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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8-01)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증조

이사야 8장 1-8절


 

여러 가지 일을 만날 때, 사건을 사건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또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일이 무엇인지 ...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도 사건을 자신의 시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복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 7장처럼 아람과 에브라임이 연합하여 유다를 침략하려 했을 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큰 서판에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고 하시며, 그의 아들 이름도 그렇게 지으라 하십니다. 이는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앗수르왕에게 노략당할 것임을 뜻합니다. 유다 백성이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의지하니,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위력이 그들을 뒤덮게 하실 것입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1-4)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것, 귀한 믿음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바로 볼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길 원하고 계십니다.

 

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2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3내가 내 아내를 가까이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4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1-4)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약속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백성들은 날마다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따르고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표적행위(1-2)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큰 서판’을 취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 위에다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쓰라고 명령하시고, 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고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표적행위에 관한 명령만 나오고 실행 보고는 없습니다. 이사야가 여호와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판의 기록 목적은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성전이나 성문 주변의 공개적 장소에 세워놓으려고 큰 서판에 기록한 것 같습니다. 서판에 기록된 ‘마헬살랄하스바스’는 문자적으로 ‘신속히 약탈물-재빨리 – 노획물’입니다. 약탈과 노략을 당하는 대상을 모르기에 여호와께서 해석해주시기 전까지는 그 의미가 모호합니다. ‘통용 문자’로 번역한 단어는 문자적으로 ‘사람의 석필’입니다. 전통적으로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글자체로 이해하지만, 서판에 글자를 기록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의 증인은 이스라엘의 사법 전통에 일치합니다(신명기 17:6; 19:15). 예루살렘 왕궁과 성전의 최고위층에 속한 자들이 증인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열왕기하 16:10-16에 의하면 제사장 우리야는 아하스가 통치할 때 예루살렘 성전의 최고 제사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아하스의 지침과 명령에 따라 다메섹의 제단을 모방해서 새 제단을 만들고 이전의 놋제단은 새 제단 북쪽에 옮겨놓았습니다.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가 열왕기하 18:2의 스가리야와 동일 인물이라면 그는 아하스의 장인이 됩니다.

‘진실한 증인’은 이들에 대한 여호와의 평가를 담은 표현이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문맥에 더 가깝습니다. 표적행위와 관련해 증인이 세워지는 경우는 여기가 유일합니다. 일반적으로 표적행위는 공적 장소에서 행해지기에 증인이 필요 없습니다. 표적행위의 실행과 그 해석 사이의 시간적 간격 때문에 진실한 증인이 요청됩니다. 3-4절에 의하면 적어도 10개월이 지나서야 표적행위에 대한 해석이 주어집니다. 서판이 기록된 시점을 확실하게 증언해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증인이 필요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남아있을 때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멸망을 선포하시고, 그 말씀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증인을 세우시고 있습니다.

 

(2) 아이의 출생과 이름(3)

 

새로운 사건을 보고해주는 3-4절은 아이의 이름에 의해 앞 단락에 연결되며, 표적행위를 해석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사야의 사적(私的) 사건이 여호와에 의해 공적(公的) 메시지가 됩니다.

이사야가 아내(여선지자)에게서 아들을 낳자 여호와께서 아이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지어주시고 그 의미도 해석해주십니다. 10개월 이상 모호하게 남았던 서판에 기록된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의미가 여호와의 계시로 밝혀집니다. 다메섹과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해 ‘신속히 약탈물-재빨리 노획물’이 됩니다.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멸망이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전’(7:16)에서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으로 임박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갓 태어난 아이는 보통 1년이 되기 전에 ‘엄마, 아빠’를 부르게 됩니다. 임마누엘의 징조가 2-3년의 기간을 내다본다면, 이사야의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에 따르면 1년도 안 돼 유다를 위협하는 아람과 에브라임이 멸망합니다.

‘앗수르 왕 앞에’는 승리의 행진을 전제합니다.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앗수르의 용사들이 다메섹과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약탈한 재물을 가지고 앗수르 왕 앞으로 자랑스럽게 행진할 것입니다.

 

유다까지 뒤덮는 대홍수 예언(5-8)

재난 영화를 보면 다가오는 재앙의 전조를 무시하다가 순식간에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전에 경고하시고 전조를 주십니다. 안일에 빠진 이들이 그 사인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만이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5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7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8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5-8)

 

아람과 에브라임의 위기 때 선포된 네 번째 말씀입니다. 1-4절의 심판은 다메섹(아람)과 사마리아(북이스라엘)에 한정됐는데, 여기서는 심판의 범위가 에브라임을 넘어 유다로 확대됩니다.

 

(1) 고발(5-6)

 

6절의 이해는 ‘이 백성’과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이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한다고 고발하십니다. 이미 이백 몇 십 년 전에 남북이 분열됐기에 이스라엘이 자기 왕을 기뻐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백성’이 유다 백성일 때만 고발은 남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백성’은 르신과 베가가 추진하는 반 앗수르 연합에 동조하는 자들입니다. 유다는 전통적으로 친애굽적이었기에 아하스의 친앗수르 정책에 반발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르신과 베가와 함께 앗수르에 맞설 것을 주장했습니다.

유다 백성이 버린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여호와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두 가지 근거에서 다윗 왕조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첫째, ‘실로아 물’과 ‘르신과 르말리아의 아들’이 비교의 대상이기에 둘은 같은 또는 대등한 범주에 속해야 합니다. 후자가 왕이라면 전자도 왕이어야 합니다. 둘째,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이 7절에서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에 대비되고, 8절에 따르면 후자에 의해 전자가 압도당합니다. 후자가 다윗 왕조일 때만 가능합니다. 세차게 넘쳐흐르는 큰 강과 잔잔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각각 앗수르와 유다의 국력을 반영한 표현입니다.

 

(2) 심판언선(7-8a)

 

정리하자면,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일부가 다윗 왕조에 등을 돌리고 르신과 베가가 추진하던 반 앗수르 연합에 동조했습니다. 물론 친앗수르 노선을 따르는 자들이나 반앗수르 노선을 주장하는 자들이나 모두 여호와께 의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은 물론 유다도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과 그의 군대를 불러 먼저 다윗 왕조를 위협한 아람과 에브라임을 심판하십니다. 앗수르의 침략이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홍수에 비교됩니다(이사야 17:12-14; 예레미야 46:7; 51:42).

여호와께서 르신(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에브라임) 위로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티그리스 또는 유브라데)가 넘쳐흐르게 하십니다. 홍수가 땅을 뒤덮듯이 앗수르 군대가 아람과 에브라임을 뒤덮습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을 덮친 홍수가 계속 유다로 밀려들고 넘쳐흘러 범람하고 목에까지 차게 됩니다. 홍수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 아람과 에브라임과 달리 유다는 죽음 직전까지 내몰리지만, 그래도 목숨은 구합니다.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으로 함락의 위기에 처했던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극적인 간섭으로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습니다(29:1-8;37:36). 여호와께서는 아람과 에브라임을 주고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7:20)을 통해 유다의 불신앙을 혹독하게 징벌하십니다. 아하스의 불신앙 때문에 임마누엘의 징조가 구원(7:16)에서 심판(7:17)으로 옮겨지는 것처럼, 앗수르의 역할도 유다에 이중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불러 유다를 위협한 아람과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시고(8:4,7), 또 당신께 등을 돌리고 앗수르에 의존한 유다를 징계하십니다. 다윗 왕조와 그의 백성이 굳게 믿지 않기에 굳게 서지 못하고(7:9) 강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위기에 빠집니다.

 

(3) 펼친 날개(8b)

 

8절의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의 해석은 그의 이해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가 앗수르 왕을 가리킨다면, 넘쳐흐르는 홍수의 표상과 온 땅을 뒤덮는 펼쳐진 날개의 표상은 상호보완적입니다. 앗수르의 군대가 한 번은 유다 땅을 밑에서부터 뒤덮는 홍수로, 한 번은 하늘 위에서 먹이를 노리며 덮치는 거대한 새로 묘사됩니다. 날개를 활짝 펼치고 먹이를 노리는 새처럼 앗수르가 먹이를 찾아 유다를 침략합니다. ‘그’가 여호와를 가리킨다면, 유다의 심판이 유다의 구원으로 전환되는 반전을 볼 수 있습니다(29:5). 어미 새가 날개를 펴서 새끼 새들을 보호하듯이 여호와께서 날개를 펼쳐 당신 백성을 지켜주십니다(시편 17:8; 36:7; 57:1; 61:4; 91:4; 룻기 2:12).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임마누엘) 앗수르의 침략은 위협적이지만 제한적입니다.


온 세상을 삼킬 듯 흉용하게 넘실거리며 흐르는 창수도 하나님 나라를 덮칠 수는 없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통제하시고 ‘잔잔하라’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의 은혜의 날개 아래 거할 때만, 잔잔히 흐르는 맑고 깨끗한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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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7-02)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아하스

이사야 7장 10-25절


 

같은 일, 같은 사람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들의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과부가 드린 동전 두 개는 사람들이 보기에 적은 헌금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가장 많은 헌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이 참된 신앙인이라고 여겼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세리가 더 바른 신앙인이었습니다. 이사야와 아하스에 대한 평가는 어떠하겠습니까?

 

 

  • 첫 번째 신탁을 거절한 아하스에게 여호와께서 다시 신탁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준 약속을 지키려고 쓰시고 아하스는 여호와를 왕궁의 정치에서 배제 시키려 애씁니다. 아하스는 어떠한 징조라도 구하면 주겠다는 여호와의 제안을 경건으로 포장해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여호와의 구원 의지가 아하스의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만들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합니다.

 

아하스에게 주는 두 번째 예언(10-17)

 

하나님께서는 시험해야 할 대상은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모든 경우에 불경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시험을 명령하기도 합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징조를 구하라고 아하스 왕에게 말했습니다. 이 명령을 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10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려느냐 1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대저 이 아기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17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10-17)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징조를 구하게 하여 믿음의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하지만 왕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며 거절합니다. 이는 겸손이 아니라 거역이자 오만입니다. 경건을 가장하여 하나님을 괴롭히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1) 하나님의 제안과 아하스의 거절(10-11)

 

르신과 베가의 계획이 반드시 실패하리라는 예언(7-9)을 주셨지만, 앗수르에 의존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아하스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하스의 결정에서 다윗 왕조의 멸망까지 이어질 수 있는 위기를 보셨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구원 약속의 확실성을 확인할 수 있는 아무 징조라도 구하면 이를 들어주겠다고 제안하십니다(11).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는 다른 예를 찾을 수 없는 파격적 제안으로, 아하스와의 개인적 관계보다는 다윗 왕조와 유다가 직면한 사태의 심각성과 중요성에서 기인합니다. 확인할 수 있는 징조를 통해 신뢰의 부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제안을 아하스는 경건을 가장한 위선적 신앙으로 거절합니다(12). 그는 아람과 에브라임의 군사적 위협과 관련해 여호와의 능력과 의지를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간접적이지만, 정치영역에서 여호와의 주권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2) 책망과 징조 (13-14)

 

‘다윗의 집’은 사람들을 괴롭힐 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괴롭힙니다(13). 이들은 백성을 전쟁의 위험에 빠뜨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실 수 없게 만듭니다. 아하스의 거절로 여호와께서 어려운 처지에 빠지십니다. 그분의 약속과 다윗의 집의 불순종이 충돌합니다.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준 약속에 신실하셔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윗 왕조의 불순종에 대해 그분은 눈을 감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라는 제안을 거절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다윗의 집에 징조를 주십니다(14). 불순종을 책망한 다음에 주어진 임마누엘 징조의 해석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3) 징조의 해석 (15-17)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으로, 불의한 자에게는 심판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사야의 문맥에서도 임마누엘의 징조는 이중적입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의 멸망을 선포하는 16절에 따르면 구원의 징조가 되고, 유다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파멸적 재앙을 선포하는 17절에 따르면 심판의 징조가 됩니다. 임마누엘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처녀’로 번역한 ‘알마’는 의미상 처녀를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처녀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너희’에게 징조로 주어졌기에 ‘처녀’와 ‘임마누엘’은 아하스가 알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아기 임마누엘은 악을 물리치고 선을 택할 줄 알 때까지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입니다(15). ‘엉긴 젖과 꿀’이 구원의 양식인지 고난의 양식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전자라면 짧은 평안의 시기가 끝나고 긴 고난의 시대가 오고, 후자라면 짧은 고난의 시기가 지난 후에 안정과 번영의 시대가 옵니다. 징조의 이중성은 여호와의 약속과 아하스의 불순종의 충돌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의 멸망(16)은 다윗에게 준 약속을 지키시려는 여호와의 결정이기에 아하스의 선택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7-9a). 그렇다고 여호와께 의지하기를 거절한 다윗 집안의 불순종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9b). 그분은 아하스가 구원자로 선택한 앗수르를 불러 유다를 심판하십니다(17).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임마누엘)은 자기 계획 따라 예루살렘을 침략하려는 북쪽의 두 나라뿐만 아니라, 구원 약속을 거절한 유다에도 심판의 징조가 됩니다. 아하스가 다윗 왕조의 신학적 초석이신 여호와 배반하고 앗수르를 택함으로써 구원의 징조가 될 수 있었던 임마누엘이 심판의 징조가 됩니다.

 

심판의 도구 앗수르와 애굽(18-25)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배신, 패역함, 불순종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번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순종하며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18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곳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19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 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20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 털과 발 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21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22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 땅 가운데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과 꿀을 먹으리라 23그 날에는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 있던 곳마다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라 24온 땅에 찔레와 가시가 있으므로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25보습으로 갈던 모든 산에도 찔레와 가시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풀어 놓으며 양이 밟는 곳이 되리라(18-25)

 

왕이 의지했던 앗수르는 유다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황무지가 되고 유다는 큰 수치를 겪을 것입니다. 당장 어려움이 해결되었다고 축복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배가 된 고통이 뒤따를 것입니다. 징조와 은혜를 입었다면, 늦기 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1) 심판의 도구 앗수르와 애굽(18-20)

 

18-25절의 ‘그 날에는’으로 시작하는 세 개의 말씀은 17절의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난 때부터 당하여보지 못한 날’의 구체적 설명입니다. 아하스의 불순종이 유다에 파국적 재앙을 가져옵니다. 이사야는 애굽과 앗수르 군대를 파리와 벌에 비유해 유다에 심판을 선언합니다. 벌을 치는 사람이 휘파람을 불어 벌들을 한곳으로 불러 모으듯, 여호와께서 애굽과 앗수르의 군대를 이스라엘 땅으로 불러 모으십니다. 유다가 생존을 위해 조공을 바치고 머리를 숙였던 강대국들이 유다를 침략합니다. 다윗 왕조의 유일한 후원자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앗수르와 애굽에 도움을 구한 유다는 혹독한 수업료를 납부하고 서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깨달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브라데 건너편에서 앗수르를 용병으로 데려와 유다를 치십니다. 사람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머리 털’과 ‘수염’뿐만 아니라 ‘발 털’(음부의 털)마저 밀리는 수치와 모욕을 당합니다.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에서 아하스의 결정에 대한 이사야의 신랄한 풍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아하스는 앗수르에 의존하여 다메섹과 에브라임의 위협을 벗어나려 하지만, 구원자로 불러드린 앗수르에 의해 도리어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앗수르는 유다의 아하스를 징계하기 위해 다메섹과 사마리아를 삯으로 주고 불러온 용병이 됩니다.

 

(2) 심판 이후의 삶 (21-22)

 

두 번째 ‘그 날에는’ 말씀이 구원 시대의 축복과 관련된 말씀인지 심판과 관련된 말씀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심판으로 경작지가 황폐해져 농사도 짓지 못하고 최소한의 가축으로 목숨을 연명하게 됩니다.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에서 나오는 젖은 한 가정의 양식으로는 부족한 양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하며 살게 됩니다. ‘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의 해석은 상이합니다. 심판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는 역설 또는 풍자가 됩니다.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어 어린 암소한 마리와 양 두 마리에서 나는 젖으로도 충분히 먹고 남습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심판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진 소박한 구원 약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심판으로 생활 기반이 다 파괴됐지만, 소망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에서 온 가족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많은 양의 젖이 나기 때문입니다. ‘엉긴 젖과 꿀’도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상입니다. 경작지와 가축의 소산과 함께 먹는다면 풍요로운 양식이 되고, 수확물이 부족해 야생의 젖과 꿀에 의존해 생존해야 한다면 심판 시대의 척박한 삶을 보여주는 양식이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엉긴 젖과 꿀’은 임마누엘의 양식이기에(7:15) 구원에 대한 암시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심판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절망적 환경이 극복될 수 있습니다.

 

(3) 폐허가 된 땅(23-25)

 

백성의 운명 다음에 땅의 운명이 언급됩니다. 땅도 같은 처지에 놓입니다. 5:1-7의 포도원 노래에서 사용된 단어들과 표상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전쟁으로 거주지와 경작지가 완전히 파괴 됩니다. 은 천 세겔이나 나가는 천 그루의 포도나무가 있던 포도원이 완전히 황폐해져서 찔레와 가시가 자랍니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은 한 개는 매우 높은 가격입니다. ‘은 천 냥 값이나 되는 천그루의 포도나무가 있던 곳’은 최고 품질의 포도나무가 심긴 비옥한 포도밭(5:1-2)을 시사하는 표현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풍요로운 결실이 보장된 기름진 포도밭이 찔레와 가시가 자라는 황무지가 됩니다. 야생 동물이나 살 수 있는 곳이 되었기에, 사람들이 거기로 가려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해야 합니다. 가나안 ‘온 땅’이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됩니다. 경작지로 개간한 산들이 폐허가 돼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소와 양이 풀을 뜯어 먹는 곳이 됩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가장 큰 징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징조를 통해 기회를 주기 원하시며,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길 바라십니다. 징조를 무시하면 수치와 심판을 당하겠지만 징조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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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7-01)


임마누엘을 믿기 원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7장 1-9절


 

사탄이 우리를 무너뜨리고자 할 때 전략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서 낙심하게 만듭니다.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낙심하도록 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어렸습니다. 성도들은 문제를 만나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다스릴 수 있는 주권자 하나님을 바라봐야할 것입니다.

 

  • 유다 왕 아하스가 통치할 때 아람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가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위협했습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주도한 반 앗수르 연합에 가담하기를 거절한 아하스를 징계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도 반앗수르 정책을 지지하는 정치적 세력이 있었습니다. 아하스는 외부와 내부의 적으로부터 위협을 당했습니다.

 

역사적 배경(1-2)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작은 위기에도 두려움에 빠집니다. 마음을 흔드는 위기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할 때, 상황은 완전히 역전될 수 있습니다. 남 유다 아하스 왕과 백성들이 흔들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1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더라(1-2)

 

본문에서 언급된 전쟁은 아람과 북 이스라엘 연합군이 남 유다를 침공한 사건입니다. 앗수르가 제국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은 반 앗수르 동맹을 형성하고 친 앗수르 정책을 편 남 유다를 침입합니다.

 

(1) 아람과 이스라엘의 위협(1)

 

먼저 사건의 시작과 결말을 요약적으로 알려줍니다.

신흥 강국인 앗수르 압박 속에서 아람과 북 이스라엘은 반 앗수르 동맹을 맺습니다. 그들은 남 유다의 아하스 왕을 침공해서 패하고 그들의 꼭두각시 왕은 세우려고 남 유다를 침략했습니다. 당시 아람 왕은 다메섹에서 통치하고 있었던 르신이며, 이스라엘 왕은 사마리아에서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들을 통치하고 있었던 베가 왕이었습니다. 그 왕은 이스라엘 시대에 부가하야 왕 시대에 장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찬탈한 자였습니다. 이렇게 이방 왕과 정통성을 가질 수 없는 북 이스라엘 왕은 남 유다왕 아하스가 자신들의 동맹에 참여하도록 압박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를 정복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침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절에서 이 전쟁은 연합군의 실패로 끝이 납니다. 본문은 전쟁의 목적이나 실패로 끝난 배경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결말만 간단히 언급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의 침략이 별다른 위협이 아니었던 것처럼 거리를 두고 보고합니다.

 

(2) 흔들리는 왕과 백성(2)

 

아람 왕(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베가)이 유다 왕(아하스)에게 동맹을 제안합니다. 이는 반앗수르 동맹을 맺어 남하해 내려오는 앗수르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지해 친앗수르 정책을 폈기에 반앗수르 동맹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연합해 유다를 먼저 공격해 옵니다(주전 734-733). 두 나라가 예루살렘까지 공격해 들어오자 대항할 힘이 없던 아하스 왕과 백성의 마음은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다윗의 집’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절의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베가 왕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인정한 다윗 왕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소문, 연합군의 침입이 전 유다에 알려졌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만으로도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 남 유다가 당시에 얼마나 많이 동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남 유다의 두려움과 혼란은 나름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유다의 군사력은 이스라엘을 상대하기에도 버거웠기에,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은 유다에 치명적일 수 있었습니다. 마치 따로 노는 듯한 1절과 2절을 함께 읽으면, 두려움에 빠진 왕과 백성의 반응은 부정적 전망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그 배후를 보지 못하기에, 이사야가 환상 중에 본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6:5)을 바라보지 못하며, 위협 같지 않은 위협에도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나무처럼 떱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격려와 경고의 말씀(3-6)

성도는 사람의 계획에 낙심하지 말고,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만이 온전히 이루어짐을 굳게 믿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인간의 모든 도모와 계획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3그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5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3-6)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아하스 왕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는 유다를 침략해 아하스 왕을 끌어내리고, 대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울 계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계획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단언하십니다. 오히려 유다를 멸하려는 북 이스라엘이 65년 내에 패망할 것임을 예언하십니다.

 

(1) 이사야와 스알야숩(3)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아하스를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만남에는 그의 아들 ‘스알야숩’을 동행하도록 하십니다. ‘스알야숩’은 ‘만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며 반드시 심판이 올 것임을 알리는 역학을 했습니다. ‘스알야숩’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처럼, 이제 이름 자체로서 하나님의 예언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와 그이 아들 ‘스알야숩’이 군사적인 요충지인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길’에서 아하스 왕을 만납니다(3). 예언자가 말씀을 전하거나 선포할 때 자식이나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경우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또 왕을 만나려면 왕궁을 찾아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두 지침은 특별한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남의 장소로 선택된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은 아하스에게 정치적 표징이, 여호와께는 신학적 표징이 됩니다. 아하스가 그곳에 간 목적은 예루살렘이 포위당할 경우에 대비하여 수로 시설을 점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샘물이나 지하수가 없었기에 물의 확보는 수성의 결정적 요소였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윗못 수도’가 아닌 여호와가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생명수임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의 전쟁 위협은 다윗 왕조의 영원한 통치를 약속하신 여호와께 의존해 극복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아들 스알야숩의 동반과 관련해서는 이름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8:18에서 이사야는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라고 말함으로써, ‘이사야’와 ‘스알야숩’의 이름이 징조로 사용됐음을 시사합니다. ‘여호와께서 도움이시다’를 의미하는 이사야는 구원의 징조가 되고, ‘(전쟁에서 패하고) 남은 자가 돌아오다’를 의미하는 스알야숩은 심판 징조가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사야와 스알야숩을 아하스에게 보내 구원과 심판이 그의 결정에 달렸음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아하스는 구원하시는 이사야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정치적 선택을 하면 남은 자만 돌아오게 하시는 스알야숩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2) 격려와 경고(4)

 

아람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위협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하스에게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통해 격려의 말씀을 전하십니다(4). 이사야는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고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 침착하게 대처할 것을 주문하십니다. 아하스에게 분노해 전쟁으로 위협하는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의 르말리야의 아들(베가)은 다 타버리고 연기만 나는 장작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에 타버린 장작이 화로나 아궁이에서 꺼내 버려지는 것처럼, 르신과 베가도 이미 세력을 다 상실하고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기에 이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왕 베가를 거듭 ‘르말리야의 아들’로 부르면서 그에 대한 경멸감을 표출합니다. 베가에 대한 경멸은 그의 왕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열왕기하 15:27-31)는 이스라엘 왕 브가히야(주전 737-736년)의 무관으로 있다가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인물입니다(열왕기하 15:25).

 

(3) 적들의 계획(5-6)

 

원문에서 접속사 ‘때문에’로 시작하는 5-6절은 문법적으로는 7절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꾸민 계획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계획이 아니기에 악하며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이들이 세운 악한 계획은 유다를 침략해 반 앗수르 연합에 참여하길 거절한 아하스를 제거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앉히는 것이었습니다(6). 르신과 베가가 아하스 대신 보좌에 앉히려 했던 다브엘의 아들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아람어 이름이기에 아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임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디글랏빌레셀의 조공 목록에 다메섹의 르신과 사마리아의 므나헴과 함께 언급된 두로 왕 투바일(Tubail)을 자주 다브엘과 일치시키지만, 이런 추측은 유다의 다윗 왕조 전통과 충돌합니다. 모계가 다브엘 집안 출신으로 반앗수르 정책에 동조하는 다윗 가문에 속한 인물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불확실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하스를 제거하려는 아람과 에브라임의 위협이 매우 구체적이고 심각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통치는 다윗의 후손에 의해 행해질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7-9)

삶의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두려워하며 마음이 흔들리는 연약함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위태롭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강한 오른팔이 붙잡고 계심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신을 위해 우리와 함께하하시고 싸우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7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8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9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7-9)

 

인간적인 연합군의 계획은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유다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르신의 결정도 사마리아의 결정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생의 서고 넘어짐을 결정하십니다.

 

(1) 무조건적 구원 약속(7-9)

 

7절은 무조건적인 구원 약속입니다. 아하스를 제거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대신 왕으로 세우려는 아람과 에브라임의 계획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8a절과 9절은 이들의 계획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람의 다메섹이 유다를 위협하지만, 이것은 르신의 머리에서 나온 결정일 뿐입니다. 에브라임의 사마리아도 아람의 다메섹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에브라임이 하나님 백성에 속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다윗 왕조와 유다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를 경영하시고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적 약속이 9절에서 조건적 약속으로 옮겨갑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와 유다의 미래가 당신의 약속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위기의 한복판에 여호와께서 계심을, 그분만이 이 위기로부터 구해주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하스와 그의 백성이 나단을 통해 다윗 집안에 주어진 약속(사무엘하 7:17)에 굳건히 선다면 다윗 왕조는 흔들리지 않겠지만, 다윗 왕조의 신학적 토대를 부정하고 정치적 선택에 의존한다면 다윗 왕조의 미래는 불투명해집니다.

 

(2) 조건적 구원 약속(9b)

 

무조건적 약속과 조건적 약속이 함께 주어져서 언뜻 충돌처럼 보이지만, 이 두 약속은 보충적 관계에 있습니다. 7절의 무조건적 약속은 시리아-에브라임의 위협이라는 특정 사건에 한정된, 아하스 개인에게 주는 구체적인 약속이고, 9b절의 조건적 약속은 지속적인 영향을 갖는 ‘너희’에게 주는 포괄적 약속입니다. 두 약속을 함께 읽으면, 예루살렘을 공격하려는 르신과 베가의 계획은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않은 ‘그들만의 결정’이라 아하스의 태도와 상관없이 반드시 실패로 끝나지만, 시리아 에브라임 위기 때 주어진 무조건적인 구원 약속은 아하스의 태도에 따라 지속될 수도 일회적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아하스와 그의 백성이 여호와의 구원 약속에 전적으로 의존할 때만 다윗 왕조의 미래는 흔들리지 않고 굳건해집니다. 뒤따르는 두 번째 말씀(10-17)은 9b절의 약속이 수반된 권면이 아하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일도, 사람도, 서거나 무너지는 것은 다 하나님이 주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사소해 보이는 일도, 열강이 만드는 역사도 하나님께서 주장하십니다. 그분의 주권을 온전히 믿을 때 비로소 평안할 수 있습니다. 주권을 믿는 것은 운명론적 체념이 아닌 약속에 근거한 신뢰요 사랑의 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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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6-01)

 


그루터기를 위해 부름 받은 이사야

이사야 6장 1-13절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 확신은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약속을 알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알고 신뢰할 때만, 인간은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여호와를 봅니다. 웃시야의 왕권이 그의 손자 아하스에게로 옮겨지는 정치적 혼란기에 여호와께서는 온 땅에 미치는 당신의 왕권을 이사야에게 보여주십니다. 지상의 왕이 죽었다고 왕이 부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왕궁의 왕이 아니라 하늘의 왕 여호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보좌의 환상(1-4)

세상은 점점 어두워져서 진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되어 있습니다. 회복의 강을 건너버린 것 같습니다. 참으로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 그리고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영적인 기회입니다. 이사야는 어려운 시기에 부름을 받습니다.

 

1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1-4)

 

하나님께서는 배신한 북이스라엘이 간음하자 내쫓으며 이혼서까지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지켜본 자매 유다는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죄악을 답습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형제의 실패를 통해 경고해 주십니다.

 

(1) 보좌의 하나님(1)

 

남 유다 왕 아마샤는 북 이스라엘 왕 요하스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습니다. 약 15년간 북이스라엘에 잡혀 있다가 주전 782년 요하스가 죽고, 여호로함 2세가 직위하자 석방됩니다. 남 유다로 돌아온 아마샤는 15년간 섭정하다가 살해당합니다. 이후 웃시야는 독립적인 통치력을 발휘해 남 유다를 안정적으로 통치합니다.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조공을 받친 목록에서 웃시야가 빠진 것을 보면, 유다는 웃시야 통치 기간 동안은 앗수르에게 대항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들은 웃시야에게 많은 기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향력 있는 왕이 죽은 후에 이사야를 부르시며 인간 왕이 아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합니다.

 

본문주해 1-4절 보좌의 환상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환상 가운데 하늘보좌에 앉아계신 여호와를 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해’는 단순히 환상의 시점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왕권과 관련한 언급입니다. 52년간 강력한 왕권으로 남 유다를 통치했던 왕의 죽음은 나라를 혼란됩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왕궁에서 통치하던 왕이 죽던 해에 하늘 보좌에서 온 땅을 통치하시는 왕 여호와를 봅니다. 인간 왕에 대한 기대가 살라진 그 때에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왕궁에 왕이 부재할지라도 유다와 예루살렘에 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늘의 왕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왕임을 알아야 합니다. ‘높이 들린 보좌’는 왕이신 여호와의 무한한 능력과 우주적 통치권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왕권을 상징합니다. 어떤 존재도, 어떤 사건도 그분의 드높은 보좌를 흔들 수 없습니다. ‘옷자락’은 왕의 겉옷 끝자락 장식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왕의 겉옷 끝자락만으로도 성전(왕궁)이 가득 찹니다. 성전이 그분의 왕적 영광과 권능의 작은 일부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높이 들린 보좌’는 수직적 차원에서, 그의 옷자락은 수평적 차원에서 여호와 왕권의 무한한 크기와 위엄을 보여줍니다.

 

(2) 스랍들의 모습(2)

 

이사야의 시선이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옷자락에서 그분 주변의 스랍들로 옮겨갑니다. ‘스랍’은 이곳에만 등장하는 천상적 존재로, 불꽃을 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있는 그룹과는 구별됩니다. 그들은 불꽃을 내는 존재이지만 여호와 앞에서는 자신들의 얼굴을 가린 채로 겸손하게 수종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거룩함과 영광의 빛을 결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모시고 서 있는 스랍들의 자세가 특별합니다. 세 쌍의 날개를 갖고 있지만, 이들은 두 쌍의 날개로는 얼굴과 발(하체)을 가리고 한 쌍의 날개로 만납니다. 세 쌍의 날개는 한 쌍의 날개를 세 배로 확장한 것인데, 여기서는 몸을 가리는 데 두 쌍이 사용됩니다. 여호와를 아주 가까이서 보좌하는 스랍이지만 그분의 거룩함에 생명을 잃지 않으려면 날개로 온몸을 가려야 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함은 천상적 존재인 스랍에게도 치명적입니다. 왕이신 여호와와 그분을 모시고 서있는 천상적 존재인 스랍 사이의 간격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절대 간격입니다. 그분의 권능과 거룩함 앞에 노출된 자는 누구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3) 스랍들의 찬양(3-4)

 

여호와를 찬양하는 스랍들의 소리가 성전을 흔들며 그곳에 충만합니다. 스랍들에게는 찬양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외면하고 멸시하는 유다 백성들과는 달리, 그분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린 스랍들의 모습입니다.

찬양의 첫 번째 대상인 여호와의 거룩함은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신학이지만, 이를 표현한 ‘거룩 삼창’(trishagion)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거룩 삼창’은 여호와의 거룩함을 최상급으로 표현합니다. 여호와의 거룩함은 때로는 심판의 능력으로, 때로는 구원의 능력으로 계시됩니다. 여기서는 여호와의 독점적 왕권을 배경으로 합니다.

찬양의 두 번째 대상은 여호와의 영광으로, 세 번이나 ‘충만하다’라는 동사가 나타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강조되어집니다(1,3,4).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는 이스라엘과 앗수르를 포함한 모든 나라가 그분의 왕권 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절대자의 거룩함과 왕권을 찬양하는 스랍들의 소리에 성전의 문지방 터가 요동합니다. 성전건축 신학에 따르면 성전 입구의 흔들림은 성전 자체의 동요로 심판의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지만, 여기서는 성전에 충만한 연기와 함께 신현의 변형된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환상에서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동반하는 현상이 스랍들의 창화 소리에 적용되면서 흔들림의 강도가 약화됩니다(‘요동하며’). 또 이사야가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하기에 구름 대신 연기가 그분의 모습을 감추는 역할을 맡습니다.

 

부정의 고백과 죄사함(5-7)

정결케 된 입술만이 온전한 찬양을 드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사역자는 정결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부정한 입술로는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정함을 인식하고 주님의 은총에 맡기는 것입니다.

 

5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5-7)

 

유다의 죄가 심각해지자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 배역한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복에 필요한 것은 철저한 죄의 자복이다. 긍휼이 풍성하시고 한 없이 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1) 이사야의 반응(5)

 

만왕의 왕 여호와 하나님의 갑작스러운 출현 앞에 이사야는 죽음의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입술이 부정한 자’는 만군의 여호와를 조롱하고 멸시한 죄를 상기시킵니다. 유다 백성들은 입과 행동으로 여호와를 경멸했기에 화(禍)의 대상으로 선언됩니다. 이들과 달리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인정하고 존중하기에 자신의 부정함을 부인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그대로 들어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기에 그에게는 멸망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입술의 부정’은 입에서 나오는 죄나 제의적 음식 규정의 위반을 시사 하는 언급이 아닙니다. ‘입술의 정화’(6)를 때로는 예언자 직무와 관련지어 이해하기도 하지만, ‘입술의 부정’이 백성에게도 적용되기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입술은 전체의 대표로, 10절에 나오는 신체 기관(마음, 귀, 눈)과 관련하여 선택된 것 같습니다.

이사야가 뵈온 여호와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도 예언자의 입에서는 특별합니다. 심판의 문맥에서 여호와를 왕으로 부르는 경우가 없고, 언제나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련한 문맥에 등장합니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왕이신 여호와를 본 것은 그분 백성의 운명이 심판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암시합니다.

이사야의 부정함이 스랍들의 제의적 정화의식을 통해 이사야 입술에서 제거됩니다. 악과 죄가 사하여졌다는 선언과 함께 속죄에 대한 확증이 주어집니다. 스랍의 해석은 더러움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잘못임을 시사 합니다. 이러한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도 하나님에 의해 사해짐을 시사합니다.

 

(2) 죄사함(6-7)

 

문제는 ‘예언자 이사야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범했는가?’입니다. 아마도 5절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는 그의 부정함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부정함에서 기인했음을 보여줍니다. 부정한 물건이나 사람과 접촉하면 그 사람도 부정해지는 것처럼, 이사야는 부정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았기에 부정해졌습니다. 부정함을 인정함으로써 그는 자신을 백성에 일치시킵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죄사함은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전형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부정함(죄)를 인정하고 고백한 이사야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진 사건은 죄로 심판받을 이스라엘의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가 됩니다.

 

완악함과 그 결과(8-13)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전에 그분의 사역을 감당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없이 사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단순히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 때문에 감당하는 사역은 훨씬 더 즐겁고 복됩니다. 소명을 받은 이사야에게 생각하지 못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8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8-13)

 

하나님께서는 배역한 자신들을 시온으로 데려와 이루실 약속을 주십니다. 지식과 명철로 양육할 지도자와 언약궤가 더 이상 필요 없는 나라를 주실 것이며, 예루살렘이 예배의 중심지가 되고, 분열된 형제가 하나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만이 참 회복의 소망이 되십니다.

 

(1) 이사야의 파견(8)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이사야의 긍정적인 반응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사야의 책임 있는 결단에 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의 응답은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속죄의 은혜에 근거한 자발적인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어전회의의 결정을 이스라엘에 전달할 메신저를 찾는 하나님께 이사야는 자신을 보내달라고 자천합니다. 그의 헌신은 하나님의 속량에 대한 그의 응답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맡기신 사명은 예언자들의 통상적인 사명을 뒤집는 충격적인 것입니다.

 

(2) 이사야의 사명(9-10)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뜻밖에 명령하십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기름지게 하고 그 귀를 무겁게 하며 그 눈을 들러붙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9-10). 부조리해 보이는 여호와의 명령은 백성이 예언자의 선포를 거절하는 일이 그분의 의지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심판 결정과 이스라엘의 책임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오랜 기간 동안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거역하고 백성들의 패역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거절을 미리 아시고 이를 당신의 심판 계획에 반영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완고하게 이사야의 선포를 거절하면서 그분의 심판 결정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께서 멸망의 길로만 내달리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의 원인자이자 심판자가 되십니다. 이스라엘을 심판에서 구하려고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이 이스라엘의 완고한 거절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3) 완악함의 결말(11-13)

 

이해할 수 없는 완고함과 그분에 대한 맹목적 거절이 이스라엘을 멸망에 떨어뜨립니다. 많은 사람이 멀리 유배를 떠나고 땅은 황량하게 남습니다.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를 묻는 이사야의 질문(‘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 때까지니라’)은 완악함이 초래한 멸망 이후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할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역설적이지만, 나라의 멸망이 완악함의 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멸망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결과임을 인정할 때, 이사야의 경우처럼(5-7)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구원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마지막 절은 ‘까지’ 이후를 조심스럽게 전망합니다. 일부 남은 것마저 파괴돼 온 땅이 황무지가 되지만, 하나님 백성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가 남아 거기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거룩한 씨’가 남아 다시 자랄 것입니다. 철저한 멸망 후에, 남은 자들에 의해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다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의 백성을 교훈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고,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우리 구원의 소망은 오로지 신실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믿는 자는 방종하거나 죄아래 머물지 말고, 순종의 종으로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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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5-02)


유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이유

이사야 5장 18-30절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처럼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심도 그렇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심판을 내리시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가학적으로 학대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자기 백성을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는 항상 공의롭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내리실 화가 선포되는 대상의 신분이 본문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고발의 내용은 이들이 하나님 백성의 지배 계층에 속한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은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전면적이고 총체적이어서, 어디에서도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화의 선포(18-24)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얼마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유리한대로 사용하면 멀어진 것입니다. 그 말씀을 진지하게 듣지 않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위로와 용서의 약속도 말씀해줍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18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19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20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1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2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3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24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18-24)

 

유다에는 여러 악습이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첫 번째의 악습은 거짓이었습니다. 악을 선하다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죄악은 교만입니다. 스스로 잘난 체하고 지혜로운 척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죄악은 방탕함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포도주와 독주에 취해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했습니다.

 

(1) 세 번째 화의 선포(18-19)

 

세 번째 화의 선포 대상이 어떤 사회적 집단에 속한 자들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구원사적 전통에 근거해 이사야의 심판 선포에 대놓고 맞서는 자들이기에 일반 백성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이사야는 심판 선포를 조롱하는 자들에게 단호하게 화를 선포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조롱하는 자들은 거짓의 끈으로 악과 죄를 끌어당기는 자들입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은 달리 설명하지 않습니다. 19절에 따르면, 여호와를 구원의 하나님으로 주장하면서 백성을 멸망으로 이끄는 자들을 조롱하는 표현 같습니다. 이들은 수레의 줄을 당기듯 죄악을 끌어당겨 징벌을 자초합니다. 멸망을 피하려고 애쓰기는커녕 멸망에 떨어지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악과 죄를 끌어당기다’는 죄와 벌에 관한 이스라엘의 통합적 사고를 전제하는 표현입니다.

죄와 악에 이미 징계(벌)가 포함됐기에, 죄를 짓는 행위는 그 자체로 징계의 벌을 자초하는 행위가 됩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고,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이 징벌로 작용하게 됩니다. 예언의 즉각적 성취를 기대하는 자들에게 거듭 선포되는 이사야의 심판 예언은 거짓 예언처럼 보였습니다. 이들은 이사야가 참 예언자임을 인정할 수 있게 그가 선포한 대로 모든 일이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조롱합니다. 구원사적 전통에 매인 자들은 반복적 선포에서 사태의 위중함과 심판 의지를 거두시려는 하나님의 절박한 기다림을 읽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조롱거리로 삼았습니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도록 거듭 외치는 심판 메시지가 이들을 더 완악하게 만들어 선포된 심판을 되돌릴 수 없게 합니다.

 

(2) 네 번째 화의 선포(20)

 

네 번째 화의 선포도 그 대상이 불분명합니다. 이들은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어둠을 빛으로 만들고 빛을 어둠으로 만드는, 쓴 것을 단 것으로 만들고 단 것을 쓴 것으로 만드는 자들입니다. 사실이나 옳고 그름을 임의로 뒤바꿀 수 있는 힘(권력, 부, 지혜, 능력)을 가진 자들이기에 일반 사람은 아닙니다.

남에게 치명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들은 여러 집단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뇌물을 받고 법과 정의를 왜곡하고 불의한 자를 의인으로 죄 없는 사회경제적 약자를 죄인으로 판결하는 재판관을, 지혜문학과 관련하여 허황한 말만 번듯하게 하면서 속이는 자들을(잠언 26:24 이하; 28:24), 여호와의 가르침을 성전의 제의종교로 축소시키고 그분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주장하는 종교인들을, 여호와를 예루살렘 성전에 고립시키고 정치의 독립을 떠드는 왕궁의 통치자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단것과 쓴 것이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에 의지해서 공정하게 판단되지 않고, 집단의 이기적 목적과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됩니다.

 

(3) 다섯 번째 화의 선포: 자칭 지혜로운 자들(21)

 

다섯 번째 화는 지혜자들에게 선언됩니다. 이들은 자기지혜와 총명만으로 모든 일을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지혜자는 자기 분야의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가진 자로, 모든 분야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고발이 특히 왕궁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에게 집중되기에 왕의 관료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지혜의 전통적 이해에 따르면, 관료들은 다 지혜자가 됩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자들이 지혜의 근원이신 여호와께 의존하지 않고 자기 지혜에 의지해 정치를 합니다. 지혜자들의 어리석음이 나라를 멸망으로 이끕니다.

 

(4) 여섯 번째 화의 선포: 술에 용감한 자들(22-24)

 

두 번째 화의 선포와 주제가 연결됩니다. 이사야는 지배 계층에 속한 자들을 다시금 포도주와 독주에 빠져 사는 자들이라고 조롱합니다. ‘화가 있어라, 포도주를 마시는 데는 용사들이요 독주를 섞는 데는 용맹한자들!’ 유다의 용맹을 자랑하는 자들은 술자리에서 용맹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술 마시기에 용감하고 술에 관해 박식한 자들입니다. 맡겨진 직분과 역할에 관해서는 배우려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맛있고 독한 술을 빚을 수 있을지에 열심인 자들입니다. 법의 공정한집행이나 부당하게 위협당하는 자들의 권리 보호는 술과 향락에 빠진 자들의 안중에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술자리를 즐기는 데 필요한 뇌물뿐입니다. 이들은 뇌물을 받고 죄가 있는 자를 죄 없다고 선언하고, 죄가 없는 자에게서는 법적 권리를 박탈합니다. ‘이로 말미암아’(그러므로)로 시작하는 24절은 전체단락(8-23)을 맺는 절입니다. 이사야는 제 이익과 향락만 추구하는 지배 계층에게 일상적인 경험에 속하는 비유를 사용해 멸망을 선포합니다. 이들은 지푸라기처럼, 마른 풀처럼 심판의 불에 타 사라질 것입니다. 이들의 뿌리는 썩어서 죽고, 꽃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티끌(먼지)처럼 날려갑니다. 뿌리의 썩음과 꽃의 날아감은 이들의 멸망이 전면적일 것을, 온 집안이 완전히 멸절할 것을 시사합니다. 심판의 근거는 분명합니다. 이들이 여호와의 율법(가르침)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공동체의 연대를 짓밟아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은 제의적 차원을 넘어 윤리적 성격을 갖습니다. 그분의 거룩함은 불의한 자들에게 심판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에 그분의 백성도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곧 그분이 기대하시는 정의와 공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강한 군대에 의한 심판(25-30)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죽으나 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 준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이면 순종하는 바로 그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불순종하던 지난날을 회개하고 말씀을 몸소 행하시기 바랍니다.

 

25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에 분토 같이 되었도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 26또 그가 기치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자기에게로 오게 하실 것이라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올 것이로되 27그 중에 곤핍하여 넘어지는 자도 없을 것이며 조는 자나 자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들메끈은 끊어지지 아니하며 28그들의 화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겨졌으며 그들의 말굽은 부싯돌 같고 병거 바퀴는 회오리바람 같을 것이며 29그들의 부르짖음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그들의 소리지름은 어린 사자들과 같을 것이라 그들이 부르짖으며 먹이를 움켜 가져가 버려도 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30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려서 어두우리라(25-30)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백성을 불태워 버리기로 결정하십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 가운데 손을 들어 백성을 치시면 그들은 차목한 죽음과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1) 펼쳐진 여호와의 손(25)

 

25절은 연결구에 해당합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분노를 쏟으실 때 산들이 흔들리고, 매장하지 못한 시체가 거리를 뒤덮습니다. 그분의 심판이 전면적이고 파국적으로 그분의 백성 위에 임합니다. ‘강한 손과 편팔’(신명기 4:34; 5:15; 7:19; 11:2)로 이스라엘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해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하여 팔을 뻗으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역사에 개입하셨던 분이 이스라엘의 심판자로 그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강하고 무서운 군대를 땅 끝에서 불러오신다. 그분의 명령에 따라 달려오는 군대는 먼 거리의 원정임에도 지치거나 졸거나 대오에서 이탈하는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화살촉은 날카롭게 갈렸고 활시위는 팽팽하게 당겨졌고, 기병대와 병거는 거침없이 내달립니다. 사자가 포효하듯 함성을 내지르며 공격하는 이들의 손아귀에서 누구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먼 곳에서 불러오신 군대가 노호하는 바다처럼 ‘백성’을 덮칩니다. 빛마저 구름에 가려 어두워지고, 땅에는 오직 ‘흑암’과 고난을 뿐입니다. 침략군의 공격을 피해 몸을 숨길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2) 멀리서 오는 강한 군대(26-30)

 

26-30절은 땅 끝에서 불러오는 군대의 압도적 위용만 묘사할 뿐, 고도로 훈련받고 뛰어난 무기로 무장한 군대가 어느 나라 군대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원정을 떠나는 군대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싸움의 상대가 누구인지도, 군대를 불러오는 주체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호성은 초점을 심판의 철저함에 맞추려는 선포자의 의도에서 기인합니다. 누구도 먼 곳에서 올라오는 중무장한 군대의 공격에서 목숨을 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모호성은 다음 장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해결됩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군대를 불러 들포도를 맺은 당신의 포도원을 짓밟게 하십니다.


교회가 말씀을 소홀히 할 때, 영적 집중력을 잃고 무분별하게 됩니다. 위기의 단초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멈추는 데 있습니다. 말씀을 왜곡하거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데 있습니다. 기뻐하실 열매를 바란다면 말씀을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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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5-01)


파멸로 이끄는 들포도의 실체

이사야 5장 1-17절


 

농작물들을 심어 놓고 성장하는 것을 바라보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나고, 꽃이 피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이 농작물 자라는 것처럼 자라는 모습을 보시면서 기뻐하십니다. 더 나가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기를 기다하십니다.

 

 

  • 3:14-15에서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포도원을 삼키는 자’로 고발하신 여호와께서 당신의 포도원을 대적에 넘겨 파괴하기로 하십니다. 심판의 대상이 지배 계층에서 ‘이스라엘 족속과 유다 사람’으로 확장됩니다. 이는 희생자였던 하나님 백성도 지배 계층의 불의와 불법에 함께했음을 시사합니다. 3:13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려고 서시도다’가 현실이 됩니다.

 

포도원의 노래(1-7)

하나님께서 선하고 좋은 열매를 기대하시면서 포도원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해 주셨습니다. 포도원의 땅을 파서 돌을 제거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망대까지 세웠고, 열매가 맺으면 포도주를 만들려고 술틀까지 만드셨습니다.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지극 정성을 기울이신 이유는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길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1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3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4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7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1-7)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농부하고 표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을 가꾸시는 농부로 등장하셨습니다. 그분은 좋은 농부답게,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먼저 좋은 땅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은 포도가 가라기에 가장 적합한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1) 에언자의 노래(1-2)

 

예언자가 ‘내가 사랑하는 자’를 대신하여 그의 포도원에 관해 노래를 부릅니다(1). ‘나’의 친구는 매우 기름진 언덕에 포도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최고 품질의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망대도 세우고 술틀도 팠습니다(2). 포도원의 망대는 특별하다. 대개 초막을 세우는데 망대를 세운 것입니다. 매년 다시 세워야 하는 초막과 달리, 망대는 적이 침략했을 때 방어시설로도 활용할 수 있는 건축물입니다. 포도원에 대한 주인의 깊은 애정과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줍니다. 포도원 주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후에, 그는 포도나무에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애씀과 기대를 저버리고 포도나무는 먹을 수 없는 ‘들포도를 맺었다. 좋은 결실을얻으려는 포도원 주인의 노력과 실망스러운 결과 사이의 괴리는 이 노래의 분위기를 예기치 않은 긴장에 빠뜨린다.

 

(2) 포도원 주인의 고발(3-4)

 

포도원 주인이 등장해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에게 자신과 포도원 사이를 판단해주도록 요청합니다(3). 그는 사적인 문제를 전체 이스라엘의 문제로 확대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좋은 포도를 얻기 위해 자신이 어떤 수고를 더해야 했는지 묻습니다(4). 포도원 농사에 관하여 경험적으로 잘 알았던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들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지 못한 채 자신을 심판하게 됩니다.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포도원 주인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선포합니다. 3-4절에서 고발자로 등장했던 주인이 5-6절에서는 재판관의 역할을 맡습니다. 주인은 기대를 저버린 포도원을 철저하게 파괴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는 울타리와 담을 헐고 포도원을 외부 침입에 그대로 맡겨버리기로 합니다. 포도원을 폐허로 만들어 포도나무의 가지를 자르거나 북을 돋우는 일이 다시는 없게 합니다. 기름진 산에 만든 포도원이 찔레와 가시가자라는 황무지가 됩니다. 더 나아가 포도원 주인은 구름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지 않게 합니다. 정성과 기대를 배반한 포도나무(포도원)에 주인은 더 이상 관심과 동정을 보이지 않습니다. 비를 금하실 수도 있는 분의 결정이기에 파국적 운명을 피할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1-2절의 ‘나’가 등장해서 포도원의 노래를 해석해줍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포도원’은 포도원이 여호와의 소유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유다는 하나님께 기쁨의 대상이었습니다. 과거 그분께 기쁨이 되었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실망만 안겨줍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정의’와 ‘공의'를 기대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포학’과 ‘부르짖음’으로 응답했습니다. 5:8-24의 화 선포가 포학(피 흘림)과 부르짖음(울부짖음)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화의 선포(8-17)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큰 욕심을 품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유다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유다의 부유한 사람들은 땅에 대해, 그리고 집에 대해, 요즘의 표현으로 부동산에 대해 한없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의 땅을 차지했더라도, 희년이 되면 그 땅을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8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9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10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11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12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13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그들의 귀한 자는 굶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 14그러므로 스올이 욕심을 크게 내어 한량 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즐거워하는 자가 거기에 빠질 것이라 15여느 사람은 구푸리고 존귀한 자는 낮아지고 오만한 자의 눈도 낮아질 것이로되 16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17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8-17)

 

이스라엘의 토지 제도는 모든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기본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땅을 빌려서 사용할 뿐 영원히 소유하거나 매매를 통해 시세차익을 남길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토지 제도는 희년이 되면 땅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1) 첫 번째 화의 선포: 땅을 독점하는 자들(8-10)

 

이사야는 집과 경작지를 독점하려는 자들에게 화를 선포합니다. 이들이 부와 권력을 이용해 애써 차지한 가옥과 땅이 폐허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공동체가 허물어져 가는데도 이들은 ‘땅 가운데에서’ 자신들만 평안하게 살려 했습니다. 이들은 안전하고 번화한 예루살렘에 살면서 지방의 땅을 헐값에 사들여 자기소유지를 넓혀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연대성을 파괴하는 자들의 탐욕을 헛수고로 만드실 것을 당신의 의무로 서약하십니다. 권력자들과 부자들이 탐욕스럽게 소유하려 했던 것들 위에 그분의 심판이 떨어집니다. 이들의 집은 폐허가 되어 사람이 살 수 없게 됩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이용해 탐욕스럽게 넓힌 경작지가 황폐해져 결실을 얻지 못합니다. 열흘 갈이 포도원이 겨우 한 바트의 포도주를 내고, 한 호멜의 씨앗을 뿌린 밭은 겨우 한 에바를 냅니다. 열흘 갈이는 한 쌍의 소가 열흘에 갈 수 있는 넓이를 가리킵니다. 한 쌍의 소가 하루에 갈 수 있는 평균 넓이는 대략 2천 평방미터가 됩니다. 바트는 액체를 재는 단위로, 시대에 따라 그 용량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대략 40리터로 추산합니다. 곡식을 재는 단위인 호멜도 일정하지 않았는데 대략 400리터로 추산합니다. 에바는 호멜의 1/10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자기 땅’에서 ‘자기 손으로 경작해 수확한 자기 소산물’을 먹고 살았는데, 왕정이 도입된 이후 점차 자유민의 권리를 상실해갔습니다. 특히 주전 8세기 이스라엘과 유다는 계급적 분화와 갈등을 심각하게 경험했습니다. 경제적 부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지배 계층과 그 주변에 속한 특권층에 독점되면서 사회는 급속히 양극화의 수렁에 빠졌습니다. 다수의 소농은 국가권력과 이를 사유화한 부패한 특권층에 의해 끊임없이 수탈당했고, 전쟁이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로 이들의 삶의 토대는 피폐해져갔습니다.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노동력의 상실도 이들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식량이 부족해지면 이들은 가진 자들에게 높은 이자를 약속하고 곡식을 빌렸습니다. 작황이 나빠 이자와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면, 집과 경작지를 채권자에게 헐값에 넘기거나 강제로 빼앗기고 소작농신분이 되었습니다. 사정이 더 나쁜 경우에는 가족이나 자신마저 농노로 팔아야 했습니다. 사회가 계급화되고 권력과 부가 소수의 지배 계층에 독점되면서 ‘여호와의 기업’이라는 땅에 관한 이스라엘의 신학적 전통도 더 이상 존중되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은 부자들이 집과 토지를 독점적으로 확장함에 따라 도시빈민이 확대되고 농민이 경제적-사회적으로 예속되어 하나님 백성의 존립 기반이 붕괴되는 것을 보고 이를 신랄하게 고발했습니다.

 

(2) 두 번째 화의 선포: 술에 취해 연회를 즐기는 자들(11-17)

 

두 번째 화의 선포 대상은 사치와 향락을 즐기며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에 취해 살면서 연회를 즐기는 데 열심이지만,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 ‘그의 손으로 하신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속적인 즐거움에 빠진 자들에게 여호와를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윗물의 부패가 아랫물도 부패하게 만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포로로 끌려갈 것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이스라엘은 적에 넘겨지고, 백성은 사로잡혀갑니다. 존귀한 자들과 일반 사람들 모두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난에 넘겨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점에서 지배 계층이나 피지배 계층이나 다를 바가 없기에 같은 운명에 떨어집니다. 만족을 모르는 스올이 목구멍(‘욕심’)과 입을 한껏 열어젖히고 죽음의 문턱을 넘어 내려오는 손님들을 맞습니다. 예루살렘의 귀족들(‘호화로움’)과 평민들(‘무리’)이, 예루살렘에서 소란을 떨며 기뻐 뛰던 자들이 모두 스올로 내려옵니다. 여호와를 무시한 유다와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는 날은 여호와께서 높임을 받으시는 날이기도 합니다(2:11-17).

오만한 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낮아집니다. ‘정의와 공의’를 버리고 ‘포학(피 흘림)과 부르짖음’으로 사회를 가득 채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그분의 정의와 공의가 드러나고 그분이 홀로 높임을 받으십니다. 그분의 거룩함 앞에 모든 인간은 자신이 사멸적 존재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한때 ‘호화로움과 무리와 소란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던 성읍이 폐허가 돼 양 떼의 차지가 됩니다. 모든 사람이 떠나고 버려졌기에 초장으로 이용됩니다.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빼앗거나 부당하게 사들였던 부자들의 땅이 하나님의 징계로 황폐해지고, 양들이 꼴을 먹는 초지로 바뀝니다. 부자들이 독점하던 집과 땅이 폐허가 되자, 목자들이 아무 제한 없이 그곳으로 양을 끌고 가 꼴을 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당한 독점과 이를 바탕으로 누리는 사치와 쾌락을 심판하십니다. 들포도 맺은 백성을 포로로 만드시고 스올에 던지십니다. 시끌벅적하던 연회장은 초장이 되고, 낯선 이들이 망한 부자들의 밭을 소유합니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이 길을 가지 않도록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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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3-02)

 


백성의 통치자이신 하나님

이사야 3장 13절-4장 6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최고의 한수입니다. 바둑에 ‘자충수(自充手)’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길을 메우는 가장 좋지 않는 수입니다. 충분히 살 수 있는 돌이 자충수를 두게 되면 꼼짝없이 죽고 맙니다. 지금 유다 역시 자충수를 연달아 두고 있습니다. 유다의 자충수가 무엇인지 살펴보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도록 합시다.

 

  • 여호와께서 재판관이 되셔서 당신의 백성을 열망의 길로 이끈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십니다. 그분은 이들이 포도원을 망쳐놓았다고 고발하십니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기는커녕 그들의 얼마 남지 않은 재산마저 강탈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돌볼 책임이 있는 자들이 자기 탐욕을 만족시키는 데만 열심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의 고발(13-15)

하나님께서는 자격 없는 지도자들의 통치가 백성들을 혼란하게 하고, 또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게 한다고 탄식하십니다.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도자, 겁쟁이 여인 같은 지도자를 보내신 것은 참 지도자이신 하나님을 버린 죄의 심판입니다. 그 시대의 불의한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문책하십니다.

 

13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14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러 오시리니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이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의 집에 있도다 15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도다(13-15)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공동체의 거룩함이 훼손된 데는 장로들, 고관들의 책임 큽니다. 권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므로 그것을 맡은 자들의 욕망과 편의를 위해 남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들의 권위와 권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1) 일어나시는 여호와(13)

 

여호와께서 재판정에서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고발하시는(14-15) 현재의 문맥에서 ‘백성들’은 이해가 어렵습니다. 14절과 15절은 단수를 사용하여 ‘자기 백성’ 또는 ‘내 백성’으로 부릅니다. 재판이 이스라엘에 한정되기에 ‘민족들’은 아닙니다. 아마도 예루살렘과 유다를 독자적 단위로 간주한 표현 같습니다. 12절처럼 14절에서도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이 분리되고, 후자는 거듭 여호와의 백성으로 불립니다. 여호와의 소송 상대가 ‘백성들’에서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로 좁혀집니다. 백성은 이들에게 약탈당한 자들로, 여호와의 연민의 대상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돌보고 지킬 책임이 있는 자들을 심리하여 판결하기 위해 재판정에 서십니다.

 

(2) 포도원을 삼키는 자(14)

 

통치자들은 포도원을 삼킨 자들입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상입니다(5:1-7). 여호와께서 심은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을 포도원 농부인 장로들과 고관들이 제 탐욕을 위해 망쳐 놓았습니다.

 

(3) 폭력적 착취(15)

 

공정한 법 집행의 책임을 진 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기회를 이용해 가난한 자들의 재산마저 빼앗아 제 집을 약탈물로 가득 채웠습니다. 맷돌로 곡식을 갈듯, 이들은 사회적·경제적 약자를 착취하고 이들의 법적 권리를 짓밟았습니다. 여호와께서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가난한 자를 ‘내 백성’이라 부르시면서 이들을 위해 개입하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가해지는 불의와 폭력은 곧 이들의 보호자이신 여호와께 행해지는 불의와 폭력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을 짓밟으며 그들의 얼굴을 짓뭉개는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짓밟는 행위와 같습니다.

 

시온의 딸들의 사치(16-24)

사람들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나아 보이는 사람에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개혁을 위해 지도력을 발휘하라 요청하지만, 부탁받은 사람은 자신도 먹을 것이 없고 백성 앞에 나아갈 때 걸칠 마땅한 겉옷도 없다며 간절한 요청을 거절합니다. 당시의 혼란스러운 유다의 모습이 이 시대의 사회상과 닮아 있습니다.

 

16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17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가 드러나게 하시리라 18주께서 그 날에 그들이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19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얼굴 가리개와 20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21반지와 코 고리와 22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23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24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기를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 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수치스러운 흔적이 아름다움을 대신할 것이며(16-24)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부유층 여인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본문은 그들의 화려한 치장과 오만한 모습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만함에 하나님의 심판은 각 영역과 대상별로 구체적이며 강력하게 예고되고 있습니다.

 

(1) 고발(16)

 

예루살렘과 유다의 장로들과 고관들의 탐욕과 불법을 고발한 예언자는 이제 사치와 아름다움에만 관심을 두는 ‘시온의 딸들’(지배계층의 여자들)에게 시선을 돌려 이들을 고발합니다.

 

(2) 심판 선언(17-24)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니며 교태를 부리는 시온의 여자들은 수치와 모욕을 당할 것입니다. 화려함과 사치를 자랑하며 즐길 때, 예기치 않게 여호와께서 이들을 치욕거리로 만들어 내치십니다. 그날에 그분은 이들이 자랑하던 패물과 장신구를 다 빼앗아버리십니다. 몸에서는 향수 냄새 대신 썩은 냄새가 나고, 허리에는 화려한 띠 대신 노끈이 둘리고, 아름답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 대신 대머리(수치의 상징)가 되고, 화사한 옷 대신 굵은 베옷이 걸쳐지고, 아름다움 대신 수치가 자리합니다. 전란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만 부지하고 길거리에 내몰린 여자의 더럽고 추한 모습입니다.

지배 계층의 남자들은 재물을 얻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고 약자를 착취하고, 이들의 아내와 딸은 불의한 재물로 몸치장과 사치를 즐겼습니다. 제 욕심만 차리고 이웃의 고난에 무관심했다는 점에서 남자나 여자나 차이가 없었습니다(아모스 4:1-3).

 

황폐해진 시온(3:25-4:1)

하나님의 심판은 참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죄악상을 계층별로 조목조목 언급하신 후에 전쟁을 선포하십니다. 전쟁 후의 사회상도 보여 주십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가차 없는 보응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역설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25너희의 장정은 칼에, 너희의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26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폐하여 땅에 앉으리라 4:1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다만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게 하여 우리가 수치를 면하게 하라 하리라(25-4:1)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 시온의 장정과 용사가 다 칼에 죽고, 시온의 성문이 이들의 죽음을 탄식하고 통곡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성문 안쪽에 마련된 광장은 공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시온은 자식이 없는 과부처럼 혼자가 돼 땅바닥에 주저앉습니다. 자식이 없는 과부에게 미래가 없는 것처럼, 시온은 남편뿐만 아니라 자식도 칼에 죽었기에 절망만 남았습니다. ‘땅에 앉음’은 애도 행위에 속합니다. 예루살렘의 극단적 혼란으로 전통적인 관습마저 기능을 상실합니다.

 

전쟁의 참화로 남자가 없기에 ‘일곱 여자’가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한다는 조건으로 한 남자에 매달립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생계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혼자됨’과 ‘자식 없음’의 수치를 면하기 위해 결혼을 애원합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에게 남편과 자식이 없음은 그 자체로 수치를 의미했습니다.

 

시온의 구원(4:2-6)

혹독한 심판이 지난 뒤, 시온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회복의 나리 선포됩니다. 심판 이후에 임하는 회복의 날은 심판의 목적이 멸망이 아닌 회복임을 알려 줍니다. 회복의 날은 은헤의 날이며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맞이하는 봄날과 같은 기쁨과 감격의 시간입니다.

 

2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3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5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며 6또 초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2-6)

 

성도에게 임하는 심판은 결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고 포기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심판이 지나간 뒤 임하는 회복의 풍경은 하나님께서 어그러진 모든 것을 바로잡고 더 아름다운 것을 선물로 주신다는 교훈을 줍니다.

 

(1) 시온의 풍요(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시는 날, 열매 맺지 못하는 황무지였던 예루살렘이 풍성하게 결실을 맺는 옥토로 변하고, 전쟁의 파국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축복으로 주어지는 땅의 열매를 자랑합니다. ‘땅의 소산’은 땅의 풍요로운 결실을, ‘여호와의 싹’은 ‘여호와께서 땅에서 돋아나게 하실 싹’을 의미합니다. ‘아름다움’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선물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을 찬양하는 문맥에 자주 사용됩니다(예레미야 3:19; 에스겔 20:6,15). 구원 시대에 땅이 맺을 결실이 종말론적 공동체의 아름다움이 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주변 나라들로부터 구별해주는 ‘아름다움’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됩니다. 구원받은 시온에 모든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2) 시온의 정화(3-4)

 

생명책에 기록된 자, 곧 파국에서 보호받고 살아남은 자만 시온에 거주하게 됩니다(3). 거룩함이 이들의 특성이 됩니다. 옛 전통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거룩해야 합니다. 죄로 더러워진 이스라엘이 정화의 심판을 통해 깨끗해지기에, 이들의 거룩함에는 윤리적 성격이 주어집니다. 종말론적 공동체는 죄(더러움)에서 떠나야 합니다. ‘시온에 남아 있는 자’는 자신들의 삶의 공간에 다시는 죄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심판은 정화를 위한 심판이었습니다. 정화를 통해 종말론적 공동체가 준비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더러움과 피흘림을 제거하시고 예루살렘을 깨끗하게 하십니다(4). 심판하는 영(심판의 영)은 심판을 통해 찌꺼기를 씻어내고 불순물을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고(1:25), 소멸하는 영(불의 영)도 죄를 태우고 단련하시는 그분의 능력입니다(6:6-7), ‘시온의 딸들’은 3:16의 ‘시온의 딸들’과 달리 예루살렘 주민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배설물을 의미하는 ‘더러움’은 현재 문맥에서는 제의적 부정보다는 윤리적 잘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3) 시온의 보호(5-6)

 

‘예루살렘의 피’는 하나님의 질서와 의지를 거슬러 공동체를 파괴하는 폭력적인 행위를 가리킵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을 ‘피 흘린 성읍’(피의 도성)으로 부릅니다(22:2; 24:6,9; 나훔 3:1). 광야에서 출애굽 세대를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처럼(출애굽기 13:21-22; 33:9; 40:34,38) 하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에 현존하셔서 이들을 이끄시고 위험에서 보호하십니다(5). 그분은 예루살렘과 거기에 모인 회중을 보호하기 위해 낮에는 구름을, 밤에는 연기와 타오르는 불의 광채를 창조하십니다. 구름과 연기와 불은 원래 신현의 동반 현상에 속한 것으로, 여호와의 현존 자체가 시온을 밤낮으로 보호하실 것을 시사합니다. ‘만드시고’의 ‘바라’는 창조신학에 뿌리를 둔 단어로, 여호와께서 시온에 현존하시는 종말론적 사건이 과거의 갱신이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 행위에 속함을 시사합니다. 구원받은 시온의 영광 위에 그분의 보호하시는 덮개 (지붕)가 덮임으로써, 여호와의 현존이 시온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미래의 시온은 여호와의 지속적인 보호 아래 어떤 위험이나 부족함도 없이 살게 됩니다. 초막의 비유를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보호를 약속합니다(6). 시온의 하늘 위에 지붕을 덮어서 그 영광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땅 위에 피난처와 안식처를 마련하십니다. 한낮의 뜨거운 폭염과 갑작스럽게 내리는 폭우를 피하기 위해 지은 초막처럼 시온 산에 임재하시는 그분의 영광이 예루살렘과 그 주민을 위험에서 지켜 보호하십니다(25:4). 하나님께서 영속적으로 지키시기에 구원받은 예루살렘 공동체는 성의 안전을 위해 더 이상 경제력이나 군사력, 정치적 능력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28:15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애굽에서 피난처와 은신처를 찾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멸망의 날인 동시에 구원과 회복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부정한 것을 제거하시고 백성들을 정결하게 만드십니다. 장차 새 예루살렘에 임재 하셔서 눈물을 씻기시고 영광으로 덮으실 하나님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힘들더라도 소망을 가지고 인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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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3-01)

 


백성의 통치자이신 하나님

이사야 3장 1-12절


 

믿음은 현재형입니다. 믿음은 과거에 집착하거나 불투명한 미래에 소망을 두지 않고 지금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유다 사회를 향해 심판을 선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들이 의회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해 버리십니다. 그것들을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게 했던 거짓 도움입니다. 심판은 거짓을 제거함으로 참과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 땅에 은금과 보화가 가득하고 마필과 병거가 무수하며 점쟁이와 우상이 가득할지라도(2:7-8) 여호와의 날에 아무 도움이 죄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는 것을 모두 제하여 버리심으로써, 이들이 의존하는 풍족한 물적 자원(양식과 물)과 인적 자원이 참된 지팡이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십니다.

 

정치·사회적 혼란(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요소들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백성이 혼돈과 무질서와 연약함을 철저히 경험함으로 기존에 의지할 만하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이 사실은 전혀 의지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음을 깨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의지하는 것은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1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과 2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3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정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 4그가 또 소년들을 그들의 고관으로 삼으시며 아이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5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6혹시 사람이 자기 아버지 집에서 자기의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네게는 겉옷이 있으니 너는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이 폐허를 네 손아래에 두라 할 것이면 7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아니하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를 백성의 통치자로 삼지 말라 하리라(1-7)

 

2장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라는 권고로 결론이 났습니다. 계속해서 3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의지하는 것들을 제거하실 것이라는 예고로 시작합니다.

 

(1) 양식과 물의 제거(1)

 

1-5절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예루살렘과 유다가 겪게 될 극단적 혼란과 공황 상태에 관한 기술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존하는 것’(지팡이와 막대기)을 모두 제거해버리실 것입니다. 제거의 방식은 달리 언급하지 않고, 제거의 대상에 집중합니다.

이사야에 의하면, 여호와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불러 당신에게 등 돌린 자들을 치십니다(10:6). 여호와께서 제하여버리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는 것들이 구체적으로 열거됩니다(1b-3). 양식과 물은 생존의 필수품으로, 특히 전시에 예루살렘 성의 방어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입니다. 열왕기하 25:13에 의하면,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양식이 떨어져 바벨론 군대에 함락 당했습니다.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은 문자적으로는 ‘모든 빵 막대기와 모든 물 막대기’로, 의지해야 할 지팡이인 여호와를 떠나 자신들의 경제력을 의지한(2:7) 예루살렘과 유다의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2) 지도자들을 제거하심(2-4)

 

하나님께서는 양식과 물을 제거하실 뿐만 아니라 용사로부터 시작해 요술자에게 이르기까지 군사, 재판, 정치, 행정, 종교, 기술 등 각 분야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사회 지도자들을 제거하십니다.

‘용사’는 최고의 병사로, 왕의 친위부대를 구성하는(삼하 23:89) 용병을 가리킵니다. ‘전사’는 징집병(삿 20:17; 민 31:28,49; 신 2:14-16)이나 군사 훈련을 받은 자(삼상 16:18;17:33; 삼하 17:8)를 가리킵니다. 재판관은 통치 조직의 일원으로, 왕의 관료에 속합니다. 함께 언급된 ‘선지자(예언자)’가 직분에 속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언자가 황홀경 가운데 환상을 보는 자들이라면, ‘복술자(점쟁이)’는 신탁을 내리는 기술자에 속합니다. 기능상 예언자와 점쟁이는 서로 중첩됩니다. ‘장로’는 씨족의 우두머리로 사회적·정치적·사법적 영역에서 상당한 권위와 영향력을 인정받은 자들입니다. ‘오십부장’은 군 조직의 핵심에 속하는 장교 집단입니다(삼상 8:12), ‘귀인’은 왕과 밀접하게 연결된 집단으로, 9:15에서는 ‘장로’와, 욥기 22:8에서는 ‘권세 있는 자’와 함께 언급됩니다. ‘모사’(고문관)는 왕의 자문관을 가리킵니다. ‘마술사’(장인)와 ‘요술자’는 기능상 동의어로, 3절의 ‘복술자’와 함께 공적 종교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됐지만, 민간 신앙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2:6).

 

(3) 사회적인 혼란(4-5)

 

정치, 사회, 종교의 주요 집단이 거의 모두 열거됐는데, 특이하게 왕과 제사장은 빠졌습니다. 이사야의 고발은 왕보다 그의 배교적 정치에 집중합니다. 그에게 예루살렘의 다윗 왕조는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약속이 주어진 왕조였습니다.

제사장의 타락도 이사야의 신학에 얼마간 일치합니다. 성전 제의(1:10-15)와 제사장(28:7)에 관한 고발이 없진 않지만, 이사야의 하나님은 ‘시온 산’(예루살렘 성전)에 계신 여호와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복술자와 마술사와 요술자가 별다른 부정적 평가 없이 여호와 종교에서 인정받는 다른 집단들과 함께 언급된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아마도 유다와 예루살렘이 전통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해왔던 집단들도, 이교적 영향을 받은 점쟁이 집단처럼, 여호와를 떠난 자들임을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4) 정치적인 혼란(6-7)

 

여호와께서 모든 분야의 권위를 제거하시자 예루살렘과 유다는 극단적인 혼란과 무질서에 빠집니다(4). ‘소년들’과 ‘아이들’이 고관이 되어 통치합니다. 정치와 사회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 없는 자들이 무질서를 틈타 권력의 자리에 앉았기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됩니다. 공동체를 지탱하던 사회적 규범과 전통이 붕괴되고, 개인의 이익이 행동 규범이 됩니다. 사람들은 각자 권위자가 되어 힘으로 이웃을 괴롭히고 학대합니다(5). 최소한의 사회적 규범도 존중되지 않기에 세대 간의 긴장이 힘 있는 젊은이들의 반역으로 폭발합니다. 아이가 노인의 권위와 지위를 존중하지 않고 대들며 괴롭힙니다. 당연히 계층 간의 질서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대듭니다. 예루살렘이 경험하게 될 혼란과 무질서는 6-7절의 풍자적 묘사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겉옷 한 벌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백성의 지도자가 되기에 족합니다(6). 생존에 필요한 것을 다 빼앗긴 자들에게는 겨우 남은 겉옷 한 벌이 사회적 부와 권위로, 재앙 가운데 축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극심한 혼돈의 상황 속에서는 누구도 통치자가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7),

권위와 특권을 보장하던 정치적·사회적 지위가 자기 한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 극도의 혼란기에는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혼돈의 시대에 군중이 통치자에게 일차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며, 이를 채워주지 못할 때 통치자는 권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혼란의 신학적 배경(8-12)

무너지는 유다 공동체의 모습이, 우리가 속한 크고 작은 공동체의 모습들과 겹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눈을 범하지 않는 의인의 길을 걸읍시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소유된 백성이요, 그의 영광을 누리는 자녀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8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 9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10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11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12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다스리는 자는 여자들이라 내 백성이여 네 인도자들이 너를 유혹하여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8-12)

 

하나님께서 양식과 물, 지도자들을 제거해 버리시면 유다 백성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고 결국 또 다른 의지할 대상을 찾아 헤맬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선택하는 대상은 최악의 자충수가 될 것입니다.

 

(1) 멸망의 원인(8-9)

 

예루살렘과 유다의 유례없는 파국에는 물론 이유가 없지 않다. 이사야는 동사의 시제를 완료형으로 사용해(‘멸망하였고’, ‘엎드러졌음’) 6절에서 예고된 ‘폐허’의 심판을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 선포합니다(8). ‘멸망하였고’의 카샬(לשׁכ)과 ‘폐허’의 마크셰라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동사와 명사입니다. 범죄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임할 심판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반드시 이루어질 사건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폐허의 심판에 떨어지는 이유는 이들의 언어(혀)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고 그분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거역한 혀는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의미하지만(예레미야 9:8; 미가 6:12; 스바냐 3:13),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여호와께 대한 신뢰를 저해하는 허튼소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눈’은 다른 곳에 나오지 않는 표현으로, ‘눈’은 아마도 앞에 나온 ‘행위’와 관련해 사용된 것 같습니다. 시온 산에 계신 여호와께서 보시는데도 이들은 그분을 거역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행위를 보신 분의 심판이기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폐허는 정당합니다.

이사야는 두 가지 예를 들어 이들의 죄악을 고발합니다(9).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는 거리낌 없이 이웃을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뻔뻔스러운 태도를 고발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는 ‘그들은 소돔처럼 자기들의 죄를 드러내며 감추려 하지 않는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들은 부끄러움이나 주저함 없이 대놓고 죄를 범합니다. 죄에 너무 익숙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자들로, 화를 피할 수 없습니다.

 

(2)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10-11)

 

지혜의 가르침으로, 내용상 9절의 ‘화가 있을진저’에 연결됩니다. 의인에게는 복(구원)이 있어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고, 악인에게는 화(심판)가 있어 행한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때로는 의인과 악인의 구별 없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전쟁이나 자연재해)에 떨어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의인의 운명과 악의의 운명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악의 번창에도 불구하고 의를 행하며 살면, 그는 자신이 뿌린 의의 열매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심판은 물론 ‘하나님의 의’에 근거합니다. 의인의 궁극적 승리와 구원을 고백할 수 있고 또 고백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멸망에 관한 가르침은 단순한 교리적 고백이 아니라, 악한 세상에서 흔들리며 사는 자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3) 백성을 오도하는 지도자들(12)

 

13-15절을 예비하는 12절은 아이들에 의한 통치를 여호와의 징벌로 선언하는 4절의 단어들을 반복함으로써 지도자들을 고발합니다. 유다 백성이 악한 길로 가서 심판을 받게 된 데는 지도자들의 핵임이 큽니다. ‘내 백성’에 연민을 느끼는 이사야(여호와)는 그들을 멸망의 길로 오도하는 지도자들을 ‘아이와 여자들’로 혹평합니다. 아이(젖먹이)가 여호와의 백성을 학대하고, 여자들이 그들을 다스립니다. 무능력하고 경험이 없는 자들이 통치자의 자리에 앉아 제 탐욕만 채웁니다. 백성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이들을 이끌어야 할 ‘인도자들’(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끌며 저들이 다닐 길을 혼란케 합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을 뿐 아니라 권력과 지위를 남용해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했습니다. 아내들에게 남편의 권력을 이용해 악에 가담했습니다. 하나님의 탄식은 심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의로운 자는 보답을 받고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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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2-01)

 


종말, 여호와께 돌아오는 날

이사야 2장 1-22절


 

하나님 나라는 꿈이고 미래입니다. 질퍽거리는 진창 같은 현실을 딛고 일어서 걷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샬롬이 이루어질 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불의한 현실을 살아갑니다. 선지자를 통해 보여주신 미래와 처한 현실은 무엇입니까? 심판과 구원으로 임할 그날을 어찌 기다려야 합니까?

 

  • 마지막 때 예루살렘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여호와의 왕권은 사람들의 힘에 의해 성취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인간의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신적 개입으로 시작하는 초자연적 전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오는 예루살렘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요한계시록 21:2).

 

시온 산으로 순례 오는 민족들(1-5)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며, 반드시 그 교만을 꺾고 낮추시는 분입니다. 교만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교만해진 부분은 무엇입니까? 오늘 버려야 할 교만은 무엇이며, 겸손히 낮추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5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1-5)

 

이사야는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질 예루살렘과 시온의 회복이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한되지 않음을 소개합니다. 열방을 포함하고 있음을 선언합니다. 따라서 이미 시온에 있는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빛에 행하고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왕권이 서는 날 열방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당신의 임재 앞으로 나아올 것입니다. 그날에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배우고 그들로 살고자 할 것이고 그분의 뜻대로 모든 무기를 농기구로 바꾸어 평화롭게 살 것입니다.

 

(1) 표제어(1)

 

1:1에 비해서 보다 간략한 형태의 표제로 다음에 오는 말씀의 성격을 제시합니다. 이하의 예언은 이방인들을 다루고 있지만, 여전히 유다와 예루살렘에 예언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2) 민족들의 순례(2-4)

 

이사야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때를 ‘말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일’에 시온이 모든 산 위에 굳게 서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시온의 회복은 칼을 처서 보습을 만들며,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말일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은 모든 산보다 높아지고(시편 48:3; 78:69), 세상 모든 민족이 그곳으로 순례를 옵니다(2). 시온 성전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여호와의 계시 장소로 개방됩니다. 시온의 ‘높임 받음’은 여호와의 계시 장소로서 시온 성전이 갖게 될 압도적 지위를 보여줍니다. 민족들이 서로 격려하며 시온으로 올라오는 목적은 하나님의 율법(가르침)과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3). 마지막 때에 우상을 숭배하던 민족들이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됩니다. 공정하게 판단하고 재판하시는 여호와의 통치 아래 살아가기에, 민족들이 다시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에 의존하지 않습니다(4).

 

(3) 권면(5)

 

이들은 칼과 창 같은 쓸모없게 된 전쟁 무기를 녹여 보습과 낫 같은 농기구로 만듭니다. 힘과 폭력과 전쟁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 곧 그분의 정의와 공의가 온 땅을 지배합니다. 여호와 신앙이 땅에서 파괴적인 전쟁의 두려움을 완전히 몰아내고 평화로운 삶을 보장해줍니다. 환상 중에 민족들이 야곱의 하나님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순례 오는 모습을 보는 예언자는 야곱 족속을 향해 그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확실하게 깨닫고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고 권면합니다(5). ‘여호와의 빛’은 그분의 은총과 구원사적 현존의 상징이자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빛은 역동적 힘으로, 이를 인식한 자들에게 그 빛에 의존하여 살 것을 명령합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은총의 빛을 경험한 자들은 그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6-22)

심판의 날이 오면, 부와 군력의 상징이었던 성벽과 망대, 배와 조각품들이 다 사라질 것입니다. 오만한 자들의 눈은 낮아지고, 두려운 중 바위틈을 찾으나 숨을 수 없습니다. 주님만 홀로 높임을 받으십니다. 사라질 세속 가치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날을 두려워하며 의와 경건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6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7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8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9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10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11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12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13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14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 오른 작은 언덕과 15모든 높은 망대와 모든 견고한 성벽과 16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17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18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19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20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21암혈과 험악한 바위 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22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6-22)

 

본 다락은 이사야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신 이유를 제시합니다. 먼저 이스라엘 땅에는 이방의 동방 풍속이 가득합니다. 이방 풍속은 우상 숭배와 종교적 미신들을 말합니다.

 

(1) 고발(6-9)

 

우상과 제 힘을 의존하는 이스라엘 현재의 문맥에 따르면 야곱 족속은 이사야의 권면(5)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 족속을 더 이상 돌보시지 않고 그들을 불순종에 방치하십니다. 그분이 이스라엘을 버리실 때는 물론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를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6-8). 첫째,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의 제의적 풍습에 깊이 물들었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인 야곱 족속이 신탁을 묻기 위해 그분을 찾지 않고 이방 풍습을 따라 점쟁이나 요술쟁이를 찾았습니다. 고대인들은 점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때와 조건을 알아내거나, 주술을 통해 악한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율법은 이러한 이교적 관습을 엄격하게 금했지만, 이스라엘의 민간 신앙에서는 이 관습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둘째, 은과 금과 보화와 군마와 병거가 땅에 가득했습니다. 야곱 족속은 자신의 경제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안전을 군사력에 의존했습니다. 경제적 부와 군사력에 의존하는 행태는 예언자가 볼 때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야곱 족속의 안전은 그들을 ‘주의 백성’으로 택하신 분께 의존할 때만 가능했습니다.

셋째, 우상들이 야곱 족속의 땅에 가득했습니다. 우상이란 섬기는 자들을 도와줄 능력이 없는 거짓 존재인데, 이스라엘은 능력의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허망한 우상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동사 ‘가득하다’는 금은보화와 군사력에 의존하는 행위와 우상숭배가 동전의 양면임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을 버렸다는 점에서 양자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예언자의 시선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서 민족들의 우상숭배로 옮겨집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땅 위의 모든 사람이 우상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을 천하고 낮게 만들었습니다(9). 우상에게 엎드려 자신을 비천하게 만드는 행위가 이미 여호와의 심판에 속했습니다. 행위와 그 결과의 내적 관계가 여호와의 개입에 의해 단절될 수도 있음을 아는 예언자는 하나님의 정의가 분명하게 드러나길 간구합니다(‘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9b). 자신을 위해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은 반드시 상응하는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2) 심판선언: 여호와의 날(10-21)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이날은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의 교만이 땅에 떨어지고 우상의 무능력이 폭로되는 날입니다.

여호와의 주권이 유감없이 과시되는 날로, 그분만 높임을 받습니다. 경제적 부와 군사적 힘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교만과 거만과 자만이 징벌을 받아 산산조각 납니다. 진노의 대상으로 먼저 거대 건축물에 사용되는 나무들이 언급됩니다(13).

레바논의 백향목은 높이가 30미터 이상 자라는 나무로,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 건축에 사용됐습니다. 스가랴 11:1-2에서도 레바논 백향목과 함께 언급된 바산의 상수리나무가 목재로 유명했습니다. 백향목을 수식하는 ‘높고 높은’은 12절의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와 히브리어가 동일합니다.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만든 것들 위에도 여호와의 진노가 임합니다(14-16).

‘높은 산’과 ‘솟아 오른 작은 언덕’은 가나안의 지형적 형편과 관련된 언급입니다. 가나안의 성읍들은 대부분 언덕과 산 위에 건설됐습니다.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용이한 높은 곳에 세워졌지만,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에는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망대’(믹돌מגדל)는 교외의 독자적인 탑 또는 성문과 성 둘레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만든 성벽 일부를 가리킵니다. 견고한의 바추르(בציר)는 원래 ‘접근할 수 없는’을 의미합니다.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이 보호해주리라 기대하지만, 진노하신 여호와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다시스의 모든 배’는 지중해를 왕래하는 원양 선단을 가리킵니다. 성공하면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원양 선단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간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경이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원양 선단의 위용과 사치스럽게 치장한 배의 호화스러움을 자랑하지만, 하나님의 진노의 바람이 불면 파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11절을 거의 문자적으로 반복하는 17절은 12절을 받아 하나님의 위협을 마무리 짓습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 인간의 거만과 교만이 꺾이고 그분만 높임을 받으십니다. 이날은 누가 진정으로 높은 자인지를 보여주는 날입니다.

 

18절은 다시 8절을 받아 우상의 멸망을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높임을 받으실 때 이스라엘이 무릎을 꿇고 경배 드린 우상이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우상과 우상숭배자가 모두 멸절합니다. 19절은 표현과 내용이 10절과 유사합니다.

‘위엄’과 ‘영광’은 주로 왕에게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 왕적 위엄 가운데 심판하려고 일어나실 때 세상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현현은 그분의 말씀과 의지를 무시하고 악을 행한 자들에게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는 심판 사건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는 날,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우상의 헛됨을 참담하게 깨닫습니다. 이들이 의존하던 우상은 환난을 피해 도망하는 데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도움은커녕 짐이 되는 우상을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져버리고 서둘러 숨을 곳을 찾아 바위틈에서 살길을 찾습니다(20-21).

 

(3) 권면: 덧없는 인생(22)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교만을 심판하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예언자는 선포의 마지막을 권면으로 마무리합니다. 여호와의 진노를 피할 길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사멸적 존재에 불과한 인간은 신뢰할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코로 호흡하는 동안만 생명이 유지되는 제한적 피조물일 뿐입니다. 사멸적인 인간이 이룩한 업적은 결국 사멸할 수밖에 없고, 그 업적에 의존하는 자도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사람을 생명체가 되게 하신(창세기 2:7) 분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숨이 막히면 흙으로 돌아가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권력자도, 재벌도 한순간 사라질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심판과 구원을 베푸실 참 통치자만이 의지할 유일한 분입니다. 하나님 외에 내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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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1-02)


사죄를 위한 하나님의 변론에로의 초청

이사야 1장 21-31절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혼란스런 국제 정세와 시장 절대주의 시스템, 종교적인 부패와 사회적 관계의 파괴, 만연하는 격차와 차별 등에 처해 있습니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고민이 깊습니다. 소명을 받은 우리가 세상의 희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우상숭배와 불의로 가득 찬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애가의 양식을 활용해 예루살렘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예루살렘은 정치적으로는 아직 살아 있지만, 윤리적-사회적으로는 속속들이 부패한 성읍입니다. 한때 정의와 공의가 충만했던 성읍이 이제는 살인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예루살렘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신실했던 처음 상태로 회복하실 것입니다.

 

시온을 정화하는 심판(21-26)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우리 삶에서 깨어짐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변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변질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으면 변절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신실하던 자들이 범죄자로 변합니다. 고위관료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하기보다 이권을 따라 뇌물을 받고 힘없는 자들을 억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21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22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23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24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 25내가 또 내 손을 네게 돌려 네 찌꺼기를 잿물로 씻듯이 녹여 청결하게 하며 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26내가 네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네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불리리라 하셨나니(21-26)

 

신실했던 예루살렘 성읍이 창녀가 되고, 공의 가득하던 도성에 살인자가 판칩니다. 온갖 비리와 부정, 뇌물이 성행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실낱같던 희망이 끊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기 민망한 지경입니다. 탈현실의 신앙시선을 돌이켜 역사 속 하나님 나라를 직시해야 합니다.

 

(1) 예언자의 고발(21-23)

 

이사야는 신실한 아내와 같이 남편의 뜻을 따르던 예루살렘이 그 사랑과 신의를 버리고 창기와 같이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창기에 비유해 고발합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다윗 왕조를 통해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신 신실하던 성읍이었는데, ‘이제는’ 불법과 불의가 판치고 살인자들이 들끓는 더러운 성읍이 됐습니다(21). 그 안타까움을 이사야는 ‘어찌하여’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신실하던’의 네에만(נאמן)은 ‘토대가 견고한’, ‘신뢰할 만한’, ‘충실한’을 의미하고, 여기서는 ‘정의와 공의’에 신실했음을 의미합니다.

호세아는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의 성적 풍요제의에 빠진 이스라엘을 창기로 고발했는데, 이사야는 사회적 불법과 관련하여 예루살렘을 창기로 부릅니다. 돈에 몸을 파는 창기가 신실하지 않은 것처럼, 예루살렘도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탄식의 대상이 된 원인으로 지도자들의 패악을 지적합니다. 그곳에서는 권력과 돈으로 정의와 공의를 살 수 있었습니다. 권력자들은 불의와 불법을 주저하지 않고 행했으며 만족을 모르는 탐욕의 굶주림을 채워갔습니다. ‘살인자’는 정의와 공의를 무시하고 폭력을 행사해 이웃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를 가리킵니다(출애굽기 20:13).

‘정의’(미슈파트משפט)는 사법적 행위의 구체적 실천을, 공의(체데크/צדק)는 공동체적 삶이 요청하는 타인에 대한 근본적 태도를 의미하기에 공의는 특히 재판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내적 부패를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21)라고 두 개의 비유를 통해서 고발합니다(22).

첫째 ‘찌꺼기가 된 은’ 비유는 세심한 노력의 부족을 보여줍니다. 은을 얻기 위해 용광로 작업을 할 때 충분한 노력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산화연이 섞인 은이 나와 쓸모없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지만, 사람들은 이를 제의적 영역에서 형식적으로만 준수했습니다. 그 결과 축복과 구원과 생명을 약속한 말씀이 저주와 심판과 죽음을 가져오는 말씀(찌꺼기)으로 변질됐습니다.

다음으로 ‘물이 섞인 포도주’ 비유는 의도적 거짓을 고발합니다. 술장사꾼이 술에 물을 넣어 팔면서 부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주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했습니다. 공동체의 연대성에 주목하여 삶의 전반적 영역에서 계명과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여호와종교를 제사 행위를 통한 자기 구원의 제의종교로 변질시켰습니다(1:10-17).

예루살렘의 타락에는 지도자들의 잘못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루살렘의 고관들은 다 패역하여 도둑과 한패였습니다(23). 뇌물과 사례금을 받고 약한 자의 정당한 권리를 무시하거나 무죄한 자를 죽음에 넘겨준다는 점에서, 이들은 도둑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의와 공의보다 제 이익을 앞세우는 자들에게 가난한 고아와 과부의 송사는 차라리 성가신 일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뇌물의 수령을 금지하는 율법(출애굽기 23:8; 신명기 16:19; 27:25)은 사문화된 지 오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심판 선언(24-26)

 

예루살렘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문제점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개입하시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대적에 대한 보응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대적은 이방인의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고 사회적인 불의를 일삼는 지도자들입니다.

여호와의 심판 선언(24-26)은 예언자의 탄식 어린 고발(21-23)과 구조적으로 일치합니다. 양자 사이에서 24a절을 중심으로 하는 교차대구적 구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대적에게 보복을 선언하시는 24b절은 고관들을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도둑으로 고발하는 23절에, 찌꺼기와 혼잡물의 제거를 약속하시는 25절은 찌꺼기가 된 은과 물이 섞인 포도주로 고발하는 22절에, 재판관과 모사의 회복을 약속하는 26a절은 정의와 공의의 유린을 고발하는 21b절에, ‘신실한 고을’의 26b절은 ‘신실하던 성읍’의 21a절에 서로 상응합니다.

예언자의 책망에 이어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여호와의 위협적 말씀이 나와, 여호와의 심판이 언약 관계의 파기에서 나오는 필연적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께서 신실하던 성읍을 살인자와 도둑의 성읍으로 타락시킨 자들에게 보복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24).

정의와 공의에 따라 통치해야 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그분의 대적이며 원수였습니다. 신적 분노를 인간적으로 표현한 ‘보복’은 사법적 정의의 실천과 관련한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악인에게 보복하심으로써 훼손된 정의를 바로 세우십니다. 22절과 짝을 이루는 25절에서 여호와의 원수와 대적의 범위가 예루살렘 주민들로 확대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보호자로 믿는 여호와께서 손을 들어 이들을 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창기와 같이 만든 지도자들을 더 이상 묵인하지 않으시고 보응하십니다. 물론 다시 살리기 위한 징벌입니다. 잿물로 더러운 때를 용해시켜 깨끗하게 만들듯이, 찌꺼기가 된 예루살렘을 이제 여호와께서 직접 다시 녹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은으로 만드십니다.

이것은 심판의 목적이 이스라엘의 멸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에 있음을, 더불어 이스라엘의 구원사적 미래가 오직 여호와의 주도로 이루어질 것을 시사 합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여호와이시기에 개입하실 권리가 있으시며,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이시기에 보응하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행한 지도자들을 보응을 통해 그들의 문제를 제거하시고 정결케 하겠다고 하십니다. 정화를 통해 깨끗하게 된 예루살렘은 잃어버린 옛 모습을 되찾습니다(26). 여호와께서 은혜의 찌꺼기를 씻어내시고 포도주의 석인 혼합물을 제거시키시고 본래의 가치를 회복하게 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의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모사들(고문관들)을 ‘본래’와 같이 세우십니다. 재판관과 모사에 의해 정의와 공의가 회복되고, 예루살렘은 다시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로 불리게 됩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가치를 되찾고 본분과 의무를 감당하게 하십니다.

 

죄인의 멸망(27-31)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회복을 위해 심판하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참지 못하시고 오염을 견디지 못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순결하고 정결하게 만드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화의 과정을 통한 순수한 신앙의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27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28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29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30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31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27-31)

 

이사야는 하나님의 정의롭고 공의로운 개입으로 시온이 불의와 패역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예루살렘과 시온에 부족한 공의를 하나님께서 채우심으로 회복과 구속이 이루어집니다. 현재 문맥에서 27-28절은 심판을 통한 시온의 회복을 약속하는 21-26절과 우상숭배자들의 멸망을 선포하는 29-31절을 잇는 역할을 합니다.

 

(1) 시온의 구원과 악인의 멸망(27-31)

 

미래에 있을 시온의 구속에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패역한 짓을 행한 자들은 정의로 구속받은 시온에 살지 못합니다. 그 돌아온 자들은 회개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시온과 거기에 사는 회개한 자들은 정의와 공의로 구속함을 받습니다. ‘구속함을 받다’의 (파다/פדה)는 원래 ‘값을 치르고 도로 찾다’를 의미합니다. 시온을 구속하는 정의와 공의의 주체는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정의와 공의가 가져다준 구원 시대에 참여하는 회개한 자들은 정의와 공의의 실천을 통해 그분의 구속을 경험하며 삽니다.

 

회개한 자들과 달리 패역한 자(반역자)와 죄인, 곧 여호와를 버린 자는 미래의 구원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는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패역한 자’는 2절의 동사 ‘거역하다(파샤/עשׁפ)’의 현재분사이고, ‘죄인’은 4절의 ‘범죄한’과 어근(하타 kon)이 같으며, ‘여호와를 버린 자’는 4절의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에 그대로 일치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결케 하시고 회복을 이루시는 여호와께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심판의 관문을 통과하면서 구속함을 받은 자와 멸망하는 자로 나뉩니다.

 

(2) 우상숭배자들의 종말(29-31)

 

이사야는 우상숭배자를 ‘여호와를 버린 자’의 구체적인 예로 제시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식들은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가나안의 풍습을 따라갔습니다. 동산을 찾아가 상수리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상을 섬긴 자들에게 안녕과 생명과 풍요 대신 부끄러움과 수치가 이들의 몫으로 주어집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시든 상수리나무처럼, 물 없는 동산처럼 됩니다.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힘과 권력을 자랑하며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불에 타는 것과 같이 소멸되고 맙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선택과 행위로 멸망을 자초하게 됩니다.

가나안의 풍요제의에 빠져 상수리나무(신목) 아래서 제사를 드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의 거절로 응답하십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무는 시들어버리고 물은 마른 것과 같이 우상숭배의 허무함을 직접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를 섬길지 분명해집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시편 36:10; 예레미야 2:13)를 떠난 자들에게는 죽음과 멸망뿐입니다. ‘강한 자’도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삼오라기’는 삼베를 만드는 데 적합하지 못한 찌꺼기로, 불이 잘 붙기 때문에 주로 불을 붙이는 데 사용됐습니다. 그의 행위는 상수리나무가 있는 동산에서의 처신을 가리킵니다. 우상숭배자의 행위가 불에 태워서 ‘불티’가 됩니다. 강한 자의 우상숭배가 불티가 되어 자신을 삼오라기 같이 태워버립니다. 멸망이 시작되면 그 누구도 그들의 멸망을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 ‘끌 사람이 없으리라’는 관용구로(아모스 5:6; 예레미야 4:4; 21:12), 신적 분노의 파괴적 힘을 보여줍니다. 우상숭배의 결말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완전한 멸망입니다.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영혼을 결정합니다.


우상의 사회는 비리와 부정, 부의 편중, 폭력과 힘의 숭배, 비인간화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공평과 인애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는 외면을 받습니다. 종교의 성역에 안주할 것인지, 치열하게 불의한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며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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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01-01)


배은한  남유다에게 임한 심판

이사야 1장 1-20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자 자녀로 부름 받았지만, 그 특권을 남용했습니다. 소나 나귀도 자기 주인을 알아보건만, 사랑으로 자신들을 양육한 하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배은망덕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스라엘처럼 새 백성으로 불러 더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회복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 이사야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반역을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은 배은망덕한 자식이요 소와 나귀보다 못한 자들입니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이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죄악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멀리해야 할 죄들이 이스라엘의 본성과 성품의 중심에 주인처럼 자리를 잡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죄를 고발하신 하나님(1-3)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악행은 짐승들도 하지 않을 만큼 지독했습니다.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주었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게 호되게 심판을 하셨어도 그 완악한 마음을 돌이킬 줄 모릅니다. 주님의 자비가 없었으면 소돔과 고모라 같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마저 감당하지 못할 정도면 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1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2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1-3)

 

이스라엘을 참된 회개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을 분명히 깨닫도록 해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기 전에,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부터 말씀하시는 내용이 모든 만물이 동의할 만한 내용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 이사야가 본 이상(1)

 

이사야서의 머리말이라 할 수 있는 첫 절은 매우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언의 메시자 자체로 들어가기에 앞서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연구해 볼 가치와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주전 8세기 중반부터 7세기로 넘어가는 어간까지, 약 40년 동안 남 유다에서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그 시대적인 배경으로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라고 왕들을 나열합니다. 그는 웃시야가 죽던 해 소명을 받은 후, 히스기야 통치 시기까지 계속해서 사역을 했습니다.

남 유다는 주전 8세기 초에 주변 세력에 약화됨으로 번영을 누리지만, 주전 745년에 앗수르가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해서 앗수르의 압제 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는 이사야가 메시지를 전달할 대상은 남 ‘유다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는 민족들의 신탁을 포함해 이사야에 수집된 모든 말씀이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계시(환상)이고, 그 내용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과 관련됐음을 알려줍니다.

 

(2) 깨닫지 못하는 백성(2-3)

 

남 유다를 향한 이사야의 비난은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라고 매우 충격적이고 자극적이었습니다. 이 말은 1장에서만 다섯 번 등장하고(2,5,20,23,28), 이사야 마지막 구절(66:24)에서도 다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거역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상심하시는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고소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상심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확실한 증인 둘을 재판정에 불러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발합니다(2). 땅은 피 흘림과 황폐함을 초래한(7) 이스라엘의 죄악을 직접 경험한 증인이고, 하늘은 이들의 범죄 행위를 낱낱이 지켜본 증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배반을 두 개의 잘 알려진 비유를 통해 고발하십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스라엘을 친아들처럼 키워주고 돌봐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배반한 파렴치한 아들입니다. 고대적 가치관에 따르면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들은 죽음에 넘겨집니다(신 21:18-21). 여호와를 배반한 이스라엘의 행태는 아버지를 거역한 아들의 패역과 같기에, 멸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주인과 주인이 키우는 짐승의 비유입니다(3). 말 못하는 짐승인 소나 나귀보다도 지각이 없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3)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무시하는 가축일지라도 그것들은 절대로 자신에게 먹이는 주는 주인을 모른 체하거나 주인에게 대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찮은 짐승에 비하여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한 예는 또 있습니다. 즉 소나 나귀도 먹이를 주고 키워준 주인을 알아보고 따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즉 예레미야 선지자는 가축보다 더 하등 동물인 날짐승을 들어 이스라엘을 배은망덕과 어리석음을 지적했습니다.

 

7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예레미야 8:7)

 

 

이스라엘의 완악함(4-9)

 

옛날부터 은혜를 모르면 짐승만도 못한 자라고 합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은 치유의 가능성을 더 어렵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사랑의 매를 드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발바닥부터 머리가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 큰 매를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4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7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8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9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4-9)

 

이사야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양육해준 부모이며 또한 자신들에게 양식을 공급해준 주인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악하게 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상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두 번째 단락은 깨닫지 못함의 구체적인 예로, 이미 이뤄진 심판의 서술입니다. 여호와께서 거듭 치셨지만,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하고 그분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거의 죽기까지 맞았음에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1) 여호와를 버린 자들(4)

 

본문은 주전 701년 예루살렘의 함락을 목전에 둔 앗수르 군대가 갑작스럽게 철군한 직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4)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가 이제는 범죄한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를 업신여겨 등을 돌리고 악을 쫓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악행이 뼛속까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남 유다의 파괴된 정체성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 상처 투성이뿐인 이스라엘(5-6)

 

하나님께 반항하다가 맞아 중상을 입었는데도 반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5). 병이 머리와 마음(가슴)을 덮쳤음은 환자가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위험에 처했음을 시사 합니다. 병뿐만 아니라 환부의 범위도 심각했습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온몸에 성한 데라고는 한 곳도 없이 상처와 상흔과 새로 맞은 자국뿐이었습니다(6).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중환자인데도 무지한 이스라엘은 치료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살리기 위해 거듭 매를 드셨지만, 이스라엘은 아버지의 경고에 어리석게 조금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행동이 지속되는 한 상처를 치료 받기 어렵습니다.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기름이 그분의 손에 들려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분께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3) 이방에 황폐해진 이스라엘(7-8)

 

매를 맞고도 돌이키지 않아 만신창이가 된 이스라엘의 구체적 상태를 보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병의 비유가 언급됩니다. 이사야는 거듭된 패악의 결과가 현재 유다의 상태에 황폐함과 파괴임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대적을 통해 남 유다를 파괴하셨고, 땅은 황폐하고 성읍은 불에 탔고 토지소산은 이방인의 차지가 됐습니다(7). 초라한 모습으로 남게 하셨습니다.

사용된 표현은 대부분 언약 전통에 속하는 것들로, 언약 파기의 결과로 이스라엘에 저주가 임했음을 시사 합니다. ‘파괴됨’의 ‘마흐페카(מהכהפ)’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언급할 때만 사용된 단어입니다(신 29:22; 사 1:7;13:19; 렘 49:18; 50:40; 암 4:11). 완전히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될 정도로, 유다가 침략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됐습니다.

시온만 겨우 포도원의 초막처럼, 참외밭(오이밭)의 원두막처럼, 포위된 성읍처럼 남았습니다(8). 시온은 파괴된 포도원과 참외밭에 홀로 초라하게 남겨진 초막과 같았습니다. ‘포도원의 망대’, ‘원두밭의 상직막’은 열매를 맺는 동안 과실들을 도둑이나 동물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밭에 임시로 세워놓는 것으로서, 겨우 비와 햇볕을 피할 정도의 역할을 하는 가건물입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이 외롭게 동떨어져 있고 또 쉽게 허물어질 건물과 같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방인의 침략에서 겨우 목숨을 구한 시온을 기다리는 것은 추수할 열매가 하나도 없는 절망적 현실이었습니다.

 

(4) 하나님의 긍휼(9)

 

예루살렘은 외부의 작은 공격 앞에서도 쉽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원두막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소돔이나 고모라 같이 취급하여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멸시켜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제 선지자 이사야의 시선은 매를 맞은 이스라엘에서 매를 들어 치고 계신 여호와께로 옮겨집니다. 여호와께서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일부를 남겨주셔서 시온은 소돔과 고모라가 당했던 완전한 멸망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9). 그분이 어떤 이유에서 마지막 순간에 시온을 구하셨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지만(29:1-8), 이스라엘의 긍정적 태도 변화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22:1-14). ‘여호와께서’ 생존자를 남겨두셨음은 다른 한편으로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사보다 말씀의 순종(10-17)

 

이스라엘은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 못지않게 악하게 행하면서도 돌이킬 줄 모릅니다. 온갖 종교 행위로 이를 덮고 상쇄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의도를 담은 종교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교회의 부끄러운 면을 감추고 화려한 종교 의식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 하지 않습니까?

 

10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1-17)

 

이스라엘은 많은 제물로 자신들의 악행을 가렸습니다. 자신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은 많은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만나지 못하고 마당만 밟고 가는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1)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10)

 

예루살렘의 지배계급과 유다 백성은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과 다르지 않았습니다(10).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법(가르침)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제의적 행사에만 열심이었습니다.

 

(2) 제의적인 경건(11-15)

 

여호와께서는 이들이 무슨 생각에서 그처럼 많은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바치는지 당혹해하십니다(11). 그분은 이들이 끊임없이 불에 살라 바치는 제물에 넌더리를 내십니다. 이들은 단지 예물을 드리기 위해 성전 뜰을 열심히 밟을 뿐이었습니다(12). 이들은 제사와 예물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무를 대체하려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인 단 불에 살라지는 제물은 ‘헛된 제물’로, 이들의 제사는 무익한 짓이었습니다(13). 제단의 분향은 그분께 역겹고 가증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열심을 내서 온갖 절기를 지키지만, 이들의 경건은 성전의 담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성회로 모이면서도 그 마음에는 악을 품고 있었습니다. 한계에 도달한 여호와의 인내심이 제의적 모임과 절기의 축제에만 열심인 자들과의 단절을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의 축제와 절기는 ‘너희’의 종교적 행사로, 그분께는 이교적 풍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14). ‘무거운 짐’을 계속 짊어지기에는 그분이 이제 지치셨습니다. 제사와 제의적 모임뿐 아니라 기도마저도 거절됩니다(15). 기도하는 자의 두 손이 이웃의 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무죄하게 흘린 피의 호소를 들어주시는 분이기에(창세기 4:10), 불의를 행한 자의 기도는 그분께 상달될 수 없습니다.

 

(3) 선행과 정의(16-17)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신앙을 제의 규정의 준수로 축소해버린 자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시는 대신 이들에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성전예배 참석의 전제 조건이 제의적 정결에서 윤리적 정결로 바뀝니다(16). 제의에 참여하는 자는 악한 행실을 제거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윤리적 갱신을 끌어내지 못하는 기도와 제사(예배)는 그분이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숭배에 불과할 뿐입니다. 악에서 떠나 선행과 정의의 실천으로 나가야 합니다(17). 구체적으로,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과부를 위해 변호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보호자이시기에(신명기 10:18; 시편 68:5; 82:3-4; 146:9), 그분께 제사 드리는 자들은 이들의 법적 권리를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선택의 요청(18-20)

위기에 처한 공동체가 치유 받는 길은 행악을 그치고, 정의를 구하며, 약한 자를 대변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신앙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심각한 죄를 외면한 채, 종교 행위로 사소하게 다루려 하지 않습니까? 공평과 정의, 인애와 사랑만이 유일한 답니다.

 

18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19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8-20)

 

가망 없어 보이는 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손을 내미십니다. 회개하여 죄를 씻고 악한 행실을 버리고 행학을 그치고 다시 정의와 선행의 삶으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주홍 같은 죄라도 양털 같이 희게 해주실 거라고 약속하십니다.

 

(1) 여호와의 용서 의지(18)

 

선행과 정의의 실천은 하나님의 용서 의지에서 출발합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심판보다 구원을 원하시기에 죄에 물든 이스라엘에게 용서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됩니다. 죄로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화해가 그분이 값없이 주시는 용서에 의해 가능해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용서 의지에 긍정적으로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2) 순종의 결과(19)

 

이스라엘이 그분의 자기희생적 결단에 부응하여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고, 거절하고 자기 길을 가면 칼에 멸망당할 것입니다.

 

(3) 불순종의 결과(20)

 

여호와는 언약 전통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에게 축복(순종)과 저주(불복종)를 선택하라고 촉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참과 절망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백성을 남기십니다. 참회하지 않는 백성에게 ‘와서 서로 변론하자’며 초대하십니다. 긍휼을 구하는 이에게, 씻음과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만이 희망입니다. 기회 주실 때 서둘러 삶을 돌아보고 돌이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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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서론

》 이사야 개론 《

 

* 저자 : 김필회(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

이 내용은 시니어 매일성경 7,8월호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읽기 쉽도록 고정한 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1. 예언자 이사야

 

(1) 출신 배경

 

‘이사야’의 이름은 ‘여호와가 도움이시다’, ‘여호와께서 도와주셨다’란 뜻입니다. 또 그의 아버지 ‘아모스’는 ‘여호와는 강하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사야가 여호와 신앙에 뿌리를 둔 전통적인 집안에서 성장했음을 시사 합니다.

7.8장에 따르면 이사야에게는 적어도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다’를, 둘째 ‘마헬살랄하스바스’는 ‘신속히 - 약탈물 - 재빨리 – 노획물’을 의미합니다.

또 8:3에서는 이사야의 아내를 소개하는데, ‘여자 예언자’로 부릅니다. 아마도 이사야의 아내도 요시야 시대의 훌다처럼(참조. 열왕기하 22:14) 예언자로 활동했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와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모두 여호와의 의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이사야는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다]’ (8:18)고 말합니다.

 

(2) 활동 시기

 

이사야서의 표제어에 해당하는 1:1에 따르면 이사야는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웃시야 왕부터 히스기야 왕까지는 대략 주전 780년대부터 7세기로 넘어가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에 수집된 말씀은 대부분 아하스 시대와 히스기야 시대에 선포된 예언이고, 웃시야와 요담 시대를 배경으로 선포된 예언은 거의 없습니다. 이에 따르면 이사야는 웃시야 통치 말엽부터 주전 701년 직후까지 대력 40년간 예언 활동을 한 것 같습니다.

후대에 의하면 이사야는 므낫세 시대에 순교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자로 활동했던 주전 8세기 후는 반은 앗수르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가나안을 포함한 근동의 정치지형도가 격렬하게 요동치던 시대였습니다.

 

 

2. 1-39장의 역사 · 정치적 배경

 

(1) 시대적 정황

 

유다 왕 웃시야 통치 초중반은 고대 근동의 정세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 우호적이었습니다. 주전 9세기 북이스라엘을 강하게 압박했던 아람은 앗수르와 거듭된 싸움으로 세력이 약화됐고, 앗수르도 8세기 초반에 내부 분열과 전통적인 적대국인 메대와 우라르투의 팽창으로 북쪽과 동쪽 국경이 위협을 당했습니다.

힘의 공백이 발생한 덕분에 가나안은 오랜만에 외부 세력의 위협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대략 반세기 동안 지속된 힘의 공백에 따른 세력 균형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주전 745-727년)의 등장으로 끝났습니다.

앗수르는 다시 공세를 취해 근동의 정치지형도를 바꿔놓았습니다. 침략전쟁에 나선 디글랏빌레셀은 바벨론, 메대, 우라르투, 아나톨리아 남부, 시리아-가나안으로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다메섹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므나헴은 디글랏빌레셀에게 조공을 바치고서야 침략을 모면했습니다.

 

(2) 유다 왕들의 정치적 선택

 

앗수르가 다시 메대(주전 737-736년)와 우라르투(주전 735년)로 원정을 떠난 사이, 다메섹의 르신이 앗수르에 맞서기 위해 주변 나라들과 연합을 시도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나라가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두로와 이스라엘의 참여는 분명하고, 유다의 아하스는 참여를 거절했습니다.

열왕기하 16:7,8에 의하면, 아람-에브라임 동맹의 위협을 받고 있던 아하스는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의 창고에 있던 금은보화를 앗수르 왕에게 선물로 보내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하면서 자진하여 앗수르 왕의 봉신이 됐습니다. 아하스의 뒤를 이어 유다의 왕이 된 히스기야는, 처음에는 부왕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맛과 가사가 주전 720년에 사르곤 2세(주전 722-705년)에 대항하여 일으킨 봉기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주전 713-711년 아스돗이 애굽의 부추김을 받아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을 때는 에돔과 모압과 함께 가담했다가 아마도 직전에 발을 빼고 앗수르에 조공을 바쳐 침략을 모면했습니다. 이사야 18:1-6과 20:1-6은 이 시대를 배경으로 선포된 신탁처럼 보입니다.

주전 705년 사르곤이 갑작스럽게 죽고 그의 아들 산헤립(주전 705-681년)이 보좌에 오르는 권력 교체기에 앗수르 제국의 남서쪽에서 다시 봉기가 발생했습니다. 전에는 매우 신중했던 히스기야도 이번에는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물론 히스기야의 반역에는 사전에 세심한 준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이 포위될 때를 대비하여 실로암 터널을 뚫어 기혼 샘의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참조 열왕기하 20:20; 이사야 22:9).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왕하 18:4)이 그의 반앗수르 정책의 일환이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준비를 마치고 때가 왔다고 판단한 히스기야는 주전 705년 또는 704년에 앗수르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고(참조, 열왕기하 18:7) 반앗수르 연합을 주도한 바벨론 왕 므로닥 발라단(주전 704-703년)과 함께 반앗수르 세력의 결집을 시도했습니다. 산헤립은 주전 703년 바벨론의 므로닥 발라단을 권좌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제국의 남쪽과 동쪽과 북쪽의 반란 세력을 정벌한 후, 주전 701년 예루살렘의 히스기야를 목표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가 거의 점령당했습니다. 앗수르의 자료에 의하면 산헤립은 46개의 요새로 된 성읍과 많은 작은 성읍을 점령하고 히스기야를 새장에 갇힌 새처럼 완전히 고립시켰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유에서 산헤립은 예루살렘 점령을 포기하고 갑작스럽게 철군합니다(37:36,37). 예루살렘의 함락이라는 파국은 면했지만, 전쟁의 여파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치유하기 어려운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3. 1-39장의 구조와 개요

 

선포의 대상에 따라 1-39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운데 놓인 13-27장에는 민족들과 온 땅을 대상으로 선포한 말씀들이, 그 앞뒤인 1-12장과 28-39장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대상으로 선포한 말씀들이 모아졌습니다.

둘째 단락에는 그 안에 단락의 표지가 있어 비교적 쉽게 나눌 수 있지만, 첫째와 셋째 단락에는 특별한 표지가 없기에 구조가 매우 다양하게 제시됩니다. 여기서는 비교적 단순하게 심판과 구원의 주제에 따라 단락을 마감하는 12장을 제외하면 1:2-11:16은 나눠봅니다.

 

(1)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예언(1-12장)

 

이사야의 표제어인 1:1과 첫 대단락을 다음과 같이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2:5 첫 단락

1:2-20, 20-31 고발과 권면

1:21-28; 2:1-5 시온의 회복

 

2:6~4:6 둘째 단락

2:6-4:1 고발과 심판선언

4:2-6 시온의 회복

 

5:1-9:7. 셋째 단락

5:1-8:22 고발과 심판선언

9:1-7 다윗왕조의 회복: 미래의 원자

 

9:8-11:16 넷째 단락

9:8-10:4 고발과 심판선언

10:5-34 여호와의 진노의 막대기 앗수르

 

(2) 민족들에 관한 예언(13-27장)

 

민족들의 신탁이 수집된 13-23장은 표제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경고’와 선포의 대상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13:1-14:32 바벨론에 관한 경고

15:1-16:14 모압에 관한 경고

17:1-18:7 다메섹에 관한 경고

19:1-20:6 애굽에 관한 경고

21:1-10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

21:11-12 두마에 관한 경고

21:13-17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

22:1-25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

23:1-18 두로에 관한 경고

 

24-27장의 시점은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입니다. 13-23장이 각각의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지를 선포한다면, 여기서는 온 세상이 심판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24:1-23 땅의 심판과 여호와의 왕권

25:1-12 감사 노래와 여호와의 잔치

26:1-27:1 종말론적 시

27:2-13 야곱의 구원과 대적의 멸망

 

(3)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예언(28-39장)

 

주로 히스기야 시대에 선포된 말씀들이 수집된 셋째 단락은 28-35장과 36-39장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의 교만을 고발하는 28:1-6은 전체 단락의 길잡이 역할을 담당합니다.

 

28:1-31:9 다섯 개의 화 선포

32:1-33:24 여호와의 통치

34:1-35:10 에돔과 이스라엘의 대조적 운명

36:1-39:8 히스기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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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9-01)


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시편 59편 1-17절


 

항상 가시 같은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 가시는 성가시고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그 가시가 깨끗하게 정리되고 없어졌으면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 가시가 있는 것이 때로 성도들에게 유익이 됨을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과연 악인들을 보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까?

 

 

  • 시인에게 잘못이 없음에도 악을 행하며 피 흘리기를 즐기는 강한 자들이 매복하고 그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며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신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힘과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찬양합니다.

 

도움을 위한 간구(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억울함, 부당하게 조롱과 핍박,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 감수하는 손해 등을 아십니다. 성도가 부당한 현실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이유, 아무리 암담해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소망을 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2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3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4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 5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셀라)(1-5)

 

1-2절에서는 시인이 하나님을 부르며 구원을 간구합니다. 이때 네 가지 대적에 대한 표현과 구원을 나타내는 동사가 나옵니다. 대적은 “나의 원수”, “일어나 치려는 자”, “악을 행하는 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입니다. 이 표현들은 대적들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임을 보여줍니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는 문자적으로 ‘피의 사람들’로서 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리는 폭력도 사용할 수 있는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을 나타냅니다. 구원을 나타내는 동사들은 “나를 건지시고”(x2), “나를 높이 드소서”, “나를 구원하소서”입니다. ‘높이 들다’는 ‘높은 곳에 안전하게 두다’는 의미입니다. 대적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다 복수형일 뿐 아니라 네 번 반복함으로 대적이 강력하며 시인의 상황이 매우 위협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구원의 간구 역시 네 번 반복됨을 통하여 시인이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 간청하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3절과 4절 상반절에서는 간구의 이유로 대적들의 공격적인 행동이 묘사됩니다. 원문에서는 3절 앞에 간구의 이유를 표현하는 ‘왜냐하면’이 나오고 그 다음에 “보소서”가 나옵니다. 이는 대적으로 인해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지 하나님께 대적들의 행동을 주목해서 보시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시인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회를 노려 급습하려고 매복해 있는 것입니다. 이 대적들은 강한 자들이며 시인을 치려고 모여 있습니다. 강한 자들이 그의 생명을 해치기 위해 함께 매복해 있는 위급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며 시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대적에 대해 어떤 잘못이나 죄나 허물이 없음을 천명하며 죄에 대해 세 가지 용어를 사용합니다. 시인에게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적들이 달려와서 시인을 칠 준비를 하는 적극성과 자발성을 보입니다. 시인은 무죄한 가운데 억울하게 공격을 당한다고 항변하며 자신을 돕기 위해 일어나 살펴주시기를 구합니다.

앞에서 자신을 구원해주시기를 구한 것과 달리 5절에서는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또한 모든 나라의 심판과 악을 행하는 모든 자의 심판을 구하면서 개인을 위한 기도에서 공동체를 위한 간구로 나아갑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깨어 일어나셔서 온 세상의 거짓되고 악한 행동을 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말고 징벌하시기를 구합니다. 왜 시인이 자신의 위급한 상황에서 온 세상의 거짓되고 악한 자들의 심판을 구하고 있습니까? 시인은 자신을 공격하는 대적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에게 합당하지 않은 행동이요 믿음이 없는 세상의 악한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여겼습니다. 대적들에 대한 심판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께서 마땅히 하셔야 할 세상의 모든 악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대적들의 악과 교만(6-7)

세상은 그 어떤 것도 안전한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살아가면서 위기가 닥치면 우리가 평소에 의지하던 대상은 다 무너지고 떠나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자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6그들이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7그들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들의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6-7)

 

시인이 대적들의 위협을 들개의 영상으로 다시 묘사합니다. 그들은 마치 들개처럼 밤에 나타나서 울며 성을 돌아다닙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것은 그들의 악한 행위를 암시하며, 밤에 울부짖는 것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입으로 악을 토하고 입술에는 칼이 있다’는 것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는 들개들처럼 대적들이 거리에서 떠들어대며 오만하고 위협적인 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도시를 자기들 세상으로 만들고 무정부 상태의 혼돈을 즐기며, 거침없이 떠들어대고 말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위협하여 도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드는 자들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누가 듣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들 심중 깊은 곳에 어느 누구도 자신들에게 대항할 수 없고 제지할 수 없다는 오만함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의 태도인 것입니다(시 10:4; 14:1; 53:1; 73:11; 94:7).

 

신뢰의 고백(8-10)

성도들은 개인과 공동체 간의 상호연결성과 연속성에 대한 깊은 이해해야 합니다. 한순간에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향한 관심과 사랑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개인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쉬지 말고 헌신과 기도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8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며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시리이다 9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10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8-10)

 

시인은 대적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여호와께서 웃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다’고 하며 그들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시 10:4)하는 교만한 세상 나라들에 대해 하나님이 비웃으십니다(시 2:4;37:13). 시인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며 요새이니 내가 주를 바라본다’고 고백합니다. 강한 대적들이 나를 죽이려 매복했지만 대적보다 강한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며, 대적들이 온를 혼돈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호하는 요새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러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 계심을 다시 확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으로 나를 맞아 주시고 앞서 가며 대적들을 물리쳐서 그들이 보응 받는 것을 보게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악인의 심판을 위한 간구(11-1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원수를 철저하게 심판하시고 그의 억울함과 원한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보응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원한과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11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소서 12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13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어지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11-13)

 

대적들이 보응받는 것을 확신한 시인이 대적들을 죽이지 말라고 간구합니다(11).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심판하셔서 이스라엘을 보호해주셨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잊지않고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기 위해 죽이지 말고 그들을 흩으시고 낮아지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대적들이 죽어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여기저기 흩어지고 낮아져서 과거에 함께 모여 강하고 교만했던 자들에게 하나님이 보응하셨음을 생생히 보여주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시는 분임을 시인이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대적들의 입과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죄입니다(12). 그들은 교만하여 끊임없이 저주를 퍼붓고 거짓말을 하므로 시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사로잡히고 죽임을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악인들이 멸망을 당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13). 하나님의 통치가 먼저 이스라엘에서 드러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대적들의 악과 교만(14-15)

성도의 삶은 탄식으로 시작해도 찬송으로 끝납니다. 억울함으로 시작해도 감사의 찬송으로 뒤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과 방패와 피난처와 요새와 구원이 되십니다. 다급하게 부르짖던 다윗의 탄식의 기도는 이번에도 역시 찬양으로 마무리됩니다. 다윗은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그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힘을 찬양합니다.

 

14그들에게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15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14-15)

 

부분에서 6-7절에 나왔던 대적들의 들개 영상이 다시 나타납니다. 14절은 6절과 동일하나 15절의 내용은 7절과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는 먹을 것을 찾는 배고픈 들개로 그립니다. 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해 밤새도록 으르렁거립니다. 이 부분에서 다시 대적을 언급하는 것은 시인이 하나님의 구원과 나아가 악인에 대한 심판을 확신하고 있지만 대적의 위협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고 여전히 가까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신뢰의 고백과 찬양(16-17)

다윗은 비록 억울한 일을 당하며 위험에 빠져 있지만 하나님을 의뢰할 때 오히려 자기 대적들보다 훨씬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마음의 평안입니다.

 

16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7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16-17)

 

 

시인은 아침에 주님의 힘과 인자하심을 높이 노래하겠다고 말합니다. 밤새 돌아다니는 들개와 같은 대적의 위협을 받았던 시인이 죽음과 공포의 밤을 보내고 생명과 구원의 시간인 아침에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찬양의 내용은 여호와는 요새요 피난처이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내가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지혜롭게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악인들을 벌하기는 하시지만, 죽이지는 마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 또한 예수님처럼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성도가 성숙해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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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8-01)

 


악한 통치자들을의 이를 꺾으소서

시편 58편 1-11절


 

악한 세상을 보며 낙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악한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아도 별 변화가 없을 때에는 솔직히 절망에 빠지고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포기하셨다거나 세상에 무관심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견해는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 악한 통치자가 정의롭게 재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악과 폭력을 행함으로 사회에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상황에서 시인이 탄식하며 악한 통치자들을 책망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이들을 심판해주시기를 간구하며, 하나님께서 악인을 반드시 심판하시고 의인에게 보상해주실 것을 확신하고 사람들이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인과응보의 교훈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악한 통치자들에 대한 탄식과 책망(1-2)

성경은 사회지도층의 범죄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부분이 없는지 점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힘을 가진 자들의 부패를 절대로 좌시하지 않으심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1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2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1-2)

 

시인은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말 정의를 말하느냐? 사람의 아들들아, 너희가 정말 올바르게 판결하느냐?’고 물으며 시를 시작합니다. 권력을 가진 왕들, 통치자들, 지도자들은 재판이 바르게 이루어져 사회에서 정의와 공평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여러 가지 일로 서로가 ‘옳다 그르다’하는 시비가 붙을 수 있습니다.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여 해결이 나지 않을 때, 최종적으로 시비를 가르고 그 결정을 양편이 다 받아들이게 되는 최고의 권위가 재판정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적인 재판은 그 나라의 도덕의 척도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판하는 지도자들이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여 정의를 세우고, 또한 부자든 가난하든 힘 있는 자든 연약한 자든 구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판결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그 나라는 중심에서부터 부패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절은 1절 질문의 대답이 ‘아니다’임을 전제하고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고 땅에서 손으로 폭력을 달아준다.’고 말합니다. 중심 곧 마음은 내적 생각을, 손은 외적으로 실제 행함을 말합니다. 이들은 마음속에서 악을 계획하고 그 계획대로 세상에서 악을 행합니다. 악행에 대한 최후의 보루인 재판정에서도 정의와 공평을 실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경중을 달아주는 저울이나 저울질하는 것은 정의와 공평을 실행하는 재판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폭력을 달아준다는 것은 재판이 폭력을 일삼는 곳이 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재판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 사회 전반에 온갖 불의와 부정과 폭력으로 인한 악들이 횡행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악인의 모습에 대한 비유(3-5)

세상에는 어디든 불의한 세력이 있게 마련이고, 그 세력이 나라나 공동체 전체를 좌지우지할 만큼 강력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세력은 때로 뱀의 독처럼 치명적이고, 사자의 어금니처럼 강력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악에 대해 감히 대적할 용기도 내지 못한 채, 그 어둠의 세력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최선인 첫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3-5)

 

3절은 악한 통치자들로 인해 사회에서 악이 횡행하는 것을 통해 악인의 모습을 궁극적으로 그려봅니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갔다.’ 이 말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악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이 악한 본성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존재가 시작할 때부터 악으로 물들어 있어 악과 거짓을 서슴없이 행합니다. 악과 거짓은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존재의 시작부터 악과 하나 된 악인들의 모습을 뱀과 독사로 비유합니다(4). 악인들이 품고 있는 악은 마치 뱀의 독과 같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뱀의 독처럼 악인들이 뿜어내는 악한 영향력은 사람들을 죽이고 치명적인 해를 끼칩니다. 또한 악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와 같다고 합니다. 귀를 막았다는 것은 일부러 듣지 않고 불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진 것을 강조합니다.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는 술사가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듣지 못하고 능숙한 술객이 주문을 외우고 요술을 부려도 따르지 않습니다. 술사나 술객은 피리 소리와 요술로 무서운 독사를 원하는 대로 조종하고 다룹니다. 그런데 독사가 귀머거리라면 술사가 아무리 능숙하다 할지라도 제어할 길이 없습니다. 악한 지도자들은 이 귀머거리 독사와 같습니다. 아무리 지도자들의 특권과 책무와 위치와 역할의 중요함을 말한다고 해도 전혀 듣지 않습니다. 경고나 책망, 권면이나 회의 그 어느 것도 듣지 않아 그들을 설득하고 제어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서 악을 행사하여 사람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언약의 규정인 율법을 지킬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율법의 규정을 가르치고 지키도록 도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끊임없이 율법을 듣고 배울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을 때 결국 자기 마음속의 악한 본성이 계획한 대로 악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인의 심판을 위한 간구(6-9)

아무리 세상에서 큰 권세와 힘을 가진 자라 해도 하나님께서 한 번 일하시면 결국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세상의 불의한 힘이 너무 크게 느껴질 때에라도, 우리에게는 그들의 모든 모의를 무효로 돌리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6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7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8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9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6-9)

 

시인이 이런 악한 통치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6a). 먼저,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어달라’고 기도합니다. 5절의 독사를 연상하여 이를 말한 것인지 6절 하반절의 젊은 사자의 어금니와의 평행 속에서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는 악한 통치자들이 악과 폭력을 행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내시기를 구합니다. 젊은 사자에게 있어서 먹잇감을 사냥할 때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는 것이 어금니인데, 이것을 꺾는 것은 그의 힘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통치자들에게서 그들의 악한 영향력과 힘을 제거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7절에서는 악인들이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고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해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급히 흐르다가 사라지는 물은 여름철에 말라 있다가 우기에 갑자기 물이 많아져 급류가 되어 흐르는 이스라엘 지역의 와디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와디의 급류가 무섭고 위험하지만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위협적인 악인들의 세력이 속히 사라지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화살을 쏘려고 겨눌 때 부러지게 해달라는 간구는 악을 계획하고 실행하려고 할 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악인들이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고 조산한 아이가 살지 못하고 죽는 것처럼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달팽이는 물이 없으면 죽게 됩니다. 따라서 가뭄에는 완전히 말라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만삭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유산되거나 조산된 아이가 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뭄에 말라죽는 달팽이처럼 유산되어 살지 못하는 아이처럼 악인들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9절은 본문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원문에 “가마솥”이라는 단어에 2인칭 복수 소유격이 붙어 ‘너희 가마솥’이라고 한 것을 볼 때 가마솥은 악한 통치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마솥에 물이나 음식을 넣고 뜨겁게 데우려고 가시나무들을 모아 불을 지폈는데 솥이 뜨거워지기도 전에 생나무든 불붙은 나무든 바람이 불어 다 날아가 버린 경우처럼 악한 통치자들이 가마솥에서 음식을 삶듯 악한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계획과 실행을 다 날려버리고 제거해버리시기를 간구합니다.

위의 비유들을 통한 간구는 통치자가 철저하게 악에 물들어 있을 뿐 아니라 완전히 귀를 막아 어떤 권면이나 설득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수많은 악의 희생자들이 하나님께 악의 권세를 깨뜨려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의인의 확신(10-11)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과 권세를 얻은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비참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 눈앞에서 악한 자가 오히려 잘 되는 것 같은 현실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이 그들에게 임할 것임을 기억하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10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11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10-11)

 

시인은 심판을 간구한 후에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보응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악인들이 심판을 당하고 의인들이 승리한 후에 의인들이 기뻐할 것이며, 그들의 모든 억울함이 해결되고 삶이 회복될 것입니다(10).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악인은 심판하시지만, 의인에게는 반드시 보상하시는 이 세상을 정의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인과응보의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비로 우리의 눈에는 세상이 무질서하고 부조리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악인은 반드시 심판을 당하고, 억울한 자들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습니다. 이 진리를 믿으며 불의한 세상 가운데에서라도 진실하고 올바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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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7-01)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성숙한 탄원

시편 57편 1-11절


 

우리는 문제 상황을 올바르게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처해 있느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울을 피해 숨었던 어둡고 음치만 동굴이 하나님의 날개 그 동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고난의 장소가 찬송의 장소로 바뀌는 기적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 시인은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생명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합니다. 지존하시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고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구원해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한 시인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한다고 노래합니다.

 

보호를 위한 간구(1-3)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날개 그늘’과 같은 말은 화석처럼 생명력이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한 다윗에게는 그 동굴이 자신을 덮는 안락한 이불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기만 하면 어디라도 가장 포근하고 안전한 장소가 되는 기적, 이 기적을 우리도 인생의 ‘동굴’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1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3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1-3)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구합니다. 은혜는 대가를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나 필요를 돕고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두 번 연이어 간구한 것은 상황이 위급하고 절박함을 암시합니다. 시인은 재앙이 지나갈 때까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를 파멸시키려는 재앙을 만난 시인이 하나님께 이 재앙에서 보호해주시는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그늘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상징하는 은유입니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생명과 미래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신뢰하여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존하신 분이요 그를 의지하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그분이 가지고 계신 모든 목적을 이루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2).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우주의 왕이요 가장 높으신 지존자이십니다. 또한 그의 백성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그들의 필요와 안전을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아는 자는 절박한 위기에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보호를 간구합니다.

1-2절의 간구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3절은 서술보다는 소망을 나타내는 간구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내셔서 나를 구원하시고’에서 무엇을 보내시는지, 목적어가 없는데, 3절 끝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에 근거하여 인자와 진리가 목적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자와 진리를 보내셔서 나를 구원하여주시고 나를 삼키려는 자를 꾸짖어주십시오’라고 간구합니다. “인자와 진리”는 인자와 성실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증언법으로 변치 않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특히 이 두 단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 관계에서 사용되며 하나님이 그의 언약 백성에게 약속하신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했는데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는 사랑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주권과 능력을 소유하신 지존자이시며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대적으로 인한 탄식(4)

하나님께서는 인자와 진리로 원수들의 날카롭고 살벌한 공격을 파하실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원수들의 공격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가 훨씬 더 강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라고 찬송합니다.

 

4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4)

 

시인이 대적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자신의 상황을 탄식합니다. 시인은 언제 달려들어 해칠지 모르는 사자들 가운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진 상황(단 6:16-24)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불을 뿜어내어 주위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사람들 중에 누워있다고 합니다. 시인은 적대감을 뿜어내며 모든 것을 파멸시켜버리는 사람들 속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는 적대감으로 가득 찬 대적들 속에서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상황에 있습니다. 더구나 대적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며,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다고 합니다. 창이나 화살, 날카로운 칼은 모두 사람을 해치는 전쟁 무기입니다. 대적들이 시인을 공격하되 전쟁의 무기로 공격하여 그의 생명을 해치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시인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렴(5, 11)

캄캄한 동굴에서 절박하게 부르짖던 모습은 사라지고 높고 넓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모습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이러한 반전을 가증케 하시는 지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5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 11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5,11)

 

5절과 11절에 나오는 후렴은 이 시를 크게 간구와 찬양,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5절은 첫 부분인 간구를 마치는 후렴구로 사용됩니다. 후렴구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절대주권을 가진 위대한 왕이심을 선언하며 그의 위엄과 영광이 온 땅 위에 널리 드러나기를 구합니다. 생명의 위협 속에 있는 시인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구하는 것은 우주를 통치하시는 왕이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대적들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승리로 구원해주실 것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전제로 합니다. 특히 대적들이 절대주권을 행사함으로 이를 탄식하는 4절과 6절 사이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언하는 5절은 이 시의 핵심 주제를 표현합니다.

 

대적의 멸망에 대한 확신(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함, 원통함을 다 헤아리십니다. 언젠가는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면 그때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절박하게 부르짖은 다윗은 이제 구원의 확신과 찬양으로 나아갑니다.

 

6○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6)

 

6절에서 다시 대적들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여기서 대적들은 몰래 그물을 치거나 구덩이를 파서 동물을 잡는 사냥꾼의 모습으로 비유됩니다. 대적들이 시인을 잡으려고 은밀하게 함정을 파놓고 노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내 영혼이 억울하다’는 것은 대적들의 공격에 시인의 기가 꺾이고 쓰러지는 경험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대적들의 공격에 쓰러지는 경험을 했지만, 대적들은 자신들이 파 놓은 함정에 자신들이 빠졌습니다. 여기서 “빠졌도다”는 완료형으로 나오지만 미래에 일어날 것에 대한 확신을 표현합니다. 대적들이 스스로 판 함정에 시인이 아니라 자신들이 빠지게 될 것을 시인이 확신하는 것입니다. ‘악의 부메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절대주권으로 대적들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는 신뢰의 고백입니다.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찬양(7-10)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듯한 기간을 보내다 보면 자존감이 떨어지고, 찬송이 사라지고, 이 터널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 가운데 그 영광을 드러내어 주실 것임을 기억한다면,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기쁨과 찬송을 깨워서,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새벽을 깨워서 내 영혼에 햇빛이 비치게 할 수 있습니다.

 

7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7-10)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으로 대적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좌신 가운데 시인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해집니다. 여기서도 두 번 반복하여 마음의 확고함을 강조합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 대한 신뢰가 견고하므로 노래하고 찬송하겠다고 말합니다(7). 8절의 “내 영광”은 결과 11절의 “주의 영광”과 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오히려 “내 영광”은 7절의 “내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7절의 ‘내 마음이 확정되었다’와 8절의 ‘내 영광이 깰지어다’가 서로 연관됩니다. 시인의 마음이 확정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찬양으로 자신을 깨우고 비파와 수금을 깨우고 새벽을 깨웁니다. 확신에 찬 시인은 새벽에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새벽’은 하루의 어떤 시간이기보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 시간에 대한 은유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즉, 새벽이라는 말은 새로운 것, 다른 것, 이전(어제)의 낮과 밤과는 대조되는 미래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구원은 새벽이나 아침에 기대되었습니다(시 46:5; 90:14; 143:8). 시인은 곧 있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대하며 새벽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시인의 찬양은 개인에서 만민과 뭇 나라로 확장됩니다. 7-9절은 시인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온 세상의 백성들과 나라들에게 찬양할 준비가 된 것을 보여줍니다. 히브리 원문에서는 10절 앞에 ‘왜냐하면’이 나와서 찬양의 이유를 말해줍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와 진리를 인해 찬양합니다. 시인이 찬양으로 깨우는 여호와의 구원하심의 근거는 여호와의 변하지 않는 신실한 언약적 사랑입니다. 11절은 찬양의 내용입니다. 하늘과 땅에서 절대주권을 가지신 우주의 왕의 위엄과 영광이 온 땅 위에 널리 드러나기를 구하며 찬양합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그 문제에 사로잡혀 주위 사람들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마음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써 자기 어려움을 극복하는 성숙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자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 고통을 토로하되 자기 문제에 골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할 때, 하나님께서 울의 관점을 바꿔 주시고 찬송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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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6-01)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

시편 56편 1-13절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겉은 부드러운데, 속은 강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양면성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의 모숩과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 원수들이 끊임없이 시인의 생명을 노리는 상황에서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면서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하겠는가?’하고 자신에게 되물으며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을 세우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악인의 심판을 구하고 자신의 편이요 자신의 고통과 눈물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며 감사제 드릴 것을 서원합니다.

 

간구와 원수의 괴롭힘(1-2)

누구나 살다보면 광야를 만납니다. 큭히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는 누구나 한 번쯤 광야를 통과하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 시기는 하나님의 ‘강한 팔’을 구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구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다 보면 어느새 그분이 원하는 성품이 형성되고 역경에 대한 인내력이 더 강해집니다.

 

1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1-2)

 

시인은 하나님께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짧게 간구한 후 곧바로 은혜를 구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원수가 시인을 종일 공격하고 괴롭히며 짓밟듯 해하고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인을 공격하고 해치는 자들은 그 수가 많으며 또한 교만한 자들입니다. 1절의 “사람”은 단수이나 2절의 “원수”는 복수입니다. 시인의 상황은 많은 원수들이 삼키고 종일 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1,2)에서 잘 나타납니다. 시인을 짓밟는 원수들의 괴롭힘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시인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시시때때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두려워합니다.

 

신뢰의 고백(3-4)

당신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수많은 질문을 하게 되고, 그분께 직접 나아가 애원하며 통사정하고 싶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메마른 심령은 오직 하나님만이 공급하실 수 있는 시원한 생수를 무첮 갈망하기 때문에, 이 시간 동 하나님의 조언과 인도하심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3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4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3-4)

 

생명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시인은 ‘두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합니다. 수 많은 원수들에 둘러싸여 반복되는 괴롭힘을 당하면서 두려움이 엄습해올 때마다 시인은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찬송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주님을 의지할 때 시인은 두려움을 극복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시인은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다시 확신 속에서 담대함을 갖습니다. ‘혈육을 가진 사람’은 썩을 육체를 가진 사람,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을 말합니다. 원수들이 아무리 강하고 시인을 종일 괴롭히고 죽이려 할지라도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이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자들입니다.

시인은 두려움이 몰려올 때마다 순간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찬송하고 ‘연약한 인간이 나를 어떻게 하라’하고 자신에게 말하며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수들이 시인을 괴롭게 하는 것도 반복해서 말하고, 시인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통해 괴롭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마음속에서 부단히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원수와 싸움을 하고 안으로는 자신과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안에서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밖에 있는 싸움의 리를 확신합니다. 이것은 이 시를 읽는 모든 자들이 두려울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그들의 마음이 올바른 반응을 하도록 돕습니다.

 

원수들의 악행에 대한 탄식(5-6)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시간에 잘못된 태도로 임하거나 어떻게든 ᄈᆞᆯ리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으면, 더 견디기 어려워지고 더 큰 좌절과 패배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 광야와 같은 과정을 지날 때에는 인생의 마른땅을 걷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5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6그들이 내 생명을 엿보았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발자취를 지켜보나이다(5-6)

 

이 단락에서는 원수들의 악한 계획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말합니다. 원수들은 종일 시인의 말을 일부러 오해하여 비방합니다. 그들이 시인에 대해 가진 모든 생각은 악한 것뿐입니다. 시인의 원수는 단순히 시인을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모든 좋은 것을 반대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악한 생각을 가지고 함께 모여 음모를 꾸밉니다. 그리고 숨어서 시인의 발자취를 지켜봅니다. 발자취는 발뒤꿈치를 뜻하며, 발뒤꿈치를 지켜봄은 뒤에서 은밀히 공격하려는 원수들의 비열하고 사악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시인이 어디로 가는지 미행하며 자신들이 모여 꾸민 음모를 실행할 적절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인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마치 야수가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시인의 생명을 취하려고 주시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판의 간구(7-8)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방법은 성장하고 배우려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광야 같은 삶의 여정에서 여러 가지 특징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로 더 깊이 나아갈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방해하는 어떤 장애물도 우리의 삶에 끼어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7그들이 악을 행하고야 안전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8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7-8)

 

7절 상반절은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안전하오리이까”의 동사를 명령형으로 보고 ‘악행으로 인해 그들을 쫓아내십시오’라고 번역한다면, 하반절 ‘하나님이여 분노로 인해 뭇 백성을 낮추십시오’와 평행을 이룹니다. 만일 부정사로 본다면 ‘악으로 인해 그들에게 안전함이 있겠습니까?’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동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질 수 있으나, 내용의 의미는 악행으로 인해 그들에게 구원이 없고 그들이 멸망 당할 것이라는 점을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악을 행하는 민족들에게 진노하심으로 이들을 낮추어주십시오’라고 간구합니다. “낮추소서”는 악인들이 교만하게 시인을 쳤던 것(2)과 대조됩니다. 수많은 교만한 악인들에 둘러싸여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시인이 악에 대해 분노하시고 공의롭게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악인을 심판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방랑을 주께서 주의 깊게 보시고 염두에 두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방랑 생활에서 그가 고통 가운데 흘린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주시기를 구합니다. “병”은 물, 우유, 술 등을 담아두는 가죽으로 만든 자루입니다.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의 모든 상세한 것을 다 보고 계시므로 그가 고통 속에서 흘린 눈물을 잊지 마시고 기억하셔서 그의 고통을 해결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들로 인해 시인이 유리방황하며 눈물 흘린 것이 주의 책에 다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잊지 않으시고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신뢰의 고백(9-11)

때로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경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게 되면 하나님께 주시는 힘과 기쁨으로 그 과정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확실히 함으로 믿음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감사의 예배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우리 편이 되어 주시기에 우리 삶에 감사와 예배가 충만해야 합니다.

 

9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10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11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9-11)

 

시인은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겠다고 하고(3), “내가 아뢰는 날”에는 내 원수들이 물러갈 것이라고 말합니다(9). 두려움 속에서 주를 의기하고 생명의 위협 속에서 주께 부르짖어 간구할 때 주께서 가신의 원수들을 물리쳐주실 것을 확신하며 선언합니다. 시인이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신뢰하는 자들의 편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의 사정을 다 헤아려 아시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시며 그들이 구하는 것을 들어주십니다.

10-11절에서는 3-4절에서 나왔던 신뢰의 고백을 반복합니다. 내용이 똑같지 않지만 많은 부분 비슷해서 마치 후렴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3절과 10절 상반절만 다를 뿐 4절과 10b-11절은 두 단어 외에는 동일합니다. 두 단락의 다른 점은 뒤에 나오는 신뢰 고백에 주의 말씀을 찬송한다는 것이 한 번 더 나와 구원에 대한 확신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시인이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사정을 알고 기억하시며 그의 편이 되셔서 그가 기도할 때 원수들을 물러가게 하실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약속하시는 말씀에 대한 찬송이 강조된 것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서원(12-13)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8-39). 어떤 난관에 처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라는 진실을 잊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나의 고통과 눈물을 하나님께 쏟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12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13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12-13)

 

‘주께 서원함이 있다’는 것은 과거에 서원을 드려 그 의무가 있다는 뜻으로, 또는 서원을 드리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때에 감사제를 드리0겠다는 서원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편이 되셔서 그의 생명을 죽음에서 구원하셨고 생명의 빛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않게 하셨음’을 수사의문문으로 물어 하나님의 구원을 강조합니다. 13절은 동사의 완료형을 사용함으로 이미 일어난 일처럼 보이지만, 시인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완료형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대표족인 것 두 가지는 탐욕과 공포입니다. 특히 공포야말로 수천 년에 걸쳐 구속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혀 온 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세상의 논리를 따르고, 세상의 요구에 응하려 노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다시금 기억하고, 당당하게 세상에 맞설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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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5-01)


하나님을 소개 받은 나아만

열왕기하 5장 1-14절


 

세상에서는 사람의 크기나 능력은 재산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으로 평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깊이로 평가해야 하고, 그분을 향한 믿음의 무게로 잴 수 있어야 합니다. 왕좌에 앉아있어도 초라한 신앙인이 있고, 걸레질하는 어린 여종이어도 거대한 신앙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 열왕기하 5장은 전체적으로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졌습니다. 본문은 나아만이 나병에서 치료된 이야기입니다. 그는 장관이지만 나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출신 하녀의 말을 따라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엘리사에게로 찾아갑니다.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에 순종하자 나병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서 이방인들까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소녀가 엘리사를 소개(1-3)

인간이라면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두 개쯤은 다 있습니다. 저마다 그 아픔을 감추느라고 애쓸 뿐입니다. 어떤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돈을 많이 벌기만 하면, 자식 잘 키우기만 하면, 그런 문제들이 감쪽같이 살라질 것이라고 최면을 거는 것뿐입니다. 장관 나아만도 그러한 아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1-3)

 

수넴 여인과 선지자 생도들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의 기적은 이제 다른 이방나라 사람에게까지도 일어납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Naaman)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아람에 이미 구원을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1).

 

나아만은 아람 왕의 군대 장관으로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함을 받는 이물인데, 그 이유는 아람을 구원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아람을 구원한 것은 여호와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열방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용사이고 왕에게 존귀함을 받는 강한 군대 사령관이었지만 그에겐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심각한 피부병 환자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나병’은 성경에서 나병으로 변역되었지만, 일반적으로 하얗게 각질이 일어나는 건선이나 습진 등 심각한 피부병이며, 한센병과는 다릅니다. 만약 피부가 괴사하고 손가락이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한센병을 앓고 있었다면, 군대 장관도 할 수 없고 왕의 제의에도 참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병의 고통은 나아만의 모든 권위와 명예를 하찮게 만들었습니다.

 

병들어 있는 나아만과는 다른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녀를 통해 나아만에게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3)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렇게 소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아내의 시중을 들던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소녀였습니다.

 

종종 아람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변경을 침략해 재산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끌어가 노예를 부리곤 했습니다. 나아만의 집에서 일하던 이스라엘 소녀도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곁으로 보면 나아만과 이 여종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소녀는 이방 신을 숭배하는 아람에 비천한 노예에 불과하지만, 선지자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지금 지위가 높으며 남성이고 군인 장관인 나아만과 비교할 수 없지만, 그녀는 종이며 이름도 없는 이방인인 이스라엘 소녀가 대조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해 평생 문둥병으로 고생하는 주인을 보며 안타까워했고, 나아만의 아내에게 엘리사 선지자라면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고 소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이방인을 향한 안타까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종은 알고 있는데, 나아만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누리고 있는데, 나아만은 못 누리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이스라엘 소녀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나아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여종인 소녀가 더 가치 있는 것을 알고 있고 나아만보다 더 복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엘리사를 찾아 이스라엘로 간 나아만(4-7)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곧 위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잘것없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도 그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들어내 오셨고, 주의 나라 사역을 감당해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거란 사역을 통해 군대장관 나아만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4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4-7)

 

아람의 군대 장군 나아만은 여호와께서 크게 승리하게 하신 까닭에 아람 왕에세 존귀한 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는 나병환입니다. 노예로 붙잡혀 온 이스라엘 소녀는 자신의 주인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개합니다.

 

⑴ 이스라엘로 가기로 결심함(4-5)

 

이 소식을 들은 나아만은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람 나라가 주는 특권으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주인인 아람 왕을 찾아갑니다. 왕에게 여종의 말을 전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의 엘리사를 만나겠다고 요청합니다(4).

 

아람 왕은 자신의 사랑하는 부하를 고치기 위해 엘리사를 만날 수 있도록 공식적인 추천서를 써주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아람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왕은 추천서와 엄청난 선물인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선물로 줍니다. 선지자가 고쳐 주면 그것을 담례로 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간 예물의 양은 현제의 단위로 볼 때 은은 340kg이고, 금은 90kg 정도가 됩니다. 이렇게 많은 양의 예물을 준비하여 나아간 것인데, 이는 나아만이 얼마나 간절하게 질병에서 낫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⑵ 추천서를 받은 이스라엘 왕(6-7)

 

군대장관 나아만은 먼저 아람 왕의 추천서를 이스라엘 왕에게 보냅니다. 먼저 보내어 일을 준비하도록 할 의도였습니다. 그 추천서의 내용은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아만이 들고 온 추천서를 읽고 이스라엘 왕은 매우 당황합니다. 받고 낙담하여 자기 옷을 찢으며 말합니다. 마치 큰 재앙이 닥친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이 자신에게 직접 나아만의 병을 고쳐주라고 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도 아닌데 어떻게 나병을 고치냐며 한탄하고 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람 왕이 전쟁할 빌미를 찾기 위해 이런 터무니없는 서신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이미 여종과 나아만과 아람 왕의 대화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왕의 오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를 모르는 이스라엘 왕에게는 느닷없이 닥친 재앙이자 아람 왕의 선전포고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나아만이 가지고 온 아람 왕의 추천서를 읽고 큰 고민에 빠집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이방인 아람 왕과 나아만을 보면서 오해합니다. 아람 왕이 불가능한 일을 핑계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가 그의 왕도에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상황만 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의 생각은 아람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한 소녀와 대조를 이룹니다.

 

엘리사를 만난 나아만(8-12)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 안에 한정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을 다스리시며,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8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8-12)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엘리사는 이방인인 나아만의 치료 과정에서 모든 인위적 방법이 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마술적인 영력, 주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는 왕에게 심부름꾼을 보냅니다. 그리고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나아만을 엘리사는 직접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환을 보내어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의 말을 듣고 화가 난 나아만이 그냥 돌아갑니다. 나아만은 강대국 아람의 모든 군사력을 가졌고, 많은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더욱 아람 왕의 추천서까지 가지 왔는데 이런 푸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기대했던 나아만은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식 필요했습니다. 나아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잃을 뻔했던 이유는 헛된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이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분노합니다. 대부분 분노는 자신들의 익숙한 삶을 거슬리는 것들에 대해 분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조금만 다르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분노합니다. 원인은 순종하는 훈련보단 대접을 받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을 통해 문둥병을 고침(13-14)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축복을 누릴 수 없도록 하십니다. 만약 나아만 장군이 화가 나서 엘리사의 말대로 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았다면 문둥병이 낫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과 말씀이 다를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당신의 편견은 무엇입니까?

 

13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13-14)

 

처음에는 나아만은 분노하면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지혜로운 종들이 나아만을 만류하였습니다. 종들은 선지자 엘리사 어려운 일을 하라고 보냈으면 하지 않았겠냐며, 어려운 일도 아니고 씻으면 깨끗하게 된다고 하니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하여 주인을 설득합니다.

나아만은 이 종들의 말을 듣고 물로 내려가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일곱 번 물에 몸을 담갔고, 정말 엘리사의 말대로 피부가 회복되었습니다. 어른의 피부도 아닌 어린아이처럼 기대 이상으로 완벅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순종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 이스라엘에 온 것도 여종의 말 때문이었고, 나아만의 병이 나은 것도 종들의 설득 덕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왕이나 나아만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사항만 보고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과장되게 행동하는 반면에, 포로로 잡혀온 여종이나 나아만의 종들 같이 가장 낮은 자들이 오히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더 잘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이야기는 이 세상의 다수를 이루는 작은 자들의 믿음이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고, 하나님의 기적이 이 땅에 일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을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 나아만은 군대 사령관이라는 높은 위치에 있었음에도 포로로 끄려온 이스라엘 어린 소녀의 말과 동들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종들의 조언으로 요단강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주변 사람의 말을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혹시 당신보다 어리거나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말을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을 주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사람의 조언에 귀 기울이고 따름으로써 말씀의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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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4-03)


선지자로 인정받은 엘리사⑶

열왕기하 4장 38-44절


하나님께서는 예배당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과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창조하신 전 우주에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입니다. 더욱 자신이 창조한 만물에 생명을 공급해 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곳에 계시며,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 엘리사가 선지자로 인증된 사건들을 계속 소개합니다. 그가 길갈에서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 전역은 흉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엘리사 앞에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죽을 끌렸는데, 독 있는 식물이 들어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들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리떡 스무 개와 약간의 채소로 기근 중에 백 명의 제자들이 먹고도 만을 만큼 넉넉하게 해줍니다.

 

독을 없애는 엘리사(38-41)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신 분이십니다. 주관하셨던 내용을 기록한 것들 중에 하나가 열왕기입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사에 대한 내용을 길게 하례합니다. 이것은 엘리사가 엘리야 다음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내용입니다.

 

38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39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그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40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그들이 외쳐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41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독이 없어지니라(38-41)

 

본문에는 엘리사와 관련된 에 가지 사건 중에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예수님을 닮은 엘리사의 따뜻한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죽음의 시대에서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생명의 역사를 진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는 바알 신이 살고 죽는 것을 결정하고 번영과 자산을 보장해준다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지 못한 수넴 여인에게 잉태하게 하신 것도, 죽은 그 아들을 살리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엘리야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 자신을 살아계심을 엘리야를 통해 증명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엘리사를 통해 그 역사를 이어감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일을 계속하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선지자로서 인정받는 세 번째 사건으로 그 배경적 장소는 가나안 땅에 있는 길갈이었습니다. 이곳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흉년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축복하실 때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통해 풍년을 주십니다. 당시는 바알이 풍년을 주는 신이라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믿음인지를 알려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흉년을 주신 것입니다. 흉년은 바알의 무능을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방법이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매우 힘든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길갈에 있는 생도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에 관한 네 가지 사건 중에 첫 번째 사건에서는 선지자의 제자와 그 가정은 빚 때문에 시달렸습니다. 또한 선지자는 누군가의 부양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선지자와 그 공동체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은 언약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일 것입니다.

 

엘리사는 북이스라엘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역하고 있었고, 돌아다니다가 길갈에 종종 들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사가 다시 길갈로 도착한 것은 길갈도 그의 순회 도시 중 하나였음을 의미합니다. 길갈은 2:1에서 언급한 것처럼 벧엘 북쪽 중앙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야와 엘리사가 같이 출발한 지역입니다. 엘리사가 이 지역에 다시 방문했을 때 이 땅엔 심각한 기근이 들어 있었습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 앞에 앉았습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제자들이 같이 모여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선생님 앞에 제자들이 앉아 있다는 것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선지자의 제자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극심한 기근 때문에 그들에게는 당연히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제자들의 몰골을 보니 말이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한 선지자의 제자들을 본 엘리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것보다 먼저 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굶주린 제자들에 대한 연민을 느꼈습니다.

 

엘리사는 사환에게 국을 끓일 큰 솥을 걸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런 명령에 따라서 먹을 만한 야채를 채집하기 위해서 들로 나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기근이 심해 밭에서 나는 채소나 곡식이 없고, 들이나 산에서 식물과 열매를 채집하여 연명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황이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해서 굶어 죽을 수도 있는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들로 나간 한 선지자는 야생 포도나무를 찾아내었고,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 왔습니다. 우리말에서 들호박으로 번역된 것은 노란 조롱박으로 독성이 강해 위험한 식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자신의 옷에 가득 따 와서 그것을 썰어 국솥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국 속에 노란 조롱박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국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 국을 받아 먹던 사람들이 갑자기 국 안에 죽음이 있다고 소리칩니다. 이것은 국 안에 죽음에 이를 만한 치명적인 독이 있다는 뜻입니다. 배고픈 제자들에게 변변치 않지만 따뜻한 죽 한 그릇이라도 먹이려고 준비한 음식 때문에 제자들이 죽음의 위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엘리사는 호의를 베풀려고 하다가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은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었다가 아이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곤란하게 된 것과 유사한 상황입니다. 엘리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급히 제자들에게 밀가루를 가져오라고 명령하고, 그것을 바로 솥에 넣은 후 국을 퍼서 먹으라고 합니다. 밀가루를 넣음으로 국의 독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나쁜 물에 소금을 넣은 것(열왕기하 2:21)과 유사한 사건으로, 죽음의 국이었던 것을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생명의 국으로 변했습니다. 다시 엘리사가 원했던 선한 일로 마무리된 것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 사건과 이 사건은 호의를 베풀었지만 뜻하지 않게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거나 위험에 빠지게 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역경이나 실패가 없이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삐걱거리는 과정을 보면서 의심도 하고 주저도 하는 과정이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기대와 스케줄에 따라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 없을 만큼 안전한 삶은 신앙의 공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항상 예측과 기대를 뛰어 넘어서 역사합니다.

 

결국 엘리사는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처음에 가졌던 선한 목표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엘리사의 모습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정학하게 행하던 다른 선지자들과는 다릅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는 엘리사 선지자의 연민, 좌절, 극복 등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관심 갖고 돌보십니다.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은 국을 끓이고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상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주일 교회에서뿐 아니라 평일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십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백 명이 먹고도 남은 보리빵(42-44)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극한 상황에서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심으로써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자기 백성들이 궁핍했을 때 일용한 양식으로 채워주십니다.

 

42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42-44)

 

이 이야기는 바알 살리사에서 온 한 사람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엘리사에게 헌물로 가져 왔습니다. 그는 이제 막 보리 추수를 끝내고 첫 열매로 보리 떡 20개를 만들고, 밭에서 재배한 채소를 자루에 담아 엘리사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흉년이 상황에서 그 정도의 헌물은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믿음으로 드린 것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여기서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이 사람이 엘리사가 선지자라는 것을 알고는 첫 열매를 여호와께 바친다는 의미로 이것을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엘리사라는 개인에게 준 것이라기보다는 여호와께 바친 제물의 일종인 것입니다. 보리는 밀 추수보다 빠른 4월에 추수가 시작되며, 보리 추수 직전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배가 고픈 시기입니다. 이 사람이 가져온 양을 보면 이 사람도 경제적으로 그다지 넉넉한 처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저 적은 양이라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서 추수한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시 엘리사 주위에는 100여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여기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특정되진 않지만, 바로 앞에 나온 사건과 연결해 볼 때 엘리사와 함께 생활하며 말씀을 배우고 전파하던 선지자 무리일 것입니다. 4장의 이야기를 보면, 엘리사 당시 선지자의 제자들이나 선지자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선지자의 자녀들과 과부는 빚 때문에 고생하고, 선지자는 누군가의 부양을 받아야 하며, 선지자 무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산이나 들에서 먹을 것을 채집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사환에게 그 사람이 드린 헌물을 사람들에게 먹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밖에 안 되는 것을 엘리사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먹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환은 어떻게 이것으로 100명을 먹이겠느냐고 하면서 난색을 표합니다. 사환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자신들도 먹기 힘든데 얼마 되지 않는 양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느냐고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대접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엘리사는 길갈에 가서도 배고픈 제자들을 먹이는 일을 제일 먼저 했고, 여기서도 제자들을 위해 자신에게 들어온 적은 양의 양식을 나누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환의 말처럼 보리 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는 1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사환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고 다시 말하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먹고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이 말을 듣고 사환이 그들에게 떡과 채소를 나누어 주었는데, 정말 여호와의 말씀대로 먹고 음식이 남았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처럼 여호와는 자신의 백성을 먹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준 기적의 사건입니다.

엘리사는 제자들이 실제적인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도해 주겠다, 가서 배부르라, 평안히 가라, 하며 말로만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적으로 먹을 것을 제공하여 제자들의 배를 채워주었고, 돈이 될 만한 것을 제공해 빚을 탕감하게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어려운 제자들의 형편을 살피고, 이들을 실제적으로 돕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먼저 솥단지를 걸고 들에서 식물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얼마 안 되는 식량을 제자들을 위해 먼저 내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엘리사가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로 100명을 먹인 사건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을 기억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배고픈 백성들을 위해 넘치도록 풍성한 식탁을 차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엘리사의 능력보다 몇 백 배 크지만,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싶은 마음은 엘리사와 예수님이 동일합니다.

 

이 기적은 벳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도 오병이어로 오천 병을 먹이고도 남은 사건과 비슷합니다(요한복음 16장). 이 일들을 통하여 깨달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중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태복음 6:25-26,31)

 

세상의 것들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며 모든 권능을 소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돌보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두 번째 깨달은 사실은 하나님이 남을 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사용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해 주어야 합니다. 도울 때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베풀 수 있도록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는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베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수효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얼마나 헌신적이고 자신을 희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일을 이루십니다. 믿음은 문제를 통해 발휘되고 단련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이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갔습니다. 문제를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인간적인 생각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경건한 사람에게도 시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삶의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작지만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큰 사역을 이루어가십니다. 당신이 필요할 때 일용할 양식으로 이루어갑니다.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삶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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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4-02)


선지자로 인정받은 엘리사⑵

열왕기하 4장 18-37절


절망적인 순간을 만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담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렇기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포기하면 상황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이란 절망적인 순간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의 결과를 축복으로 되어 갈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끝까지 소망을 놓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이 희망으로 바뀔 것입니다.

 

  • 스승 엘리야에게 두 배나 영적인 능력을 요구했던 엘리사는 네 가지 기적을 모아서 소개합니다. 이 이적들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말이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엘리사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을 행하는 참 선지자라는 사실입니다. 이 단락에서는 수넴 여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아들을 얻었지만, 수넴 여인에게 아들의 죽음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수넴 여인의 아이 죽음(18-20)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는 중에도, 때로는 뜻하지 않는 어려움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믿음의 진가는 평온할 때보다 고난을 당할 때 더 빛이 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18그 아이가 자라매 하루는 추수꾼들에게 나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렀더니 19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사환에게 말하여 그의 어머니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20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18-20)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수넴 여인에게 기적적으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대에 이 수넵 여인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대접함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우상인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 신이라고 믿었던 의미입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마저도 가망 없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실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아이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때, 처음에는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 시대가 어둡고 불신이 가득하면 아무리 개인이 노력해도 신앙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회와 상관없이 혼자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수넴 여인에게 아이는 하나님의 선물로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또 데려가십니다. 기적처럼 생긴 아들이 자라던 어느 날 갑자기 죽었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추수하려 나간 사이,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비명을 지릅니다. 아버지는 일꾼들을 시켜 그의 어머니에게로 보냅니다. 아이에게 손도 써보지 못하고 정오쯤에 어머니의 무릎에서 아이는 죽고 맙니다.

 

‘정오’란 시간 표현은 아이가 발병한 지 한나절도 못되어서 급작스럽게 죽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침 잘 먹고 아버지와 추수하러 갔던 아이가 갑자기 업혀 오더니 손써 볼 틈도 없이 정오 무렵에 품에서 죽은 것입니다.

수넵 여인은 두 가지의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아직 어린 아들의 죽음 자체에 대한 고통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왜 아들을 얻는 기쁨을 주시고는 이렇게 무참하게 빼앗아 가시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겪는 고통입니다. 수넵 여인은 아들의 죽음을 순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엘리사을 찾아가는 수넴 여인(21-28)

문제가 발생하면 지체 없이 하나님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희망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 희망을 멈추지 않고 나가면 어려운 현실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또한 그 어려운 과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21그의 어머니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22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사환 한 명과 나귀 한 마리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하니 23그 남편이 이르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오늘 어찌하여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 하는지라 여인이 이르되 평안을 비나이다 하니라 24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고 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 하고 25드디어 갈멜 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그를 보고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26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27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28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니(21-28)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들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가져가시는 것이 당연한데도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 행복도 절대 불행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방인인 수넴 여인의 태도를 보면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⑴ 엘리사를 찾는 수넴 여인(21-24)

 

수넴 여인은 죽은 아들을 엘리사의 방으로 데리고 올라가 엘리사의 침상에 눕히고 문을 닫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아이에게 접근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고는 남편을 불러 자신에게 종 한 사람과 나귀 한 마리를 주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 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갈멜산에 머물고 있는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 다녀오겠다고 말합니다. 남편은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에 대해 걱정합니다.

이런 아내의 요구에 남편은 초하루나 안식일처럼 특별히 선지자를 찾아가 신탁을 받는 날도 아닌데, 왜 엘리사에게 가려느냐고 반문하며 만류합니다. 원래는 예배와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선지자의 집에 나아가는 날은 정해져 있었습니다(참고, 아모스 8:5; 민수기 28:9-15). 하지만 그 여인은 남편의 염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형식적인 종교 규례에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나귀를 타고 갈멜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에게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수넴 여인과 남편의 관계를 보면, 남편에게 말하는 22절은 전체적으로 청유형(請誘形)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수넴 여인이 엘리사에게 다녀올 수 있도록 매우 공손하게 남편에게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남편에게 예의 바른 아내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23절을 보면 이 수넴 여인은 남편이 가지 말라고 말리는 말을 듣고는 아무 설명 없이 다녀오겠다는 인사만 하고 바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수넴 여인은 예의 바른 아내인 동시에 매우 독립적이고 의지가 강한 인물로 보입니다.

여기서 수넴 여인은 ‘달려가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급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집을 출발하면서 그녀는 사환에게 자신을 배려해서 나귀 모는 속도를 늦추지 말라고 합니다. 도리어 최대한 빨리 가자고 재촉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갈멜산으로 재촉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볼 수 없었던 믿음입니다. 이방여인이었던 수넴 여인에게서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⑵ 수넴 여인의 원망(25-28)

 

수넴 여인이 갈멜 산에 도착했을 때, 엘리사가 먼저 알아봅니다. 선지자는 게하시를 보내 수넴 여인에게 남편과 아이의 안부를 물어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평안하냐?’는 안부를 묻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게하시의 안부 인사를 들은 여인은 그냥 간단한 인사만 하고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지나칩니다.

수넴 여인의 목적은 엘리사를 만나는 것이 기에 곧장 산으로 달려가 엘리사를 만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만나자마자 그의 발을 끌어안습니다. 여기서 발을 안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애원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행동은 구약에서는 여기에만 나오지만, 아카드 문헌에는 온갖 도망자나 간구자들이 복종이나 굴복을 나타내고 탄원하기 위해 왕의 발을 안는 예들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이런 갑작스런 행동을 본 게하시는 수넴 여인을 제지하려고 하였지만, 엘리사는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그녀가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무슨 내용인지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아 자신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사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수넴 여인의 행동을 보며 매우 큰 비극이 닥쳤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매우 날카로운 어조로 자신이 아들을 구한 적이 있느냐, 나를 속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며 원망의 말을 쏟아냅니다. 이 말은 자신이 구하지도 않은 아들을 주어서 삶에 희망과 기쁨을 품게 하고는, 이제 이처럼 무책임하게 아들을 죽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아들 잃은 비통함과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에서 오는 아픔을 토로한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엘리사가 아들을 얻게 했으니 아들의 죽음도 책임지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엘리사라면 다시 이 아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들어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녀는 아픔을 쏟아놓기 위해 엘리사를 찾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살릴 희망이 있기 때문에 먼 길을 급하게 달려온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수넴 여인은 아이가 죽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라면 그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믿음은 희망을 갖게 하고 그 믿음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문제만 커질 뿐입니다. 무릎 꿇고 하나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엘리사의 동행을 요청하는 수넴 여인(29-31)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을 찾습니다. 때로는 일시방책적인 해결책으로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이방인 수넴 여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기도한 야곱처럼 정말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29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하는지라 30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 31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29-31)

 

수넴 여인의 말을 듣고 아이의 죽음을 알게 된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급히 아이에게 가서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허리를 묶는다’는 것은 달려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으로 급하게 뛰어가라는 뜻입니다.

아무에게 인사하지도 받지도 말라는 것 역시 위급한 상황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최대한 빨리 가서 아이 얼굴에 자신의 지팡이를 놓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선지자의 지팡이는 선지자의 능력의 상징이며 지팡이를 통해 엘리사의 능력이 아이에게 임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수넴 여인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엘리사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엘리사가 가야만 아이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가 반드시 가야 한다고 매달린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수넴 여인은 자기주장과 의지가 매우 확고한 여성입니다. 이렇듯 단호하게 매달리는 수넴 여인의 모습을 보고 엘리사도 결국 그 여인을 따라 나섭니다. 여기서 본문은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뒤를 따라갔다고 표현함으로써 이 일에서 수넴 여인이 주도권을 갖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리사보다 먼저 도착한 게하시는 시킨 대로 주인의 지팡이를 아이 얼굴 위에 놓았지만, 아이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숨소리도 없고 생명의 징후를 나타내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엘리사에게 돌아와 아이가 깨어나지 않는다고 보고합니다. 엘리사의 지팡이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팡이는 단지 지팡이를 쓰는 사람의 신앙을 표시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게하시가 하나님께서 아이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그 지팡이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팡이가 아무런 효과도 없었던 것은 게하시의 믿음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수넴 여인은 문제 해결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수단이나 사람을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형식적인 믿음은 있지만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비아냥거립니다. 그것은 세상은 썩을지라도 성도들만이라도 썩지 않길 원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종교는 결코 거룩함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향해 어두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입니다.

 

죽은 아이를 살린 엘리사(32-37)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다가 힘든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낙심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만 진정한 위로와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능히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어려운 사정을 아뢰고 해결 받아야 합니다.

 

32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36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37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32-37)

 

엘리사는 자신의 침상에 누워 있는 아이를 보고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몸에 자신의 몸을 올려놓는데, 입과 입, 눈과 눈, 손과 손을 대고 아이 위에 누웠습니다. 엘리사는 지팡이 대신 자신을 아이에게 올려놓은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열왕기상 17:21에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이를 살리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엘리야는 아이의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기도했고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엘리사가 이렇게 하자 아이의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잠시 내려와 집 안을 돌아다닌 뒤 다시 올라가 아이 위에 엎드리니 아이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여기서 재채기를 한 것이나 눈을 뜬 것은 게하시가 지팡이를 올려놓았을 때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과 대조됩니다. 이렇게 살아난 아이는 다시 엄마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수넴 여인은 죽은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엘리사도 엘리야처럼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권능을 행함으로 엘리야의 확실한 후계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려 준 사건(열왕기상 17:17-24),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신 사건(마가복음 5:35-43) 그리고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려 주신 사건(요한복음 11장) 등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임을 다시 깨닫게 해줍니다. 이미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능력은 우리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엘리사의 기도는 들으시고 수넴 여인의 죽은 아이를 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더라도 회복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당신을 하나님께서 치료와 회복이 필요한 부분이 어디입니까?


엘리사는 이 일로 확실한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시대적인으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이방인 출신인 수넴 여인은 믿음을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믿음은 미지근한 믿음이 아니라 이 여인처럼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상황을 볼 때, 해결자이신 하나님께서 항상 가까이 계십니다. 수넴 여인처럼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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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4-01)


선지자로 인정받은 엘리사⑴

열왕기하 4장 1-17절


사람들이 누리는 모든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복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길 원하시지만, 더욱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와도 그릇이 엎어 놓으면 빗물을 한 방울도 담을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아무리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실지라도 마음 문을 열지 않으면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 엘리야가 떠난 자리에 엘리사가 남았습니다. 4장부터는 엘리야의 제자란 말은 나오지 않고 엘리사라고만 나옵니다. 스승 엘리야에게 두 배나 다 많은 영적인 능력을 요구했던 엘리사는 네 가지 기적을 행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엘리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실현하는 종임을 입증합니다. 그 첫 번째 기적이 죽은 제자의 아내를 돕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제자의 가정을 돌봄(1-7)

오늘날 부정적 관행의 온상임을 모르는 이는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하고 이해하시 어려운 처지에서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대한 마땅한 반응은 세상을 향한 간절한 기도요 강청입니다. 엘리사는 한 제자의 부인의 강청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적 위치를 증명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2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3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4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5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6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7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1-7)

 

엘리사는 북이스라엘과 두 나라가 모압과의 전쟁을 통해서 선지자로서의 권위를 확고하게 확보하였습니다. 이곳에서부터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제자’란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4장에 있는 네 가지 기적인 ‘가난한 제자의 고부의 궁핍한 문제’(1-7),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림’(8-37), ‘독이 든 음식을 고치는 일’(38-41), ‘한 솥을 끓여 200명을 먹이는 일’(42-44) 등이 등장합니다. 엘리사가 사역한 네 가지 일들은 생명을 살리고 궁핍을 벗어나게 하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모음집이기 때문에 화자는 시간적 배경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첫 이야기는 선지자 중에 엘리사의 한 제자의 아내가 엘리사를 찾아와 부르짖으면서 시작됩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의 제자의 아내였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부르짖다’는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이 간저하게 도움을 청할 때 사용하는 말로서, 제자의 아내는 매우 다급하게 엘리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 엘리사의 제자의 아내는 남편이 죽고 그의 아내는 두 아들과 살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습니다. 먹고살 것도 난감한데 빚까지 있어 경제적인 생활고를 호소했습니다. 제자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죽은 사실과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 선지자로 엘리사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것은 남편의 죽음이 죄로 인한 것이 아니며,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남편이 병들어 죽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간호비와 생활비가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빚을 졌는데, 갚지 못했던 것입니다. 빚을 준 사람이 종으로 삼기 위해 두 아이를 데려가려 상황이 벌려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모른 척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선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될 수 있었기에 율법에도 히브리 노예에 대한 규례가 언급 됩니다(출애굽기 21장).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지만, 그 가족에게 만은 것은 비극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서 권력자들의 비위나 맞추고 호의호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집에 무엇이 있냐고 묻습니다. 엘리사는 그것을 기반으로 도움을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자신의 집에는 기름 한 그릇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제자의 아내의 궁핍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이웃에게서 그릇을 빌리되 될 수만 있으면 많이 빌려오라고 권고합니다. 혹시라도 적게 빌려와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여인에게 문을 닫고 빌려온 그릇들에 기름을 부어 채우라고 지시하였고, 여인은 지시대로 기름을 부어 그릇을 채우기 시작하는데, 빌려온 그릇을 다 채울 동안 기름이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손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면서, 또 아이들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자비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릇이 다 차자 기름은 멈추었고, 엘리사는 이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두 아이와 함께 살 생활비로 쓰라고 합니다.

여기서 엘리사가 직접 행하지 않고도 놀라운 이적이 일어나는 것을 통해 엘리사의 능력과 하나님의 권능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사역자의 가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예수님의 기적처럼, 하나님께서는 한 그릿 기름으로 여인의 모든 빚을 탕감하고 두 아들과 생활할 수 있을 만큼 넘치게 해주셨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자졌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얼마나 곧이곧대로 순종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도움(8-10)

하나님께서 먹여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더 이상 사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역자가 돈에 밝은 사람이 되면, 돈을 버는 것이 사역에 목적이 되면 더 이상 마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사명에 집중하고 따라 살아가는 삶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8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한 귀한 여인이 그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으므로 엘리사가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9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10청하건대 우리가 그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사이다 그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에 머물리이다 하였더라(8-10)

 

선지자의 제자 아내 이야기 다음으로 수넴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수넴 지역은 이스르엘 마을 북쪽에 위치하며, 모레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 잇사갈 지파 땅입니다.

 

엘리사가 갈릴리 남쪽 지역을 여행할 때 수넴 지역을 지나는데, 어느 날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 그곳에서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한 여성이 엘리사에게 자신의 집에서 식사하라고 강하게 권유하였습니다. 덕분에 엘리사는 수넴을 지날 때마다 이 여성의 집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에게 음식을 제공한 이유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9)라고 설명합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 즉 참 선지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란 말에는 엘리사를 하나님의 참 선지자로 생각한다는 것과 이런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녀는 음식 대접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남편에게 엘리사를 위한 방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합니다.

 

본문에서 방에 침상, 책상, 의자, 촛대를 둔다는 것은 언제든지 와서 불편하지 않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배려가 넘치는 행동입니다. 이 집은 가끔 오는 손님을 위해 방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가진 부유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 나온 선지자의 아내와 대조적입니다.

 

여기서 남편의 대답이 나오지 않고 바로 방에 누운 엘리사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이야기의 중심은 수넴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로도 남편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수넴 여인에게 원하는 것을 묻는 엘리사(11-13)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면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지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은 타인을 위한 배례와 중보기도가 끊기지 않습니다. 두 번째 나온 수넴 여인은 영적인 안목과 자신의 넉넉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섬길 만큼 열정적인 헌신이 있었습니다.

 

11하루는 엘리사가 거기에 이르러 그 방에 들어가 누웠더니 12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이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여인을 부르매 여인이 그 앞에 선지라 13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그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는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하니 여인이 이르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 하니라(11-13)

 

수넴 여인의 넘치는 호의로 수넴에 올 때마다 편한 생활을 하던 엘리사는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사환 게하시에게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과 엘리사가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게하시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신분이 높은 여성의 경우 남편이 아닌 남성을 대면하여 말하는 것이 당시 예절에 어긋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자신을 위해 매우 신경 써서 세심하게 준비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한 후 자신이 이에 대해 어떤 보답을 해주면 좋을지를 묻습니다.

 

그러면서 엘리사는 혹시 왕에게 넣을 청이 있다거나 그 지역의 군사령관에게 넣을 청이 있는지 묻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아무리 어려운 요청이라도 들어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당시 엘리사가 왕이나 군대 장관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수넴 여인은 자신이 자신의 백성 중에 거한다고 말하면서 엘리사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라는 것은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면 가까이에 사는 친척들에게서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왕이나 군사령관처럼 권력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 여성은 자신의 삶에 자신감이 있으며 만족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여성의 삶에 결핍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없는 심각한 결핍이 있었고 그것은 당시 여성에겐 수치스런 일이었음에도 그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현재의 삶에 감사하고 욕심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걸 보면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덕을 보기 위해서 도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순수하게 도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수넴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을 알려줌(14-17)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돈으로 자신의 만족을 채우지는 못합니다. 만족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행복감을 느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물질 자체에 있거나 물질을 모으는 행위에 있지 않음을 기억합시다. 진정으로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14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까 하니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하니 15이르되 다시 부르라 하여 부르매 여인이 문에 서니라 16엘리사가 이르되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하니 여인이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14-17)

 

이런 수넴 여인의 마음을 알게 된 엘리사는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하지 알고 꼭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어떻게 해주면 좋을지 자신의 시종인 게하시에게 묻습니다.

 

게하시는 그녀에게 아들이 없고 남편은 늙어서 아들을 가질 수 없는 상태임을 알려줍니다. 고대 가부장 사회에서 아들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이름을 이어갈 상속자가 없는 매우 불행한 상황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수넴 여인을 다시 불러 내년 이맘때 품에 아들을 안을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여기서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17절에서 실제로 아들을 낳은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장에서의 엘리사의 이적 사역에는 여호와가 직접 말씀하시거나 행하신다는 언급 없이 오직 엘리사가 행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 것은 엘리사가 큰 권능을 행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 여호와의 도움 없이 엘리사가 자신의 권능만으로 행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엘리사의 예언을 수넴 여인은 믿지 않았고 속이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도 수넴 여인은 자신이 먼저 엘리사에게 아들을 요청했을지도 모릅니다. 수넴 여인은 하나님을 경외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은 잘 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의 말처럼 이 여인은 1년 뒤 아들을 품에 안음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대로 주신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이상으로 주심으로서 그 은혜에 어울리는 믿음으로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믿음에 어울릴 믿음으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어디에 있든지, 누구와 함께 하든지, 무슨 하든지 엘리사의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하나님께서 예비한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주의 일에 충성합니다. 마땅한 충성이고 섬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가 당신에게 행한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이 넉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결코 거래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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