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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0-02)

 


살아있어 능력 있는 복음

사도행전 20장 13-27절


 

엣날에 신문을 받아보면 많은 사람이 먼저 보는 것이 ‘오늘의 운세’였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와 또 어떤 방향으로 나갈까 하는 궁금한 의문들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확실한 미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다 죽습니다.’ 그리고 때문에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관심은 어떻게 이 세상을 편하고 안락하고 멋있게 그리고 잘 살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삶은 그런 삶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겠습니까?

 

  • 본문에는 사도 바울은 오순절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여행을 재촉합니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석별의 정을 나눕니다. 장로들은 에베소에서의 사역과 위험이 기다리는 앞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명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별을 고합니다.

 

에베소에서의 목회를 회고하는 바울(17-21)

사명자로서 일생일대의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인입니다. 증인이 입을 다물고 있거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죄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듣지 못해 죽어 가는 사람이 이곳저곳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현장에 보냄을 받은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17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17-21)

 

에베소에 가면 예상치 않은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배가 출항하기까지 남은 시간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권면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17). 이를 위해 바울은 동역자 중 한 명을 에베소에 보냅니다. 장로들의 주된 역할은 교회를 목양하고 진리에 따라 성도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시아 지역에 도착한 첫날부터 어떤 태도로 목회했는지를 장로들에게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이런 태도를 설교의 시작(18-21)과 마지막(31-35)에 배치함으로써 장로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모본으로 삼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9절에서 종으로서 주를 섬긴 것을 강조합니다. 종으로서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입니다(참조. 눅 22:26-27). 바울은 종으로서 복음을 증언하는 일(행 20:24)과 동료들의 필요를 채우는 섬김의 일(행 20:34)을 하였습니다. 섬기는 삶은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곧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견디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시험으로 생긴 시련을 겪으면서도 처음부터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습니다(행 13:50; 14:2–7,19; 17:5-9,13; 18:6,12-17; 19:9; 20:3).

 

바울이 헌신적으로 전한 메시지는 교회에 ‘유익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고, 다가올 심판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측면에서 복음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기 때문에, 즉 거룩하지 않은 세상에서 거룩한 인생을 살도록 돕기 때문에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복음이 이처럼 유익한 것이므로 바울은 침묵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장로들이 복음의 진리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복음의 진리를 희석시킬 위험성이 있었습니다(참조, 고전 2:17: 4:2-5: 4:16).

21절은 20절과 평행을 이룹니다. 바울이 20절에서 공개적인 장소와 가정에서 물러서지 않고 담대히 전하고 가르친 ‘유익한 것’은 21절에서 ‘회개’와 ‘믿음’으로 표현됩니다. 말하자면, 회개와 믿음은 바울이 20절에서 말한 ‘유익한 것’을 요약하는 내용입니다. 회개는 방향의 전환, 즉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므로, 회개에는 떠나야 할 대상이 있으며 돌아가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회개(행 17:30:26:18, 20)와 믿음(행 11:17; 14:23; 16:31; 20:21; 24:24; 갈 2:16; 3:26; 빌 1:29)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행 2:38; 3:19; 14:15; 17:30-31). 바울은 회개를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개역개정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대상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밝힙니다. 회개는 의존하던 것에서 돌아서서 예수께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인 방향(우상: 행 14:15; 17:30-31)에서 돌아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습니다(행 13:38-41; 16:31; 17:2-3).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향해 돌아와야(return) 하고 이방인들은 그들이 섬기던 신들에서 참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야 합니다(turn). 이처럼 회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필요한 메시지로서(참조, 롬 3:19-4:25; 10:8-13), 바울은 성도들이 모인 가정과 믿지 않는 자들이 모이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회개와 믿음을 전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곧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복음이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라고 이들을 가르치려면,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견디는 것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외의 것이 유익한 줄 알고 그런 것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언제나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유익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일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또한 성도들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으로부터 계속해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와 믿음은 신자들에게도 불변의 명령입니다(참조, 롬 2:4; 고후 7:9-10; 12:21: 딤후 2:25-26).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언제나 진정으로 유익한 것을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미래를 하나님의 말씀에 맡겨진 바울(22-27)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생을 즐기며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오직 성도의 길을 걸어가라고 가르쳐 줍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에 충성하여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죽기까지 충성한 사도 바울의 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22-27)

 

사도 바울은 거리낌 없이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복음에 유익한 것이라면 어디에 있든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복음 증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울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 사명이었기에 결코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1) 예루살렘에 있게 될 바울(22-24)

 

바울은 성령이 인도하시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다(21:4, 11). ‘매다’, ‘사로잡다’, ‘묶다’ 등의 뜻인 ‘데오(δεω)’의 수동태를 사용해서 자신의 계획과 뜻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임을 표현합니다. 아울러 완료형(데데메노스,δεδεμενος)을 사용하여 성령의 뜻이 이미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고 말합니다(22b). 투옥되고 환난을 겪게 되는 것(23)은 분명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자신의 목숨이 아닙니다. 운동장의 육상 선수처럼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코스를 완주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고난이 있다고 하여 경주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끝내 로마까지 완주할 것을 결심합니다(19:21). 자신이 이 사명을 예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사명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고 이 사명을 마치는 것이 자신의 일임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께 소속된 육상 선수와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 곧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를 통해 죄를 용서받게 되고 새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은 참 은혜이며,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인생이란, 내 계획을 단순히 성령이 도와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거나 난관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는 신자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조바심을 내며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코스를 완주할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2) 과거 사역에 대한 확신(25-27)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그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것으로 요약됩니다(행 19:8; 28:23,31). 복음이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식입니다(사 52:7).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곧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목회에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는 표현은 에베소에서 영적으로 (영원히)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에스겔 3:17-21에 있는 파수꾼과 같이 생각합니다. 만일 백성에게 경고하지 않아서 악인이 ‘죄악 중에서’ 죽게 되면, 선지자는 악인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겔 3:18). 그러나 파수꾼이 악한 자들에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악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19).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다가을 심판의 위험을 알려야 하는 영적인 파수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뜻(계획)을 물러서지 않고 전했습니다(27). 만일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심판을 받는 운명에 처한다면, 그것은 바울의 책임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 즉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을 신실하게 수행했음을 확신합니다. 파수꾼의 역할은 하나님 나라(25), 즉 하나님이 통치하다는 소식(=복음)을 물러서지 않고(27)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식만이 개인과 사회의 유일한 소망임을 담대히 전하지 않는 교회와 복음의 일꾼들하거나 그런 것을 열심히 가르치는 사람들이 받을 책에게 하나님은 책임을 물으십니다. 복음 아닌 것에 의존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복음 증거자는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자기 인생에 대한 진지한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바울 사도로부터 이러한 확신과 각오를 본받아야 합니다. 험한 세상에서 열매 맺는 인생이 되기 위해 일사각오의 믿음으로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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