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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77-01)

 


하나님을 찾을 때 느끼는 아픔

시편 77편 1-20절


 

누구나 나름대로의 고민과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어떤 경우에 고통을 느끼는가는 상당히 다릅니다. 사람들은 주로 욕망이 좌절될 때, 소외감이 둘 때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시편 77편의 시인인 아삽은 전혀 다른 이유로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으며 용서를 구하면서 힘들어합니다.

 

  • 이 시는 절망의 밤을 견디는 이의 탄식과 함께 지난날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지연되고 고뇌하는 불면의 밤은 길어져 암흑의 시간 속에서 시인은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현재의 고난 속에서 지나간 시간의 은총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신비로운 발자취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노래합니다.

 

절망과 불안 속에서 부르는 노래(1-6)

하나님 앞에서는 죄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는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 본 사람만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큰 고통을 느끼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혼나고 있으면서도 엄마를 찾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엄마 때문에 아프지만 엄마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2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3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4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5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6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1-6)

 

시인은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나아갑니다. 손을 들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문제는 시인이 이렇게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 절망의 밤에 부르는 노래(1-3)

 

고난 속에서 사람들은 부르짖고 하나님을 찾고 밤새워 손을 들고 도움을 구하며 밤을 보냅니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 시인들에게 친숙한 주제입니다. 시인은, 내목소리를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그가 내게 귀 기울일 것이라고(1) 합니다. ‘내 목소리’와 ‘하나님께’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할 정도로 절실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호소했던 순간을 고백합니다. ‘환난 날에 내가 여호와를 찾았고, 밤에 나의 손을 치켜들고 거두지 않았으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했도다’(2). 응답 없는 하나님 때문에 위로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겪는 고난보다 하나님의 침묵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불안은 고조되었고 근심으로 약해진 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내가 고함치고, 내가 깊이 생각하며 나의 영혼이 무기력해졌도다’(3). 시인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불안에 압도되어 불평합니다. 근심이 깊어져 평정이 사라지고 실신할 정도로 무력해졌습니다. 밤마다 여호와를 찾았지만, 거의 절망의 끝에 서 있습니다.

 

(2) 잠들지 못하는 밤의 노래(4-6)

 

시인은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밤이 괴롭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해 직접 호소합니다. ‘당신이 내 눈꺼풀을 단단히 쥐고 계시니, 나는 혼란스러워 말할 수 없습니다’(4). 그의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눈꺼풀을 꼭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불면의 고통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고통을 일일이 다 표현 못하는 답답함도 호소합니다. 또 내가 지난날들, 오랜 옛 세월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5). 시인이 말하는 옛일들은 무엇입니까? 개인적인 고통의 시간들인가, 조상들이 경험한 역사적인 사건들입니가? 지난날 들(야밈 믹크뎀)과 아주 오래된 ‘옛 세월’(쉐노트 올라밈)을 병행하여 표현한 것을 볼 때 시인은 개인적인 고통만을 반추한 것이 아니라 구원 역사를 되새기며 공동체의 현실적인 고통을 깊이 생각하는 중으로 보입니다. 그 생각 끝에서 시인은 밤에 부른 노래를 떠올리고 독백하듯 말합니다. ‘내가 그 밤에 나의 노래를 기억하고,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고 내 영혼이 찾고 찾는다’(6). 시인의 깊은 사색과 내적인 추구를 표현한 말입니다. 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영혼의 바람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지만, 지난 옛일을 떠올렸던 것(5)과 관련되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내적인 고통은 멈추지 않고, 고통스러운 질문들이 이어집니다(7-9).

 

지난 시간들을 회고하는 노래(7-9)

하나님께서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을 품으시고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지, 하나님의 용서를 쉽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는 일을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도 자신에게 당연히 용서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하는 것은 뻔뻔하고 가증한 모습입니다.

 

7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9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7-9)

 

현재 느끼는 하나님의 부재는 시인을 그분의 인애와 보호가 있었던 과거로 향하게 합니다. 시인은 당혹스러운 질문을 이어갑니다. ‘나의 주님이 영원히 버리실까? 그가 다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까?’(7) 시인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절하지 않으실까 걱정합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친구처럼 기뻐해주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은혜를 베풀다’는, 호의를 베풀거나 친구가 되거나 기뻐한다는 뜻이 포함되었습니다. 호의를 베풀지 않으실까 하는 염려와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기대가 섞여 있습니다. 이어지는 질문도 하나님께서 언약적인 사랑을 철회하실까 봐 염려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습니까? “그의 약속하심”도 끝났습니까?(8) “그의 약속하심”은 문자적으로 ‘세대를 거듭하는 말씀’입니다. 한결같고 실패하지 않는 사랑, ‘헤세드’는 세대를 거듭하지만,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약속의 말씀은 폐기되었는지 묻고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습니까? 분노 때문에 그의 긍휼을 닫으셨습니까?(9) 긍휼은 복받치는 사랑의 감정(창 43:30), 곧 깊은 동정심입니다. 시인은 분노 때문에 주께서 ‘언약적 사랑’(헤세드)을 폐기하신 것은 아닌지 알고 싶어 합니다.

 

옛적에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10-20)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단계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인생길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묵상해 가야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문제를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강한 팔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인생의 고비를 넘기는 비결입니다.

 

10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11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12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13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14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15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셀라) 16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17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18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19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20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10-20)

 

시인은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탄식과 낙담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가 환난의 상황을 바라보는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진술합니다.

 

(1) 여호와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리라(10-12)

 

시인은 어두운 밤의 탄식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회상하며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전환합니다. 1인칭 화법이 계속됩니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나의 잘못”이었다(10)고 합니다. “나의 잘못”은 ‘고통을 느끼다’, ‘후회하다’, ‘낙담하다’라는 동사의 부정사입니다. 곧이어 시인이 느꼈던 고통과 낙심과 후회는 ‘지존자의 오른손이 변화시키신 것’(10b)이라고 말합니다. 10절 시행이 모호하여 역본마다 다르지만, 시인의 슬픔과 절망도 다르게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행하심에 기인한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이 때문입니까? 시인은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합니다. 참으로, 내가 옛적 당신의 기이한 일을 기억합니다’(11). 놀라운 일은 경이롭고 경탄할 만한 비범한 일이며, 모세가 홍해를 건넌 후 부르던 노래에서 사용된 말입니다(출 15:11; 시 89:5). 또 시인은 하나님께, 내가 당신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고, 당신의 행위를 묵상하겠다고(12) 말합니다. 이는 고요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하나하나 깊이 새기겠다는 고백과 다짐입니다.

 

(2) 거룩하고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13-15)

 

시인의 ‘나’ 중심적인 어법에서 하나님을 향하고 ‘당신’으로 전환됩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의 집착을 벗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선언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도는 거룩하며, 당신처럼 위대한 신이 누구입니까?’(13) 어떤 신도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대함에 도달할 수 없음을 수사의문문으로 표현했습니다. 대담하고 단호한 고백이며 선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당신은 “기이한 일”을 행하신 그 하나님이며(참조. 11절), 당신이 당신의 힘을 민족들 중에 선포하셨다고 말합니다(14). 시인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개방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팔로 속량하신 것이 대표적인 일입니다(15). 이것은 출애굽 시대를 소환하여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강조한 것입니다.

 

(3)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16-20)

 

시인의 ‘내 목소리’(1)는 여호와의 우렛소리(18)로 응답되고, 하나님을 찾는 시인의 ‘내 손’(2)은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으로 응답 됩니다(20). 이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탄식의 언어가 공동체 전체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기억하고 노래하는 것으로 전환됨을 보여줍니다. 그 사이에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물들이 하나님 당신을 보고 당신을 두려워하고, 깊음조차 전율했고(16), 구름이 물을 쏟아내고, 궁창이 소리를 내고, 당신의 화살도 사방으로 날아다녔으며(17), 당신의 천둥소리가 회오리와 함께 번쩍였고, 번개가 세계를 진동시키고 진동시켰습니다(18). 이러한 묘사들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는 하나님의 현현입니다. 깊은 사색이 묻어난 질문들(7-9, 13)과 놀라운 하나님의 현현 사이에서 심연의 혼돈과 갈등은 더는 없습니다. 천둥, 번개, 회오리바람을 다스리시고 조종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혼돈을 질서로 바꾸신 창조와 출애굽 당시 바다에 길을 내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시인은 바다에 당신의 길이 있고, 당신의 길이 큰 바다에 있으나 당신의 발자취를 깨닫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19).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시인은 주께서 양 떼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목자 하나님의 심상과 두 명의 지도자(모세와 아론)를 통해 일하신 것을 노래합니다(20). 시인은 이렇듯 역사의 현장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현재화하여 새 믿음을 향해 전진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용서를 아무런 대가 없이 받았지만, 주님은 그것을 위해 십자가라는 큰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죄는 쉽게 짓고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이 겪으셨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용서받는 일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진정으로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주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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