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088-01)
극심한 절망 중에 드리는 기도
시편 88편 1-18절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마다 즐겁고 기쁠 때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 중심에서부터 절망에 빠지게 되고 모든 상황 속에서 희망이 비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 우리에게 계속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상황 속에 눌려서 그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모든 시간을 버릴 순 없습니다. 이때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 본 시의 저자를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이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인 헤만은 다음 세대들이 읽고 또 배워야 할 내용을 시로 작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시의 내용은 극심한 고난을 당한 시인은 하나님께 주야로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없고 시인의 기력은 쇠락해갑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인(1-2)
우리 인생 속에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절망 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을 아무리 도우려고 해도, 어려운 상황들이 있음을 보게 되고 그 상황 속에서 헤어 나오려고 하지만, 계속 그 절망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고 계심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1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1-2)
시인은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하나님만 그를 고난에서 건져줄 수 있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매우 절박하게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울부짖습니다. 그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르고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기를 간청합니다(시 39:12; 102:1). 40편의 시인처럼 시인도 구원의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고난에서 구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고난 중에 있는 시인(3-5)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하나님에게서도 버림받고 도움이 끊어져 버린 것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마치 소생할 힘이 없을 만큼 무기력하고, 죽은 채 방치된 자처럼 여겨집니다. 그의 침상은 무덤처럼 여겨집니다. 얼마나 극심한 고통이고 끊어지지 않는 아픔이든지 하나님을 부르짖는 힘조차 없을 때가 있습니다.
3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3-5)
지난 이 극심하므로 시인은 죽음의 문턱에 이른 것(“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3)처럼 느낍니다. ‘재난’은 재앙, 화, 악, 병 등 괴로움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일이나 사진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그가 당한 재난이 어떤 것인지 언급하지는 않으나, 자기에게 재난이 가득하다고 한탄합니다. “재난이 가득하다”는 말은 배가 꽉차서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듯, 시인에게 괴로운 일이 충만하고 극심해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3-5절까지 거듭거듭 자신이 죽은 자와 마찬가지라고 토로합니다. 그런데 시인의 이런 상황은 시인만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다 알려진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들조차 시인을 ‘무덤 구멍으로 내려가는 자’로 간주만큼 그의 고난과 고통스러운 처지는 외부적으로도 다 공개되었습니다. 그는 힘없는 용사같이 되어 자기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마치 죽어서 다 시체들 가운데 던져진 것처럼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 죽은 자들은 노쇠하거나 병약해서 죽은 자들이 아니라 칼이나 창에 찔리거나 구타당해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4절의 “힘없는 용사”와 연결해서 보면, 시인이 힘도 못 쓰는 군인 같으므로 그는 자기에게 닥친 재난과 싸우지도 못한 채 무참히 공격당하고 죽임 당했음을 암시합니다. 그의 시체는 제대로 매장되지도 못하고 한곳에 쌓여 방치된 다른 병사의 시체 더미에 더해질 뿐입니다. 사람들도 이렇게 허망하고 비참하게 죽은 자들을 기억하지 않고 지나갈 터인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그들에게 관심을 두시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기억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끊어진 자, 즉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의 손길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자들이 아닙니까? 시인도 그들 중 하나처럼 되었습니다.
시인을 향한 하나님의 화(6-8)
고통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어떻게든 하나님을 ‘고통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나쁜 일’에서 하나님을 보호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분명 ‘모든 일’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이고 그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6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6-8)
시인은 죽을 지경이 된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웅덩이 맨 밑바닥, 어둡고 깊은 곳에 두셨으므로 시인은 한 치 앞도볼 수 없고 스스로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웅덩이”, “어둡고 음침한 곳”(6)은 3-5절의 “재난”, “스올”, “무덤”과 같은 의미입니다. 죽음이 도사린 이런 곳에서 시인은 두려움과 절망을 느낍니다. 또한 하나님의 분노가 시인을 지탱하듯 누르고 하나님께서 많은 고통의 물결로 시인을 괴롭히시니, 시인은 숨 쉴 수도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시인은 하나님한테서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도 배척당했습니다. 시인의 가까운 지인들은 그를 멀리 떠났고, 그뿐 아니라 그를 가증한 자로 여겼습니다. 시인은 8절 맨 마지막 문장을 제외한 6-8절의 모든 문장의 주어로 하나님을 칭하는 “주(당신)께서” 또는 “주(당신)의 노”를 사용하여 자신을 큰 시련 속에 몰아넣은 주체가 하나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갇혔고 나갈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시인을 웅덩이에 빠뜨렸다면 하나님께 끌어내주시길 간청할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능히 구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를 웅덩이에 집어넣으셨으니 하나님의 긍휼과 도움이 얼마나 더 필요합니까? 시인은 하나님 신뢰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을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인(9-12)
인간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것인데, 사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더 큽니다. 죽음과 고난 등에 대해서 두려움을 아주 크게 키워놓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최상의 방법은 직면하는 것입니다. 직면하면 하나님께서 나아갈 길을 보여주십니다.
9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11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9-12)
하나님의 노하심으로 인해 시인은 고통 속에서 점점 쇠약해져 갑니다. 기자는 네 가지 수사적 질문들, 곧 전형적인 쟁점들을 동원하여 자신이 죽기 전에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9)란 표현은 그가 하나님께 매일 울부짖느라 눈이 침침해졌다는 뜻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심신이 약해졌다는 의미로볼 수 있습니다. 시편 6편에서도 시인은 밤마다 하나님께 탄식하고 통곡하여 근심하므로 눈이 쇠하고 침침해졌고, 여기에 뼈와 영혼이 떨리고 수척해졌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시 6:2-3, 6-7). 시인은 기력이 쇠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듭니다. 이런 행동은 시인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겸비함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살아있는 자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음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랍니다. 죽은 자들(“죽은자”, “유령들”)이나 그들이 있는 곳(“무덤”, “멸망”, “흑암”, “잊음의 땅”)은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기이한 일”, “기적”, “공의”)나 성품(“인자하심”, “성실하심”)을 찬양할 수도 선포할 수도 없습니다(10-12; 시 6:5).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경배는 오로지 생명을 가진 자들의 몫이자 특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의 위협에서 구하여 하나님을 계속 찬양할 수 있게 해주시길 간청합니다.
고난 중에도 끊임없는 기도(13-18)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빛되심을 경험하고, 그 후에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서 깊은 어둠을 절감하는 사람은 참 빛이신 주님을 갈구하게 됩니다. 자신이 어둠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참 빛을 구해야 하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어둠 속에 헤매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는 순간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수용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죽음에 직면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13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13-18)
시편 기자가 드린 기도의 일부를 되풀이하지만 부르짖는 시점이 아침으로 바뀝니다. 본문에서는 1-9절의 주제와 유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징계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느낌이 닥친 것을 탄식합니다(7,14).
시인은 ‘그러나 나는 당신께 부르짖었나이다’(13, “오직 내가”로 번역됨)라고 외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밝힙니다. 죽으면 하나님께 찬양도 기도도 할 수 없지만, 그전까지는 기도를 그만둘 수 없고 또 그만두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주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1,9,13). 아침에도 그가 계속 기도할 것이므로 기도는 하나님 앞에 전달될 것입니다(13). 그러나 시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거절하고 얼굴을 숨기신다고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서 얼굴을 숨기시는 행동은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거나 비추는 행동(민 6:25-26)의 반대로서 그 사람의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침묵과 무반응으로 일관하시며(시 13:1; 102:2) 대적처럼 여기심(사 64:7;욥 13:14)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응답과 무관심으로 시인을 고립시키셨으나, 시인을 향한 진노는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시인의 고난의 역사는 오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고통을 당해 지금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두려움으로 괴롭히시므로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쇠약해져 갔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바다 물결처럼 그를 누르고 괴롭혔습니다(7). 지금도 물이 시인 위로 넘실대며 지나가듯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넘실대며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두려움으로 시인은 말문이 막히고 소진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이런 일들이 물처럼 시인을 둘러싸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시인이 재난을 당하고 고통에 처하자 시인의 지인, 사랑하는 자, 친구들은 다 멀리 떠났습니다. 시의 맨 마지막 문장,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란 문장은 하나님께서 시인의 지인들을 어두운 곳으로 떠나보내어 그로부터 멀어지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내가 아는 자는 흑암이니이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번역을 따르면 친구들이다 떠났으므로 이제 시인에게 있어서는 죽음을 상징하는 흑암만이 그의 지인이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흑암”은 위 6절에서 “어두운 곳”으로 번역되어 ‘죽음’을 암시하고, 앞의 친구들이 떠난 곳을 ‘죽음’으로 보기는 적당치 않으므로 후자의 번역을 지지해줍니다. 시인의 계속되는 탄식의 표현들은 허무하게 내뱉는 절망의 하소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는 간접적인 요청, 하나님께 직접 상달되는 간구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도 오늘 본문의 시인이 겪었던 것처럼, 크고 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또 우리를 짓누르는 여러 상황들로 인해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또한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아스라이 계신 것 같이 여겨지고, 가족들도, 친구들도, 지인들도 나를 멀리하는 것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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