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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7-01)


시드기야의 선택: 순종과 불순종의 갈림길

예레미야 37장 1-10절


 

종종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도 부탁해 온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웃으면서 기도의 제목을 받습니다. 기도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는 합니다만, 마음은 영 꺼림직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기도의 제목이 응답될 없을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의 합당한 방법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 본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기도해 달라고 한 사람과 같은 사람이 나옵니다.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던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함락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도입부(1-2)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1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유다 땅의 왕으로 삼음이었더라 2그와 그의 신하와 그의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1-2)

 

본문에서는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의 왕이 되었으나, 그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들이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남유다의 멸망의 날이 더 다가왔습니다. 역대적으로 기록해 나간다면, 예레미야 37-38장은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39장은 멸망의 날을 보고합니다. 시드기야 왕의 마지막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37-39장이 연대기적으로 약 17-18전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러므로 37장은 34장 뒤에 나온 것이 가장 잘 어울립니다.

이 시기에 있던 사건은 바벨론 부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여호와께 계약을 맺고 종들을 자유롭게 놓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이 애굽 군대가 개입한 결과로, 잠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의 포위를 풀자, 예루살렘 사람들이 해방시켰던 종들을 다시 잡아서 종으로 부렸습니다(34장). 여호와께서 이러한 불순종을 보시고, 다시 바벨론 군대를 오도록 하셔서 성을 빼앗아 불사르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37장). 이 장면 다음에 나오는 것이 예레미야 37장의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저자의 의도는 시간적 차이를 무시하고 36장을 시대적 배경으로 37-39장을 읽도록 한 것입니다. 어떤 두려움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불에 태워버리는 여호야김 왕의 오만에 대해서 여호와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37-39장에 수집된 이야기들은 여호야김에 의해 확정된 심판의 구체적 집행 과정입니다.

 

⑴ 느부갓네살의 봉신 시드기야(1)

 

본 1-2절은 예레미야 37:1-10절을 넘어 예루살렘의 함락과 시드기야의 체포를 보고하는 39장까지의 도입부 역항을 담당합니다. 먼저 시드기야 왕권의 출발에 관한 기술합니다.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호야긴)의 뒤로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이었는데, 그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 땅의 왕으로 앉혀졌습니다(1).

바벨론 연대기에 의하면 주전 598년 겨울 서쪽으로 원정을 떠난 느부갓네살은 597년 3월에 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그는 유다 왕 여호야긴(고니야)을 포로로 잡아가고 삼촌 맛다니야를 보좌에 앉히고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꿉니다(열왕기하 24:17). 시드기야의 왕권은 처음부터 종속적이었습니다. 시드기야의 배반은 봉신조약의 파기이며 그를 유다의 왕으로 임명한 느부갓네살의 개인적 권위에도 큰 상처를 준 사건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의 배반을 철저하게 보복합니다.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침공은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의 불순종을 징계하는 신학적 사건이었습니다.

 

⑵ 예레미야의 선포를 듣지 않는 자들(2)

 

시드기야와 신하들과 땅의 백성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전하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2). 총체적 불순종입니다. 왕을 포함한 예루살렘의 정치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백성도 예레미야의 선포를 무시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구하는 시드기야(3-5)

종종 환경에 따라 기분이 좌우될 때가 있습니다. 잠시 환경이 희망적일 때는 좋았다가, 희망이 없어볼 때는 힘들어하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환경을 지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지, 환경에 지배받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3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 청하되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하였으니 4그 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었더라 5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3-5)

 

하나님께서는 시드기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루살렘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또 한 번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벨론 군대를 일시로 예루살렘에서 철수시킵니다.

 

⑴ 사절을 보내는 시드기야(3)

 

21:1에서처럼 시드기야 왕은 두 사람을 예레미야에게 사절로 보내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부탁합니다(3). 중보 기도는 예언자의 역할에 속하기에 시드기야의 기도 요청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참조, 이사야 37:4; 7). 21장에서는 과거의 구속사에 소망을 두었다면(‘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신다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여기서는 유다 백성과 여호와의 개인적 관계에 의지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전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도(2)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극단적 위기에 처해 도움이 필요할 때만 여호와를 찾습니다(참조, 2:27). 여호와를 일방적으로 유다 백성의 구원자로 이해합니다. 사절로 파견된 여후갈과 스바냐는 아마도 각각 예루살렘 정치와 종교를 대표해서 선발된 것 같습니다.

 

⑵ 예레미야의 개인적 상황(4)

 

셀레마의 아들 여후갈이 38:1에 나오는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동일 인물이라면, 여후갈은 예레미야에게 매우 적대적인 인물이고, 성전 관리의 책임을 맡은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는 우호적인 인물입니다(참조 29:24-32).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사절을 파견해 중보 기도를 부탁한 때에 관한 정보가 뒤늦게 나옵니다. 특이하게도 이중적으로 시점이 제시됩니다. 먼저 예레미야의 개인적 형편과 관련해 언급됩니다. ‘그때에 예레미야가 갇히지 아니 하였으므로 백성 가운데 출입하는 중이 었더라’(4). 예언자의 구금은 선포의 중단 또는 끝이기에,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활동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줍니다. 뒤따르는 11-16절에서 예레미야는 바벨론 진영으로 옮겨 가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됩니다.

 

⑶ 예루살렘의 정치적 형편(5)

 

다음으로는 예루살렘의 정치적 형편과 관련해 언급됩니다. 애굽 군대가 유다를 돕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갈대아인들이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물러났을 때였습니다(34:21; 참조. 열왕기하 19:7; 이사야 37:7).

애굽의 개입은 시드기야가 애굽을 섬기기 위해 바벨론에 등을 돌렸음을 시사해줍니다. 주전 589-570년에 애굽을 통치한 바로 호브라(참조 44:30)는 포위된 예루살렘을 구출하기 위해 588년 초여름에 군대를 동원해 원정을 떠납니다. 애굽 군대를 막기 위해 느부갓네살은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의 포위를 풉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애굽 원정군은 바벨론 군대에게 격퇴되고 예루살렘은 고립무원이 됩니다. 시드기야는 아마도 애굽의 출정에서 소망을 보고 사절을 예레미야에게 보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응답(6-10)

제도나 환경이 바뀐다고 사람의 마음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지기 때문에 신앙이 더 좋아진 것은 아닙니다. 지금 마음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하고,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기 위해 헌신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도나 환경을 바뀐 문제는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6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7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를 보내어 내게 구하게 한 유다의 왕에게 아뢰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8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 9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 말하기를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를 떠나리라 하지 말라 그들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10가령 너희가 너희를 치는 갈대아인의 온 군대를 쳐서 그 중에 부상자만 남긴다 할지라도 그들이 각기 장막에서 일어나 이 성을 불사르리라(6-10)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시드기야 왕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요청한 애굽의 군대는 돌아갈 것이며,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다시 공격하여 점령하고 불태울 것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의 침략을 피할 수 없음을 경고받습니다. 심지어 부상당한 바벨론 군인들도 예루살렘을 불태울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집니다.

 

⑴ 말씀의 계시(6)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다가 애굽의 군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애굽의 군대는 돌아갈 것이고 유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바벨론의 침략을 피하려는 인간적인 방법이 성공하지 못할 것임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주변 강대국의 힘을 의지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의지하는 애굽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⑵ 돌아올 바벨론 군대(7-8)

 

문맥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3)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으로 부르고,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시고,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부르십니다.

시드기야가 다스리는, 정치적 단위에 속하는 유다의 하나님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로 각인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십니다. 거리감은 ‘내게 구하게 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했는데, 여호와께서는 이를 신탁을 구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2절과 함께 보면 중보를 요청한 시드기야의 불순종 때문이고, 예레미야서의 문맥에서는 심판이 최종적으로 확정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참조 7:16; 11:14; 14:74). 시드기야가 피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답변으로 주어집니다.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로리라’(7-8절), 바벨론 군대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애굽 군대가 돌아갑니다. 포위를 풀고 떠났던 바벨론 군대가 반드시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불태워 버릴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내리기로 하신 심판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습니다.

 

⑶ 피할 수 없는 예루살렘의 멸망(9-10)

 

9절은 애굽 군대의 출정과 바벨론 군대의 철군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해방의 기대감을 심어주었음을 보여줍니다(참조. 34:11). 예루살렘을 둘러싼 국제정치적·군사적 상황의 급변은 구원 예언자들의 선포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이들은 목소리를 높여 바벨론의 굴레로부터의 임박한 해방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일시적인 호전에 들떠 상황을 오도하지 말 것을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길은 전혀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바벨론 군대에게 피해를 준다 해도 예루살렘은 반드시 점령당합니다. 바벨론 군대가 패하여 부상자들만 남는다 할지라도 이들이 진영에서 일어나 예루살렘 성을 잿더미로 만들 것입니다(10). 예레미야의 선포는 사람들의 막연히 들뜬 기대감과 소망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체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악한 마귀와 싸워 나가는 승리할 수 있는 무기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나가는 것입니다(엡 6:10-18). 말씀으로 깨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 안에 순종하며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데 스스로 속여 말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백성들이 죄에서 떠나게 하시려고 책망하시고 심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밖에 할 줄 모르는 하나님으로 착각하며, 심판하실 하나님을 무시하진 않습니까?


바벨론 군데는 다시 돌아오고 애굽 군대는 자기 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말씀에는 귀를 막으면서 세속적인 안녕을 구한다면 그것은 무엇이든 자기기만입니다. 예루살렘이 불타는 날 진실하지 못한 기도는 후회를 낳지만, 진실한 선포의 사역은 위로와 구원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심판자가 되시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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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6-02)


끝까지 패역한 이스라엘

예레미야 36장 20-32절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지만 성경은 그것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책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정확하고 틀림이 없으며 결코 사라지고 않고 다 이루어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무엇입니까? 어둠을 드러내는 말씀, 욕망의 재조정하도록 요구하는 말씀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본문은 예레미야에 의해 전해지고 바룩에게 대서했던 재앙의 경고를 여호야김 왕이 듣습니다. 왕은 선포된 말씀을 듣고 기록된 두루마리의 성경을 찢어 불에 태워버리고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으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두루마리에 말씀을 기록하되 더 많이 기록하게 하십니다.

 

말씀을 불태우는 여호야김 왕(20-23)

이스라엘은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왕도 여호와의 권위 아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왕들은 여호와의 권위로부터 분리된 자기만의 독자적인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왕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여호와의 활동은 종교 영역에 한정 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종교와 정치를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왕이시라고 주장했습니다.

 

20그들이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뜰에 들어가 왕께 나아가서 이 모든 말을 왕의 귀에 아뢰니 21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고관의 귀에 낭독하니 22그 때는 아홉째 달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23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20-23)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바룩에게 두루마리를 기록하게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 그리고 왕에게 하나님의 의도대로 읽혀졌고, 이 말씀을 들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3).

 

⑴ 왕에게 보고(20)

 

본문의 여호야김은 바룩이 예레미야의 말이 적힌 두루마리를 낭독하는 갓을 들은 미가야가 서기관 방으로 들어가서 고관들에게 보고한 것처럼, 두루마리의 내용을 알게 된 고관들은 왕을 찾아가 보고합니다.

 

⑵ 두루마리의 낭독(21)

 

고관들이 여후디를 보내 바울이 두루마리를 가져와 낭독하게 한 것처럼 왕은 여후디를 보내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낭독하게 합니다. 여호야김 왕과 고관들 앞에서 읽어졌지만, 그들의 반응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과는 정반대로 다릅니다. 왕은 여후디에게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있던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왕과 신하들 앞에서 그것을 읽게 합니다. 그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⑶ 여호야김 왕의 반응(23)

 

두 이야기는 모두 낭독을 들은 자들의 반응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두 이야기에서 반응은 다릅니다. 고관들은 듣고 놀라 서로 바로보고, 왕과 측근들은 듣고 놀라지 않습니다. 고관들은 바룩에게 예레미야와 함께 몸을 숨기도록 권면하고, 왕은 바룩과 예레미야를 잡아 오게 명령합니다.

이런 병행 구조는 유다의 멸망이 여호야김에 의해 되돌릴 수 없게 확정됐음을 보여줍니다. 유다의 파멸에서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여호야김에게 주어졌지만, 그는 이 기회를 잡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언자가 대변하는 여호와의 권위마자 짓밟아버렸습니다. 여호야김 왕의 아버지는 요시야 왕입니다. 요시야 왕은 성전을 청소하다가 두루마리 성경을 발견하고, 그것을 읽어가면서 자기 옷을 찢으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열왕기하 22장). 하지만 그의 아들인 여호야김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무시하였습니다.

고관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왕은 여후디를 보내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읽게 합니다(20-21). 요약해서 보고를 받지 않고 낭독하게 합니다. ‘∼의 귀에 낭독하다’가 모두 열 번 사용되면서 듣는 자들의 반응을 연결해줍니다. 서기관들의 귀만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백성과 여호야김과 그의 측근 신하들의 귀는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하지만 여호야김 왕은 자기 아버지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신하 여후디가 두루마리를 서너 단씩 읽어 내려갈 때마다 왕은 칼로 그 두루마리를 잘라서 화롯불에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심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마치 시기적으로 아홉째 달이어서 화롯불이 타고 있는 겨울궁전에 머물고 있던 왕은, 여후디가 서너 단을 낭독하면 서기관의 칼로 그것 을 베어 화롯불에 던져 두루마리를 모두 태워버립니다(22-23). 예레미야와 바룩의 수고가 값비싼 양피지가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말씀이 재로 사라집니다. 여호야김은 여호와의 심판 의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는 듯 보입니다.

아홉째 달(9)은 대략 604년 12월에 해당합니다. 여호야김의 겨울 궁전은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해 만든 왕궁 일부를 가리킵니다. 22:14에 따르면 여호야김은 자신을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었습니다. 여호야김 왕의 이러한 태도는 교만이 극치를 이룬 것입니다.

 

교만을 말리는 신하들(24-26)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만큼 말씀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말씀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만큼 말씀을 존중해야 합니다.

 

24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25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불사르지 말도록 아뢰어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26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에게 명령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24-26)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여호야김 왕과 고관들의 반응은 정말 놀랍습니다. 교만한 행동은 화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한 엘리단과 들라야와 그마랴라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으로 하여금 두루마리를 불태우는데 말리지만, 왕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 예레미야와 서기관 바룩을 잡아 오도록 명령하기까지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된 말씀에 조금도 두려움을 모르는 여호야김과 그의 주변 신하들의 태도와 예레미야의 선포에서 여호와의 의지를 읽는 일부 서기관들의 태도가 대조됩니다. 왕의 신하들은 ‘왕의 곁에 선 모든 고관’(21)으로, 12절 이하에 나오는 ‘고관들’과는 구별되는 자들입니다. 고관들은 그 모든 말씀을 듣고 놀라 서로 쳐다보았는데(16), 왕과 측근 신하들은 두루마리에 적힌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않았습니다(24). ‘두려워 하거나’와 ‘놀라’(16)는 같은 단어입니다.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두루마리를 태우지 말도록 왕에게 간청해보지만, 예언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왕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25). 악볼의 아들 엘라단은 애굽으로 도피한 예언자 우리아를 소환해오기 위해 여호야김이 바로에게 파견한 사절의 일원이었고(26:22), 열왕기하 24:8에 언급된 엘라단과 동일인이라면, 그는 여호야김의 장인이요 여호야긴의 외조부가 됩니다. 두루마리를 조각조각 잘라 불태워버린 왕은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를 보내 두루마리를 만들어 낭독한 예레미야와 바룩 사로잡아 오게 합니다(26; 참조, 26:21-23). ‘왕의 아들’은 혈통보다는 직분과 관련된 표현일 것입니다. 물론 왕의 권력은 명령을 내리는 데까지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예언자 예레미야와 그의 동반자 바룩을 지켜주시기에 왕의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여호와께는 고관들을 통해 (19절) 이들을 지켜주십니다. 예레미야와 바룩이 언제까지 숨어 지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여호야김의 통치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35장에서 예레미야는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전체적으로 여호야김의 모습은 그의 아버지 요시야의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여호야김은 두루마리의 말을 듣고 옷을 찢지 않는데, 요시 야는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수리 중에 발견한 율법책을 사반이 읽어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열왕기하 22:11; 참조 3:6-7), 여호야김은 부하들을 보내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아 오게 하는데, 요시야는 여 예언자 훌다에게 사절을 보내 여호와의 신탁을 묻습니다(열왕기하 22:12.14). 여호야김은 여호와의 말씀을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요시야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율법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준수합니다(열왕기하 23:3), 여호야김은 시신이 들판에 버려지는 저주받은 죽음에 떨어지고, 요시야는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된다(열왕기하 22:20). 요시야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 앞에 어떻게 서야 할지를 보여주는 모범적 인물이고, 여호야김은 악한 왕의 전형입니다.

예레미야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경고의 메지시가 전파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한 가닥 마지막 소망을 가지고 회개하길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왕은 회개치 않고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니깐 예레미야를 숨겨주십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무시하는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미워하십니다. 혹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지 않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앞에서 듣는 것처럼 들어야 합니다.

 

다시 기록된 두루마리(27-32)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부족한 죄악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마음을 찢으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성경을 아는 만큼 지적인 유희를 즐기고, 말씀을 개인적인 이득을 챙겨보려는 도구로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게 존경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먀에게 불타버린 두루마리 책 대신에 말씀을 다시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7왕이 두루마리와 바룩이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기록한 말씀을 불사른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8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기록하고 29또 유다의 여호야김 왕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이 두루마리를 불사르며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바벨론의 왕이 반드시 와서 이 땅을 멸하고 사람과 짐승을 이 땅에서 없어지게 하리라 하는 말을 이 두루마리에 기록하였느냐 하도다 30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에게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가 없게 될 것이요 그의 시체는 버림을 당하여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 31또 내가 그와 그의 자손과 신하들을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할 것이라 내가 일찍이 그들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 그 모든 재난을 내리리라 선포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32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가 전하는 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 하였더라(27-32)

 

여호야김 왕이 예레미야가 기록한 두루마리를 불태우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두루마리를 다시 기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받아 적게 했으며, 이번 두루마리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심판의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⑴ 여호와의 지시내용(27-28)

 

여호야김이 두루마리를 불살라버린 후에 여호와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27). 여호와의 두 가지 명령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명령은 두루마리를 준비해 첫 번째 두루마리에 기록했던 모든 말씀을 다시하는 것입니다.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와, 유다 왕 여호야김이 태워버린 첫 번째 두루마리에 (적혀) 있던 첫 번째 말씀을 다 거기에 적어라’(28절의 사역), ‘첫 번째’를 두 번 사용해 두 번째 두루마리가 첫 번째 두루마리의 완전한 복사본임을 강조합니다.

 

⑵ 여호야김에게 주신 말씀(29-31)

 

여호야김이 첫 번째 두루마리를 태워버렸지만, 거기에 적힌 말씀은 하나도 변경되거나 상실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명령이 그대로 실행됩니다.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가 전하는 대로 기록하고 그 의에도 그 같은 밭을 많이 더 하였더라’(32절). 첫 번째에도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뿐만 아니라 비슷한 내용의 많은 말씀이 더 첨가됩니다. 두 번째 명령은 두루마리를 태워버린 여호야김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심판 선포에 앞서 심판의 근거로 여호야김의 말이 인용됩니다(26). 21-26절은 여호야김의 외적 반응만 기술하고, 그가 여호와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불에 태워버리고 예레미야와 바룩을 체포하려는 동기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인용을 통해 기록된 말씀의 내용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여호야김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의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1) 바벨론 왕이 반드시 옵니다. 예레미야는 20:4부터 바벨론 왕에 의한 유다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는 ‘반드시’를 통해 이를 더욱 강조합니다. 2) 그가 이 땅을 멸합니다(참조, 열왕기하 18:25, 이사야 36:10). 3) 그가 사람과 짐승(참조. 7:20, 21:6), 곧 살아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립니다. 27:5에 따르면 여호와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사람과 짐승을 내가 보기에 옳은 사람에게 주십니다.

고발의 말씀에 뒤이어 두 가지 내용으로 이뤄진 심판의 말씀이 주어집니다(30). 첫째, 여호야김에게는 후계자가 없을 것입니다(참조 22:30). 둘째, 여호야김에게는 왕에게 합당한 장례가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시신은 들판에 버려져 낮과 밤의 기온 차로 급속히 부패하게 됩니다(참조 22:18,19). ‘던져서’(23)와 ‘버림을 당하여’는 같은 단어입니다. 두루마리를 낭독하는 대로 서기관의 칼로 잘라 화롯불에 ‘던져서’ 태워버린 왕에게 그의 시산이 들판에 ‘던져지는’ 징벌이 선언됩니다. 심판의 대상이 왕을 넘어 ‘그의 자손과 신하들’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로 확대됩니다(31).

 

⑶ 지시의 이행(32)

 

두루마리의 말을 듣고 돌이키지 않기는 왕이나 일반 백성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선포에 귀를 막은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하십니다.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은 약소국의 바에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정치적 파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호와께서 아들의 죄악에 책임을 물으시는 신학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소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순종 여부에 상관없이 말씀하신 그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이고 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겸손히 그 말씀을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기득권에 취해 돌 같은 마음이 되어 말씀이 읽혀지지 않는 인생은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게 됩니다. 자기 옷을 찢고 우상을 불태우는 삶에 소망이 있습니다. 신앙 양심에 비추어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하고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담대한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열려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귀를 기울이며, 주신 말씀을 겸손히 말씀에 순종하며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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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6-01)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

예레미야 36장 1-19절


 

지도자의 중요성은 누누이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 지도자의 리더십에 따라 그가 속한 조직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리더십 부재의 지도자는 조직원들의 방종과 혼란을 불러옵니다. 영적인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가 경험과 지혜가 많으면 좋겠지만, 가장 중요한 지혜는 여호와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나라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가 회개하길 원하시면서 여호야김 시대를 향해 말씀을 기록하고 권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붙잡혀 있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동역자인 바룩을 통해 대신 기록하도록 한 후, 그 내용을 백성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읽어줍니다.

 

말씀을 백성들에게 낭독됨(1-8)

종교 지도자들이 권위로 행세하면서 외형적인 형식과 의식으로 자신들을 치장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자기기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 같은 위선적인 삶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가차 없이 책망하신 것입니다.

 

1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제사년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너는 두루마리 책을 가져다가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거기에 기록하라 3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 4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 5예레미야가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는 붙잡혔으므로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수 없으니 6너는 들어가서 내가 말한 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유다 모든 성읍에서 온 자들의 귀에도 낭독하라 7그들이 여호와 앞에 기도를 드리며 각기 악한 길을 떠나리라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선포하신 노여움과 분이 크니라 8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에게 명령한 대로 하여 여호와의 성전에서 책에 있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니라(1-8)

 

심판을 초래한 이스라엘의 범죄가 한 사람의 범죄가 아니라 왕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총체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야김 왕의 타락을 잘 소개하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보여줍니다.

 

⑴ 말씀을 기록케 받은 예레미야(1-4)

 

본문에 나타난 시기는 ‘여호야김 제 4년’(주전 605년; 25:1)입니다. 이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대파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틴 지역 통치권을 손에 넣은 해입니다. 예레미야가 오래전부터 선포했던 여호와의 재앙이 북쪽에서부터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가 이 해입니다(1:13-14). 바벨론이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는 시점에 예레미야는 여호와로부터 명령을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두루마리 책을 가져와 그에게 이른 모든 말을 기록하게 하십니다(2). 문맥상 말씀의 기록은 심판의 확정성을 보여줍니다. 3절에서는 유다의 회개에 대한 여호와의 막연한 기대가 동기로 언급됩니다.

25:3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13년부터 오늘까지 23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참조 1:2-3). 25:1에 의하면, 오늘은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4년이 됩니다. 요시야는 남 유다의 역사 상 가장 하나님을 섬겼던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우상과 산당을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여호야김은 아버지가 없앤 우상과 산당을 다시 지었습니다.

그동안 입술로만 선포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요시야 때부터 이제껏 이스라엘과 유다, 열방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을 두루마리 책에 낱낱이 기록하게 하십니다. 두루마리에 기록할 내용의 시간적·공간적 범위가 제시됩니다.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말씀입니다. 유다의 회개에 대한 여호와의 긍정적 기대감을 담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돌이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시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실 수 없는 그분의 절망적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시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혹시 악한 길에서 돌이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유다의 악과 죄를 용서해주고 싶으신 여호와께서는 유다가 마지막 가능성을 뿌리치지 않고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길’을 수식 하는 ‘악한’과 ‘재난’은 히브리어로는 동일합니다. 재난은 한편으로는 악한 길에 대한 여호와 징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악한 길의 필연적 결말입니다.

악한 길은 운명처럼 재난을 초래하는 길입니다. 말씀을 기록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예레미야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불러 자기가 불러주는 대로 두루마리 책에 받아 적게 합니다(4). 네리야의 아들 바룩은 예레미야의 동역자로서 끝까지 그와 함께합니다(참조. 43:3, 6). 그 시기는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627년부터 605년까지 선포한 말씀이 고스란히 두루마리 책에 기록합니다. 예레미야서의 현재 구조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말씀은 1-20장에서 ‘모든 나라’에 대한 말씀은 46-51장에서(참조. 46:2)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포기할 수 없어서 끝까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남 유다의 악과 죄를 용서하고 싶으신 여호와께서 이제 마지막 가능성을 뿌리치지 않고,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⑵ 말씀을 대신 기록한 바룩(5-8)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입이었다면, 예레미야의 손과 입이 되어준 신실한 동역자 ‘바룩’이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가 불러준 대로 두루마리에 받아 적었습니다. 바룩을 ‘서기관’으로 부릅니다(26,32). 전문적인 직업교육을 받은 서기관은 비교적 높은 지위에 속한 자로 주로 왕궁에서 고위관료로 활동했습니다.

그동안 선포된 예언으로도 이미 충분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이유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또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은 그냥 입으로 들려지는 말씀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붙잡혀서 자유롭게 다닐 수 없으니, 예레미야는 신실한 바룩에게 말씀을 기록하라고 명합니다.

5-7절의 말씀은 기록의 배경과 동기를 보여줍니다.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대신 성전에 가서 그가 불러준 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낭독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은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기에 최적의 장소였고(참조 7:2, 19:14, 26:2),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금식일은 최상의 시점이었습니다. 성전에 모인 자들은 금식을 위해 유다 모든 성읍에서 온 자들이었습니다. 바룩이 성전에서 낭독한 말씀은 모든 유다 백성이 들어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예레미야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행동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았기에 ‘붙잡혔으므로’는 ‘제한받고 있어’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예레미야는 소란을 일으키는 자로 제사장에 의해서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를 당했던 것입니다.

7절은 내용상 3절의 반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행여 그들의 기도가 여호와 앞에 올라가고 그들이 저마다 제 악한 길에서 돌아설지도 모른다.’라고 기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의 회개는 예레미야에게도 막연한 희망 사항이었습니다. 가능성이 없음을 아시면서도 여호와께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예레미야도 실낱같은 소망에 몸을 던집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크신 노여움과 분에서 회개의 이유라고 찾습니다.

그 말씀대로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멸망했고, 그 말씀대로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앗수르 제국이 무너지고 애굽도 패하고 바벨론이 새롭게 중동의 패권을 차지했습니다(주전 605년). 그러니 유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말씀대로 바벨론에 붙이실 것임을 깨닫게 하고 싶으셨으며, 유다라도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죄사함을 받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타오르는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속히 악한 길에서 떠나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바울은 예레미야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합니다(8). 악한 길에는 반드시 재난이 따를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우리에게 남겨두신 뜻도 이것일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여 주님을 만남으로써 내가 선 자리와 가는 방향이 주께서 앞서 가신 길이고 동행하고 계신 길인지 확인합시다.

 

낭독된 말씀과 그들의 반응(9-19)

복음은 모두에게나 복음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위협적인 메시지입니다. 회개한 자에게는 불온한 소식이기에 말씀 선포자는 항상 위태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의 전달자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록하고 낭독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9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의 제오년 구월에 예루살렘 모든 백성과 유다 성읍들에서 예루살렘에 이른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금식을 선포한지라 10바룩이 여호와의 성전 위뜰 곧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새 문 어귀 곁에 있는 사반의 아들 서기관 그마랴의 방에서 그 책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말을 모든 백성에게 낭독하니라 11사반의 손자요 그마랴의 아들인 미가야가 그 책에 기록된 여호와의 말씀을 다 듣고 12왕궁에 내려가서 서기관의 방에 들어가니 모든 고관 곧 서기관 엘리사마와 스마야의 아들 들라야와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사반의 아들 그마랴와 하나냐의 아들 시드기야와 모든 고관이 거기에 앉아 있는지라 13미가야가 바룩이 백성의 귀에 책을 낭독할 때에 들은 모든 말을 그들에게 전하매 14이에 모든 고관이 구시의 증손 셀레먀의 손자 느다냐의 아들 여후디를 바룩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한 두루마리를 손에 가지고 오라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두루마리를 손에 가지고 그들에게로 오니 15그들이 바룩에게 이르되 앉아서 이를 우리 귀에 낭독하라 바룩이 그들의 귀에 낭독하매 16그들이 그 모든 말씀을 듣고 놀라 서로 보며 바룩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모든 말을 왕에게 아뢰리라 17그들이 또 바룩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그가 불러 주는 이 모든 말을 어떻게 기록하였느냐 청하노니 우리에게 알리라 18바룩이 대답하되 그가 그의 입으로 이 모든 말을 내게 불러 주기로 내가 먹으로 책에 기록하였노라 19이에 고관들이 바룩에게 이르되 너는 가서 예레미야와 함께 숨고 너희가 있는 곳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니라(9-19)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유다가 돌아오길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그는 제사장들에 의해서 성전 출입 금지로 인해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 대신에 동역자인 서기관 바룩으로 하여금 성전에서 예레미야에게 전해진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합니다.

 

⑴ 선포의 배경(9)

 

9-10절은 내용상 6절의 구체적 설명에 해당합니다. ‘여호야김의 제오년 구월’에 예루살렘에서 금식이 선포됩니다. 특이하게도 왕이 아니라 ‘예루살렘 모든 백성과 유다 성읍들에서 예루살렘에 이른 모든 백성’이 금식 선포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의 주도로 자발적 금식이 거행됩니다. ‘여호야김의 제오년 구월’은 604년 11/12월에 해당합니다. 주전 605년 9월 7일 바벨론에서 왕위에 오른 느부갓네살은 곧 시리아로 돌아와 주변을 종속시키고 주전 604년 12월에 아스글론 원정을 떠나 하나씩 성을 점령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아스글론까지 진출한 바벨론 군대를 보고 혼란과 두려움에 빠져 금식을 선포했다면 예레미야는 아스글론의 멸망에서 예루살렘의 위기를 보고 특히 예루살렘 왕궁이 긴박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호소하기 위해 두루마리를 성전에서 낭독한 것 같습니다.

 

⑵ 서기관 미가야의 반응(10-13)

 

바룩이 성전 위 뜰에 있는 사반의 서기관 그마랴의 방에서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낭독합니다(10). 그마랴는 서기관 사반의 아들입니다. 그마랴의 방에서 예레미야의 말을 낭독했음은 그마랴가 예레미야에게 우호적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26:24에 의하면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여호야김 왕의 손에서 지켜줍니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지만(31), 성과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금식을 선포한 백성은 말씀에 무관심했지만, 일부 서 기관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합니다. 백성의 귀에 낭독된 두루마리의 말씀이 그마랴의 아들 미가야에 의해 고관들의 귀에 알려지고, 뒤이어 왕의 귀에도 들려지게 됩니다.

두루마리에 적힌 ‘예레미야의 말’의 중요성을 인지한 미가야는 지체하지 않고 행동합니다(11). 그는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으로 가서 그곳에 모인 모든 고관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12-13). 고관들 가운데 다섯 사람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서기관 엘리사마와 스마야의 아들 들라야와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사반의 아들 그마랴와 하나냐의 아들 시드기야로’ 이들 가운데 세 사람의 이름은 25절에 다시 나옵니다.

 

⑶ 왕궁 서기관들의 반응(14-19)

 

미가야의 보고를 들은 고관들도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들은 여후디를 바룩에게 보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고, 두루마리를 손에 들고 온 바룩에게 낭독해주기를 청합니다(14-15). 유다 사람을 의미하는 ‘여후다’(14, 21, 23)의 경우 특이하게도 삼 대에 걸쳐 집안을 소개합니다. 미가야가 바룩의 낭독을 듣고 상황의 위중함을 감지했던 것처럼 고관들도 두루마리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알아챕니다. 바룩이 읽어주는 말씀을 다 들은 고관들은 놀라 서로를 쳐다보다가 왕에게 보고하기로 합니다(16).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은 누구보다도 왕이 알아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두루마리의 내용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29). 왕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고관들이 바룩에게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의 출처에 관해 묻자(17), 바룩은 예레미야가 직접 입으로 불러주는 것을 받아 자신이 먹으로 기록했다고 말합니다(18). 말씀의 기원이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있음을 강조합니다(10). 왕의 폭력적 성품을 잘 알고 있던(참조, 22:13-19) 고관들은 바룩에게 예레미야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도록 충고합니다(19). 많은 사람이 예레미야에게 적대적이었지만,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에 예레미야를 도와주는 사람이 일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통해 예레미야에게 하신 구원 약속(참조, 13,19)을 지켜 나가십니다. 26절은 고관들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26:21-23에 따르면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여 예언한’ 예언자 우리야가 애굽으로 피신하자 여호야김은 사절을 보내 그를 애굽에서 데려다가 처형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셔서 심판 가운데서도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고 있는 우리도 그렇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참고자료가 아닙니다. 정보가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회개한 자에게는 두렵고 기쁜 소식이지만, 거부하는 자에게는 불온한 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의 전달자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록하고 낭독하고 전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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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5-01)


레갑 자손들을 통한 교훈

예레미야 35장 1-19절


 

어두움이 깊을수록 아주 작은 빛이라도 그 빛은 더 선명하게 밝습니다. 세상에 어두워지면 경건치 못한 성도들은 세상의 풍조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세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신실한 성도들은 자신의 위치에 서서 믿음의 사람으로서 분명하게 빛을 비추면서 살아갑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엘리야 시대 남은 칠천 명처럼 자기 믿음을 지킨 신실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 남 유다의 멸망을 앞두고 성경은 레갑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레갑 자손의 순종과 대비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불순종을 고발합니다. 레갑 사람들은 수백 년이 지나도록 조상의 명령을 지켜왔는데, 여호와 백성을 자랑하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엔 심판을, 레갑 자손의 순종에는 축복을 선포하십니다.

 

레갑 사람들의 순종(1-11)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때, 불편하게 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에게 무시와 조롱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들을 불러 신앙의 본보기로 세우십니다. 이스라엘은 절박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까지도 상황이 호전되자마자 금방 저버렸지만, 레갑 족속 사람들은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예레미야가 권해도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1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너는 레갑 사람들의 집에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 하시니라 3이에 내가 하바시냐의 손자요 예레미야의 아들인 야아사냐와 그의 형제와 그의 모든 아들과 모든 레갑 사람들을 데리고 4여호와의 집에 이르러 익다랴의 아들 하나님의 사람 하난의 아들들의 방에 들였는데 그 방은 고관들의 방 곁이요 문을 지키는 살룸의 아들 마아세야의 방 위더라 5내가 레갑 사람들의 후손들 앞에 포도주가 가득한 종지와 술잔을 놓고 마시라 권하매 6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7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8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9살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 10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 11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이 땅에 올라왔을 때에 우리가 말하기를 갈대아인의 군대와 수리아인의 군대를 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자 하고 우리가 예루살렘에 살았노라(1-11)

 

예레미야 34장은 시드기야 시대에 일어난 일이고, 35장은 여호야김 시대에 일어난 일로서 35장이 34장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본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연대순으로 기록하지 않고 메시지 중심으로 편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요나답 후손들의 순종과 하나님이 택한 유다 백성의 불순종이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⑴ 여호와의 명령(1-2)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때를, 막연히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때에’(1)로 말합니다. 말씀이 여호야김과 직접 관련되지 않았음을 시사해 줍니다. 좀 더 정확한 시점은 레갑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살게 된 배경을 보고하는 11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레갑 자손은 유목민으로 목축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유목민인 레갑 사람들은 ‘갈대아인의 군대와 수리아인의 군대’의 위험을 피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살게 됐습니다. 열왕기하 24:1-2에 관련된 사건이 나옵니다.

601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산은 애굽 원정을 떠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이를 바벨론의 패배로 오인한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게 바치던 조공을 중단합니다. 애굽 원정 때 병력 손실이 적지 않았기에 느부갓네살은 배반한 여호야김을 즉시 징계하지 못합니다. 대신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보내 유다를 약탈하게 명령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보자면 레갑 사람들은 대략 주전 600년경에 적들의 약탈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피난처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해야 할 일을 ‘레갑 사람들의 집에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2)고 구체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를 통해 레갑 사람들이 성전 한 방으로 초대를 받아 포도주를 마시도록 권고합니다.

 

⑵ 예레미야의 명령 이행(3-5)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는 레갑 자손들에게 성전으로 인도합니다. ‘하바시냐의 손자요 예레미야의 아들인 야아사냐와 그의 형제와 그의 모든 아들과 모든 레갑 사람들’을 여호와의 집에 있는 ‘익다랴의 아들 하나님의 사람 하난의 아들들의 방’으로 데려가 그들에게 ‘포도주가 가득 담긴 단지와 잔을 내놓고 포도주를 마시라’고 권합니다(3-5).

레갑 사람들이 빠짐없이 모두 성전의 한 방으로 초대를 받습니다. 야아사냐의 조부 하바시냐는 여기에만 나오는 이름입니다. 에스겔 11:1의 야아사냐는 앗술의 아들입니다. ‘형제들’은 친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하난’은 성전에서 활동하는 제의 예언자였던 것 같고, ‘(그의) 아들들’은 그의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에게 자신들의 방을 빌려준 것으로 보아 ‘하난의 아들들’은 예레미야에 동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임을 갖는 방의 위치가 상세하게 언급됩니다. ‘마이세야의 방 위’는 ‘하난의 아들들의 방’이 아마도 중간층에 있었음을, ‘고관들의 방 곁’은 비중 있는 인물의 방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마아세야가 문지기로 되는데, 열왕기하 12:9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전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에서 성전의 문지기는 고위 직분이었습니다.

 

⑶ 레갑인의 답변(6-11)

 

레갑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권유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자기네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명령을 인용합니다. 요나답의 지침은 네 개의 부정명령과 한 개의 긍정명령과 결과문으로 구성되어 거절합니다.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6-7). 이 레갑 자손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철저하게 준수하며 살아왔음을 주장합니다.

6-7절을 거의 그대로 받는 8-10절은 내용뿐만 아니라, 그 구조에서도 실천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로 시작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로 당당하게 말합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후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조상의 명령에 따라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집도 짓지 않고 포도원이나 밭도 갖지 않았습니다. 농경생활에 관한 최소한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명령의 상대 ‘너희와 너희 후손(아들들), 이 명령의 실천에서는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너희 아들들과 너희 딸들)’로 확대됩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집안의 모든 사람이 순종했습니다. ‘파종도 하지 말며’를 받는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는 농경 생활과 관련한 최소한 소유하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나그네 삶인 고단한 방식을 고수해 온 것입니다.

레갑 사람들의 기원과 해석에 관해서는 통일된 입장이 없지만, 다수는 열왕기하 10:15-17을 배경으로 이해합니다. 엘리사가 보낸 제자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예후는 열렬한 여호와주의자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혼합주의에 빠진 오므리 왕조에 반기를 듭니다. 예후의 혁명에 가담한 여호나답은 그와 함께 사마리아의 바알 제사장들을 진멸해 버립니다(열왕기하 10장). 35장의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예후의 혁명에 가담한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같은 인물이라면, 레갑 족속의 시조이자 스승인 요나답은 여호와 종교가 가나안의 바알 숭배로 오염되는 것에 맞서 싸운 인물입니다. 예후가 반정을 시도한 때가 845년 또는 842년이기에, 레갑 사람들은 240년 이상의 긴 기간 동안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지켜왔습니다.

요나답의 명령을 배경으로 추론해보면, 레갑 사람들은 가나안적 농경 생활을 거절하고 천막에 살면서 반유목민 생활을 하는 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생존 방식은 유목민 시대부터 내려오는 사회·종교적 흐름이라기보다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아마도 9세기경에) 발생한 종파적 운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레갑 자손은 이토록 조상의 말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신의를 지킨 레갑 자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말씀(12-19)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겁지 않은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한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있기에 순종이 안 되고, 주의 말씀보다 더 그럴듯하게 여기는 소리가 있기에 말씀대로 행하기 않았던 것입니다. 이 불순종에 대해 오늘도 하나님이 말씀으로 재앙을 경고하시는 까닭은 불순종에서 돌이켜 순종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2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3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는 가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내 말을 들으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15내가 내 종 모든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고 끊임없이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따라 그를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가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 살리라 하여도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6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그의 선조가 그들에게 명령한 그 명령을 지켜 행하나 이 백성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17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내가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함이니라 하셨다 하라 18예레미야가 레갑 사람의 가문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 19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2-19)

 

주인을 몰라보고 주인의 말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이스라엘에게는 선지자들이 누누이 경고했던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명령이지만 조상의 명령에 오래도록 신실했던 레갑 족속에게는 대가 영영히 끊어지지 않는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⑴ 말씀의 계시(12-13)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레갑 자손들의 태도에 대해 반응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는 이미 죽은 지 오랜 사람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오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순종에는 축복으로, 불순종에는 심판으로 응대하십니다. 축복이 선언됨과 대조적으로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는 재앙을 경고하십니다. 복과 화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그분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서 결정됩니다.

 

⑵ 레갑인의 순종(14-16)

 

여호와께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의 불순종을 레갑 족속의 순종에 대비하여 고발하십니다. 레갑 사람들은 조상 요나답이 준 규정을 수 세기가 지나도록 변함없이 지켜왔는데,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계명과 율법을 거듭 위반하였습니다(14-16). 명령의 기원이 다르기에 유다의 불순종은 더욱 악합니다. 레갑 사람들은 자신들이 준수하는 규정의 기원을 시종일관 요나답에게로 돌렸습니다(6,8,10).

 

⑶ 근거가 제시된 심판의 말씀(17)

 

사람의 입에서 나온 규정도 추종자들에 의해서 그처럼 존중을 받아왔는데,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명령은 그분 백성 이스라엘에 의해 처음부터 무시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사람의 명령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참조. 7:13, 27) 유다 백성에게 ‘내가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참조 19:15)을 내리기로 확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내가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함이니라’(17)고 경고하십니다.

 

⑷ 레갑인들의 구원 약속(18-19)

 

반면에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한 신앙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레갑 사람들의 순종은 여호와에 의해 인정받습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여호와 앞에 서 있을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19; 참조. 33:18). ‘여호와 앞에 서다’는 제의적 표현으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다’ 또는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일하다’를 의미합니다(참조. 신 4:10; 10:8).

스스로 예배자의 자격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멸시하였던 자들이 아니라, 이렇게 성실하고 신실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유다 백성을 책망하시고 요나답의 후손들에게는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결국 요나답의 후손들은 하나님 앞에서 지속적으로 쓰임 받는 믿음의 가문을 이루게 됩니다. 거듭해서 말씀하실 뿐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조상의 명령에 순종한 레갑 사람들을 칭찬하시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복을 주셨습니다.


레갑 사람들은 240년 이상 조상의 명령을 섬겼던 뚝심을 우리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유나 하나님께 드림보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반응을 요구하십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하는지, 그분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지, 이웃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랑하는지를 보십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을 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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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4-02)

 


끝까지 패역한 이스라엘

예레미야 34장 8-22절


 

사람들에게 모든 자유가 다 바람직한 자유는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 또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자신 맘대로 하기 위하여 말씀의 요구를 거절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를 벗어나는 자유는 필경 자신을 구속하고 얽어매어 욕망의 노예로 만듭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자유를 추구했습니까?

 

  • 본문은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이 계약을 맺는 일로 시작합니다. 그 동안 알고도 시행하지 않았던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을 선포하였습니다. 바벨론이 물러가자 노예의 주인들은 이 결정을 번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심판을 단행하십니다.

시드기야 계약과 백성의 불복(8-11)

하나님과의 약속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깔보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 한 약속 중 잊어버리고 지키지 못한 것이 있다면 지키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8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9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10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11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8-11)

 

남 유다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야 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자기 민족의 약자들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돌보기는커녕 그들에게 갑질하며 억압하고 탈취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남 유다는 바벨론 군대에 의해 모든 성읍들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바벨론에 성읍들이 점령을 당하자, 시드기야는 긴급 상황을 인지하게 됩니다(7). 위기에 빠진 시드기야 왕과 유다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는 일을 행합니다. 처음 네 절은 시드기야 왕 때 있었던 종의 해방과 관련한 특별한 사건을 보고합니다.

 

⑴ 계약의 소개(8-9)

 

시드기야 왕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나름대로 노력을 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자기 동족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드기야 왕의 주도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 이 자유를 선포하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8).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하는 것이었습니다(9). 계약은 곧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그 계약의 내용이 같은 민족인 히브리 남녀 노비를 모두 풀어 주어 자유롭게 하기로 하나님과 약속합니다. 시드기야의 이런 행동에 고관들과 백성들이 가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종들을 놓아 주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나라를 빼앗기면 수많은 종들도 필요 없습니다.

이 약속은 옛날 모세 때부터 7년마다 모든 종을 풀어 주던 율법과 관련이 있었습니다(신 15:12). 이것은 비록 종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학대해서는 안 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유롭게 풀어 주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⑵ 계약의 실천(10)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않겠다고 계약에 참여한 자들은 그 계약에 따라 종들을 풀어주었습니다(10).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고 진실하셔서 하나님과 맺은 약속은 꼭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시편 76: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⑶ 계약의 파기(11)

 

얼마 후에 계약에 참여한 자들이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자유롭게 놓아준 종들을 도로 데려다가 다시 종으로 부렸습니다(11). 사건의 과정만 평가 없이 보고하고 그 배경이나 동기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단락의 마지막 두 절을 통해서야 계약 체결과 파기의 배경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21)와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 성읍에 다시 오게 하리니’(22)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다가 물러났음을 전제합니다.

37장 5절에 따르면 애굽의 바로 군대가 출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습니다. 계약 체결이 바벨론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포위 공격과 관련됐다면 종을 해방하기로 계약을 맺은 동기와 목적이 비교적 분명해집니다.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종은 징집 대상이 아니지만 해방된 종은 자유민으로 징집 대상이 되기에 병력을 확충하기 위해 해방했을 수 있습니다. ②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주인은 종의 먹거리를 책임져야 했다. 평시에는 노동으로 되갚을 수 있었지만, 전시에는 주인에게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주인은 부족한 양식을 밭에 나가 일하지도 않고 노는 종에게 나눠 주어야 했습니다. ③ 종교적 측면에서 보자면, 여호와만이 바벨론 군대의 포위 공격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지켜주실 수 있기에 그분의 도움을 기대하며 계약을 맺었을 수 있습니다.

바벨론 군대에 포위당한 예루살렘의 형편과 계약을 주도한 왕과 적극적으로 참여한 예루살렘 백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군사적·경제적·종교적 요인이 모두 종을 해방하는 동기와 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계약에 참여했던 자들은 목적이 달성되자 종을 해방하는 계약을 없었던 일로 하고 무시했습니다. 애굽의 개입으로 바벨론 군대가 철군하는 것을 보고 이들은 예루살렘의 안전이 확보됐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바벨론 군대의 철군으로 노동력이 다시 필요해졌기에 이들은 자신들이 풀어주었던 종들을 다시 데려와 일을 시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시적으로만 계약을 지켰지 지속적으로는 지키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내내 지키지 않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니깐, 하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시드기야 왕의 개혁에 동참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순종한척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환경이 좋아지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유다 백성(12-16)

우리는 ‘갑질’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성도들은 절대로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지체를 착취하거나 차별대우 그리고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유에 상관없이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 것은 약자들을 관심과 돌봄으로 베푸셨습니다.

 

12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3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이르기를 14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칠 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 줄 것이니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15그러나 너희는 이제 돌이켜 내 눈 앞에 바른 일을 행하여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계약을 맺었거늘 16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너희의 노비로 삼았도다(12-16)

 

하나님의 계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유다 백성들의 파렴치한 행태를 여호와께서 당신께 대한 불순종으로, 특히 여호와 신앙의 초석에 속하는 출애굽과 언약의 시각에서 고발하신다(13). 종의 해방이 출애굽과 언약의 목표로 제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년에 동족 히브리 종들을 모두 해방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종 되었던 데서 해방되어 한 형제가 된 운명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⑴ 말씀의 계시(12)

 

처음에는 주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종들을 성전에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제물로 쓰일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게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쪼개진 송아지처럼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⑵ 조상들의 불순종(13-14)

 

이스라엘 백성들이 히브리 종들을 놓아주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래서 적군인 바벨론을 예루살렘 에워쌌던 애굽 군대들과 싸우도록 예루살렘에서 군대를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눈앞에서 적 바벨론이 사라지자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풀어 주었던 종들을 다시 데려다가 종으로 삼았습니다.

출애굽이 종을 해방하는 사건이라면, 종의 해방이 곧 ‘너를 애굽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출애굽기 20:2; 신명기 5:6)께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언약을 맺으며 이르기를’은 마치 종의 해방과 관련해서 언약을 맺은 것 같은 인상마저 줍니다. 많은 율법 가운데 하나인 종의 해방에 관한 규정이 언약 준수의 척도가 됩니다. 일곱째 해에 종을 자유롭게 놓아주라는 명령을 어긴 것이 곧 여호와께 대한 불순종이요 언약 위반입니다. 종의 해방에 관한 규정을 준수하지 않음으로써 조상들은 언약을 파기했고 더 나아가 출애굽 전통마저 무시했습니다(14).

 

⑶ 현 세대의 불순종(15-16)

 

이제 시선을 과거에서 현재로 돌립니다. 여께서 먼저 ‘너희의 돌이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십니다(15). 시드기야의 계약에 따른 종의 해방이 여호와 보시기에 ‘바른 일’이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는 계약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결됐음을, 곧 여호와께서도 계약에 참여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너희의 선조’로부터 돌이켜 바른길을 가는 듯 했지만,'너희'도 결국에는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여호와 앞에서 맺은 계약을 폐기하고 그분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16). 이들은 신실함이 없는 거듭 돌이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조상들의 불순종에서 ‘돌이켜’ 여호와 보시기에 바른 일을 행한 자들이 이제는 바른 일에서 ‘돌이켜’ 자유롭게 놓아준 종들을 끌어다가 ‘다시’ 종으로 부립니다.

이렇게 변질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께서 다시 징계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행동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과 같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했지만, 어려움이 지나가고 난 후에,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심판에 대한 경고(17-22)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회개하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를 거부하면 뒤따르는 결과는 참혹한 심판입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회개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17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18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 내 앞에 언약을 맺었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아니하여 내 계약을 어긴 그들을 19곧 송아지 두 조각 사이로 지난 유다 고관들과 예루살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20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21또 내가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을 그의 원수의 손과 그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기리라 22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 성읍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의 성읍들을 주민이 없어 처참한 황무지가 되게 하리라(17-22)

 

이처럼 약속을 변심하는 유다 백성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변심 하십니다. 약속을 뒤집는 유다 백성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무서운 심판을 준비하십니다.

 

⑴ ‘너희’의 심판(17)

 

하나님께서는 돌려보냈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바벨론 왕이 그들을 공격하여 성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이름을 더럽힌 ‘너희’의 불순종에 책임을 물으신다. ‘자유를 선포하다’(17)를 두 번 사용해 상응하는 징벌을 선언합니다. 제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듣지 않은 자들에 맞서 여호와께서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동포에게 자유를 주지 않은 자들을 칼과 전염병과 기근이 자유롭게 치도록 허락하십니다. 세상 모든 나라에 공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심판은 혹독하게 집행됩니다.

 

⑵ ‘그들’의 심판(18-22)

 

유다 백성들이 형제들에게 선포한 자유를 실행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께서도 이 백성에게 행할 언약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유다 백성에게는 전쟁과 굶주림과 무서운 병들이 그들을 자유롭게 찾아들도록 허락 하십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계약 조인에 따른 제의적 의식과 언어유희를 활용해 계약을 어긴 자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언합니다(18-19).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사이로 지나가며 맺은 계약을 내버린 자들을 여호와께서 모두 쪼개진 송아지처럼 만드실 것입니다. 계약 체결 의식을 위해 두 조각으로 가른 송아지의 운명이 계약을 파기한 자들의 운명이 됩니다. 계약을 조인할 때 행하는 이 의식(참조, 창세기 15:10,17)은 계약을 위반하면 조각난 짐승처럼 쪼개짐을 당할 것을 맹세하는 일종의 자기 저주 의식입니다. 조각난 송아지 사이로 ‘지나가며’ 규정의 준수를 의무로 받아들인 자들이 바로 계약을 ‘어긴 자들’입니다. 계약에 ‘가담한’ 자들(10)이 계약 안에 머물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버렸습니다.

시드기야가 주도한 계약이 15절에서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맺은 계약으로, 18절에서는 ‘내 계약’으로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계약의 증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계약의 당사자가 되십니다. 시드기야의 주도로 이루어진 계약 위반은 여호와의 계약을 위반한 것이기에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징벌의 방식과 멸망의 철저성에 초점을 맞춰 심판을 선언합니다(20). 여호와께서 계약을 어긴 자들을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겨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활용해 내 계약을 어긴 자들을 남김없이 진멸하십니다. 전면적인 파국입니다. 들판에 버려진 수많은 시체를 날짐승과 들짐승이 뜯어 먹지만, 그것들을 쫓아내고 시체를 지켜줄 사람이 없습니다(참조. 7:33; 16:4).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말씀으로 일부를 제외하고 20a절과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합니다(21). 계약을 주도한 시드기야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집니다.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는 주전 588년에 유다를 돕기 위해 애굽의 군대가 출정한 사건과 관련된 언급입니다(참조. 37:5). 애굽 왕 호프라(Hophra)가 원정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군대는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의 포위를 풀었습니다. 결과는 물론 바벨론 원정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군대는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의 포위를 풀었다. 결과는 물론 바벨론의 승리였습니다.

다시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선포합니다(22). 마음이 ‘변하여’ 자유롭게 놓아준 종들을 ‘끌어다가’ 다시 종으로 부린 자들에 맞서(11; 참조 15-16) 여호와께서도 철군한 바벨론 군대에게 명령하여 성읍에 다시 ‘오게’ 하십니다. 이제 중도에 철군하는 일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불길에 휩싸이고(참조 39:8), 유다 성읍들은 폐허가 됩니다.


회개의 열매가 없으면 참 회가 아닙니다. 벗어나야 할 것에는 벗어나고 매여야 할 것에는 매이는 것이 회개입니다. 둘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은 참된 회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격성을 무시한 채 그분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회심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모습이 변해야만, 하나님께서도 성도들을 향한 모습이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맺은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지킬 수 있도록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형편에 따라 바꾸는 믿음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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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4-01)

 


심판 중에도 끝까지 남겨놓은 은총

예레미야 34장 1-7절


 

사람에게나 동물에게 무서워서 기를 펴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것을 일컬어 ‘주눅 들었다’고 합니다. 가끔 사람이나 환경 앞에서 주눅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꼼짝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결코 주눅 들어서는 안 됩니다.

 

  • 하나님의 경고대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멸망은 초읽기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 시드기야는 항복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시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그리고 여전히 남은 하나님의 은총의 기회를 전합니다.

 

피할 수 없는 예루살렘의 멸망(1-2)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시드기야 왕에게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경고하십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머지않아 함락될 것입니다. 이는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1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 모든 군대와 그 통치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에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가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1-2)

 

느헤미야는 지금까지 감옥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전합니다. 새롭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 왕에게 붙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서 바벨론 왕 앞에 설 것을 예언합니다.

신탁의 시대적 배경을 제공해주는 1절은 시점보다는 바벨론의 엄청난 군 병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통치 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 여호와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를 공격하는 바벨론의 군대를 이처럼 자세히 서술하는 곳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거느리고 예루살렘과 유다를 공격합니다. 군사력에서 비교될 수 없는 변방의 유다가 앗수르의 뒤를 이어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의 공격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7절의 정보는 좀 더 구체적입니다. 유다의 모든 성읍이 점령당하고, 예루살렘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 라기스와 아세가만 남습니다. 이 두성마저 함락된다면 예루살렘은 완전히 고립됩니다.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했던 라기스(Telled-Duweir)는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 아세가(Tell ez-Zakariyeh; 참조. 수 10:10-11; 15:35; 삼상 17:1; 대하 11:9)는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대략 30km, 라기스 북쪽으로 18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이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대항하는 전쟁을 멈추라고 합니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심판을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는 항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받아 들려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마음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비록 왕이 라고 해도 눈치 보거나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파할 수 있습니까?

 

전달할 신탁 내용(3-5)

하나님의 마음이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신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이지만, 그 최종 목적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들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완전히 실현됩니다.

 

3그러나 유다 왕 시드기야여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5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이 너보다 먼저 있은 네 열조 선왕에게 분향하던 일례로 네게 분향하며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3-5)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신탁을 받아 시드기야 왕에게 전한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 왕에게 함락될 것이며 시드기야는 포로로 잡혀가지만, 죽을 때는 평안히 죽고 백성들이 그를 위해 애도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1) 첫 번째 신탁: 시드기야의 절망적 운명(2-3)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신탁이 전달될 상대를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2).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소유적 관계를 보여 주는 표현으로, 현재의 문맥에서는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짝을 이룹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에 유다 왕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21:1과 37:3에서는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신하들을 보내 신탁을 구하고, 37:17과 38:14에서는 시드기야가 요나단의 집 또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를 불러 여호와의 신탁을 묻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여호와의 말씀에 시드기야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 왕 시드기야의 파국적 운명에 큰 관심을 갖고 개입하시지만, 정작 위기의 당사자인 시드기야는 그분의 신탁에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신탁의 주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시드기야의 사로잡힘인데, 후자에 대해 무게가 주어집니다. 성의 운명에 관해서는 두 개의 동사가, 시드기야의 운명에 관해서는 여섯 개의 동사가 사용됩니다. 동사 ‘넘기다’와 ‘바벨론 왕의 손’은 양쪽에 다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시기에 시드기야 왕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손’에 넘겨집니다. 예루살렘과 시드기야의 운명이 하나로 묶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완전한 파괴와 시드기야의 사로잡힘을 결정하셨기에, 막연한 또는 최소한의 소망마저(참조. 21:2) 다 사라집니다.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점령당한(39:2; 52:6) 예루살렘은 한 달 후인 다섯째 달 열째 날에 화염에 휩싸입니다(52:12-13). 신탁이 전하는 시드기야의 절망적 처지는 39:4-7과 52:7-11에 그대로 나옵니다. 성벽이 깨지자 시드기야 왕은 야음을 틈타 왕실 정원길을 따라 성벽 사이의 통로를 지나 도성 밖으로 탈출하여 아라바 쪽으로 피신하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갈대아 군대의 추적을 받아 여리고 평지에서 사로잡혀 하맛 땅 립나(리블라)의 느부갓네살의 사령부로 끌려갑니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아들들을 죽인 후에 그의 두 눈을 뽑고 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2) 두 번째 신탁 : 예루살렘의 운명(4-5)

 

예루살렘의 운명을 먼저 짧게 언급했던 첫 번째 신탁과 달리 두 번째 신탁은 오직 시드기야의 운명에 집중합니다. 2절의 ‘유다의 시드기야 왕’을 호격으로 사용하는 권면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는 10절의 경우처럼 순종의 의미도 함축합니다(10절의 ‘듣고’와 ‘순복하여’는 같은 동사 ‘듣다’의 번역이다).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는 예외적인 표현으로, 여호와께서 시드기야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신탁의 주제는 시드기야가 맞게 될 죽음입니다. 시드기야는 칼에 맞아 죽지 않고 평화롭게 죽고, 사람들은 정상적인 장례 의례에 따라 이전 왕들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격에 맞게 불을 피우고 애곡을 할 것입니다. ‘칼에 의한 죽음’에 대비되는 ‘평화로운 죽음’은 불행이나 폭력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고 제 명을 다한 죽음을 가리킵니다. ‘분향하던 것’과 ‘분향하며’는 각각 명사 ‘불에 태움’을 의미하는 ‘미스러 포트’와 ‘불에 태우다’를 의미하는 동사 ‘사라프’의 번역입니다. ‘선왕들에게 분향하던(불에 태우던) 것 같이’는 ‘불에 태우는 의식’이 전통적인 장례 의식의 일부에 속했음을 시사해줍니다. 다른 표현이 사용됐지만, 역대하 16:14; 21:19도 유다에서는 왕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불을 피우는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시신 가까이에 불을 켜놓고 그 위에 유향이나 향신료를 태웠던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언급된 애곡은 장례 의식의 핵심에 속합니다. ‘슬프다 주여’는 여기와 22:18에만 나오는 애도의 표현으로(참조. 왕상 13:30), 시드기야의 죽음과 여호야김의 죽음을 서로 대비해줍니다. 시드기야를 위하여 사람들이 ‘슬프다 주여’하고 애곡하지만, 여호야김을 위하여는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하고 통곡하지 않습니다. 불의와 불법으로 통치한 여호야김의 (저주받은) 죽음과 다른 죽음이 시드기야에게 약속됩니다. 첫 번째 신탁은 시드기야에게 사로잡힘과 유배를 선포하고, 두 번째 신탁은 평화로운 죽음을 약속합니다. 두 신탁 사이에 있는 긴장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부는 후자가 전자의 심판을 조금 완화하고 있다고 해석하지만,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유배지에서의 죽음은 평화로운 죽음이 될 수 없습니다. 평화로운 죽음과 왕에게 걸맞은 장례 의식은 시드기야가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을 전제합니다. 예레미야서의 보고(참조. 39:4-7;52:7-11; 왕하 25:4-7)에 따르면 시드기야는 극히 비참하게 유배지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시드기야의 운명이 질적으로 상이하게 언급됐다면, 두 말씀은 선택의 문제에 속하게 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두 번째 신탁은, 본문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조건이 함축된 약속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여호와에 의해 확정된 운명이기에 피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가능성은 바벨론에 항복하고 완전한 파멸을 모면하는 것뿐입니다(참조. 21:8-10). 시드기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여호와의 심판 의지로 받아들이고 바벨론에 항복한다면, 그에게는 평화로운 죽음과 유다 왕에 합당한 장례 의식이 허락될 것입니다(참조. 38:17-18).

 

바벨론 군대의 침략(6-7)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면 산성이고 방패이십니다. 유다가 멸망한 것은 바벨론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야 우리 삶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하나님께 맡기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는 유다의 많은 성들은 너무나 쉽게 바벨론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넘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6선지자 예레미야가 이 모든 말씀을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니라 7때에 바벨론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6-7)

 

시드기야의 실패는 믿음과 자기신념을 구별하지 못한 맹신과 자기기만이 가져다준 비참한 결말을 봅니다. 바벨론 왕의 군대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성들을 침략하고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전쟁은 너무나 손쉽게 진행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2a)을 예레미야가 그대로 이행했다는 6절의 보고는 매우 특이합니다. 예언자에 의한 실행보고가 주요 구성 요소에 속하는 표적행위의 경우와 달리 말씀 선포에서는 일반적으로 명령 이행에 관한 보고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예레미야의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순종과 시드기야의 침묵(불순종)을 대조하기 위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보내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지만, 그는 듣기만 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돌출적입니다. 32:2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는 그의 출입이 자유로웠음을 전제합니다. 양자를 함께 보면, 예레미야가 전한 ‘이 모든 말씀’을 들은 시드기야의 반응은 예레미야의 체포와 구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시드기야 왕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습니다. 기회를 주셨을 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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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3-02)

 


다윗과의 언약을 잊지 않는 하나님

예레미야 33장 14-26절


 

너무나 믿었던 사람에게 속았거나 실망을 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은 연약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속이거나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시대를 초월하여 신실하게 이루어집니다. 예레미야는 전혀 불가능하고 예측불허의 시대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와 더불어서 소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갈 것이지만, 반드시 돌아오게 하며 회복시켜 주실 것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본문은 귀환과 회복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성취해 나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새로운 일은 영원히 깨어지지 않고 존재할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 계열의 왕권과 영원한 제사장(14-18)

하나님의 약속은 수백 년이 흐를지라도 반드시 지켜질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메시아를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은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값진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시 죄 가운데 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14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16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17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18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를 항상 드릴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4-18)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지, 또 미리 조상들에게 약속한 것은 어떻게 될 것인지, 이스라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조목조목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단락은 심판 이후의 구원 시대를 이끌어갈 왕권과 제사장직에 관한 두 개의 말씀으로 구성됩니다. 15-16절은 각각 다윗의 후손에 의한 공의로운 통치와 유다와 예루살렘의 구원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로 시작하는 17-18절은 각각 다윗 왕권과 레위 제사장직의 영속성을 약속합니다.

 

(1) 다윗을 위한 ‘한 공의로운 가지’(14-16)

 

도입부에 해당하는 14절은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구원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구원 약속의 대상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유다에 백삼사십 년 앞서 앗수르에 멸망 당한 북왕국 이스라엘도 미래의 구원에 유다와 함께 참여합니다(참조, 31:27,31). ‘일러 준 선한 말’의 성취는 구원 약속이 이미 주어졌음을 전제합니다. 아마도 29:10의 약속을 되돌아보는 것 같습니다. 15-16절은 23:5-6의 약속을 일부 변경하여 인용합니다. 구원의 때를 이중적으로 표현한 ‘그 날 그 때에’는 시점이 아직 특정되지는 않지만, 반드시 올 것을 강조합니다. 먼저 다윗 왕조의 회복에 관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한 공의로운 가지’(공의의 싹/가지)를 돋아나게 해서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이루게 하십니다(15). ‘가지’(싹)는 다윗 왕조가 멸망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줄기가 잘리고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에서 새순이 돋아나듯이, 여호와께서 바벨론에 멸망 당한 다윗 왕조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새로운 통치자가 태어나게 하십니다. 왕정 시대 예루살렘의 왕들에 의해 무시됐던 정의와 공의가 구원 시대의 통치자에 의해 회복됩니다. 다시금 ‘그날에’로 시작하는 두 번째 약속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대상으로 합니다(16). 23:6과 비교해보면 그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집니다. 유다의 구원만 일치하고 나머지는 차이를 보입니다. 안전하게 사는 주체가 후자에서는 ‘이스라엘’이고, 여기서는 ‘예루살렘’입니다. 또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이름이 후자에서는 구원 시대의 통치자에게(‘그의 이름은’), 여기서는 예루살렘에게(‘이 성은’) 주어집니다.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되는 날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신실하시고도 의로운 역사를 경험합니다. 여호와의 의가 의로운 왕의 정의와 공의를 통해 예루살렘에 구현되고, 주민들도 여호와의 의에 참여해 정의와 공의를 행합니다. 심판이 예루살렘에 집중된 것처럼(4-5) 구원 또한 예루살렘의 회복에서 정점에 도달합니다(9).

 

(2) 끊이지 않을 다윗과 레위 자손(17-18)

 

17-18절은 앞 두 절의 주제를 좀 더 구체화합니다. 먼저 17절은 15절의 약속을 시간적으로 확장합니다. 후자가 메시아적 통치자를 내다보고 그의 성품에 관심을 둔다면, 전자는 왕권의 단절을 직시하고 그 지속성에 관심을 둡니다(참조. 신 18:15). 이스라엘 집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서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보좌’는 조건이 없는 일방적인 약속인데(참조. 삼하 7:12-16), 다윗은 이를 조건적 약속으로 바꿔 솔로몬에게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로 행하도록 권면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참조. 왕상8:25; 9:5-7)에 의해 조건적 약속으로 바뀐 나단의 신탁이 여호와에 의해 다시 원래의 무조건적 성격을 되찾습니다. 18절의 레위인 제사장직에 관한 언급은 뜻밖입니다. 30:1-33:13에서 제사장직의 회복은 지엽적이고도 간접적으로만 언급되고(참조. 31:6,14; 33:11), 어디에서도 주제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다윗에게서 왕위에 앉을 사람이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레위인 제사장들에게서도 번제를 드리고 소제를 사르고 희생제사를 드릴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6절은 예루살렘의 구원을 배경으로 주어진 약속 같습니다. 왕권(왕궁)과 제사장직(성전)은 예루살렘의 두 중심축이었는데, 이 점은 미래의 구원 시대에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 두 제도의 부패와 타락이 심판을 초래했지만, 그렇다고 폐지되지는 않습니다. 이 두 제도에 부여된 구원 매체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특이하게도 제사장직이 아론이나 사독과 같은 특정 집안에 독점되지 않고 폭넓게 열두 지파의 하나인 레위인들에게 주어집니다(참조. 신 17:9,18;18:1-8). ‘내 앞에서’는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들만의 남다른 특권과 번제와 소제와 희생 제사를 여호와께 드려야 하는 이들의 (위험한) 책임을 보여줍니다.

 

다윗과 레위인들에게 주실 축복(19-22)

예배의 회복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배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알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다른 것을 열심히 하더라도 예배에 중심을 지키지 못하면 가장 소중한 것을 빠뜨린 것입니다.

 

19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0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찐대 21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22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라(19-22)

 

본 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낮과 밤의 언약처럼 다윗의 자손에게 왕좌를, 레위 자손에게 제사장직을 영원히 주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군대와 바닷가의 모래처럼 그들의 자손을 번성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1) 깨지지 않는 다윗과 레위의 언약(19-21)

 

20-21절은 자연 질서와의 비교를 통해 17-18절의 약속을 한 번 더 심화합니다. 10절의 경우처럼 20절의 청자가 갑자기 ‘너희’로 등장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들어야 할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말씀임을 시사해줍니다. 낮과 밤의 주기적 교체(참조. 창 1:3)는 창조 이래로 변함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과 레위인 제사장과 세운 언약도 여호와께서 세우신 언약이기에, 다윗 집안과 레위인 제사장들에 의해 깨어지지 않습니다.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깨뜨리신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옛 언약과 다릅니다(참조. 11:10; 31:32). ‘나의 언약’이 ‘낮’ 또는 ‘밤’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는 여기가 유일합니다. 창세기 8:22을 노아의 언약(창 9:9-11)에 연결해 읽은 것 같습니다. ‘내 종’과 ‘나를 섬기는’(문자적으로, ‘내 시종들’)은 여호와와의 개인적 관계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17절의 ‘이스라엘 집의 왕위에 앉을 사람’에 비교해 ‘그의 자리에 앉아 다스릴 아들’은 다윗 왕권의 혈통적 연속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다윗과의 언약은 나단을 통해 주어진 영원한 왕권에 관한 무조건적인 약속을 가리키고(삼하 7:16; 23:5; 사 55:3; 시 89:3-4), 레위인 제사장들과의 언약(참조. 말 2:4-5)은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와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민 25:12-13)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2) 다윗의 후손과 레위인의 번성(22)

 

놀랍게도 22절은 아브라함에게 준 후손의 번성에 관한 약속(참조. 창 22:17)의 비유적 표현을 다윗의 후손과 레위인들에게 적용합니다. 다윗의 후손과 레위인들이 번성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집니다. 한편으로는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여호와의 특별한 간섭이 다윗의 씨와 레위인들을 셀 수 없이 많게 하실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의 후손들과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로 언급됐음을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유효한 야곱과 다윗의 선택(23-26)

아무도 믿지 못할 크고 기이한 일이지라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긍휼히 여기시니 무참히 무너진 민족과 나라라도 결국 돌아와 한 나라를 세우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는 주의 긍휼로 이뤄진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그 나라와 회복을 바라보며 인내해야 합니다.

 

23○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4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자기가 택하신 그들 중에 두 가계를 버리셨다 한 것을 네가 생각하지 아니하느냐 그들이 내 백성을 멸시하여 자기들 앞에서 나라로 인정하지 아니하도다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26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리고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된 자를 돌아오게 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23-26)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레위의 자손과의 언약을 확고히 하여 그들의 후손이 계속해서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할 것을 약속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과 하나님의 신실함을 나타냅니다.

 

(1) 버림받은 두 가문(23-24)

 

여기서는 이스라엘과 다윗 왕조 선택의 유효성이 주제로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선택을 무효화했다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주는 답변입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이 백성’의 불만을 인용하시고, 그러한 불만이 ‘그들’에게 주는 부정적 결과를 지적하십니다(24). 여호와의 선택에 근거한 그분과 이스라엘의 남다른 관계가 끝났다는 ‘이 백성’의 불평으로 ‘내 백성’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멸시를 당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을 자랑하던 자들이 민족으로 살아남지도 못하게 됐다고 조롱합니다.

 

(2) 취소될 수 없는 선택(25-26)

 

이 백성의 비난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다윗 왕조의 선택은 낮과 밤의 창조 질서처럼 앞으로도 언제나 유효하다고 주장하십니다(25-26; 참조. 31:35-37). 주전 587년 바벨론에게 유다가 멸망당하지만, 그것이 선택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호와의 선택은 땅의 정치적 사건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선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이들의 운명을 되돌리시고 자비를 베푸실 때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백성’은 유다 백성으로, 예레미야서에서는 자주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 심판의 대상이 된 백성을 가리킵니다(참조. 5:13; 6:19, 21 등등), ‘두 가계’는 20-22절에 나오는 ‘다윗 집안과 레위 지파’보다는 한 민족을 구성하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한 뿌리에서 나온 민족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함과 변치 않는 약속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지키시고, 그의 자손을 통해 영원한 왕국을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레위 자손에게는 끊임없는 제사장직을 보장하셨습니다. 이 모든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질 것임을 확증해 줍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상황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분의 언약을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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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3-01)

 


부르짖는 기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33장 1-13절


 

밤은 캄캄하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종종 밤으로 비유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도 이런 밤들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렇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좀처럼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그만큼 크신 분임을 몰라서일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한 만큼, 우리가 기도한 만큼이 나의 신앙의 크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에게 부르짖어 기도하면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예루살렘의 함락은 심판의 정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 후에 회복을 단호하게 약속하십니다.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주시고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실제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도입부(1-3)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돌이나 철 그리고 금으로 만들어진 우상들처럼 아무런 반응하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도 구속의 역사를 지체치 않고 이루어가십니다.

 

1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가라사대 2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1-3)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다시 말씀하시며, 그에게 크고 놀라운 비밀을 알려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기도하면 응답하겠다고 하시며, 그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 주겠다고 하십니다.

 

(1) 계시의 배경(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였다’(1). 계시의 내용과 관련한 정보는 아닙니다. ‘아직’이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33장을 앞 장에 연결해주는 언급입니다. 32:1-2에 따르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열째 해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예레미야는 왕궁의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습니다(참조. 37:21; 38:13,28). ‘두 번째’는 기도에 대한 두 번째 응답을 가리킵니다. 표적 행위 직후 예레미야가 여호와께 기도하자(32:16-2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응답을 주셨는데(32:26-44),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두 번째 응답이 주어집니다.

 

(2) 권능의 여호와(2)

 

계시의 내용을 알려주기 전에 먼저 여호와에 관한 언급이 나옵니다(2). 여기 ‘일’로 번역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두 입장이 나름대로 경쟁 중입니다. 하나는 칠십인역에 의존해 목적어로 ‘땅’을 삽입하고 모음점을 수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에서 막연히 여호와의 생각이나 계획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기도를 시작하는 32:17의 창조에 관한 언급은 전자를 심판 이후의 구원과 관련된 33:3의 ‘크고 은밀한 일’은 후자를 지지할 수 있습니다. 전자에 따르면 무한 능력의 창조주께서, 후자에 따르면 계획을 만들고 그대로 실행해 성취하시는 여호와께서 약속하셨기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구원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그분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다’, 참조. 10:16; 31:35; 32:18)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3) 크고 놀라운 일(3)

 

다음 절은 예레미야 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가 당신을 부르면 그에게 응답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도 그에게 말해줄 것을 약속하십니다(3). 예레미야는 이미 32장에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그분에게서 응답을 받았습니다. ‘너는 나를 부르라’는 명령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기도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실 준비가 되셨음을, 곧 심판의 시대가 끝나고 구원의 시대가 밝아옴을 전제합니다(참조. 29:12). 예레미야가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참조. 7:16; 11:14; 14:11). 여호와의 응답은 기대를 뛰어넘는 응답입니다. 예레미야가 알 수 없었던 것까지 그에게 알려주십니다(참조, 사 48:6).

 

예루살렘 성의 심판과 구원(4-9)

하나님게서는 열심과 능력으로, 지혜로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크고 비밀한 일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재림을 통한 심판과 구원을 통하여 이뤄질 것입니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사 43:13)하신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참호와 칼을 대항하여 5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6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7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8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9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4-9)

 

본문은 예루살렘 성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회복의 날이 올 것이며, 그들이 다시 번성하고 평안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예루살렘이 온 세상에 기쁨과 찬양의 이름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1) 성의 파괴와 죽음(4-5)

 

이 문장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공성축대와 칼에 맞서 (방어를 위해) 허문도성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갈대아인들과 싸워 내가 노여움과 분함으로 내리칠 사람들의 시체로 그것들을 채우려고 나온다. 그들의 모든 죄악 때문에 내가 이 도성에서 내 얼굴을 숨겼기 때문이다.’ 4절은 이사야 22:10의 경우처럼 방어를 위한 예루살렘 성의 긴급조치와 관련한 말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성 주변에 공성 축대를 쌓고 공격하자 포위당한 예루살렘 사람들은 적의 공격에 맞서 성벽에 인접해 세워진 집들을 허물어버립니다. 성벽 주변의 집들을 허물어 병사가 주둔하는 공간과 병력을 신속하게 이동시킬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고, 거기에서 나온 돌은 성벽을 보강하는 건축 자재나 무기로 사용합니다. 성을 방어하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하지만, 여호와께서 갈대아인들의 편에서 ‘노여움과 분함’(참조, 7:20; 32:31; 36:7)으로 성을 공격하시기에 전혀 무익한 짓입니다(5). 예루살렘 사람들은 승리를 기대하며 싸우지만, 실상은 자기 파멸적 싸움입니이다. 허문 집들을 사람들의 시체로 채우려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얼굴을 숨기셨기에 예루살렘에게는 패배와 죽음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서 얼굴을 숨기신 이유는 ‘그들의 모든 악행’ 때문입니다.

 

(2) 예루살렘 성의 치유와 영광(6-9)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절망과 죽음에서 소망과 생명으로 바뀝니다. 심판(4-5)이 끝나고 구원의 약속이 선포됩니다. 서두의 ‘보라’는 새로운 사건의 시작을 시사해줍니다. 심판이 예루살렘 성에 집중된 것처럼 구원도 예루살렘 성에 집중됩니다. ‘노여움과 분함으로’ 예루살렘을 치셨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건강과 치유를 가져다주실 것을, 예루살렘 주민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넘치는 평안과 진실을 보여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6; 참조. 30:17). 여호와께서 의사가 되셔서 죽음에 이르는 불치의 병에 걸린 예루살렘을 치료해 낫게 하시고 평화와 안정(‘평안과 진실’)을 풍성히 경험하게 하십니다.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멸망한 예루살렘이 외부의 위협과 폭력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치유의 비유적 약속이 7-9절에서 다섯 개의 약속으로 구체화합니다. 첫째, 유다와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십니다(7a). 심판 시대를 끝내시고 구원 시대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케 함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한가지였기에(참조. 32:32) 이스라엘에게도 구원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둘째, 그들을 ‘처음과 같이’ 다시 세우십니다(7b; 참조. 24:6; 31:28; 42:10; 45:4).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떠났고, 땅은 주민도 짐승도 없을 정도로 황폐해졌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생존의 위험에 처하지만, 여호와께서 그들을 번성케 하여 수가 줄어들지 않게 하십니다(참조. 30:19; 31:27). 셋째, 모든 죄악에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용서해주십니다(8).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수 있는 과거에 범한 죄악의 굴레로부터 온전하게 해방해주십니다. 용서는 여호와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새 언약의 약속에 속하기도 합니다(참조, 31:34). 넷째,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 앞에서 ‘기쁜 이름과 찬송과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9; 참조. 13:11; 신 26:19). ‘그들의 모든 악행’ 때문에(5)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된 예루살렘이(26:6) 다시 민족들 가운데 높임을 받습니다. 다섯째, 민족들이 보고 두려워 떨 정도로 예루살렘 주민에게 ‘모든 복’을 베푸십니다(9b; 참조. 32:42). 여호와의 ‘노여움과 분함'의 대상이었던 예루살렘이 축복의 대상이 된다. '민족들이 두려워 떪’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조롱하던 민족들이 폐허가 된 도성을 ‘기쁜 이름과 찬송과 영광’의 대상으로 만드시는 여호와의 큰 능력을 보고 두려워 떱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번성(10-13)

기도는 죄인과 연약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기도 응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과 감사로 주의 초청에 응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심판을 향하면서도 자비를 베풀려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멸망 직전의 백성에게 회복의 약속을 두 번이나 제시하고 기도를 명령합니다.

 

1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 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10절과 동일) 1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던 이 곳과 그 모든 성읍에 다시 목자가 살 곳이 있으리니 그의 양 떼를 눕게 할 것이라 13산지 성읍들과 평지 성읍들과 네겝의 성읍들과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면과 유다 성읍들에서 양 떼가 다시 계수하는 자의 손 아래로 지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10-13)

 

예루살렘과 유다가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고 탄식하는 ‘너희’에게 주는 말씀으로, 10-11절은 ‘사람도 없고’에 대한 답변이고, 12-13절은 ‘짐승도 없다’에 대한 답변입니다.

 

(1) 사람의 번성(10-11)

 

현재의 문맥에서는 9절의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절망과 탄식의 소리만 들리는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가 다시 생기를 되찾습니다.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로 가득 찹니다(11). 사라졌던 축제와 결혼의 잔치가 돌아오고,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한 자들의 감사제로 성전도 기쁨을 되찾습니다. 일상적인 삶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삶도 ‘처음과 같이’(7) 다 회복돼 즐거움과 기쁨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2) 짐승의 번성(12-13)

 

짐승도 살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예루살렘과 유다에 다시 생명이 자라납니다. ‘산지 성읍들과 평지 성읍들과 네겝의 성읍들과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면과 유다 성읍들에’ 목자들이 양 떼를 쉬게 할 목장이 다시 생깁니다(12-13). 눈으로 세지 못하고 손으로 하나하나 세야 할 정도로 양들이 많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낙담하고 좌절하고 있는 기도의 사람에게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만 유일하게 자신이 계획하시고 약속하시고 그 말이 실제 시간 속에서 이뤄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크고 비밀한 것을 기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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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2-04)

 


내게 기쁨으로 복을 주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32장 36-44절


 

밤은 캄캄하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종종 밤으로 비유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도 이런 밤들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이 어려움을 이길 수입니까?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 사람의 진짜 신앙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어려움을 이겨 가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참고 기다리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은 끝까지 인내하지 못합니다.

 

 

  •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의 손에 넘겨지는 파국적 재앙의 신학적 원인을 알려주신 후에, 여호와께서 그 이후에 있을 구원을 약속해주십니다. 멸망의 원인에 대한 바른 깨달음 없이는 새로운 출발도 없습니다. 우상숭배의 필연적 결과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징계하시는 하나님(36-42)

환자가 자기 병을 모르면 건강 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 알게 되면, 구원 받기 전에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였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비참한 삶이 계속 될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36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말하는 바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긴 바 되었다 하는 이 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37보라 내가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들여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 38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39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40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41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4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 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38-42)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성을 ‘갈대아인의 손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주신(28-35) 후, 회복에 관한 말씀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약속은 예레미야의 탄식에 대한 본격적인 답변으로, 두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단락(36-42)은 유배 민의 귀향과 영원한 언약과 축복을 약속하고, 둘째 단락(43-44)은 유다 온 땅에서 밭이 다시 매매될 것을 약속합니다. 특이하게도 각 단락은 ‘너희’의 탄식을 인용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예레미야 개인의 탄식 기도(16)에 대한 응답으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이기에(26) 원래는 2인칭 단수 ‘너’가 사용돼야 합니다. 이 두 인용문을 제외하면, 고발과 심판의 대상이나 구원의 대상이나 언제나 3인칭 복수 ‘그들’로 나옵니다. 기도에 따른 여호와의 응답이지만 예레미야에게 직접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문맥으로 보면 예레미야 개인의 탄식이 여호와에 의해 ‘너희’ 공동체의 탄식으로 수용된 것입니다. 응답이 공동체를 지향하기에 36절은 신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용합니다. 사실 36절과 43절에 인용된 ‘너희’의 탄식은 예레미야의 탄식(25b)과 내용상 차이가 없습니다. ‘너희’와 예레미야 모두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을 탄식 합니다. 정리하자면, 심판 이후를 내다보는 예레미야의 탄식과 간구는 공동체를 대신하여 드려진 것으로, 그의 기도와 여호와의 답변은 멸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⑴ 성에 관한 ‘너희’ 말의 인용(36)

 

‘그러나’는 원문에 따라 연속성을 보여 주는 ‘그러므로 이제’로 옮겨야 합니다. 심판(28-29절)과 고발(30-35절)로 이뤄진 첫 번째 말씀도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36절에는 ‘이제’가 더 나옵니다. 심판의 말씀과 구원이 모두 27절의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에 걸리는데, 무게중심이 구원에 놓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상숭배의 늪에 빠진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 징벌하시지만, 그분의 시선은 처음부터 심판 이후의 회복을 내다봅니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긴 바 되었다’는 24절의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이 성이 이를 치는 갈대아인의 손에 넘긴 바 되었으니’와 대체로 일치합니다.

 

⑵ 영원한 언약(37-40)

 

첫 번째 약속은 유배민의 귀향과 관련됩니다. 큰 진노로 민족들 가운데로 쫓아 보내셨던 여호와께서 이들을 다시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하게 살게 하실 것입니다(38; 참조, 29:14).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신 분께서 이제 구원자로 함께하십니다. 통속적 사고에 따르면 한 민족의 멸망은 그 민족이 섬기는 신의 패배를 의미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배는 여호와의 징벌적 진노의 구체적 모습입니다. 심판에서는 여호와의 능력이 부정적으로 표출된다면, 구원에서는 그분의 능력이 긍정적으로 과시됩니다. 이 곳은 예루살렘과 유다를 가리킵니다. 번역을 달리했지만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는 21:5의 ‘진노와 분노와 대노’와 같습니다. 31절에서는 처음 두 표현 ‘노여움’과 분만 나옵니다. 두 번째 약속은 신학적 차원에 속합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시고 당신 백성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음은 다른 한편으로는 출애굽 이후 계속돼온 언약 관계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파기된 언약 관계의 회복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셨던 것처럼 이제 민족들 가운데 유배살이하던 자들을 돌아오게 하시고 언약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들은 그 분의 백성이 됩니다(38; 참조 . 참조 24:7; 30:22; 31:1,33). 회복된 언약 관계가 파탄에 직면하는 일이 없도록 언약을 지킬 수 있는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우상들을 겸하여 섬기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다시는 우상에게 한눈팔지 않고 당신만 섬길 수 있도록 여호와께서 유배민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십니다(39; 참조. 31:33). ‘한 마음’(참조. 역대상 12:30; 역대하 30:12)은 나누이지 않은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우상들을 겸하여 섬기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한 길’도 의미상 다르지 않습니다. 혼합주의에 빠진 자들은 열심히 우상을 찾아다니다가도 환난을 당하면 또 여호와를 찾아와서 구원을 요청했습니다(참조, 2:27).

앞으로는 두 마음을 품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고 오직 여호와를 경외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까지도 복을 받습니다. 새로이 맺게 될 언약(참조. 31:31-34)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쌍무적이었던 시내산 언약과 달리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의무를 지시기에 언약은 파기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고 그들이 잘되게 해주시고, 또 이스라엘이 그분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그들의 마음에 경외심을 주십니다(40).

 

⑶ 축복(41-42)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언약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필요조건을 충족시켜주신다. 언약의 파기가 초래한 저주의 시대가 끝나고 언약의 회복과 함께 축복의 시대가 전개됩니다. 여호와께서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가나안에 심으십니다(41). ‘분명히(성실하게, 신실하게) 심다.’는 구약성경에 한 번만 나오는 표현으로, 구체적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2:21과 관련된 표현이라면 왕정 시대처럼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로 변질하는 일이 없게 심으신 포도나무를 성심껏 돌보실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가 여호와께 적용된 경우도 여기가 유일합니다. 원래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고 기대하셨던 순종의 모습입니다(참조, 신명기 4:29; 6:5 등등). 이스라엘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당신을 섬기도록 여호와께서 직접 본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둥을 돌리지 않듯이 이스라엘은 여호와에게서 돌아서지 말아야 하고(40), 여호와께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이스라엘을 돌보시듯이 이스라엘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여야 합니다.

42절은 37절의 경우처럼 심판과 구원을 하나의 연속된 사건으로 언급합니다.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여호와께서 이들을 유배지에서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하시고, 이 백성에게 이 (모든) 큰 재앙’(참조. 16:10)을 내리신 그분께서 이제는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 십니다.

 

유다의 재건(43-44)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혹독하게 징계하신 것은 약속하신 복을 온전히 부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물로 가득 찬 그릇은 온전히 비워야만 생수로 채울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빈 그릇처럼 사람도 짐승도 없는 폐허가 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다시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하시고, 평지와 고지가 다 유다 백성의 일터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43너희가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없으며 갈대아인의 손에 넘긴 바 되었다 하는 이 땅에서 사람들이 밭을 사되 44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방과 유다 성읍들과 산지의 성읍들과 저지대의 성읍들과 네겝의 성읍들에 있는 밭을 은으로 사고 증서를 기록하여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포로를 돌아오게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3-44)

 

마지막 두 절은 다시 처음의 표적행위(7-15)로 돌아갑니다. ‘너희’의 말은 내용상 25b절에 일치합니다. 25절과 36절에서는 ‘이 성’(예루살렘)이 갈대아인의 손 또는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졌다고 말하고, 여기서는 ‘이 땅’(유다 땅)이 갈대아인의 손에 넘겨졌다고 말합니다.

 

⑴ 밭 매매의 재개(43)

 

예루살렘의 멸망은 곤 유다의 멸망입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이 밭을 사되’는 15절의 경우처럼 수동의 문장으로, 매매 행위가 강조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의 운명을 되돌리십니다. 짐승마저 살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된 에루살렘과 유다에서 밭을 사고파는 일이 재개됩니다. 사람들이 돈을 주고 밭을 사고 제약서에 서명하고 봉인하고 증인을 세웁니다(10). ‘이 땅’의 범위가 유다로 한정되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제외됩니다(참조. 17:26; 33:13).

 

⑵ 온 땅에서의 밭 거래(44)

 

‘베냐민 땅’은 예루살렘 북쪽 지역을, ‘예루살렘 사방’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지역을, ‘유다 성읍들’은 방어시설이 갖춰진 유다의 주요 성읍들을, ‘산지’는 예루살렘 남쪽의 유다 산지를, ‘저지대’는 유다 산지와 헤인 평야 사이의 완만하게 경사진 구릉지대를, ‘네겝’은 유다 산지 남쪽의 광야 지대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심판은 그분의 떠남에 있었다면, 회복은 그분의 함께하심에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오게 해주시고 새 언약을 세워주시고, 허락한 모든 복을 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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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2-03)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이유

예레미야 32장 26-35절


 

세상의 갑들은 죄를 지어도 잘 나가고 잘 살아갑니다. 죄와 동거동락하면서도 자책도 없습니다. 너나 잘하라고 말하지만 나만 잘해선 요동 않는 사회입니다. 열어놓은 보마다 죄악이 무한 방류되는 4대강 수질만도 못한 이 사회를 어찌해야 합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끙끙 앓고 계십니다.

 

  •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한 여호와께서 응답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여호와의 무관심이나 무능력이 불러온 참사가 아닙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배반과 우상숭배가 초래한 여호와의 징벌적 재앙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26-27)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탄식 밖에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절망의 상황에서 생명을 만들어 오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환경에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수 있습니다. 절망을 보고 절망하든지, 아니면 그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26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7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26-27)

 

예레미야는 조카 하나멜의 기업 물을 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크게 확대해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시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선지자적 행동입니다. 나라가 망하면서 곧 포로로 잡혀 가야한 상황에서 땅을 사고파는 일이 아무 의미 없어보였지만, 하나님께 반드시 이 나라를 회복시키실 것이며, 하나님 나라는 다시 서게 될 것이니 그 땅을 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점점 멸망되어갈 쯤에 하나님께서 ‘밭을 사라’는 명령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예레미야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탄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과거에 어떤 놀라운 일을 이루셨는지를 기억하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⑴ 말씀의 계시(26)

 

예레미야의 기도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무능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우상숭배가 초래한 징벌이었습니다. 결국에는 회복의 메시지를 주시지만, 그 전에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선포하시고 그 이유를 알려 주십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원한다면 멸망의 원인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의 구원자였습니다. 진노는 일시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 행한 대로 갚으셨다면,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처럼 사라졌을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렇게 작은 나라가 이처럼 오래 유지된 경우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의 우수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6절은 연결구에 해당합니다. 1절의 경우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지만, 예레미야에게 직접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할 그분의 상대는 ‘너희’입니다. ‘너희’에게 전달하도록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⑵ 여호와의 자기소개(27)

 

여호와의 답변은 그분의 자기소개로 시작합니다. ‘나는 여호와요’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24:7에서 여호와께서는 제1차 바벨론 유민들에게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모든 육체의 하나님’은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현재의 문맥에서는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시며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는’(19) 하나님에 연결됩니다.

구체적으로 24절과 관련해 보자면, 갈대아인들이 예루살렘을 쳐서 빼앗지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이들은 때가 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는 예레미야의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입니다. 여호와의 무한 능력을 인정하는 예레미야에게 여호와께서는 당신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겠냐고 물으십니다. 물론 여호와의 질문은 답변을 요구하지 않는 수사적 질문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반복도 아닙니다.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창조와 관련해 이 말을 하고, 여호와께서는 역사, 곧 이스라엘의 심판과 구원과 관련해 이 말을 하십니다. 전자가 창조에 근거한 일반적 진술이라면, 후자는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실행 능력과 관련한 주장입니다(참조. 창세기 18:14).

 

심판 받을 우상숭배(28-29)

자신이 기도한 대로 응답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무력하고 무능력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자신도 도움도 안 되고 하나님께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안 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 길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유다의 멸망이 여호와의 연약함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징벌 때문이었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28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이 성을 갈대아인의 손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길 것인즉 그가 차지할 것이라 29이 성을 치는 갈대아인이 와서 이 성읍에 불을 놓아 성과 집 곧 그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며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려 나를 격노하게 한 집들을 사르리니(28-29)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모든 육체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 불에 타게 하십니다. 불가능을 모르시는 분의 결정이기에 성은 어떤 경우에도 멸망을 피하지 못합니다. 28절은 ‘바벨론 왕의 손에’ 대신 ‘갈대아인의 손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가 나온 것을 제외하면 3b절 후반의 말씀과 문자적으로 일치합니다. 예루살렘의 점령으로 재앙이 끝나지 않습니다. 바벨론 점령군은 성에 불을 질러 그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며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려 나를 격노하게 한 집들을 모두 잿더미로 만들 것입니다(29). 성의 심판이 만연한 우상숭배 때문임을 시사해줍니다. 지붕에서의 분향은 아마도 가나안을 통해 받아들인 앗수르와 바벨론의 일월성신 숭배를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주민은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렸습니다. 성 안에 있는 집들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상숭배가 저질러졌습니다.

예레미야는 19:13(참조 7:18)에서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고 멸망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이유(30-35)

하나님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신봉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부리는 하나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하나님을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 표현해도 그분께 받은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우리 지식 안에 가두려고 합니다.

 

30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예로부터 내 눈 앞에 악을 행하였을 뿐이라 이스라엘 자손은 그의 손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나를 격노하게 한 것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이 성이 건설된 날부터 오늘까지 나의 노여움과 분을 일으키므로 내가 내 앞에서 그것을 옮기려 하노니 32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모든 악을 행하여 내 노여움을 일으켰음이라 그들과 그들의 왕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제사장들과 그의 선지자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다 그러하였느니라(30-35)

 

본문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우상을 숭배하고, 심지어 자녀를 몰렉에게 제물로 바치는 등 가증한 행위를 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벌어졌으며, 이는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은 이로 인해 그들에게 큰 재앙을 내리기로 결심하셨습니다.

 

⑴ 뿌리 깊은 죄악(30-31)

 

먼저 30-31a절은 역사적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점령한 이후 줄곧 우상을 숭배하면서 여호와를 노하게 할 뿐이었습니다(30; 참조. 23). ‘예로부터’는 문자적으로는 ‘어릴 패부터’, ‘젊을 때부터’로, 광야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부터를 의미합니다(참조, 3:4,24,25; 22:21; 31:19). 그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의 실체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서 저지른 가장 대표적인 악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육체의 하나님’을 떠나 육체에 불과한 자들이 제 손으로 만든 것을 신으로 승배했습니다. 뿌리 깊은 반역의 중심에는 여호와의 성전에 자리 잡은 예루살렘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건설된 날부터 오늘까지’ 여호와의 ‘노여움과 분’만 일으켜왔습니다. 예루살렘의 타락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줄곧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것처럼 예루살렘도 성에 세워진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호와의 진노를 돋우기만 해왔습니다(참조, 겔 16:1-52). 더 이상의 기다림이 무의미해졌기에 마지막 결정이 내려집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앞에서 성을 치워버리기로 하십니다(31b). ‘옮기려 하노니’는 ‘치워버리겠다’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⑵ 편만한 죄악(32-33)

 

이제 악의 편만을 고발합니다.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는 악행은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전 722년에 멸망한 이스라엘이나 멸망을 앞둔 유다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함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 둘은 한 악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였습니다. 악을 저지른 북왕국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한 것을 보았음에도 유다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왕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제사장들과 그의 선지자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앞에 나온 ‘유다 자손’의 구체적 설명입니다.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는 물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 왕궁과 성전에서 유다의 산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온갖 악을 저지르며 여호와를 화나게 했습니다. 이들의 불순종은 의도적이며 의식적이었습니다(33). 이들은 여호와께 얼굴이 아니라 등을 보이고 그분에게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9:14)을 따라가는 자들을 돌려세우기 위해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해 줄곧 가르치셨지만, 이들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맹목적 질주 앞에 그분의 가르침과 훈계(교훈)는 허공을 가를 뿐이었습니다.

‘가르치되 끊임없이 가르쳤는데’는 여호와께서 이들의 얼굴을 당신께로 되돌리게 하려고 얼마나 많이 애쓰셨는지를 보여줍니다. ‘듣지 아니하며’는 현재분사 문장으로, 불순종이 이들의 유일한 답변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23). 여호와의 심판은 유다 자손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끝난 후의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선택이었습니다.

 

⑶ 우상숭배(34-35)

 

앞에서 막연히 언급한 우상숭배의 악을 구체적으로 고발하는 34-35절은 일부를 제외하면 7:30b-31의 반복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증한 물건들을 세워 더럽혔습니다(34, 참조. 열왕기하 23:4-7). 당신 백성인 이스라엘에 의해 여호와께서 당신 집에서 우상들과의 동거를 강요받으십니다. 우상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면 성전 밖의 형편이 어떠할지는 뻔했습니다. 우상들에게 여호와의 성전을 내준 자들은 예루살렘 남서쪽을 두르고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다 바알을 위한 산당을 세우고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몰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습니다(35). 예루살렘 주민들은 몰렉에게 자기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어린아이 회생제사가 여호와와 전혀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는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는 사람들이 어린아이 희생 제사를 여호와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간주했음을 시사해 줍니다(참조. 출애굽기 22:29b; 에스겔 20:25-26; 미가 6:6-7), 아마도 혼합주의에 빠진 자들은 몰렉 숭배가 여호와 예배 안에서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몰렉은 어린아이 희생 제사와 관련해 등장하는 신의 이름입니다(참조. 레위기 18:21; 20:2-5; 열왕기하 23:10). 예루살렘 성이 성전에서부터 주변의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우상에의 역겨운 짓거리로 온통 더럽혀졌는데, 그런데도 여호와께서는 은혜를 베푸시어(18) 예루살렘 성을 지켜주셔야 하였습니까?


불순종과 반역,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격노케 한 이스라엘의 일대기를 듣다 보면, 임박한 심판 앞에 애도의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닌 하나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범람하는 홍해만큼이나 출렁이는 죄악의 수위를 높이는 일에 우리 또한 기여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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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2-02)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32장 16-25절


 

이스라엘과 예레미야가 바라본 희망은 ‘기승전’-‘희망’이라는 점에서 결론 부분에서 같으나, 심판의 기간이 2년과 70년으로 현격하게 달랐습니다.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심판 이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란 점에서 희망의 결도, 질도, 속도도 달랐습니다.

 

  •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조카 하나멜의 밭을 구입한 예레미야가 여호와께 기도를 드립니다. 밭 구매에 담긴 신학적 의미(15)를 전달받았지만, 예레미야는 무엇인가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여호와께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그 응답은 예루살렘의 멸망은 여호와의 무관심이나 무능력이 불러온 참사가 아닙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배반과 우상숭배가 초례한 여호와의 징벌적 재앙입니다.

 

도입부(16)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돌보시지만, 결코 죄는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았기에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공정하게 중립을 지키며 남은 자비의 가능성을 찾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회복과 자비의 약속을 믿고 백성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레미야의 태도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6내가 매매 증서를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넘겨 준 뒤에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16)

 

현재의 문맥에서 예레미야의 기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는 도입부인 16절과 기도를 마무리하는 25절에 의해 앞 단락의 표적 행위에 연결됩니다. 17절부터 24절까지의 기도에는 밭을 산 사건에 관한 언급이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24.25절을 제외한다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을 고발하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강조 능력과 그분의 크신 은혜를 찬양하지만(17,18), 기도의 전체 분위기는 차라리 무겁습니다. 24,25절에서는 탄식하는 예언자의 음성도 들립니다. 구원 약속이 주어진 다음에 드려진 기도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구원 약속과 예레미야의 탄식 어린 기도가 따로 노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사실 24-25절은 예레미야가 15절의 표적 행위 해석을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구원의 말씀으로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의 기도가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로 시작함도 우연은 아닙니다. 매매 계약서를 바룩에게 넘겨주고 난 뒤 예레미야는 감사와 기쁨으로 여호와께 나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혹스러움과 슬픔이 그로 여호와께 기도하게 했습니다. 기도의 마지막은 한 걸을 더 나아가 원망과 탄식으로 가득 찹니다.

예루살렘의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갔는데 ‘그런데도 주 여호와여, 당신께서는 저에게 돈을 주고 밭을 사고 증인들을 세우라 하고 말씀하셨나이다 이 성이 갈대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는데도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 망했는데,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레미야의 복잡한 심경은 아마도 15절과 제1차 유배민들에게 주어진 29:5-14의 말씀을 비교해보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능동으로 옮겼지만, 15절은 수동의 문장으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땅에 있는 집과 밭과 포도원이 다시 사지리라,’ 동사 ‘사다’의 주어보다 목적어가 강조됩니다. 구원의 대상이 불분명해집니다. 단순히 멸망 이후의 삶이 어떠할지를 보여 주는 말처럼 보이 기도 합니다. 반면에 29:5-7는 ‘너희’에게 주는 명령문으로 구원의 대상이 분명합니다.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17-22)

하나님께서는 순종하고 주의 율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하나님의 약속을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닮아 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17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18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버지의 죄악을 그 후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 19주는 책략에 크시며 하시는 일에 능하시며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시며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 20주께서 애굽 땅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고 오늘까지도 이스라엘과 인류 가운데 그와 같이 행하사 주의 이름을 오늘과 같이 되게 하셨나이다 21주께서 표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22그들에게 주시기로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에게 주셨으므로(17-22)

 

본문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을 찬양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공의롭게 보응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공의를 인정하며 그분을 신뢰합니다.

 

⑴ 무한 능력의 창조주(17)

 

예레미야가 기도를 시작하는 ‘슬프도소이다’(참조. 1:6, 4:10; 14:13)는 예레미야의 당혹스럽고도 억눌린 마음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전체 기도에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덧칠해줍니다. ‘주 여호와’는 기도를 마감하는 25절에 한 번 더 나오는데, 탄식과 호소의 음성을 담고 있습니다. 당혹스러움을 표출한 뒤에 예레미야는 먼저 여호와께서 창조주이심을 인정합니다(참조. 10:12).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큰 능력과 펼친 팔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입니다(참조. 27:5), ‘큰 능력과 펼친 팔’은 출애굽과 창조와 관련해 각각 두 번 사용됩니다. ‘큰 능력과 펼친 팔’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참조. 신명기 9:29, 열왕기하 17:36) 여호와가 바로 큰 능력과 펼친 팔로 세상 만물을 만드신 분입니다(참조, 예레미야 27:5; 32:17). ‘주께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는 태초에 관한 언급 이상입니다. 열왕기하 19:15에서 앗수르 왕 산헤립의 위협에 직면한 히스기야 왕은 성전으로 올라가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하며 여호와의 도움을 간구합니다. 능력으로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여호와께 할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참조, 창세기 18:14). 예레미야의 고백은 일종의 간구이기도 합니다. 무한 능력의 여호와께서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를 외칠 수 밖에 없는 무거운 상황에 개입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의 간접적 표현입니다.

 

⑵ 생존을 결정하신 하나님(18-19)

 

창조주 여호와의 무한 능력을 인정한 예레미야는 십계명의 일부를 인용해 내의 크신 은혜를 주장합니다(18).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버지의 죄악을 그 후손의 품에 갚으시니이다’(18a). 전반은 출애굽기 20:6(참조, 신명기 5:10)의 문자적 인용이고, 후반은 20:5b(참조 5:9b)과 내용 상 일치합니다. ‘은혜’(헤세드)는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을 가리키고, ‘갚으시오니’로 옮긴 동사 쉴렘(שלם)은 ‘부당하게 발생한 손실에 상응해서 보상하다’를 뜻합니다. 수천 대에 걸친 여호와의 은혜와 두 세대를 넘지 못하는 그분 보응의 대비는 각각 창조와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전후의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원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은혜가 거둬진 것 같은 이스라엘의 절망적 현재(24)와 관련해 이 말씀을 인용 것 같습니다. 당면한 재앙이 가나안 정착 이후 계속된 순종에 대한 여호와의 징벌이기에 직접 도움을 구하지 못하고 다시금 간접적으로 은혜를 수천 대에 걸쳐 베푸시는 여호와의 성품에 호소합니다.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19절의 말씀은 17절에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는 크신 지혜와 능하신 행동으로 인류를 통치하십니다. 그분은 결정하시고 그 결정을 실행하시는 분입니다. ‘책략’은 ‘조언’, ‘결정’, ‘계획’을 의미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분께서 땅 위의 모든 사람을 빠짐없이 지켜보시고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에 따라 갚아주십니다. 창조주 여호와께서 인류(사람의 아들들)의 재판관이 되십니다.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시기에’ 그분의 판결은 언제나 공의롭습니다. 18절과 함께 보자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과 관련해) 은혜가 한없이 크신 분이고, (인류와 관련해) 각 사람의 행실을 살펴 갚아주시는 분입니다. 여호와께서 은혜를 거두신다면, 이스라엘도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에 대해 그분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3) 출애굽과 땅의 선물(20-22)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언약적인 은혜로 보호하실 것입니다. 또 그 능력으로 자기 백성이라도 거역하고 제 길로 가면 심판하실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지혜와 모략을 당할 자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시선이 인류에서 이스라엘로 옮겨집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 가운데 먼저 출애굽 사건을 언급합니다. 출애굽은 과거사에 속하지만, 그때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행하셨던 표적과 기사는 그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오늘까지도 이스라엘과 인류 가운데 그와 같이 행하사 주의 이름을 오늘과 같이 되게 하셨다’(20),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당신 이름을 떨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곧 여호와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경험하는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21절은 출애굽 사건에 초점을 맞춥니다. 표적과 기사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해방하실 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한 또 다른 큰 은혜는 가나안 땅의 선물입니다. 조상들에게 한 맹세를 지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22 참조 11:5). 여호와께서는 당신 맹세(약속)에 신실하셨습니다.

 

가나안 정착 이후의 불순종과 그 결과(23-25)

예언대로 멸망이 필연적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던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벨론에 항거한 자들에게 전혀 살아남을 가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손길을 겸허히 수용하고 단순히 순종할 때,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과 감사’가 찾아옵니다.

 

23그들이 들어가서 이를 차지하였거늘 주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주의 율법에서 행하지 아니하며 무릇 주께서 행하라 명령하신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나이다 24보옵소서 이 성을 빼앗으려고 만든 참호가 이 성에 이르렀고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이 성이 이를 치는 갈대아인의 손에 넘긴 바 되었으니 주의 말씀대로 되었음을 주께서 보시나이다 25주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은으로 밭을 사며 증인을 세우라 하셨으나 이 성은 갈대아인의 손에 넘기신 바 되었나이다(23-25)

 

이스라엘의 길은 여호와의 길하고는 전혀 달랐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23절은 이를 삼중적으로 고발합니다. ‘주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주의 율법에서 행하지 아니하며 무릇 주께서 행하라 명령하신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다’(23),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일시적·우발적 현상이 아니라,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계속 나빠져만 간 의도적인 악행이었습니다. 여호와께는 은혜를 거두고 이들의 행위대로 벌하시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는 바벨론 군대는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이 초래한 되돌릴 수 없는 파국입니다(24).


예레미야는 멸망의 한가운데서 급진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대신, 하나님에 대한 근원적인 묵상과 현실적인 질문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알수록 흑화에 가까운 말씀 속에서도 마음을 타일러 희망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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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2-01)


믿을 수 없는 심판과 약속

예레미야 32장 1-15절


 

바둑이나 장기는 잘 뒤는 사람을 ‘고수(高手)’라고 하고, 미숙한 사람을 ‘하수(下手)’라고 합니다. 고수들은 하수들이 놓는 방법에 따라 다음 수를 읽어서 대처를 잘 합니다. 그러나 하수들은 고수들이 진행하는 수를 모르기 때문에 답답하기만 합니다. 하수들에게는 고수들의 훈수하나가 승패를 좌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역사들을 보시면서 모든 것을 환히 꿰뚫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훈수를 받을 때, 지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들이 죄의 길을 고집할 때, 그들을 바벨론이라는 용광로에 넣으셔서 징계하십니다. 이는 그들을 소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쌌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도록 예언하여 예레미야는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그런 중에도 하나멜의 밭을 사라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시위대 뜰에 갇힌 이야기(1-5)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진심으로 의지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선한 충고를 물리치고, 기도를 멈추지 않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1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2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3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1-5)

 

예레미야는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말을 전했습니다. 계속해서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침략 당해 남 유다 나라가 망하고,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 왕에게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시드기야 왕이 통치한지 10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에워 쌓습니다. 이 사건은 유다 멸망하기 1년 전에 일어난 상황입니다.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에 멸망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 때문에 예레미야는 궁중 시위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⑴ 사건이 발생한 시기(1)

 

원문에는 ‘여호와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말씀임을 분명히 합니다. 16절부터 25절까지는 예레미야의 기도이고, 26절에 다시 계시 사건의 공식이 나오기에 1절은 일차적으로는 6-15절의 표제이지만, 예레미야의 기도가 독자적 단락이 아니라 전후의 단락에 의존적이기에 32장 전체의 도입부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25:1의 경우처럼 유다 왕의 연대와 바벨론 왕의 연대가 함께 주어집니다. 유다의 역사가 바벨론의 역사에 연동된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열째 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여덟째 해의 영향아래 놓였음을 시사해줍니다. 바벨론 왕이 유다의 마지막 시간을 결정합니다.

 

⑵ 시위대 뜰의 예레미야(2)

 

이제 말씀이 주어진 때의 외적 상황을 알려줍니다. 바벨론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고, 예레미야는 왕궁의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언제부터 시위대 뜰에 구금당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처음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예레미야는 자유로웠습니다(참조 37:35).

첫 번째와 두 번째 포위 사이(참조. 37:11-16) 또는 바벨론 군대가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성의 함락이 임박했을 때(참조. 38: 1-6) 체포됐던 것 같습니다.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이 예레미야가 구금된 장소로 나옵니다. 왕궁 단지 안에 있는 시위대의 역할은 왕과 왕궁을 보호하는 것으로, 시위대 뜰에 감옥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왕궁의 시위대 뜰은 안전한 곳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⑶ 시위대 뜰에 갇힌 이유(3-5)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히게 된 배경을 보여줍니다.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가 성의 패망과 자신의 유배를 선포했다고 그를 시위대 뜰에 가뒀습니다. 예레미야의 체포와 구금에 관해서는 37:11-21과 38:1-13을 참조하면 됩니다. 시드기야 왕이 인용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시작(3a)과 마지막(5b)을 제외하면 모두 시드기야 개인의 운명에 관한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갈대아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로잡혀 바벨론 왕 앞에 끌려가 그에게 심문을 당하고 바벨론으로 잡혀가 여호와께서 그를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45a). 처음의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와 마지막의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는 예루살렘의 운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주기로 결정하셨기에 갈대아인들과 싸울지라도 이길 수 없습니다. 시드기야의 유배와 예루살렘의 패망은 여호와께서 결정하신 이들의 운명입니다.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5)는 때가 되면 여호와께서 다시 돌보실 것을, 곧 바벨론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약속하시는 말처럼 들립니다(참조. 15:15, 27:22, 29:10: 32:5). 39:4-7; 52:5-11이 보고하는 시드기야의 비참한 운명하고는 매우 다릅니다. 52:11에 따르면 바벨론으로 끌려간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다. 5b절의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는 여호와의 도움으로 바벨론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선동하는 자들에게 주는 답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구원자로 아는 자들은 주전 701년의 경우처럼 여호와께서 극적으로 개입해 구원해주실 것을 기대하겠지만(참조. 21:2), 이는 헛된 소망입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자로 알고 있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기로 하셨습니다.

시드기야의 말은 5절을 제외하면 대체로 34:2-3의 인용입니다. ‘내가 이 성을’부터 바벨론으로 끌려 가리까지는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한다. 후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통치 아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에(34:1) 여호와께서 시드가야에게 전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특히 첫 번째 문장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예레미야의 선포와 충돌하는 내용으로, 시드기야의 오해나 개인적 첨가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밭 구매에 관한 예레미야의 보고(6-15)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명령이 이치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제 곧 포로로 잡혀갈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밭을 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혹시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라고 느껴 본 적이 없습니까? 오늘 당신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습니까?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은 어렵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약속의 말씀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순종은 지금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상의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6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9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12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4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5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6-15)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사촌 하나멜의 밭을 사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밭을 사고, 증서를 봉인하여 저장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이 장차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복과 재건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이 행동은 포로 생활 후 땅을 다시 소유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순종합니다.

 

(1) 여호와의 계시적 정보(6-7)

 

여호와께서 계시로 예레미야에게 곧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신다. ‘네 숙부 살롬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7)

 

(2) 하나멜의 방문(8)

 

그리고 여호와께서 알려주신 대로 그대로 일어납니다(8; 참조. 사무엘상 9:15-17; 에스겔 24:15-18, 33:21-22). 예레미야는 조카 하나멜의 방문이 여호와의 결정임 깨닫습니다. 하나멜이 어떤 이유에서 삼촌 예레미야에게 땅을 팔려 줬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나’(8)로부터 추론해보면 아마도 하나멜은 빚을 갚지 못해서 채권자에게 땅을 넘겨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족이나 씨족이 소유한 땅은 상속 재산에 속했습니다.

하나멜은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친척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고엘의 권리를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던 것 같습니다. 고엘 제도는 씨족사회에 뿌리를 둔 전통으로 집안의 일원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곤경에 처하거나 종이 되었을 때는 그 빚을 갚아주거나 속량해주어야 합니다(참조. 레위기 25:23-28, 47-49; 민수기 35:19-27, 룻기 3:12; 4:14).

 

(3) 하나멜의 밭 구매(9-14)

 

예레미야는 고엘의 자격으로 조카 하나멜에게서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기로 하고 은 십칠 세겔을 달아줍니다(9). 세겔은 무게 단위로 대략 11.4그램에 해당합니다. 예레미야는 200그램 못 미치는 은을 달아 주고 밭을 사는데, 이것이 적당한 가격인지 또는 전시라서 싼값에 사들인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10-11절은 통상적인 계약서 작정 과정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와 하나엘과 증인들이 계약서에 서명하고 봉인합니다. 서명은 주로 이름과 직분이 새겨진 도장이 사용됐습니다. 매매 계약서는 빈 공간을 기준으로 둘로 나뉜 두루마리에 동일하게 두 번 적고 그 반은 말아 봉인하고 바깥쪽에 서명합니다. 다른 반은 필요하면 펴볼 수 있도록 그냥 말아둡니다. 계약의 진위가 의심스러울 때는 봉인한 계약서의 봉인을 풀고 조사합니다. 매매의 법적 절차가 마무리된 후에 예레미야는 매매 계약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그 매매 계약서, 곧 봉인한 매매 계약서와 봉안하지 않은 계약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넘겨주고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도록 토기에 넣게 합니다(12-14). 네리야의 아들 바룩은 주전 605년 이전부터 동역자와 서기관으로 예레미야와 함께했습니다. ‘앞에서’(12)를 세 번 사용해(원문에 따르면 하나엘 앞에도 나온다) 매매 계약서의 전달과 보관 행위의 공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당사자들 외에도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이 증인으로 참여합니다.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토기에 넣어 보관할 뿐만 아니라 증인들도 많기에 예레미야가 하나멜과 맺은 매매 계약은 잊히지 않습니다.

 

(5) 밭 구매의 해석(15)

 

마지막 15절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 행해진 밭의 매매를 표적 행위로 해석해줍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유다가 멸망하기는 하지만 영원히 폐허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사고팔고 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집과 밭과 포도원의 거래 재개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한 자들에게 주어진 구원 약속으로는 너무 소박하게 보이 기도 합니다. 뒤따르는 예레미야의 기도는 이를 배경으로 합니다.


믿기 힘든 현실, 그것이 이스라엘이 믿어야 할 현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심판을 수용하는 데서 구원은 시작됩니다. 오독(誤讀)은 오판(誤判)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이 우선이라면 과연 현실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생각한 결말과 하나님의 대단원이 다를 경우 과감히 자신 생각을 철회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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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1-03)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31장 23-40절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모세와 세운 언약이 지워지지 않도록 언약을 돌에 새겨서 주셨습니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하고 있는 타락한 모습을 보고 십계명 돌 판을 깨뜨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어기지 않고 잘 지킬 수 있습니까?

 

  •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진 언약 관계를 새롭게 갱신하십니다. 언약 파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기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새 언약은 죄를 용서하심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새로운 관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도 재건시켜 주실 것도 약속하십니다.

 

유다를 회복시키실 하나님(23-26)

항상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속적인 부자 관계를 이루어 가시길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암울한 죄악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23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 것이며 24유다와 그 모든 성읍의 농부와 양 떼를 인도하는 자가 거기에 함께 살리니 25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 하시기로 26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23-26)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따라 살아가기보다는 죄악으로 가득한 암울한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파기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물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혹독한 바벨론 포로가 징벌이긴 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1) 의로운 처소(23)

 

앞 15-20절이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 당한 북왕국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주어진 말씀인 반면에, 본문 23-26절은 주전 587년 바벨론에 멸망당한 유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심판을 받고 유배 갔던 유다의 운명을 여호와께서 되돌리실 것입니다. 고토로 돌아온 유배민들이 여호와의 축복 가운데 시온(과 가나안)에서 풍족하고도 평화롭게 살게 될 것입니다(23). ‘의로운 처소’는 여호와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의로운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2) 내적인 평안(24-25)

 

24-25절에서는 12-14절에서 시온에 주어진 축복의 약속이 유다로 확대됩니다. 시온을 중심으로 ‘유다와 그 모든 성읍’(성읍에 거주하는 자들)과 농부와 목자들이 함께 사이좋게 지냅니다. 지친 자들(‘피곤한 심령’)이 물을 마음껏 마시고 허약해진 자들(‘연약한 심령’)이 모두 배불리 먹습니다. 저주 아래 놓였던 땅이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시는 의롭고 거룩한 땅이 됩니다.

 

(3) 외적인 안전(26)

 

26절의 ‘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는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미래의 회복에 관한 말씀을 하나의 꿈이나 꿈에서 본 이상으로 해석해주는 말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이는 본문이 ‘꿈’이 아니라 ‘잠’을 말하고 있음을 무시한 이해입니다. ‘내 잠이 달았다’는 걱정 근심이 없는 평안한 삶의 표상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구원은 먼 미래에 있을 사건이지만, 예레미야는 이를 이미 맛보고 있었습니다. 유배민들의 구원과 회복에 관한 약속은 예레미야의 단잠 안에서 벌써 현재화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심판의 극복(27-30)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범죄한 백성들을 심판하지만 돌아올 기회를 주십니다. 돌아온 자들에게 다시 회복시키는 복을 주십니다.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징계는 심판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입니다. 모든 것을 잃게 될 철저한 절망의 날이 지나고 회복과 소망의 날이 올 것입니다.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9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30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27-30)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들을 다시 심으시고, 각 사람은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며 자기 자신을 비판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의 약속을 나타냅니다.

 

⑴ 축복의 회복(27-28)

 

유배에서 돌아오는 것은 회복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전쟁과 멸망보다 더 힘겨운 것은 그 이후의 생존이었습니다. 파괴된 고향에 남은 자들은 황폐해진 땅을 일구며 힘겹게 생존을 이어가지만, 일상사가 된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치안 부재에 따른 폭력과 약탈에 절망적인 삶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생존을 위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환경이 모두 남김없이 파괴됐기에, 아이들이 태어나더라도 살아남지를 못했습니다. 주민 수가 계속 줄어들어 민족의 유지조차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사라지고 있는데 여호와께서 주신 미래의 구원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현실이 너무 절망적인데, 이는 이스라엘의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고, 여호와께서 개입하시면 그냥 극복될 수 있는 절망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려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다시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생명을 끊으셨던 여호와께서 사람과 짐승의 생명력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주거지에는 사람이, 숲에는 짐승이 다시 많아집니다.

28절에 사용된 일곱 개의 부정사 가운데 다섯 번째 ‘괴롭게 하던’을 제외한 여섯 개는 1:10에도 나옵니다. 여호와와 예레미야의 일치를 보여줍니다. 전에 이스라엘의 심판을 지켜보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을 지켜보십니다. 심판이 그분의 계획에 따라 집행됐던 것처럼 미래의 구원 또한 그분의 계획에 따라 그대로 이뤄집니다.

 

⑵ 죄책의 문제(29-30)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된 이유를 하나님께 대한 죄악의 보응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죄책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죄와 책임이라는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제기했습니다(참조. 겔 18장). 조상의 잘못으로 나라가 멸망했는데, 왜 그 멸망에 관여한 적이 없는 후손이 유배살이를 해야 합니까? 본문은 이에 대한 사변적 설명을 거절하고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내다볼 것을 권면합니다. 구원 시대에 각 개인은 자기 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집니다.

 

용서에 기초한 새로운 언약(31-34)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로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시험에 들도록 했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시험에 들었던 사람은 바로 자신이란 것입니다. 믿음은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며 자신의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 됩니다. 더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상처받은 사람이 없을까라고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방법으로 제시해 주십니다.

 

3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34)

 

하나님께서 죄로 물든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가길 원하셨습니다. 그 백성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 예언자를 통해서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타락한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점점 잊어버렸습니다.

 

(1) 새 언약의 채결(31)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 백성의 불순종이 의지적이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들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 능력도 없음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여호와의 용서와 은혜로 시내산 언약이 갱신된다고 해도, 이를 준수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본문은 이런 당혹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여호와께서 계획하신 언약은 출애굽의 조상들과 맺은 시내산 언약(참조. 신 29:25)의 갱신이 아니라, ‘새 언약’입니다(31). 조건적인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좌초했습니다.

 

(2) 옛 언약과 새 언약(32)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남편이셨음에도 이스라엘은 남편 여호와를 떠나 가나안에서 알게 된 간부 바알을 쫓았습니다(32). 아내 이스라엘이 결혼(언약)의 의무를 지속적으로 무시함으로써 여호와와의 결혼 관계가 파탄 났습니다.

 

(3) 새 언약의 내용(33-34)

 

새 언약에서는 시내산 언약의 경우처럼 의무 규정이 돌비에(참조. 신 9:9-16) 새겨지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법(가르침)을 각자의 가슴 속에 넣어주시고 각자의 마음에 기록해주십니다(33). 새 언약이나 시내산 언약이나 법이 주어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전자에서는 법을 준수할 수 있는 필요조건마저 여호와께서 마련해주십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여호와의 의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마음이 여호와의 법을 기록하는 장소가 되기에 여호와의 법을 잊거나 무시하지 않게 되고, 여호와의 법을 잊거나 무시하지 않기에 언약관계가 파기되지 않고 영원히 유지됩니다. 물론 새 언약도 시내산 언약처럼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를 목표로 합니다. 각 사람의 마음에 여호와의 법이 각인돼 있기에 다른 사람에게서 그분의 법을 배울 필요가 없게 됩니다. 시내산 언약 시대에는 비천한 자나 지도자나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는데(참조. 5:4-5), 새 언약 시대에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모두 여호와를 알기에 ‘너는 여호와를 알라’하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악행의 사함과 죄를 기억하지 않음은 새 언약 체결의 전체에 해당합니다.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죄의 용서를 선언하시고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으십니다.

 

영원한 구원 의지(35-3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창조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지금까지도 조화롭고 질서정연하게 유지되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언약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7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위에 있는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밑에 있는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행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5-37)

 

옛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파기 되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각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새 언약은 파기 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흔들림 없이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⑴ 창조주 여호와(35)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통치하시는 입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의 재건될 것을 가리킵니다. 성내에서는 진정하는 통치자인 하나님께서 거하실 것입니다. ‘하나넬 망대’에서 ‘모퉁이 문’까지 건축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 전체를 건축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성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⑵ 창조주 여호와의 약속(36-37)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도 신실하여 이스라엘을 영원한 나라로 세우실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새롭게 지어가시는 깊은 지혜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분의 결단을 꺾지 못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재건하실 약속(38-40)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규칙에 따라 자연계의 질서가 유지되듯 이스라엘과 맺은 새 언약도 영속성을 지닙니다. 새 언약이 깨어지기란 자연 질서가 깨어지는 것만큼 불가능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허물어져 사라질 일도, 이스라엘의 죄로 그들을 버릴 일도 없게ㅔ 될 것입니다.

 

38보라, 날이 이르리니 이 성은 하나넬 망대로부터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9측량줄이 곧게 가렙 언덕 밑에 이르고 고아로 돌아 40시체와 재의 모든 골짜기와 기드론 시내에 이르는 모든 고지 곧 동쪽 마문의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여호와의 거룩한 곳이니라 영원히 다시는 뽑거나 전복하지 못할 것이니라(38-40)

 

하나님께서는 이전의 언약과는 다른 새로운 성격의 언약을 주실 뿐 아니라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이 새 언약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새 언약(31-34)과 새 백성(35-37)의 약속이 새 예루살렘(38-40)에서 정점에 달합니다. 예루살렘이 ‘여호와를 위하여’ 재건됩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 재건되고, 여호와의 성으로서의 특별한 지위가 재건된 성에 주어집니다. 지리적 언급이 일부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북쪽에서 서쪽을 거쳐 남쪽을 지나 동쪽 방향으로 기술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넬 망대’는 예루살렘 북쪽에(참조. 즉 14:10; 느 3:1), ‘모퉁이 문’은 서쪽(?)에(참조. 왕하 14:13; 슥 14:10), 가렙 언덕은 힌놈 계곡 북동쪽(?)에, 고아는 힌놈 계곡 북쪽과 기드론 계곡 서쪽(?)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체와 재의 모든 골짜기’는 예루살렘을 서쪽과 남쪽에서 둘러싸고 있는, 어린아이 희생제사가 드려졌던 도벳 사당이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를 가리키는 표현 같습니다. ‘기드론 시내’는 도성과 감람산 사이의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계곡의 이름입니다. ‘마문’(말들의 문)은 아마도 예루살렘 남동쪽 모퉁이에 있었던, 기드론 계곡으로 나아가는 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묵은 언약을 파기시키고 새로운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언약인 복음은 우리에게까지 주신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과 맺은 새로운 언약인 복음을 마음 판에 잘 새겨야 합니다. 새로운 언약 안에서 통치를 받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담대하게 살아가면서 감사의 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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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1-02)

 


북 이스라엘을 회복시킨 것처럼

예레미야 31장 10-22절


 

성경에서는 두 가지 길인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은 좁고 힘든 고난의 길이며, ‘사망의 길’은 크고 넓고 평탄한 길처럼 보여 많은 사람들이 찾지만,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좁은 생명의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고, 어려운 길이고, 상처받는 길이지만, 그 길을 가야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길을 갈 때, 교만을 꺾으시며 하나님의 아버지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회복 가운데 돌아갈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통해 회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다시 북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회복시켜 주실 것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날을 준비하시고 분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고통과 슬픔이 변하여 희망과 기쁨이 될 것이며 새로운 날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의 약속(10-1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분이지만 그 이스라엘을 다시 돌이켜서 회복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당신의 문제들을 맡겨 드리고, 그 손을 꼭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10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무리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11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12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찌어다 13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것임이니라 14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0-14)

 

하나님께서는 열방 끝까지 주님께서 야곱을 위해 이루실 일들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인도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과 포로생활을 지켜본 모든 이방 나라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과 회복을 보면서 증인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조롱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증인으로서 이야기합니다.

 

(1) 유배민들의 해방(10-11)

 

민족들은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예비하신 구원의 소식을 듣고 먼 바닷가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야 합니다. 전에 당신 백성을 심판하시고 민족들 가운데 흩으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목자처럼 흩어졌던 자들을 다시 모아 보호하십니다(10; 참조. 6:3). 그분께서 야곱을 더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십니다(11), ‘강한 자’는 바벨론 제국뿐만 아니라 폭력으로 약자를 짓밟는 악한 세력까지도 가리킵니다.

 

(2) 여호와의 복(12)

 

유배살이에서 벗어나 시온으로 돌아온 자들에게 여호와의 축복에 따른 풍요로운 삶이 약속됩니다(12).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여호와의 선물로 받습니다. 굶주림과 헐벗음이 사라지고 풍요로움과 기쁨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물 댄 동산’의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듯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축복으로 풍족하고 활기찬 삶을 살게 됩니다. ‘시온의 높은 곳’은 시온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을 가리킵니다.

 

(3) 돌아온 즐거움(13)

 

시온에 다시 축제가 돌아옵니다.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참조, 출 15:20; 시 30:11),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즐거워합니다(13). 울며 돌아온 자들이(9) 기뻐 춤춥니다.

 

(4) 여호와의 복(14)

 

여호와의 복을 매개로 땅과 성전이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14). 여호와의 복이 땅의 풍요로운 결실을 가져오고, 풍요로운 결실이 풍요로운 예물로 성전에 드려지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성전 제사가 여호와를 기쁘게 해 다시 땅의 축복으로 되돌아옵니다. 제사가 풍족하게 드려지기에 제사장들은 기름진 것을 배부르게 먹고(참조, 레 7:32-36), 땅의 결실을 성전에 제물로 드린 백성은 여호와의 축복으로 배부르게 됩니다.

 

라헬의 탄식과 여호와의 답변(15-17)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의 고난 중에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미래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십니다. 당신은 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시고, 당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살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15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16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7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18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19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20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1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22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15-22)

 

본문에서는 라마에서 들려오는 통곡 소리를 묘사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슬픔을 위로하고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며 그들을 사랑으로 맞이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1) 라헬의 탄식(15)

 

사자의 전언양식으로 시작하지만, 여호와의 메시지 대신 ‘한 소리’에 관한 서술적 언급이 나옵니다(15). 통곡하는 소리를 누가 보고하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내용상 아마도 예언자가 인용해서 보고하는 것 같습니다.

 

(2) 여호와의 답변(16-17)

 

여호와께서 긍정적으로 반응하시지만(16-17), ‘들리니’는 직접 여호와를 향한 통곡이 아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슬퍼하며 통곡하는’은 애도의 모습으로, 죽음으로 인한 슬픔임을 미리 보여줍니다. 통곡의 동기뿐만 아니라 장소와 주체도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라마에서 들리는 소리로 라헬이 자식들 때문에 우는 통곡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북왕국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당했고, 많은 주민이 먼 땅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백 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라헬의 절망적 처지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의 회복을 전혀 기대할 수 없기에 애곡할 뿐이었습니다. 자식이 죽어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비통하게 울부짖는 라헬에게 여호와께서는 울음을 멈추고 눈물을 그치라고 위로하시며 자식들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16절의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네 수고에 보상이 있어)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라헬의 일(수고)은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통곡한 것뿐입니다. 라헬의 애도 행위를 일로 인정해주고 그 대가로 구원이 주어질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레미야는 어디에서도 구원을 수고의 대가로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출생한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보상은 자녀의 건강한 성장과 복된 삶입니다. 마찬가지로 북왕국의 자식들을 낳은 라헬에게도 같은 보상이 주어지는데, 자식들이 죽지 않고 강건하게 성장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너의 미래에 소망이 있어’는 유배의 종식과 관련한 약속입니다.

 

(3) 에브라임의 고백(18-19)

 

15절에서는 라마에서 한 소리가 들리는데, 18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직접 들으십니다. 특히 동사 ‘듣다’를 절대부정사와 함께 사용해 여호와께서 들으셨음을 최상급으로 강조합니다. 탄식의 주체는 에브라임으로, 현재의 문맥에서는 대적의 땅에서 유배살이 하는 라헬의 자식들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인용하시는 에브라임의 고백은 전형적인 참회기도입니다. 에브라임은 먼저 자신의 불순종과 완고함을 시인하고 여호와의 징계가 정당했음을 인정합니다(18a). 여호와의 징계를 무시하고 완강하게 제 길을 가다가 멸망에 떨어졌던 에브라임이 마침내 징계를 받아들입니다. 실패한 것 같았던 여호와의 교육적 징계가 결국에는 의도했던 목표에 도달합니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길들지 않은 송아지)는 여호와의 가르침과 명령을 거절하고 오직 자기 결정에 따라 살아간 에브라임을 상징합니다(참조. 2:20).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에브라임은 여호와께 나아가 도움을 호소합니다. ‘저를 돌아가게 해주소서. 제가 돌아가고자 합니다’(18b절의 사역). 여호와를 배반한 결과로 징계를 받았기에 그분의 허락 없이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회개가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에브라임의 돌아감은 이중적입니다.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감뿐만 아니라 여호와께로 돌아감도 여호와의 허락 아래서만 가능합니다. 여호와와의 관계 단절이 유배의 심판을 초래했기에 고향으로 돌아감과 여호와께로 돌아감은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에브라임은 자신의 지난 삶이 반역으로 얼룩진 삶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19). ‘후에’를 반복 사용하면서 과거와 현재의 단절을 강조합니다. ‘돌이킨’은 회개보다는 배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볼기/허벅지를 치다’는 깊은 슬픔을 보여주는 제의적 행위입니다(참조. 겔 21:17). 에브라임은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떠났다가 징벌을 당한 후에야 깨닫고 후회하며 볼기를 쳤고, 더 나아가 현재의 수치와 창피를 짊어져야 할 죗값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렸을 때’는 멸망하기까지의 가나안에서의 삶을 가리킵니다.

 

(4) 여호와의 답변(20)

 

에브라임의 참회와 간구에 여호와께서 격정적으로 반응하십니다(20).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연민의 마음을 그대로 표출하십니다. 에브라임은 (파기될 수 있는) 언약 신학에 근거해 (18절의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호소했는데, 여호와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되돌릴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혈연관계로 답하십니다. 에브라임은 단순하게 아들이나 자식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입니다. 귀한 아들이기에 책망하는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생각이 났습니다. 귀한 아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여호와의 맹목적 사랑이 절망적 처지에 빠진 에브라임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줍니다.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5) 예언자의 책망 어린 권면(21-22)

 

다섯 개의 명령문으로 이뤄진 21절은 현재의 문맥에서 18b절에 대한 답변입니다. 여호와를 대신하여 예언자가 처녀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도록 허락합니다. 여호와의 약속에 따라 이스라엘도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먼 여정이기에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곁길로 빠져 길을 잃지 않게 선발대를 보내 이정표와 푯말을 세워놓고, 대로로 돌아와야 합니다. ‘네가 전에 가던 길’은, 이미 백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기에, 단순하게 유배지로 끌려갈 때 갔던 길만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유배의 극복을 보여주는 신학적 함의를 갖고 사용된 표현 같습니다. 유배 길이 여호와에 의해 쫓겨나는 징벌의 길이라면, 귀향길은 그분에 의해 다시 받아들여지는 용서와 구원의 길입니다. 권면의 말씀 다음에 뜻밖에도 책망의 말씀이 나옵니다(22). 지금까지의 청자는 위로의 대상이었는데 여기서는 질책을 당합니다. 일부 유배민은 구원 약속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방황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와 고토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선포를 거절했습니다. ‘반역한 딸’은 여호와의 구원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의 부정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용서와 관계 회복, 위로와 새 창조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에서 선취됐으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구원에서 온전히 성취됐습니다.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떠났던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녀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 안에 거하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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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1-01)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와 축복

예레미야 31장 1-9절


 

부모와 자식 사이나 형제간에 저절로 우러나는 본능적인 애정인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일컬어서 천륜지정(天倫之情)이라고 합니다. 이 정(情)에는 자녀들이 잘못을 한다고 하더라고 끝까지 용서할 수 있는 부모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유다를 향한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된 사람들을 계속 위로하시면서 회복을 구체적으로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을 보증하시기 위해 과거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 시키면서 약속하십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 끝없는 사랑이란 것을 맛볼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의 재건(1-6)

유다 백성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경고하셨지만 불순종은 계속되었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계서 유다와 관계를 정리하실 법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계속 아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쉽게 유다를 버리실 수 없었습니다.

 

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3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4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5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6에브라임산 위에서 파숫군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1-6)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람난 부인처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만 향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 포로라는 특단의 조처를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라는 피해의식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관계성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영원히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십니다.

 

(1) 언약 관계의 회복(1)

 

앞 단락과 뒤 단락을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담당하는 1절은 내용상 22절과 일치합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으로 파기됐던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관계가 다시 회복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분 백성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종족’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혈연관계에 있는 친족임을 시사해줍니다. 회복된 언약관계에 처음처럼 온 이스라엘이 참여합니다. ‘그 때에’는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새로운 구원 시대를 열어주실 미래의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30:8의 ‘그 날에’와 의미상 같습니다.

 

(2) 구원사의 회고(2-3)

 

미래의 구원을 선포하기에 앞서 출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의 이스라엘 초기 구속사가 간략하게 언급됩니다. 이스라엘의 미래가 처음에 연결되면서, 과거의 구속사가 역사적 유물에 속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함께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살이하는 유배민들과 함께하십니다.

2절은 출애굽과 광야를 회고합니다. ‘칼에서 벗어난’은 특히 애굽 왕 바로의 추격을 벗어나 홍해를 건넌 사건을 가리킵니다. 애굽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여호와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오경 전통에 의하면 광야 사십 년은 출애굽 세대의 불순종이 초래한 징벌의 기간이지만, 예레미야에게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만 따른 축복의 기간입니다.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는 출애굽의 목표가 가나안 정착임을 보여줍니다. 가나안은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안식처로 주신 땅입니다(참조. 신 12:9-10).(2절을 2a절에 걸리는 때의 부사절로 번역한 개역개정에 따르면) 3절은 아마도 2절에 언급된 광야의 은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셔서 ‘영원한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인자함으로’ 이스라엘을 이끄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마음을 사랑(아하바)과 인자함(헤세드)으로 규정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분의 변함없는 신실함이 이스라엘의 부족함을 메꿔가면서 이스라엘을 영원한 사랑으로 감싸주었습니다. 사랑과 인자함(인애)은 2:2에서도 광야를 회고할 때 사용된 중심단어입니다.

다수의 입장은 2b-3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 먼 곳에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인자함을 (계속) 베풀었다.”’ 이 경우 ‘여호와의 나타나심’(3)이 출애굽과 광야(2)와 가나안 도착(2b) 사이에 위치하게 되기에, 시내산 강림을 배경으로 읽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언약 체결 가운데 계시된 그분의 사랑과 인자함은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언약이 영원한 사랑과 인자함에 근거했음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으로 언약관계가 완전히 끝장나지 않았음을 시사해줍니다.

 

(3) 회복의 약속(4-5)

 

시선이 이스라엘의 처음에서 현재로 옮겨집니다. 출애굽 세대가 경험했던 해방의 구속사와 영원한 사랑과 인애함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당한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시기에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다시 소고를 들고 흥겹게 춤을 추며 나오고,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즐기게 됩니다(4-5). 멸망한 이스라엘이 재건되고 사람들은 다시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되찾습니다. ‘심은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는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의 표상입니다. 땅의 결실이 더는 검령군의 손에 넘겨지지 않고 씨를 뿌린 자가 그 열매를 먹게 됩니다. 포도나무는 4b절의 축제와 관련해 선택된 것 같습니다. 포도주는 축제와 기쁨을 상징합니다. 4절에 두 번, 5절에 한 번 사용된 ‘다시’는 앞으로 있을 구속사건이 제2의 출애굽 사건임을 시사해줍니다.

 

(4) 시온으로의 순례(6)

 

이스라엘의 회복에서 시온으로의 순례로 주제가 바뀝니다. 예전 북왕국의 중심에 속하는 에브라임 산지의 주민들에게 파수꾼들이 일어나 여호와께서 현존하시는 시온으로 올라가자고 외칩니다(6).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 곧 종교적 회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호와는 (재건된 성전이 있는) 시온에서만 만날 수 있고, 시온 이외의 지역에서는 여호와께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시온에 계신 여호와가 회복된 에브라임 산지의 주민들이 찾아야 할 하나님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솔로몬 사후에 다윗이 유산으로 물려준 통일 왕조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남과 북으로 분열됐습니다. 북쪽 지파들과 남쪽의 유다 지파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이스라엘 왕으로 세움을 받은 여로보암(926-907)은 자기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지 못하도록 그 대항마로 벧엘과 단에 국가 성소를 세웠습니다(참조. 왕상 12:25-33). 멸망하기까지 이스라엘은 벧엘 성소에서 예배를 드렸고, 유다는 켈엘 성소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정치적·종교적으로 분열됐던 남·북 왕조가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시온을 중심으로 다시 결합하게 될 것을 내다봅니다.

 

유배민의 귀향(7-9)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그랬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로서 당신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아버지의 말을 믿고 따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7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9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7-9)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자들을 모아 안전하게 인도하시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강과 평탄한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의 약속을 강조합니다.

 

(1) 예언자의 찬양 요청(7)

 

흩어진 자들의 귀향을 약속하시기에 앞서 여호와께서 찬양을 권면하십니다. ‘너희는 야곱에게 기쁨으로 환호하라. 민족들의 (우두머리에게 환성을 질러라’(7a). 야곱이 민족들의 우두머리로 선포됩니다. 야곱이 심판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여호와에 의해 선택된 야곱의 특별한 지위가 폐지된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민족들 가운데 첫째로, 예나 지금이나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영원한 사랑과 인자의 대상입니다. 원래 찬양의 권면 다음에는 찬양의 동기로 여호와의 구원 행위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데(참조. 사 44:23;48:20;49:13;54:1), 여기서는 다시금 간청이 등장합니다.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7b). 여호와의 구원 행위가 아직 미래에 속하지만, 그분의 취소될 수 없는 결정으로 반드시 성취될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일차적으로는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유배살이 하는 옛 북왕국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유다의 경우처럼(24장) 이스라엘에서도 유배민이 남은 자가 됩니다. 찬양과 간구의 명령을 받는 ‘너희’의 정체는 불분명합니다.

 

(2) 여호와이 구원 선포(8-9)

 

여호와의 구원 행위에 세계사적 지평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북쪽 땅과 땅 끝에서, 앗수르와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불러 모으십니다. 가나안까지 멀고 험난한 길이지만, 보행조차 힘든 사람까지도 모두 안전하게 귀환합니다(8). ‘맹인과 다리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은 여행은커녕 제 힘으로 걷기도 힘든 자들로, 귀향이 철저하게 여호와의 은총에 근거함을 보여줍니다. 그분께서는 한 사람의 낙오자가 없도록 위험이 없는 평탄한 길로 인도하시고, 유배민들은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옵니다(9). 이스라엘의 구원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 기인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9b; 참조. 2:3). 끊임없이 반역했음에도(참조. 3:19-20;4:22)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시기에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일시적으로는 일그러질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완전히 끝장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의 진노가 아버지의 사랑과 인자함 앞에 무장해제를 당합니다. 에브라임의 장자권은 유다보다는 민족들과 관련한 표현으로(7), 에브라임/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지으신 민족들 가운데 첫째로 그분의 맏아들입니다. 또 장자의 신분은 출애굽 사건을 시사해주기도 합니다(참조. 출 4:22-23; 호 11:1).


우리의 삶에서도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시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평탄한 길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기억하며, 그분께서 주시는 희망과 평안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고,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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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0-02)

 


사랑의 징계를 주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30장 12-24절


 

어렸을 때, 한두 번 정도 부모님의 속을 상하게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들은 잘못한 자녀들에게 매를 듭니다. 이렇게 매를 든 것은 자녀가 미워서 매를 들진 안습니다. 자녀에게 벌을 주어서 바르게 세우려는 것입니다. 벌을 주는 진짜 목적은 단순히 고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통해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게 하는 데 있습니다.

 

  • 치료가 불가능한 중한 병에 걸린 사람처럼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혹독한 징계의 심판에 떨어졌습니다. 허물과 죄악 때문에 치료약이 없는 불치병에 걸린 예루살렘을 여호와께서 치료해 다시 건강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시온의 치료(12-17)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인해 심판받아야 할 우리를 회복합니다. 한마디로 치료 불가능, 회복 불가능에 빠진 유다를 치료하고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치료와 회복이 필요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1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13네 송사를 처리할 재판관이 없고 네 상처에는 약도 없고 처방도 없도다 14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많기 때문에 나는 네 원수가 당할 고난을 네가 받게 하며 잔인한 징계를 내렸도다 15너는 어찌하여 네 상처 때문에 부르짖느냐 네 고통이 심하도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허다하므로 내가 이 일을 너에게 행하였느니라 16그러므로 너를 먹는 모든 자는 잡아먹힐 것이며 네 모든 대적은 사로잡혀 갈 것이고 너에게서 탈취해 간 자는 탈취를 당할 것이며 너에게서 노략질한 모든 자는 노략물이 되리라 1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매 시온을 찾는 자가 없은즉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12-17)

 

예레미야서 30-33장까지는 위로의 책입니다.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본문은 시온의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는 위로와 경려의 소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그들의 상처가 깊고 치유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로 인해 친구들이 떠나고 원수들이 공격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벌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상처를 고치고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1) 불치병에 걸린 시온(12-15)

 

탄식시에서 개인이나 공동체가 당면한 역경을 묘사하듯이 여호와께서 심판으로 인한 시온의 참상을 묘사하십니다(12-14). 마치 여호와께서 백성을 대신하여 탄식하시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시온은 고칠 수 없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습니다(12). ‘상처’로 번역된 히브리어 ‘셰베르’(붕괴, 멸망)는 적의 침략으로 인한 멸망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참조. 4:6,20; 6:1,14; 8:11,21). 13a절은 시온의 절망적 처지를 사법적 언어로 표현합니다. ‘네 송사를 처리할 재판관이 없다.’ 시온은 자신을 변호해줄 사람조차 구할 수 없는 처참한 형편에 떨어졌습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의로우신 재판장 여호와께서 불의한 시온을 치셨기에 시온 편에서 변호해줄 자는 없습니다. 누가 시온을 치신 여호와를 재판정의 피고인석으로 불러낼 수 있겠습니까? 13b절은 언어와 표상에서 다시 12절로 돌아갑니다. 시온의 상처를 아물게 할 약은 없습니다(참조. 8:22). 여호와께서 치셔서 난 상처이기에 치료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원수 같이 되어’ 치셨기에(애 2:5) 상처의 치료는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14절은 정치적 관점에서 시온의 막다른 상황을 기술합니다. 시온의 애인들은 모두 시온을 잊고 찾지 않습니다. ‘너를 사랑하던 자’(너의 애인들)는 우상보다는 정치적 동맹자들(참조, 22:20), 특히 애굽을 가리킵니다. 시드기야 통치 후반 유다가 애굽의 지원을 기대하고 (또는 애굽의 부추김을 받아) 주변 나라들과 연대해서 반역을 꾀하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배반한 유다를 징계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고립무원의 예루살렘을 돕기 위해 주전 588년 애굽 군대가 개입하지만, 바벨론 군대의 반격에 곧 퇴각하고(참조. 37:5), 유다는 홀로 남겨집니다. 시온이 치명적 상처를 입을 때는 물론 이유가 있었습니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많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원수가 치는 것처럼 시온을 치셨고, 잔인한 자가 징계하는 것처럼 징계하셨습니다(14b). 시온을 가득 채운 악행과 죄가 시온의 보호자이신 여호와를 시온의 원수가 되게 했습니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허다하므로’ 여호와께서 시온에게 그렇게 하셨는데도 시온은 여호와께서 상처를 치료해주지 않는다고 불만만 토로합니다(15). 시온은 상처의 치료만 바랄 뿐, 상처의 원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상처를 치료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시온은 먼저 상처가 악행과 죄에 대한 그분의 징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억압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는 분이지만(참조. 시 107:13,19), 모든 부르짖음에 항상 긍정적으로 응답하지는 않으십니다. 시온의 부르짖음은 권리와 보호를 부당하게 박탈당한 과부와 고아와 객의 호소와는 전혀 다릅니다. 시온은 자신들의 악행과 죄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기에 상처를 치료받지 못했다고 여호와께 부르짖을 권리나 자격이 없습니다. 시온에게 우선으로 요청되는 것은 상처의 원인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2) 치료에 대한 약속(16-17)

 

시온의 중한 상처가 죄악에 따른 징벌임을 알려준 후에 상처 치료에 관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는 치료를 요구할 자격이 없는 시온에게 원수들의 멸망과 상처의 치료를 약속하십니다. 시온의 원수들을 불러 시온을 징계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시온을 친 자들을 마찬가지로 징벌하실 것입니다(16). 시온이 멸망 당하고 사로잡혀 간 것처럼 시온을 친 자들도 멸망 당하고 사로잡혀 갑니다. 시온을 약탈하였던 자들이 약탈을 당합니다. 원수들의 멸망은 당한 자의 증오심의 표출이 아니라, 시온의 정치적 회복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적들을 멸망시키실 뿐만 아니라 치료가 불가능한 중병에 걸린 시온의 건강도 회복시켜주십니다(17). 시온은 죄로부터 완전히 용서를 받습니다.

시온을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주어 멸시당하게 하셨던 여호와께서 이들로부터 시온을 다시 구해주십니다. 그분이 시온을 치셨지만,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11). 이방인들의 조롱은 탄식시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로(참조, 렘 18:19; 시 35:24-26), 기도자는 여호와의 개입을 기대하며 자신의 조롱 받는 현실을 그분께 하소연합니다.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직접 인용하시며 구원의 동기로 사용하십니다. 이방인들의 눈에 시온은 자기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은 여자’(쫓겨난 자)입니다. 시온은 폐허가 되어 들짐승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된 시온의 가엾고 비참한 운명이 여호와를 움직여 그분 마음을 되돌리게 합니다.

 

구원 시대의 도래(18-2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징계하시지만, 징계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강조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18○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그 폐허가 된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그 보루는 규정에 따라 사람이 살게 되리라 19그들에게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존귀하게 하리니 그들은 비천하여지지 아니하리라 20그의 자손은 예전과 같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그를 압박하는 모든 사람은 내가 다 벌하리라 21그 영도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요 그 통치자도 그들 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리니 그가 내게 가까이 오리라 참으로 담대한 마음으로 내게 가까이 올 자가 누구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2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3○보라 여호와의 노여움이 일어나 폭풍과 회오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 위에서 회오리칠 것이라 24여호와의 진노는 그의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돌이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깨달으리라(18-2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원수들을 벌하시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번영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인들에게 쏟아질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후에 이 모든 일을 깨달을 것입니다.

 

(1) 새로운 회복(18-22)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야곱 장막의 포로들/운명’을 되돌리십니다(18; 참조. 3). 그분의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 곧 모성적 사랑이 운명의 전환을 가능하게 만듭니다(참조. 사 30:18; 49:10-15; 54:8-10). 어머니가 자기 자궁에서 나온 자녀에게 베푸는 그러한 사랑으로 여호와께서 야곱/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입니다. 민족들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폐허로 남은 거처(참조. 9:19)와 성읍과 보루(참조. 6:5; 9:21; 17:27)가 재건됩니다. ‘야곱의 장막’은 장막(천막)에 사는 야곱의 후손들을 가리키는데(참조. 민 24:5; 말 2:12), 아마도 의도적으로 선택된 표현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폐허가 된 성읍이나 광야에서 사는 현재의 궁핍함을, 다른 한편으로 여호와와 함께했던 예전의 광야 시대를 시사해줍니다. 모든 즐거움과 기쁨을 빼앗겼던 시온이 감사와 기쁨을 되찾습니다(19; 참조. 31:4; 33:11). 사람들은 여호와의 구원과 땅의 축복을 감사하고 그분께 예배를 드립니다. 시온에 기쁨의 잔치, 특히 혼인 잔치가 끊이지 않고(참조. 7:34; 16:8-9; 25:10), 다시 거주민이 넘치게 됩니다(참조. 23:3; 29:6). 주변 나라들로부터 멸시를 당하던 시온이 여호와의 축복으로 영화롭게 됩니다. 야곱의 자손이 옛날처럼 많아지고(참조. 출 1:7,9,10), 여호와 앞에 굳게 섭니다(20). 예전 모습을 되찾은 야곱의 자손은 여호와 앞에 굳건해져 다시는 그분을 배반하지 않고, 여호와께서는 당신 앞에 온전히 서 있는 야곱의 자손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참조. 2:3). 파탄에 직면했던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22). 21절은 여호와와의 사적 관계에 초점을 맞춰 이스라엘의 통치자를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나오는데(참조. 신 17:15), 그에게는 예전 통치자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신학적 특권이 주어집니다.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리니 그가 내게 가까이 오리라’ 여호와 앞으로 나아올 수 있는 자격은 레위인과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특권이기에(참조. 출 19:22; 20:21; 24:2; 민 16:5,10), 구원 공동체의 통치자에게 제사장적·중보적 기능이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나올 새로운 통치자는 모세나 아론처럼 구원을 중재하는 제사장적 인물입니다. ‘참으로 담대한 마음으로 내게 가까이 올 자가 누구냐’는 새로운 통치자에 의한 구원 시대가 철저하게 여호와의 은총에 의존적임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나아가는 것은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위험스러운 일로(참조, 출 3:5; 19:9-25) 그분의 허락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제사장적·중보적 기능이 주어진 통치자에게 여호와께서는 당신 앞에 나아올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십니다.

 

(2) 악인의 심판(23-24)

 

23:19-20과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합니다. 동일한 말씀이 한 번은 심판을 선포하는 문맥에, 한 번은 구원을 선포하는 문맥에 나옵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보자면, 이스라엘의 회복(18-22) 다음에 여호와의 진노가 ‘악인의 머리 위에서’ 휘몰아치기에, 이때 악인들은 전체 이스라엘 또는 예언자들이 아니라, 회복된 공동[안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겪은 고난과 회복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원수들은 벌을 받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다시 세우십니다. 우리 삶의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결국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뢰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확고해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셔서 결국 그분의 선하신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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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0-01)

 


포로에서의 해방과 평안의 약속

예레미야 30장 1-11절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저녁이 되면 달이 뜹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옵니다. 그리고 겨울이 찾아옵니다. 이렇게 순서를 따라 진행되는 것이 자연적으로 된 일입니까? 아니면 누구에 의해 되어진 일입니까? 자연적으로 되었다면, 어느 한 순간에 질서가 무너지면 전 우주가 모두 파괴될 것입니다.

 

  • 예레미야 30-3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 후에 회복이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죄악 때문에 심판을 당하지만, 하나님 백성의 영사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심판을 집행하시는 중에 벌써 이스라엘과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십니다. 본문은 도입 부분으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함께 포로에서 돌아와 메시아적인 왕인 다윗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1-3)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때가 되면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과 유다를 해방하시겠다고 하시며 이를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1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니라 2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3)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색다른 명령을 하십니다. 그 명령은 책에 기록하라는 것은 약속을 성취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불순종한 유다 백성은 벌을 받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서운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1) 도입부(1)

 

지금은 유다 백성들이 벌을 받고 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는 반드시 회복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차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공정하게 심판하시지만,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면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2) 책을 기록하라(2)

 

예레미야가 여호와에게서 색다른 명령을 받는다.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2). 일반적으로 당사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하도록 예언자에게 말씀이 주어지는데, 여기서는 두루마리에 기록하게 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포와 달리 기록은 후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보존을 목적으로 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보자면, 심판 이후에 있을 구원 약속은 예레미야에게만 알려지고 이를 들어야 할 자들에게는 감춰집니다. 이들은 아직 심판의 대상이기에, 선포된 심판이 이뤄지기까지 구원의 말씀은 이들에게 공개되지 않습니다. 문서로 남겨져 읽힐 때를 기다립니다. 예언이 문서화하면서 예레미야가 없어도 그를 통해 주어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읽을) 수 있게 됩니다. 예언자를 통해 선포됐던 여호와의 의지가 이제는 글로 전달되고, 예언자의 선포에 주어졌던 신적 권위가 마찬가지로 글에도 주어집니다.

 

(3) 메시지의 요약(3)

 

3절은 책에 기록된 전체 내용의 요약입니다. 서두의 ‘보라 (그) 날들이 오고 있다’(보라 - 날이 오리니)는 지금과는 다른 시대가 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새로운 시대는 여호와의 선포로 시작됩니다. 회개에 따른 응답으로 주어지지 않고, 그분의 은총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을 되돌리실 날이 옵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유배지에서 그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다시 데려와 그 땅을 다시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참조. 7:7:32:22-23). 고향 땅에서 쫓겨나지만(참조, 32:23), 그렇다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사실이 무효가 된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조상들에게 주셨던 땅을 유배당한 자들에게 되돌려주십니다. 주전 597년과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유배당한 유다 사람들은 물론 주전 732년과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유배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가나안 땅이 열두 지파 공동체에 주어졌던 것처럼 하나님 백성의 회복에 북쪽 지파들도 참여합니다. 정치적 분열과 반목이 끝나고,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시 여호와의 백성으로 통일됩니다. 24장과 29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가나안에 남은 자들이 아니라 유배민들이 여호와께서 베푸실 구원의 수혜자가 됩니다.

 

심판 이후의 해방(4-11)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습니다. 그 심판 앞에 용사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무섭게 심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지은 죄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까? 죄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불러 드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심판 날에 겪을 일들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4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5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우리가 떨리는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로다 6너희는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 남자마다 해산하는 여인 같이 손으로 각기 허리를 짚고 그 얼굴 빛이 창백하여 보임은 어찜이뇨 7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냄을 얻으리로다 8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버리며 네 줄을 끊으리니 이방인이 다시는 너를 부리지 못할 것이며 9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10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고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라 너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1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진멸한다 할찌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4-11)

 

본문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나옵니다. 먼저, 이스라엘과 유다는 큰 재난과 고통을 겪게 되지만, 이는 회복의 과정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켜 다시는 이방의 종이 되지 않게 하시고, 평안을 주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고 보호하시며, 그들을 괴롭힌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1) 여호와의 날과 그 이후(4-7)

 

개역개정은 5절의 화자로 여호와를 전제했지만, 전체 문맥으로 보아 두려움에 사로잡힌 백성의 아우성을 인용하고 있는 말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심판에 떨어진 백성은 서로 ‘무서워 떠는 자의 소리’(공포의 외침)만 듣습니다. 환난에 휩쓸린 땅에는 ‘두려움’만 있고, 생명과 사회의 안전을 보장해줄 ‘평안함’(샬롬)은 어디에도 없습니다(참조. 6:14; 8:11; 12:12).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에는 공황에 빠진 자들의 절망적인 울부짖음만이 들릴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공포의 아우성을 듣는 ‘우리’를 2인칭 복수 ‘너희’로 부르면서 이들에게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남자가 애를 낳을 수 있는지 너희는 물어 보아라)하고 명령하십니다(6). 수사적 질문에 대한 답변은 물론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용사들이 마치 해산하는 여자처럼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배에 손을 대고 망연자실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해산하는 여자’의 비유는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함의하지는 않ㅅㅂ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싸움에 용감한 자들이 해산하는 여자처럼 전투 능력(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절망적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참조. 4:31; 6:24; 13:21; 49:24; 50:43). 이들의 손은 맥이 풀려 무기를 들지도 못하게 됩니다.

야곱에게 닥친 환난의 구체적 내용에 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환난의 정도를 간결하게 언급합니다. ‘그 날’은 야곱이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큰 재앙의 날입니다(참조. 욜 2:31; 습 1:14; 말 4:5). 그러나 심판으로 야곱의 역사가 끝장나지는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심판이 구원 시대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파괴적 심판에 긍정적 의미가 부여됩니다. 이 구원은 심판의 경감이나 중지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무서움과 두려움과 재앙이 지배하는 징계의 심판을 통과하지 않고는 구원의 때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2) 해방 약속(8-9)

 

‘그 날에’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부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것입니다. 7절의 ‘그날’은 야곱이 환난을 당하는 때이지만, 8절의 ‘그날’은 미래에 있을 환난이 끝나고 구원이 시작하는 때를 가리킵니다. ‘바벨론의 멍에’에 관한 표상은 27-28장에도 나옵니다. 앞에서는 유다의 심판을 상징한 멍에의 표상이 여기서는 구원의 약속과 관련해 사용됩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목에서 멍에를 부수시고 그의 사슬을 끊으실 것입니다(참조. 사 9:5; 10:27; 겔 34:27). 과거 애굽 바로의 멍에를 메고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해방하셨던(참조. 레 26:13) 여호와께서 다시 바벨론의 멍에로부터 그 후손들을 해방하실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8절의 선포는 예레미야에게 맞서 유다의 구원을 주장하였던 하나냐의 선포와 거의 일치합니다. 28:12에서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꺾어버리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물론 차이가 있는데, 하나냐는 2년 안에 구원 시대가 열릴 것을 예언했고, 예레미야는 멸망의 심판 이후에 여호와의 구원이 있을 것을 선포했습니다. 바벨론의 멍에를 벗어버린 자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분께서 일으켜주실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게 됩니다(9; 참조. 겔 34:23-24; 호 3:5). 우상을 섬기다가 멸망을 당하고 이방 왕을 섬기던 자들이 다시 그들의 구원자 여호와께로 돌아오고 다윗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여호와의 주도로 그분 백성의 종교와 정치가 온전히 회복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이 단순히 다윗 왕조의 회복을 말하는지 또는 구원 시대의 메시아적 통치를 시사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23:5에서 여호와께서는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아무튼 구원 시대에는 여호와께서 다윗과 같은 왕을 세워 다시 하나가 된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치하게 하십니다.

 

(3) 귀환 약속(10-11)

 

여호와께서 유배당한 자들을 ‘나의 종 야곱’과 ‘이스라엘’로 부르시며 그들을 먼 곳에서 구해내 ‘두렵게 할 자’(적들)가 없는 고향에서 안전하게 살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참조. 겔 34:28; 39:26). 초점이 가나안에 남은 자들에서(5-7) 다시 유배민들에게로 옮겨집니다. ‘나의 종 야곱’은 이사야서를(참조. 사 41:8; 44:1,2; 45:4; 48:20) 제외하고는 예레미야서에만 나오는(참조. 렘 30:10; 46:27,28) 표현으로, 야곱을 한정하는 ‘나의 종’은 여호와와 야곱/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 곧 야곱/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속했음을 강조합니다. 구원을 받는 장소를 막연히 ‘먼 곳에서’로 표현하는데, 유다 사람들의 유배지 바벨론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로잡혀 간 앗수르까지 포함시키기 위한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구원 행위는 야곱을 고향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종 야곱을 포로로 잡아간 민족들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야곱도 죄를 범했기에 징벌을 받기는 하겠지만(참조, 출 34:7), 민족들과 달리 완전한 멸망에 떨어지지는 않습니다(참조. 4:27; 5:10,18). 야곱은 그분의 종으로 그분의 보호 아래 있기에 여호와께서는 ‘법에 따라’ 징계하십니다(참조. 10:24). 10-11절은 애굽에 관한 신탁(46장)의 마지막에 거의 문자적으로 다시 등장합니다(46:27-28).


거짓말을 전하는 자와 거짓말을 따르는 자는 한통속입니다. 그들에게는 원하는 말이 진실이 되고, 갈망이 채워지면 진실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흔들림에 대해 변명할 수 없을 날이 올 것입니다. 거짓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함과 도덕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은밀한 욕망을 제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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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9-02)


불순종한 자들에 대한 경고

예레미야 29장 15-32절


 

누구나가 나를 보고 있을 때와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의 행동은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하나님께서는 유다에 남은 백성에게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보내셔서 상해서 먹을 수 없는 몸쓸 무화과 같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서 거짓을 예언한 아합과 시드기야는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

 

유배지의 예언자들(15)

마지막 때가 될수록 기만과 거짓 평안의 메시지가 횡행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호응을 얻는 것은 거짓 예언일지라도 구미와 갈망에 들어맞아서입니다. 그러나 거짓 메시지는 잎만 무성한 나무를 키울 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거짓에 휘둘리지 않고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15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셨느니라(15)

 

예레미야 29장 전반부에서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 대해 예레미야가 쓴 편지 내용입니다. 하나냐 같은 사람은 베벨론 포로에서 2년이 돌아온다고 주장했지만, 예레미야는 70년의 포로 생활을 예언했습니다. 본문은 그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한 반응들입니다.

예언자들에 관한 ‘너희’의 말을 인용하는 15절은 문맥에 이질적입니다. 현재의 위치에서는 아마도 바벨론 유배민에게 편지를 보낸 예언자 예레미야와 유배민들 가운데 활동하는 예언자들을 대비시키기 위해 유배민들과 관련한 말씀 마지막에 놓인 것 같습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셨느니라’라고 말하지만, 이는 ‘너희’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너희’ 가운데 활동하는 예언자들은 여호와께서 보낸 자들이 아닙니다(8-9). ‘너희’에게 편지를 보낸 예레미야만이 참된 예언자로, ‘너희’는 편지의 메시지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4)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16-20)

평안한 삶이 늘 축복의 증거는 아닙니다. 평안하기 때문에 방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입니다. 편안할수록 자성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할 때 쓰임을 받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16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과 이 성에 사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 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17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 상하여 먹을 수 없는 몹쓸 무화과 같게 하겠고 18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뒤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낸 나라들 가운데에서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리라 19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들에게 꾸준히 보냈으나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0그런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16-20)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라 경고합니다. 그들은 칼, 기근, 전염병으로 큰 고통을 겪고 여러 나라에 흩어질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무시한 결과입니다.

 

(1) 유배당하지 않는 자들(16)

 

첫 번째 유배를 모면하고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의 운명에 관한 말씀이 바벨론 유배민들에게 주어집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은 왕’(참조, 22:2)은 현재의 문맥에서는 여호야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를 가리킵니다. ‘너희 형제’는 남은 자들과 잡혀간 자들이 한 가족에 속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아마도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형제의 의무를 저버렸음을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참조. 겔 11:15). 예루살렘에 남겨진 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보다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나은 바가 있어서 유배를 면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완전한 멸망을 위해 남겨졌을 뿐입니다. 바벨론 유배민을 기다리는 것은 구원과 평안과 소망의 미래이고(10-14),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더 큰 재앙입니다(참조. 28:14).

 

(2) 심판 선언(17-18)

 

여호와께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보내 이들을 세상 나라들 가운데로 쫓아내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으로 만드실 것입니다(17-18).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포하는 17-18절은 전체적으로 24:8-10의 반복입니다.

 

(3) 심판의 근거(19)

 

이들이 이처럼 비참한 운명에 넘겨지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이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9).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꾸준히 이들에게 보내셨지만, 이들은 예언자들의 선포에 귀 기울이기를 거절하였습니다(참조. 25:4). 20절은 시선을 다시 바벨론 유배민에게로 돌려 이들에게 말씀에 순종할 것을 권면합니다

 

바벨론의 거짓 예언자들(21-23)

거짓 선지자들은 미래를 낙관적으로 희망과 축복이라는 마약으로 유혹합니다. 그렇다고 욕심을 낸다고 얻을 수 있는 미래는 아닙니다. 제멋대로 발행한 희망의 백지수표는 출저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백지화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가 말씀하신 만큼, 그가 보여주신 만큼만 믿고 따르면 됩니다.

 

21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을 죽일 것이라 22바벨론에 있는 유다의 모든 포로가 그들을 저줏거리로 삼아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너를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리니 23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어리석게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며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말함이라 나는 알고 있는 자로서 증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21-23)

 

본문은 하나님에서는 바벨론의 거짓 예언자 아합과 시드기야가 악행과 거짓 예언으로 인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죽이고 시체를 불태울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1) 심판 선언(21-22)

 

이 단락은 ‘너희’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일으키신 예언자들로 인정하는 자들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유배지에서도 많은 예언자가 등장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했지만, 이들은 거짓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유배민들에게 거짓을 예언한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2) 심판의 근거(23)

 

이들은 거짓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21a) 이웃의 여자와 간음하는 망측한 짓을 저지르기까지 했습니다(23a; 참조. 23:14). 여호와의 예언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떠들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파렴치한 짓도 범했습니다. 이들의 신학적·윤리적 타락을 속속들이 아시는 여호와께서 증인이시기에,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23b).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들을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여 죽게 하고 저주거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21b-22). 27장과 28장에 의하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거짓은 유배민들의 조속한 귀향이었고, 29:26-28에 나오는 스마야의 편지도 유배지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임박한 구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아합과 시드기야도 다르지 않았음은 이들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공개적으로(‘너희 눈 앞에서’) 처형당했다는 사실로부터 어렵지 않게 끌어낼 수 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한 처형은 이들이 정치범으로 고발당했음을, 곧 바벨론에 해로운 정치적 내용이 이들의 메시지에 담겨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이들은 유배민 조기 귀환의 배경으로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했던 것 같습니다. 바벨론의 입장에서 사로잡혀 온 예언자들이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하는 것은 반역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거짓 예언자들의 윤리적 타락을 고발하는 말씀은 여호와의 율법을 범하는 자는 그분께서 보내신 예언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의 구별이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가 그분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여호와께서 보내신 자가 아님이 분명하십니다

 

 

예언자 스마야(24-32)

거짓된 선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의 죄에 상응하는 엄중한 형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 예언과 악행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현혹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폭로하고 심판하십니다. 흔들려 잘못되었다고 변명할 수 없는 때가 오며, 하나님께서는 참된 말씀을 전할 자에게 자신의 말씀을 담아 전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쉽게 믿음의 대상을 바꾸거나 내어주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24○너는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라 25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네 이름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와 모든 제사장에게 글을 보내 이르기를 26여호와께서 너를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제사장을 삼아 여호와의 성전 감독자로 세우심은 모든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을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과 목에 씌우는 쇠 고랑을 채우게 하심이어늘 27이제 네가 어찌하여 너희 중에 선지자 노릇을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 28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하기를 오래 지내야 하리니 너희는 집을 짓고 살며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 하셨다 하니라 29제사장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서 들려 줄 때에 30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1너는 모든 포로에게 전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느헬람 사람 스마야를 두고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스마야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에게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 32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의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이 백성 중에 살아 남을 그의 자손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복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4-31)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스마야가 거짓 예언으로 예레미야를 대적한 죄를 지적하십니다. 스마야와 그의 후손은 벌을 받아 다시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살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스마야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짓 예언으로 백성을 현혹했기 때문입니다.

 

(1) 예레미야에게 주시는 말씀(24)

 

예언자 예레미야가 바벨론으로 편지를 보내자, 이에 맞서 유배민들 가운데 활동하는 예언자 스마야가 예루살렘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예레미야의 편지는 사로잡혀 간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내지고, 스마야의 편지는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와 모든 제사장’에게(25) 보내집니다. 예레미야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유배민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편지를 보내고(4), 스마야는 자기 개인의 이름으로(‘네 이름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편지에는 유배민들이 인정하는 예언자가(15; 참조. 8-9) 반응하고, 예언자 스마야의 편지에는 여호와께서 직접 반응하십니다(24-25,30;참조․ 28:12-14). 예레미야가 바벨론으로 보낸 편지가 긍정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유배민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예언자 스마야가 이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예루살렘의 공적 종교가 예레미야의 활동에 개입해 그를 단속하도록 요청합니다.

 

(2) 스마야를 고발하시는 여호와(25-28)

 

스마야가 ‘여호와의 성전 감독자’, 곧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로 예언자를 침묵시키려 하자 유일하고도 최고의 권위이신 여호와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25). 예레미야에게 가해지는 고발이나 위해는 그를 예언자로 보내신 분을 향한 도발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공개하신 스마야의 편지에는 서로 관련된 두 개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스마야는 제사장 스바냐에게 여호와의 성전 감독자의 직무를 지체없이 이행하도록 촉구합니다. 그의 눈에 예레미야는 성전 주변에서 자주 보는 ‘모든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예언자 행세하는 미친 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26). ‘선지자 노릇을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27)는 성전을 소란케 하는 자이기에 붙잡아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과 목에 씌우는 쇠고랑’으로 체벌하고 쫓아버려야 했습니다(참조. 20:1-3a). 28절은 스마야가 예레미야를 사이비 예언자로 간주한 근거를 보여주는데, 5절을 거의 문자적으로 인용합니다. 스마야와 같은 구원 예언자들이 볼 때 바벨론의 지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결정으로 받아들이고 이방 땅에 정착해 살라고 권면하는 예레미야는 헛소리를 떠드는 ‘미친놈’에 불과했습니다.

 

(3) 스마야에게 심판을 선고하시는 여호와(29-32)

 

스마야의 기대와 달리 제사장 스바냐는 예레미야에게 호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한 소란꾼으로 체포하지 않고 (아마도 성전으로 불러) 그에게 스마야의 편지를 읽어줍니다(29). 스마야의 편지를 알게 된 예레미야에게 여호와께서 유배민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주십니다(30-31a). 유배민들은 자신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스마야와 같은 예언자들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15). 31b절의 고발은 28:15의 고발과 거의 일치합니다. 스마야가 ‘이 년’ 이내의 구원을 선포한 하나냐와 같은 계열의 예언자였음을 보여줍니다. 32절의 심판은, 스마야의 후손까지 포함합니다. 스마야는 물론 그의 후손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구원에 참여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복된 일’은 칠십 년 후의 회복을 약속한 10절의 ‘선한 말’을 받습니다.


거짓을 따른 자와 거짓을 전한 자들이 받을 형벌이 각각 선고되고 있습니다. 흔들어서 흔들렸다고, 흔들린 자가 잘못이라고 변명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자신의 말씀을 담아 들려주시겠습니까? 쉽게 믿음의 대상을 내어주지도 말고 바꾸려 둘지도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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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88-01)


극심한 절망 중에 드리는 기도

시편 88편 1-18절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마다 즐겁고 기쁠 때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 중심에서부터 절망에 빠지게 되고 모든 상황 속에서 희망이 비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 우리에게 계속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상황 속에 눌려서 그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모든 시간을 버릴 순 없습니다. 이때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 본 시의 저자를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이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인 헤만은 다음 세대들이 읽고 또 배워야 할 내용을 시로 작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시의 내용은 극심한 고난을 당한 시인은 하나님께 주야로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없고 시인의 기력은 쇠락해갑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인(1-2)

우리 인생 속에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절망 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을 아무리 도우려고 해도, 어려운 상황들이 있음을 보게 되고 그 상황 속에서 헤어 나오려고 하지만, 계속 그 절망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고 계심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1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1-2)

 

시인은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하나님만 그를 고난에서 건져줄 수 있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매우 절박하게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울부짖습니다. 그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르고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기를 간청합니다(시 39:12; 102:1). 40편의 시인처럼 시인도 구원의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고난에서 구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고난 중에 있는 시인(3-5)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하나님에게서도 버림받고 도움이 끊어져 버린 것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마치 소생할 힘이 없을 만큼 무기력하고, 죽은 채 방치된 자처럼 여겨집니다. 그의 침상은 무덤처럼 여겨집니다. 얼마나 극심한 고통이고 끊어지지 않는 아픔이든지 하나님을 부르짖는 힘조차 없을 때가 있습니다.

 

3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3-5)

 

지난 이 극심하므로 시인은 죽음의 문턱에 이른 것(“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3)처럼 느낍니다. ‘재난’은 재앙, 화, 악, 병 등 괴로움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일이나 사진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그가 당한 재난이 어떤 것인지 언급하지는 않으나, 자기에게 재난이 가득하다고 한탄합니다. “재난이 가득하다”는 말은 배가 꽉차서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듯, 시인에게 괴로운 일이 충만하고 극심해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3-5절까지 거듭거듭 자신이 죽은 자와 마찬가지라고 토로합니다. 그런데 시인의 이런 상황은 시인만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다 알려진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들조차 시인을 ‘무덤 구멍으로 내려가는 자’로 간주만큼 그의 고난과 고통스러운 처지는 외부적으로도 다 공개되었습니다. 그는 힘없는 용사같이 되어 자기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마치 죽어서 다 시체들 가운데 던져진 것처럼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 죽은 자들은 노쇠하거나 병약해서 죽은 자들이 아니라 칼이나 창에 찔리거나 구타당해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4절의 “힘없는 용사”와 연결해서 보면, 시인이 힘도 못 쓰는 군인 같으므로 그는 자기에게 닥친 재난과 싸우지도 못한 채 무참히 공격당하고 죽임 당했음을 암시합니다. 그의 시체는 제대로 매장되지도 못하고 한곳에 쌓여 방치된 다른 병사의 시체 더미에 더해질 뿐입니다. 사람들도 이렇게 허망하고 비참하게 죽은 자들을 기억하지 않고 지나갈 터인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그들에게 관심을 두시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기억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끊어진 자, 즉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의 손길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자들이 아닙니까? 시인도 그들 중 하나처럼 되었습니다.

 

시인을 향한 하나님의 화(6-8)

고통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어떻게든 하나님을 ‘고통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나쁜 일’에서 하나님을 보호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분명 ‘모든 일’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이고 그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6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6-8)

 

시인은 죽을 지경이 된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웅덩이 맨 밑바닥, 어둡고 깊은 곳에 두셨으므로 시인은 한 치 앞도볼 수 없고 스스로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웅덩이”, “어둡고 음침한 곳”(6)은 3-5절의 “재난”, “스올”, “무덤”과 같은 의미입니다. 죽음이 도사린 이런 곳에서 시인은 두려움과 절망을 느낍니다. 또한 하나님의 분노가 시인을 지탱하듯 누르고 하나님께서 많은 고통의 물결로 시인을 괴롭히시니, 시인은 숨 쉴 수도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시인은 하나님한테서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도 배척당했습니다. 시인의 가까운 지인들은 그를 멀리 떠났고, 그뿐 아니라 그를 가증한 자로 여겼습니다. 시인은 8절 맨 마지막 문장을 제외한 6-8절의 모든 문장의 주어로 하나님을 칭하는 “주(당신)께서” 또는 “주(당신)의 노”를 사용하여 자신을 큰 시련 속에 몰아넣은 주체가 하나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갇혔고 나갈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시인을 웅덩이에 빠뜨렸다면 하나님께 끌어내주시길 간청할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능히 구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를 웅덩이에 집어넣으셨으니 하나님의 긍휼과 도움이 얼마나 더 필요합니까? 시인은 하나님 신뢰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을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인(9-12)

인간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것인데, 사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더 큽니다. 죽음과 고난 등에 대해서 두려움을 아주 크게 키워놓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최상의 방법은 직면하는 것입니다. 직면하면 하나님께서 나아갈 길을 보여주십니다.

 

9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11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9-12)

 

하나님의 노하심으로 인해 시인은 고통 속에서 점점 쇠약해져 갑니다. 기자는 네 가지 수사적 질문들, 곧 전형적인 쟁점들을 동원하여 자신이 죽기 전에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9)란 표현은 그가 하나님께 매일 울부짖느라 눈이 침침해졌다는 뜻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심신이 약해졌다는 의미로볼 수 있습니다. 시편 6편에서도 시인은 밤마다 하나님께 탄식하고 통곡하여 근심하므로 눈이 쇠하고 침침해졌고, 여기에 뼈와 영혼이 떨리고 수척해졌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시 6:2-3, 6-7). 시인은 기력이 쇠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듭니다. 이런 행동은 시인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겸비함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살아있는 자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음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랍니다. 죽은 자들(“죽은자”, “유령들”)이나 그들이 있는 곳(“무덤”, “멸망”, “흑암”, “잊음의 땅”)은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기이한 일”, “기적”, “공의”)나 성품(“인자하심”, “성실하심”)을 찬양할 수도 선포할 수도 없습니다(10-12; 시 6:5).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경배는 오로지 생명을 가진 자들의 몫이자 특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의 위협에서 구하여 하나님을 계속 찬양할 수 있게 해주시길 간청합니다.

 

고난 중에도 끊임없는 기도(13-18)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빛되심을 경험하고, 그 후에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서 깊은 어둠을 절감하는 사람은 참 빛이신 주님을 갈구하게 됩니다. 자신이 어둠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참 빛을 구해야 하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어둠 속에 헤매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는 순간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수용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죽음에 직면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13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13-18)

 

시편 기자가 드린 기도의 일부를 되풀이하지만 부르짖는 시점이 아침으로 바뀝니다. 본문에서는 1-9절의 주제와 유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징계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느낌이 닥친 것을 탄식합니다(7,14).

시인은 ‘그러나 나는 당신께 부르짖었나이다’(13, “오직 내가”로 번역됨)라고 외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밝힙니다. 죽으면 하나님께 찬양도 기도도 할 수 없지만, 그전까지는 기도를 그만둘 수 없고 또 그만두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주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1,9,13). 아침에도 그가 계속 기도할 것이므로 기도는 하나님 앞에 전달될 것입니다(13). 그러나 시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거절하고 얼굴을 숨기신다고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서 얼굴을 숨기시는 행동은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거나 비추는 행동(민 6:25-26)의 반대로서 그 사람의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침묵과 무반응으로 일관하시며(시 13:1; 102:2) 대적처럼 여기심(사 64:7;욥 13:14)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응답과 무관심으로 시인을 고립시키셨으나, 시인을 향한 진노는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시인의 고난의 역사는 오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고통을 당해 지금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두려움으로 괴롭히시므로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쇠약해져 갔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바다 물결처럼 그를 누르고 괴롭혔습니다(7). 지금도 물이 시인 위로 넘실대며 지나가듯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넘실대며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두려움으로 시인은 말문이 막히고 소진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이런 일들이 물처럼 시인을 둘러싸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시인이 재난을 당하고 고통에 처하자 시인의 지인, 사랑하는 자, 친구들은 다 멀리 떠났습니다. 시의 맨 마지막 문장,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란 문장은 하나님께서 시인의 지인들을 어두운 곳으로 떠나보내어 그로부터 멀어지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내가 아는 자는 흑암이니이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번역을 따르면 친구들이다 떠났으므로 이제 시인에게 있어서는 죽음을 상징하는 흑암만이 그의 지인이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흑암”은 위 6절에서 “어두운 곳”으로 번역되어 ‘죽음’을 암시하고, 앞의 친구들이 떠난 곳을 ‘죽음’으로 보기는 적당치 않으므로 후자의 번역을 지지해줍니다. 시인의 계속되는 탄식의 표현들은 허무하게 내뱉는 절망의 하소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는 간접적인 요청, 하나님께 직접 상달되는 간구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도 오늘 본문의 시인이 겪었던 것처럼, 크고 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또 우리를 짓누르는 여러 상황들로 인해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또한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아스라이 계신 것 같이 여겨지고, 가족들도, 친구들도, 지인들도 나를 멀리하는 것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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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87-01)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시온

시편 87편 1-7절


 

교회를 비판해야 교회가 바로 선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올바른 교회론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사람이 보는 시각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는 시간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는 사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곳이 교회입니다.

 

  • 하나님께서 시온의 문들을 더 사랑하셔서 성산에 터를 세우셨습니다.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시리니 이방 민족은 물론 하나님을 아는 모든사람이 ‘거기서났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 ‘이 사람이 거기서났다’ 하실 것이며, 노래하는 자들은 모든 근원이 시온에 있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시온(1-2)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각 나라와 각 지역을 소유하시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본부 기지로 삼으셨습니다.

 

1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2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1-2)

 

시온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시의 첫 문장 “그(하나님)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에서 “터전”은 뭔가를 세울 때의 ‘기초’나 ‘토대’를 뜻하므로 그의 터전은 하나님께서 설립자임을 나타냅니다. “성산”은 ‘거룩한 산’이란 뜻으로서 시온산을 가리킵니다. 첫 문장은 하나님께서 시온을 세우셨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성산”은 두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성산들’은 시온산을 지칭하며, 복수형을 사용하여 시온산의 장엄함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성산들’을 예루살렘 주위를 두르고 있는 시온산을 비롯한 여러 산들 또는 산등성이(시 125:2; 133:3)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산들 중에는 시온산을 비롯하여 감람산, 모리아 산 등이 있으나, 시 전체가 시온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성산들’은 결국 시온산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온은 또한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곳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신다고 선언합니다(2). 여기서 “시온의 문들”은 예루살렘 성의 입구(성문)를 가리킵니다. 원래 시온은 다윗 왕이 여부스 족에게서 빼앗은 요새로서 ‘다윗의 성’(삼하 5:7,9; 대상 11:5)으로 불렸고, 예루살렘 성에 속해 있어 ‘예루살렘’의 별칭 또는 대체어로 사용되었습니다(사 39:9). “야곱의 모든 거처”는 말 그대로 이스라엘의 다른 거주지들(성, 마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거나 1절의 ‘성산들’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 이해하든, 2절은 시온이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는 곳임을 부각하려는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사랑하는 이유는 시온이 다른 데에 비해 비옥하거나 수려해서가 아니며, 거기 사는 백성이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바산의 산들이 시온산보다 훨씬 높고 보기에 더 빼어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온을 사랑하셨고 시온을 그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시 68:15-16; 78:68). 다른 민족이 더 수가 많고 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기뻐하셨습니다(신 7:7). 시온과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의 성소에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므로 시온은 거룩한 산 여호와의 산이 되었습니다(시 2:6;24:3; 48:1). 하나님께서 이 성에 계시므로 시온은 요동치 않으며 영원히 있습니다(시 46:5; 48:8; 125:1). 하나님의 축복이 시온에 대대로 머뭅니다(시 128:5).

 

시온에 대한 영광스러운 일들(3-6)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용하셔서 온 땅을 다스리십니다. 시온을 통해 열방을 통치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교회를 사용하셔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영광을 받기 원하십니다.

 

3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셀라) 4나는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5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6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셀라)(3-6)

 

하나님의 도성 시온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세계의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너(시온)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3)는 직역하면 ‘영광스러운 일들이 너에 대해 말해지는도다’입니다. 원문에서 ‘영광스러운 일들’이 첫 단어로 나와 강조되었고, 동사가 ‘말하다’의 수동형으로 나와 말하는 주체보다는 목적어인 영광스러운 일을 강조합니다. 1-2절의 하나님께서 성을 세우시고 사랑하신 것을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온의 영광스러운 일들로 본다면, 이제 시인이 말하려는 4-6절의 내용은 종말에 일어날 영광스러운 일들입니다. 시온에 대한 영광스러움이 언급된다는 것은 시온에 대한 찬양을 암시합니다. 1-2절이 이스라엘에 초점을 맞추어 시온을 찬양한다면, 4-6절은 범우주적으로 시온의 영광스러움을 찬양합니다.

본 시에서 선포하는 시온의 영광스러운 일은 시온이 열국의 모태가 된다는 점입니다. 먼저, 4절은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들로 언급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시온)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합니다. 이때 4절에서 말하는 주체는 누구인지 언급되지 않았으나, 내용상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가 대언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라합’은 원래 바다 괴물(욥 26:12; 사 51:9)을 지칭하지만 여기서는 ‘애굽’을 가리킵니다. ‘라합’이 바벨론과 병행되었고 블레셋 등 열국 목록의 같은 문맥에서 나왔으므로, 이사야 30:7에서처럼 지명인 ‘애굽’을 상징하는 비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애굽과 바벨론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침략했던 강대국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들은 수많은 우상 신을 섬겼으며, 애굽은 ‘라합’이라는 바다 괴물로 불리는 데서도 추측할 수 있듯 강포함과 교만함으로 세상에 알려진 열국입니다(사 14:4;겔 29:3;30:10-11). 이스라엘은 이런 열국들한테서 도움을 구하며 우상들을 섬겼습니다(사 30:1-2; 겔 23장).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애굽과 바벨론이 ‘하나님을 아는 자’, 즉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자들 중에 속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뿐 아니라 이들에 버금가는 블레셋, 두로, 구스도 시온에서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포될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남서부의 해양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시시때때로 괴롭혔던 원수며, 두로는 시돈과 더불어 해상무역으로 이름을 떨친 나라이고, 구스는 다시스와 같이 애굽에서 멀리 떨어진 무역국 에티오피아를 지칭합니다. 모두 하나님께 대항하고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던 나라들입니다(사 45:14). 그러나 장래에 이들은 시온의 하나님 백성이 되며 그를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사 19:23-25). 5절에서도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시온)서 태어났다”고 말할 것이라고 하며, 세계의 온 나라와 백성이 시온의 백성이 될 것을 예고합니다. 이와 같은 장면은 다른 시편에서, 또는 이사야나 스바냐 선지자 등을 통해 예견된 바와 일치합니다(시 22:27-28;72:10-11;사 19:21-25;60:3-9;습 3:10).

세상의 열국을 다 품은 시온은 지존자 하나님께서 세우신 도성으로 확실히 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족들을 명부에 기록하며 그 수를 헤아리실 때, 이들이 다 시온에서 나온 하나님의 백성임을 다시금 확증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시는 모습은 다른 성경에서도 볼 수 있고, 그 명부는 기념책이나 생명책 등으로 언급되었습니다(시 68:28; 말 3:16; 단 12:1). 특히 이 책에 기록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들, 즉 하나님께 의인으로 칭함 받은 자들입니다(시 68:28; 말 3:16).

 

온 백성의 근원인 시온을 찬양(7)

교회는 예배를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배 드리는 것을 즐거워하며,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 전파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교회의 본질인 예배를 귀하게 여기며, 말씀 위에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더욱 영광스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7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7)

 

이제 열국이 나와 노래하며 춤추며 온 백성의 근원이 된 시온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은 언제나 기뻐 외치는 자, 노래하는 자, 악기 연주자, 춤추는 자 등이 넘치며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삼상 18:6-7; 계 7:9). 그들 모두가 “나의 모든 근원이 네(시온)게 있다”고 외치며, 시온의 백성임을 축하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근원”은 ‘샘’이란 뜻도 있습니다. 시온에는 시내가 있고, 그 줄기가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인 시온성과 하나님의 처소를 기쁘게 한다고 시인은 노래하였습니다(시 46:4). 시온에 사는 백성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살진 것으로 맘껏 배불리고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기쁨의 강물을 마실 것입니다(시 36:8). 이때 시온에 흐르는 물의 원천지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 물이 성소를 통해 흘러나옴을 목격했고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내린 물이 점점 차올라 사람이 건널 수 없는 충만한 강이 되있음을 묘사했습니다(겔 47:1-5). 사도 요한은 이 강을 ‘생명수의 강’으로 부르며, 이 강물이 하나님과 그의 어린 양 그리스도의 보좌로부터 나온다고 진술함으로 써 강물의 시작이 하나님이심을 밝혔습니다(계 22:1). 이 강의 좌우에 수많은 과일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들은 성소에서 흐르는 물 덕분에 잎도 시들지 않고 매달 치로제가 되는 새 열매를 맺습니다(겔 47:7,12; 계 22:2). 이 나무들은 ‘생명나무’라 불리며 열매들은 만국을 치유합니다(계 22:2). 또한 물줄기를 따라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아나고 번성하며 치유됩니다(겔 47:9-10).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나 원하는 자에게 값없이 제공하십니다(계 21:6; 22:17). 이와같이 시온이 모든 것과 모든 이의 근원이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판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 원하시므로 교회가 구원의 방주 역할을 잘 감당하려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 위에 견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가장 중요한 사명인 예배를 잘 감당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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