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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1-02)


홍마 탄 사람과 내 뿔의 환상

스가랴 1장 7-21절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입해 들어오시는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도무지 변화가 없는 것 같아도 결국 주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시는 날이 옵니다. 그날에는 주님을 믿고 섬긴 자들에게는 복 있는 날이 되지만, 주님을 섬기기를 싫어하고 게으름을 피운 자들에게는 심판이나 재앙의 날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반드시 응답하실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스가랴 1:7-6:8에서 여러 환상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7-17절에서는 첫째 환상이 나오고, 18-21절에서는 둘째 환상이 나옵니다. 첫째 환상에서는 ‘붉은 말을 탄 자’가 여러 색의 말들과 더불어 온 땅을 두루 돌아다니며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둘째 환상에서는 네 뿔과 네 대장장이의 모습을 통해 유다와 주변 나라들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환상:붉은 말을 탄 자(7-17)

어떤 사람들은 밤에 불이 들어오는 수많은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나라에 복음의 꽃이 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교회가 교회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수의 교회와 목회자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말씀과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노력하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중성과 교회의 순결하지 못한 모습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면 철저히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7다리오 왕 제이년 열한째 달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8내가 밤에 보니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기로 9내가 말하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니 10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11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천사에게 말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 하더라 12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13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14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15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16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7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7-17)

 

이스라엘은 성전 재건이 주변 방해로 중단되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지 의심하며 나태해졌습니다. 학개 선지자의 독려로 공사는 재개되었습니다. 스가랴가 회개하라는 첫 메시지를 전한지 석 달 째 하나님께서는 8개의 환상을 통해 종말적 구원을 생생한 그림 언어로 약속 보증하십니다.

 

(1) 시대적 배경(7)

 

“다리오 왕 제이년 열한째 달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스가랴서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받은 시간에 대한 언급은 주제의 흐름이 어떻게 전환되는지를 알리는 표시어 역할을 합니다.

 

(2) 첫째 환상의 내용(8-11)

 

이 환상에서는 붉은 말을 타고 있는 ‘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여호와의 사자와의 대화를 통해 이 사람(또 다른 여호와의 사자)을 소개합니다. 또 이 사람의 행동을 말한 후에 다시 여호와의 사자와의 대화 내용이 나옵니다. 이 한 사람이 무엇을 보았는지가 이 환상의 핵심 주제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습니다. ‘화석류나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흔한 관목으로 뿌리가 깊게 내리며 겨울에도 푸름을 유지합니다. 이런 점에서 화석류나무는 생명의 재탄생(rebirth)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41:19-20과 55:13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맥락에서 이 나무가 표현되고 있습니다. 특히 성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나무이기에, 환상에서 화석류나무를 보는 것은 새로운 시작과 관련한 메시지임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8절에 ‘붉은 말을 탄 자’와 더불어 여러 색의 말이 등장하는데, 여기 등장하는 말들이 다시 6장의 환상에 등장합니다(비록 같은 색은 아니지만). 색이 상징하는 의미보다는 말들이 활기차게 온 땅을 두루 돌아다니는 모습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들이 두루 돌아다니는 것(10)은 여호와의 통치 영역이 온 세상에 두루미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여호와의 주권이 온 세상에 미친다는 메시지는 스가랴서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학개서와 마찬가지로 스가랴서는 성전 건축이 중단된 상황을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전 건축이 중단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주권에 대해 회의하고 불신하였기 때문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오고 나서 성전 재건을 시작했지만 여러 어려움을 연달아 겪고 외부 세력들의 방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신념이 스가랴서의 주요 신학적 주제로 등장한 것입니다. 말들이 온 세상을 두루 다니듯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온 세상을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11절에서 ‘붉은 말을 탄 자’는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라고 합니다. 평안하고 조용한 모습은 이스라엘 주변 강대국들이 방해받지 않고 승승장구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온 땅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불안정한 상황과 대조적입니다.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돌아와 정착하며 성전을 재건하고 과거의 모습을 회복하려 했지만, 그리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는 여호와에 대한 불신과 의구심이 편만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온 땅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화롭기만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에 대한 신학적 질문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왜 회복을 볼 수 없습니까? 오히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 불의한 나라가 평안합니까?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대답하기 시작하십니다.

 

(3) 첫째 환상의 의미(12-17)

 

7-11절이 환상의 내용을 보여주었다면, 12-17절에서는 환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여줍니다. 12절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에서 ‘언제까지’는 여호와의 긴 침묵을 한탄하는 표현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 호소하고 있습니다. 12절의 ‘칠십 년’은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서 언약 파기에 대한 징벌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벨론 포로 기간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사 23:15-17; 렘 25:11; 29:10). 그러나 고레스 칙령이 있던 주전 538년 이후 1차 포로귀환이 있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호와의 회복은 요원합니다.

13절의 여호와께서 천사에게 하신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14-15절은 환상이 보여주는 의미의 핵심에 해당합니다. ‘붉은 말을 탄 자’가 여러 색의 말들과 함께 세상을 두루 다녀 관찰한 결과,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게’(11)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해 크게 질투하실 것입니다. 자신들은 안전할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15) 여러 나라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히 진노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질투’는 결혼 관계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며, 구약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묘사해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소개하곤 했습니다(참조, 출 20:5; 겔 5:13;8:3;16:38).

16-17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질투하신 결과로 나타나게 될 구체적 양상을 묘사합니다. 학개와 스가랴 당시 주요 관심사였던 성전 건축과 관련한 메시지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집’은 여호와의 성전을 의미하지만 건물로서의 성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회복된 모습을 뜻합니다. 성전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성막이 있습니다. 이 성막은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에 이스라엘 가운데 나타나신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합니다(출 25:22; 29:44-45).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 위에 먹줄을 치시겠다고 합니다(16). 여기 ‘먹줄’(측량줄)은 파괴와 건설, 혹은 회복 모두를 상징하는 말로 성경에 쓰이고 있습니다(파괴: 왕상 21:13; 사 34:11; 애 2:8/건설 : 왕상 7:23: 대하 4:2; 겔 47:3). 16절의 성전과 예루살렘(여호와의 거주 장소를 상징) 회복에 이어, 17절에서는 ‘내 성읍’, 곧 땅의 회복을 다시 확증하고 있습니다. 땅은 언약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땅의 회복은 언약의 회복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신 28:11; 30:9).

 

둘째 환상:네 뿔과 네 대장장이(18-21)

성도가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데 방해 요인이 되는 것은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세속적 사상, 출세 지향적 가치관, 성적 유혹과 도덕적 타락 등입니다. 물론 이보다 더 다양한 요인들이 신앙생활을 저해하고 성도를 성결한 생활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듭니다. 그렇다면 마귀의 당한 뿔을 부러뜨릴 수 있는 것은 기도, 말씀, 영적 훈련, 예배의 회복일 것입니다.

 

18○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개의 뿔이 보이기로 19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이니라 20그 때에 여호와께서 대장장이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21내가 말하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그 뿔들이 유다를 흩뜨려서 사람들이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니 이 대장장이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의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흩뜨린 여러 나라의 뿔들을 떨어뜨리려 하느니라 하시더라(18-21)

 

스가랴 1장 18절에서 스가랴 선지자가 네 개의 뿔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슥 1:18). 이 뿔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라고 했습니다. 헤쳤다는 것은 흩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개의 뿔은 정치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네 개의 정치적인 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온 세계로 헤쳐 놓았다는 것입니다.

 

(1) 네 뿔의 환상(18-19)

 

7-17절의 첫 환상에서 세상의 평온함은 겉모습만 그러할 뿐임이 드러났습니다. 곧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예루살렘의 회복(1:16-17)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때, 세상의 참 평안이 찾아옵니다. 둘째 환상은 회복의 측면을 더욱 발전시켜 ‘뿔’로 상징되는 강력한 대적이 이스라엘을 괴롭힐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둘째 환상은 아울러 하나님이 세운 ‘뿔’을 상대하는 ‘대장장이’를 통해, 대적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할 것 보여줍니다. 짧은 단락이지만 각각 뿔과 대장장이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고, 그 환상의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킬 것에 대해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18절의 ‘뿔’은 뿔 있는 동물의 힘을 상징합니다. 비유적인 의미로 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신 33:17; 삼상 2:1-10; 왕하 22:11; 렘 48:25; 단 8:20-21;시 18:2; 75:10; 92:10).

 

(2) 네 대장장이의 환상(20-21)

 

숫자 넷은 구체적으로 네 나라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사방의 방향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사방의 강대국들을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무시무시한 대적을 가리킵니다(참조. 사 11:12; 렘 49:36; 겔 7:2; 37:9; 단 7:2). 여기서 ‘흩뜨렸다’는 것은 포로로 추방당했다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앗수르가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으며, 바벨론은 주전 586년 남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 포로(추방) 개념은 언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언약을 깨뜨린 결과(레 26장: 신 28장)로 임하는 언약의 저주 가운데 하나가 이 흩어짐입니다. 20절의 ‘대장장이’는 다양한 유형의 기술자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어떤 종류의 일을 하는가 보다는 ‘뿔’ 넷에 대응해 이들을 처리하는 그의 파괴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사 54:16에서 무기를 만드는 자로 대장장이를 언급한 바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속에서는 항상 핍박받고 멸시당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거하신다고 나와 있고, 스가랴 1장에서도 화석류나무 사이에 거하신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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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1-01)


깨어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라

스가랴 1장 1-6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느 시대, 어느 상황을 막론하고 죄악에서 돌이킬 것을 기다리셨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둔하고 어리석어 이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를 등한시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복 주시기 위해서 많은 권면과 훈련으로 인내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상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을 잊어버리곤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선지자를 통하여 잘못을 촉구하고 회개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 스가랴 1:1-6은 스가랴서 전체의 서론적인 역할을 합니다. 저자는 가장 중요한 주제를 먼저 제시한 후에 이 주제를 확대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전개합니다. 이스라엘 조상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현 세대를 향해 회개와 순종을 촉구합니다. 핵심 구절은 3절에 나오는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입니다.

 

시대적 배경(1)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로 가는 백성들에게 경고하십니다. 경거를 무시한 채 욕심대로 행한 사람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들은 악한 길을 떠나 돌아오기를 촉구하셨던 음성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선을 행한 자는 영생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1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1)

 

스가랴서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시기를 세 번 언급합니다(1:1; 1:7; 7:1). 이는 스가랴가 여호와에게서 받은 예언의 시기를 가리키는 동시에 스가랴서 전체의 흐름을 가늠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곧 장면이 바뀌거나 주제의 흐름이 전환되는 것을 가리키는 표시어(marker)에 해당합니다. 시간에 대한 언급을 중심으로 1:1-6과 1:7-6:15과 7:1-8:23이 구분되고, 9장 이후부터는 시간에 대한 언급과는 다른 표시어가 나옵니다. 전혀 다른 표시어는 주제의 흐름이 더 크게 바뀐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회개와 회복(2-4)

믿음의 선조들의 삶을 통해 거울삼아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악을 떠나 하나님께로 오면, 하나님께서 돌아와 함께 거하겠다고 하십니다. 죄를 범했을지라도 회개하고 돌아가면 주께서는 용서하시고 품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전 재건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2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3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2-4)

 

스가랴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성전 재건 문제를 다룹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실 것입니다. 짐승과 새와 고기뿐 아니라 사람들도 그리하실 것입니다. 이 엄중한 심판은 유다 민족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을 향해 집중적으로 선포됩니다.

 

(1) 조상들에 대한 심판(2)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이 표현이 스가랴를 통해 전달되는 첫 메시지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는 아마도 당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전달된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스가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포로 됨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스가랴 당시(주전 520년경) 이스라엘이 주전 538년 1차로 바벨론에서 돌아오고 성전 건축을 시작했으나, 내외의 어려움으로 중단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또한 국제 정치와 경제적으로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이스라엘은 더더욱 포로 됨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남유다는 왜 바벨론에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가게 됐는가?’ 다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신앙 공동체를 회복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허락했겠는가?’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 왜 성전 재건에 대한 방해가 있었는가?’ ‘과연 성전을 재건하는 게 의미가 있는 일인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무능하셔서 그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어려움에 처했고, 돌아와서도 성전 재건과 더불어 공동체 재건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조상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이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 약속과는 달리 성전과 신앙 공동체의 재건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 ‘너희’에게 있습니다.

 

(2) 회개와 회복의 메시지(3)

 

‘너희의 조상들에게’는 과거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 시점의 이스라엘에게도 이 말씀은 그대로 해당합니다. 선지자는 지금 과거 이스라엘 모습에 빗대어 현재 이스라엘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의 이 말씀(“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와 ‘너희’(현재의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첫 메시지입니다. 이후 스가랴 선지자는 이 메시지를 확장 발전시킵니다. 3절의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에서 ‘그들’은 스가라 당시의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2절에서 ‘너희 조상들’을 이야기하고, 4절에서 다시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면서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지만, 단락의 주요한 초점은 현재의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또한 이 단락의 핵심 표현은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입니다(참조, 호 6:1; 암 4:6,8,9; 말 3:7). 이 표현은 스가랴서 전체의 주제를 통제하기도 합니다. 이후에 나오는 환상이나 ‘여호와의 날’에 대한 반복적인 언급처럼 양상은 달라지지만, 이 핵심 주제는 스가랴서 전체를 통해 유지됩니다. 동일한 동사 ‘슈브’를 가지고 ‘돌아오다’와 ‘돌아가다’를 표현했지만, 이 동사는 이스라엘의 회개와 여호와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모두 전달합니다.

 

(3)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4a)

 

이전 세대가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자신들의 악한 행위에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을 물려받았지만, 그들은 결국 땅을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6절에서는 이런 비극이 이스라엘이 범한 악한 행위로 인해 심판을 받았기 때문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악한 길’과 ‘악한 행위’는 병행을 이루며 이스라엘의 악한 행위를 지적합니다.

 

(4) 순종하지 않았던 조상들(4b)

 

그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듣지 아니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하는데(“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조상들의 불순종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현 세대 이스라엘 역시 조상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5-6)

기회는 영원히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기회가 있을 때, 두려우신 하나님께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아직까지도 이방인의 가치관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그 법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5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6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느니라(5-6)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자신과 백성의 관계가 올바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착수해야할 고적인 과업은 성전 재건축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방해와 불리한 상황으로 인해 그 과업에 대한 열망은 식고 건축이 중단되었습니다.

 

(1) 조상들과 선지자들의 운명(5)

 

5절에서의 “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라는 표현은 6절의 ’내 말과 내 법도‘가 영원하며 끝까지 미치는 것과 대조됩니다. 이를 통해 조상들이나 심지어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들도 영원하지 않으며 일시적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2) 대조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6)

 

6절에서는 조상들이나 선지자들은 일시적인 존재들이지만, 여호와의 말씀과 법도(율법)는 반드시 이루어지며 그 행한 대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6절의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는 여호와 말씀대로, 곧 율법에 기록한 대로 조상들에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 의미는 6b절에서 조상들이 스스로 하는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행하셨다는 표현에서도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심판하신 근거가 그들에게 임한 여호와의 법도와 말씀이었음을 알려줍니다(여기서 ‘우리’는 조상들이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시내산 언약(레 26장)과 모압 언약(신 28장)에서 언약적인 저주와 축복을 선포하여 언약에 충실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이 언약에 따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점령과 정착보다 중요한 것은, 그 땅을 주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충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제사장 나라로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출 19:6). 현재의 이스라엘은 언약의 길을 떠난 조상들을 하나님께서 쫓아내시고 포로로 만드신 비극의 역사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 땅을 차지한 것이 끝이 아니듯이, 포로에서 돌아온 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에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의도와 뜻이 무엇인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불순종하여 벌을 받은 조상들의 행적은 오늘을 향한 경고가 됩니다. 악한 선조들의 전철을 밟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호와께 돌이켜야 할 만큼 주께로부터 떠나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복을 예배하고 계십니다. 헛된 것에서 돌이켜 어서 속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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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서론


스가랴 서론


스가랴서의 서론은 학개서의 첫 부분과 비슷합니다. 이 책의 배경은 모두 다리오 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와 학개는 같은 시대에 사역했던 선지자들이며, 동일한 사건을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서와 학개서를 함께 읽으면 두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명칭

본서의 제목은 ‘스가랴’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록하게 하신 저자의 이름을 따서 그 제목을 ‘스가랴’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스가랴는 ‘여호와를 기억하셨다’이란 뜻입니다.

 

2. 저자

본서의 저자는 제사장 잇도의 손자이며 베레갸의 아들인 스가랴입니다. 학개와는 다르게 그가 출생한 족보를 잘 소개됩니다. 그에게 하나님 말씀이 직접 임했으며(1:1,7,4:8,6:9,7:8,8:18), 스가랴 자신을 1인칭 ‘내가’로 칭한 점에서 확인됩니다(1:8,9,14,18, 2:1).

 

3. 기록 연대

본서 자체에는 정확한 기록 시기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스가랴의 활동 시기를 본서의 저작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잇도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잇도는 귀한 공동체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스가랴가 처음 말씀을 선포할 때가 다리오 왕 2년 8월(B.C.520)이고 마지막으로 말씀을 선포한 시기가 다리오 왕 4년 9월(B.C.518)입니다(1:1, 7:1). 그러므로 본 서의 기록 시기는 바사(페르시아) 포로 귀환 이후인 B.C.520-518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4. 기록 목적

스가랴서는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을 재건하며 영적 부흥을 도모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바사에서 49,897명이 귀환했는데,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큰 소망을 가지고 귀환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번제단을 만들고 예배를 드리고 귀환한 지 2년 2개월만에 성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여러 가지 방해를 받게 되었고,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중단된 건축 사역은 약 16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스가랴는 유다 백성을 고무시켜 성전 재건을 완수하도록 하려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5. 기록 배경

유다 백성이 3차에 걸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1차 포로는 B.C.605년 유다왕 여호야김 3년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2차 포로는 B.C.597년 유다왕 여호야긴 1년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3차 포로는 B.C.586년 유다왕 시드기야 11년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70년이 차자 바사왕 고레스를 감동시켜 유다 백성이 유다로 귀환해도 좋다는 조서를 내리게 합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이 3차에 걸쳐 귀환하게 됩니다. 1차 귀환은 B.C.537년 바사왕 고레스 때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도 하에 49,897명이, 2차 귀환은 B.C.458년 바사왕 아닥사스다 때 에스라의 지도하에 1,754명이, 3차 귀환은 B.C.444년 바사왕 아닥사스다 때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통계는 나와 있지 않음)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1차로 귀환한 자들이 고레스왕의 조서가 내려진지 2년만에 성전 기초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주변 민족들의 악의적인 고소를 하므로 유다 백성이 흔들리게 되고 급기야 성전 건축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중단의 이유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재건 의지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스가랴는 유다 백성에게 불신적 태도를 깨우지려 노력했고 그 후 비로소 다리오왕이 즉위하여 성전 재건을 허락하자 성전 재건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학 1:5).

 

6. 주제

본서는 성전 재건 중단으로 인해 혼돈과 분열에 빠지게 된 유다 백성을 다시금 성전을 재건하도록 격려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스가랴는 주로 미래 성전의 영광을 보이면서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도 성전을 재건할 수 있다는 확신과 용기를 줍니다. 본서의 주제는 크게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성전 재건의 중요성입니다. 스가랴는 귀환한 유다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모범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번영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그 중에서도 예배 의식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적 신앙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성전 재건을 강조한 것입니다. 둘째는 메시야를 통한 승리의 기대입니다. 스가랴는 현재의 고통과 아픔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메시야가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영원히 통치할 때가 오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메시야의 임재의 처소가 되고 메시야로 인하여 유다의 미래가 번영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여 유다 백성이 그 날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각성할 것을 촉구하게 됩니다.

 

7. 스가랴와 그리스도

스가랴는 이사야를 제외하고 그 어떤 선지자들 보다도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많이 했습니다. 본서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초림(3:8, 9:9,10, 11:11-13, 12:10, 13;1,6)과 그리스도의 재림(6:12, 14:1-21)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순(3:8), 제사장과 왕(6:13), 왕국 건설 자(9:9-10), 배신당해 팔리는 자(11:11-14), 구원자(13:9) 등으로 묘사했습니다.

 

 

8. 내용 구조

1부/ 메시야 왕국에 대한 환상과 현재의 명령

 

회개 촉구(1:1-6),

스가랴의 8가지 환상(1:7-6:8),

여호수아의 면류관(6:9-15),

금식에 대한 질문(7:1-3),

스가랴의 4가지 메시지(7:4-8:23)

 

2부/ 미래 메시야의 도래

 

배척받은 메시야(9:1-11:17)

메시야의 통치(12:1-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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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13-02)


선한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개혁하는 느헤미야

느헤미야 13장 15-31절


 

신앙 공동체는 정체성과 관계성의 균형 속에서 살아갑니다. 정체성만 강조하여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해서도 안 되고, 관계성에 치중하다가 정체성이 약화 되어서도 안 됩니다. 역사적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느헤미야 시대는 공동체의 신앙 정체성을 명확히 세워야 했습니다.

 

  • 세 번째 개혁은 안식일 준수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외곽에 사는 유대인들이 성내로 들어와 물건을 매매하는 것을 발견하고 안식일에는 모든 상거래를 금지합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혼합결혼과 관계됩니다. 느헤미야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통혼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 일에 참여한 엘리아십의 손자 ‘하나’를 추방합니다.

 

느헤미야의 안식일 개혁(15-22)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안식을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을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강력한 불신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조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안식일에 대한 준수사항을 무시하여 멸망을 자초했던 것을 기억하고 순종해 나가야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15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16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도 유다 자손에게 팔기로 17내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18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더욱 심하게 임하도록 하는도다 하고 19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갈 때에 내가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나를 따르는 종자 몇을 성문마다 세워 안식일에는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20장사꾼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한두 번 예루살렘 성 밖에서 자므로 21내가 그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후부터는 안식일에 그들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22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15-22)

 

느헤미야는 성전을 전화하고 레위인의 사역을 회복시켰습니다. 그 이후에는 안식일 준수를 위한 개혁도 진행했습니다. 이 단락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추진했던 세 번째 개혁인 유다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안식일 준수에 대한 내용을 다룹니다.

 

(1) 백성들이 안식일 계명을 어김(15-16)

 

안식일은 계명 중에 핵심적인 계명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유대 백성들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을 발견합니다(15). 안식일에 노동하거나 물건을 사고파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진정으로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안식일이 지켜야 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고 매매하는 일은 분명히 사라져야 할 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했던 맹세를 어기는 행동입니다(참조 10:31). 백성들은 안식일에 노동하고 상거래를 함으로 안식일을 한 주간의 다른 날과 동일하게 여긴 것입니다(15-16).

예컨대 그들은 술틀을 밟고, 곡식단과 포도주와 여러 가지 과일들을 지고 예루살렘에 들어와 그것들을 판매했습니다. 심지어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이 상주하며 유다 백성들과 상거래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2) 느헤미야가 지도자들을 책망함(17-18)

 

느헤미야는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립니다(15-17).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18; 참조, 예레미야 17:19-27). ‘우리와 이 성에 내린 이 모든 재앙’(18b)은 예루살렘의 파괴, 나라의 멸망과 포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매우 심각하게 여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느헤미야의 조치(19-22)

 

느헤미야는 이어서 안식일 준수를 위한 실제적인 조치를 취합니다(19-22).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안식일에 성문을 닫고 경비를 세워, 안식일에 물건들을 성안으로 들여오지 못하게 합니다(19). 느헤미야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은 성 밖에서 밤을 새웠는데, 성안의 백성들이 밤중에 몰래 물건을 사러 나올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20).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듣고 강한 어조로 꾸짖고 경고합니다(21a). 느헤미야의 경고는 즉각적으로 효력을 발휘합니다. 본문은 이후 장사꾼들이 다시 안식일에 성안에 들어오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음을 보고합니다(21b).

느헤미야는 추가적인 조치로 레위인들에게 명하여 성문을 지키도록 합니다(22a). 그리고 이전에 성전 곳간을 정화하던 때처럼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22b).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신실한 사랑과 자비(헤세드)를 베푸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개혁을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개혁되지 못한다는 것을 느헤미야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 준수’는 십일조와 더불어 느헤미야가 강조한 대표적인 율법 규정입니다. 안식일 준수에 대한 관심은 이미 유다 멸망 전후에 활동한 예언자들의 메시지에 특별히 강조되어 나타납니다(이사야 56:2; 58:13; 예레미야 17:19-27; 에스겔 20:12,20). 이어 유대인의 증표로 인식됩니다. 느헤미야가 귀환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안식일 준수를 강조한 것은 이런 배경입니다.

 

이방 여인과의 통혼을 금지함(23-31)

이방인과 결혼은 이스라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일이었습니다. 2세들이 점점 유대인의 언어를 잊어가며 결국에는 민족 정체성을 상실하며 하나님과의 소통 단절을 의미하는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혼합결혼이 혼합종교가 되고,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은 솔로몬 시대를 떠올리며 그것이 유대 사회의 존립과 직결된 얼마나 중한 죄인지 강조합니다.

 

23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24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25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26또 이르기를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이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많은 나라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나 이방 여인이 그를 범죄하게 하였나니 27너희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 28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29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 30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31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23-31)

 

느헤미야가 단행한 네 번째, 다섯 번째 개혁은 이방 여인과의 통혼을 금지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엄히 책망하고, 두어 사람은 때리고 머리털을 뽑기까지 합니다.

 

(1) 유다 사람들의 통혼과 느헤미야의 책망(23-25)

 

당시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했던 이전의 맹세(10:30)를 어기고,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자녀들이 유다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24). 동족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공동체의 연합과 일체성을 깨뜨리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문제에 단호하게 대처합니다. 그는 이 일에 관련된 백성들을 책망하고 저주할 뿐 아니라 심지어 머리털을 뽑기까지 합니다(25a). 여기에서 ‘머리털을 뽑다.’로 번역된 단어는 ‘수염을 뽑는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수염을 뽑히는 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습니다(참조, 사무엘하 10:4; 이사야 50:6).

 

(2) 솔로몬 왕의 잘못된 결혼 예시(26-27)

 

느헤미야는 그들로 하여금 다시는 이런 죄를 범치 않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게 합니다(25b). 이어서 그는 이 일의 심각성을 보여주기 위해 솔로몬 왕의 타락을 실례로 제시합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역사에서 교훈을 찾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왕이었지만, 정략결혼을 통해 맞아들인 이방 여인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했습니다(26b). 솔로몬의 타락은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결국 이스라엘이 분열되는 불행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느헤미야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행동을 ‘큰 악’이요 ‘하나님께 범죄하는 행동’으로 규정합니다(27).

‘범죄하다’로 번역한 단어는 언약적인 용어로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행동’을 가리킵니다. 느헤미야가 이방 여인과의 통혼을 ‘언약적인 범죄’로 간주했다는 것은 귀환 공동체가 처한 위기를 방증합니다. 이방 여인과의 통혼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본 것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라는 공동체의 정체성과 관계됩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그 땅의 백성’과 ‘이방 지역의 주민들’은 제의적으로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정한 이방 여인과의 결혼은 거룩함을 침해하는 행동이고, 성전을 오염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임재가 공동체로부터 떠나게 되어 민족의 멸망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3) 제사장 하나를 추방함(28)

 

느헤미야를 더욱 분노하게 한 것은 본이 되어야 할 제사장들이 이런 일에 앞장섰다는 것입니다(28).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한 명이 호론 사람 산발랏의 딸을 아내로 취한 것입니다. 산발랏은 암몬 사람 도비야와 함께 성벽 재건을 방해한 유다의 대적입니다(참조 2:10, 19; 4;1,7; 6:1-2,5,12,14). 산발랏과 도비야는 지속적으로 유다 공동체를 와해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공격이 얼마나 집요하고, 그들의 음모가 얼마나 교활한 방식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곧바로 엘리아십의 손자에게서 제사장 자격을 박탈하고 공동체에서 추방합니다(28b).

 

(4) 기도(29-31)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깁니다(29). 여기서 ‘그들’은 28절에 언급된 인물들 전체를 가리키는데, 그렇다면 할아버지 엘리아십과 아버지 요야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느헤미야가 이들을 정죄한 법적인 근거는 제사장 직분에 대한 규정입니다(레위기 21:7-14). 이 규정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자기 백성 중에서 처녀를 아내로 취해야 합니다(레위기 21:13-15).

대제사장의 혈통인 엘리아십의 손자는 이 쥬정을 지켜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것입니다. 엘리아십의 손자의 행동은 제사장 직분을 더럽힌 행동이었기에, 별도의 정결의식이 필요했습니다(30a). 그 후에야 비로소 느헤미야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직무에 복귀시킵니다(30b). 느헤미야는 끝으로 백성들에게 지시하여 번제단에 쓸 나무와 곡식의 첫 열매를 성전에 가져오도록 합니다(31a; 참조 10-13). 이것은 성전 제의와 운영에 대한 느헤미야의 관심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짤막한 기도로 회고록을 마칩니다(31b). 느헤미야 회고록에 자주 등장하는 기억 문구(remamber formula)는 사건의 종결을 표시하는 기능을 합니다(5:19; 6:14; 13:29). 느헤미야의 기도는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했던 느헤미야의 경건한 신앙을 보여즙니다. 율법(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기도)이 느헤미야 개혁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느헤미야서의 종결은 에스라처럼 열려 있는 형식(open-ended conclusion)을 취합니다. 다시 말하면, 개혁의 진행만 있고 끝은 없습니다. 이것은 귀환 공동체가 앞으로도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해나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종교개혁자의 표어처럼 개혁된 공동체(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개혁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에베소서 4:13).


철저하고 과감한 결단 없이는 결코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경계와 울타리가 명확해야 공동체의 정체성이 분명해집니다. 느헤미야의 개혁 조치는 공동체의 경계와 울타리를 명확히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진리의 경계선이 모호해진 시대에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의 진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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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13-01)


뒷걸음질 친 개혁을 바로잡은 느헤미야

느헤미야 13장 1-14절


 

‘관성의 법칙’이 있습니다. 해마다 새로운 뱐화를 다짐하지만 옛 습관으로 돌아가려는 힘입니다. 느헤미야가 1차 임기를 마치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유다 공동체는 과거의 습관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단호한 개혁 조치를 시행합니다.

 

  • 느헤미야 13장은 느헤미야의 추가적인 개혁 다섯 가지를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성벽을 재건하고 공동체 건설에 헌신했습니다. 잠시 페르시아를 다녀온 후 두 번째 개혁을 추진합니다. 첫 번째 개혁(느헤미야 5장)이 주로 경제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두 번째 개혁은 공동체 내의 다양한 문제를 다룹니다.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1-9)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문제를 보고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중단되면 언제든 이방인과 같이 되어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성경 묵상은 자신의 영혼이 살고 죽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며 결코 신앙의 장식품이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잘못되어 가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혀서 잘못됨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1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2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3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4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5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6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7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악한 일을 안지라 8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9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1-9)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재위 20년에서 32년까지 12년 동안 유다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서 활동했습니다. 12년이 지나자 느헤미야는 자신이 이전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약속한 대로(참조 2;6)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갔다가, 이후 왕의 허락을 받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6).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머문 기간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약 2-3년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 섞인 무리를 분리함(1-3)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자신의 부재 기간 중 공동체 안에 우려스러운 사건들이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사건입니다(참조, 에스라 9:2). 이에 느헤미야는 곧바로 자신의 두 번째 임기의 개혁을 추진해 나갑니다. 그 첫 번째는 귀환 공동체로부터 섞인 무리를 분리하는 일입니다(1-3).

‘그 날’(1)은 불특정한 시점을 가리키는데, 그 전 문맥의 ‘그 날’(12:44)과 관계되기보다, 13:4-7에 나와 있는 대로, 느헤미야가 다시 유다 총독으로 귀환한 이후의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 모세의 율법을 듣게 합니다. 원문은 ‘그날 백성의 귀에 모세의 책이 낭독되었다’로 되어 있어, 이 모임을 주도한 사람이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고 있지만, 정황상 느헤미야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낭독한 본문은 이방 민족과의 관계를 다루는 신명기 23:3-5로, 이 규정에 의하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신명기 문맥에서 ‘하나님의 총회’는 제의적 모임(cultic congregation)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총회에서 암몬과 모압 사람을 배제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행진을 막했기 때문입니다(민수기 22-25장). 낭독한 율법의 말씀을 듣자 그 자리에 참석한 백성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섞인 무리’를 회중으로부터 분리합니다(3).

여기에서 ‘섞인 무리’는 당시 유다인들과 함께 거주하는 주변 국가 사람들이거나 이방인과의 결혼을 통해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에스라 9:2). ‘이스라엘 가운데서 섞인 무리를 분리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마도 이방인들을 ‘거룩한 성회’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추축됩니다. 이것은 느헤미야의 관심이 귀환 공동체를 거룩한 공동체로 세우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귀환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은 당시 느헤미야에게 절박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2) 성전에서 도비야의 기물을 제거함(4-9)

 

이후 느헤미야는 본격적으로 공동체 개혁 작업에 착수합니다. 느헤미야가 발견한 또 하나의 문제는 대제사장 엘리아심의 잘못으로 인한 성전의 오염입니다(4-7). 당시 제사장 엘리아십이 친밀한 관계를 맺은 도비야를 위해 성전 안에 큰 방(곳간)을 마련해 둔 것입니다(4b,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느헤미야서에서 도비야는 암몬 사람으로 성벽 재건 공사를 방해한 대표적 인물입니다(느헤미야 2:10-19; 4:3; 6:1,12,17,19), 그렇지만 도비야는 당시 몇몇 유다 지도자들과 결혼 관계를 통해서 유대를 맺었던 것으로 보입니다(6:17-18).

느헤미야가 잠시 페르시아로 돌아간 사이 암몬 사람 도비야가 성전의 한 ‘방’에 살면서(7), 성전 ‘곳간’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한 것입니다(5). 4-5절에서 ‘방’으로 번역된 단어는 7절의 ‘방’과 달리 ‘창고’의 의미로 쓰입니다(참조. 에스라 8:29; 느헤미야 10:37-39). 이 방은 백성들이 바친 제물, 십일조, 거제물들을 저장해두는 장소, 즉 성전 곳간입니다(4-5). 아마도 도비야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 방을 쓰고 있었고, 엘리아십은 그를 통해 부당한 이득을 취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레위인에 대한 배려(십일조)(10-14)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예배가 들어서야 할 마음이나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주인 되셔서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것들이 자리하면, 도비야 같은 것, 세상 것들이 자리를 잡기 마련입니다. 도비야가 앉아 있다면 어서 비우고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에 거룩함을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10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11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12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13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으로 삼았나니 이는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14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10-14)

 

느헤미야의 두 번째 개혁은 제의 종사자의 처우 개선에 대한 것입니다. 십일조가 제대로 겉히지 않아 레위인들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흩어졌습니다. 성전 관리와 제사가 소홀해졌습니다. 느헤미야는 지도자들을 꾸짖고 십일조를 다시 수납했습니다.

 

(1) 느헤미야의 책망(10-11)

 

느헤미야는 곧바로 도비야가 어떻게 성전 곳간 안에서 거주할 수 있었는지 조사에 착수합니다(10a). 그 결과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돌아갈 십일조와 거제물들을 내지 않아 성전 곳간이 비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당연히 성전에 거주해야 할 성전 종사자들이 성전에 머물 수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레위인들과 성전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농사를 지어야만 했습니다(10b). 여기에 대해 느헤미야는 관리들(민장들)을 불러 그들이 해야 할 책임(성전 운영)을 다하지 못한 것을 꾸짖습니다(11a). 이후 백성들이 가져온 곡식, 포도주, 거름의 십일조가 다시 곳간에 채워지게 됩니다(12). 느헤미야서는 십일조에 대한 규정을 특별히 강조합니다(참조. 12:44-47).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 제의가 올바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레위인을 비롯한 제의 종사자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말라기 선지자가 선포했던 메시지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참조. 말라기 3:8-10).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백성들을 올바로 지도하지 못한 관리들의 책임을 묻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사람들입니다(참조, 느헤미야 9:38; 10:14-29,35,37,39; 특히 39b,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지도자들의 임무 태만을 책망한 후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먼저 레위인들을 불러 모아 자신들의 위치(성전의 일)로 돌아가도록 합니다(11b). 네 사람을 지명하여 백성들이 내는 십일조를 감독하도록 합니다.

 

(2) 레위인들에 대한 지원(12-14)

 

여기에서 느헤미야는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하여 투명성을 기하고자 합니다. 본문은 느헤미야가 이들을 세운 이유를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받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13b). ‘충직한’으로 번역된 단어는 신실함, 충성스러움의 의미를 지닙니다(참조, 민수기 12:7). 이들의 직무는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인 곡식과 십일조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분배하는 일입니다(13c). 끝으로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깁니다(14a). 느헤미야가 잊지 말아달라(‘도말하지 마옵소서’)고 한 ‘선한 일’은 ‘하나님께 대한 변치 않는 충성과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결국, 느헤미야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성전에 대한 관심으로, 성전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의 종들(제의 종사자들)에 대한 배려로 표현된 것입니다.


결심이 곧 변화로 자리 잡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를 바라지 않거나 과거의 습성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장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관행을 바꾸기 더욱 힘든 것은 문화의 문제이고 이해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끈기와 인내로 오래 순종할 때 변화가 자리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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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12-02)


성벽 봉헌 축제를 드린 이스라엘

느헤미야 12장 27-47절


 

느헤미야 사역의 절정입니다. 모든 성벽 재건 과정을 전부 마무리하고, 성벽 봉헌식이 거행됩니다. 고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던 때부터 시작된 길고 험난한 과정을 마무리하는 이 축제는, 그간의 피로를 풀어내고 희망의 미래를 여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모으는 한마당이었습니다.

 

  • 본문은 느헤미야가 에스라와 함께 성벽을 봉헌하는 장면으로 내러티브상 성벽 재건의 완공을 보도하는 7:1-3과 연결됩니다. 느헤미야서 본문은 성벽 봉헌을 거의 성전 봉헌에 버금가는 외식으로 소개하는데, 이 일은 고레스 칙령이 명령한 일(하나님의 집 재건)이 드디어 완성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회복된 공동체는 한마음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성벽 봉헌의 준비(27-30)

성벽 봉헌은 성전 봉헌에 이은 도 하나의 큰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전 봉헌을 완성하는 일이었습니다. 봉헌식을 위해 각처에서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자들을 예루살렘에 모았습니다. 제자장과 레위인들은 몸을 정결케 하고 백성과 성문과 성도 정결케 했습니다. 이제 이 성전을 통해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고, 침묵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것을 믿고 확신하는 찬양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기뻐할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27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28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29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아스마웨ㅅ)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30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27-30)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되자 성벽에 올라 즐겁게 봉헌식을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귀환 공동체가 이룬 과업은 성벽 재건, 거룩한 자손들의 회복, 언약 갱신, 율법에 대한 헌신, 예루살렘 성읍 안으로 거주민들을 이주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할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1) 노래하는 자들을 불러 모음(27-29)

 

바벨론 군대에 의해 주전 587년에 폐허가 된 이래 140여 년 동안 방치된 예루살렘 성읍이 재건되었으니, 귀환 공동체에게 그 감격은 매우 컸을 것입니다.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함께함으로 귀환 공동체는 놀라운 일을 이룬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봉헌식 준비 절차를 진행하는데, 이는 노래하는 자들을 불러 모으는 일과 정결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27-30). 백성들은 곳곳으로 다니며 레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예루살렘으로 데려옵니다(27a). 이는 갖가지 악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하려는 것입니다. 레위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28-29). ‘그들의 예루살렘 사방들에서 … 모여들었다’(28)는 표현은 레위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의미합니다. 당시 그들이 거주했던 지역은 느도바, 벧길갈, 게바, 아스마웻 등지로 주로 예루살렘 근처 베냐민 지파의 성읍들에 거주했습니다.

 

(2) 정결 의식(30)

 

찬양대가 구성되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봉헌식을 위한 준비로 정결 의식을 치릅니다(30). 그들은 먼저 자신의 몸을 정결하게 한 다음에, 백성, 성문, 성벽을 정결하게 합니다. 정결 의식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고 있지만, 속죄제를 드리거나 물로 씻는 방식이었을 것입니다(참조, 출애굽기 30:18,19; 레위기 8:6; 15:13; 민수기 8:6-7; 19:13,18). 성문이나 성벽을 정결케 하는 이유는 건축 도중 발생했을지 모를 오염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귀환민들이 예루살렘을 거룩한 도성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합니다.

 

성벽 밟기와 봉헌 예배(31-43)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봉헌식에서 백성이 누린 큰 기쁨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주장하셨고, 지도자 느헤미야를 감동하셨으며, 대적들의 음모에서 공동체를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쁨도 있습니다.

 

31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32그들의 뒤를 따르는 자는 호세야와 유다 지도자의 절반이요 33또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과 34유다와 베냐민과 스마야와 예레미야이며 35또 제사장들의 자손 몇 사람이 나팔을 잡았으니 요나단의 아들 스마야의 손자 맛다냐의 증손 미가야의 현손 삭굴의 오대 손 아삽의 육대 손 스가랴와 36그의 형제들인 스마야와 아사렐과 밀랄래와 길랄래와 마애와 느다넬과 유다와 하나니라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37샘문으로 전진하여 성벽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 길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38감사 찬송하는 다른 무리는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과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벽 위로 가서 화덕 망대 윗 길로 성벽 넓은 곳에 이르고 39에브라임 문 위로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멈추매 40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가 하나님의 전에 섰고 또 나와 민장의 절반도 함께 하였고 41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고 42또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으며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43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31-43)

 

성벽 봉헌식에서 백성이 누린 큰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페르시야를 감동하셨으며, 대적들의 음모에서 공동체를 지켜주셨기에 백성의 헌신과 수고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곳에 백성의 기쁨도 있습니다.

 

(1) 성벽 밟기(31-39)

 

31절부터는 시제가 1인칭으로 바뀌면서 7:5 이후 중단되었던 느헤미야 회고록으로 돌아옵니다. 성벽 봉헌식의 핵심 의식은 성벽 밟기와 봉헌 예배인데, 성벽 밟기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성별을 위한 행진’(consecration procession)의 의미로 행해졌습니다(참조, 시편 48:12-14; 68:24-27). 성벽 밟기는 백성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행렬을 지어 성벽 위로 행진하는 방식인데, 한 그룹은 오른쪽 방향으로 향하고, 또 한 그룹은 그 반대 방향으로 행진하여 성전에서 만나는 것입니다(40).

학자들에 의하면, 느헤미야 시대 성벽 위의 넓이는 거의 3미터가량으로 성인 두세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첫 번째 행렬은 오른쪽 분문을 향하여 나아가는데(31b), 행렬의 맨 앞에는 성가대가 위치합니다(31; 참조 38). 36b절에 의하면, 이 행렬의 전체 인도자는 학사 에스라입니다. 성가대 뒤를 따르는 무리는 호세아와 유다 지도자 절반입니다(32). 이어서 나팔을 든 제사장 일곱 명이 따르는데(32-35a; 참조 41), 그들은 아사랴, 에스라, 므술람, 유다, 베냐민(민야민), 스마야, 예레미야로 소개됩니다(33-34). 끝으로 스가랴와 악기를 든 여덟 명의 레위인들이 따라갑니다(35b-36a).

본문은 이들의 악기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라고 밝히면서, 이 의식이 다윗의 규례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역대기에 의하면 다윗은 성전 예배의 창시자다).

 

두 번째 행렬은 느헤미야가 인도합니다(38). 본문은 첫 번째 행렬의 인도자인 에스라를 단락의 맨 뒤(36b)에 언급함으로 에스라와 느헤미야 두 사람을 나란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서는 이 두 인물이 귀환 공동체를 거룩한 공동체로 세운 일에 동역했음을 강조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함께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것처럼,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이 함께 동역했던 것처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에스라가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두 번째 행렬도 첫 번째와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행렬의 선두에는 찬양대가 위치합니다(38a). 이어서 두 번째 행렬의 책임자인 느헤미야와 백성의 절반이 따릅니다(38b). 그 뒤로는 나팔을 든 일곱 제사장이 따르고(41), 맨 후미에는 예스라히야(지휘자)와 노래하는 여덟 명의 레위인이 위치합니다(42). 두 행렬에서 각기 일곱 명의 제사장이 나팔을 부는 것은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역대상 15:24).

 

(2) 봉헌 예배(40-43)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행진하던 두 그룹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나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43). 백성들은 하나님께 많은 예물을 드리며 즐거워합니다. 본문은 43절 한 절에만 ‘즐거움’이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언급하며 성읍 재건으로 인한 공동체의 기쁨을 강조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거룩한 기쁨입니다(43b).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헌신과 예배를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추가적인 규례:제사장과 레위인의 몫(44-47)

제사장과 레위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고 백성이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백성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섬김에 감사하여 즐거이 드렸고, 느헤미야는 날마다 그들의 쓸 것을 채워주었습니다. 율법이 정한 대로 백성이 드린 헌물을 잘 관리하고 분배하도록 사람을 세웁니다.

 

44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때문이라 45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명령을 따라 행하였으니 46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지도자가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47스룹바벨 때와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주되 그들이 성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44-47)

 

성벽 봉헌 의식에 이어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몫에 대한 추가 규정이 소개됩니다. 44a절의 ‘그 날’는 성벽 봉헌식이 끝난 이후 불특정한 시점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규례는 성벽 봉헌식이 끝나고 어느 정도 지난 시점에서 귀환 공동체가 행한 추가 조치로 보이며, 주로 백성들이 해야 할 사항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문맥에서 이 단락은 12장과 느헤미야 개혁을 다루는 13장을 연결하는 기능을 합니다. 귀환 공동체는 먼저 사람들을 세워 성전의 보고를 관리하는 일을 맡깁니다(44a).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고대 사회에서 성전은 지금의 중앙은행과 같은 기능을 했기 때문에 이곳을 경비하고 관리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임명된 관리들을 백성들은 백성들의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거두어 성전 곳간에 보관했다가 후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돌려줍니다.

본문에 이 일이 율법에 정해진 것(44b)임을 밝히면서 귀환 공동체가 철저하게 율법을 좇아 살아가려고 애씀을 보여줍니다. 백성들은 물질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섬김으로 제의 종사자들로 하여금 성전 운영에 전념하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본문은 백성들이 이것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했음을 밝힙니다(44b). 제의 종사자들은 모두 다윗과 솔로몬의 명령(규례)에 따라 성전의 임무(하나님을 섬기는 일)와 정결 의식(결례의 일)에 종사하였습니다(45b). 여기에서 다윗과 함께 솔로몬을 언급한 것은 다윗이 만든 제도와 규례를 성전 건축 이후 솔로몬이 더욱 공고히 했기 때문입니다(역대하 8:14), 역대기에 의하면, 다윗 시대부터 찬양은 성전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본문은 특별히 노래하는 자(찬양 인도자)의 조상으로 아삽을 언급하고, 그 찬양대의 기원을 다윗 때로 밝힙니다(참조. 역대상 16:4-7).

‘백성들이 성별하여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이 그것을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다’(47b)고 하는데, 이것은 십일조를 가리킵니다(참조. 민수기 18장). 이것은 귀환 공동체가 오경에 나와 있는 율법 규정(민수기 18장)대로 제의 종사자들을 섬겼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결론적으로 스룹바벨 시대와 느헤미야 시대에 귀환 공동체 내에 안정된 성전 운영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알리면서, 그 배경에 온 백성들의 헌신과 제의 종사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이 단락은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제사장 나라는 섬김의 나라입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하나님과 백성을 섬기는 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백성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물질로 섬김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도록 배려합니다. 본문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임을 보여줍니다.


성벽 봉헌식은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자리입니다. 이 축제에서 유다 백성들은 수동적 관람객이 아니라 적극적 참여자였고, 성벽 봉헌식을 통해 다양성과 통일성, 자유와 질서의 조화를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또한, 성벽 봉헌식과 같이 적극적으로 참여가 있는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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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12-01)

 


구원의 이야기를 계승하는 이스라엘

느헤미야 12장 1-26절


 

약속의 가나안 땅에 정착한 새로운 언약 백성의 명단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명단으로 마무리됩니다.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유다 백성들에게 구원 이야기를 전달해 줌으로써, 언약 공동체의 정체성을 명확히 확립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 이 단락은 제1차 귀환 때부터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에 활동했던 제의 종사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의 목록으로 각각의 가문과 이름을 소개합니다. 1-9절은 대제사장 예수아 시대의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름이고, 12-26절은 예수아의 아들 요야김 이후 시대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이름입니다. 22-23절은 이들 목록의 출처를 밝힙니다. 본문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귀환 공동체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스룹바벨부터 느헤미야 시대까지 세대 간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예수아 시대에 귀환한 제사장 가문과 레위인 명단(1-9)

제사장과 레위인의 주된 임무는 제사를 주관하고 돕는 것입니다. 제사는 신앙 공동체의 영적 건강을 판가름해주는 온도계입니다. 백성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멀어질 때, 예언자들을 통해 잘못된 예배를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1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돌아온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이러하니라 제사장들은 스라야와 예레미야와 에스라와 2아마랴와 말룩과 핫두스와 3스가냐와 르훔과 므레못과 4잇도와 긴느도이와 아비야와 5미야민과 마아댜와 빌가와 6스마야와 요야립과 여다야와 7살루와 아목과 힐기야와 여다야니 이상은 예수아 때에 제사장들과 그들의 형제의 지도자들이었느니라 8레위 사람들은 예수아와 빈누이와 갓미엘과 세레뱌와 유다와 맛다냐니 이 맛다냐는 그의 형제와 함께 찬송하는 일을 맡았고 9또 그들의 형제 박부갸와 운노는 직무를 따라 그들의 맞은편에 있으며(1-9)

 

이제 중요한 세 가지 일인 성벽 재건, 공동체 갱신, 성읍 정비가 끝났습니다. 귀환 공동체는 회복된 이스라엘로서 위상을 갖추게 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성벽 봉헌식입니다. 느헤미야서는 성벽 봉헌에 앞서 긴 목록을 제시하는데, 1-26절은 회복된 공동체의 종교 도자들의 명단입니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명단으로 스룹바벨 때 시작한 1차 귀환부터 느헤미야 시대의 3차 귀환까지 귀환하여 활동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입니다.

 

(1) 예수아 시대 제사장 가문의 명단(1-7)

 

먼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제사장 가문들의 명단이 소개되는데(1-7), 이들은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귀국했던 사람들로 소개됩니다(1a). 예수아는 1차 귀환 이후의 대제사장으로 학개, 스가랴와 함께 활동했습니다(학개 1:1; 스가랴 3:1). 따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이 들은 느헤미야 당시로부터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들입니다. 예수아 시대 활동했던 제사장들은 스라야(1b)를 시작으로 여다야(7a)까지 전체 22명입니다. 이 단락은 ‘이들이 대제사장 예수아 때 활동했던 제사장들과 그들의 형제의 지도자들’임을 언급함으로 끝납니다(7b). ‘제사장들과 그들의 형제의 지도자들’의 의미는 제사장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1차 귀환 때 돌아온 제사장들의 명단을 보도하는 에스라 2:36-39은 가문별로 제사장들의 숫자를 제시합니다(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 973명, 임멜 자손 1,052명, 바스홀 자손 1,247명, 하림 자손 1,017명). 에스라 2장과 비교해 볼 때, 느헤미야 12장 본문은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역대기 자료에 의하면, 다윗은 제사장들을 24반열로 조직하여 성전 일에 봉사하도록 했습니다(참조. 역대상 24:7-19). 본문의 제사장 명단은 22명으로 두 명의 차이가 나는데, 이것은 아마도 필사하는 과정에서 두 명이 명단에서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2) 예수아 시대 레위 사람들의 명단(8-9)

 

제사장들의 명단에 이어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레위인들의 이름이 소개되는데(8-9), 예수아, 빈누이, 갓미엘, 세레뱌, 유다, 맛다냐, 박부가 운노로 도합 여덟 명입니다. 첫 번째 귀환 때 함께한 레위인들과 그 숫자를 보도하는 에스라 2:40에 의하면, 예수아와 갓미엘이 레위인 74명을 이끌고 귀환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은 예수아와 갓미엘 외에 추가로 여섯 명을 언급합니다(빈누이, 세레뱌, 유다, 맛다냐, 박부가 운노), 그리고 이들 가운데 맛다냐는 찬송하는 일을 맡았습니다(8b). 그들의 형제 박부가와 운노는 ‘직무를 따라 그들의 맞은편에 섰다’고 하는데(9), 이는 박부갸와 운노가 맛다냐를 도와 함께 성전 음악을 담당했음을 의미합니다. 맛다냐와 박부가는 아삽의 후손으로 느헤미야 시대에 예배를 인도했던 사람들로 소개됩니다(참조. 11:17; 12:25).

 

예수아부터 얏두아까지 대제사장의 명단(10-11)

우리 공동체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선배들의 기도와 헌신과 열정이 오늘 우리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여 이루신 일들을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다. 선배들에게 감사하는 시간을 갖고, 이어 받아야 할 좋은 신앙의 전통을 확인해야 합니다.

 

10예수아는 요야김을 낳고 요야김은 엘리아십을 낳고 엘리아십은 요야다를 낳고 11요야다는 요나단을 낳고 요나단은 얏두아를 낳았느니라(10-11)

 

대제사장의 계보는 귀환 1세대인 예수아부터 시작하여 요야김-엘리 아십-요야다-요나단-얏두아로 이어집니다(10-11). 예수아는 귀환공동체의 첫 번째 대제사장이고 엘리아십은 느헤미야 시대 대제사장입니다(느헤미야 3:1). 따라서 요야김은 1차와 3차 귀환 사이, 예컨대 에스라가 귀환할 당시의 대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참조. 1Esdras 9:39-40). 11절에서 요야다에 이어서 나오는 요나단은 주전 410년경 대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 맨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얏두아는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할 당시(주전 331년) 대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유대 고대사 11, 302). 그렇다면 본문의 계보 중 일부는 느헤미야 시대 이후 대제사장들의 이름으로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요야김 시대와 그 이후 제사장과 레위인의 족장들(12-26)

레위인의 역할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는 예배 도중에 찬양과 감사를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전 창고를 지키는 일입니다. 활발한 예루살렘 예배 뒤에는 레위인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서 찬양하든, 뒤에서 창고를 지키든 오늘 우리 헌신을 통해 예배는 진행되고 공동체도 유지됩니다.

 

12요야김 때에 제사장, 족장 된 자는 스라야 족속에는 므라야요 예레미야 족속에는 하나냐요 13에스라 족속에는 므술람이요 아마랴 족속에는 여호하난이요 14말루기 족속에는 요나단이요 스바냐 족속에는 요셉이요 15하림 족속에는 아드나요 므라욧 족속에는 헬개요 16잇도 족속에는 스가랴요 긴느돈 족속에는 므술람이요 17아비야 족속에는 시그리요 미냐민 곧 모아댜 족속에는 빌대요 18빌가 족속에는 삼무아요 스마야 족속에는 여호나단이요 19요야립 족속에는 맛드내요 여다야 족속에는 웃시요 20살래 족속에는 갈래요 아목 족속에는 에벨이요 21힐기야 족속에는 하사뱌요 여다야 족속에는 느다넬이었느니라 22엘리아십과 요야다와 요하난과 얏두아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이 모두 책에 기록되었고 바사 왕 다리오 때에 제사장도 책에 기록되었고 23레위 자손의 족장들은 엘리아십의 아들 요하난 때까지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으며 24레위 족속의 지도자들은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라 그들은 그들의 형제의 맞은편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령대로 순서를 따라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고 25맛다냐와 박부갸와 오바댜와 므술람과 달몬과 악굽은 다 문지기로서 순서대로 문안의 곳간을 파수하였나니 26이상의 모든 사람들은 요사닥의 손자 예수아의 아들 요야김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 때에 있었느니라(12-26)

 

느헤미야 시대에 재건된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에 참여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이 구절에는 봉헌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제사장과 레위 가문의 지도자들과 악사, 문지기들의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1) 요야김 시대 제사장의 족장들(12-21)

 

예수아 시대의 제사장 목록(1-7)에 이어 요야김 시대 제사장들의 이름이 소개됩니다(12-21). 이들은 귀환 2세대에 활동했던 ‘제사장 족속의 족장들’입니다.

‘족장’으로 번역된 로쉬(ראש)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지파나 족속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며, ‘족속’으로 번역된 아봇은 ‘아브(אב 아버지)’의 복수형으로 ‘가문’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가문들’의 이름은 언약에 인봉한 제사장들의 목록을 제시하는 10:2-8과 유사합니다. 두드러진 차이는 본문이 여섯 명의 이름을 새로 추가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본문의 명단이 10:28의 목록을 확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2) 목록의 출처(22-23)

 

22-23절은 일종의 간기(colophone)와 같은 역할을 하며, 정보에 대한 신뢰성을 제공하고자 목록들의 출처를 밝힙니다. 그리고 그 출처는 대제사장 엘리아십, 요야다, 요하난 얏두아 때 기록된 페르시아의 공식 문서입니다(22b의 ‘책’과 23b의 ‘역대지략’). 학자들에 따라서는 22절의 요하난을 요야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요야다의 형제로 보기도 합니다. 요하난은 주전 410년 경(다리우스 2세 때) 대제사장의 이름으로 언급됩니다. 이동하던 레위인들의 이름(하레비 임 הליים)은 제사장의 이름과 함께 페르시아 제국의 왕실 일지에 기록되었습니다(22b). ‘레위 자손의 족장들’은 엘리아십의 아들(혹은 후손) 요하난 때까지 역대지략에 기록되었습니다(23).

 

(3) 레위 족장들과 문지기들의 이름(24-25)

 

레위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임무를 맡았습니다. 첫째는 예배 도중 찬양과 감사를 인도하는 것으로 이 일을 책임지는 자들은 하사바와 세레뱌(갓미엘의 아들)와 예수아입니다(24a).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만들어 놓은 규정대로 순서를 따라 찬양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24b).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는데, 특히 모세를 언급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본문은 의도적으로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소개하면서 모세와 같은 인물로 소개합니다.

역대기에 의하면, 다윗은 성전 찬양대를 조직하고, 규례를 만든 인물로(참조 역대상 25장), 모세처럼 이스라엘의 예배를 세운 인물입니다(모세의 성막 예배 → 다윗의 성전 예배). 본문은 포로 이후 레위인들이 다윗이 만든 규례대로 성전 예배를 드렸음을 언급함으로써 예배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강조합니다. 레위인들의 둘째 임무는 성전 창고를 지키는 일로(25b), 책임자들은 맛다냐를 비롯한 여섯 명입니다. 에스라-느혜미야서는 제사장들과 함께 레위인들의 역할에 큰 관심을 가집니다. 예루살렘 성전 예배가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레위인들의 헌신이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레위인에 대한 관심은 당시 레위인들의 불안정한 위치와도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4) 결론적인 요약(26)

 

26절은 끝으로 이상의 인물들이 모두 대제사장 요야김 시대, 그리고 느헤미야와 에스라 시대에 활동했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임을 밝힙니다(26). 예수아의 아들 요야김, 총독 느헤미야,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를 언급하는 26절은 귀환 1세대를 대표하는 대제사장 예수아와 스룹바벨을 언급하는 1a절과 수미 쌍관(인클루지오) 구조를 이루며 전체 단락을 끝맺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목록은 느헤미야 7장의 목록에 비해 월등히 많은데, 이는 뒤따라 나오는 성벽 봉헌식을 준비하기 위한 의도로 보입니다. 즉 성벽 봉헌식에 최대한으로 많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온 제사장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함께 언급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헌신한 사람들의 후손이 성벽 재건에 참여했음을 알리려는 의도입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귀환민들의 세대 간 연속성을 강조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찬양이 지속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들이 제 기능을 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들의 수고로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고, 이들이 들려주는 구원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오래된 구원 이야기의 일부임을 깨닫고, 언약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명확히 지닐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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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11-01)


약속의 땅에 심긴 생명의 씨앗 같은 이스라엘

느헤미야 11장 1-36절


 

포로 귀환 공동체가 예루살렘 성안과 역속의 땅 전역에 정착합니다. 이는 구원사의 새로운 전환점입니다. 이들은 거주민인 동시에 경비를 겸한 ‘용사’였습니다. 포로 귀환의 최종 목적은 유다 백성이 새로운 언약 백성으로서 약속의 땅에 정착하는 것이었습니다.

 

  • 본문은 예루살렘과 주변 성읍에 정착한 사람들의 명단을 소개합니다. 따라서 문맥상 7장(귀환자들의 명단)의 관심사와 연결됩니다. 거주자들의 이름은 백성의 지도자들로 시작해서, 제사장, 레위인, 기타 봉사자(성 문지기, 느디님 사람, 노래하는 자들)의 순으로 소개됩니다. 마지막 단락은 마을과 주변 성읍들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목록을 기술하는데, 이는 문맥상 예루살렘 밖을 재정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론(1-2)

진정한 리더는 뒤에 서서 지시하고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앞서 먼저 솔선수범하는 사람입니다. 섬기는 리더가 있는 곳에 그 공동체는 온전해지며 건강한 공동체가 됩니다. 예루살렘의 상황은 열악했지만,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험한 곳에 정착합니다.

 

1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2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1-2)

 

느헤미야 11-12장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 이후 내부 정비의 상황을 보도합니다. 11장은 예루살렘과 주변 성읍에 정착한 사람들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느헤미야 본문은 7:4에서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될 당시 성읍의 인구가 희소했음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각자 자기들 성읍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7:6, 73). 이제 성벽 재건을 마친 상태에서 대적들의 위협으로부터 성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이 더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귀환 공동체는 이 문제에 있어서 원칙을 정하게 되는데, 다른 지역에 사는 지도자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도록 하는 것이다(1a). 이것은 귀환 공동체를 예루살렘 중심의 공동체로 세우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남은 백성들 가운데 제비를 뽑아 십 분의 일은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사람에게 우선권을 부여하고 축복합니다(2). 따라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은 지도자들과 백성들 가운데 십분의 일인데, 백성들 가운데 십분의 일은 자원하는 사람들과 제비 뽑아 결정된 사람들로 구성됩니다(구약 성경에서 제비를 뽑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의미한다), 백성들은 좀 더 안전한 곳에서 정착하기를 원했고, 지금까지 살아온 지역과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 거주를 자원하는 것은 결단과 헌신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이들을 위해 복을 빌었습니다.

 

예루살렘 거주자들의 명단(3-24)

자원하는 사람은 예루살렘에 거할 수 있었습니다. 선택받아 순종하는 것보다 자원이 더 귀합니다. 대적들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는데도 하나님의 선택에 순종한 사람들의 명단이 나열됩니다. 유다 자손들(4-6), 베냐민 자손들(7-9), 제사장들(10-14), 레위인들(15-18), 문지기들(19), 노래하는 자들(22-24)이 열거됩니다.

 

3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자손은 유다 여러 성읍에서 각각 자기 성읍 자기 기업에 거주하였느니라 예루살렘에 거주한 그 지방의 지도자들은 이러하니 4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 명이라 유다 자손 중에는 베레스 자손 아다야이니 그는 웃시야의 아들이요 스가랴의 손자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스바댜의 현손이요 마할랄렐의 오대 손이며 5또 마아세야니 그는 바룩의 아들이요 골호세의 손자요 하사야의 증손이요 아다야의 현손이요 요야립의 오대 손이요 스가랴의 육대 손이요 실로 사람의 칠대 손이라 6예루살렘에 거주한 베레스 자손은 모두 사백육십팔 명이니 다 용사였느니라 7베냐민 자손은 살루이니 그는 므술람의 아들이요 요엣의 손자요 브다야의 증손이요 골라야의 현손이요 마아세야의 오대 손이요 이디엘의 육대 손이요 여사야의 칠대 손이며 8그 다음은 갑배와 살래 등이니 모두 구백이십팔 명이라 9시그리의 아들 요엘이 그들의 감독이 되었고 핫스누아의 아들 유다는 버금이 되어 성읍을 다스렸느니라 10제사장 중에는 요야립의 아들 여다야와 야긴이며 11또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 스라야이니 그는 힐기야의 아들이요 므술람의 손자요 사독의 증손이요 므라욧의 현손이요 아히둡의 오대 손이며 12또 전에서 일하는 그들의 형제니 모두 팔백이십이 명이요 또 아다야이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블라야의 손자요 암시의 증손이요 스가랴의 현손이요 바스훌의 오대 손이요 말기야의 육대 손이며 13또 그 형제의 족장된 자이니 모두 이백사십이 명이요 또 아맛새이니 그는 아사렐의 아들이요 아흐새의 손자요 므실레못의 증손이요 임멜의 현손이며 14또 그들의 형제의 큰 용사들이니 모두 백이십팔 명이라 하그돌림의 아들 삽디엘이 그들의 감독이 되었느니라 15레위 사람 중에는 스마야이니 그는 핫숩의 아들이요 아스리감의 손자요 하사뱌의 증손이요 분니의 현손이며 16또 레위 사람의 족장 삽브대와 요사밧이니 그들은 하나님의 전 바깥 일을 맡았고 17또 아삽의 증손 삽디의 손자 미가의 아들 맛다냐이니 그는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자가 되었고 형제 중에 박부갸가 버금이 되었으며 또 여두둔의 증손 갈랄의 손자 삼무아의 아들 압다니 18거룩한 성에 레위 사람은 모두 이백팔십사 명이었느니라 19성 문지기는 악굽과 달몬과 그 형제이니 모두 백칠십이 명이며 20그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유다 모든 성읍에 흩어져 각각 자기 기업에 살았고 21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주하니 시하와 기스바가 그들의 책임자가 되었느니라 22노래하는 자들인 아삽 자손 중 미가의 현손 맛다냐의 증손 하사뱌의 손자 바니의 아들 웃시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하나님의 전 일을 맡아 다스렸으니 23이는 왕의 명령대로 노래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할 일을 정해 주었기 때문이며 24유다의 아들 세라의 자손 곧 므세사벨의 아들 브다히야는 왕의 수하에서 백성의 일을 다스렸느니라(3-24)

 

본문은 이어서 예루살렘에 거주한 사람들의 명단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목록에 소개되는 순서는 백성의 지도자들(3-9) → 제사장들(10-14) → 레위인들(15-18) → 기타 봉사자들(19-24) 순입니다.

3절(MT)은 ‘예루살렘에 거주한 그 지방의 지도자들은 이러하니’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3-9절 단락의 도입구 역할을 합니다. 유다와 베냐민 자손 가운데 예루살렘에 거주한 지도자들의 목록은 4절부터 본격적으로 소개됩니다. 그 안에 당시 제사장을 포함한 대다수 백성들이 자신들의 성읍과 기업에 살고 있었음을 밝힙니다(3b). 본문이 이런 식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당시 대부분의 백성들이 자신의 성읍에 거주하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예루살렘 거주자들의 헌신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유다 자손 가운데 먼저 베레스 자손 아다야가 소개됩니다. 아다야는 웃시야-스가랴-아마라스바댜-마할랄렐 계보로 연결됩니다(4b). 이어서 소개되는 마아세야는 바룩-골호세-하사야-아다아요야립-스가랴-실로로 연결됩니다(5). 예루살렘에 정착한 베레스의 자손은 468명으로 그들은 다 용사였다고 소개됩니다(6). 용사로 번역된 ‘하일’은 전쟁에 능한 무리를 일컫는 용어로 예루살렘 거주 목적이 성을 방어하고 지키는 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평행 본문인 역대상 9:6은 세라의 자손들 중 690명이 예루살렘에 정착했다고 보도하고 있어, 베레스와 더불어 세라의 후손의 숫자를 추가합니다(베레스와 세라는 유다의 쌍둥이 아들로 이들을 통해 유다 지파가 나온다 참조. 창세기 38:27-30). 유다 자손 지도자들에 이어 베냐민 지파 지도자들의 명단이 소개됩니다(7-9). 베냐민 자손 중에는 살루 집안, 갑배와 살래 집안으로 전체 928명입니다. 그가운데 시그리의 아들 요엘은 감독으로 소개됩니다. ‘감독’으로 번역된 단어는 공동체의 행정 책임자를 뜻합니다. 이 용어는 11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어(9,14,22,42), 당시 유다 공동체의 조직화된 모습을 암시합니다. 제사장들 가운데는 여다야, 야간 스라야 집안에서 822명(12), 아다야 집안에서 242명, 그리고 아맛새 집안에서 모두 128명으로 전체 1192명입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큰 용사들로 소개됩니다. ‘큰 용사’로 번역된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용맹스러운 군인을 뜻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예루살렘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제사장들도 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스룹바벨과 함께 바벨론에서 돌아온 제사장의 자손들로 예루살렘에 정착한 것입니다(참조, 에스라 2장), 레위 사람들 중에는 핫숩의 아들 스마야, 삽브대와 요사밧, 아삽의 증손 맛다냐, 박부가 압다가 소개됩니다(15-17). 이들 중 삽브대와 요사밧은 ‘성전 바깥 일’을 맡았고 아삽의 증손 맛다냐는 성전에서 기도할 때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17). ‘성전 바깥 일’은 레위인들의 업무 중 성전 물품을 구입하거나 조달하는 일, 성전 건물에 대한 유지 및 보수와 같은 일을 뜻합니다. 기도할 때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일은 찬양 인도나 찬양대를 지휘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역대하 5:12).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레위 사람 전체는 총 284명입니다(18). 끝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될 기타 봉사자들이 소개되는데(19-24), 그들은 성 문지기 악굽과 달몬과 그 형제 172명입니다. ‘성 문지기들’이 레위인과 별도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아직은 레위인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평행 본문인 역대상 9장은 ‘성 문지기들’도 레위인으로 간주합니다.

20절은 제사장과 레위인들 가운데 일부는 예루살렘 성읍 근처 자신들의 기업에 살았음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느디님 사람들은 오벨에 거주하였고, 시하와 기스바는 그들의 책임자가 됩니다(21). 느디님 사람들이 거주한 오벨은 예루살렘 성전의 남쪽, 즉 다윗 성의 북쪽 끝 언덕 지역을 가리킵니다. 끝으로 노래하는 자들인 아십 자손 가운데 미가의 가문 웃시는 레위 사람의 감독으로 성전의 일을 맡아 다스렸습니다(22). 본문은 ‘노래하는 자들’에게 왕의 명령이 주어졌음을 언급합니다(23).

여기에서 왕은 폐르시아의 왕을 가리킨다. 이것은 노래하는 자들이 페르시아 왕의 임명을 받았으며, 제국이 피정복민의 제의를 주관하였음을 의미합니다. 페르시아 왕은 피정복민들의 제의를 통해 제국의 평화와 안정을 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에 정착한 자들의 목록(3-24)은 역대상 9장에 언급된 귀환자(정착자)들의 목록(2-27)과 상당 부분 일치합니다. 정착자의 총수는 역대상 9장에서 약간 증가되어 있습니다(비교. 느헤미야 11:6과 역대상 9:7; 느헤미야 11:8과 역대상 9:9). 소개하는 순서도 백성의 지도자 → 제사장 → 레위인 → 기타 봉사자들로 일치합니다(참조. 역대상 9:2-3, 10-13, 13-16, 17-27). 이 두 자료의 유사성은 두 자료가 공동의 전승에 의존하고 있거나, 역대기 저자가 느헤미야서 본문을 기초로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밖의 재정비(25-36)

가장 좋은 신앙, 헌신적인 신앙, 앞서서 행하는 신앙만이 신앙 전부가 아닙니다. 부르신 곳이면 어디든 언제든 나서는 것이 신앙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수준과 처지에 맞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25마을과 들로 말하면 유다 자손의 일부는 기럇 아르바와 그 주변 동네들과 디본과 그 주변 동네들과 여갑스엘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며 26또 예수아와 몰라다와 벧벨렛과 27하살수알과 브엘세바와 그 주변 동네들에 거주하며 28또 시글락과 므고나와 그 주변 동네들에 거주하며 29또 에느림몬과 소라와 야르뭇에 거주하며 30또 사노아와 아둘람과 그 마을들과 라기스와 그 들판과 아세가와 그 주변 동네들에 살았으니 그들은 브엘세바에서부터 힌놈의 골짜기까지 장막을 쳤으며 31또 베냐민 자손은 게바에서부터 믹마스와 아야와 벧엘과 그 주변 동네들에 거주하며 32아나돗과 놉과 아나냐와 33하솔과 라마와 깃다임과 34하딧과 스보임과 느발랏과 35로드와 오노와 장인들의 골짜기에 거주하였으며 36유다에 있던 레위 사람의 일부는 베냐민과 합하였느니라(25-36)

 

이 단락은 예루살렘 밖의 지역을 재정비하는 내용을 다룹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지명은 귀환민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정착했던 성읍들을 가리킵니다. 이곳에 소개되고 있는 유다 성읍들(25-30)과 베냐민의 성읍들(31-36)은 느헤미야 당시 유다도(예후드)의 영토를 보여줍니다(유다 성읍들의 대부분은 여호수아 15장의 유다 지파 성읍들 목록에 등장한다).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활동했을 당시 유다도(道)는 페르시아의 한 행정구역(메디나)으로 북쪽으로는 사마리아, 남쪽으로는 에돔과 접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노’(35)처럼 유다도 범위 밖의 성읍들도 포함하고 있는데(참조 느헤미야 6:2), 이것은 당시 얼마간 이주의 자유가 주어졌음을 암시합니다(유다 국경을 넘어서도 정착이 이루어짐). 이제 귀환민들은 옛적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은 것처럼(참조. 여호수아 13-19장),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유업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공간이 되려면, 그 땅 곳곳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의 터전이 되어야 했습니다. 약속의 땅에 심긴 생명의 씨앗들입니다. 우리가 모두 자기 삶의 현장에서 썩어져 꽃을 피울 때, 온 세상은 복음의 향기로 가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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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10-01)


구체적인 변화를 다짐하는 이스라엘

느헤미야 10장 1-39절


 

과거 반성도 중요하지만, 새 역사를 펼쳐가려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모호한 다짐으로는 부족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10장은 새로운 변화를 다짐한 사람들의 명단(1-27)과 변화의 내용(28-39)으로 구성됩니다.

 

  • 에스라의 율법 낭독과 레위인들의 기도에 강화를 받은 귀환자들은 언약에 인봉을 합니다. 10장은 언약에 인친 자들의 명단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명단은 유다 총독 느헤미야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백성의 우두머리와 일반 백성들의 순으로 소개됩니다. 언약에 인친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언액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서약합니다.

 

가나안 땅 정복과 정착(1-27)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답게 들리고 그 말씀이 선명하게 들릴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비로소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손발을 움직여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능력, 하나님의 말씀이 주신 새로운 안목, 그 말씀이 주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들 때문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1그 인봉한 자는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2스라야, 아사랴, 예레미야, 3바스훌, 아마랴, 말기야, 4핫두스, 스바냐, 말룩, 5하림, 므레못, 오바댜, 6다니엘, 긴느돈, 바룩, 7므술람, 아비야, 미야민, 8마아시야, 빌개, 스마야이니 이는 제사장들이요 9또 레위 사람 곧 아사냐의 아들 예수아, 헤나닷의 자손 중 빈누이, 갓미엘과 10그의 형제 스바냐, 호디야, 그리다, 블라야, 하난, 11미가, 르홉, 하사뱌, 12삭굴, 세레뱌, 스바냐, 13호디야, 바니, 브니누요 14또 백성의 우두머리들 곧 바로스, 바핫모압, 엘람, 삿두, 바니, 15분니, 아스갓, 베배, 16아도니야, 비그왜, 아딘, 17아델, 히스기야, 앗술, 18호디야, 하숨, 베새, 19하립, 아나돗, 노배, 20막비아스, 므술람, 헤실, 21므세사벨, 사독, 얏두아, 22블라댜, 하난, 아나야, 23호세아, 하나냐, 핫숩, 24할르헤스, 빌하, 소벡, 25르훔, 하삽나, 마아세야, 26아히야, 하난, 아난, 27말룩, 하림, 바아나이니라(1-27)

 

에스라가 주도하여 율법을 낭독하고 레위인들이 율법을 통역과 해석해주었습니다. 에스라의 율법 낭독과 레위인들의 기도에 감화를 받은 귀환자들은 언약에 인봉을 합니다. 1-27절은 언약 체결에 서명한 사람들의 명단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는데, 이 명단에 소개되는 인물들은 약속의 땅에서 새로운 공동체로 출발하고자 하는 결단과 의지를 보여줍니다.

느헤미야의 문맥에서 이 명단은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7장)과 언약 갱신을 인증하는 기능을 합니다. 서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가장 먼저 총독 느헤미야가 등장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구성에 의하면(9:38부터 새로운 장이 시작됨), 전체 단락은 총독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동심원 구조를 이룹니다.

 

        A. 방백들(9:38)

                  B. 레위인들(9:38)

                           C. 제사장들(9:38)

                                    X. 총독 느헤미야(10:1)

                           C′. 제사장들(10:2-8)

                  B′. 레위인들(10:9-13)

         A′. 방백들(10:14-27)

 

이러한 구성은 공동체 내에 느헤미야의 위치를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인 기법입니다. 등장하는 일 가운데 느헤미야와 시드기야의 경우에만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두 사람이 유다 행정부를 대표하는 페르시아의 관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시드기야에 이어 제사장들의 명단이 소개됩니다(2-8).

여기에는 총 21명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15개는 성씨, 즉 가문의 이름입니다. 특이한 점은 에스라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에스라가 스라야 가문(2)의 일원이기 때문에 생략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사장들의 명단에 이어 레위 사람들이 소개됩니다(9-13). 소개된 레위인들의 총수는 17명으로 제사장들의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에스라와 함께 율법을 가르친 레위인들로 소개됩니다(참조. 8:7). 끝으로 레위인들에 이어 백성들의 지도자들의 이름이 소개됩니다(14-27). 이들은 총 44명으로 대부분 집안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곳에 소개된 44명의 이름 중 앞부분의 21명은 1차 귀환자들의 목록인 에스라 2:3-30과 동일합니다(언급되는 순서도 일치). 동일한 집안(가문)의 이름이 이곳에 반복되는 것은 귀환 공동체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21명을 제외한 나머지 23명은 전혀 새로운 인물들인데, 이들은 최근에 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룹바벨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과 최근에 도착한 사람들이 함께 언약에 서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온 공동체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따라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했음을 의미합니다.

 

공동체 맹세와 서역의 내용(28-39)

성전과 성벽이 무너져 있는 동안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신앙 전통도 무너져 있었습니다. 마땅히 지켜야 하고, 그래야 생명과 축복을 노릴 수 있는 참된 길을 다 버린 채 이방의 풍속을 좇아 살았습니다. 백성은 이것이 저주받을 일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녀의 결혼 앞에서 세상적인 조건을 더 따지지 않을 때, 공동체를 위한 헌신에 주저하지 않을 때,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28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 29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30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31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품이나 온갖 곡물을 가져다가 팔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않겠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32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33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 34또 우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시기에 나무를 우리 하나님의 전에 바쳐 율법에 기록한 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에 사르게 하였고 35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36또 우리의 맏아들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주고 37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38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두되 39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28-39)

 

언약 체결에 서명한 사람들의 명단에 이어 28절은 언약 체결의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본문은 지도자들 외에 온 백성이 함께했음을 강조합니다(28a). 이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은 여덟 개의 그룹으로 구성되는데(28b), 각각 (1) 제사장, (2) 레위 사람, (3) 성전 문지기, (4) 노래하는 사람, (5) 느디님 사람들, (6) 율법에 따라 살기 위해 이방 사람과 절교한 사람들, (7) 아내들' (8) 자녀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지식과 총명이 있는 사람들’로 묘사되는데(28c), ‘이들이 율법의 의미를 깨닫는 능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함께 ‘저주로 맹세’했는데(29a), ‘저주와 맹세’는 여기서 ‘맹세로 확증하는 조약’을 의미합니다. 서약을 강조하기 위한 용법으로 신명기 29:14에 나오는 ‘언약과 맹세’와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참조, 역대하 15:12-15, 23:3, 6). 이들이 한 맹세의 내용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29). 그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이방 백성과의 동혼 금지입니다(30, 비교 13:25). 이것은 신명기 7:14의 율법을 당시 상황에 적용한 것인데, 가나안의 일곱 족속의 자리에 ‘이 땅의 백성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말라기(2:10-16)와 에스라서(9장)처럼 느헤미야서도 이방 민족과의 통혼을 엄격히 금지합니다. 이것은 귀환 공동체가 처해 있던(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는) 특수한 상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방 민족과의 통혼 금지에 이어 안식일과 안식년 규정이 언급됩니다. 안식일 준수는 느헤미야의 핵심적인 개혁 가운데 하나입니다(참조. 13:15-22).

바벨론 유배로 약속의 땅과 성전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과 음식법(정결법) 준수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확인하는 지표(boundary marker)로 자리 잡게 됩니다. 오경의 율법 규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과 음식법(정결법) 준수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확인하는 지표(boundary marker)로 자리 잡게 됩니다. 오경의 율법 규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는 안식년 법을 지켜야 합니다(참조, 출애굽기 23:11; 레위기 25:1-7).

신명기 율법(15장)은 안식년 규정을 인도주의적 관절으로 확대해서 면제년(빚의 탕감)과 노예 해방의 해로 규정합니다. 본문은 땅을 쉬게 하는 것과 빚의 탕감을 함께 언급함으로써 오경의 안식년 규정을 종합하고 있습니다(31), 안식일과 안식년 준수에 이어 성전 유지와 관련된 규정이 맹세의 내용으로 언급됩니다. 귀환민들은 해마다 3분의1세겔을 성전세로 내기로 서약하는데(32), 이것은 성소 운영기금으로 속전을 바치도록 한 오경의 규정(출애굽기 30:11-16; 38:25-26)과 관계됩니다.

본문은 이어서 성전세의 용도를 상세히 밝히고 있는데(33절), 그것은 진설병의 제조, 정규적인 소제와 번제 준비, 안식일, 초하루, 정한 절기에 드리는 제물들 준비, 기타 성전 건물 보수와 유지에 필요한 사항들입니다.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시기에 나무를 성전에 바치도록 하는 것‘(34)은 번제단에 사용될 땔감을 조달하기 위함입니다. 제사 규정에 의하면(레위기 6:1-13), 번제단의 불은 항상 타고 있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기브온 거민들이 했던 일(참조, 여호수아 9:27)을 이제 가문별로 돌아가며 담당하기로 한 것입니다.

다음의 내용은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가축의 초태생을 성전에 바치는 것입니다(35-36). 토지 소산의 맏물을 바치는 규정은 오경의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는데(출애굽기 23:19, 34:26; 신명기 26:1-11), 이것은 땅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백성들은 수확을 할 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처음 것을 드려야 합니다. 민수기 규정은 이것을 제사장의 몫으로 돌리도록 규정합니다(민수기 18:12-13). 가축과 사람의 초태생에 대한 규례는 출애굽 사건, 즉 애굽의 장자 재앙과 관계됩니다. 이스라엘은 장자 재앙을 면한 것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몸값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사람의 경우는 성소의 세겔로 값을 정해서 드려야 합니다(출애굽기 13:13; 34:20; 민수기 18:15). 마지막 서약은 제사장과 레위인을 위해 정기적으로 십일조를 바치는 것입니다(37-38; 비교 13:10-13). 오경의 십일조 규례에 의하면,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는 레위인들의 몫으로, 레위인들의 십일조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야 합니다(민수기 18장), 귀환 공동체에게 성전 유지와 관리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였기에 특별한 결단이 필요했습니다(39b). 공동체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성전 예배가 필수적이었고, 이를 수행하는 제의 종사자들의 생계 유지가 보장되어야 했습니다(에스라서는 1-2차 귀환 행렬 당시 레위인들의 참여가 소극적이었음을 언급합니다). 서약의 내용에는 귀환 공동체를 거룩한 공동체로 세우기 열망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거룩한 공동체는 하나님 중심(예배 중심)의 삶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이 다짐한 변화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토대로 유다 사회의 경제와 사회질서 전반을 새롭게 하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원래 율법에 규정되어 있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던 제도들을 강화했습니다. 기본을 중요하게 여길 때 견실한 공동체가 세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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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09-03)


과거의 반성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이스라엘

느헤미야 9장 23-38절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실수를 바로 잡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귀환 공동체는 제2의 출애굽을 경한 새로운 언약 백성으로서, 자신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 이렇듯 부끄러운 현실에 처하게 되었는지 뼈아프게 반성합니다.

 

  • 가나안 땅 진입 이후 이스라엘 역사는 배교와 불순종의 역사로 규정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저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패역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남은 자를 허락하셨습니다. 레위인의 기도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결단을 촉구하며 끝을 맺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언약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서약하고 이를 다짐하는 의미에서 인을 칩니다.

 

가나안 땅 정복과 정착(23-25)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어려워도 한다고 하신 일에 대해서는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말씀이 곧 사건을 창조해내는 능력입니다. 가나안이 이스라엘 백성의 땅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가나안 거민도 이스라엘에게 복종하게 하셨고, 땅도 하나님께 복종하여 충성한 결실로 배불러 먹고 즐기는 복을 만끽하게 하셨습니다.

 

23주께서 그들의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시고 전에 그들의 열조에게 들어가서 차지하라고 말씀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이르게 하셨으므로 24그 자손이 들어가서 땅을 차지하되 주께서 그 땅 가나안 주민들이 그들 앞에 복종하게 하실 때에 가나안 사람들과 그들의 왕들과 본토 여러 족속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임의로 행하게 하시매 25그들이 견고한 성읍들과 기름진 땅을 점령하고 모든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과 판 우물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허다한 과목을 차지하여 배불리 먹어 살찌고 주의 큰 복을 즐겼사오나(23-25)

 

레위인들의 기도(역사 회고)는 출애굽 사건과 광야 전승에서 가나안 땅 정복에 대한 주제로 넘어갑니다.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후손과 땅 유업)을 이루셨음을 강조합니다. 23a절의 그들의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암시합니다(참조, 창세기 12:2; 15:5), 23b절의 ‘그들의 열조에게 들어가서 차지하라고 말씀하신 땅’이라는 구절도 족장 이야기에 땅 약속과 관련하여 반복되는 표현입니다(참조, 창세기 26:2; 28:4,13; 50:24).

본문은 가나안 땅 정복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로 간주합니다. 특히 24절은 가나안 땅 정복을 하나님께서 싸우신 거룩한 전쟁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정복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임을 강조합니다. 가나안의 정복 이야기에서 여호수아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삶을 묘사하는 표현들(25, ‘기름진 땅’, ‘아름다운 물건’, ‘배불리 먹고’)은 그 땅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요한 땅('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을 소개하는 이 단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보여줍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불순종과 배교(26-31)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도 하나님의 고집스러운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여러 번, 여러 해 동안 용서하고 구원하며 긍휼을 베푸셨고, 그러고도 돌아서는 자들을 주의 영을 통해 경계하셨습니다. 몇 번을 멸해도 부족할 백성이었고, 그래서 대적의 손에 넘기기도 하셨지만, 기어이 언약을 파기하지 않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26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를 심히 모독하였나이다 27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28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 29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30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또 주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의 영으로 그들을 경계하시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도 31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26-31)

 

약속의 성취에 이어 레위인들의 기도는 가나안 땅에서 겪은 이스라엘의 실패담을 회상합니다. 전체 단락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한 백성들에 대한 언급을 처음과 끝(26절과 30절)에 위치시킴으로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를 동일한 불순종과 배교의 시대로 묶습니다. 사사기의 증언에 의하면, 가나안 땅에서의 역사는 불순종과 배교의 시대로 요약됩니다.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이방 대적들을 통한 징계로 나타납니다(27a). 이전에는 대적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스라엘을 대적들의 손에 넘기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배교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사기 문맥에서 대적들의 압제는 이스라엘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징계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대적들의 압제로 고통당할 때(혹은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자(사사)를 세워 대적들의 압제에서 구워하십니다(27b).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참조 예레미야애가 3:19-23).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평안’을 얻은 후에 다시 배교의 상태로 회귀합니다(28a). 우상숭배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는 결정적인 행위로 하나님께서는 언약적인 책임을 물으십니다.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불순종과 배교는 죄와 유혹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류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행한 배교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29). 말씀에 대한 반복적인 불순종은 결국 배교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 삶(생명)을 얻는 주의 계명’이라고 표현합니다(참조. 레위기 18:5; 신명기 4:1; 30:16), 율법(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같은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것은 민족적인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배교를 오래 참으셨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심으로 그 오길 기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거부하고, 선지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진노로 바뀌고, 이방인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십니다(30b).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긍휼하심과 은혜를 베풀어 패역한 이스라엘을 다 멸하지 않으시고 남은 자를 허락하셨습니다(31b). 이것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이 70년이 지난 후에 고토로 돌아온 사실을 가리킵니다(참조. 에스라 1-3장)

 

회복에 대한 청원과 공동체의 죄에 대한 고백(32-38)

레위인들은 하나님께 죄악된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손에 넘긴 일을 공의로운 심판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이제 한 번 더 언약을 기억하셔서 예전의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도록 간청합니다. 오늘 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가 아닙니까?

 

32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 33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34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조상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께서 그들에게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35그들이 그 나라와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36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는데 곧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사 그것의 열매를 먹고 그것의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 37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이방 왕들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그들이 우리의 몸과 가축을 임의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곤란이 심하오며 38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32-38)

 

레위인들의 기도는 끝으로 그들의 현재 상태(죄)에 대한 고백과 청원으로 이어집니다(final petition), 느헤미야서 문맥에서 백성들의 참회와 회복에 대한 간구는 이후에 등장하는 언약 체결 의식(느헤미야 10장)을 준비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 단락은 주제의 전환을 나타내는 ‘베 아타’(ועתה 그리고 이제) 구문으로 시작하는데, 이러한 형식은 시편에서 현재의 고통에서 구원해주시길 간구하는 문맥에서 나옵니다(참조, 시편 39:7). 레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당하는 고통을 감찰하시고 이전의 상태로 회복해주시길 기도합니다(32b). 32b절의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주전 722년)부터 귀환 이후의 시점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먼저 선조들과 자신들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인정합니다(33). 그리고 이어서 실패의 원인을 두 가지로 요약하는데, 첫째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입니다(34). 여기에서 율법을 가리키는 다양한 용어(‘주의 율법’, ‘주의 명령’, ‘경계하신 말씀’)를 사용하여 율법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합니다(참조. 13-14,26,29), 둘째, 실패 원인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35).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것이 결국 이스라엘 타락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위인들의 기도는 자신들의 현 상태를 애통하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36-37). 본문은 그들의 현재 상태를 ‘종살이’로 규정합니다(36절). ‘하나님 섬기기’를 포기한 결과는 이방 나라의 종살이로 나타납니다(참조, 35b).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시 구원 이전의 상태로 회귀함을 의미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피정복민의 신분입니다. 그들은 페르시아에 세금을 내고 이방 왕의 통제하에 살아가고 있습니다(37b). 그런 의미에서 현재 그들의 상태는 ‘종살이’입니다. 레위인들의 간절한 소망은 페르시아 왕의 통치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통치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분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시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15:18; 사무엘상 8:7). 이제 방백들과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언약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합니다(38). ‘언약적인 헌신’을 다루는 38절은 백성들이 언약에 인봉하고 서약하는 장면을 다루는 10장으로 연결됩니다. 이런 배경에서 히브리어 성경(MT)은 38절(‘우리가 …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을 10장의 도입으로 간주합니다. ‘견고한 언약을 세우다’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언약 체결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히브리어 구문 ‘카라트 베리트’와 비교할 때 ‘베리트’ 자리에 ‘아마나’가 들어가 있습니다. ‘아마나’는 원래 ‘신실함’ 혹은 ‘충성스러움’을 의미하며, 언약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이 단어와 동일한 어근 네에만(נאמן 충성스러운) 이 아브라함 언약을 언급하는 장면(8절)에 나옵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여 앞으로 체결되는 언약을 아브라함 언약의 연속으로 간주하며, 언약에 참여하는 백성들이 아브라함처럼 언약에 신실하게 반응할 것을 요청합니다. 레위인들의 역사 회고의 기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율법에 대한 순종이 매우 강조된 형태로 나타납니다(13-14, 26,29,34). 율법에 대한 강조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귀환 공동체에게 ‘토라’가 차지하는 중요성과 위치를 보여줍니다. 신명기적인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 사랑은 말씀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로 귀환 공동체는 아주 긴, 뼈아픈 역사 반성문을 기록하고 도장까지 찍었습니다.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펼쳐가실 구원사의 주역이 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들은 첫 출애굽 세대와 다른 역사를 써나가겠다고 결단합니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는 것만이 새 역사의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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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09-02)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이스라엘

느헤미야 9장 9-22절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불순종만큼이나 심각한 죄입니다. 신약과 구약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기억하라’는 명령을 반복하십니다. 포로 귀환 공동체는 출애굽 시대와 광야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베푸신 은혜를 잊은 그들의 죄를 고백합니다. 망각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역사회고는 출애굽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출애굽 사건에 나타난 구원의 은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태동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광야 여정에서 백성을 인도하시고,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으며,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총 역사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인도하심(9-15)

이스라엘은 애굽 고통의 노예 생활에서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소리에 응답하여 바로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으로써 온 땅에 여호와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셨습니다. 홍해의 난관도, 광야의 위험도 여호와 앞에서는 고분고분 길을 내었고, 물을 내었으며, 양식을 내었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배은망덕했습니다.

 

9그 주께서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10이적과 기사를 베푸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니 이는 그들이 우리의 조상들에게 교만하게 행함을 아셨음이라 주께서 오늘과 같이 명예를 얻으셨나이다 11또 주께서 우리 조상들 앞에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사 그들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 같이 통과하게 하시고 쫓아오는 자들을 돌을 큰 물에 던짐 같이 깊은 물에 던지시고 12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이 행할 길을 그들에게 비추셨사오며 13또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그들과 말씀하사 정직한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그들에게 주시고 14거룩한 안식일을 그들에게 알리시며 주의 종 모세를 통하여 계명과 율례와 율법을 그들에게 명령하시고 15그들의 굶주림 때문에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들의 목마름 때문에 그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또 주께서 옛적에 손을 들어 맹세하시고 주겠다고 하신 땅을 들어가서 차지하라 말씀하셨사오나(9-15)

 

레위인들의 기도(역사회고)는 출애굽 사건과 광야 여정에 대한 주제로 이어집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합니다(9). 직역하면 ‘그(여호와)가 애굽에 있는 우리 조상들의 고통을 보셨다’입니다. 9절은 신인동형론적 표현(anthropomorphism)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자기 백성을 향하고, 그분의 귀는 자녀들의 간구에 기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출애굽 사건과 홍해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10절과 11절은 각각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에 대한 사건과 홍해 사건을 요약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의 백성을 치신 이유를 그들의 교만함 때문이라고 밝힙니다(10b). 하나님의 역사 개입은 그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출애굽 사건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친히 영광을 받으시는 사건이고, 온 땅의 주가 되심을 만방에 선포하는 의미를 지닙니다(10c, ‘오늘과 같이 명예를 얻으셨나이다’). 출애굽 사건의 절정은 훔해 사건으로 나타납니다(11).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비교, 9a, ‘고난을 보셨다’),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바로의 군대를 수장한 사건으로 나타납니다(11b). 이스라엘 백성들은 직접 바다 가운데를 육지 같이 통과하고(참조, 출애굽기 14장), 바로와 애굽의 군대가 깊은 물에 잠기게 된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 사건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사건(야훼 전쟁 혹은 거룩한 전쟁)으로 대대로 전해지는 공동체적 신앙 전승의 핵심입니다.

 

12-21절까지는 광야 전승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광야 생활을 회고하는 12-21절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 모티브가 백성들의 반역을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A. 하나님의 공급하심(12-15절)

      B. 백성들의 반역(16-18절)

  A′. 하나님의 공급하심(19-21절)

 

이 구조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백성들의 배은망덕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의 백성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시내산의 언약 체결과 율법 수여(13-14)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는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삼아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 위함입니다(참조, 출애굽기 19:5-6).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는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 백성의 표증으로 율법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언약 체결과 율법 수여 사건은 성격상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은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지침입니다.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그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본문은 율법을 가리키는 다양한 용어(정직한 규례, 진정한 율법, 선한 율례와 계명)를 사용함으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13b). 그 율법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해 주신 것’입니다(14). 율법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거룩한 안식일’(14a)을 별도로 언급하는 것은 바벨론 포로 이후 안식일 규정이 특별한 중요성을 갖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후 안식일 규정은 유대인들에게 모든 율법의 기본이 된다. 레위인들의 기도는 다시 광야 여정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15).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주셨음을 회고합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을 통해서 물을 공급하신 사건입니다(참조 출애굽기 16-17장),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만나의 공급이 계속되었음을 증언합니다(여호수아 5:12). 애굽에서의 구원, 시내산의 언약체결, 광야 40년의 여정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역(16-1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40년 동안에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고, 율법과 계명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지 않도록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 공급과 보호의 은총을 기억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런 은혜까지도 잊고 살았습니다.

 

16그들과 우리 조상들이 교만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17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18또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한 신이라 하여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였사오나(16-18)

 

이 단락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반역 사건(정탐꾼 사건과 금송아지 사건을 다룹니다(참조, 민수기13-14장, 출애굽기 32장). 여기에서 시간적으로 후대인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먼저 언급한 이유는 이것이 땅 약속과 직접 관계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참조, 8). 열 명의 정탐꾼의 불신앙적인 보고는 백성들 사이에 큰 동요를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다른 지도자를 세워애굽으로 돌아가려는 반역으로 발전합니다(17a).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무효화하는 행위이며,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인 반역이다. 이런 배경에서 본문은 반역적인 의미의 ‘패역하다’(마라 מרה)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본문은 이러한 행동을 이스라엘이 교만하여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한 행동으로 표현합니다(16). 여기에서 교만하여 목을 굳게 한 행동은 출애굽기에서 바로와 애굽 백성들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참조. 10). 이제 이스라엘이 바로처럼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셨는데(범죄의 결과로 광야에서 죽어가야 했지만), 그분의 성품 때문이었습니다(17b).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신, 분입니다(참조, 출애굽기 34장). 이렇게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반역은 계속됩니다(참조. 민수기 16-25장). 본문은 광야 시절 또 한 번의 반역적인 사건을 언급하는데,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입니다(참조. 출애굽기 32장),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송아지의 형상 안에 가두는 행위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범죄입니다(18b). 백성들의 반역(A)-하나님 의 긍휼하심 (B)-백성들의 반역 (A')으로 이어지는 광야 시절의 회고는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의 반역을 극명하게 대비시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19-22)

배은망덕한 백성이 하나님을 지웠고 귀를 막았으며, 마음을 받았습니다. 반역했고, 자기 하나님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사랑밖에 베풀 것이 없는 분처럼 용서하시고 또 기다리면서 더디 깨닫고 믿는 백성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19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20또 주의 선한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을 인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어 21사십 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사오며 22또 나라들과 족속들을 그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시매 그들이 시혼의 땅 곧 헤스본 왕의 땅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차지하였나이다(19-22)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을 언급한 후 레위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주제로 돌아갑니다. 광야 시절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19).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은혜를 베푸시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물을 공급하셨습니다(20). ‘주의 선한 영을 주사’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20a). ‘주의 선한 영을 주신’이 사건은 하나님의 영이 회중의 지도자들에게 임한 사건(민수기 11:16-30)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대한 무지가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나가지 않도록 특별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광야 시절에 대한 회고는 40년 여정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로 끝맺습니다(2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공급하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참조 신명기 2:8; 8:4).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신 사건으로 입증됩니다(22a). 하나님께서 요단 동편 아모리 족속의 땅을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하게 사셨는데(22b), 이는 임박한 가나안 땅 정복을 예고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역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이루십니다(참조 8).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그 은혜를 잊고 교만해졌다고 고백합니다. 출애굽을 겪었으면서도 애굽 땅으로 돌아가려 했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은 교만의 죄와 불순종의 죄와 직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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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09-01)


이스라엘을 내적 갱신과 변화시킨 느헤미야

느헤미야 9장 1-8절


 

많은 목회자가 교회 성장을 내실보다는 외형적인 성장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역하면 할수록 내적인 성장에 대한 중요성을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공동체 재건의 사업까지 완결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내적 갱신과 변화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초막절이 끝난 지 이틀 후에 백성들이 대대적으로 모여 성회를 갖습니다. 모인 시간의 절반은 율법을 읽고, 절반은 엎드려 자복합니다. 지금까지 율법을 깨닫도록 도움을 준 레위인들도 이 대열에 합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 높여 여호와를 송축한 후,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회고합니다. 이를 통해 백성들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다른 한편으로 그 크신 은혜를 저버린 조상들과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합니다.

 

24일의 금식 성회(1-5a)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깊이 깨달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과 비교하여 자신들의 허물과 부족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 깊숙이 들어와 있는 죄의 심각성을 깨달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경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행동을 비교하여,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은 부족함과 죄를 갖고 있는지를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1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2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3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4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5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1-5a)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스스로 견딜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삶을 돌아보고 내면의 어둠을 진실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1) 회개(1-2)

 

초막절 집회가 끝난 직후 백성들은 곧바로 금식 성회를 개회합니다(1). 그들은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권면에 따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시간을 가진 후(참조. 8:9-11) 이제 자신들과 조상들의 죄를 자복합니다. 백성들(‘이스라엘 자손’)은 다 같이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씁니다.

 

(2) 율법 낭독과 레위인들의 기도(3-5a)

 

백성들은 낮 1/4 동안 서서 율법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3). 낮 1/4은 약 세 시간에 해당합니다(오전 6시부터 9시까지). 백성들이 금식하며 낮 1/4 동안 서서 율법을 듣는 것은 ‘말씀에 대한 갈급함과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열정’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이 성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부흥의 자리였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에는 율법을 낭독한 주체가 언급되지 않지만, 레위인이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8-9장에서 레위인들의 율법 낭독은 세 번에 걸쳐서 소개됩니다(8:4-8; 8:14-15; 9:3). 백성들은 율법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합니다(3b). 그때 여덟 명의 레위인은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4), 그들은 예수아, 바니, 갓미엘, 스바냐, 분니, 세레뱌, 바니, 그나니입니다. 본문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데, 이것은 백성들의 자발성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고백의 기도(5b-8)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회개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의 교훈을 따르지 않은 점을 자백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스스로 죄인으로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자세로 나아갔습니다. 의 회개와 죄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더욱 깊이 의지하며,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인도와 지도를 허락했습니다.

 

5…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6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7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8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5b-8)

 

세 번째 율법 낭독은 레위인들의 고백의 기도(5b-37)로 이어집니다. 전체 단락은 예전의 형식을 따라 잘 구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A. 찬양(5b)

   B. 역사를 회상하는 형식의 고백(6-31)

      C. 청원(32)

   B’. 현재의 죄에 대한 고백(33-35)

A’. 애통(36-37)

 

(1) 송축(5b)

 

레위인들의 기도는 성격상 백성들을 대신해서 드리는 공적인 기도로 볼 수 있습니다. 여덟 명의 레위인들이 단에 올라서서 하나님을 송축하며 기도를 인도합니다(5a). 레위인들은 백성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명령합니다(5b).

하나님의 영원성은 신구약성경에서 강조되는 주제로(신명기 33:27; 이사야 40:28; 로마서 16:26, 디모데전서 6:16), 여호와는 이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구별되는 분입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여호와의 영원성’은 그분의 거룩하신 성품과 연결됩니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레위인들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70인역에서는 5b-37절을 에스라의 기도문으로 이해하지만, 레위인들의 기도로 보는 것이 정황상,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주도적인 참여를 강조하는 9-10장의 문맥상 더 적절해 보입니다. 레위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화로운 이름에 대한 송축으로 시작합니다(5c).

 

(2)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6)

 

성경에서 이름은 ‘존재 자체’를 나타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으로 영광 가운데 임하십니다. 백성들이 여호와를 송축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세상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6). 6a절의 고백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는 문자적으로는 ‘당신 그분은 홀로 여호와시라’입니다. 이것은 여호와만이 참 신이라는 유일신 신앙의 고백이며(신명기 6:4), 여호와의 독특성과 초월성에 대한 표현입니다(참조, 이사야 44:6,8; 45:6,21-22; 46:9). 하나님을 송축하는 대상에는 하나님의 천사들도 포함되는데, 그 이유는 그분이 하늘과 땅과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6b).

 

(3)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7-8)

 

레위인들의 기도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에 대한 회고로 이어집니다(7).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앞으로 전개될 이스라엘의 구원을 준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이 충성됨(혹은 신실함)을 보셨다.’(8a)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며(창세기 12:1-4; 히브리서 11:8),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창세기 12:78; 13:18). 본문은 아브라함이 신앙을 이스라엘이 따라야 할 본으로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8b절은 땅에 대한 약속이 아브라함의 후손(그의 씨)에게 한 약속임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여기서 언급한 것은 귀환 공동체가 가나안 땅을 차지할 자격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심으로 자신의 신실하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주는 의로우심이로다’(8c)는 이것을 의미합니다. 레위인들은 아브라함의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이 동일하게 자신들에게 임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회개와 참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금식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강화하며,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변화를 이루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 장은 우리의 실수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의미 있는 순간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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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08-01)

 


이스라엘 집회를 모인 느헤미야

느헤미야 8장 1-18절


 

신앙생활은 곧 말씀 생활입니다. 기도와 찬양, 섬김과 나눔 등 우리 신앙에 중요한 항목들이 많이 있지만, 모든 것의 근본에는 말씀이 있습니다. 쥬의 백성으로서 말씀을 대하는 우리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각기 성읍에 거주하던 백성들이 일곱째 달 초하루에 율법을 듣기 원하여 예루살렘 성의 수문 앞 광장에 모여듭니다. 학사(서기관) 에스라는 그들의 요청에 따라 율법책을 가져와 수문 앞 광장에서 낭독합니다. 레위인들이 에스라가 읽은 말씀의 뜻을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깨닫게 하자 백성들은 애통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첫 번째 집회(1-12)

말씀은 준비되었지만, 마음 밭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버려지는 말씀이 더러 있습니다. 말씀은 들을 때는 귀도, 마음도 열어야 합니다. 마음이 준비된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서 감동되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을 열어 선포되는 말씀을 받을 때, 손을 들어 ‘아멘’,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1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7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12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1-12)

 

본문은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모여와 성전 앞 광장에서 성경을 듣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임은 스스로 도덕적으로 살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1) 역사적 배경(1)

 

8-10장 단락은 귀환 공동체의 수문(Water Gate) 앞 광장에서의 집회와 언약 갱신 의식을 다룹니다. 단락 전체의 흐름은 율법 선포(8) → 회개와 고백(9) → 언약 갱신(10)으로 성전과 성벽 재건 이후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 중 8장은 첫 번째 집회인 율법 낭독과 해석(81-12) 그리고 두 번째 집회인 초막절 의식(8:13-18)으로 구성됩니다. 귀환 공동체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성벽을 재건하므로 어느 정도 안정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제 언약을 갱신하고 공동체 내의 회복과 부흥을 기할 단계가 되었습니다. 일곱째 달이 이르자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입니다(1a). 그리고 함께 모인 백성들은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 낭독을 부탁합니다(1b). 특별한 점은 이 모임이 지도자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1b,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이후에도 모든 백성이라는 용어는 8장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1,3,5,6,9,11,12), 저자는 이를 통해 공동체의 연대감을 강조합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모세의 율법은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기능을 합니다.

 

(2) 율법 낭독(2-6)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모든 사람 앞에서 율법책을 낭독합니다(2). 일곱째 달 초하루는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절입니다(참조, 레위기 23:24). 백성들은 한 해를 말씀으로 시작하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토라(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세우기 원하는 귀환 공동체의 열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율법을 듣는 대상에 남자 어른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되고 있는 것도 이것을 보여줍니다(2b,3).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가 읽어주는 율법에 귀를 기울입니다(3b). 이때 에스라는 여러 명의 조력자들(제사장들 혹은 레위인들)과 함께 나무 강단 위에 서서 율법을 낭독합니다(4). 율법 책을 펼 때 모든 백성이 일어서는 것은 전적인 순종을 다짐하는 행동입니다. 율법 낭독은 하나님께 대한 송축과 회중의 응답으로 진행되는데, 모든 백성은 동의의 표시로 손을 들어 아멘으로 화답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6). 얼굴을 땅에 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3) 율법 해석(7-12)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할 때, 레위 사람들이 회중에게 말씀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강단에 에스라와 함께 섰던 조력자들은 율법의 한 부분씩 교대로 낭독하고, 열세 명의 레위인들은 율법이 낭독될 때 회중 사이를 다니면서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합니다(7).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살았던 귀환민들은 페르시아의 공용어인 아람어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기록된 율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역이 필요했습니다. 이 역할을 레위인들이 맡았는데, 율법에서 강조한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입니다(신명기 33:10; 역대하 17:7-9; 35:3), 레위인들은 에스라가 낭독한 율법을 해석하고 백성들에게 그 의미를 깨우쳐주자(8), 백성들은 애통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9a). 지금까지 율법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탄식의 눈물입니다. 그렇지만 수문 앞 광장 집회가 열린 날은 나팔절로 이날은 ‘여호와께 거룩한 날’이요(레위기 23:24),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는 날’(신년축제)입니다(참조. 민수기 29:1-6; 신명기 12:12; 16:11). 여기에 근거해서 느헤미야 에스라, 레위인들은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성일에 슬퍼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9). 느헤미야는 슬퍼하는 대신 ‘살진 것’과 ‘단 것’을 먹고 공동체와 함께 즐거워하도록 지침을 내립니다(10). 느헤미야는 그러면서 그들이 슬퍼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합니다(10b). 지금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즐거워할 때라는 것이다. 백성들은 곧바로 깨달은 말씀을 실행에 옮깁니다(12). 이처럼 수문 앞 광장의 집회는 말씀을 듣고 깨달은 말씀을 실행에 옮기는 영적 각성 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초막절 의식과 여덟째 날 성회(13-18)

말씀 생활의 열매는 실천입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귀하지만, 실천되지 않는다면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과 같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백성에게 주께서 임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를 통해 말씀이 선포될 때, 온 백성이 마음 모아 실천합니다.

 

13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14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15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한지라 16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17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18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13-18)

 

에스라가 모든 백성에게 율법을 낭독해준 다음 날,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율법의 말씀을 더 깊이 알기 위해 에스라에게 찾아옵니다(13). 그리고 그들은 말씀을 읽는 중에 초막절 규례를 접하게 됩니다(그들이 읽은 본문은 아마도 레위기 23장이었을 것이다). 레위기 규정에 의하면, 초막절은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지키도록 되어 있고(레 23:34), 초막절이 끝난 다음 날 ‘성회’로 모여야 합니다(레위기 23:36). 고대 이스라엘에서 초막절은 일종의 감사제의 성격을 지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첫 번째 감사의 조건은 1년 동안 풍성한 수확을 주신 것이다. 초막절은 가을 추수를 기념하는 절기이며, 초막절을 지킴으로 한 해의 모든 추수가 종결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막절은 이스라엘에 가장 성대하게 지키는 절기입니다(참조, 민수기 29장: 초막절 때 드리는 제물의 양), 또 하나 감사의 조건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초막절은 광야 시절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회상하는 기간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 기간 동안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가지와 시내 버들을 가져다가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지내야 합니다(레위기 23:40-42).

에스라를 찾아온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이 규정에 따라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곳곳에 초막을 짓습니다(16a). 초막을 짓는 장소는 가옥의 지붕 위나 뜰안, 성전 뜰, 수문 광장, 에브라임 문 광장입니다(16b). 추측건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지붕 위나 그 주변에 초막을 설치했을 것이고,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은 성전 뜰이나, 수문 근처,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 등에 초막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백성들이 규정에 따라 함께 초막절을 지킨 일은 여호수아 때 이후로 없었던 일이라고 강조합니다(17b). 이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부터 줄곧 초막절 규례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여호수아 시대를 언급함으로 이 사건을 여호수아 당시 행했던 언약 갱신 의식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참조. 여호수아 5-8장). 이것은 에스라-느헤미야서가 포로에서의 귀환을 제2의 출애굽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느헤미야 문맥에서는 10장의 언약 갱신 의식을 준비하는 기능을 합니다. 18절은 에스라가 초막절 기간 동안 매일 모세의 율법책을 백성들에게 낭독했음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면제년의 초막절 언약 갱신 의식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참조, 신명기 31:10-13), 백성들은 끝으로 규례에 따라 일주일 동안 초막절을 지키고 여덟째 날 성회를 연다(참조, 레위기 23:36).

율법을 존중하는 일에 지도자와 백성들 모두가 뜻을 같이합니다. 주석가들은 이 모임이 성전에서 제사장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문 앞 광장에서 백성들이 주도하여 율법학자 에스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모임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후로 종교 생활의 축은 제사에서 율법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귀환 공동체는 수문 앞 광장의 말씀 부흥을 통해 ‘토라 공동체’로서 기초를 다지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제의의 중심인 것처럼 율법(토라)은 귀환민들의 삶과 정신에 있어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경외하고,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배우며, 깨달은 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 말씀의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과 교회의 모습이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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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07-01)


성전 재건에 참석한 명단을 파악한 느헤미야

느헤미야 7장 5-73절


 

성경을 읽을 때 가장 힘든 부분 가운데 하나가 계보입니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가 지속하는 반복을 인내하며 읽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보도 주의 말씀이고, 그 안에도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계보를 통해 선포하는 진실은 무엇입니까?

 

  • 예루살렘 성벽이 거의 다 완성되어 가자 대적들은 다른 방법으로 성벽 재건을 중단시키려고 시도합니다. 산발랏과 게셈은 느헤미야를 오노 평지의 한 촌으로 유인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도비야와 산발랏이 스마야에게 뇌물을 주고 거짓으로 예언하게 하여 느헤미야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시도합니다.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5-73)

 

먼저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확인합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은 먼 이국땅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사라진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속적으로 회복을 약속하셨는데, 때가 되매 이루십니다. 오늘 계보가 그 증거입니다. 주님은 주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5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6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와 각기 자기들의 성읍에 이른 자들 곧 7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와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 8바로스 자손이 이천 백칠십이 명이요 9스바댜 자손이 삼백칠십이 명이요 10아라 자손이 육백오십이 명이요 11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팔백십팔 명이요 12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13삿두 자손이 팔백사십오 명이요 14삭개 자손이 칠백육십 명이요 15빈누이 자손이 육백사십팔 명이요 16브배 자손이 육백이십팔 명이요 17아스갓 자손이 이천삼백이십이 명이요 18아도니감 자손이 육백육십칠 명이요 19비그왜 자손이 이천육십칠 명이요 20아딘 자손이 육백오십오 명이요 21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팔 명이요 22하숨 자손이 삼백이십팔 명이요 23베새 자손이 삼백이십사 명이요 24하립 자손이 백십이 명이요 25기브온 사람이 구십오 명이요 26베들레헴과 느도바 사람이 백팔십팔 명이요 27아나돗 사람이 백이십팔 명이요 28벧아스마웻(벧아스마웨ㅅ) 사람이 사십이 명이요 29기럇여아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사람이 칠백사십삼 명이요 30라마와 게바 사람이 육백이십일 명이요 31믹마스 사람이 백이십이 명이요 32벧엘과 아이 사람이 백이십삼 명이요 33기타 느보 사람이 오십이 명이요 34기타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35하림 자손이 삼백이십 명이요 36여리고 자손이 삼백사십오 명이요 37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칠백이십일 명이요 38스나아 자손이 삼천 구백삼십 명이었느니라 39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칠십삼 명이요 40임멜 자손이 천오십이 명이요 41바스훌 자손이 천이백사십칠 명이요 42하림 자손이 천십칠 명이었느니라 43레위 사람들은 호드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사 명이요 44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백사십팔 명이요 45문지기들은 살룸 자손과 아델 자손과 달문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디다 자손과 소배 자손이 모두 백삼십팔 명이었느니라 46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47게로스 자손과 시아 자손과 바돈 자손과 48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살매 자손과 49하난 자손과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50르아야 자손과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51갓삼 자손과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52베새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비스심 자손과 53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54바슬릿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55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56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느니라 57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소베렛 자손과 브리다 자손과 58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59스바댜 자손과 핫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몬 자손이니 60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이었느니라 61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돈과 임멜로부터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들의 종족이나 계보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거할 수 없으니 62그들은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모두가 육백사십이 명이요 63제사장 중에는 호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의 하나로 아내를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으로 불린 자라 64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65총독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66온 회중의 합계는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67그 외에 노비가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그들에게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사십오 명이 있었고 68말이 칠백삼십육 마리요 노새가 이백사십오 마리요 69낙타가 사백삼십오 마리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 마리였느니라 70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하여 보조하였고 총독은 금 천 드라크마와 대접 오십과 제사장의 의복 오백삼십 벌을 보물 곳간에 드렸고 71또 어떤 족장들은 금 이만 드라크마와 은 이천이백 마네를 역사 곳간에 드렸고 72그 나머지 백성은 금 이만 드라크마와 은 이천 마네와 제사장의 의복 육십칠 벌을 드렸느니라 73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느니라(5-7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십니다. 계보를 읽기가 어려운 것은 대체로 남의 이름이고, 낯선 이름이고,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사자들에게는 그 어떤 본문보다 가슴 벅찬 본문일 것입니다.

 

(1) 첫 번째 귀환자들의 명단에 대한 소개(5-6)

 

성벽이 완공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집에 거할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감동으로’(5a) 유다에 거주하는 귀환민들의 숫자와 동향을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발견하게 됩니다(5b).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온 자’는 세스바살과 함께 바벨론에서 돌아온 1차 귀환민들을 가리킵니다. 느헤미야서의 저자는 이들의 목록을 이곳에 위치시킴으로써 1차 귀환민들과의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6절은 이 계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실체를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갔던 자들’ 중에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온 자들로 밝힌다. 에스라-느혜미야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정통성은 바로 이들을 통해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은 의도적으로 이들을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언급합니다(7b).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가리킵니다. 귀환민은 대부분 바벨론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들로 그곳 문화와 관습에 익숙해 있었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 삶의 터전을 떠난 사람들입니다(비교, 창세기 12:1).

 

(2) 포로에서 귀환한 지도자들의 명단과 일반 백성(7-32)

 

귀환자들의 명단은 귀환을 주도한 열두 명의 지도자들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7). 여기에 소개된 열두 명의 지도자들은 회복된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스룹바벨은 사로잡혀 간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역대상 3:19).

그는 세스바살과 함께 귀환했거나, 적어도 고레스 제위 기간에 유다에 도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그를 ‘여호와의 종’과 ‘인장’(印章)으로 소개하고(학개 2:23), 스가랴는 다윗의 후손인 ‘순’(싹)으로 언급하여(스가랴 3:8; 6:12) 메시아를 예표하는 인물로 소개합니다. 한편, 제사장 예수아는 바벨론 포로 이전 마지막 대제사장 요사닥의 아들입니다(에스라 3:2, 역대상 6:14). 따라서 맨 먼저 언급되는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각각 정치와 종교 면에서 귀환 공동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명단에 이어 일반 백성들의 목록이 소개됩니다. 이들의 이름은 귀환자들의 명단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합니다(전체 31절).

전체 내용은 소개하는 방식에 따라 가문별 목록(8-24절)과 성읍별 목록(25-38절)으로 구분합니다. 먼저 가문에 따른 소개는 바로스 자손으로 시작합니다(8). 바로스가 먼저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잘 알려진 가문인 것 같습니다. 이후로 가문들의 소개는 24절의 하립 자손까지 이어집니다(전체 인원 15,604명). 가문에 따른 소개 다음에 성읍 별 목록이 제시됩니다. 이 목록은 베들레헴 사람(26절)을 시작으로 스나아 자손(38절)까지 총 8,650명입니다. 이들을 지명에 따라 기록한 이유는 그들의 가계를 정확하게 밝힐 수 없거나 족보가 부정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이름과 더불어 일반 백성들의 이름을 나란히 소개하는 것은 성전 재건과 공동체 회복에 이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3) 제사장, 레위인, 성전 일꾼들의 숫자(39-60)

 

일반 백성들의 목록에 이어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목록이 제시됩니다. 제사장 중에는 가장 먼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의 숫자가 소개됩니다(39). ‘예수아의 집’으로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여다야 자손은 대제사장 예수아가 속했던 가문인 것 같습니다. 제사장들의 목록은 다윗 시대 24개의 가문과 달리 네 가문만 언급되는데, 아마도 제사장들 중 일부만 귀환길에 올랐으며, 다른 제사장 가문들은 훗날 귀환한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에스라 8:23). 귀환한 제사장들의 총수는 4,289명으로 전체 인원의 약 10분의 1에 해당합니다.

제사장에 이어 레위 사람들의 목록이 세 부류로 나뉘어 소개됩니다. 맨 먼저 등장하는 그룹은 호드야 자손 73명입니다(43). 다음으로 노래하는 자들인 아삽 자손으로 148명입니다(44). 이 들은 포로 이전에 주로 성전에서 예전 음악을 담당했던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138명의 문지기 자손들입니다(45).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을 레위 사람들과 구별해서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정식 레위인으로 분류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비교 느헤미야 11:19; 12:25; 역대상 9:17-32; 26:1-19).

레위인들의 전체 숫자는 제사장들의 숫자에 비해 훨씬 적습니다. 이것은 레위 자손들이 예루살렘 귀환에 소극적이었음을 반증합니다(참조. 에스라 8:15). 레위인들에 이어 46절부터는 성전의 일을 도왔던 사람들을 열거합니다. 이들은 느디님 사람들로 불리는데, 전체 35명의 이름들이 열거됩니다. 등장하는 이름들 가운데는 생소한 이름들이 있는데(시하[46], 하수바[46], 르신[50], 바르고스 [55], 시스라[55] 등), 이는 그들의 이방 배경을 암시합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느디님 사람들은 기브온 사람들과 연계되어 이스라엘의 노예들로 간주되거나(참조. 여호수아 9장), 일부는 전쟁 포로의 후예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민수기 31:25-47). 그렇지만 에스라-느헤미야서에서 느디님 사람들은 성전 봉사자들을 가리킵니다(에스라 7:24). 느헤미야 당시 이들 중 일부는 예루살렘 성벽 공사에 참여했으며(느헤미야 3:26) 율법 준수를 서약했던 사람들로 소개됩니다(느헤미야 10:28). 끝으로 57절의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은 솔로몬 당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이방 사람들의 후손들로(참조, 열왕기상 9:20-21), 느디님 자손과 함께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60) 후에 느디님 사람으로 동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4) 족보가 불분명한 사람들(61-65)

 

귀환민들 가운데는 델멜라, 델하르사, 그룹, 앗단, 임멜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61절). 이 지명들은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정착지로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안타깝게도 조상의 가문과 계보를 밝힐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64), 이 가운데는 제사장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63). 성전 제의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들의 제사장 직무는 정지되었고(64),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성물 먹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65).

귀환 공동체가 족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포로 이후 공동체 안에 남아 있던 이방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려 했기 때문입니다.

 

(5) 귀환민들의 총수, 족장들의 예물, 예루살렘 정착(66-73)

 

귀환민들의 숫자는 남종과 여종 7,337명, 그리고 노래하는 남녀 245명을 포함하여 총 49,942명입니다(66-67). 귀환민들이 돌아올 때 가축들을 데리고 왔다는 사실(68-69)은 그들이 경제적으로 상당히 윤택했음을 암시합니다. 에스라-느헤미야 문맥에서 이들의 귀환은 제2의 출애굽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계보는 지루하지도 메마르지도 않습니다. 그 안에 약속을 이루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도하심이 배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신다는 행복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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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06-02)


성벽을 완성 시키는 느헤미야

느헤미야 6장 15절-7장 4절


 

성벽 역사가 단 52일 만에 완공됩니다. 어려운 여건과 대적들의 방해에도 흔들림 없이 달려온 결과입니다. 대적들과 이방 족속들도 하나님께서 일하심과 그들과 함께하심을 깨닫고는 두려워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귀한 성취를 주실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 하나님의 도우심과 느헤미야의 지도력에 힘입어 드디어 성벽 공사가 52일 만에 기적적으로 완성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적들과 주위 민족들은 큰 두려움과 상실감에 빠집니다. 그들은 성벽 재건 공사 과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합니다. 성벽 공사에 이어 느헤미야는 성문을 달고, 성벽 경비 책임자를 세우는 등 성읍 경비에 관한 구체적인 절차를 진행해 나갑니다.

 

성벽 완공과 대적의 반응(15-19)

일이 완성되고 진척이 잘 되는 것은 일하는 사람의 능력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는 사역을 통해 찬송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140년 동안 재건되지 않는 성벽이 52일 만에 건축된 것을 보면서 원수들은 낙담하여 두려워 할 것이며,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15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16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17또한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18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19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내 말도 그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15-19)

 

성벽 공사의 완성을 소개하는 15-16절은 내용상 1절과 연결됩니다. 대적들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성벽 공사를 시작한 지 52일 만에 완공합니다.

본문은 그 시점을 엘룰 월 25일로 밝힙니다. 엘룰 월은 유대력으로 여섯째 달로 양력 8-9월에 해당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바벨론의 연대기를 근거로 이 날을 주전 445년 10월 2일로 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로 140여 년 동안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성벽 재건 사업을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100일도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이루어낸 것입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느헤미야가 그토록 짧은 시간에 큰일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의구심 때문에 요세푸스는 실제 소요된 공사 기간을 2년 4개월로 보도합니다(유대고대사 11.179). 그렇지만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할 때 우리는 본문의 사실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첫째, 3장의 자료를 근거로 볼 때, 중건한 지역은 주로 북쪽의 양문에서 남동쪽의 샘문까지의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루살렘 동쪽 지역은 보수에서 거의 빠져 있습니다. 여러 골짜기가 위치한 동쪽 지역이 크게 훼손되지 않아 공정의 상당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도착 직후 밤에 성벽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이것을 파악했을 것입니다. 둘째, 예루살렘 성벽이 학자들의 생각만큼 실제로 그렇게 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성벽의 둘레는 약 2.6킬로미터 정도로 추정됩니다. 셋째로 에스라 4:12에 의하면, 아닥사스다 시절에 예루살렘 성읍이 어느 정도 재건되고 있었기 때문에, 느헤미야의 재건 사업이 공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52일의 기간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본문은 이 일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본문이 52일이라는 숫자를 언급하는 것은 이것을 암시한다).

 

대적들의 반응(16-19)

세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한순간입니다. 그래서 방심은 금물입니다. 특히 성취의 기쁨이 충만할 때 그러합니다. 느헤미야는 끝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습니다. 성문 관리를 통해 백성이 지속적으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6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17또한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18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19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내 말도 그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16-19)

 

성벽 재건 공사가 완공되었다는 소식은 대적들과 이방 족속들에게 두려움과 낙담을 안겨주었습니다(16).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다’(16a)의 표현은 대적들이 느끼는 절망감을 잘 표현해 줍니다.

정치적인 배경에서 보면,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공사는 페르시아 제국의 요새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강 서편 지역이나 이집트의 지속적인 반란, 그리고 그리스의 유다 지역(예후드) 침공의 가능성으로 인해 페르시아는 팔레스틴 지역을 안정시키고 유다를 요새화할 필요를 느꼈고, 그 책임자로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에 파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의 요새화는 주변 지역, 즉 사마리아, 암몬, 아라비아 지역의 영향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산발랏을 비롯하여 주변의 총독들과 민족들이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공사를 중단시키려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귀환 공동체와 함께함으로 대적들의 음모와 방해 공작을 무력화했습니다. 그리고 대적들은 공사가 그토록 빨리 진행된 배경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손길이 함께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16b). 결국 대적들의 방해가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귀환 공동체와 주변 백성들에게 알리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17-19절은 성벽 공사의 완공으로 대적들의 공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성벽 공사는 완성되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참조. 7:1-4). 17a절의 그 때에는 앞의 내용과 관련하여 어느 부정확한 시기를 가리킵니다. 즉 성벽 공사가 완공된 이후에도 대적자들이 다시 느헤미야를 모함하려고 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대제사장을 비롯해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돈독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참조 13:4). 도비아와 유다의 귀족들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었습니다(17).

본문은 이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의 배경에 도비야가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맺은 혼인 관계가 자리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그는 스가나의 사위였고, 그의 아들 여호하난도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18b). 도비야는 그 외에도 많은 유다 사람들과 정치·경제적인 동맹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혹자는 예루살렘에 도비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그룹이 존재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19a)라는 말은 이 견해를 지지한다. 이들은 아마 주변국들과 경제적인 교류를 맺는 등 개방 정책을 지향함으로 느헤미야의 지도력과 갈등을 빚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비야는 자신이 맺고 있는 유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최대한 이용해서 느헤미야를 어려움에 빠뜨리고자 시도한 것입니다(18b).

 

성읍 경비의 지도자들을 세움(7:1-3)

공동체의 본질은 명성이나 조직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과 사역할 수 있도록 배려에 최선을 다해 나가야 합니다. 지도자는 적절한 은사와 자격을 갖춘 사람을 적소에 두어 공동체를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느헤미야는 사람들은 적절하게 잘 배치하고 있습니다.

 

1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2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3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1-3)

 

성벽 공사가 완성된 후에 느헤미야는 마지막 남은 공사인 성문에 문짝을 다는 일을 마칩니다(1a). 그렇다고 해서 성벽 재건의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을 잘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 느헤미야는 성전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웁니다(1). 아직도 대적들의 위협이 상존하는 만큼 예루살렘의 경계를 지속할 필요가 있었다. 느헤미야는 앞으로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 세부적인 방어 체계를 확립한다. 그는 자신의 동생인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인 하나냐를 예루살렘 성읍의 경비 책임자로 세웁니다(2a). 느헤미야는 자신의 동생 하나니를 책임자로 세운 이유를 밝히는데 그가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 본을 보였기 때문입니다(2b). ‘충성스러운 사람’은 그가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있을 만큼 신실한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니에 대해 별도의 소개를 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유다 공동체에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문 경비와 관리에 대한 지침을 하달합니다(3). 그것은 해가 환하게 뜨기 전까지는 문을 열지 않고, 파수할 때에는 문을 닫고 성문에 빗장을 지르는 것입니다(3a). ‘파수할 때에 문을 닫는 것’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성문을 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지시한 이유는 대적들의 위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함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주민도 경비를 서는 일에 참여하도록 하고, 성벽 접경지역 주민들은 자기 집 맞은편 성벽을 경비하도록 지침을 내립니다(3b).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을 지키는 일에 책임감을 갖고 참여하도록 한 것입니다.

 

거주민 소집의 필요성과 준비(7:4)

기도하지 않을 때 비열해지고 탐욕의 노예가 되며 망상에 빠지게 됩니다. 바른 신앙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동으로 세상의 것들이 단절되어 집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사역을 이루어 나갈 때, 세미한 것까지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4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4)

 

성벽이 완공되고 경비 체계가 확립됨으로 예루살렘 성읍은 드디어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도성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이 파괴된 지 약 140여 년 만의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었고 가옥도 부족한 상태였다는 점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대적들의 위협이 건재한 상태에서 안전상의 이유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게다가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공사가 끝난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서 성읍의 인구는 더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거주민의 숫자를 늘려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귀환민들의 계보와 숫자를 파악하게 합니다. 느헤미야는 전체를 볼 줄 아는 포괄적인 안목과 더불어 세밀한 부분까지 살피는 섬세함을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성숙함은 성취의 순간에 더욱 빛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방심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다음 단계 일꾼을 준비합니다. 이렇게 성숙한 일꾼들이 많이 나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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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06-01)


옴모와 모함 속에서 승리한 느헤미야

느헤미야 6장 1-14절


산발랏 무리가 느헤미야를 해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상의하자며 평지로 불러내어 죽이려 하고, 실패하자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선지자를 매수하여 함정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이 모습을 통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 예루살렘 성벽이 거의 다 완성되어 가자 대적들은 다른 방법으로 성벽 재건을 중단시키려고 시도합니다. 산발랏과 게셈은 느헤미야를 오노 평지의 한 촌으로 유인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도비야와 산발랏이 스마야에게 뇌물을 주고 거짓으로 예언하게 하여 느헤미야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시도합니다.

 

상황 설명(1)

대적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대적들은 자기 원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무너질 때까지 음모를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공격합니다. 유다가 점점 회복되어 가는 것을 저해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대적들은 지도자인 느헤미야를 먼저 처리하려 했습니다.

 

1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1)

 

느헤미야와 백성들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성벽 재건공사가 많은 진척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문에 문짝을 다는 일만 남겨놓은 상태입니다(1b). 주위의 대적들, 즉 산발랏,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나머지 원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해서든 진행 중인 작업을 중단시키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고고학적 자료에 ‘게델의 왕(총독)’이라는 칭호로 소개되고 있어 당시 팔레스틴 남부와 델타 지역까지 흩어져 살고 있던 게델 민족들(연합족속)의 총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 재건으로 인한 유다의 요새화는 사마리아, 암몬, 아라비아 지역의 영향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총독들이 연합하여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공사를 중단시키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왜 게셈이 느헤미야의 일에 참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1b절의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은 이들에게 동조한 사람들인 암몬과 아스돗 사람들을 가리킵니다(참조 4:7).

 

산발랏과 게셈의 음모(2-9)

성벽을 쌓는 일도, 공동체를 세우는 일도 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젠 다 됐다고 마음을 놓을 만한 때부터 방해와 위협은 더 교묘해지고 거세집니다. 성벽을 틈새 없이 잘 쌓았듯이 마음에도 악이 들어올 만한 조그마한 틈새도 허락하지 않아야 합니다. 느헤미야에게는 대적들은 매우 집요하게 공격해 옵니다.

 

2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3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4그들이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사람을 보내되 나는 꼭 같이 대답하였더니 5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는데 6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7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지금 이 말이 왕에게 들릴지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8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9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2-9)

 

성벽 재건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자 산발랏과 그 일당은 전략을 수정하여 공격의 대상을 전적으로 느헤미야 한 개인으로 집중시킵니다(3-4장에서는 성벽의 건축자들을 향했다). 그리고 대적들의 방해도 더욱 교활하고 치밀한 방식으로 바뀌어갑니다(지금까지의 방법은 조소, 공갈, 협박 등이었다). 산발랏과 게셈은 느헤미야에게 사람을 보내 오노 평지의 한 마을에서 만날 것을 제안합니다(2a). 오노 평지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25마일쯤 떨어져 있는 지역으로 사마리아(산발랏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와 아스돗(블레셋 지역)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산발랏과 게셈이 오노 평지를 선택한 이유는 그 지역이 산발랏의 고향(벧 호론)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이거나 중립 지역이기 때문에 느헤미야를 안심시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평화 회담을 제안한 것처럼 위장해서 느헤미야를 은밀히 해치려 했습니다(2b).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이들의 회담 제의를 즉시 거절합니다(3a). 공사의 완공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3a) 책임자인 자신이 현장을 떠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3b). 느헤미야의 말(3c)로 추측해볼 때, 느헤미야는 이들의 제안에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발랏과 게셈은 포기하지 않고 네 번이나 느헤미야에게 초청장을 보내지만(4), 느헤미야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느헤미야가 응하지 않자, 산발랏은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 번에는 신하를 시켜 느헤미야에게 ‘봉하지 않은 편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5). ‘봉하지 않은 편지’는 누구나 읽어 볼 수 있는 흑색선전용 편지를 말합니다. 봉하지 않은 편지를 사용한 것은 느헤미야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이번에는 유언비어를 이용해서 성벽 재건을 중단시키려는 것입니다. 편지 내용에 의하면, 느헤미야가 유대인의 왕이 되고자 아닥사스다 왕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느헤미야가 응하지 않자, 산발랏은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 번에는 신하를 시켜 느헤미야에게 '봉하지 않은 편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5). ‘봉하지 않은 편지’는 누구나 읽어볼 수 있는 흑색선전용 편지를 말합니다. ‘봉하지 않은 편지’를 사용한 것은 느헤미야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이번에는 유언비어를 이용해서 성벽 재건을 중단시키려는 것입니다. 편지 내용에 의하면, 느헤미야가 유대인의 왕이 되고자 아닥사스다 왕에게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이 유다와 이방 사람들 가운데 떠돌고 있다는 것입니다(6). 이미 느헤미야가 예언자들의 지원 아래 유다 왕으로 즉위할 준비를 마쳤다는 것입니다(7a). 아닥사스다 왕에게 편지를 써서 유다 지도자를 참소하는 것은 수년 전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예루살렘 재건 공사를 멈추기 위해 사용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참조 에스라 4:7-16), 산발랏은 아닥사스다 왕이 강 건너편 영지의 불안정한 정세에 매우 민감하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발랏은 이 소문이 머지않아 아닥사스다 왕에게 알려질 수 있음을 알리면서, 함께 만나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합니다(7b). 그렇지만 느헤미야의 반응은 단호합니다. 그 소문이 산발랏이 지어낸 허구라고 하면서 산발랏의 제안을 묵살합니다(8b). 느헤미야는 이미 산발랏이 자신과 유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어 공사를 중단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입니다(9b). 느헤미야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9b).

 

도비야와 거짓 예언자들의 음모(10-13)

‘믿는 도끼에 발등 찍는다.’는 말은 가장 신뢰할 만한 사람들에게 속을 때 하는 말입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일을 막는 경우가 있어서 가장 힘들게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겸손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10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 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그가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11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12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13그들이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10-13)

 

느헤미야를 해하려 한 음모가 수포로 돌아가자 대적들은 내부의 인물들(스마야와 여선지 노아댜)을 통해 느헤미야를 제거하려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도비야의 이름이 먼저 언급된 것으로 보아(12b), 이번에는 도비야가 주도적으로 행동한 것 같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당시 유다의 지도층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참조, 느헤미야 13:4-5, 28). 도비야는 예루살렘 제사장들과 유대 관계에 있는(참조. 13:4) 자신의 위치를 활용해서 느헤미야와 제사장 그룹을 이간시키려고 합니다. 도비야는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스마야라고 하는 사람을 시켜서 느헤미야를 성전으로 유인하려고 합니다. 스마야의 정체에 대해서 본문이 침묵하지만, 문맥상 성전 예언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12b). 10b절의 스마야의 말은 예언자의 선포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느혜미야는 스마야가 두문분출하자 그를 찾아갑니다(10a). ‘두문불출하다’는 다양한 의미(‘감금하다’, ‘저지하다’, ‘억제하다’)로 사용되기 때문에 ‘스마야의 두문불출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 치는 않습니다. 정황상 스마야가 예언자적 황홀경 상태에 있는 것을 가장해 느헤미야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혹자는 스마야의 행동이 느헤미야의 위험을 알리는 행위예언으로 보기도 합니다. 느헤미야가 소문을 듣고 스마야를 찾아오자, 스마야는 느헤미야에게 대적들의 암살 음모를 알리며 성전에 숨어 있을 것을 제안합니다(10b).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곧 스마야의 예언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스마야의 제안을 거절합니다(11). 느헤미야는 자신이 성전에 숨을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합니다(11a).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라는 말은 ‘사명을 맡은 자가 자신의 신병을 위해 그 자리를 피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는 말은 제사장이 아닌 자가 성전에 들어감으로 제의 규정을 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비록 총독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제사장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스마야가 종교적인 규율을 어기도록 하면서까지 성소로 은신하게 하려는 것을 보고 그의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확신한 것 같습니다. 결국 스마야가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자신을 속이려고 했다는 것이 느헤미야에게 알려지게 됩니다(12b). 느헤미야로 하여금 제의 규정을 어기도록 해서 제사장들의 적대감을 사도록 의도했던 것 같습니다(13).

 

느헤미야의 기도(14)

 

이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세상의 게략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진실하고 순결하되, 하늘의 지혜로 무장해야만 합니다. 느헤미야는 교만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14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14)

 

이번에도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대적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깁니다(참조, 로마서 12:19). 여기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던 느헤미야의 신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서 느헤미야는 자신을 공격하는 일에 가담했던 여 선지자 노아댜와 다른 선지자들을 언급합니다(14b). 산발랏, 도비야, 게셈의 위협이 외부로부터의 공격이라면, 여선지자 노아댜와 성전 내 거짓 선지자들은 내부의 적들입니다. 대적들은 페르시아 왕의 재가로 시작된 성벽 재건 공사를 공식적으로 방해하는 데 한계가 있어 공동체 내부 인사들과 연계하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안팎의 방해 세력과 싸웠던 것입니다. 꿋꿋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맡은 일을 이루어가는 느헤미야의 지도력이 돋보입니다.


주의 일꾼은 순결하되 순전해서 안 됩니다. 지금도 악의 세력은 거룩한 사역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악한 세력을 물리칠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순결하면서도 지혜로움이 탁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주의 일꾼들에게 그러한 지혜롭고 순결한 모습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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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05-02)


예루살렘 공동체를 세우는 느헤미야

느헤미야 5장 6-19절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시대 앞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갈등 구조를 낳은 이기주의에 대해서 느헤미야처럼 거룩한 의분을 갖는 것입니다. 거룩한 의분을 가지고 시대의 어려움, 또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잘못했을 때 느헤미야처럼 권면하는 사람이 일어나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에게 행한 일이 있고 유대민족 전체 공동체가 한 일이 있습니다.

 

  • 본문은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시작하고 찾아온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경제적인 불평등으로 인해 동족들 사이에 생긴 위기 상황에 느헤미야는 분노합니다.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즉흥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 지혜롭게 처리합니다. 먼저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율법에 따라 동족들로부터 이자를 받지 않기로 맹세하게 합니다. 느헤미야는 12년의 유다 총독 재임 기간 동안 총독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하고 백성들을 섬기는 일에 모범을 보였습니다.

 

느헤미야의 공적인 개혁(6-13)

지도자는 공동체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시해야 합니다. 지도자들 가운데는 공동체의 문제를 드러내기보다 덮어두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비겁함이고 개으름입니다. 지도자는 문제를 직시합니다. 느헤미야는 금전 문제로 유대인 공동체에 일어난 문제를 직시하고 아픈 마음으로 해결책을 찾습니다.

 

6○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7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8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9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10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11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 12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그 말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하고 13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6-13)

 

느헤미야는 입술의 회개만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르는 회개를 요구합니다. 그 예로 이제 이자 받기를 그치고 받은 이자는 돌려주자고 제안합니다. 백성은 이 제안을 수용하고 제사장은 이 맹세의 증인이 됩니다. 맹세를 어기면 저주를 받을 것이란 말씀에도 ‘아멘’으로 화답하여 단호하게 실천을 다짐합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1) 느헤미야의 분노(6)

 

6-10절 느헤미야의 분노와 귀족들과 민장들에 대한 질책 성벽을 재건하는 동안 발생한 예기치 않은 위기 상황에 느헤미야는 지혜롭게 대처하여 오히려 내부의 문제를 돌아보고, 더 나아가 공동체 연합을 도모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느헤미야는 부자들의 탐욕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의 울부짖음과 동족들 사이에 생긴 위화감에 분노로 반응합니다(6).

 

(2) 귀족들과 민장들에 대한 질책(7-10)

 

느헤미야는 거룩한 공동체가 세워져 가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연합을 위협하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행동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즉각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대신, 먼저 조용히 대안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7). 이것은 즉흥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매사에 계획성을 갖고 행동하는 느헤미야의 인물됨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지도자들을 불러 그들의 책임을 추궁합니다. 여기에서 ‘귀족들과 민장들’은 성벽 공사에 함께 참여한 공동체의 지도자들입니다(4:14,19). 그들의 잘못은 형제들에게서 높은 이자를 취했다는 것입니다(7). 느헤미야는 그들의 행동을 ‘형제를 파는 행위’로 간주하면서 강한 어조로 비판합니다(8).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 받는 것을 금지합니다(출 22:25; 레 25:35-38; 신 23:19-20;24:10-13). 그 근거는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가족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느헤미야는 거듭 귀환민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귀환민들이 회복된 이스라엘이라는 인식이 자리합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귀환민들은 언약 공동체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9).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하나님 앞에서의 삶). 그리고 그 삶은 지금이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형제들에게 돈과 양식을 빌려주고 이자 받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느헤미야는 자신의 사례를 들어 백성들에게 돈과 곡식을 빌려준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느헤미야 자신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돈과 곡식을 빌려주었지만, 이자를 받지 않았음을 알립니다(10). 느헤미야는 스스로 본을 제시하면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문제 해결에 동참하기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3) 구체적인 해결책 제시(11-13)

 

느헤미야는 이어서 백성들에게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만약 동포들에게 돈을 꾸어주며 부동산(밭, 포도원, 감람원, 집)을 담보로 잡았으면 당장 돌려주고 이자(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1/100)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11). 여기에서 1/100은 월 1%나 연 12%의 이자를 의미합니다. 느헤미야의 권고에 대해 백성들은 즉각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12a). 즉, 이자도 받지 아니하고 담보로 잡은 것도 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 말을 이자와 더불어 모든 빚을 탕감해주는 것으로 해석하여 ‘돌발적인 희년’의 상황이 발생한 것으로 해석합니다(Blenkinsopp). 느헤미야는 이들이 후에 마음이 변해 자신들이 한 약속을 어길 것을 염려하여 제사장들을 불러(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합니다(12). 이것은 하나님을 이 약속의 증인으로 세우는 의미를 지닙니다. 느헤미야는 이어서 그들이 만약 자신들이 한 약속을 어길 경우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것을 경고합니다(13a). ‘옷자락을 터는 것’은 이 약속을 어긴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저주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Breneman; 참조. 행 18:6). 이에 대해 그 자리에 있는 회중은 모두 ‘아멘’으로 화답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본문(13b)은 백성들이 자신들이 말한 대로 실천했음을 알립니다. 느헤미야의 지도력이 빛을 발하는 장면입니다. 느헤미야는 허물어진 성벽과 함께 금이 간 공동체의 장벽도 보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서는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집(성전)을 세우는 일’임을 강조합니다.

 

느헤미야의 개인적인 모범(14-19)

우리의 영원한 지도자이신 주님께서는 먼저 걸어가신 길입니다. 죄 문제를 분명히 지적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주셨습니다. 주님 닮은 귀한 지도자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강압이 아니라 솔선수범으로 백성을 움직이는 지도자가 참된 지도자입니다.

 

14○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15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16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17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18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19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4-19)

 

느헤미야와 동료들은 바벨론에 유배 중이던 자들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는데, 지도자들은 도리어 돌아온 자들을 다시 종으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며, 대적들의 비웃음을 살 만한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고 우리끼리 사랑하지 못하면서 화평의 복음을 전하면 세상이 믿을 리 없습니다.

 

(1) 느헤미야의 사역 회고(14)

 

이 단락은 느헤미야가 총독 재임 기간에 보여준 지도력을 보여줍니다. 앞에서 다룬 내용이 성벽 재건 때의 위기에 대한 느헤미야의 대응이라면, 이후의 내용은 12년의 총독 재임 기간 동안 느헤미야가 보여준 모습을 소개합니다. 이 단락은 후에 느헤미야가 앞에서 언급한 사건을 회고하면서 기록한 부분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느헤미야는 앞 단락에서 자신과 백성들이 한 맹세(12)를 스스로 어떻게 지켜 나갔는지를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아닥사스다 왕의 임명을 받은 총독으로서 예루살렘을 찾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합니다(14).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20년부터 32년(주전 445-433년)까지 12년 동안을 유다도 총독의 자격으로 사역하게 됩니다. 당시 페르시아의 총독은 많은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총독들은 이 세금을 가족들과 종들의 생계비와 외교적인 목적으로 사람을 접대하는 비용으로 사용했습니다(Breneman).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이 기간 동안 총독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이러한 특권을 기꺼이 포기했음을 밝힙니다(14b).

 

(2) 느헤미야의 섬김의 지도력(15-18)

 

느헤미야는 자신의 관리들과 함께 온 힘을 기울여 백성들의 성벽 재건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세금을 못 내거나 빚을 갚지 못할 때, 총독의 권한으로 그들의 땅을 구입하지도 않았습니다(16,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느헤미야의 이러한 통치 행위는 이전의 다른 총독들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양식과 포도주와 은 40세겔의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15). 은 한 세겔이 보통 노동자의 나흘 치 품삯인 것을 생각할 때, 은 40세겔은 상당한 액수입니다. 거기다가 총독 밑에 있는 신하들마저 백성들을 압제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임을 밝힙니다(15). 앞에서 느헤미야는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할 것을 권고했는데, 스스로 본을 보인 것입니다. 17절은 당시 느헤미야가 접대를 베풀었던 사람들을 밝히는데, 그들은 유다 사람들, 민장들 150명, 그리고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느헤미야에게 나아온 자들입니다. ‘주위에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은 페르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찾아온 관리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서는 매일 상당한 양의 양식이 필요했습니다(18). 그런데도 느헤미야는 이 모든 비용을 개인 재산으로 충당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한 이유는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우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18b).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에 힘써야 하는 상황에서 백성들이 세금에 대한 부담까지 지는 것은 너무 과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형편을 헤아리는 느헤미야의 세심한 마음이 느껴지는 부분입니다(참조, 요일 3:17). 느헤미야의 이러한 희생은 한편으로 백성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 그리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느헤미야는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 인물입니다.

 

(3) 느헤미야의 기도(19)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이 단락을 마칩니다(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이와 유사한 기도가 느헤미야서의 끝부분에도 등장합니다(13:31). 느헤미야의 기도는 일부 주석가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자기 의를 드러내거나 자신의 행동에 어떤 보상을 바라는 마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단지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일의 증인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McConville).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참조. 히 11:6).


느헤미야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지도자였다. 권력을 남용하는 이전 총독들과 달리 그는 백성이 질 부담을 염려하여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헌신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 백성의 재건이었지 자기 아성 쌓기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권한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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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04-01)


성벽 건축에 방해받는 느헤미야

느헤미야 4장 1절-5장 5절


 

거룩한 일일수록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 하여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재건도 마찬가지, 걸림돌을 넘어야 해고, 방해 세력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가 넘고 극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외적인 방해와 내적인 위기를 소개합니다. 1차 귀환 이후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대적들(그 땅의 백성들)의 반대가 있었듯 성벽 재건에도 산발랏과 도비야를 중심으로 한 적대자들에 의해 반대에 부딪힙니다. 외부세력의 방해와 더불어 공동체 내부의 갈등이 또 하나의 방해 요소로 등장합니다.

 

재적들의 반대(1-8)

승리를 위해 넘어야 할 첫 관문은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입니다. 비웃음은 식중독처럼 사람을 힘 빠지게 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예루살렘 재건을 방해한 첫 방법은 비웃음이었습니다. 사악한 비웃음을 앞에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비열한 비웃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의연한 기도뿐입니다.

 

1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2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3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4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5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6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7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8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1-8)

 

성벽 재건을 반대하는 세력의 중심인물로 산발랏이 등장합니다(1). 그는 귀환 공동체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성벽을 재건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와 조롱으로 반응합니다(1b), 히브리어 구문은 분노하는 동작을 묘사하는 두 개의 동사 연속적으로 사용하여 산발랏의 격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산발랏은 이전에도 암몬 사람 도비아와 함께 찾아와 느헤미아를 조롱하고 협박했던 인물입니다(참조 2:10,19). 산발랏은 자신의 군대(2a, ‘사마리아 군대')를 동원하여 군사적인 시위를 하며 위협을 가합니다(2), 산발랏에 이어 암몬 사람 도비야가 나서서 유다 사람들을 조롱합니다(3). 도비야는 유다 사람들과 그들이 하려는 시도(성벽 재건)를 비아냥거리며 조소하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위협과 조롱에 대해 느헤미야는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4).

느헤미야의 기도(4b-5)의 내용은 시편의 탄원시(시편 17, 54편)나 저주시(시편 35, 38, 39, 09, 83, 109, 137편) 혹은 예레미야의 기도(예레미야 11:18-20; 15:15; 17:18; 18:19-25)를 연상케 합니다.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조롱과 욕설이 그들에게 돌아가길 기도하면서(4),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 이 문제를 맡깁니다(5a).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동으로 간주합니다(5b), 대적들의 방해에도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공사를 진행해 나갔고, 짧은 시간에 상당한 진척을 이루게 됩니다(6).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간다는 소식을 들은 주위의 대적들은 다같이 모여 또 다른 음모를 꾸밉니다(7). 아라비아 사람, 암몬 사람, 아스돗 사람들도 대적들의 무리에 합류합니다(7). 이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해 있어(북쪽: 산발랏, 동쪽:도비 야와 암몬 사람, 남쪽: 아라비아 사람들, 서쪽:아스돗 사람들), 예루살렘이 대적들에 의해 사방으로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주위의 대적들은 모두 예루살렘 중심의 유다 공동체가 재건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곳을 치고 요란하게 할 것을 결의합니다(8). 조롱이나 협박만으로는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고, 직접 행동으로 성벽 재건을 저지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참조, 시편 2:2).

 

느헤미야와 공동체의 대응(9-23)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세력이 침공한다는 소문이 백성 사이에 펴져 나갑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지극히 크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람을 향한 두려움을 이기는 첩경은 하나님을 행한 두려움입니다.

 

9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10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11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12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13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14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15우리의 대적이 우리가 그들의 의도를 눈치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일하였는데 16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17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18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19내가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공사는 크고 넓으므로 우리가 성에서 떨어져 거리가 먼즉 20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21우리가 이같이 공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으며 22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23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9-23)

 

상황을 알아차린 느헤미야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고(9a), 곧바로 대응책을 강구합니다.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공격에 대비해 파수꾼을 세워 주야로 방비하게 합니다(9b). 한편 대적들의 계략이 알려지자 공동체 안에 동요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대적들이 금방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소식(11)은 공동체 내부에 위기의식과 좌절감을 불러일으켜, 백성들로 하여금 공사를 할 수 없다는 비관론에 빠지게 합니다(10b). 느헤미야가 상대해야 하는 대상은 이제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불평, 패배 의식, 내부 분열이라는 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두 차원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갑니다.

첫째는 다가오는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칼과 창으로 무장한 민병대를 편성하는 것입니다(13). 의도적으로 적들의 눈에 잘 띄는 곳인 성벽 뒤 낮고 넓은 장소에서 군대를 소집합니다. 둘째는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격려하고 믿음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14).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자신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그분만을 의지하여 싸우도록 합니다. 느헤미야는 지금 대적들을 상대로 거룩한 전쟁을 치를 군대를 소집한 것입니다(참조, 신명기 20장). 느헤미야의 전략은 즉각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대적들은 느헤미야의 신속한 대응으로 자신들의 시도가 실패할 것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계획을 철회합니다(15a). 본문은 이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음을 밝힙니다(15b). 이것은 이전에 느헤미야가 했던 기도의 응답이기도 합니다(참조 9). 이후에도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다양한 조치를 취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사병들)을 둘로 나누어 절반은 성벽 공사에 참여하게 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무장한 상태로 현장을 지키게 합니다(16),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도 무장한 상태에서 일하도록 하고(17a), 나팔수를 두어 위기 상황을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신호 체계를 세웁니다(20). 이것은 마치 옛적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거룩한 전쟁을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참조, 민수기 10장). 구약성경에서 나팔을 부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이며, 거룩한 전쟁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합니다(참조. 사사기 3:27). 나팔 신호를 통해 느헤미야는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그들의 싸움이 거룩한 전쟁임을 상기시키려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대응은 효과적이어서 전에 낙심했던(10b) 백성들이 이제 다시 일어나 공사에 참여하게 됩니다(21). 느헤미야는 그의 형제와 신하들과 더불어 공사를 마칠 때까지 옷을 입은 채 잠을 자고, 물을 길으러 갈 때도 무기를 지니고 다녔습니다(23). 이 단락에 묘사된 느헤미야의 대응 장면에는 거룩한 전쟁의 용어와 사상이 나타나 있는데, ‘대항할 능력이 없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백성들의 모습’(9-10),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대적들의 의도를 좌절시키는 장면’(15), ‘나팔을 불어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하는 것’(19-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다는 고백’(20b) 등입니다. 옛적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도력 하에 가나안 땅에서 거룩한 전쟁을 치름 같이 느헤미야는 귀환 공동체를 위협하는 대적들을 향해 거룩한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공동체 내의 위기(5:1-5)

승리로 가는 길에 꼭 필요한 것이 있으니,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는 각오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필요한 싸움이라면 피 흘려 싸우는 용기 있는 백성입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백성들은 한 손으로 일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병기를 잡았습니다. 경고의 나팔도 준비하여 언제든지 전투에 돌입할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1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2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3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4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5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1-5)

 

5장은 느헤미야와 귀환 공동체가 경험했던 또 하나의 위기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빈곤으로 인한 공동체 내부의 분열입니다. 4장이 공동체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하는 이야기라면, 5장은 공동체 내부의 위협을 극복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유다 지역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첫째는 당시 유다 지역의 흉년으로 인한 수확량 감소입니다(3). 느헤미야가 귀국할 당시 이미 흉년으로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는 주위 민족들의 적대감으로 인한 유다 지역의 고립입니다. 이로 인해 유다와 인근 지역 간 상거래가 일시적으로 중단되고, 이는 물자 부족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셋째는 공사 진행과 예루살렘 이주 정책(참조, 4:22)으로 인해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수확량 감소와 양식 부족 현상을 초래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부자들이 이런 상황을 악용하여 부를 증대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하면서 공동체 내부에 갈등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1). 여기에 ‘아내들’까지 나선 것은 당시 상황이 매우 심각했음을 의미합니다. 백성들이 원망한 ‘그들의 형제 유다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 있는 부유한 계층을 말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원망의 내용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됩니다. (1) 부양가족이 많은 백성들의 식량 부족 문제(2), (2)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밭과 재산을 저당 잡혀야 하는 경우(3), 세금 때문에 진 빚과 인신매매(4-5). 이러한 것들은 공동체 내부 결속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외부의 압력을 잘 이겨내며 과업을 진행하던 느헤미야에게 공동체 내분이라는 복병이 나타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사회-경제적 불평 등으로 생긴 내부의 불평, 원망의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내부의 갈등과 분열로 공동체가 큰 위기에 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길은 험난할 수 있지만, 그 길은 반드시 승리로 귀결됩니다. 그 길에 참여하는 자들은 비웃음과 두려움을 물리쳐야 합니다. 또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바쳐 싸울 각오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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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03-01)


백성들과 함께 재건하는 느헤미야

느헤미야 3장 1-32절


 

위대한 사역이 시작됩니다. 느헤미야와 함께한 백성이 팔을 겉어붙이고, 한 마음으로 성벽 재건에 나섭니다. 수많은 이름들이 각자에게 합당된 부분을 힘써 재건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주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 본문은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을 소개하는 기사로 성벽 재건 공사는 성벽 북쪽에 있는 ‘양문’에서 시작합니다. 성벽 재건 소개는 이어서 옛 문과 골짜기 문이 위치한 서쪽 성벽으로 옮겨갑니다. 남쪽 성벽 공사는 분문과 샘문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끝으로 동쪽 성벽 공사는 수문에서 함밉갓 문을 지나 처음 출발했던 양문에 이릅니다.

 

성벽 공사(1-32)

성벽 재건은 이스라엘 전체가 연합하여 한 사역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백성들에게 자기 집 가까운 곳에서 일하도록 작업을 지시합니다. 이는 일할 맘을 불러일으키고 소요시간을 줄이며, 대적들이 공격할 경우 일한 곳과 가족을 쉽게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1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2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3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4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5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 6옛 문은 바세아의 아들 요야다와 브소드야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7그 다음은 기브온 사람 믈라댜와 메로놋 사람 야돈이 강 서쪽 총독의 관할에 속한 기브온 사람들 및 미스바 사람들과 더불어 중수하였고 8그 다음은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 등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향품 장사 하나냐 등이 중수하되 그들이 예루살렘의 넓은 성벽까지 하였고 9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는 후르의 아들 르바야가 중수하였고 10그 다음은 하루맙의 아들 여다야가 자기 집과 마주 대한 곳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하삽느야의 아들 핫두스가 중수하였고 11하림의 아들 말기야와 바핫모압의 아들 핫숩이 한 부분과 화덕 망대를 중수하였고 12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 13골짜기 문은 하눈과 사노아 주민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분문까지 성벽 천 규빗을 중수하였고 14분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15샘문은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고 덮었으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왕의 동산 근처 셀라 못 가의 성벽을 중수하여 다윗 성에서 내려오는 층계까지 이르렀고 16그 다음은 벧술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아스북의 아들 느헤미야가 중수하여 다윗의 묘실과 마주 대한 곳에 이르고 또 파서 만든 못을 지나 용사의 집까지 이르렀고 17그 다음은 레위 사람 바니의 아들 르훔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하사뱌가 그 지방을 대표하여 중수하였고 18그 다음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헤나닷의 아들 바왜가 중수하였고 19그 다음은 미스바를 다스리는 예수아의 아들 에셀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성 굽이에 있는 군기고 맞은편까지 이르렀고 20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 21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야의 아들 므레못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엘리아십의 집 문에서부터 엘리아십의 집 모퉁이에 이르렀고 22그 다음은 평지에 사는 제사장들이 중수하였고 23그 다음은 베냐민과 핫숩이 자기 집 맞은편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아나냐의 손자 마아세야의 아들 아사랴가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24그 다음은 헤나닷의 아들 빈누이가 한 부분을 중수하되 아사랴의 집에서부터 성 굽이를 지나 성 모퉁이에 이르렀고 25우새의 아들 발랄은 성 굽이 맞은편과 왕의 윗 궁에서 내민 망대 맞은편 곧 시위청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로스의 아들 브다야가 중수하였고 26(그 때에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주하여 동쪽 수문과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내민 망대까지 이르렀느니라) 27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내민 큰 망대와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오벨 성벽까지 이르렀느니라 28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29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 30그 다음은 셀레먀의 아들 하나냐와 살랍의 여섯째 아들 하눈이 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자기의 방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31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인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성루에 이르렀고 32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1-32)

 

성벽 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목록은 성벽 주변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방식으로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연속적으로 전개해 나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출발점인 양문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1) 북쪽 성벽 공사(1-5)

 

북쪽의 성벽 공사는 성전 구역과 가까운 ‘양문과 함메아 망대’에서 ‘하나넬 망대’에 이르는 구간을 건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성전과 인접해 있어 성벽 공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 구간은 제사장 그룹이 담당하고 대제사장이 직접 지휘를 합니다(1a).

1절에서 대제사장으로 소개된 엘리아십은 1차 귀환 시 스룹바벨과 함께 성전 건축 공사를 담당했던 대제사장 예수아의 손자입니다(느 12:10). 양문 건축 과정에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참여한 것과 공사 직후에 봉헌식을 거행한 것(1b, ‘건축하여 성별하고’)은 이 구역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백성들은 이어서 함메아 망대와 하나넬 망대를 보수합니다(참조, 느헤미야 12:39). 이 두 망대의 위치는 분명치 않지만, 양문과 어문(Fish Gate) 사이에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스니아의 자손들이 건축한 어문은 북서쪽 모퉁이에 위치한 문으로 이곳에서 수산시장이 열려 두로 사람들이 어류를 가져다가 이곳에서 팔았던 것 같습니다(참조. 느헤미야 13:16).

 

(2) 서쪽 성벽 공사(6-13)

 

성벽 재건의 방향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서쪽 성벽 공사와 이에 참여한 사람들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서쪽 성벽 공사 단락은 ‘옛 문(Old Gate)’에 대한 건축 보고로 시작합니다. 옛 문은 히브리어로 ‘샤아르 하예샤나’의 번역으로 ‘옛날 성읍의 문’을 줄인 말입니다. 이 문은 히스기야 왕 때 확장된 예루살렘 제2구역과 연결됩니다(열왕기하 22:14; 스바냐 1:10).

이 지역의 공사에는 기브온, 메르놋, 미스바 사람들이 참여했는데(7), 기브온 사람들은 혈통적으로 가나안 원주님이었던 히위 사람의 후손으로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했습니다(여호수아 9장). 이들은 비록 속임수를 써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실하지만, 그 이후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게 반응하여 성소의 일을 하며 이스라엘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는 존재가 됩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이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공동체에 흡수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구역 공사에 상인 조직들인 금장색(금은 세공업자)과 향품 장사(향품 제조업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입니다(8). 금은 세공업자들은 이외 다른 성벽 공사에도 참여합니다(31-32). 이것은 성벽 재건 공사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했음을 입증합니다.

하눈과 사노아 주민은 협력하여 골짜기 문을 세우고 분문(Dung Gate)까지 성벽 천 규빗을 중수합니다(13). 13b절의 분문(Dung Gate)은 예루살렘 남쪽의 힌놈의 골짜기(인신제사를 드리거나 오물을 태우는 곳)로 가는 문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신약성경에서 지옥을 의미하는 ‘게헨나’는 힌놈의 골짜기에서 나온 용어다).

 

(3) 남쪽 성벽 공사(14-15)

 

서쪽에 이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남쪽 성벽의 재건과 이에 참여한 사람들의 목록을 소개합니다. 이 지역에는 두 개의 성문이 세워지게 됩니다. 남쪽 끝에 위치한 분문(Dung Gate)은 벧학게렘 지방의 책임자인 말기야가 중수하였습니다. 예레미야 6:1에 의하면, 벤학게렘은 예루살렘, 드고아와 함께 베냐민 성읍으로 소개됩니다.

다음으로 샘문(Fountain Gate)은 미스바 지방 행정 책임자인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중수합니다. 샘문은 엔로겔 샘으로 가는 문으로 엔로겔은 힌놈 골짜기와 기도론 골짜기가 만나는 곳에서 약 200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4) 동쪽 성벽 공사(16-32)

 

3장의 목록은 끝으로 동쪽 성벽의 재건과 이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이 지역은 전에 느헤미야가 말에서 내려 도보로 둘러보았던 지역입니다(참조 2:14-15). 이 부분에서는 가옥이나 건축물의 재건에 대한 내용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개인 주택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옵니다(20-21, 23, 아사랴의 집, 제사장들의 집, 사독의 집, 므술람의 집, 성전 봉사자들과 상인들의 집).

느헤미야는 주택 소유자들에게 맡겨 스스로 보수하게 하여 이 공사를 효과적으로 진행합니다. 예외적으로 대제사장의 주택은 우리야의 아들 므레못(21절)이 보수하는데, 므레못은 바룩과 함께 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참조. 느 10:1-8). 성전 언덕 부근에 위치한 대제사장의 저택은 견고하고 규모가 컸기 때문에 다른 제사장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벨에 거주한 느디님 사람들은 동쪽 수문을 세웁니다(26). 오벨은 느디님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장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느디님 사람들은 성전 노예가 된 사람들의 자손으로 알려지는데, 에스라 2장의 목록에 의하면 포로기 이후에 수백 명의 느디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참고. 에스라 2:43-54).

수문(Water Gate)은 성읍 내의 왕궁과 성전 단지로부터 기혼 샘을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수문(Water Gate)이라는 이름은 기혼 샘에서 물을 길어 오기 위해 통과하는 문이라는 데서 유래합니다(느헤미야 8:1,3,16; 12:37), 28절의 마문(Horse Gate/Guard Gate)은 기마대들이 왕궁을 출입할 때 이용했던 문인 것 같습니다(참조, 역대하 23:15; 열왕기하 11:16; 예레미야 31:40). 이 문은 예루살렘 성전 동쪽 성벽에 위치해 있고, 이 지역에 제사장들의 주거지가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28절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29절에 소개된 임멜의 아들 사독은 에스라-느헤미야서에서 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참조. 에스라 2:37; 느헤미야 10:21). 31절의 ‘함미갓 문’은 ‘점호 문’(Inspection Gate/Muster Gate)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 문은 느헤미야 12:39에서는 감옥 문과 동일시 됩니다. 이 문은 성전 구역 내 북쪽 내벽에 세워져 있고, 양문과 인접해 있었습니다. 이 문앞 광장에서 성전 혹은 왕궁 수비대의 조회나 점검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참조, 역대하 32:6). 끝으로 동쪽 성벽 공사의 마지막은 성루에서 양문까지의 구간을 건축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습니다. 성벽 재건 공사 목록은 양문 건축으로 시작하여 양문 건축에 대한 언급으로 끝맺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에 대한 안내는 양문으로 시작해서 양문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성벽과 성문 재건자들의 목록을 소개하는 3장은 느헤미야가 뛰어난 기획력과 행정력을 지닌 인물(organizer)임을 보여줍니다. 본문에는 사십 개가 넘는 공사구간과 열 개의 성문이 언급됩니다. 열 개의 성문 가운데 보수된 성문은 여섯 개로 소개됩니다(1,3,6,13,15). 무너진 성벽을 건축하고 성문을 세우는 작업은 결코 단순한 작업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에 계획을 세우고, 일꾼들을 조직하고, 재원을 조달하는 문제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지만,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받아 이 과업을 지혜롭게 처리해 나갑니다.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에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3장은 성벽 재건과 관계하여 최소한 열두 부류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즉, 제사장들(1,22,28), 여리고 사람들(2), 미스바와 기브온 사람들(7), 전문 직업인들(8, 31, 32), 성읍 관리들(12, 16, 17, 19), 여인들(12), 하눈과 사노아 사람들(13), 레위 사람들(17), 성전에서 봉사하는 느디님 사람들(26), 드고아 사람들(5,27), 문지기들(29), 상인들(32)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참여한 대표자만 해도 75명이나 됩니다. 이들은 스룹바벨 당시 자신들의 조상들이 기쁨으로 성전 재건의 일에 헌신했던 것처럼(에스라 3장), 자발적으로 일 일에 참여했습니다(참조 4:6b).

저자는 이를 통해 성벽 재건이 귀환 공동체 전체가 참여한 사역이며, 이 일로 인해 백성들은 성벽을 쌓아 올리면서 그동안 무너져 내렸던 신뢰와 화합이이라는 벽돌도 쌓아 올렸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벽 재건은 공동체의 연합을 이루게 된 기회로 작용한 것이며, 그 배후에 지도자 느헤미야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언제나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특히 준비된 일꾼을 쓰십니다. 구체적인 계획과 동역, 그리고 방해 앞에도 흔들린 없는 귀한 일꾼이 우리 안에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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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02-01)


주께서 사용하신 느헤미야

느헤미야 2장 1-20절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앞 장에서 왕의 힘을 통해 무너진 공동체를 회복하려고 주의 도우심을 구했는데, 주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십니다. 주님이 느헤미야를 회복의 일꾼으로 쓰기로 하신 것인비다. 주께서 쓰시는 일꾼은 어떤 사람입니까?

 

  • 아닥사스다 왕은 술 관원인 느헤미야가 얼굴에 수심이 있음을 보고, 그 이유를 물은 다음 느헤미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을 중건할 것을 허락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이 소식을 들은 대적 산발랏과 도비야가 근심합니다. 느헤미야는 몇 사람을 데리고 은밀히 예루살렘 성벽을 시찰한 다음 성 재건에 대한 계획을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알립니다. 이에 대해 산발랏, 도비야, 게셈이 함께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사업을 방해합니다.

 

느헤미야의 귀환(1-10)

기도의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신중하면서도 용의주도하게 필요한 것을 간구하여 응답합니다. 기도한 후 두 손 놓고 기다리는 것보다 도우시고 인도하실 하나님을 크게 신뢰하고 하나님의 때와 행동을 잘 분별하기를 원하십니다. 느헤미야가 기도한 지 4개월 만에 기회를 주셨습니다.

 

1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2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3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4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5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6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7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8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9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쪽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10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1-10)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는 결정적인 순간이 오자 신중하면서도 용의주도하게 필요한 것을 왕께 요구하여 얻어 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 회복의 한 중심에 자신의 헌신과 희생이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기도했습니다.

 

(1)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1-8)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고 금식하며 기도한 후 아닥사스다 왕에게 나아간 때는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월로 언급됩니다. 니산월은 페르시아 월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달로 이때 신년 축제가 열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는 느헤미야가 고국에 대한 소식을 들은 때(기슬르 월, 1:1)로부터 약 넉 달 정도 지난 시점이 됩니다. 느헤미야는 그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아닥사스다 왕이 잔치를 벌이게 되자, 술 관원인 느헤미야가 왕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당시 페르시아 왕들은 정기적으로 특별한 잔치를 벌이곤 했는데, 때로 그 자리에서 호의를 베푸는 일들이 있었습니다(Herodotus 9.110). 그때 느헤미야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아닥사스다 왕 앞으로 나아갑니다. 평소와 다른 느헤미야의 표정을 금방 알아차리고 아닥사스다 왕은 그 연유를 묻습니다(2). 느헤미야가 그동안 기회를 보다가 신년 축제가 있는 날을 택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시 술 관원이 안색이 좋지 않은 상태로 왕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였다’(2b)라고 한 것입니다. 에스더가 금식한 후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간 것과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질문을 기회로 삼아 예루살렘의 안타까운 형편을 아룁니다(3b).

느헤미야는 왕에게 예루살렘의 형편과 동족들에 대한 연민으로 인한 자신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줄 것을 간청한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이 요청에 대해 호의로 반응합니다(‘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4a). 이 질문은 선왕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에게 한 질문을 연상케 합니다(참조. 에스라 4:8). 하나님의 손길이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느헤미야는 곧바로 하나님께 짤막한 기도를 올립니다(4).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때를 위해 지금까지 기도로 준비했고, 이 순간에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최대한 경의를 표하며 자신의 요구, 즉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유다 땅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을 재건하는 일을 허락해줄 것을 아룁니다(5). 에스라서에 의하면(4:11-21) 아닥사스다 왕은 이전에 칙령을 내려 예루살렘 성읍 재건을 중단시킨 장본인입니다. 그가 스스로 선포한 칙령을 번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때문에 느헤미야는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왕 앞으로 나아갈 당시 왕후가 왕 곁에 있었음을 밝힙니다(6). 이것은 모든 상황이 느헤미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이어서 느헤미야에게 여행에 소요되는 기간을 묻습니다(6b). 이것은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의 요청에 호의적으로 반응함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체류의 기한을 알리는데, 본문은 구체적인 정보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서 문맥에서 이해할 때(특히 5:14와 13:6), 그 기한은 12년인 셈입니다. 느헤미야는 본격적으로 예루살렘 여행에 필요한 사항들을 왕에게 요청합니다(7-8). 가장 우선적인 것은 느헤미야의 신분을 보장해주는 왕의 친서입니다(7,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 느헤미야는 자신이 지나가야할 강 서편 지역의 총독들이 인정해줄 수 있는 보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느헤미야는 성읍 재건에 사용될 목재를 조달받을 수 있도록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공문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합니다(8a).

 

(2) 느헤미야의 여정(9-10)

 

본문은 ‘왕의 삼림’이 있던 지역을 밝히지는 않지만, 당시 목재 원산지였던 레바논일 가능성이 큽니다(참조 에스라 3:7). 느헤미야의 요청에 대해 왕은 호의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자신을 도우셨음을 고백합니다(8b). 느헤미야는 모든 상황에서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호의로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9a). 이것은 에스라가 페르시아 군대의 호위를 받지 않고 귀환한 것과 대비를 이룹니다(비교. 에스라 8:21-23). 그렇지만 이것도 느헤미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직접 귀환민들을 지키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페르시아 군대를 통해 지키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느헤미야 일행이 지나온 길은 생략되어 있지만, 그들은 수산을 출발하여 바벨론, 다마스커스 그리고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가 심히 근심합니다(10). 이들은 앞으로 느헤미야의 성읍 재건 사업을 방해하게 될 핵심 인물들입니다. 또 다른 대적인 도비야는 요단 동편 암몬 지역의 총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느헤미야서의 증언에 의하면, 도비야는 유다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돈독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참조 6:17-19), 제사장과도 친분이 있어 성전 안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참조, 13:4-7).

 

귀환 후의 사건들(11-20)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조롱과 업신여김을 쏟아 놓습니다. 그릇된 여론을 조성하여 협박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먼저 계획하셨고, 또 때를 정하여 허락하셨으니 꼭 형통케 하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또한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11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12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13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더라 14앞으로 나아가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15그 밤에 시내를 따라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본 후에 돌아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 돌아왔으나 16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족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아니하다가 17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18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19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20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11-20)

 

예루살렘에 도착했지만 3일 동안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곧장 왕에게 받은 권한을 실행에 옮기지 않습니다. 귀로 듣던 예루살렘의 참담한 현실을 남몰래 눈으로 확인합니다. 느헤미야는 강요하지 않고 올바른 현실인식과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백성을 설득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백성에게 직접 확인한 성의 절망적인 상황을 환기시킴으로써 변화를 향한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1) 야간 답사(11-16)

 

2장의 후반부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귀환한 직후에 있었던 사건들을 소개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3일 동안 휴식을 취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12a). 그는 오랜 여정 이후 지친 심신을 회복하면서 예루살렘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얻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직후 예루살렘 방문 이유를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고 조용히 행동하기 시작합니다(12b). 그는 밤중에 수행원 몇 명만 데리고 예루살렘 성을 둘러봅니다. 이렇게 한 배경에는 전에 대적들의 방해로 에스라가 주도했던 성벽 재건이 실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주도면밀한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일행은 골짜기 문에서 출발해서 용정, 분문, 샘문, 왕의 못까지 갔고 그곳부터는 길이 없어 계곡을 따라서 성벽을 살핀 후 다시 골짜기 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13-15). 본문에 나오는 명칭을 근거로 추측해보건대, 그들은 대략 예루살렘 성읍 서쪽에서 출발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동해 동쪽에 도착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과 일행이 그날 밤에 했던 일에 대해서 비밀에 부칩니다(16).

 

(2) 느헤미야의 결단과 백성들이 동의(17-18)

 

느헤미야가 자신의 행적을 비밀에 부친 이유는 당시 유다 귀인들과 민장들이 대적들과 결탁한 정황과 관계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후에 느헤미야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이제야 비로소 백성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을 밝힙니다(17). 그리고 그는 계획했던 일들을 신속히 처리해 나가기 위해 백성들의 지지를 호소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역사하심(‘하나님이 선한 손’)을 간증하고, 그것이 어떻게 아닥사스다 왕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밝힙니다(18).

 

(3) 대적들의 비웃음(19-20)

 

이 소식은 대적들인 산발랏, 도비야, 게셈의 귀에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산발랏과 도비야와 함께 소개된 게셈은 아라비아 부족의 족장으로 보입니다. 느헤미야는 사방의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느헤미야가 일행이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반역적인 일이라고 협박하면서 느헤미야로 하여금 성읍 재건의 과업을 포기하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다시 한 번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용기를 얻습니다(20,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느헤미야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이며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확신합니다(참조, 빌립보서 1:6).


주님을 언제나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특히 준비된 일꾼을 쓰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하며,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 치밀하게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감동으로 일하는 기쁨을 경험해보았습니까? 아니면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시고자 할 때, 마음도, 계획도, 기도도, 믿음도 준비된 사람을 쓰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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