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04-01)
그리스도의 진실한 추천서
고린도후서 4장 1-18절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반응으로 ‘자기 연민’이나 ‘패배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스스로 자신은 불쌍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인생은 실패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에게는 실패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 앞부분과 연결해 바울의 사역 변호가 계속됩니다. 영광스러운 새 언약 시역이지만, 항상 긍정적 모습만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6절에서 새 언약 복음을 방해는 세력과 이에 반하는 바울의 사역 내용과 확신이 설명됩니다. 둘째, 7-15절은 사역에 수반된 고난과 그것을 견디는 목적을 언급하고 그 경험으로 독자와 연결합니다. 셋째, 16-18절은 고난을 견디게 하는 미래 소망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의 사역 변호와 복음의 방해 세력(1-6)
생명을 살리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은 사람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답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망치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그분의 뜻입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1-6)
바울의 사역 변호가 이어집니다. 새 언약 사역의 영광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역 과정에서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새 언약의 직분에는 영광과 함께 고난도 따릅니다. 바울은 갖은 반대에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반은 긍휼이 크고, 맡은 사명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의 사역 변호와 복음의 방해 세력(1-4)
‘낙심’(1,16)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낯설지 않습니다. 이미 1:3-11과 2:14-16에서 비슷한 상황을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부터는 그런 상황에 굴하지 않는 확신과 당당함을 소개합니다.
핵심 이유는 영광스러운 새 언약 사역을 맡았기 때문입니다(1a). 쉽지 않다고 낙심하고 내려놓기에는 그 사역이 너무 귀합니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진리를 드러내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1b-2). 숨은 부끄러움을 버리는 것입니다. 교묘함과 약빠름으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것과 섞어 전하지 않고, 사람의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드러냄으로 자신을 추천하는 것에 더 힘쓴다고 합니다. 자신을 추천한다는 말은 거짓 사도들을 배경으로 한 표현입니다. 그들과 달리 어려울수록 인간적 방법으로 호감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정공법으로 진리를 더 진리대로 바르게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역 과정의 어려움 중 하나는 복음을 전해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3-4).
바울은 이 상황을 복음이 가려진 것으로 묘사합니다. 몇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 편에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가 전하는 것은 복음의 광채, 곧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영광스런 예수 메시아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문제는 어둠의 영역에 속한 자들과 그 영역의 통치 세력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각각 망하는 자들과 이 세상의 신이라고 묘사합니다. 둘 중 누가 더 문제일까를 묻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망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을 거절하고 믿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의 핵심으로 말합니다(롬 1:28). 사탄은 그 믿지 않는 마음을 더 혼미케 합니다. 에베소서 2:1-3은 이 둘의 관계를 말합니다.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은 어둠의 영역 속에 있는 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따라 하나님을 거절하고 사탄을 따르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런 면에서 세상 어둠의 영역에서 복음의 진리가 막히고 가려지고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으로 회개한다는 것이 더 신기합니다.
(2) 바울의 사역 내용과 확신(5-6)
3-4절 상황과 연결해 바울의 사역 내용을 소개합니다. 복음이 막힌 것이 자신의 무능함이나 전파 내용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님을 부연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증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기를 높여 섬김 받거나 세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 메시아가 주님인 것과 바울이 독자들의 종이 된 것만을 증거합니다. 바울의 주인이 둘인 셈입니다. 하나는 독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더 높은 주인 예수입니다. 예수가 주인 것은 이해되지만, 두 번째 표현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독자들을 예수와 동급으로 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신 예수의 섬김을 따라 그들을 섬김다는 말입니다(참조. 요 13:14-15). 예수님을 주로 모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라면, 예수를 따라 그분 백성을 섬기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독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일하면서 사역한 것이나, 그들을 배려함으로 방문 계획을 수정한 것도 섬김의 표현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의 증거는 말뿐 아니라 주를 따르는 삶도 같이 있습니다. 그가 그런 증거의 삶은 산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때문입니다(6). 마치 어둠 속에서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시듯(창 1:3), 어둠의 영역에 있던 바울에게 예수 메시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비추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버지-자녀’의 친밀한 관계, 곧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가 바른 증거와 삶을 살게 하는 이유이자 동력입니다.
바울의 고난 사역과 성도들(7-15)
세상에는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탄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과의 싸움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마음을 혼미하게 하고 눈을 가려 영적 장님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사람들의 영적 눈을 여시고 하나님이 비추시는 영광의 빛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복음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7-15)
바울은 영광스러운 직분자임에도 언제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종 된 태도를 견지합니다. 전해져야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실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상전이 아닌 종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바울의 고난과 하나님의 위로(7-11)
3-4절과 연결해 새 언약 사역 과정에서 경험하는 또 다른 고난 상황들과 그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 소개됩니다. 앞 경우는 복음 전파가 막히고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라면, 이 경우는 바울 자신에게 직접 가해지는 상황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질그릇 속에 보배를 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연약한 육체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은 메시아 예수님의 복음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육체가 연약하기에 스스로 보호할 힘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뿐입니다(7). 그렇기에 사방으로 욱여쌈과 답답한 일과 박해와 거꾸러뜨림을 당하지만, 완전히 절망하거나 사역을 포기하지 않습니다(8-9). 오히려 그 고난을 예수를 위해 그분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으로 여깁니다(10-11). 그분을 따르고 증거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지만, 예수의 죽음이 생명으로 연결되었기에 바울 역시 그 생명의 능력을 기대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생명은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그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과정이었습니다. 둘째, 예수의 실제 부활입니다.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 사역이 완성되었고, 그것을 통해 믿는 자가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역시 자신의 고난이 또 다른 이에게 예수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는 새 생명의 완성이 있기에 지금의 고난이 끝이 아님을 믿었습니다. 죽음과 생명의 이런 역설적 모습을 사역에 담고 있는 자가 참 사도입니다. 인간적 성공의 모습만을 강조한 거짓 사도와 대조됩니다.
(2) 바울의 상황과 독자와의 연결(12-15)
‘우리’와 ‘너희’ 표현을 통해 바울의 고난 사역을 독자와 연결시킵니다. 사망이 ‘우리’안에 일하고 생명이 ‘너희’ 안에 일한다고 합니다 (12). 예수님의 죽음을 깊어지는 고난 사역을 통해 그의 생명이 건달되는 실재가 독자와의 관계성에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독자들은 바울의 그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환난과 독자의 구원을 연결시킨 1:6과 같은 개념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바울의 고난 사역을 독자와 연결시킨 것은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첫째,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입니다. 장차부활의 날에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이 바울과 독자 모두를 예수의 부활과 연합해 다시 살리시고 그분 앞에 서게 하실 것입니다(14). 바울은 독자들에게 이 소망을 증거했고 언젠가 그 증거대로 부활의 실제를 경험하게 될 것을 믿었기에 자신의 고난 사역을 독자와 공유한다고 말한 것입니다(13). 둘째, 독자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바울의 고난이 독자의 유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환난과 주의 위로를 배경으로 독자들에게 기도로 바울 사역에 동참하라고 말한 1:11 내용과의 유사성을 고려하면 좋겠습니다. 즉, 바울의 고난 사역에 기도 등으로 함께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사역의 긍정적 결과로 감사할 것이 많아지고,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고난은 인간적으로 실패한 듯 보여서 거짓 사도들의 자랑에 비해 별 볼일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사역 같은 것이 바로 독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디게 하는 미래 소망(16-18)
성도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초대교회 선배들은 목숨까지도 포기했습니다. 성도라는 이름보다 귀한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명함(名銜)에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 속사람 보다는 겉사람으로 여전히 행사한다면, 그는 성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날이 갈수록 속 사람이 새로워진다면 그가 참 성도입니다. 그의 영적인 실존이 나날이 강해진다는 증표이기 때문입니다.
16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6-18)
바울은 고난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더 집중하게 하고, 그 사역이 예수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부활의 소망입니다. 질그릇 같은 겉 사람, 곧 사람의 육체는 사라질 것이지만, 주님을 믿는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바울은 보이는 것에만 주목하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영광의 미래를 믿음으로 보고 산다고 합니다.
바울의 행적과 열망을 보시기 바랍니다. 온통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만 전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종임을 한 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예수만 드러난다면 어떤 고난도 감수했습니다. 성도들도 그 예수를 알기를, 닮기를 바랐습니다.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광체를 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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