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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2-01)


하나님의 판단력으로 다스리는 왕

시편 72편 1-11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를 이루시기에,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확실한 길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믿어야 하며, 기도가 실천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는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합니까?

 

  • 하나님을 따르는 왕은 그가 주신 판단력과 공의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립니다. 그 결과 온 나라에 평화가 깃들고 의인이 흥왕하게 됩니다. 왕의 통치는 영원하며 땅 끝까지 이르므로 온 세계 왕들과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상적인 왕(1)

왕은 결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공의를 왜곡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특히 힘없고 약한 가난한 자들을 향해서는 더욱 엄격하게 공의와 정의를 적용하여 억울한 피해를 막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라와 교회에 세우신 지도자들이 위임받은 권력을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사용할 수 있는 판단력(공정한 마음)과 정의로운 마음 주시기를 기도하고 또 그렇게 사용하는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1)

시편 72편은 시편 제2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시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적인 인간 왕을 위한 기도입니다. 1절에 소개된 ‘왕’와 ‘왕의 아들’은 같은 사람으로 볼 수도 있고, 두 사람이라면 왕의 아들이 이번에 새 왕이 되므로 적법한 왕임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시 45:16). 시인은 “하나님이여”라고 기도를 시작하며 백성을 다스릴 때 왕에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판단력(또는 정의)과 공의를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판단력과 공의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께서 규정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은 하나님 대신 그의 백성을 통치하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통치 속성인 판단력과 공의를 가져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나라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간구는 솔로몬이 왕이 된 후 하나님의 백성을 재판할 때 제대로 판결할 수 있도록 지혜와 판단력을 하나님께 간구한 모습을 기억나게 합니다(왕상 3:9-12). 솔로몬은 백성을 공의로 판단하고 선악을 구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의 통치 방법임을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성전 건축 후에도 하나님께 자신과 백성을 위해 기도하였고, 백성들에게는 여호와만이 온 세상의 하나님임을 선언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행하라고 권면함으로써 영적 지도자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왕상 8장).

 

왕의 공의로운 통치(2-4)

하나님을 떠난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연약한 자의 것을 빼앗고 자연을 파괴하는 동안 자연도 인간을 외면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 우리를 징계하시지만, 우리가 나누고 사랑하고 평화를 구할 때 사람은 물론 자연과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2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4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2-4)

왕은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판단력과 공의를 받아야 백성을 하나님 방식대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또한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태도를 가지고, 공의를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통치를 이뤄나갈 수 있습니다(시 45:7). 그렇다면 이때 왕이 돌봐야 할 백성은 누구입니까? 나라의 백성은 왕의 개인 소유가 아니라 2절에 언급하듯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출 19:5).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왕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백성들로 소개된 자들은 삶 속에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안고 있는 무리라는 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 억울하고 압박 받는 자들을 소개합니다(2,4,12,13).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벙어리, 고독한 자, 간곤한 자, 궁핍한 자를 예로 들었습니다(잠 31:8). 시편 113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살피시는 자들의 예로 가난한 자, 궁핍한 자, 잉태하지 못한 여자를 언급했습니다(시 113:6-9). 이런 예들에서 알 수 있듯이 본 시에서 언급한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란 단지 물질적인 부족함을 느끼는 무리만이 아니라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신앙적이든 삶의 어떤 영역에서든 도움이 필요한 무리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이웃과 가족에게 소외당하고 마음에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이런 백성들은 가족과 사회의 관심과 긍휼을 필요로 하지만 이를 확실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왕의 공정한 재판을 통해서입니다. 왕이 이들을 성실하게 변호하여 억울함을 풀어주고 핍박하는 자를 심판할 때 그의 왕권도 견고하게 되며(잠 29:14) 이스라엘 온 산지, 즉 나라 전체에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시 72:4).

 

왕의 영원한 왕국(5-7)

왕의 통치는 해와 달이 있을 동안 영원할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왕의 나라는 강성할 것이고, 왕의 통치가 때맞춰 내리는 비와 땅을 넉넉히 적시는 소낙비(폭우) 같을 것임을 믿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정의가 만개하고(혹은 의인이 번성하고) 평화가 것이며, 왕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6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5-7)

 

공의를 실천하는 왕이 있는 나라는 평화롭고 영원히 지속됩니다. 백성들은 왕이 자기들을 어떻게 보살피고 정의를 구현하는지 보았으므로 해와 달이 지속되듯 변치 않고 ‘주’를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5). 여기서 ‘주’(당신)는 하나님을 가리킬 수도 있고 왕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1, 2절에 나오는 ‘주’는 분명히 하나님을 지칭하므로 여기서도 일관성 있게 하나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인간 왕의 공의로운 통치를 통해 백성이 하나님을 계속 경외할 것으로 이해됩니다. 반면 2절부터 시작하여 17절까지 줄곧 ‘그’(왕)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문맥상 ‘왕’으로 읽는다면 자연스럽습니다. 이 경우는 왕의 공의로운 통치를 보고 백성이 그 왕을 계속적으로 존경할 것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둘 다 시의 전체 주제인 ‘공의의 하나님이 세우시는 공의의 왕의 다스림’에 벗어나지 않으므로 하나를 고르기보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그대로 두어도 해석상 큰 문제는 없습니다.

왕의 공의로운 다스림은 물이 꼭 필요한 풀 위와 땅에 내리는 비와 같이 백성에게 유익을 줍니다. 건기와 우기만 있어 물의 소중함이 더 절실한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는 것은 다른 것으로 충족할 수 없는 큰 유익과 축복을 뜻합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파종과 추수 때에 맞춰 내리는 이른 비(가을비)와 늦은 비(봄비)를 종종 하나님의 은혜로 표현하듯(호 6:3; 욜 2:23) 6절의 비나 소낙비는 백성에게 임한 왕의 은혜를 함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공의로운 왕이 다스리는 평화로운 나라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의 백성들의 합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왕만 공정하고 의롭게 다스린다 해서 나라의 명화가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왕을 따라 백성들도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 중에서 의인이 늘어나고 흥왕하게 될 것이며 달이 없어질 때까지 영원히 나라에 평화가 유지됩니다. 이처럼 지도자의 역할은 무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면, 모세와 여호수아가 지도자였을 때는 그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종용하였으므로 그나마 백성들이 하나님을 따랐지만, 가나안 정착 후 여호수아가 죽자 백성은 곧 우상을 섬기고 자기 눈을 기준 삼아 제멋대로 살게 되었습니다(삿2:10-13; 17:6). 다윗의 경우 하나님을 전심으로 따르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자였으므로(왕상 9:4; 14:8) 그 시대의 백성만이 아니라 후대의 왕들과 백성들이 따라가야 할 표본이 되었습니다(왕하 22:2; 대하 28:1). 그러나 여로보암이나 므낫세처럼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하는 자가 왕으로 통치했을 때는 백성이 더한 악을 행하게 되었고(왕상 14:16; 대하 33:9).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죄를 범한 것은 왕이 악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왕상 14:16: 16:2).

 

왕의 우주적 통치(8-11)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십니다. 창조 이래로 지금까지, 또 영원토록 변함없이 세상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스라엘 왕들을 통해 펼쳐졌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백성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펼쳐집니다.

 

8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9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10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11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8-11)

 

백성의 좋은 지도자인 왕의 나라는 영원할 뿐 아니라 그의 통치가 세상 모든 땅과 바다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라는 어구는 두 가지 단어로 전체를 표현하는 수사법입니다. 구체적으로 바다는 지중해를 강은 유브라데를 가리키지만 전체적으로는 온 세상을 지칭합니다. 이와 같이 온 세상을 통치하는 왕의 모습은 시편 2:8에 언급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이 실현되는 장면입니다. 왕의 위세와 우주적 통치는 땅 끝까지 영향을 미쳐 온 민족이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상황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왕을 대적하던 자들조차 왕에게 나와 굽히고 티끌을 핥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굽히다’는 무릎을 꿇어 복종하며 경배하는 모습을(시 22:29), ‘티끌을 핥다’는 완전히 패배하여 수모를 당하는 모습(창 3:14; 사 49:23: 미 7:17)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둘째, 온 세계의 왕과 민족이 왕을 경배하고 섬길 것입니다. 다시스, 스바, 시바와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진귀한 예물을 들고 와 그를 경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의의 왕이 온 세계 모든 왕을 다스리게 되므로 땅 끝에 있는 민족들까지 다 그 앞에서 경배할 것입니다(시 22:27-28). 지금까지 언급된 이상적인 왕국은 다윗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며 (삼하 7장),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높여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의 무름을 예수의 이름으로 꿇게 하시고 모든 자가 그를 주라 칭할 때 완벽하게 실현될 것입니다(빌 2:10).


기도는 단순한 기대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역사의 다음 페이지를 여는 열쇠이자 부활의 능력이 우리 삶의 실재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합시다. 기도 중에 의지는 새로워지고 성령께서 복음으로 충만케 하시고 주의 뜻을 행하는 자로 우리가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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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1-02)

 

 


끝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

시편 71편 17-24절


 

버려진다는 것은 끔찍한 경험입니다. 누군가에게 버려졌을때 설상가상으로 큰 어려움들이 많이 닥쳐오기 때문에 충격은 몇 배로 더 커집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나이가 많아쇠약해진 때에 누군가에게 버림받는다면 자존감이 추락하고 더 큰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은 시인은 하나님만이 성도의 의지가 되는 분이며 고난 중에 구해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를 심판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성실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는 시인(17-18)

공의와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 일생을 큰 능력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인정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해야 합니다.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어려서부터 경험했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철저히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17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18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17-18)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태어날 때부터 그의 보호자가 되어 주신 것(5-6)만이 아니라 그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 주셨습니다(17). 이 말은 시인이 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배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나 부모나 다른 이들을 통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암송하기 위해 읊조리며 자라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어렸을 때부터 나이가 든 지금까지 줄곧 하나님을 신뢰하며 배우고 하나님의 능력을 담대히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였습니다. 이번에 하나님이 또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시면 이번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전파할 것입니다. 그는 이 세대에게만이 아니라 다가올 세대에게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려는 의지를 불태웁니다. 이때 시인은 9절의 간구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마시고 계속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를 다시금 간구합니다. 한편, 여기서 반복되는 “버리지 마소서”라는 간구(9,12,18)는 원수들의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11)는 주장을 생각나게 하여 긴장감을 일으킵니다. 현재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시인을 버리셨다고 봐야 합니까? 시인은 하나님의 무응답과 무관심을 이제 받아들이고 포기해야 합니까? 시인은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고, 떠나시고, 내버려 두시고, 귀 기울이지 않으시는 것같이 느끼는데(2,9,12) 이런 유사한 상황은 성경의 다른 책이나 시편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시 13:1; 27:9; 44:24; 욥 13:24). 그러나 시편 27편의 시인이 권면하듯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을 바라야 합니다(시 27:7-14). 이 시기는 단련의 기회이며 하나님을 더 신뢰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것은 잠깐이고 우리의 인내를 위함이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회복을 위함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우리로 칭찬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욥 42:5; 잠 7:14; 벧전 1:7; 4:12-16). 더구나 본 시편에서 시인은 부당하게 고난을 받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리면 그의 구원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잠 20:22: 시 37:34), 그러나 죄를 지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를 찾으라”고 하셨지(욜 2:12-14; 암 5:4) 방관하거나 포기하고 죄의 형벌을 기다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행동,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행동을 책망하셨습니다(호 7:10, 13-14; 암 4:6-12; 미 2장). 이처럼 죄로 인한 고난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의 때이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찾고 불러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고난의 때에 능력의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동이 아닙니다(호 12:6; 약 5:13).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다른 점입니다(시 79:6; 렘 10:25), 하나님 백성만이 가지는 의무이며 특권입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주장(11)이 허무맹랑한 말이며 억측이라고, 당당히 나서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놀라운 일을 전할 때를 기다립니다. 노년의 때를 다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시인은 점점 나이 들고 쇠약해지는 때인 것 같습니다(9,18). 어렸을 때나 지금 나이 들어 노년의 시기를 바라보는 때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였고 이는 계속될 것입니다.

 

고난에서 구하시는 하나님(19-21)

큰 어려움을 당했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 앞에서 낙망하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땅 깊은 곳과 같은 외롭고 힘든 곳, 아무도 찾는이 없는 고난의 땅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으키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깊은 곳에 내려갔던 만큼 더 높은 곳으로 올리시고 창대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큰 일을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20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21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19-21)

시인은 이제 공의를 베풀어 그의 백성을 고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이 시에서 하나님의 성품 중 ‘공의’를 가장 강조하였습니다. 현재 그가 무고히 고난 받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공의가 확실히 나타나길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크고 놀라운 일(17, 19)입니다. 특히 고난과 재난에서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고 땅 깊은 죽음의 장소에서라도 그들을 소생시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같은 분이 어디 있습니까? 시인은 오직 하나님만이 성도가 신뢰할 분이며 고난의 때에 공의의 구원을 기대할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한편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통한 축복과 위로도 간구합니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소서”의 문자적 번역은 “나의 창대함을 더하소서”인데 이 기도는 마치 “성공하게 하소서”, “유명하게 만드소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개인의 부귀영화를 바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 근거로는 첫째, 앞에 19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큰 일’과 ‘창대함’이란 단어가 모두 히브리어로 ‘큰’이라는 같은 단어에서 파생되었으므로 시인이 말하는 창대함이란 자신의 명예나 명성보다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그 큰 일과 같은 창대한 일을 자기에게 계속 일어나게 해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소서” 뒤에 나오는 “다시 나를 위로하소서”도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어 위로해달라는 요청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자신의 수치를 씻어주시고 괴로움에서 기쁨으로 바꿔달라는 요청으로 이해되므로 위 같은 해석을 지지해줍니다. 셋째, 이 시편 전체에서 시인이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의도는 나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전하고 찬양하겠다는 의지만 반복된다는 점도 이 해석을 지지해줍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이켜 천하 만민 중에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습 3:19-20)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 덕분에 수치가 아닌 칭찬을 얻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의 성실과 공의를 찬양(22-24)

믿음의 사람도 고난을 잘 견뎌내고 회복의 은혜를 입지 않았습니까? 지금 깊은 땅속과 같은 상황이라도 찬송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갑절로 창대하게 하시고 지난 모든 고난조차 기억나지 않도록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반드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23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24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22-24)

공의의 하나님이 자기를 고난에서 건져 위로하시길 구한 시인은 이제 기도를 마치며 하나님의 성실을 찬양하겠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시인은 악기를 연주하고 기뻐 외치며 하나님을 노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 찬양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성실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여러 고난과 행복을 겪는 시간과 늙어 백발이 될 때까지 하나님의 변함없는 공의와 사랑을 시인은 찬양합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목소리로 찬양하든 소리쳐 외치든 하나님의 속성과 하신 일에 감사하므로 시인에게 진정한 기쁨이 넘칩니다. 시의 곳곳에 ‘항상’, ‘종일토록’, ‘더욱 더욱’(6,8,14,15,24)과 같은 표현이 나와 시인이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생각하며 찬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22)를 포함하여 시 전체에서 시인이 자주 부르는 하나님의 호칭하나 하나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담겼습니다. 처음으로 나온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라는 호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이집트에서 구출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나라가 되길 원하신 것(출 19:4-6)을 상기시킵니다. 덧붙여, 시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속량자’로 부르는 데에서도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삼하 4:9; 왕상 1:29)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건져 구속하신 사건과 언약을 떠오르게 합니다(신 7:8; 시 111:9). 구속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시인과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찬송의 대상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찬양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종일 읊조릴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중얼거린다는 것은 시편 1:2에서 행복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삼고 그 말씀을 중얼거리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께서 교훈하신 말씀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과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이 이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성실과 공의를 되풀이하는 것은 그에게 언제 재난이 일어날까 살피는 자들(“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13,24)이 결국 수치를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 공의의 심판이 임할 때 하나님의 공의와 성실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시인의 첫 간구인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의 기도도 같이 응답됩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람들에게 없는 신실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하시면 끝까지 놓지 않으시고 보호하시기에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백발이 되어도, 깊은 땅 속에 갇힌 것과 같은 고난을 겪을 때에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강한 팔로 더 든든하게 붙들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세월 지나갈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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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1-01)


어릴 때부터 변함없이 신뢰한 하나님

시편 71편 1-16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도 인생에서 수많은 굴곳을 경험합니다. 똑같이 환난이 닥쳐왔을 때 어떤 성도는 주저앉아 버리거나 낙심합니다. 반면에 어떤 성도는 묵묵히 견디며 의연하게 이겨 냅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요? 어려운 문제나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 어떻게 해야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잘 이겨 낼 수 있을까요?

 

  •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모태에 있을 때부터 나이 들어 늙을 때까지 늘 든든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현재 원수들이 그를 해하려 할 때에도 시인은 하나님만 신뢰하며 그의 구원만을 간절히 구합니다. 이때 그가 잘못했는데 구해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무고하게 고통 받고 있으므로 공의의 하나님이 상황을 살피시고 그의 공의를 따라 신속히 그를 구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구원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신뢰의 고백과 구원의 요청(1-4)

우리 인생에서 이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안전과 승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들리고 넘어지고 쇠하고 사라집니다. 이 세상은 다 그렇습니다. 존재 의원이신 주님만이 영원하십니다. 그분을 의지하는 것만이 그 영원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2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3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4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1-4)

본 시편은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 고백과 구원 요청으로 가득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함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께”라고 첫마디를 외치며 “내가 피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시인은 자신이 피난처 삼는 분이 오직 하나님임을 강조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여호와여”라고 부르는 데는 하나님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시인의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음과 하나님께서 시인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 분임이 암시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피한다는 말 자체에서 시인이 현재 고난에 처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잇따라 나오는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마소서”(1)라는 간구가 이 점을 뒷받침합니다. 그가 당하는 수치는 그를 죽이려는 자들의 간계와 비방 때문이며, 이에 대해서 4, 7, 10-11, 13, 24절에 대부분 간접적으로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신뢰를 바탕으로 구원을 간구하는 시인의 기도는 계속됩니다. 구원과 관련하여 시인은 “나를 건지소서”, “나를 풀어주소서”, “당신의 귀를 내게 기울이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항상 가서 숨을 바위가 되어주소서”, “나를 구원하라고 명하소서”, “악인의 손에서 풀어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건지소서”, “풀어주소서”, “구원하소서”는 모두 ‘구원하다’로 번역할 수 있는 동사지만, 각 동사가 가진 의미를 풀어보면 ‘위험에서 잡아채어 건지소서’,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소서’, ‘나를 도와 승리하게 하소서’로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간구는 하나님만이 시인을 건져줄 수 있으며 그럴 능력이 있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때 시인은 특별히 하나님의 공의로 자기를 구해주시길 요청합니다. 이는 시인이 하나님을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장으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시인이 하나님의 공의의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현재 고난이 자기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상황을 공정하게 살펴보시고 자기를 원수들에게서 구해주시길 기대합니다. 시인의 이런 기대는 ‘혹시나’ 하는 의구심 섞인 기대가 아니라 “당신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나이다”(3)라는 선포에서 알 수 있듯이, 앞으로 일어날 구원을 확신하는 기대입니다. 시인의 간구와 기대는 모두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뢰와 관련된 단어와 표현은 1절의 “주께 내가 피하나이다”와 더불어 “내가 항상 가서 숨을 바위”, “나의 반석”, “나의 요새”로 나왔습니다. 모두 하나님 안에서 생명의 안전을 얻고 위험으로부터 숨어 보호받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잇달아 나오는 “나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나의 반석”, “나의 요새”라는 표현에는 시인과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도 드러납니다.

시인은 무엇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껴 하나님께 보호받으려 합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악인의 손, 즉 악인의 세력이었습니다. 시인은 악인을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로 정의하였습니다. 4절에서 악인은 단수로 나왔지만 10절과 13절을 보면 한 명이 아니고 악인의 무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속성이자 시인이 추구하는 가치인 ‘공’와 정반대 속성인 ‘악’과 ‘불의’와 ‘홍악함’을 지니고 이를 휘두르는 자들입니다.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찬양(5-8)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여기고 따돌리는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았습니다. 다윗이 노년에 위기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평온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일생을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강한 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뢰합니다.

 

5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6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7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8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5-8)

 

하나님의 구원을 간청한 시인은 이제 그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늘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찬양하고 있음을 진술합니다. “진실로 당신은 나의 소망이시라”라며 고백을 시작한 시인은 그가 어릴 때부터 특히, 그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이 신뢰하는 분이었다고 밝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태에서부터 자기를 붙들어주셨고 탯줄을 끊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신 창조주이시며 태어날 때부터 그를 돌봐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의 찬양은 늘 하나님께 향합니다.

시인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관심사였지만 현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눈초리와 구설수에 오르는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상한 징조”란 출애굽에서 일어난 기적과 표적(출 4:21; 4:34), 선지자들이 전하는 저주나 심판의 전조(왕상 13:3), 병 치료와 같은 이적(대하 32:24) 등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기이한 일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단어로서, 이런 표적들은 이를 목격하거나 들은 사람들에게 큰 놀라움과 두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본 시편의 시인에게는 어떤 징조가 일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가 원수들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고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11)는 원수들의 말을 고려했을 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여전히 견고한 피난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루 종일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고난에 처하여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때에도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믿음은 이렇듯 한결같습니다. 시인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신 점을 언급하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감을 표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점들을 눈여겨보시고 어려움에서 구하시기를 바람에서입니다.

 

시인의 간구(9-13)

자신을 하나님께서 버리실까 봐 이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다윗은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 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나 노인이 되었을 때나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은 소망이시라는 다윗의 고백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9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10내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내 영혼을 엿보는 자들이 서로 꾀하여 11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12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3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들이 수치와 멸망을 당하게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들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9-13)

 

시인이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버리지 않았듯이 하나님도 시인이 늙어가고 육체가 쇠약해지는 때에도 계속 그의 피난처가 되시기를 시인은 소원합니다. “나를 내던져버리지 마소서”,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는 간구는 출생 때부터 시인의 삶에 개입하신 하나님이시니 죽을 때까지도 자신을 살펴달라는 요청입니다. 시인은 육체적으로 약해졌고 정신적으로도 고통 받아 힘겹습니다. 특히 그의 원수들이 그를 향하여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하고 “그를 뒤쫓아서 잡으라! 그를 건질 자가 없다니까!”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원수들은 서로 작당하여 시인의 목숨을 노리며 앙심을 품고 그에게 재앙이 언제 닥치나 하고 탐색하는 자들입니다. 시인이 원수들의 이런 비열한 행동과 모욕적인 거짓말 때문에 수치를 당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런 원수들의 악행을 그의 간구에 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수치와 욕이 오히려 그들에게 임하고 그들이 멸망 당하길 간구합니다(1,13).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를 모르는 체하지 마시고 서둘러 도우시길 간구합니다(12). 하나님께서 신속히 그를 고난에서 잡아채지 않으시면 원수들의 비방과 거짓 소문은 사실을 진술한 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수치를 주시고 의인의 수치를 거두시며, 악인을 멸망에 내버려 두시고 의인을 멸망에서 건지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의 하나님 찬양과 선포(14-16)

버려진다는 것은 끔찍한 경험입니다. 누군가에게 버려졌을때 설상가상으로 큰 어려움들이 많이 닥쳐오기 때문에 충격은 몇 배로 더 커집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나이가 많아 쇠약해진 때에 누군가에게 버림받는다면 자존감이 추락하고 더 큰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14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15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16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14-16)

 

시인은 “그러나 나는”이라고 외치며 원수들은 죄 없는 시인에게 앙심을 품고 모해하지만, 자신은 항상 하나님을 기다리며 계속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행하신 셀 수 없이 많은 공의와 구원을 하루 종일 전하겠다고 다짐하며 선포합니다. 이번에 하나님께서 시인이 겪고 있는 고난에서 시인을 구원하시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의 사건이 하나 더 늘어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힘과 공의로 성취될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운 간섭을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알릴 것입니다. 이는 아직 하나님께서 시인을 건지시지 않았지만 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자기를 건지실 것을 확신하고 이를 선포함(15-16)으로써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재확증하고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의 응답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기도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심연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끌어 올리십니다. 우리를 해하려는 자들을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십니다. 포기하지 말고 그 하나님께 계속 간구하면 어느새 우리의 부르짖음이 찬양으로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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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0-01)

 


여호와여, 나를 도우소서

시편 70편 1-5절

 


 

성도들은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많이 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기도의 대부분 긴급한 일이 있을 때 많이 드려집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사귐이기 때문에 잠잠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긴급한 일에 간절히 구하는 기도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과 도움이 신속히 임하길 간구합니다. 그는 자기를 조롱하고 멸하려 하는 원수들 속에서 외롭고 괴롭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시인의 목숨을 찾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이 내리길 간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주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길 간구합니다.

 

하나님이여 서두르소서(1)

강청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낙망하지 않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가 목말라하지 않고 갈급해하지 않으면 응답 또한 더디게 올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부르짖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속히 임하셔서 우리의 원통함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

 

시인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는 일을 ‘서두르시는 것’입니다. 시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서두르소서”(1), 시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속히 내게 임하소서”(5), 그리고 시의 마지막 문장으로 나오는 “지체하지 마소서”(5)라는 간구가 이점을 증명해줍니다. 이 두 명령형은 긍정형과 부정형으로 이루어졌을 뿐 그 내용은 같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서둘러 자기를 구원하시길 간구합니다. 이런 간구의 내용은 1절에서 “나를 건지소서”와 “나를 도우소서”라는 명령형으로 나오고, 5절에서는 “당신은 나의 도움이시요”와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라는 서술형으로 나오지만 이러한 다른 문장형태를 통해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가장 절실한 구원자와 도움임이 더 강조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여기서 1, 5절에 나오는 “도움”에 해당하는 두 단어는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지만, “건지다” 동사의 경우는 시인을 구한다는 뜻이지만 서로 다른 단어로 나왔습니다. 1절에 나오는 “건지다”는 누군가를 위험에서 잡아채거나 끌어내어 구조한다는 뜻이며 5절의 “건지다”는 누군가를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두 단어의 의미처럼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조하는 일이 재빠르게 일어나고 그 결과로 안전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원수와 성도에 대한 간구(2-4)

우리의 기도가 정말로 간절하고 갈급하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서 속히 임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억해야 하는 ㄱ덧은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종하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응답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2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3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4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2-4)

 

다윗은 하나님께 그들을 심판하시되, 그들이 악한 행위로 인해 수치와 수모를 당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는 그들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악한 행위는 보통 은밀하게 진행됩니다.

 

(1) 나의 원수들을 심판하소서(2-3)

 

하나님의 신속한 도움을 갈망하는 시인은 어떤 상황에 처했습니까? 2-3, 5절을 살펴보면 시인의 현재 고난은 시인을 경멸하고 그가 죽기를 바라는 원수들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이 시편뿐 아니라 탄식이나 탄원을 담고 있는 대부분의 시편에는 시인이 어쩌다가 고난에 처하게 됐는지, 원수가 그 고난의 원인인 경우 그 원수가 대체 누구인지, 그 고난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자세히 나오지는 않습니다. 창세기나 사사기나 사무엘서와 같이 이야기 형식이 대부분인 책을 이해할 때와는 달리 시편에서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에 해당하는 자세한 줄거리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시인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관심을 두는 게 적절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신속히 구원해달라고 요청한 후 자기를 괴롭히는 원수들의 심판을 간구합니다. 간구의 내용은 두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원수들의 특징과 악행에 대한 고발이며, 둘째는 원수들에게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는 간청입니다. 먼저, 시인의 원수들은 시인을 죽이려 드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며 더 나아가 자기들이 다른 이의 생사를 주관하려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그들이 근본적으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자기를 찾아 없애려 하는 그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수치와 낭패를 당하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둘째, 원수들은 시인의 고난이나 상함을 그들의 낙과 기쁨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시편 1:2에서 행복한 사람의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소개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재앙에서 건지심으로써 그들이 나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수모를 당하길 간구합니다. 셋째, 원수들은 시인을 비웃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아하, 아하”하는 웃음은 조롱과 멸시가 내포되었습니다. 이 웃음에는 “그러면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안됐다”, “꼴좋다” 등의 의미가 함축되었습니다. 원수들은 비열하여 그들의 추악한 감정을 상대에게 드러내는 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야유를 받는 대상이 수치스럽고 무안을 느낄 때 더 기뻐합니다. 시인은 조롱받는 자기가 아니라 원수 본인들이 수치를 느끼고 시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길 간구합니다.

성경에 자주 기록되는 악인의 소행에서 나타나는 악인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호 5:4). 그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다른 것 때문에 하나님을 쉽게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 선하고 성결하게 사는 길을 버리고 자기들의 유익을 추구하며 삽니다. 공법과 정의를 쓸개나 쑥처럼 쓴 것이라 여기고 악행을 저지르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암 6:12). 자신의 승리나 성공을 자기 힘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며 교만하게 행동합니다(암 6:13).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고 제사와 예물을 드리지만 그들의 진정한 의도는 자기만족에서 나옵니다(시 40:6-8: 암 4:4-5: 미6:6-7).

 

(2) 성도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소서(4)

 

원수들의 심판을 간구한 시인은 이제 정반대의 무리인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시인이 소개하는 참된 성도에 대한 정의와 그들을 위한 간구는 원수에 대한 정의와 정반대로 서술되었습니다. 원수들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멸하기 위해 그 사람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이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입니다. 원수들은 그들이 괴롭히는 자의 상처를 기뻐하고 조롱하는 자들이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원수들은 그들의 핍박 대상을 향해 “아하, 아하라며 비웃는 자들이지만, 성도들은 늘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라며 찬양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위대함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그의 주권으로 우주를 다스리시며 각 성도의 삶을 주관하고 살피고 베푸심을 제대로 인식하고 감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각자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닌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함으로써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입니다(잠 3:5-7), 에스라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영적, 사회적, 종교적 재건에 힘쓸 때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기도했으며(스 9장; 느 1:4-11) 매사에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있었음을 언급했습니다(스 7:6,9: 8:18; 느 1:8,18). 다니엘도 왕들의 꿈이나 불가사의한 일을 설명하면서 그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늘 고백하였습니다(단 2:27-30).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시인도 하나님의 진정한 성도 중 하나라는 점이며, 성도를 위한 간구는 시인 자신의 구원을 위한 간청도 된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자기가 하나님을 찾는 자이며 그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이므로 하나님께서 어서 자기를 건져주셔서 다시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의 위대함을 선포할 수 있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5)

우리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먼저 내가 가진 것으로, 내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따져 봅니다. 여의치 않다 판단되면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봅니다. 도와줄 사람도 찾지 못하면 그제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순서가 잘못됐습니다.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아무리 큰 문제라도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어야 합니다.

 

5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5)

 

대적에게는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이,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구원과 기쁨이 있기를 간구한 후 시인은 다시 자신의 곤고한 상황을 토로하고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을 요청하며 기도를 마칩니다.

먼저 시인은 “그러나 나는”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주목을 끕니다. 그리고 자기를 가난하고 궁핍한 자로 표현합니다. 이는 그가 목숨이 위태롭고 도움이 필요하여 외롭고 괴로운 처지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을 확실히 아시고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끝으로 시인은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이 내용은 “속히 내게 임하소서”(A)와 “지체하지 마소서”(A')라는 간구가 “당신은 나의 도움이시요”(B)와 “당신은 나를 건지시는 분이시오니”(B')라는 고백을 감싸고 있는 대구교차형태(A-B-B'-A')로 나옵니다. 하나님을 ‘도움’과 ‘구원자’(누군가를 위험한 곳에서 탈출시켜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는 의미)로 표현한 문장이 가운데에 나오는 이 형식은 시인이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을 요청하는 데 있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밑받침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나님꼐서 시인에게 이미 도움과 구원자이셨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이제 그 하나님이 다시금 시인의 도움과 구원자이심을 지체 없이 증명해주시길 시인은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위급한 상황에서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한 응답을 믿으며 간절히 구하십시오. 동시에 응답이 더디게 올지라도 낙망하지 않는 믿음을 달라고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속히 응답하시든 더디게 응답하시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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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9-01)

 

 


믿음 때문에 고난 당할 때

시편 69편 1-12절


 

과거로 돌아가 현실에서의 반전을 꾀하는 ‘타임슬립’은 이야기에 이따금 등장하는 모티브입니다. 굳이 과거로 돌아가 주인공이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자유자재로 반전을 구현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펜이 쥐어진 이상 구원 이야기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 시인은 그를 향한 원수들의 까닭 없는 비방과 억지로 인한 고통에서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정직하게 행하였지만 원수들의 악행으로 가족에게서조차 따돌림을 받고 마을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이 고난 속에서도 울며 금식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고충과 결백을 호소하면서 그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소서(1-5)

시간을 지체했다간 생명을 잃을 것 같은 상황에서 튀어나온 첫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호소였습니다. 깊은 물과 수렁에 비유된 원수들에게서, 그들의 미움과 모략에서 시인은 절박하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그 손을 잡을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2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3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4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5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1-5)

 

시인은 자신이 겪는 고통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물들이 영혼에까지 흘러들어 왔고, 깊은 물과 수렁에 빠졌고, 큰물이 그를 덮친다고 묘사합니다. 깊은 물과 수렁에 빠져 숨을 쉴 수 없는 것처럼 괴롭다고 호소합니다.

 

(1) 시인의 간구(1a)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이 첫마디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시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도움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구조를 요청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 깊은 어려움에 빠진 시인(1b-5)

 

시인이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하는 이유는 그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시인은 자신을 깊은 물에 빠진 자로 묘사합니다. 그는 제대로 설 수도 없고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깊은 수렁과 물속에 빠졌습니다. 게다가 사방에서 진흙과 물이 그를 에워싸며 물살이 그를 덮쳐왔습니다. 시인이 언급한 ‘물들’, ‘깊은 수렁’, ‘깊은 물’, ‘큰물’과 같은 단어는 어려운 처지를 가리키는데 자주 사용되며(14-15; 시 32:6; 40:2; 144:7; 욥 22:11) ‘스올’이나 ‘무덤’을 연상시킵니다(시 18:4-5, 16). 그러므로 시인이 묘사하는 현재 상황은 자기가 큰 어려움에 갇혀 죽을 위기에 있으며 거기서 손을 쓰거나 빠져나올 방도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아름으로써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긍휼히 여겨 구원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때에 시인은 하나님을 바라고 애타게 그의 도움을 간청하였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피곤하고 목이 타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응답을 기다리므로 눈이 침침해지는 등 육체적으로도 연약해졌다고 설명합니다. 시인의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일시적이지 않고 오래전부터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는 데서도 시인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쌓아왔음을 드러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의 도우심을 기다릴 줄 압니다. 이는 시인이 인내할 줄 알아서라기보다는 그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해주실 능력자임을 확실히 믿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4절에서 시인은 1-2절에서 설명한 깊은 수렁의 실체를 밝힙니다. 그것은 바로 시인을 미워하고 원수같이 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시인의 편에는 아무도 없고 힘도 없지만 그를 상대하는 원수들은 아주 많고 강합니다. 그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부당하게 시인 한 사람을 미워하고 파멸시키는 데 자신들의 힘을 모으고 협력하였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아닌 여럿이 서로 만나 미움, 불의, 불공평 등 악을 공유하게 되면 그 악의 성장력이 빠르고 뭉치는 힘이 강하여 그들의 상대에게 더 큰 악행을 저지르며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쉬워집니다(잠 1:11-14). 시인은 강하고 많은 원수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훔치거나 약탈하지도 않은 것을 원수들에게 물어줘야 하는 억울한 일조차 겪고 있습니다(출 22:1-4; 레 6:1-7).

시인은 하나님을 다시 부르며 자신의 억울함과 결백을 주장합니다. “바로 당신이 나의 우매함을 아시며 나의 죄가 당신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사고나 언행에 미련함이나 죄가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동시에 이런 연약함과 죄가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므로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시는 부분이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시인의 이런 고백은 내용의 흐름 상 갑작스럽게 들리지만, 그 의도는 자신이 때로 미련하고 죄를 짓지만 원수들의 것을 도둑질하지도 않았으며 다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뢴 모든 말이 참말이며 현재 겪는 모든 일에 자신이 결백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면서 시인이 가장 바라는 것은 자신의 억울함과 결백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셔서 속히 어려움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수치를 당치 않게 하소서(6)

하나님께서 시인을 구원해주셔야 할 명백한 이유가 있습니다. 원수들에게서 당하는 비방과 수치의 원인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함께 낙심하며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 실망이 아닌 희망이 되어달라고 간구합니다.

 

6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6)

 

시인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 원수의 불의, 자신의 결백을 고백한 후 이제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이 자기 때문에 수치를 당치 않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시인이 겪는 부당한 고난이 자기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에게도 부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의한 원수들의 계략대로 시인이 도둑질하지 않은 것을 물어주어 죄인으로 판결난다면 자기에게만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실한 성도들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공동체를 구하지 않으심과 매한가지라고 호소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을 요청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즉, 불의를 멸하고 정의를 신원하시기를 호소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주 만군의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부른 데서도 나타납니다. “주 여호와”는 하나님의 구원을 강조하는 데 자주 사용된 호칭이며, “만군의 여호와”는 전쟁의 용사와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하나님을 상기시키는 호칭입니다. 시인의 원수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같은 마을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성도 공동체를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라 부르지 않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고 기다리며 바라는 자들’로 부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언약의 왕 되심과 그의 주권과 심판의 능력에 호소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속히 구원해 주실 것을 재차 간구합니다.

 

수치와 비방을 받는 시인(7-12)

하나님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면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무고하게 비난당하는 억울한 상황이 닥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삶이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억울함을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난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래서 믿음의 지체들에게 힘을 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7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8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9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10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11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그들의 말 거리가 되었나이다 12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비난하며 독주에 취한 무리가 나를 두고 노래하나이다(7-12)

 

시인이 원수한테서 비방 받는 원인은 하나님 때문에,그의 성전을 위하는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당신을 위하여 비방을 받았나이다”(7), “당신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나이다”(9),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9)라는 시인의 말들이 그의 고난과 그가 받고 있는 비방이 하나님과 관련되었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당면한 문제는 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이 점을 우회적으로 언급하며 하나님의 간섭을 촉구합니다.

원수들의 부당한 행동으로 시인이 당하는 고난의 영역은 더 넓어졌습니다. 원수들이 그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트집 잡고 헐뜯고 거짓말을 일삼고 거짓 소문을 퍼트려 시인에 대한 소문이 흉흉해지므로 시인은 수치심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문을 듣고 그의 형제자매조차 그를 외면하고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하여 시인의 외로움과 괴로움은 더해갔습니다.

시인은 원수들의 비방과 가족의 따돌림을 되받아치지 않고, 그 대신 울며 금식하고 기도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누가 죽었을 때나 어려움을 당했을 때 자신을 낮추고 기도할 때 입는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창 37:34;사 37:1: 욘 3:7). 이와 같이 시인은 하나님 때문에 듣는 비방을 참아내며 원수에게 보복하기보다는 겸손하게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이런 태도가 도리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성문에 모여 장사하고 물건을 사는 자, 재판이나 모임에 참여한 자, 성을 출입하는 자 등 마을의 여느 사람들에서부터 술 취하여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자들에게까지 시인은 비난과 조소와 욕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시인처럼 비웃음거리가 되고 괴롭힘을 당할 때 참기 어렵지만 그 원인이 나의 실수나 죄라면 인정하고 회개해야 하고, 아니라면 감사하며 참아내야 합니다. 남의 악한 언행과 죄로 인해 내가 다른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하는 태도를 익혀 주를 진정하게 바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죽음에 가까운 절망의 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분도, 사면에 막힌 절망의 늪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기에 어떤 고통과 고립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 편에 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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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8-03)

 


하나님의 성소에서 나오는 찬송

시편 68편 24-35절


 

예전에 한 마을에 해마다 성대한 축제가 열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축제를 통해 그들의 왕을 경배하고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왕의 행차였는데, 이때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길가에 나와 왕을 환영하며 찬양했습니다. 왕이 마차를 타고 마을 중심으로 들어오면,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하고 사람들은 춤추며 노래했습니다. 이 장면은 마을 사람들에게 왕의 권위와 사랑을 새롭게 인식하게 했습니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위엄과 능력이 충만하신 분으로서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분의 주권과 통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열방의 모든 왕과 백성도 하나님께 굴복하고 그가 계시는 처소로 나와 그분께 예물을 드리고 찬양하며 경배해야 합니다.

 

시온으로 행차하시는 하나님(24-2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왕이시며, 그분의 임재는 우리의 삶과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그분의 왕권을 인정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항상 그분을 찬양하고 송축해야 합니다.

 

24하나님이여 그들이 주께서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로 행차하시는 것이라 25소고 치는 처녀들 중에서 노래 부르는 자들은 앞서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뒤따르나이다 26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 27거기에는 그들을 주관하는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고관과 그들의 무리와 스불론의 고관과 납달리의 고관이 있도다(24-27)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성소로 행차하시는 장면을 묘사하며, 그분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찬양합니다.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임재하시며, 우리의 예배와 찬양이 어떻게 하나님께 올려져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1) 시온으로 행차하시는 하나님(24)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성소로 행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소로 행차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법궤를 시온 성의 성소 안으로 옮기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 장면은 본 시편의 1-3, 7-8절에서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를 통과할 때 이스라엘의 우두머리이자 전사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앞세워 행진하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이 부분들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궤를 메고 전쟁에 나가는 장면으로 본다면, 24절부터는 전쟁 후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궤를 메고 시온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바로 앞부분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하나님(11-18)과 원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19-23)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므로, 24절의 하나님의 행차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전사의 입성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예루살렘 백성이 나와 하나님의 행차 장면을 목격하고 하나님 찬양에 동참합니다. 전쟁을 위해 도성을 떠난 하나님의 법궤가 다시 성소로 돌아온 것은 전쟁의 승리를 함축합니다(삼상 4:3-10). ‘그들이 당신의 행차하심을 보았다’(24)는 말은 하나님의 법궤를 도성으로 옮기는 의식이 실제로 진행되었음과 전쟁의 승리가 실제임을 강조합니다.

 

(2) 하나님을 맞이하는 백성들(25-27)

 

하나님의 법궤를 따라 노래하는 자들, 소고 치는 자들, 악기 연주자들의 행렬이 이어지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장면은 홍해의 기적 직후(출 15:20-21)나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삼상 18:6-7) 많은 여인들이 나와 소고와 경쇠 등 악기를 잡고 노래하며 춤추던 것과 마찬가지로 놀라운 기적의 소식이나 승전의 소식을 축하하고 전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기쁨의 행렬에는 베냐민 지파를 선두로 유다. 스불론, 납달리 지파의 고관들도 함께하고 있다고 시인은 언급합니다. 이 네 지파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전체의 대표로 소개되었습니다. 각각 기업으로 받은 땅의 위치에 따라 베냐민과 유다 지파는 남쪽의 지파(유다 왕국)를 대표하고,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는 북쪽의 지파(이스라엘 왕국)를 대표합니다. 이 단락에서 한 가지 더 눈여겨봐야 하는 부분은 시인이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왕’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며 모든 백성의 왕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인 하나님과 왕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다른 신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왕으로 섬기고 있음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는 공동체의 기쁜 소식을 본인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개인적인 희소식으로 받아들여 이에 감격하며 “이분이 바로 나의 왕, 나의 하나님께서다”라고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드높이고 있습니다.

 

열방의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28-31)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즐기는 백성들을 흩으시고, 그들의 교만을 꺾으시는 분입니다.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며,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그분의 능력 안에서 굳건히 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힘과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우리는 그분의 보호하심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28○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29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30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에 밟으소서 그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31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28-31)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열방의 경배를 받으실 분임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찬양합니다.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열방 가운데 경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1) 시인의 간구(28)

 

28절의 ‘네 하나님께서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라는 문장은 ‘하나님이여 당신의 능력을 베푸소서’로도 번역이 가능하며, 바로 뒤에 나오는 문장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해 행하신 능력을 베푸소서’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는 능력은 29-35절을 토대로 볼 때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심과 열방을 심판하심 그리고 그분의 백성과 열방으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심을 통해 나타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열방의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28-31)

 

하나님께서 열방의 왕들과 군대를 무찌르고 예루살렘 성소에서 그분의 위엄을 나타내시므로 온 세상의 왕, 고관,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경배하며 예물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왕들 중 뛰어난 왕에게는 그의 원수들이 앞에 나와서 부복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의 왕들도 그에게 공세와 예물을 바치며 열방이 그를 경배하지 않습니까(시 72:8-11)? 하물며 온 땅과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세상의 모든 자들이 나와 경배한다니 얼마나 당연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서 그분께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짐승과 같은 이집트 왕(‘갈밭의 들짐승’)이나 이방의 고관들(‘수소의 무리’)이나 백성의 무리(‘만민의 송아지’)를 제압하고 그들의 값비싼 소유물(‘은 조각’)을 짓밟아 하나님의 능력을 만방에 알리시기를 요청합니다. 여기서 수소나 송아지는 앞에 나온 이집트 왕과 같은 열방의 세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칠고 포악하고 들이받는 습성을 가진 들짐승이나 소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의 백성을 습격하여 치고 학대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폭력적이고 전쟁을 좋아하는 무리들을 심판하여 흩으심으로써 권능을 보이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집트나 구스(에티오피아)를 비롯한 모든 열방이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오고, 그가 계신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드리며 경배할 것입니다. 본 시편의 시인과 마찬가지로 선지자들도 이러한 날을 예고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집트와 구스에서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시온 산에 나오게 될 것을 바라보았고(사 18:7; 19:21) 열방이 시온의 성전에 몰려올 날을 예언하였습니다(사 2:2-3; 미 4:1-2). 또한 이집트나 앗수르도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백성이 되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며(사 19:24-25) 온 세계가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집트와 열국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오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징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며(슥 14:16-18) 만국이 기꺼이 하나님께 나와 경배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능력과 위엄의 하나님을(32-35)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과 왕국의 주인이시며, 그분의 능력과 위엄은 무한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과 힘을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삶의 어려움과 도전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셀라)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34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35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32-35)

 

이제 능력과 위엄의 하나님께서 열국 위에 왕으로 좌정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땅의 모든 나라로부터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오래전부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출현하시는 분’으로 설명하면서 그분이 세상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세상의 왕이셨으며 전능하신 분임을 밝힙니다. 하늘을 타고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4절에서 그분이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능력과 위엄을 나타내시고, 그의 백성으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셨던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33절에서는 4절에서 소개된 하나님께서 지금도 동일하게 세상의 왕이시며, 과거 시내산에서나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하늘과 땅이 요동하며 반응하였듯이(8) 지금도 그분이 나타나실 때 여전히 하늘에 뇌성이 울리며 세상을 진동시키는 전능자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제는 땅의 모든 왕국이 함께 하나님을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그분을 경배해야 함을 부각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과 위엄을 이스라엘과 역사 속에서 나타내셨으니 우리도 이제 이에 화답하여 우리의 능력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능력을 돌리라’는 명령(34)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여 그 권위와 권세에 복종하라는 의미입니다. 땅의 예루살렘 성소나 하늘의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장엄하고 놀라우십니다. 그분은 능력과 위엄의 원천이시므로 자신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앞서 5-6, 9-10, 19-20절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하나님께서는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날마다 그의 백성의 짐을 대신 지며 도우십니다. 시인은 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강조하면서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에 대한 감사와 자랑스러움 그리고 백성으로서 누리는 특권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제 열방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이러한 특혜를 누리며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목도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능력과 권세를 믿으며,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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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8-02)


전능자의 승리와 백성의 기쁨

시편 68편 11-23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인의 길을 가는 길은 쉽지만 않습니다. 그 길은 꿈과 비전을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고난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 침묵의 순간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며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을 체험하면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수록 믿음도 더욱 굳건해지도 은혜도 넘치게 됩니다.

 

  • 시온에서 자신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을 위해서 날마다 그들이 지고 갈 짐을 대신 지시며 그들을 고난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악의 삶을 사는 자들은 빠짐없이 찾아내어 응징하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승전 소식(11-14)

우리는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그 말씀은 강력하며,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것은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고 우리를 승리로 인도합니다.

 

11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라 12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있던 여자들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13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14전능하신 이가 왕들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11-14)

 

전쟁의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11-14절의 기록은 본 시편 68편 첫 부분(1-3)에 나오는 시인의 기원이 실현되는 장면입니다.

 

(1) 하나님의 승전 소식(11)

 

11절에서 주가 주신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전투를 개시하셨을 때 그분의 말씀과 능력으로 열방의 군대를 치셔서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게는 승리를 적군에게는 패배를 가져다주셨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승전 소식에 여자들이 나와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합니다.

 

(2) 패배자와 승리자(12-13)

 

이처럼 승전의 소식에 하나님의 백성은 모여들어 기쁨을 나누지만, 하나님께서 치신 군대와 그 우두머리들은 패배의 소식을 서로 전하기도 전에 앞다투어 도망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통한 전쟁에서의 큰 승리로 인해 이스라엘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집에 머물고 있던 여인들까지도 적들이 남긴 물건들을 서로 나눕니다. 그 약탈물 중에는 은과 금 깃털을 두른 비둘기 모양의 장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 우리(또는 모닥불) 사이에 누워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남자들에게 돌아갈 전리품은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승전 소식(14)

 

하나님께서 적들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얻으신 것은 그분의 권능과 전능함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이를 언급하는 14절의 ‘하나님께서 왕들을 흩으실 때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살몬이 세겜의 살몬(삿 9:48)인지 15절 이하에 나오는 바산의 높은 산들 중 하나인지 확실히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살몬에 눈을 내려 적을 몰아내셨다는 의미인지 쌓인 눈을 연상시킬 만큼 패배자가 많았다는 의미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여기서 분명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났으며 큰 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눈이 내려 적군을 친 사건은 기록된 바 없지만, 비슷한 예로 여호수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을 내려 이스라엘에게 대승을 안겨주신 사건(수 10:11-14)이나 다윗이 기도에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 뇌성과 우박과 번개를 날려 원수들을 쫓아내신 사건(시 18:13-14)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15-18)

시온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심지였습니다. 성전이 시온에 세워졌고, 백성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백성 간의 깊은 관계를 나타내며, 시온에서의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15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16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계시리로다 17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18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15-18)

 

권능으로 열방을 쳐서 승리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시온에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 거하십니다. 15-18절에서는 하나님을 주어로 하여 ‘거주하다’라는 의미의 동사가 16절에 두 번, 18절에 한 번 나타나며, 17절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문장이 나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에 중점을 둡니다.

 

(1)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15-16)

 

하나님께서 시온에 임재하심을 선포하면서, 시인은 먼저 바산의 높은 산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신이며 바산도 하나님의 소유라고 선포합니다. 바산은 갈릴리 북동쪽에 위치한 곳이며, 높은 산들이 있는 곳은 대부분 동편을 가리킵니다. 고대 사람들은 가나안의 북쪽에 위치한 시론 산(헤르몬 산; 해발 2800미터)과 같은 높은 산들을 이방신들의 거주지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바산의 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선언하는 이유는 험하고 높은 이 모든 산에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신들의 세력이 침투할 수 없으며, 이 산들이 모두다 하나님의 소유이자 피조물임을 확실히 밝히는 데 있습니다.

 

(2) 승리의 전사 하나님의 임재하심(17-18)

 

하나님의 소유인 바산의 높은 산들은 하나님께서 거주하기 원하시는 산을 시기심으로 바라봅니다. 16절에 언급된 하나님께서 거주하기 원하시고 영원히 계시는 산은 29절에서 명백히 밝히듯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해 있는 시온이나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을 둔 곳이고 예배 장소로 지정하신 곳이며 하나님께서 영원히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겠다고 약속하신 거주지(신 12:5,11; 출 15:17; 왕상 8:13)입니다. 바산의 산들이 시온 산을 질투한다는 말은 시온 산이 바산의 높고 위엄스러운 산들에 비할 바가 못 되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바산의 산과 같은 멋진 거주지를 택하지 않고 보잘것없는 시온 산을 자신의 거처로 선택하셨는지 의구심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이런 질문에 빗대어 하나님께서 시온을 택하신 이유가 외형적인 수려함이나 인간이 바라보는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러 열방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가 그들의 인구가 많아서 이거나 강한 민족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기뻐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듯이(신 7:7) 시온을 택한 것도 그곳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시 78:68). 시온이 지금은 바산의 산보다 빼어나 보이지 않더라도 종말에는 이 산이 모든 산 위에 높이 솟아 만방이 그곳으로 몰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그의 통치를 찬양하는 곳으로, 세상에서 가장 출중한 곳으로 변화될 것입니다(사 2:2-3).

전쟁에서 승리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강력한 군대인 천군천사와 함께 높은 곳(하늘 또는 시온)으로 올라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에 패한 자들을 사로잡아 그들이 더 이상 반역하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승전하신 왕 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 더불어 패망한 자들로부터 예물을 받으십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직접 선택하신 시온 산에 영원히 거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왕으로서 자신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을 예고합니다(출 15:17-18; 왕상 8:13; 시 132:13-14).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19-23)

우리는 삶의 무거운 짐과 어려움을 홀로 감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이시며,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짐을 대신 지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에 우리는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19○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셀라) 20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21그의 원수들의 머리 곧 죄를 짓고 다니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시리로다 22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게 하고 23네가 그들을 심히 치고 그들의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집의 개의 혀로 네 원수들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19-23)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거하시면서 열방을 치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과 주권을 나타내며, 그분이 온 세상의 왕이심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고, 대적들을 물리치시며, 열방을 다스리십니다.

 

(1)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19-20)

 

과거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위기에서 구하신 하나님께서는 현재에도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구하시는 분이니 그분을 찬송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전쟁과 같은 국가의 큰 위기나 특정한 시간에서만 우리를 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매일매일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는 분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을얻게 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뿐이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백성은 그분으로부터 구원과 생명을 얻지만 하나님의 원수들은 심판과 죽음을 선고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로 여기는 자는 죄 속에 걸어가는 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죄를 짓고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죄인들의 정수리를 깨뜨리기를 기원하는 시인의 기도는 섬뜩하게 들리지만 이러한 간구는 시인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어떻게 벌하실지 관심을 두었다거나 잔인한 보복의 마음을 품었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그토록 미워하시며 죄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의지를 가지셨고 죄인을 분명히 심판하시는 분임을 시인이 제대로 알고 있음을 보여주며, 정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정의로운 심판과 판결을 구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2)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21-23)

 

여기서 하나님의 원수들(21)은 하나님께만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고 핍박하므로 그분의 백성들의 원수들(23)이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 원수들을 쳐서 깨뜨리시지만(21),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바산과 바다 깊은 곳에서 데리고 나오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 원수들을 쳐서 깨뜨려(23; ‘심히 치고’로 번역됨)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바산의 산이나 바다 깊은 곳에서 데리고 나오신다는 표현은 원수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발을 악인의 피로 담근다는 말은 죄에 대한 마땅한 심판을 받은 원수들의 피에 발을 씻는 모습(시 58:10)을 표현한 것으로 원수들의 완전한 패망을 의미합니다. 개들이 원수들로부터 제 몫을 챙긴다는 말은 개들이 그들의 피를 핥고 살을 먹는 것을 묘사한 것(왕상 21:19; 22:38; 왕하 9:36-37)으로서 역시 원수들의 완전한 패망을 뜻합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은 이와 같이 분명히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68편 11-23절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그분의 능력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고,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시며,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께 우리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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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8-01)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시편 68편 1-10절


 

하나님께서는 앞서 가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앞서 가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로막고 위협하는 요소들을 제거하셨습니다. 앞서 가시기 위해 하나님은 일어나십니다. 하나님의 일어나심은 전쟁을 위한 것이고, 원수들을 무찌르기 위한 것입니다. 백성이 가는 길을 평탄하게 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셔서 광야에서 그들을 친히 인도하셨습니다.

 

  • 전쟁의 용사이자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해 친히 강림하셔서 구원의 능력과 은혜를 드러내십니다. 그분의 나타나심에 천지가 요동하며 악인들이 흩어지고 의인들은 기뻐 뛰놉니다. 거룩한 처소에 임재하신 구원과 승리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자신의 백성이 처한 어려움을 일일이 돌아보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그들을 안전히 이끌어주신 분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찬양(1-3)

성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 거룩한 용사로 활약하시면 원수는 흩어지고 주를 미워하는 자는 도망합니다. 바람에 연기가 몰려가듯이, 불 앞에서 밀이 녹듯이 악인은 철저하게 망하겠지만, 의인은 주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이것은 정의와 공의를 향한 요청이고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서는 곳에 오늘도 찬양이 솟아날 것입니다.

 

1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2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3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1-3)

 

한숨과 탄식과 울음과 울부짖음이 있던 곳이 찬양과 기쁨의 춤이 있는 곳으로 변할 것입니다. 흥망성쇠는 우리가 가진 자원과 힘에 달린 것이 아니라 거룩한 용사이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1) 악인들의 반응(1-2)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면, 즉 하나님께서 행동을 개시하시면 악인들과 의인들은 현저하게 대조되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1절의 기원은 광야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무리가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행진할 때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원수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모세가 외친 기도(민10:35)를 유사하게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목적지로 두고 시내산을 떠나 광야로 떠날 때 하나님께서 군사의 우두머리로서 그들 앞에 나아가 인도해주시기를 기원하였습니다. 본 시편 단락에서도 행동을 개시하신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전쟁의 용사로 표현되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원수들의 반응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의인들의 반응까지 기원하고 있습니다. 즉, 전쟁에 능한 용사이신 하나님의 출현에 악인들은 흩어지고 멸망하되 의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기대합니다. 시인은 이런 대조를 보여주면서 악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함께 밝힙니다. 그들은 의인들을 침략한 원이지만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고 악인들이라고 시인은 설명합니다. 의인들에 대한 정의는 본 단락에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악인들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해볼 때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호의적으로 여기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악인들을 연기를 불어 흩어버리듯 몰아내고 초가 불 앞에서 녹아 없어지듯 망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타오르는 연기나 불(2) 그리고 뿔뿔이 도망가는 원수들(1)은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된 장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1-2절에서 원수들과 관련하여 나온 동사들(흩어지다, 도망하다. 몰아냄을 당하다, 망하다)은 원수들이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했음을 암시합니다. 패배한 원수들은 용사이신 하나님 앞에서 각각 흩어져 도망하며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겐 고통과 눈물이 함께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인들은 승리의 소식을 듣게 되고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즐거워하게 됩니다.

 

(2) 의인들의 반응(3)

 

여기서 시인이 하나님께 원수를 몰아내고 멸해달라는 요구는 매정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시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정의의 심판을 보여주시라는 요구입니다. 그럼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다스림이 충만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맘껏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찬양(4-6)

절망스런 처지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이들은 형통하게 하시지만, 자기 가진 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도리어 메마른 땅에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단순히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중에도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떠나지 않고 그분의 구원을 신뢰하여 도움을 기다리는 자를 주께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오만한 자리는 아무리 선망의 대상이라도 결국 메마른 광야일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4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5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6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4-6)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충만하시지만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요동하는 모든 것은 변할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신성은 유한한 피조물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 유한한 피조물은 부끄러워 자신을 숨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기에 하나님 안에 살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찬양에 초청(4)

 

시인은 위 단락에서와 마찬가지로 과거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용사로 오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강림하신 전능하신 왕이며 그의 백성을 보살피시는 사랑의 왕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즉 스스로 있는 자(출 3:14)로서 구원의 하나님께서입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전쟁에서는 당할 자 없는 강력한 용사지만 그의 백성에게는 한없이 정의와 자비를 베푸시는 왕입니다. 시인은 하늘을 타고 땅으로 내려와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께서 고아에게는 아버지가 되어주고 과부에게는 공정한 재판장이 되어주며 외로운 자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갇힌 자들을 끌어내어 형통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5-6). 솔로몬도 하나님께 구하였듯이(시 72:1-4, 12-14) 이와 같이 백성을 의로 판결하고 가난하고 압제당한 자를 변호하며 생명을 건져주는 일이야말로 하나님 경외를 실천하는 이상적인 왕의 본분입니다(신 17:18-20).

 

(2) 하나님의 보살피심(5-6)

 

5-6절에 언급된 왕의 주목을 받는 자들은 모두 사회에서 소외되고 정의로운 대우를 받지 못하며 필요를 공급받지 못하는 외롭고 괴로운 자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과 상반되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단순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보살피신다는 말이 아니라 어려움과 고통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도움을 기다리는 자들이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살피시고 어려움을 해결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은 뜨거운 햇볕이 내리찍어 바짝 타버린 불모지에 거하는 것처럼 애타게 도움을 기다려도 아무런 원조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는 물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아 하나님의 관심과 보살핌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자라지만, 사람을 신뢰하거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자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는 광야에 있는 마른 나무나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아 그의 현재나 미래에 대한 어떠한 소망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시 1:3-5; 렘 17:5-8).

이와 같이 시인은 자신과 함께한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다시금 인식하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그분께 노래하면서 하나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을 맞이하는 공동체는 그분을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그 앞에서 기뻐 뜁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은 기쁨과 평안만이 넘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7-10)

죽음의 땅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서 인도하셨습니다. 그분이 앞장서실 때 땅은 흔들렸고 시내산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진동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으며, 약속하신 대로 그 땅이 생명력으로 충실하도록 때에 따라 비를 쏟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지친 땅은 생기를 얻었고 미래가 없던 가난한 이들도 풍성한 음식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7○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셀라) 8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9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7-10)

 

공동체를 향하여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을 보살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한 시인은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출애굽과 그 이후의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공급하신 일들에 대해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1)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7-8)

 

7-8절은 출애굽 과정과 광야 여정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앞서 행진하며 그들을 이끌고 가시는 과정 중 시내산 등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땅이 지진을 일으키고 하늘이 비와 천둥과 번개를 떨어뜨린 일들을 묘사합니다. 두 군데 모두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용사로서, 이스라엘의 보호자 되신 왕으로서, 또한 사람과 온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로서 찬송합니다. 1-6절에서 언급되었듯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그분의 임재와 다스리심에 기쁨의 환호와 찬양의 소리를 내며 반응하였습니다. 7-8절에서는 그들뿐 아니라 하늘과 땅과 산들도 하나님의 강림과 그분의 통치 앞에서 떨며 진동하고 하나님을 맞이하며 그분께 순복하였음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9-10)

 

시인은 이제 9-10절에서는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단계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신실하게 보살피고 공급해주셨는지를 찬양합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께서 흡족한 비를 내리셔서 그의 기업을 견고하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기업은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전자를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물이 부족한 가나안 땅에 비를 충분히 내려 메마른 땅이 풍성한 작물을 낼 수 있도록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후자를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피곤하고 지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풍성한 비와 양식을 공급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거주하게 하셨다고 진술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겠다고 하신 약속(창 17:8)이 이루어졌음을 확증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무리 중 가난한 자를 위해서도 호의를 잊지 않으셨다고 언급함으로써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보호하고 보살피고 공급하심에 대해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그 일이 계속될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한결같이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곤핍할 때 하나님은 비를 주십니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속절없이 당하고 말지만, 하나님께서는 궁핍한 백성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결같이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기에 우리는 한결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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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7-01)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

시편 67편 1-7절


 

하나님의 은혜는 주의 백성에게 영혼의 양식입니다. 주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겸손한 자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악인들은 세상의 욕망과 거짓을 갈망하지만,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마음은 거룩을 향한 마음입니다. 의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거룩해지기를 소망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얼굴에 있는 은혜의 빛으로 가능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은혜의 근원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구원하심으로써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일들은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 그들도 하나님께서 세상의 왕이며 재판장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고 그분을 기뻐하며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을 복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만민에게서 찬송과 경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소서(1-2)

하나님의 얼굴빛이 우리를 비출 때 어둠 속에서도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와 평강, 호의와 축복만이 생명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자신을 향한 그 축복을 통해 주의 도와 구원이 온 땅에 알려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원리와 생명의 길이 이방에게도 알려져 그들도 자신들의 축복에 참여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1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2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1-2)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복을 베풀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할 때 사용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문과 내용이 흡사하여 이를 떠올리게 합니다(민 6:24-26). 제사장의 지침 기도의 내용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을 지키시고, 얼굴을 그들에게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얼굴을 그들에게 향하시고, 평강을 주시기를 기원하는 여섯 문장이 들어있습니다.

 

(1) 주의 복을 구함(1)

 

기도의 내용 중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누군가에게 비추는 모습(1; 시 4:6; 31:17; 80:19; 민 6:25)은 하나님 얼굴의 빛을 드는 모습(시 4:6) 또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누군가에게 향하는 모습(민 6:26)과 같은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그 대상에게 나타나셨고 그를 향하여 보고 계시는 표면적인 모습과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시고 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피시는 내면적인 태도를 함축합니다. 욥기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욥의 머리에 비추었다는 표현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욥 29:3).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이나 등불이 누군가를 비출 때는 하나님께서 그 대상에게 은혜와 평강, 축복과 호의, 구원 등을 베푸시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시 31:17; 민 6:25,26). 하나님의 빛이 그 사람과 함께한다면 흑암과 같은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욥 29:3).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관심과 은혜가 자신의 공동체에 지속되기를 갈망하며 기원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에 반대되는 상황의 표현으로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누군가로부터 숨기시는행동(시 13:1: 30:7: 사 64:7; 미 3:4)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잊었고 그가 처한 고난과 어려운 상황에 참견하지 않고 침묵과 무관심으로 반응하시며(시 44:24) 그를 대적처럼 여기신다는 뜻을 은유적으로 나타냅니다(욥 13:24).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실 때라도 그분의 은혜를 갈망한다면 우리도 얼굴을 하나님께 들어야 하며(욥 22:26)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시 24:6; 27:8: 105:4).

 

(2) 만국에 전파될 주의 구원(2)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기원한 시인은 그 결과로 공동체의 안위와 복을 기대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 소식이 온 세상에 알려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실 은혜를 특히 하나님의 길(‘도’로 번역됨)과 구원으로 연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서 추구하시는 방향과 방법을 포함한 그분의 말씀이 만국에 알려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고 구원하는 일이 만국에 알려져 그들도 하나님의 길과 구원의 은혜를 구하고 그와 같은 축복을 받기를 갈망합니다.

 

만민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3-6)

하나님의 공평한 판단과 지혜로운 통치는 창조 이래 지금까지 변함없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불의가 춤추고 악인이 형통하고 불신이 승리하는 듯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매번 이 땅 위의 권력은 때가 되면 스스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불의한 권력 앞에서 처세하기보다 하나님의 올바른 판단의 날을 고대하며, 지금 눈에 보이는 거대한 힘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을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인으로 인정할 때, 우리의 입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찬양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3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4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셀라) 5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3-5)

 

하나님의 이름이 ‘민족들’에게서 ‘모든 민족들’에게로 전파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바다처럼 세상을 덮을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 가운데 높아지기를 하라고 있습니다. 구원의 노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만민의 주 찬양(3)

 

시인은 온 땅에 있는 만국과 거기 사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 시편은 짧게 7절로 구성되었지만 1절을 제외하고 매 절에 ‘땅’, ‘나라’, ‘백성’, ‘민족’ 등 세상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등장하고, ‘모든’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며, 마지막 7절에서는 ‘땅의 모든 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뛰어넘어 온 세계 나라와 민족을 향한 관심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첫째, 시인은 세계의 어떤 나라나 민족도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제외되지 않고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줍니다. 둘째, 세계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듣고 그들도 그와 같은 축복을 받기를 기대합니다. 셋째, 온 세계 각 지역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과 감사로 찬양을 드리게 될 때를 재촉합니다.

 

(2) 왕이신 하나님(4)

 

시인은 하나님 찬양의 이유로 그가 세상의 재판장이며 왕이 되심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어려움에서 그들을 구하실 때마다 그의 은혜와 공의를 따라 행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온 땅 만국의 백성 또한 공평히 심판하실 것이며 그들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은혜의 다스림을 받는 만국은 이에 화답하여 모두 기뻐하며 하나님께 목소리와 악기로 찬송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3) 만민의 주 찬양(5)

 

시인은 앞서 3절에서처럼 5절에서도 모든 민족의 찬송을 반복하여 기원합니다. 시인이 만국을 향한 열정을 가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국 중에서 택하셨지만, 그분이 단지 한 나라의 왕으로서 한 백성에게만 찬송을 받아야 할 분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통치자이시므로 땅의 모든 이들로부터 하나님의 권능과 지위에 합당한 찬송을 받으실 권리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만국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주신 약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복 주시고, 이름을 크게 만드시고, 그가 복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2). 아브라함이 ‘복’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뿐 아니라 그의 자손과 그의 민족 이스라엘을 축복하시겠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창 12:3). 이렇게 함으로써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적 축복과 아브라함을 ‘복’으로 만드시는 최종적인 목적은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창 12:3). 다만 여기서 기억할 것은 오늘 시인의 기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자체의 어떤 행위나 성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통해서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성도인 우리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통해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를 찬양하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소서(6-7)

추수는 이 땅이나 자신들의 공이 아니라 이 땅에 때를 따라 햇빛과 비를 내리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복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땅 끝의 모든 사람이 우리가 누리는 복을 보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찬양에 참여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나만 잘 살기 위해 차별과 구별과 배척을 선택하는 세상에서,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부요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까?

 

6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7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6-7)

 

평범한 일상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시인은 땅이 소산을 내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인정합니다. 구원 이후의 삶에서 수고와 애씀이 필요합니다. 땅의 소산은 성실히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저주받은 땅에서는 심어도 거두지 못하고, 수고해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심으로 복을 주십니다.

 

(1) 주의 복을 구함(6-7a)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의 공동체에게 내려주신 축복의 예로서 땅이 소산을 내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소산이 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소산으로 축복을 주실 것을 작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건기와 우기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햇빛과 비를 주셨고 파종과 추수에 혜택을 주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셨으며 우박이나 폭풍을 보내지 않으셨고 병충해를 막아주셨고 곡식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셨으며 약탈자나 이방인의 침략이 없게 지켜주셨음을 의미합니다(학 1:10-11;2:15-19; 호 2:22). 이처럼 땅이 소산을 낸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의 결과입니다(슥 8:12).

 

(2) 만국의 경외를 받으실 하나님(7b)

 

하나님의 복을 구하며 기도를 시작한 시인은 마칠 때에도 다시금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축복을 두 차례나 더 반복하여 말하면서(6,7) 하나님께서 복을 주는 근원이심을 재확인 해주고, 그분의 이름으로 백성을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릴 것이라는 약속(민 6:27)이 이루어지기를 재촉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복 내리심을 통해 땅의 모든 끝에 있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세상의 왕이며 심판주이심을 깨닫고 그분을 섬기며 예배하기를 바라봅니다.


징계는 잠깐의 굴복을 가져오지만, 복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를 가져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추운 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은혜의 햇빛은 스스로 마음을 열게 만듭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나라와 민족이 기쁨으로 찬양할 것입니다. 은혜는 햇빛과 같아서 영혼을 자라게 하며, 소생하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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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6-02)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인 예배

시편 66편 10-20절


 

신을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창조하셨고, 구원하기 위해 찾아오셨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역사입니다.

 

  • 하나님께서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시련을 주어 시험하시는 것은 그들을 순은과 정금같이 단련하여 하나님의 성결하고 성숙한 백성으로 만드시려는 의도에서 비롯됩니다.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중을 제대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환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회개하여 마음에 죄악을 없애고 서원의 기도를 드리며 구원을 간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였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일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하나님을 함께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시험과 인도(10-12)

신앙생활은 만사형통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우리에게는 고난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으면 받지 않아도 되는 고난까지 받게 됩니다. 기독교는 고난이 사라지는 만사형통의 종교가 아니라, 고난 중에도 이길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10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11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12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10-1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고난을 주어 시험하시는 것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까? 시인은 그렇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사람을 시험하고 연단하는 것은 은금과 같은 광석을 뜨거운 용광로에 넣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타오르는 용광로에서 광석에 붙어 있거나 들어 있는 철과 흙 등 불순물이 다녹으면 단단하고 조잡했던 광석이 순도 높은 값진 보석으로 탄생되어 나오듯이, 사람이 연단을 받는 동안은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그 기간을 견디고 나와 성결하고 성숙한 믿음과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하나님께서는 고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언약으로 맺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그의 언약에 순종하여 ‘보배와 같은 그의 소유’이자 ‘제사장들의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되기를 고대하셨습니다(출 19:5-6).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단련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물과 같은 어려움에 빠지기도 하고 고난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않는 시기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역경 중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거리에 일렬로 눕혀 그들의 등을 도로처럼 만든 후 말이나 병거를 타고 그들을 짓밟고 지나가게 하신 일도 있었다고 시인은 증거합니다. 시인의 이런 표현은 원수들에게 당한 짓밟힘의 비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고 실제적으로 일어난 일일 수도 있는데(사 51:23; 수 10:24), 여기서 시인이 확실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적들에 의해 패배하였고 그로 인한 수모와 굴욕을 당했으며, 하나님께서 이런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을 연단하셨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불과 물을 통과였다고 말합니다. ‘불과 물’은 앞서 언급한 홍해나 요단을 건넌 사건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고 여러 종류의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보든, 시인이 전달하려는 뜻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온갖 시험과 시련의 과정을 통하여 연단하셨고, 결국은 그들을 고난에서 건져 안전하고 풍성한 곳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연단한 후 하나님의 평화와 안전을 누리게 하셨다는 점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연단과 구원은 이스라엘이 물과 불 속을 지날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물이 그들을 쓸어버리거나 불꽃이 그들을 사르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사 43:2)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시인이 선언하였듯이(9)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생명을 보호하고 실족하지 않게 하셨음을 증명해줍니다.

 

서원을 갚는 시인(13-15)

서원은 조건이나 거래가 아니라 전적인 신뢰의 표현입니다. 고난은 영혼에 아픔을 주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심으로 영혼을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입술의 고백은 온 천하에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언하는 역할을 합니다.

 

13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으리니 14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15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 (셀라)(13-15)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해주신 일을 증언하며 계속 사람들을 찬양에 초대합니다. 시인은 환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서원의 기도를 드렸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므로 그에게 서원을 갚는 제사를 드리겠다고 선포합니다. 시인은 “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입니다”(14)라고 ‘내 입술’과 ‘내 입’을 재차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자원하여 하나님께 서원하였으며 하나님께 서원한 사실이 확실하다는 것을 청중 앞에서 확실히 밝힙니다.

시인이 서원을 갚는 데에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헌신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먼저, 서원을 한 경우 서원을 갚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민 30장)에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둘째, 서원을 이행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곳 즉, 그가 계신 곳으로 가는 것도 순종입니다(신 12:11-14). 셋째,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이때 시인은 번제의 희생 제물로 살진 짐승들인 숫양들, 수소와 염소들을 드린다고 진술합니다. 이 살진 짐승은 하나님께 바치기에 적합한 질 좋은 제물임을 나타내며, 더구나 이 제물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조건인 한 마리의 소나 양이나 염소(레 3장; 22:18-23 참고)보다 더 많은 수를 나타냅니다. 이런 점들에서 시인이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에 대해 크게 감사하고 있으며 그에게 아낌없이 드리기를 원하고 그렇게 드리려고 작정했음이 잘 나타납니다. 넷째, 제물의 연기(‘향기’로 번역됨)에 대한 언급에서 시인의 순종이 드러납니다. 이 연기는 제단의 불 위에서 제물을 태워(화제)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로서 시인이 서원제에 적합한 방법으로 제사(레 3:3)를 드렸음을 보여줍니다. 화제는 또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레 3:5, 16)이므로 예배자인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참회, 겸손, 감사, 환대, 헌신과 하나님께서 시인을 용서하고 제사를 받으셨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찬양(16-20)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소리에 속지 않으십니다. 기도자의 중심으로 보시고 깊은 생각까지 판단하십니다. 마음에 죄악을 품은 자의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고난은 마음속에의 쓰레기를 치우고 영혼을 맑게 하십니다. 고난을 체험한 성도는 믿음이 더 깊어지고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16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17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18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19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20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16-20)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입으로 고백하고 우리의 혀로 찬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마음 속에 죄를 묵인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입니다. 그 후에야 응답된 기도가 찬양으로 흘러나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무엇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 찬양에 초청 (16)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화답의 표시로 서원제를 드리겠다고 선언한 시인은 특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모든 자들을 초청하여 자신의 간증을 전하려 합니다. 앞서 “와서 보라”(5)고 했던 것처럼 시인은 이제 “와서 들으라”(16)고 하며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이때 초청을 받은 자들이 보고 듣게 될 내용은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신 능력과 구원의 일입니다. 내용에 있어서 다른 점이라면,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들에게 베푸신 일을 진술하는 반면 1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시인 한 사람에게 하신 일을 진술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두 군데 모두 초청을 받은 자들에게 시인이 의도하는 바는 그들이 시인이 전하는 말을 듣고 능력과 구원의 왕이신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2) 시인의 간증(17-19)

 

시인이 그의 입과 혀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그를 찬송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실제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때 시인은 마음에 어떤 죄악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말하며 죄가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회개하여 순전한 마음으로 간구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고 겸손하게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인의 기도 소리에 귀 기울이셨고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고 보살피시는 분이며 곤경을 주어 연단하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점은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증명되었습니다.

 

(3) 하나님 찬양(20)

 

온 땅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1)고 외치며 시를 시작한 시인은 다시금 하나님 찬양을 촉구하며 시를 마감합니다(20). ‘하나님께서 송축 받으시리로다’라는 그의 외침은 하나님께서 찬양받기에 마땅하심을 재차 강조합니다. 이 외침은 이미 8절에서 만민을 향해 ‘하나님을 송축하라’는 시인의 촉구에 대한 화답으로도 기대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20절에서는 온 땅(1,4)이나 만민들(8)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았지만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송축하는 대상임이 암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두지 아니하신 점을 들어 감사하는데, 이 두 가지 감사의 이유는 하나님의 하신 일과 성품을 표현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니라 밀접하게 관련된 하나의 내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의 기도를 들어주신 데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 즉, 인애와 성실, 긍휼 등의 성품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역으로, 이러한 성품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행동과 성품은 따로 분리되지 않고 일치되어 나타납니다. 덧붙여,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하고 견고한 왕국을 약속하셨을 때 그의 인자하심을 다윗으로부터 거두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신 후 다윗의 왕국과 그의 왕좌가 영원히 보존될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이셨듯이(삼하 7:15-16), 이제 시편 66편에서도 시인을 향한 하나님의 기도 응답과 인자하심을 계속적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심으로 시작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그분이 우리를 만나주셨고,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예배와 찬양은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 응답을 받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과 예배의 감격을 회복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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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6-01)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시편 66편 1-9절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과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에게 무엇보다도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조성하셨고 지금도 유지하고 계시고 때문입니다.

 

  • 온 땅에 사는 만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택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놀라온 권능의 역사를 베풀며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와 거기에 사는 백성 모두를 다스리고 보살피시려는 능력과 의지를 지닌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계의 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온 땅이여 하나님을 찬양하라(1-4)

때로는 기쁜 소리를 높여서 찬양해야 하며, 때로는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찬양하는 것이며, 그분의 역사에 믿음으로 참여하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입술의 찬양이나 기술적인 찬양에 그치지 않고 우리 전체로 찬양하고 온 삶으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대적을 이기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며,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대적이 될 수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 백성의 존재 방식입니다.

 

1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2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3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4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셀라)(1-4)

 

시인은 온 땅 즉, 온 땅에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그가 단순히 그가 속한 공동체의 몇몇 사람이나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명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을 불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하는 데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뿐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를 포함한 우주의 왕이라는 점이 함축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왕이심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으며 온 세계와 우주를 염두에 두고 있는 기도하는 자, 세계를 품은 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있어서 다양하고 적절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먼저, 즐거운 소리를 내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소리를 내라’는 말은 전쟁의 시작을 알리며 함성을 외치듯, 승리의 환호를 지르듯 하나님을 높이는 말을 기쁨으로 외치라는 뜻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또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하되 영광스럽게 찬양해야 합니다. 여기서 찬양은 악기로 연주를 하거나 노래를 불러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때 시인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언급하고 또한 영광스럽게 찬양하라고 요구하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름이란 그 소유자의 존재와 능력과 성품 등을 다 함축하고 있는 단어로서 그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구실을 합니다. 시인은 만민이 그의 초청을 받아들이되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도 모른 채 찬양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통하여 그의 왕 되심, 전지전능하심, 거룩하심, 정의와 은혜 등을 떠올리며 그가 우주의 왕이심을 확실히 알아야 하고, 그가 만민의 영광과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분임을 분명히 인식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한 찬양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 영광스러운 찬양이 됩니다. 셋째,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그에게 아뢰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권능의 놀라운(엄위한'으로 번역됨) 일과 그에 수반된 결과를 찬양의 이유로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그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그의 존재와 능력을 밝히 드러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능력의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반응합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들도 자기를 높이지 말고 승리의 하나님께 굴복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경배하다’는 ‘절하다’라는 뜻이므로 온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그를 노래해야 합니다.

 

와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라(5-7)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시고 구원자이심을 깊이 깨닫기 원합니다. 그러면 온 맘 다해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5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6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7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셀라)(5-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갈라진 홍해를 걸어서 건넜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만 가능하신 일입니다.

 

(1) 시인의 명령:와서 보라(5a)

 

시인은 온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와서 직접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경험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국 중에서 선택하여 특별히 보호하고 구원하셨지만, 그가 온 세계의 왕이시므로 궁극적으로 만민을 돌보고 구원하실 것임을 그들이 분명히 알고 체험하기를 시인은 소망합니다. 시인은 3절에 언급한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의 예로 사람들이 바다를 육지처럼 통과한 사건을 듭니다. 여기서 바다가 육지가 된 일과 사람들이 강을 걸어서 건넌 일을 한 사건으로 볼 수도 있으나, 각각 홍해와 요단을 건넌 두 사건으로 읽는 것도 적절합니다. 유사한 용례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사건을 배경으로 기록된 시편 114편에서도 나오는데, 이때 시인은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바다가 보고 도망하였고 요단은 물러섰다…바다야 네가 왜 도망하느냐 요단아 네가 어찌 물러서느냐”(시 114:3,5)라고 노래하며 홍해와 요단을 건넌 사건을 언급합니다.

 

(2)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5b-7)

 

시인이 실제 일어났던 나님의 행사를 진술하는 주된 목적은 온 땅에 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능력을 가지셨는지,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알아 그분에 대한 확실하고 견고한 믿음을 갖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과거에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큰 능력을 직접 눈으로 본 후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출 14:31). 시인과 그의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합니다(시 66:6). 이때 6절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바다를 육지로 변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강을 그들이 걸어서 건넜다’로 번역되며, 그 다음 문장은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다’로 번역되었지만(개역개정) 문자적 번역은 ‘거기서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기뻐하자’입니다. 앞의 번역을 따르면 시인과 공동체가 기적의 사건을 직접 경험하고 기뻐했다는 의미로 또는 과거의 기적 사건을 기억하며 그 장소에서 기뻐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뒤의 문자적 번역을 따른다면, 시인이 청중에게 과거 기적의 사건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나님으로 인해 함께 기뻐하자고 요청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번역과 해석이든 여기서 시인이 확실하게 진술하려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능력과 구원을 베푸셨다는 점과 그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시인과 모두의 기쁨이 되신다는 점입니다. 이제 이런 놀라운 사건을 통한 하나님 찬양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온 땅에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백성에게 행하신 일을 확실히 인정하고 그가 능력의 왕이심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여 그들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는 일 가운데는 인간의 이성과 상식이나 과학을 뛰어넘는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다스리심과 전능하심을 보여주신다. 동시에 인애와 정의를 비롯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십니다. 눈앞에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시는데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믿기를 거부하거나 머뭇거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가!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과 왕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시인의 초청을 거부하는 자들을 완악하고 고집 센 반항자라고 칭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과거뿐 아니라 지금도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들을 살피고 계시며, 그의 다스리심이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높이거나 하나님께 도전하여 반역하기를 그치라는 시인의 경고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라(8-9)

 

능력으로 영원히 온 나라들을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온 나라들을 살펴서 교만한 자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라고 부릅니다. 또한 자신들의 영혼을 살려두시고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시는 은총을 찬양하라고 부릅니다.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하신 신실하신 구원과 보호의 역사입니다.

 

8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9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8-9)

 

인생 가운데 고난의 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들을 고난의 불 속에 넣어 담김질하십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성숙하도록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겨 내시길 바랍니다.

 

(1) 시인의 명령:하나님을 송축하라(8)

 

능력의 왕이신 하나님을 송축하며 찬양해야 하는 것은 온 세계 백성의 의무입니다. 시인은 재차 세상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이번에 시인이 언급하는 하나님 송축의 이유는 그가 생명을 제공하고 주관하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군대의 생사가 하나님께 달려있었듯이 현재와 미래에도 인생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특히 그의 백성이 어려움과 죽음의 위험에 놓여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구원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권위와 능력으로 백성을 강압적으로 눌러 그들로 하여금 억지로 복종하게 만드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돌보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우리의 실족함 즉, 발이 흔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표현하는데, 이때 실족함이란 어려움이나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발이 흔들릴 때 도와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발이 흔들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사랑의 마음과 능력과 강한 의지를 이미 소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2)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유(9)

 

하나님 덕분에 우리의 생명이 붙어있고 그가 주시는 안전과 보호를 체험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기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이 특권을 그의 성도만이 아니라 만민이 함께 누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고대합니다. 시인처럼 온 세계 만민이 놀라운 권세와 능력으로 세계를 다스리고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를 찬양하는 소리가 울리는 날을 우리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계 7:9-12; 19:6).


믿음의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세상을 다스리시고 당신의 백성을 보살피십니다. 악이 강하고, 세상의 힘이 막강하다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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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01-02)

 


사역을 성취해 가는 사람들

출애굽기 1장 15-22절


 

찬송가 586장에서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 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사이에 서선 택하며 살리라”라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느 곳이든지 어느 시간이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며, 복음의 일군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곳이라고 순종하며 나가야 합니다.

 

 

애굽 왕의 핍박이 더욱 가중되어 이스라엘이 큰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때도 큰 믿음을 발휘한 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특히 본문에 십브라와 부아는 어떤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입니까?

 

환경을 두려워하는 사람(15-16)

때로는 삶에 고민스러운 선택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렵고 힘들면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어려운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15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15-16)

 

바로 왕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급성장이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왕으로 권위와 담대함보다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왕국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완전치 못한 그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그는 두려움의 대상을 없애려 했습니다.

바로왕은 이스라엘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라는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에게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16)고 살벌한 명령합니다. 이러한 왕의 명령에 하나님께서 기뻐할 리 없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을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죽음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환경을 보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왕의 명령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바로 왕의 권위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 왕의 권위 위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긋나게 하면서까지 왕에게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두 산파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살면서 선택의 기로에 있습니까? 사람들의 말이나 평가가 두렵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아무것도 압니다. 시간이 지나면 세상에 모든 것을 모두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17)

세상에 살벌한 환경 속에도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보다도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도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권위가 하나님의 뜻과 대치될 때, 순종의 길을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가장 소중한 결정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일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입니다.

 

17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17)

 

바로 왕은 당시에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최강의 권력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히브리 산파들은 너무도 보잘것없는 평범한 여인들이었습니다. 바로의 명령을 거역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들은 용감한 결단하였습니다. 비록 세상의 바로에게는 불순종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순종의 길이었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바로왕의 칼날을 두려운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믿음의 생활에 생명을 위협하는 어려운 결단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왕의 명령을 어기고 히브리 남자 아기를 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들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는 일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일입니다. 생명이 가장 우선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움이 있는 세상 조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주변 사람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혹시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힘과 능력으로도 꺾을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린 사람들(18-21)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풍성한 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권력자 바로 왕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산파들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 지혜는 아주 뛰어났습니다. 그들은 추궁 받을 상황 속에서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르게 대답합니다.

 

18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19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20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21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18-21)

 

마침내 바로왕은 그녀들을 불렀습니다. 왕의 명령을 어기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살렸는지 심문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불순종에 대한 대가로 처벌이 앞에 다가왔습니다.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산파들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아주 지혜롭게 말했습니다. 애굽 여인과 달리 이스라엘 여인들은 건장해서 자신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해산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지혜롭게 위기를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잠언 9:10). 산파들은 세상 왕을 능가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었습니다. 산파들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피할 길을 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괴롭게 할지라도 그때뿐입니다. 이 산파들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민족을 함부로 죽일 수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신앙은 에스더와 같은 믿음으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주변 환경에 너무 치우쳐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내적으로 약한 성도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온실에서 자란 꽃을 날씨가 따뜻하다고 밖에 내놓았다가 찬바람이 불면 시들어 버립니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한 군사가 되도록 축복을 드릴 수 있도록 당신의 환경 속에 기도의 제목을 주신 것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 축복을 가지고 불평 불만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축복으로 가는 지름길을 주었는데 반항하고 거부하며 불평하며 살아가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지게 되면,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깐 하나님께서는 축복해 주십니다.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21)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산파들의 경외심과 믿음에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의 집을 흥왕하게 하셨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으로 사니깐 그 가정에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산파들 덕분에 번성하고 강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성도 한 사람이 믿음으로 살아갈 때 가정뿐 아니라 나라 전체에 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가정과 사회에 복을 가져올 수 있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담대하게 나가시길 바랍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살아가길 원하십니까? 세상과 환경을 타협하지 않고, 죽으면 죽이리라는 신앙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축복 받을 것입니다. 가정이 어려울 때 불평하지 말고 자녀들에게 같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믿음대로 살면 더 어려운 환경(22)

세상의 길이란 한 고비를 넘긴 것 같은데 또다른 한 고비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파를 통해 남자 아이들이 살았지만, 이제는 바로 왕은 산파를 믿지 못하고 또 다른 법을 만들어 공포합니다.

 

22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22)

 

하나님의 축복에는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바로 왕은 더욱 악해지기 시작합니다. 악은 점점 더 힘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자 아이를 낳은 사람들마다 자기가 자기 아이들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를 출산하면 아이를 악어가 득실거리는 애굽의 나일강에 집어 던져 넣어야 했습니다.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고 할지라도 그 때에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이 아무리 강할 지라도 그곳이 고난의 한 복판에 있지만, 그곳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항상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죽인다는 것처럼 큰 고통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안양에서 유괴되어 죽은 아이들의 부모를 보면 제 정신이 아닙니다.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이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잠시 더 어려워 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마귀의 최후에 발악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을 계속 믿으시고 나가길 바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며 세상을 이길 힘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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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5-01)

 

 


온 땅에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복

시편 65편 1-13절


 

최고의 성취를 이룬 사람이 자신의 성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수고한 사람들에게 진실한 감사와 애정을 표현할 때, 그의 진정한 면모가 드러납니다. 추수를 마치고 성전을 향해 감사의 제사를 드리러 나오는이들의 찬양에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믿음의 고백과 온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다스림이 충만하게 나타나길 바라는 종말론적 소망이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 시편 65편은 하나님의 통치 행위를 묘사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4)에서는 시온에 위치한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후반부(5-13)에서는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은 시온산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열방의 모든 부분에 동일하게 적용됨을 알려줍니다.

 

시온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1-4)

 

상황이 변해도 침묵하며 기다릴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신뢰의 표현이며,큰 성취 앞에서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그분께 대한 진정한 감사의 표현입니다(1절). 죄는 하나님의때를 신뢰하지 못하고 악인의 때를 좇을 때 범하게 됩니다. 사죄의 은총의 시작은 기다림입니다. 소극성입니다. 주님의 처분을 관대하게 기다리는 일입니다.

 

1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2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3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4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1-4)

 

먼저 1-4절은 하나님께서 시온에 거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 시편의 전형적인 특징이며, 시온 중심성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1) 시온에서 하나님을 찾음(1)

 

‘시온에서 잠잠함이 주님께 찬양이 된다’고 고백하면서 1절은 시작합니다. 시편 62편 말씀을 다시금 읽는 듯합니다. 그런데 왜 ‘잠잠함이 찬양이 된다’고 고백했습니까? 물론 ‘잠잠함이 찬양이 된다’라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 시편 기자의 이 고백이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시편 65편을 전체적으로 읽어야 이 말씀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시온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며, 서원을 주께 이행하게 되는 장소입니다.

 

(2) 시온에서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능력(2-3)

 

2-3절에서는 시온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서술합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의 합의입니다. 그 함의가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악이 사람보다 강하기에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만들지만, 하나님은 그런 죄악들보다 더 강하시므로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시온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오면 그 어떤 죄인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시온에 거하는 복(4)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권세를 말한 후, 4절은 주의 뜰에 살게 된 사람은 복이 있음을 노래합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분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며 기도하면 모든 은총을 얻어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절 하반절은 ‘우리가 주의 집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합니다’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죄 사하심의 권세를 높이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피조세계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5-13)

추수란 하늘의 것을 이 땅에 가져오는 일입니다.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성도의 감사와 찬양이있으니, 하늘과 땅을 연결하여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온 땅에 나타납니다. 이제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하늘의 은총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5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6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7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8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9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10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11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12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13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5-13)

 

1-4절의 내용은 시편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온 성전에 대한 메시지로서, 독자들에게 크게 새로운 내용은 아닙니다. 그런데 65편은 매우 특별하게도 이러한 성전 중심의 메시지를 피조세계 전체를 위한 메시지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대의 방향성이 바로 5-13절에 나타납니다. 시온에서 다스리시며 용서하시는 주님의 역사는 피조세계 전체에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1) 놀라우신 하나님의 역사(5)

 

5절은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역사가 매우 놀라움을 고백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러한 놀라우신 하나님의 역사는 단순히 한 지역인 시온 성전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이르기까지 펼쳐집니다.

 

(2)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6-7)

 

6절은 주님께서 권능으로 띠를 띠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권능’이라는 단어는 ‘게부라’라는 단어로 3절에 나오는 ‘이기다’라는 단어의 원어인 ‘가바르’와 같은 어근을 가집니다. 즉 죄악을 사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는 곧 온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세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6절의 ‘산을 세운다’는 표현과 7절의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을 진정케 한다’는 표현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산이 높이 올라오게 하시고, 물이 한 곳으로 모이게 하셔서 육지를 만드신 장면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민의 소요를 진정시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만민’이란 ‘민족들’ 혹은 ‘열방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만민의 소요를 진정시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심을 뜻합니다. 창조주로서 온 땅을 다스리시는 섭리주가 되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예시I(8-10)

 

8-10절은 온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여러 가지 예를 통해서 표현합니다. 8절에서는 아침이 되는 것과 저녁되는 것이 즐겁게 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원문을 보면 ‘아침과 저녁이 들어오고 나가는 현상이 즐거워 외치게 된다’입니다. 따라서 아침과 저녁이 되는 것 즉 하루하루의 삶이 복되고 즐거운 시간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다스리시며 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9-10절은 하나님께서 땅을 복되게 하심을 묘사합니다. 땅에 물을 주시고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곡식을 허락하시는데, 이 모든 것이 이 세상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말합니다. 밭고랑과 밭이랑에 물을 주시며 필요에 따라 때를 기억하여 비를 주시는 은총이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의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8절이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의 시간적 영역을 복되게 하심을 말했다면, 9-10절은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의 공간적 영역을 복되게 하시고 그 공간을 은총으로 채워주심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예시Ⅱ(11-13)

 

11-13절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예시를 이어갑니다. 특별히 11절에서는 ‘주께서 선한 것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루하루의 시간을 복되게 하셨음을 말했는데, 이제 11절에서는 ‘한 해’를 복되게 하심을 말하면서 더 깊은 주제적 발전을 보여줍니다. 한 해를 주신다는 것 역시 시간적 영역에 은총을 주신다는 의미인데, ‘관 씌우신다’는 표현을 통해서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의미를 추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허락하십니다. 5절이 말한 대로 ‘놀라우심’은 하나님께 속한 특징인데,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영광이 이제 피조세계 속에 넘치도록 역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12-13절은 공간적 영역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함을 다시금 묘사합니다. 들의 초장에 하나님의 기름방울이 떨어지고,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며, 초장은 양 떼로 덮이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이게 된다는 아름다운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피조세계의 공간들이 가득히 넘치게 되는 장면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시편 65편은 시온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곧 피조세계 전체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시온은 세계의 중심인 동시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구현하는 모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영역이 단순히 한 시간이나 한 공간이라는 제한을 두지 말고, 온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모이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땅 끝까지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민족들 가운데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모든 영역들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는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뢰와 감사와 순종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시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질서 있고 조화로운 안식의 사람, 샬롬의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빚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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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4-01)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악인의 존재

시편 64편 1-10절


 

태산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하늘 아래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하고 똑똑하고 과학이 발달한 첨단의 시대를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조금만 힘이 생기고 소유가 늘어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망각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착각합니다.

 

 

  • 본 시편은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내용이 나오며(1-2), 악인들의 계획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고(3-6),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용사이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타난 후(7-9), 의인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찬양하는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10).

 

하나님께 드리는 구원 요청(1-2)

세상은 큰 울음소리도 흘려듣지만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고통당하는 백성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고 악인의 계략에서 건져 주십니다. 은밀히 공격하는 대적들에게서 ‘숨을 곳’이 되어주십니다. 그리니 하나님 앞에서는 숨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토설하시기 바랍니다.

 

1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2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1-2)

 

시편 64편은 하나님께 대한 구원 요청으로 시작됩니다. 시편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애가(탄식시)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여”라며 하나님을 부르고, 원수의 두려움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과연 어떤 어려움 가운데 처해있는 것입니까? 그 내용이 2절에 간략하게 등장합니다. 악을 꾀하는 자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악을 행하는 자들이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악인들의 계획 때문에 시편 기자는 어려움 가운데 빠져 있고,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까지는 전형적인 애가(탄식시)의 형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악인들에 대한 묘사(3-6)

원수들의 무기는 칼처럼 날카로운 혀와 화살같이 독한 말이었습니다. 완전한 자의 의로움을 견딥니다. 완전한 자의 의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거짓과 비방으로 그를 넘어뜨렸습니다. 사냥꾼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예고 없이 공격하였습니다. 그러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그의 마음은 돌같이 굳어 있었습니다. 악인들끼리 서로 격려하고 정려하고 힘을 합쳤습니다.

 

3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4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5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6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3-6)

 

1-2절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한 후 시편 기자는 이제 3-6절에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이 부분은 악인들에 대한 집중적인 묘사를 제시합니다. 먼저 3-4절은 악인들의 말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3절은 악인들이 입으로 펼쳐내는 언사가 칼과 같고 화살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칼과 화살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이며, 다른 이들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됩니다. 따라서 악인들이 칼과 화살과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악인들이 의인들을 죽이기 위한 말을 한다는 뜻이 됩니다. 4절은 이에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악인들은 그 독하고 악한 말을 칼과 화살과 같이 사용하되, 숨은 곳에서 갑자기 자신의 길을 올바로 가고 있는 사람을 겨냥해서 씁니다. 즉 악인들이 하는 말은 의인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의인들을 억울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하는 악한 말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그 일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움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 일로 인해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언뜻 보기에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7절 이하에 내려가면 명확하게 이해될 것입니다.

5-6절은 악인들에 대한 묘사를 이어갑니다. 3-4절이 악인들의 말에 대해서 언급했다면, 5-6절은 그런 악한 말을 하고 있는 악인들의 속마음이 어떠한지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5절에서는 악인들이 악한 목적으로 서로를 격려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격려합니다’는 말은 ‘강하게 합니다’는 뜻입니다. 악한 목적으로 서로를 강하게 붙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불성설이지만, 이것이 악인들의 정체입니다. 악한 일을 위해서 서로 힘을 합하고 뭉치는 것이 바로 악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마음으로 하려고 하는 일은 바로 ‘몰래 올무를 놓는 일’입니다. 원어를 보면 ‘올무들을 놓는다’라고 복수형태를 사용합니다. 즉 길을 올바로 잘 가고 있는 자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올무를 여러 개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가 이것들을 보리요’ 하면서 의인들이 올무를 보지 못하여 그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악인들의 속마음은 6절에 더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악한 계획을 꾸며내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습니다’라며 기뻐합니다. 이러한 악인들의 행태를 향해 시편 기자는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다’고 한탄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깊은 곳까지 죄악으로 물들어 있기에,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악한 역사와 죄에 물든 생각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쟁의 용사이신 하나님(7-9)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맘 놓고 거만하게 떠들던 악인들의 입은 닫히고, 탄식하며 기도하던 의인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즐거운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그들의 화살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에게 돌아가게 하시고 그들이 친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들어 조롱거리가 되게 하십니다

 

7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8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9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7-9)

 

이제 7절부터는 3-6절에서 언급한 악인들이 어떤 최종적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심판을 내리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화살로 쏘신다’고 묘사합니다. 여기서 화살로 쓴다는 표현은 다름 아닌 4절에서 악인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표현과 동일합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악인들은 의인들을 악한 말이라는 화살로 쏘아 넘어뜨리려 했으나, 정작 화살을 맞아 넘어지게 되는 자들은 다름 아닌 악인들 자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악인들을 향해서 화살을 쏘시는 분은 심판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8절은 이러한 악인들이 맞게 되는 멸망이 바로 자신들의 악함의 결과라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이 엎드러지나니’라는 말은 ‘그들이 그를 엎드러지게 하나니’라는 뜻으로, 악인들이 스스로를 엎어지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혀는 그 자신들에게 임하게 됩니다. 3-4절에서 의인을 상하게 하려고 악한 말을 꾸며냈는데, 그 악한 말이 악인들 자신에게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악인들을 보는 자들이 다 머리를 흔들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머리를 흔든다는 말은 악인들이 받는 형벌을 보고 만족스러워하거나 혹은 그 형벌로 인해 놀라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악인들이 받는 벌을 보고 놀라서 도망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악인들의 계획은 의인을 넘어뜨릴 줄로 예상되었으나, 놀랍게도 악인들 자신에게 그대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9절은 이러한 모든 일의 결과,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앞서 4절에서 악인들은 온전한 의인들을 향해 화살을 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악인들이 맞는 종말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악을 그 악인들에게 갚으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공의로우심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10)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피와 생각을 좇아 삽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반면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10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10)

 

64편의 마지막 구절인 10절은 ‘의인’에 대해서 말합니다. 64편에서 ‘의인’이라는 단어는 10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오직 ‘악인’ 혹은 ‘악을 꾀하는 자들’에 대해서만 언급해 왔습니다. 악인에 반대되는 말은 4절에서 ‘온전한 자’라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10절은 64편의 마지막 구절로서, 악인들의 계획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목숨이 위태로워졌지만,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을 ‘의인’이라고 명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경험한 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며, 그 앞을 막아서는 간교한 악인들의 계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도우심을 기대하고, 악인들과 싸우시며 그들의 악한 계획을 물리쳐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의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마음이 정직한 자 곧 마음이 올바른 자들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악인들의 계획을 만나게 될 때, 64편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의로우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 악인들의 악함을 물리쳐주시고 의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임을 믿으며 담대한 신앙으로 살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악인이 우리를 공격하고 힘들게 해도,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것일 뿐입니다. 악인의 힘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우리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모든 행위를 아십니다. 악인의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무지(無知)만 못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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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63-01)

 


광야에서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시편 63편 1-11절


 

인생은 고단합니다. 산을 넘으면 강을 만나고, 강을 건너 한숨 돌리면 깊은 계곡, 메마른 광야를 만납니다. 인생의 어느 한순간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하시면 우리는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과 함께 고난을 이겨 냈습니다.

 

  • 시편 63편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 다윗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절이 서론 역할을 하며, 11절이 결론 역할을 하는데, 그 중간에 나타난 2-10절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고 찬양하는 다윗의 신앙을 묘사해줍니다. 다윗은 과거 성소에서 하나님을 찾았던 것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인자로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원수를 멸하여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다(1)

하나님께서 고난에서 자신을 건져주시고 다시 성소로 돌아가 감격의 제사를 드릴 것을 소망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이 회복되기를 갈망합니다. 절망 중에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본 시는 다윗은 대적에게 쫓겨 유다 광야에 피신했을 때 지은 시입니다.

 

1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시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기도의 시작점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그것이 우리가 시편 63편에서 찾아내야 할 주제이다. 다윗은 물이 없어서 마르고 지치는 땅에서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다. 광야에서는 물을 갈망하게 되는데,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 광야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은 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사모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신앙이 가능할까? 다윗은 2절부터 자신의 이러한 신앙의 이유를 풀어나간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찾던 과거의 모습(2)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곳이 이미 성소입니다. 삶이 유린되고 일상의 무너진 시공일지라도 기도하는 곳은 어디든 성소입니다. 기도하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자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비롯 그곳이 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으며 나아갑니다.

 

2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

 

다윗은 자신의 과거 신앙을 회상합니다. 비록 지금은 광야에서 원수에게 쫓기고 있으나, 과거에 자신과 함께하셨던 주님이 지금도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회상하는 과거의 모습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보기 위해 성소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모습입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모습인 것입니다.

 

찬양의 이유 I(3-4)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의뢰하는 자에게 온갖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습니다. 즉 주의 인자하심이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생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 드려야 합니다.

 

3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3-4)

 

이렇게 과거에 하나님께 제사로 예배드리던 모습을 회상하면서, 다윗은 매우 중요한 한 단어를 떠올립니다.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 즉 ‘인자하심’입니다. ‘인자하심’은 사무엘하 7:8-16에 나오는 다윗 언약의 결론부(삼하 7:15)에 나오는 단어입니다(개역개정에는 ‘은총’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는 ‘헤세드’이다). 다윗 언약에서 인자하심은 ‘다윗 언약의 영원성’을 뜻합니다. 즉 다윗 가문이 비록 실수를 하고 잘못을 범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윗 가문을 끝까지 지켜주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보장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인자하심’은 생명보다 더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다윗의 생명을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윗은 원수에게 쫓겨서 광야에 와 있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다윗을 그 어려움에서 건져주고,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가게 할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은 다윗이 평생에 하나님을 송축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할 것임을 말합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이므로, 그의 생이 다할 때까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분명한 것입니다.

 

찬양의 이유 Ⅱ(5-8)

우리는 물질의 축복을 늘 갈급해합니다. 그렇다고 축복의 기준이 물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복을 얼마나 많이 받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물질의 욕심에 끌려 수많은 우상을 찾아 헤맸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이방의 신들 속에 파묻혀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5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5-8)

 

5-8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찾고 기대하며 찬양해야 할 이유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나갑니다. 5절 상반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으로 인해 자신이 기름진 것을 먹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기름진 것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만족케 하시는 분입니다. 기름진 것과 만족의 주제는 지금 다윗이 처해있는 광야의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지금은 광야에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만족을 주실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사모함과 신뢰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5절 하반절부터 6절까지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5절 하반절은 다윗이 기쁜 소리로 주님을 찬양함을 말하며, 6절에서는 밤에 침상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밤이 새도록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다윗의 모습을 그립니다. 7절은 다윗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기뻐 소리 높여 외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7절 상반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움이 되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비록 광야라는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실 것임을 알기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5-7절에서 다윗이 기뻐하면서 찬양하는 모습은 광야라는 주제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광야에 있지만 광야에 매여 있거나 광야로 인해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사모하면서,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은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는 것으로 서술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다윗을 하나님의 오른손이 붙들어주신다고 표현합니다. 광야에서 즐거워하며, 고난 가운데서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 다윗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고 역사를 일으켜주심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들의 멸망(9-10)

인생은 전쟁터입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심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필요합니다. 다윗은 원수들의 끊임없는 공격과 도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9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9-10)

 

이미지와 이어지는 9-10절은 다윗을 죽이려는 원수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9절과 10절은 모두 상반절과 하반절을 대조하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영혼을 멸하려 하는 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며(9) 다윗을 칼에 붙이려 하는 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광야에서 승냥이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10). 지금은 광야에서 다윗이 죽게 될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지만, 모든 일들은 새롭게 전환되어 오히려 다윗은 살아나고 대적들이 죽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죽음의 땅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는 땅입니다. 그 전환점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주님을 기대하며 찬양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왕(11)

광야는 시인을 절망에 빠뜨리지 못합니다. 대적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인을 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님만을 따르며, 오직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광야는 세상에서 버려진 자가 하나님을 얻는 곳이고, 헛된 것에서 멀어짐으로 참된 것에 가까워지는 곳입니다.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장소가 아닌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장소입니다.

 

11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11)

 

본 절은 63편의 결론으로, 1절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서 해답을 제공합니다. 여기서 ‘왕’이란 물론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왜 ‘나’라는 1인칭이 아닌 3인칭의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까? 바로 자신의 상황을 더욱더 객관화하기 위함입니다. 1절에서 ‘나의 하나님이여’라는 관계성을 표현했다면, 11절에서는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왕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관계임을 서술합니다. 광야에서조차 하나님을 기대하고 신뢰하고 즐거워 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객관적인 관점에서 담담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11절 하반절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맹세하는 자는 자랑하게 될 것이지만,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으로 인해 맹세하는 자’란 63편 전체에서의 다윗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인자하심을 기대하는 자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자 즉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지 않고 자 것입니다. 신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자는 그 입이 막히게 다윗은 하나님 편에 섰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뿐 아니라 앞으로도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면서 기쁜 소리를 외치는 감격을 계속해서 맛보게 될 것입니다. 63편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신뢰의 노래를 불러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광야는 절망을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많은 사람이 광야와 같은 삶을 힘겨워합니다. 그 이유는 길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메마른 인생에도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 나옵니다. 가난하고 힘든 인생을 걸어가도 영혼이 만족하여 감사가 넘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인생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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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60-01)


절망에서 승리로 나아가려면

시편 60편 1-12절


 

승리에 익숙한 사람과 실패에 익숙한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승리에 익숙한 사람은 작은 실패에도 크게 충격을 받습니다. 하지만 패배에 익숙한 사람은 어떤 실패를 만나도 충격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덤덤합니다. 공부하기를 포기한 학생은 낙제 점수를 받아도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성적을 높이려고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일등인 인생은 작은 실수에도 크게 충격을 받고, 그 충격을 발판으로 해서 더 열심히 보완하고 노력합니다.

 

 

  • 가나안 정복 전쟁의 상황에서 패배하여 다윗이 주께서 우리에게 분노하시고 우리를 버리셨으므로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시인합니다. 다윗은 다시 한번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선언합니다.

 

전쟁의 패배로 인한 애통과 간구(1-5)

환난이 죄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닙니다. 환난의 원인이 나태, 무분별, 무지 때문일 수도 있고, 사탄의 시험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든지 해결책은 하나,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복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승리의 깃발을 주셔서 힘과 용기와 자신감을 얻고 결국 승리하게 하십니다.

 

1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2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3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나이다 4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5○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1-5)

 

시인은 하나님을 부른 후 곧바로 ‘주님이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흩으셨습니다. 주님이 분노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도 없고 접속사도 없이 연이어 나오는 세 개의 동사로 자신들이 당한 상황을 하나님께 탄식하며 몹시 괴롭고 힘든 것을 표현합니다. 시인은 지금의 고통스런 상황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주님이 그들을 버리셨다는 것은 마치 그들이 주의 백성이 아닌 것처럼 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분노하심으로 그들을 버리셨고 그 결과 그들이 완전히 깨어지고 부숴져 버렸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다시 회복시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치 잘못한 자녀를 회초리로 때리는 어머니 품으로 자녀가 뛰어들 듯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2-3절은 주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주께서 지진이 나게 하셔서 땅이 흔들리게 하시고 갈라지게 하셨습니다(2). 지진으로 인해 땅이 흔들림은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시 18:7; 46:3,6; 사13:13; 24:18–20). 시인은 하나님께 갈라진 틈을 메워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마도 지진은 전쟁에 대한 비유로, 땅이 갈라짐은 전쟁의 패배로 인한 이스라엘 백성의 혼돈과 좌절과 낙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갈라진 틈을 메우는 것은 이를 극복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당하게 하셨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마시게 하셨다고 합니다(3). 포도주를 마시고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것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 쓰러지는 비참함을 표현합니다.

 

4절은 여러 다른 번역들이 시도되고 있으며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다’고 했는데 “진리를 위하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라는 단어는 ‘화살’로 보고 ‘달게 하다’는 ‘피하다’로 본다면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활쏘는 자) 앞에서 피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1-3절의 내용에 애통이 나오고 간구가 나온 형식에 따라 4-5절도 애통(4)에 이어 간구(5)가 나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4절은 하나님께서 이미 도움을 주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경외하는 자들에게 깃발을 주셔서 화살을 피하게 하셨다.’이처럼 이런 구원의 경험에 비추어, 주께서 주의 사랑하는 자들을 주의 능력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호소(6-8)

승리하는 삶을 위해서는 승리를 약속하는 말씀을 붙잡고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승리의 확신이 있을 때 범사에 감사하는 삶도 쉬워집니다. 현재의 고난 너머에 있는 가능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로 들어서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지라도 승리의 확신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괴롭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승리의 가능성은 확실히 커집니다. 하나님께 승리를 약속하는 말씀을 받고 다윗이 얼마나 힘이 났겠습니까?

 

6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7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8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나의 신발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로 말미암아 외치라 하셨도다(6-8)

 

시인의 “응답하소서”의 간구가 ‘하나님이 그의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신다’로 곧바로 연결됩니다.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땅을 주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전쟁에서의 패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함으로 하나님께 구원과 승리를 요청할 수 있게 하고 백성들이 다시 전쟁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며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고 합니다. 세겜을 나누고 숙곳 골짜기를 측량한다는 것은 땅을 나누고 분배하여 각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는 것을 내포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심을 말해줍니다. 세겜은 북이스라엘의 중요한 장소이고 숙곳은 요단 동쪽에 있는 얍복강의 북쪽에 위치합니다. 세겜과 숙곳이 왜 언급되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이스라엘 북쪽 지역의 요단 동편과 서편의 땅 전체를 대표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길르앗과 므낫세는 요단 동편 땅 전부를 가리킵니다. 길르앗 남쪽은 르우벤과 갓 지파가 차지했습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중심 지역이고 유다는 남유다의 중심 지역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는 지역입니다.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라는 명칭이 붙습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는 전쟁 장비요 규는 왕권을 상징하는 지휘봉이라면, 에브라임은 방어를 유다는 공격을맡는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8절에서는 이스라엘 주위의 주요 나라인 모압, 에돔, 블레셋이 언급됩니다. ‘모압이 나의 목욕통이라’는 것은 용사들이 전쟁에서 돌아와 몸을 씻을 때 씻을 물을 가져오는 종의 역할을 한다는 것으로 모압이 정복됨을 암시합니다. ‘에돔에 나의 신발을 던진다’는 것은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기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블레셋에게 ‘외치라’는 것은 패배로 인한 두려움으로 소리를 지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9-12)

생각이 행동을 규정짓지만 때로는 행동이 생각을 규정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생각이 짧아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실패들이 큰 성공을 위한 학습과정이 되고 디딤돌과 발판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좋은 생각만큼 좋은 행동이 중요합니다. 그처럼 승리의 확신과 승리의 기도만큼 승리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9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까 10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1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2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9-12)

 

6-8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이스라엘의 영광된 모습과 대비되어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곤경이 묘사됩니다. 9절에서 “나”는 시인을 가리키며 시인은 왕으로 보입니다. 9절과 10절에 의하면 왕이 에돔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돔은 바위 꼭대기에 지어진 성으로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옵 3), ‘누가 난공불으로 보이는 성을 정복할 수 있겠는가?’ 궁극적으로 그 답은 여호와입니다. 이 진리 앞에 시인이 다시 한번 탄식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군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에 대한 경험은 주님께 대한 새로운 믿음과 확신을 가져옵니다. 시인은 구원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다시 확인합니다.

11절과 12절은 “대적”이라는 말로 서로 연관되어 뿐 아니라 교차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11절 상반점과 12절 하반절은 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그는 우리의 대적을 밝으실 이심이로다.” 11절 하반절과 12절 상반절은 인간의 도움과 하나님의 도움에 대해 대조적인 평행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구원은 첫됨이니이다//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승리를 위해 시도하는 인간의 모든 전략과 전쟁 기술과 무기와 군사에 따른 전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막강해도 승리와 구원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대적을 복종시킬 수 있는 분이라고 선언하며 하나님과 함께 씩씩하게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시는 전쟁의 패배로 인해 생긴 국가적 곤고함과 굴욕의 시기 동안에 드려지는 백성들의 기도를 표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절과 유기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절로 인한 패배의 경험은 백성들의 믿음과 방향을 새롭게 합니다. 구원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자신들에게 재확신시킵니다. 시인과 백성이 여전히 고통스런 상황에 있지만 그들의 전망이 바뀌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을 단념하고 여호와께 대한 전적인 의존을 새롭게 합니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둡니다.


살다 보면 때로 패배할 때도 있습니다. 패배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 3가지 승리의 재료를 더해야 합니다. 바로 ‘승리의 확신, 승리의 기도, 승리의 행동’입니다. 인간의 능력과 수단과 방법만 의지하지 마십시오. 승리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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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5-01)


날아가는 두루마리에 적힌 저주

스가랴 5장 1-11절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다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삶의 기준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견고하고 안정감 있게 지켜준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킬 때 더 큰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 이전의 두 환상이 역사적 인물과 관계된 환상으로 특이한 점들이 많이 발견됐다면, 여기서는 다시 그 이전 환상들과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5장에서는 두루마리에 대한 환상과 에바 속의 여인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는데, 각각 철저한 심판과 완전한 죄악의 제거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여섯 번째 환상 : 두루마리(1-4)

성경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말씀을 떠났을 때 어떤 결과가 있는지, 그런 사람이 받을 벌과 저주는 무엇인지 그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받을 복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때 받을 벌을 가볍게 여기고 사랑과 축복에만 초점을 맞추면 정작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1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2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십 규빗이니이다 3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4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1-4)

 

하나님께서는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2절의 두루마리는 기록을 목적으로 하는 종이 같은 것으로, 주로 파피루스나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두루마리는 십계명, 언약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언약을 상징하는 두루마리가 임할 때, 복이 아니라 저주가 임하고 있습니다.

 

(1) 두루마리 소개(1-2)

 

3장에서 죄(정결)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환상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의 정결을 요구하지만, 이제 5:1-4은 저주를 상징하는 두루마리를 통해 온 땅에 저주로 인한 심판이 내릴 것을 예고합니다. 이렇게 죄를 제거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은 이스라엘과 거주할 수 없으므로 이스라엘에게 거룩함(죄가 없음)을 요구하십니다(레 19:2). 가나안 족속을 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이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그리고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도 죄악 때문입니다(레 18:27-28, ‘너희가 전에 있던 그 땅 주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2절의 ‘날아가는 두루마리’는 기록을 목적으로 하는 두루마리(렘 36:2)입니다. 주로 파피루스나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말아서 휴대할 수 있는 고대의 책입니다. 두루마리가 난다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게 한다는 의미이며, 두루마리에 기록된 저주(5:3)가 온 천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두루마리의 길이가 이십규빗이면 약 9미터에 해당하며, 너비 십 규빗은 4.5미터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이런 크기의 두루마리는 없습니다. 대부분 길이는 이와 같이 길지만, 너비가 이처럼 넓지 않습니다. 모양도 특이하며, 굉장히 큰 두루마리가 하늘을 덮은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루마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몇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첫째, 두루마리의 크기와 법궤를 덮는 속죄소의 크기가 같은 점을 착안해 둘 사이의 연관성을 주장하기도 합니다(왕상 6:24-27). 크기 이외에도 두루마리가 난다는 점, 속죄소는 나는 존재인 두 그룹(cherub)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비슷합니다. 그리고 3절에도 나오듯이 두루마리 양쪽에 기록된 저주의 내용이 십계명과 관련 있습니다. 속죄소가 덮은 법궤(언약궤)는 십계명 두 돌판을 보관한 곳입니다(왕상 8:9). 이렇게 볼 경우 두루마리가 하는 역할은 십계명, 즉 언약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의 핵심 내용은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이 담겨 있는 언약궤(법궤와 그 법궤를 덮는 속죄소는 언약의 핵심을 늘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두루마리가 속죄소에 연관된다면, 두루마리에 기록된 저주를 통해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을 언약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루마리에 기록된 저주는 다름 아닌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이며, 죄악에서 돌이키라는 강력한 촉구의 메시지가 됩니다.

둘째, 어떤 학자는 ‘주랑’의 크기와 같다는 점에 착안합니다(왕상 6:3). ‘주랑’은 성전의 입구를 의미하며, ‘주랑’ 앞에 번제단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7:7에서는 ‘재판하는 주랑’을 소개하는데, 주랑은 제사장이 재판하는 곳입니다(슥 3:7; 욜 2:7). 솔로몬의 기도에서 성전은 심판의 기능을 담당하는데(왕상 8:31-32), 이런 측면에서 날아다니는 두루마리가 심판의 성격을 지닌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셋째, 어떤 학자는 두루마리의 크기가 성소(출 26장)의 크기와 같다고 제안합니다. 성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나는 곳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늘 기억하게 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두루마리에 기록된 저주(5:3)는 하나님께서 보낸 저주이며, 따라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도록 하는 강력한 권고를 의미합니다.

 

(2) 두루마리의 확인 및 파급 효과(3-4)

 

3절에서 ‘두루마리’'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고 확인됩니다. ‘온 땅 위에 내리는’이라는 표현은 저주가 미치는 범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저주’는 궁극적으로는 언약적인 저주를 가리키며,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를 기억나게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충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질책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3절에는 두루마리 양쪽에 각각 ‘도둑질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 대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는데, 저주가 있게 된 죄악과 그 죄악으로 인한 저주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주의 대상으로 도둑질과 망령되이 행한 거짓 맹세는 십계명의 셋째와 여덟째 계명에 해당합니다. 4절에서도 이 표현과 내용을 확대하여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언약 공동체를 훼손하는 죄악을 중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환상: 에바 속의 여인(5-11)

하나님의 기준 대신 자기 스스로 잣대를 가지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성숙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별도로 자기중심적인 신앙, 왜곡된 믿음을 가지기가 쉽니다.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만 판단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멋대로 행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한다고 우깁니다.

 

5○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6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그가 이르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이니라 하시고 또 이르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7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니 그 때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8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던져 덮더라 9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오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10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니 11그가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5-11)

 

이어지는 에바 속에 들어앉은 여인의 환상은 보다 실생활 속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꼬집습니다. 에바는 곡식을 세는 단위로 곡식을 되로 다려줄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주 남을 속여서 부당이익을 취하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여러 선지서에서 이런 죄악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에바에 대한 소개(5)

 

여섯 번째 환상은 죄가 가득한 상황을 보여주는 환상이며, 일곱 번째 환상은 죄가 제거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이제 일곱 번째 환상에서 본격적으로 죄의 제거에 대한 미래적 소망을 다룹니다. 새 언약에서도 이미 죄에 대한 미래적 소망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렘 31:33-34). 특히 일곱 번째 환상에서는 주요 초점이 되는 대상을 옮겨가며 주목하게 합니다. 먼저 에바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어떤 용도인지 궁금증을 유발하고, 이어지는 6-7절에서 에바의 용도를 알려줍니다. 즉, 한 여인을 담고 있으며, 무엇보다 에바 자체보다 에바를 덮은 뚜껑이 납으로 되어 있어 얼마나 무겁게 누르는지를 반복을 통해 강조합니다. 다음 장면인 8-11절에서는 이 ‘악’을 의미하는 여인을 담은 에바를 옮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 한 여인과 에바의 납 뚜껑 확인(6-7)

 

6절의 ‘에바’는 측정 단위나 담는 용기를 가리킬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담는 용기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에바는 약 22리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 시기에는 큰 용기를 가리키며,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클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에바에 들어있는 여자(7)를 작은 조각상, 즉 우상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편 에바는 단순한 용기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측정 용기이기 때문에 측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징적으로 언약의 기준에 맞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7절의 장면은 에바에 납으로 된 뚜껑이 덮고 있었으나 이 뚜껑을 여니 ‘한 여인’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한 여인’은 이 환상에서 ‘악’(8)으로 확인하고 있으며, 더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문맥상 ‘여인’은 우상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우상에만 한정할 수는 없고 통상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전반에 일어난 죄를 대표적으로 언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여인을 담은 에바의 이동 확인(8-11)

 

8절의 ‘납 조각’은 무거움을 상징하며, 악을 에바 용기에 넣어 닫을 때 무거워서 꼼짝하지 못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무거워 꼼짝하지 못하도록 하여에바에 ‘악’을 가두는 것은 악을 완전히 해결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9절의 ‘두 여인’은 8절에서 ‘악’을 상징하는 ‘한 여인’과는 다릅니다. 9절의 ‘두 여인’은 ‘악’의 해결을 상징합니다. 날개에 바람이 있다는 표현은 사무엘하 22:11과 시편 18:10에도 등장하며, 하나님이 그룹을 타고 가는 장면을 묘사할 때 나옵니다. 여기서도 역시 그릅과 같은 존재인 ‘두 여인’이 하늘을 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 여인’은 사람을 지칭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적 존재(그룹)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환상의 장면에서 에바를 옮겨간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악’을 옮겨가는 것, 즉 악의 제거를 의미합니다.

11절의 ‘시날’은 메소포타미아에 있으며, 바벨론과 연관됩니다(단 1:1). 한편, ‘시날’은 바벨탑을 쌓은 곳이기도 합니다(창 11:2). 바벨론이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이지만, ‘시날’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의도적으로 바벨탑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죄악과 연결시키기 위한 저자의 의도로 보입니다. 집은 악을 가둘 장소를 가리킵니다. ‘바이트’는 ‘집’이나 ‘성전’(또는 사원)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바벨론에 우상들을 놓을 사원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이 당연시하는 죄를 피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다들 죄를 짓는다고 해서 우리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을 버리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욕심과 죄악을 제해 버리고 우리의 정체성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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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4-01)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장 1-14절


 

살아오면서 한 번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며 실행했는데, 큰 장애물을 만난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으로 인도하던 여호수아가 맞닥뜨린 여리고 성이 그러했고, 와서 도우라는 호나산을 따라간 빌립보 성에 이른 바울과 실라가 귀신 들린 여종을 깨끗하게 해 준 후에 맞이하게 된 심한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투옥되는 일이 그렇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 제건이라는 큰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 네 번째 환상과 비슷하게 다섯 번째 환상 역시 다른 환상들과는 다른 특징들이 보입니다. 네 번째 환상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집중했다면, 다섯 번째 환상은 스룹바벨에게 집중합니다. 역시 성전 재건을 주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으며,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스룹바벨과 관련된 두 감람나무에 대한 환상을 소개하고 두 감람나무의 정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환상(1-5)

이 세상에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아니 되고 모든 기술과 재능을 다 동원해도 안 되는 일은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낙심하고 포기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을 주십니까? 그것은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아니 되는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1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 2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3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 4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5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1-5)

 

동 시대에 선포된 학개서와 스가랴서의 차이 중 하나는 학개는 사람의 책임을, 스가랴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책임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을 통해서 성전 건축이 완성될 것이고 방해들이 없어질 것이라는 언약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들을 명확히 지적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다른 것을 통하여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을 통하여 들어내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환상의 내용(1-3)

 

2절에서는 순금 등잔대에 초점을 두고 등잔대의 위에까지 어떻게 기름이 공급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는 3절에서 등잔대 곁의 두 감람나무에까지 연결됩니다. 감람나무는 감람유를 내는 나무로, 등잔을 밝히는 재료인 기름의 근원이 됩니다. 감람나무와 기름을 연결시키는 것은 이 장면에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1-14절에서 감람나무와 기름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두 감람나무는 2절에서 묘사하기 시작한 순금 등잔대 위의 등잔을 밝히기 위한 기름의 근원입니다. 다시 거꾸로 보자면, 이는 두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기름이 공급되어 순금 등잔대 위의 등잔이 밝게 비추고 있는 장면을 소개한 것입니다. 두 감람나무에 대한 설명은 12-14절에서 다시 거론하며 설명하는데, 거기서는 기름부음 받은 자 둘이라고 대답합니다.

 

(2) 환상에 대한 질문(4-5)

 

두 감람나무의 정체는 환상의 의미를 밝히는 가운데 드러나지만, 순금 등잔대는 이 환상과 환상에 대한 설명에서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 대체로 세 가지 해석이 제시됩니다. 문맥상 순금 등잔대의 환상이 성전 재건과 관련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순금 등잔대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기보다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성전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감람나무의 정체가 궁극적으로는 메시아적 인물이겠지만, 구체적으로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라는 두 인물이라고 한다면, 순금 등잔대의 환상은 기름이 공급되어 등잔대가 유지되듯이 이 둘을 통해 성전이 완성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환상과 관련된 말씀(6-10)

순금 등대와 같은 교회에 성령님의 은혜가 충만해질 때 교회는 세상에 빛을 밝게 비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은혜가 없는 교회와 성도는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야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가 성도답게 살 수가 있습니다.

 

6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7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8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9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6-10)

 

시작이 미약해 보인다 하여 우습게 여겨서도 안됩니다. 여전히 지금 상황은 성전을 건축하기에 낙담할만한 환경, 그리고 지쳐버리고 무감각해져 버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회복의 차원에서 주어진다는 문맥에서 이 모든 것을 해석해야 합니다. 즉, 지쳐버리고 무감각해져 버리면 성전 건축 자체가 매우 무가치한 일 정도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 (6-7)

 

1-3절에서 환상의 내용을 소개했는데, 4절 이후에서는 이 환상이 의미하는 바에 집중합니다. 다른 환상들에서는 스가랴가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1:9,19)라고 물을 때 천사가 대답하며 환상의 의미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11-14절에 가서야 이 질문을 다시 확인한 후 감람나무의 정체에 대해 밝히는데, 그 대답도 역시 구체적이지는 않습니다. 또한 순금 등잔대의 의미는 더욱 모호하게만 남겨집니다. 4-5절에서는 환상에서 보여주는 것들이 무엇인지 주목하게 합니다. 그러나 6-7절의 대답은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아닙니다. 6-7절은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6절의 ‘힘’과 ‘능력’은 ‘내 영’과 대조되는 인간의 힘을 의미합니다. 물론 ‘내 영’의 역사는 9절에 표현된 성전의 기초와 관계가 있습니다. 스가랴가 이 메시지를 전하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은 성전 건축이 여러 반대에 부딪혀 중단된 상황이었습니다. 학개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재건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스룹바벨은 정치적인 지도자로서 성전 재건을 주도해야 할 인물입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가 아니라 여호와의 영으로 성전 재건이 가능함을 권고하며, 주변 환경이나 인간적인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권고하는 메시지입니다.

7절은 성전 재건에 방해가 되는 것을 ‘산’에 비유하였으며(사 40:4), 산이 평지가 된다는 것은 평탄하게 일이 진행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7절의 ‘머릿돌’은 건물의 완성 단계에 놓는 중요한 돌을 가리키며, 성전이 완성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모두가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의 완성은 곧 성전이라는 건물의 완성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순금 등잔대라는 환상을 통해 암시하듯이, 여호와께서 자신의 언약 백성 가운데 다시 거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의 완성은 언약 공동체, 신앙 공동체의 회복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인 셈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전 재건은 단순히 인간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시는 역사입니다.

 

(2) 백성에게 하는 촉구의 말씀(8-10)

 

6-7절이 스룹바벨에게 한 말씀이었다면, 여기서는 스룹바벨이 할 일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촉구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9절의 ‘손’은 하나님의 사역 대행자를 가리킵니다(8:9,13). 6절에서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라고 했으나, 이는 단순히 하나님의 영이 모든 것을 다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9절의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참조, 즉 2:9). 다시 말해, 선지자를 통해 대언되는 여호와의 말씀이 성취됨으로써, 그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임을 인정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10절에서 ‘작은 날’이라고 멸시하는 것은 당시 제2성전의 초라한 외양에 얽힌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킵니다. 파괴되기 전 솔로몬 성전에 비해 기초를 놓은 제2성전의 겉모습은 볼품이 없었습니다. 부푼 기대를 안고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는 이만저만한 실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기초를 놓은 후에도 십육 년 동안 여러 가지 요인으로 공사가 중단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실망은 커져만 갔을 것입니다.

10절에서 스룹바벨의 손에 있는 ‘다림줄’은 다른 단어이기는 하지만, 2:1의 측량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스룹바벨이 성전 건축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10절의 ‘일곱 눈’은 아마도 3:9의 ‘일곱 눈’과 연결될 것입니다. 2절에서도 눈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일곱’이 반복됩니다. 순금 등잔대와 그 위에 있는 것을 보는 환상이 세상을 두루 다니며 보는 여호와의 눈 일곱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친히 증인이 됨과 동시에 성전의 완성에 대한 예언이 확고히 성취될 것을 보증하는 이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두 감람나무의 정체(11-14)

교회는 세상의 빛의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순금 등잔대처럼 불을 밝힐 수 있는 기름을 무한 공급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름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기름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의 헌신입니다. 나아가 그 기름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11내가 그에게 물어 이르되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12다시 그에게 물어 이르되 금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니 13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는지라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14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11-14)

 

여기서는 두 감람나무가 무엇인지에 대해 초점을 두고 내용이 진행되며, 감람나무와 순금 등잔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묘사가 있습니다(12). 11-12절은 두 감람나무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반복하여 묻습니다. 이어서 13절은 스가랴 선지자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재차 확인합니다. 14절에서는 두 감람나무의 정체를 알립니다. 이렇게 많은 양을 할애해서 주목하게 하는 것은 그만큼 두 감람나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감람나무를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라고 확인하는데, 여기서 사용된 기름(이츠하르)은 보통 임명할 때 붓는 기름이나 연료로 사용하는 기름(셰멘)과는 다릅니다. 혹자는 여호수아는 제사장으로 기름 부음 받았지만 스룹바벨의 경우는 다르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리하여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을 역사적 인물인 여호수아와 스룹바벨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특별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스가랴서의 첫 독자들이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분명히 알았다는 것을 암시할 것입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은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행자로서의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은 궁극적으로 메시아를 통해서만 성취될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일차적으로 당시의 역사적인 두 인물에게 적용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성전의 완성을 이룰 메시아적 인물을 가리킨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곳을 통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성전 한 곳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자 하시는 곳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자녀들과 교통해 주셨습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사랑하시어 끊임없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공급해 주시고, 변함없이 말씀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항상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을 위협하는 큰 산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큰 산을 넘어야 한다면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감당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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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3-01)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스가랴 3장 1-10절


 

이스라엘을 향한 조건없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기억해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허랑방탕한 삶, 우상숭배와 점철된 죄악으로 시간과 삶을 낭비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택하시고 꺼내주시고,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정결한 관을 씌워 제사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며, 하나님의 도와 규례를 따름으로써,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이어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관련된 네 번째 환상은 이전 환상들과는 사뭇 다른 형식을 띠며, 새로운 주제가 등장합니다. 1:1-6에서 돌이킴과 회복이라는 주제를 제시했으며, 첫 세 환상은 회복에 초점을 둡니다. 반면에 1-7절에서 네 번째 환상은 여호수아의 위임식을 보여주며 죄악의 문제를 통해 돌이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8-10절에서는 죄악을 해결하는 온전한 회복을 다룹니다.

 

환상의 내용(1): 여호수아의 위임식(1-7)

그리스도인은 완전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악의 불구덩이를 피하게 된 존재입니다. 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받은 존재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은 성도에게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범한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1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4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6○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하여 이르되 7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1-7)

 

네 번째 환상과 다섯 번째 환상(4:1-14)은 다른 환상에 비해 특이한 점들이 발견됩니다. 연속된 환상들 가운데 다른 특이한 요소들이 많은 것은 저자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구문들은 독특한 특성을 보이며, 환상의 내용에 있어서도 역사적 인물(여호수아, 스룹바벨)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다른 환상과 다릅니다. 연속된 환상들은 전체 환상이 모여 궁극적인 흐름, 즉 주제의 흐름을 갖게 되는데(1:1-6 특히 1:3에 나오는 주제를 이후의 본문들에서 확대, 발전시킨다), 그중에서도 네 번째와 다섯 번째 환상은 연속적인 환상의 가운데에 위치하면서 주제 역할도 합니다. 스가랴서의 주제는 이스라엘의 회개와 여호와의 회복입니다(1:3). 조건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역동적으로 여호와는 회복을 약속하면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요구합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방법, 곧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돌아오는 방법은 역사적 인물인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역할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종교와 정치 지도자로서 언약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여호수아의 위임식 장면은 출애굽기 29장과 레위기 8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위임하는 위임식 내용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환상의 배경은 대체로 천상 회의로 간주됩니다. 여호수아는 스룹바벨과 함께 포로 후기 유다 공동체의 대표적인 지도자인데(학1:1,12,14; 2:2,4), 이 위임식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개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합니다. 3절에서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죄로 더럽혀진 것을 나타냅니다. 여호수아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신앙 공동체로 회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더럽혀진 옷에서 깨끗한 옷으로 바뀔 필요가 있듯이 이스라엘도 깨끗해져야 합니다.

이사야 64:6에서 이스라엘의 의롭지 못한 상태를 더러운 옷에 비유한 바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입는 의복은, 에봇, 겉옷, 흉패, 우림과 둠밈, 관입니다(출 28:6-14;39:2-7). 에봇의 경우 금실, 청색, 자색, 홍색의 실,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속죄일에 일 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가는 베실이 아닌 단순한 베실(세마포)을 사용했으며, 이는 단순함을 강조합니다. 또 대제사장은 세마포 속옷, 세마포 속바지, 세마포 띠, 세마포 관을 입었습니다(레 16:4). 이는 단순하지만 ‘거룩한 옷’임을 강조합니다(레 6:4,32).

한편, ‘더러운 옷’이라는 것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절은 ‘더러운 옷’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발전시킵니다. ‘죄악’이라는 분명한 단어는 여호수아의 죄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죄악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악을 제거함으로써(4) ‘정결한 관’을 쓰게 됩니다(5). 이 ‘정결한 관’은 3절의 ‘더러운 옷’과 대조되어, 4절에서 표현하는 대로 죄악을 제거했음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환상을 통해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공동체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더러움에서 정결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정결함은 거룩함의 개념과 더불어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곧 정결함은 거룩함과 더불어 여호와께 다가가기 위한 중요한 조건입니다(레15:13; 16:30; 참조 사 66:20). 이는 단순히 의식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종교 생활과 분리되지 않은 전반적 사회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정결과 거룩함의 개념은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 중심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성전과 관련된 의식적인(제의적) 문제만을 다룬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 중심의 언약 공동체로 회복하기를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상의 내용(2) : 온전한 회복(8-10)

자신이 가정이나 직장 등에서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 자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기쁨과 평화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음과 실제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8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9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10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8-10)

 

온전한 회복이란 무엇입니까? 본문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거하려면 그들이 정결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더럽혀진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떠나시며 그들을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추방한 것도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들과 함께 더 이상 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로기를 지나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온 현재에도 그들이 깨끗하게 되며 거룩하게 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전 재건은 언약 백성과 신앙 공동체의 회복에 관한 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회복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에 거하시려면 죄악의 문제, 다시 말해 그들의 정결과 거룩함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문제는 단순히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8-10절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죄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현재적 관점과 미래적 관점에서 더욱 큰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8절의 ‘싹’은 6:12에서도 다시 언급되는데, 여기서 ‘내 종’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중대한 역할을 할 메시아적 인물을 가리킵니다. ‘종’ 개념은 이사야에서 처음 등장하며, 메시아적인 인물로 고난을 통해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존재로 소개됩니다(사 52:13; 53:4-11). 예레미야에서는 싹을 다윗과 연관된 왕으로 그립니다(23:5, ‘의로운 가지’ : 33:15, ‘공의로운 가지’).

스가라는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서 메시아적 인물을 가리키는 데 빈번하게 사용되는 표현인 ‘싹’이나 ‘종’의 개념을 차용합니다. 그리하여 스가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통한 사역이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미래 계획 및 완성과 연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 재건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전 재건 자체보다는 성전 재건이 상징하는 의미, 곧 궁극적으로는 메시아를 통한 미래적 완성에 주목하게 합니다. 네 번째 환상과 다섯 번째 환상(4:1-14)은 역사적 인물에 집중하면서도 ‘그 날에’(10)에 대한 언급을 통해 종말론적·미래적 관점을 제시하는데, 하나님 백성의 궁극적인 회복은 메시아를 통해 성취될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9)는 표현이 이런 온전한 회복을 잘 보여줍니다.

9절의 ‘돌’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귀중한 돌, 즉 보석으로 보기도 하고 비슷하게 장식용 돌로 보기도 하며, 성전 재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너면서 취한 열두 돌을 표징으로 삼아 이스라엘이 기념하도록 한 것과 같이 돌은 증거의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수 4:5-7). 여기서도 이 돌은 증거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4:10에서 일곱을 ‘세상에 두루 돌아다니는 여호와의 눈’으로 설명하는데, 이를 고려할 때, 9절의 ‘일곱 눈’ 역시 여호와의 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곧 ‘일곱 눈’은 ‘내 종 싹’을 통한 미래적인 일, 곧 성전 회복을 통한 죄악 제거에 대한 증인 역할을 하며 그 증인이 다름 아닌 여호와시라는 것을 보증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눈이 직접 보며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 환상에서 보여주는 내용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를 행하면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성전이 서면 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에게는 죄 용서의 은혜가 되겠지만, 이 은혜를 거절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모든 죄가 용서받는 그날이 되면 이스라엘은 어떤 복을 누리게 되는가? 하나님과 잔치를 누릴 것입니다.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사망도 없는 메시아 잔치로 초대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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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02-01)


척량줄을 잡은 사람

스가랴 2장 1-13절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길 원하십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또 성소에서도 우리를 부르시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오라고 말씀하신 것도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마치 벌판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 단락은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환상을 보여주며, 예루살렘이 성곽 없는 성읍이 될 정도로 풍요롭게 될 것을 약속합니다. 이전 환상들과는 다르게 명령문을 사용하여 강력하게 권고하는 여호와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각각 6-9절과 10-13절에서 북방 땅 바벨론에서 피하라는 권고와 여호와께서 함께하실 것이므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라는 권고가 이어집니다.

 

셋째 환상 : 측량줄을 잡은 한 사람(1-5)

 

자신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고 다른 성도는 함께 구원받는 형제자매라는 의식을 가지고 예배드리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이나 교회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데, 교회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쓰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1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2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 3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4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5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1-5)

 

셋째 환상에서의 특이한 점은 이전 환상들처럼 회복의 주제를 전하면서도 명령문을 써서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전 환상들에서는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권고를 간접적으로 전달했다면, 여기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의 행동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둘은 약간 다릅니다. 앞선 두 환상에서는 천사와 스가랴의 대화를 통해 환상의 의미를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직접적인 여호와의 말씀이 추가되고 있습니다. 이런 형식의 변화는 3-4장에 나오는 넷째와 다섯째 환상에서 더욱 두드러질 것입니다.

 

(1) 환상의 내용(1-2)

 

1절의 ‘측량’은 1:16의 먹줄과는 다른 단어이지만 관련이 있습니다. ‘측량’은 심판과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암 7:7-9),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구원과 회복을 상징합니다. 1:7-17의 첫 환상에서는 환상이 나온 후 조용한 온 땅과 여호와의 역사로 인해 예루살렘이 풍요롭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여기서는 더 구체적으로 환상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더 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후에 나오는 두 번의 여호와의 말씀에서는 이 환상에 대해 이스라엘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곧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니,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절의 ‘측량하다’라는 동사(마다드)는 에스겔 40-47장에서도 성전 건축과 관련해서 자주 나옵니다. 예루살렘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성읍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성읍입니다.

 

(2) 환상의 의미(3-5)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함께하신다는 개념은 5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임재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성막(출 16:10;40:34)과 에스겔 환상의 성전(겔 9:3)이 스가랴 본문과 비슷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언약 백성 가운데 거하며 자신을 드러내시겠다는 의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공식화하는 언약 회복의 표현입니다.

5절의 ‘불’은 여호와의 임재를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됐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불이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갔고(창 15:17), 모세를 부르실 때 가시떨기 나무에 불로 나타나셨습니다(출 3:2). 홍해를 건너는 상황에서, 그리고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출 14:24: 신 1:33).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며 불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출 19:18). 이처럼 여호와의 나타나심이 자주 불로 표현되는데, 여기서도 역시 여호와께서 친히 나타나는 것이 불로 표현됐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로 둘러싼 성곽은 여호와의 보호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성벽으로 이스라엘을 막겠다는 뜻입니다. 한편, 4절의 ‘성곽 없는 성읍’은 무방비 상태의 성읍이 아니라, 사람과 가축이 가득한 상태로 회복된 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전 재건이 중단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다시 한 번 성전 재건을 독려하고 확신을 주기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6-13)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관해서 수많은 회의와 질문을 빠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하시고 정의로우시다는 말씀을 접할 때 자신의 경험이나 세상의 형편을 떠올리며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회의를 품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고 죽음과 같은 고난을 경험하는 동안 완전히 절망했을 것입니다.

 

6오호라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내가 너희를 하늘 사방에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8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9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들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10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11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12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13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6-13)

 

셋째 환상에 이어 여호와 말씀은 6-9절과 10-13절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13절은 직접적으로 환상의 주제를 다루지만, 6-9절은 예루살렘을 측정하는 환상과는 직접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도피할지어다’, ‘피할지니라’라는 권고에서 볼 수 있듯이 6-9절은 환상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환상을 보여주는 목적, 즉 이스라엘 백성을 권고하려는 의도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 여호와의 말씀(1):북방에서 피하라(6-9)

 

6절의 ‘북방 땅’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침략한 나라의 방향을 의미합니다(렘 1:14). 그러나 스가랴 당시 앗수르와 바벨론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페르시아(바사) 제국도 회개하고 돌아온 이스라엘에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방 땅에서 도피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지 않아 보입니다. ‘북방 땅’이 현재는 위협의 대상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강대국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스가랴 10:10에서도 당시와는 상관없는 애굽과 앗수르를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이스라엘에게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현재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북방 땅에서 피하라는 메시지의 문맥은 8-9절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범한 자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그들은 ‘노략거리’가 될 것입니다(9). 북방 땅 바벨론에서 돌아오라는 메시지는 이들에게 심판이 임박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강대국들이 평안하고 세상은 고요한 듯하지만(1:7-17의 환상의 주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정의를 세우시며 이들을 멸하실 것입니다(네 대장장이의 환상, 1:18-21). 따라서 멸망이 임박했으므로 바벨론(이제는 바사 제국 아래에 안주하여 남아있지 말고, 시온(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미 바벨론 문화에 익숙하여 돌아오지 않고 바벨론에 정착하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겨냥한 메시지로 볼 수 있습니다. 스가랴가 메시지를 전했던 때는 주전 520년경으로, 곧 1차 바벨론 포로귀환(주전 538년) 이후에 해당합니다. 역사적으로 볼때 이후에도 2차(주전 458년)와 3차(444년)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은 본토로 귀환했습니다.

 

(2) 여호와의 말씀(2):네 가운데 머물리라(10-13)

 

10-13절은 직접적으로 환상의 내용과 연결되어 예루살렘의 회복을 노래합니다. 이는 마치 강대국을 멸망시키고 돌아올 때 승전보를 알리며 예루살렘에 대한 회복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 10-13절은 5절의 ‘내가…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라는 주제를 반복하고 있으며, 환상의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10절에서 이스라엘이 기뻐할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기 때문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언약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머물다’라는 동사는 성막에도 사용된 단어이며, 출애굽을 통해 이룬 언약 공동체의 회복을 시사합니다. 여호와의 임재가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이 언약 백성의 하나님이 되심을 선언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듯이(출 29:45-46), 언약의 파기로 바벨론에 끌려갔던 이스라엘의 회복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머물겠다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1절의 ‘그 날에’는 문맥상으로는 여호와께서 회복할 미래의 어느 날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스가랴서 후반에서 충분히 발전되는 개념인 종말의 ‘여호와의 날’을 가리킵니다.

‘많은 나라가 … 내 백성이 될 것이요’라는 표현은 약에서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문구입니다(참조. 신 7:6; 14:2; 렘 24:7; 겔 11:20; 37:23). 뒤에 이어지고 반복되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라는 표현 역시 언약적인 회복을 시사하며, 여기서 ‘그 날’은 언약의 회복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은 새 언약의 성취 장면에서 자주 언급됩니다(참조, 사 2:2-3; 56:6-8; 미 4:1-2). 이 표현은 종말론적인 어투가 짙은 스가랴서 후반부에서도 다시 언급될 것입니다(슥 14:16). 이는 원래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예언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또한 시내산 언약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출 19:6)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인 맥락에서 스가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미래에 이루어질 것임을 종말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 12-13절의 예루살렘을 다시 택한다는 선언은 예루살렘의 회복이라는 맥락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으며(1:17), 여기서는 많은 나라가 하나님 앞에 돌아온다는 선언과 함께 한층 더 발전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 열국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세상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대국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팔레스틴 땅 그곳에 정한 경계 안에서 걱정 없이 살게 하십니다. 다만 주변 나라들을 흥하게도 하시고 쇠하게도 하시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기도 하시고 벌을 주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그 가운데 영광이 되시므로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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