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44-01)
애굽에서 우상숭배하는 남은 자들
예레미야 44장 1-13절
혹시 ‘고집불통’과 ‘신념’을 동일하다고 착각하고 있진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그 마음이 굳어지고 강퍅해지는 더 악한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은 성경의 일관된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민감함과 부드러움을 가지고 받아들이며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말씀은 읽어도 들어도 굳어진 마음에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영적으로 병이 든 것입니다. 회개하며 돌이켜야 할 일입니다.
- 유다 땅에 머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요하난과 지도자들은 애굽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의 기대대로 잘 정착이 되고 애굽에 살게 되었지만, 점점 애굽 사람들처럼 동화 되어 멸망한 조상들처럼 우상숭배에 몰두하며 살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동화되어간 그들에게 예레미야를 통해 마지막으로 임할 재난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도입부(1)
많은 사람들이 지나온 역사를 타산지석이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자주 무시되거나 잊힙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의 역사는 다시 반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며 교훈을 삼아야 되었으며, 남은 유다 사람들은 남 유다를 보고 교훈을 삼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은 역사들을 통한 교훈을 받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애굽 땅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 곧 믹돌과 다바네스와 놉과 바드로스 지방에 사는 자에 대하여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1)
예레미야 44장은 ‘애굽 땅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바벨론이 침략하자 많은 사람들이 칼과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돌아간 요하난 일행도 그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열거된 성읍들과 지역 이름은 유다 사람들이 애굽 전역에 펴져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애굽에 내려간 요하난과 유다 백성들은 믹돌과 다바네스와 놉 그리고 바드로스 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유다 사람들이 애굽의 전반적으로 모든 지역에 살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정착한 ‘다바네스’는 아일 삼각주 동쪽 연안에 있는 펠루시움(Pelusium) 남서쪽의 텔 데프네에서 그 유적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군사 식민지로 그 주변에 이방인들이 많이 거주했습니다. 믹돌은 바다네스 동쪽 있는 성읍으로 출애굽의 출발 경로를 언급할 때도 등장합니다(참조 출애굽기 14:2; 민수기 33:7). 에스겔 29:10과 30:6은 ‘믹돌에서부터 수에네까지’를 애굽의 가장 북쪽에서 가장 남쪽까지의 모든 지역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멤피스(memphis)로 더 잘 알려진 ‘남쪽의 땅’을 의미하는 바드로스는 지역 이름으로 상부(남부) 애굽을 가리킵니다. 하부 애굽과 상부 애굽에 정착한 모든 유다 사람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유다의 재앙과 그 원인(2-6)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우상에게 분향하여 섬기는 일을 가증히 여기시고 노여워하십니다. 그래서 역사 이래로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 악행을 중단하고 돌아서라고 촉구하셨습니다. 이제 예레미야를 통해 예루살렘과 유다 온 성읍이 사람이 없는 폐허와 황무지가 된 것을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2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성읍에 내린 나의 모든 재난을 보았느니라 보라 오늘 그것들이 황무지가 되었고 사는 사람이 없나니 3이는 그들이 자기나 너희나 너희 조상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여 섬겨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악행으로 말미암음이라 4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내가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 하였으나 5그들이 듣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다른 신들에게 여전히 분향하여 그들의 악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6나의 분과 나의 노여움을 쏟아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를 불살랐더니 그것들이 오늘과 같이 폐허와 황무지가 되었느니라(2-6)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애굽에 도착합니다. 이 애굽에 내려온 유다 백성들은 조상들과 자신들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애굽에 와서 점점 애굽 사람들처럼 우상 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쌓고 있습니다.
⑴ 유다의 재앙(2)
예레미야는 애굽에 사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루살렘과 유다가 그처럼 처참하게 멸망한 원인에 관해 잘 생각해보도록 권면합니다. 애굽에 내려온 자들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성읍에 불러들인 모든 재난을 보았습니다(2).
⑵ 재앙의 원인(3-5)
성읍들은 황무지가 되어 이제 아무도 살지 않게 됐습니다. 여호와께서 왜 재앙을 내리셨는지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우상숭배가 여호와의 노여움을 촉발하고, 그분의 노여움이 재난을 불러왔습니다(3). ‘악행’과 ‘재난’(2)은 같은 단어의 번역입니다. 여호와의 정의에 따르면 악행과 재난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악을 행한 자에게 재난은 가능성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정하신)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우상을 숭배했던 모든 자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계속돼온 악행이었습니다. ‘너희’와 그들의 동시 사용은 우상숭배에 있어 현 세대나 이전 세대들이나 모두 한통속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는 여호와만을 알았다가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 우상들을 알게 됐습니다(참조 2:1-13).
4-5절은 여호와의 애쓰심에 대비하여 유다의 완악함을 고발합니다. 여호와는 당신의 모든 종 예언자들을 거듭 보내 ‘너희는 내가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하셨지만, 그들은 듣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다른 신들에게 여전히 분향하여 자신들의 악행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참조. 7:25-26: 25:4). 여호와와 유다는 마지막까지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유다의 맹목적 질주를 돌이키려는 여호와의 모든 노력이 어떤 결실도 얻지 못하고 헛된 수고로 끝났습니다.
⑶ 황무지가 된 유다(6)
6절은 내용 상 2절의 반복입니다. 여호와께는 분과 노여움을 쏟아 붓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어졌습니다. 여호와의 분노의 불길이 우상숭배자들로 가득 찬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타올라, 모든 것이 폐허와 황무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애굽의 유다 사람들은 불순종과 우상숭배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지금처럼 폐허로 만들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메시지를 들어보면, 그들의 삶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다시 언급하십니다(2). 예루살렘의 멸망한 이유에 대해 “그들이 자기나 너희나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여 섬겨서 나의 노를 격동한 악행을 인함이라”(3)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온 성읍이 사람이 없는 폐허와 황무지가 된 것은 그들이 이 경고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책망하시는 하나님(7-10)
실수하고도 망각하는 것은 영적 자해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황무지가 되는 재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묵도했습니다. 왜 영광의 도시가 수치와 조롱의 도시로 전락했는지 모르는 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임 없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일만 골라서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교육하십니다.
7나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어찌하여 큰 악을 행하여 자기 영혼을 해하며 유다 중에서 너희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젖 먹는 자를 멸절하여 하나도 남기지 않게 하려느냐 8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손의 소위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너희의 가서 우거하는 애굽 땅에서 다른 신들에게 분향함으로 끊어버림을 당하여 세계 열방 중에서 저주와 모욕거리가 되고자 하느냐 9너희가 유다 땅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한 너희 열조의 악과 유다 왕들의 악과 왕비들의 악과 너희의 악과 너희 아내들의 악을 잊었느냐 10그들이 오늘까지 겸비치 아니하며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내가 너희와 너희 열조 앞에 세운 나의 법과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느니라(7-10)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이 폐허가 됐지만, 애굽에 사는 유다 사람들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어떤 교훈도 끌어내지 않았습니다.
⑴ 자멸의 길로 가는 자들(7)
이들은 악을 행하여(3,5) 심판을 당한 자들보다 더 큰 악을 행하며 자신에게 해를 끼칩니다. 이들은 마치 유다 백성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는 자가 없게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습니다(7).
⑵ 우상숭배(8)
‘어찌하여’는 여호와의 안타까움과 당혹감을 보여줍니다. 죽도록 맞았는데도 그대로인 것을 보시고 차라리 여호와께서 절망하십니다. 8절은 여호와를 당혹스럽게 하는 이들의 ‘큰 악’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8a절은 내용상 3절의 반복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초래했던 우상숭배가 애굽 땅에서도 그대로 저질러집니다. 가나안에서 다른 신들에게 가서 향을 피우고 섬기며 여호와를 노하게 했던 자들이 애굽에서도 여전히 다른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자기 손으로 만든 것으로 그분을 노하게 합니다.
⑶ 조상의 죄악을 잊은 자들(9)
‘너희 손이 만든 것’은 우상의 실체를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어리석게도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신으로 숭배합니다. 결국 이들의 우상숭배가 이들을 멸망시켜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저주와 수치 거리’로 만듭니다. ‘끊어 버림을 당하여’는 완전한 멸망을 의미한다. 이 들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저지른 조상들의 악행과 유다 왕들의 악행과 왕비들의 악행과 자신들의 악행과 아내들의 악행을 잊었습니다(9). 조상 때부터 현 세대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 악행을 저지른 결과로 재앙이 임했다는 사실을 지나간 과거사로 치부해버렸습니다. 이들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자신들하고는 상관없는 남의 일이었습니다.
⑷ 율법과 법규를 지키지 않은 자들(10)
파국적 재난을 반면교사로 삼지 않고 깨끗하게 잊었기에 악행을 뉘우치거나 두려워해야 할 이유도,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를 지켜 행해야 할 이유도 다 사라집니다(10). 애굽으로 들어가 과거를 망각하고 전과 같은 악행을 저지르며 사는 자들에게 심판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황무지가 되는 재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습니다. 왜 영광의 도시가 수치와 조롱의 도시로 전락했는지 모르는 이가 없었습니다. 왕과 왕비에서부터 백성까지, 조상 때부터 한 순간도 그친 적 없는 불순종과 악행이 가져온 유례없는 참극을 모를 리 없고 잊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애굽의 유다인들은 까맣게 잊었습니다. 알면서 모른 체했습니다. 애굽에는 안 계신 것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무시하고 애굽 신들을 부지런히 섬김으로 저주와 수치를 자초했습니다. 말씀묵상은 기억행위입니다. 성경 속에서, 역사 속에서,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말씀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 역사를 현재화하는 일입니다. 묵상 없는 기억 없고, 기억 없는 각성은 없고, 각성 없는 순종은 없습니다.
징계를 밝히시는 하나님(11-14)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자주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우상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는 유다 백성들을 벌하시겠다는 뜻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11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여 환난을 내리고 온 유다를 끊어 버릴 것이며 12내가 또 애굽 땅에 머물러 살기로 고집하고 그리로 들어간 유다의 남은 자들을 처단하리니 그들이 다 멸망하여 애굽 땅에서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이 칼과 기근에 망하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칼과 기근에 죽어서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되리라 13내가 예루살렘을 벌한 것 같이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벌하리니 14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살려는 유다의 남은 자 중에 피하거나 살아 남아 소원대로 돌아와서 살고자 하여 유다 땅에 돌아올 자가 없을 것이라 도망치는 자들 외에는 돌아올 자가 없으리라 하셨느니라(11-14)
애굽에서도 하나님만이 홀로 경배를 받으실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하여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은 예루살렘 사람들처럼(21:9; 38:2), 하나님의 명령을 업신여기고 애굽에 내려와서는 우상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긴 이들도 큰 자부터 작은 자까지 애굽 어디에서 살든지 똑같은 재난을 겪고 끊어질 것입니다.
⑴ 심판을 결정하신 여호와(11)
고발의 말씀 다음에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심판의 말씀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아무 뉘우침이나 두려워함 없이 애굽에 들어와 살면서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환난’(재난)을 내려 멀하시기로(7, 8) 작정 하십니다.
⑵ 완전한 멸망(12-14)
‘온 유다’는 ‘애굽 땅에 머물러 살기로 고집하고 그리로 들어간 유다의 남은 자들’(12)(‘애굽 땅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1))을 가리킨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모두 붙들어 애굽 땅에서 다 멸하십니다.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애굽이 이들의 무덤이 됩니다. 칼과 기근을 피하여(42:14,16) 애굽으로 들어온 자들이 거기에서 칼과 기근에 죽어서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됩니다(42:18; 참조, 28:18).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42:1,8) 다 멸망에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예루살렘을 벌한 것같이 애굽 땅에 사는 자들도 그렇게 벌하십니다. 장소만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애굽으로 바뀌었지 유다 백성의 우상숭배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파국적 재앙을 경험했지만, 뉘우침이나 두려워함 없이 이전의 길을 그대로 가다가 같은 멸망의 심판에 떨어진다.
14절의 원문은 복잡한데, 다음과 같이 번역해볼 수 있다. ‘거기 애굽 땅에 살려고 들어온 유다의 남은 자들 가운데 살아남거나 벗어나 그들이 (거기) 돌아가 살고 싶어 하던 유다 땅으로 돌아갈 자가 아무도 없으리라. 몇몇 살아남은 자들을 빼놓고는 아무도 돌아가지 못하리라.’ 애굽으로 들어온 자들은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겠지만, 아무도 돌아가지 못하고 모두 애굽에서 죽습니다. 극히 소수의 사람만 살아남아 유다 땅으로 돌아갑니다. 유다의 남은 자들은 전쟁도 없고 나팔소리도 들리지 않고 양식도 풍부해 굶주릴 격정이 없는 곳을 찾아 애굽으로 왔지만, 이들의 기대와 달리 애굽은 멸망의 장소가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말씀을 멸시하고, 그것이 습관이 된다면, 그 결말은 두려운 심판뿐입니다. 내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고 겸손히 회개해야 합니다. 주의 자비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꾸짖음을 경청하여 교만을 떨치고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할 일, 경고하신 말씀, 주께서 행하신 일을 잘 기억하여 그 은혜 아래 살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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