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48-01)
완고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사야 48장 1-11절
평생 하나님께 신실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완고하게 거역하는 길을 갑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다지만 그분의 명예를 훼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무조건 믿어야 합니까? 이스라엘이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기만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외음부터 말씀하시고 이를 이루시면서 역사를 이끌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전 약속이 모두 성취됐다면 미래 약속도 분명히 성취될 것입니다.
진실과 공의가 없는 이스라엘(1-2)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들어 철저히 욕망을 추구합니다.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은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진실과 공의에 있습니다. 삶에 거짓과 악의로 가득하면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없고, 회복될 수 없습니다.
1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 2그들은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며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나(1-2)
유다 사람들의 말과 행실은 괴리되어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이스라엘이라, 유다의 자손이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심기며 의하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1) 전통에 따른 경건(1)
이스라엘이 들어야 할 말씀은 3-11절에 나오지만, 이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청자들이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순종하지 않았음을 시사해줍니다. “야곱의 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조상에서 나왔음을 보여주고 또 각 구성원의 일치와 연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는 이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참된 이스라엘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허리”는 바벨론유배민이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사로잡혀 온 자들임을 시사하고, 창세기 49:8-12에 나오는 유다에 대한 야곱의 축복을 암시합니다. 이들은 자랑스러운 전통의 계승자이며 여호와를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교적 환경에 살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자신들이 여호와께 속했음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는’ 자들, 즉 조상들의 신앙 전통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고백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2) 거룩한 성 출신을 자랑하는 자들(2)
더 나아가 “거룩한 성 출신”임을 자랑합니다. 유배민은 예루살렘의 이름을 따라 자신들을 예루살렘 공동체로 간주하였기에 “거룩한 성 출신”이란 표현에는 종교적 의미도 포함됩니다. 민족적-종교적 전통에 뿌리내린 유배민의 경건은 사람들의 눈에는 완벽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보시기에는 진실과 공의가 없는 속 빈 껍질에 불과했습니다.
'처음 일들'의 선포(3-6)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총을 입은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선민으로 자처했습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백성임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진실과 공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됨’은 신앙의 가문이나 연조, 자의식 같은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됩니다.
3내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을 알게 하였고 내 입에서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것들을 듣게 하였고 내가 홀연히 행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 4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5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 이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 그것을 네가 듣게 하여 내가 이것을 내 신이 행한 바요 내가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6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보라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3-6)
이스라엘 자신들을 이렇게 칭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의 조상들에게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 사실을 후대의 이스라엘에게 기록된 말씀을 통해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은 진실도, 공의도 실천하지 않으며, 완고하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었습니다.
(1) 알려주시고 이루신 여호와(3)
여호와의 역사 경영을 되돌아봅니다. 그분께서는 처음부터 하실 일들을 미리 알려주시고 이를 이뤄오셨습니다(3). “예로부터"는 세상이 창조된 이후,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를 가리키고, ”처음 일들”은 6절의 “새 일”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예언자를 기준으로 그 이전에 선포되고 성취된 모든 사건을 포함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예언이 성취된 과정으로 우연히 발생한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었습니다. 재앙이나 심판의 문맥에 등장하는 “홀연히”는 심판의 돌발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그분께서는 알리신 일들이 때가 되면 단호하고도 신속하게 이루어졌습니다.
(2) 이뤄지기 전에 알려주신 이유(4-5)
4-5a절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미리 알려주신 이유를 가르쳐주는데, 이스라엘의 완악함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의지적이고 완강하고 단호하게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절했습니다(참조. 신 31:27; 렘 5:3; 겔 3: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역한 성품을 아셨기에 핑계할 수 없도록 처음부터 먼저 들려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5b절은 유배민이 우상숭배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일부 유배민은 주전 587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의 멸망에서 이방 신들의 승리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언자들의 선포와 그 결말을 살펴본다면 우상들이 역사를 결정한다는 쓸데없는 소리를 더는 떠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역사를 경영해 오셨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
(3) 증인의 역할(6a)
이야기의 흐름과 내용에서 6절의 “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것을 보라”는 5절의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에 직접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미 들은 것들을 살펴서 그 진위를 확인해보라고 명령하십니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알리신 것을 그대로 이루셨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개별적 사건들의 합(合)이 아니라 연속적인 역사 전체를 가리킵니다. 한두 사건은 우상들도 우연히 예견하고 이룰 수 있지만, 역사를 연관된 흐름으로 선포하고 이끄시는 분은 여호와 외에는 없습니다. 첫 번째 논증은 수사적 의문문으로 끝을 맺습니다.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역사적으로 확인된 보고 들은 것을 알리도록 권면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과거 역사에 대한 공적 증인의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새 일’의 선포(6b-8)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 주시고 그대로 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분명하게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의 역사를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배신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립니다.
7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8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7-8)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 일, 곧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는 은비한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이제까지 들어본 적도 없고 짐작할 수도 없는, 전혀 새로운 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인간의 완악함과 패역함을 뛰어넘습니다.
(1) ‘새 일’을 알려주시는 여호와(6b)
하나님께서 이제 “새 일”을 선포하십니다(6b). 3절의 “예로부터”에 대응하는 “이제부터”는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는 역사의 전환점을 가리킵니다.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많은 사람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간 심판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처음 일들”(이전 일들)이 주전 587년 유다의 멸망과 유배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이라면, ‘새 일들’은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내다보는 사건들을 가리킵니다. 이제 심판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새로운 일들, 곧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감추어진 일들)”을 들려주십니다. 예로부터 알려지고 들려진 처음 일들(3)과 달리 새 일들은 이제까지 이스라엘에게 알려지거나 들려지지 않았던, 이제 막 시작되는 사건들입니다.
(2) 지금 창조된 ‘새 일’(7)
이 새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 곧이제 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들이며, “오늘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들어본 적이 없던 것들입니다(7).새 일들은 창조되자마자 즉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다고 먼 훗날에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창조주가 선포하셨기에 신속하게 진행되고, 또 이런 의미에서 지금 선포됨으로써 창조됩니다. 창조의 능력을 품은 하나님 말씀은 선포되는 순간부터 작용합니다. 새 일의 미지적(未知的) 성격은 3절에 나오는 성취의 돌발적 성격(‘홀연히’)에 상응합니다. 7b절은 56절과 유사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새 일들은 다른 신들을 통해 알려진 적이 없는, 하나님께서 지금 창조하신 일들이기에 누구도 이를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새 일들에 대한 신들의 무지는 이들의 무능력과 이들이 헛것임을 보여줍니다. 새 일들의 선포를 듣고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의 역사도 지배하시는 참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상 7a절에 직접 연결되는 8a절은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창조된 새 일의 ‘새로움’을 강조하는 언급입니다. 새 일에 관해서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고, 그렇기에 당연히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3) 들어본 적이 없는 ‘새 일’(8)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도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일이 선포될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새 일을 이제야 알려주시는 이유는 이들이 배반만 하고 ‘모태에서부터 배역한 자’라 불릴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8b).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돌봄과 관심의 대상’이던 이스라엘(참조. 44:1,24; 49:1, 5)이 여기서는 ‘모태에서부터 반역자’로 언급입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본성에 속하는 악행이었습니다. 요약하면, 예로부터 알게 한 “처음 일들”을 들으려 하지 않은 이스라엘이 “새 일”도 듣지 않을 것이기에 이들에게 미리 알려지지 않고 ‘지금’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새 일’의 선포 근거(9-11)
이스라엘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실망 시켜 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높이지 못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새 일을 행하심으로 친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9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10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11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9-1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그들을 멸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징계의 과정을 통해 연단하기는 하시지만, 새 일을 행하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1) ‘내 이름을 위하여’ 참으시는 분(9)
그 목이 쇠의 힘줄이고 그 이마가 놋인(4), 모태에서부터 배역한 자인(8) 이스라엘의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처음 일들”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멸망에 떨어진 이스라엘이 “새 일”의 선포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쪽에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구원이 하나님의 자기결정에 의해 그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이름과 당신 영광(명예)을 위해 노여움을 참고 분노를 억눌러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9).
(2) 이스라엘의 연단(10)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연단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행동을 일러 모태에서부터 배역하였다고 평가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잘못과 죄악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나를 위하여’ 이루시는 분(11)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11)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해 당신 능력을 과시하시고 당신 이름의 영예를 회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심으로 당신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높이지도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성품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인도하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된 것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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