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26-04)
하나님 아들임을 시인한 예수님과 부인한 베드로
마태복음 26장 57-75절
어떤 상황에도 당신은 주님을 인정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당신과 주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어떤 상황에서도 인정할 때, 주님도 당신을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닭이 울 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통곡하였습니다. 자신의 무지를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 제자들은 모두 도망치고 홀로 붙잡힌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공관으로 끌려옵니다. 베드로가 멀찍이서 뒤를 쭟으며 진행 과정을 목격합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각본에 따라 재판이 진행됩니다. 일차적으로 사형이 언도되자 예수님에게 폭력과 수치가 가해집니다. 그 시각 공관 뜰에 있던 베드로 역시 비공식적 심문받게 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강력하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합니다.
유대 법정에 선 예수님(57-68)
탐욕과 불의에 물든 권력은 거짓과 가짜 뉴스를 생산합니다. 권력이 남용된 곳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면 생명의 대가를 지불 해야 합니다. 신성모독죄는 배제와 쉬운 제거가 가능한 안성맞춤의 카드입니다. 데제사장들의 기득권의 날조와 교살 의지를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다.
57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57-68)
본 단락은 가야바와 예수님의 대립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과 가야바를 대립시켜서 누구의 권위가 더 높은지를 보여 주려고 시도합니다. 심문 장면을 통해서 예수님과 가야바의 충돌에 나타난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종말의 하늘) 법정과 가야바의 (땅의) 법정의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한 자들은 그를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고 갔습니다(57).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의 집과 같이 별도의 장소에서 열릴 수 있었습니다. 무리에게 체포되셔서 가야바의 집에 새벽까지 심문을 받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아침과 저녁에 두 번 심문을 받았다고 언급합니다.
잠시 장면이 바뀝니다(58).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까지 왔습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과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초점을 다시 예수님의 심문 장면으로 돌립니다(59). 유대 법정은 ‘거짓 증인들’에게서 ‘거짓 증언’을 찾고자 합니다. 유대 법정은 예수님을 죽일 권한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서 로마(또는 빌라도)의 법정을 압박할 사유를 찾고자 합니다. 거짓 증언을 할 사람들은 많이 왔지만 산헤드린은 거짓 증언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60-61). 두 증인의 증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대답을 재촉합니다(62),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63), 예수님의 침묵은 고난 받는 종의 침묵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사 53:7).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진실을 변호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침묵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사 53:7).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실을 변호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침묵이 길어지자 대제사장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걸고 맹세하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인지 말할 것을 요구합니다(63).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합니다(64). 당시에 누군가 자신이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자신이 신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야바의 정죄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4)는 예수님의 선언 뒤에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신성모독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64절은 시편 110:1과 다니엘 7:13-14을 인용한 내용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적인 위치에 있다고 밝힙니다. 64절의 배경이 되는 다니엘서 7:13-14은 하늘 의회(보좌/법정)의 전형적인 본문입니다. 구약과 유대 묵시 문헌에서 하늘 의회의 주요 기능은 재판입니다. 유대 법정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신의 위치에 놓으며 유대 지역의 안정을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을 능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신적인 권위를 부여받아 이스라엘의 안정을 책임지고 있다고 믿었던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옷을 찢으면서 신성모독의 죄로 예수님을 정죄합니다(65). 예수님께서는 하늘 법정의 그림으로 자신이 천상 세계에 속한 신적인 존재요 하늘 법정에서 산헤드린을 재판할 것을 암시하여, 신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지도자들, 그것도 대제사장을 공격했기에, 가야바는 예수님을 향하여 ‘신성모독’이라고 외칩니다. 어느 법정, 누구의 권세가 더 강한가? 정답은 예수님과 하늘 법정입니다. 가야바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특권을 지녔기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자인 예수님께서는 지성소의 본체인 하늘 또는 하늘 보좌에 앉을 것이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하늘 법정을 주재할 것입니다. 땅의 현실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유대 법정이라는 최고의 권세 앞에 죄수로 서서 치욕을 당하는 모습이지만, 하늘의 진리는 이 죄수가 하늘과 종말의 심판자로 와서 그들을 앞에 세워 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예, 25:31-32). 미래에 일어날 대역전의 암시는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주를 부인하지 않도록 격려합니다(참조 10:32-33).
베드로의 부인과 통곡(69-75)
수련 없는 신앙은 갑 속에 든 칼과 같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껍데기 신앙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진리에 기초한 담대한 신앙이 대조됩니다. 형식적인 신앙은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그 진상을 낱낱이 드러냅니다. 제자도는 평생 배움의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을 닮기를 연마하는 것입니다.
69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69-75)
유대 법정에서의 재판 중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69). 한 여종이 베드로 앞으로 와서 그의 얼굴을 보고는 예수님의 일행인 것을 알아챕니다(70).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는 중이고 그 강도가 세지면서 베드로의 마음에 두려움이 심해졌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과 어떤 관련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70). 베드로는 앞문으로 갑니다(71). 이는 자리를 떠나 도망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가리켜 나사렛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를 하면서 예수님을 부정합니다(71). 예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잠시 뒤에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갈릴리 지방 억양을 듣고는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가 틀림없다고 말합니다(73).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맹세합니다(74). 그때 닭이 울자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베드로는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마음이 찢겼습니다.
베드로의 몰락은 그가 연약한 인간임을 드러냅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계시에 가장 근접했고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성경의 기록에서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기적, 곧 물 위를 걷는 수준의 믿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위협 앞에서 얼마 전에 자기 입으로 내뱉었던 고백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마태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를 최고의 제자로 묘사하지만 동시에 연약한 인간임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인간의 연약함을 볼 수 있도록 만듭니다. 아무리 최고 수준의 훈련을 받은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연약한 인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닭이 세 번 울고 나서 통곡한 모습은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사실적이고 진솔한 상태입니다. 오만은 타락의 지름길입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서 오는 장벽을 무서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실제 모습을 감추며 강한 척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존경과 관심을 얻을 수는 있겠으나 무너질 때는 한순간입니다. 신앙의 영웅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배신과 부인과 통곡을 통해서 지도자를 영웅시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향유 부은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에 따르면 복음은 주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의 헌신과 함께 전해지고 그 삶이 기억되는 것이지 그 사람의 이름이 우상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구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은 연약한 인간들이었습니다(모세, 노아, 다윗, 솔로몬 등).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같은 위치에 있는 지도자를 영웅시하지 않을 때 교회도 건강하고 그 지도자도 몰락의 길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모았거나 능력 있는 은사를 행하거나 화려한 설교로 청중을 끌고 다닌다 할지라도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인간임을 본인도 알고 보는 이들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긍휼 외에는 베드로의 회복을 설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다시 복음 사역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몰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0:32-33에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시인하면 하늘에서도 그 사람을 부인하거나 시인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면 베드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이 보여 주는 그림을 보면, 하나님의 긍휼로 그는 다시 세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통곡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구원 역사에 쓰십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할 때, 순식간에 넘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씨를 문제 삼으며 그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 다그치자 그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합니다.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던 큰 소리가 죽어도 주님을 모른다는 큰소리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세 번이나 잠들었기에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 힘을 빼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험과 위기 앞에서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주를 의지하는 기도 없이 장담과 과시는 금물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 기도 없는 신앙은 여종의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는 나약한 믿음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하고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의 길을 따라 순종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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