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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8-04)


심판 그리고 회복의 여망하는 모압

예레미야 48장 36-47절


 

오늘날 교회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은 ‘참된 제자’인 ‘일꾼’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많이 세워지고 성도들은 모여 드는데, 일꾼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수준이 아닙니다.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가식적인 종교인을 뿐이며 하나님의 심판에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멸망하실 때는 아주 철저하고 냉정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질그릇처럼 여겨 깨뜨리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도 작은 희망의 불씨는 남기십니다.

 

  • 교만한 모압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모든 즐거움과 기쁨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애곡 소리가 대신합니다. 그모스를 섬기던 백성이 자기 신들과 함께 모두 사로잡혀 유배를 떠납니다. 더 이상 한 민족을 이루지 못하도록 사라질 것입니다. 그모스를 섬기던 백성이 자기 신들과 함께 모두 사로잡혀 유배를 떠널 것입니다.

 

모압을 위한 탄식(36-39)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크고 강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며 능력과 재산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자랑거리들은 통곡거리들로 바뀔 것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교만한 모압을 향해 깨진 항아리처럼 산산조각 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6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피리 같이 소리 내며 나의 마음이 길헤레스 사람들을 위하여 피리 같이 소리 내나니 이는 그가 모은 재물이 없어졌음이라 37모든 사람이 대머리가 되었고 모든 사람이 수염을 밀었으며 손에 칼자국이 있고 허리에 굵은 베가 둘렸고 38모압의 모든 지붕과 거리 각처에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니 내가 모압을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 같이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9어찌하여 모압이 파괴되었으며 어찌하여 그들이 애곡하는가 모압이 부끄러워서 등을 돌렸도다 그런즉 모압이 그 사방 모든 사람의 조롱거리와 공포의 대상이 되리로다(36-39)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딸들에게 난 아들에게서 시작된 나라들입니다. 이스라엘과는 형제 나라입니다. 남쪽의 에돔은 에서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들로서 형제의 나라입니다. 이들은 큰 나라는 아니었지만, 비옥한 땅에서 안정된 삶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를 일삼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모압에 대한 심판은 다른 나라보다 긴 것이 특이합니다.

 

⑴ 탄식(36)

 

모압을 멸망하지만 그 멸망한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머음은 좋지 않습니다. 적들의 침략으로 모압이 황폐해졌기에 여호와께서 탄식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피리 같이 소리 내며 나의 마음이 길헤레스 사람들을 위하여 피리 같이 소리 내나니 이는 그가 모은 재물이 없어졌음이라’(36)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공익에 따라 모압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지만, 모압의 멸망은 그분께도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분의 마음이 모압 때문에 피리처럼 슬피 울고, 그분의 마음이 길헤레스 사람들 때문에 피리처럼 슬피 웁니다(36a; 참조. 31a). 애곡의 대상을 ‘모압’ 대신 ‘길헤레스 사람들’로 바꾼 것을 제외하면 두 문장은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합니다. 슬픔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입니다. 애곡을 피리 소리에 비유하는 경우는 여기가 유일합니다(참조, 마태복음 9:23). 피리는 원래 축제 때 사용하는 악기였습니다(참조. 사무엘상 10:5; 열왕기상 1:40; 이사야 5:12; 30:29). 아마도 애곡의 강렬함을 표현하기 위해 피리에 비교한 것 같습니다. 또 애곡의 주체로 여호와의 마음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적 사고에 따르면 마음은 판단과 이성의 자리입니다. 모압의 멸망을 결정한 그분의 마음이 멸망에 떨어진 모압 때문에 슬피 웁니다. 다시금 여호와의 심판 결정이 가슴 아픈 결정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소리 내다’는 31:20b에서는 여호와의 ‘창자’를 주어로 사용합니다. 심판을 당한 에브라임을 생각하실 때마다 그분의 창자가 동요하는 것처럼 멸망에 떨어진 모압 때문에 그분의 마음이 동요합니다. 심판에 떨어진 이스라엘과 모압을 바라보는 그분의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후반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애곡이 모압의 약탈을 초래합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순서가 뒤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피상적 이해입니다. 여호와의 애곡은 모압의 멸망이 확정됐음을 보여주고, 이런 면에서 심판 선언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모압의 심판을 결정하셨기에 모압은 애써 모아놓은 자랑거린 재물을 약탈당합니다.

 

⑵ 깨뜨려진 그릇(37-38)

 

사람들이 모압의 멸망을 죽음으로 보고 애곡합니다(37-38a; 참조. 이사야 15:2-3), 머리를 밀고 수염을 깎고 몸에 상처를 내고 허리에 굵은 베를 두르는 행위는 사람이 죽었을 때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애도 의식에 속합니다. 재난이 전면적이라 개별적으로 애도하지 않고, 주민들이 모두 힘을 합쳐 애곡에 참여합니다. 다들 집에서 나와 지붕이나 광장에서 애곡합니다.

아무도 모압에 임한 재난에서 안전하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필요없는 그릇을 부스는 것처럼 멸망시킵니다. 죽은 자가 없는 집이 없습니다. 모압의 주민들이 모두 공개적 장소에서 국가적 위기를 애곡할 때는 이유가 없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그릇)처럼 모압을 부수시기 때문입니다(38b).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은 22:28에서는 바벨론으로 유배된 유다 왕 여호야긴(고니야)에게 적용된 표현입니다. ‘깨뜨리다, 부수다’를 의미하는 동사 샤바르(שבר)는 48장에 네 번 사용됩니다. 여호와께서 모압을 부수셨기에 모압의 ‘아름다운 지팡이’(17)와 ‘그 팔’(25)과 ‘모압’(4절)이 부서집니다. 19:10-11에서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그릇(옹기)을 깨뜨리는 표적행위를 통해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부수실 것을 선포했습니다. 잘못 만들어진 옹기처럼 예루살렘과 유다를 부수신 여호와께서 모압을 쓸모없는 그릇처럼 부수십니다.

 

⑶ 조롱거리가 된 모압(39)

 

다시 한 번 탄식의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은 모압의 파괴를 애곡하고, 모압은 수치스러워 등을 돌립니다(39a; 참조. 1,20). ‘등을 돌리다’는 도망하기 위해 돌아서는 행동이나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심한 모멸감의 표현입니다. 수치를 당한 모압이 주위 모든 민족에게 ‘조롱거리와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39b). ‘모압에게 취하도록 술을 먹여 조롱거리가 되게 하라’(26)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모압은 민족들의 조롱거리로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내던져진 그릇이 조각조각 깨지듯이 모압이 너무도 처참하게 파괴되기에 민족들은 멸망당한 모압을 보고 공포를 느낍니다. 모압의 상황이 극에 달하여 곳곳에서 사람들이 슬픔으로 울부짖고 큰 혼란 속에 빠지면서 모압 백성은 물론이고 하나님 역시 모압의 상황을 가슴 아프게 여기시고 함께 슬퍼하십니다. 특히 모압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밀어 대머리를 만들고 수염을 깎으며 손에 상처를 내고 허리에 베옷을 걸치는 등 사람이 죽었을 때,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재난에 대해 탄식하는 모습이 독특하게 그려집니다.

 

피할 수 없는 심판(40-44)

하나님을 거스르는 만용보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재건될 수 없는 멸망할 나라를 위하여 살지 말고 영원히 흔들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모압이 다시는 재건되지 못할 만큼 철저히 파괴될 것입니다.

 

40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가 독수리 같이 날아와서 모압 위에 그의 날개를 펴리라 41성읍들이 점령을 당하며 요새가 함락되는 날에 모압 용사의 마음이 산고를 당하는 여인 같을 것이라 42모압이 여호와를 거슬러 자만하였으므로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로다 4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모압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닥치나니 44두려움에서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떨어지겠고 함정에서 나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내가 모압이 벌 받을 해가 임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0-44)

 

모압에 내리실 재난을 다루는 마지막 단락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압을 쳐부술 적군을 묘사하는 말로 시작하여 교만한 모압이 겪을 무력함과 절망을 예고하시며 재앙을 결코 피할 수 없음을 확고히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압에게도 회복의 기회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양한 비유적 표현을 사용해 모압의 피할 수 없는 멸망을 기술합니다.

 

⑴ 모압의 멸망(40-41)

 

먼저 모압을 침략하는 적군이 독수리에 비유됩니다. 적이 독수리처럼 날아와 모압을 향해 날개를 폅니다(40). ‘편 날개’는 보통 보호를 상징하지만(출애굽기 25:20; 신명기 32:11), 여기서는 신속함과 위협의 표상입니다. 독수리에 비유된 적이 누구인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17:3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색깔이 화려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에 비유합니다. 또 신명기 28:49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배반하면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오게 해서 이스라엘을 치게 하십니다. 다음으로는 모압의 용사들이 산고를 겪는 여인에 비유됩니다. ‘성읍들이 점령을 당하며 요새가 함락되는 날에 모압 용사의 마음이 산고를 당하는 여인 같을 것이라.’(41) 출산의 진통이 시작된 산모는 해산하기까지 홀로 고통과 두려움에 맞서야 합니다. 적이 침략해 성읍과 요새를 공격하면 용감하게 맞서 방어해야 할 용사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성읍이 점령당하고 요새는 함락됩니다.

 

⑵ 멸망의 원인(42)

 

‘모압이 여호와를 거슬러 자만하였으므로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로다.’(42) 이 말씀은 34-41절의 요약에 해당합니다. 여호와를 거슬러 교만했기에(26) 모압은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합니다. 더 이상 한 민족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를 끊어서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하자고 헤스본에서 적들이 세운 계획(2)이 성취됩니다.

 

⑶ 피할 수 없는 심판(43-44)

 

모압 주민들은 침략자를 피해 목숨을 구하지 못합니다(43-44a; 참조 이사야 24:17-18). 이들 앞에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놓입니다. 이 세 단어(파하드과 하트-파흐)에는 두음법이 사용돼 강하게 서로 연결됩니다. 함정은 동물을 잡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를, 올무는 새 사냥꾼이 사용하는 그물을 가리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하는 차는 함정에 떨어지고, 함정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립니다(참조 아모스 5:19).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랑을 해보지만, 사로잡힘을 피하지 못합니다. 독수리처럼 날래고 무섭게 쳐들어오는 적으로부터 누구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모압 주민이 모두 재난에 떨어짐은 적의 침략이 여호와께서 모압에 내리시는 벌이기 때문입니다(44b). 여호와께서 모압을 멸망시키시기로 결정하셨기에 그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단호하게 다루시는 분입니다. 모압 백성에게 닥칠 재난으로 무척 가슴 아파하셨지만, 그들의 죄에 대해서만큼은 엄격하게 판결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 곳곳에 또는 내 주변에 독버섯처럼 퍼져있는 불의와 죄악을 바라보면,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심판(45-47)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은 언제가 반드시 옵니다. 그날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지금부터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살아갈 궁리를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서 애굽에게 회복을 약속하셨듯이 모압에게도 약속하십니다.

 

45도망하는 자들이 기진하여 헤스본 그늘 아래에 서니 이는 불이 헤스본에서 나며 불길이 시혼 가운데 나서 모압의 살쩍과 떠드는 자들의 정수리를 사름이로다 46모압이여 네게 화가 있도다 그모스의 백성이 망하였도다 네 아들들은 사로잡혀 갔고 네 딸들은 포로가 되었도다 47그러나 내가 마지막 날에 모압의 포로를 돌려보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모압의 심판이 여기까지니라(45-47)

 

운이 좋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를 힘겹게 벗어나 헤스본 그늘 아래서 안도의 한숨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행운은 거기까지 입니다.

 

⑴ 멸망과 유배(45-46)

 

헤스본에서 불이 나오고 시혼 가운데서 불꽃이 나와 ‘모압의 살쩍과 떠드는 자들의 정수리’를 삼켜버립니다(45; 참조, 민수기 21:28). 도망한 자들은 헤스본에서 피난처를 찾지만, 헤스본은 이미 적들의 수중에 넘어 갔습니다(2). 헤스본에서 적들이 나와 그늘에서 지친 몸을 추스르며 쉬는 자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헤스본과 시혼은 동격입니다. ‘모압의 살쩍과 떠드는 자들의 정수리’(참조, 민수기 24:17)는 모압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살쩍’은 ‘옆’, ‘가장자리’를 의미하는 폐아(פאה)의 번역으로 관자놀이/이마 부분을 가리킵니다.

46절은 모압의 심판을 마무리합니다. 모압에 화가 임합니다. 그 모스의 백성이 멸망하고, 모압의 아들들과 딸들이 모두 잡혀 유배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벌로 그모스를 섬기는 모압이 멸망합니다. 그모스의 정체가 헛것으로 폭로됩니다. 그모스는 자기 숭배자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자신도 포로로 잡혀갑니다(7).

 

⑵ 모압의 회복(47)

 

모압의 운명이 멸망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훗날에 모압의 운명을 되돌리실 것입니다(47a; 참조. 46:26). ‘모압의 심판’은 모압의 멸망이 모압의 잘못에 대한 징벌임을 보여줍니다(21). 애굽에게 회복을 약속하셨듯이 모압에게도 회복의 소망을 남겨주십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성품 때문이고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든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모스를 믿은 모압 사람들 중 아무도 재난에서 피할 수 없게 하실 것입니다. 두려움에서 도망하면 함정에 떨어지고, 함정에서 나오면 올무에 걸릴 것입니다. 성읍을 빠져나와 헤스본으로 도망하더라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큰 불에 타는 헤스본일 것입니다. 그 불을 피하더라도 모압의 아들 딸들은 포로로 잡혀갈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지금부터,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살아갈 궁리를 멈춰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인간을 징계하시고, 회개를 촉구하기고,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값없는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이를 아는 자들은 교만으로 방종하거나 죄 아래 머물지 않고, 돌이켜 순종의 종으로 자신을 드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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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8-03)

 


조롱거리가 된 오만한 모압

예레미야 48장 26-35절


 

교만함은 무지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인 냥 착각하기 때문에, 그 무지함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지금 소유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조롱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도울 것입니다. 모압은 가진 것 때문에 교만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 모압의 심판을 결정하신 여호와께서는 모압의 멸망을 탄식하십니다. 그들은 풍부와 평안을 자랑했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을 피하진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오만해서 무력으로 침공 받은 이스라엘을 웃음거리가 되게 했습니다. 도리어 이제 모압이 심판 날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들의 부요와 번영은 극심한 가뭄과 함께 끝날 것입니다.

 

조롱하던 모압이 조롱당함(26-28)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해해서 자신들만이 특혜를 받은 것처럼 생각해지만,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또한 이스라엘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만 거룩을 요구하신 분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이방 나라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다릅니다.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26모압으로 취하게 할지어다 이는 그가 여호와에 대하여 교만함이라 그가 그 토한 것에서 뒹굴므로 조롱거리가 되리로다 27네가 이스라엘을 조롱하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도둑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느냐 네가 그를 말할 때마다 네 머리를 흔드는도다 28모압 주민들아 너희는 성읍을 떠나 바위 사이에 살지어다 깊은 골짜기 어귀에 깃들이는 비둘기 같이 할지어다(26-28)

 

역사적으로 모압은 이스라엘의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스라엘과 거듭된 전쟁과 영토권 분쟁으로 사이가 무척 나빴습니다. 따라서 모압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유 없이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모압이 행했던 것처럼 그대로 받을 것입니다.

 

⑴ 조롱거리가 되는 모압(26)

 

모압의 심판이 ‘여호와에 의한 모압의 술 취함’으로 표현됩니다. 여호와께서 모압에게 취하도록 술을 먹이라고 명령하십니다(참조, 25:15-29). 다른 곳에서처럼 명령을 받는 ‘너희’의 정체는 모호하게 남습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시는 ‘파멸하는 자’(8) 또는 ‘술을 옮겨 담는 사람’(12)을 보내 일하도록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실 때는 물론 까닭이 없지 않았습니다. 모압이 그분을 거슬러 교만했기 때문입니다(42a).

모압의 교만을 구체적으로 고발하기에 앞서 술자리의 꼴사나운 모습에 비교해서 모압을 조롱합니다. 하나님께 모압은 마치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자기가 토한 것 위에 나뒹구는 자와 같습니다. 온갖 추태로 조롱거리가 된 술꾼처럼 교만에 취한 모압이 (여호와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조롱거리가 됩니다.

 

⑵ 이스라엘을 조롱한 모압(27)

 

모압이 조롱거리가 되는 이유는 이들이 이스라엘을 조롱했기 때문입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을 마치 도둑질하다가 들켜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처럼 취급하며 조롱했습니다(27; 2:26; 참조. 출애굽기 22:2) 도둑이 아닌 이스라엘을 도둑으로 멸시했기에 모압이 멸시를 당합니다.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을 경멸하고 조롱한 것이 곧 그분을 거슬러 행한 교만입니다. ‘(머리를) 흔들다’는 오만하게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태도입니다.

 

⑶ 도망하라 조롱당한 모압(28)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여호와를 거슬러 으스댄 모압에 심판이 선고됩니다(28). 모압 주민들은 성읍을 버리고 바위틈에서 살아야 합니다. 성읍에서의 평안한 삶은 이제 끝났습니다. 성이 더는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어떤 성읍도 적의 침략을 피할 수 없기에 목숨을 구하려면 성을 떠나 적의 칼이 미치지 않는 산으로 도망해야 합니다. 사냥꾼의 눈을 피해 골짜기 벼랑에 둥지를 틀고 사는 비둘기처럼 모압 사람들은 험한 골짜기에서 힘겹게 살아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편안하게 살았던 모압이 광야처럼 폐허가 되고, 들짐승의 거처가 모압 주민들의 거주지가 됩니다.

 

심판을 부른 모압의 교만(29-30)

교만하고 오만한 사람은 굴종을 받지만 진정한 환영과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이들은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며,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진정으로 존경하지 않습니다. 결국, 진정한 존경은 겸손에서 비롯됩니다.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경받을 수 있으며, 자신을 높이기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29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의 자고와 오만과 자랑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 30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의 노여워함의 허탄함을 아노니 그가 자랑하여도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였도다(28-30)

 

요새를 자랑하던 모압이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외딴 곳에 숨어 겨우 목숨만 부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맞설 만큼 크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26)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⑴ 심한 교만(29)

 

정체가 불분명한 ‘우리’가 여호와의 심판을 초래한 모압의 교만을 인용합니다(29; 참조. 이사야 16:6). 문맥에서 보면 우리는 26절에서 여호와로부터 모압에게 술을 먹이도록 명령을 받은 ‘너희’입니다. ‘우리’가 들은 모압의 교만을 여호와께서 아시기에 ‘너희’에게 모압을 징벌하게 하십니다. 비슷한 의미를 갖는 다섯 개의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모압의 교만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줍니다.

 

⑵ 노여워함의 허탄함(30)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가 빈 말로 큰소리쳐도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그가 분내는 것도 헛되다는 것을 아십니다. 교만한 자에게는 허풍과 거짓이 있을 뿐 실속은 없습니다. 사람을 향한 이런 교만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든지 하나님마저 속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29-30절을 통해 나타난 교만의 내용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고 교만 자체에 집중합니다. 교만은 모압의 상징이자 그 본질이었습니다. ‘교만과 오만과 자랑’은 모두 ‘높다’를 의미하는 동사로, 의미 차이 없이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첫 번째 ‘교만’과 네 번째 ‘오만’은 같은 단어로, 13:9은 같은 단어로 ‘예루살렘의 교만과 유다의 큰 교만’을 고발합니다. 두 번째 ‘교만’은 ‘심한’을 첨가해 교만의 강도를 한층 강조합니다. 세 번째 ‘자고’는 마찬가지로 ‘높다’를 의미에서 파생된 단어의 번역으로, 13:15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고 교만하지 말도록 경고합니다. 다섯째 ‘자랑’은 예레미야서에서는 여기에만 나옵니다. 여섯 번째 ‘거만’은 ‘높다’, ‘위에 있다’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특별히 교만의 장소로 ‘마음’을 언급합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마음은 사고와 계획과 정정을 담당하는 신체 기관입니다. ‘마음의 교만’은 생기하고 결정하는 것이 모두 교만에 근거함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모압에 관하여 들은 것을 여호와께서 사실로 확인해주십니다(30). ‘노여워함의 허탄함’으로 번역한 단어는 ‘한계’ 또는 ‘정도’를 넘었음을 의미합니다. 평정심의 한계를 넘으면 노여워함으로,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교만함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 이상의 높은 것을 탐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시는’(17:10) 여호와께서 아셨기에 그분의 판단은 틀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압의 자랑은 입술의 자랑에 불과합니다. 실체 없는 허황한 말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압의 태도를 교만하다고 책망하시고 모압을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압의 멸망을 슬퍼하시는 하나님(31-35)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서 함께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이 재난 가운데 괴로움을 겪으면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슬픔에 함께 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압의 고통에도 슬퍼하십니다.

 

31그러므로 내가 모압을 위하여 울며 온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으리니 무리가 길헤레스 사람을 위하여 신음하리로다 32십마의 포도나무여 너의 가지가 바다를 넘어 야셀 바다까지 뻗었더니 너의 여름 과일과 포도 수확을 탈취하는 자가 나타났으니 내가 너를 위하여 울기를 야셀이 우는 것보다 더하리로다 33기쁨과 환희가 옥토와 모압 땅에서 빼앗겼도다 내가 포도주 틀에 포도주가 끊어지게 하리니 외치며 밟는 자가 없을 것이라 그 외침은 즐거운 외침이 되지 못하리로다 34헤스본에서 엘르알레를 지나 야하스까지와 소알에서 호로나임을 지나 에글랏 셀리시야에 이르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소리를 내어 부르짖음은 니므림의 물도 황폐하였음이로다 35여호와의 말씀이라 모압 산당에서 제사하며 그 신들에게 분향하는 자를 내가 끊어버리리라(31-35)

 

하나님께서는 번영과 부요에 취해 자만하는 모압을 술에 취하게 하여 자기 토한 데 뒹굴게 하고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조롱하였고, 이스라엘이 도둑질하다 들키기나 한 것처럼 머리를 흔들며 비웃음거리로 삼았습니다. 누군가에 대해 아주 적게 혹은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 쉽게 비판하고 냉소하지는 않는지 돌아봅시다.

 

⑴ 여호와의 탄식(31-32)

 

하나님께서는 모압의 멸망을 슬퍼하십니다. 온 모압을 위하여 애곡하며 부르짖으십니다. 보통 고발의 말씀 다음에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심판의 말씀이 뒤따르는데, 여기서는 탄식이 나옵니다. 심판이 이미 이뤄진 것을 전제하고 탄식합니다.

심판이 가능성의 영역을 떠나 확정됐음을 보여줍니다. 탄식의 주체가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33,35,38절의 내용은 예언자보다는 여호와께 어울립니다. 모압의 교만을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모압의 멸망을 탄식하십니다. 단순한 문학적 표현만은 아닙니다. 심판의 결정과 집행에 따른 여호와의 안타까움과 아픔을 보여줍니다. 공의에 따라 심판하시지만, 한 민족의 멸망은 그분께도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압의 죽음을 직접 애도하십니다(31; 참조, 이사야 16:7). 반복 사용된 ‘모압을 위하여’는 모압의 멸망이 그분께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호와만 통곡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애도할 때 이웃들도 함께하는 것처럼 길헤레스 주민들을 위해 불특정의 사람들도 슬피 웁니다(17). (후반절도 1인칭으로 읽는 다수 입장에 따르면, 길헤레스 사람들을 위해 여호와께서 우신다.) 길헤레스(오늘의 케락)는 사해에서 동쪽으로 20km 떨어진, 아르논과 세레드의 가운데쯤에 위치한 성읍으로 모압의 도성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현재의 문맥에서는 모압을 대표합니다. 길하레셋(이사야 16:7; 열왕기하 3:25)의 단축형에 해당하는 길헤레스는 히브리어로는 ‘옹기 조각들의 성’을 의미합니다. 질그릇이 깨지듯이 길헤레스가 완전히 파괴될 것을 암시해줍니다. 모압의 멸망으로 모압 신들의 무능력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여호와의 심판 앞에서 모압의 제의와 신들은 자신의 숭배자들을 구해주지 못합니다.

 

⑵ 부르짖음(33-34)

 

모압의 유명했던 포도 농사를 배경으로 모압의 멸망을 기술합니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포도나무가 여기서는 모압의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포도 산지로 유명한 십마와 야셀이 들이닥친 파괴자들에게 ‘여름 과일과 포도’를 모두 빼앗깁니다. 폐허가 된 포도밭과 과수원에는 수확하는 즐거움이 사라지고 적막감만 감돕니다. ‘내가 포도주 틀에 포도주가 끊어지게 하리니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의 주관자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분께서 모압의 교만을 징계하시려고 수확의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그치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압을 위해 통곡하시고 부르짖으시지만, 모압의 멸망은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이기도 합니다. 십마와 야셀을 유린한 재난이 다른 성읍들로 확장됩니다. 울부짖는 소리가 ‘헤스본에서 엘르알레를 지나 야하스까지’ 들리고, ‘소알에서 호로나임을 지나 에글랏 셸리시야’까지 부르짖음으로 가득 찹니다(34).

모압 전역이 일시에 적군들의 발에 밟혀 황폐하게 하실 것입니다. 모압 본토의 젖줄이 되는 강물(니므림)도 마르게 하시고, 하나님 대신 모압 산당에서 우상에게 제사하는 자들을 그 신들과 함께 없애실 것입니다.

 

⑶ 우상숭배들의 징벌(35)

 

심판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모압의 북쪽 지역과 남쪽 지역이 모두 적들에게 유린당합니다. 엘르알레는 헤스본에서 북동쪽으로 3km, 야하스는 남쪽으로 25km 떨어졌습니다. 소알은 사해 남단 세레드 시내 근처의 성읍이고, 에글랏 셸리시야의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니므림은 사해 남쪽의 오아시스였던 것 같습니다. 모압이 폐허가 되기에 산당에서 제사를 바치고 신들에게 분향하는 자들도 모두 사라집니다.

그렇지만 모압이 모두 파괴되어 곳곳마다 울부짖음과 슬픔만이 가득하고 사람마다 모든 것을 잃고 큰 고통에 빠지자 하나님은 가슴 아프게 여기시고 슬퍼하십니다. 여기서 독특한 점은 모압이 저지른 잘못과 그들에게 닥칠 재난을 예고하는 말보다는 모압의 비참한 상태나 이를 두고 탄식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아픔당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조롱한 모압 역시 다른 나라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나는 다른 친구가 고통 당할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자비한 사람이 복이 있으며 자비함을 입게 될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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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8-02)


교만의 뿔이 잘린 모압

예레미야 48장 11-25절


 

인생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한계가 가득하여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고, 보장해주는 것처럼 여깁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이것을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십니다. 겸손하게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모압에 대한 예언을 하시면서, 과거 가장 안전한 곳에 위치해 평안했던 모압을 이야기합니다. 가장 안전한 곳에 있었던 환란과 파멸이 시작되고 있음을 예언합니다. 모압의 모습을 포도주 제조과정으로 설명합니다. 멸망한 것은 군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술을 옮겨 담을 사람(11-13)

이스라엘 멸망을 보고 기뻐하는 모압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지는 않습니다. 모압의 멸망은 여호와의 되돌릴 수 없는 그런 결정일 것입니다. 하나님 외의 것들을 의지하면 의지하는 그것으로 인해 고난 앞에 서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압은 자신들이 용사이며 능숙한 전사임을 자부하였습니다. 그들이 자부하는 힘이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철저하게 파괴될 것을 알지 못합니다.

 

11모압은 젊은 시절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이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하지 아니하였도다 12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술을 옮겨 담는 사람을 보낼 것이라 그들이 기울여서 그 그릇을 비게 하고 그 병들을 부수리니 13이스라엘 집이 벧엘을 의뢰하므로 수치를 당한 것 같이 모압이 그모스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리로다(11-13)

 

모압은 지금까지 외부의 침략 없이 평안한 삶을 즐겼습니다. 적의 침략을 모르고 살았던 좋은 시절이 이제 마치게 됩니다. 모압의 재난이 가까웠습니다. 파멸하는 자가 모압에 올라와서 모압 전역을 황폐하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형제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 당할 때 기뻐하였던 그런 악행에 걸맞은 심판이 임하게 되어집니다.

 

⑴ 평안을 빼앗기는 모압(11-12)

 

예레미야를 통해 모압의 평안했던 과거와 전쟁에 휩싸일 미래가 포도주의 제조 과정에 비교됩니다. 모압을 ‘모압은 젊은 시절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이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하지 아니하였도다’(11)라고 표현합니다. 포도주가 어느 정도 기간을 지나서 발효가 되면 찌끼와 분리하여 다른 그릇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압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을 옮겨 담을 사람을 보내시겠다고 말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포도주는 대략 네 단계의 과정을 거쳐 제조됐습니다. (1) 수확한 포도를 술틀에 넣고 발로 밟아 포도즙을 짜냅니다. (2) 짜내 포도즙을 토기나 가죽 부대에 넣고 마개를 열어 놓은 채 발효시킵니다. 찌끼가 밑으로 가라앉도록 포도즙이 담긴 토기나 가죽 부대를 한동안 그대로 놓아둡니다. (3) 발효 과정이 끝나면 포도주를 찌끼로부터 분리합니다. 찌끼가 섞이지 않게 세마포를 이용해 포도주를 조심스럽게 다른 그릇에 따라 넣습니다. (4) 걸러낸 포도주를 담은 토기나 가죽 부대를 창고로 옮겨 저장합니다.

본문에서 하신 ‘마치 술이 그 찌끼 위에 있고’는 두 번째 단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모압은 외부의 침략 없이 자기들만의 삶을 안전하게 즐겼습니다.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는 포도주 제조 과정의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적당히 발효하면 순수한 포도주를 다른 그릇에 담아야 하는데, 모압의 경우는 계속 그대로 두었습니다.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는 옮겨 담는 세 번째 단계를 유배로 해석합니다. 마지막의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하지 아니하였도다’는 모압의 처음 평안함이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됐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지체됐던 세 번째 단계가 모압에게 시행됩니다. 때가 되면 포도주를 옮겨 담는 것처럼 모압을 옮겨 담을 ‘날(들)’이 옵니다(12). 여호와께서 ‘술을 옮겨 담는 사람(들)’을 보내시면, 그들이 술을 옮겨 담아 그릇을 비우고 단지는 부숴버릴 것입니다. 원래는 옮겨 담고 빈 그릇을 부수지 않습니다. 포도주를 옮겨 담는 목적이 맛과 향이 좋은 포도주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담았던 그릇의 파괴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술을 옮겨 담는 사람(들)’이 ‘파멸하는 자’의 역할을 담당합니다(8). ‘옮겨 담음’이 모압 사람들의 유배를 가리킨다면(11), 단지의 파괴는 모압의 완전한 멸망을 상징합니다.

 

⑵ 그모스로 인한 수치(13)

 

모압이 여호와의 심판에 넘겨질 때는 이유가 없지 않았습니다. 특이하게도 모압의 멸망을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과 나란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집이 벧엘을 의뢰하므로 수치를 당한 것 같이 모압이 그모스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리로다’(13)라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성소 벧엘과 모압의 신 그모스가 대등하게 비교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섬긴 벧엘의 송아지 상과 모압 백성이 섬긴 그모스는 우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벧엘의 송아지를 숭배하다가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하고 많은 백성이 제국의 변방으로 사로 잡혀간 것처럼, 모압도 그모스를 숭배하다가 멸망하고 그 백성은 유배를 당합니다.

열왕기상 12:28-29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송아지 상을 만들어놓고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송아지 상이 안치된 벧엘 성소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기까지 국가 성소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참조. 암 7:13). 하나님께서는 풍요와 평안을 누리면서 그모스를 의지했던 모압이 그 우상으로 인해 멸망당할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모압의 재난이 가까웠고(14-17)

주변 정세나 정보에 민감하되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도움의 근원이신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힘에 기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모압은 자신이 이룬 사업과 재산만을 의지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당했습니다. 혹시 당신도 모압과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가장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14너희가 어찌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전사라 하느냐 15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모압이 황폐하였도다 그 성읍들은 사라졌고 그 선택 받은 장정들은 내려가서 죽임을 당하니 16모압의 재난이 가까웠고 그 고난이 속히 닥치리로다 17그의 사면에 있는 모든 자여, 그의 이름을 아는 모든 자여, 그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강한 막대기, 아름다운 지팡이가 부러졌는고 할지니라(14-17)

 

예언자(여호와)가 탄식하듯이 모압 사람들의 자신감 넘치는 말을 인용합니다. 멸망할 운명으로 이미 결정됐는데도 이들은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전사라’하며 자신들의 뛰어난 군사력을 신뢰합니다(14; 참조 46:7-9). 이들의 과거 경험과 자만이 여호와께서 ‘술을 옮겨 담는 사람을 보낼’ 날이 오고 있음을 볼 수 없게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께서(참조 46:18) 이들의 실체 없는 자신감을 폭로하십니다. ‘모압이 황폐하였도다 그 성읍들은 사라졌고 그 선택 받은 장정들은 내려가서 죽임을 당하니’(15) 모압이 자랑하는 최고의 용사들이 파멸하는 자 앞에서 도살당하는 짐승처럼 힘없이 죽어갑니다. 여호와의 계획안에 따르면 모압의 멸망은 아직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시작되고 있는 사건입니다(16). 모압의 멸망이 확정적이기에 모든 민족에게 그의 죽음을 애도하도록 요청합니다(17). ‘그의 사면에 있는 모든 자’는 가까운 이웃 민족들을, ‘그의 이름을 아는 모든 자’는 모압에 관해 들어서 아는 먼 곳의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모든 민족이 모압의 죽음을 애도하며 ‘강한 막대기, 아름다운 지팡이’가 부러졌다고 탄식합니다. 왕권을 상징하는 홀이 꺾였습니다. 오랫동안 편안하게 살아온 모압이 종말을 맞았습니다.

 

단호한 심판 지속 명령(18-25)

한 때 번성하고 사람들이 많았던 곳이 내일도 그렇게 되리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사실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보다 번성하고 풍요로울 때, 더 긴장하고 더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교만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풍요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풍요로울 때 하나님께 겸손한 신앙으로 나가지 않으면 나중에 하나님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교만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모압이 하나님께 멸망 받아야 할 이유가 이곳에서 있었습니다.

 

18디본에 사는 딸아 네 영화에서 내려와 메마른 데 앉으라 모압을 파멸하는 자가 올라와서 너를 쳐서 네 요새를 깨뜨렸음이로다 19아로엘에 사는 여인이여 길 곁에 서서 지키며 도망하는 자와 피하는 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물을지어다 20모압이 패하여 수치를 받나니 너희는 울면서 부르짖으며 아르논 가에서 이르기를 모압이 황폐하였다 할지어다 21심판이 평지에 이르렀나니 곧 홀론과 야사와 메바앗과 22디본과 느보와 벧디불라다임과 23기랴다임과 벧가물과 벧므온과 24그리욧과 보스라와 모압 땅 원근 모든 성읍에로다 25모압의 뿔이 잘렸고 그 팔이 부러졌도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8-25)

 

만군의 주님이 심판하러 오실 때, 누구에게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앉으라 하실 것 같습니까? 그 대상이 내가 되지 않도록 낮은 자리에서 겸손하게 살아갑시다. 모압의 멸망은 그들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⑴ 무너진 요새들(18-20)

 

모압의 멸망이 ‘디본’과 ‘아로엘’의 경험으로 구체화합니다. 모압을 파멸하는 자가 올라와 디본을 치고 그 요새들을 무너뜨렸기에 딸 디본의 주민은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와 ‘메마른 데’ 앉아야 합니다(18). 풍족하게 물을 사용하는 자들이 물이 없어 고통을 당합니다. 디본이 옛 영화를 모두 잃고 비참한 처지에 떨어집니다. 이미 요새들이 무너졌기에 피신할 곳도 없어졌습니다. 디본은 모압의 주요 도성으로 아르논 강에서 북동쪽으로 5킬로미터, 사해에서 동쪽으로 20km 정도 떨어졌습니다. 아로엘의 주민들에게는 세 가지 명령이 주어집니다(19). 아로엘 주민들은 길가에 서서 지켜보다가 도망하는 남자나 피하는 여자를 보면 무슨 일이냐고 물어야 합니다.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나름대로 대책을 세울 수 있기에 전시에는 정보가 중요했습니다. 아로엘 주민들은 너무 늦지 않게 적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파악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아로엘은 아르논 근처에 있는 성읍으로, 디본에서 남서쪽으로 대략 5km 떨어졌습니다. 전시 상황을 물어보는 아로엘 주민들에게 피난민들이 절망적 소식을 전해줍니다.

‘모압이 패하여 수치를 받나니 너희는 울면서 부르짖으며 아르논 가에서 이르기를 모압이 황폐하였다 할지어다’(20) 모압은 이미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되돌릴 수 있는 패배가 아닙니다. 통곡과 부르짖음만 남은 멸망입니다. 남은 일은 모압의 멸망 소식을 아르논에 가서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아로엘 남쪽을 지나가는 아르논은 모압 평지와 요단 분지를 지나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입니다.

 

⑵ 심판에 넘겨진 성읍들(21-24)

 

21-24절은 파멸하는 자가 무너뜨린 성읍의 목록입니다. 현재의 문맥에서는 피난민들이 아로엘 주민들에게 하는 계속된 답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압의 패배를 ‘심판’(21a), 곧 잘못에 대한 징벌로 이해합니다(13, 14). ‘평지’는 아르논 북쪽의 고원지대를 가리킵니다(8). 모두 열한 개의 성읍 이름이 나오는데, ‘디본’과 ‘느보’와 ‘기랴다임’을 제외한 아홉 성은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홀론’의 위치는 불분명합니다. ‘야사’는 ‘야하스’(34)와 같은 성읍으로 메데바와 디본 사이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메바앗’은 디본 동쪽에서 찾기도 하지만 불확실합니다. ‘벧디불라다임’과 ‘벧가물’과 ‘벧므온’은 여기에만 나오는 지명으로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읍들’을 의미하는 그리욧은 그모스 제의의 중심지로, 아모스 2:2에는 모압의 왕도로 나옵니다. 때로는 디본에서 북동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찾기도 하지만 불분명합니다. 모압의 보스라는 에돔의 보스라와는 구별되는 성읍으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모압 땅 원근 모든 성읍’은 위에 열거한 열 한 성읍을 포함한 모압의 모든 성읍을 가리킵니다.

 

⑶ 모압의 잘린 뿔(25)

 

‘모압의 뿔이 잘렸고 그 팔이 부러졌도다’(25)는 18-24절의 요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뿔과 팔은 힘을 상징합니다. 뿔이 잘리고 팔이 부러졌음은 모압이 힘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보여줍니다. 헤스본에 모인 적들이 계획한 대로 모압은 이제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없게 됐습니다(2).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은 철저하게 임합니다. 교만한 모압을 심판하시기 위해 세속적인 바벨론의 욕망을 이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도구인 바벨론의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심판의 칼을 멈추면 도리어 그들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모압의 교만의 뿔은 잘리고 그 필은 부러졌습니다. 하나님이 없이 세운 모든 것은 불타고, 더불어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은 울며 가슴을 칠 것입니다. 허탄한 것에 사로잡혀 살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날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 세상 나라는 사라지되, 하나님의 나라만은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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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8-01)


오만한 모압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예레미야 48장 1-10절


 

주변 정세나 정보에 민감하되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도움의 근원이신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힘에 기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모압은 자신이 이룬 사업과 재산만을 의지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당했습니다. 혹시 당신도 모압과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가장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 심판의 대상으로 애굽과 블레셋 다음으로 요단 동편 암몬과 에돔 사이에 있는 모압(Moab)이 등장합니다. 자부심이 대단했고 명성이 자자했던 모압도 하나님의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칼이 도착하자 우상을 숭배하던 나라 모압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고 황폐한 땅이 되었습니다. 골짜기에서 평원까지,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사람과 장소는 없을 것입니다.

모압의 멸망을 탄식함(1-6)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우리를 향한 깊은 연민과 사랑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자만과 죄를 경계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공의를 깊이 생각하며,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모압에 관한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오호라 느보여 그가 유린 당하였도다 기랴다임이 수치를 당하여 점령되었고 미스갑이 수치를 당하여 파괴되었으니 2모압의 찬송 소리가 없어졌도다 헤스본에서 무리가 그를 해하려고 악을 도모하고 이르기를 와서 그를 끊어서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하자 하는도다 맛멘이여 너도 조용하게 되리니 칼이 너를 뒤쫓아 가리라 3호로나임에서 부르짖는 소리여 황폐와 큰 파멸이로다 4모압이 멸망을 당하여 그 어린이들의 부르짖음이 들리는도다 5그들이 루힛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울고 호로나임 내리막 길에서 파멸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듣는도다 6도망하여 네 생명을 구원하여 광야의 노간주나무 같이 될지어다(1-6)

 

하나님께서 모압의 여러 성읍들이 겪는 곤경을 보시며 안타까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항상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입니다(창세기 19:30-37). 사해 동편에 포도 재배와 목축업으로 풍부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동화되어 열성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런 모압에게 선지자 예레미야는 모압 전역이 재난을 겪게 될 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⑴ 모압 북쪽의 침략(1-3)

 

모압의 신탁이 특정 성읍들의 멸망으로 탄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는 ‘오호라 느보여 그가 유린 당하였도다 기랴다임이 수치를 당하여 점령되었고 미스갑이 수치를 당하여 파괴되었으니’(1b)라고 시작합니다. 멸망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멸망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에는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처음 나오는 ‘느보’는 모세가 올라가서 가나안을 보고 숨을 거둔 느보 산(신명기 34:1-6) 근처에 세워진 성읍으로, ‘메데바(Medeba)’에서 북서쪽으로 대략 5km, 헤스본에서 남서쪽으로 8km정도 떨어졌습니다. ‘가랴다임’은 메데바에서 서쪽으로 대략 15km 떨어졌습니다. 땅 분배 기사에의하면 브도(민수기 32:3,38)와 기랴다임(여호수아 13:19)은 르우벤 지파의 영토에 속했습니다. ‘미스갑’은 원래 언덕이나 높은 곳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산지가 많은 모압의 지형적 특징을 반영합니다.

적의 공격에 느보와 기랴다임이 수치를 당하고 점령당하는 것으로 이미 모압의 명성은 끝났습니다. 유리한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외적에 점령당한 적이 거의 없었던 모압이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파국적 재난에 직면합니다. 적들이 헤스본에서 모압을 침략할 계획을 세웁니다(2). 이들의 계획은 모압이 더는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없게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메데바에서 북동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헤스본은 원래 아모리 사람의 왕 시혼의 도성이었습니다(참조, 민 21:25-30). 여호수아 13:26에 의하면 갓 지파에, 13:17에 의하면 르우벤 지파에 속했습니다. 예레미야 49:3에는 암몬의 성읍으로 나옵니다. 아마도 주인이 자주 바뀌는 국경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헤스본에서 세운 계획에 따라 모압 침략이 진행됩니다. 느보와 기랴다임 다음으로 맛멘이 희생당합니다(2b). 맛멘의 주민이 다 죽어 사람 소리가 사라집니다. 적의 칼이 주민들을 뒤쫓기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맛멘은 여기에만 나오는 성읍으로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네번째 희생자는 호로나임입니다. 호로나임에서 ‘황폐와 큰 파멸이로다’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립니다(4). 호로나임이 적의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되고, 그곳 주민들이 절망적으로 부르짖습니다. 호로나임의 위치도 불분명합니다. 모압의 남부 지방에 있었으리라 추측합니다. 적의 진격이 거침없습니다. 적이 모압의 북부 지방을 짓밟고 남부까지 유린합니다. 모압의 온 땅이 적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2) 모압의 부르짖음(4-5)

 

젊은이들이 모압이 멸망했다고 부르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립니다(4). 젊은이들이 적에 맞설 생각도 못하고 두려움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울부짖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울며 루힛 고개를 올라가고, 호로나임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파멸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듣습니다(5; 참조. 사 15:4). 적이 호로나임을 친다는 소리를 듣고 루힛 사람들이 피난길에 오르는데, 루힛 고개에서 벌써 호로나임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루힛의 위치도 불분명하지만, 일반적으로 호로나임 아래의 모압 남부에서 찾습니다. 전란에 휩싸인 고향을 떠난 피난민들이 안전한 곳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헤맵니다. 이들은 아마도 남쪽으로 내려가 에돔이나 유다 남부로 가려 했던 것 같습니다.

 

(3) 도망(6)

 

모압의 멸망은 확정됐기에 살기 위해서는 도망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들에게 살길을 알려주십니다. ‘도망하여 네 생명을 구원하여 광야의 노간주나무 같이 될지어다’(6). 적들이 의도한 대로 모압은 더는 나라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모압의 온 땅이 적들에게 유린당할 것이기에 지금까지 살아온 성읍을 떠나야 합니다. 적의 칼이 뒤따르지 않는 광야로 들어가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모압의 멸망 예언(7-9)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시는 분으로, 범죄한 사람들에게 심판이 선포되었지만 그들의 고통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하십니다. 이는 온 땅의 모든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심판 속에서도 함께하며 모두에게 미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깊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7네가 네 공작과 보물을 의뢰하므로 너도 취함을 당할 것이요 그모스는 그 제사장들과 방백들과 함께 포로되어 갈 것이라 8파멸하는 자가 각 성에 이를 것인즉 한 성도 면치 못할 것이며 골짜기는 훼파되며 평원은 파멸되어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로다 9모압에 날개를 주어 날아 피하게 하라 그 성읍들이 황무하여 거기 거하는 자 없으리로다(7-9)

 

애굽과 블레셋의 신탁에서는 이들이 심판에 떨어지는 이유가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는데, 모압의 신탁에서는 심판의 이유가 여러 곳에서 제시됩니다.

 

(1) 그모스의 유배(7)

 

7a절에 따르면 자신의 능력과 업적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업적과 보물’을 의지했기에 모압은 정복당합니다. 곧 모압의 교만이 모압을 멸망에 빠뜨립니다(29), ‘보물’은 모압이 축적해놓은 경제적 부를 가리키고, ‘업적’은 아마도 군사력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모압은 주요 산지를 요새화하여 방어시설을 갖춰놓고 군사력을 강화했기에 적의 침략에 자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만에 빠져 나라를 멸망시킨 지배계층에 속한 자들이 징벌을 받습니다. 모압의 신 그모스가 자신의 제사장들과 고관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갑니다(7b).

 

(2) 모압의 부르짖음(4-5)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 그모스까지 유배를 당합니다. 신상을 약탈해가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일반적이었습니다. 신상이 값비싼 귀금속으로 만들어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패배한 민족의 신상은 승리한 민족의 신이 우두머리로 있는 만신전의 낮은 자리에 놓였습니다(참조, 삼상 5:1). 정치적으로 종속된 관계가 신학적으로 정당화됐습니다. 그모스는 모압 민족의 신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이방 여자를 위하여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어주었는데(참조. 왕상 11:7),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시야 왕이 제거할 때까지 계속 그모스의 산당을 찾아갔던 것 같습니다(참조. 왕하 23:13). 모압에 임하는 재난은 전면적이어서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파멸하는 자’가 성읍에 이르면 어떤 성읍도 멸망을 피하지 못하고, 골짜기가 멸망하고 평지는 파멸됩니다(8). 모압의 모든 성읍이 적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함락당합니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적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파멸하는 자’(18,32)로 대신한 것 같습니다. 파멸하는 자에 의해 모압이 철저하게 파괴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모압에게 결정적인 것은 ‘파멸하는 자’가 곧 온다는 사실입니다. ‘골짜기’는 요단 분지를, ‘평지’는 아르논 북쪽의 고원지대를 가리킵니다.

 

(3) 도주(9)

 

6절에서 모압 사람들에게 광야로 도망해 생명을 구하라고 명령하신 여호와께서 9절에서는 ‘너희’에게 ‘모압에게 날개를 주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수사적 명령이기에 ‘너희’의 정체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뒤쫓는 칼에 죽지 않으려면 모압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빨리 성읍을 떠나 도망해야 합니다. 절망하거나 울부짖을 여유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건 힘을 내서 적이 미치지 못하는 광야로 도망해야 합니다. 도망하지 않고 성에 남는다면 재난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압의 성읍들은 폐허가 되고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단호한 심판(10)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고 완전할 것입니다. 심판의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심판이 가려선 안 됩니다. 심판의 칼을 멈추면 심판자들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심판을 위임 받은 자들은 철저히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심판은 철저하고 냉정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도구들이 철저히 그 임무를 수행하길 원하십니다.

 

10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10)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은 철저하게 임합니다. 교만한 모압을 심판하시기 위해 세속적인 바벨론의 욕망을 이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도구인 바벨론의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심판의 칼을 멈추면 도리어 그들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하는 사람이 예언자로 바뀝니다. 예언자가 여호와의 일을 소홀히 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 ‘여호와의 일’은 모압을 침략해 폐허로 만드는 일로, 3절의 헤스본에서 모압을 침략할 계획을 세운 자들, 곧 8절의 ‘파멸하는 자’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모압의 멸망이 여호와의 의지에 속하기에 심판의 도구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모압이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자비를 베풀거나 연민을 갖지 말고 칼을 휘둘러야 합니다. 겉으로는 모압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모압의 멸망은 어떤 경우에도 모압이 떨쳐낼 수 없는, 여호와께서 씌우신 운명의 굴레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모압의 멸망과 하나님의 심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가 자만과 죄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며, 모든 악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가지시며, 심판 속에서도 긍휼을 잃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회개하며, 그분의 긍휼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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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7-01)

 


역사의 주인이신 사랑의 하나님

예레미야 47장 1-7절


 

한 젊은이가 이웃집에 살고 계신 신실한 그리스도인 할머니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할머니에게 제일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여쭈었습니다. 할머니는 서슴지 않고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 1:1)라고 답했습니다. 청년은 놀라서 다시 ‘그 많은 성경 중에서 제일 처음에 있는 성경이라니요?’라고 반문했습니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고 그 이유를 ‘그 말씀을 신뢰할 수만 있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리 어렵지 않지!’라고 덧붙였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주십니다(46:1). 그동안 첫 번째 대상이 애굽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며, 다음으로 블레셋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옆구리에서 눈엣가시 같던 블레셋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북방에서 바벨론을 내려오게 하여 블레셋 온 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시대적 배경(1)

블레셋은 이스라엘 옆에서 자주 그들을 괴롭혔고, 이스라엘은 그들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시 같은 존재’로 이스라엘이 잘못했을 때, 그들을 일깨우신 방법으로 블레셋을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할 때는 조금도 위협적인 세력이 되지 못했지만, 불순종할 때는 그들을 강하게 하여서 이스라엘에게 고난을 주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블레셋을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1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블레셋 사람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1)

 

이스라엘의 두번째 숙적인 블레셋 사람들에 대하여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데(이사야 14:29-31; 에스겔 25:15-17; 스바냐 2:4-7; 스가랴 9:5-7), 그 시점이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로 제시됩니다. 때가 바로와 관련한 사건을 기준으로 해서 주어지지만, 블레셋을 공격하는 주체는 남쪽의 애굽이 아니라 북쪽에서 내려오는 민족입니다. 그 예언대로 철저히 멸망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애굽이 가사를 침략하기 전에 블레셋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라는 신탁이 예레미야에게 주어집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그 사건 다음에 발생할 사건이 계시로 알려 집니다. 애굽에 의한 가사의 침략뿐만 아니라 바벨론에 의한 블레셋의 멸망이 여호와의 역사 의지에 속함을 시사해줍니다. 바로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에 계시의 시점을 한정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탁에도 역사적 사건과 관련한 구체적 언급이 없고, 예레미야 시대에 애굽이 블레셋을 침략했다는 언급은 여기를 제외하면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애굽의 자료에도 관련된 언급이 없습니다. 자료의 부재로 신탁이 주어진 때에 관해서는 대략적인 추정만 가능합니다. 간접 자료에 근거한 추정이기에 다양하게 제안됩니다. 프삼메티쿠스 1세(주전 664-610)가 통치 말년에 아스돗을 점령할 때 가사도 같이 공격했습니까? 609년과 605년에 바벨론과 싸우기 위해 시리아 북쪽으로 출병했던 느고(주전 610-595)가 돌아오는 길에 가사를 쳤습니까? 601년 겨울 바벨론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 느고가 올라가서 가사를 공격했습니까? 바벨론에 의한 블레셋 침략이 바벨론 자료에 나오는 604년 바벨론에 의한 아스글론 정벌과 관련된 사건입니까? 아무튼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은 애굽이 가나안에 대한 권리를 여전히 주장하고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군대(2-3)

우리의 심판 날 우리를 도와줄 분은 우리를 변호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만을 참 도움이요 참 의지로 삼아야 합니다. 블레셋을 심판하시는 날 두로와 시돈에 남아있던 불레셋을 도울 자들을 끊으실 것입니다.

 

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물이 북쪽에서 일어나 물결치는 시내를 이루어 그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그 성읍과 거기에 사는 자들을 휩쓸리니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그 땅 모든 주민이 울부짖으리라 3군마의 발굽 소리와 달리는 병거 바퀴가 진동하는 소리 때문에 아버지의 손맥이 풀려서 자기의 자녀를 돌보지 못하리니(2-3)

 

북쪽에서 바벨론이 홍수처럼 밀려와 블레셋 땅을 덮치듯이, 적군이 몰려와 파괴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적군의 전차와 말발굽 소리에 블레셋 사람들이 공포에 떨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⑴ 홍수의 비유(2)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를 사용해서 다시금 블레셋에 대한 심판이 여호와의 말씀임을 강조합니다. 46:7-8에서 시리아 북부 지방으로 원정을 떠나는 애굽 군대의 위용을 나일 강의 범람에 비유한 것처럼, 블레셋을 침략하는 군대가 거세게 넘쳐흐르는 홍수에 비유됩니다(참조. 이사야 8:7, 30:28). 그 비유는 북쪽에서 불어난 물이 넘쳐흐르는 강물이 되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립니다. 애굽을 침략하는 적도 ‘북으로부터’ 오는데(46:20), 블레셋을 몰살하는 적도 ‘북쪽에서’ 일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북방에서 바벨론을 불러와 블레셋 전역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애굽이나 블레셋의 입장에서 북쪽은 시리아 북부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신학적 의도에서 바벨론에 의한 블레셋의 멸망을 바로의 가사 공격에 연결시킨 것 같습니다. 바로가 가사를 칠지라도 블레셋은 애굽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북쪽에서 오는 바벨론 군대에 넘겨주기로 하셨기에 바로의 가사 침략은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납니다. 넘쳐흐르는 강물이 땅과 그곳을 가득 메운 것을, 성읍과 그 주민들을 휩쓸어갑니다. 블레셋 전역을 뒤덮으며 공격해오는 적들을 보면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울부짖고 통곡합니다. 침략자들의 압도적인 세력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부짖기만 합니다.

 

⑵ 사실적 기술(3)

 

위에서 비유로 표현했던 모습들이 사실적 표현으로 바뀝니다. 군마의 발굽 소리와 병거들의 내달리며 내는 요란한 바퀴 소리에(참조 겔 26:10-11) 아버지들은 맥이 풀려 자식들을 돌보지도 못합니다. 적의 위세에 놀려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패한 애굽 군대는 도망이라도 치는데(46:5,16), 블레셋 사람들은 공포로 온몸에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심판의 날이 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날을 감당할 재물도, 권력도, 명예도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도 자식을 위해서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더 늦기 전에 자식에게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을 준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블레셋의 멸망(4-5)

하나님 없는 삶에 남는 것은 죽음의 슬픔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화려한 이력 뒤에 따라오는 지독한 고독과 우울과 공허함도 불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블레셋에 죽음과 슬픔이 임할 것을 예언합니다.

 

4이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며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는 바 도와 줄 자를 다 끊어 버리시는 날이 올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갑돌 섬에 남아 있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리라 5가사는 대머리가 되었고 아스글론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가 잠잠하게 되었나니 네가 네 몸 베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4-5)

 

블레셋을 심판하시는 날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던 블레셋을 도울 자들을 끊으실 것입니다. 그들의 고향 갑돌마저 진멸하심으로써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철저히 멸하실 것입니다.

 

⑴ 진멸의 날(4)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적들의 무서운 공격이 더 절망적인 것은 그 일을 여호와께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블레셋 사람을 모두 멸하고 두로와 시돈의 지원군 가운데 남은 자들마저 모두 끊어버리는 그날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3a사역; 참조 46:11, 21) 페니키아의 도시국가 시돈과 두로가 블레셋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바벨론에 맞서 연합전선을 구축했던 것 같습니다.

블레셋이 두로와 시돈의 도움을 기대하겠지만, 이는 헛된 소망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지원군을 보낼지라도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여호와께서 갑돌 섬의 남은 자들인 블레셋 사람들을 멸하십니다. ‘갑돌 섬에 남아 있는’은 오해의 여지가 있어 ‘갑돌 섬의 남은 자들’로 번역으로 ‘블레셋 사람들’과 동격입니다. 구약성경의 전통에 따르면 갑돌은 블레셋의 출발지였습니다(참조. 아모스 9:7, 참조. 신명기 2:23).

 

⑵ 죽음의 애도(5)

 

예언자가 블러셋 사람의 입장에서 블레셋의 절망적 상황을 기술한 것입니다. ‘기사는 머리를 밀고 아스글론은 입을 다문다. 그들의 골짜기에 남은 자(들)야, 너(희)는 언제까지 자기 몸에 상처를 내려는가?’(5절의 사역) 가사는 블레셋의 다섯 성읍(에그론, 아스돗, 가드, 아스글론, 사사) 가운데 가장 남쪽, 곧 애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지중해에 면해 있는 성읍으로 남부 팔레스나에서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아스글론 가사에서 북쪽으로 대략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성읍입니다. ‘그들의 골짜기에 남은 자(들)’는 블레셋의 해안평야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가사와 아스글론을 포함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거주지가 전쟁으로 폐허가 됩니다. 머리를 밀고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는 죽은 사람을 애통해하는 제의적 의식에 속합니다. ‘입을 다물다’는 죽음의 침묵을 시사합니다. 아스글론의 주민들이 다 죽어 성읍이 조용해집니다. 가사와 아스글론을 포함해 해안평지에 살던 블레셋 사람들이 다 죽었기에 (의인화된) 성읍이 애통해합니다.

심판 날이 오면 가사는 죽음을 애도하며 삭발을 할 것이고, 아스글론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어 정적만 감돌 것입니다. 남은 사람들은 자기 몸을 베며 죽음을 슬퍼할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에 남는 것은 죽음의 슬픔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화려한 이력 뒤에 따라오는 지독한 고독과 우울과 공허함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중독이 아니면 견뎌낼 수 없는 권태의 고통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칼(6-7)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에 안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서 죄악을 멈추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한 대로 블레셋을 여호와께서 치실 것입니다.

 

6오호라 여호와의 칼이여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네 칼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쉴지어다 7여호와께서 이를 명령하셨은즉 어떻게 잠잠하며 쉬겠느냐 아스글론과 해변을 치려 하여 그가 정하셨느니라 하니라(6-7)

 

4b절은 블레셋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주체로 여호와를 언급했는데, 여기서는 ‘여호와의 칼’이 심판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6절에서 예레미야는 블레셋 사람의 입장에서 탄식하며 의인화된 여호와의 칼에게 직접 말합니다. ‘오호라 여호와의 칼이여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네 칼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쉴지어다.’ 하나의 탄식 다음에 세 개의 명령이 뒤따릅니다. ‘여호와의 칼’은 블레셋을 심판하시려고 여호와께서 보내신 칼로, 북쪽에서 오는 바벨론 군대를 가리킵니다. 칼이 여호와의 원수들(애굽 군대)을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는’(46:10) 것처럼 여호와의 칼이 쉬지도 않고 블레셋이 완전히 멸절하기까지 칩니다. ‘쉬다’에 의해 블레셋의 운명과 야곱의 운명이 대조적으로 연결됩니다. 46:27의 ‘평안하며’도 동사 ‘쉬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야곱은 돌아와 쉬지만, 블레셋을 치는 여호와의 칼은 쉬지 않습니다. 세 개의 명령(문자적으로, ‘네 칼집에 들어가 가만히 쉬며 조용히 있어라’)을 사용해 재난이 그만 멈춰주기를 간구합니다.

7절은 6절의 예언자가 대신한 블레셋의 탄식에 대한 답변입니다. 직역해보면, ‘여호와께서 그것에게 명령하셨는데, 그것이 어떻게 쉴 수 있겠는가? 아스글론과 해안가를 치시려고, 그분께서 거기로 그것을 부르셨다.’(7), 블레셋 사람들은 칼이 흡족하게 마셨기에 쉬기를 바라지만 헛된 기대에 불과합니다. 북쪽에서 오는 적은 여호와께서 명령한 ‘여호와의 칼’이기에 자신들에게 맡겨진 과업을 완수하기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바벨론을 불러 아스글론과 블레셋의 해안 지역을 침략하게 하십니다. 블레셋의 경우에는 애굽의 경우(46:26)와 달리 심판 이후의 회복에 관한 약속이 나오지 않습니다. 멸하시는 주체(4)와 명령하시는 분(7)이 여호와라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블레셋의 멸망이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블레셋을 내려친 바벨론의 칼은 여호와의 칼이었습니다. 그 칼에 쓰러져 블레셋이 잠잠해졌습니다. 온 블레셋이 다 심판을 받을 때까지 그 칼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고 강력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계속 듣고도 돌이키지 않은 블레셋은 심판의 칼을 받게 될 것이고, 아무도 블레셋을 도와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요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 하나님의 묵인이나 방관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멈추고 돌아가야 합니다.


작은 힘으로 이웃을 괴롭혔던 블레셋은 어디 갔습니까? 더 강한 자의 칼에 비둔한 몸뚱이가 나뒹굴고 있지 않습니까? 알량한 권력으로 약한 자를 괴롭힌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경고에 곧바로 돌이켜야 합니다. 심판 날 도와줄 분은 변호해주실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요일 2:1). 그분만이 참 도움이요 참 의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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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6-02)


역사의 주인이신 사랑의 하나님

예레미야 46장 13-28절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 우리 민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우리나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우리 민족을 두고 무엇인가를 결정하려 합니다. 우리와 그들이 전혀 상관없는 것 같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너무나 밀접히 얽혀 있어서 이 문제는 그들의 문제가 되고, 그들의 문제 또한 당장 우리의 문제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이와 같은 현장을 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나 예레미야 시대나 모두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모든 세상이 운행됨을 믿기 때문입니다. 참 왕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 없음을 오늘도 성경을 통해서 배웁니다.

 

  • 갈그미스의 참패는 애굽의 운명의 서곡에 불과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애굽 본토를 침략하여 폐허로 만들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의 공격으로 애굽은 거의 죽은 몸이 됩니다.

 

바벨론의 애굽 침략(13-24)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을 대상은 애굽이나 바벨론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였습니다. 때가 늦기 전에 세상의 허풍에 속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애굽의 멸망이 선포되고 있는 46장은 전부 애굽의 심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이스라엘을 말씀하십니다.

 

13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와서 애굽 땅을 칠 일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말씀이라 14너희는 애굽에 선포하며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에 선포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굳건히 서서 준비하라 네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 15너희 장사들이 쓰러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서지 못함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몰아내신 까닭이니라 16그가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시매 사람이 사람 위에 엎드러지며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포악한 칼을 피하여 우리 민족에게로,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자 하도다 17그들이 그 곳에서 부르짖기를 애굽의 바로 왕이 망하였도다 그가 기회를 놓쳤도다 18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르시되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그가 과연 산들 중의 다볼 같이, 해변의 갈멜 같이 오리라 19애굽에 사는 딸이여 너는 너를 위하여 포로의 짐을 꾸리라 놉이 황무하며 불에 타서 주민이 없을 것임이라 20애굽은 심히 아름다운 암송아지일지라도 북으로부터 쇠파리 떼가 줄곧 오리라 21또 그 중의 고용꾼은 살진 수송아지 같아서 돌이켜 함께 도망하고 서지 못하였나니 재난의 날이 이르렀고 벌 받는 때가 왔음이라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13-24)

 

바벨론이 애굽을 공격하여 패배시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애굽의 용사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며, 그들의 땅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재앙을 내리실 것이며, 애굽은 바벨론의 손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⑴ 도입부(13)

 

앞에서는 애굽이 원정을 떠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바벨론이 원정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옵니다. 전쟁의 무대가 이방 땅에서 본토로 바뀝니다. 역사를 계획하시고 그대로 집행하시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애굽 땅을 치러 올 것을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십니다(13; 참조 43:11).

 

⑵ 결정된 패배(14)

 

애굽 왕 느고의 갈그미스 원정과 달리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애굽 원정이 여호와의 의지로 선포됩니다.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가 바벨론 군대의 침략을 받습니다(14). 칼이 사방을 삼키려 하기에(10) 전열을 가다듬고 싸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세 성읍의 이름이 나오는 44:1과 함께 읽으면, 바벨론의 애굽 침략은 다른 한편으로는 애굽에 사는 유다 백성의 우상숭배와 불순종을 심판하는 전쟁입니다.

 

⑶ 바로의 패배(15-17)

 

애굽을 침략한 바벨론 군대를 보게 될 때 여호와의 말씀과 애굽의 유다 백성의 주장 가운데 누구의 말이 맞았는지 알게 됩니다(43:28). 적의 공격 앞에 방어선이 허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몰아내시기에, 용맹한 자들도 버티지 못하고 거꾸러집니다(15). 여호와께서 바벨론 군대 편에 서서 함께 싸우시기에 살기 위해서는 도망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16). 징집된 자들과 동맹군으로 참여한 자들이 더 이 상의 싸움이 소용없음을 보고 전선을 이탈해 각자 자기 민족이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애굽의 왕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바벨론과 싸웠던 바로가 놀림을 당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애굽 왕 바로를 때를 놓친 허풍쟁이라고 불렀다’(17절의 사역). 유능한 왕이라면 주어진 기회를 잡아야 하는데 바로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애굽을 패배의 수렁에 빠뜨립니다. 대적의 침입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닙니다. 왕이신 여호와께서 당신의 생명을 두고 하신 약속입니다.

 

⑷ 유배와 파괴(18-19)

 

‘그가 과연 산들 중의 다볼 같이, 해변의 갈멜 같이 오리라’(18). ‘쳐들어오는 자’를 이스라엘에 있는 다볼 산과 갈멜 산에 비유한 이유는 아마도 이 산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잘 알려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볼 산과 갈멜 산은 그 높이가 각각 549미터와 518미터에 불과했지만, 이스르엘 평지를 굽어보거나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위용 있게 보였습니다.

특이하게 여호와를 ‘왕’으로 부릅니다(참조. 8:19). 때를 놓친 애굽 왕과 때를 정하지는 만군의 여호와 왕의 대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애굽 왕은 온 땅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정하신 때를 따를 수박에 없습니다. 바벨론의 침략과 애굽의 패배가 확정됐기에 유배를 대비해 짐을 챙겨놓는 것이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19a 참조. 10:17; 에스겔 12:3). 애굽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놉이 폐허가 된다(19b). 유다가 의존했던 애굽의 운명이 유다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⑸ 패배의 비유적 서술(20-23)

 

20-22절은 동물의 비유를 사용해 애굽의 패배를 선포합니다.

먼저 바벨론에 의해 침략을 당하는 애굽을 쇠파리 떼에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암송아지에 비유합니다(20). 여기서 애굽 백성이나 땅의 상징으로 사용된 ‘암송아지’는 여신 하도르(Hathor)를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심히 아름다운’, 곧 주변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애굽의 부요함이 적들의 침략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침략해 오는 방향을 보여주는 ‘북으로부터’는 애굽의 운명을 유다의 운명에 연결합니다(참조.1:13-15). ‘줄곧 오리라’는 침략이 반복될 것을 보여줍니다. 쇠파리 떼가 암송아지 곁을 떠나지 않고 괴롭히듯이 바벨론 군대가 경제적으로 번성한 애굽을 약탈하기 위해 거듭 침략합니다. 다음으로는 북으로부터 침략해오는 적에게 패해 도망하는 용병들이 ‘살진 수송아지’에 비유된다(2a; 참조 28:24, 말라기 3:20). 특별 대우를 받았지만 정작 필요한 때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잘 훈련받고 충분히 무장한 용병들도 적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등을 돌려 함께 도망합니다. 이날은 그들에게 재난이 닥치는 날이요 그들을 벌하는 때이기에(21b; 참조 10) 달리 어찌해볼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애굽을 ‘뱀’에 비유합니다. ‘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라’(22a). 벌목꾼이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하면 숨어 있던 뱀이 위험을 느끼고 소리를 죽여 재빨리 도망하듯이 애굽 군대 가고 그렇게 도망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뱀의 비유는 고대인들의 일상적 경험을 반영한 것이지만, 암송아지처럼 뱀(코브라)도 애굽의 종교와 왕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바로의 왕관 중에서는 전면에 수호신과 힘을 상징하는 코브라를 새겨 넣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22b-23절에서는 비유의 종류가 바뀐다. 바벨론 군대가 손에 도끼를 든 벌목꾼에, 애굽이 나무로 가득찬 수풀에 비유됩니다. 숲이 수많은 나무로 빽빽이 들어찼을지라도 메뚜기보다도 많은 벌목꾼이 베어 넘기기에 하나도 남아나지 못한다 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고 북쪽 백성의 손에 넘겨진다(24). 온 땅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애굽을 주기로 하셨기에 애굽이 패배의 수치를 피할 길은 없습니다.

 

바벨론의 손에 넘겨지는 애굽(25-26)

심판으로 초토화시키는 것도 하나님의 결정이지만, 다시 그들을 회복하여 사람 살 땅이 되게 하실 것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북쪽에서 내려와서 애굽을 심판하시는 것도 하나님입니다.

 

25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노의 아몬과 바로와 애굽과 애굽 신들과 왕들 곧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 26내가 그들의 생명을 노리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 종들의 손에 넘기리라 그럴지라도 그 후에는 그 땅이 이전 같이 사람 살 곳이 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5-26)

 

심판의 대상이 확대됩니다. 애굽과 바로를 넘어 애굽의 신들까지 벌을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모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 종들의 손에 넘기십니다. 애굽의 운명이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애굽에 심판 이후의 회복이 약속됩니다. 여호와의 징벌 후에 애굽은 이전 같이, 사람이 살게 됩니다. 문맥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때(27-28) 애굽도 참여하게 됩니다. ‘그를 의지하는 자들’(참조, 열왕기하 18:21, 이사야 36:6)은 바로의 봉신들을 가리키고, 예레미야서의 문맥에서는 여호와의 권면과 경고를 무시하고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애굽으로 내려간 요하난 일행을 포함한 유다 사람들을 가리킵니다(42-44장). 18왕조 시대(주전 1552-1306) 제국의 수도였던 노(참조, 겔 30:14-16; 나 3:8)는 그 후에도 왕들의 무덤과 성소가 있는 장소로 그 중요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어로 테베로 부르는 노는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대략 740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도성으로, 아몬 신을 섬겼습니다. 아몬은 노에서 때로는 레와 혼합되어 신들의 왕인 아몬-레(Amon-Re)가 되어 제국의 신으로 섬겨지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구원(27-28)

첫 출애굽할 때도 애굽에 열 재앙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전했듯이 이번에도 이스라엘을 지켜주실 것이며, 애굽의 재앙이 도리어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 백성의 죄를 묵인하시거나 공의를 저버리겠다는 뜻은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27내 종 야곱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보라 내가 너를 먼 곳에서 구원하며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평안하며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라 그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28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종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나라들은 다 멸할지라도 너는 사라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7-2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위로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먼 땅에서 구원하여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그들을 지키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적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나, 이스라엘은 징계를 받을지라도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⑴ 야곱의 귀환(27)

 

애굽의 신탁 다음에 야곱의 회복에 관한 말씀이 뒤따릅니다. 여호와께서 이방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야곱의 자손들을 다시 고토 로 불러 모아 안전하게 살게 해주십니다.

 

⑵ 야곱과 함께하는 여호와(28)

 

야곱을 한정하는 ‘내 종’은 여호와와 야곱/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 곧 야곱/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속했음을 보여줍니다. 먼 곳에서는 지리적 거리감뿐만 아니라 신학적 거리감도 포함합니다. 가나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여호와로부터도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먼 곳에서 돌아옴은 여호와와 야곱/이스라엘의 거리가 좁혀졌음을, 곧 관계가 회복됐음을 시사해준다. 유배지에서 야곱을 해방해 고향으로 데려오신 여호와께서는 민족들을 멸망시켜 이들이 두려움 없이 평안히 살 수 있게 해주십니다. 야곱도 죄를 범하면 징벌을 받기는 하겠지만(참조 출애굽기 34:7), 민족들과 달리 멸망에 떨어지지는 않습니다(참조 4:27; 5:10,18). 야곱은 그분의 종으로 그분의 보호 아래 있기에 여호와께서는 ‘법도대로’(러미슈파트) 징계하십니다(10:24). 아마도 교육적 목적의 제한적 징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참조. 31:18: 신 8:5). 27-28절은 30:10-11의 문자적 반복입니다. 애굽의 구원을 약속하는 26b절과 함께 읽도록 여기에서 다시 반복된 것 같습니다.


바룩의 바람은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재난과 심판이었습니다. 백성의 고통을 아파하는 마음은 귀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심판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인정해야 합니다. 의를 위해 살되, 하나님의 주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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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6-01)

 


애굽을 심판하신 하나님

예레미야 46장 1-12절


 

역사 속에서 한때 세계를 호령하며 힘을 과시했던 대제국들이 있습니다. 동양에는 고려와 같은 나라들이 있고, 성경 속에는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제국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 제국은 대부분 과거의 역사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대제국들이 종적을 감춘 이유는 다양한 요인—내부의 부패, 외부의 침략,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복합적입니다. 결국, 권력과 번영이 영원하지 않다는 교훈을 줍니다.

 

  • 본문부터 51장까지는 여섯 장에는 민족들의 신탁이 수집돼 있습니다. 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론 나라 민족들의 운명도 결정하시는 분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신 여호와께서 민족들도 심판하십니다.

 

시대적인 배경 : 신바벨론 제국(주전 626-539)의 등장과 애굽

626년 갈대아인 족장 나보폴라살이 바벨론 도시민들의 지지로 바벨론의 왕이 되지만, 그가 실질적인 바벨론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전투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는 616년부터는 앗수르 지역으로 전선을 확대합니다. 유브라데 중류 지역의 콰블리누(Qablinu)에서 앗수르 군대에 패배를 안기지만, 앗수르를 도와주러 온 애굽 군대에 의해 다시 쫓겨납니다. 메대가 나보폴라살에 한발 앞서 614년에 앗수르를 점령합니다. 나보폴라살에게 성과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메대와 불가침 상호협조 조약을 맺습니다. 612년에 그는 메대와 연합하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점령합니다. 니느웨가 점령당하자 앗수르의 왕자 앗수르-우발리트(Aššur-uballit)는 시리아 북부 지방에 있는 하란으로 옮겨 생존을 도모합니다. 메대와 바벨론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애굽이 싸움에 개입해 612년부터 605년까지 바벨론 군대에 맞서 곳곳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그 사이 주전 610년 하란이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에 의해 파괴됩니다. 나보폴라살은 유브라데 상류에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609-607년 사이에 갈그미스 바깥에서 애굽과 싸움을 벌이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합니다. 연로해진 나보폴라살은 지휘권을 아들 느부갓네살에게 넘겨줍니다. 느부갓네살은 주전 605년 갈그미스의 애굽 군대를 기습하여 궤멸합니다(참조, 렘 46:2). 갈그미스에서의 패배로 애굽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지배는 사실상 막을 내립니다.

 

이방 나라들에 대해 말씀(1)

이스라엘뿐 아니라 열국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입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을 요구하시고, 그 반응에 따라 판단하십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알기 원하십니다.

 

1이방 나라들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1)

 

예레미야 46장 1절은 예레미야 46-51장에 나오는 이방 나라들, 곧 이집트,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다마스커스, 게달과 하솔, 엘람, 바빌로니아를 향한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이끄는 표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열방의 예언자로 부르신 예레미야에게 여러 나라들에 대해 친히 말씀하셨음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46-51장에 수집된 민족들의 신탁 표제입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시대 이스라엘과 관련 있는 민족들에 관해서도 여호와의 의지를 선포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주로 당신 백성의 운명에 관심을 두시지만, 그분의 통치권은 가나안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온 땅이 그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분께서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고 땅 위의 역사를 이끌어가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신다는 주장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이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애굽과 바벨론 같은 강대국도 여호와의 결정에 종속된 제한적 권력입니다. 오직 여호와만 절대 권력을 행사하십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수집한 단락 다음에 민족들의 심판이 수집된 단락이 뒤따르는 것은 일반적 순서에 속합니다. 민족들 역시 동일하게 여호와의 진노에 떨어집니다. 민족들의 신탁은 가까운 문맥에서는 45:4에, 넓은 문맥에서는 1:10에 연결됩니다.

 

갈그미스에서 애굽의 참패(2-12)

교만은 파멸을 초래하며, 거만한 마음은 결국 넘어짐을 가져옵니다(잠 16:18). 아무리 강력한 제국이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자신을 낮추며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로써 교만을 피하고 겸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2애굽에 관한 것이라 곧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유브라데 강 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한 애굽의 왕 바로느고의 군대에 대한 말씀이라 3너희는 작은 방패와 큰 방패를 예비하고 나가서 싸우라 4너희 기병이여 말에 안장을 지워 타며 투구를 쓰고 나서며 창을 갈며 갑옷을 입으라 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본즉 그들이 놀라 물러가며 그들의 용사는 패하여 황급히 도망하며 뒤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어찜이냐 두려움이 그들의 사방에 있음이로다 6발이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사도 피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 북쪽에서 유브라데 강 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는도다 7강의 물이 출렁임 같고 나일 강이 불어남 같은 자가 누구냐 8애굽은 나일 강이 불어남 같고 강물이 출렁임 같도다 그가 이르되 내가 일어나 땅을 덮어 성읍들과 그 주민을 멸할 것이라 9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 없이 달려라 용사여 나오라 방패 잡은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이여 나올지니라 하거니와 10그 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쪽 유브라데 강 가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것임이로다 11처녀 딸 애굽이여 길르앗으로 올라가서 유향을 취하라 네가 치료를 많이 받아도 효력이 없어 낫지 못하리라 12네 수치가 나라들에 들렸고 네 부르짖음은 땅에 가득하였나니 용사가 용사에게 걸려 넘어져 둘이 함께 엎드러졌음이라(2-12)

 

예레미야는 이제까지 이웃 나라들에게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던 애굽 군대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빌론 군대에게 크게 패배할 것을 예언합니다. 먼저 단락의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3-6절은 애굽 군대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대패하는 모습을 신탁으로 선포하고, 7-9절은 갈그미스로 올라가는 애굽 군대의 위용을 11-12절은 회복이 불가능하게 치명적 피해를 입은 애굽의 처참한 형편을 노래합니다. 10절은 갈그미스 전쟁을 신학적으로 기술한 유일한 구절로 전후로부터 구별됩니다. 요약하면, 7-9절은 원정을, 3-6절은 전투 장면을, 11-12절은 전투의 결과를 묘사합니다.

 

(1) 도입부(2)

 

애굽에 관한 신탁은 그 시대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2). 25:1; 36:1; 45:1에도 나오는 ‘여호야김 넷째 해’(605년)는 바벨론에 의한 칠십 년 통치가 확정된 해입니다(25:11). 바로 느고에 의해 유다의 왕이 된 여호야김 넷째 해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뿐만 아니라(36장) 유다가 의존하는 애굽의 운명도 결정된 해입니다.

근동의 패권이 앗수르에서 바벨론으로 넘어가는 정치적 혼란기에 애굽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대한 전통적인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앗수르를 멸망시킨 바벨론과 메대는 협정에 따라 지역을 분할했습니다. 원래 앗수르가 차지했던 지역(티그리스강 북쪽)과 하란을 포함한 시리아 북부 지방과 소아시아 지방과 이란과 아르메니아의 산지는 메대 족속의 차지가 되고, 앗수르 제국의 서쪽과 남서쪽 지역(메소포타미아와 길리기아와 남부 시리아와 페니키아와 팔레스티나)은 바벨론의 몫이 됐습니다. 바벨론이 팽창할 수 있었던 실질적 출구는 서쪽이었기에 그 지역의 주도권을 선점한 애굽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2) 애굽 군대의 공격(3-4)

 

여호와께서 애굽 왕 느고의 패배를 결정하셨다.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를 부추겨 전쟁터로 내보내십니다(3-4). 애굽의 메소포타미아 원정이 겉보기에는 바로 느고의 결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호와의 계획에 따른 원정입니다. 물론 그에게 승리를 주시려고 원정을 떠나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주시려고 애굽 군대를 갈그미스로 부르신 것입니다.

 

(3) 애굽 군대의 패배(5-6)

 

애굽 군대가 바벨론 군대의 공격으로 궤멸을 당합니다(5-6). 전선이 무너지고 용사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황급히 도망합니다. 적이 더 빨리 추격하기에 날랜 자도 용사도 도망하지 못하고 모두 유브라데 강가에 쓰러져 죽습니다. 바벨론에 의한 애굽의 패배는 애굽 의존적인 유다의 대외 정책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유다가 여호와께서 이미 패배를 결정하신 애굽에 의존해서 그분께서 세상의 통치권을 (일시적으로) 위임한 바벨론에 거역하려 한다면, 유다의 멸망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유다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땅과 지상에 있는 사람과 짐승’을 주어 통치하게 하셨음(참조. 27:5-6)을 너무 늦지 않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4) 애굽 군대의 공격(7-9)

 

7-8절은 나일강의 범람에 비유하여 애굽 군대의 위용을 기술합니다. 연례적으로 나일강의 범람은 나일 삼각주를 물에 잠기게 만들고, 물에 잠긴 땅은 태양빛에 마르면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납니다. 나일강이 범람하여 주변 땅을 물로 뒤덮는 것처럼 애굽 군대는 땅을 덮으며 원정을 떠납니다. 9절은 이를 사실적으로 기술합니다. 말들이 달리고 병거들이 돌격하고 용사들이 진격합니다. 동맹군 또는 용병으로 방패를 든 구스(에티오피아) 사람들과 붓(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사람들과 활을 든 루딤(리디아) 사람들도 함께 진격합니다. 기병과 병거로 중무장하고 뛰어난 용사들로 원정군이 조직됩니다. 전쟁의 승리를 보장해주는 압도적인 위용입니다. 많은 말과 병거와 용사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면 애굽 군대의 승리는 거의 확정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의 패배를 결정하셨기에 모든 준비가 무용지물이 됩니다.

 

(5) 애굽의 파국적 패배(10-12)

 

본문은 애굽의 파멸적인 패배를 기술합니다. 회복이 불가능한 패배입니다. 길르앗의 유향으로도 치료할 수 없습니다(참조. 8:22). 치명적인 병이기에 어떤 약을 사용할지라도 고칠 수 없습니다. 민족들이 애굽 군대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 군대에 궤멸당했다는 수치스런 소문을 듣고, 참패를 당한 애굽의 부르짖음이 온 땅에 가득 합니다.

10절은 애굽의 패배를 신학적으로 설명합니다. 애굽이 패배하는 날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원수 애굽에 복수하시는 날입니다. (여호와의) 칼이 배부르기까지 휘둘리고 적들의 피로 흠뻑 적셔집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를 희생제물로 잡아 유브라데 강가에서 희생제사를 지내십니다. 애굽 군대가 여호와께 드릴 희생제물로 정해졌기에 살아남을 길이 없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직접 언급되지 않고, 여호와의 ‘보복’ 가운데 간접적으로 암시됩니다. 애굽 심판은 여호와께서 애굽에 의해 뒤틀린 정의를 세우시는 일입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강력한 애굽에도 임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교만이 가져오는 파멸의 결과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애굽이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우리도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겸손하게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평안과 번영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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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5-01)


하나님께서 보시는 큰 그림

 

예레미야 45장 1-5절


‘예레미야야, 너는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마라. 그들을 위해 부르짖지도 말고 무엇이든 구하지도 마라. 그들을 구해 달라고 빌지도 마라. 네 기도를 들어 주지 않겠다’(에레미야 7: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예레미야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듣는 예레미야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 예레미야 45장은 다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유다 왕 여호야김 때에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한 말을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서기관 바룩은 멸망으로 기울어 가는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탄식하고, 그것을 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심판 계획을 알리시고 바룩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말씀의 상황적 배경(1)

이 세상이 나름대로 성실하게, 양심적으로, 정직하게 살아온 삶에 정당한 대가를 주기는커녕 아픔과 외면으로 돌려줄 때, 혹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어긋나는 현실을 보면서 혼자 울분을 삭이며 아파하고 탄식할 때, 주님도 들으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깨어진 평화를 회복하시려고 주님도 쉬지 않고 계십니다.

 

1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그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1)

 

바룩에게 말씀이 주어진 시대와 상황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합니다.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는 주전 605년으로, 바벨론 왕 나보폴라살의 아들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군대가 갈그미스에서 애굽 왕 바로 느고의 군대를 대파하고(46:2)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해였습니다. 갈그미스의 승리로 느부갓네살은 시리아와 가나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근동의 정치 지형도가 바벨론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면서 유다도 폭풍전야의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는 내용상 36:4의 반복이다. 현재의 문맥에서 바룩의 기록에 관한 언급은 이중적 의미를 갖습니다. 한편으로는 3절에 나오는 바룩의 탄식을 36장의 사건에 연결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5절의 구원 약속이 주어진 배경 역할을 담당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에 따르면 바룩에게 주는 말이 예레미야의 말인 것처럼 보이지만, 2절은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을 바룩에게 전달했음을 보여줍니다.

 

바룩에게 주시는 말씀(2-5)

자기 백성의 멸망을 아파하고 구원을 바란 마음을 귀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심판을 통해 하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다는 기도나 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겸허하게 주의 뜻을 먼저 듣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룩의 바람은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재난이고 심판이었습니다.

 

2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3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4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5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5)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울은 받아 적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받아쓰며 괴로움에 지친 바룩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씀이 주어집니다(2).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택하신 여호와께서 바룩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바룩에게 주는 말씀에 공적 성격이 더해집니다. 말씀에 앞서 여호와께서 바룩의 탄식을 인용하신다(3절). 예레미야가 ‘내게 화로다’하며 탄식했던(참조, 10:19, 15:10) 것처럼 그의 동역자 바룩도 ‘내게 화로다’하며 자신의 처지를 탄식 합니다. 화를 선포하는 이유가 세 문장으로 진술됩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자신의 고통에 슬픔(24)을 더하셨다고 한탄하면서 그 책임을 여호와께로 돌립니다. 여호와께서 열매를 맺게 도와주지 않으시고 좌절만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다음 두 문장으로는 자신의 절망적 처지를 기술합니다. 탄식(한탄)으로 지쳤지만 안식(쉼)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참조, 시편 6:6). 바룩의 좌절과 한탄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를 절망케 한 원인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바룩의 탄식 다음에 등장하는 4절은 문맥에서 돌출적입니다. 3절은 4절을 건너 5절로 직접 이어지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5절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4절의 말씀이 필요했음을 시사해줍니다. 4절의 도입부 ‘너는 그에게 이르라’(그러니 너는 그에게 말해야 한다)는 바룩의 말이 끝나고 여호와의 말씀이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바룩의 탄식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을 꼭 그에게 전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이 세운 것을 부수시고, 당신이 심은 것을 뽑으시는 분이다. 그분이 직접 세우고 심으셨다고 무한 책임 속에 끝까지 돌보지는 않으신다 친히 구원하셨던 자들(이스라엘)일지라도 그분의 심판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신학적 진술이 아닙니다. ‘여호야김 넷째 해’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한 것으로 당신 백성을 심판하시겠다는 그분의 의지를 과시하는 말씀입니다.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은 여호와 심판이 그분 백성을 넘어 민족들에게로 확장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46-51장에 수집된 민족들의 신탁은 이에 대한 구체적 증거입니다. 예레미야서의 넓은 문맥에서 보면, 4절은 1:10에 연결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시며 그에게 민족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예레미야의 활동을 시작하는 소명 기사(1:5-10)와 그 마지막이 서로 호응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세운 것을 부수시고 심은 것을 뽑으시는 분’임이 예레미야가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이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바룩의 소망을 이루어주지는 않으시지만, 그의 목숨은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5). 이스라엘과 민족들을 포함한 ‘모든 육체’에 재앙을 내리실 때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의 생명은 보호해주십니다. 예레미야의 생명을 구한 에벳멜렉의 경우처럼 예레미야의 신실한 동역자 바룩에게도 구원이 약속됩니다. 여호와께서 바룩을 책망하며 말씀하신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합니다. 4절을 배경으로 추론해 보자면, 바룩은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심판주로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유다의 완전한 멸망보다는 제한적 심판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바룩은 유다 심판의 필연성과 여호와의 절대 주권 앞에 자신의 ‘큰 일’을 내려놓아야 하다 누구도 그분의 확정된 의지에 맞설 수 없다. 그분의 결정 앞에 개인적인 바람이나 계획은 포기해야 합니다. 45장은 멸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심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룩처럼 그분의 의지를 따른다면 구원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는 불의한 세상에서 사는 동안 때때로 괴로움과 아픔에 한숨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믿음의 사람 바룩과 같은 안타까운 심정을 느껴 본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위로와 보호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바룩의 바람은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재난과 심판이었습니다. 백성의 고통을 아파하는 마음은 귀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심판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인정해야 합니다. 의를 위해 살되, 하나님의 주권을 잊어 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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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4-02)


말씀을 거부한 유다 백성들

예레미야 44장 15-30절


 

대부분 다른 충고나 권면을 잘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려는 데로 합니다. 옳은 것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잘못을 고치기보다 잘못된 자신을 지키기를 좋아합니다. 자신이 계획한 일을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좋아합니다. 이렇게 해서 무엇을 이루고 잘 살았다고 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서 성공한 인생은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다가 수많은 사람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아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사람들보다 많을 것이다.’라고 하신 사실은 사실일 것입니다.

 

  •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애굽에 내려 가 있는 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결코 애굽은 안전한 피난처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더 나가서 숭배하던 유다 여인들까지 예레미야의 경고를 듣지 않고 계속 숭배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그들이 의지하던 애굽을 모두 심판하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예레미야의 경고에 대한 반박(15-19)

‘역사(history)’는 그분(하나님)의 이야기(His+story)입니다. 따라서 역사 안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항상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애굽에 유다 백성들에게 경고가 선포되지만, 그들의 반응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15그리하여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줄을 아는 모든 남자와 곁에 섰던 모든 여인 곧 애굽 땅 바드로스에 사는 모든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16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17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18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19여인들은 이르되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의 형상과 같은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 하는지라(15-19)

 

예레미야의 심판 선포에 유다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늘 여왕에게 분향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회개 없는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긍휼도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심판 선고가 적대적 반발을 초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유다 백성들 간에 결렬한 다툼입니다.

 

⑴ 바드로스에 사는 모든 백성(15)

 

애굽 땅 바드로스에 사는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의 상대로 등장합니다(15). 다 나왔다는 의미로 ‘모두’가 세 번 사용됩니다. 애굽에 사는 유다 백성 전체가 예레미야에게 맞섭니다. ‘모든 남자’를 한정하는 ‘하늘의 여왕 제의’에서는 여자가 주도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모든 여자’를 한정하는 ‘(거기에) 서 있던’은 아마도 여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시사해 주는 것 같습니다.

 

⑵ 예레미야의 선포 거절(16)

 

여자들이 직접 예레미야에게 반박합니다(16). 이 들은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듣지 않겠다고 단절을 선언합니다(16). 이들은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예언자로 인정하면서도 그가 한 말은 거절합니다. 요하난 일행은 예레미야가 신탁을 왜곡했다고 거절했고(43:23), 바드로스의 유다 백성들은 그를 예언자로는 인정하면서도 그의 선포를 거절합니다.

 

⑶ 우상을 숭배하는 이유(17-18)

 

예레미야의 선포를 거절한 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살 것을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이들은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늘의 여왕을 섬기며 살 때에는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않았는데, 하늘의 여왕 제의를 폐지하자 그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다’고 주장합니다(17,18).

우상숭배를 그치자 재난을 당했기에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우상을 숭배해야 합니다. 이들은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을 하늘 여왕의 진노로 돌립니다.

 

⑷ 여자들의 자기변호(19)

 

이제 여자들이 예레미야에 맞서 답변합니다.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의 형상과 같은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 여자들은 하늘의 여왕 제의가 남편들이 인정한 공인된 제의였음을 주장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자들도 유다의 멸망 원인을 나름대로 살펴보았는데, 예레미야의 이해와는 딴판이었습니다. 이들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신의 징계로 간주했지만, 징벌의 주체와 동기를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았습니다. 풍요와 안전을 보장해 준 하늘의 여왕을 섬기지 못하게 된 결과로 재앙과 파괴가 왔습니다. 유다의 멸망은 우상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이 아니라, 하늘의 여왕이 보낸 재난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하늘의 여왕에게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이교적인 것을 모두 제거하고 여호와 종교의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던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멸망을 가져왔다고 보았습니다. 요시야의 개혁 이전의 삶이 개혁 이후의 삶보다 풍요로웠기에 우상숭배 근절은 재앙을 불러온 잘못된 정책이 됩니다. 이들의 신과 제의 이해는 철저하게 기복적·세속적입니다. 이들은 축복과 안녕에 근거하여 신앙의 유효성을 판단했습니다. 숭배자들에게 풍요로움과 안전을 가져다주면 그가 숭배할 만한 좋은 신이 됩니다. 풍요 제의에 속하는 ‘하늘의 여왕 제의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에서 성행하였습니다. 왕들과 고관들도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술을 부었습니다. 제의에 전체 가족이 참여했는데, 여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아이들이 나무를 해오면 아버지가 불을 지피고 어머니가 가루를 반죽하여 과자를 만들었습니다(7:18). 여신이나 별의 모습을 본떠서 과자를 만들거나 과자에 그 모습이나 표상을 그려 넣었습니다. 하늘의 여왕 제의를 통하여 땅의 축복과 재앙으로부터의 보호를 기원하였습니다. 하늘의 여왕 제의는 주로 가정의 영역에서 행해졌습니다.

 

징계의 심판(20-30)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 은혜로 충만하신 분이지만,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거부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겠다는 표징까지 보여 주십니다.

 

20예레미야가 남녀 모든 무리 곧 이 말로 대답하는 모든 백성에게 일러 이르되 21너희가 너희 선조와 너희 왕들과 고관들과 유다 땅 백성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분향한 일을 여호와께서 기억하셨고 그의 마음에 떠오른 것이 아닌가 22여호와께서 너희 악행과 가증한 행위를 더 참을 수 없으셨으므로 너희 땅이 오늘과 같이 황폐하며 놀램과 저줏거리가 되어 주민이 없게 되었나니 23너희가 분향하여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며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와 여러 증거대로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재난이 오늘과 같이 너희에게 일어났느니라 24예레미야가 다시 모든 백성과 모든 여인에게 말하되 애굽 땅에서 사는 모든 유다 사람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25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와 너희 아내들이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이루려 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서원한 대로 반드시 이행하여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전제를 드리리라 하였은즉 너희 서원을 성취하며 너희 서원을 이행하라 하시느니라 26그러므로 애굽 땅에서 사는 모든 유다 사람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나의 큰 이름으로 맹세하였은즉 애굽 온 땅에 사는 유다 사람들의 입에서 다시는 내 이름을 부르며 주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자가 없으리라 27보라 내가 깨어 있어 그들에게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니 애굽 땅에 있는 유다 모든 사람이 칼과 기근에 망하여 멸절되리라 28그런즉 칼을 피한 소수의 사람이 애굽 땅에서 나와 유다 땅으로 돌아오리니 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사는 유다의 모든 남은 자가 내 말과 그들의 말 가운데서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알리라 29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 곳에서 너희를 벌할 표징이 이것이라 내가 너희에게 재난을 내리리라 한 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그것으로 알게 하리라 30보라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을 그의 원수 곧 그의 생명을 찾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긴 것 같이 애굽의 바로 호브라 왕을 그의 원수들 곧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겨 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20-30)

 

바드로스에 사는 유다 사람들이 반박하자 예레미야는 그들이 지난날 유다에서 저지른 잘못과 이로 인한 재난을 생각하게 합니다. 지금 유다 백성이 똑같이 저지르는 악한 짓과 역겨운 죄를 지적하고 앞으로 닥칠 심판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강대국들이 권력을 다투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역사적인 사건을 표징으로 보여 주시며 교만한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⑴ 유다 멸망의 원인(20-23)

 

예루살렘과 유다를 폐허로 만든 재난의 원인을 하늘의 여왕 제의 폐지에서 찾는 모든 백성에게 예레미야는 다시금 예루살렘과 유다 멸망이 우상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징계였음을 분명히 합니다(20-23; 참조 2-6). ‘남녀 모든 무리’는 문자적으로 ‘모든 백성 남자들과 여자들’로, 예레미야에 맞서 우상숭배를 옹호했던 자들을 지칭한 ‘모든 남자’와 '모든여자와 '모든 백성에 상응합니다. 우상숭배의 대표로 등장하는 하늘의 여왕 제의를 여자들이 주도하였기에 여자들이 거듭 언급됩니다. 우상숭배를 구원과 축복의 길로 옹호하는 모든 백성에 맞서 예레미야는 우상숭배가 심판과 재난의 길이었음을 주장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해졌던 우상숭배를 그냥 모르는 척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21).

‘너희 왕들과 고관들과 유다 땅 백성’은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유다의 정치사회 지도자들도 우상 숭배에 적극 참여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기억하심은 자주 그분의 개입을 촉발하는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만연한 우상숭배를 기억하시고 재앙을 내리셨는데, 애굽의 유다 백성은 자기 조상들의 악행과 유다 왕들의 악행과 왕비들의 악행과 자신들의 악행과 아내들의 악행을 잊었습니다(9).

여호와께서 이들의 ‘악행과 가중한 행위 더 참을 수 없었기에’ 예루살렘과 유다가 ‘오늘과 같이 황폐하며 놀램과 저줏거리가 되어 주민이 없게’ 됐습니다(22; 참조 6; 24:9;42:18). 여호와의 참으심은 기다림의 기간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악행에서 돌이키기는커녕 더 깊이 빠져들었다(4-5). 더 이상의 참으심(기다림)이 무의미해졌기에 여호와께서 당신의 분과 노여움을 유다와 예루살렘에 쏟아 부으셨습니다. 내용상 22절의 반복인 23절에서는 이들의 악행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우상에게 분향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와 여러 증거대로 행하지 아니하였기에’ 오늘과 같은 재앙이 닥쳤습니다(23). 자신들이 경험한 비극적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고 같은 길을 가기에 비극이 반복됩니다.

 

⑵ 풍자적 고발(24-26)

 

여호와께서 예언자를 통해 선포한 당신 말씀을 공개적으로 거절하는 애굽의 유다 사람들을 풍자적으로 신랄하게 고발하십니다(25). ‘너희는 입으로 말한 것을 행동으로 다 이루있다. 너희가 하늘의 여왕에게 서원하고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하니 너희가 원하는 대로 실천해 보아라. 너희 조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너희도 원하는 대로 해보아라.’ 하늘 여왕을 섬기겠다고 서원한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려 칼과 기근으로 마지막 사람까지 진멸하실 것입니다(25-28). 애굽 땅에 사는 유다 사람들을 모두 멸망시켜 다시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주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자가 없게 하십니다(26).

 

⑶ 재앙의 기술(26-28)

 

여호와께서 지켜보시다가 이들에게 재난을 내려 ‘칼과 기근’으로 모두 전멸시키고 소수의 사람만 유다 땅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27-28a).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한 여호와의 말씀이 맞는지, 하늘의 여왕 숭배자들이 한 말이 맞는지는 곧 알게 될 것입니다(28b).

 

⑷ 재앙의 예표(29-30)

 

여호와께서 당신 말씀의 확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표징을 주십니다(29-30). 표징을 통해 에굽의 우상숭배자들에게 선포한 심판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우상숭배를 구원의 길로 주장하는 자들의 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를 ‘그의 원수 곧 그의 생명을 찾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셨듯이, 애굽 왕 호브라(Hophra; 589-570)를 ‘그의 원수들 곧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기실 것입니다(30; 참조 37:5),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했듯이 유다가 의존했던 애굽도 같은 운명에 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루하루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아차리고 순종하겠습니다. 원하던 대로 하라고 하시기 전에, 하지 말라고 일깨워주신 말씀을 듣고 돌아서고 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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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4-01)

 


애굽에서 우상숭배하는 남은 자들

예레미야 44장 1-13절


 

혹시 ‘고집불통’과 ‘신념’을 동일하다고 착각하고 있진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그 마음이 굳어지고 강퍅해지는 더 악한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은 성경의 일관된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민감함과 부드러움을 가지고 받아들이며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말씀은 읽어도 들어도 굳어진 마음에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영적으로 병이 든 것입니다. 회개하며 돌이켜야 할 일입니다.

 

  • 유다 땅에 머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요하난과 지도자들은 애굽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의 기대대로 잘 정착이 되고 애굽에 살게 되었지만, 점점 애굽 사람들처럼 동화 되어 멸망한 조상들처럼 우상숭배에 몰두하며 살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동화되어간 그들에게 예레미야를 통해 마지막으로 임할 재난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도입부(1)

많은 사람들이 지나온 역사를 타산지석이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자주 무시되거나 잊힙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의 역사는 다시 반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며 교훈을 삼아야 되었으며, 남은 유다 사람들은 남 유다를 보고 교훈을 삼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은 역사들을 통한 교훈을 받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애굽 땅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 곧 믹돌과 다바네스와 놉과 바드로스 지방에 사는 자에 대하여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1)

 

예레미야 44장은 ‘애굽 땅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바벨론이 침략하자 많은 사람들이 칼과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돌아간 요하난 일행도 그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열거된 성읍들과 지역 이름은 유다 사람들이 애굽 전역에 펴져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애굽에 내려간 요하난과 유다 백성들은 믹돌과 다바네스와 놉 그리고 바드로스 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유다 사람들이 애굽의 전반적으로 모든 지역에 살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정착한 ‘다바네스’는 아일 삼각주 동쪽 연안에 있는 펠루시움(Pelusium) 남서쪽의 텔 데프네에서 그 유적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군사 식민지로 그 주변에 이방인들이 많이 거주했습니다. 믹돌은 바다네스 동쪽 있는 성읍으로 출애굽의 출발 경로를 언급할 때도 등장합니다(참조 출애굽기 14:2; 민수기 33:7). 에스겔 29:10과 30:6은 ‘믹돌에서부터 수에네까지’를 애굽의 가장 북쪽에서 가장 남쪽까지의 모든 지역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멤피스(memphis)로 더 잘 알려진 ‘남쪽의 땅’을 의미하는 바드로스는 지역 이름으로 상부(남부) 애굽을 가리킵니다. 하부 애굽과 상부 애굽에 정착한 모든 유다 사람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유다의 재앙과 그 원인(2-6)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우상에게 분향하여 섬기는 일을 가증히 여기시고 노여워하십니다. 그래서 역사 이래로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 악행을 중단하고 돌아서라고 촉구하셨습니다. 이제 예레미야를 통해 예루살렘과 유다 온 성읍이 사람이 없는 폐허와 황무지가 된 것을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2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성읍에 내린 나의 모든 재난을 보았느니라 보라 오늘 그것들이 황무지가 되었고 사는 사람이 없나니 3이는 그들이 자기나 너희나 너희 조상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여 섬겨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악행으로 말미암음이라 4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내가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 하였으나 5그들이 듣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다른 신들에게 여전히 분향하여 그들의 악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6나의 분과 나의 노여움을 쏟아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를 불살랐더니 그것들이 오늘과 같이 폐허와 황무지가 되었느니라(2-6)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애굽에 도착합니다. 이 애굽에 내려온 유다 백성들은 조상들과 자신들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애굽에 와서 점점 애굽 사람들처럼 우상 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쌓고 있습니다.

 

⑴ 유다의 재앙(2)

 

예레미야는 애굽에 사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루살렘과 유다가 그처럼 처참하게 멸망한 원인에 관해 잘 생각해보도록 권면합니다. 애굽에 내려온 자들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성읍에 불러들인 모든 재난을 보았습니다(2).

 

⑵ 재앙의 원인(3-5)

 

성읍들은 황무지가 되어 이제 아무도 살지 않게 됐습니다. 여호와께서 왜 재앙을 내리셨는지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우상숭배가 여호와의 노여움을 촉발하고, 그분의 노여움이 재난을 불러왔습니다(3). ‘악행’과 ‘재난’(2)은 같은 단어의 번역입니다. 여호와의 정의에 따르면 악행과 재난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악을 행한 자에게 재난은 가능성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정하신)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우상을 숭배했던 모든 자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계속돼온 악행이었습니다. ‘너희’와 그들의 동시 사용은 우상숭배에 있어 현 세대나 이전 세대들이나 모두 한통속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는 여호와만을 알았다가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 우상들을 알게 됐습니다(참조 2:1-13).

4-5절은 여호와의 애쓰심에 대비하여 유다의 완악함을 고발합니다. 여호와는 당신의 모든 종 예언자들을 거듭 보내 ‘너희는 내가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하셨지만, 그들은 듣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다른 신들에게 여전히 분향하여 자신들의 악행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참조. 7:25-26: 25:4). 여호와와 유다는 마지막까지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유다의 맹목적 질주를 돌이키려는 여호와의 모든 노력이 어떤 결실도 얻지 못하고 헛된 수고로 끝났습니다.

 

⑶ 황무지가 된 유다(6)

 

6절은 내용 상 2절의 반복입니다. 여호와께는 분과 노여움을 쏟아 붓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어졌습니다. 여호와의 분노의 불길이 우상숭배자들로 가득 찬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타올라, 모든 것이 폐허와 황무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애굽의 유다 사람들은 불순종과 우상숭배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지금처럼 폐허로 만들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메시지를 들어보면, 그들의 삶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다시 언급하십니다(2). 예루살렘의 멸망한 이유에 대해 “그들이 자기나 너희나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여 섬겨서 나의 노를 격동한 악행을 인함이라”(3)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온 성읍이 사람이 없는 폐허와 황무지가 된 것은 그들이 이 경고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책망하시는 하나님(7-10)

실수하고도 망각하는 것은 영적 자해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황무지가 되는 재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묵도했습니다. 왜 영광의 도시가 수치와 조롱의 도시로 전락했는지 모르는 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임 없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일만 골라서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교육하십니다.

 

7나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어찌하여 큰 악을 행하여 자기 영혼을 해하며 유다 중에서 너희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젖 먹는 자를 멸절하여 하나도 남기지 않게 하려느냐 8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손의 소위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너희의 가서 우거하는 애굽 땅에서 다른 신들에게 분향함으로 끊어버림을 당하여 세계 열방 중에서 저주와 모욕거리가 되고자 하느냐 9너희가 유다 땅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한 너희 열조의 악과 유다 왕들의 악과 왕비들의 악과 너희의 악과 너희 아내들의 악을 잊었느냐 10그들이 오늘까지 겸비치 아니하며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내가 너희와 너희 열조 앞에 세운 나의 법과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느니라(7-10)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이 폐허가 됐지만, 애굽에 사는 유다 사람들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어떤 교훈도 끌어내지 않았습니다.

 

⑴ 자멸의 길로 가는 자들(7)

 

이들은 악을 행하여(3,5) 심판을 당한 자들보다 더 큰 악을 행하며 자신에게 해를 끼칩니다. 이들은 마치 유다 백성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는 자가 없게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습니다(7).

 

⑵ 우상숭배(8)

 

‘어찌하여’는 여호와의 안타까움과 당혹감을 보여줍니다. 죽도록 맞았는데도 그대로인 것을 보시고 차라리 여호와께서 절망하십니다. 8절은 여호와를 당혹스럽게 하는 이들의 ‘큰 악’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8a절은 내용상 3절의 반복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초래했던 우상숭배가 애굽 땅에서도 그대로 저질러집니다. 가나안에서 다른 신들에게 가서 향을 피우고 섬기며 여호와를 노하게 했던 자들이 애굽에서도 여전히 다른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자기 손으로 만든 것으로 그분을 노하게 합니다.

 

⑶ 조상의 죄악을 잊은 자들(9)

 

‘너희 손이 만든 것’은 우상의 실체를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어리석게도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신으로 숭배합니다. 결국 이들의 우상숭배가 이들을 멸망시켜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저주와 수치 거리’로 만듭니다. ‘끊어 버림을 당하여’는 완전한 멸망을 의미한다. 이 들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저지른 조상들의 악행과 유다 왕들의 악행과 왕비들의 악행과 자신들의 악행과 아내들의 악행을 잊었습니다(9). 조상 때부터 현 세대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 악행을 저지른 결과로 재앙이 임했다는 사실을 지나간 과거사로 치부해버렸습니다. 이들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자신들하고는 상관없는 남의 일이었습니다.

 

⑷ 율법과 법규를 지키지 않은 자들(10)

 

파국적 재난을 반면교사로 삼지 않고 깨끗하게 잊었기에 악행을 뉘우치거나 두려워해야 할 이유도,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를 지켜 행해야 할 이유도 다 사라집니다(10). 애굽으로 들어가 과거를 망각하고 전과 같은 악행을 저지르며 사는 자들에게 심판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황무지가 되는 재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습니다. 왜 영광의 도시가 수치와 조롱의 도시로 전락했는지 모르는 이가 없었습니다. 왕과 왕비에서부터 백성까지, 조상 때부터 한 순간도 그친 적 없는 불순종과 악행이 가져온 유례없는 참극을 모를 리 없고 잊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애굽의 유다인들은 까맣게 잊었습니다. 알면서 모른 체했습니다. 애굽에는 안 계신 것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무시하고 애굽 신들을 부지런히 섬김으로 저주와 수치를 자초했습니다. 말씀묵상은 기억행위입니다. 성경 속에서, 역사 속에서,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말씀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 역사를 현재화하는 일입니다. 묵상 없는 기억 없고, 기억 없는 각성은 없고, 각성 없는 순종은 없습니다.

 

 

징계를 밝히시는 하나님(11-14)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자주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우상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는 유다 백성들을 벌하시겠다는 뜻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11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여 환난을 내리고 온 유다를 끊어 버릴 것이며 12내가 또 애굽 땅에 머물러 살기로 고집하고 그리로 들어간 유다의 남은 자들을 처단하리니 그들이 다 멸망하여 애굽 땅에서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이 칼과 기근에 망하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칼과 기근에 죽어서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되리라 13내가 예루살렘을 벌한 것 같이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벌하리니 14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살려는 유다의 남은 자 중에 피하거나 살아 남아 소원대로 돌아와서 살고자 하여 유다 땅에 돌아올 자가 없을 것이라 도망치는 자들 외에는 돌아올 자가 없으리라 하셨느니라(11-14)

 

애굽에서도 하나님만이 홀로 경배를 받으실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하여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은 예루살렘 사람들처럼(21:9; 38:2), 하나님의 명령을 업신여기고 애굽에 내려와서는 우상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긴 이들도 큰 자부터 작은 자까지 애굽 어디에서 살든지 똑같은 재난을 겪고 끊어질 것입니다.

 

⑴ 심판을 결정하신 여호와(11)

 

고발의 말씀 다음에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심판의 말씀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아무 뉘우침이나 두려워함 없이 애굽에 들어와 살면서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환난’(재난)을 내려 멀하시기로(7, 8) 작정 하십니다.

 

⑵ 완전한 멸망(12-14)

 

‘온 유다’는 ‘애굽 땅에 머물러 살기로 고집하고 그리로 들어간 유다의 남은 자들’(12)(‘애굽 땅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1))을 가리킨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모두 붙들어 애굽 땅에서 다 멸하십니다.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애굽이 이들의 무덤이 됩니다. 칼과 기근을 피하여(42:14,16) 애굽으로 들어온 자들이 거기에서 칼과 기근에 죽어서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됩니다(42:18; 참조, 28:18).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42:1,8) 다 멸망에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예루살렘을 벌한 것같이 애굽 땅에 사는 자들도 그렇게 벌하십니다. 장소만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애굽으로 바뀌었지 유다 백성의 우상숭배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파국적 재앙을 경험했지만, 뉘우침이나 두려워함 없이 이전의 길을 그대로 가다가 같은 멸망의 심판에 떨어진다.

14절의 원문은 복잡한데, 다음과 같이 번역해볼 수 있다. ‘거기 애굽 땅에 살려고 들어온 유다의 남은 자들 가운데 살아남거나 벗어나 그들이 (거기) 돌아가 살고 싶어 하던 유다 땅으로 돌아갈 자가 아무도 없으리라. 몇몇 살아남은 자들을 빼놓고는 아무도 돌아가지 못하리라.’ 애굽으로 들어온 자들은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겠지만, 아무도 돌아가지 못하고 모두 애굽에서 죽습니다. 극히 소수의 사람만 살아남아 유다 땅으로 돌아갑니다. 유다의 남은 자들은 전쟁도 없고 나팔소리도 들리지 않고 양식도 풍부해 굶주릴 격정이 없는 곳을 찾아 애굽으로 왔지만, 이들의 기대와 달리 애굽은 멸망의 장소가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말씀을 멸시하고, 그것이 습관이 된다면, 그 결말은 두려운 심판뿐입니다. 내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고 겸손히 회개해야 합니다. 주의 자비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꾸짖음을 경청하여 교만을 떨치고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할 일, 경고하신 말씀, 주께서 행하신 일을 잘 기억하여 그 은혜 아래 살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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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3-01)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

예레미야 43장 1-13절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고 멸하시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그분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분의 존재와 진실을 꺾지 못합니다. 본문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신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요하난과 ‘유다의 남은 자’들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신뢰하지 않습니다. 바룩의 부추김을 받아 예레미야를 거짓 선지자로 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애굽으로 내려가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을 통한 애굽의 심판 계획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1-7)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존재를 무시하려 들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람으로 훼손할 수 없습니다. 그런다고 그분의 말씀이 거짓이 되는 게 아니며, 그들이 멸시한다고 그분이 거룩이 훼손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멸시 가운데도 거룩하시고, 기어코 당신의 거룩을 드러내십니다. 요하난 일행이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되는 그분의 뜻을 거짓이라고 짓밟습니다. 대놓고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1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신 이 모든 말씀을 말하기를 마치니 2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3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 4이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과 모든 백성이 유다 땅에 살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5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이 유다의 남은 자 곧 쫓겨났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유다 땅에 살려 하여 돌아온 자 6곧 남자와 여자와 유아와 왕의 딸들과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맡겨 둔 모든 사람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거느리고 7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함이러라(1-7)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후, 유다 지역에는 ‘두 남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무리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2,3차 침공을 통해 바벨론으로 끌려간 바벨론 포로 공동체입니다. 나머지 무리는 42-43장에 나오는 이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감을 면하고 예루살렘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까지 회복이 전제되는 말씀을 주셨다는 점입니다. 즉, 바벨론 땅에 유배된 백성들과 동일한 남은 자의 지위를 부여하시겠다고, 또 다른 소망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⑴ 신탁의 전달(1)

 

요하난을 중심으로 한 ‘유다의 남은 자’들은 불분명한 미래와 현재의 공포스러운 상황 때문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열흘이 지나서, 여호와로부터 분명히 응답 받은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신 이 모든 말씀’을 전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응답이 자신들에게 좋든 나쁘든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할 것을 약속한 자들이었습니다(42:6). 예레미야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신탁을 전달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무데도 가지 말고, 특히 애굽으로 내려가거나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유다 땅에 머물면서 언약대로 이스라엘에 이래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레미야는 모든 일이 잘될 수 있도록 자진하여 한 약속을 지킬 것을 간접적으로 촉구하는 것 같습니다.

 

⑵ 신탁을 거절하는 자들(2-4)

 

예레미야가 응답 받은 대로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전하자, 여호와와 예레미야가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됩니다.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을 왜곡해서 전한 ‘거짓’으로 규정하고(참조. 40:16) 강력하게 반발합니다(2).

요하난 일행은 기도를 부탁할 때, 하나님의 응답에 순종하겠다고 하면서 예레미야를 ‘여호와께서 보내신 사람’(42:5)이라고 했지만, 선지자가 자신들이 기대하던 대로 말해주지 않자, 그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니며 그가 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거짓말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이 스스로 제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발한 이유는 자신들이 기다렸던 응답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응답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묻기 위해 자신들이 했던 말은 처음부터 거짓말이었음을 이렇게 들어납니다. 심지어 예레미야 배후에는 자신들을 죽이거나 바벨론에게 넘기려는 바룩의 음모와 부추김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들의 거짓 맹세와 애굽을 맹신하는 마음을 감추려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과 심지어 자신이 한 말까지 부정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애굽에 들어가서 살지 말라는 말을 하라고 너를 보내셨을 리 없다고 항변합니다. 단순히 예레미야가 전달한 메시지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의 순수성을 의심합니다. 이들은 예레미야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왜곡의 주범으로 동역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지목합니다. 바룩이 자신들을 갈대아인들의 손에 넘겨 죽여버리거나 바벨론으로 유배 보내려고 예레미야를 부추겼다는 것입니다(3). 오만한 자들의 주장이 상황을 장악합니다. 군 지휘관들을 포함한 모든 백성이 ‘유다 땅에 살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습니다(4).

 

⑶ 애굽으로 출발(5-6)

 

요하난 일행이 모두 예레미야를 찾아와(42:1) 중보기도를 청탁하고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할 것을 확약했습니다(6. 하지만, 예레미야가 열흘 후에 이들을 모두 불러(8)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자, 이들은 모두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습니다(43:4). 한마디로 이들은 여호와보다 바벨론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바벨론의 보복을 더 두려워하는 자들의 귀에 ‘바벨론 왕을 겁내지 말라’는 여호와의 권면(42:11)은 실체 없는 약속처럼 들렸습니다.

3절과 45장의 보고는 바룩의 역할이 단순히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온 말을 기록하고 정리해서 보존하는 일에 한정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45:5에 따르면 여호야김 시대에 바룩은 무엇인가 ‘큰 일’을 계획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의 기록과 보존을 제외하고, 바룩의 역할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기에 ‘큰 일’의 실체는 모호하게 남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룩이 예레미야와 함께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처음 생각했던 대로(참조 41:16-18) 애굽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모두 함께 길을 떠납니다. 5-6a절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의 명단을 자세하게 보고합니다. 40:11-41:18에 등장하는 집단들의 요약입니다.

‘유다의 (모든) 남은 자 곧 쫓겨났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유다 땅에 살려 하여 돌아온 자’는 40:11-12의 주변 나라들로 피신했다가 그 나라에게로 온 ‘모든 유다 백성’에, ‘남자와 여자와 유아’는 41:16의 ‘군사와 여자와 유아와 내시’에, ‘왕의 딸들과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맡겨 둔 모든 사람’은 41:10의 ‘미스바에 남아 있는 왕의 딸들과 모든 백성 곧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위임하였던 바 미스바에 남아 있는 모든 백성’에 대체로 일치합니다.

그다랴의 통치 때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이 유다를 떠나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여호와께서 칠십 년의 통치권을 허락한 바벨론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된 그다랴가 살해되고 요하난 일행이 여호와의 권면을 거절하여 애굽으로 내려감으로써 가나안은 미래의 구원 사역에서 탈락합니다. 물론 유다 백성이 모두 가나안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요하난 일행은 예레미야와 바룩을 데리고 애굽으로 갑니다(6b). ‘유다의 남은 자’들은 시드기야 왕을 포함한 유다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멸망의 길을 재촉했던 것처럼 끝내 애굽으로 내려가서 유다 땅을 떠나지 말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미련 없이 던져버렸습니다.

 

⑷ 애굽에 도착(7)

 

예레미야가 전달한 여호와의 말씀을 거짓으로 거절하고, 바룩이 자신들을 갈대아인들에 넘겨 멸망시키려 한다고 주장하던 자들이 예레미야와 바룩을 데려갑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애굽 땅으로 들어가 다바네스에 도착합니다(7). 이들이 어떤 이유에서 예레미야와 바룩을 데리고 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와 바룩이 자진하여 함께 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의 전달을 거짓으로 고발한 자들이 애굽에서 신탁을 묻기 위해 데려갔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예언자 예레미야와 바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넓은 문맥에서 보면, 일행을 대표하는 요하난은 40:1-6의 바벨론 사령관 느부사라단과 대비됩니다.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가 포로들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불러 예루살렘 멸망이 유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였다고 말한 후 그를 풀어주고 원하는 곳으로, 미스바의 그다랴에게로 가게 합니다. 반면에 여호난은 예레미야가 전한 신탁을 ‘거짓’으로 부정하고 그를 강제로 애굽으로 데려갑니다. 이방인은 여호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유다인은 불순종의 파국적 결과를 경험했음에도 다시금 그분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회칠한 무덤과 같은 거짓 신앙의 가면이 벗겨지면 초라하고 사납고 무자비한 민낯을 보게 됩니다. 말씀이 드러낸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면 더 큰 치욕거리로 전락할 것입니다(42:18; 히브리서 4:12-13; 시편 19:12).

 

요적 행위(8-13)

자신의 생각이나 결정 그리고 자신의 바람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말씀하시고 해야 할 일을 보여주셔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할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눈물 나고 고통스러워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어렵고 힘들어도 가야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순종치 않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간 ‘유다의 남은 자’들은 영원히 남은 자로서 지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8다바네스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너는 유다 사람의 눈 앞에서 네 손으로 큰 돌 여러 개를 가져다가 다바네스에 있는 바로의 궁전 대문의 벽돌로 쌓은 축대에 진흙으로 감추라 10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불러오리니 그가 그의 왕좌를 내가 감추게 한 이 돌들 위에 놓고 또 그 화려한 큰 장막을 그 위에 치리라 11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12내가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지르리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불사르며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요 목자가 그의 몸에 옷을 두름 같이 애굽 땅을 자기 몸에 두르고 평안히 그 곳을 떠날 것이며 13그가 또 애굽 땅 벧세메스의 석상들을 깨뜨리고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사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8-13)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과 결정을 무엇으로든지 덮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하난과 일행들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순종하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자신만 내려간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신의 죄악들을 정당화시켜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⑴ 표적행위의 명령(8-9)

 

다바네스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일하여 표적행위를 명하십니다(8). 표적행위는 애굽으로의 도피가 구원이 아닌 재난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곧 예레미야가 전달한 권면과 경고의 말씀(42:10-22)이 거짓이거나 바룩의 주장이 아니라 여호와의 의지임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에 의한 피의 보복이 두려워서 나일 삼각주 동편에 있는 애굽의 다바네스로 피신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 애굽을 침략하게 하심으로 이들의 불순종을 징계하실 것입니다. 표적행위는 여호와의 명령(9)과 표적행위의 해석(10-11절+12-13절)으로 이루어지고, 실행보고는 나오지 않습니다.

 

⑵ 표적행위의 해석(10-13)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유다 사람의 눈 앞에서’ 큰 돌들을 날라다 다바네스에 있는 바로의 궁전 입구에 있는 벽돌로 쌓은 축대 진흙에(진흙으로 포장된 광장에?) 묻을 것을 지시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표적 행위를 해석해주십니다.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데려오겠다. 내가 그의 왕좌를 내가 감추게 한 이 돌들 위에 놓으면, 그는 자신의 화려한 차일을 그 위에 칠 것이다’(10).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 느부갓네살(참조. 25:9)를 불러 애굽을 치게 하시고 그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느부갓네살의 애굽 원정이 마치 여호와(주인)와 느부갓네살(종)의 연합 작전처럼 언급됩니다. 바로의 왕궁 입구에 놓인 느부갓네살의 보좌는 애급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상징한다. 애굽은 전쟁에서 치명적 패배를 당한다. 여호와께서 결정해 놓으신 대로, 어떤 자는 죽고, 어떤 자는 사로잡히고, 어떤 자는 칼에 맞습니다(11). 누구도 피하여 목숨을 구하지 못합니다. 패배의 파국적 결과는 애굽에 사는 사람들을 넘어 애굽의 신전과 신상에도 미칩니다(12). 여호와께서 애굽의 신전들(애굽 신들의 집들)에 불을 지르시고, 그분의 종 느부갓네살은 신상들을 태우거나 전리품으로 약탈해 갑니다. ‘목자가 그의 몸에 옷을 두름 같이’는 아마도 철저한 약탈을 보여주는 비유 같다. 느부갓네살은 많은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안전하게 애굽을 떠납니다(참조, 에스겔 29:19-20).

13절은 12절의 보충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애굽의 신전들을 불살라버리고 태양신전의 돌기둥(‘벧세메스의 석상’)을 부숩니다(13). 신전들을 불사르는 주체가 여호와에서 느부갓네살로 바뀝니다. 느부갓네살이 여호와의 종으로서 그분의 결정을 집행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근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자, 완악한 시대를 위해 회개하길 바랍니다. 말씀의 권능을 심판이 아니라 순종을 통해서 경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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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2-02)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남은 자

예레미야 42장 15-22절


 

‘전화위복(轉禍爲福)’과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그 순간을 지혜롭게 넘어가려고 여러모로 노력합니다. 어려운 일이 회복되는 것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하며, 문제가 더 어려워진 것을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선택한 회심의 카드가 오히려 상황을 더 위태롭게 만든 적이 있었습니까?

 

  • ‘유다의 남은 자’들. 즉, 요하난 일행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도 되는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10일 만에 응답 받은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칼과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요하난 일행에게 애굽에서 기다리는 것은 평화와 번영이 아니라 그곳에서는 혹독한 저주와 심판이 임할 것을 거듭 경고합니다.

 

경고의 말씀(15-1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이 사실은 다윗을 비롯한 여러 시편 기자들의 한결같은 고백이었지만, 유다 백성들은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들이 보기에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인 애굽에 가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도 세상 어딘가에 안전하고 평화로운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 맙시다. 하나님의 뜻을 좇는 믿음이 안전하게 잘 살 수 있는 지름길임을 신뢰합니다.

 

15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 거하기로 고집하면 16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17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18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의 노와 분을 예루살렘 거민에게 부은 것 같이 너희가 애굽에 이른 때에 나의 분을 너희에게 부으리니 너희가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치욕거리가 될 것이라 너희가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도다(15-18)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남은 자들인 요하난의 일행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먼저 애굽에 내려가는 길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결과가 좋든지 나쁘든지 여호와의 뜻대로 하겠다고 먼저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레미야를 통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합니다.

 

⑴ 말씀에 순종하라(15)

 

예레미야는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권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좋지 않는 말씀도 순종하겠다고 다짐했지만(6),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은 거부하겠다는 내면적인 마음을 아시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순종해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은 문맥에 따라 두 단어를 나눠 옮겼지만, 15절의 원문은 ‘이제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이제’는 자주 무엇인가 결정적 인 것을 언급할 때 서두에 놓이고(참조. 2:18; 7:13 등등), 그러므로는 때대로 심판의 말씀을 이끄는 연결사로 사용됩니다(참조, 2:9; 6:18 등등). 권면과 고발의 말씀이 나란히 주어지지만, 후자에 무게가 주어짐을 보여줍니다. 문맥에 따라 읽자면, ‘그러므로’에 의해 권면의 말씀(10-12)에 고발의 역할이 주어집니다. 곧, 요하난 일행이 권면의 말씀을 거절했기에 경고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겠다고 굳게 맹세한 자들(5-6)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경고의 말씀은 14절의 조건문에 연결됩니다. 그들은 거의 일 년 반 동안 계속된 바벨론의 공격으로 전쟁의 두려움과 굶주림의 고통을 뼛속까지 경험한 사람들이기에, 전쟁과 나팔소리와 굶주림이 없는 곳을 동경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애굽’이 이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곳이냐 입니다. 애굽은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의 최종 목표였습니다. 바벨론의 애굽 침략은 사실상 시간 문제였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눈에는 유다의 모습은 폐허와 혼란만 보였겠지만, 가나안은 여호와께서 이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버려야 할 곳이 아니라 남아서 재건해야 할 곳이었습니다. 또 이들에게는 파국적 재앙의 근본 원인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특히 ‘모든 군대의 지휘관’에게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의 멸망은 약소국의 비극적 운명이었습니다. 유다의 남은 사람들은 이스마엘과 그다랴를 죽인 사건들로 인해서 바벨론을 두려워하고 했기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애굽에 내려가서 살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으면서 아무리 선지자를 동원하여 기도하고 큰 말로 맹세를 한다 해도 살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애굽이 어떤 곳입니까? 에레미야 42장 전체에서 ‘애굽’이란 단어가 7번이나 나옵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면 바벨론이 오해할 빌미를 제공합니다. 유다가 잘못한 것이 아닌 결백하다면, 그들이 애굽으로 도망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은 다시 바벨론 군에 진노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땅에 남아 있는 더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라도 애굽으로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가는 것은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유다의 미래 앞날에 관계된 아주 심각한 일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애굽은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에 생활을 했던 곳입니다. 출애굽 이후 성경에서는 지속적으로 애굽 행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적인 허락이 없이 애굽으로 가는 것은 불신이고 불순종이었습니다. 애굽은 탈출하는 곳이지 더 이상 피난처가 아닙니다. 하지만 ‘유다의 남은 자’의 입장에서는 애굽을 피난처로 여깁니다(14).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여호와의 신탁을 청탁했지만, 그가 선포했던 말씀에서 새로운 출발의 토대가 될 신학적 교훈을 끌어내지는 않았습니다. 땅의 전통과 멸망의 근본 원인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부재가 이들로 하여금 떠나야 할 애굽(출애굽의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게 합니다.

 

⑵ 불순종의 결과(16-17)

 

예레미야에게 찾아왔던 ‘유다의 남은 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생각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말씀을 거절하고 애굽으로 떠나면, ‘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17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16-17)고 소개합니다. 그들이 피하고 싶었던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 그 땅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전쟁과 굶주림과 질병이 기어이 애굽까지 ‘뒤쫓아서’ ‘따라잡아’ 애굽의 보호 아래 살아남겠다던 자들을 삼킬 것입니다. 결국 애굽이 무덤이 될 곳이라고 경고합니다. 요하난 일행을 지칭하는 ‘유다의 남은 자’는 주목할 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요청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들의 의도를 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과 더불어, 내려갈 경우 참혹한 결과의 불순종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남은 자’들의 멸망을 막겠다고 나선 요하난이 유다의 남은 자들을 멸망으로 이끕니다. 경고의 말씀에 앞서 다시 한 번 조건문이 등장합니다. 내용상 14절의 반복으로, 요하난 일행이 애굽으로 내려가 거기에 머물기로 결정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전쟁과 나팔소리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려 하지만, 애굽은 전쟁과 기근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합니다. ‘너희가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가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을 것이라’(16절). 칼이 두려워 안전한 애굽으로 도망하지만 거기에서 칼에 따라잡히고, 굶주림이 두려워 양식이 풍부한 애굽으로 내려가지만 거기에서 굶주림과 함께 살게 됩니다. 유다 땅에 머문다면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지만(11), 칼과 기근이 두려워서 애굽으로 내려간다면 거기서 칼과 기근에 죽게 됩니다.

17절은 내용상 16절의 반복입니다. 후자가 ‘두려워하는 것의 피할 수 없음’에 초점을 맞춘다면, 전자는 ‘두려워하는 것에 의한 완전한 멸망’에 초점을 맞춥니다.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살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은 심판의 철저성, 특히 전쟁에 의한 완전한 멸망을 상징합니다. 전쟁 중에는 칼에 맞아 죽고, 전쟁에서 살아날지라도 양식이 없어 굶주려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습니다. 이 재난을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것이기에 ‘벗어나서 남을 자’가 없다. ‘유다의 남은 자’가 이미 혹독하게 경험한 예루살렘의 멸망에 비교해서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이들이 애굽으로 들어간다면,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당신의 ‘노여움과 분’을 부으셨던 것처럼, 당신의 ‘분’을 이들에게 부어 ‘가증함과 놀람과 저주와 치욕거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29:18(참조 24:9, 44:12)에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주민들을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실 것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의 분노는 그분 정의의 부정적 표현으로, 악한 자들에게 부어집니다.

요하난 일행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여호와의 분노의 결과였음을 인정하고 그분 말씀에 순종해서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루살렘 주민들의 파국적 운명이 이들의 운명이 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는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 유배민들(참조, 29:10, 14)과 달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여호와의 권면과 경고의 말씀을 무시한 자들이기에 귀향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⑶ 결론(18)

 

실감나는 단어들을 동원해서 하나님께서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의 노와 분을 예루살렘 거민에게 부은 것 같이 너희가 애굽에 이른 때에 나의 분을 너희에게 부으리니 너희가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치욕거리가 될 것이라 너희가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도다’(18)라고, 결정적으로 그들의 애굽 행에 대해서 거듭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의 안전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몇 달 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한 장면을 본 큰 상처들이 아직 아물지도 않았습니다. 바벨론 군의 공격 앞에서 유다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판자처럼 누어서 신음소리만 낼 뿐이었습니다. 인간으로서 보지 못할 참혹한 광경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큰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잊기 어려운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면 초토화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분노가 안전한 피난처라고 여기는 애굽에 쏟아져서 그들은 모두가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순종하려는 마음 없는 기도는 하면 할수록 내 신념만 강화하고 내 욕심만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자기들의 말을 들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순종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이 세상 어느 곳도 결코 안전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경고(19-22)

사람들이 복권을 사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가졌던 행운을 자신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행운을 얻은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한 다른 불행을 보면서 그 사실이 자신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이율배반적인 본질입니다.

 

19유다의 남은 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 일로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셨고 나도 오늘날 너희에게 경계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 20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우리에게 고하라 우리가 이를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21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에게 명하신 말씀을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고하였어도 너희가 그 목소리를 도무지 순종치 아니하였은즉 22너희가 가서 우거하려 하는 곳에서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줄 분명히 알찌니라(19-22)

 

‘유다의 남은 자’들은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애굽 행을 고집합니다. 그곳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애굽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을 자신들도 다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경고는 이들의 불순종을 되돌려보려는 마지막 시도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쪽으로 굳어진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 깨보려고 예레미야는 그들의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용하는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13-18절의 요약입니다.

 

⑴ 너희는 분명히 알라(19)

 

유다의 남은 사람들이 이렇게 결정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42장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뒤이어 예레미야의 경고가 나옵니다. 이 네 절은 유다의 남은 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갈 것을 전제하며 이들의 자기기만적 불순종을 고발합니다.

애굽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여호와의 의지입니다. 이들의 불순종을 이미 알았던 예레미야는 이들에게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나도 오늘 너희에게 경고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19) 애굽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내리는 재난’(17)을 알고도 내려간 자들입니다.

 

⑵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20)

 

예레미야는 유다의 남은 자들을, 이들이 자기에게 한 약속 앞에 세워 이들의 자기기만적 행태를 고발합니다.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였다’(20절). 2-3절과 5-6절의 요약입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거나 전달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순종을 확약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진하여 예레미야에게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라고(5) 맹세했고,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겠다’고(6) 거듭 약속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순종할 것을 자발적으로 약속한 자들이었기에 이들의 불순종은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악했습니다.

사람의 반듯한 말에 속지 않으십니다. 요하난 일행의 ‘좋든 좋지 않든’ 순종하겠다는 말은 신앙 깊은 이의 믿음의 고백처럼 보였지만, 오만하고 고집스런 이의 입바른 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는 하나님이 마음을 속이는 말에 속으실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만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도 주신 것입니다. 무심코 던지는 습관적인 말들을 점검해봅시다. 마음을 담지 않은 그럴듯한 신앙 언어들이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를 방해하고, 사람들과의 진솔한 대화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⑶ 죽을 줄 분명히 알지니라(21-22)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이 삶과 죽음을 결정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신 심판의 말씀은 정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순종하면 심판의 말씀은 실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완고했습니다. 애굽에 대한 환상에 젖어 말씀을 듣는 귀를 닫아버렸습니다. 예레미야는 결과를 예견하고 그들이 맞게 될 비참한 결말을 선언합니다.

이미 마음이 굳어져 하나님의 말씀조차 멋대로 이용하려했던 이들을 향해 예레미야가 내린 꾸지람은 추상같은 처방이었습니다.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는 ‘너희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예레미야를 속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여호와까지도 기만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알려달라’해서 ‘오늘’ 알려주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모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21). 이들은 들어가서 머물고 싶어 했던 바로 그곳에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을 것입니다(22). 예레미야의 심판 예고는 내용상 17절의 요약입니다. 예레미야의 경고는 ‘너희는 분명히 알라’로 시작해서 ‘분명히 알지니라’로 끝납니다. 그런데도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하고 거기로 내려가 정착하기를 원한다면,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남은 백성이 마음에도 없으면서 순종의 맹세를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해도 순종할 자들이 아니라 자기 계획을 뒷받침 해주는 말이 나올 때까지는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피하지 못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간 대다수의 백성들처럼, 그들에게도 칼과 전염병의 재난이 꼭 임할 것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구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근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자, 완악한 시대를 위해 회개해야 합니다. 순종의 다짐이나 고백으로 순종의 행동을 대신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그의 말을 따라 순종해 나가는 것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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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2-01)

 


말씀을 순종하려는 남은 자

예레미야 42장 1-14절


 

옛날 시조 중에서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고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겉으로는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가득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위대하고 거대하게 보여도 실제로는 아주 연약하고 무능합니다. 해결할 수 없는 난제 앞에서 방황하고 두려워합니다. 바로 이때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 본문의 내용은 그달랴를 잃고 바벨론이 두려워서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로만 행하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합니다. 자신들의 진로에 대해서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이미 결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요하난과 백성들(1-6)

 

모든 삶에서 우리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위기를 만나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최선책을 찾아 나섭니다. 종종 마음속으로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는 확인받고 싶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대답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면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 나가야 합니다.

 

1이에 모든 군대의 지휘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나아와 2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탄원을 듣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 3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4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말하리라 5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6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1-6)

 

그달리야가 살해된 이후, 이스마엘이 추격해 쫓아버리고 그가 사로잡아가던 ‘왕의 딸들과 모든 백성’을 구출한 것으로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닙니다. 또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는 다른 살아가야할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⑴ 신탁의 부탁(1-3)

 

긴박한 상황에서 군대 지휘관들과 요하난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갈 길을 잃고 있었습니다. 40:15에서 요하난이 걱정했던 일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옵니다. ‘유다의 남은 자’가 멸망에 떨어질 위기에 처합니다.

 

갈대아인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유다 사람이 바벨론 왕이 임명한 총독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갈대아인들의 보복은 피할 수 없어 보였습니다. 이들은 가만히 앉아 보복을 당하느니 차라리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합니다. 애굽을 향해 가다가 베들레헴 근처 게롯김함에서 쉬게 됐을 때, 이들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생각해냅니다.

39:14과 40:6에 의하면 석방된 예레미야는 미스바의 그다랴에게로 보내지는데, 그는 미스바에서 그다랴와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맥에 따르면 요하난 일행이 예레미야를 찾아왔을 때, 그는 베들레헴 근처에 머물고 있었던 갓 같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언의 성취로, 이를 통해 그의 예언자적 권위가 전반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남은 유다의 모든 백성들, 요하난과 여사냐를 포함한 ‘모든 군대의 지휘관’과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예레미야에게로 옵니다. 모든 남은 사람이 예레미야와의 대화에 참여했기에 후에 누구도 핑계 될 수 없습니다. 모두 자기 말과 결정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자신들의 절망적인 처지를 호소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여호와께 중보해줄 것을 간청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는 예레미야와 여호와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성취하신 하나님을 함축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자신들의 갈 길을 위해서 중보기도해주길 부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표현하기를 ‘우리는 많은 사람 중에서 남은 적은 무리이니’는 과장법을 사용한 호소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 침공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남은 자들입니다. 요하난 일행은 환경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매우 마음이 낮아진 상태였습니다. 예레미야의 도움을 호소한 후에, 그들은 찾아온 목적을 언급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3) 그다랴가 살해당한 충격으로 바벨론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혼란에 휩싸인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당혹해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성적으로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은 합리적인 길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내려가야 할지, 또는 다른 길이 있는지 예레미야를 통해 여호와의 뜻을 묻습니다.

 

⑵ 부탁의 수락(4)

 

예레미야는 이들의 간절한 부탁을 기꺼이 들어줍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를 부탁하자, 예레미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주겠다고 응답합니다(4). 두려움에 사로잡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요하난 일행은 어쨌건 예레미야의 동포이고, 또 그와 함께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자들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하나나도 숨기지 않고 다 전달해줄 것을 약속합니다.

 

⑶ 일행의 답변(5-6)

 

예레미야가 메시지 전달을 약속하자 중보기도를 부탁했던 자들도 순종을 굳게 약속합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으로 세워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할’ 것을 장엄하게 약속합니다(5).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은 모두 좋든 나쁘든 순종하겠다고 맹세하고, 여호와를 증인으로 내세우기까지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말씀이 주어지든 간에 순종할 것을 확약하면서 순종이 축복의 길임을 고백합니다(6; 참조 7:23; 38:20; 40:9).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숨김없이 전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의 감정이 아니라 전할 메시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가 의식해야 할 것은 맡긴 분의 음성이었지 듣는 이들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확신한 말씀을 숨김없이 전하는 일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7-14)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 당신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7십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 8그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 지휘관과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부르고 9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보내어 너희의 간구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이렇게 이르니라 10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 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의 왕을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12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리니 그도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리라 하셨느니라 13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이 땅에 살지 아니하리라 하며 14또 너희가 말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양식의 궁핍도 당하지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들어가 살리라 하면 잘못되리라(7-14)

 

남은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지만, 그 응답은 자신들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했지만,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결정이 나니 순종하지 않으려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 들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기도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⑴ 신탁의 도입부(7-9)

 

열흘이 지난 후에 여호와의 응답이 주어집니다(7). 예레미야가 열흘 동안 계속 기도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답변이 주어지기까지 왜 열흘의 기간이 필요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놀람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애굽으로 내려가던 요하난 일행에게 열흘의 기다림은 긴 시산이었을 것입니다. 43:2-3에 따르면, 기다림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의심을 품게 됐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거듭 순종을 약속하고 순종이 복을 가져다준다고 고백했지만 이들의 순종은 결과적으로 열흘을 넘지 못합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응답이 주어지자 약속에 따라 예레미야는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 지휘관과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한곳으로 부릅니다. 처음 예레미야를 찾아와 중보기도를 간청했던 사람들이 모든 답변 전달에 참여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답변을 전달하기에 앞서 이들이 자신을 찾아와 중보기도를 부탁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제 전할 신탁은 예레미야가 개인적으로 여호와께 기도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이들의 청탁에 따라 여호와께 간구해서 받은 것입니다(9). 이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응답에 순종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⑵ 권면의 말씀(10-12)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답변은 조건적으로 주어집니다. ‘너희가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10) 여호와께서 당신이 내린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기에, 이들이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지금 살고 있는 유다에 그대로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요하난과 함께한 남은 백성들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이 땅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와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는 24:6에서 제1차 바벨론 유배민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24장은 제1차 바벨론 유대민들을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들로 선포했는데, 유다가 멸망한 후 가나안에 남은 자들에게도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집니다. 차이가 있다면 24장의 약속에는 조건이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라’(6)고 고백한 자들에게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가나안에 사는 자들의 눈에는 심판의 흔적만 보이겠지만, 여호와께서는 이미 이들을 위해 새로운 구원 시대를 준비하셨습니다.  11-12절은 요하난 일행이 처한 상황과 관련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는데(41:16), 그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들과 함께하시며 이들을 바벨론 왕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불쌍히 여기시기에 바벨론 왕도 이들을 불쌍히 여겨 고향 땅으로 돌려보낼 것입니다(참조 27:11). 선행하는 여호와의 자비가 바벨론 왕의 자비를 결정합니다. 바벨론 왕이 유다를 지배하도록 허락하신 분께서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하셨기에 바벨론 왕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것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본향’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바벨론의 보복이 무서워 애굽으로 도피하려고 떠나왔던 고향 땅을 가리킵니다. 요하난 일행에게 주는 구원 약속(11)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주신 약속의 말씀과 유사합니다(1:8).

 

⑶ 권고의 말씀(13-14)

 

권면의 말씀은 세 절로 짧게 주어지는데, 경고의 말씀은 13절부터 23절까지 열한 절에 걸쳐 길게 주어집니다.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겠다고 하던 요하난 일행은 눈앞에 보이는 불안한 유다에 남지 않고 안전한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할 것을 시사해줍니다. 13절의 조건문은 앞에 나오는 권면의 말씀을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14절의 고건문은 요하난 일행의 속마음을 노출한 것입니다. 내용상으로는 동일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 아니하리라.’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지 아니한’ 결정이기에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전쟁도 겪지 않고 나팔소리도 들리지 않고 양식이 떨어져 굶주리지도 않는 애굽 땅으로 내려간다면, 이들이 피하려 했던 재앙을 그곳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공격을 받을 때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신(22:7) 것처럼,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유다를 떠나려는 자들 앞에 다시금 구원에 이르는 권면의 말씀과 멸망으로 끝나는 경고의 말씀을 두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하난을 따르는 무리 속에 도사린 불신앙의 불씨를 보고 계십니다. 그들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대신에 전쟁도 없고 기근도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애굽을 택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보복도 근거 없는 걱정이었고, 애굽에서의 절대 평화와 번영도 근거 없는 망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헛된 상상이 빚어낸 부질없는 염려와 무익한 망상에서 우리를 건져 현실에 뿌리 내린 옹골진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애굽 행을 허락하는 말씀을 하시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결정을 정당화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결정하실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오만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처럼 자신의 생각이 부정적으로 고정되어 있으면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결제 받으려는 것처럼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통치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요하난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오히려 바벨론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바벨론 왕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하나님과 견줄 수 없음을 그들은 알아야 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요하난 일행은 안타깝게도 예레미야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들을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했을 때, 자신의 뜻이 아니라도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응답에 불순종의 길을 선택합니다. 기도의 모양은 갖추었으되 껍데기였을 뿐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순종할 결단과 믿음으로 드리는 참된 기도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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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1-01)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암투

예레미야 41장 1-10절


나라가 멸망해 갈 때, 나라의 지도자들은 당파 싸움이 극을 이룹니다. 조선 말기에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선조들 중에는 깨어있는 사람들은 나라를 구하고자 동분서주했습니다. 여러 해법을 내놓았지만 결국 그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채 멸망을 당하고, 고난의 세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뜻을 하나로 모아 바른 길을 찾아 걸었더라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요?

 

  •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포로로 끌려가고 왕이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의 총독으로 그다랴를 통독으로 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지도자들에게는 사사기 시대처럼 혼란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느다냐를 살해하는 이스마엘(1-3)

성도들에게 역사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이전투구의 공간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국익이 하나님의 보편적 정의와 사랑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대의명분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1일곱째 달에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요 느다냐의 아들로서 왕의 장관인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2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 있던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의 왕의 그 땅을 위임했던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3이스마엘이 또 미스바에서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모든 유다 사람과 거기에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1-3)

 

바벨론의 의해 총독으로 그다랴가 임명되었습니다. 그다랴의 지도 아래서 유다에 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을 섬기며 평화롭게 살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유다가 바벨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에 평안이 찾아온 것입니다.

 

⑴ 그다랴를 찾아간 이스마엘(1)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살해할 계획이라는 지휘관들의 제보가 옳았습니다. 이스마엘에 대해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이 덧붙여집니다. 이스마엘은 왕족 출신으로 다윗 가문에 속했고, 고위직에 속한 자로 전쟁 중에 군부대의 지휘관으로 활동했습니다. 이스마엘은 그다랴에게로 온 다른 지휘관들보다 혈통으로나 직분으로나 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왕족인 이스마엘은 지속적으로 바벨론에 반대하고 싸우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암몬 왕의 명령을 받아 그다랴 총독을 죽일 기회를 보았던 것입니다. 다윗 가문의 일원으로 시드기야 시대에 고위직에서 활동했던 인물이 바벨론 왕이 유다 총독으로 임명한 그다랴를 살해하는 주범으로 나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해 일곱째 달을 가리킨다면, 그다랴의 통치는 2달을 넘지 못했습니다. 52:12에 의하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열아홉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어전 사령관 느부사라단에 의해 예루살렘은 불에 타 폐허가 됩니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40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발생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입니다. 그나랴의 통치 기간이 더 길었으리라는 추측하는 학자들은 그의 살해 사건을 52:30에 나오는 세 번째 유배와 관련시킵니다.

30절에 따르면 ‘느부갓네살의 제이 십삼년’(주전 582)에 느부사라단이 유다 사람 745명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 경우 그다랴의 통치 기간이 대략 5년으로 늘어납니다. 유다의 운명에 미친 엄청난 결과에 비해 그다랴의 살해 사건 자체는 너무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⑵ 살해 당한 그달랴(2-3)

 

일곱째 달에 왕족 출신의 이스마엘이 부하 10명과 함께 미스바로 찾아오자 그다랴는 이들을 환대해 함께 식사합니다. 이들은 식 자리가 무르익자 일어나 그다랴를 갈로 치고(2),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유다 사람과 갈대아 군인도 죽입니다(3).

이스마엘은 그다랴의 신뢰(참조 40:13-16)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손님 대접’의 전통을 피로 물들입니다. 손님을 친절하게 맞이하는 주인을 해치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다랴가 베푼 신뢰와 친교의 식탁을 배반과 살인의 자리로 바꾸고 맙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수용하는 일보다 왕의 종친으로서 다윗 왕가를 무너뜨린 바벨론에 협력한 자에게 앙갚음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다랴의 암살로 유다 공동체를 재건하려는 시도가 수포로 돌아갑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다윗 집안에 속한 이스마엘에 의한 그다랴의 살해는 다윗 왕조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에 책임이 있는 다윗 왕조는 마지막까지 유다를 혼란과 분열에 빠뜨렸습니다.

여호야김(36장)과 시드기야(37-38장)의 불순종이 예루살렘을 불바다로 만들고 백성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했는데, 다윗 집안의 과오는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다윗 집안에 속한 이스마엘은 유다 총독 그다랴를 살해함으로써 지휘관들과 백성의 동참으로 힘차게 시작된 유다의 재건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윗 왕조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멸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멸망 이후의 새로운 출발마저 좌초시켰습니다. 갈대아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해 유다 땅에 남았던 자들이 애굽으로 피난처를 찾아 떠남으로써 다윗 왕조는 결국 가나안 땅에 남은 자들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미래의 구원을 책임질 남은 자들의 공동체로 바벨론 유배민들과 애굽 피난민들이 남습니다.

뒤따르는 41-44장의 이야기는 애굽 피난민들이 어떻게 여호와의 구원 계획에서 탈락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바벨론 유배 공동체만 남는다(참조, 24:57, 29:4-14).

 

순례자들을 살해하는 이스마엘(4-9)

사단은 지금도 진실의 얼굴을 한 거짓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격려와 축복과 평안으로 포장된 거짓 메시지로 심판의 경고를 감춥니다. 듣기에 좋은 말이 항상 꼭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은 아닐 수 있습니다.

 

4그가 그다랴를 죽인 지 이틀이 되었어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더라 5그 때에 사람 팔십 명이 자기들의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내고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로부터 와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나아가려 한지라 6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영접하러 미스바에서 나와 울면서 가다가 그들을 만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가자 하더라 7그들이 성읍 중앙에 이를 때에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기와 함께 있던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을 죽여 구덩이 가운데에 던지니라 8그 중의 열 사람은 이스마엘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우리를 죽이지 말라 하니 그가 그치고 그들을 그의 형제와 마찬가지로 죽이지 아니하였더라 9이스마엘이 그다랴에게 속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 시체를 던진 구덩이는 아사 왕이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을 두려워하여 팠던 것이라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가 쳐죽인 사람들의 시체를 거기에 채우고(4-9)

 

이스마엘이 그달랴를 죽인 다음 날, 80명의 사람들이 향품을 바치러 미스바에 왔습니다. 이스마엘은 그들을 울면서 맞이해 미스바로 초대했지만,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죽이고 시체를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그 구덩이는 바아사 왕이 아사 왕을 공격할 때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스마엘의 잔혹함이 드러났습니다.

 

⑴ 이스마엘의 흉계(4-6)

 

그다랴를 속여 암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성전 순례자 칠십 명에게 우는 모습으로 접근하여 안심시키고, 총독 그다랴를 면담하게 해주겠다고 속여서 유인한 후 무고한 백성을 살해합니다.

이스마엘은 유다 총독 그다랴와 그의 일행만 죽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호해주어야 할 순례자들마저 살해했습니다. 그다랴가 살해되고 다음 날이 됐지만 아무도 미스바에서 벌어진 일을 몰랐습니다(4). 이스마엘 일행이 미스바의 상황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시사해줍니다.

 

⑵ 순례자들의 살해(7-9)

 

일행은 도망하지 않고 미스바에 그대로 머뭅니다. 권력 장악을 시도한 것인지 다른 남은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때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에서 팔십 명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수염을 깎고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내고, 여호와의 집에 드릴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왔습니다(5). 아마도 옛 북왕국에 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622년 요시야에 의해 단행된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고 예루살렘 성전을 유일한 성전으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잿더미가 됐지만 제의마저 중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폐허가 됐고 제단도 없어졌고 제사장들도 대부분 사로잡혀 갔지만, 예배는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남은 자들은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며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탄식했던 것 같습니다. 순례자들의 등장은 이스마엘의 계획에는 없었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습니다. 순례자들을 안심시켜 미스바로 데려오기 위해 그는 자신도 순례자인 것처럼 위장하고 나가 그들을 맞습니다(6). 의심 없이 초대에 응한 순례자들이 성안으로 들어오자 이스마엘은 부하들과 함께 그들을 살해하고 구덩이에 던져버립니다(7). 순례자들을 모두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열 명은 밭에 숨겨놓은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8). 유다가 멸망한 후 지안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도적들은 들끓었습니다. 순례자들은 도적 떼에 다 빼앗지 않기 위해 일부 양식을 밭에 숨겨두었던 것 같습니다.

9절은 이스마엘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의 시신이 버려진 구덩이의 유례를 설명해줍니다. 이스마엘이 예루살렘으로 순례 가는 사람들을 죽인 동기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숨겨진 양식을 내놓는 조건으로 열 명의 목숨을 살려준 것으로 보아 단순한 약탈일 수도 있지만, 현재의 문맥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다랴의 행정부가 있는 미스바에도 적지 않은 양식이 비축돼 있었을 것입니다. 순례자들이 미스바를 들러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예상하고 이들에 의해 그다랴의 암살 소식이 알려질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이들을 죽였겠습니까? 양식을 감춘 곳을 알려준 열 명의 순례자를 살려준 것으로 보아서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북왕국에 속했던 사람들의 (다윗 왕조에 속한) 예루살렘 성소방문을 막기 위해 살해했습니까? 이 경우라면, 이스마엘은 나머지 열 명도 살해했어야 합니다. 순례자들을 살해하는 이스마엘의 행동은 피에 굶주린 인간의 잔인함을 보여줄 뿐으로, 그다랴의 살해 동기마저 광기의 발로로 보게 해줍니다.

 

암몬으로 도주하는 이스마엘(10-15)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악의적인 돌팔매질이 거룩한 공동체를 와해하게 됩니다. 작은 악이라도 허용하지 말고 죄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지우는 것이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우는 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평생 동안 자기 이권에 따라 다른 주인으로 바꾸는 일만 되풀이할 뿐 뿌리내릴 곳이 없습니다.

 

10미스바에 남아 있는 왕의 딸들과 모든 백성 곧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위임하였던 바 미스바에 남아 있는 모든 백성을 이스마엘이 사로잡되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사로잡고 암몬 자손에게로 가려고 떠나니라 11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 지휘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행한 모든 악을 듣고 12모든 사람을 데리고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싸우러 가다가 기브온 큰 물 가에서 그를 만나매 13이스마엘과 함께 있던 모든 백성이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군 지휘관을 보고 기뻐한지라 14이에 미스바에서 이스마엘이 사로잡은 그 모든 백성이 돌이켜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로 돌아가니 15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여덟 사람과 함께 요하난을 피하여 암몬 자손에게로 가니라(10-15)

 

이스마엘은 미스바에서 남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암몬 자손에게로 가려 했습니다. 요하난과 군 지휘관들이 이를 듣고 이스마엘과 싸우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기브온 큰 물가에서 만났을 때, 이스마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요하난 편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스마엘은 8명과 함께 요하난에게서 도망쳤습니다.

 

⑴ 미스바를 떠나는 이스마엘(10)

 

이스마엘과 그의 부하 여덟 명은 포로들을 데리고 암몬으로 도주를 시도합니다. 10절에 의하면 ‘왕의 딸들’(참조. 43:6)이 죽음과 유배를 면하고 미스바에 남겨졌습니다. 시드기야의 몸에서 나온 딸들보다는 왕실에 속한 여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느부사라단이 어떤 이유에서 이들을 포로로 잡아가지 않고 그다랴에게 보살피도록 위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⑵ 추격하는 요하난 일행(11-15)

 

요하난과 군 지휘관들이 그다랴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11) 부하들을 동원해서 이스마엘을 추적합니다. 이들은 기브온에 있는 큰 못 가에서 도주하는 이스마엘 일행을 만나(12) 잡혀가던 사람들을 구출합니다(13-14). 수적으로 불리한 이스마엘은 여덟 명의 일행과 함께 암몬으로 도피 합니다(15).

 

애굽으로 향하는 요하난 일행(16-18)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적절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16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군 지휘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이고 미스바에서 잡아간 모든 남은 백성 곧 군사와 여자와 유아와 내시를 기브온에서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서 17애굽으로 가려고 떠나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 머물렀으니 18이는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바벨론의 왕이 그 땅을 위임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였으므로 그들이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16-18)

 

갈대아인들의 보복이 두려워 요하난과 그 일행은 애굽으로 도망가려고 사람들과 길을 떠나 베들레헴 근처 게롯김함에 머뭅니다. 바벨론 왕에 의해 임명된 총독과 주둔해 있던 바벨론 군인이 살해되었기에 바벨론의 보복은 예상될 수 있었습니다. 게롯김함은 ‘김함의 야영지’를 의미합니다. 사무엘하 19:34-35,41에 따르면 김함은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이름입니다. 바르실래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길르앗으로 도피했을 때 도와준 인물입니다. 양자가 서로 관련이 있다면, 게롯김함은 다윗이 길르앗 사람 김함에게 준영지가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해보고, 신실한 삶을 살아가도록 다짐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해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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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0-01)

 

 


남은 동족 유다에게 돌아간 예레미야

예레미야 40장 1-16절


 

천주교 김수한 추기경이나 불교계 법정 스님 같은 분들은 세상 사람들에 많은 존경을 받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길은 가지 못한 분이지만 종교인으로서 일반사람들은 걸어가지 못할 만큼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을 통해 성도들에게 교훈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일부분이지만, 성도들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잘 깨달아 살아갑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법을 가르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성도들이 부끄럽습니다.

 

  • 본문은 예루살렘 멸망으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던 예레미야가 시위대장에 의해 발견되어지고 자유에 몸으로 석방이 되어 집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안정적인 바벨론으로 가는 대신 유다로 돌아가 백성 가운데 거하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이방인(1-3)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채, 하나님의 백성의 지위를 유지할 길은 없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서 촛대를 옮기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유다에게 벌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돌아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1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라마에서 풀려난 후에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2사령관이 예레미야를 불러다가 이르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곳에 이 재난을 선포하시더니 3여호와께서 그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이루어졌도다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 4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풀어 주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거든 가자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 만일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 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좋게 여기는 대로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 하니라 5예레미야가 아직 돌이키기 전에 그가 다시 이르되 너는 바벨론의 왕이 유다 성읍들을 맡도록 세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백성 가운데 살거나 네가 옳게 여기는 곳으로 가거나 할지니라 하고 그 사령관이 그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내매 6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사니라(1-6)

 

예레미야의 석방을 보고하는 기사의 시작(1)이 특이합니다. 예레미야가 라마에서 풀려난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고 하는데, 2-6절은 느부사라단과 예레미야의 대화입니다.

 

⑴ 말씀의 계시(1)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여호와의 말씀은 (새로운 도입부로 시작하는) 42:7-18에 가서야 나옵니다. 유다의 멸망으로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활동이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유다의 멸망으로 여호와의 심판 예언이 성취되기는 했지만, 예레미야를 통한 여호와의 개입은 멸망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유다를 멸망시키는 것이 그분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이 도입부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느부사라단의 입을 통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느부사라단의 말을 바벨론 사령관의 주장이 아니라, 여호와의 의지를 대변하는 말로 읽게 도와줍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가다가 라마에서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에 의해서 석방됩니다(1).

‘라마’(참조 31:15)는 베냐민 지파의 영토에 속한 성읍으로(참조. 여호수아 18:25; 사사기 4:5),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대략 10킬로미터 떨어진,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시위대 뜰에서 석방된 예레미야가 어떻게 다시 사로잡혀 다른 유배자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서 석방한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다시 체포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가 유배자들 가운데 있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⑵ 느부사라단의 말(2-5)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를 풀어주기에 앞서 예루살렘의 멸망 원인을 유다의 불순종으로 지적합니다(2-3). 유다 백성에 의해 거절당했던 예레미야가 구스인 에벳메렉(38:9)과 갈대아인 느부사라단에 의해 여호와의 예언자로 인정받습니다.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를 풀어주면서 자기와 함께 바벨론으로 갈 것인지 또는 유다 땅에 남을 것인지 마음대로 하도록 제안합니다(4). 그는 예레미야를 점령지의 포로가 아니라 완전한 자유인으로 대우합니다.

39:12에서 느부갓네살이 그에게 준 명령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에 일치하게 행동합니다. 느부사라단은 ‘바벨론 왕이 유다 성읍들을 맡도록 세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백성 가운데 살든지, 또는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말하며, 예레미야에게 길에서 먹을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냅니다(5).

 

⑶ 미스바의 예레미야(6)

 

예레미야는 전자의 제안을 선택합니다. 그는 미스바에 있는 그다랴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 삽니다(6). 예레미야는 폐허가 된 유다 땅에서 아직 할 일이 있음을 자각하고 남은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심판, 즉 아픔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새로운 자녀로 창조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바벨론에 항복을 권했지만, 그는 바벨론 나라의 번성을 위해 일하는 매국노가 아니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고 권고합니다.

 

안정을 되찾는 유다(7-12)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혼란스러워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그 혼란시기를 잡아주시기도 합니다. 가령 모세는 그의 장인 이드로를 통해 이스라엘 질서 있게 통치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총독 그다랴를 통해 남은 백성이 살길을 제시합니다.

 

7들에 있는 모든 지휘관과 그 부하들이 바벨론의 왕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그 땅을 맡기고 남녀와 유아와 바벨론으로 잡혀가지 아니한 빈민을 그에게 위임하였다 함을 듣고 8그들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두 아들 요하난과 요나단과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느도바 사람 에배의 아들들과 마아가 사람의 아들 여사냐와 그들의 사람들이 미스바로 가서 그다랴에게 이르니 9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그들과 그들의 사람들에게 맹세하며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사람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면서 바벨론의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 10보라 나는 미스바에 살면서 우리에게로 오는 갈대아 사람을 섬기리니 너희는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을 모아 그릇에 저장하고 너희가 얻은 성읍들에 살라 하니라 11모압과 암몬 자손 중과 에돔과 모든 지방에 있는 유다 사람도 바벨론의 왕이 유다에 사람을 남겨 둔 것과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그들을 위하여 세웠다 함을 듣고 12그 모든 유다 사람이 쫓겨났던 각처에서 돌아와 유다 땅 미스바에 사는 그다랴에게 이르러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심히 많이 모으니라(7-12)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총독으로 임명해(5,7) 그에게 유다를 맡기고 바벨론에 잡혀가지 않은 자들을 돌보게 합니다. 그다랴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떠나 미스바에 자리를 잡고 혼란과 두려움에 빠진 유다를 안정시키기 위해 애씁니다(6,10).

남쪽의 유다 산지로 피신했던 저항 세력들도 바벨론 점령군이 세운 그다랴의 통치를 받아들입니다. 이들의 지도자들인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 가레아의 두 아들 요하난과 요나단,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 느도바 사람 에배의 아들들과 마아가 사람의 아들 여사냐(참조, 열왕기하 25:23)가 그다랴에게로 돌아옵니다(8). 그다랴는 이들에게 (예레미야의 선포와 동일하게) 두려워하지 말고 바벨론 왕을 섬기며 그의 재건 사업에 동참할 것을 호소합니다(9). 이 땅에서 살면서 바벨론 왕을 섬기면 모든 일이 잘될 것입니다(참조 38:20). 그는 이들에게 역할 분담을 제안합니다. 자신은 미스바에서 갈대아인들을 상대할 것이니 각자 마음에 드는 성읍으로 가서 정착하여 살 것을 부탁합니다(10).

바벨론 왕이 그다랴에게 유다의 통치를 맡겼다는 소식이 유다의 경계 밖까지 전 해집니다. 전쟁과 요단 동편 모압과 암몬과 에돔 땅으로 피난했던 유다 사람들이 돌아와 성읍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11-12).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심히 많이 모으니라’(12b)는 사실적 언급이 아닙니다. 포도나무와 과일나무를 심어 그 열매를 거두기까지는 여러 해가 지나야 합니다.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진술로, 여호와께서 다시 땅을 축복하기 시작하셨음을 보여줍니다(참조. 29:5). 유다가 심판의 시대를 지나 구원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여호와의 축복이 함께하면서 전후의 혼란과 궁핍함이 신속하게 극복됩니다.

예레미야서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자주 사반 집안에 속한 인물들의 도움을 받는다. 사반은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 참여한 인물입니다(열왕기하 22:3 이하). 사반의 아들 아히감은 26:24에서 여호야김의 위험으로부터 예레미야의 목숨을 보호해줍니다. 열왕기하 22:14에 의하면 아히감은 여호와의 신탁을 묻기 위해 요시아 왕이 예언자 홀다에게 파견한 사절들 가운데 한명입니다. 사반의 또 다른 아들 엘리사는 시드기야 왕의 사신으로 바벨론에 갈 때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벨론 유배민들에게 전해줍니다(29:3). 느부사라단은 석방된 예레미야를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맡깁니다(39:14; 40:5). 예루살렘 왕궁에서 중요 지위를 차자했던 사반 집안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우호적이었음은 사반 집안의 정치적 입장과 예레미야의 신학적 입장이 서로 일치하는 바가 있있음을 사사해 줍니다. 사반 집안은 정치적 판단에 따라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였겠지만,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지배가 양적 공통분모였습니다.

 

내재된 위험(13-16)

오늘날 성도 중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평안한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고 박수 받지 않는 길이지만 가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과 좁은 문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그 길을 순종하며 나가야 합니다.

 

13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들에 있던 모든 군 지휘관들이 미스바에 사는 그다랴에게 이르러 14그에게 이르되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가 네 생명을 빼앗으려 하여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낸 줄 네가 아느냐 하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믿지 아니한지라 15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미스바에서 그다랴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되 청하노니 내가 가서 사람이 모르게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죽이게 하라 어찌하여 그가 네 생명을 빼앗게 하여 네게 모인 모든 유다 사람을 흩어지게 하며 유다의 남은 자로 멸망을 당하게 하랴 하니라 16그러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 이르되 네가 이 일을 행하지 말 것이니라 네가 이스마엘에 대하여 한 말은 진정이 아니니라 하니라(13-16)

 

유다를 안정시키고 재건하려는 그다랴의 시도가 예기지 않은 위험에 직면합니다. 그다랴에게 돌아온 유다 저항군의 모든 지휘관은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와 공모해 그다랴를 암살할 생각으로 돌아왔다고 알려 주지만, 그다랴는 이들의 정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13-14).

암살의 주모자와 배후 세력만 언급하고 그 동기나 목적에 관해서는 달리 말하지 않습니다. 또 그다랴가 자신에 대한 암살 정보를 신뢰하지 않은 이유도 나오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해준다. 지휘관들과 그다리의 만남이 성과 없이 끝나자 이번에는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은밀하게 그다랴를 찾아가서 제안합니다.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해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이스마엘을 죽일 테니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자, 그다랴는 요하난이 이스마엘에 관해 거짓을 말한다고 하면서 그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15-16). 그다랴가 이스마엘의 암살 음모에 관한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에 관해서는 추측만 가능하다. 시드기야 시대 왕궁의 당파적 분열을 경험한 그다랴는 화합과 일치에 우선을 두었을 수 있습니다. 그는 멸망당한 유다가 다시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휘관들의 정보를 무시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됐건, 이스마엘에 대한 그다랴의 신뢰가 결국은 요하난이 걱정했던 대로모인 모든 유다 사람을 흩어지게 하며 유다의 남은 자로 멸망을 당하게 합니다(참조. 41:16-43:7).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는 여기에만 나오는 인물로, 그가 이스마엘을 사주하거나 그와 공모해서 바벨론 왕이 유다 총독으로 임명한 그다랴를 죽이려 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암몬 왕은 유다 지역의 안정이 자신의 세력 확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랴는 바벨론 왕이 유다 총독으로 세운 인물이기에 암몬 왕의 의도는 자신에게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보복을 피하려고 그는 다윗 가문에 속한 이스마엘을 대리인으로 내세웠을까?


하나님께서는 때로 주변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말씀 앞에 신중한 분별이 필요하지만, 때로 사람의 음성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잇습니다. 안락함과 부요함이 아니라 부르심과 주의 뜻을 따라 선택하며 살아갑시다.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와 사회를 섬기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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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9-01)


말씀을 멸시한 유다의 멸망

예레미야 39장 1-18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는데, 말씀 앞에서 더욱 그렀습니다. 설마 그런 불길한 말씀이 이루어질까? 그런 재앙이 임할까? 말씀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모두 ‘설마’거리지만, 말씀을 멸시한 대가는 두렵고도 혹독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설마라는 말로 결코 말씀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 아무 성과 없이 끝난 시드기야 왕과의 마지막 만남 직후, 시드기야 왕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함락됩니다. 요시야 왕 13년부터 선포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성취됩니다.

 

예루살렘의 함락(1-10)

오리라고 경고했던 날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 최후의 날이 임했습니다. 아모스 시대부터 선지자들이 줄곧 경고한 바로 그 ‘여호와의 날’이 임하였습니다. 이제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은 틀렸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옳았음을 증명하게 되었습니다.

 

1유다의 시드기야 왕의 제구년 열째 달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2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성이 함락되니라 예루살렘이 함락되매 3바벨론의 왕의 모든 고관이 나타나 중문에 앉으니 곧 네르갈사레셀과 삼갈네부와 내시장 살스김이니 네르갈사레셀은 궁중 장관이며 바벨론의 왕의 나머지 고관들도 있더라 4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모든 군사가 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밤에 왕의 동산 길을 따라 두 담 샛문을 통하여 성읍을 벗어나서 아라바로 갔더니 5갈대아인의 군대가 그들을 따라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에게 미쳐 그를 잡아서 데리고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로 올라가매 왕이 그를 심문하였더라 6바벨론의 왕이 리블라에서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족을 죽였으며 7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하였더라 8갈대아인들이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고 9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잡아 바벨론으로 옮겼으며 10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1-10)

 

시드기야 왕 제 9년 10달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위된 예루살렘은 마침내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성벽이 뚫리고 점령당합니다(1-2). 18개월의 포위로 양식이 떨어진(참조. 38:9) 예루살렘은 기근으로 전투력을 상실하고, 성벽을 파괴하는 바벨론 군대를 막지 못합니다(52:6). 52:12-13에 의하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성전과 왕궁과 모든 집을 불사릅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는 야음을 틈타 ‘왕의 동산 길’을 따라 성벽 사이의 통로를 지나 도성 밖으로 탈출하여 아라바 쪽으로 피신합니다(4). 바벨론의 공격이 집중된 북쪽을 피해 남쪽으로 성을 빠져나갑니다. ‘아라바’는 원래 갈릴리 호수 남단에서 아카바 만 북쪽 끝에 위치한 엘랏까지 이어지는 요단 분지의 스텝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인데, 여기서는 여리고 평지를 가리킵니다.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시드기야는 갈대아 군대의 추적 끝에 여리고 평지에서 사로잡혀 하맛 땅 립나(리블라)에 있는 느부갓네살의 사령부로 끌려갑니다(5).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인 후에(6) 그의 두 눈을 뽑고 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7).

성을 점령한 갈대아인들은 왕궁과 백성의 집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허물어버립니다(8). 성에 다시 사람들이 거주할 수 없게 완전히 파괴해버립니다. 특히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는 성벽의 파괴가 치명적입니다.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이 재건되기까지 예루살렘 주민은 적의 위협에 노출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성에 남아있던 백성과 항복한 자들과 그 밖의 남은 백성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지만(9), 모든 사람이 사로잡혀 가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지배 계층에 속한 자들과 사회적·경제적으로 독립된 시민들과 수공업자들이 주로 유배를 당하고,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던 자들은 대부분 폐허가 된 가나안에 그대로 남겨집니다.

느부사라단의 마지막 조치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느부사라단은 ‘포도원과 밭을 유다 땅에 남겨진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들’에게 나눠줍니다(10). 이러한 토지의 재분배는 유다의 기존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혁명적 정책입니다. 농경 사회에 속하는 유다에서 법적으로 완전한 시민은 자기 땅에서 독자적으로 농사를 짓는 자들입니다. 주류에 속했던 자들이 사로잡혀 가서 생긴 빈 공간을 주변부에 속했던 빈민들이 차지합니다.

 

예레미야의 석방(11-14)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은 하나님의 경고를 업신여긴 이들에겐 죽음과 포로의 날이 되지만, 갖은 조롱과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가감 없이 주의 말씀을 전파한 예레미야에게는 자유의 날이 되게 하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예레미야를 선대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11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사령관 느부사라단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2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 13이에 사령관 느부사라단과 내시장 느부사스반과 궁중 장관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14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서 데리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 가운데에 사니라(11-14)

 

시드기야의 비극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한 다음에 예레미야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과 예언자의 운명이 완전히 엇갈립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시드기야는 도주에 실패하고 바벨론 군대에 사로잡혀 모진 고초를 당하고, 끝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유다 고관들에 의해 죽음의 문턱까지 떨어졌던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석방되고 후대를 받습니다. 물론 예레미야의 석방은 (아직 남겨진 사명이 있어서 허락된) 일시적 구원입니다. 그 역시 유다 민족과 다윗 왕조의 멸망이라는 파국적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40-44장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예레미야의 고난이 그가 선포한 심판 예언의 성취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심판을 선포한 예레미야는 끝까지 유다 백성과 함께 멸망의 무거운 짐을 집니다.

예레미야의 활동을 알고 있었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친위대장(‘사령관’) 느부사라단에게 예레미야를 석방해 환대하고 그의 요구를 다 들어줄 것을 명령합니다(11-12). 예루살렘을 점령한 느부사라단은 느부갓네살 왕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을 보내 시위대 뜰에서 예레미야를 데려다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맡겨 집으로 돌려보냅니다(13-14a). 시위대 뜰에 머물던 예레미야가 석방돼서는 백성 가운데 머뭅니다(14b). 예레미야가 물러나 있지 않고 두려움과 절망감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함께합니다. 그다랴가 예레미야를 데리고 간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예레미야의 집도 가능하지만, 그다랴에게 맡겨 데려가게 했음은 그다라와 관련된 집임을 시사해줍니다. 40:5에 따르면 그다라는 바벨론 왕이 유다의 총독으로 세운 인물입니다. 그다랴는 예레미야를 새 행정부가 들어선 집으로 데려간 것 같습니다. 그다랴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루살렘의 고위 관료로, 여호야김의 위협으로부터 예레미야의 생명을 보호해주었습니다(26:24).

온 나라가 무너진 것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왕궁과 백성의 집이며, 예루살렘 성벽 전체가 허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찬란했던 나라와 성읍이 일시에 무너집니다. 말씀을 멸시한 대가가 얼마나 심한 대가인지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지 않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에벳멜렉의 구원(15-18)

성도의 용기는 개인적 이익을 넘어 하나님의 정의와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위험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하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신실한 믿음과 용기를 보시고 안전과 보호를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자들에게 신실하게 응답하신다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용기를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15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6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눈 앞에 이루리라 1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18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15-18)

 

시위대 뜰에 구금된 예레미야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명령으로 석방된 이야기 다음에 갑자기 구스인 에벳멜렉의 구원을 약속해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기 이전의 시점으로 돌아갑니다.

15절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합니다. 38:7-13에 따르면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져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예레미야가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의 적극적 개입으로 구출돼 시위대 뜰로 옮겨집니다. 내용상으로나 시간상으로나 여기보다는 38:7-13 다음에 위치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에벳멜렉에게 주는 구원 약속이 의도적으로 예레미야의 석방 기사 다음에 놓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는 에벳멜렉의 구원 약속만 나오고 약속에 따라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나 언급은 없습니다. 구원 약속의 성취를 (간접적으뢰 보여주기 위해 예레미야의 석방 기사 다음에 놓입니다. 예레미야에게 나타난 약속의 성취가 에벳멜렉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구원의 성취를 보장해줍니다.

예레미야가 구스인 에벳멜렉의 도움으로 사지에서 벗어나 시위대 뜰에 머물고 있을 때(38:13) 여호와의 말씀이 내립니다. 말씀은 에벳멜렉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예레미야를 반역자로 처형하려는 고관들의 강압적 요청을 왕이 승인했기에 예레미야를 위해서 나선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그 사람이 이방인이라면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입니다. 고관들의 불의에 맞서 여호와의 예언자를 살린 에벳멜렉의 헌신이 여호와에 의해 인정을 받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에벳멜렉에게 가서 당신께서 주시는 구원 약속을 전하게 하십니다. 약속에 앞서 예루살렘의 멸망의 날이 왔음을 알려줍니다. 에벳멜렉은 왕궁 내시였기에 바벨론 군대의 칼을 피하기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1:8)는 약속을 주신 여호와께서 에벳멜렉에게도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17).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는데(37:17), 그의 시종인 에벳멜렉은 대적의 손에 넘겨지지 않습니다. ‘네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유다의 고관들도 가능하지만, 성의 함락이라는 가까운 문맥을 고려하면 바벨론 군대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18a절은 내용상 17절의 반복으로, 구원 약속의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18b절은 여호와께서 에벳멜렉을 구원하시는 이유에 해당합니다.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이 복을 받듯이(17:7) 이방인 에벳멜렉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에벳멜렉의 신실한 믿음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을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신뢰하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실함을 잃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시고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신뢰와 용기를 드리며, 그분의 구원의 약속을 확신하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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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9-01)


언약을 성취하신 위대한 하나님

시편 89편 1-18절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 속에서 혹시 어떤 약속 때문에 고민하고 기다리다가 잠 못 이룬 밤이 있었는데, 그 약속이 성취된 것에 대해 너무 기뻐서 소리친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었다면 그 순간이 당신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약속해주시는 분이시고 그것을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통해서 바로 주어진 것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떠올리며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인자와 성실을 찬양합니다. 다윗과 연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왕이시며 그가 만든 모든 세계를 공의와 인자로 통치하시므로, 하늘의 천군 천사나 바다와 신 등의 자연 또는 땅의 백성들로부터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다윗 언약에 드러난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1-4)

인자와 성실은 시편에서 자주 언급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인자를 한없이 베푸시는 분입니다.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지키고 이루시는 성실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인해 언약 백성이 된 성도는 하나님의 그 성품을 영원히 찬송하고 대대로 전해야 합니다.

 

1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2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3○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4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셀라)(1-4)

 

시편 89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영원히 찬양하고 대대에 전하겠다는 시인의 선포로 시작합니다. ‘확실히 내가 말하였다’(2)라고 선언하는 시인은 하나님 찬양에 대한 자신의 진정성과 확고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는 찬양의 초점을 먼저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의 영원함과 견고함에 맞춥니다.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2)의 문장은 직역하면 ‘영원히 인자하심이 건축되리이다’로 번역되는데, 이처럼 ‘영원히’가 문장 맨 앞에 나와 하나님의 인자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강조합니다.

연이어 나오는 “당신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2)는 문장에서는 ‘하늘’이 맨 앞에 나와 강조되었습니다. 하늘을 강조한 의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실을 견고하게 한 곳이 하늘임을 알림과 동시에 그의 지위가 천지를 포함한 우주의 왕이자 주권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문장은 ‘당신의 성실하심이 하늘처럼 견고하시리라’로도 번역이 가능한데, 이 경우는 앞에서 하나님의 인자가 영원히 세워졌듯이 그의 성실도 하늘과 같이 변치 않으면서도 견고하고 영원함을 재차 강조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1-4절에 ‘영원’과 관련된 단어(영원히, 하늘에서, 영원히, 대대에)가 반복해서 나온 것을 고려하면, ‘하늘에서’라는 표현도 하나님의 지위와 더불어 영원성을 함께 함축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시인이 1절부터 찬양하는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게 베푸는 인자와 성실보다는 3-4절과 이후 19-37절 구체적으로 언급된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과 긴밀하게 연결된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왕이 된 후(통치 기간: 기원전 1010-970년) 그와 언약을 맺으셨고, 그 내용은 사무엘하 7장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가리켜 ‘내 종’(삼하 7:5)이라 언급하셨는데, 본 시편에서도 다윗은 ‘종’과 ‘내가 택한 자’(3)로 언급되었습니다. 이 호칭들은 하나님과 다윗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암시하면서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며 다윗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백성들을 지도할 자임을 분명히 해줍니다. 그렇다면 언약의 주요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영원한 왕권을 허락하셨다’는 문장으로 요약됩니다(4). 다윗의 왕권은 ‘네(다윗) 자손’과 ‘네 왕위’라는 문구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고, 그 왕국의 견고함과 영원함은 ‘영원히 견고히 하며’와 ‘대대에 세우리라’는 표현(4)에 나타납니다.

또한 여기서 시인은 4절의 다윗 왕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1-2절의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에 대한 찬양 내용(영원성, 견고함)을 동일시합니다. 2절의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은 4절에서 ‘다윗의 왕위와 자손’으로 대체되었을 뿐, 2절과 4절은 같은 동사(세우다, 견고하게 하다)와 같거나 유사한 뜻의 부사(영원히, 대대에, 하늘에서, 영원히)가 반복되어 두 절의 연결고리가 강화되었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은 하나님의 속성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연결성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한 하나님의 언약 자체에 그의 인자와 성실이 내포되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여기서 시인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을 때 약속하신 그 인자와 성실을 지금 다윗의 왕권에 지속해서 나타내시길 호소하는 것입니다. 현재 시인이 처한 상황은 38절 이하의 내용(다윗 왕조의 종말과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심)을 고려할 때, 포로기(기원전 586-538년)로 추정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1-2절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찬양과 선포는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품을 다윗의 언약에 계속 나타내야 함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그렇게 해주시길 촉구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온 우주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실을 찬양(5-18)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은 하늘도 찬양할 만큼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떠한 신도 그분 앞에서도 두려워 떨 정도로 전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실 뿐 아니라 성실하십니다. 그 큰 능력으로 언약을 성실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은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5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6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7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8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9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10주께서 라합을 죽임 당한 자 같이 깨뜨리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 11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12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나이다 13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이 들리우셨나이다 14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15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16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 17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18우리의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니이다(5-18)

 

이 부분은 주님의 기이한 일들과 그분의 성실을 찬양하고, 주님이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로서 바다를 다스리시고, 주의 원수를 흩으신 것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개관하며 시작합니다.

 

(1) 천상에서 전능자 하나님의 성실을 찬양(5-8)

 

시인이 땅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을 찬양하듯, 하늘에서는 천군천사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능력과 성실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들은 5절에서 ‘하늘’과 ‘거룩한 자들의 모임’으로, 7절에서는 ‘거룩한 자의 모임’과 ‘둘러 있는 모든 자’로 소개되었습니다. 이 천상의 실체들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에워싸고 그를 보좌하고 그의 기이한 일과 성실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기에 천상의 존재들까지 그를 찬양합니까? 시인은 하나님께서 인간 나라의 한 왕으로서 다윗을 선택하여 언약을 맺은 분임을 밝혔고, 이제 그분이 온 우주의 왕이자 주권자임을 선포합니다(6-8). 6,8절의 ‘누구리이까?’로 끝나는 세 가지 수사의문문이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대답하면서 하나님께서 우주의 전능한 왕임을 부각합니다. 첫째, 구름 위 천상에서도 하나님과 비교할 자가 없습니다. 6절의 ‘비교할 자’에서 ‘비교하다’는 원래 ‘순서대로 세우다’, ‘전쟁터에서 군사를 정렬하다’의 뜻이므로, 비교할 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앞설 자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신들, 즉 천군 천사나 신적 존재들 중에서도 하나님과 같은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군천사들마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종합니다. 셋째, 하나님과 같이 강한 자가 없습니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란 칭호가 암시하듯 하나님께서는 모든 천군천사 군대의 우두머리십니다.

 

(2) 능력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9-14)

 

우주의 왕으로서 천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은 하늘 아래 바다와 땅과 산에서도 여실히 나타납니다. 9,10절에 묘사된 ‘바다’, ‘파도’, ‘라합’, ‘원수들’은 모두 바다의 질서를 깨뜨리고 혼란을 일으키는 세력을 상징하는데, 이런 세력도 하나님 앞에서는 제 힘을 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만한 바다(‘바다의 파도’로 번역됨)를 다스리시고, 거세게 일어나는 파도를 단번에 잠잠케 하십니다. 라합 같은 위협적인 바다 생물도 이미 죽은 자처럼 짓밟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적의 정체가 무엇이든지간에 그들을 제압하여 홀을 수 있는 강한 능력의 용사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혼란과 파괴를 가져오는 세력을 통제하고 질서로 다스릴 수 있는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세상의 기초를 놓은 창조주시기 때문입니다. 천지와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작품이며 그의 소유물입니다(11). 사람들은 갈릴리 남서쪽의 다볼산이나 북동쪽의 헤르몬 산을 신들의 거주지로 여기지만, 이들을 포함한 사방의 산들은 다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듣고 즐거움의 반응을 보이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능력을 가진 창조주이자 왕이시나 그의 모든 다스림의 기초는 공의와 정의 그리고 인자함과 진실함에 있습니다. 시인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찬양하고 그의 속성을 언급하는 데에는 전능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한 언약을 회복하고 그의 인자를 계속해서 보여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암시되었습니다.

 

(3) 왕이신 하나님을 기뻐하는 백성의 행복(15-18)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을 찬양하면서 청중에게 천상에서의 하나님과 바다와 산에서의 하나님을 기억하게 했고, 이제 땅으로 와 백성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산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보고 즐거워하듯(12), 왕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 탄성을 지르는 백성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얼굴빛’) 안에서 살며 그의 공의를 지킴으로써 높아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힘과 방패로 삼고 그의 은총 덕분에 힘과 승리를 얻는 자들입니다. 이 백성을 통치하는 인간 왕도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분의 공의와 힘을 의지하기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높아지고 승리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다윗 왕국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되길 계속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힘과 보호가 되는 진정한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구원자,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 기이한 일들을 능히 행하십니다. 의와 공의와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역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들이 넘쳐납니다. 온 땅과 하늘도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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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8-02)

 


중간에서 머뭇거리는 시드기야 왕

예레미야 38장 14-28절


 

시드기야는 나름 괜찮은 인생이었습니다. 나름 좋은 자질과 지혜를 가졌고, 어려운 시기지만 왕좌도 경험했으니, 나름 족적을 남긴 인생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아쉬운 것은, 진리 앞에 반응하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시드기야의 면모를 살펴볼 때에, 그의 아쉬움이 우리에겐 없기를 바랍니다.

 

  • 시드기야 왕이 시위대 뜰에 구금된 예레미야를 성전 셋째 입구로 불러 만납니다. 왕이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묻자 예레미야는 왕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왕은 여호와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신뢰하고 그에게 신탁을 묻지만, 그가 전해주는 신탁에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묻는 시드기야(14-23)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했습니다. 오늘 반드시 전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용기 있게 실천합시다.

 

14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선지자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성전 셋째 문으로 데려오게 하고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물으리니 한 마디도 내게 숨기지 말라 15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왕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이 결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16시드기야 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으며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넘기지도 아니하리라 하는지라 17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당하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18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19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염려하건대 갈대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넘기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20예레미야가 이르되 그 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넘기지 아니하리이다 원하옵나니 내가 왕에게 아뢴 바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 21그러나 만일 항복하기를 거절하시면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말씀대로 되리이다 22보라 곧 유다 왕궁에 남아 있는 모든 여자가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로 끌려갈 것이요 그 여자들은 네게 말하기를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하리라 23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아인에게로 끌려가겠고 너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벨론 왕의 손에 잡히리라 또 네가 이 성읍으로 불사름을 당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4-23)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바빌론 침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에 항복하라고 충고하지만, 왕과 백성은 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고, 시드기야는 포로로 잡혀갑니다.

 

⑴ 도입부 : 맹세하는 시드기야(14-16)

 

시드기야 왕과 예언자 예레미야의 마지막 만남입니다. ‘여호와의 성전 셋째 문’으로 불러 만납니다. 성전의 셋째 문은 왕이 사람들에게 노출되지 않고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왕궁과 성전을 이어주는 문인 것 같습니다.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강하게 ‘네게 한 가지 일을 물으리니 한 마디도 내게 숨기지 말라’(14)라고 묻습니다. 시드기야가 알기를 원하는 ‘한 가지 일’(참조, 사무엘하 3:13; 14:18)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37:17에서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왕의 요청을 따르기 전에 예레미야는 먼저 두 가지를 분명히 합니다(15). 첫째는 자기 생명과 관련된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왕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이 결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예레미야의 의심과 두려움은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고관들의 위협적 요청 때문이기는 하지만, 38:4-6에서 예레미야는 왕이 이들의 손에 자신을 넘겨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24절에서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자신과의 대화를 누설하면 죽게 되리라고 위협합니다. 두 번째는 예레미야가 이미 여러 번 경험한 시드기야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관련된 것입니다.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말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⑵ 예레미야의 양자택일적 메시지(17-18)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두 가지를 말했는데, 시드기야는 첫 번째에 관해서만 답변하고 두 번째의 ‘듣지 않음’에 관해서는 침묵합니다. 다시금 시드기야가 듣기는 듣지만 따르지는 않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목숨을 노리는 고관들의 손에도 넘기지 않을 것을 살아계신 여호와를 두고 ‘비밀히’ 맹세합니다(16). 은밀한 맹세는 신하들의 눈을 피하려는 시드기야의 염려를 시사해줍니다. 37:17에서도 시드기야는 왕궁에서 예레미야에게 ‘비밀히’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는지를 물어봅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생명을 노리는 고관들을 ‘그 사람들’로 부릅니다. 자기 신하들에 대한 강한 불신감과 거리감을 보여줍니다. 38:9에서 에벳멜렉도 예레미야를 참소해 구덩이에 던져 넣은 고관들을 ‘저 사람들’로 부릅니다. ‘그 사람들’과 ‘저 사람들’은 같은 ‘하아나쉼 하엘레’의 번역입니다. 보통은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는데 시드기야는 여호와를 수식하는 관계문을 하나 덧붙입니다. ‘우리에게 영혼을 지으신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시드기야는 여호와를 생명을 주신 창조주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좁게는 시드기야와 예레미야를 넓게는 모든 인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생명을 주신 분임은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도, 왕조차 생명을 빼앗을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드기야는 생명을 주신 분이 여호와임을 고백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그분께 맡기지는 않습니다. 시드기야가 격식을 차려 엄숙하게 맹세하자 예레미야도 격식을 차려 응답합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예레미야서에만 나오는 표현입니다(참조, 35:17: 44:7).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능력의 하나님 여호와의 권위에 의존해서 신탁을 전합니다. 1계의 신탁은 예레미야가 이미 여러 번 선포했던 메시지입니다(참조, 21:9; 38:2). 저항을 포기하고 자진해서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입니다. 항복이 가져오게 될 긍정적 결과로 세 가지가 언급됩니다. 왕의 생명이 살아남고 예루살렘 성도 불사름을 당하지 않고 왕의 집안도 살게 됩니다. 항복의 결과가 세 문장으로 표현된 것처럼 항복하지 아니했을 때의 결과가 세 문장으로 표현됩니다. 예루살렘 성이 갈대아인들의 손에 넘겨지고 그들은 성을 불사를 것이며, 왕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18).

항복했을 때의 17절과 비교해보면 일부 변화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자에서는 왕의 생명이 처음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첫머리에 나옵니다. 관심이 왕의 운명에서 예루살렘의 운명으로 옮겨집니다. 왕의 결정에 따라 예루살렘은 잿더미가 될 수도, 점령만 될 수도 있습니다.

 

⑶ 시드기야의 반응(19)

 

시드기야가 항복을 주저하는 이유가 그의 입을 통해 밝혀집니다. 시드기야는 먼저 항복한 유다 사람들에 의해 학대당할 것을 두려워합니다(19). 이들이 예레미야의 신탁(참조, 21:9; 38:2)에 따라 진영을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다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저항을 포기하고 바벨론에 항복했습니다. 이들의 입장에서 항복을 거절하는 또는 주저하는 시드기야는 유다를 회복 불능의 완전한 파멸로 몰아넣는 왕이었습니다.

 

⑷ 예레미야의 답변(20-23)

 

시드기야는 항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조언을 받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예레미야는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왕에게 자신이 전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간절히 권면합니다(20). 왕이 항복할지라도 갈대아인들이 왕을 먼저 항복한 유다 사람들에게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왕의 생각과 달리 일이 잘 풀려서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드기야의 두려움은 예루살렘 왕궁에서 벌어졌던 주전파와 화친파 사이의 극심한 정쟁과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한 시드기야 왕권의 허약함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왕이 거절하는 경우와 관련해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여자들이 끌려가면서 부르는 노래는 형식상 애가이지만, 내용은 조롱의 노래입니다. ‘네 친구들’은 문자적으로는 ‘네 평화의 사람들’입니다(참조. 20:10). 동사 ‘빠지다’의 호팔은 단순 실수가 아니라 친구들의 꾐에 넘어가 진흙에 빠졌음을 보여줍니다(참조. 38:6). 시드기야를 죽음의 늪에 빠뜨린 자들은 그가 허우적거리자 등을 돌리고 떠납니다. ‘유다 왕궁에 남아 있는 여자’는 23절의 시드기야의 아내들과 구별되는, 여전히 왕궁에 남아 있는 여호야김이나 여호야긴에게 속했던 여자들을 가리킵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기를’ 거절하기에(21) 왕궁에 남아 있는 여자들이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로 끌려갑니다. 23절은 18절을 받아 한 가지를 더 첨가합니다. 왕의 아내들과 자녀들도 포로로 끌려갑니다. 왕이 나가지 않기에 그의 아내들과 자녀들이 갈대인들에게 끌려갑니다.

날로 더해지는 박해 속에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전합니다.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했던 시드기야 왕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은밀히 불러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심한 절망에 빠진 왕의 갈등과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기위감에 절박한 심정으로 전합니다.

 

비밀 유지를 명하는 시드기야(24-27)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백성이고 구별한 도성이라도 살 길을 거부하면 반드시 심판하신 분입니다. 사람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멸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은 하나님을 보면서 결단하는 신앙입니까?

 

24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너는 이 말을 어느 사람에게도 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25만일 고관들이 내가 너와 말하였다 함을 듣고 와서 네게 말하기를 네가 왕에게 말씀한 것을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에게 숨기지 말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또 왕이 네게 말씀한 것을 전하라 하거든 26그들에게 대답하되 내가 왕 앞에 간구하기를 나를 요나단의 집으로 되돌려 보내지 마소서 그리하여 거기서 죽지 않게 하옵소서 하였다 하라 하니라 27모든 고관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물으매 그가 왕이 명령한 모든 말대로 대답하였으므로 일이 탄로되지 아니하였고 그들은 그와 더불어 말하기를 그쳤더라(24-27)

 

시드기야 왕의 요청에 따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동안 지속적으로 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바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⑴ 왕의 지침(24-26)

 

예레미야의 말이 끝나자 시드기야가 그에게 위협적으로 비밀 유지를 당부합니다(24). 예레미야가 대화의 내용을 누설한다면 생명을 내놓아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전해준 이상/말씀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시드기야의 침묵은 그가 예레미야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시사해줍니다. 같은 유대인들에게 당할 학대를 두려워한 시드기야는 여호와의 말씀보다 고관들의 움직임에 더 신경을 씁니다.

시드기야는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자신과의 대화에 관해 캐물을 것을 알고 예레미야에게 이들에게 답변할 말을 가르쳐줍니다(25-26). 분명 고관들이 찾아와서 왕이 한 말뿐 아니라 예레미야가 한 말까지 왕과 나눈 모든 대화에 관해 물어볼 텐데, 그러면 요나단의 집으로 돌아가면 죽게 되니 그곳으로 보내지 말라달라고 왕에게 간청하였다(참조 37:20)고 그들에게 말하게 합니다.

 

⑵ 왕의 지침에 따른 예레미야(27)

 

왕은 예상대로 고관들이 모두 예레미야를 찾아와 묻지만, 예레미야는 왕이 명령한 대로 그들에게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달리 이야기하지도 않고, 대화에 관해 들은 바도 없기에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묻는 일을 그만둡니다(27).

 

맺는 말(28)

어떤 성도가 부당하게 감옥에 갇혔지만, 진리를 전하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내와 신실함에 감동한 사람들은 결국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큰 재난을 겪은 후, 사람들은 회개하고 진리를 받아들여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를 지키고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28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감옥 뜰에 머물렀더라(28)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동안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는 어떤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예언을 전했습니다. 이 절은 인간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레미야의 인내와 신실함은 우리에게 진리를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줍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임을 상기시키며, 회개와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귀한 면모를 많이 가졌지만, 아쉬움을 품은 인생이 많습니다. 말씀에 대한 관심도 좋고, 지혜도 좋지만, 우리의 삶을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용기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용기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정성 다해 따르며 맡기신 하나님의 말씀을 용기 있게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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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8-01)


고난과 구원을 경험한 예레미야

예레미야 38장 1-13절


우리는 모두 인생의 여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고난과 도전에 직면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일을 했을 때조차, 오히려 어려움과 반대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고, 우리의 믿음은 시험에 들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 주위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반대로 피해를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자 고관들에 의해 반역자로 체포되었습니다. 예레미야를 왕의 아들 말기야의 우물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물은 없고 진흙만 있는 구덩이에 빠졌기에 예레미야가 생존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완전히 끊어진 순간에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도움이 옵니다.

 

구덩이에 갇힌 예레미야(1-6)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한 것은 조국에 대한 반항이나 부정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이 살 길이 무엇인가를 예레미야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민족에 운명을 쥐고 있는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내용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조국에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1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는 말을 들은즉 이르기를 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 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4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5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 6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1-6)

 

시드기야 왕의 시위대 뜰 안에 갇혀있는 예레미야는 온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을 계속하여 선포하고 예언했습니다. 본문에서도 예레미야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감하지 않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⑴ 고발의 근거(1-3)

 

예레미야가 체포되는 상황이 37:11-21과 달리 기술됩니다.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선포한 메시지의 내용을 문제 삼아 고발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바벨론 군대에게 포위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벨론에 항복을 권고합니다. 계속적으로 유다가 저항하면,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게 될 것이지만 항복하면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백성들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하시는 가운데서도 그 백성의 살 길을 열어 두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면서도 그 가운데서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했던 메시지의 핵심은 바벨론에 항복하는 자는 살겠고, 대항하는 자는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서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에레미야는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2) 그리고 ‘이(예루살렘)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3)고 멸망하겠다는 내용을 반복하여 전했습니다.

‘이 성’은 예루살렘 성입니다. 이 성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며, 언약궤가 있는 곳이며,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이 성에 머무는 것을 사모하며 이 성에 머무는 것이 자랑과 큰 특권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편 15:1)라고 성전에 거하는 즐거움을 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성은 이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호와의 장막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을 떠나셨으며, 오히려 이제는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배반의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에 의해 멸망하셨던 것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32:12에서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매매 증서를 바룩에게 주었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고발의 증거로 사용합니다. 2절은 21:9에 대한 인용입니다. 32:3을 인용하는 3절은 항복만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이유를 보여줍니다.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점령은 여호와의 결정으로 어떤 경우에도 취소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 확정됐기에 성을 떠

 

⑵ 말씀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4-6)

 

예레미야는 계속적으로 외쳤습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에 평안이 아닌 재앙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몇몇 고위 관리들은 성 안에 남을 군인들과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는 이유로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고 예레미야를 왕에게 고발합니다. 그들을 왕에게 나아갈 수 있는 ‘고관들’로 부릅니다. ‘셀레먀의 아들 유갈’은 37:3에서 시드기야에 의해 제사장 마아세야의 다들 스바냐와 함께, 마지막의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은 21:1에서 마찬가지로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와 함께,

예레미야의 이러한 예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 중에 예루살렘에 있는 고위 관리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 합니다. 그리고 왕은 그들의 고발을 허용하여 웅덩이에 집어넣습니다. 그 웅덩이는 물 대신에 진흙으로 채워진 웅덩이 속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에렛멜렉이었습니다. 당신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구스인 에벳멜렉을 통한 구출(7-13)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삶은 때때로 듣기 싫은 말이라 하더라도 그 말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 걷는 이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이방인 구스인 내시인 에벳멜렉을 통해 예레미야가 구출을 받습니다.

 

7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그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8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아뢰어 이르되 9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에서 굶어 죽으리이다 하니 10왕이 구스 사람 에벳멜렉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 11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 곳간 밑 방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헝겊과 낡은 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구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밧줄로 내리며 12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당신의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에 대시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13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7-13)

 

고관들이 왕을 강요해서 예레미야를 진흙 구덩이에 집어넣었기에 예레미야의 구출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왕과 고관들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흙으로 덮인 깊은 구덩이에 던져져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예레미야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이방인이었습니다.

 

⑴ 왕을 찾아간 에벳멜렉(7-8)

 

뜻밖에도 궁전에 있던 구스인 내시 에벳멜렉이 예레미야가 고관들에 의해 구덩이에 넣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행동에 나섭니다. 왕이 왕궁 밖에 있었지만, 그는 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왕을 찾아 나섭니다(8). 왕궁의 실세인 고관들의 결정에 맞서는 에벳멜렉의 행동은 목숨을 담보로 한 극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번역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지만, 7절은 1절과 동일하게 ‘그리고 그가 들었다’로 시작합니다. 스바댜도 듣고 행동에 나서고 에벳멜렉도 듣고 행동에 나섭니다.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이른 말을 들은 구스인 에벳멜렉은 왕에게 예레미야의 구출을 호소합니다. 왕이 어떤 이유나 목적에서 ‘베냐민 문’에 앉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성문에서 재판이 열리기에 왕이 법적 문제에 관한 백성의 호소를 듣고 판결해주기 위해 성문에 앉았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바벨론의 포위 공격을 받는 성의 방비를 직접 살펴보기 위해 베냐민 문으로 시찰 나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베냐민 문’은 문맥적으로도 주목할 만합니다. 37:12-14에서 예레미야는 베냐민 문을 지나가려다가 수문장 이리야에 의해 체포됐습니다. 예레미야가 체포된 바로 그 문에서 예레미야의 구출이 결정됩니다.

 

⑵ 에벳멜렉과 왕의 대화(9-10)

 

이방인 에벳멜렉이 왕도 거스를 수 없었던 고관들(5)에 홀로 맞섭니다(9). 그는 먼저 예언자 예레미야를 참소해 구덩이에 던져 넣은 고관들의 행위를 악으로 고발합니다. 이들이 한 일은 모두 악하다고 고발합니다. 뒤이어 그는 예레미야의 절망적 처지를 언급합니다. 이미 성 중에 떡이 다 떨어졌기에 구덩이에 던져진 예레미야는 거기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호소합니다. 9절에서 에벳멜렉과 고관들의 대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왕에게 말할 때 4절의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칭하지 않고 ‘이 사람’(이 자)으로 부르고, 에벳멜렉은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칭하고 고관들을 이 사람의 복수형 ‘저/이 사람들’로 부릅니다.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고 홀대하던 유다의 고관들이 이방인 왕궁 내시에 의해 홀대받습니다. 유다 백성에게서 버림을 받은 예레미야가 이방인에 의해 예언자로 인정받습니다. 37:20-21에서 예레미야의 간청에 긍정적으로 응답했던 시드기야는 에벳멜렉의 개입에도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힘이 없다는 핑계로 예레미야를 고관들의 손에 넘겼던 왕이 여기서는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죽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왕은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언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도록 에벳멜렉에게 명령합니다.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는 일은 대여섯 명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왕은 고관들의 방해나 저항을 염두에 두고 서른 명을 데려가게 한 것 같습니다.

 

⑶ 예레미야를 구하는 에벳멜렉(11-13)

 

예레미야를 구출하는 장면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합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에벳멜렉은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구출 계획도 세우고 그들로 실행합니다. 먼저 왕궁 창고로 가서 구출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 예레미야에게로 갑니다.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지만(6,9), 에벳멜렉은 바닥의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게 ‘헝겊과 낡은 옷’을 줄에 묶어 예레미야에게 내려 보냅니다. 그는 구출 중에 예레미야가 다치거나 사고가 나지 않게 신중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겨드랑이와 줄 사이에 헝겊과 낡은 옷을 끼워 넣게 한 후 줄을 당겨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올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움의 근원이십니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에벳벨렉을 통한 도움의 손길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이방인 환관은 자신의 안전을 돌아보지 않고 예레미야의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죽이는 일은 악한 일이라고 굶어 죽게 하는 것은 못할 짓이라며 왕에게 간구합니다.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고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도 예레미야와 같은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 속에서 일하고 계시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계획은 언제나 선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레미야의 믿음과 순종을 본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길 다짐해야겠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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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7-02)


예레미야와 시드기야 왕의 만남

예레미야 37장 11-2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고난의 십자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명을 감당하다보면, 고난이 있습니다. 이 시대는 겉으로는 고난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실한 삶을 살려고 하면 더 큰 고난을 당하기 쉬운 시대입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괴롭긴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로서 십자가를 감당하고 살아나가야 합니다. 그러한 고난의 십자가를 이겨내면 영광이 찾아옵니다.

 

  •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벨론 군대는 애굽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바벨론 군의 철수가 이루어진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고향 베냐민 땅으로 갑니다. 가던 중에 예루살렘 문에서 바벨론에게 항복하려 간다는 누명으로 체포당하고 감옥에 갇혀 고초를 당합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 앞에서는 또 당당히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것을 선포합니다.

 

누명을 쓰고 옥에 간 예레미야(11-15)

진정하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자일뿐, 자신의 뜻을 신에게 관철시키는 자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뜻대로 기도하거나 설교해 주거나 그리고 교회 운영하지 않는 목회자를 인간적인 권력으로 거절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른 목회자는 그런 형태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11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12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가운데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 하여 13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우두머리가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이르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14예레미야가 이르되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고관들에게로 끌어 가매 15고관들이 노여워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을 옥으로 삼았음이더라(11-15)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찾아가서 중보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는 마치 영매를 찾아가서 신이 원하는 대로 빌어주면, 신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준다고 믿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이 원하는 대로 해 줄리 없습니다. 반대로 이런 선지자를 시드기야 왕이 좋아할 리 없습니다. 자기 뜻을 거절한 선지자에게 왕이 어떻게 하는지,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⑴ 성을 떠나는 예레미야(11-12)

 

이 단락은 예레미야가 어떻게 옥에 갇히게 됐는지를 보고합니다. 시기적으로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그의 사절을 통해 여호와의 메시지를 전달한 직후가 됩니다. 바로의 군대가 궁지에 몰린 시드기야를 도와주려 애굽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갈대아인의 군대가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일시적으로 철수했습니다(11). 예루살렘의 성 밖 출입이 다시 가능해졌습니다. 그 시기에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향 베냐민에서 분깃 상속 재산을 받으려고 고향집에 다녀오기 위해 나섭니다(12). 상속 재산과 관련한 이야기는 32:7-12에도 나옵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32:2), 조카 하나멜이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고멜의 권리를 행사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마도 두 개의 이야기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관련된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⑵ 체포되는 예레미야(13-14)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성을 떠나던 예레미야가 ‘베냐민 문’에 이르렀을 때, 수문장 셀레먀의 아들 이리야는 예레미야가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는 오해를 받습니다(13; 참고 21:9; 38:2).

수문장 이리야 입장에서는 예레미야를 잘못 이해했던 것은, 지금까지 40년 동안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항복하면 산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22:8-9에서 예레미야는 항복이 생명의 길임을 대놓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37:9-10에서도 예루살렘이 반드시 갈대아인들의 군대에 의해 불꽃의 먹이가 될 것을 선포 했습니다.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바벨론에 항복해 망명을 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벨론 군대에 맞서 성문을 지키는 이리야의 눈에는 예레미야는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하는 탈주병처럼 보였습니다. ‘베냐민 문’은 예루살렘 북쪽 베냐민 지역으로 나가는 성문 이름입니다. ‘문지기의 우두머리’는 특히 전시에는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수문장 이리야에게 단호하게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항변하지만, 이리야에게 체포당하고 고관들에게 데리고 가리고 갑니다(14). 그는 요나단의 집 지하 감옥에 투옥되어져 버립니다.

 

⑶ 구금되는 예레미야(15)

 

바벨론 근대가 예루살렘에서 일시적으로 떠난 후 예루살렘 출입이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빠져 나가려고 하는 이유가, 예레미야가 지금까지 예언한 내용들이 거짓이었기 때문에, 바벨론에 도망가려고 하지 않는가라고 오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를 매국노라고 생각해서 고관들에게 끌고 갑니다.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보자 노여워하고 때리고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15). 여호와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26장에서는 고관들이 재판관의 입장에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 희해 고발당한 예레미야에게 무죄를 선언해주었는데, 여기서는 분노한 고관들이 재판 절차도 무시하고 예레미야를 때리고 옥에 가둬버립니다. 법 집행의 책임을 맡고 고관들이 집단적으로 불법을 저지릅니다.

36장에서는 일부 고관들이 위기에 처한 예레야를 도와주었는데(36:19,25), 이제는 고관들 가운데 예레미야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서기관 요나단의 집’을 감옥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전시 상황과 관련된 임시 조치였던 것 같은데, 어떤 배경이나 이유에서 서기관의 집이 그런 용도로 선택됐는지는 불분명한비다. 예레미야가 갇힌 감옥은 아마다 저수조로 사용했던, 지하에 판 천장이 둥근 구덩이였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빛과 공기가 거의 차단된 어둡고 습한 지하 토굴에 버려집니다. 예레미야의 목숨이 이제대적의 손에 거의 넘겨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오해를 받아 어둡고 캄캄한 지하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말씀 때문에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난이 찾아올 때, 감사함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시드기야와의 예레미야와의 만남(16-21)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잡혀야 합니다. 타인의 충고가 쓴 말이라도 그것이 당신을 위하는 것이고 당신을 살리는 말이라면 그것을 귀담아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그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드기야 왕과의 만남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16예레미야가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17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이르되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18예레미야가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 이르되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19바벨론의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20내 주 왕이여 이제 청하건대 내게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에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21이에 시드기야 왕이 명령하여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 개씩 그에게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떨어질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머무니라(16-21)

 

예레미야가 들어간 감옥은 아주 열약한 지하 토굴에 감금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날’(많은 날들)이 지나 시드기야 왕이 신하들을 보내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를 급히 찾아 사람들 은밀하게 왕궁으로 불러 드립니다.

 

⑴ 시드기야의 질문과 답변(17)

 

혹시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받은 말씀이 있는지 조용하게 물어봅니다. 옥에 갇힌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불러 개인적으로 묻는 것을 보면, 시드기야와 예루살렘의 상황이 절망적으로 더 악화된 것 같습니다. 왕은 예레미야와의 만남이 신하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합니다. 시드기야의 왕권이 매우 허약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시드기야 왕의 기대는 지금까지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에워싼 좋지 않는 상황 때문에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지만,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떠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지는 않을까하는 소식과, 그리고 자신의 왕의 자리가 계속 보존되어 지는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왕의 질문에 예레미야는 먼저 ‘있나이다’라고 답변하고, 뒤이어 말씀의 내용을 알려줍니다(17).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시드기야에게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참조 32:4; 34:3)라는 신탁이 주어지지만, 시드기야가 거기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⑵ 예레미야의 질문(18-19)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기회를 이용해서 서로 요구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비난이나 책망이 담긴 질문입니다. 첫째 질문은 자신의 무죄 주장과 담긴 질문입니다.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18) 예레미야는 왕뿐만 아니라 왕의 신하들과 유다 백성 누구에게도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옥에 가두기로 한 고관들의 결정에 왕도 연루됐음을 분명하게 주장합니다. 고대 근동에서처럼 이스라엘에서도 왕은 최고 재판관이었습니다. 왕이 모르는 신하들만의 결정이라면 왕은 이를 바로잡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예레미야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구원예언자들을 향합니다. ‘바벨론의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19) 누가 참 예언자이고 누가 거짓 예언자인지 확실해졌는데, 역설적이게도 참 예언자는 옥에 같혔고, 거짓 예언자들은 조용히 숨어버렸습니다. 최고 재판관인 왕은 누가 왕과 와의 신하와 백성에게 잘못을 범했는지를 바르게 판결해주어야 합니다. ‘어디’는 한편으로는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해 입을 다문 구원예언자들의 기회주의적 침묵을 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을 오도해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구원예언자들이야말로 옥에 넣어야 할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하고 솔직해야 합니다. 비록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처지였지만, 예레미야는 감옥에서 풀려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시드기야 왕의 기분을 맞춰 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더욱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⑶ 예레미야의 탄원(20-21)

 

질문을 마친 예레미야는 마지막으로 왕에게 한 가지 억울함을 간청합니다. ‘내 주 왕이여 이제 청하건대 내게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20)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예레미야는 석방을 요청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요나단의 집에 있는 기하 토굴로 돌려보내지만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왕이 신하들의 손아귀에서 자신을 구출해주기에는 능력이나 용기가 없음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의 간청에 시드기야가 긍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의 말을 듣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머물게 하고, 성에 떡이 모두 동날 때까지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날마다 떡을 가져다주게 합니다(21). 고립무원의 예레미야가 왕의 도움을 받아 죽음의 위기를 넘긴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의지를 대변하는 예언자로 인정하고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묻지만, 전해준 말씀에 순종해 결단을 내릴 만한 용기는 없었습니다. 38:9과 52:6에 따르면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성 중에 떡이 완전히 동난 것 같습니다. 시위대 뜰로 옮겨진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거기에 있다가(38:28),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바벨론 점령군에 의해 해방됩니다(39:14).

우리에게 교훈한 것은 우리들은 너무 많은 경우 자신의 번영이나 소유와 같은 것에만 관심 있고 집착합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부합되는 아첨의 말들이 독이 되는 것을 모르고 그것을 즐기고 그곳에 중독되어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생들을 많이 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뜻하지 않은 고난이 찾아와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고난 때문에 정당히 거짓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때에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 때문에 당한 고난이라는 감사함으로 잘 감당하고,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지체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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