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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7-01)


전통에 대한 바른 교육한 예수님

마가복음 7장 1-13


 

신앙의 길은 장벽을 허무는 길입니다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일입니다이것이 샬롬이고 평화인 것입니다하나님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은 사람들과도 벽을 쌓고 살아갔습니다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은 손잡고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과감하게 버리고 맙니다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기득권을 지키려고 끊임없이 장벽을 만듭니다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장벽을 철폐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서로 감사하는 태도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이러한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 본문은 거룩에 대한 문제입니다. 결례에 대한 논쟁 기사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의 논쟁을 다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은 의식적 정결보다 영적인 정결이 더 중요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전통으로 교훈을 삼는다고 비판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종교지도자(1-5)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한 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습니다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의 허점을 찾아 없애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예루살렘에서 게네사렛 땅으로 내려왔습니다전통을 통해 예수님을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전통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1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2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1-5)

 

예수님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그래서 그들은 모든 유대인들이 지키는 장로들의 유전을 제자들은 지키지 않은 것에 물었습니다이들이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잘 배우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어떻게든 예수님을 트집 잡이서 정죄하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그들은 게네사렛 사람들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순하게 믿었습니다그들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치유를 받았습니다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마음을 닫은 사람들입니다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혈안이 된 사람들입니다.

 

음식 앞에서 손을 씻는 내용을 기록한 구약 성경을 살펴보면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제사를 드리기 전에 손발을 씻도록 하셨습니다.

 

19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20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21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애굽기 30:19-21)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릴 때 정결해야 하기 때문에 명하신 내용입니다하지만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은 일반 백성들이 지켜야 의무로 바꾸었습니다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는 잘 씻고시장에 다녀와서는 몸 전체를 씻었으며잔과 주발과 그릇까지 정결하게 씻도록 까다로운 규칙을 만들었습니다이 규례는 매우 까다롭고 어려웠습니다보통사람들은 지키기가 거의 불가능했던 것입니다결국 이것은 율법학자들이 일반 사람들을 기를 죽여서 자신들이 우월한 존재로 비추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을 어긴 죄로 여겼습니다제사장들에게 요구되던 높은 수준을 일반 사람들에게 정결함을 요구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열정이 문제였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나 내적 거룩함이 아닌 전통만 유지하는데 집중했습니다고수한 지나치게 엄격한 정결 기준 때문에 형제를 마구 정죄하는 오만한 사람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사랑 없는 순종은 인간적인 의만 쌓으며 차가운 판단의 마음만 키웁니다.

 

이제 정결의 기준이 바뀌었습니다부정한 죄인들이 거룩하게 되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옴으로 인해서 정결해집니다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힘은 예수님의 임재입니다거룩한 하나님과 접촉함으로 정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새롭게 정결하게 된 것에 대해 고린도교회에게 말합니다.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도 당연히 여기는 전통이나 관습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충되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신앙생활이 형식이나 습관에 매여 있지 말아야 합니다형식주의나 율법주의에 매인 것들을 벗어버리고 말씀을 최우선으로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6-9)

때로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자신의 생각과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6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9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6-9)

 

예수님께는 그들의 질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순종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전통만 따르는 위선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전통은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릇인데그 내용은 버리고 그릇만 중요하다고 붙들고 있었습니다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라고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을 것입니다처음에는 말씀을 사모해서 형식과 규례를 만들었을 것입니다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사라지고 행위만 남은 것입니다마치 하나님의 일을 해왔는데하나님은 사라지고 일만 남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설명합니다이사야의 예언대로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마음은 멀리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그들은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과 헛된 예배를 책망하셨습니다이처럼 제멋대로 만들어 놓은 규칙들은 철저하게 지키려 하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유대인들을 꾸짖었습니다.

 

현대 교회 안에 바리새인들과 유사한 것들이 많습니다성경 말씀보다 전통적인 관례나 법을 가지고 그것이 신앙의 표준처럼 생각해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구실로 이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사람을 잘못되게 하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입니다마음에서부터 문제가 생기면서 행동도 더러워진 것입니다악한 생각이 음란한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그리고 도둑질과 살인을 하도록 만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과 지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전통은 사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하고오로지 우리의 오만과 태만을 감추는 도구만 될 것입니다껍데기뿐인 전통을 고수하려고 생생하고 역동적인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도간의 사귐세대 간의 소통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입술과 마음은 모두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길 바랍니다.

 

당신의 신앙은 어떻습니까주님을 향한 첫사랑과 마음을 상실하면 겉대기만 매너리즘(mannerism)에 가득 찬 남을 정죄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말씀을 사모하고 말씀대로 살려했던 순수한 첫사랑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잘못된 전통을 바르게 교훈하신 예수님(10-13)

헌신을 핑계 삼아 이웃에게 악을 행하면 안 됩니다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전통을 더 중요 하게 여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지적하시면서 그런 것이 얼마나 나쁜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10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10-13)

 

유대인들 중에는 장로의 전통인 고르반 제도를 지킨다는 핑계 삼아 이웃에게 악을 행한 것입니다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무시하여 부모를 모욕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전통을 더 중시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질타하시면서 그 예로 고르반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로서 제사 때 구별해 드리는 곡식짐승제물 등을 말합니다이것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르반의 맹세였습니다서원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만 사용했습니다하나님께 드린다고 고르반’ 해놓고일정 기간 아무 것도 손을 데지 못하도록 악용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문제는 자신의 연로한 부모님의 생계가 막막함에도 불구하고 고르반이라고 둘러대며 부모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던 것입니다헌신을 핑계로 마땅히 행해야할 것은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서는 안 됩니다.

불순종을 정당화하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 진짜 부정함이고 순종과 믿음을 통해 말씀으로 이끌림을 받는 것이 참된 성결입니다.

 

사람들은 동기가 불순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영적인 지식을 악용해서 사용합니다하나님의 본질의 거룩함을 피해가는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지키겠다는 의도로 만들어 놓은 좋은 전통들이 하나님의 요구를 교묘하게 피해가는 교활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거룩한 지식도 악한 동기로 잘못 이용되면 악한 열매를 맺게 되어 집니다.

 

오늘 우리들이 믿는 진리가 진리임을 세상에 증명하는 길은우리들이 진리대로 사는 삶으로 진리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계명의 정신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바리새인들은 고르반의 전통을 내세워 하나님의 명령하신 부모 공경의 책임을 회피했습니다혹시 당신도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리고 있진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규칙보다도 중요합니다모든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의 생각보다 앞세워야 합니다외모를 중시함으로 형식에 치우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신이 사라지진 않습니까이런 경우가 있다면 주님 앞에 부끄러운 삶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그리고 어긋나는 생각이 앞장서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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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6-04)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마가복음 6장 45-56


 

사람들이 두려움은 과거에 실패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다시 똑같이 실패할 것 같은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그래서 두려움에 휩싸이면마음을 마비시키며실제보다 문제를 확대해석합니다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합니다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그래서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온 명령어는 366번 나온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환호하고 유대인의 왕으로 잔득 기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관심을 뒤로하고 제자들을 배를 태워 보내시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십니다. 배를 타고 건너가던 제자들은 중간에 큰 바람을 만나서 어려움을 당합니다.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가셨지만,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몰라봅니다. 

 

홀로 기도하신 예수님(45-46)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부러워합니다사람들은 부러워하면서도 예수님과 같이 능력을 얻는 방법을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을 얻으려하지 않습니다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능력을 얻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45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45-46)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무리는 모세가 환생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을 잡아 억지로 왕을 삼으려고 했습니다(요 6:14-15). 무리들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켰듯이예수님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큰 유혹의 순간이었습니다무리가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제자들의 생각도 무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무리들 못지않게 흥분했을 것입니다그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왕으로 임하실 때가 임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무리의 환호 속에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편 벳세다로 먼저 가게 하십니다열광하는 무리에게서 제자들을 신속히 떼어놓으신 것입니다제자들에게 무리가 주는 헛된 기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시려고 배를 띄워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인 무리들을 흩어 보내신 후에한적한 산으로 기도하려 올라가셨습니다사람들의 요구를 멀리하시고 세례 요한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위해 친히 기도의 골방으로 가신 것입니다예수님의 진짜 능력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골방 기도만이 예수님께서 힘들고 분주한 사역을 모두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하시기 전과 후에 반드시 기도하셨습니다작은 성공에 도취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사람들은 성공 앞에서 겸손하기 어렵고감사하기도 어렵습니다스스로 교만해져서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려 할 때가 많습니다그래서 환호를 받는 시간은 짧을수록 좋고하나님께 무릎 꿇는 시간은 길수록 좋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후에 열광하는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무척 피곤하셨을 텐데도 홀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시는 분입니다많은 사람들이 주변 분위기나 육체적 피곤함을 핑계로 기도하는 일에 게으른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길 원한다면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시간과 장소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47-52)

예수님은 언제나 모든 성도들의 삶에 모델입니다항상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을 항상 돌아보셨습니다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닮고 싶어 합니다본문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고난에 빠져 있을 때그들을 돌아보시고 계십니다.

 

47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47-52)

 

예수님께서는 분주한 일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시는 것을 잊지 않으신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멀리서 기도하고 계셨지만제자들에게 가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셨지만마음은 제자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지만때마침 불어오는 맞바람이 불어서 제자들을 매우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랐기 때문에 당한 어려움입니다그들은 밤이 맞도록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고난을 당했습니다예수님께서 자신의 욕망과 싸우면서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제자들은 바다에서 역풍과 싸우고 있습니다육지에 있으면 화려함과 인기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인생이었습니다배를 타고 바다 중앙으로 나가면 그곳은 어두움이 있고 풍랑이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인생입니다폭풍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의 배에 다가가십니다밤새 바다와 싸우느라 녹초가 된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유령으로 착각하며 소리를 지릅니다항상 함께 다닌 제자들이었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히니깐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유령이 보인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자신들도 제자로 파송되어 기적을 일으켰습니다몇 시간 전에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그러기 때문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먹이신 기적을 깨닫지 못했습니다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메시아이심을 명백하게 증명한 것입니다메시아가 마련하신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오병이어임을 몰랐던 것입니다제자들은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아야 했습니다그들은 마음이 무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적어도 이 시점에 이르러서 제자들은 그러한 기적에 대한 진전된 깨달음이 있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계속 폭풍 속에 계속 방치해 두지 않습니다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그리고 제자들에게 안심하라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킵니다그리고 주님에서 배안에 들어가니깐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었습니다힘들던 폭풍의 바다가 주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모두 잠잠해집니다제자들은 또 한 번 놀랍니다예수님의 말씀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마음이나 거칠게 불고 있는 바다모두를 다 잠잠케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도 놀랄 뿐이지 진정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그들은 기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굳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놀라운 체험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마음이 굳어지면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당신의 마음은 어떤 상태입니까항상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어떤 풍랑 속에서도 안전하다는 사실입니다.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53-56)

폭풍의 바다를 건너고 이른 곳은 원래 위치와 다른 곳입니다하지만 그곳 또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그곳 사람들은 예수님을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십니다그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53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56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53-56)

 

풍랑의 영향으로 배가 본래의 목적지인 갈릴리 북쪽의 벳세다로 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몇 킬로 떨어진 게네사렛에 도착했습니다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게는 냉대를 당했지만그와는 대조적으로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열렬하게 환대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게네사렛에 도착하자 병든 자를 침상 째 메고 나아왔으며예수님의 옷자락에라도 병자의 손을 대려고 했습니다그런 간절함과 믿음 때문에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아쉽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아픔에 있는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찾는 것입니다절박한 심령으로 주님께 나와 매달려야 합니다그러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에게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십니다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주린 배를 채워주고병을 치유하여 주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축사하셨습니다그리고 이 세상의 것만 채워주신 것이 아니라 영생에 이를 때까지 인도하십니다예수님을 만나면 당신의 인생에 모든 것을 해결을 받습니다.

 

게네사렛 땅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기를 소망하였고만진 자들은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내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예수님을 향한 이와 같은 간절함이 있습니까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시길 원하십니까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간절히 찾으시길 바랍니다.


열광하는 분위기와 피곤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하는 일에 힘을 쏟으셨습니다모든 사역의 능력은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에서 시작하셨습니다우리들도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덧입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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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6-03)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6장 30-44


 

댐이나 저수지를 만들면그 댐에 물이 가득 찰 때까지는 물을 방류하지 않습니다사역이란 억지로 짜는 것이 아니라 흘러나오는 것입니다쉼과 사역에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사역자는 큰 탈이 날 것입니다좋은 차일수록 브레이크가 좋습니다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육적 감정적 영적 재충전을 계속하면서 사역해야 합니다충만한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힘으로 사역하는 절묘한 균형의 원리를 주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치진 제자들에게 안식을 줍니다. 제자들을 통해 많은 것을 보았던 무리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쫓습니다. 그들에게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먹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의 광야 잔치는 헤롯왕의 잔치와 비교됩니다. 세상에 속한 헤롯왕은 방탕한 생일 잔칫상에서 선지자를 죽이는 참극을 벌렸지만,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께서 마련한 광야의 풍성한 식탁은 목자 없는 양무리 같은 무리에게 배부름과 만족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통한 메시아 잔치의 풍성함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사역 후 휴식(30-32)

하나님의 사역을 집중하면 신나게 할 수 있습니다사역에 집중하게 되면 흥분됩니다신바람이 나서 감정이 넘쳐나기 시작합니다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정신없이 일에만 집중합니다제자들도 전도 사역을 통해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30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30-3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필요한 것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전도 사역을 나갔던 제자들은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옵니다성공리 마친 사역의 결과를 보고합니다그들은 사역에서 귀신이 축사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을 할 때기분이 들떠 있을 것입니다그들은 육신이 지친 줄 모르고 일을 했을 것입니다그들은 흥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상적으로 행한 일이지만 제자들은 처음 경험해 본 일이기 때문에 신나서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증들을 잘 들어주셨을 것입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셨을 것입니다그리고 집중해야할 것은 사역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영혼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라고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제자들은 사역은 신이 났겠지만그들의 육신은 점점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더욱 제자들의 성공적인 사역만큼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일행들에게 몰려들었습니다무리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너무 많이 나옴으로 제자들이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선에서 수고한 제자들을 위해 한적한 곳 즉 광야를 마련해 주셨습니다제자들을 성공 직후에 광야로 보내신 것을 단지 육체적인 휴식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그들이 사역에 성과에 너무 취하지 않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제자들에게도 그 시간이 필요했습니다자신이 이룬 성공적인 삶과 자신과는 별개입니다성공에 취하여 그 일이 마치 자신이라고 착각해서 교만스러워 버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는 영광스러운 취임식을 가졌습니다그러나 그 후에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쫓으셨습니다그곳에서 단독으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동편 한적한 곳 광야로 보내십니다이것은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배려와 사랑을 보여 줍니다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한계와 필요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

 

종종 우리들은 광야와 같이 혼자 남겨진 상황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고독해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그 시간은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보는 시간입니다자신의 사역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과 별개라는 것입니다성공적인 사역에 취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그럼으로 세례 요한처럼 자신의 사역에 충성하는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동행하시며 가르치신 예수님(33-34)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나온 무리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풍족하게 채우시는 선한 목자이심을 보여주십니다본문 말씀을 통해 선한 목자를 만나보겠습니다.

 

33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33-34)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선지를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먼저 걸어서 도착합니다그들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을 휴식을 방해하는 사람들이라고 귀찮게 여기지 않으십니다오히려 그들을 보시면서 영적 지도자가 없어서 영적으로 갈 길을 모르고 굶주려가는 양들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과 같이 영적으로 갈 길을 모르는 양의 무리들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안식을 소홀히 여겨서가 아니라로마 식민지 아래서 사회 경제적인 안식뿐 아니라 영적인 안식마저 잃은 갈릴리 사람들이 자신보다 돌보는 것을 더 중요하다고 보신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피곤하시지만굶주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그들의 영혼을 하늘 양식으로 풍족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만약 기적이 효과적인 방법이었다면 가르치지 안 했을 것입니다그 당시나 우리 시대나 충격적인 기적보다는 오래도록 전하는 바른 지식이 사람들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바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영적 필요와 육체적인 필요를 채어 주셨습니다오늘도 예수님께 나오는 자들은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그분 앞으로 간절히 필요들을 간구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그러나 눈에 보이는 육적인 필요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필요로 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서 영육이 강건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을 시험하시는 예수님(35-37)

하나님 나라는 믿는 사람들의 헌신순종을 통해서 그곳에 주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이뤄집니다제자들에게 광야에 모인 수많은 무리를 먹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부요와 기쁨을 보여 주시고자 했습니다.

 

35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35-37)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이에 저녁이 되었습니다무리들은 충동적으로 따라왔기 때문에 먹을 것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제자들은 이러한 무리들을 보면서 저녁 식사를 마을 근처로 내려가서 사먹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정말 합리적인 제안입니다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직접 먹을 것을 주라고 황당한 명령을 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렇게 하려면 돈이 200데나리온이나 너무 많은 돈이 드는데 어떻게 하겠냐고 따졌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제자들은 무리가 가진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고 대답합니다그러나 제자들은 현실성 없어 보여도 명령에 한편으로 난색을 표합니다제자들은 200데나리온이나 든다고 불평했지만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로 충분했습니다주님께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드리면나머지는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당신이 가진 오병이어를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표정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방금 전까지 귀신을 축사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한 사람들입니다그리고 그들이 전도 여행을 떠날 때먹을 것을 준비하지 안 해도 채워주셨던 체험하셨습니다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시와 명령에 순종하라고 권합니다아무리 현실의 문제를 잘 분석해도 예수님이 그것에 계시지 않으면 해답이 없습니다현실을 잘 알면 알수록 절망만 깊어진 뿐입니다그러기 때문에 골방에서 단독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제자들과 같은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이미 구약 성경에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고기를 달라고 불평했습니다모세는 하나님께 몰맨 기도합니다.

 

13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 21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22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13-14,21-22)

 

그렇게 기도하는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응답하셨습니까?

 

23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민 11:23)

 

이 대답은 모세의 믿음을 책망한 말씀입니다이 사실을 보면서 우리들의 믿음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가능성을 한정시킬 때가 많습니다제자들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현실을 잘 분석했습니다정보도 정확했습니다하지만 그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그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예수님을 모른 채 현실만 잘 알면 절망만 깊어집니다한숨과 불평만 늘어갑니다두려움만 자라갑니다.

 

때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당혹스런 명령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마시고 그 명령을 주신 하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주님께 왜 그것을 원하시는지 대답을 들으시고그것을 이루기 위한 능력과 자원도 주시길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오병이어로 먹이신 예수님(38-44)

한 소년이 자신의 작은 도시락을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작은 헌신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그들에게 새로운 만나를 공급해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38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다 배불리 먹고 43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38-44)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오십 명씩백 명씩 나누어 질서정현하게 앉혔습니다제자들이 가지고 나온 오병이어를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나눠 주였습니다신기하게도 남자만 헤아려도 5000명이 넘는 무리를 먹였는데도 남았습니다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그 떡을 나누어준 일에 제자들도 참여했습니다제자들은 끊임없이 나오는 떡을 나누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신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첫 출애굽 후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먹이셨듯이새로운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왕되신 새로운 이스라엘이 얼마나 풍족한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함께 하시자 광야가 초장으로 변화되었습니다광야에서 목자 없는 무리에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또한 가난하고 주린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목자가 푸른 초장으로 양들을 인도하듯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에게 광야에서 천국의 향연을 만끽하게 해주셨습니다.

 

세상 왕인 헤롯이 주관하는 왕궁의 잔치는 화려하고 방탕 했습니다그리고 세상의 권력자들만의 유흥이었으며오만과 미움 그리고 살기 가득한 잔치였습니다하지만 참된 왕 예수께서 마련하신 광야의 밥상은 소박하지만 풍성했습니다아무 자격없는 자들에게 베푸신 예기치 않은 은혜의 잔치였고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는 소외된 자들의 연회였습니다.

 

당신은 어떤 잔치에 참여하길 원하십니까세상에 탐욕스런 잔치에 참여하시길 언하십니까은혜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시길 원하십니까참여하기 전에 당신의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을 주님께 보여드려야 합니다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큰 복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집니다.


오늘도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주리고 있는 영혼들이 있습니다주님은 모든 영혼들에게 목자로 영육간에 양식을 공급해 주신 분이십니다때를 따라 풍성하게 공급하신 잔치로 당신도 초청하십니다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소유한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기쁘게 드리시길 바랍니다그러면 상상치 못할 놀라운 역사들을 만날 것입니다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잔치에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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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6-02)


순교 당하는 세례 요한

마가복음 6장 13-29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건강한 사람들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봅니다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밥 입맛이 없어서 밥을 멀리합니다하지만 건강한 사람들은 밥맛이 넘쳐서 밥을 가까이합니다영혼도 건강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합니다말씀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 건강한 믿음을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본문에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나옵니다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떠남으로 영적인 큰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그가 바로 헤롯이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복음 전도하는 일에 파송했었습니다. 그 일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인 예수님의 이름도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제자들의 활동상을 다양하게 해석했습니다. 본문은 분봉왕 헤롯이 예수님의 반응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자신이 목 베어 죽인 세례 요한의 영혼이 살아나서 예수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헤롯의 생각(14-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어 전파하게 후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더욱 확산되어 갔습니다이러한 사실은 최고지도자였던 헤롯왕에게까지 보고가 되어 집니다하지만 그에게는 예수님의 사역을 들으면서 두려움에 쌓이게 됩니다.

 

14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15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14-16)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점차적으로 퍼지자 헤롯왕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사람들은 저마다 예수님에 대한 평가를 살아난 세례 요한하늘로 올라간 엘리야 또는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이러한 소문은 헤롯을 괴롭혔습니다그는 잊혀진듯했던 과거에 자신의 악행이 악몽처럼 다시 살아나고 있었습니다그는 자신이 목 베어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헤롯의 만행은 이복형 빌립의 집을 방문해서 그의 아내인 헤로디아에게 반하게 됩니다그는 15년 동안 살던 아내와 이혼하고 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아서 결혼했습니다세례 요한은 최고 권력자인 헤롯에게 선지자의 심령으로 부당성을 지적했습니다헤롯은 자신의 부당성을 지적한 세례 요한의 말이 가슴에 찔리긴 했지만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그리고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옥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죽이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을 잘 이해했고 권위를 인정했습니다하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그는 정당히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실천하고서 불순종의 불씨를 남겨 두었습니다헤롯의 모습 속에서 현대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들을 때 맞는다는 것은 인정합니다하지만 자신의 방종하고 타락한 삶을 지적하는 것은 듣지 않습니다.

 

혹시 당신도 정당히 필요한 부분만 순종하고 불순종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허물을 들어내는 빼 아픈 지적이라 할지라도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헤롯을 비판했던 세례 요한(17-20)

헤롯의 생각과는 반대로 헤로디아는 다른 생각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그녀는 원하는 것은 다 얻어야 하는 여인이었습니다그래서 자신의 일을 반대하는 요한을 죽이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요한을 죽일 기회만 틈타고 있었습니다그녀에게 세례 요한을 죽일 좋은 기회가 다가왔습니다.

 

17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17-20)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었던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첫째는 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합니다제자들의 활동은 세례 요한의 환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다시 재현될 것임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암시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의 선한 말과 그의 권위를 인정했고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그래서 헤로디아의 청을 거절해 왔던 것입니다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도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과 진정으로 회개를 하는 것은 다릅니다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왔던 것입니다헤롯처럼 사탄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작 자신에게 들려진 메시지는 적용하지 않았습니다그리고 그 말씀을 확산되지 않도록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그는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말씀을 적용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헤롯은 절반의 순종으로 불순종을 정당화하는 사람이었습니다우리들이 말씀을 거절한 것은 말씀이 틀려서가 아니라 대부분 순종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그 말씀을 받아 들렸을 때자신의 생각과 패턴을 포기해야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부정적인 부분을 부각시킵니다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맞지만그런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을 매도 시켜버립니다헤롯도 세례 요한의 말은 맞고 의로운 사람이지만왕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버릇없다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를 통해서 말씀하시든지 그 말씀이 사실이거나 죄를 들추어내거든 인정하고 말씀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길 바랍니다그런 사람을 통해 말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일리 없다고 부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세례 요한의 행동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부도덕한 왕을 책망하던 때와 같습니다특별히 아합 왕의 죄를 책망한 엘리야와 흡사합니다아합 왕도 이세벨의 치마폭에서 놀아난 사람입니다이세벨 때문에 엘리야가 공격을 많이 당했습니다세례 요한도 헤롯왕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곤욕을 당합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의 목숨만은 살려주길 다짐했지만그것만이 최소한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하지만 그 같은 최소한 양심은 그리 오래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말씀에 대한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때로는 말씀이 당신을 잘했다고 격려할 것입니다그러나 때로는 헤롯을 책망하듯이 당신을 책망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그것까지 믿음으로 받아 들려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그러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지만 헤롯과 같이 말씀을 적당하게 순종하면 그것에 걸림돌이 되어질 것입니다.

 

참수와 매장을 당한 세례 요한(21-29)

악한 자들은 굶주린 사자들처럼 삼킬 자를 찾아 항상 기회만 옆보고 있습니다악한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죽이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그리고 헤롯의 생일잔치에서 기회를 잡습니다.

 

21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21-29)

 

헤롯은 무절제와 방종으로 특징지어지는 생일잔치를 열었습니다헤롯이 자신의 생일잔치에 헤로디아의 딸에게 재롱의 대가로 무엇을 요청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세례 요한을 죽일 기회를 찾던 헤로디아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합니다.

 

구하는 것을 다 주겠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습니다헤롯은 자신의 혀를 다스리지 못한 채 어린 딸에게 놀아나고 있었습니다이러한 오만이 사탄에 무너지는 도구가 되어 집니다딸과 손님들 앞에서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고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인 줄 알면서도 선지자를 죽였습니다세상의 권력자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살아가지 않습니다다만 대중의 눈을 두려워하고 인기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남편도 자식도 이용했습니다그것을 방해하면 선지자도 죽였습니다이렇게 한 상황에서 딸에게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도록 시켰고헤롯은 이를 거절할 수 없어서 세례 요한을 참수형에 처하게 됩니다왕궁의 방종한 분위기와 무절제한 헤롯의 약속이 무죄한 사람의 생명을 무책임하게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의인의 죽음을 허락하십니다요한의 죽음은 억울하고 가슴 아픕니다그러나 이 죽음을 통해 요한은 등장부터 퇴장까지 철저히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당장은 권력자 헤롯이 힘없는 요한을 이긴 듯합니다그러나 이 사건의 진정한 승리자는 세례 요한이라는 사실이 복음서 끝부분의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결 결과에서 사시됩니다.

 

말씀이 역사하도록 허용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가둬두면언제가 그 말씀을 아예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회개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아닌 죄와 단절하고 떠나지 않으면 죄가 자신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용기 있게 행하는 사람입니다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사명으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며 회개를 외쳤던 선지자였습니다세례 요한처럼 거룩한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말씀이 전달될 때모든 것을 내려놓고 말씀에 완벽하게 순종해야 합니다삶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당신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혹시 세례 요한처럼 억울한 일이 생기더라도 그 상황을 주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인내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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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6-01)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6장 1-13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사탄은 성도들을 주저앉히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끝까지 보내시는 분이십니다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 능력도 주시고귀한 동역자들도 붙여주십니다행동하지 않고 묵상만 신앙이 병이 들게 되어 집니다.

 

  •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을 떠나서 고향 나사렛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고향에서 기적을 베푸시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인간적으로 잘 알아온 예수님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보다는 배척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을 즉시 다른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제자들을 둘씩 파송하시고 복음을 전파하게 하십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신 예수님(1-3)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지만동시에 항상 핍박과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고향을 방문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큰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1-3)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고향의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고향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그 지혜가 너무나 놀랐습니다하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목수였다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혔습니다그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기적을 믿지도 않았습니다오히려 예수님을 무시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누구보다 더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선입견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진정한 권위를 깨닫지 못하고 배척하는 실수를 범합니다이것은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식에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대하려 했던 실수를 연상하게 합니다(3:21).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을 당한 것은 그의 제자들도 얼마든지 배척을 당할 것을 의미합니다우리들도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고 세상에서도 거부당하면서도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바보 취급을 받지 않으면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아이니 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이 바보처럼 살 때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환영을 받습니다반대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어울려 살면그들이 친구로 받아주긴 하지만우리들이 전하는 예수님은 믿지 않습니다심지어 우리들의 신앙마저도 진실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나 사람들을 대할 때선입견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시길 바랍니다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리시길 바랍니다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을 잘 안다는 이유만으로 정작 온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배척했습니다혹시 당신도 적은 경험과 지식으로외모로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는 않습니까?

 

고향에서 사역하지 않은 예수님(4-6)

믿음이 있는 곳에서만 역사가 나타납니다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문제점을 분명히 지적하십니다그리고 그들이 의심하고 영접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사역도 행하지 않습니다.

 

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4-6)

 

구약의 선지자 중에 예레미야처럼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렘 11:21). 믿음이 없는 고향 때문에 예수님은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셨습니다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초인간적인 사역으로 받아들이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너무 가까이 보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예수님의 가족들이 그랬습니다고향 사람들은 예수님 대한 알량한 지식과 오만한 생각이 예수님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향 사람들의 마음을 믿음 없음이라고 평가하십니다그리고 그 지역에서는 거의 기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기적은 비유처럼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고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믿음이 없던 고향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가는 제자들 역시 가시밭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고난 없이 영광도 없고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기 때문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이들이 고난의 제자도가 아니라 부와 영광의 제자도를 추구하려 합니다조롱과 멸시의 길을 가신 예수님께 영광과 명예를 구하며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앞에서 일신의 안락과 성공을 구하려 듭니다.

 

열두 제자를 파송시키신 예수님(7-13)

진정한 리더십은 책상에 앉아서 배운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뛰면서 직접 체험해 본 것입니다주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지금까지는 예수님께서 직접 사역하셨지만이제는 주님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제자들을 앞장 세워서 사역의 현장으로 인도하십니다.

 

7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8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7-13)

 

예수님께서는 고향을 떠나 다른 마을들을 두루 다니며 가르치십니다그리고 열두 제자들을 불러 두 사람씩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둘씩 보내신 이유는 같이 협력하라고 하신 것입니다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능력을 행하며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친 권세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나가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그것은 예수님께서 성공적인 사역을 살 수 있었던 것을 예수님의 믿음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예수님을 항상 성령님과 동행하셨고세상이 주는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사역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제자들도 그래야 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여행할 때는 최대한 간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단 벌 옷과 신발만 가지고 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너무 많은 것을 챙기다 보면 실제로 사역할 시간이 없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에 기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제자들이 생계에 매어서 사명을 망각하거나 먹고 살기 위해서 듣는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어 복음을 변질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취해야할 태도는 예수님처럼 환영도 받겠지만 배척도 받을 것입니다하지만 더 나은 대접을 찾아서 이집저집 기웃거리지 말아야 합니다성도들이 직장에서 연봉 때문에 기웃거리지 말아야 합니다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좋은 제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나갔습니다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그들의 사역은 성공적인 사역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었습니다병을 고쳐 주며 회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이것은 훗날에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이어갈 제자들의 사역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복음을 전파해야할 사명이 이곳에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주인을 받아 들리라는 요구입니다세상을 향해서 거짓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외치려면 자신이 먼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내가 먼저 세상 앞에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그래야 세상도 돌아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복음을 전하십니다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큰 능력을 주시고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셨습니다예수님은 당신을 통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길 원하십니다복음을 잘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만 보고 쉽게 평가했습니다그 결과로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알량한 경험과 지식 대문에 주님의 능력과 지혜를 제한하지 않도록 겸허함이 있어야 합니다누구를 통해서든지 파송된 제자들처럼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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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5-03)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

마가복음 5장 35-43절


 

오늘날 체감 경기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다들 너무나 어렵다고들 아우성입니다. 그렇지만 한 번도 쉬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안해하고 힘들어 하는 것은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있겠지만, 능력 밖에 일들은 노력해도 불가능합니다. 이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까지는 아직 소망이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하길 바랍니다. 본문에서는 소망이 끊어진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잡는 놀라운 믿음의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던 도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료하십니다. 지체하는 시간 동안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딸이 죽었다 할지라도 믿음을 흔들리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야이로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딸을 살려내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생명까지도 주관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절망에서 믿음을 촉구하신 예수님(35-36)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직면한 상황에서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에게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과 같은 소식을 듣고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두려움과 믿음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은 문제를 더 확대 해석해서 문제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35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35-36)

 

회당장 야이로는 딸의 위급한 상황에서 딸을 치료하기 위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열 두해 혈루증 걸린 여인의 문제로 인해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회당장의 집에서 전갈하는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라고 아주 절망적인 보고합니다. 열두 해 혈루증 걸린 여인은 살았지만, 야이로의 딸은 죽었습니다. 상황이 아주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 원망을 쏟아놓고, 야이로에게는 믿음을 포기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모든 상황은 종료된 것 같고,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말 것처럼 더 이상은 이 일에 관해서 희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등장했던 이적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귀신 들린 사람에게 더는 희망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5:3-5). 혈루증을 앎은 여인의 소개에서도 그녀가 병은 치료하지 못하고 가산만 탕진하며 보낸 12년간의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절망적인 상황을 말해주었습니다(5:25-26). 인간적인 희망이 더 이상 없는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연출됩니다. 아마 일반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혈루증 여인이 원망스러웠을지 모릅니다. ‘혈루증 여인 때문에 지체하지 않았다면, 딸이 살았을 것인데...’라고 푸념이나 불평했을지 모릅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부정적으로 반응할 시간도 주시지 않습니다. 즉시 개입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것이 더 극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중병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이 헬라어 동사는 모두 현재 명령법으로 계속해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는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는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누가 보더라도 이 상황이 회당장에게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발생한 순간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풍랑 앞에서 두려워했을 제자들을 연상시킵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이미 끝난 상황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시작은 인간의 끝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려운 문제는 사람들이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지만, 불가능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해주실 것을 신뢰하고 매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는 문제라면 당신도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치유하실 능력뿐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까지 있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딸의 생명뿐만 아니라 회당장의 믿음까지도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을 더욱 성장시켜 주실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을 통해 야이로의 믿음을 성숙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통해 당신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고 붙드시길 바랍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하는 사람들(37-40)

세상이 어려울 때 일수록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는 자꾸 믿음을 흔드는 불신앙의 소리만 들립니다. 이런 말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더 집중해야 합니다. 흔들림 없는 기준은 환경이나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37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37-4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이들은 9장에 언급된 변화산 사건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참석시키셔서 자신의 하신 일들에 대한 분명한 목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한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인 장례집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야이로는 종교 지도자이기 때문에 지역 사람들이 야이로의 집으로 많이 몰려와 문상(聞喪)을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린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통곡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아마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는 표현은 아마다 이 아이의 죽음은 영원한 것일 수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야이로의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딸을 보지도 않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 예수님을 볼 때 정말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를 비웃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웃는 사람들을 집밖으로 다 내보내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 세 제자들을 데리고 그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사역을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나중에 확실한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죽은 아이를 일으키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죽은 소녀를 일으키신 행위는 요한복음의 나사로 사건과 더불어 하나님의 종말적 통치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 시작되고 있음을 일려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전부터 제자들은 이 사역들을 온전하게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혈루증 여인을 통해서 야이로의 믿음을 세우셨던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믿음을 세워주시고 계십니다. 이 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세 제자들에게 특별교육을 실시하셨습니다. 그 제자들ᅟᅳᆫ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성숙 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회가 있음 때마다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통한 설교와 성경공부 그리고 말씀묵상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이러한 훈련들을 통해 성도의 믿음을 성숙시키신 것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훈련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석하십니까! 제자들에게 야이로의 딸을 통해 특별 신앙 훈련을 시키신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께서 훈련시켜 좋은 제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딸을 살리신 예수님(41-42)

기적은 불신이 아니라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살아가다보면 돈, 지식, 권력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한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믿음은 무엇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까? 더 높은 확률이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으지를 믿는 일입니다. 그분께 다 맡기는 일입니다.

 

41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41-42)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내어보내시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소녀야 일어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명령에 12년 된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서 증상이 ‘곧’ 사라졌듯이, 죽었던 소녀도 ‘곧’ 살아나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기적이 아주 간단하게 일어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들이 믿는 예수님은 상상할 수 없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당신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에 흥분되지 않습니다. 이 시간에도 당신에게 ‘달리다굼’이라고 명령하십니다.

 

한마디 말씀으로 죽은 소녀를 살리신 예수님의 기적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적이니 마땅히 놀라고 놀랄 일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명령하여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명령에 생명이 없던 것들이 생명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에게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명령하여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처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처럼 당신의 삶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도 이 사실을 믿지 못한 사람들은 비웃고 비아냥거릴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달리다굼’이라고 명령하십니다. 잠자거나 죽은 영혼들이 향해 명령하십니다. 주님의 명령에 일어나고 깨어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일으켜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침묵을 명령하신 예수님(43) 

믿음은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하신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세상의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놀라운 축복을 얻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또 다른 부탁을 하십니다.

 

43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43)

 

예수님은 부활이며 생명이십니다. 야이로는 현실성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권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묵묵히 따라갑니다. 결국 그의 딸이 살아나는 은혜를 누립니다.

살아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간의 일상적 필요에 대한 세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시며 묵묵히 따라가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면 회개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능력으로 당신이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통해 일어난 일처럼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곳에는 야이로의 집에 역사하신 뜻이 있었던 것처럼, 당신에게도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섣불리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묵묵히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기적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에 일어날 부활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흥분이 될 것입니다. 이제 부활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우리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의 죽음 앞에서도 믿음의 선택을 했습니다. 그래서 딸이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희망이 사라질 때, 주위에서 포기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하신 두려워말고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놀라운 권능을 경험할 것입니다. 말씀을 확실히 믿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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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5-02)


 예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

마가복음 5장 21-35절


 

우리들이 주님 앞에 나올 때, 베드로가 그물을 버려두고 나갔던 것처럼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에서 수여한 훈장과 세상에 붙여 준 명예들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는 이 모든 것들을 모두 벗어놓고 나아가야 합니다. 반대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가지고 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처, 아픔, 상한 마음, 무거운 짐과 걱정 그리고 염려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가지고 오라고 주님께서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해결해 주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 앞에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가지고 갈 것은 가지고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광풍을 뚫고 거라사 지방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광인을 치유하시고 또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돌아오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간절함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간절히 나온 사람들 중에 딸이 죽어가고 있는 회당장 야이로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않는 여인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달랐지만,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딸의 치료를 위해 간구하는 회장당(21-24)

인생은 자신의 권력과 부와 지위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큰 세력인 병이나 죽음 앞에 직면할 때에야 비로소 무능한 자신을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사탄의 나라를 결박하고 강력하게 이 세상에 침노하였음을 보여주십니다.

 

21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21-24)

 

예수님께서 자기 지역을 떠나달라는 요구에 이방 지역에서 다시 유대 지역으로 배를 타시고 다시 이동하셨습니다.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선창에 무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나아가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며 따랐지만, 그들 중에는 간절하게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갈릴리에 도착하자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야이로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구합니다. 그는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의 모든 건물과 예배를 관리하고 집례하는 업무를 감당하는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종교지도자로서 이렇게 예수님을 인정한 사람은 그가 처음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회당장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비판거리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무리 앞에서 예수님께 엎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 직위, 체면 그리고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망가진 모습으로 무리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의 해결하실 예수님 앞에 엎드리어서 간구한 것입니다.

 

야이로가 얼마나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는 매우 간곡하게 사정합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23) 그 딸에 대한 소개는 42절에 보면, 그 딸의 나이가 12살이며 외동딸(누가복음 8:42)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딸은 아직은 중병으로 죽지 않았고 죽어가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그 문제를 위해 예수님을 찾아와서 살려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두 가지, 즉, ‘자기 집에 들어와 달란 것’과 ‘손은 얹어서 딸을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는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굳이 병자에게 손은 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는 대로 원하는 대로 해주십니다.

딸의 죽음 앞에서 이 아버지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재물이든, 명예든, 체신이든, 아무 것도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딸의 목숨과 바꿀 수 있다면, 그는 버리지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회장당이라면 이미 예수님께서 여기저기서 행하셨던 일들을 다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위와 체면을 내던지고, 그 앞에 엎드릴 만큼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인 이방여인이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마가복음 7:25-30). 자신의 귀신 들린 딸을 위해 예수님께 강청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모진 소리를 들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딸에게 있는 귀신을 쫓아내달라고 간구했던 여인입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길 간구했던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딸을 희생시키면서 세상의 것을 지키고 싶은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딸의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버리지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딸의 죽을 병을 통해 회당장에게 인간의 무능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구하는 야이로와 함께 그의 딸을 치유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이처럼 구하고 찾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겠지만, 구하는 사람들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닥친 시련과 고난은 당신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합니다.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하는 여인(25-29)

인간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인간의 모든 방법이 절망으로 끝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할 최적의 시간입니다. 무리들 중에 간절히 예수님을 찾고 있었던 사람은 혈루증 걸린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의원을 만나고 전 재산으로 고침을 받지 못한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도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길 원했습니다.

 

25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25-29)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길은 한시라도 빨리 가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발길을 잡는 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는 열 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하혈이 멈추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오는 병입니다. 당시에 이런 병은 부정하게 생각하고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은 다른 사람과 접촉해서는 안 되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질병을 가진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외면 받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레위기 15:25-33). 이 혈루증은 부정한 병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다닐 수 없었습니다.

 

만약 당시에 이 여인의 정체를 알았다면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도 회장장처럼 혈루증을 치료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해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도 병 때문에 탕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몸도 상하고 병만 악화되었을 뿐입니다. 점점 깊은 좌절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여인에게 자신처럼 부정한 나병환자를 고치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은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치유하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축사(逐邪)하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이 소식은 그녀에게 복음(Good News)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길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만나길 사모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것은 복음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아닙니다. 이제는 예수님 앞에 나가야 하는 믿음의 선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가는 길에 ‘무리들’이라는 장애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시기 위해 가시는 중입니다. 예수님을 멈출 수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 이 여인은 결정합니다.

그녀는 오직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신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 그 믿음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질병 때문에 예수님 뒤에서 몰래 손길을 내밀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 12년 동안 알았던 혈루증인 나았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짐으로 긴 고통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가는 길에는 많은 방해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애 앞에 예수님께 나가는 소망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그러면서 복잡한 핑계거리를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나가는 길은 아주 단순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앞에 나아가지 못한 것에 대한 우리들은 핑계를 늘어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에 역사를 맛보길 원하신다면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영혼까지 고침 받은 여인(30-34)

필사적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의 간절한 행동과 믿음이 기적을 낳게 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찾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30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0-34)

 

위험을 무릎 쓴 믿음 위에 예수님께서는 화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이 나간 줄 아셨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시고 모든 무리가 이 여인을 주목하게 만드십니다. 모든 무리 앞에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 앞에서 물으신 것은 무엇이 믿음인지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자신을 만지기 전에 그녀의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의 옷을 만져서 나았다고 믿을 것입니다. 모든 치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믿음이 있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여인과 무리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인의 연약한 믿음과 불안전한 지식을 온전하게 해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세상 앞에 공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너무 많은 무리가 에워싸 밀어서 누군가 예수님께 닿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왜 손을 내밀어 만진 자가 누구냐고 물으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 여인만은 그 질문이 옳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실 직고를 합니다.

아마 많은 무리들도 밀치면서 예수님의 몸을 만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이 여인뿐이었습니다. 믿음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것입니다. 교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지만 주님을 만나고 그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무리에 있지 아니하고 한 영혼에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누가 나를 만졌느냐?’라는 말씀에 두려워했습니다. 부정한 여인으로서 거룩한 분을 만진 것 때문에 분명히 그녀는 책망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사정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무리들에게 여인과 같은 신앙고백을 가르치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놀랍게도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무리 앞에서 여인의 치유를 선언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뿐만 아니라 그의 사회적인 관계까지도 회복해 주시고 계십니다. 더욱이 여인이 예수님을 마술적인 치유자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영적인 회복까지 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치유는 육적인 치유, 정시적인 치유, 사회적인 관계 치유, 영적인 치유까지 다 망라하는 전인적인 치유였습니다. 그 여인은 혈루증만 치유된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위를 통해 영혼 구원의 은혜까지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여인의 모든 비참함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벗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과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12년 동안 고치지 못했던 여인은 혈루증이 나았습니다. 당신도 혈루증처럼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면,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질 각오로 믿음으로 나간다면, 반드시 놀라운 기적적인 역사를 경험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회당장 야이로와 열 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 이 두 사람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과 열두 해 혈루증에 시달린 여인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만 의지하며 나가면 예수 그리스도부터 오는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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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5-01)


 광인을 온전케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5장 1-20절


 

요즘 우리 주변에는 중독으로 삶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콜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게임 중독 그리고 음란 중독까지 다양합니다. 중독자들은 자신은 스스로 절제하려고 하지만 할 수 없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어려움은 마음은 끊고 싶지만, 끊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독 증세는 독이 되어서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중독을 통해 사람들을 무엇인가에 사로잡혀서 인생다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인생들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광풍’을 말씀으로 잔잔케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천지만물을 다스린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거라사 지방에 도착하자 짐승처럼 살아가는 귀신 들린 ‘광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축사하고, 그 귀신을 돼지 떼에게 들어가서 바다에 빠져 죽은 사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다시 영적인 세계까지 통치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거라사에 도착하신 예수님(1-5)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영원토록 교제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잊어버리고 귀신의 형상대로 어두운 인생길을 살아갑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형상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거라사인의 광인과 같습니다.

 

1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1-5)

 

예수님의 일행은 전날에도 많은 사역 때문에 피곤했고, 특히, 갈릴리 바다를 건너면서 광풍 때문에 밤새도록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광풍이 부는 바다를 잠잠케 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 충격은 그들에게 진한 여운의 질문,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잠잠하는가?’라는 질문 하나를 남겼습니다.

 

본문에서는 귀신들린 광인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을 통해 보여주신 기적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여주십니다. 그 반응들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는 큰 바람과 파도를 뚫고 도착한 곳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 지방은 거라사인(Gerasenes)들이 사는 땅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이방지역에 들어가서 사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 신학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새 이스라엘의 대표로 살아가고 계십니다.

앞에서 광풍을 잠잠케 한 사건은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사건을 재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첫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켰습니다. 그 사건이 본문에서 재현됩니다. 예수님께서 쫓아낸 귀신의 이름이 다름 아닌 ‘군대’였습니다. 이 ‘군대’라는 단어 ‘레이온’은 3,000-6,000명 정도에 이르는 로마 군대의 단위를 말합니다. 이런 엄청난 귀신이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서 바다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일행들을 편하게 쉴 수 있는 안식할 장소나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러운 귀신 들인 사람이 예수님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의 군대처럼 그들도 수장되었습니다. 첫 출애굽을 이끄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셨다면, 이제 영적인 새 출애굽을 이끄실 분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이방 땅 거라사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놀랍게도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그는 아무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쇠사슬로 매면 끊어버렸고, 고랑은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 안에 엄청나게 많은 귀신이 들어 있어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더러운 귀신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귀신 들린 사람은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들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혼자 살았고, 혼자처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5절에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산에서나 들에서 항상 소리를 지릅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15절에서 ‘옷을 입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평상시에는 옷을 벗고 살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아주 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수치도 모른 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기 좋았던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이것이 죄 아래에 맺어 있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타인에게는 강하지만 사실 자기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존재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입니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세계가 강한 사람, 혼자 밖에 모른 사람, 그는 무덤 곁에서 이미 죽은 자나 다름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절대 하나님을 떠나는 성공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불안하고 두려운 실존을 감추려고 세상의 것(옷, 명예, 집 등)으로 혼자 밖에 모르는 사람, 그는 이미 무덤 곁에서 죽은 자나 다름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부요나 성공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불안한 실존을 외모로 꾸미려는 것뿐입니다.

 

영적인 세력은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강력합니다. 사탄은 이렇게 강력한 힘을 좋지 못한 곳에 사용하여 자신이나 타인을 파괴하는데 사용합니다. 이것이 죄로 물든 인간의 근본 모습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떠난 결과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시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그들의 삶은 짐승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참고 로마서 1장). 마귀가 하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파괴하는 일을 합니다. 인격을 파괴시키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쳐서 결국 파괴와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날 사탄에 사로잡힌 이단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사람들끼리의 관계를 파괴시키며 서로 불신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새로 들어온 형제들을 먼저 아낌없이 사랑하기 보다는, 일단은 한 번 정도는 의심에 눈초리로 살펴본 후에 받아들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랑해야할 형제들까지 어떻게 먼저 불신을 할 있겠습니까! 사탄의 힘은 누구도 통제(제어)할 수 없습니다. 영적 세력은 물리적 힘보다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귀신과 대면하신 예수님(6-8) 

영적 세계는 두 나라가 항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두움의 권세를 가진 귀신과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영적 전쟁에 대해 어떻게 진행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탄에 의해 파괴된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6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6-8)

 

귀신은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며 예수님을 극진히 환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을 귀신이 먼저 알아보고 경배하였습니다. 귀신은 어떤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먼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왔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한다고 믿음은 아닙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훼방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렇게 저 자세로 나온 귀신의 본색은 서서히 들어나고 있습니다. 귀신은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7)라고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합니다. 귀신 스스로는 한 인간을 완전히 파괴하고 괴롭게 해놓고,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요구하다니 말입니다.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강한 것이 사단에서 사로잡힌 이 세상에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귀신에게 파괴된 인생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권세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8)고 명하셨습니다. 아무리 강한 귀신이라고 할지라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신 예수님의 권세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파괴된 사람은 누구라도 예수님 앞에 서면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동일하게 창조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고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사탄에 의해 파괴된 영혼들은 예수님으로 온전하게 회복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변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변화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없고 대부분 인생을 파괴시켜 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창조주이시며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완전히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필요합니다. 순종하는 삶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의 신앙고백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짐승처럼 파괴시켜놓은 귀신의 고백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사랑이 없는 지식,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고백 그리고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예배 등과 같은 영적인 형식들은 받으시지 않습니다.

 

돼지 때를 몰살한 귀신(9-13)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에서 광풍을 말씀으로 잔잔케 하심으로 친지를 다스리신 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가라사에서 귀신 들린 사람의 귀신을 축사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세계까지도 주인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 영혼을 회복시켜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점차적으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9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9-13)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향해 ‘네 이름이 무엇이냐?’(9)라고 묻습니다. 이름을 묻는 것은 자신이 더 강한 자란 것을 재확인하는 통상적인 방법입니다. 놀랍게 그 귀신은 자신을 ‘군대’ 귀신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한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이 ‘레기온’의 규모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귀신의 힘은 막강하고, 막강한 힘으로 사람들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은 일반적인 사람의 능력으로는 그 귀신을 대항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모든 세상의 힘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귀신을 제압하고 쫓는 권세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귀신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권세 앞에서 굴복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귀신은 자신의 신분이 들어나자, 마침 산 곁에서 먹고 있는 돼지 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12)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되었던 그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혼돈의 공간인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다 몰살되고 맙니다. 귀신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일까지 가맹한 것입니다. 귀신은 처음부터 예수님께 순종할 의도가 없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기적을 보고나 듣거나 알게 된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출애굽 때 홍해가 갈라지고 뒤쫓던 애굽 왕 바로의 부대가 그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출애굽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진 후(4:35-41), 그 바다에 ‘군대’ 귀신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계십니다.

 

귀신을 쫓아냄에 대한 반응(14-20)

아무리 악의 세력이 여러 모양으로 신앙을 뒤흔들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통해 회복되어 가는 사역을 막을 순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14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14-20)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알리기 위해 사역하셨습니다. 광풍을 통해 광인의 사역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지만, 그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서로 믿음과 불신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1) 부정적인 반응(14-17)

 

거라사의 군대 귀신을 통해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서, 2,000마리가 넘는 수많은 돼지 떼가 바다에 몰살당해 죽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재물의 손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 들렸던 자는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15)라고 소개합니다.

 

이 과정에서 돼지 떼의 주인들은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돼지를 치던 자들이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소식을 주인들이 이 관경을 보기 위하여 달려왔습니다. 그들에게는 돼지 떼에 대한 시험의 순간입니다. 그들이 도착해서 보니, 전에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 곁에서 얌전하게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놀랐을 뿐만 아니라 두려웠습니다.

그들 앞에서는 두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 때문에 귀신 들린 자가 온전해졌습니다. 둘째는 예수님 때문에 돼지 2,000마리가 수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좋은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불행한 현상입니다. 그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죽은 것이 다른 없던 사람을 온전하게 새 창조하신 예수님, 귀신을 쫓아내신 그 예수님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돼지 2000마리나 잃게 만든 요주의 인물을 배척할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17)고 우리의 기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반대로 예수님을 자기 지역에서 떠나시길 간청했습니다. 경제적인 관심사 하나 때문에 예수님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은 것보다는 잃어버린 돼지로 인해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고도 오히려 더 많은 재산이 없어질 걸 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조용히 떠나 주시길 원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손해를 본 재물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한 영혼을 돌아보셨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물질에 눈이 멀어서 한 영혼의 귀중성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질과 영혼 중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르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권세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2) 긍정적인 반응(18-20)

 

돼지 떼 주인은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귀신 들렸던 사람은 순한 양처럼 변했습니다. 귀신 축사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수종자가 되겠다는 제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19)고 명령하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 순종합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데가볼리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전했습니다. 그에게 선교지는 자신의 집과 지역이었습니다. 그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다니면서 예수님의 놀라운 구원의 사역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사실을 듣는 놀랐습니다.

 

불안 속에 빠져 있던 한 인생이, 이제는 사람들의 감탄과 감동을 주는 존재로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이방 땅에 최초의 선교사로 세우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이 아니라 귀신 들렸던 사람이 이방인을 향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함께 있고 따라 다니는 것만 제자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제자는 자신에게 주신 사명과 선교지에서 최선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체험하고, 자신의 사명을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한 제자임을 가르칩니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간증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탐욕의 종이 되었던 비참한 삶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약하고 비천했지만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셨습니다. 귀신으로부터 치유 받은 사람들을 통해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에 연약한 다른 지체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며, 그들을 예수 앞으로 나아서 온전하게 치유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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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4-04)

  

 


광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4장 35-41절


 

영어권에 있는 나라를 여행하면 영어가 절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를 모르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자신의 뜻을 바디랭기지(body-language)로 손짓발짓하면서 힘들게 뜻을 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영어를 잘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외국인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도움을 청해서 자신의 의사를 바르게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폭풍을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었다면 제자들은 폭풍우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지금 것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 대해서 살폈습니다. 본문부터 6장 6절까지는 기적으로 눈으로 보는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나라를 이기고 역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에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시는 중에 큰 광풍을 만났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자연 세계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이신 것을 보여주시지만, 제자들은 그분의 절대적 권위를 믿지 못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갑자기 닥친 폭풍(35-38)

예수님께서는 행하시는 기적들은 눈으로 보는 비유의 역할을 합니다. 기적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나라를 이기고 이 땅에서 역사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들을 보고도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눈으로 보는 사람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35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35-38)

 

예수님께서는 날이 저물 때까지 배 위에서 청중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에 몸을 실고 갈릴리 동쪽으로 가자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열광한 무리들이 그대로 물러 설리 없습니다. 그들도 배를 타고 예수님을 뒤따라 왔습니다.

 

(1) 생생한 제자훈련을 계획하시는 예수님(35-36)

 

직전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스터리’를 비유를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날 저물 때에’란 표현은 문맥 속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날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의 제자훈련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던 주님은 이제 시작할 여행을 통해서 가르치려고 계획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나 궁중을 대상으로 사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제자들에게만 가르침을 제한하는 것을 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출발하는 것을 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출발하자 무리들이 탄 것으로 보이는 다른 배가 예수님 일행을 따라 옵니다. 생생한 제자훈련을 위한 예수님의 계획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찬사를 받으나 부당한 고난을 받으나 요지부동으로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신뢰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큰 인기를 얻을 때는 그들도 덩달아서 출세한 것 마냥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련의 파도가 밀려올 때면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사단은 그렇게 돌밭에 떨어진 씨 같은 제자들을 노렸습니다.

 

(2) 광풍과 제자들의 구조 요청(37-38)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떠나서 갈릴리 호수의 다른 곳으로 건너거자고 제안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와의 동행하는 것은 모든 것이 순탄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 바람은 배를 집어삼킬 만한 광풍이었습니다. 큰 파도가 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배에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강한 바람, 사나운 파도, 요동하는 배, 차가운 물이 들어 왔습니다. ‘큰 광풍’이라는 표현은 이 풍랑이 일반적인 풍랑이기보다는 매우 것은 바람을 동반한 돌풍이었음을 시사 합니다. 실제로 갈릴리 호수는 갑작스럽고 사나운 돌풍으로 유명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바다나 바람은 혼돈의 세계, 즉 사탄의 세력을 의미했습니다. 바다는 사탄이 사는 장소라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 바다의 이름을 성경에서는 ‘리워야단’이나 ‘라합’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사건도 이 악한 세력을 이긴 사건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사탄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탄 배를 습격한 것입니다. 앞에서는 마음에도 없으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거룩한 자라도 거짓으로 칭송하여 예수님의 길을 방해하더니(마가복음 3:11), 이번에는 자연의 혼돈 세력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노린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신 후에 갈릴리 호수의 다른 곳으로 떠나고자 말씀하셨는데, 마침 돌풍이 불었다고 하는 것은 이 돌풍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마치 구약에서 요나 선지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각각 바람과 큰 물고기와 박 넝쿨을 준비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큰 호수가 아닙니다. 통상 한 두 시간 정도면 여행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주님과의 동행이 우리에게 순탄하지만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도리어 세상이 그렇게도 미워하는 예수님과 같이 다니니 안 당해도 되는 부당한 고난까지 당할 수 있고, 희생까지 치르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상황을 알 수 없었던 제자들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왜 주님이 계신 배인데 큰 광풍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황당한 것은 물결이 일어나 배가 침몰할 것 같을 때에도 주님은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절규하며 주님을 깨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기막힌 노릇이었습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을 원망하여 깨웠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관심하고 아무런 대책도 없으신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광풍이 이는 바다로 나가게 했겠습니까?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뜻하지 않는 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삶에 원하지 않는 광풍으로 인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로 벼랑 끝에 서있는 느낌을 든 사람과 홍해와 같은 일들로 절망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그곳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어 있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반응해야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장소라고 한다면 지금보다 더 어렵다고 할지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훈련 하신 예수님(39-41)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황하는 제자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교훈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능력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원망과 불평에도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39-41)

 

위험 속에 빠진 제자들은 예수님께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곧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시고 이내 바람도 그치고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1)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39-40)

 

제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돌보지 않고 주무시는 주님을 향해 불평을 쏟아내는 제자들 때문에 주님은 잠에서 깨어나십니다. 잠에서 깨어나 행하신 예수님의 행위를 마가는 특징적으로 묘사해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서 ‘꾸짖으셨다’라는 표현은 피조 세계의 주인이며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암시합니다. 물론 마가복음은 요한복음 1장처럼 로고스이신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창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셨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피조 세계에 관여하고 다스리신다는 말만 직접적으로 하지 않을 뿐 실제로는 예수님께서는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자 바람이 그칩니다. 또한 바다를 향해서 잠잠하고 고요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바다마저 오용해졌습니다. 피조물은 주인의 명령에 즉시 반응하는 종과 같이 묘사됩니다. 이 두 표현은 1:25에 나오는 축사의 말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악한 세력을 상대하듯 바람과 바다를 꾸짖고 조용해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실제로 대자연의 세계가 악한 세력으로 묘사되는 것은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종종 발견됩니다(제2에녹서 40:9;43:1-3; 제4에스라 6:41-42; 희년서 2:2 등).

 

지금 예수님께서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41절에서 제기될 ‘저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세계관 속에서 바다와 파도를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심에 틀림없습니다(시편 89:8-9).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는 모습을 보았기에 놀랐을 것입니다.

마가를 비롯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자신들의 백성을 향해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저자의 구체적인 상황 묘사는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신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상징이며 회화적이지만 매우 노골적인 방식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40절에서 이제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을 향합니다. 요동하던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광풍을 만나자 그들의 근본적인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서워하고 두려워한 것은 직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주셨는데도 여전히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 단락에서 자신의 인격과 사역 안에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그 가르침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겨내야 했지만, 작은 믿음마저 광풍 앞에서 포기하고 말아야 합니다.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본 제자들은 놀라워하며,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강한 바람과 거친 파도 속에서도 편안히 주무셨으며, 또 광풍이 불 때 말씀으로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실 수 없는 상황은 없습니다. 혹시 감당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나가서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길 바랍니다. 흥미롭게도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광풍을 만났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위로하는 위로자 역할을 담당합니다.

 

(2) 제자들의 반응(41)

 

광풍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관건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꾸짖음에 바람과 바다마저 순종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구약에서 바다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표현이었습니다(욥기 38:8-11; 시편 65:5-8; 89:8-9 등). 이러한 구역 본문의 빛에서 이 본문이 갖는 함의는 혁명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메시아지만 메시아를 넘어서는 정체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처럼 자신의 백성에게 돌아올 것이라 말씀하셨던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광풍의 시험을 허락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다시 한 번 질문하게 하십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광풍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신에게 허락된 문제들을 통해 무엇을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두려움의 대상은 환경이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당신에게 허락하신 문제는 자신뿐 아니라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지식과 관계를 돌아보게 합니다.

  

홍해처럼 가로막힌 장애물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당신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가르시며 마른 땅같이 걷게 하신 것처럼 당신도 걷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이 중요합니다. 어려운 상황을 당신의 경험을 통해 해결하려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해결이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나오시길 바랍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한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믿음이 없는 자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선장으로 모시고 믿음의 항해를 떠납니다. 선장에 인도하심을 받으면 우리는 평화롭게 운항할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들으시고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도움을 구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을 도와주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보호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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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4-03)


하나님 나라를 가르친 비유(3)

마가복음 4장 26-34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들어왔을 그 이름을 말없는 마차라고 불렀습니다왜냐하면 사람들이 마차는 알았지만자동차는 몰랐기 때문입니다당시에 최신형 마차에 말이 없는 것은 대단한 이슈가 되었습니다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는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농부가 뿌린 씨앗은 스스로 땅에서 자라나듯이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성장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작은 겨자씨가 땅에 뿌려져 크게 자라듯 처음과 다르게 큰 나무처럼 성장할 것입니다. 그 영향력이 대단할 것입니다. 앞에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다면, 이 두 비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씨앗의 성장과 같은 하나님 나라(26-29)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였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중심도 항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일군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가시길 원하십니다.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26-2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땅에 씨를 뿌림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이 비유는 농부는 씨를 뿌리지만 그것을 성장하게 할 순 없습니다땅에서 싹이 나고 이삭이 자라고 그리고 충실한 곡식이 되는 것을 지켜볼 뿐입니다그래서 밭에 뿌려진 씨앗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싹이 나고 자라 때가 되면 추수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습니다씨가 뿌려져서 성장하듯이 조용히 시작되며 점점 성장해 갑니다하나님 나라의 진행도 인간의 능력과 지혜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신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장시켜 나가실 것입니다농부가 곡식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모르듯이우리들도 하나님 나라가 성장해 가는 것을 매번 확인할 수 없습니다하지만 인간의 생각과 계산논리와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 나라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최후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있으면 그 완성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성장을 에베소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신앙의 열매는 사람의 노력으로 열매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다만 성도들에게 복음인 생명이 안에 거함으로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습니다절대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성장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당신에게도 복음의 씨가 뿌려졌다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성장시키길 것입니다언제 어떻게 자라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언젠가는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사람들은 열매가 맺기까지 인내가 필요합니다인내가 없이는 열매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까당신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 나라(30-32)

생명은 언제나 성장합니다생명은 씨의 크기가 문제가 아닙니다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시작이 세상처럼 광대하거나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매우 작게 시작된 복음이지만 그의 결과를 설명하십니다.

 

30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30-32)

 

예수님께서는 또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이는 겨자씨가 매우 작아서 나무처럼 크게 자랄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습니다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보면매우 미약해 보이기 때문에 창대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하지만 처음에는 작고 미약해 보잘것없어 보여도 나중에는 크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로마 제국의 수도가 아닌 식민지 이스라엘의 한 촌 갈릴리의 젊은 목수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그의 제자들은 어부와 세리들로 구성되어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시작된 복음은 미래가 매우 미약해서 불안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보잘것없었지만 이후에 그들의 복음 사역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보잘것없던 복음이 한 세기가 지나서는 로마 제국의 수도까지 퍼졌습니다그리고 지금은 그 말씀대로 온 세상 곳곳에서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며 복종하는 자들이 그분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개인적인 영적 성장이나 교회 성장에 대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지금은 부족해 보이지만 때가 되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기다리다 보면 성장해서 삼 십배육십 배 그리고 백배의 열매를 거둘 때가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복음 전파에 대한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낙망하지 않고 씨를 뿌리면 놀라운 열매를 맺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연약하고 부족해 보일 수 있겠지만작은 믿음이라도 정말 소중합니다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그 겨자씨만한 믿음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0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태복음 17:20)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이 작다고 실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부족하다고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지금은 볼품없지만 그 믿음을 가지면나중에는 큰 나무처럼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산을 옮길 뿐만 믿음으로 자랄 것입니다지금은 아주 미미한 겨자씨만한 믿음을 자졌다 할지라도 주님의 큰 나무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을 세울 재목(材木)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의 수고가 매우 미약해 보일 수 있지만점점 성장해서 새들이 깃들 수 있도록 큰 영향력을 미칠 것입니다그래서 미래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횐경에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 부흥 운동은 겨자씨와 같이 작은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회심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습니다그래서 부흥의 불길로 타오릅니다교회의 성장도 당신의 작은 헌신부터 시작한 것입니다하나님 나라는 규모로 성패를 나누는 세상이 아닙니다충성과 순종을 보십니다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비유로 가르쳐 주신 예수님(33-34)

우리들은 삶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순 없습니다그 결과 때로는 방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방황해야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가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33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33-34)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제자들에게도 여전히 비유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었습니다그래서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따로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더 잘 준비시켜 자신의 일을 맡기기 위해서였습니다더 잘 준비시켜 자신의 일을 맡기기 위해서였습니다예수님을 배울 기회를 얻었거든 더 잘 순종하고 더 오래도록 충성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시고 설명해 주십니다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많은 비유를 사용해서 가르쳐 주셨고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복음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그러기 때문에 지금 부족한 부분에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주님께서 함께하시면 승리하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최후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작은 헌신과 섬김을 통해 큰일을 행하실 것입니다그 하나님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날마다 복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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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2-01)


엘리후의 등장

욥기 32장 1-22절


말에게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말에게는 중요한 소통 수단이요 마음의 울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우에 합당하지 않는 말은 오히려 죽이는 독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잠언 25장 11절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의 대화를 듣고 욥이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점과 세 친구의 욥에 대한 정죄와 무능한 반박에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는 이제 친구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욥과 논쟁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말하려고 하는 의견은 그의 안에 있는 전능자의 영이 주신 지혜로운 깨달음이며 그것을 공평하고 정직하게 진술할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자신의 발언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엘리후의 등장(1-5)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지혜를 주시고 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은혜를 받았기에 담대히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모두에게 필요한 삶의 해답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1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2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4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1-5)

 

득명한 의견 차이로 팽팽한 대립이 계속되면 토론은 더 이상 진행되기 어렵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분위기를 새롭게 하는 적절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욥과 세 친구의 대화가 팽팽한 의견 차이로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가운데 엘리후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1) 세 친구의 말이 그침(1)

 

마침내 욥이 말을 끝냈지만, 여전히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므로 친구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욥과 세 친구 간의 긴 대화(3-36장)가 드디어 중단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욥이나 친구들이나 독자들 모두 욥의 의로움의 진위와 고난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이 제공해주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2) 욥과 세 친구에게 화난 엘리후(2-5)

 

욥과 친구들 간의 논쟁이 해답 없이 끝나자 다들 어찌할바 모르고 있을 때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젊고 말 잘하는 엘리후가 비로소 입을 엽니다. ‘그는 나의 하나님’란 뜻의 이름을 가진 엘리후는 종족 부스 사람(렘 25:23) 바라겔의 아들로 소개됩니다. 엘리후라는 사람과 그의 말은 욥기 전체에서 오로지 32-37장에만 나타나며, 말을 듣고 욥이나 친구들이나 하나님이 답변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등장과 독백은 욥과 세 친구의 의견을 종합하여 비판해주고 사람이 고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의 설명을 제공합니다. 다만 그의 의견도 욥의 고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와 같이 해답이 점점 지연되므로 청중이나 독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해답만을 애타게 기다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엘리후의 등장은 그의 소개와 함께 그가 화났다는 설명으로 시작됩니다.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 모두에게 화가 났습니다. ‘화’라는 말이 2-5절에 네 번이나 나와 엘리후가 참고 묵묵히 기다리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서는 욥과 친구들을 향해 분통이 끓어 오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화가 난 이유는 욥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보다(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더 의롭게 여기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욥이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점과 하나님이 그를벌하는 것이 옳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엘리후가 욥의 세 친구에게 화가 난 이유는 그들이 욥의 분명한 죄를 끄집어내지 못하면서 그를 정죄하는 데만 힘을 썼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자신이 나서서 욥과 논쟁하고 싶었으나 욥의 친구들이 훨씬 나이가 많으므로 그들이 욥에게 제대로 반박하기를 기대하며 참고 참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욥에게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여 결국 할 말을 잃고 침묵하므로 이제 엘리후는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엘리후가 잠잠했던 이유(6-10)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길 줄 알고 그 교훈을 받아들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러지 못해 망한다고 교훈합니다(잠 10:8).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지혜를 얻으려면 자신의 생각과 세상의 지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치 광산에서 은을 찾고 금을 찾듯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6○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7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8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9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10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6-10)

 

엘리후의 직접적인 말이 6절부터 시작됩니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32:6;34:1;35:1)라는 표현은 세 친구와 욥이 서로에게 대답할 때에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 엘리후의 독백을 욥과 친구들의 대화와 연결시켜 주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입을 열자마자 바로 자기가 지금까지 침묵했다가 지금에서야 입을 열게 된 경위와 이제는 자기가 나서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 대해 긴 발언을 합니다(6-22).

엘리후는 자신이 욥의 친구들보다 나이가 어리므로 그들의 나이를 존중하여 그가 깨달아 안 것을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잠잠히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연장자 세 친구가 자신보다 더 지혜로울 것이라 생각하여 그들이 연륜을 통해 쌓은 지혜로 욥을 깨우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끝까지 들은 결과, 나이를 먹고 오래 살았다 해서 더 지혜롭거나 무엇이 옳은지를 깨닫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며 실망을 나타냅니다. 그는 지혜가 나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나오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연장자가 더 지혜롭다’는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생각을 접어두고 ‘자신의 의견’(10,17)을 말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입어 의견을 제시할 것이므로 연륜이 많은 욥과 그의 친구들이 그의 나이 적음을 문제 삼지 말고 그가 앞으로 진술할 지혜로운 말을 들으라고 종용합니다.

 

세 친구를 책망하는 엘리후(11-14)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인생의 궁극적인 해답이 있다는 것을 때달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지혜를 주시고 진리를 알았기에 하셨습니다. 그러한 은혜를 받았기에 담대히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모두에게 필요한 삶의 해답입니다.

 

11○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12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13당신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진상을 파악했으나 그를 추궁할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14그가 내게 자기 이론을 제기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이론으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라(11-14)

 

엘리후는 줄곧 욥의 친구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 들으면서 그들이 합당한 말을 찾아 욥에게 대답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기대에 어긋나게 욥의 친구들은 그 어느 누구도 욥의 변론을 확실하게 반박하지 못했고 그의 견해가 옳지 않다는 것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에게 “우리가 욥에게 대답할지(‘진상'으로 번역됨)를 찾았지만 욥을 추궁해야 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는 핑계를 대지 말라고 확실히 못 박습니다. 또한 이런 핑계를 대는 근본적인 이유가 그들이 욥의 변론에 반박할 증거를 찾지 못했으며 욥의 논리를 뒤집을 만한 지혜가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엘리후는 세 친구처럼 뚜렷한 증거도 없고 논리적으로 반박도 못 하면서 욥을 죄인으로 몰고 가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방법과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과 논쟁하겠다고 선포합니다.

 

할 말이 가득한 엘리후(15-22)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향한 참 닐리요 참된 지혜인 것을 알면서도 그 말씀을 전하는 일에 예레미야처럼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면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영적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말씀을 저하는 일을 미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지체 없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15○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었더라 16당신들이 말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하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17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18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19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20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21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 22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시리로다(15-22)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을 계속 듣고만 있던 엘리후는 그동안 참고 있던 말들을 쏟아 내면서 먼저 욥의 세 친구를 책망합니다. 본격적으로 욥을 향해 말하기 전에 먼저 그들은 잘못을 짚고 넘어가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말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말합니다. 그의 말과 태도에서 세 친구와는 다른 참된 지혜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1) 할 말을 잃은 세 친구(15)

 

숲의 친구들은 욥이 강력하게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자 거기에 할 말을 잃었고(1) 이제는 엘리후의 우회적이면서도 단도직입적인 유창한 언변과 논리에 말문이 막혀 다시금 할 말을 잃었습니다(15). 엘리후는 지혜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과 욥과의 논쟁에서 어리석음과 무능함을 보였다는 자신의 평가를 듣고도 아무런 변명이나 반박도 못한 채 서 있는 친구들을 보고 마음에 더 큰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세 친구가 각자 자기 몫을 할당받아 욥과 논쟁을 했듯이 이제 그도 자신의 몫을 찾아 욥과 논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합니다.

 

(2) 세 친구들 책망하는 엘리후(16)

 

욥의 변론에 제대로 반박도 못하고 엘리후의 책망에 할 말을 다 잃은 친구와는 대조적으로 엘리후 마음속에는 할 말이 가득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처음부터 욥과 친구들의 논쟁을 계속 듣는 동안 합리적인 대화가 오가길 기다렸고, 들으면 들을수록 분이 가득 차고 할 말이 마음에 계속 쌓였으나 아직까지 의견을 발설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그에게 지혜로운 생각을 불어 넣어준 전능자의 영이 이제 그에게 말을 하라고 다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주둥이까지 꽉 찬 밀봉한 포도주 통이나 포도주를 가득 넣은 새 가죽부대처럼 할 말이 그의 목구멍까지 차올라 말을 안 하면 터질 것만 같습니다. 6절부터 엘리후는 계속해서 자신이 말을 안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자신은 사람의 낯을 보거나 누구의 편을 들어 비위를 맞추지 않고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깨달음을 주신 그대로를 말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가 만일 정직하고 공평하게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그 자리에서 데려가실 것이라고 주장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공평하게 진술할 것을 약속합니다.

 

(3) 할 말이 가득한 엘리후(17-22)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가 대화하는 동안(3-31장) 그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속히 말하고 싶었지만 기다리느라 얼마나 답답했던지 32:6-22에 이르도록 구구절절 답답한 자기 심정을 토로하고 세 친구들의 무능을 비판하며 자기의 말의 정당성을 설명하느라 정작 욥을 향한 의견 제시는 아직 시작하지도 못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전해 줄 책무가 있습니다. 신실한 사람들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함으로 사람들을 진리의 빛으로 인도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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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4-02)


하나님 나라를 가르친 비유(2)

마가복음 4장 13-25


 

하나님의 말씀이 씨라면 열매는 그 말씀으로 인한 사람들의 삶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것을 싫어합니다그 때문에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막고 방해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더 나가서 말씀에 순종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당신에게도 그런 사탄의 방해 현상은 없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그 중에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통해 예수님은 성도들이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어서 등불의 비유로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세상에 확실하게 드러나도록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말씀을 듣는 태도의 중요성을 설명하십니다.

 

씨 뿌린 자의 비유에 대한 설명(13-20)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우리들이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십니다예수님은 항상 일상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는 사물들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을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본문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비유들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기초적인 비유입니다.

 

13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13-14)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비유이기 때문입니다이 비유를 먼저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씨앗이 땅에 떨어지면싹이 나고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있으면 그 마지막에는 완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작은 출발이 큰 완성을 이루기까지 성숙한 과정이 필요합니다어떤 일이든지 작게 출발하지만 미래에 큰 완성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일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원리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현실에 완주하지 않고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작은 출발이 미래에 큰 꿈을 이루는 성도들로 살아간다면 희망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땅에 뿌려진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각종 땅들은 말씀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심령을 의미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은 전파되어지지만 때로는 배척을 받기도 합니다그러나 결국에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어 집니다그것은 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령에 따라 달라집니다그래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주었을 때사람들의 다양한 반응들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1) 길가에 뿌려진 씨

 

15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15)

 

길가의 땅을 의미하는 사람은 딱딱한 마음을 자신 사람입니다아예 처음부터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말씀이 전파되어지지만 사탄이 말씀을 빼앗고 맙니다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막 3:6). 그리고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치유를 부정했던 사탄의 역사과 같습니다(막 3:22).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보았습니다만그것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가짐으로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그들은 보고 들은 것들로 예수님을 대항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은 즉시 아무런 반응이 없거나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그래서 세상에는 항상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이들 때문에 박해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2) 돌무더기에 뿌려진 씨

 

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16-17)

 

돌무더기에 비유된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는 처음에는 기쁨과 감격으로 듣지만마음 속 깊이 믿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길가에 뿌리진 씨보다는 오래 남습니다평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환란이나 박해가 닥치면 곧 믿음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랍니다그 다음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사람들과 똑같습니다(막 11:18). 주위의 환경과 변화에 따라서 춤추는 사람입니다은혜를 받을 때는 혼자 다 믿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시험이 들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비난하는 사람들과 똑같습니다그들은 어떤 환경에 자신의 유익이 있으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잘 따라 순종하다가어려움이 오면 배반하는 사람들이 돌밭에 뿌린 사람들과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즉흥적인 사람들이 대부분 돌밭에 뿌려진 사람들처럼 반응합니다말씀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합니다그래서 고난을 거치지 않는 믿음은 장담하거나 자신해서는 안 됩니다성도들에겐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고난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믿음을 지키면서 어떤 환경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그래서 평탄할 때더 깊이 말씀을 배우고 경험하고 말씀의 능력을 확신해야 합니다.

 

(3)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

 

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18-19)

 

가시덤불에 비유된 사람은 마음속에 가시덤불과 같은 걱정과 욕심이 가득한 사람입니다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세상의 염려와 제물의 욕심이 가득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삶이 바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막 10:17-22). 부귀와 재물에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들입니다세상의 것들이 가득 차 있어서 하나님의 것들이 들어올 여유가 없다면가시밭에 뿌려진 사람들과 똑같습니다그들은 밖에서 오는 고난은 잘 견뎌내지만 내면에서 일어나는 세상 염려와 재물 유혹에 스스로 무너진 것입니다그래서 안락함과 번영이 항상 축복은 아니며 더 무서운 시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잠시 동안 말씀에 살아있긴 하지만끝까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열매가 없는 삶은 살아있는 동안 의미가 없습니다열매가 없으면 실패입니다열매는 결실입니다종종 신앙의 경륜만을 열매로 보며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 좋은 땅에 뿌려진 씨

 

20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20)

 

좋은 땅에 비유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말씀을 마음에 깊이 심어두어 삶에 순종함으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외적인 환란이나 내적인 유혹을 모두 말씀으로 이기고 끝까지 살아남습니다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들을 잘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와 같은 인물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되었다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 좋은 땅과 같은 사람들입니다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덕을 세우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시대에 좋은 땅에 심은 씨처럼풍성한 열매를 통해서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씨앗들이 결실한 양이 삼십 배육십 배백배로 다르듯이제자들이 순종하여 맺는 성령의 열매들은 그들의 능력과 처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열매를 위해 오늘도 잘 인내하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좋은 땅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 밭에 잘 받은 자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말씀에 대한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말씀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하지만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말씀의 씨가 땅에 뿌려진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당신은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그러한 것들을 이겨 내야 합니다.

 

비유를 대하는 자세(21-25)

예수님께서는 비유는 목적이 진리를 숨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있습니다비유를 듣고 마음에 새기는 사람들은 더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1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21-23)

 

하나님 나라는 지금은 숨겨 있지만 언젠가는 등불의 목적처럼 들어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등불은 등경 위에 두고서 어두움을 비추는 것이 목적입니다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습니다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는 성취되어갈 것입니다그러므로 믿음의 귀로 이것들을 들어야 합니다우리는 말씀을 잘 배우고 묵상하여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4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24-25)

 

씨를 받는 땅이 중요하듯이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받는 사람들의 태도가 중요합니다말씀에 대한 태도에 따라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어집니다말씀을 듣고도 그것은 헤아리고만 있다면 헤아림을 받게 되어질 것입니다말씀을 겸손하게 받으면 받은 만큼 열매를 맺습니다비유를 통해 더 분명히 깨닫겠지만거부하면 비유를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그들의 삶은 더 완악해질 뿐입니다.

 

말씀이 너무 흔하거나 너무 귀해서 잘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오늘 당신의 말씀을 듣는 태도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그리고 열매 맺는 좋은 땅과 같은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사탄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하지만 좋은 영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들었을 때에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실 것입니다그들에게는 기적적인 일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일어날 것입니다어떤 말씀이든지 받아들이기 부족함이 없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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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4-01)


하나님 나라를 가르친 비유(1)

마가복음 4장 1-12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할 수 없을 때다른 비슷한 것으로 설명합니다다른 것을 빗대어 설명한 것을 비유(比喩)’라고 합니다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통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특히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이렇게 가르쳐야할 이유는 일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비유로 시작합니다. 여러 가지 비유를 하시는데, 농사, 등경 그리고 겨자씨 등 일상에게 친숙한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맨 먼저 네 종류의 밭을 비유로 밭에 떨어진 씨가 각기 다른 결과를 소개하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가르치신 예수님(1-2)

예수님께서 말씀의 비유는 천국의 비밀입니다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알려야할 사람들에게는 알리고몰라야할 사람들에게는 모르도록하기 위한 방법이십니다우리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대한 말씀을 모른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예수님을 비유를 통해 가장 쉬운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1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2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1-2)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다시 바닷가로 가셨습니다(참조 1:16; 2:13; 3:7). 바닷가에 계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주변에는 점점 배에 오를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바닷가는 가르침의 장소로서 집에 비해 두 가지 면에서 장점이 있었습니다첫째는 집은 공간적인 제약이 있는 반면(2:2), 바닷가는 더 넓어서 아주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습니다둘째는 먼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배를 타고 몰려오기 쉽고(3:8) 또한 가르침을 가른 곳으로 빨리 전파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의 장소로 바닷가를 선택하셨습니다.

 

무리가 많이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통해 많은 것을 가르치셨는데그 중에 하나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3-9)

하나님 나라는 씨 뿌린 비유처럼 임한다고 소개하십니다하나님의 왕권의 통치가 임할 때 성도들이 어떤 반응을 하느냐 태도를 말씀합니다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한 심령이 되길 원한다면과거를 통해서 교훈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3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3-9)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닷가에 모인 무리들에게 비유가 시작되는 3절과 9절을 통해 들으라라고 촉구하십니다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실 때처럼 같은 의미를 부여합니다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말씀을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내용이 신명기에 나타납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4-5)

 

이 신명기에서 들으라이스라엘아!(쉐마이스라엘!)’라고 말씀하신 다음 부분에 무슨 내용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순종하는 사람들은 복을 받고불순종하는 사람들은 화가 미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하게 귀로 듣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데까지 나아가라는 요구입니다말씀에 대한 태도는 어떤 반응을 하든지 성도들의 자유입니다하지만 그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 따라 하나님께서 내리는 화()와 복()의 갈림길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들은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면 성품이 되어서 열매를 삼십 배육십 배 그리고 백 배를 수확합니다열매를 맺기까지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시에는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릴 때에 가로질러 다니면서 뿌렸습니다농부들은 어깨에 큰 주머니를 매고 한 줌씩 씨를 집어 들고 뿌렸습니다그러기 때문에 씨가 바람에 날려서 길가나 둘 무더기가시덤불 속에 떨어졌습니다그리고 좋은 땅에도 떨어지기도 했습니다따라서 열매의 수확은 씨가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달랐습니다.

성도들의 환경은 예나 지금이나 길가나 돌짝밭과 같고 가시나무가 가득한 환경들입니다이러한 환경 속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그렇게 어려운 환경이라고 한단지라도 말씀의 씨는 뿌려지고 그 가운데서 열매는 맺게 되어 있습니다.

씨 뿌리는 농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의미합니다어려운 환경에서도 씨앗이 좋은 심령들에게 떨어지면 열매는 삼십 배육십 배 그리고 백 배를 맺게 될 것입니다들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백 배의 축복을 주신 것처럼당신의 삶 가운데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밭이 되길 원한다면좋은 마음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묵은 심령을 새로운 좋은 심령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시편 기자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편 51:10-13)

 

정직한 영혼에 말씀의 열매가 있습니다그래서 말씀을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어두운 세상에 물들려진 심령이나더러운 죄악으로 물들려진 심령으로 그리고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한 가운데 말씀을 받으면 말씀을 왜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9)고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받아 들릴 믿음의 마음이 필요합니다믿음의 마음이 준비가 된 사람들은 마음에 옥토가 되어서주님의 비유를 알아듣고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어집니다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은 옥토에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그들은 주님의 말씀과 응답에 목말라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목회자와 관계에서 시험이 들면자신의 마음이 닫히고 굳어집니다그래서 목사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그것은 누구에 손해입니까자신의 손해가 됩니다당신이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면목사님이 어떤 말씀을 해도 자신의 심령에 감사함으로 말씀이 깊이 심어지고그 말씀이 자신의 삶을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똑같은 씨지만 어떤 땅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지듯이똑같은 말씀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확연히 달라집니다그러므로 말씀 앞에서는 당신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당신의 심령은 좋은 땅과 같이 준비되어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비유(10-12)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지만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그래서 조용한 시간에 예수님께 무슨 내용인지 묻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10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11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10-12)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무리들이 없을 때제자들은 조용한 시간에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지 그리고 씨를 뿌리는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특권입니다성경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와 같이 조용한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묵상의 시간을 통해 설명해주시고 이해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그래야 말씀을 통한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여주셨습니다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만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셨습니다그래야만 알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기에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아브라함은 마음에 걸려서 하나님께 의인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간구합니다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아브라함을 기억하면서 롯을 구출시키셨습니다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비유를 통해 가르치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셨습니다당신은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깊이 알고 계십니까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예수님께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반응은 다양했습니다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주님은 우리가 말씀에 진실하게 반응하고 순종함으로 삶이 변화하기를 기대하십니다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말씀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어떤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말씀을 지키고 우리 인격과 삶으로 말씀의 씨를 뿌리는 충성스러운 자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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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3-02)


진정한 가족을 가르쳐 준 예수님

마가복음 3장 20-35


 

초대교회 로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네로 황제 시대에 성찬식에 사용된 피를 어린이를 잡아서 피를 먹고 마신다고 오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미치광이 네로 황제의 로마에 대화재를 낸 후그들에게 방화의 누명을 씌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형을 받기도 했습니다이러한 오해는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비난을 받거나 핍박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그러나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주님도 오해와 비난과 핍박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와 축사를 하셨지만 서기관들은 매도했습니다. 친족들도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진정한 영적인 가족이 누구인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가족은 육신의 친족도 아니고 율법을 잘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모함을 받으신 예수님(20-27)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이 소문은 순식간에 펴져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길 원했습니다그러나 주님의 곁에는 항상 호의적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예수님을 모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0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20-22)

 

예수님의 사역은 점점 힘을 더해 가고 있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께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그들을 돌보셨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친족들은 예수님께서 정신이 이상하단 말을 들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을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가족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을 위한 일처럼 보이지만그것은 십자가의 길을 가로 막는 일이었습니다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실 것을 예언했을 때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말렸지만그것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방해했던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의 친족들을 괴롭힌 것은 서기관들의 태도였습니다그들 또한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성경에 정통하다고 한 서기관들은 한 술 더 떠서 예수님이 바알세불이 들렸고귀신의 왕을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한다고 모함했습니다하지만 그들은 더 율법을 가장 잘 알고 진리를 지키는 자로 자처하면서도 정작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영혼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못하는 지식이라면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오해는 받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가까운 사람이나 권위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오해를 받으면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하나님 나라의 일하다가 오해와 모독을 받을 때 억울함을 당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것 때문에 침체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열심히 일하셨지만이런 일로 모함을 당하셨습니다사탄은 활동하는 성도들을 주저앉히려고 노력하지절대로 잠자고 있는 성도들을 깨우진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가까운 가족도성경을 많이 아는 서기관들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던 것입니다성급하게 다른 사람을 겉모습만 가지고 평가한 태도는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계속해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모략하고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23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23-27)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하셨습니다귀신을 명하여 내어 쫓으셨습니다그런 모습을 보면서 서기관들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귀신 논쟁은 일반적으로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반대 세력에게 사용하는 가장 혹독한 사회적인 공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흥분하거나 분통을 터드리지 않습니다오히려 말씀으로 침착하면서도 분명하게 비유를 통해 변호하셨습니다본인이 귀신의 힘을 입어 쫓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씀합니다비유로 나라가 나라 안에집이 자기들끼리 싸우면 설 수 없음을 설명합니다그러한 잘못된 논쟁을 일축시키십니다예수님께서 귀신을 축사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사탄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결박하여 승리한 사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사탄의 세력은 여전히 막강하지만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가공할 만한 사탄의 힘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지만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습니다예수님의 능력은 강하여서 사탄을 멸하기 시작해서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성령 훼방죄를 설명하신 예수님(28-30)

성령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은 성령이 하는 일들을 훼방하는 것입니다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방해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28-30)

 

예수님의 사역을 귀신의 사역이라고 진리를 왜곡하는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경고로 이어집니다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행동입니다그들을 향해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0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0-32)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용서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구원의 진리를 매도하고 훼방하는 것만큼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성령 훼방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태도를 가리킵니다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을 성령이 아니라 사단의 능력으로 돌림으로써 성령을 훼방했습니다메시지 전달자에 대한 거부는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것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성령께서 행하신 권능의 역사들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명백한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일은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하지만 구원의 진리를 매도하고 훼방하는 것만을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그래서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5-8)

 

영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분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가족을 설명하신 예수님(31-35)

예수님의 사역에 가장 이해하고 후원해 주어야할 사람들은 예수님의 친족들일 것입니다그러나 주님은 가족들로부터 오해를 받아 배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이처럼 가장 가까워야할 사람들이 가장 비난하고 오해한 적은 없습니까그때 본문의 주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31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1-35)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이 이상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예수님은 모친과 동생들이 찾고 있다는 말에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라고 대답하셨습니다예수님의 발언은 혈족 중심이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당시에는 가족을 거부하거나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삶의 기반을 잃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못 오해하면 인간적인 육신의 관계를 부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절대로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에게 불효자가 아닙니다주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걱정했던 분이십니다그의 형제들은 지금은 오해했겠지만나중에 사역을 이해합니다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함께 앉아있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이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 나라의 가족은 육신의 가족도 아니고 율법을 잘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35)이라는 말씀합니다예수님의 참된 가족은 혈통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임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인종과 계층을 넘어서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한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입니다마가는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들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묘사함으로써 이러한 주제를 더 분명하게 전달합니다.

 

믿음 때문에 종종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어려운 관계에 있습니다그런 분들이 있다면 예수님의 모습을 보시며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주님을 통해서 용기와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지금은 당신의 가족이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가족을 미워하거나 저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당신을 이해해줄 때를 바라보면 끝임 없는 사랑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밖에 있던 당신을 부르셨습니다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하늘 가족이 되게 불러주셨습니다당신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대접받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삶 가운데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고난이 임할 것입니다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기뻐하실 바랍니다믿음의 가족들이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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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3-01)


열두 제자를 세우신 예수님

마가복음 3장 1-19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길 원하십니다그 관계는 막연한 관계가 되지 않고 계십니다그저 그런 관계도 원치 않습니다항상 주님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관계로 살아가시길 원하십니다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하나님과의 관계 단절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끝낸다는 것입니다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이 기뻐하신 삶이 무엇입니까본문은 그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 2장부터 시작된 논쟁은 장소가 바뀌면서 더욱 경렬해집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항상 예수님을 비판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이 그런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한번 종교 지도자들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의 반응을 살피고, 그 사건을 통해 죽일 모의를 꾸몄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사역을 지속하십니다. 그리고 함께 사역할 열두 명의 사도를 선택하십니다.

 

 

안식일에 손을 고치신 예수님(1-6)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하셨습니다갈릴리라는 지역은 이스라엘에서 소외되어지고 아픔이 있는 배경을 가지고 이었습니다이런 곳에서 많은 사역들을 이루어가시지만반대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나타나 있습니다.

 

1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1-6)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그곳에 손 바른 사람이 있어 긍휼하게 보시지만바리새인들은 연약한 사람을 통해 예수님을 잡을 미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악한 일과 선한 일을 대조하고 질문하고 있습니다선한 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이 예수님의 사역이라면악한 일로 죽이는 일은 바리새인들의 일들이라고 대조하며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평강과 긍휼 그리고 축복의 사역이지만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대적하면서 죽이려는 음모만 꾸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무슨 날입니까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신 후에 마지막 날은 쉬신 날입니다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쉬며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을 주셨습니다그리고 이 날에는 하나님 안에서 쉬면서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날입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어느 것이 옳으냐”(4)라고 묻습니다악으로 가득한 심령들은 아무 대답도 못합니다예수님께서는 그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습니다죄로 인해 오그라든 인간의 몸과 영혼을 온전케 만들어 주셨습니다하나님과 인간이 조화로운 관계를 누리게 하는 사명을 성취하고 계십니다안식일은 편안히 쉴 수 있는 날이었지만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오히려 사람을 괴롭게 하는 날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고소할 빌미를 잡으려는 의도를 아시면서도손 바른 사람을 공개적으로 고쳐 주셨습니다예수님은 손이 바른 사람을 통해 안식일에 잘못된 규례를 바로 잡으시길 원하셨습니다그들에게 안식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사랑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 그들은 자신들과 종교적 신념이 전혀 다른 헤롯당과 협력하여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가장 중요한 원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일에 맺어있어서 안식일의 규정을 내세우며 고통 받는 사람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습니다그들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그래서 종교는 형식적이 되고 이권이 주인 되어 생명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버렸습니다연약한 손 마른 자의 고통만 더 증가시켰습니다당신의 신앙은 생명을 살리는 믿음입니까형식만 남아있는 종교입니까? 21세기의 신종 바리새인처럼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평안 그리고 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 있는 삶이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7-12)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자유를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유를 주셨지만 그것을 가지고 방종하면서 살아갑니다반대로 율법을 통해서 억압을 당하면서 살아갑니다예수님께서는 규모 있는 삶을 위해 오셨습니다.

 

7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7-12)

 

바리새인들의 못된 의도에도 불구하고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적의를 피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제자들과 함께 다시 갈릴리 호숫가로 나갔습니다그곳에서도 가르치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두움에 있던 사람들에게 광명을 찾아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말라기 선지자 이후 복음의 빛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으로 어두워졌습니다예수님의 가르침은 생명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이러한 소문은 각처에 펴졌습니다꿀이 있는 벌이 모여들듯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점점 더 사람들이 곳곳에서 예수님의 행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왔습니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먼 거리에 있던 이두매와 두로와 시돈처럼 먼 거리에서도 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그렇게 나온 사람들을 예수님은 하나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몸과 마음을 고쳐주셨습니다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아로새겨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는 귀신 들린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귀신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아직까지도 제자들도 깨닫지 못한 놀라운 영적 지식을 귀신들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매우 흥미롭습니다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신분이 무리에게 널리 알려지는 것을 아직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세우신 예수님(13-19)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셨지만수많은 무리를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예수님의 사역 중에 갈릴리에서 중요한 사역은 사도들을 선택하신 일입니다사역의 전반부에서는 대중을 상대로 사역하지만후반부로 갈수록 제자들에게 많은 시간을 집중하십니다.

 

13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13-19)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무리를 떠나 산 위에 올라가셨습니다산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는 일군을 세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이 사건은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는 것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 중에서 자신이 원하시는 열두 명을 선발해서 그들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이 열두 명을 세움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육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두 명의 아들들을 통해서만 이스라엘이 이루어졌습니다하지만새로운 영적으로 이스라엘은 새로운 열두 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그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회개와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로 이루어졌습니다예수님께서 세우신 열두 제자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기초가 됩니다이들은 새로운 신앙 공동체의 대표자들입니다출신성격직업 관심사 등 모든 것이 달랐지만하나님 나라를 전할 사명자로 부르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은 따른 것은 흥분을 일으키고 인기를 얻습니다그러나 반면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군중에 많은 무리에 휩싸여서 자신이 가야할 많은 방향들을 놓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주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은 혼자 담당하지 않으셨습니다사역에 많은 부분을 제자들과 공유하길 원하셨습니다제자들을 구분시켜서 그들을 훈련시키시길 원하셨습니다.

 

그 사도들을 구별하신 목적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4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14-15)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를 세우셨습니다그들을 따로 세운 목적은 첫째는 주님과 함께 있게 하고다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시도록 하였습니다그리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까지도 허락해 주셨습니다주님과 함께 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믿음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제자로 세우셨습니다아주 평범하고 배척 받던 당신을 불러 세우셨습니다또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선택 때문입니다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즉 임마누엘 되는 삶입니다그리고 주의 명령을 가지고 나가서 증거 하는 것입니다결과적으로 당신이 복음을 증거할 때 더러운 귀신들을 쫓겨나는 능력을 맛볼 것입니다.


어떤 수고를 감내하더라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하나님을 찾는 무리들 중에서 제자로 세우며 자신의 사명을 부여해 주셨습니다우리는 불러서 제자를 삼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주님의 권능을 선포하는 능력 있는 성도들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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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2-02)


 죄 사함을 보여주신 예수님

마가복음 2장 13-28절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사람마다 모두 다릅니다. 당신이 만난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라고 분명하게 소개할 수 있습니까? 신앙 간증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잘 구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둠 속에 삶, 예수님을 만날 때의 변화된 과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삶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거듭난 삶은 과거의 삶에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새로운 문을 여십니다. 이제 새로운 문으로 들어온 사람과 거부한 사람을 설명합니다. 먼저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고, 세리와 함께 집에서 잡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율법에 매인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어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면서 이삭을 꺾었던 일에 대해 또 안식에 대한 문제로 제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입증하셨습니다.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13-17)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평이 좋지 않는 사람과는 같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외모로 보고 판단하는 선입견(先入見)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외모를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으로 살펴보셨습니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13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3-17)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면 누구나 환영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지만, 반대로 그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증오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 새로운 제자를 부르심(13-14)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시내로 들어가시면서, 세관을 지나치셨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인 레위라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사람의 마음의 눈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14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야고보와 요한처럼,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곧 바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죄인 취급을 받았지만, 누구보다도 넉넉하게 살 수 있었던 세리라는 직업을 버리고 가난하지만 떳떳하고 자유롭게 사랑 받으면서 인간답게 대접받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레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배설하고 친구들까지 초청하였습니다.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며 살던 친구들인 동료 친구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칭찬 받거나 존경받은 직업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멸시와 혐오에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로마 정부에 협조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매국노로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상대하여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도 죄인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자비의 사람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순식간에 회개와 사죄가 선포되는 부흥회 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을 보셨을 때,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러한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므로 유대인들이 쌓았던 정결법의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만든 부정과 정결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다시 쌓았던 것입니다.

 

(2)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15-17)

 

하지만 그들의 기쁨을 멸시하고 증오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유대사회는 사람들을 구분했습니다. 그 당시에 죄인들과 세리들과 같이 한 식탁에 앉은 것은 불경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바리새인들에게 불온한 사람으로 증오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라고 단지를 겁니다. 그들에게 경건한 사람은 세리와 죄인들과 상종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옷깃만 쓰처도 부정해진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예수님을 다르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은혜와 구원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그들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은 건강하고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할 필요도 없고, 구원 받을 필요도 없고, 메시가 오시면 가장 먼저 축복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비판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판단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죄인인 레위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의인이라고 자부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메시아를 못 알아보고 대적했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회개해야 될 진짜 죄인이고 병든 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세리인 레위가 바로 우리에게 마태복음을 기록한 세리 마태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 마태와 친구들인 같은 사람들을 환영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멸시하는 사람들을 무시할 때, 예수님께서는 큰 인기를 얻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인기와 평판보다도 자신이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사명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인은 실제적인 의인이 아니라 ‘자칭 의인’을 지칭한 것입니다(참고 누가복음 7:36-47).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예수님 앞에 나오면,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회개와 믿음으로 이루어진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혹시 당신도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기보다는 비판하는 데 익숙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은혜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차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차별 없이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삼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에 확장하는 일에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차별을 두고 있다면, 예수님의 뜻과 반대되는 길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금식에 대한 논쟁하신 예수님(18-2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 왕을 인정하고 왕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새로운 가치관과 삶의 방식, 새로운 인생 목표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삶입니다. 바울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롭게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라고 말했습니다. 새 날이 새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새롭게 됩니다.

 

18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18-22)

 

세리의 집에서 만찬에 초대되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있을 때, 바리새인들이 요한의 제자들과 함께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한 번 대속제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을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하지만 금식했다고 자신들이 더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금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왔습니다. 이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평할 때, 세리와 죄인 친구며,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못마땅한 것으로 평가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금식과 경건 생활에 대한 관습의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 종교에는 세 가지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구제, 다음은 기도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식이었습니다. 이것을 그들의 경건 생활에 판단 기준이었습니다. 과거의 규정을 지키지 않은 제자들의 행동을 문제를 삼았던 것입니다.

 

(1) 혼인잔치 비유(19-20)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예를 들어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혼인잔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도 절대로 금식을 혼인날과 겹치지 않도록 했습니다. 오히려 실컷 먹고 마시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잃을 때가 올 텐데, 그 때는 금식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고 이스라엘을 신부에 비유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을 신부로 비유한 것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음란한 신부 이스라엘이 우상 신랑과 바람이 나서, 신랑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부부관계가 깨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신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다시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 그 구원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고 잔치할 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가 올 때인데 그 때는 금식해야 합니다.

 

(2) 새로운 부대의 비유(21-22)

 

원래 포도주 부대는 염소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낡은 부대는 신축성이 떨어져, 새 포도주를 담으면 가스 압력 때문에 떠져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21)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부대와 같은 풍요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왔는데, 옛 것만 고집하고 그 나라를 영접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종교는 의식 같은 종교 행위로 자기 의를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허하게 인격적으로 신랑 예수님을 영접하며 그 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찌든 우리 생각과 가치관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만끽할 수 없고, 예수님께서 우리에 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만 아니라 공동체도 예수님의 복음을 담을만한 열린 마음과 겸허한 마음으로 늘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 합니다.

 

회개는 과거의 잘못된 삶들을 버림 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생사가 달린 문제라도 버림으로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물을 세리 테이블 그리고 아버지까지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과거를 돌아보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세 가지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신랑의 비유, 생베 조간의 비유 그리고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비유를 통해서 종교 지도자들에 잘못된 생각에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결혼식 잔치를 예로 들면서 금식은 필요할 때에 정당한 이유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사역 상황이 메시아 잔치 상황이기에 지금은 금식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밝히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22)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옛 시대를 ‘헌 가죽 부대’와 ‘낡은 옷’으로 비유하고, 새 시대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 그리고 ‘생베 주각’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옛 시대의 방법으로 살았다면, 새로운 시대는 비통에 금식이 아니라 잔치와 같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야 합니다. 새 시대에 맞은 행동이 요구된 것입니다. 새로운 전환의 배움에 겸손한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새 포도주를 과거의 낡은 율법의 부대에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과거에 것으론 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부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거나 새로운 시대를 읽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옛날 방법만 고집한다면 세상을 쉽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 걸맞은 행동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기독교가 이 시대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못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대를 보는 안목이 부족해서 기독교가 홀대 받고 있습니다. 세상에 기독교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이런 부분입니다. 이런 것들을 잘 생각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안식일에 대한 논쟁하신 예수님(23-28)

하나님 나라는 과거에 억매인 나라가 아니라 아닌 새로운 나라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제도로부터 회개이며, 잘못된 형식적인 종교로부터 회개입니다. 잘못된 생활에 매여 있으면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바리새인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생명이 빠진 형식에 집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은 가물어 간 것입니다. 그곳에 새로운 단비를 부어주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23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3-28)

 

예수님께서는 새 시대의 특징으로 한 가지 더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안식의 나라이고, 구원은 안식을 얻는 안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안식일에 대한 논쟁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가던 중 이삭을 꺾어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안식일 규례와 관련하여 문제를 제기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법으로 치면, 그것은 추수행위고 탈곡행위로 안식일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일행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제단 진설병(빵)을 먹어 던 일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사무엘상 21:1-6). 이러한 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예를 통해 반박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의 제도나 규례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주인도 정죄하지 않는 일을 바리새인들이 정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39가지의 할라카라든지 234가지의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이 규례들을 지키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 시대에는 안식일 노예의 날이 아니라 축복의 날로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차 메시아를 보내서 죄와 사망 아래서 안식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태초의 안식을 회복시켜 주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왔고, 그 메시아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는 모든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성도들이 쉬고 있을 때 무능하다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일하고 생산하고 성취해야 잘한다고 칭찬합니다. 결국에서는 쉬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하다가 죽게 됩니다. 죽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죽을 만큼 힘들게 일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진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제자의 삶처럼, 우리들도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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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2-01)


죄 사함을 보여주신 예수님

마가복음 2장 1-12절


 

세상을 살아가보면 난관(難關)에 부딪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사람들의 태도가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대체적으로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부정적으로는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고 원망하며 분노합니다. 반대로 문제 앞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단 것입니다. 난관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 본문은 2:1-3:5까지 등장하는 다섯 가지 논쟁 이야기의 첫 번째 해당합니다. 가버나음에서 벌어진 중풍병자의 치유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신 예수님의 사역이 그의 백성들에게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경험하는 수단으로서 믿음에 대한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예수님(1-5)

하나님께 포기하지 말고 은혜를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성도들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는지,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성도들을 향해 조롱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결해 나가면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1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1-5)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친 후, 며칠이 지나서 가버나움에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한 집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그곳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곳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는 과정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1) 가버나움으로 가신 예수님(1-2)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진행하셨스니다. 이 사역은 고통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사역이었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뿐 아니라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귀신들인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사역도 같이 수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대중적인 인기는 상종가를 쳤던 것 같습니다.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자,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불신앙의 도시’로 낙인찍힌 가버나움에도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얼마나 운집했던지 문 앞까지도 사람들이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차서 용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 일전에 진행되었던 그의 갈릴리 사역의 여파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곳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를 가르침과 치유의 형태를 통해서 증거 하셨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도’라는 표현은 문맥상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3-4)

 

마가복음은 중풍병자 치유 이야기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마태복음보다 더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마태에서는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을 예수님께로 접근시켰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습니다. 반면에 마가의 본문은 중풍병자가 함께 온 사람들이 수 많은 사람들 때문에 지붕을 통해서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의 가옥은 주로 평지붕이었고, 그 지붕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지붕은 흙과 짚 나무 등을 이겨서 만들었기 때문에 중풍병자를 달라 내린 사람들이 지붕을 해체하기가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적 구조물에 비해서 손쉬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은 매우 곤란한 상황을 야기하는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남의 집 지붕을 훼손한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쉽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건으로 돌아가서,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쉽지 않습니다. 중풍병자는 친구들에 의해 예수님께서 계신 곳까진 왔지만, 많은 무리 때문에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방법은 지붕을 걷어내고 중풍병자가 누어있는 침상 채 예수님께서 계신 집안으로 내려 보낸 방법이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를 친구로 둔 네 사람의 믿음을 봅니다. 지붕을 뜯어서라도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온 이들의 모습 속에서 행동하는 믿음과 사랑의 모습을 배웁니다. 자기들의 문제가 아닌데도 중풍병자를 고쳐 주기 위해 그곳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저돌적인 행동을 취한 이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신앙이었습니다.

 

(3) 죄 사함을 선포하시는 예수님(5)

 

예수님께서 보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에서 그들이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그 자체로는 분명해 보이지 않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중풍병자까지도 포함된 사람들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전자를 의미한다면 믿음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적인 성격에 대한 강조를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붕 해체 작업이 짧은 시간 안에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고 네 친구들과 함께 누워 있는 중풍병자의 동의 없이 진행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아마도 ‘그들의 믿음’에서 ‘그들’은 중풍병자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끝까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이방여인이 부스러기 운혜라고 사모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만지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내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부스러기 은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지시고 치유하며 세우실 것입니다.

 

간절히 치유 받기 위해 남의 지붕을 부스면서 까지 예수님께 나오는 중풍병자와 네 친구들의 행동을 믿음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들의 행동은 일반적인 상식이나 관념을 벗어난 급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체면이나 염치, 사회적인 통념 안에 갇혀있는 세상 가치관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아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가는데, 당신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의 믿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져야할 믿음입니다. 뜻하지 않는 난관에 부딪히면, 쉽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포기가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주님의 제자들이 나가는데 뚫어내야 할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담대하게 통과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을 갖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주님께 나아가길 머뭇거리진 않습니까?

  

잘못된 믿음을 꾸짖는 예수님(6-10)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모르면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하나님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성령의 역사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판이나 경험을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6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6-10)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모든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은 아닙니다. 같은 일이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시고 게시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1) 서기관들의 도전(6-7)

 

서기관들은 자신의 생각에 다른 것에 예수님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관점과 가치관과 신학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진단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마음을 아시고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죄 사함에 대한 관점은 서기관들의 생각이 맞습니다. 메시아 시대가 되면 죄 사함의 은혜가 있을 것임을 구약의 선지자들이 공통적으로 외쳤던 내용입니다(이사야 29:18; 예레미야 31:34; 에스겔; 미가 7:18-19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에서 죄 사함의 주체는 의심할 나위 없이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이사야 43:25; 출애굽기 34:6 이하). 하나님께서는 죄 사하는 권세는 사람들에게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죄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생들은 스스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 죄 사함의 권세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위가 신성을 모독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생각은 이러한 맥락과 맞닿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적한 대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패역함과 외식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그와 같지는 않았으며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독법입니다. 패역한 지도자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에는 당시 종교적 전통에서 신성 모독으로 느낄 법한 것도 있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응답(8-10)

 

서기관들이 이러한 생각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도전에 대해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둘 다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이 더 어렵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그 말의 효력이 나타났는지를 어느 누구도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죄 사함의 선포는 절대로 쉬운 발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라 여겼기에 그 말이 야기할 수 있는 파장은 정상적인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죄 사람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유대인의 정서상 훨씬 어려운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불신은 마음 밭에 거친 독초들입니다.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면서 마음속에 불신앙과 적의의 독초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을 키우고 실천하는 사람의 극명한 대조를 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집 문 안에 있지만 실제로 그들은 주님의 문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비록 집 바깥에 있었지만 주님이 칭찬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서라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나아가는 믿음의 행동은 주님이 보시고 기억하시며 칭찬하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사람들의 반응(11-12)

적극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는 자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신성모독죄로 정죄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 치유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11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11-12)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선포하셨을 때 서기관들의 생각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의 논쟁을 정리하시면서, 자신이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의도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고 명하셨습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은 눈에 보이는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현대의학에도 중풍병자를 완치할 순 없습니다. 마비되었던 기관이 움직인다던지 조금의 차도가 있을 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질병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요한복음 9장). 물론 모든 질병을 직접적으로 특정 죄에 대한 결과로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에게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은 그의 경우에 있어서 죄와 질병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즉, 이 경우에 있어서 질병이 치유된 것은 죄 사람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우려와 상관없이 중풍병자에게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는 ‘곧’ 일어나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중풍병이 완전하게 나아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이 중풍병자 치유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단순히 ‘이적 행하는 자’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강조점은 선지자들이 예견했던 하나님의 종말론적통치의 한 부분인 죄 사함의 사건이 예수님을 통해 실제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사함하는 권세가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죄로 물든 몸과 마음을 모두 치료하십니다.

마가의 이러한 묘사는 이 이야기의 초점이 단순히 기적 이야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예수님의 실체적인 통치사역에 맞추어져 있음을 보게 합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경험하는 수단으로 믿음에 대한 강조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조점은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이는 서기관들과 사람들의 믿음이라는 적절한 대조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가버나움에 찾아온 중풍병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자들은 거침없는 믿음으로 반응하였지만,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못 알아본 그들이 도리어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우리 앞에 다가온 새로운 시대에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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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1-04)


우선순위를 따라 행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장 35-45절


 

우리나라에는 실을 바늘허리에 매어 쓰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모든 일에는 일의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아무리 급하다고 순서를 건너뛸 순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예를 들어서 건물을 건축하는데 기초를 세우는 것은 가장 먼저해야할 것입니다그렇게 되지 않으면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이 망쳐지는 경우가 있습니다신앙의 가장 기초는 기도로부터 시작합니다혹시 지금 당신은 바쁘다고 기도를 건너뛰고 있진 않습니까!

 

  •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하루 종일 말씀 선포하시고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시며 더러운 귀신까지 축사 하셨습니다. 피곤한 가운데도 다음날 새벽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후 사역지를 정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리를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지만,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에 예수님의 정체가 들어나게 됨으로 잠시 한적한 곳으로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35)

사람들은 종종 어려운 현실은 대충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아무리 광야 같은 현실이라도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이렇게 넘어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그것은 바로 골방과 같은 한적한 곳을 찾아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5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35)

 

예수님께서는 전날에 분주한 하루 사역을 마치셨습니다힘든 사역을 마친 뒤에 좀 더 쉬셔야 했습니다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드는 사람 때문에 힘드셨을 것입니다하지만 육체적 필요를 뒤로 하시고다음 날 아침에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아서 홀로 기도하십니다한적한 곳은 광야를 의미합니다광야에서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항상 생명 없는 광야 같은 세상을 향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곳에서 오해를 당하고 곤욕을 당했습니다때로는 뜻하지 않는 찬사와 기대를 받기도 했습니다이러한 환경 속에서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사명입니다자신을 알아주며 칭찬이 자자한 곳에는 스스로 우쭐거릴 수 있습니다그리고 교만하여 넘어질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 자신의 소명을 잊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기도였습니다기도를 통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기도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다시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새롭게 결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과의 싶은 만남이 없고서는 세상과의 강력하게 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바쁘신 중에도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당신도 분주할수록 매일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해야 합니다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힘써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사명과 하나님의 뜻을 다시 세워 줄 것입니다그 사명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새로운 곳을 찾아가신 예수님(36-39) ⁂【 마태복음 4:23-25누가복음 4:43-44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호응하는 곳을 찾아가서 일하려고 합니다그런 곳이 일하기 쉽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전혀 달랐습니다예수님께서 자신을 반기는 사람들을 찾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36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36-39)

 

전날의 사역으로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그래서 새벽 미명부터 기도하고 있던 예수님을 제자들이 찾아갔습니다그리고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을 발견한 제자들은 모두 사람이 주를 찾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아마도 전날에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사역에 대해 사람들이 열렬히 반응했기 때문입니다이것에 제자들은 상당이 고무되었던 것 같습니다제자들이 예수님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었음을 시사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이상할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시고다른 마을로 들어가십니다예수님의 선택은 사람들의 인기와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이었습니다그래서 자신의 사명을 따라 복음 전도의 길로 떠났던 것입니다예수님을 통해 치유사건이 많이 나오지만치유가 목적이 아닙니다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선순위를 두셨고치유라는 도구를 통해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온 갈릴리로 다니셨습니다온 갈릴리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보고가 틀려서가 아닙니다다른 마을이 더 중요해서가 아닙니다하나님의 사역보다 다른 것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습니다인기나 명예는 무조건 피해야할 대상이기 때문도 아닙니다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지금은 다른 곳에 더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인기가 있든 없든고난이나 성공이 기다리던자신이 필요한 곳이든 아니든 간에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그것에 순종하고 나갔던 것입니다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 그대로 실현되는 곳에 임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인기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소홀합니다인기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명입니다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사에 보내신 목적인 영혼 구원한 것입니다당신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준이 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다른 사람에게 칭찬 듣는 것인지 아니면 그 영혼을 인도한 것인지 분명하게 기준을 세우시길 바랍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40-44) ⁂【 마태복음 8:1-4누가복음 5:12-16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신 곳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그 대표적인 사건이 본문의 나병한자를 고쳐주신 사건입니다이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40한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40-44)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을 깨끗케 해달라고 간구합니다나병환자는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를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나아와 치유를 간구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그는 원하시면라고 말할 만큼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주님의 주권을 인정할 만큼 겸손했습니다세상에는 자신이 소유한 것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풍족함으로 교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나병환자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함으로 주님 앞에 나올 때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당시에 나병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했습니다나병환자는 죽은 사람과 같이 취급당했습니다그들은 자신의 마을에게 쫓겨나서 사람들이 없는 광야로 나가야했습니다개인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절망과 단절을 겪었습니다인간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나병환자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이 그 환자 곁에서 떠났습니다그 나병환자는 주님 앞에 나와서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민망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그에게 사랑의 손으로 대어 만져주셨습니다말씀으로 명하여 그의 나병을 깨끗하게 고치셨습니다율법에 의하면 나병은 부정한 병입니다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나병환자를 만지는 것은 부정한 행동입니다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만지셨습니다그리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그에게 손을 대어도 예수님은 부정해지지 않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친히 속죄양이 되시어 그를 부정하게 한 사망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정결규례를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지심으로 더러운 병을 깨끗하면 치유하십니다나병환자를 치료하신 것은 생명이 없는 사람 같은 부정한 사람을 깨끗하게 치료하신 것입니다예수님은 이처럼 치유하실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처럼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모든 사람들은 피해가는 길을 예수님께서는 감당하시려고 당신에게 찾아왔습니다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당신을 만지시고 계십니다당신의 문제를 나병환자처럼 나간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놀라운 치유의 역사축사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다시 광야로 나가신 예수님(45)

예수님의 사명은 죽은 영혼을 찾으신 것입니다광야를 향해 영혼을 찾아나섭니다나병환자에게 치유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엄히 명령하십니다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전함으로 새로운 일들이 시작됩니다.

 

45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45)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침묵하란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사람들에게 오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죽은 영혼을 찾아 영혼 구원함이 목적이지 치유가 중심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주신 것입니다주님은 자신의 사역에 집중하기 위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복음이 전파된 것이 주님의 목표였습니다이 침묵은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 나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표시입니다.

하지만그 나병환자는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립니다그 사람에는 치유를 받은 사실보다 더 큰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그 결과 예수님은 더 이상 다른 마을로 다닐 없었습니다그리고 예수께서는 다시 광야와 같은 한적한 곳으로 다시 들어가십니다때로는 불순종의 열심보다 순종의 침묵이 하나님 나라에 보탬이 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른 사역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의 말씀을 따라 사역을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본질을 뒤로하고 다른 것에 분주한 삶이 아닌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그 때문에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끝까지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인기주의에 빠져서 자신의 사명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당신이 사명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당신만의 골방으로 들어가시길 바랍니다그곳에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그곳에서 능력이 임합니다그곳에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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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1-03)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증거들

마가복음 1장 21-34절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말은 같은 침대에 잠을 자더라도 각자 다른 꿈을 꾼다는 말입니다. 같은 말을 들어도 각자 다르게 해석합니다. 같은 일을 경험해도 배우는 교훈이 서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의 사명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난 받는 메시아요, 둘째는 영광 받는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영광 받는 아들로서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결과로 사단의 세력은 물러가고, 어두움에 세력이 떠나가고, 온갖 사망의 증상들이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 먼저 예수님의 사역을 정리해 보면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가르침(21) 악한 영들을 축사하심(23-27) 그리고 복음 전도(35-45)가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사역을 계속 진행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교훈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사역을 보고 놀랐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21-28)

많은 귀신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쫓으시고 온갖 병들이 고쳐졌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의 권세로 하나님 나라가 어두움의 나라를 침노하여, 어두움과 악한 나라가 하나님 나라로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권세가 사탄의 권세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첫 사역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일어났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계셨습니다.

 

21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21-28)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먼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회당(會堂)’은 유대인들이 모임을 갖는 집회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특별히 가버나움 회당 가운데서 말씀과 기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 같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예수님과 그 분의 사역을 수용하지 않고 자신들이 기대한 대로 예수님을 평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견과 사역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설명해 나가십니다.

 

(1) 권세 있는 말씀(21-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설명해 가십니다. 이전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부르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내다보셨다면, 이제 그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한꺼번에 자신을 들어내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들어내셨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 있는 자와 같았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권위 있는 새 교훈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율법학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평소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는 비교할 수 없이, 권세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에 성경 선생인 랍비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달랐던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단순하게 성경을 지식적으로 전달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본인이 친히 말씀이셨습니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권위가 예수님의 말씀과 모습에서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기계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역동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의 특권을 지니고 있는 교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이성적으로 알지만, 그들은 말씀을 가슴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말씀의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신의 삶이 되어졌고, 말씀을 선포하신 마음의 믿음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2) 귀신을 쫓는 능력(23-26)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말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역도 하셨습니다. 그곳에는 더러운 귀신들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들 귀신들린 사람에 대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가장 거룩한 날인 안식일에, 거룩한 장소인 회당에서, 거룩한 사람들인 종교지도자들이 모여 있는데도 부정한 귀신들인 사람 하나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유대교가 결코 죄인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종교임을 증명해 줍니다. 이미 그 종교의 수명이 다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게 말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을 꾸짖고 내어 쫓고 있습니다. 거룩한 회당을 장악하고 있던 더러운 영은 그 시대의 영적인 상태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어두워질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심령에 작은 죄라도 있을 때, 영적으로 어두워집니다. 거룩한 영과 어두운 영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보자,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4)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와 당신에게 이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수사적 질문인데, 유대인들의 언어적 배경 속에서 이 질문은 보통 지위가 낮은 자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주십니다. 자신이 거룩하신 자이심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놀랍ㄷ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인 것을 알아본 것은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라 귀신이었습니다. 이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을 만나자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칭호를 통해서 예수님의 신분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는 귀신의 질문은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사탄과 그의 세력을 물리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더러운 귀신 조차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란 사실을 알아보고 있는데, 거룩함으로 포장된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에게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26)라고 명합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아들의 명령에 순종하여 잠잠하고 사람에게서 쫓겨나옵니다. 이 축사는 단순히 이적을 말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귀신들의 쫓겨남이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귀신은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잘 아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예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빙해하려는 존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할 마음이 전혀 없이 입에 발린 고백이나 성경적인 지식이나 심지어 예배나 찬양과 같은 것들을 아무리 잘해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 즉,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에 나서겠다고 하는 자만, 주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로 인정하시고 그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가버나움 회당 사건은 예수님께서 사탄에 대한 첫 번째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로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고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역들이 안식일에 일어나야할 사역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거룩하신 성령을 통해 하시는 사역입니다.

 

(3) 메시아에 대한 반응(27-28)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사탄의 통치로부터 해방해 주었습니다. 이 치유되는 것을 본 무리들은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27)라고 감동하고 놀랐습니다. 이것은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들 반응 속에 ‘권위’는 단순히 말로 귀신을 제압한 예수님의 권위를 언급한 것 같습니다. 사탄의 세력을 결박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신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묻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규정합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관되고 있고, 이 이적과 가르침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인 하나님 나라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일이 발생했느냐는 질문은 마가복음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시대는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 주어질 것이고 사탄의 세력이 결박당할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하는 이적 이야기는 종말론적 사건의 선취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자신의 선생들이 권세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듣고 체험했지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믿음의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모두 다였습니다. 아무도 그 사건을 통해 믿고 회개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적은 결코 감탄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고 우리의 죄에 대해서 통탄하여 돌아서고, 그 권위 아래서 경탄하여 복종해야 합니다.

 

시몬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29-31)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인해 훌륭한 설교들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은 더 많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설교를 감상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설교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려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을 체험한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감동에 감탄한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능력이 자신의 죄를 통탄하게 하고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경탄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29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29-31)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제는 거룩한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장소를 옮깁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과 회당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 성전과 회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과 제사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곳에서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광야 같은 세상에서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회당을 뛰어넘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인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도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일어난 말씀과 기적을 보고도 배척했지만, 성전이 아닌 집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온 야고보와 요한은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요한의 서술에 따르면 베드로 및 예수님의 제자들의 상당수는 갈릴리 벳세다 출신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일행이 가버나움에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결혼 후에 가버나움으로 이사한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인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집에서는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어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병으로 거동하지 못할 만큼 쇠약해진 상태였습니다. 그곳에 누어있던 시몬의 장모 손을 잡고 일으키실 때, 그녀에게 있던 열병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열병에 누어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고침을 받은 장모는 예수님과 그 무리들을 위해 수종을 들었습니다. ‘수종을 듣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섬김을 나타내는 동사인데, 여자들에게 사용되었을 때 음식을 대접하는 등의 섬김을 의미합니다.

 

문맥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신 이야기를 기록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기적을 말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앞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성취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글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회복되는 것을 육신적인 질병으로부터 자유함을 받게 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마가는 이사야가 내다보았던 종말론적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이미 현실로 임했음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회복된 그녀는 예수님과 그와 함께 한 무리들을 위해 수종을 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태도를 통해서 오늘날 은혜 받은 자들의 태도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시몬의 장모처럼 섬김으로 삶을 나타나야 합니다. 회복 후에 이렇게 섬김은 마가복음의 제자도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줍니다.

 

각종 병자와 귀신들린 고치신 예수님(32-34)

종종 인간의 열정으로 일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열정은 때로는 주님의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열정보다 중요한 것은 잘 듣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사망의 나라를 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함부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실지 예수님께서 스스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32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32-34)

 

마가는 회당에서 귀신 축출 사건을 기록한 후에 베드로의 장모가 가지고 있는 육신적인 질병을 치유한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 짧은 이야기들의 종결로 가버나움의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왔음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안식일에 행하고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지난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각종 병든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몰려 나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새벽이 되도록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섬김으로 인해서 안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 치유가 없던 사람들에게 치유를 주시기 위해 섬기셨습니다. 순식간에 베드로의 집은 영과 육신을 치료하는 병원이 되었습니다. 각종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모든 문제들을 나가면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이 장소에서도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한 말을 옳을지라도 그가 말하려는 의도는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쉼 없이 확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이 사역을 통해 가득한 것을 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을 보고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영적인 눈과 귀가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이 주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합니다. 이 회복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 결과 가버나움 회당에서, 베드로의 집에서 어두운 영혼들을 밝은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당시는 거룩한 성전에서조차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보다는 어두운 권세에 짓눌린 상태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유대 땅에 서서히 복음의 빛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죽은 영혼들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곳을 치유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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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1-02)


하나님 나라를 위한 부르심

마가복음 1장 12-20절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있다.’ 또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따느냐에 따라 생활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예수님을 따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다보면 삶이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가나가십니다. 비록 인간적으로 훌륭하지 못하고 평범할지라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를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듯, 지금도 당신을 부르십니다.

 

  •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런 동안 세례 요한은 헤롯왕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광야의 시험을 승리하신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전파하십니다. 함께 할 일꾼들을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살던 안드레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형제 네 명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12-13) ⁂【 마태복음 4:1-11, 누가복음 4:1-13 】

 

하나님의 일꾼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종종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시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 안에 감춰진 다른 동기들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자신은 철저히 낮추면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12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12-13)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태복음 4:1-11). 예수님께 찾아온 공생애의 시작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이나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영혼들은 없고 죽음의 그림자가 회오리바람처럼 감돌며 생명을 위협을 느끼는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마가는 ‘곧’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마태도 ‘그 때에’(마태복음 4:1)란 단어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즉시 광야로 나가서 시험받으셨음을 암시합니다. 이 시험을 이끄시는 주체는 ‘성령’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단편적으로 예수님의 광야 40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동안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내산에서 모세처럼(출애굽기 24:18), 엘리야 이야기처럼(열왕기상 19:8)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죽음과 소외를 맛보았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시험의 시간을 통과하셨습니다(마태복음 4:2).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본질과 결말을 예시합니다. 시종 드는 천사들과 함께 사탄에 대한 영적 전쟁을 수행하셨습니다. 복음서 시작과 더불어 소개되는 예수님과 그 대적들 사이의 대면은 복음서가 앞으로 진술해 나갈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전쟁을 미리 내다보게 합니다(3:23-30). 그리고 마지막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사탄을 승리하시면서 복음서가 막을 내립니다.

 

시조인 아담의 불순종함으로 에덴동산을 광야로 만들었고,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광야에서 불순종함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었습니다. 광야를 죽음의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장소에 인간을 억류하고 그 위에 군림하고 있는 사탄과 싸워야 했습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해 바로를 만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탄을 먼저 만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 승리는 자녀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확증인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항상 에덴동산과 같지 평안하지는 않습니다. 시험이 없으면 좋겠지만, 예수님께서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던 것처럼, 성도들도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성령님과 천사들과 함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이 가득한 세상에서 승리함으로, 광야와 같이 삭막한 세상을 행복 가득한 에덴동산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갑시다.

 

천국을 선포하신 예수님(14-15) ⁂【 마태복음 4:12-17, 누가복음 4:14-15 】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 나라를 모두가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나라를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왕과 백성의 관계로 들어가게 해줍니다. 그래서 당신이 세상을 향하여 외쳐야 할 것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서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자.’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14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4-15)

 

마가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시고,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었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애를 소개하기 전에, 세례 요한이 헤롯왕에게 체포된 사실을 소개합니다. 철저히 순종한 세례 요한을 왜 체포와 순교로 사역을 마무리 시켰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게 역사하는 분이십니다.

 

(1) 세례 요한의 체포(14a)

 

세례 요한이 헤롯왕에게 체포당했습니다. 그는 헤롯왕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습니다. 그 불의한 일들을 세례 요한이 지적하다가 잡혔습니다(마태복음 14:3).

비록 헤롯왕은 자신의 뜻대로 세례 요한을 투옥한 것으로 진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세례 요한의 사역이 마무리 졌고, 자연스럽게 사역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가 마무리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신약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마태는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마태복음 11:13)라고 말씀합니다. 이제부터 세례 요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2) 갈릴리로 오신 예수님(14b-15)

 

예수님께서는 광야의 시험을 받으신 후, 갈릴리로 옮기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체포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공생애의 메시지를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에는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때(15a)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가 찾고’는 ‘그리스도 시대’를 의미하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왕권 통치’를 뜻합니다. 이 복음은 창세 이후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이 성취되어 가고 있습니다.

 

②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15b)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들 앞에 도래한 상태의 표현입니다. 어두움이 물러가기 위해 빛이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적으로 그렇게 많이 기다리던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소적인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그 나라는 ‘통치적인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람들이 어두움의 권세 아래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심령에 이루이지는 예수님께서 주인 되신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이면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우리 심령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이루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15).

 

③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5c)

예수님께서는 이제 어두움의 세상 나라는 물러갈 때가 이르렀다는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오셨고,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서 왕노릇하실 때가 가까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왕을 영접하는 것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悔改)는 자신의 주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복종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 이제 그의 백성은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와 ‘믿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기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자격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동안의 삶으로부터 돌아서는 회개로 바른 반응을 해야 합니다. 이제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시대를 향해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선포에 반응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도록 초청하시는 분입니다. 지금도 당신을 초청하시고 그 초청에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천국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16-20) ⁂【 마태복음 4:18-22, 누가복음 5:1-11 】

세상 나라는 모든 세상이 마치 자신의 것처럼 과시하면서 화려하고 웅장하게 시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시작하지 안 했습니다. 그의 나라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방법으로 임합니다(4:30-32).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매우 조용하고 차분하게 시작됩니다. 그 시작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방법이 매우 독특합니다.

 

16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16-2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시면서 차분하게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12제자들 가운데서 먼저 주목 받을 만한 네 명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을 선택하는 방법은 당시 전통적인 방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선택하십니다.

 

(1) 매우 평범한 제자들(16,19)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선택할 때는 세상에서 똑똑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은 직업도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실 때 장면을,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한가로이 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꾸준하게 자신의 일,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아주 평범하지만 자기를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일꾼의 자격은 뛰어난 재능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순종할 사람을 찾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고기 잡던 어부 베드로나 세금을 착취하던 세리 마태 등과 같은 사람들을 선택해서, 위대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군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한 사람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평범하지만 충성스럽게 일할 일꾼을 찾으셨습니다. 지금도 그런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일꾼으로 찾아 부르십니다.

 

(2) 스승이 부르신 제자들(17,20)

 

일반적인 유대인의 풍습에서는 제자들이 위대한 스승을 찾아가서 제자가 되는 방식을 취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를 선택하신 방법은 일반적인 방법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스승이 제자들을 직접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거닐다가 바다에서 어부로서 일하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7)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잠시 머뭇거림 없이 즉각적인 순종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의 길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와 주도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버려야 따를 수 있는 제자도(18)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먼저 자신들의 생업과 가족을 버려두고 다음으로 예수님만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 강조되는 제자의 길입니다(8:34-37;10:28-30).

모든 제자들은 부르심이 임했을 때, 한결같이 버리고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18)라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배와 그름과 아버지 그리고 일꾼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어부에게 있어서 배와 그물은 자신의 생명과 같은 매우 중요한 재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들을 버렸습니다.

물론 그들이 생업과 가족을 버렸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가족과 모든 관계를 끊어 버렸다는 뜻이 아닙니다(1:29-31).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모든 방식과 관계를 새롭게 재정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삶이 정리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는 그분의 삶과 사역에 철저하게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의 경우처럼 소유가 많으면 순종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청년에게 주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9: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고 반응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제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부르심을 받을 때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중요한 도구인 그물을 버렸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보다 더 좋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종이 되지 않는 것은 포기하지 못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도 네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순종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버려두는 대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당신을 예수님께서 부르시는데 아직 내려놓지 못한 것이 남아 있습니까? 먼저 부르신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버려놓고 온전하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4) 사람 낚는 제자들(17)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에 순종한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로 요구하심과 그 요구에 반응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각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건설과 확장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전수하고 그분의 선교 사역에 동참할 것이 기대되는 것입니다(3:4, 6:7).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사람 낚는 어부들에 대한 언급합니다(렘 16:16). 그런데 예레미야를 통해 사람들은 모으는 목적은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한 것인데,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사람들을 모으는 목적은 심판에서 구원하기 위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움켜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면서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당신이 내려놓아야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풍성한 것으로 더 많이 채우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천국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통해 회개하고 믿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수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랐습니다. 세상의 것들이 많으면 무거워서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세상의 자랑거리들은 모두 내려놓고 제자로 따라갔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내려놓을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 같은 세상이 에덴과 같은 삶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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