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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01-01)

 


조국을 위해 기도하는 느헤미야

느헤미야 1장 1-11절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댐 건설로 수몰된 사람들이 사라져 가는 마을을 보면서 눈물짓는 것을 보았습니다. 평생 동안 살아온 집이 무너지고 마을이 사라져갈 때, 추억들이 사라져간 것입니다. 많은 집들이 무너져 퇴락되게 변했을 때,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마음이 많이 아플 것입니다. 돈으로 보상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이 담긴 시골 고향을 가보면, 집들이 하나하나 폐허로 변하고 무너져 내려져 가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집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어릴 적 추억이 무너진 것입니다. 무너진 터를 보면서 어릴 적 추억을 돌아보면서 마음이 매우 아파 옴을 느낍니다.

 

  • 본문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의 소식을 슬퍼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멀리 이국땅에서 성공한 사람이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고향을 향해 있었습니다. 폐허된 고향의 모습을 듣고 괴로워했던 사람이 바로 느헤미야(Nehemiah)입니다. 그는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언젠간 고향으로 돌아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향한 영적인 지도자를 찾고 계심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지도자가 당신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봄(1-3)

믿음의 선진들이 철저하게 의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노아도 그의 약속을 따라 방주를 만들었고(창세기 6장), 아브라함도 그의 약속을 따라 이삭을 드렸고(창세기 22장), 다윗도 그의 약속을 따라 인내했습니다.

 

1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2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3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1-3)

 

느헤미야의 몸은 대제국의 궁전에서 안락했지만, 그의 마음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소식을 먼저 물었으며, 하나니를 통해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의 마음도 무너졌고 새까맣게 탔습니다.

 

(1) 역사적인 배경(1)

 

느헤미야서는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로 시작합니다. 다음으로 이 책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설정하는데, 원문은 ‘제20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간 중에 있었는데’로 되어 있습니다. 2장 1절에 가서야 비로소 20년의 통치 기간의 주체가 아닥사스다 왕임을 밝힙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 7:1에서 이미 언급되어 느헤미야 1:1은 왕의 이름을 생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서로 연결된 책임을 암시합니다. ‘아닥사스다 왕 20년’은 주전 445년으로 에스라가 귀환한지 13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당시 느헤미야가 있던 ‘수산 궁’은 페르시아 왕이 겨울철을 보내는 장소로 페르시아의 겨울철 수도와 같은 곳입니다.

 

(2) 예루살렘이 대한 소식(2-3)

 

느헤미야의 직업은 바벨론에서 왕을 시종 드는 사람으로 비교적 성공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때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의 방문을 받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안부를 묻습니다(2). 그들은 에스라-느헤미야서 문맥상 바벨론 포로에서 귀화한 유다 공동체나 포로로 끌려오지 않아 남아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느헤미야가 들은 소식은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것입니다(3b). 에스라 4:11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읍은 아닥사스다 왕 때,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재건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이 아닥사스다 왕 때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제2차 귀환(주전 458년) 후 에스라를 중심으로 성읍 재건의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후 성읍 재건은 대적들의 반대로 중단되었고(에스라 4:12-23), 오랫동안 방치되면서 훼파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귀환 공동체의 성벽 재건 작업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느헤미야는 형제들을 통해 이 계획이 좌절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기도(4-11)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시각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연약한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비참한 조국의 소식을 들고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4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9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10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4-11)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시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한 백성들을 보면서 매우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거룩한 약속의 땅입니다. 거룩한 땅이 더러운 이방인들이 침략의 발로 거룩한 것을 짓밟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아십니까?

 

(1) 슬퍼하는 느헤미야(4)

 

하나나를 통해 고국의 비참한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본문에서는 네 개의 연속된 동사(‘울고’,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여’)를 사용하여 느헤미야의 안타까운 심정과 슬픔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극심한 절망과 슬픔 속에서 느헤미야가 한 일은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2) 기도하는 느헤미야(5-11)

 

느헤미야서 안에는 느헤미야가 기도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전체 아홉 개), 본문은 그중 첫 번째입니다. 본문은 느헤미야가 무엇보다도 기도의 사람이었고, 느헤미야의 지도력의 원천이 기도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기도는 공동체의 탄식시를 연상시키며(참조, 시편 74, 79, 80, 85편 등),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느헤미야의 깊은 통찰력을 잘 보여줍니다.

본문에 소개된 느헤미야의 기도는 ①하나님을 부름(5), ②간구(6), ③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고백(6b-7), ④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호소(8-9), ⑤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고백(10), ⑥백성과 자신을 위한 기원(11)의 순으로 구성됩니다. 기도의 분석해 보면, 오늘 기도와 동일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것을 봅니다. 기도의 구조는 찬양, 회개, 감사, 간구 등으로 분리할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을 부름(5)

느헤미야의 기도는 먼저 하늘의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5a).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일반적으로 페르시아 사람들이 신을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이 하늘을 지배한다고 믿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칭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께서 하늘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참고, 창세기 24:7).

본문은 이어서 느헤미야가 믿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어떤 분인가를 보여줍니다(5b). 그가 믿는 여호와는 ‘크고 두려우신 분’이며,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느헤미야는 여호와의 공이로우신과 신실하심, 그분의 긍휼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균형 잡힌 신관(神觀)을 엿볼 수 있습니다.

 

② 간구(6)

이어서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립니다(6). 여기에서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종’이라고 부릅니다(6a). 느헤미야의 기도에 나오는 ‘주의 종’이라는 표현(6, 8, 10)은 그가 귀환민들을 여호와의 언약백성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느헤미야는 고레스 왕 때부터 이루어진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언약의 회복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③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고백(6b-7)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 흩어지게 된 이유를 하나님께 대한 범죄 때문이라고 밝힙니다(7a, ‘크게 악을 행하여’; 참조. 신명기 4:26-27). 이스라엘이 범한 ‘큰 악’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긴 것으로 요약됩니다(7-8). 7b절에서 율법을 가리키는 다양한 용어들(‘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을 사용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④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호소(8-9)

8절에서 포로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제시한 ‘범죄’는 언약 파기를 암시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마알은 언약적인 개념으로 하나님께 신실치 못한 행동을 나타냅니다. 구약성경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과 언약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결국 하나님과 맺은 언약 파기로 나아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에 충실한 삶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가 지속되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참고.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9절에서 느헤미야의 기도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주제로 바뀝니다. 본문에 의하면, 회복의 군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 즉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이라는 주제는 느헤미야의 기도의 핵심으로 기도문 전체 구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A. 하나님의 부름과 간구(5-6a)

    B. 고백(6b-7)

       X.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에 호소(8-9)

   B′. 고백: 하나님의 백성(10)

A′. 하나님의 부름과 기원(11)

 

9b절의 약속의 말씀은 신명기 30:49의 말씀 인용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참조, 열왕기상 8:50). 신명기 30장은 모세를 통해 주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고백(10)

느헤미야는 이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귀환민들을 가리켜 ‘주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라고 칭합니다(10; 참조, 신명기 9:29).

 

⑥ 백성과 자신을 위한 기원(11)

신명기 인용을 통해 느헤미야는 고대 이스라엘과 귀환민들 사이의 연속성을 드러냅니다. 귀환민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남은 자들’이요 회복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끝으로 백성들과 자신을 위한 기원으로 마무리됩니다(11). 여기에서 그는 귀환민들을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이라고 언급하면서 여호와의 종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11b절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는 느헤미야 자신을 위한 간구입니다. 느헤미야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달라’는 요청은 곧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왕이 자신의 요청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자신의 직책이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음을 회고합니다(11c). 이 구절은 문학적으로 술 관원으로서의 느헤미야의 모습을 묘사하는 2:1과 자연스럽게 연결 됩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타까운 소식을 통해 느헤미야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한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길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일꾼들이 회개하고 기도할 때, 어려운 환경에서 회복되어지고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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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 서론


느헤미야서 개론

- 다시 성전을 건축하라 -


 

느헤미야서는 에스라서와 함께 바벨론 포로기 이후 귀환 공동체의 재건과 주제로 합니다. 에스라서가 성전 재건과 정체성 확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느헤미야서는 성벽 재건과 공동체 회복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에스라서가 총독과 제사장 겸 서기관 에스라를 중심인물로 소개한다면, 느헤미야서에서는 총독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두 책을 연결해서 읽으면 전체 흐름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벽의 재건으로 정체성 회복에서 공동체의 회복으로 주제가 확대되며 발전하는 도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전통적으로 에스라-느헤미야서는 한 권의 연속된 자료로 읽혔습니다(맛소라 사본은 두 책을 하나의 제목으로 묶는다).

 

느헤미야서의 저자

느헤미야가 본서의 저자라는 데는 큰 이의가 없습니다. 특히 본문에 나타난 주어의 대부분이 1인칭인 것은 느헤미야 자신이 저자임을 가리킵니다. 자신을 3인칭으로 언급하는 곳도 있으나(8:9; 10:1; 12:26,47) 같은 시대의 다른 인물들과 함께 자신을 열거하면서 지난 날 자신의 행적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 1세의 수산 궁에서 술 따르는 일을 맡은 관원으로서 영향력 있는 지위에 있었습니다(주전 465-424년). 그의 이름 끝자인 ‘야’는 그의 가족이 유다 정통 신앙에 충실하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느헤미야 1:1). 주전 444년에 친척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겪고 있는 참상을 전해 듣고 슬퍼하며 수심에 가득 차 있던 중 왕의 허락을 받아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가게 되었습니다(느헤미야 1:1-2:8).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율법에의 충성과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위하여 백성들과 동고동락합니다. 담력과 지혜, 겸손과 신념, 불타는 애국심과 경건한 신앙심을 갖춘 지도자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사역을 마친 뒤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 이 책을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서의 저작 연대

본서의 사건들은 대략 주전 445-425년경에 일어난 일들로서, 느헤미야가 총독 자리에서 물러난 뒤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저작 연대는 대략 주전 42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느헤미야의 역사적 배경

느헤미야서는 고레스 칙령으로 첫 번째 귀환 행렬이 있은 후(주전 538년), 약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책의 중심인물인 느헤미야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기 전,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주전 465년부터 주전 424년까지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한 왕으로 에스라-느혜미야서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해 호의 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아닥사스다 왕 7년(주전 458녠에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귀환 행렬이 고토 로 돌아오고(에스라 7-10장), 이로부터 13년 후 아닥사스다 통치 20년(주전 445년)에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3차 귀환 행렬이 이어집니다(느헤미야 2:1). 귀환 후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유다 총독으로 있으면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공동체를 재건하는 역사를 이룹니다. 이후 느헤미야는 잠시 페르시아를 다녀온 후 두 번째 공동체 개혁을 추진해 나갑니다(느헤미야 13장).

 

느헤미야의 기록 목적

본 느헤미야서의 기록한 목적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3차 귀환의 과정과 성벽중건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하여,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정착과 종교적 정황을 보여주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이에 대한 인간의 복종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주요 내용

본서에 나타난 주요 내용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과 여호와의 율법에 대한 충성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과 더불어 민족의 상징이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원수들의 갖가지 조롱과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건축하라는 나팔소리는 결국 승리의 환호로 이어져, 죄악으로 인해 허물어졌던 성벽이 갖은 고초 가운데서 재건되었습니다. 이는 포로 후의 새 출발에 있어서 새 삶의 터전이 되었고, 또한 신앙의 증거로서 후대에 큰 귀감이 되었다

느헤미야는 이전 자기 민족의 멸망과 포로생활의 고난은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한 범죄의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율법의 회복과 거룩한 말씀에 대한 충실한 해석 및 준행에 그의 정성을 기울여 강력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특히 제사장 겸 학사인 에스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서 마음 판에 새겨 온전한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의 구조

Ⅰ. 성벽재건(1-6장)

  A. 예루살렘의 상황(1장)

  B. 느헤미야의 귀환(2장)

  C. 성벽 재건(3-6)

 

Ⅱ. 포로 귀환민들의 명단(7장)

 

Ⅲ. 공동체 재건(8-13장)

  A. 수문 앞 광장의 모임(8-10장)

  B. 예루살렘 거주민들의 명단(11-12장)

  C. 공동체 재건을 위한 개혁(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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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5-02)


남 유다 멸망과 회복의 서광

열왕기하 25장 8-30절


김기석 목사는 그의 책 『아슬아슬한 희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은 그렇게 늘 위태롭다.’, ‘희망은 낙관적 전망이 아니라, 기어코 살아내기 위한 안간힘이다.’ 너무 쉬운 희망은 희망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슬아슬하기에 희망하는 것입니다.

 

  •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에게 반역하자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2년간 포위합니다. 오랜 포위로 인한 심한 기근과 성벽의 파괴로 예루살렘 성은 함락됩니다. 시드기야는 도망가다가 바벨론 왕에게 잡혀 아들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실각하면서 다윗 왕조는 막을 내리고 이스라엘은 망하게 됩니다. 열왕기 저자는 특별히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해 관심을 자기고 리고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파괴(8-12)

 

젖과 꿀이 흐르는 영광의 땅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떠나시면 황량한 폐허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부요보다 하나님을 모신 가난이 더 큰 축복입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침공한 후에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성전과 왕궁 그리고 귀인 집에 불을 질러버립니다.

 

8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9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0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11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12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8-12)

 

시드기야 왕을 잡은 바벨론 왕은 5월 7일에 그의 부하인 느부사라단을 예루살렘으로 보냅니다. 이때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나서 한 달 정도 지난 후로 주전 586년 7월 어간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함락 후 정리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오자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민가들과 귀족들의 집까지 모조리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을 모두 헐어버렸습니다. 성벽이 없으면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을 더 이상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예루살렘에 대한 철저한 파괴는 이미 예언서에 예고되어 있었습니다(예, 이사야 3:16-26; 에스겔 7장).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과 항복한 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이전처럼 가난한 백성들만 그 땅에 남겨두어 포도원 관리인과 농부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땅에서 경작하는 것은 허락하고, 완전히 사람이 살지 못하는 폐허로 두자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13-17)

건물이든, 장식이든, 책이든, 관습이든 그 안에 복임이 없고 하나님께서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만 영원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전쟁의 승자가 패자국의 신상을 훔쳐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유다에는 신상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성전 기명들을 탈취해 갔습니다.

 

13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4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15시위대장이 또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곧 금으로 만든 것이나 은으로 만든 것이나 모두 가져갔으며 16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가져갔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17그 한 기둥은 높이가 열여덟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 머리가 있어 높이가 세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13-17)

 

느부사라단은 여호와의 성전을 부수고 야간과 보아스로 불리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성전의 놋 바다를 부수어서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 갖고 가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에 조각내어 들고 간 것입니다. 14절에서는 가마들, 부삽들, 붑집게들 등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쓰던 모든 놋그릇을 가져갔다고 기록합니다. 불 옮기는 그릇들과 금과 은으로 만든 모든 그릇을 가져갑니다. 여호야긴 때 가져가고 남은 것을 이번엔 놋그릇과 함께 모두 가져가버렸습니다. 16-17절은 여호와 성전의 두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와 놋 바다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화자는 그것들의 놋 무게가 셀 수 없다는 것과 그 크기와 모양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합니다. 이것은 솔로몬 시대의 영화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제 그 영화가 사라지고 철저히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대조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반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장엄하던 성전 기둥이 무너지고 조각조각 잘려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 시대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사라진 것과 여호와께서 더 이상 그들을 돌보시지 않는다는 아픔에 통곡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두 기둥의 파괴는 이스라엘에 있던 영광이 사라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두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여호와 성전의 파괴는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나 에스겔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에스겔 8장에서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온갖 우상숭배를 보았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정하게 된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십니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에서 지고 신전이 헐리는 것은 그 땅의 신이 패배하고 수치를 당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범죄하고 부정해진 유다와 예루살렘과 성전을 버리고 심판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손에 파괴되고 모욕당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죽음(18-21)

짧은 영화와 권력을 누리다가 영원한 멸망을 자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힘 있는 사람들의 눈치나 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원수의 손에 붙잡히고 처형하도록 버려둡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18시위대장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19또 성 중에서 사람을 사로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한 사람과 또 성 중에서 만난 바 왕의 시종 다섯 사람과 백성을 징집하는 장관의 서기관 한 사람과 성 중에서 만난 바 백성 육십 명이라 20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그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리블라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21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리블라에서 다 쳐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18-21)

 

예루살렘과 여호와 성전을 파괴한 시위대장은 대제사장과 부제사장과 성전 문지 지 등 종교 지도자들을 체포합니다. 예루살렘 성중에 남아있는 위협이 될 만한 인물들은 모두 잡아들입니다. 군사를 가진 내시나 왕의 시종들과 군대 장관의 서기관과 군사 60명 등 끝까지 저항하고 반란을 꾀하며 남아있는 자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이들을 데리고 립나에 주둔하고 있는 바벨론 왕에게 갑니다. 바벨론 왕은 이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반란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부사르단과 바벨론 왕은 마지막 반란의 불씨까지도 완전히 제거합니다. 21절 하반절은 유다 멸망의 결론으로 이렇게 유다가 그들의 땅에서 떠났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민족을 쫓아내고 주신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고 제거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 놓아주신 축복의 길과 멸망의 길 중에서 멸망의 길을 택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신명기 28:30-37;47-57;63-67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 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경고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주변 나라들이 하는 대로 우상을 따르며 불의를 행하고, 약자를 억압하고 수탈하며 지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날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호와께 제사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삶은 여호와와 무관하게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땅도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름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달리야의 반란(22-26)

세상이 다 끝나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베어죽은 그루터기와 같은 곳에서도 다시 희망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벌하셨지만 그 중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신 것은 다윗에게 하신 영원한 나라에 관한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는 징표입니다.

 

22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더라 23모든 군대 지휘관과 그를 따르는 자가 바벨론 왕이 그달리야를 지도자로 삼았다 함을 듣고 이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느도바 사람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와 그를 따르는 사람이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24그달리야가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25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26노소를 막론하고 백성과 군대 장관들이 다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22-26)

 

22-30절은 열왕기의 부록으로 그달리아의 반란과 여호야긴의 석방이라는 두 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22절에서 바벨론 왕이 유다 땅에서 살게 한 사람들을 위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세웁니다. 바벨론이 유다의 통치권을 갖고 그 지역의 관리자를 임명한 것입니다. 그달리야는 예레미야 26:24에 예레미야를 여호야김의 손에서 지켜낸 인물이며, 그 뒤에 예루살렘에서 친바벨론 그룹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총독으로 적합하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달리야가 총독으로 입명되자 그 땅에 남아 있던 군대 장관들과 군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것은 그달리야를 중심으로 유다를 다시 일으키고 안정시키려는 시도입니다. 그달리야는 이들에게 바벨론 왕을 섬기며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말고 현 상태에 순응하여 살면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레미야 40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포도주와 과일과 기름을 모아 저장하며 얻은 성읍에서 살 수 있다고 보장해줍니다. 그런데 왕족, 즉 남아있던 다윗의 후손인 이스마엘이 그달리야의 친바벨론 정책에 반감을 품고 부하 열 명을 데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죽이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바벨론 사람들을 죽입니다. 이스마엘이 달랑 열 명으로 바벨론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유다와 예루살렘에 남아 살면서 후일을 기약하고 있던 유다 사람들, 즉 군인들과 군대 장관들은 바벨론의 보복과 응징을 두려워하여 모두 애굽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소위 다윗의 후손인 이스마엘의 어리석은 반란 사건으로 그나마 유다 땅에 남아있던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지고 이들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유다 역사의 마지막이 이렇게 역출애굽으로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 다시 애굽에서 거류민으로 이방인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게 된 것입니다.

 

여호야긴이 37년 뒤에 풀려남(27-30)

다 죽어가는 썩은 고목에서도 꽃이 피는 것은 새로운 희망에 대한 단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면서도 자비를 베푸십니다. 여호야긴의 복권은 형벌의 때가 저물고 회복의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의로운 해가 떠오를 것입니다(말라기 4:2).

 

27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9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30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27-30)

 

이 단락은 37년 뒤의 이야기로 열왕기 저자는 갑자기 시간을 건너뛰어 여호야긴 왕이 감옥에서 풀려나온 이야기를 합니다. 여호와긴은 감옥에서 풀려나 왕의 호의를 받으며 왕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좋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여호야긴의 신세가 좋은 쪽으로 바뀌는 것을 통해 열왕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포로 생활도 끝내시고, 곧 그들의 땅에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왕기 저자는 비록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멸망했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열왕기를 끝내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 사가(史家)는 열왕기서를 마감하면서 어설픈 희망의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너무 크게 희망을 말하지도 많습니다. 열린 결말, 열린 희망입니다. 참된 희망은 모든 가짜 희망과 긍정의 힘 따위를 버릴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철저한 절망 속에서 피어난 가느다란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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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5-01)

 


바벨론 포로가 된 여호아하스 왕

열왕기하 24장 8절-25장 7절


역사가는 시인이나 수필가가 아닙니다. 감정을 드러내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나라의 몰락을 기록하는 열왕기 사가의 진술이 냉정하리만큼 사실적입니다. 그래서 더욱 슬픕니다. 어머니와 함께 끌려가는 아들, 눈앞에서 아들들의 죽음을 본 아비의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아파하는 한 분이 더 계십니다.

 

  • 요시야 왕 이후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심판의 말씀들이 실행되기 시작합니다. 요시야의 아들인 여호아하스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3개월만 왕위에 있다가 애굽에 의해 폐위됩니다. 여호야김 왕도 바벨론의 속국으로 지내다 바벨론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폐위 되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렇게 요시야 이후 유다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급격하게 망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야긴의 등극(8-9)

앞선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역사의 과오를 답습할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아픔의 역사가 되풀이 됩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역사를 바르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유다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 교훈을 얻지 못하고 점점 헤어날 수 없는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듭니다.

 

8여호야긴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느후스다요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9여호야긴이 그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8-9)

 

여호야긴은 여호야김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사이에 왕위에 올라서 3개월 밖에 통치를 못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느후스이고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로 소개됩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통치하다가, 재위 3개월 만에 예루살렘을 치러 온 느부갓네살 왕에게 항복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만큼 유다는 나라의 정세가 불안했다는 것입니다. 그도 자신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하던 정책에서 돌아서지 않고 여전히 우상숭배와 불의한 행위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열왕기서는 역사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닮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순한 역사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뜻을 필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왕기서를 통해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왕과 백성들(10-17)

하나님께서는 식언(食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약속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말을 함부로 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항상 자신을 경성합시다.

 

10그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11그의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12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그의 어머니와 신복과 지도자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의 왕 여덟째 해이라 13그가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14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15그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내시들과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16또 용사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곧 용감하여 싸움을 할 만한 모든 자들을 바벨론 왕이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17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숙부 맛다니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10-17)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랐을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올라오다’란 의미는 ‘전쟁하기 위해 오다’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 느부갓네살 왕도 이곳에 도착합니다. 바벨론 연대기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격은 주전 598년 마지막 달에 시작하여 주전 597년 둘째 달에 끝납니다. 즉, 여호야긴이 왕위에 있던 기간이 바벨론에게 포위되어 있던 기간입니다. 3개월 동안 포위당하자 여호야긴은 자신의 어머니와 신복들과 지도자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 앞에 나가서 자발적으로 항복합니다. 그 결과로 왕과 왕의 어머니와 신하들과 지도자들과 내시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관대한 처벌을 받습니다. 예루살렘을 함락한 바벨론 군대는 여호와의 성전에 침입하여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약탈하였고, 솔로몬이 만든 여호와 성전의 금 그릇을 잘라버리기도 하였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여호와 성전의 금 그릇을 조각조각 자른 것은 전쟁에 패한 신을 모욕하기 위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성전 보물들을 약탈당하는 것이 여호와께서 전쟁에 저서 모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유다에 대해 심판하실 때 예루살렘 성전이 약탈당하고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셨는데, 지금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즉,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의 백성들과 지도자와 용사 만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를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모든’(14)이란 단어를 반복하여 예루살렘 백성들이 상당히 많이 끌려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끌려간 사람들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바벨론 왕은 왕과 태후와 왕비들과 내시들과 지도자들을 모두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15-16). 전쟁할 만한 모든 자도 데리고 갔습니다. 이들을 데리고 간 것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군사들은 바벨론 병사로 사용하기 위해서 데리고 갔습니다. 장인과 대장장이는 일을 시키기 위해 데리고 갔습니다. 이렇게 왕, 지도자, 군인과 기술자까지 모두 바벨론으로 데려감으로써 예루살렘에는 가난하고 힘없고 무능력한 자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여호야긴을 대신해서 바벨론 왕은 여호야긴의 숙부인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꾸었습니다. 족보상으로 보면 시드기아는 여호아 김의 형제이며 요시야의 아들이 됩니다. 요시아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 되었습니다.

 

시드기야의 등극(18-20)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길만이 개인과 공동체가 살길입니다. 순종은 빠를수록 좋지만, 설령 불순종의 벌을 받을 때에라도 순종하면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기는 시드기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여호야김의 길을 따라 악을 행했고, 여호야김처럼 바벨론을 배반했습니다.

 

18시드기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요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19그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20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18-20)

 

시드기야가 왕이 될 때 나이는 21세로 예루살렘을 11년간 다스렸고, 그의 어머니 이름은 하무달로 예레미야의 딸입니다. 그녀는 3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던 여호아하스의 어머니이 기도하기에, 시드기야와 여호아하스는 동복형제로 형이 폐위되어 애굽의 포로로 끌려갔을 때의 나이가 10세 전후였습니다. 시드기야도 여호야김의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습니다. 여호야김의 죄는 우상숭배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불의와 불법이었는데, 시드기야도 여호야김과 동일한 기간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여호야김의 행위를 본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진노하심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그의 앞에서 모두 던져버릴 때까지 계속 있었습니다. 즉, 시드기야 왕은 제위 기간 내내의 종으로서 바벨론의 간섭과 위협을 받았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유다의 현재 어려운 상황이 여호와의 분노 때문이라고 해설해주고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이 애굽과의 전쟁으로 약해진 틈을 타서 바벨론에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시드기야의 통치 기간 동안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조언했습니다(렘 21:1-10; 34:1-3;37:6-10;38:17-23).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실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았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자들이 70년의 징벌 기간이 끝나면 돌아올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이런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예언을 하는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둬버립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반역을 일으킨 것은 바벨론이 당시 팔레스틴에 대해 관여를 덜하게 되고, 애굽은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던 때로 애굽의 힘을 믿고 반역을 시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예언처럼 철저한 파괴였습니다.

 

예루살렘 함락과 시드기야의 폐위(25:1-7)

군인에게 군사 훈련이 필요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군사로서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훈련장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때로 사회적, 정치적 압박 아래 두어 순종을 훈련시키십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섬기라는 예레미야의 경고(예레미야 27:12-22)를 듣지 않고 반기를 들었고, 결국 예루살렘은 포위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함락됩니다.

 

1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2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라 3그 해 넷째 달 구일에 성 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라 4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가 아라바 길로 가더니 5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그를 따라 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6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들이 그를 심문하니라 7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1-7)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함락하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그들은 성 주변에 토성을 쌓고 2년간 포위를 합니다. 성 주위에 토성을 쌓는 것은 공성전의 전형적인 방법으로 성 벽보다 높은 단을 만들어서 성 위에서 방어하는 자들에게 화살이나 돌 등을 던지며 공격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2년 동안 포위되면서 심한 기근이 들어 먹을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성안에 기혼 샘이 있어 마실 물은 충분했을지 모르지 만 양식이 바닥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이 파괴되자 모든 군사들은 밤에 도망하여 아라바 길로 갑니다. 여기서 모든 군사들에는 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이어지는 길로 요단강 건너 모압이나 암몬으로 가려한 것 같습니다. 당시 암몬과 모압은 유다와 같이 반바벨론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이곳에서 피난처를 얻으려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왕희 탈출 시도는 바벨론 군대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처로 실패합니다. 여리고 평지는 여리고 동편으로 마른 땅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잡혔다는 것은 도망친 다음날 잡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을 모시고 같이 도망하던 군대는 바벨론 군대를 보자 모두 떠나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것은 왕의 호위 부대가 바벨론 군대를 보고 무서워하여 왕을 버리고 도망간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스기야 왕은 사로잡혔고 바벨론 왕이 있는 립나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판결을 받습니다. ‘그를 심문하다’는 재판을 하고 판 쉽을 내린다는 뜻의 전형적 표현입니다. 여기서 시드기야가 재판을 받은 것은 바벨론과의 종주 언약을 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시드기야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묶어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포로의 눈을 뽑는 것은 사람을 무능하게 만드는 처벌입니다. 삼손도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혔을 때 두 눈이 뽑히고 포로들이 하는 노역을 했습니다. 이렇게 유다 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의 아들들이 죽고, 시드기야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면서 다윗 왕조는 문을 닫습니다. 다윗 왕조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다윗 왕조를 벌하시고 문을 닫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에게서 받은 벌은 하나님이 주신 벌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우신 언약 파기를 의미했습니다. 스스로 택한 백성을 멸하시고 세운 나라를 찢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행간에 숨어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접촉하여 행간을 읽고, 하나님의 슬픔에 사로잡혀 울고, 그 눈물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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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4-01)


예언대로 바벨론의 침공

열왕기하 23장 31절-24장 7절


요시야는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발한 마지막 빛이었습니다. 심판의 신호탄이 울리는 순간, 예루살렘 멸망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됩니다.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유다 왕들은 누구 편에 설지를 고심하며 줄다리기 외교를 이어갔습니다. 역사의 주인을 모르는 이들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 요시야는 여호와의 섬진과 예루살렘과 유다와 이스라엘에 있던 모든 우상들과 제단들과 산당들을 부정하게 만들거나 부수고 그 제단에서 봉사하던 제사장을 모두 축출합니다. 요시야가 우상을 제거한 명단을 보면 팔레스틴 땅에 우상숭배가 매우 길고 넓게 오랫동안 이루어져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우상을 제거한 뒤 요시야는 세 번째 개혁으로 유다 땅에서 성대한 유월절을 시행합니다.

 

여호아하스의 등극과 죽음(31-34)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죄에 대해서 나약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도 그를 떠나십니다. 남 유다의 죄의 결과는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31여호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삼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32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33바로 느고가 그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또 그 나라로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고 34바로 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그가 거기서 죽으니라(31-34)

 

요시야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의 나이는 23세이고 그의 어머니는 하무달로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라고 소개됩니다. 일반적인 왕위 계승의 패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재위 기간이 3개월로 매우 짧았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그는 애굽 왕에게 반기를 든 세력에 의해 왕으로 세워졌고,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바로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그 대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요시야가 느고의 군대에 죽었으며, 당시 에는 유다가 애굽의 속국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열왕기 저자는 여호아하스의 실각 원인을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신학적인 이유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3개월간의 통치를 악하다고 평가하신 이유는 그가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아하스가 왕위를 잃고 애굽으로 끌려가는 모든 일을 겪는 동안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는 것은, 그가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당시의 정치 상황에 따라 움직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신앙적인 부분만을 중심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바로 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하맛 땅 리블라에 갇히게 됩니다. 리블라는 어머니 하무달의 고향이기도 한데, 수리아 오론테스 강의 가데스 부근인 아람의 중심지 하맛에서 남쪽으로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행정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앗수르는 8세기부터 이곳에 요새를 세웠습니다. 애굽 왕 느고가 여호아하스가 왕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예루살렘으로 군사를 보냈고, 여호아하스는 이를 피해 어머니의 고향이자 군사적 요새가 있는 북쪽의 리블라로 도망한 것입니다. 애굽 군대는 리블라로 도망한 여호아하스가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가둬버리고, 이렇게 바로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유다의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벌금으로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렇게 여호아하스를 쫓아낸 느고는 요시야의 아들이자 여호아하스의 형인 엘리야김을 왕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말은 엘리야김을 요시야의 정식 후계자로 인정했다는 말로 바로 느고가 여호아하스를 정식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열왕기 저자는 여호아하스가 비록 단 석 달간 왕위에 있었는데도 유다의 왕으로 인정하고 왕의 명단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고는 엘리야김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는데, 의미상으로는 ‘하나님께서 세우다’에서 ‘여호와께서 세우다’라는 뜻으로 바뀐 것으로, 큰 변화를 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이름을 새롭게 선사한 지배자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의미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앗수르 왕들도 이렇게 했는데, 느고의 아버지 프사메티쿠스 1세는 통치자로 취임할 때 앗수르 왕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나부세지반니로 개명되었습니다. 또한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바벨론에 잡혀갔을 때 이름을 바꾼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여호야김은 애굽의 봉신으로 바로 느고에게 충성하기로 서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왕이 세워진 뒤에 바로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사로잡아서 애굽으로 데리고 갑니다. 여호아하스는 그곳에서 죽습니다.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사로잡혀 간 것은 정치적으로 더 이상 애굽에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지는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 되었던 생활에서 풀려나면서 민족이 형성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호아하스가 애굽의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은 것은 역출애굽 사건으로서, 이는 머지않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이스라엘 멸망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후에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예레미야가 애굽으로 가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유다는 요시야가 죽자마자 바로 주권을 잃고 애굽의 봉신으로 전락하게 되면서 급작스럽게 멸망의 길로 들어섭니다. 애굽에 반기를 들었던 여호아하스와는 다르게 여호야김은 애굽 왕 느고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줍니다. 35절은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의 대조적 행보를 강조하기 위해 쓴 부분인데, 여호야김은 느고가 요구한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강제로 걷었습니다. 조공을 바치기 위해 유다의 백성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인 것입니다(참조. 출애굽기 5:6). 출애굽기 5:6에서 ‘감독들’로 번역된 단어는 여기서 ‘징수하다’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한데, ‘압제하다’, ‘강요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언어적 유사성은 이스라엘의 상황이 출애굽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갔음을 암시합니다.

 

여호야김의 등극(35-37)

하나님은 ‘말씀대로’ 이루시기 위해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십니다. 다음 세대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의와 공의를 행하도록 우리 세대가 믿음으로 그들을 양육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시야의 아들들인 여호아하스와 엘리아김(여호야김)이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평가합니다.

 

35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그가 바로 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백성들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징수하였더라 36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스비다라 루마 브다야의 딸이더라 37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35-37)

 

여호야김의 등극 공식은 다른 왕의 등극과 같습니다. 그가 25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1년간 다스렸습니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스비다이고 루마 브다야의 딸입니다.

여호야김이 왕이 된 나이가 25세인 것을 보면 여호아하스보다 2살 위인 형입니다. 여호야김은 애굽의 힘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제위 기간 내내 바벨론의 봉신으로 있다가 바벨론에게 반역하는 바람에 바벨론으로 끌려가면서 왕위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하지만 열왕기 저자는 이런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신학적 입장에서 여호야김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주변의 어느 나라를 지지하느냐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바벨론의 전쟁(24:1-4)

성도들은 어떠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교만하거나 자고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자칫 교만할 때 그 교만이 파멸로 이끄는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 년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더니 2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3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4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1-4)

 

여호야김은 비록 바로 느고의 손에 왕이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애굽이 힘을 잃게 되고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침입으로 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이 됩니다. 그렇게 3년을 속국으로 보내다가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바벨론이 애굽과의 전쟁으로 전력이 약화되자 그 사이에 여호야김은 애굽과 동맹을 맺고 바벨론에게 대항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유다로 침공한 것입니다.

2절에서 열왕기 저자는 이 침략은 여호와께서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유다를 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침략으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3-4절은 하나님께서 유다를 내지 신 이유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이것은 므낫세가 지은 악한 죄들인 우상숭배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불의와 불법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열왕기 저자는 여호야김이 종교적인 죄뿐 아니라, 윤리적 사회적으로도 불의를 행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무죄 한자의 피가 가득했다는 말은 여호야김 통치 시대에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불법과 불의가 매우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로 열왕기 저자는 다시 여호와께서 왜 요시야의 회개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지 않으셨는지 설명합니다. 즉, 유다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야김의 죽음(24:5-7)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더라도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습니다. 스스로 한계를 무너트린 것은 극단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극단의 끝은 멸망의 낭떠러지 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죽음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5여호야김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6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7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점령하였음이더라(5-7)

 

여호야김의 죽음 공식에서 다른 왕들과 다른 것은 그의 무덤에 묻혔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역대하 36:5-8에 따르면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고 나옵니다. 그가 그의 무덤이나 조상들의 무덤에 묻혔다는 표현이 없기에 바벨론에서 죽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렇게 요시야의 두 아들 중 한 명은 애굽에서,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바벨론에서 포로로 생을 마감합니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릅니다. 열왕기 저자는 애굽의 멸망과 바벨론의 번성을 보고하며, 여호야김 왕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열강의 힘이 어디로 흐르는지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 누구신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흥하고 망함이 오직 주께 달려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권력의 흐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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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3-02)


요시야의 왕정 평가와 죽음

열왕기하 23장 21-30절


부지런히 한 일을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옳으냐’보다 ‘이익이 되냐’를 먼저 따지는 세상입니다. 그래서인지 내게 돌아올 이익을 계산하기보다 옳음을 유일한 이유로 삼아 행하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은 무엇보다 큽니다. 요시야 왕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 요시야는 여호와의 섬진과 예루살렘과 유다와 이스라엘에 있던 모든 우상들과 제단들과 산당들을 부정하게 만들거나 부수고 그 제단에서 봉사하던 제사장을 모두 축출합니다. 요시야가 우상을 제거한 명단을 보면 팔레스틴 땅에 우상숭배가 매우 길고 넓게 오랫동안 이루어져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우상을 제거한 뒤 요시야는 세 번째 개혁으로 유다 땅에서 성대한 유월절을 시행합니다.

 

유월절을 지킴(21-23)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몸은 풍요로운 땅에 살았지만, 하지만 그들에게 영적으로 그곳은 더 고통스러운 땅이었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는 영적으로 출애굽의 감격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한 ‘광야’였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유월절을 지키려고 합니다.

 

21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2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21-23)

 

요시야의 세 번째 개혁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백성들에게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여호와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보호하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기념 절기입니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질이 가장 중요한 3대 절기인데, 유월절이 여호와의 구원을 가장 잘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22절에서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왕정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다고 언급합니다. 이것은 이 시기에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고발이라기보다는, 요시야 18년에 지킨 유월절이 가장 여호와의 말씀대로 지켜진 유월절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역대하 30장에서 히스기야도 유월절을 지켰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와 다른 부분도 있는데, 출애굽기의 유월절은 가족 단위로 이루어진 가족 축제라면, 요시야 시대의 유월절은 왕이 주최하는 축제로 지켰고 예루살렘에서만 행해졌습니다. 요시야가 이렇듯 철저하게 유월절을 지킨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됩니다. 첫째는 유월절 기념을 통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고, 이제라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지켰을 것입니다.

 

요시야 개혁에 대한 평가(24-25)

참된 믿음은 이해타산을 초월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자신에게 올 대가를 계산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그러한 순전한 믿음을 함께 사모해야 합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도 유다가 소생할 길이 전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 순가까지 할 도리를 다했습니다.

 

24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24-25)

 

이 단락은 요시야 개혁에 대한 열왕기 저자의 평가입니다. 요시야는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서 신접한 자, 점쟁이, 드라빔, 우상과 모든 혐오스러운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우상을 제거하였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닌 이방신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들과 도구들로 이스라엘에서 흔히 이루어지던 종교적 관행이었습니다.

요시야는 신명기 18:9-12을 따라 이 우상들을 모두 제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요시야가 이런 일을 한 것은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의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평가합니다. 요시야는 일상생활 속에 뿌리 내린 종교적 관행들도 모두 제거함으로써 하나님만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25절은 열왕기 저자의 요시야 왕에 대한 평가로 이스라엘 역사상 요시야처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자가 없다고 평가합니다. 이전에 열왕기하 18:5에서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의 전과 후의 유다 왕들 중에 그런 자가 없었다고 평가되었습니다. 이제는 요시야처럼 온 맘과 온 영혼을 다해 여호와께로 돌아온 자가 없다고 평가합니다. 여호와께 돌아온다는 것은 회개를 의미하는 것으로 요시야가 우상과 산당과 제단을 파괴하고 이방 제사장들을 제거하여 일상의 모든 이방 관행을 없앤 것이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길이었습니다. 회개란 말로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열왕기 저자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였습니다.

 

유다의 심판을 확고히 선언함(26-27)

하나님의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분의 은혜는 죄를 묵인하는 불의한 은혜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를 북 이스라엘처럼 심판하신다고 선언합니다.

 

26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2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26-27)

 

요시야의 철저한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유다를 용서하실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의 기도를 외면한 적이 없으십니다.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도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와 통곡에 귀를 기울이시고 15년 더 살게 해주셨습니다. 심지어 가장 악한 왕이라고 평가받은 아합 왕도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합에게 내리기로 한 벌을 아들 세대로 미뤄주셨습니다(열왕기상 21:29), 요나서에서는 앗수르의 니느웨 왕이 회개하며 금식하고 베옷을 입었을 때 니느웨에 대한 심판 선언을 철회하십니다.

출애굽기의 황금 송아지 사건에서도 모세와 백성들의 회개에 마음을 돌이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요시야의 온전한 회개를 보면 하나님께서 므낫세 왕 때 유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 선언(열왕기하 21:12-15)을 돌이키실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26절은 그런 우리의 기대를 저버립니다.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해서 내린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완전하게 돌이켰지만 하나님께서는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므낫세는 하나님께서 가장 악하다고 평가하시며, 그로 인해 예루살렘과 유다를 그릇을 씻어 엎어놓는 것 같이 모두 제거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언을 돌이키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7절에서 유다도 내 앞에서 제거할 것이고, 선택한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여호와의 성전도 버리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동시대에 활동하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한 말씀에도 유다의 심판이 정해졌기 때문에 모세와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간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므낫세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예레미야 15:14). 모세와 사무엘도 막을 수 없을 만큼 이미 유다에 대한 심판의 추는 너무 기울어졌기에, 요시야의 개혁으로 유다 전체를 구할 수는 없었고, 다만 요시야 자신만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시야의 죽음(28-30)

하나님께서는 귀하고 선한 사람들 일수록 빨리 데려 가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로운 요시야 왕은 39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다의 모습은 왕의 죽음마저 축복이 될 정도로 유다에게 참혹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8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30신복들이 그의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 백성들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더라(28-30)

 

애굽의 바로 느고는 앗수르 왕을 지기 위해 출정하였고, 이것이 여의치 않자 유다 지역을 점령하려고 방향을 바꿉니다. 요시야는 이를 막기 위해 므깃도로 출정하였다가 애굽과 전쟁하였고, 그 와중에 요시야가 죽습니다.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지 13년 만에, 그는 39세의 나이로 전쟁터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장사됩니다. 전쟁터에서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평안한 죽음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보지 않았고, 굴욕을 당하지도 포로 끌려가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왕들에 비하면 그는 평안히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사히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조상들의 무덤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시신을 가져와서 그의 무덤에 장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그가 평안히 무덤에 묻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시아의 죽음 이후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여호아하스는 후에 애굽에서 죽습니다. 요시아를 실패한 개혁자로 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가 존재했기 때문에 유다의 멸망을 31년 동안 유예할 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과 그의 존재로 유다의 멸망을 29년간 미룰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를 실패했다고 평가하기보다는,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심판의 추가 이미 기울었고, 그것을 역전시킬 만한 상황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하나님만을 올바로 섬겼으며, 그로 인해 그의 치세 동안은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을 늦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요시야의 역할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고 회개한 왕이라는 명예를 주셨습니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사람들’ 속에서 가끔 요시야 같은 사람을 만납니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이들입니다. 어떤 이익으로 보상받지 못해도 그 길이 옳기에 걷는 사람이 되어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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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3-01)


요시야의 철저한 종교개혁

열왕기하 23장 1-20절


자신은 재앙에서 예외라는 말씀을 받았으니 적당히 해도 될 일이었습니다.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요시야는 그런 왕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확보한 구원이라고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예정된 멸망이라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오히려 더 철저했고 치밀했습니다.

 

  • 아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요시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는 일을 지시하였고 그런 가운데 여호와의 율법을 발견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확실히 알기 위해 선지자 홀다를 찾습니다. 훌다는 요시야에게 유다의 멸망은 정해졌다는 것과 요시아는 평안히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말을 들은 요시야는 세 가지 개혁을 하는데 언약갱신과 종교개혁과 유월절 준수를 하게 됩니다.

 

백성들과 언약 갱신(1-3)

종종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은 모두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봅니다. 나만 옳고 다 틀렸다는 마음으로는 개혁할 수 없습니다. 참된 가치는 서로 존중하며 같이 지켜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1왕이 보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로 모으고 2이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1-3)

 

유다의 왕 요시야의 개혁은 중요했습니다. 그의 모습은 개혁의 상징이었습니다. 그의 개혁이 위대한 것은 그 개혁을 요시야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주도하게 했고, 단 하나도 예외가 없이 철저하게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개혁은 일관된 개혁이었습니다.

당시 지도자인 제사장과 서기관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성전에 처박혀있던 율법책의 발견한 사실을 아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요시야에게는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 율법을 직접 들은 사건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8살에 왕이 된 요시야는 국정을 장악한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떤 나라를 원하신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미지가 불신앙의 원인이었습니다.

유다는 너무 타락되어서 무엇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요시야는 멸망을 바라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멸망해도 유다 안에 남아 있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원하신 것을 알았으니,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이라도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장로들과 백성들을 모아서 그 언약책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다시 세웁니다. 백성들과 함께 자신이 먼저 마음과 뜻을 다하여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것을 본 백성들도 모두 그 언약을 따르겠다고 약속합니다. 마치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체결하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요시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생각으로 이러한 의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유다 안에 있는 우상들을 제거하기로 다짐합니다. 그에게 종교 개혁은 언약에 대한 순종의 표현이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철저하게 우상을 척결할 수 있었던 것은 개혁에 앞서 온 백성이 율법을 중심으로 언약을 체결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개혁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개혁을 주도할 때, 하나님의 의가 세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성전에 있던 모든 우상을 제거함(4-7)

믿음은 그 자체로 미덕이 아닙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고 그리고 왜 믿어야 하는지를 모르면, 신앙생활이 자기최면이나 자기도취 혹은 자기기만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른 믿음을 세우기 위하여 성경을 주시고, 시대마다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들을 보내주십니다. 믿음은 믿는 자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4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부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령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것들의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5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들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 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6또 여호와의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 거기에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7또 여호와의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을 헐었으니 그 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는 처소였더라(4-7)

 

요시야의 개혁은 철저하고도 포괄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루살렘 성전 외에는 예외 없이 척결과 청산의 대상이었습니다. 다시 재건될 수 없도록 철두철미하게 파괴하였고, 자신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면 어디든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특히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우상들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했으며, 선대 왕들이 건드리지 못했던 산당들도 요시야의 단호한 개혁에는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용납하지도 말고, 봐주지도 말고, 나의 우상들을 깨뜨리고 불사르고 빻아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합시다.

 

유다 땅에 있던 모든 우상을 제거함(8-14)

개혁의 방식은 다양합니다. 즉시 제거해야할 악습이 있고, 단계적으로 마련해야할 제도가 있고, 그리고 장기적으로 변화시켜야 할 사람과 제도와 문화가 있습니다. 제도만 중요시해서도 안 되고, 사람의 변화만 강조해서도 안 됩니다.

 

8또 유다 각 성읍에서 모든 제사장을 불러오고 또 제사장이 분향하던 산당을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더럽게 하고 또 성문의 산당들을 헐어 버렸으니 이 산당들은 그 성읍의 지도자 여호수아의 대문 어귀 곧 성문 왼쪽에 있었더라 9산당들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제단에 올라가지 못하고 다만 그의 형제 중에서 무교병을 먹을 뿐이었더라 10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어떤 사람도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11또 유다 여러 왕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제하여 버렸으니 이 말들은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곳의 근처 내시 나단멜렉의 집 곁에 있던 것이며 또 태양 수레를 불사르고 12유다 여러 왕이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세운 제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세운 제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빻아내려서 그것들의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 버리고 13또 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 오른쪽에 세운 산당들을 왕이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 14왕이 또 석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고 사람의 해골로 그 곳에 채웠더라(8-14)

 

유다 왕들이 용납한 우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그 오랜 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악취 나는 우상과 그 제단과 악한 관습들이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묵히고 쌓여서 이젠 그들에게 친숙한 문화가 되고 영적으로 무감각해져버린 죄악들이 깨어있는 한 지도자에 의해 폭로되고 파괴되고 전복된 것입니다. 율법이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위대한 왕 솔로몬이 한 일이고 많은 왕들이 묵인해온 일이라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우상을 제거함(15-20)

오늘날 교회 안으로 세상의 문화가 너무 깊숙이 철저하게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하는 안일함으로는 몰아낼 수 없습니다. 요시야는 우상을 철저하게 하나도 용납하지 안했습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척결하고 청산해 나갔습니다.

 

15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16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17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하니 성읍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되 왕께서 벧엘의 제단에 대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하니라 18이르되 그대로 두고 그의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의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 19전에 이스라엘 여러 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거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20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제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15-20)

 

요시야는 철저하게 우상을 제거해 나갔습니다. 다시 재건될 수 없도록 철두철미하게 파괴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선왕들로부터 물러받은 악취 나는 우상숭배의 유산들을 과감하게 거부합니다. 묵히고 쌓여서 그들의 친숙한 문화가 되고 영적으로 무감각해졌던 죄악들이, 깨어 있는 지도자에 의해서 폭로되고 파괴되고 전복되었습니다.

요시야는 여로보암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왕들이 심어놓은 우상숭배의 흔적들도 일소하였습니다. 그는 유다를 넘어서 이스라엘에까지 개혁이 확장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려 300여 년 전 여로보암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성취되기도 하였습니다(열왕기상 13:1-3). 산당의 제사장을 죽이고 그 해골을 제단 위에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순종하는 이들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 사람이 한 나라의 왕이 아니더라도 깨어 있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가정을 세우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성취해 나갈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요시야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구원에 만족하지 않은 왕이 있었고, 온 백성의 순종이 있었으며, 이름 없이 죽어간 믿음의 선조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말씀으로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개혁은 모두의 공동 작품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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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2-01)


요시야의 개혁과 회개

열왕기하 22장 1-20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맞서 싸워온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성경을 금서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독재자들의 최대 실수’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이 므낫세 왕 시절이 아닌 요시야 왕 때 발견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다. 악을 폭로하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데 성경 말씀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 21장이 뮤다 최악의 왕인 므낫세에 관한 이야기라면 22장은 이외 대조적으로 유다 역사상 최고로 신실한 왕인 요시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므낫세 왕에 대해서 열왕기 저자는 신명기 율법을 근거로 가증한 우상숭배를 한 인물로 비난하며 그로 인해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렇게 심판의 길로 빠르게 가는 도중에 요시야라는 신실한 왕을 맞이하게 되면서 유다의 운명이 바뀔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게 됩니다.

 

요시야의 등극과 평가(1-2)

종종 우리는 남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체념하며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변하기 전에 자신부터 변해야 합니다. 남의 허물만 들추기 전에 자신부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도록 노력합시다. 때가 되면 거룩성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유다를 깨끗하게 할 요시야를 세워주셨습니다.

 

1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요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2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1-2)

 

므낫세와 아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는 이방 나라보다 더 악했습니다. 하지만 좌우로 치우치지 않은 왕 요시야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요시야는 왕이 되었을 때 여덟 살이었고 31년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요 보스갓 아다야의 딸입니다. 요시야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고 다윗의 길로 행했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평가를 받은 왕은 역사상 히스기야와 요시야 둘 뿐입니다.

 

성전 수리를 명령한 요시야(3-7)

위선의 냄새는 불신보다 고약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의 타락은 아예 안 믿는 나라보다 더 악독하고 그래서 더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냅니다. 므낫세와 아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는 이방나라보다 더 악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시야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3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성전에 보내며 이르되 4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산하여 5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넘겨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작업자에게 주어 성전에 부숴진 것을 수리하게 하되 6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성전을 수리하게 하라 7그러나 그들의 손에 맡긴 은을 회계하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진실하게 행함이니라 (3-7)

 

요시야가 국정을 책임질 나이(26살)가 되자 성전을 수리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예배의 회복을 개혁의 출발로 삼은 것입니다. 새로운 제도를 만들기보다는 성전 수리비용을 조달하는 기존 제도가 잘 운용되도록 챙겼습니다. 이 땅의 교회도 하나님과의 교제, 예배, 섬김, 말씀 순종의 갱신을 통해 나와 우리 공동체가 성전의 기능을 회복하도록 애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았습니까?

요시야는 왕이 된 지 18년이 되던 해에 사반에게 성전 수리를 명령합니다. 성전 수리는 고대 사회에서 왕의 일상적인 일이지만 열왕기에서는 요아스와 요시야만 성전 수리를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성전 수리의 책임을 맡은 사반은 왕의 서기관으로 그의 아들 아히감은 예레미야 26:24에서 예레미야를 도운 인물이고 또 다른 아들인 그마랴는 여호야김 시대에 예루살렘의 귀족이었습니다(렘 36:12,25). 그리고 사반의 손자 그달랴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당한 뒤에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반은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진 귀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성전 문에서 걷은 은의 합계를 내서 감독관에게 건네주는 역할만 하고 성전 수리에 대한 전체적인 감독은 성전 수리를 맡은 감독관에게 넘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업자들에게 돈을 주어 성전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요아스 시대(열왕기하 12:12-13)에 만들어 진 것으로 아마도 요아스 이후에 이런 방식이 관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7절에서 그들 손에 맡긴 은을 회계하지 말라고 하며 그들은 늘 믿을 만하게 일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열왕기하 12:15과 동일합니다. 이는 성전 수리가 매우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요시야가 여호와의 성전 수리에 힘썼다는 것은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돈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 앗수르가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 왕들처럼 조공을 바쳐야 하는 부담도 줄어들어 성전을 수리하는 데 쓸 은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8-13)

말씀이 말씀 그대로 선포되고, 말씀의 영광이 회복되고,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여 가슴을 찢고 회개할 때, 우리 가운데 참다운 개혁과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반이 읽어주는 율법을 듣고 요시야는 말씀을 듣고 옷을 찢었습니다.

 

8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9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보고하여 이르되 왕의 신복들이 성전에서 찾아낸 돈을 쏟아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맡겼나이다 하고 10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1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12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3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8-13)

 

성전을 청소하던 중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했다며 사반에게 줍니다. 당시 책은 양피지에 쓰인 두루마리 형태입니다. 제사장들은 토라를 가르칠 의무가 있었기에 토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되는 것은 당연한데 이것이 이슈가 된 것은 므낫세 통치 기간 동안 토라를 성전 구석에 처박아두고 읽거나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고를 받은 사반은 왕에게 돌아와 왕의 명령대로 돈을 감독자의 손에 나누어 준 것을 말하고, 대제사장 힐기야가 책을 주었다면서 그 책을 왕 앞에서 읽었습니다. 사반은 이 책을 받고 바로 읽었으므로 내용을 알고 있었고 왕에게 읽어드려야 할 만큼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왕은 율법책의 말들을 듣고는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옷을 찢는 행동은 재앙이 닥쳤을 때나 회개할 때 하는 행동으로 요시야는 율법책을 들으면서 이 책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다의 현재 상황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율법을 무시하고 듣지 않았기에 유다가 이방보다 더 악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은 힐기야와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에게 자신과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해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여호와께 물으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요시야는 율법책의 말씀을 들으며 현재 유다의 종교 윤리적 상황과 종교 전통이 여호와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만큼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명기를 통해 백성에게 계속해서 요구하신 것으로 요시야는 들음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지 확인합니다. 말씀이 말씀 그대로 선포되고, 말씀의 영광이 회복되고,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여 가슴을 찢고 회개할 때, 참다운 갱신과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요시야는 성전 수리를 명령할 만큼 이미 경건한 사람이었으면서도 율법을 듣자 당장에라도 심판을 받을 것처럼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여호와께 묻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평가하고 안일하게 살지는 않습니까?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 드러나지 않으면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홀다 선지자가 율법책을 확증해줌(14-20)

개혁은 마음의 회개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처음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였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회개는 곧 개혁의 출발점입니다. 회개 없는 개혁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의지한 진정한 회개는 새로운 개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4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매 15훌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말하기를 16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17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곳을 향하여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18너희를 보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들은 말들에 대하여는 19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0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14-20)

 

요시야 왕의 명령에 따라 그들이 찾아간 곳이 바로 여선지자 홀다입니다. 홀다는 여선지자이며 살룸의 아내로 살룸은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이며 예복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홀다가 성전 하급 관리의 아내라고 말해주는 것은 결혼한 여자를 소개하는 관습적 구문입니다.

그녀는 예루살렘 성의 신도시인 둘째 구역에 살고 있었는데 이 장소적 배경은 그녀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지자였음을 나타냅니다. 이들이 왜 여선지자인 홀다에게 갔는지에 대한 많은 논란들이 있습니다. 당시 예레미야나 스바냐 선지자가 이미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이 포함된 왕의 대규모 사절단이 주저하지 않고 그녀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홀다는 무척 잘 알려져 있고 국가의 신임을 받는 예언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왕의 말을 홀다에게 알렸고 홀다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홀다의 예언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유다에 재앙이 내린다는 것으로 유다의 멸망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여호와를 격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에게 분향했다는 것은 히스기야를 제외한 유다 모든 왕들이 산당을 없애지 않아 백성들이 그곳에서 분향하게 한 우상숭배의 죄를 말합니다. 또한 손의 모든 행위는 율법의 정신인 공의롭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사회적 정치적 도덕적인 죄도 지적하십니다. 종교적인 삶과 윤리적인 삶 모두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요시야 왕 개인에 대한 예언으로 요시야 왕이 유다가 빈 땅이 되고 저주거리가 된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겸비하며 웃을 찢는 모습을 보였기에 하나님께서 요시아의 말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요시야의 행동은 마음으로부터 철저히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먼저 마음의 상태를 언급한 후에 웃을 찢은 것을 마지막에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상태와 진정성을 보신다는 의미다. 11절에서 요시야가 옷을 찢는 겉모습만 서술했다면 19절에서는 요시야의 옷 찢는 행위 이면의 속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요시야의 회개는 이전에 심판 선언을 듣고 회개한 히스기야와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요시야 왕의 기도도 들으시고 요시야는 임박한 심판을 보지 않고 평안히 선조들의 묘실로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평안히’란 말은 논란거리입니다. 요시야는 애굽과의 전쟁 중에 갑작스럽게 전사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은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평안히’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나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요시야는 평안히 죽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임박한 심판 속에서 요시아는 심판을 다 보지 않고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평안히’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끝나고 심판은 이제 미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아무리 경건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동안 유다가 쌓아온 죄가 너무 커서 요시야 한 사람의 회개로는 심판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 지만 영원히 참는 분은 아니며 그러나 심판 중에도 여호와를 찾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개혁은 공허하며 심지어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개혁이어야 합니다. 개혁가가 아닌 개혁의 말씀이 드러나야 합니다. 말씀의 창조를 허용하는 일, 그것이 개혁의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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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1-02)


므낫세의 죽음과 아몬의 등극

열왕기하 21장 10-26절


자녀 교육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녀 교육에는 부모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바람대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 가정에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지 않으면, 처음 키워보는 자녀를 잘 키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도 믿음으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 키우는 것이 신앙적으로 키우는 것인지 잘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오늘도 기독교적 가정에 무엇인지 몰라 방황하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 므낫세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틀어 50년 가장 오랫동안 통치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의 아합 만큼이나 우상숭배에 몰두했했고, 당시 강대국인 앗수르의 봉신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고 죽습니다. 뒤를 이은 아몬 역시 아비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악행을 하다가 반역으로 죽음을 당합니다.

 

선지자를 통한 심판 선언(10-15)

 

때로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한 일을 계속하면서 멸망 아닌 다른 길이 기다릴 것이라는 헛된 망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매우 엄격합니다. 더 이상 자비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마지막 남은 기업인 유다까지도 원수들의 땅에 버려지게 하십니다.

 

10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여 이르시되 11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12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3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를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 14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들을 버려 그들의 원수의 손에 넘긴즉 그들이 모든 원수에게 노략거리와 겁탈거리가 되리니 15이는 애굽에서 나온 그의 조상 때부터 오늘까지 내가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나의 진노를 일으켰음이니라 하셨더라(10-15)

 

이런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들은 특정한 선지자의 말이 아니라 이 상황에 대한 선지자들의 말씀을 정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므낫세의 악함이 이전의 아모리 사람보다 더 악하다고 평하십니다. 그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재앙을 내리겠다고 선언하시며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두 귀가 울릴 것이라고 하십니다(12). ‘귀가 울린다’는 것은 두려움으로 떤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이스라엘을 평가하던 것과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평가할 것이고 그 결과 예루살렘을 완전히 씻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13). ‘그릇을 씻어서 엎어 놓은 것처럼’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고 그 거민을 모두 없애겠다는 것으로 진멸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들’(14)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남겨두었던 유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손에 멸망시키면서도 유다는 남겨두셨습니다(열왕기하 17:18). 하지만 이제 그 남은 자마저 적들의 손에 넘겨버리시고 그들이 노략거리와 겁탈거리가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이들을 보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 때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악을 참으셨는데 이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시간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므낫세의 죽음(16-18)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가는 길은 다르나 마지막은 다 똑같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한두 줄로 짧게 정리된다면, 우리 인생이 어떻게 요약되겠습니까? 흘러가는 감정을 따라 허비했던 어제의 시간이 후회스럽고, 이 하루의 시간에 대해 새삼스레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악한 므낫세도 마지막 죽음을 맞이합니다.

 

16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17므낫세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범한 죄는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8므낫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궁궐 동산 곧 웃사의 동산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6-18)

 

이 단락은 므낫세의 죽음 공식으로 여기서 특별한 사항은 므낫세의 죄가 우상숭배뿐만 아니라 사회적 윤리적인 폭력을 많이 행했다는 것입니다. 무죄한 피를 많이 흘렸다는 것은 므낫세의 치세 동안 공의와 정의가 실행되지 않는, 힘 있는 자들의 폭력의 시대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여호와 신앙의 타락은 항상 윤리적 다락을 동반합니다. 특이한 것은 므낫세의 죄가 언급된 것으로 므낫세가 유다 멸망의 원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17).

또한 므낫세는 조상의 묘실에 장사되지 않고 웃사의 정원에 장사되는데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고 다윗 성 동쪽의 실로암 마을에 있는 공동묘지로 추측합니다(18).

 

아몬의 등극과 죽음(19-26)

‘반면교사(反面敎師)’란 ‘본이 되지 않는 남의 말이나 행동이 도리어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를 이르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고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몬은 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실수를 보고도 답습하고 있습니다. 절대 관습은 죄의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19아몬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므술레멧이요 욧바 하루스의 딸이더라 20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21그의 아버지가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그의 아버지가 섬기던 우상을 섬겨 그것들에게 경배하고 22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길로 행하지 아니하더니 23그의 신복들이 그에게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이매 24그 국민이 아몬 왕을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대신하게 하여 왕을 삼았더라 25아몬이 행한 바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6아몬이 웃사의 동산 자기 묘실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요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9-26)

 

므낫세 이후 그의 아들 아몬이 등극하여 2년 동안 다스립니다. 아몬에 대한 평가는 므낫세와 동일합니다. 그는 므낫세가 간 모든 길을 따라 행하였고 여호와의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몬에게 강조되는 것은 므낫세의 행위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반란이 일어나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함으로 최후를 맞았다고 열왕기 저자는 말합니다. 반란 세력은 백성들에게 진압당하면서 그의 아들 요시아가 왕위에 오릅니다. 아몬도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웃사의 동산에 묻힙니다.

이방 민족보다 더 악한 짓을 자행한 므낫세와 그 시대 백성들을 향하여 재앙을 선고하십니다. 사마리아와 아합의 집에 내린 혹독한 심판을 예루살렘에도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그들을 원수의 손에 버리실 것이고, 무죄한 자의 피를 많이 흘린 예루살렘이 노략의 대상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분별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분별력을 망가뜨려 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왕만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그를 유다 백성들에게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날에 지도자들에게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에게도 분별력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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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1-01)


므낫세의 등극과 악행

열왕기하 21장 1-9절


우리 속담에 ‘다 된 밥에 재 뿌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완성이 되어가는 일을 실수로 망쳤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데 우리는 이상한 것을 추구하고 헛되게 망쳐놓은 일들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 므낫세 왕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왕들에 대한 이야기보다 열왕기 저자의 신학적 견해에 의해 선택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세워 놓은 남 유다를 그의 아들인 므낫세는 망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통틀어 가장 오래 통치했지만, 이스라엘의 아합 만큼이나 우상숭배에 몰두했습니다.

 

므낫세 왕의 등극(1-3)

선대(先代)의 신앙이 후손의 신앙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책임져주지 못합니다. 신앙은 꾸준히 진행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나 조직적으로 항상 개혁이 지속되지 않으면 처음보다 더 악해질 수 있습니다. 멈춘다는 것은 멈춘 것이 아니라 고인물은 썩은 것처럼 신앙도 썩어져 가는 되어 갑니다.

 

1므낫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오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2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서 3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1-3)

 

히스기야를 이어 므낫세가 12세에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는 남 유다를 55년 동안 오랜 시간을 통치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므낫세의 긴 제위 기간은 아버지 히스기야와 공동으로 통치한 기간을 포함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헵시바인데, 어머니의 출신지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므낫세는 히스기야 왕이 간절히 기도해서 15년 동안에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그 연장된 기간 동안, 히스기야가 병에서 나은 지 3년 후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아들을 얻은 이후에 안일하고 교만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역대하 32:25-26). 그는 12살 때 왕이 되지만, 아버지 히스기야의 개혁적인 신앙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셨던 부와 영광만 누리며 자랐습니다(역대하 32:27). 므낫세에게는 모든 것이 아무런 대가없이 주어진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통치의 날 동안 하나님을 멀리하였습니다. 주변 나라들의 모습을 본받았던 것입니다.

므낫세가 왕을 등극하면서 놀라우리만큼 부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통치 기간 동안 아합으로 비유될 정도로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2)라고 평가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의 모습이 하나님을 향하는 모습에서 다시 우상으로 돌아가는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가나안 민족들의 가증한 것을 따라한 것입니다. 신명기 18:9에서는 그 땅 민족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가증한 일 때문에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1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가증한 것을 따라 행했다는 것은 유다도 이 땅에서 쫓겨날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므낫세의 가증한 일은 아버지 히스기야의 신앙을 본받지 않고, 도리어 힘들여 이뤄놓은 개혁의 성과들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장 오래 왕위에 있으면서 가장 악한 왕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그가 행한 가증한 일은 첫째, 히스기야가 헐었던 산당들이 다시 세웠습니다. 유다의 죄의 근원이 되었던 산당을 히스기야가 간신히 없앴는데 므낫세는 이것을 가시 세웠습니다. 둘째는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이 된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 제단과 아세라 상을 만들고 일월성신 숭배가 재개되었습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일월성신을 섬긴 것은 스바냐 1:6과 예레미야 8:2에도 나오는데, 이 관행은 예루살렘에서 요시야 시대 이전에 널리 유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신명기 17:3에서 일월성신을 섬기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즉, 열왕기 저자는 므낫세가 유다 왕들과 이스라엘 왕들의 가장 악한 죄를 모두 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남 유다는 이후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24:3) 인해 멸망합니다. 그의 아비 히스기야는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18:5)고 할 정도로 하나님을 의지했고, 모세의 계명을 지켜 이스라엘의 신앙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떻게 이렇듯 정반대로 악한 왕이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자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어떤 모습을 보고 자라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녀나 주변의 지체들에게 영적 성숙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우상이 중심된 예루살렘(4-7)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단독으로 섬긴다는, 헛된 것을 함께 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하지만 므낫세는 우상을 섬김으로 점점 악을 행하는 것이 심해져 갔습니다.

 

4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성전에 제단들을 쌓고 5또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6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 7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성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성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성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지라(4-7)

 

약속의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만 섬겨야할 이스라엘은 점점 가나안 사람들을 담아가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만 섬겨야할 성전까지 악한 우상이 성전까지 장악해버렸습니다. 성전의 중요성은 이스라엘 여호와 신앙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우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6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7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8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9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명기 5:6-10)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지만, 므낫세는 말씀을 붙들고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므낫세의 행동은 열왕기서를 기록하고 있을 당시 바벨론 포로 생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일을 행한 왕이라고 알립니다.

이 단락에서 므낫세의 우상숭배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므낫세는 여호와의 성전을 건드립니다. 여호와의 성전은 여호와의 이름을 두기 위해 건설된 곳으로 여호와만 섬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것인 성전에 이방신을 위한 재단을 만들고, 우상의 제단들을 하나둘씩 성전 안에 들어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신 거룩한 곳에 아세라 목상이 세워졌습니다. 자식들을 제물로 바치고, 점치고 사술하고, 신접한 자와 박수를 가까이하였습니다. 이젠 드러내놓고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긴 것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성전에서 여호와만 섬기라는 명령을 정면으로 어겼습니다(신명기 12:2-7). 에스겔 8장에서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환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는 각종 우상숭배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10장에서 하나님께서 그 가증한 곳을 떠나는 환상을 봅니다. 그러므로 므낫세가 성전에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우상들을 들여놓고 부정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과 유다 땅에 계실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그 외의 우상숭배 관습을 열거하는데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것과 점치며 사술을 행하는 것, 신접한 자와 박수를 세우는 것입니다(6). 이 모든 행위는 신명기 18:9-14에서 분명히 금지하신 일들입니다. 그리고 이 일들을 여호와께서 가증한 것으로 여기시고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7절은 3절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으로 므낫세는 아세라 조각상을 성전 안에 세웠습니다. 일반적으로 아세라 상은 기둥으로, 보통 새긴 우상으로 표현하지 않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아세라 조각상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세라를 섬기는 데 특별한 열심을 보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화자는 아세라를 세운 장소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아세라를 세운 곳은 옛날에 다윗과 솔로몬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두라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온 지파 중에서 특별히 선택한 성전과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전과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둔 곳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독점하여 섬김을 받고 예배 받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 거룩한 곳에 우상을 둔다는 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한 행위입니다. 또한 여기에 언급된 죄들은 열왕기하 17:16-17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 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왕기 저자는 이 행위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이 땅을 떠나 유리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시 생각하실 정도로 심각한 범죄라고 말합니다.

한 가지 악을 행하면 그 다음 악은 어렵지 않게 행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결국 하나님까지 저버리게 됩니다. 무심코 용납하는 작은 죄는 없습니까? 작은 것을 용납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삶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는 것이 어제의 문제였다면, 세상과 교회가 구분되지 않는 것이 오늘의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의 삶에 들어선 우상은 없는지 뼈아프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므낫세의 꼬임(8-9)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할 것과 그의 율법을 지켜야만 이 땅에서 쫓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러한 경고를 듣고도 므낫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꾀여 넘어뜨립니다. 자기 욕망을 부채질하는 지도자를 거절하지 않고 따른 것입니다.

 

8만일 이스라엘이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떠나 유리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하셨으나 9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여러 민족보다 더 심하였더라(8-9)

 

므낫세가 왕이 된 후 앗수르의 왕위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간 산헤립은 살해당했고,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왕이 되었다가 이후 앗수르바니팔이 왕이 되었습니다. 이 두 왕의 시대는 앗수르의 전성기였습니다. 어린 시절 앗수르의 위협을 겪은 므낫세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맞아 힘겹게 저항하는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는 히스기야와 같이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는 대신 할아버지 아하스의 전례를 따라 온갖 신에게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직접 아세라 목상을 아로새겨 여호와의 전에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 왕을 섬기는 것에 아무런 갈등이 없었습니다. 백성도 므낫세의 꼬임을 받아 열방보다 더 심하게 악을 행합니다. 우리의 영향력은 선하건 악하건 주변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모세의 율법을 지키면 그 땅에서 떠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안했습니다. 그리고 므낫세는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기에 현재의 상황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신 그 민족들보다 더 악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유다도 결국 심판 받고 그 땅에서 쫓겨날 상황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속에 있어야 할 교회 안으로 세상이 침투해올 때, 교회는 얼마든지 세상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준은 더욱 엄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태복음 7: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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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0-02)


다시 교만해진 히스기야

열왕기하 20장 12-21절


 

소셜 미디어(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하는 이들에게 자기 과시의 욕망은 피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지나친 자기 과시는 정체성 왜곡의 부작용까지 낳습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끝없는 가면의 전시장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이길 험은 어디서 오는가?

 

  •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시고 15년 더 생명을 연장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다윗의 가문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신 그 언약을 따라 히스기야와 그 성읍 예루살렘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러 온 사절단과의 만남에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바벨론 사신에게 모든 것을 보여줌(12-15)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방심은 금물입니다. 받은 은혜를 소개하기보다 자신의 소유를 소개하는 모습은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났던 히스기야가 다시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국력과 군사력을 자랑합니다.

 

12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13히스기야가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 14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이르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하니 15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12-15)

 

이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입니다(12).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의 속국으로 브로닥발라단은 앗수르 왕의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남 유다의 히스기야와 동맹을 맺고 같이 앗수르 왕에게 대항하기를 원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제국의 왕이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그는 용의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히스기야 왕은 매우 순진한 왕이었습니다. 바벨론 왕 브로닥발라단은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는 소리를 듣자 편지와 예물을 보낸 것입니다. 이처럼 왕이 병들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기밀인데, 아주 멀리 있는 나라인 바벨론에서도 알고 있다면 그는 뛰어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사신을 보내는 것은 단순한 위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다 의도가 있는 호의입니다.

용의주도한 바벨론 왕과는 대조적으로 히스기야는 경솔했습니다. 선물과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브로닥발라단이 보낸 사자들에게 매우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앗수르의 강력한 압박에 같이 연합할 동지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보물을 쌓아둔 창고의 금은과 향품과 무기 그리고 창고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히스기야가 그의 왕궁과 그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보여주지 않은 것이 없다고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히스기야의 경솔한 행동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모든 물품과 무기를 보여준 것은 바벨론 사자에게 유다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완전히 노출한 행동입니다. 히스기야 입장에서는 바벨론과 동맹을 맺는 입장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부와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자랑하여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려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부와 군사력이 남 유다를 지켜주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의지하는 것은 이것들이 아니라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는 아직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어와 조공으로 왕실과 성전의 모든 은금을 가져가기 전입니다. 그래서 왕궁의 창고에는 물건들이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히스기야의 행동에 선지자 이사야는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찾아와 사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였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묻는 것은 그들이 누군지를 묻는 말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그들이 멀리서 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바벨론에서 왔다고 대답합니다. 먼 지방 사람들은 진멸의 대상은 아니지만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들은 종종 심판의 도구로서 쓰임받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9:21), 히스기야가 멀리서 왔다는 말을 강조하는 것은 진멸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동맹을 맺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히스기야 왕이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히스기야가 바벨론과 동맹을 맺기 위해서 바벨론 사자들에게 매우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입장에서는 앗수르의 심각한 군사적 위협 속에서 바벨론이 동맹을 맺자고 손을 뻗어온 것이 매우 반갑고 든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왕이 동맹국으로서 유다를 유익한 나라로 여겨주길 바라면서,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바벨론과 손잡으면 자신의 나라 유다는 더 안전하게 이끌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살다보면 자신들이 사랑 받을 만하다고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될 때가 분명이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교육을 많이 시키거나 우리들이 일하는 것들도 모두 인정받으려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게 선택을 받으면 이것을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것이 모든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다 보여주었지만, 자기 안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히스기야의 실수를 우리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주라는 사실을 동시에 인상을 주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과 자신의 나라의 위엄만 증명하려고 했을 뿐, 여호와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여호와의 심판 선언(16-18)

자기 과시는 자기 파괴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자신을 들러내고자 하는 욕망은 자신을 포장하려는 유혹으로 이어지고 결국 ‘자신’은 남김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과시는 교만으로, 교만은 심판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시련을 이겨냈지만 자만하다가 시험에 넘어졌습니다. 교만보다 더 큰 인생의 위기는 없습니다.

 

16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17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18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16-18)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라는 명령으로 매우 심각하고 준엄하게 여호와의 심판 선언을 전달합니다. 심판의 날이 올 것이며, 그날에는 왕궁의 모든 것과 조상들이 창고에 쌓아두었던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고, 물건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 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로 말을 맺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16)와 짝을 이루어 자신이 한 말이 여호와의 말씀이란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한 말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히스기야의 직계 후손, 즉 아들이나 손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는 왕궁의 환관이 되는 자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환관’은 거세되어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이것은 왕이나 왕자들이 바벨론 궁의 종이 되는 굴욕을 겪을 것이라는 의미 이상입니다. 신명기 23:1에 따르면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왕의 직계 후손들이 거세가 되는 것은 다윗 가문의 후손이 끊긴다는 생물학적 문제와 함께 다윗 가문의 후손이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된다는 신학적 문제를 같이 야기합니다. 이것은 물건을 모두 빼앗기는 것보다 더욱 수치스럽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이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히스기야가 19장에서 보여준 것처럼 다른 주변의 강대국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적을 물리쳐주셨습니다. 그런데 20장에서 히스기야는 여호와가 아닌 바벨론을 의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히스기야에게 그가 의지하려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치욕을 당할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아마 히스기야는 이런 경험을 토대로 앗수르가 쳐들어왔을 때는 오로지 여호와만을 의지하고 기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유다는 앗수르의 공격은 막을 수 있었지만, 바벨론의 침략은 막을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고 의지하는 모든 것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하나님보다 권력과 돈과 숫자와 규모에 의지하여 교세를 확장하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교회는 약해지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기보다는 외부적인 원인에 그 책임을 돌리려고만 합니다. 그러면서 정치와 사회 등 곳곳에서 기독교의 힘을 이용해 소위 기독교의 가치라고 생각되는 것을 강요하고 밀어붙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고 천지를 주관하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는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그 어떤 힘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의 반응(19)

회개는 죄에 대한 자백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며 하나님의 처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과신하고 세상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자책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신실하지 못했음을 자인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변명하거나 징벌이 가혹하다고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심판 선고를 겸허히 수용합니다.

 

19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19)

 

이런 하나님의 유다에 대한 심판 선언에 대해 히스기야의 반응은 매우 미지근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히스기야는 자신의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평안과 진실함을 주시면 그걸로 만족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호하심을 말하는 것이며, 진실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히스기야와 언약관계 속에 계시며 성실함을 보여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신이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히스기야의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믿음의 인물로 여호와와 동행하며 신실하게 살았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지만, 이것은 자신에게 한정된 삶이었습니다. 그는 자식들과 가족들에게 여호와 신앙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후손들도 대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도록 관심을 갖고 인도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의 관심이 그 자신의 인생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 시대는 부흥의 시대 마지막을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조국교회가 얼마나 힘든지 피부에 와 닫도록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젊은 세대가 사라진 현실에 대해 걱정은 하지만, 심각한 위기로 여기진 않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빚을 내서 큰 건물을 짓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위기의 시기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교회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교회들이 일군을 키워야 합니다. 자녀들이 세상이 좋아할만한 존재로 자라길 기대하기보다도 하나님의 증인이 되도록 키워야 합니다.

 

히스기야의 죽음(20-21)

사람은 떠나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남아 있습니다. 어제 이룬 성취나 오늘 내 손에 쥔 자원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오만하고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늘 경계합시다. 은혜로 살아야 사람답게 살아갑니다. 히스기야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0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1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0-21)

 

이 단락은 히스기야의 죽음 공식으로 특별히 저수지와 연못을 만든 것을 그의 업적으로 말하는데, 저수지와 연못은 앗수르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대하 32:2-8에서는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히스기야의 여러 가지 준비가 등장하는데, 물 공급이 중요한 것은 고대 공격이 주로 오랜 기간의 철통 포위를 통해 고사시키는 전략을 썼기 때문입니다. 15년 수명을 연장 받았지만, 결국 히스기야도 죽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남김없이 보여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의 유혹은 내 삶에 남은 것이 오직 은혜뿐임을 망각할 때 찾아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에게 성도로서 살아가야할 기본 자세를 갈라디아서에서 소개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라디아서 6:14).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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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0-01)

 


히스기야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

열왕기하 20장 1-11절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왜 기도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는 분이 시다 동시에 뜻을 돌이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성품은 기도하는 우리 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 20장에서 히스기야가 병 고침을 받은 사건은 18-19장에서 일어난 산헤립의 침공 이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시간 순서로 보면 회상에 해당합니다. 이전의 이야기가 후에 언급된 것은 이전부터 계속된 앗수르의 공격에 대해 히스기야가 어떻게 신앙으로 잘 넘겼는가에 집중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20장은 히스기야가 어떻게 여호와께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1)

 

가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잘못된 태도를 고치시기 위해 육신적인 고통을 보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보내실 때는, 항상 그들이 무슨 태도를 고치시기 원하시는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치유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1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1)

 

20장의 이야기는 ‘그때에’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그때’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오기 건어지만 정확히 언제인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날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일부러 시간의 모호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이야기를 보면 대략 히스기야가 죽기 15년 전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나이가 39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렸는데 죽을 정도로 심각한 병이었습니다.

본문은 히스기야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병명에 대한 많은 추측들이 있지만, 무화과 반죽을 상처에 놓으니 나았다는 계의 보고를 통해 추측해보건대 일종의 피부 질환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지자 어사야가 히스기야를 찾아옵니다. 여기서 19장에서 한 이사야에 대한 소개를 반복하는 것은 이사야의 선지자적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9장에서는 히스기야가 이사야를 불렸지만 여기서는 이사야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언하며 집을 정리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집을 정리하라’는 말은 다음 왕을 지명하여 알리라는 의미로 이사야는 히스기아에게 반드시 죽을 것이니 후계자를 지명하여 왕권에 혼란이 없게 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한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2-3)

진실한 기도는 날것 그대로를 하나님께 드러내며 자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 여부에 상관없이 정해진 대로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변함없는 하나님 사랑이 변화의 근거입니다. 삶을 정리하라는 진단이 떨어졌으나 히스기야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얼굴을 돌린 채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봅니다.

 

2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2-3)

 

하나님께 죽음 선언을 들은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돌리고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얼굴을 벽으로 돌렸다는 것은 임박한 죽음 선언에 매우 상심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낙심하고 체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거짓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실현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리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기도합니다.

 

3절은 히스기야의 기도 내용으로 제발 지금 여호와께서 기억해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과 온전한 마음으로 행했던 것과 하나님의 눈에 선하게 행동한 것은 ‘진실함’이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했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온전한 마음’은 다른 신은 섬기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을 온전하게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선하게 행했다는 것은 열왕기하 18:3에서 열왕기 저자가 평가한 것과 거의 같습니다. 이렇게 히스기야가 자신이 하나님만을 성실하게 섬겼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는 것은 공로로 거래를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본인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려고 애쓴 것을 기억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면 좀 더 살 수 있는 시간을 주실 수는 없겠는지 하고 매우 겸손하게 요청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히스기야가 큰 소리로 울면서도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살고 죽는 문제를 여호와의 손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가며 순종하는 과정이지 나의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여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4-7)

공동체가 직면한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 미래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15년 생명 연장은 개인적 치유 이상의 경험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앗수르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예시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4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7이사야가 이르되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상처에 놓으니 나으니라(4-7)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십니다. 4절에서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 이르지 못했을 때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이사야가 말씀을 전하고 성읍을 빠져나가기 전에 매우 신속하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돌아가서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주권자’라는 표현은 사사 시대 말기와 초기 왕정 시대의 전통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지도자의 칭호입니다. ‘너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호칭도 초기 왕정 시대의 다윗 언약을 기억하게 합니다. 사무엘하 7:8에서 여호와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 왕조 언약을 내리실 때 다윗을 부르신 용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입니다. 즉, 5절은 다윗 언약을 근간으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와 자신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듣고 눈물을 보았다고 하시는데, 이 말은 19:16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들으시고 보소서’라고 한 것의 근거가 됩니다. 히스기야는 이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신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병을 낫게 해주고, 3일 만에 성전에 올라갈수 있게 하며 15년을 더 살게 해주겠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며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과 다윗을 위해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시겠다는 말은 19:34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달한 이사야는 염증 부위에 무화과 으깬 것을 얹어놓았습니다. 무화과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어떤 효능이 있다기보다는, 상처를 낫게 하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예수님께서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신 행동(마가복음 8:23), 진흙을 눈에 바르는 행위(요한복음 9:6) 등과 유사합니다.

 

징표를 구하는 히스기야(8)

하나님의 징표는 회복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응답해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믿을 만한 분임을 말씀으로 사건으로 친밀한 관계로 증명해 주십니다.

 

8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하니(8)

 

그러나 히스기야는 이런 이사야의 말을 믿지 못하고 징표를 구합니다. 히스기야는 아직 여호와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에 나가면 이길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 징표를 구한 기드온과 유사합니다. 이것을 보면 히스기야가 처음부터 여호와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앗수르의 대군 앞에서도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9-11)

하나님께서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너머에게 계시는 동시에 시간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역사 속에 들어오시길 요청하는 행위입니다.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9이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한 징표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하니 10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뒤로 물러갈 것이니이다 하니라 11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9-11)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질 때 징표가 임할 것인데, 해 그림자를 십도 나아가게 할 것인지 아니면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가게 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즉, 해 그림자로 징표를 삼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해 그림자가 십도 앞으로 가는 것은 쉬우니 뒤로 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즉, 시간이 뒤로 돌아가는 초자연 적인 일을 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해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천지를 주관한다는 의미이고, 결국 천지를 창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임을 눈으로 보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정말 해 그림자가 십도 물러나게 하셨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고 히스기야의 병이 나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해그림자를 십도 뒤로 가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당연히 히스기야의 병은 나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해도 뒤로 가게 하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구조와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못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히스기야의 구원 기사는 모든 기도가 불치병을 낫게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말하기보다 기도할 이유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이자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듣고 뜻을 돌이키실 만큼 변함없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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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9-02)


이사야를 통해 응답 받는 히스기야

열왕기하 19장 20-37절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있다면 교만일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원죄의 중심핵입니다. C.S. 루이스의 표현에 의하면, 교만은 동물적 본성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곧장 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언제 주로 교만해집니까?

 

  • 앗수르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히스기야는 여호와 앞에 기도하며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예언을 받았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앗수르 군대는 돌아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유다 땅에 머물며 여전히 히스기야를 위협하자 히스기야는 좌절합니다. 그리고 다시 여호와 앞에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명예를 위해 유다를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사야는 다시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을 전달합니다.

 

앗수르 왕에 대한 심판(20-28)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고만장합니다. 자신의 힘만 믿고 화려한 전과를 믿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며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일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교만은 자신의 된 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앗수르 왕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20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21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2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비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23네가 사자들을 통하여 주를 비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가장 먼 곳에 들어가며 그의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24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강들을 말렸노라 하였도다 25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옛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무너진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 26그러므로 거기에 거주하는 백성의 힘이 약하여 두려워하며 놀랐나니 그들은 들의 채소와 푸른 풀과 지붕의 잡초와 자라기 전에 시든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27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다 아노니 28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20-28)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협박 편지를 가지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히스기야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들려주십니다. 첫째는 앗수르 왕에 대한 심판입니다(19:20-28). 앗수르 왕에 대한 심판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20-24절은 앗수르 왕에 대한 고발이고, 25-28절은 앗수르 왕에 대한 심판입니다.

 

⑴ 앗수르 왕에 대한 고발(20-24)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처녀 딸이 앗수르 왕을 멸시하고 비웃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딸이 머리를 흔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문장은 평행법으로 앗수르 왕이 여자들에게 비웃음당하고 조롱당하는 치욕을 겪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여성들이 나와 승리를 축하하며 노래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장면은 그 반대로 전쟁에 패한 후에 적의 여성들에게 조롱당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머리를 흔든다’는 것은 그 대상을 경멸하고 조롱한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를 조롱하고 비방한 앗수르 왕이 제일 먼저 받을 벌이 경멸과 조롱입니다.

22절에서 앗수르 왕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하나님을 비방하고 꾸짖은 앗수르 왕의 오만함에 대해 꾸짖으신 뒤, 그 오만함의 대상이 바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소리를 높이다’, ‘눈을 높이 뜨다’는 교만한 자의 행동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표현하는 것은 가장 이사야적인 표현입니다.

23-24절은 앗수르 왕의 말을 직접 화법으로 인용하며 앗수르 왕의 오만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이 많은 전차를 가지고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정복하고, 그곳을 전부 파괴하고 수풀만 무성한 숲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갔다는 표현은 앗수르 왕의 군대가 땅의 모든 곳을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24절에서는 앗수르 왕이 물을 조종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는 많은 지역을 정복하여 그곳을 새롭게 건설할 때, 자신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물을 얻을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강들을 말렸다’는 것은 24절 상반절과 대조되는 것으로 자신은 수량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애굽의 물도 말려버릴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발바닥으로 말린다는 것은 자신의 군대가 그 지역을 점령하면 완전히 초토화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앗수르 왕의 모습은 홍해를 가르시고, 비구름을 몰고 오시며, 땅에 풍요의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유사하게 그리면서, 자신에게 신적인 능력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⑵ 앗수르 왕에 대한 심판(25-28)

 

이런 앗수르 왕의 오만한 말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25절부터 등장으로 시작하는 것은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 너만 모른다는 뉘앙스의 조롱입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행하시고 옛날부터 정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앗수르 왕이 아무도 침략할 수 없었던 강한 성읍들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복당한 백성들은 두렵고 부끄러워 마치 시든 풀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복당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 앞에선 시든 풀 같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온 세상의 진정한 왕은 세상을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앗수르 왕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정복하게끔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27절에서 다시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가 하나님께 분노를 품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앗수르 왕이 말한 분노와 교만한 말을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 듣고 계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방신들처럼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우상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앗수르 왕의 한계와 어리석음과 대조됩니다. 앗수르 왕의 악한 말을 들으신 하나님의 판결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입에 물려 오던 길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앗수르가 관행적으로 포로를 다루던 모습으로 자신들이 포로에게 행한 것처럼, 이제 앗수르 왕이 이런 치욕을 당할 것이란 뜻입니다. 앗수르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은 산헤립이 더 이상 유다를 공격하지 못하고 퇴각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오만하고 악한 산헤립에게 벌을 내리심으로써 산헤립의 정복은 실패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유다를 지키실 것을 약속하심(29-34)

사람들에게 의해 고난을 당한 사람들은 비록 상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회복의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열심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신의 열심히 하나님의 열심을 앞서려고 할 때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29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30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31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2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34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29-3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에 사랑과 긍휼로 반응하시고, 악인들의 교만에 대해서는 심판으로 응징하실 것입니다. 이 확신을 품고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시면,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⑴ 곡식을 풍성하게 허락하심(29-31)

 

두 번째 하나님의 약속은 유다의 초목들의 회복을 징조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앗수르에 의해 파괴된 유다의 초목과 과실들이 3년에 걸쳐서 회복될 것을 말씀하시는데, 올해와 내년은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그냥 자란 곡물들을 먹을 것이고, 3년째가 돼서야 비로소 농사지은 것을 먹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30절에서는 농사 이미지를 통해 유다의 남은 자들도 회복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남은 자들은 앗수르의 침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로 이 들은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시온으로 도망간 사람들도 다시 유다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보증으로 하나님께선 자신의 이름을 거신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이 직접 이 모든 일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의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⑵ 앗수르가 못 쳐들어오도록 약속(32-34)

 

세 번째 약속은 앗수르 왕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2절에서 이 성에 오지 못하고, 화살도 쏘지 못하고, 방패도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고, 토성을 쌓지도 못한다고 하는데, 여기 언급된 것은 고대 사회에서 성을 점령하기 위해 하는 모든 전쟁 방식을 열거한 것입니다. 33절은 한걸음 더 나아가 공격은 고사하고 성에 오지도 못하고 되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에 이 모든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확인시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시는 이유는 여호와 자신과 여호와의 총 다윗 때문이다, 하나님과 다윗이 세운 언약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유다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이 세우신 언약에 충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기반이 우리 마음이나 우리 자신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 예언의 성취(35-37)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인생이 추락하는 것은 하루아침에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이 모든 일을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일해 가신다고 소개합니다.

 

35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35-37)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대를 치기 위해 나왔고, 여호와의 전쟁으로 십팔만 오천 명이 하룻밤 사이에 죽었습니다. 화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데, 이것이 구약성경이 여호와의 전쟁을 서술하는 방식입나이다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자신이 자랑하던 군대를 일은 산헤립은 앗수르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아들들에게 살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들이 성취되면서 유다에 대한 앗수르의 위협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기도로 앗수르의 무서운 군대를 물리치고 유다와 예루살렘을 지켰습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이루십니다. 나를 위한 일이기 이전에 하나님 당신의 이름과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구원이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일인 줄 착각할 때, 교만은 나를 패망의 길로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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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9-01)


어려움 속에 이사야를 찾은 히스기야

열왕기하 19장 1-19절


‘하나님의 전능을 마주하는 일이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면 우리의 무능을 마주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위협 앞에 철저히 자신과 그의 나라의 무능함을 깨닫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 랍사게의 예루살렘 공격 사건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랍사게의 말은 예루살렘의 백성들을 위협하여 항복하게 만들기 위한 수사학적 연설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여호와께서 개입하지 않으시면 여호와가 이방의 우상들과 다를 바 없는 무능한 신이 되고 마는 신학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히스기야는 이 문제를 들고 여호와 앞에 나가 여호와의 도움을 구합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를 찾음(1-5)

참담한 치욕을 당해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약소국의 비애입니다. 그러나 출산할 기력이 없는 여인의 기도만큼 간절한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힘이 남아서가 아니라 힘이 없기에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될 만큼 유능한 사람은 없습니다.

 

1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2왕궁의 책임자인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둘려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3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4랍사게가 그의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 때문에 꾸짖으실 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 하니라 5이와 같이 히스기야 왕의 신복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니(1-5)

 

신하들에게 랍사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가린 후 여호와의 전에 들어갑니다.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른 것은 커다란 재앙이 임했다는 상징으로 히스기야는 재앙이 임하자 여호와를 의지하기 위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갑니다. 현재의 상황을 여호와께 알립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신탁을 받기 위해 랍사게의 말을 들은 엘리야김과 셉나와 제사장 중 연장자들에게 회개를 상징하는 굵은 베로 몸을 가리게 한 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냅니다.

이사야에게 간 이들은 오늘은 환란과 징벌과 모욕의 날인데, 이는 아기들이 출구까지 왔는데 낳을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히스기야의 말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아기가 자궁 입구까지 나왔으나 출산할 힘이 없다는 속담은 재앙과 연결된 것으로, 아기를 출산할 때 산모가 제대로 힘을 주지 않으면 아기와 산모가 모두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특별히 랍사게가 하나님을 비방한 것에 대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허무한 우상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적들의 비방하는 말을 들으시고 옳고 그름을 판결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요청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부로 말한 앗수르를 심판해주실 것과 랍사게와 앗수르 왕의 위협에 떨고 있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아 있는 자’는 앗수르의 침략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예루살렘 사람을 의미 합니다. 이렇게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선지 자 이사야를 찾아갑니다. 그래도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여호와를 찾고 그의 말씀을 구하는 것은, 아직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에 희망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만 빼고 세상의 논리들은 맞습니다. 그때 성도들이 많은 말로 반박하려고 해도 이길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이나 전제하지 않는 논쟁에 공연히 기어든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때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용히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이사야(6-7)

구약 시대는 나라의 무능이 그들이 믿는 신에 대한 무능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복한 나라는 지배한 나라의 신을 무시하고 깔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의지할 여러 대상 중 더 나은 대상이 아니라 유일한 대상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라갈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6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7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라(6-7)

 

히스기야가 전한 말을 들은 이사야는 그들에게 앗수르의 신하들이 한 여호와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랍사게의 말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그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실이 아닌 말이 성취된 듯 보이는 것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의 참 주인이시기에 그런 말이 역사가 되지 않도록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헛된 말에 의해서 무너지도록 그냥 두고 보실 분이 아닙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보다 약하다고 하는 말은 여호와에 대한 지식 없이 전략적으로 내뱉은 말로 그런 말이 하나님께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여호와를 조롱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응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 거짓 소문을 퍼뜨려 본국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며, 또한 앗수르 왕은 본국에서 칼에 죽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조롱한 자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약속하셨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앗수르 왕은 풍문에 속아서 죽게 될 것입니다. 헛된 말로 함부로 하나님께 지껄인 자를 하나님께서는 헛된 말이 비수가 되어 돌아오게 하실 것이란 뜻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랍사게의 말에 흔들렸던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주고 안심하게 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그 속에 두시겠다’는 영은 열왕기상 22:22에서도 나오는데, 하나님의 명령으로 ‘거짓말을 하는 영’입니다. ‘거짓말하는 영’이 만든 소문은 거짓 소문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헛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조롱하던 인간들이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거짓말에 놀아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랍사게가 돌아가다가’(8)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앗수르 진영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고, 그로 인해 갑자기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를 풀고 앗수르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물거품처럼 없어졌지만, 다른 이들이 지어내는 헛된 말에는 사로 잡혀 죽게 될 것입니다. 거짓말을 잘 지어낸 자들이 거짓말에 잘 속는 것과 같은 위치였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첫 번째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높아졌을 때 우리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우리에게도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진정하게 회복 될 때, 교회도 부흥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명예를 위해 살 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명예는 땅에 떨어집니다. 이것은 곧 교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 교회도 살고, 우리도 살 것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가 침묵을 강요하고 있는 시대가 이 시대입니다.

 

앗수르 왕이 다시 협박함(8-13)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세상의 위협과 회유, 그리고 핍박까지도 도리어 자신들을 죽이는 ‘풍문’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만 믿고 위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안개처럼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 더욱 담대해야 합니다.

 

8랍사게가 돌아가다가 앗수르 왕이 이미 라기스에서 떠났다 함을 듣고 립나로 가서 앗수르 왕을 만났으니 왕이 거기서 립나와 싸우는 중이더라 9앗수르 왕은 구스 왕 디르하가가 당신과 싸우고자 나왔다 함을 듣고 다시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며 이르되 10너희는 유다의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네가 믿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겠다 하는 말에 속지 말라 11앗수르의 여러 왕이 여러 나라에 행한 바 진멸한 일을 네가 들었나니 네가 어찌 구원을 얻겠느냐 12내 조상들이 멸하신 여러 민족 곧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들라살에 있는 에덴 족속을 그 나라들의 신들이 건졌느냐 13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와 아와의 왕들이 다 어디 있느냐 하라 하니라(8-13)

 

랍사게는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정복하고 립나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앗수르 왕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립나로 방향을 돌립니다. 그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는 듯하다가 중단되었습니다. 산헤립은 랍사게의 군대와 합류하여 립나를 함락하고 더 큰 규모의 군대로 예루살렘을 다시 공격하려고 랍사게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다시 위협을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앗수르 왕은 자신과 싸우기 해서 구스 왕 디르하가가 온다는 말을 듣고 히스기야를 다시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구스 왕 디르하가는 애굽의 바로로 앗수르와는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앗수르 왕 입장에서 구스 왕의 등장은 예루살렘 정복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때마침 등장한 우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다와 애굽이 동맹 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앗수르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앗수르 왕은 이런 곤란한 상황 속에서 다시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앞서 랍사게를 통해서 했던 협박을 다시 하고 있습니다. 그 협박한 편지의 내용은 두 가지로, 첫째는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손에 예루살렘을 넘기지 않을 것이란 말에 속지 말라며, 둘째는 앗수르의 손에서 스스로 구원을 한 신들이 있었느냐고 협박한 것입니다.

왕이 전쟁하러 왔다고 하여 혹시라도 구스와 유다가 협공하면 앗수르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히스기야가 앗수르와 전쟁하러 나올지 모른다고 예상한 것입니다. 그것을 막기 위한 앗수르 왕의 술책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진멸’이란 말을 첨가하여 전쟁하러 나오면 모두 죽이겠다고 강하게 협박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14-19)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당하는 것을 보고 영적인 분노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 되심이 알려지길 위해 강력하게 요청하면, 그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욕심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제자리에 세우는 것입니다.

 

14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6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17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18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19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14-19)

 

히스기야는 이런 앗수르 왕의 서신을 받고 다시 기가 막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대로 랍사게가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앗수르로 돌아가는 것 같아 안심했는데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헤립의 군대와 합류하여 더 큰 위협을 가하는 상황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헛된 것 인가 하는 회의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가서 앗수르 왕의 편지를 하나님 보시라고 펴놓고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제일 먼저 여호와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시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으로 이런 하나님만이 세상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시며, 악한 자는 심판하시고, 의로운 주의 백성은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뒤 히스기야는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눈을 뜨고 봐달라고 요청 합니다. 여기서 히스기야가 보고 들어달라고 요청한 것은 산헤립이 하나님을 비방한 말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들으시고 이들의 무례함과 오만함을 직접 심판해달라는 암시가 들어있습니다. 앗수르 왕이 여러 나라들을 점령하고 그들의 신을 불태워버렸지만, 그들은 신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12절에서 앗수르 왕이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신들이 아무도 구원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에 대한 반박입니다. 히스기야의 이런 주장은 이사야 44장의 주장과 유사합니다. 즉, 여호와만이 신이지 우상들은 단지 돌이고 나무일뿐입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에, 귀로 들을 수 있으로 볼 수 있으며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스기야는 여호와께 자신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 만민이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은 이전에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리고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울 때 한 말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이름으로 싸우는 자들을 지키시는 이유는, 여호와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명예와 이름과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기도할 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싸울 때,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울 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싸울 때, 하나님께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가장 무기력한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기도가 나옵니다. 참된 기도는 나의 무능함에 대한 뼈저린 고백과 하나님의 전능함에 대한 찬양이 만나는 지점에서 들려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이유는 약해서가 아니라 충분히 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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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8-02)


랍사게의 회유와 협박

열왕기하 18장 17-37절


신앙의 오솔길에 우군은 드뭅니다. 마치 이리 떼 속에 던져진 양을의 처지와 같습니다. 주위를 들러봐도 아무도 없는 것같이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그 나라의 도래와 구현을 열망하는 교회는 매 순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합니까? 누그의 말을 들을 것입니까?

 

  • 앗수르의 산헤립이 국내의 혼란한 상황을 정비한 후 군사를 이끌고 다시 팔레스틴으로 침입하였고 블레셋 지역을 되찾았으며, 유다의 성들까지 정복하며 무서운 기세로 유다를 정복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요구하는 공물을 바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고, 예루살렘은 함락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공격함(17-18)

우리의 신앙적 결단은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서 줄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냐 다른 것이냐 사이의 선택일 뿐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우리를 아는 채하지만, 사실은 왜 여호와를 의뢰하는지에 대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반대로 조롱합니다. 항상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지를 점검하면 승리하게 됩니다.

 

17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18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17-18)

 

산헤립이 앗수르의 왕정을 정리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게 되자, 팔레스틴 정복에 나섭니다. 자신이 직접 출정하는 대신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끌고 라기스부터 예루살렘까지 정복하라고 보냅니다. 라기스 성은 강력한 수비성이거나 왕의 요새였습니다. 이곳은 르호보암이 요새화한 곳으로 유다 산지와 해안 평야 사이의 세펠라 기슭에 있으며, 사방으로 깊은 골짜기에 둘러싸인 천연 요새이고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라기스는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는 주요 관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산헤립의 명령을 받은 랍사게의 대군은 이런 견고한 요새인 라기스를 함락하고 예루살렘까지 진격합니다. 이 것은 당시 앗수르 군대의 전력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루살렘 성 근처까지 온 이들은 왕을 불러냅니다. 고대 전쟁에선 무력으로 싸우기 전에 먼저 말로 항복하라고 설득하거나 협박하는 말싸움을 먼저 합니다. 그러자 왕을 대신해서 왕궁 책임자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사관 요아가 대응하기 위해 나갑니다.

 

랍사게의 선동 Ⅰ(19-27)

세상은 하나님께서만 줄 수 있는 풍요와 번영을 자신들이 줄 수 있다고, 그리고 쉴 새 없이 ‘너희에게 풍요를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일종의 신성모독입니다. 오늘날 광고와 선전 문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을 진리인 양 제시하고 있습니다. 랍사게의 선동, 또한 그러한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19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20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21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2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비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23네가 사자들을 통하여 주를 비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가장 먼 곳에 들어가며 그의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24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강들을 말렸노라 하였도다 25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옛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무너진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 26그러므로 거기에 거주하는 백성의 힘이 약하여 두려워하며 놀랐나니 그들은 들의 채소와 푸른 풀과 지붕의 잡초와 자라기 전에 시든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27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다 아노니(19-27)

 

앗수르 왕의 사신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전의를 꺾기 위해 그가 의뢰하는 대상이 얼마나 미덥지 못한지를 지적합니다. 그러니 싸울 계교와 용력이 있다는 말도 입에 붙은 말뿐이라고 폄훼합니다.

 

⑴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19-25)

 

랍사게는 앗수르 왕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는데, 너희가 믿은 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19절과 20절에서 반복적으로 질문하는 것은 너희가 누구를 믿고 반역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다 왕이 싸울 능력이나 계략이 있다는 말은 오직 말뿐이라고 하며, 유다 자체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전채합니다. 유다가 의지한다고 생각하는 대상들을 21절부터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21절에 따르면 앗수르 왕은 유다가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히스기야가 애굽과의 동맹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의 비난으로 이 동맹이 성공하진 못했습니다. 랍사게는 애굽을 상한 갈대 지팡이로 비유하면서, 애굽은 동맹국을 도울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동맹들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조롱합니다. 당시 애굽은 이전의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한 상태이지만, 앗수르에 맞설 만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22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다의 믿음의 근간이 되는 여호와 신앙도 히스기야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비난합니다. 히스기야가 산당과 제단들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하라고 한 것이 여호와의 분노를 일으켜, 여호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일신 종교인 여호와 신앙의 특징을 제대로 알지 못했거나, 설혹 알았더라도 그동안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불만이 있거나 불안한 마음을 가진 백성들에게 히스기야에 대한 불신을 만들기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기를 하자며 말 타고 싸울 수 있는 병사 이천 명을 세울 수 있다면, 자기가 기꺼이 말 이천 마리를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너희는 말 탈 병사 이천 명도 없는 주제에 무슨 전쟁을 하겠다고 버티느냐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이스라엘의 신학을 이용해 놀립니다. 자신이 이곳에 전쟁을 하러 온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며 자신은 유다를 멸망시키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허풍을 칩니다. 즉,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제대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여호와의 명을 받고 유다를 치러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랍사게의 말은 매우 교묘하고 간교합니다. 이스라엘의 신학을 비틀어 자신의 공격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뜻을 바로 알고 있지 못하면 속아 넘어갈 만큼 랍사게는 탁월한 언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⑵ 유다 관리들과 랍사게의 협상(26-27)

 

랍사게의 교묘하고 탁월한 언변에 당황한 히스기야의 신하들은 랍사게에게 아람 말로 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으니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히브리 말이 아닌 아람어로 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랍사게의 말을 듣고 백성들에게 히스기야 왕에 대한 불신이 생겨서 불만이 커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국제 통용어는 아람어있기 때문에 앗수르도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랍사계는 이런 요청을 무시하는데, 성에 있는 군인들이나 백성들도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의 소변을 먹고 대변을 먹는다는 말은 앗수르의 철통같은 포위로 식량이 떨어져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며, 예루살렘이 곧 이런 운명에 처할 것을 백성들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책임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히스기야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열왕기하 6장에서 극심한 기아에 시달려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는 모습이 떠오르게 합니다.

 

랍사게의 선동 Ⅱ(28-37)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고 세속화가 교회를 유혹할 때, 유일한 대응전략은 침묵입니다. 세상의 제안과 논리를 거부해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의 말을 들어줄 용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목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꾸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때로는 가장 큰 용기와 울림이 됩니다.

 

28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29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30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31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2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34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35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8-37)

 

랍사게는 간교한 회유와 협박으로 계층간의 불화를 조장하고 저항 의지를 꺾으려 했습니다. 항복하면 좋은 땅과 안전을 선물할 것이라고 회유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앗수르의 손에서 살아남은 나라가 없었던 역사를 상기시키며 여호와를 의뢰하라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고 위협합니다. 누구의 말을 따르시렵니까?

 

⑴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28-35)

 

하지만 랍사게는 이런 요청을 무시하며, 더 크게 유다 말로 위대한 앗수르 왕의 말을 들으라고 외칩니다. 이 형식은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형식과 동일한데, 이것은 앗수르 왕이 여호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말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과 상당히 유사한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히스기야의 말에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가 너희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믿으라고 해도 듣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여호와가 앗수르 왕의 손에서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해도 듣지 말라고 반복적으로 경고합니다. 대신 앗수르 왕의 말을 들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31절에서 앗수르 왕의 말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만일 항복하면 너희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각기 우물물을 마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함락 후 볼모로 끌고가고 성읍과 포도원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과 반대의 모습입니다. 또한 더 좋은 곳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이 가득한 지역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8:78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실 때 하신 말씀을 랍사게가 인용하면서 여호와께서 주신 땅보다 더 좋은 땅으로 앗수르 왕이 인도해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앗수르 왕을 믿으라고 하며 반복적으로 여호와와 히스기야를 믿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33-35절에서는 앗수르 왕의 손에서 자신의 땅을 구한 신이 없다는 사실을 실제 예를 들어가며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이제 히스기야 대신에 직접적으로 여호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랍사게는 여호와가 앗수르 왕보다 무능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앗수르 왕이 정복한 땅의 어떤 신도 앗수르 왕의 손에서 자신의 나라를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경험적으로 보면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유다보다 강한 나라들과 도시들도 모두 멸망당했고 특히 같은 여호와를 믿은 사마리아도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상황 속에서 여호와께서 유다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신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랍사게는 이렇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말로 예루살렘의 항복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논리와 통계와 합리적인 것을 넘는 일입니다.

나라가 흥하고 멸망하는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고, 전쟁의 승패가 여호와의 손에 있으며,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여호와를 의지하면 주께서는 결코 그런 믿음의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며, 이 모든 상황을 뛰어넘으실 것입니다.

 

⑵ 유다 백성의 반응(36-37)

 

유다 백성들은 이런 랍사게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왕을 신뢰하고 그 명령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랍사게의 이간질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기 때문에 신하들은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립니다.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느끼는 지성’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세상을 읽는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애통의 언어가 필요하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도도 필요합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유지하고 살려내기 위해서 시대를 분별하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영적 실력이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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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8-01)

 


히스기야의 등극과 평가

열왕기하 18장 1-16절


 

무시로 성령 안에서 깨어 하나님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속도와 영상의 시대에 자신의 내면을 살피면서 사는 것은 신앙 유지하고 성장하는 열쇠입니다. 경건의 연습은 일상과 일터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여정에 제대로 지름길은 없습니다.

 

  • 열왕기 기자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단순히 강대국 앗수르의 침략에 의한 멸망으로 보지 않고, 여호와와 언약을 맺은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업신여겼기 때문에 여호와의 징벌을 받아 망했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는 주변 강대국의 손에 갈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신명기적 관점을 드러낸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등극과 평가(1-4)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은 얄팍한 피상성을 거부합니다.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 그 사람의 가치나 나타납니다. 질기고 질긴 우상숭배를 과감하게 단절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전통과 관행과 풍습의 이름으로 자행되던 악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1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2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3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4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1-4)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왕 호세아 3년에 유다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는 25세로 예루살렘에서 29년간 다스렸고,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던 시기는 이스라엘이 전체적으로 앗수르의 지배를 받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길로 행하며, 우상숭배를 열심히 하였던 자신의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는데,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처럼 정직하게 행했다는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히스기야 왕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결국 멸망하게 된 이스라엘의 왕들과 대조가 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것이 동 시대에 이스라엘이 망하는 사이에 유다는 망하지 않은 이유라고 열왕기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구체적인 일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4). 첫째로 여러 산당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왕들이 우상들은 제거하였지만,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 백성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게 만듦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가장 문제가 되었던 산당을 제거했다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둘째,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잘라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제거했다는 것입니다. 아세라의 경우는 매우 끈질기게 이스라엘 초기부터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셋째,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수었습니다. 모세가 만든 놋뱀은 민수기 21:6-9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놋뱀을 보면 치료되었습니다.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놋뱀을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는 우상으로 섬기며 분향하였던 것 같습니다. 놋뱀에 대한 이야기는 민수기 이후 여기서 처음 언급되지만, ‘이때까지’란 말 속에서 놋뱀을 섬기는 것이 매우 오래된 전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에 놋뱀을 보면 산다고 하는 것은 놋뱀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놋뱀을 보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 행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하는 역할이 끝나면 놋뱀은 없어져야 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보여준 놋뱀을 부수지 못하고 지금까지 간직하며 하나님이 아닌 놋뱀을 섬기는 지경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어떤 물건이나 제도나 의식 등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것으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한 히스기야(5-8)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을 떠나지 않으면 여호와께서도 항상 동행하여 주십니다. 그 결과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담대하게 앗수르 왕을 섬기지 않기로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골칫덩이였던 블레셋마저도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5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7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8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5-8)

 

이 단락은 구체적으로 히스기야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었는지 설명합니다. 히스기야는 우상을 섬기고 놋뱀을 의지하던 사람들과 달리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우리말에서 ‘의지하다’는 ‘믿다’라는 뜻으로 여호와 신앙에 바르게 서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절은 ‘들러붙다’와 ‘떠나지 않다’라는 구문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믿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6절 하반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다는 신명기적 강조점으로 그의 믿음은 말씀을 지키는 행함이 동반된 믿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7-8절은 하나님을 믿은 결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그와 항상 함께하셨고 그가 전쟁하는 모든 곳에서 그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신명기 20:1-4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의지했기 때문에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왕과는 달리 앗수르를 섬기지 않았고, 오히려 블레셋과 싸워 이기기까지 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사르곤 2세가 전사하고 산헤립이 왕권을 강화하는 시기, 즉 앗수르가 혼란기에 있을 때 앗수르에게 독립을 선포하고 블레셋과 전쟁하여 승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모든 사건에 대해 열왕기 저자는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함께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멸망(9-12)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액을 멸시하고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형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나라는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말씀 대접 받을 때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 성도는 성도가될 수 있습니다.

 

9히스기야 왕 제사년 곧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칠년에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에워쌌더라 10삼 년 후에 그 성읍이 함락되니 곧 히스기야 왕의 제육년이요 이스라엘 왕 호세아의 제구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되매 11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앗수르에 이르러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두었으니 12이는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9-12)

 

히스기야가 여호와와 함께하며 형통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 단락에서는 사마리아의 멸망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4년 곧 이스라엘 왕 호세아 7년에 앗수르의 왕 살만에 셀이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포위하였고, 3년 동안 버티다 결국 호세아 9년 히스기야 6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됩니다. 10절은 문장 앞뒤로 ‘함락하다’는 사마리아가 함락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1절은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포로로 끌고 갔다는 것을 보고합니다. 12절은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함락당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언약과 모세가 명령한 것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멸망한 사마리아는 현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전쟁에 이긴 히스기야와 대조됩니다. 이것은 열왕기 저자의 관점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형통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말하는 신명 기적 관점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친 히스기야(13-16)

사람들은 항상 완전할 수 없습니다. 현실 속에서 마음이 흔들이기도 합니다. 특히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 사람의 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점령당하자 하나님을 신뢰하던 마음이 흔들렸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을 무기력하고 초라한 분이 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13히스기야 왕 제십사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매 14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지라 15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16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13-16)

 

이야기는 다시 히스기야로 돌아옵니다. 히스기야 14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유다에 쳐들어와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합니다. 산헤립이 쳐들어온 이유는 이전에 빼앗긴 블레셋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얻고, 유다의 요새화된 성읍들을 파괴함으로써 블레셋 평야의 동쪽에 가해지는 유다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산헤립의 기록에 따르면,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채들과 수많은 마을들을 비롯해서 유다의 요새화된 성읍 46개를 점령했다고 하는데, 점령된 많은 성읍들은 해안 평야에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산헤립의 공격이 강해지자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항복하고 그에게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여기서 ‘죄를 지었다’는 표현은 왕의 말을 어겼다는, 즉 항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이 돈을 충당하기 위해 다른 왕들처럼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의 은을 주었다. 하지만 이것으론 모자라 성전 문의 금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 모두 벗겨서 앗수르 왕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산헤립이 이끄는 앗수르 군대가 매우 강성하여 히스기야가 갑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유다도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 히스기야도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 멸망당한 사마리아와 같은 운명이 될지 여부가 궁금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강대국 앗수르의 손에서 히스기야를 구원하실지, 아니면 유다를 망하게 하실지 궁금한 상태로 다음 부분을 기대하도록 남겨두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위기가 닥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고 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 모습은 히스기야의 모습으로 사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위기와 고난의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떤 분으로 다가옵니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유일한 힘이시고 능력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뢰해야 합니다.


배움은 회심을 낳고 회심은 배움을 통해 일어납니다. 배움은 사실에 대한 얄팍한 읊조림이 아니라 죽음을 거부하려는 생명을 향한 투신과 몰입입니다. 배움이 멈춘 곳에는 두 마음으로 충만한 영적 간음이 계속됩니다. 회심은 근본적인 사상의 전환이고 욕망의 재조정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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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7-02)

 


사마리아에 거주한 이방인들

열왕기하 17장 24-41절


코카콜라 사장은 피 속까지 콜라가 흐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이처럼 참된 회심을 경험한 사람은 가장 깊은 무의식적인 영역까지 하나님의 이야기가 작동해야 합니다. 외형적인 종교행위만 무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가치 체계가 하나님으로 다시 형성되어야 합니다.

 

  • 열왕기하 17장은 이스라엘이 호세아 왕을 마지막으로 앗수르에 멸망당한 것과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 이곳저곳으로 사로잡혀간 강제 이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7-23절에서는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의 이유가 무엇인지, 이스라엘이 망한 원인과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루고, 24-33절에서는 사마리아에 정착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34-41절에서는 사마리아 공동체에 대한 평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이주민에게 여호와를 가르침(24-28)

우상숭배의 본질은 ‘여호와 플러스 알파’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으면서 다른 것들을 삶의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를 믿는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확보하려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온 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따르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24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25그들이 처음으로 거기 거주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26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앗수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주하게 하신 민족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신이 사자들을 그들 가운데에 보내매 그들을 죽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니라 27앗수르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그 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그 곳으로 데려가되 그가 그 곳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하니 28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24-28)

 

앗수르에 멸망당한 뒤에 사마리아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한 뒤, 이곳에 바벨론 지역 성읍인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 사람들과 아람 지역 성읍인 하맛과 스발와임 사람들을 사마리아의 여러 성읍으로 이주시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자신들이 섬기던 종교를 그대로 가지고 왔고, 이곳에서 자신들의 신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신들을 섬기는 것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곳에 사자(獅子)를 보내어, 몇 사람을 죽이셨습니다. 갑자기 사자가 사마리아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는 사건은 흔한 일이 아니라 일종의 재앙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런 재앙은 신의 벌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재앙을 만난 사람들은 이 재앙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였고, 결국 그 땅의 주인인 여호와로부터 왔다는 것과, 여호와의 법을 알지 못해서 내려진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는데, 이미 25절에서 사자를 보낸 분이 여호와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각 지역에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 오면 그 지역의 신을 올바로 섬겨야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매우 역설적인데 그 땅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닥쳐 온 전쟁이나 기근의 재앙을 여호와께서 내리셨다고 깨닫지도 못했고, 여호와를 바로 섬김으로 그 재앙을 해결할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이들에게 닥친 그리고 닥칠 재앙은 여호와의 벌이라고 거듭해서 말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이 이 땅의 신인 여호와께서 내린 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대상이 다를 뿐 신앙심은 이방인들이 더 깊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앗수르 왕은 포로들 가운데 제사장 한 명을 데리고 가서 그곳에 거주하게 하고, 그 땅의 하나님의 법규를 가르치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법규는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방식과 여호와의 율법 전반에 관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한 제사장이 선발되었고, 그는 벧엘에 거하면서 백성들에게 여호와 경외하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단과 벧엘은 원래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로 제사장들이 활동하던 지역이기에 벧엘로 돌아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25-28절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A 여호와 경외를 하지 않음

    B 여호와의 법을 알지 못함

    B' 여호와의 법을 가르치라

A' 여호와 경외를 가르침

 

이 구조를 통해 여호와 경외와 여호와의 법을 아는 것이 이 단락의 핵심 주제라는 것과, 여호와 경외는 여호와의 법을 아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호세아와 이사야에서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과 연결됩니다.

 

종교 혼합주의가 성행한 사마리아(29-33)

‘여호와 신앙’은 전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가치와 그 이야기를 붙잡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 사랑이 그 밑바탕에 있습니다. 신앙은 항상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진리의 존재를 부정한 채 모호함을 관용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29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30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31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32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33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29-33)

 

이 단락은 이방인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에 대한 한계를 잘 보여줍니다. 이 당시는 다신 사회였기에, 여호와를 섬기면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여호와의 법을 배웠지만 여호와만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여호와를 섬기지만, 자신들이 섬기던 이방신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각 민족들마다 각기 자신들의 신상을 만들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만들어둔 산당 안에 신상들을 안치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만든 산당이란 이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기 위해 만들었던 산당들을 말합니다. 17:10에 따르면 호세아 왕 시대에도 이스라엘에 산당을 세우고 모든 산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목상과 아세라상을 세웠습니다. 그 산당들이 앗수르의 침략에도 남아 있었고 현재 이주한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장소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이주로 인해 이스라엘은 우상이 넘쳐나는 장소로 변했습니다. 30-31절은 이스라엘 땅에서 섬기던 이방신들의 명단으로 이 신들이 어떤 신들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땅에서 다양한 신들을 섬겼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32절은 여호와를 경외하여 산당의 제사장을 택하였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여호와 경외와 산당의 제사를 겸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즉, 여호와를 경외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여호와만을 배타적으로 섬기지는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33절에서는 여호와도 경외하였고 섬겼다고 표현함으로 사마리아의 종교가 혼합주의 종교였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사마리아의 종교에 대한 비판(34-41)

기억은 하나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되새기며 즉각적인 순종을 위한 고도의 영성입니다. 기억과 순종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해 경청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날도 서로 자기 말을 하려고 할 뿐 들으려고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들음에서 신실한 순종이 나옵니다.

 

34그들이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령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는도다 35옛적에 여호와께서 야곱의 자손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며 그를 경배하지 말며 그를 섬기지 말며 그에게 제사하지 말고 36오직 큰 능력과 편 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만 경외하여 그를 예배하며 그에게 제사를 드릴 것이며 37또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기록한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지켜 영원히 행하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지 말며 38또 내가 너희와 세운 언약을 잊지 말며 다른 신들을 경외하지 말고 39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만을 경외하라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셨으나 40그러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전 풍속대로 행하였느니라 41이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니 그들의 자자 손손이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대로 그들도 오늘까지 행하니라(34-41)

 

34-41절에서 열왕기 저자는 이런 상황에 대해 평가하는데, 이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아니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열왕기 저자는 지금까지도 이런 혼합주의가 계속되는 것을 질책하며, 여호와께서 야곱의 자손들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여호와만을 경외하라고 명령하셨다고 합니다.

 

35절과 36절에서는 이방신을 섬기지 말 것과 여호와만을 섬기라는 것을 대조하기 위해,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고 그를 경배하지 말며, 그를 섬기지 말고, 그에게 제사하지 말라고 사중적으로 금지한 후에 여호와만 경외하고 그를 경배하고, 그에게 제사 드리라고 말합니다. 36절에서 ‘예배하다’라고 번역한 단어는 35절에서 ‘경배하다’로 번역한 단어와 동일합니다. 그리고 37-38절에서는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39절에서 다시 여호와만을 경외하라고 말합니다. 35-39절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것과 여호와만을 경외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0-41절은 지금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호와만 섬기지 않고 당시의 풍습대로 여호와도 섬기고 자신들의 조상들의 신도 섬겼습니다. 결국 신명기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열왕기 저자는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결론을 짓습니다.

 

이 결론은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 사람을 성전 건설에서 배제하는 이유가 되며, 신약 시대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여호와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6:24에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단 눈에 보이는 우상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며,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힘을 잃어가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열왕기 저자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배움은 회심을 낳고 회심은 배움을 통해 일어납니다. 배움은 사실에 대한 얄팍한 읊조림이 아니라 죽음을 거부하려는 생명을 향한 투신과 몰입입니다. 배움이 멈춘 곳에는 두 마음으로 충만한 영적 간음이 계속됩니다. 회심은 근본적인 사상의 전환이고 욕망의 재조정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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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7-01)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그 원인

열왕기하 17장 1-23절


죄는 맹목적인 상향과 근시안적인 시각을 만듭니다. 무딘 칼처럼 변화의 시대를 놓치고 안주와 현상유지에 빠집니다. 교회가 자기만족적인 향우회나 상조회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전격적이고 근본적인 인지구조(mentality)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 이스라엘은 호세아 왕 때 앗수르에게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망하게 된 원인을 열왕기 저자가 신명기적 신학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멸망 부분(1-6)과 이스라엘 멸망의 신학적 해석(7-23)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1-6)

 

공동체의 위기는 원칙과 진리를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주의 말씀에 대한 경청과 순종을 잃게 되면 분별력이 저하되고 세속이 독버섯처럼 퍼집니다. 조상이 남긴 죄악의 적폐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누적시켜 온 북이스라엘은 이제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1유다의 왕 아하스 제십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 년간 다스리며 2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3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올라오니 호세아가 그에게 종이 되어 조공을 드리더니 4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5앗수르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 곳을 삼 년간 에워쌌더라 6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1-6)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는 ‘구원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앗수르에 의해 세워진 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의 속국 처지가 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이 단락은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역사적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1-2절은 등극 공식으로 호세아는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었고, 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지만, 이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호세아 시대에 종교적으로 이전 왕들보다는 우상숭배를 덜 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가 우상숭배에서 돌아서서 이전 왕보다 여호와를 의지한 것이 이스라엘의 멸망의 수레바퀴를 멈추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이전의 수많은 악한 왕들이 쌓아 놓은 악을 호세아 한 사람이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유다 왕 요시야도 유다의 멸망을 멈출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호세아는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침입하여 베가를 죽이고 세운 왕으로 친 앗수르 정책을 폈습니다. 이 정책은 디글랏 빌레셀 3세 다음 왕인 살만에셀 때까지 이어져 계속해서 앗수르에 충실하게 조공을 바치며 봉신국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4절에서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호세아는 앗수르에 반기를 듭니다. 먼저 호세아는 애굽의 왕 소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사자를 보낸 이유는 본문에서 설명하지 않지만,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애굽의 원조를 받아 앗수르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앗수르에게 보내던 조공을 보내지 않습니다. 애굽에는 사자를 보내고 앗수르에는 조공을 보내지 않은 이 행동들은 앗수르 왕이 보기에 호세아가 반역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앗수르 왕은 호세아를 사로잡아 자기나라 감옥에 감금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는 사로잡혀 적국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이스라엘 왕조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애굽의 힘을 의지하여 앗수르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시도가 이스라엘과 자신의 멸망을 앞당긴 것입니다. 당시 유다에서 활동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애굽에 의존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의지하였고 그 시도는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호세아를 폐위한 후 앗수르는 이스라엘로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점령하였고, 마지막에 사마리아 성을 3년이나 포위하고 공격하여 결국 함락합니다. 앗수르는 주로 완벽하게 포위하고 오랫동안 기다리며, 그곳이 기근으로 자멸하는 전법을 사용하였는데, 열왕기하 6장의 사마리아 포위 전쟁에서 보듯이, 이는 매우 효과가 있는 전법입니다. 결국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고사 작전에 견디지 못하고 호세아 9년인 주전 722년에 함락되어 이스라엘은 점령되고, 백성들은 앗수르에 포 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들은 앗수르의 여러 지역에 분산해서 거주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배교 상황(7-12)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 말고 다른 신들도 숭배했으며, 이방 사람들의 규례를 좇아 살았고, 실패한 선왕들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믿고 우상도 믿었습니다. 율법도 지키고 죄도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셨고 눈감지 않으셨고 격노하셨습니다.

 

7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8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9이스라엘의 자손이 점차로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10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우고 11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 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며 12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이라(7-12)

 

7-23절은 이스라엘 멸망에 대한 신학적 해설로 신명기적 신학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7절 시작에서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를 명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첫째 죄는 다른 신을 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직접 구원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습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이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1계명부터 어기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둘째 죄는 가나안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왕들의 규례를 행한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에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새로운 규례들을 만든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9절부터는 이들이 저지른 죄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비밀리에 행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지 말라는 것’은 우상숭배로 처음에는 비밀리에 행하던 우상숭배가 점차 이스라엘에 만연해졌습니다. 모든 곳에 산당을 만들고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습니다. 혼합주의와 우상숭배로 변질된 것이 하나님을 진노케 만든 궁극적인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이스라엘의 배교(13-18)

이방신에게 절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제의를 넘어 불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풍요를 독점하고 싶은 욕심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힘을 이용해서 착취를 일삼았습니다.

 

13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14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을 곧게 하기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그들 조상들의 목 같이 하여 15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뒤따라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따르지 말라 하신 사방 이방 사람을 따라 16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17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18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13-18)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배교의 길로 가는 이스라엘을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13-14절에서는 많은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시며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지만 듣지 않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립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뛰어난 선지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망하기 직전에도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의 외침에 회개했다는 보고가 예언서나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나서를 보면 앗수르의 니느웨가 회개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15절에서 헛된 것을 따라가며 헛되게 되었다는 것은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우상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며 나무나 돌로 인간이 만든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것을 따라갔습니다. 16-17절은 이스라엘이 행한 우상숭배를 열거하는데, 우상숭배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과 벧엘에 황금 송아지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우상들이 점점 늘어나고, 심지어는 자녀를 번제로 드리는 죄까지 저지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입니다. 이것이 열왕기 저자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국제 정세나 주변 나라들의 강성함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흥하고 망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버리신 여호와(19-23)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한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 판단은 오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판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그 말씀을 듣지 않았고 여호와를 믿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 명령을 ‘버린’ 자들을 하나님께서도 ‘버리셨고’, 악한 되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을 이방 땅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19유다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하였으므로 20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버리사 괴롭게 하시며 노략꾼의 손에 넘기시고 마침내 그의 앞에서 쫓아내시니라 21이스라엘을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나누시매 그들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더니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몰아 여호와를 떠나고 큰 죄를 범하게 하매 22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이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므로 23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19-23)

 

19-23절은 이스라엘을 버리신 이유를 다시 정리합니다. 19절은 유다와 관련된 죄로 이스라엘의 죄를 유다까지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합 가문의 악행과 우상숭배가 유다 왕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을 말하며, 이것이 이스라엘이 유다보다 먼저 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21-23절은 간략하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가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나누어 주신 것인데, 여로보암이 이 사실을 잊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호와를 떠났고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쫓으신 것입니다. 20절과 23절에서 ‘여호와께서 쫓아내다’라는 말을 반복함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은 신명기 28:36과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징벌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런 열왕기 저자의 신학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왜 망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지금까지 앗수르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을 보면 열왕기는 포로기에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타국에서 포로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왜 망했는지에 대한 신학적 물음을 가졌고, 열왕기 저자는 역사를 신명기 언약의 축복과 징벌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우리가 망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신학이란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와 시간 속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신학적 물음에 대답하기 위한 해석 작업입니다.


우리는 맘몸과 소비주의가 주입하려는 얄팍한 소비자의 정체성을 거부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유는 인간을 고립시키고 괴물로 만들어 두려움이라는 동굴에 갇히게 합니다. 성령의 분별력을 시리시간 작동하며 살려면 하나님과 이웃과의 세밀한 관계망을 형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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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6-01)

 


잘못된 배교 길로 가는 아하스

열왕기하 16장 1-20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보기도를 할 때,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식의 신앙은 훌륭한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는 교회가 능력을 잃게 만드는 독이 되고 있습니다. 성공과 번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 것입니다. 돈과 권력이 호령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신앙을 유지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면서 이스라엘 왕 베가는 죽임을 당하고 그를 대신해서 친앗수르 인물인 호세아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기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고 앗수르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담 이후 왕이 된 아하스부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면서 유다도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합니다.

 

유다 왕 아하스의 등극(1-4)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두려움에 빠지면 자신을 지켜줄 다른 것을 찾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강국의 힘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친앗수르 정책으로 잠시 반앗수르 동맹국의 위협에서 벗어났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1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십칠년에 유다의 왕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니 2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3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4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1-4)

 

유다 왕 요담의 뒤를 이어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됩니다. 아하스가 왕이 될 때의 나이는 20세 이미 예루살렘에서 16년을 다스립니다. 하지만 이전의 왕들과 그의 조상 다윗과 달리 그는 이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3-4절은 구체적으로 이하스가 행한 죄로 첫째는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길이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로보암처럼 이호와 예배와 이방 제의를 혼합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황금 송아지라는 우상을 만들어놓고 여호와 제의라고 하며, 에루살렘에서의 제사를 대신하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아합처럼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이 두 가지 죄를 모두 지었습니다.

3절에서 아하스는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이라고 서술하는데 신명기 18:10에 따르면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서 본받지 말라는 가나안 민족의 가증한 행위 중 하나입니다. 사람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것은 불로 태워 번제로 드린다는 의미입니다(에스겔 20:31). 이것뿐만 아니라 그는 산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와 같은 이 분향하면서 이방신 섬기는 데 매우 열정적인 있습니다. 이전의 왕들은 백성들이 산당에서 분향하는 것을 막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방신을 섬기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여호와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이방신을 열심히 섬긴 이유는, 당시 앗수르가 매우 강성해져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침입하고 압박했기 때문입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유다도 이에 참여하라고 압박합니다. 주변 나라들의 압박으로 유다 정세가 불안해지자 아하스는 여호와튼 이방 종교든 종교적 힘으로 이 위기를 넘기려고 제사를 드리는 데 열심을 냈던 것입니다.

유다의 위기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은데서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하스와 당대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모른 채 더욱 헛된 열정으로 죄를 지은 것입니다. 미가 6:7-8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의 도움을 청한 아하스(5-9)

모든 삶을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모든 일이 깔끔한 인과응보의 공식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의가 제때 심판을 당하지 않고 도리어 더 잘되는 일이 세상에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들키지 않은 죄가 아니라, 아직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지 않고 연기된 심판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5이 때에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6당시에 아람의 왕 르신이 엘랏을 회복하여 아람에 돌리고 유다 사람을 엘랏에서 쫓아내었고 아람 사람이 엘랏에 이르러 거기에 거주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7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8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 9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5-9)

 

앗수르의 세력을 막기 위해 아람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 하였고, 이에 함께 하지 않은 아하스를 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옵니다. 하지만 연합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아람 왕 르신은 엘랏을 회복하고, 그곳에 있던 유다 사람을 쫓아내고, 아람 사람을 그곳에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역대하 28:5에 따르면, 아람 왕은 유다 사람을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유다가 아람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는 자신을 왕의 신하요 왕의 아들이라고 하며 앗수르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약속한 뒤 아람과 이스라엘의 손에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복종을 맹세하며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하는데,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이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기며, 그에게 복종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인간 왕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대가로 여호와의 전과 왕궁에 있던 금은을 모두 가져다 뇌물로 보냅니다. 여기서 ‘예물’이란 단어 대신 ‘뇌물’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아하스의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뇌물’은 신명기 10:17과 16:19 등에서 금지된 범죄로, 뇌물로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옳지 않은 것이 라고 분명히 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의뢰하는 정정당당한 방법 대신 이방 왕에게 뇌물을 주고 그의 도움을 구하는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시도는 일시적으로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앗수르 왕이 그 요청을 듣고 올라와서 아람이 점령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였고, 다메섹에 있던 사람들을 기르로 사로잡아 갑니다. 이것은 아람 왕 르신이 엘랏을 점령하고 유다 사람들을 사로잡아 간 것과 반대로, 이번엔 아람 사람들이 앗수르로 끌려간 것입니다. 아람 왕 르신은 죽임을 당합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아람은 더는 유다의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성전에 새로운 제단을 만든 아하스(10-16)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하는 곳입니다. 이 제단을 성전에서 멀리 떨어지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포기한 배역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버리는 행위였습니다.

 

10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1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12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13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14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 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15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침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다 이 큰 제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라 오직 놋 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 16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였더라(10-16)

 

앗수르가 다메섹을 점령하자 아하스는 다메섹으로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갑니다. 전쟁 승리에 대한 축하와 아람을 물리쳐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아하스가 직접 앗수르 왕을 알현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갔다가 아하스는 제단을 보고 그것의 구조와 양식을 그려서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냅니다. 역대하 28:23에서는 이 단을 아람 신들을 위한 제단이라고 하면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에서는 다메섹의 제단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만 하고 있을 뿐 제단이 이 신을 위한 것이라는 언급은 없습니다. 오히려 왕은 다메섹 양식으로 만들어진 제단을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이전의 제단이 있던 곳에 두고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사 드리는 데 사용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아하스가 새로운 제단에서 드리는 각종 제사의 종류를 언급한 것은 새로운 제단을 공식적인 제단으로 삼으라는 의미입니다. 새 제단에 대해 ‘커다란'이란 수식어를 붙이는데, 이것은 제단이 이전 제단에 비해 크고 화려했음을 나타냅니다. 12-13절에 따르면 왕이 제단에 올라가서 제사를 지낼 만큼 매우 규모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제단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작고 단순한 놋제단에 비해 크고 화려했기 때문에, 이 제단이 아하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습니다. 이전의 놋제단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신탁을 받을 때 사용하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전에 사용한 놋제단의 권위를 더 인정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일은 아하스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우리야와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이런 아하스의 행동에 대해 열왕기 저자는 이러저러한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하스의 행동이 앗수르의 제사 양식을 가져온 우상숭배나 혼합주의 종교라고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아하스가 예루살렘 구조를 옮김(17-20)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교회도 점점 이러한 세속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효율성과 생산성을 하나님의 뜻보다 더 중시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기준에 따라 성공을 거둘 때 세속적인 요소들이 교회로 들어옵니다. 세상과 타협하거나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17아하스 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그것을 두며 18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더라 19아하스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0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7-20)

 

아하스는 성전 뜰에 있던 물두멍의 구조를 바꾸고 놋바다를 놋으로 만든 소 형상의 받침대에서 내려 돌판 위에 두었습니다. 이 것은 예루살렘 성전 기명들을 재배열 하면서 물두멍과 바다의 놋 지지대를 없앴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동을 순조롭게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부족한 놋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재배치에 대해 열왕기 저자는 어떤 평가도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앗수르 왕에게 복종하는 의미로 안식일에 사용되었던 별궁과 밖에서 들어가는 별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세웁니다. 이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아하스는 비록 아람의 위협에서는 벗어났지만, 앗수르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아하스는 한편으로는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앗수르 왕을 섬기는 이중적인 면을 드러냅니다. 19-20절은 죽음의 공식으로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를 잇습니다.


교회는 항상 ‘누구를 위해서?’와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성찰과 분별없는 신앙은 외적인 결과만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가는 과정에서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좋게 보이는 결과가 도리어 교회를 망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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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5-02)


멸망 직전 북이스라엘의 대혼란

 

열왕기하 15장 23-38절


우리 사회는 최근 정치의 무질서와 혼돈을 경험했습니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진물들이 쏟아졌습니다. 열왕기를 읽고 묵상해야 하는 중대한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성경 역시 인간의 정치와 하나님의 배후 정치를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므나헴 이후 이스라엘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나 베가, 호세아가 반란을 일으키고 왕이 됩니다. 앗수르의 침략은 더욱 거세져 이스라엘 땅을 점령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지경이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격동의 마지막 시기를 겪고 있지만, 유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왕인 웃시야와 요담으로 인해 이스라엘보다는 덜 불안정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 브가히야의 통치(23-26)

‘여로보암의 길’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진리와 계시, 역사를 왜곡하거나 권력에 종교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권력은 우상이 되고, 과정은 무시됩니다. 아무리 국가적 번영의 주역이었습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권력은 모두 헛된 것이 됩니다.

 

23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년에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간 다스리며 24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25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과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이되 길르앗 사람 오십 명과 더불어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더라 26브가히야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23-25)

 

므나헴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단지 2년간 다스립니다. 므나헵이 매우 잔인하게 백성들을 다루었기 때문에, 그의 통치 기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세력이 어린 새 왕이 등극하자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브가히야에 대한 평가도 이전의 이스라엘 왕과 동일하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브가히야에 대한 다른 업적은 언급되지 않고, 단지 그의 부하인 베가가 길르앗 사람 50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고, 사마리아에 있는 왕궁의 요새에서 브가히야와 그의 부하인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였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위소’로 번역된 ‘아르몬’는 왕궁 내에 있는 구조물로 종종 요새로 번역됩니다. 즉, 반란이 일어날 경우 성내에서 방어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이런 성내 방어 요새도 최측근의 배신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가는 브가히야의 군대 장관 혹은 신하로 소개되는데, 이것은 그가 므나헴의 최측근 신하로서 보좌하던 인물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므나헴은 상당히 잔인하게 백성을 다루고 전쟁을 한 인물입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 므나헴의 측근이었던 베가를 중심으로 모여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베가의 반란을 가장 지지한 곳이 길르앗으로 그곳에서 50명의 용사를 보내 베가의 반란을 도왔습니다, 이렇게 브가히야는 길가나 전쟁터가 아닌 자신의 왕궁 요새 안에서 최측근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면 광야 길도, 저들이 에워싼 전쟁터도 안전하지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시면 자신의 왕궁 요새도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왕 베가의 통치(27-31)

참된 권위가 상실된 곳에 권위를 무시하는 경향이 독버섯처럼 펴집니다. 책임이 사라지고 반역을 향한 권리만 주장됩니다. 유지되고 계승되어야 할 가치와 정신은 사라지고, 무질서의 혼돈만 남습니다. 부패와 혹정은 혁명을 부르지만, 권위 상실은 공동체의 와해를 가져옵니다.

 

27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이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간 다스리며 28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9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30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31베가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28-31)

 

이스라엘 왕 베가가 왕이 되었을 때 유다는 아사랴(웃시야) 52년입니다. 베가는 20년간 이스라엘의 왕로서 다스렸지만, 그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베가 때 앗수르의 왕은 디글랏 빌레셀 3세이며, 당시 앗수르는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가진 상태였습니다. 결국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이스라엘 북쪽 도시들을 점령하였습니다.

29절에서 언급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는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 지명들로서 이스라엘이 북쪽 지역을 거의 전부 앗수르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때가 주전 733년경이며, 기록에 따르면 만 삼천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앗수르로 끌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것은 이스라엘이 다시는 경제, 군사적으로 회복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기에 호세아는 반란을 일으켜서 베가를 죽이고 대신 왕이 됩니다. 호세아의 반란은 단순히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이전의 반란과 성격이 다릅니다. 디글랏 빌레셀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들의 왕인 베가를 폐위했고, 내가 그들을 다스릴 왕으로 호세아를 세웠다고 합니다. 즉, 베가는 앗수르의 손에 의해 제거되었고, 앗수르의 하수인인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으로 등극한 것입니다. 31절은 베가의 죽음 공식으로 베가도 비록 반란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정식 왕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유다 왕 요담의 통치(32-38)

불순종에 빠진 권력자를 하나님께서 버리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선택된 자가 그 뜻을 거역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불러서 버린 사람을 대신하게 하십니다. 소명과 사명에의 충성이 생명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32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33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34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5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36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7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38요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32-38)

 

이야기는 유다 왕조로 넘어갑니다. 유다 왕조는 이스라엘 왕 베가 2년에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됩니다. 요담은 아버지 웃시야가 나병에 걸려 별궁에 격리되었기 때문에, 웃시야를 대신해 여러 해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웃시 야가 죽고 나서 정식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의 어머니는 사독의 딸 여루사입니다.

이전 유다 왕의 태후는 출신 지역으로 소개한 반면, 요담의 어머니는 사독 가문의 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독 가문은 유다의 대제사장 가문으로 웃시야가 사독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은 왕실과 제사장 가문의 결혼으로 유다 왕정이 여호와 신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하게는 것은 아닌데, 34절에서 요담에 대한 평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전의 왕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였지만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고, 백성들이 여전히 우상에게 분향하게 하였습니다. 한 번 잘못 들어온 우상숭배는 제거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시대에 유다에서 활동하던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유다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신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모르고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해 비판합니다(이사야 1:29). 요담의 업적은 예루살렘의 위쪽 문을 건축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독 가문의 어머니의 영향으로 예루살렘 성전 제의를 중요하게 여겨 설전을 보수하고 개축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요담의 모습은 하나님을 섬기면 서도 뿌리 깊은 악습을 뽑아내지 못하는 모습으로,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산당까지 완전히 제거했을 것입니다.

 

유다 왕국에서 여호와의 산당까지 제거하며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간 인물은 후에 등장하는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뿐입니다. 히스기야의 경우는 우상을 제거하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였고요시야의 경우는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개혁해야 한다고 이야기해 준 훌다 선지자의 말을 믿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요담 당시에도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이사야의 소명 기사는 웃시야가 죽고 요담이 왕으로 즉위하던 때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담은 이사야의 말을 온전하게 순종하진 못했습니다. 요담이 우상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순종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동뎀담은 이사야의 말을 온전하게 순종하진 못했습니다. 요담이 우상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순종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동맹군을 보내 유다를 공격하게 하십니다. 당시에는 앗수르가 너무 강력하여 이에 위협을 느낀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대항하였고, 이 동맹에 유다가 참여하기를 촉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촉구에 응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유다를 공적하게 되는데, 열왕기 저자는이 모든 일을 여호와께서 주관하고 계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38절은 요담에 대한 죽음 공식입니다. 요담은 죽은 후에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그를 대신해 왕이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이스라엘이 반란과 대조적으로 유다는 평안하게 왕위가 계승되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여호와 잎에서 정직하게 행한 왕들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저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시고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원대한 구원의 계획은 그 뜻과 이야기를 알고 순종한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은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 속에서 드러납니다. 생명을 위한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歷史)와 만나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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