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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6-04)


하나님 아들임을 시인한 예수님과 부인한 베드로

마태복음 26장 57-75절


어떤 상황에도 당신은 주님을 인정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당신과 주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어떤 상황에서도 인정할 때, 주님도 당신을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닭이 울 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통곡하였습니다. 자신의 무지를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 제자들은 모두 도망치고 홀로 붙잡힌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공관으로 끌려옵니다. 베드로가 멀찍이서 뒤를 쭟으며 진행 과정을 목격합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각본에 따라 재판이 진행됩니다. 일차적으로 사형이 언도되자 예수님에게 폭력과 수치가 가해집니다. 그 시각 공관 뜰에 있던 베드로 역시 비공식적 심문받게 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강력하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합니다.

 

유대 법정에 선 예수님(57-68)

탐욕과 불의에 물든 권력은 거짓과 가짜 뉴스를 생산합니다. 권력이 남용된 곳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면 생명의 대가를 지불 해야 합니다. 신성모독죄는 배제와 쉬운 제거가 가능한 안성맞춤의 카드입니다. 데제사장들의 기득권의 날조와 교살 의지를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다.

 

57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57-68)

 

본 단락은 가야바와 예수님의 대립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과 가야바를 대립시켜서 누구의 권위가 더 높은지를 보여 주려고 시도합니다. 심문 장면을 통해서 예수님과 가야바의 충돌에 나타난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종말의 하늘) 법정과 가야바의 (땅의) 법정의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한 자들은 그를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고 갔습니다(57).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의 집과 같이 별도의 장소에서 열릴 수 있었습니다. 무리에게 체포되셔서 가야바의 집에 새벽까지 심문을 받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아침과 저녁에 두 번 심문을 받았다고 언급합니다.

잠시 장면이 바뀝니다(58).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까지 왔습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과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초점을 다시 예수님의 심문 장면으로 돌립니다(59). 유대 법정은 ‘거짓 증인들’에게서 ‘거짓 증언’을 찾고자 합니다. 유대 법정은 예수님을 죽일 권한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서 로마(또는 빌라도)의 법정을 압박할 사유를 찾고자 합니다. 거짓 증언을 할 사람들은 많이 왔지만 산헤드린은 거짓 증언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60-61). 두 증인의 증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대답을 재촉합니다(62),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63), 예수님의 침묵은 고난 받는 종의 침묵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사 53:7).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진실을 변호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침묵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사 53:7).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실을 변호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침묵이 길어지자 대제사장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걸고 맹세하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인지 말할 것을 요구합니다(63).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합니다(64). 당시에 누군가 자신이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자신이 신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야바의 정죄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4)는 예수님의 선언 뒤에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신성모독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64절은 시편 110:1과 다니엘 7:13-14을 인용한 내용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적인 위치에 있다고 밝힙니다. 64절의 배경이 되는 다니엘서 7:13-14은 하늘 의회(보좌/법정)의 전형적인 본문입니다. 구약과 유대 묵시 문헌에서 하늘 의회의 주요 기능은 재판입니다. 유대 법정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신의 위치에 놓으며 유대 지역의 안정을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을 능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신적인 권위를 부여받아 이스라엘의 안정을 책임지고 있다고 믿었던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옷을 찢으면서 신성모독의 죄로 예수님을 정죄합니다(65). 예수님께서는 하늘 법정의 그림으로 자신이 천상 세계에 속한 신적인 존재요 하늘 법정에서 산헤드린을 재판할 것을 암시하여, 신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지도자들, 그것도 대제사장을 공격했기에, 가야바는 예수님을 향하여 ‘신성모독’이라고 외칩니다. 어느 법정, 누구의 권세가 더 강한가? 정답은 예수님과 하늘 법정입니다. 가야바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특권을 지녔기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자인 예수님께서는 지성소의 본체인 하늘 또는 하늘 보좌에 앉을 것이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하늘 법정을 주재할 것입니다. 땅의 현실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유대 법정이라는 최고의 권세 앞에 죄수로 서서 치욕을 당하는 모습이지만, 하늘의 진리는 이 죄수가 하늘과 종말의 심판자로 와서 그들을 앞에 세워 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예, 25:31-32). 미래에 일어날 대역전의 암시는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주를 부인하지 않도록 격려합니다(참조 10:32-33).

 

베드로의 부인과 통곡(69-75)

수련 없는 신앙은 갑 속에 든 칼과 같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껍데기 신앙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진리에 기초한 담대한 신앙이 대조됩니다. 형식적인 신앙은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그 진상을 낱낱이 드러냅니다. 제자도는 평생 배움의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을 닮기를 연마하는 것입니다.

 

69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69-75)

 

유대 법정에서의 재판 중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69). 한 여종이 베드로 앞으로 와서 그의 얼굴을 보고는 예수님의 일행인 것을 알아챕니다(70).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는 중이고 그 강도가 세지면서 베드로의 마음에 두려움이 심해졌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과 어떤 관련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70). 베드로는 앞문으로 갑니다(71). 이는 자리를 떠나 도망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가리켜 나사렛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를 하면서 예수님을 부정합니다(71). 예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잠시 뒤에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갈릴리 지방 억양을 듣고는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가 틀림없다고 말합니다(73).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맹세합니다(74). 그때 닭이 울자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베드로는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마음이 찢겼습니다.

 

베드로의 몰락은 그가 연약한 인간임을 드러냅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계시에 가장 근접했고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성경의 기록에서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기적, 곧 물 위를 걷는 수준의 믿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위협 앞에서 얼마 전에 자기 입으로 내뱉었던 고백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마태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를 최고의 제자로 묘사하지만 동시에 연약한 인간임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인간의 연약함을 볼 수 있도록 만듭니다. 아무리 최고 수준의 훈련을 받은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연약한 인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닭이 세 번 울고 나서 통곡한 모습은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사실적이고 진솔한 상태입니다. 오만은 타락의 지름길입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서 오는 장벽을 무서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실제 모습을 감추며 강한 척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존경과 관심을 얻을 수는 있겠으나 무너질 때는 한순간입니다. 신앙의 영웅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배신과 부인과 통곡을 통해서 지도자를 영웅시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향유 부은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에 따르면 복음은 주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의 헌신과 함께 전해지고 그 삶이 기억되는 것이지 그 사람의 이름이 우상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구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은 연약한 인간들이었습니다(모세, 노아, 다윗, 솔로몬 등).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같은 위치에 있는 지도자를 영웅시하지 않을 때 교회도 건강하고 그 지도자도 몰락의 길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모았거나 능력 있는 은사를 행하거나 화려한 설교로 청중을 끌고 다닌다 할지라도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인간임을 본인도 알고 보는 이들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긍휼 외에는 베드로의 회복을 설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다시 복음 사역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몰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0:32-33에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시인하면 하늘에서도 그 사람을 부인하거나 시인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면 베드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이 보여 주는 그림을 보면, 하나님의 긍휼로 그는 다시 세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통곡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구원 역사에 쓰십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할 때, 순식간에 넘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씨를 문제 삼으며 그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 다그치자 그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합니다.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던 큰 소리가 죽어도 주님을 모른다는 큰소리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세 번이나 잠들었기에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 힘을 빼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험과 위기 앞에서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주를 의지하는 기도 없이 장담과 과시는 금물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 기도 없는 신앙은 여종의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는 나약한 믿음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하고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의 길을 따라 순종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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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7-01)


하나님을 의지하는 욥

욥기 16장 18절-17장 16절


우리가 시련 속에서 외치는 탄식은 사람들을 향할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이해와 공감은 한계가 있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이해와 공감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시련 중에 찾고 의지했던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 욥의 말이 계속 이어져 절규가 됩니다. 욥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조롱을 당하게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욥의 항변을 들어주실 분도 하나님 한 분뿐이고 욥이 옳다고 욥은 무죄하다고 판정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욥은 고난 이전과 마찬가지로 “까닭 없는” 극심한 고통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욥의 절규(1): 나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기를(18-22)

우리도 힘든 일을 당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욥과 같이 우리의 증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을 내어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한 모든 사정을 아시며 해결해 주시는 아버지가 되실 뿐아니라, 우리의 호소를 들으시고 기꺼이 우리의 증인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18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19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20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21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22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18-22)

 

욥은 18절의 “땅”과 “피” 그리고 “부르짖음”을 말하고 있는데, 17절과 함께 창세기 4장의 아벨의 죽음을 연상시킵니다. 개역이 “포학”이라고 번역하는 ‘하마스’(7)는 폭력을 의미하고 폭력을 행사한 자는 ‘가인’입니다. 아벨의 제사(제사도 일종의 “기도”라고 한다면)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결”한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수난과 최초의 죽음은 무죄한 자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도저히 인과응보의 원리를 적용할 수 없습니다. 땅으로 하여금 자신의 피를 덮지(“가리지”) 말기를, 자신의 부르짖음이 땅에서 그대로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아벨의 피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했듯이 자신의 울부짖음 또한 하나님께 닿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벨처럼 무죄하게 고통당하는 것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욥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욥의 무죄를 아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욥에게서 이 고난을 제거해주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주시는 분도 거두시는 분”이라고 했던 욥의 최초의 고백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면 중간에서 문제를 중재하는 사람이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중재자가 있기를 바랍니다(21). 하나님과 욥 사이의 ‘수직적인 갈등’을 중간에서 중재해줄 사람은 없습니다(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 혹은 성령 같은 개념은 이 시대에 없었다).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둘이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곧 그렇게 될 거라고 욥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몇 년 지나지 않아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절의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에서 “조롱하는 자)”로 번역된 단어는 ‘멜리쯔’입니다. 이 단어는 잠언에서 ‘조롱하다’, ‘비웃다’, ‘업신여기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잠 3:34;9:12;14:9;19:28), 그 밖에서는 ‘중재자’, ‘통역자’, ‘해석자’, ‘가르치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창 42:23; 대하32:31; 욥 33:23; 사 43:27). 따라서 본문을 ‘내 친구들은 나를 가르치려고 하지만 (혹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재자 노릇을 하지만) 나의 눈은 하나님을 향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욥의 절규(2): 하나님 외에 누가 내 손을 잡아주겠습니까(17:1-5)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변호사가 필요합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편에 서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의뢰인을 보호하여 의뢰인이 고민하고 결정하는 시간을 벌어 줍니다. 욥은 자신을 변호해 줄 중재자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1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 2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 3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4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마소서 5보상을 얻으려고 친구를 비난하는 자는 그의 자손들의 눈이 멀게 되리라(1-5)

 

16절을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로 번역하면, 바로 앞 절인 16:22과 잘 연결됩니다. 욥은 이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칠십인역(LXX)은 이와는 다르게 ‘나는 무덤을 찾아다니지만 얻지 못했다’로 읽고 있습니다. 이 독법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2절과 잘 연결됩니다. ‘나는 죽고 싶지만 죽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고 있구나.’ 이런 해석의 차이는 동사 ‘니즈아쿠’가 이 구절에서만 단 한 번 쓰인 단어(hapax)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근은 아람어에서 ‘잘리다’, ‘(불이) 꺼지다’, ‘끝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의미를 적용하여 본문을 직역하면 ‘나에게는 무덤들이 잘려나갔다(없어졌다)’가 됩니다. 칠십인역의 해석에 좀 더 가까운 결과물입니다. 욥은 자신을 조롱하는 이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탄식합니다(2). 그러면서 동시에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 이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4). 이 고통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거둬 가실 분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손을 잡아달라고, 욥의 무죄를 믿어주고 지지해줄 이가 하나님 외에 대체 누가 있겠냐고 외칩니다(3).

5절은 일종의 속담이나 격언으로 여겨지는데, 문장이 워낙 함축적이어서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직역하면 ‘몫을 위해 그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그의 자식들의 눈은 끝난다/멈춘다/죽는다’입니다. 우리말 번역 성경들도 모두 다르게 해석합니다: “옛 격언에도 이르기를 ‘돈에 눈이 멀어 친구를 버리면, 자식이 눈이 먼다’ 하였다”(새번역); “제 자식은 못 먹어 눈이 멀어 가는데 분깃을 받아 가라고 친구들을 청한다더라고”(공동번역). 하경택은 “어떤 사람이 친구들에게 물려줄 유산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의 말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의 자손들의 눈이 쇠하여질 정도로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하고 실망만 안겨주게 될 것이다”로 풀이합니다.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자식들에게 나눠줄 유산이 있다고 이웃들에게 자랑해봤자 자식이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인가.’ 5절이 4절에서 이어지는 ‘악인들의 결과’가 아니라, 6절과의 문맥 속에서 욥 자신에게 들려지는 조롱의 말(“속담거리”)이라는 해석입니다. ‘헬레끄’가 ‘상속할 유산’을 의미한다고 가정하면, 이 속담은 누군가 자녀들에게 상속할 유산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는 상황을 언급하고 있는 듯합니다. 유산에 대한 언급은 규범적 지혜의 가장 큰 복인 ‘부귀’와 ‘자녀’(욥 1:23 참조)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자/의인의 자녀가 ‘눈이 멀게 되는’ 질병 혹은 죽음을 겪는 상황은 규범적 패턴이 깨진 상태입니다. 전도서가 지적하는 것처럼, 수고의 대가를 수고하지 않은 후손이 물려받게 되는 상황(전 2:21)이나, 유산을 물려줄 후손이 없음에도 부귀를 추구하는 것(전 4:8)은 규범적 패턴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욥의 절규(3): 너희의 지혜는 지혜가 아니다(17:6-10)

이 땅에서 우리의 의로움을 입증할 유일한 보증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없습니다. 암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피의 공로를 의지 하는 자마다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이를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아 영원한 심판에 이를 것입니다.

 

6하나님이 나를 백성의 속담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7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8정직한 자는 이로 말미암아 놀라고 죄 없는 자는 경건하지 못한 자 때문에 분을 내나니 9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10너희는 모두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6-10)

 

6-10절은 무죄한 자가 당하는 고난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반응을 비판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번역의 스펙트럼을 넓게 주지 않아서 이해하기 쉽습니다. 8-9절에서는 규범적 지혜의 익숙한 어휘가 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자”, “죄 없는 자”, “경건하지 못한 자”, “의인”, “손이 깨끗한 자.” 욥은 규범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진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1) 고난 받는 무죄한 자에게 침을 뱉으며 조롱해서는 안 됩니다(6).

(2)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진 현실 앞에서 놀라고 본누해야 합니다(8).

(3)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의인”)은 규범적 지혜의 원리에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9).

 

규범적 지혜는 욥의 삶을 지탱해준 근간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살아왔습니다. 지금 비록 그가 처한 고난은 인과응보의 원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까닭 없는” 고난이지만, 예외가 있다고 해서 규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혜자는 예외에도 불구하고 규범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욥의 절규(4):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11-16)

고난에서 구원해 주실 이는 하나님뿐입니다. 비록 그 고난을 허락하신 이가 하나님이라하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보증이 되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인 예수님까지 우리 죄를 위한 대가로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에 시달리고 있든지 그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음과 탄식을 다 듣고 계시며, 이미 가장 근본적 문제인 죄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11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 12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 앞에서 어둠이 가깝다 하는구나 13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14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15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16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11-16)

 

욥기 17장을 마무리하는 욥의 절규는 지금까지의 그의 다른 발언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끝을 맺습니다(7:21; 10:20-22; 14:18-22). 11절의 “내 계획”과 “내 마음의 소원”이라는 번역은 현대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과거 지향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고대인들에게는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짐마’는 규범적 지혜의 어휘로, 패턴을 잘 알고 그 패턴에 따라 계획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과거를 잘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직역하면 ‘내 심장이 상속받은 것들’입니다. 즉, 조상들로부터 배운 규범적 지혜를 뜻합니다. 욥은 그 동안 자신의 삶을 지탱해오던 것들이 다 무너졌음을 고통스럽게 토로합니다. 욥을 둘러싼 사람들 모두 밤을 낮이라 하고, 어둠을 빛이라고 말합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둠을 선명하게 나누던 이분법이 무너진 것입니다. 욥은 더 이상 삶을 지속할 힘이 없습니다. 그저 바라는 것은 무덤(“스올의 문”)으로 내려가는 것뿐입니다.


고난 중에 우리가 찾아야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한 상황을 아시며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구원으로 인해 마침내 독수리같이 힘차게 비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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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6-03)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6장 36-56절


자기 힘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최대 사명인 십자가에 죽으심을 감당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주도권조차 내려놓고 하나님의 최종적인 결정에 전적으로 맡기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 유월절 식사 후 겟세마네 동산으로 자리를 옮기십니다. 세 제자들을 따로 구별해 기도의 자리로 함께 나가십니다. 고난의 잔을 앞두고 심히 괴로워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제자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전혀 준비하지 못한 그때, ‘인자의 넘겨질 때’가 와버린 것입니다. 배신자 유다가 큰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의 공동체의 가장 깊숙한 공간까지 침투해 결국 예수님을 체포하기에 이릅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버려두고 모두 도망칩니다.

 

겟세마네의 기도(36-46)

믿음은 말로 장담하는 신앙이 아니라 기도의 무릎으로 순종하는 신앙만이 십자가를 지나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자기부정과 절대 의존의 기도 없이는 십자가의 순종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역 앞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있습니다.

 

36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37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8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9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40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1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2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3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4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5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6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36-46)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마태복음(혹은 공관복음서)에서 겟세마네의 기도와 11:25-27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을 길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11:25-27의 기도가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와 대화를 반영한 것이었던 것처럼, 겟세마네의 기도 역시 고통 가운데 있는 아들의 절규를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함을 역설적으로 증언합니다.

 

(1) 겟세마네에 제자들과 함께 가신 예수님(36-38)

 

기도의 장면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따로 기도하러 가셨고, 슬퍼하고 고통하기 시작하셨습니다(37). 너무 슬퍼서 죽게 됐으니,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제자들에게 요청하십니다(38).

 

(2) 3번씩 기도하신 예수님(39-45)

 

본문에는 세 번의 기도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세 번의 반응이 나옵니다(36-41, 42-43, 44-46).

 

① 첫 번째 기도(36-41) : A 그는 갔다/기도했다(39) → B 당신이 원하는 대로(39) → C 그는 왔다/자는 것을 보았다(40) → 기도하라(41)

② 두 번째 기도(42-43) : A′ 그는 갔다/기도했다(42) → B' 당신의 뜻이 이뤄지게 하소서(42) → C' 그는 왔다/자는 것을 보았다(43)

③ 세 번째 기도(44-46) : A″ 그는 갔다/기도했다(44) → C″ 그는 왔다/그들은 자고 있었다(45) → D″ 아직도 자느냐?(45)

 

겟세마네 기도에서 보인 예수님의 모습, 곧 극도의 긴장감, 깊은 슬픔, 두려움은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낯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 자체를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받아들인 고통의 잔은 곧 진노의 잔으로서 구속사적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만 유일하게 주신 진노의 잔을 어느 사람에게도 주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인간도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 성도들은 구원처럼 큰 희생을 치르고 오는 것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둘째, 겟세마네의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본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의 애가와 주의 기도처럼 이미 공식화된 말씀으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지만 순종을 택하십니다. 마태는 특히 아들의 순종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기도(‘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를 가르치셨고 공식이 된 그 기도를 겟세마네에서 직접 실천하는 순종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가르친 그대로 실천하셨고 실천하신 그대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만큼 주의 기도로 주어진 가르침, 곧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삶이 힘들다는 것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고통의 예수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라’(40)는 말씀은 제자의 길이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겪은 슬픔과 고통을 견디지 못해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예고합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표출하신 감정은 제자도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슬픔과 고통은 의인들에게 없어야 하는 요소가 아니라 경건한 인생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구약에 나타난 고난 받는 의인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통당한 의인들처럼 겟세마네의 예수님께서는 탄식과 신뢰, 개인적 탄원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보여 주는데, 이런 조합은 의인들의 살아 있는 신앙을 입증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서 오는 탄식과 고통을 쏟아내지 않고 기계처럼 순종하는 인간을 만든 창조주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자들, 특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탄식과 애가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탄식과 신뢰, 간청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분리되지 않으며 의롭게 살아가는 여정에서 언제나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슬픔, 고통, 두려움은 그가 죄의 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가 없지만 참 인간이기에 당연히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유일하게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런 죽음이 가져다 주는 고통을 겪어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길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슬픔, 고통, 두려움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고난 받는 의인의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순종의 길을 가야 합니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느낀 감정은 신자들을 위한 위로가 됩니다. 주께서 감정을 그대로 토로하셨기에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하나님 아버지께 나갈 때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인생일지라도 수없이 다가오는 난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생길 때가 수없이 많습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통곡하고 감정을 토해내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통곡하셨으니 나도 통곡하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에서 하나님의 침묵이 곧 하나님의 고통을 대변합니다. 주의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대상을 아버지라고 가르치셨고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을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부르짖는 이 순간에 아버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의 반응은 왜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무반응을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침묵이 그의 부재를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겟세마네의 아들과 함께하시는 아버지는 단지 침묵하실 뿐입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고통을 더욱 강렬히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예수님께서는 무응답으로 여기지 않고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침묵이 곧 응답이며, 침묵 속에 아버지의 고통이 담겨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고통 없이 하나님의 종이 고난 받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고통과 고뇌 속에서 하나님께서 헛되이 위로의 아버지로 불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체포된 예수님과 도망하는 제자들(47-56)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 알고서도 손해와 희생이 기다리는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기려면 하면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지고, 버려지고, 낮아지는 것이 세상의 모략을 이기는 길일 때가 있습니다. 비폭력과 무저항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올바름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체포되는 장면에서 아무 저항 없이 무폭력을 볼 수 있습니다.

 

47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47-56)

 

가룟 유다는 누가 예수님인지 알리려고 입을 맞추고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넘깁니다(47-50). 위기가 닥치자 제자 중 한 명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잘라버립니다(51). 예수님께서는 칼을 잡은 모든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기 때문에 칼을 집어넣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은 칼로 혁명운동을 하는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입니다(5:13-16). 칼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뤄지는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5:43-48).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때문에, 칼로 고난의 길을 거부하는 시도를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청원해서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주시도록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으나 그런 힘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53). 예수님께서는 역사의 마지막에는 실제로 천사들을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13:41; 24:29-31). 그러나 메시아로서 구원 역사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런 권한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권능과 특권을 행사하지 않고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을 담고 있는 구약 전체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입니다(54). 위급한 순간에 제자들은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본능적으로 도망합니다. 마가는 한 청년이 옷을 벗고 달아난 내용을 넣어서 당시의 공포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막 14:51-52). 제자들이 도망하는 것은 26:31에 예고된 내용이 성취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흩어진 양 떼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반과 군인들의 무력에 체포되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아버지의 계획에 아들이 얼마나 철저히 순종하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 때문에 자신의 권위와 권한을 사용하지 않고 도리어 수치를 당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삶에 가까울 뿐 아니라 진정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칼을 사용하지 않는 방식은 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하듯이 그 뜻을 행하는 방식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결코 부인하지 않고 함께 죽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결국 주님을 부인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고 맙니다. 그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도 피곤의 핑계로 기도에 게으르지는 않습니까? 정신을 차라고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도 제자들처럼 똑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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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5-03)


최후 심판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25장 31-46절


인간에게 계시된 하나님 정체의 절정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존재 방식과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정체를 드러내며, 그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또한 새롭게 창조될 인간의 정체를 반영합니다. 소자가 되신 인자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고, 그것을 통해 심판이 진행될 것입니다.

 

  • 세 가지 비유가 끝나자 이야기는 인자의 도래 이후에 있을 심판에 초점을 맞춥니다. 인자가 영광 천사와 함께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습니다. 모든 민족이 인자의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되자 준엄한 심판이 시작됩니다.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에게는 칭찬과 상급이 베풀어지지만, 왼편에 있는 악인들에게는 책망과 영원한 형벌이 주어집니다. 그 기준은 이 땅에서 종말을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근거합니다.

 

최후 심판의 장면(31-32a)

예수님의 왕권은 최후의 심판 때, 그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양의 염소를 나누듯, 의인과 악인을 나누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자와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를 나누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의 판단대로 시행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변화될 모습을 가르치십니다.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a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31-32a)

 

인자는 천사들과 함께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천사들의 역할이 본 단락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그들은 사람들을 재판장 앞에 불러 모으고 염소로 지목받는 악인들에게 형벌을 집행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31-32절을 하늘 법정의 장면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민족이 그의 영광의 보좌 앞에 모이는 것은 이 심판이 최종적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 우주적 심판임을 의미합니다(참조, 16:17; 19:28).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인자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재판장 앞에 서게 됩니다. 본 주해에서 반복해서 언급한 대로 ‘보좌 앞’의 ‘앞’은 하늘 회의(‘하늘 궁정’, ‘하나님의 회의’ 등으로 불림) 또는 하늘 법정(하늘 궁정의 기능 중에서 법적 기능을 강조하는 용어)을 묘사하는 전치사입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하나님 앞이나 옆에, 재판받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단 7:10,14; 마 10:32,33; 11:26; 18:14; 참조 5:16; 6:1; 26:70; 27:11).

 

본문은 인자가 재림할 때 일어날 마지막 재판 장면으로 24:29-31의 확장판입니다. 재판을 주재하는 존재는 목자와 왕으로 표현되는데, 그는 인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실 때(성육신) 회복의 나라인 하늘나라(복음)를 가지고 왔으며, 두 번째 오실 때는(파루시아) 역사를 마감하고 최종 평결을 선언할 것입니다. 지상에서 머리 둘 곳 없이 고난을 겪으며, 결국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재림의 모습은 지상의 모습과 전혀 다릅니다. 인생의 운명은 인자에 대한 태도로 결정되며, 인생의 운명을 판결하는 분도 인자입니다. 모든 민족이, 곧 모든 사람이 최후 심판을 받기 위해 인자 앞에 서게 됩니다. 의인들과 악인들 모두 심판대 앞에 섭니다. 이런 점에서 재판은 보편적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32b-46)

예수님께서는 악을 행한 자만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자’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지 않으십니다. 마땅히 사랑할 자만 사랑하는 이방인이나 이웃의 범주를 자의대로 정하여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는 거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자기 백성으로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32b…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32b-46)

 

인자의 최후 심판은 분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1차적으로는 의인들과 악인들을 분리하고, 2차적으로는 각각 복과 벌을 받게 됩니다. 인자가 목자와 왕의 역할을 맡습니다. 인자는 양들을 오른쪽에 세우고 염소들을 왼쪽에 세웁니다.

일반적으로 오른쪽이 선호되는 방향이었기에(예. 20:21) 양들은 오른쪽에 세워집니다. 예를 들어, 유대 묵시 문헌인 아브라함의 유언 12:12에서 보좌의 오른쪽에 있는 천사는 좋은 행위를, 왼쪽에 있는 천사는 죄를 기록합니다. 왼쪽은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인자가 왕으로서 앉아서 재판하는 장면은 다니엘 7장과 시편 110:1의 결합입니다(34).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최후 심판 이후에 영원한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35-36절은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복을 받는 이유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긍휼입니다(5:7).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을 받고 다가오는 아버지의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긍휼의 행위로 입증해야 합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긍휼의 삶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확인받았습니다. 그런데 의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왕이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있었던 것과 그런 왕을 도왔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37-39). 왕은 의인들에게 그들이 ‘내 형제들의 작은 자들(소자들) 중 한 명’에게 행한 것이 곧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차적으로는 ‘내 형제들’(12:48-49; 28:10), ‘작은 자들’(10:42; 18:6,10,14), ‘소자’(25:40)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라는 용어를 제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십니다(12:48-50; 28:10: 참조 요 20:17; 롬 8:29; 히 2:11-12).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므로 본문의 형제들은 제자들을 가리키며(12:49-50),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들로 부르십니다(28:10; 참조 고린도전서 6:2). 따라서 소자들은 일반적인, 사회적 의미 궁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 메신저들로서 재림이 오기까지 온 세상에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1세기나 초기 교회의 상황에서는 더욱 명확한 현실이었습니다. 땅에서 이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이지만, 하늘 법정에서는 높아질 것이며, 하늘나라를 상속하는 보상을 받습니다. 소자를 섬긴 것은 결국 종말의 왕을 섬긴 것입니다.

 

41-45절은 34-40절과 반대의 상황입니다. 복을 받는 의인들이 긍휼과 동정의 삶을 살았다면 악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영예를 위한 길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는 것이며, 그의 명령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악인들은 의인들이 한 말과 반대로 자신들은 주를 섬겼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지식과 신앙을 삶으로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왼쪽에 있는 자들이 형벌의 장소로 쫓겨나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왕은 악인들이 소자 한 사람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 자신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자는 사회에서 낮은 사람이므로 누구나 무시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0:4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첫째가 되려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18:5)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낮고 작은 자를 존중하고 환대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이 됩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첫째, 최후 심판에서 변론의 기회는 없습니다. 재판장 앞에서 변론해서 무죄를 선언 받거나 죄를 감면받을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없을 것입니다. 재판장 앞에 서는 순간에 그 운명은 이미 결정된 상태입니다. 지상에서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로 운명은 결정됩니다. 지상의 생애를 마친 후에 그 운명이 바뀔 가망은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여기서 임마누엘의 주제를 볼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개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에 제한되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나와 함께하실 뿐 아니라 형제들과도 함께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인생이라고 인정하기 힘들 만큼 곤란한 사람에게도 임마누엘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함부로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셋째, 마태는 네 개의 강화를 모두 심판 장면으로 마치며(7:21-27; 13:37-43, 47-50; 18:23-35), 마지막 강화도 심판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왜 심판 장면으로 모든 강화가 끝나는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인자가 재판장이고 복을 준다는 점에서 본문은 교회에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오른쪽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서 크게 충격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다는 사실은 교회에 긴장감을 일으킵니다.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며(‘주’, ‘섬기다’) 자신들의 입으로 주를 섬겼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들처럼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과 긍휼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최후 심판의 때에 큰 분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게다가 강화는 왼쪽 사람들의 말과 운명으로 끝남으로써 긴장감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모호한 상태로 끝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자들을 돌본 것으로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들을 돌본 자들을 위해 창세부터 나라를 준비하였고, 마귀와 그 사람들을 위해서 영원한 부를 준비하셨습니다. 따라서 심판의 날은 작은 자들을 돌본 자들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이지만, 심판의 날은 작은 자들을 돌보지 않는 자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면 그날에 있을 영생과 영벌의 심판도 믿어야 됩니다. 우리는 그 심판의 날에 어느 쪽에 있습니까? 믿음의 삶에 작고 연약한 지체를 돌봄으로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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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6-01)


주님의 마지막을 준비한 사람들

마태복음 26장 1-16절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할 때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일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었지만, 안팎으로 아무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는 홀로 짊어지고 가야 하는 외로운 길입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도 실낱같은 희망의 전조가 보입니다.

 

  • 마태복음 26장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과 전하신 말씀들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수난을 다시 한번 예고하고 나서(26:1-2),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밉니다(1-16). 이름 없는 한 여자가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반면(6-16) 내부의 유다는 예수님을 팝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1-5)

예수님의 죽음은 제2의 출애굽을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새 이스라엘로 부르고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성취하는 데속적 죽음임을 알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취하신 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죽음으로 나아가길 결심하는 동안,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의논합니다. 하지만, 백성 가운데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명절에 실행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1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월절에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팔릴 것을 말씀하십니다(1-2). 유월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출애굽기 12-13장).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유월절에 계획된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죄에서) 해방을 얻게 될 것을 내포합니다(참조 1:21, 20:28, 26:28).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로 불리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였습니다(3).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해서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4). 결국, 예수님을 체포할 것입니다(47-56). 유대 지도자들은 폭동을 염려해서 명절이 지난 뒤에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습니다(5). 명절은 유월절'을 말합니다. 유월절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군중은 이미 예수님을 환영했기(21:1-17) 때문에 유월절에 예수님을 처리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향유를 부은 여자(6-13)

구제도 아름답고 절약도 권장할 만한 미덕이지만, 예수님을 인정하여 섬기고 경배하는 일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주님의 죽음에 참여하는 ‘거룩한 낭비’보다 더 효과적인 씀씀이는 없습니다. 한 여인은 매우 귀한 향유로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붓습니다. 제자들은 비난하지만, 예수님을 인정하고 섬기고 경배하는 일보다 앞설 순 없습니다.

 

6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6-13)

 

예수님과 제자 일행은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베다니로 가서 나환자 시몬의 집에 머뭅니다. 한 여자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열어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붓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1-19절에서 중심을 차지합니다. 제자들은 여인의 행동을 보고 화를 내면서 왜 값비싼 것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줄 수 있는데도 낭비하는지 꾸짖습니다(8). 제자들은 예수님의 운명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여자가 기름을 붓는 사건이 구원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꿰뚫어 버시고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예수님을 위해 좋은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10). 가난한 자들은 항상 제자들과 함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들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보다 우선시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을 예고하실 뿐 아니라 마땅히 모든 사랑과 희생을 받을 수 있는 신적 존재로 자신의 신분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향유를 부은 것은 장례를 준비한 행위라고 하십니다(12). 유대인들에게 장사를 지내는 것은 가장 큰 덕목이었으며, 가난한 자를 돕는 것과 같은 자선과 장례 또는 매장에 헌신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후자가 유대 문화에서는 더 칭찬을 받는 행위였습니다. 랍비 전통에서 죽은 자를 매장하는 일은 기부나 나그네를 섬기는 것이나 환자를 방문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윤리였습니다. 따라서 여자의 행위는 제자들이 말한 것과 같은 가난한 자를 위한 기부를 능가하는 좋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전해지는(24:14) 곳마다 여자가 행한 것을 기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13).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파송 받는 제자들을 통해 가능해집니다(28:19-20). 여기서 ‘이 복음’(τό ευαγγέλιον τούτο)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자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 곧 죽음을 위한 것이 기에, 이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을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복음의 핵심에 해당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온 것이며(이사야 52:7), 이 나라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없이는 올 수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메시아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우주적 통치를 오게 만든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24:14의 그 나라의 이 복음(τούτο το ευαγγέλιον της βασιλείας)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이 사역의 초점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의 죽으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이 없었다면 하늘나라의 도래는 성취될 수 없었고 아들을 통한 구원(1:23) 역사의 절정도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돌봄과 관심은 끊어지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사역도 예수님의 죽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것과 같은 윤리적인 행위가 객관적으로 옳다고 해서 본문의 여자와 같이 예수님을 위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명의 여자처럼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 행하는 헌신은 좋은 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셋째, 복음은 인격이 없는 기계가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목격자들의 헌신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실현된 복음이 확장될 때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희생하는 인간의 삶이 함께 전해집니다. 복음이 이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행위와 함께 전해지기 때문에 복음은 감동적이며 또 다른 목격자들을 양산합니다. 특히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을 복음을 전달받은 사람들은 잊지 말아야 하며 그런 행위를 진정으로 좋은 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넷째, 본문에 여자의 이름이 없다는 점은 여자의 이름이 아니라 여자의 행위가 복음과 함께 전해질 것임을 의미합니다. 여자는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 한 제자들과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예수님이 전해지고, 복음을 가능하게 만든 예수님의 죽음이 전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만국에 전해지는 것은 복음이며 복음의 핵심은 여자의 행위, 곧 예수님의 죽음이 최고의 가치로 전해집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름이 죽음과 부활에서 절정에 이른 예수님의 생애보다 더 가치 있게 기억되는 것은 진정한 복음 아닙니다.

다섯째, 본 단락의 중심에는 여자의 행위가 나오며 이후 수난과 부활 내러티브에서 여자들은 예수님의 목격자들로서 언제나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에서 여성은 주변부의 목격자가 아니며, 남자의 사역을 돕는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도 아닙니다. 마태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 여성은 예수님의 목격자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데서 소외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파는 유다(14-16)

가장 값진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선택한 여인과 달리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가장 귀한 예수님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민란의 위험을 피하면서 예수님을 제거할 방법을 알려줄 것을 약속함으로써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포기한 계획에 불씨를 살려주었습니다.

 

14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14-16)

 

14-16절은 1-5절과 연결됩니다. 열두 제자 중 한 명(1)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으며(3-5), 그들과 예수님을 놓고 흥정을 벌입니다(14-16). 예수님로부터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듣고(12-13), 예수님의 나라가 자신에게 전혀 이득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음을 향한다는 사실을 감지합니다.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자가 예수님의 운명을 예측한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마태는 7:1-10에서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을 구약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해석할 것입니다. 마태는 은 삼십을 예수님의 몸값으로 받은 사건을 강조함으로써 유다의 탐심을 분명히 부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중한 것을 예수님의 목숨을 위해 드리는 여자와 대조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얻으려고 따르는 자의 전형이며, 이런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버릴 뿐 아니라 버리는 순간에도 이득을 챙기려 합니다. 교회는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유다의 행동과 같은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수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심각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다의 배반과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해서, 그가 잘못된 메시아 사상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가시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은을 취하지 말도록 명령하신 점을 고려하면(10:9),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판 것은 그가 거짓 사도인 것과 이런 열매로 그가 나쁜 나무였음을 입증합니다.


무명의 여인이 보여준 향유 부음 사건은 문학적으로 공권력의 파행과 가룟 유다의 배신 사이에 들어 있습니다. 두 어리석은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 와중에 생명의 누룩이 퍼지고 있습니다. 여인처럼 영적으로 깨달았다면 자기 수준에서 실천하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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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5-03)


최후 심판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25장 31-46절


인간에게 계시된 하나님 정체의 절정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존재 방식과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정체를 드러내며, 그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또한 새롭게 창조될 인간의 정체를 반영합니다. 소자가 되신 인자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고, 그것을 통해 심판이 진행될 것입니다.

 

  • 본문에서는 종말 강화(24-25장)의 결론으로서 인자가 와서 집행할 재판 장면을 강렬한 언어로 묘사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재판을 받고, 의인들은 보상을 받지만 악인들은 형벌에 처해집니다.

 

최후 심판의 장면(31-32a)

예수님의 왕권은 최후의 심판 때, 그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양의 염소를 나누듯, 의인과 악인을 나누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자와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를 나누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의 판단대로 시행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변화될 모습을 가르치십니다.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a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31-32a)

 

인자는 천사들과 함께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천사들의 역할이 본 단락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그들은 사람들을 재판장 앞에 불러 모으고 염소로 지목받는 악인들에게 형벌을 집행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31-32절을 하늘 법정의 장면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민족이 그의 영광의 보좌 앞에 모이는 것은 이 심판이 최종적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 우주적 심판임을 의미합니다(참조, 16:17; 19:28).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인자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재판장 앞에 서게 됩니다. 본 주해에서 반복해서 언급한 대로 ‘보좌 앞’의 ‘앞’은 하늘 회의(‘하늘 궁정’, ‘하나님의 회의’ 등으로 불림) 또는 하늘 법정(하늘 궁정의 기능 중에서 법적 기능을 강조하는 용어)을 묘사하는 전치사입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하나님 앞이나 옆에, 재판받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다니엘 7:10,14; 마태복음 10:32,33; 11:26; 18:14; 참조 5:16; 6:1; 26:70; 27:11).

 

본문은 인자가 재림할 때 일어날 마지막 재판 장면으로 24:29-31의 확장판입니다. 재판을 주재하는 존재는 목자와 왕으로 표현되는데, 그는 인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실 때(성육신) 회복의 나라인 하늘나라(복음)를 가지고 왔으며, 두 번째 오실 때는(파루시아) 역사를 마감하고 최종 평결을 선언할 것입니다. 지상에서 머리 둘 곳 없이 고난을 겪으며, 결국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재림의 모습은 지상의 모습과 전혀 다릅니다. 인생의 운명은 인자에 대한 태도로 결정되며, 인생의 운명을 판결하는 분도 인자입니다. 모든 민족이, 곧 모든 사람이 최후 심판을 받기 위해 인자 앞에 서게 됩니다. 의인들과 악인들 모두 심판대 앞에 섭니다. 이런 점에서 재관은 보편적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32b-46)

예수님께서는 악을 행한 자만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자’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지 않으십니다. 마땅히 사랑할 자만 사랑하는 이방인이나 이웃의 범주를 자의대로 정하여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는 거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자기 백성으로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32b…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32b-46)

 

인자의 최후 심판은 분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1차적으로는 의인들과 악인들을 분리하고, 2차적으로는 각각 복과 벌을 받게 됩니다. 인자가 목자와 왕의 역할을 맡습니다. 인자는 양들을 오른쪽에 세우고 염소들을 왼쪽에 세웁니다.

일반적으로 오른쪽이 선호되는 방향이었기에(예. 20:21) 양들은 오른쪽에 세워집니다. 예를 들어, 유대 묵시 문헌인 아브라함의 유언 12:12에서 보좌의 오른쪽에 있는 천사는 좋은 행위를, 왼쪽에 있는 천사는 죄를 기록합니다. 왼쪽은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인자가 왕으로서 앉아서 재판하는 장면은 다니엘 7장과 시편 110:1의 결합입니다(34).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최후 심판 이후에 영원한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35-36절은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복을 받는 이유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긍휼입니다(5:7).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을 받고 나가오는 아버지의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긍휼의 행위로 입증해야 합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긍휼의 삶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확인받았습니다. 그런데 의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왕이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있었던 것과 그런 왕을 도왔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37-39). 왕은 의인들에게 그들이 ‘내 형제들의 작은 자들(소자들) 중 한 명’에게 행한 것이 곧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차적으로는 ‘내 형제들’(12:48-49; 28:10), ‘작은 자들’(10:42; 18:6,10,14), ‘소자’(25:40)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라는 용어를 제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십니다(12:48-50; 28:10: 참조 요한복음 20:17; 로마서 8:29; 히브리서 2:11-12).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므로 본문의 형제들은 제자들을 가리키며(12:49-50),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들로 부르십니다(28:10; 참조 고린도전서 6:2). 따라서 소자들은 일반적인, 사회적 의미。궁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 메신저들로서 파루시아가 오기까지 온 세상에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1세기나 초기 교회의 상황에서는 더욱 명확한 현실이었습니다. 땅에서 이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이지만, 하늘 법정에서는 높아질 것이며, 하늘나라를 상속하는 보상을 받습니다. 소자를 섬긴 것은 결국 종말의 왕을 섬긴 것입니다.

 

41-45절은 34-40절과 반대의 상황입니다. 복을 받는 의인들이 긍휼과 동정의 삶을 살았다면 악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영예를 위한 길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는 것이며, 그의 명령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악인들은 의인들이 한 말과 반대로 자신들은 주를 섬겼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지식과 신앙을 삶으로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왼쪽에 있는 자들이 형벌의 장소로 쫓겨나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왕은 악인들이 소자 한 사람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 자신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자는 사회에서 낮은 사람이므로 누구나 무시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0:4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첫째가 되려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18:5)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낮고 작은 자를 존중하고 환대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이 됩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첫째, 최후 심판에서 변론의 기회는 없습니다. 재판장 앞에서 변론해서 무죄를 선언 받거나 죄를 감면받을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없을 것입니다. 재판장 앞에 서는 순간에 그 운명은 이미 결정된 상태입니다. 지상에서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로 운명은 결정됩니다. 지상의 생애를 마친 후에 그 운명이 바뀔 가망은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여기서 임마누엘의 주제를 볼 수 있다. 임마누엘의 개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에 제한되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나와 함께하실 뿐 아니라 형제들과도 함께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인생이라고 인정하기 힘들 만큼 곤란한 사람에게도 임마누엘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함부로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셋째, 마태는 네 개의 강화를 모두 심판 장면으로 마치며(7:21-27; 13:37-43, 47-50; 18:23-35), 마지막 강화도 심판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왜 심판 장면으로 모든 강화가 끝나는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인자가 재판장이고 복을 준다는 점에서 본문은 교회에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오른쪽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서 크게 충격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다는 사실은 교회에 긴장감을 일으킵니다.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며(‘주’, ‘섬기다’) 자신들의 입으로 주를 섬겼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들처럼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과 긍휼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최후 심판의 때에 큰 분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게다가 강화는 왼쪽 사람들의 말과 운명으로 끝남으로써 긴장감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모호한 상태로 끝났습니다.


인자 예수님께서는 소자이십니다. 소자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소자로 창조하십니다. 인자의 길은 소자의 길입니다. 사회, 경제적인 소자가 아니라, 정의와 진리의 길을 걸어가다가 기꺼이 이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자초하는 소자가 곧 제자이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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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5-02)


달란트 비유로 가르쳐 주신 예수님

마태복음 25장 14-30절


우리는 돈이 매우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 재능, 교육, 정성, 그리고 힘을 집중하여, 자신의 수익과 투자에 집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인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 가운데 머물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재능, 시간, 열정 그리고 모든 것을 투자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 재림하신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디에 인생을 투자하면서 살았는가를 물으시는 때가 올 것입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말씀으로 세 명의 종들에게 막대한 자본을 맡기고 타국으로 떠난 주인의 이야기입니다. 종들의 재능에 따라 차등해서 주인의 소유가 맡겨집니다. 두 종은 곧바로 가서 장사를 해 원금만큼 이윤을 남깁니다. 세 번째 종은 땅에 고이 묻어둡니다. 주인이 귀환하자 종들과 정산합니다. 원금만큼 이윤을 남긴 처음 두 종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습니다. 한편 세 번째 종은 원금을 그대로 돌려주었지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을 받습니다.

 

종들에게 경영을 맡기는 주인(14-15)

하나님 나라를 알고 경험한 은혜를, 크든 작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여 주의 나라를 섬기는 데 써야 합니다. 선물로 받은 것이니 겨루거나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은 종들의 능력에 맞게 책임을 맡긴 비유를 하십니다.

 

14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14-15)

 

본 비유도 재림을 준비하는 하늘나라 백성이 기준으로 삼아야 할 삶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이 세상에 임해 있는 하늘나라는 재림까지 예수님의 사명(책임)을 맡은 교회를 통해 확장해가는 나라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누가복음 19:12-13에는 ‘귀인’으로 표현됨)은 예수님을 가리키며 종들은 제자들을 가리킵니다(20:26-27).

그는 먼 길을 떠나면서 소유를 종들에게 맡깁니다. 주인이 자신의 종들에게 사명을 맡기는 장면은 24:45과 비슷합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 ‘현명함’과 ‘신실함’을 좋은 종의 태도로 제시했으며, 열 처녀 비유(25:1-13)가 재림을 준비하는 것의 초점을 ‘현명함’에 맞췄다면 달란트 비유는 ‘신실함’을 강조합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임무와 책임을 맡기고 먼 길을 떠났다가 돌아와서 결산한다는 점에서 첫 번째 비유와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첫 번째 비유가 집안일을 묘사하는 반면에 본 비유는 외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배경으로 합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주인이 예상보다 일찍 왔지만, 세 번째 비유에서는 주인의 관점에서 보면 긴 시간, 충분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실제보다 쉽게 생각했지만, 달란트 비유에서 악한 종은 실제보다 더 힘들게 생각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을 구분해서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어 사업을 할 수 있게 합니다. 본문의 달란트는 하늘나라를 섬기도록 주어진 ‘책임성’, ‘기회’에 가깝습니다. 종들은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들이 아니라 사업에 능한 전문가들입니다. 주인은 돈을 허비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윤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본 비유가 알레고리라는 점을 감안할 때, 주인이 달란트를 맡긴 것은 성도들이 받은 책임이나 기회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주인은 세 사람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나눠줍니다.

 

능력에 따라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백성이 맡는 책임이나 기회는 능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늘나라를 위해 일을 하더라도 역량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기에,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이나 기회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적은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큰 책임을 맡기는 것은 무자비 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책임성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자기 백성을 차별해서 평가하지 않으십니다(21,23), 신자들은 책임이나 기회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그 자체로 좌절하거나 오만하게 굴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차이는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없으며, 차별 의식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평가는 받은 책임이나 기회를 신실하게 사용했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자랑의 조건이 결코 되지 못합니다.

 

임무를 수행하는 종들(16-18)

하나님께서 판단하는 기준은 충성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였고,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하였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장사든 뭐든지 상관없습니다. 얼마나 남겼는지도 상관없습니다. 더 많이 남겼다고 더 많이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얼마를 남겼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성실했는지로 평가했습니다.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16-18)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즉시 사업을 하러 나가서 자산을 배로 불렸습니다. ‘즉시’는 청지기의 태도를 강조합니다(16). 즉시 사업을 하러 나가는 첫 번째 종의 태도는 주인이 맡긴 임무를 진실하게, 수행하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같이’ 즉 같은 방식으로 두 달란트의 재산을 배로 늘렸습니다(17). 두 번째 종도 즉시 장사하러 갔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모두 같은 비율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 돈을 전혀 활용하지 않고 땅을 파서 숨겼습니다(18). 달란트가 ‘돈’(문자적으로는 ‘은’)으로 표현된 것으로 볼 때, 달란트가 동전의 형태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맡긴 돈을 그대로 돌려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라 소득을 남기라고 지시했으므로 세 번째 종은 주인의 뜻을 어겼습니다. 세 번째 종이 달란트를 땅에 묻은 이유는 주인이 회계하는 장면에서 설명됩니다.

 

‘즉시’ 일하러 나간 두 종은 그만큼 하늘나라의 일에 대한 책임감이 컸습니다. 그러나 책임감이 전혀 없는 사람, 즉 하늘나라의 사업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은 종말의 나라에서 제외됩니다. 제자도는 실패의 위험이 있더라도 부여받은 기회를 사용하는 것입니다(참조 10:39; 16:25-26).

 

주인의 회계(19-30)

심판의 기준은 불충이고 무지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심판은 그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냉정하고 비정한 주인으로 잘못 안 데서 기인합니다. 그러니 이미 받은 은혜를 은혜인 줄 모를 것이고, 자신의 삶 전체를 책임져주시는 주인을 신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19-30)

 

주인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왔습니다. 오랜 시간은 주인이 충분한 시간, 충분한 기회를 종들에게 주고 나서 결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인은 자신의 것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사람이기에 결산을 시작합니다. 결산하는 장면에서(20-23) 첫 번째 종은 다섯 달란트를 가져와 재산을 배로 늘렸다고 보고합니다(20). 주인은 그 종에게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고 칭찬하면서 많은 것을 종에게 맡깁니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보상을 내립니다. 주인이 종에게 작은 것에 신실했다고 말하지만, 종이 받은 다섯 달란트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주인이 약속한 ‘네 주인의 기쁨’은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두 달란트를 받은 두 번째 종이 와서 주인에게 두 달란트를 더 남겼다고 보고합니다(22). 주인의 칭찬과 보상은 첫 번째 종에게 한 것과 같습니다(23).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주인을 엄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종은 주인이 엄하므로 사업에서 실패했을 때 받게 될 평가가 두려워서 아무런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핑계합니다. 종은 주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득을 착취하는 사람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주인을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않았고, 주인에 대해서 상당한 불만을 가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사명을 평가하는 기준은 신실함입니다. 모든 신자가 똑같은 능력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늘나라의 일을 수행하는 기회나 책임이 동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책임의 크기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각자가 맡은 일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선한 청지기로서 재림을 준비할 것을 원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성품(또는 예수님을 통해 반영된 하나님의 성품)은 세 번째 종의 말과 달리 엄하지도 않고, 성도들의 수고를 착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20년 치,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는 각각 100년 치 임금과, 40년 치 임금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입니다. 주의 제자들이 하나님께 받은 기회와 책임은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인은 이렇게 큰 책임을 맡기고도 최소한의 성과를 낸 행위에 대해서 ‘작은 것’에 신실했다고 칭찬합니다. 재림을 준비하는 기간은 은혜와 감사의 기회이지 무서움과 착취의 기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품을 오해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사업에 관심이 없으며,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사명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주인이 오랜 후에 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완수할 충분한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위해 유용한 일을 했는지 물으실 때, 기회가 너무 적었거나 활동할 기간이 너무 짧았다고 변명할 수 없을 만큼 충분한 시간입니다. 신실함은 아무리 짧은 기간, 아무리 적은 기회가 주어지는 상황에서도 반드시 입증됩니다.

 

마지막으로, 재림 전까지 교회는 착한 종들과 악한 종들이 섞여 있으며, 나쁜 제자는 재림에 대한 긴장감이 없을 뿐 아니라 주인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따라서, 달란트 비유는 재림 때에는 선한 제자와 나쁜 제자가 분리될 것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와 기회를 낭비하지 말고 충실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바로 가서 장사해서 두 배나 되는 이윤을 남겼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과감하게 생명을 걸고 모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 최선을 다해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꼐서 보시기에 착하고 충성된 종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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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5-01)


신랑을 기다린 처녀들의 비유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5장 1-13절


우리나라의 속담에 ‘우물에서 숭늉 찾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미가 급할 때 표현하는 속담입니다. 속도는 편리함을 주지만, 대부분의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정 시간을 기다려야 됩니다.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도 곧바로 나오지 않고 기다려야 합니다. 결혼한 것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 본문에서는 혼인식에 신랑을 맞는 열 처녀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신랑은 밤중에 오지만 정확히 언제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열 처녀들은 무작정 기다려야 하지만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준비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이 기름이 떨어져 사러 갔을 때, 신랑이 옵니다. 그들은 신랑을 맞지 못하고 슬기로운 다섯이 맞아 잔치에 들어갑니다. 나중에 미련한 다섯이 문 밖에서 외쳐보지만, 잔치에 입장이 거부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과 현명한 처녀들(1-5)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사람들입니다. 혼인 잔치의 들러리들이 신랑을 맞이하듯, 천국 백성은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맞이하는 처녀들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1-5)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오실 날과 시간을 물었습니다. 그 말에 예수님께서 놀랍게도 ‘자신도 모른다’고 대답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모른 것이 당연하며, 그때와 시기를 알려고 하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날을 깨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온 ‘처녀’는 오늘날 ‘들러리’와 같은 개념입니다. ‘들러리’들은 신랑(과 신부)이 밤에 오는 것을 알지만, 정확하게 언제 도착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늦게 올 것을 대비해서 여분의 기름이 필요했습니다. 신랑이 늦게 옴으로써 다섯 처녀의 현명함과 다섯 처녀의 어리석음이 드러납니다.

‘지혜로운’은 ‘신중한’, ‘생각이 있는’, ‘분별력이 있는’ 등의 뜻입니다. 어리석고 현명하다는 표현은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올바르고 현명한 판단이나 결정과 관련됩니다. ‘어리석음’과 ‘현명함’을 대조하는 것은 유대 지혜 전통에서는 흔히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이미 7:24-27과 바로 앞의 장면인 24:45-51에 나왔습니다. 특히 7:24-27은 ‘주여 주여’(25:11)라는 표현에서도 본 비유와 비슷합니다. 이 점에서 '현명함'은 종말을 준비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심판의 기준입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등불을 위한 기름을 추가적으로 준비하지 않았고, 현명한 자들은 준비했습니다. 지혜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차이는 신랑이 늦게 올 수 있음을 대비하는가에 있습니다. 비유는 이들이 졸거나 자는 것을 문제 삼지 않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본 비유에서도 어떤 행위가 준비인지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문학적 구조에서 ‘긍휼’을 주제로 삼는 25:31-46이 연속되는 세 비유의 결론인 점을 고려하면, 긍휼을 베푸는 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행위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열 처녀는 모두 신랑이 늦게 오므로 졸다가 잠들어버립니다(5). 모든 처녀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곯아떨어진 모습은 신랑이 도착할 시간이 예상보다 늦어졌음을 반영합니다. 당시에 신랑이 신부 부모의 집에서 늦게 오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현명한 들러리라면 이 정도를 예상했을 것입니다. ‘현명함’이란 신랑이 곧 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가 아니라 신랑이 늦을 수도 있음을 알고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하는 태도입니다.

 

본 비유의 핵심 개념은 ‘지연’, 또는 ‘늦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예상보다) 늦다는 사실 앞에서 현명한 그리스도인과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이 구분될 것입니다.

 

신랑의 도착(6-9)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 위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언제든지 도착하면 안내할 채비를 한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사는 이들에게 재림은 갑작스런 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준비 없이 땅의 일에 취해 사는 일들에는 재앙의 날이 될 것입니다.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6-9)

 

한밤중에 신랑이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제 처녀들을 깨워서 신랑과 신부를 환영하고 인도하는 일을 시작하게 하라는 소리입니다. 모든 처녀들은 일어나 각자의 등불을 점검합니다. 횃불 막대기에 헝겊이 제대로 감겼는지 점검하고, 불이 잘 붙도록 여분의 기름을 묻혀야 합니다. 등불을 점검하는 것은 결국 기름이 충분히 준비됐는지를 살피는 게 핵심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지혜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 달라고 부탁합니다(8). 당시에 기름을 바른 횃불은 15분 정도만 타올랐기에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모두들 신랑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리석은 들러리들은 신랑이 자신들이 예상한 시간보다 늦게 올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문제는 신랑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예상한 시간에 올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만큼만 기름을 준비한 데 있습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어리석은 처녀들의 부탁을 거절합니다(9). 기름은 나눌 만큼의 양이 아니니 필요한 만큼 가서 구입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현명한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지 않은 행위를 비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 비유는 알레고리입니다. 깨어 준비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잘 전달하고 있으며, 지혜로운 여자들이 기름을 빌려주지 않는 것을 이기적인 태도로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기름을 나누면 신랑의 집까지 등불을 켜서 인도할 수 없게 됩니다. 현명한 들러리들의 관심은 자신이나 동료의 처지가 아니라 신랑을 혼인 잔치와 신방으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라도 준비한 기름으로 신랑을 인도하는 임무를 잘 완수하고 싶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믿음이나 지혜는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림을 위한 준비는 자기 몫이지 남의 것을 빌려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 잔치(10-12)

재림을 준비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누구나 각자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여 개인의 성숙을 도와야 하지만, 교회의 명성이나 가족의 믿음, 혹은 한때의 신앙경력 등이 그날 주님을 영접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10-12)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은 혼인 잔치에 참여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이 돌아오기 전에 신랑이 왔고 혼인 잔치의 문은 닫혔습니다(10). 준비한 자들이 ‘그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다는 표현은 준비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지고의 복을 의미합니다. 신랑과 함께하는 복은 다름 아닌 ‘임마누엘’입니다(1:23, 28:20).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열 처녀의 최종 목적지는 신랑을 맞이하는 곳이 아니라 혼인 잔치였다는 사실입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장소까지 열 명이 함께 있었으나, 모두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참 제자와 거짓 제자가 섞인 교회(참조 13:36-43,47-50; 18:6-14; 22:11-14, 24:9-14)는 모두 인자의 오심을 목격하지만, 모두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이 닫힌 후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주여’를 두 번 외치며 신랑과의 친밀성을 강조하지만 참석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요약과 결론: 깨어 있으라(13)

‘깨어 있으라!’는 것은 그날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말고 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서 주인의 길을 밝히지 못한 어둠은 주인을 사랑하지도, 주인께 순종하지도 않는 삶이며, 자기 기대와 에측을 따라 주인이 움직이길 바라는 불법의 삶일 뿐입니다.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십니다. 경고를 받는 교회는 참 제자(신자)와 거짓 제자(신자)가 혼합된 상태로 존재합니다.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그 날’과 ‘그 시각’, 즉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4:36, 37-44).

본 비유가 풍유(알레고리)라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열 처녀 비유의 핵심 메시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비유의 결론인 1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준비가 비유의 핵심입니다. 신앙을 준비하는 목적은 인자의 오심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인자와 함께 혼인 잔치에서 최고의 복에 참여하는 데 있습니다. 신랑이 오는 것을 본다고 해서 모두 혼인 잔치까지 가는 것이 아닙니다. 겉보기에는 열 처녀 모두 자고 있었으므로 이들 중에서 누가 진정으로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교회는 참 제자와 거짓 제자가 섞인 공동체로서 재림 때까지는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다가 잔치에 참여하는 여부로 그들이 준비된 사람들인지 아닌지 드러날 것입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상의 빛으로 부름 받은 교회(5:16)의 밝음은 착한 행위로 가능해지며, 25:31-46에 묘사된 최후 심판의 장면은 ‘긍휼’(또는 사랑)이 종말을 살아가는 성자의 기름에 해당함을 암시합니다. 둘째, 재림까지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참 제자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판명 납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 악한 종이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고 판단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면,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이 예상한 시각보다 늦게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빠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어리석은 들러리들은 마치 일정 기간의 신앙 행위(준비)를 한 것에 만족하면서 더 이상 준비하지 않는 명목적, 신자들과 같습니다. 이들의 운명은 얕은 흙 위에 떨어진 씨의 결과와 같지만(13:5-6, 20-21), 현명한 처녀들은 인내로 결실하는 좋은 밭의 모습과 같습니다(13:23). 올바른 신자는 시간을 예상하기보다 주께서 언제 오시든 오늘 주의 뜻을 실행합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예수님께서 빨리 오실 것이라거나 늦게 오실 것이라고 경솔하게 짐작하지 말고 인내로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오랜 기다림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신랑이 늦게 오자 처녀들은 슬기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다 잠들었습니다. 하지만 두 종류의 사람들의 차이는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느냐 하지 못했느냐였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 삶이란 끊임없는 긴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주님께서 오시든지 그분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예복을 갖추고 준비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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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4-03)


마지막을 준비하고 권고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4장 36-51절


세상 물건 중에 일회용품이나 싼 제품들은 쉽게 망가집니다. 하지만 값비싼 명품은 오랫동안 사용해도 변하지 않고 원형을 잘 유지합니다. 그렇게 좋은 명품이라도 영원하진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헐리고 망가집니다. 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이며, 이것을 증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고 영원합니다.

 

  • 본문은 재림의 시기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정확한 날과 때는 하나님을 제외한 모두의 무지 속에 숨겨집니다. 그것은 기다리는 자에게 모호함과 의심이 아닌 성실한 준비를 요구합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그 때는 부지불식간에 성큼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노아의 때가 교훈하듯 준비는 고사하고 무관심과 방종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재림의 시기(36-41)

아무도 모르는 일을 알아내려는 것은 매우 무모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즉 세상 끝나는 시기는 하나님만 아시고 아무도 모르며,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모르십니다. 하물며 우리가 그때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더욱 무의미한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제자들의 자세를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36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36-44)

 

앞에 예수님께서 임박한 재림을 강조하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번에는 재림의 시기는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임하실 것이기 때문에 항상 때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는 마치 노아의 때와 같습니다.

 

(1) 그 때를 알지 못함(36)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마지막이 언제 일지는 ‘그 날과 시간에 대해’ 성부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날과 시간’은 인자가 오는 때를 말합니다. ‘그 날과 시간’, 곧 역사의 끝에 예수님께서는 천사들과 함께 오시는데, 천사들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그 때를 알지 못합니다.

본문은 성자의 자발적인 낮추심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들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그 때를 모르기 때문에, 성부 외에는 어떤 누구도, 천사들이라 할지라도 알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돌로 빵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신 것처럼, 자신은 능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교회가 종말에 대한 무분별한 자식을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도록 의도하십니다. 재림의 시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스스로 제한하신 겸손은 교회로 하여금 그 시기에 대한 사람들의 오만과 거짓에 미혹되지 않도록 합니다.

 

(2) 그 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운명(37-41)

 

본문은 인자가 오실 때 세상에 일어날 모습을 설명합니다. 노아 시대 실제로 일어난 일(37-39)은 심판이 임했을 때, 한 가족 또는 동료 가운데서도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설명합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결혼하는 일상의 일에 매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홍수가 쓸어버리는 순간까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특별한 전조를 전달하고 나서 오는 사건이 아니기에, 그때도 세상의 분위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사람들이 홍수를 경험했던 것처럼 공개적인 사건이 될 것이지만(27), 일상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일어날 것입니다.

40-41절은 심판의 때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임하고, 그 결과로 운명이 갈라진다는 점을 다른 예로 설명합니다. 함께 일하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심판의 때를 알지 못할 운명이 달라집니다. 밭에서 함께 일하는 ‘둘’은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일 수 있습니다(41). 함께 맷돌을 돌리는 두 여자는 어머니와 딸, 자매일 것입니다(42). 심판의 날이 이르면 한 사람은 데려감을 겪고 다른 한 사람은 남겨지게 됩니다.

 

(3) 그 때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태도(42-44)

 

앞에서 심판의 날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의 운명을 언급하신 에수님께서는 42-44절에서 재림의 시기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 또는 교회가 취해야 할 삶의 태도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크게 ‘깨어 있으라’와 ‘준비하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 명령을 지원하기 위해 도둑에 대한 비유가 들어가 있습니다.

42-44절의 구조를 보면, 주께서 오시는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깨어 있음과 준비는 도둑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집주인이 깨어 있다는 것과 도둑의 침입을 준비(대비)할 것이라는 당연한, 즉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논리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깨어 있는 것’과 ‘준비하는 것’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제자는 신실한 청지기로서 재림의 시기를 추측하는 데 집중하거나 그 시간을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신실하고 현명한 종과 악한 종의 비유(45-51)

도둑이 올 때를 미리 알 수 없습니다. 그때를 예측하는 것이 무모하듯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시간도 알 수 없습니다. 도둑을 맞닥뜨리는 방법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재림하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명한 종이라면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맡겨준 일에 대해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45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45-51)

 

이 비유는 45절의 질문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주인의 적합한 때에 음식을 제공하도록 집에 있는 종들을 맡겨 놓은 신실하고 현명한 종은 누구입니까?’ 주인이 와서 베푸는 보상을 받게(46-47) 될 종은 주인이 올 때 변함없이 행하고 있기 때문에 ‘신실하며’ 적합한 때에 양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현명합니다.’

주인의 집, 곧 하나님의 집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교회의 지도자가 일반적으로 가장 큰 책임을 맡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도자들에게만 본 비유를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연속되는 세 가지 비유에서 ‘준비를 하라’는 가르침은 지도자들보다는 교회를 향하고 있습니다. 종은 성도들(참조 롬 1:1; 갈 1:10), 집의 동료 종들로서, 신실하고 현명한 사람들은 동료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음식을 나눠주는 장면은 시편 104:27과 145:15과 비슷한데, 이 시편들에서 적합한 때에 음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인 반면, 비유의 주인은 종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겠습니다. 종이 적합한 때에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성도로서 동료를 위해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그렇게 행하는 것을 주인이 본 종은 복됩니다.

 

악한 종은 주인이 오려면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의 동료 종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지냈습니다(49). 여기서 원어 ‘크로니조’는 ‘시간이 걸리다’의 의미뿐만 아니라 ‘오지 않는다’의 뜻도 포함합니다. 종은 주인이 지금까지 오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도 오지 않을 줄로 오판했을 수 있습니다. 한편, 종은 주인이 맡긴 일을 책임졌으므로 공동체의 내부자입니다.

주인은 악한 종이 예상하지 않은 날과 종이 알지 못하는 기간에, 즉 종이 예상한 때보다 더 일찍 왔습니다(50). 주인의 심판은 종을 산산조각 내는 것입니다(51). 그런데 악한 종은 위선자로 불립니다(참조 눅 12:46). 마테복음에서 사용된 위선을 범주화해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속과 다르게 겉모습을 보이는 것(6:2,5,16; 7:5; 22:18; 23:25,27),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착각하고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서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자기기만(23:13), 가르치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태도(23:23,29)가 됩니다.

51절의 위선은 셋째에 해당합니다. 23장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행위를 재판하고 율법에 따라 순종할 것을 가르치고 설교했지만, 자신들은 실행하지 않았던 것처럼, 주인의 뜻을 알고도 실행하지 않은 악한 종은 유대 지도자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위선자들이 던져지는 곳은 바깥 어두운 곳, 지옥이며, 종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51b; 8:12; 13:42,50; 15:30; 22:13).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곳(마 8:12; 13:42,50; 22:13; 24:51; 25:30)은 최후 심판에서 벌어질 예상 밖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바깥 어두운 곳’(마 8:12; 22:13; 25:30)이 붙은 세 본문은 모두 하늘나라의 잔치가 벌어지는 ‘밝은’, ‘안쪽’의 이미지와 대조되는 어두운 지옥(게헨나)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에 속한 것으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연속되는 세 비유 중에서 첫 번째 비유(45-51)의 내용과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을 대신해서 동료 종들과 집을 책임 맡은 종들이 책임을 수행해야 하는 시기는 주인의 부재 기간으로, 이 기간은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이후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들이 청지기 역할을 하도록 의도하셨고(창 1:26-28), 이 기간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회복된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최후 심판에서 보상하고 벌하시는 기준은 청지기적 삶입니다. 형제와 자매를 향한 긍휼이 청지기적 삶의 핵심입니다(25:31-46). 청지기적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최종적인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재림이 없다면 이런 행위를 일삼는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하지 못함과 어리석음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기에, ‘지연’은 거짓 신앙인들의 삶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책임을 연기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최후 심판의 때가 예상보다 빨리 이르러 회개할 기회를 박탈당합니다. 회개할 시간이 없을 뿐 아니라 회개할 마음도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재림이 있기 때문에 가짜 믿음과 참 믿음이 드러납니다.


항상 인자의 오심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도둑이 예고 없이 들어닥치는 것처럼, 주님도 생각하지 않을 때에 오실 것입니다. 따라서 때를 알려고 하기보다 날마다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가 마치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인 것처럼 여기며 거룩하고 치열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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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30-01)


말씀을 통해 주는 지혜

잠언 30장 1-17절


‘야베스의 기도’가 빗나간 기복주의 영성을 조장하며 한국교회 안에서 신드롭을 일으킬 때 열광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낯설고 또 잊힌, 그래서 늘 아쉽고 아타깝게 여겼던 기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굴의 기도’입니다. 잠언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이 기도는 잠언의 정수인 지혜의 백미를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에 이어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는 기도,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욕망을 경계하라는 교훈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 30장 전체가 아굴의 잠언인데, 오늘은 전반부와 중반부를 묵상합니다. 2-9절이 전반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인정할 때 참된 진리의 길로 갈 수 있고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10-17절은 전반부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순종과 만족에 대한 여러 가르침을 베푸는데, 우리의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일들을 강한 비유적 언어로 표현해냅니다.

 

표제(1)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넘어 계신 분입니다. 자신의 무지를 짐승에 비유하는 것은 단순히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음을 깨달은 자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1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1)

 

1절은 30장 전체의 표제입니다. 아굴이 전해준 말씀이며, 이 말씀은 또한 히브리어 ‘마싸’로 표현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아굴이 누구인지, 야게, 이디엘, 우갈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방 사람들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혜를 위한 말씀의 중요성(2-9)

부와 가난 모두 그 자체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지혜는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앞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아굴처럼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2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3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4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5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6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7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2-9)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넘어 계신 분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짐승에 비유하는 것은 단순히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음을 깨달은 자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1) 지혜를 갖지 못한 한계(2-4)

 

2절부터 아굴은 매우 논리적이고도 화려한 어법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갑니다. 2절에서 자신이 지혜를 소유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어떤 다른 사람보다도 어리석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3절에서는 자신이 지혜를 배우지 못했고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지혜’와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란 잠언 9:10에서 병행되어 나타난 잠언의 대표적인 어휘 쌍으로, 지혜를 강조하여 서술하는 표현 양식입니다. 즉, 아굴은 자신이 잠언 1-29장에서 설명해온 잠언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굴이 지혜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는 지혜자로서 지금 잠언 30장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2-3절에서 아굴의 표현은 강조를 위한 문예적 서술로서, 사람이 지혜를 갖는 것이 사실상 너무나 어렵다는 점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이런 해석의 명확한 근거를 확보하게 됩니다. 4절은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땅의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4절이 가리키는 존재는 창조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2-4절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지혜를 가지신 분이라는 점을 독특한 논리적 구조를 통해 강조하여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말씀의 중요성(5-6)

 

5-6절은 말씀의 중요성을 서술합니다. 5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여, 하나님께 피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어주심을 말합니다. 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훈은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더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주어집니다. 말씀을 그대로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책망을 당하게 되고, 결국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에 거짓말하는 자로 판명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만이 지혜를 가지셨음을 강조한 2-4절에 이어, 5-6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울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여호와 경외의 중요성(7-9)

 

7-9절은 참 지혜를 소유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의지하게 될 때 얻게 되는 지혜의 삶을 보여줍니다. 아굴은 죽기 전에 두 가지 일을 하나님께 구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5-6절에 의하면 거짓말을 멀리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붙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첫째 소원은 말씀 중심의 삶을 살 때 이룰 수 있습니다. 아굴의 둘째 간구는 조금 더 깊은 의미로 나아갑니다.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시고 오직 내게 정하신 분량의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이런 간구의 핵심은 ‘만족’이 ‘나의 만족한 상태’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부터 비롯됨을 깨닫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족하여 하나님을 모른다 하거나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사는 어느 정도의 ‘분량’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원리에서 벗어나서 만족과 불만족이 핵심이 된다면, 그 어느 경우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굴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때 참 만족이 있음을 아름다운 문예적 표현을 통해서 힘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혜로 인한 만족(10-16)

사람은 왜 잘 안 변합니까? 타고 난 성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성장 과정에서의 각인된 경험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오늘을 바라보고, 또한 내일을 예상합니다. 결국 ‘과거’로 인해 오늘의 나는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정반대입니다. ’과거’가 아닌, 반드시 일어나리라 확신하는 ‘미래’를 토대로 오늘을 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삶은 분명 변화를 동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10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11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2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3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14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15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6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10-16)

 

겸손을 배우면 교만이 보이고, 자족을 배우면 탐욕이 보입니다. 남을 비방하면 결국 그 비방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짐승에 비유하는 겸손한 이가 있는가 하면(2), 눈꺼풀이 내려올 줄 모르는 교만한 이가 있습니다.

 

(1) 상전과 종(10)

 

10절은 상전과 종의 관계에 대해서 다룹니다. 종을 그 상전 앞에서 비방하면 종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2-9절에서 신앙적인 원리를 다루었다면, 10절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10절은 주변 문맥과 잘 연결되지 않는 주제를 홀로 다루고 있는 한 절로 구성된 개별잠언입니다.

 

(2) 지혜 없는 무리의 실례(11-14)

 

11-14절은 지혜 없이 행하는 네 종류의 무리에 대해서 서술합니다.

11절은 부모를 저주하며 축복하지 않는 무리를 언급합니다. 마땅히 공경을 표해야 할 권위의 대상을 인정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동체의 원리를 해치는 무리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언 전체의 맥락에서, 특별히 잠언 1~9장에서 잠언의 독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푼 주인공인데, 그 주인공을 무시한다는 것은 지혜의 가르침을 저버린다는 의미가 됩니다.

12절은 스스로 깨끗하게 여기지만 사실은 씻지 않아서 매우 더러운 상태에 있는 무리입니다. 잠언의 거시적인 맥락에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미련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절은 눈이 높아진 교만한 무리를 언급합니다. 잠언의 거시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거만한 자’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교훈을 받지 않으려 하며 지혜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자들입니다.

14절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핍박하는 지도자의 무리입니다. 잠언 10-29장에서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악인들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들이 이미 주어진 바 있습니다. 11-14절은 잠언 1-9장에 나온 중요한 가르침들을 위반하고 거절하는 무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들이 되지 않도록, 지혜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 되도록,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3) 만족을 모르는 경우들(15-16)

 

15-16절은 만족함을 모르는 여러 존재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5절 상반절에는 만족함을 알지 못해 계속 달라고 외치는 거머리의 두 딸들이 등장합니다. 15절 하반절부터 16절까지에서는 족함을 알지 못하는 서너 가지가 등장합니다. 사실상 네 가지를 말하는데, 첫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고 마지막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됩니다.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는 죽음과 생명의 이미지를 표현합니다. 스올은 죽음의 장소이고, 아이 배지 못하는 태는 생명이 없는 곳입니다. 물로 만족하지 못하는 땅과 만족을 모르는 불은 서로가 서로를 상쇄하는 관계입니다. 15-16절의 죽음과 생명 없음 그리고 자연물은 참된 만족을 찾지 못함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참된 만족은 피조물로부터 나오지 않으며, 7-9절이 이미 알려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원리로 붙잡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녀(17)

아무리 악이 편만해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자들이 젊은이들에게 엄격한 도덕률을 제시하고 경험하게 하는 목적은 그들이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현실을 볼 때 마음에 불편함과 거부감이 생기게 끔하려는 것입니다.

 

17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17)

 

17절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순종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잠언 전체의 거시적인 맥락에서 보면,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지혜를 소유하지 못한 자는 패망의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삶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는 깨지고 이 시대의 불의와 인생의 무상함은 더욱 분명해지곤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당연시 여기진 말아야 합니다. 죄에 젖어 죄를 생산하며 살기보다 죄가 가져다준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세상의 혼돈을 단번에 바로잡지 않고 그냥 두시는 여백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지혜와 믿음으로 절망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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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9-01)

 

 


재물을 사용하는 지혜

잠언 19장 1-14절


 

성경은 '부의 위험성을 지적하지만 부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결핍이나 빈곤 등을 해결해야할 일로 말하며 풍성함을 복이라고 말해줍니다. 심지어 생명력이 고갈되어 온전하지 못한 상태를 죽음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말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재물에 대한 공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 가치를 긍정할뿐 아니라 돈이 갖고 있는 막강한 파괴력도 잘 인지하여 우리 시대에 돈이 갖는 전능성과 거룩성을 과감하게폭로하고 해체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몫입니다.

 

 

  • 본문의 중심내용은 재물입니다. 잠언이 가르치는 지혜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1-9절을 통해 집중적으로 조명합니다. 재물은 중요하나, 그 재물을 사용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현실의 재물 문제를 헤쳐나가야 합니다. 10-14절은 공동체 안에서 분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여러 가지 경우를 들어 설명합니다.

 

재물에 대한 가르침 1(1-5)

많은 돈을 버는 것보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것이 더 큰 미덕입니다. 불의한 재물을 모으려고 혀를 잘못 사용하거나 재물에 대한 소원만 있지 참된 지식이 없이 서두르기만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 뜻대로 돈이 벌리지 않으면 사람도 하나님도 원망합니다.

 

1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2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3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4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5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1-5)

 

어리석은 마음은 재물을 따라 움직이고, 재판에서도 침과 구너력 앞에서 진실을 덮고 거짓을 말하게 합니다. 잘못을 용서하고, 과오를 인정하며,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지혜를 얻는 길입니다.

 

(1) 재물에 대한 가르침(1-4)

 

1절은 재물에 대한 주제를 비교잠언(‘~보다 ~이 낫다’는 형태로 이루어진 잠언)의 형식으로 설명합니다.

가난해도 성실한 것이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가 어떤 자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가난해도 성실한 자와 비교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패역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는 자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불의의 재물을 누리는 것보다 정직한 가난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1절은 이어서 9절까지 이어지는 재물에 대한 논의를 열어주는 서론입니다.

잠언 19:1-9은 불의의 재물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2절은 지식이 없는 욕심은 선하지 못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지식은 물론 지혜의 유사어휘입니다. 즉, 지혜롭지 못하게 욕심을 내면 잘못된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3절은 사람이 자기 미련함 때문에 실수하고서는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2-3절이 무엇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바로 1절에서 나온 패역하고 미련한 자의 결국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의의 재물을 모으려고 할 때, 잠시는 잘될지 모르지만 결국은 잘못된 길로 가서 악한 결과를 맞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4절은 재물이 많으면 친구가 많고 재물이 적으면 친구가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진술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현실을 말할,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2) 거짓 증거에 대한 경고(5)

 

1-4절에 이어서 5절은 갑작스럽게 거짓 증거 및 거짓말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거짓 증거는 물론 재물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 증거와 거짓말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불의의 행동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거시적인 관점에서 재물과 어느 정도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즉 5절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다가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4절의 가르침과 연결될 수 있겠고, 특히 4절에서 재물이 많아야 친구가 많다는 현실 인식을 신앙적 관점으로 재조명하여, 재물을 위해 불의한 행동을 하지 말 것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가르침 2(6-9)

지혜자는 재물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따라서 그것으로 자기 배를 불리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며 돈을 쌓는 것 자체를 기쁨으로 삼지 않습니다. 타인의 필요를 채우는 데 쓰기 때문에 지혜로운 부자 곁에는 친구가 많고, 그에게 너그러움과 은혜를 구하는 자들이 더 많이 생깁니다.

 

6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7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8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9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6-9)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증인과 거짓말을 퍼뜨리는 자를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눈앞에 놓인 작은 이익 때문에 거짓으로 형제와 이웃을 어려움에 빠지게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1) 재물에 대한 가르침(6-8)

 

6절부터는 다시금 재물에 대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6절에서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은 선물에 대한 가르침인데, 선물을 주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친구가 많다는 현실을 제시합니다. 7절은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라고 역시 유사한 메시지를 전하는데, 재물이 없는 자는 형제에게 미움을 받게 될 뿐 아니라 친구까지 없어진다는 점을 말합니다.

6-7절은 동일하게 재물이 꼭 필요한 우리 삶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물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도 괜찮습니까? 8절에서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은 지혜와 명철의 중요성을 언급하는데, 지혜를 얻은 자야말로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자이고, 명철을 지키는 자가 바로 선을 발견한 자임을 강조합니다. 잠언 전체에서 지혜와 명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적 관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8절은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여호와 경외를 가장 기본적인 삶의 해석법으로 삼아야 함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8절은 6-7절에서 말한 재물의 중요성에 대해서 신앙적인 관점에서 제한을 걸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재물은 꼭 필요하지만, 재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입니다. 신앙적으로 옳고 합당한 선 안에서 재물은 의미가 있습니다.

 

(2) 거짓 증거에 대한 경고(9)

 

9절은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라는 사실상 5절과 거의 동일합니다. 거짓 증인이 되는 자와 거짓말을 하는 자는 결국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9절은 6-8절의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이는 5절이 1-4절의 연장선상에 있음과 같습니다. 5절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는 피하지 못한다고 조금 소극적으로 표현했으나, 9절은 거짓말하는 자는 망할 것이라고 더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재물이 중요하나, 불의한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면 망하게 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분노에 대한 가르침(10-14)

분노는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며 타인을 모두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간주할 때 나옵니다. 거룩한 분노도 있겠지만, 이기적인 분노는 오만함에서 나옵니다.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어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자기 기준에 따라 움직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11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12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 13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14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10-14)

 

10-14절은 ‘분노’라는 새로운 주제를 다룹니다. 다만 10절은 분노를 직접 다루지는 않고, 종이 방백을 다스리는 것이 합당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종이 방백을 다스리는 것과 비교되는 사항이 있는데, 바로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입니다.

‘사치’란 1-9절에 나온 재물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즉 10절에서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라는 1-9절의 논의에서 11-14절의 분노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는 디딤돌 역할을 합니다. 11절부터는 분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다룹니다. 11절에서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라는 분노를 잘 조절하는 것이 필요함을 말합니다. 허물이 있을 때 넘어가 주는 것이 결국 유익이 된다고도 말합니다. 12절에서 “왕의 노힘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라는 왕의 분노에 대해서 말하는데, 왕이 화를 내면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아서 두려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왕의 진노를 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12절은 정당한 분노 혹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의 분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만나게 되면, 가능한 한 그런 분노를 피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13절에서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라는 다투는 아내에 대해 소개합니다. 아내의 다툼이란 넓게 보았을 때 분노의 주제와 연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투기를 잘하는 아내가 그 남편에게 있어서 쏟아지는 빗방울 같음은 마치 미련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앙인 것과 같습니다. 아내는 분노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14절에서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라는 슬기로운 아내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합니다. 13절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다툼을 삼가는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내들은 분노를 잘 조절할 수 있어야 하며, 남편들은 아내가 분노를 잘 조절하여 신앙적인 덕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러한 아내의 분노에 대한 적용점은 물론 남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13-14절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분노를 잘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지혜로운 남편, 아내, 부모, 자녀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분노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화가 나는 상황은 있을 수 있으나, 그 화를 잘 조절하여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회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왕의 정당한 분노는 풀 위의 이슬같이 부당한 권력에 의해 짓눌린 생명력을 복원하고 자유의 공기를 마시게 해줍니다. 가정에서도 분노하며 다투는 아내 또는 남편이 있는 집이나 부모를 업신여기는 자녀가 있는 집이 행복할 리 없습니다. 분노를 잘 조절할 줄 아는 아내와 남편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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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4-02)


마지막 시대에 관해 설명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4장 15-35절


옛날에는 매월 15일이면 ‘민방공의 날’이 있었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전쟁을 가상해서 피하는 방법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불이 날 때나 아니면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 어떻게 피하는 방법으로 전환해서 훈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공서에 가면, 위기 상황이 발생할 경우를 대처하는 요령을 담은 ‘매뉴얼(manual)’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날에 환난을 당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끝, 14), 직전에 있을 큰 환난을 예언하십니다. 전무후무한 환난 앞에서 유대 땅에 거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도망치는 것뿐입니다. 고통을 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크고 심각한 환난입니다. 그때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성도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은 자연스럽게 인자의 재림으로 이어집니다.

 

끝을 가리키는 표적들(15-28)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시고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시는 과정은 소수만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재림은 번개처럼 세상 모든 사람이 일시에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의 다시 오심은 누구든지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23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15-28)

 

화려한 외형을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치욕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능멸하더니 가증한 것에 유린당합니다. 하지만 유례없는 환난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 경고마저 우습게 여긴다면 더 이상 가망이 없습니다. 임박한 심판 앞에서 요행이 아니라 말씀과 상황으로 경고하실 때 잘 따라야 합니다.

 

(1) 유대에 일어날 일(15-22)

 

선지자 다니엘을 통해 전해진 황폐함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볼 때, 듣는 자는 깨달아야 하고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해야 합니다(15-16).

성전의 파괴만큼 참혹한 환난은 없습니다. 그때 유대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침략자들을 피해서 산으로 도망해야 합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무섭습니다. 침략이 너무나 처절하므로 뒤를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옥의 지붕은 평평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이나 사다리가 집 밖에 설치돼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습한 숙소를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거나, 빨래를 널거나, 기도하는 용도로 지붕을 활용했습니다(신 22:8; 막 2:4; 행 10:9).

그러나 비극적인 소식이 들리면 집 안에 들어갈 시간도 없습니다. 겉옷은 밤에 기온이 떨어지는 중동지역에서는 필수적이었지만,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집에 겉옷을 가지러 가지 말아야 합니다(18).

긴급히 서둘러야 한다는 경고는 아이를 배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의 그림으로 강화됩니다(19). 엄마는 아이 때문에 빨리 도망할 수 없고 아이의 소리 때문에 숨을 수도 없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망하는 시기가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경고하십니다(20). 겨울에는 비가 자주 내려서 이동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고, 폭풍 때문에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특히 겉옷을 가지러 갈 수 없는 상태가 겨울에 벌어진다는 것은 악몽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예배에 집중하는 날이므로, 그날 성전으로 향하지 않고 정반대쪽으로 도망해야 한다는 것 자체는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큼 닥쳐올 재앙이 비극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모욕당하고 도성이 멸망하는 사건은 역사의 끝에 벌어질 비극을 겹쳐서 보게 합니다(21). 환난이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그 날이 감해지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22). 택하신 자들은 예루살렘이 망할 때 예수님의 예고를 사실로 받아들여서 시련의 현장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전무후무할 것 같은 비극은 역사에서 반복해서 일어나고, 최고의 환난은 역사의 끝에 일어날 것입니다. 물론 역사의 끝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은 택함 받은 자들에게는 비극이 아니지만, 하늘나라의 복음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당연히 비극입니다.

 

(2) 교회와 세상에 일어날 일(23-28)

 

본문은 온 세상에서 일어날 사건을 언급하면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23-24절은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날 사건과 인자의 오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가 몰래 왔다는 말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오실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특정 지역에 나타나 큰 표적과 기적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데, 택하신 자들마저 미혹하려 들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비밀리에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아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는 비밀스럽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오실 것입니다. 번개가 동쪽에서 나와서 서쪽에까지 번쩍이는 것처럼 인자의 오심도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27). 인자의 오심은 번개처럼 등장하는 것이므로 전 세계적이며 우주적입니다.

28절은 인자의 재림을 보지 못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려진 격언으로 설명합니다. 독수리들의 시야에 주검이 들어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인자의 오심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늘에 모습을 보이실 것입니다.

살아가기 힘든 시대로 느껴지면 신자들마저 흔들리기 쉽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언제든지 등장하는데, 특히 시대가 어려울 때 그들의 가르침은 큰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가 특정 지역에 온다는 예고입니다. 이런 주장이 유혹이 되는 이유는 마치 시대의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처럼 선전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고통과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하며 인자의 오심은 전 우주적이고 일회적 사건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재림은 초림과 다릅니다. 팔레스타인에 임하셨던 인자는 온 세상이 볼 수 있게 오실 것입니다.

 

세상의 끝에 다시 오실 인자(29-31)

신앙적인 박해가 심해지고 사회 혼란이 격화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 무리가 나타납니다. 신비한 능력이나 은사를 통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아닙니다. 환난의 때에 거짓 그리스도와 예언자들은 거짓 증거와 기적을 보여 주며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을 유혹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거짓된 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29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29-31)

 

본문은 인자의 오심을 그때 일어날 우주적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주적 사건은 물리적 세계뿐만 아니라 초자연적 세계의 현상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인자의 재림은 모두가 식별할 수 있는 천체의 변화로 나타날 것입니다(참조, 사 13:10; 겔 32:7; 암 8:9; 욜 2:10,31; 3:15; 사 34:4; 학 2:6,21). 인자의 오심으로 인간의 역사에 침투해서 영향을 미치는 모든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세력이 패배할 것입니다(29). 인자는 자신의 천사들을 보내서 택하신 자들을 모으는데, 이 장면 역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모으신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30; 신 304, 사 11:11,16,27:12; 겔 39:27). 그런데 인자가 천사들을 보낼 때 큰 나팔 소리가 들립니다. 고대 사회에서 나팔 소리는 전쟁을 시작하고 진행하고 마칠 때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인자가 천사들과 함께 와서 종말의 전쟁을 벌이며, 그 결과로 택한 자들이 구원받습니다. 독자들은 이날이 있음을 잊지 말고 깨어서 준비해야 합니다.

현재의 세상에서 권세를 누리고 부를 축적해서 힘을 쓴다고 할지라도 역사의 종말이 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현실이 영원할 것 같지만 초자연적인 재림의 현상 앞에서 현실에 안주한 사람들은 후회하게 될 것이고, 어려움 중에서도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장면을 목격하고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대해서(32-35)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신비로운 기적과 놀라운 능력을 행하면서 자신들을 따르도록 사람들을 현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순결한 신부로 서기 위해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32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4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5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2-35)

 

본문에는 제자들이 언제 이런 일이 있을 것인지 물은 것에 대한(24:3)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2절부터는 청중이 제자들로 좁혀집니다. 제자들은 무화과나무를 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에 잎이 생기면 다음에는 여름이 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사건들을 보면서 여름에 비유되는 인자의 오심을 짐작해야 합니다. 또한, 본문의 ‘너희’에게 인자가 오는 것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을 구원하는 목적을 갖고 있어서 고난이 온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화과나무의 여름이 오는 것처럼 인자께서 신원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인자는 어떤 방식으로 오십니까? 문 앞에 도착하는 그림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자연스럽습니다. 몰래 오는 것이 아니라 왕이나 고관들의 공식적인 도착을 묘사하기 때문에, 인자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오십니다. 34절의 이 모든 일은 앞에 나온 24:1-28의 사건들을 가리키고 인자의 재림을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이 모든 일은 이 세대에 일어날 것이며, 미래에 일어날 비극의 전조입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인 하늘과 땅은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종말이 도래할 때 사라질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지 현재의 하늘과 땅이 아닙니다. 가시적인 하늘은 영원히 존속할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지속할 새 하늘과 새 땅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사 40:7-8).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므로 그의 말씀에 의존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올바른 종말 신앙은 영원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말씀을 통해 누리는 예수님과 사귐이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벽한 교제를 경험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신념이 있었기에, 성전 파괴를 예언하신 예수님을 성전을 모독한 자로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부활, 승천, 성령, 성전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과 지식에 거슬릴 때라도 기꺼이 말씀을 수용하고 순종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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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4-01)

 


마지막 심판에 대한 징조를 설명한 예수님

마태복음 24장 1-14절


사람은 출생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마칩니다. 이처럼 일에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세상도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으로 이제는 끝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지진이나 전쟁이나 기근 그리고 테러와 같은 소식들을 들으면서 이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실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심어준 지혜입니다. 세상과 인간은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그 시기와 말세의 징조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과 난리와 전쟁을 예고하시며,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면 끝이 온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환난을 겪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한 질문(1-3)

성경은 한 번도 외적인 규모가 심판의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패한 내면과 본질을 감풀 수 있는 외적인 성공과 피상적 신앙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능을 상실한 채 버림을 받을 성전이 운명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성전의 화려하고 웅장한 외형에 여전히 주목합니다.

 

1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3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1-3)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고 나서 그들과 나눈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나온 제자들은 성전의 건물을 보고 감탄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흥분에 예수님께서도 동참하길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흥이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고하십니다.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은 그만큼 철저히 성전이 파괴될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골짜기를 지나 감람산(올리브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 특히 종말에 대해 알려주실 것입니다(24-25장). 스가랴 선지자도 바로 이곳에서 종말의 사건들을 예고했었습니다(스가랴 14:4). 스가랴 선지자가 계시를 전달한 곳에서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 예고하시자, 제자들은 시대의 끝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제자들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이 묻는 ‘이 모든 일들’은 성전의 파괴뿐만 아니라 이와 더불어 일어날 사건들을 포함합니다. 제자들은 ‘주의 오심’과 ‘세상 끝’ 또는 ‘시대의 끝’에 나타날 표적에 관해 묻습니다. ‘시대의 끝’은 인자가 다시 와서 악인들을 심판하고 의인들에게 상을 줄 때입니다. 인자가 그의 천사들과 함께 와서 의인들과 악인들을 분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관점에서 ‘당신의 오심’과 ‘시대의 끝’은 동일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과 시대의 끝을 포함하며, 종말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제자들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판의 때를 준비하기 위해서 시기와 표적에 대해 묻습니다.

 

종말의 일반적인 징조(4-8)

세상의 마지막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궁금해야 할 것은 종말의 때가 아닙니다. 그날을 맞이할 만큼 우리가 늘 깨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전이 멸망하는 때가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그때를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섣불리 세상의 끝을 말하지 말고 그런 주장으로 미혹하는 이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4-8)

 

예수님의 경고는 미혹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제자들은 거짓 메시아들의 주장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5). 그들은 ‘나는 그 그리스도이다’라면서 자신을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메시아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거짓 메시아들은 예수 이후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이들의 주장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 기근, 지진은 시대의 끝이 오기 전에 경험할 사건들을 의미합니다(6-8). 이런 표적들은 끝, 즉 인자의 오심이 아니라 끝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기 위해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다니엘 2:28).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서 시대의 끝이 임한 것은 아니며, 메시아가 다시 왔다는 표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재앙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재난의 시작’은 문자적으로는 ‘산통(産痛)’입니다. 산통은 고통의 극치를 상상하게 만들지만 아이가 태어날 때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이므로 결과는 좋은 것입니다. 4-8절의 재앙은 참으로 끔찍하지만, 시대의 끝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너머의 것, 즉 재앙의 결과를 예상해야 합니다.

 

교회와 관련된 사건들(9-14)

예수님께서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고 돌아가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고난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악의 세력은 기승을 부리며 한층 위세를 떨치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는 제자는 최후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9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9-14)

 

본문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이어가면서 역사의 끝이 오기 전에 일어날 사건들을 포함시킵니다. 핍박(9-10),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11), 불법이 성해서 사랑이 식음(12), 견디는 자들의 구원(13), 복음의 전파(14). 세상의 끝이 오기 전에 성도들은 핍박, 거짓 선지자들, 배교, 열방을 향한 복음 전파를 먼저 경험할 것입니다.

 

(1) 성도들의 핍박(9-10)

 

성도들은 환난에 넘겨져 죽을 것이며, 모든 민족에게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9). 그리스도인들에게 조난을 주는 주체는 ‘사람들’과 ‘모든 민족’으로서 유대교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서로를 넘겨주고 서로를 미워할 것입니다(10). 그리스도인들은 반대자들 편에 서서 동료들을 넘겨주고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 교회에 대해 갖는 ‘증오심’이 교회 안에서도 서로에 대해 표출될 것입니다. 이들은 마치 돌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고난 앞에서 서로를 넘겨주는, 즉 배반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환난을 계기로 누가 참 제자들인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2) 거짓 선지자의 출현(11)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11). 거짓 선지자들은 탁월한 능력을 행하기도 하고,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종교성을 과시하며 미혹할 것입니다. 특히 11절을 9-10절과 연결해 보면, 사람들은 핍박과 미음이라는 압박 가운데서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 가운데 하나는 핍박과 미움을 받는 대신 이 세대에서 영광을 누리도록 하는 번영신학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국가의 재건, 제 3성전의 건축 등과 같은 사건들을 재림의 징조라고 주장하는 것도 미혹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기에, 이들을 따른 결과는 멸망입니다.

 

(3) 사랑이 식어짐(12)

 

핍박 앞에서 교회가 진리를 지키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교회의 사랑이 식습니다(12). ‘불법’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어기는 모든 활동을 의미합니다(7:23; 13:41; 23:28). 제자 공동체의 특징은 급진적인 사랑, 곧 자연 현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불법으로 교회의 본질인 ‘사랑’이 식을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의 이중 계명에 걸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 동료에 대한 사랑이 식을 수밖에 없습니다(22:37-40). 불법과 사랑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불법이 힘을 얻으면 사랑이 식고, 사랑이 불타오르면 불법이 힘을 잃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증오를 생가하는 지도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교리나 행하는 기적이 아니라 삶의 열매로 식별되기 때문에, 사랑 없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4) 끝까지 견디는 자(13)

 

9-12절에서 예고된 비극적인 현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하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인내로써 자신들이 참으로 택함 받는 자들임을 증명합니다. 핍박이 오지 않을 때는 누가 참 제자인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시련을 받는 현실이 닥칠 때 비로소 신앙의 색깔이 드러나게 됩니다.

 

(5) 온 세상에 복음전파(14)

 

역사의 마지막이 오기 전에 나타날 현상 중 하나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것입니다(14). 14절의 복음은 28:18-20에서 복음 전파의 명령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 실현될 것입니다. 14절은 13절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독자들이 미혹 당하고 불법이 침투하는 현상 속에서도 끝이 반드시 올 것을 확신하고 인내하도록 만듭니다. 고난의 시기는 복음 전파를 위한 과정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미혹 당하고 불법이 침투하는 현상 속에서도 끝이 반드시 올 것을 확신하고 인내하도록 만듭니다. 고난의 시기는 복음 전파를 위한 과정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비관적인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미래 계획에 대해 낙관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역사에는 분명한 목적과 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는 수많은 문제와 고통이 생깁니다. 이런 일들의 목표 혹은 마지막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역사에 일어나는 수많은 비극의 표적들은 재림을 예고하는 산통의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목표로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또한, 복음 전파의 완성이 끝을 가져옵니다. 부활과 재림 사이에 하나님의 관심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사람들과 약속을 잡아서 나가면 약속 시간이 지나지만 오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언제 올 것인지 약속 장소에 앉아서 몇 시간을 기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불안했으나 기다렸습니다. 꼭 오리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힘겹고 암울한 시대를 살지만 끝까지 견디며 기다리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기다릴 가치가 넘치고도 넘치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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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3-03)


영적 지도자들이 받을 화를 가르친 예수님(2)

마태복음 23장 29-39절


학생들이 공부할 때 잘할 방법은 문제집을 풀어가면서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며, 문제집의 정답과 오답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틀린 문제를 왜 틀렸는지 분석하고 연구함으로써 다음에 틀리지 않으면 실력이 상승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반복되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일곱 번째 화(29-33)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애가(34-39)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에 내려질 심판(34-36)과 예루살렘의 비참한 운명(37-39)을 예고하십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정성스럽게 가꾸면서 선지자보다 더 큰 자로 오신 예수님과 그분이 보낸 자들을 핍박하는 지도자들과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일곱 번째 화(29-33)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단점을 지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나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판단하면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가 되어서 동일한 환경에 처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어쩌면 더 심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손질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29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29-33)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화를 지적하십니다. 이제 마지막 일곱 번째 화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일곱 번째 화는 무덤이라는 내용으로 여섯 번째 화(23:27-28)와 연결되고 전체 ‘화’ 선언의 결론입니다.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실수(29-30)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들을 단장하면서 자신들이 조상들의 시절에 있었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29-30). 그들은 위대한 선지자들과 의인들의 무덤과 비석을 만들고 단장하면서 조상을 기념했습니다(다윗의 무덤-열왕기상 2:10; 사도행전 2:29; 솔로몬 무덤-열왕기상 11:43 등).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은 옛 영웅들을 기념하기 위해 대규모 비석을 세우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마카비의 무고자들의 무덤, 다윗의 무덤 등).

과연 그들이 선지자들이 고난 당하고 있는 자리에 있었다면, 피를 흘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가장 최근에 그들은 세례 요한이 전한 선지자적 메시지를 거부하며 그를 배척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이런 선지자들에 포함시킵니다.

 

(2)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죄(31-33)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 조상들의 분량을 채워라’(32)는 그들이 하지 말아야 할 죄를 행하라는 역설적인 명령입니다. 그릇이 다 채워지면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집니다. 이들이 어떤 점에서 조상들의 분량을 채우는지 34-35절에 나타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거나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따라다니면서 박해할 것입니다(34).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조상들의 대열에 합류한 ‘뱀들’과 ‘독사의 새끼들’이며,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곱 번째 화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질 무서운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을 증오해서 가스실에 죽였던 홀로코스트(Holocaust)와 같은 반인률적인 비극의 도구가 된 반-유대교 사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정 민족을 심판의 대상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은 본문의 의도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의 윤리에도 어긋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을 잘못 인도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백성은 영적으로 눈먼 이들의 지도로 비참하게 고통을 겪게 될 것을 한탄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고 그 뜻대로 백성을 인도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와 오만과 위선은 위험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은 이제 교회를 향합니다. 독자들은 23장을 읽으면서 옛 이스라엘이 지도자들과 함께 몰락하게 된 원인을 자신들의 교회에 적용해야 합니다. 어느 쪽 길이 예수님의 뜻에 맞는지 성경을 통해서 철저히 확인하지 않은 채 어리석고 눈먼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공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일곱 화는 산상설교의 언어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공유하고 있으며,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산상설교의 교훈을 자신과 인도자들과 인도받는 자들의 현재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세대와 예루살렘의 심판(34-39)

선지자적 삶을 선지자 무덤 만들기로 대체하고 의로운 삶을 의인의 기념비로 바꾼 이들에게 남은 것은 심판입니다. 의인들의 비석을 꾸민다고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이 있다고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미 닭의 보호 날개를 거절한 새끼들은 버려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3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37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34-39)

 

29-31절에서는 선지자들과 의인들을 보내신 주체가 하나님이었으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이들이 받을 핍박은 네 개의 미래형 동사로 표현되기 때문에, 선지자들(참조, 10:41), 지혜자들, 서기관들(예. 13:52)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보냄 받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신 뜻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은 자들입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자들도 같은 맥락에서 활동할 것이기에 구약의 용어가 사용됩니다. 당시의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그들처럼 이미 의인들의 피를 흘린 조상들과 결속된 상태에 있고 연속 선상에 서 있습니다. 의로운 아벨의 피부터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죽임당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 흘린 모든 의로운 피가 그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35). ‘∽의 피’는 심판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 벌을 받아야 할 책임을 상징합니다(참조. 예레미야 26:15; 요나서 1:14). 누군가에게 피가 돌아온다는 표현은 유대식 표현입니다(참조, 사무엘하 1:16; 예레미야 51:35). 이스라엘은 의로운 피를 흘리게 했기 때문에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요엘서 4:19; 요나서1:14; 잠 6:17). 의로운 피를 흘린 의인들은 아벨에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스가랴)에 이르며, 이 기간은 ‘모든 의인의 피’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이야기는 창세기 4:10을 떠올리게 합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니라.’ 특히 ‘땅 위에는 창세기 4:10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악이 쌓인 결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고, 이미 이스라엘은 역사에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비극을 통해 이런 식의 심판 공식을 경험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로 예수님께 응답하지 않고 그를 핍박해서 죽일 뿐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보냄 받은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은, 그들이 조상들의 피 흘리는 행위와 모종의 연대감을 갖고 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중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서 예루살렘으로 확장하십니다. 37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인격화해서 선지자들을 죽인 것(23:34; 5:12; 사도행전 7:2)과 예루살렘에 보냄 받은 자를 죽인 행위를 지적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민족의 멸망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신저들을 핍박하고 죽인 예루살렘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 스가랴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역대하 24:20-22). 이제는 마지막 메신저인 예수를 죽일 것입니다(16:21: 20:17-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들을 모으듯 민족을 품기 원하셨습니다. 어미 새가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는 것은 안전과 양육과 평안을 주기 위한 행위이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품으신 사랑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참조, 신명기 32:11; 시편 17:8; 36:7; 63:7; 이사야 31:5; 34:15; 예레미야 48:40; 룻기 2:12).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날개 아래에 모으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예루살렘이 배척했으므로, 멸망의 책임은 모으려고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거부한 쪽에 있습니다. 38절의 ’버림받아‘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는 개념을 상기시킵니다.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과 예루살렘과 그 세대가 예수를 배척했지만, 본문은 이스라엘이 영원히 버림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 이후 예수님의 초청에서 유대인들이 제외된다는 주장은 본문의 의도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11:28-30이 증언하는 것처럼 긍휼의 아들은 유대인들도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심판을 받습니다(10:32-33; 12:41).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으러 오셨고, 이 사역을 위해 자신이 비참하게 버림받는 수치를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일어나지만,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새처럼 사람들을 따뜻한 품에 모으려는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23장의 말씀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전해졌으나 그들이 귀를 막고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에,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교회에 중요한 교훈으로 전달됩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운명과 예루살렘의 심판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에 경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일은 교회 밖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념관과 기념비가 우리 신앙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좋은 설교를 하거나 들었다고 자동으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을 비판하는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살아내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나를 정죄할 것입니다. ’나는 그들과 달라.‘라는 교만을 벗고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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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3-02)

 


영적 지도자들이 받을 화를 가르친 예수님(1)

마태복음 23장 13-28절


새로운 지역을 관광할 때 가이드가 중요합니다. 가이드가 그 지역을 구체적으로 잘 알고 잘 설명해주면 관광이 즐겁습니다. 만약 가이드가 길을 모르거나 잘못된 길로 안내한다면, 그를 따르는 관광객들은 그 여행을 망치게 됩니다. 관광은 한 번 망치면 되겠지만, 인생을 안내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앞서 예수님께서 화를 선포하신 예들이 있었습니다(11:21; 18:7, 참조 24:19;26:24).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일곱 번째에 화를 집중적으로 쏟아내시며 부패한 유대교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십니다. 본 단락은 여섯 가지 화를 소개합니다. 천국문을 가로막고, 교인을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며, 맹세로 기만하며, 형식과 겉만 치중하고 내용과 안은 부패했으며, 회칠한 무덤과 같은 종교적 위선과 부패로 가득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화(13-15)

신앙 생활에서 삶과 신앙이 일치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등대로서 빛의 역할을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과는 반대로 예수님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은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1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없음) 1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13-15)

 

앞에서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참된 지도자는 섬기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높아지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진 자는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첫째 화(13)와 둘째 화(15)는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열정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줍니다.

 

(1) 첫째 화(1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모습과 달리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의 행동을 한 것은 ‘위선’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버립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라는 표현(5:20; 7:21; 18:3; 19:23,24; 21:31; 참조 7:13-14, 18:8-9; 19:17)은 구원과 영생을 얻은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23:2) 자신들이야말로 토라의 올바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백성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2) 두 번째 화(15)

 

본문은 첫 번째 화의 주제를 발전시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수고해서 개종자를 만들지만, 자신들보다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13)과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것(15)은 같은 의미입니다. 개종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결과가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라는 점에서 13절과 15절은 연결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며(15:12-14, 바리새인들), 그들의 교훈은 누룩과 같이 공동체를 파괴해(16:12,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람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위선은 지도자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거나 공동체를 몰락시키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위선적인 사람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자기기만으로 가득 차 있으면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해 더욱 열심히 활동하고, 그 결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락의 길로 함께 갑니다. 이런 점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화는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지도자를 예수님의 가르침에 초해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함을 경고로 가르칩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화(16-24)

정결 규례 같은 외적인 규례는 잘 지키면서 본래 취지인 마음의 정결을 지키는 데 소홀했습니다. 마음에 탐욕(착취)과 방탕이 가득하다면 외적인 정결 규례를 잘 지켜도 소용없습니다. 외적인 정결은 쉽게 내적인 부정을 감추거나, 혹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16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16-24)

 

세 번째 화와 네 번째 화는 ‘눈먼 인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특히 맹세하는 일을 통해 백성들로 하여금 위험한 오해를 하게 했는데, 이 맹세하는 일은 모든 나라에서 신성시되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많은 영혼들의 피를 보상해야 하는 소경된 인도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고하신다.

 

(1) 세 번째 화(16-22)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진실성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을 강조하려고 성전의 금과 같은 것을 이용했습니다. 금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성전에 있기 때문에 구별됩니다. 성전이 급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더 작은 것(성전의 금, 제단 위의 예물)과 더 큰 것(성전, 제단)을 반대로 생각한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단이 아니라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그 맹세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물은 제단 위에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만한 제물로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제단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제단과 예물 중에서 어느 것이 큰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성전으로 맹세하거나 성전의 제단으로 맹세할 때 성전이나 성전과 관련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맹세나 맹세의 대상도 하나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맹세의 대상을 크고 작은 것으로 구분하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2) 네 번째 화(23-24)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세밀한 부분에 신경을 쓰지만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더 중요한 것들’의 항목인 크리시스(κρίσις)는 ‘정의’에 가깝습니다(참조, 12:18, 20).

긍휼은 하나님의 뜻에서 핵심이고 율법이 지향하는 바다(9:13; 127; 호세아 6:6). 피스티스(πίστις)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으므로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이런 번역과 해석은 미가 6:8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미가가 언급하는 ‘정의’, ‘인자’(긍휼),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신실함)은 23절의 원리에 상응합니다. 그렇다면 23절의 의미는 이웃 사랑과 관련이 있습니다(22:34-40; 참조 5:21,26,43-48; 7:12).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에 세세히 신경을 쓰면서도 율법의 근본 정신인 이웃 사랑을 간과하는 것은 모순입니다(참조. 22:36-40). 또한 이들은 무엇을 마실 때 율법의 가르침(레 11:4)에 신경을 써서 하루살이는 걸러내지만, 엄청나게 큰 낙타를 삼키고 맙니다. 하루살이(또는 모기)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곤충을, 낙타는 가장 큰 생물을 대표합니다. 유대인들은 갈매(하루살이)를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에 매우 신중하게 걸러서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을 피했다고 안심했으나 실제로는 더 부정한 낙타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지 못하는 성경 교사들은 신앙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지 못합니다. 이들을 따르는 자들도 함께 엉뚱한 길로 인도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어리석은 가르침과 그런 것을 진리로 가르치는 눈먼 인도자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화(25-28)

위선은 그 속은 뼈와 썩은 것들로 가득하지만, 겉만 그럴듯하게 회칠하여 꾸며놓은 무덤과 같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칭찬받지만, 하나님께서는 불법의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헛된 만족을 버리고 허위의 가면을 벗고 주 앞에 사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2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5-28)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화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겉과 속이 다른 문제를 비판합니다. 그들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죄로 가득찬 사람들도 그들의 생활 속에서 비난을 받지 않고 매우 선한 것처럼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겉과 속이 다른 외식을 지적하십니다.

 

(1) 다섯 번째 화(25-26)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내면을 청결하게 하는 대신 외적인 종교 행위에 신경을 쓰는 문제를 지적하십니다(15:11, 17-20).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마시고 먹을 때 제의적 정결을 위해 잔과 그릇을 깨끗이 하는 것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정결 규례는 갈수록 강화되고 있었습니다. 잔과 그릇의 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외적으로 정결 규례를 지켰으나 내면은 탐심과 방탕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정결법의 핵심은 윤리적 정결입니다. 윤리적 정결이 없는 제의적 정결은 모순입니다. 특히 ‘탐심’으로 번역한 단어는 남의 것을 빼앗는 강도 짓 혹은 폭력입니다. ‘방탕’으로 번역한 단어는 성적인 부도덕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는 용어인데, 자기 절제가 되지 않는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참조 고전 7:5). 잔과 그릇이 부정한 이유는 욕심을 절제하지 못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뺏은 것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안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2) 여섯 번째 화(27-28)

 

26절은 그릇을, 27절은 무덤을 소재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당시에 많은 무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뼈가 노출되는 일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덤을 하얗게 칠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시체와 접촉해서 부정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특히 외지인들이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오면 지리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무덤 곁을 지나거나 무덤을 접촉할 수도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유월절에 무덤을 하얗게 치장했으며, 어떤 무덤은 아름다운 모양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많은 무덤이 회칠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밖에서 보면 무덤은 아름답지만, 무덤 내부는 깨끗하지 않은 뼈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내면은 썩었습니다.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내면에 있는 탐심과 무절제와 위선과 불법을 깨끗이 하는 것을 외적인 활동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신 여섯 번째 복에서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이웃에 대해 청결한 사람들로서, 내면과 달리 곁으로만 정결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화(禍)를 선언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천국의 복을 내리시지만, 자기 영혼을 기만하고 타인의 생명을 파멸케 하는 이들에게는 심판의 화를 내리십니다. 더러운 속사람을 외식과 위선으로 감추고 경건으로 포장하면 땅에서는 칭찬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천국문 앞에서는 거절을 당할 것입니다. 위선은 속사람을 보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도 위태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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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3-01)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선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23장 1-12절


‘말의 힘’은 ‘얼마나 말을 잘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잘하지만, 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끝까지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가르치는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얼마나 실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경계해야 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를 언급하고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덕목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갖은 위선적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자세를 경계하고 낮아져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위(1-7)

그리스도의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습니까? 두 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는 입술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종교적으로 아주 열정적인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정의에 불타서 사회 개혁에 앞장서는 사람이나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들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1-7)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하여 강하게 질책하시고, 제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가르쳐 주시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자세는 두 가지입니다.

 

(1)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태도(1-4)

 

바리새인들에 관한 언행불일치의 내용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바른 말이지만 그대로 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십니다(1). ‘모세의 자리’는 은유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있었던 교육하고 다스리는 권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배우지 말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3). 그들은 잘 가르치고 지시했지만, 정작 자신들을 그렇게 실천하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율법을 성취하는 자들입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율법에 나타난 뜻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22:10). 물론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관점이 아니라 예수의 관점을 통해 율법의 원래 의미를 알고 지킵니다.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해석을 통해서 밝혀지며, 예수님의 해석이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목적을 드러냅니다. 불행하게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입니다. 그들이 지운 짐이 무거운 이유를 몇 가지로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23:23의 평가처럼 예수님의 적대자들인 종교지도자들이 지우는 멍에는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결여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종교지도자들은 짐을 지우기만 했지 사람들을 실제로 움직이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셋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만든 전통은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지고 가기 힘든 짐이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우는 예는 음식 규례(9:10-13), 엄격한 안식일 규례(12:1-13), 정결 예식에 대한 규례(15:2) 등에 나타납니다. 무거운 짐을 묶고 지우는 것은 안식일의 규례처럼(12:1-14)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율법 해석을 통해서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부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짐은 가볍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지느라 힘들어했습니다. 그들이 짐을 무겁게 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무겁게 했으니 사람들은 짐이 무거워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힘든 짐을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고도 사람들을 위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세우신 목적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손가락에 신체적인 문제가 있지 않은 한, 손가락을 움직이는 행위는 가장 쉬운 동작 가운데 하나지만, 그들에게는 사람들을 도와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원래의 의도와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열심히 율법의 규례를 가르쳤으나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졌습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상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규제와 통제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자신들의 요구가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는지를 마음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들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못했습니다. 수고하는 자들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냉정한 율법주의와 권위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권위주의적인 사람들은 지시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 말에 누군가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순종하는 자들의 마음과 고민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긍휼은 전통보다 크고 긍휼함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입니다(12:7, 참조. 9:13; 호세아 6:6). 고난받는 종으로서 긍휼을 베푸는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쉼을 주십니다(11:29), 고난 받는 종으로서 연약한 사람들을 회복시키십니다(12:19-20; 이사야 42:1-4).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아시면서 그들을 움직이게 했는데, 이런 힘은 예수의 긍휼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교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결과인 피폐함은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이 얻는 결과인 안식과 정반대입니다(11:28-30).

 

(2) 칭찬받으려는 위선적인 행위(5-7)

 

앞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행함 간의 불일치를, 본문에서는 그들이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한 위선적인 행위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의 문제는 옷(5), 모임에서의 위치(6), 인사를 받는 것(7)으로 드러납니다.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 술을 길게 하는 것은 성경을 많이, 열심히 암송하고 순종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5). 그들은 잔치의 윗자리, 즉 가장 존중받는 자리에 앉음으로써 자신이 최고로 가치 있는 위치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을 즐겼습니다. 또한,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려고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은 것을 원했습니다. 시장에서 인사를 받는 것과 사람들에게 랍비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높은 수준의 경전을 행하지 않으면서도 모범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척했습니다. 마음과 관심의 방향이 백성이 아니라 자신들을 행해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신앙의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장 취약한 문제 중 하나는 경건함을 드러내 영예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해석해주고, 지킬 수 있게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르치지만 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눈에 띄는 곳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제자들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8-12)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은혜를 아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래서 창조주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자신을 만들기까지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과 환경을 통해 보살펴 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으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조건과 환경을 은혜의 선물로 여기면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참다운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8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8-12)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지적하시고. 이어서 제자들이 지녀야 할 바른 태도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8-12절에서 제자 공동체를 향한 어떻게 스스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를 가르치십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랍비(8), 아버지(9), 지도자(10)로 불리는 것을 즐기지 않도록 경고하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행동 지침을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모본으로 제시하시기 때문에, 8-12절은 기독론(그리스도)과 교회론(제자 공동체)에 무게를 둡니다.

 

제자들이 경계해야 할 태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랍비로 불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선생은 한 명이고 그들 모두는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8). 제자 공동체가 한 분의 교사를 두었다는 말은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기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다 형제’이기 때문에 랍비로 불리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형제들 사이에 권위주의 체계나 높고 낮음의 계층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9:11; 10:24-25; 17:24; 26:18; 23;10). 한 분 그리스도를 따르는 평등한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정체성입니다. 불필요한 칭송으로 특정인이 높임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위선의 길에 가깝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 것을 경고하십니다(9). ‘하늘에 계신 분’을 아버지로 불러야 합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형제와 자매의 관계입니다. 형제의 개념은 한 아버지 아래서 서로 평등과 결속력을 전달합니다. 형제와 자매로 이뤄진 공동체는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한 분이신 아버지 아래서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면서 서로 동등한 가치를 존중하고 한 가족이라는 공동의 가치를 존중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셋째, 예수는 지도자에 상응하는 단어로 그리스도를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참된 인도자이시지만 겸손히 섬기는 종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가르치고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할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고난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 지도자를 따르면 공동체는 분파주의로 흐르기 쉽고 예수님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제자 공동체는 한 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행동하는 사람이 큰 사람인지를 가르치십니다(11-12). 제자 공동체에서 큰 자는 공동체를 섬기는 사람입니다(마태복음 20:26; 누가복음 22:26). 유일한 선생인 그리스도께서 보여주고 강조하신 삶은 섬기는 것이며 낮아짐(겸손)입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달리 존경받는 칭호를 사용하기보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져야 합니다(12). 위선에 빠지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식은 칭호에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낮아져 그리스도의 삶을 배우고 그대로 따르는 삶은 공동체의 권위주의적을 배우고 그대로 따르는 삶은 공동체의 권위주의적 질서를 깨고 서로 평등하게 섬기는 공동체로 만듭니다.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 해서도 안 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높이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제자의 올바른 태도며 그렇게 사는 제자가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참 좋은 제자란, 얼마나 많이 좋은 이론이나 사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좋은 이론이나 사상을 바탕으로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군림하려는 사람은 낮아지고 낮아져 있던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 큰 자가 되기 위해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낮은 자리가 제자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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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2-04)


사두개인에 대한 평가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2장 34-46절


예수님의 이미지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바꿔 왔습니다. 백인 예수, 흑인 예수, 남성적 예수, 여성적 예수, 랍비 예수, CEO 예수,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오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와 오해와 직결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몰이해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드러내십니까?

 

  • 예수님께서 또 사두개인들까지 물리쳤다는 소식에 바리새인들에게 들렸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가장 율법에 실력 있는 사람이 예수님께 나섭니다. 그는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리스도가 다윗보다 더 위대한 존재임을 증명합니다.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34-40)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이지, 말씀을 다스리려는 자들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켜야만 하는 또 하나의 계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통치하신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말문을 막았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새인 중 율법 전문가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찾아왔습니다.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4-40)

 

바리새인들은 음모를 꾸민 끝에 한 율법사를 보내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율법사는 율법의 선생(교사)으로서 서기관과 동의어이며, 헤롯 정부나 사두개파(또는 성서 책임자들) 가운데도 율법사가 있어서 자문 역할을 했습니다. 본문의 율법사는 바리새인 중에서 율법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당시에 율법의 선생마다 자신들이 정해 놓은 원칙에 따라 율법의 경중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어느 율법을 강조하든지 다른 의견을 가진 쪽에서 제기하는 공격을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보여준 행보에 근거해서 그가 율법의 특정 부분을 무시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참조 5:17)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를 인용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계명에 대해 묵상하는 것도 아니며, 신비적 경험을 향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39-40절을 함께 고려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너의 온 마음으로’는 마음의 깊은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의 온 목숨으로’는 순교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너의 온 뜻으로’는 생각과 계획을 세우는 과정을 포함하며, 지적 능력을 다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종합해 보면, ‘내적인’ 감정으로 느끼는 것을 넘어서 존재와 소유 전체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가장 크고 으뜸 되는 계명입니다(38).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18을 인용해서 두 번째 계명을 말씀하십니다(5:43; 19:19). 두 번째 계명은 순서로는 두 번째에 배치됐으나 중요성에서 두 번째라는 뜻이 아닙니다. 첫 번째 계명과 같은 중요성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개의 가장 큰 계명이 있는 것입니다. 40절에서 ‘강령이다’로 번역한 크레마뉘미 엔(κρεμάννυμι έν)은 ‘에 걸려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재 수동태형(크레마타이 κρέμαται)을 사용해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모든 가르침이 사랑의 두 계명(신명기 6:4; 레위기 19:18)에 걸려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운동회에서 만국기가 하나의 줄에 걸려 있듯이 구약의 모든 가르침은 사랑의 두 계명이라는 줄에 걸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해석의 원리를 가르치십니다. 첫째, 이웃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동등하게 중요하므로 두 계명을 함께 묶어서 순종해야 합니다. 레위기 19:18이 포함된 문맥인 19:11-18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제 예를 제시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웃은 제자 공동체의 구성원이나 유대인들에게 국한되지 않고(5:43-47: 누가복음 10:25-37) 제한이 없습니다(레 19:34). 둘째, 사랑의 두 계명은 구약의 핵심 가치일 뿐 아니라 구약을 해석하는 원리를 제공합니다. 두 계명에 걸려 있는 어떤 율법도 가볍게 여길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의 두 계명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 계명에 따라 살아낸 열매가 최후 심판에서 하나님의 참 백성인 것을 입증하는 근거와 평가의 잣대가 될 것입니다(7:21-23: 25:31-46).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과 대답(41-46)

예수님께서는 시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육신적 후손이지만 그의 주가 되십니다. 단지 다윗의 영화를 재현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윗의 지상 보좌를 회복하는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그는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과 사랑의 대상이 되실 분입니다.

 

41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41-46)

 

본 단락은 다섯 개의 논쟁과 세 개의 비유를 마감하는 역할을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제까지는 적대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다면, 본 단락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선제적으로 질문하십니다. 이번에도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해석해서 원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하시고(42ab), 그들은 다윗의 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42c). 다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질문을 하시고(43-45),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46).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누구의 아들인지 물으십니다. 그를 다윗의 자손으로 해석하는 것을 활용해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 사실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리스도에 대해, 이어서 그리스도가 누구의 아들인지 질문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사무엘하 7:12; 역대상 17:11-14; 이사야 11:1; 예레미야 23:5-6; 33:15; 에스겔 34:23-24). 다윗의 아들은 왕적인 메시아에 대한 칭호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윗 왕과 같은 왕의 역할을 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시 같은 왕의 역할을 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로 이해하는 대답은 옳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아들은 인간이지 신은 아니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신적인 존재임을 암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로 부른다면, 성령을 통해 영감을 받은 다윗이 왜 그리스도, 곧 자신의 후손을 ‘주’로 불렀는지 질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넣어서 다윗이 시편 110편의 저자인 것을 강조하십니다. ‘성령으로’(έν πνευματι)는 시편 110편을 선지자적인 본문으로 보게 하며 이 본문이 ‘성령의 영감으로’ 다윗을 통해 주어진 것을 내포합니다.

 

신약 저자들이 만물을 다스리는 예수의 유일한 신적 권위와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시편 110:1을 적용한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보캄은 제 2성전기 유대교 문헌 전체에서 욥의 유언서 33:3을 제외하면 시편 110:1이 사용된 곳은 없다고 관찰했습니다. 초기 유대교의 어디에서도 시편 110:1이 지금 또는 미래에 하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하늘에 승귀한 인물들(천사들이 나 족장들) 중 하나에게 적용된 적이 없습니다. 초기 유대인들의 기대 사상에서 메시아는 하늘에서 우주를 통치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땅의 통치자였습니다. 시편 110:1을 예수님의 지위에 적용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독립적인 주장입니다. 예수님의 견해에서 앞의 주는 하나님이시고, 뒤의 ‘내 주’는 메시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주로 부른 메시아에게 ‘네 원수’(메시아의 원수)를 ‘네 발 아래’(메시아의 발아래) 둘 때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으고 하십니다. 이 표현은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신원하시고 승리를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부터 재림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통치하실 것입니다. 아버지(선조)가 어떻게 후손을 주로 부를 수 있습니까?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권위 아래 있던 가부장적 사회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본문은 다윗의 아들(인간)인 예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기 이전에 이미 신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혈통적으로는 다윗의 아들이지만 하나님과 유일한 관계를 갖고 계시는 선재하신 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해석에 대해서 답하지도 묻지도 못합니다.

 

21:23-22:46의 맥락에서 본문에 접근해보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21:23-27)과 그리스도에 대한 예수님의 물음(22:41-46)은 서로 대칭을 이룹니다. 자신의 권위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통치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22:43-44).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보좌 우편에서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서 버림 받아 죽지만, 원래는 하늘에 선재하셨던 분입니다.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주를 통치하십니다.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원수를 완전히 굴복시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단순히 중보자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충성하고 순종해야 할 왕이십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통치를 확신함으로써 땅의 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그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사적 이미지를 덧입혀 전쟁을 정당화하는 호전적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 할 말을 잃습니다. 그들이 꿈꾸는 기독교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의 예수 이해는 어떻게 합니까?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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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6-01) 

 


절망에서 하나님께 항변하는 욥

욥기 16장 1-17절


재난을 맞아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격려입니다. 실제적 해결책은 줄 수 없어도 자신을 정서적으로 지원하고 격려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은 점차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욥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친구들은 혹독한 비판자가 되었습니다. 이에 욥은 격앙된 감정으로 항변합니다.

 

  • 두번째 라운드의 엘리바스는 더욱 원색적인 표현으로 욥의 무지와 죄를 비난하며, 욥의 아픔과 고난에서 더욱 멀어진 원론적인 인과응보론을 설파합니다. 이 논리는 결과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그 고난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지혜가 깊은 고난을 겪어 보지 않은 자들이나 할 수 있는 소리라고 비난하며 자신의 고통에 집중하고 공감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16장에서는 완전히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진 욥의 아픔이 절절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친구들을 향한 욥의 탄식(1-6)

종종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상황과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경우를 들을 때,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위로하려면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다른 이의 고통을 품고 근심을 나누어야 합니다(히 4:15).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3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4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5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6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1-6)

 

엘리바스가 마치 엄청난 비밀인 것처럼 늘어놓은 지혜는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이며, 욥기를 읽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지극히 평범한 규범적 지혜였습니다. 욥의 첫 반응은 그래서 ‘그와 같은 것들은 나도 아주 많이 들어봤다’라는 것입니다(2). 욥은 엘리바스뿐 아니라 세 친구 모두를 ‘고통의 위로자들’이라고 평가합니다. 이 표현은 일종의 형용모순으로, 그들의 위로가 고난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더 가중시키고 있다는 역설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엘리바스의 이전 발언에서 고통은 악인이 (뇌물을 받는 등) 악을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엘리바스의 주장(15:34)을 되받아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욥이 도전하고 반항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친구들의 말이고 신학입니다. 욥의 말을 ‘거센 바람’ 혹은 ‘뜨거운 동풍’과 같다고 비난한 친구들의 평가에 대해(8:2; 15:2) 욥은 그들의 말이야말로 ‘바람의 말’이라며 동일한 평가를 되돌려줍니다(3).

대체 욥이 그 친구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욥은 그들에게 해를 가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에게 되묻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대답할 정도로 내가 한 말 중에 무엇이 너희를 그렇게 자극했냐고 묻습니다(3). 욥의 말은 단순히 (1) 나는 너무 고통스럽다, (2) 이 고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3) 그러나 나는 이런 ‘징벌’을 받을 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다 라는 것입니다. 어느 말도 친구들을 겨냥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 없는 자에게 고난이 임할 수도 있다는 주장은 친구들의 신앙(규범적 지혜)의 근본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도 친구들의 위치에 있었다면 그들이 한 것과 같은 “그럴 듯한 말”로 조롱하며 고통 받는 자에게 2차 가해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4). 4b절의 ‘머리를 흔들다’라는 표현은 조롱과 경멸과 꾸짖음의 의미를 갖는 숙어적 표현입니다(참조, 왕하 19:21; 시 22:7; 109:25). 이 말을 뒤집으면, 친구들이 지금 하고 있는 말과 행위는 만약 욥의 처지에 있었더라면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친구들은 고통 받는 자와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위치에 그대로 서서 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죄한 자의 고난’을 겪고 있는 욥이라면 두려워하는 자를 굳건히 잡아주고 고통 받는 자의 마음을 위로해줄 말을 했을 것입니다(5). 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무리 말로 표현해도 고통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그 고통이 저절로 사라질까?’(6) 말을 해도 말을 하지 않아도 괴로움은 여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에 대한 탄식(7-17)

의로운 자가 고난을 당하는 현실은 죽음같이 가혹합니다. 더욱 잘못된 조언으로 더 깊은 좌절감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에서는 신앙에 회의를 느낄 것입니다. 바닥이 꺼져버리는 듯한 어려운 현실에서도 올바른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께 게속 믿음의 닻을 내려아 합니다. 믿음의 항해에서 고난의 폭풍을 만나 휩쓸려 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7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8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9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10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11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12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13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 없이 나를 쏨으로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14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15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16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17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7-17)

 

7-16절은 ‘하나님을 향한 탄식’이라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탄식’입니다. 욥은 7b절과 8절에서만 하나님을 2인칭으로 호칭할 뿐, 그 외에는 모두 하나님을 3인칭으로 부릅니다. 이 호칭 변화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욥기뿐 아니라 다른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도 호칭의 변화는 상당히 자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개역개정 등의 번역 성경은 일관성 있게 인칭을 수정하여 번역하기 때문에 번역 성경만으로는 이러한 히브리어의 특징을 파악할 수 없다).

욥의 항변은 친구들을 향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또한 욥기를 읽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욥은 친구들 혹은 독자들에게 자신에게 고통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신 일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친구들이 주장하듯 욥의 악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를 다른 어휘로 반복해서 표현하는 것을 평행법(parallelism) 혹은 대구법이라 합니다. 평행법은 히브리어의 산문(prose)과 운문(poetry)을 나누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평행법으로 되어 있으면 운문이고 그렇지 않으면 산문입니다. 이 평행법이 주는 효과는 다양한 어휘들을 통해 형식의 아름다움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하거나 혹은 명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복과 변형을 통해 욥은 자신이 현재 처한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를 알리고자 합니다. 욥을 가르치려고 하고 바꾸려고 하는 친구들의 논의에서 빠진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얼마만큼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너덜너덜하게’(“피로하게”) 만드셨고 욥의 모든 집안 식구들(자녀들과 종들)을 끝장내셨습니다(7). 그분께서 욥을 꼼짝 못하게 붙들어 놓으셨다는 것은(“시들게”가 아니라) 분명한 사실입니다(8). 개역개정의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8)에서 “증거”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욥을 보고 하나님의 징벌이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내렸음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증거, 혹은 단순히, (2)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증거. 욥은 인과응보의 개념으로 자신의 고난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후자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8b절에서도 욥은 ‘그분이 나를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내 몰골이 증언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후자의 의미와 평행합니다. 하나님의 분노(직역하면 ‘그의 코’)가 욥을 찢어발기고 욥을 향해 이빨을 갈면서 으르렁거립니다(9a). 욥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은 날카롭게 뾰족합니다(9b). 욥의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수직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친구들을 비롯한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도 결코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람들은 욥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욥을 모욕하고 뺨을 후려갈깁니다. 한 사람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모두 다 같이 욥을 공격합니다(10).

욥은 이 사람들을 ‘애송이들’(“악인들”)이라고 지칭합니다. ‘아빌’은 나이 어린 소년이나 청년을 지칭하는 규범적 지혜의 단어로, 지혜가 없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참고로 19:18에서 “어린 아이들”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어린 것들’이 곧 “행악자들”(나쁜 사람들)입니다. 지혜가 없는 악인은 욥이 아니라 욥을 공격하는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우매한 자와 나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벌이 내리는 규범적 지혜의 원리가 작동한다면 천벌을 받아야 할 이들은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욥 자신은 아무 문제없이 살아왔으나 하나님께서는 마치 자신을 향해 전쟁을 벌이는 용사처럼 행하셨습니다: “꺾으시며”, “부숴뜨리시며”, “과녁을 삼으시고”(12),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14). 그분이 쏘신 화살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욥의 심장(히브리어로는 “콩팥”)을 쪼개고 온 내장을 땅에 쏟게 하셨습니다(13). ‘베옷’은 주로 상을 당했을 때 입는 옷으로 깊은 슬픔을 표현합니다(창 37:34; 삼하 3:31; 사 3:32;15:3;22:12; 렘 4:8;6:26; 겔 7:18;27:31; 욜 1:8; 암 8:10; 시 30:11;35:13;69:12; 애 2:10; 느 9:1). 욥은 슬픔의 상복을 너무 입어서 아예 그 옷이 자신의 피부가 되어버렸다고 고통을 호소합니다: ‘나는 베옷을 내 피부에 꿰매 놓았다’(15).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라는 표현은(15) 가시적으로는 머리를 땅에 처박은 상태를 가리키며, 심리적으로는 패배와 슬픔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뿔”을 높이 드는 것은 힘과 승리를 상징합니다(2:1,10; 75:4-5, 10; 89:24; 92:10; 112:9;148:14). “더럽혔구나”로 번역된 ‘올랄티’는 ‘집어넣다’라는 의미로, 욥의 고통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슬픔이 너무 깊은 나머지 욥은 너무 울어서 얼굴이 붉어졌고 눈꺼풀 위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정도입니다(16). 그러나 욥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결코 자신의 죄와 악행 때문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이런 ‘폭력’을 당해도 마땅할 정도로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은 결코 무엇인가 악하고 잘못된 것을 바란 적이 없습니다(“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무죄와 정결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시편의 탄원시(시 7:3-5;17:1-5; 26:1)과 궤를 같이합니다.


욥은 친구들이 위로해 주지 않는 현실에 낙담했습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무능한 질택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선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자신을 고난에서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하나님과 변론하고자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 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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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2-03)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에 답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2장 23-33절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사는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될 수만 있으면 믿지 않으려고 주정하는 존재들입니다. 믿어야 할 이유가 수만 가지 있어도, 믿을 수 없는 이유를 찾기에 골몰합니다. 그러다가 자신만의 한 두 가지 이유를 찾으면, 그것으로 객관적인 수많은 진리와 증거들을 모두 거부합니다.

 

  • 두 번째 종교지도자 그룹으로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특징인 그들이 예수님에게 부활을 묻습니다. 유대교 내에서 부활은 분파를 가르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난감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던진 질문 자체의 오류를 지적하시고, 더 나아가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들춰내시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선명하게 계시해 주십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한 사두개인들(23-31)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논리에 매여 있기에 부활의 본질이나 능력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한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어리석은 일로만 여깁니다(고전 2:14). 세속적인 논리를 버리고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이 지나간 자리에 이제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23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23-31)

 

자신의 기득권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한 종교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과의 논쟁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계속 시도합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물러난 그날에, 사두개인들은 신학적 이슈인 부활에 대한 질문을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앞에서는 세금 납부의 문제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더니, 본문에서는 신학적인 문제로 예수님을 믿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1)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23-28)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파처럼 부활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16:21; 17:22-23: 20:17- 19). 부활이나 천사를 믿지 않은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는 교리이고 이성적으로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제기한 문제는 모세의 수혼법에 따라 일곱 남편을 둔 여인이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 하는 질문을 통해 부활 신앙의 맹점을 지적했습니다. 어떤 남자가 대를 이을 자녀를 남기지 않고 죽으면, 그의 형제들이 남은 아내와 결혼을 해서 자손을 세워야 한다는 모세의 기록을 언급합니다. 신명기 25:5-10에 기록된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와 창세기 38:8의 내용을 연결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일곱 명의 형제가 한 명의 여자와 결혼한 예를 듭니다. 장남이 죽고 나서 차남부터 일곱째 형제까지 형수와 결혼했지만 모두 (자녀를 남기지 않고)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여자도 죽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있다면 부활 때에 일곱 남편 중에서 누가 아내의 남편이 되는지 묻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몸의 부활은 현재의 세상과 단절된 저 너머 세상의 삶이 아니라 현재의 생애와 연속되는 것이므로, 부활 교리는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만일 어떤 남자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는데도 하나님꼐서 죽은 남자를 살릴 것인지(하나님의 뜻), 과연 살릴 수 있는지(하나님의 능력) 질문합니다.

 

(2) 사두개인에게 대답하신 예수님(29-31)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두개인들이 틀렸다고 하십니다. 사두개인들은 헤매는 양처럼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헤매고 있습니다. 왜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대해서 잘못 해석하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십니다. 첫째,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오해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때 일어나는 두 가지 연결되는 일들을 언급하십니다(30). 부활 때에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됩니다. ‘부활 때’는 의인들의 ‘부활 상태에 있어서’에 가깝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천사처럼, 되는 사실과 이 세상 너머의 세계를 강조하려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거론하십니다. 하늘의 천사들처럼 된다는 내용은 다니엘 12.3에서 온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 성적인 관계를 맺고 자녀를 출산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결혼이 땅의 일이며 임시적인 관계라는 사실은 연속성을 강조하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해답입니다. 부활한 사람은 땅에서 살았던 사람과 동일한 인물이지만(연속성), 부활한 사람의 몸은 썩지 않는 몸으로, 천상의 존재로 변화될 것이기에, 그 사람의 상태 혹은 조건은 달라진다(불연속성). 물론 동일한 인물이라고 해도 새로운 몸으로 갱신될 것이기에 지상에서 가졌던 성품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했는지 물으십니다(31).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는 마태복음에서 반복되는 표현으로서(12.3; 19:4, 21:42,46)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도전하실 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29절의 ‘오해하였도다’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말씀인 출애굽기 3:6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사두개인들에게도 주어졌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일이 성경을 근거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에게서 일어날 수 있음을 본문의 논쟁이 잘 보여줍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잘못된 행위로 이어집니다. 바른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문제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출발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의 독자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읽어야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읽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32-33)

사람들이 너무 현실적이다 보면, 이처럼 내세에 대한 소망이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적당히 긴장감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영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두개인들의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32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32-33)

 

모세오경에 신학의 근거를 두는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출애굽기 3:6을 인용해서 그들의 무지를 지적하십니다. 출애굽기 3:6에서 하나님이 광야의 가시덤불 가운데 나타나 모세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누구의 하나님’은 도와주시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이 표현은 하나님이 조상들이나 후손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언급할 때 사용됩니다(출 2:24, 3:6,15,16). 언약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죽은 이후에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은 상태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현재적으로 함께 계십니다. 어떻게 이런 논리가 성립될 수 있습니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몸이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이들의 몸은 썩어 뼈로 남아 있을지라도, 마지막 날 몸의 부활을 하는 때까지 현재 살아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약 관계는 어떻게 유지됩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부활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계셨던’ 과거 형의 하나님이 아니라 ‘계시는’ 현재형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두개인들은 해석의 근거로 삼는 오경에 나타난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들의 하나님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억할 점이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육체의 부활을 한 상태가 아니며 하늘에서 임시 상태로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중입니다.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재림 전까지 의인들은 하늘에서 부활의 상태를 미리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의 끝에 일어날 부활을 믿는 신앙에는 의인들이 죽음 직후에 하늘에서 경험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부활과 죽음 직후의 (하늘에서의) 임시 상태는 배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근거를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는 죽음으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죽어도 하나님과 함께 교제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란 내가 죽어도 산다는 것이 아니라 몸이 사나 죽으나 하나님과 함께 언제나 살아서, 교제한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조상들에게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은 사라지지 않고 언약 백성,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사변적이지 않습니다. 언어유희로 정서를 만족시키는 종교도 아닙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부활의 능력을 믿는 신자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경을 바라보고 바로 이해하고 바르게 이해하길 힘써야 합니다. 무지는 오해를 낳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고, 모세오경에서는 부활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수혼법에 따라 일곱 형제의 아내였던 여자가 일곱 형제 모두가 부활한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수준에서 부활을 오해하고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어리석은 논리였습니다. 혹시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성경과 신앙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우리는 오늘도 셩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오늘도 예수님을 통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성경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르게 바라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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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2-02)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가르친 예수님

마태복음 22장 15-22절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뒷받침하는 말씀으로 사용된 본문입니다. 세속과 영역, 국가와 교회의 영역을 나누고,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을 구분하였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가 그의 나라에 온전히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 본문에서는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사람들이 로마 정부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드러내시며, 하나님께 충성의 대상인 것을 강조하십니다.

 

바리새인의 악함을 드러내신 예수님(15-20)

악한 자는 간계로 행하나 주님의 사람은 참되고 진실해야 합니다.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간교한 계략에 넘어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15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15-20)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고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논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들은 세금이라는 질문으로 예수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확신과 계획 가운데 예수를 급습했습니다.

적대자들은 로마의 가이샤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세금은 17:24-27의 성전 세금이 아니라 로마에 바치는 세금입니다. 가이샤는 율리우스 가이샤가 사용한 로마 황제의 칭호입니다. 이 칭호는 특정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로마 황제를 가리킵니다. 예수 당시의 황제는 티베리우스였습니다(주후 14-37년 재위). 이들은 이방 정부와 통치자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합한 것인지 묻습니다.

 

왜 세금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세금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로마의 법질서에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적대자들은 성전 정화 사건과 결부시켜서 예수님을 선동자로 로마 당국에 고발할 수 있습니다. 세금 징수에 동조하면 로마의 통치에 반감을 가진 백성은 예수를 지지하던 데서 등을 돌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백성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예수를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헤롯 사람들의 악함을 간파하십니다(참조. 9:4; 12:34; 16:1; 22:18). 마치 사탄이 시험한 것과 같이(4:1-11) 이들은 예수님을 제거할 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험하는 이들을 위선자들로 부르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중요한 개념인 위선은 불일치나 모순을 뜻합니다. 이들은 세금 관련 질문을 함정에 빠뜨릴 올가미로 사용하면서도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면서 배우는 척 묻기에, 이들의 언행은 마음의 숨은 의도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세금으로 내는 주화를 보여달라고 하자 한 데나리온을 가져왔습니다. 로마의 데나리온(라틴어로 denarius)은 신약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 주화입니다(마태복음 18:28, 20:2이하; 22:19; 마가복음 6:37; 12:15; 14:5; 누가복음 7:41; 10:35; 20:24; 요한복음 6:7, 12:5; 요한계시록 6:6). 세금으로 내는 데나리온은 당시의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형상과 그에 관한 글이 새겨진 주화를 말합니다. 제국은 황제의 형상(얼굴과 글귀가 새겨진 주화를 황제 숭배를 장려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유대 통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데나리온으로 로마에 세금 내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일신 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은 황제를 하나님의 아들과 대제사장로 묘사하는 주화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왕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을 소지하거나 사용하는 것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고 여겼습니다. 신으로 표현된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것은 두 번째 계명에 어긋나며(출애굽기 20:4), 하나님 외에 하나님의 아들 또는 신으로 불리는 황제를 지칭하는 것은 첫 번째 계명에 어긋나는(출 20:3) 우상숭배였습니다.

이처럼 민감한 상황을 알았던 로마 당국은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금화나 은화는 타국에서 주조해서 팔레스타인에서 인두세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외의 상업 활동이나 일반 생활에서는 황제의 형상이 없는 동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화를 가져오라고 하시자, 바리새인들은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을 가져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주화를 소지하고 있었던 장면은 역설적입니다. 백성은 바리새인들이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주화를 사용하지도 소지하지도 않는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드러내기 위해 주화를 달라고 하십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21-22)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모든 이 세상의 호라동 중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는 것이 없기에, 우리는 삶의 각 영역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전인적인 신앙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십니다.

 

21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21-22)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화에 새겨진 형상과 글귀가 누구를 가리 키는지 질문하십니다(21). 이 주화에는 당시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형상과 그에 대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 주화의 한 쪽 면에는 면류관을 쓴 황제 티베리우스의 형상과 함께 둘레에 TI CAERAR DİVI AVG F AVGVSTVS(티베리우스키 카이사로 존엄자, 신적 존엄자의 아들)라는 글귀가 새겨졌고, 반대쪽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새겨졌습니다. 여인은 평화(PAX)의 현현을 상징적으로 새겨졌습니다. 황제의 아내인 ‘리비아’로 추정됩니다. 여인의 모습과 함께 PONTIF MAXIM(‘최고의 사제’ 또는 ‘최고의 대제사장’)이 새겨져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주후 15년 3월 10일에 대제사장이 됐습니다.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킬 때나(고린도전서 11:7; 고린도후서 4:4; 골로새서 1:15; 3:10) 우상숭배와 관련된 사물이나 사람을 나타낼 때(로마서 1:23; 요한계시록 13:14-15) 사용됩니다. 본문에서 형상은 주화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가이사의 것들’이라고 말한다. 주화의 주인은 황제이므로, 이 주화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황제에게 속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셈이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왕이라고 외치던 자들에게 ‘가이사의 것’이라고 말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이사의 것들’이나 ‘하나님의 것들’에서 ‘∽ 것들’은 수식하는 명사에게서 받은 혜택이나 관심을 뜻합니다. 가이사의 것들과 하나님의 것들은 수혜를 입은 자들이 응답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21절의 ‘카이(Kai)’는 단순한 두 내용을 연결해주는 ‘그리고’의 의미 그 이상이며, 본문의 강조점을 고려할 때 역접 접속사 ‘그러나’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합니다(시편 24:1; 이사야 41 :2). 사람뿐만 아니라 제국이나 식민지 모두 하나님께 속합니다. 로마의 황제는 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충성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황제 역시 하나님께 속한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그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것을 황제의 권위로 제자들에게 요구한다면 그들은 가이사에게 돌아갈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면, 즉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돈을 카이사르에게 세금으로 내는 것이 옳다면, 더 확실한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충성해야 하는 유일한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은 국가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면서도 하나님을 유일하게 섬길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6:24). 국가에 대한 충성을 명목으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소홀히 여기는 일은 하늘나라 백성이 지지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국가에 무조건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면서 국가의 정책과 흐름에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게 백성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거나 우매화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단호히 그 길이 옳지 않음을 파악해야 합니다.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교훈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돌려지지 않는 권력과 영광은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가 권력에 아부하고 교회의 구성원들이 권력과 부를 추구할 때 세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동등하게 보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더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황제에게는 그가 만든 동전을 돌려주면 되지만, 하나님께는 인격과 생명 전체를 드려야 합니다. 세금을 바쳐야 할 것으로 알면서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주저한다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섬김과 사랑을 받으실 분이라고 고백하며 헌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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