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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01-01)

 


역경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린도후서 1장 1-11절


‘제 코가 석자’란 속담은 ‘자기도 어려워 주변을 돌아볼 여우가 없다.’는 뜻입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이 자기 힘든데 다른 사람을 위로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자기도 어려운데 다른 사람을 위로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극심한 고난으로 살 소망까지

 

  •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네 번째 편지입니다. 1:1-11은 시작 부분입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1-2에는 발신자와 수신자와 문안 인사가 있고, 둘째, 3-11절은 하나님을 향한 송영입니다. 메시아 예수로 인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경험한 것에 감사하고(3-5), 그 과정을 독자 상황과 연결시킵니다(6-7). 특별히 아시아에서의 환난과 구원 경험을 부연함으로써 독자들의 참여를 유도합니다(8-11).

 

서신의 서언(1-2)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모든 고난을 제거해 주시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기에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사명을 감당하는 사명자들은 더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야 한다면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2)

 

바울은 사도로서 권위와 고린도교회 설립한 사람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발생된 여러 문제들에 대해 책망과 고린도 교회에서 질문한 답변을 담은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발송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그의 처방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악화 되었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눈물의 편지’를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후에 감사하게도 그 편지를 통해 교회가 회개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어지럽히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울은 이전 문제 상화 해결에 대한 감사와 함께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부분과 거짓 사도라는 새로운 문제에 관해 편지를 씁니다. 본문은 그 편지의 시작입니다.

 

(1) 발신자와 수신자(1)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도전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다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됨과 고린도 교회를 위해 사역했던 일 그리고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는 당시의 편지 양식을 따라 발신자와 수신자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➀ 발신자(1a)

 

발신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함께 편지 보내는 사람으로 디모데를 소개합니다. 평범한 표현이지만, 독자와의 관계를 고려하면 두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예수의 사도’라는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비롯한 여러 편지에서도 언급된 것이지만, 고린도후서와 관계된 상황에서는 특별히 강조하는 듯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며 갈등이 일단락되었지만,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구심을 풀지 않았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하므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인정한 사도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이후 전개될 사도권 변호의 발판으로 삼기 위한 인사로 시작합니다.

 

둘째, 바울과 함께 이 서신의 공동 발신인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소스데네(고전 1:1) 대신 디모데를 언급합니다. 이렇게 디모데를 언급한 이유는 디모데의 상황이 특별합니다. 고린도 교회와 바울 간의 갈등과 회복의 전 과정을 경험하고 목격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기쁨으로 바뀐 디모데는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을 전하는 증인입니다.

 

➁ 수신자(1b)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입니다. 바울은 수신자들을 ‘하나님의 교회’라고 묘사합니다(고전 1:2).

이전 고린도전서의 수신자에 대해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라고 장황하게 나열했습니다. 하지만 본 고린도후서에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단백하게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서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갈등이 해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안에 거짓 사도들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도성의 정체성은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언급한 것은 이 편지에만 있습니다. 아마도 이후에 제시할 연보(9:2)와 거짓 사도들의 영향을 경고하는 내용과 관련 있는 듯합니다(11:10). 또한 그의 편지가 점진적으로 모든 교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회람(回覽)해 가면서 읽기를 원했습니다.

 

(2) 문안 인사(2)

 

바울은 당시 기독교인들의 통상적인 인사말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이라고 인사를 전합니다. 이러한 ‘은혜와 평강’의 인사는 바울의 초기 서신들로부터 후기 서신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딤전 1:2과 딤후 1:2에는 ‘긍휼’이 첨가되기도 함). 바울이 인사로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동등하게 공급됩니다. 그 ‘은혜와 평강’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은혜’는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는 총애,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구원이며, ‘평강’은 유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인사말로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는 평화와 안녕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은혜와 평강은 진정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향한 찬송(3-7)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와 평강도 주십니다. 고난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 겪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당할 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해결책을 마련해 주십니다. 따라서 문제는 환난 자체가 아니라 환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3-7)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본론을 시작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며 겪었던 일들이 고린도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비록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했지만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렸습니다.

 

(1) 메시아로 인한 고난을 위로하신 하나님을 찬양(3-5)

 

바울의 서신에서 이곳과 에베소서에만 찬양이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과정을 신령한 복으로 소개하고, 영에서 언급한 구원 과정의 각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합니다. 고린도후서도 마찬가지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이후 내용은 송영에서 언급한 구원 과정의 각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합니다. 고린도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송영 내용인 바울의 환난과 주의 위로가 이후 내용에서 계속 언급되기 때문입니다(2:14-17; 4:1-5:10; 7:4-16; 거짓 사도와 관련한 10-13장). 송영을 이후 전하려는 내용의 밑그림으로 제공하는 전략적 구성입니다. 송영의 구조 역시 의도적입니다. 환난과 위로의 과정을 하나님 – 바울(‘우리’) - 독자(‘너희’)로 두 번 연결합니다. 첫 연결은 3-7절이고, 두 번째 연결은 8-11절입니다. 3-5절은 하나님과 바울의 연결입니다.

 

송영은 하나님의 속성 묘사로 시작합니다(3). 그분은 우리 주 예수 메시아의 아버지이고 위로와 자비의 아버지이자 하나님입니다.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예수와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아버지, 곧 예수를 통해 구원 과정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둘째, 새 언약 관계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 신자들과 새 언약 관계를 맺은 분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이자 아버지입니다. 또한 새 언약 관계 안에서 신실함과 사랑의 의무를 행하시는 의로운 분입니다. 그 사랑의 의무는 위로와 자비로 표현됩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4-5절에서 바울(‘우리’)의 실제 삶과 연결됩니다. 먼저 위로와 관련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4). 그분은 ‘우리’의 모든 환난에서 위로하신 분입니다. 그 위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통해 환난 받는 또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새 언약과 관련한 바울 사역의 핵심 형태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과의 관계안으로 들어간 언약 백성에게는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통로, 곧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제사장 역할입니다(출 19:5-6; 벧전 2:9).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른 이에게 흘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중에 자신과 관련한 이 의무를 새 언약 사역(3:6)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5:18)으로 표현합니다. 한편, 예수와의 연결은 바울이 당하는 환난과 위로가 어떤 의미인지를 서술하는 5절에 있습니다. 바울의 고난은 메시아의 고난, 즉 그분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고난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위로는 메시아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것입니다(4:11). 제사장 역할을 하는 새 언약 백성의 특권입니다. 이런 면에서 송영은 바울의 사도권과 사역 변호와 관련 있는 듯합니다.

 

(2) 환난과 위로를 통해 바울과 독자를 연결(6-7)

 

바울은 자신이 환난과 위로를 경험한 것은 독자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라고 한다. 얼핏 보기에 그 연결이 생뚱맞다. 독자 때문에 환난 받은 것도 아니고, 바울의 위로 자체가 독자들에게 구원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표현을 이해하는 열쇠는 앞서 언급한 새 언약 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예수와 바울의 사역이다. 바울의 고난은 단순한 삶의 어려움이 아니라 복음 사역과 관련 있다. 이런 고난은 교회도 겪을 수 있다. 특별히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과 벗하는 삶을 거절하고 복음의 통로로 살기로 결정했기에 가능성이 더욱 높다. 이 과정에서 교회도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예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고, 그 경험은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를 더 굳건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소망이다(7절). 바울의 경험은 교회를 향한 모범이다.

 

환난을 주시는 목적(8-10)

‘고난을 당할 때 기뻐하라’라는 명령은 고난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열매를 바라보며 기뻐하라는 것입니다(롬 5:3-4). 고난에는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고난을 당한 이웃에게 가장 큰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그와 유사한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믿음으로 잘 이겨 냄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8-10)

 

8-10절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과 하나님의 구원 ‘형제들아…모르기를 원치 않는다' 표현으로 바울의 상황을 독자와 공유한다(8절). 4절을 부연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다. 아주 심해서 사형선고를 받은 듯 바울 스스로도 살 소망을 접을 정도였다. 상황 자체가 초점이 아니기에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바울의 의도는 두 가지다.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소개하고, 그 상황을 독자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얻은 교훈을 언급합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것입니다(9b-10). 이전에도 복음을 전하면서 어려움을 당했고(11:23; 참조. 고전 4:9-13),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상황은 상당히 심각합니다. 죽음에 가까운 경험과 주의 도우심은 마치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듯한 경험으로 인식되었고, 믿음과 진리의 관점을 더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된 듯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삶뿐 아니라 사역의 모든 초점이 주께 있음을 재확인하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언급은 이후 내용을 위한 복선 설정으로 보입니다. 자기사역에 부정적인 일부 교인들과 특별히 인간적 자랑거리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 문제에 대해 바울이 사도권을 변호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인간적 조건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과 그분의 도우심만을 구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사역한 자가 참 사도임을 보여주고픈 것입니다.

 

기도 부탁(11)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상대방과 같은 처지에 놓여 보지 않는 한,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자신이 당한 고난을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연장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도우실 것을 확신합니까?

 

11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11)

 

독자들에게 기도로 도울 것을 요청하며 자신의 환난 경험을 독자와 연결합니다. 성도의 중보기도는 사역자가 흔히 요청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요청에는 두 가지 의도가 담긴 듯합니다. 첫째, 독자들의 유익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많이 경험해서 그로 인한 감사가 많아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독자의 신앙이 더 견고해지는 방법이다. 둘째, 바울과의 관계입니다. 기도로 바울 사역에 동참하라는 말입니다. 거짓 사도들과 관련한 문제 상황에서 참 사도인 바울의 사역에 함께하라는 권면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3-11절은 복음 증거 과정에서 경험한 환난과 주의 위로를 바탕으로 두 가지를 전달합니다. 1) 하나님/예수를 중심으로 한 새 언약 사역자로서 바울의 사역 변호, 2) 독자와의 연결입니다. 누가 참 사도인지를 분별하고 진리 편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아픔이 없으니 창조도 없다’는 말이 이렇게 풀어봅니다. 고난이 있으니 위로도 있습니다. ‘무통분만의 시대’는 참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통증이 있어야 통감도 가능하기에, 성도에게 고난은 필연입니다. 하지만 그 고난은 ‘위로의 샘’입니다. 그 샘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공동체를 새롭게 만나고, 믿음을 새롭게 만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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