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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3-01)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의 증언하는 바울

사도행전 22장 30절 - 23장 11절


 

‘공평(公平)’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모든 일을 공의롭게 이뤄나가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타락하여 이기적인 탐욕과 죄악으로 공의롭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공의롭지 못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재판장들을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재판장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을 세상에 심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재판정(裁判廷)하는 곳은 공평을 만드는 기관입니다. 모든 사람은 법 아래에서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불공정한 재판은 나라는 혼돈스러워지고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불공정한 재판은 공평한 세상을 파괴하며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입니다.

 

  •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자신의 소명을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한 것으로 인해 대제사장과의 충돌이 야기됩니다(1-5). 바울은 자신이 심문받는 이유가 부활에 관한 이슈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로 인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신학적인 이유에서 크게 충돌합니다(6-9). 예수님은 병영에 갇힌 바울 곁에 서서 바울이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함을 알리십니다(10-11).

 

산헤드린 공의회에 선 바울(22:30-23:9)

오늘날 인문학들은 인간의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고 ‘질병’이라고 어린 시절의 상처로 발생한 실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범죄한 후에 회개하기보다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그 결과로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진실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담대하길 원한다면 먼저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22:30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30:1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22:30-23:9)

 

바울이 성벽에서 말한 변론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더욱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죽이고 서야 가라앉힐 것 같았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 그것도 자신과는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시민권을 가진 것을 알고는 바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이전까지는 이 소요의 모든 책임을 바울에게 전가시키려고 했습니다. 바울한 사람만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으로 여겼습니다.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조용해지기만 기다렸던 것입니다.

 

(1) 바울의 증언과 대제사장 반응(22:30-23:5)

 

바울의 기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천부장은 먼저 유대 군중이 격하게 반응한 이유를 파악하려고 합니다(행 22:30). 천부장은 바울에 대한 의심을 풀고 있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고발한 바울의 죄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고, 정식적으로 예루살렘 공의회를 열어 바울을 그들 앞에 세우고 심문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유대인이 중심이 된 정식 재판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재판에 참석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바울과 회집한 사람들이 모여 주고받는 공방은 사적인 영역이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 그들의 대표들이 듣고 반응하는 역사적인 현장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소요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천부장의 요청을 받은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각하려 합니다. 바울은 공회 앞에 서서 참석자들을 당당하게 바라보면서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이 항상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바울의 행위는 선한 양심에 따른 것이며 유대인들이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확신했지만, 오히려 그때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선한 양심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즉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하나님의 참된 계시를 깨닫게 되자 이전의 핍박하는 삶이 아니라, 그 이후의 고난 받는 삶이 양심에 따른 행위였음을 강조합니다. 그러자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옆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입을 때리라고 명령합니다(2). 주후 47-59년에 대제사장직을 수행한 아나니아는 바울이 하늘의 환상을 통해서 계시를 받았다는 것과 그의 선교 활동이 선한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 것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나니아를 ‘회칠한 담’(참조, 마 23:27)으로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는 예수가 마태복음 23:27-28에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경고하셨던 내용입니다. 아나니아는 자신이 율법에 따라서 심판한다고 하였지만, 바울은자신을 치라고 하는 것이 곧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꾸짖습니다. 이는 바울이 아나니아의 위선을 책망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의 눈에는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확신하는 산헤드린의 구성원들, 특히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처럼 명령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어떤 점에서 율법을 어겼습니까?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자 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 19:15). 모세의 법에 따르면 법을 어긴 것으로 고소당하더라도 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죄인으로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바울이 대제사장을 모욕했다고 반응합니다(4). 그러자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고 말합니다. 천부장의 요청으로 산헤드린 공회가 비공식적으로 모였기 때문에 아나니아는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지 않았을 것이고, 바울은 그가 미처 누구인지 식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대제사장을 모욕하는 행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으므로(출 22:28), 바울은 자신이 알지 못하고 그런 말을 했다고 인정합니다. 이는 바울이 유대의 율법과 관습을 여전히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분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분노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판단한다고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의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위선은 영광을 얻으려고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는 행동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자신이 잘 알며 순종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태도, 즉 ‘자기기만’까지 포함합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은 자기기만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바울을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모욕하는 사람으로 정죄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담대함을 통해서 위선에 맞서는 용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위선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얼마나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지 분별하고 위선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지위에 스스로 속지 말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았는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의 분노를 통해서 위선이야말로 신앙공동체의 가장 큰 위협 중 하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심문받는 이유가 부활이라고 주장하는 바울(6-9)

 

바울에게는 이것 역시 복음을 전할 기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바울을 통해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다시 한 번 듣고 믿을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사실을 알고 자신은 바리새인이며 바리새인의 아들이기에,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때문에 심문받는다고 외칩니다(6). 누가는 바울이 변호의 전략으로 부활을 사용한 것이라 묘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유대적인 신앙이 바리새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바리새인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밝힙니다(참조. 행 26:5; 빌 3:5).

 

바울이 부활을 언급하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서로 싸웁니다(7). 사두개인은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믿지 않은 반면, 바리새인은 이 모두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서 서기관 몇 명은 바울에게 문제가 없다고 평가합니다(8). 그들은 천사나 영이 바울에게 말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서기관들은 부활한 예수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바울이 다메섹과 성전에서 천사나 영의 음성을 들은 것일 수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명을 받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가 바울을 부르셨기에 부활은 소명의 이유가 됩니다. 이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에 해당합니다. 약속된 메시아이자 구원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께서 신원하신 사건이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합니다.

 

유대인들 앞에 변론하는 바울(23:10-11)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합니다. 온갖 고난에도 바울이 담대히 맞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혹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있다면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가시길 바랍니다.

 

10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10-11)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부활신앙은 서로의 구속자가 되어 하나님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도록 힘을 부여합니다. 부활신앙은 하나님께서 죄와 시망의 세력을 이기신 것을 믿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두 진영 사이에 분쟁이 심해지자 천부장은 군인들에게 명령해서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도록 합니다(10). 그리고 그날 밤 주님이 바울 곁에 서십니다. 11절의 ‘주’는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 찾아오셨던 부활의 ‘주’를 가리킵니다.

‘담대하라!’ 바울이 선포한 대로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살아 계셔서 위로하기 위해 그의 곁에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재 명령형(동작의 계속을 강조)을 사용하여, 계속되는 시련을 겪고 있는 바울에게 용기를 갖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주의 일을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게 될 것을 알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 같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지금까지 고난을 겪은 것처럼, 로마에서도 고난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증언하게 될 것이라 암시하십니다.

 

바울은 고난의 시기를 거쳐 자신이 로마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것을 알게 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있던 바울에게 오셔서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세상의 권세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을 거쳐서 로마에 가길 소원했으나 동족에게 얻어맞고 로마 군인들에 의해 구금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옆에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시고 격려하시며, 로마에서 바울이 증언하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결국 바울은 체포된 몸으로 로마에 가게 될 것입니다. 증인 옆에 예수님께서 계시므로 고난은 섭리의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증인으로 부르신 사람을 찾아오시고 격려하시고 섭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 사실이 성도들의 소망입니다.


‘세상보다 못한 교회’는 복음의 공공성이 주는 힘과 영광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성경에 충실한 구별된 삶과 윤리가 없다면 교회의 선교는 힘을 잃게 됩니다. 상식과 양심을 통한 선한 행실과 복음은 제국의 문턱을 넘어 새로운 나라의 실체를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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