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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0-01)

 

  


선 줄로 생각하는 자의 어리석음

고린도전서 9장 24절-10장 13절


과거 일들은 오늘과 내일 있을 일들의 거울입니다. 지나간 과거를 무시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잘된 것과 잘못된 교훈들을 살펴보면, 선배들의 삶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잘못된 실수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면, 선인들의 훌륭한 교훈을 받아들임으로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우리의 거울입니다.

 

  •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우상 제물을 먹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를 이어갑니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9:24-27입니다. 복음을 위해 자기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9:18-23 내용과 연결해 바울 자신이 많은 절제를 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두 번째 부분은 10:1-13, 구약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의 예를 들어 권면합니다. 특별히 지식과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고 자만하는 자들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의 자기 절제(24-27)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23)도 알고, 싸움의 상태도 알았습니다. 사명을 이루기 위해 싸워야 할 상대는 다름 아니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긍정과 자기 부정의 싸움입니다. 전리포기(18)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그것 없이는 복음이 요구하는 믿음이 완주도, 사명의 완수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4-27)

 

복음으로 구원 얻은 자들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구약시대 그들의 조상 이야기를 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를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1) 자기 절제 원리와 명령(24)

 

앞부분처럼 바울 자신의 예를 통해 권면합니다. ‘알지 못하느냐?’는 표현으로 원리를 제시하고 그에 따른 적용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운동장에서 많은 사람이 달려도 우승자만 상을 받는다는 원리입니다. 이처럼 상 받기 위해 달리라고 명합니다. 초점은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닙니다. 우승할 수 있도록 열심히 달리라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열렸던 이스트리안 경기를 배경으로 권면하는 듯합니다.

 

(2) 두 가지 예를 통한 설명(25-27)

 

어떻게 달릴 것인가와 관련한 권면입니다. 역시 원리와 적용으로 설명합니다. 원리는 25a절에 있습니다. 상을 얻기 위해 애쓰는 모든 자는 모든 것에 절제합니다. 비단 운동경기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냥 되는 것은 없습니다. 수고하고 애써야 하지만, 그 과정에 반드시 철제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원리의 적용을 말하기 전에 중요한 요소 하나를 짚고 갑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목적입니다(25b),

세상 사람들은 썩는 월계관을 목적으로 하지만, 성도인 ‘우리’는 썩지 않는 것을 위해서 합니다. 수고와 절제의 모습은 같지만, 세상이 추구하는 목적과는 다릅니다. 영원한 하나님 안에서 그분 뜻에 따라 살며 그분과의 관계를 온전히 누리기 위함입니다(1:5-9). 그렇기에 세상처럼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배려하고 세상을 따르는 여러 죄에서 떠나는 절제와 수고가 독자들에게도 요구됩니다.

원리에 대한 적용이 26-27절에서 제시됩니다. 두 가지 운동 경기를 배경으로 바울 자신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달리기입니다(26a). 방향 없이 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도와 복음 사역자로서의 목적과 방향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권투경기입니다(26b-27). 주먹을 허공에 치듯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상대로 효과적으로 사역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싸움의 대상이 바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27). 마치 주먹으로 자기 몸을 거칠게 쳐서 말 잘 듣는 노예로 만들 듯, 주님의 뜻을 따라 잘 살아가도록 절제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첨언합니다. 남에게 복음을 전파하지만 정작 자신이 합당하지 않은 자로 판명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신앙의 삶과 복음 사역을 일회적 성공의 어떤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예수와의 관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달리는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과 예수와 형제들과 구원받아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주님의 상급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절제와 성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의 예를 통한 경고(10:1-13)

영적 자만을 경계하되,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변치 않아야 합니다. 변덕스러운 자신을 믿지 말고, 변함없는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넘어진 이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시험이 어렵거나 시련이 힘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을 과신하고 하나님을 분신했기 때문입니다.

 

1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1-13)

 

그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처럼 복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출애굽 시대를 예를 들며 고린도 교인들 중에 우상 숭배와 음란에 빠진 자들이 당한 멸망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1) 우상 제물과 관련한 구약의 예(10:1-5)

 

‘형제들아’란 표현으로 바울 자신의 예에서 독자들 상황으로 관점을 전환합니다. 주제도 권리에 대한 것에서 우상 제물에 대한 것으로 바뀝니다.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로 원리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논증합니다. 원리는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예입니다. 5절까지 이어집니다.

출애굽에서 광야에서의 멸망까지 시간 순서로 기술합니다. 그들의 시작은 긍정적이었습니다. 구름 아래 있었고 홍해 바다를 건넜으며 신령한 음식을 먹고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부정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기에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이 내용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 요소는 언약 관계입니다. 내용은 구약 사건이지만, 세부 묘사와 해석은 메시아로 인한 새 언약 관점을 반영합니다. 두 가지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름과 바다에서의 세례입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구름과 바다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사건을 세례로 묘사합니다. 독자들이 세례로 인해 새 언약 관계 안에 있듯, 구약 백성들도 옛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령한 음식과 음료라는 표현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와 반석에서 난 물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물대신 음료라고 말합니다. 또한 동일한 음식과 음료라고 말합니다. 구약 사건을 예수의 몸과 피에 해당하는 같은 빵과 같은 포도주를 먹는 주의 만찬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14절 이하에 나올 권면을 위한 복선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신앙의 경주입니다. 다섯 번 사용한 ‘모든’(1-4)과 ‘다수’(5)의 대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달리지만 한 사람만 승리한다는 말(9:24)처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구원을 경험했지만 모두 끝까지 승리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1-5절에서 말한 원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언약 관계 속에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했던 구약 백성처럼 예수를 통해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에 들어온 고린도 교인들도 신앙의 경주를 계속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구약 백성은 신약의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2) 구약의 예를 통한 명령들(6-13)

 

구약의 예를 통해 독자들을 권면합니다. ‘그들’(구약 백성)과 ‘우리’(성도)를 연결해 명령하는 방식입니다. 먼저 구약의 일을 언급한 이유를 설명함으로 시작합니다(6). 그들 일은 ‘우리’ 성도가 어찌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들의 악행은 동일하게 언약 관계 안에서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하는 독자들에게 타산지석이 됩니다.

그러고 나서 네 가지 악한 영역에 대해 다룹니다. 첫째, 우상숭배입니다(7).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치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우상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았는데(출애굽기 32:6), 그 모습이 고린도 성도 중 일부가 우상 신전 만찬에서 행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구약 백성이 심판받았기에 동일한 심판이 그들에게도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둘째, 음행입니다(8), 구약 백성은 모압 여인들과의 음행 때문에 염병으로 하루에 이만 사천 명이 죽었습니다(민수기 25:9).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도 비슷한 음행이 있었습니다. 계모와의 음행(5장)과 부유한 사람들의 만찬에 수반된 음행에 참여하는 일(6:12-20)도 있었습니다. 우상 성전에서 열리는 만찬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에 구약의 예를 보면서 신자들은 음행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주를 시험하는 것입니다(9). 구약 백성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불뱀에 물려 멸망했기에(민수기 21:5-6)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넷째,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출애굽기 17:2-3; 민수기 21:5-6). 셋째 악과 관련된 것으로 광야 생활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 받았습니다. 이집트를 심판하셨던 주님이 당신을 거절하는 자를 동일한 심판자의 위치에서 심판하셨습니다. 이 모든 예들은 예수 믿는 자들을 향한 중요한 본보기입니다(11). 비록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 들어와 있지만, 죄와 악으로 신앙의 경주에서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경고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이미 섰다고 생각하는 자, 곧 믿음과 지식과 많은 경험이 있는 자 또는 영적 은사를 포함해 받은 은혜가 많은 자는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12).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감당할 수 있는 시험 외에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감당하지 못할 시험에는 피할 길을 주시니(13), 악한 일에 동참하지 말고 계속 조심해서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해야 합니다. 고린도 독자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신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구원도 사명도 한순간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는 과정이자 여정입니다. 그러니 자만과 방심만큼 큰 장애물은 없습니다. 구원의 ‘안전’입니다. ‘확신’보다 구원의 ‘목적’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시험도 이기고, 후회와 후퇴 없는 영적 진보를 이루며 영원한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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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9-01)


사도로써 권리를 포기한 바울

고린도전서 9장 1-23절


세상의 역사는 오늘도 자신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것 때문에 싸움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 세계를 호령했던 나폴레옹, 알렉산더, 징키스칸과 같은 전쟁에 영웅호걸들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권리를 얻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들이 죽은 후에 역사 속으로 묻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철저하게 낮아지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역사에 변함없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 우상 제물 먹는 자들이 주장한 권리(8:9)와 연결해 그 권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8:13처럼 바울 자신의 예를 통해 전체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1-14절은 바울의 사도적 권리에 대해 말하고, 15-23절은 복음을 위해 그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이 부분은 대화 방식을 많이 사용하여 진행합니다(1[x3],4,5,6,7[x3],8,9,10,11,12,13, 18). 자기 권리를 타인을 위해 사용하도록 설득하는 것입니다.

 

사도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1-14)

교역자는 성도의 영적 생활을 책임지고 성도는 교역자의 육적 생활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목회자의 육적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기도하고 인도하는 것이 방해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라디아서 6:6)고 권고한 적도 있습니다.

 

1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1-14)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성전과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이 거기서 나오는 것을 먹고 나누던 일을 상기시켰습니다. 주님도 복음 전하는 자에게 복음을 통해 생계를 꾸려 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1) 사도의 자격(1-2)

 

성도 중 일부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고린도 시민으로서 우상 신전에서의 만찬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했습니다(8:9). 바울은 자신의 예를 들어 그들을 교정합니다. 네 개의 수사적 질문으로 자신이 사도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음을 논증합니다(1절). 모두 긍정 대답을 요구하는 방식입니다. (1) 바울이 자유자이고 (2) 사도이며 (3) 부활의 주 예수를 목격했고 (4) 주 안에서 그의 사역의 결과가 독자들입니다. 첫째 근거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종이 된 것(19)과 연결하고, 둘째와 셋째는 사도의 자격이고(15:8), 넷째는 사역의 결과입니다. 바울은 넷째 내용을 2절에서 부연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독자들에게는 분명 사도의 자격이 있다고 합니다. 교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3:6,10).

 

(2) 바울의 권리 논증(3-14)

 

사도 자격을 설명한 바울은 그에 어울리는 권리도 있음을 논증합니다. 먼저 수사적 질문으로 진행합니다(3-6). ‘권리가 없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세 가지 내용을 제시gkqsl다. 모두 긍정 대답을 유도합니다. 첫째, 먹고 마실 권리입니다. 사도의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권리입니다. 둘째, 다른 사도나 주의 형제들과 게바처럼 신자 아내와 함께 다닐 권리입니다. 셋째, 자기와 바나바도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을 권리입니다. 이 표현들은 현재 바울이 어떻게 사역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교회의 재정 지원 없이 천막 짓는 일을 통해 생계비를 충당하면서 아내 없이 혼자 사역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런 모습으로 사역하고 있지만, 그는 사도이며 사도로서 누릴 권리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논증이 계속됩니다. 이번에는 여러 예들을 통해 자기에게도 권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7-10). 네 가지 질문으로 진행합니다. 첫 세 개는 ‘누가 ~하겠느냐?’는 형식으로 군인과 농부와 목축업자를 예로 듭니다. 군인은 자비량으로 일하지 않고, 농부와 목축업자는 자기가 일한 것을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바울 역시 복음의 일을 하기에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권리가 있습니다. 네 번째 질문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구약 율법(신 25:4)을 사용합니다. 구약 내용은 소가 일할 동안 먹을 수 있게 해주라는 뜻이지만, 바울은 그것을 자신의 사역에 적용합니다. 밭을 가는 자나 곡식을 떠는 자는 그 결과를 먹을 기대로 일합니다.

바울은 위의 예들을 교회 상황과 연결시켜 자기 권리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이어갑니다(11-14). 역시 대화 방법으로 진행합니다. 두 가지 유비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씨 뿌리는 농부입니다. 자신이 영적 씨를 뿌렸기에 육적인 것, 즉 사역비를 받는 것을 과하다 할 수 있습니까? ‘아니다’란 대답을 이끄는 질문입니다. 다른 사도들도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바울은 교회를 세운 사도이기에 더욱 자격이 있습니다(1-2). 또 다른 유비는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예배의 일을 하고 그 제물로 살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독자와 공유하고 있는 지식을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성전 제사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기에(3:16) 그들을 위해 사역하는 바울은 영적 의미에서 제사장입니다. 당연히 후원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 유비들은 3장에서 자기 역할을 설명할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합니다. 바울은 밭에 씨를 심은 자와 건축 과정에서 터를 닦은 자, 곧 성전 건물을 위해 일한 자로 자신을 묘사했습니다. 그 내용을 상기시켜 자신이 사도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음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살리라는 주의 명령(마 10:10; 눅 10:7)을 통해 자신의 권리에 대한 논증의 정점을 찍습니다(14).

 

사도의 권리를 복음을 위해 거절함(15-23)

복음을 전할 때 보상이나 특권을 누리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복음 자체가 너무나 귀하기에 그것을 전하는 것 자체가 의무가 아니라 큰 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억지로 해야 하는 의무로 다가온다면 자신이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15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9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15-23)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행위가 자랑하거나 공로로 내세울 수 없는 사명임에도 자신이 왜 자랑할 수밖에 없는지를 다시 고백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 누릴 수 있는 마땅한 보상과 특권 대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 자체를 상으로 여겼습니다.

 

(1) 바울의 복음 사역(15-17)

 

‘그러나’를 통해 이제껏 설명한 것을 반전시킵니다. 바울은 자기의 그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이미 12절에서 메시아의 복음에 장애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이 부분은 그에 대한 추가 설명입니다. 복음과 관련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복음 사역의 상급과 자랑 때문입니다(15b). 바울은 자기 권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 말이 독자들에게 또 다른 오해를 일으킬까 조심합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후원을 요구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의도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죽으면 죽었지 고린도 교회의 후원을 절대로 받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학생을 얻어 수업료를 많이 받으려는 당시 철학 선생처럼 여김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복음 사역을 통한 그의 자랑은 따로 있습니다. 그 구체적 내용은 둘째 이유를 설명한 후 18-23절에서 다룹니다. 한편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둘째 이유는 그의 복음 사역의 특징 때문입니다(16-17). 비록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지만, 그 복음은 그의 것이 아닙니다. 사역 주도권도 그에게 있지 않습니다. 단지 복음을 전하라는 청지기직을 부여받았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사역 자체는 후원금을 상으로 받거나 또는 자기 것인 양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위임받았기에 그것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禍)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불충실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바울의 입장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가 들어야 하는 보편적 규범입니까? 바울이 말하는 복음 사역의 진짜 자랑과 상급, 사역의 성격은 모든 시대에서 통용되는 원리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역 후원을 절대로 받지 않겠다는 태도가 모든 사역자들에게 적용해야 할 보편적 규범이 되지는 않습니다. 바울도 후원받을 권리를 긍정적으로 말했고, 실제로 빌립보 교회의 후원은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바울의 태도는 고린도 교회의 특별한 상황 때문인 듯합니다.

 

(2) 바울의 상급과 복음사역 방법(18-23)

 

복음으로 인한 진짜 상급에 대해 설명합니다. 자기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첫째 이유와 관련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복음 안에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을 상급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세상 철학자들의 태도나 비교와 경쟁이 난무하는 교회 상황을 감안하면 독자들이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자기의 권리와 이익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2:17-31). 그 방법을 따르는 것이 참 지혜이자 능력이라는 것도 알았기에 몸소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고 세상과 다르게 살았습니다. 사도이고 자유인이지만(1) 모든 이의 종처럼 살았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살았고, 비유대인들이나 약한 자들에게는 그들과 함께함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십자가 예수의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막힘없이 드러나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은 (1) 하나님과 예수를 정말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고, (2)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의 삶을 따르려는 제자이며, (3)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사역자이고, (4) 맡겨진 것에 충성하는 일꾼이며, (5) 무엇이더 가치 있는지를 분별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을 위해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 형제들을 배려하지 않는 자들이 보고 배워야 하는 신앙의 선배이자 사역자입니다.


권리도 자유처럼 사랑의 정신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리도 자유처럼 기쁘게 포기했습니다. 네게 주신 권리를 주의 복음과 공동체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을 자랑할 것을 얻는 데 매여 살기보다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일에 우리의 삶에 목포를 가지고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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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8-01)

 

 


지식에 사랑을 더하는 교회

고린도전서 8장 1-13절


종종 어떤 회사가 음식이나 제품을 먹으면 아주 똑똑해지고 총명해 질 것을 광고한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지혜로워진 것보다 똑똑해지는 것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똑똑해지는 것과 지혜로운 것 중에 지혜로운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삶은 지속적으로 알고 배우고 그리고 지식을 늘리는데 열심을 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돌보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데는 매우 느립니다. 본문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보여줍니다.

 

  • 7장에 이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질문한 것을 계속 다릅니다. 이번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한 것입니다. 크게 1-3절과 4-13절의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에 대해서는’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1,4), 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방식입니다. 첫 부분은 독자들 행동에 근거가 되는 지식에 대해 다룹니다. 둘째 부분은 우상 제물 먹는 것에 대해 우상에 대한 지식(4-7)과 음식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덕을 세우지 못한 지식인(1-3)

학습을 하므로 무엇인가를 깨달아 갈 때, 마음을 시원케 합니다. 하지만 깨닫는 순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답답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을 무식한 사람으로 무시하며, 때로는 가르쳐 변화시키려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익은 곡식은 머리를 숙인다고 하였습니다.

 

1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1-3)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에게 문의한 또 다른 문제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우상의 제물에 대해 먹을 수 있다는 입장과 먹을 수 없다는 입장이 갈등을 빚었기 때문입니다.

 

(1)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 제기(1)

 

바울은 ‘...에 대하여’를 통해 성도들의 질문에 계속 답니다. 이번에는 우상 제물에 대해서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제물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집중합니다.

먼저 1인칭 ‘우리’로 우상 제물을 먹는 사람들이 소유한 지식을 언급합니다. ‘우리는 다 지식을 가지고 있는 줄 안다.’ 이 지식은 우상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것(4-6)과 음식에 대한 것(8)입니다. 그들은 이 지식을 통해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는 듯합니다.

 

(2) 바울의 응답(2-3)

 

지식과 사랑 지식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자들에게 지식과 사랑에 대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세워줍니다. ‘세우다’는 신자와의 관계를 통해 서로 성장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지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어떻게 관계 맺고 함께 살아가는지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두 개의 조건절로 구체화합니다. 만일 누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만일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알아주십니다. 두 가지 요소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진리와 사랑과의 연관성이고, 둘째는 자신과 하나님의 대조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스스로 만족하는 지식은 의미 없습니다. 그분을 알 뿐 아니라 그분이 알아주는 관계 요소가 포함돼야 하고, 그 관계는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직적 차원과 그분이 귀히 여기는 사람을 향한 수평적 차원이 있습니다. 얕은 지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적절한 관계 표현인 사랑으로 연결되는지가 중요합니다.

 

구체적인 구원 1 :우정에 대한 독자의 지식과 바울의 인정(4-6)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이 올바르고 선한 방법으로 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연약한 성도에게 악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선한 양심을 심어주기보다 더러워질 수 있는 영향이라면 더욱더 조심하고 행동을 삼가 해야 합니다.

 

4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4-6)

 

‘페리 데(περί δε)’로 우상 제물을 먹는 것과 그 행위자에 대한 구체적 권면과 교정을 시작합니다. 역시 우상제물을 먹는 자들이 소유한 지식을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참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신명기 6:4-5에 근거하며, 모든 유대 기독교인이 공유하고 있는 공리입니다. 바울은 그들 지식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왜냐하면’이란 접속사로 그들 지식이 옳음을 보여줍니다(5). 하늘에나 땅에 신과 주로 불리는 많은 존재들이 있지만, 신자인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 곧 아버지가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창조주이고 사람은 그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또한 한 주 예수 메시아가 계십니다. 신자들은 하나님 창조의 통로이며 그분을 통해 존재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었거나 섬기는 것이지만, 하나님 예수는 사람과 우상에 비할 수 없는 절대타자요 창조주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우상 제물 먹는 자들이 공유하는 진리입니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독자들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그 지식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점이고(7), 둘째는 그 지식을 소유한 자들이 다른 사람을 향한 긍정적 관계 표현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8-13).

 

구체적 권면 2 : 문제 상황들과 바울의 권면(7-13)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통해 안식을 얻어야 합니다. 높은 수준의 지식으로 ‘사랑 없는 자유’를 정당화하기보다 연약한 지체들이 깨달을 때까지 ‘절제하는 자유’를 보이는 것이 복음(11)에 합당한 태도입니다.

 

7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7-13)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은 자유로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우상의 제물을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상의 실체가 무엇이며, 하나님은 누구신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1) 문제 상황 1 :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7)

 

지식과 관련한 첫 번째 문제 상황입니다. 그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자가 교인 중에 있습니다. 초신자나 진리를 잘 모르는 자일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은 없고 오직 하나님/예수님만이 참 신임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이해와 습관을 따라 고기를 우상에게 바쳐진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 음식 먹는 것을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일로 생각해 양심에 거리끼지만 계속 그 행위를 합니다. 마치 우리 문화에서 조상에게 제사한 후 음복하는 것을 귀신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일로 생각하면서 참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참여하면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수 있고, 우상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지거나 반대로 하나님을 향한 민감성이 떨어지게 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배교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2) 문제 상황 2 : 음식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이해(8)

 

지식과 관련한 두 번째 문제 상황입니다. 우상 신전에서 음식을 먹음으로 지식 없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음식에 대한 그들의 말을 인용함으로 시작합니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음식이 신자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음식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입니다. 즉, 음식은 자신의 영적 상태와 관계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음식에 대한 또 다른 지식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우상 신전에서 만찬에 참여합니다.

 

(3) 바울의 권면과 이유(9-13)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그 권리가 약한 자들이 걸려 넘어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명령합니다. 약한 자들이란 우상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입니다(7). 우상 제물을 먹는 자들은 두 가지 근거로 자기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 (4-6)과 음식에 대한 지식(8)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행위가 다른 교인들 신앙에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으로 표현되는 과정이 없습니다(1b-3). 바울은 그 구체적 모습을 10-12절에서 부연합니다. 그들은 우상은 없는 것이라는 지식에 근거해 우상 신전에서 음식을 먹습니다. 우상 신전에서 열리는 사회 유력 인사가 주최한 만찬에 참여해 세상 사람들과 사회-정치적 교제를 유지하려는 의도입니다.

또한 음식 자체는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기에 문제없다고 믿고 그렇게 합니다. 우상 신전 만찬에 참여한 교인들은 사회와 교회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와 영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믿음 약한 신자들은 그들로 인해 좋지 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초신자들은 믿음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고, 그 사람들이 사회에서도 영향력 있으면 당연히 하나의 본(本)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본이 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자연스레 따라하게 됩니다. 우상 제물을 먹고 양심에 계속 거리끼는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바울은 이 상황에 대해 그 약한 형제들은 메시아 예수가 위해서 죽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그들을 실족하게 하면 그들을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사역을 무위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지식이 있고 만찬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믿지만, 예수 안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곧 언약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 관계는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수반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분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이 표현되지 않으면 그분과의 언약 관계에 진정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배려하고 사랑하기보다 자신의 사회적 관계 유지를 더 우선시했습니다. 이것은 형제 사랑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음식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바울 자신은 절대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분명히 전합니다. 자기 유익보다 형제 사랑이 더 중요하고, 그것으로 하나님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지식과 사랑은 양자택일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자적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사용입니다.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다 안다는 오만함에서 건져달라고, 정작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한 무지함에서 건져달라고 더 온전한 진리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려는 나태함에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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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7-02)

 

 


고린도교회의 문제점: 그리스도인의 결혼관

고린도전서 7장 25-40절


운동선수나 뚜렷한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목표달성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합니다. 많은 것들을 희생하지 않고는 목표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포기해야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당연해 보이는 것들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내려놓고 포기해야 할 것은 없습니까?

  

  • 1-24절에 이어 결혼과 관련된 주제를 계속 다룹니다. 특별히 약혼한 사람이 결혼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과 과부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질문을 언급한 후(25), 약혼한 남녀에 대한 제안과 그에 대한 근거를 제공합니다(26-28). 이어 두 가지 근거를 추가로 언급하고(29-35), 약혼한 남자에 대한 주제를 드라눈 후(36-38), 과부에 대한 제안(39-40)을 제시합니다.

문제점 : 문제 제기(25)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하는 사람을 보면 그가 무슨 문제가 있거나 나이 든 후에 쓸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 나라에 영원한 것을 바라보면 살아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25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25)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질문한 미혼자의 결혼에 대한 질문에 대해 대답합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주님께 주신 명령이나 계시는 아니지만 충성스러운 자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고 합니다.

약혼한 처녀들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따로 설명하고 명령하신 것은 없지만, 자비로 부르심을 입은 사도로서 권면한다고 합니다. 전체 내용을 목회자의 제안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약혼한 남녀에 대한 제안과 군거들(26-35)

종말 의식은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 것처럼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심판과 주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결혼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결혼하면 배우자를 살펴야 하는 어려움도 있기 때문에 바울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권했습니다.

 

26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9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32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26-35)

  

(1) 약혼한 남녀에 대한 제안과 근거 1(26-28)

 

바울은 그 질문에 대해 ‘내 생각에는’는 말로 시작합니다. 명령이라기보다는 제언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처럼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26). 또한 만일 약혼한 남자가 결혼 헌신을 약속했으면 이혼하지 말고 계속 살 것이고, 혹시 이혼과 비슷한 파경을 맞았으면 굳이 결혼하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27).

먼저 결혼에 앞에서도 임박한 환난 날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마지막 날이 가깝다는 생각 때문에 미혼들이 결혼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현재의 어려움 때문입니다(26). 당시 고린도 지역은 기근으로 경제 상황이 많이 안 좋았는데, 그런 형편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결혼해도 어려움 당할 수 있기에 약혼한 상태지만 가급적 결혼을 미루는 것이 괜찮을 듯싶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결혼 자체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약혼자와 결혼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단지 육신의 고난, 곧 기근으로 인한 어려움에 독자들이 고생할까 봐 그렇게 권한 것입니다(28). 모든 시대에 통용되는 절대규범이라기보다 상황에 근거한 목회적인 권면입니다.

 

(2) 약혼한 남녀에 대한 제안과 근거 2(29-31)

 

약혼한 자들에 대한 제언에 대해 두 번째 근거입니다. ‘때’ 곧 주의 재림과 종말의 시간이 단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은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심판과 구원을 담고 있기에 종말의 시작이며, 완성은 주의 재림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신자의 ‘오늘’은 종말의 시작과 완성 사이의 시간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의 기근을 종말의 한 징조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아직 역사의 끝이 온 것은 아니지만, 그 어려움으로 종말의 시간이 가까이 왔음을 인식하며 살라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지금의 세상은 지나가고 없어집니다. 그렇기에 희로애락의 삶이나 소유나 세상 물건을 사용하는 것에 다른 태도를 가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결혼의 영역도 포함되는데, 약혼녀가 있는 자는 굳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좋겠다는 제안도하고 있습니다. 역시 바울의 목회적인 권면입니다.

 

(3) 약혼한 남녀에 대한 제안과 근거 3(32-35)

 

세 번째 근거를 언급합니다. 결혼하면 마음이 나뉘어 상대적으로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두 부류의 예를 듭니다. 첫째, 결혼한 남자입니다. 가정의 가장으로서 세상 일에 마음이 나뉘고 아내를 기쁘게 하기를 추구합니다.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결혼 전에 비해 주님을 향한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 여자들입니다. 시집가지 않은 일반 여자나 약혼녀는 할 수 있으면 주의 일에 집중하려 하고 몸과 영을 더 순결하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결혼하면 남편의 경우처럼 세상 일과 남편에게 충실하게 되어 마음이 나뉠 수 있습니다. 결혼이 마음을 나뉘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주님께 마음이 집중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결혼 자체가 주님을 향한 순결한 헌신에 장애물도 아닙니다. 바울의 제안은 기근이라는 당시의 특별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듯합니다. 힘든 시기라서 아무래도 결혼한자들은 혼자 있을 때보다는 가정과 배우자에 대한 염려가 더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아끼는 마음으로 권면한다고 합니다(35). 할 수 있으면 그들이 주를 향한 삶에 덜 방해받고 지내기를 바랐습니다.

 

약혼한 남자에 대한 권면(36-38)

전반적으로 성도들은 세상에 대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라도 과대평가하거나 절대화하거나 우상시해서는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 곧 없어져 버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물건이나 현 모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곧 사라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36그러므로 만일 누가 자기의 약혼녀에 대한 행동이 합당하지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그 약혼녀의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원하는 대로 하라 그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그들로 결혼하게 하라 37그러나 그가 마음을 정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약혼녀를 그대로 두기로 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38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36-38)

 

주제를 약간 바꾸어 약혼한 남자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두 가지 상황을 전제합니다. 첫째, 그 남자가 약혼녀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 경우입니다. 이 부분은 해석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마도 약혼한 남자가 결혼을 미루고 있었는데, 그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 약혼녀가 혼기가 찼고 결혼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그 마음을 실행해 결혼하라는 권면입니다. 결혼하는 것이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결혼을 계속 미루는 경우입니다. 약혼한 남자가 강요함 없이 마음을 정하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결혼하지 않고 자기 약혼녀를 그 상태로 두기로 자기 마음에 결정하면 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뜻대로’와 ‘자기 마음으로’라는 표현을 통해 약혼남의 개인적 결정과 책임을 강조합니다. 결론적으로 약혼한 남자는 결혼을 해도 되고 좀 더 미뤄도 됩니다. 둘 다 괜찮습니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제안합니다. 좋음과 더 좋음의 선택입니다. 역시 현재의 어려움을 고려해 독자들을 배려한 제안인 듯합니다.

 

과부에 대한 제안(39-40)

결혼을 하면 세상 일로 마음이 나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장가간 자는 아내를, 시집간 자는 남편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 염려하느라 주님의 일에 집중하기 어렵고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이 올무가 아니라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명령이 아니라 권면임을 분명히 합니다.

 

39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40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39-40)

 

결혼한 아내에 대해 제안합니다. 기본적으로 아내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만 결혼 관계에 묶여 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관계에서 자유롭게 되어 자기가 원하는 이와 재혼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도 언급됩니다(로마서 7:1-3). 바울은 여기에 주안에서만 하라는 말을 첨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결혼 같은 삶의 일반 관계보다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마지막 권면은 그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그냥 지냈으면 하는 것입니다(40). 비록 주의 명령이 아니라 바울의 생각이지만, 두 가지 표현을 첨가함으로써 자신의 권면이 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비교급 사용입니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복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으로 인한 의견임을 전달합니다. 이 또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하는 규범은 아닙니다. 당시의 특별한 상황을 전제하여 성도를 아끼는 제안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결혼과 관련해 신자의 삶과 목회 차원에서 몇 가지 원리들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신자의 삶에 대해서 ① 결혼은 삶의 절대 요소가 아닙니다. 결혼을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② 본인의 진지한 결정과 그에 따른 책임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그 결정은 현실적 어려움이라는 변수와 종말이 있음을 기억하고 조심해서 살아야 하는 것, 그리고 주님을 향한 순전한 집중을 고려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현대에는 다른 요소들이 가감될 수 있지만, 주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집중은 시대를 불문하고 고려해야 합니다. 한편, 목회 차원에서 바울의 모든 권면은 독자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주의 명령은 아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고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계속 잘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바울 권면의 또 다른 특징은 독자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충분히 그렇게 해도 될 만한 위치에 있었지만, 여러 변수들을 제시하면서 그들이 신중하게 판단하도록 유도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도록 돕고 있다. 사역자로서 성도들을 권면하는 좋은 귀감을 보여준다.


인생의 문제는 결국 가치의 문제고, 신앙의 문제입니다. 묵상은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사라지기 않는 것(가치)에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 안목을 갖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묵상의 이유이고 목표입니까?

 

 

*** 용서

 

영화 ‘밀양’의 내용은 대략,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아들과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들까지 유괴 후에 살해당합니다. 신애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안정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기를 권합니다. 그녀는 예수를 믿고 나서 위로를 받고, 살인자를 용서하려 교도소에 면회를 가서 어렵게 예수를 믿고 나서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범인도 “나도 교도소에서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라면서, 비아냥거리면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할 줄 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신애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뒤집어지기 시작합니다. 미치기 시작하고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영화 ‘밀양’에서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 큽니다.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진정한 자유란 것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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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7-01)

 


 고린도교회의 문제점:결혼과 부부생활

고린도전서 7장 1-24절


어떤 가정들은 자녀 교육을 잘해보겠다고, 남편은 한국에 남아 있고, 아내와 자녀들만 외국으로 가서 헤어져 사는 것을 종종 봅니다. 이러한 가정의 남편들을 ‘기러기 아빠’라고 부릅니다. 이 ‘기러기 아빠’들이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건이나 외도로 많은 가정들이 파괴된다는 슬픈 소식을 듭니다. 자녀를 좋은 교육을 시키는 것은 좋지만, 얼마나 잘해 보겠다고 가정까지 파괴되면서 교육시킬 필요가 있습니까! 이렇게 교육받은 자녀들이 장차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봅니다.

 

  • 7장부터 16장 12절까지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한 질문들을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주로 결혼과 부부 관계에 대한 여러 주제들을 짧게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그 내용은 부부간 성관계에 대한 것(1-5)과 결혼과 독신(6-9)과 이혼에 대한 것(10-16)입니다. 한편, 17-24절은 결혼이란 주제와 약간 다른 내용이 제시됩니다. 하나님꼐서는 부르신 대로 살라는 권면입니다. 유대인/비유대인 문제와 노예 상태에 대한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문제점(1) : 부부간에 성관계에 대해(1-5)

 

결혼한 목적은 성적 만족을 위해서 아닙니다. 부부간의 성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영성과 긴밀히 연계된 사안입니다. 성적 방종이 문제지만, 이습이나 편견에서 비롯된 금욕주의적 태도도 만만찮은 걸림돌이 됩니다. 하지만 결혼의 중요한 축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은 오직 부부 관계 안에서만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1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1-5)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어려운 문제들을 질의하는 편지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점에 관해 편지를 공식적 질문을 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편지로 질문한 것에 대해 다르기 시작합니다.

 

(1) 질문 내용(1)

 

먼저, 첫 질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고 남자가 아내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질문했습니다. 바울과 성도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현대 성도들에게 어떤 문맥에서 그 말이 나왔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부부간 성관계에 대한 내용인 듯합니다.

 

(2) 바울의 대답(2-5)

 

바울은 부부의 성에 대한 대답을 합니다. 음행 때문에 각 남자는 자기 아내를 갖고, 각 여자들도 자기 남편을 갖게 하라고 합니다(2). ‘갖다’라는 말은 성관계를 의미하며,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부부간 성관계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말한 것에 대한 구체적 대답입니다. 둘째, 음행의 요소입니다. 5-6장에서 계속 다룬 주제입니다. 부부간 성관계는 음행과 관련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런 죄를 막을 수 있게 합니다. 셋째, 성관계는 부부에게만 허락됩니다. 성관계가 한 몸 되게 하는 가장 친밀한 행위이기에(창세기 2:24), 오직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만 허락됩니다. ‘각각’과 ‘자기’ 표현을 반복함으로 이 요소를 강조합니다.

이런 원리에도 불구하고 실제 상황에서는 첨가할 요소들이 더 있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를 추가합니다(3-5). 한 가지는 상대방을 향한 배려와 섬김입니다(3-4).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 대한 성적 의무에 충실해야 하며, 자기 몸에 대한 배우자의 주장을 허락해야 합니다. 그 권리를 빼앗으면 안 됩니다. 상당히 놀랍습니다. 오직 남편의 권리만 인정되는 당시 문화에서 서로 섬김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다른 원리가 부부간 성관계에도 적용됩니다. 또 다른 추가 요소는 성관계의 예외 사항입니다. 기도 같은 경건 생활을 위해 잠시 절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합의 하에 해야 하고 오랫동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제 못함으로 음행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에 대한 이기적 왜곡과 부부 관계에 대한 어그러짐이 여전히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도 적용해야 하는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문제점(2) : 결혼과 독신에 대해(6-9)

지혜 있는 부부는 서로에게 필요한 영적, 성적 필요를 이해하고 합의를 통해 서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요리에 적당한 조미료가 필요하듯이 부부 사이에도 조화로운 합의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은사대로 순종할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연합하여 합력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 그리고 이웃을 섬김으로 거룩한 삶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또 독신자는 많은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더 많이 섬길 수 있습니다.

 

6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6-9)

 

바울은 자신의 말이 명령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결혼이 부정한 것도, 독신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결혼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며, 하나님께 은사를 받아 혼자 사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 바울 같기를 원함(6-7)

 

결혼과 독신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주의 명령이 아니라 자기가 허락하는 것, 곧 사도의 의견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결혼했는지, 혹 했다면 언제 독신이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독자들이 그 정보를 알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 혼자된 것은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자기처럼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살기 바란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부르심이 같지는 않다고 첨언합니다. 독신이 강제의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2) 결혼하지 않은 자나 과부에 대해(8-9)

 

독신과 관련해 미혼자와 과부에게 말합니다. 역시 자기처럼 그냥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구체적 이유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25절부터 처녀에 대해 언급하면서 몇몇 이유를 제시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지나갑니다. 대신 절재할 수 없으면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성관계 자체가 결혼의 목적은 아니지만, 2절 설명처럼 음행보다 결혼의 낫다는 말입니다.

 

문제점(3) : 이혼에 대해(10-16)

요즘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지면서 자신의 일과 자유분방한 삶을 유지하고자 독신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어떻습니까? 당신은 독신으로 살고자 합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복음 안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 자신만을 위한 삶은 없습니다.

 

10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10-16)

 

본문은 결혼과 이혼 상담소 같습니다. 먼저 ‘독신’에 대해, 영적인 과욕으로 독신을 고집한다면 더 곤란한 상황에 빠질 우려가 있다고 말합니다.

 

(1) 결혼한 자에 대한 주의 명령(10-11)

 

화제를 바꾸어 결혼한 자에 대해 이혼하지 말라는 주의 명령을 전합니다(마가복음 10:9). 아내는 남편과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혼했다면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그대로 독신으로 있든지 다시 남편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은 안 됩니다. 남편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아내와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2) 바울의 제안(12-16)

 

바울의 제안 나머지 사람들의 경우로 화제를 돌리고 주의 명령이 아닌 사도의 권면으로 다룹니다. 부부간 일이지만, 앞의 상황과 다른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의 경우입니다. 기본 원칙은 이혼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만일 믿지 않는 배우자가 원치 않으면 이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믿는 자로 인해 배우자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백성이 될 수도 있고, 자녀들 또한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배우자가 나도 원하면 이혼해도 됩니다. 이혼이 절대적 금지 명령은 나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배우자 때문에 애써 이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위한 생명의 통로로 부르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16).

결국, 결혼이냐 이혼이냐의 문사 제는 신자에게 절대적 구속 요건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통로로서 이 땅에서 배우자를 포함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진리와 사랑의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관계입니다.

 

부르심에 따른 삶(17-24)

성도의 삶의 자리 전반에 관한 문제로 논의를 확대합니다. 중요한 것은 혈통, 신분, 결혼 여부 등 외적인 삶의 조건보다 소명(신자다운 삶)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 더 근사하게 해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다가 지금 그 자리에서 주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닙니다.

 

17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17-24)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 가운데에는 자신의 상태나 신분을 바꾸려 하는 자들이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할례자는 할례의 표지를 제거하기 위해 육체적 수술을 받을 필요가 없고, 무할례자 역시 할례를 신자의 참된 표지로 여기며 그것을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1) 원리 부르신 대로 살라(17)

 

부르심에 따른 삶이라는 주제로 넘어갑니다. 결혼이나 이혼과 무관한 듯하지만 연결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앞부분에서 독신, 결혼, 이혼에 대해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주 안에서 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 주제를 일반화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주 되심 입니다. 삶의 모습을 주께서 나눠주셨다고 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도 합니다. 반복하며 상황과 처지를 비롯한 모든 삶의 주인이 그분임을 강조합니다. 다른 하나는 부르심의 개별성입니다. ‘각 사람’이란 말의 반복을 통해 제시됩니다. 그렇기에 각 사람은 부르심에 충실함으로 주님의 주 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에 그 명령을 모든 교회가 들어야 한다고 첨언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전달합니다.

 

(2) 적용1 : 할례와 무할례(18-20)

 

부르심에 충실한 첫 번째 예입니다. 할례와 무할례, 곧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의 구별에 대해서입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런 구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됨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3) 적용2 : 노예 상태에 대해(21-24)

 

두 번째 적용으로 노예 상태를 예로 듭니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입니다. 기회가 되어 자유인이 되면 좋습니다(21). 하지만 신분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형제들’이라고 불리는 신자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노예지만 예수로 인해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자유인이더라도 메시아께 속한 사람, 그분의 종인 정체성이 더 중요합니다. 둘째, 정체성에 합당한 삶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과 신분에 얽매여 신자로서의 삶의 표현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답게 그분께 충성하며 세상에서 진리와 사랑으로 신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벼운 주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도 ‘주의 명령’은 아니라고 거듭 말하며, 분명한 원칙을 지키면서도 구체적 상황의 특수성을 배려하는 의도를 내비칩니다. 그러고는 이 난제를 ‘종말의 시각’(26)에서 한 번 더 헤아려보라고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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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6-02)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중요성

고린도전서 6장 12-20절


오늘날 시대와 사회에 따라 성과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변해 왔습니다. 그 변화 속에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좋은 영향도 받지만 악도 쉽게 받아 들릴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으려면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항상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네 번째 문제를 다룹니다. 교회 안에 있는 방종한 삶을 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세상 힘 있는 자들의 문화를 따라 만찬 때 방탕하고 음란한 짓을 행하면서도 갖은 논리를 동원하여 자기 삶을 정당화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대화 방법을 사용해 그들을 질책하고 교정합니다. 먼저 그들의 논리를 반박하고(12-14), 음행과 몸과 주님과의 관련성에 대해 설명한 후, 문제에 대한 구체적 명령을 전합니다(15-20).

 

고린도 성도들의 주장과 바울의 반박(12-14)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자유는 쉽게 권태로워집니다. 중독이 아니면 만족이 없으며, 두려움과 불안에 떨면서도 참된 관계를 맺지 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사랑하고 헌신하는 자발적인 매임이 참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주장에 대해 바울은 반박합니다.

 

12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12-14)

 

고린도 교회의 네 번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금욕주의가 있었지만, 반대로 자유분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도 중 일부가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1) 고린도교회의 주장(12)

 

고린도전서 5:1-13의 경우와 다릅니다. 그 부분은 근친상간과 간음이었다면, 본문은 만찬을 배경으로 한 음행입니다. 당시 세상에서 지위와 힘이 있는 사람들은 만찬에서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그 자리에 창녀들을 불러 음행하곤 했었습니다.

교인 중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어줍지 않은 표어로 자기를 정당화하였습니다. 어쩌면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젊은이였을지 모릅니다. 어른이 되었으니 모든 것을 할 자유가 있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또한 이 표어에는 얄팍한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13).

바울은 대화 형식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교정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고 주장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며 바울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않는다고 반박합니다. 그들 문제의 핵심은 ‘내게’라는 표현입니다.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나’가 모든 사고와 결정의 중심이고 철저히 ‘나’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반박에 의하면 그들은 몇 가지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고, 그러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심지어 영적으로 어둠의 영역(예, 사탄이나 세상 악들)이나 빛의 영역(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들)에 속할 때도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관계를 벗어난 절대 자유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가?’입니다. 둘째, 죄의 핵심은 ‘나’에게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존재와 관계의 시작점이 되시는 창조주를 거절하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만 집중하게 하는 것을 죄의 핵심으로 말합니다(창세기 3:5; 로마서 1:28). 단순히 무엇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사고와 결정의 중심에 두는 사유 방식과 그것을 통한 하나님 거절이 죄입니다. 셋째, 신자는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새 언약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의 참 행복은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분과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것은 재앙이 됩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가(可)하다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합당한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내가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스스로 자유롭다 여기지만, 사실은 음행을 통해 자기에게만 집중하여 마치 하나님 아닌 다른 관계의 노예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는 그런 것에 얽매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은 채 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2) 음식과 몸과 하나님(13-14)

 

12절에 이어 독자의 자기 합리화를 깹니다. 몸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들은 음식은 배(몸)를 위해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음식과 음행이 결합된 만찬을 배경으로 몸과 연결을 짓고 있습니다. 음식은 몸을 위해 있고 식욕이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처럼, 성욕도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음행도 문제될 것 없다는 논리를 독자들은 펴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어차피 하나님이 미래 어느 날 몸과 음식도 다 폐하실 것인데, 지금 그 몸을 위해 성욕 채우는 것이 무슨 문제이겠냐는 논리를 펴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들의 논리를 따라 반박합니다. 몸은 음란이 아니라 주를 위해 존재하고 주는 몸을 위해 존재하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님을 다시 살리셨고 이후에 신자 또한 몸으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 신자 몸은 자기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존재로서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생명과 새로운 관계를 주신 그분이 삶의 주인이며 내 몸의 주인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몸의 주인인 양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몸을 쓰며 사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둘째, 몸은 영원합니다. 독자들은 부활 교리를 인식하지 않기에 몸이 폐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비록 부활로 몸이 다르게 변하겠지만(15장), 신자의 몸은 영원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누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몸을 함부로 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음행과 몸과 주님과의 관련성(15-17)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은 어두움에 행동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너희만이라도 거룩하게 살아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썩어짐을 방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빛과 소금된 역할을 감당해달라고 부탁합니다.

 

15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15-17)

 

문답식 대화법으로 음행과 몸과 주님과의 관계성을 설명합니다. 두 가지 전제로 진행하며 모두 ‘~을 알지 못하느냐?’로 시작합니다. 하나는 신자들은 메시아 몸의 일부라는 것입니다(15). 메시아와 신자와의 관계를 신비한 연합으로 묘사합니다. 음행을 통해 그 몸의 일부를 떼어 창녀 몸의 일부로 만드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바울은 ‘내가…그렇게 하겠느냐?’라는 질문과 ‘그럴 수 없다’는 스스로의 대답을 통해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독자들도 그래야 함을 말합니다. 또 다른 전제는 결혼과 언약 관계입니다.

 

16-17절은 왜 음행이 창녀의 지체를 만드는지를 부연합니다. 역시 ‘~을 알지 못하느냐?’는 질문으로 창녀와 합하는 자는 한 몸이 된다는 원리를 상기시키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몇 가지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결혼은 남녀의 성적 결합으로 이루어지며(사실혼), 그 결합으로 한 몸이 됩니다(창세기 2:24). 둘째, 창녀와 성관계하면 그와 결혼한 것이 되고 한 몸이 됩니다. 셋째, 그 상태에서 다른 창녀나 아내와 성관계하면 간음입니다. 넷째, 신자는 새 언약 관계를 통해 주님과 영적으로 결혼한 상태입니다.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말합니다(17). 다섯째,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 성관계 맺는 것이 간음인 것처럼, 주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신자가 음행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를 깨는 간음과 같습니다. 언약 관계에서 몸은 주 위해야 하는데(13), 세상과 관계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명령들(18-20)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죄함도 없지만, 아직은 완전히 완성된 사람은 아닙니다. 천국 가는 날까지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가는 것뿐입니다. 순간적으로 과거 죄악으로 돌아서려는 모습이 강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바른 성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권고합니다.

 

18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8-20)

 

교회의 음행 문제에 대해 두 가지 명령을 합니다. 첫째, 음행을 피하라는 것입니다(18). 맞서지 말고 음행의 자리에서 도망치라고 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음행은 다른 죄와 달리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8). 이 외에 두 가지 이유들이 ‘~을 알지 못하느냐?’는 질문으로 제시됩니다(19-20). 그중 하나는 신자의 몸이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3:16-17에서 신자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이미 말했습니다.

하지만 본문 내용과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3:16-17은 집단적 교회를 의미하지만, 본문은 신자 개인을 의미합니다. 창녀와의 음행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표현 사이에 충돌은 없습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그들 모임 속에 하나님 영이 거하실 것이라는 구약 약속의 성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에스겔 36:27-28). 또 다른 이유는 신자의 몸이 값으로 산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구속을 통해 죄와 사탄이 지배하는 어둠의 영역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로 옮김 받아 새 생명을 얻고 새 언약 관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골로새서 1:13-14). 그렇기에 자기가 자기 몸의 주인인 양 음행하면 안 됩니다. 오직 새로운 관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명령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이 훌륭한 존재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에 걸맞게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성도의 의무입니다.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 있을 때, 어느 한순간 하나님께서는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을 찾아서 위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준비된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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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6-01)

 


세상에 송사하지 말아야할 성도들

고린도전서 6장 1-11절


사람들은 각각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분쟁보다는 분쟁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풀어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방법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얼마 전에 기독교 신문에 한 교회가 법정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을 광고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교회는 항상 지루한 다툼과 시비가 끝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성도들끼리 다툼이 세상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것은 그렇게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 광고를 보고 있는 목회자로서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 고린도 교회 안에 또 하나의 문제는 영적 무질서입니다. 그들은 불의한 일을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무질서했습니다. 그 문제를 세상의 법정으로 가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질서가 없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불신자들의 재판정에 가서 문제 해결을 부탁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행위입니다.

 

교회 안에 3번째 문제(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최근에 한국 교회 안에는 공동체가 균열하는 모습을 경험합니다. 세상을 이끌기 위해서는 빛과 소금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공동체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해답을 본문은 줍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는 교회로 세워갈 것인지 가르쳐 줍니다.

 

1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1)

 

고린도 교회 안에 있던 세 번째 문제를 다룹니다. 성도들 간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세상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했습니다. 음행의 문제를 다루었던 바울은, 이번에는 교회 내에 있는 분쟁과 소송에 관한 지침을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 밝히진 않지만, 세상 법정에 소송했던 문제로 시끄러웠던 같습니다.

 

당시는 세상이 교회를 인정하지 않은 때여서 법정에서 성도들이 고소하고 다투면 세상은 교회를 경멸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동료 성도가 세상에서 벌을 받고 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세상 법정에서 다루어야 할 근친상간 간음에는 침묵하면서(5:1-13) 법정에 고발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고발했습니다. 아마도 음행하는 자는 세상에서 영향력이 크게 때문에 고발하지 못했지만, 본문의 경우는 감당할 수 있어서 고소한 것 같습니다. 세상의 힘의 논리를 따라 성도들을 대하는 참으로 치졸하고 비겁한 태도입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원리가 아닌 세상의 논리가 성도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둘째, 교회/성도와 세상과의 역할 관계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셋째, 십자가로 인한 구원과 그에 근거한 삶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이후 바울은 둘째와 셋째에 대한 권면을 통해 첫째 모습을 바꾸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성도에 대한 두 가지 원리와 적용(2-4)

성도들은 잘잘못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성도는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아 세상을 심판하고 심지어 천사마저 심판할 존재입니다. 그렇게 할 만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처럼 의롭고 온전해야 합니다. 세상과 전혀 다른 기준으로, 전혀 다른 가치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2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2-4)

 

성도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길 만큼 지혜를 자랑했지만, 자기들 가운데 일어난 분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의 재판정에 가지고 나아가 서로 송사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에 대해 매우 분격하고 있습니다.

 

(1) 성도와 세상에 대해(2)

 

교회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권면합니다. 그 시작은 성도와 세상과의 연할 관계에 대한 설명입니다. 원리를 말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원리는 ‘...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통해 독자와의 공유 지식을 상기시키는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성도는 세상을 판단하는 존재라는 것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성도란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새 언약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1:2). 장차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완성되어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리실 때 그의 백성들도 함께 세상을 다스립니다(디모데후서 2:12; 요한계시록 2:26;22:5). 그런 성도들이라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조건문과 의문문을 씁니다.

세상이 ‘너희’에게 판단 받겠거늘 ‘너희’는 가장 작은 일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까? 상당히 강한 질책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영적으로 성숙하고 지혜 있다고 여기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자부심을 깨뜨리고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2) 성도와 천사들에 대해(3)

 

성도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두 번째 설명입니다. 2절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것이라면, 3절은 천사라는 영적 존재들과의 관계를 다릅니다.

역시 원리와 적용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원리는 2절처럼 ‘~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사용해 성도인 ‘우리’는 천사도 판단하는 자들임을 말합니다. 여기서 천사는 주님의 심판을 받을 악한 천사를 말합니다(유다서 1:6). 그에 대한 적용은 부정의문문을 써서 ‘하물며 세상의 일상적인 것도 못하느냐?’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듣는 자로 하여금 부정적인 대답을 유도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입에서 ‘못한다’는 말을 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악한 영적 존재도 판단하게 될 성도가 세상의 작은 것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하여 스스로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3) 적용(4)

 

바울은 ‘그러므로’를 통해 2-3절 내용을 결론짓고 독자들을 질책합니다. 세상의 사소한 일이 있을 때 교회에서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우겠느냐고 묻습니다. 교만한 독자들을 심히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주님과 함께 법관이나 관리를 포함한 세상과 심지어 악한 천사도 판단할 사람이 성도라는 것을 아는가? 안다면 왜 그 작은 일도 처리하기 못하고 세상을 의지하는가? 부끄러운 줄 알라!’

 

바울의 책망(5-8)

성도들은 서로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서는 서로 고소하는 것부터가 이미 잘못된 일입니다. 세상 법정에 송사한 잘못을 범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좀 속아주고 손해를 보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 낫습니다. 설사 승리하여 손실을 만회하거나 손해를 끼친 상대를 처벌한다 해도 교회와 그리스도께 큰 상처만 남습니다. 결국 둘 다 패배이며 불의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5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5-8)

 

바울은 2-4절과 연결해서 책망을 계속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또한 ‘너희’가운데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말한 지혜가 없느냐고 묻습니다. 긍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며, 독자들은 ‘그렇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그들이 어리석은 일을 했음을 스스로 고백하게 만듭니다(5). 더 나아가 그들의 행동은 함께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이었습니다. 형제를 고발할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 앞에서 심판 받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소를 통해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했지만, 사실 그들의 행동은 이미 자신들이 그 다툼에서 패한 자임을 보여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형제들의 어떤 것을 빼앗거나 자신들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투기 때문에 사실상 불의를 행하고 속여 빼앗는 자나 다름없었습니다. 형제를 대상으로 그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들 모습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분별력이 있었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법정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고소는 하나님 앞에서의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이익과 기득권 유지 때문인 듯합니다. 율법의 첫째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위배됩니다. 둘째, 형제 사랑이 없습니다. 형제들을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자녀로서 사랑의 마음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오직 다툼과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 생각합니다. 이는 율법의 둘째 계명인 형제 사랑에 위배됩니다. 셋째,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모습이 없습니다. 섬김 받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온 예수님의 모본(마가복음 10:45)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세상이 십자가를 우습게 여기듯 그들 역시 십자가의 삶을 우습게 여깁니다. 오직 자기만 높이려 할 뿐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삶에서 기대하는 필수 요소이지만,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그들이 심각하게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원리와 독자에게로의 적용(9-11)

교회의 일로 세상의 법정을 소란케 한 일들은 부끄러워하며 회개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법정에 세우기까지 한 것은 죄악입니다. 아무리 자랑할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연약한 아이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주변에는 이런 영적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판칩니까? 성도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자들입니다. 그것을 상속 받을 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법이 아니라 육신과 정욕과 욕망을 쫓은 행위입니다.

 

9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9-11)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마지막 권면입니다. 구원 과정과 관련하여 독자들의 모습과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2-4절처럼 ‘~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원리를 말하고 그에 대해 적용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 원리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자라고 말한 것과 연결시킵니다. 성도들의 행동은 하나님 나라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적용은 속지 말라는 부정 명령법으로 제시합니다. 여러 악을 행하는 자들, 곧 음행과 우상숭배와 간음과 동성애와 도적질과 탐욕과 술 취함과 모욕 주기와 속여 빼앗는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예수를 통해 구원받았기에 어찌 살든 상관없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구원은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이기에, 그 관계 안에서의 삶도 중요합니다. 관계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은 이전의 삶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 없었는데,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주 예수 메시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이전 세상의 방식, 곧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권합니다. 세상 법정을 통해 자기 이익과 권리를 지키려는 태도를 포기하고 겸손히 형제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삶입니다.


 

교회는 세상보다 더 높고 분명한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 법정이 문제 삼지 않은 일까지도 하나님 나라 기준에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법정을 의지하여 성도 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보다 더 거룩한 성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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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5-01)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간음 사건

고린도전서 5장 1-13절


고슴도치가 공동체를 이룰 수 없습니다. 서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고통을 주기 때문에 항상 혼자 다니는 고독한 동물입니다. 외로울 때면 이웃에게 다가가 보지만, 그러면 더 고통스러움이 더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고슴도치와 같이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존 울트버그(John Ortberg)는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했습니다.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은 사람들의 마음 속 상처를 치유 받으면 이웃의 치유자로 설 것입니다.

 

  • 고린도교회의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갑니다. 교회 안에 있던 근친상간과 간음의 문제입니다. 상당히 심각한 범죄임에도 교회는 세상의 힘의 논리에 굴복해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일을 행한 자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교회 상황을 책망하고(1-2) 문제 해결을 촉구합니다(3-13). 이 과정에서 악한 일을 행한 형제에 대한 이전 편지 내용의 오해를 교정하고 현재 문제에 대해 단호한 명령을 내립니다. 음행하는 자를 신속히 내쫓으라고 권고합니다.

 

교회 안에 근친상간/간음문제(1-2)

죄는 절대로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에 대해 단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사탄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거룩과 순결을 지키는 일에 바울처럼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1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1-2)

 

고린도 교회 안에 두 번째 문제를 다룹니다. 음행의 악행의 죄악이 들어왔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방인들마저 놀랄 불륜의 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입에 담기도 힘든 ‘근친상간(近親相姦)’이었습니다.

 

(1) 문제 상황(1)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문제를 다룹니다. 음행의 문제입니다. 교회 안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 방법으로 그 심각성을 표현합니다. 첫째, ‘실제로’입니다. 바울이 들은 정보가 확실함을 말해줍니다. 그들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 역시 적절하다는 것을 전합니다. 둘째, 이런 일은 이방 중에도 없던 일이라고 첨언합니다. 세상도 용납 못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아내란 법적으로 어머니 위치에 있는 여자를 의미합니다. 자기 어머니로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계모인 듯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근친상간입니다. 아버지가 죽고 미망인이었다면 간음은 아니지만, 살아 있다면 간음이기도 합니다. 과부라고 하지 않았기에 아마도 아버지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친상간과 간음은 당시 로마법에서도 엄하게 처벌하는 죄였습니다.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이런 일에 대해 세상 법에 호소하는 일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합니다. 하지만 본문 상황은 그렇게 하지 않은 듯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당시 간음의 일은 먼저 이혼한 후 법적 처리를 하는데, 아직 이혼 과정이 끝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더 가능성 있는 것은 계모가 남편보다 더 높은 신분이나 유력한 집 출신이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남편이 그 사회/정치 모임의 수혜자이면 더 그럴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면 이 문제는 단순히 성적 문제만이 아닌, 사회 계급과 신분의 힘이라는 변수도 함께 섞여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교인들의 반응(2)

 

바울의 당황스러움이 계속됩니다. 그런 문제가 있는 것도 심각한데 교회가 교만해져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묵인하고 비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보통은 아들과 계모를 정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계모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고 법적 아들이 계모를 통해 사회, 정치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그 아들의 눈치를 보고 그 죄에 눈감고 오히려 그 사람을 두둔하고 자랑하는 듯합니다(6). 세상 힘이 교회에서도 통하는 사례입니다.

 

문제 해결 촉구:음행하는 자를 내쫓으라(3-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가 방종은 아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죄를 범하고서도 교만해 그 죄를 통탄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항상 살펴야 합니다.

 

3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6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9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3-13)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음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방인도 하지 않는,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일이 버젓이 행해지고. 교회가 이 일에 대해 통탄하지도 않으며 그러한 일을 한 자를 제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1) 음행하는 자에 대해(3-5)

 

교회 문제에 대한 구체적 대답이 제시됩니다. 먼저 음행한 자에 대한 판단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세상 법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기에 교회가 이미 판단하고 처리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을 추구함으로 판단력을 상실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바울은 행음한 자에 대한 판단을 제시합니다. 그 사람을 사탄에게 내주었습니다(5). 출교, 곧 사탄이 통치하는 세상으로 쫓아내는 것이며 언약 백성 밖에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6:9). 바울의 판단은 상당히 엄중합니다. 몇 가지 표현으로 전달합니다. 첫째, ‘나’라는 인칭대명사입니다. 고린도 성도들 태도와 다름을 강조합니다. 둘째, 육신의 몸은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 함께 있는 것 같다는 표현입니다. 어설프게 듣고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마치 교회에 함께 있어 듣고 본 것처럼 분명한 결정을 내린다는 말입니다. 셋째,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입니다(4). 음행하는 자에 대한 바울의 판단을 주님의 권위와 연결시킵니다. 이 모든 것은 고린도 성도가 어찌 생각하고 행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그들은 모임 중에 공개적으로 징계해야 합니다(4-5).

이 과정에 두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가 공적으로 엄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일 때 바울도 영으로 동참할 것을 말함으로 모임의 공공성을 말하고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처리하라는 것은 주님의 권위로 징계하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징계가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 사람을 하나님 통치 바깥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축출하지만,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육은 세상 사람이 그렇듯 죽게 될 것이지만, 영이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회개함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음을 말합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계속 교회에 머물러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주님의 심판을 받는 것보다 지금 징계 받아 회개하면 그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2) 묵은 누룩을 버리라(6-8)

 

고린도 성도들 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권면합니다. 그들의 자랑은 옳지 않습니다. 그 문제가 심각함에도 교회가 그것을 묵인하고 심지어 음행하는 자를 두둔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룩의 예를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듯 그런 죄를 묵인하면 교회 전체가 부정해집니다. 더 나아가 유대 유월절과 관련해 부연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새 언약을 위한 유월절 어린 양, 곧 예수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백성이 되었기에(1:2) 묵은 누륵으로 하나님의 공동체를 더럽히면 안 됩니다. 오히려 순전함과 진실함의 빵으로 새로운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철저하게 예수로 인한 구원과 그로 인한 독자들의 정체성에 근거한 권면입니다. 세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합당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3) 이전 편지에 썼던 바울 명령에 대해(9-10)

 

갑자기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한 이전 편지 내용에 대한 오해를 교정합니다. 당시 독자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현대 독자는 어떤 내용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현재 편지에서 음행하는 자를 내쫓으라는 말(2,5,13)과 관련해 오해가 있을까 봐 설명하는 듯합니다. 이전 편지에서 말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 신자를 향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만일 세상 악한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고 하면, 신자는 관계 맺을 사람이 없기에 이 땅을 떠나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과장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초점이 하나님 백성 공동체 안에서 음행하는 자에 대한 처리 방법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4) 현재 편지를 통한 명령(11-13)

 

10절과 연결해 현재 바울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증합니다. 철저하게 교회 안에 있는 신자에게 해당하는 명령입니다. 만일 어떤 신자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 예를 들어 음행이나 탐욕, 우상숭배,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는 일을 하거든 그와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관심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받을 심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의 관심은 지금 교회가 행하는 자를 어찌해야 하는가입니다. 그 악한 사람을 내쫓아야 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그 일에 동조하지도, 지지하지도 않게 함으로써 죄의 오염을 막기 위함이고, 죄지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그가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일지라도 교회는 악을 용납하면 안 된다. 물론, 그렇게 하면 세상에서 손해 볼 수 있습니다. 악행하는 자는 여전히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일 수 있고 독자들은 그 아래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교회가 바르게 권면하고 징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원리가 지배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죄를 살펴야 합니다. 미혹된 일들이 있지 않는가 살펴야 합니다. 죄악이 해결되지 않으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슴도치처럼 수많은 상처의 가시가 남아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살아갑니다. 말씀으로 치료를 받아 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거룩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고 죄악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고린도 교회의 실수는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는 훈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깊이 적용하는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1:22) 말씀 속에 살아있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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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4-02)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사도

고린도전서 4장 6-21절


온전한 복음에는 고난과 영광이 공존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 부활의 영광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의 고민과 교회의 위기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만을 누리려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속화에 대해서 신속하게 마음의 문을 열고, 교회가 타락해 가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갈등 없이 합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본문은 자신의 모든 삶을 드려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믿음의 사람들의 여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걸어간 고난 길을 보면서 우리에게 숙연하게 하고 경건과 값없이 얻은 은혜에 아름다운 가치들을 다시 한 번 묵상하게 합니다.

 

 

  • 교회 분열 문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3:5부터 교회 문제의 원인(지혜 집착)과 현상(사람 자랑 3:18-23)과 사역자에 대한 바른 인식과 태도를 다룬(4:1-5) 바울은 그 모든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고 권하기 위해서임을 말합니다(6-13). 마지막으로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며 디모데를 보낸 이유를 밝히고, 향후 방문 계획을 통해 그들의 교만을 엄히 경고하며 이 문제를 마무리합니다(14-21).

 

다른 사람들에 대해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6-13)

로마 시대를 살던 바울은 아마도 원형경기장(콜로세움)에 검투사를 영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을 내놓고 굶주린 사자나 같은 검투사끼리 싸워야했지만, 수많은 구경꾼들의 쾌락을 위한 눈요깃감으로 생명을 걸고 싸워야 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희생과 자신의 삶과 생명을 받쳐서 희생하고 해산의 고통을 낳아야만 교회는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의 여정과 수고를 잊어버렸습니다. 이전의 모든 수고를 잊어버리고 복음의 마지막에 있는 영광과 해택을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6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6-13)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바울에 대한 비판이나 판단 소리는 영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참된 복음의 의미와 본질, 그리고 복음이 자신들에게 전달되기까지 아름다운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로 껍데기 신앙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원인 때문에 일어난 문제들이었습니다.

 

(1) 사역자로서 바울과 아볼로(6)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이 일’(이것들)을 바울 자신과 아볼로에게 적용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교회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권면이 무엇인지를 밝힌 것입니다. 그 속에는 두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지도자 문제 정리와 고린도 성도들의 유익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 요소와 관련해 목적절 두 개를 첨가해 자신의 의도를 전합니다. 하나는 기록된 것을 넘지 말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사도나 사역자들)를 통해 배우게 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도 어떤 사람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둘 모두 교만하게 행하지 말라는 내용을 전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스스로에 대한 교만이 아닙니다. 두 번째 절의 ‘어떤 사람을 위해서’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나 모임이 생각하는 지도자를 위해서 다른 성도를 교만하게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지도자에 대한 이해를 교정하고(3:5-9; 4:1-5) 교회에서 누가 더 중요한지(3:21-23)와 성도들 역할(3:9-17)을 설명한 것입니다.

 

(2) ‘너희’의 상황(7-8)

 

교만에 대한 권면을 잘 전달하기 위해 고린도 성도와 바울의 상황을 비교해 제시합니다. 먼저 고린도 성도들의 교만한 상황입니다. ‘누구’와 ‘무엇’과 ‘왜’라는 일련의 질문으로 그들 상태를 꼬집습니다. 누가 ‘너’를 특별하다고 했습니까? 사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인식했기에 교만한 것입니다. 네가 가진 것 중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다 받은 것이면, 왜 마치 다른 이에게서 받지 않고 스스로 얻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고린도 성도들의 교만을 거침없이 비판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바울은 반어적인 표현으로도 그들의 교만을 지적합니다(8).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양 풍족하고 부유하며 ‘우리’(사도나 사역자들)없이도 왕 노릇합니다. 그들에게 주신 풍족함의 은혜가 오히려 그들 마음을 가리고 거만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그들의 풍족함을 시기하거나 경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로 하여금 성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8절 후반에 ‘너희’가 참으로 왕 노릇하기 원하는데 ‘우리’ 역시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함이라고 덧붙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잘되기를 진정 원하지만,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것으로 변질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3) ‘우리’의 상황(9-13)

 

왜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왕 노릇하기 원하는지를 설명함으로써 그들의 교만을 부각합니다. 그들과 다른 ‘우리’의 모습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의 생각에 자기들은 사도들(일꾼들)인데(4:1) 왕 노릇은커녕 하나님께서 마치 사형 선고 받은 맨 마지막 사람처럼 자기들을 세상에 보이셨다고 합니다. ‘우리’를 세상과 천사와 사람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구경하는 원형 경기장에서 싸우고 죽어야 하는 검투사처럼 혹은 맹수에게 죽어야 하는 자들처럼 세상에서 고난 당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도 혹은 지도자로서의 화려함이 아닙니다. 세상 보기에 어리석은 실패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계속 비교합니다(10-13). ‘우리’는 메시아 때문에 세상에서 어리석지만, 그들은 메시아 안에서 지혜롭다고 자랑합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그들은 강하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고 명예를 추구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지금까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거주지가 없고 손으로 수고하며 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욕을 당하지만 축복하고 박해를 당하지만 참고, 비방을 당하지만 권면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세상의 더러운 것과 찌꺼기처럼 여김 받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신앙도 있고 세상에서 어느 정도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이 좋게 여기는 것들, 곧 지위와 명예와 안정과 능력과 부와 지혜 등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십자가 예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메시아 안에서 누리려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다릅니다. 오직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삽니다. 세상에 미련 두지 않고 진정한 평가자이신 하나님을 보고 이 땅에서 십자가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라 부르심에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대조가 세상을 중요시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었습니까? 어쩌면 계속 코웃음 치며 듣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자기들의 실상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듯합니다. 현대 교회들은 어떻겠습니까? 감히 고린도 교회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동일하게 십자가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일입니다.

 

바울의 권면과 계획(14-21)

한 사람이 바르게 세워진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요, 죄인들이 구원의 길로 나오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사명은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라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 십자가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고난이 없이는 영광의 부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기 위해서는 먼저 울며 씨를 뿌리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14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14-21)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는 자신이 예수님 안에 거하며 생명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사랑으로 권면하며 복음을 가르칩니다. 잘못을 지적하며 자신의 우월함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즐거워하기를 소망하며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도록 질책하고 바른길로 인도합니다.

 

(1) 바울의 권면: 나를 본받는 자 되라(14-16)

 

고린도 성도와의 대조를 서술한 이유와 그에 근거한 명령을 제시합니다. 자신의 상황을 언급한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녀를 권면하듯 고린도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많은 안내자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참 아버지 역할을 하는 자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 메시아 안에서 복음으로 새 생명 얻게 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표현으로 그 자격을 강조합니다. 이제 그 ‘아버지-자녀’관계 속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명령합니다. 지금까지 내용에 의하면 바울은 (1) 세상을 향한 추구를 멈추고 (2) 십자가 예수만을 중요시하고 (3) 십자가를 포함한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며 살고 (4) 비교와 경쟁이 아닌 부르심에 신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의 삶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살려는 복음의 참 스승이자 영적 아버지인 바울을 따라 예수 안에서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모본)-바울(제자, 모본)-독자(제자, 영적 자녀)로 연결된 삶입니다.

 

(2) 바울의 계획 1: 디모데를 보냄(17)

 

두 가지 계획을 언급하며 교회 분열 문제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는 디모데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를 보낸 이유는 지금까지 바울이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 들을 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 대한 추천의 말을 전합니다. 잘 영접하고 그의 말을 듣고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편지 끝 부분인 16:10-11에서 디모데를 잘 영접하라고 당부합니다. 이 편지를 통해 그리고 디모데를 통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싶은 의도입니다.

 

(3) 바울의 계획 2: 바울의 방문 계획(18-21)

 

두 번째 계획은 바울의 고린도 방문입니다. 언제 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주께서 허락하시면 속히 가고 싶다고 합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안 올 것처럼 여기고 교만한 태도를 취하지만, 바울이 가면 그들의 교만한 말이 아닌 참 능력을 보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에 걸맞은 하나님 능력의 유무를 검증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는 상당히 심각한 경고입니다. 자신이 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갈지 결정하라고 합니다. 매를 통한 징계냐,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이냐? 이것은 독자들인 고린도 성도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전에 빨리 돌이키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것은 값없이 부르신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부르셨고 다양한 은사들도 주셨습니다. 은사를 통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들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통해 섬기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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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4-01)

 


하나님의 성전을 허는 행위

고린도전서 3장 16절 - 4장 5절


남아공아국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지도자는 마땅히 자기의 텃밭을 가꾸어야 합니다. 씨 뿌리고 살피고 일궈야만 하며 그 열매를 거둬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지도자는 정원사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경작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평신도이거나 복음사역자이거나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 직접관계를 맺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닌 어떤 사람에게 속하거나 판단 받으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려 해야 합니다.

 

  • 교회 분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진행합니다. 16-17절은 앞부분의 집 짓는 예와 연결해 하나님의 성전 개념을 통해 교회가 무엇이고 어찌 행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이후 3:18-4:5에서는 결론 같은 명령들을 이어갑니다.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각각 두 가지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18-23절은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것으로 세상 지혜에 집착해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고, 4:1-5은 사역자에 대한 것으로 그들을 사역자로 여기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16-17)

성도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자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성전으로 보존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성전으로 보존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국하게 지키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전이라는 정체성에 합당한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16-17)

 

‘집 짓는 예’(9b-15)와 연결해 성전 개념으로 경고합니다. ‘알지 못하느냐’는 표현으로 고린도 성도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고 생각을 교정합니다. 그 내용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이 그들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 언약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내주에 대한 약속의 실현을 경험하고 있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의도는 긍정적 확신을 주려는 것이 아니며, 그 상태를 전제로 삶에 대해 경고하려는 것입니다. 경고는 부정적 내용이 담긴 조건절로 제시됩니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파괴하실 것입니다. 성전을 파괴한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교회 안에 있는 시기와 경쟁으로 인한 분열 현상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성전 파괴, 즉 공동체의 분열을 경고합니다. 분열은 단순히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는 것이기에 즉시 멈춰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 권면1: 세상과 다르게 살라(18-23)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입는 것입니까? 넓고 화려한 안식처를 갖는 것입니까? 주목 받는 자리에 올라서거나 자신만의 특별한 자랑거리를 갖는 것입니까? 이것이 좋아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은 그 일에 지혜를 모으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18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18-23)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지혜와 관련해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세상 지혜를 가지고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면 스스로 속아서 결국 어리석은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거리끼리는 것과 미련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1) 명령 1: 세상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18-20)

 

명령법으로 분열 문제에 대한 결론적 권면합니다. 첫 번째 다루는 것은 세상 지혜에 대한 집착입니다. 문제 상황 이면에 있는 원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 믿고 교회 안에 있지만, 여전히 세상과 구별 없이 삽니다. 세상이 말하는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계속 따르고 있고, 특별히 말이나 지식과 지혜를 통한 경쟁으로 우위를 점하려는 세상 문화 속에서 당연한 듯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교회와 세상은 단지 용어와 대하는 사람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바울이 명령합니다. ‘아무도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18). 누군가의 강요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세상에 동화해 살았습니다. 세상 방식을 따르는 것을 지혜롭게 여기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란 변수를 놓쳤습니다. 그들은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고, 정말 지혜로운 자는 세상이 어리석게 여기는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자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지혜자들의 생각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욥 5:13; 시 94:11). 그들은 결국 자기 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관련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 정체성에 따른 분별의 삶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비록 많은 은사와 지식을 갖고 있는 듯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교회가 되었다는 것(1:2)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며,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생각(2:16)으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어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신령하고 성숙하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돌이켜 복음 안에 있는 예수 메시아에 대한 내용과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2) 명령 2: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21-23)

 

두 번째 명령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문제의 표면적 모습, 곧 지도자를 내세워 경쟁하는 것을 멈추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소속과 관련한 꼬리물기 방식으로 이유를 제시합니다. 모든 것이 ‘너희’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는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 등의 지도자들과 세계와 사망과 지금이나 장래 것 등 세상 요소들이 포함됩니다. 하지만 고린도 성도들이 최고는 아닙니다. 그들은 메시아 것이고, 메시아는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결고리는 모든 것 < ‘너희’ <메시아 < 하나님의 구도를 보여줍니다.

몇 가지 중요한 관찰점이 있습니다. 첫째, 성도 삶에 대한 큰 그림입니다.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와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존재들이고 온 우주의 회복을 함께 누릴 자입니다. 누구 편이냐, 하는 작은 일에 얽매여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둘째, 교회 구조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누구에게 속했느냐로 싸우지만, 오히려 교회는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속해 있는 구조입니다. 신적 존재를 제외하면 성도들이 제일 중요합니다. 사역자가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성도 중 한 사람입니다. 단지 섬기는 자, 곧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지도자를 두고 경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셋째, 교회는 하나님/예수의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분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린도 성도들은 하나님 백성이 무엇인지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 교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를 정쟁이나 이익의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이나 목회자에 대한 바른 자리매김을 잊은 채 주님의 교회를 ‘내’ 교회로 생각하는 일들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에 주목해야 합니다.

 

결론적 권면2 : 사역자들을 메시아의 일꾼으로 여기라(4:1-5)

주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은 복음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보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파벌을 만드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그런 삶을 지양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사람을 앞세워 그것으로 자신의 뜻을 나타내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속하려 하지 말고 복음에 집중하며 주님께만 속해야 합니다.

 

1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1-5)

 

바울은 그가 주님의 일꾼이기에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작은 일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자신을 판단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을지라도 그것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주님의 판단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1) 명령 1: ‘우리’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여기라(4:1-2)

 

사역자들을 ‘너희’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바울은 명령형으로 사역자들에 대한 인식을 교정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과 아볼로(‘우리’)를 메시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메시아를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맡아 관리하고 전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교회나 사역의 주인이 아니기에 일을 맡긴 주인에 대한 ‘신실함’(개역개정은 ‘충성’으로 번역하고 있다)이 요구됩니다(2). 결국, 그들 역시 하나님의 언약 백성 중 하나입니다. 단지 성도들을 복음으로 섬기는 역할과 부르심이 다를 뿐입니다(12:28). 주인이 아니기에 그 역할을 자기 것인 양 자랑하거나 경쟁의 통로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은혜이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은사와 직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12-14),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사역자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확인케 합니다.

 

(2) 명령 2: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4:3-5)

 

사역자와 관련한 두 번째 명령을 전합니다. 판단과 비교를 멈추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비교와 경쟁은 지도자들을 비교함으로써 자신들의 모임을 높이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연히 각 지도자들의 장점과 단점들이 부각되고 사역의 내용이 판단과 비교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3절 표현은 그들이 실제로 바울에 대해 그렇게 했음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 자신도 스스로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최종 평가자는 주님입니다(4). 타인이나 스스로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록 스스로 자책할 것이 없다 해도 그 자체가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님은 단순히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의 뜻과 동기도 보십니다(5). 행동이나 말은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에 함께 평가하십니다. 셋째, 주님의 평가는 지금 여기서가 아니라 그분이 다시 오셔서 역사를 완성할 때 이루어집니다(5).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나 스스로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날의 참 평가를 기대하고 계속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독자들 역시 동일한 생각을 공유하기를 기대합니다. 참 사역자와 거짓 사역자를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역자에 대한 평가로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최종 평가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지금의 평가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지 않고 내 맘대로 행함으로서 성전을 세우기는커녕 성전을 허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나 지도자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만 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도 하나님의 성전을 무너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이것이 성도의 첫째 되는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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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3-01)


육신에 속한 성도들의 특징

고린도전서 3장 1-15절


생명을 가진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하지 못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어 있는 물건이든지, 아니면 다음으로 성장하는 장애물들로 성장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새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을 가진 것은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름에도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무엇인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성장을 멈추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 바울은 1:10에서 시작된 교회 분열 문제에 대한 구체적 권면이 제시됩니다. 고린도 성도들을 보면서 아직 육신에 속한 자로서 어린 아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분쟁은 성령과 무고나한 육적 존재방식입니다. 성장하기 위해 바울이나 아볼로는 심고 물을 주는 일뿐이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일한 대로 각자의 수고한 대로 상을 받을 것입니다.

 

성장이 멈춘 그리스도인(1-4)

거듭난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만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문제가 아니라 성장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1-4)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은 성숙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그들이 미숙하다고 판정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 ‘젖으로 먹임’(2) 등의 표현을 쓴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1)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책망(1-2)

 

바울은 교회 분열 문제에 대한 구체적 답변들을 제시합니다. 1인칭 강조 지시어인 ‘나 자신’(카고 κἀγὼ)와 ‘형제들아’라는 호격을 사용해 주의를 집중시키고 책망함으로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고린도 성도들을 신령한 사람으로 부를 수 없고 어린아이 같은 육신의 사람들로 부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사실 그들은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 곧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아마 스스로를 성숙하고 신령한 자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령을 경험했고 여러 지식과 은사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2:6-16에서 말한 세상과의 분명한 구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오만을 꼬집듯 미성숙한 자, 심지어 세상을 의미하는 육신에 속한 자라 평합니다. 더 나아가 메시아의 마음(2:16)을 이해하지 못하는, 과거에도 지금도 젖만 먹을 수밖에 없는 유아로 평합니다(2).

 

(2) 책망의 이유(3-4)

 

그들이 책망 받아야 할 이유가 소개됩니다. 그들 안에 있는 시기와 분쟁 때문입니다. 분쟁은 경쟁으로 인한 갈등을 뜻하며 교회 문제의 핵심입니다(1:11). 시기는 그 경쟁의 이유입니다. 이 두 항목은 당시 철학 학파나 정치 모임 간의 관계를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세상은 자기 모임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영향력과 이익을 얻고자 그것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모습이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바울에게 속한 자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2). 바울은 이 모습을 육신에 속해 사람을 따르는 것이라고 평합니다(3-4). 하나님 백성에 합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런 평가를 독자 스스로 동의하는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우(ου)를 통해 긍정대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질문함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의 상태를 인정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책망합니다: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요?”

 

 

문제 상황에 대한 바울의 대답1(5-9a)

 

현대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잘 속는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처럼 은사를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큰 능력을 행하면 ‘이 정도의 능력을 행한 사람의 위대한 사람이다’라는 법칙으로 사역자를 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믿어버린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그러니깐 이런 거짓 은사주의자들이 아직 미숙한 성도들을 악용합니다.

 

5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5-9a)

 

고린도 성도들이 파당을 지어가며 추앙 하는 지도자들은 사실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주신 사역자입니다. 그들의 다양한 가르침과 서로 다른 은사 모두 섬김의 수단일 뿐 비교의 기준이나 경쟁의 도구가 아닙니다.

 

(1) 바울과 아볼로(5)

 

4절과 연결해 지도자 바울과 아볼로에 대한 이해를 교정합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입니다.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에베소에 왔을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도를 배워 더 탁월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떠난 고린도에 아볼로가 와서 사역을 잘했던 것 같습니다(행 18:24-28). 하지만 교회는 바울과 아볼로를 두고 경쟁하여 분열했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이 문제가 발생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제 바울이 이 분열 문제에 대해 자신과 아볼로는 하나님께서 각자 주신 대로 독자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한 사역자라고 말합니다.

 

(2) 하나님의 밭과 사역자, 그리고 하나님(6-9a)

 

농사의 예를 통해 사역자와 교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설명gkqsl다. 그 예에서 ‘너희’라고 불리는 독자들은 밭이고, 바울과 아볼로는 농사짓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씨를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이 설명은 독자들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씨를 심듯 교회를 개척한 바울과 물을 주듯 성장케 한 아볼로 중 누가 더 훌륭할까?’하는 경쟁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기 모임의 위치를 높이려는 의도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이해를 교정합니다.

그의 의도는 몇 가지 반복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입니다. 네 번 언급합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자라는 모든 과정을 그분이 하셨습니다(6-7). 심지어 교회도 하나님 것이고 바울과 아볼로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 동역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9). 고린도 성도들의 초점을 하나님께로 돌려서 더는 사람에게 집중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각각’과 ‘자기’라는 표현입니다(5,8). 사역자들 역할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비교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이 다릅니다.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 주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서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비교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비교와 상대평가로 사람을 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신 은혜에 대한 개인적 충실함 자체로 평가하십니다. 독자들은 하나님의 평가 방식을 배워서 자신과 교회에 적용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와 ‘함께’의 표현입니다. 비록 역할은 다르지만, 사역자들은 하나님 일을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입니다(7).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입니다(9). 이 세 가지는 모두 관점이나 사고방식과 관련 있습니다. 어디에 초점을 두고 무엇을 중요시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분이 사람 대하는 방식에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문제 상황에 대한 바울의 대답2(9b-11)

 

하나님의 사역에 사람을 일꾼으로 쓰시되 각각의 상황에 따라 인물을 쓰십니다. 저마다 일의 역할이 다르고 일하는 모양이 다를 지라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모든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동일한 사역자입니다. 결국은 그 일꾼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9…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9b-15)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초로 할 때 믿음에 합당한 삶으로 세워지고,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보존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공적을 세워서 마지막 심판 때 인정받는 거룩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 교회, 하나님의 집(9b-11)

 

집짓기의 또 다른 예로 교회 문제에 대해 권면합니다. 앞부분이 사역자에 대한 관점이었다면, 이번에는 ‘너희’라는 성도들의 일에 대해서입니다. 독자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하며 시작합니다.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함을 전달합니다. 집짓기는 터를 파고 주춧돌을 세운 후 건물을 올려 꾸미는 과정이 있습니다. 바울은 첫 과정을 담당해 충실히 수행했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터는 예수님인데,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그 예수님을 충실하게 전해(1:18-2:5) 독자들이 믿게끔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과정입니다. 그 터 위에 무엇으로 어떻게 짓는가에 따라 하나님 집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린도 교회 문제는 바울이 잘못 가르친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에 엉뚱하게 반응하고 살았기 때문에 벌어집니다.

 

(2) 어떻게 지을 것인가(12-15)

 

집짓기와 관련해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대해 부연합니다. 특별히 사용한 건축 재료에 따라 세운 집의 항구성 여부로 평가받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로 평가하실 것인데, 만일 금이나 은이나 보석 등 불에 타지 않는 것으로 지으면 상을 받고, 불에 타는 것들로 지으면 해를 받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설명에는 몇 가지 생각할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지어져 갑니다(엡 2:20-21). 이 땅에서 교회의 완성은 없습니다. 실제로 교회는 건물이 아닌 신자의 모임, 곧 관계이기 때문입니다(1:2). 오직 세워져 가는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둘째, 교회는 신자 개개인이 만들어갑니다. 농사에서 곡식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지만, 집짓기는 성도가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도우시지만 초점은 그들이 일한다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각각’과 ‘누구든지’를 통해 성도의 개별 역할을 강조합니다. 함께 살아가지만 개인들이 서로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셋째, 성도 삶에 대한 평가가 있습니다. 바울의 설명은 미래 심판(1:8)을 배경으로 행한 대로 갚는다는 대원칙이 지배합니다(마 16:27; 롬 2:6; 계 22:12). 모든 성도 역시 하나님 평가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주목할 것은 그분의 평가 방법입니다. 건축 재료의 귀천, 즉 금이냐 은이냐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에 견딜 수 있게 일했는지로 평가하십니다. 비교를 통한 보상이 아니라 각자의 일과 삶을 통한 절대평가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안팎에서 성도 간의 경쟁은 의미 없습니다.

아쉽게도 집짓기와 관련한 설명에 명쾌하지 않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각 건축 재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상과 벌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니 시기와 경쟁이라는 세상 방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돌이켜 교회를 잘 세워가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기초로 각자의 사역을 통해 교회가 세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금 사역이 복음을 기초로 이뤄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사역이 복음을 강화합니까가 아니면 오히려 약화합니까? 교회의 사역이 세상의 지혜를 좇거나 자기 위를 기초로 세우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구원을 어리석게 여기는 것이며, 결국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역의 동기와 방향은 복음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복음을 설명하고 증명하고 적용하는 사역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지키고 복음의 영광을 높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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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2-01)


바울의 전도하는 방법

고린도전서 2장 1-16절


노래를 부르지 못한 사람을 음치(音癡)라고 합니다. 대부분 음치들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수준에 맞는 좋은 음악을 많이 들려주고, 점점 음악에 대해서 리듬 박자 음정이 무엇인지 깊숙이 가르쳐 갈 때, 음악을 이해하며 섭렵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복음이 아니라 이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 바울은 1:17에서 자신의 복음 전도 내용과 방법을 언급했습니다. 1:18-31에서 내용 차원을 다루었다면, 2:1-5은 방법에 대한 것을 설명합니다. ‘나’라고 세상 지혜에 대해 비판하고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증거 했는지를 기술합니다. 2:6-16은 ‘우리’라는 복수를 통해 성령으로 인한 참 지혜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이후 3:1부터 소위 영적이라고 믿지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독자를 향한 권면의 근거가 나옵니다.

 

바울의 과거 전도(1-5)

세상에 가장 좋은 소식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게 불편하고 거북합니다. 세상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 속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사용하지 않고 눌변가라는 혹평을 받더라도 오직 십자가를 전합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을 전했고, 자신을 드러내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말을 전했습니다.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1-5)

 

바울은 인간의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눌변가라는 혹평을 받더라도 십자가만 전합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을 전했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말을 했습니다. 세상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 속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과거에 고린도에서 행한 자신의 전도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 방법을 두 단계로 설명합니다.

 

(1) 고린도로 나아감(1-2)

 

바울은 고린도로 나아갔습니다. 1:17과 연결해 바울의 복음 전파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말합니다. 그는 세상 방식을 따라 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1)

바울은 두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첫째는 말과 지혜의 거창함입니다. 당시 어떤 웅변가나 선생이 어느 도시에 가면 자리 잡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보이려고 여러 사람과 논쟁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통해 자리 잡기 위해서입니다. 이 과정에서 말과 지혜의 거창함은 중요한 무기였습니다. 고린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였기에 고린도에 처음 온 바울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당연히 세상 무기를 사용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2). 십자가의 예수님을 세상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구원 과정의 열쇠이자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이 기대하는 말과 지혜의 거창함이 아닌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전하는 것을 중요시했습니다.

 

(2) 고린도에 거주함(3-5)

 

바울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3)라고 고린도에 거주했습니다. 그가 고린도에서 한 일들이 무엇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도’(4)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하는 모습을 세 가지로 ‘(그는) …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하는 동안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무능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에게 나타날 수 있는 3중의 무능함입니다. 즉, 바울은 복음의 능력에 있어 사람에게서 나올 것이 전혀 없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전도를 ‘말과 전도’로 설명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4) ‘말’은 전도하는 언어의 틀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말을 전도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전도’는 전도하는 언어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전한 내용은 ‘복음’이었습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바울의 전도 방법의 두 번째 차원은 외적 인상과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새로운 학파가 자리 잡으려면 외적으로 좋은 인상을 주어야 했습니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나 사람들을 휘어잡는 설득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습니다. 좋은 인상을 주기에는 부족한 덕목입니다. 바울은 애써 외적인 것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결과가 사람의 어떠함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결정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바울의 전도 방법은 세상 방식과 달랐습니다. 외적 화려함이나 거창함을 통해 사람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구원의 비밀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가감 없이 전했고, 그분의 일하심만을 추구하며 전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복음 안에 있는 진짜 지혜와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짜를 갖고 있기에 사람의 환심을 얻기 위해 애써 어색한 치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복음 전도 이후 믿음의 삶의 초점이 사람에게 맞취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5) 이런 태도는 여전히 화려한 말의 지혜로 경쟁하는 고린도 교회가 들어야 했지만, 현대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성령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6-16)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급조된 임기웅변의 이론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만세 전부터 정하신 것을 ‘때가 차매’ 이루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세상의 없어진 어리석은 지혜를 이용하여 오히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이 성취되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6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6-16)

 

복음 선포자는 '십자가의 지혜를 믿으라라고 외쳐야 합니다. 십자가 구원 계획은 급조된 임기웅변의 지혜가 아닙니다. 만세 전부터 정하신 것을 ‘때가 차매’ 이루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세상의 어리석은 지혜를 이용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이 성취되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1) 우리는 참 지혜를 전함(6-7)

 

바울이 세상 방식을 따르지 않았지만, 지혜를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온전한 자들, 곧 성령을 받은 성도들 안에서 참 지혜에 대해 말합니다. 1장에서 언급한 복음 안에서 있는 예수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먼저 참 지혜의 성격을 대조를 통해 제시합니다. 세상 것이나 세상 통치자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바울은 몇 가지 추가 표현으로 참지혜의 성경을 구체화합니다. 첫째, ‘비밀로 감춰진’이란 표현입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세상 지혜로 절대로 알 수 없고 오직 선포를 통해 알 수 있으며(1:21), 시간적으로 오랫동안 감춰졌던 것이 지금 복음 증거로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시간의 영속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멸망’이란 표현을 쓰고 하나님 지혜는 영세 전에 미리 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유한성과 하나님 계획의 무한성의 대조입니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셋째, ‘너희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대상에 독자들이 있으며, 거룩하고 온전케 해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독자들로서는 감사한 일입니다.

 

(2)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방법(8-13)

 

참 지혜에 대한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갑니다.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입니다. 역시 세상과의 대조로 설명합니다. 세상 그 누구도 참 지혜를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지혜는 세상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이 세상 통치자들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8). 그들 보기에 십자가는 어리석고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인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10). 바울은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성령으로 소개합니다. 구약에서 성령은 창조의 영이자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임한 영입니다. 새 언약 약속 역시 성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에스겔 36:27). 성도 되는 과정과 이후의 삶도 성령과 관련 있습니다(12:13). 하지만, 바울은 왜 성령이어야 하는지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제시합니다(11-13).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는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이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성령이 보이고 가르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12). 성령이 계시한 복음(10)을 믿어 하나님의 구원을 알고 받았으며 성령의 임재 또한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그 목적 중 하나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은혜들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미 독자는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1:4-7).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인식은 적습니다(12-14장). 그렇기에 그들은 성령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지만, 성령이 아닌 세상의 생각을 갖고 있는 어린아이들입니다. 한편, 성령으로 인한 결과 중 하나가 13절에서 서술됩니다. 바울(‘우리’)이 사람의 지혜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으로 가르친다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것은 성령을 통해 분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독자들의 모습과 다릅니다. 그들은 영적인 일을 세상 지혜와 경쟁의 모습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3) 자연적 사람과 영적 사람의 대조(14-16)

 

8-13절과 연계하여 왜 세상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가에 대해 다룹니다.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성령을 통한 일들이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미 1장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실제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방법을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간 이상한 말이지만, 성령의 가르침과 행함은 성령을 통해 계시된 것이기에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분별됩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자들이 참 지혜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에 반해, 성령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다릅니다.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고 있기에 가능합니다(16). 또한 그들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15).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각과 사고를 알기에 주를 알지 못하는 세상의 생각과 판단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16). 아쉽게도 독자들은 성령을 받은 자임에도 성령의 일을 모르며 세상의 가치에 편승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해 성숙한 신령한 사람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까지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 과정은 영원 전 계획에서 시작해(7) 때가 되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역으로 실행되었습니다. 사도는 이 내용을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했고(4-5), 성령의 계시 사역을 통해 사람들이 이것을 인식했으며(10), 믿음의 반응을 통해 성령이 신자에게 임했습니다(12). 이 성령은 또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은혜를 알게 하고 영적인 것을 분별해 살게 하십니다(12-13). 계속 거룩하게 해서 주님과의 교제를 온전히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1:9). 독자들은 이 과정에 속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그 과정에 합당한 삶의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방식을 여전히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인간의 지혜안에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논리나 기대를 거스르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비우고 부인하는 것이 사랑이요, 그것이 얻는 것이요 채워지는 것이요 살리는 것임을 믿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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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1-03)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십자가

고린도전서 1장 18-31절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겉으로 보기에 무기력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잡아 죽이는 세력에게 힘으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지혜롭게 빠져 나가지도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무력하게 만드신 하나님께서 하락하신 속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 이제 바울은 17절에서 말한 복음의 내용과 전달 방식 중 복음의 내용에 대해 다룹니다. 특별히 세상이 무가치하게 여기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에게 집중합니다. 18-25절에서는 ‘우리’라고 세상의 이해와 다르게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우리’가 전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26-31절까지는 ‘너희’라는 2인칭으로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독자들과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우리’가 전한 그리스도(18-25)

십자가에 대한 태도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구원의 길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적인 지식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열어두신 길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교회도 복음으로 형성하기 때문에, 당연히 복음을 모르면 교회를 모른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고린도 지역에 유행하던 다른 철학이나 영지주의 같은 종교가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18-25)

 

고린도 교회는 성도들은 너무 똑똑했습니다.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고 가장 우월하다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선생들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를 폐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알았다면 작시 어리석음을 먼저 보았을 것입니다.

 

(1) 십자가의 역설(18)

 

바울은 먼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왜냐하면’을 사용하여, ‘십자가의 도’(로고스)라는 표현으로 앞부분과의 연결성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느냐?’(13)와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7)에서 말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에 복음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러한 연결은 이 부분이 교회 분열 상황과 관련 있으며, 왜 바울이 말의 경쟁이 아니라 복음에만 집중하는지를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더 나아가 독자들이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도 인식하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바울은 십자가 메시지에 관한 대조로 설명을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 십자가의 도가 미치는 영향에 관해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인간에게 ‘구분’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의 두 종류는 멸망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멸망하는 자들, 곧 하나님을 거절하는 세상에 속해 있기에 장차 심판받을 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구원과 멸망, 어리석음과 능력의 대조이며, 바울을 포함한 성도인 ‘우리’와 불신자 ‘그들’과의 대조입니다.

 

(2)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구원 방법(19-21)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지혜 사이에 있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질문을 사용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조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지혜와 관련해 세상과 하나님을 대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지혜를 멸하시겠다는 이사야 29:14를 인용하여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라는 말씀을 필두로,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인간 지혜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이 자신을 계시하고 구원 과정을 보이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의 주도권을 갖고 계시며 그분만의 방법으로 진행하십니다. 그 방법은 사람의 생각과 예측을 뛰어넘습니다. 오직 선포(전도)의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선포란 18절에 있는 십자가에 대한 말을 의미하고, 믿음이란 그에 대한 응답을 말합니다. 즉, 십자를 말하는 미련한 방법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는 사람만 구원을 경험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세상 지혜를 무색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왜 십자가에 대한 선포를 미련한 방법이라고 한 겁니까? 이어지는 부분(22-25)에서 그 내용을 다룹니다.

 

(3) 세상의 추구와 ‘우리’의 전도 내용(22-25)

 

왜 ‘십자가의 도’가 세상 보기에 미련한 것인지를 설명하고 세상 반응과 대조되는 바울의 선포 내용을 서술합니다. 세상 반응과 관련해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의 경우를 구분해 설명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증거를 구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표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한 혐오감과 반대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인데(신명기 21:22-23),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한편,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철저한 실패이자 수치스러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우리’)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만 전합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진실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십자가 자체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단지 끔찍한 죽음의 장소일 뿐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새롭게 인식되고 이를 통해 그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가 비로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 곧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만 경험되는 비밀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지혜로 부활을 못 믿는 자들에게 예수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유대인과 헬라인을 막론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분은 하나님께서 능력이자 지혜입니다. 아쉽게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세상보다 지혜롭고 그분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부연합니다. 그것이면 됩니다. 고린도 교인의 경우가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독자들과의 관계(26-31)

갈등은 모두 서로 자신의 힘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깁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인간의 능력을 폐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제대로 알면 자신의 연약함을 제대로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지체의 도움으로 산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26-31)

 

개인은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지도자를 따르면서 파당이 형성되었고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은 교회를 구성했지만, 하나님과 복음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일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1) 독자들의 구원(26)

 

이전 상황 2인칭 지시어(‘너희’)를 통해 왜 십자가의 예수님만 하나님의 능력이고 구원인지를 독자들과 연계해 설명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형제들아’라는 호격과 ‘보라’라는 명령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 곧 독자들의 구원 경험을 상기시킵니다. 그들 모두가 세상 지혜와 능력이 탁월하거나 좋은 가문 출신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세상 최고의 사람들이 아니며, 세상 보기에 구원의 조건을 가진 자들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이유(27-29)

 

독자들을 주어로 사용한 26절과 달리 27-28절은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해 독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세상의 기대와 다름을 설명합니다. 세상은 능력과 지혜를 포함해 무엇을 가진 자를 선택합니다. 효용성 높고 어떤 결과를 산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역시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있고, 세상의 선택을 추구하며 살려 합니다. 심지어 세상의 선택 방식을 교회에 도입하여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선택하고 연약한 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천하게 여김 받는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 심지어 없는 존재처럼 여김 받는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세상 지혜나 능력이나 자랑을 무색하게 하고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9). 하나님 대신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죄의 근원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에서도 그 죄의 오만함과 자부심을 완전히 꺾어버립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방법은 죄악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향한 사랑이기도 하고, 높은 마음 가진 세상 죄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이기도 합니다.

 

(3) 하나님의 구원 방법의 결과(30-31)

 

독자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의 수혜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님와 독자와의 관계성을 통해 이를 표현합니다(30). 초점은 독자들의 상태입니다. 주절 안에 주어(너희)와 현재 상태 동사(에스테)를 통해 그들의 현재 모습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들의 상태는 세 가지 표현을 통해 구체화합니다. 첫째,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구원 과정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27-28절에서 언급한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의미합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입니다. 구원 과정의 결과로서 하나님/예수님의 통치 안에서 그분과 관계 맺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독자들은 공의와 은혜라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통해 현재 예수님의 통치 안에 있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1:9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와 독자와의 관계성을 묘사한 것과 일치합니다. 셋째,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로 얻게 된 상태입니다. 한편, 바울은 독자들 상태와 더불어 예수님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관계절을 통해 부연합니다(30).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우리’(바울과 독자들 모두)에게 지혜가 되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으니).’ 독자들의 구원과 관련해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 구원 방식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이 부분에서 말하는 바는 독자들이 세상 방식이 아닌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에 세상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방식의 경쟁을 멈추고 오직 주님께만 집중해야 함을 전달합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공동체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세상의 능력을 이기고, 십자가의 지혜로 세상의 지혜를 이기는 공동체입니다. 십자가만이 갈등과 분열을 이기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합니다. 분열의 공동체에 없는 것이 바로 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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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1-02)

 


복음으로 하나 되어야 할 교회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단체 경기는 팀워크(team work)이 중요합니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이라 할지라도 단체 경기에서 팀워크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그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교회도 구성원들이 팀워크이 제대로 이룰 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종종 분열이나 편 가름이 있습니다.

 

  • 사도 바울은 서론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교회 문제로 들어갑니다. 인편으로 주고 받은 주제들을 먼저 다루는데, 6:20까지 이어집니다. 첫 주제는 교회 속에 있는 분쟁이며 4:21까지 진행됩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그만큼 심각한 문제인 듯합니다. 본문은 그 시작 부분입니다. 글로에의 집 사람들을 통해 전해 받은 것을 근거로 성도들에 대한 전체적 권면을 하고, 그들 문제가 무엇인지 재신술함으로써 주체적으로 다르기 시작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할 공동체(10-11)

교회(敎會)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 된 몸입니다. 분쟁이 아닌 연합과 조화가 교회의 본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저마다 취향에 따라 어떤 인간 지도자들을 선호하면서 숭배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허무는 행위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참된 일치를 위해서는 모두가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1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11)

 

사도 바울은 본격적인 본론으로 성도들의 첫 번째 문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 문제는 다름 아닌, 교회 안에 분열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그 문제에 대한 전체 권면을 제시합니다. 비록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친밀함을 유지하지만, 바울의 권면은 묵직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주 예수 그리스도, 곧 구원 과정의 핵심이요(2) 성도가 주님으로 섬기고 교제할 대상이자(9) 다시 오셔서 역사를 완성하실 분(7)의 이름을 걸고 권면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권면의 내용은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라며, 정리하면 세 가지 권면으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① 모두 같은 말을 하고, ② 그들 분열이 없게 하고, ③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같이 됨’을 통해 분열 문제를 해결하라고 명합니다. 여기에는 말과 사고 판단의 영역들이 포함됩니다. 행위에 앞서 내적 인지 영역과 그것을 표현하는 말의 영역을 통해 온전히 회복된 교회를 만들라는 권면입니다. 8절에서 말한 책망할 것이 없는 모습이며,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게 어울리는 거룩함으로의 회복입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거룩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다른 생각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 깊어지면 분쟁으로 발생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11-12)

기독교의 핵심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언제나 주인으로 인정할 때 겸손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될 때,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종종 공동체 안에서 자기만을 세우려 하고, 자기중심적인 활동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행동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1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11-12)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신학적인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경쟁과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분위기에 편승해서 교회 안에서도 분파에 따라 지도자를 중심으로 분열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세상적인 삶의 원리의 방법을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행했던 것입니다.

 

(1) 바울이 들은 것(11)

 

바울은 10절에서 전체적 권면을 했지만, 곧 바로 구체적 명령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 상황을 설명함으로써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상황 인식과 그에 대한 권면의 적절함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합니다. 바울은 글로에Chloe의 집 사람들을 통해 정보를 받았다고 밝힙니다. 현대 성도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지만, 당시 고린도 성도들은 이름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정보의 신뢰성을 주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분쟁(分爭)'이란 단어의 원어 의미는 경쟁과 불화로 인한 갈등입니다. 이 단어는 바울이 교회 상황을 진단하는 3:3에 다시 언급되는데, 시기심과 연결되어 나옵니다. 결국 바울이 얻은 정보에 의하면 교회 분열의 핵심은 시기와 경쟁이 어우러진 비교의식이었습니다.

 

(2) 구체적인 상황(12)

 

본문애서 분열의 구체적인 모습이 제시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분쟁은 어떤 이는 바울에게, 또 다른 이는 아볼로Apollos, 혹은 게바(베드로)Cephas에게 속한 자라고 말하고, 심지어 그리스도Christ에게 속한 자라고 말합니다. 자기와 관련된 지도자들을 내세워 서로 비교와 경쟁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은 로마 식민 도시인 고린도에서 있었던 경쟁 분위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학풍의 분위기가 수사학 학파들의 경우 제자들은 자기 선생을 변호하기 위해 상대 학파를 논쟁으로 공격하여 우위를 점하려 했습니다. 선생들 역시 더 많은 학생과 후원자를 얻기 위해 상대 학파의 지도자와 경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경쟁은 또한 도시 행정과 관련해 우위를 점하려는 정치 모임과도 관련 있었습니다. 만일 어느 모임이 경쟁을 통해 지방 총독이나 황제 앞에서 도시 행정관으로 임명되면 재정이나 명예와 관련한 기회를 얻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쟁은 마치 오늘날 정치인들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렇기에 당시 엘리트 계층은 경쟁을 사회생활의 필수요건처럼 여겼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록 정치 요소는 아닐지라도,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자신들을 우위에 두고 싶은 경쟁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이기고자 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교회 안에 있던 엘리트 계층 사람들을 중심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상의 삶의 원리와 형태가 교회 안에서도 여과 없이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 폐단입니다.

 

바울의 응답(13-17)

 

현란한 말이나 감동적인 언어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능력이 없는 것에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구원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빈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말의 지혜, 곧 인간적인 웅변술이나 철학과 사상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3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17)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례를 받아서, 이제는 사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지도자한테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이제는 그분처럼 자신을 죽이고 남을 높이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1) 반문(13)

 

교회 문제에 대한 바울은 대답하기 시작합니다. 세 가지 수사 질문으로 진행합니다. 첫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입니다. 그리스도는 한 개인을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열쇠입니다. 또한 그런 개인들이 모인 하나님이 백성 모임, 곧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가 경쟁으로 성도를 나누고 편애를 통해 몸을 찢었습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그 개념 자체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를 들먹인 12절 마지막 표현에 대한 응답일 듯합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은 바울과 관련된 형태로 제시됩니다. 바울이 독자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바울의 이름으로 성도들이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듣는 자들이 부정적으로 답하는 방식으로 질문함으로써 스스로 아니라고 대답하게끔 유도합니다.

십자가는 성도가 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고, 세례는 하나님의 교회 구성원 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이 두 과정 모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바울을 그 과정 중심에 놓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중심으로 한 경쟁적 분열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하나님 백성 됨의 모습과 거리가 멉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권면은 3장에서 제시됩니다.

 

(2) 바울과 세례(14-17)

 

바울은 13절의 세례 문제와 연결해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 주제를 언급한 것은 독자들이 세례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과의 관계를 오해 혹은 왜곡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들은 세례의 과정을 마치 세상 학파에서 선생과 제자의 관계 혹은 정치 모임에서 후견인과 후원 받는 자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처럼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이해와 그로 인한 분열의 결과의 분명한 선을 긋습니다. 그의 의도는 몇 가지 표현을 통해 전달됩니다. 먼저 자신이 세례 준 사람이 적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또한 세례를 적게 준 목적이 누군가 자신의 이름으로 주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세례 준 사람들은 경쟁의 분열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본인 역시 경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세례를 주지 않았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비록 그리스보Crispus와 가이오Gaius를 언급한 후, 스데바나Stephanas의 집 사람들이 생각나 추가했지만, 그 외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부연합니다.

 

바울의 입장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17절 표현입니다. 자신이 왜 세례에 집중하지 않는지를 설명합니다. 소명과 그의 사역 내용과 방법 때문입니다. 그의 소명, 곧 그리스도가 자신을 보낸 것은 세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한 마지막 명령 속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마태복음 28:19), 그 자체가 핵심이 아닙니다. 구원은 세례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에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함을 통해서만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의 복음 증거 내용과 방법도 다릅니다. 그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말로 경쟁에서 이기려는 세상 방법으로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복음의 내용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7절 표현은 바울의 입장뿐 아니라 독자들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보여줍니다. 이 표현에 의하면 독자들의 문제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말의 지혜를 통해 경쟁에서 이기려 하고 분열을 만든 것입니다. 세례도 그런 통로로 이용되었습니다. 그 주장 안에는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세상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7절에 근거한 구체적 설명은 18절부터 복음의 내용(18-31)과 절달 방식(2:1-5)을 언급하는 것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기에게 세례를 준 지도자를 중심으로 분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님만 높임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자신은 죽여서 지체를 살리고 세우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분열되었던 교회가 성령의 은헤로 하나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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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1-01)

 

 


고린도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

고린도전서 1장 1-9절


 

당신에게 대통령 취임식 후 만찬까지 참석해달라는 초대장이 왔습니다. 이런 큰 행사에 초대장을 받았다면 얼마나 황송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천국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죄인이 아닌 거룩한 사람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이제는 그에 걸맞게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고민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삶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냈던 교회에 독보적인 교회는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무시하지 않고 문안합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증거 위에 굳게 서서 모든 은사에 부족함 없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을 감사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에베소에 있던 소스데네(Sosthenes)는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합니다.

  

거룩한 초대를 받은 교회(1-3)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 인식은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으로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거룩한 교회(Holy Church)’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공동체는 세상의 공동체와는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해야할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1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3)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당과 은사 남용, 부도덕 등 유난히 문제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먼저 그들에게 따끔한 회초리를 드는 대신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가섭니다. 고린도 전서를 읽어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성도들을 향한 뜨거운 관심이 있었습니다.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감동이 됩니다.

 

⑴ 발신자(1)

 

먼저,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내는 자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사도(使徒)’로 부르셨다고 소개합니다. 고린도 모든 성도들 또한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도(聖徒)’로 불러서 세우셨다고 합니다. 그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⑵ 수신자(2)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바울은 수신자를 문제가 많은 교회이지만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임을 분명히 합니다.

 

본문을 통해 ‘교회(敎會)’를 정의해 보면,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룩해진 자들이며, 마지막으로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께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잠시 고린도 도시는 무역항으로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무역이 매우 발달한 항으로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에 기초한 스콜라 철학자, 시인, 수많은 상인, 무역업자들 그리고 퇴역 군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종으로는 그리스인, 로마인 그리고 유대인까지도 합세한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다양한 인종만큼이나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인 영향을 받아서 고린도 문화를 형상해 갔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 만큼이나 많은 종교가 있어서 우상을 숭배하였고,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 사람들이 ‘당신은 고린도사람!’이라고 하면, 이 의미는 고린도 사람들처럼 방탕하고 음란하며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큰 욕이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에 고린도 교회에도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그 고린도에 있는 문제들로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성도들끼리 분쟁이었고, 영적으로 점점 우상숭배 제물, 성적 타락, 은사 문제 등을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고린도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교회 안에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바울이 전해 듣고 그는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자라도록 권면하기 위해 바울 쓴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비록 고린도교회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지만, 바울은 보이는 데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각(視覺)에 기초하여 보았습니다. 문제점들이 많았지만,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고린도 성도들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부르신 거룩한 공동체며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聖徒)’란 하나님의 자비로운 부르심에 의해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세상에 통용되는 인간적 모든 가치관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한 초대를 통한 축복(4-9)

성도들이 온전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신 은혜 자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의식과 부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린도의 문제점은 이러한 교회와 성도에 대한 정체성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 있었습니다.

 

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4-9)

 

서신의 목적이 고린도교회를 바르게 고치는 것이지만, 다른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감사하는 부분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교회들에 대해 감사하듯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서 1:8; 에베소서 1:16; 빌립보서 1:3; 골로새서 1:3; 데살로니가전서 1:2; 데살로니가후서 1:3; 디모데전서 1:12; 디모데후서 1:3; 빌레몬서 4 등). 책망보다 칭찬을 통한 권면이 인격적인 관계 형성과 변화를 가져옵니다. 고린도 교회는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였지만, 바울은 문제점들을 책망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사랑의 대상이자 근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와 스승이 아닌 아버지로서 관계합니다(4:14-15). 교회의 아비지인 바울은 잠시도 자녀인 고린도 교회에게서 마음을 뗄 수 없습니다.

 

(1)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이유(4)

 

바울은 인사말 이후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언급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4) 감사합니다. 은혜란, 사람의 형편과 관계없이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따라 무엇인가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우상 숭배자들이었던 고린도 사람들을 부르시는 은혜를, 그리고 이 부르심에 더하여 신령한 선물을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4) 주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바깥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은혜의 범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넘어서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효력이 있습니다.

 

(2) 감사의 이유에 대한 내용Ⅰ(5-7)

 

바울은 감사의 이유에 대해서 부연 설명하면서, 먼저 고린도 성도의 상태에 대해 집중합니다. 감사의 이유는 그들을 향한 은혜의 영역에 말과 지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5)라고 ‘풍족’한 것에 감사합니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 그들 가운데 메시아에 대한 증거가 견고하게 확증되었습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철학의 근거지였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이성적으로 올바른 것을 판단하고 지혜를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언변에 능하고 그리스 철학에서 발생한 지식에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합니다(7). 고린도 교회의 특징 중에 하나는 고린도 성도들은 은사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은사를 사랑했던 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은사, 특히 진리 체계와 진리 이해의 은사를 풍성하게 주셨지만, 사람들은 이 풍요를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지혜(1:18,24)는 잊히고 풍요한 은사는 분쟁의 도구가 되고 맙니다(12:12이하). 이처럼 사실 감사할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삶을 보면서 당시 상황은 한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미래 거룩하게 변화될 모습을 보면서 감사했습니다.

 

(3) 감사의 이유에 대한 내용Ⅱ(8-9)

 

바울의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출발점을 둡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풍족한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8). 성도들을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와의 교제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9) 구원의 과정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성도의 현재 삶에도 은혜를 베푸셔서 미래 완전함으로 연결시키시기에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런 감사 이유들은 고린도 교회들의 모습을 상당히 고무적인 것으로 보게 하지만, 사실 아픈 현실에 대한 반어적 진단이 담겨 있습니다. 서신 뒷부분에 나타난 교회의 현실은 5-7절의 감사의 내용과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은 교만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는 데 사용되었고(4:19-20), 지식도 자신을 합리화하는 도구였습니다(8:1,10-11). 주님과 연합하는 만찬은 우상 재물과 섞여버렸고(10:19-22), 성령의 은사 역시 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소가 되었으며(12-14장), 주님의 오심과 관련해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기도 했습니다(15장). 오히려 그들은 책망 받을 것이 많기에 주의 오심을 두려워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감사 이유를 기술한 것은 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과 기대의 마음 때문이며, 몇 가지를 인식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첫째, 비록 그들 개인과 공동체에 문제가 많지만 여전히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예수 안에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수신자 소개 내용을 통해 전하려는 의도와 같습니다. 둘째, 그들에게 신자 삶의 중요 요소를 인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과의 교제 안으로 부르심 받은 자들입니다. 기본적으로 주의 만찬을 통한 연합을 의미하지만(10:16-17) 교제란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그 관계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는 그런 삶을 개인과 공동체적으로 만들어가고 세워주는 통로여야 합니다. 또한 그 과정은 시간적으로 과거의 구원과 현재 구원의 삶, 그리고 미래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과 다른 가치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은혜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예수와의 언약 관계를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셋째,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것은 신자의 삶 자체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5절은 그 은혜의 풍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이라는 표현을 세 번 반복합니다. 또한 8-9절에서 신자의 삶을 만들어가고 완성케 하신 하나님의 신실함을 말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은혜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꼭 기억해야 하고 그것으로 삶을 돌이켜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문제 많은 교회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고 그 은혜에 성도들을 의탁합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은 귀한 사역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람으로 초대하셨고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는 구원의 은혜를 만끽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흠잡을 곳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바로 초대를 받은 성도의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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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25-01)


기다림과 기대 사이에서

시편 25:1-22


기다림은 시제를 바꾸는 일이라고 했던 한 평론가의 문장이 시편 25편과 맞닿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현재 속에서 미래를 들춰보게 되고, 없을 지도 모르는 미래가 가까운 미래가 될 것 같은 기대랄까 기다림이랄까. 당신은 어떤 기다림으로 삶을 물들이고 있습니까?

 

  • 시편 25편은 죄와 아픔, 고독, 그리고 마음의 슬픔과 내적인 투쟁뿐만 아니라 원수의 적대감과 싸우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안과 밖에서 밀려드는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가르침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의로운 길을 걷고 찬양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구합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1-3)

정직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선하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 겸손하고 온유한 자에게 공의와 도를 가르쳐 그 길을 걷는 자들에게 충실히 언약을 지키십니다. 죄는 미워하시되 돌아온 죄인을 받아주시고 갈 길과 행할 도를 알러 주십니다. 다윗은 애초에 고난과 원수의 위협 앞에서 죄에 빠지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1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3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1-3)

 

시인은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봅니다.’(1) 이것은 목을 들어 올려 간절하게 위를 바라보는 상태를 표현한 말입니다. 응답의 주도권이 위에 계신 여호와께 있음을 인식한 태도입니다. 가난한 노동자가 하루 품삯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처럼(신 24:15), 마음과 손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어 올리듯(애 3:41; 시 86:4; 143:8) 시인은 절실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후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을 신뢰합니다.’(2a). ‘신뢰하다’(바타흐)라는 말은 어렴풋한 것이 아닌 어떤 의심도 없는 확신으로 충만한 상태를 뜻합니다. 고지식하고 그릇된 자기 확신이나 자기 과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터득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일하심에 대한 인간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시인의 의심 없는 믿음은 당당한 요청의 근거가 됩니다.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승리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2bc) 시인은 치욕을 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3d)이기에 상황이 뒤집혀 그들이 어떤 이득이나 성공, 은총도 없기를 간청합니다(3c). 반대로 자신과 하나님을 열망하는 사람들을 동일시하고 그들이 부끄러움 당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3ab).

 

여호와의 가르침과 죄 용서를 구함(4-7)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 백성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려움만 주목하지 말고 고난 중에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기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 못지않게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있습니다.

 

4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6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7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4-7)

 

시인의 기도는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지도와 교훈을 구하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4-5). ‘여호와여, 당신의 길을 내게 보이시고 당신의 행로를 내게 가르치소서’(4). 시인은 삶의 여정, 곧 ‘길’(데렉)에서 방향을 설정해주실 여호와의 가르침이 절실합니다. 삶을 위한 여호와의 ‘방식’(오라흐)을 구합니다. 시인은 삶의 방침과 그 이유와 근거를 여호와로부터 얻고 싶습니다.

시인은 더 구체적으로 요청합니다. ‘당신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이는 당신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니/내가 온종일 당신을 기다립니다’(5).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참된 배움을 얻고 교화되기를 열망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시인은 가르치고 교훈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면서 ‘구원’을 온종일 열망하며 기다립니다. 그가 갈망하는 구원은 현재 당면한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구출입니다. 시인은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당신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7a). 그 이유는 영원부터 있었기 때문입니다(7b). ‘긍휼하심’(라하밈)과 ‘인자하심’(헤세드)은 하나님의 핵심적인 성품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긍휼하심은 어머니가 자식을 향해 품는 사랑의 감정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시인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실패하지 않으시는 ‘언약적인 사랑’(출 34:6)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셔서 자기 삶에서 그 따듯한 영향력을 발휘해주시길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칠 줄 모르는 사랑을 의지하는 시인은 ‘당신의 인자하심을 따라’ 젊은 시절의 죄와 반역을 기억하지 마시길 간청합니다(7ab). 반면에 ‘당신의 선하심을 위해’ 나를 기억해주시길 간구합니다(7cd). 시인은 그 반대의 상황이 발생하면, 하나님 성품에 위배된 것이요 주님이 손해를 볼 것처럼 하나님을 압박하듯 호소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근거하여 죄의 사면을 청하고, 여호와의 어머니 같은 사랑에 기대어 호소합니다.

 

여호와의 인도하심과 죄 용서를 구함(8-11)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죄인을 심판하시기도 하지만 반대로 회복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하십니다. 죄인은 그 속성상 금방 깨닫지 못하고, 곧바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온유한 마음을 잃지 않으시고 지속적으로 일깨우십니다.

 

8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9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11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8-11)

 

시인은 여호와가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 방식으로’(‘주의 도로’) 죄인을 교훈하실 것이라(8)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선함’과 ‘올곧음’은 죄인을 교훈하는 방법입니다. 또한 여호와는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시고, 온유한 자에게 그의 ‘길’(도)을 가르치실 것이라고(9) 선포합니다.

시인은 온유한 자(비천한 자)를 ‘공의’(미슈파트)로 지도하고 가르치는 스승 같은 여호와를 믿습니다. 이 시행은 시인의 의도적인 어휘 선택이 돋보입니다. ‘지도하다’, ‘인도하다’라는 동사 다라크()와 ‘도’(길)를 뜻하는 명사 ‘데레크’를 연결시켜 주님의 길과 인도하심이 분리될 수 없음을 역설합니다.

곧이어 시인은 여호와의 모든 길은 인자와 진리이며, 이는 그분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들을 위함이라(10) 선포합니다. ‘인자’(헤세드)와 ‘진리’(에메트)는 하나님 성품을 압축한 말입니다. 따라서 인자와 진리는 ‘언약’(베리트)과 ‘증거’(에두트), 곧 경고의 법규를 지키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후 시인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면서 간청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의 죄악이 클지라도 용서하소서’(11). 앞서 시인이 ‘당신의 선하심을 위하여’ 기억해주기를 청했다면(7), 이번에는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명목을 내세워 죄 용서를 구합니다.

시인은 언약에 충성을 다할 때에야 여호와의 실패 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맛볼 것임을 알지만, 동시에 그 언약적인 사랑 때문에 죄 용서를 적극적으로 청할 수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서 시인은 용기 있게 자신의 크고 무거운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여호와의 인도하심과 구원을 확신(12-15)

과오를 저지르는 존재, 인간, 과오는 인간성의 기본적인 조건이자 불가피한 인간 요소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한계 속에서 과오를 범하게 되고 이는 다양한 생의 비극을 초래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회개한 자들을 돌아보시고 인도하십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니어서 잚은 날에 범한 과오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12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5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12-15)

 

시인은 질문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 누구인가?’(12a) 시인은 여호와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택하신 그 길에서 여호와가 인도하실 것이라(12b) 답합니다. ‘여호와 경외’는 이스라엘 지혜신앙의 핵심이며 가장 중요한 명제입니다(잠 1:7).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하나님 신뢰의 표시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자는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13) 여호와가 친밀하게 대우해주시고, 그분의 언약을 이해하고 깨닫게 될 것을 믿습니다(14). 경험과 믿음이 분리되지 않고 반영된 이러한 말들은 기계적으로 수학적으로 주고받는 계약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통해 얻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그분만이 나의 발을 올가미에서 이끌어내시기 때문입니다’(15). 시인은 마치 덫에 걸린 짐승처럼 위기에 봉착했지만, 여전히 여호와만을 앙망한다.

 

환난에서 벗어나기를 구함(16-22)

고난 중에 또 고난을 만나면 크게 고생합니다. 사람들은 고난당하기 전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고 고난에 빠진 이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겹치는 고난으로 크게 고생합니다. 안으로는 근심이 있고, 밖으로는 원수들이 호시탐탐 노립니다.

 

16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17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18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9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20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2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16-22)

 

시인의 탄식과 하소연은 여호와만을 앙망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시인은 깊은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은혜를 구합니다(16). 시인은 적극적으로 호소합니다. ‘내 마음의 근심이 많으니 나의 곤경에서 나를 이끌어 내소서’(17) 애타는 간절함은 여호와를 향해 ‘보십시오!’(18, 19)라는 반복적인 외침에서 강화됩니다. 시인은 언약의 하나님을 향해 곤고와 환난, 그리고 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라고 촉구합니다(18a; 19a). 또 시인은 자기 죄가 사함받기를 구하면서(18b), 원수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나를 미워하는지 알아주시기를 청합니다(19b). 시인을 향한 원수들의 미움은 폭력을 동반한 증오와 혐오로 표출됩니다.

 

시인은 절박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향해 구출을 요청합니다(20). 그러고서 시인은 알파벳 마지막 자음 ‘타브’ 절의 첫 글자인 ‘온전함’과 ‘올바름’, 곧 ‘성실과 정직’이 보호해줄 것을 믿고 청합니다. 시인은 ‘내가 당신을 앙망하기 때문’이라는(21) 고백적인 선포를 끝으로 알파벳에 맞춘 시행을 마무리합니다. 시인은 처음처럼 마지막에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우러러보며 의지했습니다(1-2). 그리고 마지막 시행(22)은 알파벳 ‘페’로 시작하는 ‘구속하소서’에 초점을 둡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이스라엘을 모든 환난에서 구속(속량)해주시기를 구합니다. 22절은 마지막 알파벳 ‘타브’ 시행 이후에 덧붙였기 때문에 후대의 예배 공동체가 개인적인 환난을 넘어 국가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첨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시인의 기도에는 간구와 탄원, 신뢰와 확신, 회개와 중보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채롭습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지금 그는 어느 때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절박합니다. 하지만 어떤 어려운 상황이든 주를 경외하고 가르침 받기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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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서론


고린도전서 서론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항상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대부분 성도의 믿음과 실천에 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 고린도전서는 신약의 그 어떤 서신보다 가장 실용적으로 조언한다. 다양한 문제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단호하겠지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모든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며 있다고 할지라고 단순하게 해결될 것입니다.

 

 

고린도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전후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고린도교회의 설립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 고린도를 주후 50년경에 방문했습니다. 그가 고린도에서 사역했던 것이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도착해서 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들 부부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할 때 로마를 떠나 온 사람들인데, 바울이 고린도에서 이들을 만나 동업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랍비 교육을 받으면서 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익혔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이 때부터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일하지 않고 복음 전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생겼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내려와 사역에 합류한 것입니다(사도행전 18:5). 실라와 디모데는 마게도냐에 있는 성도들의 헌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빌립보 교회에서 바울을 돕기 위한 헌금을 보내준 것으로 보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고린도 사역에 물질적으로 후원했고, 바울은 그들의 도움으로 말씀 사역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2 . 고린도에서의 사역

사도 바울은 핍박 받으면서도 고린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을 대적해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사도행전 18:9-10)에 따라 유대인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했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 지역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회당장 그리보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사도행전 18:8).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따랐더니 하나님이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에 성도가 생기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사도행전 18:11).

바울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이 그를 아가야의 총독인 갈리오 앞으로 끌고 가서 재판에 회부하려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자라는 죄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리오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않고 사람들을 재판 자리에서 쫓아냈습니다. 핍박은 끊이지 않았지만, 복음은 고린도 인근 지역에 꾸준히 퍼져 나갔습니다. 박해가 복음의 진전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편지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뿐 아니라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 지역에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고린도교회에 쓴 첫 번째 편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쓴 첫 번째 편지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이 고린도전서 5:9에 남아 있습니다(“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편지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5:9, 11을 통해 그것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바울은 첫 번째 편지에서 음행의 문제를 다루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4. 고린도 교회의 답장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편지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바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여러 가지를 질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7:1에 보면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질문한 주제에 대해 이제 답변하겠다는 뜻입니다.

 

5. 고린도 교회에 대한 소문을 들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편지를 받은 것과 비슷한 시기에, 그는 고린도교회에 대한 우려할 만한 소식을 듣습니다. 고린도전서 1:11에 나타난 것처럼 글로에의 집 사람들에게서 고린도 교회가 분쟁 중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심지어 음행이 있다는 소식도 듣는다(고전 5:1), 그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두 번째 편지에서 이 문제들을 다룹니다.

 

6. 고린도전서 기록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편지를 받고 고린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들은 후에 고린도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를 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고린도전서라고 부르는 편지입니다. 기록한 장소는 에베소에서 주후 53-55년에 썼을 것으로 보입니다.

 

7. 바울의 고린도 방문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신학적 위기가 고조되자, 바울은 고린도를 직접 방문합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4:21에서 예견했던 방문이었으며, 고린도후서 2:1에서 회고하는 방문입니다. 바울에게는 매우 근심스럽고 괴로운 방문이었습니다. 이 방문은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8. 세 번째 편지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은 그들을 심하게 나무라는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의 흔적은 고린도후서 2:2-4과 7:8에 남아 있습니다. 이 편지도 우리에게 전해 지지 않습니다.

 

9. 고린도후서 기록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를 방문한 후 다시 고린도로 가려고 길을 떠났다. 마게도냐에 이르러 고린도에서 오는 디도를 만난 바울은 주후 55년경에 마게도냐에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네 번째 편지를 쓰는데, 이것이 고린도후서입니다.

 

 

10. 고린도 지역

 

바울의 교회가 있었던 고린도는 어떤 곳인가? 고린도는 무역과 여행의 중심지였다. 겐그레아와 레기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고린도 해협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주요 동서교역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⑵ 경제

 

올림픽에 버금가는 이스트미아(Isthmia) 경기가 2년에 한번 이곳에서 개최된 것도 고린도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24의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는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개최되는 운동 경기를 염두에 두고 운동 선수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사업과 여행, 운동 경기 등의 이유로 고린도에 몰려들었습니다. 바울 당시 고린도 이상 인구는 약 20만 명이었다고 하며, 아덴보다 여덟 배 이상 큰 규모였다고 합니다.

 

⑶ 윤리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기 이전 옛 고린도는 성적으로 매우 유명했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코린티아제스타이’(고린도화 하다)라는 단어를 만들어 성적 부도덕을 고린도에 비유해 표현했습니다. 스트라보(Strabo)는 1000명의 매춘부가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신전의 매춘부와 종교적인 매춘 행위를 하는 것이 여신을 숭배하는 하나의 행위였다고도 합니다. 바울 당시는 어떠했습니까? 최근의 하자들은 고린도를 지나치게 문란한 도시로 과장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당대 헬라의 다른 항구도시들이나 무역의 중심지가 성적으로 문란 것, 또한 사실이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이런 사회 속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교회는 성적 부도덕의 영향을 받아 음행의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⑷ 종교

 

고린도는 종교적으로 혼탁한 곳이었다. 고린도가 내려다보는 언덕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많은 신전에서 포세이돈을 비롯한 다양한 우상들과 로마 황제를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안에서 이방 신전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가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11 . 고린도전서의 내용

 

고린도전서의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문안 인사(1:1-3)에 이어 하나님께 감사(1:4-9)하고, 1:10-421에서 교회 내의 분쟁과 지도력에 대해 다룹니다. 5장은 근친상간 문제를 다루고 이전 편지에 대한 오해를 수정하며, 6장은 신자 간의 소송 분제(6:1-11)와 성도가 창녀에게 가는 분제(6:12-20)를 다룬다. 7장은 고린도 교회가 질문한 결혼 및 그와

관련된 주제를 언급하며, 8:1-1 1:1 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음식에 관한 교훈을 줍니다. 11:2-16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문제 특히 여자가 머리를 가리는 문제를 논합니다. 11:17-34은 잘못된 성찬식을 바로잡고, 12:1~14:40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다루면서 사랑의 필요성과 영원성을 가르칩니다(13장). 15장에서 바울은 신자들의 부활을 다루면서 궁극적 승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16:1-11에서 헌금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16:12에서 아볼로의 방문을 언급한 후, 마지막 권면(16:13-18)과 문안 인사(16:19-24)로 편지를 끝맺습니다.

 

12. 고린도전서의 구조

 

1:1-3 서론 - 인사말

 

1:4-6:20 책망-죄에 대한 보고

1:4-4:21 교회의 분열

Ⅰ. 문안과 감사 (1:1-9)

 

Ⅱ. 분쟁문제 (1:10-4:21)

① 같은 마음으로 온전히 합하라 (1:10-17)

②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바울(1:18-31)

③ 성령의 지혜로 가르치는 바울(2:1-16)

④ 하나님의 동역자들 (3:1-9)

⑤ 지혜로운 건축자 (3:10-23)

⑥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4:1-5)

⑦ 만물의 찌끼같이 된 바울(4:6-13)

⑧ 영적인 아비 바울(4:14-21)

 

Ⅲ. 도덕 문제 (5:1-7:40)

① 음행하는 자를 쫓아 내라(5:1-13)

② 세상 법정에 소송하지 말라(6:1-8)

③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6:9-20)

④ 기본적인 결혼의 진리 (7:1-7)

⑤ 독신과 이혼에 관한 진리(7:8-24)

⑥ 미혼남녀의 결혼에 관한 진리(7:21-38)

⑦ 과부의 결혼에 대하여 (7:39-40)

 

Ⅳ. 우상의 제물에 대한 문제 (8:1-10:33)

①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유 (8:1-13)

② 모든 사람의 종이 된 바울 (9:1-27)

③ 우상숭배를 피하라(10:1-22)

④ 먹든지 마시든지 (10:23-11:1)

 

Ⅴ. 예배와 모임에 대한 문제 (11:1-35)

① 너울을 쓰는 유전에 대한 교훈 (11:1-16)

② 주의 만찬에 관한 교훈 (11:17-35)

 

Ⅳ.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12:1-14:40)

① 성령의 중심 사역 (12:1-3)

② 신령한 은사의 목적과 다양성(12:4-11)

③ 사랑의 진리 (13:1-13)

④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 (14:1-25)

⑤ 모든 것을 질서대로 하라(14:26-40)

 

Ⅴ. 부활문제 (15:1-58)

① 부활의 복음 (15:1-11)

② 부활의 첫 열매 (15:12-34)

③ 부활의 영광 (35-49)

④ 최후의 승리(50-58)

 

Ⅵ. 마지막 권면과 문안 (16:1-24)

① 성도를 위하는 연보 (16:1-4)

② 바울의 고린도 방문 계획 (16:5-12)

③ 마지막 권면과 문안 (16: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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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21-02)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결말

사사기 21장 13-25절


 

지난번 한 드라마의 내용이 주인공이 비극적으로 죽어가는 상황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드라마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주인공을 죽어서는 안 된다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슬프게 끝나야 할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끝난 경우를 보았습니다. 대부분 드라마의 결말은 행복하게 끝나길 원합니다. 모든 소설, 연극 그리고 영화들을 보면, 결말이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주인공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happy ending”과 비극적으로 끝납니다. 사사기의 결말은 비극적인 결실을 맺습니다. 우리의 삶이 행복한 결말로 맺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반복되는 우상숭배를 비롯해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기록한 사사기는 막을 내립니다. 사사기에 기록된 크고 작은 사건들과 죄악들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결과입니다. 사사 시대의 문제는 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강에 보았던 베냐민 지파에 대한 아내를 구하는 것도 인위적인 방법으로 구합니다. 이제 사사기의 결말을 보겠습니다.

 

더렵혀진 결혼 제도(13-18)

성숙한 성도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스스로 해결하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해결하려 합니다. 미숙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일들은 어떤 좋은 결과가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고민은 고민을 낳고 문제는 문제를 낳으면서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아있습니다.

 

13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14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인 중에서 살려둔 여자를 그들에게 주었으나 오히려 부족하므로 15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궐이 나게 하셨음이더라 16회중 장로들이 가로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꼬 17또 가로되 베냐민의 도망하여 면한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18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13-18)

 

모든 이스라엘이 베냐민 지파 기브아 사람들의 잘못한 것을 징벌하기 모였습니다.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베냐민 지파를 전멸시켜 버립니다. 남녀노소를 칼날로 다 죽이고 그 베냐민 성읍까지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들을 주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마음이 평정심을 찾아보니깐, 자신들의 행위가 지나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동족인 베냐민 지파들이 불쌍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온 회중과 베냐민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림몬 바위에 숨어 지내는 베냐민 자손 600명(20:47)에게 사람을 보내 평화를 선언합니다. 그 동안 베냐민 자손은 죽을까봐 두려워했겠지만, 이제 상황이 호전된 이상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기브아의 죄인을 내놓으라고 요구받았을 때는 이기적으로 거절했으나(20:13-14),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순순히 기회를 잡습니다. 이들의 이기심 때문에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마땅한 죗값을 받았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다 죽었을 수 있지만, 이 600명 속에 끼어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은 베냐민 자손에게 야베스 길르앗의 젊은 처녀 400명(12)을 화해의 선물처럼 주어서 아내로 삼게 합니다. 베냐민 자손들이야 고맙겠지만, 가족과 친척을 다 잃고 강제로 남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 야베스 길르앗의 여인들의 심정은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관심은 남은 200명의 베냐민 자손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데만 있었습니다. 15절은 6절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해 뉘우쳤다’로 시작하면서 18절까지 다시금 앞의 1-2, 6-7절의 내용을 소환합니다. 반복된 내용은 베냐민 지파의 멸족위기와 여자의 부족 문제입니다. 여기서 이를 반복하는 목적은 200명의 여자를 찾을 다른 방책(19-22)을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한편 15절의 이스라엘의 뉘우침은 6절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6절에서는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지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현했지만, 이번에는 여호와가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 ‘틈’을 만드셨다고 설명합니다. ‘틈’이란 ‘파열’, ‘터짐’을 뜻합니다. 이 설명은 6절과 같이 백성들의 생각인지, 저자의 해석인지 모호합니다. 저자의 해석이라면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열이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리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백성의 생각이라면 2절에서처럼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스라엘 중 한 지파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번에는 이스라엘 회중의 장로들이 개입합니다. 이미 베냐민 여자들이 전쟁에서 멸절했기 때문에(16), 야베스 길르앗의 여자들을 구해준 후에도 여전히 200명이 모자랍니다. 장로들 또한 자기들의 딸을 베냐민의 아내로 주지 못하는 실정에 개탄합니다. 그렇게 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18). 또한, 그들은 600명의 베냐민 자손이 그들에게 할당된 기업을 제대로 돌볼 수 있을지도 신경을 씁니다. 장로들의 염려는 얼핏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백성을 향한 관심과 긍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베냐민 여자들이 전쟁에서 멸절되었다.’라고 함으로써 자신들이 멸절의 장본인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저주받을까 봐 딸을 못 준다고 하면서, 다른 백성의 딸을 빼앗아 주려는 심보는 얼마나 고약합니까? 남겨진 베냐민 자손을 ‘베냐민의 도망자’로 부르는 것은 그들을 업신여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참조. 12:4). 백성들이나 지도자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상대 지파에 대한 무시와 비하의 태도입니다. 사사 시대의 장로들 역할은 여호수아 사후 생존했던 장로들이 이스라엘로 여호와를 섬기는 데 한몫을 감당한 것(2:7)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입다 당시 길르앗 장로들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 용사를 물색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권력을 홍정하여 입다를 길르앗의 머리로 고용했습니다(11:5).

본문의 장로들 또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 눈에 옳은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인간적인 머리를 짜내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방법을 찾아냅니다. 두 예를 통해 본 장로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이나 그들의 행위는 영적 지도자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우선순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참한 유괴사건(19-24)

왕이 없는 사람들의 행동은 자기 편할 때로 생각하고 행동함으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또 다른 비극을 낳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지도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도 되지도 않는 이상한 제안을 합니다. 본문에는 여호와의 절기에 이루어진 비참한 유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또 가로되 보라 벧엘 북편, 르보나 남편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길 동편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도다 하고 20베냐민 자손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21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그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22만일 그 아비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쟁론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찌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23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 중에서 자기들의 수효대로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니라 24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곳을 떠나 각각 그 지파, 그 가족에게로 돌아가되 곧 각각 그곳에서 나와서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더라(19-24)

 

이에 이스라엘 장로들은 부족한 200명의 여자를 얻어 줄 방법을 생각해 베냐민에게 가르쳐 줍니다. 베냐민 사람들의 범죄 함이 크니깐, 그들에게 화를 내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맹세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좋은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들의 방법은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잘못된 맹세를 했다면, 그 자리에서 고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한 지나친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장로들이 생각해낸 방법은 실로의 여자를 납치하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야베스 길르앗 해결책(7-11)보다 더 추악하여, 악행과 망령된 일의 표본을 만들어냅니다. 장로들은 실로의 명절을 여자 납치의 절호의 기회라 여겼습니다. 그들은 실로가 뻗엘의 북쪽, 르보나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가는 큰 길 동쪽이라며, 구체적인 지리를 알려줍니다.

이 실로에서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었습니다(19).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이나, 본문에서는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에서 절기 행사를 하는 것을 보면 장막절이거나 일반적인 포도 수확기의 축제(9:27)로 유추됩니다. 명절은 하나님의 구원을 묵상하고, 수확의 은혜에 감사하며, 서로 기쁨을 나누는 때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기를 노려 여자를 납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처사입니다.

장로들은 베냐민 자손에게 행할 일을 명령합니다(20). 먼저 실로에 가서 포도원에 숨어, 여자들이 춤을 추러나오면, 포도원에서 나와 각각 한 여자를 붙듭니다. ‘붙들다’의 의미는 사자가 몰래 숨어 있다가 먹잇감을 움켜쥐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시 10:9), 폭력과 강압성이 암시됩니다. 그 후 여자를 데리고 베냐민 땅으로 갑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장로들이 생각했던 것은 당시 이방인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주변에 이방인들은 자신들에게 여인들이 부족하면 ‘처녀 사냥’을 통하는 방법으로 여인들을 보충시키려 했습니다.

결국 베냐민의 강간죄를 벌하려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에게 다른 여인들을 납치하고, 강간하라고 명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이들의 행위는 자신의 딸과 레위인의 첩을 불량배에게 스스럼없이 내주려 했던 노인의 행동(19:24)과 똑같이 존중의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인은 기브아의 행위를 ‘망령된 일’(20:6,10)과 ‘악행’(20:12,13)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죄가 중하여, 죽여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20:13). 그러나 지금은 악행을 지시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딸들 가족이 일으킬 만한 시비에 대한 강구책까지 미리 마련해놓았습니다. 딸의 아버지나 형제가 이의를 제기하면, 장로들은 그들에게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는 맹세(18)를 이용하여 그들의 이의를 묵살할 계획입니다. 전쟁할 때, 그들이 베냐민에게 아내를 얻어주지 못했기에, 실로의 가족들은 딸을 보내는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 계획을 수용하면, 자진해서 딸을 베냐민에게 준 것이 아니므로 가족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따르지 않으면 딸을 베냐민에게 자진해서 준 것으로 여겨 그들에게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실로의 가족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장로들의 이기적인 계획에 연루되어,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베냐민 자손은 장로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릅니다. 죄인을 넘겨주어 악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어겼듯이(20:13-14) 죄악을 저지르는 데는 기꺼이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3절의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아”는 원문에서 보면 세 동사가 나와 이들이 여자를 아내로 삼은 과정을 보여준다. 먼저 그들은 자신들의 숫자에 맞게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여자를 강제로 붙들었습니다. ‘붙들다’(가잘)는 ‘(강제로) 찢다, 뜯어내다.’의 뜻으로서 21절의 ‘붙들다’와 마찬가지로 강제성과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베냐민 자손은 강제로 붙잡은 각 여자를 들어 올렸습니다. ‘붙들다’와 ‘들어올리다’는 그들이 여자들을 납치하고 강간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후 자기들 기업으로 돌아와,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정착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온전히 유지하게 되었으므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각각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이스라엘이 각자 자기 처소로 떠난 것을 상기시킵니다(2:6).

 

사사기의 결론(25)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눈에 옳은 대로만 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도 자신이 좋은 대로만 주장하고 진행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죄악만 확대 재생산하고 죄질을 심화시킬 뿐이었습니다. 사사기의 기록된 내용은 실패라는 결론을 냅니다. 그러나 그 실패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씀입니다.

 

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25)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은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다시금 상기시키며 마무리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의 부재는 왕정 시대를 내다보고 있긴 하지만, 왕정 시대를 환영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두지 않으면 그 자리에 내가 들어섭니다. 내 눈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은 ‘여호와의 눈에 악’입니다. 사사기가 주는 교훈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사기 기간 내내 되풀이 되는 타락상의 원인은 왕이 없었다고 합니다. 왕이 없었던 사사시대의 특징을 다시 한 번 밝히며 끝맺습니다. 그 왕은 지도자를 말하지만, 눈에 보이는 왕보다는 전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사니깐, 삶 자체가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이 사사 시대를 영화로 만든다면 “happy ending”이 아닌 비극적인 결말을 맺습니다.

 

사사기는 이러한 패역한 일이 일어난 이유를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로 정리합니다. 왕이 없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길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을 갖기도 하지만,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은 이런 적극적인 자유를 방종과 타락으로 바꾸어 살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제나 말씀의 법 없이 사는 생애의 비참함이 사사기가 주는 교훈입니다.


 

사사기를 마치면서 성도들에게 숙제를 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서전(自敍傳)’을 써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애를 지금까지만이 아닌 죽음까지 아니 하나님 앞에 서는 장면까지 기록해 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결말은 어떻게 마감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비극적인 결말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마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간 이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순종함으로 행복한 인생을 맞이하길 바랍니다. -사사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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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 길르앗을 진멸한 이스라엘

사사기 21장 1-12절


이 세상에서 쉽게 행동할 수 있겠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져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말(言語)입니다. 하긴 쉽지만, 그 결과는 대단히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좋은 의도로 하지만, 때로는 종종 오해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해서 해야 합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미스바에서 한 맹세 때문에, 그들은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두 가지 문제는, 하나는 달아난 600명(20:47)을 제외한 베냐민 지파의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써 베냐민 지파가 없어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스바에서 회의를 할 때 오지 않은 사람은 죽이기로 맹세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겠습니까?

 

벧엘로 올라간 이스라엘(1-5)

서양에는 ‘우유는 한 번 엎질러지면 담을 수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유만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말(言語)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은 뱉어내면 다시 담을 수 없는 것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맹세한 말이 나옵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1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2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통곡하여 3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하더니 4이튿날에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거기 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5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1-5)

 

사사시의 마지막 21장은 19-21장의 결말이자, 이스라엘과 베냐민 간 전쟁의 후속 이야기입니다. 내전 후 ‘베냐민 지파의 멸족’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언약 공동체가 붕괴 위기에 봉착했음을 인지합니다.

 

(1) 잘못된 맹세(1)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서 출전하면서 분노에 상응하는 맹세를 했습니다. 그들은 베냐민 사람에게 분노하면서, 그 감정에 상응하는 행동을 함께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들은 합당한 처벌과 복수의 기준을 생각하지 않고 감정에 따라 맹세했습니다. 그들의 감정과 맹세는 올무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와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베냐민 지파 중 남자 600명만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칼날을 피해 림몬 바위에서 넉 달째 거주하고 있었습니다(20:47).

그런데 문제는 미스바 총회(20:1)에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1)라고 맹세했던 것입니다. 이 맹세를 어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선언되었습니다(18). 결과적으로 베냐민 지파의 멸족 위기와 딸을 줄 주 없는 상황이 상충하게 되었습니다.

 

(2) 벧엘에서 새로운 맹세(2-5)

 

예기치 못한 난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벧엘에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 목소리 높여 통곡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3)라고 울면서 기도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2-3). 그들이 울고 있는 것은 베냐민 지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도 이렇게 당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만 생기면 벧엘에 올라가 울곤 합니다. 베냐민과의 싸움에서 두 번 패배했을 때도 벧엘에 올라가 울었습니다(20:23.26). 그때와 마찬가지로 본문의 이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원망의 눈물이었습니다. 원래 베냐민 지파를 치는 계획은 그들이 자기 눈에 옳다고 여겨 세운 계획이었고, 하나님을 졸라 허락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라고 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베냐민을 치라고 허락은 하셨으나(20:18,23,28),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라고 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도 처음에는 기브아의 불량배들만 죽이려 했으나, 베냐민이 거절하자, 분노에 차 자신들의 감정대로 베냐민 지파를 멸절한 것입니다(20:13-14).

베냐민의 아내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과의 결혼을 금하셨지(신 7:3-4), 동족 간의 결혼을 금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솔한 맹세가 그들을 자가당착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처럼 베냐민과의 전쟁에서 전멸당해, 한 지파가 없어진 잘못을 자기들이 다 저질러놓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기도에 응답한 결과로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가 없어졌다며, 모든 화살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또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면서도,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자기들 식대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제사를 드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튿날 일찍 일어나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4). ‘번제’는 속죄, 헌신, 순종의 목적으로 드리며(레 1:1-17), ‘화목제’는 ‘화목’과 ‘천교’를 상징합니다(레 3장). 그러므로 이 두 제사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어그러진 관계를 바로잡고, 헌신을 다짐하는 제사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깨닫지 못한 채, 종교적 의식에 치중하고 맙니다.

어쩌면 곁으로는 이런 목적을 앞세웠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답 없는 하나님께 응답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알맹이는 없고 형식에만 익숙한 이들의 신앙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참고 6:28).

한편, 이스라엘의 기대와 달리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나서서 난관을 헤쳐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기왕에 베냐민 지파의 멸족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겼으니, 하나님께서 그 일을 처리하시도록 계속 간구하며 기다리는 게 지혜로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현듯 미스바 총회 때, 그들이 한 다른 맹세를 떠올립니다(5). 그 내용은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고,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저주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맹세를 두 번째 해결책으로 삼을 작정이었습니다. 이번에 이스라엘 총회로 모인 것은 기브아의 악행이 출애굽 이후에 듣도 보도 못한 흉악한 범죄임을 인식하여, 그 악행을 함께 벌하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19:30). 그런데 이 목적을 알고도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 악행을 처벌하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반대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큰 맹세’를 했다고 나오는데(5), 이는 언약 공동체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포기한 자들을 마땅히 죽음, 특히 ‘진멸’로 다스려야 한다고 결정한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런 자들이 있는지 물색하여, 그들을 처리함으로써 베냐민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회개와 화목을 앞세우지만, 제사 직후에는 거리낌 없이 다른 형제를 죽일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또한, 그들이 죽이려는 대상을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로 표현하여(5), 자기들 계획을 마치 하나님의 계획인 것처럼 선언합니다.

 

야베스 길르앗을 진멸한 이스라엘(6-12)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가운데 종교적 열심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마음대로 행한 악행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런 파괴적이고 불법적인 행위가 없도록 늘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6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쳤도다 7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8또 가로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에 이르러 총회에 참예치 아니하였으니 9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거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10회중이 큰 용사 일만 이천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11너희의 행할 일은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할 것이니라 하였더니 12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거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인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자지 아니하여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이 실로 진으로 끌어 오니라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6-12)

 

이스라엘 백성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이전의 맹세를 점검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림몬 바위에 숨어 있는 600명의 베냐민 사람들이 베냐민 지파를 부활시킬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1)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 야베스 길르앗(6-9)

 

이스라엘 백성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이전의 맹세를 점검하기 시작합니다. 6절은 “이스라엘이 베냐민 자손에 대해 뉘우쳤다”로 시작하면서, 7절까지 앞의 1,3,5절의 내용을 반복합니다. 이런 반복은 내용상 매끄럽지 않지만, 이스라엘이 베냐민의 멸족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사안을 해결하는 데 절박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때 이스라엘의 뉘우침은 후회는 하지만 회개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생존한 베냐민 자손이 대를 잇지 못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베냐민 지파가 끊어지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뉘우침 전에 베냐민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무자비하게 여자와 아이와 가축까지 쓸어버린 행동에 대한 뉘우침이 먼저 우선해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남은 베냐민 남자들인 림몬 바위에 숨어 있는 600명의 베냐민 사람들이 베냐민 지파를 부활시킬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이 남은 사람들에게 아내를 제공한다면, 그 지파는 부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아내를 얻어줄 방법만 고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딸을 베냐민의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여호와께 맹세했기 때문입니다(1,7). 자신들의 경솔한 맹세에 발목이 잡힌 것입니다. 사사 입다가 조급하게 서원하여 자신의 딸을 희생하게 된 사건을 상기시킵니다(11:30,34-39).

두 경우 모두 감정에 치우쳐 이 서원이 무슨 의미이며 어떤 여파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입나다 이스라엘은 모두 경솔한 서원이나 맹세를 했으므로 이를 되돌리는 방도를 율법에서 찾거나 하나님께 여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늘 자기들이 방법을 강구하고 자기들이 결정합니다.

 

(2) 야베스 길르앗을 진멸한 이스라엘(10-12)

 

이때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가지 방책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미스바 총회에 모일 때 여호와 앞에 참석하지 않은 자들을 죽일 것이라 맹세하지 않았습니까?(5).

이제 그런 자들이 있는 지를 조사해서 나오기만 한다면 베냐민의 아내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그들을 죽인다고 맹세했으니, 그들을 죽이고 여자만을 남겨 베냐민에게 아내로 줄 계책인 것이다. 조사해보니 마침 야베스 길르앗에서 아무도 총회에 오지 않았음이 발견되었다. 야베스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있는 길르앗 산지의 북부로 추정된다. 총회에서 출석을 점검했을 때, 그들이 하나도 참석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이에 이스라엘 회중은 큰 용사 12,000명을 야베스 길르앗으로 보냅니다. 그들에게 그곳 주민과 부녀와 어린아이를 다 칼로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지난 번 베냐민 사건 때는 베냐민 지파 모두에게 그런 악행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설명할 기회를 주었습니다(20:12-13).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이 왜 참석하지 않았는지 말할 기회도 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야베스 길르앗의 모든 남자, 남자와 동침한 여자를 ‘진멸하여 바칠 것’을 명했습니다(11). 그렇게 되면 남자와 동침하지 않은 처녀를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특수한 진멸 방식은 이전에 광야 바알브올에서 음행 사건이 있었을 때 실행되었던 방식입니다(민 31:17-18). 그때는 미디안 사람들을 진멸했으나, 이번에는 동족을 진멸합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기브아의 죄에 무관심하고 거부를 표명한 데에 대한 처벌이 아니기 때문에, 맹세의 원래 취지에서 벗어납니다. 단지 자기들의 조급했던 맹세로 파생된 다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대체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도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려 했던 자들이었으나(20:48), 이제는 베냐민이 멸족하는 것을 막으려고 다른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 같지만, 실제 방식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셈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야베스 길르앗에서 젊은 처녀 400명을 얻는 데 성공합니다. 젊은 처녀들은 실로의 진영으로 끌려옵니다.

이때 성막이 있는 실로를 ‘가나안 땅’이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요단 동편(야베스 길르앗)에 대한 상대어로 요단 서편을 지칭하거나, 가나안 땅에 물든 이스라엘을 꼬집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딸을 베냐민 지파에 주지 않겠다고 한 서원을 어기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여인을 공급할 궁리를 합니다. 길르앗 야베스에서 한 사람도 미스바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만이천 명의 군인을 보내 맹세한 대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전멸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젊은 처녀 4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이렇게까지 베냐민 지파의 멸망을 염려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나누어 주신 기업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언약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모든 족속도 그런 결과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분노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성급한 맹세의 아픈 결과를 보며, 하나님 앞에 늘 진지한 자세로 살아가야 함을 되새겨 봅니다. 바른 결단을 위한 인내와 지혜로운 마음을 갖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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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20-03)


교만으로 몰락한 베냐민 지파

사사기 20장 29-48절


한 가지 일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 신선도가 떨어집니다. 그리고 의미없이 기계적으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역사가 오래된 교회는 타성에 젖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역에 신선함은 살아지고 사역의 기준이 ‘전례(前例)가 무엇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사역은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 구원’입니다. 전례를 따라 사역하면 결국 일하는 사람도 사역도 무의미해져 버립니다.

 

  • 본문은 승리의 약속을 받고 세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유인전법을 사용하여 기브아 성을 정복하고 베냐민 자손을 남자 600명만 남기고 모두 죽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전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 지역에 성읍을 돌아다니며 모든 성읍의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하는 진멸 전쟁을 수행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함정에 빠진 베냐민 지파(29-35)

엉터리같이 불의하게 사업해도 얼마든지 성공처럼 보이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대박을 노리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투자한 것, 이상으로 대박을 원하는 것은 토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냐민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격 없는 승리를 두 번이나 맛보았습니다. 자신들이 강해서 마땅히 누릴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29이스라엘이 기브아 주위에 군사를 매복하니라 30이스라엘 자손이 셋째 날에 베냐민 자손을 치러 올라가서 전과 같이 기브아에 맞서 전열을 갖추매 31베냐민 자손이 나와서 백성을 맞더니 꾀임에 빠져 성읍을 떠났더라 그들이 큰 길 곧 한쪽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이요 한쪽은 기브아의 들로 가는 길에서 백성을 쳐서 전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죽이기 시작하며 32베냐민 자손이 스스로 이르기를 이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패한다 하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르기를 우리가 도망하여 그들을 성읍에서 큰 길로 꾀어내자 하고 33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그들의 처소에서 일어나서 바알다말에서 전열을 갖추었고 이스라엘의 복병은 그 장소 곧 기브아 초장에서 쏟아져 나왔더라 34온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택한 사람 만 명이 기브아에 이르러 치매 싸움이 치열하나 베냐민 사람은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35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백 명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29-35)

 

이스라엘은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베냐민과의 전투(26-48)에서 두 번이나 패했습니다. 1차전도, 2차전도 패한 이스라엘이 비로소 전쟁의 승리가 자신들의 힘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패배의 원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의 약속을 힘입어 특별한 전략을 다시 세웁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행동합니다.

 

(1) 세 번째 전투에서 베냐민을 이기는 이스라엘(29-34)

 

하나님께 승리를 약속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전날과는 다른 전법을 구사합니다. 이전에는 전면전을 하여 성을 끼고 전투하는 베냐민에게 유리한 전법을 사용하였다면, 이번에는 양면작전인 ‘매복과 유인의 전법’을 사용합니다.

먼저, 군사 일부를 매복시킨 후 나머지 군사들은 전날처럼 전열을 맞추어 기브아로 갑니다. 이때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 성에서 나오는데, 본문은 베냐민 사람들이 성에서 나오도록 유인당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후에 37절에서 44절에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들은 성을 중심으로 싸우는 전법 대신 성에서 나와서 전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을 치기 시작하였고, 이전처럼 초반에 이스라엘 연합군을 몇몇을 죽이자 베냐민에는 이스라엘을 다시 승리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전략이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들은 베냐민을 성에서 끌어내기 위해서 패하는 척하며 도망하였던 것입니다. 베냐민의 기브아 성 밖으로 유인하여 큰 길로 나오게 하였고, 곧 도망하던 자들이 전열을 가다듬어 쫓아오는 베냐민과 맞섰습니다. 이때 매복해 있던 이스라엘 군대도 일어나서 베냐민과 싸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10,000명의 정예 부대를 기브아 성에 보내어 대다수가 빠져나가 수비에 취약해진 기브아 성을 정복하게 하였습니다. 양면 작전으로 베냐민이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지만, 베냐민이 이런 심각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투에서 베냐민이 이겼기 때문에 자신들이 패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날 전투는 이전 전투와는 양상이 크게 달랐습니다. 본문은 35절에서 여호와께서 이 날의 전투에서는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 지파를 치셨다고 말합니다. 즉, 이 날의 전투는 여호와께서 직접 참전하신 여호와의 전쟁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베냐민의 결과(35)

 

왜 성경은 베냐민과의 전쟁을 여호와의 전쟁으로 설명하겠습니까? 그 이유는 기브아의 악한 상황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소동과 고모라 같았기 때문에 이런 기브아는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베냐민 지파가 이들의 죄악을 감쌌기 때문에 기브아 주민과 똑같은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하고 하나님이 손수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전하시자 승승장구하던 베냐민은 하루아침에 26,000명 중 25,000명이 죽는 참극을 겪습니다.

 

연합군의 승리와 베냐민 지파의 몰락(37-48)

세상의 사업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경영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이 늘어났다고 성령께서 역사하셨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엉터리입니다. 목사가 능력의 종이며,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종이기 때문에 수가 늘어났다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말씀대로 충실히 설교하고 목회하면, 오히려 인기가 없고 수적으로 성장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36이에 베냐민 자손이 자기가 패한 것을 깨달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 기브아에 매복한 군사를 믿고 잠깐 베냐민 사람 앞을 피하매 37복병이 급히 나와 기브아로 돌격하고 나아가며 칼날로 온 성읍을 쳤음이더라 38처음에 이스라엘 사람과 복병 사이에 약속하기를 성읍에서 큰 연기가 치솟는 것으로 군호를 삼자 하고 39이스라엘 사람은 싸우다가 물러가고 베냐민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쳐죽이기를 시작하며 이르기를 이들이 틀림없이 처음 싸움 같이 우리에게 패한다 하다가 40연기 구름이 기둥 같이 성읍 가운데에서 치솟을 때에 베냐민 사람이 뒤를 돌아보매 온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았고 41이스라엘 사람은 돌아서는지라 베냐민 사람들이 화가 자기들에게 미친 것을 보고 심히 놀라 42이스라엘 사람 앞에서 몸을 돌려 광야 길로 향하였으나 군사가 급히 추격하며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 그 가운데에서 진멸하니라 43그들이 베냐민 사람을 에워싸고 기브아 앞 동쪽까지 추격하며 그 쉬는 곳에서 짓밟으매 44베냐민 중에서 엎드러진 자가 만 팔천 명이니 다 용사더라 45그들이 몸을 돌려 광야로 도망하였으나 림몬 바위에 이르는 큰 길에서 이스라엘이 또 오천 명을 이삭 줍듯 하고 또 급히 그 뒤를 따라 기돔에 이르러 또 이천 명을 죽였으니 46이 날에 베냐민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가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 명이니 다 용사였더라 47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에서 넉 달 동안을 지냈더라 48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36-48)

 

이번 전투에서도 자신의 승리와 이스라엘의 패배를 호언장담한 베냐민(32)은 이스라엘의 전술에 꼼짝없이 걸려들었습니다. 37절부터는 베냐민의 관점에서 셋째 날 전투를 다시 설명합니다. 매복 장르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림몬 바위에 도망간 부분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전투의 과정(36-46) 

 

35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찢었다고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는데 여기서는 베냐민 지파의 관점에서 그들이 어떻게 폐하였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이길 줄 알고 기브아 성을 나와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였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또, 베냐민 사람들이 성을 비운 사이에 이스라엘 군대는 지체하지 않고 기브아로 돌진하여 성을 정복하였습니다. 또, 성읍을 점령하면 연기를 점령의 신호로 삼기로 미리 약속하였습니다. ‘큰 연기가 일어난다’는 것은 일부러 연기를 피웠다기보다 점령하는 과정에서 도시의 일부분을 태울 때 생기는 연기를 의미합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기브아 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은 싸움하면서 점점 뒤로 후퇴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30여 명이 죽고 이스라엘 자손이 이전처럼 밀리자 베냐민 자손들은 자만했습니다. 자만심에 빠진 사이에 기부와 정복을 알리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베냐민 자손들도 이 연기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자손들이 이 연기의 의미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도망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베냐민을 공격하기 위해 뒤돌아섰고, 그때야 기브아 성읍을 빼앗기고 자신들이 덧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자손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려고 두 번이나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용하여 베냐민을 방심하게 하시고 결과적으로 유인 작전이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덫에 걸린 베냐민은 광야로 도망하였지만, 이들을 추적하는 이스라엘 군대와 또한 성읍을 점령한 군대가 성읍에서 나와 퇴로를 막으며 베냐민을 완전히 포위하였고, 이들은 쉬지 않고 도망하는 베냐민 자손을 추적하여 기부 앞에 있는 해 뜨는 곳까지 따라가서 그들을 쳤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맹렬한 추적으로 베냐민 자손이 엄청나게 죽었는데, 이렇게 추적을 당하여 죽는 자가 18,000명이나 되었습니다. 26,000명 중에서 8,000명만 남고 모두 죽은 것입니다. 하루 만에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아닌 이스라엘의 전술과 베냐민의 착각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마치, 여호수아에서 나오는 아이성 전투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베냐민이 꾀임에 빠졌다’라는 표현을 통해 여호와께서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의 두 버전으로 보여준 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전략적으로 이긴 것 같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싸워주신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2) 전쟁의 결과(45-48)

 

이 단락은 전쟁의 결과를 요약한 부분으로 베냐민의 남은 잔당들을 어떻게 소탕하였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림몬 바위로 도망가는 베냐민을 쫓아가서 5,000명을 죽였고 여기서 도망하여 기돔까지 도망하는 자들을 쫓아가 2,000명을 죽입니다(45). 8,000명 중에서 7,000명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을 끝까지 추적하여 죽였습니다. 결국 베냐민 자손 가운데 1,000명만을 남기고 모두 죽였습니다. 45절에서 5,000명을 ‘이삭 줍듯 하였다.’라는 표현을 하는데, 이것은 싸움할 힘도 능력도 남지 않은 도망한 자들을 손쉽게 죽였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싸울 힘도 없이도 도망하는 동족을 이렇게까지 죽이는 모습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살육을 통해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000명인데 나머지는 흩어지고 600명만 모여 광야로 도망하였습니다. 이곳은 유다 광야로 기브아의 동쪽에 있는 지역이며 여기에 림몬 바위가 있었고 이곳에 넉 달 동안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베냐민 지파 26,000명 중에서 최후로 살아남은 사람은 600명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지파의 남성들이 거의 사라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전쟁은 기브아 성읍을 정복하고 베냐민의 군사를 거의 몰살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베냐민 지경에 있는 성읍들을 전부 불태우고 짐승들과 사람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본문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죽이고 성업을 파괴하고 다닌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베냐민을 진멸하기 위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헬렘의 대상이 아닌 동족이므로 이들을 대상으로 여리고를 정복하듯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듯이 잔인하게 정복하는 모습은 이스라엘 자손이 지나치게 복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비록 베냐민의 악을 심판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사용하셨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못하고 자신의 동족에게 지나친 폭력과 학살을 자행함으로 또다시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비록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베냐민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이스라엘 자손을 사용하시기는 했지만, 이들이 여전히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가 한두 번 기적적인 체험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기가 힘들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고 자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연합군과 베냐민 지파 모두에게 패배를 주신 것입니다. 레위인이 대표하는 온 이스라엘이나 그 레위인의 첩을 죽인 베냐민 지파나 하나님 앞에서는 당장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한 힘을 민뜬 명분을 믿는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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