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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5-01)

 


북이스라엘의 혼란과 아사랴 

열왕기하 15장 1-22절


권력이 사유화될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의 몫이 됩니다. 이 무서운 파괴력 때문에 우리는 권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들은 이런 영적 비밀 때문에 권력에 집착하는 자를 우는 사자와 같이 찾고 있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분별력뿐만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분별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 최고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열왕기 저자는 그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도 역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유다에서는 아사랴(웃시야)가 왕이 되었고, 그거 52년간 왕으로 통치합니다. 이 시기가 이스라엘과 유다 양쪽 왕국 모두 평화와 번역의 시대였습니다.

 

유다 왕 아사랴의 통치(1-7)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할 수 있으므로 국가 권력에 대한 적절한 규제와 제한은 필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력이 남용되면 국민들이 피해를 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큰 악행입니다.

 

1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제이십칠년에 유다 왕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니 2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육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야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4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5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가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왕궁을 다스리며 그 땅의 백성을 치리하였더라 6아사랴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7아사랴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7)

 

본문은 더욱 급박하게 요동치는 남북 이스라엘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용돌이치는 두 나라 모두 더 깊은 죄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점차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나라의 멸망의 길을 끊을 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화가 중요합니다. 악이 만연하면 처음에는 괴롭지만 나중에는 내성이 생겨서 견딜 만해집니다. 자신도 생존하기 위해 자신도 악을 범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자신도 악한 문화의 일부가 되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심판이 닥치면 옴짝달싹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통치 아래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 남 유다는 아사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16세에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52년을 다스리는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사랴의 통치 기간이 긴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공동으로 통치한 기간이 포함되었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열왕기 왕들의 연대기는 정확하게 밝히기 어렵기 때문에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아사랴의 평가는 아마샤와 동일한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신실하지는 못했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도, 그의 아버지처럼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 백성들은 지도자의 묵인 아래 그 산당에서 분향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왕은 하나님만 믿기에는 그의 믿음이 적었고, 백성들은 혼합주의입니다.

 

아사랴의 가장 기억할 만한 사건은 여호와께서 그를 치셔서 나병에 걸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 원인을 열왕기에서는 생략하지만, 역대기에선 그가 마음이 교만해져 성전에 들어가 직접 향단에 분향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역대기에 따르면 아사랴가 암몬을 쳐서 조공을 바치게 하였고 나라의 영토를 넓혔으며, 예루살렘 성에 망대를 세우고 견고하게 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바로 그런 번성과 성취 때문에 그가 교만해졌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열왕기는 업적이나 자세한 사항보다는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성했는지 악했는지에 대한 평가 자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놀랍게도 52년 동안 이룬 업적과 사건들은 모두 생략하고 있습니다. 왕이 하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사랴의 나병은 나아만의 나병과 다른 병으로 보이는데, 나아만의 경우는 격리되지 않고 공적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사랴는 레위기에서 부정 하다고 간주되어 다른 곳에 홀로 격리되어야하는 종류의 나병으로 더욱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하게 얼굴을 들던 아사랴는 사람들 앞에 서도 얼굴을 들지 못하는 철저히 낮아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 바로 아사랴의 죽음에 대해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사히 다윗 성에 있는 조상의 묘실에 안장되고 그의 아들 요담이 왕위를 계승합니다.

 

이스라엘 왕 스가랴의 통치(8-12)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망은 모반과 살인으로 얼룩진 권력을 만듭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실은 쿠데타로 피범벅이 되었고, 갖은 왕권 교체로 왕의 자리는 더는 권위 있는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8유다의 왕 아사랴의 제삼십팔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사마리아에서 여섯 달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9그의 조상들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10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그를 반역하여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1스가랴의 남은 사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12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사 대 동안 이스라엘 왕위에 있으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8-12)

 

여기서부터는 이스라엘 왕국에서 계속 반란이 일어나 왕들이 짧은 시간에 계속해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약속하신 4대가 지나자 이스라엘은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왕국은 혼돈에 빠집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과 왕가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유다 왕 아사랴의 통치 38년에 여로보암 2세가 마침내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왕이 됩니다. 그런데 그의 통치 기간은 6개월밖에 되지 않습니다. 스가랴 왕도 이전의 선조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스가랴의 경우는 그의 조상들의 행위대로'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는데, 이것은 그동안 예후 가문이 계속해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으며 이제 그 결과 예후 왕조는 망하고 이스라엘도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점점 임계점에 이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스가랴가 통치한 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반역하였고, 살룸은 백성들 앞에서 스가랴를 공격하여 죽이고 대신 왕이 됩니다. 스가랴의 업적은 일절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다만 그가 왕이 되었고 또 때가 되어 죽었다는 언급이 전부입니다. 열왕기 저자는 이 반역 사건으로 예후 가문에 네 명의 후손이 이스라엘 왕위에 있으리라는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열왕기 저자의 사상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살룸의 통치(13-16)

권력이 집중되면 갑질을 하고 상처를 주고 안하무인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공익보다는 사익을 추구하기 쉽습니다.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은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고, 그런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 됩니다.

 

13유다 왕 웃시야 제삼십구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한 달 동안 다스리니라 14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디르사에서부터 사마리아로 올라가서 야베스의 아들 살룸을 거기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5살룸의 남은 사적과 그가 반역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16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그들이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그 곳을 치고 그 가운데에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13-16)

 

이 단락은 살룸 왕의 통치에 대한 단락으로 유다 왕 웃시야 제39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었지만, 그는 겨우 한 달을 통치하는데 그칩니다.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짧은 기간 왕위에 있었던 사람은 시므리인데 그는 단 7일간 통치하였습니다(왕상 16:15-20). 살룸이 반역하여 왕이 된 지 한 달만에 가디의 아들 나헴이 디르사로부터 사마리아 왕궁으로 쳐들어와서 살룸을 죽이고 왕이 됩니다. 반란이 일어난 지 한 달 만에 또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때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한 달밖에 안 다스린 살룸도 다른 왕들과 동일한 등극 공식과 죽음 공식을 갖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왕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은 므나헴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므나헴은 딥사를 점령할 때 문을 열고 자신을 환영하지 않았다는 이 유로 딥사 성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성에 속한 모든 지역을 다 공격하고 죽였으며, 심지어 그곳에 있던 임산부의 배를 갈라 죽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반대한 딥사를 완전히 파괴하고 그곳 사람들의 씨를 말린 것입니다. 이것은 나헴이 얼마나 잔인한 인물인지를 보여줍니다. 므나헴이 얼마나 잔인한 인물인지를 보여줍니다. 므나헴의 이름 뜻은 ‘위로자’인데, 이름과는 정반대로 잔인한 살인자로 행동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 므나헴의 통치(17-22)

악한 자들의 통치하는 방법은 약한 자들에게는 혹독하고 가혹할 만큼 착취하여, 강자들에게 비굴해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남의 희생을 밟고 얻는 부요와 지위를 축복이나 성공이라고 부르지 않고 ‘불의’라고 부릅니다. 북 이스라엘 왕 므나헴이 그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17유다 왕 아사랴 제삼십구년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십 년간 다스리며 18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19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그로 자기를 도와 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20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강탈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되돌아가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 21므나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2므나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7-22)

 

잔인한 반란으로 왕이 된 므나헴은 사마리아에서 10년간 다스렸습니다. 반란이 성공하여 10년간은 안정적인 통치를 하였지만, 그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죄가 쌓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므나헴이 왕이 되었을 때의 앗수르 왕은 ‘불’이라는 사람인데(19), 그는 디글랏 빌레셀 3세와 동일 인물입니다. 앗수르는 디글랏 빌레셀 3세 때부터 강성해지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므나헴은 앗수르가 쳐들어오자 은 천 달란트를 공물로 바치고, 이스라엘의 귀족들과 부자들에게서 강제로 은을 빼앗아 한 명당은 오십 세겔을 주고 앗수르의 용병을 데리고 옵니다. 그는 공물을 바치고 용병을 사음으로 왕권을 유지하고 영토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시도는 성공하였고 앗수르는 이스라엘에서 떠납니다. 앗수르의 기록에 따르면, 앗수르는 사마리아의 므나헴으로부터 한 차례 이상 조공을 받았다고 합니다.

 

므나헴이 돈으로 앗수르의 환심을 사고 앗수르의 용병으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한 것은, 그가 여호와 의지하지 않고 주변 강대국을 의지하려 한 것입니다. 므나헴은 이스라엘의 왕권은 여호와께서 주시고 거두지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운명도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이로써 므나헴은 왕권을 유지했지만, 이스라엘의 힘은 점점 약해져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므나헴이 죽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에 오르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점점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갔지만, 그들은 여호와께 돌아오거나 부르짖지 않고 주변 강대국을 의지하며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지와 어려석음이 권력을 악용하는 오용하는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정치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반역과 오만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영역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권한을 제대로 사용하는지 예언자의 눈으로 감시하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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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4-02)


새로운 지도자 아사랴의 등극

열왕기하 14장 17-29절


죄가 더할수록 은혜가 깊어진다는 말씀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은혜를 받으려고 죄를 더 지어야 한다는 말합니까? 그럴 리 제대로 없습니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지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은혜 아니면 안 되는 인간의 철저한 무능과 부패 때문입니다.

 

  • 엘리사는 죽기 직전에 요아스에게 아람을 이길 기회를 주지만, 요아스는 그의 믿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아람을 완전히 진멸할 수 있는 기회를 잃습니다. 하지만 엘리사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아람을 세 번 이김으로써 빼앗겼던 성읍들을 되찾습니다. 이때 유다는 요아스의 아들 아마사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합니다. 이 두 왕국 간에 이전의 동맹관계는 사라지고 전쟁을 하게 됩니다.

 

아마샤의 죽음과 아사랴의 등극(17-22)

성경에서 말하는 착한 왕의 기준은 세상을 향해 얼마나 많은 기여도가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어떤 태도로 살았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없는 업적은 기억될 가치가 없습니다. 계명 준수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17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십오 년간을 생존하였더라 18아마샤의 남은 행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9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한 고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반역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 그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20그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하니라 21유다 온 백성이 아사랴를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 때에 그의 나이가 십육 세라 22아마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잔 후에 아사랴가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더라(17-22)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죽음 이후에 아마샤는 15년간 더 살았습니다. 요아스가 예루살렘을 침략하고 약탈한 뒤 아마샤를 예루살렘에서 풀어주고 되돌아왔기 때문에, 아마샤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유다의 왕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에서 지고 15년 후에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에서 진 것을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삼기는 어렵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진 이후 아마샤는 이전 권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서서히 내부 갈등이 생기면서 반역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화자가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나 세력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무리’라고 한 것은,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일부 반역 세력이 아니라 아마샤의 통치를 반대하던 상당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역을 당한 아마샤는 예루살렘에 있다가 라기스로 도망갑니다. 라기스는 아모리 족속이 살던 다섯 성읍 중 하나로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요새화된 큰 성읍이었기에 반란 세력을 막고 안전하게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하지만 이 도주는 성공하지 못하고, 아마샤 왕은 이곳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요새화된 성읍을 뚫고 들어가 아마샤를 죽였다는 것은 아마샤를 잡기 위해 상당히 많은 군사를 보냈음을 보여줍니다. 자객을 보내는 방법이 아니 라면 요새화된 성읍을 공격하기 위해 많은 군사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마샤의 죽음은 백성들 상당수가 왕에 대한 반역을 지지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아버지 요아스처럼 반란 세력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의 시신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성에 장사됩니다. 반란으로 죽음을 당했어도 장례만큼은 왕으로서의 합당한 대우를 받은 것입니다. 그가 살아서는 백성들에게서 왕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죽어서는 왕 대접을 받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아마샤는 피살당했지만 유다 백성들은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를 왕으로 세웁니다. 그의 나이가 당시 16세였습니다. 축출된 왕의 아들이 온 유다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는데, 이는 반란 세력이 아사랴를 지지했다는 뜻입니다. 아사랴의 모친 가문이 반란 세력의 주축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아사랴는 왕위에 오른 후 아마샤처럼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처형했다는 보고가 없는 것을 볼 때 이렇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사랴의 최대 업적을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로 복귀시킨 것이 라고 합니다(22). 아사랴는 웃시야라고도 불리는데, 그는 역대하 26:6-15에 따르면 엄청나게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엘랏의 회복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엘랏은 솔로몬이 아카바 만 꼭대기에 건설한 항구이며, 인근에 있는 에시온게벨 항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유다가 아라비아, 아프리카, 인도와 교역을 시작하게 한 항구입니다. 그러므로 아사랴가 이곳을 회복한 것은 솔로몬 시대에 시작한 홍해 무역을 되살리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엘랏의 회복은 솔로몬 시대의 영화를 회복했다는 상징 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장 큰 업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의 등극과 업적(23-27)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의 신비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습니다. 불순종한 사람들에게도 물질적인 풍요를 주시기도 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주시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23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24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5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6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23-27)

 

유다 왕 아마샤가 등극한 지 15년 후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수도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41년을 다스립니다. 이때의 여로보암을 우리는 이스라엘 1대 왕 여로보암과 구별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여로보암 2세라고 부릅니다.

24절은 여로보암 왕에 대한 열왕기 저자의 평가입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가 이방신을 섬기는 것과 단과 벧엘에서 제사 지내는 것과 정의를 행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던 시기가 여로보암 2세 때입니다.

열왕기에서는 여로보암 2세의 죄에 대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는 말로 요약하고 있지만, 이 시기는 물질적 풍요와 함께 사회, 종교적 타락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신 것은 아니었기에, 선지자들은 주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25절은 여로보암이 영토를 회복하였는데, 여호와의 종 아밋대의 아들 요나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이루어졌다고 보고합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요나서의 주인공입니다. 하맛어귀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이스라엘 영토가 회복될 것이라는 요나의 예언은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열왕기에서는 이런 예언이 있었고 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고 알려줍니다. 여기서 하맛 어귀는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이고, 아라바 바다는 남쪽 경계입니다. 북쪽 경계부터 남쪽 경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는 것은 솔로몬 시대의 땅을 모두 회복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여로보암 2세 시대 이스라엘의 국력이 솔로몬 시대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강했다는 것입니다. 26-27절은 왜 이렇게 여로보암시대에 이스라엘이 강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설명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엄청난 고난의 시간들을 보냈는데, 그 시 절을 보내면서 스스로 매고 풀 수도 없으며, 그들을 도와줄 사람도 없는 절대적인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는 자도 없고 푸는 자도 없다는 표현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철저히 무능력한 상태를 표현하는 관용구입니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이렇게 무능하고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을 도와 줄 동맹도, 이방신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비웃음인데, 그동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고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으며 부국강병을 꾀하였지만, 그 결과는 철저한 무능과 고난이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 대해 관심 갖고 보고 계신 분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이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거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기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고 열왕기 저자는 고백합니다. 아직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남아 있었기에, 고통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버릴 수가 없었고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의 풍요는 철저히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의 산물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마지막 신호였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풍요가 자신들의 힘과 이방신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하나님을 멀리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다. 결국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고 여로보암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국내외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죽음(28-29)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는 한 동전의 양면입니다. 정의 구현하는 사랑은 정의 그 자체보다 용량이 더 큽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불의를 인정하지 않지만 불의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어집니다. 사랑은 율법적인 정의를 넘어섭니다. 기계적인 정의가 아니라 궁극에는 사랑과 긍휼이 이기기 때문입니다.

 

28여로보암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과 싸운 업적과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여로보암이 그의 조상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8-29)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 왕 중에서 솔로몬에 버금가는 영토를 얻고, 풍요를 누리고, 주변 나라들과 활발하게 무역하여 널리 이름을 날렸습니다. 하지만 열왕기 기자에게 그런 업적은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기에, 전쟁한 것과 다메섹과 하맛을 회복한 일 정도만 간단하게 언급한 채 여로보암 2세 이야기를 마무리 합니다. 열왕기 기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업적이 아니라 여호와 보시기에 선했느냐 약했느냐 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평가하시는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업적과 스펙으로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으로 평가하십니다. 여로보암이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왕이 되었지만, 이후로 이스라엘은 엄청난 내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작동합니다. 가장 악한 시대가 누린 최대의 번영은 하나님 은혜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또한 심판의 일종이기도 합니다. 죄악에 둔감해지게 하는 심판이요,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푼 은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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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4-01)


아마샤의 번성과 쇠퇴

열왕기하 14장 1-16절


어리석은 지도자는 힘을 정당하고 의로운 쪽으로 쓰지 않고 남용하다가 슬픈 최후를 맞이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서로 분별하도록 돕는 공동체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과신(過信)에 빠지지 않고 견제와 균형을 갖게 됩니다.

 

  • 엘리사는 죽기 직전에 요아스에게 아람을 이길 기회를 주지만, 요아스는 그의 믿음 없음으로 말미암아 아람을 완전히 진멸할 수 있는 기회를 잃습니다. 하지만 엘리사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아람을 세 번 이김으로써 빼앗겼던 성읍들을 되찾습니다. 이때 유다는 요아스의 아들 아마사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합니다. 이 두 왕국 간에 이전의 동맹관계는 사라지고 전쟁을 하게 됩니다.

 

유다 왕 아마새의 등극(1-4)

죄악에 물든 과거와 단절하거나 누적된 악습의 구조를 끊어버리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바알체제는 승자독식과 위계질서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도록 정교한 제의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정은 이러한 가나안 문화를 전복할 신앙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1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제이년에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2그가 왕이 된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호앗단이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4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1-4)

 

이 단락에는 유다 왕 아마샤의 등극 공식이 나옵니다. 아마샤는 유다 왕 요아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데, 그는 이스라엘 왕 요아스 시대부터 여로보암 시대까지 유다의 왕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아엘 왕 요아스가 죽은 뒤에도 15년간 더 살아 있었습니다. 그는 25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29년을 통치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마샤의 시대는 제한적이지만 평탄한 왕정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여호앗단으로 예루살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과 다르게 유다가 어머니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일부다처 사회에서 왕이 여러 명의 왕비를 두었기 때문에 어느 왕비의 아들인지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반정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머니의 이름보다는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3절은 아마샤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완전히 합한 것은 아니었고, 그의 아버지 요아스 수준만큼 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했지만 산당을 없애지 않아서 아쉬움을 남겼는데, 아들 아마샤도 아버지처럼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산당은 이방신을 제사하고 분향하던 곳으로 이곳을 제거하지 않고 강력하게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계속 산당에서 이방신들을 위해 분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와 함께 우상을 섬기는 영적 간음입니다.

 

아마샤와 요아스가 산당을 없애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 왕들이 여로보암의 황금 송아지를 없애지 못한 것과 같은 죄입니다. 이들은 여호와 종교는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여호와만을 섬겨야 한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신을 다양하게 섬길 수 있다는 당시 문화를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당대의 관습을 벗어나거나 오랜 관행을 벗고 참다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동일한 과오를 되풀이하여 저질렀기에 아마샤도 아버지처럼 반역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열왕기하 14:19).

 

아마샤의 업적(5-7)

사람들은 대체로 실패보다 실수에 관대합니다. 그래서 일에 있어서도 실수에서 빚어진 그 어떤 것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라는 것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실수를 예방할 수는 없지만 해결해 나갈 수 있기에, 성공에 이르는 길은 수많은 실수로 포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 것이나 이 정도면 준비가 됐겠지라는 판단은 실수가 아닌 실력입니다. 실력이 그 정도이니 딱 그 정도의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5나라가 그의 손에 굳게 서매 그의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6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7아마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또 전쟁을 하여 셀라를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5-7)

 

아마샤는 반역자들이 아버지 요아스를 죽이는 바람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는 과정만큼이나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아마샤가 권력을 쥐고 왕권을 강화하여 정적들, 즉 아버지를 죽인 반역 세력을 제거합니다. 하지만 아마샤는 그의 자손들까지 모두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데, 열왕기 저자는 그 이유를 아버지 죄 때문에 아들을 죽이지 말고 아들 죄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율법은 신명기 24:16입니다. 이 사상이 이전에는 잘 등장하지 않다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에스겔 18:2-3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 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도 31:29-30에서 동일한 말을 합니다. 이것은 아마샤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실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7절에서 아마샤의 업적은 에돔을 물리치고 영토를 넓힌 것으로 그는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과의 전쟁에 승리하고 포로로 잡은 만 명의 사람들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역대하 25:12에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포로는 노예로 삼거나 팔고 그것도 여의치 않은 경우엔 죽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군인이 되어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전쟁 방식입니다.

그들은 에돔에게 승리하면서 셀라를 취하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승리 소식입니다. 여기 셀라는 오늘날의 페트라와 인접한 지역으로 보입니다.

 

이 지역은 일시적으로 점령한 땅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유다 땅에 편입된 땅입니다. 이 부분에서 열왕기 기자의 사상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아마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과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셀라를 정복한 것을 연결시켜서, 여호와께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전쟁의 승리를 주시고 땅도 얻을 수 있게 해주신다는 사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지 여부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전쟁(8-14)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걸려 넘어지는 암초와 같습니다. 왕의 교만으로 유다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고 왕도 무명의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누가 왕을 죽였는지 밝히지 않는 것은 수모이자 비극입니다. 아마샤는 자기애라는 동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8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 9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유다의 왕 아마샤에게 사람을 보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전갈을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10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왕궁에나 네 집으로 돌아가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11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그와 유다의 왕 아마샤가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 12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13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14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8-14)

 

왕권을 강화하고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아마샤는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만나자고 제안합니다. 이 본문에선 아마샤가 요아스를 보자고 한 이유가 정확히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역대하 25:6-16에 따르면 유다군이 에돔을 공격할 때, 십만명의 이스라엘 군사를 용병으로 고용했지만, 유다가 돈을 주지 않고 돌려보냅니다.

이런 유다의 처사에 화가 난 북이스라엘 군사들은 사마리아에서 벧호론까지 모든 유다 성읍들을 약탈하였습니다. 아마샤가 요아스를 만나자고 한 시점은 약탈이 일어난 뒤로 보입니다.

이렇게 유다와 이스라엘 간에 분쟁이 있는 상황에서 아마샤는 요아스에게 전쟁을 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전쟁은 항상 선전포고를 하고 먼저 말싸움을 한 후,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일종의 선전포고인 것입니다. 그러자 요아스는 레바논 백향목과 가시나무의 비유를 들며 만남을 거절합니다. 여기서 레바논 백향목은 고대 근동에서 가장 값비싼 목재이고 가시나무는 가장 가치 없는 나무를 의미하며, 가시나무가 백향목에게 서로 결혼하자고 말하는 것은 가시나무가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백향목에게 함부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함부로 깝죽거리 가시나무는 레바논의 들짐승에게 밟혀 최후를 맞이합니다.

 

10절에서 요아스는 네가 에돔을 쳐서 마음이 교만해졌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 후,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를 자초하여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아마샤는 요아스의 경고를 듣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승리를 누린 것을 잊은 채 아마샤는 자기 힘으로 승리했다고 자만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아마샤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던 사람은 요아스였던 것입니다.

결국 요아스와 아마샤는 벧세메스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고, 아마샤는 패하여 도망합니다. 아마샤는 요아스에게 잡혀 예루살렘까지 끌려오고, 요아스는 예루살렘 성벽을 400규빗가량 헐어버리고, 성전과 왕궁의 곳간을 털어 보물들과 볼모로 잡은 사람들을 데리고 사마리아로 돌아갑니다. 완전한 요아스의 승리로 아마샤는 치욕을 당하고 유다의 수도는 파괴되고 약탈당하였습니다. 주변의 적에게 이기고 승승장구하던 아마샤가 동족 이스라엘에게 철저히 약탈당하고 파괴되는 수치를 당하게 된 것은 그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죽음(15-16)

온전한 리더십은 과욕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이룹니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굴림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자신이 누구인가 성찰하면서 자기를 알면 알수록 더욱더 자유롭고 원만해집니다. 그리고 주변에 모든 것을 포용하며 원활하게 조직을 인도해 나아갑니다.

 

15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의 업적과 또 유다의 왕 아마샤와 싸운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6요아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사마리아에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5-16)

 

이 단락은 요아스의 죽음에 대한 공식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가장 기억할 만한 업적은 유다 왕 아마샤와의 전쟁에 서 이 긴 것이 라고 말합니다.

요아스는 큰 믿음을 가지지 못해 엘리사가 자신에게 준 큰 기회를 아쉽게 만든 인물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4대 동안 그 후손을 왕으로 세워주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도 무사히 왕권을 지켰고 아들 여로보암에게 왕권을 넘겨주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평안히 사마리아의 묘실에 묻히게 됩니다.

이렇게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은 온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살았기에 대외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넘길 수 있었습니다.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깨어 있는 경건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성령 안에서 분별력을 갖고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위험성을 간파해야 합니다. 죄는 맹목적인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잘못된 길은 잘못된 선택이 낳은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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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3-02)


엘리사의 마지막 능력

열왕기하 13장 14-25절


오늘날 교회와 사회는 지도자의 자질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선한 행실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언해야 하는데, 말 따로 삶 따로 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표(師表)의 부재 속에 흠모할 만한 새로운 리더십이 출현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지도자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 북이스라엘의 왕 요아스 시대에 엘리사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엘리사는 제자를 보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사건 이후에 전혀 등장하지 않다가 이곳에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시기는 엘리사가 예후를 왕으로 세운지 대략 10년도 더 지난 때입니다.

 

요아스에게 활을 쏘라고 한 엘리사(14-19)

지도자는 공동체가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을 때 담대한 겸손으로 확신을 넣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환경이나 능력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공동체의 한계는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모자라기 때문에 찾아옵니다.

 

14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15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활과 화살들을 가져오소서 하는지라 활과 화살들을 그에게 가져오매 16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하매 그가 손으로 잡으니 엘리사가 자기 손을 왕의 손 위에 얹고 17이르되 동쪽 창을 여소서 하여 곧 열매 엘리사가 이르되 쏘소서 하는지라 곧 쏘매 엘리사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 18또 이르되 화살들을 집으소서 곧 집으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하는지라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19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14-19)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 후 등장하지 않던 엘리사는 50년이 지난 후에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갑자기 등장합니다. 예후가 왕이 된 이후 엘리사의 남은 행적은 열왕기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엘리사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자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던 요아스는 직접 그에게 문병을 갑니다. 이것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다. 이스라엘에서 선지자는 왕보다 신분이 낮기 때문에 왕이 선지자를 찾아 가는 일은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왕이 선지자를 향해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볼 때 요아스와 엘리사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에게 간 요아스는 죽음을 앞둔 엘리사를 위해 울면서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엘리사가 열왕기하 2:12에서 엘리야가 승천하는 모습을 보면서 외쳤던 말과 같습니다.

요아스가 엘리사를 향해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요아스 왕은 엘리사를 상당히 의지하며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은 표현은 보호자를 의미하며, 엘리사를 병거와 마병이라고 부르는 것도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보호자로서 적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7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아람과의 전쟁 후에 군사가 얼마 남지 않은 열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존재는 더욱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력을 잃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엘리사의 죽음은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마지막 방어벽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자신을 향해 절박한 심정으로 우는 요아스에게 엘리사는 마지막 선물을 한다. 엘리사는 두 가지 상징적 행위를 요아스에게 시킵니다. 먼저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고 한 뒤 요아스 왕에게 활을 잡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요아스는 이해할 수 없는 엘리사의 말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가 활을 잡자 엘리사는 자신의 손을 왕의 손 위에 얹고 동쪽을 향해 활을 쏘라고 명령합니다. 왕이 활을 쏘자 엘리사는 활 쏘기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아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의 화살이라고 하며, 왕이 아벡을 완전히 쳐서 점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해 줍니다.

그런 후에 엘리사는 다시 요아스에게 화살을 잡으라고 명령하고, 그가 화살을 잡자 땅을 치라고 합니다. 왕은 화살로 땅을 세 번 칩니다. 엘리사가 명령대로 한 것입니다. 요아스가 엘리사를 권위 있는 선지자로 생각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요아스가 땅을 단 세 번만 치자 엘리사는 매우 강하게 화를 내면서 대여섯 번 정도 쳤으면 아람을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합니다. 엘리사가 화를 낸 것은 요아스의 믿음 없음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람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앞둔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로 아람을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 마지막 기회를 요아스 왕의 소심함 때문에 날린 것입니다. 분명히 엘리사가 활과 화살이 아람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면, 화살을 치는 행동의 의미도 이해했어야 했습니다. 아람을 ‘치다’라는 단어와 ‘땅을 치다’라는 단어는 모두 같은 단어입니다.

요아스는 화살로 땅을 치라는 소리를 듣고 세 번만 친다. 요아스가 엘리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믿었다면 아람을 멸망시킬 만큼 격렬하게 쳤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 없음 때문에 위대한 선지자 엘리사가 생존해 있는데도 아람에게 약탈당하고 점령당한 것입니다. 왕은 엘리사가 하늘의 군대로 불릴 수 있는 권능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람과의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거나 엘리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 하사엘이 왕으로 있는 아람은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들은 그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사엘 왕도 여호와께서 세우셨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며, 나라를 일으키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는 역사의 주인이심을 정작 선민 이스라엘은 믿지 못한 것입니다.

 

엘리사의 죽음(20-21)

지도자는 주께 받은 섬김과 세움의 은사를 다 쓰고 가야 합니다.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일은 살았을 때 그 존재와 삶으로 생명의 자리를 고수한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바울은 자신을 죽음에 넘겨지는 자로 자각하며 살았습니다. 지도자는 예수님처럼 삶과 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20엘리사가 죽으니 그를 장사하였고 해가 바뀌매 모압 도적 떼들이 그 땅에 온지라 21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20-21)

 

엘리사는 아쉬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요단 근처에 매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죽은 뒤 새해가 되자 모압에서 도적 떼가 그곳을 습격합니다. 이스라엘의 새해는 봄(3-4월 정도)인데, 이 시기는 춘궁기이기 때문에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이웃 나라의 도시들을 습격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묻힌 곳도 모압의 도적 떼가 습격해 왔고, 그때 마침 장사 지내기 위해 시신을 메고 가던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놀라 시신을 급한 대로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런데 시신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자 살아나고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엘리사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이적을 베풀었는데, 죽어서도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엘리사는 죽었지만 엘리사를 통해 역사하시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그의 권능은 여전히 놀랍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며, 여호와께서 아직도 이스라엘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희망의 메시지로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회복한 요아스(22-25)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은 오래 참으면서 자기 백성이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과 같습니다. 지도자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으로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람이요, 그 은혜에 화답하며 전하는 사람입니다.

 

22여호아하스 왕의 시대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으나 23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이 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셨더라 24아람의 왕 하사엘이 죽고 그의 아들 벤하닷이 대신하여 왕이 되매 25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성읍을 다시 빼앗으니 이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무찌르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22-25)

 

이 단락에서도 또 하나의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아람이 아무리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멸망시키려고 애를 써도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강하거나 아람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돌보시며,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열왕기 저자는 여기서 자신의 신학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맹세한 시내산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언약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하신 무조건적인 선택과 은혜의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은혜를 베풀고 계셨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시내산 언약이 아닌 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언약인 아브라함의 언약에 기대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 저자가 생각할 때 시내산 언약만으로 판단하면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심판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24절에서 아람 왕 하사엘이 죽고 벤하닷이 왕이 되면서 아람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25절에서 요아스가 벤하닷의 손에서 성읍을 다시 빼앗아 왔습니다. 엘리사의 말대로 세 번 아람을 쳐서 이기고 이스라엘 성읍을 회복한 것입니다. 엘리사의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었는데, 이는 아직 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런 은혜는 한계 없는 은혜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그 은혜를 소홀히 여기면서 점점 그 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뼈의 상태로도 생명을 살리는 엘리사, 그는 끝까지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며 생명을 주었습니다. 신아의 계승은 지도자를 본받는 일일진대, 참 지도자는 온데간데없고 가짜 리더십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하늘의 은혜를 품은 영혼의 목자들이 나올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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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3-01)


돌아설 줄 모르는 여호아하스, 요아스

열왕기하 13장 1-13절


자녀를 편하게 해주고 싶고 많은 혜택을 넘겨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지나쳐 편법과 부정으로 권력과 부를 승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우리는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 미완성의 종교개혁을 한 요아스는 아람 왕 하사엘이 쳐들어오자 그간 모아둔 성전 물건들과 돈을 내주고 맙니다. 전체적으로 남유다가 여호와 신앙으로 돌아오긴 하였지만, 요아스는 통치 후반기로 갈수록 타협적인 신앙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 시기에 북이스라엘도 회복과 혼란을 반복하며 점점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워집니다.

 

요아스의 등극 공식과 평가(1-3)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회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기꺼이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배신까지도 감내하시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제이십삼 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칠 년간 다스리며 2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3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노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더니 4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그들이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1-4)

 

13장은 이야기의 무대가 유다에서 이스라엘로 넘어갑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 제23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17년을 다스립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아하스의 악행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7절에서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두었다는 언급을 보면 이스라엘에 우상숭배가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만을 섬기는 예후의 종교개혁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이전의 혼합주의적 종교 전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는 예후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여로보암이 만든 단과 벤엘의 황금 송아지 제의를 완전히 없애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은 죄는 조금만 방심해도 전 상태로 돌아가려는 관성을 자극하여 금방 번성하게 만듭니다. 우상숭배의 죄가 쉽게 만연해지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성공 욕구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이런 욕망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이웃을 돌보고 사랑하며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기에,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이 종교보다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는 이방제의가 더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람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손에 넘기다’라는 표현은 전쟁에서 승리를 약속하는 관용적인 표현인데, 여기서는 아람의 승리를 약속하셨으므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항상 패배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것도 여호아하스 평생 동안 아람에게 졌다고 말합니다.

화자는 이스라엘이 아람 왕 하사엘과 벤하닷에게 진 것을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압제하였습니다. 나라 간의 압제는 무거운 조공을 바치게 하고 영토의 일부분을 빼앗는 것입니다. 하사엘은 남조 유다 왕 요아스에게서도 막대한 양의 조공을 받아 갔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사, 경제적 부담은 모두 백성들이 져야 하기에, 백성들의 삶 역시 황폐해졌을 것이 다원적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한 여호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절하게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5-7)

자신이 실패 후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그분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교훈을 삼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비참과 초라함을 안기십니다. 은혜를 망각한 채 배신과 반역으로 배은망덕한 것이 여호아하스의 허물이었습니다.

 

5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6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따라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더라 7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라(5-7)

 

여호아하스의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구원자를 주십니다. 이 구원자가 누구인지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수의 학자들은 그가 당시 앗수르의 왕인 아다드니라리 3세이거나 하맛의 자쿠르 등 이웃 나라의 통치자라고 봅니다. 당시 사역하고 있던 엘리사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 구원자는 이스라엘을 아람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장막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부분은 애굽의 압제에 있던 이스라엘이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나온 것을 묘사한 신명기 26:7-9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죄를 짓고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적의 손에 넘기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자 구원자를 보내셔서 압제자의 손에서 구원해주시는 이 패턴은, 사사기에서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모습과 매우 닮았습니다. 여기서 구원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일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자는 이방 나라 왕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째, 구원자에 집중하지 않고 구원자를 세우신 여호와께 집중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엘리야 이야기 이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만 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변 나라들의 정세에도 관여하여 하나님의 시간과 기준에 따라 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시며,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보면 나라의 성쇠가 주변 나라들과의 역학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듯이 보이지만, 신앙인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열왕기 기자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6-7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급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이들이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어려움이 끝나자 여전히 이전에 믿던 신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고 그 길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아세라 상은 여전히 사마리아 곳곳에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으면 이전의 모든 죄의 길에서 돌이키고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지만, 구원만 경험하고 잠시 하나님께 감사하고는 다시 이전 생활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아하스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지식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것은 다른 신을 절대 섬기면 안 되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겨야 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방식도 여호와께서 정한 방식으로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십계명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회심한 것이 아니라 개종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신만 요청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께서 다시 아람 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신 것이다. 타작마당의 티끌같이 되었다는 것은 알곡 하나 없이 먼지만 날리는 상황에 대한 묘사입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 군대를 거의 죽이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 보병 만 명만 남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군대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한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을 배반한 심판의 결과는 혹독했습니다.

 

여호아하스의 죽음 공식(8-9)

하나님 대신에 돈과 권력을 숭배하면 그것들에게 넘기셔서, 그것을 바라는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닌 모든 것은 나를 노예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8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9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8-9)

 

이 단락은 여호아하스의 죽음 공식입니다. 여호아하스에 대해서는 아람과의 전쟁 이외에 다른 업적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여호아하스는 죽어 왕의 묘실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요아스가 왕위에 오릅니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약속하신 대로 예후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통치(10-13)

가정이나 국가가 혼란스러워진 상황을 경험하면 이러한 일들을 다음에나 다음 세대들이 답습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문제의식을 가지고 깊이 자성하지 않으면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합니다. 의지를 가지고 개선하지 않으면 악행은 반복하게 됩니다.

 

10유다의 왕 요아스의 제삼십칠 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육 년간 다스리며 11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행하였더라 12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3요아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여로보암이 그 자리에 앉으니라(10-13)

 

요아스는 유다 왕 요아스 37년에 이스라엘 왕이 됩니다. 그런데 1절에서 그의 아버지 여호아하스가 요아스 23년에 왕이 되었고 17년을 다스렸으므로,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왕이 된 것은 유다 왕 요아스 39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러 역본들이 이런 조화를 위해 유다 왕 요아스 39년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요아스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인데, 죄목은 아버지 여호아하스와 동일합니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 가운데서 행한 것입니다. 요아스의 업 적으로는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것만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후 바로 죽음 공식이 나옵니다. 그도 사마리아 왕의 묘실에 묻히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뒤를 이어 왕이 됩니다. 이렇게 요아스의 업적은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가는데, 이 요아스의 이야기는 엘리사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부모의 실패가 자녀에게서 반복되는 것은 성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 인격과 삶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 부모의 삶을 반추하며 교훈을 얻고, 과오를 답습하지 않기 위하여 성찰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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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2-01)


요아스의 선정과 실정

열왕기하 12장 1-21절


인생을 끝까지 잘 살아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수많은 유혹과 지현과 위험을 만납니다. 바른 길을 가다가도 낭떠러지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인생의 굴곡진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믿음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과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모험입니다.

 

  • 요아스는 남 유다의 왕이 된 후 여호야다 제사장을 통해 종교개혁을 단행하는데, 제일 먼저 여호와의 백성들이 다시 언약을 맺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바알 신전과 우상과 제단을 깨뜨리고 바알 제사장을 죽여 유다 땅에서 바알 숭배를 없앱니다. 남유다는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여호와 신앙을 회복합니다. 이 종교개혁은 아마사에 의해 계승됩니다.

 

요아스의 등극 공식과 평가(1-3)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하나님의 길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자신의 삶에 하나님께서 떠나고 자신이 주인 되고, 하나님께서는 주변인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변함없어야 합니다. 끝까지 온전하고 지혜롭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1예후의 제칠년에 요아스가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2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3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1-3)

 

이 단락은 요아스의 등극 공식으로 요아스는 에후 제7년에 유다의 왕이 되어 40년간 통치합니다. 40년간의 통치는 상당히 긴 기간으로 다윗, 솔로몬, 여로보암 2세가 40년 정도 다스렸습니다. 요아스의 어머니는 시비아로 브엘세바 사람입니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가르치는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행하였습니다. 여호야다가 요아스의 스승이자 보호자 역할을 하였음을 뜻합니다. 아쉬운 것은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계속해서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였다는 점입니다. 여호와께 제사 드리는 것은 오직 여호와께서 지정하신 성전과 지방 성소에서만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산당은 주로 우상에게 제사하고 분향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열왕기에서는 산당을 항상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이유입니다.

 

성전 수리 명령을 따르지 않은 제사장들(4-8)

우상을 섬기게 되면 우리 마음 안의 성전도 파손되고 무너지네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생각해야 할 우선순위는 눈에 보이는 경제적인 풍요와 정치적인 성공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을 수리하고 재건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과 공동체의 무너지고 파손된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전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4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성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모든 은 곧 사람이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5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자에게서 받아들여 성전의 어느 곳이든지 파손된 것을 보거든 그것으로 수리하라 하였으나 6요아스 왕 제이십삼년에 이르도록 제사장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는지라 7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위하여 드리게 하라 8제사장들이 다시는 백성에게 은을 받지도 아니하고 성전 파손한 것을 수리하지도 아니하기로 동의하니라(4-8)

 

공동체의 재정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재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성전을 보수하는 선한 일이 지지부진하다가, 성전 수리 재정을 분리하자 다시 순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교회 재정을 함부로 쓰진 않습니까? 선한 일을 하되, 재정도 지혜롭고 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요아스는 왕이 된 후 성전 수리 공사를 주도합니다. 여호람과 아하시야 왕은 아합 왕가의 영향을 받아 여호와 신앙에서 멀어졌고, 대신 바알 신당을 짓고 제단을 만드는 등 바알 숭배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성전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신앙에 열심을 내던 요아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여 예배를 회복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11장부터 이루어진 유다 종교개혁의 절정이자 마지막 과제였습니다. 여기서 성전에 거룩하게 드리는 모든 은, 즉 헌금의 종류가 등장하는데, 사람이 통용하는 은은 출애굽기 30:12에서 생명의 속전으로 언급된 성전세 입니다. 몸값으로 드리는 은은 레위기 27:2에서 언급된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한 값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드리는 돈이 있습니다. 5절에서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사람에게서 받으라고 하는데, 여기서 아는 사람은 재무 담당관을 말하는 관용구입니다. 요아스는 성전에서 걷는 각종 세금과 헌금을 받아서 성전을 수리하라고 제사장들에게 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아스 왕 23년이 되도록 제사장들은 성전 수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요아스가 언제 성전 수리를 명령했는지 알 수 없지만, 상당 기간 동안 제사장들은 요아스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 들어온 돈으로 성전 수리를 하지 않은 이유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몫을 챙기느라 성전 수리비를 남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래 성전세는 제사와 성전 관리를 위해서 사용됩니다. 하지만 당시는 이런 용도보다는 제사장들이 개인적으로 사용하였던 것 같습니다. 제사장에게 맡겼던 성전 수리가 제대로 되지 않자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성전 수리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질책하고 제사장들에게 재무담당관에게서 돈을 받지 말라고 명령한비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성전 수입에 손대는 것을 금지한 것입니다. 왕이 대제사장과 제사장을 불러 제사장들이 성전 수입에 관여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을 보면, 요아스 왕의 왕권이 매우 강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아스가 예루살렘 성전 수리에 상당히 관심을 갖고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왕의 명령을 들은 제사장들은 성전 수입과 성전 수리에서 손을 떼는 것에 동의합니다. 이제 이들은 성전 수입에 대한 권리도 성전 수리에 대한 책임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의 권한은 점점 약화되고, 왕의 권력은 점점 강화되었습니다.

 

성전에 드린 은으로 성전을 수리함(9-16)

교회에서는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직분자를 세워 헌금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집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역자 사례도 합리적으로 지불되어야 합니다. 목적 헌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헌금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사역자들이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모범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9제사장 여호야다가 한 궤를 가져다가 그것의 뚜껑에 구멍을 뚫어 여호와의 전문 어귀 오른쪽 곧 제단 옆에 두매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 오는 모든 은을 다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그 궤에 넣더라 10이에 그 궤 가운데 은이 많은 것을 보면 왕의 서기와 대제사장이 올라와서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대로 그 은을 계산하여 봉하고 11그 달아본 은을 일하는 자 곧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자의 손에 넘기면 그들은 또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는 목수와 건축하는 자들에게 주고 12또 미장이와 석수에게 주고 또 여호와의 성전 파손한 데를 수리할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게 하며 그 성전을 수리할 모든 물건을 위하여 쓰게 하였으되 13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그 은으로 그 성전의 은 대접이나 불집게나 주발이나 나팔이나 아무 금 그릇이나 은 그릇도 만들지 아니하고 14그 은을 일하는 자에게 주어 그것으로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으며 15또 그 은을 받아 일꾼에게 주는 사람들과 회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성실히 일을 하였음이라 16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지 아니하고 제사장에게 돌렸더라 (9-16)

 

왕이 결정하자 여호야다는 상자를 가져다가 뚜껑에 구멍을 뚫어 제단 곁에 두었다. 성전으로 가져오는 모든 돈을 문 지키는 제사장들이 받아 그 상자에 다 집어넣었습니다. 돈이 모이면 왕의 서기와 대제사장 전에서 받은 그대로 자루에 넣어 묶은 뒤 저울에 달아 계산하였습니다. 그 돈을 그대로 성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주면, 그가 성전을 수리하는 목수들과 건축가들과 미장이와 석수에게 주었고, 또 필요한 물품들을 사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11-13절에서 성전 수리를 위해 모인 돈이 얼마나 꼼꼼하고 적절하게 지출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긴 목록은 성전을 수리하는 데 많은 돈과 일꾼들이 필요했다는 것을 말해주며, 동시에 성전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수리할 곳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줍니다. 13-14절에서 성전의 돈은 수리 이외의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는 성전 수리를 맡은 관원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그는 매우 믿을 만하여 맡긴 돈에 대해선 전혀 신경 쓸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성전 수리 비용을 주었지만 자신들이 사용하느라 성전 수리를 하지 못한 제사장들의 불성실함과 대조를 이룹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여호와를 잘 섬기는 인물이었지만, 일반 제사장들은 여호야다 만큼 여호와를 섬기는 데 성실하지 않았고 나태했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기강이 흐트러졌기에, 요아스가 대제사장을 직접 불러 이들이 수리하는 것을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요아스와 여호야다의 종교개혁이 완전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반 제사장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회복되면서 점점 제물이 늘고 수입 많아지고 권위도 회복되자 그 번영의 열매에 젖어 정작 자신들이 섬겨야 할 여호와께는 소홀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에선 제사장의 몫을 언급하는데, 요아스는 원래 제사장의 몫인 속죄제와 속건제의 은을 제사장 몫으로 돌렸습니다. 제사장들이 지나치게 재물을 취하는 것은 막고, 그 대신 율법이 정하는 적절한 몫을 갖게 한 것입니다.

 

아람 왕 하사엘에게 공물을 바친 요아스(17-18)

하나님의 사역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상을 허용하는 이중적인 모습은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지도자라면 자신의 이중적 신앙으로 인해 공동체가 악영향을 받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징계받을 때 쉽게 낙심하지도 말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17그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를 쳐서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고자 하므로 18유다의 왕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17-18)

 

요아스 때 아람 왕 하사엘이 가드를 점령하고 예루살렘까지 쳐들어오려고 하였다. 이 시기에 앗수르가 아직 남쪽까지 힘을 발휘하지 않았기에 아람의 국력이 가장 강성하였습니다. 따라서 요아스는 하사엘이 예루살렘으로 오지 못하도록 하사엘에게 공물을 바쳤고, 하사엘에게 준 공물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여호와의 성물들입니다. 화자가 유다 왕 여호사밧 때부터 요아스 때까지 모아두었던 성물과 금들을 모두 하사엘에게 주었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유다가 매우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아스는 이 위기에서 여호와께 부르짖고 도움을 구하기보다는 여호와의 전의 재물을 내주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가르침을 받을 때는 여호와 보시기에 바르게 살았지만, 왕권이 강화되고 여호야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면서부터는 여호와께 대한 신앙도 약해졌던 것입니다,

 

요아스의 죽음(19-21)

우리를 신앙적으로 이끌어 주는 지도자나 목회자의 영향력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자신이 스스로 말씀ㅁ을 따라 마음을 지키고 언약에 충성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지 못하면 사람들의 평가와 요구에 의해 풍랑 가운데 위태로운 배처럼 요동하게 됩니다. 결국 변함없는 언약의 말씀 대신 인간을 의지하는 신앙은 모래 위해 쌓은 성과 같습니다.

 

19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0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 궁에서 그를 죽였고 21그를 쳐서 죽인 신복은 시므앗의 아들 요사갈과 소멜의 아들 여호사바드였더라 그는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마샤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9-21)

 

결국 요아스는 자신의 신복들의 반란으로 밀로 궁에서 살해당합니다. 그가 왜 신복들의 반란으로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 없지만, 말년에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의 성전 기명을 하사엘에게 갖습니다.

바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요아스는 반란자의 손에서 살아아 왕이 되었지만, 결국 반란자의 손에 죽는 기구한 삶을 살았다. 요아스의 죽음은 유다의 종교개혁에 한계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오랜 우상숭배와 그릇된 여호와 경배에 대해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성전을 수리하였지만, 산당의 잔존에서 보듯이 이교적인 것이 여전히 유다 땅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으며, 그것이 결정적인 순간에 영향을 미쳐 여호와를 의지하기보다 돈과 권력이라는 세상적인 방법을 위지하게 만든 것입니다.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위에 올라 다윗 왕권은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그치지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이 싹틉니다. 은혜를 망각하고 사람의 힘을 이지할 때 위기가 찾아옵니다. 자신의 업적을 의지할 때 존재와 삶이 위태해집니다. 오늘도 여전히 주 앞에 신실하게 살고 있습니까? 유혹을 이기고 끝까지 신실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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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1-01)


요아스의 선정과 실정

열왕기하 11장 1-21절


 

허물투성이지만 다윗 왕조는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고 굳건한 약속의 표증입니다. 신실한 백성의 신앙적 지반이자 가능성을 향한 믿음의 단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희망은 다윗 왕조의 영광에서 현실화되고 표현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이어가고 있습니까?

 

  • 요아스는 남 유다의 왕이 된 후 여호야다 제사장을 통해 종교개혁을 단행하는데, 제일 먼저 여호와의 백성들이 다시 언약을 맺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바알 신전과 우상과 제단을 깨뜨리고 바알 제사장을 죽여 유다 땅에서 바알 숭배를 없앱니다. 남유다는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여호와 신앙을 회복합니다. 이 종교개혁은 아마사에 의해 계승됩니다.

 

아달랴가 유다를 다스림(1-3)

영적으로 황폐한 선교지에서 또 불신자들로 가득한 직장에서 희망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여명을 기다리는 순간에도 꺼질 듯 흔들리면서도 작은 불씨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1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그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자손을 모두 멸절하였으나 2요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게 한지라 3요아스가 그와 함께 여호와의 성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1-3)

 

예후가 북이스라엘을 개혁하는 동안 남 유다에서는 죽은 아하시야를 대신해서 아하시야의 어머니인 아달랴가 일어나 왕의 자손을 모두 멸절하고 자신이 왕으로 등극합니다. 왕의 어머니인 태후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왕이 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를 위해 아달랴는 남 유다에서 다윗의 씨를 멸절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남 유다는 다윗 왕가가 대대로 나라를 다스렸기에, 다윗 후손이 하나라도 살아있으면 언제든 아달랴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반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북 왕조에서 예후가 아합의 후손을 멸절한 것처럼, 아합의 딸은 다윗의 후손을 멸절하려고 한 것입니다. 아달랴는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자신의 친손자도 죽이는 무정하고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요람의 딸이자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빼돌렸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숨어 살게 됩니다. 여기서 여호세바는 두 가지 역할을 하는데, 첫째는 다윗 왕가의 씨를 보존하는 것이고, 둘째는 성전에서 자란 아이가 아하시야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신원보증인의 역할을 명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은 제사장만 출입할 수 있는 지역이 많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요아스를 보호하면 아달랴가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달랴의 반역은 성공하였고, 그녀는 6년 동안 남 유다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 유다 역사상 왕이 된 유일한 여성입니다. 하지만 열왕기 저자는 아달랴가 어떻게 남 유다를 다스렸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며, 6년 후 여호야다의 반란으로 그가 폐위되었다고만 기록합니다. 열왕기 저자의 입장에서 아달랴는 찬탈자에 불과하며 다시 다윗 왕조를 회복하는 것이 저자에게는 더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반란을 준비함(4-8)

하나님의 사명자는 앞뒤 안 가리는 열정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열정만 가지고 물불 안가리면 실패하기 쉽습니다. 철저한 준비, 용기 있는 실천력, 동료들과의 아름다운 협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4일곱째 해에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여호와의 성전에서 맹세하게 한 후에 왕자를 그들에게 보이고 5명령하여 이르되 너희가 행할 것이 이러하니 안식일에 들어온 너희 중 삼분의 일은 왕궁을 주의하여 지키고 6삼분의 일은 수르 문에 있고 삼분의 일은 호위대 뒤에 있는 문에 있어서 이와 같이 왕궁을 주의하여 지키고 7안식일에 나가는 너희 중 두 대는 여호와의 성전을 주의하여 지켜 왕을 호위하되 8너희는 각각 손에 무기를 잡고 왕을 호위하며 너희 대열을 침범하는 모든 자는 죽이고 왕이 출입할 때에 시위할지니라 하니(4-8)

 

7년째 되던 해 여호야다는 요아스를 앞세워 반란을 준비합니다. 가리 사람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여호와 앞에서 맹세하게 한 뒤, 요아스 왕자를 만나게 합니다. 여호야다는 반란을 일으킬 세력을 모은 뒤 이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지 명령합니다. ‘명령하다’(5)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여호야다가 지도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당시 요아스의 나이가 일곱 살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호야다가 권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을 반역의 날짜로 잡고, 안식일에 근무를 서는 부대는 성안 곳곳에서 왕궁을 철저하게 수비하고, 안식일에 나가는 부대, 즉 안식일에 비번인 부대는 왕을 지키기 위해 여호와의 성전을 철저히 수비하라고 명령합니다. 8절은 특별히 왕을 호위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는데, 모두 무장을 하고 방어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무조건 죽이라고 명합니다. 반란에서 반란의 구심점이 되는 왕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왕으로 세움(9-12)

자신들이 이루고 싶은 욕망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미명으로 포장하는 아주 잘못된 습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면 때론 일생 동안 화려하게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초라한 인생들이 많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쌓은 그의 스펙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일에 전혀 쓰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9백부장들이 이에 제사장 여호야다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여 각기 관할하는 바 안식일에 들어오는 자와 안식일에 나가는 자를 거느리고 제사장 여호야다에게 나아오매 10제사장이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다윗 왕의 창과 방패를 백부장들에게 주니 11호위병이 각각 손에 무기를 잡고 왕을 호위하되 성전 오른쪽에서부터 왼쪽까지 제단과 성전 곁에 서고 12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왕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매 무리가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9-12)

 

여호야다의 명령대로 백부장은 안식일에 근무하는 부대와 안식일에 쉬는 부대를 모두 데리고 제사장에게 왔고, 여호야다는 성전에 있는 다윗의 창과 방패를 백부장들에게 줍니다. 성전에 있는 다윗의 창이나 방패는 전쟁을 위한 무기라기보다는 의전용으로 왕의 대관식에서 다윗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했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8:7에서 다윗은 하닷에셀에게서 금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에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4:27-28에서 보면 르호보암이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고 나올 때 호위병이 방패를 가지고 다녔다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인 왕의 호위병이 성전의 오른쪽부터 왼쪽까지 제단과 성전 곁에 섰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성전을 완전히 둘러싸 왕을 잘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고, 또한 반란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았음을 나타냅니다.

이들이 성전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가득 채운 모습은 10장에서 바알을 섬기는 자들이 바알 성전에 가득 찬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예후의 이야기에선 바알을 섬기는 자들이 많았지만, 여호야다의 이야기에선 여호와를 섬기고 다윗 왕권을 지키려는 자들로 가득한 것입니다.

예후 이야기에서는 성전에 가득한 사람들이 제거되었지만, 여호야다의 이야기에서는 성전에 가득한 사람들이 승리하였습니다. 상징적으로 바알을 섬기는 자들이 사라지는 모습과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이 가득해지는 것이 대조되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군사적 배치를 마친 여호야다는 요아스 왕자를 데리고 나와 머리에 왕관을 씌우고 왕권을 상징하는 조서를 주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웁니다. 여기서 여호야다는 제사장의 권한으로 유일한 다윗의 후손인 요아스를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왕을 축복하며 그를 왕으로 인정합니다.

 

아달랴를 죽인 여호야다(13-16)

인생이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을 반역한 인생은 별 볼일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보이는 곳을 찾아 돕고 협력하므로 불씨를 지펴야 합니다. 여호야다는 아달랴를 죽이고 있습니다.

 

13아달랴가 호위병과 백성의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 백성에게 이르러 14보매 왕이 규례대로 단 위에 섰고 장관들과 나팔수가 왕의 곁에 모셔 섰으며 온 백성이 즐거워하여 나팔을 부는지라 아달랴가 옷을 찢으며 외치되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 하매 15제사장 여호야다가 군대를 거느린 백부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를 대열 밖으로 몰아내라 그를 따르는 자는 모두 칼로 죽이라 하니 제사장의 이 말은 여호와의 성전에서는 그를 죽이지 말라 함이라 16이에 그의 길을 열어 주매 그가 왕궁의 말이 다니는 길로 가다가 거기서 죽임을 당하였더라(13-16)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던 아달랴는 호위병들과 백성들이 왕을 축복하는 소리와 환호성을 듣고 급히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백성들에게 갑니다. 12절부터 백성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여호야다와 백부장들이 주도한 반란이지만, 백성들도 찬성하고 지지하고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14절에서는 이런 사실이 더 분하게 나타납니다. 14절은 아달랴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 본 광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왕은 규례대로 단 위에서 있었고, 장관들과 나팔수들은 왕 옆에서 왕을 호위하고 있었으며, 그 땅의 모든 백성들은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달랴는 이 광경을 보자 옷을 찢으며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하고 외치면서 이들이 불법적인 행동을 했다고 격하게 표현합니다. 아달랴의 이런 행동은 열왕기하 9:23에서 요람이 예후에게 반역이라고 외친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이렇듯 아합의 아들과 딸이 장악한 정권을 하나님께서는 불법으로 규정하시고, 반란을 통해 이들을 모두 왕좌에서 끌어내리신 것입니다. 요아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역이라고 외치는 아달랴를 본 여호야다는 그녀가 왕권에 승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그녀와 그녀를 따르는 무리를 성전 밖으로 몰아내 죽이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화자는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성전 밖으로 내몰라고 한 것은 그녀를 성전 안에서 죽이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해설해 줍니다.

성전은 거룩한 곳이기에 시체와 피로 부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쫓겨난 아달랴와 호위 부대는 왕궁으로 가는 길에 여호야다의 호위 부대를 만나 죽임을 당한다. 아달랴도 요람처럼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아달랴를 끝으로 아합의 자손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유다를 여호와께 돌아오게 한 여호야다(17-21)

하나님 나라가 회복하면, 바른 통치 질서와 평화가 도래한비다. 그리고 거짓과 패역의 잔재는 소멸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교회가 회복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합니다.

 

17여호야다가 왕과 백성에게 여호와와 언약을 맺어 여호와의 백성이 되게 하고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세우게 하매 18온 백성이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그 신당을 허물고 그 제단들과 우상들을 철저히 깨뜨리고 그 제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을 수직하게 하고 19또 백부장들과 가리 사람과 호위병과 온 백성을 거느리고 왕을 인도하여 여호와의 성전에서 내려와 호위병의 문 길을 통하여 왕궁에 이르매 그가 왕의 왕좌에 앉으니 20온 백성이 즐거워하고 온 성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왕궁에서 칼로 죽였더라 21요아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칠 세였더라(17-21)

 

요아스가 왕이 된 후 여호야다는 왕과 백성들이 여호와와 언약을 맺게 하여 여호와의 백성으로 돌아오게 만들었고, 백성과 왕 사이에도 언약을 세워 요아스를 모든 백성들이 인정하는 명실상부한 유다의 왕으로 공인받게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된 유다 사람들은 바알 신당과 제단과 우상을 파괴하고,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여 유다 땅에서 바알 숭배를 완전히 제거하였습니다.

7년 전 북이스라엘에서 예후가 행한 것을 남 유다는 이제야 행한 것이다. 여기서 아달랴는 바알 숭배의 상징으로 등장하며, 남유다에서 아달랴가 죽음으로써 바알 숭배도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화자는 아달리의 죽음과 요아스의 등극으로 찾아온 평안을 보고하면서 이야기를 마칩니다.


악의 세력은 영원히 세상을 장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와 사랑으로 통치하시고, 우상이 난무하는 세계를 재편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분의 기대를 따라 오늘 우리가 힘써 불씨를 지핀다면 언젠가 그 불씨가 세상을 정화하고 새롭게 하는 불로 따오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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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0-02)


예후의 업적과 평가

열왕기하 10장 18-36절


 

한 번뿐인 이생을 후회 없이 살 수 있다면 행복한 일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서 냉정하고 준엄한 시각으로 성취와 과오를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갖고 있는 예후의 삶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 아합의 아들 요람을 죽이면서 시작된 예후의 아합 왕가 심판은 아합의 아들 70명을 죽이고, 이스르엘에서 아합 왕가에서 권력과 부를 누리던 귀족들과 권문세가들을 모두 죽이고, 사마리아로 내려가 그곳에 남아 있던 아함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죽이는 데까지 이어졌습니다. 예후의 살육은 마지막 대상인 바알 숭배자들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를 죽이기 위한 준비(18-24)

지도자의 기도와 말씀은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하신 큰일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때 여호와를 경외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섬길 수 있고, 악을 행하여 멸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선하고 의로운 도를 전하며, 기도 쉬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돕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18예후가 뭇 백성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19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아오게 하라 모든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려 두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계책을 씀이라 20예후가 바알을 위하는 대회를 거룩히 열라 하매 드디어 공포되었더라 21예후가 온 이스라엘에 사람을 두루 보냈더니 바알을 섬기는 모든 사람이 하나도 빠진 자가 없이 다 이르렀고 무리가 바알의 신당에 들어가매 바알의 신당 이쪽부터 저쪽까지 가득하였더라 22예후가 예복 맡은 자에게 이르되 예복을 내다가 바알을 섬기는 모든 자에게 주라 하매 그들에게로 예복을 가져온지라 23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더불어 바알의 신당에 들어가서 바알을 섬기는 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살펴보아 바알을 섬기는 자들만 여기 있게 하고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여기 너희 중에 있지 못하게 하라 하고 24무리가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려고 들어간 때에 예후가 팔십 명을 밖에 두며 이르되 내가 너희 손에 넘겨 주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도망하게 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리라 하니라(18-24)

 

아합 왕가와 연관된 모든 사람을 죽이고 확실히 왕권을 장악한 예후는, 어느 날 자신이 바알을 섬기겠다고 선언합니다. 그것도 아합이 섬긴 것과 비교해서 자신은 더 많이 섬길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자신이 왕이 된 기념으로 바알을 위해 큰 제사를 지낼 것이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들과 바알을 섬기는 모든 자들과 모든 제사장들을 자신에게 불러오라고 명령합니다.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와야 하고, 빠지는 사람은 죽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이런 예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해 열왕기 화자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알을 위한 성회를 열겠다고 공표한 예후는 사람들을 보내어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여기서 ‘바알을 섬기는 자’란 단순한 예배자가 아니라 바알 신전이나 신당에서 일정한 직분을 가지고 일하는 봉사자들을 말합니다. ‘한 명도 남겨진 사람이 없다’는 표현은 예후가 철저하게 바알을 섬기는 자를 죽이려고 계획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바알 신당에 모두 불러 모으니 그들이 바알 신당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는 북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가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알 신앙이 이렇게 부흥하게 된 원인은 이세벨이 아합과 결혼하면서 바알 선지자들을 들여온 탓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에 들어오자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지었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후원하며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 땅에 전파하는 데 열성을 다하였습니다. 대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에서 여호와 신앙은 점차 잊히고 바알 신앙이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이 때문에 하나님께 혹독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신당에 모두 몰아넣은 예후는 이들에게 예복을 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부터 독자들과 바알을 섬기는 자들 사이에 지식의 차이로 인한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예후가 이들에게 예복을 주고 바알을 섬기는 자들에게 여호와의 종은 한 명도 여기 있지 못하도록 내보내라고 말할 때, 바알을 섬기는 자들은 예후가 자신들을 특별하게 생각해서 예복을 주고, 제사에 부정이 타는 것을 방지하고 바알만을 섬기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여호와의 종들을 모두 내보내라고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이들은 예후가 정말 바알 숭배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예후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며 예후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화자를 통해 예후의 의도를 알고 있는 독자는 이 모든 행동이 바알을 섬기는 자들만을 따로 구분하여 죽이려고 준비하는 작업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후는 매우 교묘한 방법으로 바알을 섬기는 자들만 분리하여 한꺼번에 죽이기 쉬운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23절에서 보면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같이 움직이는데, 여호나답은 15절에서 예후를 따르기로 결심한 후 예후의 종교개혁을 돕는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됩니다. 16절에서 보듯이 예후와 여호나답은 여호와를 위한 열심'이란 부분에서 서로 마음이 일치하였습니다. 예후는 바알 숭배자들이 아무 의심 없이 번제와 다른 제사들을 드리기 위해 신당으로 들어갈 때, 따로 80명의 병사들을 불러 신당 밖에 두고, 그들에게 신당에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라고 엄히 당부합니다. 그들 손에 넘겨준 자를 도망가게 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으로 대신해야 한다는 무서운 명령을 내립니다. 이렇게 예후는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잡을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신당으로 들어갔으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바알에게 제사 드리는 데만 전념하였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죽이고 바알 신당을 부숨(25-28)

악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맞서야할 전략의 중요성을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영역들을 철저히 평가하고, 부족하거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반성해서 제대로 살아갈 것을 수립해야합니다. 예후가 주도면밀하고 은밀하게 바알 숭배자들을 척결할 전략을 세웠던 것처럼, 지금 이 악한 시대에 맞서기 위해 신중하고 지혜로운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겠습니다.

 

25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예후가 호위병과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하매 호위병과 지휘관들이 칼로 그들을 죽여 밖에 던지고 26바알의 신당 있는 성으로 가서 바알의 신당에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27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28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25-28)

 

드디어 바알을 위한 제사 드리기를 마치자, 예후는 병사들에게 안으로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다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예후의 명령을 받은 호위병과 지휘관은 칼로 그들을 죽여 밖에 던졌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바알 신전이 있는 도시로 가서 바알 신전의 주상들을 끌어내서 불태워버립니다. 바알의 목상과 신전을 헐어버리고, 그곳에 화장실을 두었습니다. 이것은 그 장소를 부정한 곳으로 만들어 다시는 신당이나 제단을 세울 수 없도록 하는 조치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대변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수많은 바알 숭배자들이 바알을 위해 성대한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올렸지만, 바알은 자신의 종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집과 신상도 지키지 못하고 있으며, 바알을 섬긴 사람들은 바알에게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바알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바알이 참 신이 아니라 한낱 나무 기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바알이 진정한 신이라면 이런 재앙에서 자신의 숭배자들을 구원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섬기는 우상들이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너희를 구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후는 이스라엘 안에서 바알을 완전히 제거하였습니다.

 

예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한계(29-31)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을 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마음에 영적인 변화 없이 사는 자일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형식만을 고집합니다.

 

29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30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 하시니라 31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29-31)

 

이 단락은 예후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입니다. 29절과 31절에서 반복되는 것은 비록 예후가 바알을 이스라엘 안에서 완전히 제거하였지만, 여로보암의 죄, 즉 단과 벧엘에 있는 황금 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여로보암 이후부터 내재적으로 깊게 가지고 있는 죄악이기 때문에, 이것이 죄인지 아닌지도 구분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알은 후대에 외부에서 들여온 신이기에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제거하기 쉬웠지만, 몇 백 년 동안 북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이어져 온 잘못된 여호와 종교는 개력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태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잘못된 여호와 종교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버리지 못하여 결국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한 번 잘못 형성된 관습이 교회와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을 때, 이것을 없애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예후의 아합 가문 심판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조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후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것과 하나님 마음에 들게 아합 집에 행한 것을 칭찬하십니다. 우리가 볼 때 예후가 아합 집에 대해 너무 가혹하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예후가 아합 집에게 행한 것은 여호와의 전쟁이 있습니다. 가나안의 우상과 그 거주민을 진멸하였듯이, 에후는 아합 집과 그 우상을 제거하는 진멸 전쟁을 수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에 대한 축복으로 하나님께서는 예후에게 4대 동안 왕위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다만 다윗과 같이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지 않으신 것은 여로보암의 죄를 제거하지 않은 한계 때문입니다.

 

예후의 남은 업적과 죽음(32-36)

평가에 따른 축복과 저주는 언약이지 기복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심으로 찾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하기보다 오늘도 자신을 위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바라보는 신실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신실한 자들을 통해서 일하시고,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32이 때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서 땅을 잘라 내기 시작하시매 하사엘이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에서 공격하되 33요단 동쪽 길르앗 온 땅 곧 갓 사람과 르우벤 사람과 므낫세 사람의 땅 아르논 골짜기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과 바산까지 하였더라 34예후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5예후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36예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햇수는 스물여덟 해이더라(32-36)

 

예후의 남은 업적에서 중요한 것은 아람의 하사엘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 지역을 모두 아람에게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3절에 언급된 지역은 요단 동면 지역 전부입니다. 열왕기 저자는 예후가 여로보암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은 것에 대의 이스라엘에 내린 벌이라고 해석합니다. 신명기 3:12-13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은 벌로 아람의 손에 넘겨주신 것입니다. 34-36절은 죽음 공식으로 예후는 평안히 조상의 묘실에 안장 되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를 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면서 절제하고 지혜롭고 진취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 역사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까? 세상이 기억할 만한 성취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떤 의미로 남을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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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10-01)


아합의 후손을 숙청하는 예후

열왕기하 10장 1-17절


 

역사에서 완전한 인간이나 완벽한 순수함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차선이나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애쓸 뿐입니다. 불완전한 우리가 개혁을 수행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예후는 하나님께 왕으로 선택을 받은 후 거침없는 행보를 합니다. 제일 먼저 이스라엘 왕 요람을 죽었고, 그 다음 유다의 왕 아하시야를 죽인 후 그대로 이스르엘 궁으로 쳐들어가 태후 이세벨을 죽입니다. 요람의 시신은 나봇의 밭에 버리고 이세벨의 시신은 들짐승의 밥이 되도록 방치하며, 아들의 죽음도 평안할 수 없게 만듭니다. 예후의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의 후손들에게까지 미칩니다.

 

아합의 후손들을 모두 죽임(1-7)

종종 사회 지도자층이라는 자들이 고귀하고 능력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권력자들에게 부합하여 자신의 권세와 혜택을 누리지만, 막상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자신의 살 길을 찾기에만 급급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배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출세와 부와 권력을 위해서라면 기회주의자들입니다.

 

1아합의 아들 칠십 명이 사마리아에 있는지라 예후가 편지들을 써서 사마리아에 보내서 이스르엘 귀족들 곧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전하니 일렀으되 2너희 주의 아들들이 너희와 함께 있고 또 병거와 말과 견고한 성과 무기가 너희에게 있으니 이 편지가 너희에게 이르거든 3너희 주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질고 정직한 자를 택하여 그의 아버지의 왕좌에 두고 너희 주의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더라 4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 왕이 그를 당하지 못하였거든 우리가 어찌 당하리요 하고 5그 왕궁을 책임지는 자와 그 성읍을 책임지는 자와 장로들과 왕자를 교육하는 자들이 예후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왕으로 세우지 아니하리니 당신이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하라 한지라 6예후가 다시 그들에게 편지를 부치니 일렀으되 만일 너희가 내 편이 되어 내 말을 너희가 들으려거든 너희 주의 아들된 사람들의 머리를 가지고 내일 이맘때에 이스르엘에 이르러 내게 나아오라 하였더라 왕자 칠십 명이 그 성읍의 귀족들, 곧 그들을 양육하는 자들과 함께 있는 중에 7편지가 그들에게 이르매 그들이 왕자 칠십 명을 붙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 이스르엘 예후에게로 보내니라(1-7)

 

이스르엘 왕궁에 있던 이세벨을 죽이고 이스르엘 궁전을 점령하면서 반란에 성공한 예후는 남은 아합의 후손들도 모두 제거하기로 합니다. 당시 사마리아에는 아합의 자손 70명이 있다고 알려줍니다. 본문에서 ‘아들’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아들뿐 아니라 자손들을 통칭하므로 ‘자손’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수도였기에 이곳에 아합의 자손들이 번성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70명의 자손은 아합의 자손들이 상당히 번성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후는 사마리아에 있는 장로들과 아합의 자손을 교육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여기서 ‘이스르엘의 귀족들’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들은 예후가 이스르엘을 점령할 때 예후를 피해 도망하여 사마리아로 간 귀족들일 것입니다. 첫 번째 편지를 보내어 아합의 후손 중에서 새로 왕을 뽑고 자신과 싸울 준비를 하라고 도전장을 보냅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수도이기에, 많은 군대와 병거와 말과 무기뿐만 아니라 튼튼한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성이 예후를 상대해 전쟁하기에 충분한 물적 인적 자원이 있다는 것인데, 예후는 사마리아 귀족들이 이것을 믿고 새로운 왕을 세워서 자신에게 대항하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후는 새로운 왕에 대해 ‘훌륭하고 올바른 자’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아합 가문에서 이런 사람을 찾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자신 있으면 새로 왕을 세워 자신과 싸우자는 예후의 편지를 받은 사마리아의 귀족들은 매우 두려워합니다. 이들이 생각하기에 두 명의 왕들도 감당 못한 예후를 자신들이 맞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마리아의 모든 관리들과 귀족들은 예후에게 우리는 당신의 종이고, 당신이 말하는 대로 모두 할 것이며, 당신만이 왕이라고 하면서 철저히 예후에게 복종할 뜻을 전달합니다.

 

예후에게 말을 전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사마리아에 있는 모든 귀족과 지도자들과 관리들이 예후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또 그에게 복종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이런 말을 예후에게 전하자, 예후는 다시 편지를 보내 자신의 신하가 된 징표로 내일까지 아합의 자손들의 머리를 이스르엘로 가져오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도 예후는 간접적으로 이세벨을 죽인 것처럼 자신에 대한충성의 징표로 아합의 자손들을 죽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귀족들은 즉시 아합의 자손들을 죽여 그 머리를 자르 고 광주리에 담아 예후에게 보냅니다. 조금도 시간을 지체하거나 망설이지 않습니다.

왕자들을 죽인 자들이 그들을 키운 귀족들이라고 말 것은 아합 왕조에서 권세와 혜택을 누리던 자들이 자신들의 살 길을 찾기 위해 너무 쉽게 배신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세벨을 섬기던 내시가 예후의 말 한마디에 배신한 것과 동일합니다. 이것을 통해 아합 왕조에서 권세를 누리던 자들은 충성과 신의로 아합 왕조를 섬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출세와 권력과 부를 위해 움직인 기회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합의 후손의 시신을 통해 경고함(8-11)

정권이나 사회에 타락하면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바르게 세우려는 개혁 세력들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변화를 이루자고 주장하는 것이 나쁜 방향이 아니라면 진행되어 가야 합니다. 하지만 개혁되는 과정에서 애매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정도를 지키며 실행해야 합니다. 예후는 철저하게 아합의 후손을 진멸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사자가 와서 예후에게 전하여 이르되 그 무리가 왕자들의 머리를 가지고 왔나이다 이르되 두 무더기로 쌓아 내일 아침까지 문 어귀에 두라 하고 9이튿날 아침에 그가 나가 서서 뭇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의롭도다 나는 내 주를 배반하여 죽였거니와 이 여러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냐 10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 11예후가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를 다 죽이고 또 그의 귀족들과 신뢰 받는 자들과 제사장들을 죽이되 그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생존자를 남기지 아니하였더라(8-11)

 

예후는 사마리아의 귀족들이 가져온 아합 가문 왕자들의 머리를 성분 바깥쪽 문 앞에 두 무더기로 쌓아 내일 아침까지 두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앗수르의 관습과 같은데, 적이나 반역자의 복을 쌓아 전시함으로써 반역에 대한 경고와 두려움을 주려는 것입니다.

예후는 이 방법을 통해 자신을 반대하고 그 대신 아합 가문의 편을 들면 그 결과가 어떠할지를 강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날 예후는 백성들에게 나가 이 광경을 자신의 반역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리는 기회로 삼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의롭다.’고 선언합니다. 자신은 자신의 주인에게 반역하고 그를 죽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을 죽인 사람은 누구냐고 묻고 있는데, 이는 마치 왕자들의 죽음에 대해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한 것입니다. 왕과 왕자들의 죽음에 대해 백성들은 아무런 죄가 없고, 다만 자신은 왕을 죽인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왕을 죽이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왕자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모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에 내리신 예언의 성취라고 선언합니다. 즉, 자신이 아합을 죽인 것과 아합의 왕자들이 죽임당한 것 모두가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정당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후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의롭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후는 여호와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예후의 진정한 신앙고백인지, 아니면 자신의 반역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인지 앞으로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반역을 성공한 예후는 이스르엘에 남아있던 아합의 가족들과 그의 신하들과 아합 왕가의 후원을 받으며 권세를 누리던 모든 사람들과 제사장들까지 다 죽였습니다. 여기서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제사장이 아니라, 이세벨의 보호를 받던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입니다. 이렇게 예후는 모든 부분에서 아함 왕가의 사람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죽임(12-14)

종종 잔혹한 살육이나 전쟁으로 통해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한다는 명목을 삽니다. 이러한 모습은 낯설고 당황스럽게 보이지만,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환기시킵니다.

 

12예후가 일어나서 사마리아로 가더니 도중에 목자가 양털 깎는 집에 이르러 13예후가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하는지라 14이르되 사로잡으라 하매 곧 사로잡아 목자가 양털 깎는 집 웅덩이 곁에서 죽이니 사십이 명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12-14)

 

이스르엘에서 반정을 완성한 에후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로 갑니다. 가던 도중에 ‘목자가 양털 깎는 집’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벧에케 드하로임’이란 곳에 들르게 됩니다. 이곳은 사마리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지역이 아니라, 사마리아 북서쪽에 위치한 산이 지역으로 부자가 양들을 모으는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지역은 길에서 벗어난 외딴 곳에 있기 때문에, 예후는 사마리아로 가는 길에 어쩌다 들른 것이 아니라 일부러 간 것입니다.

이곳에 도착한 예후는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서 그들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그러자 자신들을 아하시야의 형제들이라고 소개하며, 왕의 아들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샬롬의 인사를 하러 간다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왕과 태후는 요람과 이세벨을 말합니다. 이들은 아직 요람과 이세벨과 아하시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이 것을 보면 예후는 이들에 대한 소식을 먼저 듣고 반역의 소식이 알려지기 전에 미리 아하시야의 형제들, 즉 이세벨의 자손들을 죽이기 위해 온 것입니다. 여기서도 ‘샬롬’이란 인사가 등장합니다. 예후의 이야기에서 ‘샬롬’이란 인사는 항상 죽음의 인사였는데 여기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신분을 확인하자마자 예후는 이들을 모두 사로잡아 ‘벤에케드’의 웅덩이에서 42명이나 되는 이들을 모두 죽입니다. 여기서도 후렴구처럼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의 신하들을 진멸함(15-17)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말로 모든 활동을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분별없는 열정이나 이기적인 야망과 결합된 열심을 잘 점검하여, 동기와 결과만으로 불의한 과정을 정당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15예후가 거기에서 떠나가다가 자기를 맞이하러 오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난지라 그의 안부를 묻고 그에게 이르되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하니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르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손을 잡으니 예후가 끌어 병거에 올리며 16이르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17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에 남아 있는 바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죽여 진멸하였으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15-17)

 

사마리아로 가는 도중 예후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나온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납니다. 레갑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예레미야에 따르면 레갑 족속은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이들에게 남긴 말을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들로 매우 긍정적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그 전에 레갑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여호나답은 예후와 동맹을 맺은 첫 번째 인물입니다. 여호나답과 사마리아로 간 예후는 거기서도 남아 있는 아합의 사람들을 모두 죽입니다. 이런 예후의 행동에 대해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심 없는 철저한 예후를 통해 아합 가문에게 내리신 심판 예언을 모두 실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예후의 무자비함을 두려워하지만, 이런 예후를 심판자로 선택하시고, 이를 통해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예후의 개혁과정에 권력을 향한 이기적 야망이 숨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합 가문의 가혹한 통치를 배경으로 본문을 일어야 하며,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다’는 저자의 해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불의한 권력은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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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9-03)


이세벨의 비참한 최후

열왕기하 9장 27-37절


 

역사적인 교훈으로 악한 자는 언젠가는 심판을 받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권력과 재물, 정욕에 눈멀어 자신을 성찰하지 못합니다. 훗날 심판이 임하고 나서야 비로소 후회와 희한으로 가슴을 칩니다. 악인들의 비참한 말로를 보며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여 징벌로 향하는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 예후는 요람에 이어 남조 유다의 왕 아하시야를 뒤따라가 죽이고 이세벨을 죽이기 위해 이스르엘로 돌아옵니다. 자신을 맞이하는 이세벨을 보며 그녀를 던져 죽이라고 명령하였고, 그녀의 내시들이 그녀를 던져 죽입니다. 그리고 이세벨의 시체를 개들이 먹음으로 엘리야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를 죽인 예후(27-29)

종종 세상에서 오늘 충성하던 사람이 내일은 배반하는 모습을 봅니다. 죄인과 손을 잡고 살아가면 주변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을 눈여겨봅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주변 사람들이 배신하여 그동안 누렸던 영화와 권력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7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그 뒤를 쫓아가며 이르되 그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그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28그의 신복들이 그를 병거에 싣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다윗 성에서 그들의 조상들과 함께 그의 묘실에 장사하니라 29아합의 아들 요람의 제십일년에 아하시야가 유다 왕이 되었었더라(27-29)

 

예후가 이스라엘 왕 요람을 죽이면서 아합과 이세벨의 우상숭배와 악행 때문이라고 언급하는 것을 들은 아하시야는 자신의 어머니 아달랴가 요람의 형제이자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므로, 자신도 아합 가문 사람으로 간주하여 죽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달랴가 유다 왕과 결혼한 이후 유다와 이스라엘은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합 가문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왕기 저자는 유다 왕 여호람과 아하시야에 대해 아합 집과 같다고 하며 악한 왕으로 평가하였습니다. 예후의 입장에선 자신이 아하시야의 삼촌 요람을 죽였기에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아하시야도 죽이려고 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하시야는 일단 할머니 이세벨이 있는 사마리아로 도망하기 위해 사마리아로 가는 남쪽 길인 벧하간 길로 도망합니다. 하지만 요람을 죽인 후 전력으로 쫓아오는 예후에게 결국 이스르엘에서 대략 1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이블르암에서 따라잡히게 되었고, 그곳에서 예후와 싸우다 중상을 입게 됩니다. 그러자 아하시야는 사마리아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므깃도로 도망갑니다. 므깃도는 이블르암 북서쪽에 위치하여 사마리아와는 거의 반대 방향에 있었습니다. 아하시야는 므깃도로 무사히 도망하지만, 예후와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부하들은 시신을 병거에 싣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윗 성에 있는 조상들의 묘실에 장사합니다. 아하시야가 조상의 묘실에 장사된 모습은 여호람의 시신이 나봇의 밭에 버려진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여호람은 죽어서까도 평안을 누릴 수 없었지만, 아하시야는 그나마 죽어서는 평안을 누리게 되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 가문에게 내린 특별한 은혜 때문입니다.

 

이세벨을 죽인 예후(30-33)

인간의 진정한 위엄한 기품은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한다고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돈도 권력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고 피조물과 그 백성의 자리를 지킬 때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비로써 주의 나라를 혼란과 부패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이 제거되고 새로운 전기를 맞습니다. 심판의 손길은 단호하고 분명합니다.

 

30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31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이르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하니 32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이르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33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30-33)

 

이블르암에서 아하시야에게 치명상을 입힌 예후는 더 이상 도망가는 아하시야를 뒤 쫓지 않고 뒤돌아 다시 이스르엘로 진격합니다. 그의 최종 목표가 이세벨이며 이세벨을 죽이는 것이 중상 입은 아하시야의 숨통을 끊는 것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예후가 이스르엘 왕궁으로 돌아왔을 때, 이세벨은 눈 화장을 하고 머리를 꾸미고, 왕궁의 창에 서서 이스르엘 왕궁으로 다가오는 예후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이런 이세벨의 행동은 최대한 태후로서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행동이며, 그녀의 자신만만하고 강한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그녀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자신을 죽이러 오는 예후에 맞섭니다. 예후가 왕궁 문으로 들어오자 그를 향하여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고 묻습니다. 또 다시 ‘평안하냐’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요람이 예후를 만났을 때도 제일 먼저 한 질문이 ‘평안하냐’이었습니다. 그 역시 이 질문을 끝으로 예후의 손에 죽었습니다. 이세벨도 동일한 질문을 하며 예후를 맞이합니다. 이것은 이 상황이 전혀 평안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반어적 표현입니다. 여기서 이세벨이 예후를 시므리로 불렀는데, 시므리는 바아사에게 반역을 일으켰지만 겨우 7일 동안만 이스라엘의 왕위에 있다가 오므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궁에 불을 지르고 죽은 인물입니다(열왕기상 16:15-18). 이것은 오므리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예후의 운명이 오므리 왕조의 반란으로 7일이란 짧은 시간 동안만 왕을 한 시므리의 운명과 같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세벨은 이 이름을 통해 예후를 조롱하고 저주하고 있습니다. 이세벨의 목소리를 들은 예후는 이세벨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이세벨이 있는 창을 올려보며 자신의 편에 설 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예후는 ‘누구냐’를 반복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편에 서라고 독촉합니다. 이것은 매우 자신만만한 모습이며, 이세벨이 아무리 위엄 있는 듯이 행동해도 이미 상황은 자신에게 기울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시 두세 사람이 테라스에서 이런 예후의 모습을 내려다보았고, 예후는 그들에게 이세벨을 밑으로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이세벨 곁에서 있던 내시들은 예후의 명령을 따라 이세벨을 밑으로 던져버립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며 수종을 들던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예후를 주인으로 여기고, 그의 명령을 따라 자신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세벨의 입장에서 예후의 반란보다 자신 곁에서 입의 혀처럼 굴던 하인들의 배신이 더 뼈아팠을 것입니다. 그녀의 피가 담과 말에까지 튀었다는 것은, 그녀가 창밖으로 내던져져 매우 비참하고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음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 예후는 그녀의 시체를 밟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북이스라엘에 바알 신앙을 퍼뜨리고, 여호와의 선지자를 죽이며,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그 영향력을 남유다까지 퍼지게 한 이세벨 왕비는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세벨에 대한 예언이 성취됨(34-37)

잘못된 옛 유산을 청산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고 악을 답습하며 패역의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 기로에 섰을 때, 지도자와 공동체는 신중하고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정의를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34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이르되 가서 이 저주 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 그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35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그의 손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36돌아와서 전하니 예후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 37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였더라(34-27)

 

이렇게 이세벨을 죽인 예후는 이세벨의 시체를 그대로 두고 왕궁으로 들어가 먹고 마시며 잔치를 즐깁니다. 그는 일부러 이세벨을 장사 지내는 것을 지연시키며, 그녀의 비참한 죽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렸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잔치를 하던 중, 예후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이세벨을 장사 지내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이세벨을 저주받은 여자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대로 처벌받은 여자라는 의미입니다. 저주받은 여자이지만, 장사 지내주는 것은 그녀가 왕의 딸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후는 이세벨을 이스라엘의 왕비로 보지 않고 이방 나라의 공주로 부르며 경멸하고 있습니다. 예후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이세벨을 장사하려고 이세벨의 시신을 찾았지만, 그들은 두개골과 두 발과 두 손밖에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후가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인 사이에 이세벨의 시신은 짐승들에 의해 훼손되고 유실되었던 것입니다 이세벨은 죽은 후에도 시신이 먹히는 성경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저주를 받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예후에게 전하자, 예후는 이런 이세벨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해 예언하신 말씀이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이스르엘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 것이라는 예언은 열왕기상 21:23에 나옵니다. 하지만 37절에서 ‘그 시체가 이스라엘 토지에서 거름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는 예언에 없는 말이며, 이것은 엘리야의 예언을 예후가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세벨의 시신이 산산이 부서지고 없어져 이스르엘 땅에 거름처럼 흡수되고, 이세벨의 흔적이 이스라엘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후는 개가 먹을 것이란 엘리야의 저주를 이세벨의 존재가 이스라엘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것은 악인의 이름이 기억되지 않고 사라지는 벌을 받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여호와를 대적하는 일에 앞장섰던 이국의 공주이며 철저한 바알 신봉자였던 이세벨은 여호와께서 내린 심판을 받고 역사상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대적은 시스라처럼, 이세벨처럼, 아합처럼, 이렇게 하나님께 심판을 받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후라는 인물이 상당히 단호한 성격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선택을 받은 이후 아합 가문의 사람들을 죽이는 데 조금도 망설이거나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후의 성격이 하나님께서 아합 가문을 심판하는 데 적합했기 때문에, 그를 아합 가문의 심판자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 땅도 부패한 권력을 단죄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가선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지금도 죄악들을 청산하고 일소하여 정의와 인애에 기초한 사회를 세울 전기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평화, 정의의 가치가 개인과 공공의 삶에 반영될 수 있도록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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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9-02)


예후의 혁명을 통한 요람의 죽음

열왕기하 9장 14-26절


요즘 한국교회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한국 교회의 타락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라고 염려와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한 나라를 부패시킨 죄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영화에 취하여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다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지 가슴 조여집니다.

 

 

  • 엘리사의 제자가 예후에게 왕이 될 것을 말하고 기름을 부은 후 도망가자, 예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자 주변에 있던 요람의 신하들이 예후를 왕으로 세우며 반역을 일으킵니다. 이 여세를 몰아 예후와 그의 무리는 요람 왕이 있는 이스르엘로 진격합니다.

 

이스르엘에 있는 요람 왕(14-16)

복잡하고 다양한 세상에서 여러 가지 관계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권력의지와 불신, 반역과 우정, 미움과 사랑 등으로 복합적인 요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소를 모두 사용하여 자신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14이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곧 요람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아람의 왕 하사엘과 맞서서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15아람의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울 때에 아람 사람에게 부상한 것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던 때라 예후가 이르되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한 사람이라도 이 성에서 도망하여 이스르엘에 알리러 가지 못하게 하라 하니라 16예후가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요람 왕이 거기에 누워 있었음이라 유다의 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왔더라(14-16)

 

이 본문에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왕이 등장합니다. 예후가 엘리사가 보낸 제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아 여호와께 왕으로 선택되고, 무리가 예후를 왕으로 추대하는 동안, 요람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님시의 손자이며 여호사밧의 아들인 예후가 그의 무리와 요람에 대해 반역을 모의하고 있을 때, 요람은 유다 왕 아하시야와 함께 아람 왕 하사엘에 맞서서 길르앗 라못에서 전쟁을 하다가 부상을 입어 이스르엘로 돌아왔습니다. 아람과 전쟁을 하던 길르앗 라못에는 예후가 군사들과 남아있었습니다. 이곳을 반란의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반란하기로 결정한 예후는 입단속부터 철저하게 시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반역이 성공하길 원한다면, 이스르엘에 반역 소식이 알려지지 않도록 단 한 명의 도망자도 없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반란의 성공 여부는 비밀 유지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할지 결정한 뒤에 예후는 병거를 타고 요람이 병으로 누워 있는 이스르엘로 갑니다. 마침 그때 유다 왕 아하시야도 요람을 병문안하기 위해 그곳으로 와있었습니다. 이스르엘에 요람과 예후와 아하시야까지도 모두 모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후가 병거를 몰고 갔다는 것은 군대를 이끌고 갔다는 의미입니다.

 

예후에게 보낸 사자가 돌아오지 않음(17-20)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지 않는 자는 사람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곁에 있던 사람들을 빼앗으심으로써 교회를 타락시킨 죄를 심판하십니다. 죄를 멈추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진정한 평안이 하나님의 공동체에 찾아옵니다.

 

17이스르엘 망대에 파수꾼 하나가 서 있더니 예후의 무리가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 하니 요람이 이르되 한 사람을 말에 태워 보내어 맞이하여 평안하냐 묻게 하라 하는지라 18한 사람이 말을 타고 가서 만나 이르되 왕의 말씀이 평안하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이르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물러나라 하니라 파수꾼이 전하여 이르되 사자가 그들에게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나이다 하는지라 19다시 한 사람을 말에 태워 보내었더니 그들에게 가서 이르되 왕의 말씀이 평안하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이르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를 따르라 하더라 20파수꾼이 또 전하여 이르되 그도 그들에게까지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 병거 모는 것이 님시의 손자 예후가 모는 것 같이 미치게 모나이다 하니(17-20)

 

이스르엘 망대에 파수꾼 하나가 서 있더니 예후의 무리가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문에선 그가 본 것을 그대로 보고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파수꾼의 말을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그대로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요람에게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라고 알립니다. 이런 보고를 들은 요람은 말 타는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말 타는 사람은 왕의 사자이며, 왕은 빨리 가서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게 하려고 보낸 것입니다. 병거를 타고 군대를 이끌고 오는 경우는 적들로부터 도망쳐 오는 것이거나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준비하기 위해 빨리 움직일 수 있는 먈 타는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여기서 보낸 병사에게 ‘평안하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무슨 일이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후는 ‘너는 무엇이고 샬롬은 무엇이냐?’며 자신의 뒤로 돌아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일인지 알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뒤에 서라는 것은 왕에게 알리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예후는 이스르엘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의 의도를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말 타는 사람을 돌아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파수꾼은 사자가 그들에게 갔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요람에게 보고합니다.

요람은 다시 사람을 보내어 ‘평안하냐?’고 묻지만, 또다시 예후는 그 질문을 무시하고 사자를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파수꾼이 왕에게 다시 보낸 사람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보고합니다. 그러면서 병거를 모는 모양새가 미친 듯이 모는 것이 님시의 아들 예후같다고 보고합니다. 아마도 예후는 평소에도 병거를 거칠게 모는 것으로 유명했던 것 같습니다.

 

왕은 누군가 병거와 군대를 몰고 이스르엘 성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무슨 일인지 알기 위해 사자를 보내어 평안한지를 계속 물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하였고, 마침내 그 정체가 예후라는 것을 알아낸 것은 예후가 이스르엘에 가까이 온 후였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맡 타는 사람을 보내 상황이 평안한지를 물어보는 요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요람이 하사엘과의 전쟁을 매우 걱정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합의 아들 요람을 죽인 예후(21-26)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부패시킨 자는 생명까지 잃게 됩니다. 예후가 추구했던 ‘샬롬’은 전쟁의 승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와 부순종을 통해 이스라엘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아함 가문을 심판하는 것이 참된 평안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1요람이 이르되 메우라 하매 그의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의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22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 23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하니 24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겨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화살이 그의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그가 병거 가운데에 엎드러진지라 25예후가 그의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가져다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의 아버지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그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26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제 나봇의 피와 그의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이 밭에 던질지니라 하는지라(21-26)

 

병거를 몰고 오는 사람이 예후라는 것을 알게 된 요람은 유다 왕 아하시야와 함께 각각의 병거를 타고 예후를 맞이하러 나갑니다. 상황이 너무 궁금했던 요람 왕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마중을 나간 것입니다. 이런 요람의 모습을 보면 그는 예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다른 방비를 하지 않은 채 병거를 타고 예후를 만나러 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읽는 독자들은 요람이 자신의 생명을 재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병거를 이끌고 가서 만난 곳이 마침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 자리였습니다. 지금은 아합이 빼앗아 아합 집의 소유가 되었지만, 성경에서는 그곳을 나봇의 기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이 불법적으로 빼앗은 것을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밧세바를 항상 우리아의 아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합니다. 비록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지만, 성경은 여전히 밧세바를 우리아의 아내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아는 아내 밧세바의 호칭 속에 여전히 살아있어, 솔로몬의 이름이 거론될 때, 의인 우리아도 기억되게 하였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이라는 장소적 배경은, 왜 하나님께서 예후를 왕으로 선택하고 아합의 가문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그 밭을 소유하기 위해 무죄한 나봇을 여호와를 저주하였다는 누명을 씌워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해 나봇의 무죄 한 피 값을 반드시 되갚아줄 것이 라고 선언하셨다. 물론 아합의 회개로 그 벌이 지연되었지만, 이제 그 죗값을 아합의 집에 물을 시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도 세실 만큼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기에, 우리의 죄악도 모두 아십니다. 다만 오래 참으시며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에, 그 진노가 더디게 올 뿐 심판을 생략하지는 않으십니다. 예후를 만나자 요람은 또다시 평안하냐고 묻습니다. 요람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예후가 미친 듯이 달려온 것이 별일 아니기를 바라는 소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요람의 질문에 예후는 매우 무례하고 도전적인 대답을 합니다. 당신의 어머니인 이세벨의 우상숭배와 이교 행위들이 널리 시행되고 있는데, 어떻게 평안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예후의 이 말은 이세벨의 우상숭배와 이교 행위 때문에 자신이 반역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요람은 예후가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몰고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고는 재 빨리 자신의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자신과 함께한 아하시야에게도 반역이 일어났다고 경고합니다. 이렇게 도망하는 요람을 향해 예후는 있는 힘껏 활을 당겨 요람의 어깨 사이를 향해 쏘았고, 그 화살이 그의 심장을 뚫고 나왔습니다. 우리말은 ‘염통’이라고 번역했는데, 염통은 주로 동물의 심장을 일컫는 말로 사람에게 쓰기에 적절한 단어는 아닙니다. 그는 병거 가운데 엎어졌습니다. 즉, 예후의 화살 한 발에 심장을 맞고 즉사하였습니다. 아합도 도망하다가 우연히 한 병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부자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심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을 놓치는 법이 없으십니다.

 

이렇게 요람은 너무 허무하게 죽었고, 예후는 그 시체를 나봇의 밭에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전에 아합에게 심판을 선언하실 때 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합이 나봇의 토지를 빼앗기 위해서 나봇과 그의 아들의 피를 흘렸기 때문에 아합의 아들의 피로 갚으신 것입니다. 예후가 여호와의 심판 예언에 대한 성취를 선언하며 요람의 시체를 나봇의 토지에 버린 것은, 자신의 반란이 개인적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합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드러내려는 의도이며, 또한 자신의 반란은 여호와의 지지를 받는 정당한 반란이라는 것을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행동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탐욕스러운 죄를 예후의 손으로 갚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잊지 않으시며 자신의 말씀을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억울한 자에겐 소망이 되며 악한 자에겐 두려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훼손한 죄를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심판이 임하면, 개인이나 권력은 순식간에 위기에 처하고, 하루아침에 사람을 잃고, 정치적, 사회적 생명이 끝나며, 결국 생명마저 위협을 받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신판을 두려워하고 깨어 각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한 것들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함으로서 하나님의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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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9-01)


예후를 왕으로 세움

열왕기하 9장 1-13절


 

보통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을 하는데, 어떤 말씀을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순종하는 메시지가 공허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있지만, 그 성경을 어떻게 적용하고 무슨 말씀을 적용해야 하는지 잘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것은 성경 전체의 사상과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성경의 세계관’ 또는 ‘성경의 가치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 무엇을 하든지 그 말씀 속에서 나오는 사상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 여호람(요람)은 12년 정도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었는데, 그동안 아람 왕 벤하닷과의 전쟁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벤하닷에 이어 하사엘이 아람 왕이 된 후에도 요람은 계속해서 아람과 전쟁하였고, 이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병에 걸립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엘리사는 예후에게 기름 부어 그를 왕으로 세웁니다.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심(1-3)

일하고 그에 대한 값으로 받는 보수를 일컬어 ‘대가(代價)’라고 합니다. 정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은 죄를 저지른 대가 즉 죗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죄의 대가를 사망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로마서 6:23).

 

1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2거기에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의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그를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 3기름병을 가지고 그의 머리에 부으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하지 말지니라 하니(1-3)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신 말씀을 엘리사가 성취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엘리사는 젊은 선지자를 불러서 북이스라엘의 예후에게 보내며 가서 해야 할 구체적인 일들을 지시해 주었습니다. 예후가 왕이 되면서 아합 가문은 멸족을 당합니다. 허리띠를 묶고 기름병을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길르앗 라못은 요단 동편 길르앗 지방의 중심 도시로 비옥한 고원 위에 건설된 상업, 군사,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자주 발생한 도시이며, 아합 왕은 이곳에 아람과 싸우다가 전사하기도 했습니다. 아합의 아들 요람도 이곳에서 아람 왕 하사엘 군대에 의해 부상을 입었습니다.

 

엘리사가 제자를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보내면서 허리띠를 묶는 이유는 ‘단단히 준비하라’는 의미로, 빨리 움직이기 좋게 옷을 단단히 묶는 행동을 말합니다.

엘리사는 제자에게 예후를 만나면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그를 택해서 골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기름을 그의 머리에 붓고, ‘여호와께서 너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고 말한 후에, 곧바로 문을 열고 도망치라고 합니다. 여기서 엘리사 선지자는 제자에게 예후를 왕으로 삼는 것이 여호와의 신탁이라는 것을 반드시 밝히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후를 왕으로 세우라는 명령은 엘리야가 받았습니다(열왕기상 19:16-17). 열왕기상 19:17에서 여호와께서 아합 가문을 심판하기 위해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울 것이고, 아람 왕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는 예후가 죽일 것이고,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일 것이 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제 이 예언들이 하나씩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한 자들이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4-10)

때로는 악인들의 형통을 하나님의 무능력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악한 현실에 체념이나 악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니 악을 고발하고 악에 저항하고 의를 세우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4그 청년 곧 그 선지자의 청년이 길르앗 라못으로 가니라 5그가 이르러 보니 군대 장관들이 앉아 있는지라 소년이 이르되 장관이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나이다 예후가 이르되 우리 모든 사람 중에 누구에게 하려느냐 하니 이르되 장관이여 당신에게니이다 하는지라 6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청년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노니 7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 8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9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지라 10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그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니라 (4-10)

 

엘리사의 명령을 받은 엘리사의 제자는 길르앗 라못으로 갑니다. 여기서 선지자가 젊은 사람이란 것을 강조하는데, 엘리사의 명령을 수행한 후 재빨리 도망치기에 적합한 인물이란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그곳에 갔고 군대 장관들이 앉아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젊은 선지자는 장관을 부르며 할 말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후가 누구에게 할 말이 있는지 묻자 선지자는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며 예후를 지목합니다.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자, 선지자는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아합의 집을 쳐서 여호와의 종들, 즉 선지자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주라고 합니다. 결국 예후의 임무는 아합의 집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8절에서 보면 ‘매인 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할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나는 여호와를 가리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후를 통해 아합의 집에 대한 멸망을 이루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매인 자’나 ‘놓인 자’라는 표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멸망시킬 것이라는 의미로, 매인 자는 예후의 반란을 통해 예후에게 잡힌 아합의 후손들을 나타냅니다. 즉, 예후에게 잡혔든 잡히지 않았든 하나님의 손을 피할 수 있는 아합의 후손들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집과 같이 아합의 집도 모두 멸망시키겠다고 하십니다.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을 세우자마자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단과 벧엘에 우상을 만들어 섬기게 한 죄로 그의 모든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결국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죽이고 왕이 되면서, 여로보암 가문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맙니다. 하지만 바아사도 하나님 앞에서 여로보암처럼 악을 행했기 때문에, 예후를 통해 바아사의 집이 모두 죽으리란 예언을 받았고, 결국 시므리가 왕이 되면서 바아사 집안의 모든 남자를 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후를 통해 아합의 집에 대한 멸망을 시행하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세벨은 이스르엘에서 죽을 것이며, 개들이 이세벨을 먹을 것이고, 그녀를 장사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개는 이스라엘에서 부정하고 가장 하찮은 동물로 간주되며, 개가 먹는다는 것은 사후에 겪는 가장 치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사람이 죽은 후에 가족 묘지에 무사히 안장되는 것은 큰 축복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장되지 못한 자, 특히 새나 야생동물들에게 시신이 훼손되는 경우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생각되었습니다. 이세벨의 경우는 이 모든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사실 7-10절의 말은 1-3절에서 엘리사가 제자에게 전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략으로 실제로는 말을 했지만, 화자가 가장 중요한 말만 기록하고 나머지는 7-10절에서 자세히 전달한 것입니다. 이렇게 엘리사가 전달하라는 말을 모두 전달한 후 제자는 엘리사의 말대로 문을 열고 도망하였습니다.

 

10절 마지막에 3절 마지막과 동일한 구문을 쓴 것은 엘리사의 제자가 엘리사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여호람이 12년이나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던 상황에서 열리사의 제자는 예후에게 반역을 사주하였는데,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지면 엘리사와 그의 제자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반역을 그냥 두고 볼 여호람과 이세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여호와의 명령이기에,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정권을 바꾸는 일에 참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 시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젊은 선지자는 스승 엘리사의 명령을 받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는 것부터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나서 빨리 도망치는 것까지 빠짐없이 순종했습니다. 당신은 설교를 통해 받은 말씀을 빠짐없이 순종하고 있습니까?

 

예후가 반란을 일으킴(11-13)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정쟁과 반역을 이용해서 심판해야 할 자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니 권력이나 소유 자체가 우리의 의로움을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의 제자를 비아냥거릴 만큼 이스라엘은 왕으로부터 백성까지 악했습니다.

 

11예후가 나와서 그의 주인의 신복들에게 이르니 한 사람이 그에게 묻되 평안하냐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냐 대답하되 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가 말한 것을 알리라 하더라 12무리가 이르되 당치 아니한 말이라 청하건대 그대는 우리에게 이르라 하니 대답하되 그가 이리 이리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는다 하셨다 하더라 하는지라 13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11-13)

 

엘리사의 제자에게서 여호와의 신탁을 들은 예후는 집에서 나와 그의 주인의 신복들, 즉 이스라엘 왕인 여호람의 신하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냐고 안부를 물었고, 그 미친 자가 왜 왔는지 묻습니다. 어떤 청년이 갑자기 와서 예후를 불러내더니 집으로 데리고 들어간 후 조금 있다가 문을 열고 도망하였으니,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후는 당신들은 이미 그 사람이 누군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며 떠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신들을 속이지 말라고 하면서 어서 알려달라고 요청합니다. ‘당치 않은 말’은 ‘속임수’, ‘사기’, ‘어리석음’이란 뜻입니다. 그러자 예후는 선지자의 제자가 전달한 말을 다 전하면서 가장 핵심적인 말인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는다는 말만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이 문장은 1-13절 사이에서 세 번 반복되고 있는데, 이 문장이 핵심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예후가 선지자의 말을 전달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예후의 걱정과 달리 매우 열광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들은 옷을 가져다 예후의 발아래 깔고 나팔을 불며 예후가 왕이라고 선포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여호람의 신하들이 바로 예후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을 보면 당시 신하들이 아합 가문의 통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선 모든 상황이 무르익었을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심판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후는 엘리사의 지지를 받으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죗값을 치르시는 분입니다. 우상숭배에 앞장서며 온갖 죄를 일삼았던 아합의 집안을 멸하시기 위해 예후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또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왕같 은 제사장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예후가 완전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를 택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 수도,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악은 심판을 받으며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을 섬길 기회는 주어진다는 점만은 확실합니다. 기회를 얻는 자는 마땅히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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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8-02)


아합의 집을 따른 유다 왕들

열왕기하 8장 16-29절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사는 길은 좁은 길이어서 찾는 이가 적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유다 왕 여호람과 아하시야는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하였으며, 그 귀결은 비참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결국 어떤 길을 가게 되겠습니까?

 

  • 열왕기상 19장부터 엘리야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열왕기의 전형적인 문학 형식이 깨지고,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열왕기하 8장 16-24절에서 유다 왕 여호람의 통치 이야기는 전형적인 등극 공식과 죽음 공식을, 다음 왕 아하시야는 전형적인 등극 공식을 보여줍니다. 이는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하던 중간에서 시대적 배경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엘리사 당시 유다 왕들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집어넣은 것입니다.

 

유다 왕 여호람의 통치(16-23)

하나님 앞에서 ‘연합’은 그 자체로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무슨 가치를 위한 것인지에 따라 더 큰 악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몸집을 키워 권력을 누리는 데만 여념이 없는 뒤틀린 이합집산은 또 하나의 바벨탑을 쌓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오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17여호람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통치하니라 18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19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16-19)

 

이 단락은 유다 왕 여호람의 등극 공식으로, 그가 등국할 당시에 북이스라엘 왕은 아합의 아들 요람이며 요람이 통치한 지 5년 되던 해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차적으로 서로의 왕을 언급하여 연대기적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여호람이 등극할 당시 그의 아버지인 여호사밧이 여전히 살아 있었고 왕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이 섭정 왕으로 물러나면서 아들인 여호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실제적인 통치는 여호람이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선 여호사밧과 여호람을 모두 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람이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는 32세이며, 레위인의 경우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고 인정되는 나이인 30세를 넘겼습니다.

여호사밧은 여호람이 성인으로서 왕이 되기에 충분한 나이가 되자 그를 왕으로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8년을 통치합니다. 여호람은 그리 오래 살지는 못했는데, 열왕기 신학에서 왕들의 이른 죽음은 여호와의 심판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여호람이 악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아합 가문이 행한 것처럼 행했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악함의 기준이 이전에는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에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을 여호와 대신 섬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의 우상숭배와 불의가 더 악했기 때문에, 새로운 악함의 기준으로 등장했습니다. 유다 왕 여호람이 북이스라엘의 아합 집처럼 행한 이유는 그가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달랴와 결혼하면서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따라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유다의 집을 아합의 집을 멸망시키는 것처럼 멸망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에게 그의 자손들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등불은 이스라엘에서 종종 생명과 번영을 비유적으로 상징했습니다. 즉 등불을 주셨다는 말은 다윗 왕가가 계속해서 지속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는 뜻이며, 이는 사무엘하 7장에서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셨던 약속과 연결됩니다. 이 말은 현재 유다의 상황도 북이스라엘의 상황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다윗과의 약속 때문에 유다를 참아주지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다 왕 여호람의 행적과 죽음(20-2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은 변치 않으십니다. 항상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 약속을 따라 변치 않는 사람으로 사람들을 대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 조아리게 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20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21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들의 장막들로 돌아갔더라 22이와 같이 에돔이 유다의 수하에서 배반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23여호람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4여호람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20-24)

 

이 단락은 여호람의 대표적 행적을 언급하는데,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왕을 세웠습니다. 사무엘하 8장에 따르면,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죽이고 에돔에 수비대를 두면서 에돔을 속국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평가합니다. 즉, 다윗이 에돔을 속국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를 성실하게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람 때 에돔이 속국에서 벗어나 독립했다는 것은 여호람의 범죄 때문에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호의를 거두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승승장구하고 그가 참여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며 이스라엘을 크게 번성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여호와 앞에서 신실하였고,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일 뿐 다윗 자신의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람들이 보기에 성공으로 보이는 결과가 나오면 하나님보다는 그 사람 자신에게 능력이나 비법이 착각하여 그 비법을 배우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여호와 앞에 신실하게 살면서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이 다윗이 형통할 수 있었던 유일한 비법이었습니다.

 

여호람은 에돔의 배신을 응징하고 다시 되찾기 위해 모든 병거를 모아 사일로 갑니다. 그리고 자신을 에워싸고 있던 에돔 군사들과 병거들을 밤에 기습하여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 문장은 여호람이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결과는 완전한 패배였습니다.

군사들은 모두 흩어져 각자 집으로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여호람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도 여호람을 돕지 않았기에, 이전에 누리던 영화가 하나둘씩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에돔은 유다의 통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22). 또한 여호람 때 립나도 유다에게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립나는 여호수아 10:30에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시에 싸워 점령한 지역인비다. 그런데 오랫동안 점령지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던 립나도 독립하려고 반역하였습니다. 여기서 립나와 에돔이 같은 시기에 반역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여 여호람 때 유다의 힘이 매우 약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더는 유다를 지키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23-24절은 죽음 공식입니다. 여호람 왕에 대한 기록은 에돔과의 전쟁이 전부입니다. 여호람을 이어서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의 행적(25-29)

하나님께서는 악을 근절하기 위해 심판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십니다. 당장은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심판을 잘 피해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순간도 잊지 않고 심판을 준비하십니다.

 

25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십이년에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니 26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라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이더라 27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그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 28그가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에게 부상을 입힌지라 29요람 왕이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울 때에 라마에서 아람 사람에게 당한 부상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더라 유다의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아합의 아들 요람을 보기 위하여 내려갔으니 이는 그에게 병이 생겼음이더라(25-29)

 

25-26절은 유다 왕의 등극 공식입니다. 여호람이 죽은 후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고, 왕이 될 때 나이는 22세였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1년에 불과했습니다. 유다의 다른 왕들처럼 어머니 이름이 소개되고 있는데, 아하시야의 어머니는 아달랴이며 그녀는 오므리의 손녀, 즉 아합의 딸입니다. 열왕기 저자가 오므리의 손녀로 아달랴를 소개한 것은 오므리 왕이 시작한 결혼 동맹 때문에 우상숭배의 영향이 손녀와 아달랴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므리 왕조의 죄가 유다까지 강하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 유다 왕조도 하나님에게서 더욱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27절은 아하시야에 대한 평가입니다. 아하시야에 대해서도 여호람과 동일한 평가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하시야도 가장 악하다고 평가받은 아합의 집과 동일합니다. 그 이유는 아하시야가 아합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하시야는 아달랴의 아들이고 아합의 외손자입니다. 여기서 ‘사위’는 ‘사위의 후손’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아하시야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어머니 아달랴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호람과 아하시야 모두 아달랴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는데, 아달랴가 어떤 인물인지는 열왕기하 11장에 나옵니다. 아하시야는 아합의 아들 요람을 돕기 위해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하사엘과 전쟁하였고, 요람이 부상을 입습니다. 그로 인해 전쟁은 중단됩니다. 여기서 요람은 열왕기하 3장에 등장하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과 동일한 인물입니다. 요람은 대략 주전 852-841년까지 재위했고, 이때 남유다의 왕은 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시야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북이스라엘 왕 요람은 부상을 입습니다. 아마 아하시야는 북왕조와 아람의 계속되는 갈등 속에서 북왕조를 돕기 위해 참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서로 친밀했던 것은 아달랴라는 연결의 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와 요람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입니다. 이렇듯 친밀한 친족 관계라서, 요람이 아람과의 또 다른 전쟁에서 부상을 입자 그를 보기 위해 아하시야가 이스라엘을 방문합니다. 열왕기 저자는 이런 두 왕국의 교류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오히려 아합 왕조의 악한 영향이 남유다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것은 오므리와 아합이 바알 선지자인 이세벨을 이스라엘에 들인 죄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고 있으며, 다음 장에 등장할 오므리 왕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선택과 태도, 결단으로 나타납니다.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며 힘을 추구하는 동맹은 분열과 배신과 파멸을 낳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혈연, 지연, 학연을 의지하여 세를 키우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정직한 길을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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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8-01)


온 땅의 주권자 하나님

열왕기하 8장 1-15절


운동 경기의 정신, 기술, 전술 등은 선수들에게 지도하고 훈련시키는 일,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코치(coach)라고 합니다. 최고의 운동선수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코치가 있습니다. 훌륭한 리더의 첫째 조건은 남들을 리드하기 전에 좋은 ‘셀프-리더’여야 합니다. 스포츠를 보면 좋은 코치란 꼭 선수보다 더 운동능력이 뛰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스로가 변화의 도구가 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 이 단락에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1-6절에서는 4장에서 나온 수넴 여인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녀는 엘리사를 통해 아들을 얻고 아들이 다시 사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한 인물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 후 얼마가 지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둘째 이야기에서 엘리사는 하사엘을 만나 하사엘이 아람 왕이 될 것을 전하고, 하사엘은 벤하닷을 죽이고 아람의 왕이 됩니다.

 

기근을 피해 고향 떠난 여인(1-2)

 

사람들은 갈수록 자신만 사랑하고 교회 안팎에서도 이기주의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듯 보이는 행동까지도 사실은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을 교묘히 숨긴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느낄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1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 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가족과 함께 거주할 만한 곳으로 가서 거주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 하니 2여인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행하여 그의 가족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 칠 년을 우거하다가(1-2)

 

8장에서는 수넴 여인이 다시 등장합니다. 여기서 수넴 여인을 가리켜 아들을 살려준 여인이라고 소개하는데, 현재 이야기가 4장의 내용을 전제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가족과 함께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거주하라고 명령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에 7년 동안 기근이 생기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심판하기 위해서인데, 엘리사는 여호와를 신실하게 섬기는 수넴 여인에게 이 심판을 피할 길을 알려준 것입니다. 수넴 여인은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하여 정말로 고향을 떠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서 7년을 거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2)는 수넴 여인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물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사 이야기를 보면 여호와를 믿고, 여호와의 능력을 체험하며, 순종하는 인물들은 전부 사회 주변인들이다. 여성, 노예 소녀, 가난한 선지자의 과부, 가난한 선지자의 제자들, 이방인 나아만, 이름 없는 왕의 신하, 나병 환자가 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누가복음 6:20)라고 하셨습니다.

 

대조적으로 왕이나 지도자들은 항상 여호와의 말씀을 의심했고, 여호와의 권능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신분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땅을 되찾은 수넴 여인(3-6)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대로 따랐는데도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 때 너무 상심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기 쉽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소망하는 일이 우리가 생각한 때에 이루어지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시기와 상황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3칠 년이 다하매 여인이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서 돌아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호소하려 하여 왕에게 나아갔더라 4그 때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와 서로 말하며 이르되 너는 엘리사가 행한 모든 큰 일을 내게 설명하라 하니 5게하시가 곧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을 왕에게 이야기할 때에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머니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왕에게 호소하는지라 게하시가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의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 하니라 6왕이 그 여인에게 물으매 여인이 설명한지라 왕이 그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여 이르되 이 여인에게 속한 모든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의 밭의 소출을 다 돌려 주라 하였더라(3-7)

 

선지자의 말대로 7년 동안 블레셋에서 지낸 수넴 여인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옵니다, 자신의 집과 땅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되찾아 달라며 왕에게 재판을 청구합니다. 수넴 여인이 직접 왕에게 나온 것을 보면 남편은 죽었고, 아들은 아직 사회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미성년인 것으로 보입니다.

 

수넴 여인이 왕에게 직접 재판을 요청하러 나올 때, 마침 왕은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는 게하시에게 엘리사가 행한 큰 이적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를 하는 도중 마침 다시 살아난 아이의 엄마인 그 여자가 왕에게 호소하기 위해서 들어온 것입니다. 놀라운 우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 본 게하시는 왕에게 이 여성이 바로 엘리사가 살린 아이의 엄마라고 소개합니다. 그러자 왕은 그녀에게 정말 그런지 물었고, 그녀는 왕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왕은 그녀를 위해 관리 하나를 세우고,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과 7년 동안 생산한 소출까지 돌려주라고 명령합니다.

 

수넴 여인에게 일어난 모든 우연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여인과 그의 아이를 기근에서 보호하셨고, 돌아와서도 어려움 없이 자신의 기업을 찾을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런 수넴 여인의 풍족한 모습은 기근 속에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어야 했던 엄마의 울부짖음과 그 울부짖음을 들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옷만 찢으며 가슴을 치던 이스라엘 왕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의 결말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엘리사를 찾아간 하사엘(7-10)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교회에서는 그의 백성을 못 찾고 교회 밖에 찾으실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지금처럼 부패와 타락을 거듭한다면 교회 내에서 소망이 없습니다.

 

7엘리사가 다메섹에 갔을 때에 아람 왕 벤하닷이 병들었더니 왕에게 들리기를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 이르렀나이다 하니 8왕이 하사엘에게 이르되 너는 손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사람을 맞이하고 내가 이 병에서 살아나겠는지 그를 통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9하사엘이 그를 맞이하러 갈새 다메섹의 모든 좋은 물품으로 예물을 삼아 가지고 낙타 사십 마리에 싣고 나아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 이르되 나의 이 병이 낫겠나이까 하더이다 하니 10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 반드시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고(7-10)

 

7-15절은 하사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사엘은 열왕기상 19:15에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세 가지 사명을 주시는데, 첫째가 엘리사를 제자로 삼는 것이며, 둘째가 하사엘을 아람의 왕으로 세우는 것이고, 셋째는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엘리야는 엘리사를 제자로 삼는 것만 실행하고 하늘로 승천합니다. 이제 제자인 엘리사가 엘리야를 대신해서 하사엘을 만납니다. 장소는 다메섹입니다. 엘리사가 다메섹으로 갔을 때 마침 아람 왕 벤하닷이 병이 듭니다.

이 벤하닷은 7장에서 사마리아를 포위했던 바로 그 인물입니다. 병든 벤하닷에게 누군가가 엘리사가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자 벤하닷은 자신의 심복인 하사엘을 불러 명령하는데, 예물을 들고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서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을지에 대해 여호와의 신탁을 받아오라고 시킵니다.

 

아람이 여호와를 섬기는 나라는 아니지만, 이미 나아만의 일과 사마리아 포위와 도망 사건에서 여호와의 권능을 경험한 아람 사람들은 여호와가 참 신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있었기에, 아람 나라의 신이 아닌 여호와께 물어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모습은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을 때에 에그론의 신인 바알세불을 찾아가라던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대조를 이룹니다(열왕기하 1:2). 이방 아람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데, 이스라엘 왕은 우상을 찾고 있습니다.

 

왕명을 받은 하사엘은 다메섹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낙타 40마리에 싣고 엘리사를 만나러 갑니다. 마치 나아만이 금과 은을 잔뜩 싣고 엘리사를 만나러온 것과 유사합니다. 엘리사를 만난 하사엘은 아들 벤하닷의 병이 나을 수 있을지 묻습니다. 여기서 벤하닷을 신의 아들로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것처럼 최대한 겸손하게 자신과 벤하닷을 낮추는 표현입니다.

 

엘리사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너는 가서 벤하닷에게 반드시 살 것이라고 전하라고 한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가 반드시 죽을 것임을 자신에게 보이셨다고 합니다. 즉 벤하닷이 죽을 것이라는 말이 참이고 살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며, 이 거짓말은 벤하닷을 속이기 위한 것이고 참말은 하사엘에게 그가 왕을 죽이고 왕이 될 것이라는 신탁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사엘을 위해 예언하는 엘리사(11-13)

택함을 받았을지라도 순종치 않는 자는 자비 없는 심판으로 징계하십니다. 슬피 우는 시간이 닥치기 전에 정의와 인애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1하나님의 사람이 그가 부끄러워하기까지 그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우니 12하사엘이 이르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하는지라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그들의 성에 불을 지르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하니 13하사엘이 이르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기에 이런 큰일을 행하오리이까 하더라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더라(11-13)

 

엘리사는 하사엘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쳐다본 후 웁니다. 하사엘이 왜 우냐고 묻자 엘리사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할 악행을 알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엘리사가 예견한 하사엘의 악행은 그가 이스라엘을 점령할 때 어린이와 태아까지도 죽이는 끔찍한 살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직역하면 ‘그들 곁에 너는 불을 보내고 그들의 젊은이를 너는 칼로 죽이고 그들의 어린이를 너는 던지고 그들의 임산부를 너는 가를 것이다’입니다. 엘리사는 젊은 사람에서 어린이 및 태아의 죽음까지 언급하며, 하사엘이 이스라엘 자손을 철저히 진멸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동족을 잔인하게 죽일 당사자에게 이런 끔찍한 예언을 전하면서 엘리사는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사엘은 이 말을 듣고 개 같은 자신이 어떻게 이런 큰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엘리사에게는 통곡할 일인 그것을 하사엘은 큰 일 혹은 위대한 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가 아람의 왕이 될 것을 여호와께서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할 사람으로 하사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사의 통곡은 하나님의 통곡일 것입니다. 자신의 백성을 심판할 인물을 자신의 손으로 선택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자신의 입으로 그 예언을 전해야 하는 엘리사의 마음은 같기 때문입니다.

 

아람의 왕이 된 하사엘(14-15)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역사는 없습니다. 능력을 제한할 존재도 없습니다. 그분만 의지해야 할 이유입니다.

 

14그가 엘리사를 떠나가서 그의 주인에게 나아가니 왕이 그에게 묻되 엘리사가 네게 무슨 말을 하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왕이 반드시 살아나시리이다 하더이다 하더라 15그 이튿날에 하사엘이 이불을 물에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으매 왕이 죽은지라 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4-15)

 

예언을 듣고 벤하닷에게 돌아간 하사엘은 엘리사가 말한 참말 대신 거짓말을 전달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엘리사의 예언을 받아들이고 왕이 되겠다고 작정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 위한 대답입니다.

 

다음 날 하사엘은 물에 적신 이불을 왕의 얼굴에 덮어 왕을 질식시켜 죽게 하고 자신이 왕이 됩니다. 그는 엘리사의 예언처럼 아람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사엘이 아람 왕이 되었다는 것은 엘리사가 한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 역시 모두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이 하사엘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여호와를 신실하게 믿는 수넴 여인을 세심하게 돌보신 것과는 매우 대조됩니다.


 

역사의 주인이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코치를 더욱 잘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히 찾는 이는 평생도록 지켜주시지만, 오만하게 행하며 거절하는 자는 징계하십니다. 국가 또는 겸손한 정의로 행할 때는 긍휼을 입지만, 오만한 폭력과 불의로 행할 때는 심판하십니다. 개인만, 오만한 폭력과 불의로 행할 때는 심판하십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가 정의로울 수 있도록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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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7-01)

 


생명의 소식을 알린 나병환자들

열왕기하 7장 3-20절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병으로 간주되어 그 병에 걸린 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불쌍해 보인 나병환자들이지만 그들의 영혼은 살아 있었습니다. 평소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 그들이 보여준 모습이 주의 백성의 삶에 대해 우리에게 귀한 도전을 줍니다.

 

  • 극심한 기근을 겪은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께 회개하며 부르짖는 대신 엘리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자신을 죽이려고 온 사람들에게 내일 하나님께서 식량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왕의 신하는 하나님의 신탁을 믿지 않음으로써 심판의 신탁을 받습니다. 본문은 이 신탁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퇴각을 알게 된 나병환자들(3-8)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어려움도 하나님은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고 하나님의 때에 기적을 베푸시는 목적은 믿음이 성장시키시려는 것입니다. 단지 기적을 체험하는 것으로는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민수기 14:1-3). 믿음은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 속에서 순종을 연습함으로 성장합니다.

 

3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4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5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6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7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8그 나병환자들이 진영 끝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3-7)

 

사마리아 성안에서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생하는 동안 이런 성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성문 어귀에 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부정한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성안에서 살지 못하였습니다. 이 들은 성안 사람들이 주는 것을 먹고 살았으며, 성안에 기근이 드니 이들은 더욱더 어려워져 목숨 부지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이 되면 약한 자들이 더욱 고통당하고 희생당합니다. 아이들은 살육당하고 병자들은 완전히 버려진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의 대화는 이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성읍으로 들어가도 식량이 없어 죽고, 성문 어귀에 있어도 어차피 죽을 것이니, 차라리 아람 군대에 항복해서 살려주면 사는 것이고 죽이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래저래 죽는 건 마찬가지니 차라리 시도라도 해보고 죽자는 말입니다. 이들은 살길을 찾기 위해죽을 각오를 하고 해 질 무렵 아람 진영으로 갔는데, 가보니 놀랍게도 그곳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6-7절에서 화자는 왜 아람 진영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아람 군대에게 말소리, 병거 소리, 많은 군사들의 소리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엄청난 군대의 진군 소리를 들은 아람 사람들은 이스라엘 왕이 돈을 주고 헷 왕과 애굽 왕에게서 용병을 사서, 그들이 자신들을 치러 오는 것이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느닷없이 들려오는 커다란 진군 소리에 겁을 먹고 군대가 오는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생각이 사실인지 확인할 정찰병을 보내거나, 군대가 눈에 보이길 기다리며 싸울 전략을 세우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두고 급히 도망해 버렸습니다.

화자는 그들이 목숨을 위해 이렇게 필사적으로 도망하였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여호와께서 들려주신 군대 소리가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키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할 만큼 크고 위협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이나 나귀나 장막 등을 챙길 새도 없이 몸만 간신히 빠져나간 형국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떠난 황혼 무렵은 네 명의 나병 환자가 아람 진으로 출발한 시간입니다. 아람 군대와 네 명의 나병 환자는 같은 시간에 출발하였고, 나병 환자들이 진에 도착했을 때는 아람 군대가 막 사라진 직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병 환자들이 출발한 시간에 맞추어 아람 군대를 쫓아낸 것처럼 저자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8절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나병 환자들이 진영에 들어와 이 장막 저 장막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배불리 먹은 후 금은 의복까지 느긋하게 약탈하는 행운을 누리는 장면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온 아람 진영에서 이런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람 진영을 정탐한 (9-15)

세상은 눈에 보이는 만큼 견고하지 않습니다. 돈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막강하지 않습니다. 돈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막강하지 않습니다. 의지할 데 없어 불안하고, 두려워서 더욱 성장의 노예가 되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자들입니다.

 

9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10가서 성읍 문지기를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서 보니 거기에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하는지라 11그가 문지기들을 부르매 그들이 왕궁에 있는 자에게 말하니 12왕이 밤에 일어나 그의 신복들에게 이르되 아람 사람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그들이 우리가 주린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 진영을 떠나서 들에 매복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그들이 성읍에서 나오거든 우리가 사로잡고 성읍에 들어가겠다 한 것이니라 하니 13그의 신하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아직 성중에 남아 있는 말 다섯 마리를 취하고 사람을 보내 정탐하게 하소서 그것들이 성중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온 무리 곧 멸망한 이스라엘 온 무리와 같으니이다 하고 14그들이 병거 둘과 그 말들을 취한지라 왕이 아람 군대 뒤로 보내며 가서 정탐하라 하였더니 15그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 요단에 이른즉 아람 사람이 급히 도망하느라고 버린 의복과 병기가 길에 가득하였더라 사자가 돌아와서 왕에게 알리니(9-15)

 

배고픔도 해결하고 노략물을 가득 챙긴 후, 네 나병 환자들은 정신을 차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이 좋은 소식을 같이 나누어야 하며, 만일 자신들만 알고 있거나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는 것은 잘못이며, 그랬다가는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그래서 빨리 가서 왕궁에 알리자고 말합니다. 이들은 나병 때문에 성안에 들어가 살 수 없었으며 성안 사람들보다 더 죽음의 위협을 당했지만,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많은 식량을 보고 성 안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느꼈으며,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가 발각되었을 때 받을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있던 자들입니다. 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지만, 인간에 대한 연민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성으로 가서 문지기를 불러 자신들이 본 것을 그대로 전합니다.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문지기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그러자 문지기는 다른 문지기들을 불렀고, 그들은 왕궁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립니다. 매우 급하고 중대한 소식이기에, 왕은 밤에 일어나 신하들을 불러 상황 파악을 하려고 회의를 한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 채 아람 진영이 비었다는 말을 듣고 왕은 자신들을 성읍에서 유인하기 위한 술책이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비록 엘리사가 내일 많은 양식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왕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기에 말과 식량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아람 진영이 비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자 신하 중 한사람이 그럼 남은 다섯 마리의 말과 사람을 보내 정탐을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어차피 지금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말 다섯 마리 아낀다 해도 모두 죽을 것 같은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 말은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이니 아람 진영에 가보자는 나병 환자들의 말과 유사합니다. 이 말에 병거둘과 말을 택하여 아람 군대를 추적하도록 보냅니다. 정탐꾼들이 아람 군대를 요단까지 추적하여 정탐하였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요단까지의 거리는 대략 64킬로미터 정도입니다. 사마리아 정탐꾼은 상당히 멀리까지 정탐한 것입니다. 아람 군대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야 하기에 요단까지 추적하였고 그곳에 도착해서 보니 아람 사람들이 도망하면서 버린 의복과 병기들이 길에 가득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람 사람들이 정말 혼비백산하여 몸만 간신히 도망갔다는 것과 아람 군대가 완전히 이스라엘 땅을 떠난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신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려줍니다.

 

엘리사의 예언이 성취됨(16-20)

여호와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인내하며 믿는 자를 통해 역사합니다. 이러한 일꾼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그 주변 사람들이 누릴 수 있습니다. 왕은 정탐꾼을 보내 확인하고서야 나병환자들의 전한 소식을 믿었습니다.

 

16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영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17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가 말한 대로라 18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말한 바와 같으니 이르기를 내일 이맘 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한즉 19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20그의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곧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죽었더라(16-20)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성 밖으로 나가서 아람 진영을 노략합니다. 여기서 ‘노략하다’라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노획물을 취할 때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아람은 여호와의 개입으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스라엘 땅에서 도망감으로써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지금 이스라엘은 싸워보지도 않고 승리의 노획물을 얻게 된 것입니다.

아람 진영에서 많은 곡식을 얻게 되니, 정말 여호와의 말씀처럼 밀가루 한 스아가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기적이 사마리아 성에 일어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17절은 여호와의 예언의 두 번째 성취다.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장관은 성문에서 백성들에게 밟혀 죽습니다. 백성들의 발에 밟혀 죽었다는 것은 식량을 얻기 위해 다급히 밀고 나가는 군중에게 떠밀려 죽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18-20절에서 다시 한 번 엘리사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반복함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왕과 지도자들이 살아계신 여호와의 권능을 믿든지 안 믿든지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살아 계시며, 그 권능을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열왕기는 계속해서 왕들과 지도자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왕도 여호와의 말씀을 의심하였고 그의 심복도 여호와의 말씀을 의심하였습니다.

그 결과 왕과 지도자들은 이 처참한 재난 속에서 철저하게 무능했습니다. 대조적으로 이 상황에서 좋은 소식은 사마리아 성에서 버림받은 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좋은 소식을 알려주시고 이들의 입을 통해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나아만 집의 이스라엘 노예 소녀를 통해 구원의 소식을 알려준 것과 유사합니다. 지도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버리고 여호와를 버리고 철저히 무능할 때, 여호와께서는 노예 소녀나 나병 환자처럼 사회 주변인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복음을 계속해서 전하십니다.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아무 데나 붙일 순 없지만, 나병환자들에게는 손색이 없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걸고 살길을 찾았고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한 그들은 참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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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6-03)


사마리아 성을 포위한 현실

열왕기하 6장 24절-7장 2절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포위하였는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안타깝다 못해 처참하기까지 합니다. 너무나 극단적인 모습이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혹 이것이 우리 시대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 아람과 얽힌 새로운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열왕기하 6:24-7:20은 하나의 단위로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포위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이 안에 자식을 먹는 이야기, 양식을 찾은 나병 환자의 이야기, 성문을 지키던 관리의 운명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호람 시대가 아닌 여호아하스 시대의 이야기지만, 여호와의 권능과 무능한 왕이란 주제로 계속 연결되고 있기에 여기에 위치했을 것입니다.

 

아람의 포위로 심각해진 사마리아(24-25)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처절한 아픔을 허락하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시고 멸망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백성에게 고난이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백성에게 임할 저주를 분명히 말씀하시고(레위기 26:23-26; 신명기 28:49-57), 저주가 임할 때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셨습니다.

 

24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25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24-25)

 

그 후에는 아람군이 엘리사에게 큰 굴욕을 당한 사건 이후를 말합니다. 아람 왕 벤하닷은 소규모의 습격으로는 이스라엘을 점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번에는 전면적인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다. 아람의 ‘온 군대’를 모았다는 것은 아람이 사마리아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는 의미입니다.

벤하닷은 아람의 전군을 끌고 와 시마리아를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이렇게 포위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사마리아 성안에 극심한 기근이 왔습니다. 기근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화자는 나귀 머리 하나에 은 80세겔이고 비둘기 똥 사분의 1갑에 은 5세겔이나 한다고 말합니다. 나귀 머리는 가장 맛이 없는 요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런 맛없는 요리에 은 80세겔을 주었는데, 한 달 월급이 은 1세겔이고 성인 남성이 서원할 때 내는 값이 50세겔인 것을 감안하면, 음식 한 그릇에 80세겔은 대단히 비싼 값입니다. 비둘기 똥을 식용으로 사용했는지 연료로 사용했는지 분명하진 않습니다. 1갑은 0.5리터 정도이므로 1/4은 125밀리리터 정도 되는 아주 적은 양입니다. 이렇게 적은 양에 은 5세겔을 주어야 할 성도로 사마리아의 물가는 지나치게 높았다고 말합니다. 물가가 이 정도면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의 무능(26-30)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자비로운 공급자 역할을 중단하시면, 참극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극단적인 아픔 속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내 삶의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그분의 말씀을 덮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현실에 대한 믿음으로 반응한 것도 중요합니다.

 

26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지나갈 때에 한 여인이 외쳐 이르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27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 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하니라 28또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오늘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29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하는지라 30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그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의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26-30)

 

이런 심각한 상황을 살피기 위해 왕이 성 위로 지나가며 시찰할 때, 한 여성이 자신을 도와달라고 외칩니다. 왕은 백성들의 요청을 듣고 일을 해결해주거나 재판을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왕을 찾습니다. 그래서 이 여성이 왕을 부르며 이 상황에서 구원해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여기서 ‘외치다’는 주로 고난 중에 구원해달라고 외칠 때 사용됩니다. 구원해 달라는 외침을 들은 왕은 여호와께서 돕지 아니하시면 자신은 도울 수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 백성을 살리고 죽이는 문제에서 자신은 철저히 무능력함을 토로한 것입니다.

‘타작 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에서 타작 마당이나 포도주 틀은 풍요의 원천을 가리키며,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이 있어도 여호와께서 곡식을 주시고 포도를 풍성하게 주셔야 타작 마당에서 타작을 하고 포도주 틀에서 포도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심각한 기근과 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한 분뿐이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이 무슨 일 때문에 불렀는지 구체적으로 묻습니다. 이에 대해 다른 여인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오늘은 너의 아들을 잡아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잡아먹자고 이야기해서 자신의 아들을 삶아 먹었고, 다음날 네 아들을 내놓으라고 하니 자기 아들은 숨겼다는 것입니다. 정말 끔찍한 상황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심한 기근이 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아이를 잡아먹는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이런 참혹한 이야기를 들은 왕은 옷을 찢으며 애도를 표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 재앙의 상황을 애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성에서도 베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28:53-57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할 벌 가운데 심각한 기근으로 자기 아이를 먹는 재앙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 사마리아에서 벌어지는 이런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약소국이기에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벌어진 비극이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서 숱하게 경고하시고 자신의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셨는데도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아서 생긴 결과인 것입니다.

 

엘리사에 대한 분노(31-33)

포위된 성읍에 인간이 살고 있지만 인간성이 사라졌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자기 자식을 잡아먹다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삶이 팍팍해지더라도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귀한 주의 자녀로서의 품위와 인간다움은 지켜나가야 합니다.

 

31왕이 이르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32그 때에 엘리사가 그의 집에 앉아 있고 장로들이 그와 함께 앉아 있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아들이 내 머리를 베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 그의 주인의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33무리와 말을 할 때에 그 사자가 그에게 이르니라 왕이 이르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31-33)

 

이스라엘 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참혹한 상황에 처한 것이 엘리사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분노하며 그를 오늘 반드시 죽이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엘리사가 사마리아로 사로잡아 온 아람 군대를 처리하지 않고 놓아주었기 때문에 아람 왕 벤하닷이 아람 군대가 받은 굴욕을 갚으려고 이처럼 전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왕은 엘리사를 죽임으로써 이 재앙으로 인한 죽음의 책임을 모두 엘리사에게 돌리려 합니다.

 

그때 엘리사는 사마리아에 있는 자신의 집에 있었고, 왕은 엘리사를 죽이려고 사람을 보냅니다. 하지만 왕이 보낸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엘리사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장로들에게 살인자의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냈다며, 망을 보다가 사람이 오면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왕을 ‘살인자의 아들’로 지칭한 것은 일차적으로는 ‘아합 왕의 아들’이란 의미이지만, 그가 곧 살인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죽여 화풀이를 하려는 왕에 대해 엘리사는 살인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사는 왕의 사자에게 죽지 않기 위해 장로들에게 보호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전에 불만과 불병거의 호위를 받던 엘리사의 모습은 안 보이고, 장로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취약한 엘리사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지만 불말과 불병거는 없어도 여전히 엘리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말하자마자 왕이 그를 죽이려고 보낸 사자와 함께 도착하였고, 그들은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왔는데 언제까지 여호와를 기다려야 하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더는 기다릴 수 없고 기다리지도 않겠다는 말입니다. 더는 여호와의 말씀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엘리사를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왕이 스스로 여호와께 대한 소망을 거두었음을 의미합니다.

 

엘리사의 응답과 장관의 불신(7:1-2)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이 사라지면 그의 삶은 황폐하게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희망적인 메시지가 전해져도 그것은 현실 앞에 막혀서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한 것입니다. 왕의 장관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도 막상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고 하자 믿지 못합니다.

 

1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2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7:1-2)

 

더는 여호와께 희망을 걸지 않는 왕에게 엘리사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엘리사는 여기서 처음으로 선지자의 신탁 형식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내일 이맘때 극심한 기근이 해결될 것입니다. 한 스아는 대략 7.3리터이며, 6:25에서 언급된 한 갑의 여섯 배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밀가루 한 스아가 비둘기 똥의 1/20 가격밖에 안 되는 셈입니다. 이 둘을 대조함으로써 양식이 풍성해질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왕의 측근인 장관은 이런 엘리사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문을 내신다 해도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비아냥거릴 뿐입니다. 이런 불신앙에 대해 엘리사는 네가 반드시 이 일을 볼 것이지만, 그것을 먹지는 못할 것이라는 심판을 선언합니다.

 

이런 장관의 불신앙적인 모습은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의 모습을 대표합니다. 분명히 엘리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했는데도, 고위 관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대놓고 무시한 것입니다. 왕은 물론이고 장관의 이 같은 반응은 그 시대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둔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악한 세상은 본문이 말하는 대로 변해갈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백성인 우리는 시대를 거슬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함을 지키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기대감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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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6-02)


눈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

열왕기하 6장 15-23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주 작은 세균이나 바이러스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현미경과 같은 특수한 장비가 있어야만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은 때로 정말 소중한 진실을 놓치기도 합니다.

 

  • 아람의 공격이 번번이 막히지 아람 왕은 간첩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는 엘리사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알려줍니다. 이에 아람 왕은 곧바로 말과 병거까지 동원한 대규모 군데를 보내 엘리사를 잡아 오라고 명령합니다. 아람 군대는 밤사이에 엘리사가 있는 도단을 에워쌌고 엘리사는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한 엘리사(15-17)

육신의 눈이 가장 자주 놓치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엘리사 시대의 백성들은 성읍을 들러싼 아람 군대는 또렷하게 보았지만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들과도 함께하셨듯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15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15-17)

 

밤사이에 아람 군대가 도단 성을 에워쌌습니다. 사실을 모르던 엘리사의 사환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가 아람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을 발견하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바로 엘리사에게 알립니다.

 

사환은 열왕기하 3:10에서 광야에서 물이 없는 재난을 만났을 때나 6:5에서 제자가 쇠도끼를 물에 빠뜨리고 절망에 빠져 한탄한 것처럼 이 재난을 엘리사에게 알립니다. 그는 이 상황에 대해 매우 절망하며 자신들의 무능력함에 대해 탄식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절망에 빠진 사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이렇게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함께한 존재들이 그늘이 이끌고 온 군대보다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엘리사는 하나님께 제자의 눈을 열어 그도 그 존재들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기도가 응답되어 제자의 눈이 열리자, 그는 산에 가득할 정도로 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이미 아람 왕의 명령과 아람군대의 움직임을 아시고, 엘리사를 지키기 위해 하늘의 군대를 파견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이 제자는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놀랐을 것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 눈이 열린 사람만 볼 수 있을 뿐이었고, 일반인들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항상 눈앞에 보이는 적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만 보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해나갈 때, 세상의 힘과 권세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심을 보게 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과 권세에 맞서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로 인도한 엘리사(18-19)

주의 백성은 약하지 않습니다. 때로 거친 광야에 홀로 내던져진 듯 고립감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를 통해 진실이 선포되게 하십니다. 시대가 우울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시대를 환하게 밝힐 소명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수많은 거룩한 친구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18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19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읍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18-19)

 

아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보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엘리사를 공격하기 위해서 내려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엘리사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이 번에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제자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한 것과 정반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이 기도 역시 응답됩니다. 눈먼 아람 군대는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는 고사하고 자신들이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화자가 ‘엘리사의 말대로’라는 말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에게 응답하고 계시며, 엘리사는 하나님의 진정한 선지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눈을 멀게 한 것은 실제로 전혀 볼 수 없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현혹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엘리사가 자기 앞에 서 있고 자신들이 엘리사가 사는 도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가 길을 잘못 들었고 이곳은 도단이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이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 인도하겠다고 말하는데도 말하는 사람이 엘리사라는 것과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나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뜬장님이란 말이 여기에 잘 어울립니다. 이렇게 눈뜬장님이 된 아람 군대는 엘리사가 인도하는 대로 이끌려 사마리아까지 갑니다.

도단에서 사마리아까지는 대략 1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중앙 산지를 통과하여 가파르게 올라가는 길입니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독자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찾고 있는 엘리사를 따라 엘리사를 찾겠다고 멀고 험한 길을 수고스럽게 걸어가는 모습이 한 편의 희극을 보는 것과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아람군대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알지 못했습니다. 엘리사는 지금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아람 군대와 아람 왕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아람 군대처럼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을 하면서도 그 행동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채 역사의 주인을 자처하는 세력들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스스로 조롱을 자처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아람 군대를 돌려보낸 엘리사(20-23)

주의 백성은 약하지 않습니다. 세상 군대가 겉보기에는 거대하고 강해보여도 더욱 강한 군대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우리입니다. 수많은 아람 군대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하나를 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악한 세력의 공격은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거세고 위협적인이겠지만, 그들이 한 번도 주의 교회를 완전히 무너뜨린 적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0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매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더라 21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하니 22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23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20-23)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까지 인도하였고, 그들이 도단에 도착하자 다시 하나님께 그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기도대로 그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셨습니다.

정신 차린 아람 군대는 자신들이 사마리아 성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군대에 포위당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엘리사를 잡기 위해 따라왔지만, 오히려 엘리사에게 낚여 자신들이 잡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왕 입장에선 엘리사가 이끌고 온 아람 군대는 손쉬운 먹잇감이었습니다. 이 호시탐탐 기회를 보며 이스라엘을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아람의 주력부대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으니 이스라엘 왕 입장에선 얼마나 흥분되고 마음이 급했겠는가, 따라서 엘리사에게 ‘내가 공격할까요’라고 재차 물으며 엘리사의 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엘리사에 대한 존칭으로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들 중에 왕들에게서 ‘아버지’라는 호칭을 들은 사람은 엘리사가 유일한데, 이것은 엘리사가 다른 선지자들에 비해 왕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적들을 죽이려고 흥분한 이스라엘 왕에게 엘리사는 치지 말라고 단호하게 명령합니다.

왕에게 명령문을 사용하여 금지하는 것은 엘리사가 왕에 대해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칼과 활로 사로잡힌 자들’이란 포로를 의미하는 관용구로 엘리사는 포로로 잡힌 자들을 죽이지 말고, 오히려 관용을 베풀어 음식을 먹이고 다시 그들의 왕에게 돌려보내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왕은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들에게 커다란 잔치를 베풀어주었고, 그들의 주인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의 이런 처사가 매우 불만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왕은 하나님의 권능과 엘리사의 권위를 인정하기에 순종하였습니다.

이렇게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아람 군대를 돌려보내자 왕의 예상과 달리 아람 군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을 습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 여호와의 권능을 맛본 아람 군대는 국지 적인 습격 정도로는 엘리사와 여호와께서 지키시는 이스라엘을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앙의 길이 외롭고 힘겹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친구이신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외롭지 않고 약하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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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6-01)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사

열왕기하 6장 1-14절


 

사람의 힘은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강합니다. 약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구의 손에 붙잡혀 있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 6-8장은 선지자의 능력을 보여주는 다섯 대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물위로 떠오른 도끼(6:1-7), 저지당한 아람의 습격자들(6:8-23), 풀린 포위망과 예언의 성취(6:24-7:20), 회복된 수넴 여인의 재산(8:1-6), 왕으로 선택된 하사엘(8:7-15) 이야기입니다. 6-7장은 5장에서 엘리사에게 병고침을 받고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선언하고 돌아간 나아만의 고향인 아람과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는 엘리사 제자들(1-4)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목적, 방법은 오직 성령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뜻밖의 질문이나 문제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순간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자 애쓰며 또한 그 분이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1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2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가져다가 그 곳에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가라 하는지라 3그 하나가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가리라 하고 4드디어 그들과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1-4)

 

아람 사람 나아만이 치료받은 이야기 후에, 다시 선지자 수련생들을 도운 엘리사의 기적을 보여줍니다. 엘리사를 통해 점점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였습니다. 엘리사는 혼자 다니던 엘리야와는 다르게 늘 사환이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수련생들이 점점 모여들어서 선지자 수련생들이 사는 집이 너무 작았습니다.

이렇게 선지자의 제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은 일찌감치 사무엘상 10:10에서 등장하는 선지자 무리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와 함께 생활하던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서인지, 제자들은 엘리사에게 현재 처소는 함께 지내기 좁으니 요단으로 가서 그곳에다 처소를 짓겠다며 매우 공손하게 엘리사의 허락을 구합니다. 이런 언어적인 표현을 보면, 이들은 엘리사를 매우 존경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자 제자 중 한 사람이 엘리사도 같이 가면 어떻겠냐고 매우 조심스럽게 요청합니다. 엘리사는 나도 반드시 가겠다며 제자들의 말을 따릅니다. 엘리사는 자신이 말한 대로 제자들과 함께 거하던 곳을 떠나 요단으로 갔고, 그들은 그곳에서 집을 짓기 위한 나무를 자르게 되었습니다.

 

도끼를 떠오르게 한 엘리사(5-7)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한 사람을 귀히 여기시고 세심하게 돌보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마음인 모든 사람들을 긍휼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이 사소해 보이고 하찮아 보인다면, 아직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제자의 실수로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5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쇠도끼가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이르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하니 6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고 7이르되 너는 그것을 집으라 하니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집으니라(5-7)

 

요단 강가로 엘리사와 선지자의 제자들과 함께 선지자의 무리가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베려고 도끼를 빌려왔습니다. 한 제자가 나무를 베다가 도끼를 물에 빠뜨렸습니다. 문장에서 목적어인 ‘도끼’를 앞에 놓아 물에 빠뜨린 것이 도끼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제자는 매우 절망적인 목소리로 ‘아아, 내 주여’라는 외쳤습니다. 그의 절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엘리사를 부르며 빠뜨린 도끼는 빌려온 것이라고 외칩니다. 집을 짓기 위한 변변한 도구도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물건을 빌려서 간신히 일하고 있던 상황에서 값비싼 쇠도끼를 잃어버렸으니 이 제자는 너무 절망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엘리사 일행의 빈궁한 상태를 잘 드러냅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선지자의 제자는 빌려온 값비싼 철제 도끼를 변상할 능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제자의 부름에 응답하며 어디에 빠졌느냐고 묻고, 나뭇가지를 잘라 도끼가 빠진 곳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쇠도끼가 물 위로 떠올랐고, 제자가 그것을 잡아서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 엘리사는 그가 도끼를 찾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엘리사 체포 작전(8-14)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많은 지략에 뛰어난 지혜로운 장수라도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략을 맞설 수 없으며, 숱한 군사와 말과 병거가 하나님께 사로잡힌 한 사람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한 사람만 있어도 자신이 속한 곳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8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9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10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11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12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13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하나이다 14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8-14)

 

아람의 침입이 이스라엘 왕에게 계속 알려져서 이스라엘 침입이 계속 실패하자 아람 왕은 매우 화를 내었습니다. ‘불안하다’는 ‘폭풍이 일다’라는 뜻으로 ‘화를 내다’, ‘격분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람 왕은 번번이 자신의 계획이 막히자 자신들 가운데 간첩이 있어서 회의한 내용을 이스라엘 왕에게 전달하는 것 아니냐며 심하게 화를 낸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왕을 도왔습니다. 아람 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해서 군대를 배치하면 엘리사가 알아차리고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곳을 잘 지키도록 했습니다. 아람 왕 입장에선 자신들이 침입하기로 정한 그곳에 족집게처럼 이스라엘 군대가 막고 있으니, 이런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아람 왕은 신하 중 한 사람이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사람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 사이에서 간첩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왕의 신하 중 한 사람이 이 일을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준 사람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라고 말합니다. 그는 심지어 가장 은밀한 곳인 왕의 침실에서 하는 말까지도 알 수 있고, 그 말을 이스라엘 왕에게 전달해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엘리사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아만의 병은 아람의 의술이나 신들이 고칠 수 없는 나병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아만이 나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로 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신하들은 반신반의하며 그를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치료를 받고 돌아왔을 때, 아람 왕과 그의 신하들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능력과 엘리사의 능력에 매우 놀랐을 것이다. 그중 몇몇은 나아만에게 엘리사에 대해 자세히 물어봤을 것이고, 또 그중 몇몇은 엘리사가 어떤 사람인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 조사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아람 사람들에게 엘리사가 얼마나 뛰어난 하나님의 선지자인지 알려지게 되었고,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람 왕에게 이렇게 보고한 것입니다. 엘리사의 명성은 이미 이스라엘을 넘어 주변 나라까지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으려는 생각을 합니다. 아람 왕도 엘리사의 능력을 믿었으므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엘리사를 제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한 신하가 그가 도단에 있다고 알려줍니다. 이 말을 들은 아람 왕은 엘리사 한 사람을 잡기 위해 말과 병거와 많은 용사들을 도단으로 밤에 도단을 에워쌌기 때문에 성읍에 있는 사람들은 아람 군대가 온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의 사환이 아침에 아람 군대를 보고 놀라서 소리칩니다.

 

아람 왕이 엘리사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이렇게 많은 군대를 보낸 것은 엘리사와 엘리사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엘리사라는 선지자 한 사람의 존재로 인해 이스라엘은 천만 군대가 지키는 것보다 더 든든하게 지켜지고 있었고, 적들은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며, 과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온전히 드러내며 사는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는지, 아니면 내가 오히려 세상의 위협에 두려워 떨고 사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대적을 상대하시게 하는 것이다. 내가 싸워야 할 것은 상대방을 하나님 보다 더 두려워하는 불신앙입니다. 영적 싸움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나의 한계와 상대방의 강함을 아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하람 왕의 작전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모든 계획과 준비는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도움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소한 기도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 크고 어려운 기도도 없습니다. 하나님 뜻을 따라서 이 모든 세상이 섭리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자의 태도입니다. 진심과 신뢰를 담아드리는 기도에 주님을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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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05-02)


탐욕으로 망하는 게하시

열왕기하 5장 15-27절


 

작은 불씨가 무섭다는 것은 그것이 불로 발화가 되었을 알 수 있습니다. 산에 던진 작은 불씨가 점점 커져 큰 산불이 되듯이 순간적인 욕심으로 시작한 거짓말이 점점 커져 감당키 어려운 큰 죄가 되기도 합니다. 불은 커지기 전에 꺼야 합니다. 죄도 마찬가지로 시작할 때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온 몸을 불사를 때가 있습니다.

 

  •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갔을 때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시종을 보내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면 나을 것이란 말만 전합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무례함과, 기대와 달리 너무나 간단한 방법 때문에 화를 내며 돌아가려고 할 때, 또 다시 종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들어가서 병 고침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병 고침을 받은 나아만은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고 여호와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물을 거절하는 엘리사(15-16)

견물생심은 죄인의 본성입니다. 사람의 눈을 가리는 가장 짙은 어둠은 재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6:24). 재물은 복이 될 수 있지만 재앙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15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16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15-16)

 

엘리사의 말대로 행하여 병이 낫게 된 나아만은 군대를 이끌고 엘리사에게 다시 옵니다. 그때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 앞에 선 나아만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땅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나아만은 이전의 교만하고 자기 과시적인 모습에서 변하여 매우 겸손하게 이스라엘에 계신 신만이 진정한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자신을 당신의 종'이라고 칭합니다. 나병에서 치유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맛보자 바로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준비한 예물을 받아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자신이 섬기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절대로 그 예물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예물을 받으라고 강요하다시피 하였지만, 엘리사는 끝끝내 거절합니다.

4장에서 본대로 당시 엘리사나 엘리사의 제자들은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과 귀족들을 비롯하여 일반 백성들까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엘리사와 선지자의 제자들을 돌보는 사람도 없었고, 은 몇 개, 떡 몇 덩이를 가져와 하나님의 신탁을 구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기에 선지자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습니다. 엘리야도 늘 쫓겨 다니며 어려운 생활을 했다. 그렇기에 나아만이 주는 어마어마한 예물은 선지자와 선지자 생도들의 삶을 좀 더 편안하고 윤택하게 바꿔줄 수 있었지만, 엘리사는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돈과 바꾸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거저 행하라고 명하신 대로 아무것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을 행했으며,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믿고 하나님께서 살라고 하신 가난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만 인정하며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을 보지 못하고 이 땅의 재물을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맹세한 나아만(17-19)

새롭게 교회에 출석한 성도들은 넘어지기 쉽습니다. 옛 습관을 버리고, 거룩과 순결로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조금만 더 배려하고, 더 사랑하며, 더 소중히 여기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결단한 나아만에게 엘리사는 그를 지혜롭게 인도하고 있습니다.

 

17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18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19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가니라(17-19)

 

엘리사가 완강하게 거절하자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따르기로 합니다. 다만 노새 두 마리에 실을 수 있을 만큼 흙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본문에서는 정확하게 그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흙을 달라고 하면서 이제부터는 다른 신을 위한 번제와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을 위해 제사를 드리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여호와의 놀라운 권능을 체험한 순간 여호와만이 참 신이 라는 것을 고백하고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나아만이 여호와께 제사드릴 제단을 만들기 위해 이스라엘의 흙을 가지고 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신들은 각 지역에 묶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고 계시는 이스라엘의 흙을 아람으로 가지고 와서 자신이 사는 곳에서도 문제 없이 하나님을 섬기려는 신앙의 발로에서 나온 요청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나아만의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수많은 권능을 보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의 왕과 지도자들과 백성들과 달리, 나아만은 단 한 번 기적을 체험하고도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한 가지 양해를 구하는데, 자신의 주인인 아람 왕이 림몬 신당에 들어가서 절할 때 왕이 자신의 손을 의지하기 때문에, 자신도 림몬 신당에 들어가 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자신의 손을 의지한다는 것은 자신이 왕의 오른팔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지금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신앙을 고백했지만, 그의 육신의 주인인 아람 왕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림몬신을 섬기지 않기 위해 아람 왕을 떠나는 것은 결심한다고 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적인 문제 등 여러 고려 사항들이 얽혀 있다. 따라서 여호와만을 섬기기로 회심하고 영적 주인을 바꾸었지만, 육신의 주인인 아람 왕은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대신 나아만 앞뒤로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길 원한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엘리사의 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아만의 간곡한 요청에 엘리사는 ‘평안히 가라’고 답해줍니다. ‘평안히 가라’라는 구문은 출애굽기 4:18에서 이드로가 모세의 요청을 허락하는 의미로 한 말이고, 사무엘상 1:17에서는 엘리가 한나의 말을 듣고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한 것은 나아만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할 때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죄에 대해서 유보 조항을 둔다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는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에서 과감하게 떠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엘리사가 나아만의 요청을 승인해준 이유는, 그가 이제 막 개종한 이방인으로 신앙이 아직 연약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개종을 하였지만, 이스라엘에서 살지 않고 아람으로 돌아가 다른 신을 섬기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막 개종한 나아만에게 완전한 율법 준수를 요구한다면,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잃거나 그와 그의 가족이 전부 죽을 수 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엘리사는 어쩔 수 없는 그의 처지를 인정해준 것입니다. 이방 땅에서 목숨을 내놓고 믿음을 지킨 다니엘과 세 친구와 같은 순교적 믿음을 갓 회심한 나아만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나아만에게서 예물을 받은 게하시(20-23)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챙기려다가 큰 것을 잃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작고 하찮은 것을 내려놓고 크고 귀중한 것을 잡는 것이 지혜고 신앙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게하시는 작은 돈 챙기려다가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20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21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23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20-23)

 

20절부터는 나아만에게서 게하시에게로 초점이 바뀝니다. 그는 주인 엘리사가 나아만의 병을 고쳐주고도 그가 가지고 온 예물을 하나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분개합니다. 따라서 그 뒤를 달려가서라도 반드시 뭐든지 받아내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이런 게하시의 맹세는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는 엘리사의 맹세와 분명히 대조됩니다. 엘리사는 여호와의 권능을 돈을 얻는 일에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게하시는 이런 호의를 베풀었으면 많은 돈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나아만은 이방인이고 부자이니 돈을 받는 것은 더욱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게하시는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서 인사를 한 뒤 나아만에게 엘리사가 자신을 보냈고, 선지자의 제자 두 명이 왔으니, 그들을 위해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달라고 말씀하셨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아무것도 안 받겠다고 맹세까지 한 엘리사가 말을 번복할 법한 핑계를 만들기 위해 갑자기 두 명의 제자를 들먹이는 재치까지 보입니다.

이런 게하시의 말을 나아만은 의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건네줍니다. 나아만의 입장에서는 엘리사가 워낙 강하게 거절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고 온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이런 참에 게하시를 통해 엘리사가 무엇을 달라고 하자 기쁜 마음으로 준 것입니다. 그는 게하시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하고 정직한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겸손히 순종한 나아만에게는 병 고침의 은혜를 베푸셨지만, 욕심에 이끌려 거짓을 행한 게하시에게는 문둥병을 주셨습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과 태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과 태도를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나병이 발병한 게하시(24-27)

종종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속여서 재물을 얻습니다. 그것을 밭에 숨길 수 있겠지만, 그 탐욕의 형태마저 숨길 순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중심까지 보시는 하나님을 보며 깨끗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게하시는 부패한 욕심으로 재물을 얻었지만 또 한 가지 나병도 얻었습니다.

 

24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6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24-27)

 

나아만에게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챙긴 게하시는 엘리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언덕쯤에서 미리 전대와 옷을 받아 자신의 집에 숨깁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모를 엘리사가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는 게하시를 불러 어디 다녀오느냐 묻습니다. 마치 하나님에서 가인에게 동생이 어디 있냐고 묻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엘리사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게하시가 회개할 기회를 주려고 한 질문입니다. 엘리사의 물음에 거짓말을 했지만, 엘리사는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게하시는 그 기회를 놓치고 결국 엘리사를 통해 나아만이 해방된 나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치유의 사건을 개인적인 탐욕의 기회로 삼은 게하시는 결국 그의 욕심과 거짓말의 결과로 저주를 받아 몸에 문둥병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들의 운명이 바뀐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불신앙과 이방인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보여줍니다.

 

탐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의 마음에 생긴 욕심은 자라서 거짓말을 낳았고, 그 거짓말은 그의 몸에 문둥병을 가져왔습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점점 자라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보서 1:15). 지금 당신이 욕심내는 것들을 무엇입니까? 욕심에 이끌리지 않기 위해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견물생심, 소탐대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실천적 무신론은 죄인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어리석은 게하시는 하나님을 지워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없는 것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 그의 삶은 자신의 고백과 지식을 배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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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6-02)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

이사야 66장 15-24절


 

하나님의 날은 항상 양면성을 가집니다. 그날은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오는 날 같아서 승리한 편은 크게 기뻐하는 날이지만, 포로로 잡혀 온 적군에게는 가장 수치스러운 날이 됩니다. 이사야 역시 하나님의 날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 두 가지 날의 의미를 자세히 묵상해 봅시다.

 

  • 이사야 마지막 부분입니다. 진노하신 여호와께서 불과 폭풍 가운데 임하셔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을 심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종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으로 함께하시고, 당신 원수들에게는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진노의 불로 당신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모든 혈육이 죽음에 넘겨지지는 않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심판을 넘어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 강림하시기에 일부 살아남은 자들이 그분께로 돌아옵니다.

 

불 가운데 임하시는 여호와(15-17)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마지막 때를 사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줄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열심을 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 전에 가까운 사람부터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고 듣는 것은 그들의 책임입니다.

 

15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리니 그의 수레들은 회오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여움을 나타내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이라 16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죽임당할 자가 많으리니 17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에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5-17)

 

하나님께서는 장차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셨습니다.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은 진노와 심판의 맹렬함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의 심판은 모든 혈육을 대상으로 합니다.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지 못하고 죽임 당할 것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자가 많습니다(마 7:13).

 

(1) 모든 혈육의 심판(15-16)

 

주제가 예루살렘의 회복과 위로에서 민족들의 심판으로 바뀝니다. 여호와께서 노여움과 책망을 발하시려고 불과 폭풍 가운데 오십니다(15; 참조. 51:20). 불과 회오리바람과 화염은 하나님의 현현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요소들입니다. 마치 외투를 두르신 것처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오십니다. 불 가운데의 임재는 위협과 접근 불가(출 3:2)를 내포합니다. 불은 그분의 출현을 알려주는 외적 표지일 뿐만 아니라 악인을 멸하는 무기이기도 합니다. 회오리바람에 비교된 수레(병거)는 전쟁 무기로 신속하고도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합니다. 구름(병거)을 타고 하늘을 이동하는 여호와는 잘 알려진 신현의 모습입니다(19:1; 시 18:10; 68:4). “혁혁한 위세”의 ‘헤마’는 화가 나서 감정적으로 뜨거워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은 그분의 견책이 매우 파괴적일 것을 시사해줍니다. 맹렬한 화염이 건물을 잿더미로 만들듯이, 그분의 타오르는 분노가 심판에 떨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태워버립니다.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기에 많은 사람이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합니다(16).

“모든 혈육”은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심판의 범위가 하나님 백성 가운데 악을 행하는 자들을 넘어 민족들로 확장됩니다. 15-16절에서는 모든 혈육이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지고, 66:23에서는 모든 혈육이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여호와 앞에 나아와 예배합니다.

 

(2) 우상숭배자들의 멸망(17)

 

동산의 우상숭배를 고발하는 17절은 내용과 표현에서 65:3-5에 가깝다. 후자에서처럼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발의 대상입니다. 제의에 참가하는 자들이 동산에서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자신을 성별하고 정결하게 합니다. “동산”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제의 공간으로 나무들이 있는 작은 숲을, “그 가운데에 있는 자”는 신상보다는 제의를 주관하는 사제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제의 참가자들은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습니다. “가중한 물건”의 ‘셰케츠’는 가증한 짐승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참조, 레 11:10 이하; 겔 8:10). 제의의 성격은 달리 언급되지 않지만, 풍요제의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7절의 현재 위치는 주목할 만합니다. 불과 칼에 의한 민족들의 심판 선언(15-16) 다음에 놓이면서, 이교적 제의에 빠진 예루살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불과 칼의 심판임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육체를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의 배교자들도 마찬가지로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종말론적 전망(18-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는 도리어 이방인들에게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방인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습니다. 우리는 기쁨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역할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18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19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20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 나라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21나는 그 가운데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8-21)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위와 사상을 모두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18).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하고 의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이스라엘 대신 이방 민족을 모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1) 여호와의 영광을 보는 민족들(18)

 

여호와께서 당신 영광을 보게 하시려고 민족들을 불러 모으십니다(18). 15-16절에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시는데, 여기서는 민족들을 모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56:8)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모으시고, 그분의 모으심(오심)에 호응해서 민족들이 그분의 영광을 보기 위해 옵니다. 민족들이 보게 될 여호와의 영광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2) 파송 받는 살아남은 자들(19)

 

이방 선교사로 파송을 받는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는 15-16절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가리키기에, 민족들이 볼 그분의 영광은 심판과 구원을 함께 포함하는 그분의 우주적 통치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혈육을 불과 칼로 치는 심판을 경험한 민족들 가운데 일부가 여호와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분께로 돌아옵니다. 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왕으로 보좌에 오르는 종말론적 사건을 보고(참조, 24:23; 25:6-8) 그분의 왕권(영광)을 선포하는 증인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 가운데 세우시는 “징조”(오트)는 선교사의 파송이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신호라기보다는 그분의 현존과 권능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에게 당신의 영광(왕권)을 보여주기 위해 권능을 행하시고, 이들 가운데서 일부 살아남은 자들이 자신들이 경험한 여호와의 영광을 전하도록 땅 끝으로 파송받습니다(19). 여호와에 관해 들어본 적도 없고 그분의 영광을 본 적도 없는 자들이 선교의 대상이 됩니다. 이방 선교가 여호와의 주도로 개종한 이방인들에 의해 시작됩니다. 선교사들에 의해 많은 이방인이 여호와 종교로 개종하고, 선교사들과 개종한 자들이 여호와께 드릴 예물로 유배민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나섭니다.

 

(3) 흩어진 자들의 귀향(20)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깨끗한 그릇에 예물(소제)을 담아 여호와의 집으로 가져오듯이, 이들은 모든 민족에게서 “너희 모든 형제”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소제)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 여호와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옵니다(20). 세상에 흩어진 유배민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는 사건이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는 제의적 행위처럼 묘사됩니다. “깨끗한 그릇”에 담긴 예물에 비교함으로써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유배민이 제의적으로 온전한,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임을 보여줍니다. 부정한 이방 땅에서 부정한 이방인들 가운데 거주한 유배민이 여호와에 의해 깨끗한 자들로 인정을 받습니다.

 

(4) 제사장 직분의 개방(21)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를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삼으십니다(21).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분이 집안이나 지파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개방됩니다.

 

맺는 말(22-24)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찬송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지구촌 방방곳곳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는 끓이지 않습니다.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있으며 많은 이방인이 하나님께 헌신하려고 돌아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22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3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24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22-24)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것입니다(23).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충만하게 나타날 것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온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1) 영원한 실존의 약속(22)

 

본 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약속하는 65:17을 다시 받습니다. 새 창조의 목표가 65:17-25에서는 예루살렘과 하나님 백성의 구원과 축복인데, 여기서는 “모든 혈육”이 여호와 제의에 참여하는 것으로 화장됩니다. 여호와께서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그분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을 것입니다(22). 멸망의 위험에 처했던 이스라엘에게 항구적 실존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다시는 멸절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지속적인 보호와 돌봄 속에 자손들이 번성하고 그 이름이 커질 것입니다. 현재 문맥에서 “너희 자손”은 육신의 자녀보다는 영적 후손을 가리킬 것입니다(참조, 53:10).

 

(2) 여호와께 예배하는 모든 혈육(23)

 

성전이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56:7)이 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예배 대상이 되십니다.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여호와께 나아와서 경배를 드립니다(23). 여호와께 나와 예배를 드린다는 점에서 이스라엘과 민족들의 구별이 사라집니다.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예배는 민족들이 여호와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했음을 전제합니다.

 

(3) 악인의 영원한 멸망(24)

 

여호와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고 민족들이 그분께 나아와 경배 드리지만, 여전히 그분의 구원 밖에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패역한 자들에게는 평화와 구원이 없습니다. 이들의 시체는 죽지 않는 벌레의 먹이가 되고, 심판의 꺼지지 않는 불에 넘겨집니다(24). 이들의 심판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형벌은 계속됩니다. 이들의 시체는 새로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가증함의 대상이 됩니다. 23절과 24절을 함께 읽으면,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모든 혈육”이 성 밖에 널린 시체를 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의 전통적 구분이 ‘예루살렘 성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는 자들’과 ‘예배를 거절하고 성 밖에 남은 자들’로 대체됩니다. ‘여호와께 예배를 드림’이 하나님 백성의 판단기준이 된다. 성전(하나님 백성의 종교적 특권)과 예루살렘(하나님 백성의 시민권)이 여호와와 연합하여 초하루와 안식일을 지키는 모든 혈육에게 돌려집니다(56:3-7).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즉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열방 가운데서 당신의 백성을 택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 받아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항상 하나님께 기쁘게 예배드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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