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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2-01)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간증

사도행전 22장 1-11절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일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귀한 일을 계획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끈기가 없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다가 중단합니다. 그리고 변명을 늘어놓거나 주변 탓할 때가 많습니다. 귀한 일을 계획하는 자는 그 계획에 따른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눅 14:28). 바울은 희생을 각오하고 복음 전파를 포기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전력투구했습니다.

 

  • 바울이 무리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누가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이야기까지 다룹니다. 박해자로 지냈던 시절과 회심한 사건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신실한 유대인이며, 자신을 이끄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유대교 시절(1-5)

성도들에게는 열정도 필요하지만 그 방향이 예수의 뜻에 맞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열정이 다른 사람들을 해치게 되고 결국 자신도 망가뜨립니다. 예수를 향한, 성령이 주시는 열정은 사람을 회복하고 살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열정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열정이 공동체와 이웃을 살리는 쪽으로 향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1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2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4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1-5)

 

유대인들에게 심하게 폭행을 받던 바울은 로마 군대들에 의해서 로마 군인들이 주둔한 영내로 들어갑니다. 끌려가고 있던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얻어 성벽 위에서 자신을 폭행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향해 아람어로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아람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들은 유대인들은 조용해지고 바울의 말을 청종합니다.

 

(1) 바울의 말을 청종한 유대인들(1-2)

 

바울은 동족을 향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겠다고 말합니다(1). 바울은 허락을 받아 ‘부형들아!’라고 부르며 변호를 시작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아버지와 형제로 부름으로써 자신을 핍박했던 유대인들을 향하여 여전히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유창한 아람어를 말하자 귀 기울려고 더욱 조용히 듣습니다. 그들은 이미 바울이 손짓할 때 크게 조용해진 상태였지만(행 21:40) 그가 자기들의 언어인 아람어로 말하자 더욱 조용해졌습니다.

 

(2) 과거 자신의 모습을 설명한 바울(3-5)

 

바울은 동족을 향해 과거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명학하게 밝힙니다(3-5). 자신의 출신, 교육, 신앙에 대해 변증합니다. 바울이 제시한 증거들은 그가 얼마나 정통적인 유대인인지를 입증해 주었습니다.

 

① 태생적인 유대인으로 성장한 바울(3)

 

첫째,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입니다(행 9:11; 21:39). 둘째, 바울은 유대인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아마 유대인으로 정통 교육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자랐습니다. 3절의 ‘이 성’은 다소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셋째,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에게서 조상들의 율법을 철저하게 배웠습니다(행 5:34). 바울은 자신의 유대교 신앙이 디아스포라 유대교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립니다. 곧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청중에게 자신의 신앙이 정통적인 유대교에 입각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특히 가말리엘은 바리새파의 율법 교사였고 산헤드린 공회에 속했으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습니다(행 5:34). 또한 바울은 자신을 공격한 유대인들처럼, 율법에 열성을 보인 유대인들처럼, 자신도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보였다고 증언합니다(참조. 롬 10:2; 갈 1:14; 빌 3:4-7).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자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밝힙니다(빌 3:5). 나중에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천명합니다(행 23:6).

 

② 정통적인 유대인으로 살아온 바울(4-5)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율법을 엄격하게 교육받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보인 증거를 제시합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이 도’,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박해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체포해서 옥에 넘겼습니다. 바울이 이 정도 수준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 했다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모임을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 군중을 향해 자신이 유대교의 고위 관계자들을 알고 있음을 밝힙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서 다메섹으로 보내는 공문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열심을 입증할 수 있는 증인들이라고 밝힙니다. 그가 다메섹에 간 이유 역시 ‘이 도’를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서 벌을 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정과 질투심으로 바울은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유대인에게 있는 열심과 자신의 열심을 비교할 수 있다고 바울은 외칩니다(3). 바울이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졌으나, 그 열심은 바른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바른 지식을 얻게 되자 박해를 위해 사용되던 열정이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뒤바뀝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바울(6-11)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주의에 빠져 진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바울을 율법의 속박에서 건져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6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6-11)

 

6-11절은 다메섹 경험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참조.19:1-18; 26:13-18)로서, 바울이 자신의 언어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6절부터 바울은 어떻게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됐는지 설명합니다(6-16). 그는 다메섹에 도착할 즈음에 예수를 만났습니다(행 9:1-19). 9장에 묘사된 사건을 바울은 1인칭으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정오 무렵에 하늘로부터 비친 큰 빛을 보았습니다. 태양이 가장 밝게 보이는 시간에 태양보다 훨씬 밝은 빛은 초자연적인 빛입니다. 그는 그 빛 때문에 한동안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11). 큰 빛을 본 바울은 땅에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바울은 하늘에서 들린 음성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바울은 ‘주님 누구시이니까?’라고 묻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다’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바울이 들은 음성은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 대한 박해를 자신에 대한 박해로 여기셨습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예수와 제자들, 예수와 교회가 동일시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에(참조, 눅 10:16; 마 25:40) 그들을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도 바울에게 비친 빛을 보았지만 예수의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7에 따르면,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9절은 그들이 하늘에서 들린 어떤 소리(sound)를 들었으나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voice)을 듣지 못했다고 묘사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을 목격했지만 바울이 이해한 것처럼 알아들을 수 있는 예수의 말씀, 즉 음성의 내용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예수를 주로 부릅니다(10).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부활해서 살아 계시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자신이 따라야 할 대상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쓰러져 있는 바울에게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다메섹으로 가면 어떤 사람이 그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빛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고, 그와 동행하던 자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음성을 들었지만 함께 다메섹으로 가던 유대인들은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소리만 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같은 말씀을 들어도 그 의미를 깨닫는 사람이 있고 그저 지나치는 소리로만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 경로와 방법으로 우리에게 들립니다. 우리가 단지 소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면 이는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했습니까? 바울과 같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의미 없이 우리를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에 머물러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바른 답을 얻어 그 답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던졌고, 일생 동안 반복했던 그 질문을 우리 인생의 화두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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