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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6-01)


하나님을 향한 간구와 믿음

시편 86편 1-17절


 

기도에 등급을 매길 수는 없지만, 기도는 기도자에 대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제공합니다. 고난 중에도 틀에 박힌 일방적인 기도가 아닌,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헤져 나가는 기도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신의 손만이 아니라 주님의 손을 함께 포개고 말씀 가운데 기도를 나눠보시길 바랍니다.

 

  • 원수들로 인해 중한 고난을 당한 시인은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구원을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구원하실 것이며,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은 시인의 찬양만이 아니라 열방의 경배까지도 고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1-7)

성도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헌신되어 있어야 합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만은 끝까지 부여잡고 있어야 합니다. 목숨을 지켜달라고 간구합니다. 쉼 없이 부르짖어야 할 만큼 절박하여질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마다 그의 영혼은 환난을 가져다준 원수를 보지 않고 환난에서 구원하실 주를 우러러 보았습니다(눅 23:46).

 

1여호아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2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3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4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5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6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7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1-7)

 

시인은 “주(당신)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외치며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에 응답해주셔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는 무언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어구는 ‘악인에게 착취당하여 가난해진 자’라든지 ‘무고하게 핍박을 받는 자’ 등 ‘정의를 되찾아야 하는 자’를 가리킵니다(렘 22:16: 겔 16:49;욥 24:14). 이들의 정의 구현을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 인간 왕의 의무 중 하나(잠 31:9)로 소개될 만큼 이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특히, 시편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자”는 ‘의인’이나 ‘경건한 자’와 동일시되어 사용되었습니다(시 40:17; 70:5). 본 시편에서도 시인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신을 ‘경건한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동일시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2). 시인은 하나님이 책임감을 갖고 시인이 뺏긴 정의를 되찾아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시인이 고대하는 응답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시인은 지금 목숨의 위협을 받는 위중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나 그를 의지하는 자의 생명을 보존하고 구하시는 분임을 잘 알고 있다(시 145:18-20). 그러므로 자신을 "경건한 자", "주(당신)를 의지하는 종"(2절)으로 소개하며, 하나님의 도움과 구조를 받기에 합당한 자임을 밝힌다.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 부르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임을 강조한다. 한편, 시인은 하나님의 구조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수적임을 인지하고 있다. 그는 종일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신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간구합니다. 또한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이때 “내 영혼”은 원문에서 ‘당신의 종의 영혼’으로 나옵니다. 시인은 반복해서 자신을 하나님의 “종”(2,4)으로 부르며, 자기가 하나님께 속한 자, 주인의 보호가 필요한 자임을 상기시킵니다. 5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여러 성품(하나님의 선하심, 용서를 즐겨하심,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하심)을 나열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는 이유를 덧붙입니다.

6절에서 시인은 다시금 하나님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기도에 응답해주시길 요청합니다. 이 구절은 1절과 유사한 내용인데, 다른 것은 1절 이후 2-5절까지는 시인의 간구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셔야 할 이유가 나열된 반면, 6절 후 7절에서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선언한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그의 환난 날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런 확신의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신뢰와 하나님과 시인의 돈독한 관계를 더 부각합니다.

 

열방의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8-10)

포악한 대적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하고 포악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두려워한(경외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긍휼과 은혜,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여 노하기를 더디 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로지 한 분 참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을 절대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8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9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 10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8-10)

 

시인 한 사람의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개인이나 한 나라의 왕을 넘어 세상의 왕, 세상의 창조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의 유일한 참 신이며 창조주이므로 그에게 견줄 만한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전능자이므로 그가 하시는 일에 견줄 만한 뛰어난 일 또한 없습니다. 그러므로 훗날 하나님의 피조물인 온 열방이 그 앞에 나아와 절하고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열방의 하나님 경배를 고대하는 시인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한 이스라엘에게서만이 아니라 온민족에게서 찬양을 받으심이 마땅함을 드러냅니다. 이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언어로부터 모여든 셀 수 없는 무리로서 그들의 하나님 찬양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계 7:9-12). 하나님에게 대항하던 왕이나 민족들조차 하나님께 굴복하고 그 앞에 나와 귀중한 예물을 바치며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시 72:8-11).

 

시인의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11-13)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길 간구하고, 그분의 길이 참되다는 믿음을 가지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길임을 기억합시다.

 

11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12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13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11-13)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그의 도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합니다. 가르침을 청하는 시인의 행동은 1-6절의 간구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얻어내려고 떼쓰는 행동이 아니었음을 밝혀줍니다. 그가 1-6절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 것은 긍휼과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이 자기에게 없고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의무는 하나님의 진리의 도를 배워 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를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가르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에게 그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신 6:6).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시인은 이를 분명히 인지하여 하나님께 “일심으로 당신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11)라고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과 더불어 시인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 찬양입니다. 시인은 온 마음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찬송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그의 성품과 하신 일이 드러나므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시인의 찬양 이유는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2) 자신을 하나님께서 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가장 깊은 곳, 스올에 빠져 있다며 자신의 상황을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장소로서 강이나 바다 맨 밑바닥의 구덩이를 가리키며, 여기서는 ‘죽음’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시인은 스올, 그것도 가장 깊은 바닥에 있으므로 도저히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거기서 끌어내어 구조하실 것입니다. 시인의 “스올에서 건지셨다”(13)는 완료형 표현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건지심에 대한 시인의 확신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원은 그의 크신 인자하심과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인자하심)과 하신 일(구원)은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끝없이 찬양하게 하는 이유를 제공해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14-17)

성도는 하나님께 모든 민족들보다 앞서 주의 도를 듣고 행하겠다고 서원해야 합니다. 마음을 모아 경외하고 마음을 다하여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겠다고 해야 합니다. 죽음과 망각의 땅인 깊은 스올에 있었지만, 향한 주의 인자하심(헤세드)이 거기까지 미쳐 넉넉히 구원받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은 미리 찬양하고 미리 감사하고 미리 맡기는 일입니다.

 

14하나님이여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15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16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7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14-17)

 

이제 시인은 자신을 스올로 몰아넣은 이들이 원수들임을 직접적으로 밝히며 구원의 은혜를 간청합니다. 시인은 그의 원수들을 “교만한 자들”, “포악한 자의 무리”, “시인을 미워하는 자들”(14,17)로 규명하며, 이들의 행동 기반이 불의와 악임을 부각합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자기 앞에 하나님을 두지 않는 자들, 즉 정의와 긍휼의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지 않고 자기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앞세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주인 삼고 그의 말씀대로 의를 행하려고 하는 시인과는 반대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무리를 지어 시인을 대항하여 일어나서 서슴없이 그의 목숨을 해하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시인의 신뢰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그의 긍휼, 은혜, 노를 참으심, 인자, 진실 등의 성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반역하는 이스라엘에게 조차 긍휼과 용서를 베푸신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신뢰하며 포악한 원수들로부터 고통 받는 시인을 하나님께서는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시인은 이 점을 확신하므로 하나님께 자기에게 주목하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간구합니다. 시인은 2,4절에서처럼 자신을 “당신의 종”(16)으로 부르고 “당신의 여종의 아들”도 덧붙입니다. “당신의 여종의 아들”은 “당신의 종”보다 자신을 더 낮추는 표현(시 116:16)으로서 시인의 겸손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 태도는 원수들의 교만함과 포악함과 대조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표적으로 보여주시길 간청합니다. 시인이 요청하는 표적은 특히 ‘선’(“은총”으로 번역됨)의 표적으로서 하나님께서 정의로 시인을 신원하고 원수를 심판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인을 미워하는 원수들은 도움과 위로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인에게 임하는 것을 보고 수치를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의지로 마무리됩니다. 이 시편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자 구원자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분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가 진심으로 의지할 때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인도하심과 구원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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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5-01)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의 약속

시편 85편 1-13절


 

성경은 종종 어리석은 사람을 개나 돼지에 비유하곤 합니다. 개는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는 더러운 곳에 다시눕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은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다시 죄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이런 삶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다시 죄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죄를 덮으시고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은혜를 고백한 후, 다시 진노를 거두시고 구원하시길 간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화평의 말씀으 전합니다. 구원은 주를 경외하는 이에게 가깝고, 인애와 진리가 만나며, 의와 화평이 입맞추고, 땅은 산물을 낼 것입니다.

 

포로 귀환에 대한 감사(1-3)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는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참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해방은 단순히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을 넘어서,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기쁨을 선사합니다. 죄에서 해방된 기쁨은 우리의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주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회복시키고, 참된 평안과 소망을 주는 기쁨입니다.

 

1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2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3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1-3)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시인이 언급하는 포로 귀환이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시신은 포로 귀환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며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땅’에 호의를 베풀어 주고 기쁘게 봐주셨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온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땅’이라 부름으로써 이곳이 하나님께 속한 땅(레 25:23)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이 땅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여 유업으로 주신 땅임을 상기시킵니다. 잃었던 땅을 되찾게 하신 것은 백성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시인은 포로 귀환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야곱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방의 포로 잡힌 백성을 해방하시고 하나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분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칭함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 언약의 백성임을 강조합니다. 이 언약 백성이 ‘포로가 된 것’은 단지 전쟁에 패하여 이방 나라에 끌려갔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죄 지었음과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 임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역대기에서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된 원인을 그들의 ‘범죄함’ 때문이라고 설명한 데서도 자명하게 나타납니다(대상 5:25-26;9: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고 불순종하면 대적을 보내 이스라엘을 치고, 땅을 황무케하고, 백성을 열방 중에 흠을 것임을 이미 경고하셨습니다(레 26:31-39; 신 4:25-27).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시시때때로 죄를 지었고, 결국 포로로 잡혀가곤 했습니다. 이런 자들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음을 보여줍니다(대하 33:11-13). 본 시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이키신 것은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고 모든 죄를 덮으신 결과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진노를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분노’와 ‘맹렬한 화’는 이스라엘에게 임한 심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돌이키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이며, 심판 기간을 종결시키겠다는 암시입니다(슥 1:12). 하나님께서 진노를 돌이키셨음(슈브, 3절)은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심(슈브, 1절)으로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4-7)

유다 백성이 귀환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돌아와야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랑이 없어집니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속량된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속량 되었습니다. 죄에서 거저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4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5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시겠나이까 6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7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4-7)

 

시인의 감사 기도는 4절의 “우리를 돌이키소서”라는 외침을 시작으로 애통과 간구로 전환됩니다.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에서 ‘돌이키셨다’(“돌아오게 하셨으며”로 번역됨)고 말하며, 3절까지 과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4절에서는 “우리를 돌이키소서”라고 간청합니다. 3절에서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셨나이다”라고 감사했으나, 4절에서는 “우리에게 향하신 당신의 분노를거두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처럼 1-3절의 감사 내용 대부분이 4-7절에는 간구 내용으로 전환되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에서 귀환 했으나 현재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이번에도 은혜를 베푸시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간구는 하나님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단락(4-7)의 시작과 끝에 “우리 구원의 하나님”과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가 ‘하나님의 구원’에 핵심을 두며 서로 연결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전능자임을 암시하면서 구원을 촉구합니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의 회복을 간구합니다. “우리를 돌이키소서”(4)라는 요청은 문자적으로는 ‘우리를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소서’라는 구체적인 뜻 또는 ‘우리를 회복하소서’라는 일반적인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후자로 읽는 것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4-13절의 내용에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직접적인 간구나 암시가 없는 대신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머물고 땅이 산물을 내기를 고대하는 내용(9,12)이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시인은 하나님께서 노를 거두시기를 구합니다. 4-5절에 하나님의 분노는 세 문장에 반복되어 강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이스라엘임은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라는 어구나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겠나이까”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다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한 이유는 이 단락과 나머지 시 내용에서 언급되지 않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계속되므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영원히 계속하시겠느냐고 부르짖으며 분노를 그치시길 간청합니다. 셋째, 이스라엘의 소생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은 죽음을 맞이한 것과 같으므로 이스라엘을 다시 살려 하나님을 기뻐하게 해달라고 시인은 간청합니다. 시인은 이때도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2,6)으로 칭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그의 선택하신 언약 백성임을 기억하고 긍휼을 베푸시길 바랍니다. 넷째,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통한 구원을 간청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서 비롯됨을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응답(8-9)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이며, 우리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 구원은 우리의 공로나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8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9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8-9)

 

하나님의 응답이 시인을 통해 전달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모든 이에게 저절로 임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께 신실하고 헌신된 자들(“성도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의 백성에게 두려움이 아닌 화평을 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리석음으로 돌아가지(슈브, 8절) 않도록 경고합니다. 어리석음이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백성에게 구원으로 곧 응답하실 것입니다. 시인은 이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땅에 머무를 것임을 확신합니다. 시인이 이 땅을 ‘하나님의 땅’으로 불렀다가(2) 이제 “우리의 중”(9)으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유산으로 주신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땅에 임할 하나님의 통치와 축복(10-13)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고, 회개를 무력화시키는 일입니다. 회개한 사람이 옛 생활로 돌아가더라도 다시 돌아오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는 것은 이전보다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옛 생활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성도들에게 응답을 주십니다.

 

10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11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12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13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10-13)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이 머무르는 땅에는 그의 의로운 통치와 축복이 뒤따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통치는 단순히 공의뿐 아니라 인애, 진리, 의, 화평 등 하나님의 속성이 땅과 하늘에서 조화를 이루며 실행되는 통치입니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12)라는 시인의 선언은 하나님께서 땅과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축복을 내리시길 바라는 간접적인 간구입니다. 학개서에는 ‘땅이 산물을 내는 것’과 반대 상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자들이 성전 재건을 중단한 후 자기들만 위해 살 때 하늘의 이슬이 그치고 땅의 산물이 그쳤습니다(학 1:1-10). 하나님이 보내신 가뭄이 땅만이 아니라 산, 곡물, 새 포도주, 올리브 기름, 땅의 모든 소산, 사람, 육축,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했고, 폭풍과 곰팡이와 우박이 내렸고, 곡식과 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함으로써 땅의 산물이 그쳤습니다(학 1:11; 2:17-19). 본 시편의 ‘땅이 산물을 내는 것’의 의미 또한 하나님께서 땅을 포함하여 백성과 백성이 소유한 모든 것에 좋은 것을 공급하심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그의 공의로운 통치가 지속될 것을 고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죄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더러운 죄의 옷을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전의 끔찍하고 더러운 삶에서 멀리 떠나,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매일매일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갈망에 보답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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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4-01)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기쁨

시편 84편 1-12절


 

사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공간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힘이 납니다. 성도들은 어떤 장소를 가장 좋아하고 즐겨 찾아야 합니까?

 

  • 본 시는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시인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성전에서의 하루가 세상의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더 낫다고 고백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에서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주의 집에 거하는 자에게 은혜와 영광을 주시며,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과 그분의 집에서 누리는 축복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의 행복(1-4)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들이 득세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패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만군의 주,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화려하고 웅장한 곳으로 임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그곳을 통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1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1-4)

 

시편 84편은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시인의 사모함이 가득 묻어납니다. “당신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1)라고 감탄하며, 시인은 하나님 ‘처소’(“장막”으로 번역됨)의 사랑스러움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은 시온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곳을 이스라엘과 함께 거주할 자신의 거처로 손수 택하셨습니다(시 24:3). 이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고(신 12:5; 렘 7:14)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후손과 영원히 함께 거주하겠다고 약속하신 곳입니다(시 78:68-69). 하나님의 처소에 대한 시인의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 시인은 몸이 쇠약해질 정도로 하나님의 궁정을 고대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궁정”은 성전의 ‘뜰’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가리킵니다. 이곳은 성전을 찾는 자들이 모이고 머물러 있는 장소로서,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 점은 시편 65:4에서 ‘성전 뜰에 머무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택하여 가까이 오게 하신 자들’로 동일시한 데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처소나 그가 계신 곳의 뜰이 시인에게 사랑스럽고 소중한 이유는 그 건물이나 장소 자체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허상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신 분이며, 지금도 시인과 사랑의 교제를 지속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마음과 육체를 다 쏟아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는 원래 ‘기뻐 외치다’의 뜻으로 시인이 하나님께 즐거이 사랑의 말을 외치거나 기쁨의 찬양을 부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시 81:1).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가고픈 시인은 성전 제단에 제 집을 지은 참새나 새끼를 위해 둥지를 튼 제비를 떠올리며 부러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새들처럼 자유롭게 하나님 거처로 날아가 거기서 자기와 자녀의 거처를 마련하여 하나님 가까이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들이 얼마나 행복한가!(‘복이 있나니’로 번역됨)”라고 외칩니다. 하나님 곁에 살며 늘 찬송하며 예배하기를 고대합니다(시 27:6).

한편, 시인은 1절에서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불렀고, 3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모든 군대의 하나님이란 뜻으로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그 능력을 나타내는 군대 지휘관이자 용사를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능력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이란 표현은 시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셨다는 점과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암시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칭호에 “나의~”를 반복하는데 시인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 힘을 얻는 자의 행복(5-7)

세상의 나라들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부흥하다 사라지기도 합니다. 세상이 점점 강성해지고 이스라엘이 약해져 성전이 무너질 때, 세상은 승리의 잔을 들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으로 돌아가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의 참된 모습입니다.

 

5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5-7)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사랑은 성전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순례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시인은 이들처럼 오직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고 마음에 하나님의 성전으로 향하는 대로를 품고 있는 자들에게 행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들은 4절의 성전에 사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성전으로 가는 여정은 순탄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 성전이 있는 시온이 예루살렘 동편의 산등성이로서, 그곳으로 가는 길에 험난한 산들과 짐승이나 강도 등 여러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지키실 것이므로(시 121:1-8)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라도 샘에서 물줄기를 내어줄 것이며 그들에게 이른 비를 복으로 덮어주실 것입니다(12). 이와 같은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반석에서 물을 내주시고 그들의 40년 생활 동안 의식주를 해결해주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억나게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힘을 의지하여 순례의 길을 걷는 자들은 곧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위한 간구(8-9)

세상의 일을 귀하게 여기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예배에 소홀한 성도들을 볼 때 참으로 답답합니다. 예배를 중요시하지 않는 자세는 곧 은혜의 통로를 스스로 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배를 정검하고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8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9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8-9)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 즉 왕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문맥상 이 간구가 느닷없이 들리긴 하지만, 왕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사랑을 보여 줌에는 틀림없습니다. 9절에 왕을 위한 시인의 기도로 나오는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는 원문에서 ‘우리의 방패’, ‘보소서’, ‘하나님’이란 단어들과 순서로 나옵니다. 이 단어들은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보소서’ 또는 ‘하나님, 우리의 방패를 보소서’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방패로 비유하는 예가 종종 있고(삼하 22:3;시 7:10; 59:11), 11절에서도 방패로 부르므로 전자의 번역을 따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후자의 번역을 따른다면 방패는 뒤에 나오는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인 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 89:19에서도 인간 왕을 방패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한편, 왕의 얼굴을 살펴달라는 간구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왕에게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행복(10-12)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아무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전이기에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만 성전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당을 나가서도 범사에 성전 중심,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0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0-12)

 

시인이 성전에 대한 그의 사랑을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는 ‘A가 B보다 낫다’는 형식을 두 번 이용하여 이 사랑을 표현합니다. 첫 번째로 시인은 하나님의 궁정에 있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보내는 천 날보다 더 낫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27편에서도 유사하게 시인이 평생 하나님의 집에 살기를 갈망함을 밝히며, 이것이 자신의 유일한 기도 제목이라고 말합니다. 본 시편과 마찬가지로 27편에서도 시인이 성전에 거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사모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표현으로, 시인은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은 첫째, 하나님의 성전을 악인의 장막과 대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 악이나 죄가 있을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 오는 자는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여야 함(시 24:4)을 상기시킵니다. 둘째, 이 설명은 악인과 연루된 곳에서 안락을 추구하기보다는 고달프더라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문지기로 있는 게 낫다는 말로 들립니다. 다만, 이때 ‘문지기’를 성전에서 일하는 공적 직책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지기’는 하나님께 특별하게 선택받은 레위인들에게 맡겨진 직책 중 사무 보는 자, 관리, 재판관, 찬양단과 같은 직급의 하나로 소개되었기 때문입니다(대상 23:3-5). 한편 ‘문지기로 있는 것’은 ‘문지방에 누워있는 것’ 또는 ‘문지방에 서 있는 것’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의 의미를 문지기 직책을 감당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성전 출입의 허가를 얻기 위해 성전 입구에서 있거나 성전 문지방에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좋사오니”(10)의 ‘좋다’란 동사는 ‘선택하다’, ‘선호하다’라는 뜻으로 시인의 감정만이 아니라 결단과 의지도 함께 나타냅니다.

시인에게 있어 하나님께서는 “해”와 “방패”와 같습니다. 해는 하나님의 변치 않으심. 은혜, 구원, 호의 등을 의미합니다. 방패는 하나님의 보호, 도움, 힘 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흠 없이 사는 자들에게나 흠 없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은혜와 영화 등 좋은 것을 망설임 없이 아낌없이 주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얼마나 행복합니까! 시인은 그와 함께한 공동체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하며 기도를 마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전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인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와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세상으로 나가서도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으로 살아가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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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3-01)

 


악한 자들의 어리석은 계획

시편 83편 1-18절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여러 비난과 조롱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분위기와강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세상에 속한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시편 중에는 세상에서당하는 조롱과 고통에 대한 탄식 시가 많은데, 오늘 다룰 83편 역시 그중 하나입니다.

 

  • 본문은 이스라엘의 적들이 연합하여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는 상황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침묵하지 말고 개입해 달라고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과거 하나님이 미디안과 다른 적들을 물리친 승리를 상기시키며, 현재의 적들 또한 멸망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정의를 구하는 강력한 호소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간구(1)

성도들은 항상 영적인 공격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대적들이 없다면 우리는 치열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거나 나태해졌을 것입니다. 나의 신앙을 공격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공격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되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1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1)

 

오늘 시인의 간구는 국가적 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의 내용(2-4절의 대적에 대한 설명, 6-8절의 대적의 목록)만으로 이 위기가 발생한 역사적 시점이나 구체적 상황을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이 다수 이방 세력의 공격을 받을 위기에 처했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때에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므로 하나님께 관망하지 말고 적극 개입해주시기를 구합니다. “침묵하지 마소서”는 직역하면 ‘당신께 쉽이 없게 하소서’ 또는 ‘쉬지 마소서’로서 독특한 표현입니다. ‘심’이라는 단어는 1절 외에 오직 이사야 62장에서 파수꾼에게 쉬지말고 성을 지키라는 명령(사 62:6)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세상에서 칭찬 받게 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쉬지 못하시게 하라는 명령(사 62:7)에 유사한 상황으로 나옵니다. 이 모두를 고려해보면 1절의 ‘쉬지 마소서’라는 요청은 하나님의 빈틈없는 경계 태세 그리고 쉼 없는 개입을 통한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보호를 바라는 요구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란 요청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시인의 기도를 못 들은 척 무시하지 마시고,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이제는 행동을 개시하시라는 요구입니다.

 

원수들의 공모(2-4)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신앙을 공격하고 핍박하는 자들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다급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합당한 조치를 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더 가까이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 원수들을 상태해 주실 것입니다.

 

2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3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4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2-4)

 

시인은 하나님께서 잠잠하지 마셔야 하는 이유로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자들의 간계를 고발합니다. 시인은 2절 시작에서 “왜냐하면 보소서!”라고 외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에 집중하시도록 주의를 끕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자들을 ‘하나님의 원수들’,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을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는 자들’로 정의함으로써 이들이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대항하는 무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는 무리임을 밝힙니다. 동시에 이들이 지금 소란을 피우고 반역을 꾀하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숨기신 자들’(또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들’)로 칭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출 3:5)으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며 “나의 보배로운 소유”(출 19:5)로 부르셨음을 상기시킵니다. 대적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자 언약의 백성을 진멸하려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사라지게 만들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기억되지 못하게 하려는 간계를 공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이 기억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도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이 대적들의 음모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고발하는 주목적은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고 행동을 개시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동맹 맺은 원수들(5-8)

선을 행하고 의를 이루는 데 마음을 합하고 하나 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반면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데는 쉽게 연합합니다. 인간의 오만함은 불가능한 일을 이루어 내겠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런 오만함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 선한 영향을 끼치고 의의 길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5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6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7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사람이요 8앗수르도 그들과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셀라)(5-8)

 

시인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동맹을 맺고 의기투합한 대적들의 명단을 내놓습니다. 이 명단은 대적이 사는 지역 또는 족속의 이름을 열거한 것으로, 에돔을 시작으로 열 족속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사방에 자리 잡은 이방 민족들로서 이스라엘 역사에 자주 원수로 등장합니다. 그들 중에는 아브라함과 관련된 ‘이스마엘인’과 ‘하갈인’, 이삭의 아들 에서의 속인 ‘에돔’에서의 자손으로 추정되는 ‘아말렉’(창 36:12,16), 롯의 자손인 ‘모압’과 ‘암몬’과 같이 이스라엘의 형제로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족속이 있습니다. 지역적으로 에돔, 모압, 암몬은 요단 동쪽에 위치했으며, 이스마엘인은 이스라엘 남부에 사는 대상 미디안인(창 37:27,36; 삿 8:22-24)으로, 하갈인은 요단의 북동쪽에 사는 유목민(대상 5:10,18이하)으로, 아말렉은 이스라엘 남부의 유목민으로 추정됩니다. 나머지 지역 및 족속 중 ‘그발’은 에돔 근처 또는 두로 근처 도시로 추정되며, 블레셋인은 이스라엘 남서부의 해양 민족, 두로는 이스라엘 북쪽 지중해 해안의 페니키아 도시이며, 앗수르는 티그리스 상류에 있는 도시나 앗수르 왕국으로 추측됩니다. 특히 8절에서 시인은 앗수르가 연합군이 되어 롯 자손인 모압과 암몬의 군사력에 힘을 더했다고 설명을 덧붙여 5절의 동맹을 뒷받침합니다.

이와 같이 대적들의 음모를 고발(2-4)한 데 이어 대적들의 정체를 밝힘(5-8)으로써 시인은 첫째, 이 나라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한마음으로 단호하게 뭉쳤음을 강조합니다. 둘째,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여 일어난 나라들이 숫자나 군사력에서 이스라엘을 압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의 안위만이 아니라 국가의 존속성이 위협받는 위태로운 상황임을 암시합니다. 넷째, 이런 시점에서 이스라엘과 연합하여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시사합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속히 결단하시고 이스라엘을 위해 나서주시길 바랍니다.

 

원수들을 심판하셨던 하나님(9-12)

사람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또 다른 역사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유한함과 뿌리 깊은 죄성이 빚어 내는 고통에 직면할 때마다, 아주 중요한 선택의 고비에 성 때마다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기도합니다. 신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원수들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그러므로 수 있습니다.

 

9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소서 10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11그들의 귀인들이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고관들은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12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9-12)

 

하나님의 개입을 촉구하기 위해 이제 시인은 “그들에게 행하소서”라고 간청하며 과거 사사 시대에 하나님이 물리쳐주셨던 이스라엘의 여러 대적과 사건들을 언급합니다. 한 예는 미디안과 전쟁을 벌인 기드온 때 일어난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천사와 꿈을 통해 여러 번 나타나 용기와 승리의 확신을 주시고, 전략을 일러주시고 기적을 베푸셨으며, 전쟁의 승리가 오로지 하나님의 덕분임을 이스라엘로 깨닫게 하기 위해 기드온과 단지 삼백 용사만을 통해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셨습니다(삿 6-8장). 이때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는 도망가다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삿 7:25; 8:21). 시인은 이들이 감히 ‘하나님의 목장’인 이스라엘 땅을 자기들의 소유로 취하려 했다고 설명합니다(12). ‘소유로 취하자’는 계획은 땅을 빼앗아 후손에게까지 유산으로 물려주려는 의도가 함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을 무산시키고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삿 7:9; 8:34). 또 다른 예는 드보라와 바락의 시대에 가나안의 학대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에게 이미 승리의 확신과 전략을 주셨고, 기손 강에서 드보라와 바락의 군대로 시스라 군대를 쳐서 패하게 하셨고, 가나안 장군 시스라를 여인 야엘의 손에 죽게 하셨으며, 가나안 왕 야빈도 결국 진멸하게 하셨습니다(삿 4-5장). 이에 드보라와 바락은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전쟁에 승리를 주셨다고 찬양했습니다(삿 5:4-5). 시인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의 수많은 대적을 물리치시고 심판하셨듯이 이스라엘 사방에 있는 수많은 대적을 무찔러 심판하시기를 거듭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13-18)

대적들에 대한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을 바르게 설정합니다. 그것은 만민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대적들이 주의 이름을 찾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온 세계의 지존자임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3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14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 15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 16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17그들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사 18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13-18)

 

시인은 더 적극적으로 대적들을 향한 심판을 간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보여주신 놀라운 능력으로 현재 대적들을 바람 앞에 흩날리는 잡초같이 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불길이 산을 사르듯이 광풍으로 그들을 뒤쫓고 폭풍으로 두렵게 하시길 간구합니다. 여기서 불, 광풍, 폭풍 등은 하나님의 강림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합니다. 덧붙여, 시인은 대적들이 공모한 계략(2-5)이 다 실패하여 승리와 기름 대신 수치와 놀람과 낭패와 멸망을 맛보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고 대적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찾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시인의 마지막 간구는 이런 심판을 통하여 그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의 대적들은 이스라엘을 멸하여 그 이름이 소멸되기를 바랐지만(4),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실 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의 지존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분투하는 이유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인정하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온 땅에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늘 세상과 갈등을 빚으며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주님을 붙잡으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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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2-01)

 


정의롭게 재판장이신 하나님

시편 82편 1-8절


 

누구나 공의로운 세상을 꿈꿉니다. 하지만 세상은 공의롭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지 못하는 반면,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인맥과 뇌물을 이용해 법망을 빠져나갑니다. 공의는 인류가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공의로운 세상이 속히 오기를 바라며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 온 세상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신들을 소집하여 천상의 재판을 주재하시고, 그들의 불의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신이며 온 나라를 심판할 우주적 재판장이십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1)

재판이 무너진 것은 공의가 무너진 것입니다.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뇌물과 지위를 따라 재판하게 됨에 따라 나라를 엉망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재판의 권세를 사람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1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1)

 

시편 82편은 천상에서 벌어지는 재판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독특한 시편입니다. 마치 열왕기상 22:19-22에서 미가야가 설명하듯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회의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시입니다. 이런 천상의 회의가 독자의 궁금증을 끌지만, 시 전체에서 중점을 두고 확실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유일한 신이며 심판자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심판자/재판장이라는 점은 1절에 명시되었으며 시편 전체에서 암시되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신의 모임에 ‘서신’ 분으로 언급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시 2:4: 왕상 22:19)과 대조적인 장면으로 보이지만, 보좌에 앉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왕임을 나타내는 것처럼 하늘 법정에 서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벌어질 재판을 최종 판결하는 대재판장 지위에 있으며, 판결을 위해 자리하였음을 나타냅니다. 1절 하반절의 ‘하나님이 신들 가운데서 재판하신다’는 설명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재한 이 모임은 ‘신들’의 법정 회합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여기서 ‘신들’이란 명칭은 천사, 인간 왕이나 재판관, 우상신 무리를 지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1절과 6-8절을 고려해 볼 때 ‘신들’을 ‘우상신들’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이 모임이 천상에서 이루어졌으므로(1) 인간 왕이나 재판관을 제외시키며, 신들은 ‘지존자의 아들 같아 보이나 결국 인간과 마찬가지’라는 설명(6-7)과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왕이자 심판자라는 선언(8) 또한 이 점을 뒷받침합니다.

 

신들의 불의를 고발(2-7)

악인의 낯을 보아주고 그들에게 죄가 없다고 판결하기 시작했고, 의인들은 오히려 형벌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재판이 무너진 것은 곧 공의가 무너진 것입니다.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뇌물과 지위를 따래 재판하게 됨에 따라 나라는 엉망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게서 부여하신 재판의 권세를 사람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워하시는 일입니다.

 

2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셀라) 3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4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5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6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7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2-7)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신들을 소집해 그들을 꾸짖으시는 모습을 그렸지만, 실제로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았음이 바로 5절 이후에서 드러납니다. 그들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존재입니다.

 

(1) 신들에 대한 심문(2)

 

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문이 공개되었습니다: “언제까지 불의하게 재판하고 악인들의 낯들을 봐줄 것인가?”이 질문은 “언제까지 불의한 자를 변호하고 악인들의 낯들을 봐줄 것인가?”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판단하다”에 해당하는 동사(샤파트)가 ‘변호하다’의 뜻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동사는 본 시편에 네 번(1,2,3,8) 각기 다르게 번역되었으므로 문맥에 따라 가능하고 적절한 의미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기서 어떤 번역을 택하든 하나님의 질문은 다 신들의 불의한 재판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이란 ‘악인들의 낯을 올려주는 행위’(2)이며, 그들의 죄를 봐주는 등 악인들에게 유리한 재판을 하는 행태로 설명되었습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의 통치(3-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다스림의 근본은 ‘정의’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정의와 불의의 개념은 사전이나 세상에서 설명하는 개념과 달리 여호와 경외의 여부로 판단합니다(잠 8:13). 또한 여호와 경외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연결됩니다. 이는 ‘의’를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는 것’이라고 정의한 신명기 6:25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런 하나님의 정의(正義)는 특히 사회의 약자들 사이에 가장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약자로 소개되는 자들은 ‘고아’, ‘과부’, ‘나그네’ 무리입니다(신 10:17-19). 본 시에서는 소외된 무리를 여섯 번 언급하였습니다(‘가난한 자’, ‘고아’, ‘곤란한 자’, ‘빈궁한 자’, ‘가난한 자’, ‘궁핍한자’). 여기서 ‘가난한 자’가 대부분 이어서 마치 사회의 약자를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자’로 지칭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란 경제적인 것을 포함하여 사회적, 지식적, 정신적, 육체적 도움이 필요한 자를 일컫습니다. 또한 이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정의로 돌봐야 할 대상은 ‘불의로 피해를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변호하고, 공의를 베풀고, 구하고, 건지라고 명하십니다(3-4). 악인들에게 유리한 재판은 결국 약자들에게 불리한 재판이므로 약자들을 공평하게 변호해야 합니다. 악인들의 악행으로 곤란을 당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정의를 획득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세상의 신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바로 이런 부분에 관심과 책임을 갖고 정의를 실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들은 이와 같은 정의로운 다스림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았고, 부당하게 억압받는 약자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2). 신들은 세상을 통치할 자격이 없습니다.

 

(3) 불의의 통치의 결과(5)

 

세상의 신들의 불의와 무책임한 통치는 세상의 모든 기본 질서를 흔들리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들의 불의와 무책임이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고, 이것이 그들을 흑암으로 몰아넣었다고 밝히십니다. 여기서 “알지 못하다”나 “흑암 중에 다니다”라는 표현은 특히 잠언에서 여호와와 아무 관계도 없는 미련한 자들, 악한 자들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미련하고 악한 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맘에 두지 않고 악을 행하는 데만 집중하므로(잠 4:16) 공의를 알지 못하고(잠 28:5). 마음이 어두워져 그들이 도덕적, 영적 암흑 속에 빠졌음을 깨닫지 못하여(사 44:18), 결국 자기 죄에 실족하고 맙니다(잠 4:19).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인 땅의 기초를 정하셨을 뿐 아니라(잠 8:29), 그의 정의로 사회적, 도덕적, 영적 통치 질서의 기초를 세우셨지만, 신들은 이 질서를 무너뜨리고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시 11:3).

 

(4) 신들에 대한 판결(6-7)

 

이제 신들이 저지른 불의의 통치와 통치 질서를 무너뜨린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내려집니다(6-7). 이때 6절에 인칭대명사 “내(하나님)가”가 문장 맨 앞에 나와 강조되었는데, 이것은 이 판결을 내리는 주체가 인간 재판장이나 하찮은 신들이 아니라, 온 세상의 대재판장이신 ‘하나님’임을 강조해줍니다. 정의롭고 엄격한 재판을 통해 피고들에게 형을 내릴 하나님의 재판장 지위와 권위가 부각 되었고, 그의 판결의 정확함과 엄중함이 암시되었습니다. 신들을 향한 판결로 하나님께서는 신들의 실체를 밝히고 죽음을 선고하십니다. 신들은 신적 존재이며 가나안 신화에 나오는 지존자 엘룐의 아들들, 즉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불멸의 존재로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추앙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실체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과 같은 존재임을 천명하십니다. 사람이라면 평범한 자나 고위 관직에 있는 자나 다 죽을 운명에 놓이듯 신들도 똑같은 처지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이나 잘못된 믿음과 상관없이 그들이 섬기는 신들은 거짓이며 허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 신들을 “허무한 것”(렘 18:15), “허탄한 거짓”(시 31:6), “거짓된 것”(욘 2:8)으로 부른 것은 아주 적절합니다.

 

세상의 재판장이신 하나님(8)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돈이나 권력, 명예 등은 결국 모두 무너질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이 세상을 소유하시고, 다스리고 계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돈이나 정치권력이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십니다.

 

8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8)

 

허탄한 신들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해도 세상을 정의롭게 심판할 자격이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신들의 실체가 거짓과 허망한 것으로 밝혀졌고 하나님만이 우주의 참 신이시며 참된 재판장임이 재확증 되었으므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개시하실 것을 고대하며 간구합니다. 각 나라들은 헛된 신들을 참 신으로 여겼으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세상 모든 나라의 주인이며 자신의 기업으로 소유하셨습니다. 종말에도 하나님께서는 세계 온 나라를 자신의 기업으로 소유하실 것이므로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와 심판은 우주적 통치와 심판이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통치로 하나님 나라의 근간이 확고히 설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위해 그들 나름의 신전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님의 뜻에 의해 통치되고 있음을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을 다스리신다는 진리를 확신하며,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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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1-01)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시편 81편 1-16절


 

우리가 후회가 남지 않는 삶을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귀를 기울이고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의 미래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후회할 일이 생기고 난 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껄하면서 후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절기에 시인과 공동체는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과거의 돌보심에 감사하며 순종에 대한 명령을 확고히 합니다.

 

절기를 맞아 하나님을 찬양(1-5)

신앙은 오직 하나님이 나의 힘이요 능력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나의 힘인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당연히 우리의 심령에서 일어나는 영적 반응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면 둘수록 그는 그 가능성을 자신에게 두는 것만큼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듣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1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2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3초하루와 보름과 우리의 명절에 나팔을 불지어다 4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로다 5하나님이 애굽 땅을 치러 나아가시던 때에 요셉의 족속 중에 이를 증거로 세우셨도다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1-5)

 

시인은 백성들을 찬양으로 초대합니다. 시를 읊고, 소고와 수금과 비파로 찬양하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을 치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규례로 정해주신 날에 모여 찬양하자고 합니다. 찬양은 감사고 기억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요 그 근원에 대한 고백입니다.

 

(1) 절기에 하나님 찬양(1-3)

 

시인은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되신 분, 즉 이스라엘에게 그의 능력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야곱의 하나님”(1), 즉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 그의 백성이 즐겁게, 다양한 방법으로 찬양을 드림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방법으로는 목소리로 곡조 있는 노래를 부르거나, 즐거이 소리를 외치기도 하고, 소고와 같은 타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같은 현악기 등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특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를 맞아 축하하고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3절의 “초하루”와 “보름”은 각각 새 달, 보름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의 ‘절기’를 가리킵니다. 특히 나팔을 부는 절기는 ‘나팔절’로 불리는(레 23:24; 민 29:1), 새 해를 알리는 날(티쉬리[7월; 양력 9-10월] 1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7월 10일의 속죄일과 7월 15일의 장막절이 그 뒤를 따릅니다(민 29장). 3절의 절기들은 새해를 맞이하고(나팔절), 하나님의 성소와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속죄하고(속죄일), 광야 시절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감사하는(장막절) 데 의미를 둡니다.

 

(2) 절기를 정하신 하나님(4-5a)

 

절기를 지키는 이유는 절기가 “이스라엘의 율례”이자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이기 때문입니다(4). 여기에는 절기를 명령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점, 절기는 백성의 의무라는 점, 절기를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임이 선포된다는 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세 명절은 3절에 소개된 ‘장막절’ 외에 ‘유월절’과 ‘오순절’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3:14-17에 소개된 이 세 절기는 나머지 모세의 율법(레위기 23장:민수기 28-29장:신명기 16장)에 반복될 만큼 중요합니다. 절기는 근본적으로 안식일에서 유래하였습니다(레 23:2-3). 안식일은 다른 날과 구별된 날로서 일을 금하고 각처에서 성회로 모이는 등 거룩하게 보내야 했습니다(창 2:3). 이날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날입니다(창 2:3). 각절기에 백성은 다른 일을 삼가고, 거룩한 모임으로 모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배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각 절기는 추수 때와 맞물리므로 하나님께 바칠 예물이 충분히 준비되었습니다. 절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때에 애굽을 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의 증거로 삼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애굽과 광야에서의 돌보심(5b-7)

 

신앙의 싸움은 ‘누가 나의 힘인가’의 싸움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 일을 주지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군대의 추적과 홍해 앞에서 절대 절명의 위기에 놓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하라고 하십니다(출 14:13). 무엇이라도 해야만 하는 그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능력임을 가르치십니다.

 

6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7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셀라) 8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9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10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11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12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13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14그리하면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들을 치리니 15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 16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5b-16)

 

구원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바로의 고역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어깨의 짐을 손에 있는 광주리를 놓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또 믿음을 심으시려고 결핍과 위험이 도사리는 불임의 땅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주의 음성을 청종하는 이들을 지금도 창조하고 계십니다.

 

(1) 애굽와 광야에서의 돌보심(5b-7)

 

절기에 백성의 찬송에 덧붙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은 6-16절의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내용을 가리킬 것입니다. 첫 말씀은 하나님께서 과거 애굽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돌보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어깨에 놓인 짐과 손의 광주리를 놓게 하셨다(6)는 말은 애굽에서 강제 노역을 하며 고난 받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해방시키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듣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출 2:24).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7)는 말은 아마도 시내산에서 나타나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므리바 물가(7)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 물이 없자 하나님을 원망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반석에서 물을 얻게 하신 곳입니다(출 17:1-7). 이스라엘은 이 일로 서로 다투고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시는지에 대해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출 17:7). 그러나 본 시편에서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 뜻은 신명기 8:2에서 설명하듯, 하나님께서는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을 낮추고 그들의 진정한 마음을 살피고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시험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구하고 광야로 이끄시는 내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요구를 들어주시며 그들을 아들처럼 돌봐주셨습니다(신 8:5-6).

 

(2) 하나님의 말씀: 순종의 명령(8-10)

 

둘째로 소개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순종의 명령입니다. 앞의 므리바 사건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표명하면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순종의 명령이 적절하게 연결됩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증언이자 경고입니다. “들으라 내 백성이여”(8)는 신명기 6:4 이하 내용입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이심을 확실히 알고, 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본 시에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의 첫 계명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와 둘째 계명인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를 예로 언급하십니다. 이는 하나님 순종에 있어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인지와 하나님께 온전한 섬김과 헌신이 요구됨을 명시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다”(10)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암시되었습니다(출 19:4). 또한 이는 십계명 선포 직전에 선언된 말(출 20:2)이며, 이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에 덧붙여 자주 나타난 문장(레 11:45;22:33; 민 15:41)입니다. 이 문장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는 대상이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한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확인시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그의 백성이 요구할 때 그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 이스라엘의 불순종(11-12)

 

셋째로 소개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돌보셨는데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했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이미 7절의 므리바 사건에 암시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역이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행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무시했으며 하나님을 기꺼이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완악하고 고집스러웠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지 않고 자기들 계획대로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두었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치 애굽의 왕 바로의 완고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어 그 결과로 바로가 마땅한 심판을 받게 되었듯이(출 10:2), 이스라엘의 제멋대로 하려는 의지를 꺾지 않고 두심으로써 그들이 마땅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겔 18, 33장: 렘 31:29-30)

 

(4) 하나님의 말씀: 순종의 명령과 축복의 약속(13-16)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다시금 이스라엘의 순종을 요구하시며 이에 따른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내 백성”이란 칭호가 반복되면서(8,11,13)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언약 백성임이 강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그의 말을 듣고 행하기만 하면 그들을 괴롭히는 대적들을 속히 제압하실 준비를 이미 갖추셨습니다. 설령 하나님을 미워하는 이 대적들이 순종을 가장합니다 하더라도 그들이 받을 심판의 시간은 영원할 것입니다. 반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기름진 밀과 반석의 꿀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16). 이 증언은 과거 이스라엘을 돌보셨던 하나님(6-7)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순종하는 백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줍니다.


우리 삶에 참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을 줄 압니다. 예배가 전부는 아니지만, 예배부터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예배를 통해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향할 때 우리 어깨의 짐과 손에 든 광주리를 놓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금 구원의 은혜와 체험의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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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0-01)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간구

시편 80편 1-19절


 

어늘해진 기억을 더듬어 방치된 기억 상자를 열었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백성일지라도, 오래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참츰 채색되더니 곧추세워졌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기억의 반대편에 있어서 아픕니다. 기억 속 주님만이 회복의 열쇠입니다.

 

 

  • 하나님께서 직접 돌보신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이 멸망하였습니다. 시인은 전사이신 만군의 하나님께서 선두에 나서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호의와 구원을 간구(1-3)

역사적으로 왕의 상징은 주로 칼이었으며, 왕의 주된 의무는 전쟁에서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왕의 역할은 목자로서 어리석은 백성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지도하며, 강한 자들 사이에서 약한 다들을 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얼굴빝, 임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깊은 절망입니다.

 

1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2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3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1-3)

 

시인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청합니다. 이 목자는 ‘양 떼를 모는 목자’, 즉 시편 23편에 묘사된 선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목자는 양을 초장과 물가로 몰고 가 그들을 배불리고 편히 쉬게 해주며, 짐승과 위험한 곳의 위협으로부터 양을 보호하여 안전을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로서 이스라엘을 몰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기를 시인은 소망합니다. 또한 이 목자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입니다. 그룹은 성막의 지성소에 놓인 법궤 위의 천사들(출 25:17-21)이며, 이 천사들이 있는 곳에 “좌정하신”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상징합니다. 출애굽 후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하나님의 법궤가 선두에서 행진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서 행하며 장막 칠 곳을 찾고, 불과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민 10:33; 신 1:33).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신 31:8)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때도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 앞에서 행진하며 백성을 인도하였습니다(수 3:6,11-17). 시인은 이같이 목자의 비유와 법궤의 상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동행과 인도가 시인과 공동체에게도 여전하기를 호소합니다.

시인은 구원의 대상으로서 ‘이스라엘’을 언급하는데, 특히 “요셉”(1)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양으로 지목함으로써 북이스라엘에 초점을 둡니다. 2절에서 요셉의 아들들이자 북이스라엘의 대표 지파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남북 분열 후 북이스라엘 영토의 일부가 된 “베냐민”을 예로 든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 세 지파는 모두 야곱과 라헬의 자손이며, 출애굽 후 광야에서 같은 서쪽 진영에 머문 지파입니다(민 2:18-24).

하나님께 드리는 구원의 기도는 첫째, 그의 관심과 호의를 가져달라는 비유적인 표현(“귀를 기울이소서”, “빛을 비추소서”)으로 시작됩니다(1). 하나님께 간구하는 백성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집중해주시고, 이스라엘에게 얼굴빛을 비추는 호의를 약속하셨던 그 약속(민 6:25)을 지금 그의 백성에게 이루어주시기를 바라는 요구입니다. 둘째,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한 구원을 구합니다(2). 특히, “주의 능력을 나타내소서”라는 외침에서 ‘나타내다’(2)에 해당하는 동사는 ‘휘저어 일으키다’, ‘깨우다’, ‘선동하다’의 뜻이므로, 이 간구는 소용돌이가 솟구쳐 오르듯 하나님께서 그의 힘을 휘저어 일으켜 이스라엘을 위해 행동을 개시해주시라는 강렬하고 적극적인 요구입니다. 이에 덧붙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2)라는 외침은 하나님께서 전쟁의 용사로 나서서 이스라엘의 선두에서 전투를 이끌어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시라는 구체적인 요청입니다. 3절의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당신의 얼굴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는 간구는 7철과 19절에도 나와 후렴구를 이룹니다. 첫째 간구에서 시인이 언급한 ‘회복’ 또는 ‘돌이키심’은 구체적으로 포로로부터의 회복인지, 땅의 회복인지, 언약의 회복인지 알기 어렵지만, 문맥상 ‘구원’과 밀접한 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둘째 간구인 ‘당신의 얼굴을 비추소서’에서 하나님꼐서 얼굴을 어떤 대상에게 비추는 행동(시 4:6; 31:17; 67:1; 민 6:25)은 그 대상에게 관심과 호의를 품으심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관심과 호의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을 원수한테서 구원하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는 앞의 두 간구의 궁극적 목적지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4-7)

죄인된 모습을 보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장 떠나가셔도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의지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성도가 가져야 할 합당한 마음입니다.

 

4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5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6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7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4-7)

 

시인은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쏟으신 분노에 애통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로 호칭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할 능력자임을 드러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할 전쟁의 용사로 나서서 싸워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현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분노하셨고, 그의 정의로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기도에 대해 노하신다(4)는 표현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직 그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4)라는 물음은 하나님의 진노 대신 긍휼로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재촉하는 시인의 절규입니다. 그의 양 떼에게 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눈물의 빵을 먹고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런 현실은 과거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이끄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늘로부터 빵을 내려 먹이시고 굳은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신 것과 대조적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이 놀라움과 감사의 양식과 물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였고, 계속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익히게 하시려는 배려였습니다(신 8:15-16).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가르침을 잊고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으며, 그에 마땅한 심판으로서 고통과 눈물의 양식을 먹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런 상황은 이방 원수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시 79:4,10). 시인이 이스라엘이 겪는 내, 외부적 고통을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원망이나 하소연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받는 심판은 마땅하지만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간청하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이 심고 가꾸신 포도나무(8-13)

하나님의 교회가 불미스러운 일로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듣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에 이런 일을 자주 있었습니다. 전반적인 이유는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보호에서 떠났기 때문에, 세상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9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10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12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13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8-13)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친히 돌보셨음을 회고하며 구원을 재촉합니다. 이 단락에서 언급한 역사적 시기는 출애굽 사건(8)으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정복(8b-9), 왕정시대와 황금기(10-11)를 거쳐 이스라엘의 멸망(12-13)까지 이릅니다. 또한 이 단락에서 이스라엘은 ‘포도나무’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8절의 첫마디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한 포도나무”로 시작됩니다. 시인은 ‘한 포도나무를 이집트에서 당신이 뽑아오셨나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종살이에서 직접 구한 대상이 ‘이스라엘’임을 부각합니다.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언약(창 12:2; 17:4-7)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창 13:15-17)에 대한 기대가 고조됩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가꾸심으로 인해 풍요로워지고, 그 영향력이 바다(지중해)와 강(유브라데)까지 뻗쳐 갔습니다(11). 그러나 이제 이방인들이 멧돼지와 들짐승들처럼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하나님께서 가꾸신 포도원 이스라엘을 뒤엎어버렸습니다.

 

포도나무의 회복을 간구(14-19)

아무리 역사가 오래되고, 많은 사람이 모이며, 재정이 넉넉한 교회일지라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혹시 이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돌보심을 갈망하고 있는지, 지도자가 하나님의 손에 불들려 사역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14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15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6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17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18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9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4-19)

 

하나님께서 심고 가꾸신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처참히 짓밟혔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를 긍휼히 보시고 구원하시기를 시인은 간청합니다. ‘당신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 ‘당신을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아들’, ‘당신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 ‘당신을 위하여 힘있게 하신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15,17)을 반복함으로써, 시인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다윗과 맺은 언약(삼하 7:14)을 기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적극적인 개입이 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생명을 회복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18). 19절에서 시인은 7절에서처럼 3절의 간구를 후렴같이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재차 간청하고 기도를 끝냅니다. 이때 하나님에 대한 호칭인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는 3절의 “하나님이여”와 7절의 “만군의 하나님이여”에 이어 가장 긴 형태로 나와 시인의 간구의 간절함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시인의 호소는 여전히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과 언약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망각의 백성에게 재차 기억하라고 주께서 당부한 말씀은 애굽에서의 종 됨과 하나님의 속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백성이 하나님께 그때를 기억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기억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근거요 기도 제목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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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9-01)

 


전쟁의 폐허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

시편 79편 1-13절


 

아무리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현실일지라도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이 산재되어 있지만, 그러나 교회가 한마음으로 전심으로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분별력과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과 민족의 위기 앞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본 시는 ‘아삽의 시’라고 개합니다. 시대적 배경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 되는 때의 내용입니다. 이방 나라들이 유다를 침공하여 하나님의 성전과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조롱하는 것을 탄식합니다. 하나님께 이방 나라들을 향한 보복과 유다의 회복을 간청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극심한 곤경에 처하였을 때 어떤 기도와 소망이 나오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성전(1-4)

민족적 정체성의 기반이었던 나라가 망하고, 신앙의 정체성을 규정해 주던 성전이 무너졌지만, 이들은 하나님 앞에 모여 함께 탄식하며 고발함으로 그 고통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함께 부르는 노래의 힘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고 찬송할 때 어떠한 고통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1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2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3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4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1-4)

 

시편 79편은 남유다의 멸망(주전 586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기록한 시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이미 멸망했고(주전 722년) 136년이 지난 후 남유다까지 멸망함으로써 이스라엘이란 국가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시인은 시의 첫머리에서 유다의 멸망과 이로 인한 이스라엘의 처참함을 애통해하며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유다의 멸망은 표면적으로는 강한 군대를 가진 바벨론을 위시한 이방(시 137:7-8: 애 4:21)이 유다 땅을 침략하여 승리를 거둔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상황을 하나님과 유다와 이방 나라들 간의 관계 속에서만 관찰하고 설명합니다. 먼저 시인은 유다 땅을 가리켜 ‘당신의 기업’, 즉 ‘하나님의 기업’으로 부릅니다. 이 표현은 이방인들이 짓밟은 유다의 땅이 단순히 물리적인 땅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과 그의 후손에게 마련해준 언약의 유산임(창 17:8)을 강조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시인은 이 기업의 상징적 장소로 성전과 예루살렘을 언급합니다. 시인은 성전을 ‘당신의 성전’으로 칭하며 성전과 예루살렘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주하기 위해 직접 선택하신 곳(왕상 9:7; 시 78:68-69)임을 부각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하심을 상징하는 성전과 하나님의 도시 예루살렘은 상상할 수 없는 치욕에 휩싸였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의 침입으로 성전은 더럽혀졌고 파괴되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예배하는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여 성전은 희생 제물의 피가 아닌 사람들의 시체와 피로 얼룩지고 부정해졌습니다. 예루살렘 도성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시체와 피가 넘쳤고, 시신이 제대로 매장되지도 못한 채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이때도 시인은 유다 백성들을 ‘당신의 종들’과 ‘당신의 성도들’로 칭하며 성전이나 도성에서 처절하게 죽임을 당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언약 백성이며(출 19:6), 하나님을 섬기던 자들임을 하나님께 상기시켜드리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매장되지도 못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은 자처럼 간주되었음(왕상 16:4; 왕하 9:33-37; 전 6:3)을 시인은 애곡합니다. 물론 유다가 멸망한 것은 유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이지만, 이것이 지금 시인이 강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의 요지는 시신을 매장할 자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잔혹하게 도륙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헤아리시고 이 백성을 겁 없이 살육한 무리들에게 분노를 쏟으시고, 자기 백성들에게는 긍휼을 베풀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침략으로 하나님의 처소와 백성들의 처소는 돌무더기가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회개와 용서의 제사나 기쁨과 즐거움의 찬양과 감사로 가득 찬 예배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을 통해 평안과 즐거움을 누렸던 도성엔 이제 애곡과 비참함만 남았습니다. 이방인들의 두려움과 부러움의 대상이던 하나님의 백성(수 2:9-11; 왕상 10:1-9)은 현재 이방인들의 조롱과 비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시인의 간구(5-12)

하나님의 백성이 징계를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는 이유를 살펴보고 그 징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교회는 하나님 앞에 하나가 되어 구원을 요청하고 용서를 비는 공동체로 서야 합니다.

 

5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6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7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8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9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10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 11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12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5-12)

 

시인은 이방 군대의 만행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주의 기업(땅)에 들어와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주의 성 예루살렘을 멸하며 주의 백성과 성도들을 살육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방치하여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열방 앞에 조롱과 치욕거리가 되게 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내리신 형벌이라도,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해달라는 것입니다.

 

(1) 이방인의 심판을 간구(5-7)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절규하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유다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쏟기를 간청합니다. 시인은 유다 백성이 당면한 이 상황이 하나님 백성을 향한 진노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크고 계속되므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영원히 품으시고 질투가 영원히 불타게 두실 것이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질투’는 ‘진노’와 같은 뜻입니다. 이 물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풀며 노를 한없이 품지 않고 그들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할 것이라 약속하셨고, 그동안 그렇게 실행하셨던 분(출 34:6; 렘 3:12: 시 109:8-10)이 아니시냐는 반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과 약속대로 그의 백성에 대한 진노를 거두시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진노를 하나님의 언약의 기업에 쳐들어와 하나님의 처소를 더럽히고 백성을 살육한 이방인들에게 돌리시기를 간구합니다. 이들은 유다의 원수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이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 자들입니다. 반면, 유다는 “야곱”의 족속입니다(7). 시인이 야곱을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후 그 언약이 이삭과 야곱을 통해 계속되었고 시내산에서 야곱의 열두 족속과 그 언약을 확정하셨으므로 그 언약이 지금도 유효함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이 언약 백성이 이방인들과 달리 오랫동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섬겨온 자들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을 이방인들이 무자비하게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하게 했으니 하나님께서 진노를 그들에게 쏟으심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용서와 구원을 간구(8-9)

 

이방인의 심판을 간청한 시인은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과거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8절의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는 ‘우리 이전의 죄악들을 기억하지 마시고’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번역을 고려하면 시인은 단지 조상들의 죄뿐 아니라 현재 그가 속한 공동체가 지은 죄악들도 하나님이 용서하시기를 간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간청은 이스라엘과 조상의 죄를 축소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시인은 5절에서처럼 하나님의 긍휼하신 성품에 호소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시며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출 34:6-7a). 또한 이스라엘의 허물과 반역을 보지 않겠다고(민 23:21) 말씀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호의와 용서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들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속히 만나게 해달라고(8, “영접하소서”) 기도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아주 낮아지고 대수롭지 않게 되었음을 고백하여 하나님께서 긍홀로 자신들을 용서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시인은 또한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하나님”(9)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건져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 간청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부각시켜 신속한 도움을 이끌어 내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3) 이방인의 심판을 간구(10-12)

 

시인은 다시 1-4절의 이방 나라들의 악행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심판하시기를 강하게 요청합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패배와 처참한 상황을 비웃었을(4)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실존을 들먹이며 그의 구원의 능력을 비웃었다고(10)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하나님을 섬겼던 백성들은 포로가 되었고 죽을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영광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탄식하고 간구하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원수들에게 보복하시고 이스라엘을 보존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시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을 비방한 그들에게 칠 배나 비방을 돌려주시도록 간청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13)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백성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한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맺은 언약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자신의 죄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지레짐작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13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13)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도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하고 찬양 의지를 밝히며 기도를 끝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멸망한 때에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목자시므로 그의 백성, 그의 양인 이스라엘을 구하시고 원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의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하며 하나님 찬양을 계속할 것이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옛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보되기를 바라며 이 시를 금요일 오후에 통곡의 벽에서 낭송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교회를 비방할지라도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들이 행한대로 보응하시며 영광스러운 교회를 다시 일으키시리라는 기대를 하고 이 시를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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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8-04)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시는 땅

시편 78편 56-72절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편만하게 계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임재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참 평안과 위로가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사모해야 합니다.

 

  • 시인은 거룩한 영토에 들어와 다시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조상들의 배신을 고발하며 시온과 다윗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뿌리와 지나간 구원 역사의 의미를 더듬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만남과 언약이 지속되었음을 회고합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분노(56-60)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여 약속의 땅을 선물로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지존자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고 말씀을 업신여겼습니다. 광야에서 그의 조상들이 하던 대로 배반하고 속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어떤 소리보다 내 삶을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게 하고 있습니까?

 

56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57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58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59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60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56-60)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다시 ‘지존하신 하나님’(엘로힘 엘론)을 시험하고 반항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56). 그들이 돌이켜 거듭 하나님을 시험했다(41a)는 말이 반복된 셈입니다. 그때는 그들이 광야에 있었고, 지금은 ‘거룩한 영토’(54)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반역은 이전보다 심각한 것입니다. 이제 시인이 말하는 조상들은 출애굽 1세대가 아니라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 조상으로 언급됩니다. 시인은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배반하고 신실하게 행동하지 않았고, 느슨한 활처럼 빗나갔다고 말합니다(57). “속이는 활 같이”는 더 정확히 ‘느슨한 활 같이’입니다. “속이는”(레미야)에 해당하는 단어는 태만함, 느슨함, 부주의를 뜻하는 명사입니다. 시행 사이의 평행관계가 보여주듯 느슨한 활이 과녁을 향해 정확히 쏘지 못하는 것처럼,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목표하는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시인은 그 대표적인 항목을 말합니다. 그들이 신당에서 그를 격동시켰고, 그들의 우상이 그를 질투심에 불타게 했습니다(58).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우상숭배 때문에 질투심을 일으켰던 사례들이 있습니다(신 32:16; 겔 8:3). 이것은 언약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의 첫 계명을 위반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그가 분노하셨으며, 이스라엘을 극도로 미워하셨습니다(59). 하나님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미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떠나는 것으로 매듭지어집니다. 끝내 하나님께서는 실로의 ‘장막’(미쉬칸)을 떠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 사이에서 그가 거주하셨던 ‘장막’(오헬)이었습니다(60). 실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 초기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였지만, 하나님께서 더는 그들과 함께 거주하지 않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참조. 삼상 3-5장).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는 하나님의 부재로 귀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61-64)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도 미워하여 떠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자 성소가 있던 실로는 파괴되고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깁니다. 이스라엘의 능력은 빼앗기고 영광도 대적의 손에 넘어갑니다. 대적을 향하던 칼과 불이 이스라엘을 유린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청년들이 전쟁에서 사라지자 혼인의 노래도 들리지 않고, 과부들의 통곡 소리만 들립니다.

 

61그가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 주시며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62그가 그의 소유 때문에 분내사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으니 63그들의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그들의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었으며 64그들의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그들의 과부들은 애곡도 하지 못하였도다(61-64)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님의 부재였습니다(60).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주시고,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셨다고 합니다(61). 그의 능력과 그의 영광은 법궤를 의미합니다(시 132:8). 하나님께서는 실로를 떠나시고, 법궤를 빼앗기게 하셔서 실로를 중심으로 ‘거룩한 영토’에 정착한 첫 세대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이 법궤를 전리품으로 빼앗아 갔으니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신 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칼에 넘기셨고, 그의 소유(기업) 때문에 분노하셨습니다(62). 시의 평행구조가 제시하듯 그의 소유는 곧 그의 백성이며, 그의 분노는 칼입니다. 그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을 불이 삼켰고, 그의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63). 전쟁에서 죽은 젊은이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젊은 여성들에게 구애하기 위한 칭송도 들리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의 제사장들도 칼에 맞아 넘어졌고, 그의 과부들은 애곡도 못했습니다(64; 참조. 삼상 4:17-22). 하나님께서 자기능력을 포기하신 것 같은 철저한 파괴와 슬픔과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심판은 다름 아닌 방치와 유기였습니다. 이것은 법궤를 우상처럼 섬겼던 조상들의 불신앙이 가져온 참담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과 선택(65-7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셔도 영원히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포도주에서 깬 용사처럼 큰소리 외치시며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의 대적을 물리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수치와 하나님 자신의 수를 갚아주셨습니다. 왕을 세우시고 시온 산에 견고하고 영원히 안전한 성소를 세우셨습니다.

 

65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66그의 대적들을 쳐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도다 67또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68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69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70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71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72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65-72)

 

아삽은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일어나사 이스라엘을 구언하셨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열두 지파 중 장자 지파라할 수 있는 에브라임을 버리고 유다를 택하셨으며, 시온산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결정하셨습니다.

 

(1) 강인한 용사처럼(65-66)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회복을 기획하십니다. 시인은 회복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용사에 빗대어 노래합니다. 그때 나의 주님(아도나이)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가 술에서 깬 맑은 정신의 용사처럼 깨어나셨습니다(65). 시인은 포도주로 붉게 달아올랐지만, 취하지 않고 침착한 용사로 하나님을 비유합니다. 시편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의 잠을 언급합니다(시 7:6;35:23;44:23;59:4-5). 이 시들은 하나님께서 깨어나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을 실제로 하나님이 주무신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듯, 하나님의 깨어나심을 이스라엘을 위해 다시 활동하시는 것으로 생생하게 표현한 은유입니다. 술을 마셨어도 취하지 않은 용사로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강인한 용사의 이미지로 그려진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영원히 그들에게 수치가 되게 하셨습니다(66). 이 두 절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온 이야기를 회고하는 듯합니다(참조. 삼상 6:1-18). 그러니 영원히 그의 대적들을 욕되게 하셨다는 것은(66b),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재앙과 그들이 전리품 취급한 법궤를 반환한 사건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후 법궤는 기럇여아림에 머물고 백성들은 전쟁을 위해 인간 왕을 선택합니다.

 

(2) 유다 지파와 시온 산을 선택(67-69)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고 에브라임 지파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67). 에브라임 지파는 가장 수효가 많고 유력한 지파였지만 우상숭배와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에서 탈락했습니다(삿 12,17장 참조). 이는 하나님이 북쪽 성소와 에브라임 지파가 속한 곳이 예배처소가 되길 원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셨습니다(68). 하나님께서는 한동안 멀리 계셨습니다. 그가 유다지파와 시온을 선택하시고 에브라임 지파를 거부하셨지만, 그렇다고 북쪽 지파를 버리시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다윗 왕권 수립의 중요성에 있습니다(삼하 7장). 시온, 곧 예루살렘은 다윗 왕이 선택한 수도이며(삼하 6:21; 왕상 8:16),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다윗이 처음 한 일은 언약궤를 긴 것입니다(삼하 6:1-19). 그래서 시인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을 선택했다고 해석합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그의 ‘성소’(미크다쉬)를 높이 세우셨고, 땅처럼 영원히 세우셨다고 노래합니다(69).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것과 다윗이 정한 수도는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며, 시인에게 이것은 구속 역사의 핵심이 됩니다.

 

(3) 이스라엘의 목자로 다윗을 선택(70-72)

 

시온과 다윗의 선택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획하신 새로운 출발이 시작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 다윗을 선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선택하셨다고 노래합니다(70). 이는 그가 양을 치는 목동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만, 이스라엘을 돌보는 목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한 것입니다(삼하 7:8; 겔 37:24).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목적을 밝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암양을 돌보는 그를 데려와 그의 백성 야곱과 그의 유산 이스라엘을 돌보게 하기 위함입니다(71). 여기에 암컷 동물이 어린 새끼를 젖먹이고, 키우며, 돌보는 행위를 표현하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 왕권이 제왕적인 통치가 아니라 필요를 공급하며 소박하고 따뜻하게 돌보는 선한 목자의 돌봄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또한 그의 백성 야곱과 이스라엘은 마치 유산 같은 하나님의 영원한 소유로서 목자의 돌봄을 받습니다. 시인은 그가 온전한 마음으로 돌보았고, 그의 능숙한 손으로 그들을 인도했다고(72) 회고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세우신 선한 목자로서 그 역할을 정직하게 수행한 인물로 기억되었습니다. 시인은 목자 다윗의 돌봄의 통치를 회상하기까지 구원 역사의 드라마에 하나님의 사랑, 좌절, 분노, 심판이 고스란히 배어 있음을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78편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인류 간의 길고 긴 투쟁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 시편이 그려주듯,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온갖 죄악들 사이에서 번뇌하시고 심판하시지만, 항상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입니다.


지도자들은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좋은 지도자입니다. 어떤 일이든 맡은 일에 전문가가 되는 사람이 나중에 더 큰일에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준비하지 않고서 지도자가 되려는 것은 공동체를 망치는 일입니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일을 사랑합니까? 그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그 일에 전문가가 되려고 애씁니까? 스스로 점감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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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8-03)

 


애굽에서 가나안 여정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시편 78편 34-55절


 

예수님을 영접한 날, 구원받은 날, 또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특정한 날을 지정하기는 어렵더라도 교회의 지체들을 통해서, 또는 여러 활동 가운데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를 ‘처음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억들이 오늘의 삶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충성심을 저버린 이스라엘을 향해 여전히 자비하셔서 분노를 모조리 쏟아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근원적인 실패를 망각에서 찾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리고, 거기서 끌어내 홍해를 건너고 가나안 땅에 입성한 구원 역사를 되새깁니다.

 

조상들의 회개와 기억(34-35)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 쏟아부으셔야 할 진노의 잔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위에 쏟아부으시고,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긍휼의 절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불신앙으로 인한 실패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긍휼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실패로 끝나게 놔놓지 않으셨습니다. 진노를 돌이키시고 결국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34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35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34-35)

 

시인은 하나님께서 죽이실 때에 이스라엘이 그를 찾았고, 돌아와 간절히 찾았다고 합니다(34).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의 고된 방랑 생활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다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의 행동 패턴을 잘 아십니다. 은혜의 주께는 너무 곤혹스런 일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반석이며 ‘지존자 하나님’(엘 엘론)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했다고 말합니다(35). 신성을 표현하는 아주 오래된 용어 ‘엘’은 시편, 욥기, 이사야서, 창세기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속자”(고알람)라고 했을 때, ‘구속하다’(가알)의 뜻은 1차적으로 자산과 관련된 것으로서, 팔린 집을 다시 사들이거나(레 25:33)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의 자유를 살 때(레 25:48), 기업 무를 자나(룻 4:4) 죗값을 갚기 위한 것에 대해 사용됩니다(민 5:8). 그들은 히브리 노예의 삶에서 자유 시민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기억했습니다.

 

다시 반복되는 불성실함(36-37)

교회 안에 많은 기념일이 있습니다. 매년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성도들이 그 의미를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년 성탄절에는 예수님이 아니라 산타클로스가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구원과 은혜가 잊혀진 예배와 절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참된 예배와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까?

 

36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37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36-37)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러나’라는 표현을 통해 그들의 회개는 진실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입과 혀로 하나님께 아첨하고 거짓말했다고 합니다(36).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굳건하지 않았고, 그의 ‘언약’(베리트)을 꾸준히 유지하는데 성실하지 않았습니다(37). 시인은 조상들의 신실하지 못한 행위를 표현할 때, 몸의 기관(입과 혀)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고, 흔들리는 마음 상태를 꼬집습니다. 이는 몸과 마음의 성향이 언약을 지키는 신실성과 매우 밀접한 관계임을 역설한 것입니다. 삶은 몸으로 살아내고 뜻을 펼치는 것은 마음이 결정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몸의 기관을 위선과 가식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기억(38-39)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사람들은 영원한 죽음이 기다릴 뿐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이 예수를 선택하면, 그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38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39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38-3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 규정대로 행하셨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오직”) 하나님께서는 긍휼하셔서 죄악을 덮어주셨고, 멸망시키지 않으셨으며, 분노를 돌이키기를 거듭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분노를 다 높이지는 않으셨습니다(38). 자기 백성의 아첨과 거짓말, 꾸준하지 못한 마음, 언약을 견실히 지키지 못한 것(35-36)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덮고 분노를 누그러뜨리셨습니다. 그는 ‘긍휼하셨다’(라훔). 긍휼은 어머니가 아기를 대하는 것과 같은 깊은 헤아림입니다. 죄를 덮어서 없는 것처럼 감춰주시고, 진노를 돌이키시고 또 돌이키시기를 수도 없이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긍휼이 그들을 살렸습니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덩이요,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으로 기억하셨다고 합니다(39). 시인은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존재라는 사실과 그것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어머니 같은 하나님으로 연결시켰습니다.

 

지나간 구원의 역사를 되짚어 봄(40-55)

성경에서 ‘헤세드’는 도무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부어 주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을 뜻하는 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입은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무사히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40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41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42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43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의 표적들을, 소안 들에서 그의 징조들을 나타내사 44그들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그들로 마실 수 없게 하시며 45쇠파리 떼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물게 하시고 개구리를 보내어 해하게 하셨으며 46그들의 토산물을 황충에게 주셨고 그들이 수고한 것을 메뚜기에게 주셨으며 47그들의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그들의 뽕나무를 서리로 죽이셨으며 48그들의 가축을 우박에, 그들의 양 떼를 번갯불에 넘기셨으며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51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52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53그들을 안전히 인도하시니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으나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 54그들을 그의 성소의 영역 곧 그의 오른손으로 만드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55또 나라를 그들의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시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 살게 하셨도다(40-5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단지 애굽의 종살이에서 끌어내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다른 나라의 침공을 막아 주셨으며,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셔서 각 지파에게 분배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1) 하나님의 슬픔(40-42)

 

광야에서의 반역과 시인은 다시 반역의 역사와 하나님의 자비를 돌이켜 묵상하며 노래합니다(참고. 12-16). 그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자주 반역했습니까? 그들이 사막에서 그를 얼마나 많이 슬프게 했습니까(40)? 시인이 광야에서 그들의 지속적인 반역을 언급한 것처럼(17), 거듭된 조상들의 고집스러움과 완고함에 대해 탄식합니다. 그들은 돌이켜 하나님을 시험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상처 입혔습니다(41).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그분에게 상처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 하였도다”(히트누)를 정확히 풀이하면 ‘아픔을 주다’, ‘괴롭게 하다’, ‘상처를 입히다’라는 사역형 동사로서 구약에서 오직 여기서만 사용됩니다. 또 그들은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않고 대적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4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기억하셔서 분노를 거두셨지만(38-39),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신’(파담) 것을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시인은 망각의 문제를 다시 반복합니다(11절 참조). 그리고 ‘그가 구원하신 날’, 곧 그 시간은 출애굽 시점부터 가나안 정복과 정착의 과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2) 애굽에서 일어난 재앙들(43-51)

 

시인은 시간적으로 더 먼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징조와 재앙 일곱 가지를 묘사합니다. 재앙에 대한 묘사는 피로 변한 나일강에서 시작하여 장자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시인이 회고하며 묘사한 재앙 목록이 출애굽기의 재앙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출애굽 당시의 일을 똑같이 기술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재앙이 주는 효과에 관심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압제자로부터 구원하고, 창조 세계가 모조리 하나님의 무기라는 것을 보여주고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12절에서 ‘소안’을 언급했는데 다시 ‘소안’ 지역을 언급하면서 애굽에서의 ‘그의 표적들’과 ‘그의 징조들’을 열거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강과 시냇물을 피로 변하게 하셔서 마실 수 없게 하셨습니다(44). 나일강은 애굽 사람들이 식수와 먹거리를 얻는 생명의 강이었지만 죽음의 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쇠파리 떼를 보내셔서 물게 하셨고, 개구리를 보내 큰 피해를 입게 하셨습니다(45). 그들의 땅에서 얻은 농산물을 해충에게 주셨고, 그들이 수고하여 거둔 곡식을 메뚜기에게 주셨습니다(46). 그들의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그들의 “뽕나무”(무화과)를 서리로 죽이셨습니다(47). 그들의 가축을 우박으로, 그들의 양 떼를 번개로 치셨습니다(48). 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적의, 곧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49). 그가 진노의 길을 터놓음으로 그들의 목숨이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게 하셨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가두셨습니다(5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인간의 조화로운 공존은 하나님의 뜻이지만, 창조 질서의 아름다움은 무참히 깨졌습니다. 재앙은 창조의 역행이었지만, 동시에 창조 세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냈습니다. 마침내 그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셨습니다(51). 이것은 재앙의 절정이었고, 이 재앙을 근거로 유월절이 제정되었고(출 12장),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핵심이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인도와 소유의 분배(52-55)

 

시인이 일곱 가지 재앙을 묘사한 목적은 애굽 심판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그가 자기 백성을 양처럼 인도해내시고, 광야에서 가축 떼처럼 인도하셨다고 노래합니다(52).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목자처럼 보호하시고 안전하게 이끄셔서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구원받았지만, 그들의 원수들을 바다가 덮어버렸습니다(53; 출 14:24-31). 그는 그의 거룩한 ‘영토’(게불)로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곧 그의 오른손으로 획득하신 산입니다(54). 거룩한 영토, 곧 이것과 평행하는 산은 시대산일까요, 시온산일까요? 둘 중 하나라기보다는 거룩한 영토(경계)와 평행하기 때문에 약속의 땅 전체를 일컫습니다(참조, 출 15:17; 사 11:9). 왜냐하면 곧바로 시인이 하나님께서 나라들을 그들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셔서 이스라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서 살게 하셨다고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55). 이렇게 시인은 오래전 여호수아가 장로들과 함께 정복한 땅을 지파별로 분배했던 때를 회고합니다(수 14-21장).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11절 참조).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평생 그 은혜를 찬송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 더해 매일의 삶에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혹여 우리의 마음이 그 은혜를 잊고 세상 것에 붙들려 있지는 않은지 다시금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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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8-02)

 


은혜와 반역의 역사를 기억하라

시편 78편 12-33절


 

우리 조상들이 조선왕조실록을 꼼꼼히 기록한 이유도, 후대인 우리들에게 왕조의 모든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국가가 나아갈 방향과 각 개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온고이지신”이라는 말처럼, 옛 것을 알고 새것을 알아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것이 구시대적이라 생각해서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과거를 거울로 삼아 미래를 계획할 수가 있습니다.

 

  • 시인은 지나간 역사 속에서 반항했던 이스라엘과 그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활동들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충분한 먹거리로 필요를 채우시고, 기적을 행하셨지만 먹고 마시는 문제로 하나님을 불신한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시인은 고발하듯 읊조립니다. 결국 조상들의 탐욕과 불신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부르는 원인이 됩니다.

 

옛적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12-16)

이스라엘 백성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배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자들을 즉시 벌하시지는 않지만, 만족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결국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12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그들의 조상들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13그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그들을 지나가게 하셨으며 14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으며 15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16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12-16)

 

시인은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상기합니다. 옛적에 하나님께서 조상들 눈앞에서 ‘기이한 일’(펠레), 곧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일은 애굽 땅에 있는 소안 들판에서 있었다(12)고 합니다. 소안 지역을 칠십인역에서 ‘타니스’로 번역했는데, 이곳은 나일 델타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열 재앙(출 7-12장)을 염두에 두고 소안을 언급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기이한 일’은 열 재앙을 한 덩어리의 큰 사건으로 취급한 시인의 의도적인 어휘 선택일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자자손손 전해야 할 모범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바다를 가르시고 물을 둑처럼 서게 하시고, 그들 곧 조상들이 지나가게 하셨습니다(13; 출 14:16;15:8). 이 사건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성경 저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언급됩니다(참조, 수 3:13,16;4:23;느 9:11;사 63:12).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14). 낮과 밤은 한 쌍이 되어 하루 종일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그려보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름과 불빛은 한 쌍으로 묶여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출 13:21; 14:20;민 10:34; 느 9:12; 욥 37:11,15; 시 105:39; 겔 32:7).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낮의 뜨거운 열기와 밤의 추위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안전하게 보호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다(15절). “매우 깊은 곳”(테호모트)은 원시의 깊은 바다(창 1:2; 7:11; 출 15:5)이며 심연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강조하려는 시인의 의도가 매우 강하게 드러난 과장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바위에서 시냇물이 흐르게 하시고, 강물처럼 물이 흐르게 하셨습니다(16). 물이 부족한 광야에서 바위틈 사이로 솟아난 ‘물’(마임)은 유프라테스 강이나 티그리스 강 또는 나일 강에 붙이는 ‘강물’(나하로트) 같습니다. 범람하는 강물처럼 바위 사이에서 분출하는 물은 출애굽기(17:1-6)와 민수기(20:10-13)에 기록된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오래전 목말라 물을 찾으며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조상들의 반역과 하나님의 분노(17-22)

욕심은 마음 바닥에 깨진 구멍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으로도 욕심이 가득한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이전에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앞으로 이끌어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오늘 부어 주신 은혜를 붙잡고 주님과 하나 되는 일에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17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18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19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20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21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셨으며 야곱에게 불 같이 노하셨고 또한 이스라엘에게 진노가 불타 올랐으니 22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17-22)

 

그러나 그들은 계속 하나님께 범죄하고,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엘룐)를 배반했습니다(17). 시인은 하나님의 기이한 은총을 맛본 사람들의 반역을 고발합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지속적으로 범죄한 사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평행하는 둘째 소절이 제시하듯, 물 없는 건조한 땅에서 가장 높으신 분을 향해 대항하거나 완고한 태도를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배반했다’는 표현은 반감을 갖거나 고집스럽고 완고하게 구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시험했고,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먹거리를 요구했습니다(18). 놀랍게도 시인은 부사구 ‘자기들 마음으로’(빌바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자기들 욕망을 위해’(레나프샵)를 나란히 평행시켜 동의적인 의미로 배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을 조율하지 않고 자기들 ‘입맛’(네페쉬), 즉 ‘욕구’대로만 살았습니다. 먹고자 하는 욕구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제한받지 않고 절제되지 않는 욕구나 식욕은 탐욕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엘로힘)께 대적하며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엘)이 광야에서 식탁을차리실 수 있을까?’(19) 이는 조상들이 보고 경험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들을 신속하게 잊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후 그들은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그 물이 넘쳤지만, 그가 어찌 자기 백성에게 고기도 준비하실까?’(20)라고 말했습니다. 19-20절은 의도적으로 조롱하려는 의도가 내재된 표현입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범죄했다’(17)는 시인의 고발은 죄의 성격과 습성, 반역적인 망각의 병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꼬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셨습니다. 야곱에게, 곧 이스라엘에게 불같이 노하셨다고 묘사됩니다(21).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며 “노하셨으며 … 불같이 노하셨고 … 진노가 불타올랐으니”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의 구원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2). ‘믿는다’(아만)는 것은 꾸준히 신실함을 유지하는 것이며(호 12:1), 착실함이고, 머무르며 지속한다는 뜻입니다(참조. 사 7:9). ‘의지한다’ 또는 ‘신뢰한다’(바타흐)는 것은 확신에 차서(사 12:2), 의심을 품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삿 18:10). 따라서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삶의 태도이며 방향성입니다.

 

하늘 양식과 하나님의 심판(23-31)

탐욕은 불신을 낳았고, 불신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오만불손한 악행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그들의 욕심을 만족시켜주는 사환으로 전락했습니다. 광야의 망각과 배은망덕이 오늘 우리의 광야에서 재현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23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24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25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26그가 동풍을 하늘에서 일게 하시며 그의 권능으로 남풍을 인도하시고 27먼지처럼 많은 고기를 비 같이 내리시고 나는 새를 바다의 모래 같이 내리셨도다 28그가 그것들을 그들의 진중에 떨어지게 하사 그들의 거처에 두르셨으므로 29그들이 먹고 심히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다 30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여 그들의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에 31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사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23-31)

 

하나님의 심판은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 임했습니다. 풍요를 즐기고 있는 그때가 바로 심판이 임하는 때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1) 하나님께서 베푸신 풍족한 음식(23-29)

 

하나님을 향한 조상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22), 하나님께서는 위의 궁창(하늘)에게 명령하시고 하늘의 문을 여셨습니다(23). 그는 그들을 먹이시려고 그들 위에 ‘만나’(만)를 내리시고 하늘의 곡식을 주셨습니다(24; 출 16:4). ‘만나’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사입니다. 이 말은 조상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만 후)라고 했던 말에서 시작됩니다(출 16:15). 즉 ‘만나’는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표현한 말입니다. 시인은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힘센 자”의 빵을 먹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음식을 보내셨습니다(25). 하나님께서 동풍과 남풍으로 먼지처럼 많은 고기를 비처럼 내리시고, 새를 바다의 모래처럼 내리셨습니다. 이것들이 진중에 떨어지게 하셔서 심히 배부르게 하셨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넉넉히 주셨습니다(26-29). 조상들은 하나님을 시험했지만(18),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고조되는 가운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십니다(참조. 민 11장). 하나님의 역설적인 행동이 혼란스럽습니다.

 

(2) 조상들의 탐욕과 하나님의 심판(30-31)

 

그러나 ‘그들의 욕망대로’(18) 그들에게 가득 차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치셨습니다. 시인은 아직 그들의 입에 먹을 것이 있는데 ‘그들의 욕망으로부터’(믿타아바탐) 돌아서지 않았다(30)고 고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그의 심판 사이의 밀접한 연결성을 보여줍니다. 끝내 하나님의 분노가 그들을 향해 불타올랐고, 그들 중의 “강한 자”(문자적으로, ‘비대한 자들’)를 죽이셨고, 이스라엘의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들을 거꾸러뜨리셨습니다(31). 이것은 심판의 철저성을 보여주며, 또한 심판은 약한 자보다 강한 자에게 더 가혹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조상들의 지속적인 불신과 두려움(32-33)

하나님의 약속이 빨리 성취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하나님께서 성실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섭리가 늦게 이루어진다고 투덜거릴 수 없습니다.

 

32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여 그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33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32-33)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않았습니다(32; 참조. 4,11,22). 조상들의 삶에 대한 신학적인 요약은 두 마디입니다. ‘죄를 지었고, 믿지 않았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필요가 채워지지마자 끝나버렸습니다(30절 참조).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에 만족할 줄 몰랐고, 더 센 기적을 원했습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순간 신뢰는 사라집니다. 시인은 그들의 날들은 ‘순간’(헤벨)처럼 끝나고, 그들의 생애(“햇수”)는 갑작스러운 공포와 파멸에 잠식된다(33)고 일갈합니다. 그들의 인생은 실체 없는 텅 빈 공허 곧 ‘헤벨’이며, 그들의 생애조차 갑작스럽고 경악스러운 공포와 낙심뿐입니다. 끝내 하나님의 은총은 지속적인 죄와 믿음 없음 때문에 슬픈 결론으로 마무리됩니다.


출애굽과 광야 여정은 놀랍기 그지없는 기적들이 가장많이 일어난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가시적으로 풍성히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쉽게 믿을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탐욕에 있었습니다. 탐욕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었습니다. 탐욕이 가득한 심령에 믿음이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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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8-01)

 


다음 세대를 위한 권면

시편 78편 1-11절


 

교회의 침체, 그로 인해 신앙을 이어 갈 다음 세대의 부재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를 키우기 위한 프로그램, 화려한 건물, 과감한 투자 등 여러 방법들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정말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 이 시편은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재진술하는 역사적인 서사시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도록 안내하는 교훈적인 찬양입니다. 이 부분은 시 전체의 도입부로서 다양한 주제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비유와 역사의 신비한 수수께끼를 드러내고, 여호와의 기이한 행적을 잊지 않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도록 당부합니다.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과 기인한 일을 전하리라(1-4)

말씀이 없는 부흥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믿음도 생겨나기 않습니다. 믿음이 생기려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 아들이 다시 아들에게 전하는 방법으로 전수했습니다.

 

1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1-4)

 

본 시는 다윗 시대에 성소에서 제사를 주도했던 아삽이 지은 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마지막이 다윗에 대한 찬사로 끝나고, 전체 내용 중 성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 아삽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대변해 백성에게 노래로 말씀을 선포합니다.

 

(1) 내 가르침을 들어라(1-2)

 

“나의 백성이여, 내 가르침을 들어라”(1). 시인의 첫마디는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듯 백성에게 말합니다. “내 율법”(토라티)의 우선적인 뜻은 가르침, 교훈, 방향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부여하신 율법이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출애굽 2세대에게 교훈했던 것처럼 가르침의 권위를 갖고 말합니다(참조. 신 32:1). 또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16)고 말합니다. ‘내 가르침’과 ‘내 입의 말’은 동의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시인은 입을 열어 비유와 예로부터 감춰진 것들을 말하고 드러내겠다고 합니다(2). 시인이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처럼 자신의 교훈을 “비유”(마샬), 곧 ‘잠언’ 형식으로 말하고, “감추어졌던 것”(히도트), 곧 ‘수수께끼’같은 말로 쏟아내겠다는 뜻입니다(참조. 잠 1:6). 예로부터 감춰진 것들은 이전 세대로부터 전수 받은 삶의 수수께끼 같은 것들, 곧 즉각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해 말하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과 이스라엘의 죄 사이에서 반복된 신비한 은총의 역사입니다.

 

(2) 여호와의 기이한 일을 전하리라(3-4)

 

시인은 비유와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이고,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수해준 것이라고 합니다(3). 시인은 ‘내 백성’, ‘내 교훈’, ‘내 입의 말’(1), ‘내가 입을 열어 말한다’(2)와 같은 1인칭화법 사용에서 1인칭 복수형태 ‘우리’로 전환합니다. 그리고 비유와 예로부터 감춰진 것들은 시인만 아는 것이거나 획기적인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듣고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조상들이 일일이 열거하며 전수한 비유와 수수께끼는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입니다(4cd). 비범하고 놀랍다는 뜻의 ‘팔라’ 동사의 분사형태로 표현된 여호와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 곧 기이한 일들은 11절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이것은 107편에서 다섯 번 반복됩니다(107:8,15;21;24,31). 시인은 이것을 ‘우리 자손’(“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않고,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이라(4ab)고 말합니다. 흥미롭게 시인은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겠다고 밝힌 것처럼, 여호와의 ‘영광’(테힐로트)과 그의 능력과 기이한 일들을 ‘우리가 숨기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영광과 기이한 일, 곧 기적은 모세가 부른 이른바 바다의 노래와 평행합니다(출 15:11). 시인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온갖 이적들 중에서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을 자자손손 전수해야 한다는 책임성을 모든 세대에게 부여한 셈입니다. 또한 시인 자신의 교훈은 세대를 거듭하며 전수할 하나님의 기적과 관련된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과 법, 그리고 그의 기이한 일을 망각(5-11)

우스갯소리인지 모르지만, 요즘 아이들의 가장 큰 꿈은 건물주가 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조물주보다 건물주’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우스갯소리를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아이들에게서 소망이, 비전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그저 편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입니다.

 

5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6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7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8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9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10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11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5-11)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후대에 말씀을 전수하고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할 이유와 책임을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가나안을 정복했지만, 이후 세대는 전 세대를 알지 못해 각자 가기의 마음에 옳은 대로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 언약과 법을 세우신 목적(5-8)

 

시인은 더 먼 옛적 일을 회고하며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증거”(에두트), 곧 ‘경계 표지’를 맡기셨고, 율법(토라)을 이스라엘에게 부과하셨습니다(5ab). 이것을 그가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셨고, 그들의 후손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습니다(5cd). 시인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전수해야 할 교훈을 야곱에게 소급하면서 거기서 시작되고 지파별로 분화된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되새깁니다. 이스라엘에게 시내산에서 부과하신 “법도”, 곧 ‘토라’는 야곱에게 부여하신 ‘경계 표지판’ 같은 삶의 길잡이입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거행하기 전에 부여된 삶을 위한 신호 표지판은 자동적으로 전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과 가르침(토라)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만 다음 세대로 전수됩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언약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을, 삶을 위한 경계의 표지들을 자손들에게 가르치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출 10:2;13:14; 참조. 신 4:9; 6:7). 하나님의 구원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은 모든 세대의 의무입니다. 다음 세대가 알 수 있도록, 태어날 후손들도 그들의 후손을 위해 지속하여 하나하나 일러주어야 한다(6)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 “소망”(키쏠람), 곧 ‘신뢰’를 두며,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잊지 않고 그분의 명령을 준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7). 이것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맡기신 ‘경계의 표지’와 이스라엘에게 부과하신 ‘법’(토라)을 전달하며 교육하는 목적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완고한 세대요, 고집 센 세대요, 그 마음은 견고하지 않으며, 그의 심령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조상들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8). 이스라엘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가졌음에도 현재의 이스라엘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되지 못했습니다. 완고하고, 패역했고, 마음은 정직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찬양하는 대신에 이스라엘 조상들의 불신의 역사를 열거합니까? 시인은 전통 전수만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릇된 역사의식과 잘못된 전통들이 새 세대에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도”, 곧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못한 역사를 언급한 것입니다.

 

(2) 언약과 법을 준행하지 않고, 여호와의 일을 망각(9-11)

 

시인은 좀 더 구체적으로 에브라임의 불순종을 언급합니다. 시인은, 에브라임 자손이 무기를 갖추고 활 쏘는 자들이었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났다(9절)고 합니다. 에브라임은 야곱의 큰 축복을 받았던 요셉의 두 아들 중 둘째입니다. 에브라임의 후손들은 북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많았을 뿐만 아니라 용맹성으로 유명했습니다(삿 8:1-3; 12:1-6). 그러나 시인은 에브라임 후손들이 전쟁에서 물러서는 비겁함을 전합니다. 시인이 특정한 어떤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입니까? 에브라임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땅을 정복하지 못한 것입니까(삿 1장), 아니면 실로에 있던 법궤를 빼앗기고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을 말하는가(삼상 4-6장), 아니면 사마리아가 앗시리아 군대에 의해 함락된 일을 말합니까(왕하 17:7-18)?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될 수 있지만, 이것은 에브라임 지파만을 특정하기보다는 유명한 조상 이름으로 민족 전체를 언급하는 셈족 시문학의 일반적인 관행입니다.

시인은 에브라임, 곧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를 밝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고, 그의 율법에 따라 걷기를 거절했습니다(10). 언약(베리트)과 율법(토라)은 구약에서 여러 차례 평행되는 말입니다(신 29:21; 31:9,26; 스 10:3; 사 24:5; 렘 31:33; 호 8:1; 말 2:8). 율법은 언약보다 하위 개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법도”(5), 곧 ‘토라’입니다. 이것은 언약 백성으로서 살아갈 삶의 방향성을 지시하며, 언약 백성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명시한 가르침입니다. 에브라임 자손은 이 둘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행위와 그들에게 보이신 기이한 일을 잊었습니다(11). 여호와의 행하신 일이나 기이한 일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과 구원은 밀착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행동하시는 분으로 노래할 뿐만 아니라, 그 행위는 ‘기이한 일’(4, “기이한 사적”), 곧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강화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동과 기적은 그 수혜자들(언약 백성들)에 의해 잊히지 않고 기억될 때, 아름다운 전통으로 빛납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까? 자녀에게 세상의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 쏟는 노력의 몇 퍼센트를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말씀보다 세상의 지식을 전수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경고를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우리 자녀와 이웃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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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7-01)

 


하나님을 찾을 때 느끼는 아픔

시편 77편 1-20절


 

누구나 나름대로의 고민과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어떤 경우에 고통을 느끼는가는 상당히 다릅니다. 사람들은 주로 욕망이 좌절될 때, 소외감이 둘 때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시편 77편의 시인인 아삽은 전혀 다른 이유로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으며 용서를 구하면서 힘들어합니다.

 

  • 이 시는 절망의 밤을 견디는 이의 탄식과 함께 지난날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지연되고 고뇌하는 불면의 밤은 길어져 암흑의 시간 속에서 시인은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현재의 고난 속에서 지나간 시간의 은총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신비로운 발자취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노래합니다.

 

절망과 불안 속에서 부르는 노래(1-6)

하나님 앞에서는 죄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는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본 사람만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큰 고통을 느끼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혼나고 있으면서도 엄마를 찾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엄마 때문에 아프지만 엄마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2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3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4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5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6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1-6)

 

시인은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나아갑니다. 손을 들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문제는 시인이 이렇게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 절망의 밤에 부르는 노래(1-3)

 

고난 속에서 사람들은 부르짖고 하나님을 찾고 밤새워 손을 들고 도움을 구하며 밤을 보냅니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 시인들에게 친숙한 주제입니다. 시인은, 내목소리를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그가 내게 귀 기울일 것이라고(1) 합니다. ‘내 목소리’와 ‘하나님께’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할 정도로 절실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호소했던 순간을 고백합니다. ‘환난 날에 내가 여호와를 찾았고, 밤에 나의 손을 치켜들고 거두지 않았으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했도다’(2). 응답 없는 하나님 때문에 위로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겪는 고난보다 하나님의 침묵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불안은 고조되었고 근심으로 약해진 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내가 고함치고, 내가 깊이 생각하며 나의 영혼이 무기력해졌도다’(3). 시인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불안에 압도되어 불평합니다. 근심이 깊어져 평정이 사라지고 실신할 정도로 무력해졌습니다. 밤마다 여호와를 찾았지만, 거의 절망의 끝에 서 있습니다.

 

(2) 잠들지 못하는 밤의 노래(4-6)

 

시인은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밤이 괴롭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해 직접 호소합니다. ‘당신이 내 눈꺼풀을 단단히 쥐고 계시니, 나는 혼란스러워 말할 수 없습니다’(4). 그의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눈꺼풀을 꼭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불면의 고통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고통을 일일이 다 표현 못하는 답답함도 호소합니다. 또 내가 지난날들, 오랜 옛 세월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5). 시인이 말하는 옛일들은 무엇입니까? 개인적인 고통의 시간들인가, 조상들이 경험한 역사적인 사건들입니가? 지난날 들(야밈 믹크뎀)과 아주 오래된 ‘옛 세월’(쉐노트 올라밈)을 병행하여 표현한 것을 볼 때 시인은 개인적인 고통만을 반추한 것이 아니라 구원 역사를 되새기며 공동체의 현실적인 고통을 깊이 생각하는 중으로 보입니다. 그 생각 끝에서 시인은 밤에 부른 노래를 떠올리고 독백하듯 말합니다. ‘내가 그 밤에 나의 노래를 기억하고,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고 내 영혼이 찾고 찾는다’(6). 시인의 깊은 사색과 내적인 추구를 표현한 말입니다. 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영혼의 바람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지만, 지난 옛일을 떠올렸던 것(5)과 관련되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내적인 고통은 멈추지 않고, 고통스러운 질문들이 이어집니다(7-9).

 

지난 시간들을 회고하는 노래(7-9)

하나님께서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을 품으시고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지, 하나님의 용서를 쉽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는 일을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도 자신에게 당연히 용서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하는 것은 뻔뻔하고 가증한 모습입니다.

 

7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9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7-9)

 

현재 느끼는 하나님의 부재는 시인을 그분의 인애와 보호가 있었던 과거로 향하게 합니다. 시인은 당혹스러운 질문을 이어갑니다. ‘나의 주님이 영원히 버리실까? 그가 다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까?’(7) 시인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절하지 않으실까 걱정합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친구처럼 기뻐해주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은혜를 베풀다’는, 호의를 베풀거나 친구가 되거나 기뻐한다는 뜻이 포함되었습니다. 호의를 베풀지 않으실까 하는 염려와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기대가 섞여 있습니다. 이어지는 질문도 하나님께서 언약적인 사랑을 철회하실까 봐 염려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습니까? “그의 약속하심”도 끝났습니까?(8) “그의 약속하심”은 문자적으로 ‘세대를 거듭하는 말씀’입니다. 한결같고 실패하지 않는 사랑, ‘헤세드’는 세대를 거듭하지만,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약속의 말씀은 폐기되었는지 묻고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습니까? 분노 때문에 그의 긍휼을 닫으셨습니까?(9) 긍휼은 복받치는 사랑의 감정(창 43:30), 곧 깊은 동정심입니다. 시인은 분노 때문에 주께서 ‘언약적 사랑’(헤세드)을 폐기하신 것은 아닌지 알고 싶어 합니다.

 

옛적에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10-20)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단계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인생길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묵상해 가야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문제를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강한 팔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인생의 고비를 넘기는 비결입니다.

 

10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11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12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13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14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15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셀라) 16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17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18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19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20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10-20)

 

시인은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탄식과 낙담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가 환난의 상황을 바라보는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진술합니다.

 

(1)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리라(10-12)

 

시인은 어두운 밤의 탄식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회상하며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전환합니다. 1인칭 화법이 계속됩니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나의 잘못”이었다(10)고 합니다. “나의 잘못”은 ‘고통을 느끼다’, ‘후회하다’, ‘낙담하다’라는 동사의 부정사입니다. 곧이어 시인이 느꼈던 고통과 낙심과 후회는 ‘지존자의 오른손이 변화시키신 것’(10b)이라고 말합니다. 10절 시행이 모호하여 역본마다 다르지만, 시인의 슬픔과 절망도 다르게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행하심에 기인한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이 때문입니까? 시인은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합니다. 참으로, 내가 옛적 당신의 기이한 일을 기억합니다’(11). 놀라운 일은 경이롭고 경탄할 만한 비범한 일이며, 모세가 홍해를 건넌 후 부르던 노래에서 사용된 말입니다(출 15:11; 시 89:5). 또 시인은 하나님께, 내가 당신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고, 당신의 행위를 묵상하겠다고(12) 말합니다. 이는 고요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하나하나 깊이 새기겠다는 고백과 다짐입니다.

 

(2) 거룩하고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13-15)

 

시인의 ‘나’ 중심적인 어법에서 하나님을 향하고 ‘당신’으로 전환됩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의 집착을 벗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선언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도는 거룩하며, 당신처럼 위대한 신이 누구입니까?’(13) 어떤 신도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대함에 도달할 수 없음을 수사의문문으로 표현했습니다. 대담하고 단호한 고백이며 선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당신은 “기이한 일”을 행하신 그 하나님이며(참조. 11절), 당신이 당신의 힘을 민족들 중에 선포하셨다고 말합니다(14). 시인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개방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팔로 속량하신 것이 대표적인 일입니다(15). 이것은 출애굽 시대를 소환하여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강조한 것입니다.

 

(3)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16-20)

 

시인의 ‘내 목소리’(1)는 여호와의 우렛소리(18)로 응답되고, 하나님을 찾는 시인의 ‘내 손’(2)은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으로 응답 됩니다(20). 이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탄식의 언어가 공동체 전체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기억하고 노래하는 것으로 전환됨을 보여줍니다. 그 사이에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물들이 하나님 당신을 보고 당신을 두려워하고, 깊음조차 전율했고(16), 구름이 물을 쏟아내고, 궁창이 소리를 내고, 당신의 화살도 사방으로 날아다녔으며(17), 당신의 천둥소리가 회오리와 함께 번쩍였고, 번개가 세계를 진동시키고 진동시켰습니다(18). 이러한 묘사들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는 하나님의 현현입니다. 깊은 사색이 묻어난 질문들(7-9, 13)과 놀라운 하나님의 현현 사이에서 심연의 혼돈과 갈등은 더는 없습니다. 천둥, 번개, 회오리바람을 다스리시고 조종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혼돈을 질서로 바꾸신 창조와 출애굽 당시 바다에 길을 내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바다에 당신의 길이 있고, 당신의 길이 큰 바다에 있으나 당신의 발자취를 깨닫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19).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시인은 주께서 양 떼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목자 하나님의 심상과 두 명의 지도자(모세와 아론)를 통해 일하신 것을 노래합니다(20). 시인은 이렇듯 역사의 현장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현재화하여 새 믿음을 향해 전진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용서를 아무런 대가 없이 받았지만, 주님은 그것을 위해 십자가라는 큰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죄는 쉽게 짓고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이 겪으셨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용서받는 일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진정으로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주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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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6-01)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

시편 76편 1-12절


 

우리는 종종 인생의 어려움과 문제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는 분명하고,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의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능력은 무한하며, 땅 끝까지 창조하신 전능자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의뢰하는 삶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 이 시편은 시온에서 부르짖는 사자 하나님과 약자를 구원하시는 범세계적인 재판장이요, 거룩한 용사 하나님께 초점을 둔 노래입니다. 시인은 자기 백성들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 전쟁에서 승리하신 하나님, 무서운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 전쟁 무기를 부수고 세상 왕들에게 두려움이 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온에서 전쟁을 없애신 평화의 왕(1-3)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가므로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힘과 능력의 주되신 분을 붙들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참으로 숨을 곳이 있으면 좋은데 다가오는 폭풍우와 풍랑을 피하고 숨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숨을 곳이 되는 것입니다.

 

1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 2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3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셀라)(1-3)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나타났음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유다에 알려지시고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큽니다(1). 이 시행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 전체를 표현한 것입니다. 유다에서 알려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그의 이름’, 곧 그의 명성이 드높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름’은 명성과 신망을 뜻합니다(전 7:1; 겔 22:5). 시인은 하나님의 장막은 살렘에 있고,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다고 합니다(2). 장막과 처소가 평행관계에 따라 동의적인 의미입니다. 흥미롭게도 “장막”의 사전적 의미는 수풀이나 덤불로서 사자의 ‘굴’ 같은 것입니다(시 10:9; 렘 25:38). 마찬가지로 “처소”(메오나)는 동물들의 숨겨진 굴을 뜻합니다(암 3:4; 욥 37:8). 하나님을 사자로 명명하지 않지만 마치 사자처럼 묘사했습니다. 실제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자처럼 그려집니다(호 5:14;11:10; 암 1:2;3:8; 사 31:4;38:13; 렘 4:7 등). 살렘과 시온 역시 동의적인 의미가 됩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의 단축형으로 보이며, 이스라엘이 국가로 수립되기 이전에 멜기세덱 왕의 도읍지였습니다(창14:18). ‘살렘’이 평화를 뜻하기 때문에 그 뜻을 반영하면, ‘그의 굴이 평화롭게 있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시온의 처소에서 모든 것을 평정하고 평화롭게 앉은 사자처럼 앉으신 하나님을 묘사한 셈입니다. 이윽고 시인은, 거기에서 하나님이 불화살을 부수셨고,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애셨다(3)고 노래합니다. 시온의 사자 하나님께서 전쟁터로 진격하셔서 전쟁의 모든 무기를 무력화시킨 장면입니다. 전쟁의 무기들을 부수고 전쟁을 없앤다는 말은 본래 히브리 시행에서 첫 소절에서 한 번만 사용되었지만, 둘째 소절에도 적용됩니다(동사의 이중의무). 깨트리고 쪼개고 부수고 꺾는다는 뜻의 ‘샤바르’ 동사의 강조형태(쉽베르)로 쓰였습니다. 이는 전쟁 무기들이 산산이 부서져 폐기된 평화로운 땅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사자 이미지로 그려진 하나님의 위엄이 전사 이미지와 결합합니다. 이것은 예언적인 종말의 희망을 암시하는 듯 들립니다(호 2:18; 미 3:3-4;사 2:4; 9:5; 겔 39:9-10; 슥 9:10).

 

용맹스러운 전사 하나님(4-6)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괴롭히던 자들의 비참한 최후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 지혜의 삶입니다.

 

4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5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6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4-6)

 

시인은 하나님을 용맹스럽고 영광스러운 전사처럼 빛나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당신은 사냥감 있는 산에서 위엄 있게 빛납니다’(4). “약탈한 산에서”라는 말보다 사냥감이나 먹잇감 있는 산으로 읽는 것이 문맥상 더 자연스럽습니다. “약탈한”(타렙)으로 번역된 말은 본래 야생동물의 ‘먹이’를 뜻합니다(민 23:24). 2절에서 하나님 처소를 사자 굴처럼 묘사했듯 같은 이미지가 활용되었습니다. 이는 먹잇감이 풍부한 용맹스러운 사자의 위엄과 여유로움보다 더 빛나는 하나님을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장엄하고 번쩍이는 광채를 지닌 하나님의 승리를 말하기 위해 하나님의 권능에 놀라고 잠에 빠진 자들을 언급합니다. 마음이 강한 자들도 빼앗기고, 잠에 빠져들며, 힘센 모든 자들은 힘을 얻지 못합니다(5). 마음이 강한 자들과 힘 센 모든 자들은 동의적인 의미입니다. 용감하고 ‘힘센 전사들’(“장사들”; ‘용감한 군인들’[새번역]), 그들이 잠에 빠진다(나무 쉐나탐)는 말은 힘센 전사들이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무력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의 잠’이 죽음을 뜻하는 ‘영원한 잠’(새번역)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5절 시행에서 쓰인 ‘잠’이 구약 다른 곳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영원한 잠이 아니라 일상적인 잠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참조. 창 28:16; 시 127:2). 따라서 뛰어난 전사이신 하나님 앞에서 힘 자랑 못하고 무력해진 전사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후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말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당신의 꾸짖음으로 전차와 말이 깊이 잠듭니다’(6). 전사들이 힘을 전혀 쓰지 못하는 것처럼, 전사들의 용맹성과 짝을 이루는 말과 전차도 깊은 잠에 빠진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분사형태로 쓰인 ‘깊은 잠’(니르담)은 죽음이 아니라 자각하지 못하는 깊은 숙면 상태를 묘사한 흥미로운 표현입니다(삿 4:21). 시인은 독특한 방식으로 뛰어난 전사로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판결자 하나님(7-9)

마지막 심판의 날이 이르면 하나님을 거르려 불순종하던 모든 악인들은 두려움이 떨게 됩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의 산헤립 군대를 진멸시키신 것처럼 악인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일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7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8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9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7-9)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고백합니다. ‘당신은 두려운 분이니, 당신이 분노하실 때 누가 당신 앞에 서겠습니까?’(7) 하나님의 분노를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로 번역된 말은, ‘두려워하다’(야레) 동사의 수동분사형태입니다. 이 두려움은 폭력적인 행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과 위엄에 압도된 상태와 관련됩니다. 시인은 ‘당신’은 두려운 분이라고 반복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두려운 분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또 두려운 분의 분노 앞에서 숨죽이며 고요해진 땅에 대해 하나님께 말합니다. ‘당신이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니 땅은 두려워 잠잠했습니다’(8). 두려우신 분 앞에서 땅은 두려워했고, 두려움은 아무 동요도 없는 고요한 상태가 됩니다. 놀랍게도 두려움 때문에 평화의 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참조. 수 11:23). 이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일어나실 때, 땅의 모든 가난한 자를 구원하실 때입니다(9). “땅의 모든 온유한 자”는 정확히 ‘땅의 모든 가난한 자’입니다. 낮은 자, 비참한 자입니다. 이 땅이 불의로 가득할 때, 가난한 자들은 위축되고 억압당하며 가진 것까지 빼앗기기 쉽지만, 하늘의 심판자가 일어나셔서 판결하실 때, 낮은 자들, 곧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자들이 구원받습니다. 한마디로, ‘심판을 위한’ 시간은 동시에 ‘구원을 위한’ 시간입니다. 이 땅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정의로운 심판이 있기를 절규합니다. 이에 응답하듯 심판과 구원의 시간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시간입니다.

 

세상을 떨게 하시는 하나님(10-12)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통찰력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 앞에 있는 어려움들을 헤쳐 나가지만, 악한 자들은 이것을 빼앗겨 버리므로 환난이나 어려움의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떠라서 우리는 여기서 명석하고도 기발한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려고 하는 자의 눈을 어두워지게 하여 그들의 지식을 빼앗아 버리는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10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11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12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10-12)

 

매우 난해한 말이 이어집니다. ‘실로 사람의 노여움(분노)이 당신을 찬양하게 할 것이며, 남은 분노를 당신이 묶어버릴 것입니다’(10). 사람의 분노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든다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인류의 격분을 잠재우시고, 반역의 의지를 제압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판결 앞에서 가난하고 하나님 앞에 겸허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아우성과 분노가 상상되는 장면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던 믿음의 고백을 마치고 “너희”로 언급한 사감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원하고 갚으라. 그의 사방에 있는 모든 자는 두려위할 자에게 예물을 드려야 한다’(11). 시인의 명형과 권면이 함께 병행됩니다. 서원하고 갚으라는 것은 직접 명령형이지만, 예물을 드려야 한다는 말은 권면형태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자에게 마땅히 감사하라고 요청한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 사방에 있는 자, 곧 여호와를 아는 자 누구든 그분께 예물을 드리라는 권면입니다. 이러한 명령형의 요청과 권면은 심판과 구원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마땅히 영광 받으실 분에게 감사의 제사로 응답하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낮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천명합니다. 그가 군주들의 호흡을 끊을 것이니, 땅의 왕들에게는 두려움이십니다(12). 시인은 “고관들”, 곧 군주들과 왕들의 목숨과 사기를 끊어버리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노래하며 하나님만이 의지할 분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할 분이며, 하나님 앞에 겸허한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 속에서 안전합니다.


시편 76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능력을 경외하며, 그분의 공의를 신뢰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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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5-01)


높이시고 낮추시는 하나님

시편 75편 1-10절


 

세상에서 높은 자리는 흔한 자리가 아닙니다. 가파른 피라미드처럼 맨 아래에는 넓고 많은 사람이 있지만, 맨 꼭대기는 아주 좁고, 한 사람이 설 수 있는 공간밖에 없습니다. 그해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그 꼭대기에 오르려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높이는 일은 위험한 일입니다.

 

  • 시인은 땅을 지탱하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신뢰하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이 전해지고 악인에 대한 심판 선언은 정의를 실현하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인은 의인들의 위풍당당한 위엄이 높여질 것을 확신합니다.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1)

하나님께서는 심판주 되신 분입니다. 악한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은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날이 가장 기대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그 날을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 정상입니다.

 

1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1)

 

시인은 예배인도자로서 회중과 함께 하나님 이름을 부르며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을 고백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더 정확히 ‘하나님,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고 찬양합니다’입니다. ‘찬양하다’(야다)는 감사와 찬양을 목소리로 드릴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느 11:17 참조). 더군다나 2인칭 복수 형태의 ‘우리가 찬양합니다’를 두 번 반복하여 강조하는 표현 방식은 오직 이곳에서만 발견됩니다. 시인은 찬양의 이유를 밝히듯 목소리를 이어갑니다. ‘당신의 이름이 가깝고, 사람들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전파합니다.’(1bc) 시인을 비롯해 예배자들이 경험한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또 ‘당신의 이름이 가깝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시인이 하나님의 놀라운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으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택하신 곳에 자기 이름을 두시고, 거기서 백성을 만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 12:5,11; 참조. 출 3:13-15). 따라서 주의 이름이 가깝다는 것은 예배 받으시는 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로 언급한 회중이 예배하며 하나님 이름의 현존을 실제화하는 광경 묘사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배에 참여한 이들이 함께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반복해서 하나하나 자세히 열거합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신탁(2-10)

세상의 판결은 바르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을 때나 불의한 재판관이 잘못된 판결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바르고 공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임하기를 고대할 수 있습니다.

 

2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3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4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5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6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7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8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9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10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2-10)

 

시인은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인용합니다. 정한 때가 이르면 바르게 심판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삼판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심판이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공정한 판결(2-3)

 

시인은 하나님의 신탁 말씀을 인용하여 선포합니다. ‘내가 때를 정하고, 내가 공정하게 심판할 것이다’(2). 1절과 2절의 인칭 변화(3인칭 복수 1인칭 단수) 사이에 공백이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성전 예언자를 통해 백성에게 전달된 신탁의 과정이 생략된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시 46:10; 50:7,16). 정의로운 심판이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때에 실행하신다는 약속이 포함되었습니다. 1인칭 대명사 아니를첨가하여 1인칭 동사 ‘내가 판결(심판)할 것이다’(에쉬포트)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지금은 명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때가 무르익으면 의인을 옹호하는 정의로운 심판의 시간이 도래합니다(합 2:1-4). 하나님께서는 땅과 거기에 거주하는 모든 것이 소멸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땅의 기둥을 내가 질서 있게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3). “그 모든 주민”(콜-요쉬베하)은 땅에 거주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사람만이 아니라 땅을 거주지 삼는 모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계와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임을 천명하신 것이며, 창조자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경고입니다. 또한 ‘내가 세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결정하고, 측정하고, 질서 있게 배열하신다는 뜻이며, 1인칭 동사 앞에 독립인칭대명사 ‘내가’를 배치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가 강화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과 세계의 질서를 굳건히 붙들고 계신 분입니다.

 

(2) 교만한 악인들을 향한 경고(4-5)

 

하나님께서 오만한 자들을 향해 직접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지 말라. 악인들에게는 뿔을 들어 올리지 말라고 말했다’(4). ‘내가 말했다’(아마르티)에 포함된 내용은 5절까지 이어집니다. 흥미롭게도 시편에서 ‘내가 말했다’는 표현은 대체로 기도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말입니다(시 30:6;31:14; 32:5; 38:16; 40:7,10 등). 그런데 시편에서 유일하게 이곳만 하나님께서 주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라.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라’(5) 말씀하셨습니다. 악인들에게 뿔을 들어 올리지 말라(4)는 경고는 ‘높이’ 들지 말라는 경고로 강화되고,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지 말라는 경고는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로 한층 강화됩니다. 시행의 배열은, 하나님께서 오만한 자들과 악인을 평행관계로 설정하여 동급으로 취급하고 계심을 드러냅니다. ‘뿔’은 힘, 능력, 자랑, 권력, 위엄을 상징하는 은유(18:2; 89:17,24; 92:10; 112:9; 132:17;16:1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에게 힘과 능력을 높이 쳐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엄히 경고하십니다. 오만한 자들과 악인들은 자기를 높이거나 뻣뻣하게 목을 세워 자랑하는 모든 것을 멈춰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3) 높이시고 낮추시는 재판장 하나님(6-8)

 

오만한 자들과 악인들의 행동을 멈춰야 하는 이유가 시인의 언어로 설명됩니다. 6절 시행이 다소 모호하지만, 4-5절과 연결된 것으로 읽을 때 모호함이 해소됩니다. “높이는 일”은 동쪽이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않고,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않는다(6)고 합니다. ’높이다‘라는 동사가 오만하고 도도하고 불손함을 표현할 때 사용되곤 합니다. 이것은 4-5절의 악인들과 교만한 자들의 행위를 가리킵니다(참조. 시 131:1). 해가 뜨고 지는 곳이나 광야의 산들로부터, 곧 사방 모든 곳에서 높아짐의 발원지가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어디로부터 옵니까? 오직 재판장 하나님입니다. 시인은 그가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7)고 말합니다. 시인은 모든 주권을 가지신 창조자 하나님을(3) 재판장으로 고백합니다(시 7:11;9:4;50:6).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일찍이 한나의 입에서 처음 고백된 이후로(삼상 2:7), 구약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삼하 22:28; 시 18:27; 138:6; 사 2:11,17; 10:33; 겔 21:26). 이처럼 시인은 신앙공동체가 공유했던 고백을 반복하며 스스로 높이는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이어지는 8절도 모호합니다. “주님은 거픔이 이는 잔을 들고 계신다. 잔 가득히 진노의 향료가 섞여 있다. 하나님이 이 잔에서 따라 주시면, 이 땅의 악인은 모두 받아 마시고, 그 찌끼까지도 핥아야 한다”(새번역). 한마디로 여호와 손에 들려진 잔에 가득한 포도주는 파도가 거품을 만들 듯 거품으로 일렁입니다. 예언서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술잔으로 표현한 것처럼(렘 25:15), 악인이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음을 표현한 것입니다(시 60:3; 사 51:17; 렘 25:15,28;49:12;51:7). 반대로 잔은 하나님의 은총을 표현합니다(시 23:6; 116:13). 이 때문에 축복의 잔에 악인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심판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4)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하리라(9-10)

 

시인은 악인과 오만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확신하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마무리합니다. ‘나는 영원히 선포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9). 시인은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하나님올 중단 없이 큰소리로 외쳐 말할 것을 다짐합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판결이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인은 여호와를 ‘야곱의 하나님’(시 20:1;46:7,11; 76:6 등)으로 부르며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노래할 것이라 맹세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악인들의 모든 뿔, 곧 악인들의 능력과 권세를 잃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반면,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릴 것이라고 노래합니다(10). 그러면 누가 이것을 실행하십니까? 문자적으로 ‘내가 조각낼 것이다’(아갇데아)라는 말이기 때문에 정확히 10절은 2-5절 처럼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한 셈입니다. 또한 의인(차디크)은 단수형이고, 악인들(레샤임)은 복수형입니다. 이 때문에 의인을 메시아로 해석하긴 하지만, 의인의 소수성과 악인의 다수성을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잔과 산산조각 부서질 악인의 ‘뿔’ 이미지와 위풍당당할 의인이 대조되어, 반전을 기획하시고 공정하게 재판하실 하나님이 찬미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예수님의 방법을 배워야합니다. 우리가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길 때 우리를 높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한 높아짐의 비결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할 교회에서조차 세상의 방법이 횡행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세상의 뿔을 소망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의인의 뿔(10)을 기대하며 잠잠히 하나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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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4-02)

 


눈여겨보시며 기억하소서

시편 74편 12-23절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과 지혜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라는 것은 고백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에 자기 삶의 주도권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통해서, 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하면 주인 노릇을 하실까 고민하면서, 그분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뜻이 얼마나 선한지 끝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 이 시의 전반부에 묘사된 원수의 극악한 성전 훼손과 유린과 도발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서 시인은 그런 하나님께서 백성과 압제당하는 가난한 자들을 잔인한 힘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구원하시기를 강력히 요청합니다.

 

창조자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 찬양(12-17)

 

신앙은 고백으로 나타나지만, 고백만 했다고 해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만 다닌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자기 삶에 개입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그 삶이 동반될 때만 참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변화된 삶의 열매가 있을 때 신앙인 것입니다.

 

12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13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14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15주께서 바위를 쪼개어 큰 물을 내시며 주께서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나이다 16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17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12-17)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시인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바벨론으로 끌려온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지난날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되짚어 보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 왕이신 하나님(12)

 

무엇보다 12절은 하나님을 3인칭으로 묘사합니다. 74편 1편부터 시인은 계속 하나님을 2인칭으로 언급해 왔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주께서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를 보면, 1절에서 11절은 계속 하나님을 2인층으로 부르면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도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에서 시인은 갑작스럽게 하나님을 3인칭으로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객관적으로 묘사하여 자신의 기도가 더 설득력 있는 논리가 되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옛적부터 왕이셨다는 것입니다.

‘옛적부터’란 13절 이후에 서술되듯이 창조의 시점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권을 가진 통치자이셨고 창조 전부터 구원을 베푸신 분입니다. 히브리 원문에서 구원을 베푸신 분의 베푸시다에 해당하는 원한은 팔 동사의 분사 형태인데 히브리시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군사용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즉 12절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예로부터 왕이시기에 이제도 구원을 베풀 수 있는 분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무질서를 제압하시는 하나님(13-15)

 

하나님을 다시금 2인칭으로 13절부터 묘사합니다. 즉, 12절에서 3인칭으로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서술한 내용이 13절부터 17절에서는 2인칭으로 하나님과의 대화로 이어지면서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 17절은 2인칭 남성 단수 인칭대명사인 아타가 거듭 사용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금 기억하시도록 하나님께 요청하는 어법을 사용합니다. 12절과 13절에서 17절은 사용하는 인칭을 변화시켜 가면서 하나님이 어떠신 분인가를 계속해서 묘사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 14절은 먼저 물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물은 무질서를 상징하는 이미지입니다. 특히 물 가운데 살고 있는 용들과 리어야단은 무질서 가운데 악을 행하는 악의 화신의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물들 위에 하나님 자신의 질서를 부유하신 분입니다. 13절은 하나님께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있는 용돈의 머리를 깨뜨리셨다라고 말하며 14절 상반절은 니오 야단의 머리를 부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까지 통치하는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용들과 리오야단은 고대 근동 신화적 동물들인데 성경 기자들이 실제로 이런 동물들의 존재를 믿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당시의 백성들이 잘 알고 있는 이미지를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통제하신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14절에 하반절은 하나님께서 리어야단에 머리를 깨뜨리신 후에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다라고 말합니다. 사막이란 물이 없는 곳인데 그곳에 사는 자들이 모래 사는 리어야단을 음식으로 먹었다는 것은 결국 물을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됩니다. 13절에서 14절은 무질서의 이미지를 지닌 물과 악의 화신인 용 리어야단을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5절 역시 하나님께서 샘과 강을 쪼개셨고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물을 다스리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창조 질서를 수립하신 하나님(16-17)

 

하나님께서는 우주 질서를 수립하셨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낮이 당신 것이고, 밤도 당신 것입니다. 당신이 광명체와 해를 걸어두셨습니다.’(16)라고 노래합니다. 16절부터는 새로운 이미지를 도입하는데 역시 창조 시점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새롭게 도입되는 이미지는 빛과 광명체입니다. 13절에서 15절의 물의 이미지는 창세기 1장의 제 2일과 제 3일에 해당하는 내용인데, 이제 16절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제 4일에 하나님께서 해 달 별들의 광명체를 만드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만물을 만드시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은 하나님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신 일과 여름과 겨울 등의 계절을 만드신 일을 언급합니다. ‘땅의 경계를 정하셨다’라는 것은 제 3일의 바다와 육지를 나누신 이를 다시금 가리키고 있고,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다라는 것은 창세기 1장의 자세히 묘사되진 않으나 이 세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표현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향한 호소(18-23)

교회가 위기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도의 수가 줄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결과일 뿐입니다. 참 위기는 교회가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지 않고,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보다 세상의 약속을 기대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고 세상을 더 기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보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영광을 더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18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19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 20그 언약을 눈여겨 보소서 무릇 땅의 어두운 곳에 포악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나이다 21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22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23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18-23)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권능을 떠올리며 고통을 이겨 낸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를 정하시고 그 질서를 유지해오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합니다. 없어도 될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혜와 능력으로 질서를 만들어내십니다.

 

(1) 가난한 이들의 생명을 잊지 마소서(18-21)

 

12절과 17절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묘사했습니다. 이제 18절 이후에는 12절에서 17절의 내용을 근거로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여호와께서 시인의 공동체를 구원해 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18절은 그런 탄원의 첫 번째 내용으로 기억하소서라는 명령형 어법을 구사합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셔야 되는 내용이란 원수들이 주를 비방하고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했다라는 것인데 앞서 74편 1절에서 11절에 언급된 내용들의 요약입니다. 19절은 가난한 자를 언급함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도입합니다. 가난한 자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속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받아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자신이 가진 권리를 빼앗기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난한 자란 바로 그런 경우를 당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힘을 가진 권세자들에 의하여 억울하게 땅이나 삶의 권리들을 박탈당한 경우들을 가리킬 때도 많습니다.

19절에서 시작된 가난한 자의 이미지는 21절까지 계속됩니다. 20절은 땅의 어두운 곳에 포악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다고 말함으로써 포악한 자들이 언약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아 그들을 가난한 자로 전락시켰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1절은 하나님께서 그런 학대 받는 자 가난한 자 궁핍한 자들을 구원해 주셔야 한다고 기도합니다. 이런 19절에서 21절의 중심에 언약이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포악한 자가 가난한 자를 핍박하는 사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깨뜨려진 사이인 것입니다. 이제 13절에서 17절과 18절에서 21절을 연결해 보면 창조의 능력으로 악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은 이제 언약 공동체 안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하셔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가난한 자들의 삶의 복을 회복해 주셔야 된다라는 기도가 들여지고 있다는 맥락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를 핍박하는 포악한 자들이란 시편 74편의 문맥에서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당연히 우리는 이 내용을 1절에서 11절에 탄원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포악한 자란 예루살렘 성전에 침략하여 그 성전을 해한 원수들을 말하며 가난한 자란 그런 원수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언약을 기억하사 원수들을 물리쳐 주셔야 된다라는 기도의 흐름이 되는 것입니다.

 

(2) 당신의 대적들의 비방을 기억하소서(22-23)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3절은 하나님을 향한 그동안의 모든 단원을 정리하여 요약합니다. 22절은 하나님께 자신을 위한 변호를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능력자이심므로 악한 자들을 심판하는 분이심을 보여달라는 강력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23절은 대적들의 소리가 하나님께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항거하는 원수들이 성전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소리를 지금도 듣고 계시고 동시에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창조주이시며 언약을 기억하여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풀어주는 분이시므로 더 이상 이런 상황을 지켜보지 마시고 구원의 손길을 펴셔야 된다는 기도인 것입니다.

74편은 공동체 탄식시로 성전 이미지 창조 이미지 언약사상 등을 포괄적으로 함께 사용하여 공동체를 고난에서 건져주실 것을 강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 백성으로 74편과 같은 기도를 고난 중에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시고 언약주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따라 우리의 기도에 그분의 능력과 지혜와 언약의 사랑을 따라 응답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푸실 능력의 왕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통치자 구원자 창조자 그리고 심판자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로 나누어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합니다. 첫째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능력이고 둘째는 자연 만물을 통치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시인의 고백이 더욱더 마음에 와닿는 것은 이 시를 평안할 때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파괴되던 때에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평안할 때는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빛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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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74-01)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의 신앙

시편 74편 1-11절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두렵다고 말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침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존재입니까?

 

  • 이 시편은 극심한 고난을 겪은 공동체의 탄식 어린 기도입니다. ‘하나님 왜입니까?’라는 외침으로 시작하는 시인의 절규는 공적인 기도와 탄식으로서 이방 침입자들의 잔인한 성전 파괴와 맞물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능욕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원수들의 멸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탄원Ⅰ(1-3)

인생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문제들을 겪게 마련입니다. 사람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닥치면 대부분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신앙까지 잃어버리는 삶도 있습니다. 시편의 많은 탄식시들은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처한 시인이 지은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지 이 탄식의 부르짖음과 간구를 살펴보겠습니다.

 

1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2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3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1-3)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질문하며 탄원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옛적에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셨음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그 백성이 고통받고 성전이 파괴된 상황에서 다시 돌아와 구원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외침과 질문(1)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십니까?’(1a)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까? “영원히”는 중단 없는 지속성을 뜻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고 배제된 것처럼 느껴지는 고통이 지속되는 것을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시인의 질문은 더 깊어집니다. ‘어찌하여 당신 목장의 양 떼에게 당신의 분노를 내뿜으십니까?’(1b) ‘분노를 내뿜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당신의 코가 연기를 내뿜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이미지입니다(신 29:20; 시 18:8 등). 시인은 목자이신 하나님, 곧 목장의 주인이 양 떼를 돌봄이 마땅한데, 돌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고대 근동 문헌에는 신들이 왕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때, 목자의 호칭이 사용됩니다. 하나님도 목자로서(시 23:1; 28:9; 80:1; 창 49:24; 사 40:11; 렘 31:10; 겔 34:15), 백성은 양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시 79:13; 95:7; 100:3; 사 5:17; 49:9; 렘 50:19; 겔 34:2-23; 습 3:13).

 

(2) 공동체를 위한 탄원Ⅰ(2-3)

 

시인은 하나님께 단호히 요청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옛적에 당신이 사신 당신의 회중을/당신이 구속하셔서 당신의 소유 삼으신 민족을/당신이 거처 삼으신 시온산을’(2).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를 멈추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기억에 호소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까? 마치 모세처럼 말입니다(출 32:13). 그러고서 영원한 파멸을 향해 당신의 발걸음을 들어 올리셔서 심판하시기를 구합니다(3). 구약에서 발걸음은 정복과 관련됩니다(시 58:10; 60:12; 미 1:3-4; 사 37:25 등). 이유 절을 위한 언어학적인 표시는 없지만, 이유를 밝히듯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고발합니다(3b). 이는 시인이 성소(코데쉬), 곧 예루살렘을 짓밟은 자를 심판하시고, 주님이 다시 그곳을 거처 삼으시길 바란다는 요청입니다.

 

원수들에 의해 파괴된 성소(4-8)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 처한 어려움과 고통을 여러 차례 보여줍니다. 특히 성소가 파괴되는 사건은 그들의 신앙생활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성소는 단순한 건물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과의 교제를 상징하는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성소의 파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4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5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6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7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8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4-8)

 

시인이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원수가 성소에서 악행을 저지르고, 대적들이 주의 회중을 표적으로 삼은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거룩한 성소를 더럽히며 짓밟고, 주의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1) 원수들의 성전 파괴와 약탈(4-6)

 

시인은 원수들이 성소에서 행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시인은 ‘원수’(3)를 ‘당신의 대적들’이라고 칭하면서, 그들이 당신의 회중 가운데서 으르렁거리며, 깃발들을 세워 표시했다고 말합니다(4). “회중”은 지정된 시간이나 만남의 장소, 곧 집회 장소를 뜻하기도 합니다. 솔로몬 성전이 건축된 이후 회막은 없어졌지만, 이 단어는 축제의 장소를 가리키곤 했습니다(애 2:6; 사 33:20). 이 때문에 회중을 뜻하기보다 성전이 탈취된 상황에서 예배를 위해 회중이 모일 수 없기 때문에 장소적인 의미가 더 적합해 보입니다. 더군다나 대적자들은 탈환을 자랑하듯 깃발들을 꽂고,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면서 세상을 호령하듯 소란하게 떠들어대는 상황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침략자들은 자기들의 신을 상징하는 깃발을 성소에 두었고, 고대인들은 전쟁하며 깃발을 들었습니다(렘 4:6;51:12,27). 점령당한 이스라엘의 성소에 침략자들의 깃발이 펄럭이는 영상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들이 도끼로 빽빽한 나무숲을 찍어버리는 사람 같다(5)고 말합니다. 시인은 성소를 파괴한 대적자들을 숲을 파괴하는 무자비한 벌목꾼처럼 생각합니다. 그들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들을 찍어서 산산조각 냈습니다(6). 대적들이 성전 내부에있는 장식품들을 마구잡이로 ‘모조리’(야하드) 또는 ‘철저하게’ 부수는 폭력성과 야만성을 드러낸 묘사입니다. 그들이 성전을 완전히 폐허로 만든 셈입니다.

 

(2) 성소 방화와 주의 이름 모독(7-8)

 

파괴자들의 고발하는 목소리는 계속됩니. 시인은, 그들이 당신의 ‘성소’를 땅에 불살라버리고, 당신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혔습니다(7)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당신의 성소’와 ‘당신의 이름을 두신 곳’을 동의적인 의미로 사용하며 강조합니다. 이곳은 이미 언급한 시온(2)이며 성소(3)입니다. 주전 587년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주님의 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던 시점을 가리킵니다(왕하 25:9-10; 렘 52:13). 그러니까 땅 위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가 철저하게 더럽혀지고 유린된 그때의 그 사건을 소환한 셈입니다. 시인은 그들이 마음속으로 했던 말을, 광기에 휩싸인 폭력적인 언사를 직접 들은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모조리 제압하자!’(8) 그러고서 다시 파괴자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묘사합니다. 그들이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콜-모아데엘), 곧 ‘하나님을 만나는 모든 곳’을 불살랐습니다(8b)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회당”(모에드)은 4절에서 “회중”으로 번역된 단어와 같은 낱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적인 의미와 회중들 다를 뜻할 수 있지만, 마카비 시대, 구약과 신약 중간기 때 존재했던 회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회당”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나 회중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철저하게 실행된 물리적 파괴와 종교적 오염을 표현합니다. 곧 시인은 성소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제압하고 약탈하고 파괴하자는 노골적인 외침처럼(8a), 대적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에서 예배자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유린한 상황을 표현한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탄언Ⅱ(9-11)

우리는 모두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겪어본 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서 매우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직장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혹은 삶의 여러 문제들로 인해 낙심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이런 순간들에 우리는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왜 저를 도와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이런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9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10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비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11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주의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손을 빼내시어 그들을 멸하소서(9-11)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탄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더 이상 표적이 보이지 않으며, 예언자도 없고,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어려움이 지속될지 알 수 없다고 호소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왜 손을 사용하지 않으시는지, 왜 오른손을 품에 감추고 계시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개입과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1) 표적과 환상 없는 하나님의 침묵(9)

 

시인에게 더 큰 고통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표적들을 볼 수 없고, 예언자는 더 이상 없으며, 얼마나 오래일는지 우리 곁에 아는 자가 없습니다.’ 표적도 예언자도 아는 자도 없다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예언자의 임무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그분의 뜻을 알리는 것입니다. 또한 “표적”(오트), 곧 경이로운 징후를 보는 것도 예언자의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임재의 표시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상과 묵시가 그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삼상 3:1; 애 2:9; 젤 7:26),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느 때까지입니까?”라고 질문하며 탄식했습니다(시 13:1; 35:17; 80:4).

 

(2) 하나님의 개인을 간구함(10-11)

 

시인은 예배 처소에서 행해진 끔찍한 피해와 하나님 이름을 조롱하는 행위를 더는 견디기 어려워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오, 하나님! 언제까지 원수가 조롱합니까? 언제까지 원수가 당신의 이름을 능욕하게 두시렵니까?’(10) 이스라엘의 원수가 성전 기물을 파괴하고 불태운 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조롱과 능욕은 행동과 말을 모두 포함합니다(8). 시인의 감정은 점점 고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원수를 멸하시도록 촉구합니다. 그 방식은 질문과 명령의 형태입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손과 당신의 오른손을 거두십니까? 당신의 품에서 그들을 소멸하소서!’(11) 시인은 하나님께서 감춰진 손을 사용하셔서 원수를 철저히 파멸해주시길 요청합니다. 시인의 강력한 요청은 출애굽 당시 애굽인들을 치셨던 기억에 근거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후손들과 함께 홍해를 건넌 후 했던 말처럼(출 15:12; 참조. 사 52:10), 하나님께서 거두셨던 손으로, 감추셨던 오른손으로, 품에 숨기셨던 능력의 손으로 원수를 멸망시켜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개입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74편뿐 아니라, 시편 전체의 경첩이 될 만큼 해석자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공격한 것은 거기에 계신 분을 공격한 것이며 시온의 신성불가침을 훼손한 것이기에 사망의 영역으로 던져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재 속에 절망하면서도 길을 찾으려는 탄식입니다.


세상에는 끝이 있고 악행에는 심판이 따릅니다. 간밤의 꿈은 깨기 마련이고 악한 자의 번성은 깨지기 마련입니다. 세속적인 번영의 허황된 꿈을 버리고 꿈같이 임할 종말의 영생을 소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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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3-02)

 


마음의 반석이신 피난처인 하나님

시편 73편 17-28절


 

우리는 때로는 삶의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함을 보며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석이자 피난처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곁에 계시며,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 시인은 악인들의 번성과 영광에 대한 질투의 마음을 폭로한 후 성소에서 깨닫습니다. 성소에서의 경험이 악인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안내합니다. 시인은 갱신된 마음과 감각으로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함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 가까이에서 행복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악인의 파멸(17-20)

악한 사람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며 호화로운 삶을 살 때,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인의 형통함은 일시적일 뿐이며, 결국 그들은 파멸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국 참된 평안을 얻게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7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17-20)

 

시인은 성전에서 비로서 깨닫습니다. 악인이 잘되는 것 같고 빠른 것 같아도 결국 악인의 종말을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한낱 꿈에서 깨어나듯 그 결말은 영원한 파멸입니다. 시인은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하게 되고 찬양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1) 딜레마에 대한 마음의 변화(17)

 

악인의 형통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이 전환됩니다. 17절은 시인의 흔들렸던 마음을 바꾸는 변곡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내가 그들의 마지막을 깨닫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깨닫게 되는 악인들의 마지막 운명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밝히진 않습니다. 시인이 깨달은 장소는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시인의 생각이 전환되었습니다. 성소(미크다쉬)는 거룩한 장소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데, 흥미롭게 복수형의 연계형태로 쓰였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성소들을 언급한 것처럼 보이지만, 예루살렘 성전을 고려한다면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는 순간 새로운 통찰이 시인을 사로잡은 듯합니다.

 

(2) 악인의 파멸(18-20)

 

시인은 하나님 성소에서 깨달은 악인들의 마지막 운명을 말합니다. 시인은 다시 ‘참으로’(1절 참조)를 반복하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합니다. ‘참으로 당신이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고, 당신이 그들을 파멸에 빠지게 하셨습니다’(18). 하나님께서는 높은 데서 거만했던 악인들이(8) 미끄러져 전복되게 하셨습니다. 지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을 상징하는 ‘성소’(17)에서 시인은 새로운 전망을 내다보았습니다. 꿈결 같지만, 시인은 또 다른 현실을 봅니다. 시인도 놀라서 묻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한순간에 끔찍하게 되었는가? 그들이 갑작스러운 공포에 의해 철저하게 멸망했습니다’(19). 시인은 한순간에 (“그리 갑자기”), 갑작스러운 공포에 의해(“놀랄 정도로”) 끔찍하고 철저한 파멸을 맞이하게 된 악인들의 최후가 어리둥절합니다. 신속하고 철저한 멸망과 공포가 악인들이 맞이할 궁극의 운명입니다. 시인은 악인들의 철저한 파멸은 한낱 꿈처럼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꿈”(할롬)에서 깨는 것처럼, 나의 주님! 당신이 일으키실 때, 그들의 “형상”(렘)을 당신이 멸시할 것입니다(20). 본래 히브리 시행 자체에 모호한 측면이 있습니다. 형상과 꿈은 동의적인 의미로 풀이됩니다. “형상”(첼렘)은 ‘그림자’ 비슷하게 조형된 모습이며 실체가 아닌 ‘이미지’입니다. 새번역 성경이 잘 풀어 번역했습니다.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님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처럼 시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악인들의 번성은 단지 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의 반석이며 피난처(21-28)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방황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역시 그런 순간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을 우리의 반석과 피난처로 삼읍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우리에게 복임을 잊지 말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21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1-28)

 

악인의 잘되는 모습이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좌절감이 휩싸였던 시인은 이제 성소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자신이 늘 봉사하던 곳이지만, 그곳에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28절에서 나의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삽에게는 하나님이 정말 그의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1) 내 손을 붙드시는 하나님(21-23)

 

시인의 솔직한 언어는 참회로 이어집니다. 시인은 ‘내 마음은 쓰디쓰고, 내 콩팥이 예리하게 찔렸다’(21)고 말합니다. 내적인 아픔과 고통을 표현하면서 심장과 콩팥이 사용되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심장(또는 마음)은 지혜와 양심과 의지의 자리입니다. 콩팥은 사람의 가장 비밀스러운 기관이면서 가장 깊숙한 부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콩팥은 “양심”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또 시인은 ‘내가 어리석었고 알지 못했으며, 내가 당신 앞에 짐승 같다’(22)고 고백합니다. 한때 악인의 평안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지만(3-9), 이제 하나님 앞에서 무지를 참회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음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나는 항상 당신과 함께 있으며, 당신이 나의 오른손을 붙드십니다’(23)라고 노래합니다.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순간 주님을 향한 믿음은 더 커집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오른손을 붙드는 것’이란 표현은 신이 왕을 영광의 자리로 인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참조. 사 45:1). 이것은 또한 주님의 영원한 보호와 인도의 상징입니다(사 42:6).

 

(2)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의 힘(24-26)

 

오른손을 붙드시는 주님의 보호와 인도는 어떻게 실행하시겠습니까. 시인은 주님께, 당신의 교훈으로 당신이 인도하실 것이라고(24) 고백합니다. 교훈(에)은 충고, 조언, 권고, 계획을 포괄하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마치 지혜 선생님처럼 조언하며 계획하신 곳으로 안내하신다는 뜻입니다.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이끄실’ 것이라(24b)고 확신합니다. 영광으로 안내하시는 주님을 상상해볼 수 있는 시행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후에’가 언제일지는 모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에녹을 취해서 ‘데리고 올라가듯’(창 5:24),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려고 하실 때처럼(왕하 2:1 이하) 영광스러운 삶의 마무리를 뜻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말합니다. ‘하늘에 나를 위해 누가 있습니까. 당신 없이 나는 땅에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25). 이 땅에 사는 동안 시인에게 유일한 기쁨의 원천은 주님입니다. 악인들의 입은 오만하게 하늘과 땅에서 떠들어대지만(9), 시인이 열망하는 이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한계를 알지만, 동시에 강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내 육체와 내 마음이 쇠약해졌지만,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바위시며, 영원한 나의 분깃입니다’(26). 하늘과 땅이 한 쌍이듯(25), 몸과 마음이 한 쌍입니다. 시인은 몸이 쇠약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내면 깊은 자아와 의지마저 쇠약해지는 자신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소멸할 듯 위태한 마음에 깃든 하나님은 강인한 바위처럼 든든합니다. 무엇보다 “분깃”은 나눠진 몫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재산이나 자산의 할당된 몫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 여러 곳에서 할당된 ‘기업’(헬렉)으로 사용된 것처럼(민 18:20; 신 10:9; 수 13:7 등), 시인은 하나님을 자기만 독차지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지켜보며 좌절의 시간을 통과했지만, 든든한 바위이신 하나님께서는 시인뿐만 아니라 그를 신뢰하는 공동체 각 사람의 분깃이라는 의미가 내재 되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나의 반석(바위)이라고 고백하지만, 그 하나님은 ‘나의 분깃’이면서 ‘너의 분깃’, 궁극적으로 ‘우리의 분깃’입니다.

 

(3) 악인의 파멸과 의인의 복(27-28)

 

시인은 악인들을 향해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들이라고 고쳐 말합니다. 그 언어는 처음처럼(1)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을 멀리하는 자들은 망할 것입니다. 음행하는 모든 자는 당신 없이 소멸되었습니다’(27). 시인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를 매음하는 남자에 빗대어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음녀 같이”로 번역되었지만, 본래 히브리어 본문은 남성단수 분사 ‘매춘하는 자’(조네)입니다.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자들을 매음하는 남자에 빗대어 심각성을 강화합니다(호 4:13,15). 하나님 없는 삶은 음행하는 남자처럼 신실하지 못하여 그 끝은 파멸과 제거다. 시인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들과 반대로 하나님을 가까이했던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읊조립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가까이했고, 내게 “복”(토브)이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선하시다’(토브)라는 말로 시작한 것처럼(1), 똑같은 형용사 ‘토브’로 마무리합니다. 시인은 선함과 즐거움과 행복을 함축하는 말, ‘토브’를 사용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명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나의 주님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 삼고, 당신의 모든 일을 하나하나 전파하겠다고(28bc) 다짐합니다. ‘나의 주님’(아도나이)과 여호와를 동시에 호명한 것에 시인의 간절함이 배어 있습니다. 시인은 악인들과 오만한 자들의 평안을 보며 질문하며 질투했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지만(3), 흔들리는 시간을 통과하며 성장한 믿음은 더 두터워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얼마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 종종 하나님을 잊고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서 비로소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오른손을 붙들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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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3-01)


악인의 번영함을 보고 받은 교훈

시편 73편 1-16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삽니다. 내가 아무리 넉넉해도 더 부요한 사람 앞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도 자칫 이런 세상의 잣대로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신보다 더 낫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기 때문입니다.

 

  • 이 시는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과 악인의 형통 사이에서 마음의 고통을 억제하지 않고 쏟아내는 시인의 흔들림과 내적 투쟁을 오롯이 표현했습니다. 시인은 재난 같은 하루를 맞이하는 것 같아 악인의 평안을 질투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폭로하듯 쏟아내는 격렬하고 사색적인 언어가 족자를 압도합니다.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과 삶의 위기(1-4)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다른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유행에 민감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것을 누림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다고 불평합니다. 상대적 빈곤 의식 속에서 질투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 지금은 거치는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삶이라도 악인의 형통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1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1-4)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단지 이스라엘 혈통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정결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습니다.

 

(1)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1)

 

본 시는 ‘참으로 선하시도다!’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면서 선(善,토브)의 주체와 대상을 분명히 합니다. 그 대상은 이스라엘(1)과 마음이 깨끗한 자입니다(16).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엘로힘)을 시행 중심에 두고 이스라엘과 마음이 깨끗한 자를 평행되게 배열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과 마음이 깨끗한 자가 동의적인 개념처럼 해석되지만,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대상이 이동한 것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언약 백성이면서 언약 파트너로서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시인은 그 초점을 ‘마음’이 정결한 자, 청결하고 깨끗하고 순결한 자에게로 이동합니다. 이것은 시인이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를 개인과 동일시한 것이며 또한 개인의 운명을 이스라엘의 운명과 일치시켜 공동체적 의미로 확장한 셈입니다. 이것은 또한 중요한 신앙의 명제를 밝힌 것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73편에서 반복되는 단어이며(1,7,13,21,26) 시인의 관심사인데, 이는 인간의 양심과 의지와 지혜와 정신, 무엇보다 인간 내면의 중심을 일컫는 몸의 기관입니다. 때문에 시인은 내면의 순결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개인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토브’, 곧 선하심과 친절과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2) 그러나 악인의 형통함과 강건함(2-4)

 

그러나 시인의 신앙 명제와 시인의 고백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참으로’(1)라는 말을 덧붙였던 시인에게 하나님을 향한 확신에 균열이 일어나는 듯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했다. 나의 발걸음이 미끄러질 뻔했다’(2). 개역개정은 생략했지만 ‘그러나’(바)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과 청결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했지만, 시인에게 삶의 아찔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삶의 어떤 경험이 그의 확신을 뒤집은 것입니까? 시인은 곧바로 이유를 밝힙니다. 시인은 ‘왜냐하면’ 내가 오만한 자들을 질투했고 악인들의 평안을 보고 시샘했기 때문(3)이라고 합니다(3). 오만하거나 거만한 자들로 번역되는 말은 ‘빛나는 자들’이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평안’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악인의 ‘샬롬’, 곧 번영과 성공뿐만 아니라 부족함 없는 완전한 상태를 시샘했습니다. 시인이 잠깐 동안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악인들과 오만한 자들이 성공하고 있었고 평안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청결한 자에게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위배 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질투하다’라는 동사는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열망, 간절히 하고 싶은 마음이 내재된 말입니다(참조, 왕상 19:10). 악인들의 평안을 보며 내면에 솟구치는 열망에 시인도 아찔했던 것입니다. 시인은 고통스럽습니다. 자랑하는 오만한 자들이나 악인들은 죽을 때까지 고통이 없고 몸에 윤기가 흘렀기 때문입니다(4). “그 힘이 강건하여”라는 표현에는 몸에 기름기가 많다는 문자적인 의미에 약간의 조롱이 포함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로 짐승에게 쓴 표현이고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은 고대사회에서는 풍요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참조, 창 41:4; 겔 34:3).

 

뒤집힌 삶의 현실과 깊어지는 내적 투쟁(5-16)

우리의 마음은 참 약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의 유혹 앞에서 너무 쉽게 흔들립니다. 악이 유혹은 달콤합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보라는 뱀의 유혹은 아담과 하와에게 너무나 달콤했습니다. 이처럼 인류 최초의 유혹은 의심이었습니다.

 

5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5-16)

 

시인은 의롭게 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찾아오는 것은 형통이 아니고 고난이 죄자 인생이 허무해졌습니다. 악인의 형통이 부럽고 손해 보고 산 삶을 후회할 뻔했습니다. 시인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괴로웠지만, 악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말에 동조하여 악을 확대 재생산하지도 않았습니다.

 

(1) 재앙 없는 악인들의 삶과 교만(5-6)

 

인류의 노고가 악인들에게는 없고, 사람이 으레 당하는 것도 당하지 않습니다(5). 시인은 보편적 인류를 뜻하는 낱말 ‘에노쉬’와 ‘아담’을 사용해 인류가 대체로 직면하는 삶의 ‘노고’(아말)나 이러저러한 질병이나 아픔으로 ‘고통당하는’(강조 수동형 동사) 일들조차 악인들을 비껴가는 현실을 말합니다. 악인의 평안과 성공(4)보다 더 큰 문제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수고와 고통조차 악인들에게 닥치지 않는 현실의 비애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가 되고, 폭력은 그들에게 둘러싸는 옷이 됩니다(6). 보편적 인간이 당하는 수고로움과 고난을 겪지 않는 악인의 자만과 우쭐함이 목걸이로 치장하는 그림으로 비유됩니다. 목걸이를 목에 거는 것은 단지 장식적인 효과만이 아니라 높은 신분을 상징합니다(창 41:42). 이에 더해 외출할 때 몸을 감싸주는 의복을 입듯 폭력이 일상화된 악인들의 삶을 표현했습니다.

 

(2) 악인들의 오만(7-9)

 

그들의 눈은 살쪄서 튀어나왔고, 마음은 상상을 초월합니다(7). 몸의 기관 중에서 눈은 사물을 인식하고 느낄 때 가장 먼저 활동하는 기관입니다. 마음은 고대인들에게 양심과 의지와 지혜의 자리로서 인간 내면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몸 안팎으로 가장 중요한 기관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를 지방질로 비대해진 눈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다’(개역개정). ‘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 (새번역)라는 번역이 암시하듯, 악인들은 상상을 벗어난, 곧 제한받지 않는 터무니없는 망상에 젖습니다. 조롱하고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폭언을 즐깁니다(8). 이것은 악인들의 조롱과 악한 말, 그리고 학대하고 탄압하는 폭력적 언행을 고발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지도층 인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이 자기 지위를 이용해 사람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일에 권력을 남용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서 걸어 다닙니다(9). 시인은 하늘과 땅을 막론하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악인들의 두려움 없는 망언과 교만의 극치를 표현했습니다.

 

(2) 악인들의 신성모독적인 발언(10-12)

 

그의 백성도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셔버렸습니다(10). 문맥상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켜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새번역)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선하시다’(1)라는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알겠는가? 가장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는가?’(11)이 말을 하는 이들이 누군지 불분명합니다. 모호하지만, ‘그의 백성’은 단수형이고 악인들이 복수형이기 때문에 이 모독적인 발언은 악인들의 말입니다. 격정에 찬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보라! 이들은 악인들이다. 언제나 근심 없고 재산은 늘어만 간다’(12) ‘보라’는 불의에 대해 외치는 소리입니다. 시인은 근심도 없이 재산을 증식하는 악인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차오르는 내적 분노를 감추지 않습니다.

 

(4) 시인의 불행과 내적 투쟁(13-16)

 

‘참으로 헛되다!’ 악인이 번성하는 현실을 말한 후 첫마디입니다. ‘참으로 선하시다’(1)라고 고백했던 시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내가 내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이제 쓸모없게 되어 괴롭다. 더군다나 시인은 종일 재난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다(14)고 자기 삶을 돌아보며 탄식합니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번성하는 악인들 앞에서 처참하게 고통당한 자의 격정적인 호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향합니다. 악인들이 한 말을 내가 했더라면, 내가 당신의 아들들의 세대와 상관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5). 시인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아무 상관없는, 곧 ‘믿음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이것을 깨달으려고 깊이 생각했지만, 이것이 자기 눈앞에 근심이었다고 고백합니다(16). 삶의 실상과 진실 앞에서 알려고 몸부림쳤지만, 그것마저 고통일 뿐이라는 시인의 절규와 내적 투쟁과 갈증이 오롯합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받는 것을 보면서 혼란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의심하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부러워하면 세상에 지는 겁니다. 언제나 진정한 형통이신 하나님만 바라보는 시선을 놓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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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3-02)

 


고통받는 자를 위한 왕의 사랑

 

시편 72편 12-20절


세상 왕의 악한 통치를 경험해본 사람은 의롭고 사랑이 많은 왕을 모시는 행복을 알 것입니다. 우리의 왕은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에는 구원과 감사와 평화가 깃듭니다. 그 백성인 우리가 가는 곳에 드러나야 할 은혜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나라를 통치할 때 왕과 백성은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왕은 긍휼과 정의의 재판장이 되어주며 백성은 그를 존중하고 위해서 기도합니다. 왕과 백성들의 이상적인 관계는 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기타 모든 면에서 풍요로움을 가져옵니다. 왕의 이름이 장구하리라는 약속과 그를 통해 온 민족이 복을 받는 것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됩니다.

 

왕의 공의로운 통치(12-14)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궁핍한 자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을 긍휼히 여길 뿐 아니라 손을 내밀어 구해낸다는 뜻입니다. 또 약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불의와 거짓과 악한 구조에 저항하여 그들의 생명도 나의 생명만큼 고귀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12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13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14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12-14)

 

왕의 영원하고 우주적인 통치를 기원한 시인은 다시 왕의 본연의 의무인 백성을 향한 공의로운 통치를 간구합니다. 12-14절에 소개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궁핍한 자, 도움을 못 받은 가난한 자, 압박과 강포를 당하는 자로서 2-4절에서 소개된 백성과 같은 상황에 있는 무리입니다. 실제 백성 중에는 선을 행하는 무리와 악을 행하는 무리가 있습니다(잠 29:13). 하나님의 관심은 그를 경외하는 진정한 백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에게 악을 끼친 자들이 있으면 그들을 심판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관심도 이런 자들을 신원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2-4절과 마찬가지로 왕은 공의의 재판과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심판함으로써 하나님 백성의 권리를 찾아줍니다. 이런 일에 있어 왕은 그들에 대한 긍휼과 그들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태도를 버리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우고 이유 없이 당하는 힘없는 자들은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며 그들의 생명을 구원해줍니다.

이처럼 왕은 자신이 어떤 왕이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인간 왕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이 돼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적인 왕은 온 백성의 영적 지도자, 영적 대표가 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기에 앞서 그도 먼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신 사항은 한 가지,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 제사장들의 나라와 거룩한 민족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출 19:5-6). 하나님께서 완전하고 거룩한 분이므로 그가 택한 백성들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를 바라셨습니다(레 19:2). 이 점은 왕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17:14-20의 하나님이 규정하신 왕의 규례를 보면 왕이 해야 할 평생 의무는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필사하여 그의 평생 옆에 두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고 그 율법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복을 누릴 수 있듯이, 왕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공의와 긍휼을 자신의 삶과 백성의 삶에 실천할 때 진정한 왕이 될 것이며 그의 왕국이 지속될 것입니다(왕상 9:4-9).

 

왕의 우주적 통치(15-17)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할 것이고, 그의 은혜를 입은 열방의 백성들은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찬송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축복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백성은 그에게 복을 빌어주고, 그를 통해 백성이 복을 받는 이 아름다운 관계가 오늘 우리의 삶에도 이뤄지길 기도해야 합니다.

 

15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16산 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17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15-19)

 

왕의 긍휼과 공의로운 다스림을 경험할 때 백성들은 그가 자신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하나님의 진정한 왕임을 알게 되므로 이에 마땅한 존경과 감사로 화답합니다. 이들의 마음은 왕에게 예물을 바치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송축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온 세상을 지배하는 왕에게 다시스, 스바, 시바와 같은 먼 곳 왕들과 민족들이 진귀한 예물을 바치는 것은 그들이 왕에게 굴복하고 복종한다는 표현이며 강제성도 있지만(8-11), 자국 내에서 백성이 왕에게 진귀한 보배를 바치는 것은 그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자발적인 존경과 감사의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은 그 왕을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종일 그를 축복하는 말을 쉬지 않습니다(“찬송하리로다”로 번역됨). 이와 같은 공의로운 인간 왕과 백성의 관계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와도 유사하여, 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정의와 긍휼을 베풀고 백성은 자원하여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으로 화답합니다.

시인은 왕과 백성 사이에 신뢰와 사랑이 늘어가는 것만 아니라 산과 들에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고 백성의 수가 늘어남으로써 경제, 사회 등 다방면으로 풍요와 평화를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이때 곡식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린다는(16) 표현은 들의 열매가 얼마나 풍성한지 레바논의 자랑인 백향목(사 6:13)을 비롯한 수목들이 흔들려 풍성한 소리를 내듯 한다는 의미입니다. 백성이 땅의 풀처럼 번성한다는 것은 그의 백성을 별처럼, 모래처럼 늘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상기시킵니다(창 22:17).

나라의 번영에 덧붙여 시인은 왕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될 것을 고대하며 간구합니다. 시인은 왕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시에서 ‘해’나 ‘달’(17,5,7)은 자연 세계에서 변함없이 항상 존재하는 피조물로서 영속성, 지속성, 확실성을 내포합니다. 왕의 이름의 장구함은 두 가지 함축성이 있는데, 첫째로 하나님의 축복이 이 왕과 후손에게 임함을 나타냅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성품, 능력, 가능성 등을 함축하고 있어 그 사람을 대표하는 힘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영원한 이름’으로 소개하시며 자기의 성품과 능력이 변함없음을 선언하셨고(출 3:15)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높이고 찬양함으로 응대했습니다(삼하 7:26: 시 135:13). 사람의 경우는 이름의창대함을 약속받는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창 12:3; 삼하 7:9), 특히 아브라함에게는 그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3). 이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자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의 후손 다윗은 영원한 왕국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신실한 왕으로 알려졌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구속하심으로써 영원한 구세주와 만민의 축복이 되셨습니다. 둘째, 왕의 이름의 장구함은 그의 나라가 영원무궁할 것이라는 뜻을 함축합니다. 본 시와 시편에서 언급하는 영원한 나라는 다윗 왕국으로 시작하여 종말의 메시아 왕국에서 완성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언약을 맺으시며 그와 그 후손에게 하늘의 날과 같이 영원하고 견고한 왕국, 세계에서 으뜸가는 왕국을 맹세하셨습니다(삼하 7:13,16;23:5; 시 89:3-4,28-29). 그러나 실제로는 인간 왕은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영원한 왕국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 후손의 왕국을 버리지 않겠다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표현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 우주의 왕으로 다시 보내셔서 만국을 통치하실 때 비로소 영원한 다윗 왕국이 완성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에 다윗의 왕국은 역대기 저자가 부르듯 ‘여호와의 왕국’으로서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대상 28:5; 대하 13:8;28:5;29:23: 벧후 1:11).

 

송영: 하나님의 통치 찬양(18-19)

찬양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인정하고 드러내는 일이며, 그분께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한 일을 과시하려는 마음이나 내 이름을 드러내려는 이들에겐 찬양은 공허한 울림일 뿐입니다. 하나님만 홀로 드러내는 순전한 찬양으로 영광을 드리시길 바랍니다.

 

18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19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18-19)

 

18-19절의 하나님 송영의 내용은 원래 이 시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시편 제2권의 끝을 표시하는 편집적 기능으로 이해됩니다. 시편 제1-4권까지 각 권 맨 마지막 시편의 마지막 절에 이와 유사한 하나님 송영이 나와 각 권의 마지막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시 41:13;72:18-19;89:52; 106:48). 제5권의 경우는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나는 146-150편까지가 하나님 송영으로서 시편 전체의 끝을 장식합니다.

송영의 내용은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찬송하다”(18,19)로 번역된 단어는 ‘축복하다’의 수동형으로서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보통 ‘송축하다’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홀로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란 칭호는 하나님만이 세상에서 참된 신이며 능력의 신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분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되어주신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므로 그의 이름과 영광도 영원하며 온 땅에 가득 찰 것입니다. 이름과 영광은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덧붙여 나오는 “아멘 아멘”은 백성의 찬송이며 화답입니다.

맨 마지막 문장인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19c)는 72편 이후로 다윗의 시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편의 수집과 편집 과정의 증거로 초기에 수집된 다윗 시선집의 끝을 알리는 기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홀로 놀라우신 일을 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이름과 자비로운 사랑의 통치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영광을 온 땅에 가득 채워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져 그분 이름이 높임 받으실 수 있도록 힘써 주님과 함께 일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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