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073-02)
마음의 반석이신 피난처인 하나님
시편 73편 17-28절
우리는 때로는 삶의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함을 보며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석이자 피난처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곁에 계시며,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 시인은 악인들의 번성과 영광에 대한 질투의 마음을 폭로한 후 성소에서 깨닫습니다. 성소에서의 경험이 악인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안내합니다. 시인은 갱신된 마음과 감각으로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함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 가까이에서 행복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악인의 파멸(17-20)
악한 사람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며 호화로운 삶을 살 때,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인의 형통함은 일시적일 뿐이며, 결국 그들은 파멸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국 참된 평안을 얻게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7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17-20)
시인은 성전에서 비로서 깨닫습니다. 악인이 잘되는 것 같고 빠른 것 같아도 결국 악인의 종말을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한낱 꿈에서 깨어나듯 그 결말은 영원한 파멸입니다. 시인은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하게 되고 찬양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1) 딜레마에 대한 마음의 변화(17)
악인의 형통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이 전환됩니다. 17절은 시인의 흔들렸던 마음을 바꾸는 변곡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내가 그들의 마지막을 깨닫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깨닫게 되는 악인들의 마지막 운명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밝히진 않습니다. 시인이 깨달은 장소는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시인의 생각이 전환되었습니다. 성소(미크다쉬)는 거룩한 장소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데, 흥미롭게 복수형의 연계형태로 쓰였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성소들을 언급한 것처럼 보이지만, 예루살렘 성전을 고려한다면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는 순간 새로운 통찰이 시인을 사로잡은 듯합니다.
(2) 악인의 파멸(18-20)
시인은 하나님 성소에서 깨달은 악인들의 마지막 운명을 말합니다. 시인은 다시 ‘참으로’(1절 참조)를 반복하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합니다. ‘참으로 당신이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고, 당신이 그들을 파멸에 빠지게 하셨습니다’(18). 하나님께서는 높은 데서 거만했던 악인들이(8) 미끄러져 전복되게 하셨습니다. 지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을 상징하는 ‘성소’(17)에서 시인은 새로운 전망을 내다보았습니다. 꿈결 같지만, 시인은 또 다른 현실을 봅니다. 시인도 놀라서 묻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한순간에 끔찍하게 되었는가? 그들이 갑작스러운 공포에 의해 철저하게 멸망했습니다’(19). 시인은 한순간에 (“그리 갑자기”), 갑작스러운 공포에 의해(“놀랄 정도로”) 끔찍하고 철저한 파멸을 맞이하게 된 악인들의 최후가 어리둥절합니다. 신속하고 철저한 멸망과 공포가 악인들이 맞이할 궁극의 운명입니다. 시인은 악인들의 철저한 파멸은 한낱 꿈처럼 자취 없이 사라질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꿈”(할롬)에서 깨는 것처럼, 나의 주님! 당신이 일으키실 때, 그들의 “형상”(렘)을 당신이 멸시할 것입니다(20). 본래 히브리 시행 자체에 모호한 측면이 있습니다. 형상과 꿈은 동의적인 의미로 풀이됩니다. “형상”(첼렘)은 ‘그림자’ 비슷하게 조형된 모습이며 실체가 아닌 ‘이미지’입니다. 새번역 성경이 잘 풀어 번역했습니다.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님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처럼 시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악인들의 번성은 단지 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의 반석이며 피난처(21-28)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방황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역시 그런 순간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을 우리의 반석과 피난처로 삼읍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우리에게 복임을 잊지 말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21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1-28)
악인의 잘되는 모습이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좌절감이 휩싸였던 시인은 이제 성소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자신이 늘 봉사하던 곳이지만, 그곳에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28절에서 나의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삽에게는 하나님이 정말 그의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1) 내 손을 붙드시는 하나님(21-23)
시인의 솔직한 언어는 참회로 이어집니다. 시인은 ‘내 마음은 쓰디쓰고, 내 콩팥이 예리하게 찔렸다’(21)고 말합니다. 내적인 아픔과 고통을 표현하면서 심장과 콩팥이 사용되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심장(또는 마음)은 지혜와 양심과 의지의 자리입니다. 콩팥은 사람의 가장 비밀스러운 기관이면서 가장 깊숙한 부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콩팥은 “양심”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또 시인은 ‘내가 어리석었고 알지 못했으며, 내가 당신 앞에 짐승 같다’(22)고 고백합니다. 한때 악인의 평안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지만(3-9), 이제 하나님 앞에서 무지를 참회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음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나는 항상 당신과 함께 있으며, 당신이 나의 오른손을 붙드십니다’(23)라고 노래합니다.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순간 주님을 향한 믿음은 더 커집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오른손을 붙드는 것’이란 표현은 신이 왕을 영광의 자리로 인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참조. 사 45:1). 이것은 또한 주님의 영원한 보호와 인도의 상징입니다(사 42:6).
(2)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의 힘(24-26)
오른손을 붙드시는 주님의 보호와 인도는 어떻게 실행하시겠습니까. 시인은 주님께, 당신의 교훈으로 당신이 인도하실 것이라고(24) 고백합니다. 교훈(에)은 충고, 조언, 권고, 계획을 포괄하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마치 지혜 선생님처럼 조언하며 계획하신 곳으로 안내하신다는 뜻입니다.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이끄실’ 것이라(24b)고 확신합니다. 영광으로 안내하시는 주님을 상상해볼 수 있는 시행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후에’가 언제일지는 모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에녹을 취해서 ‘데리고 올라가듯’(창 5:24),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려고 하실 때처럼(왕하 2:1 이하) 영광스러운 삶의 마무리를 뜻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말합니다. ‘하늘에 나를 위해 누가 있습니까. 당신 없이 나는 땅에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25). 이 땅에 사는 동안 시인에게 유일한 기쁨의 원천은 주님입니다. 악인들의 입은 오만하게 하늘과 땅에서 떠들어대지만(9), 시인이 열망하는 이는 오직 주님뿐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한계를 알지만, 동시에 강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내 육체와 내 마음이 쇠약해졌지만,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바위시며, 영원한 나의 분깃입니다’(26). 하늘과 땅이 한 쌍이듯(25), 몸과 마음이 한 쌍입니다. 시인은 몸이 쇠약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내면 깊은 자아와 의지마저 쇠약해지는 자신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소멸할 듯 위태한 마음에 깃든 하나님은 강인한 바위처럼 든든합니다. 무엇보다 “분깃”은 나눠진 몫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재산이나 자산의 할당된 몫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 여러 곳에서 할당된 ‘기업’(헬렉)으로 사용된 것처럼(민 18:20; 신 10:9; 수 13:7 등), 시인은 하나님을 자기만 독차지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지켜보며 좌절의 시간을 통과했지만, 든든한 바위이신 하나님께서는 시인뿐만 아니라 그를 신뢰하는 공동체 각 사람의 분깃이라는 의미가 내재 되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나의 반석(바위)이라고 고백하지만, 그 하나님은 ‘나의 분깃’이면서 ‘너의 분깃’, 궁극적으로 ‘우리의 분깃’입니다.
(3) 악인의 파멸과 의인의 복(27-28)
시인은 악인들을 향해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들이라고 고쳐 말합니다. 그 언어는 처음처럼(1)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을 멀리하는 자들은 망할 것입니다. 음행하는 모든 자는 당신 없이 소멸되었습니다’(27). 시인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를 매음하는 남자에 빗대어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음녀 같이”로 번역되었지만, 본래 히브리어 본문은 남성단수 분사 ‘매춘하는 자’(조네)입니다.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자들을 매음하는 남자에 빗대어 심각성을 강화합니다(호 4:13,15). 하나님 없는 삶은 음행하는 남자처럼 신실하지 못하여 그 끝은 파멸과 제거다. 시인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들과 반대로 하나님을 가까이했던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읊조립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가까이했고, 내게 “복”(토브)이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선하시다’(토브)라는 말로 시작한 것처럼(1), 똑같은 형용사 ‘토브’로 마무리합니다. 시인은 선함과 즐거움과 행복을 함축하는 말, ‘토브’를 사용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명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나의 주님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 삼고, 당신의 모든 일을 하나하나 전파하겠다고(28bc) 다짐합니다. ‘나의 주님’(아도나이)과 여호와를 동시에 호명한 것에 시인의 간절함이 배어 있습니다. 시인은 악인들과 오만한 자들의 평안을 보며 질문하며 질투했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지만(3), 흔들리는 시간을 통과하며 성장한 믿음은 더 두터워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얼마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 종종 하나님을 잊고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서 비로소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오른손을 붙들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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