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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2-02)


영내 성벽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행전 22장 12-29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 사명(부르심)은 무엇입니까? 제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시류에 떠밀려 살아가는 삶만큼 고달프고 무의미한 시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보냄을 받았고 선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 바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부르심을 설명합니다(12-21).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울은 성전에서 예수를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17-21). 예수님은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보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 했고, 천부장과 로마 군인들은 바울이 로마 시민인 사실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22-29).

 

아나니아와 바울의 새 인생(12-16)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의지와 뜻으로 복음의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사람을 부르시고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굴레에 빠져 있던 바울을 부르셔서 복음의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12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12-16)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바울을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에게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만난 아나니아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소개합니다(12). 사도행전 9:10에는 아나니아가 예수님의 제자로 소개되지만, 바울은 유대 청중을 생각해서 아나니아가 율법에 따라 경건하게 살았고 다메섹의 유대인들에게서 칭찬을 받던 사람인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경건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바울의 경험을 인정한 것은 청중에게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나니아는 바울 곁에 와서 ‘형제’라고 부르며 그를 동료 그리스도인으로 환대합니다(13).

아나니아가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라고 말하자 바울이 시력을 회복해서 즉시 아나니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도행전 9:17에서는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고 기록합니다. 큰 빛의 영광을 보고 시력을 잃었던 바울이 아나니아의 말로 시력을 회복했으므로, 바울은 아나니아가 앞으로 말하는 것 역시 주께서 주시는 메시지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택하신 분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아나니아와 바울은 구약의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며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진정한 상속자들입니다. 아나니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신 목적을 세 개의 부정사(~을 위하여)로 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깨닫게 하려고, 그 의인을 보게 하려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려고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제부터 부활하신 예수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는 증인, 목격자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15). 모든 사람은 유대인과 이방인(행 22:17-21)을 모두 포함합니다. 근접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유대인들(행 23:11)과 이방인 통치자들(24-26장) 앞에서 예수를 증언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부르고 세례를 받아 죄를 씻으라고 지시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하며, 세례는 죄를 씻음 받은 사건(참조. 고전 6:11; 엡 5:26; 딛 3:5; 히 10:22), 곧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롬 6:3-11; 고전 6:11: 갈 3:27), 바울은 박해자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로 믿고 있음(‘주의 이름을 불러’)을 공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또한 세례는 교회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택하셨고(14) 예수가 파송하신(15, 17-21) 사도입니다. 예수님은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 앞에서 전하도록 바울을 구원해서 증인으로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 즉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며,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음성(또는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14).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씻음 받은, 곧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이 보냄 받은 자가 증언하고 전달할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를 만나고, 회심의 은혜를 간직한 사람이 참된 증인의 역할을 수 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환상을 경험하는 바울(17-21)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은 저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일꾼은 주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하여 섬기면 됩니다. 그 사명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가르치고 그 사명 앞에 순종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건강한 영적 성장을 돕는 최선의 길입니다.

 

17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17-21)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자기 동족에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동안의 습관으로 성전에서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기도던 중에 황홀경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이 시기는 다메섹의 경험이 있은 지 3년 후로 보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베드로가 환상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행 10:10; 11:5). 구약에서 사무엘(삼상 3:1-18)이나 이사야(사 6:1-9)는 환상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황홀경 상태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다메섹 사건에서 ‘주’는 예수였기 때문에 본문의 ‘주’를 예수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수님께 대해 증언해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핍박을 받으면서 이전에 성전에서 예수님이 경고하신 내용을 떠올립니다. 바울의 핍박은 이미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것이며,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들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바울의 부르심이 명확히 언급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인생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소명이 성전에서 주어진 장면은 특별히 이사야 6장에 자세히 묘사된 이사야의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유대인들은 바울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참조. 28:24-28의 사 6:9-10). 이사야 6장과 본문을 연결해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에 나타난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위로 바울에게 명령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전 행적을 말하면서 예루살렘에 있어도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바울이 주를 믿는 사람들을 투옥했고 회당에서 때렸고 주의 증인인 스데반을 죽일 때 찬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0). 그러나 주님은 바울을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십니다(행 13:46 18:6; 롬 11:13; 갈 2:2.7). 예루살렘에서 멀리 떠나갈수록 이방인들은 많아지고 유대인들은 적어집니다. ‘내가 너를 보낼 것이다’라는 표현은 다시 한 번 이사야 6:9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할 정도로 하나님의 율법에 열정적이었던 바울이 이방인들을 향해 멀리 가게 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개입하심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주신 소명을 바울이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청중 중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율법에 열심이었던 자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일어났음을 담대히 증언합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나 다시 이방인들에게 보내집니다. 선지자 이사야처럼 부름 받은 종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갖고 사람을 부르시며, 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알게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예배와 기도는 자신을 향한 예수의 뜻을 깨닫는 통로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부정적인 반응과 로마 시민인 것을 밝히는 바울(22-29)

특정 프레임에 갇히면 그것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와 유대주의라는 편견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프레임 속에 예수님을 통한 진리를 거절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이단자로 정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 생각은 변함없이 바울에게도 적용하고 있습니다.

 

22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24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25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6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27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22-29)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전에 이방인을 동반하여 더럽힌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에게 율법을 전하는 그를 이단자로 단정하고 폭행했습니다. 그들은 죽을 지경에 이르게 폭행했습니다. 로마 천부장에 의해 겨우 영내로 끌려 들어간 바울은 영내 성벽에서 자기 동족에게 변명을 하게 됩니다.

 

(1) 유대인들의 부정적인 반응(22-23)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는 말을 듣다가 ‘멀리 이방인에게로’라는 말에 인내심을 잃었습니다(21). 이 말까지 들은 청중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더구나 바울의 입에서 나온 이방인이라는 말에 더욱 흥분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전에 이방인으로 성전에 더럽혔다고 생각해서 폭행했는데, 또 이방인을 두둔하는 말에 더 이상 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전반적인 일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을 위해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저런 자는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고 외칩니다(22). 유대 청중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위해 바울을 보내셨다고 말하자 분노하면서 더 이상 말을 못하게 막습니다. 군중은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립니다(23).

 

(2) 로마 시민인 것을 밝히는 바울(24-29)

 

군중이 광분하자 그 자리에 있던 천부장은 몹시 놀랍니다. 군중이 더욱 소리를 지르며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천부장은 자기 휘하의 군인들을 동원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도록 명령합니다(24). 천부장은 부하를 시켜 군중을 자극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바울을 채찍으로 때려서 심문하라고 명령합니다. 채찍질로 심문하는 것은 사실을 파악하려고 외국인에게 가하는 고문의 형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부장의 부당한 대우에 맞서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백부장에게 분명히 알렸습니다(25). 그리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천부장에게 바울이 로마 시민인 사실을 알리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에게 로마 시민이 맞는지 직접 확인합니다.

천부장은 자신은 많은 돈을 사용해서 로마 시민권을 샀다고 말합니다(28). 심문하려던 군인들은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물러갑니다(29). 천부장도 로마 시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도리어 결박한 것 때문에 염려합니다. 로마 시민이라고 할지라도 공공의 질서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이면 체포해서 결박할 수 있지만,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도록 만드는 것은 합법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군인들이 정의를 행하도록 자신의 시민권을 밝힙니다.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불의한 권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습니다. 불의한 정치 질서는 선량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하도록 만듭니다. 예수의 제자는 바울처럼 공의가 실현되도록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활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신자는 세상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포함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부름을 받아 사명을 갖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치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폐쇄적이고 닫힌 공동체는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교회의 자기중심적 내향화는 교회를 안으로부터 썩게 만들 것입니다. 부르심과 사명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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