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고린도후서(05-01)

 

 


영생과 최후 심판을 준비하는 삶

고린도후서 5장 1-10절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다. 바람, 하중, 진종,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것보다 세게 내력을 설계하는 거다.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인생도 신앙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에게 그 내력은 무엇이겠습니까?

 

  • 앞에 4:16-18과 연결해 현재와 미래 소망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 설명과 맥을 같이합니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5절은 현재 몸과 부활의 몸의 대조를 기반으로 현재의 탄식 상황 속에서 미래 부활을 간절히 기대한다고 합니다. 6-10절은 부활에 근거한 현재 소망과 그 소망을 품은 삶의 모습을 언급합니다. 사역 차원뿐 아니라, 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개인적 소망과 그에 근거한 삶의 실제를 소개합니다.

 

현재의 탄식과 미래 부활에 대한 소망(1-5)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창조의 원형인 하늘나라의 모형입니다.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호화 주택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1-5)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다가 육체가 무너지면 하늘에 영원한 육체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육신의 옷을 벗어버리면 영원히 썩지 않을 하늘나라에 육신의 옷을 입게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난을 겪으면서 낙심하지 않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살 수 있는 이유는 부활의 소망 때문입니다.

 

(1) 현재 몸과 부활의 몸의 대조(1)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6-18절과 연결해서, 계속해서 부활 소망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이어갑니다. 새 언약 사역 과정의 고난에 대한 태도를 설명하는 문맥, 그리고 바울과 동역자를 의미하는 ‘우리’를 사용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생명과 관련한 두 차원 중 예수님과 연합해 미래 부활을 경험하는 것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고난에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부활의 소망 때문입니다. 그는 현재의 육체와 미래의 부활의 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시간적 지속성과 가치 경중에 집중한 16-18절에 비해 이 설명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몸을 집으로 묘사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도 없는 표현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서처럼 부활 이후에도 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재와 미래의 몸은 다릅니다. 현재의 몸이 임시로 거주하고 무너질 운명을 갖고 있는 장막이라면, 미래의 몸은 영원한 건물 집입니다. 지속성과 안정성이 다릅니다.

둘째, 바울은 땅과 하늘의 대조합니다. 현재 몸을 땅의 것으로 말하고 부활의 몸은 하늘의 것으로 표현합니다. 소속과 정체성을 담은 표현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땅에 속한 자였기에 후손들도 땅에 속합니다. 하지만 둘째 아담 메시아가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그에게 속한 자들은 하늘의 생명과 몸을 유업으로 받을 것입니다(고전 15:47-50).

셋째, ‘손으로 짓지 않은’이란 표현입니다. 몸의 기원에 대한 것입니다. 이 표현과 반대되는 ‘손으로 지은’이란 것은 일반적으로 신적 기원이 아닌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상과 관련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육신의 부모에게 받은 몸과 하나님께 직접 받는 몸의 차이를 의미합니다. 부활의 몸은 주님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2) 현재의 탄식 상황과 미래 부활에 대한 소망(2-4)

 

계속해서 바울은 1절의 내용을 부연합니다. ‘탄식하다’를 주동사로 한 주절과 그에 딸린 종속절 구조가 두 번(2-3과 4)반복됩니다. 주절 내용은 육체의 장막에 있는 현재 상태를 전제로 탄식한다는 것이고, 종속절은 미래 부활 상황에 대한 것입니다. 앞부분처럼 사람이 거하는 처소로 현재와 미래 몸을 묘사하고 있고 하늘과 땅의 대조를 갖고 있지만, 미래를 소망하는 현재 상태에 더 집중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의 설명은 공간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반역의 나라의 충돌과 시간적으로 ‘이미’와 ‘아직’의 갈등을 배경으로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통해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반역의 통치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 옮겨와 새 언약 관계 안에 거합니다. 하지만 반역의 통치가 아직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연결이 시작되었지만, 지금 여기서 그 완전함을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 과정에서 성도는 무거운 짐 진 것같이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의 요소가 있지만, 여전히 망가진 세상에서 질그릇 같이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4:1,7).

바울과 동역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박해와 답답한 일과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그렇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미래의 온전함을 더 소망합니다. 그 소망은 단순히 육체의 몸을 벗어 버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마치 죽을 육체가 생명에 의해 삼켜지듯 혹은 육의 몸이 신령한 몸을 덧입듯 주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할 것입니다(고후 3:18; 빌 3:21). 예수님의 재림 때 경험할 것이며, 고린도전서 15:53-54에서 독자들에게 가르쳤던 내용입니다.

 

(3) 부활과 관련한 하나님과 성령의 역할(5)

 

미래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신자의 부활을 포함한 구원의 모든 과정을 계획하고 실행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메시아를 다시 살려 새 언약 약속을 이루셨고(4:14), 성도들에게 정체성과 미래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십니다(1:21-22; 엡 1:14). 성령은 예수 부활의 능력이며 새 언약의 영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신자들을 동일한 능력으로 부활하게 하실 분입니다(3:18; 롬 8:11). 마치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은 사람에게 생기를 부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신 것처럼(창 2:7), 성령을 통해 부활의 몸을 온전히 덧입는 새 창조의 완성을 이루실 것입니다. 지금은 온전함을 경험할 수 없지만, 신자는 그 과정을 이루실 하나님과 새 언약 관계 안에 있고, 그 완전함의 보증인 성령을 경험하고 있는 자입니다. 바울도 그중 하나입니다.

 

부활에 근거한 현재 소망과 그에 근거한 삶(6-10)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서 오는 차이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땅이 삶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은 영원의 관점 안에서 이 땅의 삶을 설계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과 눈에 보이는 일에 목숨을 거는 삶은 차원이 다릅니다.

 

6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6-10)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몸으로 있는지 아니면 죽어서 부활의 몸을 입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바울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께 부끄럽지 않고 기쁘게 영접 받을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1) 부활에 근거한 바울의 소망(6-8)

 

지금까지의 설명을 근거로 오늘을 살아가는 바울의 두 가지(6-8, 9-10절) 태도를 언급합니다. 첫째, 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소망으로 산다고 합니다. 미래 소망을 주목하고(4:18), 육신의 몸을 벗고 영원하고 신령한 몸 덧입기를 사모한다(2)는 이전 설명의 연장입니다. 그 내용은 ‘담대하다’(타레오) 동사와 함께 지식과 사고의 동사를 통해 두 번 표현됩니다.

6-7절에서는 ‘항상 담대하다’고 말합니다. 부활의 소망 때문에 탄식과 어려움에도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다는 말입니다. ‘안다’ 동사의 분사형(에이도테스)으로 현재 상태에 대한 지식을 소개합니다. 현재 몸, 곧 장막 집에 거할 때는 주님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육신의 몸으로는 주님을 볼 수 없고 친밀한 교제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지식을 언급한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신자 삶의 한 특징입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기대하고 담대하게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 미래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예수를 통해 하신 일 때문입니다. 그 과거 사건을 믿음으로 구원의 현재 실제에 참여하고, 하나님이 미래에 하실 일을 믿음으로 소망하고 오늘을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담대하다’를 주동사로 사용하고 이어 ‘유도케오’ 단어를 써서 더 좋은 것을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선택 내용은 육신의 몸을 떠나 주와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으로 주님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고 싶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몸으로 세상을 사는 것보다 그분과의 영원한 교제가 더 중요하다고 가치판단을 한 것입니다. 이 선택은 또한 바울이 부활을 기대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그것을 통해 '아버지-자녀 관계‘ 또는 ’사랑을 주고받는 이로서의 관계(새 언약)‘를 온전히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연결이 구원의 본질임을 알기에 새 언약의 바울은 오늘을 담대하게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부활 소망에 근거한 바울의 현재 삶과 그 근거(9-10)

 

둘째, 부활 소망 때문에 바울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씁니다. 바울의 이런 삶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육신의 몸으로 주님과 떠나 있든지 아니면 죽어 부활의 몸으로 그분과 함께 있든지 바울의 유일한 초점은 자신을 사랑하신 그분을 사랑하며 사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랑의 표현 방법으로 지금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에게 맡겨진 새 언약 사역을 정성스럽게 수행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 주님의 마지막 심판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행위대로 평가하시는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기에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힘쓴다고 합니다. 선한 행위로 최후 구원을 얻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 과정에 참여했다고 해서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때 있을 칭찬과 인정을 기대하며 그분과의 관계를 조심히, 귀히 여기며 살겠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경험하고 미래를 소망하며 오늘을 담대히 사는 것, 그것이 바울 사도의 삶의 원리입니다.


육신을 벗고 싶을 만큼 삶이 고단합니까? 사명이 힘겹습니까? 부활의 약속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합니다. 잠깐 자신을 만족시켜주는 것을 위해 영원한 가치를 버리지 않고 주님을 만나기에 합당한 영혼으로 준비하며 살아온 당신의 삶을 주님을 다 아십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