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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6-02)


하나님의 기적과 여리고의 붕괴

여호수아 6장 8-27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을 때, 그 결과는 심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명령을 존중해야 하며, 불순종은 경고로 남아야 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순종의 결과를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기이한 하나님의 전쟁 수칙을 묵묵히 따릅니다. 여기서 11절의 ‘여호와의 궤가 성을 한 번 돌았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전쟁의 주체는 백성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법궤와 제사장들이 앞장서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진행되는 침묵의 행진은 이것이 군사적 행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룩한 예식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리고 성 주변을 행진하는 백성(8-1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에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어 협력할 때 큰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8○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10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12○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13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14그 둘째 날에도 그 성을 한 번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8-14)

 

여호수아의 명령을 받은 백성은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지침대로 특별한 대열을 갖추고 여리고 성을 향해 행진합니다(8-9). 군사들은 행진 중에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이러한 기괴한 침묵의 행진은 여리고 백성에게 엄청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을지 모릅니다.

여기서 최전선에서 행진하는 ‘무장한 자들’은 누굽니까? 원래 민수기의 진영 배치와 행진 대열 배치의 규정에 따르면, 행진 시에는 유다 지파가 법궤 뒤를 따라 모든 지파의 선봉에 섭니다(민 10:14). 전쟁 시에도 하나님께서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 유다가 선봉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삿 1:2). 그러나 모든 전쟁에서 유다가 선봉에 설 필요는 없습니다. 민수기 32장의 요단 동편 지파들과 모세의 협상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지파가 자원해서 선봉에 선다면 허용될 수 있었습니다. 민수기 32:16-27에서 요단 동편의 소유권을 부탁한 르우벤과 갓 사람들이 선봉대로 전투에 임하겠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그들이 다짐한 대로 ‘여호와 앞에서 가서’ 싸울 것을 요구합니다(20).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 싸운다’는 표현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바로 법궤 앞에서 선봉대로 나가 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민 32:20-22; 27,29,32). 따라서 현재 여리고 행진 대열 맨 앞의 무장한 자들은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의 군사들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침묵 속에서 행진하는데, 이 침묵은 6일 동안, 일곱째 날에 여호수아가 함성을 외치라는 명령을 내릴 때까지 유지됩니다(10). 우리는 여기서 여리고 성 행진에 동원된 ‘모든 군사’(6:3; 참조. 5:6)와 ‘백성’(6:5,7,16)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리고 성의 둘레의 규모에 맞는 군사들이 출동하여 그들이 온 백성을 대표해서 성곽을 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성을 둘러싸기 위해서는 수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무너진 여리고 성과 진멸 전쟁(15-21)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기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입장을 상기시키며, 우리는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합니다.

 

15○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16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20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15-21)

 

일곱째 날 새벽이 되었습니다. 행동 지침대로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아주 길게 불 때,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함성을 지르라고 지시합니다. 백성의 함성 소리와 함께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타고 군사들이 여리고 성안으로 올라갔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정복은 진멸 전쟁임을 주지시킵니다. 진멸은 ‘헤렘’을 옮긴 말인데, 헤렘의 기본 의미는 ‘온전히 바친 것’을 뜻합니다. 헤렘 전쟁에서는 여리고 성의 사례에서 보듯이 물건 중에 금속류는 제외하는 것이 관례였을 것입니다. 가장 수위가 높은 우상숭배를 한 성읍에 대한 헤렘 심판은 금속류도 허용되지 않습니다(신 13:12-18). 때로 가축과 재산은 전리품으로 허용된 아이 성과 같은 좀 더 수위가 낮은 사례도 발견됩니다(수 8:2). 여리고 성은 가나안 족속에 속하므로 헤렘 전쟁의 규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금속류는 ‘여호와의 곳간(창고)’(오차르 아도나이)으로 옮겨 하나님께 바쳤는데, 이것은 여호와께 구별된 것(코데쉬), 곧 ‘성물’로 취급되어 녹여서 성막/성전의 시설에 재활용되었을 것입니다.

헤렘으로 바쳐진 물건에 누군가 손을 댄다면,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 수칙을 어긴 것으로 이스라엘 진영이 오히려 ‘바치는 것’, 곧 헤렘으로 바쳐진 바가 되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성에 있는 모든 것을 헤렘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의 약조를 주지시키면서 라합과 그녀의 집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살려주라고 명령합니다(17).

 

구원받은 라합과 가족들(22-25)

공동체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협력과 연대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도우며,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협력은 신앙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22○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23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고 24무리가 그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25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22-25)

 

라합 한 명의 결단으로 그와 모든 살붙이가 함께 구원을 받습니다. 이러한 집단의 연대성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분명히 그의 부모와 가족, 친족들이 자동으로 라합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들 각자는 아마도 그녀의 행위를 알고 동조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가족과 친족들에게 몰래 이 사실을 알려 자신의 집으로 소집했을 것이며, 그들이 그녀에게 동의하여 여호와를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에 합류하기로 결단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그들 모두가 라합의 집에 모여 구출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인지력과 분별력이 없는 유아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더라도, 신앙과 구원은 궁극에는 언제나 각자의 결단의 문제입니다. 라합과 그의 친족들은 구출된 뒤 이스라엘 ‘진영 밖’에 임시로 거하게 했습니다(23). 이는 그들이 아직은 부정한 이방인이었기에, 당장 진영 안에 들어와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 백성이 헤렘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언약 밖의 백성이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라합의 위대한 결단은 여호수아서가 쓰인 ‘오늘날까지’ 칭송되고 있습니다. 그녀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고 있다는 말을 라합이 영구적으로 정착했음을 뜻하는 표현으로 해석하면서 ‘오늘’을 그녀의 후손이 살던 시기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NEB). 그러나 이것은 라합과 그녀의 가족이 현재 생존 중인 시기를 가리키는 진술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이 ‘오늘까지’는 가나안 입성 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인 것이 명백합니다. 놀랍게도 기생이었던 라합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합류한 뒤 살몬과 결혼하여 다윗의 가문에 들어갔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리고 성에 내려진 저주(26-27)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심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와 말씀의 신성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따라야 합니다. 불순종은 경고로 남아야 하며, 후대에 교훈이 됩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세대를 넘어 지속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26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27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26-27)

 

헤렘은 일시적이 아닌 영속적으로 유효합니다. 따라서 헤렘의 심판을 당한 대상을 누군가 복원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성이라도 헤렘 심판으로 무너진 성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재건축이 금지됩니다(신 13:16). 따라서 누군가 여리고 성을 재건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아 기초를 쌓을 때(건축이 시작될 때) 맏아들을, 성문을 달 때(건축이 끝날 때) 막내아들을 잃을 것입니다(26). 이것은 무너진 성을 다시 쌓아 강력한 요새를 만들지 말라는 의미이며, 사람이 그 성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수 18:21; 삿 3:13; 삼하 10:5). 후대에 이 예언은 현실이 되어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 성벽을 재건축할 때, 그의 맏아들 아비람과 막내아들 스굽을 잃습니다(왕상 16:34).

여기서 추가로 여리고 기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쟁점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성을 일곱 바퀴 돌았던 ‘일곱째 날’에 대해 탈무드는 안식일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에 동의합니다. 물론 안식일에 성을 일곱 바퀴 돌고 진멸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안식일이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의 전쟁은 특별히 신성한 전쟁이었으며 나아가 특수한 예전으로 간주되어 성곽 돌기와 전투가 허용되었는지 모릅니다. 둘째, 여리고 성 붕괴는 역사적 사실입니까? 현대인의 관점, 그리고 제국의 거대한 성들의 규모에 비해 작은 성들이지만, 여리고와 같은 성읍은 이중으로 15m에 이르는 높은 성벽을 둘러쳐 중무장한 성으로 결코 공략이 쉬운 성은 아니었습니다. 여리고의 인구를 따져보면, 아마 성안의 주민들은 삼천 명 내외로 추정되며, 다만 성밖의 둘레에도 넓은 주거지가 발견되어 여리고 성과 그 땅의 총 인구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많은 학자들이 여호수아의 역사성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지만, 그것을 지지하는 고고학적 해석과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각의 학자들은 지진으로 성벽이 크게 무너진 흔적을 발견했는데, 그 붕괴 원인이 자연적 측면에서는 강력한 지진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믿음과 인내로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며, 그분의 능력과 영광을 신뢰해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와 협력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신뢰하는 신앙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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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6-01)


여리고 성을 향한 하나님의 전략

여호수아 5장 13절-6장 7절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은 다소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성을 정복하기 위해 성벽을 돌며 나팔을 불고 소리치는 것은 전쟁의 일반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한정된 시야를 넘어선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놀랍고 깊은지 깨닫게 합니다.

 

  • 첫 번째 전투와 더불어 가나안 땅의 본격적인 입성을 앞두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여호수아를 대면하십니다. 앞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명령을 내리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직접 그에게 출현하시는 대신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이 장면은 여러모로 이상한 대화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과 마주친 여호수아(13-15)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영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자세는 우리의 신앙을 강화합니다.

 

13○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13-15)

 

이 이야기는 갑자기 문맥을 끊고 끼어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비평학자들은 갑작스런 지리적 변화(길갈에서 여리고로)와 새로운 시간의 지시, 여호수아만 등장하는 장면과 같은 요소들로 인해 다른 자료와 구별되는 독립적 자료라고 말합니다. 또한 양자간의 대화가 마치 불완전하게 끝나는 듯해 뭔가 어색합니다. 여호수아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전달되는 말씀을 들으려 하는데(14), 군대 장관은 단지 그 장소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는 명령만 내리고 대화가 종결됩니다. 그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6:1이 삽입구이며, 이 단락이 6:2-7의 여호와의 지시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은 그 자체로 적절한 위치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여호와를 만난 장면과 병행을 이루며(출 3장), 두 만남이 몇 가지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됩니다. 첫째, 출애굽기 3장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모세에게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는가 하면(출 3:2),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 떨기나무 가운데 임재하여 모세를 부릅니다(출 3:4).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현현과 ‘여호와의 사자’의 출현 사이에 경계선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흔합니다(창 16:7-11; 18장;22:11,15; 48:16; 3:2; 14:19; 32:34; 22:31-35). ‘여호와의 사자’는 전적으로 신뢰해야 할 하나님 임재의 대행자이면서 동시에 여호와로 행세합니다(창 18장). 출애굽기 3장과 달리 여호수아 6장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아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 앞에 나타나며, ‘여호와’라는 말도 직접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여호와를 대신하며 여호와와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 두 장면 모두에서 신현이 발생한 곳을 ‘네가 선곳은 거룩하니라’로 칭합니다(출 3:5; 수 5:15). 개역개정은 두 표현 사이의 번역이 약간 다르나 히브리어 원문은 정확히 같습니다. 이것은 두 장면에서 출현한 신적 존재가 본질상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은 자동적으로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셋째, 두 장면 모두에서 신적 존재가 인간 존재에게 ‘신발을 벗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것은 당시 문화권에서 권위자에 대한 예법이기도 합니다.

칼을 빼들고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는 보통 경고의 목적으로 등장합니다(발람 앞에 그의 길을 막은 칼 든 사자가 나타나는데, 그는 또한 ‘여호와’이기도 하다[민 22:31-35];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할 때 칼을 든 사자가 예루살렘 하늘을 향해 칼을 뻗는다[대상 21:16]). 군대 장관의 칼은 여호수아에 대한 경고의 의미입니다. 그 칼은 가나안 족속을 향할 수도, 반대로 이스라엘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순종을 결심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그 칼은 천군만마와 같은 지원의 칼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 앞에 칼을 빼들고 나타난 신적 존재에게 그가 누구 편인지를 묻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직 그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다.’ 이것은 마치 어떤 위엄 있는 장군이 지원병을 이끌고 도착했음을 통보하는 뉘앙스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나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에게 임재할 때는 반드시 전할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체를 파악한 여호수아는 즉각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 엎드려 말씀을 듣겠다는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갑자기 대화가 끝나면서 불완전하게 이 장면이 막을 내립니다. 정작 여호와의 사자가 무슨 말을 전달하려 했는지, 그가 왜 여호수아 앞에 나타났는지 본문은 공백으로 남겨둡니다. 아마 이 장면이 6장의 여리고 전쟁 직전에 끼어든 이유는 독자들로 하여금 여리고 전쟁에서 여호와가 직접 개입하고 있음을 간파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여호와는 ‘전쟁의 주’이십니다. 여리고 전쟁, 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의 총사령관은 결국 여호수아가 아닌 여호와이십니다. 따라서 더 이상의 대화는 군더더기일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장면만으로도 곧 시작될 여리고 전쟁과 이후의 가나안 정복을 진두지휘할 분이 여호와이심을 깨닫습니다.

 

여리고성 함락을 위한 기이한 명령(6:1-5)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항상 완전하고 선하십니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기적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1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2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3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1-5)

 

장면은 여리고 전쟁의 무대로 바뀝니다. 여리고의 성문은 철저히 봉쇄되어 철통같은 수비로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비 중입니다. 여리고가 굳게 닫혔다는 의미는 이중벽을 갖추고 있던 여리고 성벽의 특징을 반영한 묘사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첩보활동을 하고 도망갔기 때문에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명성을 듣고 넋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넘겼다’는 완료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여호수아에게 이미 여리고는 함락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여리고 공략을 위한 전투 수칙을 알려주십니다.

(1) 모든 군사가 매일 성 주위를 한 바퀴 도는데, 육일 동안 반복합니다. (2) 일곱 명의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며 언약궤 앞에서 행진합니다(8). (3) 선봉대가 일곱 명의 제사장들보다 앞에, 즉 맨 선두에 섭니다(7,9). (4) 나머지 군사들은 침묵하면서 언약궤 뒤를 따릅니다. (5) 일곱째 날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돈 뒤 양각나팔을 길게 붑니다. (6) 이때 군사들 모두가 큰 소리를 외칩니다. (7) 이때 성벽이 무너지면 군사들이 올라가서 점령합니다.

이것은 전투 수칙으로 보기에는 매우 기이합니다. 이런 군사적 행동은 전쟁터에서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군사적 행진은 여리고 성이 통상적인 군사적 방식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복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이며, 백성 편에서는 믿음의 전쟁입니다. 이것이 앞으로의 모든 가나안 전쟁의 기본 원리가 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전쟁을 통해 이 교훈을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실제로 여리고 전투는 추후에 다른 가나안 남부 지역 성들을 정복할 때 자주 모범으로 등장합니다(수 8:2; 10:1,28,30). 행동 지침에 따르면, 선봉대가 맨 앞에 서고 그 뒤에 일곱 명의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면서 대열을 이끕니다. 이 ‘양각 나팔’의 히브리어는 여기서만 사용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모든 군사들이 매일 한 바퀴씩 성을 도는데,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야 합니다. 여기서 숫자 ‘7’이 거듭 반복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7명의 제사장과 7일째의 7바퀴 행진. 익히 알려졌듯이, 성경에서 ‘7’은 완전수로 흔히 일의 성취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숫자 ‘7’들의 배열은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히 정복될 것을 암시합니다.

원래 일반 행진에서는 법궤가 가장 선두에 서지만(민 10:33-36), 전투 행렬에서는 법궤는 선봉대의 뒤로 빠집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선봉대가 맨 앞에 서 있으며, 양각 나팔을 부는 일곱 명의 제사장이 그 뒤를 따릅니다(7,9). 역시 제사장들이 어깨에 멘 법궤가 나팔 부는 제사장 뒤를 따라가고 나머지 군사들은 법궤 뒤에서 행진합니다. 참고로 구약의 여러 곳에서 확인되듯이 법궤가 모든 전쟁터에 출정했던 것은 아닙니다(7장의 아이 성 전투; 삼상 4장; 삿 20:27 등).

 

여호수아의 명령하달(6:6-7)

세상 지도자는 주로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반면,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먼저 순종하며, 신앙과 도덕적 가치에 따라 공동체를 이끕니다. 세상 지도자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강조합니다. 세상 지도자는 물질적 성과를 중시하지만, 영적인 지도자는 영적 성장과 공동체의 신앙 강화를 우선시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며, 본이 되어야 합니다.

 

6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6-7)

 

여호수아는 여호와로부터 받은 여리고 전투 수칙을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하달합니다. 제사장들의 임무가 둘로 나뉘어 먼저 주어집니다. 일곱 명의 제사장이 선봉대와 함께 선두에서 나팔을 불며 행진합니다. 그 뒤를 제사장들이 운반하는 법궤가 따릅니다. 군사들의 행진 대열도 둘로 나뉩니다. 먼저 중무장을 한 선봉대가 나팔수 제사장들보다 앞장서 맨 선두에 섭니다. 다음 본문에서 보듯이 이 선봉대는 동편의 두 지파 반일 것입니다. 나머지 군사들은 후방 부대로 법궤 뒤에서 법궤를 따라갑니다. 이런 대열은 전쟁터에서 총사령관이 안전하게 선봉대의 뒤에 서는 일반적인 군사 배치와 비슷합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군대 대장을 만나고,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기이한 명령을 받습니다. 이는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고, 그분의 계획을 따를 때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영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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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5-01)


약속의 땅을 향한 첫걸음

여호수아 5장 1-12절


 

우리의 믿음은 단지 개인적인 경험에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강화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 1절은 이야기의 흐름과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요단강 도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으로 간주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요단강의 기적에 대한 소문이 서편의 가나안 땅 전역에 퍼졌습니다. 긴장이 흐르며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긴박한 상황에서 할례 의식을 단행하고 며칠 후 가나안 땅에서 최초의 유월절을 지킵니다.

 

가나안 족속들에게 알려진 요단강 기적(1)

하나님의 역사는 그 자체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알리는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를 경험할 때, 우리의 믿음이 강화됩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1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1)

 

본문은 요단강 이야기의 결론으로 묶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요단 도하 기적에 대한 소식을 들은 가나안 부족들의 반응입니다. 두 종족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이 가나안의 대표 종족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오경의 관례입니다. 아모리 종족은 많은 경우 가나안 종족과 번갈아 가며 가나안 부족들의 목록에서 먼저 등장하고(창 15;21; 출 13:5; 23:23; 33:2;34:11) 가끔은 가나안 족속 전체가 아모리 족속으로 지칭되기도 할 만큼 강력한 부족이었습니다(창 15:16;48:22 신 1:19,20,27). 아모리 족속은 세력이 강했으며, 오래전부터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이란 표현에서도 아모리 종족이 가나안 내륙의 대표 종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요단 동편을 차지하여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분할 통치를 하고 있었고, 서편에서도 여러 곳에서 세력을 구축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해변에는 남쪽의 블레셋 족속과 북쪽의 페니키아가(두로와 시돈)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70인경(LXX)은 해변의 가나안 왕들을 페니키아 왕들로 대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해변의’(알 하얌)이라는 말은 ‘바다에서 가까운 곳’, 즉 해변에 인접한 내륙 지역을 말할 것입니다. 그 해변 쪽 가나안 사람의 왕들은 일반적 의미의 가나안 여러 족속의 왕들을 가리킬 것이며, 아모리 사람의 왕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부족의 총칭일 것입니다. 내륙과 해안의 가나안 땅 전역이 요단강 사건에 대해 전해 듣고 술렁거린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정신을 잃었다’는 것은 그들의 혼(루아흐, 정신)이 나가 혼비백산했다는 뜻입니다.

 

길갈에서 제2세대의 할례(2-9)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야 할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는 것은 우리 신앙 생활에서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을 인도하는 나침반과도 같으며, 이를 따를 때 우리는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는 우리의 삶을 향한 완벽한 계획을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이끄시는지 경험하게 됩니다.

 

2○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 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9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2-9)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 남자들을 할례 받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중요한 순간을 나타냅니다.

 

(1) 할례를 행하라는 여호와의 명령(2-3)

 

길갈에서 ‘할례의식’을 거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재할례가 아니라 할례를 받지 못한 제2세대의 할례입니다(5). 3절은 이 할례식을 행한 장소가 ‘할례 산’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산’은 사실 ‘언덕’(기아)을 가리키므로 ‘할례의 언덕’이 더 나은 번역입니다. 이 지명은 길갈의 어떤 야산에서 실행된 이스라엘의 할례식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인 것으로 보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언약의 징표였습니다(창 17:9-14).

 

(2) 제2세대가 할례를 받지 못한 이유(4-7)

 

광야는 남자아이들의 할례를 시행하기가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은 후 일주일 정도의 회복 기간이 필요했을 것인데, 광야의 삶은 언제 하나님의 구름 기둥이 움직여 이동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따라서 새로 태어난 남자아이들의 할례는 안정된 정착이 완료될 때까지 보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유보되었던 제2세대의 할례가 이제 길갈에서 시행됩니다. 어떤 사람은 광야에서의 거듭된 언약 파기와 불순종,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할례를 허용하지 않았다고 보지만, 그것보다는 5절과 7절의 진술을 볼 때(‘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무할례는 오히려 예고 없이 이동해야 하는 광야의 특수한 상황 때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어쨌든 조상들인 제1세대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는커녕 보지도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군인들(‘전쟁의 남자들’), 곧 장정들이 광야에서 40년간 유랑하다가 결국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제2세대는 광야 여정이라는 사정 때문에 할례를 받지 못하여 무할례자로 요단강 건너 길갈에 이를 때까지 유랑 생활을 해야만 했는데, 이제 그들이 드디어 할례를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3) 할례의 완수와 지명 길갈의 기원(8-9)

 

할례식이 끝난 뒤 모든 백성은 할례 부위가 낫기를 기다렸습니다. 포경 수술의 회복 기간은 통상적으로 일주일이므로, 이때의 할례도 회복을 위해 비슷한 기간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길갈에서 할례가 필요했던 이유는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유월절 규정에 따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출 12:48). 1세대는 모두 율법을 따라 생후 8일 째에 할례를 받았던 세대이며, 그들은 출애굽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최초의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2세대는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기에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의 첫 번째 유월절을 앞두고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로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위해 그들은 언약 백성의 표지인 할례를 받고 새로운 백성으로 출발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할례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애굽의 수치가 떠나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할례를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완전히 애굽의 속박과 비참한 삶과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그곳 지명을 ‘구르기’, ‘굴러감’을 뜻하는 ‘길갈’이라 불렀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가나안 땅에서의 첫 번째 거룩한 전쟁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깨끗케 하는 성결한 전쟁 준비를 하기 위함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국가 간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고, 군인들은 거룩한 종교심을 품고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전쟁 중에 군인들의 성관계를 금지시켰고(삼상 21:5-6), 진영 내에서는 배변을 못하게 했으며, 몽정을 했을 경우도 진영 밖으로 나가 자신을 정결케 해야 했습니다(신 23:9-14).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법궤의 권위와 지휘 아래 부정결을 멀리하고 깨끗한 심신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여리고 전쟁을 앞둔 그들의 할례의 시행은 이러한 준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할례의 시행은 사실상 군사 전략적 측면에서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회복 기간에 적들이 기습한다면 순식간에 무기력하게 쓰러질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기에 자신들의 상식과 어긋난다 해도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할례를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반드시 보호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직전에 여호와께서는 요단강의 기적을 행하셔서 온 가나안 족속의 마음이 녹아내리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중단된 만나와 그 땅에서 첫 번째 유월절(10-1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음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성취됩니다.

 

10○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10-12)

 

며칠 후 약속의 땅에서 첫 번째 유월절을 맞았습니다. 음력 1월 14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유월절에는 유월절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구워서 무교병과 쓴 나물을 곁들여서 먹었습니다(출 12장). 1월 15일부터 7일간은 무교절 기간으로 누룩이 들어간 유교병은 일절 먹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었으며’라는 진술에 이어서 ‘다음날 만나가 그쳤다’는 진술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유월절 이튿날’은 무교절 첫날을 의미합니다. 그날 그 땅의 소산물로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는데, 볶은 곡식(칼루이)은 보리입니다. 이 기간에 수확되는 곡식은 보리입니다. 유월절-무교절 기간의 첫 번째 안식일 다음 날이 보리의 초실절인데(레23:10-15), 정통 유대교에서는 그날이 음력 1월 16일입니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은 첫 보리 이삭을 수확한 뒤 그것을 볶아 가루로 만들어 하나님께 소제물로 바쳤습니다(레 2:14; 23:10-15). 현재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서 첫 번째 음식을 먹었던 날은 유월절(1월 14일) 다음날인 1월 15일로 이날은 무교절 기간(1월 15-21일)의 첫날입니다. 그 직후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하늘 음식인 만나가 그쳤습니다. 그들이 유월절 이후 보리의 초실절을 포함하여 무교절을 온전히 지켰다고 보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됨을 배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유월절을 지키며 감사함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계획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인도하심은 우리의 삶에 언제나 함께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과 감사는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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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4-02)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기념물

여호수아 4장 15-24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순종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순종은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따를 때,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순종은 우리 신앙 생활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자 하나님께서는 범람한 강을 틀어막은 자신의 기적을 거두어들이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지시하여 제사장들이 요단강을 벗어나게 하십니다. 여호수아가 명령하자 제사장들은 법궤를 메고 요단강으로부터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제사장들의 발이 육지에 닿는 순간 요단강이 다시 세차게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종료된 것입니다.

 

다시 흐르는 요단강(15-18)

기념석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경외심을 표현하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감사의 마음은 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기념물은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은혜를 나누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감사의 표현은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고, 서로를 격려하는 데 기여합니다.

 

15○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하신지라 17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에서 올라오라 하매 18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에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서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더라(15-18)

 

이스라엘 백성의 도하가 완료되자 요단강은 놀랍게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홍해가 갈라지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육지처럼 변한 바닷길 건너기를 완료한 뒤, 홍해가 뒤쫓아 오던 애굽 군사들을 모두 수장하면서 다시 제자리로 원상 복귀되었던 기적을 연상시킵니다. 오늘날과 달리 상류에 댐이 없던 시대에 요단강은 홍수기에 크게 범람하곤 했습니다. 당시 불어난 강을 건너는 수단으로 튼튼한 배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론되는데, 그 외에 앗수르 문헌에는 전투 중에 각 사람이 술을 담는 가죽 부대에 공기를 채워 그것을 튜브처럼 이용해 강을 건넜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에는 요단강이 크게 범람하는 우기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대규모로 그 강을 건널 만한 기술적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산사태나 신적인 기적만이 요단강 도하가 가능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범람하던 요단강 물이 끊겨 강바닥이 드러나고 그들이 강을 건넌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토록 넓은 강폭과 깊은 수심의 요단강이 멈춘 기적은 홍해가 갈라진 기적에 못지않은 놀라운 기적이었으며, 게다가 홍해가 그랬던 것처럼 강바닥은 육지처럼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특이한 자연 현상으로 보고 폭우로 인해 거대한 산사태가 발생하면서 범람하던 요단강이 가끔 일시적으로 끊기곤 했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그러한 해석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그 강을 건너려던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의 섭리로 엄청난 산사태가 일어나 강물이 끊긴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도 그 지역에서 부는 강력한 동풍이 특수하게 불면서 발생한 기적일 수 있습니다(출 14:21). 다만 이것들은 자연 현상이 사용된 기적들이긴 하지만, 엄청난 양의 물이 터져 나오고 바다 밑바닥이 마르는 등, 그 과정에서 단순히 자연 현상으로 설명될 수 없는 특이한 현상들이 동반되었다는 점에서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한 놀라운 기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길갈에 세운 기념석(19-21)

기념석은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신 일을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기념물의 의미를 자녀들에게 설명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듣고, 그들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념석은 단순한 돌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역사와 신앙의 유산을 전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자녀들이 기념석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과 함께하셨는지를 배우게 되고, 이는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는 데 기여합니다.

 

19○첫째 달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 치매 20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21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19-21)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도하한 날짜는 1월 10일로 적시되어 있습니다(19). 정확히는 출애굽 후 제41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제1세대는 모세를 지도자로 삼아 광야 40년의 생활과 더불어 모두 광야에서 죽었으며, 이제 여호수아와 더불어 제2세대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요단강 도하를 실행한 날이 1월 10일이라면, 여호수아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요단강 도하와 가나안을 향한 행진을 명령한 날은 새로운 세대의 막이 열린 제41년 1월 1일일 가능성이 큽니다. 요단강을 건넌 당일인 1월 10일(4:3), 그들은 여리고 동쪽에 위치한 길갈에 진영을 구축했습니다. 길갈은 고고학적 발굴에 따라 몇 군데 후보지가 거론되어 왔지만,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리고 북동쪽 2km 정도의 지점인 ‘키르베트 엘메프지르(Kirbet el-Mefjir)’라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북쪽(아마도 세겜과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길갈을 거점으로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공략한 점과 요단 도하 직후에 도착하여 진영을 구축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자의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넌 직후 여리고 인근 동쪽(정확히는 북동쪽)에 위치한 길갈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며칠이 지나면 이스라엘은 1월 14일의 유월절, 곧 가나안 땅에서의 최초의 유월절을 맞습니다(5장). 요단강을 건넌 날이자 길갈에 정박한 당일인 1월 10일은 유월절 양을 골라서 준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출 12:3). 이스라엘 백성은 길갈에서 유월절을 보낸 뒤 가나안 입성을 위한 첫 번째 전투를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타이밍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역사적-신학적 목적을 내포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할 때 1월 14일 유월절을 보내고(출 12-13장), 다음날 1월 15일에 즉시 애굽을 떠났습니다(민 33:3). 이때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규례를 알려주셨는데, 백성들은 1월 10일에 유월절 양/염소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최초의 유월절을 보내고 그 땅을 빠져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제 40년이 지나 약속의 땅에서 최초의 유월절을 보내고 그 땅을 정복할 것입니다. 정복은 출애굽과 마찬가지로 유월절이 기념된 뒤에 실행될 것이며, 이 점에서 ‘정복은 출애굽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길갈에 도착해서 진을 구축한 후, 여호수아는 요단 강에서 골라온 열두 개의 돌을 거기에 세웁니다. 그 돌들의 용도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그 돌들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을 증거하는 ‘기념석’입니다. 여기서 이 열두 개의 돌은 요단강 한복판에 세운 열두 개의 돌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많은 비평학자들은 서로 상이한 열두 돌에 대한 전승이 뒤섞인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반면에 어떤 학자들은 열두 개의 돌이 요단강에 잠시 세워졌다가 나중에 동일한 돌들이 길갈로 옮겨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명백히 서로 다른 종류의 열두 개의 돌들이 각각 요단강과 길갈에 세워졌음을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길갈 기념석의 목적(22-24)

기념물은 공동체 내에서 신앙의 연대를 강화하는 데 기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기적을 함께 경험한 공동체로서, 기념물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념물은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은혜를 나누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는 신앙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고, 서로를 격려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22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23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24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22-24)

 

장차 자녀들이 길갈에 세워진 돌들의 의미를 물을 때, 아버지들은 바로 이 역사적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아버지들은 그들이 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 그 땅을 점유한 것은 처음부터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로 인한 것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고대 근동의 전통과 관례에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기념석들이 세워진 곳은 모두 국가와 민족의 제의적 중심지로 여겼습니다. 이 돌들에는 그들의 신이 임재해 있으며, 따라서 그 돌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그 돌들은 전혀 우상과 무관하게 오로지 증거석과 기념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신명기는 반복해서 주상(주로 석상)과 목상, 조각된 신상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신 7:5;12:3;16:21-22;27:15). 특히 돌기둥인 주상(마체바)은 모두 제의적 용도로 만들어져 세워졌으며 때로 표면에 우상들을 묘사하는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설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기념석으로 세워진 돌들이라 할지라도 우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기념석의 용도와 관련해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기념석이 세워진 이후로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의 중요한 성지가 되어 대대로 여호와 신앙을 위한 중요한 역사적 순례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열두 개의 돌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하나씩 골라서 세운 돌입니다. 여기에는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돌들은 이스라엘 전체가 함께 간직해야 할 기억을 위한 공동의 유산입니다. 이 돌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언제까지 보존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모든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데리고 길갈을 방문할 때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들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1세대 조상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마르게 하셔서 그들이 건너가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2세대 조상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요단강을 멈추게 하시고 마르게 하셔서 그들이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온 땅의 주인이고 가장 강한 분임을 알게 하셨으며 가나안 온 땅이 그분의 명성을 듣고 마음이 녹아내리게 하셨습니다. 이 돌들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은 대대로 그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듯이, 우리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념의 필요성을 통해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공동체의 힘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을 다져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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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4-01)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념하며

여호수아 4장 1-14절


시골 마을을 방문하면 마을 입구에 ‘효자비’나 ‘열녀비’가 종종 있습니다. 이 비를 세운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당대의 훌륭한 효자가 자기 마을에서 나왔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둘째, 후대 사람들에게 효자를 본받아 충효사상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비석은 마을의 자부심과 교육적 가치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 도하를 완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각 지파에서 열두 명의 사람을 택하여 각자 하나씩 열두 개의 돌을 취하라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그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들은 요단강에서 각자 돌 하나씩을 취해 총 열두 개의 돌을 그날 밤 유숙할 곳인 길갈로 옮겨야 합니다.

 

요단강에서 취한 기념석(1-9)

순종은 단지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러한 순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고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며, 그분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1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3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 4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준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5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6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7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 8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가 명령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의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자기들이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에 두었더라 9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1-9)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강에서 12개의 돌을 가져와 기념비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돌들은 각 지파에서 하나씩 가져와서, 후대에 요단강을 건너는 기적을 기념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러한 기념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신실하심을 되새기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1) 요단강에서 기념석을 취하라는 명령(1-7)

 

앞서 미리 뽑아놓은(3:12) 열두 사람의 할 일이 지시됩니다. 각자 제사장들이 서 있는 요단강 한복판의 그 자리에서 열두 개의 돌을 골라 와야 합니다. 그 돌들을 그날 밤 그들이 진영을 구축할 장소로 옮겨놔야 합니다. 4:19에 의하면, 그곳은 인근에 위치한 길갈입니다. 그들이 각자 그 돌을 어깨에 메고 옮길 정도였다면, 아주 크고 무거운 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돌들의 용도를 알려줍니다. 그것들은 장차 대대의 후손들에게 표징으로 삼기 위해 세울 돌들입니다(6: 4:20 이하). ‘표징’(오트)은 앞서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건넨 약조의 표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요단강에서 취한 열두 개의 돌들은 요단강의 멈추어 백성이 마른 땅을 지났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돌입니다. 이 돌들이 표징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은 후손 대대로 자신들이 가나안 입성 과정에서 어떻게 요단강을 건넜는지를 기억할 것입니다(6-7).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7월 10일 동쪽 길갈에 진을 친 뒤 여호수아는 그곳에 열두 개의 돌을 기념석으로 세웠습니다(4:20 이하). 그들은 약속의 땅에 안착하기 위해 홍수로 범람하던 요단강을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습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가나안 땅은 사람의 노력과 군사적 행동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여리고 성점령 과정에서도 다시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람 편에서 필요한 것은 믿음에 따른 절대적 순종뿐이며, 견고한 여리고도 통상적인 군사 작전이 아닌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점령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세운 공로는 전혀 없습니다. 이 점에서 분명히 가나안 입성원리는 인간의 구원 원리와 상응하는 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은 스스로의 공로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 열두 개의 돌은 대를 이어 그것을 항상 잊지 않게 만드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바다가 갈라져 그들은 애굽을 탈출했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물이 멈추어 드디어 가나안에 입성했습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이중 구원론’의 근거로 이 장면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출애굽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며 광야 40년의 훈련이 필요하고, 궁극에는 가나안 입성을 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논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에게 현재의 삶은 광야 생활과 같으니 아직 구원이 보장된 삶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중 구원론은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으며, 필연적으로 행위 구원론과 율법 종교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2) 요단강에 세워진 별개의 기념석(8-9)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요단강의 제사장들이 선 자리에서 열두 개의 돌을 고른 뒤 그날 밤 진을 구축할 장소로 옮겨왔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 돌들 외에 또 다른 열두 개의 돌을 표징으로 세웁니다(9).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서 있던 자리에서 열두 개의 돌을 취해 갔는데, 이제는 바로 그 자리에 여호수아가 별개의 열두 개의 돌을 세웁니다. 여기서 두벌의 열두 개의 돌이 등장하므로 이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4:15-24에서 살펴볼 것인데, 결론만 말하자면, 이 새로운 열두 개의 돌들은 분명히 거기서 취해서 옮겨간 열두 개의 돌과 별개의 기념석들입니다. 열두 개의 돌이 없어진 자리를 열두 개의 다른 돌이 채운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난 바로 그 현장의 한복판, 즉 제사장들이 제자리에 서자 요단 강물의 흐름이 멈췄던 바로 그 장소에 그 돌들을 기념으로 세웠습니다. 이 돌들은 여호수아 이후의 어느 시기까지(‘오늘까지’) 우기 때에는 물에 잠겼다가 건기 때에 드러나곤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은 여호수아로부터 먼 후일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 그 사이 홍수가 반복되고 특별히 큰 물살을 동반하는 큰 홍수가 발생할 때는 세워놓은 돌들이 휩쓸려 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요단강 도하 이야기의 요약(10-14)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를 때, 그분의 보호 아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고 그분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10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사 백성에게 말하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한 일이 다 마치기까지 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에 서 있고 백성은 속히 건넜으며 11모든 백성이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 12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른 것 같이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앞서 건너갔으니 13무장한 사만 명 가량이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니라 14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가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10-14)

 

이 단락은 현재의 극적인 요단강 도하 사건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선 요단강 도하와 가나안 진격 명령이 내려진 순서가 간결하게 정리됩니다. 모세는 죽음 직전에 여호수아에게 이제 백성을 이끌고 그 땅에 들어가라고 명령합니다(신 31:7-8).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지시를 받고 내린 명령입니다. 모세의 명령은 곧 언제나 그를 통해 말씀을 전하셨던 여호와의 명령이었습니다. 여기서 요단강 도하의 진행 과정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법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강 한복판에서 있고, 강물이 멈추고 마른 땅이 드러나자 모든 백성이 속히 강을 건넜습니다(10). 백성이 강을 모두 건넌 뒤,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있던 법궤를 들고 강을 빠져나왔습니다.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다’는 말은 먼저 건너간 백성이 뒤따라 강을 빠져나오는 법궤와 그것을 멘 제사장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과 타나크 번역(TNK)은 법궤와 제사장들이 ‘백성 앞으로 나갔다(advanced to the head of the people)’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행진 시에는 법궤가 언제나 선두에서야 하기에, 요단강에서 빠져나온 법궤와 제사장들이 다시 백성들 맨 앞으로 이동했음을 반영한 번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선두에는 백성과 거리를 두고 법궤와 그것을 멘 제사장들이 앞장서고, 백성의 대열에서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중무장을 하고서 선두에 섰습니다(12). 이 두 지파 반은 요단강을 건널 때부터 모든 지파의 선봉대로 앞장선 것으로 보입니다. 두 지파 반의 무장 병력은 총 사만명이었으며, 그들이 선두에 서서 법궤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평지에 도착했습니다.

민수기 32장에서 두 지파 반은 요단 동편의 광활한 목초지인 길르앗 땅을 자신들에게 할당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대신 그들은 좋은 목초지를 먼저 배당받은 만큼 자신들이 요단 서편 땅을 점령하는 데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서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가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겠소’(민 32:17). 이 말의 의미는 그들이 전쟁에서 공격의 선봉대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장하고’에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선발대로 뽑혔다는 의미를 표현하는 중간태 니팔형 ‘네할레츠’가 사용되며, 뒤에 신속함을 가리키는 ‘후쉼’이란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속한 무장을 지시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마치 특공대와 같이 특수정예 부대로 선발되어 신속한 무장을 갖추고 전쟁터에서 앞장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 정복이 완료되고 그 땅이 각 지파들에게 분배될 때까지 요단 동편의 길르앗, 곧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민 32:18). 동편 지파의 이런 제안은 상당한 희생을 각오함으로써 자신들이 받을 땅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전 약속대로 지금 두 지파 반은 요단강 도하에서부터 백성의 대열의 선두에서 행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총 사만 명으로 집계되는데, 이는 실제 전투가 가능한 현역 전투 병력으로 보아야 합니다.

요단강 도하의 기적과 더불어 여호수아의 지도권이 확고해집니다. 앞선 세대는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어 그의 지팡이의 권능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카리스마적 권위 앞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앞서 3:7에서 예고하신 대로, 2세대 백성 앞에서 여호수아의 행진 명령과 더불어 요단강이 갈라지게 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크게 높여주셨습니다. 온 백성이 여호와를 힘입은 여호수아의 행진 명령과 더불어 요단강이 멈추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여호수아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신뢰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분의 임재를 삶 속에서 느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원칙들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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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3-01)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라

여호수아 3장 1-17절


 

대부분의 일들에는 중요성만큼 위험부담이 따릅니다. 위험부담이 없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위험부담이 큰 일을 할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에는 쉽게 나서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뜻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은 큰 인물로 인정받습니다. 중요한 일을 감당하는 데는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 무사히 귀환한 두 정탐꾼의 보고를 받은 여호수아는 아마도 다음날 아침에 백성을 이끌고 싯딤을 떠나 요단강 강변으로 이동해 거기에 진을 쳤습니다. ‘사흘이 지난 후’ 관리들은 백성에게 요단강 도하를 위한 행동 지침을 내리고 주의사항을 알립니다. 앞서 말했듯이 날짜를 기준으로 할 때는 1-3장의 흐름이 잘 들어맞지 않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장소를 기준으로는 서사의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요단강 도하를 예고하다(1-6)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마음과 행동을 정결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정결한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올바른 길로 인도받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면, 그분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완벽하고 신실합니다.

 

1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2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4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5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6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1-6)

 

서사의 순서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1장에서 요단 강 도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와 백성은 2장에서 싯딤에 진을 치고 있는 가운데 두 정탐꾼을 보냅니다. 3장에서 싯딤으로부터 요단강 강변으로 다시 이동합니다. 요단강 도하의 행동 지침은 여호수아에 의해 관리들에게 하달되고(1장) 이어서 관리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달됩니다(2). 우선 제사장들이 언약궤, 즉 법궤를 메고 앞장서야 합니다(3). 여기서 ‘레위 사람 제사장’이라는 표현과 관련하여, 제사장은 신명기에서도 분명히 레위인과 다른 특별한 직책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평상시의 일반적인 법궤 운반은 레위의 고핫 가문이 맡았지만, 특별한 상황에서는 제사장들이 직접 법궤를 멨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신명기는 법궤 운반을 레위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이 맡았다고 설명합니다(신 31:9). 이것을 민수기 신명기의 모순과 차이로 이해할 필요는 없으니, 이는 성막의 모든 비품의 관리와 운반 책임은 제사장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궤와 뒤따르는 백성 사이의 간격이 이천 규빗(약 900m)으로 설정됩니다. 법궤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경고는 둘 사이 간격을 이천 규빗보다 좁히지 말고 언제나 그 간격을 유지하라는 뜻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천 규빗의 간격은 아마 최장 거리로 그 간격 내에서 법궤가 앞장서 행진했을 것입니다. 접근 금지의 경고는 군사들이 법궤에 너무 근접해서 혹시라도 법궤와 접촉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를 당부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후대의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에 여행 가능한 거리를 이 규정에 근거하여 이천 규빗으로 제한하였습니다. 여기서 법궤는 내비게이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출애굽기-민수기는 물론이고 신명기에서도 확인되는 바로는 신적 구름이 법궤 위에 현현하여 그들의 갈 길을 지시해주었습니다(신 1:33). 여호수아서는 성막과 법궤 위에 출현한 그 신적 구름의 현현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신명기 전통을 잇는 여호수아서는 선두에 선 법궤의 행진에서 그 신적 구름의 현현을 전제하거나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법궤/구름 기둥은 광야에서 생소한 환경 속에서 길에 익숙지 않아 갈 바를 모르던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인도했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이동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이전에 지나가 보지 못한 길을 지나가야 합니다(4). 이때 법궤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야할 방향의 이정표 역할을 했습니다. 생소한 길을 가는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믿음과 절대 순종뿐입니다.

또한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준비 사항은 ‘성결함’입니다. 이것의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성결케 되는 방법이 여기서는 전혀 제시되지 않지만, 출애굽기 19장은 이것에 대한 암시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옷을 깨끗이 빨고(출 19:10,14; 흔히 옷을 빨 때 목욕도 전제되는 경우가 많다) 남녀 간의 잠자리를 갖지 않으며(출 19:15)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선(여기서는 법궤와의 간격)을 넘지 않는 것입니다(출 19:12-13, 21, 23-24).

 

요단강 도하를 명령하다(7-8)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지도자를 따르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할 때, 우리는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의 보호와 인도는 우리가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7○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8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7-8)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 행진하여 요단강을 걸을 것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개인적인 말씀을 통해 용기를 북돋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앞서 모세의 시대에는 자신이 모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여러 이적과 기사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진 기적, 그리고 광야에서의 숱한 이적과 기사가 모세의 손과 지팡이를 통해 발생했습니다. 이제 요단강의 기적을 통해 여호와께서 분명하게 여호수아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물이 갈라지는 이 기적은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른 사건의 재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을 가른 것처럼 이제 여호수아가 동일한 능력으로 물을 가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신 것처럼 여호수아와 함께하신 것을 모든 백성이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담대한 요단강 도하를 지시하시고, 이제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서라고 명령합니다(8).

 

백성을 독려하는 여호수아(9-13)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를 때,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면,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며, 그분의 놀라운 일을 체험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과 순종은 우리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기적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9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10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11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12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13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9-13)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독려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제 요단강 도하의 기적이 일어날 것인데, ‘이것으로서’ 그들은 가나안의 모든 족속들을 하나님께서 쫓아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신명기에서 지목한 가나안의 일곱 족속이 다시 등장합니다(신 7:1; 20:17). 가나안 땅의 종족들을 대체로 ‘가나안의 일곱 족속’으로 분류하지만, 실제로 구약은 때로 그보다 적은 대여섯 족속을, 때로는 훨씬 많은 족속들의 이름을 나열합니다(예를 들어 창세기 15:19-21에는 열 족속이 나열된다). 구약에 나오는 가나안 족속은 열다섯 종족이 넘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일곱 족속은 ‘7’이라는 완전수에 맞춘 대표 종족들로 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총 열두 명의 남자를 선발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선발된 사람들이 할 일은 4장에서 드러나는데, 요단강 한복판에 열두 개의 돌을 세우기 위함입니다(4:1-9). 여호수아는 미리 백성에게 예고합니다. 백성은 이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강에 닿는 순간 강물이 멈추고 흐름이 중단되어 한 곳에 물이 쌓이게 될 것입니다.

 

요단강이 멈춘 기적(14-17)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우리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이 우리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14○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6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14-17)

 

여호수아의 명령과 함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과 온 백성이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계절적으로 이 시기는 성서력 음력 1월초로서 현대 태양력의 3-4월에 해당하며 봄철의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몇 개의 댐들로 수량이 조절되는 오늘날과 달리, 고대에는 따뜻한 우기 막바지에 요단강이 급격히 범람하고 헤르몬 산 일대의 고산 지대에서 눈이 녹으면서 큰 홍수가 발생했습니다(15). 고대에 크게 범람하던 요단강이 멈춘 기적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발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4:15-24에서 더 자세히 논할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닿자 거대한 강줄기의 급류가 갑자기 멈췄습니다. 강물이 쌓이면서 사르단 근처 아담 성읍의 변두리까지 뒤덮었습니다. 아담의 위치는 거의 확실하게 오늘날의 텔 에드-다미예(Tel ed-Damiyeh)로 추정되는데, 얍복 강이 요단강에 합류하는 곳입니다(텔[Tel]이란 도시나 주거지였던 곳이 흙더미가 되어 유적지가 된 곳을 말하며 고고학자들이 발굴된 ‘텔’마다 고유의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사르단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하로니(Y. Aharoni)를 비롯한 다수의 학자는 아담에서 가까운 얍복 강 너머의 텔 움하마드(Tel Umm-Hammad)로 추정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북쪽의 텔 엘사이디예 (Telel-Saidiyeh)로 간주합니다. 본문을 사르단과 아담이 가까이 위치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전자가 더 타당해 보입니다. 이 경우 강물은 아담 성읍과 사르단 성읍 사이의 요단강 지류인 얍복강을 채우면서 쌓인 것으로 보입니다.

백성들은 물이 끊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놀랍게도 강바닥은 마른 땅처럼 변했습니다(17). 이것 역시 홍해가 바닥까지 마르면서 갈라졌던 기적의 재현입니다. 언약궤를 메고 앞서 가던 제사장들은 마른 강바닥에 멈춰섰습니다. 그들은 모든 백성이 계속 행진하여 요단을 다 건널 때까지 강 한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만큼은 법궤가 백성들 선두에 서지 않고 오히려 뒤 편에 위치했는데, 결국 법궤는 백성을 인도하면서도 때로 특별한 경우에는 백성의 뒤편에서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신뢰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강을 건넜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의 명령에 응답해야 합니다. 순종과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따를 때, 기적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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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2-02)

 


라합의 믿음과 구원의 이야기

여호수아 2장 15-24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편안하게 안주(安住)하는 것을 원합니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편안히 사는 것이나 현재의 상황이나 처지에 만족한 삶을 사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위치(position)이나 지키고 안주하려는 자세는 편안함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들은 주변 환경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을 살다보니깐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 민수기와 신명기 둘 다에서 정탐 활동 자체를 무제 삼고 비난하는 분위기는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다만 정탐 활동 후 그들의 불신과 낙심,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질책하고, 그것 때문에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평가합니다. 현재의 여리고성 정탐 활동과 이어지는 아이 성 탐색 자체에 대해서 여호수아서는 아무런 부정적 평가를 내리지 않으며 오히려 장당하고 필수적인 활동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정탐꾼들의 탈출(15-16)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성장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안주하는 것은 편안함을 줄 수 있어도 절대 성장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성장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장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본문의 라합 여인을 통해 그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5○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16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15-16)

 

라합은 지체 없이 정탐군들을 탈출시킵니다. 성문이 닫혔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신분이 드러나 성중에 소식이 퍼졌을 것이기에 은밀한 탈출이 필요했습니다. 날은 어두워져 눈에 띄지 않는 성벽을 통한 탈출을 감행하였습니다.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있었습니다. 문자적 의미는 ‘그녀의 집은 성벽에 있었고 그녀는 벽에 살고 있었다’입니다. 대부분의 번역들이 매우 모호합니다. 특별히 그녀의 집이 ‘성벽의 바깥쪽에 있었다’는 번역은 여리고 성의 성벽이 이중 구조였다는 사실에 기반한 번역으로 보입니다. 어떤 형식으로 집이 지어져 있든지 간에, 그녀의 집이 안쪽 성벽이 아닌 바깥쪽 성벽 바로 위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집 창문에서 성벽으로 곧바로 줄을 달아 내렸다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라합은 두 정탐꾼을 자신의 집의 창문으로부터 줄을 매달아 탈출시킵니다. 날이 어두워졌고 인적이 드문 성벽 근처라는 특징으로 인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합은 그들에게 수색대를 피해 산으로 올라가 사흘간 숨어 지내라고 충고합니다. 라합의 말은 여리고 군인들의 수색 활동이 매우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정탐꾼들과 라합의 서약(17-21)

우리는 약속을 지키고 신뢰를 바탕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그분의 보호와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한 말로 끝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확신을 가질 때, 그분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원칙입니다.

 

17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21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17-21)

 

정탐꾼들은 라합과 약속한 서약에 대한 보증의 징표, 곧 앞서 라합이 요구했던 징표를 제시합니다. 그 징표와 더불어 정탐꾼들은 서약에 대한 책임을 다함으로써 라합에게 무슨 일이 발생할 경우 면책될 것입니다. 그 징표는 붉은 줄입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온 가족과 친족이 함께 구출되도록 그녀의 집에 모여 있을 것을 당부합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차례 한 사람으로 인해 가족이 연대 구원을 얻는 사례가 나타납니다(예,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 노아와 그의 가족; 라합과 그녀의 가족; 사도행전에서 고넬료와 그의 가족 등). 또한 한 사람으로 인해 가족 전체가 망하기도 합니다(예. 아간과 그의 가족). 마치 구원의 문제에서 연좌제가 적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시에 멸족에서 개인의 결단으로 생명을 얻는 사례도 존재합니다(예. 고라의 아들들). 특별히 고라의 아들들이 구원을 얻은 사례는 구약에서도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결국 가족과 공동체의 연대보다는 개인의 결단이 최종적이고 궁극적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라합의 가족과 가까운 친족들은 나중에 결국 라합의 집에 한데 모임으로써 모두 구원을 얻는다. 가족들 각자의 선택에 의한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민 26:10-11; 대상 9:19;20:9).

여기서 왜 정탐꾼들은 ‘붉은 줄’을 징표로 제시했습니까? 분명 이 붉은 줄은 구원의 생명줄이었습니다. 히브리어 ‘티크봐’가 ‘희망’이라는 뜻의 단어이기도 하므로 학자들은 이 단어가 의도적으로 여기서 사용된 것으로 봅니다. ‘티크봐’가 ‘끈’으로 사용되는 것은 여호수아의 이 본문에서만 나타납니다(수 2:18,21). 여기서 ‘희망’과 ‘끈’의 의도적 연결은 라합과 그의 가족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인 소망의 끈이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정탐꾼들은 ‘붉은 줄’을 매달라 했습니까?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그 줄이 정탐꾼들을 탈출시킨 밧줄이었을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라합이 내린 밧줄(헤벨)과 그 붉은 줄(후트)은 각각의 히브리어가 다르고 본문의 대화를 통해서 ‘붉은 줄’은 정탐꾼들이 단순히 성벽에 달아맬 표징으로 건네준 것으로 추론됩니다. 어떤 사람은 원래 창녀의 집 표시로 평소에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아 놓았다는 견해를 내놓지만 증거가 없으며, 그 경우 다른 창녀들의 집에도 붉은 줄이 달려 있었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라합의 집을 특정하는 표시 기능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앞서 말한 대로 정탐꾼들의 ‘이 붉은 줄을 매라’는 말에서 그 줄은 정탐꾼들이 건넨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이 ‘붉은 줄’에서 그리스도의 ‘붉은 피’를 찾으려 합니다. 그리스도의 붉은 피가 생명을 구원한 피라는 것이 이 생명줄인 ‘붉은 줄’에 암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붉은 줄은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운 해석인데, 일단 성경에서 ‘붉은 색’이 언제나 자동적으로 ‘피’와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붉은색’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를 암시한다는 과도한 풍유적 해석은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붉은 줄’의 기능을 볼 때 피와의 관련성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 시 유월절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붉은 피’는 그 집안에 있는 가족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모든 장자를 죽인 여호와의 사자가 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그냥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정탐꾼들이 요구한 ‘붉은 줄’은 이스라엘 군인들을 그냥 지나가게 함으로써 라합의 모든 가족과 친족의 생명을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다’(19). 이런 측면에서 ‘붉은 색’이 이 줄의 색깔로 선택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물론 붉은 색의 줄이 성벽의 색깔을 배경으로 단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 그런 해석을 주의하라는 지적 또한 정당합니다. 그러나 또한 붉은 색을 피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닌 듯합니다.

정탐꾼들은 붉은 줄로 표식이 된 그 집의 안전을 보장합니다. 그러나 만일 라합의 가족과 친족 중 누구라도 그 집밖으로 나온다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반면에 아무라도 이스라엘 군인이 붉은 줄의 표식을 무시하고 라합의 집으로 들어가 그들을 해친다면, 그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19). 이렇게 해서 라합의 집은 파도가 휩쓰는 홍수 속의 구원의 방주와 같고 유월절의 재앙 가운데 피가 발라진 안전한 집과 같습니다. 만일 노아 가족 중 누군가 방주를 타지 않는다면, 피가 발라진 문설주 밖으로 나간다면 재앙을 피할 수 없듯이, 라합의 집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구원에서 배제됩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구원은 결국 무임승차가 아닌 개인의 선택과 결단의 결과임을 말해줍니다. 정탐꾼들은 라합 또한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정탐꾼들은 만일 그녀가 여리고에 정보를 건네주어 배신한다면, 그 책임은 라합 자신이 져야 하며 그 서약은 파기되고 자신들은 무고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라합은 다시 한 번 그들 간의 맹세에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들을 보낸 뒤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아 놓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을 살렸던 동일한 창문을 통해 라합과 그의 가족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정탐꾼들의 귀환과 보고(22-24)

우리는 지혜롭고 신중하게 행동할 때 안전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인도하심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우리를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의지할 때, 그분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를 때 우리는 안전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과 신뢰는 우리 삶의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22○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뒤쫓는 자들이 돌아가기까지 사흘을 거기 머물매 뒤쫓는 자들이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찾지 못하니라 23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 24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22-24)

 

수색대를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한 두 정탐꾼은 라합의 조언대로 산으로 올라가 사흘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여기서도 사흘은 동태를 살피기에 충분한 기간을 의미하는 어림수의 기간일 수 있습니다. 여리고의 수색대는 ‘모든 길을’ 다니면서 정탐꾼들을 색출하려 애썼습니다. 이것은 수색대가 그들의 예상 탈출로를 모두 봉쇄하고 검문하면서 인근 지역을 뒤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정탐꾼들이 이미 정보를 입수해 산에 잠복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주로 길목을 차단하여 수색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탐꾼들은 이스라엘 진영으로 무사히 복귀한 뒤, 여호수아에게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의 자초지종을 보고했습니다. 아마 보고 내용에는 여리고에 대한 기본적인 군사적 정보와 더불어 라합의 손에 의한 탈출극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는 고무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리고 성이 이중벽으로 견고하게 차단된 요새화된 성이라는 것을 보고 왔지만, 여리고와 그 땅의 모든 사람들이 강 건너에 세력을 구축한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있음을 알렸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신실하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라합의 믿음과 용기는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게 만듭니다. 정탐꾼들과 라합 사이의 약속과 신뢰는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뢰와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 우리는 진정한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이 모든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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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2-01)


라합의 믿음과 하나님의 구원

여호수아 2장 1-14절


 

우리는 믿음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으며, 누구나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행동할 때,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인도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라합의 이야기는 용기와 결단력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의 입구에 위치한 첫 번째 도성 여리고를 정탐하기 위해 두 사람을 ‘은밀히’ 보냅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은 현재 요단강 동편의 싯딤에 있습니다. 그곳은 민수기 25장에서부터 이스라엘이 머물기 시작하던 곳인데, 거기서 그들은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두 정탐꾼의 여리고 탐문(1-2)

중요한 일을 앞두고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철저한 준비는 성공의 열쇠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따를 때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삶에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우리는 안전하고 성공적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1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1-2)

 

이스라엘 백성은 싯딤에 진을 구축한 뒤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어떤 사람들은 여리고 정탐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에 단절을 일으킨다고 말하나 1-3장 서사의 스토리 전개는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도하 지시-정탐-도하 실행. 이 여리고 정탐 활동은 민수기 13-14장의 열두 정탐꾼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1세대의 정탐 활동과 더불어 이러한 정탐 활동은 여호와에 대한 불신을 암시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의 열두 정탐꾼과 아이 성 정탐을 보듯이 정탐 자체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군사 활동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두 정탐꾼은 기생 라합의 집을 숙소로 잡습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70인경, 신약에서도 그녀의 신분은 ‘기생’(포르네)으로 확정됩니다(히 11:31; 약 2:25). 이것의 어원인 동사 ‘자나’는 간통과 같은 남녀 간의 불법적인 성관계를 지시합니다. 정탐꾼이 기생 라합의 집으로 들어간 것은, 창녀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기에 서로 낯선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자신을 은닉하고 은밀하게 행위를 즐기기 때문에 낯선 사람의 출현이 외부에 발설될 위험이 적었을 것입니다. 또 라합은 당시 사회적 소외 계충의 신분으로 멸시받고 소외된 변방의 인물이었고 또한 집의 위치도 주변으로 밀려난 성벽 주변이었기에, 그녀의 집에서 벌어진 일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탐꾼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그녀가 여리고에 우호적인 태도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라합은 아마도 그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적극 동조합니다.

본문은 원인과 과정에 대해 침묵하지만, 정탐꾼들의 바람과 달리 그들의 신분은 노출되었습니다. 그 장소의 은닉성이 그들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갑니다. 신고자는 생소한 외지인들을 인지한 뒤 인근까지 진격해 와 그 땅을 위협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어떤 계기로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잠입해 왔다면 정탐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신고자가 ‘두 명’이라고 하지 않고 ‘몇몇’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정탐꾼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모르고 있습니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한 여리고 성은 규모가 작고 주민도 최대 삼천 명 정도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론되기 때문에 그들은 외지인에게 쉽게 발각되었을 것입니다.

 

두 정탐꾼을 숨기는 라합(3-7)

우리는 때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용기와 결단력은 우리의 신앙과 행동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지혜로운 대처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됩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과 행동이 함께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함을 보여줍니다.

 

3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4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6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3-7)

 

여리고 왕은 즉시 라합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그곳을 수색합니다. 당시 가나안은 부족 중심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세력 경쟁과 더불어 전략적 공생을 하고 있었는데, ‘여리고 왕’이라는 표현에서 여리고 또한 도시 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이미 두 정탐꾼을 숨긴 상태입니다(6). 여기서 우리는 정탐꾼들과 라합 간에 이미 모종의 거래와 대화가 있었는데, 그들이 이미 여호와에 대한 소문을 듣고 겁을 먹은 라합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라합은 그들을 옥상의 삼대(stalks of flax) 속에 숨겼습니다. 당시 가옥 구조는 지붕이 평평한 옥상이었습니다. 그 공간은 햇볕이 잘 들어 곡식을 말리거나 물건을 보관하는 등 다양하게 활용이 가능했습니다. 삼대는 당시 옷감 재료인 베실을 만드는 재료로서 상당히 중요한 작물이었습니다(베실 제조 과정이 이집트의 한 벽화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팔레스타인의 보리 수확은 성경의 음력 달력으로 1월의 유월절 어간 (태양력 3-4월)에 시작되는데, 키가 1미터 정도인 삼대는 한 달 앞서 (태양력 2-3월) 수확을 해서 말렸습니다(Howard; 요세푸스 역시 평평한 지붕에 삼대를 말리는 풍습을 기록한다[Josephus Ant. v, i, 2]). 이것은 그들이 여리고를 공격하기 전인 1월 10일에 요단 강을 건넌 뒤 길갈에 진을 쳤다는 4:19의 보고와 맞아떨어집니다.

라합은 여기서 거짓말을 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그녀의 거짓말은 그 자체로 죄라고 지적하며 조직신학에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소위 상황 윤리를 둘러싼 논쟁을 합니다. 전통적 견해와 조직신학의 윤리학에서는 상위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하위의 계명을 어쩔 수 없이 위반하는 경우 윤리적으로 죄로 간주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살인을 막기 위해 사람을 숨기고 추적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속임수로 정죄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여리고 군인들은 라합의 거짓말에 쉽게 속고 맙니다. 아마도 여관에 숱한 외지인이 일상적으로 드나들기 때문에 ‘그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모르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라합의 말은 전혀 거짓으로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밀정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고 정탐 지역을 두루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에, 군인들은 그들이 해가 지기 전에 급히 떠났다는 라합의 말을 쉽게 믿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한발 늦었다며 초조해했을 것입니다. 여리고 군인들은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 이스라엘 진영으로 원대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나루터까지 쫓아가서 수색했습니다. 그리고 성문을 닫아 혹시 성안에 아직 머물고 있을지도 모를 간첩들의 탈출로를 봉쇄했습니다.

 

하나님의 명성을 들은 라합(8-11)

우리는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용기와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결단력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용기와 결단은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데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로 이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뤄 나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8○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8-11)

 

여리고의 수색대를 따돌린 라합은 옥상으로 올라가 상황을 알리면서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망명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녀가 수색하러 온 군인들에게 문을 열어주기 전에 먼저 옥상에 정탐꾼들을 숨겼다는 것은 정탐꾼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고 그녀를 이미 설득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녀가 그들에게 협조한 이유는 현재의 고백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녀와 여리고 주민들, 온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여호와가 그동안 행하셨던 일을 이미 모두 전해 듣고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과 홍해가 갈라진 기적, 그리고 요단 동편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의 연달은 패배와 전멸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사인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들은 마음이 녹아내리고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 곧 하늘 위와 땅 아래를 모두 다스리는 진정한 신이라고 고백합니다(11).

 

구원을 부탁하는 라합(12-14)

인간 관계에서 신뢰와 서약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뢰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기반이 되며, 서약은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요소가 없으면 관계는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신뢰와 서약은 관계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합니다. 특히 신뢰는 상호 협력과 소통을 원활하게 합니다. 이로써 건강하고 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12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14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12-14)

 

아마 여리고에서 천대받은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를 깨닫고 새로운 삶을 위해 종교적 망명을 결단합니다. 각자의 국가 신을 숭배했던 고대 사회에서 다른 국가 신으로의 개종은 곧 국적을 바꾸는 정치적 망명이기도 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입장에서는 저주받을 배신자였겠지만, 그녀는 더 나은 삶을 선택했으며 참된 신이 누군지를 깨달은 뒤 피할 수 없는 심판으로부터 생명을 얻을 기회를 부여잡은 것입니다. 그녀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지혜로웠습니다. 모압 여인 룻과는 다른 동기의 신앙적 결단입니다. 라합은 자신과 더불어 모든 가족과 친족들의 생명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이 그들에게 자비(헤세드)를 베풀었으니, 이제 그들도 자신에게 자비(헤세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서약(맹세)과 더불어 증표를 요구합니다. 증표(오트 에메트)는 문자적으로 ‘진실의 표식’을 뜻합니다. 라합의 요구는 그들의 서약이 참되다는 표시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 증표는 바로 나중에 정탐꾼들이 구원을 위한 표시로 삼은 붉은 줄일 것입니다. 두 정탐꾼은 라합의 요구대로 맹세합니다. 그들은 만일 라합이 비밀을 지키면, 자신들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을 걸고 라합과 그의 가족들의 생명을 지켜주겠다고 보장합니다(공동 번역과 새번역을 보라). 그리고 라합의 자비 (헤세드)에 보답하여 그들도 라합에게 자비(헤세드)와 진정성(에메트)을 베풀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그분의 계획을 따를 때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용기와 결단력을 가지고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모든 요소가 합쳐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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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1-02)


여호수아의 명령과 이스라엘의 헌신

여호수아 1장 10-18절


 

에티오피아 마라톤 선수 비킬라 아베베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맨발로 우승하며 ‘맨발의 왕자’로 불렸다. 그는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도 2시간 12분 11초로 2연패를 달성했다. 그러나 1969년 교통사고로 반신불구가 되었고, 두 다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두 팔을 단련하여 장애자 올림픽 썰매 경주에서 우승했다. 1973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양식을 준비하고 하면서 ‘사흘 안에’ 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고 일러둡니다. 본문에서는 생략하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히 나나님께서 앞서 여호수아에게 전해준 통보일 것입니다. 강을 건넌 뒤 여호와께서 ‘곧 주실’ 그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준비하라 약속된 땅 (10-11)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에 대해 조금의 반문이나 의혹도 없이 그 자리에서 즉시 실행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곧바로 순종하는 것은 성도의 본분입니다(사무엘상 15:22).

 

10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1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10-1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행정적인 명령을 내리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군 지휘관들에게 백성에게 전할 명령을 주며, 삼 일 안에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차지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수아의 리더십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1) 관리들에게 명령하는 여호수아(10)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곧 실행에 옮깁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백성의 지도자들, 즉 관리들에게 이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여기서 ‘관리’이란? 원 뜻은 ‘글 쓰는 사람’, ‘서기’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아마 군사 지도자들이기보다는 이스라엘 제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 관료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장로들에게도 지칭하기도 했습니다(대상 23:4; 27:1; 대하 26:11; 34:13). 이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이며 부분적으로 종교적인 임무를 지닙니다(신 1:15-16; 16:18; 대하 19:11; 34:13). 여호수아는 자신이 받은 사명을 이스라엘의 다음 지도자인 장로들에게 명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질서한 곳에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질서가 있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고전 15:40).

 

(2) 양식을 예비(11a)

 

여호수아는 지도자들에게 요단강을 건널 시점이 임박했음을 알립니다. 그래서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11a)고 명령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식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만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갈 때에 필요한 전쟁용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문맥상 아직 광야 40년 동안 내리던 만나가 중단되지 않은 상황입니다(참조 5:12). 백성들이 양식을 준비하고, 3일 안에 요단을 건너는 것은 ‘양을 준비하고 3일 후에’ 애굽을 떠난 출애굽을 연상케 합니다(참고 출 12:3-6).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는 것을 또 한 번의 출애굽 사건으로 묘사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출애굽 1세대가 홍해를 건너는 체험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고 홍해를 건너는 체험으로 이어지는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공통의 경험으로 신앙고백의 기초를 이룹니다. 구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홍해를 건너는 경험을 한 것처럼, 새로운 세대는 모두 요단강을 건너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4:21-23).

 

(3) 사흘 안에 가나안 입성(11b)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는 이유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함입니다(11b). 본문은 가나안 땅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으로 묘사합니다(11b,1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여호수아서에서 자주 나오는 언약적인 표현입니다(1장에만 3번; 11,13,15). 이스라엘은 언약을 맺음으로 ‘여호와의 백성’이 되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차지하다’로 번역된 ‘야라쉬’는 자주 ‘유업을 얻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 백성의 자격으로 그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사역형 동사(히필, ‘차지하게 하다’)로 표현하여 가나안 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며, 유업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사흘’이란? 문자적으로 ‘삼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짧은 기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출 19:11, 스 4:16, 호 6:2). 가나안 침공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선포였습니다. ‘담대하라’는 하나님의 권면의 말씀에 힘입어 아주 담대하여 3일 만에 가나안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 백성에게 알렸던 것입니다. 지도자의 담대함은 백성들에게 파급됩니다. 성도들은 영적 전쟁을 항상 앞두고 나아가는 자로서 담대히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기억하라 옛 약속(12-15)

하나님께서 말씀을 마치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명령에 전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서 매우 기쁘게 듣고서 순종합니다.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무작정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순서와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보여주셨던 약속과 방법을 보여 주셨던 것을 따라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12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여 이르되 13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14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 15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하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12-15)

 

여호수아가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는 모세가 약속한 대로 그들의 가족과 가축은 요단강 동편에 머무르지만, 싸울 수 있는 용사들은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 전투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된 땅을 차지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로 결속되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협력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1) 여호수아의 말(12)

 

여호수아는 먼저 누구에게 독촉합니까? 광야에서 모세에게 요단강 동편 땅을 자신의 기업으로 요구했던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들에게 권고합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가나안 동편의 땅을 기업으로 요구하면서, 모세와 무슨 약속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그 약속에 준하여 순종하라고 권고합니다. 그 약속은 민수기 32장 1-42절에서 모세와 요단강 동편 땅을 차지하게 된 대신에,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가는데, 두지파 반에게 속한 군사들이 다른 지파들보다 앞장서서 먼저 싸우겠다는 약속을 한바 있습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와 약속한 것이지만, 그 배후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바로 이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도록 여호수아가 후임 지도자로서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모세의 명령(13-15)

 

여호수아는 모세가 전에 명령한 것을 상기시키면서(13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이 모세에게 한 약속을 지킬 것을 요청합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13)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이 땅”은 그들이 모세를 통해 이미 유업으로 받은 요단 동편 지역을 가리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땅과 안식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땅을 차지함으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여호수아서에서 처음으로 ‘안식’에 대한 주제가 등장합니다. 안식은 여호수아서 후반부에서 중심 주제로 등장합니다. 본문에서 가나안 땅의 안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화자는 안식을 언급하면서, 앞으로 이 약속이 여호수아를 통해 성취될 것을 내다봅니다(수 21:44; 22:4). 여호수아를 통해 주신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게 합니다(히 4:8-11). 여호수아는 모세가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에게 했던 명령을 인용합니다(14-15; 참조. 민 32:20-22; 신 3:18-20). 모세의 명령은 그들이 모세에게 했던 약속이기도 합니다. 민수기 32장은 어떻게 해서 두 지파 반이 요단 동편 지역을 유업으로 받게 되었는지를 보도합니다. 르우벤과 갓 지파가 모세에게 찾아와서 요단 동편 땅에 머무르게 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 배경에는 그들의 목축에 대한 관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므낫세 반 지파가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다른 이유(예컨대 인구 증가)로 동편 지역을 유업으로 얻게 된 것 같습니다(민 32:33). 다른 지파들에 비해 가축이 많은 르우벤과 갓 지파는 목축에 적합한 그 지역에 머물 것을 요청합니다(민 32:4-5). 문제는 그들이 머물고자 하는 요단 동편 지역은 약속의 땅(가나안 땅) 경계 밖에 있는 지역이라는 것입니다(참조. 민 34장). 모세는 그들이 다른 지파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것을 염려하여 처음에는 그들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며 재차 요청합니다(민 32:16). 그것은 자신들이 앞장서서 다른 지파들과 함께 정복 전쟁을 치를 것이며, 그 이후에 자신들의 유업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민 32:17-19). 모세는 이들의 수정 제안을 받아들이고(민 32:20-22), 이들에게 요단 동편 땅을 분배합니다(민 32:33). 여호수아는 지금 요단 동편 지파들에게 자신들이 전에 모세에게 한 약속을 상기시키며,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이 차지하게 될 소유지를 ‘여호와의 종 모세가 준 땅’(15)으로 표현하여 제비를 뽑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분배한 요단 서편의 땅과 미묘한 차이를 둡니다(비교. 수 14:2; 18:10).

 

격려하는 지파들(16-18)

하나님의 지도 하에 하나로 결속되는 것은 우리의 목표 달성에 필수적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 줍니다. 우리는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협력과 순종은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시키고, 더 큰 성과를 이루게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16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17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18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16-18)

 

요단강 동편을 차지한 지파의 지도자들은 이미 모세에게 약속한 대로 성실하게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순종하였습니다. 이러한 순종은 모세와 약속을 실천한 것이기는 하지만, 더 나가서 하나님께 대한 약속에 순종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요청에 대해 요단 동편 지파들이 곧바로 반응합니다(16). 그들은 앞으로 ‘여호수아의 명령을 다 준행할 것이며, 여호수아가 어디로 보내든지 갈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온전한 헌신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모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한 충성과 헌신을 보일 것을 맹세합니다. 의미상 이들의 반응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을 대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려 합니다. 여기에 묘사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순종적이고 이상적입니다.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은 거듭 순종을 다짐하며 충성을 맹세합니다(17).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수아에게 한 충성 다짐은 여호수아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17b). 그들은 한 목소리로 여호수아의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처럼 여길 것이고, 거역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게 될 것을 다짐합니다(18a). ‘거역하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마라’는 ‘반역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수아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을 여호와께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입니다.

16-18절은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헌신이 매우 고조되어 있는 형식입니다. 이 짧은 본문 안에는 ‘모든’이라는 단어 ‘콜’이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전적인 헌신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인 기법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들을 향한 이들의 헌신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보여야 할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새로운 일을 앞에 놓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마음을 강하게 담대히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잘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은 끝없는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대적 원수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무장되어 있지 않고 오합지졸 같은 신자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한 번 마귀에게 넘어지고 공격당하고 나면 그 후유증이 심각합니다. 오랜 슬럼프에서 허우적거리는 안타까운 손실을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은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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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01-01)


새로운 지도자와 새로운 시작

여호수아 1장 1-9절


 

새로운 직장에 첫 출근하는 신입사원의 심정은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합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잘 할 수 있다는 격려입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충고보다는, 실수를 감싸주고 격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충고는 단점을 지적하여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 있지만, 격려는 용기를 주어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주변 사람들은 격려를 통해 신입사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 본문 여호수아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출애굽을 시키고 요단강 동편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1-2).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 여호수아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겠습니까? 그 명령을 받았을 때, 이제 곧 가나안을 차지하게 된다는 희망에 부푼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자신이 이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을 정복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가졌을 것입니다.

 

임무를 맡겨 주실 때 격려(1-2)

이제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자신의 직무를 다하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의 문 앞까지 인도하라는 사명을 수행하고서 임종을 맡겨 된 것입니다(신명기 34장).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아직 불완전한 제자들에게 지상 사역들을 맡겨 놓으시고 승천하셨던 것과 같습니다(행 1장). 모세는 18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1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1-2)

 

여호수아서에서 모세를 “여호와의 종”으로 부릅니다(2,7). 성경에서 ‘여호와의 종’은 매우 영광스러운 호칭입니다(수 24:29; 시 18:1; 36:1; 사 42:19). 반면에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수 l:l)으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수종자’란 종과는 다른 개념으로 ‘옆에서 봉사하는 사람’이나 ‘조력자’를 가리킵니다. 한 지도자의 종뿐만 아니라, 성막에서 일하는 일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참조, 출 24:13;33:11, 민 11:28, 신 1:28).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모세의 충실한 제자로 사역했는데, 이제는 지금까지 모세의 충실한 제자로 사역했는데, 이제 모세의 뒤를 이어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명령을 내리는 사령관이 되기 전에 먼저 종으로서 순종하는 법을 먼저 배웠습니다. 먼저 순종하는 법을 철저하게 배운 종이 된 다음에 지도자가 되었습니다(마 25:21).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그의 책 ‘정치학(Politics)’에서 “순종을 배워 본 적이 없는 사람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현명한 지도자는 과거의 교훈을 함부로 버리지 아니하고, 모세의 좋은 전통들을 계승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후손들에게 그 교훈을 남겨주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요 8:56)이라는 단어가 신약에까지 자주 등장합니다.

여호수아는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사람이던 모세의 업적을 따라, 아니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길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여호수아서 전체를 통해서 모세의 이름이 57번이나 거론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전통성에 의해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종으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약속을 허락하실 때 격려(3-6)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안전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용기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지하며 살 때, 그분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큰 평안과 안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3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4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5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3-6)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세 가지 임무를 부여해 주십니다. 이 세 가지 임무는 (1)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 (2)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적을 물리칠 것 (3)이스라엘의 기업을 분배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임무에 각각 하나씩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3,4)

 

가나안은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조상들에게 이미 주시기로 한 약속의 땅입니다.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였고(창 12장),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한 번도 잊지 아니하고 약속의 땅을 주시기로 여호수아의 선진들에게 약속을 해왔습니다. 여호수아의 전직 지도자인 모세에게까지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땅은 이미 그 자녀들의 땅이었습니다. 자녀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주시는 것입니다만,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안일함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자녀들이 이 선물을 받아들이기에 합당치 않으면 주시지 않습니다. 그 예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민수기 13장).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약속하였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여호수아에게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3)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할 땅의 동서남북 경계(境界)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4).

 

(2)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적을 물리칠 것(5)

 

약속의 가나안 땅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라는 방해물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없애야만 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움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약속을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노력이 없이 공짜로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옛 속담에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노력을 다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호수아에게는 그 동안 하나님께서 모세를 인도하신 것과 모세가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법을 산교육으로 배워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있던 갈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5)라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들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마 1:23). 그 이름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적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3) 이스라엘의 기업을 분배 할 것(6)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세 번이나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창 12:6-7, 13:14-15, 15:18-21). 이 약속이 이제 여호수아를 통해서 성취되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을 이루실 수 있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믿음을 행사하여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해져만 했습니다(6). 여호수아는 마지막으로 가장 큰 사명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가나안 땅을 공평하게 분배해 주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하신 약속은 절대로 이루어 가십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생각에 조금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육신의 편안함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극하는 자극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약속을 여호수아서를 통해 살펴보면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첫 번째 약속인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은 여호수아서 2-5장에서, 두 번째 약속인 ‘적을 물리쳐 승리할 것’은 6-12장에서, 마지막 약속인 ‘이스라엘의 기업을 분배 할 것’은 13-22장까지를 통하여 이루어 가신 내용이 성취되어 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격려(7-8)

말씀을 통한 격려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힘든 시기에 용기를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며,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격려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게 만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격려는 공동체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7-8)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하심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잘 간직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신명기 31:9).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 말씀들을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기록물(모세오경)은 하나님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여호수아에게는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루신 업적으로 되돌아보아서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심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잘 보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날마다 시간을 내서 그것을 읽고 기록된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그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야 했던 것입니다(시편 1:2; 119:97).

‘묵상하다’는 말씀의 뜻은 ‘나즈막한 목소리로 읊조리다’는 말로, ‘어떤 목적으로 설정하고 그에 온 마음을 집중하여 사색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결국 주야로 묵상하라는 말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겨 생활에까지 반영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공급되어집니다(8). 여호수아는 성경의 다섯 권이 모세오경만을 가지고 가나안을 정복하였다면, 완전한 성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적군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많은 선진들은 시간이 없는 가운데도 성경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곳에 성공의 비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령을 통하여 격려(9)

한국에는 '암행어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이 아닌 왕의 명령권으로 불의를 재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의 통치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권위를 따른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그분의 통치권을 집행합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의와 정의를 세상에 드러냅니다.

 

9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9)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한 대상이 누구냐고 반문합니다. 모든 일은 주인의 뜻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지, 종의 능력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종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지혜나 능력은 아닙니다. 다만 왕의 명령을 집행할 수 있는 담대한 심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거나 전도를 할 때 담대히 할 수 있습니까? 명령을 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나와 함께 하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어디를 가든지 자신의 종들에게 항상 함께 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좋은 일을 계획할지라도 그 계획을 이루시는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잠언 16:9).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꾼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가야 합니다(잠언 16:3). 그리하면 모든 일을 이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격려의 말씀을 통하여 여호수아서 전체에 있는 내용들을 이루어 나가는데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시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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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서론


여호수아 서론


 

여호수아의 내용은 모세 오경의 마지막 부분인 모세가 죽은 뒤를 이은 내용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 앞에까지 인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요단 강 앞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죽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이 여호수아서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법을 기술합니다. 그곳에는 이미 자리잡고 살고있던 원주민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진멸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에 정착해야 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자신의 터전을 쉽게 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전투를 통해서 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해 나가야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약속의 땅의 원주민들의 정복 과정(1-12장)과 정복한 후에 약속의 땅을 배분하는 과정(6-12장), 그리고 여호수아의 말년 생애(22-24장)를 기록하였습니다.

 

 

인간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이 여호수아서 내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주도적으로 하였던 사람입니다. 본 여호수아서는 모세의 뒤를 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활약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늘날 이 이름은 우리와도 아주 친숙한 이름입니다. 여호수아(Joshua)는 이름부터가 우리들이 많이 들었던 이름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 친숙한 이름은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수’의 이름을 표현하면, ‘여호수아’나 ‘호세아’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수아’는 원 이름이 ‘호세아’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여호수아’로 바뀌게 된 것은 출애굽 후 광야 여행 도중에 모세가 그의 이름을 ‘여호와는 구원이다’라는 뜻을 가진 ‘예호수아’(Jehoshua)라고 바꾸도록 하였습니다(민 13:8, 신 32:44). ‘예수’의 이름의 뜻이 ‘구원(salvation)’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듯, ‘여호수아’의 이름의 의미도 ‘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와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친숙한 것입니다.

 

(1) 여호수아는 어떤 사람

 

여호수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출애굽의 광야 40년 동안 모세의 수종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성경 속에서 그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은 충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출 24:13). 그리고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모든 환경에서든지 항상 믿음 안에 선 사람이었습니다(민 14:1-9). 그가 하나님의 군사로서 두려움 없이 대적과 맞서 싸우는 용맹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출 17:8-16). 여호수아에 대한 소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1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19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20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민수기 27:18-20)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자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만 신뢰하는 믿음, 자신의 일에 충성하는 생활, 지도자로서 용맹스러운 성격 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여호수아처럼 하나님께 크게 사용 받으시길 원하십니까? 당신의 그릇을 넓히시길 바랍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주위에는 이 땅보다 더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이 있었습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약속의 가나안 땅을 들어가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더 유추해서 보면, 우리들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천국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해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곳입니다(창 12:1-7; 13:15-17; 15:7,18; 17:8; 24: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2장 1절에서 약속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지시할 땅은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에게 거듭거듭 강조하면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 땅이 영원한 고향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 속에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가리켜서 “열방의 중앙”(󰃫 겔 5:5)이요, 이스라엘 땅은 “세상의 중앙”(󰃫 겔 38:12)이라고 말했습니다. “중앙”이라는 말은 ‘배꼽’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말은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이 세상 사이를 잇는 “생명선”이라는 듯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 베들레헴에서 구세주(救世主)가 태어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미 5:2). 또한 구세주가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되었습니다(사 53장). 이처럼 가나안은 구속의 역사가 일어날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 땅이 자신들의 생명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나안 땅의 주인의 모습이 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범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서 번영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불순종하며 우상을 섬기면, 그 땅의 주권(主權)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맡겼습니다.

 

 

기록된 여호수아서

 

(1) 여호수아를 기록한 목적

 

왜 여호수아서를 기록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서는 처음 읽었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하나님의 깊은 의도(意圖)가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들은 이 의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 의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 여호수아서가 언제 쓰여졌겠느냐는 숙제가 나옵니다.

 

대부분 성경학자들은 여호수아서가 사사기 시대 특히 웃니엘이 사사로 있었을 때 기록되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BC. 1370-1330). 이 당시에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교훈을 알지 못하였습니다(삿 2;10).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짐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 주위에 있던 이방 사람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여호수아서는 사사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방인들의 교훈을 따라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며,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여호수아서의 중요한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들의 믿음의 발자취를 보여주고 그 발자취를 따라 오도록 제시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연히 가나안 땅에 흘러 들어와 살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허락하신 땅에서 그 약속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연히 가나안 땅에 주인이 되어야 하고, 이방인들은 이 땅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된 사명을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 교훈하여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결한 백성이니 가나안 원주민들의 바알 신과 같은 타락하고 부패한 모습을 본 받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결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도록 제시합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이방인들의 종교, 습관, 환경과 영적인 전쟁을 치러서 승리해 나가야 했습니다. 즉, 하나님 백성으로서 애국심과 성결성을 고취하기 위한 내용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마지막 교훈은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배분하는 과정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배분되어진 땅을 인간의 욕심을 따라서 취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힘(Power)의 원리로 힘없는 사람(지파)들의 땅을 취득하여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간 후에 돌려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배반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삶의 방식은 이방인들의 생활 방식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 여호수아의 기록 연대

 

여호수아의 어느 연대를 기록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세오경이 존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후의 역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널 때부터 시작하여 그가 110세 죽기까지 기록하였습니다.

모세 오경과 연결해서 보면,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약속의 땅에 대한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가나안 땅에 사는 것은 역사적 전통성을 가지고 산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교훈서로서 여호수아

오늘날 우리들은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어떤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여호수아’는 ‘예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약속의 땅인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른다 할지라도 천국을 사모하면서 빼앗기지 않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생활 속에서 또한, 세상들과는 다른 생활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천국을 사모하는 것과 천국 백성의 성결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살아갑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느슨하면, 이 세상에서도 삶이 느슨해집니다. 느슨해지면 모든 것이 느슨해지고 결국에는 세상의 것들이 우리를 삼켜버립니다. 우리의 삶의 주권(主權)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풍속에 있고, 마귀의 종이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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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2-02)


하나님의 공급과 사람의 가치

누가복음 12장 13-34절


 

물질적인 것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물질과 명예보다 우리의 성품과 영혼은 영원한 가치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물질적인 염려 대신 감사와 믿음을 가지며 살아갑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12:1-12에서 핍박받게 될 제자들이 종말의 시각에서 신실하게 대처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12:13~34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소유와 재물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를 종말론적 세계관으로 설명하십니다. 구체적으로 13-21절에는 생명의 가치를 재물로 이해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평가가 나놉니다. 22-34절은 재앙으로 끝난 어리석은 부자의 인생을 피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소유에 있지 않는 생명의 가치(13-21)

사람의 가치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품과 영혼의 가치에 있습니다. 물질적인 소유는 일시적이지만, 성품과 영적인 성장은 영원합니다.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소유보다 성품과 영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가치관은 우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듭니다.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13-21)

 

한 사람이 예수님께 재산 분배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탐욕의 위험성과 물질적인 풍요에만 집중하는 삶의 어리석음을 경고하십니다. 그는 한 부자가 많은 곡식을 쌓아두고 안락한 삶을 계획했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요구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게서는 물질이 아닌 하나님께 부요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십니다.

 

(1) 탐심을 물리치라(13-15)

 

예수님께서 핍박 가운데서 신실한 신앙을 시켜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실 때(12:1-12) 무리 중에 어떤 사람이 유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합니다(13). 그는 동생으로, 자신이 결정한 해결책을 예수님의 권위로 승인해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재자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그가 중재를 요청한 동기를 탐심으로 규정하십니다. ‘생명’(조에)의 가치는 소유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탐심’(플레오네시아)의 배후에는 불안이 존재하고, 불안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많이 소유해야 한다는 잘못된 확신이 생깁니다.

 

(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6-21)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알지 못한 채 탐심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예로 들기 위해 비유를 전하십니다(16-20). 부자 농부는 풍성한 소출을 얻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러자 탐심이 발동해 곳간을 헐고 더 큰 곳간에 곡식과 물건을 저장하려 합니다. 곳간을 만들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마음으로 부풀어 올랐습니다(20). 그는 ‘나의’를 강조해 ‘내 곡식’, ‘내 곳간’, ‘내 물건’, ‘내 영혼’(17-19)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느날 그의 영혼을 데려가시자 자기를 위해 준비한 재산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고 맙니다. 부자는 지혜로운 계획을 세웠다고 확신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로 규정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실 때 어느 것 하나 ‘나의’ 것은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가치는 자신을 위해 쌓는 소유가 아니라(15)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21).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를 위하여 제물을 쌓아’ 두었으나 ‘하나님에 대하여’ 쌓은 것이 없었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탐심을 채우려 하지만, 생명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부자가 되려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요해지는, 즉 깊어지는 것이 미래를 위한 최고의 준비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부를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부요하고 생명이 더욱 풍성해집니다(12:33-34).

 

궁핍함 가운데서도 염려하지 말라(22-34)

성도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우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먹고 마시는 걱정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합니다. 염려 대신 감사와 기도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그의 공급하심을 신뢰합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평안과 기쁨 속에서 살아갑니다.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22-34)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는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걱정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께서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를 돌보시듯, 우리도 돌보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공급하심을 믿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 염려하지 말라(22-30)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만, 건강하지 않은 욕망이나 열망은 염려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목숨과 몸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먹고 입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대표하므로, 의식주를 추구하는 것은 물질적인 필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를 뜻합니다. 제자들의 목숨과 몸은 먹고 입는 문제보다 소중하기 때문에 먹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22)은 탐심을 물리치라는 명령(15)과 비슷하고, 사람의 목숨이 먹고 입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사실(23)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많은 것에 달려 있지 않다는 교훈(15)과 연결됩니다. 24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가치를 근거로 염려하지 않도록 가르치십니다. 까마귀는 씨를 뿌려 추수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 곳간(골방)과 창고에 쌓지 않습니다. 까마귀는 탐욕스럽고 부정하고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새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지 않으실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까마귀도 돌보십니다. 여기서 곳간과 창고에 저장하는 그림은 곳간에 재산을 쌓은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을 떠올립니다(12:18-19). 부자는 자신이 쌓은 재산에 근거해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쌓아 놓은 곳간과 창고가 없어도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저장하지 않는 까마귀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면 존귀한 자녀를 돌보시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당사자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논증하십니다(25-26). 염려한다고 해서 생명의 한 시간이라도 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듯, 염려는 도리어 생명을 단축할 뿐입니다. 생명의 길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자신의 나약한 능력에 의존하는 데서 오는 염려에 시달리지 말고 초월적인 능력으로 인생에 개입하시는 하나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성부에 대한 신뢰가 염려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27-28절은 다시 한 번 제자들의 존귀한 가치를 피조물과 비교해서 강조합니다. 들꽃은 사람이 정성껏 가꾸는 정원의 식물이 아닙니다. 오늘 잠시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의 땔감으로 사용됩니다. 이처럼 하찮게 보이는 들꽃의 아름다움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인생을 산 솔로몬(왕상 10:4-5,21,23; 대하 9:4,20,22)의 업적보다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신 것 같지만, 돌봄을 받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들꽃, 하루를 생존하고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에도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아버지가 되십니다. 자연의 미약한 풀에도 하나님의 마음이 가 있다면, 당신의 자녀를 얼마나 아름답게 돌보시겠는가! 제자들은 세상에서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결코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돌봄을 받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29-3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연의 교훈을 요약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의 아버지로서 자녀의 필요를 아시므로, 근심으로 이런 것들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모든 물질적인 필요를 대표하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채워주실(31) 아버지가 계십니다. 자녀의 필요를 아시는 능력의 아버지께서 계시다는 자체가 신자들에게는 선물이며 감사입니다. 따라서 염려는 하나님을 망각할 때 생기고, 감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때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의 원천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으며, 앞의 비유에 나온 부자가 그렇습니다. 비록 쌓을 곳간이 부족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부를 축적한 것이 미래를 최고로 잘 준비한 것처럼 보였으나, 소망을 하나님께서 아니라 물질적 풍요에 두었기에 어리석었습니다. 특히 부의 원천을 ‘나’로 생각했기에 어리석었습니다(17-19).

 

(2)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31-32절)

 

제자들은 염려하는 것 대신 그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그’는 30절의 ‘너희 아버지’를 가리키므로, ‘그의 나라’는 자녀의 필요를 알고 채워주시는 아버지가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제자들은 큰 세상에 비해 ‘작은’ 존재고 맹수처럼 힘 있는 세력에 비해 약한 ‘양 무리’이므로, 강한 자들이 살아가는 큰 세상에서 염려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양 무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분이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뻐하다’(유도케오)의 명사형은 ‘선한 뜻’ 혹은 ‘은혜로운 뜻’(유도키아)입니다(예. 참조. 10:21; 마 11:26). 세상에서는 약해서 힘을 얻지 못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작은 양 무리를 위해 ‘선한 뜻’을 갖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작은 양 떼를 기쁜 마음으로 돌보시는 아버지와 목자이시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3) 낡지 않는 보물 가방에 채우라(33-34)

 

하나님을 아버지와 목자로 모시는 사람의 시선은 궁핍한 사람을 향해야 합니다. 궁핍한 사람을 위해 긍휼의 마음으로 베푸는 행위는 하늘에 보물 가방을 만들고 그곳에 보물을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재산이 보관된 곳에 늘 마음이 가 있게 마련이므로, 구제는 제자의 마음을 하늘로 향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의 필요를 상세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나의 작은 수고도 정확히 보고 보상하십니다. 제자는 돈 때문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영혼이 되지 말아야 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배워 긍휼을 베푸는 것이야 말로 제자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길입니다.


이 불안한 시대에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생명의 주권자이신 주님뿐입니다. 본문은 물질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으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는 소유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그의 뜻을 따를 때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믿음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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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2-01)


하늘 법정에서의 신앙 고백

누가복음 12장 1-12절


 

세상에 질병은 무서워합니다. 질병을 통해서 죽음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큰 질병이 있습니다. 암도, 에이즈도. 급성전염병도 아닌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위선(僞善)입니다. 위선은 자신을 망가지게 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시스 쉐퍼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 이후에, 제자들에게 외식(外飾)에 대해 엄격히 가르치셨습니다.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 지도자들의 위협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두려워할 대상을 가르치시며, 또한 안심할 수 있는 이유들을 설명하십니다.

 

바리새인의 위선을 주의(1-3)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비난한 것은 기독교에 대해 비난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진실하지 못하고 외식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안티 기독교인들은 성도답지 못한 위선을 지적하고 비판한 것입니다.

 

1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1-3)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들어내셨습니다. 즉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11:53).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계를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위선(僞善)의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또한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고 권고하십니다. ‘외식(外飾)’의 의미는 ‘마스크를 쓰다.’라는 뜻입니다. 대부분 외식은 눈앞에 이익만 보고 먼 날에 일어날 일을 외면한 결과입니다. 눈앞의 사람만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외면하는 근시안적인 마음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 서로 밟힐 정도로 많은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도 무리가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무리가 있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위선’의 비유어로 사용하십니다.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침투력을 가진 누룩이 눈에 보이지 않듯이,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태도는 누룩처럼 보이지 않게 급속히 침투해서 공동체를 부패시킵니다. 누룩이 침투한 여부가 반드시 겉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태도도 드러나고 알려질 수밖에 없습니다(2).

4-11절이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핍박을 소재로 삼는 것을 고려하면, 1-3절의 누룩은 제자들이 핍박받는 상황에서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8-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핍박 중에 제자들이 인자를 시인할 것을 강조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말과 관련해서 위선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곳에서 말한 모든 것이 밝은 데서 들리고 어두운 데서 귓속말로 나눈 대화도 지붕 위에서 모두가 알아듣도록 퍼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인 줄 알면서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를 진리로 믿고 있다면, 반대와 위협에도 믿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믿고 있으면서 드러내지 않는 위선은 시간문제일 뿐 언젠가 드러납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의 핵심적인 특성은 진실함입니다. 진실함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드러내실 때가 온다는 두려움을 가질 때 실현됩니다. 거짓으로 한순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진실을 공해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4-7)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들은 환난이나 박해, 심지어는 죽음까지 따라오겠지만,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만 위해 사는 사람들은 고난이나 죽음은 두려운 일이겠지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주십니다.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4-7)

 

제자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적인 면에서 ‘외식’만이 아닙니다. 외적으로 바리새인들은 복음 사역하는 제자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 진짜 두려어 해야할 분(4-5)

 

예수님께서는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돌봄을 강조하기 위해 ‘나의 친구들에게’ 말한다고 표현하십니다(참조. 요 15:13-15). 제자들을 ‘친구’로 칭한 장면은 누가복음에서 이 구절뿐입니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친구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를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공유하며, 하나님 아버지도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시는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보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인 제자들에게 몸만 죽일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4). 몸만 죽이는 자들은 죽음 이후의 더 무서운 행위는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죽음 이후에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는 분, 곧 하나님입니다(5). 지옥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던져질 최후의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5절, ‘...곧 죽인 후에…그를 두려워하라 그를 두려워하라’의 헬라어 문장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로 시작하고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핍박받는 상황을 전제로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십니다. 제자들을 핍박할 사람들보다 당연히 하나님이 훨씬 강하십니다. 사람의 위협이 두려워 항복하게 되면 더 무서운 분의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통제권(6-7)

 

4-5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6-7절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기 위해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논법에 따라 작은 참새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참새보다 훨씬 귀한 제자들을 기억하고 참으로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머리카락의 예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급하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알고 개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봄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제자의 여정에 개입하고 섭리로 반응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하나님의 시선이 언제나 자신에게 머물고 있음을 의식함으로써,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비극적인 현실에서 돌봄의 손길이 머물고 있음을 신뢰해야 합니다.

 

무엇을 말할지 염려하지 말라(8-12)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고 시인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함께 계셔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하늘 법정에서 중요한 평가를 받게 되며, 종말의 시각에서 현재의 삶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의 고난 속에서도 굳건한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8-1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강조하시며,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들을 시인할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그들을 부인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종말의 시각에서 현재를 바라보고,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킬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1) 하늘 법정에서 평가(8-10)

 

본문에서는 지상에서의 행위가 하늘 법정에서 평가받게 될 것을 땅과 하늘의 대조로 설명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인자를 시인하면 인자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하실 것입니다(8). 반대로 사람들 앞에서 인자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될 것입니다(9).

8-9절은 전형적인 하늘 법정 또는 천상 회의 장면을 배경으로 삼습니다. 하늘 법정에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호하는 역할을 맡아 지상에서 고난 중에 신앙을 고백한 자를 변호하시고 고백하지 않은 자를 외면하십니다. 재판은 종말에 열리고 집행될 것입니다. 종말에는 현재 지상에서 살아온 삶과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지상에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고난이 가중되고 부인하면 고난을 피할 수 있겠지만, 종말의 하늘 법정에서 내려지는 결과는 역전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종말의 시각에서 현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핍박과 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놓일 때일수록 더욱 시선을 미래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관점에서 고난을 견딜 것을 이미 5절에서 언급하셨습니다. 누가는 두 번째 책에서 죽음으로 핍박을 견딘 스데반이 하늘 법정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본 모습을 묘사할 것입니다(행 7:55-56). 이처럼 제자들은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반응을 생각하면서 현재 이곳에서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자를 한 번이라도 부정한 자에게 기회는 없는 것입니까?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도 제자들을 굳게 세우는 사명을 수행합니다(22:54-62).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 자체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핍박이 오기 전에는 신앙이 참된 여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기대와 달리 핍박과 위협이 닥칠 때 돌이키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사역을 부정하는 자는 잘못된 신앙관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배교와 같아서, 구원의 길로 돌이킬 수 없으므로 용서받지 못합니다.

 

(2) 제자들과 성령과의 관계(11-12)

 

성령을 언급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성령의 관계를 이어가십니다(11-12). 예수님께서는 다가오는 핍박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에게 핍박을 가하는 장소와 주체인 회당과 위정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은 유대와 이방의 환경을 포괄합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뿐 아니라 앞으로 그를 따르게 될 제자들은 적대적인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처지에 놓일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대답할지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필요한 말을 가르쳐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6-7절의 약속이 실현될 것을 예고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하나님의 기억에서 사라졌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어려움에 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그런 어려움에 처한 제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보호하시고 대처하게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하늘 법정에서 어떻게 평가받게 되는지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도 우리를 시인하시고, 부인하면 부인하실 것입니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부정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우리는 종말의 시각에서 현재를 바라보며,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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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1-04)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비판하는 예수님

누가복음 11장 37-54절


 

인도 한 힌두교 신자가 힌두교 사원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길거리에 떨어진 작고 아름다운 종이를 보았습니다. 집어든 종이를 자세히 보니, 종이에는 “새 생명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 내용에 ‘사람은 한 번은 다 죽습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 자신의 죄의 대가를 받습니다. 이것이 심판이 있습니다.’라고 기록되었고, 그리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힌두교의 예배를 드려보고, 힌두교에서 요구한데로 살아보았지만, 자신에게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힌두교 가지고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종이를 읽고서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 본문은 율법의 본질은 외면한 채 외적인 형식만 추구하는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종교성과 위선을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보고 이상히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바리새인을 향해 사람의 겉만 중시하는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의 본질은 외면한 채 형식만 추구했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37-38)

종종 기도하다가 멈추고 멍하니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입술만 중언부언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신앙은 마음의 문제이고 영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영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갈급한 영을 가져야 신앙입니다.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37-41)

 

이제에 등장했던 예수님에 대한 반대와 갈등이란 주제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으로 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점차로 하나님의 뜻보다 외면적 열심과 성취에만 집중했고, 그런 사람은 교만으로 이어졌습니다.

 

(1) 바리새인 집에 초대된 예수님(37-38)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 감동된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 식사에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37). 그는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식사문화는 오늘날의 식탁문화와는 조금 다릅니다. 반 안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반쯤 기대어 누운 모양으로 연상하는 것이 본문의 모습과 더 유사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결 규례를 따라 식사하기 전에 의식적으로 정결하게 하는 행위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손 씻지 않고 식사를 위해 앉은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38). 초대한 바리새인은 손님이 식사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언짢게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정결 예법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손을 씻었기 때문입니다.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행위는 단순히 위생상의 이유뿐 아니라, 손님과 집 안 전체를 부정하게 만들고 만찬을 망치는 요인이었습니다. 특히 백성들을 가르치는 예수님께서 기본적인 예법도 준수하지 않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드신 것을 보자 이상에게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범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을 어긴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조상들의 유전으로 판단하는 이 바리새인에게는 빛을 알아보는 영적인 안목이 없었던 것입니다(11:35). 예수님을 친절히 모셔놓고도 그분을 아는 데 관심이 없고 그분을 통해 나 자신을 살피지 않는다면, 천국의 식탁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2) 외식을 지적하신 예수님(39-40)

 

사람들은 외모뿐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겉모습에 대해서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중심까지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생각과 반응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이라고 바리새인 전체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39). 바리새인들은 외적으로 잔이나 대접은 깨끗하게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속마음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릇을 씻는 것과 같은 제의적 정결을 핵심 가치로 여겼으나(참조. 레 11:32-33; 15:12) 본질적인 가치와 우선권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리새인들은 정결 예법을 생명처럼 여기면서도 그 마음은 탐욕과 악독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탐욕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탐하고 취하는 욕심입니다. ‘악한 것들’은 ‘이 악한 세대’에 속하고 ‘악한’ 눈을 가진 자들을 떠올리는 표현으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막는 요인입니다(29,34). 바리새인들은 정결 예식으로 실제 악한 모습을 덮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 실제 모습을 정결해 보이는 겉모습으로 치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어리석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는 것과 같은 정결 예식을 지키기보다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내면의 더러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남몰래 숨겨둔 소유를 구제에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깨끗하게 될 수 있고(41) 신행의 일치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정결한 신앙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은 궁핍한 자들과 갇힌 자들을 회복하는 것입니다(4:18-19). 구제는 탐욕과 악독과 반대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이고 깨끗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정결한 신앙은 이웃을 위한 긍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세 가지 화(42-44)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만 보지 않고 속도 보십니다. 사람의 겉만 만드시지 않고 속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동기, 의도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사람들 앞에서는 숨길 수 있고, 멋진 말과 행동으로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습니다.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면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화가 있습니다.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2-44)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대인의 정결 규례를 위반한 것을 목격한 바리새인이 놀라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이 단락은 바리새인들이 외적인 정결에 주목하는 만큼 자신들의 내면을 성찰하는 데 실패한 것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서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다고 선언하십니다(42-44).

첫째,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지만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42). 십일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표현으로, 이웃을 위해 사용돼야 했습니다. 모든 채소에 십일조를 매겨도 탐욕을 채우는 행위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도, 이웃을 위한 공의도 아닙니다(미 6:8). 십일조의 규례도 행하고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도 실현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십일조 규례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합니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항에 우선권을 둘 때, 십일조 행위가 의미 있습니다. 둘째, 바리새인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합니다(43). 바리새인들은 대중의 인정과 인기를 즐겼습니다. 더 많은 인기와 더 높은 지위를 누리기 위해 종교 시설인 회당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을 들락거렸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에만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신앙을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셋째, 바리새인들은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무덤 위를 밟는 사람은 부정한 무덤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내면은 누구보다 탐욕과 악독으로 부정해졌습니다. 겉은 품격 있게 단장했지만 속은 죽은 자들의 뼈가 보관된 무덤과 같았습니다. 더구나 이 무덤에는 표시가 없어서 지나는 사람들이 무덤을 밟고서도 무덤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속이 부정결한 줄 모르고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같이 오염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집단으로 감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중심까지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하길 바라십니다. 혹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가면을 썼다면 이제는 진실한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영혼의 거울인 성경을 통해 자신을 비추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율법 전문가들을 비판하는 예수님(45-52)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들어난 결과보다 마음으로부터 말씀을 지키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살피십니다. 하나님의 평가를 받는다면 기뻐하실 만한 마음의 의도와 동기를 보실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그 신앙은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45-52)

 

예수님의 신랄한 비판을 듣던 율법교사 한 명이 예수님께 그런 비판은 자신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45).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에 대한 지적이 율법 전문가들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과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건방진 태도가 자신들을 모욕한 것을 지적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사회의 근간인 정결과 부정의 기준을 뒤흔들고 이런 기준을 지키고 가르치기 위해 헌신하는 자신들을 폄훼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율법교사의 항의를 받은 예수님께서는 율법 전문가들에게 임할 화를 세 가지로 선언하십니다(46-52).

첫째, 율법 전문가들은 지기 어려운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우면서도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짐을 지는 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46). 그들은 정결과 부정의 규례를 세밀하게 설정함으로 백성의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엄청난 짐을 지웠습니다. 손가락은 신체에서 가장 움직이기 쉬운 부위인데도 불구하고 긍휼 없는 무거운 규례를 지키려고 애쓰는 백성의 고충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둘째, 율법 전문가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듭니다(47). 율법 전문가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입니다.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율법 전문가들은 이 조상들의 증인이 되어 조상들의 행위를 옳게 여깁니다(48). 하나님의 지혜, 곧 성경은 말했습니다(49).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예수님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구원 역사를 박해의 역사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은 자기 백성에 의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 세대’ 역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신저들을 배척하고 제거합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종들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 이후 모든 선지자들이 흘린 피의 책임을 이 세대가 지게 될 것입니다(50).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에 대한 책임이 이 세대에 돌아갈 것입니다(51).

셋째, 율법교사들은 지식의 열쇠를 갖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가로막습니다(52). 율법 전문가들은 율법에 대한 독점적인 지식을 근거로 수많은 규례를 만들고 강요하지만 실제로는 비본질을 본질로, 본질을 비본질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본질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정결 규례를 준수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집니다. 율법 전문가들의 문제는 성경에서 명확하고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것보다 모호하고 본질이 아닌 사항을 구체화하고 목숨처럼 강요한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을 강화할수록 그들의 기득권은 강화되고 전문가의 지위는 드높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을 무서운 심판을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고 가르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오만하고 긍휼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집니다. 진리의 열쇠를 가졌다고 자만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겪는 고충에 둔감한 사람들일수록 하나님의 심판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관심과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항의(53-54)

하나님께서는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겉만 아니라 속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꾸민 겉보다 속 품은 동기와 의도를 보십니다. 마음으로부터 말씀을 지키는지를 보십니다. 겉으로 들어난 일의 결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른 말씀을 교육할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것을 듣지 않고 비난합니다.

 

53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53-54)

 

예수님께서 날선 가르침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맹렬한 기세로 달라붙어 책잡습니다. 바리새인의 집에서 나오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며 항의했습니다(53). 이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꼬투리 잡기 위함이었습니다(5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극도로 적대적인 태도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성찰과 회개와 추구가 빠진 종교는 자존심의 껍데기만 남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예수님의 지적에 모욕감을 느끼고 죽이려 했습니다. 이것이 그때만의 일이겠습니까? 우리 역시 자존심 세우느라 고개 빳빳하게 들고 예수님을 위협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일입니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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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1-03)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의 삶

누가복음 11장 27-36절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견문과 학식을 보고 ‘안목(眼目)’이라고 합니다. 안목은 시력과는 다릅니다. 시력이 눈으로 사물을 보는 힘이라면, 안목은 그 이면의 것까지 보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안목이 낮으면 많은 좋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키우고 높여야할 가장 중요한 안목은 무엇이겠습니까?

 

  •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무지를 책망하시고,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따르는 영적인 안목에 중요성을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야할 이유를 세 가지를 통해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시각을 가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27-28)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 합니다. 교회를 향한 손가락질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그것과 상관이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한 여인이 찬양합니다.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볼 수 있습니다.

 

27이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27-28)

 

이전에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무리와 논쟁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말씀을 나누시던 시점에 한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 여인은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에 크게 감화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가 복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 말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참조 눅 1:48). 그러나 뒤이어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여인의 말에서 빠져있는 무엇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복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복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는 앞서 언급되었던 주제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 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의 내용을 지키며 사는 것이 진정한 복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라는 도전으로 갈무리됩니다.

 

악한 시대의 보일 표적(29-32)

세상의 탐욕에 빠지지 않으려면, 영적으로 깨어 분별할 줄 아는 밝은 눈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청종하고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만 밝아질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도 밝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영적 분별력을 얻고 세상의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개인과 지역 사회가 함께 변화될 수 있습니다.

 

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29-32)

 

많은 기적을 보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이 또 다른 표적을 구했다는 것은 그들이 불신앙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악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이 세대의 표적 요구(29-30)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고 유일한 표적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온 이방인들을 언급하면서 당시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들어내십니다. 첫 번째 이방인들은 니느웨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 요나가 마지못해 전한 메시지를 듣고서도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두 번째 이방인은 남방 시바 여왕이었습니다. 이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 남부 아라비아에서부터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솔로몬을 통해 전해진 말씀을 듣고자 땅 끝에서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건의 주인공들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믿음으로 반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불신앙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불신앙을 가진 유대인들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방인들이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2) 솔로몬과 요나보다 크신 분 예수(31-32)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31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31)

32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32)

 

이방인이었던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방인이었던 남방 여왕도 솔로몬의 말을 듣기 위해 멀리서도 찾아왔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신데도 듣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빗대어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이방인들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방인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다는 것은 핑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심판의 날에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신앙의 반응을 보인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34). 그들은 니느웨 사람들보다 더 악한 것임으로 심판의 날에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이 일어나서 그들의 불신앙의 죄를 책망하고 정죄할 것입니다.

종종 성도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많은 성경 지식이나 교회 안에 직분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이 없는 지식은 강퍅한 심령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직책은 알맹이 없는 형식만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정말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8-20)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가장 강력하고 분명한 구원을 증거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증거로 요나보다도 크고 솔로몬보다도 위대하신 분으로서 구원의 메시지를 들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분명한 증거에 흔들림 없는 신앙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몸의 등불인 눈(33-36)

세상이 어두워진 것은 빛이 없어서 어두워진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가 어두워진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살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빛을 찾아서 헤매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어두움이 점점 빌려오고 있습니다.

 

33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33-36)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어두운 상황을 통해서 비유로 설명합니다.

 

(1) 빛이신 예수님(33)

 

격언조의 다소 수수께끼와 같은 이 말씀은 종종 이 문맥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의 병행구들은 상당히 다른 문맥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등을 켜서 등경 아래에 두지 않는다. 그 이유는 들어가는 사람들이 빛을 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어구는 현 문맥 속에서 구체적인 함의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참 빛을 비추기 위해서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2) 눈은 몸의 등불(34-36)

 

‘당신의 눈은 몸의 등불이다’라는 표현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을 통해서 빛이 몸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눈이 몸으로 하여금 그 길을 찾을 수 있게 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경우에서 중요한 것은 눈이 얼마나 건강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눈이 건강하면 몸이 밝을 것이고 눈이 건강하지 못하면 몸이 어두울 것입니다. 이것은 빛이신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빛이신 자신과 자신의 말씀이 사람들의 삶을 두루 비추고 있는지 질문하십니다. 이 빛이 사람을 밝히면 그 사람은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을 것이고 온전히 밝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 수수께끼 지혜 문헌 같은 누가의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이 세대의 거부라는 문맥 속에서 분명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신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게 될 것이고, 그와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의 눈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눈이 밝아질 때 우리의 삶도 밝아진 것입니다. 말씀으로 가득 충만해서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빛이 되길 바랍니다. 빛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말씀의 빛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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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1-02)


영적 전쟁에서 승리

누가복음 11장 14-26절


 

시골에서 목회할 때, 한 교회는 양반촌에 있었습니다. 양반촌답게 집이 크고 아름다운 몇 집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을 관리할 사람이 없어서 점점 퇴락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 할지라도 관리하지 않으면 이처럼 점점 퇴락되면 보기 정말 흉합니다. 그래서 ‘흉가(凶家)’라고 부릅니다. 영혼도 마찬가지로 영혼이 집이라면 좋은 주인이 들어가서 관리해야 합니다. 그 좋은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문밖에서 지금도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 본문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들린 사람에게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눈으로 직접보고도 예수님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나가서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귀신이 쫓겨난 일은 이미 사단의 나라가 패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 대한 비난과 불신(14-16)

옛 속담에 ‘가게는 게 편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어떤 일을 두고 한통속이 되어 서로 돕는다는 말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하나가 될 수 없듯이 예수님과 사단도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사단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14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14-16)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보고 놀랐지만,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것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일어난 일이라고 폄하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귀신과 한 편이란 주장입니다. 그리고는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로써 오는 다른 표적들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눈이 어두워졌기에, 공평한 분별력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행하신 일을 통해 증명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벙어리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던 예수님께서 오늘도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에 귀신 들린 자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가시길 바랍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기적을 본다고 자동적으로 믿음으로 받아 들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신비적인 경험이나 색다른 은사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의존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새롭게 임한 하나님 나라(17-23)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동시에 설 수 없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한쪽이 이기면, 한쪽이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 부분에도 사탄과 예수님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17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8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0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23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17-23)

 

예수님께서는 사단이라도 스스로 분쟁하여 자멸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바알세일의 힘을 빌려 한 것이냐고 반박하십니다.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모순을 낳는 비판이었던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 앞에 귀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귀신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쫓겨나면 귀신의 요새가 무너지고 정복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하나님의 나라가 거기에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사하신 것을 바알세불의 힘으로 비난하지만, 귀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사단의 왕국이 타격을 입었으며 점령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이 말씀은 실로 놀라운 진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도래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구약이 말한 가장 큰 약속이며, 그 약속은 하나님의 위임 통치자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강한 자입니다. 하지만 더 강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단을 제압시키시고 굴복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사단을 결박하고 영원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나라들이 존재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두 나라만 존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단 나라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두 나라에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편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사단의 편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탄인 바알세불의 하수인으로 보는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보는지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갈릴 것입니다. 양자택일만 있을 뿐입니다.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한1서 3:8)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적인 전투를 하는데 영적 전투에 참여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보여줍니다. 영적인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사단의 다스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새롭게 된 하나님 나라(24-26)

살아가면서 음식을 먹지만 시간이 지나면 비워집니다. 허기질 때 양식으로 채워야 합니다. 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심령에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사단이 임재합니다.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24-28)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잠시 귀신이 나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행되지 않은 땅이라면 그 귀신은 언제고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사람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결국 악한 영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지금 영적인 상태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항상 영적 전쟁터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더욱 철저히 영적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영적 전쟁은 다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 있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전쟁은 이미 승리가 보장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당신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는 구원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주셨더라도 그 사람이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전보다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감격의 자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경험으로 채워가길 바랍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적으로 공격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어두움이 빛 앞에서 힘을 쓸 수 없듯이, 하나님의 능력은 사단의 왕 능력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항상 깨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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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1-01)


하나님 앞에 엎드린 기도자의 자세

누가복음 11장 1-13절


 

어렸을 때 시골에는 ‘행정 전화’라 불리는 전화기 한 대만 있었습니다. 전화가 오면 동네 앰프로 ‘누구네 서울에서 전화 왔습니다’라고 알려 달려가서 받곤 했습니다. 전화기는 손잡이를 돌려 교환원을 통해 연결됐고, 때론 한 시간 이상 걸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언제, 어떻게 응답될 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저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신뢰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확실히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한밤중에 간청하러 온 친구의 비유와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강조하십니다. 아버지로서 자녀의 요청에 응답하고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소개하십니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1-4)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기도에 대한 내용이 특히 많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 얻는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자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1-4)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1). 기도는 예수님의 습관이고 생활입니다(3:12-22; 6:12; 9:18,28; 10:21-22).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시자 제자들 중에 한 명이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1)라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배운 기도와 구별되는 기도를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하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기도에 참여할 때 자신들이 요한의 제자들과 구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선생이나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에서나 시장에서 기도하는 모습이었지만, 예수님께는 색다른 모습으로 동산이나 골방에 가서 혼자 조용히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을 보면, 당시에 선생들과는 비교해 볼 때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노력한 모습이 영력하지만, 예수님께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주기도문’이었습니다. ‘주기도’는 다른 종교의 주문과 같이 무조건이고 반복적으로 외우는 기도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형식입니다. 주님께서 기도의 주요 요소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기도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늘을 선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의 기도는 지상의 기도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 삶을 위한 필요를 간구하는 기도합니다. 지상의 기도는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용할 양식에 관한 기도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존하는데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영적이고 육적인 양식이 끊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에 있어서 죄나 허물 그리고 상처가 없도록, 그러므로 분노나 아픔이 없도록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므로 용서함으로 아름다운 만남과 축복에 관계가 열려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전쟁에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분노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시험과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사탄이 주는 교묘한 시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에서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서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가장 모범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수단입니다. 그렇기에 기도를 통해 얻는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기도에 대한 내용이 특히 많습니다. 중대한 일을 만날 때마다 몸소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세상이 구하는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기도하는 마음(5-8)

기도하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를 원하고, 그분의 뜻을 알고자 하는 열망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염려와 소망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인도와 도우심을 구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힘과 평안을 주며,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얻게 합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하며,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5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5-8)

 

예수님께서는 한 밤 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통해 기도에 대한 자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강청하며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간절히 갈망하는 필요에 대해 절박하게 느끼는 기도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갈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갈망입니다.

한밤중에 친구 집에 찾아가서 떡 세 덩어리를 빌리는 비유입니다. 자기 집에 밤중에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옆 집 친구에게 가서 밤중에 깨우면서 떡을 빌리려 갑니다. 하지만 친구의 집은 온 식구가 잠자리에 자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며 부탁한다는 것은 대단한 실례입니다. 그러나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여행 중에 자신을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밤중에 문을 두드리며 잠든 친구가 깰 때까지 강청합니다. 자신의 필요 때문에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적과 소원을 가지고 절박하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음식을 빌려줄 때까지 강청을 하면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절박함입니다. 간절한 원합니다. 강청함이란 부끄러운 것을 알지만 파렴치 하게 때나 장소나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절박하게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사람들도 강청하면 들어주는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간청하는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끈질긴 기도는 바로 강청(强請)하는 기도입니다. 고집스럽고 막무가내의 기도가 아닙니다. 간절함과 절박함이 없으면 기도는 꼼수이고 만약에 사태에 대비하는 보험일 뿐입니다. 자기가 기대했던 것이 성취되면 만족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는 자기에게 있는 능력과 자원을 신뢰합니다. 세상의 의지할 것이 있으면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출구가 없어 볼 때, 간절한 심령으로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사모하는 기도가 된 것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이 반기시는 기도가 됩니다.

 

기도해야 할 이유(9-10)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구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깊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어려움 속에서도 평안을 찾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도우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기도의 중요성을 기억하고 삶 속에서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9-10)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절박하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기도합니다. 기도가 간절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을 두드린다고 바로 열린 것은 아닙니다. 구한다고 곧 바로 받는 것도 아닙니다. 찾는다고 곧 바로 찾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드리지 않으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습니다. 혹시 한 두 번 기도하고 응답이 없으면 쉽게 기도를 포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길 것을 믿고 끈질기고 줄기차게 기도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인내 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세(11-13)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해야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 전파는 우리의 중요한 책임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실천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응답하실 것을 믿고 구하라고 하십니다.

 

11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1-13)

 

우리들이 기도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아버지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백성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흠이 있고 악한 아버지라도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려고 합니다. 하물며 가장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최상과 최선의 것으로 주실 좋아하신 분입니다. 그 증거로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받았습니다.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서 구할 때마다 다른 선물 또한 주실 것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것은 말솜씨나 열심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첫 걸음은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며 주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믿을 때,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끈질기게 기도하되 기도 응답의 방법과 시간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을 때,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기도하다 보면 점차 기도의 순서가 우리의 뜻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변해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간절히 강청하는 기도에 가장 좋은 것을 응답하십니다. 세상의 친구도 강청하면 들어줍니다. 이 땅의 아버지도 자녀들이 구하면 가장 좋은 것으로 줍니다. 하물며 만유의 주인이신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필요를 외면하실 리 없습니다.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기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하늘 뜻이 이뤄지기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약 1:5) 아바 아버지께 간청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본을 따라 기도함으로 더욱 풍성해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기도하고 믿음으로 구할 때 응답되어질 것입니다. 무정한 친구나 악한 아버지라고 강청하면 어쩔 수 없이 라도 응답해 줍니다. 하물며 좋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면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좋은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끈질기게 기도의 문을 두드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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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4)


바른 하나님 사랑을 가르친 예수님

누가복음 10장 38-42절


 

우리는 한계가 있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성취하려 합니다. 그래서 항상 분주합니다. 하지만 너무 분주해서, 정작 매우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쁘다, 시간 없다 하는 말들로 핑계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해서 후회하곤 합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놓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의 질문에 율법의 주요 핵심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람으로 요약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 사랑’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오늘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는 ‘하나님 사랑’(27)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환대 받으신 예수님(38)

사랑을 실천하기 전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한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사명을 모르면 그 사명을 찾기까지는 분주합니다. 분주한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사명입니다.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38)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와의 대화를 통해 율법에서 분명히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임을 제시했습니다. 사마리아 비유는 진정한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마리아와 마르다의 사건을 통해서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한 마을에 들어가십니다(38). 그곳에는 ‘마르다’라는 여인으로부터 영접을 받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태도(39-40)

사람들은 항상 바쁘다면서, 바빠서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분주함’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선순위적인 문제입니다. ‘바쁨’과 ‘분주함’은 주님과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바쁘면 그것에 대해 집착하고, 분주한 환경을 따르게 됩니다. 점점 주님이 아니라 세상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39-40)

 

본문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더 많은 음식을 대접하는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혼자서 음식을 만들면서 매우 분주했습니다. 그녀의 헌신은 매우 귀합니다.

자매지간인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39).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습니다(40). 그런데 동생은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해 언니 혼자 섬겨야 합니다. 마리아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발아래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의 일행을 섬기기 위해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구석구석 분주하게 챙겼을 것입니다. ‘분주함’이란 ‘끌러가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조금도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져서 식사 준비하는 일에 끌려 염려와 근심 가운데 들어갔던 것입니다.

급기야 마리아의 이런 모습을 본 마르다는 마리아를 비난하고 원망하였습니다. 마르다는 많은 일로 인한 근심이 있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40) 마르다는 마리아의 행동이 이기적이고 옳지 않다고 확신하면서 예수님께서도 당연히 동의할 줄로 생각하여 마리아에게 자기의 일을 돕도록 말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교훈을 가르친 예수님(41-42)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시기와 질투로 하는 경우를 봅니다. 더 나가서 싸우면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부분 싸움의 시작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역은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디서 누구를 사랑해서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통한 감동은 많은 사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실천에 있습니다.

 

41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1-4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반응을 보입니다.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불러 친근한 마음으로 조언합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41-42).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지 말고 한 가지만 준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반면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습니다(42).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편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좋은 것, 필수적인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듣는 말씀을 통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좋은 편’의 ‘편’(메리스μερίς)은 유산과 유업을 뜻합니다. 마리아는 영원한 유업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 자신 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표현해 본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어떤 선행도 예수님과 그의 복음 앞에서는 상대화되고 맙니다. 환대는 예수께서 줄곧 강조하셨고 계속해서 강조하실 필수 사항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섬김도 말씀을 듣는 것보다 우선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봉사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독자들은 앞 단락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을 보았습니다. 그는 고통 받는 사람의 선한 이웃으로 환대의 모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어떤 선행도 유일한 한 가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 단락과 연결해 보면, 율법사는 무엇을 행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10:25-26).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계명을 실천하고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 영생에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계시므로 언제나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하고, 그분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저자도 말합니다(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선행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하고, 섬기는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분주함과 불안감 속에서 주의 일을 하게 됩니다. 또한 본문은 섬기는 일을 주로 맡았던 여성의 역할을 충격적으로 설정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집안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여성의 몫이었고, 성경 선생의 가르침을 공적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성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특권에서 제외되지 말아야 하고 가장 좋은 유업을 빼앗기지 말아야 함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 앞에 나아가는 일에서 누구도 제외되거나 소외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어느 것이 낫다 할 것이 없이 둘 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진심이며, 각자가 생각한 예수님을 향한 대접이었습니다. 다만 서로 자신이 더 나은 섬김이라고 여기는 것은 진정한 이웃 사랑의 태도는 아닙니다. 그것이 마르다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권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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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3)


율법교사에게 비유로 대답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10장 25-37절


 

우리들이 가진 자원과 시간은 한정 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시험 삼아 살아본 후에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하지만 한 번 허비해버리면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른 선택과 선택한 것에 대한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선택해야할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선택하고 집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 본문은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영생을 얻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실천해야할 이웃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랑하는 실천하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을 좀 도 상세하게 듣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한 방법(25-28)

아무리 학생이 머릿속에 답을 알고 있더라도, 시험지에 정답을 표시하지 않으면 틀린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아도 순종하지 않으면, 성격적인 지식일 뿐 하나님의 능력은 아닙니다. 본문에는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나와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25-28)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영생을 얻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율법 전문가인 그의 질문은 이미 자신만의 대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정답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답을 주지 않고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라며, 율법교사의 견해를 밝히도록 반문하십니다. 이에 율법교사는 성경의 요약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했습니다(27). 이는 신명기 6:5과 레위기 19:8에 근거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대답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제자들의 갈 길’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율법교사는 지식적으로는 영생의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실천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삶에 실천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지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는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나타납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고 말씀하십니다. 이론으로만 아는 신앙이 아니라 실천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실천을 위한 촉구(29-37)

말씀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이어지는 앎, 삶을 통해 진정한 삶에 이르는 것, 그것이 영생입니다. 행함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하나님이자 이웃인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황당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한 이웃이 누군지에 대해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통해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29-37)

 

본문은 우리들이 아주 잘 알고 있는 비유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묻습니다(29). 예수님께서는 참된 사랑은 실천을 통해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선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를 만나서 쓰러진 사람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 두 가지로 선택이 달랐습니다. 이웃이란 단지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란 것을 가르쳐줍니다.

 

(1) 자기만을 위한 선택(29-32)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난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구타하고 반 주검 상태로 버려두고 떠났습니다.

때마침 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성전의 임무를 마치고 여리고의 집으로 가던 중에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31).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 지나가버렸습니다. 한 레위인도 현장을 보았지만 피해 지나가버렸습니다(32). 그들은 유대인 중의 참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임무를 맡은 두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라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율법에 따라면 죽은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함께 부정해집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들은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부정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아예 그 사람의 상태를 알아보려도 하지 않고 피해서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를 그 상태로 버려두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자신의 율법적인 정결을 위해 이웃의 어려운 일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자신의 일에 혹시라도 생길지 모르는 손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죽어가는 사람을 돕지 않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파묻혀 바른 율법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이시면서 이웃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교의 잘못된 자화상이었습니다.

 

(2) 타인을 위한 선택(33-35)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당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33).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바르고 붕대로 상처를 싸맸습니다(34). 짐승에 태워 여관에 데리고 가서 돌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다음 날 주인에게 데나리온 두 개를 주고 보호를 부탁합니다. 나머지 비용은 돌아올 때 갚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강도 만난 사람은 죽었을 것입니다. 참 이웃은 혈통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할 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정교하게 설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은 참된 이웃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선민’의 상징 제사장과 레위인은 ‘동족’ 유대인을 외면했지만, 유대인에게 경별과 멸시의 대상이던 사마리아인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원수 유대인을 곤경에서 구해주었습니다.

 

(3) 진정한 이웃(36-37)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시고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십니다(36). 율법교사는 차마 ‘사마리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긍휼을 베푼 자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령하십니다(37).

우리는 율법교사가 던진 질문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처음부터 시험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예수님께 질문했기 때문입니다(25). 우리가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음을 선전하고 싶어 했다는 점입니다(29).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네가 힘든 처지에 있는 자의 이웃이 되고 있는가?”를 바꾸십니다.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거룩한 지위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회적 약자나 곤궁에 처한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모본으로 제시한 선한 사마리아인은 선행으로 구원 받는 사람의 케이스가 아니라 좋은 이웃의 예입니다. “너도 좋은 이웃이 돼라!” 영생을 얻은 사람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 이웃이 됩니다.

 

사실은 율법교사가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율법의 양만큼 의롭게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여겼던 율법교사는 이 비유를 통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역은 자신의 이익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자신이 보기에 좋은 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편이 결국에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편을 선택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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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02)


70인 제자들의 전도 사역에 대한 보고

누가복음 10장 17-24절


 

사람들은 무엇을 기뻐하는지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소중히 생각하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기뻤던 일은 무엇입니까? 앞으로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은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천국에 들어간 입장권만 얻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고, 더욱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살아가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 70명 제자들은 전도를 보고합니다(17-20).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뻐해야 할 이유(21-24)를 설명하십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깨닫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21-22). 구약의 선지자들과 왕들이 보고 싶어 했던 비밀을 예수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에 기뻐합니다(23-24).

 

70인 제자들의 전도 보고(17-20)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영적 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루어낸 성과나 능력에 자만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겸손과 감사는 신앙 생활의 핵심 요소입니다.

 

17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17-20)

 

전도에 파송되었던 70인 제자들은 전도를 마치고 기쁨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사건에 고무(鼓舞)가 되었습니다.

70명의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기쁨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예수님께 보고합니다(17).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전도 여정이 힘들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능력을 경험하고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화답하십니다(18). 이 내용은 이사야 14:13-15에 근거하며, 이미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의 교만을 바벨론의 예로 지적하셨습니다. 미완료과거 ‘보고 있었다’(에쎄오룬 ἐθεώρουν)는 70명의 제자들이 전도 활동하는 기간에 사탄이 추락하는 장면을 생생히 보고 계셨다고 시각화합니다. 제자들은 사탄이 떨어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선교가 사탄과의 싸움이었다고 해석하십니다. 1:68-79(특히 1:71,74)에서 사가랴는 구원을 원수들의 손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말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원수를 로마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원수는 로마가 아니라 그런 악의 체제를 이용하는 사탄입니다.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고 나서 우주적 전쟁에 참여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싸움의 대상이 사탄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17절뿐 아니라 20절에서도 제자들이 싸운 대상이 ‘귀신들’로 언급되는 점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귀신들을 쫓아낸 행위를 사탄과 싸운 것으로 이해하십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패배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제자들의 활동으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고 사탄은 결정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그때의 운명이 제자들의 권능에 의해 실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사탄이 떨어지는 것은 제자들의 활동으로 하나님 나라가 현재 역동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전도가 사탄을 떨어뜨리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된 근거를 설명하십니다(19). 사탄이 떨어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19). 뱀과 전갈은 구약에서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예. 창 3:15). 사탄이 떨어지는 것은 뱀의 패배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탄의 힘을 무너뜨리며, 그 권위를 부여받은 제자들은 사탄의 졸개인 귀신들을 무너뜨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능력이 사탄과 싸울 정도인 것을 근거로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라고 약속하십니다(19b). 이 말씀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왔고 하나님의 아들이 주는 권위를 받은 제자들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을 항복시키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할 것을 당부하십니다(20).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인간의 어떤 능력으로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만 기록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참된 기쁨은 사역의 업적과 결과가 아니라 신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 제자의 참된 기쁨이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늑대 떼 속으로 보내지는 것처럼 위험 속으로 보냄 받았습니다. 무서운 세상에 어린 양처럼 위기 가운데서 활동합니다. 그들은 낙심하고(10:2), 위험에 처하고(10:3), 궁핍한(10:4) 상황을 겪었습니다. 궁핍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지갑과 가방과 신발을 추가로 소유하지 말라는 명령대로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은 부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연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24절은 온통 기쁨의 언어로 채워집니다. 제자로 부름받아 하나님의 개입과 긍홀을 경험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10:9,11)으로 선포하고 그의 이름으로 치유할 때(17)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도 기쁨입니다. 제자로 부름 받는 생활에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를 찾고 기뻐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복(21-24)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자랑하며 겸손함을 잃어버리기 쉽지만,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마음을 기뻐하시고 특별한 계시와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복에 감사하며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잊기 쉽지만, 감사는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만들어 줍니다. 작은 일상 속에서도 감사의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감사와 겸손은 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21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21-24)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계시를 나타내심을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시며, 오직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그들이 보고 듣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강조하십니다.

 

(1)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21-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뻐해야 할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21-22). ‘그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전도 사역을 평가하신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뻐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기쁨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성령과 기쁨으로 충만해진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감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해 감사의 근거를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제자들)에게 계시하신 것을 감사합니다(21). ‘이것들’은 22-24절에 따르면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지식(22)과 구속 역사의 성취(24)를 포함합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에게 계시된 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로 예수님의 사역, 즉 그의 가르침과 기적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 사탄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도 계시에 포함됩니다. 전통적으로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전수 받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간주 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있어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어린아이(네피오스 νήπιος)처럼 예수님께 의존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제자들이 복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세상에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계시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작은 자들이 계시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노래처럼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일이 제자들의 깨달음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1:51-53).

감사의 기도를 보면, 먼저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신 것을 언급하십니다(22). ‘모든 것’은 예수님의 권위와 권능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지식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만 아들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통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아들만이 아버지를 알고 계시므로 아들과 그의 뜻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만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로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아들과 아버지입니다. 제자들은 아들을 통해 아들도 알고 아버지도 압니다. 구원 역사를 계획하고 전개하시는 아버지, 구원 역사를 성취하시는 아들을 압니다.

 

(2) 선지자들과 왕들의 소원이었기 때문(23-24)

 

하나님과 대화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향해 기쁨의 이유를 구약의 선지자들과 왕들과 비교해 설명하십니다(23-24). 제자들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됩니다(23). 왜냐하면 많은 선지자들과 왕들이 제자들이 보고 듣는 것을 보고 듣기 원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24). 선지자들과 왕들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경험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소망했던 구원의 시대가 예수님의 오심과 활동으로 열리고 전개됩니다(렘 31:31-34; 겔 36:24-32).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드디어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통치하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 나라의 실현을 보고 듣습니다. 제자들은 왕의 통치를 경험하고 있으며, 왕과 함께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아들을 아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사 52:7)을 아는 것이 복입니다. 제자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 역시 아버지와 아들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누리는 복은 더욱 커집니다.


본문을 통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제압하고 기뻐하며 돌아온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능력이나 성과보다 구원받은 기쁨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권세와 승리를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우리 신앙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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