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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3-01)


 어린양을 위한 목자의 헌신

시편 23편 1-6절


부족함과 넉넉함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도가 함께 지녀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부족한 모습을 인정할 때, 목자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순종하는 자세를 견지할 때, 넉넉함과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내 삶의 목자이신 주님을 얼마나 잘 따르며 살고 있습니까?

  

  • 23편은 양 떼를 돌보는 목자의 이미지로 주님을 향한 신뢰를 노래한 시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다고 다짐하는 언약 공동체를 대표하는 다윗에게 여호와는 목자뿐만 아니라 위험에서 건져주는 용서와 같습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누이시고, 소생시키시고, 의로운 길로 이끄실 ‘나의 목자’ 여호와를 향한 감사로 충만합니다.

 

내 목자이신 여호와(1-4)

양들은 제 길만 고집하고 근시안적이고 혼자 자신을 방어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겁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과 같은 우리를 위해 밤낮들에서 지내며 한데서 자야 하는 고된 목자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물질문명의 기준에 따라서 생각하니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1-4)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왕이 뙤기까지 많은 고통을 겪었고, 와이 되어서도 밧세바 사건, 아들 압살롬과의 달등 등, 그의 삶은 사실 부족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1) 부족함 없으신 여호와(1-2)

 

다윗은 하나님께 ‘여호와는 나의 목자’(la)라고 고백합니다. 이곳 말고도 구약에서 주님을 목자의 이미지로 표현하는데(시편 28:9; 77:20; 78:52; 100:3; 이사야 40:11; 49:9-10; 에스겔 34:11-16), 이는 히브리 전통에서 아주 오래된 칭호 중 하나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할 때, ‘목자이신 하나님’(창세기 48:15)이 출생부터 지금까지 함께하심을 고백했습니다. 고대근동 세계에서도 신들과 왕들을 묘사하면서 목자 이미지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이는 고대인들의 권위와 통치의 상징으로서 목자 이미지를 활용한 셈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윗이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부를 때, 자신을 그의 돌봄을 받는 양으로 고백한 것이며, 동시에 그분의 통치 아래 있는 존재인 자기 정체성을 표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시고 목자이며 왕이십니다(참조. 미가 5:5). 목자는 일차적으로 양을 먹이고 보호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목자 이미지는 구원 역사라는 더 큰 맥락에서 출애굽과 광야 생활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시편 80:1; 95:7).

다윗의 고백은 자기 조상들에게 행하신 구원 행위에 근거합니다. 다윗의 고백적인 선언은 둘째 소절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다윗은 목자이신 여호와 덕분에 ‘나는 부족함이 없다’(1b)고 노래합니다. 본래 미완료형태인데, 히브리어 구문에서 미완료형은 지속되는 현재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다윗의 조상들에게 여호와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셨던 기억을 반영합니다. 이스라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직전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회고하면서 들었던 절절한 당부, 곧 모세의 고별 설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신명기 2:7).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선물로 받을 가나안 땅을 먹을 것에 모자람 없고, 아무 부족함 없는 땅이라고(신명기 8:9) 했습니다.

다윗은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셔서 현재뿐 아니라 알지 못하는 미래까지 책임져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다윗은 전형적인 히브리 시형의 문체로 노래합니다. 두 개의 소절로 구성된 시행이 매우 음악적이고 아름답습니다. ‘푸른 초장으로 그가 나를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그가 나를 인도하신다’(2). 겨울철의 건기가 끝나고 봄비를 머금은 상쾌한 계절의 연둣빛을 연상시킵니다. 새싹이 돋는 봄날의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양들은 편히 누워 쉬는 목가적인 그림입니다. 옛적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거룩한 ‘처소’(출애굽기 15:13), 곧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목장’(시편 83:12)에서 평화롭게 쉴 수 있음을 노래합니다.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안식이었던 것처럼(신명기 12:9), 여호와의 목장은 다윗의 안식처가 됩니다.

 

(2)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여호와(3-4)

 

여호와의 푸른 목장과 쉴 만한 물가에서 누가 안식하지 못하겠는가? 때문에 다윗은 고백합니다. ‘그가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해 의의 길로 인도하셨다’(3). 다윗의 ‘생명’(네페쉬)을 회복시킨 목적이 마치 ‘의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인 것처럼 들립니다. ‘의의 길’은 ‘바른 길’입니다. ‘의’는 바름과 ‘곧음’이며, 마땅히 행할 ‘표준’입니다. 또한 ‘길’(마갈)은 밟아서 다져진 길을 뜻하니 오랜 세월 합의된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하나님이시니 그의 양도 마땅히 가야 할 그 길, 즉 ‘곧은 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는 여호와가 자기 이름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 당신의 평판 때문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여호와 그의 이름에 어울리게, 합당하게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는 오래전 자기 언약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시면서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으나, 악행에 대한 보응도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출애굽기 34:5-7). 여호와께서 당신 이름에 합당한 존재로서 그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셨던 것처럼, 그의 백성도 그분의 존재 목적에 걸맞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그분’(3인칭)으로 불렀지만, 이제 ‘당신’(2인칭 남성 단수)으로 호명합니다. 좀 더 친밀한 관계를 표시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당신이 나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십니다’(4). 다윗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골짜기에서도 ‘악’이 두렵지 않습니다. ‘해로움’이나 불운이 닥쳐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다윗에게 여호와는 언제 덮칠지 모를 위험과 외로움에도 함께할 나의 친구이자 나와 함께 걷는 일행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함께 계시면서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보호해줍니다. ‘지팡이’로 번역된 말은, 목자들이 양을 인도하는 도구입니다(미가 7:14).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목자는 들짐승으로부터 양을 보호하는 막대기와 양들을 돌보는 손잡이가 구부러진 지팡이를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팡이는 고대 사회에서 왕이나 재판장 또는 지도자들의 법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통치의 막대기’였습니다(창세기 49:10; 민수기 24:17; 시편 45:7; 에스겔 19:11, ‘규’). 여호와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다윗에게 위로의 도구입니다. 나의 안위가 된다는 말은 나의 위로와 안락함이 된다는 뜻입니다. ‘위로하다’라는 말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거나(이사야 66:13) 여호와가 나의 위로라는 다윗들의 언어에서(시편 71:21; 119:82),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표현할 때 쓰입니다(이사야 12:13; 40:1).

 

내 잔치의 주인이신 여호와(5-6)

하나님께서는 슬픔과 시름과 두려움으로 죽은 듯 쳐져 있던 양들에게 새 힘을 주는 목자입니다. 그 이름에 어울리도록 내가 의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밟고 간 땅을 좇아 주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걷는 길이 의의 길입니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5-6)

 

여호와의 보호를 묘사하는 배경이 푸른 초장에서, 죽음의 골짜기로, 즐거움이 넘치는 잔칫집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고백합니다. ‘당신이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나의 대적들 앞에서 당신이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고 나의 잔이 넘칩니다’(5). 갑작스럽게 다윗의 원수가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목가적인 분위기와 사뭇 다릅니다. 이는 아마도 다윗의 역사적인 정황이나 실존적인 상황 같아 보이지만, 원수가 누구인지 규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다윗을 비방하고 미워하며 적대시했던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건 간에 여호와가 그들 앞에서 잔칫상을 차려주십니다. 이 ‘상’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진설병을 두는 ‘상’(출애굽기 25:23)이나 희생제사를 위한 상을(에스겔 40:39) 언급할 때 사용되었지만, 왕을 위한 화려하고 풍요로운 상차림(열왕기상 4:27)에도 쓰였습니다. 이러한 문맥들을 고려하면, 이것은 필요한 식사와 잔치를 여호와가 직접 준비해주심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더군다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생기를 회복시키는 은유입니다(잠언 15:30). 또한 고대사회에서 잔칫집 주인은 손님을 맞이하며 올리브기름을 머리와 얼굴에 바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귀한 손님으로 영접하는 의식으로서 전통적으로 잔치에서는 기름이 빠지지 않았습니다(아모스 6:6; 시편 45:7; 92:10; 104:15).

이러한 의식의 상징적 의미는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보호에 대한 찬미입니다. ‘나의 잔이 넘칩니다’라는 고백으로 풍요롭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마지막 시행의 고백은 감격과 확신에 차 있습니다. 다윗은 두 가지를 확신합니다. 첫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뒤따를 것인데, 살아있는 내 온 생애 동안(6ab) 이라고 합니다. ‘선하심’은 ‘좋다’라는 의미를 넘어 사람의 삶을 기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과 관련된 말입니다.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의무와 사랑을 표현한 핵심적인 말로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낸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오래오래 살 것을 다짐합니다(6). 이는 잔치를 베푸신 여호와, 그분의 집에서 그분과 함께 지속적인 교제를 나누는 그림입니다. 23편은 마치 ‘나는 선한 목자라’(요한복음 10:11)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된 숲의 메아리처럼 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으로 이끄시는 목자이십니다. 돌보시고 인도하시며, 보로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신실한 자를 선대하시고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 그에게만 의와 생명, 쉼과 평안이 있습니다. 위로하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거짓 목자의 음성에 현혹되지 말고 참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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