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19-01)
바벨론의 멸망과 혼인잔치
요한계시록 18장 21절-19장 10절
운동 경기는 마지막 끝날 때가지 긴장을 풀지 않고 경기에 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이겨놓은 경기도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삶을 야구에 비유하면 9회말 2아웃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2대 1로 지고 있더라도, 마지막 투구에서 말루 홈런을 쳐서 역전을 한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 상황까지 계속 지고 있던 상황이라도 마지막 한 순간에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운동선수라면 막판 뒤집기의 승리에 대한 기쁨이 어떤 느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힘센 천사가 큰 맷돌을 바다에 던집니다. 바벨론 멸망을 기념하는 상징적 행위예술입니다. 바벨론 심판의 최종 선고입니다. 최종 여성 가지 목록은 바벨론에서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늘에서는 승전가가 올려 나옵니다. 18:20의 지시가 시행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고,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배설됩니다. 신부가 준비하고 축하객이 초청됩니다. 요한은 너무 흥분하여 또 실수합니다.
바벨론을 위한 장송곡(18:21-24)
악한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을 아는 성도는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험하고 좁아서 걷기 힘들어도 생명과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과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의 길을 걸어가는 복된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통치자로서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항상 아름다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21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23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24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하더라(21-24)
20절에서 초상집에서 애곡하는 분위기가 잠시 중단됩니다. 하나님 백성은 이제 애가가 아닌 축가를 부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준비됩니다(19:1-10). 하나님의 준비를 21-24절에서 바벨론 심판이 가져오는 냉엄한 실재로 나열합니다.
(1) 힘쎈 천사와 큰 맷돌(21)
힘센 천사가 큰 맷돌을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바벨론은 존재감 자체가 완전히 지워집니다.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가 홍해에 수몰되는 장면,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사라지는 광경을 연상시킵니다. 바벨론은 거주민이 없는 유령 도시가 됩니다. 완전한 황폐함의 이미지를 여섯 번의 연속적인 ‘아니하고’를 통해 표현합니다(이사야 13:20-22).
(2) 바벨론이 상실한 여섯 가지(22-23a)
‘바벨론은 결코 다시 보이지 않는다’는 주제를 다섯 가지 ‘아니하다’로 구체적인 내용을 나열합니다. 바벨론에는 풍악 소리가 끊어졌습니다. 미술과 음악과 세공과 무역의 중심지로서 구가해온 바벨론의 명성은 끝이 났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도시 생활의 특색인 청사초롱 빛과 결혼하는 장면이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3) 바벨론이 황폐하게 된 이유(23b-24)
왜 음녀 바벨론은 이렇게 황무하게 되었습니까? 요한은 바벨론 멸망으로 인한 황무함의 원인 세 가지를 최종적으로 선고합니다. 첫째는 바벨론의 상인들은 정치적 축재자입니다. ‘왕족’(메기스탄)은 ‘높은 자’, ‘우두머리’입니다. 대부호가 되어서 자기 영화에 도취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교만합니다(이사야 23:9의 휘브리스). 정치를 이용하여 축재한 자들은 자신만만하고 거들먹거립니다. 결국은 신성 모독의 길을 걷습니다. 바벨론과 그 동맹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위대하다’고 부릅니다(11:8; 14:8; 16:19; 17:1,5,18; 18:2,10,16,19,21,23).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합당한 호칭이고,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둘째, 모든 열방을 미혹한 ‘복술’입니다. ‘복술’(파르마케이아)은 이사야 47:9과 나훔 3:4의 인유입니다. 복술은 마술이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여러 종류의 약품을 혼합하여 주술 행위를 하고 마시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18:3, 6에서 바벨론이 혼합된 포도주로 미혹하는 은유는 당시의 주술적 관습이나 행위를 발전시킨 표현입니다. 로마 황실과 귀족에서 연회를 할 때 마술을 행하였습니다. ‘미혹’은 음행, 즉 우상숭배와 연결됩니다. 이세벨은 음행과 복술로 이스라엘을 미혹했습니다(열왕기하 9:22). 셋째, 바벨론의 번영 배후에는 하나님 백성과 사회적 희생자들의 피가 있습니다. 피는 온갖 종류의 종교적 정체적 핍박과 경제적 착취를 상징합니다. 성중에서 피가 발견되었습니다(유레데). ‘발견되다’는 바벨론이 ‘결코 보이지 않는다’를 염두에 둔 언어유희입니다. 바벨론이 번성할 때는 약자와 희생자들의 피가 흥건했다는 표현입니다. 경제활동과 사교 행위는 본성상 정치나 종교와는 무관하게 중립적이라고 생각한 독자들은 바벨론 멸망을 관찰하면서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밑바닥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 전형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각입니다. 바벨론은 인간을 향하여 악독한 폭력을 자행하던 곳인 동시에 소수 특권층인 왕들과 거상들이 축재를 할 수 있었던 곳입니다. 정치권력과 경제 번영을 위해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키는 체제는 바벨론과 함께 멸망을 당하는 길로 걸어갑니다. 부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상의 할렐루야 공연(19:1-8)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할 때, 보좌에서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모든 자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편 115:13). 성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찬양하며,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충만히 받아 누려야 합니다.
1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6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1-8)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입니다. 18:20에 ‘성도들아 즐거워하라’는 권면에 대한 하늘 성도들의 응답입니다. 1-6절의 사중적인 할렐루야는 할렐 시편들(시편 113-118)을 인유합니다. 이들 시편들은 출애굽 사건을 최고조로 조명합니다. 특히 랍비 문헌은 할렐 시편과 사악한 자의 최후 파멸을 결부시킵니다.
(1) 첫 번째 할렐루야 : 허다한 무리의 찬양(1-3)
무엇을 찬양합니까? 첫째, 의로운 심판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탈리오 원칙은 신적 정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피로 땅을 황폐하게 한 자는 황폐해집니다. 둘째는 바벨론 멸망으로 인해 찬양합니다. 연기가 올라가는 장면은 바벨론 멸망을 상징합니다(14:11).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더불어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표현합니다(8:4). 셋째, 아멘 할렐루야는 신적 비준을 뜻한다. 지금은 찬양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들이 찬양할 때입니다. 바벨론이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배설되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넷째, ‘주가 통치하신다.’ 구약에서 대적의 심판은 하나님 왕권 확립의 신호입니다(시편 93:1; 96:10; 97:1; 역대상 16:31; 이사야 52:7; 스가랴 14:9).
이사야의 복음의 내용은 ‘주가 다스리신다’, 즉 하나님 나라입니다(이사야 40:9; 52:7; 61:1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잔치 이미지로 표현하셨습니다. 이제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준비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설립되는 마지막 절차입니다. 잔치는 그 백성을 불러 모으는 자리입니다. 어린양의 신부는 스스로 혼인 예복을 준비해 왔습니다. 음녀 바벨론에 저항하며 신실한 중언을 하였습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인데 성도의 ‘옳은 행실’(디카이오마타)을 가리킵니다.
7절에서는 신부가 옷을 준비해왔습니다. 8절에서는 신부의 옷이 주어집니다. 모순입니까? 아닙니다. 동전의 양면입니다. 구원은 ‘주어지는’ 수동성과 우리가 ‘이루어가는’ 능동성의 측면이 모두 있습니다. 그래서 번역자는 이 양면의 긴장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동사 ‘주어지다’(에도데)를 ‘허락하다’, ‘승인하다’로 번역합니다. 어린양이 준비한 옷을 입도록 허락하십니다. 신부의 옷은 제사장의 옷입니다. 음녀 바벨론의 복장(18:16)과 대조됩니다.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입는 옷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9-10)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성도들을 초대하시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사치스러운 옷을 입던 바벨론은 심판을 받아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지만, 고난의 옷을 입어야 했던 성도들은 어린 양의 신부가 되어 영광스러운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아름답고 거룩한 신부가 될 준비를 해야 합니다.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9-10)
천사가 요한에게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전하며 기록하라고 명했습니다.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음녀들과 대조적으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다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영생을 누리는 복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1) 잔치에 초대받은 자의 복(9)
천사의 선언입니다. 가장 본질적이고 은혜로운 복입니다. 일곱 우레 심판을 기록하지 말라던 천사는 이 축복 선언을 기록하라고 합니다. 요한은 또 실수를 범합니다.
분위기가 고조되어 홍분하면 실수합니다. 천사는 함께 섬기는 종이고 함께 예배하는 동역자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천사를 숭배하려고 합니다. 오늘날도 종인 메신저를 수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풍조가 교회에 팽배합니다. 바벨론 멸망을 두고 서로 다른 음성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나옵니다. 애곡하는 소리와 승리의 함성입니다. 18-19장의 특징입니다. 독자들이 어떤 쪽에 마음을 들 것인지 선택하기를 요구합니다. 현재 제국적 체제에 부역해왔던 독자들은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교회 내부에는 여전히 이세벨과 발람의 목소리가 권력자와 경제적 강자들을 통해 강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계시록의 끝까지 결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지속적으로 울려 나오는데, 이는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목소리입니다. ‘부정한’ 것이 여전히 새 예루살렘 도성의 문에 잠복하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의 역사를 주의 깊게 상고하고, 국제적인 경제 ‘질서’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국제 무역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까지 중립적인지를 평가해보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2) 요한의 천사 경배와 천사의 교정(10)
바벨론과 더불어 왕들과 권력자들이 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부와 지위와 권세를 얻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권력이 대다수의 자원을 착취하고 고갈시켜나간, 하나의 문화적인 형태를 띤 난잡한 성행위입니다(a cultural promiscuity).
정치학이나 경제학은 복음에 비추어서 해석하기가 불가능하며, 그들 자체의 법칙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가설을 계시록은 장려하지 않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구속이 필요 없다고 수상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계시록에서 어린양의 목음을 신실하게 증언한다는 기준은 신조의 고백이나 교회 생활이 아닌 바벨론에 대한 저항이 그 판단 기준입니다.
새 노래의 기백을 회복하여 제국의 이야기와 싸워 이길 전투력을 높여야 합니다. 피상적인 종교성 제외에서 벗어나 예배와 저항으로 충만한 선교적 기세를 축적하고 발휘해야 합니다. 담보된 승리 속에서 소망의 인내로 할렐루야를 구현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린양은 승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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