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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07-03)

 

 


이방인의 장벽을 무너트린 예수님

마가복음 7장 24-37절


 

몸이 아프면 정상적이기 않기 때문에 몸이 움츠려듭니다. 특히 감기가 들어서 코만 막혀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만일 혈관이 막히면 동맥경화로 마비가 됩니다. 터지면 큰 질병을 가져 옵니다. 뇌에 산소 공급이 되질 않으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도 막힌 것이 있다면 반드시 뚫어야만 해결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가는 데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결법’으로 이방인들에게 장벽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예수님을 뚫어주셨습니다.

 

  • 본문에서 8장 10절까지 예수님의 이방 사역이 전개됩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이방인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눈총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이방 지역에서 이방 여인의 딸과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과 유대인의 장벽을 무너뜨리셨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자격은 유대인의 생각처럼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꾸셨습니다. 것을 의미하십니다.

 

이방인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24-30)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들은 절대로 구원의 반열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만이 구원의 혈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방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모든 장벽을 초월하여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4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24-30)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으로 넘어가시기 전에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한 장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결 교리였습니다. 본문은 먼저 예수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고치십니다. 이 사람들은 ‘씨 뿌린 비유’에서 좋은 밭에 뿌려진 사람들입니다.

 

(1) 두로 지방을 찾으신 예수님(24)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게네사렛에게 갈릴리 중부에 위치한 두로 지역을 방문하셨습니다. 먼저 넘어가시기 전에 이방인들과 유대인의 장벽을 먼저 무너뜨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두로는 구약에서 주로 시돈과 함께 연결되어 언급되는데(이사야 23:1-12; 예레미야 47:4 등), 이방인 거주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역의 한 집에 들어가셨다는 언급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정결 규례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새 시대에 토라의 규정들, 특별히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성과 속을 나누는 음식법이 의미 없어졌음을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7:19).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의 방문은 구약에서 예언된 두로와 다른 이방 민족에 대한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읽힐 수 있습니다(시편 87:4). 본문 문맥도 이 같은 해석을 지지합니다. 바로 이전에서 정결 규례에 대한 언급 이후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을 찾아가시는 이야기는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방인들의 지역에서도 임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휴식을 위해 잠시 사적인 시간을 갖기 원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예수님의 시도는 이번에도 실패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 사람들에게도 익히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25-26)

 

아무도 모르게 쉬시려고 두로 지역에 들어가셨지만, 그곳에서도 쉴 수 없었습니다. 이방 지역이었지만 예수님의 명성은 이미 두로 지역까지도 널리 펴져있었습니다. 그 두로 지역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더러운 귀신’이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더러운’이란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정결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앞서는 정결 규례와 관련된 주제와 잘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인이 가나안 여인이라고 소개 됩니다. 이미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 예수님께 나아온 무리 가운데 두로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3:8) 예수님께서는 이 지역을 방문하셨을 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헬라인이었고, 정결의 관점에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딸을 두었습니다. 헬라인이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종종 유대인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이방인을 언급하는 용어입니다(로마서 1:16; 고린도전서 1:24; 갈라디아 3:28). 정결 규례의 관점에서 이러한 이방 여인과 유대인들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 발아래 엎드려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유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둘 사이에는 너무나도 멀었지만,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기준으로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이 하나님께 더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3) 예수님의 대답과 여인의 반응(27-28)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정결 규례나 이방인들에 대해서 취하신 태도로 생각해볼 때, 이방 여인의 간청에 대한 그의 반응은 얼핏 보면 당혹스럽습니다.

 

① 황당한 예수님의 대답(27)

이방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에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으로 그녀의 요청을 매우 쌀쌀하게 거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곳에 사용된 ‘개들’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지칭하던 경멸적인 표현입니다.

앞에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신 답변과는 모순처럼 드리는 답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진심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시험하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이방인 지역 거라사 지역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이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하는 지역인 이방 지역으로 들어오셨고, 이방인 집에 머물고 계시고 있습니다. 더 나가서 이방인 여인과 대화까지 하고 계십니다. 이미 이러한 행동들만으로도 정통 유대인의 생각을 깨드리는 행동이었습니다.

 

② 믿음을 가진 여인의 반응(28)

이방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사의 순서에서 이스라엘에 우선권이 주어져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차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다소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개’의 은유를 그대로 사용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적절히 답합니다.

차가워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라고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이곳에서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그녀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예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도 보여줍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옳소이다’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보다 유대인들을 먼저 구원하려 오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속사의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창조적인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 개가 자녀들의 상아래 있다면, 자녀들과 동시에 해택을 입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라고 말합니다. 물론 온전한 떡은 아니더라도 부스러기만이라도 먹을 권리가 개에게도 있다고 합니다.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여인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 메시아의 풍성한 식탁에 참여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 잔치는 이미 오병이어에서 보았듯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나 남을 만큼 풍성한 잔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발 아래 조아리고 있으면, 유대인에게 구원을 베풀 때, 이방인인 자신도 그 남은 떡을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이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바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의 빛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이사야 42:6;49:6). 이 여인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이 같은 정확한 인식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매우 놀랍습니다. 더욱이 항상 예수님과 같이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놀라움은 더해집니다.

 

(3) 놀라운 반전(29-30)

 

예수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29)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딸을 보지도 않고 말씀만으로 귀신을 쫓아내주십니다. 집으로 돌아간 여인은 귀신이 떠나고 딸이 온전해진 채, 침상에 누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귀신이 쫓겨나간 사건 보도를 통해서 마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유대 지역뿐만 아니라, 이방 지역에서도 선포되고 성취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귀먹은 자를 치유하신 예수님(31-37)

하나님 앞에서는 가난한 마음과 순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마음으로 연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는 관심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변 사람들 가운데 당신의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하나님 나라는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임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해방과 자유의 역사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31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31-37)

 

이제 예수님께서는 두로를 나와서 북쪽 시돈을 통과해서 갈릴리 남동쪽에 위치한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바다로 가셨다고 소개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갈릴 서편의 유대 지역과 대조되는, 아마도 동편의 이방 지역을 의미합니다.

 

(1) 데가볼리에서 사역하신 예수님(31-35)

 

그런데 그 데가볼리 사람들이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들이 이사야 35:5-6에서 메시아가 행하실 일들을 언급하면서 등장합니다.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고 말 못 하는 자의 혀가 노래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35장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따로 데리고 사서 치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특이하게 고쳐주십니다. 따로 데리고 가섰습니다. 따로 데려가신 이유는 아마도 이 치유 사역을 공개적으로 함으로써 불러올 수 있는 불필요한 주목을 피하려고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에 손가락을 넣고 손바닥에 침을 뱉어서 그의 혀를 만지시며 ‘에바다’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귀와 눈이 뚫리면서 병이 나았습니다. ‘에바다’는 아람어로 ‘열리라’라는 뜻인데, 그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어떠한 신체 부위가 열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귀먹은 자가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지막 날에 메시아가 오실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이사야서 35:5-6)

 

이렇게 소경과 귀머거리를 고치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충분히 메시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예수님을 충분히 보고 배우지 않는 상태에서 기적만 보고 오해할 수 있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사역이 방해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과는 달리 이 소식은 더욱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들에게 귀가 열리니깐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구약의 성취(36-37)

 

예수님께서는 치유 이적을 베푸신 후, 다시 침묵을 명령하십니다. 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영적인 귀를 통해 들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 말씀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복음도 전파할 수 없었습니다. 전하더라도 어눌하게 전파했던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의 상태를 ‘에바다’로 귀를 여시고 입을 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서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라고 반응하였습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아더라’(창세기 1:33)라는 것과 표현과 같은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아주 새롭게 보시기 좋은 상태로 되돌립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재창조 사역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치유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가서 치유 받아야할 눈멀고 귀먹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영적인 귀먹거리와 말 더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바다의 은총을 간절히 기다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하나님 자녀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막힌 담을 허신 분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들 사이의 막혀 있는 것들을 뚫어주셨습니다. 이제는 모든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통이 아니라 믿음을 보고 계십니다.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모든 문제들을 깨끗하게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능력 있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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