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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02-01)

 


뒤늦게 후회하는 이스라엘

사사기 2장 1-10절


사업하다가 실패하신 분을 심방 했습니다. 과거 많은 재산을 돌아보면서 그 때에 하나님께 봉사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혼잣말처럼 ‘지금까지 날려버린 물질 중에 10분의 1만이라도 교회에 봉사했다면 교회가 아름답게 건축되었을 텐데…….’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래서 ‘달아난 재물은 돌아오지 않으니깐 이제부터라고 충성하면 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을 망치고 난 후에는 아무리 후회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현재에 어떤 태도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지만, 이스라엘은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의 실패와 우상숭배에 대해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이전에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생존했을 때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겼으나 그들이 죽은 후 하나님을 저렸습니다.

 

보김 사건(1-5)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한 번 약속하신 것은 손해날지라도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함을 닮아서, 신실하게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점점 영적으로 타락되어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신실함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 점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실함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1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3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1-5)

 

여호수아가 죽은 후 지파별로 자신의 기업을 차지하는 전쟁을 치르게 된 이스라엘은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가나안 사람들의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과 더불어 살며 결혼과 같은 언약을 맺고 그들의 풍습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온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갑자기 등장합니다. 사사기에서는 ‘여호와의 사자’는 신적인 존재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전달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사사 시대에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직접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질책하고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서 그들이 이방 민족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리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선지자를 가리킬 수 있으나(대하 36:15-16; 학 1:13), 사사기에서 천사인 여호와의 사자(6:22; 13:16, 21)와 인간 선지자(6:8; 13:6)를 달리 칭하고 있기에, 여기 사사기에서는 하늘에서 보내신 전령, 천사로 보입니다. 사사기에서는 ‘하나님의 사자’가 종종 등장하여, 하나님의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것은 사사시대에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직접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의 정복 기록(1장) 직후, 여호와 사자의 등장은 느닷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이 가나안 정복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이 범한 불순종을 책망하는 내용이라서 1장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1:1-2:5 단락의 첫 부분에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1:2)이 있었고, 마지막 부분(2:1-3)에 유사한 상황이 등장하여 형식상으로도 짜임새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왔습니다. 길갈은 여리고의 동쪽 경계(수 4:19)이며,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 여러 중요한 일-장막을 치고 할례를 했던 일, 예배를 드리고 제비뽑기를 해서 땅을 분배하던 거룩하고 중요한 장소-들이 일어난 곳입니다. 길강에서 보김으로 올라오는데, 그 장소가 벧엘과 실로 사이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눈물’이라는 뜻의 이 지명은 4절의 이스라엘의 통곡을 예고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음을 상기시키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응답이며, 그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창 15:13-14; 46:4)을 실행하신 증거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또한 그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루신 것입니다(창 15:16, 18-21; 26:3; 28:15). 셋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영원히 깨뜨리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근본적으로는 시내산 언약(출 19:6)을 가리키지만, 구체적으로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쫓아내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가리킵니다(신 7:2; 수 1:2-4).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도 신실히 지키셨습니다(6).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반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이 값을 치르고 있음을 알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한 명령은 가나안 주민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것입니다(출 34:12; 신 7: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을 살려둔다는 뜻이므로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신 1:2)는 명령을 어기게 됩니다. 사사기 1장이 정복 보고에도 가나안 족속과 언약을 맞은 일과 그들을 살려 노예로 삼은 일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일로 기술된 바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금한 언약에는 이방인과의 결혼도 포함되었습니다(신 7:3), 이를 통해 이방인의 우상숭배가 이스라엘 가정에 스며들고 하나님을 배반하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출 34:16; 신 1:2-4).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결혼했고 자녀들을 이방 자녀와 결혼시키는 죄를 범했습니다(3:6; 12:9). 둘째 명령은 우상숭배의 유혹이 될 수 있는 제단들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출 34:13; 신 7:5). 제단을 하는 행위에는 그 주변의 주상, 목상, 조각상 등의 우상을 깨드리고 불사르는 일도 포함되었습니다(신 7:5). 제단이 남아 있으면, 이스라엘이 유혹을 받아 우상을 숭배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명령 또한 지키지 않았습니다(11-12,19). 두 가지 중요한 명령들을 상기시키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질책하십니다(2). 이 수사적 질문은 이스라엘의 죄를 재차 확증할 뿐 아니라 순종에 대한 분노, 상심, 안타까움과 그들을 심판해야 하는 고통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불순종하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신 바 있습니다(수 23:13).

결국, 사사기 1장에 기록된 각 지파의 정복 실패는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겨진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 옆구리에 가시가 되며,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신앙에 올무가 된 것도, 미리 알리셨습니다(민 33:55; 신 7:16; 수 23:13). 슬프게도, 이 예고가 이루어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족속과 우상은 사사 시대만 아니라 왕정 시대를 거쳐 나라가 멸망하기까지 이스라엘에게 거침돌과 고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가나안 족속과 언약 맺은 것과 우상 제단을 헐지 않은 것에 대한 질책합니다(2-3). 이러한 ‘명령을 어겼다’라는 것은 1장에서 거민들을 남겨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을 남겨두고 일을 시킨 것이 바로 그들과 언약을 맺은 행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력을 다해 가나안을 진멸할 때까지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정복의 성패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을 몰아냄으로써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안정과 발전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신 것은 완전한 정복을 통해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그의 거룩한 백성의 길을 지속하는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소리 높여 웁니다. 그래서 지명이 ‘울음’, ‘우는 자들’이라는 뜻의 ‘보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제사를 드립니다(5). 백성의 눈물과 제사는 불순종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곧바로 여호와를 잊고 맙니다(10).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한 회상(6-10)

너무 과거에 받았던 은혜를 집착하지 말고, 새롭게 주실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물질도 날아가 버린 물질을 가지고 후회하기보다는 장차 내려주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열심히 봉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은혜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것은 타락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6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9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6-10)

 

사사기를 다시 시작하듯 여호수아의 죽음과 그 이후 이스라엘의 영적 변화를 설명합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이 순하여 가나안 백성을 진멸하고 그 땅을 점령합니다(수 1-12장). 그 후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정복한 땅과 정복할 땅을 분배했습니다(수 13-19장). 백성들은 각각 분배받은 그들의 땅으로 가시 정착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의 지도에 따라 하나님을 섬김 있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함께 가나안에 정착한 장로들이 생존한 동안에는 이 장로들의 신앙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7; 수 24:31). 여호수아 및 그와 함께한 장로들은 광야에서 살아남아서 가나안 땅에 입성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광야를 지나며 여호와가 베푼 기적과 구원을 경험했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와 여리고 등의 성읍을 정복하면서 여호와가 행하신 모든 큰일을 목격하고 경험했습니다. 7절에서 여호수아 및 장로들의 생존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원동력처럼 기술한 것은 영적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공동체에 미치는 이상적인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이는 이후에 있을 큰 영서 쇠퇴(10)를 예상케 합니다.

여호수아는 처음에는 모세의 ‘수종자’로 소개되었는데(수 1:1), 110세에 죽을 때에는 모세처럼 “여호와의 종”이란 호칭으로 불립니다(8; 수 24:29). 이런 변화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모세를 따라 자신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했음을 증명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지도자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딤낫 세라)에 장사됩니다. 이곳은 여호수아가 원한 성읍이며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분배받은 땅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성읍을 재건하고 정착했습니다(수 19:50). 여호수아에 대한 기록은 그가 분배받은 기업을 잘 누렸다는 축복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었을 때 갈렙과 함께 여호수아가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110세까지 장수하고 가나안에서 기업을 얻고 평생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며 그분을 섬기다가 여호와의 종으로 삶을 마감한 것은 큰 축복이자 은혜입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그를 아는 장로들과 그 세대도 다 죽었습니다. 이제 그 뒤를 이은 새로운 이스라엘 세대에게는 그들을 영적으로 이끌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도 몰랐고, 여호와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도 몰랐습니다. 물론 이들이 하나님께서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 전혀 몰랐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알다’라는 동사가 정보의 입수만 아니라 ‘관계성’을 함축한 동사임을 고려하면, 이들 세대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으니 당연히 그가 하신 일을 직접 경험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그들이 전해 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그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갔으며, 그들의 현재 삶에 어떤 의미나 영향력으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암울한 변화는 가나안 정복 시대에서 사사 시대로의 전환을 나타냅니다.


여호수아의 시대를 마감합니다. 그리고 점점 영적인 암흑기로 접어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경험했던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들은 그래도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죽은 후에 자란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였습니다. 신앙교육의 실패와 이스라엘 불신앙의 의미합니다. 사사기 시대는 영적인 지도자가 없었고, 신실한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중심사상인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는 결과를 맺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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