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078-03)
애굽에서 가나안 여정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시편 78편 34-55절
예수님을 영접한 날, 구원받은 날, 또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특정한 날을 지정하기는 어렵더라도 교회의 지체들을 통해서, 또는 여러 활동 가운데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를 ‘처음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억들이 오늘의 삶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충성심을 저버린 이스라엘을 향해 여전히 자비하셔서 분노를 모조리 쏟아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근원적인 실패를 망각에서 찾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애굽 땅에 재앙을 내리고, 거기서 끌어내 홍해를 건너고 가나안 땅에 입성한 구원 역사를 되새깁니다.
조상들의 회개와 기억(34-35)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 쏟아부으셔야 할 진노의 잔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위에 쏟아부으시고,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긍휼의 절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불신앙으로 인한 실패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긍휼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실패로 끝나게 놔놓지 않으셨습니다. 진노를 돌이키시고 결국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34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35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34-35)
시인은 하나님께서 죽이실 때에 이스라엘이 그를 찾았고, 돌아와 간절히 찾았다고 합니다(34).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의 고된 방랑 생활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다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의 행동 패턴을 잘 아십니다. 은혜의 주께는 너무 곤혹스런 일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반석이며 ‘지존자 하나님’(엘 엘론)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했다고 말합니다(35). 신성을 표현하는 아주 오래된 용어 ‘엘’은 시편, 욥기, 이사야서, 창세기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속자”(고알람)라고 했을 때, ‘구속하다’(가알)의 뜻은 1차적으로 자산과 관련된 것으로서, 팔린 집을 다시 사들이거나(레 25:33)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의 자유를 살 때(레 25:48), 기업 무를 자나(룻 4:4) 죗값을 갚기 위한 것에 대해 사용됩니다(민 5:8). 그들은 히브리 노예의 삶에서 자유 시민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기억했습니다.
다시 반복되는 불성실함(36-37)
교회 안에 많은 기념일이 있습니다. 매년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성도들이 그 의미를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년 성탄절에는 예수님이 아니라 산타클로스가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구원과 은혜가 잊혀진 예배와 절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참된 예배와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까?
36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37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36-37)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러나’라는 표현을 통해 그들의 회개는 진실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입과 혀로 하나님께 아첨하고 거짓말했다고 합니다(36).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굳건하지 않았고, 그의 ‘언약’(베리트)을 꾸준히 유지하는데 성실하지 않았습니다(37). 시인은 조상들의 신실하지 못한 행위를 표현할 때, 몸의 기관(입과 혀)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고, 흔들리는 마음 상태를 꼬집습니다. 이는 몸과 마음의 성향이 언약을 지키는 신실성과 매우 밀접한 관계임을 역설한 것입니다. 삶은 몸으로 살아내고 뜻을 펼치는 것은 마음이 결정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몸의 기관을 위선과 가식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기억(38-39)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사람들은 영원한 죽음이 기다릴 뿐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이 예수를 선택하면, 그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38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39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38-3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 규정대로 행하셨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오직”) 하나님께서는 긍휼하셔서 죄악을 덮어주셨고, 멸망시키지 않으셨으며, 분노를 돌이키기를 거듭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분노를 다 높이지는 않으셨습니다(38). 자기 백성의 아첨과 거짓말, 꾸준하지 못한 마음, 언약을 견실히 지키지 못한 것(35-36)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덮고 분노를 누그러뜨리셨습니다. 그는 ‘긍휼하셨다’(라훔). 긍휼은 어머니가 아기를 대하는 것과 같은 깊은 헤아림입니다. 죄를 덮어서 없는 것처럼 감춰주시고, 진노를 돌이키시고 또 돌이키시기를 수도 없이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긍휼이 그들을 살렸습니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덩이요,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으로 기억하셨다고 합니다(39). 시인은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존재라는 사실과 그것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어머니 같은 하나님으로 연결시켰습니다.
지나간 구원의 역사를 되짚어 봄(40-55)
성경에서 ‘헤세드’는 도무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부어 주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을 뜻하는 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입은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무사히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40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41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42그들이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하였도다 43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의 표적들을, 소안 들에서 그의 징조들을 나타내사 44그들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그들로 마실 수 없게 하시며 45쇠파리 떼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물게 하시고 개구리를 보내어 해하게 하셨으며 46그들의 토산물을 황충에게 주셨고 그들이 수고한 것을 메뚜기에게 주셨으며 47그들의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그들의 뽕나무를 서리로 죽이셨으며 48그들의 가축을 우박에, 그들의 양 떼를 번갯불에 넘기셨으며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51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52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53그들을 안전히 인도하시니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으나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 54그들을 그의 성소의 영역 곧 그의 오른손으로 만드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55또 나라를 그들의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시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 살게 하셨도다(40-5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단지 애굽의 종살이에서 끌어내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다른 나라의 침공을 막아 주셨으며,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셔서 각 지파에게 분배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1) 하나님의 슬픔(40-42)
광야에서의 반역과 시인은 다시 반역의 역사와 하나님의 자비를 돌이켜 묵상하며 노래합니다(참고. 12-16). 그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자주 반역했습니까? 그들이 사막에서 그를 얼마나 많이 슬프게 했습니까(40)? 시인이 광야에서 그들의 지속적인 반역을 언급한 것처럼(17), 거듭된 조상들의 고집스러움과 완고함에 대해 탄식합니다. 그들은 돌이켜 하나님을 시험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상처 입혔습니다(41).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그분에게 상처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 하였도다”(히트누)를 정확히 풀이하면 ‘아픔을 주다’, ‘괴롭게 하다’, ‘상처를 입히다’라는 사역형 동사로서 구약에서 오직 여기서만 사용됩니다. 또 그들은 그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않고 대적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4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기억하셔서 분노를 거두셨지만(38-39),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신’(파담) 것을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시인은 망각의 문제를 다시 반복합니다(11절 참조). 그리고 ‘그가 구원하신 날’, 곧 그 시간은 출애굽 시점부터 가나안 정복과 정착의 과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2) 애굽에서 일어난 재앙들(43-51)
시인은 시간적으로 더 먼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징조와 재앙 일곱 가지를 묘사합니다. 재앙에 대한 묘사는 피로 변한 나일강에서 시작하여 장자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시인이 회고하며 묘사한 재앙 목록이 출애굽기의 재앙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출애굽 당시의 일을 똑같이 기술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재앙이 주는 효과에 관심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압제자로부터 구원하고, 창조 세계가 모조리 하나님의 무기라는 것을 보여주고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12절에서 ‘소안’을 언급했는데 다시 ‘소안’ 지역을 언급하면서 애굽에서의 ‘그의 표적들’과 ‘그의 징조들’을 열거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강과 시냇물을 피로 변하게 하셔서 마실 수 없게 하셨습니다(44). 나일강은 애굽 사람들이 식수와 먹거리를 얻는 생명의 강이었지만 죽음의 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쇠파리 떼를 보내셔서 물게 하셨고, 개구리를 보내 큰 피해를 입게 하셨습니다(45). 그들의 땅에서 얻은 농산물을 해충에게 주셨고, 그들이 수고하여 거둔 곡식을 메뚜기에게 주셨습니다(46). 그들의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그들의 “뽕나무”(무화과)를 서리로 죽이셨습니다(47). 그들의 가축을 우박으로, 그들의 양 떼를 번개로 치셨습니다(48). 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적의, 곧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49). 그가 진노의 길을 터놓음으로 그들의 목숨이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게 하셨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가두셨습니다(5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 인간의 조화로운 공존은 하나님의 뜻이지만, 창조 질서의 아름다움은 무참히 깨졌습니다. 재앙은 창조의 역행이었지만, 동시에 창조 세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냈습니다. 마침내 그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셨습니다(51). 이것은 재앙의 절정이었고, 이 재앙을 근거로 유월절이 제정되었고(출 12장),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핵심이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인도와 소유의 분배(52-55)
시인이 일곱 가지 재앙을 묘사한 목적은 애굽 심판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그가 자기 백성을 양처럼 인도해내시고, 광야에서 가축 떼처럼 인도하셨다고 노래합니다(52).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목자처럼 보호하시고 안전하게 이끄셔서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구원받았지만, 그들의 원수들을 바다가 덮어버렸습니다(53; 출 14:24-31). 그는 그의 거룩한 ‘영토’(게불)로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곧 그의 오른손으로 획득하신 산입니다(54). 거룩한 영토, 곧 이것과 평행하는 산은 시대산일까요, 시온산일까요? 둘 중 하나라기보다는 거룩한 영토(경계)와 평행하기 때문에 약속의 땅 전체를 일컫습니다(참조, 출 15:17; 사 11:9). 왜냐하면 곧바로 시인이 하나님께서 나라들을 그들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셔서 이스라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서 살게 하셨다고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55). 이렇게 시인은 오래전 여호수아가 장로들과 함께 정복한 땅을 지파별로 분배했던 때를 회고합니다(수 14-21장).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11절 참조).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평생 그 은혜를 찬송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 더해 매일의 삶에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혹여 우리의 마음이 그 은혜를 잊고 세상 것에 붙들려 있지는 않은지 다시금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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