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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2-02)


 미리 보는 십자가의 고난(2)

시편 22편 22-31절


복음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지만, 우리는 점점 복음이 위축되는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스스로 복음을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생명력을 경험하지 않으면 복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나 자신부터 복음을 깊이 이해하며 능력을 맛보고, 그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하겠습니까?

  

  • 22편 후반부는 탄식과 애통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의 소리로 가득합니다. 홀로 맞이하는 외로운 죽음과 어둠은 사라지고, 다윗은 신앙 공동체의 모든 회중과 함께 찬양하며 구원을 선포합니다. 땅의 모든 끝과 열방의 모든 족속이 온 세상 주인이신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와 예배하는 주님의 우주적 왕권의 성취를 예고합니다.

 

회중 가운데서 드리는 감사의 찬양(22-26)

하나님께서는 내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참 좋은 분입니다. 그러니 두려움보다 기대를 품고 내일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그분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으며, 여전히 그는 백성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서원한 대로 자신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서 담대하게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합니다.

 

22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2-26)

 

십자가 고난에 초점이 맞추어진 전반부와는 달리, 고난을 넘어선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승리를 맛본 사람들은 먼저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서 찬양할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1) 회중 앞에서의 감사와 찬양(22-24)

 

더 이상 다윗의 절망과 좌절의 탄식 소리는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했기에 여호와께 당신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속에서 찬양하겠다고 다짐합니다(22). 다윗은 혈연적인 관계를 넘어 함께 예배하는 언약 공동체인 ‘회중’ 가운데서 여호와 이름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러고서 다윗은 언약 백성인 회중을 다양한 방식으로 부르며 동참할 것을 권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 야곱의 후손들,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에게 그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고, 두려워하라’(23). 독특한 점은 회중을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23a)라고 호명하면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라’(23c)고 권고합니다. 이미 언약 백성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로서 정체성이 전제되었음에도 주님을 두려워하라는 조언은 그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을 좀 더 강조한 셈입니다.

이어서 다윗이 회중에게 주님께 찬양하고 영광 돌리고, 그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분은 곤고한 자의 고통을 멸시하거나 경멸하는 분이 아니며, 그의 얼굴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도움을 청하는 부르짖음에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24). 다윗은 처음에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생각했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신다고 외쳤지만(1-2), 완전히 뒤바뀐 상황을 선포하며 노래합니다.

 

(2) 서원과 다짐(25-26)

 

이제 다윗은 ‘큰 회중’ 가운데서(25a) 여호와께 다짐합니다. ‘나의 찬송의 주제는 당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들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겠습니다’(25). ‘큰 회중’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축제의 날임을 알 수 있지만, 다윗이 무엇을 서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고통에서 풀려나면 성전에 예물을 바치겠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레위기 7:15-21). 서원과 갚음은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닙니다. 다만 서원 갚는 자는 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은총을 경험한 것을 공동체 앞에서 공적으로 알리고, 공동체는 서원 지킨 자의 구원에 동참합니다.

‘가난한 자들’(‘겸손한 자들’)이 배불리 먹으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양하고, 언약공동체인 회중의 생명이 항상 지속되기를 기원합니다(26). 두 시행의 이미지는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 일부를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식사 자리를 연상시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집니다. 또한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라고 했는데, ‘마음’을 뜻하는 ‘레바브’는 ‘심장’을 뜻하는 말입니다. 굶주림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는 생명의 양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영원히’라는 말은 늘, 항상, 언제나 지속되는 현재성을 표현한 것이지 내세적 가치를 표현한 말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배불리 먹고 찬양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마치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것이고, 주린 자는 배불리 먹게 된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일부를 미리 맛보는 듯합니다(참조, 누가복음 6:20-21).

 

모든 열방과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찬양(27-31)

주님의 공의로우심은 산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와 상차 태어날 자에게까지,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까지 찬양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고난을 듣고도 멀리하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와 맺은 언약대로 언제까지든지 신실하실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불안해하지 말고 주님의 공의가 우리를 지키실 것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27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9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27-31)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해야할 사람들은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과 모든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의 주재이시기에 십자가의 복음은 이 모든 사람에게 승리를 경험하게 합니다.

 

(1) 땅 끝 모든 족속이 여호와를 예배(27-29)

 

개인적인 감사는 회중 속에서 찬양으로 커지고, 예배자인 다윗의 서원 갚음은 공동체의 축제에서 나누는 공동체의 식사로 확장되어 생명의 활기로 충만해졌습니다(24-26). 다윗은 이제 자신의 구원 경험을 더 폭넓게 확장시켜 땅 끝은 민족이 주 앞에서 예배하기를 열망합니다. 개인의 구원 경험은 공동체로 확장되고 좀 더 보편적인 관점으로 전환됩니다. 이를 표현한 시인의 언어는 장엄합니다. 당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모든 나라의 민족이 돌아와 경배할 것입니다(27). 모든 민족이 ‘기억하고 돌아온다’는 것은 1차적으로 모든 열방이 여호와가 자기 백성에게 행한 일을 깊이 생각하고 돌아오는 것이지만, 결국 온 세계의 창조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민족들이 귀환하는 우주적인 사건과 우주적인 왕권의 묘사입니다. 창조를 받은 자들이 창조자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마땅한 귀결로 묘사합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온 세계에 깃든 하나님의 왕권을 노래합니다. ‘그 왕권은 여호와께 속하였고, 모든 나라들 가운데 계신 통치자시라’(28). 창조자는 온 세상의 통치자이며 왕이요, 그분이 여호와임을 명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여호와 왕권을 찬송하며 경배하는 것은 풍요를 누리며 사는 자들만의 일이 아니라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임을 선포합니다(29). 이는 매우 독특합니다. 생명 없는 죽은 자들, 곧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자기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가 어떻게 찬송할 수 있습니까? 이는 구약 다른 본문의 입장과 다릅니다(참조. 시편 30:9;이사야 38:18).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하늘과 땅 그리고 삶과 죽음이 모두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포함되기에 찬송과 경배가 오로지 살아 있는 자들의 것만이 아님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해석자들 중에는 온 열방이 경배하기 위해 돌아오는 것을 예루살렘(또는 시온)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보고 종말론적인 사상과 연결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다윗은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장벽의 구분이 의미 없을 정도로 여호와의 통치권이 죽음의 영역까지 미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다윗은 살아 있는 사람은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영역까지 포함시켜 여호와의 우주적 왕권을 노래합니다.

 

(2) 구원받은 후손들이 여호와 공의를 전파(30-31)

 

이 땅에서 고난당한 자들의 삶은 죽음으로 귀결되지 않고 구원받았으며, 온 열방의 증거가 되었습니다(24-29).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한 세대로 끝나지 않고 죽음을 초월하여 아직 출생하지 않은 세대에까지 미칠 것입니다(30-31). 죽음은 모든 인류가 공평하게 맞이할 순간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경험한 다윗은 하나님의 역사가 한 세대에서 멈추지 않음을 확신하며 노래합니다. 다윗은 후손이 여호와를 섬길 것이고, 세대를 거듭하며 나의 주가 회자되면서 전해질 것이라고(30) 예고합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주’라고 호명하여 자기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셔서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신 주님에 대해 개인적이고 친밀한 경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친밀한 경험은 다윗만의 특별한 개별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며, 세대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재현될 것입니다.

 

후손들은 와서 그분의 ‘공의’를 장차 출생할 백성에게 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행하신 것 때문입니다(31). 다윗은 아직 출생하지 않은 미래의 세대들에게까지 주님의 공의, 곧 정의롭고 공평한 행위로 규명되는 ‘구원’이 미칠 것을 예고합니다. 주님의 ‘공의’는 ‘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 ‘구원’(salvation), ‘해방’ (deliverance)의 모든 과정과 관계된 하나님의 핵심적인 품성이며 사역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22편은 고난 받은 한 개인만의 구원 사건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로서 메시아적인 관점으로 해석됩니다.

22편의 전반부(1-21절)에서 한 사람의 지독한 외로움과 고난이 메시아 예수의 사역과 연결되어 해석된 것처럼, 후반부(22-31절) 역시 세대를 거듭하여 메시아를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의’를 노래합니다(참조. 시편 78:6; 로마서 3:22).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 순간에 신뢰와 죽음의 순종으로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살려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고난을 통해 온전케 하시려는 선하신 뜻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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