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073-01)
악인의 번영함을 보고 받은 교훈
시편 73편 1-16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삽니다. 내가 아무리 넉넉해도 더 부요한 사람 앞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도 자칫 이런 세상의 잣대로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신보다 더 낫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기 때문입니다.
- 이 시는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과 악인의 형통 사이에서 마음의 고통을 억제하지 않고 쏟아내는 시인의 흔들림과 내적 투쟁을 오롯이 표현했습니다. 시인은 재난 같은 하루를 맞이하는 것 같아 악인의 평안을 질투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폭로하듯 쏟아내는 격렬하고 사색적인 언어가 족자를 압도합니다.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과 삶의 위기(1-4)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다른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유행에 민감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것을 누림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다고 불평합니다. 상대적 빈곤 의식 속에서 질투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 지금은 거치는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삶이라도 악인의 형통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1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1-4)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단지 이스라엘 혈통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정결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습니다.
(1)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1)
본 시는 ‘참으로 선하시도다!’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면서 선(善,토브)의 주체와 대상을 분명히 합니다. 그 대상은 이스라엘(1)과 마음이 깨끗한 자입니다(16).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엘로힘)을 시행 중심에 두고 이스라엘과 마음이 깨끗한 자를 평행되게 배열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과 마음이 깨끗한 자가 동의적인 개념처럼 해석되지만,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대상이 이동한 것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언약 백성이면서 언약 파트너로서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시인은 그 초점을 ‘마음’이 정결한 자, 청결하고 깨끗하고 순결한 자에게로 이동합니다. 이것은 시인이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를 개인과 동일시한 것이며 또한 개인의 운명을 이스라엘의 운명과 일치시켜 공동체적 의미로 확장한 셈입니다. 이것은 또한 중요한 신앙의 명제를 밝힌 것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73편에서 반복되는 단어이며(1,7,13,21,26) 시인의 관심사인데, 이는 인간의 양심과 의지와 지혜와 정신, 무엇보다 인간 내면의 중심을 일컫는 몸의 기관입니다. 때문에 시인은 내면의 순결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개인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토브’, 곧 선하심과 친절과 즐거움을 노래합니다.
(2) 그러나 악인의 형통함과 강건함(2-4)
그러나 시인의 신앙 명제와 시인의 고백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참으로’(1)라는 말을 덧붙였던 시인에게 하나님을 향한 확신에 균열이 일어나는 듯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했다. 나의 발걸음이 미끄러질 뻔했다’(2). 개역개정은 생략했지만 ‘그러나’(바)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과 청결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했지만, 시인에게 삶의 아찔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삶의 어떤 경험이 그의 확신을 뒤집은 것입니까? 시인은 곧바로 이유를 밝힙니다. 시인은 ‘왜냐하면’ 내가 오만한 자들을 질투했고 악인들의 평안을 보고 시샘했기 때문(3)이라고 합니다(3). 오만하거나 거만한 자들로 번역되는 말은 ‘빛나는 자들’이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평안’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악인의 ‘샬롬’, 곧 번영과 성공뿐만 아니라 부족함 없는 완전한 상태를 시샘했습니다. 시인이 잠깐 동안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악인들과 오만한 자들이 성공하고 있었고 평안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청결한 자에게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위배 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질투하다’라는 동사는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열망, 간절히 하고 싶은 마음이 내재된 말입니다(참조, 왕상 19:10). 악인들의 평안을 보며 내면에 솟구치는 열망에 시인도 아찔했던 것입니다. 시인은 고통스럽습니다. 자랑하는 오만한 자들이나 악인들은 죽을 때까지 고통이 없고 몸에 윤기가 흘렀기 때문입니다(4). “그 힘이 강건하여”라는 표현에는 몸에 기름기가 많다는 문자적인 의미에 약간의 조롱이 포함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로 짐승에게 쓴 표현이고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은 고대사회에서는 풍요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참조, 창 41:4; 겔 34:3).
뒤집힌 삶의 현실과 깊어지는 내적 투쟁(5-16)
우리의 마음은 참 약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의 유혹 앞에서 너무 쉽게 흔들립니다. 악이 유혹은 달콤합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 보라는 뱀의 유혹은 아담과 하와에게 너무나 달콤했습니다. 이처럼 인류 최초의 유혹은 의심이었습니다.
5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5-16)
시인은 의롭게 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찾아오는 것은 형통이 아니고 고난이 죄자 인생이 허무해졌습니다. 악인의 형통이 부럽고 손해 보고 산 삶을 후회할 뻔했습니다. 시인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괴로웠지만, 악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말에 동조하여 악을 확대 재생산하지도 않았습니다.
(1) 재앙 없는 악인들의 삶과 교만(5-6)
인류의 노고가 악인들에게는 없고, 사람이 으레 당하는 것도 당하지 않습니다(5). 시인은 보편적 인류를 뜻하는 낱말 ‘에노쉬’와 ‘아담’을 사용해 인류가 대체로 직면하는 삶의 ‘노고’(아말)나 이러저러한 질병이나 아픔으로 ‘고통당하는’(강조 수동형 동사) 일들조차 악인들을 비껴가는 현실을 말합니다. 악인의 평안과 성공(4)보다 더 큰 문제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수고와 고통조차 악인들에게 닥치지 않는 현실의 비애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가 되고, 폭력은 그들에게 둘러싸는 옷이 됩니다(6). 보편적 인간이 당하는 수고로움과 고난을 겪지 않는 악인의 자만과 우쭐함이 목걸이로 치장하는 그림으로 비유됩니다. 목걸이를 목에 거는 것은 단지 장식적인 효과만이 아니라 높은 신분을 상징합니다(창 41:42). 이에 더해 외출할 때 몸을 감싸주는 의복을 입듯 폭력이 일상화된 악인들의 삶을 표현했습니다.
(2) 악인들의 오만(7-9)
그들의 눈은 살쪄서 튀어나왔고, 마음은 상상을 초월합니다(7). 몸의 기관 중에서 눈은 사물을 인식하고 느낄 때 가장 먼저 활동하는 기관입니다. 마음은 고대인들에게 양심과 의지와 지혜의 자리로서 인간 내면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몸 안팎으로 가장 중요한 기관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를 지방질로 비대해진 눈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다’(개역개정). ‘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 (새번역)라는 번역이 암시하듯, 악인들은 상상을 벗어난, 곧 제한받지 않는 터무니없는 망상에 젖습니다. 조롱하고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폭언을 즐깁니다(8). 이것은 악인들의 조롱과 악한 말, 그리고 학대하고 탄압하는 폭력적 언행을 고발한 셈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지도층 인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이 자기 지위를 이용해 사람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일에 권력을 남용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서 걸어 다닙니다(9). 시인은 하늘과 땅을 막론하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악인들의 두려움 없는 망언과 교만의 극치를 표현했습니다.
(2) 악인들의 신성모독적인 발언(10-12)
그의 백성도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셔버렸습니다(10). 문맥상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켜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새번역)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선하시다’(1)라는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알겠는가? 가장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는가?’(11)이 말을 하는 이들이 누군지 불분명합니다. 모호하지만, ‘그의 백성’은 단수형이고 악인들이 복수형이기 때문에 이 모독적인 발언은 악인들의 말입니다. 격정에 찬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보라! 이들은 악인들이다. 언제나 근심 없고 재산은 늘어만 간다’(12) ‘보라’는 불의에 대해 외치는 소리입니다. 시인은 근심도 없이 재산을 증식하는 악인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차오르는 내적 분노를 감추지 않습니다.
(4) 시인의 불행과 내적 투쟁(13-16)
‘참으로 헛되다!’ 악인이 번성하는 현실을 말한 후 첫마디입니다. ‘참으로 선하시다’(1)라고 고백했던 시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내가 내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이제 쓸모없게 되어 괴롭다. 더군다나 시인은 종일 재난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다(14)고 자기 삶을 돌아보며 탄식합니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번성하는 악인들 앞에서 처참하게 고통당한 자의 격정적인 호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향합니다. 악인들이 한 말을 내가 했더라면, 내가 당신의 아들들의 세대와 상관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5). 시인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아무 상관없는, 곧 ‘믿음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이것을 깨달으려고 깊이 생각했지만, 이것이 자기 눈앞에 근심이었다고 고백합니다(16). 삶의 실상과 진실 앞에서 알려고 몸부림쳤지만, 그것마저 고통일 뿐이라는 시인의 절규와 내적 투쟁과 갈증이 오롯합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받는 것을 보면서 혼란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의심하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부러워하면 세상에 지는 겁니다. 언제나 진정한 형통이신 하나님만 바라보는 시선을 놓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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