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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9-02)

 


바른 신앙을 회복시킨 하나님

사도행전 19장 13-22절


 

유명한 명품일수록 가짜(짝퉁)가 많습니다. 위대한 인물일수록 거짓으로 흉내 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가짜가 진짜의 진정성을 헤치기도 합니다. 복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가짜 신앙이 오늘날도 독버섯처럼 곳곳에 자라고 있습니다. 그 가짜는 진리를 훼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짓 신앙으로부터 진정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능력을 행하시자, 마술사의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바울과 예수의 이름을 빙자해 악귀를 쫓아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악귀 들린 사람에게 봉변을 당합니다. 이 사건 때문에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계획을 세우고 동역자들을 먼저 마게도냐로 보냅니다.

 

예수를 빙자한 마술사들(13-16)

예수님의 이름은 마법으로 사용되는 이름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되는 이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만이 그 능력을 온전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만 빌려온 거짓 사역자를 거짓 아비인 마귀가 먼저 알아볼 것입니다. 거짓 신앙은 결국 벌거벗겨져 적나라한 불신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13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13-16)

 

에베소 사역은 말씀 사역과 더불어 축사의 영역에서도 놀라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물건을 가져다가 병자의 몸에 얹기만 해도 치유가 일어나고 악귀가 떠나가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축사 사역은 또 다른 사역으로 인도했습니다. 바울과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사 사역을 시험 삼아 흉내를 내려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에 에베소는 교통의 중심지답게 헬라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로 온갖 종교 장사꾼, 사기꾼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역사를 오용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1)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사람들(13)

 

이제는 바울의 사역은 전도와 논쟁 같은 ‘말씀의 사역’뿐 아니라 ‘능력의 사역’을 포함했습니다. 바울의 능력은 하나님의 수단일 뿐입니다. 이곳에서 병든 자들이 낳았고, 심지어는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병든 사람들이 낳았고 악귀는 떠났습니다(9:12). 이 일들은 소문이 나고, 에베소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2) 거짓 스게와 아들들(14-16)

 

바울의 치유 사역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역을 보면서 에베소에게 종교적 마술하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중 유대인 순회 ‘마술사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방 종교와 마술에 심취한 유대인들인 듯합니다. 이들은 바울의 축사 사역을 모방하려고 악한 영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시험 삼사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문처럼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명한다”라며,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명령했습니다. 바울과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했지만, 웃지 못할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 중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그런 일을 시도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어야 할 제사장의 아들들이 속주 아시아의 수도인 에베소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배교(背敎)입니다.

 

악귀는 그들이 사기꾼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악귀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15) 라며, 그들이 예수님 및 바울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그리고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악귀 들린 사람은 스게와의 아들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는 혼자였지만, 그들에게 올라가 눌러 이겼습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16). 그들은 혼쭐이 나서 상처를 입고 벌거벗은 몸으로 집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원한다면, 예수님과 영적인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반응하는 에베소인들(17-20)

진정한 믿음의 삶이 아니라면 겉모습은 비슷해도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결국 썩어질 것만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갈 6:8).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영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옛 습관이 있습니까?

 

17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17-20)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 중 하나는 사람들의 마음에 회개를 불러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그의 능력을 보고 들은 사람 중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합니다.

 

(1) 두려워 자복하는 에베소인들(17-18)

 

이 일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단지 악귀 들린 사람의 초인적인 힘과 난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진짜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이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다”(17) 라고 소개합니다. 이 표현은 회심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인지하고 경외심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중에는 회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행한 일’을 공깨적으로 밝히면서 자복하기 시작했습니다(18).

 

(2) 불사르는 마술책들(19)

 

이 일은 우상에 찌들었던 에베소 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회개의 고백은 말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마술과 관련된 책을 모아 불태웠습니다. 주술적 생각과 말, 행동은 에베소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당시에 다른 이들에게 악한 일이 일어나도록 저주하거나, 누군가가 자신과 사랑에 빠지도록 하거나, 불운을 액땜하기 위한 주문, 부적, 약의 제조법과 사용법이 기록된 책들이 많이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회심한 사람들이 불태운 마술책들의 가치는 오늘날 화폐 가치로 수십억 원에 달아는 ‘은 오만’에 달했습니다.

 

(3) 강력해진 주의 말씀(20)

 

기적과 이적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는 20절에서 기적 이야기를 기록한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지적과 이적이 필요한 이유는 말씀이 힘을 얻도록 하려 합니다. 바울과 관련된 이야기(행 19:11-12)와 스게와의 일곱 아들 이야기(19:13-16), 그리고 그로 인한 에베소 사람들의 영적 변화에 고나한 이야기(19:17-19)는 모두 20절로 요약됩니다.

에베소에서는 다시 한번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6:7;12:24)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직해하면, ‘주의 힘에 의해 말씀이 계속 자라났고 강해졌다’라는 직역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 하나님의 말씀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20). 큰 능력이 나타난 것은 주의 말씀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바울의 손을 통해 나타난 비상한 능력이었지만(11),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그것을 바울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주의 힘’으로 돌리고 있고, 결과적으로 자라나고 강해진 것은, 바울의 사역이 아니라 주의 말씀이었다고 서술합니다.

 

새로운 선교 계획(21-22)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할 때나, 개인의 일을 할 때, 위험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조금만 성공적이면 만족하고 안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깨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는 순간, 위대한 하나님의 사명과 영적 능력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신 사명을 점검해보고 하나님의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21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21-22)

 

바울은 몇몇 지역에서 복음화되고 변화 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족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사명에 불타올랐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현세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비전을 안고 살아갑니다. 좀 더 성장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진정한 사역자의 모습은, 에베소에서 2년 3개월 동안 사역을 감당한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에베소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선교 여행을 계획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마게도냐,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갔다가 궁극적인 목적지인 로마(참고 롬 15:22-25)까지 갈 것을 작정합니다(21). 이곳에서 ‘작정한다’를 직역하면 ‘그 영 안에 혹은 그 영을 통해 정했다’라는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쓰인 ‘영’이라는 단어가 성령을 의미한다면, 바울이 로마로 가기로 한 결정은 스스로 한 게 아니라 성령의 작용에 따른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아시아에서의 사역이 성장하고 안정되어 갈 때, 바울은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경계로 나아갔습니다. 마게도냐로 떠나기 전 바울은 동역자 두 사람, 곧 디모데(고전 16:10; 빌 2:19-23)와 에라스도(롬 16:23; 딤후 4:20)를 먼저 보냈습니다. 이때 바울의 나이가 50대 중반쯤으로 추정됩니다. 적지 않는 나이에 비교적 안정된 에베소 사역을 내려놓고 새로운 사역으로 떠난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그 불꽃이 이제 우리 가운데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바울은 현실에 안주하고 작은 성공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선교 지역이 안정적으로 성장하면 자신이 손길이 필요한 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더 새로운 큰 비전을 가지고 소아사이와 유럽을 돌며 전도한 후 당시 세계의 심장부인 세계의 심장인 로마를 전도 목표로 삼고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효과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안주하는 삶에서 벗어나서 당신에게 맡길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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