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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1-03)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는 바울

사도행전 21장 27-40절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일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귀한 일을 계획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끈기가 없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다가 중단합니다. 그리고 변명을 늘어놓거나 주변 탓할 때가 많습니다. 귀한 일을 계획하는 자는 그 계획에 따른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눅 14:28). 바울은 희생을 각오하고 복음 전파를 포기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전력투구했습니다.

 

  •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붙잡고 죽이려합니다. 유대인들은 여론몰이를 통해 바울을 죽이려 하지만, 천부장과 군인들이 출동해서 바울을 체포하고, 영내로 데리고 갑니다. 바울은 천부장에게 요청해 허락을 받아 백성 앞에서 말할 기회를 얻어 히브리 말로 말합니다.

 

성전에서 일어난 폭동(27-30)

성령의 사람들에게는 ‘시기’와 ‘질투’하는 모습이 없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있으면, 조금만한 흠이 발견되면 크게 부풀려 업혀 씌우는 모습을 봅니다. 슬프기는 믿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끔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울을 체포하기 위한 유대인들은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함은 사라지고 혈기가 가득했습니다.

 

27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27-30)

 

바울은 정결례를 위한 7일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결박을 당하고 고초를 당합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한 소문이 진실인지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1)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고소(27-28)

 

정결례를 위한 7일을 마칠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잡고 무리 앞에서 외칩니다. 공개적으로 고소한 것입니다. 고소 내용은 유대 민족, 율법, 성전을 비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누구입니까? 전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오순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오는데, 이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아마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 시리아로 가려 할 때, 바울과 고린도 또는 겐그리아에서 마주친 유대인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거기서 바울을 암살하려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던 유대인들이 그들과 같이 시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바울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복음, 유대인과 율법이 당시 얼마나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었는지, 나아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유대교의 근간인 율법과 성전, 유대인(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흔들고 불안하게 했는지 보여 줍니다. 이들이 바울을 고소한 내용은 유대인이 스데반을 고소했던 내용과 유사합니다(6:11-13).

 

(2) 고소 이유(29)

 

유대인들이 고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오해 때문입니다. 누가는 그들이 바울과 에베소인 ‘드로비모’Trophimus가 함께 성전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이방인인 그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왔다고 섣불리 결론을 내려 버렸습니다. 진실 여부를 확인하려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바울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바울을 죽이려는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하고 변명을 하여도 그들의 마음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 전에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성전에 있기 전부터 바울과 그가 함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함께 성전에 있는 드리비모는 당연히 바울이 그를 성전으로 데리고 왔을 것이라는 추측한 것입니다. 드리비모는 본문에서는 에베소 사람으로 나오는데, 20장 4절에 따르면 그는 아시아 출신이라고 소개합니다. 누가는 아시아와 에베소를 동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너무나 특출한 도시임으로 아시아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정의라는 이름으로 바울을 정죄합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 처형했듯이, 바울도 그러한 모습으로 정죄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바울을 죽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어떤 죄목을 붙여서라도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죽일 때와 똑같이 바울을 향해 몰려들어 폭행을 가했던 것입니다.

 

(3) 소요의 발발(30)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선동은 소요로 이어졌습니다. 온 예루살렘 도시가 요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극도로 흥분한 군중은 바울을 성전을 이방인의 더러운 발걸음으로 유린한 범죄자라고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성전 밖으로 끌어내자마자 즉시 성전 문이 닫힙니다. 이것은 성전 내에서 추가적인 소요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군중심리에 휩싸이면 누구든 이성이 마비됩니다. 그래서 폭력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때도 군중심리를 이용했습니다. 악한 세력이 자주 사용하는 요소가 바로 군중심리입니다. 다수가 모였다고 해서 진리를 결정하고 진행한 것은 아닙니다.

 

체포를 당하는 바울(31-36)

우리에게 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키고 건져 주십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인도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믿을 때 주의 뜻에 순종하며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31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무리 가운데서 어떤이는 이 말로, 어떤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31-36)

 

사실도 따져보지도 않고 군중심리에 휩쓸린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오순절 명절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장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찬성하며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요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1) 천부장을 파송한 로마군(31-32)

 

바울은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이유 없는 매를 맞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죽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이 요란해졌습니다. 큰 소동은 예루살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안토니아 성채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 일어나는 소요를 통제하기 위해 로마군 수비대가 주둔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안토니아 성채는 높이가 약 25미터로, 성전보다 높이 있어 성전 안을 잘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성전 북쪽, 바깥뜰과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로 군대를 투입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로마군에서는 소요가 난 곳에 천부장을 급파했습니다. 천부장은 도시의 치안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군대를 거리고 그곳에 파송되었습니다. 군사들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바울을 치는 것을 멈추었습니다(32).

 

(2) 바울을 체포한 천부장(33-34)

 

천부장은 성난 군중의 손에서 바울을 건져 냈습니다. 그는 바울을 두 사슬로 결박했고, 바울의 신분과 소요의 경위를 보사하려고 물었습니다. 군중들이 흥분한 채로 말하므로 천부장은 진상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을 막사로 데려가도록 명령합니다(34).

 

(3) 몸을 가눌 수 없는 바울(35-36)

 

바울은 군중의 폭행으로 큰 상처를 입어 스스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그를 들고 가야 했습니다. 바울과 군인들의 뒤로는 ‘그를 제거하라!’(22:23)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체포를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신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습니다. 즉 바울이 당하는 핍박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매를 맞고 찢기고 결박을 당합니다. 그의 삶은 따라가고 싶지 않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 26:29)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진실된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넉넉히 이기도 남는 열정이 안에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이 아닌 천부장을 보내어 구원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그 자리에서 생명을 마치게 두지 않으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렸습니다. 그는 급하게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갔습니다. 바울을 때리고 있던 사람들은 군사들을 보고 멈추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맞고 있는 바울을 체포해서 영문 안으로 데려가고 명합니다. 그리고 그를 포박해서 층계 위로 올라갑니다. 사람들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 앞에서는 예수님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없애라!’라고 쉬지 않고 외쳤습니다. 진리에서 멀어져 복음을 대적하는 인간은 악하고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들이 소리를 질러 진상을 파악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지만, 사실상 그를 죽이려 하는 군종으로부터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도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고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잡아 쇠사슬로 결박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일의 시작과 끝을 물었습니다.

 

복음을 위한 열정(37-40)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의 삶과 비슷한 삶을 살아감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채찍에 맞고 계속적으로 똑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 주변에는 돌을 든 군중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 중에서도 끝까지 복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의연하게 선포한 모습이 닮은 모습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37○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37-40)

 

바울 사도는 심하게 매를 맞고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여전히 곁에는 아무도 변호해줄 사람이 없는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유창한 헬라어로 로마 천부장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자신은 애굽(이집트)인 반란군 지도자가 아니라는 의혹을 벗기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그는 오해를 풀고 위기를 벗어난 데 만족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방금 전까지 가기를 죽이려 했던 자기 민족, 그것도 흥분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형들아!”(22:1)라고 층계에 올라선 바울은 자신을 때렸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에게 매우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쇠사슬에 맺어가면서도 천국 복음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체험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간증은 변화된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킨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폭행을 피해 군인들에게 들려가면서도 복음 전파의 기회를 엿보는 바울을 발견합니다. 바울과 같은 복음에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불리할지라도 목격한 것을 진실하게 고백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하도록 비둘기 같이 정결함과 뱀 같은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보다 진리가 드러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그를 포기하게 말들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복음의 용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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