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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5-01)


 의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잠언 15장 1-18절


말은 곧 그 사람 자신이고, 예배는 그의 신앙 자체이며, 행복에 관한 생각은 그의 가치관을 대변합니다. 만일 여기에서 진정성을 찾아볼 수 없다면 말도, 예배도, 행복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에서 그 사람의 성품과 가치관, 본성이 집약되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음 항목을 통해 우리의 진정성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의인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며 아버지의 훈계를 따르고 여호와 경외함으로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위에 덕을 끼치는 자입니다. 반면, 우매한 악인은 말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아버지의 교훈을 멸시하고 분을 쉽게 내는 미련한 길을 걷는 자입니다.

 

온화한 말과 과격한 말(1-4)

말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로 말을 잘 다루고 잘 듣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언변이 유창해도 그 말에 진정성을 담지 못하면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힘듭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따뜻한 말은 생명나무와 같습니다.

1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2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3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4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1-4)

1절은 나의 말이 상대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오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나의 부드러운 대답은 상대방의 분노조차 내쫓지만, 고통과 모욕이 담긴 말은 상대방의 화를 끓어오르게 합니다.

1절과 수미일치를 이루는 4절은 나의 말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언급합니다. 여기서 ‘온순한 혀’는 ‘치료의 혀’라는 뜻이고 ‘폐역한 혀’는 ‘속임의 혀’, ‘사악함의 혀’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말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생명나무와 같지만 사악한 말은 영혼을 깨부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1, 4절을 2, 3절과 연결해서 볼 때, 심한 말과 속임의 말로 남에게 고통을 주는 자는 미련한 자며 악한 자입니다. 정직한 말을 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며 부드럽게 말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며 선인이고, 이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말을 언제 어디서나 다 감찰하십니다. 그만큼 언어생활은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언어가 나와 상대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신중하게 생각하여, 일상의 말이나 행동에서 늘 여호와 경외를 근본으로 온화함, 신실함, 정직함이 진심으로 배어 나오도록 애써야 합니다.

 

훈계를 따르는 지혜자와 거부하는 우매자(5-12)

훈계를 따르는 어부가 지혜의 유무를 결정합니다. 벌써 여러 번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그만큼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과 타인으로부터 겸허하게 권면과 책망을 수용하여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자가 지혜롭습니다. 실수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 더 온전해지는 것이 지혜입니다.

5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6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7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8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9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10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11스올과 아바돈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리요 12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5-12)

5-12절에서는 지혜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우매자가 각각 ‘미련한 자’와 ‘거만한 자’로 5절과 12절에 소개되어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5절에서 슬기로운 자는 지혜로운 아들로서, 앞서 10:1; 12:1; 13:1; 15:10에서 언급되었듯이 아버지의 훈계를 따르며 그의 책망을 듣고 삶을 고치는 자입니다. 반면, 우매자는 삶의 경험과 지혜에서 오는 아버지의 훈계를 하찮게 여기며 따르기를 거부합니다.

6-7절에서 지혜자는 아버지의 훈계를 받아 그 지식을 마음에 쌓으며(2:1; 9:9; 10:14; 13:1), 그 입술로 지식을 널리 전파하는 자로 설명됩니다. 의인은 지식만 얻는 자가(5) 아니라 집에 보물도 쌓아 이웃에게 나눠주는 자입니다(6). 반면, 악인의 불의하게 모은 재물은 그와 그의 주변 사람에게 불안과 고통을 주고(6), 궁극적으로는 파국으로 치닫게 만듭니다(10:1-5). 그의 마음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식 또한 없기에 미련하고, 기본 바탕이 견고하지 않으며 올바르지 않습니다(7). 그러므로 믿을 수 없는 악인의 말은 결국 공허하게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한편, 8-9절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과 기뻐하시는 것을 악인과 의인의 대조되는 예배 생활과 삶을 통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행악자의 길을 가면서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절대로 받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자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의 일상 모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언행과 공의를 따라 사는 모습이 일상에 지속하여 나타날 때 하나님이 기도와 예배를 받으시며, 그러한 자가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10-12절의 금언들은 하나님이 바른길을 저버린 자와 책망받기 싫어하는 자를 엄히 징계하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0절을 5절과 연결해서 볼 때,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에 대한 책망과 징계를 받는 것을 싫어하는 자는 곧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미련한 자로서 필연적으로 죽음의 심판을 맞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은 사람이 볼 수도 없고 근접할 수 없는 곳인 스올과 아바돈 즉, 죽음의 영역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드러난다는 점을 밝힙니다. 3절에서와같이 감찰하시는 여호와 앞에서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 사람의 마음과 행위뿐만이 아니라 숨겨 있는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는 보고 아십니다(시 139:1-4, 7-8; 눅 12:2). 그러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고 나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교훈을 받으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거만한 자는 책망받기를 싫어하여,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지혜자들을 피하는 우매한 자입니다(12).

 

즐거운 마음과 근심의 마음(13-18)

지혜의 길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선순환의 질서를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악한 세력의 반대도 있고, 또 의미 있는 역사는 시간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변수도 있지만, 궁극에는 즐거움과 기쁨과 보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질서를 거스르면 눈앞에의 성공에도 마음에는 근심과 불안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분을 내고 미워하고 번뇌하게 됩니다.

13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14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15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16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7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8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13-18)

13-18절은 내면의 즐거움과 근심을 대조적으로 묘사한 금언이 주를 이릅니다.

13, 14절은 원문에서 ‘마음’이라는 단어가 각 절의 첫 단어로 등장하여 반복됨으로써 지혜자와 우매자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금언에서는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지혜자의 삶이라고 제안합니다. 13절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즐거움이 밖으로 드러나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하지만, 마음에 근심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심령’(영혼)을 상하게 한다고 지적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지혜자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 하더라도 바른 마음을 갖고 즐거워하는 것이 영육 간에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웁니다.

14절의 금언은 명철한 자는 마음에서부터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여 찾고 구하나 미련한 자는 입으로 미련한 것을 즐길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즐기다’는 원래 ‘목양하다’라는 의미로서, 미련한 자가 자신의 마음뿐 아니라 입으로도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그런 어리석음을 추구하여 더욱더 미련한 자의 삶을 키우게 됨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우매자의 모습은 지혜자가 마음을 잘 다스려 점점 더 지혜로워지는 모습과 상반됩니다.

15절의 ‘고난받는 자’는 16-17절과 연결하여 볼 때 ‘가난한 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15절에서는 가난한 자가 험악한 현실 속에서 어려움과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음을 묘사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삶의 현장이 가난과 고통 속에 있음을 드러내 줍니다. 그러나 마음이 즐거울 때는 어려운 환경이 닥쳐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내적 안정과 평안을 소유하게 되어 날마다 잔치하듯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됩니다. 특히 15절은 13-14절과 16-17절의 중심에 등장하고 마음과 ‘즐거운(좋은)’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두 단락을 의미상 서로 연결해줍니다.

16-17절에는 ‘~하는 것이 ~보다 낫다(좋다)’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16절에서 ‘가난한 자’의 모습은 15절의 고난 받는 자와 연결성을 가지며, ‘부한 자의 마음과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비록 가난하여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이 재물이 많아 다투고 시기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호와 경외의 가치는 삶에 질적인 기쁨과 풍성함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지혜를 소유하는 것이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습니다. 17절은 15절처럼 잔치와 먹고 마시는 장면을 예로 들었으며, 이번에는 두 종류의 식사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비록 가난하여 채소를 먹을 수밖에 없어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잔칫상에 차려진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싸우는 것보다 낫습니다.

17절도 16절과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자의 삶이 물질의 소유나 그 풍부함에 있지 않음을 교훈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곧 여호와를 경외하며 사는 지혜자의 삶입니다.

18절은 다시 1절의 ’분노’와 연결됩니다. 1절에서는 유순한 대답이 분노를 내쫓는다고 설명하였고, 18절에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쉽게 표출하면 싸움만 커질 뿐 화평을 가져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14:17; 29). 즉, 화평한 말을 할 줄 알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강한 절제력을 실천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말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관계에서, 행복은 가족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또한, 그 어느 것 하나에서도 진심이 빠져선 안 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가장 삐걱거리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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