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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6-01)

 


나를 실피시고 시험하소서

시편 26편 1-12절


거친 텃밭에서도 보들보들한 새잎이 나듯, 연일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새잎을 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인의 불안을 넘어 사회적 불안이 우리를 자극하고 공격할 때, 어떻게 담당하게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상자가 있습니다.

 

  • 이 시는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온전함과 진리 중에 행한 것과 주님 의지하는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시인 자신은 모함하는 행악자들과 같지 않고, 하나님께서 계신 집을 사랑하는 자로서 무죄함과 결백을 호소합니다. 무엇보다 시인은 악인들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을 염려하며 구속의 은총을 구하면서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결백을 호소하는 기도(1-3)

 

하나님께서는 재판관이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호소할 사람도 호소할 길도 없다면,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밝혀줄 것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공평하게 재판하시고 또한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샅샅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공평하게 재판하실 하나님께 간청하면 선하고 의로운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1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3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1-3)

 

시인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그분이 자기 사정을 공정하게 처리해주실 것을 믿고 호소합니다. 시인의 첫마디가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la)라고 의미심장하게 시작합니다. ‘판단하다’(샤파트)라는 말은 재판관으로서 판결을 내려달라는 뜻입니다. 왜 여호와의 판단이 필요한지 이유를 밝힙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신의 온전함을 따라 걸었기 때문입니다(1b). 이는 진실한 마음과 온전한 행실로 살아왔음을 천명하는 호소입니다(참조, 시 101:2; 잠 2:7; 10:9; 19:1; 20:7; 28:6). 또한 시인이 흔들리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1c).

 

시인의 거침없는 호소는 계속됩니다. ‘여호와여 나를 조사해보시고, 내 뜻과 내 양심을 감찰하소서’(2). ‘내 뜻’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몸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콩팥’(킬야)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콩팥은 사람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양심’은 ‘심장’ 또는 ‘마음’을 뜻하는 ‘레브’입니다. 심장은 고대인들에게 한 사람의 의사 결정 기관이며, 지혜와 의지의 자리입니다. 시인은 남이 들추지 못할 내면 깊숙한 곳과 양심까지 샅샅이 조사해달라고 말할 만큼 깨끗합니다. 시인은 마음의 법정인 양심과 가장 깊은 내면의 깨끗함을 호소합니다. 시인의 뜻과 양심을 포함한 전부를 뜨거운 용광로에 넣어서 불순물이 나오는지 살펴보시길 원합니다.

 

이처럼 시인의 요청은 뒤로 물러섬 없이 당당하고 자신만만합니다. 시인의 절박함에 당당함이 끼어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시인의 주장과 담대한 태도는 자칫 교만하거나 적절하지 않은 태도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이유를 밝힙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인자하심이 내 앞에 있고, 나는 당신의 진리를 따라 걸었기 때문입니다’(3). ‘인자하심’은 언약적인 사랑이며 실패하지 않는 사랑, ‘헤세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인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강렬했으니 여호와의 ‘진리’, 곧 진실함과 신실하심을 따라 걷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인의 온전한 삶의 실천은 여호와의 엄한 명령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당신의 진리(진실하심) 안에서’ 자신의 투철한 의지로 살아왔노라고 고백할 뿐입니다. 이것이 곧 구원의 절박함 속에서도 당당한 이유입니다.

 

악인들과 다름을 호소(4-5)

악한 무리와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윤리와 도덕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무리들과 단절하면 많은 이익관계까지도 단절되는 위험을 수반합니다. 설사 그럴지라도 기꺼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하면 그들의 운명에 휩쓸리기 때문입니다.

 

4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5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4-5)

 

하나님께 헌신된 시인의 온전하고 무죄한 삶은 악인들과의 관계나 그들에 대한 시인의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진리에 부합하게 살았음을 호소했습니다(3). 그런 그가 ‘허망한 사람’, ‘간사한 자’와 동행할 리 없습니다(4). 시인은 헛것을 따르는 자들, 곧 우상숭배자들과 함께 앉지 않을 것입니다(4a). 따라서 마음속에 음흉하게 무언가를 숨기거나 사건을 덮어 은폐하는 ‘간사한 자’, 곧 ‘감추는 자들’과 동행하지 않을 것이라고(4b) 다짐합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부류는 ‘내 뜻’과 ‘내 양심’을 샅샅이 조사해주시기를 구했던(2) 시인과 정반대의 사람들입니다. 평행관계가 보여주듯 시인은 헛것을 추구하거나 숭배하는 자들과 비밀스럽게 뭔가를 감추는 자들을 동급으로 여깁니다. 그들과 교제하며 친분을 나누는 일이 없을 것이라 다짐합니다. 또한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반역하는 악한 자들과 함께 앉지 않을 것입니다(5). 선행을 위한 ‘집회’(카할)가 아니라 행악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패거리 문화나 대중 집회를 시인은 ‘미워했고’, 악한 자들과는 동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백 호소와 여호와를 향한 사랑 고백(6-8)

성도들은 거룩한 성도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에서는 손에 뇌물이나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고, 불평 대신 감사의 노래를 높이 부르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적을 더불어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악한 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삶을 꾸려나가는 것과 정확하게 대조되는 삶을 노래합니다.

 

6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7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8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6-8)

 

시인은 다시 여호와를 부르며 결백을 호소합니다. ‘내가 무죄하여 내 손을 씻고, 여호와여 당신의 제단에 두루 다닙니다’(6). 깨끗한 손은 깨끗한 마음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손을 씻는 행동은 다양한 정황에서 발견되지만, 무죄와 정결의 필요성을 상징합니다. 예배자의 선행 조건으로서 깨끗한 손(시 24:4)은 성전 입장을 위한 정규적인 의식이기도 했습니다(시 73:13). 또한 제단은 하나님과의 친교와 임재를 알려주는 식탁을 상징합니다. 시인은 그 주변을 돌면서 ‘감사의 소리를 듣게 하고, 당신의 기이한 모든 일들을 말할 것입니다’(7)라고 다짐합니다. 여호와를 향한 시인의 사랑 고백이 독특합니다. ‘여호와여, 나는 당신이 거주하시는 집을 사랑하고 당신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했습니다’(8), 시인은 마치 회상하듯이 완료형 동사로 말합니다. ‘당신이 거주하시는 집’과 ‘당신의 영광이 머무는 곳’은 지성소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를 ‘내가 사랑했다’(아하브티)는 말은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했다(5)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물론 시인이 사랑하는 것은 건물 자체의 영광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 처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과 그 영광을 사랑합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드물지만(31:23; 97:10; 116:1; 145:20),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이름(5:11; 69:36), 여호와의 법과 구원을 사랑합니다(119:47, 48, 97, 113, 119, 127, 159, 163)는 표현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악인들과 구별되기를 간구(9-10)

성도들은 악한 사람들과 함께하면 그들의 운명에 따라서 자신도 휩쓸려 갑니다. 그들은 우상숭배하고 뇌물로 사람의 마음을 훔치고 심지어 살인까지 일삼는 자들과 함께 부당한 이권에 기웃거리지 않아야 합니다. 소수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과 사귀는 일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서 있기 때문입니다.

 

9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10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9-10)

 

시인은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면서 악인들과 함께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들과 한패가 되지 않을 것을 다짐했습니다(4-5). 이제 시인은 자신의 다짐 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나의 영혼을 죄인들과 함께 제거하지 마소서/내 생명을 살인자들과 함께 제거하지 마소서’(9). 시인이 악인들과 함께 휩쓸려 제거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구는 여호와가 악인들을 박멸하실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시인이 죄인들(9)과 동격 관계로 설정한 살인자들(9b)은 주로 피에 굶주려 폭력적인 행위나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그런 자들과 한통속으로 묶여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그들의 속성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의 손에는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는 뇌물로 가득합니다’(10). 시인은 악인들의 사악함을 뇌물을 밝히는 손으로 특정합니다. 시인은 앞서 자신의 무죄한 손을 언급했지만(6), 사악한 죄인들의 손은 부정하고 불법한 뇌물로 가득합니다. 뇌물과 관련된 자들은 대체로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고, 이들은 자기보다 취약한 계층의 사람으로부터 부당하고 불법적인 이득을 챙깁니다. 시인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구별되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요청합니다.

 

결백 확신과 구속의 은총을 호소(11-12)

완전할 수 없다고 해서 완전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완전함이 아니라 세상과 달리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들리고 떠나는 무리 가운데서도 그들과 달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시인도 많이 흔들렸고, 항상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1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2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11-12)

 

시인이 맨 처음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니’(1a)라고 고백하고 호소한 것처럼 다시 반복합니다. 시작과 끝이 서로 호응하는 구성입니다. 시인은 ‘내가 흠 없는 삶을 살겠습니다’(11a)라고 다짐하고 간청합니다.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11b).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무죄함을 맹세했지만(6), 여전히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총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구속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무엇보다 ‘속량하다’ 또는 ‘구속하다’라는 의미의 ‘파다’는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처럼, 죽을 운명에 처해졌다가 구원받는 것처럼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자기백성 삼으신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삼하 7:23). 그러니까 시인은 자기 조상들이 맛본 구속의 은총이 여전히 자신에게도 유효한 은총이 되기를 열망합니다.

시인의 언어를 통해 예배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여호와가 보이신 은총 속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서고 싶습니다. 시인은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으니 내가 회중 가운데서 여호와 당신을 송축할 것이라’(12) 다짐합니다.

시인은 앞서 ‘행악자들의 집회’를 미워한다고 고백했지만(5), 이제 ‘회중’(막헬림)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더군다나 시인이 발을 딛고 있는 평탄한 데는 견고한 장소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공평함, 정직함, 의로움을 표현한 은유입니다(참조. 사 11:4). 따라서 시인은 신앙과 윤리적인 삶의 일치를 다짐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나의 완전함으로’(1,12) 살았다고 고백한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의 올바른 삶의 방식은 변함없을 것이라 다짐합니다.


하나님께 변호를 의뢰한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더 책임 있는 자세로 완전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늘을 판단하실 하나님이 그날에도 재판장이 되어 모든 걸 판단하실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힘을 얻고 곧게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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