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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4-01)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시편 24편 1-10절


한 공동체가 같은 마음과 정신을 공유함에 있어 노래한 요소도 없을 것입니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화답하며 나지막한 산을 오르는 백성들을 그려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들의 정서를 완벽히 공감하기는 어렵지만, 감격과 기쁨만은 공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시편 24편은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 찬양과 경배에 초점을 둔 시입니다. 물의 혼돈을 정복하시고 땅과 세계질서를 수립하신창조주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을 찬미합니다. 이와 함께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합당한 자격을 묻는 질문과 응답 형식의 노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 찬양(1-2)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신 주인이십니다. 이 땅에 존재한 모든 것은 창조하신 분이 계시고, 그분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에 있는 것들을 호명하시고 다스리시며 하나님께서 주신 분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앙은 창조주요, 주권자로, 영광의 왕으로 그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1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1-2)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찬양하며 시를 시작합니다. 시의 첫 시행부터 장엄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여호와의 것이며, 세계와 거기에 거주하는 것들이 여호와께 속했습니다(1). ‘땅’과 ‘세계’가 평행관계 안에서 안전한 거주지로서의 세상, 온갖 생물들이 활기 있게 살아가는 지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때 시인은 땅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피조물들의 주인이 여호와라고 노래합니다. 땅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동식물과 사람의 조화는 질서 잡힌 세계의 그림입니다. 땅을 경작하고 돌보는 사람과 땅에 충만한 동식물들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로서 여호와의 통치권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땅과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구체적으로 소명합니다.

2절은 이유 접속사(키)로 시작합니다. 그가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고, 강들 위에 세우셨기 때문입니다(2). 여호와를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묘사하여 주권을 강조합니다. ‘바다’와 ‘강’은 구약에서 주로 한 쌍으로 언급됩니다. ‘바다’는 ‘땅’과 구별되는 모든 물을 지칭합니다(창 1:10). 일반적으로 구약에 묘사된 바다와 강은 고대근동 세계의 우주론적인 또는 신화적인 배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태초의 세상이 무질서와 혼돈의 상징인 강과 바다로 뒤덮여 있다고 믿었습니다.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혼돈의 세력을 누르시고 땅과 세계를 견고하게 세우신 분입니다(참조, 시 104:5; 욥 38:4-10). 이러한 의미에서 태곳적 홍수는 온갖 동식물과 사람 사는 땅 아래 큰 깊음의 샘들까지 분출한 사건처럼(창 7:11) 혼돈으로의 회귀이며 하나님이 창조 자체를 철회시킨 심판입니다.

 

예배에 합당한 자(3-6)

성도 모든 사람들이 예배하지만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주님의 복과 의를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얻지 못한 이유는 삶이 없이 예배만 드린다면 말입니다. 손이 깨끗한 것과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아름다운 이웃 관계 후에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실 것입니다.

 

3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3-6)

 

본문에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문지기들에게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고 묻습니다. 성전 문지기들은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라고 대답합니다.

 

(1) 질문: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인가?(3)

 

3절에서 주제와 공간의 변화가 있습니다. 시인은 우주적인 창조 사건을 본 것처럼 상상력을 발휘하여 묘사한 후(1-2), 질문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인가?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 누구인가?’

여호와의 산, 그의 거룩한 산은 어디입니까? 시편 맥락에서 ‘오르다’라는 말은 예배하려고 성소를 향해 행진하는 것을 일컫는 전문 용어입니다(시 47:5; 참조. 사 2:3; 38:22; 삼상 1:3,22; 삼하 6:12). 따라서 여호와의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언덕으로, 시온 산입니다(시 2:6). 문맥을 고려하면 여호와가 혼돈의 물을 장악하시고 질서를 세우시고 왕권을 수립하신 산입니다. 시인은 우주적 질서를 수립하신 여호와를 찬미하고서 예배의 상황, 곧 언약과 관련된 ‘거룩한 곳’으로 관점을 이동시켰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산은 예언서에서 말하는 마지막 날에 모든 민족들이 찾아올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사 2:3; 미 4:2).

 

(2) 응답: 손과 마음이 깨끗한 자(4-5)

 

거룩한 곳 시온 산에서 경배 받으실 여호와께 누가 올 수 있습니까? 시인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자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4). ‘손’은 외적인 신체 기관입니다. 이것을 통해 인간의 행위 문제와 마음에서 발현되는 내면의 순결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람의 겉과 속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깨끗하여 윤리 도덕적으로 책임감 있는 삶을 예배자의 자격으로 제시한 셈입니다.

또한 허무하고, 가치 없고, 텅 빈 것에 자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4b). ‘뜻’으로 번역된 ‘네페쉬’는 욕망과 마음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깨끗한 자는 ‘속임’, ‘거짓’, ‘우상’으로 자기의 뜻을 치환하지 않습니다. ‘허탄한 데’ 마음이 향하도록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한 거짓 맹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4b). 행동으로 옮길 의지도 없으면서 허위로 맹세하는 일이 없어야 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윤리 도덕적인 삶과 우상을 따르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의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게 됩니다(5).

예배자의 손과 마음의 청결은(4) 결국 복과 의로 결실 맺습니다. ‘복’(베라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했던 복입니다. 독특하게 복과 의(체다카)가 시적 평행관계 안에서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 복과 의가 평행관계로 묶여 동의적 의미로 쓰인 곳은 오직 이곳뿐입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신 것을 서로 연결시키는 인상을 남깁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의롭습니다. 인정받는 사람이 예배자로서 하나님 임재 앞에 설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와 의로운 삶, 그리고 복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3) 확언: 여호와를 찾고 그 얼굴을 구하는 자(6)

 

시인은 예배에 합당한 자들의 성격을 최종적으로 확언합니다. ‘이와 같은 자가 여호와를 찾는 족속(세대)이며, 야곱의 하나님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와 ‘하나님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평행하면서 서로의 의미를 보충합니다.

‘찾다’(다라쉬)는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조언을 구하고, 탐구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며(시 69:32; 암 5:6),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함입니다(창 25:22; 삼상 9:9). 현재 시행에서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평행하는 소절처럼(6b),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곧 하나님의 임재와 도움을 구하기 위함입니다(시 77:2). ‘구하다’(바카슈)라는 말도 기대하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애쓰며 찾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따라서 시인의 ‘찾고 구하는’ 행위는 언약의 하나님, 곧 야곱의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태도의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시인이 말하는 예배에 합당한 자는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자입니다.

 

만군의 주이며 영광의 왕 찬양(7-10)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용사이십니다. 세상은 배은망덕하게도 자신을 만든 하나님께 저항하고 반역을 꾀합니다. 그로 인해 혼돈과 파괴가 들끓습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제압하시고 통치를 회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승전하시고 성전의 문으로 들어가시자 문들이 소리치며 환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7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7-10)

 

시인은 주제를 바꿔 여호와의 군사적인 능력을 찬양합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역사적 정황이 시행 자체에서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아 재구성하기 어렵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을 때인지(삼하 6장), 전쟁이 끝나고 승리한 후 법궤가 성전으로 들어오는 장면인지, 예배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들의 극적인 표현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우주적 왕권을 고백하며 찬양한 처음 두 절(1-2)에 상응하는 만군의 주 하나님을 향한 영광송이라는 것입니다.

7-10절의 시행이 질문과 응답을 반복하는 형식미를 갖추었습니다(ABAB). 그 형식은 예술적이고 내용은 장엄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 올려라/영원한 문들아, 들어 올려라/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7,9). 이 시행이 두 번 반복되는 데, ‘문들’은 어떤 문입니까? 보통 성문을 떠올리게 되는데, 흥미롭게 성문이 인격화하여 명령을 받습니다. 이 때문에 ‘문들’은 성전의 문지기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평행하는 ‘영원한 문들’은 무엇입니까? ‘영원’을 뜻하는 ‘올람’은 태고성과 미래성 모두를 포함하는 미지의 시공간적 개념입니다. 옛적 ‘태고의 문들’로 해석될 수도 있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내세의 문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영원은 현재를 사는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영광의 왕이 영원한 문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8a,10a)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강하고 전쟁에 능한 전사로서의 여호와의 영광을(8bc; 참조. 출 15:3) 강조하기 위한 수사학적인 질문입니다. 시인은 군대를 통솔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그가 영광의 왕이심을(10bc) 칭송하고 높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만군의 주인이며 통치자로서, 태곳적 창조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천상천하의 군대를 거느리는 영광의 왕입니다. 이는 우주론적인 창조 신앙과 언약백성의 역사적 구원 경험을 결합시켜 장엄한 하나님 왕권을 찬미한 것입니다.


온 세상의 혼돈을 정복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예배 안에서도, 예배 밖에서도 왕이고 주인이십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는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닫아둔 문을 열어 그분의 통치가 적용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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