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66-01)
시온을 통해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
이사야 66장 1-14절
예루살렘에 있는 중요한 건물은 솔로몬의 궁전과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궁전의 용도는 왕의 거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성전의 용도는 예배와 제사입니다. 성전은 그 이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 본 장은 이사야를 대단원을 마감하는 결론부입니다. 예루살렘 신앙공동체가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와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는 자들’로 분열됩니다. 혼합주의에 물든 자들에 의해 여호와의 통치를 고대하며 종말론적 기쁨 가운데 사는 자들이 쫓겨납니다. 여호와께서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생존의 위협에 노출된 당신 종들을 돌보실 것입니다.
참된 예배자(를 옹호하시는 여호와(1-6)
우리는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만한 장소가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안식할 집을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온 세상도 하나님께서 계시기에는 너무도 좁을 텐데 세상의 한 귀퉁이에 너무도 작은 하나님의 집을 만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1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3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5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6떠드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들려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1-6)
하나님께서는 하늘이 당신의 보좌이고 땅이 발판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성전 건물이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없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했던 자들을 염두에 둔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1) 하늘과 땅을 보좌와 발판으로 삼으신 분(1-2a)
여호와의 절대성과 초월성이 공간적 관점에서 언급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을 당신 보좌와 발판으로 지으셨는데, 그분을 위해 사람이 어디에 그분의 집(성전)을, 그분의 안식처(쉴 곳)를 지어드릴 수 있겠습니까(1)?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분은 사람들이 지어준 집에 거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참조․ 왕상 8:27). 이는 성전과 하나님 사이의 상대적 관계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성전에서 독립적이신 반면에 성전은 의존적입니다. 성전이 그분의 의지를 대변하지 못할 때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6; 참조. 겔 9:1-7).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는 여호와의 우주적-보편적 왕권을, 그분의 전지(全知)하심과 전능(全能)하심을, 그분의 의로우심을 담고 있는 표현이며, 현재 문맥에서는 성전 밖에서도 그분의 왕권을 경험하고 그분께 예배드릴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신 12:11) 예루살렘 성전이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아닙니다.
(2) 말씀에 떠는 자들을 돌보시는 분(2b)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하늘 보좌에 앉아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를 바라보시는 분이기에(2), 성전을 통하지 않고도 그분과 교제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쉴 곳’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쉼이 필요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입니다. ‘가난한 자’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하나님께 도움과 소망을 찾는 자를, ‘심령에 통회하는 자’(문자적으로는 ‘영이 부서진 자’)는 갑작스럽게 경제적-영적으로 빈곤에 떨어진 자를, “내 말을 듣고 떠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분 말씀을 범하지 않으려 애쓰는 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3) 우상숭배자들의 고발(3-4)
어려움에 처해 자들이 하나님께로 피한 자들의 보호를 약속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우상숭배를 고발하십니다(3).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의 환난이 우상숭배자들의 핍박으로 인한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고발의 대상이 제의를 집전하는 자들인지, 제사를 드리는 자들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가증한 것”도 기뻐한다는 점입니다.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서 동시에 우상에게도 제사를 드립니다. 소와 양을 제물로 드리는 자가 사람을 제물로 죽이고 개의 목을 꺾습니다. 제단에서 소제를 사르는 자가 돼지의 피를 전제로 드리고, 여호와의 마음에 들도록 향을 사르는 자가 우상을 축복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가르침보다 자기가 선택한 ‘자기의 길’이 우선적이었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이 임의로 자기의 길을 선택한 것처럼 여호와께서도 징계를 선택하십니다. 그분은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으로 보응하십니다. 우상숭배를 통해 피하려 했던 것을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들이닥치게 하실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이 우상을 숭배한 대가로 임하게 됩니다. 징계를 결정하시기 전에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부르셨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50:2; 65:12). 이들은 그분 목전에서 악한 짓을 하며 그분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귀를 막고 우상숭배의 길을 고집하기에 재앙 외에 다른 선택이 없어집니다.
(4) 형제를 쫓아낸 자들의 심판(5-6)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 곧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2)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해 그들의 형제들에 의해 공동체에서 쫓겨납니다(5). 미워하고 쫓아내는 자들을 지칭하는 “너희 형제”와 축출 근거로 제시된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는 다툼과 분열이 예루살렘 신앙공동체 안에서 같은 유대인들 사이에 발생했음을 전제합니다(참조. 65:13-14). 내쫓는 자도 내쫓김을 당하는 자도 모두 여호와께 속한 예루살렘 주민들입니다. 내쫓는 자들의 조롱하는 말(“여호와께서는…원하노라”)은 신학적 노선의 차이가 분열의 원인이었음을 시사해줍니다.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자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그분의 종말론적 통치를 고대하던 자들이었다면, 쫓아내는 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질서를 따르는 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혼합주의에 물든 자들(3)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공동체의 종교와 행정을 책임진 자들의 눈에 종말론적 열정과 기쁨은 여호와 종교의 전통에 어긋나 보였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말씀에 떠는 자들을 위해 개입하십니다. 쫓겨난 자들이 아니라 쫓아낸 자들이 수치를 당합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에서 여호와께서 복수하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립니다(6). 성읍과 성전이 심판의 대상으로 언급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떠는 자들’이 성전과 예루살렘에서 쫓겨났음을, 이들의 종교적 권리와 시민권이 박탈됐음을 전제합니다.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는 그분의 원수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무리(제의 종사자들)임을 시사해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을 쫓아낸 자들, 시온 공동체의 주류에 속하는 집단이 여호와의 원수가 됩니다(참조. 59:18;63:10).
시온의 구원(7-14)
하나님께서는 중국에는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시온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풍족히 누리며 기뻐할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새 예루살렘 백성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10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11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1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13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14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7-1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시온을 통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평강과 영광이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백성은 시온을 통해 위로, 만족, 기쁨, 즐거움, 평강, 영광을 풍성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관계는 마치 아이가 어머니의 젖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는 것에 비유됩니다.
(1) 시온이 자녀 출산(7-9)
진통과 산고의 과정도 없이 아이가 태어납니다(7). 아이의 출생이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특별한 출생임을 시사해줍니다. 나라와 민족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형성되지만, 여호와께서 단 하루 만에 단번에 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8). 그분의 간섭과 축복으로 시온은 왕성한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궁을 열고 태어나게 하시는 분이기에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9). 그분께서 시온의 자궁을 다시 닫지 않으시기에 후손이 많이 태어나 주민이 넘치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다시 큰 기쁨이 주어집니다.
(2) 슬퍼하는 자들의 기쁨(10-11)
폐허가 된 시온을 바라보며 슬퍼하던 자들이 넘치는 주민들로 활기를 되찾은 시온을 보며 기뻐하게 됩니다(10).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 안에서 풍족하게 젖을 먹으며 평안함을 즐기듯이 예루살렘 주민들도 다시 풍요를 즐기며 안전하게 살게 됩니다(11).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예루살렘을 통해 주민들이 위로를 받습니다. 풍족함을 상징하는 “그 영광의 풍성함”(‘그 영광의 가슴’)은 예루살렘이 민족들로부터 영광을 받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 위로받지 못하던 예루살렘이 위로의 샘이 되고, 땅바닥에 떨어져 멸시를 받던 예루살렘이 높여져 영화롭게 됩니다.
(3) 위로 받는 시온(12-14a)
예루살렘에 평강과 풍요의 약속이 주어집니다(12). 항상 물이 흐르는 강처럼 평강이 예루살렘에 함께하고, 민족들의 많은 부가 예루살렘으로 흘러 들어와 넘칩니다. 아이가 어미 품에서 젖을 빨듯이 주민들이 예루살렘의 넘쳐흐르는 부를 풍족하게 즐깁니다. 어머니가 슬픔에 잠긴 제 자식을 위로하듯이 하나님께서 당신 종들을 위로하십니다(13). 자식에게 무한 책임을 지는 어머니처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주민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위로하시기에 위로받는 자의 마음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고, 비 온 후에 어린 풀이 싱그럽게 돋아나는 것처럼 강건하게 자랍니다(14).
(4) 여호와의 종들과 원수들의 대조적 운명(14b)
모든 사람이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종들”에게는 여호와의 손이 알려지고, “그의 원수에게는 그분의 진노가 알려집니다. ‘그의 종들’은 그분과의 개인적 관계 속에서 그분의 의지를 따르는 경건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는 그분의 구원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분 손에서 진노의 잔을 받았던 시온(51:17)이 이제는 그분 손에서 위로와 구원의 기쁨을 맛봅니다. 진노에 떨어지는 ‘그의 원수’의 신분은 얼마간 모호합니다. 앞 문맥(5-6)에 따르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여호와의 종들)을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쫓아낸 그들의 형제들이 되고, 뒤 문맥(15-16)에 따르면 “모든 혈육”(민족들)이 됩니다. 후자의 경우 ‘그의 종들’은 9-14a절의 청자 ‘너희’(예루살렘 주민들)를 받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렇게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반드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고 위로하시며 기쁨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오늘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당당히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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