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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3-01)

 


모세의 축복 : 지파들의 축복(1)

신명기 33장 1-17절


성도는 이 세상에서 몸답고 살아갑니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여수룬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갑니다. 세상은 자신을 의지하라고, 즉, 하나님보다 재산과 학식과 그리고 인간관계에 더 의지해야 한다고 속삭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그분이 주시는 복을 힘입어 사는 존재입니다. 복의 군원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어떤 분이시겠습니까?

 

 

본문은 임종을 앞둔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한 유언이자 축복의 노래의 전반부이며, 더 이상 질책과 훈계와 경고, 저주의 선언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온전히 희망찬 미래에 대한 축복만이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이 예언적 축사는 오경에서 가장 어려운 본문으로 꼽힙니다. 드문 단어들이 나열되고, 많은 문법적, 구문론적 어려움이 있으며, 뜻 자체도 매우 모호한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서문 :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1-5)

모세의 마지막 유언적인 축복의 노래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우선 1절은 모세의 이 노래를 도입하는 서사적 진술이며, 2-29절이 시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2-5절 서언(Exordim), 6-25절 지파들의 축복; 26-29절은 종언(Code)입니다. 각 지파를 축복하는데 시므온 지파만 누락되어 있는데, 불행히도 축복해야 할 미래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중에 시므온의 후손들은 유다 영토로 흡수됩니다(여호수아 19:1,9; 창세기 34:25).

 

1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2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3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4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 5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수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한 때에로다(1-5)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영웅이며, 광야 40년 동안 불순종하던 이스라엘을 인도했고,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문 앞까지 인도한 위대한 지도자 모세에게 놀랍게도 죽음을 선고하십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새로운 시대 사람’이 아니라 ‘옛 시대 사람’으로 정하셨습니다. 그가 행한 단 한 번에 불순종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냉정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그의 존재 차체가 가나안 정복의 장애가 되며, 또한 여호수아의 지도력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의 존재보다 그의 사라짐이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서언은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임재의 현상으로 묘사하면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이 거쳐간 시내 산, 세일 산, 바란 산은 특정한 산봉우리라기보다는 높은 산지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바란 산에서 비치고 오른손에 번쩍 이는 불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영광의 광채로 임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바란 광야에 거하고 있을 때에도 그 영광의 빛을 발현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수많은 성도 가운데 임재하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시내산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했던 풍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토라) 자체를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라고 율법이 상속받을 재산이요 기업이 된다는 것이 강조됩니다(시편 119:11). 이스라엘은 여수룬 백성입니다. ‘여수룬’은 앞서 32:15에서 살펴본 대로 ‘올바른 자’, ‘곧게 선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의 별명입니다.

 

각 지파들을 향한 축복(6-25)

모세가 각 지파를 위해 축복한 본문을 읽고 있으면, 창세기 49장에서 요셉이 12지파를 위한 축복한 예언과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신명기 본문에 집중해서 해석하겠습니다.

 

⑴ 르우벤 지파(6)

 

6르우벤은 죽지 아니하고 살기를 원하며 그 사람 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6)

 

첫 번째 등장하는 지파는 르우벤으로 야곱의 장자입니다. 그에 대한 축복권은 단 한 줄로 도입부가 없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의 자리는 선두에 배정했으나, 그의 축복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여 단 한 줄에 그칩니다. 그가 장자 지파지만 장자의 축복권을 실질적으로 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레아의 아들이자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 지파가 수적으로는 소수(창세기 34:30: 신명기 4:27; 예레미야 44:28; 시편 105:12; 역대상 16:19)이나 그의 후손이 끊이지 않을 것을 기원합니다. 물론 독법에 따라 수가 많아지기를 소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야곱의 유언은 서모를 범한 르우벤의 소행 때문에 부정적이었으나(창세기 49:3-4), 모세의 유언은 다소 긍정적입니다.

실제 이후의 역사에서 급격히 침체의 길을 걷습니다. 창세기 49장 야곱의 예언에서 그는 ‘물의 끓음’과 같은 성급한 기질과 분별력 없는 성격을 지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죄악을 저지른 일로(창세기 35:22) 더는 ‘탁월하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를 받습니다(창세기 49:4).

르우벤의 실질적인 장자권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넘어갑니다. 장남의 특수한 위치는 통상적으로 두 배의 지분과 지도권을 보장받습니다. 법적으로는 르우벤이 일련의 계보들 속에서(창세기 49:3-4: 출애굽기 6:14; 민수기 26:5; 역대상 5:1) 장남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지만, 실제 두 배 몫은 요셉에게 배당됩니다(참조 창 48장).

16절은 르우벤이 인구가 줄어 간신히 유지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민수기를 보면 다른 지파와 비교해 볼 때 평균치를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 시대 이후로 요단 동편에 있던 그들의 땅이 갓과 길르앗 땅으로만 언급될 뿐 르우벤은 언급되지 않아 그들이 급격히 쇠퇴했음이 암시됩니다(사무엘상 13:7; 사무엘하 24:5). 그들은 요단 동편 땅의 동쪽에 자리한 여러 부족들의 공격을 받아 약해졌을 것입니다.

결국 주전 730년경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침략으로 다수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고 동쪽 유브라데 강 쪽으로 이주하면서 점점 흩어집니다(역대상 5:3-10).

 

⑵ 유다 지파(7)

 

7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의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의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가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7)

 

다음은 유대에 대한 축복입니다. 야곱의 축복에서(창세기 49:8-12) 유다는 장자권을 넘겨받지 않았으나, 온 이스라엘 지파를 이끌도록 지도권을 양도받는 지파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장차 그가 수행할 군사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크게 부각됩니다(민수기 2:3-4; 10:14; 그리고 사사기에서의 전쟁들, 사사기 1:1-19; 2-:18). 이후 유다 지파에서 다윗 왕이 등장하고, 그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십니다. 유다는 요셉을 구하고 언약 가족을 세우기 위해 희생했기 때문에 이런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창세기 44:18-34).

 

⑶ 레위 지파(8-11)

 

8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9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10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11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8-11)

 

레위 지파는 성직으로 임명된 특별한 지파입니다. 이 부분은 모세의 기도 중에서 둘째로 길며, 해석하기 어려운 점들도 많습니다. 여기에서는 야곱의 축복에 나타난 비제의적 측면보다는 상대적으로 제의적 축제의적 측면보다는(창세기 49:5-7) 상대적으로 제의적 측면(8-10)이 강조됩니다. 그들에게는 ‘우림과 둠밈’이 있다는 점이 강조되는데, 이는 대제사장의 흉패에 보관된 물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신탁의 도구입니다.

여기에서 레위인들이 맡은 신탁, 교육 그리고 제의적 업무가 언급됩니다. 레위지파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쓰는 ‘둠밈과 우림’을 맡은 ‘헷세드’의 사람들입니다. 우림과 둠밈은 레위인들을 통하여 특정한 질문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즉 ‘예’의 ‘아니오’)을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 신탁의 매체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백성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용된 여러 사건들이 시적 형태로 혼합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맛사와 므리바 사건 때에 백성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그들과 다투셨지만(모세와 아론으로 대표되는 레위인들, 출애굽기 17:1-1; 민수기 20:1-13; 신명기 32:51, 시편 81:7; 95:8-9; 106:32),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과 언약을 지키고 백성에게 계명과 토라를 전하기 위해서 부모와 형제와 자녀의 인연도 무시하였습니다(황금 송아지 사건, 출애굽기 32:25-29; 민수기 25:1-9).

이들은 여호와의 규례들을 야곱에게 여호와의 토라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여호와 앞에서 향(희생제물의 타는 연기, 참조. 사무엘상 2:16; 호세아 4:13; 11:2: 이사야 1:13)을 피우며, 여호와의 제단에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리는 것과 같은 직무를 받았습니다. 본격적인 레위에 대한 축복은 11절에만 나옵니다.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때 레위인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옳다면, 모세의 이 진술은 사건들을 뭉뚱그려 설명하는 신명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부모와 형제와 가족들에게 냉정하라는 레위인에 대한 명령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킨다’는 말로 미루어 볼 때, 성막에 봉헌된 특수한 신분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합니다.

레위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언약)’을 지켜 이 일을 우선시하므로, 부모와 가족들에게 더는 우선순위를 둘 수 없었습니다. 특히 대제사장의 경우 직계 가족이 사망해도 장례에 가지 못했습니다(레위기 21:11). 그들은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성막에서 백성의 모든 제사, 특히 매일의 아침과 저녁의 번제를 맡았습니다. 이러한 직무를 수행하는 레위인들이 비록 땅을 분배받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부족함 없이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11). 그들이 특별히 원수의 허리를 꺾는다는 것은 실제로 레위인들이 전쟁에서 수행하는 중요한 임무를 지시 합니다. 전쟁 중에 제사장들은 법궤를 멘 뒤 실제 전투에서 싸우지는 않지만, 전쟁터의 최전선까지 앞장서 백성을 이끄는 역할을 했습니다.

모세는 여러 제사와 다양한 직무수행을 위하여 그들에게 힘(혹은 재산)을 주시기를 레위인들의 업무가 하나님께 용납되기를 원수들에게서 보호하시기를 간구합니다.

 

 

⑷ 베냐민 지파(12)

 

12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12)

 

베냐민은 야곱의 열두째인 막내이자 라헬의 둘째 아들입니다(창세기 35:18,24; 참조. 창세기 42:4,38; 44:1-34). 하나님께서는 베냐민을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는 것처럼 보호하실 것입니다.

모세는 야곱의 축복과 같이 군사적인 탁월성을 강조합니다. 모세는 베냐민 지파를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부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오래 함께하실 것이며, 그들이 여호와의 어깨 사이에 거할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애정과 보호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대 근동에서 아버지가 아이를 품에 안거나 목말을 태워 이동하던 관행에서 비롯된 유비입니다. 즉 모세는 베냐민 지파가 안전하게 거하기를 기원합니다.

훗날 베냐민은 남북 분열 시 유다의 보호 아래 남유다와 동맹하며 포로 귀환기에는 유다와 함께 국가 재건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열왕기상 12:21,23; 역대상 12:2,16; 역대하 15:9;25:5; 34:9,32; 스 1:5;4:5).

 

⑸ 요셉 지파(에브라임 므낫세/13-17)

 

13요셉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14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15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16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17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13-17)

 

이 부분은 모세의 축복에서 가장 긴 내용이며 야곱의 축복(창세기 49:22-26)과 유사한 점들이 많습니다. 요셉에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한 두 배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들은 하늘의 상수원과 땅의 지하수로부터 물이 넉넉히 공급되는 좋은 땅, 농사와 목축이 잘되는 기름진 땅을 얻을 것입니다. 넉넉한 일조량을 통해 열두 달 내내(‘태음’) 소산물이 잘 자랄 것입니다. ‘옛 산’은 당시 문화권에서 풍성한 자원들이 쏟아지는 곳을 의미했습니다. 이를테면, 목재, 돌, 금속, 귀금속, 과일 등. 실제로 요셉 족속의 땅 에브라임과 므낫세 반 지파의 요단 서편 땅은 삼림이 우거지고 나중에 많은 과수원이 개간되었습니다(여호수아 17:16-18).

므낫세 반 지파의 요단 동편 고원 지대도 좋은 숲과 목초지를 지녔다. 축복의 근원은 모세 가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 불타는 떨기나무에 현현하신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16). 그들은 ‘구별된 자’란 말을 들을 만큼 특별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북왕국 에브라임은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쏟아 붓고 배교의 길을 가고야 말았지만, 대단한 물질적 번영과 더불어 큰 영광을 누렸습니다. 요셉에게 실질적인 ‘첫 수송아지’의 권리, 즉 장자권의 축복이 옮겨왔습니다. 원래 르우벤은 ‘내 기력의 첫 열매’라는 수식어가 붙은 장자의 신분이었습니다(창세기 49:3). 그러나 그 별칭이 요셉에게 넘어갑니다. 장남이 통상적으로 두 배의 지분을 받는 것처럼, 요셉은 두 아들을 통해 두 배의 몫을 상속 받습니다. 다만 자손 번영의 축복은 므낫세보다는 에브라임에게 압도적으로 크게 주어질 것입니다.

 

요셉지파는 야곱이 가장 사랑한 지파이며, 모세의 축복에서도 그러한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요셉 지파보다는 두 개의 독립된 지파들로 언급됩니다(참조. 3:13-14: 삿 5:14). 요셉 지파에 대한 축복은 두 지파들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질적인 풍요(13-16)와 이방 국가들 사이에서 군사적 능력(17)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13-16절에서 모세는 요셉지파의 지도자들(나실인)의 머리에 임하길 원하는 하늘 위의 물과 지하의 물과 태양의 결실물과 달의 결실물(곡식)과 옛 산들과 영원한 언덕들(참조, 창 49:26; 합 3:6)의 탁월한 것들(삼림)과 땅과 그 위에 거하는 것들과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를 나열합니다. 비와 물은 하늘과 땅의 소산(所産)이자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선물로 이해합니다. 산과 언덕에 대한 표현은 영적 풍요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삼림은 풍요와 번성을 의미하는 갈멜산의 삼림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세는 요셉지파가 군사적(혹은 수적으로 막강해지길 기원한다. 16절의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으로, 출애굽기 32 이하에서 양을 찾아 헤매다가 하나님의 산 앞에 있던 불타는 덤불 가운데 계신 여호와를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17절은 요셉 지파의 첫 수송아지 같은 위엄이 뿔에서 나타나며 민족들을 세상 끝까지 들이받을 것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에브라임 지파의 수만 마리와 므낫세


모세 오경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레위 지파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가르칠 때 책임감과 특권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그 의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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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2-03)


모세의 찬양(3):여호와의 보응

신명기 32장 34-52절


모든 사람들은 칭찬 듣기를 원합니다. 꾸중을 좋아한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칭찬 듣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심지어는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칭찬 듣기를 원합니다.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인정받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을 교육하는 데는 칭찬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계속 칭찬만으로 교육하면 실수 앞에서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좋은 일을 했을 때는 칭찬을 해야 하겠지만, 나쁜 일을 했을 때는 분명히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에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합니다.

 

모세의 시가 막바지에 이릅니다. 시의 분위기는 반전되어 백성을 행한 회복의 약속이 낭송됩니다. 원수를 향해서는 심판의 맹세가 선언됩니다. 원수들이 제압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위상이 만국 중에서 회복됨으로써 이제 모든 민족들이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 할 것입니다. 시는 종언과 더불어 마무리되고 시가 노래된 후 백성을 향한 모세의 당부가 덧붙이고 있습니다.

 

백성을 행한 회복의 약속(34-39)

무조건 악인을 용납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니지만, 자기 백성들이 범죄하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계획마저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백성들이 포로된 곳에서 회개하면 다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심판하실 것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34이것이 내게 쌓여 있고 내 곳간에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 35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36참으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37또한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그들이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 38그들의 제물의 기름을 먹고 그들의 전제의 제물인 포도주를 마시던 자들이 일어나 너희를 돕게 하고 너희를 위해 피난처가 되게 하라 39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36-39)

 

시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말씀의 주체가 누구인지 분지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20-35절까지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36-37a절은 모세의 말이며, 37b-42절은 다시 여호와의 직접 적인 말씀이고 마지막 43절은 모세에 의한 시의 종언입니다.

여기서는 모세가 다시 주어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실 것이다.’ ‘판결하다’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이 재판은 뒤따르는 총들에 대한 애정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긍휼한 판정을 내리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이 무력한 가운데 있을 때, 또한 종들이든 자유인이든 아무도 보이지 않는 비참한 가운데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위해 유리한 판결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따지실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직접 적인 발언으로 전환됩니다(37b).

‘너희가 신뢰하던 그 반석이 이제 어디 있느냐?’, ‘너희가 바친 짐승을 먹고 붓던 포도주를 마시던 그 신들이 어디 있느냐?’ 여기서 ‘반석’은 비아냥대기 위한 풍자적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반석(Rock)은 하나님이신데, 너희의 반석(rock)은 하나님이신데, 너희의 반석은 무엇이냐?이 가짜 반석은 바로 앞에 언급된 ‘신들’과 이어지는 우상들을 가리킵니다.

3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말씀을 꺼내십니다. ‘내가 바로 그인 줄 알라.’ 다시 말해 ‘내가 바로 그 반석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모두 가짜 신들이며, 오직 여호와만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39).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다.’ ‘빼앗다’는 엄밀히 ‘구원하다,’ ‘구출하다’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발언은 ‘내 손에서 능히 구해낼 자가 없도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붙들고 계시는 언약 백성을 빼앗아갈 자가 없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사로잡은 대적들을 아무도 구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즉, 패배한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의지할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끝까지 우리의 피난처가 될 것은 아무 곳은 없습니다. 진정한 반석은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원수를 향한 심판의 맹세(40-4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분노는 영원히 멸하실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향해서 보호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향해서는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40이는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내가 영원히 살리라 하였노라 41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 42내 화살이 피에 취하게 하고 내 칼이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된 자의 피요 대적의 우두머리의 머리로다(40-42)

 

원수들이 받을 절망적 심판이 더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불변을 약속하는 전형적인 맹세 형식을 사용하여 자신의 말과 약속의 확실성을 보장하십니다.

손을 하늘을 향해 드는 것은 원래 하늘에 계신 분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발언을 보장해줄 신적 존재의 임재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맹세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위의 어떤 존재에게 맹세하는 분이 아니 기에, 단순히 ‘맹세 형식’으로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스스로의 다짐입니다. ‘내가 영원히 살리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로 번역하면 ‘내가 영원히 살아 있는 한’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맹세와 약속의 불변성에 대한 보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그것은 대적들을 향한 전쟁과 심판 철저한 복수에 대한 맹세입니다.

‘칼을 간다는 것’은 여호와의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의미합니다(42). ‘정의를 붙는다’는 말을 다소 추상적인데, ‘정의’는 ‘공의’, ‘정의’ 판결을 의미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정의의 심판’을 말할 것입니다. 여호와는 적들이 정의의 심판을 받게 하십니다. 그분의 무기는 강합니다. 그분이 쏜 화살에는 피가 잔뜩 묻을 것이고, 칼은 많은 육체를 삼킬 것입니다. 여기서 ‘화살’과 ‘칼’은 모든 무기를 가리키는 총칭 어법(merism)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칼에 피살된 자들은 물론 포로로 잡힌 자들도 그 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포로로 잡힌 자들은 포로로 잡혀와 도륙을 당한다기보다, 칼에 부상을 입고 붙잡힌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대적들의 왕들과 대장들도 그분의 강력한 무기를 피할 수 없습니다.

‘대적의 우두머리의 머리’는 다소 모호한 번역입니다. 한글개역(개정)의 번역은 대장들의 ‘머리카락’이라기보다 베인 ‘머리’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어 원문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장발을 가리킬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이 어구의 의미는 ‘장발의 우두머리’일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화살과 칼이 장발의 우두머리의 피를 흘리게 하고 살을 벤다는 뜻입니다.

여기 ‘긴 머리’는 지도자나 장군들의 위엄 있는 풍채와 뽐내는 장식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예. 압살롬의 장발). 어쨌든 적들은 피살자나 포로나 나아가 우람한 풍채를 자랑하는 그들의 지도자들이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심판의 무기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종언(Coda)(43)

*******

    

43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43)

 

모세의 노래가 마무리됩니다. 이 종결부에서 갑자기 시의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민족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구원의 대열에 합류하여 함께 즐거워합니다. 주께서는 주의 백성의 대적들에게 복수하심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열국을 초대하셔서 잔치를 베푸시는 장면을 연출하십니다. 그분은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속죄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단어 키페르가 나타납니다. 이 동사는 모세의 노래의 마지막 동사라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가 있습니다. 이 동사에 대한 번역이 학자들과 역본마다 갈리는데, 키페르는 밀그롬이 말한 대로 속죄제 본문에서는 ‘정결케 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그 외의 본문에서는 단순히 어떤 값을 지불해서 ‘보상적 대속을 하다(make atonement for)’라는 뜻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민수기 35:33에 비추어 볼 때, 동사 키페르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 이중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하나님의 대적을 향한 보응은 곧 이스라엘을 위한 보상적 대속이자 그들로 인해 더럽혀진 오염의 씻어냄입니다.

 

시 낭송의 완료와 당부(44-47)

오늘날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도록 신실한 선포하고 바르게 가르치고 마음에 새기도록 돕는 일을 잘 감당해야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여전히 모든 사람들을 축복과 생명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생명의 잔치에 초대할 때,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될 것입니다.

 

44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 45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46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벌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47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44-47)

 

모세는 눈의 아들 호세아(여호수아)와 함께 백성들 앞에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낭송했습니다. 이곳에서는 ‘호세아’로 등장하지만,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로 부른 것은 민수기 13:36절에 나옵니다. 여호수아는 실제로 낭송을 하지는 않고, 단지 시의 공동 선포자 자격으로 모세 옆에서 참관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45절이 그것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시를 기억하라고 요청하면서 이 모압 평지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지켜 행하고, 자녀들을 잘 가르치라고 당부합니다. 이것만이 그 땅에서의 축복과 장수와 생명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이제 모세가 이 노래(32:1-43)를 다 부른 후에 모든 설교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백성들에게 교훈합니다.

 

모세의 죽음 예고(48-52)

무지한 인생들은 자신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겉으로는 생을 만끽하면서 사는 보이지만, 실은 걸음을 내디딜수록 더 죽음에 가까이 갈 뿐입니다. 뒤틀린 인생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모세는 이제 모든 사역을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 앞에 한 발 더 다가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8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9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50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51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52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48-52)

 

여호와께서 같은 날(출애굽 40년 11월 1일),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죽음을 준비합니다. 모세에게 아바림 산지의 느보 산에 올라가 약속의 가나안 땅을 바라봅니다. 들어갈 수 없지만 가나안 땅을 조망하도록 허락해줍니다. 그리고 아론이 이전에 호르 산에서 죽은 것처럼 모세도 이제 조상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모세는 민수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도록 아바림 산, 비스가 산 그리고 느보 산을 모두 오릅니다. 모세는 아바림 산맥에 올라 여러 봉우리들 중 하나인 느보 산을 등산해야 합니다. 느보 산은 해발 850여 미터에 이르는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요단 동편과 서편 양쪽 모두를 조망할 수 있다고 알려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소 가혹하고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는 드라마와 같았던 모세의 인생에 마지막 슬픔을 자아내는 말을 다시 꺼내십니다. 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가데스 므리바의 사건은 식수난의 현장에서 백성들이 아우성치고 하나님께 대들며 범죄했을 때, 모세는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들어내야 했습니다.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에 합류했기 때문입니다(민수기 20장). 당시 그는 지도자로서 백성들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혈기를 드러내며 이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백성들과 거의 동일한 불순종을 범하였습니다. 그는 그 땅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도 중요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말씀과 때를 따라서 사는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이 세상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지 않길 간절히 원합니다. 세상의 법칙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법칙이며 영적인 타락을 가져오는 법칙이요, 결국에는 재앙을 불러오는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심판과 보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순히 협박이 아니라 무서운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축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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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2-02)

 


모세의 찬양(2):패역한 이스라엘

신명기 32장 15-33절


어린 시절 여름 방학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섬진강에서 수영하며 놀았습니다. 항상 부모님들께서는 수영하려 가는 자녀들에게 조심시키고 타이르십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부모님들의 말씀을 잔소리로 들리지 훈계로 들리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종종 물길을 알지 못한 타지 사람들이 익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아이들에게 큰 경고의 메시지로 들리고 한 동안은 조심스럽게 물놀이하곤 했습니다.

 

  •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배반합니다. 우상을 섬기고 새로운 신을 찾아 나섭니다. 그들의 패역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을 불러들여 치시고, 갖가지 자연재해와 질병과 전염병을 보내 벌하실 것입니다. 이때 다른 민족들은 승리를 자신들의 공적으로 여기며 자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배반(15-18)

‘관계’라는 것은 가변적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이라는 예식을 부부라는 관계를 결정해준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당연한 관계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항상 기계적 무조건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15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16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18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15-18)

 

서론 부분(1-14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변함없으신 분인 것을 보여주지만,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패역한 백성인가를 강조합니다. 본문은 이 ‘모세의 노래’는 당시 근동 지방의 소송 형식을 띄고 있는데,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마치 눈 앞에서 이루어진 일처럼 세세하게 묘사합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고발’과 ‘하나님의 판결’, 그리고 ‘하나님의 고민’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의 노래’는 역사의 회상과 함께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백성들을 인도하셨고 높이셨는지를 기술하며 그분을 찬미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땅을 정복했던 ‘여수룬’ 민족입니다. ‘여수룬’은 ‘올 곧은’, ‘곧게 선’이라는 뜻을 지녔는데, 그들은 이름값을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여수룬이라는 명칭은 항상 의로우시고 올바르신 하나님과 대비되면서,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에 대한 반어적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여수룬이 냉소적인 뉘앙스를 내포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모세와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깃든 표현으로 보입니다. ‘너희가 잘도 여수룬이겠다. 이 나쁜 녀석들아!’라기보다는 ‘너희가 여수룬 민족인데, 패역의 길로 가는구나!’ 힘든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상상 그리던 젖과 꿀의 향연을 마음껏 누리면서, 육신은 기름지고 비대해졌습니다. 그러나 기껏 살찌우고 키워 놓았더니 이들이 주인에게 발길질을 합니다.

그들은 다른 신, 가짜 신들을 섬기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격분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귀신들’에게 희생을 바칩니다. 이 귀신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최근에 가나안에서 접하게 될 신들, 곧 조상들이 겪어보지 못했던 신들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신들에 빠르게 매료되고, 심지어 새로운 신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들은 이제 그 신들을 두려워하고 제사를 바치며, 그들의 명령을 따르기에 열중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들은 그 신들을 두려워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 초기에 잠시나마 순수했던 조상들의 신앙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낳으시고 조성하신 분입니다. ‘낳다’는 하나님의 여성적인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어머니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낳으셨고 그들에게 젖을 먹여 키우고 살찌워서 비대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그들은 잊고 우상을 섬기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와 백성 심판(19-25)

종종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하면서 심판하신 하나님에 대해 성경에서 지워버리려고 하는 시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자기 쓸모대로 만들어서 이용하겠다는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란 계념이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품는 것이 불편할 수 있겠지만, ‘심판’을 말할 수 없다면 ‘정의’를 말할 수 없습니다.

 

19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까닭이로다 20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21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22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 23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 24그들이 주리므로 쇠약하며 불같은 더위와 독한 질병에 삼켜질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25밖으로는 칼에, 방 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젊은 남자도 처녀도 백발 노인과 함께 젖 먹는 아이까지 그러하리로다(19-25)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은 존재합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을 탓하거나 거부할 수 있겠지만, 그런 기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버리고 잊으며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지 상기시킵니다.

 

⑴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백성(19-21)

 

하나님은 언약을 깨트린 그들에게 언약의 약속대로 책임을 물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무시하고 거절하십니다(19). 패역한 아들을 향해 부모가 진노하듯이 맹렬히 진노하십니다. 그들은 패역했고, ‘진실이 없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셨지만(4), 그들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헛된 우상으로 하나님을 격분케 했습니다. ‘하발람’은 공기나 증기를 말합니다. 우상들은 바람처럼 흩어지고 증기처럼 사라질 헛된 것들입니다. 그러한 허망한 존재들에게 제사를 바치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정당합니다.

21절은 기막힌 반어법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동일한 동사들을 사용하면서 뚜렷한 대구법을 만듭니다. 그들이 내 질투를 일으키며 분노(진노)를 일으켰으니/나도 질투를 일으키며 …분노를 일으키리라. 말하자면, 그들이 ‘신이 아닌 우상들’을 시중들어 하나님의 질투와 진노를 일으킨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민족이 아닌 사람들’을 지원하여 이스라엘의 질투와 진노를 일으키실 것입니다(21). ‘민족 취급을 받지 한 사람들’은 매우 미개하고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떠돌이 민족 집단을 일컫습니다. 이런 유형에 해당하는 족속은 역사 속에서 뚜렷한 영토를 구축하지 못한 미디안 족이나 아말렉, 다른 어떤 종족일 수 있는데, 이 용어가 굳이 특정한 종족을 가리킨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민족답지도 않은 민족이나 나라를 사용해서라도 교만한 이스라엘을 치실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지식 없는 ‘우둔한/어리석은 민족’을 일으켜 그들을 치실 것입니다.

6절에 나오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는 ‘우둔한 백성’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둔하니 그들을 징계하는 것은 다른 우둔한 백성으로도 충분합니다.

 

⑵ 백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22-25)

 

하나님의 진노가 재앙으로 표출되어 나옵니다. 스올(음부)은 당시 세계관에서 무덤 아래 망자들이 가는 지하 세계입니다. 분노의 불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불’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각종 재앙에 대한 은유입니다.

스올까지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번진다는 것은 심판의 범위가 하늘 아래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불길이 온 땅을 뒤덮고, 땅 위의 모든 소산물을 삼키며 산들의 기초들, 곧 땅의 뿌리까지 불에 탈 것입니다. 재앙에 의한 전면적 파국입니다. 23-25절에 그 재앙의 목록이 나열됩니다. 23절은 24-25절의 재앙들에 대한 요약적 진술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이 ‘재앙’과 ‘화살’로 묘사됩니다. ‘재앙’은 24절의 다섯 가지 목록으로 구체화되고, ‘화살’은 25절의 전쟁의 두 가지 비극적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24절의 재앙 목록은 히브리어가 너무 난해해 번역과 주석이 다양합니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재앙들의 정체는 더욱 그렇습니다.(한글개역은 ‘더위와 독한 질병’). 필자의 견해로 24절에 나오는 재앙들의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근, 열병(fever, CJB, ‘더위’ 대신), 역병, 맹수, 독사. 25절에 두 가지가 추가됩니다. 검, 공포, 마지막 공포는 전쟁으로 인한 공황 상태를 가리키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젖먹이까지 온 백성이 넋을 잃습니다. 이렇듯 모세의 시는 재앙들을 완전수 ‘7’에 맞춰 일곱 가지로 간추려 열거하면서 백성들이 이것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대적들 심판(26-33)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다른 이방 민족을 통해 심판하시지만, 지속하지 않습니다. 원수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길까 걱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심판을 되돌리신 상황은 광야생활에서도 종종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다가 멈추고 대적을 심판하십니다.

 

26내가 그들을 흩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였으나 27혹시 내가 원수를 자극하여 그들의 원수가 잘못 생각할까 걱정하였으니 원수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수단이 높으며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함이라 28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 29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 30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 31진실로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니 우리의 원수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다 32이는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독이 든 포도이니 그 송이는 쓰며 33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라 (26-33)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은 피할 길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엄격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이스라엘은 역사상으로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도 다시 한 번 큰 하나님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⑴ 심판을 오해하는 대적들(26-3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맹렬한 진노를 계속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멈추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긍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 성경번역에 아쉽게도 ‘그러나’(27)가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이 확고하지만,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러나’라는 표현을 통해 스스로 제동을 거십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그들의 반석이셨던 하나님을 멸시하며 우쭐대는 모습을 저지하기 위해서입니다(27). 대적들이 준동하도록 자극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원수들은 그것을 오해합니다. 자신들의 모략과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제압한 것으로 생각하며 우쭐댑니다.

28-29절은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에 의한 업적이라 생각하며 우쭐대는 그 대적들은 모략도 없고 분별력도 없으며 지혜도 없습니다. 자신들의 능력과 힘이 여호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마침내 그들도 종말의 파국을 맞을 것입니다. 30절의 그들의 반석에서 그들은 이스라엘, ‘반석’(Rock)은 하나님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이스라엘) 팔고 그들을 내주지 않았다면, 어찌 대적들이 그들을 격파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그들은 한 명이 이스라엘 백성 천을 쫓고 둘이 만 명을 도망가게 했을 것입니까? 31절은 분명하게 확증합니다. 그들의 ‘반석’(rock)이 이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반석은 우리의 반석 (Rock)과 다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여 자신들의 반석이 이 일을 도왔고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제압했다고 오판합니다.

 

⑵ 대적들이 받을 심판(32-33)

 

그러나 이토록 교만한 대적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는 말은,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운명을 맞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좋아 보이는 포도는 쓴 포도일 뿐이고,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이 든 포도주를 창고에 잔뜩 쌓아두셨으며, 언제든지 원수들에게 공급하여 마시고 쓰러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 대적들이 웃음이 그칠 환난의 날이 곧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원문 그대로 변역하면 ‘복수는 나의 것! 내가 보응할 것이며 그날이 속히 오리라!’라는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실패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과 씨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과 씨름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업신여기고 계속해서 어기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씨름하시며, 결국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해 가십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시작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씨름을 포기한 순간, 이스라엘은 정말로 역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과의 씨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남겨주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씨름하시며,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위한 연민과 사랑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반응하는 자들을 일으키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풍요로움 속에 타락하면 진노의 매를 드시지만, 자신의 백성들이 소멸하기까지 심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 백성들이 바르게 살아가길 원하고, 의에 길로 돌아오길 기다린 것입니다. 성도들은 항상 심판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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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2-01)

   


모세의 찬양(1):신실하신 하나님

신명기 32장 1-14절


복음송 중에서 ‘하늘 문이 열리면 노래할 이유 있네. 놀라운 일 그곳에 있으리 노래할 이유 있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생명수가 될 것입니다.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가 성도다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와 찬양의 제목을 삼고 있습니다.

 

  • 본문은 모세의 노래로서 첫째 부분의 내용을 시를 여는 서언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먼저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간결하게 그러나 최상의 표현들을 동원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과거의 일을 기억하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순간,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세의 노래 : 서언(1-3)

성도들은 세상의 어떤 위엄이나 권위 권세보다 하나님께 그 위엄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가장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루하루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면서 살아갑니다.

 

1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2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3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1-3)

 

이 찬양은 ‘모세의 노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치라고 지시하신 노래가 신명기 32장에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기쁨의 찬양이기보다는 어두운 면을 나타내는 슬픈 찬양입니다.

먼저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더불어 초대하고 하늘과 땅을 청중의 일원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시작됩니다. 하늘과 땅이 증인으로 초대되고 있습니다.

앞서 여러 차례 ‘하늘과 땅’을, 혹은 ‘천지를’ 증인(증거)으로 삼는다는 표현들이 사용된 바 있습니다(3:24; 4:26; 30:19, 28; 한글개역[개정]의 번역에 일관성이 없는 아쉬움이 있다). 이들이 믿을 만한 증인인 것은 사람은 변해도 천지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많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습니다.

자신의 교훈이 백성에게 생명수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 교훈은 마치 단비와 이슬이 대지를 적시는 것같이 백성들에게 잘 흡수되어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흥미롭게도 증인으로 초대된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또 다른 증인인 땅은 그 비를 흡수하여 생명을 풍성케 합니다. 시의 첫째 교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3). 모세가 증인으로 청한 땅과 하늘이 가장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증인으로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4-6)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물고기가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에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모습을 가는 비와 이슬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은 이러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4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5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6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4-6)

 

본문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노래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성품과 속성을 시(詩)이기 함축적으로 짧은 구절 안에 비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이십니다. 사실 반석의 의미는 반석보다 커다란 바위산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바위 요새와 같으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바위산과 같으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고 진실하십니다. 의로우시고 바른 분입니다. 참고로 ‘의로운’은 사법적 뉘앙스가 강한 ‘공의롭다’ 보다는 ‘의롭다’가 더 나은 번역입니다. ‘야샤르’는 ‘올곧다’, ‘올바르다’를 뜻하는데, 사실 두 단어는 비슷한 의미의 동어 반복이며, 이러한 그분의 성품과 속성은 형편없는 인간 존재와 잘 대비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흠투성이에 때가 묻어있고 금이 가 있는 존재이며, 늘 변하고 의롭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고 흠이 있으며, ‘뒤틀리고 비뚤어진’ 백성일 뿐입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백성이요 무지한 백성’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자랑했습니다. 선택 받은 이스라엘은 무한 감사해야 하고 무한 책임을 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순종치 않고 악을 행했습니다. 이것은 베풀어주신 은혜를 배반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고 세우시는 분이시고, 그분은 그들을 지으시고 만드신 아버지이십니다(6). 아마도 신약에서는 자주 등장한 표현이지만, 구약에서는 여기서 최초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이미 출애굽기 4:22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심을 천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라고 하셨지만, 직접 이렇게 ‘아버지’라 부른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역할을 해주셨기에 불순종과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었고, 그들을 향한 기대와 계획을 철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가야할 이유가 이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무엇인가 차이가 나야 합니다. 더 거룩하고 귀감된 삶을 살아갈 때,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기억하라(7-14)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은 기억에 대한 명령에 누군가가 순종한 결과입니다. 기억과 기록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화 시키고 그 역사를 이어가게 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가장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지존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7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8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9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10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 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13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14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7-14)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쉽게 잊어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거룩한 성도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그 비결을 소개합니다.

 

⑴ 이스라엘을 선택하심(7-9)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과거에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역사를 열거하면서 기억하라고 노래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역사를 말씀합니다.

모세는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고 찬양합니다. 태고의 역사부터 최근의 역사를 짧은 몇 개의 소절에 담고 있습니다. ‘역대의 연대’란 문자적으로 ‘세대와 세대의 해들(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즉 여러 세대의 날들입니다. 그들의 역사를 돌아보고 또한 아버지에게서 조상들의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존하신 분입니다. ‘지존’이란 히브리어 ‘엘욘’은 ‘최고’, ‘지존’을 가리키는 말로 견줄 대상이 없이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뜻이며, 구약에서 종종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별칭에 사용됩니다(창 14:18-20; 민 24:16). 가장 높으신 분이 세계 질서를 정하시고, 각 민족의 경계선을 그으셨습니다. 그분이 ‘인종을 나누실 때’ 곧 인류를 세계에 흩어 분산시키시고 각 민족에게 기업, 곧 땅을 배분하실 때, 그분은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맞춰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백성들의 경계를 정했다’(8)는 뜻은 민족들의 땅을 나누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인류의 경계선을 나누실 때, 이스라엘 자소의 수대로 나누셨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창세기 10장은 인류가 분산되어 구성된 70개 나라의 목록을 제시하는데, 이 것은 70명의 야곱 가족의 숫자에 부합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실제적으로 정확히 70개의 나라라는 의미가 아니며, 야곱의 가족도 사도행전에서는 75명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숫자 ‘70’은 많은 민족들과 야곱의 첫 가족의 숫자에 대한 어림수이며, 문학적 숫자로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어림수의 문학적 사용이 성경의 무오성을 저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성경을 신학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입니다. 이를테면 족보의 세대를 계산할 때도 여러 세대를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특징을 보입니다(예, 마태복음의 14대 족보는 중간에 여러 세대가 누락됨).

경계를 정해 흩어진 열국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자신의 기업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구원의 섭리와 계획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선택이기에, 인간은 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무한히 감사해야 할 뿐입니다.

 

⑵ 이스라엘을 보호하심(10-12)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보배로운 민족으로 택하시고, 그들을 황량한 광야 길에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났다’의 원래 뜻은 ‘발견하다’는 뜻입니다. 우연히 광야에서 만나 뒷바라지를 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에 대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친 광야 길을 독수리가 새끼를 업어서 오는 것처럼 그들을 홀로, 완벽히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

 

⑶ 이스라엘을 높이심(13-14)

 

백성을 광야 길에서 안전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더 큰 복으로 채우십니다. 가나안 땅은 고원 지대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곳을 주로 타고 다니게 하시고, 땅의 온갖 풍성한 소산물들을 만끽하며 즐기게 하실 것입니다.

‘높이신다’는 말은 지정학적으로만 높이시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중에서 으뜸 되는 민족으로 높이셔서 그들이 가장 큰 복을 누리며 살게 하실 것입니다.

반석의 꿀과 굳은 반석의 기름은 바위산의 여러 갈라진 틈과 구멍들에서 발견되는 막대한 양의 야생 꿀과 석회질 암반의 감람나무 단지에서 대량으로 채취되는 감람유를 말합니다. 그 외 우유와 각종 유제품들과 최고 품질의 (‘기름’이 그런 뜻이다) 양과 염소 고기를, 들판의 곡식과 과수원의 포도를 마음껏 먹게 하실 것입니다.


신앙은 기억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기억의 활동입니다. 찬양과 기도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잊지 않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 사람들만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 뜻을 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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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1-02)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

신명기 31장 14-30절


부모의 가르침을 무시하던 아들이 결국 패가망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그 아들이 ‘이것이 다 부모가 나를 잘못 가르친 탓이다.’라고 한다면, 부모의 심정은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죽음 이후 가나안 이방신들을 섬기며 언약을 어기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날에 백성들이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입을 다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죄악된 역사를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임박한 모세는 이제 마지막 유언의 메시지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앞서 여호수아를 ‘실무적인’ 후계자로 세우는 절차를 시작했는데(이미 후계자 임명식은 민수기 27장에서 완료되어 일종의 대통령 당선자 신분),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회막으로 불러 직접 명령을 내리시고 격려하십니다.

 

여호수아의 임명 준비(14-15)

노래는 그 시대의 문화와 철학을 반영하는 도구이며, 다음 세대를 향한 교육적인 증거입니다. 그래서 역사상 독재자들은 노래를 통해 사람들을 자극하고 통제했습니다. 진실을 드러내고 불의를 고발하는 노래는 매우 강력한 증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노래를 만들어 후손에게 가르치라고 권고합니다.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죽을 기한이 가까웠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 15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러 있더라(14-15)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그의 후계자로 내정된 여호수아를 회막으로 불러들이십니다. 회막 장면은 신명기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익숙한 장면이 여기서 재현되는데, 바로 하나님의 구름 기둥이 회막 위에(14), 구체적으로 회막 입구에(15, ‘장막 문 위’의 장막은 곧 회막) 내려와 있습니다. 이 구름 기둥은 하나님 임재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비평학자들은 이 회막이 진영 밖에 존재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보수적 견해는 이 회막을 진영 안의 성막으로 봅니다.

일단 15절 자체의 표현은 언뜻 모순되어 보입니다. ‘장막에’(in the Tent)와 ‘장막 문 위에’(on the entrance of the Tent), 이 중 ‘장막에’는 비평 주의자들이 말하는 진영 밖 회막의 특징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진영 밖 회막은 항상 회막 입구에 구름이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5절을 신명기 특유의 대략적인 표현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회막/성막은 구체적으로는 마당 구역을 제외한 천막 건물 부분, 즉 내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된 본당만으로 국한됩니다. 따라서 현재 그 건물 위에 하나님의 구름이 내려와 있고, 모세와 여호수아는 그 내성소를 가리는 휘장 앞의 성막 마당에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때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지성소에도 특별하게 입장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여호수아와 함께 진영 안 성막 마당에 성막 본당 앞에 서 있습니다.

 

그 땅에서 백성들의 반역이 예언됨(16-18)

풍요는 축복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멸망의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보다 가나안이 더 축복의 공간입니다. 하지만 광야만큼 가나안은 영원한 복락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가 더 쉬운 공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반역할 것을 예언합니다.

 

16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18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16-18)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이 걷게 될 배교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여호와를 버리고 그 땅 신들을 섬기며 언약을 파기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배교가 부부의 정절을 버리는 것(‘음란’)에 비유됩니다.

이어지는 진술에서 맺은 언약을 어긴다는 말에서도 확인되듯이, 우상숭배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맺은 일종의 결혼 서약의 파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실 하나님을 버린 적은 없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신들을 동시에 섬긴 것입니다. 이것은 간통이며 결혼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시고 얼굴을 숨기실 것입니다(17,18). ‘얼굴이 함께 있다’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당사자가 거기에 있음을 의미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창세기 3:8;4:16;35:1; 신명기 4:37; 사무엘상 1:22; 이사야 63:9). 반대로 ‘얼굴을 숨기다’는 역겨움과 반감, 거절을 표현하는 숙어입니다(이사야 53:3; 시편 132:10). 백성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의 이탈은 그 자체로 심판이요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패요 산성이요 강한 보호막입니다. 그분이 백성 가운데 계셔서 질병과 기근과 메뚜기 떼를 비롯하여 모든 재앙을 막아주시며 적들이 노리지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침입을 물리치십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시는 순간 이 모든 재앙들이 한꺼번에 그 땅과 백성들에게 엄습할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이 허다한 재앙과 환란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은 까닭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비관적 예언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희망에 부풀어 있던 백성들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백성의 미래는 열려 있습니다. 이 예언은 어쩌면 배교의 길을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예방적 경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역사는 모든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결국 패역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 신들을 따라 여로보암의 길로 갔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경고대로 숱한 재앙들을 맞았고 이 땅에서 추방당하였습니다.

  

모세가 노래를 지어 백성들을 가르침(19-23)

신신하신 하나님을 신실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지만, 목이 곧은 이스라엘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교육하는 방법으로 노래를 만들어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19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22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 23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니라(19-23)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자손 대대로 불러야 할 노래를 지어 가르치라고 명하십니다. 이 노래는 세대를 거듭하며 백성들이 불러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노래를 그들에게 마치 옆에서 사실을 증언하는 ‘증인’(21절에서 보듯이 증거라기보다는)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 땅에 들어가 젖과 꿀의 온갖 풍요를 누리며 배부르고 살찐 뒤 정작 하나님을 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들의 풍요가 가나안의 농경 신 바알과 풍산의 신 아세라의 선물이라고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배은망덕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32:19에서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백성을 ‘멸시하실’ 것입니다.

 

모세가 지어서 들려줄 이 노래는 장차 그 땅에서 그들이 불순종으로 인해 온갖 재앙과 고초를 당할 때도 여전히 그들의 입술에서 불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노래 자체가 그들 곁에서 소리쳐 그들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증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원래 민간에서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온 노래는 세대를 거치며 그들의 삶에 중요한 교훈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미리 아시고 이 노래를 통해 예방적 조치를 취하고 계십니다(21). 모세는 그 날 이 시를 지어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당연히 하나님의 영감에 사로잡혀 이것을 작시했을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직접 말을 건네 그를 격려하십니다(23). 그가 이제 모세를 이어 백성을 인도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힘을 북돋는 것입니다. 모세와 함께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호수아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흥미롭게도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이 모세의 중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여호수아에게 하달됩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직접 말씀을 받는 장면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율법책을 법궤 옆에 보관(24-30)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해석하고, 예고하고, 경고하고 돌이키게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사후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고 후계자를 세우는 한편, 말씀을 기록하고 언약궤 곁에 두게 하는 등의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24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25모세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6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7내가 너희의 반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 내가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어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28너희 지파 모든 장로와 관리들을 내 앞에 모으라 내가 이 말씀을 그들의 귀에 들려주고 그들에게 하늘과 땅을 증거로 삼으리라 29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길을 떠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하게 하므로 너희가 후일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30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24-30)

 

모세는 이 율법서를 기록해서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 책은 당시의 관행대로 양피지 두루마리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단 이 책이 신명기에서 모세가 강론한 율법들의 기록이라 볼 수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오경의 정경론적 관점에서는 어쩌면 이전에 모세를 통해 반포된 모든 율법들을 포괄하는지도 모릅니다.

모세를 이 율법책을 레위 사람들에게 ‘법궤 옆에’ 보관하라고 지시합니다. 여기서 ‘레위 사람’은 제사장 계층을 포함한 포괄적인 명칭을 볼 때, 좁게는 제사장을 지시할 것입니다. 레위 지파 고핫 자손들이 법궤를 운반할 때, 그 율법책은 제사장들이 별도로 운반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이런 각자의 임무에 대한 포괄적인 묘사로 보아야 합니다. 고대 중동에 조약문들은 성소에 보관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 책을 어떤 항아리나 상자에 넣은 뒤 법궤 옆에 두었을 것입니다(예레미야 32:14; 탈굼). 법궤 옆에 보관한 이 율법서는 그들에게 증거가 될 것입니다. 앞서 모세의 노래가 증인이 된다고 언급되는 반면, 여기서는 이 율법서가 그들에게 증거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율법서가 의인화된 ‘증인’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조약문으로서 ‘증거’ 능력을 갖는 징표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법궤 옆에 보관되어야 할 이 율법서는 오랜 배교 역사 속에서 어느 순간 사라졌습니다. 훗날 요시야 왕 때 대대적인 종교개혁과 더불어 성전을 정비할 때 성전의 어느 구석에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던 이 율법서가 발견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세는 지파의 모든 어르신들, 곧 장로들과 관리들(행정 지도자들)을 소환하여 이 언약의 말씀을 거듭 읽어준 뒤 앞서 31:19에서와 같이 이 언약의 불변성을 확증하기 위해 하늘과 땅을 증거로 삼습니다.

모세는 염려합니다. 자신이 이렇게 오래도록 그들을 지도했음에도 그들이 여호와를 거듭 배반했는데, 자신이 죽으면 어찌 될 것입니까?(27)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모세도 그들이 장차 배교의 길을 갈 것이 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의 재앙으로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래와 율법과 천지를 증거물로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변할 수 있어서 나중에 다른 소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확실한 증거를 통해 다른 소리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하고 미련한 우리가 죄악의 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미리 할고 조심하라는 배려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세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매우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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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1-01)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

신명기 31장 1-13절


올림픽이 끝나면 개최국에서 다음 개최하는 나라로 올림픽 기(旗)를 전달합니다. 한 회기 올림픽이 끝났기 때문에 다음 회기로 넘어 가는 것입니다. 인생도 절정기에는 열정적으로 일하지만, 시간이 서서히 지나면 현직에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계속 붙잡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율법선포와 모압 언약의 체결을 선언한 뒤, 모세는 후계자 임명의 절차를 밟습니다. 여호수아는 오래전부터 후계자로 내정된 인물로서 모세의 일을 가까이서 도왔습니다. 여호수아의 지도자 내정은 민수기에서 이미 완료된 바 있는데(민수기 27:18-23), 이지 실무적인 지도권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모세는 후계자 여호수아를 격려한 뒤 장로들과 제사장들에게 백성을 향한 철저한 말씀 교육을 당부합니다.

 

여호수아에게 이양된 지도권(1-6)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는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자기 분수를 정확히 알고 거기 맞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훌륭한 리더십은 이런 것입니다. 타자 속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고 모든 영광을 그분께 돌렸습니다. 모세도 이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음 지도자를 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또 모세가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전하여 2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 나이 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3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 4또한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5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넘기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6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1-6)

 

신명기 서사의 흐름은 31장에서 새로운 장면으로 전화됩니다. 모세는 다른 사역자들과 전혀 다른 훌륭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은 여과 없이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신의 사역을 내려놓은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⑴ 새로운 일꾼을 세운 모세(1-3)

 

모세는 긴 연설을 일단 마무리한 뒤 계속해서(‘가서’) 이제 자신의 죽음 준비와 후계자 임명에 대해 설명합니다. 모세는 80세에 부름을 받고 이제 나이는 120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34:7에서 다시 언급되는데, 고령인데도 기력은 여전했다고 진술됩니다. 하지만 많은 나이 때문에 더는 현역으로 활동하기 힘들게 되었고, 임박한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과 같은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가나안 땅 입성을 위해 싸워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도 참아가면서 보내온 시간들입니다. 그런 모세는 가나안 입구 요단강 앞에 서서 정말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모세는 담담하게 말을 전합니다. 이제 모세의 역할을 여호수아가 감당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백성 앞에 세워 놓고 말합니다.

먼저 그는 백성들에게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들어오고 나감’은 군사적 지도자로서의 활동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더 이상 회중을 특별히 군대를 이끌 수 없습니다. 더욱이 가나안 땅에 진격해서 수많은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데, 노쇠한 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대신해서 군대를 이끌고 진영을 오갈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 땅에 건너가지 못하다고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는 1:34-38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모세의 가나안 입성 금지가 민수기에서는 모세 자신의 커다란 실수 때문인 것으로 보고되지만(민수기 13-14장), 신명기의 관점에서는 백성의 중대한 반역들에 대한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물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모세는 고령도 문제지만,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기 에 시급히 후계자를 세워야 했습니다. 이제 후임자 여호수아를 세움으로 모세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세운다고 할지라도 모세 자신이 지도자로서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백성을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3). 하나님께서 ‘너보다 먼저’, 즉 여호수아의 앞에 서서 요단강을 건너실 것이며, 그분이 여호수아 앞에서 가나안의 대적들을 무찌르시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행진 대열 선두에 서신다는 사실은 민수기에서 확인됩니다. 그것은 신명기에서 언급되지 않는데, 법궤가 맨 앞에서 행진을 이끄는 방식입니다(민수기 10:11-28). 더불어 구름 기둥이 백성들을 이끌었는데, 법궤 위에는 하나님 임재의 현상으로 신적 구름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결국 구름의 이동은 곧 법궤의 이동입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제의적 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기에, 법궤의 구체적인 역할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고, 단지 ‘여호와께서 너와 백성들보다 앞서 건너가셨다’고만 진술합니다. 이제 모세의 역할을 여호수아가 감당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백성 앞에 세워 놓고 말합니다.

 

⑵ 가나안 입성에 함께하신 여호와(4-6)

 

이스라엘 군대를 이끄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라’(13:22), 동시에 모세는 백성들을 향해 ‘여호수아가 네 앞에서 먼저 건너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제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지휘자로서 그들을 이끌어 전쟁을 수행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세의 자리에 이제 여호수아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총사령관, 군대 장관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왕의 자격으로 이끄십니다. 여호수아는 부관이자 참모일 뿐입니다. 여호수아는 유능한 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모세가 모압을 몰아낸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아모리의 두 왕을 연달아 격파했던 것처럼, 여호수아는 모든 가나안 족속을 무찌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서도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여호와께서 멸하신 아모리 왕들처럼 가나안 족속도 그렇게 여호와께서 멸하실 것이다(4), 모세는 여호수아를 뒤따를 백성들의 용기를 힘껏 북돋습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5). 대장 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동행의 약속을 ‘너와 함께 가시며,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다.’라고 삼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루셨던 사역들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나가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세의 부재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과 특히 여호수아는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자신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 여정을 주도하실 것임을 기억하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가 떠나가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떠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모세가 이끌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끌어오셨습니다. 이제 가나안 입성도 하나님께서 앞장서 가실 것입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서 강하고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격려하다(7-8)

하나님의 사명에 헌신된 사람은 상황에 동요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만 집중 합니다. 모세가 이렇게 사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7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8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7-8)

 

모세는 자기 개인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사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모세는 확신에 찬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권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에 앞서 행하셨던 것을 경험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온전히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일을 온전히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는 경험에서 울러 나오는 신앙을 담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여호수아 개인을 향해 동일한 내려와 권면으로 용기를 북돋습니다. 백성들에게 했던 말을 여호수아에게 반복합니다.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7),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모세는 여호수아 앞에서 여호와께서 앞장서실 것이라고 격려합니다(8). 진정한 대장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여호와이십니다.

이미 신명기 서두의 모세 연설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워 그를 격려하라는 명령을 주신 바 있습니다(1:38; 3:28). 이것은 31:23과 여호수아 1:5-6, 9에서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반복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권고는 차기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안심시킬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격려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에서 오는 신뢰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만 마음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말씀 교육을 당부(9-13)

성도들은 자신들이 떠난 자리에 무엇을 남겨야 합니까? 많은 재산, 높은 업적 그리고 넓은 영향력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떠난 자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남도록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입성이라는 전쟁 앞서서 최첨단 무기로 무장하는 일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9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10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11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12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13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9-1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전쟁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군사적 무장보다 더 중요한 말씀 무장을 강조합니다. 이 영적 무장이 물질적 무장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가장 중요한 준비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율법 강론을 책에 기록했다는 진술이 최초로 등장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모세가 기록한 이 ‘율법’이 신명기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앞서 반포된 모든 율법, 곧 출애굽기 19장 이후의 시내산에서 백성들이 들은 말씀들 두 돌판에 기록한 십계명을 제외한 ‘언약서’(출애굽기 20:22-23:33)와 성막법,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에 포함된 제반 율법들을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24:4에서 모세가 앞서 반포된 율법들을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시내산에서 반포된 말씀들을 차례로 기록해 두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모세가 기록한 말씀이 신명기의 율법 문집이든, 앞서 반포된 제반율법들을 포함한 거대한 율법 문집이든, 모세는 그것을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위탁했습니다(9). 흥미롭게도 여기서 ‘언약궤’가 언급되고, 그것을 제사장들이 멘다고 진술됩니다. 비평학자들은 민수기에서는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들이 언약궤를 메기에(민수기 4장), 두 책은 모순을 이야기하며 결국 서로 다른 전승에 속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명기 내에서도 민수기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10:8과 31:25은 같은 신명기의 진술임에도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이라고 적시합니다. 율법책을 맡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매 7년의 ‘면제년’이 돌아오면 초막절에 성소에 집결한 백성들 앞에서 그 말씀을 낭독해야 했습니다. 여기서도 ‘그 택하실 곳’을 우리는 특정한 단일 성소로 보지 않고 지방의 레위 도성들에 지정된 복수의 성소들로 받아들입니다.

‘신명기 개관’에서 강조한 대로, 이것이 신명기의 법적 현실에도 부합합니다. 왜 7년 주기의 면제년에 이 말씀이 낭독되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빚 탕감이 선언되는 해이기 때문에, 그들이 애굽 노예의 속박에서 해방된 날임을 기억하면서 이 말씀을 기억하기에 가장 적절했을 것입니다. 면제년의 유월절/무교절이 아닌 초막절에 율법을 낭독하라는 이유는, 초막절에 백성들이 성소에 장기 체류를 했고, 또 그 절기의 중요성 때문일 것입니다. 추가적인 이유로 우리는 7월이 새로운 달로서 모든 것이 시작하는 달이기 때문이라고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7월 1일 나팔절은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의 새해로 지킵니다.

게다가 7월 10일은 대속죄일로서 이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누적된 1년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성소도 완전히 정결케 되어 새 출발을 합니다. 따라서 닷새 후인 초막절은 심령이 새로워 진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기에 가장 적절했습니다. 참고로 크리스텐슨은 레위인들이 음악적 형태로 성경 본문을 전달하는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말대로 낭독은 곡조가 달린 음악적 낭독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신명기가 매일의 말씀 교육과 기억, 규칙적인 강론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 7년의 율법 낭독으로 말씀 훈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날 국가적 행사로 성대한 율법 낭독과 훈련이 전개되지만, 매일 백성들은 율법을 묵상하고 낭독하고 가르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명예와 권력 그리고 안위를 추구했더라면, 그의 퇴장은 추하고 비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사명과 몫을 알고 떠나야할 때를 알았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은퇴식으로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부재가 백성들에게도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 교훈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영원히 의지할 존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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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30-01)


  복과 저주 사이에서

신명기 30장 1-20절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주님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나 생각도, 꿈과 소망도 다 알고 계십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도 알고 계십니다. 현재 연약한 모습만 가지고 매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가운데로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미래에 아름답게 변화되어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것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교회들도 장차 어떻게 형성되어 갈지 알고 계십니다. 큰 꿈을 가지고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부흥의 역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모세 연설의 분위기가 신명기 30장에서 바뀝니다. 잇따른 저주의 경고가 마무리되고 온화하고 자비로운 말투와 더불어 회복과 희망의 미래가 약속됩니다. 백성이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진 절망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소생과 제가의 불씨를 아직 남겨두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한다면 회복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땅으로 귀환할 것이며 순종에 따른 모든 축복들이 다시 그들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회복의 약속(1-1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언약을 유지할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속적으로 순종하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불순종할 가능성이 있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 백성을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지만 알맞은 인간의 반응인 율법을 향한 순종을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1내게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4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네게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 실 것이며 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네게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네게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7네 하나님 여호와에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8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9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10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1-8)

 

이스라엘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습니다.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가 언약의 조건입니다. 서로 지켜야 될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약속을 지켰을 때와 어겼을 때, 각각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⑴ 회개에 따른 귀환의 약속(1-8)

 

저주와 재앙이 언약 백성의 마지막 운명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소생과 회복의 희망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모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일들 곧 모든 복과 저주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현실화하면, 불순종한 결과 저주들이 모두 그들에게 쏟아진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 모든 일을 기억 속에 되살린 뒤, 하나님께 ‘돌아온다면’(회개를 가리키는 동사),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마음과 뜻을 다해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도 ‘돌아오실 것입니다.’(3) 3절의 원문의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너의 포로됨과 더불어 돌아오다’입니다. 이것은 또한 미드라쉬의 해석이기도 한데, 혹자는 이 해석을 하나님께서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곳에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고통을 함께 나누실 것이고, 그들이 포로로부터 돌아올 때 함께 돌아온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좋은 해석이지만, 이 의미는 이어지는 진술인 ‘하나님은 너를 긍휼히 여겨 돌아오신다’와 동일한 맥락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네가 포로 되어 있을 돌아오실 것이며, 너를 긍휼히 여겨 돌아오실 것이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여 흩으셨던 그들을 모든 민족들로부터 모으실 것입니다. 그들이 하늘 끝까지 내쫓겼을지라도 데려오실 것입니다(4).

세상의 끝자락인 절망의 땅에 잡혀가면, 그들을 다시 데려온다는 것이 사람에겐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 땅을 다시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순종의 대가로 약속된 모든 복을 다시 쏟아주시고, 그들을 번성케 하실 것입니다(5).

이 모든 행동들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그들의 순종의 대가로 이 일을 행하시지만,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백성은 결국 생명을 얻을 것이나 그들을 압제했던 적군과 원수들에게 그 모든 저주들이 퍼부어질 것입니다(7). 이러한 극적인 반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순종이 조건으로 이루어진 일이나, 6절에서는 ‘회개’와 ‘순종’마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명시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자손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그들이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까지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생명, 곧 영생의 선물은 우리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신명기에서 나아가 신구약 전체에서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의무와 사명입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8절에서 모세는 '너는 돌아와 말씀에 순종하고 모든 계명을 준행하라고 명령하며, 이것은 9절 이하에서 크게 강조됩니다.

 

⑵ 순종에 따른 축복의 회복(9-10)

 

하나님께서 마음의 할례를 시켜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만드신다고 했지만, 동시에 여기서 하나님께 돌아와 순종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만일 그들이 순종하면 그들은 번성과 번영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을 것입니다(10).

바로 여기에 ‘이미’와 ‘아직’이라는 인간의 이성으로 조화시키기 어려운 신자들의 삶의 변증법적 긴장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최종적 구원은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니, 그분께 맡겨둔 채 우리는 그저 명령하신 대로 구원의 확신 속에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순종해야 할 하나님 말씀(11-20)

복과 저주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동시에 둘 다 선택할 수 없고,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감수하고 나와의 싸움을 감행하고서라도 순종을 택하여 복을 누릴 수 도 있고, 결국 자신의 바람과 쾌락과 욕망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심오한 기독교 진리의 한 핵심에는 사랑과 순종의 길만이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11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5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11-20)

 

하나님께서 순종을 명령하시면서 그것을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율법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아는 이들에게 순종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⑴ 순종하기 쉬운 말씀(11-14)

 

모세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비유를 들어 이 말씀을 소유하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 그것을 가져오거나(12), 바다 밖의 먼 곳에 가서 가져와(13), 들려주어 행하도록 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 말씀이 자신을 통해 그들에게 전달되고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말, 이 명령이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가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키기 어렵지 않다는 의미인지, 율법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는 의미인지 견해가 갈립니다. 우선 이 율법을 가르치고 배우라는 강조로 비추어 볼 때, 율법은 배우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모세의 이 진술이 순종에 대한 강조의 문맥에서 나오기에, 분명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이 아니라는 취지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율법이 하늘 위, 바다 건너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서 주어졌다는 말도 지체 없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이 말씀이 지금 여기에 있으니, 우리에게 선포되어 들려지는 이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12). 바울은 모세의 이 비유를 자신의 설교에 각색해서 인용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고자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고 하늘로 올라가거나, 무저갱에 내려가 죽은 자 가운데 그분을 모셔 올리려는 시도는 헛되며 불필요하다고 말합니다(로마서 10:57). 말씀이 땅에 내려와 가까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와 함께 있으니, 그분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로마서 10:8-9). 이것은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이 아니며 순종하기에 너무 멀리 있는 말씀도 아닙니다.

 

⑵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15-20)

 

모세는 1절에 이어 다시 백성들 앞에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내놓습니다. 그것은 생명과 복 그리고 사망과 화입니다. 복과 화의 문자적 의미는 각각 ‘선과 악’입니다. 여기서 ‘생명과 사망’이 양극의 짝을 이루고 ‘선과 악’이 또한 양극의 짝을 이룹니다. 백성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선은 온갖 좋은 복들을 말하고, 악은 온갖 두려운 재앙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다시 28장에서 강조한 원론적인 법칙을 반복합니다. 순종은 축복의 길, 불순종은 재앙의 길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온전히 따른다면 그것은 생명과 선을 선택하는 결정입니다. 반대로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따라가 섬기면, 그것은 사망과 악을 선택하는 결정입니다. 그 결과는 엄중합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장수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여러 세대 장구한 세월의 땅의 거주를 말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오랜 장수의 복을 가리키기도 합니다(잠언 32, 16, 전도서 8:13). 이것은 마지막 20절의 ‘네 생명이요, 네 장수’라는 표현에도 적용됩니다. 출애굽기 20:12에서 부모를 공경하면 ‘그 땅에서 네 생명(날들)이 길리라’도 마찬가지로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문자적으로 ‘너의 날들이 길어질 것이다). 장수를 비롯하여 16-20절에서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대조적 결과의 비교는 단순합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도식화할 수 있다.

 

순종-생명, 번성, 오랜 거주(장수), 번영

불순종-사망, 멸망, 짧은 거주(단명), 저주

 

모세는 이 언약의 불변성을 확증하기 위해 강한 상징성을 동원합니다. ‘내가 하늘과 땅을 불러 증거를 삼노라.’ 하늘이나 땅과 같은 불변의 자연물을 상징적으로 증인으로 삼는 것은 고대 중동의 조약과 계약 관행입니다. 이것은 쌍방 간의 조약과 계약의 불변성을 강조하여 모든 조약문들을 엄중히 지킬 것을 요구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의 땅에서 ‘생명’이시고, ‘장수’가 되시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오래도록 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순종했을 때, 어떤 복을 누릴 수 있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면 당연히 그 백성은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길이 자유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그 분의 사랑에 응답한다면, 우리는 생명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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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9-02)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

신명기 29장 14-29절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가 되지 못할 때 안팎으로 실망을 줍니다. 때로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세상까지도 교회를 향해 ‘교회까지도 이러느냐?’는 말을 합니다. 이 세대의 마지막 소망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이 지상 교회는 완전할 정도로 거룩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언약의 참여자는 수평적으로 현 세대의 회중에서부터 수직적으로 미래 세대의 회중으로까지 확대됩니다. 언약 조항의 법적 유효성이 세대를 거슬러 지속되는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과 그것의 개정판인 모압 언약을 후세대가 잘 지키면 축복이 임하지만, 후세대가 언약을 파기하면 동일한 저주가 쏟아질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기어코 불순종의 길을 가게 된다면, 이 경고는 현실이 될 것입니다.

 

세대로 확대되는 언약 참석자(14-17)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 민족과 별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거룩한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으로써 거룩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14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15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이니 16(우리가 애굽 땅에서 살았던 것과 너희가 여러 나라를 통과한 것을 너희가 알며 17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14-17)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종교들처럼 사람들이 신이나 종교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애굽의 종이 되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렀습니다.

 

‘시내산 언약’과 그것을 재확인한 ‘모압 언약’은 본질상 동일한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지금 동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체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의 잠재적 참 여자들도 이 역사적 현장에 함께 서 있습니다(15). 후대로 이어지는 조약의 유효성은 ‘에살핫돈 조약’ 문서를 비롯하여 고대 중동의 여러 계약 문서에서도 발견됩니다.

베드로 또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성령의 선물에 대한 약속이 ‘너희와 너희 자녀와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외칩니다(사도행전 2:39).

하나님의 언약은 당대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모든 세대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삽입부로 처리된 16-17절은 흐름을 깨지 않는 모세의 말로 간주해도 무방합니다. 모세는 과거 그들이 애굽 땅에서 살았던 때와 또한 출애굽 후 40년 광야에서 생활하다가 ‘여러 나라’를, 즉 에돔과 모압을 통과했던 순간을 상기 시킵니다. 그때 그들은 특별히 많은 종류의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피조물인 생물과 자연물을 신으로 숭배한 고대의 종교와 사상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가나안 일대뿐 아니라 애굽에서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 시 하나님께서 애굽 전역에 퍼부으신 10대 재앙은 사실상 애굽의 여러 신들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에돔과 모압을 통과하면서 그들의 우상들도 목격하고 경험했을 것입니다. 에돔의 신은 구약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고대 애굽의 문헌과 에돔 지역에서 발견된 비문과 여러 주상들과 석상들의 조사를 통해 코스(Qos)라는 신으로 밝혀졌습니다. 구약에서 모압 신은 그모스, 암몬 신은 밀곰으로 등장합니다(열왕기상 11:1). 이스라엘이 암몬 국경을 통과한 적이 없으므로 그들은 에돔과 모압 국경을 통과하면서 그들의 신에 대해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 모압의 우상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큰 해를 끼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5:3-4에서 살펴보았던 바알브올 사건입니다. 바알은 주인을 뜻하므로, 바알브올을 해석하자면 ‘브올 성읍의 주인’을 의미합니다. 그는 모압의 주신 그 모스를 가리킬 것입니다. 에돔과 모압은 국가 신을 중심으로 다신 숭배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 중에 있는 목석과 은금의 우상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우상에 대해서 신명기에서 사용되지 않은 단어 ‘길룰림’이 특징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똥’이란 단어와 비슷합니다. 이것은 우상의 더러움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단어 선택이 분명하며, 또한 그것들을 ‘가증한 것들’로 칭합니다. ‘시 쿠즈’는 특히 부정한 짐승의 고기를 가증하게 여기는 레위기 11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이런 이방 민족들의 우상에 현혹되어 하나님을 떠나 그것들을 ‘섬기게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로 인해 그들 가운데 쓰디쓴 독초의 뿌리가 사방으로 뻗고 쑥이 무성히 자랄 것입니다. 이런 비유는 그들이 당할 고통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두려운 저주의 경고를 지금 분명하게 들었음에도 스스로를 위안하고, 자기 확신에 빠져 ‘젖은 것과 마르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 마음은 편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젖은 것과 마른 것’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가장 무난한 견해는 이 문구를 ‘모든 것’을 가리키는 총칭어법(merism)으로 보는 것입니다. 땅에는 물 공급을 충분히 받는 동식물과 땅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동식물과 땅도 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모든 것들이 다 ‘쓸려 간다’(사파트의 분사 세포트)는 뜻입니다. 즉, 세상이 어찌 되었든 그 마음이 완악한 죄인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스스로 위안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이기 때문에 말씀을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 공동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높이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한 백성이 되길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 거룩해져야 합니다.

 

언약 파기에 따른 저주(18-21)

하나님께서 열방에게 당신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순종하는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어주시는 것입니다. 작은 나라가 척박한 땅에서 번성하고 강대국 사이에서 안전한 것을 보면 열국도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인정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큰 재앙으로 쏙대밭이 되는 것을 보면, 열국도 하나님의 존재감을 놀라게 될 것입니다.

 

18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19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20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시되 21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언약의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18-21)

 

다시금 여호와의 분노와 저주가 확정적으로 선언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며, 앞서 모세가 나열한 모든 저주가 그에게 쏟아질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다 이름의 제거는 앞서 아말렉에게 선언된 가장 무서운 저주였는데, 모세는 언약 백성에게도 해당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구별되어’ 모세가 강론한 뒤 기록될 율법서의 경고대로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구별이란 동사 ‘힙딜’은 특별한 떼어놓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저주를 붓기 위한 구별을 의미하는데, 풍자적 의도로 쓴 단어입니다. 이것은 평화로운 공동체 안에서 악을 행하는 개인에 대한 경고다 한 사람의 죄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징벌을 받지만, 여기서는 공동체의 보존을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징벌하신다고 경고합니다. 공동체가 우상숭배자들을 감시하여 통제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공동의 책임을 지고 벌을 받게 되지만, 적발되지 않은 채 은밀히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직접 제거하실 것이라는 경고로 이해됩니다.

 

열국을 놀라게 한 이스라엘의 재앙(22-29)

심판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랑의 하나님만 믿는 자들은 사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우상 하나를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좋기만 한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밀히 저질러진 죄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드러난 일은 사람을 통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22너희 뒤에 일어나는 너희의 자손과 멀리서 오는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시는 질병을 보며 23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요 24여러 나라 사람들도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25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26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27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28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 29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22-29)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인해 당할 재난은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처절할 것입니다. 우선 그 재앙을 당할 그들의 후손들과 그 땅을 잠시 찾은 외국의 방문객들이 이 광경을 보고 충격에 빠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재앙으로 그 땅이 온통 유황과 소금이 뒤 섞이고, 가뭄으로 건조하여 산과 들판이 불에 타 농사는커녕 풀도 나지 않는 땅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유황과 소금’은 이어지는 ‘불 심판’과 소돔과 고모라 및 위성 도시들인 아드마와 스보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황불 심판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소금’이 뿌려진 것으로 보아 다른 성격의 재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소금은 하늘에서 심판의 일환으로 뿌려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국이 침략하여 소금과 유황을 들판에 뿌려 농사를 불가능하게 만든 것으로 해석됩니다. 후손들과 외국의 방문객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나라들도 그 재앙들이 자연 재앙들일 수가 없음을 알고 놀랍니다. 그들은 자문자답할 것입니다(25).

 

25-26절에서 네 개의 일련의 동사가 연속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이방인의 입술을 통해 증거 됩니다. 그들이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했다.’ 27-28절에서도 일련의 동사들이 나열되면서 이방인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가 표현됩니다. ‘진노하사’, ‘재앙을 내리시고’, ‘크게 통한하시어’, ‘뽑아내시고’, ‘내던지셨다’. 여기서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서 뽑아내 내던졌다는 것은 나무나 작물을 뽑아내 짐승의 먹거리나 폐기물로 내던진 것처럼 그들이 버려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변의 열국들도 여호와와 그분의 율법 및 율법서의 경고를 잘 알고 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29절의 결론적 진술은 난해 구절입니다. ‘감추어진 일은 여호와께 속했고 나타난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했습니다.’ ‘감추어진 일들’과 ‘나타난 일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은밀히 저질러진 죄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드러난 일은 사람이 심판한다는 의미라는 해석이 있습니다(탈굼 요나단). 둘째, 감추어진 것은 율법의 신비로운 의미이며, 드러난 것은 율법의 표면적 의미로 인간은 그저 감추어진 의미를 몰라도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의무라는 해석입니다. 셋째, 감추어진 것은 하나님만 아시는 미래의 일이고, 드러난 것은 현재 주어진 율법들이며, 인간은 주어진 율법에 따라 사는 것에 충실해야 한다는 해석입니다(현대의 일부 해석가들). 이 중 첫째 견해가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라는 진술과 잘 어울립니다. 율법을 불순종하면 은밀한 행위는 하나님이 직접 재앙을 내리시고 드러난 행위는 공동체가 사법적 징벌을 내리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종종 성도들에게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문제점들을 듣습니다. 모든 문제점들을 인정합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될 사실은 지상의 교회는 완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도 때를 따라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문제들을 들추기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자신부터 거룩해져 갈 때,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자녀들에게 예수 믿어야 복을 받는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잘못 이해한 자녀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 받은 방편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믿는 것 자체가 바로 복’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시편 73:28). 하나님 앞선 성도들은 축복만 아니라 불순종의 대가 역시 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개인이 아름다운 신앙을 가질 때, 하나님의 공동체가 거룩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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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9-01)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

신명기 29장 1-13절


하나님께서는 때를 놓치신 것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해 조급함으로 다 완성해가던 일까지 망치는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 오시지도 늦게 오시지도 않고 하나님의 때에 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난을 겪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때가 되자 모세를 통해 출애굽 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신 것 같지만 결코 침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신 것 같지만 결코 모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시간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대로 인도하셨습니다.

 

28장과 더불어 모든 언약 말씀의 선포와 이후 백성들의 반응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선포가 마무리 되고, 29장은 새로운 단락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모압 언약의 채결입니다. 먼저 1-4장과 마찬가지로 이 언약은 역사적 회고로 시작됩니다. 출애굽 사건과 더불어 40년의 광야생활을 간략히 회상하고 이어서 모압 광야에 도착한 뒤 아모리 족속을 몰아내고 요단 동편을 점령한 일을 회심합니다.

 

모압 언약의 선언(1)

 

1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1)

 

앞서 신명기 4:44-28:68은 모세의 율법 강론이었습니다. 29-30장은 모세의 세 번째 강론이며, 여기서 모압 언약의 수립을 선포합니다. 히브리 성경은 유대 학자들의 전통을 따라 1절을 율법 강론을 끝내는 마무리 전술로 분류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호렙(시내)산 언약’ 이외에 다른 ‘모압 언약’이 세워졌습니다. 모압 언약은 호렙 언약을 폐기하는 새로운 언약이 아닙니다. 그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강화하는 갱신 언약입니다. 따라서 업에서 선포된 율법이 그대로 승계되고 필요한 경우에 새로운 율법과 해설들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율법들은 가나안 땅의 상황에 맞도록 개정되었습니다.

29-30장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전형적인 고대 중동의 종주권 조약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형식은 역사적 회상(29:2-9), 언약 파트너의 지정과 충성의 맹세(29:10-15), 배신에 대한 경고(29:16-20), 복과 저주의 선언(30:1-20)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절을 제외하면, 29-30장은 별다른 서론이 없는 형식적으로 매우 어색한 언약 수립 선언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1절은 율법 강론의 마무리이면서 모압 언약 선언의 서론으로 이중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압 언약은 시내산 언약을 폐기하는 새로운 언약이 아니라, 그것을 재확인하고 강화하는 시내산 언약의 갱신입니다. 따라서 앞서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에서 반포된 대부분의 율법이 승계되며, 필요한 경우 어떤 율법들의 해설이 덧붙여지고, 일부는 새로 추가되며, 몇몇 율법들은 가나안 땅 상황에 맞추어 개정될 뿐입니다.

 

출애굽의 회상(2-4)

하나님과 언약을 채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구원이라는 큰 선물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구원을 베푸셨고, 우리들은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수혜자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자랑할 수 없고, 감사함으로 말씀을 따라 살아간 것입니다.

 

2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4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2-4)

 

앞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말씀 순종여부에 따른 복과 저주를 아주 구체적이고도 장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언약을 들었던 불신 세대는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의 손자와 손녀들은 이제 막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 언약 갱신을 하십니다. 그 가르침은 과거의 복, 현재의 자원, 미래의 위험, 그리고 시간을 초월하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29-30장은 종주권 조약의 형식과 거의 흡사한데, 그에 걸맞게 간략한 역사적 회고로 시작됩니다. 모세는 1-4장에서 자세히 연설했던 지난 40년의 세월에 대한 역사적 회고를 간략히 요약해서 진술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24장의 시내산 언약 체결의 절차와 비슷합니다. 거기서도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시내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그들에게 회상시킵니다(출애굽기 19:4). 출애굽기 19-24장은 여러 모로 신명기 전체의 구조 및 현재의 29-30장의 구조와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19장에서 짧은 역사적 회상과 더불어 그들의 거룩한 백성이자 재사장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선언한 뒤(출애굽기 19:5-6), 백성 전체가 언약에 참여하도록 준비시킵니다. 이어서 20장에서 십계명(20:1-17)과 다양한 율법들(출애굽기 20:22-23:33로 ‘언약서’라 불린다)이 언약의 조건 사항들로 선포됩니다. 그런 다음 24장에서 성대한 시내산 언약식이 진행됩니다. 신명ㅅ기 1-4장의 역사적 회상에 이어 그들이 택함 받은 특별한 백성임을 선포하고(신명기 4:44-28:68) 모압 언약을 채결합니다(신명기 29-30장). 모압 언약을 체결하는 신명기 29-30장 자체도 앞서 말한 대로 거의 동일하게 이와 같은 조약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세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충분히 목도했습니다. ‘너희가 목도했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한 증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앞에서 강한 팔과 능력으로 행하신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특히 앞서 이 하나님의 ‘시험’은 하나님께서 온 애굽과 바로 앞에서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증명작업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와 애굽의 신들이 거짓됨을 밝히 드러낸 시험, 곧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통한 그들의 패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강한 전사이심이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거듭해서 망각했습니다. 기적 체험은 분명히 중요하나 신앙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목격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 그리고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마음, 눈, 귀는 인간이 단순히 물리적 수준을 넘은 그 이상의 영적인 인지 능력을 비니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그들의 불순종이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지 않아서 생긴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살아계심에 대해 기적을 동반한 충분한 증거를 보여주시더라도 깨달음을 얻고 믿음을 간직할 책임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몫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불순종이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지 않아서 생긴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는 영적 비밀을 깨닫고 구원의 비밀과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됩니다. 동시에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인간의 통제 하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은 엄청난 이적과 기사가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마음을 열고, 눈을 크게 뜨고, 신중히 귀 기울인다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광야 생활의 회상(5-6)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체험하면 모두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과 광야 40년의 역사를 보았지만, 불순종한 자들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더 간구할 것은 성령의 새로움 안에 충만하게 깃드는 것입니다.

 

5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 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6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5-6)

 

역사적 회상은 출애굽 후 그들의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한 회상으로 이어집니다. 40년간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부족함 없이 지낸 수 있었습니다.

앞서 8장 4절에서도 설명대로, ‘옷이 낡지 않고 신발이 해어지지 않았다’는 표현을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의 기적적인 내구성으로 40년간 버텼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의복과 신발의 공급을 뜻합니다. 기적적인 만나와 메추라기의 공급 외에 중단 없는 생필품의 공급은 옷과 신발에만 국한되지 않고, 당연히 그들의 천막을 비롯한 의식주 전반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밀가루를 주지 않으셔서 그들은 ‘떡’을 먹지는 못했으며, 포도주와 독주(곡주로 보아야 함)를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광야 방랑 생활의 특징상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무려 40년간 이것들을 먹지 못한 이유는 이것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함을 깨닫게 하려는 고된 훈련이요 교육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요단 동편의 점유에 대한 회상(7-9)

 

7너희가 이 곳에 올 때에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우리와 싸우러 나왔으므로 우리가 그들을 치고 8그 땅을 차지하여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나니 9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7-9)

 

40년간의 방랑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모압 평지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로 아모리 왕,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연달아 격파했으며, 광활한 요단 동편 땅을 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땅은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되었습니다. 이 축복은 오로지 순종의 대가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약의 말씀을 지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순종이 있을 때 형통할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언약의 참여자들(10-13)

하나님께서는 언약적 신실하심을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충만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언약 공동체는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포용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연약한 자들까지도 하나님의 공동체에 포함되었습니다. 교회는 계급, 성, 민족을 떠나서 모두 다 화합할 수 있습니다.

 

10오늘 너희 곧 너희의 수령과 너희의 지파와 너희의 장로들과 너희의 지도자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11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 있는 것은 12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13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10-13)

 

모세는 이 언약에 참여할 자격을 갖추 사람들을 계급 순으로 나열합니다. 곧 리더 그룹인 ‘지파의 수령들과 장로들 및 지도자들’이며, 나아가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 유아들, 그들의 아내들을 포함합니다.

이 언약의 우산 아래 이방인들인 ‘객’들과 ‘종들’도 포함됩니다. ‘나무 패는 자들과 물 긷는 자들’은 이스라엘을 섬기는 모든 사람에 대한 총칭어법(merism)인데, 이들은 이스라엘 동포가 아니라 ‘객’들과 함께 묶이는 이방인 노예들입니다. 이들도 모압 언약의 체결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들도 언약에 참여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는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언약 준수의 맹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며, 혈통적인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들어와서 순종하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도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과제를 포함합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십니다. 우리에게 아들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은혜는 위대한 각성을 일으켜 하나님의 뜻을 위한 헌신과 투신을 촉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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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8-03)

 


불순종에 따른 저주들⑵

신명기 28장 36-57절


인생은 누구와 함께 이웃을 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악한 사람들과 교제하면 악함을 배우고,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하면 거룩함이 삶에서 베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맹모삼천지교’란 말을 기억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복된 삶’이 ‘저주 가득한 삶’으로 역전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말씀이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주는 적들의 침략으로 인한 국토의 유린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원수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본국으로 끌고 가서 강제 개종시킬 것이며, 땅은 메뚜기가 창궐하여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비참한 민족으로 전락하여 열국의 입에 오르내리며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의 저주는 적들의 침력으로 인한 약탈과 대기근에서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불순종에 따른 저주들(36-57)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다른 것은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하나님 외에 어떤 것을 의지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소망과 능력이 끊어집니다. 반대로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36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 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37여호와께서 너를 끌어 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38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뿌릴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39네가 포도원을 심고 가꿀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 할 것이며 40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41너와 함께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네게 있지 못할 것이며 42네 모든 나무와 토지 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 43너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 44그는 네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그에게 꾸어주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 45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네게 명령하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와서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 46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가 되리라 47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48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49곧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50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보살피지 아니하며 유아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51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의 소산을 먹어 마침내 너를 멸망시키며 또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소의 새끼나 양의 새끼를 너를 위하여 남기지 아니하고 마침내 너를 멸절시키리라 52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 53네가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곤란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살을 먹을 것이라 54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남자까지도 그의 형제와 그의 품의 아내와 그의 남은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55자기가 먹는 그 자녀의 살을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까닭일 것이며 56또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부녀 곧 온유하고 연약하여 자기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자기 품의 남편과 자기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57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36-57)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버리실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영원히 그들의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므로 그들이 부정해지면 땅은 그들을 토해낼 것입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불순종한 자들에 대한 저주가 본장 마지막 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⑷ 유배와 땅의 죽음(36-42)

 

① 미지의 땅으로 유배(36-37)

저주는 국토 유린과 백성의 유배로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은 알지 못하던, 먼 곳에서 쳐들어온 적들의 땅으로 끌려갈 것이며, 거기서 치욕적으로 강제 개종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민족들이 만든 수많은 새로운 우상들을 보게 될 것이며, 결국 그 신들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배교는 처음엔 분명 강제성이 있었겠지만 그곳에서의 새로운 정착 생활 속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동화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끌려간 땅의 ‘모든 민족들 속에서’ 큰 화젯거리가 될 것입니다. 한때 여호와라는 막강한 신과 그 신이 비호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소문을 들었는데, 그들이 포로로 잡혀 왔다는 것은 놀라운 뉴스가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 민족들에게 ‘속담’, 곧 일종의 ‘교훈’이 되었으며,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앞서 어떤 나라는 단수였으나, 여기서는 끌려간 땅의 사람들이 복수의 ‘민족들’로 등장합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제국은 여러 민족들을 점령지에서 붙잡아와 영토 사방에서 살게 했습니다. 약소국은 거듭된 주변 국가의 침략으로 사방으로 뿔뿔이 잡혀갑니다. 훗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도 숱한 고난을 당했습니다(참조 이사야 11:11). 당시 강대국의 정복지의 국민을 포로로 잡아가는 것은 보편적 관행이었습니다. 다양한 목적으로 그러했는데, 인재를 뽑아 쓰고 국가의 토목 공사와 같은 곳에 인력 자원으로 쓰며, 타국에 노예로 팔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식민지 국민들이 저항을 하거나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② 기근이 임함(38-42)

적들에 의한 국토 유린과 더불어 자연 재해와 메뚜기 떼가 습격하고 벌레가 창궐하여 가나안은 죽음의 땅이 될 것입니다(38-42). 논밭의 곡식은 메뚜기 떼에게 다 뜯기고 과수원의 열매들은 벌레가 먹을 것입니다. 감람나무 열매는 익기도 전에 병충해로 인해 모두 떨어질 것이며, 감람유를 구하지 못해 몸에 기름을 바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애써 재배한 농작물뿐 아니라 사랑을 쏟아 키웠던 자녀들도 메뚜기 떼처럼 습격한 적들에게 빼앗길 것입니다. 오늘날뿐만 아니라 고대의 중동 지역에서도 메뚜기 떼는 가장 무서운 재앙 중 하나였습니다. 메뚜기 떼는 애굽에 내려진 10대 재앙 중 하나였으며(출애굽기 10장), 선지자들의 심판 예고에도 빈번히 등장하는 재앙입니다(요엘 1:4; 2:25, 아모스 7:12).

 

⑸ 꼬리가 되는 나라(43-46)

 

언약 백성은 만일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열국을 능가하는 일등 민족이 될 것이나, 반대로 불순종의 길을 선택하면 그들은 점점 낮아져 가장 비천한 민족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심지어 ‘너희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보다 더 낮아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얹혀사는 이방인 장기 체류자인 객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는 신분입니다.

그러나 심지어 그들도 이제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높아져 언약 백성이 그들을 섬겨야 하는 치욕스런 일을 당할 것입니다(43). 그들은 꾸어주던 위치에서 이제는 빌리는 위치로 전락되며, 머리에서 꼬리가 되는 수모를 겪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일어날 일이라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네게 명령하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와서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45)고 소개합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으셔서, 모든 나라들 중에 구별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사랑하며 다른 것들에 눈질이나 마음을 주질 않길 원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채우시길 원하십니다.

불순종하는 백성에게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나 멸망하게 될 것이며, 이 재앙들은 그들의 자손대대로 ‘표징과 훈계’가 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표징과 훈계’는 앞서 이적과 기사로 번역되었습니다. ‘훈계’로 번역된 ‘모페트’는 기본적으로 ‘놀라운 일’, ‘기이한 일’을 가리키며, 그것은 ‘증거’, ‘징조’의 의미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은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표적’과 ‘증거’를 삼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표징과 훈계’ 대신 ‘표적과 증거’가 좋은 번역입니다. 출애굽 당시 파라오와 애굽에 열 번이나 내린 재앙과 저주의 초자연적 현상을 하나님께서는 ‘이적과 기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실 하나님의 능력과 살아계심을 보여 주는 ‘표적과 증거’입니다.

지금은 그 모든 재앙이 몇 배 더 센 강도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퍼부어집니다. 이 재앙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다스리심에 대한 자자손손대대의 ‘표적과 증거’가 될 것입니다.

 

⑹ 침략과 기근(47-57)

 

① 강대국의 침략(47-51)

이 저주의 마지막 단계는 적군의 침략과 그로 인한 가장 비참한 기근의 재앙을 소개합니다. 언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풍요에 눈이 멀어서 감사함으로 그분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걷어찬 대가로 그들은 이제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며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이 와중에 적들이 침략해 그들의 목에 ‘철 멍에’를 멜 것입니다(48). ‘멍에’는 나무로 만들어 소나 나귀의 등에 메어 부리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것에 수레나 쟁기를 연결해 일을 시킵니다. 이때 짐을 부리고 쟁기질을 하는 소는 꼼짝 못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멍에를 멘 소와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멍에를 제거해 주시고, 그들을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다시 멍에를 메는데, 이번에는 ‘철 멍에’다 멍에는 나무로 만들어도 무겁고 불편한데, 철 멍에는 훨씬 무겁고 부서지지도 않습니다. 이들이 당할 고통이 애굽에서보다 훨씬 크다는 의미입니다.

적들은 멀리서 마치 독수리가 날아와 엄습하는 것처럼 그들을 어느 날 갑자기 칠 것입니다. ‘멀리 땅 끝의 한 민족’은 장차 이스라엘을 번갈아가며 칠 앗수르와 바벨론을 예언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박국은 임박한 갈대아 민족의 군대가 표범보다 빠르고 이리보다 사나우며 먹이를 움키려고 날아오는 독수리와 같다고 비유합니다(하바국 1:6-8). 그들은 언어가 생소한 나라이며, 용모는 거칠고 자비심을 찾아볼 수 없어 노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짓밟을 것입니다. 모든 농산물과 가축을 약탈하고 전국토를 남김없이 유린할 것입니다.

 

② 인육을 먹는 비극(52-57)

비극의 절정은 비참한 동족 간의 식인입니다. 먼 곳에서 침략한 적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성읍들을 포위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철옹성과 같은 성벽을 허물고 성들을 포위하여 맹렬히 공격할 것입니다. 성안에 갇힌 그들은 식량이 떨어져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사람을 잡아먹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자녀를 잡아먹는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자녀를 잡아먹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임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쉽게 발각될 위험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자녀 살해는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모르게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과 도덕의식은 아무리 극단적 상황이라도 이것을 허용하진 않습니다. 그들의 극단적 굶주림이 비극적이게도 이 선을 넘어가게 만듭니다. 심지어 자녀의 풍요를 누리며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았던 남편과 아내는 이 인육을 둘러싼 경쟁자입니다. 그들은 서로 자신의 배우자와 형제자매, 심지어 남은 자녀들마저 그 도살한 자녀의 인육을 축내는 경쟁자로 여기며 미워하고, 그것을 몰래 감추어 놓고 남몰래 혼자 먹으려 할 것입니다.

포위당한 성에서 인육을 먹은 일은 실제로 먼 훗날 이스라엘 역사에서 현실화되고 맙니다. 또한 고대 중동의 다른 지역에서도 역사적으로 발생한 일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서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에워싸 식량이 떨어지자 여인들은 성중에서 자신의 자녀를 잡아먹었습니다(열왕기하 6:28-29; 예레미야 4:10). 요세푸스는 제2성전 시대에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에도 그런 일들이 발생했다고 전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은 축복의 언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무시한다거나 뜻을 알면서도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로부터 추방하시고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낮추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에 감사하며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축복과 저주의 산에서 선택하라고 권고하신 것처럼,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들은 축복의 산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리는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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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8-02)

   


불순종에 따른 저주들⑴

신명기 28장 15-35절


사람들이 하나님께 축복받을 수 있는 길은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살면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까지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로마서 7:19)라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죄성 때문에 절제를 놓쳐 버리면 너무 쉽게 불순종하여 악행으로 돌아섭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함을 아십니다. 하지만 ‘타락한 죄성’ 때문이라며, 그것을 핑계 삼아 범죄한 것을 정당화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축복을, 불순종은 저주라는 공식이 주제입니다. 순종에 따른 복의 목록이 나열된 뒤 이제 불순종에 따른 저주의 목록이 나열되기 시작합니다. 저주의 선포는 매우 길어 축복의 선포의 거의 네 배에 이릅니다. 여기서는 먼저 앞서 축복의 선언과 마찬가지로 15-19절에서 간략히 저주에 대한 서론적으로 묘사한 뒤 10절부터 상세하게 저주들의 목록을 설명해 나갑니다. 

 

불순종에 따른 저주 서언(15-19)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에 대해 이스라엘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순종’과 ‘불순종’ 두 가지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사회에서 정의로운 시스템이 붕괴되었습니다. 불평등 구조가 심화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심으로 각종 질병이 임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징계를 살펴보겠습니다.

 

15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16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17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18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19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15-19)

 

‘저주에 대한 선언’도 ‘축복의 선언’과 마찬가지로 받을 저주에 대한 개괄적인 진술과 더불어 시작합니다. 축복의 목록을 1-14절까지 설명하신 후 이어서 저주의 목록이 시작됩니다. 15-19절에는 서론적인 의미에서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면 모든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본문부터 65절까지 저주에 대해 길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저주’란 무엇입니까? ‘저주’의 의미는 ‘가벼이 여기다’, ‘낮추다’라는 뜻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저주하는 행위’는 ‘부모를 멸시한다.’는 의미입니다. 현재의 단락은 그들이 받을 저주를 간략히 요약합니다. 그들이 저주 아래 놓이면 집 안의 쌀이 동나고, 밥그릇에 밥이 없을 것입니다. 자손은 끊기고 농사와 목축은 파산할 것입니다. 그 저주를 피할 방법이 없으니 성읍과 들판에서도 저주를 받게 되고, 들어와도 나가도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많은 저주를 나열한 이유는 죄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제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불순종에 대한 경고가 아주 길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축복의 목록보다 저주는 네 배정도로 길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복보다 저주에 초점이 맞춤으로 불순종에 대한 강한 경고의 효과를 노리셨습니다.

 

불순종에 따른 저주들(20-35)

불순종과 도덕적 부패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습니다. 심판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공평과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인비다. 알지도 못하는 다른 민족에게 패전을 겪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이 재판장이심을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20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 21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마침내 너를 멸하실 것이며 22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 23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24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 25여호와께서 네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그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가서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땅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지고 26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줄 자가 없을 것이며 27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피부병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유 받지 못할 것이며 28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치는 것과 눈 머는 것과 정신병으로 치시리니 29맹인이 어두운 데에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하지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30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 여자와 같이 동침 할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 31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겨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원수에게 빼앗길 것이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32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찾음으로 눈이 피곤하여지나 네 손에 힘이 없을 것이며 33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34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말미암아 네가 미치리라 35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를 생기게 하여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20-35)

 

⑴ 재앙과 흉년(20-24)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한 행동의 대가로 그들의 모든 일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재앙을 가리키는 삼중적 표현인 ‘저주와 혼란과 책망’은 구약에서 드물게 사용되는 단어들입니다. 마지막의 ‘책망’은 언뜻 저주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이 동사는 심한 질책으로 상대의 힘과 기력을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책망’은 저주로 퍼부어지는 온갖 재앙들이 하나님의 강한 질책이라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몸에 발생하는 ‘염병’은 ‘전염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염병이 이어지는 각종 질병들과 별개로 언급된 이유는 질병은 사람마다 다양하게 앓는 질환들인 반면, 전염병은 집단 발병과 강한 전염성으로 떼죽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일곱 가지 재앙이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라고 나열됩니다. 앞의 네 종류는 고열을 동반하는 인간의 질병이고, 뒤의 세 종류는 곡식의 질병으로 보입니다. ‘폐병과 열종’은 레위기 26:16의 축복과 저주의 선언에서도 나란히 등장합니다(거기서는 ‘폐병과 열병’). 이 두 단어는 구약에서 이곳과 레위기에서 두 차례만 사용될 정도로 드문 단어입니다. ‘염증’과 ‘학질’ 또한 한 번 나오는 단어들인데, 둘 다 ‘태우다’는 뜻의 어근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나머지 셋은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입니다. 어떤 해석자는 이 세 가지 증상도 사람이 앓는 질병이라 생각합니다. 22절의 일곱 가지 질병은 인간의 몸에 발생하는 재앙이고 23절에서 가뭄의 주제로 전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농사에 타격을 주는 ‘가뭄’과 곡식의 ‘마름병’, ‘병충해’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어서 그 자연의 재앙이 생생한 시청각적 묘사로 설명됩니다. 하늘이 놋이 되고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 두 금속의 우열을 염두에 두고 있는 비유가 아니라, 가뭄에 대한 생생한 비유입니다. 극한의 가뭄으로 논밭은 곡식이 자랄 수 없으며 과실수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의 수문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대지는 모래 바람과 티끌이 나부껴 비 대신 땅 위에 먼지가 수북이 쌓일 것입니다(24).

 

⑵ 패배와 질병, 공포(25-29)

 

이어지는 재앙들의 종류는 전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질병들이 등장하는데, 앞선 질병들과 다른 점은 이 질병들이 전쟁 통에 하나님의 공격으로 생긴다는 점입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은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늘 패배할 것이며, 그것도 가장 비참한 패배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들이 기세등등하게 한 길로 들어가 적들을 공격할지언정, 적들에게 격파되어 일곱 길로 흩어져 도망할 것입니다. 앞서 순종하는 백성이 적들을 격퇴할 때, 적들이 일곱 길로 혼비백산하며 도망가는 것과 대조됩니다. 칼을 맞고 쓰러진 백성들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뒹굴 것이며, 그것은 독수리 떼와 들짐승의 밥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시체를 새와 짐승들로부터 지켜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 이 후에도 끔직한 저주가 가중된 무서운 저주입니다. 죽음 후에 자신의 시신이 잘 보존되지 못하고 짐승에게 뜯기고 훼손되는 것은 큰 수치와 불명예였으며, 고대 중동에서는 가장 큰 형벌 중 하나였습니다(참조 삼하 21:10). 열왕기상 21장은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왕상 21:21-24).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에게 그들의 역겨운 죄로 인해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을 것이며 이세벨의 시체를 개들이 먹을 것이라는 저주입니다. 또한 엘리야는 그들에게 협력했던 자들의 시체도 개들이 먹고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저주합니다. 이스라엘이 아합과 이세벨처럼 배교의 길을 간다면, 불순종의 대가로 이런 비참한 저주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애굽의 종기’와 ‘각종 피부병’과 ‘괴질’로 이스라엘을 치실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새로운 일곱, 가지 질병들이 나열됩니다. 먼저 ‘애굽의 종기’는 분명 전쟁의 맥락에서 사용된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과거 하나님께서 애굽 파라오의 학정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셨을 때, 그것은 분명히 여호와께서 파라오와 그의 제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으로 그들을 공격하셨습니다. 이때 애굽의 종기로 이집트 온 땅의 사람들과 심지어 짐승들을 타격하셨습니다(출애굽기 9:9-10). 또한 이것은 7:15과 이어지는 60절의 ‘애굽의 모든 악질/질병’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런 질병들의 출처가 다름 아닌 애굽이라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이 첫 번째 질병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추가로 여섯 가지의 각종 괴질과 심리적 고통들로 이스라엘을 치실 것이다. 먼저 계절 괴혈병, 피부병입니다. ‘치질’로 번역된 ‘오팔림’에 대해 여러 학자들은 치질은 피부 질환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항문에 생기는 종양 종류로 생각합니다.

뒤이은 세 가지 증상은 정신적 고통들이다 미친 것은 정신이 혼절한 상태 눈먼 것은 시각장애라기보다는 정신적 충격으로 눈이 안 보이는 증상을 말합니다. ‘정신병’은 극도의 정신분열을 말할 것입니다.

 

⑶ 약탈과 압제(30-35)

 

저주의 셋째 범주는 적들에 의한 약탈과 압제입니다. 적들이 침공하여 국토를 유린하고 모든 것을 약탈해 갈 것입니다. 약혼한 남자는 신부를 빼앗길 것이고, 집을 근사하게 지어도 살지 못할 것이며, 희망을 품고 땀 흘려 포도원을 가꾸지만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사례는 모두 앞서 장정들의 징집 면제 사유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약탈극은 앞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던 특권들을 모두 뒤집어놓을 것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적들이 그 모든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의 적들이 그들이 짓지 않은 집을 얻고 파지 않은 우물을 차지하며 심지 아니한 과수원의 과실을 먹게 될 것입니다. 덧붙여 애써 기른 가축과 사랑하는 자녀마저 빼앗기고 모든 것을 약탈당합니다(31-33). 그들은 이 장면을 보고 넋이 나갈 것입니다(34). 이 약탈의 저주 단락은 다시 ‘종기’ 발생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 됩니다. 앞서 ‘애굽의 종기’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나 종기 증상은 애굽의 종가와 달리 무릎과 다리와 관련되어 있고 심하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퍼지는 심한 피부 질환이므로 양자는 다른 병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순한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 범죄하였느냐?’라는 평가를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이 범죄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방식으로 만들어가져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린도전서 16:22)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을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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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8-01)

 


빌닷의 잘못된 관점들

욥기 8장 1-22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훈계하는 태도를 보이기 쉽습니다. 성경 지식이 많으면 사람들을 가르치고 고치려 하기 쉽습니다. 엄정한 잣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권면이나 훈계가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합니다.

 

빌닷의 첫 번째 발언은 엘리바스의 첫 발언(4-5장)과 유사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악인/죄인/무지자에게는 화가 임하고, 의인/선인/지혜자에게는 복이 임한다는 원칙을 설명합니다. 다만, 엘리바스가 개인적 경험과 신비 체험을 바탕으로 주장을 전개했다면, 빌닷은 “옛 시대 사람”과 “조상들”에게서 지혜의 근거를 찾습니다.

 

인과응보와 하나님의 의(1-7)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하고 따르기를 강요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경우를 봅니다. 상대방의 아픔이나 성황을 헤아리지 않고 신앙이라는 잣대를 사정없이 들이대는 경우도 많습니다. 판단과 정죄의 언어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권면이 아니라면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1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1-7)

 

빌닷에게 욥의 말은 “거센 바람”처럼 들립니다. 7장에서 욥이 인간의 인생을 한낱 바람(루아흐)에 불과하다며 바람의 짧게 스쳐 지나가는 성질을 강조한 것과는 다르게, 빌닷은 바람의 세찬 힘(캅비르)을 부각 시킵니다.

욥의 말을 빌닷은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굽게 하신다’는 주장으로 해석합니다. 욥은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도)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빌닷에게 욥의 말이 그렇게 ‘해석’된 이유는, 욥이 고난을 당하는 현실과의 무죄 주장을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에게 벌을 내리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는 규범적 지혜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드신 창조 원리인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칙에 어긋나게 움직이시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선한 분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빌닷은 욥의 자녀들의 죽음을 그들이 지은 죄에서 찾습니다. “수아 사람” 빌닷은 (수아라는 지역이 어디 있든지 간에) 욥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직접 옆에서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욥의 자녀들에 대한 빌닷의 정죄는 그러므로 인과응보의 원리를 적용한 추론일 뿐입니다. 욥기의 독자인 우리는 욥의 자녀들의 죽음이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빌닷은 자신의 추론을 이어나갑니다. 죄인에게 멸망이 할당된 것처럼 의인에게는 온전함의 회복(샬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의인과 지혜자를 빌닷은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사람(5), 순수/순결하고 올바른 사람(6). ‘자크’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금(개역한글 “정금”)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형용사입니다. “정직”으로 번역하는 ‘야샤르’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그 길을 ‘똑바로’ 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비록 지금 현재의 상태가 작고 “미약”할지라도 미래에는 매우 커질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이 유명한 구절을 빌닷은 지금 자식들을 다 잃고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욥에게 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잃은 아픔을 겪는 사람의 면전에 ‘너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라는 말을 대놓고 한 뒤에 이어지는 말입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그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놓는 끔찍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반성적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불의한 자에게 임하는 화(8-19)

오랫동안 축적한 지식과 지혜라고 해서 어떤 상황에든지 다 적용할 수 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오래되어 검증된 지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모든 문제에 적용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재앙을 만나기 때문에 과거에 범죄한 것은 아닙니다.

 

8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11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12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13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14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15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16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17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18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19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8-19)

 

빌닷은 자신의 지혜의 근거를 “옛 시대 사람”과 “조상들”에게 둡니다(둘은 평행어로 동일한 의미를 지님). 규범적 지혜가 말하는 규범(패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때부터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천지창조의 때에 더 가까이 있는 과거 시대와 조상들이 그 규범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는 따라서 ‘과거 지향적’입니다. 규범을 더 많이 경험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므로,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점점 더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대표적인 잠언이 부모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구도로 되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잠 1:8).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동일합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 32:7). 참고로, 나중에 등장하는 엘리후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참고 있었다는 것(32:4,6)은 나이와 지혜를 동일시하는 규범적 지혜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입니다. 동시에,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32:9)라는 엘리후의 말은 반성적 지혜의 표현입니다.

이어서 빌닷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규범적 지혜의 근본 원리를 설명합니다. 이 지혜는 자연 세계에 대한 관찰(‘경험’)에서 온 것입니다. 좋은 것(“왕골”, “갈대”)이 나쁜 곳(“진펄 아닌 데”, “물 없는 데”)에서 나올 리가 없습니다. 물론 척박한 곳에서도 무엇인가 자라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지속될 리는 없고, 하나님께서 본래 지정하신 충분한 수명(“뜯을 때”)을 다 살지 못하고 명멸하게 됩니다(11-12). 악인/무지자(“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 “저속한 자”)의 운명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13). 여기서, “저속한 자”라고 번역된 ‘하네프’는 어원적으로 길에서 벗어나거나 똑바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17:8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똑바로 사는 사람(예샤림)과 반의어로 사용되었고, 20:5에서는 악인들(레샤임)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악인은 멸망한다’는 공식은 다음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왜 악인은 존재하는가?’ 악인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통해 다 없어져야 마땅한데 악인들이 존재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빌닷의 대답은 한마디로 ‘그들은 오래 가지 못한다’입니다. 비록 악인들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그들도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그 뿌리”를 내릴 수는 있습니다(16-17). 그러나 그들이 뿌리내린 곳은 “돌무더기”이고 그 돌 틈 사이로 뿌리를 겨우 내렸다 하더라도 쉽게 뽑히고 맙니다(17-18). 그들이 집을 지을 수는 있어도 그 집은 마치 거미줄 같아서 쉽게 끊어지고 오래 “보존되지”는 못합니다(14-15). 그들은 곧 “다른 것”으로 대체됩니다(19).

이 자연의 법칙에서 끌어낸 인과응보의 원리를 욥이 처한 현실에 적용하면, 욥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수명을 충분히 다 살지 못하고 일찍 죽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4절에서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라는 ‘주장’의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이고 “저속한 자”(비뚤어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빌닷의 주장은 재난이나 천재지변이 닥쳤을 때 그것이 죄 때문이라고 정죄하는 목회자들의 경우를 연상시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으로(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라는 명분으로) 2차 가해를 저지릅니다. 욥기의 반성적 지혜는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신학적 원리’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지혜가 아닌 악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온전한 자에게 임하는 복(20-22)

종종 환자 심방에서 환자를 찾아가 회개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은 죄가 없기에 아프지 않고 상대방에게 위로는커녕 상처만 주게 됩니다. 성도들은 어려움에 당한 타인의 상황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규정하지 말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위로를 전해야 합니다.

 

20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1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20-22)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지혜자(“순전한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상은 “웃음”과 “즐거운 소리”입니다(21). 기독교의 금욕주의 전통이 ‘웃음’을 사탄이 틈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과는 달리 (보들레르의 “웃음의 본질/On the Essence of Laughter(1855)”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 신부를 보라), 규범적 지혜는 웃음을 의인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선물로 여깁니다. 시편 126:2에서는 “웃음”과 “찬양”을 평행어로 취급하기까지 합니다(반면에,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는 “웃음”을 “미친 짓”과 연결시키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전 2:2]).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자를 “미워하는 자”는 곧 “악인”이며, 그들에게 내리는 벌은 “부끄러움”과 “없어짐”입니다(22). 누군가에는 큰 용기와 위로를 줄 수 있는 말이 누군가에는 정죄와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빌닷은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리의 온전하지 못한 지식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가고 그들을 품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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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8-01)

 


 순종에 따르는 축복

신명기 28장 1-14절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린 사람들의 특징은 모두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복은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증명해 줍니다. 절대로 하나님과의 ‘거래(去來)의 관계’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서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축복의 동산에 이릅니다.

 

모세는 28장에서 장황한 축복과 저주들을 쏟아냅니다. 이것은 앞서 5-26장의 율법 강론 전체에 대한 축복과 저주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모세는 축복을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말씀대로 산다면, 그들은 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것이 세 가지 범주로 나뉘어 선언 되는데, 대적에 대한 승리, 후손의 번성, 세계 속의 일등 국가가 되는 것 등입니다.

  

서언(1-6)

우리는 복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복’의 다른 말은 생명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짐승과 다를 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복을 받기 위해서는 선행(먼저 행할 것)해야 할 조건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1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1-6)

 

신명기 2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28장은 축복과 저주의 장입니다. 이것은 언약에 대한 반응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언약이 일방적인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하시면서, 그들에게서 인격적인 반응을 기대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표현이 언약입니다.

 

축복과 저주의 선언은 고대 중동의 전형적인 종주권 조약 형식에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축복의 내용은 짧은 반면(1-14), 저주의 선언은 그 분량이 네 배에 이를 만큼 장황합니다(15-68). 따라서 28장은 저주의 장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숱한 저주들의 상세한 묘사는 언약 백성이 이 언약의 계명들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받을 대가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1-6절은 14절까지 축복의 선언의 서론적 부분입니다. 이 단락에서 앞으로 설명될 복들이 개괄적으로 진술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앞서 선포된 모든 율법의 말씀을 지키고 행할 때 그들이 누릴 영예가 요약됩니다. 모든 민족들보다 뛰어난 ‘지존의 나라’가 될 것이며, 온갖 풍요로운 복들을 받을 것입니다.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인데, 이는 언제 어디서든 그들에게 복이 뒤따를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순종에 따른 복(7-14)

우리들이 진정한 축복을 누리려거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삶의 방식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의도대로 살아갈 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영광과 희열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이 ‘언약’입니다.

 

7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8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9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10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11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12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7-14)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맺은 백성들로서의 의무를 다시 한 번 총체적으로 점검합니다. 복에 대한 서론적 진술에 이어 구체적인 복들이 대체로 주제별로 묶여서 선언됩니다.

 

⑴ 전쟁에서 승리(7-10)

 

첫째 복은 이스라엘은 말씀에 순종하면 승리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들은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의 주체가 백성들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는 모든 적군들을 격파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신명기에서, 나아가 이전의 책들인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줄곧 약속되었던 것이며, 실제로 지난 40년의 역사 속에서 증면된 사실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거듭된 불순종과 배역으 길을 갔으며, 믿음을 간직하지 못하고 대적들을 두려워했을 뿐, 오직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주도권을 쥐시고 모든 여정 가운데서 그들을 이끄시어 모압 광야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순종하는 백성으로 산다면,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들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실 것입니다(1).

침략자들은 한 길로 들어왔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심으로 일곱 길로 도망갈 것입니다. ‘일곱 길’은 완전수로서 그들의 군대가 격파되어 사방팔방으로 대열이 흩어져 도주한다는 뜻입니다. 승리를 거둔 나라는 마땅히 승전의 복을 누리며, 평화 속에서 국가는 번영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창고’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실 것이고, 온 땅이 하늘에서 내리는 복을 만끽할 것입니다.

9절은 마치 그들이 장차 그 땅에서 순종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이 복을 누릴 것처럼 읽히는 데, 약간 수정 되어야 합니다. 물론 신명기 신학의 기본적 기조는 ‘너는 성민이다’라는 직설법적 선언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신명기는 ‘너는 성민이 되라’는 명령 법적 요구와 ‘만일 네가 순종하면 복을 누리고 성민이 될 것이다’라는 조건적 약속을 수 없이 강조합니다.

9절 역시 조건이 내세워진 성민의 약속입니다. ‘만일 네가 그 명령을 지키고 그 길로 행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세워 네가 성민이 될 것이다.’ 그들이 만민 중에서 승리하는 날, 또한 ‘지존의 나라’인 성민으로 세워진 결과, 그들은 언제나 성소에서의 예배의 삶 속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고 높일 것입니다. 땅의 모든 민족들은 여호와의 이름이 그들 위에 높임을 받고, 왕으로 그들을 통치하는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10).

 

⑵ 삶에 풍요로움을 누림(11-12)

 

둘째 그들이 누릴 복은 ‘번영’의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그들에게 풍성한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들에 복이 충만히 임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던 약속이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창세기 12:13). 이 약속대로 그들은 약속의 땅을 점유하게 될 것이며, 이제 그 땅에서 ‘몸의 소생’, 곧 후손이 번성하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들이 키우는 가축들도, 곧 소와 양/염소, 그리고 아마도 나귀와 약대에 이르기까지 번성할 것이며, 땅은 곡식과 과일들을 풍성히 맺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하늘을 여실 것입니다. 하늘은 아름다운 보물 창고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복이 쏟아져 내립니다. 땅에게 베푸는 가장 큰 복은 사실은 대지를 적시는 ‘비’였습니다. 순종하는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11:8-17에서 약속의 땅의 농사법은 거대한 강들이 흐르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농사법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마르지 않는 큰 강이 흘러 어지간히 심각한 가뭄이 아니라면 농사를 망치진 않았습니다. 그 강줄기와 거기서 거미줄처럼 뻗어 나와 광활한 경작지 사방에 물을 대는 인공 농수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발을 굴려 물을 퍼올려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약속의 땅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인공적으로, 물리적 힘을 동원해 땅에 물을 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직접 급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늘 농사법, 또는 ‘믿음 농사법’이자 ‘기도 농사법’입니다. 그들의 농사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가장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파종기인 음력 7-8월경에 이른 비가 내려야 합니다. 이때 비가 오지 않으면 1년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그 후 6개월 동안 중간 비가 또한 내려야 하는데, 이 비는 설사 덜 내린다 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풍년을 위해서는 늦은 비가 또한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미 곡식의 줄기는 힘차게 뻗었고 줄기마다 낟알들이 빽빽하게 송골송골 맺혀 있지만, 아직 알이 차지 않았습니다. 만일 늦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알이 차지 않은 빈껍데기 낟알만 남게 되어 그해 농사는 흉작이 될 것입니다. 늦은 비가 쏟아져야 곡식의 낟알이 꽉 찹니다. 이 늦은 비는 또한 6개월의 건기를 버티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자원이며, 6개월이 지나 음력 7-8월에 다시 이른 비가 내리기 전까지 과실수들이 풍성히 열매를 맺게 하는 비였습니다. 그러니 늦은 비는 또 얼마나 중요한가? 또한 그 비가 주는 혜택은 인간만이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가축들도 들판에 무성히 자란 풀을 마음껏 뜯을 것입니다. 가축들은 많은 새끼를 낳고 살을 찌우며 우유를 풍성히 공급해줄 것입니다. 그들은 경제적 번영을 누릴 것이며, 손으로 하는 다른 모든 일들도 복을 받아 넉넉한 삶을 영위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형편이 어려운 민족들에게 차관을 주는 나라가 될 것이며, 그들이 차관을 들이며 살림을 유지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강하게 경고하셨으며, 이어지는 저주의 선언에서도 거듭 강조하십니다.

만일 그들이 이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거짓 신들 풍요를 약속한다는 농경 신 바알에게 현혹되어 바알을 섬긴다면, 하나님은 하늘 문을 닫으시고 하늘 보물창고의 물줄기는 끊어질 것입니다.

 

⑶ 주도적인 나라로 세움(13-14)

 

순종하는 백성은 ‘일등 국가’가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든 민족 위에 머리가 되게 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신명기에서만 사용되는 신명기 특유의 표현인데, 앞서 1절에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즉 ‘모든 민족 위에 최고가 되게 하신다.’는 표현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도 강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오직’이하의 긴 요구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지켜야 하다는 조건인데, 여기서는 그것이 시청각적인 묘사로 더욱 생생하게 표현됩니다.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가지 말라.’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은 고대의 여행길에서 목적지를 향해 갈 때, 자칫 길을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은 생명이라는 목적지로 향하는 바로 ‘그 길’입니다. 그 길에서 좌우로 벗어나 바알 또는 아세라라는 목적지로 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생명과 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한 필수요소가 무엇입니까? 또한 자신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 선행되어야할 신앙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순종을 통해 그 복을 전달 받는 사람이 됩니다. 일상과 일터에서 작은 예수로서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이웃의 구원은 시작됩니다. 이미 받은 구원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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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7-02)


언약을 새롭게 받은 백성들

신명기 27장 11-26절


종종 성도들 중에서는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설교자가 자신의 동감하는 메시지를 전했고, 알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깨닫게 하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앞에 말한 은혜는 감정적인 은혜이며, 다음은 지식적인 은혜입니다. 이것들도 하나님의 은혜이기는 하지만,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은혜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또 다른 의식을 거행하도록 지시를 받습니다. 약속의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 에발 산에서 언약 체결식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언약 했습니다. 그 동안 모세를 통해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약속의 땅에서 순종하면서 살아가겠다는 의식이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청종(11-15)

하나님을 따르는 생활이란 악과 선의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에 대해 순종이 아니면 불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 번째 해야 할 일을 지시하셨습니다.

 

11모세가 그 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2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14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5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11-15)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모세와는 이제 헤어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기준은 지도자가 바뀐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에발산에 돌단과 돌비를 쌓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서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앙에 있는 세겜 근처에 마주 보고 있은 두 산이 있는데, 하나는 그리심 산이요, 다른 하나는 에발 산입니다. 하나는 축복을 의미하는 산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를 의미하는 산입니다. 두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둘로 나누어 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서원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여섯 지파 씩 둘로 나누어서, 한 쪽 여섯 지파는 백성을 축복하기 위해 그리심 산에 서고, 다른 쪽 여섯 지파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도록 지시합니다.

이곳에서 저주산에 선 여섯 지파는 저주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각 지파를 나눈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기 위해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 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순종하면 죽음의 저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아 죄에 대해 죽고 의해 대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거룩한 언약의 십자가 돌비 아래서 ‘죽음과 생명을 앞에 두고 하는 언약’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십자가 앞에서 새롭게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처럼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서원하는 자세를 가질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12가지 약속(15-26)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행하는 자에게는 형벌이 임합니다. 레위 사람들이 외치는 죄악의 목록은 가나안 땅에서 벌어지고 있던 추악한 죄였습니다.

 

15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15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16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17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18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19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0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1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2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3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4그의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5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6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15-2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한 내용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레위인들이 외쳐야할 내용은 12가지입니다. 12가지는 저주만 기록되어 있고, 축복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본성적으로 인간은 범죄하기 쉬운 죄악된 심성에 강한 경위한 조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는 총체적으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백성과의 언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15), 이기적인 욕망으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 깊은 해를 끼치는 자(16-20), 동물과 수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를 포기하는 사람(21)으로 저주 하십니다. 이 언약들을 보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들로서 순수한 백성들이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공동체와 세운 언약관계를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멘”하고 따라 살면 됩니다. 이 말씀을 따라 살면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고, 유익만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보호해 주는 은혜의 장막입니다. 그러니깐 오늘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맺은 언약을 지속하려면 엄히 명령하시는 말씀 앞에서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이 말씀을 설명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3)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이런 축면에서 더욱 깊게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 속에 축복과 저주가 두셨음을 고백합니다. 에발 산을 향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을 기억하며 순종을 선택하는 복 있는 자가 되어 집니다. 한 번 묵상해 보며 우리의 믿음 생활을 더 다지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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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7-01)

 


언약을 새롭게 정립하는 하나님

신명기 27장 1-10절


청춘남녀들이 눈이 맞아 이성교제를 시작한 다음, 배우자로 서로 마음에 들면 결혼을 발표합니다. 결혼을 앞두고 만인 앞에서 결혼하겠다고 발표하는 식을 ‘약혼식’이라고 합니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연애하는 기간 동안에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라면 배우자로 합당한지 꼽꼽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약혼식을 통해 공식적인 부부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살도록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정해주고 축복해줍니다.

 

모압 평지에서 신명기 26장까지 모세의 2번째 긴 설교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제 27장부터는 모세의 3번째 짧은 설교가 시작됩니다. 이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에 순종하므로 축복된 삶을 영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의 첫머리를 여는 본문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맨 처음으로 이행해야 할 의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날 이스라엘은 율법의 하나님과의 언약식을 준비합니다.

 

에발산에 기념비를 세움(1-3)

약속을 잘 지키는 행위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철저하게 언약의 용어며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그것은 순종의 행동을 동반하는 계념입니다. 머리로만 믿는다고 생각하고 입술로만 고백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약속을 지켜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1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2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3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1-3)

 

신명기를 다시 조명해 보면, 그 속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도와주는 지침서입니다. 그래서 삶과 관계된 많은 법들이 있습니다. 이 법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행동으로 나타나야한다는 호소이지 무거운 짐은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을 마치고 이제 가나안 입성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긴 말씀을 선포한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행해야 할 중요한 예식 절차를 가르쳐줍니다.

 

⑴ 일반적인 언약식을 사용하신 하나님(1)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맺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는 언약의 상대도 될 수 없고 맺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한낱 작은 민족이 천지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게 그들을 그러한 자리로 올려 주셨습니다. 언약은 양 당사자 간에 약속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을 ‘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잘 지키면 ‘의로우신 하나님’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로운 백성’, 개인적으로는 ‘의인’이라고 칭합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어떻게 언약을 세우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고대 세계에는 특별히 기념될 만한 사건이 있거나 상호간의 언약을 채결할 때는 일반적으로 돌비를 세워 기념했습니다. 돌비를 세워 그 속에 쌍방의 약속한 내용을 기록하고, 상대방 신들을 기쁘게 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제사 후에는 내용을 서로 지켜나가는 것이 기본 예의입니다. 만약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긴다면, 약속한 상대방에게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언약을 어긴 쪽이 상대방에게 도전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대가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더욱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언약을 체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언약을 체결하면서 상대방 신의 우상 제사하고, 기념비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우상을 신으로 인정하는 결과와 같은 것입니다.

 

⑵ 언약식을 실행하는 방법(2-3)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의지의 표시로 돌비를 세우고, 그 돌비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넣어서 기념비를 삼도록 하셨습니다. 돌비에 새긴 이유는 그 돌이 풍화되어 없어질 때까지 계속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순종을 통해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 약속이 바로 ‘토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인, 모세가 설교했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지켜야 될 약속들입니다. 이 말씀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언약한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순종이고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금 천국을 누리를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언약의 모습이 자주 나타납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무엇을 합니까?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창세기 28:18)라고 소개합니다. 돌로 기둥을 세우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세운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 모세 시대의 일반적인 방법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마음 속 깊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기면서 바르게 지켜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 의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언약식에 근거하여 가나안 땅에 입성하면, 큰 돌에 석회를 바른 후에 그 위에 율법의 모든 말씀을 정확히 기록하고 그것을 에발 산에 세워야 했습니다. 당시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도록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대개 돌기둥에 글을 새겼습니다. ‘석회’를 바른 돌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율법의 내용들을 기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석회’를 바른 이유는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발산’에 그 돌들을 세우라고 합니다. 신명기 11장 29절을 통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에발산’을 저주를 의미하는 북쪽 산으로, ‘그리심산’은 축복을 의미하는 남쪽 산으로 존재했습니다. 저주를 상징하는 ‘에발산’에 돌비를 세우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해줄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순종하면 축복이 오지만, 불순종했을 때, 저주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기억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다가올 저주의 심각성을 일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통해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그대로 이행합니다(여호수아서 8:32). 이스라엘 백성들 목전 앞에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그 돌에 기록하였다고 나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제사법을 신약 시대 사람들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신약 시대 사람들은 이 기념비를 돌판에 새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린도후서 3:3)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 넣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화목제물을 드림(4-8)

사랑이 없이 율법조문만 지키려 하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명망을 자초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사랑하여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큰 긍휼과 오래 참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가도록 수준에 맞게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종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와주십니다.

 

4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5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6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7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8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4-8)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에 행해야 되는 두 가지 의식을 말합니다. 첫째는 돌 기념비를 세워야 했고, 다음으로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발산에다 돌단을 쌓을 때, 철기를 대지 아니한 돌로 단을 쌓아야했습니다. 자연 상태로 있는 돌들로 돌단을 쌓아야했습니다. 아마도 가나안의 제단(祭壇)과 구별하시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철 연장도 사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구약에서는 사람의 손이 타지 않는 것을 여호와 앞에 받치고 원형을 보존하라는 말씀이 여러 곳에서 등장합니다.

백성들은 그 돌제단 위에 번제와 화목제물을 받쳐야 합니다. 돌단을 세운 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7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6-7)고 합니다. 근동 사람들은 어약체결에 있어서 기념비를 세워 놓고, 상대방의 신의 제사를 집례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언약관계라는 것을 기억시키기 위해 ‘번제’와 ‘화목제’를 원하셨습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특별한 행사로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화목제’를 드리란 이유는 무엇입니까? ‘화목제’는 ‘서로 나누는 제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제물을 나누어서 일부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고, 나머지는 제물을 드린 사람과 제사장 그리고 공동체 내에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안에서 ‘한 공동체’, ‘한 지체’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본문을 다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즉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명령과 규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조건임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겸손히 말씀을 청종(9-10)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큰 은혜이며 특권입니다. 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9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10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9-10)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잠잠하여 들으라!’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숙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청종하기 위해서는 조용히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침묵은 주님의 말씀 앞에서 절대 순종하겠다는 소리 없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들뜬 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하는 모세의 말이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언약 체결식을 마친 후에 의례적으로 선포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이 체결되었으니, 이제는 언약에 따른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 것입니다.

 

순종에 대한 선택은 이스라엘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을 때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약속의 가나안 땅에 입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살겠다고 언약식을 체결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을 때,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조건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절대적으로 순종하겠다고 언약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식을 통해 약속한 것을 파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알지 못하고 있을 때 불러서 주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돌비는 세우지는 않았지만, 세례를 통해 언약식을 치렀습니다. 이제는 마땅히 선을 행하고 그 분의 말씀을 따라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준행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현제 우리들에게도 제일 중요한 것은 항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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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6-01)

 


보배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책임

신명기 26장 1-19절


중세 종교개혁의 중요한 성과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인간의 의로 스스로 구원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조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잃은 것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말미암은 관계적인 차원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안에서도 이웃들, 특히 사회의 밑바닥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어떻게 하느냐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인지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켜야 할 제반 율법의 선포가 25장으로 마무리 되고, 26장에서 모세는 전반부에서 충분히 설명했던 예배에 대한 문제로 전환합니다. 언약 공동체는 예배 공동체인비다. 그들은 우선 예배에서 성공해야 하며 이어서 삶의 제반 영역에서 거룩한 백성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세는 축복과 저주의 선포로 자신의 연설을 마무리하기 전에 다시 예배의 문제에 집중합니다.

 

첫 소산물의 봉헌(1-11)

예배와 찬양은 하나님께만 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상(돈, 권력 등)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것이 아까워서 하나님께 드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웃의 아픔을 보고도 자신의 것이 아까워서 외면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예배자로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첫 수확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 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4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5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6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7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에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8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험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10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1-11)

 

신명기 25장까지 하나님의 공동체에 대한 구성을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합당한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만 예배를 잘 드리면 된다는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 예배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를 잘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현재는 하나님 나라에 살지 않으면서도 죽어서는 가고 싶은 이중적인 이상한 논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니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교인이 나온 것입니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해 줍니다.

 

⑴ 지정된 장소에서 봉헌(1-4)

 

본문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집중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무엇보다 가장 먼저 잘 지켜야 할 법도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예배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압제과 박해 속에 있던 애굽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 것을 감하기 위해 그 해 첫 소출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의 표시를 드려야 했습니다. 따라서 매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풍성한 수확물을 거둘 때 가장 먼저 첫 수확물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삶에 대한 감사를 결코 잊어선 안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맏물’은 ‘첫째’, 또는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수확한 최초의 첫 열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과 통치권, 그리고 소산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추수할 수 있게 된 것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논밭의 곡식과 작물들, 과수원의 모든 과일들이 포함됩니다.

장소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 즉 ‘지정된 성소’입니다. 앞서 이 택하신 성소를 굳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볼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각 지방에 중앙의 통제를 받는 여호와의 성소들이 있었으며, 거기에 제사장들이 파견되어 제의를 감독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곳은 레위인들이 거주하는 성읍들, 곧 전국에 흩어져 있던 레위 도성들 중 몇 곳이 지정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의 지역에 속한 그 성소로 올라가 첫 소산물을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로 바치며 축제를 벌였을 것입니다.

이 첫 소산물의 봉헌을 위한 특정한 날짜는 지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각 개인이 적절한 날에 들고 올라가야 합니다. 지역마다 수확기가 차이가 나고, 또한 개별 농부 간에도 그것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며, 작물의 종류와 과일 나무의 종류에 따라 각기 수확기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3대 절기는 추수기와 맞물려 있으므로, 이때 성소에 올라가면서 첫 수확물을 챙겨서 올라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음력 1-3월은 곡식 추수기로 유월절이 있는 1월은 보리 추수, 오순절이 있는 3월은 밀 추수기였으며, 건기 6개월을 지나 음력 7월이 되면 초막절(수장절)은 포도를 비롯한 과일들을 수확하는 가을 수확기였습니다.

중간기 유대 문헌은 음력 3월 칠칠절 시기부터 음력 7월 초막절까지 중간에 언제든 가져올 수 있도록 허용하는데, 각 지역마다 별도의 날을 잡아 오도록 권면합니다. 앞서 18:4에서 첫 수확물을 바치는 예배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거기서 구체적인 품목들인 ‘첫 곡식과 포도주, 기름’이 명시되어 있고, 흥미롭게도 ‘처음 깎은 양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대추 열매, 과일 꿀, 석류, 무화과와 같은 모든 첫 수확물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농부들은 첫 수확물을 들고 제사장 앞으로 가서 이 풍성한 열매가 약속의 땅에 살면서 얻었음을 고백하는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올려야 했습니다(3). 제사장은 헌제자에게서 그 예물 광주리를 받고 제단 앞에 놓아 하나님께 봉헌해드렸습니다(5).

 

⑵ 구원과 축복에 대한 찬양(5-11)

 

제사장이 제단 앞에 첫 소산물의 예물을 놓은 뒤 헌제자는 찬양과 기도를 올립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민족이 겪었던 쓰라렸던 역사와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에 대한 간략한 회고이자 신앙고백적 찬양입니다. 자신들의 위대한 조상은 ‘아무 것도 없던 자들’, ‘방랑하는 아람 사람’이었는데, 애굽으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야곱과 아들들이 겪은 기근으로 ‘파멸해 가는 조상이었든’, ‘정처 없이 유리하던’ 조상들이었든지 간에, 그들은 아람 땅을 떠난 후 약속이 땅에 정착하지 못한 채 오랜 기간 불안정하게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헌제자는 그 후 애굽 땅에 들어간 조상들이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생생히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 가련한 조상들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어 극적으로 구원해주셨음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조상들을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기에 이토록 풍성한 복을 누릴 수 있음을 토지소산의 만물을 올려 바치면서 감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분명 제단 앞의 이러한 찬양과 기도는 헌제자의 입에서 음성으로 발설되어 하나님께 올라갔을 것입니다.

사실 가나안 땅은 객관적으로 볼 때 매우 농사가 불리했던 토양과 기후 조건을 지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11절은 레위인에 대한 언급으로 인해 이어지는 매 3년의 십일조 규정에 묶이는지 아니면 이 첫 소산물의 예배에 포함되는지 다소 모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첫 소산물의 규정임이 분명합니다. 즉, 첫 소산물을 레위인들 및 거류민들과 나누며 즐거워하라는 지시입니다. 12:17-19에서 백성들이 각종 십일조(곡식, 포도주, 기름), 가축의 첫 태생, 각종 서원과 낙헌의 예물 및 거제물을 성소에 바칠 때 가족들을 비롯하여 노비와 레위인이 함께 먹어야 한다는 규정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거기서 토지의 첫 소산물은 누락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여기서 보완되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따라서 그 규정을 따라 이 첫 소산물도 레위인과 나그네가 함께 나누어 먹은 것입니다. 다만 토지의 첫 소산물에는 나그네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12장에서도 언급했듯이, 민수기 18:12은 토지의 첫 소산물이 제사장 몫이었습니다.

따라서 농부들은 이 첫 수확물의 예물을 가지고 올라가 광주리에 일부를 담고 제단 앞에 바친 뒤 레위인과 거류하는 객들과(아마도 그 외 사회적 약자들 및 가난한 사람들도) 함께 먹으며 즐거워했고, 남은 것은 모두 제사장 몫으로 드렸을 것입니다. 이 첫 수확물은 토지 농산물의 십일조와는 별도였습니다. 모든 수확을 끝낸 후에 십일조를 떼서 바치지만, 이 것은 첫 번째 수확을 거둬 먼저 봉헌하는 중요한 감사 예물이었습니다. 그 양이 어느 정도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서 16:16-17에서 말한 대로 랍비들은 형편이 넉넉한 농부에게는 1/40을 제시했고, 바리새인의 샴마이 학파는 최대 1/30, 평균 1/50, 궁한 경우 1/60로 정했습니다. 이 첫 소산물들은 일부를 레위인들과 먹고 남은 것은 제사장 몫으로 돌린 다른 봉헌물들과 달리, 레위 인을 포함하여 나그네와(아마도 다른 약자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모든 소산물은 이스라엘 백성의 노력한 대가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고, 하나님의 축복임을 인정하는 것이 예배의 조건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첫 소산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즐겨 받으시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 자기 자부심으로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니라 자신이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매 3년의 십일조 봉헌(12-15)

경제 활동은 정직하고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신 물질을 통해 하나님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당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십일조를 통해서 또 다른 용도인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도록 하신 권고하십니다. 특별히 오늘날 헌금 이름으로 바꾼다면, ‘구제헌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2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13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하지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 하였나이다 14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15원하건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보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12-15)

 

매 3년의 십일조에 대해 앞서 14:28-29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 3년 주기로 바치는 십일조는 가장 우선이 목적이 레위인, 객, 고아와 과부, 즉 사회적 약자 부양하는 데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매 3년의 십일조를 바칠 때 14장에서 언급되지 않은 감사의 고백을 담은 기도를 올리도록 지시합니다. 아마 이 고백의 낭송은 매 3년의 십일조만이 아닌 매년 십일조를 바칠 때마다 실행되었을 것입니다. 고백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그 말씀대로 십일조를 거룩하게 잘 간수하여 정성스럽게 성소로 가지고 올라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십일조의 예물은 거룩한 성물이므로 부정한 것에 접촉되지 않도록 잘 보관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특히 장례가 발생했을 때는 가족과 조문객들에게 송장의 부정 결의 집단 감염이 발생하여 성물로 떼어놓은 십일조의 물품에도 부정이 옮을 수 있었으니 주의해야 했습니다. 하객들을 위해 잠시 십일조 곡식에서 떼어 음식을 만들면 십일조 곡식 전체가 더럽혀졌을 것이고, 장례로 인해 부정해진 몸으로 십일조 곡식과 접촉하면 더럽혀졌을 것입니다. 농부는 깨끗하게 보존된 십일조를 성소에 가지고 올라와야 했습니다. 이것을 고려할 때 현재의 농부의 고백이 매 3년의 십일조에만 국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의 십일조를 봉헌할 때마다 이 같은 감사 기도를 올려야 했을 것입니다. 당당하게 복을 달라고 기도할 만큼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사용할 줄 아는 성도가 되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많은 물질을 소유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한 물질을 가지고 사랑으로 나누고 베풀고 자비하고 관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때, 그 사람이 보배처럼 영광스러워질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요구되는 순종의 삶(16-19)

말씀에 대한 순종하는 것이 참다운 예배가 될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이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종교 행위 밖에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주신 율법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16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17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 18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19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16-19)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모든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면 그들에게 복 주신다는 약속이 반복됩니다. 그들은 ‘보배로운 백성’이 될 것입니다. 앞서 7:6에서 살펴본 대로 세굴라는 일반적인 재산이 아닌 매우 소중한 보물이나 소유물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오래도록 몰래 숨겨 놓은 종자돈과 같이 귀중한 물품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한 보화처럼 여기고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토록 귀하게 여기시며,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영광스러운 여호와의 성민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종종 성도들 중에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세상 앞에서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얻고 싶어 합니다. 그 길을 하나님께서 이미 제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소중한 분으로 여기면 됩니다. 그러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로 반응하는 마음은 없으면서 교회를 향하여 비판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보는 시각대로 교회가 잘못한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판할 만큼 교회를 사랑하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이웃을 섬기는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나 교회 그리고 사회를 진실하게 아끼며 사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차 가나안 땅에 입성하면, 수고해서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잘못하면, 자신의 노력이나 ‘바알’과 같은 우상의 힘으로 소출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영적인 범죄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시지 않으면 풍성히 채워질 수 없습니다. 소출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들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케 하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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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5-01)


공동체를 위한 제반 법규

신명기 25장 1-19절


종종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신앙과 생활을 분리하려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간혹 교회 안에서는 충실한 모습인데, 세상에서는 지탄받는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참다운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생활을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공동체가 더불어 잘 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공동체의 제반 법규들의 마지막 묶음들이 나열됩니다. 먼저 죄를 범한 사람을 매로 다스리는 태형에서 형제애를 고려한 적절한 형벌 기준을 제시하고, 타작을 할 때는 일하는 소를 베려하는 권면이 주어집니다. 공동체의 기반인 각 가문의 혈통이 존속되도록 계대결혼법이 설명되고, 싸움 중 외간 남자의 음낭을 잡는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 여인에 대한 처벌법이 등장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제반 법규(7)(1-4)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무리 법을 어긴 자라 할지라도 공동체는 죄를 미워해야지 사람까지 과도하게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범죄자의 권리와 존엄을 보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과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배워야 합니다.

 

1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3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4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1-4)

 

재판장은 악인과 선인을 공정하고 명확하게 재판해야 했습니다. 재판장들에게는 철저한 사법 정의가 요구되었습니다. 태형을 집행할 경우에는 40대 넘게 때리지 말아야 합니다. 일하는 소에게는 망을 씌우지 말아야 합니다.  

 

⑴ 지나친 태형 금지(1-3)

 

민간에서 심각한 시비나 다툼이 생기면 재판이 열리고 사건을 조사해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때 유죄이면 사안에 따라 재판관은 태형을 선고하였습니다. 태형은 주로 채찍질이며 때로는 곤장질로 실행되었습니다.

앞서 자신의 아내를 모함한 사람은 태형에 처해진다는 법을 살핀 적 있습니다(22:18). 이 태형에 해당하는 죄의 종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법정에서 사안 별로 결정하였을 것입니다(1).

죄질에 따른 태형의 횟수가 법정에서 결정되면 재판장 앞에서 즉시 실행되었는데, 재판장은 판결이 내려진 태장의 숫자대로 형벌이 집행되는지도 감독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40대로 제한하는데, 실제로 미드라쉬는 39대까지만 집행하도록 권했습니다. 이는 죄인에 대한 인권적 배려 때문입니다. 비록 그는 범죄자지만 여전히 존중받아야할 동족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인간에 대한 존엄을 표시하는 마지막 선을 설정해준 것입니다(3).

 

⑵ 일하는 소를 위한 배려(4)

 

인간에 대한 존엄을 지켜준 율법의 정신은 가축에 대한 배려로 이어집니다. 율법은 곡식을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도록 명령합니다. 소나 나귀와 같은 힘센 가축이 타작에 이용되었는데, 곡식 단을 깔아놓고 소가 발로 밟게 하거나 어떤 기구를 끌어서 낟알을 털어냈습니다. 이때 가축은 일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곡식을 먹었는데, 농부는 곡식을 아끼거나 일을 빨리 끝낼 목적으로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입에 망을 씌우는 일을 해선 안 되었습니다. 이 법령은 신약에서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위한 생계 지원의 근거로 두 차례 인용됩니다(고린도전서 9:9; 디모데전서 5:18)

 

성경에서 죄인에게 그 죄 값을 정당하게 물을 것을 요구합니다. 지나친 관용을 베풀다보면, 본인만 아니라 공동체 내에 윤리의식이 약화되어지고 도덕적 해이해져 망칠 수 있습니다. 형벌을 가할 때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범죄자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무죄한 자를 정죄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심판에 대한 공정성을 기해야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제반 법규(8)(5-10)

‘취수혼’은 남편이 상속자 없이 죽으면 남은 형제 중에서 그 아내와 결혼해 재산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제도입니다. 미망인이 아들을 낳지 못한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하고, 땅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가족을 돌보아야 합니다.

 

5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 하노라 하면 9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 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5-10)

 

현대인들에게는 조금 의아한 법이지만,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근동에서는 형이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게 하고 첫 아들을 죽은 형의 아들로 삼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언약 공동체는 후손이 잘 이어지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⑴ 계대결혼(5-10)

 

언약 공동체의 가족들은 대대손손 후손이 이어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문의 가족 중에는 간혹 아들을 낳지 못해 대가 끊길 위험이 있는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대개 형제들은 가문의 땅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만일 형제 중 하나가 죽었는데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면 형제들이 미망인을 아내로 맞아 애를 낳은 뒤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의 가문이 이어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형사취수 제도인데, 형제를 넘어 삼촌과 친족까지도 이런 결혼이 가능하므로 ‘계대결혼 제도’라고 부르는 게 더 타당합니다.

5절의 ‘아들이 없거든’을 70인경과 미드라쉬는 딸을 포함한 ‘자녀’로 간주합니다. 민수기 27장과 36장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의 사례를 통해 딸에게도 아버지의 땅에 대한 상속권이 있다는 법령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법을 따라 그 형제가 만일 딸이라도 있으면 일단 땅의 상속이 가능했고, 혈통의 보존은 고인이 된 형제의 아내가 아닌 딸의 계대결혼을 통해 충분히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딸은 민수기 36장에서 마련된 법을 따라 아버지의 땅을 가문 내에 보존하기 위해 가문 내의 남자와 결혼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당장에 그 홀로된 미망인과 형제들에 의한 계대결혼이 필요하진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형제가 전혀 자녀 없이 사망했을 경우입니다. 이때는 현재의 규정을 따릅니다. 죽은 자의 아내에는 약혼녀도 포함됩니다. 약혼도 신부 값을 지불했기 때문에 부부로서의 법적 효력이 발생했습니다. 홀로된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재혼해선 안 되며, 죽은 남편의 형제들 중 한 명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습니다(5).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면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 그 가 문의 대가 이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형제의 사망 직후 일단 집안 회의를 통해 합법적으로 형제들 중에서 죽은 형제의 대를 이어줄 사람이 결정되면, 현재의 신명기 계대결혼법이 적용되지만, 그 외의 미망인 형수/제수와의 자의적인 결혼 시도는 레위기 법에 따라 중형으로 다스려졌습니다.

만일 계대결혼의 책임이 있는 사람이 여러 핑계를 내세우며 계대결혼을 거부하면, 그 죽은 형제의 아내는 재판에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형제들이 존재했다면, 가족회의를 통해 연장자 순서를 따라 한 명을 결정했을 것인데, 현재의 상황은 단 한 명도 자처해서 그 의무를 지 겠다는 사람이 없는 경우입니다. 이때 역시 성문에서 장로들의 관장 아래 재판이 열렸고, 공식적으로 그 사람, 혹은 형제들 모두가 계대결혼의 포기를 선언하면 그 결정은 일단 존중되었습니다.

다만 그 형제의 아내가 그 사람들에게서 신발을 벗기고,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어 모욕과 수치심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집안은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이 붙어 다녔습니다. 신발을 벗기는 일은 아마도 더는 그 여인이 그 가문과 상관없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명예의 상실을 가리키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만일 형제 중 아무도 계대결혼의 의무를 지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율법은 그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레위기 25장에 의하면 그 의무를 진 가족과 친척의 법위와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⑴ 그의 형제들, 2) 그의 삼촌, ⑶ 그의 사촌, ⑷ 그의 대가족의 근족(레위기 18:6, 41-42)까지 포함합니다. 가족 내에서 형제들 중 누군가 그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장 가까운 친척들부터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어야 합니다. 자손들이 신앙의 가문을 이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혈통이 이어질 수 있도록 신앙을 계대(繼代)를 이루는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제반 법규(9)(11-19)

모든 경제적인 고통에는 영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도덕적 가치로 제어하지 않으면 강자 독식의 파괴적인 사회가 됩니다. 이기적 자유는 경제 활동을 속임수와 협잡(挾雜)으로 변질시킵니다. 교회는 맘몬의 노예가 된 사회를 향해 예언자적인 메시지를 나눠야 합니다.

 

11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그의 남편을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12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지니라 13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14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15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16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17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9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11-19)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남편을 도우려고 부적절한 행동을 한 여인에 대한 처벌 규정이 제시됩니다. 이어서 공정한 상거래를 위해 무게가 같은 저울추, 크기가 같은 되를 둘 것을 권면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말렉 진멸 명령이 나옵니다. 과거에 아말렉이 뒤에 처진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⑴ 싸움 중 외간 남자의 음낭을 움킨 아내(11-12)

 

이 법령 역시 전후 문맥과 이질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형제들에 의한 계대결혼을 통해 자손이 이어진다는 법령과 한 남자의 음낭을 상해하여 자손이 끊어지게 할 위험이 있는 현재의 사례는 서로 느슨하게 연관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녀의 불미스런 행위는 남자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고, 또한 자칫 생식기를 다쳐서 후손을 못 볼 수 있게 만드는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 해석가들은 문자적으로 그 여인의 손을 잘랐다고 보지 않습니다. 손의 가치에 따라 벌금을 내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⑵ 공정한 저울추(13-16)

 

공정한 상거래는 한 사회의 안정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현재의 법은 정직한 상거래를 위한 양심적인 저울추와 됫박을 사용할 것을 명령합니다. 저울추는 돌로 만든 것이었고, 됫박은 사실은 항아리로서 에바 단위의 양에 맞추어 제작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두 종류의 저울추 사용법은 이렇습니다. 받을 때는 큰 저울추를 사용하고, 줄 때는 작은 저울추를 사용합니다(아모스 8:5).

 

⑶ 지워야 할 아말렉에 대한 기억(17-19)

 

모세의 긴 율법 강론은 이제 아말렉에 대한 저주와 더불어 일단 막을 내리고, 이어서 그 땅에 들어가 누릴 순종에 따른 축복과 불순종에 따른 저주를 선포하는 장황한 연설이 새로 재개됩니다.

아말렉에 대한 저주가 연설의 말미에 놓인 이유는 그들이 지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가장 잔인하고 야비하게 공격했던 민족이기 때문입니다(18). 모세의 의도는 연설 마지막에 가장 역겨운 민족을 끄집어냄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에게 순종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는지 모릅니다.

민수기 24장의 발람의 저주에서 아말렉은 ‘민족들 중의 으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민수기 24:20). 아말렉은 여호와의 ‘대대의 대적’입니다(출애굽기 17:16). 실제로 민수기에서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강력한 대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정탐꾼들에게 공포심을 주어 가나안 진입을 포기하게 만들었으며(민 13:29; 14:25), 그들과의 두 번째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패배한 적이 있습니다(민수기 14:45). 발람은 이 아말렉에 대한 멸망을 선포한 바 있습니다(민수기 24:20). 현재의 모압 평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없애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법을 지키지 않고, 가진 자들이나 권력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사회 구조를 방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윤택해지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축복을 누립니다. 그들의 비극은 자신의 지난날을 잊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변의 가난한 자들을 보지 못합니다. 공감은 단지 감정적인 느낌만을 가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공감이란 불의에 밀려나간 사람들에 대한 올바른 파악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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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4-02)

 


공동체를 위한 제반 규칙

신명기 24장 10-22절


교회가 공동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성도들 간에 참된 사귐이 있고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유무상통의 교회는 돌봄과 나눔의 원형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반영하는 실체적인 생태계를 만드는 곳입니다.

 

모세오경은 다양한 약자 보호법을 마련합니다. 자비로운 추수법은 대표적입니다(출 23:10-11; 레 25:22; 25:4-7; 신 24:24). 곡식을 거둘 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식량을 삼도록 발의 모퉁이는 낫질을 해선 안 되며 바닥에 떨어진 이삭을 내버려둬야 합니다. 칠 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땅이 스스로 내는 소산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들짐승이 마음껏 즐기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베려(10-16)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이 유지되는 일에 중대한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을 향한 사랑과 배려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특별히 청년들과 다음 세대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10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11너는 밖에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12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13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14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15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16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10-16)

 

가나안 땅에서 입성했을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지라도 기근과 가난한 자들이 생길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 말씀하십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이 땅에 현실일 뿐입니다.

 

⑴ 가난한 자에게 금지된 담보물(10-13)

 

6절에 이어 전당물에 대한 규례가 추가로 설명됩니다. 채권자는 돈이나 씨앗, 혹은 식량을 꾸어줬을 때, 채무자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 물건을 담보물로 가지고 나올 수 없습니다. 채권자가 주인 행세를 하며 빚진 자의 집에 침입하는 것은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한 모독 행위입니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물건을 밖으로 들고 나와 건네주도록 최대한 배려해야 합니다. 12절의 지침은 채무자가 극히 가난한 사람인 경우입니다. 출애굽기 22:26-27에서도 동일한 법이 발견됩니다. 그 사람에게서 담보물을 일단 취했다가 해가 지면 돌려줘야 합니다. 이 담보물은 ‘가지고 잘 수 있는’ 물건이므로 옷입니다. 이 겉옷은 잠을 잘 때 덮는 중요한 물건입니다. 여벌의 옷이 있을 만큼 넉넉한 사람이 그 웃을 가져간다면, 덮고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12) 자비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옷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유일한 덮을 것이니 해 질 때에는 돌려주어야 했으며, 채권자는 아침에 다시 그 옷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미드라쉬가 교훈하는 대로 이 옷 역시 단순히 그 외 여러 가지 생필품을 대표하는 물건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2:26은 채무자가 옷을 돌려받지 못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그 탄원을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채권자가 가난한 자에게 큰 자비심을 베푼다면, 하나님께서 그 의로운 행동을 꼭 기억하실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을 배려해주는 채권자들을 축복했습니다(13). 이러한 약속과 경고는 하나님께서 힘없는 자들의 궁극적인 후견인이 되신다는 신념에 의존합니다.

 

⑵ 금지된 임금 체불(14-16)

 

언약 공동체는 극히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인 품꾼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비천하고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입니다. 마태복음 2장의 품꾼 비유는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되는데, 그들은 하루 일당으로 삶을 연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형제이든 거류민이든, 차별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선 안 됩니다. 비천한 일용직 노동자에 대한 ‘학대하다’라는 동사의 사용은 얼마나 그 행동이 잔인하고 비인간적 인지를 느끼게 합니다. 그는 ‘품삯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일당은 일한 그의 날에, 그의 품삯을 지급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날의 식량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문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날 ‘해가 그의 위에서 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입니다. 품삯을 받지 못한 암울한 상황에서 해가 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처지가 잘 묘사된 표현입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며 간절히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그 호소가 하나님께 상달될 것이고, 그 가혹한 고용주를 하나님은 문책하실 것입니다(15).

16절은 죄에 대한 사법 처리의 원론적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법 역시 문맥을 깨트리는 이질적인 요소로 보이나, 앞부분의 죄의 문책과 분명한 연관이 있는 징벌의 원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약자를 보살피지 않고 인명을 경시하며 생명마저 서슴없이 앗아가는 포악한 범죄 행위들, 결국 언약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이러한 중대한 죄를 하나님이 엄중히 물으십니다.

각 사람은 각자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연좌제가 보편적이었습니다. 가족은 곧 자신의 살붙이라는 개념에 따라 가족 내 한 식구의 범죄는 모든 식구의 범죄로 간주되어, 다른 식구가 대신 처벌을 받았습니다. 예컨대, 함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짓고 있던 건물이 무너져 주인집 아들이 죽으면 그 건축가의 아들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고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는 이스라엘 사회에 전래되던 속담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예레미야 21:29-30; 에스겔 18:2). 그러나 동시에 일부 다른 관행들도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중기 앗수르 문헌에는 신성모독으로 어떤 여인이 중벌을 받았으나 자녀는 벌을 받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크레이는 이 두 가지 법이 상충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분명 일종의 연좌제, 대를 이은 죄책의 승계와 죄의 공동 책임 사상은 최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는 십계명의 경고이 기도합니다(신명기 5:9). 이것은 각자 자신의 죄로 죽는다는 현재의 원칙과 모순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을 통한 균형을 이룹니다.

죄의 성격상 아비의 죄악은 필연적으로 자녀와 손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결코 아버지의 죄로 인해 필연적 인과응보 적으로 아들과 손자가 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아들들도 결국 아버지와 동일한 길을 걷기 때문에 징벌을 받습니다(레위기 26:40). 구약성경은 죗값의 승계에 대해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합니다. 먼저, 아버지의 죄의 대가인 징벌은 자동적으로 후손에게 가해지지 않습니다. 각 사람은 각자의 죄로 망합니다!

그것을 예레미야(31:29-30)와 에스겔(18:19-22)이 재차 확인해 주었습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망했으나 아들은 아버지와 별개로 바른 길을 갔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고라의 아들들; 아버지 아하스의 길을 떠난 히스기야; 아몬의 아들 요시야 반대로 아버지는 신실했으나 아들은 패역의 길을 간 아들들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동시에 죄의 공동 책임의 원리는 구약 사상의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이 원리는 세대 간에도 적용되어 후손들은 조상의 죄를 고백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레위기 26:40). 당대의 범죄에 대해 이스라엘은 공동 책임의 짐을 졌습니다.

 

공동체에서 고아와 과부와 객과 같이 약한 자들은 희생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 빚이 있으면 함부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이 없는 채무자의 인권과 인격을 존중받아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무를 떠나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직원들에게 불이익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직장에서 등위를 나누어서 차별하고 갑질해서도 안 됩니다.

 

약한 자를 위한 배려(17-22)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든 성도들이 부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교회는 부자들만 차고 넘쳐날 것인데, 현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 때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마음이 필요하고, 곁에 있는 지체들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과 사랑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관계가 돈독해지고 신앙도 정결해질 것입니다.

 

17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18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19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20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21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22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17-22)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와 모자람이 더욱더 생생하게 주님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같이 연약한 자들에게 대한 자비는 추수할 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만나는 다른 지체들의 어려움을 도와주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더 설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⑴ 객과 고아, 과부를 위한 배려(17-18)

 

가난한 품꾼에 이어 여러 사회적 약자들을 잘 돌보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객, 고아, 과부는 전형적인 사회적 약자들로서 헐벗었을 뿐 아니라 언제나 착취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참고. 이들을 공동체가 돌보라는 권면은 1:16: 10:18). 특히 객(거류민)과 고아는 재판에서 쉽게 편파 판정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의로운 언약 공동체에서 이러한 불의한 재판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공정한 재판에 대해 이미 16:19에서 자세히 논의한 바 있습니다. 경제를 뒷바라지 해줄 남편을 잃은 과부는 의지할 곳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빚을 졌을 때 앞서 가난한 사람들의 사례와 달리 가혹하게 겉옷을 담보물로 가져오는 일마저 금지됩니다.

 

⑵ 자비로운 추수법(19-22)

 

객과 고아 그리고 과부는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이 전혀 없거나 부양해줄 가장이 부재하여 생계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을 위한 자비로운 추수법이 마련되었습니다.

추수기에 논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이삭줍기가 허용되었으며, 포도원에서는 주인이 수확하고 남은 포도를 따 먹을 수 있었습니다. 동일한 법이 레위기 19:9-10과 23:22에도 나옵니다. 만일 밭에서 보리나 밀 한 단(한 뭇)을 두고 왔다면, 가난한 사람들 몫으로 남겨두도록 권합니다. 레위기에서는 추수하면서 밭에 흘린 이삭들과 네 모퉁이도 낫질하지 말고 남겨두라 합니다. 아마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에 남아 있는 감람나무(올리브) 열매도 막대기를 이용해 따긴 했지만(20), 그것을 과일로 먹지는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밭주인은 밀과 보리의 이삭까지 훑어가선 안 되며, 포도원 주인도 남아 있는 포도열매까지 샅샅이 거두어선 안 됩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했습니다. 룻과 나오미를 돌본 보아스처럼 주인은 밭에 이삭을 넉넉히 남겨둘 뿐 아니라, 낫질을 하지 않는 모퉁이 구역을 넓게 산정하며, 가지에 많은 포도송이를 남겨두는 자비심을 품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자비로운 추수법은 안식년에는 밭과 과수원에서 저절로 자란 것은 그들 몫으로 남겨두라는 명령에서도 발견됩니다(출애굽기 23:10-11; 레위기 25:2-7).

 

이렇게 아량을 베풀고 살아야할 이유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2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합당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객과 과부와 고아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셨고 추수도 하게 해셨습니다.


매튜 아놀드는 ‘불평등은 탐욕을 채워줌으로써 해악을 끼치며, 약자에게는 비참하게 하고 위축시킴으로써 해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동물의 세계처럼 약육강식의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처럼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수 있는 곳이 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이제 은혜를 나누는 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불우한 이웃들을 섬기며 배려하는 성도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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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4-01)


거룩한 공동체를 원하시는 하나님

신명기 23장 19절–24장 9절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길 원하십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는 세상에 거룩한 천국을 보여주시길 원하십니다. 서로 아낌없이 사랑하는 모습은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처럼 연약한 자들을 돕길 원하십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나타내므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세상에 보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본 장에는 나타난 각종 율법들은 얼른 보기에는 서로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뚜렷한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약자에 대한 보호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산권에 대한 율법(19-23)

우리는 기본적으로 세상 가운데 선을 행하고 은혜를 베풀어야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악용되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없도록 지혜롭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베풀라고 하십니다. 이 긍휼의 법을 악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에 ‘그릇에 담거나 낫을 대는’ 행위는 분명하게 금하신 것입니다.

 

19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20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21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22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23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24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25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19-25)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원칙이 모든 율법을 아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열된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라는 차원의 규례입니다. 긍휼의 법이 오용되지 않도록 제한조건과 함께 주어집니다.

 

(1) 대부(貸)에 관한 규정(19-20)

 

이스라엘 사회에는 영리 목적의 금융구조가 설 수 없습니다. 대부(loans)는 궁핍함을 덜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형제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가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한다면, 그의 위기는 더 심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부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공급으로 부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형제가 어려울 때 이자(돈이나 곡물)를 받기로 하고 꾸어준다면 하나님의 공급을 악용하는 것이 됩니다. 가진 자는 그의 형제인 언약 공동체 구성원에게 이자를 받지 않고 아낌없이 빌려주어야 합니다(19). 하지만 타국인에게는 이자를 받아도 된다(20a). 이렇게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것을 필요한 형제에게 아낌없이 꾸어줌은 그의 소유가 여호와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즉 그의 수고와 땀이 헛되지 않도록 기후를 조정해주시고 제 때에 수확하게 해주신 여호와의 축복과 개입을 인정하는 언약에 충실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는 자는 기업으로 받은 땅에서 범사가 잘되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21b). 순종함으로 선순환의 삶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2) 서원에 관한 규정(21-23)

 

서원은 예배자가 자발적으로 행하는 서약으로 반드시 이행해야 합니다. 즉 여호와께 자원하여 어떤 것을 행하겠다고, 아니면 예물을 드리겠다고 약속하는 행동입니다. 이를테면 남자나 여자가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나실인의 서원(민 6:1-21), 한나의 서원(삼상 1:11) 등이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한나의 경우처럼,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서원한 것을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까닭은 서원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여호와를 본받는 언약 백성으로서 마땅히 행할 덕목입니다(참조, 레 19장). 서원은 의무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서원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습니다(22). 그러나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23).

 

(3) 이웃의 농작물(24-25)

 

이런 경우는 수확기에 이웃의 일을 도울 때나, 또는 먼 길을 가는 중 먹을 것이 떨어져 배고플 때입니다. 일꾼이나 여행자가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권리는 그 땅의 소유주가 여호와이시고, 그 밭을 경작하는 자는 그분의 소작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분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도록 부름 받은 백성은 여호와의 통치를 받는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언약적 성실하심 덕분에 포도원이나 곡식밭의 수확을 얻은 소작인은 주인이신 여호와의 자비를 본받아서 수확의 열매를 나누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일꾼이나 여행자는 밭에서 포도나 곡식을 가지고 나갈 권리가 없습니다. 농작물을 추수해서 소유하는 권리는 가꾼 농부, 여호와의 소작인의 것입니다.

 

 

이혼에 대한 율법들(1-4)

인간의 역사를 보면, 법은 주로 강자의 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보통 강자가 법을 제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약자였던 여자, 가난한 자, 병자, 나그네 등과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약한 자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1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1-4)

 

만일 남자가 아내에게 ‘수치되는 일’을 발견하여 이혼하기를 결정한다면, 이혼장을 주고 이혼할 수 있습니다(1). 그리고 그 여자는 재혼할 수 있습니다(2). 그녀의 둘째 남편이 마음이 변해서 이혼장을 주고 이혼하거나 그 남편이 죽은 경우(3), 전 남편은 그녀를 다시 아내로 맞을 수 없습니다. 그 까닭은 여자가 더럽혀졌기 때문입니다(4a). 전 남편과의 관계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즉 간음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재혼은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고, 기업으로 주시는 약속의 땅을 죄로 오염시키는 행동입니다(4a). 다시 말해서 그런 재혼은 그 땅에서 멸절되어야 할 가나안 사람들의 관습과 같습니다(참조. 레 18:24-26). 따라서 고대 근동에서 널리 퍼진 이혼 관습을 이스라엘 백성은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천명합니다. 또한 언약 공동체의 기본 질서는 가정 질서이고, 가정 질서는 탄탄한 부부관계를 기반으로 확고하게 세워집니다.

 

기타 규정(5-9)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이들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 살 수 없고, 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직하게 행하고 긍휼과 사랑을 베풀면 현실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복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온전함을 이룰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5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6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7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8너는 나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지켜 행하되 너희는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지켜 행하라 9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5-9)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앞둔 상태였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강한 자들에게 관심을 더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이처럼 약한 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1) 갓 결혼한 자를 위한 군 복무규정(5)

 

갓 결혼한 남자는 일 년 동안 군 복무에서 제외됩니다. 이 규정은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서로 알아가고 남편의 사랑과 배려 속에서 아내가 잘 적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이 보호 규정은 가족 관계의 성장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가족 관계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넓은 가족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새롭게 출발한 가정이 깊은 신뢰와 사랑 가운데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도록 국가가 도와야 합니다.

 

(2) 맷돌에 관한 규정(6)

 

가난한 형제를 돕기 위해서는 이자 없이 빌려주어야 하는데, 담보는 잡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돈을 꾸어주는 자는 꾸는 형제가 사용하는 맷돌의 전부 또는 그 위짝을 저당 잡아서는 안 됩니다. 맷돌은 가장 기본적인 부엌 기구 중 하나입니다. 매일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만일 맷돌 전체나 그 위짝을 저당 잡는다면 그 가족은 큰 곤란을 겪게 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무리한 저당은 꾸어줄 때 넓은 마음을 가지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악한 행실(예. 신 15:7-11)일 뿐 아니라 생명을 담보로 잡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여호와의 통치 안에서 하나의 언약 가족이기 때문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도 형제의 생명을 담보로 잡을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3) 유괴한 자에 대한 규정(7)

 

사람을 유괴하여 노예로 팔거나 자기 수하에 두었다면, 그 범인은 반드시 사형하여 언약 공동체 안에서 악을 없애야 합니다(참조, 출 21:16). 그런 자가 기업으로 주신 약속의 땅에서 여호와의 심판을 받는 것은 너무나 지당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신분에서 구출되었고, 아무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각 개인은 오직 신적 종주이신 여호와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4) 악성 피부병에 관한 규정(8-9)

 

이 규정의 내용을 명시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부병에 대한 규정을 이미 알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참조, 레 13-14장). 이 피부병은 오늘날의 한센병이 아니라 전염성 있는 다양한 악성 피부병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가르침대로 철저하게 지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8). 또한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기억하라’(민 12:9-16)는 명령은 미리암이 모세를 대적하여 반역했던 불순종의 결과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지도자를 반역하여 대적하는 불순종의 결과를 인식하고, 미리암이 행한 불순종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설령 그런 불순종으로 인하여 생긴 악성 피부병이라도 제사장의 가르침에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이 땅의 보물을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는 주님의 말씀은 탐욕을 제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일상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해 거룩한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경제적 이해관계를 떠나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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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3-01)

 


거룩한 총회를 원하시는 하나님

신명기 23장 1-18절


 

조직신학에서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로 분리합니다. ‘눈으로 보이는 교회’는 누구나 다 교회를 출입할 수 있고, 출석할 수 있습니다. 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무종교인이든지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누구나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방법대로 사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앙고백으로 바르게 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회생활에 관한 지침들이 계속해서 제시합니다.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지 배우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 점점 이방민족들과 교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방인들 중에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을 같이 믿으려는 사람들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총회에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총회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들은 백성다운 삶을 살도록 원하십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길 원하시겠습니까?

 

여호와의 총회에 회원의 자격(1-6)

교회 일을 하다보면 종종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꼭 직분자들만 의사결정권에 참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초신자들도 분명히 많은 지혜를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일은 인간의 생각과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분자들은 기도하는 사람이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뜻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1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2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3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6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1-6)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나안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거룩함을 유지하길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 올 수 없는 사람은 세 종류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1) 거세한 자(1)

 

신낭이 상한 사람이나 음낭이 베인 사람이며, 그들은 남자들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생식기가 전달되어 생산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왕궁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거세해서 내시(內侍)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국사를 보게 했습니다.

 

(2) 사생아(2)

 

가나안 사람들이 행한 근친상간은 여호와께 가증한 행실로, 이스라엘 백성이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레 18장). 그런 행실은 그것을 행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땅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제의적 매춘으로, 또 잡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우상을 섬기는 양육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이방신들에게 속한 아이들은 여호와께 가증하기 때문에 십 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총회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 규정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런 아이들은 부모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고, 토라를 배우고 깨달은 것을 일상의 삶 속에서 실천하여 십 대에 이르기까지 순종하는 삶을 살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국가정책을 여호와 중심으로 새롭게 하기 위해서 언약을 갱신하기도 하고, 이스라엘이 나아갈 영적 방향을 제시해주는 임무를 띱니다. 따라서 총회의 각 구성원은 여호와 중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하므로 사생아와 그의 후손들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려면 여호와 중심의 삶을 구축해나가야 합니다.

 

(3) 암몬과 모압 사람들(3-6)

 

이 사람들은 자손 대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총회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영원한 배제는 3절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암몬의 잘못은 약한 자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채워주지 않은 것으로, 그것은 당시 윤리에도 벗어나는 행동입니다(참조. 잠 25:21), 암몬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갈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진로를 저지했습니다(4a). 모압은 발람을 고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저주를 내리려고 시도했습니다(4b). 그러나 모압의 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좌절되었습니다(5).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모압의 이러한 시도는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불러오게 했습니다(창 12:3a). 따라서 모압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들로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외는 있습니다. 룻과 같이 자신이 섬기던 신을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며, 경외한 사람입니다(룻 1:16). 따라서 이스라엘은 암몬과 모압 사람들과 정치적 동맹을 맺거나, 친분 관계를 맺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6).

 

(4) 삼대 후에 들올 수 있는 에돔 애굽 사람들(7-8)

 

만일 에돔 사람이나 애굽 이스라엘에 살게 되면, 이주자들의 삼대 후의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이고 이스라엘의 형제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민족들처럼 혐오의 대상이 아닙니다. 또한 애굽은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체류하는 기간 동안 압박과 고난을 겪었지만, 그들이 신정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한 민족으로 성장하게 한 요람입니다(참조, 신 26:5). 따라서 에돔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은 암몬이나 모압과는 다르게 대해야 합니다.

 

진영을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한 규정들(9-14)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또한 정결해야 했습니다. 이제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들도 세상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세상의 악을 물리치고 십자가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면에서 정결함을 유지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9네가 적군을 치러 출진할 때에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갈지니 10너희 중에 누가 밤에 몽설함으로 부정하거든 진영 밖으로 나가고 진영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다가 11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요 12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그리로 나가되 13네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볼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려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14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9-14)

 

본 단락은 군사 원정 동안에 진영을 정결하게 유지하기 위한 규정들을 제시합니다. 이 규정은 위생 문제와 연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영에 함께 계시므로 진영은 정결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따듯한 기후로 인하여 진영 가운데 전염병이 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돌발한다면 적군과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에 진영은 위생적으로 정결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정결 원칙(9)이 두 사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1) 첫째 사례(10-11)

 

밤에 몽설하여 부정해진 자는 진영 밖으로 나아가서 해질 때에 몸을 씻고 해진 후에 진영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2) 둘째 사례(12-14)

 

진영이 위생적으로 정결하게 유지되지 않으면 따뜻한 기후로 인하여 군사들의 건강을 해치는 전염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배변 시 진영 밖에 땅을 파서 용변을 보고 배설물은 흙으로 덮어야 합니다(12-13). 이스라엘 군사 진영은 여호와께서 머무시는 장소이며, 적군과의 싸움을 진두지휘하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14a). 따라서 이스라엘 군사들은 진영 안에서 생활할 때 그들과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부응해 그들의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진영도 정결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또한 전승 후에 적의 금과 은을 탐하여 도금된 우상이나 우상숭배를 의미하는 장신구 같은 것들을 진영으로 가져온다든지, 또는 패전국의 약자들을 강탈하는 행동은 더욱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행실들은 이스라엘 군사들을 부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타 규정(15-18)

세상에는 어디에나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성도들은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불법적인 행위는 절대로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행위들을 금하시기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그들이 힘들지 않도록 긍휼을 베풀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바르게 세워가야 합니다.

 

15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16그가 네 성읍 중에서 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17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18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15-18)

 

율법의 기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라는 처원의 규례입니다. 다양한 규범들을 소개합니다.

 

(1) 도망친 노예에 대한 규정(15-16)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 지냈던 다를 스스로 노무들을 압제해서는 안 됩니다. 본 규정은 히브리인 노예가 도망친 경우와 다른 나라에서 이스라엘로 도망쳤 온 좋은 모두 그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인 노예가 주인을 피하여 도망하였다면 그 도망친 노예는 그가 원하는 곳 어디서든지 살 수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을 종주국으로 섬기는 봉산국에서 도망쳐 온 노예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노예도 자신이 원하는 장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가 그들 가운데 정착하게 하고, 그를 압제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도망친 노예는 이스라엘 땅에서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습니다. 이 규정은 고대 근등의 여느 법과 대조됩니다. “함무라비 법전 § 15-20”에 따르면, 도망친 종은 반드시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야 하고 그를 주인에게 돌려보낸 사람에게 주인은 은 2세겔로 보상해야 합니다(17). 또한 고대 근동의 봉신조약과 등위조약(parity treaty)에 보면, 정치적 이유로 도망친 자는 반드시 모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2) 창기에 관한 규정(17-18)

 

이스라엘 백성 중 청춘 남녀는 몸을 팔거나 이방신들을 섬기는 제의적 창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행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그분의 경륜을 이루어갈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가나안 사람들을 본받는 삶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그런 행실로 얻은 소득은 어떤 서원 제물로도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에 가져와서는 안 됩니다. 그런 소득은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고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한 ‘신앙공동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세속적인 방법으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중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중심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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