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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21-01)


거룩하고 존귀한 제사장의 사명

레위기 21장 1-15절


 

이 땅 위에 존재한 모든 성도들은 모두 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인간을 이어주는 그런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죽음을 건너 생명으로 인도하는 이가 바로 제사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라는 사실은 땅에서 죽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늘의 생명이 되신 하나님과 이어주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 지금까지 11-20장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정결 규례와 성결 규례를 다루었다면, 21-22장은 모두 제사장이 지켜야 할 윤리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고, 제사를 집례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보다 더 엄격하게 규범을 지켜야 합니다. 본문은 제사장의 결혼과 장례에 대한 규정인데, 일반 제사장과 대제사장을 위한 규정이 다르게 주어집니다. 가장 거룩한 대제사장에게는 제사장보다 더 엄격한 규정이 주어집니다.

 

제사장의 규례(1-9)

영적 지도자들에게는 더욱더 성결하고 거룩한 삶이 요구됩니다. 지도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제사장은 죄의 오염이나 영향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 하나님 앞에 정결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는 백성을 대표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이며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리는 직무를 감당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늘 자신을 지켜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지도자는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함과 성결은 영적 지도자의 필수적인 자질입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2그의 살붙이인 그의 어머니나 그의 아버지나 그의 아들이나 그의 딸이나 그의 형제나 3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그의 자매로 말미암아서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 4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5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자기의 수염 양쪽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6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7그들은 부정한 창녀나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함이니라 8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9어떤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자신을 속되게 하면 그의 아버지를 속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 지니라(1-9)

 

본문에 말씀은 제사장의 죽음의 영역과 관련 되어진 제사장의 입장과 태도를 분명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장례라는 그러한 삶의 한 영역 속에서 죽은 자를 다룰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에 제사장들은 어떤 입장과 태도를 기울려야 하는지 말씀해 줍니다.

 

(1) 제사장과 장례(1-6)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직무를 감당하는 자이기에 일반 백성들보다 더 높은 거룩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스스로 더럽히지 않기 위해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멀리해야 할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생명과 가장 멀리 있는 것으로,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는 죽음과 멀어져야 합니다. 일반 백성들도 죽음에 접촉하면 스스로 부정하게 되고, 7일 동안 부정하게 될 뿐만 아니라 시체로 인해 부정하게 된 사람은 재와 우슬초로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사장에게는 일반 백성들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규례를 적용합니다. 제사장은 죽음 자체에 가까이하는 것이 금지됩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 특히 이집트의 관습과 매우 다른 점입니다. 이집트의 제사장은 미이라를 만드는 작업을 관장하면서 항상 죽음과 접촉하고, 사후 세계를 준비하는 일이 그들의 중요한 직무였지만,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죽음을 최대한 멀리합니다. 제사장이 죽음에 노출되는 것이 허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살붙이의 죽음의 경우가 그러하다. 직계 존비속에 속한 가족들이 죽음을 맞이하면 장례를 치르고 그 시신에 접촉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3). 자매의 경우는 결혼하지 않은 상황일 때만 적용됩니다.

 

장례와 관련한 두발 규정도 주어집니다. 머리카락을 대머리처럼 깎거나, 수염의 양쪽을 깎는 것, 그리고 살을 베는 것도 금지됩니다. 일반 백성들도 머리를 둥글게 만들지 않도록 했지만, 본문은 머리를 깎아서 대머리로 만드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 금지 조항이 여기 포함된 이유는 이런 풍습이 고대 근동 이방인들의 장례 관습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즉, 이방인의 장례 풍습을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엄격하게 제사장의 거룩을 요구하는 것은 제사장은 백성들의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에서 말하는 백성의 이론이라는 말의 의미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어른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어른, 주인, 남편’ 등의 의미로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높은 신분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앞선 결혼의 문맥에서 보면, 단순히 남편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글(개역개정)을 따라 ‘바알’을 “어른”(master)으로 보는 것이 낫습니다. 이때 ‘바알’은 제사장의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별도의 호칭입니다. 이 해석의 정당성은 1-4절 전체의 구조에 의해 더욱 분명하게 뒷받침됩니다. 1-4절의 히브리어 문장 구조를 보면 4절은 1절과 더불어 백성의 장례에 참여하지 말라는 포괄적이고 원론적인 명령과 더불어 구문론적 병행을 이룹니다. 1절에서 송장으로 몸을 더럽히지 말라는 문장이 4절에서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는 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입니다(6).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 자신의 거룩을 지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2) 제사장과 결혼(7-9)

 

제사장에게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어서 결혼할 수 없는 부류의 여인들이 있습니다. 부정한 창녀와 이혼당한 여인과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부정한 창녀라는 표현은 두 개의 형용사가 ‘여인’을 수식합니다. 첫째는 ‘음란한’이고 둘째는 ‘더럽혀진’입니다. 한 부류의 여인에 대한 중첩된 설명이라고 볼 수도 있고, 두 부류의 사람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성적으로 방탕한 여인 혹은 처녀성을 잃고 더럽혀진 여인을 뜻합니다. 성적으로 방종하다는 말은 자발성을 전제하고, 처녀성을 잃었다는 표현은 비자발성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제사장은 부정한 여인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혼한 여인과도 결혼할 수 없습니다. 여기 사용된 단어는 ‘쫓겨나다’라는 의미인데, 본문의 문맥상, 그녀가 남편에 의해 쫓겨난 것은 아마도 간음과 관련 있을 것입니다. 다만, 아내의 음행이 들통났다면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음행의 증거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 그녀를 죽이지 못하고 쫓아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과부와의 결혼은 금지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제사장은 순결한 처녀 혹은 과부와의 결혼만 허용됩니다. 제사장의 딸에 대한 규례도 포함되는데, 딸이 행음하여 자신을 더럽히는 것은 제사장인 아버지를 더럽히는 것과 같으므로, 화형으로 징벌해야 합니다. 일반 백성들의 경우는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으나, 제사장의 딸에게는 더 엄격하게 규정을 정한 것입니다.

 

대제사장 규례(10-15)

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의 성소를 돌아보는 직분입니다. 성도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는 사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되어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리가 섬기고 또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들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러한 사명을 받은 자가 왕 같은 제사자입니다.

 

10자기의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의 머리를 풀지 말며 그의 옷을 찢지 말며 11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 12그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의 하나님의 성소를 속되게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3그는 처녀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을지니 14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나 창녀 짓을 하는 더러운 여인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에서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15그의 자손이 그의 백성 중에서 속되게 하지 말지니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10-15)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 중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는 백성들 앞에서는 보석으로 치장한 가장 화려한 예복을 입고 대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했으며, 유일하게 1년에 하루 대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대제사장의 구별됨은 가장 엄격하게 요구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은죽음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지만, 반대로 대제사장의 죽음은 백성들에게 특별한 순간입니다. 도피성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선언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1) 대제사장과 장례(10-12)

 

대제사장의 결혼과 장례 등에 대해서는 제사장의 경우보다 훨씬 더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반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금지됩니다. 심지어 부모의 장례에 있어서도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으며 애곡하거나, 그 주검을 만지면 안 됩니다. 제사장은 가족의 장례 의식에 참여해서 가족의 주검을 만지는 것이 허용되지만, 대제사장은 어떤 주검도 만질수 없습니다. 이렇게 애곡을 금하거나 주검을 만지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는 대제사장은 1년 내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장례로 인해 부정하게 되면 다른 제사장이 대체할 수 있지만, 오직 한 사람인 대제사장의 경우 장례 의식으로 인해 부정하게 되면 14일 동안 성소의 직무 자체가 멈추기 때문입니다. 일반 백성은 주검을 만질 경우 7일간 부정하게 되고, 제사장은 14일간 부정하게 됩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리다가 죽임을 당했을 때도, 아론은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는 행위를 하지 못했습니다(10:5-7). 자식들의 장례를 치를 때도 그는 회막 문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구별됨으로 죽음의 기운으로 인해 성소가 더럽혀지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대제사장은 가족의 죽음 심지어 아내나 부모의 죽음에도 성소를 떠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관유를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2) 대제사장과 결혼(13-15)

 

대제사장은 결혼에 있어서도 훨씬 더 엄격한 기준이 주어집니다. 제사장은 창녀, 부정한 여인, 이혼당한 여인 등과 결혼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은 더 엄격하게 과부와의 결혼도 금지되고 오직 이스라엘 지파에 속한 순결한 처녀와의 결혼만 허용됩니다. 아마 두 가지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대제사장이 지켜야 할 거룩성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세사장의 경우 후손이 다시 대제사장직을 이어갈 것이기 때문에 혈통에 대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처녀가 아닌 여인이 대제사장의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처녀는 또한 반드시 자기 백성 중에 있어야 합니다. 이방인이면 안 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자기 족속 혹은 자기 지파 안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 사용된 백성의 히브리어 뜻은 지파 혹은 부족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레위 지파 안에 속한 처녀와의 결혼만이 허락됨으로 대제사장 가문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과 백성을 온전히 섬기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 61장의 말씀대로 기름 부음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온 인류를 위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로 치유하고 공급하고 빛을 비추고 청결하게 하는 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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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20-02)


사형에 해당하는 가증한 성관계

레위기 20장 17-27절


 

예전에 나온 무술영화를 보면, 무술을 배우기 제자에게 스승은 무술을 가르쳐 주지 않고 물을 기르고, 장작을 패게 하면서 긴 시간을 보내게 합니다. 제자는 스승의 의도를 알지 못해 불평하다가 나중에 무술을 배울 때 자신이 필요한 근육과 초식을 다 갖추게 된 것을 보고 놀랍니다. 스승은 생활 속의 단순노동을 통해 훈련을 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훈련시키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세부지침을 명하셨습니다.

 

  • 18장에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결에 관한 법률을 종합적으로 마무리합니다. 성결 규례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을 법한 성범죄에 집중하고 있지만 생활 전반에 걸친 삶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심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서 그분의 규례를 지키며 그 땅 거민들의 부정한 것들을 거부해야 합니다. 거룩을 지키는 것이 언약 백성의 사명입니다.

 

근친상간에 대한 추가적 규례(17-21)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이 거룩한 삶을 살게 하려면 먹는 것을 통해서도 훈련시키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매사에 정한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음식을 가릴 필요는 없지만, 행위를 살펴보면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신앙적 가치관이 분명하게 정립된다면 죄악이 만연한 환경이나 분위기에 흔들림 없이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7누구든지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그의 어머니의 딸을 데려다가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들의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그가 자기의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가 그의 죄를 담당하리라 18누구든지 월경 중의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19네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 이는 살붙이의 하체인즉 그들이 그들의 죄를 담당하리라 20누구든지 그의 숙모와 동침하면 그의 숙부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은 그들의 죄를 담당하여 자식이 없이 죽으리라 21누구든지 그의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의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에게 자식이 없으리라(17-21)

 

믿음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처럼 거룩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영적, 정서적, 육체적 결합은 거룩한 가정을 이루는 기초가 됩니다. 따라서 믿음의 가정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항상 거룩하며 신성한 주님의 성전이 되도록 아름답게 가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가증한 성적인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엄하게 경고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여러 성적인 죄악은 당시 가나안에 만연한 문화였습니다. 따라서 그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의 성 문화에 물들지 않도록 말씀의 기준을 따라야 했습니다.

 

(1) 직계 가족과의 근친상간에 따른 징벌(17-18)

 

누구든지 자매 즉 아버지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면 그 민족 앞에서 끊어질 것입니다. 17절에서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그의 어머니의 딸”은 18:9과 같은 누이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친누이를 포함한 혈연관계가 있는 누아-첩의 딸이나 새로운 부인의 딸-를 모두 포괄합니다.

17절의 “데려다가”는 21절의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사례에서도 나타나는데, 이 동사는 결혼관계에 대한 전형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이러한 성관계와 더불어 혈통 관계가 느슨한 반-누이와의 혼인이 자칫 쉽게 용인될 수 있는 정황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는데, 본문은 ‘그것이 은혜(헤세드)니라’라고 표현되어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오직 두 곳에서만 ‘헤세드’가 부끄러운 일 혹은 수치스러운 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잠14:34).

생리 중에 있는 여인과 동침하는 것은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는 일이기에 남자와 여자 모두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입니다(18). 단순히 그녀의 벗은 것을 드러내는 것(18:19)을 넘어 그녀의 근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녀의 샘 근원 즉 자궁을 뜻할 수 있는데, 또한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을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처벌은 15장의 사례와 충돌합니다. 15장에서는 월경 중인 아내와 성관계를 하면 저녁까지 부정해지는 반면(15:24), 20장에서는 월경 중에 성관계를 하게 되면 두 사람 모두 제명당하는 형벌을 받습니다(20:18). 이에 대한 답변으로 전자의 경우 부지중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잘못일 수 있으나 후자의 경우 고의적인 범죄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경우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제명당한 것은 여자 역시 범죄에 적극 가담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직계 외의 근친상간에 따른 징벌(19-21)

 

3촌에 해당하는 여성들과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것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고모와 이모는 부모의 자매요, 숙모는 부모의 형제의 아내입니다. 이들은 모두 살붙이의 하체로 불립니다. 3촌 관계까지는 성관계가 엄격히 금지되는데, 이는 반대로 3촌에 해당하는 조카와의 결혼이나 성관계도 엄격히 금지된다는 뜻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들은 자식 없이 죽게 될 것입니다. 자식이 없음은 언약 백성 가운데서 끊어지는 것으로 매우 심각한 형벌로 간주되었습니다. 형수 혹은 제수와의 불법적 성관계를 금지합니다(21). 형수나 제수는 형제의 결혼 관계에 의해 맺어진 확대된 가족 관계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형이 자녀가 없이 죽었을 때, 형수를 취하여 자손을 잇게 하는 수혼법과는 다른 형태입니다(신 25:5-10). 어쩌면 형제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아내를 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일입니다. 여기 표현된 “더러운 일”이라는 단어는 여성이 출산이나 생리를 통해 피를 흘릴 때 제의적으로 몸이 더러워지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부적절한 성관계는 더러운 일입니다. 이렇게 형제의 하체를 범하는 자는 자손 없이 죽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삶에 대한 요청(22-2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만민 중에 구별하고 택하시어 약속의 땅을 그들의 기업으로 주셨음을 상기시키시면서 그들에게 거룩히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정한 짐승가 부정한 짐승을 구별해 부정한 짐승이나 새나 땅에 기는 것들로 자신의 몸을 더럽치지 말아야 했습니다.

 

22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23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24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25너희는 짐승이 정하고 부정함과 새가 정하고 부정함을 구별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부정한 것으로 구별한 짐승이나 새나 땅에 기는 것들로 너희의 몸을 더럽히지 말라 26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22-26)

 

22-27절은 18-20장까지의 전체 결론부에 해당합니다. 더 넓게 보면, 11장부터 시작된 정결법과 성결법 전체를 마무리하는 부분입니다. 전체를 꿰뚫는 주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 포로 생활 경고(22-23)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토해내지 않도록 하려면, 하나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해야 합니다. 18:26과 28절에서 주신 메시지를 여기서 요약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가나안 사람들의 풍속이나 규례를 따르게 되면,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서 토해냄을 당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 땅에서 쫓겨날 것임을 경고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풍속은 18장에서부터 길게 언급했던 모든 규례를 포함합니다. 여기서 차이점은 18장에서는 가나안 땅뿐만 아니라 이집트 땅에서의 풍속도 따르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는데, 여기서는 곧 들어갈 가나안 땅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패한 가나안의 풍속은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2) 땅의 구별(24)

 

22-23절이 18장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요약 반복한 것에 비하면, 24절은 새롭게 추가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그 땅의 거민들을 쫓아내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유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 표현은 레위기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사용됩니다. 젖은 가나안 땅에서 목축을 통해 우유를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는 뜻이고, 꿀은 풍성한 과일 수확을 통해 과일 시럽을 많이 만들 수 있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은 실제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절하게 내리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땅입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당이라는 표현은 낙원과 같이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땅을 의미합니다(겔 20:6).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할지라도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버리고 그 땅의 풍속을 따르면 그 당에서 쫓겨나고 말 것임을 강조합니다.

 

(3) 정함과 부정함의 구별(25-26)

 

본문은 11-15장에서 언급되었던 정결법을 다시 언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멀리 있는 정결법을 끌어온 것은 약속의 땅 안에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고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나안의 풍속을 배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11-15장까지 언급된 정결 규례 역시 잘 지켜야 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정결법에 있어서도 핵심 메시지는 ‘거룩’이기 때문입니다(11:44-45).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예전적인 측면에서의 정결은 물론,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결도 지켜야 합니다. 둘을 범하는 것 모두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성도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인적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 제사로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롬 12:1).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만민 중에서 당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만민 중에 구별된 백성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을 위함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이 거룩하게 구별됨은 열방에게 거룩한 삶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서 선교적 사명을 다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신접한 자와 박수무당을 금함(27)

인본주의적 가치관, 휴머니즘을 가장한 부패한 성 문화, 성공하고 돈만 많이 벌면 만사 오케이라는 식의 황금만능주의 가치관이 범람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신앙의 울타리를 높이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7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27)

 

26절까지 결론적 언급을 마무리하고, 27절의 규례는 부록처럼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주어진 규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20:6에서 금한 내용을 여기서 다시 반복합니다. 어쩌면 18장과 20장에서 대부분의 규례가 반복되는데, 27절의 규례가 반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 추가로 기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접한 자와 박수무당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규례를 따로 반복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함을 지키는 일은 생명과 질결되는 일이므로 최우선의 의무요 사명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도 죄로 오염시켜 타락시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언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길로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약속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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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20-01)


사형에 해당하는 우상숭배

레위기 20장 1-16절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할 그런 의미와 목표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가치관과 문화와 또 사조(思潮)들이 우리의 삶 속에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으로 삶에 펼쳐있습니다. 때로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인지 우리가 혼돈할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경고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의 삶을 그 땅 가나안 사람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는 성도의 삶 속에 혼돈스러운 시대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바, 그 영성을 회복하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 20장은 다시 한 번 우상숭배 금지와 불법적 성범죄에 대한 추가적인 처벌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본 규정은 18장의 규례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무려 열네 가지 규례가 반복되지만, 20장에서는 그 처벌 규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20장은 18장 규정을 좀 더 발전시킵니다. 또한 18장이 가족 중심적인 관점이 중심이라면, 20장은 공동체 중심적인 관점을 가집니다.

 

우상숭배 금지(1-8)

부모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자녀를 우상에게 바치는 일이 고대 근동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의 제단에 자녀를 바시는 일이 오늘도 만연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도, 우상도 아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형상이자 인격적인 존재로 존중하고 말씀의 도리를 따르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3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4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5내가 그 사람과 그의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6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7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8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1-8)

 

레위기 20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때, 가안 땅에 이미 거주하던 이방인들의 풍습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지극히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세속화된 가증한 이방의 제의적인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르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증벌이 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1) 몰렉 숭배에 대한 징벌(1-5)

 

몰렉 숭배를 금하는 것은 이미 18:21에서 언급하지만, 그에 대한 징벌은 20장에 와서 구체적으로 주어집니다. 징벌은 ‘사형’과 ‘제명’입니다. 그런 중대한 범죄자들은 ‘반드시 죽이라’고 명합니다(3). 사형 방식은 그 지역 주민들이 직접 돌을 던져 집행하는 투석형(投石形)입니다. 뒤이어 ‘제명’(끊어짐)이라 불리는 ‘카라트’ 형벌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집행하시는 형벌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이든지, 이방 나그네든지 상관없이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몰력을 위한 자녀 희생의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못본 체하면서 그를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지역의 목격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집안)까지 공동책임을 물으시고 그 몰렉 숭배자와 더불어 그들을 집단으로 끊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4-5). 이것은 그 몰렉 제사가 공공연하게 드려졌기에 지역의 어떤 주민들이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범죄하는 그가 하나님 앞에 중대한 죄를 범하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은 몰렉 승배에 대해 말할 때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하나님이 아닌 몰렉을 숭배하는 것이 영적 간음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몰렉을 숭배하는 행위는 실제 어린 자녀를 불에 지나가게 함으로 죽게 하는 잔혹한 일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직접 몰렉을 숭배하는 자를 향해 진노의 얼굴을 들어 그 백성들로부터 끊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2) 영매와 박수무당을 따름에 대한 징벌(6)

 

접신하는 자와 박수무당을 통해 신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진노의 얼굴을 드십니다. 접신한 자는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영매나 초혼술사를 지칭합니다.

여기서도 본문은 그들을 ‘음란하게’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접신한 자나 박수무당이 의식을 치를 때 음란한 행위를 한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앞선 문맥에서와 마찬가지로 영매와 박수무당을 따르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영적 간음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동일합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서 끊어질 것입니다.

접신하는 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사무엘상 28:7-8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스스로 금지시켰던 접신 자와의 만남을 스스로 가짐으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3) 거룩한 삶에 대한 명령(7-8)

 

첫 번째 단락인 1-8절을 마무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스로 거룩하게 하여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개역개정은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거룩’이라는 표현을 두 번 반복합니다.

이방 민족들의 가증한 일들, 옳지 않은 문화를 배격하고, 언약의 하나님께 집중하며 순종할 때 스스로 거룩하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즉 거룩한 삶의 출발점은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하나님만 온전히 섬기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에 대해서 처음으로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라고 소개합니다.

 

부모를 저주하는 자에 대한 징벌(9)

부모님을 향한 태도는 인간관계의 기반이며 시작입니다. 부모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로 부모 공경은 명령입니다.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십계명의 과녁을 함참 빗나간 악행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잇는 가교가 부모 공경의 계명입니다.

 

9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9)

 

9-21절은 근친 간의 성범죄에 대한 처벌 규정들을 담고 있는데, 18장에서의 금지 규정에 덧붙여서 그에 따른 형벌 내용을 제공합니다.

가장 먼저 부모를 저주하는 자에 대한 형벌을 소개합니다. ‘저주한다’는 본문의 표현은 좀 더 넓은 의미로 부모를 가볍게 여김, 모욕함, 저주함 등을 의미합니다. 부모를 업신여기고 가볍게 여기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강조합니다.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은 가정을 파괴하는 심각한 죄악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사회적인 죄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모를 무시하고 욕하는 자를 심판하는 절차는 공동체가 형벌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성문에 있는 장로들에게 고하면 성읍의 모든 사람이 그를 돌로 쳐야 했습니다(신 21:17-21).

 

성범죄에 대한 징벌(10-16)

‘부적절’이란 만남과 삶 속에서 발견되고 경험할 수 있는 주제가 됩니다. ‘부적절한 생각’이나 ‘부적절한 만남’ 그리고 ‘부적절한 계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함에 따라서 적절과 부적절을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무엇이 부적절한 것인지 조금씩 선명하게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11누구든지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12누구든지 그의 며느리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이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13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4누구든지 아내와 자기의 장모를 함께 데리고 살면 악행인즉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사를지니 이는 너희 중에 악행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15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16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 하여 교합하면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그들을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10-16)

 

성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접한 자 및 박수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들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끊으십니다. 그들은 백성을 영적으로 간음하게 만드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 거룩하게 하고 영적으로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이웃의 아내(10)

 

18:20에서는 자식을 낳을 목적으로 저지르는 성범죄에 초점이 있었다면, 본문에서는 자발적인 성범죄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고대 사회는 씨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이웃과는 매우 다른 느낌입니다. 아마도 모두 가까운 친척이거나 평생 함께해온 운명 공동체의 성격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행한 남녀는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2) 어머니와 계모, 며느리(11-12)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사람도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아버지의 아내는 친모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해하면 아버지의 첩이나 계모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아들의 아내인 며느리와의 불법적 성관계도 사형에 해당합니다. 계모 혹은 아버지의 첩, 그리고 며느리는 모두 친가족은 아니었지만 결혼 관계에 의해 새롭게 가정에 들어온 확대 가족입니다. 본문이 뚜렷하게 명시하지는 않지만, 두 사람 모두를 처벌하는 것으로 봐서 어느 정도 자발적인 성범죄를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강제적인 관계였다면 남자만 죽였을 것입니다(신 22:25-30). 이러한 죄악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러한 죄악이 있다고 언급합니다(고전 5:1).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질서를 따라 걸어가기 원하지만, 빗나가고 마는 우리를 직면해야 합니다.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거룩한 백성답게 생활까지 원합니다. 거룩한 성령님께서 주의 도를 일심으로 행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를 셤손히 간구하며 갈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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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9-02)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삶(3)

레위기 19장 19-37절


 

세상에는 많은 법칙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법칙을 초월한 하나님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칙을 통해서 날마다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적용입니다.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관념적이며 또는 종교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레위기의 정결법과 마찬가지로 생활의 셩결을 추구함에 있어서도 언약 백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 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두 종류를 혼합하는 것은 원래의 정상 상태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또한 고대 근등에 만연해 있던 점술, 마술 등에 대한 규례도 제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은 주어진 영역에서 혼합되지 않는 구별을 뜻하며, 이 원리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적용됩니다.

 

혼합 금지와 여종과의 성범죄 금지(19-2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규례 중 일부는 당시 문화 속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규례들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의미가 있었으나, 신약시대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규례는 현대의 신앙 생활에는 유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모든 인류에게 확장되었음을 나타냅니다.

 

19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20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정혼한 여종 곧 아직 속량되거나 해방되지 못한 여인과 동침하여 설정하면 그것은 책망을 받을 일이니라 그러나 그들은 죽임을 당하지는 아니하리니 그 여인이 해방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니라 21그 남자는 그 속건제물 곧 속건제 숫양을 회막 문 여호와께로 끌고 올 것이요 22제사장은 그가 범한 죄를 위하여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여호와 앞에 속죄할 것이요 그리하면 그가 범한 죄를 사함 받으리라(19-22)

 

다른 종류의 가축을 교배하거나, 다른 종류의 씨앗을 한 밭에 심는 것 등이 금지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워두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은 중대한 범죄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보건 위생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은 가축, 밭, 그리고 옷까지도 두 종류를 섞지 말라고 하는 규례입니다. 질서를 지킨다는 측면에서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거나 반대로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금지됩니다. 두 번째 규례는 다른 사람에게 대리모로 팔기로 한 여종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에 해당합니다. 여종은 비록 계약을 맺고 팔리는 것으로 정해졌지만, 아직 돈을 지불하여 자유롭게 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주인에게 속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이 범죄에 해당한다 할지라도 정혼한 사람과의 잘못된 관계로 말미암는 사형의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서 여종은 약혼은 했으나 아직 남편 될 사람에게 신부 값이 지불되지 않았으며 주인도 여자를 자유민으로 풀어준 것이 아닙니다. 이 경우엔 강간이 아니라 쌍방이 합의하여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그들은 죽음을 당하지는 않으리니”라는 진술에서 확인됩니다. 다만 정혼한 종과 관련된 규례가 이종교배와 관련된 문맥에서 주어진 것은 이 역시 부적절한 혼합이라는 주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실수의 열매(23-25)

제대로 된 열매를 얻기 위해서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좋은 토양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토양이 바뀌기까지는 약 3년 걸린다고 합니다. 열매보다 중요한 것은 토양이며 토양이 좋으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시고 자기 백성 삼으심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인데(요 15:16), 개인의 토양이라고 할 수 있는 성품이나 기질이 변화되고 할례 받은 열매처럼 좋은 열매 맺는 성도가 되려면 변화되기 위한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23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24넷째 해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25다섯째 해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23-25)

 

말에 과실수를 심을 경우 최소 3년 안에 열매를 맺는 것은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여 먹지 말 것이고, 4년째에 열리는 열매는 첫 번째 소산이니 하나님께 돌리고, 5년째부터 열매 맺는 것을 먹을 수 있다는 명령입니다. 할례받지 못했다는 말은 금지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린 나무의 열매를 일찍부터 수확하는 것은 과실수가 장기적으로 성장하여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더 안정적이고 풍성한 수확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이 규례가 주어졌을 것입니다.

 

점술과 마술, 그리고 이방 관행의 금지(26-31)

사랑의 관계에 이미 만족한 사람은 탐하기를 멈출 수 있습니다. 사랑의 결핍은 세상에 물건을 쌓은 것으로 충족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노예에게는 안식이 없고, 멈추어 안식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율법을 따르는 이의 중심입니다.

 

26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째 먹지 말며 점을 치지 말며 술법을 행하지 말며 27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며 28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29네 딸을 더럽혀 창녀가 되게 하지 말라 음행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30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31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26-3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 숭배의 문화로부터 구별될 것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러한 이방의 풍습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몸과 영혼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1) 점술과 마술 금지(26-28)

 

피째 먹지 말도록 명하는 것은 아마도 고대 사회의 종교적인 관행과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피쌔 먹다’의 히브리어 표현은 ‘피와 함께’ 혹은 ‘피 위에 선다’는 뜻입니다. 이 금지 규례가 곧장 점을 치는 것과 술법을 행하는 것을 금하는 표현 앞에 있다는 점 때문에, 피째 먹는 것은 점을 치거나 술법을 행하는 방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짐승의 피를 먹고 점을 치거나, 짐승의 내장을 보면서 점을 치는 등의 행위를 엄격하게 금합니다. 가나안의 어떤 제의에서 사람들은 구덩이를 판 뒤 짐승 도살 의식을 거행할 때 그 피를 구덩이 속에 쏟았습니다. 악귀들이 그 속에 있었는데 쏟아진 피는 그들을 불러냈고 그들은 피를 먹고서 미래의 일을 예언해주었습니다. 이때 그 제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피 위에서’ 고기를 나누어 먹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가나안 땅의 점술과 마법 의식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째 먹지 말라’는 번역은 ‘피 위에서 먹지 말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또한 고대 근동 사회의 장례 의식에 대한 규례도 주어집니다. 머리와 수염 가를 둥글게 깎거나 수염 끝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거나 문신을 하는 것도 안 됩니다(참조, 왕상 18:28).

 

(2) 음행을 금하고 안식일을 지키라(29-30)

 

먼저 자신의 딸을 창녀로 넘기면 안 됩니다. 고대 신전에는 신전 창녀들이 있었는데, 당시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신전 창녀로 바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딸을 창녀로 보내는 것은 딸을 더럽히고, 그 땅을 음란하게 만들어 죄가 가득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다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주는데, 본문 3절에서 안식일 준수 명령을 한 것과 다른 문맥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개인의 경건 문제를 넘어서 이웃과 사회를 위한 배려와 안전장치를 포함해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종들과 가축들까지도 쉬게 될 것입니다.

 

(3)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라(31)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영매나 거짓 명의 도움으로 미래를 예언하는 박수무당 등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혀 왔고 두려움으로 살게 한 장본인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마치 자신들만이 신적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 사람들을 자기들의 뜻대로 조종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에서 떠날 때, 신접한 자와 박수무당을 통해 자신이 가진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는 끊임없는 유혹이 이스라엘 역사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노인 공경과 공평한 사회 유지(32-37)

오늘날 ‘유전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오가는데, 이러한 문제는 부자들과 법을 집행하는 자들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러한 세상 속에서 약자를 사랑으로 돌보며 정의를 따라 행함으로 어두운 세상에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32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33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34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35너희는 재판할 때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36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37너희는 내 모든 규례와 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32-37)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눈에 보이는 어른을 공경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습니다. 나그네를 선대 하는 것, 재판의 판결이나 무게를 젤 때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 것등은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1) 노인 공경과 나그네 대접(32-34)

 

부모 공경의 법률은 이제 확대된 가족으로서의 사회공동체 안에 있는 노인들에게까지 적용됩니다. 흰 머리 앞에서 일어섬으로 사회는 노인들을 존경하고 예의를 다해야 합니다. 노인들을 존경하고, 그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울 때 보다 믿을 만한 공동체의 유산을 전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본문은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고대 사회는 나그네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성경 본문 역시 이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그들을 대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나그네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사회적 공통 경험이 이제 공동체의 윤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2) 공평한 재판과 공정한 저울과 결론(35-37)

 

한 사회의 타락 척도는 부정한 저울을 사용해서 장사의 이윤을 남기는 것과 불의한 재물이나 권력으로 재판을 굽게 하는 것이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됩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즉 경제적인 불의와 사법적인 불의에 대해 엄격합니다. 36절에서는 ‘공평한’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반복해두었음을 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제 활동과 사법 활동에 있어서 공평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 역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부터 은혜로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거짓으로 부를 축적하고, 부와 권력으로 재판을 굽게 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결론부에서(37) “너희는 내 모든 규례와 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고 다시 강조하며 마무리하는데, 이는 19절을 염두에 두고, 전체를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묶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19장 전체가 십계명을 전제로 규례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19장의 여러 규례들은 실제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를 굳게 하는 일과 관련됩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의 정신이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19장 전체는 ‘나는 여호와이니라’라는 전형적인 문구를 무려 16회나 반복하고 있다. 결론부에서도 마찬가지다.


타락한 인간의 죄성이 과거나 오늘이나 변함없듯이 하나님 백ㄷ성의 거룩한 삶의 원리도 변함이 없습니다. 구속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따라 행함으로 세상과 성별 됨이 마땅합니다. 성도는 거룩한 자라 일컬음을 받은 자답게 거룩한 길로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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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9-01)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삶(2)

레위기 19장 1-18절


 

세상의 모든 범죄는 자신의 욕망을 좇고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을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말씀 속에서 사랑의 법을 배워 거룩한 길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닮아 거룩해야 합니다. 부모를 경외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화목 제물이 셋째 날까지 남은 경우 불사르고, 곡식이나 열매를 거둘 때 가난한 사람을 배려해 남기며, 도둑질과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거룩한 백성(1-4)

성도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이 거룩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온전한 거룩함을 이뤄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3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4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1-4)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향한 소원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거룩해진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거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갈 때, 우리가 거룩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1) 서론: 너희는 거룩하라(1-2)

 

본문은 특별하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라는 표현은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는 전형적인 문구입니다.

하지만, 2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라는 문구를 이중으로 표현한 경우는 성경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따름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출애굽기 19:6에서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고 이미 선언한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내어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2절의 선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 백성으로서 제의적 정결법과 도덕적 성결법을 모두 지켜야 할 원리요 기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2) 부모 공경, 안식일, 우상숭배 금지(3-4)

 

십계명의 가르침을 따라 규례를 제시하는데, 본문은 제일 먼저 부모 공경, 안식일, 우상숭배 금지 규례로부터 시작합니다. 비록 번역은 ‘부모’라고 했지만, 실제 히브리어는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표기함으로 십계명의 어순을 바꾸어두었습니다. 18-20장이 불법적 성관계와 관련 있고, 18:7에서도 어머니의 하체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명령이 처음으로 주어진 것과도 연결됩니다. 부모를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경계 지점에 있습니다. ‘경외’한다는 표현 자체도 하나님 경외함과 부모 경외함에서 사용됩니다. 곧이어 안식일 준수와 우상숭배 금지 규례가 차례대로 주어집니다.

 

화목제 제물 규례(5-8)

하나님을 먼저 기쁘시게 해 드리는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예배자에게도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드릴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누릴 것도 주십니다. 예배자가 누리는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거룩한 삶에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5너희는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고 6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셋째 날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7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하고 8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을 더럽힘으로 말미암아 죄를 담당하리니 그가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5-8)

 

7:16-18에서 주어진 규례를 반복하는데, 화목제물을 바친 사람은 제물을 드린 날과 그 다음 날에 먹고 셋째 날이 되면 반드시 태워버려야 합니다. 남긴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입니다. 정한 기한 안에 음식을 먹도록 한 것은, 단순히 음식이 부패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소나 양 한 마리를 화목제물로 드린 후, 이틀 안에 모든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감사제는 하루 안에, 서원과 자원제는 이틀 안에 소비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화목제물의 기본 의도는 가능한 한 많은 이웃과 함께 나눠 먹는데 있습니다. 이 규례의 중요성은 만일 어길 시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 즉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입니다.

 

자비로운 추수법(9-10)

찰스 스윈돌은 ‘이웃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가장 우렁찬 웅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최우선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룩함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9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9-10)

 

거룩한 삶에 있어서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에 대한 배려도 법률로 요구됩니다. 추수할 때 가난한 사람들,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을 위해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어야 합니다. 또한 떨어진 이삭 역시 다시 주워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회에서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배려해야 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도덕규범이지만, 성경에서처럼 법률로 제정되는 것은 독특한 현상입니다. 이런 점은 모세오경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간주되었습니다(출 23:10-11;신 24:19-22).

신명기 규례에서는 이러한 약자 보호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장치었는데, 레위기 19장에서는 전형적인 문구인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라는 표현으로 마무리됩니다.

포도원에서 가난한 자의 몫으로 남겨진 것은 수확 후 포도나무에 남아 있는 포도송이와 더불어 수학 중에 바닥에 떨어진 포도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에는 곡식과 과일을 얼마나 많이 남겨놓아야 하는지 명시하지 않고 주인의 재량에 맡깁니다. 자비로운 주인은 의도적으로 밭과 과수원에 더 많은 열매를 남겨놓았을 것입니다. 레위기의 약자 보호법은 룻기에서 보아스가 룻을 위해 이삭을 남겨두는 모습에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과 약자 보호의 명령(11-18)

‘거룩’은 구별된 하나님 나라의 존재 원리로, 약자나 강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의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기보다는 그들의 죄를 투명하게 다루는 것이며, 원수를 갚거나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하는 일입니다.

 

11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12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3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14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5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16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7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1-18)

 

도둑질하거나 속이거나 거짓 맹세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면 안 됩니다. 이웃을 억압하지 않고, 품삯을 제때 주며,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을 괴롭히지 않아야 합니다. 공의로 재판하고 비방하지 않고, 견책하고, 원수 갚지 말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1) 도둑질과 거짓 맹세(11-12)

 

거룩한 삶의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요구합니다. 십계명의 제8계명과 9계명을 다시 확인하는데, 언약 백성은 마땅히 이웃의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것과도 깊이 관련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 역시 금지됩니다. 거짓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성경에서 아주 엄격하게 금하는 법률이기도 합니다. 소나 양을 도둑질하면 소 한 마리에 다섯 마리로 갚아야 할 만큼 엄격하게 금지합니다(출 22:1-4). 그만큼 이웃의 물건을 도둑질함으로 이웃의 재산을 보호하지 않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2)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13-14)

 

언약 백성 공동체 안에서 이웃 사랑의 원리는 고용관계에 있어서도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먼저 이웃을 억압하지 말고 강도질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억압한다는 말은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웃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경우인데, 일꾼의 삯을 미루지 말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이웃에게 강도질하지 말라는 것은 불법적으로 권력이나 힘을 이용해서 강제로 빼앗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그들이 고통받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맹렬한 노를 내리실 것입니다(출 22:24). 대신, 고용주와 고용인 상호 간에 인격적인 관계가 중요합니다. 또 다른 연약한 이웃인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규정합니다. 오늘날도 여전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고대 사회에서 훨씬 더 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장애인에게 해를 끼치는 어떤 행위도 단호하게 금지합니다.

 

(3) 불의한 재판과 불의한 이익(15-16)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백성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사회적으로 중요한 것은 첫째, 공의로운 재판이 이뤄져야 합니다. 뇌물을 받고 판결을 왜곡하거나, 권세 있는자를 두둔하거나, 가난한 자를 무시하거나, 혹은 개인적인 친분 관계로 인해 판결을 굽게 하는 것이 금지됩니다. 재판은 항상 공평하고 정의로워야 합니다. 둘째, 이웃을 이용해서 불의한 재물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니면서 이웃을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의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신의 유익을 구해서도 안 됩니다. 재판정에서 이웃에 대해 위증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죄악이며, 그 결과는 그 사람에게 주어질 형벌까지 감당하는 것입니다(신 19:16-21).

 

(4) 이웃 사랑(17-18)

 

19장에 나온 구약 율법의 대원칙을 다시 종합하고 요약합니다. 언약 백성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원리는 이웃 사랑에 있습니다. 이웃을 미워하지 말되 그잘못이 있을 때는 반드시 견책해야 합니다. 이웃을 넘어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이웃을 회복시키려는 의도여야 합니다. 이웃을 견책하는 일도 대단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 죄를 담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의 원리에 따라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고대 모든 사회의 공통된 도덕률이지만, 이렇게 율법에까지 명시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성경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성도는 마땅히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이웃의 범주에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포함됩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의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롬 12:19-21).


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를 증명하라는 백성을 향한 왕의 명령입니다.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요일 4:20-21).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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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8-02)


거룩함에 관한 명령과 경고

레위기 18장 19-30절


건강한 음식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그 음식이 주는 좋은 영향력으로 몸이 건강해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몸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나쁜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몸이 건강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원리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먹으며 살아갈 때, 그 말씀이 주는 놀라운 영향력이 있습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먹는 것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귀한 기회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하지 말아야 할 불법적인 근친 간의 성범죄 범주에서 좀 더 확대된 형태의 성적인 죄에 대해서 다룹니다. 불법적 성관계는 생명이 근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잘못된 성관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의 아내와의 성관계는 물론, 동성애의 수간, 심지어 몰렉에게 자녀를 바치는 죄악 다룹니다.

 

기타 불법적 성관계(19-23)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셔서 합당한 이유에 근거하여 복과 화를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죄를 금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행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거룩한 길이 무엇인지 배워, 그 길로 행하시길 바랍니다.

 

19너는 여인이 월경으로 불결한 동안에 그에게 가까이 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20너는 네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여 설정하므로 그 여자와 함께 자기를 더럽히지 말지니라 21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22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23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19-23)

 

사람이 중심된 이 세상은 얼마나 이중적입니다. 성희롱이나 성매매는 엄격하면서도 불륜이나 성적 방종은 관대하고 미화하기ᄁᆞ지 합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더욱 결혼과 성에 대한 세상의 생각을 성경에 비춰보며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필요할 때입니다.

 

(1) 여인과의 불법적인 성관계(19-20)

 

근친 간의 불법적 성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금지된 다른 형태의 성관계도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법적, 도덕적 논란을 일으키며, 개인과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에 대한 논의와 교육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월경 중에 있는 여인과의 불법적 성관계를 금지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여인은 아내라고 보아야 합니다. 당시에도 여성의 생리가 출산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11에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생리가 끊어진 것이 곧 출산 가능성이 없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리 중인 아내와의 성관계는 생명의 근원 혹은 쇠약하고 불결하게 된 것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여기 ‘데보타흐’의 원형 ‘연약함’이나 ‘아픈 상태’ 혹은 ‘쇠약함’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월경을 하는 여자나 출산한 여자가 육체적으로 심히 약해진 상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이런 아내와 성관계를 하는 것은 자기와 아내를 더럽히는 의식상(ritual)의 문제일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20절에서는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도 중요한 범죄로 간주합니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이웃은 단순히 주위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신뢰 관계에 기초해서 공동체를 이루는 이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아내를 범하는 것은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공동체의신뢰와 유대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기도 하며, 이웃의 아내는 하나님께서 그 이웃에게 허락하신 여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중대한 범죄로 간주됩니다.

본문은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여 설정한다’고 표현하는데, 실제 히브리어 표현은 ‘자녀를 위하여 이웃의 아내와 동침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아내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 역시 본문은 생명의 탄생과 연결시킵니다. 실제 이렇게 불법적인 성관계를 통해 태어난 자녀는 고대 사회에서도 사생아처럼 취급당했습니다.

 

(2) 몰렉 숭배 금지(21)

 

18장 전체는 성범죄와 관련되는데, 얼핏 보기에 몰렉 숭배 금지는 관련 없는 규례처럼 보이지만, 몰렉 숭배는 몰렉에게 자녀를 바치는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에 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인 자녀를 몰렉에게 산 채로 바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은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한다고 말하는데, 히브리어 본문 자체에서는 불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몰렉은 암몬의 주신인데, 불에 뜨겁게 달궈진 몰렉의 손에 어린아이를 산채로 드리는 형태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몰렉에게 자녀를 산 채로 바치는 이 행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를 죽음으로 내몰아서 생명을 단절시킵니다. 이런 이유로 불법적 성관계와 몰렉 숭배는 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몰렉에게 자녀를 주는 의식은 이스라엘에서도 여러 차례 나타났습니다(왕상 23:10; 렘 32:35 겔 23:37-39; 민 25:1-3). 신약성경에서도 동성애는 명백하게 금지되었으며(롬 1:27; 고전 6:9),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중대한 범죄입니다.

 

(3) 비정상적인 성관계 금지(22-23)

 

비정상적인 성관계는 동성애와 짐승과의 교섭을 포함합니다.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가중함’(토에바)은 혐오스러운 도덕적 문란과 마술과 우상숭배 행위를 포함한 종교적-사회적 혼란을 일으키는 행위로서 심지어 땅이 토해낼 정도로 그 오염이 심각한 것을 표현합니다(18:25,28;20:22). 현대에 이르러 동성애를 긍정 혹은 중도적 입장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동성애 자체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대한 범죄로 인정해왔습니다. 본문은 동성애를 묘사할 때, ‘여자와 동침함 같이’라고 덧붙입니다. 본문 전체에서 여자와 동침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자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고,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생명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됩니다.

둘째 금지는 짐승과 교접하는 것입니다. 짐승과 교접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더럽히는 행위이며, 가증한 일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짐승과 교접하는 수간은 어느 정도 성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문에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히타이트 법률 등에도 나타납니다. 게다가 고대 가나안이나 이집트 등의 신화들에서도 여러 차례 신들이 짐승과 성행위를 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대목이 나오고 심지어 미쉬나에서도 수간을 금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짐승과의 교접은 ‘문란’한 것인데, 이는 뒤섞임을 뜻합니다. 단순한 성적인 문란함을 넘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중대한 범죄로 봅니다.

본문에서는 여성이 짐승과 교섭하지 않도록 명령하지만, 실제로는 남성의 행위도 포함합니다.

 

가증한 풍속을 따름에 대한 경고(24-30)

성도는 이러한 성경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만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자들은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벌에 처해질 것입니다.

 

24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25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26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나 내 규례와 내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라도 행하지 말라 27너희가 전에 있던 그 땅 주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28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29이 가증한 모든 일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30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가 들어가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따름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24-30)

 

지금까지 불법의 성범죄에 대해 구체적인 규례들을 주었는데, 어제 신학적으로 재해석하고 결론적인 요약을 제공합니다. 자녀를 부모의 사적 소유로 생각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고 부릴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계십니다.

 

(1) 가나안 주민을 토해내다(24-25)

 

18장 1-23절까지 언급한 다양한 형태의 불법적 성관계는 여호와께서 매우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실제 가나안 중에 있던 주민들이 그러한 죄악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심판하사, 그 땅에서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들의 성범죄는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땅도 더러워졌습니다. 그 때문에 땅이 가나안 백성들을 토해낸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아주 역겨운 음식을 먹은 후 그 음식을 토해내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땅이 그 땅의 거민들을 토해낸다는 말은 그 백성들이 땅에서 쫓겨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을 토해낼 것임(26-30)

 

가나안 땅의 거주민들이 불법적 성관계를 통해 범죄했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셨던 것처럼, 만일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의 거민들의 죄악을 답습하게 되면, 그들도 하나님께서 쫓아내실 것입니다.

28절은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라고 표현하는데, 실제 이 문장은 수사 의문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백성들이 동일하게 범죄하면 너희도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처럼 그 땅을 더럽히면 당연히 토해낼 것이라고 강조하는 문장입니다.

창세기 15:20을 보면, 가나안 땅 거민들의 죄악이 가득 차면 땅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땅에서 쫓겨나기 전에 먼저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범죄하면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언약 백성공동체에서 끊어지게 될 것이며, 공동체적 차원에서는 그 땅이 백성들을 토해냄으로써 그 땅에서 추방되어 포로가 될 것입니다.

또한 가나안 땅에서의 거룩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족은 물론, 그 백성 중에 거류하는 나그네도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야 합니다.

 

마지막 30절은 18장 전체를 마무리하면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가나안 땅에서 그 땅 거민들의 가증한 풍속을 따름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로 마치는데, 이 표현은 18:2에서 불법적 성관계에 대한 규례를 주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을 반복한 것입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말씀과 같이, 성도의 거룩한 행실은 구원의 증거이며 음행과 탐욕을 따르는 더러운 행실은 심판의 증거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본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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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8-01)


구별된 하나님 백성의 삶

레위기 18장 1-18절


 

우리의 삶에서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가 절제입니다. 죄가 우리의 삶 가운데 다가온 것을 보면, 처음의 모습은 굉장히 달콤합니다. 그래서 그 달콤한 죄를 선택하게 되면, 그 죄 안에 날칼로운 칼이 들어있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날카로운 칼이 우리의 삶을 망가트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 이스라엘은 애굽이나 가나안의 풍속을 따라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해야 합니다. 각 사람은 자기 살붙이, 곧 어머니, 아버지의 아내, 자매, 손녀(외손녀), 고모(이모), 아버지 형제의 아내, 형제의 아내 등의 하체를 범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라(1-5)

데이비드 스툽은 ‘우리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세상 것에 대해 절제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머물러 있을 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3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4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5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1-5)

 

하나님께 선택받은 성도는 세상의 문화와 풍속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애굽의 풍속을 따르거나 가나안 땅의 규례를 행해선 안 됩니다. 그들이 따를 것은 오직 그들의 구원자 되신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야만 생명과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1) 서론적 선언(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라는 전형적인 표현을 통해 새로운 단락이 시작됨을 알립니다. 18장과 20장은 매우 유사하게 전개되는데, 본문에서 시작된 성결에 대한 규례는 20장까지 이어집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되는데,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표현(2,4,5,6,21,31절)을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 기초해 있기 때문입니다.

18장은 불법적 성관계들과 몰렉 숭배 및 그와 관련된 가증한 종교적 관행들(자녀 희생, 접신술과 마술)을 금지하고, 20장은 그 금지 명령을 어겼을 경우 뒤따를 가혹한 형벌을 경고합니다. 18장과 20장은 궁극적으로 가족 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장이 그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19장은 다양한 사회 윤리법을 나열하면서 십계명을 중심으로 동포에 대한 사랑과 약자의 보호, 사회 정의를 목표로 삼습니다. 가족 보호법이 양쪽에서 사회유지법을 둘러싸는 형태인데, 아마도 18-20장 구조는 가족이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인 것을 염두에 둔 의도적 편집으로 보입니다.

 

(2)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3-5)

 

18장 전체를 아우르는 큰 원리를 먼저 소개하는데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다른 윤리적 지침을 따라야 하기에 그들이 떠나온 애굽 땅이든지, 곧 들어갈 가나안 땅이든지 그들의 풍습과 규례를 따르는 것은 가증하고도 역겨운 일입니다. 이방의 풍습과 규례를 따르지 말라고 하면서, 18장과 20장에서는 대체로 성윤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성윤리는 가정과 결혼 제도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윤리가 이방과 구별된 삶을 대표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언약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따라야 합니다. 이를 지킴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율법을 준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근친간의 성범죄 금지(6-18)

성도의 영적인 투명함은 성적인 순결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의 문화와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첫 번째 금지 명령은 성적으로 순결한 삶과 관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상생활의 규례를 말씀하시기 전에 성 문제부터 언급하십니다. 인간 사회의 기초 윤리인 성 윤리가 무너지면 인간이 타락하기 때문입니다.

 

6각 사람은 자기의 살붙이를 가까이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7네 어머니의 하체는 곧 네 아버지의 하체이니 너는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8너는 네 아버지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아버지의 하체니라 9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버지의 딸이나 네 어머니의 딸이나 집에서나 다른 곳에서 출생하였음을 막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10네 손녀나 네 외손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하체니라 11네 아버지의 아내가 네 아버지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12너는 네 고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아버지의 살붙이니라 13너는 네 이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의 살붙이니라 14너는 네 아버지 형제의 아내를 가까이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숙모니라 15너는 네 며느리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아들의 아내이니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16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 17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하지 말며 또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데려다가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들은 그의 살붙이이니 이는 악행이니라 18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의 자매를 데려다가 그의 하체를 범하여 그로 질투하게 하지 말지니라(6-18)

 

근친간의 성범죄 금지 조항을 기록합니다. 근친의 범위를 직계 존비속과 친족과 인척까지 확대합니다. 근친간의 성범죄, 즉 근친상간은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대체로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 창세기에 기록된 근친 간의 결혼 문제는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의 고대성을 오히려 증거하는 부분입니다. 본문이 금하는 근친간의 성범죄는 크게 네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직계간의 성범죄(6-11)

 

직계 가족은 부모, 자매, 그리고 딸을 포함합니다. 촌수로 2촌까지이기 때문에 굳이 본문에서 언급하지는 않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도 포함된다고 봐야 합니다. 가장 먼저 언급된 대상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의 벗은 것은 곧 아버지의 벗은 것이기 때문에, 어머니를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는 아버지의 근본을 드러내는 죄악입니다. 친어머니를 범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중범죄에 해당하는데, 본문은 이를 조금 더 확대합니다. 아버지의 아내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아버지의 아내는 아버지의 첩이거나 어머니 사후 아버지가 재혼할 경우 계모가 이에 해당합니다(8). 창세기 35:22에서 르우벤이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사건이 이 규례와 관련됩니다.

9절에서는 아버지의 딸과의 성관계도 금지합니다. 친누이든 이복 누이든 모두 금지됩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이미 자녀가 있는 여자와 아버지가 재혼할 경우입니다. 이럴 때도 누이와의 결혼이 금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매간의 결혼은 고대 근동 특별히 이집트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풍습이었습니다.

10절은 손녀와 외손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손녀를 범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벌거벗음을 드러내는 죄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은 장모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데, 20장에서 따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금지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도 특이한데, 아마도 딸은 모든 계명에 내포되어 있고, 가장 기본적으로 금지된 관계일 것입니다. 창세기 19장에서 롯이 딸과의 관계를 통해 자손을 가지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고대로부터 딸과의 관계가 부정적이었음을 암시합니다.

 

(2) 부모의 형제 자매간의 성범죄(12-14)

 

두 번째 그룹은 부모의 형제자매로 확대됩니다. 촌수로는 3촌에 해당하는데 삼촌, 고모, 이모 등입니다. 고모나 이모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살붙이이기 때문에 법하는 것이 금지됩니다.

단순한 벌거벗음으로 표현하지 않고 살붙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고모와 이모가 실질적으로 혈연관계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만약 3촌관계에서의 성관계가 금지되어 있다면, 반대로 직격 비속으로 조카와의 성관계도 자연스럽게 금지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모와의 결혼은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 사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출 6:20). 하지만 사촌 간의 결혼이 은히 금지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3) 인척간의 성범죄(15-18)

 

세 번째 그룹은 결혼 관계로 인해 생기게 된 인천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수입은 제수, 며느리 등입니다. 형수와 제수는 형제의 하체이며, 며느리는 아들의 하체이기 때문에 엄격히 금지됩니다. 이 관계가 무너지면, 확대 가족 중심 사회에서 가족 간의 연대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형수취수법의 경우는 예외입니다. 형제가 자손 없이 죽었을 경우, 형수 혹은 제수를 아내로 취하여 형제의 후대를 이어주어야 할 책임이 형제에게 있습니다(신 25:5-10). 이는 형수 혹은 제수의 삶을 보호하고, 형 혹은 동생의 재산과 권리를 보호하는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그룹 역시 인척 관계에 따른 것인데, 아내의 직계 가족이 포함됩니다. 해당하는 사람들은 아내의 딸, 손녀, 외손녀, 아내의 자매들입니다. 결혼을 통해 아내와 한 몸이 되었기에 아내의 혈육과의불법적인 관계는 아내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수평적으로는 아내의 자매와의 성관계도 금지합니다. 레위기 율법이 주어지기 전의 일인 창세기 본문에서 자매와의 결혼 예가 나타납니다. 야곱은 레아와 결혼한 이후에 다시 레아의 여동생인 라헬을 동시에 취합니다. 이 사건은 18장이 율법으로 주어지기 전 일이기 때문에 율법 해석에서 약간은 자유롭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8절에서 ‘그로 질투하게 하지 말지니라’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레아와 라헬 사이에, 그리고 그 자녀들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났던 질투와 분쟁은 예견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동일한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아내를 취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고전 5:1). 이는 이방 가운데서도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동성애 역시 엄격히 금지됩니다(롬 1:27; 고전 6:9). 이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동성애 문제만이 아니라, 이성 간의 불법적 성관계 역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중죄임에 틀림없습니다.

극단적으로 성적인 영역에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윤리를 지키며,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게 하나님의 나라 백성 됨을 드러내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공동체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기초부터 심화ᄁᆞ지 말씀대로 구체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라는 생명의 공동체, 언약의 공동체 안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사랑하는 법을 함께 해석하고 실천하며 배워가야 합니다. 거룩하고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행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주의 몸으로 서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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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7-01)


피를 통해 배우는 생명의 소중함

레위기 17장 1-16절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영성을 위해 예배나 집회 그리고 성경공부를 참석합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배운 말씀을 잘 실천하고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말은 듣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행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씀한데로 행동하고 실천이 있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본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과 흥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 레위기 17장의 초점은 생명을 상징하는 ‘피’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장에는 화목제 규례가 보충되어 있고 그 밖에 여러 가지 법규들이 새로 주어지고 있는데, 그 규례와 법규들은 모두 ‘피’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6장의 속죄일에서 성취된 국가적인 대 속죄에서 핵심 요소는 아사셀 염소와 더불어 짐승들의 ‘피’입니다. 17장은 이제 그 ‘피’의 의미와 기능을 설명하고 취급상의 주의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16장 직후의 17장의 위치는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합법적 제의도살과 피 취급(1-9)

살아가면서 많은 위험 요소를 있습니다. 그 위험을 만나게 되면 실패나 질병과 같은 다양한 일에 대한 두려움 있습니다. 평안이 떠나고 마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위험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의 위험입니다. 우상숭배는 우리를 원한 실패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시다 하라 3이스라엘 집의 모든 사람이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영 안에서 잡든지 진영 밖에서 잡든지 4먼저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5그런즉 이스라엘 자손이 들에서 잡던 그들의 제물을 회막 문 여호와께로 끌고 가서 제사장에게 주어 화목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할 것이요 6제사장은 그 피를 회막 문 여호와의 제단에 뿌리고 그 기름을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할 것이라 7그들은 전에 음란하게 섬기던 숫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8너는 또 그들에게 이르라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혹은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 번제나 제물을 드리되 9회막 문으로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리지 아니하면 그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와 희생의 규정을 주시며, 그들이 제사를 드릴 곳은 오직 성막에서만 해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이 규정은 피를 통해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피를 먹지 말라는 경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지침입니다.

 

(1) 불법적 제사의 금지의 합법적 화목제(1-7)

 

1-9절은 언뜻 화목제에 대한 추가적인 규정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첫째 단락은 불법적인 희생 도살을 금지하는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원과 감사의 짐승 제사인 번제와 화목제를 바칠 때, 특히 화목제를 바칠 때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그들은 진영 내에서든 밖에서든(3) 불법적인 제사를 임의적인 제단에서 바쳐선 안 됩니다(3-7). 특히 진영 밖의 들판에서 ‘염소 신들’(goat-demons)에게 제사를 바치는 일이 발생해선 안 됩니다(7). 이 제사가 구체적으로 화목제라는 것이 5절을 통해 확인됩니다. 언뜻 보기에 3-4절은 모든 짐승의 도축을 성소로 제한하는 규정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이 쟁점을 둘러싼 논쟁이 깊었습니다. 일련의 학자들은 레위기 17장의 법이 사냥한 짐승은 허용하나 가축의 일반 도살을 전면 금지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논쟁은 동사 ‘샤하트’의 개념을 둘러싼 의견의 차이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샤하트’는 구약에서 제의도살뿐 아니라, 일반 도살에 대해서도 사용됩니다(예, 창 37:31; 민 11:22;삿 12:6; 삼상 14:32 등). 다수의 주석가들은 3-4절의 ‘잡다’를 일반 도살로 간주합니다. 식용을 위한 그런 도살이 이 법에서는 전면 금지되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반드시 짐승을 성소에 끌고 온 뒤 화목제로 도살해서 드려야 합니다. 만일 레위기 17장이 일반 도살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면, 이것은 신명기 12장에서 허용된 일반 도살 규정과 정면으로 어긋납니다. 역사서의 증거들 또한 신명기의 규정과 일치하고 있습니다(예, 삼상 14:31-35). 전통적인 견해는 환경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레위기 법이 주어질 때는 광야 배경이었기에 중앙 성막에 접근이 용이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백성이 일단 화목제로 하나님께 짐승을 바친 뒤 남은 화목제 고기를 집으로 가져가 식용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먼 지역은 화목제를 바치고 고기를 섭취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신명기 법을 통해 일반 도살이 허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수적 견해는 설득력이 있지만, 여전히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레위기 17장의 법이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지킬 법으로 주어졌다는 점입니다(17). 또한 설사 그것을 영원한 법으로 간주하지 않더라도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다음 몇 가지 이유로 3-4절의 동사 샤하트는 일반 도살이 아닌 제의 도살이라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첫째, 하틀리(J. Hartley)의 주장대로 3-9절의 전체 문맥을 보면 3-4절은 불법적 화목제를 금하는 제의 도살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압니다. 이어지는 5-6절의 “들에서 짐승을 잡다”에서 ‘잡다’의 히브리어가 ‘자바흐’인데, 이것은 들판에서의 제의적 도살을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3-6절은 같은 문맥 속에 있습니다. 나아가 8절은 ‘번제나 희생’(올라오 제바흐), 곧 모든 희생 제사를 포괄하는 중어법(merism)을 사용하여 그 범위를 확대합니다. 결국 3-9절의 금지는 화목제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진영 안팎의 불법적 제단에서 동물을 드리는 희생에 대한 것입니다. 둘째, 화목제로 드려진 짐승의 고기만 허용되었다면 부적격했던 흠이 있는 짐승은 버려졌습니까? 흠이 있는 짐승은 제단에서만 배제될 뿐 얼마든지 식용으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 화목제 고기만 허용되었다면 비둘기는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조류는 화목제로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4절이 네 발 짐승인 가축류의 도살만을 금지한다는 것은 이것이 일반도살이 아닌 단지 화목제의 도살을 말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넷째, 화목제 규정은 세 가지 동기로(감사, 서원, 자원) 바친 뒤 뒤풀이로 잔칫상을 벌여고기를 나누어 먹도록 합니다. 이것은 가정에서의 식용을 위한 고기 조달을 위한 규정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냥을 허용했듯이 단지 고기만을 얻기 위한 가축의 일반도살은 허용되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3-9절에서는 일반 도살이 당연히 전제되는 가운데 단지 제단에서의 불법적인 제사, 특히 화목제를 금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6절은 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만일 그런 불법적 화목제를 바친다면, 이것은 피를 하나님의 성소에 돌리지 않는 결과를 낳습니다. 만일 사적인 제단이나 임의적 제단에 화목제 짐승의 피를 뿌린다면 그것은 사실상 피 흘린 죄로 간주됩니다(4). 이 ‘피 흘림’의 죄는 무서운 ‘끊어짐’(이후 ‘제명’으로 통일)의 형벌을 불러옵니다(4). 그래서 5-6절은 하나님이 정하신 성소의 제단에 짐승의 피를 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에게 돌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제사 규정은 제사에서 피의 오용과 남용을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합법적 제사들(8-9)

 

7-9절은 그런 불법적 제사가 가장 위험하게는 들판에서 숭배된 숫염소 우상과 관련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이 광야의 숫염소 신은 분명 바로 앞 16장에서 먼 광야에 있는 악령의 이름으로 추론되는 ‘아사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1-9절은 결국 불법적 화목제와 합법적 화목제에 초점을 두면서 피가 다른 곳에 뿌려지는 일이 없도록 경고하고 오직 회막에서 모든 제사를 드려야 함을 확정합니다. 아마도 1-9절이 화목제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 제사가 고기를 나눠 먹는 잔치를 위한 제사였기에 피와 관련된 실수를 가장 잘 범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피 섭취의 금지 및 피의 의미와 기능(10-12)

하나님께서는 피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생명체에 대해 존중하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환경과 동물, 그리고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치와 존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신뢰를 쌓는 길이기도 합니다.

 

10○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11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12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 하였나니(10-12)

 

10-12절을 보면 피의 의미와 기능을 설명하는 11절을 중심으로 10절과 12절에서는 피를 먹지 말라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문맥을 고려하면, 10절은 화목제와 관련된 피의 섭취 금지를, 그리고 12절은 곧바로 이어지는 13-14절의 사냥한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는 금지와 연결됩니다. 특히 11절의 해석은 피의 대속 기능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11절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피에 관한 명제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1) 짐승의 피는 생명입니다 (2) 피는 제단에 귀속됩니다 (3) 피가 대속을 합니다. 첫째 명제는 모든 짐승의 피에 해당하며 사냥감도 예외는 아니므로 사냥한 짐승의 피 역시 절대 먹어선 안 됩니다. 둘째 명제는 희생으로 바쳐지는 짐승의 피는 결코 불법적 제단이나 다른 곳에서 임의로 처리해선 안되고, 반드시 제단으로 돌려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바쳐진 희생 짐승의 피는 대속의 효과를 불러옵니다. 이때 대속의 효과를 지닌 피는 모든 희생 짐승이 아닙니다. 바로 속죄의 제사들인 속죄제/속건제, 그리고 좀 더 폭넓게 원죄를 해결하는 번제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제외되는 셈입니다.

 

비희생 짐승들의 피 섭취 금지(13-16)

우리는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피는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생명의 상징이며,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자연과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환경과 생태계, 그리고 우리 주변의 생명체들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13모든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 먹을 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여 잡거든 그것의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지니라 14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15또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모든 자는 본토인이거나 거류민이거나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는 정하려니와 16그가 빨지 아니하거나 그의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그가 죄를 담당하리라(13-16)

 

마지막으로 사냥한 짐승은 몸통의 피를 제거하고 고기를 먹을 것과(13-14) 자연사하거나 찢겨 죽은 짐승들은 먹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15-16). 두 법령 모두 피 문제가 핵심입니다. 피는 곧 생명이며, 생명은 하나님께 속하므로 만일 피를 먹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하나님의 영역을 심각히 침해하는 셈이 됩니다. 이것은 생피를 먹는다기보다 도살이나 사냥을 해서 잡은 짐승의 피를 뽑지 않고 고기를 피째 먹는 행위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 위반자에 대해서는 ‘제명’이라는 높은 수위의 징벌이 가해졌습니다(14). 그러나 자신이 죽이지 않은 짐승, 즉 자연사했거나 찢겨 죽은 짐승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런 짐승 역시 몸에 피가 남아있는데, 이런 짐승을 섭취했을 때에는 징벌이 심각하진 않아 옷을 빨고 목욕을 한 뒤 저녁까지 부정한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15). 만일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그 사람 역시 그것에 대해 중대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와 피에 관한 규범을 주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장은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며, 피는 생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오직 성막에서 드릴 것을 명령하심으로써,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또한, 규범을 따르는 순종의 중요성과 영적 정결함의 필요성을 일깨우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책임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신앙의 삶을 실천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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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6-03)


영원히 지킬 큰 안식일

레위기 16장 23-34절


 

속죄일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본문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죄를 인식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분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 시간, 속죄일의 깊은 의미를 살펴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우리 삶에서 진정한 회복과 치유를 경험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속죄일에 가장 중요한 속죄제 의식과 아사셀 염소 의식으로 구성된 특수 속죄제를 마무리한 후, 대제사장은 세마포 하얀 옷을 벗고 자신의 정규 대제사장 복장을 다시 입습니다. 이것은 속죄제 의식과 아사셀 염소 의식이 한 묶음의 제사였음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그는 대제사장 복장을 입고 자신의 가족과 백성을 위한 두 개의 번제를 드립니다.

 

속죄일의 번제 의식(23-28)

흠 없고 온전하신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는 완벽한 제사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다른 희생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아론이 회막에서 제사 직분을 감당할 때는 지성소에서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고 거룩한 곳에서 물로 몸을 씻습니다. 제사장의 옷인 에봇으로 갈아입고 하나님께 번제와 속죄 제사를 드립니다.

 

23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 두고 24거룩한 곳에서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려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25속죄 제물의 기름을 제단에서 불사를 것이요(23-25)

 

대제사장 아론은 이제 회막 안에서 세마포 옷을 벗고 마당으로 나와 ‘거룩한 곳’에서 목욕을 한 다음 다시 자신의 평상복, 즉 대제사장 관복을 입습니다. 이곳이 성막 경내의 어느 곳인지, 별개의 시설물이 존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떡상과 등대, 향단이 놓인 매우 엄숙한 본당 건물 안에서 알몸으로 목욕을 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소는 마당에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목욕 후 다시 본당으로 들어와 대제사장 복장을 입었을 것입니다. 이때 본당에서 마당으로 알몸으로 왕래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아마 커튼으로 가리며 나갔거나 별도의 목욕용 속옷을 입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옷을 갈아입은 아론은 이제 자신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 즉 두 번제를 연거푸 드립니다. 그리고 속죄 제물의 기름을 그 번제물 위에 올려 태웁니다. 여기서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는 두 번제를 드리자 백성을 다시 속죄했다고 진술되는 것이고, 또한 속죄제의 기름이 이제야 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번제가 만든 속죄는 또 무엇입니까? 앞서 속죄제와 아사셀 염소 의식으로 성취한 속죄와 별개의 것입니까? 별도의 속죄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번제를 통해 속죄가 만들어졌다는 의미는 앞서 이미 성취된 속죄의 인준, 혹은 비준의 진술로 보아야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이 번제는 일차적으로 이루어진 속죄에 대한 감사의 성격이 있었먼 것으로 보입니다(예, 12장과 14장에서도 속죄제로 부정결의 문제가 최종 해결된 다음 번제가 드려진다). 분명히 백성의 속죄는 본질적으로 속죄제와 아사셀 염소 의식을 통해 만들어지나, 속죄일 전체의 예식 중 하나라도 누락되면 속죄는 달성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측면에서 이 두 개의 번제 또한 속죄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번제가 드려지고 난 다음 속죄제 기름이 비로소 태워집니다. 원래 모든 제물들이 번제물이 아침저녁으로 계속 타고 있는 제단 위에서 태워지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속죄일에도 매일의 상번제는 아침에 이미 드렸던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 위에다 소와 염소의 속죄 제물의 태울 부분을 올려서 태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마지막 두 개의 번제가 드려진 뒤에 최종적으로 미루어 놓은 소와 염소의 속죄 제물 기름 태우기가 진행됩니다. 이것은 여러 짐승으로 구성된 거대한 속죄일 예식의 단일한 통합성을 엿보게 합니다.

 

우리가 앞서 관찰한 바는 이것입니다: 두 마리의 염소가 한 속죄제를 구성하고, 또한 그중 속죄제 염소는 속죄제 소와 피가 혼합됨으로써 묶이고, 마지막으로 대제사장이 세마포 옷을 입고 두 속죄제와 아사셀 염소의식을 진행하는 것을 볼 때, 결국 소와 두 염소가 모두 결합되어 하나의 속죄제를 구성합니다. 이제 대제사장 옷을 입고 진행하는 번제는 명백히 별개의 제사인데, 이 번제도 속죄제 기름을 나중에 태움으로써 양자가 결합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속죄일 예식의 마무리 의식(26-28)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정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이나 갈등을 겪은 후에도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예식에서 아사셀 염소를 통해 모든 죄를 광야로 보내는 과정은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26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낸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그의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들어갈 것이며 27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다가 불사를 것이요 28불사른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그의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들어갈지니라(26-28)

 

번제를 마친 후 최종적으로 남아 있는 의식은 이제 모든 제사들을 뒷정리하는 마무리 의식입니다. 먼저 아사셀 염소를 보낸 사람이 진영으로 복귀합니다. 이때 그는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합니다. 이어서 두 속죄제 짐승, 곧 소와 염소의 잔존물을 밖에 내다 불사른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 사람 역시 동일한 정결 절차를 밟습니다. 여기서 또다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복귀 의례의 순서입니다. 만일 두 개의 정결 절차의 순서가 시간 순서대로라면, 흥미롭게도 복귀 의례의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아사셀 염소 의식이 두 속죄제보다 나중에 진행되었는데, 복귀의례는 먼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두 속죄제 의식의 마무리 순서로 고기를 태운 사람이 복귀의례를 거칩니다. 즉, 속죄제 의식의 마무리 절차와 더불어 모든 속죄일 예식이 종결됩니다. 이것은 두 속죄제와 아사셀 염소 의식이 결합되었다는 또 하나의 통합성의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아가 속죄제의 마무리 절차와 더불어 속죄일 예전이 끝난다는 것은 속죄일 예전이 속죄제로 마무리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이로써 3절에서 속죄 제물을 가져온다는 지침으로 시작된 속죄일 예식은 마지막의 속죄제의 마무리 의식과 더불어 끝나는 가운데, 지정 의례, 두 속죄제, 아사셀 염소 의식, 두 번제, 그리고 마지막의 마무리 의식들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단위의 예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월력의 지정과 추가적 지침(29-34)

속죄일은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는 날입니다. 이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이 필요함을 상기시킵니다. 개인적인 성찰과 회개는 정신적, 영적 건강에 중요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치유 과정을 통해 개인과 사회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결국 속죄일의 의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29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달 십 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30이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31이는 너희에게 안식일 중의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32기름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자기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제사장은 속죄하되 세마포 옷 곧 거룩한 옷을 입고 33지성소를 속죄하며 회막과 제단을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34이는 너희가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 년에 한 번 속죄할 것이니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29-34)

 

속죄일의 날짜와 이날을 위한 대제사장의 자격과 백성의 준비를 법제화합니다. 그날은 일곱째 달(Tishri) 10일이며, 그날 백성들에게 ‘자기 부인’(self-denial)과 ‘안식’이 요구됩니다(29-31).

이어서 그날 예식을 진행할 대제사장은 아버지의 후계자로 기름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한다고 명시됩니다(32-33). 속죄일 준수의 의무는 이스라엘 본토인들만이 아니라 장기 체류하는 이방인들, 현대의 방식으로 하자면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도 해당됩니다.

성경에서의 의미론적 범위와 랍비들의 정의에 의하면, ‘자기부인’(29,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에는 금식, 땅 위에서 자기, 옷을 갈아입지 않기, 성관계 절제, 목욕 금지 등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금욕 행위들은 백성들의 죄 고백과 참회가 역시 동반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자기 부인은 속죄일의 속죄 효력을 위해 필수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속죄일 예식은 무효할 것입니다. 율법은 그 정신은 버리고 빈껍데기를 지킨다고 효력이 발생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0,33-34절에서 속죄일의 목적이 반복적으로 진술됩니다: 성소의 속죄(정화)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 특히 34절은 마지막 결론적 진술로서, 그날의 최종 목적을 선언합니다: 이 규례는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년에 한 번 전면적 속죄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아사셀 염소는 속죄제의 일부라고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이날 특수한 속죄제가 만들어졌습니다. 두 짐승(소와 염소)이 희생되어 그 피는 제사장 집안과 백성들 양자가 발생시킨 성소 각 영역의 오염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모든 죄는 아사셀 염소가 담당하여 광야로 운반해서 제거했습니다. 평일의 속죄제에서는 속죄제 짐승 한 마리가 이 두 역할을 모두 감당했습니다. 그 짐승에게 죄가 전가되었고, 이어서 그 피가 성소에 들어가 오염을 닦아내, 그 짐승에게 제사자의 죄와 성소의 오염이 모두 묻었습니다.

그 짐승의 고기를 오염이 심한 것은 진영 밖에 태웠고, 경미한 오염은 먹을 만하여 제사장의 수고비로 건넸습니다. 그러나 속죄일에는 이 역할이 도살된 속죄제 짐승들과 살아있는 아사셀 염소에게로 양분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속죄일에 아사셀 염소도 속죄제의 일부로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견해의 문제는 살아있는 채 아사셀에게로 보내지는 염소가 엄밀한 의미에서 희생물로 분류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희생은 도살과 피 뿌림, 그리고 고기 처분의 과정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로 그것은 '속죄제' 희생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1) 기능적 측면에서 그 산 염소는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해 사용됩니다; (2) 또한 그것은 회중이 골라온 흠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3) 그것을 성소로 가져와 여호와 앞에 세워놓아야 합니다; (4) 더불어 그것은 다른 염소와 함께 짝을 이루어 ‘속죄제’로 지정됩니다(5); (5) 다른 희생 짐승들처럼 안수가 시행됩니다(21); (6) 속죄제 짐승처럼 아사셀 염소도 최종적으로 광야에서의 죽음을 내다봅니다. 마지막으로 속죄일에 처리된 죄는 무엇입니까? 평일에 속죄제/속건제로 죄가 처리되어 왔다면, 이 죄는 무엇입니까? 평일에 백성들의 비고의적 죄와 신체적 부정결은 일반 속죄제를 통해 해결되었으므로, 이미 해결된 그 죄와 부정결들은 해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레위기의 속죄제 시스템 속에서, 속죄일까지 누적된 죄들은 평일에 용서받지 못한 악행이나 망각해서 깨닫지 못해 해결되지 않은 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죄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이 의식은 개인과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정리하고, 그것을 통해 회복과 성장을 경험해야 합니다. 또한, 아사셀 염소를 통한 죄의 전가는 우리의 책임을 일깨워줍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진정한 치유를 이루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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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6-02)


속죄 제사가 필요한 인간

레위기 16장 11-22절


 

예수 그리스도는 죄 없는 대제사장이며 궁극적인 희생제물입니다. 그는 지상의 대제사장과는 달리 완벽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완벽함 덕분에 자신을 위해 희생제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희생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의 죽음은 모든 인류의 죄를 씻는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는 신과 인류를 연결하는 중재자입니다. 그의 희생은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길입니다.

 

  • 속죄일 예전을 위한 모든 제물이 준비되어 역할이 결정된 뒤, 아론은 먼저 두 번의 속죄제를 실행합니다. 하나는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소의 속죄제이고, 다른 하나는 회중을 위한 염소의 속죄제입니다. 두 짐승의 피가 각각 지성소와 내성소에 반입되어 각 기물과 공간을 씻기 위해 뿌려지고, 마지막에 두 피가 혼합되어 마당의 번제단에서 뿌려집니다. 이어서 대제사장 아론은 아사셀 염소 의식을 진행합니다.

 

속죄일의 속죄제 의식(11-19)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를 지을 수 없으며,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고백을 통해 활동하는 삶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와 우리의 모든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마리아의 힘은 우리가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억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변화와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11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 자기를 위한 그 속죄제 수송아지를 잡고 12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13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14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15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16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17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의 집안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 나오기까지는 누구든지 회막에 있지 못할 것이며 18그는 여호와 앞 제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19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제단을 성결하게 할 것이요(11-19)

 

본문에서는 대제사장이 속죄제를 위해 자신의 죄를 위한 희생양을 드리는 과정이 설명됩니다. 그는 그 양의 피를 성소에 뿌려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죄하고, 또 다른 염소는 ‘아사셀 염소’로 보내져 백성의 죄를 상징적으로 짊어집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체의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수행합니다.

 

(1) 아론과 그의 가족을 위한 속죄제(11-14)

 

대제사장 아론은 먼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속죄를 위해 속죄제 수소를 잡습니다. 이어서 피를 뿌리기 전에 향로(출 25:38 ‘불똥 그릇’)를 취해 향을 피운 뒤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지성소 안을 향연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때 향연은 히브리어로 ‘구름’이라는 뜻입니다. 시내산 위에 발현된 여호와의 불과 광채의 영광이 구름으로 가려져 산 아래의 백성들이 죽지 않았으며, 모세가 산 정상 위로 올라가 죽지 않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아론은 향로를 놓고 밖으로 나와 받아놓은 수소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 위에 한 번 뿌리고 이어서 그 바닥에 일곱 차례 뿌립니다. 이런 피 뿌리기는 명백히 속죄소를 씻어내고 지성소를 청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향료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당의 놋제단에서 태운 단순한 ‘유향’보다 비싼 것은 내성소의 향단에서 태운 ‘향기로운 향’이었고, 가장 비싼 것은 지성소에 사용된 ‘곱게 간 향료’였습니다.

 

(2) 백성을 위한 속죄제(15-19)

 

이어서 대제사장 아론은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은 뒤 그 피를 가지고 다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동일한 피 의례를 수행합니다. 그 후 그 짐승들의 피를 내 성소에서 뿌리는데, 마찬가지로 향단 위에 한 번 뿌리고 향단 앞의 바닥에 일곱 번 뿌려 향단과 그 공간을 청소했습니다(16). 피 의례의 마지막 단계로 아론은 두 짐승의 피를 마당으로 가지고 나와 놋제단의 네 모퉁이 뿔에 바르고 손가락으로 그 위에 일곱 차례 뿌립니다. 이때 소의 피와 염소의 피가 혼합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바르고 뿌리는 마당의 피 의례가 한 차례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짐승의 피의 혼합은 두 개의 속죄제가 결합되어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이미 두 염소가 한 속죄제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 한 마리가 피의 혼합을 통해 소와 결합됩니다. 따라서 짐승 세 마리가 모두 연결고리들을 통해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피 의례를 통해 제단이 깨끗하게 되고 거룩하게 됩니다(한글개역개정의 ‘성결케 되다’는 오역). 여기서 밀그롬과 게인은 ‘깨끗하게 되고 거룩하게 된다’에 대해 깨끗함은 제단에 피를 바른 결과이고 거룩함은 제단에 일곱 차례 피를 뿌린 결과라고 주장하나 이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레위기 4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언제나 피를 일곱 차례 뿌리는 효과는 정화력입니다. 만일 여기서 일곱 차례 피뿌림이 성화를 가져온다면, 레위기 4장에서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양자가 달라야 할 그 어떠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일곱 차례 피 뿌림은 양자 모두에서 정화의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렇다면 왜 ‘거룩하게 되다’가 이어집니까? 속죄일의 속죄제 피 의례는 두 차례에 걸친, 더욱 특수한 방식의 피 뿌리기였기에 철저한 청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철저한 청소의 결과가 거룩의 효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미 제단과 성막은 거룩합니다. 따라서 이 ‘거룩의 성취’는 다만 오염으로 거룩이 훼손되어 있는데, 그것을 피 의례로 철저하게 씻어냄으로써 다시 원래의 완전한 거룩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거룩하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해석은 이것입니다: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된다.”

 

16절의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부정과 악행과 모든 죄’는 19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으로 요약됩니다. 이 부정은 유출이나 피부병과 같은 의식적 부정결이라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죄로 인해 발생한 이스라엘의 부정함을 말하며, 또한 그것이 성소에 전염되어 성소에 엉겨 붙은 그들의 더러움을 말합니다. 19절은 그것을 정확히 밝혀주고 있으며, 속죄제의 피가 바로 그것을 닦아낸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아사셀 염소 의식(20-22)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이는 개인의 영적 성장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첫걸음입니다. 또한, 공동체의 죄를 함께 짊어지는 연대감과 책임감을 강조합니다.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나누는 것이 진정한 치유로 이어집니다. 결국, 속죄는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회복을 위한 과정임을 일깨워줍니다.

 

20그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살아 있는 염소를 드리되 21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22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20-22)

 

이어지는 순서는 아사셀 염소 의식입니다. 21절의 해석은 ‘이스라엘의 모든 불의, 악행, 죄’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즉, 이 살아있는 염소 머리 위에 아론이 두 손을 안수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불의’와 ‘악행’과 ‘죄’를 고백하여 그것들을 그 염소 위에 전가합니다. 그 염소는 미리 임명된 어떤 사람이 먼 광야로 데려가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풀어놓습니다. 구체적으로 ‘에레츠 게제라’는 멀리 떨어져 있는 황무지를 말합니다. 이로써 백성들의 모든 죄가 진영 밖으로 방출되어 제거됩니다. 21절의 삼중적 악인 불의, 악행, 죄가 22절에서 ‘불의’로 요약됩니다. 즉, 한마디로 아사셀 염소에게 전가된 것은 백성의 ‘죄’입니다. 반면에 16절에서 ‘부정, 악행, 죄’로부터 성소가 씻기는데, 그것이 19절에서 ‘부정’으로 요약됩니다. 한마디로, 속죄제의 피로 씻긴 것은 성소의 ‘부정’입니다. 요약하자면, 성소의 부정결은 두 속죄제 짐승이 씻어내고, 그것을 발생시킨 백성의 모든 죄는 아사셀 염소가 대신 짊어지고 제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유보한 쟁점들을 다룹니다. 우선 ‘아사셀’의 정체입니다. 그곳은 아사셀(Azazel)의 지역인데, 히브리어 ‘아자젤’이 악령의 이름의 잔재인지 아니면 낭떠러지나 험한 계곡과 같은 지명을 가리키는 고어인지 논란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힘’과 같은 설명식으로 만들어진 단어라는 주장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랜 전통 속에서 그것은 22절의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암시된 바와 같이 일종의 험한 낭떠러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 저 멀리 광야에 숫염소 형상의 악귀가 거주하고 있다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17:5에서 추론컨대, 아마도 이미 이집트 땅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들판에서 염소 신을 섬기는 관행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아사셀은 악령의 이름으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가 살아있는 염소를 통해 그 죄들이 원래 기원했던 아사셀 악령에게 되돌아갑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더럽히고 또한 자신들의 처소와 진영, 나아가 성막을 더럽힌 그 쓰레기들을 즉시 청소해서 제거해야 했습니다. 그 수단이 바로 속죄의 제사들인 속죄제/속건제였습니다. 이런 청소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반복되었지만, 마치 장롱 밑이나 마루 아래의 잘 보이지 않는 어떤 과자 부스러기나 간혹 큰 덩어리의 오물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거하지 못하고 누적되어가는 쓰레기들이 있었습니다. 날을 잡아 집안 대청소를 하듯이 이스라엘도 일 년에 한 차례 날을 잡아 국가적 대청소를 해야 했습니다. 그날이 바로 레위기 16장의 속죄일입니다.

 

아사셀 염소가 최종적으로 백성의 속죄를 위해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광야로 방출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10a절 어구의 정확한 해석을 시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카페르 알라이브’ 이 어구에 대해 학자들마다 자신의 속죄제 이론에 따른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부정사 구의 주어는 아론이고 마지막의 목적 대명사는 염소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일단 문자적으로 풀어서 해석한다면 이렇습니다. ‘그가 그것(염소)을 위해(알) 속죄하기 위해’. 그러나 학자들은 짐승을 속죄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럽기에 전치사 ‘알’에 대해 다른 해석을 시도합니다: ‘그가 그것 위에서, 그것을 통해서 속죄하기 위해.’ 하지만 이런 해석은 전치사 알의 용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억지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이 어구의 주어는 아론이 아니라 아사셀 염소입니다. 그렇다면 뒤의 목적격 대명사는 ‘그것(염소)’이 아니라 ‘그’(아론)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10절의 문장이 수동태로서 아사셀 염소가 주어라는 사실을 통해 지지를 받습니다. 그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세워진다’(수동태), 전체를 풀어 해석하면, ‘그 염소를 여호와 앞에 세워둬 그것이 그를(아론) 속죄하도록 하기 위해 아사셀에게로 광야로 보낼지니라.’ 다시 말하자면, 아사셀 염소는 ‘그’, 즉 ‘아론’을 속죄합니다. 이것은 21절에서 아론이 백성 전체를 대표해서 그 염소의 머리 위에 안수하여 백성의 모든 죄를 전가한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타당한 해석입니다. 그 염소가 백성을 대표하는 아론을 속죄할 때 백성이 결국 속죄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인정과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속죄의 의식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임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연대감을 잊지 않고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며 책임을 함께 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치유와 회복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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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6-01)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속죄 제물

레위기 16장 1-10절


성도는 죄의 인식과 회개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정직하게 죄를 인정하는 것은 회복의 첫걸음입니다.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회개로 이어집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필수적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레위기 16장은 레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속죄일 예전에 대한 규례입니다. 이 예전은 여러 가지 제사들을 연하여 드리는데, 이 제사들은 각 단계들을 잇는 절묘한 연결고리들로 상호 통합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제사들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한 단위의 예전을 구성합니다. 목적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속죄를 위함입니다. 이 국가적 속죄는 평일에 성취되는 개인의 속죄와 별개로 성취됩니다. 따라서 평일의 속죄제와 속죄일의 속죄제의 관계를 잘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속죄일 예전의 지시와 준비(1-5)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인정하고 속죄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정직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공동체의 죄를 함께 짊어지는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준비와 경건함이 신앙 생활에서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며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3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를 속죄 제물로 삼고 숫양을 번제물로 삼고 4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5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양 한 마리를 가져갈지니라(1-5)

 

본문에서는 아론이 대속죄일에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아론은 두 마리의 염소를 준비하고, 하나는 여호와께 드리고, 다른 하나는 '아사셀'에게 보내어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합니다. 이 절차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속죄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1) 서론적 진술(1-2)

 

레위기 16장은 10장의 서사를 잇는 도입문으로 시작됩니다: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즉, 16장은 10장을 곧바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 사이에 갑자기 11-15장이 끼어있습니까? 이것은 언뜻 볼 때 서사의 흐름을 가로막는 아주 형편없는 후대의 편집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웬함이 말한 대로, 레위기 11-15장의 부정결 문제는 16장의 속죄일 규정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배경을 제공합니다. 16장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와 성소의 부정결을 제거하는 날입니다. 죄의 문제는 일단 4-5장에서 속죄제와 더불어 거론되었습니다. 따라서 부정결의 문제가 16장 이전인 11-15장에 등장하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어쨌든 이 속죄일 규정은 서사의 흐름 속에서는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직후 제정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1-2절의 서론적 진술은 적절하게도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시작됩니다. 다소 어렵고 복잡한 설명이 이제부터 주어집니다. 속죄일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의식들이 진행됩니다: (1) 속죄제 짐승들의 지정 의례(6-10); (2) 두 짐승의 결합된 속죄제(11-19); (3) 아사셀 염소 의식(20-22절); (4) 두 결합된 번제(23-25); 5) 마무리 의식(26-28). 속죄일에 실행된 위의 다섯 가지 의식들은 연쇄적으로 결합되는데, 각 단계마다 특정한 연결고리들이 존재합니다.

 

(2) 속죄일 예전을 위한 제물의 준비(3-5)

 

이 거대한 예식을 진행하기 위해 먼저 짐승의 제물들이 준비되고 대제사장 아론도 특별 복장을 갖춥니다. 아론과 자신의 집을 위해서는 속죄제용 수소 한 마리, 번제용 숫양 한 마리를 준비하고 아론 자신은 목욕을 한 다음 대제사장 관복을 벗고 밋밋한 거룩한 세마포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회중의 속죄제를 위해서는 두 마리의 염소가 동원되고 번제용 짐승은 마찬가지로 숫양입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 아론이 단순한 세마포 옷을 입는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제안들이 있어 왔습니다. 하란(Haran)은 그 옷들의 하얀색은 천사의 수준에 상응하는 더 높은 거룩의 수준을 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밀그롬도 같은 생각을 품지만, 라이트(D. P. Wright)를 따라 여기에 중요한 실천적 이유의 가능성을 추가합니다. 그 단순한 세마포 옷은 “정규 제사장 복장이 그 의식에서 다량으로 뿌려진 피로 적셔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주석가들이 말한대로, 그 세마포 옷은 모든 화려한 장식이 제거된 것으로서 대제사장인 아론의 특별한 거룩의 상태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여호와의 임재 앞 가장 거룩한 장소로 들어갈 아론의 겸손을 상징했을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괴롭게 하고 일을 중단해야 하는 그날의 성격에 비추어(16:31), 이 견해는 가장 그럴듯합니다. 대제사장은 그날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마포 옷을 입은 상태에서 제사장은 온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들’을 그 살아있는 염소에 전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21). 이때 그는 이스라엘 족속의 대표로서 뿐만 아니라, 회중의 한 일원으로서 그 일을 수행하였으며, 그리함으로 그는 회중의 모든 죄로부터 그들을 위한 속죄를 행할 수 있었습니다.

 

세마포 복장과 더불어 아론이 회중의 일부가 되어온 이스라엘 위해 ‘통합된 속죄제 의식’을 행하였다는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중대합니다. 첫째, 아론의 세마포 옷은 두 짐승의 속죄제와 아사셀 염소가 ‘통합된 속죄제 의식’을 구성한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둘째, 그가 그 옷을 입고 이스라엘 족속의 한 일원으로서 회중을 위한 대표가 된다는 것은 10절의 어구 ‘레키페르 알라이브’의 이미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아론의 세마포 옷이 두 짐승의 속죄제와 아사셀 염소 의식의 통합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학자들에 의해 간과되어 왔습니다. 대제사장은 그 특별한 복장을 갖추고서 세 가지 의식을 연쇄적으로 수행합니다: (1) 속죄제 짐승들의 지정 의식(6-10); (2) 두 결합된 속죄제 의식(11-19); (3) 아사셀 염소 의식(20-22). 여기서 아론은 마지막의 아사셀 염소 의식을 마친 후에 내성소로 들어가 몸을 씻은 뒤 자신의 정규 대제사장 복장으로 갈아입습니다. 뒤이어 자신과 백성들을 위한 두 양의 번제를 각각 수행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번제 이전의 그 두 결합된 속죄제 의식과 아사셀 염소가 한 가지 공동의 목적, 곧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해 하나로 엮인 통합된 의식으로 수행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5절은 속죄일에 드려진 속죄제 기능의 이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염소 두 마리와...” 여기서 두 마리의 염소가 속죄제를 위해 취해진다는 것은 난해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한 마리는 속죄제로 바쳐지지만(9,15), 다른 하나는 살아있는 채로 광야로 아사셀에게 보내지기 때문입니다(8,10,21-22). 이 어려운 구문에 대하여 하틀리는 저자가 단지 ‘속죄제’만을 언급함으로써 복잡한 설명을 피하려고 짧고 간결한 진술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드리게즈(Rodriguez)는 “속죄제를 위한 염소가 아직 선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그 둘 중 하나는 속죄제였다”고 답변합니다. 이러한 견해들은 아사셀 염소를 속죄제 제물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우치(Kiuchi)는 두 염소가 회중을 위한 단일한 속죄제 제물로 기능하기 위해 결합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그는 레위기 16장의 아사셀 염소는 레위기 4장의 진 밖의 한 정결한 장소에서 수행된(레 4:12) ‘속죄제 짐승 태우기’의 특수한 형태(special form)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광야로의 아사셀 염소의 방출은 진 밖에서 속죄제 고기를 소각하는 것에 상응하는데, 기우치에 의하면 둘 다 ‘죄책’(guilt) 제거 기능을 감당합니다.

 

무니(D. J. Mooney)는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는 회중을 위한 이 두 염소가 제사장을 위한 소 한 마리의 제의적 가치에 상응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 제안은 아래 도식을 볼 때, 매우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 가족: 속죄제 숫소+ 번제 숫양

이스라엘 회중: 속죄제 두 숫염소+ 번제 숫양

 

결론적으로 두 숫염소는 하나의 속죄제를 구성하며, 따라서 둘 중 하나였던 아사셀 염소는 속죄제의 일부를 구성합니다. 다시 말해, 아사셀 염소 의식은 속죄제 의식의 일부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 의식: 짐승들의 지정(6-10)

살아가면서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필요성이 있습니다. 정기적인 자기 성찰을 통해 삶의 방향성을 점검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책임과 화합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큰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신앙 생활과 인간관계에 큰 도움이 됩니다.

 

6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 7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8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9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10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6-10)

 

준비된 짐승들을 가지고 아론은 각 짐승의 역할을 확정적으로 지정하기 위한 절차를 밟습니다. 다른 짐승들은 역할이 결정된 상태이나 두 염소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두 짐승 중 어느 것이 도살해서 여호와께 속죄제로 드려지는 염소가 되고, 어느 것이 산 채로 광야로 방출되는 염소가 될 것인지 확증해야 합니다. 아론은 제비뽑기로 이것을 결정합니다. 아론은 두 염소를 모두 여호와 앞에 세워둡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제비를 던집니다. 구약 어디에서도 제비뽑기의 실체만 알려줄 뿐 그 방법과 결과를 확증하는 과정은 침묵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제비뽑기의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세 가지 중요한 토론 거리가 주어집니다: 첫째, 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내는데, 아사셀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둘째, 10a절의 ‘그것으로 속죄하고’라는 문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합니까? 셋째, 아사셀에게 보내는 염소, 즉 아사셀 염소는 속죄제의 일부입니까? 지면상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한 논의는 다음 본문으로 넘깁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쟁점은 속죄일의 속죄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에서 가장 중대한 변수라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대속죄일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죄의 심각성과 그에 대한 속죄의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아론이 두 염소를 통해 죄를 지우고, 하나는 여호와께 드리고, 다른 하나는 광야로 보내는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분의 용서를 간구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화해와 회복의 길을 제시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도 지속적인 회개와 신뢰가 필요함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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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5-02)


부정함의 의미: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하기

레위기 15장 19-33절


 

부정함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회개는 이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는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는 기반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회복 과정을 기다리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현대인들이 신앙 생활을 더욱 깊이 있게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 남성의 유출증에 이어 여성의 유출증을 다룹니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생식기로부터의 정상적, 비정상적 유출 증상들은 부정하게 여겨집니다. 여성의 경우 유출 증상은 생식기에서 피가 나오는 경우에 국한됩니다. 산모의 경우에도 자궁에서 출혈이 발생하며, 성인 여성의 생리와 혈루증이라 불리는 만성자궁출혈도 그러합니다. 이것들은 역시 이차 감염을 발생시키며 출혈 기간 동안 정상적 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습니다.

 

여자의 유출과 이차 감염(19-24)

부정한 상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로 삼아야 하며, 서로를 지지하는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 구절은 영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부정함 속에서도 사랑과 회복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현대인들이 신앙을 깊이 있게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19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의 몸에 그의 유출이 피이면 이레 동안 불결하니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20그가 불결할 동안에는 그가 누웠던 자리도 다 부정하며 그가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한즉 21그의 침상을 만지는 자는 다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2그가 앉은 자리를 만지는 자도 다 그들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3그의 침상 위에나 그가 앉은 자리 위에 있는 것을 만지는 모든 자도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4누구든지 이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불결함에 전염되면 이레 동안 부정할 것이라 그가 눕는 침상은 다 부정하니라(19-24)

 

여자의 자궁 출혈 또한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매달 생리적 현상으로 찾아오는 월경과 다른 하나는 비정상적으로 자궁 출혈이 계속되는 경우입니다. 월경이 찾아오면, 여자는 7일간 부정한 상태로 지냅니다. 이것은 피가 멈춘 후 7일째가 아닙니다. 피가 보이기 시작한 후 일주일의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대략 여성의 평균 월경기간과 일치합니다. 7일째 되는 날 여자는 본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추론컨대 옷을 빨고 목욕을 한 뒤 그날 저녁이 되면 정결을 회복합니다. 아마 당일에 여자가 사용했던 침대와 자리도 함께 청소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때 그 여자는 성소에 올라가 희생을 드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어지는 만성 자궁 출혈에 비해 부정결의 정도가 낮았습니다. 여자의 월경 기간에 사물과 접촉하면 그것에 부정결이 감염됩니다. 앞서 말한대로 잠깐의 단순 접촉은 사물만 오염시키나, 앉거나 눕는 과다한 접촉은 감염 정도가 심해 그 사물(앉았던 자리나 침대)을 통해 이차 감염이 발생합니다. 현재의 율법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아마도 그 경우 사물에도 이차 감염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성기의 만성적 유출증을 겪는 남자와 월경을 치르거나 만성 자궁 출혈을 앓는 여자가 앉거나 눕는 곳이 더럽혀지는 이유는 바로 액체가 유출되는 성기의 직접적인 접촉 때문일 것입니다.

 

월경 중인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본문은 남자가 여자와 마찬가지로 7일간의 부정결 기간을 겪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7일째 되는 날, 본문에 역시 언급되지 않으나 그는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18:19와 20:18에서는 그런 행위가 ‘제명’의 형벌을 받는 범주에 포함됩니다(참조. 겔 18:6: 22:10; 36:17). 이때 남녀 모두 그 형벌을 받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런 모순에 대해 두 본문 간의 초점의 차이, 즉 현재의 본문은 부정결의 전염성의 문제와 정결 과정에 관심을 두는 반면, 레위기 18:19 및 20:18은 그런 행위의 범주적 금지와 더불어 징벌에 초점을 맞추면서 상호보완적이라고 얼버무립니다. 그렇다면, 정결케 된 뒤에 제명되었다는 것입니까? 분명 둘 사이에는 그 부정결을 처리하는 방법에 있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 하틀리가 제시한 대로, 현재의 본문이 다루는 것은 알지 못한 가운데(예. 월경 초기) 월경 중인 아내와 잠자리를 가진 경우로 비고의적인 접촉에 의한 감염인 반면, 레위기 18, 20장에서는 고의적인 성관계를 지시한다고 봐야 합니다. 후자의 경우에 남녀가 동반 징벌을 받으며 이 중대한 오염에 둘 다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은 고의성이 있는 범죄인 것입니다. 다만 레위기 18:19에서 남자에게 월경 중인 여자에 대한 접근금지를 경고한 것으로 보아, 이 법규에는 월경 중인 여자를 보호하는 취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합의로 이런 금지된 성관계가 발생하면, 둘 다 제명의 징벌을 받습니다. 이러한 성적 접촉은 일종의 과도한 접촉으로서 남자를 월경 중인 여자와 동급의 부정결한 상태로 만들어 남자가 자리에 앉거나 침대에 누우면 그곳이 부정을 탔습니다.

 

여자의 만성 자궁 출혈(25-27)

여자의 만성 자궁 출혈에 대한 규정은 현대인에게 고통과 아픔을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만성적인 문제는 큰 정서적, 신체적 부담을 주며,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배려해야 합니다. 또한, 치유와 회복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며,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를 지지하는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회복시키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5만일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의 불결기가 아닌데도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그의 불결기를 지나도 계속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모든 날 동안은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 26그의 유출이 있는 모든 날 동안에 그가 눕는 침상은 그에게 불결한 때의 침상과 같고 그가 앉는 모든 자리도 부정함이 불결한 때의 부정과 같으니 27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다 부정한즉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25-27)

 

이것은 여자의 성기로부터 출혈이 오래 지속되는 상태를 지시합니다. 정상적인 월경으로 인한 출혈을 넘은 장기간의 만성 자궁 출혈로서 의학적 관점에서 볼 때 혈루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혈루증은 혈우병과 다릅니다. 이것은 만성자궁출혈입니다. 그러나 혈우병은 혈액이 응고되지 않는 선천적 질환으로 여성 성 염색체 x에서만 발현되는 돌연변이 질병입니다. 따라서 혈우병은 성염색체가 xy인 남자들에게 대부분 나타나고, xx인 여성들은 거의 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전자 xx 중 하나가 문제가 생겨도 다른 하나가 정상적으로 작동해주기 때문입니다. 혈루증은 레 15장에 그 증상이 나온다. 여성의 생리와 달리, 장기간 자궁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는 증상입니다. 이때 여인은 피가 멈출 때까지 부정했으며, 접촉을 한 것들도 모두 부정을 탔습니다. 따라서 만성자궁출혈이 지속되면, 가족을 포함 그 누구도 그런 여인에게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회적 매장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 장애인과 만성적 부정을 탄 사람들은 율법의 정신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극도의 종교적 사회적 부패로 인해 무기력하게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목숨을 건절박함의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쨌든, 자궁출혈이 지속되는 동안 환자인 여자는 부정결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월경의 경우와 동일하게 접촉을 통해 부정결이 감염됩니다. 다른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 여자와 어떤 사물의 단순 접촉은 부정결의 정도가 낮아 그것이 이차적 오염을 발생시키지 않으나, 앉거나 눕는 과도한 접촉은 그것을 만지는 사람(아마 사물 또한)에게 이차 감염으로 이어집니다.

 

여성 유출 환자의 정결 의식(28-30)

여성 유출 환자의 정결 의식은 회복의 과정을 강조하며,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영적 재건을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자기 돌봄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며, 현대인들도 자신의 건강과 정서를 챙기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 의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공동체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28그의 유출이 그치면 이레를 센 후에야 정하리니 29그는 여덟째 날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자기를 위하여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30제사장은 그 한 마리는 속죄제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로 드려 유출로 부정한 여인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서 속죄할지니라(28-30)

 

만일 출혈이 멈추면 그날부터 7일을 더 기다렸다가, 본문은 침묵하지만 그 여자는 아마도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합니다. 월경을 겪는 여자는 피가 보이는 날부터 7일간 부정결의 기간을 지내나, 이 경우 출혈이 멈춘 날부터 7일을 추가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더 큰 본질적 차이는 8일째에 그녀가 반드시 성소에 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올라와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만성 자궁 출혈이 월경보다 훨씬 더 강한 부정결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이 부정결의 기간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큰 어려움과 고통이 따랐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무려 12년 동안 만성 자궁출혈을 앓던 복음서의 혈루증 앓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러한 배경을 두고 이해해야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유출병 규례의 결언(31-33)

유출병 규례는 정결함과 부정함의 경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현대인에게 이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공동체 내에서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며 지지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31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 가운데에 있는 내 성막을 그들이 더럽히고 그들이 부정한 중에서 죽지 않도록 할지니라 32이 규례는 유출병이 있는 자와 설정함으로 부정하게 된 자와 33불결기의 앓는 여인과 유출병이 있는 남녀와 그리고 불결한 여인과 동침한 자에 대한 것이니라(31-33)

 

유출병 규례를 마무리 짓는 결언에서 왜 그들이 진영 내에서 부정한 상태를 즉각 벗어나야 하는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이 부정결해지면, 성막이 부정해지게 되고 따라서 그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 그들이 망하고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뿐 아니라 여러 가지 부정결도 하나님의 거룩한 성막을 더럽힌다는 것이 여기서 확인됩니다. 앞서 성행위가 유발하는 부정결에 대해 덧붙이자면, 구약은 인간의 성행위를 철저히 인간의 영역으로 제한했습니다. 성소에서는 어떠한 성행위도 금지되었으며 또한 각자의 처소에서 성행위를 한 후라도 성소 접근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방의 제의에서는 성소에서 다산을 기원하는 제의적 성관계가 자행되곤 했으나, 자녀의 출산은 창조의 질서 내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허용되는 것이지 성소에서의 제의적 성행위라는 수단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 자체는 결코 더럽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인간의 영역에서 최고의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언제나 자 첫 오용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특별히 하나님 앞에 집중해서 나아갈 때는 일시적인 성적 절제가 요구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결법의 정부정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제의 신학에 의한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또한 분명히 상당한 보건-위생학적 관심이 놓여 있습니다. 유출증 환자의 활동 제한과 부분적 격리는 병원균의 감염을 차단하고 불결한 신체적 상태를 청결케 하여 환자가 조속히 회복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법의정-부정 개념은 그런 위생학적이고 물리적인 개념을 포함할 수 있으나, 그보다 더 포괄적이고 관념적입니다. 정결법의 목적은 ‘거룩’에 있습니다. 신약에서 정결법의 형식은 모두 폐지되었지만, 이 취지의 본질은 계승되어 그 율법이 완성됩니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참조. 벧전 2:9).


본문에서는 정결함과 부정함의 개념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신체적, 정서적 건강을 돌보는 것이 신앙 생활의 일부임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공동체의 지지와 이해가 필요하며, 서로의 아픔을 배려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 구절은 영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며, 우리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을 기억하게 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통해 신앙을 더욱 깊이 있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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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5-0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결함

레위기 15장 1-18절


 

정결함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즉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정결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사랑으로 감싸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관계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는 교회가 더욱 건강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 정결법의 마지막 주제는 신체로부터 액체가 빠져 나오는 유출 증상들에 대한 것입니다. 남녀 불문하고 성기에서 피나 분비물이 흘러나오는 증상들입니다. 만일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른다면, 그것은 부정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성기로부터의 유출이 몸을 더럽혔습니다. 남자는 크게 비뇨기 질환으로 추론되는 분비물의 유출과 정액의 유출이 몸을 부정하게 했고, 여자는 일정한 주기의 생리와 불규칙한 자궁 출혈, 혹은 만성 자궁 출혈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남자의 만성 유출 증상(1-3)

하나님께서는 정결함을 통해 우리에게 회복과 치유의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는 과거의 상처와 죄를 하나님께 맡기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단순히 외적인 정결함을 넘어서, 내면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현대인들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필요한 회복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 3그의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함이 이러하니 곧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든지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막혔든지 부정한즉(1-3)

 

정결법의 마지막 주제는 남녀 성기로부터의 다양한 유출증입니다. 앞서 이미 설명한 대로 이러한 피와 분비물, 그리고 정액은 역시 신체의 생명의 기운과 씨앗인데, 이것들의 유출은 곧 생명이 빠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생명에서 멀어지고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하며, 그런 연고로 신체의 유출은 부정하게 여겨집니다. 유출 증상은 다음과 같은 교차구조를 보입니다.

 

A. 서론(1-2a)

   B. 남자의 만성 유출(2b-15)

      C. 남자의 설정(16-18)

      C'. 여자의 월경(19-24)

   B'. 여자의 만성 유출(25-30)

A'. 요약(31-33)

 

이러한 다양한 유출 증상들은 매우 복잡한 감염 규칙과 더불어 그에 따른 정결 절차를 필요로 합니다. 먼저 우리는 남자의 유출 증상들부터 살펴봅니다. 이것은 ‘그의 몸’에 유출이 나타나는 현상인데, ‘그의 몸’은 성기에 대한 완곡어법입니다. 남자의 성기로부터의 유출은 정액의 유출과 만성적인 비뇨기 질환에 의한 유출로 나뉩니다. 먼저 다루어지는 것은 후자인데, 첫 번째 유출, 곧 몸에서 액체가 흘러나오는 증상(3)은 성기로부터 분비물이 나오는 일종의 임질과 같은 성병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성기에 분비물이 끼어 배뇨에 지장을 주는 증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뇨기 질환에 의한 유출은 장기간 지속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이것은 남성의 만성 유출입니다. 유출이 계속되는 한 그 남자는 부정하며, 그와 접촉하는 사람과 사물 모두 이차로 부정하게 됩니다.

 

남자의 유출병의 전염 양상들(4-12)

정결함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분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다시금 새롭게 하십니다. 현대인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4유출병 있는 자가 눕는 침상은 다 부정하고 그가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하니 5그의 침상에 접촉하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6유출병이 있는 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7유출병이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8유출병이 있는 자가 정한 자에게 침을 뱉으면 정한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9유출병이 있는 자가 탔던 안장은 다 부정하며 10그의 몸 아래에 닿았던 것에 접촉한 자는 다 저녁까지 부정하며 그런 것을 옮기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11유출병이 있는 자가 물로 그의 손을 씻지 아니하고 아무든지 만지면 그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12유출병이 있는 자가 만진 질그릇은 깨뜨리고 나무 그릇은 다 물로 씻을지니라(4-12)

 

유출병은 자신만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정결을 전염시킵니다. 즉, 유출이 계속되는 한 그 남자는 부정하며, 그와 접촉하는 사람과 사물 모두 이차로 부정하게 됩니다. 그가 앉거나 누운 자리는 과도한 접촉으로 인해 크게 감염이 되어 다른 사람이 그곳을 만지면 2차 감염으로 이어집니다. 그러한 물건은 침상과 의자(4-5), 안장(9-10)과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과의 단순 접촉은 2차 감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접촉된 사람(7,8,11)과 물건 모두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12). 또한 부정한 사람의 몸과 접촉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침이 튀겨도 부정을 탔습니다(8). 그러나 만일 유출 환자가 손을 씻으면 사람을 만질 수 있었는데(11), 따라서 손을 씻으면 아마 다른 사물도 얼마든지 만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출병 걸린 남자가 손을 씻는 한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오염된 물건들은 그것이 질그릇이면 깨트리고 나무 그릇은 씻어 내며(12), 아마도 17절로 미루어 보건대, 누웠던 침대나 앉은 자리는 그가 목욕을 하는 날 함께 세탁을 했을 것입니다. 질그릇은 액체를 흡수하는 특질로 인해 아마 부정결이 흡수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깨트리는 반면, 목각 그릇(아마도 금속류도 포함)은 그런 특질이 없으므로 단지 씻어내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부정이 옮은 물건은 그날 당장 세척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으며 따라서 씻어내기 전까지는 부정한 상태가 지속됩니다. 하지만 아래 설명되는 바와 같이 정액이 묻은 물건의 경우는 당일에 즉각 씻어서 정결케 해야 합니다(16). 따라서 다른 오염된 물건들도 당일에 씻어내야 했을 것입니다. 감염된 사람의 경우도 언제나 그날 당장 옷을 빨고 목욕한 뒤 저녁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한편, 앞서 말한 대로 11절은 이런 유출증을 앓는 사람이 손을 씻으면 한시적으로 다른 사람을 만질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사물도 만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유출증에도 적용될 것인데, 이것은 유출증 환자를 위해 별도의 침상과 자리가 마련되어 그가 집안의 특정 공간에 격리되어 있었지만, 어느 정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아마도 남자든 여자든 부정결의 기간에 그 사람을 위한 침대나 의자, 그리고 자리가 따로 마련되었을 것입니다.

 

남자 유출 환자의 정결 의식(13-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정결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셨고, 이는 그들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외적인 정결함뿐만 아니라, 내적인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깨끗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13○유출병이 있는 자는 그의 유출이 깨끗해지거든 그가 정결하게 되기 위하여 이레를 센 후에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그의 몸을 씻을 것이라 그러면 그가 정하리니 14여덟째 날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자기를 위하여 가져다가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15제사장은 그 한 마리는 속죄제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로 드려 그의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서 속죄할지니라(13-15)

 

만일 남자의 유출이 멈춰서 몸이 깨끗하게 되면, 그는 그날부터 7일을 기다렸다가 7일째 되는 날 옷을 빨고 목욕을 합니다. 그러면 그의 몸은 물리적으로 일단 완전히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제의적으로는 아직 부정한 신분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부정결로 더럽힌 성소가 청소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발생시킨 성소의 오염이 제거되어야만 비로소 그는 완전히 제의적이고 법적인 정결한 신분을 성취하게 되니다. 따라서 제8일째에 완치자는 비둘기 두 마리를 준비해서 성소에 올라가 속죄제와 번제로 그것들을 바칩니다. 여기서 속죄제가 핵심인데, 그는 자신의 유출증으로 인해 더럽혀졌을 뿐 아니라, 성소도 그로 인해 더러워졌기에 속죄제의 피로 그것을 씻어냅니다.

 

다른 사례들과 비교해 볼 때, 유출병 환자에게 요구된 제물은 간소했습니다. 12장의 산모의 경우 표준적 제물은 비둘기의 속죄제와 번제의 양이었는데, 번제는 아마 출산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들어갔을 것입니다. 따라서 속죄제는 가벼웠습니다. 그러나 13-14장의 나병 환자의 경우 속건제, 속죄제, 번제를 위해 양이 세 마리 바쳐져야 하는 등, 매우 과중한 제물들이 요구되었으며, 이때 속죄제도 숫양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것은 나병 환자의 부정결이 성소의 마당을 상대적으로 크게 오염시켰음을 암시합니다. 나병의 심각성은 이와 같이 제물에서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유출증의 경우에도 산모와 같이 비둘기의 속죄제만이 요구되었습니다. 이것은 유출중이 나병처럼 심각한 부정결은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남자의 설정과 정화(16-18)

현대 사회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관이 팽배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일상에서 정결함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결함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개인의 삶에서 정직과 진실함을 지키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사랑과 배려를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16설정한 자는 전신을 물로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17정수가 묻은 모든 옷과 가죽은 물에 빨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18남녀가 동침하여 설정하였거든 둘 다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16-18)

 

남자의 성기로부터의 설정은 두 가지 경우로 나뉩니다. 몽정과 같은 불가항력인 설정과 정상적인 성관계에 의한 설정, 우선 정액이 자연히 흘러나온 사람은 (아마옷을 빨고) 목욕을 한 뒤 저녁까지 기다려야 합니다(16). 만일 정액이 옷이나 가죽에 묻었다면 당일에 즉각 세탁을 해야 하며 저녁까지 부정의 상태가 지속됩니다(17). 아마도 12절을 따라 접촉된 질그릇은 깨뜨리고 나무 그릇은 즉각 씻어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사례로 정상적인 성관계를 통한 정액 유출도 남자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이때 여자 또한 정액에 접촉되었기에 역시 부정케 됩니다. 두 사람 모두 (아마 옷을 빨고) 당일에 목욕한 뒤 저녁까지 기다려야 합니다(18).

 

정결법에는 한 가지 더 풀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왜 자연스러운 출산과 생리와 정상적인 성관계가 더럽게 여겨졌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출산과 월경의 문제는 앞서 어느 정도 설명이 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출산 자체와 성관계 자체는 더럽게 간주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축복이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부정을 유발한 이유는 그런 행위 뒤의 신체로부터의 피와 정액의 유출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일종의 '생명력의 소실이므로 부정하게 여겨집니다. 이 문제를 포함한 레위기 11-15장의 부정결들은 아마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범죄로 인해 몸과 자연의 원래의 창조 질서가 약간 어긋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액이 부정결을 유발하기 때문에 하나님 면전에, 즉 성소에 올라갈 때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때는 부부간의 성관계가 금지되었고(출 19:15; 삼상 21:4-6;참조. 삼하 11:11), 몽정을 해도 그 사람을 진 밖으로 내보낼 만큼 심각하게 간주되었습니다(신 23:10). 바울이 기도에 집중하고자 할 때 부부간에 분방을 하도록 권면한 이유도(고전 7:5)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 단원에서 더 논의하기로 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결함을 강조하시는 이유를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깊게 하기 위해 신체적, 영적 정결함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죄와 상처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격려하며 정결함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결함은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정결함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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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4-03)


집에 발생한 나병 색점

레위기 14장 33-57절


청결의 중요성은 아무리 많이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염된 집의 문제를 조기에 발견하고 적절히 대처해야 합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현명하며, 이는 문제 해결에 있어 중요한 자세입니다. 또한, 곰팡이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므로 서로 돕고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 사람 피부만이 아니라 사물과 건물에도 짜라아트라는 표피 증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그것은 피부병이 아니라 곰팡이가 분명합니다. 만일 그것이 악성 곰팡이라면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앞서 우리는 13장에서 면류나 가죽 제품에 곰팡이가 필 때 진단법과 판정에 따른 조치를 살펴보았습니다. 현재의 본문은 집 벽에 그런 곰팡이가 발생할 때 진단법과 판정에 따른 조치를 설명합니다.

 

집에 발생한 곰팡이의 관찰(33-38)

곰팡이와 같은 오염이 발생했을 때는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주거 환경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건강한 삶을 위한 기본입니다. 자신의 행동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재발을 방지하는 예방 조치도 중요합니다.

 

33○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4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에 너희가 이를 때에 너희 기업의 땅에서 어떤 집에 나병 색점을 발생하게 하거든 35그 집 주인은 제사장에게 가서 말하여 알리기를 무슨 색점이 집에 생겼다 할 것이요 36제사장은 그 색점을 살펴보러 가기 전에 그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부정을 면하게 하기 위하여 그 집을 비우도록 명령한 후에 들어가서 그 집을 볼지니 37그 색점을 볼 때에 그 집 벽에 푸르거나 붉은 무늬의 색점이 있어 벽보다 우묵하면 38제사장은 그 집 문으로 나와 그 집을 이레 동안 폐쇄하였다가(33-39)

 

면류나 가죽 제품의 표면에 곰팡이가 발생하지만, 건물의 벽에도 흔하게 곰팡이류가 번식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경우 습한 환경으로 인해 부식이 수반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시내산 광야에 머물러 있는 가운데 천막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규정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실 때 그들이 흙과 돌로 건축한 집에 살 때 발생하는 곰팡이 문제를 다룹니다. 만일 집의 벽에 곰팡이의 발현(나병 색점)이 발견된다면, 집 주인은 즉각 제사장을 불러 검사를 요청해야 합니다. 이때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확인됩니다. 그 곰팡이의 발생이 하나님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어떤 집에 나병 색점을 발생하게 하거든.” 이것은 어떤 사람의 나병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재앙으로 인한 것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그 발현부위(색점)를 검사하러 가기 전에 그 집 안의 모든 것, 즉 모든 물건과 사람을 소거합니다. 이는 만일 악성 곰팡이일 경우 심각한 2차 감염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그 집 벽의 곰팡이가 생긴 부위가 녹색이거나(푸르거나) 빨간 색을 띄면서 우묵하게 들어간 것처럼 보이면, 제사장은 그것을 심각히 여겨 일단 칠 일 동안 집을 폐쇄한 뒤 번식이 발생하는지 그 추이를 지켜봅니다.

 

곰팡이의 이차 진단과 최종 판정(39-53)

개인의 위생과 환경 청결은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기본적인 청결 유지가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개선해야 합니다. 오염된 집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서로를 돕고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함께 건강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9이레 만에 또 가서 살펴볼 것이요 그 색점이 벽에 퍼졌으면 40그는 명령하여 색점 있는 돌을 빼내어 성 밖 부정한 곳에 버리게 하고 41또 집 안 사방을 긁게 하고 그 긁은 흙을 성 밖 부정한 곳에 쏟아버리게 할 것이요 42그들은 다른 돌로 그 돌을 대신하며 다른 흙으로 집에 바를지니라 43○돌을 빼내며 집을 긁고 고쳐 바른 후에 색점이 집에 재발하면 44제사장은 또 가서 살펴볼 것이요 그 색점이 만일 집에 퍼졌으면 악성 나병인즉 이는 부정하니 45그는 그 집을 헐고 돌과 그 재목과 그 집의 모든 흙을 성 밖 부정한 곳으로 내어 갈 것이며 46그 집을 폐쇄한 날 동안에 들어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47그 집에서 자는 자는 그의 옷을 빨 것이요 그 집에서 먹는 자도 그의 옷을 빨 것이니라 48○그 집을 고쳐 바른 후에 제사장이 들어가 살펴보아서 색점이 집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이는 색점이 나은 것이니 제사장은 그 집을 정하다 하고 49그는 그 집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다가 50그 새 하나를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51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과 살아 있는 새를 가져다가 잡은 새의 피와 흐르는 물을 찍어 그 집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52그는 새의 피와 흐르는 물과 살아 있는 새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로 집을 정결하게 하고 53그 살아 있는 새는 성 밖 들에 놓아 주고 그 집을 위하여 속죄할 것이라 그러면 정결하리라(39-53)

 

본문에서는 집안에 곰팡이나 부패가 발견되었을 때, 제사장이 그 상태를 검사하고 정결하게 하는 절차를 설명합니다. 만약 오염이 지속된다면 집을 철거하고 정결하게 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1) 악성 곰팡이로 판정된 경우: 철거와 주의사항(39-42)

 

칠 일째가 되었을 때, 제사장은 다시 벽의 그 변색된 부위를 살핍니다. 곰팡이가 주변에 번진 것이 확인되면 제사장은 그 부위의 돌을 빼내 성 밖의 부정한 곳에 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집 안의 벽 모든 곳을 긁어내 그 흙을 또한 그 부정한 곳에 버립니다. 어떤 랍비들은 집안의 벽을 모두 긁어내지 않고 발현 부근을 넓게 긁어냈다고 주장하나, 이미 감염이 의심되는 돌들은 모두 빼내어 제거하므로 이 경우 사방 벽을 모두 긁어낸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리고 다른 깨끗한 돌을 끼워 넣으며 또한 다른 깨끗한 흙으로 집의 벽을 바릅니다.

 

앞서 광야 배경에서 제단에서 청소한 기름 섞인 재를 진영 밖에 내다버리는데, 그곳을 재 버리는 ‘정결한 곳’으로 칭한 바 있습니다. 본문은 가나안 땅 배경인데, 그 땅에는 철거한 건물의 폐기물을 버리는 성 밖, 즉 마을 밖의 ‘부정한 곳’이 마련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광야에서도 그런 폐기물이나 쓰레기를 버리는 ‘부정한 곳’이 있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 철저한 조치 후에도 제사장은 한 번 더 시간을 두고 그 부위를 지켜봅니다. 43-44절은 일단 감염 부위를 제거한 뒤 집이 일단 정상이 되었다가 다시 감염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일차 조치 후 완치 여부를 살피기 위해 재차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상황입니다. 칠 일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만일 이번에도 곰팡이가 주변에 퍼져 있는 것이 확인되면, 이제 제사장의 명령에 따라 그 집을 헐고 모든 폐기물들, 곧 돌과 나무, 그리고 흙을 마을 밖의 부정한 곳으로 내다 버립니다. 만일 그 집이 폐쇄된 기간 동안 거기에 드나든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저녁까지 부정해지며 본문은 언급하지 않으나 아마도 목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집에서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목욕을 하고)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2) 악성 곰팡이가 아닌 경우: 정결례(48-53)

 

만일 제사장이 모든 조치를 다 취한 뒤, 두 번째 일주일 후의 재검에서 색점이 퍼지지 않은 것이 확인되면, 제사장은 그 집을 철거하지 않고 완전한 제의적 정결 상태로 돌리기 위해 정결례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이때 만일 39절의 첫 번째 일주일 후의 검사에서 번식이 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될 때에도 현재의 정결례를 진행합니까? 밀그롬은 39절에서 색점이 번식한 경우 일주일을 더 기다릴 뿐 아니라, 번식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도 철저한 검사를 위해 마찬가지로 일주일을 더 기다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48절은 39절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39절에서도 일주일 후의 관찰에서 만일 벽의 변색 부위가 번지지 않은 것이 확인되면, 정결례를 실시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단지 변색이 퍼진 것으로 나타나면, 그 부위의 돌을 빼고 벽의 흙을 다 긁어낸 뒤 새로운 돌로 교체하고 새로운 흙을 바른 뒤, 일주일을 더 기다려본 것입니다. 정결례의 절차는 나병 환자가 일차로 진영 안으로 복귀할 때 거쳤던 정결례와 거의 동일합니다. 제사장은 2차, 3차의 재검을 통해 최종적으로 그 집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정결하다’고 선언합니다. 즉, 그 곰팡이로 의심되는 증상은 악성 곰팡이가 아닌 대수롭지 않은 벽의 변색이나 경미한 감염으로 결론짓습니다. 악성이 아니므로 철거는 면하지만, 그 집을 위한 정결례는 필수적입니다. ‘그는 그 집을 정결하기 위해’ 몇 가지 물건을 준비해야 합니다. 여기서 ‘그’는 제사장이 주어인 문맥의 흐름 속에서 제사장처럼 읽히지만, 집 주인이 분명합니다. 준비물은 나병 환자의 정결례에 준합니다. 집 주인은 야생에서 잡은 새 두 마리와 더불어 백향목, 홍색실, 그리고 우슬초를 가져와야 합니다. 두 마리 새 중 하나를 흐르는 물에 질그릇을 담가 그 안에서 피를 내서 잡고 이어서 백향목과 홍색실을 물에 담급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적은 양의 피로는 핏물이 진하지 않은데, 더 강한 핏빛을 내기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제사장은 우슬초를 그 질그릇에 담가 적신 뒤, 그 집에 일곱 차례 뿌립니다(히). 이어서 제사장은 그 살아있는 새를 공중으로 날려 보내 성 밖으로 보냅니다. 이로써 그 집은 속죄되고 최종적으로 정결한 상태로 복귀합니다.

 

여기서 집이 속죄된다는 의미는 집이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편의상 일괄적으로 ‘속죄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키페르’는 사람이 그 대상인 경우 ‘속죄하다’가 죄를 해결한다는 의미로 잘 어울리나, 건물이 그 대상인 경우 ‘속죄하다’라고 번역은 하되 그 의미를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건물이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클라(Sklar)가 탁월하게 증명했듯이 속죄제 문맥 속에서 키페르는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항상 ‘배상 + 청소’의 의미를 지닙니다. 건물이 대상일 경우 건물에 발생한 문제가 배상되면서 건물을 씻어낸다는 의미로 ‘건물을 속죄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됩니다. 사람이 대상일 경우 그의 죄를 배상하면서 그가 더럽힌 성소를 씻어낸다는 의미로 ‘그를 속죄하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배상’과 ‘청소’, 이 두가지 의미를 담을 한 단어가 마땅치 않으므로 우리는 전통적인 번역인 ‘속죄하다’를 사용합니다. 이 문제는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키페르의 영어 상당어는 ‘make atonement’입니다. 밀그롬은 키페르의 문맥을 무려 예닐곱 개로 나누면서 다양한 번역을 제안하지만,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어떤 경우라도 이 키페르의 번역은 일관되게 영어로 ‘make atonement’와 우리말로 ‘속죄하다’를 고수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다만 ‘속죄하다’의 대상이 사람일 경우와 사물일 경우 그 뉘앙스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됩니다. 건물의 정결례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이 한가지 확인됩니다. 성소를 더럽히는 오염원은 오직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건물이 아무리 부정케 된다 해도, 그것이 성소를 더럽히진 않습니다. 따라서 건물의 오염 때문에 성소에서 속죄제를 드리는 일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백성과 성소가 피의 언약을 통해 상호 영향을 주면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관계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나병 규례의 결언(54-57)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려는 나병 규례는 신앙생활을 통해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자신의 상태를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또한, 개인의 행동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서로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이는 영적, 신체적, 사회적 건강을 지키는 데 중요한 과정입니다.

 

54이는 각종 나병 환부에 대한 규례니 곧 옴과 55의복과 가옥의 나병과 56돋는 것과 뾰루지와 색점이 57어느 때는 부정하고 어느 때는 정함을 가르치는 것이니 나병의 규례가 이러하니라(54-57)

 

마지막 단락은 사람과 사물, 그리고 건물에서 발병하는 모든 짜라아트(나병) 증상들에 대한 규례의 에필로그입니다. 이러한 피부병과 곰팡이 규례는 제의적인 정부정의 의미를 지니지만, 공동체 안에서 그것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공중 보건학적 조치이기도 한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은 오염된 집의 진단과 정화 과정을 통해 청결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며, 공동체의 건강을 책임져야 합니다. 회복의 과정은 단순한 문제 해결을 넘어, 지속적인 예방과 인내가 필요함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영적, 신체적, 사회적 청결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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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4-02)


가난한 나병 환자를 위한 제사

레위기 14장 21-20절


하나님께서는 소외 받은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회복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때, 그분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십니다. 이 의식은 단순한 규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회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 본 단락은 가난한 나병 완치자를 위한 복귀 절차를 규정합니다. 가난한 사람도 첫 번째 정결례의 요구 조건은 동일하므로 그것은 생략되었습니다. 차이점은 제사들입니다. 다른 제사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나병 완치자를 위해 비둘기로 완화된 양보안이 제시됩니다. 현재 단락의 내용은 앞서 나병 완치자의 복귀 규례에 대한 내용을 다룰 때 대부분 논의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는 지면을 정결법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보충하는 데 활용할 것입니다.

 

가난한 나병 완치자를 위한 제물의 준비(21-23)

신앙의 실천은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신념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사랑과 배려, 나눔의 실천이 신앙을 구체화하는 방법입니다. 아픈 사람을 돌보고, 그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믿음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21만일 그가 가난하여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면 그는 흔들어 자기를 속죄할 속건제를 위하여 어린 숫양 한 마리와 소제를 위하여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에 기름 섞은 것과 기름 한 록을 취하고 22그의 힘이 미치는 대로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삼아 23여덟째 날에 그 결례를 위하여 그것들을 회막 문 여호와 앞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21-23)

 

복귀 의례를 위해 요구되는 제물들은 가난한 자들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나병 완치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대폭 완화된 규정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속건제로 어린 숫양 한마리, 소제물로 기름을 섞은 밀가루 10분의 1에바, 기름한 록, 그리고 속죄제와 번제용으로 산비둘기이든 집비둘기 새끼이든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옵니다. 앞서 정규적인 준비물에서는 밀가루 10분의 3에바에 속죄제와 번제용 짐승으로 각각 어린 숫양 한 마리와 어린 암양 한 마리였는데,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는 밀가루 10분의 1에바와 비둘기 두 마리로 대폭 완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건제를 위한 짐승은 무슨 상황에서 속건제를 드리든 양보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숫양입니다.

 

앞서 정규적인 나병 완치자 복귀 의례에서 지면상 설명이 빠졌지만, 속건제 숫양은 어린 숫양으로 반 속건제 의식(레 5-6장)에서 요구된 숫양과 히브리어가 다릅니다. 속건제를 위한 숫양은 통상적으로 아일(ram)인 반면, 현재의 나병 완치자의 경우 ‘케베스’입니다. 다수의 주석학자들은 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으나, 케베스는 일반적인 양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어린 숫양(lamb)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보통 일년생입니다. 만일 후자의 의미라면 양자는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10절을 보면, 나병 완치자를 위한 번제를 위한 암양은 ‘카브스’로 속건제 숫양인 케베스와 암수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번제의 암양이 일년생이므로 아마 그것과 대조되는 숫양도 어린 일년생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더불어 12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속건제 숫양은 한 록의 기름과 더불어 요제로 들어 올려야 합니다. 그러나 숫양을 손에 들어 올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입니다. 후대 유대의 관행에서는 숫양 전체를 손으로 들어 올린 것이 아니라, 제사자가 숫양의 굽이 갈라진 발바닥을 손으로 살짝 들어 올리는 의례를 행했다고 전해집니다.

 

가난한 완치자를 위해 목욕을 하는 정결례는 생략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도 동일하게 그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도 살아있는 정결한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 그리고 우슬초를 준비해서 자신의 몸을 깨끗케 하는 정결례를 준수해야 합니다. 두 번째 목욕을 마친 후, 그는 진영 내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는 제8일에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장을 찾아 성소에 올라갑니다.

 

가난한 나병 완치자를 위한 제사들(24-32)

하나님은 각 사람의 상황에 맞추어 정결한 제물의 양을 정해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필요한 만큼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할 때, 하나님은 그에 맞는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의 회복을 돕습니다.

 

24제사장은 속건제의 어린 양과 기름 한 록을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25속건제의 어린 양을 잡아서 제사장은 그 속건제물의 피를 가져다가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를 것이요 26제사장은 그 기름을 자기 왼쪽 손바닥에 따르고 27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쪽 손의 기름을 조금 찍어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28그 손의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 곧 속건제물의 피를 바른 곳에 바를 것이며 29또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발라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할 것이며 30그는 힘이 미치는 대로 산비둘기 한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한 마리를 드리되 31곧 그의 힘이 미치는 대로 한 마리는 속죄제로, 한 마리는 소제와 함께 번제로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할지니 32나병 환자로서 그 정결예식에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한 자의 규례가 그러하니라(24-32)

 

본문에서는 문둥병에서 회복된 자가 제사장에게 가서 정결한 제물을 드리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제사장은 그를 위해 희생 제물을 바치고, 그의 정결함을 확인합니다. 이 과정은 그가 공동체에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중요한 의식입니다.

 

(1) 특수한 속건제 절차(24-29)

 

일반 나병 완치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숫양의 속건제물을 가지고 진행되는 절차는 매우 특수합니다. 아마 그 완치자가 숫양을 안수한 후 도살을 합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취하여 그 사람의 오른쪽 신체 말단 부위들, 곧 오른쪽 귓부리, 오른쪽 엄지손가락,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이어서 제사장은 가져온 한 록의 기름을 왼쪽 손바닥에 따른 뒤 오른쪽 손가락으로 기름을 찍어 제단 앞에서 지성소를 향해(여호와 앞에) 뿌립니다. 그리고 다시 그 기름을 오른쪽 손가락으로 찍어 이미 숫양의 피가 묻어 있는 그 나병 완치자의 동일한 신체 말단 부위에 바릅니다. 이어서 제사장은 손바닥에 남은 기름을 그 사람의 머리에 바릅니다. 이로써 그 환자는 여호와 앞에서 속죄를 얻습니다.

 

(2) 비둘기의 속죄제와 번제, 그리고 소제(30-32)

 

특수한 방식의 속건제 의식을 마친 뒤, 제사장은 남은 제사들을 진행합니다. 정규적인 제물은 속죄제의 숫양과 번제의 암양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나병 완치자를 위해 비둘기 두 마리로 제물을 완화해주십니다. 그는 집비둘기를 가져오거나, 집에서 비둘기를 키울 형편마저 되지 않는다면, 들판에 나가 산비둘기 둘을 잡아오면 되었습니다. 한 마리를 속죄제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를 준비한 밀가루의 소제물을 곁들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특히 자신이 더럽힌 성소를 속죄제로 씻어내는 일은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신체적으로 나병완치 판정을 받은 후, 성소를 더럽힌 제의적 책임을 완수하여 속죄를 받았고 이로써 제의적 정결 상태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제 비로소 그가 공동체로 완전하게 재허입되어 일상으로 복귀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참고. 죄와 부정결의 등급

 

레위기의 속죄제는 죄와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것들은 가벼운 것부터 심각한 것에 이르는 몇 단계의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1) 죄의 등급

 

a. 비고의적인 죄(비쉐가가 그릇, 무심코): 이것은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명령을 무의식중에 어긴죄다(레 4장). 속죄제로 해결되는 죄입니다.

 

b. 고의적인 죄(deliberate): 가벼운 고의성을 지닌 죄입니다. 몇 가지 사례가 레위기 5:1-4에 나오는데, 역시 자백과 더불어 속죄제로 용서 가능한 죄들입니다.

 

c. 속죄 가능한 악행죄(페샤): 페샤는 반역죄(악행)로 ‘높은 손으로’(베야드 라마) 하나님께 대항하는 죄입니다. 이것은 속죄 가능한 것과 불가한 것으로 나뉩니다. 원칙상 악행죄는 용서불가였습니다. 그러나 악행도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재량에 달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밀그롬이 말한 대로 악행 죄라도 회개를 통해 죄의 등급이 경감되어 속죄제를 바칠 수 있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악행이 속죄 가능했다는 것은 레위기 16장의 속죄일 규례에서도 확인됩니다.

 

d. 속죄 불가한 악행: 원칙적으로 악행은 즉각적인 징벌을 받아 죽음을 당하든지, 아니면 저주를 받아 나병에 걸려 추방당합니다. 즉, 반역죄는 사실 즉각 심관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예, 고라 일당의 반역죄(민 16장), 미리암의 모세 비방 죄(출 15장),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드린 제사(레 10장), 웃시야의 제의권 침해(대하 26장) 등. 그러나 어떤 악행은 심판을 유예하고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컨대, 왕조 시대의 사례이긴 하지만, 다윗의 악독한 범죄는 즉각 징벌을 받아야 했으나, 그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2) 부정결의 등급

 

a. 경미한(mild) 부정결: 이것은 이차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부정을 타는 경우입니다. 통상적으로 저녁까지 부정하며 그 후 목욕을 하면 정결케 되어 속죄제가 불필요했습니다. 예컨대, 부정결한 사람이 앉은 자리나 그 사람의 몸에 접촉을 하여 부정을 탄 경우(레 15:5-11). 또한 몽정을 한 뒤나 성관계 후에는 저녁까지 부정했습니다(레 15:16-18).

 

b. 중대한(심각) 부정결: 정결 기간이 7일 이상인 부정결들로 속죄제가 요구되었고, 더불어 다른 회생 짐승이 바쳐졌습니다(레 12, 14-15장). 다시 말해, 7일 이상의 중대한 부정결은 성전을 원거리에서 더럽혔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c. 속죄 불가한 부정결: 속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아주 심각한 부정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병, (아마도 만성) 유출병, 사체 접촉과 같은 부정결들은 일단 즉각 추방되었습니다(민 5:2).

 

d. 죄로 전락한 부정결: 정결 과정을 무시할 때는 그것이 죄의 문제로 악화되면서 ‘끊어짐’과 같은 무서운 징벌이 가해집니다. 이런 부정결들은 반드시 평일에 처리되어야 하며, 만일 여러 가지 이유로 처리되지 못하면 그것은 ‘중범죄’로 승격되는 것입니다. 그 절차를 거부하면 그것이 죄 문제로 바뀝니다(예, 레 17:15-16; 민 19:20). 이것이 고의적인 이유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결이기 때문에 당사자가 모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몰랐다면, 부정결의 방치는 최소한 '부지중의 죄'로 악화될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께서 정결함과 회복을 중요시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치유와 회복의 과정을 겪으며, 서로를 돌보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단순한 규례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방법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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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4-01)


나병 환자의 정결 규례

레위기 14장 1-20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받아주시고,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의 삶에서 신앙의 회복과 재생이 언제든 가능하다는 희망을 주며, 이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회복과 치유의 과정이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신뢰와 인내가 중요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 이 장은 나병 환자가 진영 밖에서 병이 치료된 후의 복귀 절차를 다룹니다. 제사장에 의해 치료가 확인되었다 해서 나병환자가 진영 내로 바고 복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러 단계로 구성된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의 복귀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크게 정결례와 제사 절차로 나뉘는데, 총 네 단계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 여러 단계의 정결 절차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물건과 제물도 많았습니다.

 

나병 환치차의 복귀 의례:정결례(1-9)

우리는 모두 인생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상처를 경험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때때로 우리의 영혼을 아프게 하고, 공동체와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나병 환자가 제사장에게 나아가 정결을 요구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3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4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5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6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7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8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9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1-9)

 

본문에서는 나병 환자의 정결 의식 시작을 설명합니다. 제사장은 환자의 상태를 확인한 후, 정결하게 할 방법을 안내하며, 두 마리의 새와 함께 의식을 진행합니다. 이 의식을 통해 환자는 신의 명령에 따라 정결하게 되어 공동체에 재입회할 수 있습니다.

 

(1) 정결례를 위한 준비물(1-4)

 

이스라엘 공동체인 진 밖으로 추방되었던 나병 환자는 제사장의 검사를 통해 완치가 확인되면 진 안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나병 환자는 제사장 앞에 서야 하는데, 제사장이 진 밖으로 나가 그의 상태를 확인하였습니다. 제사장이 그가 완치된 것을 확인하면, 그를 위한 정결례를 준비시킵니다. 준비물은 정결한 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실, 그리고 우슬초입니다. 여기서 새들은 비둘기가 아닙니다. 랍비들은 그것을 참새로 간주합니다. 우슬초, 홍색실 그리고 백향목은 정결 의식에서 자주 사용됩니다(출 12:22; 민 19:6, 18; 시 51:9; 사 1:18). 백향목은 아마도 레바논의 특산물로 삼목(cedar)의 일종일 것입니다. 이 나무는 고대근동의 정결 의례에서도 흔하게 물에 담가 사용하였습니다. 백향목은 빨간 색깔 때문에 제의에서 피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백향목은 진한 향기를 발하고 부패에 강한 나무로서 그 상징성이 컸습니다. 홍색실 또한 동일한 효과, 즉 피의 효력을 상징했습니다. 홍색 염료는 야자수나무 잎에서 사는 빨간색 벌레의 암컷과 그 알에서 추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슬초는 고대근동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박하꽃의 일종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물이나 피에 담갔다 꺼내 특정 물건에 뿌리는 방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유월절에는 문설주에 양의 피를 뿌리기 위해 사용되었으며(출 12:22), 시편 51:7에서는 죄를 씻고 정결케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2) 정결례 절차 (5-9)

 

제사장의 명령에 따라 나병 환자는 먼저 새 한 마리를 ‘흐르는 물’, 즉 문자적으로 ‘살아있는 물’에 질그릇을 담그고 새를 그 안에서 도살하여 피가 나오게 만듭니다. 이어서 다른 한 마리를 살아있는 채로 가져온 뒤, 백향목과 홍색실을 아마도 그 질그릇에 담급니다. 이렇게 백향목과 홍색실이 그릇에 담겨짐으로써 적은 양의 새의 피로 피 색깔이 옅었던 물이 진한 빨간색으로 보이게 됩니다. 제사장은 우슬초를 질그릇 안에 담가 그 핏물을 찍은 뒤 환자에게 일곱 차례 뿌립니다. 그 후 제사장은 그를 정하다고 선언한 뒤, 그 살아있는 새를 들로 날려 보냅니다. 여기서 완치된 나병 환자의 부정결의 찌꺼기가 우슬초로 그에게 핏물을 뿌리는 순간 그 살아있는 새에게로 옮겨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새가 그의 부정결을 싣고 들판으로 사라짐으로써 그 환자는 일단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그가 완전한 정결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부정결의 찌꺼기가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도 세 번의 절차가 더 남아 있습니다. 환자는 자신의 옷을 팔고 몸의 모든 털을 밀고 목욕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깨끗해진 몸이 되어 드디어 진영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을 받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완전한 정결을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영 안에 복귀하되, 아직 자신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7일 동안 집밖에 머물러야 합니다. 7일째 되는 날, 그는 다시 한 번 수염과 눈썹을 포함한 몸의 모든 털을 민 뒤 옷을 빨고 목욕을 합니다. 다시 한 번 그의 정결이 선언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결 의식이 완료된 것은 아닙니다.

 

나병 완치자의 복귀 의례: 제사들(10-20)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나타냅니다. 회복된 사람은 공동체에 재입회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께 나아올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진정한 변화와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회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10여덟째 날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또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 11정결하게 하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와 그 물건들을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12어린 숫양 한 마리를 가져다가 기름 한 록과 아울러 속건제로 드리되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13그 어린 숫양은 거룩한 장소 곧 속죄제와 번제물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속건제물은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에게 돌릴지니 이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14제사장은 그 속건제물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를 것이요 15제사장은 또 그 한 록의 기름을 취하여 자기 왼쪽 손바닥에 따르고 16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쪽 손의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으로 그것을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17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 곧 속건제물의 피 위에 바를 것이며 18아직도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바르고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하고 19또 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려 그 부정함으로 말미암아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속죄하고 그 후에 번제물을 잡을 것이요 20제사장은 그 번제와 소제를 제단에 드려 그를 위하여 속죄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정결하리라(10-20)

 

본문에서는 나병에서 회복된 사람의 정결 의식을 설명합니다. 제사장은 두 마리의 새를 사용해 하나는 제물로 바치고, 다른 하나는 자유롭게 보내며 의식을 진행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회복된 사람은 정결하게 되어 공동체에 재입회할 수 있습니다.

 

(1) 제물의 준비(10-11)

 

다음 절차는 더욱 까다롭고 복잡합니다. 이제 그가 성전에 올라가 가장 중요한 제의적 정결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준비해야 할 제물은 홈 없는 짐승들로 어린 숫양 두 마리, 일년생 어린 암양 한 마리, 10분의 3에바의 밀가루에 기름을 섞어 준비한 소제물, 그리고 기름 한록(log)입니다. 제사장은 그 환자를 회막 문, 즉 여호와 앞에 서게 하고 준비한 예물들도 거기 둡니다. 아마도 제사가 진행될 제단 앞일 것입니다.

 

(2) 특별한 속건제 절차(12-18)

 

먼저 숫양의 속건제를 바칩니다. 이때 숫양과 더불어 준비해 온 한 록의 기름을 함께 가져가 그것을 제단 앞에서 요제(테누파)로 흔듭니다(앞서 살펴본 대로 테누파는 단순히 들어 올리는 동작일 수 있다).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아마 요제로 들어 올리기 전에 숫양의 머리에 환자가 안수를 했음이 분명합니다. 분명히 이런 절차를 통해 숫양과 기름은 성물로 바뀝니다. 이어서 환자는 숫양을 도살해서 피를 내고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 그 환자의 오른쪽 귓부리, 오른쪽 엄지손가락,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모두 오른쪽 신체 말단들입니다. 이어서 제사장은 기름을 왼쪽 손바닥에 따른 뒤, 오른쪽 손가락으로 기름을 찍어서 여호와 앞에 일곱 번을 뿌립니다. 밀그롬은 ‘여호와 앞’이 제단 앞의 마당에 추린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아마도 제단 주변에서 지성소 방향으로 뿌린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 기름 뿌리기 행위에 대해 프리젠(Vriezen)과 밀그롬은 환자의 신체 말단에 바르기 전에 기름을 성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오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름은 요제로 제단 앞에서 들어 올려 하나님께 봉헌되었으므로 이미 거룩한 기름입니다. 제사장은 이제 이 거룩해진 기름을 그 환자의 피가 묻어 있는 신체 말단에 다시 바릅니다. 여전히 기름이 손바닥에 남아 있고, 제사장은 이어서 그 기름을 환자의 머리 위에 바릅니다. 이로써 그는 속죄함을 받는다(키페르), 나병 완치자의 신체 말단에 숫양의 피와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매우 독특합니다. 이것은 향단 뿔들에 피를 바르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 뿔들에 피를 바르면, 그런 끝부분들은 전체를 대표하는 일부(pas pro toto)로서 그런 피 바르기는 오염에 가장 민감한 곳을 씻어내 전체를 씻는 의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병 완치자의 경우도 신체 말단을 통해 전체를 씻고, 동시에 머리부터 발 끝까지 더럽혀진 신체 전체를 배상한다는 의미를 지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라도 제단을 씻는 기능은 속건제가 아닌 그 후 바쳐진 양의 속죄제가 담당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기름을 여호와 앞의 제단 근처에 일곱 번 뿌리고 남은 기름을 그 제사자에게 발랐습니까? 이 기름 뿌리기는 성소와 그 환자, 양자 모두를 위해 일종의 ‘재성화’와 유사한 효과를 내기 위한 특별하고 강력한 정결 의례였습니다. 그만큼 악성 피부병이 중대한 부정결로 간주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이것과 아주 흡사한 제사장 임직식입니다(레 8장). 그날 모세는 특별하게 제조된 거룩한 향유(출 30:22-33), 즉 관유를 성소의 모든 기물에 바르고 특히 제단에 일곱 차례 뿌려 성화합니다. 이어서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바르고 모든 제사장들의 신체 끝부분에 위임식 숫양의 피를 바른다. 비슷한 절차가 악성 피부병에서 치료된 환자에게 실행된 것입니다.

 

(3) 속죄제와 번제, 그리고 소제 바치기(19-20)

 

나병 완치자를 위한 마지막 절차로 남은 제사들을 바칩니다. 그것들은 속죄제와 번제, 그리고 소제입니다. 속죄제는 그 나병 환자가 더럽힌 제단을 씻기 위해서임이 명백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속죄를 얻습니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제사장은 번제와 소제를 제단에 드려 그를 위한 속죄를 최종 완성합니다. 분명히 번제와 소제는 그가 완전한 정결의 획득과 더불어 정상의 상태로 복귀한 것을 감사하기 위한 제물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18-20절에서 연달아 ‘속죄’가 선언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각각의 제사들이 고유의 속죄 기능으로 그 환자를 위해 속죄를 만든 것처럼 이해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번제와 소제가 드려진 뒤 마지막의 속죄선언과 더불어 ‘그가 정결하리라’고 최종적인 판정이 내려진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 제사의 절차들이 연합해서 최종적인 속죄를 완성하고, 그로 인한 최종적인 정결이라는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따라서 20절의 최종적 속죄 선언 전에 등장하는 속죄의 선언들은 최종적 속죄를 미리 내다본 잠정적이고 선취적인 속죄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결 의식은 회복과 재생의 상징입니다. 나병에서 회복된 사람은 제사장의 확인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나타냅니다. 이 의식을 통해 우리는 신앙 공동체에 다시 통합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을 배웁니다. 결국, 이 과정은 우리에게도 회복의 기회를 주며, 믿음 안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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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3-03) 


부정함의 경계: 하나님이 주신 깨끗함의 의미

레위기 13장 40-59절


 

모든 사람들에게 건강과 위생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또한 공동체 내에서의 건강에 대한 배려와 책임감 또한 필수적입니다. 병이나 질병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경계해야 하며, 이해와 포용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서로를 지지하고 돕는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치유와 회복의 과정을 통해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 여섯 번째의 나병 증상이 설명됩니다. 이것은 특정적으로 대머리와 관련된 피부병입니다. 그러나 나병으로 판정되는 증상들은 다른 사례들과 거의 동일합니다. 더불어 이제 사물의 표면에 나타난 악성 번짐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것 역시 ‘짜라아트’로 지칭되는데, 집안의 물건이나 건물 벽에 나타나 심각하게 퍼지는 악성 곰팡이를 말합니다. 이것은 주로 단순히 색깔로 판정을 내리므로 쉽게 악성 곰팡이의 여부가 확인됩니다.

 

나병의 증상(6): 대머리와 관련된 나병(40-46)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는 신앙과 삶의 깊이를 더하는 데 기여합니다.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 격리와 그로 인한 고통을 통해 공동체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또한, 병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서로를 지지하고 돕는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40○누구든지 그 머리털이 빠지면 그는 대머리니 정하고 41앞머리가 빠져도 그는 이마 대머리니 정하니라 42그러나 대머리나 이마 대머리에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있으면 이는 나병이 대머리에나 이마 대머리에 발생함이라 43제사장은 그를 진찰할지니 그 대머리에나 이마 대머리에 돋은 색점이 희고 불그스름하여 피부에 발생한 나병과 같으면 44이는 나병 환자라 부정하니 제사장이 그를 확실히 부정하다고 할 것은 그 환부가 그 머리에 있음이니라 45○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40-46)

 

40-44절은 머리털이 빠지는 증상 중에 피부질환을 동반하는 비정상적인 증상을 나병으로 규정합니다. 이것은 앞머리, 즉 이마에서부터 머리 전체에 걸쳐 나타날 수 있는 증상입니다. 단순한 탈모에 의한 대머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탈모 부위에 희끄무레하면서도 빨간 색이 도는 피부병변이 생기면 나병으로 선언되는 것입니다.

45-46절에서 그동안 나병으로 확진된 환자들의 조치가 비로소 설명됩니다. 나병 환자에 대한 조치는 즉각적이고 단호합니다. 우선 나병 환자 본인이 스스로 비탄의 퍼포먼스를 행하여야 합니다. 그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 헤침으로써 슬픔과 비통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은 앞서 10장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성경에서 전형적인 애곡과 슬픔의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윗입술과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탔다, 부정탔다’라고 거듭 외쳐야합니다(레 13:45). 이것은 망자를 슬퍼하는 애도의 표시(겔 24:17,22)거나 수치와 모욕을 당할 때 했던 동작입니다(미 3:7). 나병 환자의 이런 모습은 나병이 하나님의 징벌로 온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그 환자는 자신이 알지 못한 가운데 어편 잘못을 저지른 결과로 이 재앙이 찾아왔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재앙을 맞은 자신을 비탄해 하고, 또한 혹시라도 그런 재앙을 초래했을지 모를 자신의 잘못을 슬퍼하는 퍼포먼스일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나병 환자의 퍼포먼스는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기 위함인데, 피부병의 전염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배후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제의적 부정결의 전염을 막기 위한 조치로 보아야 합니다. 나병 환자가 다른 사람이나 물건을 접촉할 때 부정을 옮기는지에 대해 율법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즉각적인 추방 조치와 악성 번식으로 감염된 건물이 사람을 부정케 하는 것으로 보아(레 14:36, 46-47), 나병 환자는 부정을 옮긴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즉각 격리되어야 합니다. 환자 스스로 진 밖으로 나갔거나, 아니면 제사장의 명령으로 진 밖으로 추방되었을 것입니다. 다만, 진 밖으로 추방된 악성 피부병 환자가 완치되는 경우에 그는 진영 내로 복귀가 가능합니다.

 

사물에 생긴 악성 곰팡이(47-52)

청결과 위생은 아무리 강조해도 중요하며, 이는 개인과 공동체의 건강을 지키는 데 필수적입니다. 문제를 조기에 인식하고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외부적 요인에 대한 경각심도 필요합니다.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사회적 관계와 신뢰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47○만일 의복에 나병 색점이 발생하여 털옷에나 베옷에나 48베나 털의 날에나 씨에나 혹 가죽에나 가죽으로 만든 모든 것에 있으되 49그 의복에나 가죽에나 그 날에나 씨에나 가죽으로 만든 모든 것에 병색이 푸르거나 붉으면 이는 나병의 색점이라 제사장에게 보일 것이요 50제사장은 그 색점을 진찰하고 그것을 이레 동안 간직하였다가 51이레 만에 그 색점을 살필지니 그 색점이 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가죽에나 가죽으로 만든 것에 퍼졌으면 이는 악성 나병이라 그것이 부정하므로 52그는 그 색점 있는 의복이나 털이나 베의 날이나 씨나 모든 가죽으로 만든 것을 불사를지니 이는 악성 나병인즉 그것을 불사를지니라(47-52)

 

그 외 사람이 아닌 사물에는 악성 번식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물의 표면에 색점, 즉 얼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곰팡이가 분명합니다. 13장에서는 우선 집안의 물건들에 심각한 곰팡이가 생기는 현상을 다룹니다. 털실이나 베실로 짠 옷이나 모직류, 혹은 가죽 제품은 곰팡이 감염에 취약합니다. 필자의 견해로 아마 여기에는 가죽으로 만들었던 광야의 거처인 천막도 포함되는 듯합니다. 건물의 벽에 나타난 악성 곰팡이 문제는 14장에서 추가적으로 거론됩니다.

 

악성으로 분류되는 증상은 간단합니다. 청색 얼룩(점)이나 홍색 얼룩의 발생 여부가 기준입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물건의 표면에 나타난다면, 물건 주인은 즉시 제사장을 불러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만일 옷감류의 어떤 부위가 변색되어 있는데(48) 색깔이 녹색이나 붉은 색을 띄면, 일단 이것은 나병(악성 곰팡이)의 색점으로 의심해야 합니다(49). 어떤 가죽 제품의 표면에 그런 증상이 발견되면 마찬가지로 악성 곰팡이로 의심됩니다. 제사장은 그 물건을 검사하는데, 번짐 현상으로 얼룩져 있는 부위의 색깔을 관찰합니다. 제사장은 즉각 판정을 내리지 않고, 일주일을 동안 그 물건을 보관하여 그것이 번지는지 여부를 알아봅니다. 칠 일째 되는 날 그 얼룩(색점)이 물건의 표면에서 번졌으면 그것은 악성 곰팡이로 최종 판정됩니다. 이것들은 전염성이 강력한 해로운 곰팡이류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증상이 발견되면, 제사장은 그것을 ‘짜라아트’로 선언합니다. 그 물건을 즉각 불살라서 없애야 합니다. 이것은 곰팡이의 번식을 막으려는 비상조치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만일 청색과 홍색 얼룩이 아니면, 심각한 곰팡이가 아니므로 그 부분을 제거하거나 씻어낸 뒤, 물건이나 집을 재사용합니다.

 

사물에 생긴 악성 곰팡이의 재검(53-59)

공동체에서 상호 신뢰와 책임감을 바탕으로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고, 타인의 건강에도 관심을 기울일 때, 우리는 더욱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책임감은 서로를 존중하고 도우며,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53○그러나 제사장이 보기에 그 색점이 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모든 가죽으로 만든 것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54제사장은 명령하여 그 색점 있는 것을 빨게 하고 또 이레 동안 간직하였다가 55그 빤 곳을 볼지니 그 색점의 빛이 변하지 아니하고 그 색점이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부정하니 너는 그것을 불사르라 이는 거죽에 있든지 속에 있든지 악성 나병이니라 56○빤 후에 제사장이 보기에 그 색점이 엷으면 그 의복에서나 가죽에서나 그 날에서나 씨에서나 그 색점을 찢어 버릴 것이요 57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가죽으로 만든 모든 것에 색점이 여전히 보이면 재발하는 것이니 너는 그 색점 있는 것을 불사를지니라 58네가 빤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가죽으로 만든 모든 것에 그 색점이 벗겨졌으면 그것을 다시 빨아야 정하리라 59○이는 털옷에나 베옷에나 그 날에나 씨에나 가죽으로 만든 모든 것에 발생한 나병 색점의 정하고 부정한 것을 진단하는 규례니라(53-59)

 

만일 제사장이 검사하여 그 얼룩이 물건의 다른 곳에 번지지 않았으면, 제사장은 그 물건을 빨게 한 뒤 다시 일주일 동안 보관하여 지켜봅니다. 제사장은 칠일 째 되는 날 그 물건의 얼룩진 곳을 살펴보는데 색깔의 변화를 관찰합니다. 만일 그 색점(얼룩)이 번지지는 않았으나 그 자리에 다시 같은 증상이 여전히 나타나 있으면, 제사장은 그 물건이 부정하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즉, 그 물건은 악성 곰팡이에 감염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물건은 태워서 없애야 합니다. 하지만 물건을 세탁한 후에 그 색점의 색깔이 희미해졌으면, 제사장의 지시에 따라 주인은 그 얼룩진 부위를 뜯어내서 제거해야 합니다. 그 후 그 물건은 사용 가능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후에도 다시 그 물건에 얼룩이 나타나면, 그것은 재발된 증상으로 즉각 그 물건을 태워서 없애야 합니다. 한편, 물건을 세탁한 뒤 색점이 엷어졌으면, 그 색점 부위만을 뜯어낸 뒤 물건 사용이 가능하다 했는데, 만일 세탁 후에 색점이 아예 없어졌으면, 단지 그 물건을 다시 한번 세탁하면 완전히 정결해집니다. 이와 같이 나병과 번식증상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도표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악성 번식들 증상들
사람의 피부 나병의 증상(1-8) 흰색 얼룩/뾰루지/흰털/우묵함
나병의 추가적 증상(9-17절) 흰색 얼룩/흰 털/생살
치료된 종기의 감염(18-23절) 적백색 혹은 흰색 얼룩/우묵함
화상과 피부 감염(24-28절) 적백색 혹은 흰색 얼룩/우묵함
옴?(29-37절) 노란 털/흰색 얼룩/우묵함
예외) 어루러기?(38-39절) 희끄무레한 흰색 점
비정상적 대머리 (40-44절) 머리의 탈모 부위의 적백색 점
사물의 표면 옷이나 가죽 제품(47-59절) 청색 점/홍색 점악성 곰팡이
집과 건물(14:33-53)

 

우리는 마지막의 집과 건물의 벽에 발생한 악성 곰팡이를 제외하고 남은 모든 ‘짜라아트’ 증상들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건물 벽의 ‘짜라아트’ 문제는 14장에서 자세히 거론됩니다. 1-17절은 나병의 전형적 증상들을 설명합니다. 크게 1-8절에서 기본적 증상을 묘사하고, 이어서 9-17절에서 추가적 증상과 더불어 비슷하지만, 나병이 아닌 사례와 비교합니다. 이어서 18-23절은 치료된 종기의 이차 감염으로 인한 나병의 발병을, 24-28절은 화상을 입은 후 이차 감염을 통한 나병의 발병을 다룹니다. ‘옴’은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피부병으로서 ‘옴’은 현재 적절한 번역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것은 노란 털이 생기는 것이 가장 특징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발생하는 나병의 마지막 증상은 탈모와 더불어 발생하는 나병입니다. 이어지는 사례들은 사물들의 표면에 발생한 ‘짜라아트’인데, 우리는 적절한 번역으로 ‘악성 곰팡이’를 사용합니다. 이 악성 번식은 옷이나 가죽 제품, 그리고 건물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레위기 11-15장을 관통하는 정부정을 결정하는 기준이 생명-죽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나병과 악성 곰팡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병 환자가 부정하게 여겨진 이유는 피부가 썩은 송장을 연상케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민 12:12). 나병과 송장의 이러한 연관성은 송장과 접촉되어 부정결해진 사람을 위한 정결 규례(민 19:1-13)와 나병 환자의 정결 규례(레 14:4-7)가 아주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는 점에서 암시됩니다. 마찬가지로 악성 곰팡이가 핀 건물이나 사물의 경우 칙칙한 무덤과 무덤 안에 있는 물건을 연상케 합니다. 죽음에 속하고 거기에 가까이 있는 것은 부정합니다. 반면에 생명에 속하고 거기에 가까이 있는 것은 정결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죽음의 두 축의 원리가 레위기 13-14장의 나병 규례를 관통하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본문은 피부병에 대한 규정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이 본문은 건강과 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인과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는 데 필요함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질병에 대한 조기 인식과 적절한 대응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 또한 필수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규정은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서로의 치유와 회복을 돕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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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3-02)


상처의 진단: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하기

레위기 13장 18-39절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신중히 살펴야 합니다. 사소한 죄나 불편한 감정이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작은 문제들이 쌓이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자기 점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진정한 치유와 정결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 나병의 여러 증상들이 계속 묘사됩니다. 종기와 화상으로 인한 피부 감염, 그리고 옴으로 번역된 피부병들입니다. 고대의 히브리어로 기록된 이 증상들이 정확히 어떤 피부병을 말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종류가 다양한 피부병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병이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습니다. 제사장들은 피부병 진단에서 매우 신중히 처리했습니다. 의심이 들면 재검하고, 확진을 위해 심지어 세 번째의 검사도 시행하곤 했습니다.

 

나병의 증상(3): 치료된 종기의 감염(18-23)

육체의 노화와 쇠퇴를 피할 수 없지만, 우리는 내면의 회복에 집중해야 합니다. 부활의 몸을 약속받은 믿는 자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며 속사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진정한 치유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시작됩니다.

 

18피부에 종기가 생겼다가 나았고 19그 종처에 흰 점이 돋거나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생겼으면 제사장에게 보일 것이요 20그는 진찰하여 피부보다 얕고 그 털이 희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이는 종기로 된 나병의 환부임이니라 21그러나 제사장이 진찰하여 거기 흰 털이 없고 피부보다 얕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제사장은 그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22그 병이 크게 피부에 퍼졌으면 제사장은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이는 환부임이니라 23그러나 그 색점이 여전하고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이는 종기 흔적이니 제사장은 그를 정하다 할지니라(18-23)

 

본문에서는 피부에 생긴 종기나 상처가 치유된 후의 상태를 다룹니다. 제사장은 상처가 나은 후에도 다시 검사하여 부정 여부를 판단해야 합니다. 만약 피부가 정상으로 회복되면 깨끗하다고 선언됩니다.

 

(1) 종기에서 발생된 나병의 확진(18-20)

 

13:18-23은 나병의 세 번째 증상으로서 ‘종기’로 번역된 피부병입니다. 이것은 피부에 일종의 종기나 궤양이 치료되는 과정에서 피부 감염으로 나병의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악성 종기는 구약에서 흔히 재앙으로 나타납니다: 애굽의 10대 재앙(출 9:9-11): 아스돗 사람에게 내려진 재앙(삼상 5:6); 욥의 몸에 발생된 종기(욥 2:7): 우상숭배자에게 발생한 독한 종기(계 16:2). 그러나 악성 종기 자체가 나병은 아닙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종기가 치료되는 과정 중에 생긴 이차적인 피부 감염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증상의 표면적인 특징은 그 환부(종처)에 하얀 어루러기나 발진(흰점)이 생기거나, 하얀색을 띄면서 동시에 불그스름한 얼룩(색점)이 피부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얀 반점과 더불어 전형적인 나병의 증상 중 하나입니다. 그 사람은 제사장에게 찾아가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의 피부를 관찰하여 만일 환부가 약간 우묵하게 들어가고 그 털에 하얀 가루가 묻어 있으면 그것을 ‘나병’(짜라아트)으로 선언해야 합니다.

 

(2) 종기에서 발생한 나병의 재진 후의 판정(21-23)

 

제사장의 진단을 통해 만일 그런 나병의 전형적 증상이 보이지 않으면, 즉 털에 하얀 부스러기가 묻어 있지 않고 피부 함몰도 보이지 않고 얼룩이 희미하면, 제사장은 그를 칠 일간 격리합니다. 이러한 조치는 나병이 무서운 질병이었기 때문에 의심이 드는 경우 안이하게 최종 판정을 내려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즉, 앞서 이미 제사장의 재검 절차에서 살펴본 대로, 이것은 제사장의 확진을 위한 신중한 조치였습니다. 만일 칠 일째 되는 날 재검을 통해 피부병이 크게 번진 것이 확인되면, 제사장은 즉각 그를 ‘부정하다’고, 즉 그가 나병 환자임을 선언해야 합니다. 하지만, 피부병이 번지지 않았고 얼룩의 색깔도 변동이 없으면, 그것은 단순히 종기가 치료된 증상으로 간주되어 제사장은 최종적으로 그가 정결하다고 선언합니다.

 

나병의 증상(4): 화상과 피부 감염(24-28)

죄는 종종 작은 디테일 속에 숨어 있으며, 사소한 것이라도 무시하면 큰 문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신중히 살펴야 하며, 작은 습관이나 감정이 우리의 영적 상태에 미치는 영향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용해 작고 불편한 감정으로 역사하므로,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24피부가 불에 데었는데 그 덴 곳에 불그스름하고 희거나 순전히 흰 색점이 생기면 25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색점의 털이 희고 그 자리가 피부보다 우묵하면 이는 화상에서 생긴 나병인즉 제사장이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은 나병의 환부가 됨이니라 26그러나 제사장이 보기에 그 색점에 흰 털이 없으며 그 자리가 피부보다 얕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그는 그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27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만일 병이 크게 피부에 퍼졌으면 그가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은 나병의 환부임이니라 28만일 색점이 여전하여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화상으로 부은 것이니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은 이는 화상의 흔적임이니라(24-28)

 

본문에서는 화상이나 피부에 생긴 상처에 대한 규정을 설명합니다. 상처가 피부병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제사장이 이를 검사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만약 증상이 발견되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격리될 수 있습니다.

 

(1) 화상 부위의 감염과 나병 확진(24-25)

 

네 번째 나병의 증상은 화상을 입은 후 치료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차 감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화상 자체는 피부병이 아니며, 다만 치료 과정에서 피부 감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피부에 화상을 입은 후 이차 감염이 발생하여 환부가 불그스름하면서도 하얀 색조를 띄거나 단순히 하얀 얼룩이 나타나면 나병을 의심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의 피부를 살피고 만일 전형적인 나병의 증상이 확인되면 나병으로 확진합니다.

 

(2) 화상 부위의 재진 후의 판정(26-28)

 

만일 제사장의 검사를 통해 아무런 나병의 증상이 발견되지 않으면, 제사장은 다른 사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재검을 위해 그를 칠 일간 격리합니다. 칠 일째 되는 날 그를 다시 진찰하여 만일 피부병이 크게 번졌으면 즉시 그를 부정하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즉, 그는 나병 환자로 판결된 것입니다. 그러나 얼룩의 크기가 변함이 없는 가운데 병이 번지지 않았고, 또한 색깔도 옅어졌으면 그것은 단순히 화상으로 인해 피부가 상한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 ‘부은 것’의 히브리어 ‘세에트’는 부풀어 오른 증상이 아니라 화상으로 피부 조직이 거칠게 파괴된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나병의 증상(5): 옴(29-39)

우리는 외적인 증상뿐 아니라 내면의 상태도 신중히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기를 원하시며, 작은 문제가 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며, 영적 건강을 유지해야 합니다. 결국, 진정한 치유와 회복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9남자나 여자의 머리에나 수염에 환부가 있으면 30제사장은 진찰할지니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고 그 자리에 누르스름하고 가는 털이 있으면 그가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은 이는 옴이니라 머리에나 수염에 발생한 나병임이니라 31만일 제사장이 보기에 그 옴의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검은 털이 없으면 제사장은 그 옴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32이레 만에 제사장은 그 환부를 진찰할지니 그 옴이 퍼지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누르스름한 털이 없고 피부보다 우묵하지 아니하면 33그는 모발을 밀되 환부는 밀지 말 것이요 제사장은 옴 환자를 또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34이레 만에 제사장은 그 옴을 또 진찰할지니 그 옴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고 피부보다 우묵하지 아니하면 그는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는 자기의 옷을 빨아서 정하게 되려니와 35깨끗한 후에라도 옴이 크게 피부에 퍼지면 36제사장은 그를 진찰할지니 과연 옴이 피부에 퍼졌으면 누른 털을 찾을 것 없이 그는 부정하니라 37그러나 제사장이 보기에 옴이 여전하고 그 자리에 검은 털이 났으면 그 옴은 나았고 그 사람은 정하니 제사장은 그를 정하다 할지니라 38남자나 여자의 피부에 색점 곧 흰 색점이 있으면 39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피부의 색점이 부유스름하면 이는 피부에 발생한 어루러기라 그는 정하니라(29-39)

 

본문에서는 피부병에 대한 규정을 다룹니다. 만약 머리나 턱에 피부병이 발생하면 제사장에게 검사받아야 하며, 증상이 심각할 경우 부정하다고 선언됩니다. 이 규정은 공동체의 청결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1) 옴의 진단과 나병의 확진(29-30)

 

나병의 다섯 번째 증상은 '옴'으로 번역된 피부병입니다. ‘네테크’라 칭하는 이 병은 남녀 상관없이 특정하게 머리와 턱 부근에서 발병하는 특징을 갖습니다. 남자의 경우 수염에 그 증상이 나타나므로 수염의 상태가 진단법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머리나 수염에 특이 증상이 나타나면, 제사장이 진찰을 해서 만일 두피와 턱의 피부에 함몰이 보이고 털 색깔이 누렇게 되면서 털이 듬성듬성 빠져 있으면(가는 털이라기보다는), 제사장은 그를 나병 환자로 확정합니다. 히브리어 ‘네테크’를 전통적으로 ‘옴’(itch)으로 옮겨왔으나, 이것이 정확히 무슨 피부병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밀그롬은 이 단어가 ‘뜬다’, ‘찢다’를 의미하는 ‘나타크’에서 기원한 명사로서 아마 머리털이나 수염이 피부에서 떨어져 나오는 증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앞선 ‘가는 털’이 듬성해진 털이라는 설명과 일치합니다. 하틀리는 피부를 긁어서 피부 궤멸이 발생하며 벗겨진 증상으로 봅니다. 한편, 윌킨슨(Wilkinson)은 피부가 벗겨져 나온 것이 머리털과 수염에 달라붙은 증상으로 봅니다. 이 경우 종의 백선, 즉 버짐일 수 있습니다. 환부가 약간 함몰하고 털 색깔이 변색되어 일반적인 나병의 증상이 보이는데, 두드러진 특징은 노랗게 된 털입니다. 노란 색을 띄는 털이 ‘가느다란 털’인지는 논란이 있습니다. 의학적 관점에서는 피부병이 걸렸다 해서 털이 가늘어지는 경우는 없으므로 이것은 가는 털이 아닌 밀그롬이 말한 대로 털이 듬성듬성 빠진 상태를 가리킬 것입니다. 한편, 노란 털은 버짐의 일종인 황선(favus, 기계총)으로 인해 발생한 현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옴’보다는 버짐이 더 나은 번역일 수 있습니다.

 

(2) 옴의 재진 후의 판정(31-36)

 

만일 발병 부위에 피부 함몰은 보이지 않은데 털 색깔은 검지 않고 변색이 된 상태라면 제사장은 의심을 거두어선 안 됩니다. 제사장은 환자를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칠 일 동안 격리합니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격리를 위한 공간이 분명 자신의 집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피부병의 감염 위험성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랍비들은 그 격리실이 진영 밖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에는 성읍 밖의 어느 장소에 마련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진영 내의 특정 장소에 그런 공간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후자가 더 받아들일 만하나, 전자의 가능성도 배제될 수는 없는 듯합니다. 칠 일째 되는 날 재검을 통해 환부가 번지지 않은 상태에서 누르스름한 털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렇다 할지라도 이 경우 제사장은 서둘러 나병이 아니라는 확진을 내려선 안 됩니다. 여전히 그 자리에 의심할 만한 환부의 병변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례들에서는 이 경우 문제가 없다는 확진이 내려졌습니다. 제사장은 최종적으로 그의 환부 근처의 모발을 모두 민 다음 다시 칠 일간 그를 격리합니다. 두 번째 칠일째 되는 날 그는 세 번째 검사를 진행합니다. 만일 여전히 옴 증상은 거기에 있는데, 전혀 번지지 않고 피부 함몰이나 털의 변색이 발생하지 않는 등 아무런 변동이 없는 것이 확인되면, 제사장은 ‘그는 정결하다’고 최종적으로 선언합니다. 이때 그 환자는 (아마도 목욕을 하고) 옷을 빨며 비로소 정상적인 정결한 상태로 복귀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최종적으로 정결을 회복한 뒤라도 다시 옴이 번진다는 의심이 들면, 제사장은 그를 재차 검사해야 합니다. 만일 옴이 크게 피부에 번지면 제사장은 즉각 그를 진찰하여 피부에 번진 옴을 보고 다른 증상을 볼 것도 없이 그가 나병 환자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옴이 아직 남아 있긴 하나 점점 치료가 되는 증상이 보이면, 즉 털이 검은 색으로 바뀌고 있으면, 그 옴은 이미 완치가 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제사장은 그가 정결하다는 것을 재확합니다. 마지막으로, 38-39절은 옴과 같은 나병이 아닌 단순한 피부 질환의 증상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하얀 얼룩, 즉 하얀 피부 발진의 증상이 보인다 하더라도 그저 부유스름한(희끄무레한) 색깔을 띄는 단순 어루러기 증상으로 진단되는 피부병입니다. 이러한 증상에 대해서 제사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정하고 그가 정결하다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정한 상태에서 벗어나 깨끗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의 검증과 회복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치유를 경험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다고 선언하실 때, 우리는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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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3-01)


정결함의 중요성: 건강과 신앙의 연결

레위기 13장 1-17절


우리는 자신의 변함없는 상태를 유지해야 하며, 공동체의 정결함이 중요한 가치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개인의 상태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외부적으로는 건강을 유지하고 필요할 경우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병을 치유하고 회복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 레위기 13-14장은 극도로 부정하게 여겨지는 나병의 진단법과 환자 처리 규정을 알려줍니다. 사람의 피부, 그리고 사물의 표면과 건물의 벽에 나타나는 증상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 표피 질환들은 ‘짜라아트’라 불리는데, 인간의 피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므로 나병이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피부에는 통용되어온 나병이라는 단어를 편의상 사용하며, 사물과 건물의 표면에는 악성 곰팡이, 혹은 악성 번짐이라는 말을 사용할 것입니다.

 

나병의 증상(1) : 뾰루지와 색점, 백반증(1-3)

자신의 건강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필요할 경우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건강 문제를 다룰 때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고 돌보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교훈을 통해, 건강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 전체의 관심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3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1-3)

 

레위기 13-14장은 인간과 사물의 표피에 나타나는 악성 번식의 진단과 그것의 처리 방식에 대한 규정입니다. 13장은 이 표피의 부정결에 대한 난해한 증상들로, 14장은 그것들의 복잡한 정결 절차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나병’ 혹은 ‘문둥병’으로 번역되어 온 히브리어는 ‘짜라아트’입니다. 원래 헬라어 ‘레프라(lepra’)는 나병이 아닌 다양한 피부병에 대한 총칭이었는데, 근대에 와서 이것이 나병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로 자리 잡아 이런 오해가 발생했습니다. 현재는 이 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제거하기 위해 이 병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 한센병(Hansen's disease)으로 칭합니다. 따라서 짜라아트의 번역인 ‘문둥병’(한글개역) 혹은 ‘나병’(개역개정)은 오류입니다. 증상의 측면에서 볼 때, 세 가지 점에서 그러합니다.

 

첫째, 히브리어 ‘짜라아트’가 ‘문둥병/나병’으로 번역되었는데, 사실은 벽이나 물건의 표면에 번지는 악성 곰팡이도 ‘짜라아트’로 선언됩니다. 그런데 벽이 문둥병이 걸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짜라아트’에 대해 ‘문둥병/나병’이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습니다.

둘째, 사람의 피부에 발생한 ‘짜라아트’의 증상들을 볼 때, 오히려 나병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심지어 불에 덴 피부에 나타나는 증상을 가리키기도 하는 등(레 13:24-28),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사람 피부에 나타난 짜라아트는 매우 다양한 양상의 피부병들을 포함합니다. ‘짜라아트’로 분류된 피부 질환은 랍비들에 따라 16종, 36종, 혹은 72종으로 다양합니다. 대체로 피부가 눈처럼 하얗게 일어나며 피부 발진(색점)으로 붉게 부풀어 오른 종기, 전염성이 있는 피부 발진, 머리털이 빠지며 생기는 머리의 피부염을 비롯하여, 아마 나병을 포함할 수도 있는 포괄적이고 심각한 피부 질환들입니다. 이것은 만성 피부병이라기보다 대체로 갑자기 발생하는 특징을 갖습니다. 따라서 사람 피부의 ‘짜라아트’는 문둥병보다 악성 피부병이 더 나은 번역입니다.

셋째, ‘짜라아트’는 의학적 관점의 ‘질병’을 넘어선 제의적 관점의 ‘부정결’입니다. 제사장은 전문 의료인이거나 보건요원은 아니지만 훈련된 기본적인 의학 지식을 가지고 짜라아트 여부를 판정했을 것입니다. 이때 제사장은 의학적 관점을 포함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더 포괄적인 제의적 관점에서 판정을 내립니다. 즉, 몸을 둘러싼 피부의 무질서하고 비정상적인 상태가 ‘짜라아트’입니다. 따라서 ‘짜라아트’는 궁극적으로 나병이나 특정 피부병에 대한 의료적 진단을 넘어선 제의적 판단의 결과입니다. 이로 인해 피부병이 아닌 전염성이 없는 화상에 의한 피부 감염도 ‘짜라아트’로 선언될 수 있습니다(24-28).

 

결국, ‘짜라아트’는 나병이 아니라, 여러 증상으로 표피에 번지는 심각한 번식 현상, 즉 악성 피부 질환, 혹은 건물이나 물건 표면의 악성 곰팡이를 지칭하는 포괄적 용어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편의상 사람 피부에 대해서는 ‘나병’을, 건물/물건의 표면에 대해서는 ‘악성곰팡이’를, 둘 다를 공통적으로 표현할 때는 ‘악성 번식’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나’이란 단어를 한센병으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사람 피부에 발생하는 나병의 증상들에 대한 히브리어의 정확한 뜻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피부병인지 랍비들도 의견이 분분하며, 피부 전문의의 의학적 판단으로도 병명을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주석가들마다 나병의 증상들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한글 성경을 포함한 번역 성경들도 용어가 천차만별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정확히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주는 제의적 신학적 의미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절에서 보듯이, 나병 의심 환자가 나타나면, 제사장이 진단하고 검사를 하여 악성 피부병인지 여부를 판정합니다. 만일 악성으로 확진되면 그 환자는 즉각 진영 밖으로 추방해야 합니다. 나병의 첫째 증상은 피부에 무언가가 일어나거나(아마 어루러기나 피부 발진), 뽀루지가 생기거나 하얀 피부 병변(아마도 백선)이 생기는 것입니다. 환부에 무언가가 일어나긴 했으나 환부는 전체적으로 함몰되어 있는 특징을 보입니다. 피부에 나타난 ‘점’(바헤레트)은 ‘얼룩’이 더 나은 번역으로 볼 수 있는데, 피부에 생긴 일종의 어루러기(백반)와 같은 하얀 피부 병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절로 판단해 보건대, 아마 가려움 때문에 긁어서 ‘생살’이 드러난 것이 나병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때 대제사장이나 일반 제사장들에게 그 환자를 데리고 가 진단을 받습니다. 만일 환부에 털이 하얗게 되고 환부가 약간 함몰되어 있으면 이것은 심각한 피부 질환, 즉 ‘짜라아트’입니다. 제사장은 ‘이 사람은 부정하다’고 소리쳐야 합니다.

 

나병이 아닌 피부병(4-8)

질병의 증상을 통해 주의 깊은 관찰과 판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현대인에게도 자신의 건강 상태를 면밀히 살피고 필요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외적인 증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들의 내면과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상기시킵니다. 아픈 이들을 지지하고 돌보는 것이 서로의 건강을 지키는 데 필수적임을 일깨워 줍니다.

 

4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5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6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7그러나 그가 정결한지를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8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라 이는 나병임이니라(4-8)

 

그러나 만일 하얀 병변이 생기긴 했지만, 피부가 함몰되어 있지 않고 털에도 하얀 가루가 묻어 있지 않으면 제사장은 그를 의심 환자로 분류하여 칠 일 동안 격리해 놓습니다. 칠 일째에 다시 그를 진찰했을 때, 여전히 환부에 변화가 없고 피부병이 퍼지지 않았으면 확진을 위해 다시 그 환자를 칠 일간 격리합니다. 재진을 통해 환부의 증상이 완화된 것이 보이고 색이 희미해졌으면 그것은 일반 피부병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이때 제사장은 ‘이 사람은 정결하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단순한 부정결의 상태에 놓인 것이므로 (아마 목욕을 하고) 옷을 빨면 완전히 정결한 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완치 판정을 받은 뒤라도 다시 동일한 피부병이 발생하면 제사장에게 세 번째 검사를 받아야 하며, 만일 그 피부병이 번졌으면 그는 악성 피부병이 걸린 것으로 최종 확진되며, 제사장은 ‘이 사람은 부정하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나병의 증상(2): 흰점과 생살(9-17)

질병과 건강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며, 신체적 증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또한, 외부의 모습이나 상태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들의 내면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아픈 이들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9사람에게 나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10제사장은 진찰할지니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기 생살이 생겼으면 11이는 그의 피부의 오랜 나병이라 제사장이 부정하다 할 것이요 그가 이미 부정하였은즉 가두어두지는 않을 것이며 12제사장이 보기에 나병이 그 피부에 크게 발생하였으되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13그가 진찰할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14아무 때든지 그에게 생살이 보이면 그는 부정한즉 15제사장이 생살을 진찰하고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그 생살은 부정한 것인즉 이는 나병이며 16그 생살이 변하여 다시 희어지면 제사장에게로 갈 것이요 17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서 그 환부가 희어졌으면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그는 정하니라(9-17)

 

9-17절은 나병의 증상을 보이는 피부병을 단번에 감별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특별히 12-16절은 이상하게 읽힌다. 나병이 전신에 퍼져 피부가 여기저기 희어졌는데, 제사장은 정결한 자로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뜻 피부에 발생한 나병의 증상으로 보이기에 일단 나병이라는 표현을 쓰나 실제로는 나병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한 혼란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일종의 피부병이 치유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표피박리, 즉 새로운 하얀 피부가 생기는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나병의 하얀 피부는 눈이 내린 것 같으면서, 털까지 하얘져 눈발처럼 흩날려 보이는 특징을 가지나 표피 박리는 특징상 단순히 살갗 자체가 하얀 색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이것을 구분해서 최종 진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나병의 대표적 증상은 다섯 가지 정도로 나타나는데, 무엇보다도 피부가 군데군데 하얗게 변하는 흰색 피부 발진과 더불어 털이 희어지기 때문에 마치 피부에 눈이 내린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증상을 요약하면, 흰색 얼룩(점)과 흰털, 피부 발진, 뾰루지, 생살, 그리고 우묵하게 들어간 피부 등입니다. 저주를 받은 미리암(민 12:10)과 나아만(왕하 5:27)에서 전형적인 나병의 증상이 확인되는데, 공통적으로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다”고 표현됩니다.

 

일단 나병의 증상이 발견되면, 제사장이 진단하여 악성 여부를 판정합니다. 현대 의학적 방식으로는 아마 어떤 질환의 양성과 음성의 판정과 비슷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음성 판정이 내려지면 추방은 면하고 자신의 거처에서 일련의 정결 의례로 씻어내면 되지만, 악성판정이 내려지면 추방됩니다. 일단 추방된 나병 환자라도 나중에 치료가 되었을 경우, 진영 밖에서 제사장의 검사를 받고 완치 판정이 나오면 복귀 의례를 밟습니다. 그러나 복귀 의례는 매우 복잡한 여러 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나병은 철저한 정화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본문은 질병과 정결함에 대한 신중한 접근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자신의 건강 상태를 면밀히 살피고, 필요할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수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외적인 증상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서로의 내면과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 내에서 아픈 이들을 지지하고 돌보는 것이 서로의 건강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하고 치유하시는 분임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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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2-01)


출산의 기쁨과 성결의 의미

레위기 12장 1-8절


 

출산을 생명의 신비이자 축복으로 보며, 부모가 되는 과정에서 신체적, 정서적 변화에 대한 이해와 돌봄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정결함의 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는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또한 출산 후의 공동체 내 지원과 배려가 부모의 정서적 안정에 큰 도움이 됨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규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세심하게 돌보시고 신앙 여정에 질서를 부여하신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 정결법의 두 번째 규례는 출산 후 산모의 부정결에 대한 것입니다. 남아의 경우와 여아의 경우 정결 기간이 두 배의 차이가 납니다. 당장에 우리는 왜 아이를 낳은 산모가 부정을 탄 것으로 여겨지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수수께끼는 앞서 11장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정결과 부정결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생명 죽음이라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왜 남아와 여아 출산에서 정결 기간이 두 배의 차이가 나느냐는 것입니다.

 

출산 후의 정결 기간(1-4)

출산은 생명의 신비와 기쁨을 나타내며, 부모가 되는 과정에서 신체적, 정서적 변화가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정결함의 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공동체의 지원과 배려가 필요함을 상기시킵니다. 이러한 규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신앙 여정에 질서를 부여하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여인이 임신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곧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3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 4그 여인은 아직도 삼십삼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1-4)

 

본문에서는 출산한 여인의 정결 규례에 대해 설명합니다.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경우, 7일 동안 부정하게 되며, 이후 33일 동안 정결하게 지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결함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1) 남아의 경우(1-4)

 

어떤 여자가 출산을 한 뒤, 부정하게 된다. 그 이유는 아이를 낳아서가 아니라, 월경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자궁으로부터 출혈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출산 자체는 부정한 일이 아니다. 이때 남아 출산과 여아 출산 사이의 정결 기간에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산모는 7일 동안 부정하게 된다. 제8일에 그녀는 아이를 할례해야 한다. 본문은 7일째의 산모에 대한 아무런 추가적 조치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추론컨대, 그녀가 7일째 되었을 때 아마 목욕을 했을 것이다(Milgrom). 정결법에서 부정결의 기간이 명시될 때는 마지막 날에 그 부정한 사람이 목욕을 하고 추가로 옷을 빠는 것이 통상적 규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7일에 더하여 앞으로 33일 동안 그녀는 성소 접근이 제한되고 성물의 접촉이 금지되어 제물을 바칠 수 없다.

 

(2) 여아의 경우(5)

 

여자 아이를 낳을 경우에는 정결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납니다. 산모는 14일 동안 부정하게 되며, 14일 저녁에 아마 목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66일 동안 성소 접근과 성물 접촉에 제한을 받습니다.

 

정결 기간 후의 제사(6-8)

출산 후 회복과 정결함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부모가 된 후 자신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남성과 여성의 출산 경험이 다름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과정은 감사와 신앙의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또한, 공동체의 지원과 격려가 새로운 부모에게 큰 힘이 되어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5여자를 낳으면 그는 두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월경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육 일을 지내야 하리라 6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7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8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5-8)

 

본문에서는 여인이 딸을 낳았을 경우, 14일 동안 부정하게 되고, 이후 66일 동안 정결하게 지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이는 아들을 낳았을 때와는 다른 정결 기간을 설정하여, 출산의 성격에 따라 규례가 다름을 보여줍니다. 여인은 정결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께 맡기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 표준적 제사(6-7)

 

출산 후 산모는 남자 아이의 경우 도합 40일, 여자 아이의 경우 도합 80일의 기간을 채운 뒤, 성소에 규정된 제물을 바치러 올라갑니다. 흔히 생각하는 대로 이 기간 동안 산모가 집의 특정한 장소에 격리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은 오류입니다. 남아 출산 후 7일이 지나면, 그리고 여아 출산 후 14일이 지나면, 엄중한 격리가 풀리고 추가적인 정결 기간 동안에는 제한적인 가사 활동과 사회적 활동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그 기간에 성소 접근과 성물 접촉만 제한받았을 뿐입니다. 그 기간 동안 산모는 일정한 제한 속에서 몸의 회복을 위한 주변의 충분한 배려를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한 기간이 다 찬 뒤, 그녀는 번제를 위한 일년생 양과 속죄제를 위한 비둘기를 성소에 가져가 제사를 바칩니다. 이것이 최종적인 산후 정결을 위한 표준적 제물입니다. 여기서 속죄제 외에 양의 번제를 바친 이유는 아마도 출산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속죄제가 비둘기로 충분했던 이유는 그녀의 부정결은 심각한 죄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사장이 그 제물을 하나님께 바칠 때 비로소 그녀는 속죄를 얻으며 최종적으로 그녀의 정결이 선언됩니다. 여기서 그녀가 얻은 키페르(속죄)는 죄의 해결이 아님을 상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산혈로 인해 몸이 부정해졌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키페르(속죄)는 그녀의 부정한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속죄제 짐승의 효과인 키페르는 여기서도 이중적 의미를 지닙니다(Sklar): ‘배상(ransom) + 정화(purgation).’ 여기서 배상은 그녀의 부정해진 몸과 그로 인한 성소의 오염에 대한 값의 지불이며, 정화는 그 더럽혀진 성소를 속죄제의 피로 씻어냄을 의미합니다.

 

(2) 완화된 제사(8)

 

그러나 산모가 가난한 처지에 놓여 있다면, 제물의 요건이 크게 완화됩니다. 양은 가난한 사람이 드리기에 버거운 짐승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양 대신 비둘기를 속죄제물로 가져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산모는 속죄제용 비둘기와 번제용 비둘기, 즉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완화된 제물도 그녀를 위한 속죄의 효과는 동일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여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배려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죄 문제로 속죄제를 바칠 때와 마찬가지로, 성소를 청소하지 않으면 여인의 정결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 문제를 다룰 때, 죄를 안수를 통해 전가하고 제사자의 회개와 더불어 짐승을 죽인 것 자체로 죄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그 죄로 인해 더럽혀진 성소를 그 속죄제의 짐승의 피로 씻어낸 뒤에야 비로소 최종적으로 그의 ‘죄사함’이 선포되었습니다. 부정결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작동합니다. 산모가 정한 정결 기간을 다 채우고 목욕을 하고 추가적인 장기적인 정결 기간을 다 채웠어도 산모의 정결이 완성되지 못합니다. 마지막에 성소에 올라와 제물들, 특히 속죄제를 바친 뒤에야 비로소 최종적인 ‘정결’이 제사장에 의해 선언됩니다.

 

왜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산혈로 인해 부정해집니까? 왜 남아 여아 사이에는 두 배의 정결 기간의 차이가 발생합니까? 출산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따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창 1:26-28) 그로 인한 출혈을 부정하게 여깁니다. 일단 피가 몸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 자체가 생명의 기운의 소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출혈은 생명에서 멀어지고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하므로 부정하게 여겨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출산은 자연스러운 인간 활동이므로 언뜻 이것은 매우 부당해 보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모순된 규례를 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 여기에는 나름대로 오경의 신학적 배경이 있습니다. 12-15장 전반에 걸쳐 부정결을 제거하는 제의 절차가 매우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특히 속죄제가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이것은 12-15장의 부정결의 증상들이 분명 죄와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추정컨대 이 부정을 유발하는 신체적 유출의 배경과 기원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저지른 최초의 범죄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합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인간 신체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부정결과 일부 그와 비슷한 사물의 부정결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발생한 신체와 자연의 변화로 인한 증상들일 수 있습니다. 즉, 그것들은 일종의 죄의 증상들입니다. 그런 부정을 씻어 내기 위해 원래 죄를 위한 제사인 속죄제가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으로 보입니다. 레위기 12장의 가장 큰 난점은 여아와 남아 출산 사이의 정결 기한의 차이입니다. 여아를 낳았을 때는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납니다. 이에 대해 그동안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제시되었습니다.

 

a. 남녀의 가치의 차이 : 고대 이스라엘의 가부장적 체제 속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했으며, 몸값도 반값이었기(레 27:2-7)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정결이 더 크다 해서 반드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시체가 돼지 사체보다 더 더럽지만, 사람과 돼지 자체의 가치 면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여아의 정결 기간을 마친 뒤, 산모가 성전에 올라가 바친 제물은 남아와 여아의 차이가 없었다는 점도 이런 견해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b. 의학적 견해 : 실제로 여아를 낳으면 산모의 하혈 기간이 더 길다는 것이 관찰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나 두 배의 부정결 기간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다른 의학적 견해로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태아의 완전한 형성이 남아는 41일, 여아는 81일이 걸렸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으려 합니다.

 

c. 여아는 미래의 산모 : 여아는 매달 운명적으로 부정결의 고통을 겪는 미래의 산모라는 점이 고려되어 두 배의 기간이 요구됩니다. 이 견해는 그럴듯해 보이나 아무런 근거가 없기에 설득력이 없습니다.

 

결국, 어느 것도 남아와 여아 출산으로 인한 정결 기간의 차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아마 각각 40일과 80일의 장기간 격리와 활동 제한의 배경에는 산모의 육체적 회복과 질병 감염을 방지하기 위한 배려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여아의 경우 산모의 출혈이 더 오래가고(남아의 경우보다 두 배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그만큼 회복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 사실이라면, 바로 그런 이유로 충분하게 두 배의 기간을 법으로 정했는지 모릅니다.


출산이라는 생명의 신비와 그 과정에서의 정결함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질서를 주시며, 부모가 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돌봄과 지원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를 격려하고 도와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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