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076-01)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
시편 76편 1-12절
우리는 종종 인생의 어려움과 문제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는 분명하고,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의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능력은 무한하며, 땅 끝까지 창조하신 전능자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의뢰하는 삶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 이 시편은 시온에서 부르짖는 사자 하나님과 약자를 구원하시는 범세계적인 재판장이요, 거룩한 용사 하나님께 초점을 둔 노래입니다. 시인은 자기 백성들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 전쟁에서 승리하신 하나님, 무서운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 전쟁 무기를 부수고 세상 왕들에게 두려움이 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온에서 전쟁을 없애신 평화의 왕(1-3)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가므로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힘과 능력의 주되신 분을 붙들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참으로 숨을 곳이 있으면 좋은데 다가오는 폭풍우와 풍랑을 피하고 숨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숨을 곳이 되는 것입니다.
1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 2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3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셀라)(1-3)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나타났음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유다에 알려지시고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큽니다(1). 이 시행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 전체를 표현한 것입니다. 유다에서 알려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그의 이름’, 곧 그의 명성이 드높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름’은 명성과 신망을 뜻합니다(전 7:1; 겔 22:5). 시인은 하나님의 장막은 살렘에 있고,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다고 합니다(2). 장막과 처소가 평행관계에 따라 동의적인 의미입니다. 흥미롭게도 “장막”의 사전적 의미는 수풀이나 덤불로서 사자의 ‘굴’ 같은 것입니다(시 10:9; 렘 25:38). 마찬가지로 “처소”(메오나)는 동물들의 숨겨진 굴을 뜻합니다(암 3:4; 욥 37:8). 하나님을 사자로 명명하지 않지만 마치 사자처럼 묘사했습니다. 실제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자처럼 그려집니다(호 5:14;11:10; 암 1:2;3:8; 사 31:4;38:13; 렘 4:7 등). 살렘과 시온 역시 동의적인 의미가 됩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의 단축형으로 보이며, 이스라엘이 국가로 수립되기 이전에 멜기세덱 왕의 도읍지였습니다(창14:18). ‘살렘’이 평화를 뜻하기 때문에 그 뜻을 반영하면, ‘그의 굴이 평화롭게 있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시온의 처소에서 모든 것을 평정하고 평화롭게 앉은 사자처럼 앉으신 하나님을 묘사한 셈입니다. 이윽고 시인은, 거기에서 하나님이 불화살을 부수셨고,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애셨다(3)고 노래합니다. 시온의 사자 하나님께서 전쟁터로 진격하셔서 전쟁의 모든 무기를 무력화시킨 장면입니다. 전쟁의 무기들을 부수고 전쟁을 없앤다는 말은 본래 히브리 시행에서 첫 소절에서 한 번만 사용되었지만, 둘째 소절에도 적용됩니다(동사의 이중의무). 깨트리고 쪼개고 부수고 꺾는다는 뜻의 ‘샤바르’ 동사의 강조형태(쉽베르)로 쓰였습니다. 이는 전쟁 무기들이 산산이 부서져 폐기된 평화로운 땅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사자 이미지로 그려진 하나님의 위엄이 전사 이미지와 결합합니다. 이것은 예언적인 종말의 희망을 암시하는 듯 들립니다(호 2:18; 미 3:3-4;사 2:4; 9:5; 겔 39:9-10; 슥 9:10).
용맹스러운 전사 하나님(4-6)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괴롭히던 자들의 비참한 최후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 지혜의 삶입니다.
4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5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6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4-6)
시인은 하나님을 용맹스럽고 영광스러운 전사처럼 빛나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당신은 사냥감 있는 산에서 위엄 있게 빛납니다’(4). “약탈한 산에서”라는 말보다 사냥감이나 먹잇감 있는 산으로 읽는 것이 문맥상 더 자연스럽습니다. “약탈한”(타렙)으로 번역된 말은 본래 야생동물의 ‘먹이’를 뜻합니다(민 23:24). 2절에서 하나님 처소를 사자 굴처럼 묘사했듯 같은 이미지가 활용되었습니다. 이는 먹잇감이 풍부한 용맹스러운 사자의 위엄과 여유로움보다 더 빛나는 하나님을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장엄하고 번쩍이는 광채를 지닌 하나님의 승리를 말하기 위해 하나님의 권능에 놀라고 잠에 빠진 자들을 언급합니다. 마음이 강한 자들도 빼앗기고, 잠에 빠져들며, 힘센 모든 자들은 힘을 얻지 못합니다(5). 마음이 강한 자들과 힘 센 모든 자들은 동의적인 의미입니다. 용감하고 ‘힘센 전사들’(“장사들”; ‘용감한 군인들’[새번역]), 그들이 잠에 빠진다(나무 쉐나탐)는 말은 힘센 전사들이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무력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의 잠’이 죽음을 뜻하는 ‘영원한 잠’(새번역)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5절 시행에서 쓰인 ‘잠’이 구약 다른 곳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영원한 잠이 아니라 일상적인 잠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참조. 창 28:16; 시 127:2). 따라서 뛰어난 전사이신 하나님 앞에서 힘 자랑 못하고 무력해진 전사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후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말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당신의 꾸짖음으로 전차와 말이 깊이 잠듭니다’(6). 전사들이 힘을 전혀 쓰지 못하는 것처럼, 전사들의 용맹성과 짝을 이루는 말과 전차도 깊은 잠에 빠진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분사형태로 쓰인 ‘깊은 잠’(니르담)은 죽음이 아니라 자각하지 못하는 깊은 숙면 상태를 묘사한 흥미로운 표현입니다(삿 4:21). 시인은 독특한 방식으로 뛰어난 전사로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판결자 하나님(7-9)
마지막 심판의 날이 이르면 하나님을 거르려 불순종하던 모든 악인들은 두려움이 떨게 됩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의 산헤립 군대를 진멸시키신 것처럼 악인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일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7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8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9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7-9)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고백합니다. ‘당신은 두려운 분이니, 당신이 분노하실 때 누가 당신 앞에 서겠습니까?’(7) 하나님의 분노를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로 번역된 말은, ‘두려워하다’(야레) 동사의 수동분사형태입니다. 이 두려움은 폭력적인 행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과 위엄에 압도된 상태와 관련됩니다. 시인은 ‘당신’은 두려운 분이라고 반복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두려운 분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또 두려운 분의 분노 앞에서 숨죽이며 고요해진 땅에 대해 하나님께 말합니다. ‘당신이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니 땅은 두려워 잠잠했습니다’(8). 두려우신 분 앞에서 땅은 두려워했고, 두려움은 아무 동요도 없는 고요한 상태가 됩니다. 놀랍게도 두려움 때문에 평화의 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참조. 수 11:23). 이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일어나실 때, 땅의 모든 가난한 자를 구원하실 때입니다(9). “땅의 모든 온유한 자”는 정확히 ‘땅의 모든 가난한 자’입니다. 낮은 자, 비참한 자입니다. 이 땅이 불의로 가득할 때, 가난한 자들은 위축되고 억압당하며 가진 것까지 빼앗기기 쉽지만, 하늘의 심판자가 일어나셔서 판결하실 때, 낮은 자들, 곧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자들이 구원받습니다. 한마디로, ‘심판을 위한’ 시간은 동시에 ‘구원을 위한’ 시간입니다. 이 땅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정의로운 심판이 있기를 절규합니다. 이에 응답하듯 심판과 구원의 시간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시간입니다.
세상을 떨게 하시는 하나님(10-12)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통찰력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 앞에 있는 어려움들을 헤쳐 나가지만, 악한 자들은 이것을 빼앗겨 버리므로 환난이나 어려움의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떠라서 우리는 여기서 명석하고도 기발한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려고 하는 자의 눈을 어두워지게 하여 그들의 지식을 빼앗아 버리는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10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11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12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10-12)
매우 난해한 말이 이어집니다. ‘실로 사람의 노여움(분노)이 당신을 찬양하게 할 것이며, 남은 분노를 당신이 묶어버릴 것입니다’(10). 사람의 분노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든다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인류의 격분을 잠재우시고, 반역의 의지를 제압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판결 앞에서 가난하고 하나님 앞에 겸허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아우성과 분노가 상상되는 장면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던 믿음의 고백을 마치고 “너희”로 언급한 사감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서 원하고 갚으라. 그의 사방에 있는 모든 자는 두려위할 자에게 예물을 드려야 한다’(11). 시인의 명형과 권면이 함께 병행됩니다. 서원하고 갚으라는 것은 직접 명령형이지만, 예물을 드려야 한다는 말은 권면형태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자에게 마땅히 감사하라고 요청한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 사방에 있는 자, 곧 여호와를 아는 자 누구든 그분께 예물을 드리라는 권면입니다. 이러한 명령형의 요청과 권면은 심판과 구원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마땅히 영광 받으실 분에게 감사의 제사로 응답하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낮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천명합니다. 그가 군주들의 호흡을 끊을 것이니, 땅의 왕들에게는 두려움이십니다(12). 시인은 “고관들”, 곧 군주들과 왕들의 목숨과 사기를 끊어버리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노래하며 하나님만이 의지할 분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할 분이며, 하나님 앞에 겸허한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 속에서 안전합니다.
시편 76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능력을 경외하며, 그분의 공의를 신뢰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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