어 단어는가치(value)를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레위기와 민수기에서는 은의 무게를 정하는 기준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레 5:15, 18, 25; 27:2-17; 민 18:16 등). 왕하 23:35에서는 각 사람의 가치에 따라 세금을 부과할 때 이 단어가 쓰이며, 시편 55:13에서는 동등한 가치가 있는 동료를 지칭할 때 ‘에레크’가 사용됩니다. 따라서 13a절은 ‘사람은 지혜의 가치를 알지 못하며’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또한 이 지혜는 인간의 영역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13b). “사람 사는 땅”에서 지혜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개념과는 상충 됩니다. 지혜는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쳐주듯이 하나님께서 ‘환상’ 등의 직접 계시를 통해서나 조상들의 축적된 지식을 통해, 혹은 자연의 패턴을 관찰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의 어휘들은 인간과 인간의 생활 영역 안에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28장은 이러한 규범적 지혜와는 전혀 다른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지혜를 알수 없으며 인간의 영역 안에서는 지혜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확히 반성적 지혜의 가르침이며, 욥이 계속 지적한 ‘인간 인식의 한계’와 동일한 이야기입니다(참고로, 욥 38-41장의 하나님의 언설에서 사람이 살지 않고 살 수 없는 야생의 세계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28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생활 영역을 벗어난 피조세계, 즉 인간이 살 수 없는 “깊은 물”과 “바다”조차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14).

 

무엇보다 귀한 지혜의 가치(15-22)

세상의 지식과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여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고전 1:27). 지혜와 명철의 정체를 깨닫고 하나님께 구함으로 은혜의 선물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15순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리니 16오빌의 금이나 귀한 청옥수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겠고 17황금이나 수정이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품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18진주와 벽옥으로도 비길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산호보다 귀하구나 19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헤아리지 못하리라 20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21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22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15-22)

 

지혜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는 그 가치에 관한 것입니다. 그 어떤 값비싼 금이나 제아무리 많은 양의 은이라도 지혜에 견줄 수는 없습니다(15). 오피르의 금, 루비나 사파이어, 황금과 유리, 산호와 수정, 에티오피아의 토파즈와 순금조차 지혜의 값어치를 감당하지 못합니다(16-19). 이 귀한 것을 대체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묻고(20),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뒤따릅니다. 지혜는 모든 피조물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을 날고 먼 곳까지 내다볼 수 있는 새들조차 지혜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13절의 “사람 사는 땅”과 대비되는 죽음의 공간마저 지혜가 발견할 수 있는 장소를 모릅니다(22).

 

지혜란 무엇인가(23-28)

성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의 지혜와 명철을 따라 행하며, 세상의 모든 죄악을 멀리함으로 지혜와 명철이 충만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성도가 탐욕을 추구하면 지혜와 명철을 상실한 것임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23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24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25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26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27그 때에 그가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탐구하셨고 28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3-28)

 

‘지혜의 찬가’ 마지막은 12절과 20절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마무리합니다. 지혜는 어디 있으며 어디에서 발견됩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23).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온 세계의 구석구석을 다 알고 계시며(24), 그분의 주권 하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25). 모든 것을 결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람을 얼마나 약하게 불게 할까 얼마나 세게 불게 할까, 바다와 강의 물의 양을 정하시고 매번 내리는 비의 양을 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26a). 언제 어디서 천둥번개가 칠지 그 세밀한 것 하나하나까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 심지어 인간의 활동 반경을 벗어난 지역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25). 지혜의 출처가 바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지혜라는 것은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가 모두 공유하는 것입니다(잠 1:7; 9:10).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권자라는 점도 욥과 친구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점은 우선 지혜의 범위를 인간 생활에 중점을 두느냐의 문제와 인간의 인식 가능성에 관한 것입니다. 욥기 28장은 이 두 가지 지점에서 규범적 지혜보다는 반성적 지혜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을 세 친구들이나 아직 등장하지 않은 엘리후의 말로 보는 것은 28장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범을 아는 것이 지혜이자 하나님에 대한 경외라는 것이 규범적 지혜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28장은 지혜에 다다르는 길을 인간은 모르며 오직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란 인간은 지혜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겸손이며, 인간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지식을 무시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짧은 지식을 의지하며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의 사명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담대히 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를 따라 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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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서론)

 


고린도후서 서론


 

사도 바울은 교회 내부의 반대자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대적들로 둘러싸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헤쳐 나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는 13장으로 구성된 성경입니다. 내용상으로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을 읽은 사람마다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후서의 이름

본 고린도후서는 사본들에 의하면 이 서신서에 대해 단순히 ‘고린도인들에게 Ⅱ’라는 표제를 붙입니다. 최고의 사본, 즉 주후 3세기경 사본에서도 나타납니다.

영어 성경에서 긴 표제인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두번째 서신’(The Second Epistles of the Apostle Paul to the Corinthians)으로 표기한 것은 후대 일입니다. 이 서신서가 고린도 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라는 것과 또는 ‘후서’라는 말이 사용된 유래에 관해서는 아래의 역사적 배경을 참조바랍니다.

 

고린도후서의 저자

본서의 기록 배경과 내용 등 모든 면에서 고린도전서의 연속인 본서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외적 및 내적 증거는 바울이 이 편지서의 저자임을 결정적으로 말해 줍니다.

 

(1) 내적인 증거

 

고린도후서가 바울이 저자임을 가리키는 내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우선 그 문체가 바울의 것입니다. 이 서신서는 바울에 대하여 고린도에서의 그의 경험에 대하여, 그 교회에 보낸 그의 첫 편지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서신서가 바울의 성질과 개성과 기질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도 가장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서신서에 기록된 경험들이 역사적으로 전혀 무리가 없이 자연스러운 점은 그것의 진실성을 방증(紡證)하는 것이다.

 

(2) 외적인 증거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썼다는 외적 증거는 사도 시대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수의 초기 교부들과 저술가들이 이 서신서로부터 인용하고, 그것에 대해 언급한 기록들은 이 편지서의 진실성과 완전성에 관한 풍부한 증거를 제공합니다.

이 편지서보다 약 35년 뒤에 기록된, 고린도 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주후 95년 경)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형편과 꼭 같은 고린도의 형편을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전에 문제들의 다수가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으므로, 그다지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에게 편지하면서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155년 경 사망)는 고린도후서 8장 21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Epsistle 6). 리용(Lyons)의 감독 이레내우스(Irenaeus)는 고린도후서 12:2-4에 기록된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실을 인용하고 언급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A.D. 200년 경)는 20번 이상이나 고린도후서를 인용합니다. 소위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르타고(Carthage)의 터툴리안(Tertullian, A.D. 220년 경)은 고린도후서를 빈번히 인용합니다.

 

고린도후서의 배경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적어도 세 번 방문했고, 세 번, 어쩌면 네 번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의 제2차 선교 여행 동안에 있은 주후 51년 경 첫 방문 때에 그는 1년 반 동안 머물렀습니다(행 18:11). 이때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조직했습니다. 그 후에 종종 대표자들을 통하여 그 교회와 접촉을 계속하였습니다(고후 12:17). 첫 번째 서신은 고린도전서 5:9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는 오늘날 상실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3차 선교 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2년 이상을 보내면서 그 끝 무렵에 기록된 것이 오늘날 ‘고린도전서’로 알려진 서신서입니다(고전 16:8).

고린도전후서, 즉 에베소에서 보낸 ‘전서’와 마게도냐에서 보낸 ‘후서’ 사이에는 여러 기간이 경과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오순절까지 유하다가 그 후에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로 여행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행 19:21). 그러나 계획했던 것보다 빨리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생명까지 위협하던 그 당시의 강한 반대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행 19:24-41). 에베소에서 겪은 반대는 바울에게 큰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는 진리의 반대자들을 ‘맹수’(고전 15:32)라고 일컬었고, 또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후 1:8,9)다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향할 때의 상황이 이러하였습니다. 그는 마게도냐로 향하기 위한 승선 항구인 드로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전번 편지에 대한 고린도 사람들의 응답에 관한 보고를 가지고 돌아올 디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도는 기대한 시간 안에 도착하지 않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염려 때문에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하여(고후 2:13)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는 잇점도 활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마게도냐로 행하여 그는 빌립보에서 디도를 만났습니다. 디도가 고린도로부터 가져온 좋은 소식을 바울은 기쁨과 안도의 마음으로 청취했습니다. 바울이 이번에 고린도로 돌아온 것은 두 번째 방문이었던 것 같습니다(고후 2:1; 12:14; 13:1,2). 그는 전번 방문이 실망이었음을 말하고(고전 1:11), 그 후에 견책과 권면의 편지(고린도전서)를 써 보냈고 또 다시 계획한 방문의 준비를 위해 디도를 파견했습니다(고후 8:6; 13:1,2).

고린도후서 2:4에서 바울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고린도에서 보낸 먼저 번 편지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 편지는 그들을 ‘근심하게’하였습니다(고후 7:8). 이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이며 이번에 다시 쓴 편지는 따라서 ‘둘째’ 또는 ‘후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두 편지 사이에 또 하나의 다른 편지를 써 보냈을 가능성을 시사 하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2:13; 7:5; 8:1; 9:2,4 등에 비춰볼 때,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곳은 마게도냐였던 것 같습니다. 그 시기는 주후 57년경이었습니다.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바울의 편지들과 방문은 그 목적을 성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서 16:23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은 한사람(가이오)으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변화는 바울이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에 기록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그가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가졌던 근심과 염려로부터 회복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한 사실로 말미암아 더욱 더 확증됩니다(고후 2:13; 7:6,13,14).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고린도에서 의연금품을 모집하는 일도 성공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롬 15:26).

이 둘째 편지의 기록과 바울의 그 다음번 방문 이후로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불과 몇번의 산발적인 언급 밖에 찾아볼 수 없다. A.D. 95년경에 로마의 클레멘트가 기록하여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전에 고린도 교회가 가졌던 악들이 적어도 얼마가 다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클레멘트는 그 교회가 여러가지 면에서 모범적 행실을 했다고 칭찬을 하였으나 그 교회가 여전히 분쟁과 당파 정신을 가지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또한 질책을 가하였다. 이것이 사도 시대 동안의 고린도 교회에 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마지막 정보이다.

 

고린도후서의 기록 장소와 연대

 

(1) 기록 장소

 

본 고린도후서는 마게도냐 지역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7:5). 이는 마게도냐 지역에서의 연보 모금 소식을 통해 고린도와 아가야 지역의 교인들을 교훈하려 한 정황 중기를 통해 뒷받침됩니다(8:1, 9:2-4). 빌립보란 설도 있지만 빌립보 넓게 보면 마게도냐에 포함된다.

 

(2) 기록 연대

 

기록한 연대를 추정해 보면, 고린도전서의 기록과 연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전서를 기록하여 보내고, 수개월 또는 1년 전후로 이 서신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의 기록 시간을 주후 55년 봄으로 추정하면, 본 고린도후서는 가을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사도행전 20장 1-6절에 나타난 바울의 행적에 대한 단서들을 종합한 것입니다.

 

고린도도시의 지형

고린도후서를 이해하는 데는 골로새의 지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골로새는 동양과 서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골로새는 루고 골짜기(Lycus Valley)에 있는 골로새(Colosse, 고린도후서 1:2), 라오디게아(Laodicea, 고린도후서 2:1, 4:3-16), 히에라볼리(Hierapolis, 고린도후서 4:13)라는 “세 고을”중에 하나입니다. 골로새는 계시록에 나와 있는 라오디게아에서 약 11마일 떨어진 곳에 있으며, 에베소에서 약 100마일 떨어진 내륙지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전 5세기경에 골로새는 “부루기아의 커다란 성읍”이라고 알려 졌습니다. 그렇지만 이 골로새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여 바울 당시에는 작은 고을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유는 동서양을 있는 에베소 지방에서 유브라데 지방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던 교역의 통로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골로새 근처에는 교회가 3개 있었습니다(고린도후서 4:13).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헬라인과 부르기아인이 있었고, 원주민들은 잡다한 신들을 숭배하였습니다. 이곳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상당 수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특산물은 산간지역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양털이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의 목적

이 고린도후서는 첫 번째(고린도전서)에 이어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사도직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함이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전정한 의미에서 사도가 아니라고 선동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필요했다.

 

(2) 고린도 교회와의 왜곡된 관계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바울과 고린도 교회 교인들과의 관계를 심각하게 이간하게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진리의 복음을 다시금 확실하게 전하고,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3) 어려운 상황에 놓인 예루살렘 교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연보의 모금을 호소하기 위함이다.

 

고린도후서의 개요

서론 1:1-11

1. 인사 1:1, 2

2. 시련 중에서의 감사 1:3-11

 

고린도 교회와의 최근의 관계 1:12-7:16

1. 여행 계획의 변경에 대한 설명 1:12-2:4

2. 그리스도를 향한 비도덕적 범죄자를 회복시키라는 권면 2:5-11

3. 고린도로부터 소식을 들으려는 갈망과 들은 기쁨 2:12-17

4. 사도권 신임장 3:1-18

(1) 진정한 사도로서의 바울의 신임장 3:1-6

(2) 사도 직분의 영광 3:7-18

5. 사도는 그의 봉사를 거룩한 능력의 지지를 받음 4:1-5:10

(1) 견디는 힘: 거룩한 은혜의 증거 4:1-18

(2) 영원의 관점에서 본 생명과 사망 5:1-10

6. 화해의 봉사 5:11-6:10

(1) 그리스도를 위한 사신으로서의 사도 5:11-21

(2) 사도직을 위한 필수적인 훈련 6:1-10

7. 악행자들로부터 분리하라고 호소함 6:11-7:1

8. 따뜻한 응답에 대한 바울의 기쁨 7:2-16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연보 8:1-9:15

1.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적인 관대함 8:1-6

2.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 8:7-15

3. 고린도에서 헌금을 받아올 디도에 대한 칭찬과 사명 8:16-24

4. 각각 자기의 몫을 담당하라고 고린도인들에게 호소함 9:1-15

(1) 연보를 위해 준비하라는 호소 9:1-5

(2) 너그럽게 내라는 호소 9:6-15

 

사도권에 대한 바울의 옹호 10:1-13:10

1. 사도로서의 바울을 경시하는 자들에 대한 대답 10:1-12

2. 그의 지정된 봉사 영역 안에 있는 고린도 10:13-18

3. 참된 사도와 거짓 사도 사이의 특징적 차이점 11:1-12:18

(1) 거짓 사도의 음흉함 11:1-6

(2) 바울이 생계를 고린도인들에게 의존하지 않음 11:7-15

(3) 바울이 위기와 궁핍을 만남 11:16-33

(4) 거룩한 계시를 받은 자 바울 12:1-5

(5) 바울이 “육체의 가시”로 겸비해짐 12:6-10

(6) 바울이 그들의 재물로 치부하지 않음 12:11-18

4.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마지막 호소 12:19-13:10

 

결론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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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6-02)


역사 속에서 얻는 교훈(2)

고린도전서 16장 13-24절


영국의 작곡가 엘가(Edward Elgar)는 무명 시절에 자신에게 작곡가로서의 재능에 대해 아내가 용기와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자신을 격려한 아내를 위해 ‘사랑의 인사’란 곳을 작곡하여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사보 바울도 자신에게 사랑과 위로를 주었던 성도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에 답하기 위해 쓴 편지로서, 문제가 많았기에 편지도 길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문제의 해결책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제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면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권고합니다.

 

마지막 권면(13-14)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3:1)처럼 연약한 모습에 머물러 서 있으면 안 됩니다. 날마다 영적으로 깨어서 성장해야 합니다. 점점 성장해서 장성한 남자처럼 강인함을 지닌 성숙한 신앙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단의 공격을 분별해 낼 수 있고, 죄의 유혹을 경계하고 막을 수 있습니다.

 

13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14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3-14)

 

앞서 바울은 분쟁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임을 강조하는 한편(13장), 부활 신앙을 일깨워 주었습니다(15장). 땅에 속한 자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이 깨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늘에서의 삶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에 있는 많은 문제점들에 대해서 말씀으로 전했고 그의 의견을 제안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운 간절한 목자의 심정으로 권면을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다시 권면합니다. 그 권면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⑴ 깨어서 남자답게 강건하라(13)

 

첫째, 깨어있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깨어 있지 않고 덕과 경건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악한 세력과 대항해서 싸울 수 없고, 악한 세력에 물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에 굳게 서는 일입니다. 모든 유혹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 위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뜻합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요일 5:4). 셋째,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합니다. 용기 있게 믿음을 유지하고 유혹이나 위협에 굴하지 말 것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⑵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4)

 

우리의 열심과 봉사와 단호함은 사랑 안에서 혹은 사랑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이뤄져야 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더 많이 맺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교회 안에서 자신의 지분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파당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인으로 능력을 상실한 모습입니다. 세상을 향해 영향력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권고를 통해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바랍니다.

 

봉사자의 태도(15-18)

부활 신앙은 영적 잠에 빠진 성도를 깨우는 최고의 자명종입니다. 부활 소망으로 항상 깨어 잘못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고, 복음에 기초한 굳건한 믿음으로 담대히 세상에 맞서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15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15-18)

 

바울이 아가야에서 첫 열매로 맺은 스데바나의 가정은 성도를 섬기는 일에 집안 사람 모두 헌신했습니다. 일반적인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성도들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봉사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들에게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격려해주는 일을 합니다. 더욱이 18절에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고 권고합니다. 혹시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헐뜯거나 미워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경 지식을 배우는 주일학교 수준을 넘어서 거룩한 믿음 안에서 삶을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가 든든히 서가는 데는 언제나 공동체의 지체들을 섬기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분들의 헌신이 있습니다. 성숙한 공동체는 이러한 사람들의 수고를 존중하며 그 수고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함께 수고하기를 기뻐합니다.

 

마지막 인사(19-24)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주를 사랑함’입니다.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마 22:37~40; 요일 4:20~21 참조). 주를 사랑함을 거부하며 믿음의 형제끼리 분쟁하면, 신앙과 교회를 무너뜨리고 주를 욕되게 하는 것이기에 심판받습니다. 반면 주를 사랑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간구합니다.

 

19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하고 24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19-24)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아시아 여러 교회들의 문안을 전했습니다. 특히 바울을 도와 고린도 교회를 세웠던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문안 인사를 전했습니다. 여기서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문안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 가셔도 교회를 위해 변함없이 자기 집을 개방하여 섬긴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들불같이 펴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울과 같은 탁월한 사도들만이 아니라 이들과 같은 헌신적인 성도들이 있어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있는 에베소 교회의 문안 인사도 전했습니다. 바울 당시 대부분의 편지는 필자가 썼고 마지막으로 원저자가 친필로 서명을 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인사가 보라 이 친필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경고와 축복, 그리고 사랑의 말로 편지를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을 분명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린도전서 16:22) 이제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처럼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구원 얻은 자로써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함께 해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 나라 건설에 쓰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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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6-01)


역사 속에서 얻는 교훈

고린도전서 16장 1-12절


 

하나님의 사역에는 세 가지 생각을 하면서 사역하면 실수 없이 해나갈 수 있습니다. 사역을 위해 기도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정리하면서 일을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른 방법을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유익이 되는가? 두 번째는 하나님의 공동체에 전체적으로 유익이 되는가? 마지막으로 사역을 하는 자신에게 영적인 유익은 되는가? 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질의한 문제점들을 답을 하면서, 마지막에 부활의 문제까지 잘 설명했습니다. 이제 마무리하면서 기근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도록 권고합니다. 각 이방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조금씩 힘을 모아 어머니 같은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습니다. 다른 교회들처럼 고린도 교회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구제하는 헌금을 모금하는데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1-4)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서로 돕길 원하십니다. 특별히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길 원하십니다. 주위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도와야 방법은 무엇입니까? 성도의 필요를 채우는 일은 거룩한 책임이며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물질의 나눔을 통해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연합을 이룹니다.

 

1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1-4)

 

당시 예루살렘 지역은 심각한 기근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또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이방 교회들에게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자발적이고 체계적인 헌금을 하라고 명합니다. 그의 권고로 이미 이 일에 로마교회, 마케도니아 교회, 아가야 교회 등과 같은 이방 교회들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고린도 교회에게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요청했습니다.

헌금의 방식은 미리미리 준비한 헌금을 위해서 매주 첫날 자신의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저축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당일에 도착해서 강요하는 일이 없도록 해란 것입니다. 어느 정도 헌금이 모아지면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 갈 사람을 보내겠다면서 가능하다면 자신도 함께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나눔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의 구체적 실현이며,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종말론적 예언의 성취입니다. 또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돈독하게 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온 교회가 하나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말과 혀만으로는 진정한 감동과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실천이 역사를 만듭니다.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5-9)

하나님의 일은 모든 것이 좋기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가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를 따라서 순서에 맞도록 사역을 진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질서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5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6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8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5-9)

 

에베소에 머무는 바울은 극심한 반대와 저항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동역자들과 힘을 합해 당면한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합니다. 아울러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마게도냐와 고린도도 방문해 직접 교제할 계획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가장 원하시는 부분을 먼저 사역해 나가는 것을 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뜻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고린도교회로 가고 싶었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대적자들을 많은 에베소 교회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 방문 계획과 영접(10-12)

지도자의 외적인 자격이나 나이를 지나치게 고려하느라 그 지도자의 메시지를 제대로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느 기준으로 교회의 지도자를 대합니까? 이것은 당신의 신앙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더불어 협력하고 연대할 때,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10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11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10-12)

 

바울은 고린도가 있는 마게도니아 지역에 가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젊은 목회자 디모데를 보내게 되니, 그를 젊은 지도자라고 업신여기거나 힘들게 하지 말고 친절하게 잘 대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또한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지 못하는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 사도보다 젊은 사역자입니다. 그가 고린도에 도착하면 젊은 사역자이기 때문에 멸시를 당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해나가는데 두려움이 없이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합니다. 바울 자신을 대하듯이 디모데를 잘 섬기고 그의 가르침을 자신의 교훈처럼 여기라고 뜻을 전합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에 머물게 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고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디모데전서 4:12-13)

 

영적인 지도자가 나이나 경륜이 어리다고 쉽게 생각하면 손해를 볼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주어질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은혜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고통은 이방 교회들의 아픔입니다.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서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변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힘이나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돕는 일은 앞장서고 또 주님을 위해 일하시는 분들에게 기쁘게 협력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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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5-05)

 


부활을 통한 승리의 하나님

고린도전서 15장 50-58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가장 큰 숙제는 죽음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이겨보려고 수많은 노력해 왔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중국의 진시황제입니다. 그는 방방곳곳에서 늙지 않을 불로초를 찾았고, 북쪽 흉노족으로 보호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1500리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50세도 못 넘기고 49세 때 죽었습니다. 모든 인류는 어느 누구도 사망 권세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 부활 논의에 대한 결론으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새로운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때 사망의 권세는 완전히 정복할 것이며, 모든 것을 삼켜버리던 죽음이 부활의 승리 속으로 삼켜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소망하고 주님께 충성할 것을 권면합니다.

 

유업으로 받을 천국(50)

부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부활은 주의 재림 때 일어날 것입니다. 변화와 옷 입는 표현을 통해 썩어질 현재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고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는 어둠의 통치 세력 중 하나인 사망을 이기고 모든 것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자는 그때를 기대하고 지금 더 정성스럽게 주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50)

 

35절에서 제기한 두 가지 질문 중 부활의 과정에 대해 답합니다. ‘형제들아’라는 표현으로 독자의 반응을 유도합니다. 부활의 몸을 설명할 때 ‘어리석은 자들아’로 시작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둘 다 독자들을 비난할 의도는 아닙니다. 그들의 집중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사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 과정 설명에 대해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언급함으로 시작합니다. 살과 피로 구성된 몸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50). 앞부분에서 설명한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의 차이를 전제로 한 표현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와 그를 대적하는 반역의 나라라는 두 영역 개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50절 표현은 앞부분 설명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또 다른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입니다. ‘유업을 받다’라는 말(클레로노메오)은 언약 관계 용어로 그 관계 안에 있는 자가 상속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서 그분과의 언약 관계 결과를 누린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썩지 않음을 상속 받는다는 것도 같은 개념입니다. 결국, 성도에게 부활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관계를 누리려면 썩어짐의 과정을 경험하는 살과 피로 된 현재 몸이 아니라 불멸의 몸, 곧 영이신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할 수 있는 신령한 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변화와 새 옷을 입는 부활(51-53)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이 이뤄질 것을 믿지만 그 부활에 대해 적잖은 부분을 오해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만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도 부활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육체를 더러운 것으로 여기며 육체는 썩고 영혼만 다시 살아난다는 생각은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잘못된 개념입니다. 우리의 몸도 예수님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51-53)

 

몸의 부활에 대해 설명입니다. 죽음이 모든 성도(‘우리’)의 마지막 상태가 아니라고 합니다. 마지막 나팔에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51). 마지막 나팔은 주의 나타나심과 관련된 표현으로 그분의 재림 때를 의미합니다(15:23). 죽은 자의 부활을 다룬 데살로니가전서 4:14-17은 주의 재림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합니다. 주님이 큰 소리와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하늘에서부터 내려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주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자들이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주의 재림 때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난다고만 말하지만 고린도전서 15:51-53은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하여 부활 과정을 묘사합니다. 하나는 변화, 곧 바뀐다는 말입니다(51-52). 부활과 관련해 처음 사용한 단어입니다. 부활 과정은 죽은 자들이 이전 몸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말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도 순식간에 바뀝니다. 바울은 52절에서 이 변화 과정을 앞서 언급한 부활의 몸의 본질에 대한 것과 연결해 다시 묘사합니다. 주의 강림 때 나팔 소리와 함께 죽은 자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고, 살아 있는 ‘우리’ 몸도 순식간에 신령한 몸으로 바뀔 것입니다. 물론 이 바뀜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수동형 표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부활 과정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은 옷 입는다는 것입니다(53). 마치 옛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 새로운 몸이라는 옷을 입는 것으로 부활 과정을 묘사합니다. 약하고 영광스럽지 않고 썩어 없어질 것이 강하고 영광스럽고 썩지 않을 것으로 덧입어 새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활 과정에 대한 이 두 표현은 새롭게 된다는 것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성도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활은 ‘나’가 없어지고 또 다른 새로운 ‘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몸이 바뀌는 것이지만,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지낼 언약 관계의 상대자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과 관계할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부활 과정은 하나님께 온전히 반응할 수 있고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몸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바울의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어떤 과정으로 변화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성령(예. 롬 8:9-10; 고후 3:18)이나 예수님의 일하심(빌 3:21)으로 된다고 말하지만, 구체적 과정은 알 수 없습니다. 구체적 설명 자체가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변화의 과정을 경험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감사할 신비요 비밀입니다(5).

 

사망에 대한 승리(54-57)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로 인해 ‘이미’와 ‘아직’ 사이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인해 ‘이미’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예수님의 부활 생명으로 죄를 죽이며 거룩하게 살아갑니다. 반면 ‘아직’의 차원이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병들고 노쇠하며 죽어 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한 승리를 맛볼 것입니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4-57)

 

부활 과정과 관련해 사망에 대한 승리를 다룹니다. 바울은 썩을 것이 썩지 않는 것으로 옷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않는 것으로 옷 입을 때는 사망이 승리 안으로 삼켜진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합니다(54). 앞에서 말한 부활 과정이 온전히 실현되는 것(51-53)을 구약 이사야 25:8의 성취로 표현합니다. 두 가지 함의가 있습니다. 부활을 통한 죽음에 대한 승리는 하나님의 오래전 계획의 일부라는 것과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에 대한 구약 약속을 이루셨기에 부활을 통한 완성의 약속 또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다른 구약 본문인 호세아 13:14을 통해 사망에 대한 승리의 찬가를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으며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 그러나 이런 외침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망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와 사망과 율법과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관계성을 사망이 쏘는 것은 죄이고 죄의 능력은 율법이라고 말합니다(56).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앎과 지식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절하는 죄를 막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은 그 뜻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더 거절합니다. 이 과정에서 율법은 죄의 죄됨을 더 심각하게 보여주고, 그 죄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됨을 더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율법이 죄의 능력이란 말의 의미입니다. 그 심판과 저주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렇기에 사망이 찌르는 무기는 죄입니다. 마치 사람을 죄로 찔러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이 죄와 죽음의 카르텔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 메시아의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의 길을 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심판을 예수님에게 쏟음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길을 열었고, 부활을 통해 그 심판이 끝났음과 죽음의 통치에서 해방되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는 주의 재림 때몸이 부활하는 과정을 통해 그 해방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내용입니다(15:1-8). 그가 ‘우리 주 예수 메시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57).

 

결론적 권면(58)

부활의 소망 때문에 우리는 믿음 가운데 더 굳게설 수 있고, 복음을 전하고 알리는 데 수고하게 됩니다. 대적이나 전쟁이나 기근이나 죽음의 위협 등 우리의 믿음을 가로막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부활의 소망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서게 만듭니다. 죽어도 다시 영원히 살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귀히 여기고 더 붙들게 만듭니다.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

 

부활에 대한 설명에 근거해 독자들에게 권면합니다. 메시아의 사역으로 인해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영역으로 옮김 받은 신자는 장차 부활을 통해 참 해방의 완성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 실재를 경험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을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함은 미래에 있을 그 완성의 보증입니다. 그러니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서 항상 주의 일에 더 힘쓰라고 바울은 권합니다. 주께서 역사를 완성하시는 그 때가 있고, 신자는 부활의 몸으로 그분과 영원한 교제를 하게 될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모두 반드시 죽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뤄놓으신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죽음의 독침을 견디지 못하고 끔찍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와 죽음의 사술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결코 정죄를 받지 않게 됩니다(롬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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