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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47-01)

 


역사의 주인이신 사랑의 하나님

예레미야 47장 1-7절


 

한 젊은이가 이웃집에 살고 계신 신실한 그리스도인 할머니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할머니에게 제일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여쭈었습니다. 할머니는 서슴지 않고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 1:1)라고 답했습니다. 청년은 놀라서 다시 ‘그 많은 성경 중에서 제일 처음에 있는 성경이라니요?’라고 반문했습니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고 그 이유를 ‘그 말씀을 신뢰할 수만 있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리 어렵지 않지!’라고 덧붙였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주십니다(46:1). 그동안 첫 번째 대상이 애굽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며, 다음으로 블레셋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옆구리에서 눈엣가시 같던 블레셋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북방에서 바벨론을 내려오게 하여 블레셋 온 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시대적 배경(1)

블레셋은 이스라엘 옆에서 자주 그들을 괴롭혔고, 이스라엘은 그들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시 같은 존재’로 이스라엘이 잘못했을 때, 그들을 일깨우신 방법으로 블레셋을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할 때는 조금도 위협적인 세력이 되지 못했지만, 불순종할 때는 그들을 강하게 하여서 이스라엘에게 고난을 주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블레셋을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1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블레셋 사람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1)

 

이스라엘의 두번째 숙적인 블레셋 사람들에 대하여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데(이사야 14:29-31; 에스겔 25:15-17; 스바냐 2:4-7; 스가랴 9:5-7), 그 시점이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로 제시됩니다. 때가 바로와 관련한 사건을 기준으로 해서 주어지지만, 블레셋을 공격하는 주체는 남쪽의 애굽이 아니라 북쪽에서 내려오는 민족입니다. 그 예언대로 철저히 멸망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애굽이 가사를 침략하기 전에 블레셋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라는 신탁이 예레미야에게 주어집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그 사건 다음에 발생할 사건이 계시로 알려 집니다. 애굽에 의한 가사의 침략뿐만 아니라 바벨론에 의한 블레셋의 멸망이 여호와의 역사 의지에 속함을 시사해줍니다. 바로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에 계시의 시점을 한정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탁에도 역사적 사건과 관련한 구체적 언급이 없고, 예레미야 시대에 애굽이 블레셋을 침략했다는 언급은 여기를 제외하면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애굽의 자료에도 관련된 언급이 없습니다. 자료의 부재로 신탁이 주어진 때에 관해서는 대략적인 추정만 가능합니다. 간접 자료에 근거한 추정이기에 다양하게 제안됩니다. 프삼메티쿠스 1세(주전 664-610)가 통치 말년에 아스돗을 점령할 때 가사도 같이 공격했습니까? 609년과 605년에 바벨론과 싸우기 위해 시리아 북쪽으로 출병했던 느고(주전 610-595)가 돌아오는 길에 가사를 쳤습니까? 601년 겨울 바벨론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 느고가 올라가서 가사를 공격했습니까? 바벨론에 의한 블레셋 침략이 바벨론 자료에 나오는 604년 바벨론에 의한 아스글론 정벌과 관련된 사건입니까? 아무튼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은 애굽이 가나안에 대한 권리를 여전히 주장하고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군대(2-3)

우리의 심판 날 우리를 도와줄 분은 우리를 변호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만을 참 도움이요 참 의지로 삼아야 합니다. 블레셋을 심판하시는 날 두로와 시돈에 남아있던 불레셋을 도울 자들을 끊으실 것입니다.

 

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물이 북쪽에서 일어나 물결치는 시내를 이루어 그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그 성읍과 거기에 사는 자들을 휩쓸리니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그 땅 모든 주민이 울부짖으리라 3군마의 발굽 소리와 달리는 병거 바퀴가 진동하는 소리 때문에 아버지의 손맥이 풀려서 자기의 자녀를 돌보지 못하리니(2-3)

 

북쪽에서 바벨론이 홍수처럼 밀려와 블레셋 땅을 덮치듯이, 적군이 몰려와 파괴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적군의 전차와 말발굽 소리에 블레셋 사람들이 공포에 떨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⑴ 홍수의 비유(2)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를 사용해서 다시금 블레셋에 대한 심판이 여호와의 말씀임을 강조합니다. 46:7-8에서 시리아 북부 지방으로 원정을 떠나는 애굽 군대의 위용을 나일 강의 범람에 비유한 것처럼, 블레셋을 침략하는 군대가 거세게 넘쳐흐르는 홍수에 비유됩니다(참조. 이사야 8:7, 30:28). 그 비유는 북쪽에서 불어난 물이 넘쳐흐르는 강물이 되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립니다. 애굽을 침략하는 적도 ‘북으로부터’ 오는데(46:20), 블레셋을 몰살하는 적도 ‘북쪽에서’ 일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북방에서 바벨론을 불러와 블레셋 전역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애굽이나 블레셋의 입장에서 북쪽은 시리아 북부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신학적 의도에서 바벨론에 의한 블레셋의 멸망을 바로의 가사 공격에 연결시킨 것 같습니다. 바로가 가사를 칠지라도 블레셋은 애굽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북쪽에서 오는 바벨론 군대에 넘겨주기로 하셨기에 바로의 가사 침략은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납니다. 넘쳐흐르는 강물이 땅과 그곳을 가득 메운 것을, 성읍과 그 주민들을 휩쓸어갑니다. 블레셋 전역을 뒤덮으며 공격해오는 적들을 보면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울부짖고 통곡합니다. 침략자들의 압도적인 세력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부짖기만 합니다.

 

⑵ 사실적 기술(3)

 

위에서 비유로 표현했던 모습들이 사실적 표현으로 바뀝니다. 군마의 발굽 소리와 병거들의 내달리며 내는 요란한 바퀴 소리에(참조 겔 26:10-11) 아버지들은 맥이 풀려 자식들을 돌보지도 못합니다. 적의 위세에 놀려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패한 애굽 군대는 도망이라도 치는데(46:5,16), 블레셋 사람들은 공포로 온몸에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심판의 날이 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날을 감당할 재물도, 권력도, 명예도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도 자식을 위해서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더 늦기 전에 자식에게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을 준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블레셋의 멸망(4-5)

하나님 없는 삶에 남는 것은 죽음의 슬픔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화려한 이력 뒤에 따라오는 지독한 고독과 우울과 공허함도 불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블레셋에 죽음과 슬픔이 임할 것을 예언합니다.

 

4이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며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는 바 도와 줄 자를 다 끊어 버리시는 날이 올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갑돌 섬에 남아 있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리라 5가사는 대머리가 되었고 아스글론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가 잠잠하게 되었나니 네가 네 몸 베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4-5)

 

블레셋을 심판하시는 날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던 블레셋을 도울 자들을 끊으실 것입니다. 그들의 고향 갑돌마저 진멸하심으로써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철저히 멸하실 것입니다.

 

⑴ 진멸의 날(4)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적들의 무서운 공격이 더 절망적인 것은 그 일을 여호와께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블레셋 사람을 모두 멸하고 두로와 시돈의 지원군 가운데 남은 자들마저 모두 끊어버리는 그날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3a사역; 참조 46:11, 21) 페니키아의 도시국가 시돈과 두로가 블레셋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바벨론에 맞서 연합전선을 구축했던 것 같습니다.

블레셋이 두로와 시돈의 도움을 기대하겠지만, 이는 헛된 소망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지원군을 보낼지라도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여호와께서 갑돌 섬의 남은 자들인 블레셋 사람들을 멸하십니다. ‘갑돌 섬에 남아 있는’은 오해의 여지가 있어 ‘갑돌 섬의 남은 자들’로 번역으로 ‘블레셋 사람들’과 동격입니다. 구약성경의 전통에 따르면 갑돌은 블레셋의 출발지였습니다(참조. 아모스 9:7, 참조. 신명기 2:23).

 

⑵ 죽음의 애도(5)

 

예언자가 블러셋 사람의 입장에서 블레셋의 절망적 상황을 기술한 것입니다. ‘기사는 머리를 밀고 아스글론은 입을 다문다. 그들의 골짜기에 남은 자(들)야, 너(희)는 언제까지 자기 몸에 상처를 내려는가?’(5절의 사역) 가사는 블레셋의 다섯 성읍(에그론, 아스돗, 가드, 아스글론, 사사) 가운데 가장 남쪽, 곧 애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지중해에 면해 있는 성읍으로 남부 팔레스나에서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아스글론 가사에서 북쪽으로 대략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성읍입니다. ‘그들의 골짜기에 남은 자(들)’는 블레셋의 해안평야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가사와 아스글론을 포함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거주지가 전쟁으로 폐허가 됩니다. 머리를 밀고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는 죽은 사람을 애통해하는 제의적 의식에 속합니다. ‘입을 다물다’는 죽음의 침묵을 시사합니다. 아스글론의 주민들이 다 죽어 성읍이 조용해집니다. 가사와 아스글론을 포함해 해안평지에 살던 블레셋 사람들이 다 죽었기에 (의인화된) 성읍이 애통해합니다.

심판 날이 오면 가사는 죽음을 애도하며 삭발을 할 것이고, 아스글론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어 정적만 감돌 것입니다. 남은 사람들은 자기 몸을 베며 죽음을 슬퍼할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에 남는 것은 죽음의 슬픔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화려한 이력 뒤에 따라오는 지독한 고독과 우울과 공허함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중독이 아니면 견뎌낼 수 없는 권태의 고통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칼(6-7)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에 안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서 죄악을 멈추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한 대로 블레셋을 여호와께서 치실 것입니다.

 

6오호라 여호와의 칼이여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네 칼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쉴지어다 7여호와께서 이를 명령하셨은즉 어떻게 잠잠하며 쉬겠느냐 아스글론과 해변을 치려 하여 그가 정하셨느니라 하니라(6-7)

 

4b절은 블레셋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주체로 여호와를 언급했는데, 여기서는 ‘여호와의 칼’이 심판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6절에서 예레미야는 블레셋 사람의 입장에서 탄식하며 의인화된 여호와의 칼에게 직접 말합니다. ‘오호라 여호와의 칼이여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네 칼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쉴지어다.’ 하나의 탄식 다음에 세 개의 명령이 뒤따릅니다. ‘여호와의 칼’은 블레셋을 심판하시려고 여호와께서 보내신 칼로, 북쪽에서 오는 바벨론 군대를 가리킵니다. 칼이 여호와의 원수들(애굽 군대)을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는’(46:10) 것처럼 여호와의 칼이 쉬지도 않고 블레셋이 완전히 멸절하기까지 칩니다. ‘쉬다’에 의해 블레셋의 운명과 야곱의 운명이 대조적으로 연결됩니다. 46:27의 ‘평안하며’도 동사 ‘쉬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야곱은 돌아와 쉬지만, 블레셋을 치는 여호와의 칼은 쉬지 않습니다. 세 개의 명령(문자적으로, ‘네 칼집에 들어가 가만히 쉬며 조용히 있어라’)을 사용해 재난이 그만 멈춰주기를 간구합니다.

7절은 6절의 예언자가 대신한 블레셋의 탄식에 대한 답변입니다. 직역해보면, ‘여호와께서 그것에게 명령하셨는데, 그것이 어떻게 쉴 수 있겠는가? 아스글론과 해안가를 치시려고, 그분께서 거기로 그것을 부르셨다.’(7), 블레셋 사람들은 칼이 흡족하게 마셨기에 쉬기를 바라지만 헛된 기대에 불과합니다. 북쪽에서 오는 적은 여호와께서 명령한 ‘여호와의 칼’이기에 자신들에게 맡겨진 과업을 완수하기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바벨론을 불러 아스글론과 블레셋의 해안 지역을 침략하게 하십니다. 블레셋의 경우에는 애굽의 경우(46:26)와 달리 심판 이후의 회복에 관한 약속이 나오지 않습니다. 멸하시는 주체(4)와 명령하시는 분(7)이 여호와라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블레셋의 멸망이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에 속함을 보여줍니다. 블레셋을 내려친 바벨론의 칼은 여호와의 칼이었습니다. 그 칼에 쓰러져 블레셋이 잠잠해졌습니다. 온 블레셋이 다 심판을 받을 때까지 그 칼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고 강력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계속 듣고도 돌이키지 않은 블레셋은 심판의 칼을 받게 될 것이고, 아무도 블레셋을 도와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요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 하나님의 묵인이나 방관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멈추고 돌아가야 합니다.


작은 힘으로 이웃을 괴롭혔던 블레셋은 어디 갔습니까? 더 강한 자의 칼에 비둔한 몸뚱이가 나뒹굴고 있지 않습니까? 알량한 권력으로 약한 자를 괴롭힌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경고에 곧바로 돌이켜야 합니다. 심판 날 도와줄 분은 변호해주실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요일 2:1). 그분만이 참 도움이요 참 의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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