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사사기(20-02)

 


베냐민 지파와 동족 전쟁한 이스라엘

사사기 20장 12-23절


청년 시절에 성탄절 이부에는 회원들끼리 교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서로 선물 교환합니다. 한 번은 선물 받을 상대방에게 장난치려고, 한 번은 백화점 포장지로 상자를 포장하고 내용물은 형편없는 것을 넣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선물을 일부러 성의 없게 주는 사람은 없겠지만, 만약 다른 사람에게 받은 선물이 포장은 그럴듯한데, 속 내용물이 별 볼 일 없다면, 선물은 받은 사람은 정말 실망스러울 것입니다.

 

  • 베냐민 지파가 기브아 사람을 내놓기를 거절하자 베냐민과 전쟁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이 모였고 전쟁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들은 전쟁에 나가 자신들보다 수적으로 열쇠인 베냐민에게 두 번이나 크게 패하고 돌아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기브아를 징계를 결정한 이스라엘(8-16)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성급하게 판단할 때 일을 망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뜻보다 앞서는 섣부른 결정과 행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된 행동입니다.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이스라엘 상황은 지혜로운 왕이 부재한 한계와 현실을 보여줍니다.

 

8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9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 10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11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12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다니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13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14도리어 성읍들로부터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라 15그 때에 그 성읍들로부터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 명이요 그 외에 기브아 주민 중 택한 자가 칠백 명인데 16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8-16)

 

사사 시대는, 특히, 본문에서는 한 레위인의 사건을 조작한 이런 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선동되었습니다. 이러한 선동에 휘둘렸다는 것 자체가 이 레위인은 물론이고, 이 시대 자체가 얼마나 분별력이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1) 기브아를 징계하기로 경의한 이스라엘(8-11)

 

레위인이 기브아 사람들이 한 일을 왜곡하여 보고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의 이야기를 진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액면 그대로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고 흥분하여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로 결정합니다. 정확히 잘못한 사람들을 응징해야 하는데, 베냐민 지파 전체를 응징하려고 전쟁을 위해 모인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이러한 엄청난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물어야 마땅했습니다. 자기 소견대로 옳은 대로 행했던 것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난 사건입니다.

 

병사 40만 명이 모였습니다. 군인 중에서 10분의 1을 제비를 뽑아 베냐민의 기부와 사람들을 치기로 결정하고, 자신들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브아를 칠 때까지 한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8).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광기입니다. 이런 무자비함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범죄는 율법에서 강력하게 금하고 강간에 경우에는 돌로 처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이 모든 결정에 이스라엘 모두가 단결했습니다. 모든 단결과 하나 됨이 항상 좋은 것만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하나가 되려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재나 전체주의가 됩니다. 사사 시대는 볼 수 없었고,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연합이 동족을 전쟁의 대상으로 할 때 나타난 것은 슬픈 일입니다. 외부의 적과 전쟁하는 상황에서는 기드온 때부터 내부적으로 갈등을 빚었던 이스라엘이 자기 동족을 치는 데 합심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했겠습니까? 참으로 심각하게 병은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2) 이스라엘의 요구를 거부한 베냐민 지파(12-16)

 

이스라엘 연합군들은 베냐민을 공격하기 전에 베냐민 지파에게 용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회개를 유도하기 위해, 베냐민 사람들에게 전갈을 보내 기브아 불량배의 악행을 설명하며 그들을 넘기라고 요구하였습니다(12-13). 그들을 죽여서 악을 제거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합리적인 제안을 듣지 않고 사람들을 기브아에 모아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합니다(14). 본문은 베냐민의 이런 행동을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표현함으로써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형제이지 결코 서로 싸울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13). 동족 에브라임 지파에게 무력을 행하여 입다나, 우상숭배를 선언해서 영적으로 해악을 끼친 단 지파가 했던 악행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베냐민 지파에 대한 설명입니다(15). 베냐민 지파는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을 받는 대신에 기브아로 모여서 전쟁을 준비합니다. 이런 지파 분위기 때문에 불량배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모은 군사의 수가 26,700명이었습니다. 칼 빼낸 자 즉 전투병이 2만 6천 명이며, 기브아 주민 중에서 뽑은 용사들은 왼손잡이로 700명 모두가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 더 틀림없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왼손잡이 에훗이 생각나게 하는 장면으로, 매우 용맹스러운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베냐민은 전쟁을 택한 것입니다. 하지만, 베냐민이 기브아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선악간에 판단하지 않고, 자기 지파 사람이라고 무조건 감싸며 형제들인 모든 이스라엘을 적으로 삼은 것은 어리석은 결정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에게 패배한 이스라엘 연합군(17-28)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구하며, 이 문제의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우리 삶에 겪는 이 문제들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7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18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19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 20이스라엘 사람이 나가 베냐민과 싸우려고 전열을 갖추고 기브아에서 그들과 싸우고자 하매 21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22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니라 23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24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25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만 팔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26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8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17-28)

 

사사기가 시작하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인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을 시작했지만, 사사기 마지막 부분은 동족들 간의 전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베델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음(17-18)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기브아 사람들을 징벌하는 대신 전쟁을 도모하자, 온 이스라엘 자손들은 전쟁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수가 40만 명이 이르렀습니다. 신실하지도 않는 한 레위인을 위한 복수에 40만 명이 모여 형제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전쟁하는 이 모습은 상식에서 벗어난 결정입니다(17).

이때 제사장이 비느하스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도 베델에 함께 있었습니다. 전쟁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베델로 올라가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18). 베델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은 임시로 언약궤만 베델에 옮긴 것 같습니다. 20장 27절에서 “그 당시에는 베델의 여호와의 궤가 있었고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그 앞에서 제사장을 하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베델의 여호와의 성소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법궤를 마치 부적처럼 사용한 것입니다.

사사기 1장에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은 것처럼, 이번에도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과 싸우리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해야 되는지에 관해 물어야 하는데, 전쟁을 사실화하고 누가 먼저 올라가는지를 묻습니다(18). 놀랍게도 여호와께서는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베냐민을 너희 손에 넘겨주겠다’라는 승리 약속이 없습니다.

 

(2) 이스라엘과 베냐민과의 쉽지않는 전쟁(19-21)

 

19-21절은 전쟁 장면을 설명한 부분으로 이스라엘과 베냐민 전쟁이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치르는 전쟁과 같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전쟁의 결과는 놀랍게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에게 패배하여 22,000명이 죽습니다(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기도와 이기적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를 심판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을 먼저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기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전쟁하기 위해 재정비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진영에 약간의 변화가 생깁니다. 이들은 전쟁에 진 것을 애통하며 하나님 앞에 저녁까지 울었는데, 이 부분은 사사기 2장의 보임 사건을 기억나게 합니다. 보임에서 하나님의 사자의 질책을 얻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회개하며 울었습니다. 그런데 보임에서처럼 이들의 눈물은 고통 좌절 분노에서 나온 눈물일 뿐 진정한 회계와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의 눈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급한 이 순간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이 상황이 끝나자 곧바로 하나님을 떠나 자기 생각대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전쟁이 여부를 묻는 이스라엘(22-26)

 

다음으로 전쟁에 과연 형제 베냐민과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물었습니다(23). 이제야 그들은 베냐민이 자신의 적이 아닌 형제이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식하고 하나님께 베냐민을 줘도 좋을지에 대해서 물은 것입니다.

이들은 패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 겸손해졌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올라가라고 응답하십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승리의 약속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베냐민과 전쟁하러 나갑니다. 하지만, 전날 졌기 때문에 더욱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였습니다. 한 번의 패배에 베냐민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베냐민 사람들은 전날처럼 용맹하게 전투에 임했고 이번에도 이스라엘 군대를 이깁니다. 25절에 보면 칼을 빼는 자가 1만 8천 명이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칼을 빼는 자’라는 것은 무장한 군인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전날 죽은 사람의 숫자보다 4천 명이 적지만, 전쟁에 능한 장군이 죽었다는 것은 전력 면에서 매우 큰 손실을 입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왜 전쟁에서 졌겠습니까? 이 베냐민과 유다의 전쟁은 양 진영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이 강한 전쟁이기 때문에 형제가 비록 잘못했더라도, 그 역시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싸울지 말지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도록 해야 했는데, 싸움을 기정 사실화하고 묻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패배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28절의 세 번째와 같지만, 그들은 울기만 할 뿐 진정으로 회개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전쟁에서 또다시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이스라엘 향해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만한 주제가 있습니다. 전쟁은 군사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적으로 20대 1의 대결이기 때문에 분명히 베냐민은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전쟁에서 사람의 수가 많고 적음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전쟁의 승패는 여와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수의 이스라엘이 적은 수의 베냐민에게 크게 진 것입니다.

 

두 번의 패배를 통해서 교훈을 깨달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다시 하나님 앞에 모여 울며 금식하고 번죄와 화목죄를 들였습니다. 이것은 23절보다 종교적으로 진일보한 것으로 구약에서 금식은 해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금식과 번죄 함목재는 하나님 앞으로 진정으로 나오려는 행동들입니다.

 

(4)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27-28)

 

그리고 27절에서 28절에 언약궤와 아론의 후손인 비느하스의 제사장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므로 그들의 금식과 회개가 올바르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회개하고 올바른 모습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베냐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세 번째로 다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형제 베냐민과 전쟁을 해야 하는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들이 점점 더 겸손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하나님은 베냐민을 내 손에 넘겨주시겠다고 승리의 약속을 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전쟁은 영적인 타락에서 왔습니다. 영적인 타락은 도덕적인 타락이 오게 됩니다. 도덕적인 타락이 오게 되면 이기심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또한, 판단력이 흐려지면 어려움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먼저 자신의 원하는 바를 선택한 것이 있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어두워진 영안을 다시금 밝혀 주심으로 말씀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될 때,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20-01)

 


경악으로 미스바에 모인 모든 이스라엘

사사기 20장 1-11절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항상 불안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킬 마음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려 희생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그 속에는 사랑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이기주의적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중심성은 결국 자기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 본문에는 레위인의 첩의 조각난 시체를 본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레위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사건을 설명하라고 말합니다. 이에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고, 자신의 첩은 간강하여 죽게 만들었으며, 이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을 처벌하기 위해 자신이 이런 일을 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제 기브아 사람들은 한 개인의 원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1-2)

‘군중심리(群衆心理)’란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에, 자제력을 잃고 쉽사리 흥분하거나 다른 사람의 언동에 따라 움직이는 일시적이고 특수한 심리 상태’입니다. 쉽게 흥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같은 다혈질 기질에게는 군중심리는 잘 먹힙니다. 이 군중심리를 이용해서 통치했던 사람이 독일의 히틀러입니다. 첩을 잃었던 레위인도 첩의 시신을 토막 내어 이스라엘 전체에 보낸 엄청난 파급효과로 대단한 군중심리를 얻습니다.

 

1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는데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2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이었으며(1-2)

 

본문에 나온 레위인에게 첩을 자기만족의 수단이었습니다. 첩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희생시킬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도 이용에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경배해야 할 레위인에게 남은 것은 경건에 껍질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원했겠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영광을 원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자기 복수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종교적인 명분을 만들어갔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파멸시키는 결과는 가져 왔습니다.

 

레위인은 자신의 첩이 강간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첩의 죽음에 대해 슬퍼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첩의 죽음은 다만 기브아 사람들을 보복할 명분을 얻는 사건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첩의 시신을 12도막 내서 각 지파에 보냈습니다. 그는 죽은 첩을 향해 일말의 예의나 존중도 없습니다. 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레위인의 행동을 칭송할 것이고,

 

레위인이 보낸 시체 도막을 보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깜짝 놀라서 ‘미스바’에 여호와 앞에 모였습니다. ‘여호와 앞’이란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 모여서 국가를 위해 회의하고 결정하는 장소였습니다. 본문은 온 이스라엘이 모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1)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한국에 ‘백두에서 한라 그리고 독도까지’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경악스러운 일이 무슨 일인가 하는 알아보기 위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백성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무장한 병사들이 무려 40만 명이나 모였습니다(2). 흥미로운 것은 지금까지 사사 시대에 그 어떤 전쟁에도 이처럼 하나되어 많은 병력이 모인 적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무장한 40만 명입니다. 아직 어떤 판결도 없는데 전투의 태세로 모인 것입니다.

 

이전 사사들의 이야기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에 대항하여 지파별로 싸우거나 전체 이스라엘을 소집하며 도움을 요청해도 이렇게 모이지는 않았습니다. 드브라 이야기의 경우 소집에 응하지 않는 지파 명단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나 입다 이야기에서는 참여하지 않는 에브라임이 시비를 걸었으며, 삼손의 경우, 삼손을 잡기 위해 유다 지파가 모인 적이 있을 뿐 한 번도 제대로 모든 이스라엘이 직결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레위인이 보낸 참혹한 시체를 본 후에 모든 이스라엘이 한 마음으로 모입니다. 이들은 그 땅에서 끔찍하고 황당한 일을 겪고서야 여호와 앞에 모여 엎드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 것입니다.

 

사건의 전말을 설명함(3-7)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입장에서 말합니다. 지도자들은 문제에 바른 판단을 요구할 때는 사리가 분명해야 합니다. 자기 변론적인 주장만 듣고 판단하고 결정하면 큰 실수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에게 일에 대한 자초지정을 듣습니다.

 

3이스라엘 자손의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 악한 일의 정형을 우리에게 고하라 4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내 첩으로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5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 6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7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찌니라(3-7)

 

미스바에 도착한 모든 이스라엘이 모였을 때, 베냐민 사람들은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단순히 이 모임에 대해 들었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누군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베냐민에게 전해주었지만, 베냐민은 의도적으로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것입니다(3a).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제일 먼저 상황 파악을 나섭니다. 구약에서 시체 토막을 전 이스라엘에 보낸 일은 사무엘상 11장에서 암몬과 전쟁하기 위해 사울이 소 두 마리를 잡아 각을 떠서 이스라엘 전 진역에 보낸 사건에서도 등장합니다. 이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만일 자신을 따라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들의 소들도 이 모양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일종의 위협입니다(삼상 11:6-11).

하지만, 이 경우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레위인에게 위협을 느껴서라기보다는 레위인의 행동에 경악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모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서 이런 악한 일, 즉 사람의 시체를 토막내어 보내는 끔찍하고 악한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사건 당사자인 레위인에게 묻습니다(3).

 

본문은 레위인을 ‘죽음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라고 호칭으로 부릅니다(4). 이것은 레위인이 그 여자의 남편 자격, 즉 피해자의 자격으로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레위 인이 말할 때, 계속해서 “내 첩”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전국에서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 40만 명 앞에서 자랑스럽게 ‘내 첩’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잘못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지켜야할 사람이, 도덕불감증에 걸려서, 첩(倿)을 얻어 사는 것을 아무런 자책감도 없이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5-6절에 레위인의 진술은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모두 빠져 있고 또 과장되어 있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일을 저질렀느냐?’라는 질문합니다. 그는 “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6)고 말합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아무런 언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음행과 망령된 일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19장에서는 본문은 ‘기브아의 불량배들’이라고 하였는데, 레위인은 오히려 기브아 사람이라고 말하여 기브아 주민 전체가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또한, 무엇의 문제에서 19장에서 보면, 기브아 사람들은 레위인을 강간하려 하였는데, 그들이 자신마저 살해할 것처럼 생각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죄가 강간죄가 아니라 살인죄에 해당 되는 것처럼 고발합니다. 첩을 욕보였고 그 결과 그녀가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비겁하게 자신이 첩을 집 밖으로 끌어내어 그들의 손에 넘겨준 일이나 그가 돌아온 자신의 첩의 상태를 전혀 돌보지 않아 첩이 죽게 된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고 첩을 욕보이고 죽인 것으로 말하여 자신의 잘못은 모두 숨기고, 첩의 죽음이 전부 기브아 사람들의 잘못 때문인 것처럼 고발한 것입니다. 첩을 12조각으로 나누어 각 지파에 보낸 자신의 끔찍한 행동은 기브아 사람들의 죄악상과 강간 범죄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한 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첩의 시체 조각을 통해 기브아 사람들의 제약성을 드러내고 정의를 짓기 위한 행동이라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행동 자체가 그의 무자비함과 잔인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첩의 죽음을 위로하고 장례를 잘 치러줄 의무가 있는데도, 그녀의 죽음을 복수의 구실로 삼는 반인륜적인 행동을 하고 있던 것입니다.

 

이런 레위인의 극단적 행동은 당시 이스라엘 상황이 영적 도덕적으로 매우 탈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에 대해 무감각하고 웬만한 자극적인 사건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풍토가 만연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일 레위인이 이렇게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조치 없이 다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첩이 강간당하여 죽은 사실을 알렸다면, 한두 지파 정도나 참여하고 나머지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사기를 전체적으로 보면, 적들이 쳐들어와 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을 해야 되는 상황에서 이웃 지파들에게 도움을 청해도 서너 지파 정도가 참여하면 많이 모였다라고 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개인의 원한을 갚아주기 위해 지파들이 모였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은 평범한 상식과 하나님 말씀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무정한 사였던 것입니다. 증언을 마친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명령하여 지금 당장 여기서 어떻게 할지 계획을 만들어 내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방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니 전쟁하자 라고 다그치는 말입니다.

‘여기서’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는 당장 이런 일을 심판해야 된다라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좀 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거나 다른 증인들을 불러 자신의 진상을 조사할 필요가 없이 무조건 자신의 말을 믿고 자신의 말대로 따라야 한다라고 몰아붙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격앙된 상태를 충분히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감정이 가라앉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자신의 허물도 드러나게 되고 그러면 자신에게 불리한 사항으로 변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레위인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포장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였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둡고 혼란스러울 때, 이런 선동가들이 일어나 교회와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흥분한 감정으로 선동에 휘둘러 행동하기보다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사건을 차근차근 조사한 후에 행동으로 옮겨도 늦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은 시간에 쫓겨 급하게 행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도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과정을 더 중요하게 보시는 분이며 자신의 계획과 이를 인간의 약함이나 더딤 때문에 포기하는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 끔찍한 짓을 자행할 뿐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사건을 왜곡하고 말하는 이러한 태도가 우리 속에도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분명한 원칙이 무너지면 권위는 무너집니다. 진리의 원칙이 분명할 때, 하나님께서는 권위를 바르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9-03)

 


기브아 불량배들과 레위인의 악행

사사기 19장 22-30절


세상이 점점 걷잡을 수 없게 타락해 가면서, 마지막 희망을 기독교에게 갔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타락해도 성도만이라도 거룩해야 한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성도마저 타락하면,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시대가 영적으로 어두워지면, 많은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그 증거 중에는, 성도들에게 거룩성이 상실되어 갑니다. 거룩해야 할 사람들이 거룩성을 잃어버리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랄할 수 있습니다.

 

  • 본문에서 레위인은 자기 대신 자신의 첩을 끌어내서 기부 사람들에게 내놓습니다. 그녀는 밤새도록 기부한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새벽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기에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은 죽은 첩의 시신을 12개의 토막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온 지파를 보내어 전쟁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을 소집합니다.

 

불량배들의 악행과 첩의 죽음(22-25)

말씀의 부재가 가치의 혼동과 인류의 실종을 낳습니다. 영적인 기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법을 집행할 지체가 무너지면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됩니다. 결국,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의 부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삶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22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23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24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25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22-25)

 

본문의 사건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이어났다고 해도 끔찍할 것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일입니다. 참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를 수 없고,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잘 표현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습관적으로 입에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이런 무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1) 불량배들의 악한 요구(22)

 

기브아에 도착한 레위인 일행은 한 노인의 환대로 집에서 편안히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은 무사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작은 연회를 즐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기브아 성읍의 불량배들이 등장합니다. 이 불량배는 사회적 질서를 파괴한 자들로 표현합니다.

“집을 에워쌌다”(22)라는 표현을 통해서, 한두 명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폭력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등장으로 갈등은 최고조에 이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에워싼 채 문을 두드리며 사람을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는 모습은 매우 위협적이고 기브아 사람들의 폭력성을 잘 보여줍니다. 이들은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그와 관계하겠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관계를 의미합니다. 나그네를 환대하기는커녕 냉대하고 박대했던 그들이 이제는 학대 하겠다고 덤빈 것입니다. 이런 성폭행은 상대방에게 가장 치욕을 줄 수 있는 굴복의 방식으로 폭력입니다. 이런 모습은 그들이 얼마나 깊숙이 가나안의 악한 풍습에 빠져 있고, 또 그것을 즐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이 짓을 하는 자들은 소위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들입니다. 같은 유대인을 향해서 이런 악행을 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땅이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복했으니, 항상 나그네라는 생각으로 다른 나그네를 환대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동족을 폭행하려고 합니다.

이런 행동의 패턴 반복은 기브아가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성읍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지만, 기브아는 하나님 백성이었기에 더욱 참담하고 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불량배들의 악행을 말리는 노인(23-24)

 

이런 불량배들의 요구에 집주인 노인은 그들을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23)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이러한 일은 망령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망령된 일’이란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일이며 하나님 앞에 제가 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기브아 사람들에게 잘못된 일을 하지 말라라고 타이르던 노인은 사태를 진정시킬 수 없다라는 판단했는지, 대안으로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24). 자기 역시 악행이라고 생각할만한 행동을 제안합니다. 그는 레위인에게만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라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여기서 노인의 가부장적이고 차별적인 관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남자인 레위인만 보호의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망령된 일을 행해서는 안 되는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자신의 딸들과 레인의 첩인 여성들은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남성들의 안전을 위해 버려지고 희생당해도 좋은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원래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아버지와 남편은 딸을 지키고, 아내를 지켜야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보호해야될 대상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희생양으로 내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롯이 이러한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창 19:1-11). 소돔 문화에 젖은 롯처럼, 이 노인 역시, 다른 사람보다 나아 보였지만, 사실은 비교할 것이 못 됩니다. 이렇게 사회가 하나님 말씀에 멀어질수록 차별과 강자의 횡포는 심해지고 약자는 희생당하게 됩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분별할 수 없는 시대이며, 자기 눈에 옳은 데로 결정하다 보니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3) 노인의 제안을 거절하는 불량배(25)

 

자신들의 딸들과 레인의 첩을 내놓겠다는 노인의 제안을 기브아 불량배들은 거절합니다. 원하는 것은 기어이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욕망의 노예를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인간은 포기하고 실망하고 기다리고 체념하는 존재입니다. 성취욕에 불타서 도전만 하는 존재는 인간답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도전만 하고 산다면, 모두 미치광이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옳은 말도 어리석은 말도 모두 듣지 않고 오직 자기주장만을 되풀이하였습니다. 이미 죄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의 위협이 계속되자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직접 잡아서 밖으로 끌어내 기브아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첩은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저항하였을 것입니다. 레위인은 이런 첩을 강제로 끌어내어 밖으로 내보낸 것입니다. 친정으로 간 첩을 데리고 오기 위해 나귀까지 챙기면서 첩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던 레위인은 자신이 위험에 처하자 첩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결국, 남편의 손에 붙들려 밖으로 쫓긴 첩은 기브아 불량배들에게 어떤 수모를 당했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첩이 얼마나 오랫동안 끔찍한 성폭행을 당하며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사사기 저자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시간의 흐름을 표시함으로써 보여 주며, 불량배들의 잔악무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잔혹한 사건을 잔혹한 방법으로 알림(26-30)

교회는 거룩한 울타리가 되어 악을 바로잡고 약한 자들의 삶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추악한 일들 무자비한 폭행,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악한 세상에 거룩한 울타리가 되어줘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놀랄 만한 더 큰 스캔들과 더 큰 사건이 있어야지만, 정신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교회가 깰 때입니다.

 

26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27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28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29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30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26-30)

 

레위인의 첩은 밤새도록 남자들에게 범하여지고 새벽에 풀려나 동 뜰 때 자신의 남편이 있는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문 앞에 엎드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풀려나 집에 왔을 때도 그녀를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문 앞에서 날이 다 밟도록 엎드려져 있습니다(26). 이것이 더 큰 비극입니다. 그녀의 남편조차 집 밖으로 끌려간 그녀의 안부에 관심이 없기에, 그녀가 새벽녘에 집 앞에 왔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날이 완전히 밝았고 첩의 남편은 길을 떠나기 위해 문을 열었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첩의 안부나 그녀에 관한 생각은 전혀 없고 오직 기브아를 일찍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그가 일찍 일어나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27).

 

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에 엎드려져 있던 자신의 첩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엎드려져 있던 첩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그녀는 문 집 앞에 쓰러져 있고 그녀의 손은 문지방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이 장면은 사사기에서, 혹은 구약 천지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 중 하나입니다. 손이 문지방에 놓여 있다는 것은 그녀가 안전한 집으로 들어가기를 얼마나 바랐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간신히 살아서 집 앞에 왔지만, 문을 두드릴 힘도 없어 문도 들리지 못한 채 문 앞에 쓰러져서 문을 향해 손을 뻗은 채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녀의 안부를 걱정하며 돌아오기를 기다린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정한 남편은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첩을 보자 안부를 묻거나 그녀의 상태를 살펴보지도 않고 ‘일어나라’라고 명령합니다(28). 그는 한시바삐 이 기브아를 떠나기 원했기에, 첩의 상태나 안보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레위인의 말에 첩은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레위인의 이중적인 행동을 보면서, 우리 자신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남의 폭력성에 대해 거품을 물고 비난하면서, 정작 우리 일상에 스며든 우리의 비정함과 냉정함에 대해서 관대한 존재들이 아닙니까!

 

본문에서 ‘레위인이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문에서는 ‘시체’라는 말이 없습니다. 여기서 대답이 없는 것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시체’라고 해석하고 번역했지만, 실제 원문에서는 죽은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없는 상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은데, 이런 모호한 표현이 레위인이 자신의 첩의 상태를 살피거나 치료할 생각보다는 짐짝처럼 나귀에 실어 그 성을 빠져나오기에 급급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킴으로써 이 레위인의 무정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레위인은 첩을 12토막 내어서, 이스라엘 전 지역에 보내는 매우 엽기적인 일을 벌입니다. 전체적으로 레위인이 첩을 토막 내는 것은 마치 제사에 쓸 짐승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토막 냄으로써, 그녀를 다시 한번 모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첩을 죽음으로 몰았을 뿐 아니라, 그 죽음마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시신을 모욕하며 철저히 이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토막 난 시체를 보고 분노와 경악하여 전쟁을 일으키도록 선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레위인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무정할 뿐 아니라 분노하면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는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레위인이 이런 분노를 표하고, 온 이스라엘을 모을 만큼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레위인의 첫 이야기는 폭력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만 이 비극이 더 큰 비극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사사기 1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은 등장 인물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없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대로만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명분만 쫓은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은 누구든지 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런 주장에 알맞은지에 대한 문제는 다른 문제입니다. 다른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생각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올바른 요구한다면, 다른 사람도 변화되지 않고, 자신은 더욱 왜곡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서, 자신의 기준을 재정립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9-02)


기브아에서 동족에게 천대 받는 레위인

사사기 19장 11-21절


 

교회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서 세상은 어떻게 봅니까? 욕심 많은 사람, 말이 많은 사람, 고집이 센 사람, 실속은 없고 말한 대로 살지 않는 사람, 인정하기 싫지만, 그런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러니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세력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평가할 겁니다.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이 사사 시대 말의 상황과 비슷하지는 않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 장인의 환대를 받은 레위인은 오후 늦게 출발하였기 때문에 결국 에브라임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하룻밤을 머물기 위해 동족 베냐민이 사는 기브아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냉대를 당합니다. 다행히 에브라임 출신으로 그곳에 거래하고 있던 한 노인을 만나 그의 집에서 무사히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기브아에 도착한 레위인 일행(11-15)

교회가 사탄과 싸우는 일도 힘든데, 교회 안에서 형제들끼리 싸우는 바람에 세상으로부터 더욱 신뢰를 잃어버려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대외적으로 지역 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할지, 같이 고민하고 실천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잃은 신뢰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갈 수 있습니다.

 

11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십시다 하니 12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13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 14모두 앞으로 나아가더니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 해가 진지라 15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11-15)

 

하나님의 사람 레위인과 그의 첩은 장인의 지나친 환대를 뿌리치고 늦은 오후에 떠납니다. 여부스(현 예루살렘) 근처에 갔을 때 해가 지려 하였기에 레위인의 종은 여부스 성읍으로 들어가서 유숙하자고 조심스럽게 요청합니다(11). 여부스는 베냐민 지파에게 주신 땅인데, 그들이 이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당시는 가나안 토착민인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레위인은 이방 사람에게 속한 여부스에 들어가지 않고 그 대신 기브아로 가겠다고 말합니다(12). 당시 이방인은 제의적으로 부정한 존재이며 이스라엘에게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종교적이고 사회적 이유로 그는 여부스에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기부하러 가자고 제안합니다. 이방인이 사는 여부스보다 동족이 사는 기브아가 훨씬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브아는 여부스에서 8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된 지역이며 훗날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동족의 땅이 훨씬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부스 대신 기브아를 선택한 것이 현재까지는 매우 상식적이고 바람직한 결정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레위인의 선택은 뒤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기브아가 이방인의 땅 여부스보다 결코 더 안전하지 않고 정결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정말 안전한 여행을 원했다면, 장인의 제안대로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나는 것을 택해야 했습니다.

 

레위인은 기브아 말고 라마라는 다른 장소에도 머물 수 있을 것이라며, 여부스 말고 다른 선택지를 제안합니다(13). 지리적으로 베들레헴에서 시작하여 에브라임으로 가는 길은 남북으로 연결되는 길을 따라 가다가 동쪽으로 빠지면 되는데, 베들레헴에서 북쪽으로 가면 제일 먼저 여부스를 만나게 되고 그 다음 기브아와, 그 다음이 라마입니다.

 

즉, 종은 여부스쯤 와서 이제 유숙을 하자 하였고, 레위인은 이방 땅이라는 이유로 좀 더 북쪽에 있는 기브아나 혹은 좀 더 갈 수 있으면 라마까지 가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 레위인의 모습을 보면 에브라임까지 가는 길을 매우 서두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갔지만, 결국 기브아에 도착했을 때 해가 져서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14).

 

여기서 기브아가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는 사실을 밝히므로 훗날 기브아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방 땅에서 이방 민족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동족에게 저지른 범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레위인 일행은 하룻밤 머물기 위해 기부하러 들어갑니다. 성문에서 레위인의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일행은 사람을 기다리기 위해 성문 가까이 있는 광장으로 가서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거두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사람이 없었습니다(15). 이것은 이 당시 관습에서 볼 때,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여행객이 자신의 성읍으로 오면, 그를 자신의 집에 하룻밤 재워주는 것은 당연히 그 성읍 사람들이 해야 될 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도 아닌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여행자가 성읍에 들어와서 자신을 영접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회적 연대의식 혹은 도덕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인 일행을 영접한 노인(16-21)

선을 베푼 사람들이 하는 말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으로써 인간답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돌봄과 베풂과 배려가 성도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불안하고 두려워 쌓고 경계하고 빼앗는 데만 몰두하는 세상에서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돌봄과 베풂과 배려의 삶입니다.

 

16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17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18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19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인 우리들과 함께 한 청년에게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하는지라 20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21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16-21)

 

이스라엘 백성의 성읍인 기브아에서 하룻밤을 유속하려고 했던 레위인 일행은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환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것이 더 이상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율법은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1) 환대하지 않는 기브아(16-19)

 

이제 한 노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베냐민 사람이 아니라 에브라임의 사람이라고 본문을 소개하면서, 그가 외지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16). 이것은 베냐민 사람들의 무정함과 에브라임 출신의 노인의 호의를 비교하기 위한 포석입니다. 그는 베냐민 사람들과 다르게 눈을 들어 나그네를 바라보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와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는지 물었습니다(17).

 

이런 호의에 레위인은 자신이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로 간다고 말하고, 자신의 집이 에브라임에 있음을 밝힙니다(18). 여기서 ‘여호와의 집’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레위인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영접하는 사람이 없다며 자신의 곤란한 상황을 노인에게 설명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을 영접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레위인은 최대한 겸손하게 자신들을 종과 여정으로 지칭하며 자신들과 자신들의 나이가 먹을 충만한 음식과 사료가 있음을 길게 설명하였습니다(19). 이것은 노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니 잠만 재워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인은 기브아 성읍 사람들의 야박함을 체험한 후,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이 노인에게서도 거절 당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장인의 지나친 환대에 지쳐 급하게 나온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환대에 지쳐 나온 사람들이 이제는 환대를 구걸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장인의 지나친 환대나 기브아의 지나친 냉대와 레위인의 구걸에 가까운 모습들은, 당시 사회가 상식이 통하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비정상과 비상식적인 행동들이 만연한 사회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 레위인의 간청에 대한 노인의 대답(20-21)

 

노인은 레위인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는 레위인이 스스로 쓸 것을 담당하겠다는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뭐든 쓸 것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20). 그러고는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나귀에게 먹을 것을 주고 발을 씻고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물과 음식을 제공해 줍니다. 고대 근동에서 손님이 집에 오면 나귀와 손님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씻을 물을 제공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비정상적인 베냐민 사람들과 달리 노인은 매우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한 대를 베풀었습니다(21). 그리고 이런 환대의 레위인은 장인의 집에서처럼 편안하게 먹고 마시며 노인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폭력이 난무하는 잔인한 세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죄악 된 삶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정결한 행실을 회복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지켜 내시기 바랍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9-01)


제사장 지파 사람 레위인과 첩

사사기 19장 1-10절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안정감을 경험하기도 하고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른 인간관계는 단지 두 사람의 노력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의 이기심으로 깨어진 인간관계가 온전히 희복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습니다. 첩이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레인은 이 첩을 데리고 오기 위해 장인의 집을 방문하고 환대를 받습니다. 장인의 강권을 이기지 못한 레이는 그곳에 더 머물게 되고 날이 저물어 떠나게 됩니다.

 

레위인의 첩이 친정으로 감(1-3)

자기 뜻과 욕심대로 살면서 공동체를 일으키고 죽어가는 세상을 살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이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 세상은 더 악한 길로 치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타락과 몰락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까지 위협했습니다. 그 사건의 발단이 오늘 이야기입니다.

 

1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2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3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1-3)

 

본문은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왕이 없던 그 때”라는 표현을 통해서 사자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1). 하나님을 떠난 인간 사회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함 때문에 세상과 차별화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이 세상과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사사기 17장과 18장의 관계 속에 볼 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영적으로 얻은 시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에브람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레위인입니다. 그 또한 17장에 레위인처럼 거류자로 소개됩니다. 동일한 장소적 배경과 고려하는 레위인의 등장은 19장 이야기가 17장과 18장의 이야기와 상당히 연속성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레위인의 이름과 첩의 이름은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등장 인물들의 행동이 어떤 특별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당시의 보편적인 인물들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당시 타락한 이스라엘 자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 출신의 첩을 얻습니다(1). 첩은 정부인이 아닌 다른 부인을 일컫는 말로, 주로 정부인의 불임으로 인해 아들을 얻기 위해서 맞이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적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맥락에서 보면 입다나 아비멜렉의 예에서 보듯이 첩을 보는 사사기의 시각은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그 첩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넉 달이나 그곳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 말 번역에서는 ‘행음하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래 원음을 본다면 ‘싫어하다’, ‘화를 내다’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만일, 원래 번역처럼 ‘행음하다’라고 이 단어가 해석된다면 아내가 행음하는 일은 남편이 그 아내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심각한 범죄이며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남편이 첩을 데리러 간다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전혀 없어집니다. 대신 첩이 남편을 싫어하여, 혹은, 남편과 다투고 아버지의 집으로 간 경우에는 남편의 첩을 데리고 오는 상황이 충분히 납득됩니다.

 

특히 3절에서 “다정하게 말하고”라는 표현을 통해, 남편이 첩을 설득하고 달래는 입장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첩이 남편한테 화가 나거나 다투어서 집을 나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남편과 싸우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 첩은 넉 달 동안 아버지의 집에 지내게 됩니다.

 

넉 달 후 남편은 첩에게로 갑니다. 아마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안 돌아오니 직접 데리고 오려고 나선 것입니다. 하인과 함께 나귀 두 마리를 가지고 가는데, 나귀 한 마리는 첩을 태워서 데리고 오기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이는 첩을 반드시 데려오고 싶은 그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첩의 집에 도착하자 아내가 그를 마중 나와서 그를 자신의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아마도 그간 남편에 대한 화가 풀렸고 오랜만에 보는 남편이 반가웠던 것 같습니다. 첩의 아버지도 사이의 방문을 매우 기뻐하며 환영하고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서야 떠나는 레위인(4-10)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무한 이기주의 늪에 깊이 ᄈᆞ져들게 되어 서로를 이한 배려나 선행을 찾기 어려운 사회가 되어 버립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은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공동체성을 상실한 이기적인 백성으로 전략했습니다.

 

4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 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5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의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고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 하니라 6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니 7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그의 장인의 간청으로 거기서 다시 유숙하더니 8다섯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 9그 사람이 첩과 하인과 더불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보라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찍이 그대의 길을 가서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10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일어나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이 그와 함께 하였더라(4-10)

 

사위가 딸을 데리고 가기 위해 집을 방문하자, 3일 동안 환영 잔치를 엽니다. 3일 동안 먹고 마시며 장인의 집에 머문 것을 간략하게 언급한 것을 보면 일반적으로 사위가 왔을 때, 3일 정도 머물게 하며 한다는 것이 당시의 관습으로 보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부부 싸움 한 부부가 잠시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 화해하고 즐겁게 지내는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환대가 끝나고, 이제 레위인과 첩은 일찍 일어나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둘이 화해를 하고 같이 떠나려고 한 것입니다. 근동 지역은 낮에는 햇빛이 강하기 때문에 한낮을 피하여 주로 오전이나 오후에 여행을 합니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까지는 반나절 거리였기 때문에 일찍 오전에 출발하면 오전 중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첩의 아버지는 레위인에게 음식을 좀 먹고 기운을 얻은 후에 출발하라고 명령합니다. 명령형을 사용한 것을 통해 장인이 사이를 강하게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강권의 레인과 접은 장인과 같이 먹고 마십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첩의 장인은 레위인에게 묻고 가라고 부드럽게 설득합니다. 앞에 명령한 어조와는 대조적으로 매우 부드럽게 의사를 타진한 것입니다.

 

7절에서 보면, 이런 요청에 레위인은 일어나서 가려고 하지만, 장인이 그를 강압적으로 잡았기에 하루를 더 머물게 되었습니다. 다섯째 날도 넷째 날과 동일한 일이 반복됩니다. 레위인은 첩을 데리고 출발하려고 하고 장인은 이를 하루라도 더 잡아두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장인이 일반적인 환대를 벗어나 강압적인 방법으로 사위를 환대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환 대는 긍정적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남을 대접하는 것은 분명히 좋은 미덕입니다. 후에 기브아와 거민들이 레위인들을 환대하지 않고 공격하려 했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를 이룹니다. 장인은 과도한 환대를 통해 사이의 마음을 즐겁게 만들어 딸과 사이좋게 지내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환대 장면에 딸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딸의 생각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 비정상적인 한 대를 통해 출발하는 레위인의 의지를 반복적으로 막는 것을 보면서, 본문은 무언가 불안감을 느끼게 합니다. 상황이 레위인의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환대에도 레위인은 더 이상 출발을 지연시키지 않고 싶었습니다. 그는 대접을 받는 동안 음식을 먹었지만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8절에서 보면 6절과 다르게 ‘마셨다’라는 표현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레위인이 반드시 이날 떠나겠다고 결심하고 술을 마시지 않고 맨 정신을 유지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9절에서 레위인은 첩과 그의 하인과 더불어 일어나서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도 장인은 7절처럼 또다시 머물러 가라고 간청합니다. 이번에는 6절과 다르게 이유가 나옵니다. 해가 이미 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라는 말은 한낮이 지나서 가라는 의미이고 9절에서 날이 저물어 간다라는 말은 해가 저물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전에 쉬었다가 한낮을 피해 오후에 출발하라며 잡고 연회를 베풀었는데, 레위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연회가 너무 길어져서 오후를 지나 저녁이 가까워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가 반나절이라고 해도, 여행을 해가 저물 무렵에 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행동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인은 이번에도 사이에게 하룻밤 더 머물면서 즐겁게 지내다가 내일 일찍 출발하라고 조언합니다.

 

이 부분은 19장에서 21장의 서론 부분으로 레위인에 대한 장인의 지나친 환대와 출발 지체가 이후에 일어날 일련의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레위인은 장인이 간곡하게 하룻밤 더 자라고 붙잡았지만, 그곳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장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이성적 판단보다는 그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은 감정적 판단을 따라서 고향까지 가기 전에 해가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늦은 오후에 길을 나섰습니다.

아마도 장인의 지나친 환대가 지겨웠거나 부담스럽기에 빨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결심이 서자마자 일어나서 곧바로 떠납니다. 일어나자마자 여브스 근처에 이르렀다라고 부모는 말하는데 중간 과정을 모두 생략함으로써 레인의 급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브스는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으로 이곳은 사사기 1장 7-8절에 유다가 아도니 백섹을 죽이면서 승리하였고, 사사기 1장 21절에서 베냐민 사람들이 이곳을 공격하였지만, 완전히 정복할 수 없었기에 그곳에는 여전히 이방인들인 여브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는, 오히려 더 악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 살아간다면 불신자들보다 더 악한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날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주인으로 모시는 참된 성도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8-02)

 


불순종으로 건축한 단 지파 성읍

사사기 18장 21-31절


인간의 힘으로 만든 신은 인간의 힘으로 무너집니다. 우리가 의지한 우리의 우상은 배반할 것입니다. 결국 다른 우상들에 의해서 대체될 것입니다. 말씀에 기초하여 세워진 신앙이 아니라 언제든지 우리가 믿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우리 교회의 우상이요, 개인의 우상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 단 지파와 미가의 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본문에서 단 지파 사람들은 미가의 집에서 신상과 제사장을 훔친 후, 이에 항의하는 미가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쫓아 보냅니다. 그 후에 단 지파는 평화로운 라이스를 점령하고 그곳을 단 지파의 거주지로 삼습니다. 또한, 그곳에 미가의 집에 신상을 세우고 그들과 같이 온 모세의 손자 요나단을 자신들을 위한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미가의 요구와 단 지파의 협박(21-26)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진리인 것처럼, 통용되는 세상에서 부와 권력은 누구도 떨칠 수 없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세상보다 더 큰 힘을 가질 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르게 살 때 실추된 교회와 성도의 위상은 회복될 것입니다. 세상보다 더 큰 힘을 가질 것이 아니라 세상과 다르게 살 것을 힘써야 합니다.

 

21그들이 돌이켜서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물품을 앞에 두고 진행하더니 22미가의 집을 멀리 떠난 때에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미쳐서는 23단 자손을 부르는지라 그들이 낯을 돌이켜 미가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 24미가가 가로되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 하느냐 25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26단 자손이 자기 길을 간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21-26)

 

단 지파는 라이스를 정복하기 위해 미가의 집에 신상을 훔쳐서 떠나버립니다. 부적같이 여긴 것입니다. 아마도 그 신상을 가지고 있고, 제사장을 소유하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전쟁에서 여호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가의 신상을 훔친 단 지파는 가족들을 앞세우고 미가의 집을 떠났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족과 귀중한 물건들은 뒤에 놓고 보호하는데 여기서 앞세운 것을 보면 미가가 뒤에서 쫓아올 것을 예견하는 행동으로 보입니다(21).

단 지파 사람들이 미가의 집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미가는 이웃 사람들을 불러모았습니다(22). 미가는 자기 혼자서 일단 600명의 군사를 당할 도리가 없어서 두려우므로, 그들이 집에 있을 때는 꼼짝없이 당하기만 했었습니다. 그들이 멀어지자 이웃들을 불러 모아서 단 지파 사람들을 쫓아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 단 지파를 따라잡은 미가는 그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하지만, 단 지파 사람들은 태연하게 미가를 보며,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24)라고 묻습니다. 무슨 일인지 뻔히 알면서 태연하고 오만하게 질문합니다. 미가는 분통을 터뜨리며,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 하느냐”라고 반문합니다(24).

 

미가의 이 말에는 미가의 생각을 잘 반영하는데, 그는 일단 신상을 ‘내가 만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놓고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낸 신’이라고 했던(신 32:1-10) 이스라엘 백성들과 닮았습니다. 이런 미가의 말은 미가의 신앙이 여호와를 믿는 신앙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여호와의 신앙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든 피조물이며 사람이 만든 신상은 결코 신이 아니라 단순한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든 신상과 제사장이 없으니,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눈에 보이는 신상과 제사장을 모두 빼앗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라고 강조합니다. 그의 신앙은 신상과 제사상에 의존한 신앙이었는데 그것이 없으니 그를 축복한 하나님도 사라지게 되어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상과 제사장에 의지한 신앙의 결과입니다. 보이는 물건이나 제도를 의지하는 신앙은 그 제도와 물건이 사라지면 신앙도 사라집니다. 이것은 진짜 신앙이 아닙니다.

 

단 지파는 사과하기는커녕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즉, ‘떠들지 말라’라고 경고합니다. 혹시,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라고 협박합니다(25). 레위인에게도 “잠잠하라”라고 하면서, 위협하던 단 자손은 이제 미가의 항의를 완전히 묵살하면서 죽일 수 있다라고 협박한 것입니다.

 

단 지파는 힘 있는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당당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 지파가 하나님 말씀이 아닌 철저한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라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미가가 신상을 만들고 레인을 제사장으로 들인 이유는 여호와께 복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복을 받기 위해 만든 것 때문에 이제 미가와 그의 가족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축복의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 재앙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가의 잘못된 신앙에 대해 상실과 죽음의 위협으로 심판하셨습니다.

 

도둑질로 시작한 미가는 단 지파의 도둑질의 희생자가 되어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고, 이제 이 재앙의 물건들은 단지파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개인의 범죄가 점점 확대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집안의 위험에 빠뜨린 물건들이 이제는 한 지파 전체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에서도 ‘나 한 사람쯤이야! 괜찮겠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 한 사람부터’라고 생각하면서, 잘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가족과 자녀들에게 선한 영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까지 그 영향은 미칠 것입니다.

 

라이스 정복과 우상숭배(27-31)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번영을 축복으로 착각하고 불의를 일삼는 자기만족의 종교를 향해 분노하십니다. 죄와 함께 쌓여가는 모든 것은 한순간에 다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루하루 자기 일상이 아니라 순종의 일상을 쌓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화려한 신상과 명망 있는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세상에 사로잡힘을 면할 수 없습니다.

 

27단 자손이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되 28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거리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단 자손이 성읍을 세우고 거기 거주하면서 29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였더라 30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31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27-31)

 

단 지파 사람들은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목적지인 라이스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라이스 사람들을 한가하고 겁 없이 사는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7). 즉, 라이스 백성들은 어떤 분쟁이나 폭력도 없이 서로를 신뢰하는 백성이었습니다. 이런 라이스의 모습은 위에서 보여준 폭력적인 단 지파의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폭력적인 단 지파는 여기에서 폭력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평화로운 라이스를 칼날로 치고 성읍을 불살라 버렸습니다(27). “칼날로 치고 불살랐다”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완전히 진멸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28절에서 이렇게 라이스가 소수무책으로 당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들이 시돈 지배하에 있었지만, 시돈과는 거리가 멀어 무슨 일이 생겨도 도와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단 지파는 미가의 신상을 폭력으로 빼앗았던 것처럼, 라이스도 같은 수법으로 빼앗았습니다. 단 지파는 라이스를 정복하고 그곳의 성업을 세워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29절에서 라이스가 ‘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단’은 자기보다 힘이 센 자들과 싸워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땅을 차지하기보다는 평화롭게 살던 약한 라이스를 정복하였습니다. 단 지파에게는 전쟁이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승리는 군사력에 달려 있지 않다라는 신앙이 전혀 없었습니다(대하 20:15). 하나님을 의지하며 승리를 거둔 많은 신앙의 유산들을 잃어버린 채 단 지파는 보잘 것 없는 자기만 의지하였습니다. 그래서 강한 아모리 앞에서는 도망하고 만만한 라이스만 정복한 것입니다. 단 지파의 라이스의 정복은 단 지파가 폭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이들에게 하나님 믿는 신앙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신앙이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단에 자리를 잡자마자 신상과 제사장을 세웁니다.

 

여기서 본문은 이들 제사장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합니다.

첫째, 제사장이 모세의 손자여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모세의 가문까지 영적으로 부패하였다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온 지 100년도 되지 않았지만, 매우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불과 모세 이후 3대만에 부패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세 가문 출신의 제사장을 통해서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단 지파는 지금은 잘 나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단 지파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으셨습니다. 30절 하반절에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로잡힌 날’이라는 것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포로로 잡혀간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앗수르에게 사로 잡힘으로서 심판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미가가 만든 바로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다”(31)라는 말을 통해서, 단 지파에게 오랫동안 지속된 잘못된 제의가 바로 미가가 만든 신상 때문이었다라는 것을 다시 상기시키며 미가의 신상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17장과 18장은 미가의 도둑질이라는 도덕적 잘못이 신상을 만드는 종교적 범죄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 일에 레위인이 동참하므로 일반 백성뿐 아니라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도 종교적 탈락에 일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한 가정과 한 레인의 문제에 단 지파가 합류함으로써 한 가정의 탈락과 한 레위인의 잘못된 선택이 한 지파 전체가 잘못된 종교적 행위를 지속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개인의 종교적 탈락이 점차 심화되고 확대되어 온 이스라엘로 퍼져나가고 있음을 잘 그려냄으로써, 한 개인이 신앙을 바로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단 지파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적 삶의 기준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ㅅ갊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삶의 절대 기준이어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8-01)

 

 


라이스를 정복한 단 지파와 레위인

사사기 18장 1-20절


 

기독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증상은, 종교 지도자가 세워지는 과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종교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기준이 없어지고, 다만 아무런 경로든지 목사나 선교사 그리고 장로가 되어서 지도자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소위 ‘성직 매매’도 성행하게 됩니다. 돈을 주고, 혹은 돈이 많은 사람이 그런 자리를 차지하거나, 혹은 돈을 위해서 그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이 용납되는 시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마지막으로 갈수록 그런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 본문에서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기업을 정복하지 못하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을 정탐하려 다닙니다. 그러다 라이스를 발견하고 그곳을 정복하려고 출발합니다. 그들은 도중에 미가의 집에 들러 미가 집에 있는 신상들과 에봇과 드라빔을 무력으로 뺴앗으며, 제사장 역할을 했던 레위인에게 단 지파의 제사장 자리를 제안하였습니다. 이에 이 레위인은 기쁘게 이 제안을 수락합니다.

 

라이스를 정복하러 가는 단 지파(1-6)

사사 시대 당시 이스라엘은 주변국들과는 달리 아직 왕정 체제가 확립되어 있지 않아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혼란했습니다. 그러나 혼란의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백성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원토록 살아 계셔서 우주 만물을 통치,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며 범죄하였습니다.

 

1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2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그들의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니라 3그들이 미가의 집에 있을 때에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하니 4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하여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하니라 5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6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1-6)

 

앞에서는 에브라임 지파가 등장했지만, 본 18장은 단 지파가 등장합니다. 그때까지 단 지파는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에게 기업이 없다’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단 지파에 기업을 주었지만, 그 땅을 아모리 사람들 때문에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은 “그 때 이스라엘의 왕이 없었다”라는 구조로 시작합니다(1). 이 구절은 새로운 상황의 시작을 달리는 일종의 표시입니다. 단 지파의 이야기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합니다.

 

1절 하반 절에서 단 지파는 거주를 얻지 못하여 거주할 지역을 찾고 있는 집단으로 소개됩니다. 이들은 기업으로 분배 받은 땅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모리 사람들이 점령하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라와 에스다올로 도망쳐 와서 살면서 새 정착지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2). 이들은 갈렙처럼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라고, 말하는 여호수아 14장 12절에 나오는 그러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길을 떠난 단 지파가 도착한 곳이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이었고 그들은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개의 이야기가 한 장소에서 만납니다. 단 지파 사람들이 미가의 집을 떠날 때, 이들은 레위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가던 길에서 돌아와 레위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레위인의 목소리를 구별한 것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레위인의 특유의 어투로 토라를 외우고 있는 소리를 들었을 것으로 유출됩니다. 레위인과 단 지파 사람의 만남은 사건의 절정으로 치닫는 도화선이 됩니다.

뜻밖의 장소에서 레위인을 만나자, 단 지파 사람들은 의아해서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라고 많은 질문을 쏟아놓았습니다(3). 레위인은 이 질문에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말하면서, 모든 일은 미가가 한 일이고, 미가가 자신을 고용하였고 자신은 그의 제사장이 되었다라고 대답합니다(4). 레위인은 당당하게 자신이 미가에게 고용된 개인 제사장이라고 밝히는데, 이는 자신의 불법에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뻔뻔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단 지파 사람들은 이런 레위인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장이라는 직분을 가진 그에게 하나님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라고 알아봐달라고 부탁합니다(5). 이 질문은 단 지파 사람들의 영적인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이 신상(神像)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레위인이 합법적인 제사장인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단이 있고 신상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니, 하나님의 뜻을 물어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정해 졌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번복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그 뜻을 순종할만한 마음의 준비가 된 것입니까! 자신들을 살피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맞추려고 한 것입니다. 자기 뜻과 반대되는 말을 하면, 그렇게 말한 사람들을 자격없다고 말하며 거절할 것입니다.

 

이에 레위인의 수준도 그만그만합니다. 그 역시 제사장으로서 바른 여호와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줍니다. 하나님께 관심도 없는 이 레위인이 신탁을 내립니다.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라는 말을 해줍니다(6). 본문 레인이 여호와께 기도했다든지 물어봤다든지 하는 말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레위인은 하나님께 물어보고 답을 얻은 것이 아니라, 단지 단 지파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축복한 것입니다. 레위인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일단, 그는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고향을 떠난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른 곳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는 길은 여호와의 뜻이라고 말하며 축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뜻을 묻고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고 여호와께 제를 드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여호와의 올바른 뜻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었고, 전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행하고 있습니다.

 

라이스 정탐 빛 침략 준비(7-13)

많은 사람이 방황합니다. 그러한 방황의 종식할 방법은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실수한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방황의 종식은 안전한 땅을 찾는 데서 끝나지 않고, 참되신 왕이신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7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8그들이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가서 그들의 형제들에게 이르매 형제들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보기에 어떠하더냐 하니 9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10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는지라 11단 지파의 가족 중 육백 명이 무기를 지니고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출발하여 12올라가서 유다에 있는 기럇여아림에 진 치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이 오늘까지 마하네 단이며 그 곳은 기럇여아림 뒤에 있더라 13무리가 거기서 떠나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이르니라(7-13)

 

제사장의 신탁을 들은 단 지파 정탐꾼들은 그곳을 떠나 라이스에 이릅니다. 본문은 라이스를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정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도 상종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합니다(7).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평화로운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곳은 시돈 사람들의 영향력 아래 있지만, 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곳입니다. 이 라이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정복하라고 주신 땅의 명단에 들어있지 않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을 정탐하고 소라와 에스다올로 돌아간 정탐꾼들은 그들의 눈에 보기 좋으니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라고 합니다. 그것도 게으르게 말고 빨리 올라가자라고 선동합니다(9).

 

10절에서 정탐꾼들이 라이스로 전쟁을 하러 가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첫째는, 그들이 평화로운 백성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전쟁에 능하지 않는 민족이고 자신들이 쫓아내지 못한 아모리 족속처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민족이란 뜻입니다. 둘째, 그곳은 부족함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복 전쟁의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지금 사는 곳은 한 지파가 살기에 매우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셋째, 전쟁의 승리를 여호와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라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승리를 약속하실 때 사용되는 구문으로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전쟁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은 미가 집에 있던 레위인에게서 받은 엉터리 신탁을 정말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탐꾼들의 선동을 받은 단 사람들은 당장 군사 600명을 모집하여 라이스를 정복하기 위해 출발합니다. 이들은 유다 지역 기럇여아림을 지나서 에브라함 산지 미가의 집까지 오게 됩니다.

 

미가의 신상과 제사장을 탈취함(14-20)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성직자가 돈과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있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은 절대 돈과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돈과 권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땅이 아닌 저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4전에 라이스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 형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하고 15다섯 사람이 그 쪽으로 향하여 그 청년 레위 사람의 집 곧 미가의 집에 이르러 그에게 문안하고 16단 자손 육백 명은 무기를 지니고 문 입구에 서니라 17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서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져갈 때에 그 제사장은 무기를 지닌 육백 명과 함께 문 입구에 섰더니 18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지고 나오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하니 19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20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14-20)

 

단 지파의 다섯 정탐꾼은 이전에 라이스뿐 아니라 미가의 집도 정탐하였고, 미가의 집에는 에복과 드라빔 신상들이 있음을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은근히 형제들에게 알립니다. 그러면서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라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그것을 빼앗아 갈 것을 선동합니다(14). 이렇게 600명의 군인들을 선동한 다섯 정탐꾼들은 미가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들은 600명의 무장한 군사들로 레위 청년을 곱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샬롬’이라고 인사한 뒤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16절에서 18절에 미가의 집에서 신상들과 에봇과 드라빔을 취하는 것이 세 번 반복됩니다. 17장 2절에서 4절에 미가가 어머니의 돈을 훔친 것과 같은 동사가 동일하게 세 번 사용됩니다. 어머니에게 훔친 은으로 만든 신상을, 이제 단 지파 사람들이 훔쳐가고 있음을 같은 동사를 반복하여 사용함으로 나타내고 이를 통하여 인과응보를 강하게 부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이 도둑질 당하는 사이에, 레위인은 문 앞에 서 있다가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라며 미약한 반항을 했지만, 그들이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라고 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저항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단 지파의 아버지와 제사상이 되라는 제안을 하자, 기쁨의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미가의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들고 단지파 사람들과 합류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집에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에 의한 한 지파의 족속의 제사상이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낫겠느냐는 정탐꾼의 말이 레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20절에서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라는 표현은 그가 자발적으로 단 지파에 합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가 직접 에봇과 드라빔과 신상을 들고 갑니다. 더 이상 미가의 물건을 훔친다라는 죄책감이 없이 단 지파의 도둑질에 동참한 것입니다.

 

레위인이 자기 고향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으로 미가 집을 떠던 곳도 좀 더 살기 좋은 곳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길이 열렸으니, 이를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미가 집 제사장이 된 것도 미가 준 돈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레위인이었지만 여호와의 종이 아니며 돈만 주면 어디든지 가서 무엇인지 할 수 있는 삯꾼이며 종교 행위자였던 것입니다.


라이스로 향하는 단 지파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가나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모습이 아니라 욕심에 휩싸여 자신들의 눈에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혈안된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복된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순종해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7-01)


우상숭배를 대한 미가와 레위 제사장

사사기 17장 1-13절


예수님의 제자인 마태는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까지 무엇을 했었습니까? 그는 “세리 마태”라고 소개합니다(마 10:3). 레위인은 제사장 지파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국노의 대표로 인식하고 있는 세리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로마에 바칠 세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또 다른 영적 타락한 시대를 보여줍니다.

 

  • 본문은 미가라는 한 청년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은을 훔치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어머니께서 훔쳤다가 돌려드린 은으로 우상을 만들고 에복과 드라빈까지 만들어 집에 신당을 차리게 됩니다. 그런데 때마침 떠돌던 레인이 미가의 집에 오게 되었고 미가는 이 레인을 자신의 집 제사장으로 삼게 됩니다. 미가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미가 집의 제사장(1-7)

하나님께서 부재한 심령에 남는 것은 탐욕에 물든 자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자신의 소견과 소욕을 따라 행하던 시대입니다. 그 끝은 방황과 방탕 혼동과 공허뿐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을 불편해하고, 오로지 다른 관점으로 치부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참된 건의와 기준이 무엇인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내 야망을 이루는 욕망의 도구가 될 뿐입니다.

 

1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2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4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6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6)

 

사사기 17-21장은 마지막 에필로그에 해당합니다. 사사기 17-18장은 종교적인 타락을 다루고, 19-21장은 윤리적인 타락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타락의 배후는 하나님에 대한 타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사기 마지막에 가면 죄악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 사람들이 얼마나 무심해지고 무감각해질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죄를 짓는지도 모르고, 죄를 짓고도 마음 아파할 줄 모르고, 오히려 당당하기까지 한 뻔뻔함이 사사기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신앙은 사라지고 껍데기뿐인 종교만 남은 것입니다.

 

본문에는 미가는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큰 에브라임 지파로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1). ‘미가’라는 이름은 본문에서 두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미카 예후’인데 그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게 있느냐?’입니다. 미가 선지자와 동명이인입니다. 1절에서 소개할 때 사용되고, 4절에서 미가의 집에서 이 이름이 사용되어 단락을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 말 개역개정처럼 ‘미가’라고 번역하기보다는 ‘미가 예후’로 번역하는 것이 본문의 의도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 이름은 오직 여호아만이 신이라는 것을 고백할 때, 많이 사용되는 구문으로 이 이름 만을 보면, 미가의 어머니가 여호와를 믿는데 열심인 것처럼 보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은 1100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녀는 이 돈을 가져간 사람을 저주합니다. 이 저주를 듣고 겁이나서 아들 미가는 두려워서 자신이 그 은을 가져갔다고 자백하고 은을 도로 내놓고 있습니다(2). 아들이 어머니의 돈을 도둑질하는 시대가 사사 시대입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돈을 도둑질하는 것은 십계명 중에 ‘내 부모를 공경하라’는 넷째 계명과,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여덟째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통 크게 어기면서도 어머니의 저주, 즉, 하나님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이중성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저주가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미가는 도덕적이지는 않지만, 종교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미가 어머니의 반응도 기대와는 다릅니다. 도둑질한 아들에게 화를 내거나 벌을 내리거나, 적어도 슬퍼할 일입니다. 오히려 도둑질한 아들에게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면서 복을 빕니다. 이는 자신의 저주가 아들에게 임할 것 같으니깐, 여호와의 축복으로 상쇄시키고 있습니다. 다른 절도범은 저주를 받아도 되고, 자기 아들은 절도범이라도 해도 저주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한 것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돈을 훔친 자식을 전혀 훈계하거나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돈을 무사히 찾은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난발하고 있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미가에게 은을 돌려주면서 은을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릴 것이며 그것을 가지고 아들을 위해 신상들을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3). 신상을 만드는 것은 십계명의 제2계명을 정면으로 어긴 것입니다. 하지만 미가의 어머니는 그런 결정을 여호와를 위해 그리고 여호와께 복을 받기 위해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은 200을 가져다가 은 세공장에게 주어 신상을 만들었으며 그 신상은 이후 미가 예후의 집에 있게 됩니다(4). 미가의 어머니는 말끝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고 그분을 위하는 것처럼 말하며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전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가 어머니의 모습은 당시 허울과 형식만 남고 말씀은 전혀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집 안에 신상을 둔 미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에봇과 드라비는 주로 하나님의 신탁을 받을 때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미가는 일반인이 가져서는 안 되는 에봇을 만들고 작은 우상도 만들었습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제사장은 오직 레위인만이 할 수 있는데 이 말씀도 어기고 자신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고 맙니다(5). 결국, 미가의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제사장을 자신의 집에 두어 여호와를 섬길 곳을 마련하였지만, 그의 방식은 철저히 이방 신을 섬기는 방식이었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자행된 미가와 그의 어머니의 범죄들에 대해 사사기는 “그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라고 평가합니다(6). 여기서 “왕이 없으므로”라는 표현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왕이신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레위인이 미가집의 제사장이 됨(7-13)

신앙이 우리 욕심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기복주의로 전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의존과 섬김의 대상입니다. 언제든지 자기 만족과 행복을 위해 부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우상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기 부정과 절대 순종을 요구하는 신앙이 우리 욕심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기복주의로 전락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7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8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9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10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11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12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그 청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 13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7-13)

 

이제 7절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 유대 베들레헴에서 온 레위인 청년입니다. 여기서 레위인을 ‘나르’, 즉 청년으로 언급한 것은 공식적으로 제사장을 시작하는 나이가 30세가 아직 안 되었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7-9절에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유다 베들레헴 출신 거류민이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지역을 벗어나 떠돌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호수아 21장 4절에 하나님께서 레위인에게 주신 거주지가 있는데, 유다 베들레헴은 그 성읍 명단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신명기 18장 6-7절에 따르면, 레위인이 그가 받은 거주지를 떠나는 경우는 간절히 소원이 있을 때이고, 그 경우에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즉, 여호와의 성소가 있는 곳을 가야 됩니다.

레위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자신을 위해 선택한 사람들로 항상 예배에 봉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규정이 있는데도 이 레인은 유다 지파에 속한 레위인이 거주하는 지역에 살지 않고 이탈하여 성소도 없는 베들레헴의 거류민으로 살다가 다시 에브라임 산지까지 온 떠돌이였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의무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 인물임을 본문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장직을 수행하기에 나이도 어리고 사명도 없는 인물이 미가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미가는 거주지를 찾는다는 레위인의 말에 자신의 집에 고하며, 자신을 위한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일종의 존경의 표시로 제사장이 제사를 집행하고 신탁을 받아 조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미성숙하고 책임감이 없는 아이 거류민에게 미가는 책임이 막중한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하고 거기서 나온 것으로 생활해야지, 어느 개인에게 소속되어 그의 일을 해주어선 안 됩니다. 하지만, 이 레위인은 미가가 제시한 1년의 은 10과 옷과 음식에 만족하며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레인이 들어갔다”(10)라는 표현은 협상이 성립되었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11-12절은 미가의 집에서 생활하던 레위인의 상황을 정리한 것으로 11절은 레위인의 관점에서 그 생활이 만족스럽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레위인이 아들 중 하나 같이 되었다는 것은 미가의 식구들이 그를 한 가족처럼 잘 대어 주었다는 표현입니다. 즉, 이 협상은 서로에게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서로의 합의 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며, 본문은 이 어이없는 상황을 미가의 관점과 레위인의 관점에서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서로의 만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레위인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보다는 자신이 편하고 만족스러운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즉,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지만 철저히 사익을 쫓았으며 이를 위해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고 율법을 어기는 일이라도 개의치 않는 인물입니다. 이 레위인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미가 같은 일반인뿐 아니라 레위인까지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무질서한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13절은 전개의 결론으로, 미가는 레위인이 자신의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미가 이 말은 그의 신앙 형태를 잘 보여줍니다. 이제 재단과 우상과 레위인 제사장까지 완전한 형식을 갖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대로가 아니라 세속화되고 이방화된 종교 생활에 매달리고 있는 미가의 모습은 복음의 진수는 잃어버린 채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과 형식적인 예배, 기도와 헌금만이 기독교의 전부인 줄 알고 이것만 잘하면 복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시대의 성도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지기 않는 삶에는 도덕적 무질서와 해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관심보다는 종교적 의형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의로운 삶의 변화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나타나도록 힘써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6-03)


은혜로 마지막을 장식한 삼손

사사기 16장 23-31절


우리는 내일을 알 수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막연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고, 우리가 경험한 일들 조차 때로는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것이 합력에서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큰 용기와 힘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신 재료는 선한 것들뿐만 아니라 악하고 나쁜 동기까지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그 모든 것이 은혜의 용광로에 녹아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선으로 빚어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 신에게 제사하며 즐거워하고 삼손에게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삼손은 집을 지지하는 기둥을 찾아 붙들고는 원수를 갚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삼손이 힘을 다해 몸을 굽히니 집이 무너져 모두 죽습니다. 그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죽을 때 죽인 자가 많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축제(23-2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힘만 주시지 않고 지혜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힘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없는 자들은 속임수를 사용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세고 지혜가 출중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자신에게 유익을 주기보다 더 해로움을 줄 것입니다.

 

23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23-24)

 

나실인의 고귀한 서약을 저버린 삼손은 이방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진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두 눈이 뽑히고, 놋줄에 매어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삼손 개인의 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농사를 망치고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사로잡고 승리의 감격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 다곤이 이렇게 넘겼다고 감격에 빠졌습니다. 큰 제사를 드리고 승리의 축제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방 가운데 제사장 역할을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스라엘로 인해 다른 민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사 시대에는 지속적으로 이스라엘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무시당하고 조롱받았습니다. 본문의 블레셋 사람들도 삼손을 사로잡고서 자신들의 우상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이름이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조롱당하는 삼손(25-27)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지하지 않았던 자만을 벗어 버리고,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동행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길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기도 시간을 통해 그를 만나 주시고 참된 하늘의 능력으로 덧입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25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27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25-27)

 

블레셋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삼손이 자신들의 수중애 잡히자 블레셋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삼손을 조롱하고 그에게 재주를 부리게 했습니다.

삼손은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같은 삼손의 모습은 마치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두 눈이 뽑힌 삼손은 앞을 볼 수 없었기에 자기를 안내하는 소년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그 집을 받치는 기둥에 자신이 기댈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삼손에게는 이제 소망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끝날 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인생은 끝났을지언정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도, 변경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물리쳐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삼손의 최후(28-31)

영원한 것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아가도록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소생시키십니다.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아가도록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회의 문이 닫히지 않았을 때 속히 사명의 길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28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28-31)

 

삼손은 절망의 순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습니나, 그것은 여호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던 그때에 죽음을 각오한 삼손은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나실인이자 사사로서의 모습을 전혀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일 때문에 분노하여 블레셋에게 복수하길 바랐습니다. 삼손은 자신을 강하게 하여 인수를 갚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이 같은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간구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외치면서 그 건물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을 붙들고 몸을 굽혔습니다. 그러자 건물이 무너져 내려 그곳에 있던 수많은 블레셋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죽인 수보다 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때 죽었습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업적의 기록이 아닙니다.

비장한 최후를 통해서라도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엄중했는지를 보여 주는 비장한 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삼손은 시련 속에서 자기의 연약함을 발견했습니다. 지그까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결과,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할 힘을 얻었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의지한다면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6-02)


비극적으로 몰락한 삼손

사사기 16장 15-22절


 

모든 일은 끝이 좋아야 그 일이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작은 미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인생의 끝이 좋으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아무리 위대하게 시작해도 끝이 좋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평가받을 것입니다. 삼손의 인생이 그러했습니다.

 

  • 들릴라가 날마다 조르자 결국 삼손은 머리가 밀리면 힘이 없어진다고 자신의 비밀을 드러냅니다. 머리를 밀린 삼손은 모든 힘을 읽고 눈도 뽑힌 상태에서 블레셋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에게 엄청난 힘을 주셨는데, 삼손은 다원 신전에 몰려든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합니다.

자신의 비밀을 말하는 삼손(15-17)

대부분 인생에 닥칠 불행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죄의 유혹을 방치하면 처음에는 달콤해도 결과는 혹독하게 영혼이 파멸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갈 5:13).

 

15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15-17)

 

들릴라는 삼손에게 집요하게 힘의 근원과 그를 무력화시킬 방법을 물었습니다. 세 번이나 속은 들릴라는 단념하지 않고 순전히 돈에 대한 욕심과 자존심에 대한 오기로 삼손을 더욱더 괴롭혔습니다. 그녀는 삼손에게 여러 번 속자, 이제는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시작해 자신을 세 번이나 희롱했다며, 삼손을 매일 들볶았습니다(15-16).

처음에는 장난처럼 거짓말을 둘러댔던 삼손은, 이제 들릴라에 집요함에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고 표현할 만큼 괴로워하였습니다. 그 자신도 자신의 비밀을 알려주면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재촉하다’라는 말은 사사기 14장 17절에 ‘강요하다’와 같은 단어이며 들릴라가 딥나의 아내처럼 삼손을 압박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삼손은 들릴라가 이 정도로 시험했으면, 삼손도 들릴라는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들릴라에게 진실을 털어놓았습니다(17). 자신이 모태에서부터 나실인이 되었고, 머리털을 밀면 힘을 잃어 다른 사람들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그의 실제 삶과 매우 괴리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기 정체성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백과 삶은 일치해야 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비그리스도안들과 똑같이 사는 것은 삼손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붙잡힌 삼손(18-22)

하나님께서는 주신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정욕과 야만에만 이용하면 결국 인생이 몰락할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에 눈이 멀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고 주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최후에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18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20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18-22)

 

삼손의 비밀을 알아낸 들릴라는 그를 자기 무릎에 뉘여 잠들게 한 후에 그의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이미 철수해 버린 블레셋 지도자들에게 연락하여 돈을 챙겨서 한 번만 더 와 달라고 합니다(18). 들릴라가 삼손을 깊이 재운 다음 그의 머리털을 자르자 결국 삼손의 힘이 사라졌습니다(19).

잠에서 깬 삼손은 이전처럼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거라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이미 여호와의 영이 떠나셨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능력을 잃은 삼손은 손쉽게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삼손은 두 눈이 꼽힌 채로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하루아침에 몰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전부터 그 조짐들은 있었습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하고, 기생을 찾으며, 사체를 수도 없이 만진 일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여호와의 영이 떠난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의 전락은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된 죄의 결과였습니다. 비록 그의 삶은 추락했으나,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나실인이 규정을 어기면 일곱째 날에 머리카락을 밀고, 새롭게 서약해야 했습니다(민 6:9-13). 삼손은 어쩌면 지금 새롭게 나실인 서약을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본문의 진술이 아직 일말의 희망이 남았음을 암시해 줍니다. 삼손은 한평생 나실인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그가 죽는 날까지 나실인임을 말입니다(13:7).

하나님의 계획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거룩함을 추구하며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살이 복된 인생입니다.


성도가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세상이 조롱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길에 버려져 많힐 뿐입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내용은 일치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성령님께 붙들려 이 땅에서 사명을 다하시길 축원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6-01)


기생 들릴라에서 빠진 삼손

사사기 16장 1-14절


처음에는 작게 시작했던 불장난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켜집니다. 집도 물건도 그리고 산불까지 나서 모든 것을 태우기도 합니다. 그래서 몹시 위험한 행동을 비유해서 ‘불장난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멀어진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변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빠져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길 바랍니다. 본문을 통해 소중한 것을 바라보고 찾을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 삼손은 계속적으로 위험한 장난을 즐기고 있습니다. 몹시 위태해 보입니다. 삼손은 계속해서 이방인인 블레셋 여인에게 집착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불장난하는데 사용합니다. 삼손은 장난삼아 살아가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목숨을 놀리고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장난이 아닙니다. 당신의 생명을 노리고 접근합니다.

 

유혹에 약한 사람(1-3)

하나님의 기적인 일들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삶에 변화가 없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자 하는 결단은 없다면,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서 돌이키질 못합니다. 죄가 이렇게 무섭게 지배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기준도 목적도 없습니다. 항로를 잃어버린 배처럼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에 밀려 떠다니는 배처럼 눈에 보이는 기생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1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2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3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1-3)

 

삼손은 이번에는 블레셋에서 가장 큰 가사로 내려갑니다. 이번에도 삼손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원수의 도시로 들어간 이유는 오직 정욕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삼손은 가사에서 기생을 찾습니다. 기생을 보고 그 여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의 약점은 성적 욕망에서는 약했습니다. 그는 성욕을 채우기 위해 원수의 심장인 가사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나실인에게 합당하지 않게 이방 여인과의 첫 번째 결혼이 실패로 돌아간 후, 또 삼손이 택한 두 번째 길은 창기와의 동침함이었습니다. 죄악에 빠지게 되면 그곳에서 해치고 나오기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삼손은 블레셋에서 가장 주의할 인물입니다. 어떻게든 원수를 갚아야 할 대적 중의 대적입니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을 것인데, 삼손은 자기 힘에 취해 홀로 블레셋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과 다릅니다. 용기와 만용은 같지 않습니다. 무모함과 담대함은 아주 다릅니다. 삼손은 무모했고, 만용을 부렸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힘을 본래부터 자기 것인 양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사로서, 나실인으로서의 의무를 까맣게 잊고 생활합니다.

 

삼손을 보고 가사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밤새 그 집을 에워싸고 성문에서 매복해서 집에서 그가 나오면 급습하여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삼손을 죽이려고 성문에서 밤새 기다렸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계획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다 일어나, 새벽에 가사의 성문 문짝과 문기둥과 문빗장을 뽑아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 산꼭대기 60km가 넘은 곳까지 갔습니다. 이틀 넘게 가야 하는 거리기 때문에 헤브론으로 향하는 산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 매복을 뚫었는지는 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문은 힘과 안전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성문을 뽑아 들고 갔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블레셋이 얼마나 기겁했겠습니까!

 

성경이 삼손의 이 기이한 행적에 대한 이유를 정확히 밝히진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잡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기려 했던 유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종의 시위로 여겨집니다. 이 일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오산합니다. 그 생각은 점점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해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져 들고 있습니다.

 

들릴라를 사랑한 삼손(4-14)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지 않을 때, 자신의 기준이나 환경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은 항상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정신없이 돌아갑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따라갈 수 있습니까!

 

4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5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능히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천백 개씩을 네게 주리라 하니 6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7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8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을 여인에게로 가져오매 그가 그것으로 삼손을 결박하고 9이미 사람을 방 안에 매복시켰으므로 삼손에게 말하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그 줄들을 끊기를 불탄 삼실을 끊음 같이 하였고 그의 힘의 근원은 알아내지 못하니라 10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하건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 하니 11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2들릴라가 새 밧줄들을 가져다가 그것들로 그를 결박하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팔 위의 줄 끊기를 실을 끊음 같이 하였고 그 때에도 사람이 방 안에 매복하였더라 13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 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 하는지라 14들릴라가 바디로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그에게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어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내니라(4-14)

 

삼손은 또 다른 유혹에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삼손은 구별된 나실인으로 태어나고 자랐고, 얼마 전에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처럼 방황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삼손이 선택한 세 번째 블레셋 여인 들릴라가 등장합니다. 들릴라는 삼손의 여인 중에 유일하게 이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사용하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과가 그의 타락을 정당화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일을 이루시더라도 삼손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삼손이 가사에서 저지를 일로 인해서, 블레셋 방백들은 대책을 논의합니다. 이들은 블레셋의 5대 도시의 군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위기감을 느꼈고, 삼손을 잡아서 더 큰 화를 방지하자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삼손을 이길 수 있습니까? 이전까지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보고 고민을, 이제 블레셋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수수께끼 사건처럼, 그가 사랑하는 여인 들릴라를 매수하여 삼손의 약점을 알아내는 것이었습니다(5).

 

(1) 첫 번째 시도(6-9)

 

들릴라는 블레셋의 방백들이 제시한 보상과 동포를 향한 충성심이 동기가 되어 그들과 함께 삼손을 잡으려 했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했습니다. “청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6)라고 질문합니다. 그에 대해 삼손은 새 활줄 일곱 개로 자신을 묶으면 자신이 평범한 다른 사람처럼 힘이 줄어들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7). 여기서 ‘활줄’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지만, 시편 11:2과 욥기 230:11에서 활, ‘활시위’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마르지 않은 새 활줄 일곱 개를 여인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녀가 그것으로 삼손을 결박했습니다(8). 그녀는 사람들을 방 안에 매복시켜 놓고 삼손에게 말했습니다.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9) 그러자 삼손이 그 줄들을 불탄 삼실을 끊는 것같이 손쉽게 끊어 버렸습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그 힘의 근원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2) 두 번째 시도(10-12)

 

들릴라는 삼손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그의 힘의 비밀, 특히 어떻게 해야 그를 결박할 수 있는지 알려 달라고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하건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10) 이번에는 삼손이 들릴라에게 “만일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1)라고 대답했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의 대답을 듣고서, 새 밧줄로 묶고 블레셋 사람들이 도착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삼손을 잡아서 죽이려는 블레셋 사람들이 방 안에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새 밧줄을 실 끊듯이 간단히 끊어 버렸습니다. 다시 한번, 삼손의 거짓말에 들릴라사 속은 것입니다. 하지만 들릴라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3) 세 번째 시도(13-14)

 

삼손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또 어떻게 하면 그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들릴라는 또 삼손을 채근했습니다. “당신이 이 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13)

그러나 삼손은 진실을 말할 수 없어 또 다른 거짓말을 둘러댔습니다.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13) 들릴라는 또 삼손이 알려 준 대로 실행했습니다. 바디로 그의 머리털을 단단히 짜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이 말에 삼손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는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냈습니다(14). 이번에도 삼손은 쉽게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삼손이 자신의 힘의 비밀인 머리털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나실인의 규례대로 태어나서 한 번도 머리카락을 자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힘의 비밀을 둘러대기 위해 다른 방법들을 꾸며 냈던 그가, 이번만큼은 정답에 근접한 거짓말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아슬아슬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만은 삶의 위기를 초래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깨뜨리는 치명적 죄악입니다. 자만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우심을 구해야 할 때 자기의 힘과 지혜를 믿다가 결국 낭패를 당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로 인해 자만해지지 않도록 더욱 우리 자신을 겸허히 성찰하고 회개하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5-02)

 


나귀 턱뼈를 사용해 승리한 삼손

사사기 15장 9-20절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우리 연약한 육신을 통해서도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우리 무지한 생각을 통해서 놀라운 지혜를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의 능력을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능력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게 됩니다. 본문에는 나귀 턱뼈와 같은 언약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져 행하는 아름다운 축복의 도구가 되길 바랍니다.

 

  •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나가며 소리 지를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해 삼손이 나귀 턱뼈로 1000명을 죽임입니다. 이후 삼손이 심히 목말라 부르짖자 하나님께서는 우묵한 곳을 터뜨려 물이 솟아 나오게 하십니다. 삼손이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합니다.

 

삼손을 블레셋에 넘긴 유다 지파(9-13)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인해 빚어진 살육의 결과들조차 블레셋을 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보지만, 삼손이란 한 신앙인의 탈선이 가져다 주는 혼돈의 삶은 여전히 우리를 씁쓸하게 합니다. 그러나 삼손의 삶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의 보편적 사조였음을 본문을 통해 알게 됩니다.

 

9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한지라 10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11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12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13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9-13)

 

블레셋 사람들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해 왔습니다. 삼손에게 이렇게 당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분노한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을 하려고 유다 지파 지역을 향해 진을 쳤습니다. 그 수가 레위 지역에 가득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들은 도망친 삼손을 따라 유다로 올라와 레히에 진을 쳤습니다(9). 전쟁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큰 유다 족속 앞에 진을 치자, 놀란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면서 내용을 파악하게 됩니다. 이라한 유다 지파의 모습을 1장에서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과 싸울 것인가를 묻던 적극적인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온전히 찾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만족한 채 블레셋과 정당히 타협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올라오기는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10b)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손을 결박해서 자신들에게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 사람들을 동요시켜 삼손을 자신들의 손에 넘기게 할 참입니다(10). 이에 유다 사람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그곳으로 몰려가 삼손을 블레셋에게 넘기려고 했습니다.

이에 유다 자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말을 듣고 삼손을 잡아 블레셋에게 환심을 사려 합니다. 그들은 3000명이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질책합니다.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11a)라고 삼손을 잡으려고 의도합니다. 그들은 블레셋이 자신들을 통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오히려 삼손이 블레셋과 싸운 것에 대해 책망한 것입니다. 삼손의 행동으로 블레셋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고 전쟁 위험이 고조된 것에 대해 질책합니다.

삼손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자신은 다만, 그는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당한 대로 갚았을 뿐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과 함께 블레셋을 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삼손을 묶어서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려고 합니다. 삼손은 유대 사람들과 역시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기 전에,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했어야 합니다. 그들의 반응은 단순하게 ‘너 같은 놈만 없으면 아무 문제없는데, 미꾸라지 같은 녀석이 우리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너만 사라져!’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 문제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40년 동안 블레셋에 지배를 받았습니다. 어떻게든지 블레셋으로부터 진정한 자유인 되려고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잠잠하면 된다는 단순한 모습입니다.

자기보다 강한 적군을 잠잠하게 하고 평안을 얻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키며 타협하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은 평안하겠지만, 그들은 가만히 두지 않고, 항상 괴롭힐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을 얻은 방법은 그들과 싸워 승리하는 방법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심(14-17)

우리는 어려운 상황과 열악한 조건에서도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충만한 은혜를 받고 능력을 행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결박된 것 같고 주어진 것이 나귀 턱뼈와 같이 미비할지라도 성령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14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5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16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17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14-17)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둡니다. 사사 시대의 삼손과 유다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삼손은 사사의 일에 전혀 사명감이 없고, 유다 사람들 역시 두려움에 빠져 비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백성을 어떻게 대하셨겠습니까?

 

(1) 나귀의 턱뼈로 공격한 삼손(14-15)

 

유다 사람들에 의해 결박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진 치고 있는 레히에 도착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군대처럼 승리를 확신하고서 크게 소리치며 그에게로 다가왔습니다(14). 바로 그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마치 블레셋 사람들의 외침을 신호로 여호와께서 개입하신 듯한 순간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여 그를 묶은 밧줄이 마치 불탄 삼 오라기처럼 손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일은 결코 삼손의 능력으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블레셋을 치시기 위해 기이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권능을 주셔서 대적 블레셋이 더 이상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근처에서 나귀의 새 턱뼈를 찾았습니다. 그는 그 단순한 무기로 무려 1000명을 쳐서 죽였습니다(15). 턱뼈가 싱싱했다는 것은 짐승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뼈가 단단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삼손이 짐승의 사체에 손을 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유래 없는 초인적 힘을 주신 것입니다. 삼손의 힘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삼손이 공격에 나서면서 이 문제가 하나님의 일로 바뀌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성취한 후 우리는 자부심이 아닌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2) 승리를 선언한 삼손(16-17)

 

삼손은 1천 명의 대적을 죽인 후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라고 승전가를 불렀습니다(16). 나귀 턱뼈 하나로 적을 시체 무더기로 만들어 버렸다는 자랑입니다.

삼손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의 지명을 ‘라맛 레히’ 곧 '턱뼈의 언덕'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17). 이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사실은 이 노래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다고 자만하거나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알고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교만한 나귀 턱뼈(18-20)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경건하고 거룩한 교제로 연합을 이루길 원하십니다. 그 교제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죄로부터 보호받습니다. 또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들과 교제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본받고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른 지체들과 나누는 교제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본받고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18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19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20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18-20)

 

삼손은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대승을 거둔 것처럼 방자히 굴었으나 그러한 자랑은 공허한 것임이 곧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을 자화자찬했던 삼손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매우 목이 마른 데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18).

삼손은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제야 자신이 할례 받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내세워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에게 샘을 주셨습니다. 샘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삼손은 그 샘을 ‘엔학고레’ 곧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고 불렀습니다(19).

 

삼손은 사사로서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지만,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쳤다거나 그 땅이 평온했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라 단지 개인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 은총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삼손의 결혼 이야기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그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냈다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20). 삼손은 이방인의 지배가 당연히 여겨지던 때에 사사로 활동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 압제자들을 상대로 싸울 의지가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삼손은 사사로서 평안을 안겨 주지 못했습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나실인으로 부르신 것도,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을 통해 블레셋 사람을 치신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한 인물이었지만, 그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고 은혜로운 분이었기에 구원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도 구원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5-01)

 


감정적으로 복수에 집착한 삼손

사사기 15장 1-8절


미움은 미움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습니다. 사랑과 용서만이 미움과 복수를 끊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분노는 사람을 자유케 하도록 얽맵니다. 분노 때문에 끊임없는 방황하게 하고 갈등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일어나는 이런 죄악 된 생각은 마음을 편안하게 못 합니다. 편안하지 못한 마음 가운데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가장 진리인 것을 확인하는 축복의 날이 되길 축원합니다.

 

  • 삼손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사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잘못 사용한 삼손은 삶이 꼬입니다. 문제를 해결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조절되지 못한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러한 삼손을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시고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다시 아내를 찾은 삼손(1-2)

우리는 희박한 윤리의식에 비해 개인의 욕망을 극대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 섹스, 권력을 추구하지만, 이에 따른 윤리적 책임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을 추구하는 만큼 나누는 미덕을 찾기 어렵고,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되 결혼 관계의 신실함을 유지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추구하되 만큼 비전도 없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찾기 힘든 시대입니다.

 

1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 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2이르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하니(1-2)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불임에 대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보내신 사람 나실인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보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잘 대변해야 하고,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실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눈에 옳은 것만 선택하며 살던 사람들이라도 사사인 삼손을 보면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도록 깨닫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의 그 기대를 무너뜨립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삼손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데, 사용하고 계십니다. 삼손은 마음대로 블레셋 여인 가운데 신붓감을 골랐습니다.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결혼까지 강행합니다. 사자의 시채를 마음대로 만졌습니다.

수수께끼를 낸 것은 좋았지만, 이것이 발단되어 악화하였고, 결혼도 마무리되지 못하고 떠나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삼손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셔서 삼손은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이고 앙갚음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블레셋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사건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보복의 악순환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결혼식장에서 흥을 돋우기 수수께끼를 냈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결혼 생활이 시작하기도 전에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성경에서는 ‘얼마 후’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 후’로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은 구약성경에 3번(수 23:1; 삿 11:4; 15:1) 사용되었습니다. 삼손이 다시 아내를 찾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을 수 있습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삼손은 끓어올랐던 분노와 서운함이 진정될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을 것입니다.

밀을 수확하는 시기인 5월도 사건의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삼손은 아내와 화해하고 싶어 딤나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삼손은 아내의 행동에 화가 나서 딤나를 잠시 떠났지만, 혼인 관계는 완전히 정리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삼손은 다시 아내를 찾아오기 위해서 블레셋으로 갑니다. 그는 선물인 ‘염소 새끼’를 가지고 아내에게 찾아갔습니다. 이는 나름 화해의 제스처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장인이 다른 블레셋 사람에게 아내를 주었다는 것을 압니다. 장인으로서 얼마든지 삼손이 자기 딸에게서 마음이 떠났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인은 삼손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사람인지는 몰랐습니다. 삼손은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1)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장인은 방문의 목적을 거절합니다(1).

이미 삼손에게 보복이나 하듯이, 이미 장인은 자신의 딸을 결혼 잔치에 참석했던 삼손의 친구에게 주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장인은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2)라고 말합니다. 장인은 성급하게 다른 남자에게 준 것입니다. ‘심히 미워한다’는 표현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장인이 삼손과 결혼했던 딸을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은 일면 합리적입니다. 결혼식에서 삼손의 반응을 참작할 때, 장인은 삼손이 그녀를 버렸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장인이 삼손 대신 선택한 사람은 결혼식에 동행했던 블레셋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릴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대, 책임을 느낀 장인은 삼손에게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2) 고 청하며 타협을 제안한 것입니다.

 

삼손의 복수(3-5)

하나님께 받은 지혜, 능력, 은사를 자기 자신만을 위햐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전을 발견하고 자신의 은사를 계발하고 열정을 다해 달려 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 사명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거기에 삶의 방향을 맞추고 에너지를 기울여야 합니다.

 

3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4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5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사른지라(3-5)

 

삼손은 자기 뜻대로 되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른데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 핑계만 됩니다. 그는 장인의 말을 듣고서 분노합니다. 사실 장인과 삼손 둘 다 성급하고 쉽게 행동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장인은 더 젊고 예쁜 동생으로 대신하려 했지만, 삼손은 자신의 눈에 좋은 대로 행동한 인물이기 때문에 설득이 통하지 않습니다.

 

삼손은 분노하면서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고 말합니다(3).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삼손은 자신의 블레셋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의 분노가 정당함을 밝힌 후에 블레셋 사람들을 향한 보복을 시작합니다. 삼손의 말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허물’로 번역된 ‘ה󰘝󰙜,라아’는 원래 ‘악’이라는 뜻으로 ‘도덕적 악’ 또는 단순히 ‘재난’, ‘해로움’을 의미합니다. 장인의 처신에 대해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지 복수를 감행하여 블레셋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보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삼손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여우를 300마리를 붙잡아서 재빨리 뛸 수 없게 두 마리씩 꼬리를 묵습니다. 그리고 그 꼬리에 횃불을 달아 놓습니다. 그 여우들이 추수 직전에 블레셋의 밀밭과 과수원으로 보냅니다. 두 꼬리 사이에 나무 막대 하나를 매달고(4) 거기에 불을 붙여 여우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밀밭으로 몰았습니다.

그 피해는 막대했습니다. 마침 밀 수확 철이기 때문에, 한 해 농사 밀을 모두 태웠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포도원과 감람나무들까지 불탔습니다(5). 수년간의 과일 농사까지 완전히 망쳐 놓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고대 팔레스타인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습니다. 삼손의 이러한 행동은 블레셋 지역 경제의 핵심을 공격한 셈이었습니다.

 

아내를 죽인 것에 대한 삼손의 복수(6-8)

세상에서는 죄의 악순환이 일어나고 점점 더 심각한 범죄가 양산되고 있습니다. 서로 속이고 속는 일뿐만 아니라 관용하지 않고 적개심을 키우며 자기 자신의 성공을 위해 약자를 밟고 일어서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방관하시지 않고 개입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로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6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니 사람들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준 까닭이라 하였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사르니라 7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고 8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머물렀더라(6-8)

 

밀밭과 포도원 감람나무까지 불태우는 기가 막힐 일을 당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누가 이런 일을 했는지 수소문했습니다. 사람들은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 벌인 일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판단을 삼손의 장인이 딸을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주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절반만 사실입니다. 그들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책임자를 정하여 책임을 물었습니다. 삼손을 ‘딤나 사람의 사위’라고 부르며 삼손이 그 딸의 남편이라는 지위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삼손의 잘못이 아니라 삼손의 장인의 책임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3절에서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라고 한 말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삼손의 엄청난 파괴력을 본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더 이상 건드리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딤나 여자와 그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삼손의 화를 달래려고 했을 것입니다. 삼손의 아내와 아버지는 재앙을 피하려고 수수께기 답을 알아냈지만, 수수께끼 답을 알아냈기에 오히려 재앙을 당하는 아이러니가 생겨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올라가서 삼손의 아내와 그의 아버지를 불살라 죽임입니다(6). 삼손의 파괴력을 보면서 삼손에게 물을 수 없으니, 삼손의 장인에게 씌운 것입니다. 밀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이 불타 버린 것에 대한 책임을 삼손이 아닌 그의 장인과 딸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희생양이 필요했던 그들에게는 삼손보다 딤나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이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삼손이나 블레셋 사람들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재미로 시작한 수수께끼가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삼손의 아내와 아버지는 재앙을 피하려고 수수께끼 답을 알아냈지만, 수수께끼 답을 알아냈기에 오히려 재앙을 당하는 아이러니가 생겨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것을 본 삼손은 다른 분노를 자극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복수를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이 일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삼손은 화가 나서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 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말리라.”(7)라고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게 복수하려 삼손의 장인과 아내를 죽었지만, 또 사실을 알게 된 삼손은 아내와 장인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섭니다. 그는 ‘다시 원수를 갚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복수를 낳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원수, 민족의 원수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더니, 자기 개인적인 원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응징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였습니다(8a). 이번에도 블레셋에 결정에 분노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삼손의 이런 모습을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폭력적입니다. 재미로 시작한 수수께끼 때문에 삼손과 블레셋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극복할 수 없는 골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다 지역에 있는 에담의 바위틈에 도망쳐 숨었습니다(8b). 에담의 위치는 불확실한데, 지리적 위치보다 상징적 의미가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끝없는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입니다. 그리고 미움은 또 다른 미움을 낳을 뿐입니다. 연속되는 복수만 있을 뿐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종노릇하면서도 그 상황에 안주하여 영적 전쟁을 피하려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타협하는 선택을 반복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깨워 주시기를, 그래서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성도가 되기를 힘써 기도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4-02)


이방 여인과의 결혼하는 사사 삼손

사사기 14장 10-20절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삶은 완전하고 소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떠나며 자신에게 주신 삶을 포기할 때, 어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리고 삶 속에 고난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만, 진정한 행복의 길이 보이며 행복이 시작됩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 본문은 삼손의 부모와 하나님은 삼손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구원자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엄청난 능력과 함께 동시에, 그것을 잃을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사자같이 강하였지만, 달콤한 유혹에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잔치에서 수수께끼를 냄(10-14)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자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끝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숙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만을 바라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한다면 그 약속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10삼손의 아버지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베풀었으니 청년들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11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와서 친구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12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내리니 잔치하는 이레 동안에 너희가 그것을 풀어 내게 말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13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말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네가 수수께끼를 내면 우리가 그것을 들으리라 하매 14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10-14)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신부를 데리러 블레셋 딤나로 내려갑니다(10). 그들은 블레셋 풍습에 따라 7일 동안 결혼 잔치를 배설하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 30명을 친구로 삼고 결혼식 들러리로 세웁니다(11). 블레셋 사람을 들러리로 삼은 것은 블레셋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며, 그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거의 동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친구로 삼아 즐거운 결혼 잔치를 벌이던 삼손은 흥이 나자 겉옷 30벌과 베옷 30벌을 걸고 수수께끼 내기를 걸었습니다. 그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달콤한 것이 나온다.’(14)라는 수수께끼를 냅니다.

이 수수께끼는 삼손의 행적을 알고 있는 청중에게는 매우 쉬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삼손의 행적을 모르는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일방적인 상황이 아닌, 개인적인 경험을 수수께끼 문제로 냈기 때문입니다. 예상대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 문제를 풀지 못하였습니다. 재미있으라고 시작한 수수께끼가 큰 참변의 시작이었습니다.

 

협박으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냄(15-17)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용하실 때, 유능한 자들만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미숙한 자들도 사용하심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전능하신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한 사람만 찾지 않으시고 우리처럼 연약한 자들과 함께하심을 감사하며, 항상 그분의 자비를 찬양하며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5일곱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려 달라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빼앗고자 하여 우리를 청한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아니하냐 하니 16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이르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알려 주지 아니하도다 하는지라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알려 주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알게 하리요 하였으나 17칠 일 동안 그들이 잔치할 때 그의 아내가 그 앞에서 울며 그에게 강요함으로 일곱째 날에는 그가 그의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알려 주매 그의 아내가 그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더라(15-17)

 

삼손은 나실인이며 사사로서 구별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가져야 할 영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거룩을 추구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한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지만, 정작 작은 유혹 앞에서도 쓰러지는 약함을 보여 줄 뿐이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게 되면서 잔치에 흥을 돕기 위해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잔치에 참여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14)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가 너무나 어려워서 아무도 풀지 못합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향락에 빠진 삼손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떠나는 나실인의 삶에 포기 되어지는 그런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는 나실인으로서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했지만, 사자를 죽이고 그 시체를 만지고, 그곳에서 나오는 꿀을 먹는 삼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실인으로서 시체를 말라는 조항을 어긴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자숙하고 회개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퀴즈를 낼 정도로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실인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세속적인 삶이었습니다.

 

문제를 풀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은 “제 칠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15)라고 행복해야 될 신부가 되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라고 위협하고 협박도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결혼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즐거워해야 예식입니다. 하지만 삼손의 결혼은 즐겁기보다는 잔치의 시간이 스트레스가 되고 고민이 되고 갈등이 되어진 일을 만들게 되어 집니다.

 

그러나 삼손은 결국 패하게 됩니다. “칠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17) 결혼 잔치는 즐거움의 시간이며, 행복한 시간이어야 합니다. 삼손이 냈던 수수께끼로 말미암아 즐거움의 자리가 괴로움의 자리로 변했습니다. 그 아내가 결혼 자리에서 계속 울고 조르고 있는 비참한 모습으러 변합니다. 7일 동안의 잔치가 도히려 고통이 되고 계속해서 강박감에 못 이겨서, 결국 삼손은 그 답을 가르쳐 주게 됩니다. 그는 강한 사람이었지만, 여자에게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약한 사람이 되어야지, 이 세상의 문화나 가치관에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이방 여인에 대한 흠모로 가득 찬 나실인의 정신세계는 그 자체가 긴장이었습니다.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와의 대립, 나실인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모인 블레셋 사람들, 결혼식장을 긴장으로 채운 수수께끼와 그로 인해 동족으로부터 위협받는 아내의 처지 등은 모두가 죄로부터 출발된 긴장 거리였습니다. 답을 알아내려는 아내와 결국 실토하는 삼손, 그리고 그것을 전해 듣는 블레셋 사람들. 이처럼 나실인의 삶과는 전혀 거리가 먼 긴장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에는 파랑새가 있을 것처럼 보여 집니다. 당신의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좋을 것 같지만, 그곳에는 진정한 행복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삶에는 진정한 기쁨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할 때만이 진정한 행복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발을 돌이키실 바랍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말씀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아내를 잃어버린 삼손(18-20)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처한 어려운 시련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까에 대해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한 열악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시며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시련 앞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18일곱째 날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19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 20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였던 그의 친구에게 준 바 되었더라(18-20)

 

이 단락은 삼손의 결혼식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14장의 전체 줄거리 중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흔들어 블레셋을 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를 통해 수수께끼 답을 알아냈습니다. 그들은 기고만장하게 삼손의 질문에 대해 당당하게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18)라고 반문하며 대답합니다. 수수께끼 놀이의 승자는 블레셋 사람들로 밝혀집니다.

 

삼손은 그때 상황을 파악합니다. 자신이 이용당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울면서 답을 요구했고, 그 답을 가르쳐 줌으로, 아내가 답을 그 동족에 가르쳐 준 것을 파악하게 됩니다. 장난으로 시작한 것이 삼손과 아내의 관계가 심각하게 어긋납니다. 분노한 삼손의 모습을 봅니다. 블레셋과 삼손의 관계는 이제 더 이상 화목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수수께끼를 내든 관계와 완전히 멀어졌습니다. 게임에 져서 엄청난 배상을 해야 했습니다.

이 때 삼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19). 삼손은 그 힘으로 블레셋의 다른 도시인 아스글론에서 가서 30명을 죽이고, 그들의 옷을 빼앗아 자신의 약속을 지킵니다. 이 살육이 믿음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라 아내에 대한 배신감과 블레셋 사람들의 야비함에 대한 개인적 분노의 결과입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임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일하심의 방식을 주목하게 합니다.

 

삼손은 아내의 배신행위에 대해 매우 분노하여 아내를 버려두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즐거워 라고 시작한 수수께끼 때문에 아내와도 헤어지고, 블레셋과도 매우 불편한 관계가 되어졌습니다. 그리고 삼손의 아내는 다른 이와 결혼하게 됩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과 결혼하고자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과 원수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감정과 행동을 통해 블레셋을 치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이 사건 어디에도 기도했다는 내용이나 하나님께 물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동기가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심판하십니다. 삼손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만 해낸 것만 계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결정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곳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자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끝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숙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만을 바라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그분의 약속을 신뢰한다면 그 약속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4-01)

 


영적으로 미숙한 삼손의 첫 사역

사사기 14장 1-9절


사람은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점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지만, 사단은 약점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많은 일을 모두 실패로 만들어 버리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의 약점은 대부분 감정 조절을 대제로 못해 나오는 말로 실수하는 경우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 약점을 성령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약점을 보완하여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 삼손이 사사로서 첫 사역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딥나의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사사가 처음부터 자신의 본분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삼손이 결혼식에 낸 수수께기 때문에 결혼식 내내 아내와 갈등하다가 마침내 아내의 배신으로 내기에 지고 맙니다. 삼손은 사사로서, 그리고 나실인으로서 합당하지 않는 행동을 연달아 벌리고 있습니다.

 

블레셋 여자와 결혼을 요청한 삼손(1-3)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가 있다면, 하나님께 영광으로 되돌려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성도의 기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성도의 마땅한 본문입니다. 그런 은사와 은혜가 당신과 함께하길 원합니다.

 

1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2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3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4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1-4)

 

삼손의 부모인 마노아의 가정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 가정에 여호와의 사자의 고지를 통해 삼손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불임의 어머니에게 낳은 아들 삼손은 영적 불임의 시대, 블레셋에 꼼짝도 못한 채 약 20년 동안 종살이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랄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에게 그를 나실인으로 구별된 받쳐진 존재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삼손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능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기 눈에 보인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았습니다.

 

(1) 삼손이 불레셋 여인을 아내로 취하려 함(1-2)

 

삼손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여 이스라엘을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는 기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지역에 쉽게 내려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삼손, 또한,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는 딤나(Timnath)로 내려갔습니다. 이곳은 원래 단 지파에 할당된 것이지만, 이 시대는 블레셋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딤나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게 구원하려고 내려간 것이 아니라, 한 블레셋 여인을 보고 반하여 내려갑니다(1). 삼손은 독립적인 청년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이교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잠재적으로 그들과 타협할 수 있는 상황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집으로 올라와서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2)라고 부모에게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도록 요청합니다. 그는 매우 강압적이고 무례한 말로 블레셋 여인과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강요합니다. 이 소식은 그의 부모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사자가 요청했던 것처럼, 나실인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포도주나 독주를 입에 대지 않도록(삿 13:5), 그의 부모님은 말씀을 따라 양육했을 것입니다. 부모들이 먼저 부정한 것이 포도주를 멀리해야 했습니다. 삼손 역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그는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선민(選民)이 되면 무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리면 다 사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붙들린 사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시대의 사명자로 사용하십니다.

 

(2) 부모의 반응(3)

 

삼손은 블레셋 이방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부모에게 말씀드렸습니다. 황당한 그의 부모는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3)라고 그 결혼을 반대합니다. 원문에 의미를 보면, 그 부모는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점잖게 타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말투를 볼 때, 삼손의 부모는 이미 이길 수 알았다는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삼손은 막무가내입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3) 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는 사사기 17장에 나오는 사사 시기의 특징은 사람들이 자기의 소견에 좋은 대로 표현과 동일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이방 풍습을 쫓는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삼손은 사사로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일반 백성들과의 수준이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지도자가 그를 따르는 자들보다 리더십이나 영성에서 뛰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그만그만한 사람들 가운데서, 아무나 서로나 서서 지도자가 되려는 세태가 영적인 하향 평준하로 타락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따라 순종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모든 삶의 결정이 자신이 좋은 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삼손의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영적인 부분을 인식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잘 섬길 것인가가 아니라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것인가에 대한 것만 생각하는 삼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삼손의 모습은 나실인의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기준으로 자신의 감정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세상의 모습, 하나님을 등진 타락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구별된 삶을 주셨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과 은사를 주셨지만,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의 모습과 동일한 모습이며,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죄를 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과 같이 성도들에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별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세상의 방법과 구별된 삶이 성도의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유혹으로 눈에 보인 좋은 것들을 쫓아서 살면, 하나님의 거룩함과 능력을 상실되어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람들의 비극의 시작인 것입니다.

 

(3)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일(4)

 

삼손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4)라고 소개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당시에, 여호와께서는 삼손을 통해 블레셋 사람들을 치려고 계획하셨습니다. 여기서 삼손 부모의 무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삼손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에 무감각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상기시킵니다. 삼손의 무모한 행동마저 선하게 이용하시는 여호와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결혼은 블레셋 사람과 평화롭게 공존하려는 삼손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여호와께서는 그 상황을 깨뜨리기 위해 삼손을 사용하셨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을 화나게 하도록 선택된 도구이며, 블레셋 여인은 그 일이 일어날 기회를 제공한 도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사람을 상대 행동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행동하게 하실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는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삼손의 생각을 어쩔 수 없이 따르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삼손의 잘못된 생각을 통해 블레셋을 칠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아야할 사명자(5-9)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순종의 삶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이 두 방법에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른 결정을 해나가야 합니다.

 

5삼손이 그의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젊은 사자가 그를 보고 소리 지르는지라 6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7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 8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9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5-9)

 

삼손은 부모의 충고를 무시한 채, 자기가 좋아하는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고집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블레셋에 억압받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지만, 삼손의 관심은 할례 받지 않는 민족인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눈에 들도록 살기에 노력하는 대신에, 자기 눈에 좋은 것만을 취하려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게 되면, 그에 관한 모든 계획을 철회하실 분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이 잘못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채, 자기의 잘못된 결정을 따라 그의 부모들도 딤나로 내려가게 됩니다.

 

(1) 사자를 죽인 삼손(5-6)

 

삼손은 부모님에게 딤나 여인과 자신의 결혼식을 주선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식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블레셋 딤나로 향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딤나에 내려가다가 포도원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길에서 갑자기 배고파서 울부짖는 사자를 만납니다(5).

 

그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기 하나 없는 상태에서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라고 사자를 찢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6). 그가 침묵한 이유는 분명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체를 만짐으로써 부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음으로써 책망을 피하려 한 것 같습니다.

 

(2) 결혼에 대한 대화(7)

 

7절은, 다시, 삼손과 블레셋 여인의 결혼이라는 줄거리를 다시 이어 갑니다. 삼손은 결혼할 여자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삼손과 블레셋 여인만 보이고 삼손의 부모는 배제되었습니다. 이렇게 삼손은 점점 부모의 훈육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삼손은 자기 눈에 좋은 대로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3) 삼손이 사자의 사체에 손을 댐(8-9)

 

얼마 후, 아마도 삼손의 부모가 신부의 부모와 상의를 마쳤을 때, 삼손은 아내를 얻기 위해 다시 블레셋 딤나로 찾아갔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죽인 사자의 사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사체에 벌 떼와 꿀이 있었습니다.

삼손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나실인으로서 정결을 지켜야 되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오직, 맛있는 꿀로 자기와 부모의 입을 즐겁게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어쩌면 블레셋 여인도 달콤한 꿀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세 가지 이유로 중요합니다. 첫째, 이 광경은 하나님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꿀벌은 일반적으로 사체에 서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자의 사체는 벌이 생활하고 꿀을 생산할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둘째, 이 이미지는 명백히 아이러니합니다. 부패와 분해의 과정이 진행되어야 할 사체에서 삼손은 꿀을 생산하는 꿀벌의 공동체를 발견했습니다. ‘에다’는 타락한 세상에서 부름 받은 신앙공동체로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리를 지칭합니다.

셋째, 이 광경은 삼손의 성격을 테스트합니다. 여호와의 영을 힘입어 삼손은 신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감각에 의존하는 삼손은 영적 기질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손으로 사체에서 꿀을 긁어(‘그라다’) 무심코 먹었습니다. 이는 삼중적 죄입니다. ① 시체와 접촉하는 모든 물건은 부정해집니다(레 11:24-25, 39). ② 특히 나실인을 부정하게 만듭니다(민 6:6). ③ 이 일을 말하지 않고 부모에게도 꿀을 제공하여 그들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실인은 시체를 만지면 안 됩니다. 그러나 삼손은 꿀에 현혹되어 나실인의 규례를 어깁니다. 그것을 취함으로써 주검을 만지지 말아야 하는 나실인의 서약을 어겼습니다(민 6:6).

사자보다 강한 능력이 있었지만, 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신의 마음에 내키는 대로 행했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나실인으로서 범죄의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아버지와 모든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의 비밀이 많아져 가는 것입니다. 자신만 범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비에게도 드리고(9), 심지어는 이러한 행동을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면서 즐기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삼손이 죽은 사자의 몸에서 꿀을 취합니다. 나실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삼손은 이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점점 이방 여인과 이방 문화의 달콤함에 빠져들어감을 보여줍니다. 겉모습만 나실인이었지, 속사람은 세속인과 다름없습니다. 혹시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속은 세속인과 다름없습니까!


삼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초인적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행동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죄인이 실패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데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3-02)


나중에 기묘한 일을 깨달은 마노아

사사기 13장 15-2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고통과 시련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무한한 사람과 은혜로 개입하셔서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한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마땅한 올바른 태도가 있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의 말을 듣고 아내 말을 믿게 된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를 대접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야 된다고 말합니다. 마노아는 하나님을 보았으니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였지만, 지혜로운 아내의 말처럼 그들은 죽지 않았고 약속대로 삼손이라는 아들을 얻게 됩니다.

 

깨닫지 못하는 마노아(15-20)

교회를 봉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 영광을 취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점점 교만해져 버립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이 실족합니다. 봉사자라고 한다면, 항상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시면서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15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16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17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 18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19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20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21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22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23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15-23)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를 찾아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축복의 말을 전했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 준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마치 나그네를 환대하는 태도였습니다.

 

(1) 여호와의 사자를 대접하는 마노아(15-18)

 

마노아는 모든 말씀을 들은 후 여호와의 사자에게 대접하기 원합니다. 고대에는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는 풍습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에게 마노아는 꼭 대접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15)라고, 여호와의 사자에게 염소 새끼를 준비할 것이니 머물러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합니다.

이런 마노아의 요청에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16)라고 말합니다. 즉 여호와의 사자는 식사 대접 대신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본문 이렇게 마노아와 여호와의 사자 간의 말이 서로 어긋나는 것은, 마노아가 상대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17절에서도 마노아는 계속해서 여호와의 사자를 선지자로 생각하여 이름을 묻고 예언이 이루어지면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려 명성을 높여주겠다는 것입니다. 마노아는 예언이 이루어지면 이를 이루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이름을 높이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질문에 여호와의 사자는 자신의 ‘기묘자’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기묘’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이라는 뜻으로, 주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자신은 ‘너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로 자신이 ‘여호와’이심을 암시적으로 나타냅니다.

하지만 마노아는 여전히 자기 앞에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약화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늘 자신의 백성을 보고 계시며,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오셔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2) 재물을 드리는 마노아(19-20)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의 말을 따라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바위에 올려놓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곳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꽃이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고 사자도 불에 휩싸여 올라가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기묘자’ 즉 ‘놀라운 자’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가 이적 즉 논란 일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는 사자를 통해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놀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반신반의하던 마노아에게 놀라운 이적을 보여주시므로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마노아에게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징표를 주신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자신의 말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징표를 보여주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보고 놀란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는데, 이것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자세입니다. 그들은 이제야 자신에게 말했던 존재가 선지자가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3) 여호와의 정체를 알게 마노아(21-23)

 

여호와의 사자가 완전히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 나타나지 않자, 드디어 요와의 사자의 정체를 알게 된 마노아는 여호와를 보았으니,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21-22).

마노아도 기드온처럼 당시 민간에 퍼져 있는 속도를 더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해보면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 방문을 받고 부름을 받았던 상황과 동일합니다. 기드온도 여호와의 사자를 선지자로 알았고 자신에게 임무를 주며 여호와의 신탁을 전한 그에게 대접하기 원했으며, 염소 새끼 한 마리와 소재로 사용되는 무교병을 가지고 와서 바위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블로 제물을 태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그 후의 자신도 사라졌습니다(삿 6:11-18). 또 여호와의 사자가 사라진 후에 둘 다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죽을까 봐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이야기와 마오나의 이야기는 이런 부분에서 상당히 비슷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데, 기드온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나타나서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말을 해줍니다(23). 그런데 여기서는 마노아의 아내가 여호와의 사자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남편을 설득합니다. 만일 죽이실 것이라면 권제와 소재도 받지 않으셨을 것이고 이 모든 일도 보이지 않으셨을 것이며 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을 약속을 지키는 분이며 자신의 일에 논리적 일관성이 있는 신뢰한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이 오직 당시에 퍼져 있던 잘못된 이야기만 믿고 하나님의 일관성이 없고 즉흥적이며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한 마노아나 기드온과 대조를 이룹니다.

전체적으로 마노아보다 마노아의 아내가 더 신뢰감 있고 지혜롭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혜로운 마노아의 아내의 모습은 후에 사무엘를 임신한 한나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삼상 2:18-21). 마노아와 그의 아내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을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평안이 올 수 있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앙은 늘 불안하고 두렵고 흔들릴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삼손의 출생(24-2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은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더욱 높여 드리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가며 그분을 신뢰하는 태도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24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25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24-25)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집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그 아이의 이름을 ‘삼손’이라고 지었습니다. 삼손은 ‘작은 태양’이라는 의미입니다. 태양을 섬기는 이방 종교가 반영된 이름이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또 ‘들릴라’(밤'이라는 의미)의 이름과 삼손이 눈을 잃게 되는 사건과 연관하여 매우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나실인으로 부르셨고 사사로 세우시기 위하여 그에게 복을 주셨으나, 어리석은 죄인의 삶은 온전치 못했습니다.


사사시대는 회개도 없고 구원에 대한 간절함도 없는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삼손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을 부으셔서 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절망스러운 시기에도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인간의 능력과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3-01)

 


하나님을 만난 마노아

사사기 13장 1-14절


자녀는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소망입니다. 고통스러운 출산이지만 여성이라면 누구나 자녀를 출산하기 원합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마노아의 아내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 자녀가 없어 소망이 없던 마노아 부부나 이스라엘이나 소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노아의 아내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 하심으로써 그 부부에게 소망을 주셨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큰 소망을 주었습니다.

 

삼손이 태어날 것이 예언됨(1-7)

생명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정체성은 이곳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허락하셔서 이 세상에 사명을 가지고 보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1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2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3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4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5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6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의 남편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오셨는데 그의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7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하니라(1-7)

 

본 장부터 16장까지 4장에 걸쳐 진행됩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12번째 마지막 사사인 ‘삼손’에 관한 기록입니다. 점점 심해지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암울한 시대 상황은 삼손의 때에 이르러 사사조차 소망을 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구원의 손길을 펼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의 범죄와 블레셋의 압제(1)

 

사사기 공식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였더라”라고 합니다. 그동안 악행들보다 악을 더 행함에 담대해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행(惡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땅을 더럽힌 것’(민 35:34)이며, 같은 동족끼리 이웃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모독으로 보십니다. 다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의 특징은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 집중하여 자기 욕만을 채우기 위한 역할을 합니다. 악한 세력들은 인류가 탐욕 속에 헤매며 살아가고 지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괴롭힌 것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후손이 현대 ‘팔레스타인’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도 이미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출 13:17). 당시로는 수준 높은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항상 이스라엘 곁에서 괴롭히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블레셋에 의한 40년은 사사기에 기록된 징계 기간 중 가장 긴 세월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만큼 큰 범죄에 빠졌습니다.

 

긴 고난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지배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무력감 속에 이방의 통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한 세력과 싸우는 영적 전쟁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망각하는 순간, 무기력해져서 악한 사탄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생활이 계속되다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조차 잊어버립니다.

 

(2) 마노아 부부에게 수태고지(2-5)

 

이스라엘 백성이 간구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구원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단 지파 사람 마노아의 아내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처럼 불임 상태에 있는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3). 하나님꼐서는 구원 사역을 위해 그 아이를 도구로 사용하시겠다고 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3).

 

하나님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두 가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첫째, 그녀가 특별한 아이를 잉태할 것이니 포도주와 독한 술을 마셔서는 안 되며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4), 이것은 가나안 이방 문화인 바알 신의 문화로부터 구별되어야 합니다. 둘째, 태어날 아이의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가나안의 단발 문화에 대한 반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 문화와 구별된 삶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모태에서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5). 민수기에 나오는 나실인에 대한 규정은(민 6:1-8), 첫째, 포도나무 소산을 먹지 말라, 둘째, 머리카락을 깎지 말라 마지막으로 세치와 접촉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머리카락에 경우에 어떤 사람이 나실인으로 지내는 기간에는 머리를 깎을 수 없었습니다(민 6:5),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태어날 아이는 평생 나실인으로 세상 문화와 구별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머리를 깎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실인을 통해 구원 역사를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을 위해 세상과 구별된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이 구별된 아이를 통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를 일으키길 원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길 원합니다. 성도는 구별된 백성입니다. 사용하실 때는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시길 원하십니다.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힘들다고 세상적인 방법을 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인내하고 거룩함을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3) 마노아의 아내가 남편에게 알림(6-7)

 

마노아의 아내는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식하여 깜짝 놀라서 그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에게 말한 내용을 남편에게 알렸습니다(6). 그녀가 전달한 말은 하나님의 사자가 말한 것과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의 불임에 대해 언급한 것과 태어날 아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으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언급을 생략했습니다(7).

 

우리는 고난에서 벗어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고난을 벗어나는 것보다 그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마노아(8-14)

부모는 자녀가 성공하기 위해 자기 생각을 주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자기 생각으로 가르치기 전에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내신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갈 것인지, 다음으로 자녀가 장자 어떤 사명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물어야만 합니다. 성도들이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중요한 제목입니다.

 

8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9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10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의 남편에게 알리어 이르되 보소서 전일에 내게 오셨던 그 사람이 내게 나타났나이다 하매 11마노아가 일어나 아내를 따라가서 그 사람에게 이르러 그에게 묻되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사람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내가 그로다 하니라 12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13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14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하니라(8-14)

 

철저하게 패역한 이스라엘은 이제 구원을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손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거나 부르짖지도 않는 이스라엘을 위해 구원의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사사 삼손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를 보내기 전에 부모들부터 교육하고 계십니다.

 

(1) 마노아의 간구와 응답(8-10)

 

수태고지를 아내에게서 전해 들은 마노아는 아내의 말에 의문을 가집니다. 자신에게 지금까지 자녀가 없었는데, 당대에 자녀를 출산하지 못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자녀를 출산한다는 소식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하나님께 ‘하나님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아내를 통해 소식을 들은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완전히 믿을 수 없어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둘째 이유로 8절에서 ‘우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을 보면, 그는 아내가 보고 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기를 원하며, 자신도 하나님께서 주신 아이의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난다는 소식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리라는 소식은 그에게 너무도 기쁜 소식이었기에 그는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에 우리도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모함과 간절함으로 말씀 앞에 나아가면 주님은 기쁘게 받아 주실 것입니다.

 

(2) 마노아와 하나님의 사자의 대화(11-14)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는 다시 나타났습니다(9). 그리고 그의 아내는 남편 마노아를 불러 함께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마노아는 아내에게 나타난 대상이 하나님의 사자임을 확신하고, 그에게 장차 태어날 아이를 어떤 규례와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12). 하나님의 사자는 다시 한번 잉태될 아이가 구별된 삶, 즉 거룩한 삶을 살라고 명령했습니다(13-14).


하나님은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조차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특별히 구별하여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간절히 아이를 기다리는 가정에 아이를 태어나게 하심으로 적어도 그 아이만은 나실인으로 거룩하게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을 볼수 있습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사기(12-01)

 


작은 마음이 낳은 에브라임과 길르앗 전쟁

사사기 12장 1-15절


믿음을 지키는 것은 삶의 풍요로움이 아닙니다. 환경이 좋으면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는 여건이 됩니다. 그러나 꼭 풍요로운 삶과 좋은 여건이 하나님께 나가는 지름길은 아닙니다. 오히려 경건의 훈련과 믿음의 고백이 우리를 지켜주고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변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자신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그런 귀한 믿음이 당신을 인도하시길 원합니다.

 

  • 암몬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 에브라임이 또다시 입다에게 시비를 걸었고, 길르앗은 에브라임과 전쟁을 합니다. 그 결과로 에브라임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도망합니다. 사사 입다 이야기는 끝까지 부정적으로 끝납니다. 그 뒤에 나오는 3명의 소사사는 모두 통치하는 사사로 점점 많은 자식을 두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략 결혼을 시키며 권력을 세습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입다와 에브라임의 논쟁(1-3)

작은 화가 큰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 것이 ‘죄’로 자라고 ‘화’를 부릅니다. 이스라엘은 외부의 적이 사라지자 내부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혹시 우리도 누군가를 질투하고 시기함으로 그에게 공격적으로 대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1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2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1-3)

 

암몬 자손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 입다는 동족과의 갈등을 겪습니다. 에브라임 입다에게 암몬과의 전쟁 때 부르지 않은 것을 놓고 입다의 집을 반드시 불살라 응징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건너간다’라는 것은 에브라임의 요단 서편에 있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 요단 동편에 있는 길르앗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이런 에브라임의 말은 기드온 때보다 훨씬 더 강한데, 기드온 때는 왜 부르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섭섭함을 드러내는 정도였다면, 여기서는 “반드시 너와 내 집을 불사르겠다.”라는 말합니다. 이것은 입다의 건방진 행동을 힘으로 징벌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에브라임이 이렇게 입다를 공격하려는 이유는 1차적으로 전리품 때문입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서 전리품을 얻지 못하게 된 에브라임 지파는 입다가 받은 전리품을 탐내고, 이를 빼앗기 위해 시비를 걸어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에브라임 지파가 길르앗 부족을 우습게 보았음을 말해줍니다. 아마도 기드온 때의 일도 있고 해서 이렇게 협박을 하면 입다도 기드온처럼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입다의 반응은 기드온과 달랐습니다. 입다는 자신을 논쟁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싸움을 걸어왔을 때, 이를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운다라는 뜻으로 입다의 특징을 잘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는 길르앗의 장로들과 논쟁하고 암몬과 논쟁하여 이겼고, 지금은 에브라임과 논쟁하고 있습니다. 입단은 암몬과의 전쟁 때 에브라임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에브라임 지파가 도와주지 않았으며,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신의 손에 넘겨주어 이겼다라고 항변합니다. 전쟁의 승리에 에브라임 역할은 전혀 없었다고 반박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를 때는 오지 않더니 이제 와서 싸우려고 하는 태도를 강력하게 비난합니다.

 

입다와 에브라임의 전쟁(4-7)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공동체는 겸손과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공동체를 이끌어갈 사람들은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를 원하십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탁월하길 원하시지만, 교만하여 어리석은 지도자가 되기 원치 않으십니다. 차라리 부족하지만 겸손하고 지혜로운 성도가 되길 더 원하십니다.

 

4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5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6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7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4-7)

 

에브라임을 말로 비난한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을 모아 에브라임과 전쟁을 합니다. 여기서 ‘쳐서 무찌르다’라고 번역된 ‘낙하’라는 단어는 사사기 1장에서 가난한 성음을 칠 때 사용됐던 단어입니다. 적을 치던 전쟁이 이제는 동족을 치는 전쟁으로 성격이 바뀌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쟁까지 이르게 된 원인은 에브라임의 말에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들이며, 그래서 원래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도망자’라는 것은 주인의 허락도 없이 도망한 노예나 비천한 인물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단 서편에 있던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는 요단 동편의 길르앗을 정통성이 없는 집단으로 어신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 때 암시적으로 드러났던 동서 간의 갈등이 여기서 완전히 표면화되고 있습니다.

5-6절의 전쟁의 주체는 길르앗과 에브라임입니다. 이는 완전히 지파 간의 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쟁은 요단 나루를 먼저 점령한 길르앗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전쟁에 패한 에브라임 사람들은 이제 거꾸로 도망자가 되어 요단 나루를 건너려고 합니다. 이때 길르앗 사람들은 ‘쉽볼렛’과 ‘십볼렛’의 발음 차이로 에브라임 사람을 구별하여 그들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말을 통해 전쟁을 하는 것은 말의 사람인 입다의 특징과 잘 어울립니다. 요단 나루를 점령하는 전투는 전의 에훗의 이야기와 기드온의 이야기에서도 나왔는데, 그때는 적을 치기 위한 훌륭한 전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대상이 동적인 에브라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도 이스라엘이 점점 타락하고 있다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이렇게 암몬의 침입으로 시작된 전쟁은 비록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게 되었지만, 결국 동족 간의 전쟁으로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입다는 성공적으로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의 손에서 구원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후손을 하나도 없지 못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전체로는 지파 간의 내분으로 동족을 죽이는 비극으로 끝난 것입니다.

7절에서 입다의 죽음과 사사로서의 기관과 장사된 곳을 언급하는데 여기서부터는 평안의 기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입다가 다른 사사들에 비해 사사로 지낸 기간이 매우 짧기 때문입니다. 사사의 빠른 죽음은 이스라엘이 다시 지도자가 없는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점점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소사사 입산, 엘론, 압돈(8-15)

때로는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이나 직위가 자신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면이 소유나 자리에 걸맞은 사람으로 변하지 않으면, 그것은 헛된 안개와 같은 것뿐입니다. 자신의 소유나 지위를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해야됩니다. 그러니 지도자의 자리는 동경의 자리가 아니라 두려워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소유나 지위를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8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9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 10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 11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12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13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14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15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13-15)

 

8-15절은 3명의 소사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입다(8-10)

 

입다는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동족 안에서 결혼을 시키지 않고 딸들은 가나안 땅 밖으로 시집 보냈고 며느리들은 밖에서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자손은 기드온에서 시작된 왕 같은 사사의 모습이 점점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사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왕처럼 외부와 결혼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해 전혀 주저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좋은 수단이 될지 모르나 신앙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3장 6절의 부정적 모습과 동일합니다. 다스리는 기간도 7년으로 짧아집니다.

 

(2) 엘론(11-12)

 

이어서 나오는 사사 엘론입니다.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보고만 나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보고가 없는 것으로 보아 왕 같은 사사에 가까운 곳으로 생각됩니다.

 

(3) 압돈(13-15)

 

다음 사사는 압돈입니다. 비라돈은 15절에 의하면 에브라임 지파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에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에브라임 지파 출신의 사사입니다. 여기서 에브라임 지역에 있는 아말렉 사람의 산지는 이스라엘이 가난을 정복할 당시 아말렉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압돈의 특징은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이 있고, 그들이 어린 나귀 70마리를 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사 야일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아들이 더 많고 손자까지 나귀를 타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왕적인 지위의 세습이 자식에게서 손자까지 3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야일보다 더 왕 같은 사사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사 건이 왕 건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3명의 사사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이 없이 오직 자기들의 지위와 부와 유익을 위해 움직이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 기여한 것도 거의 없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사사들도 점점 타락하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아직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때입니다. 이 땅의 부와 권력을 좇으며 시기하고 분열하고 다투는 삶에서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자신만을 위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힘써 일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욥기(19-01)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욥기 19장 1-29절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사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보면서 ‘이렇다’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반대로 평가 되었을 때면, 과연 사람을 제대로 보는 눈이 있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기적입니다. 인간관계 역시 순수하기 쉽지 않습니다. 비교적 사이가 좋은 관계였음에도 재력, 능력, 명예, 매력 등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멀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욥과 가깝게 여기고 살던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여기고 불편해 합니다.

 

  • 욥기 19장, 욥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25절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제3부 “내 주는 살아계시니(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라는 아리아의 가사로 쓰일 정도로 유명하면서, 동시에 욥기의 구절을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주제와 연결하는 탈 문맥적 해석의 대표적인 예 중 하나입니다(발닷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와 마찬가지로). 오히려 19장의 중요성은 욥의 마지막 발언인 42:2-6과 길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친구들에 대한 비판 : 너희의 지혜는 폭력이다(1-5)

우리는 인간의 현실을 알고 인간을 사랑하며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실망은 필연입니다. 우리가 신뢰해야 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사람은 의지나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결국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물론 이기심이 자신에게도 깊이 지잡고 있음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3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4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5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1-5)

 

욥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종들과 어린 아이까지 그를 멸시하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이제 욥의 대답의 시작은 빌닷의 즐겨 사용하는 어투를 흉내 냅니다. “어느 때까지”라는 표현은 8:2과 18:2에서 빌닷이 입을 떼는 상용 어구였습니다. 상대의 말을 빌리는 논쟁 기법은 첫째, 상대가 해준 말을 상대에게 되돌려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만약 악인의 운명이 빌닷이 묘사한 그대로라면, 그 운명을 맞이할 사람은 바로 빌닷입니다. 둘째, 상대방이 한 말의 기표(시니피앙)를 사용하면서도 그 의미(시니피에)를 전혀 다르게 함으로써 상대의 말을 약하게 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익숙한 전통적인 이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욥은 빌닷의 표현을 빌려 시작하지만, 이번에도 욥의 대답은 앞선 빌닷의 말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2-3절은 2인칭 복수 동사를 사용하여 욥의 영혼을 말살하는 폭력적인 말을 한 것이 빌닷만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욥은 친구들의 ‘지혜’가 고통 받는 자의 영혼을 괴롭히고 짓부수는 짓이라고 고발합니다(2). 바른 길을 가르치려는 친구들의 ‘위로’는 욥에게 있어 “모욕”과 “학대”에 다름 아닙니다(3).

4절은 개역개정이 의문문으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평서문입니다. ‘옴남’은 ‘확실히’, ‘진실로’라는 의미의 부사인데, 욥은 이 부사를 비꼬는 투나 반어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12:2의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라는 문장도 표면적 의미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4절을 뉘앙스를 살려 번역하면, ‘그래, 정말 내가 잘못했다고, 잘못이 내게 있다고 치자’ 정도가 됩니다. 허물이 있다고 가정할 뿐 자신의 허물 때문에 심판받는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옴남’으로 시작하는 5절에도 반어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5절을 직역하면 ‘너희는 나보다 더 커서 나의 잘못을 가르쳐준다’입니다. 가정법 상황을 전제합니다.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내게 자만하는구나.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을 입증할 증거를 갖고 증언해 다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의 한탄(1): 고난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달라(6-12)!

아무리 단단한 강철도 한여름의 열기에는 휩니다. 기반이 단단한 사람도 시련의 무게가 크면 금세 무너질 것 같은 한계점에 이릅니다. 욥의 상태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세 친구에게 정죄를 받았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가혹한 시련을 맞아 하나님을 원망하고 한탄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6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7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8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9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10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11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12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7-12)

 

욥의 진심은 6절부터 표현됩니다. 여기서도 욥은 빌닷의 논거에 반박합니다. 빌닷이 재앙이란 악인이 스스로 쳐놓은 그물과 올가미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라 할 때(18:8-10), 욥은 이를 부인하면서 그 그물은 하나님께서 내게 둘러치신 것이라고 항변합니다(6). 자신이 누군가를 해치려는 악한 마음으로 함정을 파놓은 것이 아니라는 무죄 주장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지금껏 줄곧 해오던 진술의 연장입니다. 욥의 앞길이 막힌 것도(8), 그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9) 그의 희망이 뿌리까지 뽑혀버려 이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10)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자신을 공격하시며(11), 한 번의 재앙도 아니고 연속적으로 한꺼번에 재앙들이 몰려오게 하신 것도 하나님입니다(12). 자신의 행악이 불러온 재앙이 아니라는 증언입니다. 욥의 진술은 1장에서 연속된 재앙에 대한 진술(1:13-19)과 일치합니다. 하늘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는 인간에게 이렇게 “까닭 없이” 주어지는 고난은 ‘폭력’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7). “까닭”을 알면 고통을 견딜 힘이 더 생길 수 있습니다. 원인을 제공한 이를 원망하거나 아니면 잘못된일을 바꾸거나 고치거나, 혹은 후회를 통해서도 고통의 시간을 견뎌낼 힘이 조금은 더 생깁니다. 그러나 욥은 그 “까닭”을 모르고 어떠한 논리(인과응보 같은)로 자신의 고난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욥의 인내’입니다. 그는 단지 고통을 호소합니다. 아무리 도와달라고 간청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아무도 사태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음을 아파합니다(7).

 

욥의 한탄(2): 내게는 아무도 없다(13-20)

자신이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낫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폄하 하는 것만큼 교만한 모습은 없습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십니다. 성경은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는 이들을 꾸짖고 있습니다(약 4:12).

 

13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14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15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16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17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18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19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20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13-20)

 

욥에게 임한 고난은 첫째로 재산과 가족을 잃는 것이었고, 둘째로 극심한 육체적 고통이었습니다. 이 고난은 또 다른 고통을 초래합니다. 욥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세 친구)은 욥을 정죄하기에 급급하고, 그 외의 친척과 지인들은 욥에게서 멀어졌습니다(13). “형제들”과 ‘지인들’의 반의어가 바로 “낯선 사람”(이방인)입니다. 욥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반대로 뒤집어졌다는 것이 반의어들의 짝으로 표현됩니다. ‘가까운 것’이 ‘멀어졌고’(14a), ‘알던 것’이 ‘잊혔다’(14b). 욥의 집에 얹혀살던 ‘난민’과 ‘여종’이 욥을 ‘낯선 사람’이자 ‘외국인’으로 취급합니다(15). 종이 주인에게 은혜를 구하는 것이 뒤집혀서 오히려 주인이 종에게 은혜를 입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16).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인 아내와 가족, 형제들이 욥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18). 욥의 아내에 대한 진술은 여기 외에 2:9-10과 31:10에 나옵니다. 176절의 ‘내 배의 자식들’은 그 자체로는 욥의 후손(자녀와 손주들)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욥의 자녀들이 모두 사망했다는 앞선 진술에 비추어 ‘배’를 어머니의 자궁(모태)으로 해석함으로써 모순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즉, ‘나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자식들’은 곧 형제자매를 지칭한다고 해석하면, 17b절은 13절의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와 무리 없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욥의 아내가 여전히 현재 욥과 함께 있는가 아닌가, “내 허리의 자식들”이 욥의 자녀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형제를 지칭하는지, 혹은 어딘가 배 다른 자녀들이 또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욥이 말하자 한 것은 가장 가까이 있었고 가까이 있어야할 사람들이 멀어졌고(19a), 욥의 사랑과 보호를 받아온 사람들이 욥에게 사랑과 보호를 되돌려 주지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19b).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용되는 원리라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친구들을 향한 탄원: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21-22)

성도는 죽음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들에게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성도는 지금 욥이 친구들에게 말하는 경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인 우리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21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21-22)

 

욥은 친구들에게 통 사정합니다: ‘나의 친구들아, 너희는 제발 좀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눈물 어린 호소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는 방식으로 욥은 자신의 간절함을 표현합니다. 다시 한 번, ‘불쌍히 여겨달라’는 동사 ‘하난’은 “까닭 없이”의 ‘힌남’과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입니다. 제발 욥 자신에게서 고난의 까닭을 찾으려 하지 말아 달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기” 때문입니다(21b). 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만으로도 충분히 괴롭습니다. 친구들의 ‘위로의 말’과 ‘지혜의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고난만큼이나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탄원: 내 눈으로 하나님을 뵐 것이다(23-29)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원수를 갚아 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오해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마음에 원망과 분노를 품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화살로 원수들을 흩으시고 번개를 번쩍이셔서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셨다고 말할 날이 우리에게도 찾아올 것입니다. 모든 것을 공평하고 정의롭게 판단하실 하나님께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맡기고,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범죄의 자리에서 돌이키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3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28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29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23-29)

 

23절은 ‘미-이텐’으로 시작하며 ‘불가능한 가정이나 소망’을 의미하는데, 자신의 말이 기록되어 책에 쓰이기를 바라는 욥의 소원은 결국 성취되어 우리가 그의 외침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기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극심한 고난에 처한 이가 회복의 희망을 계속 품고 있기란 힘듭니다. 그런데 욥은 계속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분(고알리)이 살아계심을 확고히 믿고 있습니다(‘나는 안다’). 자신의 온 살가죽이 다 벗겨지더라도 맨살로라도 그분을 뵐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7절의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른 것 아닌 바로 내 눈으로 그분을 볼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낫습니다(27). 우리는 그의 소원이 실현되는 장엄한 장면을 함께 목도하게 됩니다.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믿음의 사람들을 떠올라야 합니다. 그들은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자이시며 최종 심판자라는 사실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을 본받아 승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시편(24-01)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시편 24편 1-10절


한 공동체가 같은 마음과 정신을 공유함에 있어 노래한 요소도 없을 것입니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화답하며 나지막한 산을 오르는 백성들을 그려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들의 정서를 완벽히 공감하기는 어렵지만, 감격과 기쁨만은 공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시편 24편은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 찬양과 경배에 초점을 둔 시입니다. 물의 혼돈을 정복하시고 땅과 세계질서를 수립하신창조주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을 찬미합니다. 이와 함께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합당한 자격을 묻는 질문과 응답 형식의 노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 찬양(1-2)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신 주인이십니다. 이 땅에 존재한 모든 것은 창조하신 분이 계시고, 그분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에 있는 것들을 호명하시고 다스리시며 하나님께서 주신 분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앙은 창조주요, 주권자로, 영광의 왕으로 그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1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1-2)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찬양하며 시를 시작합니다. 시의 첫 시행부터 장엄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여호와의 것이며, 세계와 거기에 거주하는 것들이 여호와께 속했습니다(1). ‘땅’과 ‘세계’가 평행관계 안에서 안전한 거주지로서의 세상, 온갖 생물들이 활기 있게 살아가는 지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때 시인은 땅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피조물들의 주인이 여호와라고 노래합니다. 땅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동식물과 사람의 조화는 질서 잡힌 세계의 그림입니다. 땅을 경작하고 돌보는 사람과 땅에 충만한 동식물들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로서 여호와의 통치권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땅과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구체적으로 소명합니다.

2절은 이유 접속사(키)로 시작합니다. 그가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고, 강들 위에 세우셨기 때문입니다(2). 여호와를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묘사하여 주권을 강조합니다. ‘바다’와 ‘강’은 구약에서 주로 한 쌍으로 언급됩니다. ‘바다’는 ‘땅’과 구별되는 모든 물을 지칭합니다(창 1:10). 일반적으로 구약에 묘사된 바다와 강은 고대근동 세계의 우주론적인 또는 신화적인 배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태초의 세상이 무질서와 혼돈의 상징인 강과 바다로 뒤덮여 있다고 믿었습니다.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혼돈의 세력을 누르시고 땅과 세계를 견고하게 세우신 분입니다(참조, 시 104:5; 욥 38:4-10). 이러한 의미에서 태곳적 홍수는 온갖 동식물과 사람 사는 땅 아래 큰 깊음의 샘들까지 분출한 사건처럼(창 7:11) 혼돈으로의 회귀이며 하나님이 창조 자체를 철회시킨 심판입니다.

 

예배에 합당한 자(3-6)

성도 모든 사람들이 예배하지만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주님의 복과 의를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얻지 못한 이유는 삶이 없이 예배만 드린다면 말입니다. 손이 깨끗한 것과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아름다운 이웃 관계 후에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실 것입니다.

 

3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3-6)

 

본문에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문지기들에게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고 묻습니다. 성전 문지기들은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 여호와라고 대답합니다.

 

(1) 질문: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인가?(3)

 

3절에서 주제와 공간의 변화가 있습니다. 시인은 우주적인 창조 사건을 본 것처럼 상상력을 발휘하여 묘사한 후(1-2), 질문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인가?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 누구인가?’

여호와의 산, 그의 거룩한 산은 어디입니까? 시편 맥락에서 ‘오르다’라는 말은 예배하려고 성소를 향해 행진하는 것을 일컫는 전문 용어입니다(시 47:5; 참조. 사 2:3; 38:22; 삼상 1:3,22; 삼하 6:12). 따라서 여호와의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언덕으로, 시온 산입니다(시 2:6). 문맥을 고려하면 여호와가 혼돈의 물을 장악하시고 질서를 세우시고 왕권을 수립하신 산입니다. 시인은 우주적 질서를 수립하신 여호와를 찬미하고서 예배의 상황, 곧 언약과 관련된 ‘거룩한 곳’으로 관점을 이동시켰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산은 예언서에서 말하는 마지막 날에 모든 민족들이 찾아올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사 2:3; 미 4:2).

 

(2) 응답: 손과 마음이 깨끗한 자(4-5)

 

거룩한 곳 시온 산에서 경배 받으실 여호와께 누가 올 수 있습니까? 시인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자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4). ‘손’은 외적인 신체 기관입니다. 이것을 통해 인간의 행위 문제와 마음에서 발현되는 내면의 순결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람의 겉과 속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깨끗하여 윤리 도덕적으로 책임감 있는 삶을 예배자의 자격으로 제시한 셈입니다.

또한 허무하고, 가치 없고, 텅 빈 것에 자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4b). ‘뜻’으로 번역된 ‘네페쉬’는 욕망과 마음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깨끗한 자는 ‘속임’, ‘거짓’, ‘우상’으로 자기의 뜻을 치환하지 않습니다. ‘허탄한 데’ 마음이 향하도록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한 거짓 맹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4b). 행동으로 옮길 의지도 없으면서 허위로 맹세하는 일이 없어야 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윤리 도덕적인 삶과 우상을 따르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의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게 됩니다(5).

예배자의 손과 마음의 청결은(4) 결국 복과 의로 결실 맺습니다. ‘복’(베라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했던 복입니다. 독특하게 복과 의(체다카)가 시적 평행관계 안에서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 복과 의가 평행관계로 묶여 동의적 의미로 쓰인 곳은 오직 이곳뿐입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신 것을 서로 연결시키는 인상을 남깁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의롭습니다. 인정받는 사람이 예배자로서 하나님 임재 앞에 설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와 의로운 삶, 그리고 복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3) 확언: 여호와를 찾고 그 얼굴을 구하는 자(6)

 

시인은 예배에 합당한 자들의 성격을 최종적으로 확언합니다. ‘이와 같은 자가 여호와를 찾는 족속(세대)이며, 야곱의 하나님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와 ‘하나님 당신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평행하면서 서로의 의미를 보충합니다.

‘찾다’(다라쉬)는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조언을 구하고, 탐구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며(시 69:32; 암 5:6),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함입니다(창 25:22; 삼상 9:9). 현재 시행에서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평행하는 소절처럼(6b),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곧 하나님의 임재와 도움을 구하기 위함입니다(시 77:2). ‘구하다’(바카슈)라는 말도 기대하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애쓰며 찾는 행위와 관련됩니다. 따라서 시인의 ‘찾고 구하는’ 행위는 언약의 하나님, 곧 야곱의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태도의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시인이 말하는 예배에 합당한 자는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자입니다.

 

만군의 주이며 영광의 왕 찬양(7-10)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용사이십니다. 세상은 배은망덕하게도 자신을 만든 하나님께 저항하고 반역을 꾀합니다. 그로 인해 혼돈과 파괴가 들끓습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제압하시고 통치를 회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승전하시고 성전의 문으로 들어가시자 문들이 소리치며 환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7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7-10)

 

시인은 주제를 바꿔 여호와의 군사적인 능력을 찬양합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역사적 정황이 시행 자체에서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아 재구성하기 어렵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을 때인지(삼하 6장), 전쟁이 끝나고 승리한 후 법궤가 성전으로 들어오는 장면인지, 예배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들의 극적인 표현인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우주적 왕권을 고백하며 찬양한 처음 두 절(1-2)에 상응하는 만군의 주 하나님을 향한 영광송이라는 것입니다.

7-10절의 시행이 질문과 응답을 반복하는 형식미를 갖추었습니다(ABAB). 그 형식은 예술적이고 내용은 장엄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 올려라/영원한 문들아, 들어 올려라/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7,9). 이 시행이 두 번 반복되는 데, ‘문들’은 어떤 문입니까? 보통 성문을 떠올리게 되는데, 흥미롭게 성문이 인격화하여 명령을 받습니다. 이 때문에 ‘문들’은 성전의 문지기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평행하는 ‘영원한 문들’은 무엇입니까? ‘영원’을 뜻하는 ‘올람’은 태고성과 미래성 모두를 포함하는 미지의 시공간적 개념입니다. 옛적 ‘태고의 문들’로 해석될 수도 있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내세의 문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영원은 현재를 사는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영광의 왕이 영원한 문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8a,10a)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강하고 전쟁에 능한 전사로서의 여호와의 영광을(8bc; 참조. 출 15:3) 강조하기 위한 수사학적인 질문입니다. 시인은 군대를 통솔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그가 영광의 왕이심을(10bc) 칭송하고 높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만군의 주인이며 통치자로서, 태곳적 창조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천상천하의 군대를 거느리는 영광의 왕입니다. 이는 우주론적인 창조 신앙과 언약백성의 역사적 구원 경험을 결합시켜 장엄한 하나님 왕권을 찬미한 것입니다.


온 세상의 혼돈을 정복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예배 안에서도, 예배 밖에서도 왕이고 주인이십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는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닫아둔 문을 열어 그분의 통치가 적용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