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15-01)
준비된 일곱 대접 심판
요한계시록 15장 1-8절
폭풍 전야의 바다는 고요하고 잔잔합니다. 그러나 고요한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 엄청난 바람과 파도에 의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고요하다고 해서 계속적으로 고요할 것이라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역사는 무한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지막이 분명히 있습니다. 회개의 기회도 계속 있는 것이 아니라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되어 집니다.
15장은 일곱 대접 재앙을 소개하고, 모세가 홍해를 건넜을 때, 찬양했던 노래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와 대비하여 어린양의 노래를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대접 재앙의 시행을 위한 준비로 마무리됩니다.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는 두루마리(12-15장)의 절정입니다. 노래와 재앙은 연동교합 방식으로 결합되어 서로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듭니다.
일곱 대접 심판에 대한 예고(1)
현대로 올수록 사람들은 똑똑해지지만 감사할 줄 모릅니다. 감사하고 기뻐하는 일은 사라지고, 모이기만 하면 자기 가족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불평하고 살벌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린 것이 마땅합니다. 출애굽의 홍해사건을 경험한 자들이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듯이, 어린 양의 승리를 통해 넉넉히 이기게 하신 주님을 영화롭게 찬양합니다.
1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1)
본문은 일곱 대접(15:1-16:21)의 도입부입니다. ‘하늘에 크고 이상한 이적’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12:1의 ‘하늘의 큰 이적’과 12:3의 ‘하늘의 또 다른 이적’과 연결되는 이적입니다. 이곳에서 ‘이상한’은 ‘놀랄 만한’이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경외롭고 놀라운 사역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1절은 요한계시록에서 주요 단락들 사이의 전환은 선행하는 단락을 마무리하고, 다음 단락을 도입하는 문학적 장치인 ‘연동 교합’(interlocking) 기법을 사용합니다. ‘어린양의 노래’(15:2-4)는 두루마리(12:1-14:20)의 결론이자 동시에 대접 심판 시리즈(16장)의 서론입니다. 두루마리가 용의 삼위일체(666)에 대한 어린양의 승리로 인해 두 가지 추수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어린양의 노래’는 어린양의 승리를 극대화하며,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곡식 추수의 의미를 모세의 노래의 패턴을 따라 강조합니다.
재앙을 수행하는 일곱 천사에게 재앙이 들려 있습니다. ‘일곱’은 완전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이 얼마나 실수 없이 완벽하게 진행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다른 한편으로 어린양의 승리는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을 도입합니다(15:1,5-8). 포도 추수 환상은 대접 심판에서 구체적으로 실행됩니다.
어린양의 승리의 노래(2-4)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되는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대해야할 것은 요행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분은 않고서는 그분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심판의 때가 되면, 믿음을 방해하는 모든 악한 유혹을 이겨낸 사람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경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찬양하고 닮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2-4)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만국의 왕이십니다. 만국이 주님을 경배하는 것은 전능하신 능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은 두려운 이름인 동시에 찬양 받으실 영광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사만 사천의 신실한 증언으로 열방이 주께로 돌아옵니다. 이 사상은 두 증인의 이미지(11장)와 곡식 추수의 환상(14장)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출애굽의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1) 유리 바다 가에 선 ‘이기는 자들’(2)
십사만 사천이 짐승과 더불어 싸운 전투는 홍해를 건넌 시간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닥을 이스라엘이 건널 수 있도록 유리 바다처럼 만드셨습니다. 마치 창세기 1장에서 물로 뒤덮여 있던 땅을 성령이 바람으로 말려서 드러낸 것과 같습니다. 유리 바다는 솔로몬 성전에서 놋대야로 상징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추격군이 유리 바다에서 수몰되었습니다. 유리 바다는 전투가 벌어진 장소입니다. 불로 뒤섞여 있습니다.
짐승과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은 유리 바다에 서서 승리의 새 노래를 부립니다. ‘불이 섞인 유리(수정) 바다 같은 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이 수정 바다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보았던, 하나님의 발아래에 펼쳐진 청옥과 상응하고(참조 출애굽기 24:10), 성전의 놋 바다도 연상시킵니다. 승리한 어린양의 군대는 모세의 이스라엘과 같이 바닷가에 서서 노래를 부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악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바다’는 어린양이 짐승을 심판한 장소입니다. 성도들은 어린양의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어린양의 승리는 성도들의 승리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패배를 당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 보좌의 눈으로는 이겼습니다. 핍박과 타협의 유혹과 강요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견고하게 지켰습니다. 타협에 저항하며 승리를 쟁취하였습니다.
‘짐승을 이겨왔던 자들’(2)은 짐승의 지배와 생활 방식을 거절하고 순응하지 않은 신실한 하나님의 증인들입니다.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삶은 어린양과 같은 편이라는 증거입니다. 죽임을 당한 표는 어린양의 군대에 동참하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미 하나님의 거문고(하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 어린양의 노래(3-4)
승리한 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구원자의 예표인 모세가 불렀던 노래이며(출애굽기 15장), 노래의 주제는 어린양과 구분의 승리입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의 노래’가 이제는 ‘어린양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새로운 출애굽을 새로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쟁취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참조. 7:14;12:11).
그런데 문제는 어린양의 노래와 모세의 노래가 내용상으로 전혀 일치하지 않은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면 요한의 전문적인 성경 주해 솜씨가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요한은 구약을 언어의 무기고로만 활용하지 않습니다. 주해를 통해 창출된 의미를 해석에 활용합니다. 구약과 유대 문헌에서는 모세의 노래를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해석하여 의미를 도출하는 수많은 본보기들이 있습니다. 필로는 드보라의 노래(사사기 5:2-31)를 창의적으로 해석하여, 모압 왕 시스라로부터의 구출을 애굽 왕 바로로부터의 구출로 해석했습니다(필로의 성서고대사 32장). 이사야 12장도 새로운 출애굽을 표현할 때 모세의 노래를 시편 105편을 인유하여 재해석합니다. 어린양의 노래는 모세의 노래를 이사야 12장과 시편 105편을 활용하여 주해한 창의적인 작품입니다.
요한의 ‘모세의 노래’는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4)라고 어린양의 승리를 새로운 출애굽으로 찬양합니다. 그 결과는 다섯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로서 전능하심을 드러냈습니다. (2) 열방에 왕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3) 다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 우월성을 증명하셨습니다. (4)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5) 열방을 주께로 인도합니다. 모세의 노래가 가진 민족주의적인 특성을 요한은 열방을 품는 보편주의로 변혁합니다. 모든 열방이 한 분이신 참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 신성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까? 모세의 노래 핵심 구절인 출애굽기 15:11을 예레미야 10:6-7; 시편 86:8-10;98:1-2과 연결합니다. 구약에서 오랫동안 대망해온 열방의 귀의란 보편주의의 선율에 리듬을 맞추어 노래를 해석한 것입니다: 모든 열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하러 올 것입니다.
일곱 대접 심판 시리즈의 실행 준비(5-8)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는 다루는 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계시되었습니다. 열방이 주께 돌아오도록 심판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항상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 그 기회는 심판을 받기 전까지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의 최후는 심판입니다. 혹시 오늘 회개해야 할 일은 없습니까? 본문은 끝까지 하나님을 조롱하고 그리스도를 멸시하며 끝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5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6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5-8)
요한은 일곱 나팔 심판을 마지막 재앙으로 부릅니다. 세 가지 연속적인 심판의 마지막 시리즈이기에 마지막 재앙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마지막 재앙으로 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땅에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개시되었습니다. 열방이 주께 돌아오도록 인 심판과 나팔 심판이 시행되었습니다. 이들 심판은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 심판이었습니다. 삽화가 있는 심판 시리즈입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소개되는 심판은 전혀 다릅니다. 회개할 기회가 없습니다. 심판의 연기도 없습니다.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심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입니다. 5-8절에서 일곱 대접 심판이 실행될 준비를 합니다.
(1) 하늘 증거 장막(5)
요한은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 환상을 보았습니다. 11:19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려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전쟁 이후 행하시는 심판을 선언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15:5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 재앙이 소개합니다. ‘증거 장막’은 성전의 특정한 장소인 지성소를 가리킵니다(출애굽기 29:43). 성막을 ‘증거의 장막’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성막 그 자체나 그 안에 있는 법궤를 강조하기보다는 법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을 증언하는 것들을 가조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막은 하나님께서 하신 이들의 ‘증인’입니다.
(2) 일곱 대접의 전달(6-7)
대접 심판은 성전의 이미지 속에서 시작됩니다. 성전과 대접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성소의 분향단은 성도의 기도와 연결됩니다(5:8; 6:9-10; 8:2-5). 성도의 탄원기도가 하늘에 상달됩니다. 탄원기도의 내용은 우상숭배자들의 심판과 피의 신원입니다(요한계시록 6:9-10), 1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는 너무 문자적인 번역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마지막 재앙)에 가득 차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대접’의 이미지는 구약 두 군데에서 도출됩니다. 첫째는 대접들이 30회 언급된 성막이나 성전의 제단에서 섬기는 제사장의 봉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대접과 제단의 이러한 연결 관제는 대접 재앙들이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이것이 성도들의 기도(8:3-5)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과 5:8에서 성도의 기도들을 대변하는 ‘향이 가득한 금 대접’ 사이의 어구가 비슷합니다. 성도의 복수를 위한 기도(5:8; 6:9-11; 8:3-5)는 대접 심판으로 가득히 담아서 응답됩니다. 둘째는 이사야 51:17, 22입니다. 두 번이나 ‘(하나님의) 진노의 잔의 대접’을 언급합니다.
이전에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에 쏟아 부은 이 대접은 이제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인 바벨론에 부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대접은 죄인들을 징벌하기 위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합니다. 대접 심판은 하늘 증거 장막의 성소가 열리면서 시작합니다. 법궤와 시은소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이요, 세계의 축이고 하늘 문이 있는 곳입니다. 신적 자비가 아니라 신적 진노의 시작으로 기술됩니다. 요한은 특이하게 나팔 심판을 ‘일곱 재앙’으로 표현합니다. 요한계시록과 레위기 이외에는 이 용어를 쓴 사례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레위기 26:21의 인유입니다. ‘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 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우상숭배 하여 배교하는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의 경고입니다. 네 번 반복된 경고(26:18,21,24,28)를 통해 회개하지 않으면 재앙의 강도가 더 높아진다고 경고합니다.
(3)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충만한 성전(8)
일곱 대접 심판의 정도가 얼마나 극심한지는 8절이 잘 나타냅니다. 8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 영광과 권능의 표현입니다(이사야 6장; 에스겔 10장). 하나님 현존은 진노를 표현할 때에는 너무도 무시무시합니다. 어떤 천상의 존재도 서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실행하기로 결정하실 때는 하나님을 제지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참조, 다니엘 4:35). 따라서 중보기도의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성도를 박해한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성도가 옳았음을 입증하는 것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더 이상 순교자는 생길 수 없습니까? 돈과 권력으로 호령하며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짐승이 있고, 신이 된 시장이 있습니다. 소비주의 시대에 탐욕스러운 자본과 시장의 신에게 굽힘없이 저항해야 합니다. 시대의 짐승과 우상들과 싸우고 기도하며 저항하는 증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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